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5권, 정조 16년 1792년 7월

싸라리리 2025. 8. 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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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술

경기와 삼남의 수륙조(水陸操)를 정지하였다.

 

7월 2일 기해

조종현(趙宗鉉)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7월 3일 경자

의성(義城)·함창(咸昌) 두 고을의 대동전(大同錢)을 실은 배가 충주 영죽강(永竹江)에 이르러 침몰하여 7인이 빠져 죽었다고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보고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은 월봉(越俸) 12등(等)을 명하고 두 현(縣)의 원은 장배(杖配)하였다. 대개 영남의 대동은 예전에는 육운(陸運)하여 경사(京師)에 이르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두 현에서 충주로 운반하고 다시 배로 운반하고자 하다가 침몰된 것이다.

 

영남의 후조창(後漕倉) 조선(漕船) 4척이 다시 통진(通津) 지경에서 침몰되니, 도차사원(都差使員) 밀양 부사 이복섭(李復燮)은 곧바로 그곳에서 정배하고, 기선 차사원(騎船差使員) 제포  만호(薺浦萬戶) 남궁심(南宮深)은 결곤(決棍)하고, 해도 영호 차사원(領護差使員) 장봉  만호(長峰萬戶) 김경희(金慶禧), 지방관(地方官)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달관(李達觀)은 결곤하여 파출(罷黜)하였으며, 경희는 해당 진(鎭)의 노군(櫓軍)으로 충원하였다.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을 귀성 부사(龜城府使)로 특보(特補)하였다. 수령을 잘 가리지 못한 것 때문이었는데, 곧 제주 목사로 옮겼다. 이조 참판 이병정(李秉鼎), 이조 참의 조윤대(曺允大)를 간삭(刊削)하였는데, 김사목과 같은 죄이다.

 

7월 4일 신축

영제(禜祭) 후 보사제(報謝祭)를 지내야 할 것인지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영제 파재(罷齋) 후 열흘만에 보사제를 행하는 것은 설만에 가깝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한성부 판윤 정호인(鄭好仁)을 파직하였다. 이때에 부관(部官)에 5부(部)를 합설(合設)해야 한다는 의논을 창도한 자가 있었는데 호인이 편리하다고 여겨 해사(廨舍)를 설치하려고 도모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니 전교하기를,
"민정(民情)에 편리한지 여부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관부(官府)를 합병하고자 하면서 보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국체(國體)가 있단 말인가. 5부이기 때문에 다섯 곳에 나누어 설치한 것이니 합설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팔도의 감영을 충주(忠州)에 합설하고 사학(四學)은 중학(中學)에 합설해 감사 1명과 교수(敎授) 1명으로 하자는 의견도 편리하단 말인가. 이미 경조(京兆) 이외에 다시 경조를 설치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미연에 금하지 못하였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맨 처음 창도한 부관과 하리(下吏)는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이문원(李文源)을 이조 판서로,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5일 임인

사폐(辭陛)하는 수령을 소견하였다.

 

홍억(洪檍)을 예조 판서로,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재외(在外) 경재(卿宰) 및 무재(武宰) 실군직(實軍職) 시종(侍從)의 반록(頒祿) 규식을 참작하여 작정하였다. 【 녹(祿)을 받는 자는 3백 60명이다.】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0면
【분류】재정(財政) / 사법(司法)

 

무신 당상의 녹시사(祿試射) 규정을 신칙하였다.

 

7월 7일 갑진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을 친시(親試)로 행하고, 또 금직(禁直)하는 여러 신하에게 응제(應製)를 명하였다. 시관 및 여러 문신에게 선찬(宣饌)하고 친림하여 칠석제(七夕製)를 과차(科次)하였다.

 

7월 8일 을사

초계 문신의 과강을 행하고 책(策)을 내어 다시 시험하였다.

 

7월 11일 무신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전 판서 오재순(吳載純)의 서용을 명하여 수어사(守禦使)에 잉임시켰다.

 

의주(義州)의 고(故) 첨지(僉知) 김덕운(金德雲)의 묘를 수리하라 명하였는데, 덕운의 후예가 중국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수리해 주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7월 12일 기유

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7월 14일 신해

영남 영천(永川) 등 50개 고을에 다시 홍수가 나 2천 9호가 떠내려 가거나 묻혔고 51인이 깔려 죽거나 빠져 죽었다.

 

7월 15일 임자

곽산(郭山)의 전 참봉 김수증(金守曾)과 의주(義州)의 유학(幼學) 최규정(崔奎晶)을 조용(調用)하라 명하였다. 수증의 증조 김영준(金永俊)은 4대가 한집에서 살았고, 규정의 조부 최상호(崔尙浩)는 5대가 한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영묘(英廟)가 듣고 소견하여 어필(御筆)을 내리고 장공예(張公藝)의 고사를 모방하고, 또 그 집을 정표(旌表)하고 도신에게 명하여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상이 관서의 무사들을 수용(收用)함을 인해서 본도에 명하여 그 후손을 찾도록 하였는데,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영준의 증손 수증은 행의(行宜)로써 도의 천거에 들어 일찍이 전랑(殿郞)을 지냈으며 상호의 손자 유학 규정은 학행이 제법 있습니다. 두 집안에서 모두 선조(先朝)의 수교(受敎)를 받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그 사실을 기록한 문서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두 집 사람을 소견하고 수용한 것이 선조 16년 7월 14일에 있었다. 근래에 마침 생각이 나서 도백에게 물은 것인데 도백의 장계가 이날에 도착하였고, 또 내가 즉위한 지 16년 되는 해 7월 14일이라서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더구나 정표하라는 전교의 자획이 새것과 같고 그림으로 그리라는 별유(別諭)가 은근하셨다. 이제 듣건대 양가의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를 잘 이어가고 있다 하니 풍속을 돈독히 하고 권면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 더구나 내가 옛날을 추억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올린 책자는 즉시 그 집안으로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하여 두 사람을 조용하라는 명을 내리고, 역시 말을 주어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후 수증을 내섬주부(內贍主簿)로, 규정을 강릉 참봉(康陵參奉)으로 삼았다.

 

어의(御醫)를 보내 전 우상 김종수(金鍾秀)의 병을 보도록 하였다.

 

어석정(魚錫定)을 도총관에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태영(李泰永)이 정세(情勢)가 있다고 말하면서 행공(行公)하려 하지 않으니 파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태영은 바로 고 참판 이해중(李海重)의 조카인데, 해중 역시 박하원(朴夏源)의 상소 가운데 들어있기 때문에 태영이 이를 인해서 공무를 폐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정수가 파출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하필 하교한 뒤에야 행공하겠는가. 사실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연교(筵敎) 이외에 또 먼저 대신과 의논한 한 조항이 있으며, 흥화문(興化門)에서 인접할 때의 정령한 하교는 비단 당자가 감읍했을 뿐 아니라 내가 금석(金石)처럼 받들고 있다. 이 장계를 다시 내려보내라."
하였다.

 

7월 16일 계축

제주(濟州)의 세공마(歲貢馬)가 이르렀다. 상이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예(例)대로 반사하고, 나머지는 후원(後苑) 및 제영(諸營)·태복(太僕)에서 나누어 기르라고 명하였다.

 

7월 18일 을묘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무관(武官)의 직령(直領)은 비록 금법을 두지는 않았으나 이미 선조의 하교가 계셨고 지난번 연석에서 신칙한 바가 있다. 근래에 듣건대 아장(亞將)과 별군직(別軍職)이 혹 착용한다고 하는데, 별군직은 바야흐로 시위하고 있으니 마땅히 자수(自首)하게 할 것이며 아장은 시사(試射)할 때에 경이 조사해 묻도록 하라."
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 및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수원 독성 산성(禿城山城)에서 고유(告由) 때 쓰는 제품(祭品)·제문(祭文)의 규식을 정하였다. 독성 산성을 수축하여 토신(土神)에게 고유하는 것인데 사체가 전에 비교하여 존엄하였다. 부사를 헌관(獻官)으로, 중군(中軍) 및 읍 안의 당상(堂上), 선천(宣薦) 조관(朝官)을 차헌(次獻)으로 삼고, 향축은 향관(香官)이 기영(畿營)에 전하면 기영에서는 문관 찰방(察訪)을 정하고 대축(大祝)을 겸하게 한 다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7월 19일 병진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추도기(秋到記) 유생의 제술(製述)을 시험하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유생의 전강(殿講)과 초계 문신의 과강(課講)을 행하였다. 초계 문신 이홍달(李弘達)·민치재(閔致載)는 혹 나이가 이미 많거나 혹은 문의(文義)에 익숙하지 못해 강을 면제하고 단지 응제(應製)만 하게 하였다. 김희화(金熙華)·한기유(韓耆裕)·권의(權倚)·심반(沈鎜)에게는 이달부터 명년 7월까지 긴 휴가를 주어 뜻을 오로지하여 독서하게 하였으며, 인하여 정사에 의망(擬望)하지 못하게 하고 군함(軍啣)에도 부치지 말도록 명하였다. 전강에서 수석을 한 유학 이주석(李周奭)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날 제술(製述)에서 유생의 시권(試券)이 임금의 뜻에 맞는 것이 없자, 전교하기를,
"과문(科文)의 장편(長篇)으로는 대책(對策)만한 것이 없으니, 문기(文氣)를 보고자 하면 마땅히 장편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여러 시권은 보잘것이 없고 뽑은 것을 보니 구차스러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과거의 사제(賜第)를 결코 이런 것으로 높은 등수에 두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건대 옛날 선조(先朝) 때 반시(泮試)의 책문(策問)을 세 번씩이나 다시 시험하여 비로소 사제하였으니 바로 오늘날 우러러 계술할 단서가 된다. 내일 책제(策題)를 다시 시험하여 고하를 정할 것이니, 반장(泮長)에게 잘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동지정사(冬至正使)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을 체차하고, 정1품이나 종1품 가운데서 의망하여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인점이 10년 내에 여섯 번이나 전대(專對)하게 되어 특명으로 해임을 허락하고 이문원(李文源)으로 대신하였다.

 

7월 20일 정사

도기 유생(到記儒生)을 재차 시험하였다. 이날에 비가 왔는데 상이 여러 유생들이 그 재능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여 비가 개기를 기다려 다시 시험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연안의 해공(蟹貢)을 특별히 견감하였는데, 금년에 연변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남에 포제(酺祭)를 행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해변 지방의 병충해의 재변이 열흘부터 보름사이에 배나 치열하여 전주(全州) 등 47개 읍진(邑鎭)에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포제를 설행하여 재이를 물리칠 수 있도록 향축을 해조로 하여금 내려 보내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편전(便殿)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다음날이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다.

 

7월 21일 무오

황단(皇壇)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중국 사람의 자손 49인과 충신의 자손 1백 21인이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모두 희정당에서 소견하였다. 충렬공(忠烈公)과 상원군(祥原君) 이세녕(李世寧)의 사우(祠宇)를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관에서 주도록 명하고, 삼학사(三學士) 및 증참의(贈參議) 황선신(黃善身)의 자손을 조용하라 명하였다. 또 유생의 응제(應製)와 무사(武士)의 시사(試射)를 명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우리 동방이 다시 살아나게 된 날이니, 아, 황제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더구나 금년은 꼭 2백년째가 된다. 사실은 오래되면 잊혀지기 쉽고 인정은 세월이 가면 흐지부지되기 쉬우니 한 부(部)의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어디서 밝히겠는가. 해마다 이날이면 유문(壝門) 밖에서 공손히 절하기를 감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비단 조금이나마 명(明)나라의 몰락을 슬퍼하는 정성을 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법(家法)을 지키고자 함이다. 어젯밤에 비가 아주 많이 왔는데 충신의 후예로서 가난하여 행장을 갖출 수 없는 자들이 이처럼 많이 참여했으니 아주 가상하다. 그들이 선조의 발자취를 지키고자 함이 이와 같은데 조정에서 어찌 자손들에게 미치는 숭보(崇報)의 음보(蔭補)를 헐하게 하겠는가. 충렬공과 상원군의 사우를 수리하라고 막 기백(畿伯)에게 하유하였는데 그 절의(節義)로 말하자면 삼학사보다 더 가상한 자가 없다. 세 집안에서 1명의 유생 이외에는 반열에 참여한 자를 보지 못하겠으니 그들이 영락(零落)했음을 알 수 있다. 해조로 하여금 마음써서 수용하게 하라. 증 참의 황선신의 집안에는 직사(職仕)한 자가 없다고 하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을 찾아서 수록(收錄)하게 하라."
하였다. 이날에 진사 황면철(黃勉喆)이 응제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조용을 명하였다.

 

7월 22일 기미

희정당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을 삼시(三試)하였는데 생원 김희주(金熙周)가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사제하고, 그 나머지 전후 삼시에서 입격한 20명에게는 차등을 두어 급분(給分)하였다. 전교하기를,
"생원과 진사가 유학(幼學)과 다른 것은 원점(圓點)이 있기 때문이며 도기(到記)의 절제(節製)가 정시(庭試)나 알성(謁聖)과 다른 것 역시 우수한 자를 선발하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생원 진사의 원점이 명실이 서로 부합하지 않아서 막 칙교하였는데, 이미 신칙하였으면 마땅히 그 실효를 책임지워야 하니 이것이 이번 도기에서 장편(長篇)을 세 번 시험한 까닭이다. 옛날 선조(先朝)에서 한 경서(經書)를 강하는 구식(舊式)을 거듭 정하여 단지 만점(滿點)인 생원 진사만을 응시하게 하여 제술이 앞에 있으면 강은 뒤에 있게 하고, 강이 앞에 있으면 제술은 뒤에 있도록 하여 반드시 두 번의 시험을 넘겨야 사제(賜第)하였으니 어찌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겠는가. 경서 하나를 강하는 것은 이미 설행하였다가 곧 정지한 일이므로 또다시 할 필요가 없고, 제술할 때에 혹 이렇게 다시 시험하되 초선(初選)에서 많이 뽑거나 적게 뽑는 것은 오직 임시해서 처분함이 많은가 적은가에 달려 있다. 저 훌륭한 재주를 지닌 자를 빠뜨리는 탄식을 거의 면하게 된다면 비단 옛것을 본받는 뜻에서 나온 것일 뿐 아니라 인재를 얻는 데도 일조가 될 것이므로 일거 양득(一擧兩得)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런 뜻을 생원과 진사 등 제생에게 미리 각기 잘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4일 신유

영남의 현풍(玄風) 등 22개 고을에서 포제(酺祭)를 행하였다. 선충(蟬蟲)이 치성하게 일어나 벼 줄기를 갉아먹어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장계로 포제를 설행하여 없애기를 청하니, 윤허한 것이다.

 

7월 25일 임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자손을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에 배참(陪參)하게 하고, 고(故) 목사(牧使)        제말(諸沫)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錄)에게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그곳을 정표(旌表)하라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제 황단에 공손히 절한 것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충신의 후예를 소견하고 유생은 시제(試製)하고 무사(武士)는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세워준 황제의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우리 나라 충신에게 미치게 하여 전수(篆首)로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렬(功烈)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이를 인하여 생각하니,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을 망배례의 반열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여 이미 정식을 삼았는데, 더구나 충무공은 황조(皇朝)의 도독(都督)이란 고인(誥印)을 받았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충무공의 후예도 문정공 집안의 예에 의해서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정유년 척화(斥和)한 사람의 자손도 오히려 반열에 참여하는데 충민공 임경업의 후손이 반열에 참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두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또 빠진 듯한 감상(感想)이 있어서 한번 전교하고자 한 지 오래이다. 절의[烈]가 충무공과 같고 공(功)이 충무공과 같으며 또 무후(武侯)085)                  의 후예로 지금까지 제씨(諸氏) 성을 답습해 왔고 그 이름이 말(沫)이란 자는 고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그이다. 그걸 이어받은 자가 바로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인데 재우는 갖추 숭보(崇報)하였으나, 제말이 고성(固城)을 보장(保障)하고 진양(晉陽)에서 부의(赴義)한 위대한 공훈은 고 감사        김성일(金誠一)의 천거에서 볼 수 있고 조정에서 격식을 넘어 탁용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후 성주(星州)의 대첩(大捷)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충무공의 노량(露梁) 사적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손이 영락하여 조정에 스스로 아뢰지 못하였고 끊어진 유사(遺事)가 대략만 고 정승 남구만(南九萬)의 문집에 보일 뿐이다. 증관(贈官)·시호(諡號)·정려(旌閭)·비석(碑石) 등 그 어느것 하나도 시행한 일이 없으니 흠전(欠典)·궐문(闕文)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고 충신 목사 제말을 특별히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인하여 홍문관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게 하되 시호를 내리는 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라. 일찍이 듣건대 묘가 진해(鎭海)와 칠원(漆原) 사이에 있다고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고적(故跡)을 자세히 찾아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형제가 자란 마을에 이미 비석을 정려문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는데, 유독 제말과 그 조카 선무 공신(宣武功臣)        홍록(弘錄)을 똑같이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가 성인(成仁)한 곳에다 정표(旌表) 하는 비석을 세우고 대서 특필하기를 ‘증 병조 판서 시호 제말(諸沫)과 선무 공신(宣武公臣) 증 병조 참판(贈兵曹參判)        제홍록(諸弘錄) 숙질(叔姪)이 함께 충성을 바친 곳’이라 하고, 인하여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음기(陰記)를 쓰게 하여 불후(不朽)의 밑천이 되게 하라."
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26일 계해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7일 갑자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문원(李文源)이 사사로운 의리 때문에 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천상 민이(天常民彛)에 대하여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부식(扶植)’이란 두 글자에 있다. 천하에 대방(大防)을 보존하고 후세에 인기(人紀)를 세우는 데 관계되는 것은 비록 미세한 것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비록 은미한 것이라도 반드시 천명(闡明)해야 하는데 하물며 이 의리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범연하게 생각하겠는가. 저 화양(華陽)의 편액(扁額)과 여빈(驪濱)의 비석을 보면 족히 나도 할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신으로 보내는 명은 참으로 억지로 하게 할 수도 억지로 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인데 어찌 반드시 그의 뜻을 어기고 밀어내어 차라리 여유를 둘지언정 미치지 못해서는 안 되는 혐의를 무릅쓰겠는가. 중신(重臣)이 사신으로 가기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본생(本生) 5대 조모(祖母)의 일 때문인데 절개는 절개이고 적봉(敵鋒)에 죽은 것과는 다르다. 뒤를 이은 집의 증판서(贈判書) 이가상(李嘉相)이 어버이를 찾다가 바로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은 효(孝)이지 나라에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닌데도 조정에서는 역시 효로써 정표하였고 그 어머니는 끝내 무사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한 ‘5세(世)가 되면 보답하는 의리가 다 된다.’는 설을 중신의 본생 5대 조모에서 찾아야 하지 뒤를 이은 집인 증 판서의 일을 억지로 이끌어 대서는 안 되니, 의리가 이미 없어진 것이다. 옛날 고 옥당(玉堂) 김만균(金萬均)이 그의 조모가 정축년 난리 중에 죽은 것 때문에 원접사(遠接使)에 참여시키지 말 것을 청했는데, 그때 조정 의논이 두 갈래로 나뉘었으나 송선정(宋先正)은 5세가 되면 의리가 다 된다는 설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아 김만균을 편들었다. 중신은 이와 반대이니, 김만균은 손자이나 중신은 5세손이며 증 판서는 효(孝)를 위해 죽었지만 김만균의 조모는 적에게 죽었으니 세대가 이미 다르고 일 역시 다르다. 또 생각해 보면 자결하려다가 죽지 않았다. 10년 동안 연관(燕館)에 있으면서 절의를 변치 않을 자로 어찌 선정 김상헌(金尙憲)이 평소 겪은 바와 같은 예가 있겠는가만, 그의 손자인 두 명의 고 정승은 혹 한 번 연경(燕京)에 가기도 하고 혹은 두 번 가기도 했는데 더군다나 중신이겠는가. 내가 중신으로 하여금 사명(使命)을 띠게 한 것은 대개 경중과 가부를 저울질하여 면려하고 깨우쳐서 스스로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비답을 내리려 하였으나 이제 듣건대 중신의 고조모(高祖母)가 또 중신의 5세 조모와 동시에 자결하였다고 하니 5세면 의리가 다 된다는 의리를 인용하기가 어렵다. 또 일찍이 듣건대 중신의 아버지 고 정승이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무사할 때에 상례로 보내는 사행으로는 갈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하니, 이에서 중신의 거취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 우선 소청을 허락하여 시행한다."
하고, 인하여 이 연교(筵敎)를 《일성록(日省錄)》 및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실어서 고열(考閱)에 대비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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