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유
윤대(輪對)하였다.
9월 2일 무술
전교하였다.
"공자(孔子)의 후손 중에 우리 나라로 건너온 자가 수원(水原)의 중규면(中逵面) 구정촌(九井村)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성인의 묘우(廟宇)가 있다. 고 대사헌 공서린(孔瑞麟)이 그 중에 가장 벼슬이 높고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 후손들은 지금 용인(龍仁)에 있는 도헌(都憲)의 무덤 아래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이번에 수용(收用) 때문에 생각이 나서 반당(泮堂)에 물어보고 고주(考奏)하게 하였더니 과연 사실이 그러하였다. 묘지(廟址)와 가대(家垈)도 아직 수원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고로(故老)들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다 하니, 어째서 이렇게 늦게야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별히 편비를 보내서 그곳의 형지(形址)를 도면으로 그려 올리게 하라."
충청도 병마 절도사 최경악(崔景岳)을 발탁하여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이에 앞서 홍주(洪州)에서 놓친 극악한 도적 백태성(白太成)과 김춘득(金春得) 등을 5진(鎭)에서 나서서 체포하려 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잡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청주진(淸州鎭)의 교졸(校卒)이 간성(杆城)에서 체포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은 것이다. 또 영장(營將) 김주연(金珠淵)을 방어사(防禦使)로 승진시켜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항림(李恒林)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경외(京外)의 사수(死囚)를 심리하였다.
9월 3일 기해
예조가 아뢰기를,
"고 대사헌 공서린의 후손으로 용인에 살고 있는 자들을 올라오게 하였더니 공원인(孔源仁)은 공윤항(孔胤恒)의 아비인데 늙고 병들어 올라오지 못하였고 그 동생 공도인(孔道仁)이 올라왔습니다. 도인에게 자세히 물어 보았더니, 공서린의 직손 공윤도(孔胤道)는 지금 선산(善山)에 살고 있으며 나이는 60살이라고 하였습니다. 고 참봉 공덕일(孔德一)의 6대손 공윤동(孔允東)도 이번에 올라왔는데, 그 종형(從兄) 공시동(孔始東)은 종손(宗孫)으로서 지금 상중(喪中)이어서 올라오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로 건너온 공씨는 마땅히 고 도헌 공서린파로 정통을 삼고, 또 도헌파의 현족(顯族)으로는 참봉에 제수된 후 벼슬하지 않은 공덕일파로 결정해야 한다. 이조로 하여금 알게 하여 이 두 파의 후손을 오늘 정사(政事)에서 아울러 수용하게 하라. 앞으로 이 두 파의 자손들 중에서 대대로 녹사(祿仕)시켜 중조(中朝)의 연성공(衍聖公) 세작(世爵)을 본받게 할 것이다. 만일 문음무(文蔭武)의 조적(朝籍)에 공씨가 없거든 이 두 파 중에서 잘 융통하여 초사에 수용하고 공씨가 관직에 제수되기 전에는 위의 승전(承傳)이나 아래의 차의(差擬)를 거론할 수 없도록 정식(定式)을 삼아 어람(御覽)하는 관안(官案)의 첫 권과 정안(政案)의 첫 장에 써서 후대에 전하여 영원히 준수하고 시행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장계하기를,
"도내(道內)의 곡부(穀簿)는 명색(名色)이 번잡하고 여러 곳을 관장하고 있어 모두 알기 어려운데다가 분류(分留)에 관한 법례(法例)는 많은 곳도 있고 적은 곳도 있어 실제로 근거하여 상고해 볼 만한 길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각 영(營)·읍(邑)·역(驛)·진(鎭)을 막론하고 대장에 기록된 환곡(還穀)은 모두 현재 남아있는 실수(實數)에 따라 우선 대미(大米)와 소미(小米)부터 그 분수(分數)를 정하고 다시 피곡(皮穀)과 잡곡(雜穀)도 정식에 따라 절미(折米)하고 응당 나누어 주어야 할 총수를 융통하여 마련한 다음 각 고을에 신칙하였습니다. 환곡을 받을 실지 민호(民戶)를 조사하게 하고 응당 나누어 주어야 할 환곡을 비교해 헤아려 보니, 각 민호에 따라 혹은 8, 9석(石)을 받기도 하고 혹은 1, 2석을 받기도 하는데, 이것이 적폐(糴弊)가 없어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에 별도로 분적(分糴)을 시행하되 가령 각읍과 역의 환곡의 분수는 각 민호마다 3석으로 정하고 각 진보(鎭堡)의 환곡의 분수는 각 민호마다 2석으로 정하여 남거나 모자람에 따라 분류별로 대장에 기록해야 비로소 많은 데의 곡식을 덜어서 모자라는 곳을 채워 주는 정사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서 곡식을 운반하는 일은 민간에 소란을 일으키기 쉽고 곡식을 매매하거나 무역해 가는 것도 주위의 폐단이 생길까 염려되므로 우선 신의 영에서 부채를 방지하기 위해 대여해 준 밑천과 각곤(各閫)에서 연례 지방(年例支放)의 경비를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일체 곡식이 많은 고을에 구획(區劃)하고, 경외(京外)의 각양(各樣) 응용(應用)과 모곡 작전(毛穀作錢)도 옮겨 제감(除減)하기로 하였습니다. 가령 8, 9석을 받는 민호는 5, 6석을 감면한 후에 거리를 참고해서 운반해 가고 무역해 간 것을 합계해보니 운반해 간 곡식은 1만 6천 6백 20석이었으며 무역해 간 곡식은 5만 6천 1백 24석이 되는데, 한 도내(道內)의 민곡(民穀)이 거의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상주(尙州)의 피모(皮牟) 5천 석과 순흥(順興)의 조(租) 7천 석을 금년 안으로 무역할 것을 이미 보고한 바 있는데, 많은 것을 떼어 적은 데에 보태주는 정사가 끝난 다음에는 두 고을의 곡부가 도리어 넉넉하지 못할 탄식이 있게 될 것이니, 우선 정지하고 종전대로 분류(分留)하게 하였습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허락하였다.
9월 4일 경자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방일(李邦一)을 총융사(摠戎使)로, 총융사 조심태(趙心泰)를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5일 신축
차대(次對)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공윤동(孔允東)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 공씨(孔氏)가 우리 나라로 건너온 이후 대대로 수원에 살고 있는데 묘지(廟址)가 그대로 남아 있고 단행(壇杏)이 교목(喬木)이 된 것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너희는 성인의 후손이니 만일 스스로 힘써 시례(詩禮)로써 칭송을 받는다면 세도(世道)의 다행일 것이다. 수원에 살고 있는 공씨는 몇 집이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있는 것은 몇 파(派)나 되는가?"
하니, 윤동이 아뢰기를,
"수원에 살고 있는 자들은 30여 집인데, 중간에 용인으로 많이 옮겨 갔으며 영남에는 공씨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자니, 수원에 공자(孔子)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사당이 있어 선조(先朝)께서 사액(賜額)하신 일이 있다 하는데, 내 생각에는 중규면(中逵面) 구정촌(九井村)이 우리 나라로 건너온 후 맨 처음 살았던 마을이니 영당(影堂)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각신(閣臣)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아들 이면(李葂)은 왜적에게 죽었고 서자(庶子) 이훈(李薰)과 이신(李藎)은 오랑캐에게 죽기도 하고 이괄(李适)의 난리에 죽기도 하였으니, 아울러 증직(贈職)하거나 정려(旌閭)할 것을 대신(大臣)에게 물으소서."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복주(覆奏)하기를,
"충무공이 통영(統營)에 있을 당시 아들 이면은 고향집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서 여기저기서 싸워 왜적 3명을 죽이고 그도 왜적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죽을 당시 총각이었는데 참으로 충무공의 아들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다. 다만 충무공이 순국(殉國)하기 전의 일이어서 효자로 정려할 수도 없고 또 충신으로 정려할 수도 없습니다. 이훈은 정묘년 호란(胡亂)에 죽었고 이신은 안현(鞍峴)에서 죽었으니 그 충절(忠節)이 우뚝하다고 일컬을 수 있으나, 다만 이 두 사람도 후손이 없고 또 사판(祠版)도 없으며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덤도 만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증직의 교지가 있다 한들 누구에게 전할 것이며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하니,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이양원(李陽元)의 아들 이시경(李蓍慶)은 소촌 찰방(召村察訪)으로 정유년에 힘껏 싸워 왜적을 죽이고 전쟁터에서 죽어 배에 화살이 꽂힌 채 장사지냈는데, 그 사실이 고 재상의 《자손록(子孫錄)》 및 《소촌선생안(召村先生案)》에 실려있으니, 그 문을 정려하여 풍성(風聲)을 세우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좌의정 채제공이 안면도(安眠島)의 풍락송(風落松)을 매매하여 영남과 호남의 진자(賑資)에 충당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윤영희(尹永僖)가 수사의 명령을 받들지 않은 것은 비록 고집하는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운을 낮추어 말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여 체면을 잃었으니, 이것은 영희의 과실입니다. 이항림(李恒林)이 체통을 지키고자 하여 장계를 올려 논감(論勘)한 것은 본디 기력(氣力)이 있는 사람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교(上敎)에서 이항림을 마치 강한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고 계시나, 영희가 이름은 비록 경악지신(經幄之臣)이나 오늘날 세력이 없어 업신여기기 쉬운 사람은 영희보다 더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이항림이 체통을 높이려고 한 일을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무방하겠으나 공이 있는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은 분수에 벗어나는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승천(陞遷)은 지나친 듯하다."
하고, 마침내 항림을 체직시켰다.
세황(歲荒)으로 인하여 영남의 금년 도회(都會)와 도시(都試)를 정지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서유대(徐有大)를 파직하였다. 옛 법에 민간에서는 사사로이 화약(火藥)을 매매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때 훈국(訓局)의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화약을 훔쳐 몰래 팔고 또 화승(火繩)을 창고 틈에 연결시켜 놓고 그 끝에 불을 질러 창고를 불태워 훔친 흔적을 엄폐시키려 하다가 발각되었다. 범죄자에게는 사형을 시행하도록 명하고 유대도 연좌되어 파면한 것이다.
정언(正言) 이명연(李明淵)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철에 쌀 값이 매우 높으니 겨울과 봄에는 더욱 치솟을 것인데, 백성의 일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달리 바로잡을 방책이 없다면 우선 낭비되는 구멍을 막아야 하는데 가장 낭비가 심한 것으로 논하자면 양호(釀戶)가 그 으뜸입니다. 도성 안에는 양호가 각 통(統)마다 2, 3호씩은 꼭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금주법(禁酒法)을 강구하게 하여 날짜를 정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식을 낭비하는 것이 술을 빚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명령만 내려놓고 일체 금지시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선 신중히 하는 것이 낫겠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양(大釀)을 경계하고 술주정을 금지하는 것은 본래 법전(法典)에 있는 일인데 굳이 새로이 조령(條令)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법이란 반드시 시행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니 도성의 주사(洒肆)가 지나치게 범람하여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을 제거해야 한다. 비록 묘당이라 할지라도 명령을 시행하기 위한 요령을 얻은 다음에야 시행을 의론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먼저 백성을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하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아뢴 대양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자는 의론도 진실로 곡식을 넉넉히 하는 방책이기는 하나, 안주를 금지시키는 일도 백성의 생활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근래에 백성의 풍속이 점차 교묘해져서 푸줏간의 고기와 시장의 생선이 태반은 술안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진수성찬을 무절제하게 차리는 바람에 시장의 반찬값이 날마다 뛰고 있으니 일체 엄히 금지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이조 참의 서매수(徐邁修)를 체직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참판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이어 모두 체직하고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억(洪檍)을 체직하고 민종현(閔鍾顯)으로 대신하였다.
인천부(仁川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윤영희(尹永僖)를 방면하였다. 이에 앞서 영희는 이항림(李恒林)과 서로 버티던 일에 연좌되어 인천부에 정배되었었는데, 이때 이르러 방면하도록 명한 것이다. 승지 심환지(沈煥之)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영희는 몰래 역수(逆竪)를 비호하여 그 범죄가 매우 무거웠는데도 죄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함(淸啣)을 제수하고 선지(善地)에 충원하여 마치 그를 곡진히 위하는 듯이 하셨습니다. 경기의 연안에 잠시 정배하였다가 금방 다른 이유로 인해 이번에 아주 석방시켰으니 또 매우 마땅함을 잃은 처사입니다.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그 상소를 도로 내주었다.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민종현(閔鍾顯)을 예조 판서로, 이광섭(李光燮)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9월 6일 임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서총대(瑞蔥臺)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양사(兩司)가 김중순(金重淳)과 조덕함(趙德涵) 등에 대한 합계(合啓)를 정계(停啓)하였다.
9월 7일 계묘
조윤대(曺允大)와 김이희(金履禧)를 발탁하여 도총부(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다.
이때 선릉(先陵)을 참배하려 하였는데, 길이 토원(兎院)을 지나서 가면 시냇물이 많아 10여 곳에 대교(大橋)를 설치해야 했다. 상이 백성에게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여 길을 돌아서 누원(樓院) 외방(外方)으로 지나갈 것과 횃불을 세우는 일 및 호망(虎網)·포장(布帳) 등의 일을 모두 제거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또 대가(大駕)를 수행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각자가 밥을 싸가지고 가되 두 그릇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행차하는 능침(陵寢)은 어떤 능침인가. 예전에 우리 광묘(光廟)099) 께서 근교나 먼 길을 행차하실 때면 매양 엄히 신칙하여 수행하는 관원의 반구(飯具)를 간편하게 하도록 힘쓰셨다. 하루는 근교에 행차하시면서 반구를 적간(摘奸)하게 하였는데 좌승지 한 사람이 홀로 반구를 준비해 가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서 나포(拿捕)하여 죄를 다스리고 ‘나도 밥을 싸가지고 왔는데 저자가 어찌 감히 죄를 범하는 것인가.’라는 전교를 내리셨다. 그 사실이 실록에 실려 있는데 아, 훌륭한 일이다. 오늘날의 기강을 어찌 감히 옛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번 행차에 만약 각별히 금단시킬 수 없다면 이것이 또 어찌 선대왕(先大王)의 병진년 전배(展拜) 때의 하교를 체득한 것이겠는가. 대신 이하 문무 종사관과 각영(各營)의 장신(將臣) 등은 감히 거역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정범조(丁範祖)가 아뢰기를,
"본부(本府) 경내의 여조(麗朝) 39능(陵)을 차례차례 봉심(奉審)해 보니,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에는 병풍석(屛風石) 두 조각이 무너졌고 정자각(丁字閣) 서까래 두 개가 썩어서 떨어졌으며, 냉정동(冷井洞) 제1릉·제3릉과 월로동(月老洞) 제1릉에는 사초(莎草)가 드문드문하였으며, 혜릉(惠陵)에는 사초가 많이 말라 죽었습니다. 제왕릉(諸王陵)은 본부에서 예에 따라 날짜를 잡아 고유(告由)하고 보수할 계획입니다마는, 태조의 현릉을 보수할 때에는 고유제(告由祭)와 고안제(告安祭)의 향축(香祝)을 해조로 하여금 예에 따라 날짜를 가려 내려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장계에 청한 대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9월 8일 갑진
상이 내국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선경(先卿)의 시호(諡號)를 맞이할 것이라고 하는데, 손님들을 많이 초청하려고 하는가?"
하니, 낙성이 아뢰기를,
"조정 관원을 다 초청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집안에 이러한 대례(大禮)가 있을 때 빈객을 널리 초청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근래 풍속이 남의 연회에 많이 참여하려 들지 않으니, 탄식할 일이다."
하니, 낙성이 그렇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근례(近例)에 없는 일이나 이원(梨園)의 음악을 하사하겠다."
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다시 훈련 대장에 제수하였다.
정언 이명연(李明淵)이 상소하여 윤영희(尹永僖)를 도배(島配)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금양(禁釀)의 방법을 논하여 아뢰기를,
"현재 백성들의 소원은 금주(禁洒)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비교적 풍년이 든 해가 많아서 사람들이 호화스럽게 소비하는 것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주점이 매우 번성해 있는데, 올해는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백성들의 식생활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자들도 그 화(禍)됨을 깨닫고 있으며 술을 빚는 자들도 사람을 해치는 것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자들이 도리어 온 세상에 술이 없기를 바라고 술을 빚는 자들도 도리어 온 세상이 술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물며 술을 마시지 않고 술을 빚지 않는 자들의 공통된 소원이며 또 더구나 술을 마시는 자들의 부모나 처자식의 소원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고집스레 원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술에 빠진 무리이며 남의 것을 훔치는 간사한 자이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또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전하께서 시험삼아 한번 명령을 내리신다면 순식간에 크게 호응하는 효과가 있어서 신의 말이 망녕되지 않음을 입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금지시키는 법을 말하자면 각통(各統)의 민호(民戶)끼리 서로 보증을 서게 하는 것이 제일 좋으며, 또 반드시 각 동계(洞契)의 존위(尊位)로 하여금 금지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여 통 안에 범한 자가 있으며 5호가 모두 죄를 받고 동계 안에 범한 자가 있으면 존위도 처벌을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나가 금지하면 삼사(三司)와 오부(五部)가 모두 폐단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전담해서 관장하게 하되 대신(大臣)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수시로 호조·병조·혜청(惠廳)·군문(軍門) 등의 미포(米布)를 다루는 아문(衙門)의 이예(吏隷)를 소집하고 금리(禁吏)와 금예(禁隷)를 임시로 차출하여 금지시키게 한다면 뇌물을 받고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 집의 제사와 장례 및 제약(劑藥)과 혼인이나 잔치에 필요한 술은 반드시 기한 전에 통수(統首)와 존위에게 보증을 받아 비국에 점목(粘目)을 올려 허락을 받은 다음에 술을 빚게 하고, 사용할 날짜가 지난 뒤에도 그 나머지를 감추고 있는 자가 있으면 이들도 금양률(禁釀律)로 논죄(論罪)해야 할 것입니다. 금양률은 사서인(士庶人)은 한 차례 형추(刑推)하고 조정 관원은 연한을 한정하여 금고(禁錮)하며, 너무 무겁게 하여 은폐시키게 하지 말고 너무 가볍게 하여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면 거의 영구히 준수하여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또한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가난해도 시장에서 사다가 먹는 형편입니다마는 모두 같은 소원임을 깊이 생각하여 신의 입으로 이 말씀을 아뢴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의 충정을 살피시어 어리석은 소견을 받아주소서. 우선 경조(京兆)에 명하여 길목에 방을 붙여 기일을 정해서 술을 빚지 못하게 하고, 삼남(三南)은 기근이 든 곳이어서 더욱 시급한 일이거니와 경기 및 각도에도 일제히 엄히 금지하게 하되 관서(關西)에는 술을 많이 빚어서 간혹 한 사람이 한 번 취하도록 먹는 데 열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소비하기도 하니, 가장 먼저 통렬히 금지하게 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성인(聖人)의 말씀에 ‘음식과 군대는 버릴 수 있어도 신의를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 풍속이나 기강이 옛날과 같지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용주(鎔鑄)하고 제어하는 권한을 잡고 있는 것은 나의 한 생각이 시행할 수 없는 명령을 내지 않아서 백성들에게 신의를 보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조정의 어극(御極) 이후 한 번이라도 꺼내었다가 곧 다시 환수한 명령이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이 하교가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주금(洒禁)을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곡식을 낭비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소모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금지시킨다 하더라도 술은 예전과 같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말을 대략 앞의 비답에 언급했던 것이다.
그대가 소진(疏陳)한 방법은 첫째 통(統)과 계(契)가 서로 감시하여 금지하는 것이요, 둘째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이 미포 아문의 이예를 전담하여 관장하고 금리를 임시로 차출하는 것이요, 셋째 사람 집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술 빚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다. 오가작통(五家作統)은 곧 우리 조정의 옛부터 내려오는 금석(金石) 같은 법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옛날 오위(五衛)가 단속할 때는 규율이 엄하고 밝아서 사민(士民)들이 명령을 잘 수행하였었는데 그뒤로 점차 해이해져 왔으며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이 있을 뿐이다. 지금 주금 때문에 통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미 군제(軍制)와 다르고 또 적법(籍法)을 어기는 것이다. 통에 통수가 없다면 누가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동계(洞契)의 존위(尊位)에게 금지를 관장하게 한다는 주장과 묘당이 송옥(訟獄)을 번갈아 가며 행한다는 일은 전혀 일의 모양에 맞지 않는다. 아, 타사(他司)의 이예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식양 역고(食楊役高)의 일을 한단 말인가. 사람 집에 큰 일이 있을 때는 그대도 술 빚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작은 일에도 큰 일을 빙자하여 술을 빚는다면 어느 관사(官司)로 하여금 금지하게 할 수 있겠는가. 서생(書生)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또 율(律)의 경중(輕重)에 이르러서는 그대의 의견이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백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는데도 따르지 않고 사대부(士大夫)에게 금고(禁錮)와 찬축(竄逐)을 가하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다시 어떤 율을 적용해야만 위엄을 세우고 명령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비록 상고시대 순박한 때에서 멀리 찾아보더라도 천종(千鍾)과 백고(百觚)의 많은 술이 있고 역사에서는 요(堯)·순(舜)과 주공(周公)도 없애지 않았다고 칭하고 있으며 중니(仲尼)께서도 일정한 양을 정해 놓고 마시지 않았다. 대우(大禹)는 홍수를 다스리고 맹수를 내쫓는 큰 업적을 달성했는데 술을 멀리하기만 하였을 뿐 금지시킨 일이 있지 않다. 이것은 술이 곡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곡식을 뿌리지 않아야만 술을 금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니, 그렇게 한다면 옛날 백성들에게 곡식을 먹게 하고 영원히 도움을 받게 하였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오직 술맛을 알지 못하고 맛좋은 술을 경계한다는 가르침을 대강 들었으나, 일에 있어서는 그 분수를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으므로 금지시킨다 하더라도 술은 예전과 같을 것임을 잘 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이 비답을 경조(京兆)로 하여금 방방곡곡에 게시하게 하고 만약 반드시 금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거나 비답 중에 미처 살피지 못한 점이 있으면 조관(朝官)은 상소하고 사서인(士庶人)은 판당(判堂)에게 말하도록 명하였다.
9월 10일 병오
광릉(光陵)으로 가기 위해 대가(大駕)가 흥인문(興仁門)을 출발하였다.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수직관(守直官)을 변장(邊將)으로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날이 밝을 때 미아리(美阿里)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머물렀는데, 내국 제조(內局提調) 서유린(徐有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 또한 이곳 산천의 아름다움을 아는가. 동북쪽에 절벽이 서있는 곳이 만장봉(萬丈峰)인데 수려하고 깨끗한 기상과 천지가 개벽하기 전의 형세가 나는 듯 뛰는 듯 하니 매우 볼 만하다. 일찍이 풍수가(風水家)의 말을 들어보니 풍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매양 기뻐서 춤을 추고 싶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고, 누원(樓院)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야차제만장봉(野次題萬丈峰)이란 어제(御製) 오언사운시(五言四韻詩) 1편을 짓기를,
큰 용이 곧은 줄기 뽑으니
그 형세 천리에 뻗쳐 있네
칼 차고 달려와 대궐을 에워싼 듯
홀 잡고 의연히 하늘을 향한 듯
만대의 굉장한 기업 이룩하고
해마다 풍년드니 그 공적 드넓네
지나는 길 글 읽는 소리 들리니
이 골짜기 유독 아름다워 보이네
하고는,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하여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써서 보이도록 하였다. 장수원(長水院)에 이르러 사관(史官)을 보내서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의 안부를 묻고,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와 양주 목사 이민채(李敏采)에게 명하여 양주목 5리 앞에 미리 나와서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꿇어앉아 맞이하도록 하였다. 포시(脯時)에 양주목에 이르러 아헌(衙軒)에 거둥하여 활쏘기를 하였는데 두 차례 쏘아서 각각 한 발씩 명중하였다. 근신(近臣)·장신(將臣)·지방관 등에게도 명하여 각각 한 차례씩 쏘도록 하였다.
승지를 나누어 보내서 동도(東道)의 제릉(諸陵) 및 순강원(順康園)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양주 목사 이민채가 아뢰기를,
"북한 산성의 이전미(移轉米) 1천 4백 22석과 사수미(私受米) 1천 6백 19석을 흉년이 든 해에는 본읍(本邑)에 봉류(捧留)해 두고 모조(耗條)를 작전(作錢)하여 상납하고 있고 수첩 군관(守堞軍官)과 별파진(別破陣)과 마전(麻田)에 주둔해 있는 아병(牙兵)의 신미(身米)도 돈으로 대신 상납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 생각이 모두 이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였고, 경기 관찰사 서정수가 포천현(抱川縣)에도 수어아병(守禦牙兵)의 신미를 백성들이 작전하여 대신 상납하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아뢰었는데, 모두 따랐다.
9월 11일 정미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앉아서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이 축석령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道峰山)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三角山)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 어제 오늘 지나온 산천은 모두가 좋은 기색이거니와 더구나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은 더욱 명랑하고 수려함을 깨닫게 한다. 예전 병진년 행행 때에도 마치 이번처럼 아침에 비가 내리다 금방 개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능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홍살문 밖으로 걸어 나와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본릉(本陵)의 형국(形局)은 옛부터 매우 좋다고 칭해 왔었는데 문서로만 보다가 이번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누원 동쪽으로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차례차례 겹겹이 나타나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웅장하고 깨끗한 기색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크게 나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대가가 동구(洞口)에 이르러 선전관에게 명하여 봉선사(奉先寺)의 중을 위로하고 무휼하게 하였는데, 봉선사는 광묘(光廟)의 원당(願堂)이다. 포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현감 오태첨(吳泰詹)이 부로(父老)들을 이끌고 공경히 맞이하니 상이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축석령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묻자, 백성들이 ‘한 집에서 받는 조곡(糶穀)이 10여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모두 군포(軍布)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신칙하여 너희들이 해롭고 지치는 일이 없게 하고 금년의 적모(糴耗)는 특별히 감면시켜 줄 것이다. 칙수(勅需)나 군향(軍餉)에 소용되는 곡식은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 할지라도 원래 견감시켜 주는 규례가 없으나 이 또한 규례에 매이지 않고 모두 제거해 주도록 하겠다.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중에서 70세 이상 된 자들은 자급을 올려 주고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과장(科場)을 베풀어 선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조(先朝)의 융성한 덕을 몸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원을 위로해 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주에 이르러서도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포천에서와 같이 면유(面諭)하고 저녁에는 양주목에서 묵었다.
양주와 포천의 부로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효유하였다.
"훌륭하신 우리 성조(聖祖) 광릉조(光陵朝)에서는 무(武)로 대략(大略)을 정하고 문(文)으로 태평(太平)을 이룩하시어 신공(神功)이 팔도에 입혀지고 큰 음덕이 만대에 내려졌다. 아, 창포 김치의 맛을 즐기고 서서(西序)의 홍벽(弘璧)100) 을 보매 지금도 다시 뵙는 듯한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곳은 선비가 많이 나온 고장이며 용이 날고 봉황이 나는 듯한 모양의 길지(吉地)인데다가 한대(漢代) 왕릉(王陵)의 치중(治中)의 제도를 사용하고 주가(周家)의 무강(無疆)한 책력으로 날짜를 가린데야 말할나위가 있겠는가. 나 소자가 재계(齋戒)하고 제복(祭服)을 입은 다음 일찍 출발하여 길일에 이 능을 전배하였다. 공경히 규장(珪璋)을 받들고 몸소 분필(芬苾)101) 을 올리며 주선하고 오르내리는 즈음에 상설(象設)이 매우 가까워 마치 분명히 강림하신 듯하였다. 나 소자가 성조의 능을 뵙고 성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성조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는 것은 오직 우리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예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양주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어 들에 머물면서 두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먼저 농사 형편을 묻고 다음에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농사를 힘써 짓는 방법을 권장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늙은이를 부양하는 어진 정치를 펴자, 몸이 굽은 늙은이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서로 마주보며 기쁘게 환호하여 고하는 것이 마치 내 말을 알아듣고 느끼는 것이 있는 듯하니 백성의 뜻을 여기에서 크게 알 수 있다. 오직 내가 그 뜻을 알았으니 은혜를 베푸는 조치를 어찌 대궐로 돌아가서 내릴 필요가 있겠는가. 유생(儒生)의 시제(試製)에서는 각각 거수(居首) 1명을 뽑아 사제(賜第)하고 나머지는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할 것이며, 무사(武士)의 시사(試射)에서는 우등한 자에게 사제하고 나머지는 회시에 응시하게 할 것이다. 70살이 넘은 조정 관원과 80살이 넘은 사서인으로서 선조(先朝) 병진년·을해년의 행행과 이번 행행을 모두 우러러 본 사람들에게는 모두 1급씩 가자(加資)할 것이며, 1백 살이 넘은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지급할 것이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한 해 동안 급복(給復)할 것이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환모(還耗)를 제거해 주는 실질적인 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특별히 올해의 향곡(餉穀)과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을 견감시켜 줄 것이며, 전종(田種)은 마땅한 것을 헤아려 대신 수봉하게 하고 수미(收米)는 소원대로 작전(作錢)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내 들으니 대가(大駕)가 임하는 것을 행(幸)이라 하는 것은 백성들이 다행함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효유하는 것을 어찌 족히 은혜라 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은 옛날을 몸받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보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아, 너희 두 고을 부로와 백성들은 모두 이 뜻을 알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이번 행행 때에 서동구(西洞口)를 지나왔는데 홍살문이 지척에 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홍살문에서 10보(步)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은 각 왕릉에는 없는 규례인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필시 과거에 도백(道伯)이 봉심(奉審)하러 다니면서 가깝고 편리한 방법을 택해 이 길이 한번 열린 뒤로 나무꾼의 길이 순로(巡路)가 되고 순로가 큰 길이 되어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이미 알고 난 뒤에는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들으니 길가는 이들이 이 길을 많이 왕래한다고 하니 이 또한 일체 금지시킬 수만은 없다. 홍살문의 앞을 지날 때에는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지 말게 하고 서동구의 말에서 내리는 곳도 다소 경계를 멀리 정한 다음 나무를 심을 만한 곳은 나무를 심는 것을 모두 연교(筵敎)에 따라 시행하라. 앞으로 근만(勤慢)을 수시로 적간(摘奸)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기백(畿伯) 및 능관(陵官)에게 엄히 신칙하여 이 전교를 재소(齋所)에 게시하게 하라. 축석령(祝石嶺)은 그 지세가 본디 중한 바가 있으니 고갯길에 널려진 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고갯마루에 백성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돌을 캐낸 흔적이 있으며, 주봉(主峰)의 외산(外山)에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있어 연로(輦路)에서 보니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려는 흔적이 보였다. 이는 모두 지방관이 엄히 금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고개 위에 금장(禁葬)하는 일과 그 아래 돌을 캐는 일을 각별히 엄히 금단하고 화전도 아울러 금단하게 하라. 앞으로 도백이 순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 범금(犯禁) 사실을 살펴보아 그전처럼 소홀함이 없게 하라. 본릉(本陵)의 조포사(造泡寺)는 다른 능과 다른데 오랜 세월이 지나 폐단이 쌓여 수습하기 어렵다고 한다. 고적(古蹟)과 고사(古事)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어찌하여 무너지도록 방치해 두었는가. 도백에게 신칙하여 속히 수리하게 하고 승려들의 폐단도 바로잡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선조께서 본릉을 전배하신 지 38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날에 예를 행하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물어 보았더니 이번에 배종(陪從)한 관원 중에는 옛날 배종했던 사람이 좌의정 한 사람만이 있는데, 지금 백료(百僚)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으니 보기 드문 일이다. 환궁(還宮)한 다음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보내고 낭관을 보내 안부를 물어서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일 것이다. 옛날 의빈(儀賓)으로 배종했던 자는 창성위(昌城尉)이고 음관(蔭官)으로 배종했던 자는 수어사(守禦使)이니, 창성위 집에는 의자와 식물 및 안부를 좌상의 경우와 같이 하고 수어사 오재순(吳載純)에게는 특별히 1급을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승지와 내시를 나누어 보내서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인평 대군(麟坪大君)·정빈(靜嬪)·인성군(仁城君)·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의춘 부부인(宜春府夫人)·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화협 옹주(和協翁主)·은신군(恩信君)의 묘소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에 어제 어필(御製御筆)의 비각(碑閣)을 은신군의 묘소에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앞서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직접 짓고 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상이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 찬독(贊讀) 윤면헌(尹勉憲)에게 공부를 한 일이 있었는데 면헌이 정성을 다해 학문을 권장하여 깨우쳐 준 바가 자못 많았다. 상이 매우 총애하여 오래도록 강관(講官)에 있게 하였었고 그후 면헌이 승지로 있다가 죽었다. 상이 즉위한 이후 매양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능히 학문을 좋아할 줄 알게 한 것은 찬독 윤면헌의 힘이다."
하고, 그 아들 윤수익(尹守翼)을 음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수익이 사복시 첨정이 되어 대가를 수행하였는데 면헌의 무덤이 축석령 옆에 있었다. 상이 바라보고 느낀 바 있어 승지에게 전교를 적도록 하고 이르기를,
"공부시켜준 노력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아들을 보며 매양 그 사람을 생각했는데 그 무덤을 보니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고 찬독 윤면헌이다. 그 무덤에 그 아들 사복시 첨정 수익을 보내서 이 전교로 제사하게 하라."
하고, 수익에게 명하여 달려가 제사지내게 하였다.
9월 12일 무신
사직(司直) 김화진(金華鎭) 등을 파직하였다. 이때 대가를 수행했던 경재(卿宰)들이 행궁(行宮)에서 하룻밤을 묵고서 문안을 드렸는데, 중관(中官)이 이미 온 뒤에도 여러 신하들이 미처 다 줄지어 서지 못했으므로 정원이 추고를 계청하자 모두 파직을 명한 것이다.
정호인(鄭好仁)을 예조 판서로,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참판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행궁에 거둥하여 양주와 포천의 유생(儒生)을 시취(試取)하고, 곧이어 연무당(演武堂)에 거둥하여 두 고을의 무사(武士)를 시취하였다. 명하기를 문과 시관(文科試官) 판부사(判府事) 박종악(朴宗岳)에게 시권(試券)을 거두게 하고, 무과 고관(武科考官)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심태(趙心泰)에게 뒤에 남아서 시취하게 하였는데, 복명(復命)하기 전이므로 수어사 오재순(吳載純)이 어영 대장의 일을 겸해서 후상(後廂)을 인솔하도록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에게 가의(嘉義)를 가자(加資)하고, 양주 목사 이민채(李敏采)에게 가선(嘉善)을 가자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고, 윤행임(尹行任)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이어 행임을 체차하여 임제원(林濟遠)으로 대신하였다가 곧 또다시 이가환(李家煥)으로 대신하였다.
이경운(李庚運)과 박규순(朴奎淳)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이때 승지가 결원이어서 옥당(玉堂)에 오래 있었던 사람과 사복 정(司僕正)으로 의망해 들이라고 명하여 이 두 사람이 통정(通政)에 오르게 된 것이다.
대가(大駕)가 양주목을 떠나 길에 머물어 잠시 쉬면서 승지와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고 칠언장률(七言長律)의 기구(起句)와 결구(結句)를 어제(御製)로 지은 다음 여러 신하들과 연구(聯句)하였다. 도봉 서원(道峰書院)을 지날 때 승지를 보내서 제사를 올리고, 누원(樓院) 주정(晝停)에 이르러 촌점(村店)의 백성들을 불러 고통을 물어 본 다음 환궁하였다.
이문원(摛文院)102) 에서 재계하며 머물렀는데 내일 진전(眞殿) 절하기 위해서였다. 인하여 두 고을 유생의 시권을 고시(考試)하도록 하여 양주에서 거수(居首)한 유학(幼學) 윤제홍(尹濟弘)과 포천에서 거수한 유학 허형(許珩)에게 곧장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고, 두 고을의 차등자 유학 각 2명에게는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양주에는 한량(閑良) 이도원(李道源) 등 7명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 포천에는 무사(武士) 4명 가운데 직부전시에 응시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곧장 회시에 응시하는 4명을 이튿날 무예를 비교하여 거수 1명을 뽑도록 명하여 김종복(金宗福)에게 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포천 암행 어사 김희순(金羲淳)과 김달순(金達淳)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연로(輦路)의 민폐(民弊)를 살핀 내용이었다.
상언(上言) 80통을 판하(判下)하였다.
9월 13일 기유
안춘군(安春君) 이융(李烿)과 서청군(西淸君) 이성(李煋)에게 음식물을 하사하였는데, 이 두 사람도 선조(先朝)가 광릉에 행차할 적에 수행했었던 사람들로서 이번에도 대가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세황(歲荒)으로 인하여 장계(狀啓)를 올려서 올 임자(壬子)에 뽑아 올리는 승호(陞戶)를 내년 가을로 연기하여 뽑아 올리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9월 14일 경술
해주목(海州牧)에 정배(定配)한 죄인 이주국(李柱國)을 석방하였다.
지평 김희순을 삭직하였다. 희순이 상소하기를,
"일전에 삼가 윤영희(尹永僖)를 석방한다는 영을 보고 뒤이어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를 보고 외람되이 경악과 울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아, 저 영희가 지은 죄가 어떤 것입니까. 당초에 잠깐 보임(補任)한 것은 처벌했다 할 수도 없는데 지금에 이르러 완전히 석방시킨다면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한 처분이니, 형정(刑政)이 마땅함을 잃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앞장서 영희를 성토했던 사람인데, 그의 용서할 수 없는 죄상은 다시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으나, 그러한 죄를 짓고도 왜곡되이 용서를 받았으니 이름은 처벌이나 실상은 총애이며 폄작(貶爵) 같으나 사실은 영광입니다. 그가 조금의 인심(人心)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숨을 죽이고 법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권세를 쓰고 법을 멸시하며 제멋대로 범금(犯禁)하여 수신(帥臣)의 장계에 오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조심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아, 윤영희의 징토(懲討)는 관련된 바가 매우 중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다른 의론이 없었으니, 이는 일정한 국시(國是)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대신은 지위가 모두 바라보는 자리에 있고 직분이 승좌(承佐)에 있으니 성토하는 의리에 관해서는 마땅히 다른 관료보다 앞장서야 할 것인데, 그날 주대(奏對)를 보면, 영희를 경악지신(經幄之臣)이라 말하고 권세가 없다고 말하면서 수신의 일을 인하여 보호해 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공공의 울분을 걱정하지 않고 영희를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현저히 있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대신이 평소에 반드시 영희는 죄가 없는 자여서 그를 징토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당역(黨逆)의 죄를 범한 자를 경악지신이라 칭하고 이름이 성토에 올라 있는 자를 권세가 없다고 불쌍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대신을 위하여 개연히 여기는 바입니다.
신이 앞서 관직(館職)에 있을 때에 한번 상소하여 진달할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늦게서야 거조(擧條)를 보게 되었고 곧이어 명을 받고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스스로 두려운 마음을 발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사(三司)의 직이 있는 자들이 한 사람도 아직껏 입을 연 사람이 없으니, 신의 근심과 울분이 여기에서 더욱 깊고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통의(通擬)는 큰 일이며 간장(諫長)은 청선(淸選)이어서 더욱 어렵고 신중하므로 초사(初仕)를 차출하는 것과 같이 비교할 수 없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장관(長官)의 회의를 거치지 않고 아당(亞堂)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선발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닐 것이며, 그 일을 거행했던 전관(銓官) 또한 외람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관방(官方)을 무너뜨리고 명기(名器)를 더럽힌 것이 어떠합니까. 이가환(李家煥)의 통망(通望)은 더더욱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가환이 청관(淸官)에 의망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본래 엄정한 공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거쳐온 경력만 해도 너무 지나치다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원(院)의 장관을 어찌 이 사람으로 하여금 더럽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세도(世道)에 대한 근심이 진실로 적지 않다 하겠습니다. 신의 현직을 언책(言責)으로 자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이 눈앞에 있는 것이어서 외람되이 몇 말씀 진달하는 바이니 삼가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이 협잡이 아니고 무엇인가. 윤영희를 앞장서 성토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앞장서 성토한 것도 이미 놀라운 일인데 어찌 감히 다시 이렇게 논한단 말인가. 하물며 어렵지 않게 대신을 범하고 헐뜯어 경악지신이니 세력이 없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가지고 개연히 여긴다고 대신을 경솔히 배척하였다. 무릇 대신은 뭇 관원과 달라 아는 것은 모두 말하고 말을 하면 끝까지 다하는 것이 그 직분이다. 영희는 옥당(玉堂)의 관원이니 경악지신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영희는 권문(權門)의 자제가 아니니 권세가 없는 부류이다. 언어나 문자 사이에서 결점을 찾아내어 사나운 버릇을 펴는 것은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 게다가 더구나 정격(政格)은 아래 있는 자들의 정례(政例)이다. 임금의 권한으로 어떻게 구애시킬 수 있겠는가. 이번 통의에는 아당(亞堂)과 삼당(三堂)이 갖추어졌었으나 비록 참의 혼자서 정사를 행했다 하더라도 특교(特敎)가 있으면 으레 반드시 통의하는 것이다. 고 정승 김치인(金致仁)이 아뢴 말에 ‘근래에 사람들이 일의 체면을 알지 못하고 금석(金石)의 정격을 아래에서 쉽게 방도(放倒)시키고 이미 성명(成命)된 일도 번번이 불가하다고 말을 하는데 일의 체면을 헤아려 보면 매우 한심하다.’고 한 말이 있는데 참으로 격언(格言)이다. 그때에 이로써 여러 신하들에게 신칙한 바 있다. 이번 양사 장관을 통청하는 데 대해 어찌하여 감히 장관의 회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인가. 설혹 격례에 익숙하지 못하여 이 두 편의 상소가 있었다 할지라도 양사 장관에 대해 아울러 언급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인데, 유독 신통(新通) 중인 간장(諫長)만을 제기하고 또 유독 이가환 한 사람만을 제기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정신이 이가환 한 사람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파에 사정을 둔 것이다. 전으로 보나 후로 보나 세도를 운운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얘기이다. 지평 김희순에게 속히 삭직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환궁할 때에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은 전 수어사(守禦使)로 어영(御營)의 일을 겸임하면서 후상 대장(後廂大將)이 되어 진(陣)에 남아서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참판 이병정(李秉鼎)이 참의 서매수(徐邁修)와 더불어 정사를 열게 되었었다. 이때 상이 갑자기 ‘양사 장관을 신통하되 모두 대가를 수행했던 사람으로 의망하여 들이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이병정 등이 윤행임(尹行任)과 서영보(徐榮輔) 두 사람을 통망(通望)하여 의망해 들였는데, 윤행임에게 낙점을 하였다가 곧 체직하고 다시 신통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리하여 임제원(林濟遠)·이가환·이문회(李文會)를 의망해 들였는데, 상의 뜻이 이가환에게 있었다. 이가환은 흉인(凶人) 이잠(李潛)의 종손으로, 사람됨이 음흉하고 난폭하였으나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채제공과 더불어 당(黨)을 위해 몸을 바쳤다. 이때 이르러 김희순이 윤영희의 일을 인하여 아울러 언급한 것이다.
양주 암행 어사 홍대협(洪大協)이 복명(復命)하였다.
9월 15일 신해
반궁(泮宮)에서 구일제(九日製)를 베풀었다.
승지 홍의영(洪義榮)을 보내서 정명 공주(貞明公主)와 고 판서 정혜공(靖惠公) 홍상한(洪象漢)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날은 영돈녕(領敦寧) 홍낙성(洪樂性)이 홍상한의 시호(諡號)를 맞아 잔치를 베푸는 날이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칠언 절구(七言絶句) 2편을 지어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홍낙성에게 가져다 주게 하고 술을 내리고 일등 음악을 하사한 다음 공경(公卿) 이하의 모든 관원이 다 잔치에 참여하도록 신칙하였다.
부교리 송익효(宋翼孝)와 부수찬 윤치성(尹致性)이 상소하여 지평 김희순의 삭직과 이주국을 석방시키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이명연(李明淵)이 상소하기를,
"신이 대각(臺閣)의 말석에서 편안히 있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접때 외람되이 한번 상소를 올려 대략 두 가지 말씀을 올렸었습니다. 윗 항목은 윤허를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대관에 대한 처분이 엄준하여 홍낙유(洪樂游)가 절도(絶島)로 정배(定配)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윤영희의 범죄는 윤영희 스스로 아무리 해명해봤자 극역(劇逆)에 관련된 바를 끝내 모면할 수 없을 것이고 홍낙유가 고집한 것은 극역을 엄준하고 신중히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극역의 무리를 소멸시키고 과감히 말하는 인재를 배양해야 하는 조정의 입장에서는 많은 얘기가 필요 없는 것인데, 이번에 윤영희의 사면에 대한 논란으로 인하여 도리어 엄준히 성토한 사람에게 중률을 내렸으니 장차 무엇으로 잘하는 자를 권면하고 잘못하는 자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외람되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조그만 힘만 있었더라도 전하의 정령(政令)을 이렇게까지 잘못되게 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편안히 있기 어려운 첫째 이유입니다.
아래 항목에서 청한 주금(洒禁)에 대한 여러 조목은 성비(聖批)의 내용과 같이 진실로 억지로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가능한지 시험해 보고 안 되면 그만두는 방법은 당요(唐堯)께서도 홍수를 다스리는 큰 일에 쓴 적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이번 금주령(禁洒令)에 있어서 어찌 참작해서 시험해 볼 만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단지 신의 재능이 허술하고 말이 경솔함으로 말미암아 당장 백성의 식생활을 넉넉히 해 주어야 하는 시급한 일이 연기됨을 면치 못하여 시행할 기약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이 편안히 있기 어려운 둘째 이유입니다.
일전에 잘못된 전례를 굳게 믿고 대가(大駕)를 호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하여 대가를 수행하겠다는 단자(單子)를 올렸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전당(銓堂)이 의전(儀典)에 대하여 추고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신의 죄인데 전당만이 처벌을 받고 신은 요행히 모면하였으며 연달아 사고(事故)가 있어서 피혐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편안히 있기 어려운 셋째 이유입니다.
성균관 유생으로 곤란을 겪은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인데 지금 교수가 되어 과장을 설치하고 시권(試券)에 점수를 매기니 어찌 숙원(宿願)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옥서관(玉署官)이어야만 시관(試官)의 일을 겸임할 수 있는 것인데 신과 같이 분록(僨錄) 속의 사람이 어찌 감히 옥서관으로 자처하여 시관의 일을 겸임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이 때문에 정원에서 신의 대직(臺職)을 체차해야 한다는 전지를 봉입(捧入)한 바 있습니다. 대관의 거취는 다른 이들과 달라서 그대로 대직에 남아 있을 수 없을 듯하니, 이것이 신이 편안히 있기 어려운 넷째 이유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속히 신의 대직을 체차하고 신의 겸직을 고쳐서 관방(官方)을 중히 하소서.
전 지평 김희순(金羲淳)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신이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내려온 전교를 삼가 보건대 윤영희를 성토하다가 또 죄를 입은 것임을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김희순이 말한 대신(大臣)의 일과 정관(政官)의 일은 그 말의 편벽됨이나 과불급(過不及)을 떠나서, 요즘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 때에 홀로 나서서 상소를 올려 능히 관원의 모범이 되었으니, 그 개직(介直)의 가상함은 진실로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대신 또한 즐겨 들었을 것이며 정관 또한 감수했을 것인데 대관의 말을 꺾어버렸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정덕(政德)에 큰 누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신이 원하건대, 김희순을 삭직한다는 명을 특별히 환수하시어 전환의 도량을 밝게 보이고 언로를 넓히소서. 이주국(李柱國)에게는 어떠한 은혜를 내려주셨으며 어떻게 생성(生成)시켜 주셨습니까. 작년 여름 총융사(摠戎使)로 견복(甄復)103) 하였을 때에 자리에 임하여 내리신 측달(惻怛)한 전교는 실로 곁에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고 송구했었는데, 이주국은 또 근자의 범죄가 있어서 도배(島配)의 벌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목석보다도 완악하고 돼지만도 못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서 돌아오든 죽어서 돌아오든 조금도 불쌍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방환(放還)한다는 명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또한 원하건대, 그대로 두어서 은혜를 입고도 명을 태만히 하는 아랫사람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은 귀에 거슬리지 않는데 글은 어찌 눈에 거슬리는가. 이른바 편안히 있기 어렵다는 네 가지 조목은 너무 장황하며 덧붙인 두 가지 조목 또한 잘못되었다. 김희순은 협잡하고 당파를 즐겼는데 감히 개직함이 가상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주국을 찬배(竄配)에서 풀어주는 것은 관용을 숭상하는 좋은 생각인데 그대는 살아서 돌아오든 죽어서 돌아오든 불쌍히 여길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신진(新進)의 붓끝이 어쩌면 이렇게도 박절하단 말인가. 즉시 처분을 내릴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전편의 내용이 김희순과 다르고 또 간간이 속구(俗垢)에 물들지 않은 귀절도 있고 하여 이 때문에 우선 안서(安徐)하노니, 너는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어제 동백(東伯)의 장계를 보니, 평해와 울진이 가장 심하고 삼척(三陟)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임시하여 정적(停糴)하는 것은 한결같은 규모에 의거하여 미리 영(令)을 내려서 자세히 알 수 있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히 해 주고 힘을 덜어 주어서 공사(公私) 모두 편리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새 환곡(還穀)의 절반이나 혹은 3분의 1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읍의 면(面)·리(里)를 구별하여 넉넉히 배분시킨 다음 차례차례 등급을 나누어 정퇴(停退)하게 하고, 이밖에 각읍의 면·리에 정환(停還)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은 도신의 의견으로 예를 뽑아서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대개 이곳의 도신은 그 임소에 오래 있어서 물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접제(接濟)하는 방법을 모두 도신에게 위임하고자 하는 것이니,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오직 우리 관동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도록 하라."
양산 군수(梁山郡守)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기를,
"5월 16일의 비와 6월 16일의 비, 25일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강해(江海)가 분탕되고 온 고을이 침몰되어 어디를 봐도 남은 곡식이 없이 붉은 땅만 있었는데, 7월 23일 밤중의 비바람은 임술년과 을해년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익사한 사람과 떠내려간 가축이 매우 많았으니, 산과 들이 뒤바뀌고 가옥이 허물어진 것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본군에 3개의 큰 제방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읍평(邑坪)의 20리 되는 제방이고 그 하나는 본군 남쪽 거도(巨島)의 30리 되는 동서(東西)로 이어진 제방이고 그 하나는 황산역(黃山驛)의 좌우로 이어진 긴 제방입니다. 이른바 읍언(邑堰)은 본군의 앞 큰 평지에 있고 강어귀와 다소 떨어져 있으므로, 양산 백성의 농장(農場)과 생업(生業)이 대부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여러 물줄기가 모두 그곳으로 모여 군기(郡基)를 침범하고 농토를 파손시키므로 임술년의 홍수 이후 그 당시 도신이 20리에 이르는 긴 제방을 쌓았던 것인데 을축년에 또 붕괴되었을 때 조정에서 쌀을 내어 증축하였습니다. 그 이후 수재(水災)가 있으면 백성을 동원하여 손질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전에 없던 큰 홍수를 만나서 붕괴되어 터진 곳의 길이가 1천 1백여 장(丈)이나 되며 그 밖의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 씩 파손 된 곳은 곳곳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른바 도언(島堰)은 길이가 도합 3만여 장이 되는데 흙을 채취하고 잔디를 입히는 일을 모두 제방 아래에서 할 수 있으므로 힘이 매우 적게 드는데, 금년 여름의 비로 인하여 온 섬이 침몰되었으며 평지가 드러난 후 파손된 곳을 측량해 보니 터져서 시내가 되고 파여서 구덩이가 된 곳이 3천여 장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본군에는 2천 1백 80여 호가 있는데, 떠내려가고 묻힌 가옥이 6백 65호이며 그중에 도민(島民)의 가옥이 3백 62호이니 수재를 당한 참혹함이 또한 본군에서 제일 심합니다. 이른바 황산언(黃山堰)은 우관(郵館)이 있는 곳으로서 제방 안의 농토가 모두 마위(馬位)104) 이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힘을 많이 받고 있는데, 금년 여름의 큰 홍수에 떠내려간 가옥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제방 아래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이 물에 잠겨 늪지로 변해 버렸으니 역민(驛民)인들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이상 3개의 제방은 실로 백성의 목숨과 관계된 것이어서 개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황산언은 보수하는 것이 편리한지 폐지하는 것이 편리한지 본군에서 억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도언은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읍언은 아주 파손된 곳은 다시 쌓을 수 없으나 마구 흐르는 물줄기를 또 막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읍언에 제방을 쌓는 일은 가령 다시 재력(財力)을 소비하여 종전보다 증축한다 해도 내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불행한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구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막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생업이 크게 곤궁해 질 뿐만 아니라 읍리(邑里)의 성부(城府)도 지탱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자연적인 물줄기를 따라 사람의 힘을 약간만 써서 뚫어서 소통시키고 비스듬히 새로 제방을 쌓으면 8백 장 정도면 옛 물줄기로 모여 통할 수 있어서 급류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공역(功役)이 크게 줄고 후일의 재앙도 피할 수 있어서 농토는 경작할 수 있고 읍리는 붕괴될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도언의 경우는 낙강(洛江)이 진흙이 차서 막힌 뒤로 제방에 물이 새어 파손되는 근심이 해마다 있었던 듯한데 금년 여름과 같은 홍수가 또 있기라도 한다면 한 제방으로서는 능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도언 또한 다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본도(本島)는 동서 10리, 남북 25리에 토질이 비옥하여 1말의 씨를 부리면 3섬의 곡식을 수확하는데 수전과 한전의 결수(結數)가 모두 1천 50결이며, 적내(籍內) 적외(籍外)의 가옥이 대략 적어도 7백 구(口)가 되는데 그들은 또 고기잡이와 갈대 채취로 모두 생활이 충분합니다. 이제 그곳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을 버리고자 한다면 제방을 쌓을 필요가 없겠으나, 백성을 갑자기 옮길 수 없고 그 땅을 모두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도언 또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읍언에 새로 쌓을 곳이 8백 장이고 도언에 다시 쌓을 곳이 3천 장이 되는데 여기에 투입될 역정(役丁)의 수를 헤아려 보면, 읍언은 넓이가 6장이고 높이가 2장이어서 각 장마다 10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8백 장의 역정에는 8천 명이 필요합니다. 도언은 넓이가 3 장이고 높이가 1장 조금 넘어서 각 장마다 4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3천 장의 역정은 1만 2천 명이 되므로, 합하여 계산하면 적어도 2만 명이 못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곡물을 얻어 매 역정에 하루의 고가(雇價)로 피곡(皮穀) 1말 5되를 준다면 1천 5백 석(石)만 소비하면 1만 5천 명의 역정을 구할 수 있고 부족한 5천 명은 관민(官民)이 상의하여 형편에 따라 뽑아서 맡긴다면 자연히 역사(役事)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더구나 역사를 시행하면서 주기(賙飢)의 정치를 겸할 수 있어서 각종 폐단이 자연 없어지고 여러 가지 이익이 자연 수반될 것입니다. 신의 말에 채택할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안으로 묘당(廟堂)에서부터 밖으로 방백(方伯)에 이르기까지 후일에 안정할 수 있는 계획을 널리 자문을 구하여 별도로 무휼해 주는 일을 속히 강구하소서. 그러면 끝내 잔폐된 국면을 유지하여 70주(州)의 하나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이 아침 저녁으로 바라는 바이며, 양산 군민도 이 조치를 보고 흩어진 자를 모으고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양산 백성이 수재를 가장 심하게 당했다는 것은 연신(筵臣)의 말을 통해 들었었고 도백(道伯)의 장계를 보고 대략 짐작은 했었으나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었다. 백성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보는 듯하다. 이제 알았으니 속히 구제하지 않을 수 없고, 구제해 주려면 또 보충해 주고 도와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상소 안의 소청을 윤허하여 족식(足食)의 공(功)을 완성할 수 있게 하겠다. 도백으로 하여금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을 힘써 강구하여 속히 한 가지 방법을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니, 너는 부로(父老)와 민서(民庶)를 소집하여 조정에서 염려하고 있는 사유를 다방면으로 효유하여 모두 안심하고 생업을 정할 수 있도록 하여 차견(差遣)된 본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판 이병정(李秉鼎)과 이조 참의 서매수(徐邁修)를 체차하여 박우원(朴祐源)과 신기(申耆)로 대신하였다. 이병정 등이 김희순(金羲淳)의 상소로 인하여 위패(違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홍재(李洪載)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양주 목사(楊州牧使)에게 명하여 본주의 부로(父老) 중 나이가 70 이상인 자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하사하게 하였다.
9월 16일 임자
판부사(判府事) 박종악(朴宗岳)이 차자를 올리기를,
"연(輦)이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물러 과거(科擧)를 보인 것은 두 고을의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들으니, 두 고을의 입격(入格)한 유생 중에 규정에 맞지 않는 자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삼식(三式)에 맞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것은 금석(金石)같은 법인데도 선비의 풍속이 예전같지 않아서 방자히 응시하였습니다. 매우 무엄한 일이며 또 후일의 폐단에도 관련된 일이니, 청컨대 기영(畿營)으로 하여금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삼식에 맞지 않은 자는 속히 방(榜)에서 빼내도록 명하여 과규(科規)를 중히 하소서. 신이 외람되이 주시관(主試官)이었고 또 들은 바가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규정을 어기고 참방(參榜)한 사람이 과연 많이 있다면 경과 같은 주시관은 마땅히 이처럼 바로잡는 일을 해야겠으나 또 조사하기도 전에 방에서 빼낼 수도 없는 일이니, 해도(該道)로 하여금 사문(査聞)하게 하라. 유생이 설사 함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금란(禁亂)의 조치가 있었다면 미처 살피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당해 수령의 죄도 사계(査啓)하라."
하였다.
9월 17일 계축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추등 시사(秋等試射)와 별군직(別軍職) 이하 무신(武臣)들의 시사와 반유(泮儒)의 응제(應製)를 행하고, 인하여 아침 식당도 설치하였다. 상이 초계 문신들에게 이르기를,
"이제 금원(禁苑)의 가을이 깊어 경치가 맑고 깨끗하니 연구(聯句)를 짓기에 적합하다."
하고는, 기(起)·결(結)구를 지어 내리면서 초계 문신·각신(閣臣)·문임(文任)·승지(承旨) 이하에게 명하여 앉은 순서에 관계없이 운(韻)이 해당되는 대로 연구를 짓도록 하였다. 선온(宣醞)하였다.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파직하고 중비(中批)로 이가환(李家煥)으로 대신하였다. 반유 응제 때에 관서 지방의 어떤 유생이 호소할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제목을 걸어 놓은 판자 아래 엎드려 있었는데, 김방행이 이를 신칙하지 못한 데에 연좌된 것이었다.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김희순(金羲淳)의 상소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자인(自引)하니, 비답하기를,
"일찍이 옛날 훌륭했던 재상의 말을 들었는데 ‘무릇 나라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가 나의 잘못을 부지런히 지적해 주어야만 일을 이룰 수 있으며 공을 세우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힘써서 충성스러운 마음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지적 받기를 좋아하였으니, 세속의 재상들이 남들에게 넓게 굴지 못하는 것과 서로 반대됨이 대개 이와 같다. 경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경의 마음이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이 태연히 대응한다면 저 시끄러운 소리가 경에게 무슨 누가 되겠는가."
하였다.
정언 한상신(韓商新)·이명연(李明淵)이 연명하여 상소하기를,
"대사성 이가환은 지친(至親)에게 허물이 있으니 화현(華顯)의 대열에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간장(諫長)으로 천망되었으니 사람들의 말만 무성해질 것입니다. 전하의 이 명은 혹여 격성(激成)에 가까운 것이 아니십니까. 격성은 중용(中庸)의 도가 아니니 밝으신 전하께서 어찌 이처럼 중용을 벗어나는 일을 하시겠습니까마는, 일과 때가 서로 가까워 이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가환의 제패(除牌)가 내리자마자 너희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가 뒤따라 이르렀는데 한 명의 이가환을 중비로 대사성을 삼은 것이 당장의 큰 문제인가. 마치 서로 뒤질세라 서둘러 언덕에 오르듯이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영남의 연해에서 봉진(封進)하는 건복(乾鰒) 및 약재(藥材)는 내년 가을까지 정면(停免)하고 삭선(朔膳)은 보릿가을까지 정면해 줄 것을 명하였다.
대사헌 이홍재(李洪載)가 상소하여 김희순(金羲淳)과 홍낙유(洪樂游)를 신구(伸救)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한상신(韓商新)을 옥강 만호(玉江萬戶)로, 이명연(李明淵)을 이동 만호(梨洞萬戶)로 특보(特補)하였다. 전교하였다.
"이명연과 한상신 등의 상소에 ‘격성은 중용의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중용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하였다. 애석하게도 중용을 잘못 읽은 자로 옛날에는 호광(胡廣)이 있더니 오늘날은 두 명의 대신(臺臣)에게서 보겠다.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화현의 자리라 하여 하는 자만 계속 하게 한다면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는 중용의 도리가 아니다. 옛사람이 남긴 말씀은 조화(造化)의 저울추인데 그 저울추만 있고 저울대가 없으면 경중을 구별할 수가 없어서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될 것이다. 나의 중용은 곧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군자(君子)는 때에 맞춰 중용을 한다.’는 중용의 도리이다. 저 젊은 두 대신(臺臣)이 저지른 당비(黨比)의 습관을 엄히 처벌하고 싶지만 격하면 저들의 구실거리만 만들어 주는 꼴이 될 것이다. 한상신은 옥강에, 이명연은 이동에 만호로 삼는다."
승지 서영보(徐榮輔)와 이경운(李庚運)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한상신과 이명연을 신구하니, 비답하기를,
"당을 좋아하는 대신도 만호로 삼을 수 없는가. 너희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편을 들어 깊은 밤에 연명으로 상소하였으니, 당을 좋아하는 것도 부족하여 당을 비호하기까지 한다고 하겠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엄히 처벌해야겠으니 번거로이 소란을 피운 곡절을 우선 수실(首實)하여 아뢰라."
하였다. 서영보 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이번 중비(中批)의 조치가 헌대(憲臺)가 견책되고 삭직당한 후 금방 있었으므로 그 처분이 격성(激成)에 가까운 듯하였습니다. 두 대신이 이에 능히 상소하고 호소해서 광구(匡救)의 의리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개납(開納)하시어 감히 말하는 풍도를 키우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꺾고 내쫓았습니다. 낭함(琅函)105) 이 올라가자마자 옥결(玉玦)은 곧 꺾이고 엄명(嚴命)이 거듭 내려 경색(景色)이 창백해졌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임금이 말을 들을 때에는 오직 그 말의 타당함을 보아야 하고 당사(黨私)로써 의심해서는 안되며, 언책(言責)에 있는 자들도 그 말이 사리에 합당한가만을 요구할 뿐이요 당사 때문에 스스로 멈추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이번 한 가지 일에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중비(中批)가 그 첫째요 언관의 말에 격하신 것이 그 둘째요 언관을 꺾으신 것이 그 셋째입니다. 신들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어찌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협잡질을 해서 스스로 성실치 못한 죄를 범하겠습니까. 작은 정성이 오직 성덕(聖德)에 혹 누가 되고 언로(言路)가 장차 막히고 조정의 분위기가 점차 괴리됨을 염려한 데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대신을 처분한 것이 무슨 큰 일이 되는가. 깊은 밤에 번거로이 소란을 피운 것이 너희들의 첫째 죄요, 궁문이 이미 잠겨 있어서 다른 승선(承宣)이 없어 문계(問啓)할 데가 없으므로 먼저 수실하게 했더니 감히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고 이처럼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너희들의 둘째 죄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협잡질한 것을 극구 변명한다 해도 그 진상이 탄로났음을 모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수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너희들에게 불서(不敍)의 법을 적용한다."
하였다. 이튿날 도승지 박우원(朴祐源)이 네 사람에 대한 처분을 환수해 줄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8일 갑인
대사성 이가환(李家煥)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특보(特補)하였다. 이가환이 대사성으로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무열사(武烈祠)를 보수하는 일과 낙상지(駱尙志) 참장(參將)의 위판(位版)을 만드는 일로 치계(馳啓)하면서 제사를 올릴 때 해조(該曹)로 하여금 향축(香祝)을 내려보내 주게 할 것을 청하니, 회유(回諭)하기를,
"제문(祭文)은 이미 지어서 내려보냈다. 헌관(獻官)은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손자인 행 부호군(副護軍) 이원(李源)으로 삼았는데, 향축을 받들고 대동강(大同江) 가에 이르거든 경이 활집과 전동을 갖추고 기고(旗鼓)를 인솔하여 위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인도하여 무열사에 이르러 의식대로 예를 거행하라. 예를 행할 때는 군악(軍樂)을 사용하고 복색은 헌관 이하의 참반(參班)과 감사·수령은 모두 선무사(宣武祠)와 제독 사당(提督祠堂)에서의 의식에 따라 갑주(甲胄)를 착용할 것이며, 대축(大祝)은 도내의 수령 중에서 옥당(玉堂)을 거친 적이 있는 사람으로 뽑고, 여러 집사(執事)들도 당상관(堂上官)으로서 경력이 있는 무변 수령(武弁守令)으로 정하도록 하라. 예를 마친 다음날 헌관으로 상시(上試)를 삼고 감사로 부시(副試)를 삼아서 제향에 참배했던 무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인하여 유(柳)·기(騎)·철(鐵)의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게 하되, 유의 삼중사분(三中四分) 이상과 기의 삼중(三中)과 철의 1백 30보 이상은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유의 변삼중(邊三中)과 기의 이중(二中)과 철의 1백 20보는 모두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며, 그 나머지 입격한 사람들은 본도에서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라. 제도가 다시 새로워져 일의 체모가 그전과 다르니 경은 숙묘조(肅廟朝) 때 성명(成命)한 영유(永柔)의 삼충사(三忠祠)의 의식에 따라 한 책의 절목(節目)을 작성한 다음 무열(武列)에 있는 자로 그 일을 전담하게 하라. 거기에 쓰이는 물자는 특례로 유의하여 무위(武衛)를 분발시키는 실제 효과가 있게 하라."
하였다.
지평 이상황(李相璜)이 상소하기를,
"신은 근일 전하의 처분에 대해 매우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역(黨逆)에 관계된 죄인 윤영희(尹永僖) 한 명을 성토하다가 홍낙유(洪樂游)는 정배되었고,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는 말을 올렸다가 이명연(李明淵)과 한상신(韓商新)은 궁벽한 곳으로 배척되었으며, 서영보(徐榮輔)와 이경운(李庚運)은 잠규(箴規)의 책임을 다하다가 불서(不敍)의 법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렇게 중용을 벗어난 일이 있을 줄 짐작도 못하였습니다. 저 홍낙유는 일개 말관(末官)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엄히 성토하는 책임을 다한 자이니 장려해야 하겠습니까, 죄를 내려야 하겠습니까. 두 명의 대신(臺臣)이 간절한 정성으로 자진해서 상소한 일은 간관(諫官)의 곧은 기상이 가상한 일이며, 두 명의 승선(承宣)이 유윤(惟允)의 직분에 있으면서 연명으로 다시 논란한 것은 근신(近臣)의 양규(良規)이니 들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포용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꺾어버리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맨 처음에 한 명의 헌대(憲臺)의 상소로 인하여 중비(中批)의 명을 내리고 두 번 세 번 바뀌면서 간관을 축출하고 승선을 파직하였으며 또다시 관리사(管理使)106) 의 명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하의 이러한 조치는 격성(激成)에 가깝지 않습니까. 격한 것은 대성인(大聖人)의 중화(中和)의 덕에 맞지 않는 것은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위벌(威罰)로써 협제(脅制)하고 또 당사(黨私)라는 두 글자로 입을 다물게 하여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오직 순순히 따르는 것만 공손으로 여기고 봉승(奉承)을 충성으로 여기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이목(耳目)과 후설(喉舌)의 관직을 어디에 쓰려 하시는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전환(轉環)의 도량을 돌리시어 특별히 홍낙유를 영원히 정배한 법을 환수하고 윤영희는 속히 도배(島配)를 명하고 어제 여러 신하들에 대한 처분도 아울러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몇 년 동안 관리로 도야(陶冶)를 후하게 입었는데 저자들이야 비록 옛 습관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네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이번의 상소에 논한 바는 한번 보매 놀랍고 두번 보매 더욱 패려궂다. 승선과 대신이 견책을 당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니 우선 논하지 않는다 해도 감히 홍낙유의 편을 들어 뜻을 굽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석방해 줄 것을 청하고 당역(黨逆)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도리어 윤영희에게 씌워 다시 도배시킬 것을 청하니, 너의 눈에는 국가의 기강도 보이지 않으며, 신하의 직분도 없는가. 관리사로 외보(外補)한 것은 임금의 권한에서 나온 것인데 여기에도 비방하는 말을 하여 심지어는 ‘협제하고 입을 다물게 하여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한 마디 말도 못하게 한다.’고까지 하였으니, 매우 방자스럽고 매우 망령되다. 너는 우선 삼사(三司)의 망(望)에서 영원히 삭제할 것이며 이 상소를 봉납한 승지는 체차한다. 윤영희를 방송한 데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을 서용한다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전 첨사 윤영희는 급첩(給牒)하여 서용하라."
하였다.
9월 19일 을묘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김방행(金方行)을 서용하여 대사성에 잉임시켰다.
소대(召對)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개성 유수 이가환(李家煥)의 일 때문에 이틀 밤을 자지 못하였으니 도리어 한번의 웃음거리도 못된다. 선대왕(先大王)의 평탕(平蕩)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 곧 나의 고심(苦心)이다. 근래의 일도 무편 무당(無偏無黨)하고자 하는 나의 뜻으로 대략 임금의 권한을 사용한 것이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무편무당하시다는 전교에 공경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 김한동(金翰東)은 비록 영남 사람이기는 해도 자못 영민하여 서울 사람과도 같으며, 접때 이헌유(李憲儒)를 보았는데 인상이 꽤 좋고 또 영민해 보였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헌유는 과업(科業)을 배우느라 다년간 서울에 머물러 있어서 그러하겠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영남 사람에게서 취할 점은 질박하고 진실한 것인데, 시체(時體)에 가까운 자들은 반드시 쓸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판윤 김문순(金文淳)이 후주(酗酒)에 대한 금지령을 다시 내릴 것을 청하였다.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곡식의 소비는 술을 빚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금주령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이 곡식을 낭비한다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아주 금지한다는 것은 시행될 수 없는 일이므로 하우씨(夏禹氏)도 의적(儀狄)을 멀리하기만 하고 술을 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왕조(先王朝) 때 권극(權極)의 상소로 인하여 일률(一律)을 적용해 본 적이 있었으나 그때에도 술은 그대로 있었다. 그후 다른 일로 인하여 권극을 나국(拿鞫)하였으니 선왕이 뜻하신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크게 술을 빚는 것과 가정에서 술을 파는 것은 이미 판윤으로 하여금 금단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유사(有司)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므로 조정에서 별도로 금령을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비국 유사 당상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어제 삼가 연교(筵敎)를 받들고 역원(譯院)의 두 제조(提調)와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과 더불어 익히 토론하면서 역관 중에 일을 잘 보는 사람 몇 명을 불러서 물어 보았더니, 현재의 중요한 것은 관모(官帽)에 대한 옛 제도를 회복하는 일과 모세(帽稅)를 척수(隻數)에 준하여 납부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관모는 갑오년에 혁파했는데, 그것은 명분이 바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은화(銀貨)가 넉넉치 못했던 데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옛 제도를 회복한다 하더라도 무인년 이후의 예를 따라 경외(京外)의 관부(官府)에서 작은(作銀)하여 지급해야만 준행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은화의 값이 점점 치솟아 4만 냥을 관부에서 작은한다는 것은 논할 수 없는 일이며 설령 관부에서 작은한다 하더라도 공용은(公用銀) 6천 냥과 포가은(包價銀) 4천 냥을 공제하고 나면 역행(曆行)에 들어가는 돈 5천 냥과 의주(義州)의 획부전(劃付錢) 3천 냥과 쇄마(刷馬)를 모는 구인(驅人)의 반전은(盤纏銀) 6백 냥을 또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모자세의 경우는 당초 1천 척(隻)에 준했을 때의 세전(稅錢)이 4만 냥이었으니 모든 공용(公用)에 과연 부족함이 없었으나, 근래에는 모세가 점점 줄어서 여러 가지 공용에 계속 지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관서지방의 은화를 해마다 대하(貸下)해 온 것이 4만여 냥이나 됩니다. 그런데 저들은 말하기를 ‘1천 척의 모가(帽價)는 은화이든 잡복(雜卜)이든 막론하고 마땅히 은화 6만 냥에 준하여 값을 매겨야 하는데 6만 냥으로 관모를 무역하는 것은 그 형편이 또한 어려울 것이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모두 곤란하여 바로잡을 길이 실로 없으니, 청컨대 시임·원임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소서."
하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관모는 갑자기 회복할 수 없으며, 모세는 역관뿐만 아니라 비록 국가의 회계로 보아도 관련된 바가 적지 않습니다. 관서 지방의 은화가 점차 고갈되고 있으니 어떤 근심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이것은 모세조(帽稅條)를 수에 준하여 낼 수 없었던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만, 비국에 이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른바 모세를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적으로 쓰는 것으로 영부(營府)에 이렇게까지 근심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주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비국 당상 중에서 이 일을 주관할 사람을 뽑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사행(使行)이 예비로 은화를 준비해 갔다가 저곳에 당도한 후 쓸 일이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그 수를 모두 반납해야 하는데, 역관의 무리들이 이익을 챙기고자 대출해 줄 것을 청하면 사신이 허락해 주었다가 결국엔 상환 받지 못하여 국가의 은화만 소비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현재 폐단을 바로잡을 길은 별달리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재신(宰臣)들 중에 일찍이 사신을 다녀왔거나 평안 감사를 역임한 적이 있는 자에게 물으니,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모세의 영축(盈縮)을 신이 자세히 알 수 없고 또 신이 사신으로 다녀온 지가 지금 17년이나 되어서 거가(車價)와 방전(房錢) 등의 비용이 그 당시에 비해 몇 배나 올랐다고 하니, 어떻게 국가의 은화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상이 아뢴 주관할 사람을 차출해야 한다고 한 것이 비록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아니나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은 아뢰기를,
"신이 병신년에 연경(燕京)을 다녀올 적에는 공적인 경비가 부족한 근심이 없었는데, 근자에 들으니 저 나라에서 토색(討索)하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절행(節行)에는 반드시 6천 냥을 가지고 갔었는데 근자에 은화가 점점 고갈되어 관모를 무역해 오는 수효가 더욱 감해지고 이에 따른 모세 또한 줄었기 때문에 공용 6천 냥을 채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변통할 수 있는 방법은 별도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는 아뢰기를,
"신이 무술년에 연경을 다녀왔는데 일행 중에 포(包)에 준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공용도 부족한 폐단이 없었으니, 지금의 사정과는 판이한 듯합니다. 대신이 논한 주관할 사람을 차출하여 모세를 단속하게 하자는 얘기는 언뜻 들으면 실효가 있을 듯하나, 만약 척수를 끝내 넉넉히 내지 못하고 모세를 그전처럼 형편없게 한다면 역속(譯屬)들을 논죄하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자꾸 줄어드는 모세의 실제에 있어서는 도움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는 아뢰기를,
"모세에 대한 한 조목은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인 듯하나, 다만 들으니 저곳에서 관모를 만드는 일이 그전보다 감소하였다 하니, 반드시 1천 척에 준하여 관모를 무역해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 척수에 준하여 무역해 올 수 있다 하더라도 당년도에 다 판매할 수 없다면 필경의 이해(利害)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신은 감히 억측으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비국 당상 중에서 모세 구관 당상(帽稅句管堂上) 한 사람을 차출하여 모세를 연이어 3년 동안 1천 척에 준하여 무역해 올 수 있으면 수역(首譯)을 진달하여 논상(論賞)하게 하고, 모세의 지불이 부족하면 수역을 진달하여 논죄(論罪)하게 한 다음에야 가히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사신이 예비로 가지고 가는 은화는 사신으로 하여금 평안 감영에 환부(還付)하게 하고 도신(道臣)이 그 수효를 대조하여 받아두고 명백히 장계로 보고하게 하여 중간에서 사라지는 폐단을 근절시키는 일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9월 20일 병진
전교하였다.
"매년 4월 10일 두 본궁(本宮) 대제(大祭)의 의대(衣襨)를 받들고 갈 때에 편전(便殿) 정문(正門)에서부터 받들고 갔었는데, 이번에는 제물 품목을 바로잡은 규례 및 제의(祭儀)도 함께 봉안할 것이다. 내일 내각(內閣)에 가서 봉심(奉審)하고서 이어 의대와 제품의 지영(祗迎)을 행할 것이니, 해방(該房)은 알도록 하라."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장계로 아뢰기를,
"고 성주 목사(星州牧使) 제말(諸沫) 및 그 조카인 선무 공신(宣武功臣) 제홍록(諸弘錄)에 대해 유적이나 묘소가 있는 곳과 후손이 있는지의 여부를 각 해읍(該邑)에 지위(知委)하였습니다. 성주에서는 ‘관풍안(觀風案) 가운데 목사 제말이라고 기록된 이름 아래 「적(賊)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서 주부(主簿)에서 승차(陞差)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파직되어 갔다.」라는 내용의 13자의 주(註)가 있을 뿐이며 순절(殉節)할 때의 사적에 대해서는 별달리 근거할 것이 없다. 이름자는 ‘말(沫)’ 자와 ‘말(末)’ 자가 간간이 섞여서 나오는데 제홍록의 아버지의 이름을 호(湖) 자로 기록하였다. 형제 사이에는 반드시 항렬(行列)을 따라 이름을 지었을 것인데 호(湖)와 말(沫)이 모두 물수변[水]에 있는 글자이니 제 목사의 이름은 반드시 말(沫) 자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진해(鎭海)에서는 ‘제말의 묘소가 본현(本縣) 동면(東面) 하귀산(河龜山)에 있는데 칠원(漆原)의 김동해(金東海)와 김동수(金東秀) 등이 외손으로서 수호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고성(固城)에서는 ‘제홍록의 묘소가 본현 대둔면(大芚面) 척곡산(尺谷山)에 있는데 본현의 제경빈(諸敬贇)과 제국추(諸國樞) 등이 방손(傍孫)으로서 수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말과 제홍록의 직손(直孫)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지금 현존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말은 성주에서 순절하였고 제홍록은 진양(晉陽)에서 순절하였는데 모두 고성(孤城)에서 포위당했을 때여서 그들이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곳이 성 아래인 듯하나 오래된 일이므로 증거할 만한 문서가 없습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지명이 각각 다르지만 둘 다 지조를 지킨 것은 마찬가지이니 성주와 진주 두 곳에 각각 비석을 하나씩 세우되,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일찍이 그곳의 도백(道伯)을 지낸 바 있고 또 글씨를 잘 쓰니 이병모로 하여금 비문을 써 올리게 하라."
하였다.
승지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기를,
"삼가 살펴 보건대, 전하의 근래 성려(聖慮)가 중용을 벗어나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한층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후설(喉舌)을 맡은 신하들이 유윤(惟允)의 책임을 수행하려 하다가 체직과 파직이 계속 이어졌고, 이목(耳目)을 맡은 관리들이 각각 광구(匡救)의 정성을 진달하다가 폄출(貶黜)과 삭직(削職)이 계속 이어졌으므로, 조정이 이 때문에 근심하고 있고 물정이 이 때문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윤영희(尹永僖)는 익환(翼煥)과 죽음을 맹세한 친구이며 기현(驥顯)과 혈맹한 무리라는 이유로 삼사(三司)에서 성토한 소장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상신(相臣)이 다른 일로 인해 억지로 윤영희의 이름을 제기하여 그를 위해 변론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심지어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까지 들어서 전하께 아뢰었으니, 윤영희를 비호하려는 사사로움이 있을 뿐이요 그를 징계하고 성토하려는 공정한 마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데 대신(臺臣)이 분개하여 배척한 것이 어찌 지나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가환(李家煥)은 이잠(李潛)의 종손(從孫)으로서 그가 비록 문학을 잘하여 일컬을 만하다고 해도 그 허물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서 그 허물을 버리고 그 재능을 쓰는 것에 어찌 칭정(稱停)의 도리가 없겠습니까. 무릇 관방(官方)을 설치함에 있어서 문학과 재주를 각각 그 그릇에 맞게 하는 법이지만 중히 여기는 것은 명의(名義)입니다. 명의가 있으면 문학이 그 명의를 욕되게 할 수 없고 재주가 그 명의를 파괴시킬 수 없으니, 이것이 최고의 이른바 명기(名器)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한 명의 이가환에게 사사로이 하시어 갑자기 청선(淸選)의 처분을 내리셨는데, 대개 청선은 명의를 대우하는 그릇이므로 이가환이 처할 곳이 못됩니다. 대신(臺臣)이 이 점을 어찌 언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앞서 전하께서는 간장(諫長)에 대하여 격해지면 사유(師儒)의 자리에 제수하시고 사유에 대하여 격해지면 또 거류(居留)의 중임(重任)에 발탁하시어 마치 여론을 억제하는 듯이 하셨지만 실제로는 모두 전하의 뜻을 시원히 푸신 것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를 위해 진실로 이 조치를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또 이상황(李相璜)의 상소는 가히 나이 젊은 사람의 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또 그 말로 인하여 윤영희를 서용한다는 전교까지 내리셨으니,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또 대성인(大聖人)의 상황에 순응(順應)하는 도량에 있어서 전교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격해지는 바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개탄스럽다고 배척한 것을 지나치다고 하지 않았는데 대신(大臣)에게도 개탄스러운 일이 있단 말인가? 이가환의 종조에 대해서는 나도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으나, 종조는 종조이고 종손은 종손이다.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겼는데 이가환이 문사(文士)가 아니라는 말인가. 경 또한 과구(科臼) 중의 사람으로 옛 습관을 면하지 못하고 이렇게 뭇사람들을 따라 하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윤영희를 배척하고 이상황을 신구하는 일은 또한 어찌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 말할 것이 나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불서(不敍)의 법을 시행하였다.
9월 21일 정사
이문원에 거둥하여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제품 정례(祭品定例) 및 제의(祭儀)를 봉심(奉審)하고 의대(衣襨)와 제물(祭物)의 지송(祗送)을 행하였다. 각신(閣臣) 서영보(徐榮輔)와 호조 참판 김지묵(金持默)에게 명하여 동문(東門) 밖까지 모시고 가게 하였다. 또 호조에서 이미 제조한 제기(祭器)는 수당(首堂)이 모시고 가야 한다 하여 조정진(趙鼎鎭)을 서용하여 호조 판서로 잉임(仍任)시켜 양주(楊州)까지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게 하였다.
장단(長湍)과 양진(揚津)의 명묘(溟廟)를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9월 22일 무오
대신과 각신을 소견하였는데 이날은 탄신(誕辰)이었다. 상이 영돈녕(領敦寧) 홍낙성(洪樂性) 등에게 이르기를,
"오늘을 당할 때마다 내 마음은 갑절이나 더해진다. 오직 자궁(慈宮)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으로 다소 마음에 위안을 삼는다. 경들은 기사(耆社)의 대신들로서 새벽같이 들어왔으니 공경하는 도리와 나이를 높이는 도리로 보아 인접(引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 홍낙성이 아뢰기를,
"탄신일에 축하하는 것은 응당 시행해야 하는 전례(典禮)인데도 매년 권정(權停)하고 계시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울적해 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께서는 50년 동안 태평했던 시절에도 매양 권정을 명하시고 나이가 높아진 이후 간혹 한두 해 여러 사람의 청을 살피시어 비로소 욕의(縟儀)를 거행하셨었다. 더구나 나는 매사를 확장하고 크게 하려 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생일이라 하여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3일 기미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지자, 그 사손(祀孫)인 동돈령(同敦寧) 이진익(李鎭翼)이 상소하여 묘소에 가서 지수(祇受)할 말미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진익이 사폐(辭陛)할 때 상이 인견하니, 이진익이 아뢰기를,
"효묘(孝廟)와 숙묘(肅廟)의 어제 어필(御製御筆)의 제문(祭文)이 있어서 이 제문들을 합하여 비석에 새겼으나 감히 마음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선조의 어제 제문이 있는바, 지금 내리신 어제 제문과 합하여 비석에 새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효묘와 숙묘의 어제 제문을 비석에 새긴 것은 곧 세우도록 하고 선조 및 당저(當宁)의 어제 제문도 비석에 새기되, 비석의 한 면을 3등분하여 선조의 어제는 윗 칸에 새기고 당저의 어제는 중간 칸에 새기고 그 아랫 칸과 뒷면은 비워 두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인하여 호조에 명하여 물력(物力)을 공급하게 하고 기영(畿營)에 명하여 비각(碑閣)을 하나 세워서 두 비석을 보호하게 하였다. 또 각신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서 어의동(於義洞) 별궁(別宮)을 봉심하고 아울러 대군의 사당을 봉심한 다음 별궁 및 대군의 저택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였다.
예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탄신 때 올리는 호남 지방의 방물(方物) 중 전궁(殿宮)에 올리는 물종(物種)이 기한이 넘도록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해조에 묻도록 명하였다. 판서 정호인이 대답하기를,
"방물은 으레 기한 하루나 이틀 전에 본조 당상이 수량을 대조하고 품질을 확인한 다음 가지고 온 아전에게 다시 부치면 당일 새벽에 차비문(差備門)에서 상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21일 품질을 확인하고 다시 보내 새벽에 올리도록 하였었는데, 이제 아직 올리지 않았다는 전교를 받자오매 놀랍고 두려워 조사하여 물어보니, 해리(該吏)가 궐내로 가지고 갔었으나 잡비(雜費)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해가 저물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형조에 명하여 해리 및 뇌물을 요구한 액속(掖屬)을 엄히 다스리게 하고, 정호인도 신칙하지 못하였다 하여 추고한 것이다.
9월 24일 경신
전교하였다.
"지금 대신(大臣)의 시장(諡狀)을 인하여 홍문관에 있는 여러 시장을 보니 고 판부사 이익정(李益炡)의 시호를 청한 글도 그중에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보아왔는데 이익정은 선조(先朝)의 후한 보살핌을 받았고 또 중신(重臣)으로서 모든 말을 극진히 하는 정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 시호를 내림에 있어서 어찌 옛날을 생각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예관(禮官)을 보내 날짜를 잡아 제사를 올리게 하라."
우승지 홍의영(洪義榮), 좌부승지 김효건(金孝建)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근일에 성려(聖慮)가 격하시어 처분이 뒤바뀌고 배척과 폐출이 계속되며 중비(中批)가 거듭 내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당역(黨逆)인 윤영희(尹永僖)를 서용한다는 명이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신들은 근심과 탄식으로 방황하고 대궐 담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동료 중에서도 또 매우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저 윤영희는 본래 요망한 익환(翼煥)과 죽음을 맹세한 친구로 강가에서 술을 마시며 전송했던 일은 이미 온 세상의 지목을 받고 있습니다. 흉악한 마음이 더욱 커지고 패려궂은 습관을 고치지 않고 끝내는 역적 기현(驥顯) 부자와 더불어 서로 단짝이 되어 시장(試場)에서 상소를 올렸는데 치밀하게 결탁한 내막을 감출 수가 없었으며 금오(金吾)에서 공초를 받을 때에도 교활하고 모진 말을 방자하게 하였으니, 오늘날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같은 소리로 함께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박규순(朴奎淳)이란 자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감히 당악(黨惡)의 계획을 갖고 패려궂은 말을 하여 심지어는 ‘윤영희의 재능과 용모를 끝내 유배로 막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또 ‘비록 대관의 논계가 있다 해도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을 조금도 꺼리는 바 없이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습니다. 윤영희의 죄과가 어떠한 것인데 윤영희를 비호해 준다는 공격이 앞에서 나오자마자 칭찬하는 말이 뒤따라 나와서 마치 잘못이 없는 사람이 공연히 유배된 것처럼 하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만 박규순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처럼 어려움 없이 공의(公議)에 대항하고 대방(大防)을 파괴하는 것입니까. 신들은 전에 없던 변고가 우리 동료 중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머리털이 일어서고 간담이 떨리며 마음이 매우 아프면서도 원규(院規)에 구애되어 비록 청토(請討)할 수는 없습니다만, 같이 한 원(院) 안에서 동료가 되어 있으니 실로 더럽혀질까 두려운 점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들을 체직하여 사분(私分)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동부승지 박규순이 상소하기를,
"방금 승정원에 전달된 홍의영과 김효건의 상소를 보니, 신더러 윤영희를 비호하여 감싸주었다 하고 심지어는 같은 곳에서 더럽혀질까 두렵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20일에 과연 동료들과 더불어 근래 사한(詞翰)의 우열을 논하다가 윤영희에 대해 언급되자, 신이 ‘윤영희의 문필(文筆)은 그 재능이 넉넉하여 쓰이기에 충분하다.’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김효건의 말이 ‘윤영희는 악역(惡逆)을 범한 자인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기에, 신이 ‘윤영희의 죄는 악역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고 말하고 별다른 말없이 파했었습니다. 뜻밖에도 지금 4, 5일이 지난 뒤에 이러한 논계가 있으니 신은 진실로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신은 명을 받고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러 가야 하는데 이러한 몸으로써는 태연히 제사를 올리러 갈 수 없기에 소장을 올리고 지레 먼저 나갑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뜻을 살피시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에 앞서 박규순이 김효건 등과 같이 승정원에서 조정 신하들의 글재주에 대한 우열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박규순이 윤영희의 글재주를 칭찬하자, 김효건이 ‘윤영희는 악역의 죄를 범한 사람인데 어떻게 칭찬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이에 박규순이 ‘윤영희가 비록 죄는 있지만 악역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었는데, 며칠이 지난 뒤 김효건이 갑자기 박규순을 성토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린 것이다. 박규순은 명을 받들고 인평 대군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러 가려던 중이었는데 역시 상소를 올리고 먼저 나가니, 패초(牌招)하도록 명하여 인평 대군 묘소에 가도록 신칙하였다.
정언 윤제동(尹悌東)이 상소하기를,
"아, 기현(驥顯)의 악역은 그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역적의 당여(黨與)가 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눈을 밝히고 간담을 펴서 통렬히 배척하고 엄히 성토한 다음에야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고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윤영희가 정배되었다가 석방되고 석방되었다가 서용된 것은 무슨 일입니까. 전석(前席)에서 제주(提奏)한 내용에 현저히 윤영희를 비호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이 때문에 특별히 석방하셨고, 여러 신하들이 그 일을 논집(論執)한 것은 오로지 광구(匡救)하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이 때문에 특별히 서용하셨습니다. 대저 관방(官方)을 맑게 하고 공기(公器)를 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우리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의 하나의 규모인데 중비(中批)의 명이 뜻밖에도 갑자기 나오고, 대각(臺閣)의 항론(抗論)과 승선(承宣)의 복난(覆難)은 모두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인데 혹은 외보(外補)되기도 하고 혹은 파직되기도 하여 사교(辭敎)가 공평함을 잃고 위벌(威罰)이 지나쳤습니다. 심지어 윤영희를 명목상으로는 외보로 서용한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승탁(陞擢)한 것이 되었으니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중화(中和)의 덕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여러 신하들에 대한 처분을 속히 환수할 것을 명하시어 윤영희의 죄를 분명히 바루어 제방(隄防)을 엄히 하소서.
상소를 준비하는 즈음에 삼가 들으니, 동부승지 박규순(朴奎淳)이 윤영희의 편을 들어 동료들이 가득 모인 승정원에서 ‘윤영희의 재능과 용모는 결코 오래 정배되어 있을 사람이 아니다.’고까지 허여하고 또 애석해하며 윤영희의 혈당(血黨)과 사우(死友)가 되기를 달게 여겨 거리끼는 바 없이 공공연히 패려궂은 말을 하여 곁에서 본 자들이 머리털이 일어서고 동료들은 더럽혀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방자한 당역의 무리는 한 시각도 잠신(簪紳)의 대열에 둘 수 없습니다. 신은 박규순에게 병예(屛裔)의 법을 시행하고 도로 내주었던 두 승선의 연명으로 올린 상소도 즉시 반한(反汗)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후원(喉院)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곧 공정한 공론이어서 다른 의론을 가지는 자가 있을 수 없는데, 들으니 이번 연명 상소 때에 동료들간에 의론이 갈라져 종당에는 진장(陳章)한 사람이 승선 두 명 뿐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겁을 내어 죄를 모면하려는 자는 또한 무슨 생각입니까. 형편이 부득이했던 자를 제외하고 참여하지 않는 승선들에게도 아울러 견삭(譴削)의 법을 시행하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상소에 제(題)하기를,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소(臺疏)의 이름이 붙는 경우에는 그때마다 계속해서 금지시킬 필요가 없으므로 근래에 그대로 맡겨 두었더니 이 무리들이 과연 어지럽게 날뛰고 있다. 그러나 별도로 엄히 처분을 내리고자 해도 도리어 파리 때문에 성이 나서 칼을 뽑는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므로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인데 이 또한 국가의 기강에 관계된다. 오늘 이전까지는 그냥 넘기겠지만 앞으로는 윤영희를 공격하는 자이든 윤영희를 편드는 자이든 모두 엄히 금하겠다. 이른바 중비 운운한 것은 비록 성명을 지적하여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할 일이니, 이 또한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림을 삼는다는 뜻에서 시끄럽게 구는 것을 우선 엄히 금한다."
하고, 인하여 윤제동의 직명(職名)을 지워버릴 것을 명하였다.
대사헌 이홍재(李洪載)를 간개(刊改)하였다. 전교하기를,
"먼저 상소와 나중 상소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제기한 것은 모두 속담에 이른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대사헌 이홍재를 간개하라."
하였다.
남소 위장(南所衛將) 정원대(鄭元大)를 가승지(假承旨)로 차임하였다가 곧 태거(汰去)하고 북소 위장 곽해제(郭海濟)를 가승지로 차임하였다.
윤영희(尹永僖)를 정언으로 삼고 패초(牌招)할 것을 명하였는데, 주서 이해청(李海淸)과 권황(權熀)이 명패(命牌)를 쓰려고 하지 않으므로 두 사람을 남간(南間)에 가두도록 명하고 서유문(徐有聞)을 주서로 삼아 즉시 거행하게 하였다. 윤영희가 숙명(肅命)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선발했고 또 패초하였으나 억지로 행공(行公)하게 한다면 사유(四維)107) 에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특별히 허체(許遞)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신유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번 이가환(李家煥)에 대한 일은 진실로 우리 전하의 전에 없던 잘못입니다. 신이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광구(匡救)의 정성을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다만 신이 동료 재상과 뜻이 원래 맞지 않고 의론을 구차히 같이 할 수 없어서 미움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씀도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신에 관계된 것으로써 몇 가지 조목을 진달했다가 번번이 면전에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또한 지위가 삼사(三事)를 갖추고 있는데 동료들 사이에서 이렇게 무시를 당했으니 이 모두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몹시도 부끄러운데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해 어떻게 감히 입을 놀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에 없던 잘못을 눈으로 보고도 한결같이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성상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은 궁벽한 곳에 살아서 듣는 바가 늦으므로 그 자세함을 알 수 없습니다만 소문만 가지고 말한다 해도 매우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윤영희는 매우 패려궂고 흉악하여 일개 기현(驥顯)의 그림자라고 할 것인데, 저 박규순(朴奎淳)이란 자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윤영희를 비호하는 의론을 모아서 허여하는 흉악한 말을 서슴치 않고 하면서 원중(院中)의 공적인 자리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성을 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같은 동료인 승선으로서 더럽혀짐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의리에서 상소를 올려 그 죄를 성토하고 함께 있지 않으려 한 것은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에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협하고 속박하며 거꾸로 조정에서 면관(免冠)하게 하셨으므로, 이를 보고 들은 이들이 근심하고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가승지를 차출하여 윤영희에게 대직(臺職)을 특별히 제수하고 명패(命牌)를 쓰지 않으려 했던 주서들을 남간에 가두셨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는 한 번 잘못으로 이가환의 일이 있었고 두 번 잘못으로 윤영희의 일이 있습니다. 일단 논박하고 바로잡는 의론이 있으면 그때마다 격성(激成)한 조치를 취하시니,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징계하고 두려워할 바가 없어서 장차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엄히 금단한다는 전교는 어찌하여 내리신 것입니까. 잘못을 성토하는 자를 엄히 금하고 바로잡는 자를 엄히 금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세도(世道)를 진정시키고 인심(人心)을 맑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사서(四書) 중에서 《중용》을 가장 많이 공부하였다. 입과 귀로만 배워 심신(心神) 공부에 도움이 없다고는 하겠으나, 오직 제 20장(章)의 경대신(敬大臣)의 뜻만큼은 나름대로 반복해서 연구하여 그 무한한 의미를 홀로 깨달았고 《중용》에서 취해 쓰는 것이 오직 이 한 귀절에 있다 할 것이다. 무릇 대신이 존경받은 다음에야 조정이 높아지며 대신이 가까이 하지 않으면 백성도 가까이 하지 않으니, 대신이 국가에 있어서 그 관계의 중요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경의 이번 차자의 내용은 비록 당록(堂錄)을 한 후에 진달한 바와 같지 않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람을 반목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미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느니 ‘번번이 면전에서 배척을 당했다.’느니 하는 말은 이 어찌 존경하여 예를 갖추는 말이며 중히 대우하는 도리이겠는가. 경 또한 대신이고 저 두 재상도 대신이다. 경은 전일에 밖에 있던 대신 한 명을 배척하더니 오늘은 서울에 있는 대신 한 명을 침범하였다. 대신으로서 대신을 침범하거나 배척하기를 어렵고 신중히 하지 않으니 어찌 매우 개연하고 의혹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시기에 조정이 무슨 모양이 되겠으며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지 않겠는가. 내가 공경하는 사람을 경이 어찌 소홀히 대하며 내가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을 경이 어찌 이간하는가. 차자 중에 기본 문제가 금지 사항을 언급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서도 부차적인 문제에 속한다.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경은 오늘의 이 비답으로 몸에 돌이켜 맹렬히 반성하여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힘써서 공경하고 협동하기에 더욱 힘쓰고 나의 보합 대화(保合大和)하려는 고심과 지성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연석(筵席)의 체모가 무엄함이 막심하다. 임경진(林景鎭)의 행위는 매우 경솔하니 승선(承宣)이 아무리 서투르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웃을 수 있는가. 당해 한림(翰林)을 우선 간삭(刊削)하고 고향으로 쫓아내 움추리고 있으면서 글이나 읽게 하라."
하였다. 임경진이 연신의 실수를 보고 웃어서 그 소리가 들렸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병조 정랑 고택겸(高宅謙)에게 수찬을 특별히 제수하고, 전교하기를,
"서울에 있는 자들은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제수되어도 모두 피하려고 한다. 어제 성덕우(成德雨) 등의 행동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의 후손인가. 서울에 거주하면서 모면하려 하는 자들에 비하면 혁혁한 문벌의 후손이 백 배 더 낫지 않겠는가. 이 사람으로 수찬의 결원에 제수할 것이니 패초(牌招)하여 회좌(會坐)하게 하라."
하였는데, 고택겸은 호남 사람으로,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다.
정존중(鄭存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고 부사(府使) 이장옥(李章玉)의 아내 김씨(金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연호궁(延祜宮)을 봉원(封園)하기 전에는 본궁(本宮)에서 도와주는 제수(祭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길이 없어졌고 약간의 전토(田土)가 진위(振威)·통진(通津) 등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매매되어 제사에 이바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로서 바라는 바는 이미 매각된 전토를 도로 물러서 제사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호조가 복주(覆奏)하기를,
"본가(本家)의 궁색하고 가난한 상황은 이미 보고한 바 있거니와 진념(軫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연호궁을 봉원한 뒤로 전결(田結)에서 나오는 세금을 본조로 옮긴 것이 꽤 많으니 이 중에서 해마다 쌀 20석(石)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쌀을 지급하는 것이 체모에 어떨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나오는 결세(結稅) 중에서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적당량을 지급하게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이 성장하거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요미(料米)를 주고 무예를 익히게 한 다음 수용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6일 임술
소대(召對)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판부사 박종악(朴宗岳)의 상소로 자인(自引)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을 비니, 비답하기를,
"어제는 판부사가 경의 일로 인의(引義)하고 오늘은 경이 판부사의 말로 면직을 구하니 이렇게 하고도 조정의 분위기가 편안하겠는가, 편안하지 않겠는가. 판부사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면 경이 어찌 대거리하겠는가. 이 때문에 판부사의 상소에 개연한 마음이 있어서 대략 그 비답에 언급했던 것이다. 경 또한 더욱 무면(無勉)의 경계에 힘써서 대궐에서 내려서도 화기(和氣)를 잃지 않았던 옛사람들의 두터운 풍속을 본받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경을 격려하고 책망하는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라."
하였다.
고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의 시호를 의론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문형(文衡)이 시호가 없는 것은 문원(文苑)의 고사(故事)에 위배되는 바가 있고 더구나 황경원은 다년간 빈객(賓客)으로 강석(講席)에 출입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익정(李益炡) 영부사(領府事)의 시호를 의론하면서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내각(內閣)을 설치할 적에 처음으로 제수된 사람이 이 대신과 이 중신이니 더욱이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 대제학 황경원도 일체 시호를 의론하고 장문(狀文)은 오늘 안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삼남 도신(三南道臣)에게 신칙하여 진읍(賑邑)의 수령에게는 유가(由暇)를 지급하지 말게 하였다.
9월 27일 계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동등 시사(冬等試射)를 행하였다.
정만시(鄭萬始)를 흥양현(興陽縣)에 정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정만시는 그전 범죄가 아직 감정되지도 않았는데 어젯밤의 행동은 결코 떳떳한 성품을 지닌 자가 할 짓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흥양현에 정배하라."
하였다. 이해 봄에 정만시가 대가(大駕)를 수행할 때 지공(支供)을 지나치게 받아 크게 견책을 받았었는데, 이때 이르러 응교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시좌(諡坐)에 참석해야 하는데도 무고하게 여러 차례 소명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9월 28일 갑자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본도 각읍의 정적(停糴)의 등급을 나누는 일로 치계(馳啓)하니, 회유하기를,
"여러 수령들의 근만(勤慢)은 암행 어사를 연달아 파견해서 도내의 사정을 대략 알고 있다. 경 이하의 관원이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간성(杆城)에는 백성이 그동안 몇 호(戶)나 더 늘었으며 다른 곳에서 찾아드는 성과가 있었는가? 경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시기가 늦고 빠른 것은 간성의 백성이 지난 계묘년 가장 많았을 때와 같이 되는 데에 달려 있다. 회양(淮陽)에도 호수(戶數)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은 일전에 신칙한 바가 있으니 이 또한 특례로 불러들여 1만 호 안팎으로 증가하거든 그때 장계로 보고하라. 도내 수령 중에서 만약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영송(迎送)하기에 어려운 자가 있거든 모름지기 즉시 장계로 보고하고 체파(遞罷)하라."
하였다.
9월 29일 을축
호남의 금년 적곡(糴穀)의 10분의 1을 정퇴(停退)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광식(韓光植)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판서 제말(諸沫)에게는 충의(忠毅), 증 판서 공서린(孔瑞麟)에게는 문헌(文獻), 판서 이익정(李益炡)에게는 정간(靖簡), 판서 황경원(黃景源)에게는 문경(文景), 판서 조영국(趙榮國)에게는 정헌(靖憲), 증 찬성 김준룡(金俊龍)에게는 충양(忠襄)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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