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4월 1일 기사
윤대(輪對)가 있었다.
대사헌 이성규(李聖圭)가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일로 전에 아뢴 말을 고쳐 아뢰기를,
"반드시 속이는 옛 습관을 이룩하려고 하였으니 너무나도 흉악합니다. 또 그가 흉악한 상소를 올린 뒤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뜻이 없고 더욱 사납고 독한 기운을 품어 집에 있으면서 사람을 대하면 함부로 흉악한 말을 꺼내 못하는 말이 없었으니, 듣는 사람의 귀를 가리우기 어렵습니다. 단지 이 한 조항만으로도 흉악한 심보가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비록 우리 성상께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독(毒) 있는 것들을 감춰주는 도량으로서 향암(鄕闇)의 짓과 웃음거리로 치부하고자 하나 왕법(王法)이 신장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며 윤리가 장차 땅에 떨어지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처럼 흉악한 역적 무리들을 만약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 용납한다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서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성한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심문하게 하고, 그 고친 말 한두 줄을 지우도록 하소서."
하였다. 정언 박효성(朴孝成)이 유성한에 대한 일을 아뢰면서 성한의 성(姓) 자를 빼버렸는데, 엄한 전교가 여러 번 내리자 성규(聖圭)와 효성 등이 인혐(引嫌)하고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윤4월 2일 경오
전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을 서용하여 다시 수어사로 제수하였다.
대사간 임시철(林蓍喆)이 상소하여 유성한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중신(重臣) 김이소(金履素)가 겉으로는 성토(聲討)한다는 명목을 핑계대고 안으로는 스스로 변명하려는 계책을 품어 종이 가득 장황하게 늘어놓고 두리뭉실하게 말한 것은 실로 말의 뜻이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유성한(柳星漢)의 상소는 얼마나 흉악한 말들이었습니까. 아, 저 이소(履素)가 남모르게 급히 편지를 보내어 이야기하기를 청한 것은 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또 더구나 그의 상소 중에 말하기를 ‘성한이 답장한 편지에 억누르는 말과 교활한 뜻이 상소 중의 말보다 백 배나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죄를 머금고 눈을 부릅뜨며 징토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분수에 당연한 바인데, 이런 것은 하지 않고 공론이 준엄하게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상소를 하였고, 그가 논척(論斥)한 말도 스스로 벗어나려는 꾀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마음먹은 바는 명백히 드러나 가리울 수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가 항상 친밀하게 지내고 왕래하며 결속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그대로 두고 논죄(論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조 판서 김이소에게 먼 변방으로 내쫓는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이소(金履素)에 관한 일 중 이소가 성한을 맞이하려 했던 것은 사실을 밝히고자 함이었다. 심보니 결속했다느니 하는 조목을 경솔히 남에게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처음에 여러 군영의 장수들이 연등절(燃燈節) 저녁에 장용영(壯勇營) 뒤 방마원(放馬園)에서 음악을 베풀고 이소(履素)가 장용영의 제거(提擧)라 하여 맞이하여 함께 놀았는데, 그곳은 경모궁(景慕宮)의 뒷 산등성이와 떨어져 있고 홍화문(弘化門)의 누각과 서로 마주 대한 곳이었다. 얼마 뒤에 항간에 거짓말이 떠돌자 성한(星漢)이 성급히 그 말을 믿고 마침내 상소에 언급하였다. 성한이 젊어서 고 찬선(贊善)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모셨었는데, 원행은 곧 이소의 숙부였다. 그때에 유언 비어가 떠돌기를 ‘이소가 남몰래 성한을 사주하여 성덕(聖德)을 모함하게 하였다.’ 하자, 일을 벌이는 자가 과장하여 상을 속이니 상도 또한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이소(履素)가 그 소리를 듣고는 성한을 만나서 거짓말이 나온 연유를 물어보고자 하여 편지로 성한을 초빙하니, 성한이 오지 않고 답서로 도리어 이소를 꾸짖었는데 그 말이 매우 준엄하였다. 일을 벌인 자가 더욱 부추켜 어그러지게 만들어서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이소가 부득이 상소로 그 전말을 진달하였었다. 시철(蓍喆)이 마침내 상소로 성한을 배척하고 아울러 이소까지 언급하니, 이소가 교외로 나가서 대죄(待罪)하였다.
관학(館學) 유생(儒生) 윤면순(尹勉純) 등 4백여 명이 상소하여 유성한(柳星漢)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신과 언관(言官)들이 쟁집하는 것도 오히려 나타나는 대로 조절해야 하는데 더구나 너희들이겠는가. 근래 너희들이 조정의 의논에 많이 참여하는 것을 나는 항상 민망스럽게 생각해 왔는데 또 더구나 이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유성한의 상소 중 두 조항의 말에 관해서는 이전의 상소와 차자에 대한 비답에 모두 언급했었다. 너희들의 상소 중에 ‘성한이 집에 있으면서 멋대로 흉악한 말을 했고 사람을 대해서 말한 것은 엄폐하기 어렵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참으로 의혹스럽다. 이는 참으로 얼마나 중한 일인데 어찌 남에게 말한 것으로서 당당한 태학(太學)의 상소에 삽입하였는가. 너희들이 이른바 사람을 대해서라고 한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란 자가 집에 있으며 멋대로 말한 진범과 더불어 보고 듣고 한 뒤 너희들에게 직접 전하고 입으로 말해준 것이란 말인가. 유생의 상소는 체통이 중하므로 그 사람의 성명을 다그쳐 묻지는 않겠으나 국가의 체통으로 헤아려보면 어둡다는 탄식이 없겠는가. 너희들은 언관(言官)의 직책이 아닌데 과거의 풍문(風聞)을 어려움 없이 아뢰었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다. 만일 확실하게 그 사람이 있다면 또 어찌 지나치게 이처럼 숨기는가. 내 나름대로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윤4월 3일 신미
승정원이 아뢰기를,
"대계(臺啓) 중에 유성한(柳星漢)의 성(姓) 자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상하가 서로 고집하다가 그만 아뢰지 못했는데, 어제 성상의 전교로 인하여 감히 봉입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또 여러 차례 왕복하였으나 대신(臺臣)들이 끝내 마음을 돌려서 듣지 않으니, 차라리 명령을 어겼다는 꾸짖음을 당할지언정 어찌 일국의 공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봉입합니다."
하니, 대계(臺啓)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 수찬 권평(權坪)이 상소하기를,
"아, 지금 유성한(柳星漢)의 상소는 이 무슨 성세(聖世)의 변괴입니까. 수일 전부터 잇달아 상소하는 자들은 모두 그가 여악(女樂)이란 두 글자로 공공연히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친 것에 대해 눈을 밝히고 담(膽)을 키워서 그 말이 터무니없는 허위임을 밝혔으니, 이는 신하의 직분으로서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신은 이에 대하여 특별히 답답하고 통분한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심합니다. 왜냐하면 전하께서 임금의 높은 지위에 계시고 성한의 무리가 북쪽을 향해 섬긴 지가 이미 몇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욱 방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 없이 천만 부당하게도 허황되고 사실무근인 여악(女樂)이란 두 글자로써 위로 성상을 무함하고 이로 팔방(八方)에 반포하여 후세에 보이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전일의 기만이 무슨 짓인들 못하였겠으며 전일의 무함이 어느 곳엔들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현재 기만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기만을 징험할 수 있고 현재 무함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답답하고 통분한 마음으로 30년을 하루같이 감히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감히 입으로 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지금 성한이 그 무리들의 익숙한 습성으로서 스스로 입으로 말하고 스스로 붓으로 써서 전하의 앞에 드러내고 온 세상의 눈앞에 펼쳐 놓았으니, 이는 하늘이 그의 마음을 유인하여 부득불 이와 같이 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이 특별히 답답하고 통분스러워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과 하늘의 이치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의 끝없는 효성으로서 지금을 예전에 비교해보면 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한을 국문하여 통쾌히 형벌로 바로잡고 그들의 소굴을 부수어 명분과 의리를 크게 천명하는 것이 어찌 왕법(王法)으로서 말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는 대소 신료들이 감히 제기하지도 못하고 차마 말하지도 못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붓을 들어 비답을 쓰겠는가."
하였다.
형조 판서 이민보(李敏輔)와 부사직 정경순(鄭景淳)이 연명하여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금일 여러 신하들의 상소와 양사(兩司)의 계사에 대하여 끝내 유음(兪音)을 아껴 여론을 더욱 격렬해지게 하고 천벌을 엄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라도 일이 성상에 관련되었고 간관(諫官)이란 명분이 있으므로 후일에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여 곤란하게 여기는 것입니까. 신이 의리로 분석하고 근원의 시초를 설파하여 전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달하겠습니다.
아, 지난 무인년050) 이래로 흉적(凶賊)들이 빚어낸 꾀가 실로 이에 말미암았기 때문에 성명(聖明)께서 매번 강석(講席)에 임하실 때마다 선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하여 안색이 몹시 처참하였으므로 전교를 기다리지 않고도 여러 신하들 또한 헤아려 눈물을 머금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전후에 걸쳐 진언하는 자로서 누군들 전하께서 몸소 세 번의 강(講)을 행하여 고례(古例)를 보존하기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한마디도 청하지 않은 것은 대저 옛사람이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은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설령 유성한이란 자가 성상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실제로 강연(講筵)을 정지한 것으로 걱정을 하였다면 평범한 말로 진달하여도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미 은미한 뜻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면서 고의적으로 말하여 마치 힐책(詰責)하는 것처럼 한 것은 대체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아랫조항에 인용한 네 자는 말이 흉악하고 뜻이 교활하니 그 귀속된 바를 추구해보면 과연 어느 지경을 범하는 것이겠습니까. 대저 사람들이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도 선고(先故)에 관계된 말이라면 오히려 조심하고 삼가하는데, 더구나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면서 차마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성한(星漢)은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선세자(先世子)의 죄인이며 선세자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종사(宗祀)의 만세(萬世)의 죄인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성토하는 것도 전하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닌즉, 전하께서 비록 법을 굽혀 용서해주고자 하여도 또한 전하께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관이 임금을 지척(指斥)하는 것은 바로 훌륭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옛사람 중에 자기 임금을 곧바로 하걸(夏桀)과 상주(商紂)에 비교한 자도 있었고 자기 임금이 욕심이 많은 것을 면전에서 배척한 자도 있었으며, 간언을 올리다가 난간을 부러뜨린 자도 있었고 옷자락을 끌면서 간한 자도 있었으니, 요컨대 모두가 나타난 잘못을 지적하여 진달한 것이거나 혹은 일이 생기기 전에 예방한 것입니다. 본래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이토록 기만하고 현혹시키는 계책을 꾸민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신은(新恩)들이 앞에서 인도할 때에 광대들이 임금을 호위하는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동방의 고사(故事)이고 우리 왕조의 훌륭한 구경거리로 신들도 어렸을 때부터 또한 익숙히 보았었습니다. 지난번 문관과 무관의 합격자 명단을 게시할 때가 마침 어가가 행차하는 날이었으므로 광대로 하여금 각자 따르게 하였을 뿐입니다. 당초부터 어찌 어가 앞에 가까이 하도록 한 적이 있었겠으며, 설령 어가 앞에 가까이 하게 하였더라도 이는 유래하는 옛 규정을 보존하고 한때의 기쁜 일을 장식하는 데 불과하니, 돌아보건대 어찌 성상의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연등절 저녁에 방마원(放馬苑)에서 논 것은, 삼영(三營)의 장수들이 좋은 시기를 택하여 사적으로 여악(女樂)을 베푼 것인데 그곳이 큰 거리와 가까워 사녀(士女)들이 모여 관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터럭만큼도 금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무릇 눈과 귀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듣고 보지 않았겠습니까. 아, 저 성한이 어찌 유독 들어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척하고 은연중 전하의 잘못으로 돌리며 거짓과 비방을 선동하여 원근에 전파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나타난 잘못을 지적하여 진달한 것입니까, 일이 생기기 전에 작은 일부터 방지한 것입니까. 대각(臺閣)에 풍문(風聞)으로 아뢰는 것을 허락하고 실제와 어긋나도 허물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열조(列朝)에서 간언을 오게 하려는 훌륭한 뜻이었습니다. 만약 애매하고 은미한 소문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어 듣는 대로 곧바로 간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 대하여 숨김이 없어야 되는 의리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백히 드러나 온 세상이 알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본 일을 가지고 방탕하게 부연하고 거짓을 날조하여 한결같이 성상을 모함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그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흉악을 부리자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이는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결정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부당하게 용서하려고 하더라도 오늘날 전하를 섬기는 자들이 차마 이 역적과 더불어 함께 살려고 하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였고, 또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짓 하는 것을 보면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간절한 호소가 끝내 성상의 마음을 돌려 역적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기를 원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은 연로한 신하들이다. 이처럼 대궐에 나와 상소하면서 ‘의리로 분석하고 근원의 시초를 설파하여 눈물을 흘리며 진달하겠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말로서 옛사람이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은 의리에 대하여 친절하게 말하였고, 인하여 또 평범한 사람들도 선고(先故)에 관련된 말은 조심스레 한다는 등의 말로 반복하고 부연하였으니, 경들의 말을 내가 어찌 상세히 살피지 않겠는가. 또한 더구나 경들의 말뿐이 아님에 있어서랴. 내가 의리에 대하여 비록 강명(講明)한 공부는 없지만 정(情)이 지극한 곳에는 의리도 또한 깃들어 있는 것이니,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천리(天理)와 인정(人情) 사이에는 본래부터 털끝만한 간격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대강 옛 성현의 책에서 들었었다. 저 성한(星漢)의 말이 임금에 관한 것이라 하여 벌을 줄 만한데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고, 간관(諫官)이라 하여 마땅히 용서하지 못할 것을 그릇 용서한다면 이는 인정에 배반되는 것이니, 내가 참으로 덕이 없지만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경들이 조정에 있은 지 수십 년이 되어 어언 늙어 백발이 되었으니 상전 벽해(桑田碧海)의 변혁과 진위(眞僞)의 변개를 반드시 잘 알고 다 치렀을 것이다. 어찌 내가 일일이 다 말하고 변론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 비로소 알 수 있겠는가.
지난번 등극(登極)한 초기에 차례차례 대대적으로 처벌을 시행하여 요행히 이미 죽어 없어진 흉악한 무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목숨을 용서해준 적이 없었으며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팔의(八議)의 규정에 넣지 않았었다. 성한에게 무슨 곤란하고 아낄 만한 것이 있어서 한결되게 윤허하지 않았겠는가. 이치와 의리로 헤아려보건대 과연 옳은가 옳지 않은가. 경들은 모름지기 생각해보라. 일찍이 처벌했던 자는 말과 자취가 모두 드러나서 대부(大夫)와 온 나라 사람들이 꼭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지 신명(天地神明)도 모두 함께 분통스럽게 여기고 미워했었다. 이에 《춘추》의 필법(筆法)을 빌려 비로소 태아(太阿)의 칼자루를 시험하여 천하에 큰 법을 남기고 만대에 인륜의 기강을 세웠으니, 감히 그들의 용심(用心)을 처벌하는 데 소홀하였다고 말할 것이 아니다. 내 나름대로 세세한 경중(輕重)까지도 따지는 법도가 있었으니, 후일 훌륭한 사관(史官)으로서 오늘을 의논하는 자들이 인정할지 인정하지 않을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오직 내가 평생 연구하고 정신을 쏟은 것이 모두 다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지금 보잘것없는 성한(星漢)에 대해서 무슨 일로 이처럼 논쟁을 하며 말하겠는가. 경들에게 부탁하노니 지금부터 나의 뜻이 있는 바를 찾아보아라."
하였다.
윤4월 4일 임신
차대(次對)가 있었다.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뒷 기슭을 보충하여 수축하고 남은 돈은 본부(本府)에 이속시켜 매년 나무를 심는 자금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사헌부가 【 대사헌 조종현(趙宗鉉), 장령 이태현(李泰賢).】 아뢰기를,
"유성한의 상소 내용이 지극히 흉악하고 정상이 음흉한 것은 여러 신하의 차자와 계사에서 또한 이미 대략 논하였습니다. 지금 그 상소 중에서 역적의 마음이 드러나고 흉악한 말이 패륜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윗조항의 강학(講學)에 대한 말은 특별히 성상의 마음이 차마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고 여러 신하들도 감히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근신(近臣)들의 상소에서도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말하였으니, 이는 실로 성상께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심정을 살펴 차마 말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차마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 끝내 말하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흉도들이 하늘을 욕보인 역모의 곡절을 밝혀내며 서울과 지방의 의심스러워하는 심정을 풀어주겠습니까. 신은 눈물을 섞어 붓을 적셔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하겠습니다.
지난 무인년051) 에 강연(講筵)을 회복한 조처는 실로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차츰차츰 참소하는 계제가 되었습니다. 선왕(先王)이 나이가 많아 정사에 권태(倦怠)를 느끼고 있던 때를 당하여 이미 10년 동안 정지하였던 강연(講筵)을 청한 것은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 등 여러 역적들이 꾸민 흉계(凶計)이고 성학(聖學)을 권면하려는 데 있지 않았음이 명백하였습니다. 이후로부터 강의(講義)에 청탁하고 인용하여 말한 것은 모두가 죄를 짓도록 하는 흉악한 말이었고 비밀히 끌어들인 자와 체결하여 서로 선동한 것은 모두가 참소하여 죄로 얽는 흉악한 음모였습니다. 그 화(禍)의 징조를 추구해 보면 이것이 기축[關棙]이 되었던 것이니, 이는 참으로 성명(聖明)께서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일 조정 신하들이 진실로 병이지심(秉彝之心)이 있다면 누가 흉적(凶賊)이 세운 계략에 대하여 분통스러워하지 않겠으며 전하의 슬픔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강연(講筵)에 이르면 문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증가하였으므로 비록 형식이라도 보존하려는 뜻으로 때로 강연을 열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비통한 성상의 음성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고 침울한 성상의 안색은 밖에 나타나는 것을 제어하기 어려워 하셨으니 이는 경연에 오른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한(星漢)은 한마디로 잘라서 그를 은미한 뜻이라고 말하였고 단사(單辭)로 현저하게 배척하여 목이 메임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하는 것에다 귀결시켰습니다. 종신토록 사모하는 성상의 효성은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는 바인데 성한은 조금도 슬퍼하는 뜻이 없고,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는 심정은 문인(門人)들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성한은 도리어 방자하게 원망하는 글을 썼습니다. 대저 말을 지어내어 무함하는 것은 본래 전수받아온 것이니 성상께서 즉위하기 전 몇 년 동안 이 무리들이 선동하고 무함한 말은 무엇인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일맥(一脈)의 종자가 그래도 중지할 줄 몰라, 근본이 이미 오래되고 또 쌓여서 기필코 임금에게 대항하고 모의하여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뿌리를 뽑지 못함에 지엽(枝葉)이 다시 번성하여 비로소 무자년052) 과 기축년 간에 흉모를 자행하였고 을미년053) 과 병신년 간에 다시 기승을 부렸습니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김하재(金夏材)와 공(恭)이 드러내놓고 흉악한 상소를 내부에서 올렸고 이율(李瑮)과 김상복(金相福)은 남몰래 흉악한 음모를 외부에서 자행하여 지렁이처럼 뭉치고 뱀처럼 서려서 종자 밑에 종자가 생겼으며, 금일에 이르러서는 또 성한(星漢)이 있게 되었습니다. 저 무리들도 또한 일개 신하인데 어쩌면 패역(悖逆)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또 아랫조항 두 조목의 설로 말하면 전부터 신은(新恩)이 앞에서 인도할 때에 매번 광대가 뒤에 따르도록 허가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옛 규례가 바로 그러하니, 그 말에 대해서는 족히 많은 말로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 아랫조항의 여악(女樂)에 관해서는, 지난번 등연절(燈燃節) 저녁에 각영(各營)의 장수들이 장용영(壯勇營)의 방마원(放馬園)에서 놀면서 음악을 베푼 일이 있었는데 장용영이 있는 곳은 이미 대궐문 밖이었고 방마원의 터는 또한 장용영의 뒤에 위치하였으니, 그도 또한 눈과 귀가 있는만큼 반드시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금원(禁苑)에서 놀았다고 말하고 여악(女樂)에 대한 말까지 지어내어 억지로 무함하여 속이고 현혹시켰으니, 그 뜻의 소재를 미루어보면 허위를 조작하고 없는 일을 있다고 하여 한마디 말과 하나의 일에서도 오직 성상의 덕을 무함하는 꾀를 내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항상 지극한 슬픔을 품어 왕위를 즐겁게 여기지 않았고 법에 응당 시행해야 하는 조하(朝賀)도 오히려 권정례로 하라는 특별 전교가 많았으니,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누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이런 등속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토록 극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듣건대, 성한은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조금도 자책(自責)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뜻이 전혀 없이 오직 독기(毒氣)를 부려, 집에서 손님을 대할 때에는 임금을 욕하고 지척하면서 흉악한 말이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자가 모두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비록 김이소(金履素)가 스스로 해명한 상소로 말해 보더라도 상소가 이미 때늦었고 엄호(掩護)한 말이 많았으나 오히려 그 편지의 흉악하고 무엄한 내용을 완전히 숨길 수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있어서 이미 승복한 단안(斷案)인데, 성상께서는 사적인 편지라 하여 삭제하고 고치라는 명령까지 하였습니다. 어제 대계(臺啓)에 첨입한 말은 모두 정확한 전설(傳說)에서 나온 것인데, 대충 말하고 분명하지 않게 말하여 먹으로 지워 도로 내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진실로 성상의 뜻이 결점을 감싸주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적(賊)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은 도리어 성상의 덕에 누가 될 것이니, 신은 개탄스럽고 걱정되며 분합니다. 공적인 상소에서는 전적으로 무함과 흉악을 일삼았고 사적인 집에서는 감히 흉악과 독기를 부렸으며 말마다 역적의 마음이었고 일마다 흉악한 심술이었습니다. 옛날의 정여립(鄭汝立)과 지금의 역적 김하재(金夏材)의 못된 점을 한 곳에 모았으니, 만 번 과형(剮刑)054) 을 내리더라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유성한(柳星漢)을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국가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유성한의 극심한 흉악과 이미 드러난 역모는 참으로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운데, 일전에 사헌부의 상소에서 명색은 징토(懲討)의 논의라고 하면서 삭탈 관직시켜 내쫓는 벌로 처결한 것은, 마치 백관들끼리 서로 바로잡아주는 규정과 같이 여기고 사소한 잘못처럼 보았으니, 자취는 곡진히 비호하는 듯하였고 뜻은 시험해보자는 데 있었습니다. 물정(物情)이 놀라고 분하게 여겨 오래도록 풀리지 않으니, 전 장령 유숙에게 멀리 귀양보내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또한 지나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각(臺閣)이 계사를 발하는 데는 원래 체제가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사헌부에서 발계(發啓)할 때에 처음에는 나열하여 상세히 말하였으나 끝에는 갑자기 변하여 바뀌었고 법에 의해 처벌하는 것은 비록 엄중하게 하였으나 죄를 성토하는 데는 도리어 가볍게 하였으며, 처음에는 공론의 엄중함을 두려워하여 말을 준엄하게 하였으나 끝에는 이것저것 돌아보는 작태를 지녀 조어(措語)를 다시 삭제하였으니, 그 정상을 미루어보면 참으로 지극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날 사헌부에 나온 대신(臺臣)들 모두에게 삭탈 관직하는 벌을 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포도 대장 서유대(徐有大)를 체직시키고 조심태(趙心泰)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삼남(三南) 제민창(濟民倉)에 소속된 각읍에서 수송하는 폐단 때문에 세 도의 감사에게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편리한지 불편한지에 대하여 문의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호서(湖西)와 영남의 감사가 장계로, 호서에서는 비인(庇仁)과 서천(舒川)은 그대로 본창(本倉)에 두고 한산(韓山)과 남포(藍浦)는 각각 본읍(本邑)의 해창(海倉)에 두며 홍산(鴻山)은 곡식이 적고 해창이 없으니 나누어 이웃 읍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고, 영남에서는 사천(泗川)과 곤양(昆陽)은 본읍(本邑)에 받아 두고 진주(晉州)와 고성(固城)은 별도로 해창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윤4월 7일 을해
대사헌 조종현(趙宗鉉)을 체직시켰다.
장용영(壯勇營)의 돈 4만 냥을 경기 감영에 꿔주어 현륭원(顯隆園) 화소(火巢)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 값을 보상해주고 그 나머지로는 임금이 행차할 때 외탕고(外帑庫)의 경비 및 식목(植木)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윤4월 8일 병자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이소(金履素)가 상소하여 자백하니, 비답하기를,
"결탁했다는 지목은 말도 안된다고 할 수 있다. 경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마땅히 한 번의 웃음거리에 부칠 뿐인 것이다."
하였다.
윤4월 9일 정축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대가가 성균관 다리에 이르자 여러 생도들이 경건하게 맞이하였다. 장의(掌議)에게 전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너희들이 삼사의 일을 대신 행하여 걸핏하면 상소를 하곤 하니, 식자들의 비방을 면할 수 있겠는가. 지금 너희들을 보고 이렇게 효유하는 것은 바로 성균관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금일 역적 유성한(柳星漢)의 변고는 저 혼자 꾸민 것이 아니고 반드시 소굴과 근본이 있을 것입니다. 발본 색원(拔本塞源)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번 엄격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만약 참으로 소굴과 근본이 있는 줄 알면 끝까지 추궁하는 것을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당초부터 소굴과 근본이라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근래에 이 일로 소장이 날로 쌓이니 현재의 상황이 매우 고민스럽다. 그러나 처음에는 금일의 여러 신하들이 당시의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논계(論啓)하도록 맡겨 두었는데, 지금은 점차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의리인데 이처럼 어려움 없이 말하는가. 만약 성한의 정상과 자취가 모두 탄로났다면 사형에 처하든 주벌을 하든 옳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은데 반신반의하는 중에 두어 억지로 사형의 법률을 사용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형정(刑政)이 있겠는가. 내가 처음에는 그 상소를 범연히 보았기 때문에 근래에 이런 작문이 없었다는 비답을 하였다가, 형조 판서의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렇게 된 까닭[所以然]이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不必然]느니 하는 등의 글귀가 무심히 쓴 것이 아닌 듯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래 이런 작문은 없었다 하겠다.[可謂近來無此作]’는 7자의 비답은 참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지난번에 빼버리라고 명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정상과 자취를 이미 목격하지 못하였고 또 말이 막중한 자리까지 범했으니, 지금 만약 끝까지 조사하지 않고 급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참으로 죄를 상세히 살피는 의리가 아닐 것이다. 설령 세밀하게 캐묻는다 하더라도 어찌 공초를 바칠 리가 있겠는가. 그의 상소 한 장도 오히려 차마 볼 수 없는데 더구나 어떻게 차마 다시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내어 국문하겠는가.
지난 선조(先朝) 을해년055) 에 여러 역적들을 반드시 모두 한 번 심문한 뒤에 처리한 것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이었다. 내가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한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다. 그가 만약 한결같이 변명한다면 강제로 자백을 받겠는가. 지난번 형조 판서 상소의 비답에서 ‘이에 《춘추》의 필법(筆法)을 빌리고 이에 태아(太阿)의 자루를 시험하였다.’고 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처음 있었던 비답이다. 내가 어찌 아무 뜻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병신년의 여러 역적들은 바로 만고(萬古) 이래 천지(天地)가 끝날 때까지의 극악한 역적이지만 저 무리들이 한 짓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금번 일에서 말이 막중한 자리까지 핍박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형조 판서에게 내린 비답에서 부득이 언급한 바가 있었다.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팔의(八議)의 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또한 제왕가(帝王家)의 성법인데,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 여러 역적이 내가 정사를 보는 일을 가지고 나를 핍박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한마디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가 그들의 자취와 정사을 알아낸 뒤에 미쳐서 내가 부득이하여 처결하였다. 지금 그의 상소에서 윗조항의 일을 막중한 자리에 연관시킨다면 더욱 경솔히 먼저 처결할 수 없고, 아랫조항의 말로 말하더라도 이처럼 논계(論啓)할 일이 아니니, 이후로 상소에서 빼버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종악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서 이미 ‘성한이 집에 있으면서 흉악한 말을 한 것은 상소에서 보다 더 심하였다.’고 하니, 반드시 들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조사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생들을 어찌 함문(緘問)할 수 있겠는가. 만약 남을 무고했다고 꾸짖으면 반드시 권당(捲堂)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니 이러므로 내가 곤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경조사(慶弔事)를 폐지한 것은 문득 쓸쓸한 뜻이 있어서였는데, 이는 태평 성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지난번 주교(舟橋)를 완성한 뒤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특별히 놀이를 하게 한 것은 노고를 보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세심대(洗心臺)를 설치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평범하게 등림(登臨)하는 곳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이었으니 병조 판서의 서문(序文)에서도 그 대략을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조화(調和)도 응하는 것이니, 놀이를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된 것이다. 근일 풍속이 자못 소조(蕭條)함을 깨닫겠으니, 잔치도 벌리고 놀이도 하여 화기(和氣)를 인도할 수 있는 잔치나 놀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다. 이후로는 경들부터 힘써 화합하고 즐기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담제(禫祭) 날에 상이 몸소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전교하기를,
"안으로는 하늘을 받드는 충렬이 있고 밖으로는 세상을 덮을 만한 공로가 드러난 자는 오직 도위(都尉)의 안팎에서 보았다. 선조께서 돈독히 사랑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손자에게 일명(一命)을 내려 주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하고, 인하여 그 손자 박제일(朴齊一)에게 초사(初仕)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정존중(鄭存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해(金海)와 연일(延日)에서 균역청(均役廳)에 납입하는 염세(鹽稅)를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영남 감사가 치계(馳啓)하여 그 폐단을 진달하자,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소금은 하나의 땅에서 나오는 것인데, 토지와 가마솥에 각각 세금이 있어 도서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으로 되었습니다. 궁장(宮庄)과 마위전(馬位田)은 모두 토지세에 속한 것이므로 비록 탕감할 수 없으나 가마세[釜稅]는 균역청에 속한 것으로 감손이 크지 않으니, 장계에 따라 탕감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윤4월 10일 무인
사간원이 【정언 이운행(李運行).】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일로 전에 아뢴 말을 고쳐 아뢰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흉악한 난신적자가 예로부터 매우 많았지만 음흉한 정상과 흉악한 심사가 어찌 금일 유성한의 패역무도함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그는 본래 문벌이 극히 미천하고 천성이 원래 사나워서 비록 성조(聖朝)에서 씻어주는 은혜를 입었으나 평소에 원망하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흉악한 상소를 갑자기 올린 것은 실로 윤리와 강상의 지극한 변고여서 말을 하자니 간담이 떨리고 생각하자니 뼈가 오싹합니다. 누군들 씹어 먹고 찢어 죽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아, 강연(講筵)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할 바이고 조정 신하들이 감히 제언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무인년과 기묘년의 여러 흉적(凶賊)들이 암암리에 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끝내 화근의 기틀을 만든 것도 실로 이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후 을미년과 병신년의 여러 역적들이 공공연히 모함하고 핍박한 것도 또한 전해받은 상투적인 짓이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비록 예(禮)를 아끼는 뜻으로 혹은 3일간 주강(晝講)에 나아갔으나 성상의 마음은 애통하여 서글프게 사모하는 마음만 더하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누가 우러러 바라보다가 몰래 눈물을 닦으며 모두가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으려는 뜻을 지니지 않았겠습니까. 성한(星漢)도 오늘날의 신하인데,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멋대로 기술하여 겉으로는 진계(陳戒)하는 말이라 칭탁하고 안으로는 흉악을 부리는 계책을 이루려 하였으니 말이 몹시 흉악하고 의도가 지극히 참람됩니다. 별도의 은미한 뜻이 있다느니 또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느니 하는 등의 구절로 말하면 농간을 부리고 음흉스러워 곧바로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까지 범하였고, 그 아래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음식을 폐한다.[因噎廢食]’는 4자의 흉측한 말은 더욱 어찌 감히 마음에서 생각해내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낱낱이 말하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으나, 다만 올빼미와 괴수 같은 심보는 곧 무인년과 기묘년, 을미년과 병신년의 흉당(凶黨)과 더불어 한 줄에 꿰어놓은 듯하니, 난신 적자의 종자가 다시 오늘날에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아랫조항 두 구절의 말로 말하면 그가 또 차마 이 일로서 우리 성상을 심하게 모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우리 성상께서는 부모를 그리는 애통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화려한 것에 관련되었으면 당초부터 유의(留意)하지도 않았으니, 왕위에 오른 이후로 어찌 일찍이 털끝만큼이라도 이런 등속의 일과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감히 항간에 전하는 말이라 핑계하여 없는 일을 있다고 하면서 상소에 올려 여러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킨단 말입니까. 문무과에 급제한 자들이 솔방(率榜)하는 것은 본래 국가의 옛 준례이고 태평 시대의 훌륭한 일입니다. 신은(新恩)들이 이미 위내(衛內)에 있었은즉 광대들이 또한 각기 따르는 것은 형세상 그러한 것이며, 당초부터 어디 연전(輦前)에 가까이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어찌 성상의 덕에 누(累)를 끼친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까. 여악(女樂)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등연절(燈燃節) 저녁 방마원(放馬園)에서 장수들이 놀이한 일을 가리킨 것인데, 방마원이 있는 곳은 이미 금문(禁門)의 건너편에 위치하여 있고 장수들이 놀이를 한 것은 본래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일이니, 돌아보건대 성상의 몸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상소에는 도리어 장용영의 동산을 곧바로 금원(禁苑)이라 하여 마치 사실로 엄숙하고 맑은 궁궐에 여악(女樂)이 난잡하게 들어간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거짓말을 하여 위로 상상의 덕을 무함하려고 하나 많은 사람들의 눈이 모두 본 바이고 많은 사람들의 입이 함께 전하는 바로 성상께 원래 이런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으니, 무함하고 현혹시키는 꾀가 끝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대소(大小) 신하들이 은통(隱痛)하게 여기는 것은, 전하의 심정으로서 대성인(大聖人)의 지극한 행실을 몸소 행하여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고 즐거이 노는 것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의 훌륭한 덕(德)과 더불어 천하 후세에 길이 칭송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 저 하찮은 흉적(凶賊)이 드러내놓고 멋대로 모함하여 그 장소를 변동시키고 허위를 조작하여 기필코 듣는 자들을 혼란시키고 원근을 미혹시키려고 하였으니 그 심보를 추구해 보면 낱낱이 흉악합니다. 지금 만약 분별하여 엄격히 토죄(討罪)하지 않으면 임금이 무함을 씻을 날이 없을 것이고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걱정이 있을 것이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오싹합니다. 또 그의 사적인 편지에서의 흉악한 말이 상소보다 백 배나 심하였다는 것은 중신(重臣)의 상소에서 이미 그 잘못을 잡아내었고, 집에서 손님을 대하여 멋대로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은 사헌부 신하의 계사에 또한 명백히 들은 것이 있으니, 표독한 성품은 점차 더욱 탄로나고 흉악한 자취는 더욱 가리우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요망하고 극도로 흉악한 역적은 결코 한 시각이라도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으니, 유성한(柳星漢)을 빨리 의금부에 명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심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임시철(林蓍喆)이 상소하여, 김이소가 유성한과 사적인 편지를 왕복한 죄에 대하여 거듭 논하니, 윤허하지 않고 인하여 시철(蓍喆)을 체직시켰다.
헌납 박규순(朴奎淳)이 상소하여,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일을 전계(傳啓)한 대신(臺臣) 서유기(徐有沂)가 동료들과 의논하지 않고 다시 성한의 성(姓)자를 쓴 죄를 말하고 삭탈 관직시키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부수찬 최현중(崔顯重)이 상소하여 유성한의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윤구종(尹九宗)은 본래 성한 무리의 파당으로 온 나라가 같은 목소리로 성토하는 때를 당하여 자신이 현임 대간이면서도 성토할 뜻이 없어 갑자기 미친병이라 핑계대고 오로지 피할 길만을 일삼았습니다. 이미 대론(大論)이 처음 일어난 날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이튿날 연명으로 논계할 때 소집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 음흉한 의도와 성한을 비호한 자취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빨리 먼 변방으로 물리치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구종(九宗)의 일은 풍문(風聞)이니 다 믿을 수 없다. 일반 정리로 헤아려보건대 어찌 갑자기 실성(失性)했다고 말할 리가 있겠는가. 만약 추호라도 비슷하다면 그의 죄는 면할 수 없고 또 혹시 조금이라도 사실과 틀리면 아울러 추고 파직시키는 가벼운 벌이라도 줄 필요가 없다. 반신반의하는 처지에 놓아둘 수 없으니 즉시 유사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최현중에게 물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부수찬 최현중(崔顯重)에게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윤구종(尹九宗)은 본래 그 무리 속에서 부리는 조아(爪牙)로서 세상의 지목을 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미친병이 있는 자가 또한 남의 조아(爪牙)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역임한 벼슬로 말해보면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체직되어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후 또 대각(臺閣)에 출입하였으니, 미친병이 있는 자가 수령노릇을 할 수 있으며 이조에서도 또한 어찌 잇달아 대각(臺閣)에 의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금번 정언에 임명된 뒤 지난달 20일에 나와 숙배(肅拜)하였고, 그 이튿날 또 대각에 나왔으니, 그가 병이 없는 것은 자연 알 수 있습니다. 그후 7, 8일 만에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논계가 일어난 후에 갑자기 미친병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미친 증세라는 것도 큰소리로 떠들고 사간원의 아전을 구박하고 꾸짖어 집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성한과는 이미 이웃 마을에 살았고 정분도 또 친하였는데, 앞서거나 뒤늦지도 않고 성한의 상소에 대한 논계가 벌어질 초기에 갑자기 발병(發病)하였으니, 그가 회피하였다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한다는 말이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궁벽한 시골에 살아 귀머거리와 소경이나 다름없는 신조차도 또한 듣게 되었습니다. 또 무릇 병이란 모두 숨길 수 없는 증상이 있는 것입니다. 학질(瘧疾)을 앓지 않는 자는 거짓 오한이나 열을 낼 수 없으며 급체[關格]하지 않은 자도 또한 거짓으로 토하고 설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친병으로 말하면 이와는 달라 진실로 미쳤다고 핑계대려면 이는 참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단정하던 선비가 금일 갑자기 고함을 치고 마구 뛰어다니면 문득 미친 사람이라고 하니 스스로 자기의 심적(心迹)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이 병에 유독 거짓이란 글자를 붙이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예전 벼슬할 때에 말을 들어보고 모습을 보면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공무를 집행하는 현임 대간이 되자 전에 없었던 증상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거짓 미친 데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신은 믿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이 일찍이 동릉(東陵)의 별검(別檢)이 되었을 때에 매번 혜릉(惠陵)056) 을 지나갈 적마다 말에서 내리지 않자, 능졸(陵卒)이 규례를 근거하여 고하니 그는 문득 말하기를,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 하였다 합니다. 그 말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신이 일찍이 통분해하였으니, 이도 또한 미친병에서 나와 그런 것입니까? 신이 듣고 아는 바로는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답한 바가 비록 이와 같으니 오래된 증상이 공교롭게 나타난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국가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건대 한 번 심문하지 않을 수 없다. 끝에 붙인 말로 말하면 참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그가 범한 죄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윤구종(尹九宗)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엄히 심문하여 가두고 공초를 받아 아뢰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윤구종을 잡아다 국문하니, 그가 말하기를 ‘성품이 본래 옹졸하여 조정에 선 지 수십 년이 되는 동안 실로 권력 있는 집과 친숙한 일이 없었으니, 남의 조아(爪牙)가 되었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성한(柳星漢)과 이웃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상종(相從)은 하였으나 흉악한 상소로 말하면 이미 나온 뒤에야 비로소 상소의 초본을 보았으니, 친밀했다는 말도 또한 매우 애매합니다. 거짓 미쳤다고 운운한 것으로 말하면 작년 가을부터 갑자기 심병(心病)이 있었는데 겨울에 이르러 점차 심해져 발광(發狂)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충주(忠州)에 사는 의원이 약으로 치료한 바로서 실로 이웃과 마을에서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여러 차례 대직(臺職)에 임명되어 잇달아 하유(下諭)를 받았으나 한 번도 사은하지 못하여 일이 매우 황송스러웠습니다. 3월 초에 서울에 들어와 4월 20일경에 이조 낭관으로서 정언(正言)에 옮겨 임명되었으므로 즉시 사은 숙배하고 그 이튿날 대각(臺閣)에 나아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오래된 증상이 다시 발하여 증세가 위급해졌는데 많은 약을 시험하여 7, 8일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천지를 분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한을 성토할 때에 병이 발한 것은 실로 제 명이 다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때 병의 증상은 사간원의 예속(隷屬)들이 모두 알 뿐만이 아니며, 승기탕(承氣湯) 5첩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차도가 있었습니다.
혜릉(惠陵)에서 말을 내리지 않았다는 말로 말하면, 숭릉(崇陵)057) 의 별검(別檢)으로 있을 때 왕래하는 길에 번번이 혜릉의 홍살문을 지났었는데, 신하로서 어찌 감히 말에서 내리지 않고 못된 말을 하였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들은 자와 본 자가 있을 것이니, 한 번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이며 말한 자와 한 차례 대질시켜 분변한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반복하여 엄하게 국문하였으나 그가 공초(供招)한 바는 처음부터 황당하고 어긋나는 일이 없었으며 말과 행동이 평상적인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니, 이른바 발광(發狂)했다는 말은 전혀 근사(近似)하지 않습니다. 능관(陵官)으로 있을 때의 일도 또한 극구 변명하니, 평범하게 국문해서는 결코 승복을 받기 어렵습니다. 엄한 형장으로 다스려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그가 지난해부터 병이 났다고 하면서 마을 사람으로 증거를 대니,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즉시 붙잡아다 조사하여 처결하게 하라. 막중한 처소를 범한 한 조항에 대해서도 능속(陵屬)들을 조사 심문하게 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사간원의 해당 장무 서리(掌務書吏) 문응상(文應祥)과 배종(陪從)하는 서리 이익중(李益中)과 갈도(喝導) 윤금몽(尹金夢)·강필신(姜必臣)·오성겸(吳聖謙) 등을 조사 심문하니, 응상은 말하기를 ‘저는 장무 서리로서 늘 직방(直房)에 있으면서 관원들의 거취(去就)를 관계할 뿐이고 다른 것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고, 익중·금몽·필신·성겸 등은 말하기를 ‘윤구종이 제수된 이후로 날마다 그 집에서 대령(待令)하였었는데, 지난달 25일에 「신병(身病)이 있는데 증세가 갑자기 심해졌다.」 하고, 그집 젊은이들은 말하기를 「병이 갑자기 위급해져 공무를 볼 수 없다. 서리들이 대기하는 것은 이로움이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가 창문을 열고 아프다고 부르짖는 것을 한 번 보았을 뿐이고 장시간 문을 닫고 있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병세의 경중(輕重)은 상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유학(幼學) 전호천(全浩天)과 의원 이조창(李朝昌) 등을 조사 심문하니, 호천은 말하기를 ‘구종의 사돈(査頓)인 이장흥(李長興)의 요청으로 인하여 지난달 20일 후에 구종의 병을 가서 보았더니, 증상이 바로 미친병이었기 때문에 사관(四關)과 신문(顖門) 등 혈(穴)에 잇달아 침을 놓았다.’고 하였고, 조창은 말하기를 ‘이장흥의 요청으로 구종을 가서 보았더니 증상이 바로 심질(心疾)이었으므로 먼저 당귀승기탕(當歸承氣湯) 3첩을 썼으나 끝내 내리지 않기 때문에 대승기탕(大承氣湯)을 또 2첩을 썼어도 끝내 쾌히 내리지 않으므로 또 저심환(猪心丸)을 썼더니 현저한 효험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숭릉(崇陵)의 수복(守僕) 이성위(李成位), 산지기 최개복(崔介福), 서원(書員) 박항의(朴恒儀) 등을 조사 심문하니, 성위는 말하기를 ‘구종이 이웃 능(陵)에 왕래할 때에는 문득 가마를 타고 다녔는데, 혜릉의 홍살문 밖을 지나갈 적에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고하니, 구종이 문득 얼른 지나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한 것이 2, 3차례였고,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라고 한 말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였고, 개복(介福)과 항의(恒儀)는 말하기를, ‘구종(九宗)이 혜릉(惠陵)을 지날 때에 바로 지나가고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황은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당번(當番)이었던 능속[陵隷]에게 듣고 서로 전해가며 말하였기 때문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간원 서리들의 공초에서, 사질(邪疾)을 빌미로 삼은 것은 종의 말에 의거하였고 상투를 드러내고 문 밖에 나왔다는 것은 또 동네 사람이 전하는 말에 핑계를 댔으나, 그 무리들이 목격한 것은 창문을 밀고 한 번 고함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는 반드시 미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또 데리고 다니는 종이 와서 머물러 있는 것이 무슨 괴로운 일이 있기에, 여러 가지 말로 쫓아보내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공초한 바가 지극히 불분명하니, 아울러 엄한 형장을 쳐서 실정을 알아내소서. 의원들의 공초에서는 5, 6첩의 약을 쓰고 3, 4차례 침을 맞은 뒤에 즉시 현저한 효험이 있어 거의 회복되었고 하였으니, 이는 너무나도 신속하여 믿을 수 없습니다. 능졸(陵卒)들의 공초로 말하면 남여(藍輿)를 타고 곧바로 홍살문을 지나간 상황을 낱낱이 바른대로 고하였으니, 그 소리를 듣고는 심장이 서늘하고 뼈가 오싹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만 번 과형(剮刑)에 처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의금부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해당되는 법으로 처리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윤구종(尹九宗)이 숙식(宿食)하던 주인인 전 부사(前府使) 이밀(李淧)에게 구종의 미친병의 진위를 여러모로 힐문하니, 이밀이 말하기를, ‘구종이 작년 가을부터 갑자기 심병(心病)이 생겨 여러 달 고생하다가 금년 2월에 이르러 여러 증상이 나아서 서울에 올라와 봉직하였습니다. 그가 시골에 있으며 병이 났을 때에는 그런 증상을 보지 못하였었는데, 갑자기 지난달 20일 이후에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나머지 피곤해 하고 고통스러워하더니, 점차 미친 말과 망녕된 말을 끝없이 하였고 짧은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큰 길로 뛰어나간 것이 두 차례나 되었으므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둘러서서 구경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 증상이 점차 심해져 날마다 더하였으므로 의원을 불러다가 여러 차례 침을 놓았으나 조금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또 승기탕(承氣湯) 5첩을 썼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으므로 끝에는 대황(大荒)과 망초(芒硝) 등으로 저심환(猪心丸)을 만들어 복용시킨즉 대체(大體)는 다소 덜해져 거의 평상시와 같았으나 말하는 데는 여전히 평상시와는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그가 참으로 미쳤다는 것을 명백히 알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미친 병은 본래 갑자기 생겼다가 갑자기 낫는 증상이 아닌데, 구종의 병은 대론(大論)이 한창일 때에 생겼다가 대직(臺職)이 이미 체직된 뒤에 나았으니, 5일 사이에 미친 사람이 바뀌어 정상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사리로 미루어 보아도 애당초 근사하지 않습니다. 이밀의 말은 인척으로서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니 마땅히 다시 세밀히 캐물어야 하나, 조관(朝官)에 관련되었으니, 의금부에 옮겨 처리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윤4월 11일 기묘
윤대(輪對)하였다.
이홍재(李洪載)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4월 12일 경진
차대(次對)하였다.
각 군영의 아장(亞將)과 여러 장수들은, 대장보다 자급이 높은 자도 모두 등용하는 데 구애되지 말고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고 대장(大將) 장붕익(張鵬翼)이 훈련 대장이 되었을 때에 이수량(李遂良)이 자헌(資憲)의 자급으로 도감(都監)의 중군(中軍)을 역임한 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사가 【 대사헌 이홍재(李洪載), 정언 이운행(李運行).】 아뢰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윤구종(尹九宗)의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금일 신하된 자로서 유성한(柳星漢)의 징토(懲討)에 대하여 누가 눈을 밝히고 담을 키우며 피눈물을 머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이 대직(臺職)에 있는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때 구종(九宗)은 관직으로 말하면 간관(諫官)이었고 책무로 말하면 언책(言責)이었습니다. 대론(大論)이 한창 벌어질 때에 갑자기 병을 핑계대고 스스로 미쳤다고 하여 성토하기를 회피하는 듯한 점이 현저하였습니다. 대저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성한의 집과 멀지 않고 평소의 교분(交分)이 얕지 않았는데 겉으로는 미쳤다 핑계대면서 남몰래 호위하려고 하였으니, 그가 마음먹고 있는 바는 행인들도 아는 바입니다. 그가 미쳤다는 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앞서지도 않고 뒤늦지도 않게 마침 그때와 들어맞았으니, 그가 오로지 회피하는 것만 일삼고 성토하는 데 뜻이 없었던 자취는 명백하여 감출 수 없습니다. 더구나 능소(陵所)에서 말을 내리지 않았다는 설이 또 홍문관 차자에서 나왔는데, 그 말을 듣자 담이 떨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오싹합니다. 그가 우리 나라의 신하로서 능소를 지척에 두고 어찌 감히 말을 타고 버젓이 지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인도(人道)가 멸하였고 천리가 무너졌으니, 천지간에 어찌 이런 변괴가 있겠습니까. 그의 자취를 가지고 그의 마음을 미루어 보면, 성한(星漢)을 위하여 미치지 않았으면서 미쳤다 핑계하고 징토(懲討)할 때를 당하여 성토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흉악한 심보는 성한과 더불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죄인 윤구종을 잡아다 가두고 엄하게 국문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해당되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가 병이 있고 없는 것은 능소를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일에 속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종합하여 고찰하는 정사에 있어서 반신 반의하는 사이에 두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결같이 그가 공초하며 운운한 것에 의하여 작년 가을 참견한 증인들을 이미 형조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도록 하였었다. 지금 형조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막중한 곳을 범한 일에 대하여 각각 사람들의 공초와 증거가 이처럼 분명하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죄인 윤구종(尹九宗)을 엄히 심문하여 공초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숭릉(崇陵)의 서원(書員)인 박항의(朴恒儀), 수복(守僕) 이성위(李成位), 산지기 최개복(崔介福)을 다시 조사하여 심문하니, 항의(恒儀)는 공초하기를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미 견여군(肩輿軍)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듣지는 못하였고, 견여군이었던 성위(成位)와 개복(介福)에게 들으니, 윤구종이 참으로 이런 말을 하고 인하여 곧바로 지나갔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성위와 개복은 말하기를 ‘그때 혹은 가마를 메고 혹은 횃불을 잡고 혜릉(惠陵)의 홍살문을 지나갈 때에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고하니, 윤구종이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 곧바로 지나가도 괜찮다.」고 말하였으므로 몹시 의혹스러워 박항의 등과 더불어 서로 전하여 말하였으니, 혜릉의 관원들도 또한 반드시 이로 인하여 듣고 알았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이 공초를 보니 다시 심문할 필요가 없다. 각 사람들이 증명한 바가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으니, 윤구종의 죄가 어찌 해당되는 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병을 핑계하였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는 있던 없던 따질 만한 것이 못된다. 국가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면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즉시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형문하여 실상을 찾아내게 하라. 그리고 막중한 능침(陵寢)의 홍살문 밖에서 여러 차례 곧바로 지나간 것으로도 부족하여 심지어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대체 무슨 심보인가. 해부에 분부하여 문목(問目)을 내어 엄히 심문하여 기필코 실정을 찾아내게 하라."
하였다.
교리 윤광보(尹光普)가 차자를 올려 유성한과 윤구종을 똑같이 국문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윤4월 13일 신사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윤구종(尹九宗)을 한 차례 형문(刑問)하고 곤장 25대를 치니, 구두로 공초하기를, ‘이웃 능을 왕래할 때 매번 혜릉의 홍살문을 지나면서 견여(肩輿)에서 내리지 않았고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라는 말도 입으로 말하였으니, 이는 평일에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없어서이다.’고 하였습니다. 견여(肩輿)에서 내리지 않고 흉악한 말을 한 것은 바로 위를 범한 죄와 함부로 말을 한 죄이니, 마땅히 결안(結案)을 받들어 처단해야 하겠지만 이는 극형에 관계되었으므로 의금부에서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닙니다. 준례에 의해 국청을 설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막중한 곳을 곧바로 지나간 것과 함부로 못된 말을 한 것에 대하여 그가 이미 사실대로 말하였으니, 그 법으로 처리할 뿐이다. 의율(擬律)과 죄명은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해 결정하게 하라. 당당한 의금부가 어느 형벌인들 시행하지 못하겠는가. 어찌 반드시 국청을 설치한 뒤에 거행할 수 있겠는가. 옛 규정도 또한 본래 이와 같았다."
하였다. 해부(該府)가 또 아뢰기를,
"구종은 죄가 사형에 관계되니, 음식을 주는 것과 지키는 것을 추국(推鞫)의 규정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보잘것없는 하나의 죄수가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도망가겠는가. 음식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전일 역적 문서에 실린 죄수들은 수십 년 동안 감옥에 있더라도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그가 스스로 입에 풀칠을 하였다. 국가의 체제가 본래 이와 같았다."
하였다.
윤4월 14일 임오
전교하였다.
"윤구종의 죄는 막중한 곳에 관계되었으니, 마땅히 시행해야 할 형벌을 어찌 잠시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옥사의 체모를 중히 여기는 뜻으로 대신의 의논을 수합하였던 것이다. 좌의정이 의논드릴 때에 이미 끝에 진달한 말이 있었으니, 충주(忠州)의 심문해야 할 사람을 붙잡아오면 자연 즉시 판명될 것이다. 명령을 내려 형조에 신칙하도록 하라. 구종이 공초한 바에서 또 감히 평소에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이 한 조항은 모름지기 즉시 개좌(開坐)하여 공초를 받으라. 금번의 일이 만약 선조(先朝) 시대에 있었다면 얼마나 엄한 처분을 내렸겠는가. 근일의 조처는 감히 너그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미처 상세히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다. 지금은 이밀을 이미 잡아다 가두었으니, 충주(忠州)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자연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엄하게 조사하여 아뢰어라."
의금부가 아뢰었다.
"전 부사 이밀이 공초하기를 ‘윤구종(尹九宗)이 병으로 미쳐서 고함을 치고 마구 뛰어다녔다는 것은 전일의 공초에 이미 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이 발생한 시기는 유성한(柳星漢)을 성토할 때였고 나은 것도 또 대간의 직책에서 이미 체직된 뒤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그가 병을 핑계한 것이 현저한 자취가 있는데, 어리석은 소치로 과연 속임을 당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공초한 바가 끝내 명백하지 않으니 형장으로 신문하여 정상을 밝히소서."
죄인 윤구종(尹九宗)을 다시 엄하게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판의금부사 홍억(洪檍) 등이 면대(面對)를 청하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각신(閣臣)과 의금부의 여러 당상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홍억 등이 아뢰기를,
"아까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無臣節]’는 세 글자를 가지고 반복하여 따져 물으니, 함부로 부도한 말을 하면서 ‘어제의 공초 중에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고 한 것은 바로 제가 의릉(懿陵)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극도로 흉악한 말을 들으니, 마음이 오싹하고 뼈가 떨려서 차마 공초에 쓰지도 못하였고 또 감히 준례에 따라 아뢸 수도 없었기에 감히 이렇게 면대를 청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역적이 있단 말인가. 더없이 존엄한 곳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심지어 임금을 욕하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 흉악한 말을 들음에 내 마음의 분함이 어떠하겠는가. 하늘이 낸 선왕(先王)의 효성과 우애는 동방에 사는 자로서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가 어찌 감히 이토록 흉악한 말을 하는가.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의 영혼이 밝게 내려다보신다면 놀라움과 통분함이 어떠하겠는가. 내가 선왕의 마음을 본받아 몸소 조사하는 데 임하여 즉시 사시(肆市)의 벌을 내리는 것이 정(情)과 법에 당연하지만 내일은 바로 영흥(永興)의 본궁(本宮)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기 위하여 재계하는 날이다. 이러므로 주저하는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은 아뢰기를,
"내일은 재계하는 일이 이미 소중하니, 비록 오늘이라도 결안(結案)을 받아 거행할 수 있습니다. 또 몸소 신문하지 않고 위관(委官)이 거행한다면 야심(夜深)한 때까지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두 역적의 말이 지존(至尊)한 자리에까지 범한 것은 똑같습니다. 금일 신하된 자로서 어찌 이 두 역적을 가지고 미세한 차등이 있다고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홍억(洪檍)에게 이르기를,
"죄인이 공초를 올릴 때에 그 안색을 살펴보고 그 말을 판단해 볼 때 거짓으로 미친 체한 것이 참으로 의심할 바 없더냐?"
하니, 홍억 등이 대답하기를,
"조금도 겁내는 뜻이 없고 현저하게 독한 기색이 있으니, 확실히 병을 핑계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께서 신묘년058) 5월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齊宿)할 때에 참으로 몸소 국문한 예가 있었지만 금번은 본궁(本宮)에 작헌례(酌獻禮)를 처음 행하는 일이니 더욱 신중하게 해야 할 점이 있고, 또 추국(推鞫)은 법의 뜻이 매우 가볍지만 지금은 사체가 특별하기 때문에 하문하는 것이다."
하니, 홍억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한 명의 죄수는 곧 이미 승복한 역적인데, 어찌 꼭 몸소 국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숙종(肅宗) 시대 경신년059) 의 옥사에서도 또한 몸소 국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청을 설치하는 것은 다만 결안(結案)을 받기 위한 것일 뿐이니, 재계하는 날을 지낸 뒤에 법을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찌 편한 것을 취하여 위관(委官)을 보내 대신 거행하게 하겠는가. 다만 재계하는 날은 더욱 특별히 소중하니, 경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추국을 거행하고 즉시 결안(結案)을 받아 아뢰어라."
하였다.
비변사에 나아가 윤구종(尹九宗)을 친국하였다. 전교하기를,
"3경(三更) 안에 거행하면 충분히 재계를 할 수 있다. 위관(委官)에게 넘기는 것은 끝내 송구한 듯하니 몸소 국문을 거행하겠다."
하고, 문사 낭청에게 명하여 문목(問目)을 쓰게 하고 인하여 말로 풀어서 죄인에게 물어보라고 명하였다. 문사 낭청 이명연(李明淵)이 나와서 아뢰기를,
"죄인의 공초에서 말하기를 ‘오로지 당론(黨論)을 위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인의 공초 중에 당파에 치우쳤다는 말은 더욱 한없이 흉측하다."
하고, 인하여 대신과 의금부 당상에게 명하여 당파에 치우쳤다는 말로써 잇달아 형문하게 하니, 구종이 공초하기를,
"흉악한 역적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으니, 너무 늦게 자복(自服)한 데 대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홍억이 아뢰기를,
"죄인이 이미 자복(自服)하였는데 곧바로 죽을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인이 만약 기절을 하거든 구료관(救療官)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고, 다시 공초를 받아 결안(結案)을 결정하라."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밤이 장차 새려 한다. 내일은 바로 재계하는 날이니, 친국은 우선 파하고 정국(庭鞫)으로 거행하라."
하고는 마침내 내전으로 돌아왔다. 위관(委官)이 죄인이 질식하여 공초를 받지 못하겠다고 아뢰니, 정국(庭鞫)을 우선 파하라고 명하였다.
윤4월 15일 계미
죄인 윤구종(尹九宗)이 미리 죽어버렸다.
숭릉(崇陵)의 전 참봉 조진명(趙鎭明)과 혜릉(惠陵)의 전 별검(別檢) 임희일(任希一)을 귀양보냈다. 진명은 윤구종과 동료가 되었었고, 희일은 본릉(本陵)의 능관이 되었으면서 즉시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일곱 능의 여러 관리들도 모두 삭탈 관직시켰다.
윤4월 17일 을유
병조가 남산(南山)의 잠두봉(蠶頭峰) 아래에 불을 지른 사람을 잡아 아뢰니, 습진일(習陣日)에 끌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 먼 섬에 보내 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봉화대(烽火臺) 근처에서 불을 낸 것과는 다르다. 이는 보고할 만한 일이 아닌데 초기(草記)를 올렸으니, 도리어 국가의 체통을 손상시켰다. 병조 판서를 엄중히 추고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금일 조정 신하들은 어쩌면 그리도 의리에 어둡습니까. 대저 경묘(景廟)는 4년간 왕위에 올랐던 임금이고, 선세자(先世子)는 14년간 정사를 보던 왕세자였습니다. 우리 동방에 사는 사람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누가 경종의 조정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겠으며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을 막론하고 누가 선세자 앞에서 북면(北面)을 하고 섬기지 않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사대부들 사이에 문호(門戶)가 갈라져 자기에게 이롭게 하기를 국가 호위하는 것보다 먼저하고 당파 비호하기를 임금 높이는 것보다 중히 여깁니다. 그리하여 경종에 있어서는 윤구종과 같은 극악한 역적이 감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멋대로 하였고, 선세자(先世子)에 있어서는 유성한(柳星漢)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지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은근히 위를 핍박하였습니다. 아, 마음은 하나뿐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으로 저에게 충성하고 여기에 역심(逆心)을 품는다는 것은 천하에 이런 일이 없습니다. 경종(景宗)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어찌 선대왕(先大王)에게 충성할 리가 있겠으며, 선세자를 무함하는 자가 어찌 우리 전하를 사랑하고 받들 리가 있겠습니까. 구종과 성한이 역적질한 조건은 비록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한 꿰미에 꿰어놓은 것 같으니, 국가가 역적을 다스리는 법에 있어서 하나는 엄하게 하고 하나는 느슨하게 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지극히 인자하여 생명 아끼는 것을 우선으로 하시므로 스스로 천벌에 저촉된 흉악한 무리들을 비록 부득불 법에 따라 처벌하였으나 처리하는 과정은 끝내 고식지계(姑息之計)에 가까웠습니다. 비록 유사 이래 없었던 흉악한 역적인 김하재(金夏材)와 같은 자도 아직까지 그들의 소굴과 근거지를 타파하지 않아서 구종과 성한 같은 무리들이 잇달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구종(九宗)과 성한(星漢)은 비록 올빼미나 악한 짐승과 같은 심보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본래 미천하고 한미한 무리일 뿐이니, 참으로 그들의 소굴과 근거지에서 익숙히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독살스럽게 지극히 흉악한 말을 이처럼 기탄없이 멋대로 하겠습니까. 근일 이래로 조정의 신하들이 같은 목소리로 성토하는 것은 모두 구종의 역적질에 있고 성한에 대해서는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하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선세자(先世子)의 역적이 경종(景宗)의 역적에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구종을 과형(剮刑)이나 책형(磔刑)으로 처벌하기도 전에 갑자기 지레 죽었다고 보고하니, 천지(天地)와 신인(神人)의 울분은 천고(千古)에 맺히게 되었고 국문할 수 있는 것은 성한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처음처럼 하루 이틀 늦추어준다면 왕법(王法)은 이로부터 땅을 쓸어낸 듯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법을 적용하더라도 그들의 소굴과 근거지를 조사하지 않고 예전처럼 고식적으로만 한다면 성한은 비록 주벌을 당하더라도 장차 몇 명의 성한이 아래에서 눈썹을 치켜올리고 기세를 부릴지 모르겠고 의리는 밝혀질 날이 없을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성한을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그들의 소굴을 조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성한의 국문을 지체시키고 있는 것은 느슨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고식적으로 넘기려는 것도 아니다. 말로는 뜻을 다 말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이치로 미루어보기를 바란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 대사헌 이홍재(李洪載), 대사간 윤행원(尹行元), 집의 이보천(李普天), 지평 홍극호(洪克浩)·유회(柳誨), 헌납 유광천(柳匡天), 정언 정내백(鄭來百).】 유성한에 대한 일로 전에 아뢴 말을 고쳐서 아뢰기를,
"게다가 윤구종이 거짓으로 미친 척한 것은 실로 이 역적의 진짜 죄가 됩니다. 사람이 혹 미치면 종신토록 폐기(廢棄)되는 것인데, 아, 저 구종은 대체 무슨 심보이기에 종신토록 폐기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했겠습니까. 종전의 거짓으로 미친 척하는 무리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반드시 죽게 되었을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가리우려 해서 한때의 목숨을 연장하려는 자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런 계책을 내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그 당파를 위해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것과 뜻을 다해 회피한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성한과 구종 두 역적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 하겠습니다. 결탁한 정상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무함한 근원을 지금까지 조사하지 않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찌 역적이 두려워할 줄 알고 당파가 제거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국청을 설치하여 유성한을 엄하게 신문하고 기필코 실정을 밝혀 통쾌하게 국가의 형벌을 바로잡으소서.
아, 통분스럽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옛부터 한없이 많았지만 어찌 윤구종과 같이 극도로 흉악하고 지극히 요망한 자가 있겠습니까. 그는 이[蟣蝨]와 같이 미천한 자로서 항상 올빼미와 악한 짐승의 마음을 지니고 혜릉(惠陵)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으니, 못된 역적의 행실이 여기에서 나타났습니다. 의릉(懿陵)을 향해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였으니, 원망하고 있는 흉악한 심보가 환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그가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라고 한 말은 능졸(陵卒)의 증거가 명백하고, ‘당파에 치우쳤다.[偏黨]’는 두 글자의 말이 장전(帳殿)에서 공초 바칠 때 나왔으니, 흉악하기만 합니다. 신하가 당파에 치우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을 섬긴다는 것은 전후 흉악한 역적들도 하지 못한 말인데, 이 역적이 멋대로 말한 것은 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여러 차례의 공초에서 망측하고 부도하기가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는 참으로 옛적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에게도 일찍이 없었던 바이고 지금의 김하재(金夏材)와 이율(李瑮)도 감히 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이 한 조항으로도 비록 천만 번 죽인다 하더라도 족히 신인(神人)의 분(憤)을 조금도 덜 수 없는데, 거짓으로 미친 척한 흉계로 말하면 또 어쩌면 그리도 극도로 음흉하고 사악합니까. 아, 저 성한의 흉악한 상소를 들은 자는 마음이 오싹하고 담이 떨리지 않은 사람이 없고 본 자는 모두 그를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 구종은 대간의 직책에 있으면서 갑자기 미친병이 있다 핑계하고 교묘하게 엄호하려는 계책을 부렸으니, 결탁한 자취와 참견한 상황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정상을 끝까지 조사하여 영구히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은 바로 왕법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겨우 자복(自服)을 받자마자 앞질러 먼저 죽게 하였으니, 국가에서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 추후로 죄를 줄 방도는 오직 처자를 종으로 만들고 가산을 몰수하는 법만 있으니, 자복한 뒤에 죽은 죄인 구종(九宗)에게 빨리 노적(孥籍)의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들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왕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수교(受敎)도 또한 마땅히 조금이라도 사세에 맞게 의논하여 밝게 게시하는 것은 금석처럼 바꿀 수 없는 법이다. 마땅히 널리 물어본 뒤에 재량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을 파직시켰다. 종악이 차자를 올려 윤구종에게 극형을 추후로 주자고 청하면서 구종의 흉악한 말 4글자를 차자에다 그대로 썼다. 전교하기를,
"사람들을 면려하려면 마땅히 대신들부터 완비해야만 한다. 차자는 큰 망발이라고 할 수 있으니, 종악을 우선 파직시켜라."
하였다.
대궐에서 수직하는 여러 문신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보이라고 명하였다. 병조 좌랑 신광하(申光河)가 1등을 차지하니, 벼슬을 올려주었다.
윤4월 19일 정해
김사목(金思穆)을 형조 판서로,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서유린(徐有隣)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전 장령 이지영(李祉永)이 상소하였다.
"아, 세도(世道)는 날로 타락하고 인심은 못된 곳으로 빠져 윤구종과 같은 흉악스런 자와 유성한과 같은 역적이 나오니, 충신과 지사(志士)들은 모두 의리가 어두워짐을 두려워하고 역적이 자꾸 일어나는 것을 통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대저 의리는 천지를 지탱하는 것으로 성인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고 백대(百代)를 기다려보아도 의혹이 없는 것입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는 것을 충성이라 하고 윗사람을 범하고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을 역적이라 하는데, 충성과 역적의 경계에서 의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저 일종의 올빼미와 악한 짐승 같은 무리들이 임금을 무함하고 국가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특별히 하나의 가계(家計)를 삼아, 아비는 전하고 아들은 계승하여 자신을 위하고 당파를 이롭게 하는 기반을 삼았습니다. 전후로 자행한 흉모(凶謀)는 한판에 찍어낸 것 같아 그 술책으로 말하면 먼저 거짓말을 퍼뜨려 의혹시키는 계제를 만들고 끝내는 무함하는 수단을 부려 화(禍)를 빚어내는 근본을 삼았으니, 무인년과 기묘년, 을미년과 병신년의 여러 역적들이 바로 이러한 수법이었습니다. 무인년과 기묘년의 역적들이 이미 흉모를 이루었기 때문에 을미년과 병신년의 흉악한 자들이 다시 전일의 습관을 따랐고, 을미년과 병신년의 흉악한 자들을 모두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일 추악한 종자들이 다시 멋대로 날뛰는 것입니다. 아, 신의 아비는 고 참의 임성(任珹)과 같은 시기의 동료였습니다. 천지가 소란한 뒤에 신의 아비가 임성과 서로 대하여 당시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일찍이 피눈물로 옷깃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신도 또한 곁에 있으면서 역력히 듣고 알았습니다. 근일 이래로 삼가 대신(臺臣)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니 ‘한두 번 자꾸 들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우매하지만 또한 어찌 우리 성상께서 이런 등속의 말을 차마 듣지 못하시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성상의 마음에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하고 분수와 의리에 미안함을 혐의쩍게 여겨 끝내 할 말을 하지 않으면 세월은 점점 멀어지고 의리는 더욱 어두워져 임금의 원수를 갚을 날이 없을 것이고 선대의 뜻을 펼 기약이 없을 것이며, 신의 아비도 지하에서 또한 반드시 한(恨)을 품고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신이 신의 아비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눈물을 섞어 진달하겠습니다.
아, 저 김상로(金尙魯)는 얼마나 극악한 역적입니까? 그런데 합계(合啓)를 올린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한 번의 허락을 아끼셨고 정휘량(鄭翬良)과 신만(申晩) 두 역적은 실로 괴수인데 집에 누워 편안히 죽었고 벼슬도 여전하였습니까? 이현중(李顯重)이 신하로서 차마 제기하지 못할 글을 일부러 제기하여 대조(大朝)의 앞에 진달하였으니, 그의 죄범을 논한다면 또한 김상로·홍계희와 마찬가지입니다. 박치원(朴致遠)과 윤재겸(尹在謙)의 흉악한 편지는 실로 화(禍)가 일어난 계제의 효시(嚆矢)였는데 강필리(姜必履)가 반드시 위에 고하고 아래로 공포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는 행인들도 모두 아는 것입니다. 역적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무함하여 글을 형조에 올린 것은 천지 만고에 없었던 역변(逆變)인데, 친국하겠다는 명을 내린 뒤에 죄인의 옷 속에 남몰래 흉서(凶書)를 감추게까지 하였으니, 금오랑 조덕장(趙德章)이 결탁하고 호응한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대신들이 전명(傳命)으로 입대(入對)할 때에 미쳐서 신의 아비도 따라 들어갔었으므로 그들의 속이고 과장하는 허황한 말을 대략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신이 금일에 어찌 차마 제언하겠습니까. 또 창덕궁(昌德宮)에 대가(大駕)가 행차하던 날 세자 시강원과 세자 익위사의 관리들이 도피하고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런데도 그 일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나머지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고 남모르게 서로 선동한 무리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 무리들의 술책을 논한다면 속이고 과장하는 거짓말은 못하는 것이 없고 무함하는 수단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변고가 있었던 날에 이르러 삼광(三光)이 흐릿하고 모든 신령이 찡그리고 신음 소리를 내었는데,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없었던 것은 막론하고 허다한 재상들이 삼포(三浦) 위에서 호화스런 배를 타고 놀이를 하느라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으니, 그 죄가 또한 위로 하늘에 통하지 않겠습니까.
아, 을미년과 병신년의 여러 역적들로서 《명의록(明義錄)》에 나열된 자들은 저들의 당파로서 손으로 국가의 운명을 움켜잡고 부귀(富貴)는 하늘까지 닿을 위세였는데, 무엇 때문에 고달프게 반역을 도모하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전일의 죄악을 돌아보고 전하의 영특함을 꺼려하였고, 혹은 건도(乾道)에 이상이 없으면 그들은 반드시 후일 전하의 손에 살아남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예전대로 속이고 무함하는 습관으로 국가의 근본을 동요시키려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는데, 다행하게도 선대왕의 지극한 인자(仁慈)와 지극한 명철(明哲)에 힘입어 대보(大寶)는 부탁할 곳이 있었고 종사(宗社)가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말하면 무인년과 기묘년의 역적은 실로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적에게 전발(傳鉢)한 것이고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적은 실로 무인년과 기묘년의 역적에게 전수받은 것이니, 을미년과 병신년의 역적에게서 본다면 무인년과 기묘년의 역적은 절로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일찍이 갑신년에 고 판서(判書) 홍중효(洪重孝)가 도승지로 신의 집에 찾아와 신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금일 연석에서 성상이 책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나의 세자에게 어찌 혹시라도 어떠한 잘못이 있었겠는가. 실로 경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니, 연석에 있던 여러 신하들이 송구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하교를 마땅히 그대에게 알려주어야 하겠기에 연석에서 물러와 곧바로 그대의 집으로 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전하에게 전교하기를 ‘너의 원수는 김상로(金尙魯)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갑신년의 전교로 보면 선대왕께서 근심하며 뒤늦게 후회했던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전하에게 전교한 것으로 보면 선대왕께서 흉모(凶謀)를 통촉했던 것을 또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족히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고 해동(海東)의 모든 신하들이 이 역적과 더불어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의리가 명백합니다. 다만 성상께서 너무 인자하고 호생지덕(好生之德)에만 오로지 힘쓰므로 인하여 매양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 혹은 역적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을 면치 못하니, 끝내는 풀을 제거하면서 뿌리를 남겨놓는 바람에 종자 아래에 종자가 생겨서 성한과 구종의 무리가 서로 이어 흉악한 짓을 하면서도 기탄이 없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 연유를 추구해 보면 오로지 위에서 진달한 무인년과 기묘년의 여러 역적에 대해 아직까지 형벌로 다스려 의리를 명백히 게시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름이 대간의 계사(啓辭)에 든 여러 역적들에 대해 즉시 윤허를 내려 따르시고 천벌을 주지 못한 자는 모두 추탈(追奪)하라 명하소서. 이미 자백한 구종에게는 빨리 노적(孥籍)을 시행하고, 미처 끝까지 신문하지 못한 성한은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신문하여 그들의 소굴이 있는 바와 뿌리가 잠복한 바를 끝까지 조사하여 화근이 영구히 근절되고 이륜(彝倫)이 다시 밝아지게 한다면 동방의 신민(臣民)들이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는 의리를 환히 알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윤4월 20일 무자
정호인(鄭好仁)으로 한성부 판윤을 삼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의견을 올려 윤구종(尹九宗)에게 노적의 법을 적용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조(先祖)의 수교(受敎)에서는 추후로 벌을 주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차율(次律)로 결안(結案)하고는 죽은 뒤에 다른 벌을 적용하는 것과 자백하였어도 결안을 만들지 못한 자는 모두 추후로 벌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을해년 이후로 명백히 내려오는 금석 같은 법인즉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가감하는 것은 참으로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들의 의논이 비록 이와 같으나 수교(受敎)의 구절을 미처 상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추후로 시행한다. [追施]’는 두 글자가 금령(禁令)에 나타나 있는 것만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진실로 이러한 전교가 없었다면 문성국(文聖國) 등과 같은 흉악한 역적에게 무엇 때문에 이미 시행했다가 곧바로 철회하였겠는가. 지금 구종에게는 성국 등에게 이미 시행한 법률만을 적용해야 한다."
하였다. 이에 앞서 구종을 문성국 등에게 적용한 법률에 의해 참작 처리하는 것이 합당한지 부당한지를 대신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노적의 죄를 주자고 청하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
윤4월 21일 기축
윤대(輪對)가 있었다. 관동 위유 어사(慰諭御史) 홍대협(洪大協)을 불러 보았다.
대사간 윤행원이 상소하기를,
"유성한(柳星漢)의 아비 유사문(柳師文)이 버젓이 성문 안에 살면서, 손님들을 맞이하여 임금을 욕하고 꾸짖으며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끝없이 한 것을 입을 가진 자면 모두 전하여 듣지 못한 사람이 없는데, 해부(該府)와 해조(該曹)가 어찌 듣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마땅히 붙잡아다 엄히 가두어 놓고 조사하여 법으로 다스리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귀머거리와 같이 못들은 척하고 멋대로 말하게 놓아두고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근일 대간의 계사가 있은 이후 해부와 해조의 행공 당상(行公堂上)을 모두 견책하여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성한도 신문하지 않았는데 어찌 먼저 그 아비를 처벌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서유방(徐有防)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윤4월 22일 경인
전 수찬 이지영(李祉永)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상소가 들어온 지 이미 수일이 되었으나 너의 상소를 본 뒤로부터 마음이 우울하여 수응(酬應)할 겨를이 없었기에 지금에야 비로소 너를 불러 말하는 것이다."
하고는, 목이 메어 흐느끼다가 얼마 후에 이르기를,
"너는 네 아비의 아들로서 이토록 낱낱이 진달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3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그때의 사실을 잊기가 쉽다. 너의 상소 중에 정휘량과 신만(申晩)을 비록 괴수로 논하였으나 밖에서는 속 사정을 알지 못한다. 윤숙(尹塾)의 상소에서 처음 휘량과 신만을 논한 것은 옳지 않다. 휘량은 신사년060) 가을에 공로를 세운 곳이 있으니, 역적 나경언(羅景彦)이 급서(急書)를 올리던 때를 당하여 조정 신하 중 한 사람도 곤장 한 대 치자고 청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 사람이 유독 면대를 요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이 밖에도 또한 주선한 것이 많았다. 정치달(鄭致達)의 처와 정후겸(鄭厚謙)의 연고 때문에 괴수로 단정하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만(申晩)은 신광수(申光綏)의 아비로서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만약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추후에 죄를 준다면 그 당시 정승들이 어찌 유독 신만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이러한 곳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죄인의 괴수라고 지목하는 것은 또한 당시의 사실이 아니다."
하니, 지영이 아뢰기를,
"휘량이 공로가 있고 국문하기를 청한 등의 일이 있었던 것은 지금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난만(爛漫)스레 같은 패거리가 되었으니, 공로로 죄를 덮기는 어렵습니다. 역적 신만(申晩)은 신광수(申光綏)의 아비로서 실제 범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 다만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죄를 돌리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으나 신은 기가 막혀서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덕장(趙德章)이 국청(鞫廳)을 설치하기 며칠 전에 이미 흉서(凶書)를 찾았으니, 이는 사실과 틀린다. 일찍이 임성(任珹)의 일기를 보았는데 또한 상세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하니, 지영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5월 22일 상께서 몸소 국문하실 때 죄인의 옷깃 속에 남몰래 흉서(凶書)를 감추고 실로 단단히 꿰매어 현저하게 서로 호응한 자취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해지자 그도 또한 불안하여 체직소를 올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소에서 마땅히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네가 참으로 내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내가 역적 홍인한(洪麟漢)에게 일찍이 팔의(八議)의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자궁(慈宮)의 본가에도 이미 저와 같이 하였는데 또 자궁의 외가에 대해 이와 같이 한다면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가 범한 죄를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조덕장(趙德章)은 외로운 새새끼에 불과할 뿐이다. 박치원(朴致遠)과 윤재겸(尹在謙)의 일은 시킨 자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선왕의 전교에 항상 ‘내가 어찌 간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이름을 받겠는가.’ 하였으니 선왕의 마음에 개의(介意)치 않았음을 헤아릴 수 있다."
하니, 지영이 아뢰기를,
"두 상소는 곧 급서(急書)였지만 실은 무함하는 효시(嚆矢)가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현중(李顯重)은 참으로 범한 죄가 있으나 또한 시킨 자가 있다. 그때 북관(北關) 사람으로서 겸춘추(兼春秋)를 지낸 자가 끝내 누구인지 모르겠다. 대저 의리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되니 내가 여기에 대하여 십분 헤아려 생각한 것이 있다. 홍계희(洪啓禧)·홍인한(洪麟漢)·구선복(具善復)·한순(韓純)과 같은 여러 역적들은 비록 나와 관련된 일로 처벌하였으나 이는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설사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난처하게 여길 것인데, 후일 논하는 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치미는 기운이 왕래하여 말소리를 내기 어려워 상세하게 다 말할 수 없으니, 우선 후일 입시(入侍)하는 것을 기다려 다시 물어보겠다. 원소(原疏)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고 싶지만 그때의 일로 중외(中外)에 반포하는 것은 참으로 차마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사관(史官)에게 맡겨 시정기(時政記)에 써넣고 주서(注書)도 또한 《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록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장령 이주연(李柱延)이 상소하여 유성한과 윤구종을 엄히 징토(懲討)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이밀(李淧)은 바로 구종(九宗)의 친사돈이고 기숙(寄宿)시켰던 주인입니다. 구종이 미치지 않았으면서 거짓 미친 척한 것은 사람마다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밀이 형조에 공초한 바는 병이 있다고 핑계하였으니 교활하고 간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구종이 성한과 왕래하며 결탁한 정상은 그가 목격하였을 것이니 한 번 국문하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밀을 어찌 꼭 국문해야 하겠는가. 그는 구종의 친사돈이자 기숙(寄宿)시켰던 주인으로서 공초에서 보면 자신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뜻이 하나도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다스려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흥부(永興府)의 산마을과 금산군(金山郡)의 도암(道巖)·장암(壯巖)에 진전(陳田)의 세금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으니, 두 도의 감사가 고질적인 폐단을 진달함으로 인해서였다.
윤4월 23일 신묘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희(金履禧)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김사목(金思穆)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체직시키고 홍억(洪檍)으로 대신케 하였다.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경기 고을의 농사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윤4월 24일 임진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금번의 제사는 곧 내가 정(情)으로 인하여 제정한 예(禮)이다. 비록 길이 멀기에 경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였지만 경이 향(香)과 축문을 받들고 내려간 날로 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나 정성으로 재계(齊戒)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경이 지금 이미 복명(復命)하였고, 또 제사지내는 날에 일기가 맑았으며 의식 절차가 완비되었다고 하니, 지금 이후로는 나의 초조한 생각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함흥 본궁(本宮)의 규정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지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지만, 영흥 본궁(本宮)의 규정은 제기(祭器)를 다 만들기를 기다려 다시 보완하여 완성된 문서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호수가 아뢰기를,
"함흥부(咸興府) 풍패관(豊沛館)의 동헌(東軒) 뒤에 선조(先朝) 기유년061) 에 북관(北關) 지역의 진휼을 베풀 때 특별히 효유한 비석이 있으며 이는 곧 임금께서 짓고 쓰신 것입니다. 갑인년에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비석과 비각(碑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기울어졌으니 비각을 고쳐 세우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호수가 또 아뢰기를,
"석왕사(釋王寺) 토굴(土窟)의 옛터에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조그마한 초상(肖像)이 있는데, 중들이 모두 말하기를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임진 왜란 때의 전공(戰功)으로 모두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하였는데, 무학 대사는 곧 개국 1등 공신[開國元勳]인데도 전적으로 봉향(奉享)하는 곳이 없으니, 돌아가면 임금께 아뢰어 조그마한 초상을 모사하여 토굴에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내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소원대로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인하여 명하기를,
"사액(賜額)하는 일은 밀양(密陽)의 표충사(表忠寺)와 해남(海南)의 대둔사(大芚寺)의 전례에 따르고, 대사(大師)의 호(號)도 또한 두 절의 전례를 적용하여 사액(祠額)은 석왕(釋王)이라 하고 대사의 호는 개종입교 보조법안 광제공덕 익명흥운 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라고 하라. 액자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기내(畿內)에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차례차례 역전으로 가서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호수가 또 아뢰기를,
"회양부(淮陽府)의 의령(義嶺)과 덕명(德溟) 두 사당은 바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건립한 것입니다. 고려 시대부터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어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냈는데, 수직(守直)하는 사람이 없어 황폐해지게 버려두었으니, 각각 지키는 사람을 2명씩 두소서."
하니, 따랐다. 인하여 향과 축문을 지방관에게 내려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호수가 또 아뢰기를,
"원산(元山)은 북관(北關)의 큰 도회지인데, 주민들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큰 그물을 사용하여 고기를 잡았었는데, 선조(先朝) 병술년부터 비로소 방렴(防簾)을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이로부터 발[簾]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거의 2백 개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자가 1백 90개소로 세금 총액[比摠]의 규정을 정하였는데, 10여 년 이래로 해산물의 이익이 적어 감소된 발의 수가 거의 수십여 개소이나 세금은 예전과 같으니, 현재의 수에 의하여 세금을 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가 【지평 유회(柳誨).】 아뢰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유사문(柳師文)의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극악한 역적의 아비로서 마땅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움추리고 공손히 해당되는 벌을 기다리기에 여가가 없어야 하는데, 이에 감히 성문 안에 버젓이 있으면서 손님을 맞아들이고 조금도 두려워서 움추리지 않으며 더욱 흉악을 부려 임금을 욕하면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전하는 말이 낭자(狼藉)하여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대사간의 상소에까지 올랐고 형조에서 잡아 가두기까지 하였으니, 흉악한 심보를 서로 전수하고 역적질하는 것을 대대로 인습하여 평일 국가와 임금을 원망하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방자해진 것입니다. 또 그 자식이 흉소(凶疏)를 작성할 때에 감히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그 자식이 못된 말을 마구 한 것도 본래 전수받은 곳이 있으니, 이 역적 부자(父子)의 흉악한 정상은 하루라도 천지간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 자식은 이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국문하자는 요청이 있었으니, 그 아비도 불가불 아울러 엄히 국문해야 합니다. 형조의 죄인 유사문(柳師文)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국문하게 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어 시원스레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이 【헌납 박서원(朴瑞源), 정언 엄기(嚴耆).】 아뢰기를,
"유성한(柳星漢)의 흉악한 말과 역적 행위가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그 아비 유사문(柳師文)이 진실로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으면서 죽을 곳을 찾아도 시원찮을 것인데, 그는 감히 버젓이 성문 안에 살면서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임금을 욕하기를 끝이 없이 하여, 대사간의 상소에 오르기까지 하였고 이어 형조에서 잡아 가두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몹시 놀라고 분개하면서 맹세코 이 역적 부자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한을 국문하자는 요청은 이미 합계(合啓)한 것이 있었으니, 그 아비의 흉악한 심보도 또한 엄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조의 죄인 유사문을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국문하게 하여 쾌히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정호인(鄭好仁)이 상소하여 윤구종(尹九宗)은 노륙(孥戮)하고 유성한(柳星漢)과 유사문(柳師文)은 똑같이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구종이 자복(自服)할 때에 그가 이미 스스로 색목(色目)을 말하고 인하여 두 글자의 흉측한 말을 하였는데, 그때 문사 낭청이 죄인이 공초한 말을 감히 ‘편당(偏黨)’이란 두 글자로 고쳐 아뢰었으니,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됩니다. 그때 명령을 전했던 문사 낭청을 적발하여 엄중한 형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신진(新進) 관리가 한갓 ‘색목(色目)’이란 두 글자를 감히 연석(筵席)에서 말할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죄인의 공초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훌륭하다. 옛적에 한 대신이 위관(委官)으로서 국문을 행하고 돌아가 자제들을 대하여 경계하기를 ‘위관으로서 죄인을 심문할 때에 혹시 말이 조리가 없더라도 다만 받아서 전할 뿐이고 자기 말을 붙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였다니, 참으로 격언이다. 일전에 국문하는 자리에서의 문사 낭청들은 모두가 처음 담당하였으므로 거행하는데 체제를 전혀 모르기에 여러 문사 낭청들에게 이 말로 타이르고 직접 신칙하였었다. 이 비답을 승정원의 형방 고사(刑房故事)에 기재하고 인하여 한 통을 추안 밀갑(推案密匣)에 기록 비치하게 하여 후진(後進) 소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리(事理)가 있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사간 유운우(柳雲羽)가 상소하여 윤구종과 유성한의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구종은 흉악한 역적 홍술해(洪述海)의 사돈으로 그들에게 붙어 결탁하여 벼슬길이 막힌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외람되게 대간의 자리에 들어갔고 또 남쪽 고을의 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당시 의망한 이조 당상관을 견책 파면시키고 통청(通淸)을 주장한 이조 낭관을 삭탈 관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윤4월 26일 갑오
강원도 간성(杆城)에서 화재를 당한 집의 환곡(還穀)을 3년 간 감면해 주고 다시 돌아와 사는 백성들은 10년 간 부역을 면제해주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김이희(金履禧)가 상소하여 유성한(柳星漢) 부자 및 윤구종(尹九宗)의 죄를 논하고, 끝에 진달하기를,
"근래 도적들의 환란이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곳곳마다 낭자합니다. 심지어는 명화적(明火賊)이 종종 기회를 엿보아 일어나는데 호서(湖西)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그런데 토포사(討捕使)들은 태연하게 경계하지 않으니, 이와 같으면 몇 해 전 경기도에서 도적떼를 불러 모으던 걱정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울과 지방의 토포사를 엄하게 신칙하여 도적을 없애는 방도를 특별히 생각하게 함으로써 점점 불어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도적을 없애는 일에 대해서는 네 말이 매우 옳다. 이와 같다면 포도 대장을 두었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우선 중하게 추고(推考)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만약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으면 장수는 초기(草記)로 죄를 논하고 군관들은 엄하게 다스려라. 지방 고을에서 도적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또한 영장(營將)이 태만하기 때문이니,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여 답습하는 폐단이 하나라도 있으면, 각 병사(兵使)로 하여금 우선 영문(營問)에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징계하게 하고, 혹은 파직시키고 잡아다 심문할 것을 장계로 청하게 하라. 호서(湖西)가 더욱 힘쓰지 않았다는 데 이르러서는 너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병사로 하여금 가장 용렬한 자를 조사해 내어 잡아다 곤장을 치게 하라."
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형조 판서로, 이갑(李𡊠)을 한성부 판윤으로, 서유린(徐有隣)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관서(關西) 지방의 무사(武士)들에게 갖가지 기예로 시험을 보여 인재를 뽑되, 합격한 사람에게는 급제를 내려주고 벼슬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윤4월 27일 을미
지평 심달한(沈達漢)이 아뢰기를,
"좌부승지 이제만(李濟萬)은 본래 비루하고 좀스러운 자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한 이후로 그가 역임한 벼슬은 분수에 넘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공론이 비등(沸騰)하고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할 뿐만 아니라 또 현재 천만 놀랍고 분개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병조 참의가 되어 입직(入直)했을 때에 역적 윤구종(尹九宗)이 의금부에서 최초로 공초한 초본을 미처 위에 보고하기도 전에 가지고 와서 손에 들고 상세히 보면서 현저하게 역적 구종을 위하여 혀를 차며 애석히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본조(本曹)의 참판과 낭관(郞官)이 그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중이라서 모두 목격하였는데, 그 공초의 초본은 등초한 초본도 아니고 또 서리가 쓴 것도 아니었으니, 이는 반드시 죄수가 손으로 직접 쓴 것으로 그와 상의한 것입니다. 대저 구종이 능소(陵所)에서 말에서 내리지 않은 일은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을 것입니다. 온 나라가 모두 분개하여 장차 눈을 크게 뜨고 이를 갈며 성토하기에 겨를이 없을 적에 저 이제만이란 자는 그와 더불어 서로 난만(爛漫)스레 결탁하여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죄수의 공초를 보고서 불쌍하게 여기고 애석하게 여겼으니, 그 마음이 서로 통하고 맥락이 서로 연관되었다는 것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더구나 역적 구종의 범죄는 몹시 극악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죄명(罪名)이 얼마나 막중합니까. 그런데 그는 궁궐의 수직으로 있으며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놀라고 분개하는 뜻은 조금도 없었고 친밀하게 왕래한 자취만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이 극악한 역적의 소굴과 패거리를 엄격히 조사하는 때를 당하여 그와 더불어 문자를 왕복하고 성기(聲氣)가 서로 통한 무리를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빨리 의금부에 명하여 우선 역적을 편들은 이제만(李濟萬)의 죄를 엄히 다스리고 인하여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만(李濟萬)의 일이 참으로 그와 같다면 더없이 못된 일이다. 네가 이미 참판과 낭관으로 더불어 셋이서 같이 목격하였다고 하니, 과거의 뜬소문으로 부쳐둘 수 없다. 이제만을 우선 해부(該府)로 하여금 단단히 가두고 엄하게 심문하여 공초를 받아 아뢰게 하라. 이른바 함께 있었다는 참판과 낭관은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각각 자백을 받아 보고하게 한 뒤에 사헌부에서 함사(緘辭)를 보내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홍문관 제학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 수찬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기를,
"의리가 날로 어두워져 난역(亂逆)이 잇달아 자꾸 일어납니다. 고금에 없었던 흉악한 역적인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같은 자가 계속해 일어나 공공연히 못된 말을 함부로 하고 흉악한 심보를 감히 멋대로 부렸으니, 이것이 어찌 금일 신하로서 차마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시골 집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뒤늦게 비로소 들어 알고는 분개심을 이루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진신(搢紳)들과 유생들이 서로 거느리고 문경 새재를 넘어와서 정성을 쏟아 울부짖으며 호소한 것이 임금에게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상소를 만들어 올리려고 하니, 성균관의 장의(掌議)가 여러 모로 핑계대고 미루어 삼가 살폈다[謹悉]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승정원은 성균관의 근실(謹悉)이 없다는 이유로 또 핑계를 대고 미루었으므로 여러 차례 왕복을 하였으나 끝내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영남의 진신(搢紳) 아무개가 나름대로 한 도의 사론(士論)에다 부쳐 유생으로 소두(疏頭)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은, 병이지심(秉彝之心)을 지니고 있는 자는 모두가 같은 바인데, 신들의 이 상소는 도처에서 저지를 당하니, 금일 의리가 어둡고 막힘이 어쩌면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이, 한 도의 많은 선비들이 방황하고 억울해 하면서도 위에 아뢸 길이 없는 것을 목격하고 지극히 개탄스러워 감히 짧은 글을 올려 작은 정성을 드러내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하였다.
경상도 유학(幼學) 이우(李㙖) 등 1만 57인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아, 신들은 한 폭의 의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으나 사람을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다만 죽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매번 《시경》을 읽을 때마다 ‘한없이 멀고 푸른 하늘아 이렇게 만든 사람 누구이던가.’라고 한 곳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근일 서울에서 온 자를 통해 비로소 유성한(柳星漢)이 겉으로는 경계한다는 이름에 핑계대고 속으로는 부도한 마음을 이루려고 전하 앞에 상소를 올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신들이 여러 가지로 조심하여 비록 감히 사람들을 대해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 생각하건대 전하가 신들에게는 군부(君父)이니, 어느 일을 숨기며 어느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의리란 천하의 공변된 물건이니, 비록 백대가 되더라도 공의(公議)를 기다릴 것입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위에 있으면서 모든 이치를 다 조명하고 있는데, 신들이 끝내 위에 한 번도 아뢰지 않는다면 어찌 신들의 평생의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 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듯한 정성으로 대궐문에 부르짖으니,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 천만 죽을 죄가 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소한 행실을 삼가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하는 것이고 큰 의리는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굽어 용서하고 살펴주소서.
아, 신들은 곧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50년 간 길러낸 자들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께서 영종의 후사로서 영종의 마음을 전수받고 영종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정치를 대리한 것이 14년 간이었으니 신들의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이 영종을 사랑하고 추대하는 것과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영남 사람으로서 세자 시강원에서 가까이 모신 자가 그간 많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강론할 때에는 대부분 정미(精微)한 곳에 나아가고 예의바른 용모는 장엄하여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는 은의(恩義)를 곡진히 한다.’고 하였으니, 신들이 목을 빼고 목숨을 바치기 원한 것은 타고난 병이(秉彝)의 천성이 진실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영종의 지극히 인자한 성품으로서 종묘를 부탁할 곳이 있는 것을 기뻐하고 국운이 무궁하게 됨을 경사스럽게 여긴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일종의 음흉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세자의 가차없는 사색(辭色)에 남몰래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이에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로서 비밀리에 국가의 근본을 요동시키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음모를 빚어내는 것은 귀신도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을 배치해 둔 것으로 세자의 좌우가 모두 적이 되어 오로지 속이고 과장된 거짓말로 하늘을 속이는 묘방(妙方)으로 삼아, 없는 일을 지적하여 있다고 하면서 흉측한 계책을 부리고 흰 것을 변환시켜 검다고 하여 진실을 모두 변환시켰습니다. 하늘이 비록 높지만 못된 기운이 때로 장애가 되고 태양이 비록 밝지만 무지개가 때로 침범하는 것이니, 이는 하늘도 면할 수 없는 바입니다.
대저 무인년과 기묘년 이후 5년 동안에 그들은 재주를 부리지 않은 바가 없고 수단을 시험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서로 체결하고 결탁한 자로는 강충(江充)과 같은 자가 몇십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상소로 세자를 욕하는 자도 있었고 급서(急書)로 고자질하는 자도 있었으니 이에 끌고 따르며 호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자의 기후가 혹 수심에 차고 우울할 때가 있으면, 이에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또 이야깃거리로 삼아 안팎에서 서로 선동하고 더욱 교묘하게 참언을 투입하여 원근(遠近)을 현혹시키고 더욱 시급히 소문을 퍼뜨려 끝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이것도 부족하여 건도(乾道)가 회복할까 염려하고 전하께서 영명(英明)한 것을 몹시 걱정하여 그들이 이미 사용했던 기술로 다시 이미 숙달된 수단을 시험하여 마침내 을미년과 병신년에 지렁이처럼 뭉친 여러 추악한 자들이 있게 되었던 것이니, 동방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가 이 무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함에 미쳐서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았으니, 온 나라가 바라는 바는 오직 삼가 천벌을 시행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과감히 없애버려 의리를 밝히는 데 있었는데, 어찌하여 17년 동안 조정에 있는 신하 중 건의하여 세자의 무함을 변석하자고 청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비록 전하의 다함이 없는 효성으로서도 또한 통쾌히 여러 역적들의 형을 바루지 않았으니, 대성인(大聖人)이 생각한 바를 이[蟣蝨]처럼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가 헤아릴 바는 아니지만, 초가집 밑에서 마음속으로 탄식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근일 비로소 두 노신이 연명하여 상소한 데에 대한 비답을 삼가 보았는데, 비답에 ‘지난번 등극(登極)하였을 초기에 차례차례 대대적으로 처벌을 시행하여 요행히 이미 죽은 흉악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그 형벌을 용서하지 않았고,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팔의(八議)의 규정에 적용시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읽어본 이후에 비로소 전하께서 옛 역적을 제거하는 의리에 엄격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천하의 대법을 전하고 인륜을 만대에 수립하는 데에 열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신들과 같이 우물안에 앉아 있는 자들이 어찌 능히 하늘의 광대함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은 나름대로 전하의 이 조치가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극히 잘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전하께서 선세자(先世子)의 역적을 다스리는 것은 천지가 허여한 바이고 신명도 살펴보는 바이니, 마땅히 그 죄를 명시하고 명백히 그 죽임을 가하여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아무개는 어느 해의 극악한 역적으로 극형을 당하였고 아무개는 어느 해의 수종자로 그 다음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한 뒤라야 의리가 세상에 크게 밝아질 수 있고 형정(刑政)이 후세에 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하지 않아 전하의 마음은 비록 어느 해의 역적을 다스린 것이라고 하지만 죽은 자도 자기의 죽음이 어느 해의 죄로 연유한 것인지 모르는데 더구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어떻게 알겠으며, 또 더구나 먼 지방에 사는 신들과 같은 자가 더욱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의리를 밝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밝혔다 여기지 않고 전하께서는 형정(刑政)을 거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행했다 여기지 않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선조(先朝) 때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선세자(先世子)의 역적을 토죄(討罪)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들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매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듣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도 모년(某年) 뒤에는 즉시 뉘우치면서 매번 그때에 안금장(安金藏)062) 과 같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고, 또 고(故) 중신 조중회(趙重晦)가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전교하기를 ‘경은 볼 수 있으나 이이장(李彝章)은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선대왕의 안색에 수심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는 이이장이 그때 이미 작고(作故)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삼가 듣건대, 전하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너의 원수는 김상로(金尙魯)이다.’ 하였다고 하니, 이로 말하면 선대왕께서 그때의 간신(諫臣)을 추후 생각하고 당시의 참소한 역적을 몹시 미워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모년(某年)의 의리를 천지에 세워 법을 범한 여러 흉적들을 법대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선대왕의 본심(本心)을 받드는 것이 되지 어찌 선대왕의 지극히 자애로운 덕에 손상이 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처치한 것이 은밀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의 잔당이 오히려 흉악을 멋대로 부려 선세자(先世子)를 무함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충신이라 하고 선세자를 옹호하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역신(逆臣)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충신과 지사(志士)들은 말하려고 하다가 즉시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려고 하다가 즉시 자제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의리가 밝혀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는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고 높은 이를 위하여 휘하니, 높은 이와 어버이에게는 설령 휘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휘하는데, 더구나 무함하는 말로 기필코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자는 《춘추》의 의리로 논한다면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억세어서 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 무리들이, 소굴이 이미 깊고 근본이 이미 견고해져서 공공연히 흉악한 말을 멋대로 하기를 마치 아비는 전해주고 자식은 물려받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금일에 이르러 성한(星漢)의 상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상소가 비록 강학(講學)을 권면한 것 같지만 권면하는 곳에서는 모두가 희미하게 헤아릴 수 없는 말이 있고, 비록 임금의 잘못을 진달한 것 같지만 임금의 잘못을 진달하는 곳에서는 모두가 전일의 습관대로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성한은 일개 미천한 부류일 뿐이니 그가 비록 사나운 짐승과 같은 심보를 가졌다 하더라도 진실로 익히 듣고 보아서 예사로운 일로 여기지 않았다면 홀로 어찌 멋대로 흉악한 입을 열고 종족이 침몰당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믿는 바가 있어 그랬을 것입니다.
대저 근년 이래로 법망이 매우 소활하여 비록 극악한 역적과 대단히 악한 자라도 전하께서는 혹시 다른 사람들까지 체포할까 염려하여 서둘러서 그 사람만 처벌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김하재(金夏材)와 같이 군신(君臣)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흉악한 자라 하더라도 한 번도 그 도당을 신문하지 않고 끝내 법을 적용하여 마치 입을 막아버리고야 만 것처럼 하였으므로 인심은 징계하거나 두려워할 줄 모르고 국가의 기강은 날로 무너져 지금은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순(虞舜)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삼가한 것은 오직 형벌 뿐이었는데도 오히려 ‘호종(怙終)의 경우는 처벌한다.’고 하였으니, 호(怙)란 믿는 데가 있는 것이고 종(終)이란 두 번째 범법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성한(星漢)의 무리가 소굴을 의지한 것은 믿는 데가 있는 것이요, 무인·기묘년의 일이 있었는데도 그치지 않아 을미·병신년의 역적이 있었고, 을미·병신년의 일에서 그치지 않아 하재(夏材)와 같은 역적이 있었으며, 하재와 같은 역적에서 그치지 않아 이율(李瑮)·구선복(具善復)이 있었고, 이율과 선복에서 그치지 않아 이에 성한(星漢)이 있었으니, 이는 다만 두 번째 범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순임금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방치해 둔 채 신문하지 않았으므로 대신과 삼사(三司)가 법에 의해 간쟁하고 논란하였으나 윤허를 내리지 않았고 노신과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논단하여도 한결같이 윤허를 아끼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순임금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전하로서 형벌을 쓰는 데 이르러서는 어쩌면 이토록 같지 않단 말입니까. 실로 평일 전하에게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신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릿길을 와서 서로 거느리고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성한(星漢) 때문이 아니고 실은 성한의 소굴과 근거가 염려되기 때문이며, 단지 소굴과 근거가 염려되기 때문만이 아니고 세자의 무함이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음이 통한스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영남(嶺南)을 돌보아주신 것이 저처럼 절실하고 영남을 예로 대우함이 저처럼 지극하니, 영남의 진신(搢紳)과 유생들은 모두가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목숨을 바쳐 보답하려고 한다면 선세자(先世子)를 위하여 무함을 변명하는 것이 단연코 제일의 의리이니, 신들이 어찌 차마 자신과 집안을 생각하여 몇십 년 동안 맺힌 회포를 한 번 죽을 각오로 곧바로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신들도 이 말이 한 번 나오면 성한의 무리들이 역적으로 몰아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신이 되는지 역적이 되는지는 전하께서 반드시 통찰할 것이고, 후세에 동호(董狐)의 붓063) 을 잡은 자도 또한 반드시 판단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신들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특별히 유의하여 선세자의 무함이 참소하는 역적에게서 연유했음을 명백히 변명하여 팔도에 알리고, 허다한 역적에게 미처 시행하지 못한 형벌을 바로잡아 윤리와 강상을 부식(扶植)하며, 성한(星漢)과 같이 지극히 흉악한 자는 그의 소굴과 근거를 심문하여 화(禍)의 근본을 근절하면 종묘 사직에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으며 신민(臣民)들에게도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도중에서 또 삼가 듣건대 역적 윤구종(尹九宗)이 천지간에 없었던 흉악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 무리들의 믿고[怙] 재범[終]하는 짓이 어쩌면 이처럼 갈수록 더욱 극심합니까. 성한은 그 말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잡을 수 없고 은미하여서 반드시 분석해 깨뜨린 뒤라야 그의 흉악한 심보가 드러나게 할 수 있지만, 구종으로 말하면 자기 입으로 직접 지극히 흉악한 공초를 하였으니 오직 법을 적용할 뿐입니다. 구종과 성한은 역적질한 것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이 무리가 선세자(先世子)에게 불충한 것은 대체로 같습니다.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가 미루어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이 미친 것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자입니다. 어찌 자복하였으나 지레 죽었다고 하여 노적(孥籍)의 법률을 적용하기를 어렵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여러 신하의 요청을 따라 조금이라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憤)을 덜어주시길 천만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하였다.
영남 인사 이우(李㙖) 등을 불러 보고 석전(席前)에서 비답을 내려주었다. 상이 승지 임제원(林濟遠)에게 이르기를,
"소두(疏頭)가 누구인가?"
하니, 제원이 아뢰기를,
"이우입니다. 고 옥당 이완(李埦)의 종제(從弟)이고 고 교관(敎官) 이광정(李光靖)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제원을 시켜 상소한 유생들에게 유시하기를,
"이미 글로 형용할 수 없으므로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 비록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나 너희들이 천리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전(殿)에 임하여 불러 보는 것이니, 소두(疏頭)는 전에 올라와 읽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우가 나아가 엎드리니, 상이 이르기를,
"진신(搢紳)과 유생들 중에 이름을 아는 자를 각각 두세 명씩 함께 전에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 전 장령 성언집(成彦檝), 전 지평 강세응(姜世鷹), 전 정언 강세륜(姜世綸), 유학(幼學) 이경유(李敬裕)·김희택(金熙澤)·김시찬(金是瓚) 등이 차례로 앞으로 나아가니, 유생들에게 각각 족벌(族閥)을 아뢰라고 명하였다. 경유(敬裕)는 아뢰기를,
"신은 고(故) 이조 판서 봉조하 이관징(李觀徵)의 5대손이고 고 참판 이옥(李沃)의 현손(玄孫)이며 고 수찬 이만유(李萬維)의 증손입니다."
하였고, 희택(熙澤)은 아뢰기를,
"신은 교리 김희직(金熙稷)의 재종제(再從弟)이고 김한동(金翰東)의 삼종질(三從姪)입니다."
하였으며, 시찬(是瓚)은 아뢰기를,
"신은 고 사간 증 도승지(都承旨) 김영(金坽)의 6대손입니다."
하였다. 이우(李㙖)가 상소를 다 읽자, 상이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여 말을 하려다가 말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여러 차례 되풀이 하다가 한참 후에 이르기를,
"마음이 이미 억눌리고 막혀 말에 두서가 없어서 말하자니 먼 곳에서 온 유생들이 보는 데 좋지 않을 듯하다."
하고는, 또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차마 문자로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대면하여 말하려고 하였으나, 또한 어찌 차마 너희들의 상소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이 천릿길을 발을 싸매고 올라왔고 1만여 명이 연명(聯名)하였으며 또 막중한 일이니, 내가 어찌 한 번 보는 것을 어렵게 여겨 한마디 말을 내리지 않겠는가. 만약 한마디 말도 없다면 너희들이 억울해 할 뿐만 아니라 영남의 몇 만 명의 인사(人士)들이 장차 그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여 다 말하기는 어려우니, 그 대략만을 말하겠다. 내가 애통(哀痛)함을 머금고 참아온 지가 이미 30년이 지났고 왕위에 올라 예(禮)를 거행한 지도 또한 20년에 가깝다. 허다한 세월에 어느 날인들 근심을 품지 않은 날이 있었겠는가마는, 이미 감히 의리로 명백히 말하지도 못했고 또한 능히 형벌을 통쾌히 실시하지도 못했다. 평일에 독서한 것이 학력(學力)에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이치가 조금 있다고 여겨진다. 40년 동안 강구한 것은 바로 이 의리이니, 가령 순임금과 주공(周公)이 이 처지에 놓였다면 어떤 투철한 견해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식견으로서는 평소 강론하여 결정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로 너희들의 상소 중에 말한 바와 같이 비록 죄로 처벌을 받은 자도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보고 들은 당세의 사람들과 전해 듣는 후세의 사람들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나의 본심을 알겠는가. 영남은 본래 시례(詩禮)의 고장으로 불려왔고 열조(列朝)에서 돌보고 대우한 것이 다른 도(道)와는 달라, 건국 이래로 큰 의리에 관계된 일이 있을 적에는 참여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신년064) 의 일은 비록 한 도(道)의 수치였으나 이는 또한 의리를 잘못 보아 스스로 역적에 돌아가는 것을 모른 데서 나온 것이다. 그때에도 또한 속이고 선동하는 무리들이 금일보다 심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끝내 온 도를 그르치는 데 이르게 되었었다. 너희들의 상소는 의리에서 나왔으니, 비록 차마 세밀하게 분석하지는 못하겠으나 이미 대궐 앞의 작은 자리를 빌려 나왔는데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천지가 생긴 이래로부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가 있었으니 나의 정사(情事)로 어찌 한푼이라도 가리우고 막을 마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일은 지극히 말하기 어렵고 그 말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일에는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있으니, 권도[權]라는 한 글자에 대해서 성인(聖人)보다 한 등급이 낮은 자는 비록 통달한 도에 대하여 섣불리 의논할 수 없으나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스스로 헤아려 알맞게 정해둔 것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다 말하려고 한즉 또한 감히 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차라리 천하 후세에 비방을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김상로(金尙魯)는 이미 선조(先朝)의 하교가 있었고 문녀(文女)의 죄는 상로와 같았기 때문에 즉위하던 초기에 한 번 처리했던 것이니, 이는 다만 대체(大體)와 의리에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 여러 역적들은 을미년과 병신년 사이에 스스로 천벌을 범하여 거의 모두 처벌되었다. 비록 홍인한(洪麟漢)을 처분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이미 팔의(八議)의 대상에 들어 있었고 또 그의 ‘굳이 알 필요가 없다.[不必知]’는 세 글자는 문득 ‘있었을지도 모른다.[莫須有]’는 등의 근거없는 말과 같았는데, 끝내 사형을 받게 된 것은 그 당시의 범죄 때문만이 아니라 인한(麟漢)의 죄는 바로 역적 구선복(具善復)과 같기 때문이었다. 비록 말하고 싶으나 모년(某年) 모월(某月)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역적 홍계희(洪啓禧)로 말하면 한 집안의 부자 형제, 남녀 노소, 노비(奴婢)의 무리들까지 모두 법에 복주되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은 주벌이 생긴 이후로 없었던 일이니, 이는 한(漢)나라의 삼족(三族)을 멸하는 법과 다를 것이 없다. 옛적 서연에서 일찍이 역적 계희를 지적하여 강충(江充)과 같다고 하신 분부가 있었으니, 역적 계희의 죄는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비록 병신년065) 가을의 죄악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비수를 끼고 다니고 흉물을 파묻은 일이 모두 역적 계희의 집안에서 나왔으니, 이는 천고에 듣지 못했던 바이다. 인한과 계희는 특별히 큰 자들이고 그 나머지 처벌해야 할 만한 자들은 거의 모두 제거하였다. 역적 선복(善復)으로 말하면 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전후 흉악한 역적들을 끝내 성토하고 처벌하지 못한 것은 실로 선조(先朝)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는데 의리가 이로 인하여 어두워질까 나름대로 염려해 왔다.
병신년 봄의 옥사(獄事)에 대해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는데 재한(載翰)의 무리가 극악한 역적이 된 것은 이미 한 번의 상소가 있기 전부터였다. 공공연히 뇌물이 오가고 내시들과 결탁하였으며 더구나 결탁한 자는 바로 효충(效忠)·국래(國來) 등 흉악한 내시들로서 계희(啓禧)·상로(尙魯) 등 여러 역적들이 일찍이 결탁했던 자들이다. 온갖 계책으로 찔러보고 여러모로 부추켜 혹은 감언이설로 달래고 혹은 위협하는 말로 두려움을 조성하였으니, 내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어찌 이 무리들의 음흉한 심보를 알지 못하였겠는가. 장차 선조(先朝)에게 아뢰어 그들의 간악한 실정을 밝히려고 하면 그들은 또한 감히 폐하고 다른 사람을 세운다는 등의 흉악한 말로 공공연히 욕을 하였으니 그들의 심보를 알기 어렵지 않았다. 대저 복(復)이란 한 글자는 선대왕(先大王)의 신하로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였고, 죽인다[殺]는 한 글자는 봉조하(奉朝賀)의 처지로서 제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대대적으로 처벌을 시행하고 명백하게 말하여 숨기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혼은 비록 저 세상에서라도 기뻐하겠지만 밝게 오르내리는 경모궁(景慕宮)의 영혼이 또한 어찌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내가 후일에 지하에 가서 절하고 뵈올 면목이 없을 것이다. 어버이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은즉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재한(載翰)의 무리는 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바로 경모궁(景慕宮)의 죄인이고, 또 경모궁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선대왕(先大王)의 죄인이다. 병신년의 처분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영남 지방에서 도현(道顯)이 나타난 것은 또한 처분의 외면에 나타난 대략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이 일의 본뜻은 전혀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 너의 상소 중에도 또한 이이장(李彝章)과 조중회(趙重晦) 등의 일을 말하였지만 이 사람들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 정포(旌褒)한 은전(恩典)은 족히 그의 공로에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 것이다. 대저 정(情)이 있는 곳에 이치도 또한 있는 것이니, 이치에는 정이 없는 이치가 없고 정에는 이치가 없는 정이 없다. 나의 주관은 스스로 정(情)과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또한 일마다 정과 이치에 합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근일 유성한(柳星漢)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헤아려 보았다. 임금이 어찌 사적인 원수가 있겠는가마는 옛적에는 또한 임금의 원수니 국가의 역적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 성한의 상소 중 윗조항이 하나같이 인한(麟漢)과 선복(善復)처럼 나의 원수가 되는지의 여부를 끝내 확정짓지 못하였다. 아직 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지영(李祉永)의 상소 중 정휘량(鄭翬良)과 신만(申晩)에 관한 일은 본 사실을 알지 못한 듯하다. 신광수(申光綏)는 비록 추후로 벌을 적용하였으나 신만은 반드시 그 아들과 같이 악한 짓을 하였다고는 못한다. 만약 당시의 정승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다면 이는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최익남(崔益南)이 다만 김 영부사(金領府事)066) 만을 논죄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휘량은 역적 나경언(羅景彦)을 국문하자고 청한 차자에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였으니,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사년067) 가을에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나의 본뜻은 원수나 역적을 제외하고는 죽은 뒤에 추후로 논죄하고 싶지 않다. 역적 나경언은 국청을 설치하기 전에 이미 액정서(掖庭署)에서 심문할 때 흉서(凶書)를 얻었으니, 수색해냈다는 한 조항은 금오랑(金吾郞)과는 무관하다. 삼포(三浦)에서 배를 뛰우고 논 것은 바로 김양택(金陽澤)과 홍인한(洪麟漢) 등이 한 짓이었으므로 모두 이미 처벌을 하였다. 지영(祉永)이 또한 어떻게 그때의 일을 다 알겠는가. 나도 또한 상세히 다 알지 못하는데, 40, 50세 이하의 후생들로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괴상할 것이 없다. 사람들이 이미 감히 말하지도 못하고 또 차마 제기하지도 못하니, 참으로 세월이 점점 멀어질수록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서 백대(百代) 후에 나의 본심을 알지 못할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근일 여러 신하들이 상소로 제기하는 말에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곳도 하지 말도록 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만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한(麟漢)에게 「굳이 알 필요가 없다.[不必知]」라는 말이 없었고 선복(善復)이 만약 먼저 죽었다면 장차 그들의 죄를 바로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니, 이 말이 근사한 듯하나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인한에게 비록 을미년의 범죄가 없더라도 어찌 처분할 방도가 없겠으며, 선복(善復)도 또한 어찌 스스로 죽기를 기다렸겠는가.
영남은 바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서 위급할 때에 믿는 곳이니, 내가 영남에 바라는 것은 다른 도(道)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의 본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본뜻을 가지고 돌아가 온 도(道)의 인사(人士)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우(李㙖)가 아뢰기를
"신들은 먼 지방의 천한 자들로서 이 의리를 가슴에 안고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서 평소부터 강마(講磨)하였습니다. 분통을 참고 원한을 품고는 30년 간을 하루같이 지내다가 늙어서 죽은 자들도 또한 많습니다. 신들의 이번 걸음에 만약 의리를 밝힌다면 장차 돌아가서 부형들의 사당에 고하려고 하였는데, 성상의 전교를 받고 보니, 또 가슴이 막히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음험한 기운으로 인하여 손상됨이 없고 일월(日月)의 밝음은 무지개와 상관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통쾌히 의리를 신장시키는 것이 선조(先朝)의 처분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이극(里克)을 주벌하면서 그의 죄로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의 관직을 썼으니, 그의 죄를 가지고 벌하지 않는다면 대저 벌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음침한 기운이 비록 하늘에 손상될 것이 없고 무지개가 비록 일월의 밝음에 무관하다 하지만, 말이 하늘과 일월에 미쳤으니 이미 감히 못할 바가 있다."
하였다. 인하여 제원(濟遠)에게 명하여 상소문에 대한 비답을 쓰게 하였다. 그 비답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천릿길에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그 일은 지극히 외경스럽고 중대하고 지엄한 것이며, 그 말은 차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으며 감히 제기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어찌 입을 열어서 조칙[絲綸]의 글에서 말하기를 마치 평상시 비답을 내리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들을 연전(筵前)에 불러 면대하여 본뜻을 말한 것이다. 목이 메이고 말이 막혀서 말로서 비록 뜻을 다하지는 못했으나 대략은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의리가 밝혀지지 않고 형정(刑政)이 거행되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나의 본뜻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서로 경계하며 천명(闡明)할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희들 영남의 진신(搢紳)과 유생들의 공로이다."
하였다. 뜰에 있는 진신과 유생들을 전각의 뜰로 올라오라 명하고는 전교를 마친 다음 상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금일 연교(筵敎)에서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쓸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혹시라도 사실과 틀리지 않게 상세히 기주(記注)에 기록하라."
하였다.
윤4월 28일 병신
간성군(杆城郡)에서 삼값[蔘價]으로 매호마다 거두는 수량을 감하여 경공(京貢)으로 만들고, 상진곡(常賑穀)의 감모(減耗) 몫으로 받는 곡식을 떼어주어 더 지급하는 자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 본읍(本邑)의 군안(軍案) 중 훈련 도감에 소속된 포보(砲保) 1백 67명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어사 홍대협(洪大協)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이 명령이 있었다.
경상도 좌조창(左漕倉)의 배 9척이 호서(湖西)에 이르러 침몰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남 감사는 무겁게 추고하고, 배가 망가진 지방인 서천군(舒川郡)·비인현(庇仁縣)·마량진(馬梁鎭) 등의 관리는 모두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들이소서. 수송을 통솔한 차사원(差使員)은 먼저 그 직책을 파면시키고 조운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정배(定配)의 벌을 시행하며, 충청 감사는 파직시키는 벌을 내리고, 도사공(都沙工)은 효수(梟首)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좌조창(左漕倉)의 배가 망가진 것은 비록 9척이라고 하지만 제각기 표류한 것은 17척이 다 똑같았다. 한 창고의 곡식을 실은 배가 모두 표류한 일은 수십 년 전 호남(湖南)의 조창(漕倉) 사건 이후로 듣지 못했던 바이다. 여러 조항으로 죄목을 들어 나열한 것은 모두 초기(草記)대로 시행하라. 충청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으며 파직시키는 벌은 너무 가볍다. 서용하지 않는 벌을 주도록 하라. 배를 통솔한 차사원(差使員)은 잡아다 귀양보내는 데만 그칠 수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크게 위의(威儀)를 베풀어 엄하게 곤장을 쳐서 정배(定買)시키게 하라. 해당 창고의 도차사원(都差使員)은 곧 그 지역에 정배(定配)시키라. 근년 이래로 3곳의 조창(漕倉)에 모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금년에도 또 그러하니, 우조창(右漕倉)과 후조창(後漕倉)의 도차사원(都差使員)도 또한 파직시키라. 새로 부임하여 그때 아직 출사하지 않은 자는 논죄하지 말라. 허다한 배와 인명(人命)이 손상되었을 것인데 먼저 보고된 자는 1 명이라고 하니, 감사로 하여금 구휼의 은전을 준례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정경조(鄭景祚), 지평 박재순(朴載淳) 등이 아뢰기를,
"병조 참판 이진복(李鎭復)과 전 좌랑 유회(柳誨) 등에게 함사(緘辭)를 보내어 취초(取招)하였더니, 통문에 답하면서 이진복은 말하기를 ‘금월 11일에 참의 이제만(李濟萬)과 수직(守直)을 교대하고는 난입(攔入)한 자에 관한 초기(草記)를 올리는 일로 즉시 나가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제만이 정원(政院)에 사람을 보내어 역적 윤구종(尹九宗)이 공초한 등본을 얻어 보고는 말하기를 「공초한 말을 보면 미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감히 변명하겠는가.」 운운하였으므로, 곁에서 보고 말하기를 「과연 미치지 않았다면 반드시 흉악한 놈이다.」 하고는 즉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그때에 입직(入直)한 좌랑 유회(柳誨)도 또한 자리에 있으면서 들었습니다. 그 사이의 상황은 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회는 말하기를 ‘금월 11일 병조의 내성(內省)에서 입직(入直)할 때에 본조(本曹)의 초기(草記)를 정원에 올린 뒤 당상관에게 회보(回報)할 일이 있어 정원에서 내려올 때에 곧바로 당상관이 수직하는 곳으로 들어갔더니, 본조의 참판 이진복(李鎭復)은 미처 수직하러 나오지 않았었고 자리에 있던 참의 이제만(李濟萬)은 이미 수직하러 들어온 지 한참 된 듯하였습니다. 초기(草記)를 바친 사유를 말하고 막 수직하는 장소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에, 이제만이 가늘게 쓴 중간 길이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재삼 자세히 보고는 이어서 무릎 아래에 놓았다가 다시 펼쳐보곤 하였습니다.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였지만 이미 상대하여 앉아 있었기 때문에 공적으로 전달되는 문서라 생각하고 우연히 보자고 청하였더니, 제만이 처음에는 허락치 않다가 재차 보자고 한 뒤에 마지못해 내보였습니다. 그것은 한 통의 편지를 절반으로 나눈 것인데, 아래 조각은 당초부터 내보이지 않았고 다만 윗 조각만 내보였습니다. 이는 바로 역적 구종(九宗)이 의금부에서 최초로 공초한 것이었는데 서리가 쓴 것도 아니었고 등본(謄本)도 아니었으며 자항(字行) 사이에 지우고 고친 것이 많이 있었으니, 보기에 분명히 사적인 초고였는데, 어느 곳에서 왔는지 어느 사람이 전했는지 몰랐습니다. 다 본 뒤에 돌려주고 말하기를 「홍문관의 문계(問啓)와는 크게 상반(相反)된다.」고 하였더니, 제만은 현저하게 애석히 여기고 아끼는 뜻이 있었으며 누차 불쌍하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돌아왔습니다. 지난번 사헌부가 이제만(李濟萬)을 논죄하면서 목격한 명확한 증거라 하여 함문(緘問)하라는 명령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실상이 이와 같고 달리 아뢸 것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공초한 바가 이와 같으니, 상께서 재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함사의 답장은 내어주고 해부에서 조율하여 결말이 나거든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김이익(金履翼)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부사직 윤시동(尹蓍東)이 상소하기를,
"역적이 잇달아 일어나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의 변고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두 조항의 못된 상소와 두 글자의 흉악한 공초는 실로 천고에 없었던 극악한 역적으로서,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여 사방에서 듣는 자들을 기필코 현혹시키려고 한 자는 성한이고, 불충(不忠)한 마음을 남몰래 간직하고 부도한 말을 멋대로 꺼낸 자는 구종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여러 신하들의 청을 윤허하소서. 더구나 역적 구종이 대간으로 통청된 것은 신이 이조에 있을 때였습니다. 신이 현재 뒤늦게 자책하고 분개하면서 죽고자 하여도 죽을 곳이 없는데, 과연 견책을 청하는 대간의 상소가 나왔습니다. 신은 참으로 감수하여 죄로 여기니 어찌 감히 여러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신은 본래 관리 선발에 서툴고 물정에 어두웠습니다. 이 역적이 연속해 전적·감찰과 여러 조(曹)의 낭서를 역임하였고 또 그의 할아비와 증조가 모두 대간이었다는 것만 들었으므로 예전에 벼슬길이 막혀 있었던 것을 전혀 모르고 다만 근래의 조천(調遷)에만 의거하여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고 해서 고과 문서를 살펴보고 의망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간담이 부서지고 모골이 오싹합니다. 신이 이 역적과는 얼굴도 서로 보지 못했고 소식도 서로 모르던 사이로 다만 한 조정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감히 이로써 핑계하고 스스로 변명하여 거듭 외람된 죄를 범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구종(九宗)과 성한(星漢)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윤4월 29일 정유
병조 참판 이진복(李鎭復)과 전 좌랑 유회(柳誨)에게 다시 물어 아뢰라고 명하니, 이백형(李百亨)이 아뢰기를,
"진복은 말하기를 ‘신이 어제의 함사(緘辭)에서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만, 금월 11일에 신의 참의 이제만(李濟萬)과 수직을 교대하면서 제만은 들어오고 신은 미처 나가지 못했을 때에 제만이 정원(政院)에 사람을 보내어 역적 윤구종(尹九宗)의 공초 등본(謄本)을 얻어 보고 말하기를 「공초의 말은 미친 자가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감히 발명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곁에서 보고 말하기를 「과연 미치지 않았다면 반드시 흉악한 자이다.」 하였습니다. 그때에 입직(入直)한 좌랑 유회(柳誨)도 또한 그 자리에 있으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회가 이제만에게 억지로 청하여 역적의 공초 등본을 얻어 보았다는 일과 제만이 불쌍하다고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있을 적에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으니, 필시 신이 나온 뒤의 일인 듯합니다. 또 공초를 등사한 한 통을 반으로 나누었다고 한 것은 한 조각은 공초 등본(謄本)이었고 한 조각은 정원(政院)의 답장 편지였습니다. 그날의 상황은 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이밖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유회(柳誨)는 말하기를 ‘그날 조회하기 전에 본조(本曹)의 참판과 참의가 서로 수직을 교대하였는데 이제만(李濟萬)이 입직(入直) 당상관으로 수직하는 장소에 들어왔을 때에 신은 본조의 초기(草記)를 바치는 일로 정원(政院)에서 내려오는 길에 곧바로 당상관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만이 편지를 손에 들고 상세하게 보고 있었는데, 이는 과연 절반으로 나누어진 편지 두 조각으로 그 윗 조각은 바로 역적 구종(九宗)이 의금부에서 최초로 공초한 것이었는데, 가늘게 썼고 사이사이 지우고 고쳤으며 서리가 쓴 것도 아니었고 또 등본(謄本)도 아니었습니다. 아랫 조각은 본래 당초부터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무슨 문자인지 몰랐지만 역적 구종에 대하여 현저하게 애석히 여기고 아뢰는 뜻이 있었습니다. 인하여 불쌍하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말이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역적 구종(九宗)을 미워하고 욕하는 등의 말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본조의 참판과 참의는 서로 마주한 지가 이미 오래였으니, 그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신은 잠깐 상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 바는 실로 역적 구종의 공초와 애석히 여겨 탄식하는 기색 뿐이었으며, 들은 바는 불쌍하다는 등의 말 뿐이었습니다. 이밖에는 다시 아뢸 바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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