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묘
호서의 도신에게 명하여 고(故) 충신 박호(朴箎)의 정려(旌閭)를 찾게 하고, 그 후손은 해조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였다.
8월 2일 무진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과강 문신(課講文臣)의 제술(製述), 전경 무문신(專經武文臣)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3일 기사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내금위(內禁衛)의 가을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병조 판서 이병모가 아뢰기를,
"직령(直領) 한 가지 일은 선조의 칙령(飭令)이 본디 엄명하였고 지난번 신이 연주(筵奏)한 후에 미천한 무변(武弁)은 비록 금법을 설행하지 말라는 성상의 비답을 인해서 힘닿는 대로 하도록 맡겨두었으나 무장(武將) 제인에 이르러서는 각별히 준행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듣건대 한두 아장(亞將)이 철릭[帖裏]을 입은 까닭으로 한 장신(將臣)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말이 자자하기에 신이 괴이한 생각이 들어 이명운(李明運)과 신대현(申大顯)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명운이 말하기를 ‘과연 그 일 때문에 총융사 이주국(李柱國)에게 배척을 받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신(將臣)은 일찍이 원융(元戎)을 지낸 사람인데 선조의 칙령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이런 어그러진 횡의(橫議)를 함부로 하여 여러 무변으로 하여금 휩쓸려 관망만 하게 하였고 근시(近侍) 무변에 이르기까지도 감히 어렵지 않게 범(犯)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국체를 손상시키고 기강을 무너뜨린 것은 관계된 바가 적지 않으니, 청컨대 총융사 이주국에게 견삭(譴削)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무신이 직령을 착용하는 것은 선조에서 엄금하는 명이 있었음을 모르지 않으나 금법을 설치한 후에 이미 지금껏 준수하지 못했는데 이제 또 구전(舊典)을 거듭 밝힌다면 전처럼 잠깐 행했다가 곧 폐지되는 탄식이 있을까 염려된다. 때문에 지난번 병조 판서의 거조(擧條)에 대한 비답은 비단 여러 무변을 위하여 특별히 곡진히 생각해 준 것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준행하기 어려운 법을 지레 시행하고 싶지 않은 데 뜻이 있었다. 저 이주국이란 자는 무슨 마음으로 감히 선조의 법에 대하여 이런 잡설(雜說)을 함부로 말하여서 아장(亞將) 이하가 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가. 대저 이주국의 죄는 비록 묻지 않더라도 만약 중한 죄과를 범한 데 관계되면 일찍이 용서한 적이 없었다. 기유년 가을의 지중(至重)·지경(至敬)·지존(至尊)의 큰 역사 때 우리 신민(臣民)인 자가 그 누군들 각자 삽을 드는 정성을 바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때에 주국이 맡고 있는 영문(營門)의 일은 아주 놀랍고 해괴하였으며 겸하여 주교사(舟橋司)에 있을 때에는 해영의 배를 대령케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두 가지 일은 소중하여 대략 박감(薄勘)하였다. 그후 유석(宥釋)된 뒤에도 사랑으로 살리려는 뜻이 전후의 연교(筵敎)에서 얼마나 엄명하고 자세하였던가. 만약 돈어(豚魚)와 목석(木石)이 아니라면 그 역시 사람의 마음이 있을 것인데 또 이런 죄과를 범했으니 변명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어제의 연대(筵對)가 지나갔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견삭을 청하니, 어찌 그리 느린가. 도배(島配)의 법을 시행하라."
하여, 마침내 백령진(白翎鎭)으로 유배하였다.
조심태(趙心泰)를 총융사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경일(李敬一)을 잉임(仍任)시켰다. 전교하기를,
"매번의 정사(政事)를 문득 넘기고 말아서 사체가 구차하다. 어제 정사에서 이미 점하(點下)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근일 해서의 농사 형편은 물에 잠긴 것이 비록 영남·호남과 같지 않으나 내연해(內沿海)인 연안(延安) 등의 고을은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런 때에 방백(方伯)의 직임을 결코 생무지에게 맡기기 어려우니, 이조 참의의 망통(望筒)을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전 훈련 정(訓鍊正) 오응상(吳應常)을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자궁(資窮)한 후에 만약 승서를 입게 되면 일찍이 가자(加資)한 예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훈련 정과 군기 정(軍器正)을 물론하고 정식으로 삼기를 청합니다."
하니, 따랐다.
8월 6일 임신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한풍(李漢豊)이 아뢰기를,
"본 영(營)의 지방(支放)은 새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매년 부족하기 때문에 비상 대비용으로 봉인해 놓은 물건 가운데서 옮겨다 지불한 후, 새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려 다시 갚는 것이 근래에 전례(前例)가 되었으나 감히 예를 따라서 편리한 대로 하지 못해 감히 이처럼 앙달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별비(別備)라고 하는 것은 사사로이 받아들여 공용(公用)에 보태는 것이다. 금위영·어영청 두 영에서 받아들이는 쌀·무명·돈·베는 모두가 선혜청(宣惠廳)·균역청(均役廳)에서 옮겨 떼주거나 급대(給代)한 것이다. 미보(米保)·포보(布保)는 공화(公貨)이지 사사로이 남긴 것이 아닌만큼 남는 것은 모조리 등록해야 하는데 별비란 명칭은 참으로 근거가 없다. 그런 법을 제정한 뜻은 이런 방한(防限)을 만들어서 새어나가는 것을 금하려는 데 있는 듯한데, 이것이 어찌 참으로 절용하는 방도이겠는가. 명목이 끝내 옳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그대로 두라."
하였다.
집의 송민재(宋民載)가 상소하여 도배(島配)한 죄인 이주국(李柱國)에게 위리 안치의 법을 더 시행하라고 청하니, 답하기를,
"이주국의 일에서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기질의 병이니 처분은 이만하면 족하다."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장계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가 가방(家邦)을 재조(再造)하게 된 것은 황조(皇朝)의 은혜가 아님이 없으며 또한 우리 나라를 구원한 여러 장수들이 의(義)를 지니고 무공(武功)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를 구원한 공로로는 평양(平壤)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니 우리 선조 대왕께서 특별히 화공(畵工)을 보내 석 상서(石尙書)086) 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총병(摠兵)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의 상(像)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대개 석공은 우리 나라를 응원해야 한다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고 제독과 세 총병은 평양을 수복할 때 가장 뛰어난 공로를 세웠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후 평양에 사당을 세웠으니 바로 지금의 무열사(武烈祠)가 그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처음에 맨 먼저 석 상서와 이 총병 두 분의 진상(眞像)을 배알하였는데 엄연한 기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으며 그 나머지 세 분의 상은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신주(神主)로 대신하였으니 강개(慷慨)하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사당은 병란이 막 끝난 뒤 처음 세운 것이어서 제도가 좁고 누추하며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아 몇 개의 기둥만 서 있어 집이 적막하고 황량합니다. 일찍이 수직소(守直所)가 없었고 단지 몇 명의 재임(齋任)만 있어 한 달에 두 번씩 분향(焚香)만 할 뿐입니다. 신이 개탄하여 경영하는 이에게 물어보고 유생과 무사를 초선(抄選)하여 새로 동서 두 양재(兩齋)를 지어 나누어 살면서 윤번으로 직수하게 하고 공부하는 장소를 삼았습니다. 밖의 터를 넓히고 대문을 세워 체모를 높이고 보기에 좋게 하였으니 숭보(崇報)하는 도리에 만에 하나나마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가 당시의 사적을 상고해 보니 거행하지 않은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평양지(平壤誌)》에 성을 회복한 시말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계사년 1월 6일에 제독 이여송이 세 협장(協將) 양원·이여백·장세작을 거느리고 군사 4만 2천 7백여 명을 이끌고 성의 북쪽으로 진격하여 진을 치니 왜장(倭將)이 홍의(紅衣)를 입은 천병(天兵)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양원의 절강(浙江) 군사는 사납고 용감하여 대적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8일 새벽에 제독이 징을 한 번 울리자 삼군(三軍)이 일제히 진격하여 1군(軍)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고 1군은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하고 1군은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장창(長鎗)·대검(大劒)을 사용해 칼끝을 나란히 하여 내려뜨리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같고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하여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후퇴하는 자 한 명을 베어 진전(陣前)에 돌려보이니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갔고 제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낙상지가 겨드랑이에 대포(大砲)를 끼고서 크게 외치며 연달아 쏘니 연기가 하늘까지 뻗쳤다. 또 손 으로 죽은 시체를 움켜잡아서 성 위로 동댕이치자 적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성으로 날아 올라왔다.」고 하면서 물러가 내성(內城)을 지켰다. 상지가 성문을 깨뜨리고 승승장구하며 적을 섬멸하니 적들이 움츠러들어 도망해 토굴(土窟)로 들어가 구멍을 많이 뚫고 바라보는 것이 벌집과 같았다. 그 구멍으로 어지럽게 총탄을 쏘아대어 중국 군사가 많이 죽자 제독이 군사를 거두어 영(營)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짐승도 궁하면 덤벼드는 법이니 우선은 살 길을 터주는 것만 못하다.」하였다. 밤 삼경에 적이 대동문을 통해 도망하여 하룻밤 사이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길에서 많이 거꾸러져 죽었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첩보를 주달하기를 「죽은 왜병이 2만여 명이며, 포로가 되었던 조선 사람 1천 2백 명이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을 회복한 공적은 비록 제독과 여러분이 협력하여 군사의 위엄을 드날린 데에 힘입은 것이지만 몸을 날려 성을 함락해 소굴을 소탕한 것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낙 참장의 공로를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번쩍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를 끼고 시체를 던진 것을 보면 크고 용맹스러운 담력(膽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거꾸로 돌릴 만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평양 사람들이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그 공로를 갚고자 한다면 실로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야 합당하겠지만 당시에 철향(腏享)087) 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독과 총병은 모두 대수(大帥)였고 낙공은 그 휘하의 편장(偏將)이었기 때문에 화상을 그리는 가운데 들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제사지내는 열에서 누락된 것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일찍이 선배들의 말을 듣건대 낙 참장은 용맹스러움이 삼군 가운데 으뜸이어서 ‘낙천근(駱千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 왜적을 토벌하는 싸움에서 매양 적을 꺾고 성을 함락한 공로가 많아 찬획사(贊畵使) 이시발(李時發)이 그와 함께 주선하고 행군하면서 그 장한 용기에 감복하여 의기(義氣)가 서로 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낙장이 중국 책 수천 권을 실어다가 주어 이씨(李氏) 집안이 마침내 장서가 많다고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그는 극곡(郤縠)이 시서(詩書)에 대해 잘 알고088) 관공(關公)이 《춘추(春秋)》를 즐겨 읽은 것089) 에 거의 가까워 세상에 드문 기남자(奇男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물로 이런 공적이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 어찌 드러내고 보답하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평양에 이미 세운 사우(祠宇)에서 일체로 향사하는 것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바야흐로 사우를 증수(增修)하는 날을 당했으니 따라서 배식(配食)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옳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장계를 예관(禮官)에게 물으시어 특별히 명나라의 참장 낙상지를 무열사에 제향(躋享)하도록 명하신다면 비단 우리 나라 사람이 정성을 다해 공로를 갚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성조(聖朝)에서 명나라를 존숭하는 뜻에도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회유(回諭)하기를,
"무열사의 중수(重修)를 조령(朝令)을 기다리지 않고 경이 녹봉을 내놓고 재물을 모아 북쪽 터를 넓히고 대문과 양무(兩廡)를 세웠으며 또 유생과 무사를 뽑아 안접하게 했다니, 경의 마음에 감동하고 경의 일이 가상하다. 역사를 준공하는 날에 마땅히 향축(香祝)을 보내 상서(尙書) 이하에게 치제(致祭)할 것이니 경은 그때에 임해 향축을 장계로 청하라.
아, 낙 참장이 우리 나라에 위대한 공로가 있는데도 아직껏 일체로 향사하는 것에서 빠졌으니 실로 흠전(欠典)이다. 한 달 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을 인해 생각이 나서 한두 가지 표창하고 숭보(崇報)한 일이 있었는데 미처 참장의 일은 기억하지 못해 그날의 전교에 함께 언급하지 못하였다. 경이 이처럼 진술하니 더욱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다. 예를 관장하는 신하에게 물어도 어찌 다른 견해가 있겠는가. 특별히 장계의 요청을 윤허하니, 경은 길일(吉日)을 가려 위판(位版)을 만들어서 신령을 편히 모시도록 하라."
하였다.
백령진(白翎鎭) 섬에 정배한 죄인 이주국(李柱國)을 해주목(海州牧)으로 이배(移配)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기백(畿伯)의 말을 듣건대 이주국이 배소로 출발한 후 어제 막 임진(臨津)을 지났다고 하니, 그가 병을 앓은 후 아직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번의 처분은 참으로 죄는 중한데 율은 가볍게 한 잘못이 있으나, 그가 비록 나라를 저버렸지만 나라에서 그에게 그 삶을 시종 온전하게 해주고자 하는 생각은 어찌 그의 유죄 무죄에 따라 차이를 두겠는가. 견책을 이미 보였으니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고칠 길이 있을 것이다. 마땅히 살아서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섬과 육지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령도에 정배한 죄인 이주국은 그가 도착한 지방인 해주목으로 배소를 고쳐 정하라."
하였다.
8월 7일 계유
경모궁에 전배(展拜)하고, 인하여 생기(牲器)를 살폈는데 추향(秋享)이다.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하여 남단(南壇)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다.】 상이 영보에게 이르기를,
"남단은 사체가 자별하여 《오례의(五禮儀)》에 정1품을 초헌관으로 삼도록 되어 있는데, 근래에는 2품이 하니 아주 의아스럽다. 잠농단(蠶農壇)은 지금도 1품이 헌관이 되는데 남단은 헌관의 품질(品秩)이 도리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등극한 이후 모든 크고 작은 사전(祀典)에 대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전후로 신칙한 것 역시 여러 차례였다. 근래에 또 연달아 승지와 사관을 보내 제사지내는 일을 검찰(檢察)하게 하였으나 법이 오래되면 해이해지는 것은 필연의 형세이다. 이번 봉심 때에는 단지(壇址)를 두루 살피고 제품(祭品) 등의 절차까지 하나하나 간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승지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신이 올 봄에 남단의 헌관으로 향소(享所)에 갔었는데 단의 서쪽이 큰 길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제사를 지내려 할 때에 노제(路祭)의 행렬이 모두 이 길을 통과하기 때문에 횃불의 빛이 비추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실로 정결하지 못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청컨대 소속된 자내(字內)의 영문(營門) 및 경조(京兆)의 각부(各部)로 하여금 매양 봄·가을로 단에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별도로 칙금(飭禁)을 가하게 함으로써 경건하고 정결하게 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자니 매우 놀랍다. 이후에는 해당 부에 엄칙하여 제삿날과 그 하루 전은 각별히 청도(淸道)하게 하고, 자내의 영문 및 순라(巡邏)를 관장하는 포장(捕將)에게 일체로 엄칙할 것이며, 교졸(校卒)을 별도로 정해 각별히 금단하게 하라."
하였다.
8월 8일 갑술
승지 서영보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실려 있기로는 남단은 넓이가 2장(丈) 2척(尺), 높이가 2척 7촌(寸)이기 때문에 시험 삼아 영조척(營造尺)으로 재어 보았더니 넓이가 24척 5촌, 앞의 높이가 2척 8촌이었습니다. 《오례의》에서 사용한 자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이미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제 영조척으로 헤아려 비교해 보니 대략 서로 부합하여 별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4층으로 된 섬돌과 양쪽 담장의 제도를 완연히 알 수 있습니다. 악은 아악(雅樂)을 쓰며 춤은 육일(六佾)로, 연주는 육성(六成)으로 하니 육일은 종사(宗社) 산천(山川)에 통용되고 육성은 천신 육성(天神六成)의 제도입니다. 신좌(神座)의 위치는, 풍운(風雲)과 뇌우(雷雨) 두 위(位)가 중앙에 있고 산천(山川)의 위가 왼쪽에 있으며 성황(城隍)의 위가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북쪽에 있으면서 남향(南向)한 것이 한결같이 《오례의》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례의》의 그림은 세 위가 한 줄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산천과 성황의 위가 조금 앞으로 나와 다른 줄로 된 것이 ‘품(品)’ 자 모양과 같습니다. 이는 대개 주위(主位)에는 매양 4점(坫)을 올리니 배위(配位)는 반드시 조금 앞으로 한 연후에야 작점(爵坫)의 전면(前面)이 바야흐로 가지런하게 되기 때문에 오래된 예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그럴 듯하다."
하자, 서영보가 아뢰기를,
"남단의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거나 환안(還安)할 때에는 신여(神輿)를 사용하는데, 병조에서 위장(衛將)을 정해 보내 모시고 간다고 합니다. 의절(儀節)이 너무도 간략하여 사체를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미안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지신사(知申事)의 거조(擧條)에도 역시 정식(定式)이 있었는데 축판(祝版)에 ‘신(臣)’이라 일컫고 성휘(姓諱)를 쓴 것으로 보아 제례(祭禮)가 더없이 존엄함을 알 수가 있다. 묘사(廟社)의 여러 제향에 향축을 받들고 가는데도 오히려 향정(香亭) 의장(儀仗)을 쓰고 있다. 비록 대사(大祀)·중사(中祀)의 구별이 있지만 청도(淸道)하는 절차는 그만둘 수 없다. 이 뒤로 선도자는 세장(細仗)을 쓰게 하되 반장(半仗)을 몇 자루로 할 것인지는 예조 판서에게 참작하여 마련하게 하고 아헌관이 받들고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영보가 아뢰기를,
"단(壇)의 전면은 석축(石築)이 제법 완전하나 나머지 삼면은 사초(莎草)가 덮히어 겨우 사초의 고성(枯盛)으로 그 방절(方折)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랑(禮郞)·부관(部官)에게 이미 봉심하게 하는 정식이 있으니, 잘 봉심하지 못한 자는 신칙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후에는 영원히 정식을 삼아서 예랑이 봉심하여 만일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부관을 해조에서 초기(草記)하여 논죄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랑이 봉심하는 것에 대해 비록 연전에 새로 정식한 것이 있으나 이미 자내의 군문(軍門)에서 금초(禁樵)·금송(禁松)하는 법이 있다. 지금부터는 참군(參軍)에게 맡기지 말고 해부의 대장이 봄·가을에 친히 봉심해야 할 것이다."
하자, 영보가 말하기를,
"단선(壇墠)에 반드시 나무를 심는 것은 예(禮)의 뜻이 좋은데 단소(壇所) 사방을 두른 언덕 기슭에 겨우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따로따로 드물게 서 있어 아주 보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는 반드시 수호(守護)함이 점차 처음만 못해서 그런 것이니, 해당 영에 엄칙하여 별도로 금하고 기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체로 엄칙하여 파종(播種)해서 예전처럼 울창한 효과가 있게 하라."
하자, 영보가 아뢰기를,
"《오례의》의 서례(序例)에는 대갱(大羹)·화갱(和羹)은 모두 3색(色)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단지 화갱에 양과 돼지 2색을 쓰고 있습니다. 소 희생을 쓰지 않는 것이 예전부터 그러했다면, 서례에는 3색으로 마련했는데 지금 화갱에만 2색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보가 아뢰기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향의 홀기(笏記)가 그다지 더렵혀지지는 않았으나 이것 역시 보수하는 절차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호조에 분부하여 연한을 정해놓고 곧바로 고치도록 하소서. 단소의 담장은 흙을 쌓고 떼를 입혀 겨우 형체만을 남겨 둔 것은 깨끗이 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지금 기와로 고쳐 덮을 필요는 없으나 호조에 신칙하여 잘 수리하게 해야겠습니다. 향사의 행례(行禮)는 본디 시각이 있는데 남단의 행사(行祀)는 시각을 알리는 예가 없어 일의 체면이 매우 소략하니, 해조로 하여금 행루(行漏) 하나를 만들게 하여 매 제향 때에 진배(進排)하는 터전을 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악기(樂器)를 실어나르는 수레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진배하는데 정결하다고 보장하기가 어려우니, 악원(樂院)에 분부하여 해조와 상의해 장점을 따라 변통해서 깨끗하게 하기를 힘쓰는 터전을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모두 옳게 여겼다. 영보가 이르기를,
"단직(壇直)에게 물었더니 사방으로 금경(禁耕)을 1백 보 이내로 한정하였으나 원래 금지 푯말을 세워놓지는 않았다고 하니, 자내의 영문(營門)에 분부하여 알맞게 헤아려 경계를 정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경계를 정해놓은 곳에는 해부 및 자내의 영문에 엄칙하여 잡초를 뽑게 해야 하니 우선 관할 영문의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봉심한 후 서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영보가 아뢰기를,
"청도(淸道)하는 한 조항은 어제 도승지가 이미 연석에서 품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단의 남북에는 모두 큰 길이 있으니 금지하는 절차는 참군(參軍)으로 하여금 제향 후에 물러가게 하는 일을 영원한 정식으로 삼게 해야 합니다. 단직(壇直) 4명은 본동(本洞)에서 해당 부에 망(望)을 보고해 차출하는데 어리석은 백성이 쇠잔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중하게 수호해야 할 곳을 이처럼 구차하게 해서는 마땅치 않으니 해부에 신칙하여 각별하게 가려 정하되 판윤(判尹)이 관장해 살펴 단속하는 터전을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검서관(檢書官)을 보내, 전 우상 김종수(金鍾秀)를 성 밖으로 지나가는 곳에서 위유(慰諭)하였다. 종수가 광주(廣州)에서 양주(楊州)의 청룡동(靑龍洞)으로 이거하는데 길이 동문(東門) 밖을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어의(御醫)를 보내 판부사 박종악(朴宗岳)의 병을 보게 하였다.
제주의 전 목사 이철운(李喆運)을 잉임시키고, 목사 김사목(金思穆)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이배(移拜)하였다.
상이, 제주 전 목사 이철운이 재해를 입은 본도의 농사 형편에 대해 아뢴 장본(狀本)을 보고 전교하기를,
"이 장본을 보건대 풍우(風雨)가 곡식을 해쳐 매우 마음이 쓰인다. 이런 때에 목사를 서투른 자에게 맡기기 어렵다. 신보(新補)한 목사 김사목이 이미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데, 바다 건너로 출보(出補)한 중신(重臣)을 어찌 겨우 한 해 지난 것을 오래되었다고 하여 자주 체직하는 폐단이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전 목사 이철운을 잉임시키라. 송정(松政)이 중함은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만 호남이 가장 민망하니, 겸하여 크게 소생시키고자 한다. 목사 김사목을 전라 우수사로 옮겨 제수하되 조사(朝辭)를 면제하여 부임하게 할 것이며, 밀부(密符)는 제주 목사로 사조할 때 차던 것을 그대로 차도록 유서(諭書)를 만들어 보내 바다를 건너오기를 기다려서 전하라."
하였다.
8월 9일 을해
사관(史官)을 보내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을 문병하였다. 이때에 복원이 병으로 누운 지 달이 넘어 여러 차례 어의에게 약을 가지고 가 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사관을 보내 문병한 것이다.
8월 10일 병자
부수찬 이상도(李尙度)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주국(李柱國)은 범한 죄가 매우 중한데 율명(律名)이 너무 가벼우니 여러 대신(臺臣)의 쟁집하는 상소는 실로 공공의 분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정성을 쌓기에 힘써서 스스로 의견을 진달해 성청(聖聽)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인데, 어제 정언 장지현(張至顯)의 소본을 보니 전부가 집의 송민재(宋民載)가 일전에 한 상소를 베껴낸 것이었으므로 신은 이 점에 대해 통분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논한 바가 이미 한 가지 일이면 한 말도 마땅히 동이(同異)가 없을 것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두 사람의 손을 거쳐 글이 나오고 스스로 다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주어 문자(奏御文字)는 더욱 마땅히 경근(敬謹)하게 해야 하는데, 만일 먼저 나온 한 본(本)을 베껴서 이름만 바꾸어서 써 올린다면 성의로써 각기 진달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두 소를 비교해 보면 다른 것은 단지 이따금 5, 6자를 바꾸어 놓은 것뿐이고 서두에서 말미까지 한 판(板)으로 찍어낸 것과 같습니다. 대저 장차(章箚)가 번갈아 나올 때에 뜻과 말이 서로 답습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일은 혹 더러 있지만 어찌 일찍이 1통의 소를 전부 베낀 이처럼 성실하지 못하고 무엄한 것을 보았겠습니까. 경책(警責)을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정언 장지현에게 빨리 견삭하는 법을 시행하고, 이주국에게는 천극(荐棘)을 더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네 말이 체모를 얻었다. 근래의 폐습을 만약 그대로 둔다면 조정이 어떻게 존엄해지겠는가. 대신의 견삭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는데, 얼마 후 전교하기를,
"한 마디 말로 세속을 경계했으니 마땅히 규범을 보여야 하는데 더구나, 초원(初元)090) 의 증광시(增廣試)에서 선발된 자가 아직껏 침체되어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부수찬 이상도를 관직(館職) 가운데서 승서하라."
하였다.
부수찬 윤치성(尹致性)이 상소하여 윤구종(尹九宗)을 노륙(孥戮)하고 유사문(柳師文)과 유성한(柳星漢)을 일체로 엄히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인하여 아뢰기를,
"이청(李晴)은 역적 성한과 가장 절친한 벗이라고 세상에서 지목한 지 오래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주선해 주고 옷이 없으면 옷을 주었으며 심지어 그의 집을 비워주어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긴밀하게 하여 크고 작은 일에 서로 상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경향(京鄕)에 출몰한 종적이 현저하여 감추기가 어려워 인심이 분해하고 공의(公議)가 들끓고 있습니다. 전 교리 이청에게 우선 변방으로 내치는 법을 시행하여 난리의 싹을 막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청의 일은 전해 들은 말이어서 다 믿기가 어려우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8월 11일 정축
사간원 대사간 이철모(李喆模)를 체직하고 황승원(黃昇源)으로 대신하였다.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예조 판서 홍억(洪檍)이 아뢰기를,
"금오(金吾)의 죄인을 가두어 놓는 서쪽 칸이 헐어서 무너지려 하니 사람이 깔려죽을 근심이 있고, 남쪽 칸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으니 속히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속기(俗忌)가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유사 당상(有司堂上)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신이 기유년에 전옥(典獄)을 고쳤는데 그 이듬해에 큰 은택이 널리 미쳐 감옥이 비게 되었으니 어찌 세속의 잘못된 믿음을 깨뜨릴 만한 한 가지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조정진(趙鼎鎭)에게 이르기를,
"속기 때문에 왕부(王府)를 수리하지 못하다니 어찌 이런 나라의 체모가 있겠는가. 호조 판서가 지의금(知義禁)이니 이달 안으로 역사를 다 마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억이 아뢰기를,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제사에 소찬(素饌)을 사용한다는 한 조항에 대해 전 예조 판서가 미처 복주(覆奏)하지 못하였는데, 신의 견해로는 능향(陵享)에 희생(犧牲)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고려 때의 예이고 가락국(駕洛國)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도(神道)로 말하더라도 1천여 년 동안 해온 혈식(血食)을 이제 갑자기 소채만으로 지낸다면 미안할 듯합니다. 전대로 고기를 쓰되 다만 그 제식(祭式)이 혼란스럽기가 거의 총사(叢祠)와 같으니, 그 제품(祭品)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의장 도식(儀仗圖式)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묘사(廟社)의 대제(大祭)에 향축(香祝)을 받들고 갈 때 전도(前導)는 세장(細仗)이 30병(柄)입니다. 이제 이 남단(南壇)은 사체가 자별하니 중사(中祀)의 열에 둔 채 그 의문(儀文)이 전혀 없는 것은 불가하고 또 묘사의 예를 따르는 것도 불가합니다. 이후에는 남단의 신여(神輿)를 받들고 갔다가 받들고 올 때 전도는 세장 30병 가운데서 청개(靑蓋)·봉선(鳳扇)·금월(金鉞)·은횡(銀橫)·금등(金鐙)·벽봉(碧鳳)·주작(朱雀)·삼각(三角)·백택(白澤)·홍개(紅蓋)를 각기 한 쌍(雙)씩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청(李晴)이 역적 유성한(柳星漢)의 혈당(血黨)·사우(死友)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 지 오래되었습니다. 방금 당소(堂疏)에서 논열한 것을 보니 그의 아주 흉악한 정절(情節)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아, 그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서 외람되이 청화(淸華)의 직을 차지해 전후의 은혜가 어떠하였는데 독사같은 성품으로 효경(梟獍) 같은 무리를 치우치게 좋아해 성한처럼 흉악하고 성한같은 역적에게 의식(衣食)을 나누어 주고 집을 주었습니까. 모든 초계(抄啓)를 지을 때 다 그의 손을 빌리고 크고 작은 글을 그가 윤색(潤色)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역적 성한과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간원의 상소 가운데에서도 유사문(柳師文)의 가인(家人)과 객(客)으로 가장 난만(爛漫)하고 가장 긴밀한 자를 구한다면 그보다 앞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전 교리 이청에게 우선 절도(絶島)로 안치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사간원도 함께 발계(發啓)하였다.】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2일 무인
전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교사(郊祀)하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예(禮)에 사서인(士庶人)은 오사(五祀)에 제사할 수 없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할 수 없으며, 제후(諸侯)는 천지(天地)에 제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직 기(杞)·송(宋)·노(魯)나라만이 제후로서 제사한 것은 혹 대국(大國)의 후손이거나 혹은 원성(元聖)091) 의 공로를 인해서였다.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후에도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대국에서 분모(分茅)092) 를 받지 않았고 크게 참람하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혐의를 구별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뜻이 엄하여 원구단의 예가 혹 소국(小國)에서 감히 지낼 제사가 아니라 하여 세조(世祖) 이후에는 원구단의 호칭을 남단이라 고쳐 일컫게 되었으니, 대개 군국(郡國)·주현(州縣)에서는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다. 주단(主壇)을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라 하는데 위(位)는 중앙에 있고 남면(南面)을 하며 축(祝)에서는 ‘조선 국왕 신 성휘(朝鮮國王臣姓諱)’라고 일컬으며 정1품 관원을 보내 초헌관을 삼는다. 악(樂)은 육성(六成)을 사용하여 특별히 사령(祀令)은 중사(中祀)의 열에 두었다. 시일은 양중월(兩仲月)에서 가리고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의 위판(位版)을 좌우로 배열(配列)하는데 모두 남면이다. 이에 전향(專享)을 합향(合享)으로 하여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는 미의(微意)를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만 치경(致敬)·치결(致潔)의 정성은 어찌 혹시라도 원구단과 남단이란 칭호와 제도가 다르다 하여 차이를 두겠는가. 문헌이 없어져 유사(有司)가 흔히 잘못된 예(例)를 답습해 근래에 현행식은 도리어 농잠(農蠶)과 석채(釋菜)만도 못하여 심지어 헌관의 작품(爵品)이 옛날에는 정1품이던 것이 지금은 종2품이며, 옛날에는 3색(色)의 대갱(大羹)·화갱(和羹)으로 하던 것을 지금에는 양(羊)·시(豕) 2색으로 하여 《오례의》와 이처럼 어긋난다. 이미 알았으니 빨리 원래의 의식(儀式)대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일이 전례(典禮)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물어 의논하여 아뢰라. 이밖의 절목(節目)이 소루한 곳은 예조와 태상(太常)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라."
하였는데,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신에게 물었더니,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오례의》는 바로 우리 나라 한 왕조의 제도로 천만 년 동안 준수해야지 누가 감히 의논하여 증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제품(祭品)의 식례(式例)만은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대갱과 화갱을 각기 3색으로 하면 이는 태뢰(太牢)의 예(禮)를 사용한 것입니다. 말하기를 「생뢰(牲牢)는 대사(大祀)에는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이며, 중사(中祀)에는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이며, 문선왕(文宣王)093) 은 털이 붉은 소로 양 대신 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맞추어 보면 남단을 이미 중사로 제사지낸다면 태뢰를 써서는 부당하고, 이미 태뢰를 쓰지 않는다면 대갱·화갱을 어찌 3색으로 하겠습니까. 지금 양과 돼지 2색이 비록 유사가 잘못된 예를 답습해서 그렇게 된 듯하나 한 유사가 마음대로 감손했을 이치는 없습니다. 신은 본디 고루하여 문헌을 징험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헌관의 품수(品數)로 말하더라도 정1품이 이미 초헌관이 되었다면 아헌관(亞獻官)은 마땅히 정2품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말하기를 「당상 정3품이 아헌관이 되고 당하 3품이 종헌관(終獻官)이 된다.」라고 하니 무슨 일을 인연해서 정(正)·종(從) 2품은 건너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종2품으로 초헌관을 삼는 것으로 추측해 보면 아마 ‘정1품’이란 ‘일(一)’자를 인쇄할 때 잘못 찍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교 가운데 또 「농잠(農蠶)만도 못하다.」고 의아해 하셨는데 선조(先朝)에서는 친경(親耕)·친잠(親蠶) 이후에 매양 헌관을 가려 보내라는 명이 계셨으니, 농잠 역시 중사여서 헌관이 남단(南壇)보다 높은 것은 이에서 말미암은 것인 듯합니다. 이는 모두 신의 억측이니, 오직 많이 듣고 박식한 신하로 하여금 다시 상고하여 아뢰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상께서 재단(裁斷)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갱품(羹品)을 복구(復舊)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희생을 단지 양과 돼지 2품만 사용하고 있고 보면 이 국이 한 가지 맛만을 위하여 별도로 우생(牛牲)을 잡는 것은 근거할 예가 없다. 이것은 고령(高靈) 제인(諸人)의 고견(高見)과 박식(博識)으로도 혹 탈략(脫略)됨을 면치 못한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피는 즈음에 남단의 의절(儀節)은 정미하게 새로 정하였고 원구단의 진설 도식(陳設圖式)은 빠뜨려서 서례(序例)와 대문(大文)이 이처럼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의 의절이 편리한 것만 못하다. 헌관은, 《오례의》 중사편(中祀篇)에 남단(南壇)·우단(雩壇)·선농(先農)·선잠(先蠶)에서 세 헌관의 작품(爵品)이 모두 같은데, 농잠은 아헌과 종헌을 통정(通政)·통훈(通訓)이 하던 것을 이제 올려서 정경(正卿)과 아경(亞卿)이 하고, 두 단(壇)에는 초헌을 정1품이 하던 것을 이제 종2품으로 내렸다. 혹은 올리고 혹은 내린 것은 특별히 거행하는 인습(因襲)에 말미암은 것이고 결코 예의(禮意)의 본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저 사전(祀典)은 사체가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유사가 매양 홀만하게 하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능침(陵寢)의 헌관 일을 편리한 것을 점쳐 규피하여 이에 감히 전부 사사로이 안면을 고려하며 심지어는 자급이 낮은 무변(武弁)과 종반(宗班)의 감령(監令)으로 가장 세력이 없는 자로 구차하게 채워 차송(差送)하는데, 하물며 이 산천(山川)에 매년 으레 행하는 사전이니 어찌 유의하여 법을 지킬 리가 있겠는가. 기억하건대 옛날 선조(先朝) 을유년에 우단의 세 헌관을 무신으로 차출해 보낸 것을 인해서 엄히 칙유(飭諭)를 가하시고 인하여 아경과 시종으로 가려 보내라고 하교하셨다. 그때에는 무신이 아경과는 그 등급이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에 폐습을 방지하기 위해 이런 일시의 연교(筵敎)가 계셨다. 원래의 의례(儀禮)가 본디 정1품이 초헌관이라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아래에서 즉시 귀띔해 주지 않은데다 위에서도 우연히 더는 묻지 않으시어 지금까지 한 번도 원래의 의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바로잡고자 하신 본지(本旨)를 우러러 천명한 것이겠는가. 우단의 가까운 예가 이와 같기 때문에 남단 역시 그걸 모방해서 예가 된 것이다. 지금부터는 두 단의 헌관은 한결같이 원래 의례의 관품(官品)대로 차출해 채워야 한다. 농잠의 아헌·종헌의 품계를 높이는 것은 이미 정식(定式)으로 수교(受敎)한 문적(文蹟)이 없으며 《문헌비고(文獻備考)》와 《속오례의(續五禮儀)》에도 모두 실려 있지 않는데 같은 중사가 이것은 같고 저것은 틀리니 역시 사전을 중히 하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 아니다. 일체로 원래의 의례대로 차출해 보내라."
하였다.
8월 13일 기묘
전교하기를,
"금년의 농사 형편을 거의 대략 알 수 있다. 영남·호남이 크게 서북에 미치지 못하니 공적인 경용(經用)과 사적인 민력(民力)이 모두 마음 쓰인다. 영남과 호남은 나라의 부고(府庫)이며 전획(田獲)은 백성의 쌀독이다. 부고가 차지 않은 것은 돌볼 겨를이 없으나 쌀독이 넉넉하지 못하면 부족한 것을 마땅히 구제해 주어야 한다. 장마가 져 재해를 입은 곳은 산골과 연해가 가장 심하다. 만약 두 번 수확하는 것은 한 번 거두어 먹는 것과 다르다는 것과 목화 농사는 상재(常災)가 없다는 데에 구애되어 작년에 이미 시행한 별례(別例)를 쓰지 않는다면 저 영남·호남의 백성들이 ‘나라에서 견감하는 은혜가 이미 태만해졌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또 손상됨에는 비록 천심(淺深)이 있지만 기내(畿內)와 관동(關東) 및 해서(海西)의 연(延)·백(白) 역시 논두렁이 천반 포락(川反浦落)하고 모래에 덮인 곳이 없지 않는데 같이 보는 법을 어찌 유독 아끼겠는가. 묘당에서는 이런 뜻을 알려주어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조정하여 혹시라도 한 농부에게라도 백징(白徵)하는 탄식이 없게 하라."
하였다.
다시 어의(御醫)를 보내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의 병을 보게 하였다.
8월 14일 경진
인정전(仁政殿) 뜰에 나아가 추석(秋夕) 향축(香祝) 지영례를 행하였다. 인하여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재숙(齋宿)하면서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행하고 각신(閣臣)과 승지·사관, 시관(試官) 및 유생에게 선온(宣醞)하였다.
영중추부사 이복원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염약(恬約)이 영부사(領府事)와 같은 자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김문정(金文貞)과 함께 정석(鼎席)에서 주선하여 좌진(坐鎭)으로 허여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영부사가 또 서거하였다고 하니 또 다시 서글프다. 더구나 기묘년 원(院)을 설치할 때 서문청(徐文淸)을 사(師)로 삼고 이 대신을 익선(翊善)으로 하여 명을 받들어 오랫동안 권강(勸講)의 직에 재임하였었다. 병신년 각(閣)을 설치하여서는 맨 먼저 제학(提學)을 제수받아 나를 도와주고 글을 다듬어준 힘에 의지한 바가 많았었다. 10여 년 동안 중서(中書)의 서루(西樓)에 있으면서 정백(精白)하게 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비평하지 못하였고, 집안에 또 품계 높은 관리가 있어 매양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힘쓰게 했는데, 이제 그만이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 조제(弔祭)하고 각관(閣官)을 보내 부제(賻祭)·휼고(恤孤)하는 일을 예에 의해 거행할 것이며, 녹봉(祿俸)은 상을 마칠 때까지로 한정해 줄 것이다. 문형(文衡)의 사시(賜諡)도 오히려 즉시 시행하는데 더구나 대신이겠는가. 사시하는 전례를 장례 전에 하라."
하였다. 이복원은 자(字)가 수지(綏之), 호(號)가 쌍계(雙溪)로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6세손이다. 영조(英祖) 무오년 사마시(司馬試)와 갑술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양전(兩銓)의 벼슬을 거쳤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좌의정에 이르렀다. 청신 염정(淸愼恬靜)하며 지조가 있었다. 문장은 이치(理致)를 주로 하였고 전중(典重)·온후(溫厚)하여 현란(眩亂)함을 일삼지 않았으며 사명(詞命)은 거의 근세에 제일이었다. 김익(金熤)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소박한 선비 옷을 입고, 내행(內行)이 돈독하여 세상에서 양상(兩相)이라고 일컬었다. 상이 일찍이 그의 상(像)을 가져다 보고 찬(贊)하기를 ‘내온외앙(內蘊外盎)하니 세상에서 유상(儒相)이라 일컬었다.’라고 하니 당시 신하를 잘 안다고 하였다. 이때에 졸하였다. 문집(文集)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8월 17일 계미
정범조(丁範祖)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8월 19일 을유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을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의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의 《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중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중국 부총병 등자룡 공을 진 도독(陳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의 낙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과 강진 땅 탄보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 총병은 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은 남해의 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撰)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본(本)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한 이청(李晴)의 일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해서 실정을 알아내어 쾌히 해당 율을 시행하소서.’라고 고쳤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우진(李羽晉)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능침(陵寢)의 절향(節享) 선품(膳品) 가운데 가장 성대한 것은 유밀과(油蜜果)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태상(太常)에는 잘 만드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아서 교졸(巧拙)이 가지런하지 않습니다. 매양 절신(節辰)을 당하여 서투른 사람을 구차하게 충당하여 구워 만드는 즈음에 혹 잘 만들기도 하고 잘못 만들기도 하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미안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향온(香醞)·조포(造脯)는 모두 태상에서 미리 만들어 준비해 놓으니, 유밀과도 기일 전에 만들어 준비하는 것이 더욱 경근(敬謹)에 합당합니다. 태상으로 하여금 특별히 잘 만드는 사람을 가려 기일 4, 5일 전에 미리 만들게 하되 제거(提擧) 및 판관(判官) 입회하에 간검(看檢)해 정결하게 하기를 힘쓰고, 인하여 전사관(典祀官)으로 하여금 임시해 배진(陪進)하게 하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청컨대 대신과 예당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변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시행하지 않았다.
부수찬 박규순(朴奎淳)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영남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를 1본(本) 정서(正書)하여 특별히 유생에게 명하여 가지고 안동(安東)에 가 보장(寶藏)으로 전하라 하셨기 때문에, 이번 가을 석채(釋菜) 때 한 도의 유생이 모두 모여 안동 향교(安東鄕校)에다가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안총(安寵)이란 자가 온 고을의 잡류(雜類) 약간 명을 거느리고 와서 고함치기를 ‘선왕조(先王朝)의 하교도 아직 봉안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지금 임금의 전교만을 봉안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유생이 말하기를 ‘선조 때의 통청(通淸)하라는 하교는 너희들이 조지(朝紙)에서 베껴낸 것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보배로 간직하라는 하교가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어전에서 정녕하신 하교를 친히 받은 것인데 이제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어찌 크게 잘못된 처사가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총의 무리가 더욱 노하여 외치기를 ‘너희가 이런 일을 하였으니 크게 선조의 역적이 된다.’ 하고는 마침내 봉안장(奉安欌)을 발로 차서 부수고 유생의 머리털을 끌어당기며 갖은 욕을 다하였습니다. 이러한 변괴는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것으로 안총 무리가 영남 유생의 ‘의리(義理)’란 두 글자에 노여움을 품고서 도리어 역적이란 죄목을 가하였으니 그들의 이치에 어긋나고 법을 무시함은 말하기에 부족합니다. 관장(官長)이 된 자는 마땅히 통렬하게 다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당시의 부사(府使) 신대승(申大升)은 문을 닫고 굳게 거절하면서 달려가 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밖에서 금억(禁抑)하고 내쫓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안총 무리의 기세가 두려워할 만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고 신대승이 겁이 많고 연약하게 함이 이처럼 심한 줄 몰랐습니다. 자신은 움츠리고 물러나 밖에서 위엄을 가하고 의리를 등진 무리를 편들었으니 아, 인심이 없어진 것이 이렇습니다. 청컨대 안동 부사 신대승에게 빨리 삭출하는 법을 시행하고, 안총은 도신으로 하여금 그 당여(黨與)를 엄히 조사하게 해서 각기 형배(刑配)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봉안장을 발로 차 부수어 연교(筵敎)·비지(批旨)·구전 하교(口傳下敎) 등의 문서를 조정의 명령대로 안치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안총의 소행은 난민(亂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먼 지방의 일이어서 다 믿기가 어려우니 도백에게 부쳐서 엄히 조사해 수종(首從)을 분간해 엄히 감죄하게 하라. 이후에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거나 비록 한 마디 말이나 한 장의 글이라도 입을 놀리거나 붓으로 쓰는 일이 있으면 그것이 금제를 범한 것이 됨은 같으니 곧바로 해당 원으로 하여금 해당 율로 단죄하게 하라. 신대승의 일은, 고을 원이 된 몸으로 즉시 완악한 백성을 통렬히 다스리지 않았으니 기강으로 헤아려 보아도 천만 놀랍다. 감영(監營)에 보고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수수방관하여 스스로 등문(登聞)하게 한단 말인가. 후일의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이러한 읍재(邑宰)를 엄히 감죄하지 않을 수 없다. 삭출은 지나치니 삭직하라."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김희(金憙)가 장계하여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뒷기슭을 보축(補築)하는 데 드는 재력(財力)을 공곡(公穀)을 취해 쓰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8월 20일 병술
승정원이 아뢰기를,
"오늘은 빈청(賓廳)에 모이는 날인데 대신이 병으로 와서 모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도승지 서매수(徐邁修)를 보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유시하기를,
"근래에 서늘한 기운이 생긴 지 이미 오래되어서 대신의 병환에 차도가 있다고 연석에서 들었다. 또 금년에는 영남·호남에 비가 너무 많이 내린 곳의 백성들에 대한 걱정으로 더욱 마음 쓰인다. 이러한 때에 의정부의 주인이 줄곧 집에 누워 있어서는 안 될 듯하다. 이밖에 사면(事面)과 국체(國體)가 모두 구차스러워 차대(次對)를 하면 비변사 당상관이 대신 나오고 거둥을 하면 우참찬이 압반(押班)을 하니 또 어찌 진장(鎭長)으로서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대신이 병이 있다고 하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비록 그 당초의 사단(事端)이 무엇을 인연했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요상(僚相)의 차주(箚奏)는 언외(言外)의 말이 맞지 않아서 여러 번 면대하여 바로 잡아주었다. 가끔 일을 인해서 모여 이미 모두 출사(出仕)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서 추가로 제기할 필요는 없다. 아, 경과 내가 과연 어떤 사이인가. 내가 결코 억지로 하기 어려운 일로써 경을 면려하는 것이 아니니, 경 역시 마땅히 확실하게 깨달아 벌떡 일어나 내가 측석(側席)하는 생각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만일 조정에 나오고자 한다면 내일 마땅히 상참(常參)과 차대를 행할 것이다."
하였다. 또 사관(史官)을 보내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에게 유시하기를,
"조정의 거조는 ‘체모(體貌)’란 두 글자보다 더한 것이 없다. 소관(小官)에 있어서 오히려 잡아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재상이겠는가. 현위(弦韋)094) 와 경위(涇渭)095) 는 스스로 현위·경위이며 조정의 체모는 조정의 체모이다. 도상(都相)의 망통(望筒)096) 을 보더라도 체모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지만 서용한 후에 한 번도 나오도록 권면치 않았으니 조정에서 먼저 격례(格例)를 무너뜨리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 더구나 좌상에게 돈유(敦諭)한 데서도 대략 언급했으니 결말을 짓는 법에 있어서도 당기기만 하고 쏘지 않아 반신반의하게 놓아 두어서도 안 된다. 또 경은 누구의 조카인가. 경의 집안의 훈로(勳勞)를 생각하면 어찌 혹시라도 경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의 지난날 일은 나의 고심(苦心)을 저버린 것이 크다. 내가 경례(敬禮)를 소홀히 하여 다소의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내일 좌상이 등연(登筵)하고자 하니, 어찌 반드시 전전 우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경에게 통유(洞諭)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안심하고 숙명(肅命)하라."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8월 21일 정해
상참하고 겸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상참을 먼저 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경들은 공자의 후손에 대한 일을 들었는가? 이는 매우 희귀하다. 오늘은 바로 공자께서 탄생하신 날인데, 공씨(孔氏)로서 우리 조정에 들어와 등제(登第)한 자가 4명이었다. 대개 공소(孔紹)는 바로 선성의 53대손인데 원(元)나라 때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따라서 나왔었다. 그후에 또 공부(孔頫)란 자가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태학사(太學士)가 되었고, 공서린(孔瑞麟)에 이르러서 울연하게 기묘 명현(己卯名賢)이 되어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근세에 또 음사(蔭仕)로 사옹원 참봉이 된 자가 있으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공서린 이후에 없었다. 장적(帳籍) 및 그 집에 소장된 족보(族譜)를 가져다 상고하고 인하여 중국의 문헌을 소급해 상고해 보니, 세파(世派)와 내력이 분명하게 부합하였다. 일전 일차 전강(日次殿講)을 행할 때 강생(講生) 가운데 공윤항(孔胤恒)이란 자가 있었는데 바로 공서린의 9대손이었다. 그 조부 공학수(孔學洙)는 일찍이 성균관에 있었는데, 옛날 선조 갑인연간에 반장(泮長)의 진달을 인해서 고 재상 김흥경(金興慶)이 ‘일이 국운(國運)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니, 우선 급히 조용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까지 말하여 선조에서 특별히 별료(別料)를 주어 녹용(錄用)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런데도 전관(銓官) 등이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조용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이처럼 무상(無狀)한 전관이 있겠는가. 그들은 편사(偏私)만 이루고 당비(黨比)에만 급하여 이루지 못한 욕심이 없고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으니 이에 폐단이 흘러서 위엄을 짓고 권한을 팔기에까지 이르렀다. 등극한 이후 먼저 이런 습성부터 반드시 통렬히 개혁하여 예악(禮樂)·형정(刑政)의 권병(權柄)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또 공서린에게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아직까지 할 겨를이 없었으니 역시 궐전(闕典)에 관계된다. 어젯밤에 《궐리지(闕里志)》를 상고해 보니 선성의 탄생일이 오늘과 서로 부합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만약 오늘에 선조(先朝)의 녹용하라는 유지를 본받아 성인의 후예를 녹용하는 광전(曠典)을 거행한다면 나라에 있어서 실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적장(嫡長)은 연성공(衍聖公)을 세습(世襲)하고 지파(支派)는 혹 오경 박사(五經博士)와 태상 박사(太常博士) 등에 보직하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는 남은 후예가 이미 적장이 아니니 세습은 갑자기 의논할 수가 없으며 관제(官制)도 구애됨이 많아 해당되는 자리를 정확히 정하기가 어렵다. 수재(守齋)하게 하고 늠료(廩料)를 계속 대주는 것도 이미 오래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요 집을 주고 요미를 주는 것 역시 편리하지 못한 단서가 있다. 또 단지 목전의 윤항만 뽑아 먼저 수용한다면 만약 그의 부형(父兄)이 있을 경우 비단 관계되는 일이 어떠하겠으며 적파(嫡派)를 두고 지손(支孫)을 취하면 후일 그 문중(門中) 역시 시끄러워질 폐단이 있게 된다. 전후를 말미암아서 마땅히 널리 물어서 처리하는 일이 있어야 하니, 대신과 제재(諸宰), 삼사(三司)는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공성(孔聖)의 후예에게 반드시 우대하는 예를 특별히 시행하고자 하시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더군다나 우연히 공자의 탄생일을 당하여 선조의 녹용하라는 뜻을 받드시니, 족히 간책(簡策)에 빛날 일입니다. 다만 집을 주고 요미를 주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한데 반드시 공소(孔紹)의 적장손(嫡長孫)을 그 가주(家主)를 삼은 연후에야 공씨 성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잡스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듣건대 그 장파(長派) 가운데 한미해져 영남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세파 문헌(世派文獻)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설혹 참으로 장파가 있다 하더라도 먼 고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 그 처자를 이끌고 와 준 집에서 산다면, 집은 수용할 수 있겠지만 주는 요미로써 어찌 8, 9, 10명에 이르는 식구가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반드시 우대하고자 하는 것이 혹 도리어 해가 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박종악은 아뢰기를,
"그 적장이나 혹은 여러 자손으로 녹용하기에 합당한 자를 초사(初仕)로 녹용해 그 사람됨이 감당할 만하면 자목관(字牧官)으로 바꾸어 주는 것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청백리(淸白吏)와 공신의 자손도 오히려 녹용하고 있는데 하물며 대성인의 후예이겠습니까."
하고, 사직(司直) 서유린(徐有隣)은 아뢰기를,
"오늘의 이 하교는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공윤항(孔胤恒)의 세계(世系)와 내력이 명백할 뿐만 아니니 조정에서 수용하는 데 더는 의심할 것이 없으며, 직파(直派)의 후예를 찾으면 집을 주고 벼슬을 주되 대략 세습(世襲)의 예를 모방하면 더욱 사의에 합당합니다."
하고,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은 아뢰기를,
"특별히 성균관의 벼슬 한 자리를 공씨를 번갈아 차임하는 벼슬로 삼으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억(洪檍)은 아뢰기를,
"만약 성균관의 벼슬 한 자리를 대대로 영원히 부쳐준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판윤 김문순(金文淳)은 아뢰기를,
"반드시 반관(泮官)으로 수록(收錄)할 것이 아니라 음기(蔭歧) 초사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부사직 김상집(金尙集)은 아뢰기를,
"만일 그 인품이 합당하고 반벌(班閥)을 잃지 않았다면 음사(蔭仕)로 문관이나 무관이 모두 불가할 것이 없으며, 반관으로 수용하는 것은 편리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우참찬 서유방(徐有防)은 아뢰기를,
"반관이나 초사를 물론하고 중국의 세습하는 예를 대략 모방해도 불가하지 않을 듯합니다. 고 도헌(都憲) 공서린은 이미 우리 나라의 명현(名賢)이고 또 그 아래에도 벼슬한 것이 현저하여 기록할 만하여 지금까지도 유독 양반의 본색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감당할 만한 인물을 가려서 우선 수용하고 인하여 규제(規制)를 정해 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는 아뢰기를,
"공자의 후예 중에서 직파를 찾는다면 분분한 폐단이 있을 듯하고 대대로 관직(館職)을 주고자 한다면 아끼지 않는다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인물과 문벌이 가장 드러난 자를 음직에 제수하되 어느 파인가는 논하지 말고 다만 공씨로 하여금 관리가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게만 하고 인하여 이로써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는 아뢰기를,
"평양의 숭인전 감(崇仁殿監)과 마전(麻田)의 숭의전 감(崇義殿監)은 선우씨(鮮于氏) 성과 왕씨(王氏) 성이 서로 이어가며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서린의 자손부터 시작하여 대략 이 예를 본뜨는 것 역시 하나의 방도가 될 것 같습니다. 사로(仕路)에 통하고 관직을 주는 것은 오직 사람의 그릇이 어떠한가를 보아야지 이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훈련도 정 조심태(趙心泰)는 아뢰기를,
"음과(蔭窠)의 초사는 불가할 것이 없으나 반드시 장파를 수용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손·적손을 논하지 말고 오직 사람을 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형조 참판 서유대(徐有大)는 아뢰기를,
"이미 공자의 후예이고 사람 역시 정상(精詳)하면 앞으로 성취된 후 녹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황승원(黃昇源)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명신(名臣)의 후예도 오히려 녹용하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공자의 후예이겠습니까. 다만 녹용하는 법이 공자의 후손 한 사람에게서 그치고 은택이 세상에 이어짐이 없다면 실로 오늘 하문하시는 본의가 아닙니다."
하고, 집의 송민재(宋民載)는 아뢰기를,
"대성의 후예라면 국자 낭서(國子郞署)뿐만 아니라 어느 직인들 불가하겠습니까만 단지 그 자신만 녹용하고 대대로 수용하는 방도가 없다면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하고, 사간 유광천(柳匡天)은 아뢰기를,
"세파(世派)가 이미 분명하고 사람됨이 취할 만하면 어찌 달리 녹용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부응교 김한동(金翰東)은 아뢰기를,
"비록 궐리(闕里)의 세적(世嫡)과는 다르지만 우리 나라에 온 이후에는 당연히 적장이 있게 마련이며, 또 더군다나 고 명신 공서린의 후손이니 조정에서 수용하는 것은 성덕의 일입니다. 만일 사환(仕宦)을 감당할 만하면 특별히 녹용하고, 만일 사환을 감당하지 못하면 중국의 세습하는 예에 따라서 그의 적장손에게 대대로 급복(給復)하여 특별한 은전을 표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장령 권빈(權儐)은 아뢰기를,
"대성(大聖)의 후예는 수용해야 마땅하며 대대로 뽑아 쓰는 것은 실로 성덕에 빛이 납니다."
하고, 지평 김달순(金達淳)은 아뢰기를,
"지금 이후부터 작록(爵祿)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잠영(簪纓)이 번창하게 하는 것이 성인을 사모하여 기의(起義)하는 한 방도에 합당합니다."
하고, 헌납 이우제(李遇濟)는 아뢰기를,
"국자 낭관은 모두 문관직이어서 구애됨이 있다면 모든 초사 자리가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직파를 대대로 조용한다면 후일의 사단은 없을 듯합니다."
하고, 교리 김희조(金熙朝)는 아뢰기를,
"공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 가운데 적손·지손을 논하지 말고 그 재능이 감당할 만한 자를 가려서 매양 수록하는 것이 가장 사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공윤항은 고 도헌의 후예로 사람됨이 정명(精明)하고, 또 선조에서 녹용하라는 하교가 그의 조부 학수(學洙)에게 미쳤으나 유사(有司)가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약 윤항을 재랑(齋郞)에 임명하여 승천(陞遷)하는 계제로 삼는다면 성인을 높이는 지극한 뜻과 선조를 계술하는 훌륭한 덕에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고, 교리 김희순(金羲淳)은 아뢰기를,
"수록하는 일을 시험삼아 중국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반드시 모두 적장으로 습봉(襲封)하지는 않습니다. 한림원(翰林院)의 오경 박사(五經博士)와 같은 관직은 바로 공씨 성의 차자(次子)를 봉하는 벼슬입니다. 지금 공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 가운데서 비록 누가 적손이며 누가 지손인지는 모르겠으나 오경 박사의 예에 의해서 관관(館官) 한 자리에 녹용하여 세습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부교리 송익효(宋翼孝)는 아뢰기를,
"공윤항은 제법 훌륭한 인물이라고 하니 재랑이나 교관(敎官)의 직에 조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정언 이일운(李日運)은 아뢰기를,
"이미 대성인의 후예이고 또 명현의 후예이니 무슨 직인들 불가하겠습니까. 듣건대 윤항은 경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한관(閑官) 한 자리를 주어 학업을 닦아 성취하게 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정언 이명연(李明淵)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 사는 공씨는 본래 연성공(衍聖公)의 적장파가 아니므로 모두 세작(世爵)을 주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합니다. 청백리나 사절인(死節人)의 자손에 대한 예에 의해 매 도정(都政) 때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찾아서 녹용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공윤항에 이르러서는 사람됨이 수용하기에 합당하니 먼저 수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부수찬 윤치성(尹致性)은 아뢰기를,
"관관은 내시가 세습하는 것인 만큼 이미 수록하는 실제가 아니며 또 장려해서 쓰는 방도에도 흠이 됩니다."
하고, 부수찬 박규순(朴奎淳)은 아뢰기를,
"윤항의 사람됨이 벼슬하기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알 수 없으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공씨들은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자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위세를 떨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제 성인의 후예가 학문과 자질이 갖춰져 볼 만하여 계속 이어 등용하고자 한다면 우선 교육을 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관학(館學) 및 향상(鄕庠)에서 공부하는 여러 공씨들에게 봉급을 주어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하여 재능을 이루어 과거에 합격하도록 하고, 혹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숙유(宿儒)가 된 연후에 가려서 쓰면 거의 흥기시킬 수가 있고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공소(孔紹)의 후손을 찾아내는 것은 끝내 폐단이 있습니다. 공서린은 바로 우리 나라의 명현이니 그의 후손을 수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더구나 공학수는 공서린의 직파(直派)가 된다 하여 선조께서 전교를 내리심이 이처럼 간절하였는데도 전관(銓官)이 시종 미루기만 하였으니 아주 개탄스럽습니다. 이제 학수의 손자를 등용하면 선성(先聖)을 추념(追念)하고 유지(遺旨)를 우러러 따르는 도리가 됩니다. 이는 공신의 승습(承襲)과는 다르니 그 부형을 빠뜨리고 그 자질(子姪)만 취하는 것을 혐의하여 구애되는 단서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 예조로 하여금 고 대사헌 공서린의 후손으로 용인(龍仁)에 살고 있는 자를 불러 보고 그 직파인 사람의 명자(名字)를 물어 논리 있게 초기(草記)하게 하면 마땅히 하나를 지적해서 하교하겠다. 공서린은 선성의 후예로서 겸하여 우리 나라의 명현이 되므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숭장(崇奬)한 일이 지극했었다. 그러나 그 집안 사람들이 세력이 없어서 행장(行狀)을 짓지 못하고 아직껏 시호를 맞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녹용하라는 명이 있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나라는 예의 있는 나라라고 이름하는데, 이른바 진신(搢紳)·사대부(士大夫)들이 임금의 명을 받드는 것은 도리어 중국에서 성인을 높이는 것보다 못하니, 참으로 이른바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나라의 습속이 이처럼 노망(魯莽)한 줄을 모르고 성인이 탄생한 구갑(舊甲)을 만나면 반드시 기억하여 알아 성전(盛典)이 있는 줄 인식하고 있다. 작년 사행(使行)이 연경에 들어갔을 때 공성(孔聖)의 후예가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와 직접 성인의 유상(遺像)을 전하여 받들고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어찌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로 온 자는 바로 공소인데, 공소가 가지고 온 세보(世譜)는 비록 우리 나라에서 인행한 본(本)이 있지만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다시 계보(系譜)의 진본(眞本)을 곡부(曲阜)의 공족(孔族)에게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연후에 운각(芸閣)에서 인행 반포하는 것이 실로 일의 면목에 합당하다. 이번 행차의 서장관(書狀官)은 당하 각신(閣臣)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계보도 오히려 성심으로 찾자 중국 사람이 듣고서 감격하여 한 본을 보내주어 사우(祠宇)를 세워 족보를 보관한 일까지 있었는데 더군다나 성인의 계파이겠는가. 이날을 맞이하여 이런 하교를 하는데 어찌 범연하게 말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항이 거재생(居齋生)으로 일차 전강(日次殿講)에 응시하여 《주역(周易)》을 외워보라고 하였는데 불통(不通)을 받았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공성(孔聖)께서도 만년에야 《주역》을 좋아하셨으니 그 후예가 초년에 익숙히 외우지 못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는 《시경(詩經)》 관저장(關雎章)을 외우라고 명하였으나 또 불통이었다.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윤항이 대답하기를,
"반유(泮儒) 가운데 맹현대(孟賢大)라는 자가 있어 신에게 ‘강경(講經) 때는 먼저 하경(下經)을 읽는다.’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었다. 얼마 후 맹현대가 반제(泮製)에 합격하니, 상이 그 시권(試券)에 쓰기를,
"맹을 성으로 하고서 속임수로 짐승을 잡으려는 술책을 써서 선성(先聖)의 후예를 그릇되이 가르쳤다."
하고는 뽑아 버리니, 재생들이 성대한 일로 여겨 전송(傳誦)하였는데, 이날 윤항을 소견하고는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강계(江界)에서 상납하는 인삼(人蔘) 중 30근을 정수로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경공(京貢)으로 삼았었는데, 신은 삼이 풍작일 때에는 반드시 30근 이외의 남은 수량이 있어서 도리어 훗날 강계 수령이 이익을 독점하는 밑천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남는 수량의 다소를 논하지 않고 삼을 캔 사람에게 내주어 서로 매매하게 하자는 뜻으로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강계 원의 사찰(私札)을 보니 말하기를 ‘조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뜻은 아주 감탄스러우나 만약 이 법을 시행하면 도리어 본부(本府)에 폐단이 될 것이다. 대개 강계 경내에서는 감히 삼을 사사로이 매매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비록 밭머리에서 캔 삼이라 하더라도 가지고 관부(官府)로 달려가서 관에서 정식(定式)한 값을 받아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사(京司)의 상공(上供)이 전핍(全乏)하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스스로 매매하는 길을 열면, 이것은 바로 큰 이익이 생기는 곳이기 때문에 삼을 캐는 백성들이 반드시 갖은 방법으로 숨기기 위해 간특한 모의를 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설령 삼이 풍작일 때라 하더라도 30근의 수량을 채울 리가 만무하다. 매매하는 법을 전대로 엄금하고, 30근 이외의 남은 수는 실제의 숫자에 따라 호조로 옮겨 납부하고 한편으로는 비국에 보고해 제목(題目)을 받아두었다가 만일 삼이 흉작이어서 30근을 채우지 못할 때에는 전일 더 납부한 수량으로써 경사(京師)에서 그 부족 분을 채우면 실로 사의에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이치에 맞기는 하나 다만 생각건대 자신을 다스리고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설사 남은 수량이 있더라도 결코 실제대로 모조리 보고할 리가 없으며, 또 받아서 호조에 두더라도 비단 해마다 많은 숫자가 축났다고 일컬을 뿐만 아니라 필경에는 전부 없어지게 될 근심도 자주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이 겪어본 일이어서 그 폐단을 깊이 알기 때문에 앙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찍이 도백(道伯)을 지낸 해부의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홍억(洪檍)이 아뢰기를,
"왜역(倭譯)에게 내주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왜역에게 내주어 왜관(倭館)의 수용(需用) 밑천을 삼고, 기영(箕營)에서 매년 내려보내는 삼값 가운데서 수를 나누어 저축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강계 원의 말대로 정해진 수량 이외에 남는 것은 전부 올려보내게 해 곧바로 왜학청(倭學廳)에 내주어 저축해 두게 하면 공연히 축날 근심은 저절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후로는 강계 원이 혹 모조리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삼고자 하면 도신이 반드시 엄히 염찰(廉察)을 가해 조정에 보고하도록 해 탐오(貪汚)의 율로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근래에 형정(刑政)이 어긋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성한(柳星漢)의 일을 삼사가 연달아 성토하고 있는데도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어 성한과 같은 역적이 아직도 제 집에서 아무 죄가 없는 자처럼 누워 있습니다. 신은 성상의 마음속에 무슨 별다른 생각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형정은 이미 여지없이 어긋났습니다."
하니, 판중추부사 박종악이 아뢰기를,
"삼사의 논박이 지금까지도 엄준한데 그는 털끝 하나 손상되지 않고 여전히 숨쉬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빨리 삼사의 청을 윤허하소서."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참으로 잡아낼 만한 범죄의 확증이 없다면 삼사의 논의가 비록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성한의 흉언은 스스로 그의 입에서 나와 역절(逆節)이 이미 탄로났으니 삼사의 논의는 이치에 맞고 말이 순합니다. 그런데도 이제 도리어 죄를 가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나라의 기강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훌륭하다. 만약 위의 조항으로 말한다면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그후에 중신(重臣)의 상소를 가져다 보고 사실(私室)에서 수작한 말을 참고해 보니 이 일의 속셈이 무엇 때문에 나와서 필경에는 죄를 성토함이 이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만약 지중 지대(至重至大)한 곳에 죄를 지었다면 찬배(竄配)나 형배(刑配)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의 죄를 묻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묻지 않은 것은, 만약 묻는다면 그가 반드시 불복(不服)할 것이요, 그러면 찬배로 감률(勘律)해야 하는데 경들이 기꺼이 따르겠는가. 만약 일이 범연한데 관계된다면 찬배한들 불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만 이는 얼마나 지중 지엄한 일인가. 그의 상소가 매우 음험하고 또 사서(私書)의 구어(句語)가 있기 때문에 진신(搢紳)·장보(章甫)들이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예사롭게 보아 형배해서는 안 된다. 만약 별도의 도리가 있다면 결말을 내어도 좋다. 본 상소는 음험하여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차율(次律)을 쓰는 것은 불가하다. 이 일은 요즘에는 잠잠했는데 경은 어찌하여 다시 발론하는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중한데 가볍게 처벌하는 것은 혹 그럴 수 있지만 어찌 죄가 중한데도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감사(減死)의 율을 쓴다면 이 율은 어떻겠는가?"
하니, 사직(司直) 서유린(徐有隣) 등이 일제히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매양 죄가 중하나 율을 가하지 말라고 하교하시지만 어찌 죄가 중한데 율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성한의 흉악한 심보가 남김없이 탄로나서 위로는 감히 막중한 곳을 범하였고, 아래로는 오로지 무핍(誣逼)을 일삼았습니다. 범죄 확증에 대한 단안(斷案)을 어찌 잡아낼 단서가 없다고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중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말하였다. 만약 역적을 토벌하는 것으로 논하자면 마땅히 ‘복(復)’이란 한 글자를 써야 한다는 경들의 말이 그럴 듯하나 그것이 중대하기 때문에 율을 쓰지 않은 것이다."
하니,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만약 잡아낼 만한 단서가 없다고 여기신다면 어찌하여 한번 물어서 형벌을 벗어나게 해주지 않으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 가운데 어버이의 이름자 때문에 평생동안 돌[石]을 밟지 않은 자가 있었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어찌 경들의 마음만 못하겠는가. 참으로 범죄에 대한 확증에 있어서 홍계희(洪啓禧)나 김상로(金尙魯)에게 자취가 있다면 마땅히 해당되는 율을 쓰겠지만 만약 큰 확증의 단안을 얻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죄가 있는데 그 죄에 합당한 율이 없어도 안 되고, 죽여야 할 자를 살려두는 것도 불가하며 살려두어야 할 자를 죽이는 것도 불가하다. 반드시 속마음과 자취가 다 밝혀진 연후에 죽여야 옳다. 또 홍계희와 김상로의 범죄 사실에 대한 자취가 없는 것은 우선 제쳐놓았다가 마침내 탄로가 나면 비록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병신년 때처럼 다스려야 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대저 경들이 일하는 것은 개탄스럽다. 전일 분분하던 것이 근래에 그쳤는데, 만약 참으로 막중한 곳을 범하였다고 하면 돌아보아 머뭇거릴 것이 무엇이기에 몇 차례의 차대(次對)에서 묵묵히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오늘에야 갑자기 일을 일으키는가. 대신은 애초에 등연(登筵)했고 또 맨 처음 발론했으니 청토(請討)해야 하겠지만 공조 판서에게는 이미 누누이 말했었다. 나의 정령(政令)이 어찌 잘했다고 말하겠는가. 소원은 공자(孔子)를 배워서 치세(治世)의 형정(刑政)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의리(義理)의 무궁함은 누에고치 실이나 쇠털과 같으니 마땅히 하늘의 태양처럼 밝혀서 노예(奴隷)라도 다 알게 된 연후에 단정하는 것이 옳다. 비록 병신년 이전으로 말하더라도 홍계희·김상로 이하의 제적(諸賊)을 모두 문책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마침내는 처분하거나 혹은 다른 죄를 준 것은 오로지 차마 들을 수도 없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구나 병신년 이후에 만약 지중 지엄한 곳을 범함이 있으면 어찌 혹시라도 문책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이 역시 눈으로 보았거나 손으로 잡아낸 것 이외에는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 되므로 그냥 두고 우선 보려 하였다. 만약 혹 애매함이 공조 판서의 말과 같다면 형벌을 벗어나게 해야 하며, 만약 살려주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또 어찌 이것을 굳게 지키겠는가. 내가 좌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리로 헤아려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누에고치 실이나 쇠털 같은 작은 일도 조금도 빠뜨리지 않으시니, 신은 흠앙해 마지않으나 대체로 논하자면 형정이 어긋났습니다. 지방의 간리(奸吏)들에게 ‘공물(公物)은 훔쳐 먹고 보라.’는 속담이 있는데 대개 큰 물건을 훔쳐 먹게 되면 일이 장차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중한데도 애초에 율을 쓰지 않으니, 어찌 이런 나라의 기강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간리의 비유는 참으로 옳다. 내가 곧바로 경의 말을 윤허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내 마음이 여기에 미치지 않음은 아마 미처 두루 생각이 미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비록 두루 생각하고자 하더라도 참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경들은 이처럼 괴롭게 다툴 필요가 없다. 근래에 비록 잠잠해졌다고 말하나 인심이 편안한 데 익숙해지고 견문이 습관적인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본디 그렇다."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인심이 편안함에 익숙해진 것은 참으로 성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어찌 흉악함이 성한과 같은 자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그대로 둔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자, 창순이 아뢰기를,
"먼저 차율(次律)을 쓰고, 후에 극률(極律)을 가하는 것이 실로 점차적으로 역적을 다스리는 방도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살려주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것은 그에게도 좋지 않게 된다. 내 본의는 이와 같다. 만일 꺼낼 만한 방도가 있으면 개도(開導)하여 회청(回聽)하는 것이 옳을 듯 어떨지 모르겠다."
하자, 제공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의 말처럼 차차 율을 가하면 인심의 의혹을 풀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비록 유사문(柳師文)의 일로 말하더라도 흉언(凶言)을 한 죄수를 경수(輕囚)와 혼동하여 석방했으니, 어찌 말이 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아들에 대해 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아비를 먼저 묻겠는가. 금년 여름에 경수를 석방할 때 사문 역시 그 가운데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비단 그 아들에게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비의 흉언은 그 아들의 배나 됩니다."
하고, 이병모가 아뢰기를,
"만약 그의 흉언이 아니었다면 간장(諫長)의 상소가 어찌 나왔겠으며 또 어찌 수금(囚禁)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정세(情勢) 이외에도 정신이 없는데다 또 걸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봉공(奉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미의(微意)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대저 판부사의 일은 개탄스럽다. 이미 그 권점에 참여하였고 이미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서는 차주(箚奏)하고 또 사적인 편지를 계속 보내서 경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불안하도록 하였다. 또 ‘대동 소이(大同小異)하다.’라고 한 것은 다만 망발로만 논해서는 안 된다. 유성한(柳星漢)은 경을 불러오기 전부터 이미 말했었는데 허물을 남에게 돌리려고 좌상을 핑계하고 절절(節節)이 이의를 제기했었다. 그래서 김달순(金達淳) 같은 자가 나왔으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하여 시투(時套)가 되어 성한의 상소가 나오기까지 한 것이다. 사적인 편지의 구절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처리하자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좋은 말을 가한 것인데 경이 도리어 이와 같이 하고 있다.
경이 들어온 후에 일이 층층으로 일어나 백공천창(百孔千瘡)이라고 할 수 있다. 반년 동안 수응하느라 참으로 분주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도위(都尉)가 만약 앎이 있다면 반드시 어떻다고 하겠는가. 경은 인품이 충담(沖譚)하여 기관(機關)을 두지 않기 때문에 발탁하여 등용함이 이에 이르렀는데 경은 어찌 깊이 양해하지 않고 일마다 상반되게 하는가. ‘대동 소이하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렵고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극적(劇賊)에게 어찌 대동 소이하다는 논의를 쓰겠는가. 또 전전(前前) 우상의 일로 말하더라도 구종(九宗)의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나기 전이니 그와 서로 친한 것이 괴이할 것이 없으며 하마(下馬)하지 않은 역절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설혹 말하고자 하였다면 22일 이전에는 그래도 혹 괜찮을 것인데 더구나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겠는가. 전전 우상이 만약 경의 대동 소이하다는 논의를 듣고서 공격한다면 경은 장차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지난번 경모궁(景慕宮)의 차대(次對) 입시에서 소굴이요, 부리라는 현장 고발이 나왔는데 어찌 무리한 말을 요상(僚相)에게 하는가. 전전 우상이 어찌 경의 말로써 가손(加損)되겠는가. 경이 별건(別件)의 일을 발론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근사한 자취로써 그런 것이다. 내가 대신을 존경하는 뜻에서 경을 불러 들어오게 한 것이니 차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관록(館錄)의 일도 잘못되었다. 좌상과 화동 인협(和同寅協)하고 또 전전 우상이 들어오거든 역시 화동해야 한다. 대동 소이하다고 말한 것은 천만 실언한 것이며 ‘한골동(閒汨董)097) ’이라고 말한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없기 때문에 경을 등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좌상이 경의 말을 듣고자 할 것인데 경은 과연 잘하였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관록 한 가지 일은 신이 실로 용렬하여 잘 주선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요상에게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골동이라고 말한 것은 관록의 일을 핍박한 것이니 차자에 어찌 이런 말을 쓸 수 있겠는가. 대소의 장주(章奏)가 모두 이런 투식을 본받아서 유성한 같은 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사적인 편지 건에 대해서는 좌상에게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고, 제공은 아뢰기를,
"신은 몽매간에 아무 생각 없이 붓가는 대로 쓴 것입니다. 신의 글 가운데 ‘자연스럽게 처리하자.’라고 말한 것은 단지 순리(順理)의 뜻을 취한 것으로 예담(例談)에 불과하지 실로 털끝만큼도 무슨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후 동료인 재상이 이러저러한 말을 하기에 의아하게 여겼었습니다."
하자, 종악이 아뢰기를,
"이는 좌상이 잘못 인용한 것인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들고 보니 신에게 과연 잘못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미 이와 같았고 여러 재상이 모두 들었으니 사관(史官)은 마땅히 쓸 것이다. 이제부터는 전혀 아무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다시는 경을 보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제 대조회(大朝會)를 당해 좌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경을 들어오라 청한 것이며, 반드시 전전 우상의 처지를 위하는 데 기인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였다. 종악이 아뢰기를,
"신은 구구하게 고집한 바가 있어서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이런 말을 꺼내는가. 이른바 고집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경이 미혹됨으로 인해 이처럼 수응하고 있는데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끝내 미혹을 고집하려면 어찌 나가서 명을 기다리지 않는가."
하자, 종악이 마침내 물러가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렸다. 전교하기를,
"누누이 하교함이 세도(世道)를 위한 고심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한결같이 미혹됨을 잡고서 고집한 바가 단단하기까지 하니, 내가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심하고 명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지난 신축년에 상께서 청포전(靑布廛)을 진념하시어 특별히 공적으로 쓰는 관모(官帽) 1천 개 이외의 남은 수량 2백 개를 해당 전(廛)으로 하여금 은(銀)을 마련해서 무역해 오되 의주부(義州府)에서 거두는 세(稅)를 바치지 말고 마음대로 화매(和賣)하여 살아갈 밑천으로 삼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때의 절목(節目) 가운데 ‘자체로 마련한 가은(價銀)은 실제의 수량에 따라 비국에 보고하고 포외 월송(包外越送)한다는 것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한다.’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그 염려한 바가 주밀(周密)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전민(廛民)이 갑자기 간사한 계책을 내어 애초에 가본(價本)을 보내지 않고 몰래 역관(譯官)과 결탁하여 ‘전의 모자값을 어느어느 역관의 8개 짐꾸러미 안에 넣었다.’고 말하면서 전례대로 포외 월송으로 비국에 공문서를 보냅니다. 그러다가 사행(使行)이 돌아오면 공공연히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척(帽隻)을 그들이 무역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음대로 실어갑니다. 이 때문에 공적으로 쓰는 모자가 해마다 감소되어 몇 년이 못되어 운향고(運餉庫)가 곧 바닥이 남을 면치 못해 사행의 책응(策應)을 손쓸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년 겨울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그 포외(包外)의 은자(銀子)를 조사하였으나 처음에 내려오지 않아서 금년 봄 회문(回門)할 때에 의주 부윤이 무세모(無稅帽)를 전인(廛人)들에게 내주고자 하지 않아 여러 차례 논보(論報)해 왔습니다. 그래서 신이 추조(秋曹)에 분부해서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게 했더니 전인들이 갑자기 말하기를 ‘계묘년 간에 공시 당상(貢市堂上)을 통해 저 전(廛)의 모가(帽價)를 역관의 짐꾸러미 속에다 부송할 것을 진달하여 윤허를 받아 포외 월송한다는 것으로 비국에 정장(呈狀)하였으니, 바로 구례(舊例)를 따랐기 때문에 착오가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조 판서가 이미 공초를 받고 또 문적(文跡)을 상고하여 신에게 보내서 보여주기에 신은 믿고서 의심하지 않으면서 ‘공시 당상이 반드시 전민과 사사로운 정을 둔 것이다.’라고 여겨 파면시킬 것을 청하려 했습니다. 추후에 그때의 문서를 상고해 보니, 공시 당상이 청한 것은 바로 공용모(公用帽)가 비록 1천 개의 수량에 차지 않더라도 전모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자의 짐꾸러미 안에 넘겨보내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지 가은(價銀)을 짐꾸러미 안에 넘겨보낸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형조 당상이 글의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지 않고서 단지 그 ‘포내 월송(包內越送)’이란 네 글자만 보고서 가은의 포내 월송으로 알았으니, 이는 형조 판서가 속은 것이지 공시 당상의 잘못이 아닙니다. 청컨대 금년부터는 맨 처음의 절목을 신명(申明)하여 반드시 전민배들로 하여금 자체로 마련한 가본을 짐꾸러미 이외로 보내게 하고, 의주 부윤이 특별히 조검(照檢)을 해서 들여보낸 가본의 다소에 따라서 그 모자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서유린(徐有隣)을 선혜청 제조로 삼았다.
대사간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로 숭유(崇儒)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초연(招延)하는 일과 초계(抄啓)하는 방도로써 성명(成命)을 여러 번 내리셨건만 이제 반년이 되었는데도 암혈(巖穴)에 있는 유생을 정초(旌招)하여 기용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어찌 처음에 바랐던 뜻이겠습니까. 초야의 선비는 나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절조를 굳게 지키는 것이 그 본분이니 전하께서 성의를 쌓고 더욱 예모를 갖추시어 폐백(幣帛)으로 돈독히 부르시고 윤음(綸音)으로써 믿고 감격시켜 선뜻 응하는 효과가 있게 하고, 미처 초계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도 역시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장령 권빈이 아뢰기를,
"근일 삼사(三司)의 신하가 상소하고 차자한 것이 언사(言事) 아님이 없는데, 혹 입계했는데도 비지(批旨)를 받지 못한 것이 있고 혹은 승정원에 이르렀는데도 올리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이는 비록 여러 아랫사람들이 성실하지 못한 죄이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우리 성상께서 언로(言路)를 열어주시는 뜻이겠습니까. 설혹 그 말이 성심(聖心)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배척하고 물리쳐도 불가하지 않지만 간혹 ‘도로 가지고 가라.[還持去]’라는 세 글자를 조지(朝紙)에 반포하여 사람들이 보고 듣는다면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에 부족함이 있을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금 이후부터는 모든 장주(章奏)에서 참으로 언사(言事)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성비(聖批)를 내리시어 말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은 그럴 듯하나 비답을 내리지 않는 것 역시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정언 이일운(李日運)이 청하기를,
"혜청(惠廳)과 각 영문(營門)에 명하여 공가(貢價) 및 군병료(軍兵料)를 미리 내주어 경성의 시가(市價)가 뛰어오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남 영해(寧海) 등 39개 읍에 다시 홍수가 나서 민가 6백 3호가 떠내려가고 2천 59호가 무너졌으며 떠내려가거나 깔려 죽은 자가 3백 59명이었다.
집의 송민재(宋民載)가 아뢰기를,
"금년에 생긴 큰 수재로는 영남과 호남이 가장 심한데 영남이 더 심합니다. 앞으로 구제해 살리는 방책은 오로지 수령의 능력 여부에 달려 있으니, 양도의 수령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는 도신(道臣)이 반드시 마음속으로 저울질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한갓 사사로운 안면에 얽매여 크게 경척하고 크게 변통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특별히 양도의 도신에게 신칙하여 수재(守宰)로서 능력이 없는 자는 일찍이 출척(黜斥)을 가하게 하고, 인하여 선부(選部)로 하여금 특별한 예(例)로 차견(差遣)해서 실효가 있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22일 무자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24일 경인
박종악(朴宗岳)을 동지 겸 사은 정사로 삼고, 부사 심환지(沈煥之)를 체차하고 서용보(徐龍輔)로 대신하였으며, 김조순(金祖淳)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도하(都下)의 천만 가구 중에 8가구나 10가구가 배불리 먹는 것은 두승(斗升)의 곡식 값이 비싼가 싼가에 달려 있는데, 그 구멍에 셋이 있으니 공(貢)·시(市)·상(商)이다. 근일에 대간의 말이 있어서 유사에게 신칙하여 곡식 값이 뛰어오르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나 행해도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저 무천(貿遷)하는 방도는, 돈과 곡식이 다같이 돈이 되지만 그것이 풍부한가 부족한가에 따라 서로 보배가 되기도 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조정에서 마땅히 평준(平準) 법칙에 힘써서 요컨대 백천(百川)이 도도하게 흐르듯이 해야 하는데, 그 방술은 그 근원이 되는 물을 인도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대저 공미(貢米)를 비록 억지로 시중(市中)에 들어가게 하려 하더라도 공납을 직업으로 하는 자는 바야흐로 자신도 먹고 살기에 겨를이 없는데, 시가(市價)를 비록 장사꾼이 정한 값보다 높지 않게 하더라도 앉아서 저자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어디에서 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상고(商賈)에 있어서는 먼 곳에서 배와 수레로 실어와 싼 값에 사들이고 귀할 때 팔아서 이익이 있은 연후에야 모여들고 이익이 쌓인 연후에야 흩어지게 된다. 이제 금법(禁法)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막는다면 이익이 막히게 되므로 배와 수레로 한강을 건너고 서울로 향하던 자들이 장차 허둥지둥 배와 수레를 돌려 돌아갈 것이니, 쌓아놓는다는 것은 틀린 계책이다. 그들이 폭주(輻輳)하도록 맡겨두고 그들이 서울에 이르도록 맡겨두면 비유하자면 마치 1만 곡(斛)의 곡식이 저자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모든 저자의 곡식값이 이미 고르게 되면 나라 전체의 곡식이 자연 넉넉해질 것이니, 이런 정사가 옛사람이 방(榜)을 걸어 미가(米價)를 더하게 한 뜻이다. 듣건대 도성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 고통을 받고 있다 하므로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염려되어 이처럼 곡식을 모을 요령을 묻는 것이다. 묘당에서는 이런 뜻을 알아서 말을 부연해서 거듭 알려 각처에서 풍문을 듣고서 다투어 모여들게 함으로써 도성 백성들에게 식량이 풍족하게 되는 효과가 있게 하라."
8월 25일 신묘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행부(行部)098) 가 지나가는 울산(蔚山)·기장(機張)·동래(東萊)·양산(梁山)·김해(金海) 등의 재황(災荒) 실상을 조목별로 아뢰니, 정대용에게 유시하기를,
"근래 본도의 농사와 민정(民情) 때문에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는데 순행 길에서 진달한 바가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함을 깨닫겠다. 경주(慶州) 이상의 재해를 입은 여러 곳을 위로하는 일을 지금부터 만약 유의하지 않는다면 거주하고 있던 자들은 흩어지고 흩어진 자들은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연전의 관서(關西) 일은 어찌 경이 거울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이는 붙잡아 매어 오도가도 못하게 하여 먹을 길을 찾는 것마저 막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농사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이 믿는 바가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이처럼 그들의 부모 처자를 이끌고 떠돌겠는가. 그 가운데 동래·기장·김해·양산 등 고을의 농사 형편은 장계의 말을 보건대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환하게 알 수 있겠다.
대저 진대법(賑貸法)은 봄이 된 이후에 시행하는 일이다. 가을에 떠돌아다니는데 이르지 않고 겨울에 얼어 죽는 것을 면하여 간신히 해를 넘기게 되면 재해를 입은 고을에 있는 백성들이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 있다. 당장에 우려되는 것은 가을과 겨울에 있는 것이지 명년 봄에 있지 않으니, 경은 재주가 부족하여 대양(對揚)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비록 처음 벼슬한 선비라 할지라도 참으로 사람에게 마음을 두면 반드시 구제하는 바가 있게 마련인데, 더구나 그 속에서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면서 어찌 별도의 때에 맞추어 편리하게 하는 대책이 없겠는가. 먼저 이 하교를 가지고 연읍(沿邑)의 백성들에게 상세히 위유(慰諭)하고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그곳에 눌러 살도록 할 사의(事宜)를 논리있게 장문(狀聞)하여 늦어서 미치지 못하는 탄식이 없게 하여 남쪽 지방을 돌보는 염려를 풀게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북관(北關)과 본도에서는 각기 교제창(交濟倉)이 설치되어 서로 진구(賑救)하곤 하니 법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도내의 곡식 품질이 본래 거칠기는 하나 금년에는 재손(災損)이 연읍에 편중되어 있어서 거친 곡식마저도 넉넉할 것을 기필할 수가 없다. 북쪽 지방의 곡식이 남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 아니요, 북쪽 백성들 역시 거듭된 굶주림으로 소생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차마 배로 곡식을 옮기라는 말을 경솔하게 할 수 있겠는가. 위무(慰撫)하기에 다급하여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연읍의 곡식 장부는 과연 넉넉치 못한 염려가 없겠는가. 성인(聖人)의 부국 양민(富國養民)의 가르침은 재물을 늘리는 데서 벗어나지 않은데, 더구나 구제하여 살리는 데 관계된 것임에랴. 이번 풍락송(風落松)을 민간에 나누어주어 소금을 굽거나 쪼개서 배를 만들어 고기잡이의 소용을 도와주고 쌀독을 채우는 밑천으로 보태주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지리(地利)를 통하여 백성들의 급함을 구제하는 것인데, 구구한 금칙(禁飭)을 한때 활협(闊狹)하는 데 어찌 그 사이에 경중을 따지겠는가. 다만 적간(摘奸)하는 폐단을 사람들이 시랑(豺狼)처럼 두려워한다. 이래서 경에게 물어서 민원(民願)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하니, 순로(巡路)에서 견문한 것을 자세히 장문하라."
하였다.
8월 26일 임진
전교하였다.
"연전에 영남의 면(綿)에 관한 일로써 허실을 물론하고 연석(筵席)에서 전하는 말에 의해 방백(方伯)을 특파(特罷)하였는데 더군다나 면보다 중한 곡식에 있어서이겠는가. 비록 삼남(三南)으로 말하더라도 이 군(郡)과 저 현(縣), 서주(西疇)와 남묘(南畝)가 직접 서로 자뢰(資賴)하여 교역(交易)할 수 있는데, 수령이 된 자가 우리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며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해서 알적(遏糴)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아 곡식을 무역하는 길을 막고자 하는데도 감사가 듣고서 금하지 않는다면 조정에서 온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정사를 본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일을 하기 앞서의 염려로써 이처럼 법령을 시행하기 전에 유시를 하는 것이니, 대신은 잘 알아서 즉시 삼남의 도신에게 알려서 제도(諸道)에 일체 신칙하게 하라. 경사(京師)는 바로 근본인데 어제 이미 내린 10행(行)의 하교가 어찌 한번 으레 하는 신칙이겠는가.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통상(通商)하는 본의를 낱낱이 들어서 먼저 서북 및 다른 도에 신칙하여 미가(米價)가 두루 고르게 통행되게 하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양서진(兩西鎭)의 폐단은 성상의 뜻이 간절하시어 반드시 개혁하여 바로잡고자 하시는데, 관서는 겨우 막 방편(方便)을 행회(行會)하였으나 유독 해서(海西) 한 도는 아직도 성상의 염려를 끼치고 있습니다. 방금 황해도 관찰사 이경일(李敬一)의 장본(狀本)을 보건대, 도신(道臣)·수신(帥臣)·해당 고을의 수령·해당 진(鎭)의 변장(邊將)이 과연 모두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서 저 고할 데 없는 진민(鎭民)들이 거의 소생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장계의 말 중에서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견해를 붙입니다. 산산진(蒜山鎭)의 겸모군(兼募軍)은 응역(應役)이 원아병(元牙兵)의 배나 되므로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이 본디 그러하니, 겸모군에게서 거두는 것을 한결같이 원아병에게서 거두던 것을 따라야 합니다. 병영(兵營)의 세말(歲末) 문서채(文書債)와 식년(式年) 개도안채(改都案債)를 모두 절반으로 감하고 초료(草料)를 고을에서 받지 않고 진(鎭)에서 받는 일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절대 공궤(供饋)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동리진(東里鎭) 군병의 궐오(闕伍) 2백 47명은 안부(案付)된 7읍으로 하여금 낱낱이 대신 채워넣게 하고, 환곡(還穀)은 전규(前規)에 의하여 읍진(邑鎭)에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인 데서 이미 군향모(軍餉耗)로 받은 좁쌀이 1백 10여 섬이 있으니 여러 용도에 쓸 물건은 이것으로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주(黃州) 두용둔(頭用屯)의 산화전(山火田) 수세(收稅)를 본주(本州)에서 빼앗으니 아주 괴이합니다. 금년부터는 2백 70여 일 동안 갈 수 있는 경작지를 본진(本鎭)에 소속시키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소이진(所已鎭) 군병의 궐액(闕額) 3백 61 명은 안부된 5개 읍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대신 채워넣게 하고, 환곡은 통틀어 진민과 가까운 방읍(坊邑)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병영의 문서채는 산산(蒜山)의 예에 의해 절반으로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병영이 복정(卜定)한 산사(山査)·송이버섯·치우(稚羽)·창병목(槍柄木)·궁삭목(弓槊木)·생칡 등의 물건은 장계의 말에 따라 혁파해야 합니다. 선적진(善積鎭) 군병의 궐액 2백 명은 안부된 고을로 하여금 대신 충당하게 하고, 환곡은 통틀어서 나누어 주되 소이진의 예에 의하고, 개도안채 역시 반감해야 합니다. 병영에 복정한 산사·궁삭목·창벽목·치우(稚羽)를 값도 주지 않고 가져다 쓰는 것은 매우 놀라우니, 역시 소이진의 예에 의해서 엄히 신칙해야 합니다. 위라진(位羅鎭) 군병의 궐액 1백 89명은 해당 읍에 신칙하여 대신 충당하게 하고, 개도안채와 감영·병영의 회채(會債)는 각기 반감해야 하며, 두 영의 연명채(延命債)와 하동(夏冬) 등에 장관(將官)이 계(啓)를 작성하기 위한 채(債) 등은 혁파해야 합니다. 병영에 복정한 궁삭목·치우·생칡·산사·송이·기죽(旗竹)·창병목 등의 물건은 혹 복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산진(文山鎭)의 군병 궐액 1백 9명은 안부된 고을로 하여금 대신 충당하게 하고, 감영·병영의 회채와 관문취점(官門聚點)·도목개안(都目改案) 등의 채는 모두 반감해야 합니다. 호안채(戶案債)·중기분류거안(重記分留擧案) 등의 채는 혁파해야 합니다. 모든 병영에 관계된 복정은 곧바로 병영에서 사서 쓰고, 사포서(司圃署)의 화전(火田)은 한결같이 현재 기경하는 데 따라서 수세(收稅)해야 하는데, 도장배(導掌輩)가 만일 전년의 총수량에 맞추기 위해 이웃이나 친척에게서 멋대로 빼앗아가면 도신이 엄형(嚴刑)하여 금단(禁斷)해야 합니다. 문성진(文城鎭)의 군병 궐액 1백 75명은 안부된 고을로 하여금 대신 충당하게 하고, 환곡은 다른 진의 예에 의해서 통틀어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장계의 내용 가운데 수렴(收斂)하는 명색(名色) 중 고쳐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은 도신에게 넘겨서 별도로 헤아리게 해야 합니다. 병영의 환모를 실어나르는 값, 화약을 가루내는 품값, 뽕나무를 심기 위한 정채(情債)와 공무로 여행하는 사객(使客)의 땔감·기름·석탄 등의 물건 및 각종 초료(草料)의 공급, 도계공 장리(到界公狀吏)·동지 장리(冬至狀吏)·정조 장리(正朝狀吏)의 노자(路資) 등의 명색은 한결같이 혁파해야 합니다. 좁쌀의 모조(耗條)는 단지 1두에 5승(升)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현 산성(大峴山城) 본부에서 복정한 산사와 칙사(勅使)가 올 때 모군(募軍) 14명에게 고가(雇價)를 주지 않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혁파해야 합니다. 구월 산성(九月山城)을 순력(巡歷)할 때의 거안채(擧案債)와 도임(到任)·점이(粘移)·상송(上送) 등의 고가는 도신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재감하게 해야 합니다. 병영의 돈 중에서 10분의 2를 먼저 제하고 꾸어다가 진민(鎭民)에게 빚을 준 것이 산산진(蒜山鎭)이 8백 냥, 소이진(所已鎭)이 5백 냥, 선적진(善積鎭)이 7백 냥, 위라진(位羅鎭)이 7백 냥으로 합계가 2천 7백 냥입니다. 이제 10분의 2를 병영에서 미리 제하고 진민(鎭民)에게 주어 그 나머지 이자를 가지고 수용(需用)의 밑천을 삼으면 그 10분의 5나 10분의 7의 이익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으니, 진민이 어떻게 안주(安住)할 수 있겠으며 인족(隣族)이 어떻게 이징(移徵)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장계의 내용에는 ‘가을걷이를 기다려서 본전과 이자를 물론하고 모두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전에는 연년(連年)하여 이자를 받아들일 때에도 오히려 해가 이웃 마을까지 미쳤는데 더군다나 일시에 본전과 이자를 받아낸다고 하니, 그렇게 할 도리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그 본전 액수 안에서 절반을 탕감하면 남은 액수가 마땅히 1천 3백 50냥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자조를 제하고 추수를 기다려 단지 본전만 받아들이게 하고 그 가운데서 받아낼 곳이 없는 것은 도신과 수신이 상의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탕감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후에 병영에서 혹시 빚을 주거나 진장(鎭將)이 혹 빚을 청하거든 병사(兵使) 및 진장(鎭將)을 드러나는 대로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채전(債錢)을 이미 탕감하고 나면 병영에서는 잃은 바가 없지 않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장책(長策)으로 변통하여 비국에 논보(論報)하게 해야 합니다. 군병의 정원을 채우는 일은 도신으로 하여금 열읍에 신칙하게 하여, 기사안(騎士案)에 등록된 상천(常賤)은 모두 추려내어 강정(降定)해야 합니다. 군관(軍官)에 관계된 자로 간책(刊冊)에 들지 않은 자와 각읍의 보솔(保率)로 과외(科外)에 모록(冒錄)된 자는 일체 엄히 신칙하여 바로잡아야 합니다. 문성진(文城鎭)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장계에서는 가분 취모(加分取耗) 1백 석을 떼줄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1백 석은 지나친 듯하니, 본진의 원래 환모를 50석까지 한정해서 조치해 주어 가난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폐단을 없애야 합니다. 그밖의 각진(各鎭)은 도신으로 하여금 그 형세를 헤아려서 해마다 20, 30석의 모곡을 떼줄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각항(各項)의 감영·병영의 사소한 정채(情債)를 반감하거나 전부 혁파한 수를 게판(揭板)을 만들어 누구나 살펴볼 수 있게 하라는 뜻을 더욱 엄히 신칙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란 오래되면 느슨해지고, 느슨해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인데 지금 이후부터는 8개 진(鎭)과 5개 산성의 군액(軍額)에 결원수, 환곡의 폐단, 거두어 들인 수량, 민호(民戶)가 유산(流散)했는지의 여부를 10년마다 도신으로 하여금 근만(勤慢)을 구별하여 장문하게 해 참조해서 처리할 근거로 삼도록 정식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관서의 각진을 위해서 이미 폐단을 제거하였고 똑같이 보아주는 뜻으로 이처럼 해서(海西)에까지 미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바로잡은 후에도 폐단이 다시 전과 같으면 드러나는 대로 병사는 그곳에 정배(定配)하고 도신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라. 그리고 인하여 처음 내린 전교 및 이번 회계한 초기(草記) 및 비지(批旨)와 시정한 조항을 뒤에 적어 감영·병영 및 각진에 게판(揭板)한 후 인본(印本)을 올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7일 계사
전교하였다.
"일전에 이미 별유(別諭)가 있었는데 모든 일은 미리하면 제대로 되게 된다. 이제 간절한 마음으로 모름지기 그들이 본고장에 안주(安住)하여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만든 연후에야 백성들이 참으로 믿을 바가 있게 될 것이고 나 역시 밥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있고 잠자리에 들어도 눈을 붙일 수가 있게 된다. 예(例)가 있거나 없거나 너무 이르거나 너무 급하거나를 따지지 않고 도내에서 가장 심한 읍(邑)과 가장 심한 면(面)과 리(里)의 새 환상(還上)·신역(身役)·공미(貢米)·공포(貢布)·어염세(魚鹽稅)·선세(船稅)·둔세(屯稅)를 우선 절반까지 정감(停減)하라. 양산(梁山) 등 몇 읍과 더욱 심한 면과 리에 대해서는 결세(結稅)로 정한 돈 가운데 금년 것은 역시 모두 탕감하라. 이외에 더욱 심한 곳의 다음가는 등의 고을은 그곳 백성들의 형편을 헤아려서 공화(公貨)를 대출해 주어 조치토록 하라. 이런 일은 바로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여 먼저 그 마음을 위로하자는 것이다. 응당 행하여야 할 견휼(蠲恤)하는 은전은 연분(年分)의 장본(狀本)이 등문(登聞)하기를 기다려야 하니, 이렇게 해당 도에 분부하라."
8월 28일 갑오
남소영(南小營)에 행행하여 권무과(勸武科)를 행하여 권무 군관(勸武軍官) 이극풍(李克豊) 등 13인이 합격하니, 모두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내렸다.
8월 29일 을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선전관 사강(宣傳官射講)을 행하였다.
8월 30일 병신
전교하였다.
"목화 농사가 이러하고, 또 다시 경작할 토지도 아니다. 탁지(度支)의 연분(年分) 계목(啓目)에 말을 만들어 판하(判下)해 표휼(俵恤)하는 즈음에 고르지 못한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산골 읍의 화경(火耕)과 해도(海島)를 절수(折受)한 궁방(宮房)·아문(衙門)·영읍(營邑)은 풍흉을 논하지 않고서 일정한 총액을 억지로 정하여 고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 되었으니 상년(常年)에도 오히려 신칙하는데 더군다나 큰 장마가 진 나머지이겠는가.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연전의 칙교에 의해 거행하게 하되 만약 함부로 백성들을 학대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각 궁방과 경아문(京衙門)의 차인(差人)을 중히 치죄하여 산골 백성들과 바닷가 백성들이 어깨를 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관동 역시 일체로 분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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