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무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수문장(守門將)을 나문하여 엄히 감죄(勘罪)하고, 좌직(坐直)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일전에 영남 유생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제만(李濟萬)이 공초하기를 ‘본월 11일에 내병조(內兵曹)에 입직했더니, 역적 윤구종(尹九宗)의 공초를 지난밤에 입계하였는데 승지 신기(申耆)가 함께 분개하는 뜻으로 손수 초록(抄錄)하여 나란히 써서 송치(送置)하기를 「거짓으로 미친 체한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열어보고 말하기를 「공사(供辭)가 조리가 있는데 미친 병이 있는 자가 이렇겠는가. 거짓으로 미친 체한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본조의 참판 이진복(李鎭復)에게 전해 보였는데 낭관 유회(柳誨)가 마침 옆에 있다가 보기를 청하기에 보여주었습니다. 유회 역시 말하기를 「과연 거짓으로 미친 체한 것이다. 하마(下馬)하지 않은 일을 나 역시 들어서 알고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역적 구종의 평상시의 행실이 음험한 것과 마음씨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간의 수작(酬酌)은 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회가 말한 간지(簡紙)가 두 단(段)이란 일에 이르러서는 공초의 등서(謄書)는 원래 1통의 문서였으니 어찌 두 단으로 나누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이른바 두 단이었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공초와 함께 온 소찰(小札)이 옆에 있어서 유회가 이를 보고서 두 단으로 안 것입니다. 이른바 지워버렸다는 것은 날짜가 오래되어서 몇 군데 몇 글자인지 기억하지는 못하겠으나 더러 있었습니다. 이른바 망상(罔狀)이라고 한 것은 구종의 언어와 생김새가 본래 망상하고 요악(妖惡)하기 때문에 과연 망상이라는 말을 하였으나 그 극역(劇逆)의 죄안에 대해서 말했다면 어찌 범연하게 망상이라고 했겠습니까. 이른바 미워하고 욕하는 말은 듣지 못했고 단지 망상이라는 말만 들었다는 것은 그가 아무 까닭없이 남을 무함하려 하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욕하는 말을 숨기고 망상이란 두 글자만 뽑아내 탄식했다고 지목한 것이니 어찌 매우 헤아리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만약 유회와 대질시켜 준다면 즉석에서 변론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공초를 받은 것은 수직을 교대하기 하루 전에 있었고, 등본(謄本)은 또 승지가 이미 다시 내린 본(本)을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니 수인(囚人)이 쓴 것이라고 한 말은 자연 죄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는 한 조항은 설사 참으로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리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당계(堂啓)한 후에 이런 말을 했겠는가. 더구나 두 사람의 말을 참작해서 들어보건대 역시 믿을 수가 없고 증거로 내세운 것 역시 거짓말이라 하겠다. 구종이 거짓으로 미친 체했는지의 여부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대체로 여정(輿情)에 있어서 어느 누가 의심하고 분해하지 않았겠는가. 사실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고자 구하여 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만은 특별히 석방하라.
공안(供案)을 베껴 보낸 것은 반드시 함께 분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만약 등서해서 보내지 못하도록 했다면 반드시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또 스스로 쓴 것이 아니라지만 사람들이 어찌 그런 말에 의혹되겠는가. 이런 승지에게는 모름지기 죄를 징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살피는 방도가 되니, 해당 승지를 파직하라.
의심스러운 자취를 불려서 말한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본래 의심스럽지 않은 일이겠는가. 그가 이미 잘못 헤아린 것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그후 대함(臺啣)을 탐하여 청대(請對)하는 자리에 올라왔고, 친국(親鞫)할 때에 참여하여 마치 대추를 삼킨 듯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대신(臺臣)이 발계(發啓)하여 그를 신문하기에 이르자 그가 나와서 증거를 대었다. 조사하고 또 조사했으나 결국 무의미하게 되었으니 전후를 살펴보건대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전 지평 유회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5월 2일 기해
이우(李㙖)를 의릉 참봉(懿陵參奉)으로 삼았다. 이우는 영남 유생의 소두(疏頭)로 백신(白身)인데, 이조 참판 김희(金憙)가 파격적으로 의망하였기 때문에 식자들이 비난하였다.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기를,
"이달이 무슨 달입니까. 궐문을 열고 날마다 첨앙(瞻仰)하고 달마다 예(禮)를 행하시며 밖에 나가 주선하시느라 안색이 창백하시어 신이 시위(侍衛)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우러러 바라보고 구부려 울먹였습니다.
대개 유성한의 일이 있고 난 후로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부심하면서 뼈아픈 나날을 보내왔는데, 오늘에 이르자 가슴의 피가 더욱 끓어오릅니다. 그래서 평소 마음에 쌓였던 것을 전하께 눈물로 진달하니 전하께서는 망령됨을 용서하시고 충정을 살피소서.
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되려면 역시 의리(義理)를 밝혀야 한다고 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는 사도(師道)가 아래에 있어 모든 큰 의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반드시 의리에 밝고 통달한 군자(君子)를 의지하여 훈계(訓誡)를 드리워서 그걸로써 인기(人紀)를 유지하고 국세(國勢)를 안정시켰습니다. 다행히 우리 전하께서는 즙희(緝熙)의 공부에 군사(君師)의 책임을 겸하셨습니다.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법을 전수받아 그 중도를 지키시고 지미 지밀(至微至密)의 뜻을 강구하여 큰 근본을 환히 꿰뚫었습니다. 동작이 저절로 법도에 맞고 창졸간에도 법도를 넘지 않아 성대함이 마치 강물을 터놓은 것처럼 막을 수가 없으셨는데, 더군다나 더할 수 없이 중대하고 더할 수 없이 엄경(嚴敬)한 의리를 어찌 일찍이 반 걸음 걷는 잠깐 동안이라도 잊으셨겠으며, 오매(寤寐)간이라도 소홀히 하셨겠습니까. 애통함을 참고 30년을 하루처럼 지내오셨습니다. 아주 적은 것도 저울질하고 털끝만한 단서도 쪼개어서 천지(天地)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셨으니, 문왕(文王)·무왕(武王) 이상은 비록 감히 비교하여 같이 의논하지 못하더라도 주공(周公)·공자(孔子) 이하로는 전하와 비교하여 논할 만한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유성한과 같이 흉악하고 유성한과 같이 반역스러운 자가 감히 어려움 없이 불쑥 나와 다시 구습(舊習)을 행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훌륭하게도 영남 유생의 상소에 말하기를 ‘전하의 마음은 「모년에 역적으로서 죽은 당사자라 하더라도 자기의 죽음이 모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를 것인데 하물며 조정에 있는 신하가 어떻게 알 것인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그들이 전하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말은 참으로 바꿀 수 없는 논의라고 여겨집니다.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인심이 날로 빠져들어 오직 작록(爵祿)만을 추구하고 이해(利害)만 따지는 풍조가 도도하게 성행하여 미치고 어리석은 듯하여 처음부터 의리란 두 글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십수 년이 지난 후 신의 연배(年輩) 역시 모두 죽게 되면 천 년 후에 누가 다시 전하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신 정의(精義)와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
신은 만생(晩生)이니 어찌 당시의 일을 자세히 알겠습니까만 한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부형(父兄)과 장로(長老)에게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 경모궁(景慕宮)께서는 하늘이 주신 자질로 일신(日新)의 학문에 힘쓰시어 효경(孝敬)의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부터 나타나시었고 덕용(德容)을 장엄하게 하시기에 게을리하지 않아서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빼고 기다리는 정성이 간절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여러 흉적들이 기미(機微)를 빚어낸 것이 무진년·기사년 사이에 시작되어 무인년·기묘년 후에 이루어졌으니, 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대리(代理)하는 처음에 말로 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 저 김상로(金尙魯)가 그들의 자취를 감출 터전을 마련하려고 한편으로는 거짓말로 속이기에 급급하고 한편으로는 멋대로 모함하여 얽어서 흉한 꾀와 역절(逆節)이 날로 더 심해졌습니다. 무인년·기묘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감히 예(例)에 따른 서비(書批)를 기화(奇貨)로 삼아 격성(激成)하는 계제(階梯)를 삼았으며, 이밖에도 모든 정령(政令)을 다 옆에서 동정을 살펴서 몰래 기관(機關)을 드러내지 않음이 없다가 복강(復講)하라는 청을 마침내 하나의 큰 관건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문녀(文女)가 안에서 도모하고, 홍계희(洪啓禧)가 밖에서 선동하여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 등이 흉서(凶書)·흉계(凶計)를 만들어 내고 이현중(李顯重)이 연석에서 아뢰어 한 꿰미에 꿰어놓은 것처럼 했으니, 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김상로의 흉악함은 영종(英宗)의 하교에 해와 별처럼 밝게 나타나 있으며, 계희가 강충(江充)068) 과 같음은 옛날 주연(胄筵)의 하교에서 그 속 마음을 환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두 역적은 천지가 용납하지 못하고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이며 손으로 찢고 입으로 씹어도 오히려 분을 풀기에 부족한 상황임은 초목이나 곤충도 다 아는 것으로, 사실 조정의 신하들이 누누이 아뢸 필요조차 없습니다. 홍인한(洪麟漢)·구선복(具善復) 등 여러 적이 비록 하늘의 주벌에서 피하지 못했지만 그 역명(逆名)은 그들에게 있고 이들에게 있지 않으니 전하께서는 영유(嶺儒)의 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서. 대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의리 가운데서도 의리이지만,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역시 하나의 우주(宇宙)를 지탱하는 의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편한 것이 의리가 되고 정(情)에 따르는 것이 의리가 됩니다.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히 인자하시고 인륜에 극진하신 덕으로 혹 운향(雲鄕)에서 오르내리는 가운데 수적(讎賊)과 추류(醜類)에게 아직까지 율을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을 굽어보신다면 어찌 슬퍼하며 크게 화를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징토(懲討)는 전하께서 주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대왕께서 주벌하는 것이며 천지 귀신이 죽인 것이니, 이 어찌 마음에 편안하고 정을 따르는 하나의 큰 의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간범(干犯)한 무리를 신은 하나하나 들지 못하나, 아까 말한 치원·재겸·현중 등 여러 적은 더욱 환히 드러나 길가는 사람도 들어서 아는 자들입니다. 성한(星漢)의 전신(傳神)이 이에 있고 호법(護法)이 이에 있는데도 응당 행해야 할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성한 같은 자 열 명을 죽이더라도 어떻게 대의(大義)를 밝혀 난적(亂賊)을 두렵게 해서 영원히 천추 만세(千秋萬歲)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정축년 인산(因山)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가(鶴駕)가 화현(華峴)까지 가서 전송하고 돌아오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어 옷소매를 다 적시자, 신은 길가에 있다가 저도 모르게 울먹였으며, 도성의 사녀(士女)들도 모두 손을 모으고 말하기를 ‘예효(睿孝)가 출천(出天)하시니, 우리 동방의 끝없는 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축년은 무인년에서 얼마나 되는 세월이기에 문녀의 헤아리기 어려운 모의와 김상로와 홍계희의 극악한 참소의 말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두 성모(聖母)께서 조호(調護)하신 덕이 하늘처럼 가이 없었는데도 여러 역적의 역상(逆狀)은 강충(江充)보다 1백 배나 더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기억하건대, 무인년 겨울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이 한두 경재(卿宰)와 함께 사실(私室)에서 손을 마주잡고 통곡하면서 얽어넣고 선동한 여러 역적에 대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며 분해 했는데, 신은 그때에는 어려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한 번씩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순간에 닥칠 듯했던 위기를 상상하고는 한밤중에도 눈물을 삼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라의 정사에서 선한 자를 드러내고 악한 자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비록 예사로운 선악(善惡)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혹 누락 시켜서는 안 되는데 더군다나 충역(忠逆)에 관계된 것이겠습니까. 충성을 바친 두세 명의 신하는 이미 선조(先朝)의 포상을 받았고 또 전하의 정표(旌表)와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저 법망(法網)에서 누락된 무리는 아직껏 추후 시행하는 법을 피하고 있으니, 의리가 어찌 어두워지지 않겠으며 국론(國論)이 어찌 격렬해지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리의 천명(闡明)과 난역(亂逆)의 근원에 진념하시어 먼저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이현중(李顯重) 등 여러 역적에게 빨리 응당 행하여야 할 법을 시행하고, 인하여 성한(星漢)을 국문하여 소굴을 환히 깨부수고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밝히소서. 그리하여 일반 백성들까지도 이런 의리가 있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여,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마음을 천명하고, 또 멀거나 가까운 곳으로 하여금 지난번 사한(師翰)의 역모는 바로 그 스스로 관여한 것이지 본래의 큰 의리와는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배궁(拜宮)하는 반열에 따라 왔다가 이런 상소문을 올리니 지금 내 심정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다. 어찌 차마 문자로 본심을 펴 보이는가. 영유(嶺儒)를 소견했을 때의 연석의 대화는 이미 정원으로 하여금 비밀에 붙이지 말도록 하였으니, 경은 그것을 가져다 보도록 하라. 대저 김상로와 홍계희 이외에 홍인한과 구선복을 죽이면서 본죄(本罪)로 포고하지 않은 것은 은미한 깊은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소에서 이밖에 운운한 것 역시 근일 경연의 대화에 자세히 실려 있다. 모든 주토(誅討)해야 하는, 더없이 중대하고 엄한 데 속한 일이야 어찌 여러 아래 사람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이 역시 깊이 생각하여 묵묵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서영보(徐榮輔)를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는데, 곧 체직하고 이형원(李亨元)으로 대신하였다.
5월 3일 경자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과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두 국구(國舅) 집의 제수(祭需) 가미(價米)를 경청(京廳)에서 내주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두 국구 집의 제수 미가를 기읍(畿邑)에서 수송했었는데, 기백(畿伯)의 아룀을 인해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4일 신축
이조 참판 김희(金憙)를 체직하고 이재학(李在學)으로 대신하였다.
5월 5일 임인
승지 윤필병(尹弼秉)을 소견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 울먹이다가 이르기를,
"또 이달을 당하여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제기해서는 안 될 일을 가지고 부득이 대략 펴 보인 것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피가 마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박서원(朴瑞源)의 상소 가운데 ‘차례로 발계(發啓)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껏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후 연달아서 재일(齋日)을 만났는데 많은 대간이 이제 바야흐로 대각에 나오니, 그 뜻을 대강 알겠다. 계묘년 겨울 윤숙(尹塾)의 상소 후에 내가 입시한 삼사(三司)에게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어찌 한 마디 하지 않겠는가. 이현중의 죄악을 지금 비로소 논열하는 것은 역시 늦은 것이나 스스로 곡절이 있어 말로 언급하기가 어렵다.
박치원·윤재겸 등의 일에 이르러서 내가 일등(一等)이라는 글자를 가한 것은, 대개 그때 서로 번갈아 선동한 것이 비단 치원과 재겸에게서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리들을 제거해 다스리는 것을 어찌 여러 아랫사람들의 청을 기다리겠는가. 스스로 정중(鄭重)할 바가 있는 것이다. 치원 등이 앞에서 창도하고 뒤에서 응한 지극히 흉악한 형상을 지난날 서연(書筵)에서 남김없이 밝혔는데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간관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에 개의치 않는다고 하교하고 특별히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으며, 인하여 궁속(宮屬)을 다스리고 빈연(賓筵)에서 대강 이 일을 언급하였으니, 홍계희 등 역적 무리도 역시 다 들었을 것이다.
또 수서(手書)로 본뜻을 분명히 보여 장차 만세의 법정(法程)을 삼게 하였으며, 또 흉도(凶徒)가 번갈아 선동한 죄를 놓아두어 후일에 와서 간(諫)하는 길을 열어 놓았으니 아, 성대하였다. 마땅히 계술해야 할 것은 계술해야 하고,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은 변통해야 하는데, 그때의 예교(睿敎)는 천고에 탁월하였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성덕(聖德)의 일인데 우러러 본받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 무리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어찌 한결같이 용인(容忍)하겠는가만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욱 추론(追論)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계(臺啓)가 비록 일어났지만 비답을 내리기가 어려우니, 입시한 승지는 이런 뜻을 여러 대신(臺臣)에게 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司直) 서유린(徐有隣)이 상소하기를,
"신이 전하를 섬겨 온 지가 춘방(春坊)에서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전하의 모습을 가까이서 뵈면서도 부서(簿書)의 일에 바빠 좁은 소견으로 처음에는 감히 천지(天地)와 같은 큰 덕망과 하해(河海)와 같은 깊은 아량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매양 기무(機務)를 수접하는 여가와 경사(經史)를 토론하는 여가에 우러러 보건대, 백성에 대한 걱정은 조금 풀렸으나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은 다하지 않아서, 육아장(蓼莪章)069) 을 읽다가 그만둔 뜻과 금옥(錦玉)이 편치 못한 정이 일찍이 동정(動靜)하는 사이와 사령(辭令)의 밖에 넘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전하의 이런 마음은 실로 혼자 계실 때에도 그렇게 하신 바이며 신명(神明)이 굽어보시는 바입니다. 지금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자들이 전하의 마음을 모른다면 전하의 신하가 아니며 하루라도 전하의 마음을 잊는다면 전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하의 신하 역시 따라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지엄(至嚴)·지경(至敬)·지중(至重)·지대(至大)하여 천지에 통하고 고금에 걸쳐서 없어지지 않고 실추되지 않는 의리에 대해서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흉적이 틈을 엿보아 일어나 윤강(倫綱)이 무너지고 끊어져 대동(大東) 예의의 윤리가 모두 장차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빠지게 되어 대소 신하가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을 날마다 전하께 들려드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늘은 공평하고 그 이치가 매우 밝아서 충신은 결국 펴지는 날이 있고 역적은 마침내 요행으로도 도피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좌계(左契)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아 아무리 먼 곳이라 하더라도 징험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에 충량(忠良)은 힘쓸 줄을 알고 난역(亂逆)은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니, 하늘이 사람을 인애(仁愛)하는 것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모년에 충성을 바친 신하는 모두 정표(旌表)하고 증직(贈職)하며 영화가 자손에게까지 미친 것을 보면 틀리지 않은 이치를 이에서 더욱 징험할 수가 있는데, 유독 저 요행히 도피한 무리들이 자기 집 방에 누워서 죽기를 무고(無故)한 사람과 같이 하니, 이 때문에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마음을 썩이고 뼈에 사무쳐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며 필연(必然)의 이치에 의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역적 유성한이 한번 나오자 국론이 물끓듯 하였는데 본원(本源)을 거슬러 올라가자 옛 역적이 더욱 드러났으니, 어찌 황천(皇天)·후토(后土)가 국법이 오랫동안 펴지지 못한 데 크게 분노하여 이 전신(傳神)·호법(護法)한 역적으로 하여금 그 흉한 지류(支流)와 남은 무리들을 드러내게 하여서 끝내 도피할 수 없다는 이치를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군신 상하가 이런 의리를 강명(講明)한 것이 모두 몇 차례 됩니다. 전후의 연석(筵席)에서 천신(賤臣)이 울먹이며 진달하였고 전하께서는 울먹이며 답하기를 10여 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유년 원(園)을 옮길 때 어제(御製) 지문(誌文)을 새겨넣기에 미쳐 신이 일을 감독하는 신하로서 이 역사에 참여하였던 까닭에 또 다시 한번 분명하게 진달하였는데도 남은 회포가 쌓인 지 4년이 되었기에 이제 이 기회를 인하여 감히 전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께서는 성인의 영명(英明)한 자질로서 영고(英考)의 거룩하신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에 부단히 힘쓰고 심성을 닦는 공부가 날로 진보하였으며,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는 예(禮)를 이부자리와 수라 사이에 게을리하지 않으셨고 빛나는 덕성이 저절로 외모에 나타났습니다. 연석(筵席)에 임해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여 슬기롭게 해석함에 여러 유신(儒臣)들이 문득 굴복하였고, 아랫사람을 대함에 엄하면서도 온화하여 근시들도 깊은 속마음을 엿보지 못하였으며, 전궁(殿宮) 안은 지극히 화락하고 강역(疆域) 안은 화기(和氣)가 충만하였습니다. 대리(代理)하라는 명을 받들게 되어서는 갖은 어려움이 이를 것을 생각하시어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모두 성헌(成憲)을 따랐으니, 모든 신서(臣庶)치고 그 누가 목을 빼고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는 효경(梟獍)같은 마음으로 감히 어두운 곳에서 귀역(鬼蜮)같은 꾀를 쌓아오다가 이때가 틈탈 만하다고 하고 이 기회에 도모할 만하다고 하면서 먼저 대리(代理)하는 일로부터 벌판의 불길처럼 맹위를 떨칠 계제로 삼고 몰래 틈 있는 곳을 엿보아 보호하는 사람을 원수로 보았습니다. 이로부터 옆에서 엿보는 것이 더욱 심해지고 수단이 점차 교묘해져 몰래 드러나지 않는 후원(後援) 세력과 결탁하고 좌우에 흉당(凶黨)을 깔아 놓아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말하여 유언비어가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거짓을 가지고 진실로 만들어 위험한 칼날이 더욱 급해졌습니다.
대개 무진년·기사년 사이부터 무인년·기묘년 즈음에 이르기까지 화를 빚어내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복강(復講)하는 청을 다시 더한층 관건으로 삼아서 한두 대신과 중신의 충정어린 마음으로 하여금 끝내 그 보익(輔翼)하는 공(功)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저 김상로가 문녀(文女)를 끼고서 국본(國本)을 흔드는 데에 쓰지 않은 계책이 없었고 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함께 꾀한 자는 홍계희였으니, 김상로가 바로 홍계희이며 홍계희가 바로 김상로입니다. 홍계희는 또 천만 가지 죄악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극악한 역적 나경언(羅景彦)을 꾸며서 곧바로 급변(急變)을 도출하였으며 심지어 마중나가자는 말까지 앞장서 일으켜 기어이 드러낼 계책을 삼았으니, 천고의 흉악을 다 모으고 만대의 역적을 통틀어도 어찌 홍계희 같은 역적이 있겠습니까.
병신년 가을에 역적 나경언의 집을 못으로 만들 때에 신의 동생 서유방(徐有防)이 승지로서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논의를 가지고 임종시에 우러러 아뢰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심골(心骨)이 모두 떨립니다. 아, 김양택(金陽澤)·홍인한(洪麟漢)은 삼포(三浦)에서 돛을 달고 뱃놀이를 하였고 역적 구선복(具善復)은 그날 아주 흉패한 일을 하였으니, 어찌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의 흉한 마음에는 바야흐로 스스로 변명할 수 있는 때라고 여겼기 때문에 목석(木石)도 차마 못할 일을 그들은 차마 하였고, 개·돼지도 차마 못할 일을 그들은 차마 하면서 천망(天網)도 없앨 수 있다고 말하고 인기(人紀)도 끊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필경에 홍인한은 역적으로 죽고 구선복은 시가지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비록 본죄(本罪)를 바루지는 못하였으나 다같이 천주(天誅)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고금에 없는 역적 김하재(金夏材)가 역시 김양택의 집안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천지가 뒤따라 죽이고 귀신이 뒤따라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연석에서의 대화를 보건대, 전하께서 오열하며 하교한 것이 하나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선세자(先世子)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말할 수 없다.’는 한 단락은 신이 이미 앞에서 반복하고 이어서 반드시 토벌하는 것이 천리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선세자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된다.’는 하교는 신이 비록 우매하더라도 어찌 우러러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경중으로 논한다면 이는 오히려 전하의 사정(私情)에 속하는 것으로, 천만세의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큰 공공(公共)된 의리에 비추어 볼때 어떻겠습니까.
아, 정휘량(鄭翬良)과 신만(申晩)의 무리에 대한 정절(情節)은 계묘년 겨울 중신(重臣) 윤숙(尹塾)이 상소하여 성토한 후에 삼사(三司)의 논의가 또 빈연(賓筵)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울먹이면서 ‘차마 들을 수 없다.’라고 하교하고 신 역시 그때에 울먹이면서 분명하게 진달했던 것입니다.
아, 저 두 역적이 역적 신광수(申光綏)와 긴밀히 관계를 맺고 정처(鄭妻)와 표리(表裏)가 된 것은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짐승과 같았습니다. 이에 홍계희의 사주를 받아서 번갈아 흉서(凶書)를 낸 자가 있었고 김상로의 형세에 의지하여 전석에서 차마 아뢰는 자가 있었으며, 어그러진 말을 포고하고 소매 속에 감추어서 화답한 데 이르러서는 극에 달했습니다. 대개 이 정휘량과 신만 이하의 여러 적은 혹은 근본이, 혹은 여줄가리가, 혹은 부리가, 혹은 가지가 되기도 하면서 모두 김상로·홍계희와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전후 연교(筵敎)가 해와 별처럼 밝아 길가는 사람의 귀와 눈에도 분명하였으니 이는 비단 전하의 역신(逆臣)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이는 우리 선대왕과 우리 선세자의 역신인 것입니다. 어찌 빨리 천토(天討)를 행하여 밝게 오르내리는 신령을 위로하지 않겠습니까.
영남(嶺南)의 1만여 명의 장보(章甫)·진신(搢紳)이 이에 충분(忠憤)을 품고 서로 이끌고 와 대궐 문을 두드리며 진달한 것은 바로 군신 상하가 강명(講明)해야 할 큰 의리인 것입니다. 영남이 이와 같으니, 한 나라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나라가 함께 분개하여 함께 성토하는 것을 전하께서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선세자의 지극한 덕과 순수한 행실은 비록 신의 집안에서 보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말해도 이렇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척연(戚聯)으로 조금 가까웠으므로 정성 성모(貞聖聖母)의 어찰(御札)이 때때로 내렸는데 문득 ‘세자의 출천지효는 고금에 견줄 자가 드물다.’라고 한 말씀이 지면에 가득 찼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매양 받들어 읽으면서 기쁨이 안색에 넘쳐 집안 식구들에게 보여주며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길에 나온 이후로 여러 차례 시강원 관원이 되었는데, 금직(禁直)에서 돌아오면 문득 신의 할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무 날 서연(書筵)에서는 어떤 경서를 진강(進講)하였는데 이처럼 철저하게 통달했고, 아무날 소대(召對)에는 어떤 책을 진강하였는데 이처럼 바로 깨달으시었으며, 기삼백(朞三百)의 역법(曆法)에 이르러서는 노숙한 선비들도 역시 풀기가 어려운데 환하게 통달하시어 시원스레 막힌 것이 없으시니, 국가의 만년 터전이 지금부터 시작되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옆에서 익히 들어 어제의 일처럼 또렷합니다.
정축년 국휼(國恤) 때 신의 집안 여러 족속이 집사(執事)로 많이 입참하였는데 안색의 슬퍼함과 반벽(攀擗)의 슬퍼함을 좌우 사람이 차마 우러러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대왕께서 눈물을 뿌리면서 하교하시기를 ‘슬피 통곡하는 소리를 내가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면 장차 어떻게 몸을 지탱하겠는가. 그대들이 이를 알아서 자주 죽을 마시도록 권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가족이 돌아와 신에게 전해 주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외고 있으며 일찍이 연석에서 이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또 원(園)을 옮길 때 집불(執紼)하면서 한 말은 실제 들은 바에 의해서 눈물을 섞어가면서 공손히 썼던 것입니다.
아, 선대왕의 자애와 어지심은 하늘과 같이 끝이 없고 선세자의 달효(達孝)와 깊은 학문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한데, 흉도(凶徒)와 역당(逆黨)이 몰래 이루고 드러나게 날뛰는 것을 말미암아 마침내 천지에 끝없는 아픔을 이르게 했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이 찢어질 듯합니다. 아,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명의록(明義錄)》은 우리 나라의 《춘추(春秋)》입니다. 을미년·병신년의 역적은 바로 무진년·기사년의 역적이니, 을미년·병신년의 역적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무진년·기사년의 역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성상의 미지(微旨)가 이 글에 부쳐져 있음을 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 역시 어찌 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르겠습니까. 대개 징토(懲討)하는 의리는 하나일 뿐입니다. 무진년·기사년에서 무인년·기묘년이 되었고 무인년·기묘년에서 을미년이 되고 병신년이 되었는데, 비록 1천 번 변하고 1백 번 괴이하게 얼굴 모습을 바꾸더라도 솜씨와 맥락은 한 판(板)에서 찍어낸 것과 같고 같은 수레바퀴 자국과 같아서 그 죄를 다스리는 것과 밝히는 것은 한가지 의리입니다. 이 한 ‘의(義)’ 자는 포괄하는 바가 매우 커서 성상의 미지(微旨)가 부쳐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급선무는 책을 짓는 한 가지 일보다 더 나은 것은 없고 책을 짓는 요령은 또 주토(誅討)하는 본의(本意)을 밝히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흉도들의 유래를 환하게 밝히고 주토하게 된 까닭을 분명하게 보여서 빨리 역적 김상로를 노적(孥籍)하라는 청을 윤허하시고, 아울러 정휘량과 신만 이하 여러 적에게 해당되는 율(律)을 쾌히 시행하소서. 인하여 한 부(部)의 책을 엮어내도록 명하여 대서 특필하기를 ‘을미년·병신년 이래 여러 역적 가운데서 아무 역적은 아무 죄로 죽였는데 그 근본은 모년의 역적이었고, 아무 역적은 무슨 죄로 추탈(追奪)하였는데 그 실제는 모년의 흉적이다.’라고 하여, 팔도에 전하고 만세에 전하여 의리의 근원과 목욕하고 토죄한 대의(大義)를 환히 알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아, 유성한(柳星漢)의 흉악한 정상은 조정 신하들의 소계(疏啓)에 밝게 나타나 있으므로 신은 다시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이 적은 바로 무진년·기사년·을미년·병신년에 설치던 시랑(豺狼)의 종자인데, 잗다랗고 비천한 성한 같은 자가 역적질을 오히려 이와 같이 했으니, 의리가 막히고 인심이 빠져 들어간 것이 어찌 이런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오래지 않아서 역적 윤구종(尹九宗)이 뒤따라 일어나 한 조각을 이루어 더욱 교활하고 더욱 참람하였는데, 이는 모두 흉도와 역당이 가면 갈수록 치열하게 서로 규합해 맺어 전혀 두려워할 줄을 모른 소치입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아직껏 삼사(三司)의 청을 한번 윤허하시어 사방의 미혹됨을 밝히기를 아끼십니까. 아, 크게 밝은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속이기 어려운 것도 하늘의 이치입니다. 성한과 구종 두 역적이 나옴에 하늘이 추토(追討)를 명한 것인데, 전하께서 만약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끝내 빨리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 역적들은 마침내 율(律)에서 도피하여 이치가 징험될 때가 없게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통분하고 울적함이 극에 이르러 전하를 위해 거듭 아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지난날 보고 들은 것을 진달하여 연석(筵席)에서 다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일일이 들어 말하고 인하여 책을 편찬하여 펴 보일 것을 청하였다. 대체로 차마 말을 할 수 없고 말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을 형용하고 분석하는 즈음에 자세히 하다가 자세히 하지 못하면 도리어 막히고 어둡게 되며, 간략하게 하고자 하다가 간략하게 하지 못하면 근엄함을 잃을까 염려된다. 설사 대성인(大聖人)의 대수필(大手筆)로서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죄를 주는 것을 천하 만세의 공의(公議)에 부치고자 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 일에는 감히 한 마디 말이나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는데, 더구나 나의 경우이며, 또 나를 섬기는 자의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한 부(部)의 《인경(麟經)》070) 을 보라. 그 수십 가지 대의(大義)는 은미하면서도 완곡하고 완곡하면서도 정요하여 좁은 소견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고 깊이 연구하고 힘써서 탐구한 연후에야 겨우 해와 별처럼 환하게 빛남을 엿볼 수가 있으니, 이것은 인경이 성인의 수필(手筆)인 까닭이다. 아, 《명의록》을 개국(開局)하여 편찬하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내가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이 의리는 성인에게서 취한 것이다.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변득양(邊得讓)이 상소하기를,
"신은 매우 사리에 어둡습니다. 당시에 차마 죽지 못하고서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을 입기를 보통 사람처럼 하면서 살아온 지 31년이 되었습니다. 신의 부자(父子)가 전에 동궁을 모시는 직함에 앉아 임금의 은총을 듬뿍 받았기에 살아서 은혜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갚겠노라고 맹세하였건만 임금이 승하하신 지금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큰 의리에 관계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견마(犬馬)의 정성으로 어찌 가슴속에 쌓인 비원(悲冤)을 한번 토로하고자 않겠습니까만,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얼굴을 들고 당일의 일을 말하는 것은 신하의 신분으로 감히 못할 바이고 사람의 이치로도 차마 못할 바입니다. 또 듣는 자들이 신의 말을 붕박(崩迫)한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까 염려되니, 누가 그것이 징토하려는 공변된 마음임을 헤아리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효심이 신명(神明)에 통하고 안목은 도깨비도 환히 비추시니, 등극하신 후에 먼저 김상로의 역절을 다스리고 다음에 홍계희의 집안을 도륙하였으며, 홍인한·구선복·김양택·홍낙순 등 여러 흉적은 혹 자신이 형을 받기도 하고 혹은 아들이 악역(惡逆)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하늘의 도를 믿을 수 있게 되고, 여분(輿憤)을 풀 수가 있어 군신 상하가 10년 동안 마음을 썩히고 뼈에 사무쳐온 원수를 차례로 주륙하게 되었으니, 아, 성대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신기(神機)를 묵묵히 행하시고 성무(聖武)를 밝게 펴시니 예사로운 마음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지금 노병(老病)으로 숨이 곧 끊어지려 하여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나 조금만 더 살아서 남아있는 그들의 무리가 모두 그 죄에 죽는 것을 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무인년·기묘년·을미년·병신년의 남은 무리가 지금 또 고개를 내밀어 거짓말하는 낡은 습관과 무함하는 묵은 악행을 제멋대로 장주(章奏)에 올릴 줄을 알았겠습니까. 나라 사람들의 분노가 배나 격렬하고 지난날의 애원(哀冤)이 새로워져 위로는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하인에 이르기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눈물을 뿌리면서 맹세코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했습니다.
신의 충정으로 이 역변(逆變)을 보건대, 침상에서 숨을 헐떡이며 비록 귀신의 핍박을 받고 있지만 목욕하고 엄히 성토하는 것을 어찌 남보다 뒤에 하겠습니까. 망령된 생각에는 윤강(倫綱)이 이미 무너지고 의리가 오랫동안 어두워서 유성한(柳星漢)이 나오기 전에 성한과 같은 자가 많이 있었으나 그 당시에 성토하지 못한 자가 이제 성한의 변을 인하여 여러 사람을 따라서 성한을 성토한다면 대의를 먼저 밝히지 않고 흉적을 일찌감치 분변하지 않은 죄를 신이 스스로 허물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해서 거듭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상소를 초한 지 오래되었으나 애통한 말을 다 들어주실까 두려웠습니다.
지난번에 옛날 동료 관원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대의를 밝히려 하였고, 이어서 영남의 진신(搢紳)·장보(章甫)가 1만 명 이상이나 서명하여 발을 싸매고 천리에 가까운 길을 와서 피눈물이 섞인 말로 대궐 문을 두드린 충성을 보여 신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자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저 추(鄒)·로(魯)의 인사(人士)들은 오랫동안 배양한 성화(聖化)에 젖어 선정(先正)의 유풍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매우 존경할 만합니다. 고(故) 설서(說書) 권정침(權正忱)은 신의 옛날 요관(僚官)입니다. 흉화(凶禍)에 걸린 후 신들과 함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돌아갔다가 스스로 죽지 못한 것을 죄로 여겨 문을 닫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는데 1년을 넘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그의 의리에 감복하고 그 인품을 높게 보았는데, 이제 영남 유생의 상소를 보니 더욱 죽은 동료 생각이 간절합니다. 신이 만약 몰래 팔짱을 끼고 묵묵히 있으면서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어찌 한갓 은혜를 저버리는 것뿐이겠습니까.
우리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함육(涵育)해 주신 은택과 선세자께서 14년 동안 대리(代理)하신 교화로 볼 때,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그 누가 요(堯)임금이 다스리고 순(舜)임금이 섭정할 때의 중화(重華)의 지극한 상(象)이었음을 모르겠습니까. 신 같은 자를 오랫동안 동궁을 보필하는 직함을 띠게 해서 사령(使令)의 자리에 두시어 인효(仁孝)의 다스림에 훈목(薰沐)하게 하고 온화한 덕에 젖게 하셨습니다. 들어가면 매양 예절을 다하여 제왕(帝王)의 치평(治平)의 도(道)를 물으시고 물러가면 자주 예찰(睿札)을 내리시어 고금 현사(賢邪)의 구분을 반복해 물으시어 꾸준하고 빛나는 공부가 날로 새로워지셨는데, 참소해 얽은 말로 하늘도 속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김상로와 홍계희가 모집하여 함께 죽기로 한 무리가 어찌 그리 많단 말입니까. 말을 만들어 무함하고 핍박하면서 안팎에서 번갈아 선동하고 투서(投書)하여 꾸짖고 욕하면서 머리와 얼굴을 서로 바꾸어 화(禍)의 계제로 삼고 흉악을 빚은 것이 천만 번 괴이하게 변해 아침 저녁의 무지개와 같았습니다. 연영문(延英門) 앞에서 거짓으로 목을 찌르고 형조의 뜰 가운데서 급히 글을 쓴 데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이간하는 계책을 몰래 강연에서 이루고 참독(憯毒)한 아룀을 함부로 후사(喉司)에서 꺼냈습니다. 전일의 이 무리들을 오늘날의 성한과 윤구종에게 비교해보면 화근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니 조무래기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역적 성한의 흉한 상소 가운데 ‘여악(女樂) 운운’한 것은 대개 윤재겸(尹在謙)의 흉서(凶書)를 본받은 것이니, 오늘날에 의리를 천명하는 요점은 본원(本源)을 거슬러 올라가 소굴을 타파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 선대왕께서는 하늘과 같이 성스럽고 자애로와서 간흉(奸凶)의 정상을 환히 아시고 전후의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사이에 사교(辭敎)가 측달(惻怛)하시어 신하들이 감격해 울었으며, 매양 천신(賤臣)이 등대(登對)할 때면 옥음(玉音)이 처량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우리 성상께서 진하하는 날을 당해서 특교(特敎)로 신에게 예모관(禮貌官)을 제수하여 과분한 자급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이는 신하로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픕니다.
아, 선대왕의 성덕(盛德)을 추양(追揚)하는 것은 의리를 밝히는 것이고 우러러 선세자의 영령(英靈)을 위로하는 것도 의리를 밝히는 것이며 30년 동안 쌓인 울분과 묵은 원한을 씻는 것도 의리를 밝히는 것인데, 의리를 밝히는 방도는 그 죄를 죄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영남 유생과 중신(重臣) 이병모(李秉模)의 상소 가운데서 모두 의리의 설로써 전하를 위하여 거듭 설파한 것입니다. 신은 늦게서야 비로소 영남 유생의 입시 때 연석의 하교를 들었고, 또 중신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를 보았는데, 우리 성상의 아픔과 근심을 참고 견딜 줄 아는 생각과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학문에 대해서는 비록 늙고 어리석은 천신이지만 역시 우러러 헤아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더없이 중하고 엄한 데 관계되기 때문에 한 글자 한 마디 말이라도 혹 잘 살피지 않고 망발하는 것은 비록 그 본정이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상의 감정을 돋우는 죄에 빠지는 데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이 점에 대해 황송하고 두려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삼가 선조(先朝)에서 들은 것이 있기에 전하를 위하여 흐느끼면서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우리 선대왕께서 이현중(李顯重)을 처분하신 전교를 보건대 ‘나라를 세우고 가(家)를 잇는 데는 소인(小人)을 쓰지 말라.’ 하셨습니다. 대저 벼슬하기 전에는 벼슬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고, 얻은 후에는 잃을까 우려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시세를 따르고 이익에 붙좇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틈을 엿보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국가를 흉해(凶害)하는 자를 소인이라 합니다. 저 여러 역적이 번갈아가며 흉서를 올리고 현중이 계책을 꾸며 아뢴 것은 바로 여러 소인들이 손발을 맞추어 흉측한 일을 이루려는 일관된 심사였는데, 우리 선왕께서 내리신 ‘소인(小人)’이란 두 글자의 하교는 당시의 허다한 여러 흉적에 대한 단안(斷案)과 진장(眞贓)071) 으로 비단 현중 한 사람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러 역적이 이미 죽었다 하여 아울러 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저 본인이 죽어서 죄를 논하지 않는 경우는 예사로운 범죄자인 경우입니다. 어찌 김상로와 홍계희 같은 창귀(倀鬼)·역졸(役卒)이 살아서는 현륙(顯戮)을 피하고 죽어서는 추율(追律)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상로와 계희가 성국(聖國)을 심복으로 삼고 현중 등 여러 역적을 수족으로 삼아서 깊숙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긴밀하게 엮어 장독(章牘) 사이에 배포한 것은 선대왕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이며 선세자께서 이미 하교하신 바입니다. 만일 상로와 계희에게 이 무리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상로와 계희가 되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쾌히 결단하여 빨리 여러 역적의 죄범(罪犯)에 대해 분명하게 천토(天討)를 행하시고 드러내놓고 왕법(王法)을 가하여 중외의 대소 신민으로 하여금 선왕께서 이미 감단(勘斷)한 죄안을 성상께서 따라서 행한 뜻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하찮은 신이 피눈물을 흘리며 기원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어찌 입을 열어서 내 마음을 거듭 상하게 하는가. 경이 외어 전한 것은 선조(先朝)에서 《주역(周易)》을 인용하여 비유하신 하교요, 내가 따라 지킨 것은 주연(胄筵)에서 유수(柳脩)의 일을 인하여 나 소자(小子)를 돌아보시며 하신 훈계의 말씀이다. 띠에 쓰고 가슴에 새겨 감히 떨어뜨릴 수가 없는데 경의 상소를 보니 차마 그 대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또 예대(詣臺)의 대신에게 하교한 데서 은미하게 제시한 것이 있으니, 이것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입시한 승지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5월 6일 계묘
사관(史官)을 나누어 보내 동교(東郊)·서교(西郊)·남교(南郊)의 농사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5월 7일 갑진
경상도 참봉 이우(李㙖) 등 1만 3백 68 인이 재소(再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외람되게 짧은 글을 올려 감히 높으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는 비록 천지에 세워도 되는 것이지만 그 말은 모두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억울하여 눈물이 눈에 가득 고이고,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땀이 등을 적셨습니다. 이에 우리 성상께서 선대왕을 추모하는 생각을 미루시고 초야(草野) 사람의 말에 감동하심을 입어 특별히 후원(喉院)에서 물리치려던 즈음에 받아들이기를 명하시고 인하여 매우 엄한 문폐(文陛)에서 사대(賜對)하셨으니,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버러지같이 미미한 저희가 어찌 감히 이렇게 될 줄을 꿈엔들 기약하였겠습니까. 황송하여 숨을 죽이고 서로 이끌며 들어가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니 처참한 모습에는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고 옥음(玉音)을 들어보니 목이 잠겨 말을 하지 못하셨으니 신들이 목석이 아닌데 어찌 피눈물을 흘리며 창자가 찢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비답을 내리셔서 의리가 바른 것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영남 선비들의 공(功)을 면려하셨으니, 신들은 비록 그날 죽었다 한들 어찌 다시 유감이 있었겠습니까. 마땅히 손으로 은혜로운 윤음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아서는 의리를 강마하는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의리를 품고 돌아가는 귀신이 되면 분수에 족하지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할 계책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의리와 일은 본디 두 가지 이치가 아니어서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일에 시행하고자 해서이며, 일을 결단하여 하는 자는 반드시 의리에 근본을 두는 것인데, 의리를 말로만 한다면 이는 공언(空言)인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의리가 위에 있었고 삼대 이후에는 의리가 아래에 있었는데 이는 고금의 유식한 선비들이 다같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신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삼대 이하에 있는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의리’란 두 글자를 영남 땅에만 있게 하는 데서 그치려고 하시니, 신들이 만약 묵묵히 한 마디도 없이 물러간다면 이는 ‘우리 임금은 할 수 없다.’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들에게 하교하신 바를 공손히 듣지 않은 것이 아니요, 전하의 마음을 신들이 우러러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신들이 끝내 석연치 못한 것이 있어서 부득이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의리를 거듭 나타내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그 광망(狂妄)함을 용서하시고 살펴주소서.
아, 천하의 의리가 비록 미세하지만 그 대경(大經)·대법(大法)으로 천지에 뻗쳐 있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신하된 자는 군부(君父)에게 충성하고자 하고, 군부에게 충성하고자 하면 그걸 미루어서 우리 임금의 아들을 사랑하여 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없을 때에는 학수고대하는 사랑함이 있고, 일이 발생하면 부심하는 충성이 있는 것이니, 이런 의리는 흉역(凶逆)의 종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병이(秉彝)의 천성을 다같이 타고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한 도(道)가 같은 소리로 1만 명이 서로 호응하여 천릿 길에 발을 싸맨 채 생사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온 것은 참으로 같이 부여받은 천성으로 반드시 30년 동안 맺혀 온 선세자의 무함을 분변하고자 한 것입니다. 흉적을 주토(誅討)하는 것은 변무(辨誣)한 후에 차례로 할 일입니다. 신들이 비록 먼 고장에서 생장하였으나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어찌 대궐 부근의 소식이 정확히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께서는 예학(睿學)이 날로 발전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 드러나서, 대리(代理)의 명(命)을 받들면서부터 매양 빈대(賓對)하는 자리를 당하여 용의(容儀)가 정숙하고 수작이 간략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존경하고 삼가 두려워한 것이 대조(大朝)와 차이가 없었으며 서무(庶務)를 수응하기에 이르러서는 큰 일은 대조에 품하고 나머지 일은 모두 친히 스스로 재결(裁決)하셨는데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조정이 다함께 알고 있던 바입니다.
참소하는 말이 성하게 퍼져 인심이 의혹되는 즈음에 미쳐서 온천에 거둥하신 일이 있으셨으나 혹 한 가지 일이라도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시고 혹 한 사람이라도 생업을 잃을까 염려하여 거듭 단속하시고 정성껏 보살펴주셨으니, 모든 백성들이 깃발을 우러러 보면서 모두 손을 모아 감축하였고 지금 30, 40년이 되도록 호서의 부로(父老)들이 지난 일을 언급하면서 이따금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으니, 이는 경외(京外)가 다함께 아는 바입니다.
영남 사람인 고(故) 설서(說書) 권정침(權正忱)의 그날 일기(日記)를 보건대 선대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기에 힘쓰고 다른 기미(機微)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화변(禍變)이 일어나는 즈음에 예학과 조존(操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신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저 푸른 하늘은 무슨 까닭으로 허다한 소인배들을 출생시켜 임금을 진동시킬 권력으로 내원(內援)을 맺어 참소하지 않은 말이 없었고 꾸며대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잗다랗고 하찮은 일을 태산(泰山)같이 불렸고 없는 일을 진짜로 만들었는데 그 기미가 매우 비밀스럽고 그 모의가 더욱 급박해져 필경에는 김상로와 홍계희의 계책이 이루어져 종사(宗社)가 거의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이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의리에 입각한 자들은 모두 주토(誅討)를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은 것으로써 애가 타고 뼈가 저리지만 신들은 예무(睿誣)를 분변하는 것이 급하고 주토는 그 다음이라고 여깁니다. 참으로 예무를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두고 엄히 다 변론하여 분명하게 후세에 보일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장차 무엇을 근거하여 참무(讒誣)를 씻고 진적(眞蹟)을 크게 써서 선대왕의 인자한 덕과 선세자의 지극한 효행을 아울러 우주 사이에 일제히 빛나게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이렇게 된다면 비록 오늘에 형정(刑政)에서 군흉(群凶)의 당여(黨與)들도 아울러 남김없이 죽인다 하더라도 역시 신하들의 지극히 원통한 마음에는 보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토는 그 무함을 성토하는 것이니, 무함했던 자가 주토되면 무함을 받은 처지에서는 변명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필연의 형세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주토하는 법이 변무의 다음이라 하여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설혹 크게 주토를 행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령이야 어두운 가운데서 기뻐하시겠지만 경모궁(景慕宮)의 혼령은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참으로 이렇게 된다면 내가 후일 돌아가 뵈올 면목이 없을 것이다. 어버이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니,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전하의 이 하교는 의리의 미묘한 곳까지 세밀하게 분석하신 것이지만 신들은 황공하게도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선왕께서 주토를 기뻐하시어 참으로 형체 없는 데서 보시고, 소리 없는 데서 들으신다는 뜻에는 신들도 삼가 감복하고 있습니다. 선세자의 밝으신 마음으로 헤아려보아도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기실 것은 이치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어버이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신다면 선세자께서도 또 어버이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실 것입니다. 선왕께서 기뻐하실 일을 선세자께서 슬퍼하고 불안해 한다는 것은 신들은 그럴 이치가 없다고 봅니다.
아, 선세자는 영묘(英廟)를 아버지로 삼고 전하를 아들로 삼으셨으니, 천하에 근심이 없기로는 반드시 문왕(文王)에게 별로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들로 하여금 변무(辨誣)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눈물을 흘리며 전하 앞에서 일제히 호소하게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먼저 예무(睿誣)를 밝히고 다음에 주토를 거행하여 의리에 흠결이 없게 한 연후에야 밝게 오르내리는 선세자의 영혼이 참으로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빨리 신들의 말을 윤허하소서. 어찌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릴 일이겠습니까. 아, 인간 세상의 세월은 빨리 흘러서 새 능침(陵寢)의 음용(音容)이 아득하기만 한데 신들이 이 달을 당하여 이런 억울함을 호소함은 천의(天意)와 인사(人事)가 실로 기약하지 않고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애통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선세자께서 무함을 입게 된 까닭을 다 말하여 팔도에 반포하시고, 이어서 또 전 수찬 이지영(李祉永)의 상소 가운데서 논한 여러 역적에게 혹 노적(孥籍)하는 율을 시행하거나 혹 추탈(追奪)하는 법을 시행하여 윤리와 기강을 세우고, 유성한(柳星漢)의 소굴을 따져 조사하고 윤구종(尹九宗)에게 빨리 추율(追律)을 행하소서. 그와 아울러 대청(臺請)을 윤허하되 하루라도 지체시키지 않는다면 신들은 비로소 의리가 크게 행하여져 돌아가 부모와 종족에게 자랑하고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하찮다고 하여 말까지 버리지 않으시면 종묘 사직에 다행한 일이며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오늘 상소에 어찌 차마 마음을 억제하며 답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1만여 명의 선비들의 논의는 바로 나라 사람들의 공론(公論)인데 공론이 같아서 천리(天理)가 크게 공변됨을 보겠으니, 내 자신의 사정 때문에 그대들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이른바 반포하라는 청을 내가 따를 수 없는 것은 비단 감히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말은 곧 나 한 사람의 말이므로 사(私)에 가까우니, 어찌 그대들의 1만 명의 말에 비교하겠는가. 내가 여기에 대해 감히 다시 한 마디라도 할 수 있겠는가.
전 수찬 이지영의 상소 가운데에서 여러 역적을 노적하고 혹은 추탈하라는 일을 지금까지 윤허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헤아려볼 때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정휘량과 신만의 일은 외정(外廷)에서 들은 바가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며, 이밖의 것 역시 사실이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나는 고(故) 궁관(宮官) 유수(柳脩)가 입대했을 때 하교한 것이요, 하나는 게시한 훈사(訓辭)에 수택(手澤)이 분명하니 내가 과연 선양하기에 급하여 지키며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니, 그 자세한 것은 기거주(起居注)에 있다.
끝에서 진달한 근일의 일은 혹 이미 기신(耆臣)의 상소 비답에 자세히 언급하였고, 혹은 선조(先朝)의 성헌(成憲)을 인하여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내가 결단코 지키려는 원래의 본심이 모두 선인(先人)의 뜻을 밝히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라. 아, 가슴의 피가 끓어 올라 흉폐(胸肺)를 꿰뚫는 듯하고 황천(皇天)·후토(后土)가 위·아래에서 비춰주고 실어주며 오르내리는 신명(神明)이 그대들에게 강림하여 질정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나 한 사람의 한때의 말로써 너희 1만여 장보들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지금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간절한 마음을 거듭 호소함으로 인하여 부득이 비답을 내리고 겸하여 말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말하지 못한 몇 가지 일을 언급하였다. 대저 근일 장주(章奏)의 말이 이 일에 이르렀는데도 한결같이 받아서 본 것은 바로 지난날 연석에서 하교한 뜻이다. 이번 영남 유생에게 비답을 내린 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거의 알게 되었을 것인데, 그런데도 떠들썩하게 한다면 이것이 참으로 여러 신하가 나를 섬기는 도리라 하겠는가. 기억하건대 옛날 선왕께서 ‘둥근 머리와 모난 발꿈치[圓顱方趾]’란 네 글자를 주독(奏牘)과 과문(科文)에 쓴 자를 문득 중전(重典)에 두셨으니, 이것이 어찌 선인(先人)을 추모하는 성념(聖念)이 조금이라도 극진히 헤아리지 못해서 그렇게 했겠는가. 이런 뜻을 먼저 정원은 잘 알라."
하였다.
5월 9일 병오
밀양부(密陽府)에 불탄 민가(民家) 1백 95호에 대해 특별히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5월 10일 정미
상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5월 11일 무신
정원에 명하여 전 옥당(玉堂) 김한동(金翰東) 및 영남 유생 이우를 불러 하교로써 소유(疏儒)들을 효유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전조(銓曹)에 명하여 이우를 체직시키고 김희택(金熙澤)·이경유(李敬儒) 등을 차차 등용하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체로 지금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나의 근일 모양을 알 것인데 질병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한다.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본 후에도 만약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다시 상소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이 어찌 도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는가. 설령 지금 말할 만한 기회를 당하여 참으로 한번 진달하려는 마음을 둔 자라고 해도, 서울에 있으면서 어디에 가서 머뭇거리며 관망하다가 영남 유생들의 가차하는 거조를 본 연후에 내가 고심(苦心)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통(至慟)해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예사로운 이야기로 보아 서로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더욱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근일 삼사의 소장(疏章) 및 이른바 방외(方外) 유생의 상소는 천만 미안하여 이 때문에 올리는 대로 돌려 준 것이며, 이번 한두 소장에 수응한 것은 바로 천만 부득이한 일이었다. 대저 유성한(柳星漢)의 무지하고 망령된 일은 반드시 연래에 지나치게 기휘(忌諱)를 가함을 인해서 후생(後生) 소년이 이 일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살려주는 도리를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참고 수응한 것이다. 영남 유생이 상소한 후에는 모두 반드시 내 뜻이 있는 바를 분명하게 알았을 것인데도 한결같이 이러하다면 도리어 외람되고 무엄한 것이 될 것이다. 벼슬하는 자에게는 이득신(李得臣)의 예가 있고 유사(儒士)에게는 또 선조(先朝)의 원로방지란 처분이 있었다. 인정과 천리로 말한다면 위에서 조처하는 것이 어찌 여러 아래 사람들만 못해서 그렇겠는가. 여러 신하들 역시 친족이 있고 친구가 있을 것이니 서로 알려서 설사 반드시 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중지시켜 애당초 와서 바치는 자가 없기를 기약하도록 하라. 비록 정원(政院)으로 말하더라도 이 일로 상소한 것을 어찌 열어 볼 수 있겠는가. 이는 사륜(絲綸)으로 말할 일이 아니며, 또 각사(各司)에 분부할 일도 아니니 제신들로 하여금 잘 알고 있도록 하라.
전 옥당(玉堂) 김한동(金翰東)이 어제 지레 나간 것은, 듣건대 영남 유생들이 아직도 내려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영남 유생들이 재소(再疏)한 후에 또 어찌 이에 더 보탤 말이 있겠는가. 원로 방지란 하교가 이미 비지(批旨)에 자세하나 이제 거듭 하교하는 것은 실로 선비를 대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전 옥당 김한동은 비록 파산(罷散) 중이나 관대(冠帶)하고 상사(常仕)시켜 소두(疏頭) 이우와 함께 정원에 불러들여 이로써 하교하여 이를 상세히 영남 유생에게 전하게 하라. 영남 유생들이 이를 들으면 반드시 당일 본향(本鄕)으로 돌아갈 것이니, 진청으로 하여금 돌아갈 양식을 주게 하라. 참봉 이우가 관직을 사양하였는데, 그 뜻이 가상하여 한번 그 뜻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후에 거두어 쓰는 것은 불가하지 않으니, 이런 뜻 역시 전조에 말해 즉시 초기(草記)하여 체직시키라.
마침 봉장(封章)이 올라와서 보니, 여러 유생 가운데서 김희택(金熙澤)·이경유(李敬儒)의 행동과 용모가 결코 시원찮은 인물이 아니니, 전조에 분부하여 차차 거두어 쓰라. 이들은 이우의 제직(除職)과는 다르니, 그들이 어찌 감히 관직을 사양하겠는가. 만약 벼슬을 사양한다면 크게 기강(紀綱)과 관계된다. 영남 유생은 영남 유생이고, 나라의 기강은 나라의 기강인만큼 마땅히 별도로 엄히 처치할 것이니, 역시 알도록 하라."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하교에 의하여 영남 유생이 내려 갈 때에 양식을 받아가게 했더니, 유생 이우 등이 말하기를 ‘칙교(飭敎)를 내리시어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나 여러 사람의 마음이 억울하여 감히 선뜻 물러나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돌아갈 계획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여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을 받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여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할 것이 없다. 그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연후에야 내 마음이 조금 펴질 것이니, 이런 뜻으로 엄칙하라.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을 만일 받지 않거든 먼저 머무는 데 필요한 양식을 넉넉히 주라. 이렇게 하면 반드시 내려갈 것이다. 내려간 후 양식을 준 상황을 다시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전 이조 참판 김희(金憙)를 파직시켰다. 이조에서 의릉 참봉(懿陵參奉) 이우가 신병(身病)이 더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개차(改差)하기를 계청하니, 전교하기를,
"공격(公格)이 지엄한데 일개 전관(銓官)의 의견으로 이처럼 전례에 없는 일을 하였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된다. 조연(朝筵)에서 비로소 물어 그가 백도 참봉(白徒參奉)임을 알아서 처분하고자 하였는데 초기가 마침 왔으니, 해당 전관을 파직하라. 사은 숙배하는 것은 사전(祀典)을 위한 일이요, 정장(呈狀)하니 염치를 아는 처사이다. 영남 사람들이 글읽는 풍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원하는 대로 개차하라."
하였다.
5월 12일 기유
전 수찬 김한동(金翰東)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 유생들이 언제 내려가게 되는가?"
하니, 한동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의 구전(口傳)하신 하교를 가지고 가서 여러 유생에게 전하였더니 서로 바라보면서 말이 없고 서성거리며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하기를 ‘하교가 비록 이러하나 재일(齋日) 전에는 내려갈 뜻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진청(賑廳)의 초기를 보니,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산림(山林)의 선비가 아닌데 내려주는 물건을 가지고 어찌 받을 것인지의 여부를 감히 논한단 말인가. 영남 유생이기 때문에 처분하지 않는다마는 국가의 체모로 보면 매우 미안한 일이다. 영남 유생의 상소를 내가 깊이 헤아려서 비록 하나하나 거기에 의해서 시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의리가 이를 인해서 천명되었으니, 말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일전 소유(疏儒)를 인견하면서 내 마음이 울적한데다가 또 밤이 깊어서 한 마디 언급하지 못한 말이 있다. 갑신년 선조(先朝)에 나에게 하교하신 것이 있는데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어제 연석에서 내국 제조(內局提調)에게 언급하였으니, 그대는 물어보라. 이우의 사직은 영남 사람들의 독서한 공(功)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니 본디 가상하나, 이후에 직을 제수하면 어찌 사양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존중(鄭存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고려(高麗)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참의(參議) 정보(鄭保)의 무덤에 치유(致侑)하였다.
헌납 박서원(朴瑞源)이 상소하기를,
"무인년·기묘년 이래 많은 극역(劇逆)의 흉패한 무리들은 살을 발라죽이고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으니 생각하면 마음이 떨립니다. 그중에도 역적 이현중(李顯重)의 죄는 또 얼마나 지극히 흉참하였습니까. 살아 있을 때에는 왕법이 가해지지 않았고 죽은 후에도 관작이 여전하니 사람들의 분노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臺臣)이 바야흐로 차례로 논계(論啓)하여 위 항(項)의 여러 적과 함께 해당되는 율을 적용할 것을 청하여 조금이나마 여러 해 동안 쌓인 울분을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중의 아들 이규영(李圭永)은 흉추(凶醜)한 종자로서 천성이 못되고 행실이 간특하여 세상의 지목을 받아온 지 오래입니다. 현재 징토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움추리고 엎드려 죄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에 감히 스스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처신하며 출몰(出沒)이 무상하고 종적(踪跡)이 종잡을 수 없어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제방(隄防)이 비록 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처럼 꺼리는 것 없는 흉악한 무리가 있단 말입니까. 역신(逆臣)의 패악한 자식을 하루라도 서울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역신 현중의 아들 규영에게 빨리 유사(攸司)로 하여금 우선 절도(絶島)에 정배하는 법을 시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호서(湖西)의 사옥(死獄)을 심리하였다. 공주목(公州牧)에 조파금(趙巴金)·조감득(趙甘得) 형제가 함께 한삼이(韓三伊)를 구타하여 이튿날 죽게 만들었는데, 감득은 도망쳐 숨고 파금은 자수하였다. 관찰사 박천형(朴天衡)의 장계에 말하기를,
"파금 형제가 삼이를 끌고다닌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한 목격자의 증언이 있는데 감득이 먼저 도망해 숨어 유족을 꾀어 사사로이 화해하도록 권하였으니 그가 손수 범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족은 도리어 그를 위해 풀어주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파금을 한 마디로 죄에 몰아넣기는 본디 의심스러우나 감득이 붙잡힌 후에 오로지 그의 형에게 미루고 있으며, 파금은 한 마디 군말도 없이 자복(自服)하였습니다. 무식한 상놈을 비록 옛사람이 서로 죽기를 다투는 의리에 견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원범(元犯)으로 결단하기에는 끝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두 차례 공초한 후 십분 참고해 헤아리는 방도가 있어야 합당하나 신의 천견(淺見)으로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파금은 상처가 나타나 있고 사증(詞證)이 갖추어져 있어 죽은 자를 죽인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을 듯하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한 조항은 두 사람 가운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파금·감득 형제 가운데서 정집(定執)하여 환역(換易)해야 하는데 파금을 수범(首犯)으로 간주하자니 감득이 이미 도망하였었고 감득을 수범으로 하자니 파금이 스스로 담당하여 갇혔으니, 자복(自服)한 자를 정범으로 삼아야 하겠는가, 도망하여 불복(不服)한 자를 정범으로 삼아야 하겠는가? 더구나 형제가 서로 죽기를 다투는 것을 비록 이런 어리석은 백성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파금이 끝까지 제가 했노라고 버티고 있으니 양심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서 가상한 일이다. 감득이 한결같이 미루기만 하는 사납고 무상한 정상은 마땅히 율(律)을 배가(倍加)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죄안은 어떻게 결정지어야 하겠는가. 유사(有司)에게 물으면 반드시 ‘파금을 버려두고 감득을 취해야 한다.’라고 할 것이니, 이는 본디 풍속을 돈독히 하는 정사에 해롭지 않다. 그러나 만약 감득이란 자를 실범(實犯)으로 삼는데 혹 조금이라도 애매한 것이 있으면 역시 공평하고 타당한 뜻이 아니다. 지난번 장단(長湍)·포천(抱川)의 옥사에서는 형제가 서로 죽겠다고 다툰 것 때문에 모두 가벼운 법을 따랐었다. 이 안건은, 형은 비록 자신이 담당했지만 동생은 미루고 있어 장단·포천의 예를 적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의옥(疑獄)도 사실이고 양범(兩犯)도 사실이다. 이미 의옥인 줄을 아는데 자신이 직접 죄인이라고 자청하는 자로 확정하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며, 양범이 분명한데 책임을 전가한 자로 단정하는 것 역시 불가하다. 형세상 불가불 모두 차라리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파금은 의심되는 가운데서도 장려해야 할 것이 있고 감득은 의심되는 가운데서도 통분한 바가 있으니, 파금은 한 차례 엄한 형벌을 가하여 석방하고 감득은 한 차례 엄한 형벌을 가한 후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정원에 명하여 외방 유생(儒生) 박하원(朴夏源) 등의 상소를 가져다가 없애버리게 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아,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오직 마음을 다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우리 숙묘(肅廟)를 섬기던 마음으로 경묘(景廟)를 섬기고, 경묘를 섬기던 마음으로 영묘(英廟)를 섬기고, 영묘를 섬기던 마음으로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섬기고, 우리 선대왕(先大王)과 선세자(先世子)를 섬기던 마음으로 우리 전하를 섬길 뿐입니다. 그런데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인심도 날로 물욕에 빠져서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기 위하여 걱정하고 얻고 나면 잃을까 걱정하기에 급급하여 종사(宗社)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고 사사로운 편당(偏黨)에 얽매어 마침내는 군부(君父)의 존엄함도 잊고 있습니다.
흉역(凶逆)의 주벌을 비록 이미 여러 차례 행하였으나 나쁜 마음을 아직껏 고치지 않은 자가 많아서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이 나오기에 이르렀는데, 그 근본과 맥락은 실로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무인년·기묘년 사이에 이창수(李昌壽)의 계사(啓辭)는 조진도(趙進道)를 과명(科名)에서 삭제하는 것이었는데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비답을 내린 것은 바로 우리 선대왕께서 조덕린(趙德麟)에게 말을 주어 환향하게 한 성대한 뜻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아, 저 몰래 엿보는 무리들이 마침내 이간질할 계책을 이루었는데 다행히 선대왕의 지극한 명덕(明德)과 자애로움에 힘입어서 당시에 흉계를 부리지 못하였으나 여파(餘波)가 오히려 요즈음까지 흘러왔으니, 김치인(金致仁)·윤시동(尹蓍東)의 차소(箚疏)가 있게 된 데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일 대신(臺臣)에게 내린 하교에 이르기를 ‘수교 가운데 「간신(諫臣)은 죽이고 싶지 않다.」라고 하신 말씀은 성덕(盛德)의 대도(大度)이니 내가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실로 우리 선세자의 널리 포용하시는 대도를 우러르고 역시 우리 전하의 계술(繼述)하는 덕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간서(諫書)라고 칭탁하여 그 흉계를 드러낸 자 역시 간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세자의 지덕(至德)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되므로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아도 되겠지만, 터무니없는 말로 속인 것이 여기에 있고 무핍(誣逼)함이 여기에 있다면 우리 전하의 의리에 있어서도 역시 간신이라 하여 끝내 죽이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아, 몇십 년 동안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 토역(討逆)하는 기회를 인하여 온 나라가 같은 소리를 하고 공거(公車)에 날로 쌓이는 것은 모두 한결같이 의리에 부응하라는 것입니다. 숨어 있던 적이 차례로 발각되었고 부월(斧鉞)을 대신하는 글이 다투어 번갈아 진달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성상의 묵운(默運)하는 생각으로 우선 한 번의 유음(兪音)을 아끼고 계시지만 흉역의 소굴에서 전법(傳法)하고 호신(護神)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소가 다 말하고 있으며 부녀자와 어린아이들 역시 알고 있습니다. 신들이 지난날 억울했던 바를 지금은 풀 수 있고 전에 말하지 못했던 바를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한권의 《춘추》로 2백 40 년 동안 징토한 것은 빈 말로 써놓은 데에 불과하지만 난신 역자의 간담을 떨어지게 한 것은 형벌을 시행하는 것보다 더 엄합니다. 이제 이런 의리와 이런 언론이 세상에 밝혀지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영남(嶺南) 유생의 재소(再疏)를 보건대, 예무(睿誣)를 변명하는 것이 오늘날 의리를 밝히는 근본이 되는 의의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급하게 여기는 것도 우리 선대왕의 성덕과 지인(至仁)을 선양하는 데 있는 만큼 예무를 변명하는 것은 본디 변명하지 않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 우리 선대왕의 천지와 같은 인(仁)과 일월같이 밝으심은 신들처럼 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감히 우러러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나 이현중(李顯重)이 모르는 곳에서 화응(和應)하려는 계책을 부리자 소인이라고 내쳐서 쓰지 못하게 하시고, 조덕장(趙德章)이 기회를 틈타서 들추어내 고자질하는 죄를 짓자 외임(外任)으로 내쳐 바꾸게 하셨습니다.
고(故)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가 입시하기에 이르러서는 심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하교가 계셨고 고 참판 한광조(韓光肇)를 치제(致祭)할 때는 아직도 후회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연신(筵臣)들이 듣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변별(辨別)하여 권면하고 징계한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낱낱이 지적하여 진달하지는 못하나 우리 나라의 백성들이 전왕(前王)을 잊지 못하는 통분은 비단 즐겁고 이로운 은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을 천명(闡明)하고 우리 선왕의 지극한 인(仁)을 선양하는 것은 오직 ‘의리를 밝힌다. [明義理]’라는 세 글자에 있으며, 실로 예무(睿誣)를 변명하는 큰 근본이 됩니다.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같은 대악(大惡)의 죄인에게는 단지 차율(次律)만 행하고, 정휘량(鄭翬良)·신만(申晩)같은 자는 아직껏 상형(常刑)을 피하고 있습니다.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은 흉서(凶書)를 번갈아 올렸고 박필리(朴必履)는 감히 포고(布告)하기를 청하였는데, 악(惡)은 같은데 요행히 면한 자가 있는가 하면 징토하였으나 누락된 자도 있었습니다. 천망(天網)이 너무 넓어서 여분(輿憤)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는데, 길가는 사람의 이목(耳目)과 여러 사람이 통렬하게 미워하는 자로는 서명응(徐命膺)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김상로와 홍계희로 하여금 속셈을 자행하게 한 것도 바로 명응이며, 이현중으로 하여금 그 수각(手脚)을 드러내게 한 것 역시 명응입니다. 그가 반장(泮長)072) 으로 있을 때 솔선해 응모(應募)하여 이불을 안고 반궁(泮宮)으로 들어가 3일을 유숙하면서 재생(齋生) 가운데서 이익을 좋아하고 세력을 좇는 자를 불러모아 꼬여내고 이끌기를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늙어서도 죽지 않고 있던 안형(安衡)·황만석(黃萬錫)과 궁하여 갈 곳이 없던 이이상(李頤祥)·송재덕(宋載德)이 머리를 숙여 그 명을 듣고 당류(黨類)를 불러들여 고약한 무리들의 성명으로 변환(變幻)하여 관학소(館學疏) 모양으로 만들어 참독한 모의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또 이어서 흉서를 얽었는데 ‘명륜당에 앉아서[坐明倫堂]’이란 네 글자는 이것이 어떤 말이기에 함부로 써서 제생(諸生)에게 보여 읽도록 하고, 마침내는 그 글을 가지고 말을 타고 떠났습니다. 이이상은 빨리 나가서 등자(鐙子)를 잡고서 말하기를 ‘선생의 채찍을 잡는 졸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후에 명응이 이상을 소개하여 역적 홍계능에게 몸을 의탁하게 하였고, 이상은 명응을 의지하여 영록(瀛錄)에 이름이 끼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을 말하면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떨리고 머리털이 곤두서게 되니 아아, 통분합니다. 나라가 그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그는 나라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흉한 무리를 체결하여 위기를 빚어 마침내 하늘에 닿는 화(禍)를 이처럼 참독하게 이루었단 말입니까. 부용당(芙蓉堂)에서 절패(絶悖)한 음악을 벌이고 하전문(賀箋文)에서 차마 못할 말을 하였으니, 이런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또 심이지(沈履之)의 욕하는 글이 바로 강연(講筵)에서 물러나온 후에 있었는데, 그 흉악한 마음씀과 음참(陰慘)한 말은 글자마다 역심(逆心)이고 말마다 역심이었습니다. 원(遠)·겸(謙) 등 제적과 함께 선후로 화응(和應)하였는데 곧장 함부로 무핍한 말로 위급한 화를 빚은 것으로는 심이지의 글보다 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 청토(請討)하는 논의가 유독 서명응과 심이지 두 역적에게 미치지 않음은 어찌 돌아보고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집(沈鏶)의 음흉한 꾀와 이정(李瀞)의 거짓으로 목찌른 것은 흉악함을 드러낼 묘계(妙計)였고, 이해중(李海重)은 경적(景賊)과 한통속이 되었고 송재경(宋載經)은 궁관(宮官)이 되어서 도피하였으니 이륜(彝倫)의 끊어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창수(李昌壽)와 임해(任瑎)가 고무(鼓舞)되고 환변(歡抃)했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당시의 장주(章奏) 사이에 사용하였으니, 아, 참혹합니다. 참으로 이륜(彝倫)의 마음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마음을 썩히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차마 말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감히 말하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이 어찌 신들이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아, 교외(郊外)에 나아가 영접한 것은 본디 흉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상소에서 이미 말하였으나, 온천 행행에서 돌아올 때에 나와서 맞이한 경재(卿宰)가 한 사람도 없었음을 아울러 논하지 않은 것은 왜입니까. 삼포(三浦)에서 돛을 올리고 놀이한 것은 결코 홍인한·김양택 두 사람에 그치지 않으며, 춘방(春坊)·계방(桂坊)에서 도주한 사람 역시 많았는데도 이지영(李祉永)이 당기기만 하고 쏘지 않은 것은 왜입니까.
아, 전하께서 선대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시지만, 선대왕께서 당시에 빚어진 흉역을 남겨 두어 오늘날을 기다려 주토(誅討)하는 법을 쓰게 한 것은 은미하게 나타낸 뜻있는 것으로 한 모서리를 들면 세 모서리는 저절로 그 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들은 황송하게도 비록 알 수 없지만 대성인의 정미(精微)한 심법(心法)이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임을 더욱 우러르게 됩니다.
우리 선대왕께서 진노하시고 슬퍼하실 때를 당하여 혹 정리(情理)에 미진할까 염려하여 장제(葬祭)의 예를 모두 갖추어 유감이 없도록 했는데, 아, 저들 상신(相臣)과 종백(宗伯)은 유독 무슨 마음으로 복제(服制)의 의주(儀註)를 거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 한 가지 일은 어찌 다만 임금에게 무례한 것일 뿐이겠습니까.
천원(遷園)할 때에 이르러서는 백관의 복제를 당일에 입지 못했던 예(禮)를 좇게 하여 천지에 다하지 못한 슬픔을 풀게 되었는데 한둘의 반유(泮儒)가 패악한 말을 함부로 꺼내 서로 죄명(罪名)을 시행했으니, 이 무리들의 일관된 마음씨는 아, 참혹하기만 합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성한과 구종이 나온 것은 참으로 의리를 밝히고 형정(刑政)을 바로잡을 한 번의 기회라고 여깁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쾌히 결정을 내리시고 빨리 여러 사람의 청을 따르시어 그 사실을 엄히 조사하소서. 그렇게 해야만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선대왕께도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선대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것이 됩니다."
5월 13일 경술
상이 재거(齋居)하면서 일을 보지 않았다.
5월 22일 기미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과 각신(閣臣), 약원 제조(藥院提調),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하였다. 약원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울면서 아뢰기를,
"신들이 가슴에 맺힌 피가 쌓여도 참으며 감히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이제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근일 여러 신하가 장주(章奏)하니 충정(衷情)이 배나 격분됩니다."
하였는데,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들에게 유시할 것이 있으니, 도제조는 분명히 들으라. 반수(班首)가 아직 주대(奏對)하지 않았으니, 다른 대신이 차례를 넘어 주대하기는 어렵다. 경은 먼저 물러가 합문 밖에 앉아 있다가 다른 대신이 연석에서 물러가거든 하교를 자세히 들으면 된다."
하니, 낙성이 먼저 물러갔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있고 나라가 있으니 천륜(天倫)과 인상(人常)이 중한 것이다. 부자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게 되는데 요즘의 현상은 과연 어떤가. 경들이 부자의 윤리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경들은 하루 동안 나를 이 자리에 앉혀 놓고서 나를 이처럼 곤란하게 하는가. 오늘 경들이 불령(不逞)한 한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바친 연후에야 나라가 나라답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신하가 하교를 듣고도 감히 이처럼 조용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감히 관(冠)을 쓰고 있겠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 등이 관을 벗고 협양문(協陽門)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한참 후에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구전 하교(口傳下敎)를 쓰게 하기를,
"모질어 죽지 못한 채 지난날을 참고 지내왔는데 지금 어찌 혹 입을 열어 살아온 세상 일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하루라도 이 땅 위에 살면서 경들에게 군림(君臨)하는 한 차마 윤리도 무시하고 원수도 잊어버린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불초하고 무상하지만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선(祖先)을 존경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과 같은데, 만고 천하 어디에 털끝만큼이라도 당연히 해야 할 천상(天常)·인기(人紀)를 뒤로 늦추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원통함을 삼키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낸 사람이 있는가. 경들도 생각해 보라. 내가 등극한 이후에 모년(某年)의 의리에 대해 감히 한 번도 분명한 말로 유시하지 못했고, 그들을 주륙(誅戮)한 것도 다른 일을 인해서였으며, 그들을 성토한 것도 다른 조항에 의탁해서 하였다. 화가 났지만 감히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고자 했으나 감히 자세히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과연 참으로 원수를 숨기고 원한을 잊어서 밝혀야 할 의리를 밝히지 못하고 시행해야 할 징토를 시행하지 않으려 해서 그런 것인가. 이런 사리는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놋숟갈로 밥을 떠 먹는 자라면 누군들 내가 꾹 참고 있는 본심을 알아서 비통해 하지 않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다. 선대왕께서 숱하게 내리신 정녕한 유시와 엄격한 하교는 우선 감히 제기해 말하지 않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과 여러 신하를 진전(眞殿) 문 밖에 불러놓고 어필(御筆)로 손수 쓴 글과 구주(口奏)한 긴 문자(文字)를 반시(頒示)한 일이다. 그 대략은 ‘모년(某年)의 일에 혹 누구는 무슨 죄가 있고 누구는 무슨 일을 범하였는데, 장래에 제기하는 자는 그 일이 이렇고 저렇고를 막론하고 내가 이러이러하였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고,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으며,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구절로써 결론지으며 말하기를 ‘성궁(聖躬)이 담당하겠다.’고 하시어 간곡하게 신신당부하셨다. 심지어 이 일을 언급하는 자에게는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을 다스린 율로 처단하겠다고 하셨다. 그 아래에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가 계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한 연후에야 네가 드러내지 못한 선지(先志)를 밝힐 수 있고, 나의 통석(慟惜)한 마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게 된다.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들도 차차 너의 본심과 선지를 알게 되고 또 나의 이런 뜻을 알게 되며, 너 역시 할아비에게 효도하는 손자가 되고 아비에게 효도하는 아들이 된다.’고 하교하셨다. 또 대신 이하를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 윤음(宗統綸音)을 내리셨는데, 그때의 사실은 모두 병신년 상소가 있은 후 세초(洗草)하는 가운데에 들어갔고 오직 윤음 및 진전(眞殿)에서 구주(口奏)한 문자는 아직도 사고(史庫) 및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남아 있다. 구주한 문자는 비록 감히 꺼내서 보지 못하더라도 《정원일기》의 경우는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다. 내가 그때에 하순(下詢)함에 따라 전석(前席)하여 진실된 말을 하였는데, 만약 선조(先朝)께서 돌아가신 후이니 오직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하여 한결같이 갑신년의 대답과 반대되게 한다면 이 어찌 죽은 사람을 산 사람 섬기듯이 하는 의리이겠는가. 또 더구나 성교(聖敎) 가운데 있는 ‘통석’이란 두 글자는 바로 후회하신 성의(聖意)여서 내가 받들어 가슴에 새겨 장차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단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억제할 수 없는 것은 지극한 통분이며 막을 수 없는 것은 지극한 정(情)이다. 큰 윤리가 있는 곳에 피맺힌 원수가 저기에 있어서 이에 앞뒤의 사실들을 참작하면서 경(經)에서 권도(權道)를 찾았다. 천만 번 생각하여 간장(肝腸)이 타는 듯해서 먼저 을미년의 주토(誅討)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였는데, 반드시 선조(先朝)에 재유(在宥)하실 때에 미치고자 하였다. 다음에 또 이듬해 병신년 봄에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서정(庶政)을 대리 청정(代理廳政)한 후에 울면서 호소하여 천지에 망극한 은혜를 입어 특명으로 차마 볼 수 없는 문자를 모두 세초하게 하셨다. 세초하는 날을 당하여서 성교에 말씀하시기를 ‘이 일이 사자지대(思子之臺)나 망자지궁(望子之宮)보다 나아서 내가 지하에 돌아갈 면목이 있게 되었다073) .’라고 하셨고, 그 아래에 또 감격 하시어 울먹이신 하교가 계셨는데 내가 어찌 차마 다 외우겠는가. 인하여 백관의 하례를 명하시고, 호(號)를 내리는 윤음(綸音) 및 어제(御製) 유서(諭書)와 어필(御筆) 은인(銀印)을 써서 내리셨다. 내가 처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받들지 않자 조금 후 호를 내리는 명을 환수하시고 유서(諭書) 가운데 있는 가장(嘉奬)하는 구절을 삭제하라는 하교가 계셨기 때문에 내 부득이 공손히 받았다. 또 그 후에 어전(御殿)에서 연회를 받으시고 나에게 가서 전성(展省)의 예를 행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비록 1백 번 책을 편찬하고 1만 번 선양(宣揚)하려 해도 어찌 선대왕의 갑신년 하교와 병신년 세초하라는 명보다 더하겠는가. 이것이 선조의 본의(本意)의 대략이다.
선조의 성은(聖恩)은 선조의 성은이고 나의 지통(至慟)은 나의 지통인데 병신년·정유년 이후부터 여러 번 일어난 역옥(逆獄)은 모두 모년(某年)의 의리에 근본하고 있다. 나를 아는 자는 알 것이요 나를 모르는 자는 모를 것이나, 나의 집정(執政)은, 밖으로는 형적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의리를 스스로 펴고 밖으로 원수를 잊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안으로는 묵묵히 징토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있으니, 위로는 성은을 등지지 않고 아래로는 나의 이마에 진땀을 내지 않고도 결말에 가서는 차례로 설욕(雪辱)을 하고 말게 될 것이다. 지난번 연석에서 영남 유생이 아뢴 말 가운데 해당되는 죄로 주토(誅討)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이극(里克)과 비교하였는데, 이극 때에 헌공(獻公)이 만약 이극을 경계한 일이 있었다면 공자(孔子)께서 어찌 폄하하는 평을 하였겠는가.074) 이는 영남 유생이 발걸음이 뜸해서 처음에는 몰랐겠지만 이 하교를 들으면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반드시 즉석에서 이해할 것이다. 다만 조정 신하들은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겨 발걸음이 뜸하지 않아서 그 이면(裏面)을 아는 자들인데, 이에 대하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나에게 극진히 처분하지 않아서 을해년 이전의 주토와 같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난적(亂賊)·역신(逆臣)이 아니겠는가. 을해년 이전에는 선대왕께서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라 하여 지나치게 윤허를 아끼셨으나 지금에 있어서는 내가 과연 반병(反兵)075) 하는 의리에 소홀하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이르게 된 것인가. 이 때문에 9일 동안 재거(齋居)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고 경들을 포함한 신하들을 대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대개 30년 동안 눈물을 머금었던 본심을 어찌 차마 사륜(絲綸)에 말할 수 있었겠으며 차마 장주(章奏)에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멀어지고 사실이 점점 어두워져 차마 제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후생(後生)이 막중한 의리를 모르게 되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막엄(莫嚴)한 일을 알지 못하게 되겠기에 좌상(左相)이 평소 의리를 잡은 사람으로서 한 차자를 진달하므로 부득이 말을 만들어 비답을 내렸었다. 이후에는 분분하게 시끄러운 것을 금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의 장주(章奏)에 혹 비답을 내리지 않기도 하고 혹은 돌려주어 가지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전후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법령(法令)을 내걸어 알리는 뜻이요 한편으로는 사람을 살리는 방도를 보여준 것이다. 그후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왔을 때 불러 보고 비답을 내린 것 역시 효유(曉諭)하기에 급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또 영남 유생이 입시했을 때의 연석에서의 대화를 즉시 중외에 반포해 보였으니, 더욱 나의 뜻이 있는 바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해하는 자는 반드시 보고서 통읍(痛泣)하고, 잘 모르는 자들은 듣고서 마땅히 전율(戰慄)해야 할 뿐이다. 이제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으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라면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마음을 두고자 하겠는가. 이런데도 혹 이에 반(反)해서 만에 하나라도 비지(批旨)와 사륜을 보고서도 혹심한 원통함을 알지 못하고 면유(面諭)와 연석의 주본(奏本)을 보고도 통읍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서 감히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말해서도 안 될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망극한 일을 말하며, 내가 선대(先代)를 잊고 근본을 등졌다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인가.
이밖에는 모두 직접 보거나 들은 일이 아니어서 우선은 말을 꺼내지 않지만 천고(千古) 전이나 천고 후까지도 어찌 이처럼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해서도 안 될 모년(某年)의 큰 의리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 내 본심은 위에서 누누이 말한 것과 같으니, 처분함에 미진함이 있다면 비록 시간(尸諫)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또 혹 이른바 아직 징토가 미치지 않고 있다고 말한 무리는 각자 곡절이 있어서 자세히 헤아려서 짐작해 작정한 것이니 내가 이들에 대해 까닭없이 편안하겠는가. 설혹 내 뜻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본의(本意)가 있는 바를 연역(演繹)하여 스스로 의심이 없는 데로 돌아가기를 기약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하된 자들은 이런 일을 차마하고 이를 인하여 사감(私憾)을 풀고 이를 빙자하여 협잡할 계책을 하여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었다는 것으로 은근히 위에다 돌리면서 이에 감히 징토한다는 핑계로 헤아리지도 않고 조리도 없이 넣어서는 안 될 것을 넣고 넣어야 할 것을 넣지 않는 유를 다반사로 공사(公私)간의 화제를 삼고 있으니 지금 조선 천지에 이른바 군장(君長)이란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겠는가. 조금 전 연석에서 먼저 두 글자로서 경들에게 하교한 것은 격노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비록 배우지는 못했으나 마음대로 말하지 않으며,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통심(慟心)이 있지만 나의 사정(私情)과 나의 사의(私意)대로 하고자 하지 않는데 더구나 신하를 대하여 어찌 이처럼 이치에 어긋난 일을 말하겠는가. 사람으로서 인륜(人倫)이 없으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라에 인륜이 없으면 나라가 되지 못하는데, 더구나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만약 효친(孝親)·존선(尊先)의 일에 털끝만큼이라도 분의(分義)를 다하지 못한다는 한탄이 있어 조정 신하들이 손뼉을 치고 입을 놀린다면 나라는 그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경들이 어찌 연교(筵敎)를 기다려서 알겠는가. 인륜이 있는 연후에야 사람이 되고 나라가 되는데, 경들이 한나절 동안 관을 벗고 단지 명을 기다린다고만 말하면 과연 대의(大義)에 무슨 도움이 되며 나에게는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천명하고 발휘할 방도를 경들은 생각하라."
하니,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는 분석함이 정미하고 의리가 밝아서 글을 받들어 읽는 즈음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만 그 구어(句語)에 이따금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바라건대 고쳐서 내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더는 말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이 하교(下敎) 및 갑신년 연설(筵說)을 초출(抄出)하여 합외(閤外)의 여러 신하에게 보여줄 것인데, 이번의 하교에는 소중한 것이 있으니, 여러 신하들은 관을 쓰고 받들어 읽은 후 천명(闡明)하는 방도가 있거든 사알(司謁)을 들여보내 아뢰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읽은 후 "막중 막대한 일을 사알을 들여보내 아뢰는 것은 불가하므로 사대(賜對)를 기다려서 앙주하겠다."는 뜻을 전품(轉稟)하니, 인하여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복원(福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조금 전의 연석에서의 하교를 듣고도 즉석에서 죽지 못하였으니, 신하의 분의가 모두 사라졌으며 어둡고 어리석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또 삼가 격기(膈氣)가 더해진다는 하교를 들으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어쩔 줄을 몰라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연석에 나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나의 신기(神氣)가 실로 대응해 주기가 어렵다. 조금 전의 하교는 경들의 잘못을 말한 것이 아니다. 경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합문을 지키니 병이 날까 염려되고, 또 듣건대 천명할 방도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소견한 것이다."
하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신이 전하를 섬겨온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일찍이 급한 말투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으시어 신들이 흠앙(欽仰)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조금 전의 하교는 참으로 지나치시니 신들이 억울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씀을 너무 허비하시면 기도(氣度)가 올라가기 쉬워서 성상의 몸을 보양(保養)하는 도리에 방해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년 동안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던 일에 대하여 근래에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의리가 점차 어두워짐을 인해서 유성한(柳星漢) 같은 자가 나오기까지 하였고 경이 평소 의리를 잡은 바가 있어서 맨 먼저 하나의 차자를 진달하여 나 역시 부득이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또 두 기신(耆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대략 나의 의사를 펴보였으니, 이는 대개 법령을 내걸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를 보여준 것으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영남 유생들이 천리 길에 발을 싸매고 와서 1만 명이 연명했기 때문에 이미 비답을 내렸고 또 인견하여 상세히 하교함으로 해서 다 보여 주었었다. 중외에 반시(頒示)한 것은 오늘날의 신하와 모든 백성들까지 의리의 근원을 알게 하고자 하는 데 내 뜻이 있었다.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다반사로 알아서 서로 번갈아가며 글을 올려 마치 내가 차마 듣고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니 이미 너무나 해괴하다. 지난번 이른바 외방(外方) 유생의 재소(再疏)는 승지가 열어보지도 않았고 또 들이지도 않아서 상소의 말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나 병조(兵曹)의 초기(草記)를 보니 이병정(李秉鼎)이 격고(擊鼓)한 일이 있었다고 하여 그 곡절을 물었더니 ‘유생의 상소 가운데서 이창수(李昌壽)를 배척한 일로 인해 그의 종손(從孫)이 소청(疏廳)에 가서 할명(割名)하고 왔기 때문에 이로써 억울함을 호소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전에 제조(提調)가 입시하였기에 창수가 배척받은 대개를 들었는데 바로 두 가지 일로서, 하나는 조진도(趙進道)를 삭과(削科)한 일이요, 하나는 장주(章奏)의 말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조진도의 일은, 창수가 그때의 독권관(讀券官)으로서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으니 상소하여 의(義)를 이끈 것은 별난 일이 아니며 장주의 말에 이르러서는 바로 성후(聖候)가 평복(平復)된 후였다. 비단 사실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또 창수가 모년(某年)에 평안도 관찰사로서 3개월 동안 곡림(哭臨)한 일을 비단 평양 사람들만이 지금까지 전해올 뿐만 아니다. 내가 고(故) 정승 이성원(李性源)에게서 들었는데, 이성원이 어찌 사사로이 창수를 좋아하여 그런 말을 했겠는가. 이병정을 다시 사로(仕路)에 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를 위해서 한번 붙여준 것인데 이에 도리어 상소 가운데 넣어 이처럼 논척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그밖의 것은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그 무리가 감히 더없이 중대하고 지극히 엄격한 일에 은밀히 사정을 둘 계책을 품고 있단 말인가.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한 솥의 맛을 알 수 있다. 이창수를 삽입했으니 마땅히 넣어야 할 자는 넣지 않고, 넣어서는 안 될 자는 넣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되면 의리가 점차 어두워지고 막혀서 나의 뜻을 천명할 수가 없게 된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가 또 문호(門戶)가 나누어져 유희(遊戱)하는 말처럼 보고 있으니, 어찌 이런 세계가 있겠는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고서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유생들은 오히려 사실을 몰라서 그렇다고 핑계하겠지만 유생 가운데도 반드시 진신(搢紳)의 자질(子姪)이 많을 것이니, 또 어찌 사모를 쓴 자에게서 나오지 않았는지 알겠는가. 내가 상소의 비답에서 말하고 연석에서 뜻을 펴 보이면서 생각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식견이 있는 신하는 이것을 보고 눈물을 삼키고 모르는 자는 듣고 전율(戰慄)할 것이며, 의리가 이로부터 천명되고 내 뜻도 거의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여겼다. 이제 유생의 상소로 말한다면 비단 비답이 무익하고 연석의 하교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슬픔을 머금고 비통한 생각을 참으면서 차마 교시한 본의에 마저 상반되니, 어찌 놀랍고 통분하지 않은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것이 천경 지의(天經地義)인데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꼴이 되겠는가.
경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벌(刑罰)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禮)로써 다스리는 것만 못하니, 의리의 근원을 천명 발휘하여 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요, 만일 덕화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경우에는 완악하여 하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 하나를 잡아내어 삼척(三尺)의 법을 시행함으로써 의리는 민멸(泯滅)시켜서 안 되고 병집(秉執)을 흔들 수 없음을 밝혀야 하니, 이 두 가지에 대하여 경들은 생각하라."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무릇 지금 전하의 조정에 선 자치고 그 누군들 우리 성상께서 잡으신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를 흠앙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 세상에는 결코 이러한 무리가 없을 것이니 성려(聖慮)가 너무 지나치십니다. 또 근일 이래로 의리가 분명해져 우리 나라의 신민(臣民)이 30년 동안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여 비록 집에서 처자(妻子)를 대할 때에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던 일을 지금은 장주(章奏)에서 언급하고 부인과 아이들까지 말하게 되었으니, 의리의 밝음이 어찌 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협잡하려는 사의(私意)를 품고 원한을 풀려는 계책을 한다면 참으로 난신(亂臣)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나라에 상률(常律)이 있으니 치토(致討)함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禮)로써 인도하는 것만 못하다는 성교는 참으로 지당합니다. 신의 뜻에는 모름지기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황연(怳然)히 이 의리를 알게 하여 저절로 시끄러운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고, 오늘날 의리를 천명 발휘해야 할 방도는 조금전 내리신 구전 하교가 그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차자에서 말한 ‘바라건대 애통(哀痛)한 윤음(綸音)을 내리소서.’라고 한 것이 바로 이 하교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영남 유생이 청한 바 역시 이것입니다. 이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의리는 바로 천하 만세의 공공(公共)한 큰 의리이다. 내 말은 오히려 한 개인의 사견인데 어찌 후세에 징신(徵信)되겠는가. 경은 본디 의리를 잡아 지켰으니 내가 더는 면려하지 않겠으며, 오늘날의 일은 깊이 이 영부사(李領府事)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하자, 이복원(李福源)이 아뢰기를,
"신은 늙어 정신이 혼미하여 갑자기 좋은 도리를 생각해 낼 수가 없는데,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책(冊)을 편찬하자는 청은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근일의 전교와 비답과 연본(筵本)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인쇄하여 세상에 반포하면 큰 의리의 근원과 우리 성상의 본의를 천명 발휘할 수 있고 전후 여러 적이 역적이 된 까닭이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 문자는 조지(朝紙)에 이미 반포하였고 연본 역시 비밀로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보았을 터인데 인행(印行)과 등본(謄本)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경의 말은 동문 서답(東問西答)을 면치 못한다. 천하에 막중한 것은 윤상(倫常)이니 윤상이 밝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라는 나라가 되지 못한다. 지금 입을 놀리는 자들이 은연중 ‘마땅히 행해야 하는데 행하지 않고, 마땅히 징토해야 하는데 징토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니, 참으로 이렇다면 어찌 윤상이 밝아져 사람이 되고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종기가 나면 터뜨려야 하는데 지금의 종기는 성하다고 할 수 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터뜨리라. 그렇게 한 연후에야 의리가 쾌히 펴지고 내 마음이 밝아지며, 내가 선대왕을 뵐 면목이 있게 되고 또 현륭원(顯隆園)을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옛날의 흉적으로 세상에 생존해 있는 자가 차례로 주토(誅討)되어 거의 누락된 자가 없는데 주토한 까닭은 모두 나에게 관계된 것이었음을 세상에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알 것이다. 두 기신(耆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춘추》의 필법을 빌렸다.’라고 말한 것이 이것이었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으면서 다만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만 하였는데 뜻을 발휘한 자는 좌씨(左氏)가 있고 공양씨(公羊氏)가 있고 곡량씨(穀梁氏)가 있으며 기타 부연하여 발명한 자는 몇십 가(家)인지 알 수가 없다. 무릇 의리(義理)가 미세한 것은 그 말이 은미한데, 미세하고 은미한 것은 성인(聖人)에게 달려 있고 미세한 것을 드러내고 은미한 것을 나타내는 것은 후인에게 달려 있다.
을해년·병자년에 토벌한 역적은 어찌 모두가 옛날의 역적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도 의리를 밝힌 1부(部)의 책에서 일찍이 아무 역적은 아무 해의 역적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내 나름대로 《춘추》의 필법에 부치려는 뜻이었다.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만 역시 반드시 그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
영남 유생이 입시해 연석에서 한 말 가운데 ‘손에 중병(重兵)을 쥐고 그 무리가 번성하였다.’라고 한 말은 기주(記注)의 잘못이기 때문에 고치게 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역적 구선복 같은 자가 어찌 중병을 장악하고 무리가 많다 하여 손을 쓰지 못하였겠는가. 참으로 전후의 처분을 자세히 따져보면 나의 뜻이 있는 바를 거의 이해하여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현상이 이에 이른 것을 경들은 생각해 보라. 천리(天理)가 밝지 않고 인기(人紀)가 서지 않는데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지위에 있으면서 천명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비단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로써 인도하는 것만 못할 뿐 아니라 혹시 알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도 도리어 ‘이 의리는 다시 말해서는 안 된다.’ 하여 지난해에 사람들이 제기해 말하지 못한 것처럼 된다면 이미 펴졌던 의리가 장차 다시 어두워지게 될 것이니 이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그럴 듯하나 어찌 그럴 염려가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참으로 따져 조사하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 사한(師翰)의 옥사(獄事)는 대개 그 무리가 선대왕께서 어극(御極)해 계실 때에 감히 말하지 못하던 것을 감히 내가 공묵(恭默)하고 있는 날에 말한 것이 아주 흉악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국청을 설치하여 처분한 것인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이 일을 문목(問目)을 내어 조사해 그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차마 들어야 하겠는가. 오늘날 조정에 비록 기강이 없지만 자수(自首)하게 한다면 어찌 감히 하지 않겠는가마는 이 역시 색언(索言)하고 싶지 않다. 만일 싸움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것처럼 해서 미혹(迷惑)된 자를 깨우쳐 스스로 의리가 크게 정해지기에 이르도록 한다면 어찌 한 세상을 구제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번의 이른바 외방(外方)의 상소는 첫번째 것은 대중을 따라서 휩쓸린 죄과(罪科)여서 단지 다시 내주기를 명하였으나, 두 번째 것은 비단 대중을 따라서 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협잡(挾雜)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이런 습성을 감히 오늘날 조정에서 이루려 하는가. 참으로 상소로 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어디에 가 있느라고 하지 않다가 영남 유생들이 재소(再疏)한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진정한 충분심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영남 유생의 소의 경우에는 단지 의리를 위주로 한 것이어서 식견이 있다고 하겠으나 말하는 즈음에 혹 자구(字句) 사이에 망발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먼 지방 사람들이 이 일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므로 괴이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갖추기를 구하지 않지만 도성에 사는 진신(搢紳)과 유생(儒生)에 이르러서는 어찌 내 뜻이 있는 바를 모르겠는가."
하니, 복원(福源)이 아뢰기를,
"세월이 점차 멀어져 그때의 사실을 후생(後生)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비록 사모를 쓴 자라 하더라도 역시 알지 못하는 자가 더러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서운하다. 사모를 쓴 사람이 어찌 이 의리를 모르겠는가. 알고서 말을 하면 신하의 분의(分義)가 없는 것이요, 이 의리를 알지 못하는 것 역시 신하의 분의가 없는 것이니 말이 되는가. 경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하니, 복원이 아뢰기를,
"신이 우러러 진달한 바는 성상의 뜻과 의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갑신년 연석의 이야기 역시 혹 미처 들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다가 정신이 혼미하여 말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천명(闡明)하는 방도를 한결같이 경들에게 맡기니,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이후의 일은 경들이 잘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복원, 좌의정 채제공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이 조연(朝筵)에서 삼가 차마 잠시라도 들을 수 없다는 하교를 듣고서 오장(五臟)이 다 찢어지는 듯하였으므로 황급히 물러나와 궐문 밖 진흙탕에 머리를 조아리며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랐습니다. 연석에서 물러나온 승지가 구전(口傳) 하교를 받들어 보여주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수천 마디의 말이 엄정(嚴正)하고 측달(惻怛)하여 목석(木石)을 감동시키고 돈어(豚魚)까지도 믿게 할 만하였습니다. 신들이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느라 소리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전하의 30년 동안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시던 성심(聖心)으로서 오늘날의 하교가 있게 하였으니, 이는 신들이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30년 동안 잡고 준행(遵行)한 의리가 지극히 중대하고 지극히 엄경(嚴敬)하고 지극히 정미하시어 천지 사이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 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니, 무릇 전하의 조정에서 북면(北面)하여 섬긴 자가 이에 대해 혹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이는 난역(亂逆)입니다. 아, 우리 지극히 인자하신 선대왕의 추회(追悔)하신 성덕(聖德)과 우리 선저하(先邸下)076) 의 지극한 정성과 하늘이 내린 예효(睿孝)를 우리 전하께서 두 성인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천백 대에 빛날 대의(大義)를 천명하시는 내용을 목이 메이도록 오열하면서 연석의 유시와 상소의 비답에서 정령하게 보이셨습니다. 30년 동안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했던 정미한 의리와 뜻이 근일 이래로 마치 일월처럼 밝아지고 부월(斧鉞)처럼 내걸렸으니 동쪽 나라의 대소 신민(臣民)으로 사람의 마음과 신하의 분수가 있는 자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모아 받들고 장엄히 외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저 당시의 흉악한 무리들은 죄악이 극도로 가득 차서 천지 귀신도 용납하지 않을 자들인데 차례로 죽어 모두 천주(天誅)를 받았으나, 우리 전하께서 주토(誅討)의 법을 행하는 데는 《춘추》의 은미하면서도 드러내는 뜻을 깊이 얻었습니다. 오늘의 구전 하교 가운데 병오년 이후에 역적을 다스린 것은 자신이 담당한 것이란 하교가 바로 이것이며, 조금 전 연교(筵敎) 가운데 ‘오직 그 자취가 어둡게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하신 것 역시 이것입니다. 이는 대개 선대왕께서 곡진하게 반복하여 우리 전하께 고계(告戒)하시고 우리 전하께서는 선대왕에게서 눈물을 흘리며 받들어 받으신 것으로 조심해 지키고 정성스레 받드는 도리와 엄히 징토하고 쾌히 주벌하는 뜻을 병행하여 어긋남이 없어 천하 만세에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매양 우리 전하의 고심과 지덕(至德)을 생각할 때마다 일찍이 애가 끊어지고 가슴이 찢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어서 대단히 흠앙하였습니다. 아, 우리 전하의 망극한 지통(至慟)과 무궁한 효사(孝思)로 30년 동안 슬픔을 머금고 근심을 참는 가운데서 세밀하게 헤아리시고 행동하는 가운데서도 권형(權衡)에 맞아 의(義)가 극진하고 인(仁)이 지극하셨습니다. 신들의 비통과 통분해함은 비록 온 나라가 같은 바이나 어찌 다시 한 마디라도 전하 앞에서 진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부정(不靖)하고 불령(不逞)한 무리가 있어서 감히 이 막중하고 막엄한 일을 빙자하여 쉽게 주워모아 외람되게 상소한다면 이미 간절하고 측은한 정성이 없고 두려워하고 삼가는 뜻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또 혹 협잡하려는 사의(私意)를 품고서 몰래 은혜와 원수를 갚고자 하여 하늘에 닿고 땅에 뻗치는 큰 의리를 도리어 이런 무리들이 빙자해 농간한다면 이는 임금의 기강을 멸시하고 사람의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백성들의 뜻을 함몰시키고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는 것이어서, 비단 신들이 눈을 크게 뜨고 치토(致討)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으니 그 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번 외방 유생의 상소는 이미 올리지 않아서 비록 분명하게 말하고 드러내어 배척하지는 못하겠으나 만약 의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엄히 막지 않는다면 이런 무리들이 발자취를 이어 일어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들의 이 상소를 중외에 반시(頒示)하여 국내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로 하여금 모두 큰 의리가 있는 바를 알게 하여 감히 스스로 무거운 죄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합외(閤外)의 구전 하교를 보고 연중(筵中)의 많은 설화(說話)를 들은 자로서 참으로 혈기가 있는 무리라면 누군들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나 어긋나게 되는 분수에 대해서 미혹되었음을 깨닫지 않겠는가. 이런 때에 경들이 상소로 이처럼 진달하니 내가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모름지기 이 상소를 정원으로 하여금 특례로 등사하여 조지(朝紙)에 반포하라."
하였다. 이때에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등이 또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대신의 상소한 내용과 같았다. 비답하기를,
"대신의 비답에서 이미 대략 언급하였다. 경들은 한 번의 상소로 책임을 때우지 말고 서로 분명하게 고해 사람들마다 이런 의리를 알게 하고, 또 의리 가운데 진짜 의리임을 알게 하여 위로 번뇌를 끼치지 않고 아래로는 굳게 지키게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상소가 어찌 다만 본의를 발휘하는 밑천만 되겠는가."
하였다.
만포(滿浦) 등 56진(鎭)에서 호렴(戶斂)하는 폐단을 혁파하라 명하고 가분 모미(加分耗米) 5천 석을 갈라서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현진 첨사(牛峴鎭僉使) 유문양(柳文養)이 상소하여 진의 백성에게 징렴(徵斂)하는 폐단을 진달하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명하여 폐단을 막을 방책을 조목별로 나누어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전 절도사 이한풍(李漢豊)의 첩정(牒呈) 가운데 ‘만포 등 56진에서 사용하는 긴요하지 않은 명색(名色)을 한결같이 전감(全減)하고, 지나친 요과(料窠) 역시 재감(裁減)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호렴(戶斂)을 이미 이처럼 삭감하면 반드시 별도로 조처한 연후에야 진의 모양을 수습할 수가 있고 백성들의 폐단도 없앨 수가 있습니다. 도내 각 아문(衙門)은 가분 모조를 5천 석을 한정해서 그 진의 힘의 잔성(殘盛)을 헤아려 나누어 조치해 주면 거의 바로잡는 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일을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수천 석의 나라 곡식을 전에 없던 규정을 새로 열어 해마다 조치해 주기는 실로 어려우나, 만약 이런 정사를 행한다면 관서(關西) 56진의 하소연할 곳이 없는 지친 백성이 거의 회복되어 소생할 수 있고 구중 궁궐에서 서쪽을 생각하는 끊임없는 근심 역시 영원히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각 아문의 가분 모미 5천 석을 특별히 조치하여 각진에 나누어 주게 하고, 이렇게 한 후에 호렴이 혹 다시 전처럼 되고 곡물이 도리어 자신을 살찌우는 데 들어간다면 해당 진장(鎭將)에게 장오(贓吏)의 율을 시행하고 신칙하지 못한 도신과 수신 역시 엄히 감죄(勘罪)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신칙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도내 56여 진의 백성에게 쌓인 폐단을 해소시키고자 하면서 어찌 5천 석의 쌀을 아끼겠는가. 더구나 이미 들은 후에 만약 쾌히 그 폐단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신의를 보이는 뜻이겠는가. 이 회계(回啓)에 의하여 특별히 조치해 주라. 이렇게 하고도 진장이 하나라도 죄과를 범한 경우에는 도신으로 하여금 영문(營門)에 잡아다가 위의를 크게 갖추고 엄히 곤장을 쳐 대중에게 보인 후 의금부로 하여금 장오죄의 율을 쓰게 하라. 만일 적발하지 않을 때에는 도신과 수신을 논죄하는 것 역시 경이 아뢴 바에 의해서 하고 또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이런 뜻을 일일이 들어 각진의 정당(政堂)에 게시하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 양하진(楊下鎭)을 혁파하여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소속시켰는데, 도신이 진보(鎭堡)의 폐단을 혁파하라고 논한 것을 인하여 묘당이 진달한 것이다.
김해(金海) 명지도(鳴旨島)의 공염(公鹽) 1천 5백 석을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본도 염민(鹽民)이 상언(上言)한 것과 관련하여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을 물으니,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본도에서 굽는 소금 3천 석을 반으로 줄이면 민력(民力)이 반드시 펴질 것입니다. 또 본창(本倉)에 전에 준 1천 5백 석의 쌀 역시 여유가 있을 것이니, 이것으로써 시가(柴價)에 보태주면 양쪽이 다 편리한 정사가 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인제현(麟蹄縣)의 전세(田稅)를 영월(寧越) 등 고을의 예에 의해 돈으로 만들어 상납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의 파직(罷職) 전지(傳旨)를 환수하라 명하고 그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수원부(水原府) 시사(試射)에 입격한 사람들에게 가자(加資)하고 사제(賜第)하며 차등을 두어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의 화소(火巢) 안에 몰래 장사지낸 백성 한정욱(韓廷旭) 등을 도신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호서(湖西)에 있는 양남(兩南)의 증열미(拯劣米)077) 를 민원(民願)에 따라 팔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해미 영장(海美營將) 이영철(李永喆), 충주 영장(忠州營將) 한명기(韓命祺) 등을 본도의 병사(兵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대사간 김이희(金履禧)가 상소한 것을 인하여 도적을 잘 다스리지 못한 영장을 거듭 신칙하여 살피게 한 것이었다.
5월 24일 신유
우의정 박종악을 파직하고,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돈유(敦諭)하였다. 박종악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윤4월 27일 연본(筵本) 하교를 읽어보니 글자마다 정미하고 말씀마다 측달(惻怛)하여 족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울릴 만하였으니, 오늘날 신하 된 자가 이 연교를 받들면 그 누군들 마음이 찢어지고 애가 끊어져 실성 통곡(失聲痛哭)하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 성상께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이 없이 외롭게 상중에 계셨으며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며 30년 세월을 하루처럼 지내셨습니다. 먹을 때나 쉴 때, 잠잘 때나 깨는 사이에 백성에 대한 근심으로 눈썹이 펴지지 않았고 마음속에서는 번뇌와 울적함이 맺혀셔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형법을 크게 행하고 정사(情事)를 쾌히 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다만 일이 더없이 중대하고 엄격한 자리에 관계되기 때문에 높고 두터운 천지를 부앙(俯仰)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참아오셨으니, 전하의 마음은 이처럼 궁하고 괴로우셨습니다. 연교(筵敎)에서 ‘세월이 오래되어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 근래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아, 그 훌륭하심은 비록 요(堯)·순(舜)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집안에서 듣고 본 것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계부(季父) 박명원(朴明源)에게는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이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신이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해와 달처럼 밝으심으로도 무엇을 말미암아서 모조리 밝히겠습니까. 옛날 망극한 일이 있던 처음에 여러 도위(都尉)가 등대하였는데, 신의 계부는 피눈물이 얼굴을 덮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앞자리에 한참 동안 계셨는데, 옥색(玉色)이 처창(凄愴)하시어 군신 상하가 차마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다가 이어 물러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후에 매양 밀실(密室)에 들어가 경모궁(景慕宮)의 유필(遺筆)을 받들어 구경하고는 기어이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신이 일찍이 조용히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울먹이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경모궁께서는 예용(禮容)이 장숙(莊肅)하여 천인(天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예도(睿度)가 넓어서 성신(聖神)의 자품(資稟)이 계셨다. 우리 임금의 아들로 세자의 지위에 계시어 전궁(殿宮) 사이에 지극한 즐거움이 피어오르는 듯하고 화기(和氣)가 가득 넘쳐흘렀다. 우리 영고(英考)께서 매양 예용(睿容)을 대하실 때마다 기쁨이 천안(天顔)에 넘치셨으니 비록 문왕(文王)의 지극한 자애와 주공(周公)의 뛰어난 효도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대리(代理)의 명을 받자 팔도가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불행하게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한 종류의 군흉(群凶)이 안팎에서 결탁하여 미혹시켜 어지럽히고 선동하였는데 우리 두 성모(聖母)께서 돌보아 주고 보살펴 주심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저 군흉이 조짐은 이루었으나 그래도 성공하지는 못하였었다. 승하하신 후 무인년·기묘년 이후에 이르러서는 군흉이 술잔을 들고 서로 축하하면서 난리를 선동함이 더욱 심해지고 무핍(誣逼)함은 더욱 급해져, 안에서는 유언 비어를 퍼뜨리고 밖에서는 상소하여 겉모습만 바꾸어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안금장(安金藏)078) 처럼 한 번 죽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평민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모든 세상일에 더는 마음을 쓰지 않고 마치 궁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자처럼 지낸 것이 30년이었습니다.
아, 흉역의 무리가 나와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니 신이 계부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서성거리며 기가 막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말을 하고자 하니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감히 쉽게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이 있고, 말하지 않으려니 위로 우리 성상께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신의 계부의 유충(遺忠)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즈음에 영남 유생의 만인소(萬人疏)가 나왔고 중신(重臣) 이병모(李秉模)가 이어서 또 성토하였습니다. 이 의리는 전하께서 잠시도 잊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구하시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애통한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팔방에 크게 고하기를 ‘우리 선대왕의 하교가 이미 이처럼 정령하고 간절하셨으니 선대왕의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고, 우리 소조(小朝) 저하께서 일찍이 주연(胄筵)에서 하명하시기를 「홍계희(洪繼禧)는 강충(江充)이다.」라고 하셨다. 예교(睿敎)가 또 이렇게 해와 별처럼 밝으니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의 하늘에 닿는 죄가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하소서. 이밖의 여러 역적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극도로 찬 자에게도 빨리 분명한 명을 내려 어서 천토(天討)를 행하고 아울러서 한 통의 문서를 만들어 금석(金石)에 새겨야 합니다. 연교(筵敎)에서 말씀하기를 ‘혹 주토(誅討)를 크게 행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혼은 비록 어두운 가운데서 기뻐하시겠으나 밝게 오르내리는 경모궁(景慕宮)의 영혼이야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대저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은 본디 멀지 않아서 인정이 있는 곳에 의리가 부쳐져 있고, 의리가 부쳐져 있는 곳에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전하의 지극한 정을 이미 펴면 의리가 밝아지며, 의리가 이미 밝아지면 신리 역시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대왕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으며, 경모궁 역시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중신(重臣) 서유린(徐有隣)의 소비(疏批)를 보건대 경서(經書)를 인용하고 의리를 근거해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는데, 신은 반복하여 아뢰겠습니다. 《명의록(明義錄)》 한 부(部)는 옛날의 《춘추》이며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그 법도가 하나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을 따지자면 무인년·기묘년은 근본이고 을미년과 병신년은 말엽입니다. 《명의록》 가운데서 단지 을미년·병신년만 들고 무인년·기묘년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본말(本末)의 뜻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명의록》 상편(上篇)을 편찬하되 첫머리에 상이 펼친 대고(大誥)의 글을 싣고 여러 흉적이 무인년·기묘년과 을미년·병신년이 원류(源流)와 맥락(脈絡)임을 두루 열거하며, 부록(附錄)에다가 재한(載翰)의 무리가 흉악한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써서 스스로 천주(天誅)를 범한 것을 실어서 간행된 《명의록》과 합쳐 한 질(帙)을 만든다면 어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루는 하나의 큰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아,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두 역적의 지극한 요악(妖惡)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고 고금에 없던 바입니다. 하잘것없이 천박한 그들에게 처음부터 조무래기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그가 어찌 감히 마음을 연결하여 전후에서 맞장구를 치며 밝은 해 아래에서 날뛰었겠습니까. 연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성한이 임금의 원수고 나라의 역적이 된 것은 한결같이 홍인한과 구선복과 같으나 끝내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법을 쓰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그가 참으로 무인년 연간의 일을 몰랐다고 한다면 흉소(凶疏) 가운데서 일문 일답(一問一答)으로 반복하여 억양(抑揚)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익히 알고 익히 들은 것이 불을 보듯 환하니, 흉역(凶逆)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은 우선 그 지엽(枝葉)은 버려두고 곧바로 그 근저(根柢)만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김종수(金鍾秀)는 천성이 험악하고 처신이 간특하여 뱃속에 가득찬 것은 모두 여기(戾氣)뿐이요 발언과 행사가 모두 화심(禍心)뿐인데 자칭 사류(士類)라 하여 마음을 속이고 세상을 속였습니다. 만년에는 역척(逆戚)에게로 돌아가 벼슬을 얻고 잃는 것에 대한 염려만 하였습니다. 홍국영(洪國榮)이 정권을 잡자 노예처럼 굽실거리고 파리나 개처럼 아첨하며, 심지어는 그의 형 김종후(金鍾厚)에게 권하여 글을 올려 국영을 유임시키기를 청하면서 천고의 기남자(奇男子)라고 하였으니, 이런 일은 거간꾼만도 못한 짓인데 어찌 사대부의 소행이라 하겠습니까. 아주 작은 원한으로 반드시 남의 가족을 멸망시키고자 하고 성세(聲勢)를 떨치게 되면 반드시 자기가 위복(威福)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권세를 부리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같은 무리는 옹호하고 다른 당(黨)은 공격해 부딪치기만 하면 반드시 부수어버립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합니다. 오늘날 스스로 도망한 도적을 숨겨주는 숲과 참새를 몰아넣는 숲이 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일찍이 후익(後翼)을 심복으로 삼아 후익이 역적질을 하였고, 지금 구종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일은 바로 김종수의 창귀(倀鬼) 노릇을 한 것이며, 성한의 부도(不道)한 말 역시 종수가 효시가 됩니다. 아, 종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치우치게 은우(恩遇)를 입어 이도(泥塗) 가운데서 발탁하여 보필하는 반열에 두었으니 예대(禮待)의 후함과 위임의 두터움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그 역시 사람일 뿐인데 조금이라도 은덕을 갚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채우기 어려운 큰 욕심을 두어 성한과 구종 같은 자를 애지중지하여 길러서 긴밀하게 모의하고 난만(爛漫)하게 관통(關通)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무리들이 이목(耳目)에 물들고 문견이 익숙해져 그 말과 의논을 시귀(蓍龜)처럼 보고 그의 일을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본받았습니다. 그러니 두 역적은 종수의 괴뢰가 되고, 종수는 두 역적의 두뇌가 되어 죄악이 두 역적보다 더 극심하고 큽니다.
또 연전의 선희궁(宣禧宮)의 개호(改號)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신의 계부가 글을 진달하여 청한 것은 오로지 고심과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 성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어 그 글을 묘당과 관각(館閣)에 내려 궁호 고치기를 의논하였는데, 종수는 소본(疏本)을 보고서 까닭없이 부름을 어기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임금을 이기려 하고 의리를 저버린 것은 이미 하나의 기량(伎倆)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이런 의리에 관계된 것은 일체 죽도록 모피한 것이니, 아, 역시 흉패(凶悖)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선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고 성한과 구종 두 역적은 한결같이 대신과 여러 신하의 청을 따르시어 백대 아래에 의리를 밝히고 반석과 같은 기반 위에 국가를 두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밤낮으로 염려하고 힘쓰는 것은 오직 세신(世臣)을 보호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거기다가 겹쳐서 근래 날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날마다 차마 볼 수 없는 글을 보는데, 비단 감히 하지 못할 뿐더러 모두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한 달 넘게 수응(酬應)하던 나머지에 9일 동안 재계(齋戒)하다가 병이 생겨 기운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제께 이후부터 의리가 크게 정해져서 우부(愚夫)들도 모두 알게 되어 조정의 기상이 편안해지고 심신(心神) 역시 분발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어제 늦게 우상의 상소를 보았는데 한 번 보고 놀라고 다시 보고 놀랐으며 보고 또 보고 놀라서 오랫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으니, 고금에 어찌 일찍이 대신이 대신을 논함이 그처럼 위험하게 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임용한 것이 어찌 그전 우상에게 사정을 두어서 그랬겠는가. 이 우상을 임용한 것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데 우상의 이번 거조는 어째서 하게 된 것인가. 비단 한때의 공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을 지목(指目)한 말을 모아서 두루 그의 평일을 일일이 들면서 구종(九宗)과 유성한(柳星漢)의 근저가 된다고 귀결지었다. 심지어 연전 선희궁의 개호 때 위패(違牌)한 한 가지 일을 바로 감히 말해서는 안 될 의리에 잇대어 놓았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때의 곡절은 일찍이 익히 알아서 고(故) 정승 이성원(李性源)을 연석에서 배척해 논죄(論罪)할 때 역시 다소 하교한 바가 있었다. ‘의열(義烈)’이란 두 자로 개칭하는 것이 적합한 지의 여부는 전 우상이 스스로 와서 의논하였는데 그 사이에 무슨 딴 말이 있었겠는가. 이는 중이 고기를 먹는다고 꾸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말로 변명할 것도 없다. 성한과 구종의 일에 이르러서는 천만 이치에 가깝지 않다. 가사 전 우상이 참으로 친밀한 자취가 있었다면 능침(陵寢)에서 하마(下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책망하고 가르쳐 다시는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겠는가. 전 우상은 또 매우 일을 보는 것이 민첩하니, 설혹 남의 이름을 이루는 데 그의 힘을 도와주기로 했다면 마땅히 반드시 이름을 이루는 일로써 가르쳐 주었을 것이지 어찌 분명하게 우러러 본받았고 자신이 한 방 안의 가까운 사이에서도 일찍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을 떠들어대도록 권하여 함께 붙잡고 만 길 구덩이로 빠지는 것을 달게 여기겠는가. 이밖의 여러 조항은 모두 그만두더라도 ‘홍국영에게 노예처럼 굽실거렸다.’는 것 역시 어찌 국영을 두려워해서 그랬겠는가. 사분(私憤)을 겸하여 임금의 원수를 갚는 데 솔선해서 앞장설 자는 조정에 가득한 잠신(簪紳) 가운데 단지 그의 집안이 있을 뿐이었으니, 국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일을 구제하기 바빠던 것이다. 그의 형을 산림(山林)에서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한 것 역시 후의 범죄가 나타나지 않음을 말미암아서였다. 전 우상은 바로 나라쪽 사람인데 어찌 도적이 도망해 숨는 숲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전 우상은 새매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혹시라도 새가 모여드는 숲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말을 이미 남김없이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멀리 찬축하는 율(律)까지 비의(比擬)하였으니 전 우상이 우상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처럼 악착하는 일을 하는가. 대저 우상은 누구의 집안이며 누구의 조카인가. 매복(枚卜)079) 하는 날에 정성껏 신신 당부하면서 면려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우상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우상이 나를 등진 것인가, 내가 우상을 등진 것인가. 말하는 자야 어렵지 않겠지만 듣는 자가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10 명의 우상이나 1백 명의 우상이 있다 하더라도 전의 우상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전 우상을 주연(胄筵) 때부터 여항(閭巷)에서 만나 지위가 암랑(巖廊)에 이르기까지 이미 돕고 또 도왔으니, 우상은 전의 우상에게 어떤가. 내가 우상에게 비록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려함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하니 다시 더 머뭇거리겠는가. 그 역시 대신이요 이 역시 대신이니 예(禮)는 치우치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이는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이런 것에 만약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세신(世臣)을 보호할 수 있겠으며 세도(世道)를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에게 우선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내가 어찌 경을 잊어버리겠으며, 내가 어찌 경을 버리겠는가.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비록 1백 사람이 외쳐 대더라도 마땅히 한결같은 예로 귀기울여 믿을 이치가 없다. 더구나 경은 이전에 몇 번이나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를 당했던가. 내가 이미 당일에 심력(心力)을 다 썼으며 결코 동료 정승의 말에 경중을 두어 한 번도 치우치게 의지하지 않았으니 경은 모름지기 나를 용문(龍門)의 지주(砥柱)처럼 굳게 믿으라. 원소(原疏) 1 본(本)을 또 사관(史官)에게 베껴 주고 이번의 이 전교에 만일 모조리 변석(卞釋)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역시 모름지기 낱낱이 부주(附奏)에 신폭(申暴)해서 전 우상에게 전유(傳諭)하라."
하고, 마침내 박종악의 상소에 비답을 내리기를,
"대신의 상소에 이미 처분함이 있었다 하여 비답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대략 몇 줄에 본의(本意)를 선포하니, 전교 가운데 있다. 위 조항에 운운(云云)한 것은 구전 하교를 보지 못한 듯한데, 이는 우선 생략한다."
하였다.
5월 25일 임술
공주목(公州牧) 옥천군(沃川郡)에 홍수가 나 1백 40여 호가 잠기고 59인이 빠져 죽었다. 관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위로하라고 명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의 재전(齋殿)인 어목헌(禦牧軒)을 어진봉안각(御眞奉安閣)이라 칭하고, 원관(園官)이 각령(閣令)을 겸하고 참봉(參奉)·수복(守僕)이 별감(別監)을 겸하며 하속(下屬) 역시 겸관(兼管)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위장(衛將) 2원(員)은 본읍의 이교(吏校) 가운데서 차출하게 하되 아울러 본부의 대동결전(大同結錢)에서 요포(料布)를 더 주게 하였다. 인하여 본각(本閣)과 해조에 명하여 수직(守直)·봉심(奉審)·수리(修理)하는 식(式)은 절목(節目)을 만들어 계하(啓下)하게 하였다. 수직관(守直官)은 매 5일마다 봉심하고, 본부의 부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 사이에 한 차례 봉심하며, 본도의 감사는 봄·가을에 각기 한 차례 봉심하고, 각신(閣臣) 역시 봄·가을에 봉심하는데, 본부의 부사와 본도의 감사, 각신이 봉심할 때에는 모두 직접 대면하여 봉심하게 하였다.
호남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장흥(長興) 보주사(寶珠寺)가 횡렴(橫斂)하는 폐단을 신칙하여 금하게 하였는데, 보주사는 바로 현륭원의 향(香)과 탄(炭)을 진배(進排)하는 곳이다.
5월 26일 계해
병조가 아뢰기를,
"어제 저녁 때에 한 서리(書吏)가 차자를 가지고 들어왔기에 물었더니 ‘의정부의 서리 김동선(金東善)인데 좌의정의 차자를 가지고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믿고서 의심없이 들여 보냈는데 숙장문(肅章門) 안에 이르러서 간 곳이 없어 정원에 물었더니, 역시 차자를 올린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매우 괴이하고 의아하여 다방면으로 찾았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조금 전 금호문(金虎門) 수문장 김복상(金福祥)이 와서 고하기를 ‘오늘 문을 연 후 한 서리가 들어오려고 하였는데 거동이 수상하기에 붙잡아서 힐문했더니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의 손자 김동선(金東善)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문금(門禁)이 지엄한 때를 당해서 이처럼 함부로 들어온 일이 있었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한 후에 와서 두드린 자를 본조 이하 해조에서 추문하여 초기(草記)하는 것은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정한 규정이 있다. 근래에 문금이 비록 엄하나 입직 당상이 원정(原情)을 가져다 본 후에 받아들여야 할 일에 관계되면 즉시 초기해야 하니, 비단 근래의 예가 그럴 뿐만 아니라 일전에 재신(宰臣) 이병정(李秉鼎)의 일 역시 그러하였다. 참으로 마땅히 호소할 일에 속하면 조관(朝官)과 백도(白徒)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설혹 잘못해서 금호문을 거쳤더라도 마땅히 즉시 돈화문(敦化門)을 가리켜 주어 보내야 했으며, 더구나 이 초기 가운데 ‘어제는 차자를 올리려는 서리로 여겼었고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제는 생기(省記)가 없이 대궐 안에 허접(許接)하였는가. 비록 예사로운 소원(訴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면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대신의 집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겠는가. 앞의 일로 보면 문금(門禁)이 전혀 없었던 죄가 있고 뒤의 일로 보면 소원을 막은 죄가 있으니, 해당 입직 당상은 체차하고 낭관은 잡아다가 조처할 것이며 수문 장졸은 엄히 곤장을 쳐 취초하라."
하였다.
광주(廣州) 유학(幼學) 김동선이 원정에 아뢰기를,
"신의 조부 김종수가 상중에 있던 날, 갑자기 박종악(朴宗岳)의 무고(誣告)를 받았는데 여러 역적의 수뇌부라고 지목했으니, 죽이고 말 계책을 한 것입니다. 신의 조부는 늙고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터에 놀라고 두려워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느라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하였습니다. 신의 급박한 사정(私情)이 천지 사이에 아득하던 차에 천지에 망극한 은혜를 입어 8백 74자(字)의 전교를 즉시 내리셨는데, 글자마다에 슬픔이 어려 귀신도 울릴 만하였으니 마치 자애로운 부모가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려는 어린 아이를 건져 내면서 순간을 다투는 것과 같았습니다. 대체로 밝게 변석(辨析)하는 도리에 있어서 조금의 유감도 없어서 비록 신의 집안으로 하여금 스스로 아뢰게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습니다.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이하의 몇 구절 하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밝은 해가 중천(中天)에 있는 것을 보는 것같아 정상을 도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울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 이런 성명(聖明)을 만났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라고 하고 신도 문을 닫고 감격해 울면서 하늘에 감사하였으니, 신의 온 집안 식구가 몸이 가루가 되고 결초 보은한다 해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여러 역적과 서로 알고 지냈는가의 여부는 신의 집에서 스스로 말할 것이 아니지만 비록 하늘의 해처럼 밝으심으로도 어찌 굽어 비추시겠습니까. 역적 후익(後翼)과 유성한(柳星漢)은 신의 조부가 비단 평소에 얼굴을 모를 뿐만 아니라 비록 그의 족척(族戚)·인우(姻友)에서 천류(賤流)·하배(下輩)로 그의 집에 드나드는 자까지 애당초 안면이 없는 자들이니 ‘심복이 되어 모의를 서로 통했다.’라고 한 한 조항은 가죽 없는 털과 같습니다. 한 번 흉소가 나온 후에 신의 조부는 최마(衰麻)를 몸에 걸치고 있어서 비록 피를 토하며 치토(致討)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분노하고 가슴 아파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하였습니다.
역적 윤구종(尹九宗)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데, 사천(沙川)에서 몽촌(夢村)으로 이사한 후에 역적 구종이 충주(忠州)에서 상경할 때 도중에 몇 차례 찾아왔지만 이미 출륙(出六)080) 한 지 여러 해 된 후여서 참하(參下) 때 일찍이 침랑(寢郞)을 지냈는지의 여부는 그후에도 원래 들어서 안 일이 없었습니다. 신의 조부는 그의 사납고 망령됨을 미워하여 한 번도 일찍이 부드러운 안색으로 시사(時事)를 논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故) 참판(參判) 김광묵(金光默)이 변경을 안찰할 때 도중에서 고 참판 정이환(鄭履煥)을 찾아보고 정이환의 말을 편지로 알려오기를 ‘듣자니 윤구종(尹九宗)이 친구의 집을 드나들고 있다 하는데 이는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이런 뜻을 친구에게 전해주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두 재신은 모두 신의 조부와 정분이 두터워 말해 준 것이요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구종이 권세 있는 사람을 찾아보고 양면(兩面)으로 이야기하며 남의 음사(陰事)를 들추어낸 자취가 또 무수하게 탄로났으니 이후부터 신의 조부가 역적 구종을 대한 것이 어떠했는가를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다만 그의 요사한 성품에 또 거기다가 말하기를 좋아함을 말미암아 매양 신의 조부와 서로 친한 모양을 해 가는 곳마다 과장(誇張)할 밑천을 삼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 서로 친한 것으로 잘못 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적 구종이 하마(下馬)하지 않은 역절(逆節)과 두 글자의 흉언(凶言)은 그처럼 천생(天生)이 흉악한 자 이외에 비록 조금 각성(覺省)한 자라면 결코 마음에 싹트거나 입에서 낼 이치가 없습니다.
신의 조부의 입심(立心)·지론(持論)의 본말은 성명께서 통촉하신 바인데 이로써 기르고 긴밀하게 모의하여 익숙히 견문한 것으로 돌리고자 하니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아는 자라면 차마 하지 못할 바이고 그 계책 역시 허술하다고 하겠습니다. 남을 악역(惡逆)으로 모함하는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데 더구나 허다한 역적의 근저(根柢)와 두뇌(頭腦)로 남을 몰아넣고자 한다면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는 연후에야 반좌(反坐)의 율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양자를 대질시켜서 실상을 조사해서 귀일(歸一)시켜 고한 바가 무함인가 무함이 아닌가가 이미 판명되고 나면 대역(大逆)과 반좌의 율을 그 즉시 결단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신의 조부가 현차(縣次) 가운데서 거적을 깔고 밤낮으로 하늘에 축원하며 숨이 끊어지기 전에 천지 사이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안에서 벗어나고자 바라고 있지만 최마를 입은 몸이어서 상소하여 청할 길이 막혔습니다. 특별히 변함없는 은혜를 내리시어 빨리 조사하라고 명하소서.
신의 조부의 원수가 세상에 넘치고 있음은 성명께서도 일찍이 민망스럽게 생각하신 바입니다. 흉역의 남은 무리가 밤낮으로 이를 갈면서 틈을 엿보고 있음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신의 조부 역시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여긴 지 오래였으며 특히 성명께서 위에 계시니 감히 살아날 계책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형세는 이미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이 우러러 믿는 것은 단지 해와 달처럼 밝아서 깊숙한 곳까지 밝히시는 성명입니다. 천청(天聽)을 놀라게 한 죄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변석(辨析)하여 환히 알게 한 바는 징을 치고 북을 울리지 않아도 그 허실과 망진(妄眞)이 이미 촛불과 같고 시귀(蓍龜)와 같이 판결되었다. 이 원정(原情)을 보건대, 그의 조부 대신(大臣)은 후익·유성한 등과는 서로 얼굴을 모를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인우(姻友)나 후익과 성한에게 드나드는 사람들도 본래 모른다고 하였다. 구종의 일은 대신이 비루하게 여겨 마음으로 끊었으며 구종이 가는 곳마다 자랑하고 팔았다는 등의 일에 대한 증거가 원정에 분명하니, 더욱 알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쌍방을 대질시켜 실상을 조사하여 귀일(歸一)시키라.’고 한 데 이르러서는 천만 사리에 맞지 않으니, 공정(公庭)에서 둘을 대질시키겠는가, 아니면 사실(私室)에서 대질시키겠는가. 대신이 대신을 논박함은 예전에 듣지 못했던 바인데 대질시켜 달라는 청은 어찌 더욱 국체(國體)를 손상시키지 않겠는가. 일전에 한 별도의 유시가 이미 귀일시키는 절박(節拍)이 되었고 지금 내린 판사(判辭)가 또 귀일시키는 결말이 되었다. 조가(朝家)에서 이에 대해 어찌 별도의 처분을 하겠는가. 이 판부(判付)를 가지고 돌아가 그의 조부 대신에게 전하라는 일로 분부해서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5월 27일 갑자
이보다 앞서 강원도 어사 홍대협(洪大協)이 본도 열읍(列邑)의 폐해를 조목별로 진술하여 서계하였는데, 이 일을 본도에 내렸다. 도신(道臣) 윤사국(尹師國)이 아뢰기를,
"간성군(杆城郡)에서 생산되는 삼(蔘)으로 인한 폐단은 지금 어사의 서계를 인하여 10냥(兩)의 공삼(貢蔘)을 또 경공(京貢)으로 삼으면 먼저 승(僧)·해(海)·역(驛)의 삼색(三色)은 영원히 징렴(徵斂)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신이 정미년의 예에 의해서 군가보(軍加補)의 【 간성군에는 군령삼(軍零蔘)·가삼(加蔘)·보축삼(補縮蔘)이 있는데, 이를 이른바 군가보라고 한다.】 삼가(蔘價) 1백 42냥을 역시 덜어내어 영원히 급대(給代)하고, 해당 군수(郡守) 역시 정미년의 예에 의해 31냥을 영원히 급대하면 전의 해·역·승을 혼합해 징수할 때에 비해 3분의 2를 감급(減給)하는 것이니 해당 군의 공삼(供蔘) 폐단이 이로부터 제거될 것이며 민력(民力) 역시 조금 펴지게 됩니다. 해당 군의 포보(砲保) 1백 67석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제감(除減)하게 하면 매 식년(式年)에 승호(陞戶) 1명씩을 뽑아서 올리는 것도 저절로 논의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도내의 원래 정해진 승호의 숫자는 합계가 20명인데 17읍은 뽑아 내고 9읍은 뽑아 올리지 않는데, 이번 식년(式年)부터 시작해서 위의 9읍 가운데 1식년에 1명씩 번갈아 분정(分定)해야 합니다. 포보의 급대는 신이 가포(價布)를 대급(代給)한 숫자를 가지고 계산하여 곡물에 상당한 값으로 짐작해 헤아려 보니, 1년치 가포를 납부한 후의 돈이 도합 3백 80냥이 됩니다. 매년 각종 곡식 2백 70석을 팔아서 돈으로 만든 연후에야 1년에 대납(代納)할 가포의 수에 당하게 되는데, 판매하는 규정을 만약 상정례(詳定例)에 의하여 작전(作錢)한다면 시절에는 풍년·흉년이 있게 마련이고 값 역시 떨어졌다 올랐다 하는 만큼 가본(價本)을 일정하게 하면 도리어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년 시가(市價)에 따라서 돈을 만들어 급대해야 합니다. 곡부(穀簿)에서 조치해 내는 숫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넉넉하게 조치해 준 연후에야 나머지를 취해 환보(還報)할 수 있기 때문에 상평창과 진휼청의 모곡(耗穀) 가운데서 전미(田米) 4백 석, 벼와 콩 각 1천 7백 석, 소두(小豆) 1천 석, 목맥(木麥)081) 4백 석씩 합계 5천 2백 석을 덜어 내어 ‘간성 포포 급대(杆城砲布給代)’라고 이름하여 회안(會案)에 환부(還付)해야 합니다. 금년을 시작으로 해서 매년 급대조 2백 70석을 예에 의해 발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외에 남은 4천 9백여 석은 원주(原州)의 보삼환(補蔘還)의 예에 의해 모조리 나누어 주고 모곡 전부를 취해 쓰면 임자년부터 신유년까지 10년 동안에 7천 9백 58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중 5천 2백 석은 최초에 조치해 준 상평청과 진휼청의 모곡 숫자를 다시 갚고, 그 나머지 2천 7백 58석은 그대로 원환(元還) 취모(取耗)로 하여 급대하는 뜻으로 정식하여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전부(田賦)의 감급은 조정에서 연달아 감해 준 것이 지극하였는데 이제 어찌 막중한 전부를 계속 감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설혹 조정에서 굽혀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결(結)마다 비록 약간의 전냥(錢兩)을 감한다 하더라도 감한 총계의 숫자가 적어도 1천 금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매년 1천 금의 급대를 어느 곳에서 만들어내겠습니까. 실로 의견을 갖추어 진술할 계책이 없습니다.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은 매양 성망(聲望)도 없고 이력(履歷)도 없는 잔열(殘劣)한 무변(武弁)을 차출해 보내기 때문에 규찰(糾察)하는 방도를 전혀 모르고 어리석고 사나운 교졸(校卒)이 전혀 명(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경기(京畿)의 예에 의해서 무변의 자급(資級)을 올리는 과(窠)로 만든다면 스스로 사람을 가릴 수 있는 동시에 도둑을 없애는 방법도 거의 허술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의 거처(居處)에 대한 호위도 다른 도와 별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약간의 재력을 얻는다면 지방(支放)에 보태고 해우(廨宇)를 수선할 수 있을 것이니, 우선 변통한 후 새 중군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해 정할 수가 있습니다.
강릉(江陵)의 삼화세(蔘火稅)는 이번에 감해 준 것이 무려 20결(結)이나 되는데 영원히 어염세(魚鹽稅)와 결전(結錢)으로 급대한다면 이후에는 거의 백징(白徵)하는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해당 고을의 영서(嶺西) 6개 면(面)의 각 창(倉)에 환자를 3분의 1을 한정해서 돈으로 만들어 이송(移送)하라는 영(令)이 있는데 그 숫자가 거의 1만 2천, 3천 석에 이르니 1만 석을 돈으로 만들면 그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고을로 하여금 받아가지고 가 곡식으로 바꾸게 한다면 이쪽은 편하고 저쪽은 괴로워하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원주(原州)의 차좁쌀 5천 5백 석 역시 돈으로 만들어 바꾸게 했는데, 만약 상정가(詳定價)로 발매한다면 크게 백성들을 위하여 혜택을 입히는 정사가 되나 상정가로 무납(貿納)하게 하면 도리어 혹시 하리(下吏)가 간사한 일을 할 밑천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의 천견(淺見)으로는 양쪽이 다 편리한 방도가 있습니다. 본도에 있는 비국(備局)에서 관리하는 곡식은 바로 상정가로 급대하면 각 고을에 산재(散在)한 것을 매년 급대하는 것이 적어도 2, 3천 석에 밑돌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각 고을에 있는 구관곡(勾管穀)을 작량(酌量)하여 다른 아문(衙門)으로 이록(移錄)하고, 강릉·원주 두 고을에 있는 각 아문의 곡식을 이제 발매한 숫자에 맞추어 구관곡으로 이록하고 모두 상정가로 받아들인 후 상정(詳定)이 부족한 고을로 하여금 받아가게 하는 터전을 삼으면 되는데, 비록 이렇게 조치한다 하더라도 두 고을에서 돈으로 만든 숫자는 반드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내의 원상정(元詳定)의 부세(賦稅)로 낸 각종 곡식으로 매년 받아들인 숫자는 거의 1만여 석이 됩니다. 그중에서 본색(本色)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 이외에 그 나머지 곡물은 모조리 해당 고을의 환상(還上)으로 만든 후, 그 대신 역시 두 고을에서 돈으로 만들어 모조리 옮겨 조치해 사용한다면 두 고을의 환곡은 옮겨 바꾸지 않더라도 스스로 옮겨 바뀌게 되니 이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도내의 여러 폐해는 어사의 서계 이외에 또 한두 가지 변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월부(寧越府) 환곡(還穀)의 숫자는 2만 1천여 석에 이르러 한 호(戶)에서 받는 것이 거의 무려 10여 석이 넘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실로 지탱해 보존될 방도가 없으니, 역시 3분의 1은 돈으로 만들게 하되 조치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강릉과 원주의 예대로 한다면 매우 편리하고 좋겠습니다. 울진현(蔚珍縣)의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가포(價布)를 합당(合當)하여 상납하는 일은 일찍이 이미 장청(狀請)하여 윤허를 얻었는데, 이밖에 홍천(洪川)·양양(襄陽)의 4당(當), 금성(金城)의 3당, 강릉의 2당은 1당으로 합하여 8월에 상납하게 하소서. 철원(鐵原)의 기병 3당은 1당으로 합하여 9월에 상납하고, 원보병(元步兵) 및 옹진(瓮津)에서 오는 보병은 1당으로 합하여 2월에 상납하게 하고, 평강(平康)의 6당 안에서 1번(番)과 3번은 전대로 상납하되 그 나머지 4당은 1당으로 합하여 9월에 상납하게 하고, 정선(旌善)의 4당 안에서 6월 당(六月當)은 4월 당에 합치고 12월 당은 10월 당으로 합쳐 2당으로 나누어 상납하게 하소서. 원주의 4당은 2당으로 합쳐 2월 및 10월에 상납하고자 합니다. 위 항(項)의 11개 읍 역시 울진의 예에 의해서 당을 합쳐서 상납하게 허락하소서. 이밖에도 전에 포(布)로써 합당하여 상납한 고을이 있습니다. 이번에 대전(代錢)으로 한 후에는 포를 납부할 때의 합당하는 예에 의해서 모두 합당하여 상납하게 해야 하니,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홍대협에게 명하여 묘당과 의논하게 했더니, 묘당에서 모두 편리하다고 하므로 모두 따랐다.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원임(原任)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광주부(廣州府)의 옥(獄)에서 자리를 깔고 엎드려 명을 기다리면서 아뢰기를 ‘그저께의 전교와 오늘의 판부(判付)로 천지에 사무치는 억울함을 남김없이 씻었으나 오직 조사해 달라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도 청을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질 신문하기를 청한 것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악역(惡逆)으로 고발된 사람은 모름지기 고발한 사람과 더불어 조목별로 분석하여 진상을 밝힌 연후에야 허실이 비로소 판명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상께서 특별히 소석(昭釋)을 내리시더라도 말한 자의 말은 그대로 남아 있어 저는 끝내 천지 사이에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저를 사패(司敗)에게 넘겨서 성상께서 모든 일을 대신에게 묻는 예(禮)로써 말한 자에게 물으시어 말한 자의 말로써 낱낱이 대답하게 한다면 대질 신문하지 않더라도 결말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주(州)의 옥문 밖에다 자리를 깔고 엎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기 감사의 장계를 인하여 경이 현옥(縣獄)에서 명을 기다리면서 한 말을 보고 한나절 동안 익히 생각해 보았으나 결코 따를 도리가 없다. 경은 비록 말하기를 「대신에게 물어보는 예에 의해서 말한 자에게 묻고, 말한 자의 말로써 다시 물으면 대공(對供)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으나, 경 역시 대신이요 그 역시 대신인데 그에게 캐물어 조사하고 다시 경에게 질문하는 것은 비단 일의 체면이 천만 말이 아닐 뿐더러 언외(言外)가 편리하지 못하니 또 반드시 묵회(默會)해야 할 것이다. 별유(別諭) 및 판사(判辭)에서 도리와 마음을 곡진하게 하였다. 내 마음이 이러하니 공의(公議)를 볼 수가 있으며, 그의 말이 모두 근거 없는 데로 귀결되는 것은 내가 밝히고 경이 스스로 밝히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마땅히 분명하게 될 것인데 경은 어찌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청을 하여 절박(節拍)을 삼는가. 백 번 생각해도 한 대신에게 묻고 또 한 대신에게 묻는 것은 크게 불가하니, 크게 불가하다는 것은 비록 길을 막고 물어보아도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후회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경들의 「이미 안정되고 이미 다스려졌다.」는 말을 지나치게 믿어 사람을 쓰는 데 방도가 없어 이번 사단(事端)을 부른 것이다. 지금의 방도로는 오직 내 말만을 듣고 오직 나만을 믿어서 광주리에 가득찬 비방이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그치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그렇게 하면 비록 우상 같은 자가 10명이 나온다 하더라도 단지 수고만 할 뿐 무익함을 보게 될 것이다. 경은 아무쪼록 대명(待命)하지 말고 안심하여 집으로 돌아가라.’는 일로 전유(傳諭)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간 후에 복명하라."
하였다.
용담(龍潭)·진안(鎭安)·곡성(谷城)·임실(任實) 4현(縣)에 홍수가 나 민가 2백 60여 호가 떠내려가고 20여 인이 빠져 죽었다.
5월 28일 을축
호서(湖西)·관서(關西)에 설진(設賑)하였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마쳤다. 【 호서의 공진(公賑)은 공주(公州)·노성(魯城)·석성(石城)·정산(定山)·부여(扶餘)·연기(燕岐)·홍산(鴻山) 등의 고을로, 기민(飢民)의 총수가 2만 5천 82구(口)고 진곡(賑穀)은 2천 2백 49석(石)이다. 관서의 공진은 철산(鐵山)·선천(宣川)·용천(龍川)·귀성(龜城)·맹산(孟山) 등의 고을과 선사(宣沙)·아이(阿耳)·차령(車嶺)·우현(牛峴)·미관(彌串)·안의(安義)·서림(西林)·식송(植松)·산양(山羊) 등의 진(鎭)으로, 기민의 총수가 23만 8천 2백 79구고 진곡은 7천 8백 23석이며, 사진(私賑)은 초산(楚山)·위원(渭原)·곽산(郭山)·운산(雲山)·덕천(德川)·안주(安州)·창성(昌城)·정주(定州)·삭주(朔州)·강계(江界)·벽동(碧潼)·박천(博川)·영해(寧海)·가산(嘉山)·태천(泰川)·양덕(陽德) 등의 고을과 위곡(委曲)·임해(任海)·시채(恃寨)·창주(昌洲)·천마(天摩)·영성(寧城)·토성(免城)·막령(幕嶺)·구령(仇寧)·대파아(大坡兒)·대길호리(大吉號里)·신광(神光)·평남(平南)·추파(楸坡)·종포(從浦)·마마해(馬馬海) 등의 진으로 기민의 총수가 20만 68구이며 진곡은 6천 3백 59석이다.】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18면
【분류】구휼(救恤)
5월 29일 병인
전(前) 우상(右相) 김종수에게 유시하기를,
"광명을 기다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구종(尹九宗)의 아들 및 유성한(柳星漢)을 국문하기 전에는 본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서 아직까지 낭하(廊下)에서 대명하고 있다고 하는데, 경은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구종이 경을 팔고 다닌 종적은 경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며, 성한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는 것 역시 저절로 증거가 있는데 어찌 국문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경이 환히 해명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성한의 일은 이에 앞서 대신·삼사와 진신·장보의 상소에서 모두 허락하지 않았었다. 비록 관계됨이 막중하다 하더라도 소견이 조금 달라서 이렇게 한 것인데, 이제 별로 관계없는 이 일 때문에 도리어 종전의 뜻을 굽힌다면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다시 사관으로 하여금 명을 기다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전유하게 하라."
하였다.
5월 30일 정묘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옥천(沃川)·연산(連山)·예산(禮山)·청안(淸安)·정산(定山)·문의(文義)·회인(懷仁)·회덕(懷德)·석성(石城)·이성(尼城) 등 10고을에 홍수가 나 민가 4백여 호가 떠내려가고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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