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5권, 정조 16년 1792년 6월

싸라리리 2025. 8. 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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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무진

영숙문(永肅門)에서 윤대(輪對)하였다.

 

이조와 병조에서 세초 단자(歲抄單子)를 올렸다. 전교하기를,
"응당 그대로 둘 자 이외에 전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은 일이 세도(世道)와 관계되니 전대로 두고, 전 감사 박천형(朴天衡)은 일이 백성의 일과 관계되니 1등을 감하라."
하였다.

 

6월 2일 기사

이때에 영남과 호남에 홍수가 나 영남은 대구(大丘) 등 28개 고을에서 8백 25호가 떠내려가거나 묻히고 28명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으며, 호남은 전주(全州) 등 5개 고을에서 1백 58호가 떠내려가거나 깔렸고 8명이 빠져 죽었다고 양도의 관찰사가 상문하니, 전교하기를,
"영남·호남의 수재가 이렇게 엄청나니 매우 가엾다. 무너지거나 떠내려간 집은 속히 집을 지어서 머물러 있을 곳을 정해 주고, 가난하고 고독한 집에 대해서는 신구(新舊) 환자(還子)를 징수하지 말며, 가난하고 고독한 자는 아울러 신역(身役)도 징수하지 말며, 죽은 자의 생전 환자와 신역을 아울러 논하지 말라. 양도 영읍(營邑)에서 거행하는 근무 성적을 앞으로 혹 어사(御史)나 혹 선전관(宣傳官)·비랑(備郞)을 보내 추첨하여 적간할 것이니, 이로써 엄칙하라."
하였다.

 

6월 3일 경오

전 우의정 김종수(金鐘秀)에게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이조 판서 김이소(金履素)를 체직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사람의 말은 증명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어느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본직으로써 행공하기를 독촉하는 것은 예로써 부리는 뜻이 아니니, 행 이조 판서 김이소는 이제 우선 체직을 허락하여 즉시 올라오게 하라. 상소 이외에 아뢴 말에 이르러서도 역시 나오기 어려운 한 단서가 되는데,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분명하게 안다면 마땅히 즉시 산개(刪改)한 연후에야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하찮은 미관 말직이라 하더라도 결코 문제 밖의 명목을 우연히 삽입하여 한결같이 그대로 두어 사람으로 하여금 진퇴하기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중신의 거취이겠는가. 양사 역시 이런 뜻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조 참의 서매수(徐邁修)를 잉임시키고, 서유린(徐有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함경 감사 이문원(李文源)이 병으로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고 김희(金憙)로 대신하였다.

 

6월 4일 신미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정호인(鄭好仁)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대사간 김익휴(金翊休) 등을 추고하였다. 익휴가 유성한(柳星漢)의 일을 전하면서 전계(前啓)를 산삭하지 않았고 말이 김이소(金履素)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하교하여 논집해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니, 익휴가 비로소 삭거하고 마침내 진달하여 피혐하기를,
"합사(合辭)한 내용 중에 일이 중신 김이소에게 관계된 말을 산개하라고 명하셨으나, 대계(臺啓)는 사체가 매우 중하여 쉽게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전 하교(口傳下敎)까지 받고 보니 사의(辭意)가 엄절하였습니다. 신들이 스스로 돌아봄에 황송하고 부끄러워 비록 봉승(奉承)함을 면치 못했으나 대간의 풍도가 이미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청컨대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알(司謁)이 구전한 전교가 매우 온화하였는데 어찌 엄절하다고 하는가. 참으로 사주(使嗾)한 자취가 있다면 먼저 사주한 사람부터 그 시비를 논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공연히 문제 밖의 명목과 사실 밖의 논척으로 계(啓)도 아니고 소(疏)도 아니게 다른 사람을 성토하는 탄핵문에 삽입하는 것은 일반 관리에 있어서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중신이겠는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칙유(飭諭)를 인해서 산개하여 스스로 승순(承順)하는 과로 달게 돌아갔으니, 이로써 인혐하는 것은 오히려 가하다. 그러나 엄절하지 않은 구전 하교를 엄절하다고 한 것은 너무 제목을 잘못 붙인 것이니, 그대들을 추고하겠다."
하였다.

 

좌윤(左尹) 이병정(李秉鼎)이 상소를 진달하기를,
"신하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서 선대(先代)의 무함을 신설한 경우를 예로부터 어찌 한정하겠습니까만 어찌 신이 오늘날 입은 것과 같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선신(先臣)의 평생 동안의 뜻과 일은 신이 이미 일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대략 드러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선신이 4년간 약(藥) 시중을 들어 치우치게 사랑을 입었고, 서번(西藩)으로 나가기에 미쳐서도 총애하여 하사한 것이 보통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신사년 적신(賊臣) 김양택(金陽澤)이 김춘택(金春澤)의 가장(家狀)을 간행하면서 신의 증조부 정효공(貞孝公) 이언강(李彦綱)을 날조하여 무함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선신이 신의 백부(伯父)와 함께 연명으로 글을 올려 피를 뿌리며 변명하자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시고 해부에 명을 내려 추안(推案)을 조사해 내어 그 말을 지워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선신은 매양 이 일을 외우면서 감읍(感泣)하였습니다.
이제 선신이 무함을 당한 것이 사가(私家)의 날조한 문서에 비할 바가 아니요, 성상께서 기주(記注)를 조사해 내어 남김없이 소석(昭晰)하신 것이 당일 간개(刊改)하라는 은지(恩旨)와 부합됩니다. 번(藩)에 있을 때 공을 세운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말씀 드리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특별히 감탄하는 화곤(華袞)082)  을 내리고 연본(筵本)에 반시(頒示)하셨으니 그 은수(恩數)가 세상에 드문 것이었습니다. 신이 삼가 변무(辨誣)한 시말과 은언(恩言) 한 통을 가지고 선신의 사판(祠版)에 울며 고하였으니, 참으로 선신이 지각이 있다면 어찌 어두운 가운데서 흐느끼지 않겠습니까. 이번의 은혜로운 제수(除授)는 실로 옛날을 생각하여 고자(孤子)를 녹용(錄用)하는 성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서 비록 한 번 숙배 고사(肅拜叩謝)하지 않을 수 없으나, 신처럼 불충 불효(不忠不孝)한 자가 다시는 세상에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은 비단 신만이 스스로 맹세했을 뿐 아니라 천감(天鑑) 역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대개 신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마음만 믿고 곧장 행하여 한갖 하찮은 은혜라도 반드시 갚을 줄만 알고 함정이 앞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십전 구패(十顚九沛)하여 원수가 세상에 가득합니다. 하물며 4, 5년이래로는 위험한 기틀과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없는 곳이 없어서, 처음에는 신을 죽이려 하였고 마침내는 집안을 도륙(屠戮)하려는 계책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저 한 몸만 모함하더니 마침내는 선고(先故)를 모함하여 얽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음씀이 더욱 교묘하고 꾀를 냄이 더욱 참담합니다. 신은 망극한 은혜를 받은 몸으로 보살펴 주심을 못잊어 머뭇거리고 있다가 칼날을 받아 갑자기 죽더라도 본디 근심하기에 부족하지만, 위로는 우리 성주(聖主)께서 생성(生成)해 주신 남다른 은혜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선신이 지킨 혈충(血衷)을 더럽혀 충효 모두에 흠이 있게 되어 영원히 밝은 세대의 죄인이 되었으니, 자신을 돌이켜 보매 가슴이 무너지고 급박할 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지금 자처(自處)하는 의리는 오직 자취를 감추고 두루 돌아다녀 위험한 함정을 피해 성궐(城闕)에 몸을 의지하며 큰 은덕을 노래하여 때때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다시 고령(高靈) 등 16개 고을에서 1천 7백 48호(戶)가 떠내려 가거나 무너지고 1백 3인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으며, 남원(南原) 등 5개 고을에서는 6백 31호가 무너지고 9인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다고 계문하니, 전교하기를,
"한 동네에서 빠져 죽은 사람의 수가 많은 곳은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거나 혹은 흙을 쌓아서 해당 원이 뇌제(酹祭)를 지내게 하고, 호남에도 분부하라. 작년에 떠내려가고 무너졌을 때에 특별히 견휼(蠲恤)한 일이 있었는데, 영남의 도백(道伯)이 가장 분명하게 하지 못하여 10월에 이르러서도 민읍(民邑)에서 조정의 영(令)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었다. 더군다나 금년의 홍수가 을해년보다 못하지 않음에랴. 이처럼 미리 하교하였는데도 또 작년처럼 하여 적간(摘奸)에서 발각되면 도백은 곧장 나처 전지(拿處傳旨)를 받을 것이니 묘당에서는 알아두라."
하였다.

 

6월 6일 계유

형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을 병으로 체직시키고 심이지(沈頤之)를 대신 임명하였다.

 

6월 7일 갑술

관서(關西)의 조적(糶糴) 모미(耗米) 5천 석으로 도내 각 진보(鎭堡)의 공용의 부족분 및 진장(鎭將)의 늠봉(廩俸)에 충당하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병자

영남 영산(靈山) 등 7개 고을에서 2천 1백 67호가 떠내려 가거나 무너지고 30인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다.

 

6월 11일 무인

형조의 죄수 유사문(柳師文)을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해조에서 사문이 대계(臺啓)에 올랐다 하여 잡아다 가두었었다. 상이 연신(筵臣)을 대하여 여러 차례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해조에서 고집하여 석방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휼수(恤囚)라 말하여 방송하려 하면서 정원(政院)이 반드시 간쟁할 것을 알고는 이에 서소(西所)의 위장(衛將) 허상(許鏛)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출하여 금오(金吾)에 달려가서 형조의 사수(死囚) 이외에는 모두 즉시 방송하라 명하였다. 허상이 금호문(金虎門)에서 대죄한다고 말하면서 즉시 명을 받들지 않으니, 상이 허상을 잡아다가 금오의 당직(當直)에게 부쳤다가 곧 그 직을 빼앗고 향리로 내쫓고, 다시 오위 장(五衛將) 이휘(李彙)를 가승지로 차출하여 가서 석방하게 하고는 인하여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으로 제수하였다. 이에 정원과 삼사(三司)에서 상소하여 간쟁하였지만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2일 기묘

사문(四門)에 영제(禜祭)를 지냈다. 예조에서 시우(時雨)가 장마가 되어 농사에 해를 입힌다고 하여 날짜를 점치지 말고 영제를 행하자고 청하니, 전교하기를,
"마음속으로 빈 지가 비록 오래였으나 그것이 큰비가 올 때에 행하는 절차여서 우선은 형세를 보고자 하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입추(立秋) 전에 비가 개이도록 비는 것은 근거할 예가 충분하니, 하고자 한다면 어찌 내일을 기다리겠는가. 사문 영제의 향을 받아다가 오늘 하라. 대저 6월에 기청하는 전례를 거슬러 상고한 지 오래였으나 미처 보지 못하였고, 오직 병신년에 특교(特敎)를 인하여 한 번 행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찌 모방할 만한 전례(典禮)이겠는가. 한 예관의 견해로 경솔하게 넓혔다 좁혔다 해서는 안 되며,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거나 혹은 구대(求對)하여 품청(稟請)해야지 곧바로 초기(草記)로 청하는 것은 너무 경솔하다. 해조의 당상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이후에는 6월의 기청은 대신 및 구대(求對)가 아니면 혹시라도 경솔히 초기를 먼저하지 말라."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영제의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6월 14일 신사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이 아뢰기를,
"이번에 조선(漕船) 9척이 한꺼번에 침몰된 것은 이미 전례가 없는 바이며, 6월이 반이 지나가는데도 나머지 배가 아직껏 소식이 없습니다. 후창(後倉)의 조선 역시 각 고을을 지나온 형지의 장계가 없고, 우창(右倉)의 조선은 영종도(永宗島)에 와서 여러 날 동안 머뭇거리고 있으니 크게 나라의 기강에 관계됩니다. 세 조창(漕倉)의 차사원(差使員)을 한결같이 먼저 파직한 후 잡아오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인하여 명하기를,
"도백은 10등(等)을 월봉(越俸)하라."
하였다.

 

기전(畿甸)의 재해를 입은 곳에 구례(舊例)를 비추어서 메밀을 대신 심으라고 명하였다.

 

영남의 곡식을 저축하도록 신칙하였다.

 

6월 16일 계미

사관(史官)과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 오부(五部)의 무너진 집을 적간(摘奸)하고 별도로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 역서(曆書)를 옛 규례대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전년에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가 황력(皇曆)의 각성(各省) 절기(節氣) 횡간표(橫看表)를 모방하여 본국 각도의 절기와 시각을 추측해 권수(卷首)를 증보 편찬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각신 서유방(徐有防)이 「협기변방서(協紀辨方書)」를 감인(監印)하면서 인하여, 첨가하여 간행하는 것은 한갓 보기에만 좋을 뿐이며 본감(本監)의 사역(事役) 역시 미칠 수가 없으니 그만두기를 청하자, 따른 것이다.

 

6월 17일 갑신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참판으로, 서유린(徐有隣)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6월 18일 을유

승지와 각신을 중희당(重熙堂)에서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바로 자궁(慈宮)의 탄신(誕辰)이며 원자(元子)의 생일인데 원자가 바야흐로 시좌(侍坐)하고 있기 때문에 경들로 하여금 들어와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원자가 친히 소반에서 과일을 가져다가 제신에게 나누어 주자 제신이 모두 칭송하기를,
"원자의 예자(睿姿)가 우뚝하고 단좌(端坐)한 것이 근엄하니 참으로 대성인(大聖人)의 기상으로 우리 동방의 억만 년 무궁한 큰 복입니다."
하였다. 이날에 1백 세 및 80, 90노인에게 쌀과 고기를 설날의 예와 같이 내리고, 1백 세 노인인 전(前) 지사(知事) 이여상(李如尙)에게 한 자급을 더해 주었다. 문관과 음관(蔭官)·무관의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파직과 삭직 이하의 죄명(罪名) 및 사서(士庶)의 도형·유형 죄인을 아울러 탕척하였고, 유생(儒生)의 정거(停擧)를 분간하였다. 또 명하여 일차(日次)로 보이는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은 제술(製述)로 대신하게 하고, 도기(到記) 이외의 상재생(上齋生) 및 사학생(四學生)은 재임(齋任) 이외에는 모두 부시(赴試)를 허락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이 반궁(泮宮)에서 시취(試取)하고 친림해 과차(科次)를 매겨 일차 유생으로서 수석(首席)한 진사(進士) 조석중(曺錫中)과 유학(幼學) 홍치영(洪致榮)에게 전시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6월 19일 병술

정릉(定陵)과 화릉(和陵) 두 능의 재실(齋室)을 수선하고 격구정(擊毬亭)을 중건하였다. 격구정은 바로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 격구하던 곳으로 현종(顯宗) 갑인년에 관찰사 남구만(南九萬)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45년 후 무술년에 이탄(李坦)이 중건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다시 신축한 것이다.

 

6월 20일 정해

지난 겨울에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어 관찰사 이문원이 편리한 방법으로 진휼하기를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설진(設賑)했을 때에 수령으로 스스로 마련한 곡식이 1천 석 이상인 자, 진장(鎭將)으로 1백 석을 내거나 부민(富民)으로 50석 이상을 자진 납부한 자를 계문하여 상을 주기를 청하였다. 부령 부사(富寧府使) 이여절(李汝節)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김노직(金魯直), 명천 부사(明川府使) 정우붕(鄭宇朋),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현택(李顯宅)에게는 표리를 내렸으며, 얼마 후에는 정우붕을 기내 방어사(畿內防禦使)로 발탁하였다. 부민으로 자진 납부한 자는 실직(實職)을 제수하거나 혹은 상가(賞加)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수령이 곡식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많은 폐단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다. 다만 명령한 뜻에 따라 비록 처분하지는 않겠으나 이후에는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하고 다시는 전처럼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1일 무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고 돌아와 영청문(永淸門)에 이르러서 윤대(輪對)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서(關西)의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하여 의주(義州)의 무사 장몽열(張夢說)을 별군직(別軍職)으로 삼았다. 인하여 병조에 명하여 서북의 무사를 차등을 두어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6월 22일 기축

예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파직하였다. 이때에 막 영제(禜祭)를 지내 장마가 곧 개였는데 재순이 보사제(報謝祭)를 설행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갠 지 며칠이 못되어 갑자기 보사제를 청한 것은 조용히 기다리는 뜻이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파직시킨 것이다.

 

도정(都政)을 실시하였다. 【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 참의 서매수(徐邁修),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이다.】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이문원(李文源)을 예조 판서로 삼고,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기언정(奇彦鼎)으로 대신했으며,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수령의 초사(初仕)는 마땅히 신중하게 가려야 하고, 충신(忠臣)·훈구(勳舊)·염리(廉吏)의 후예 역시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 대저 우리 나라에서는 1년에 2번 대정(大政)을 하니 바로 우정(虞廷)에서 고적(考績)하여 출척(黜陟)하던 남은 뜻이다. 정안(政眼)이 한번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보는데 만약 의망(擬望)한 바가 구하던 바와 다르고 임용한 바가 바라던 바와 다르다면 대정을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 중에서 너무 국한되거나 너무 구애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이 인재를 내면서 어찌 내외(內外)의 구별을 두겠는가. 산정(散政)도 오히려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군다나 대정이겠는가. 이번 정사는 내외와 청유(淸腴)083)  를 물론하고 복직(復職)과 서사(筮士)084)  에는 먼 곳 사람을 널리 쓰고, 소울(疏鬱)한 정사는 음관(蔭官)·무관(武官)에 있어서도 또한 회탕(恢蕩)하기에 힘써야 하는데 더구나 삼사(三司)의 신하이겠는가. 어제 전조로 하여금 초출(抄出)하여 녹계(錄啓)하도록 하였는데 과연 생각과 어긋나지 않았다. 옥당(玉堂)으로 선조(先朝)에서 경악(經幄)의 반열에 있었던 자는 오늘 정사에서 외직 당상 자리에 승차(陞差)하여 의망하고, 양사에서 조정에 벼슬한 지 30, 40년이 되고 일찍이 아장(亞長)이었던 자와 대간(臺諫)에 천거되어 30년이 지나고 나이 70이 넘은 자는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차차 조용(調用)하라. 명목상 법관(法官)·시종(侍從)으로 벼슬한 지 40년이 지난 자가 또 있다고 하는데 다만 인사가 적체되었다고만 말할 수 없으니 역시 승자(陞資)하라. 승자한 시종 가운데 등과(登科) 및 대통(臺通)이 40년에 가깝고 일찍이 정3품을 지낸 자는 일체로 전지를 받들라."
하였다.

 

6월 23일 경인

수령·변장(邊將)으로 초사(初仕)인 사람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6월 24일 신묘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열읍의 서낭당 사전(祀典)을 닦아 밝히게 하였다. 승지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외읍 수령들이 서낭의 발고(發告) 및 여제(厲祭)의 축문(祝文)을 몸소 행하지 않고 제수(祭需)도 깨끗하지 못하니 신칙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어사가 암행할 때에도 역시 열읍의 사전에 대한 근만(勤慢)으로 출척(黜陟)하라는 일을 가지고 가는 절목(節目)에 기재하도록 명하였다.

 

제도의 장적(帳籍)에 관작을 모칭(冒稱)하는 습성을 단속하여 금하도록 하였다.

 

이병정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시종으로 오래 있던 사람 중에 새로 자급을 받고 승지나 좌이(佐貳)가 된 자가 밖에 있다 하여 곧 체직하는 것은 소통하여 쓰는 뜻이 아니니, 해조로 하여금 첨추(僉樞)를 더 설치하여 단부(單付)하되 근력(筋力)이 길에 오를 수 있는 자는 올라와 숙명(肅命)하게 하라."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관동의 도신에게 명하여 도내의 경서(經書)에 밝고 글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보고하게 하였다.

 

6월 27일 갑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상소하기를,
"김동선(金東善)의 원사(爰辭)는 실로 하나의 변괴입니다. 그가 스스로 원통하다고 호소한 것은 바로 그의 죄를 더욱 드러내는 것으로 그의 도리로서는 오직 사리를 평범하게 말하고 공손히 처분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어지럽게 외쳐대면서 심지어는 ‘마땅히 반좌(反坐)의 율을 써야 한다.’ 하고, 또 ‘쌍방을 대질(對質)시키라.’고 하였으며, 또 ‘흉역(凶逆)의 여당(餘黨)이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반을 채 읽기도 전에 마음이 떨리고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후익(後翼)·유성한(柳星漢)·윤구종(尹九宗)의 소굴이 되고 근저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는 곧장 신이 사람을 모함했다는 죄과로 돌리면서 반좌율을 쓰기를 청하였으니, 아, 너무 분합니다. 구종과 친밀하게 지낸 형상을 발명할 말이 없자 갑자기 두 재신(宰臣)을 끌어다 증인을 삼는데, 그 두 재신이 무덤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입니까. 과연 두 재신이 그런 말을 하였다면 그 사람의 요특(妖慝)함이 남김없이 드러난 것이며, 그 충고의 말이 실로 우도(友道)에 맞았다면 어찌 그 말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과 절교하지 않고서 한결같이 친호(親好)하며 재작년 겨울의 회하(會下)에 모임이 있었습니까. 그가 역적질을 한 후에 미쳐서야 비로소 소원하였다고 일컬었으니 이처럼 미봉(彌縫)하는 말은 참으로 이른바 교묘히 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서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희궁(宣禧宮)의 개호(改號)에 관한 한 조항은 더욱 신의 상소 가운데 일대 관건(關鍵)인데 그가 실로 자신의 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마디의 말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것이 의리와 윤상(倫常)에 관계됨이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 그 누가 감히 이의(異議)를 두겠습니까마는 까닭없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이 한 가지가 바로 그의 단안(斷案)입니다. 홍국영(洪國榮)을 아첨으로 섬긴 것이 여름철의 김매기보다 심하였으며 그의 현재 마음 역시 감히 말을 허비하여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신이 비록 못났으나 대신의 자리에 있으며 그 역시 대신인데, 고금 이래로 대신이라 이름한 자를 어찌 일찍이 양자 대질(對質)하기를 장사치에게 하듯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행하지 못할 일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실 삼아 흐지부지하려는 계책을 한 것이니 참으로 아이들의 견해만도 못합니다. 어찌 체모를 전혀 모름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까. ‘흉역의 여당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촌부(村婦)나 주졸(走卒)들이 삿대질을 하면서 서로 욕하는 말이니 신이 어찌 더불어 시끄럽게 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도리어 욕을 하는 것이라고 핑계하여 양양하게 출사(出仕)하면 그 염방(廉防)을 그르치고 명절(名節)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히려 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고려할 것이 없겠지만 우리 성상께서 신을 지우(知遇)하고 신을 등용하신 것이 한갓 지혜에 누(累)를 끼치고 용사(用捨)가 공평을 잃는 데로 돌아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전(前前) 우상의 일은 지극하게 부석(剖析)하였으니 비록 스스로 하게 하였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경은 거의 전의 잘못을 깨달아 만년에 좋게 되기를 내가 날로 바랐었다. 이번 상소에서 또 이렇게 운운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실례(失禮)한 중에 또 실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대신이요 이쪽 역시 대신이다.’라고 말라. 먼저 한 자는 경인 것이다. 처분함이 경에게 치우친 듯한 것은 예경(禮敬)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며, 전의 상소에서 이미 시행한 처분을 어찌 뒤의 상소에서 아끼겠는가. 그러나 그 집 사람이 대변(對卞)한 원사(爰辭) 가운데서 이미 네 글자를 지목하여 사용하였는데 경의 이 상소도 말이 어떠한가를 논하지 않고 똑같이 대변한 것으로 부치니 충서(忠恕)를 숭상하고 분잡(紛雜)을 그치게 하는 방도에 있어 해롭지 않을 것이다. 이에 몇 줄로 부시(敷示)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분명하게 들으라. 처음부터 내가 혀를 차며 못내 개탄한 것은 경의 거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데, 내가 잘못이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비록 전전 우상과 교분이 깊지 않고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러니저러니 하는 즈음에 확연히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래도 경의 계책이 옳다고 하겠는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대저 경을 재상(宰相)으로 삼은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조정의 기상(氣象)을 안정시키고 세신(世臣)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취한 것은 이것이었는데 경이 응한 것이 그러하였다. 근일에 한편으로 부호(扶護)해 주고 한편으로는 억제하는 것이 어찌 단지 전전 우상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에 사과하고 미루어서 경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부끄럽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고 후회하면 또 더 유시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하루 아침에 전전 우상에게 유감을 풀 것이다. 구구한 나의 이런 괴로운 마음을 옆에서 환히 밝히고 있을 것인데, 경이 이런 말을 듣고도 얼음이 풀리듯, 구름이 흩어지듯이 하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나를 연석(筵席)에서 대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구견(舊見)을 빨리 씻어버리고 안심하고 숙명(肅命)하라."
하였다.

 

6월 28일 을미

서유성(徐有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9일 병신

내각(內閣)에 명하여 목자본(木字本)을 만들게 하였다. 이때에 어제(御製)를 인간(印刊)하고자 하여 평안 감영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자본(字本)을 주조하도록 하였다가 곧 나무로 대신하게 하고 내각으로 하여금 관장하여 만들게 하였다.

 

6월 30일 정유

이성현(尼城縣)에서 밤나무를 채취하는 규정을 혁파하고, 관동·영남·호남의 황장판(黃腸板)을 베어 운반할 때 징렴하는 폐단을 바로잡았다.

 

형조(刑曹)와 경조(京兆)의 1년 공용(公用)에서 부족한 숫자는 관서의 가분(加分) 조적 모곡(糶糴耗穀)을 취해 쓰라고 명하였다.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당(柳戇)을 파직하였는데, 세선(稅船)이 본부 용진(龍津) 앞바다에 이르러 침몰했기 때문이다.

 

전라 우수사 이항림(李恒林)은 임기가 만료되기를 기다려 곧바로 병사(兵使)로 의망하고,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윤영희(尹永僖)는 경기 연해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항림이 가리포 첨사 윤영희가 상영(上營)과 다투면서 꾸짖고 욕하는 내용으로 보고하였고 완도(莞島)의 산 소나무를 보고하지 않고 지레 베었으나 은보(恩補)에 관계되어 파출(罷黜)하지 못하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하기를 청하였었다. 그래서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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