4월 1일 기해
윤대(輪對)를 하였다.
형조 판서 홍억(洪檍)을 체직시키고 김이소(金履素)로 대신하게 하였다.
부교리 이조원(李肇源)이 상소하기를,
"도당회권(都堂會圈)은 국가의 큰 정사입니다. 수상(首相)이 주장하고 대제학이 참여하여 미흡한 부분이 없이 상세하게 논의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은 뒤라야 비로소 도당록(都堂錄)이 완성되는데, 지금은 도당(都堂)의 좌석에 잠시 모였다가 곧바로 끝마쳐 성상의 책망이 있게 하였으니, 격식과 규례에 어긋나 공론이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이름을 홍문록에서 영구히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옛 규정을 파괴한 것은 대제학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기에 이미 조처한 바가 있다. 너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형편도 아니고 또 함께 선발된 자가 유독 너 한 사람 뿐이 아닌데, 네가 이처럼 하는 것은 더욱 어진 자의 등용을 방해하는 혐의가 있게 된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일 경자
형조 판서 김이소(金履素)를 체직시켰다.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3일 신축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집(五山集)》을 간행하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차천로는 선조(宣祖) 시대 사람으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시(詩)를 잘하여 말을 타는 잠깐 동안에도 장편의 시를 지었다. 간이(簡易) 최립(崔岦)과 더불어 명성이 비슷했는데 최립이 고문(古文)을 가장 잘 지어 해동의 대가[海東大家]라고 호칭하였으나 풍부하고 민첩한 것은 차천로를 따르지 못하였다. 임진년 명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를 구원하러 왔을 때에 천로가 제술관(製述官)으로서 빈사(儐使)를 따라 군문(軍門)을 왕래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문자(文字)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집안이 미천하고 관직이 현달하지 못하여 그의 시(詩)도 또한 오래 전하지 못했었다. 상이 일찍이 명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후손에게서 찾아 홍양호(洪良浩)로 하여금 산정(刪定)하여 책을 만들도록 하였었는데, 홍양호가 관서(關西)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인쇄하여 올리니, 마침내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월 4일 임인
전교하였다.
"현륭원(顯隆園)에 나무 심는 일을 기유년부터 금년까지 8개 고을의 민력을 써서 다행스럽게 완성하였으니,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도에 있어서 등급을 나누어 공로를 기념하는 것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차등 있게 상을 주어라."
형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관찰사 박천형(朴天衡)이 공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어사가 평택(平澤)을 조사할 때에 옥사(獄事)를 엄격히 하고 비밀리에 거행하였으므로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어사가 조정에 돌아갈 때에 압송한 3명의 죄수는 즉시 법에 의해 곤장을 쳐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 범법한 정상이 용서해주기 어려운 무리들도 또한 가벼운 쪽을 따라 참작해 놓아준 자도 많았습니다. 권후(權㻈)는 역적 권위(權瑋)의 형으로서 서로 도우며 악한 짓을 하고 수령을 모함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곤장을 쳐 귀양보내는 벌을 면하였습니다. 구윤중(具允中)과 정언택(鄭彦宅)은 사람을 꾀어 통문을 띄우면서 신상오(申尙五)와 이성(李珹)의 말로 증거를 세웠으니 죄가 다름이 없는데, 언택은 곤장을 쳐 귀양보내고 윤중은 무죄로 드러나 놓아주었습니다. 신상오(申尙五)와 이성(李珹)에 이르러서는 구윤중과 정언택이 입증(立證)한 말을 저들이 비록 변명했지만 만약 당초부터 간섭함이 없었다면 어찌 증거로 인용할 리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논한다면 일의 허실(虛實)과 말의 진위(眞僞)를 막론하고 모두 똑같은 투(套)의 향전(鄕戰)에 귀결됨이 의심할 바 없이 명확했기 때문에 4명의 죄수는 향전의 죄로 한 차례 곤장을 쳐 신문하고 놓아보냈습니다. 이것이 어사의 추안(推案)과 어찌 상반되는 것이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대저 신상오와 이성 등을 징계하여 치죄한 이 일은 실로 놀랍고 의혹스럽습니다. 저들이 비록 전부터 시골에서 싸우는 무리들이지만 어사가 조사할 때에 이미 모두 죄 없이 놓아주었는데, 어사의 복명(覆命)과 서계(書啓)의 재가를 기다리지 않고 급히 감영의 옥에 가두고 아울러 곤장을 쳐 신문하였으니, 실로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혐의가 있습니다. 사체로 헤아려보건대 마땅히 중형으로 다스려야 하겠으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조사한 일의 요점은 항거하고 판결을 번복하려 하였는가 하는 한 조목에 있는데, 감사가 밝힌 말을 보건대 곤장을 쳐 다스린 자는 바로 권위의 형인 권후(權㻈)와, 같은 무리인 구윤중(具允中)이다. 그 밖에 신상오와 이성은 향교의 유생으로서 자진하여 증인을 서지 않고 도리어 윤중의 무리에게 이용을 당하였으므로 이 죄로 또한 곤장을 쳐 신문하였다고 하니, 비록 어사가 가볍게 다스린 자를 감사가 다시 혹독하게 다스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만약 권후(權㻈) 등 4명을 형장을 쳐 신문한 것을 가지고 항거하고 판결을 번복하려 했다고 한다면 너무 제사(題辭)와 맞지 않는다. 더구나 어사가 명령을 받들고 간 길에 능히 스스로 결단하여 귀양보내지 못하고 이미 조사한 자를 감사의 입을 빌려 처결하였으니, 이 일은 어사가 시켜서 한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에 이르러 감사는 터럭만큼도 처벌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즉시 임무를 살피게 하라. 어사 김희채(金熙采)가 조사하러 간 것은 암행 어사와는 다르니, 조사한 문안을 수정하고 서계(書啓)를 정서하는 것은 마땅히 본읍(本邑)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널리 의논하고 채집할 일이 있기에 7일에 돌아와 근 10일이나 성밖에 머물렀는가. 이는 안핵 어사(按覈御史)가 있은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또 일전에 올린 그의 상소는 군색한 말을 뿜어내어 마치 자기의 잘못을 빼버리고 자기의 잘하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하여 일일이 왕명을 욕되게 하고 건건이 수치를 끼쳤으니, 반좌법(反坐法)을 희채에게 시행하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희채를 의금부에 내려 해당한 법으로 처결하라."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영남으로부터 돌아와 영남 유생들이 응제(應製)한 시권을 올리니, 상이 직접 점수를 매기어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 두 사람을 발탁해서 급제를 주었다. 이어서 하교하였다.
"유학이 번성한 영남 지역이 우리 도(道)를 잘 지켜왔으므로 선정(先正)에 대한 깊은 감회와 선비들에게 가상함을 보이는 뜻에서 특별히 도산 서원(陶山書院)에서 제사 올리는 날 시험을 보아 뽑았으니 어찌 범연한 뜻이겠는가. 또 각신이 조정에 돌아와 아뢴 말을 들으니, 제생들이 근래 더욱 삼가고 경계하여 과장을 열자 문에 들어오는 이가 1만 명 가까이 되었는데도 천천히 걷고 추창하며 앞을 양보하였고 감히 시끄럽게 떠드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거듭 제생들을 위해 기쁘게 여겼는데, 시권을 봄에 미쳐서는 합당하게 지은 자가 근 5천 명이나 되었다. 서북 지역에도 오히려 관리를 보내어 과거를 설행한 예가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각신이 명을 받은 것으로 체모가 시관보다 더욱 중하니, 우수한 등급으로 합격한 자에게는 마땅히 상례에서 벗어난 논상이 있어야 한다. 합격한 사람들을 본도의 감영에 초치하여 음악을 베풀고 후하게 대접하도록 하라. 이번 제사 올릴 때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인 일은 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해 보이는 것이 합당하니,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의 예에 따라 본도에서 간행하여 바치고, 도산 서원에서 합격한 유생과 도내의 여러 고을에도 각각 한 부씩 나누어 준 뒤 판본(板本)은 도산 서원에 보관하도록 하라."
각신 이만수가 아뢰기를,
"작년에 경시관(京試官) 서영보(徐榮輔)가 돌아와 아뢴 것으로 인하여 순흥(順興)과 풍기(豊基)에서 유래해 오던 단대곡(單代穀)을 모두 현재에 있는 곡식 이름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봉화(奉化)의 환곡(還穀) 중에 회록(會錄)은 콩[大豆] 1만 2천여 섬인데, 벼로 대신 받아들인 지가 이미 1백여 년도 넘었습니다. 백성들이 일제히 호소하고 있고 사건이 이미 같으니, 원하는 대로 시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또 듣건대 이 밖에 도내의 여러 고을에 단대곡이라는 명색이 많이 있어 봉화 한 고을에 그치지 않는데, 처음에는 잘못을 인습하고 끝내는 또 죄를 두려워하여 덮어둔다고 합니다. 지금 곡식 장부를 정리하게 되었으니 두루 상세히 조사하고 어느 해의 어떤 조목인가를 상고하여 햇수가 오래 된 것은 또한 순흥과 풍기 두 고을의 예에 의하여 고쳐 기록하고, 근년의 단대곡은 해당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가을을 기다려 도로 본색(本色)으로 만들어 환곡 장부가 문란해지는 폐단이 없도록 묘당(廟堂)에 물어 처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순흥과 풍기의 일은 처분이 이미 특별한 은전(恩典)에 관련된 것인데 봉화(奉化)에서도 이와 같고 다른 각 고을에서도 이와 같다 하니, 지금부터 단대곡에 관한 법을 임시로 《속전(續典)》에서 삭제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지만 국가의 기강으로 헤아려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죄는 수령에게 있는데, 곤란을 당하는 자는 백성들이니, 지금 만약 폐단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크게 백성을 위하는 본 뜻이 아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감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먼저 봉화(奉化)로부터 순흥과 풍기의 준례에 의하여 낱낱이 정리하고 제일 먼저 범법한 수령은 이름을 지적하여 죄를 논하고 법대로 처단하며, 그 나머지 인습한 자는 특별히 모두 논하지 말라. 폐단이 되고 있는 다른 고을은 이처럼 좋은 기회에 미쳐 모두 자수하도록 하되 다만 제일 먼저 범법한 수령은 신문하여 처결하라."
하였다. 이만수가 또 아뢰기를,
"금산군(金山郡) 도암면(道巖面)에 향탄위전(香炭位田)033) 을 신설할 때에 신도 또한 그 개략을 알았습니다. 조정의 본 뜻은 혹시 조금이라도 민간에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전일에 내린 전교가 말할 수 없이 엄격하였고 받아들이는 세금도 본래 매우 적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제방을 쌓은 곳이 전부 모래와 돌이라서 한 번 장마를 겪기만 하면 문득 번거롭게 개축(改築)해야 하므로 근방의 5개 고을에서 부역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수천 명이 넘고 흙을 져나르고 모래를 메우는 노력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거두는 섬[石] 수도 점점 감축되니, 위전(位田)이 유명무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당초 백성을 위하려던 성상의 뜻과 다릅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본도에 왕래하며 혹은 다른 곳으로 옮겨 정하고 혹은 기경(起耕)하는 것에 따라 세금을 받아 매년 백성을 부역시키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민폐가 이와 같으면 어찌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묘당에서 해조에 분부하여 즉시 혁파하고 대가를 지급하는 것을 편한 대로 기획하도록 하라. 본 토지는 영남의 방백에게 소속시켜 기경(起耕)하는 대로 세금을 받든지 혹은 똑같이 아울러 세금을 면제하든지 좋을 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5일 계묘
부수찬 김달순(金達淳)이 상소하기를,
"도당회권(都堂會圈)은 국가의 큰 정사이고 사림(詞林)의 준엄한 선발입니다. 법을 엄밀하게 하고 벼슬을 신중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으니, 한두 사람이 사사로이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지난번 관록(館錄) 때부터 여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떠들썩하였고 끝내 도당회권에서는 대제학은 수수방관한 채 결정에 참여하는 말을 들어볼 수 없었고, 자리에 가득한 관원들은 입을 다물고 감히 가타부타 논하는 자가 없었으며, 명단이 한 번 나오자 사람마다 입을 가리고 몰래 웃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처럼 불초한 자 또한 그 사이에 외람되게 들어 있으니, 인심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지금 성덕이 높고 빛나며 문교(文敎)가 잘 갖추어져 있으니, 더욱 마땅히 훌륭한 선비를 잘 선발하여 명실상부토록 해야 하는데, 이런 것은 하지 않고 오직 색목(色目)으로 많고 적음을 따지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사람을 선발하는 데 이르러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구차스럽게 인망(人望)에 맞지 않는 잡된 자로서 숫자를 채우니, 성헌(成憲)에 어긋나고 맑은 조정에 흠을 남기게 되는 것은 홍문록(弘文錄)이 있은 이래로 반드시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점(圈點)을 받는 사람으로서 권점 찍는 일을 논하는 것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만약 문학과 지위가 진실로 이 직무에 합당하지 않으면 스스로 헤아려 스스로 단념하면 충분하다. 자기에게 해당되는 권점에 대하여 이처럼 스스로 논열하니, 이것이 협잡이 아니고 무엇인가. 원래의 상소를 되돌려주고 관안(官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실시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과 이조 참판 박우원(朴祐源)이 상소하였다.
"어제 부수찬 김달순(金達淳)의 상소를 보니, 금번 도당록(都堂錄)의 난잡함을 성대하게 논하여 종이에 가득히 나열하고 비방과 배척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신들도 그때에 참석한 사람으로서 권점 찍는 일이 난잡하여 사람들의 뜻에 차지 않는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일언반구도 그 사이에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았으니, 지금 이 사람의 말을 진실로 마땅히 받아들여 죄로 삼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들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우의정 박종악이 상차(上箚)하기를,
"도당회권(都堂會圈)은 국가의 큰 정사입니다. 만약 대제학이 아니면 수상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주장할 수 있으며, 좌의정과 우의정 및 의정부 우참찬과 이조의 여러 당상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논이 하나로 귀결된 다음에야 비로소 권점 찍는 일을 완수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규정입니다. 금번에는 일이 정상적인 규정과 달라 반나절이나 서로 고집하였으니, 신의 위인이 미천해 말이 무시당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학도 또한 감히 사람의 우열을 판별하여 취사(取捨)하지 못하였고, 이밖의 여러 당상관들은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앉아 있고 금인(金人)처럼 입을 봉하고 있었는데, 소략하게 끝을 내고는 권점 찍는 일을 완결하였다고 이름하였습니다. 명단이 한 번 나오자 공론이 떠들썩하여 서로 비방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도당록(都堂錄)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김달순(金達淳)의 상소가 나옴에 죄를 성토함이 왁자지껄하고 말의 내용이 엄정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입이 석 자가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변명을 하겠습니까. 신이 지금 죄를 받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감히 함께 목욕을 하면서 남이 옷벗은 것을 비방하는 계책을 꾸미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 이는 국가를 저버리는 것이고 명기(名器)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신이 공론을 들어보건대, 권점(圈點)을 받은 여러 사람이 모두 인피하여 스스로 물러가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상께서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며 인재를 선발하고 벼슬을 신중히 하는 뜻을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옥석(玉石)이 함께 불에 타는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국조(國朝)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권점을 고친 전례를 분명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일제히 모두 고쳐 기록하여 권점 찍는 일을 신중히 하고 청관(淸官)의 선발을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신을 물리치라 명하여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자를 경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달순(金達淳)의 상소에서 이미 성명을 지적하지 않았고 또 등초하여 반포하지 않았는데, 어찌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이처럼 할 수 있는가. 더구나 고쳐 기록하라는 요청은 크게 불가(不可)하다. 경이 이른바 전례라고 한 것은 아마도 선조(先朝)께서 표준을 세우고 정치를 이룩한 뒤에 와서는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경을 현재의 직책에 세울 때에 책려(責勵)한 바가 또한 어떠하였는데, 협력하여 도와주는 효과는 없고 모여 권점을 찍는 날부터 나로 하여금 한갓 수응(酬應)할 단서만을 더 늘리게 하니 어찌 한탄스러운 부분이 아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빨리 전일의 소견을 버리고 더욱 대양(對揚)의 도리에 힘쓰라."
하였다.
4월 6일 갑진
좌의정 채제공이 상차(上箚)하기를,
"도당회권(都堂會圈)은 국가의 큰 정사입니다. 신은 심정과 일이 몹시 슬프고 질병에 오래 빠져 있었지만 재촉하는 전교가 거듭 내려오는 바람에 감히 여러 번 하교를 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회의에 참석하였으니, 이 또한 망녕된 것이었습니다. 능히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못하고 뜻을 굽혀가며 낮췄다올렸다 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여 사건이 거듭 생기게 하였으니, 이도 망녕된 것입니다. 두 이조 당상은 제손으로 직접 권점을 찍고 수일 후에 갑자기 난잡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말하였는데, 그들이 눈으로 이미 보았다면 어찌하여 직접 권점을 찍었습니까. 한 사람의 몸으로 손이 눈을 따르지 못했으니, 이는 무슨 이치입니까. 신은 성품이 본래 소활하여 남을 믿기를 자신과 같이 하므로 물러간 뒤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망녕된 것입니다. 더구나 동료 정승은 상냥하고 너그러운 도량으로 신과 함께 다같이 협력하여 공경하는 뜻이 있으니, 신이 만약 처사를 온당하게 하였다면 어찌 어제 차자를 올린 일까지 있었겠습니까. 신은 오직 스스로 반성해야 할 뿐입니다. 한 번 물러가려는 뜻이 돌과 같이 견고해졌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물러가 시골 집에 엎드려 있도록 빨리 윤허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이미 경에게 전임(專任)하였으니, 비록 거짓말이 날마다 이르고 비방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하더라도 모두 제풀에 일어났다가 제풀에 소멸하게 놓아두어 일을 각각 그 일대로 붙여둘 뿐이다. 이미 지난 일도 오히려 신물이 날 지경인데 도당록(都堂錄)의 일로 또 한 가지 트집잡을 꼬투리가 첨가되었다. 경이 이 도당록에 참가한 것이 어찌 즐거워서 한 것이겠는가. 재촉하는 전교로 밤을 지내고서 마지못해 억지로 응한 것이니, 경으로 하여금 낭패를 당하게 한 것은 경의 잘못이 아닌데, 경은 어찌하여 망녕[妄]이란 한 글자로 중언부언하면서 이처럼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시키는가. 동료 정승이 운운한 것은 경에게 다른 뜻이 없는 듯하다. 다만 이조 당상의 상소에 대하여 경이 이른바 손이 눈을 따르지 못했다고 한 것은 저들이 반드시 해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정의 기상은 안정을 귀하게 여기니,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의 예리한 기세를 경들이 가는 곳마다 진정시켜야 하는데, 지금 이와는 반대로 어제 우의정의 차자가 나왔고 지금 좌의정의 차자가 있으니, 받들어 보좌하는 신하로서 함께 협력하고 공경하는 의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인가? 경들을 위하여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4월 7일 을사
예조가 아뢰기를,
"각신 이만수의 별단(別單)의 여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락국의 왕릉이 김해부(金海府) 성 서쪽 2리쯤 되는 평야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낮은 논으로 둘러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큰 장마를 만나더라도 능 곁의 10보(步) 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으니,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을 쌓은 것은 그리 높지도 넓지도 않고 사초(莎草)도 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魂遊石) 1좌(坐), 향로석(香爐石) 1좌, 진생석(陳牲石)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首露王陵)’이란 4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 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에 특별 전교로 인하여 고쳐 세운 것입니다. 돌담으로 둘러 쌓았는데 앞은 제각(祭閣)까지 닿았습니다. 허 왕후(許王后)034) 의 능은 성(城) 북쪽 2리쯤 되는 구지봉(龜旨峰)의 동쪽에 있는데, 구봉(龜峰)은 바로 수로왕이 탄생한 곳입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두 능은 서로의 거리가 또한 2리쯤 되고, 봉분 쌓은 것과 설치한 물건은 수로왕릉과 같으며,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보주태후허씨능(首露王普州太后許氏陵)’이란 10글자를 썼습니다.
돌담 전면에 삼문(三門)을 설치하고 다른 각우(閣宇)는 없습니다. 제각(祭閣)은 4칸인데 정자각(丁字閣)의 제도를 사용하였고, 부엌 4칸, 재랑(齋廊) 4칸, 재실(齋室) 4칸으로 바로 옛 회로당(會老堂)입니다. 제각(祭閣)의 기둥 밖 서까래 끝에는 간간이 물이 새고 단청은 벗겨져 떨어진 곳이 많으며 부엌의 서까래는 태반이나 썩었으니, 올 여름의 장마를 지내면 쉽게 무너질 염려가 있습니다. 금번에는 이미 고유(告由)하지 못했으니 역사를 시작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추향(秋享)을 기다려 수리하는 것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제물은 한결같이 본릉(本陵)의 동지(冬至) 제사의 전례대로 장만하는데, 벼[稻]·기장[梁]·개암[榛]·밤[栗]·희생[牲]·포[鱐]·김치[菹]·젓갈[醢] 따위는 대략 숭덕전(崇德殿)의 제물과 같습니다. 제기(祭器)는 제상(祭床) 2개, 향상(香床) 1개, 촛대[燭臺] 2개, 보(簠)와 궤(簋) 각각 2개, 목기[豆] 6개, 대그릇[籩] 10개, 술잔[爵] 6개이며, 술독이 있는 곳에 술잔이 없어 자기병[磁甁]에 제주(祭洒)를 담아 놓았으므로 신이 본 부사에게 말하여 추향(秋享) 때까지 술잔[尊] 1개와 구기[勺] 1개를 새로 장만하여 격식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허 왕후의 능은 수로왕의 능에서 거리가 다소 멀어 이미 같은 국내(局內)가 아니고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허 왕후의 능에는 제각(祭閣)이 없으므로 전부터 제사지낼 때 수로왕릉의 제각에 합설(合設)하였었습니다. 금번 제사를 지낼 때는 하교로 인하여 각각 진설하였으나, 이후 절향(節享)에는 다만 전례대로 합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위전(位田)에 관한 일은 신이 김해(金海)에 도착하여 본부(本府)의 아전·향임과 김씨·허씨 등 여러 사람을 상세히 조사하여 비로소 전말(顚末)을 알았습니다. 능의 위토전이라고 이름한 것은 1결(結)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김희명(金熙明)이 상언(上言)하기를 조정에서 떼어준 문서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고 연조(年條)도 상세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른바 회로당(會老堂)의 위토전은 4결(結)이 조금 넘는데, 이는 바로 저지난 무인년035) 에 고 부사(府使) 허재(許梓)가 장만한 것입니다. 대개 허재는 가락왕의 후예로서 이 고을의 원이 되어서 선조의 능을 위해 재목을 모으고 토지를 사서 제사를 지내고 건물을 수리할 수용을 구비하여 그대로 고을 사람에게 맡겼었습니다. 이것이 회로당 위토전이라 일컫게 된 원인인데, 본부(本府)에서 기사년에 결정한 입안(立案)을 상고해 보면 이는 고을 사람이 간여할 바가 아님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시골 풍속이 근래에는 예전과 달라 왕릉의 동지 제사에는 다만 민가에 배정한 물건만으로 희생과 술을 마련하고 허씨의 전답에서 나온 것은 공공연히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며 종말에는 또 회로당이 왕릉에 가까운 것을 혐의하여 당의 현판은 향청(鄕廳)으로 옮겨 걸고 전답의 이름은 고을 둔전(屯田)이라고 고쳐 기록하였으며, 처음에는 몰수한 것이라고 핑계대었다가 결국에는 공공연히 빼앗았습니다. 지난번 간사한 짓을 한 고을 사람을 엄중하게 형신하고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자 먼 변방의 완악한 풍속이 거의 징계할 줄 알게 되었고, 원래의 전답도 또한 본부(本府)에서 왕릉을 수리하는 위토전으로 양안(量案)을 정리하였으니, 이후로는 명목이 비로소 바로잡히고 간사한 폐단을 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위토전이 아직까지 향임(鄕任)에 속해 있으니, 실로 오래되면 또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김씨와 허씨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능감(陵監)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려고 하지만 이른바 능감이 꼭 향임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금번 춘추(春秋) 절사(節祀)를 거행한 뒤에는 왕릉의 사체(事體)가 전보다 더욱 각별하니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의 위토전을 막론하고 모두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모든 출납의 숫자와 지출의 절차를 본 부사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실제 숫자를 조사해보면, 능의 위토전과 회로당(會老堂)의 토지에서 받는 벼가 가정하여 매년마다 42석이 되며, 능졸(陵卒) 50명에게 군역(軍役)을 면제한 대가로 받는 돈이 61냥이 되고, 각면(各面)에서 각종의 제수(祭需)를 대신하여 바치는 돈이 89냥이 되니, 합하면 1백 50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지 제사의 준례에 의하여 제수를 마련하면, 두 차례 절사(節祀) 때에 들어가는 벼가 28섬이고 돈이 1백 4냥이니, 남은 숫자는 벼가 14섬이고 돈이 46냥입니다. 만약 숭덕전(崇德殿)의 준례에 의해 제수(祭需)를 본부(本府)에서 회감(會減)한다면, 위토전에서 나오는 것과 능졸(陵卒)에게서 군역을 면제한 대가로 받은 돈은 전량을 저축해 놓을 수 있으니, 제각(祭閣), 제수(祭需)를 수리 개조하는 등의 절목과 능감(陵監), 능직(陵直)에게 주는 봉급 따위는 모두 공비(公費)를 쓰지 않고도 넉넉히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 의식은 이미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고하여 마련해서 내려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또한 본부(本府)로 하여금 사세(事勢)를 참작해 품식을 결정해서 영구히 준수할 수 있는 방도를 삼게 하소서.
1. 가락왕릉과 허 왕후의 능에서 1백 보(步) 안에는 일찍이 선조(先朝)의 특별한 전교로 인하여 표석(標石)을 세워 경작과 장사 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근래 완악한 백성들이 금지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 능의 금지 표시 안에 침범하여 경작하는 걱정거리가 종종 있습니다. 금번 판부(判付)한 뒤에 본부사(本府使)가 조사하여 다스리고 엄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신이 간 뒤에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아직까지 새로 개간한 것은 없었습니다. 침범하여 장사 지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왕릉은 평지에 있기 때문에 본래 이러한 걱정이 없으나 허 왕후의 능에는 금지 구역을 침범한 곳이 한두 군데 있었는데, 여러 해가 된 것은 조사하여 규명하기가 어렵고 그중 작년에 새로 장사 지낸 것은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본부사(本府使)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고 기한을 정해 파서 옮기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1.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 12위의 왕릉은 20리 안에 있기 때문에 신이 가서 살펴보았고, 16위의 왕릉은 20리 밖에 있기 때문에 본주(本州)의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살펴보고 와서 보고토록 하였는데, 모두 봉분이 완전하고 견고했으며 사초(莎草)가 잘 자라서 바라보기에 무성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여러 왕릉은 모두 평야에 있으며, 오직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만은 거북머리 받침돌의 짤막한 비석에 능호(陵號)가 큰 글자로 적혀 있을 뿐, 그밖에는 하나의 표시도 없어 어느 무덤이 어느 왕릉이라는 것은 다만 촌노인들의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과 고을 아전의 구전(口傳)에 의거할 뿐입니다. 옛날에는 48위의 왕릉이라고 일컬었으나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은 다만 28위의 왕릉 뿐인데 그 또한 확실하지는 못합니다. 설치한 물건은 간혹 혼유석(魂遊石)과 병풍석(屛風石) 등이 있으나 다만 형체만 있어서 옛 제도를 상고하기는 어렵습니다. 헌덕왕릉(憲德王陵)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경순왕전(敬順王殿)이 있는데, 영정(影幀) 1장은 지난 무술년036) 에 영천(永川)의 은해사(銀海寺)에서 옮겨 봉안하였으므로 신이 지나는 길에 일체 살펴보았습니다.
1. 숭덕전(崇德殿)과 경순왕전(敬順王殿)에는 모두 참봉(參奉)이 있는데, 숭덕전의 참봉은 바로 계하(啓下)하는 자리였습니다. 고 판서(判書) 박문수(朴文秀)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다른 도(道)의 사람으로 구차하게 충원하고 임시 벼슬로 만들어서 오래도록 재실(齋室)을 비우는 때가 많았으니, 능(陵)과 전(殿)의 수호가 자연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절목(節目)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 사는 자가 아니면 차출하지 말도록 해도(該道)에 신칙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신라의 여러 왕릉에는 으레 왕릉을 수호하는 3호(戶)가 있었는데, 근래 본부(本府) 군역(軍役)에 거듭 침탈을 입은 것으로 인하여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왕왕 도피하고 있습니다. 신이 살펴볼 때에 간혹 능졸(陵卒)이 하나도 없는 곳도 있었으므로 본 부사(府使)로 하여금 즉시 정해서 세우도록 하였으니, 이 뒤로는 여러 능의 능졸에게 다른 역사(役事)로 침해하지 말도록 엄하게 신칙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규정을 정하도록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본(啓本) 전체를 등사하여 해도(該道)에 내려보내고 감사와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개정한 뒤에 고을의 장고(掌故)에 상세히 기록하게 하라. 능졸(陵卒)의 정원이 빠졌다는 말은 듣고 보니 매우 놀랍다. 이후로 감사는 다시 못된 습속을 따르는 자가 있는지 자주 조사해서 수령을 논죄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본부에서 서울에 바치는 군포(軍布) 중에서 능을 지키는 호는 역호(役戶)에서 제해 주고 그들을 수호하는 부서로 이속시켜 떠나지 않는 기반을 만들게 하라. 같은 기슭에 있는 왕릉들도 또한 각각 정할 것 없이 아울러 이런 뜻으로 알려 주어라."
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4월 8일 병오
상이 내원(內苑)에 나아가 짝을 지어 활을 쏘았다. 이날은 바로 연등절[放燈日]이었다.
지사(知事) 이홍직(李弘稷)이 상소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은 태평성대라는 칭송이 지어지고 성군이 잇달아 나왔다는 노래가 드높습니다. 종묘 사직의 경사는 오직 우리 원자(元子)이고 조야(朝野)의 기쁨도 또한 우리 원자입니다. 온화한 덕기(德氣)가 점점 성취되고 지혜가 날로 성장하니, 보양(輔養)하는 방도는 일찍부터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저 어렸을 때부터 미리 인도하는 방도를 더해 주어야 양지(良知)가 자연 성취되고 덕성(德性)이 자연 함양될 것입니다. 근일 군읍에서 인재를 천거하고 묘당에서 선발한 것이 실로 성상의 생각에서 나온 줄을 알고 있으니 신의 혼모한 말이 족히 그 사이에 경중(輕重)이 될 수 없겠지만 사랑하고 받드는 정성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감히 이렇게 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먼저 솔선하여 몸으로 가르쳐, 경서(經書)에 밝은 선비들을 맞이하시고 청아(菁莪)037) 의 교화를 천명(闡明)하여 우리 동방에 억만 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깃들 기반을 마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진달한 상소는 정당하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날 밤 야간 통행 금지를 풀어놓았다.
4월 9일 정미
차대(次對)가 있었다.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영철(李永喆)을 3년을 기한으로 그대로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해미(海美)의 병선(兵船)과 방선(防船)의 일로 앙달(仰達)하여 홍주(洪州)의 한 면(面)을 해미에 떼어붙이라는 일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를 이속(移屬)시킬 때에 만약 상황을 잘 알고 본말을 훤히 꿰뚫고 있는 본 수령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폐단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듣건대 오고(五考)038) 가 금년 6월에 있다고 하니, 금년까지 그대로 유임시켜 일을 끝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1년은 너무 가까우니, 3년을 기한으로 그대로 유임시키라."
하였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문양(柳文養)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0일 무신
대사헌 구익을 체직시키고 조종현(趙宗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의 당상관에게 명하여, 북도(北道)의 두 본궁(本宮)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고 각 능을 봉심(奉審)하도록 하였다.
윤동만(尹東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1일 기유
우의정 박종악이 상차(上箚)하여 도당회권의 잘못된 일을 자신에게 돌리고 겸하여 질병의 증상을 진술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경이 간절하게 진달한 본뜻이 병에 있지 않다는 것을 헤아렸으니, 출사할 것을 재촉하는 이외에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일을 보기 바란다."
하였다.
4월 12일 경술
춘당대에 나아가 무예청(武藝廳)의 여름철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4월 13일 신해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4일 임자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면긍(李勉兢)이 상소하여 병폐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본군(本郡)의 임자년 조사 호구 수는 총 3천 2백 83호인데, 중·과부·병폐인(病廢人)·무녀(巫女)·유장(柳匠) 등의 호를 제외하면 2천 7백여 호에 불과하며, 조정의 관리와 양반 족속이 1천 2백여 호이고, 내노(內奴)·사노(寺奴)·교원노(校院奴)·역노(驛奴)·개인 노비[私奴]가 6백여 호이며, 충찬위(忠贊衛)·업무(業武)·교생(校生)·삼반관속(三班官屬)·석장(席匠) 등이 3백여 호입니다. 그 나머지 숫자를 계산하면 양정(良丁)으로서 역(役)에 응할 수 있는 호구가 대략 계산하면 5백 호도 못됩니다. 본읍(本邑)의 군액(軍額)은 수포군(收布軍)의 숫자를 통산하면 모두 2천 7백 83명입니다. 지금 5백 호의 양정(良丁)을 가지고 2천 7백 80여 명의 군역에 응하게 하려면 비록 호마다 5명씩 내더라도 오히려 부족한 숫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액을 허위로 기록한 것이 3분의 2가 됩니다. 죽은 자에게 10년간의 군포(軍布)를 책임지우고 어린 아이에게 두세 가지의 신역(身役)을 겸하게 하니,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가 고달퍼 솥이 남아 있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때를 당하여 끝내 징수하지 못한 것이 4, 5백 금(金)에 이르고 기한이 이미 지나서 독촉하는 공문이 잇달아 내려오므로 부득이 진성(陳省)을 만들어 주고 담당 관리를 재촉하여 보내면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가 빚을 내어 채워서 바치곤 합니다. 그러므로 금년에는 가포(價布)를 징수하는 담당 관리를 보내고 명년에는 반드시 창고 담당자를 차출하여 보낼 것이니, 창고 담당자가 어찌 충당할 많은 재물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로 하여금 도적질하고 농간을 부려 그 빚을 갚게 할 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민가에 반드시 누락된 장정이 있을 터인데, 혹 이장[里任]이 은폐시키고 간사한 아전이 농간을 부리므로 밝히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임 장교(時任將校)와 수직하는 향교 유생도 태반이나 군안(軍案)에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대저 어렸을 때에 채워넣었으므로 소속된 뒤에는 한정(閑丁)으로 대신 때워 넣지 못하고 해마다 신포(身布)를 바칩니다. 이들도 오히려 그 러하니 잔약한 백성들은 알 만합니다. 심지어는 아전들이 그 임무를 맡아서 미리 뇌물을 받고는 충당할 사람이 없어 자기 이름을 군적[軍案]에 넣으니, 과연 누락된 장정이 있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명하여 잘 헤아려 감할 수 있는 것은 감하고 감할 수 없는 것은 본도(本道)와 다른 도를 막론하고 1천 명을 한도로 신역(身役)을 옮겨 정하여 위급한 근심을 풀도록 하소서.
본읍(本邑)이 보고한 재해는 복사(覆沙)039) 가 가장 많아 매년 수백 결(結)에 가깝습니다. 작년에도 5백 60여 결이 되었는데, 목화밭과 내재(內災)040) 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무술년041) 부터 새로 규정을 정하여 복사로 재해를 잡은 것은 다음해에는 반드시 다시 기경(起耕)한 것으로 기재하여, 비록 영영 전지의 형태가 없어진 것이라도 반드시 현재 복사(覆沙) 재해지로 기록하니, 당년의 재해지와 합치면 그 수가 또한 많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터무니없이 징수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무술년 이후로 예전에 복사된 것이 70여 결이고, 작년에 복사된 것 중 영영 개간할 수 없는 것이 대략 1백 결이며, 개간할 수 있는데 힘이 모자라는 것이 또 몇백 결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금년 가을에 이르러 재해지를 4, 5백 결로 장부에 기록해 놓는다면 영문(營門)에서는 반드시 크게 삭감할 것이니, 명년에는 전보다 10배나 더 백징(白徵)해야 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중종조(中宗朝)에 고형산(高荊山)이 영동(嶺東) 감사로 나가서 토지가 척박하고 전답이 황폐되었다고 실상을 갖추어 아뢰어 기경(起耕)에 따라 세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읍의 복사(覆沙) 피해는 자못 영동(嶺東)과 비할 바가 아니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부세를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본도(本道)에 행회(行會)하여 실제대로 장부에 기록하게 하소서.
셋째는 곡식으로 대납하는 것과 돈으로 내게 하는 폐단에 관한 것입니다. 영남에서 단곡(單穀)으로 대신 바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지만, 본읍(本邑)이 특히 심하여, 흉년에 대신 바치라는 명령이 있으면 반드시 단대곡(單代穀)으로 받아들이고 그후에 비록 풍년을 당해도 다시 본색(本色)으로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곡식 장부를 소급하여 상고해 보면, 콩[黃豆]을 단조(單租)로 대신 징수한 것이 8천 6백 40여 석이고, 팥[小豆]을 단조(單租)로 징수한 것이 1천 1백 10여 석이며, 좁쌀[小米]을 단속(單粟)으로 징수한 것이 2천 7백 80여 석입니다. 해조(該曹)나 감영에 올린 장부는 모두 본래의 곡식으로 회록(會錄)되었는데 본읍의 창고에는 모두 대신 바친 곡식으로 출납을 합니다. 대저 환곡법(還穀法)의 규정이 얼마나 엄중한데 곡식 장부가 서로 틀리는 것이 1만 2천여 석에 이르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근년 이래로 본조(本曹)에서 쌀과 좁쌀을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한 것이 7천여 석인데, 회계 장부에는 이미 본색(本色)으로 기록되었고 팔 때에도 또한 원래의 가격을 요구합니다. 당초 받아 먹거나 대신 바치는 것은 모두 백성들이 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추징하여도 그들이 억울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미 지난 일은 스스로 잘못을 알지 못하고 당장 급한 사정에 대해서는 반드시 모두 탄식을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도로 본색(本色)으로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형편이고 예전대로 덮어두려고 하면 반드시 영구히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니, 이는 불가불 변통해야 합니다.
작년에 경시관(京試官) 서영보(徐榮輔)가 명령을 받들고 본도(本道)에 왔다가 풍기(豊基)와 순흥(順興) 두 고을의 대신 바치는 곡식에 관한 일을 돌아가 아뢰자 특별히 현재 남아 있는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내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두 고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감동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두 고을의 준례에 의거하여 창고에 있는 것이든 나누어준 것이든 기한을 물려준 것이든 막론하고 모두 현재 있는 곡식으로 고쳐 기록하여 무궁한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자나깨나 밤낮 매여 있는 일념은 바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한 가지 폐단을 듣거나 한 가지 고통을 알게 되면 반드시 소생시키고야 말려고 한다. 그런 즈음에 너의 상소를 보니, 쇠잔한 5백여 호(戶)로 3천 명의 군역(軍役)에 응하게 하고, 1만여 포의 단대곡(單代穀)042) 으로 몇 배의 본색(本色)을 내게 하니, 눈앞의 것만 보느라 숨겨진 백성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데도 괄시한다면 영천군(榮川郡)에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을 원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네가 어찌 조정에 진달해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임명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처리하도록 하겠다. 전결(田結)에 백징(白徵)하는 것은 호조의 신하로 하여금 감사에게 상세히 물어 즉시 장계로 아뢰게 하겠다. 네가 이미 가까운 반열에서 나갔으니, 관리의 일을 비루하게 여기지 말고 굶주린 백성을 주급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더욱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4월 16일 갑인
금갑도(金甲島)에 위리 안치된 죄인 김문순(金文淳)·심환지(沈煥之)·이면응(李冕膺) 등을 특별히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말을 하고 생각한 바가 칠정(七情)043) 의 발함이 절도에 맞지 않았음을 면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부러 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연교(筵敎)는 반드시 전해 들었을 것이고 더구나 연석(筵席)에서 직접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아뢰는 말을 살피지 못한 것은 그 죄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처분은 나도 또한 지나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번 당상관의 상소를 그르다고 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두 특별히 방면하라."
하였다.
4월 17일 을묘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양사가 김문순(金文淳) 등에 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전교하기를,
"하루 사이의 행동거지가 앞뒤가 서로 맞지 않았으니, 비록 조정에 욕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옳다. 본래 요량이 없는 자라고 말하지 말라. 그 직무를 돌아보면 죄를 의논하는 의금부의 자리이고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는 간장(諫長)의 자리이다. 전 동지의금부사 행 대사간 홍성연(洪聖淵)을 이조에 분부하여 영영 의금부와 대사간의 의망(擬望)에서 빼버리고 인하여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홍성연(洪聖淵)이 의금부 당상관으로서 김문순(金文淳)을 특별히 방면하는 명령을 거행하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정계(停啓)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꾸짖는 전교가 있었다.
4월 18일 병진
전교하였다.
"예조 판서가 북도(北道)에 있는 왕릉을 봉심(奉審)하는 길에 두 본궁(本宮)에 이미 제사를 거행하였으니, 준원전(濬源殿)에도 똑같이 제사를 지내라."
정원이 아뢰기를,
"김문순(金文淳) 등에 관한 일은 대계(臺啓)가 철회되기도 전에 갑자기 특별히 방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은 말 한마디 없이 준례를 따라 거행하였으니, 해부(該府)의 당상관을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글을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정언 유성한(柳星漢)이 상소하기를,
"학문 공부가 진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는 것은 제왕과 신하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경연(經筵)을 설치한 것은 몸을 수양하여 정치를 하는 데 자뢰(資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천성(天性)이 탁월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셔서 비록 책을 펴놓고 강의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경전(經傳)을 잠시라도 몸에서 떼지 않기를 마치 밥을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근일 전하께서 경연에 드물게 나아가신다 하는데, 경연 신하들의 문학과 덕행이 모두 성상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여러 신하들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기 하나의 장점이 있으니 그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을 취한다면 조그마한 이익도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혹 별다른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신이 비록 그 연유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않은 점이 있을 듯합니다. 목이 메임으로 인하여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전하의 밝은 지혜로서 어찌 그 불가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가법(家法)과 4백 년의 규모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그 일이 또 중대한 것입니다. 예전 사람들의 케케묵은 말과 평상적인 말을 평상시 익히는 것은 비록 큰 유익이 없을 듯하나, 정유년044) 이후 16년 동안 태평한 것은 모두 전하께서 전일 독서한 효과이니, 그 도움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신이 어제 삼가 성상의 전교 중 ‘칠정(七情)의 발함이 절도에 맞지 않았음을 면하지 못했다.’는 분부를 읽고 삼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이는 《주역(周易)》에 이른바 ‘머지않아 회복한다.’는 것으로, 이미 지난 일인데 무슨 상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춘추(春秋)가 한창 왕성하시고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깊이 자뢰(資賴)하고 두텁게 함양할 수 있는 것은 경연(經筵)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사(故事)를 다 회복하여 자주 유신(儒臣)들을 접견하고 날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천성을 기르며 일에 응하고 사물을 대하는 도(道)를 강론한다면 그 말이 비록 신기하고 들을 만한 것은 없으나 요컨대 요(堯)·순(舜)을 배우는 사업이니, 형식적으로만 응하고 준례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실하게 하는 것은 또한 전하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일용(日用)에 간절하고 덕성(德性)을 성취하는 것이 어찌 하찮다 하겠습니까. 이미 알았어도 더욱 지극한 것 알기를 구하고 이미 행하였어도 더욱 지극한 것 행하기를 구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오랜 세월을 유지하면, 흠뻑 젖고 익숙하여 마음이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되어서 발함에 공평하고 순조로와 일을 대하여 종용하고 처리를 합당하게 하며,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형벌과 상(賞)이 온당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기꺼이 복종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삼가 항간에 전하는 말을 듣건대 ‘광대[倡優]가 대가(大駕) 앞에 외람되게 접근하고 여악(女樂)이 난잡하게 금원(禁苑)에 들어간다.’ 하니, 이는 비록 사소한 절목이지만 또한 성상의 큰 덕에 누가 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런 것들도 또한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전하의 성덕(聖德)으로서 우연히 미처 살피지 못하셨습니다. 빨리 경연(經筵)을 베풀어 앞으로의 성과를 구하고 더욱 덕(德)에 증진하기를 힘쓰소서. 신은 본래 불초한 자로서 외람되게 현직(現職)에 있으면서 전후로 한 번도 바로잡고 구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성은(聖恩)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체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윗조목의 일은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하였으니 그 연유를 반드시 속으로 알고 있을 듯한데, 어찌 ‘꼭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이로 인하여 저것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재량한 것이다. 이 밖에 아뢴 것은 말이 모두 진심에서 나왔고 글이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니, 근래에 이러한 작문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번 웃을 만한 것은 네가 말한 항간에 전한다는 것 중 둘째 조목이다. 대저 병신년045) 부터 이와 비슷한 호화로운 짓을 하였다면 윗조목에 이른바 ‘경연(經筵)을 열지 않는 연유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는 말이 어떻게 네 상소에 올랐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임무를 살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민보(李敏輔) 등의 상소로 인하여 근래에 이러한 작문이 없었다는 구절을 빼버리라고 명하였다.
홍수보(洪秀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여러 도에 신칙하여, 자기 경내(境內)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몸을 가릴 수 있는 장소를 별도로 마련해주어 병든 자는 죽지 않게 하고 병들지 않은 자는 전염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여러 도(道)와 각부(各部)에 신칙하여 버려진 아이를 특별히 찾아 내라고 하였다.
4월 19일 정사
하직 인사를 하는 수령을 불러 접견하였다.
승문원 판교(判校) 손석주(孫碩周)가 상소하여 도내에 관한 10조목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첫째, 도내(道內) 각 능침(陵寢)의 전사관(典祀官)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해읍(該邑)에서 본읍(本邑) 고을의 한잡인(閒雜人)으로 차견하니, 이미 명칭도 없고 또 지식도 없어서 혹 재물을 마구 다루더라도 감히 입을 열어 가타부타 말하지 못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지금부터 도내의 부근 고을 중에서 문관·음관·무관으로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을 별도로 기록해 놓았다가 감영에서 기한 전에 뽑아 임명하고, 예절대로 목욕재계하고 달려가 감시하여 제사지내는 규정을 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능(陵)과 전(殿)의 실직(實職) 관리가 혹 유고(有故)하면 임시 관리를 임명하여 대신 번들게 하는 것이 바로 옛 규정인데, 이른바 임시 관리를 하나도 신중히 가리지 않고 왜곡되게 사적인 안면만을 따라 한잡인(閒雜人)으로 어려움 없이 차출합니다. 이에 온갖 행동이 전혀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심지어 한번 참봉(叅奉), 봉사(奉事), 직장(直長) 등의 임시 관리의 이름을 얻으면 인하여 식년(式年) 호적에 모록(冒錄)하여 자손이 군역(軍役)을 면제받는 발판을 삼으니, 군정(軍丁)이 이로 인하여 감손되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지금 이후로는 엄격하게 법규를 세워 임시 관리가 호적에 모록(冒錄)하는 것을 일체 엄금하고 국성(國姓) 중에서 학식이 있어 감당할 만한 자를 뽑아 임명하고, 각 능·전에 원래 정한 3, 4명의 정원 수를 임의대로 더 채용하지 말도록 하며, 실직(實職) 관리도 또한 만부득이한 실제 사고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임시 관리로 대신 번을 들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셋째, 음직을 감사가 추천하는 법은 반드시 문학과 행의(行誼)가 있어 대중의 촉망이 모두 쏠리는 자를 고른 뒤에야 비로소 추천에 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중신(重臣)이었던 고 서종옥(徐宗玉)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함흥(咸興) 문회 서원(文會書院)046) 의 청금안(靑衿案)에 기록된 자라야 비로소 추천 의망을 허락해 주자는 뜻으로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른바 도천(道薦)은 부당한 길로 뚫고 들어오거나 공공연히 청탁하지 않음이 없어서 애당초 말할 만한 문벌과 명망도 없고 또 평소 드러난 재능과 학식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추천 제도를 설치하여 인재를 취하는 본뜻이겠습니까. 신의 뜻으로는 반드시 청금안(靑衿案)에 기록된 생원·진사·유학(幼學)으로 의망하여 추천하되, 먼저 해읍(該邑)에서 많은 선비들을 모아 권점(圈點)을 찍어 감영에 보고하고 또 감영에서 도내(道內)의 공론을 널리 채집하여 가리고 또 가린 뒤에야 비로소 아뢰면 이조에서 해마다 조목별로 기록하여 차례대로 등용하게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위에서는 인재를 얻는 실제가 있고 아래로는 분수에 넘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서북 지방에 별부료(別付料)를 설치하고 오래 근무한 대로 전근(轉勤)시키는 일에 관해서입니다. 기유년에 새로 설치하였을 초기에는 서관의 청천강 이남과 북도(北道)의 남관(南關)을 합하여 하나의 관청으로 만들고 오래 근무하면 전근시키는 규정을 하나같이 옛 관청을 창설할 때의 규정에 의거하여 오래되지 않은 것에 구애되지 말고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마다 전근시키기로 절목을 의논해 정하였습니다. 바로 그해 12월의 도목 정사에서 먼저 청남(淸南)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1명을 변방 장수로 임명해 보냈으니, 다음해 6월은 남관(南關)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자를 전근시킬 차례인데, 전조(銓曹)에서는 서울 군문(軍門)에서 시행하는 45개월의 준례를 인용하여 기한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경술년047) 이후로 마침내 검의(檢擬)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네 번의 도목 정사가 지났는데도 한 사람도 전근시킨 자가 없으니, 먼 지방 사람을 위로하고 무사(武士)를 발탁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금년 6월의 도목 정사 때부터 한결같이 당초 규정에 의해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다섯째, 남관(南關) 세 고을의 세초군(歲抄軍)은 바로 남병영(南兵營)이 관리하는 바인데, 이른바 제방삼색(除防三色)의 명목으로 징수하는 쌀과 콩의 수량은 석(石)마다 바치는 것이 합쳐 8두(斗)나 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이 해마다 증가하여 한 사람이 바치는 것이 적어도 15, 16 두가 넘는데 혹 흉년이라도 만나면 값이 7, 8 냥에 이르니, 이미 가난한 백성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 간혹 부자 형제가 있으면 바쳐야 할 쌀과 콩이 수삼 석에 이르게 됩니다. 또 수송하여 공납하는 거리가 혹은 수백 리나 되므로 혹은 돈을 가지고 감영 부근에 가서 쌀을 사서 공납하니, 그 비용은 더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각 역참의 마위전(馬位田)048) 이 묵어 시내나 갯벌로 되어버려 허다하게 감축된 것은 어느 곳이나 그러하지만, 그중 거산역(居山驛)은 1백여 년 전에 17마호(馬戶)를 더 설치한 뒤에는 마위전을 증설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 마호의 위전 중에서 다소 덜어내어 새로 증설한 마호(馬戶)에 분배하였으니, 반드시 쇠잔하여 지탱하기 어렵게 될 형편입니다. 역참을 설치하여 명령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정사입니까. 신은 북쪽 끝 광막한 지역에 역참의 길이 영영 끊어지는 폐단이 즉시 이를까 염려됩니다. 빨리 본도(本道)의 감사에게 명하여 충분히 상의하여 별도로 선처하게 하소서.
일곱째, 북관(北關)의 일로(一路)는 북쪽으로는 저들의 지역과 가깝고 안으로는 국가의 울타리가 됩니다. 그리고 용맹스러운 사람이 많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기 때문에 조정에서 북로(北路) 보기를 다른 도에 비해 더욱 중히 여겼으므로 특별히 먼 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은혜를 주어 별도로 부록(付祿)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고, 게다가 근자에는 선발하는 법을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전후로 위로하고 권장한 것이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별도의 무사(武士)로서 재주를 가지고 뜻이 있는 자들은 거의 우레가 동함에 구름이 모여드는 것처럼 성하게 흥기할 것입니다. 다만 등용하는 즈음에 그 도(道)를 다하지 못하여 방한(防限)에 구애되고 문벌에 견제되어, 재주와 지략의 우열을 논하지 않고 사람이 북쪽 사람이면 허통(許通)하는 것은 수문장이나 부장(部長)의 두 자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간혹 붓을 던져버리는 선비가 있으면 동배[儕流]들이 배척하고 친척들이 단절합니다. 이 때문에 양반의 이름을 가진 자는 수치스럽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북쪽 사람으로서 전후 처자를 이끌고 남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가는 자가 손으로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요컨대 북도(北道) 사람이란 이름을 모면하기 위하여 기필코 철령을 넘고야 말려고 하니, 그 정상을 추구해 보면 몹시 가련합니다. 지금 만약 특별히 개혁하여 즉시 서북(西北) 지방에 선전관 추천을 하도록 허락하시면 먼 지방 사람들이 바람에 쓸어지듯 쏠리고 온 도(道)의 사람들이 참새처럼 춤을 추며 기뻐하여, 구하지 않더라도 허다한 호걸들이 반드시 발을 싸매고 천리 먼 길을 스스로 이를 것입니다.
또 선발하는 규정으로 말하면 특별히 문벌·신체·재능·힘으로 선발해 올리는 조목을 삼은 것은 실로 널리 인재를 취하려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인데, 활쏘는 것은 그중의 한 가지 기예에 불과합니다. 지략(智略)이 상등이고 사예(射藝)는 말단적인 것인데, 지금 만약 오로지 사예로 기준을 삼으면 합격하고 합격하지 못하는 바는 오직 요행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선발에 적합한 자가 있더라도 마침 그날 활쏘기에 불리하면 선발에 들지 못하니, 인재를 놓친다는 탄식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사람이 만약 쓸 만하면 비록 활을 잘 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취하여 선발하고 점차로 여러 가지 사예(射藝)를 익히게 하면 충분히 사람과 재주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도라고 여겨집니다.
여덟째, 북도(北道)가 실로 국가의 북문(北門)으로서 고개가 험준하여 방어하기에 믿을 만한 것은 다섯 관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천령(摩天嶺)은 길주(吉州)와 성진(城津)이 합쳐 지키는 형세가 되고, 마운령(摩雲嶺)은 단천(端川)의 별중영(別中營)과 곡구(谷口)의 별중사(別中司)가 끼고 지키는 형세가 되며, 함관령(咸關嶺)은 함흥(咸興)의 감영과 북청(北靑)의 병영(兵營)이 서로 의지하여 지키는 형세가 되고, 황초령(黃草嶺)은 장진(長津)의 방어사 병영을 새로 설치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이 네 고개는 모두 방어하는 구획(區劃)이 있지만, 철령(鐵嶺)으로 말하면 강원도와 함경도 두 경계 사이에 있는데, 천연적인 참호가 칼로 자른듯이 확연하며 삼액(三阨)이 가장 중요한데도 유독 하나의 진영도 설치한 것이 없으니, 식자들의 걱정거리가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른바 삼액(三阨)이란 곧 철령(鐵嶺)·삼방(三方)·설운령(雪雲嶺)으로서 북관(北關)의 일로(一路)가 이곳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어지는데, 동쪽으로 철령을 넘으면 회양(淮陽)까지가 70리이고, 남쪽으로 삼방(三方)을 나가면 평강(平康)까지가 2백여 리이며, 서쪽으로 설운령을 넘으면 곧바로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에 통하게 되니, 이는 삼로(三路)의 요충지이고 다섯 관문의 제일입니다.
북도의 지형은 비유컨대 긴 뱀 모양과 같아 남북으로 뻗은 것이 거의 2천 리나 되고 중첩된 고개 봉우리가 차례로 솟아 있어 내외가 서로 호응하고 입술과 이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배와 등이 서로 호응하는 시설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구원하는 도리에 있어 이미 방도가 없으니, 혹시라도 급한 변고가 있어 적의 기병이 육진(六鎭)의 도로를 경유하지 않고 몰래 압록강(鴨綠江)의 상류를 건너 장진(長津)과 삼수(三水) 사이에 갑자기 나타나 일단 황초령(黃草嶺)을 넘게 되면 함흥(咸興)은 반드시 먼저 그들의 예봉을 받을 것이고 함관령(咸關嶺) 이북은 이미 적의 뒤에 있을 것입니다. 평탄한 길로 달리는 적병이 곧바로 안변(安邊)과 덕원(德源)의 남쪽으로 향한다면 함흥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다만 철령(鐵嶺) 하나의 봉우리만 있는데, 철령 고개는 험준한데다 고개 정상으로 길이 가파르게 나 있는데 반해 삼방(三方)은 평평한 저지대이고 민가가 한산하니, 그 형세는 반드시 철령의 길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삼방으로 갈 것입니다. 삼방 이남은 곧 경기도와 멀지 않은 곳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삼방의 길을 폐하자는 의논은 바로 형세를 상세히 알지 못하는 소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저 삼방(三方)의 지형은 밖에서 멀리 바라보면 그 형세가 툭 트이고 넓어서 마치 등한(等閒)한 평지와 같으므로 적의 형세가 반드시 삼방으로 갈 것이라고 운운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골짜기 어귀에 이르면 금기(錦機) 이후부터는 좁고 깊숙한 길로 좌우에는 깎아 세운 듯한 산이 있고 한 가닥의 긴 길은 골짜기와 더불어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1백여 리 사이에 수레가 나란히 다니지 못하고 기병이 대열을 이루기 어려우니, 이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 사람도 열 수 없다는 지역입니다. 참으로 이 길을 폐지한다면 두서넛 고을에 고기와 소금이 소통되지 않는 폐단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합니다. 1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반드시 무뢰배와 강도들이 도망쳐 모여드는 소굴로 될 것이니, 그 지역은 백성을 채워두어야 하고 결코 비워둘 수 없는 곳입니다. 더구나 금기(錦機) 지역은 삼방(三方)의 어구에 처해 있으면서 한 모퉁이를 자물쇠처럼 막고 있어 자연적으로 내지(內地)의 문호(門戶)를 이루고 있으며, 또 북로(北路)의 인후(咽喉)가 됩니다. 설운령(雪雲嶺)은 왼쪽 팔이 되어 겸하여 방어할 수 있고, 철령(鐵嶺)은 오른쪽 팔이 되어 겸하여 수어할 수 있으며, 삼방(三方)은 등이 되어 식량을 운반하는 길에 편리하니 장진(長津)·길주(吉州) 등의 방어와 비교해보면 경중(輕重)이 현격히 다릅니다.
또 병법으로 말하면 먼저 험한 지역을 점거하여 적병을 기다린 뒤에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한 진영의 병마(兵馬)를 이곳에 주둔하게 하면 맥락이 내지(內地)와 통하고 형세가 먼 변방까지 서로 연계될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변고를 알리는 데 편리함이 이보다 절실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또 안변(安邊) 한 고을은 지방이 가장 광활한데, 영풍(永豊)과 삼방(三方) 등 지역이 모두 1백여 리가 되거나 혹은 수백여 리가 되어 민가가 소활하고 관청의 명령이 미치지 않는 것이 거의 함흥(咸興)의 장진(長津)과 같고, 본부(本府)에 있어서도 그다지 긴요하지 않아 영풍의 백성들이 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평강(平康) 지역도 또한 안변과 같은데, 분수령(分水嶺)이 지금은 비록 평강에 소속되어 있으나 북쪽은 바로 안변의 지역입니다.
지금 만약 하나의 큰 진영을 그 중간에 설치하고 안변의 남산참(南山站) 서쪽과 평강의 분수령 이북을 떼어 새로 설치한 곳에 붙이면 지방이 흡족히 1백여 리가 되고 민가도 또한 수천 호에 못하지 않을 것이며 토질이 비옥(肥沃)하고 생산이 풍부하여 충분히 하나의 큰 고을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다만 장진(長津)에 비교할 정도만이 아닙니다. 단연코 새로 설치하여 환난에 미리 대비하는 경계를 보존하게 하소서.
아홉째, 북관(北關)은 변방의 변고를 대비하는 지역인데도 태평 시대를 오래 누리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훈련을 시행하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태만해졌습니다. 게다가 각 해당 초관(哨官)의 두목들이 멋대로 농간을 부려, 자기 뜻대로 승진과 강등을 행하고, 있는 사람을 도망쳤다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 하며, 심지어는 나이가 노제(老除)에 차면 이름을 거꾸로 쓰고 나이를 줄여서 그대로 군적에 붙여두고 당초부터 대신 뽑지 않으니, 이른바 군적이 문득 헛된 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혹 감영의 조사가 있으면 두목들이 미봉(彌縫)하기에 급급하여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조사를 받게 합니다. 아, 훈련하지 않은 군졸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북로(北路)의 여러 군(軍) 중에 세 영문(營門)의 친기위(親騎衛)로 말하면 이는 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가장 정예한 군사인데, 전마(戰馬)와 군복 색깔은 다소 볼 만하지만 군기(軍器)로는 한 벌의 쇠도리깨와 방망이가 있고 15개의 쓸데없는 긴 화살이 있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만약 마상총(馬上銃)을 각각 한 자루씩 주어 군사들로 하여금 총 쏘는 것을 연습하게 한다면 3천의 정예한 군사가 일당백(一當百)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다시 유의하소서.
또 무과 출신(出身)으로 말하면 서북(西北)의 무사들 중 매번 도과(道科)에서 출신한 자가 4백 명이고 게다가 매년마다 세 영문의 친기위(親騎衛)로서 도시(都試)에서 출신한 자 또한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아, 허다한 무사(武士) 중에 가장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자는 모두가 출신(出身)들이니, 이는 국중에서 제일 쓸 만한 군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한번 출신만 하면 스스로 할 일은 이미 끝냈다고 생각하여 말을 팔고 활을 깊숙이 넣어두고는 귀속(歸屬)할 곳이 없어 문득 한민(閑民)이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내(道內) 세 영문의 친기위(親騎衛)는 매 영문마다 각각 5백 명씩 모두 50세 이하를 뽑아 숫자를 채우고 군장(軍裝)과 군복을 마련하는 비용을 절반쯤 보태주며, 또 출세하고 권장하는 계단을 설치하여 도시(都試)에서 우등한 출신(出身) 몇 사람은 초사(初仕)나 변방 장수에 나누어 임명하거나 혹은 서울 군문(軍門)의 봉급이 많은 자리에 임명하여 차례로 뽑아 쓰면, 온 도(道)가 눈으로 보고 감격하여 용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니, 활과 말을 수습하여 더욱 연습을 시키면 장차 국가의 막강한 군사가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열째, 무릇 고통과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항간에서 늘 말하기를, ‘암행 어사가 어찌하여 내려오지 않는가.’ 하니, 참으로 저 백성들의 실정이 또한 애처롭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간사한 향임(鄕任)과 교활한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야 어느 고을인들 없겠습니까마는, 마천령(摩天嶺) 이북으로 말하면 영문(營門)에서 거리가 가장 멀어서 아전들과 향임의 횡포가 남관(南關)보다 극심합니다. 잘 다스리지 못하는 관리는 간혹 파면되었으나 죄를 진 아전과 향임들은 아직까지 태연합니다. 그 사이에 허다한 백성들의 피해를 감히 조목마다 외람되게 진달할 수는 없으나 대저 북관(北關)은 풍요롭고 기름진 고을이 매우 적으므로 장관이 된 자가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주선하고 조처할 수가 없습니다. 관청의 재물이 풍족해야만 청렴결백한 자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정치를 시행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자도 또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을 것인데, 이른바 관청의 용도가 해마다 삭감되니, 이것이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특별히 엄명공정하고 사무에 통달한 자를 뽑아 암행 어사로 보내되, 직로(直路)를 피하고 바다와 산골짜기에 출몰하면서 널리 백성의 실정을 채집하며 고통을 살피고 간사한 자를 들춰낸다면 거의 여러 가지 병폐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석주(碩周)는 북도 사람이다. 비답하기를,
"도내(道內) 각 능침의 전사관(典祀官)에 대한 일로서, 본읍(本邑)의 유생(儒生)이나 향임(鄕任)으로 채우는 것은 실로 부근 지역에 거주하는 자로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자만은 못하다. 그러나 이 법을 처음 만들 때의 뜻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제물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 헌관(獻官)이 있어야 저절로 말이 엄중하고 명령이 시행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하게 감사를 신칙하도록 하겠다. 능(陵)과 전(殿)의 임시 관리는 참으로 외람되고 난잡하다는 탄식이 있으나, 특별히 원래 정한 대로 임명하고 인원 수를 정하는 것은 자못 새로 설치하지 않고 옛 규정을 고치지 않는다는 의의가 아니니, 옛 관행대로 하는 것만 못하다. 감사에게 신칙하여 이에 의해 규정을 정하겠다.
음직을 감사가 천거하는 일은 옛 규정을 회복하여 시행하겠다. 서북(西北) 지방에 별부료(別付料)를 설치하고 오래 근무한 대로 전근시키는 일과 남관(南關) 세 고을의 세초군(歲抄軍)에 대한 일은 병조 판서가 이미 그곳 감사를 지냈으니 그로 하여금 의견을 갖추어 초기(草記)토록 하겠다. 거산역(居山驛)의 폐단에 관한 일은 감사로 하여금 좋은 것을 따라 폐단을 바로잡도록 하겠다.
무사(武士)를 뽑는 일에서, 서북(西北) 지방이 유독 선천(宣薦)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일찍이 이해하지 못한 바였다. 작년에 이 일로 여러 차례 연중(筵中)에서 물어 보았으나 풍속에 구애되어 아직까지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널리 장수에게 문의하여 품의 처리하도록 하겠다. 무략(武略) 중에서 사예(射藝)는 말기(末技)이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1만 군사와 대항할 용기를 쌓고 힘은 일곱 겹의 갑옷을 활로 뚫는 그러한 재주와 용맹이 있는 자를 쉽게 얻지 못하니,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사예(射藝)를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이는 문관을 제한된 과거에서 취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국한(局限)되기는 국한되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훌륭한 자를 선발하는 것은 옛부터 금석처럼 바뀔 수 없는 법 조문이 있으니, 지금 별도로 창설할 필요가 없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좋은 인재를 버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겠다.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일에서, 삼방(三方)이 험한 것도 알고 영풍(永豊)을 회복시키자는 의논도 또한 들었다. 진영을 설치하자는 하나의 조항은 잠깐 사이에 경솔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 군정(軍政)을 보수하자는 일에 관한 세 조목은 모두 조리가 있고 시행하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일찍이 감사나 병사를 지낸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의견을 진술하여 차대(次對)할 때에 회계하도록 하겠다.
암행 어사를 보내자는 일은, 먼 변방에 교화가 막혔으니, 비록 옛날 훌륭했던 시대라도 이 때문에 특별히 불쌍하게 여겨 변방 고을의 수령 10명은 대부분 경연 중에서 내보냈다. 근고(近古)에 고 정승 서지수(徐志修) 등을 특별히 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나는 덕이 없어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걱정이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원망이 있어도 풀지 못하며, 더하여 방백(方伯)과 수령은 적격자를 뽑지 못하였으니, 교활한 향임(鄕任)과 간사한 아전이 따라서 농간을 부리는 것은 그 형세가 곧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몸을 떠밀어 구덩이에 넣는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매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스스로 놀랍고 두려웠다. 그런 때에 너의 상소를 보니, 관북(關北) 백성들의 원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때로 암행 어사를 보내어 악한 자를 징계하는 효과가 있도록 하는 것을 어찌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다만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기는 쉽고 자취를 감추기는 어렵기 때문에 비록 북쪽 백성들이 암행 어사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자주 보내지 못하는 것이고 보내더라도 또한 대부분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근래 듣건대 이에 또 폐단이 생겨서 암행 어사가 출두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아전과 향임(鄕任)에게 요행수를 찾는 구멍을 열어 주었다고 하니, 다시 특별히 유의하려고 한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청남(淸南)과 남관(南關)에 별부료(別付料)를 신설한 것은 무사(武士)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훌륭한 뜻에서 나왔으므로 기유년049) 에 새로 설치한 후엔 옛 절목(節目) 중에 근무한 날짜가 많지 않음은 논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의하여 그해의 도목 정사에서 청남(淸南)의 별부 1명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부터는 다시 각 군문(軍門)에서 45개월이 되어야 비로소 오래 근무한 자로 여기는 법에 의하여 거론하지 않았으니, 신용을 잃게 되었습니다. 금년 여름의 도목 정사 때부터는 규정에 의하여 수용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원(李祖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0일 무오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와 과강(課講) 및 전경 문신(專經文臣)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시행하고, 겸하여 무신(武臣) 당상관과 당하관의 삭시사(朔試射)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시사(試射)와 무신(武臣) 당상관의 별시사(別試射)와 기로(耆老) 무신의 응사(應射)를 거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과 이조 참판 박우원(朴祐源)을 파직시켰다. 이에 앞서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홍문록의 일로 인하여 인피하고 들어가 일을 보지 않았다. 이때에 상이 장차 무신(武臣)들의 시사(試射)를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명하기를,
"정전(正殿)에 나와 앉았을 때에 도제조가 만약 나오지 않으면 내의원은 문안을 하지 말라."
하였다. 박종악이 마침내 입대(入對)하여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본사(本事)에서 처음부터 갈등을 일으킨 것은 바로 신이었고, 또 홍문록을 고치자고 청한 것도 또한 신이었습니다. 28명의 옥당(玉堂)을 옥(玉)인지 돌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속에 두고 신이 어찌 감히 의기양양하게 직무를 보겠습니까. 또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전조(銓曹)의 여러 당상관은 바로 권점(圈點)을 찍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히 신과 다를 것이 없는데, 근일 도목 정사가 있을 때마다 새로 등록한 여러 사람으로 쉽게 의망하니,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죄줄 것을 청하고 싶으나 신이 현재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당록(都堂錄)의 권점을 고치는 것은 바로 당론(黨論)이 혼란한 때의 일이다. 선조께서 당파의 폐습을 통쾌히 제거한 뒤이니 어찌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사목(金思穆) 등이 상소하여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아까 장전(帳殿)에서 삼가 듣건대, 대신이 새로 등록한 자를 홍문관의 직책에 의망한 것으로 개탄스럽다고까지 배척하였으니, 신들은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하여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대저 도당록(都堂錄)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수상과 대제학이 비록 주장한다고는 하지만 전조(銓曹)의 당상관도 참여하니 그런 법을 마련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들의 풍채와 언론이 남에게 꺼리는 바가 되었다면 당당한 홍문관의 관리 선발에 대해 당초부터 어떻게 감당하지 못할 사람에게 의논하였겠습니까. 금번 권점 찍는 일의 외람되고 난잡스러움은 도당회권(都堂會圈)이 있은 이래로 없었던 바입니다. 명기(名器)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여론이 갈수록 더 비등하니 이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좌석에 참가하여 권점을 찍을 때에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다가 홍문관 상소의 배척을 당하자 스스로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말을 하면서 또한 지나치게 나약하게 구는 바람에 도리어 갑(甲)에게서 당한 것을 을(乙)에게 화풀이 하는 경우를 당하였으며, 심지어는 손과 눈이 따로 놀았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수모를 당한 것이 적지 않고 수치를 끼친 것이 더욱 심합니다.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홍문관 상소에서 이미 성대하게 논죄하였고 신들도 또 잘못됨을 말한데다가 더구나 대신이 고쳐 등록하자고 요청한 것은 얼마나 준엄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새 당록은 권점을 완성시키지 못한 것인데, 근일 도목 정사의 주의(注擬)에서 혼동하여 의망하기를 마치 준례에 따라 의망하는 것처럼 하여 하나하나 모두 잘못되었으니, 어디를 가나 신들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금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배척한 데 대해서는 스스로 해명할 말이 없습니다. 현재 정상이 불안한 것은 오히려 일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속하는 것이니, 오직 먼저 신들의 죄를 다스린 뒤라야 국가의 체통을 높일 수 있고 공론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들의 직책을 삭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우의정이 오늘 연석(筵席)에서 배척한 것은 크게 개탄스러운 점이었으므로 대강 취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었는데, 경들이 이미 우의정이 아뢰는 소리를 들었다면 연명하여 상소하고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 다만 평범하게 도리를 말해야 할 뿐이다. 엉뚱한 화풀이를 받았다고 운운한 것은 좌의정과 우의정을 능멸하여 뒤섞어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손과 눈이 따로 놀았다느니 수모를 당하고 웃음거리를 끼쳤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또한 전적으로 좌의정을 경멸한 뜻이 아닌가. 조정에서 가장 엄한 것은 체통인데, 이것을 소홀히 보아넘기면 금일 조정에서 대신 노릇하는 자들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더구나 ‘감당하지 못할 사람[不可堪之人]’ 5자를 억지로 도당록에 덮어씌워 분명하지 않게 말하며 오직 현혹시키기를 일삼으니, 경들을 먼저 파직시켜서 외람되이 전조에 앉아 권한을 잡고 있으면서도 능히 임금의 뜻을 받들고 교화를 펴지 못하는 자들의 경계로 삼게 하겠다."
하였다.
신기(申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1일 기미
비국의 당상관 및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대사간 신기(申耆)를 파직시켰다.
대사헌 이조원(李祖源)을 체직시키고, 정존중(鄭存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도내(道內)의 응제생(應製生)들에게 상을 주자는 일로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본도(本道)는 무술을 숭상하는 지역인데 문학의 우월성이 날로 심해지니, 이것이 어찌 근래에 무술을 권장하는 뜻이겠는가.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무예를 시험하게 하여 철전(鐵箭)을 쏘아 1백 45보(步)를 넘어간 자와 유엽전(柳葉箭)을 쏘아 3번 이상 맞힌 자와 기추(騎蒭)로 4, 5번 이상 맞힌 자와 무경 칠서(武經七書) 3, 4책을 모두 통달한 자를 뽑아내어 장계로 보고하라."
하였다.
4월 22일 경신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김이소(金履素)를 이조 판서로, 홍검(洪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대궐에서 숙직하는 여러 신하들과 검서관(檢書官)·외각(外閣)의 관원에게 응제(應製)를 명하고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4월 23일 신유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4일 임술
간성(杆城)의 민가 1백 61호, 양양(襄陽)의 민가 54호, 고성(高城)의 민가 28호가 실화(失火)로 불에 탔다. 신·구(新舊) 환곡(還穀)과 잡역(雜役)·신포(身布)·산세(山稅)·해세(海稅)를 모두 1년간 감면하라 명하고, 병조 정랑 홍대협(洪大協)을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삼아 편의대로 조처하여 마무리하는 일이 두서가 잡힌 뒤에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4월 25일 계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 및 준원전(濬源殿)의 작헌례(酌獻禮)에 사용할 축문에 몸소 임금의 이름을 써 넣었다. 이때 두 본궁의 제사 의식을 개정하고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를 보내어 다음달 16일 갑술일에는 함흥의 본궁에 작헌례를 거행하고, 26일 갑신일에는 영흥의 본궁과 준원전에 작헌례를 거행하게 한 것이다.
경모궁(景慕宮)에 전알하였다.
4월 26일 갑자
우의정 박종악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7일 을축
장령 유숙(柳)이 상소하기를,
"신이 목전의 일에 대하여 놀랍고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기》에 ‘임금을 섬기되 범안 간쟁(犯顔諫諍)하고 덮어 숨기는 것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마땅히 명백하게 말하여 사람마다 보고 알기 쉽게 해야 하는데, 일전에 전 정언 유성한(柳星漢)의 상소는 겉으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을 내걸었지만 속으로는 현혹시키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여 말이 자못 의아스럽고 자취가 몹시 경망스러웠으니, 이것이 어찌 범안 간쟁하고 덮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까. 이처럼 바르지 못한 무리들을 언관(言官)의 대열에 놓아 둘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 정언 유성한(柳星漢)에게 먼저 삭탈 관직하여 쫓아내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성한의 일은, 시험을 주관하고 조정에 돌아온 뒤에 아뢴 글은 순전히 향암(鄕闇)의 말이었고 불러서 물어보니 또한 과연 그러하였다. 금번에 ‘진심에서 나온 것이고 외면치레를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그의 상소에 비답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저 시골에 전파되는 뜬 소문이란 옛날부터 내려온 기만하는 습성에서 나온 줄 알지만, 이미 듣고 즉시 고하였으니 이것이 숨김이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에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약한 자를 안타깝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뿐이 아니다. 윗조목의 일은 얼마나 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인가.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전혀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말했어도 오히려 향암(鄕闇)의 잘못으로 치부한 것은 스스로 참작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4월 28일 병인
경모궁(景慕宮)에 제수로 올리는 여섯 가지의 곡식을 호남(湖南)에서 봉진(封進)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본궁(本宮)에 올리는 밀[小麥]·벼[稻]·기장[梁]·피[稗]를 적전(籍田)에서 봉진하였는데, 간혹 제수를 바칠 때를 당하여 적전의 곡식이 익지 않았으면 호남에서 먼저 봉진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봉진한 것으로 똑같이 종묘에 올렸었다. 이때에 이르러 봉상시에 명하여 지금부터는 호남에서 봉진하는 여섯 가지 곡식을 각각 2되씩 더 봉진하게 하고 적전에서 봉진하는 것은 폐지하게 하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대신들의 말로 인하여 보리와 밀만 호남에서 더 봉진하게 하였다.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에서 이만수(李晩秀)·윤행원(尹行元)·김방행(金方行)을 예조 참의에 통의(通擬)하니, 전교하기를,
"대사성과 예조 참의로 통청(通淸)을 나누어 두 갈래로 만든 것은 문학과 정사(政事)에서 각각 장점을 취하려는 뜻이었다. 진실로 통달한 재주와 지극한 명망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침에 대사성으로 추천하고 저녁에 예조 참의로 추천할 수 있겠는가. 김방행은 이미 대사성으로 있었고 또 그때에 이조 당상관에 추천된 적이 있었으니, 비록 다시 통의(通擬)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만수를 일시에 아울러 통의한 것으로 말하면 이것이 어찌 당초 규정을 정할 때의 본뜻이겠는가. 다만 먼저 통의했던 대사성 자리에만 시행하라. 규장각은 본래 문학에 관련된 직책이니, 자급과 이력이 마땅히 할 만한 자를 대사성에 의망하는 것은 옳지만, 만약 정사의 재주가 비변사의 부제조(副提調)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면 절대로 경솔하게 참판이나 참의에 추천을 논하지 말아서 재주에 따라 임용하는 방도를 보존하라."
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29일 정묘
사간원이 【헌납 박서원(朴瑞源).】 아뢰기를,
"대각(臺閣)이 풍문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곧 여러 관리가 서로 바로잡아주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풍문이 만약 혹시라도 사실과 틀려 본사(本事)가 오로지 날조에서 나왔으면 경중에 따라 꾸짖거나 죄를 주는 것이 또한 조정에서 실지를 힘쓰는 정사입니다. 임금의 덕이나 위의 일에 대해 신하로서 진언(進言)할 때에는 매우 삼가하고 공경하여 반드시 확실하게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실지에 근거하고 지적해 진달하여 빨리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없고 정성뿐입니다.
일전에 유성한(柳星漢)의 상소 한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망스럽고 음흉하며 불측하기가 어쩌면 그리도 극심합니까. 강연(講筵)에 대한 한 가지 일을 진달하여 경계하려고 했다면 무슨 할 말이 없기에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꺼내고 감히 말하지 못할 곳까지 언급하여, 방자하게 은미한 뜻이니 식사를 폐하느니 하는 등의 말을 써내려간단 말입니까. 비록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라도 오히려 이처럼 흉악한 말을 차마 쉽게 가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금일 신하가 되어서 마음에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여 우리 임금 앞에 상소를 하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래 조항의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그가 또 어찌 차마 이 일로 우리 전하를 심하게 무함한단 말입니까. 아, 우리 전하의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화려함에 관계된 일은 당초부터 뜻을 두지 않아 일찍이 일호(一毫)라도 이런 등속의 일에 비슷한 것도 없다는 것은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상세히 알고 독실하게 믿지 않는 자가 없는데, 그가 어찌 감히 항간의 풍문으로 없는 것을 있다 하며 상소에 올려서 듣는 자들을 현혹시킨단 말입니까.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연등절(燃燈節) 저녁에 춘원(春苑)에서 여러 장수들이 논 것을 지적하여 운운한 것인데, 춘원의 위치는 이미 대궐문 건너편에 있고 장수들이 논 것은 좋은 때의 평범한 일에 불과하니, 돌아보건대 성상께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상소는 궁궐 밖의 춘원을 금원(禁苑)이라고 하여 마치 참으로 엄숙하고 깨끗한 궁궐에 여악(女樂)들이 마구 들어온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이 상소가 한 번 나오자 팔방(八方)이 놀라고 의혹하였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데도 밝혀낼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병이지심(秉彝之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전하의 정사(情事)로서 이런 모함을 받았으니 어찌 여러 신하들이 통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일이 임금의 정치의 득실(得失)에 관계되는 것이니,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정직하게 진달하면서 오직 그 말이 강직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없다면 비록 털끝만큼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실상과 맞지 않는 데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성한(星漢)의 상소는 그 장소를 변경하고 허위 사실을 조작하여 억지로 임금에게 돌렸으며, 겉으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을 빌리고 안으로는 혼란시키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도 또한 전하를 섬기는 자인데, 심하게 임금을 무함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의 심보를 추구해보면 마디마다 흉악합니다. 지금 만약 통쾌하게 분변하고 엄하게 성토하지 않는다면 임금께서 당한 무함은 씻어낼 기약이 없을 것이고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전 정언 유성한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정상을 밝히게 한 후 통쾌하게 법으로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일은 지난번 비답 중에 윗조항의 일은 향암(鄕闇)으로 돌려버렸고 아랫조항의 일은 한 번의 웃음거리로 치부하였다.
내가 어찌 일부러 이런 위로의 말을 하여 사실을 뒤바꾸어 놓는 술책을 썼겠는가. 인정(人情)은 상하의 차등이 없으니, 남이 근거없는 말로 책선(責善)한다 핑계대고 자기에게 덮어씌우는데 자신이 이에 속으로는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비위를 맞춰주며 예전대로 번지르르하게 넘기고 법칙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를 과연 훌륭한 사람[難人]이라 하겠는가, 소인이라 하겠는가. 이는 옷이 더러워도 빨지 않고 얼굴에 때가 있어도 씻지 않는 것은 진심을 속이는 자라고 배척한 정이천(程伊川)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임금의 도량으로 말하면 이와는 반대가 되니, 사사[己]라는 하나의 글자를 버려서 기탄없이 말하게 하는 문을 널리 열고 숨김없이 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산처럼 독(毒)이 있는 것들도 감춰주고 바다처럼 더러운 것들도 받아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다 말할 수 있게 하기를 마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하수(河水)에서 각자 자기 양껏 물을 마시게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설령 간혹 극히 맹랑하고 전혀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성낼 만한 잘못은 저 사람에게 있으니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금번의 일도 또한 그러하다. 더구나 윗조항의 일은 더욱 그 글을 깊이 보고 싶지 않아 향암(鄕闇)의 짓이라고 등한시하였다. 그 밖의 많은 말에 대해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백성들이 명백히 알지 못하는 것을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사간 홍인호(洪仁浩)가 상소하여, 중신 정창순(鄭昌順)이 상소로 홍낙안(洪樂安)을 논열한 구절에서 자신까지 핍박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인(自引)하고, 겸하여 유성한(柳星漢)에게 섬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장령 유숙(柳)의 상소에 대하여 감률(勘律)이 너무 관대하다고 논하고 삭탈 관직시킬 것을 청하니, 그를 체직시키고 원소(原疏)를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대궐에서 숙직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다시 보이고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4월 30일 무진
사헌부가 【집의 최훤(崔烜)·장령 심갱(沈鏗)·지평 민사선(閔師宣).】 아뢰기를,
"유성한(柳星漢)의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상소 중 윗조항의 강학(講學)에 대한 말은 비록 경계를 진달한다는 명목에 가탁하였으나 실상은 지중(至重)한 임금을 범하였으니, 종잡을 수 없고 지극히 흉패합니다. 아, 전하께서 차마 경연(經筵)에 자주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연전(年前)에 연교(筵敎)가 있었으니, 무릇 조정 신하들로서 누군들 덮어두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만약 근본을 거슬러 뒤미쳐 제의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상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고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강연(講筵)의 체모가 중함으로써 전폐(全廢)하려고 하지 않아 때때로 심정을 억누르고 경연에 임하여 개강(開講)하시는데, 당시 성상의 말 소리가 처량하고 성상의 용안이 해쓱한 것은 경연에 오른 여러 신하들이 또한 모두 우러러 보았고 물러가서는 서로 전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상소에서 이른바 ‘별다른 은미한 뜻이 있어 그러하다.’고 한 것은 남모르게 비난을 가한 것이고 현저하게 조롱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푼이라도 신하의 분수가 있는 자라면 마음에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의 문인(門人)들은 오히려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았는데, 지금의 흉악한 무리들은 도리어 업신여기고 농락을 부립니다. 그도 또한 사람인데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한다.’는 등의 말로 말하면, 비록 자기와 대등한 자라도 경중(輕重)에 관계된 일이라면 오히려 마땅히 삼가해야 하는데, 지금 성상께서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목이 메이는 것에다 돌리고 식사를 폐하는 것이라고 배척하였으니, 그 뜻을 추구해보고 그 죄를 논하여 보면 맹자의 무례(無禮)하다는 훈계가 그에게 있어 적당하고 한(漢)나라 법의 불경(不敬)에 대한 처벌도 그에게는 오히려 너무 가벼운 것에 속합니다.
또 아래의 두 조목은, 그날 동가(動駕)할 적에 구경한 자들이 많았는데, 신은(新恩)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창부(倡夫)들이 뒤에 따르는 것은 우리 동방의 풍속이 옛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그가 말한 바는 또한 몹시 망령됩니다. 여악(女樂)이 난잡하게 들어왔다고 한 것은 지난번 연등절 저녁에 각 영문의 장수들이 모두 모여 풍악을 벌인 것이니, 이는 태평 시대의 아름다운 일에 불과합니다. 비록 장수들에게 있어서라도 족히 허물이 될 수 없거늘 성상의 덕에 누가 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가 어찌 감히 금원(禁苑)이라는 말을 지어내어 일부러 현혹시키는 계책을 꾸미는 것입니까. 그의 마음씀이 참으로 교활하고 간사합니다. 듣건대 놀던 곳은 바로 이른바 방마원(放馬苑)이라고 하니, 방마원은 대궐문 밖에 있은즉 금원(禁苑)이라고 한 것은 성상을 몹시 기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항상 종신토록 부모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임금으로서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아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흠앙하고 감탄하는 것인데, 지금 성한(星漢)이 차마 이토록 근거없는 말을 더하여 반드시 속이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그 또한 매우 부도(不道)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성상께서는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독(毒)한 것을 감춰주는 도량으로서 향암(鄕闇)의 짓이나 웃음거리로 치부하려고 하지만, 그 상하 조항의 지극히 흉패한 말은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아도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만약 엄히 조사하고 통렬히 징계하지 않으면 의리가 인멸될 것이고 인심이 함락될 것이며, 세도(世道)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유성한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고, 끝까지 조사해 실정을 알아내어 해당되는 벌을 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인심이 날로 나쁜 곳으로 빠지고 이륜(彝倫)이 날로 어두워져서 유성한(柳星漢)의 상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대저 그 상소의 말은 종잡을 수 없고 미혹스러워 급히 보면 비록 쉽게 알 수 없으나 상세히 그 맥락(脈絡)을 추구해보면, 윗조항에 이른바 별다른 은미한 뜻이 있다고 한 것은 어찌 위로 임금을 범한 것이 아니겠으며,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한다는 말은 또 어찌 일부러 임금을 핍박한 것이 아니겠습니다. 은미한 뜻이 있다는 두 글자는 그가 짐짓 스스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 것이요,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한다는 등의 구절은 바로 흉악한 심보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당시 흉적(凶賊)들이 속인 것은 실로 목적이 있어서 한 짓이지만 금일 남은 버릇을 다시 행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상상해보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뵙고 달마다 뵙던 효성으로서 이런 등속의 흉악한 말이 갑자기 다시 여기에 이르렀으니, 성상의 은통(隱痛)한 마음과 잠자리[丙枕]에서의 놀라움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아래 조항에 말한 금원(禁苑)에 여악(女樂)이 들어갔다는 천만 허황된 말을 공공연히 상소에 기록하였으니, 마음을 먹고 말을 조작한 것이 더욱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 신하가 임금에게 진언(進言)할 적에 진실로 임금께 잘못이 있으면 무슨 일인들 지적하지 못하겠으며,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허위를 실제로 만들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말하자면 비록 같은 조정의 동료 간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남을 모함한 벌을 주어야 하는데,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등극한 이후로 오랫동안 슬픔을 지녀 화려한 것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으니, 도성 안으로는 마을의 서민들과 지방으로는 팔방(八方)의 백성들까지 누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항간에 전하는 것이라고 가칭하여 갑자기 여악(女樂)이란 두 글자로 거짓을 꾸며 말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신하로서 죽을 죄입니다. 그가 조작한 계책이 만약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 더러운 것을 감싸주는 성인의 도량으로서 향암(鄕闇)의 짓으로 돌려도 산처럼 독(毒) 있는 것들을 감춰주는 큰 도량에 해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의 맥락이 은연중 위로 은미한 뜻이니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하느니 하는 구절에 접속시켰으니, 그의 무함하고 핍박한 바는 성상에게만 미칠 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말하자니 가슴이 어찌 두근거리지 않겠으며, 마음이 어찌 썩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성한(星漢)을 국문하여 해당되는 벌을 주라고 명하시면 이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일전에 장령 유숙(柳)의 상소는 겉으로는 비록 논척(論斥)한다고 이름하였으나, 그 조어(措語)로 말하면 성한의 상소에 대한 것은 한 글자도 없고 현저하게 애석히 여기고 보호하는 태도가 있었으니, 이를 엄히 처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간의 풍기를 진작시키고 명의(名義)를 천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유숙을 빨리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성한(柳星漢)의 일에 대한 경의 차자(箚子)는 조금 전에 발론한 대간의 말에 비할 뿐이 아니다. 경의 소견이 비록 이와 같으나 어제 대간에 내린 비답 중에 말을 만들어 뜻을 펴보인 것은 그의 관명(官名)을 애석하게 여겨서일 뿐만이 아니다. 상세히 본심을 추구해보면 결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니, 향암(鄕闇)의 짓으로 돌리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끝에 유숙의 일을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새로 대각에 들어온 사람이니 어찌 족히 깊이 탓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35권, 정조 16년 1792년 5월 (4) | 2025.08.05 |
|---|---|
|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윤4월 (3) | 2025.08.05 |
|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3월 (7) | 2025.08.05 |
|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2월 (5) | 2025.08.05 |
|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1월 (4) | 2025.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