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정묘
앞서 경기 관찰사가, 포천(抱川)의 유생 허형(許珩)이 삼식(三式)의 호적 기준108) 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외람되이 과거에 응시하여 방(榜)에 오른 사실을 조사해 계문하자, 예조에 명하여 윤영의(尹永儀)와 조만원(趙萬元) 등의 전례를 자세히 조사해서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해 하나로 지정해 회계하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형이 포천에 산 지가 5년이니 호적으로만 말하면 삼식을 어긴 것이지만 집을 짓고 산 것으로 말한다면 삼식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윤영의와 조만원도 일찍이 삼식을 어긴 일로 방에서 제외된 일이 있었으나 영의는 지친(至親)의 솔하(率下)에 호적이 올라 있었고 만원은 처음부터 호적이 올라 있지 않았으니 그점이 허형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방을 발표한 지 보름이 경과한 뒤에야 비로소 이런 논의가 있게 된 것에 대하여 듣는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박종악(朴宗岳)은 아뢰기를,
"윤영의와 조만원은 모두 삼식의 기준에 미달한다고 해서 방에서 제외하였는데 유독 허형만은 그대로 둔다면 영의와 만원이 어찌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격식을 어겼느냐의 여부만을 논해야지 방을 발표한 지가 오래된 것은 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장(科場)을 엄숙히 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윤영의 등 다른 사람들과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하여 방치해두고 따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 허형을 조율(照律)하여 멀리 유배하고, 이를 살피지 못한 입문관(入門官)은 잡아들여 처치토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정만시(鄭萬始)의 죽을 죄를 특별히 용서해 준 것이 잘못 적용된 형벌이기는 하나 바로 그의 선조(先祖)를 생각해서였던 것이다. 비록 법전에 없는 법일망정 한번 정해져 법률로 발표되면 바로 금석(金石)처럼 확고해져 감히 어길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간추리고 닦아서 밝혀놓은 것이겠는가. 행행 때 반과(盤果)를 금지시킨 일은 폐단을 없애는 더없이 좋은 정책일 것이다. 연전에 검암참(黔巖站)을 적간(摘奸)한 뒤에 엄히 단속시켰던 일은 기필코 법령을 믿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군문(軍門)에 종사하는 자로서 감히 많은 군인들이 있는 곳에서 패악한 입을 함부로 놀린 사실이 적간 서계에 적혀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군사들을 양철평(梁鐵坪)에 집합시키고 군중에 회시(回示)한 뒤 해당되는 법을 집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막상 장전(帳殿)에 도착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참는다고 하여 크게 실형(失刑)될 것은 없겠기에 아울러 본죄까지도 거론하지 않고 열병(閱兵)만 하고 환궁했었다.
그 뒤 수령에 제수했던 것도 효도의 도리로 정치를 하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백성의 재물을 탐하고 있다는 보고가 암행 어사를 통해 들어왔었지만 이는 그 도(道)의 도백이 갈려서 올라오기를 기다려 조사하려고 그냥 있었던 것이다. 일전에 한 짓만 해도 정상적인 사람이 한 짓이 아니다. 새벽에 패초(牌招)를 받고서 개좌(開坐)할 것을 자청하고 정원에 전갈을 보내 시간을 무시하고 은밀하게 품했던 자가, 갑자기 이튿날 새벽에는 한사코 패초를 거역하면서 동료들은 석고 대죄를 하는데도 저만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니 앞서 저지른 난언죄(亂言罪)에 비하면 다소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전부터 허다하게 그러한 일들이 있어왔다.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이라고 매번 요행히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사형에서 유배로 감면시켜 준 것이 결국 너무 가벼운 처벌인 듯하여 그의 죄상을 국문하여 무너진 기강을 조금이나마 진작시켜 볼까 하다가 다시 생각하여 보니 연전에 바로 처분하였던 것과는 다른 듯하여 또 우선 참작하여 유배시키기로 한 것이다. 흥양(興陽)은 흉년이 더욱 심하다니 도내의 조금 나은 읍을 골라 다시 배소(配所)를 정하도록 하라. 만일 지키기를 엄하게 하지 않고 방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해당 도신(道臣)은 깊은 산이나 먼 바다로 귀양가게 되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씨가 같다고 하여 생기는 사사로운 정리(情理)를 돌아보지 말고 조정의 영을 각별히 준수토록 하라. 반과(盤果)를 금지한 것이 얼마나 큰 일인데 만시가 그러한 행위를 한단 말인가. 이 초기(草記)의 비답을 각 군문의 미포 아문(米布衙門)109) 에다 게시하도록 하라. 이후로 영을 어기는 자는 경재(卿宰) 이하 모두에게 일정한 형벌을 내릴 것이다. 감히 법령을 범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만시는 남평(南平)으로 배소를 옮겼다.
10월 3일 무진
독성 산성(禿城山城)110) 을 수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1천 4보(步)로 전체 성 중 신축 부분이 7백 32보, 수축한 부분이 2백 72보이다. 수문(水門)은 세 곳을 개축하였고, 성가퀴도 3백 9보를 신축하였으며, 남장대(南將臺)는 옛터에서 3척(尺)을 옮겨 다시 세웠다.】 전교하기를,
"산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園寢)에서 가깝다. 또 경진년111) 에 머물러 숙박하였던 곳이며 장대(將臺)는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원임 각신(閣臣)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左相)이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공씨(孔氏)가 우리 나라에 건너와 맨 먼저 수원(水原)에 정착한 사실이 읍지에 실려 있는데 일전에 도신으로 하여금 그곳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여 그 그림에서 찾아보니 궐리사(闕里祠)란 사우(祠宇)도 있고 은행나무도 심어져 있으며 대대로 눌러사는 후손들도 있었다. 또 궐리(闕里)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영당(影堂)이 있다고 하였다. 문헌공(文獻公)112) 의 시호를 내린 뒤로도 조정이 공씨 집안을 우대하는 일에 있어 보통 예와는 달리해야 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궐리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세워 내각에 있는 성상(聖像)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을 궐리사라 하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수들은 대략 이성(尼城) 궐리사(闕里祠)의 예대로 시행하되 한사코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른바 새로 세웠다는 영당은 고을 유생들이 사사로이 세운 것에 불과하고 또 간직했던 영정마저도 함께 봉안하였으니 재목이며 돌들도 당연히 이곳에다 옮겨 세워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제향을 드릴 일이겠는가. 서원 지키는 재생(齋生)에 있어서도 그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공씨를 시키도록 하고 다른 유생은 감히 섞이지 못하게 하여 시비거리가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써서 강당에다 게시하라."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을 영중추부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에게 하유하기를,
"어느덧 경의 거상(居喪)이 끝이 났구나. 효성이 남보다 한층 뛰어난 경으로서 어떻게 감내하며 지내는가? 어제 정목(政目)에 서추(西樞)로 보임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조정에 나와 있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 먼저 지극한 뜻을 펴노라."
하니, 종수가 대답하기를,
"신의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상기(喪期)를 얼결에 마쳤습니다. 관직을 옛날 그대로 보전해 주시고 이어 특별히 유시까지 내려주시니 감격이 북받쳐 올라 살을 에이는 듯하오며 단지 피눈물이 있을 뿐입니다. 아, 신이 악명(惡名)을 뒤집어쓰고서 죽고자 하면서도 죽지 못한 것이 지금 1백 20여 일이옵니다. 지난날 해와 달같은 전하의 밝음으로 통촉해 주시고 하늘과 땅같은 전하의 포용으로 감싸 주지 않았더라면 신의 집안은 이미 씨가 말랐을 것입니다. 전후 정녕하고 애달파하시는 전교가 원통함을 씻어주고 시비를 가려주는 방도에 있어 최고의 성심을 다하시기 거의 자상한 어미가 갓난아이를 보살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신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원통함을 밝히고자 하는 생각을 갖겠습니까마는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의 아들에게 캐물어 조사를 벌이자는 것은 바로 원고(原告)와 피고(被告)들이 똑같이 청을 드린 말이었습니다. 조사하여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신은 당연히 바로 그자리에서 형을 받을 것이고, 조사하여 그런 사실이 없으면 신은 당연히 다시 일어나 사람의 대열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얼버무려 덮어버리고 한번의 조사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면 신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남은 날은 장차 역적이냐 아니냐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끝내 하늘 아래 낯을 들지 못할 것이니, 살아서는 당연히 원통함을 지니고 한을 삼키는 사람이 될 것이고 죽어서도 원통함을 지니고 한을 삼키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신이 낮에는 밥먹기를 잊고 밤에는 잠자기를 잊고 흐느껴 울먹이며 손을 모아 하늘에 비는 것은 오직 그 한가지 일뿐입니다. 아, 가슴이 아프옵니다. 성한과 구종의 흉악한 역모는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있어온 이후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하늘이 내린 성정을 갖춘 자라면 뉘라서 그의 살점을 씹고 살가죽을 벗겨내 이불로 덮고자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신만이 악의 소굴이니 뿌리니 하는 악명을 입고서 이토록 어질고 밝은 세상에 길이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이 되어 하늘을 향해서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땅을 향해서는 발을 움추리니 이런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얘기하는 자들의 말에는, 두 번째의 상소를 머물려 두고서 결정하여 내리지 않은 것이 더더욱 신에게는 애매하고 밝히기 어려운 단서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사하라는 명이 내려져 역모의 내용들을 끝까지 추궁한다면 본시의 상소가 내려지는 것은 저절로 포함될 일일 것입니다. 신은 외람스러워 감히 한번 청을 올리려는 생각을 못하고 서울의 궁궐을 멀리서 바라보며 정신과 넋만 아득히 날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승지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기를,
"신은 천한 시골 사람으로서 청현(淸顯)한 벼슬을 두루 거치고 훌쩍 당상관 반열에 올랐습니다. 전하의 명철하심으로 신에게 어찌 취할 점이 있어서였겠습니까. 단지 신이 영남 사람이란 이유로 우선 신을 우대함으로써 영남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해 보자는 것뿐인 것입니다. 신이 요행히 그런 기회에 벼슬을 받고서는 한 몸의 사사로운 영광만을 생각하여, 영남 사람들이 30년을 두고 두려울 것도 앞뒤 살필 것도 없이 당당하게 주장해 왔던 큰 의리가 당장 허물어지고 어지러워지고 흐려지고 막혀가는 것을 눈앞에 보고서도, 위세를 두렵게 여기고 영화에 연연하여 주저주저 감히 할 말을 않겠습니까.
신이 며칠 전에 영남에서 조사해 올린 계본(啓本)을 보았더니 조사해서 정했다는 것이 실정과 크게 어긋나 있었습니다. 단지 신왕(申旺)과 이시백(李時白) 등을 주범과 종범(從犯)으로 구분짓고 괴수인 안총(安寵)은 그대로 무죄 석방시켰습니다. 저 총의 무리는 단지 시골의 추악한 부류일 뿐인데 그의 기세와 위엄이 능히 도백의 조사를 빠져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총이 저러한 총이 된 것은 겨우 2년 정도입니다. 은밀히 권력과 이권의 소굴에 뛰어들어 한 마을의 풍속을 선동하여 무너뜨리며 온갖 술수를 다 부려 화란을 남에게 전가시키기도 하고 재앙을 도발시키기도 하여, 착한 무리들에게는 그가 마치 묘판의 잡초와도 같고 곡식 속의 쭉정이와도 같은 존재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무신년113) 겨울에 은혜스런 전교를 거역한 자도 총이며, 기유년114) 가을에 선비들의 상소를 터무니없이 죄에 빠뜨린 자도 총입니다. 올 여름에 이르러 십행(十行)의 비지(批旨)와 전후의 하교가 글자 글자 애통한 내용이요, 구절 구절이 삼엄하기 그지없어 영남의 원로들이 모두 지팡이를 붙들고 서서 귀를 귀울이고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총과 그의 추악한 무리들만은 공연히 흉악을 부렸고 감쪽같이 밀정(密偵)들을 물샐틈없이 박아두고서는 전하의 영이 선포되는 날을 알아내어 터놓고 무뢰배들을 풀어서 누(樓)에 올라 북을 두드리게 하니 전쟁과 다를 것이 없었고 자물쇠를 깨트리고 장롱을 발로 내차는 꼴이 마치 겁탈하는 도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의리를 주장하는 쪽 사람들을 휘몰아쳐 도리어 역적의 죄목을 지게 했던 그 점이 또 총이 저지른 전후의 악독함 중에서 가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간원(西澗院)115) 원임(院任)에 관한 약속도 모두 그가 단안을 내린 것인데 기선을 잡고 앞장서서 지휘했던 적의 괴수는 고결한 선비로 대우하고 협박에 의해 따르고 이익을 위해 일한 조무래기들만 형을 당하고 유배당하였으니 이번 조사는 조정의 영을 받드는 면으로나 사사로운 인정을 베푸는 면으로나 모두 당치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근래 벼슬아치들이 사림의 기를 꺾는 데 사사로운 감정이 있는 듯합니다. 함창(咸昌) 사건은 지금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한 사건이고 예천(醴泉)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한 번의 은택이 내려지면 그때마다 꺾고 억누름이 배나 증가합니다. 그래서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발을 모아 디디며 사는 곳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삶을 즐겁게 여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총의 사건도 그렇게 법을 어기기까지 하며 보호해주고 죄를 완전히 사면해 주어 한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자기 소신을 옳다고 내세우지 못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슨 연유에서입니까? 흉년을 당해 별도로 안핵사(按覈使)를 보낼 수는 없겠으나 유사에게 급히 영을 내려 죄를 지은 괴수를 붙잡아다 엄히 조사하여 그 실상을 밝혀냄으로써 교화를 가로막는 행위는 결단코 근절시켜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전하의 밝으심으로 그 일을 엄히 조처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감히 관대를 차고 벼슬에 나아가 하늘이 내린 녹봉을 축낼 수 없으니 빨리 신의 벼슬을 깎아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으로 하여금 돌아가 고향의 부로(父老)들과 문을 닫고 앉아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 더할 수 없는 바람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직책이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하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것은 별로 금령을 어긴 일이 아니다. 더욱이나 그 상소 내용이 매우 긴요하게 지적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안총(安寵)의 일은 도신이 조사한 내용이 십분 정당하냐의 여부는 말할 것도 없이 소장에 실려진 내용이 법연 석상에서의 대답과는 서로 달라 그의 버릇없음을 의당 경고하고 단속해야겠다. 동부승지 김한동을 추고하고 그의 상소는 되돌려 주라. 사실이 이미 상반되지 않는다면 조사해 올린 계본은 습장(習杖)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고서야 어떻게 송사(訟事) 자체가 없게 할 수 있겠느냐. 도백이 선비들의 서장(書狀)에 제사(題辭)한 글귀는 승지가 눈으로 보았다고 하니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형조 판서가 마침 입시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물어보게 하여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백을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남의 연읍(沿邑)과 그밖의 다른 고을에서 바치는 토산품(土産品)을 정지시켜 진휼하는 재용에 보태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것이 사소한 일이지만 뜻만은 고락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4일 기사
차대(次對)를 열어 비변사 당상관 서유린(徐有隣)을 파직하고, 대사간 이집두(李集斗)와 승지 윤이상(尹履相)을 체직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과 판부사 박종악(朴宗岳)에게 이르기를,
"내가 요사이에 격기(膈氣)가 점점 더해 조금만 일을 하면 바로 다시 도지고 있다. 조섭하는 요점은 마음을 맑게 갖고 생각하는 것을 쉬는 것인데 요사이 조정의 흐름이 서로 조심하고 서로 협조하는 바람이 없으니 어찌해서인가? 나의 고심은 오직 보합(保合)시키고 아주 화목하게 하여 함께 대도(大道)를 성취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내가 박 판부를 재상에 기용한 것은 사실 취할 바가 있어서였는데 하는 일들이 소망하던 바와는 다른 점이 많다. 앞서에는 김 판부를 배척하더니 뒤에 와서는 좌상을 침해하는 등 조금도 주저함이 없으니 조정의 수치가 그보다 더 클 수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 조섭의 방법으로는 경들이 서로 조심하고 협조하여 나의 뜻을 받들고 도와주는 길밖에 없다. 경들은 어찌하여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새벽부터 밤까지 나의 모든 생각이 오로지 조정시키기에만 쏠려 도리어 흉년에 대한 구휼에는 전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들끼리 사이가 가깝지 않으면 백성들도 따라붙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나랏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걱정이 적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함께하고 서로 도와 내가 조정을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게해준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또 박 판부는 좌상과 함께 일해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서로 사이가 나쁘게 지낼만한 일이 없을 터인데도 박 판부의 지난번 차자의 내용 중에는 ‘헐뜯음을 당한 것이 오래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번번이 면전에서 책망을 당했다.’ 하였으니 어찌 매우 의혹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지난번 자리에서 역관(譯官)에 대한 일을 가지고 말한 것 때문이라면 말이란 구차히 같지 않은 것이 바로 좋은 것이다. 전상(殿上)에서는 서로 다투다가도 전상에서 내려가면 친의를 서로 잃지 않는 것이 어찌 경들이 당연히 면려해야 할 점들이 아니겠는가. 판부는 틀림없이 여러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만 듣고 그런 것이겠지만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렇게 대놓고 누누이 유시하는 것은 오직 세도(世道)를 위한 고심 끝에 지성으로 한 말이니 경들은 그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언행에 품격이 없어 남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여서 전하의 염려를 번거롭게 불러일으켰습니다. 황공하고 부끄러워 죽고만 싶습니다. 신이 몇 해 전부터 재상 자리를 홀로 차지하고 있어 새벽부터 밤까지 걱정하고 두려워해 오다가 판부사가 기용되고부터서는 공적으로는 기쁘고 사적으로도 다행스러워 비유하자면 늦게까지 형제가 없다가 형제를 얻은 것과 같았습니다. 신이 판부와는 일찍이 동료로서 함께 일한 적이 없어 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는 모양이나 지난번 경연에서 왈가왈부했던 것은 소견이 각기 다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하는 임금이 제일 잘 아는 것이기에 아마 다 통촉하고 계시겠지만 신의 속마음은 본시 세세하게 헤아림이 없고 일을 당하면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판부가 운운한 것도 신의 마음을 이해 못해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고, 종악은 아뢰기를,
"서로 조심하고 서로 협조하지 못한다고 신을 책망하셨는데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무엇 때문에 눈에 뜨이게 남다른 주장을 내세워 탕평 정책을 외면하겠습니까. 신과 좌상과는 일을 함께 한 지가 오래지 않아 조정의 자리에 등대한 것도 5, 6차례에 지나지 않고 묘당에서 한 일도 두서너 가지에 불과합니다. 신에게 어찌 별달리 사사로운 호오(好惡)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난번의 당록(堂錄)116) 건에 있어 신으로서는 삼가 개탄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또 윤영희(尹永僖) 사건만 해도 관계가 어떠하며 지은 죄가 어떠합니까? 그는 오익환(吳翼煥)과 죽음을 맹세한 벗이자 또 역적 신기현(申驥顯)과는 피로 뭉친 무리입니다. 그가 주시관(主試官)이 되었을 때 감히 남몰래 흉악한 역적 자식의 강(講)에 찌[栍]를 슬쩍 넘겨주었는데도 좌상만은 한마디도 그를 성토하는 말은 없이 도리어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둥 경악(經幄)이 어떻다는 둥 실권이 없다는 둥의 말들이 주대(奏對)의 과정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박규순(朴奎淳) 사건만 하더라도 그러한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좌상은 끝내 성토한 적이 없기에 신이 걱정되고 분노가 치밀어 눈물을 삼키는 심정을 약간 보이면서 속마음으로는 좌상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꾸고 신과 같이 소리 높여 성토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차자를 보니 끝까지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고 또 경연에 나와서도 옛날과 똑같이 아무런 기미가 없었습니다. 신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개탄스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록에 관한 일은 경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권점에 참여하고서 끝에 와서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참으로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며, 윤영희 일에 있어서는 이제 이미 마무리가 된 일이어서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겠으나 다만 윤영희가 변경의 장수로 있을 때의 일을 좌상이 아뢴 것은 어떤 문제를 놓고 그 일을 객관적으로 논한 것뿐이지 그게 무슨 영희를 위해서였겠는가."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윤영희가 일찍이 신기현(申驥顯)을 토죄하다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신은 그 일만을 알 뿐입니다."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어찌 이 일만을 가지고 그의 뒷날의 죄까지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비당(備堂)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오늘 두 분 대신들 하는 일이 모두가 개탄스럽습니다. 기현이 그 어떤 극악한 역적입니까. 그런데 영희가 그 자식의 강(講)에 찌를 슬쩍 넘겨 주었으니 그 죄악을 따지자면 바로 기현과 똑같은 역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좌상은 일찍이 토죄한 적도 없었고 오늘 동료 재상의 말에 대해서도 깜짝 놀라며 듣고 생각을 바꾸려는 의도는 없이 단지 여러 사람과 어울려 토죄에 참여한 한 가지 일만을 가지고서 그것을 빌어 편드는 말꼬리로 삼고 있습니다. 좌상이 의리를 알고 있다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판부사로 말하더라도 좌상이 아뢰는 태도를 보았으면 당연히 분개스럽게 말을 해야 할 터인데도 도리어 저렇게 두리뭉실하게 넘기고 있으니 두 분 대신의 하는 일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에 경재(卿宰)들이 일제히 일어나 앞으로 나오며 서유린의 말에 동조하자, 상이 제신들에게 자리에 나아가 앉으라고 명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신이 앞서 말씀드렸던 얘기를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의리라는 것은 곧 천하의 의리이며 만세의 의리인 것입니다. 영희가 역적이 된 것은 기현에서 비롯된 것이고 기현이 역적이 된 것은 역적 윤구종(尹九宗)에게서 기인한 것입니다. 뿌리가 그대로 있기에 가지며 잎이 번성하여 맥락이 서로 연결되어 마치 한 꿰미에 꿰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영희를 극악한 역적이 아니라고 이른다면 거슬러 올라가 그들을 다 극악한 역적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까? 오늘의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지아비 지어미도 함께 어깨를 걷어 붙이고 눈을 치켜뜨면서 머리를 부딪고 피를 삼킬 일인데 좌상만은 한결같이 두둔하고 보호하며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어찌 이렇게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 있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시고 혹시라도 범연하게 생각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유린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삼가 파직의 명을 받드니 참으로 몹시 황송합니다만 신은 창자의 피가 끓는 듯하여 억누르지 못하고 감히 다시 우러러 아뢰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의 밝으심으로 다시 더 생각하소서."
하였다. 도승지 박우원(朴祐源)이 아뢰기를,
"영희와 기현은 사람은 두 사람이나 실은 똑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오늘 비당이 아뢴 말이 사실은 공공의 분노에서 나온 말인데 지엄한 전교가 거듭 내려지니 그것이 어찌 전하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하고, 서영보(徐榮輔)는 말하기를,
"좌상이 지난번 경연에서 아뢰면서 영희를 경악(經幄)의 신하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력이 없어 쉽게 깔보였다.’ 하고서 영희가 일찍이 역적을 토죄한 논의에 참여했었음을 말하여 이로써 자취를 지우려 하였고 그가 역적 기현과 몰래 결탁한 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으니 단지 개탄스럽다고만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역적을 징토하는 일이 얼마나 삼엄 준절한 대의입니까. 이 쪽이냐 저 쪽이냐에서 한(漢)과 적(賊)이 판가름 나는 것 아닙니까. 저 영희는 바로 역적 기현과 피로써 뭉친 무리입니다. 영희를 토죄하지 않는다면 기현도 토죄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징토의 큰 의리마저도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고, 오재순(吳載純)은 아뢰기를,
"대신이 하는 일이 개탄스럽다고만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문순(金文淳)은 아뢰기를,
"영희는 바로 좌상의 5촌 조카입니다. 좌상이 나라로부터 받은 두터운 은혜가 어떠한데 대의는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두둔하고 보호하려고만 하여 공의를 등지고 힘을 다해 의리와 싸우려고 드니, 어찌 이다지도 무엄하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분통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이때 여러 신료들이 번갈아가며 공격하였으나 제공은 말에 따라 다 대꾸하고 변명하였다. 상이 제공에게 이르기를,
"여럿이서 공격하는 중에서도 경이 성색(聲色)을 변하지 않으니 과연 도량이 크도다."
하였다.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에 ‘폐하 앞에서도 저러한데,’라는 말이 있듯이 좌상이 오늘 전하 앞에서 영희를 조금도 기탄없이 감싸니 그가 자신의 집에서 하는 말들이야 미루어 알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대신이 이 지경이니 세도(世道)가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이때 동부승지 김한동(金翰東)이 여러 사람들과 기복(起伏)을 함께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동부승지도 그렇게 하는가?"
하니, 한동이 아뢰기를,
"신은 영희를 토죄하는 주청에 동조하는 것이지 좌상이 하는 일에 대해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자, 병모 등이 일제히 동일한 음성으로 아뢰기를,
"승지가 좌상이 하는 일에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고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경연의 신료들이 이렇게 공격들을 하니 신이 과연 잘못하는 모양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 같은 넓은 도량으로 이미 잘못되었다고 말하였으면 더구나 그렇게 아옹다옹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자, 문순이 아뢰기를,
"신들이 번갈아가며 논척(論斥)하고 있는데도 대신은 끝내 영희의 범죄에 대해 한마디의 토죄도 청하지 않고 범연히 잘못되었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 이같은 도리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물러가서 스스로 이 일을 처리할까 합니다. 만일 신이, 여러 경재(卿宰)들이 번갈아가며 아뢴 끝에 윤영희를 토죄하게 되면 이는 변명이나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신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곧 물러나갔다. 윤이상(尹履相)이 아뢰기를,
"서유린을 파직하라는 전교를 신이 부득이 받아 쓰기는 했지만 결코 반포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체직하라."
하자, 종악이 아뢰기를,
"비당과 승지에 대한 처분은 아주 지나치신 것이니 환수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다. 상은 현임 대신이 지레 나가버려 차대가 그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형세이자 여러 신료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집두(李集斗)가 아뢰기를,
"신이 기현과 영희를 맨 먼저 토죄했던 사람입니다. 지난번 신이 승지 자리에 있을 때 영희를 서용하여 벼슬을 제수하신 처분을 보고서 상소문을 만들어 올리려고 하였다가 금한다는 명이 있어 끝내 올리지 못하였고, 또 며칠 전에도 현직으로 대각에 나아가 아뢰려고 하였으나 윤영희 세 글자가 이미 금령(禁令)에 걸려 있어 또 묵묵히 물러나오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청(臺廳)으로 나가서 영희에 관한 문제를 아뢰려고 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금지의 명을 빨리 거두어주소서."
하니,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판중추부사 오재순 등이 연명 상소하여, 서유린과 같은 처벌을 줄 것을 청하니, 상소문은 되돌려 주고 재순은 파직하고 여러 경재들은 중한 벌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0월 5일 경오
좌의정 채제공이 첫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상소하여, 서유린과 오재순을 신구(伸救)하자, 그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10월 6일 신미
국법(國法)에, 중국에 가는 역관(譯官)은 모두 포은(包銀)을 가지고 가게 하였고 당상관은 3천 냥 당하관은 2천 냥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가난하여 자력으로 마련하여 가지고 갈 수 없을 경우에는 장사치의 은(銀)을 자기 몫의 포대에 채우고 그중의 10분의 1을 취하여 여비며 교역(交易)의 밑천으로 삼게 되어 있는데, 장사치들에게는 사사로이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영묘(英廟)정묘년117) 이전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왜인(倭人)들과 서로 사고 파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왜인들 중 중국산[唐産]을 사려는 자들은 반드시 동래(東萊)에서 구해야 하였다. 그런 연유로 동래부(東萊府)에는 다른 곳보다 은이 월등히 많아 우리 나라에 유통되는 은은 대부분 왜은(倭銀)이었고, 우리 나라의 여러 광산에서 나는 은도 풍부하여 중국에 가서 교역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뒤 청나라 사람들이 왜인들과 교역을 시작하자 왜인들은 직접 장기도(長崎島)로 가 교역하고 다시 동래로 오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우리 나라에서는 마침내 광산에서 캐내는 은만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산출량도 옛날보다 점점 줄어들었다. 이로부터 국내의 은이 크게 부족하여 장사치들이 모두 잡화(雜貨)로 은값을 쳐서 포대를 채웠는데 늘 기준에 미달하여 역관들이 마침내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것은 해마다 더욱 심해져 대대로 역관을 지내던 사람들이 대부분 역관직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상이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궁리하였으나 방법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역관들 중에는 혹 청나라 돈을 사들여 우리 나라에 유통시키기를 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세폐 면포(歲幣綿布)를 본 사역원에 넘겨주어 작공(作貢)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상이 동지 정사(冬至正使) 박종악(朴宗岳)과 부사·서장관 그리고 비변사 당상관, 사역원 제조들에게 그 편리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얘기해 보도록 명하였으나 결말이 나지 않았었다. 이때 와서 상이 사역원 제조 서유방(徐有防)과 역관 이수(李洙)·장렴(張濂)·김윤서(金倫瑞)·김재화(金在和) 등을 불러 각자의 주견을 말해 보라고 명하였다. 이수가 아뢰기를,
"저들은 돈 주조를 해마다 하고 있습니다. 사행이 경유하는 지역인 산해관(山海關)·심양(瀋陽)·요동(遼東) 등지에도 모두 돈 주조하는 움들이 있어 1년에 주조하는 양이 무려 수백 만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사들인다 할지라도 1년에 불과 10만 정도일 것이어서 그쪽에 돈이 희귀해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천 리를 운반하는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난색을 보이기도 하고 있으나 만일 공동 매매를 허락한다면 마치 책문(柵門)에 모자 파는 가게가 있듯이 저들은 앞으로 틀림없이 책문 안에다 돈을 쌓아두고 매매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운반하는 노고는 저절로 덜어질 수 있을 것이고 또 나라의 재정이나 민간 자산에 끼치는 영향으로 말하더라도 능라(綾羅)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런 갖가지를 사들여 수년이 못가 모두 해지고 못쓰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들 백년토록 썩지도 않고 이그러지지도 않을 물품을 가져다가 공사(公私)에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니 돈 무역을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장렴은 아뢰기를,
"돈 무역을 하면 당장은 편리하겠지만 몇 해 지나고 나서 저들이 화권(貨權)을 쥐면 저들 멋대로 조종을 하면서 간사한 꾀를 내어 물가를 오르게 할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폐(歲幣)에 있어서는 원공(元貢)의 면포가 3천 필인데 쌀로 환산하면 모두 6천여 석이 됩니다. 그중 4천여 석을 본 공물전(貢物廛) 사람에게 주어 공물을 마련하게 하고 그 나머지 1천 8백 석에서 8백 석으로는 점차 원금을 갚아나가게 하고 1천 석으로는 관생(館生)들의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등의 잡기(雜歧)로서 아직 출신하지 못하고 해당 아문(衙門)에서 일을 돕고 있는 자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생활 밑천으로 삼게 하면 본 사역원에는 은혜가 골고루 입혀질 것이고 시장 백성들도 생업을 잃는 탄식이 없을 것이니 세폐를 작공(作貢)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김윤서와 김재화는, 두 가지가 다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상은, 세폐 공물 제도는 오랫동안 공물전 사람들에게 붙여져 있던 것이어서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는 일이므로 돈 무역을 하는 것이 편리하리라고 생각하고 묘당에서 의논하게 하였던 바, 묘당에서도 그것이 편리하다고 하므로 마침내 자문을 갖추어 사신편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특별한 황자(皇慈)를 입어 멀리 있는 나라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은택은 그 넓기가 하늘같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아들같이 사랑하시는 인자함은 따스하기 봄동산 같습니다. 작은 일까지도 모두 통촉해 주시고 소원이라면 이뤄 주시지 않음이 없어 이 나라 수천 리의 초목 곤충들까지도 모두 그 덕화 속에서 낳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당직(當職)은 밤낮으로 감격하고 오매 불망 송축하면서 그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자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 대인들은 다 알고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온 나라의 신하며 뭇 백성들에게 구구하고 간절하기 그지없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섭고 두렵게 여겨 전해 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황상은 중국의 한 울타리 안으로 똑같이 취급하는데 반해 소방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격이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대체로 전폐(錢幣)란 물건은 그 자체가 천하에 유통하는 재화(財貨)로서 그 제도는 연호(年號)를 새기고 그 의의는 통보(通寶)라고 한 것이 말해주듯이 천자 나라의 책력[正朔]을 받들고 토산물을 바치는 나라들이라면 당연히 고루 후생(厚生)의 혜택을 입고 모두가 물물교환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 소방은 다행히 세공(歲貢)의 대열에 끼여 있어 민생의 일상 용품을 모두 상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역함에 있어 크고 작은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으며 심지어 의복이며 그릇이며 약물이며 축산에 이르기까지 관시(關市)를 허락하고 지방 토산물도 교환하면서 어느 것이나 다 유통이 되고 있는데, 오직 한 가지 전화(錢貨)만이 모든 문물제도가 똑같은 나라에 아직 유통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비단 소방의 실망일 뿐 아니라 어찌 광명 천하의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또 은화(銀貨)와 전폐는 피차의 경중이 현격할 뿐 아니라 은화는 교역을 하는데 막힘이 없는데 전폐는 유통이 되고 있지 않아, 저희 사신이 연경에 갈 때에 비록 통용을 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단지 사행 도중 관(館)에 머물고 있을 때에나 쓰일 뿐 관(關)을 벗어나 귀국한 뒤에는 쓸 곳이 없습니다. 똑같이 우로(雨露)의 혜택을 입는 처지이면서도 꼭 황복(皇服)의 안팎 한계가 있는 듯하여 온 나라의 신하와 뭇 백성들이 이를 답답해 하며 모두가 황상에게 아뢰어 나라 안에서 유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직이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황상께서는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지극히 융성한 정치를 따르고, 억만년 광명하고 하늘의 덕에 부합하는 운세에 부응하므로써 육부(六府)가 잘 다스려지고 구서(九敍)를 노래하며118) , 재물을 풍부하게 하고 생활을 이롭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사물의 실정을 가늠하고 백성의 뜻에 순응하지 않음이 없어 바다 밖의 창생이 이미 그 수효가 많아지고 부유하여졌습니다. 소방 뭇 백성들의 마음을 통촉하시고 똑같이 취급해 주시는 큰 은혜가 내려지기를 기대하면서도 외람되고 분수에 넘칠까 두려워 감히 주본(奏本)을 따로 준비하지 못하고 연공(年貢)의 사행을 통해 사정을 아뢰는 것이오니 여러 대인들께서 굽어 살피시고 바로 이 뜻을 아뢰어 줄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매번 사행이 돌아오는 길에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화폐를 교환하여 소방으로 하여금 영원히 그렇게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소방의 신료며 뭇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삶에 편안을 느끼고 생업을 즐길 것입니다. 뉘라서 감히 기뻐 고무하고 감격에 젖어 황제의 끝없는 덕을 기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직각(直閣) 남공철(南公轍)이 지어 올린 것이다.】 역원(譯院)이 곧 돈 무역에 관한 절목을 올렸다. 【절목은, 1. 이번에 사들여올 중국 돈[唐錢]의 수량을 정하지 않고 많고 적음을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저쪽에서 사들일 때 값이 폭등하는 폐단이 발생하기 쉽고, 돌아온 뒤에는 지나치게 많아 천하여지는 걱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을 방책으로는 1년에 사서 내올 수량을 정해 저쪽에서는 귀하고 우리쪽에서는 천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해야 수시로 적당하게 사용되어지는 물건이 될 것이다. 매년 절사(節使)와 역행(曆行) 두 차례에 회문(回門)에서 중국 돈을 무역하여 오되 합하여 10만 냥으로 정한다. 1. 각 원역(員役) 개개인이 가지고 가는 원래 정하여진 포대의 수효에 따라 무역해오되 만일 절행(節行) 때 원역의 수가 일정하지 않은 때는 역행에서의 9천 냥은 제외하고 원래 정하여진 포 중에서 혹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여 9만 1천 냥으로 맞춘다. 1. 별사(別使)나 별자행(別咨行)은 본래 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무역해올 돈의 수량은 가지고 가는 8포의 실제 수량에 따라 무역해오게 한다. 절행·별행(別行)과 황력행(皇曆行)·별자행을 막론하고 원래 정하여진 8포 정수(定數) 이외의 공사(公事)를 위한 별포(別包)는 거론하지 않는다. 1. 사사로운 상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은 법전에 더없이 엄하게 규정되어 있으나 중국 돈 무역이 정식으로 정하여진 뒤에는 그 금지법이 더더욱 자별하여야 될 것이니 정한 숫자 이외에는 비록 한 푼이라도 더 사들일 수 없도록 하여 책문(柵門)을 나올 때는 하나하나 숫자를 대조해가며 수색 점검하고 법을 범한 자는 경중에 따라 논죄(論罪)하되 1백 냥 이상은 극형에 처하고 1백 냥 이하는 외딴섬에 정배(定配)하기로 한다. 1. 저들 나라에는 돈을 취급하는 점포가 없는 곳이 없는데 저쪽에는 값이 비싸고 이쪽에는 값이 쌀 수도 있으므로 무역을 할 때 만일 조종하여 값을 더 요구하는 일이 있으면 절대로 값을 더주고 사지는 말 것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범했다가 적발이 되면 외딴섬에 정배하는 법을 적용하기로 한다. 1. 만부(灣府)는 바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아문이다. 중국 돈을 무역하도록 하였으면 다른 물화(物貨)의 예에 따라 적당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매 1백 냥에 1냥씩 세금을 거두도록 허락한다. 1. 두 나라가 화폐를 유통하는 일은 사체가 지중하여 의당 국가가 거둘 세금을 조절해야 할 것이나 금년은 법을 정한 초기라서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를 미리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번 법식의 결정은 순전히 국가가 사원을 깊이 생각하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니 이번 절행에는 논하지 말고 앞으로 형편을 보아 다시 의논해 결정한다. 1. 전폐가 서울과 지방에서 통용된 후 각 아문에서 만일 부득이 써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아문이 연품(筵稟)하거나 서장을 올려 아뢴 다음 사들여오되 수량의 다소에 관계없이 본래 정한 10만 냥 이외에 별도로 무역하게 하고, 이는 특별 무역의 예로 하여 만부에서는 이를 거론하지 않는다. 1. 중국 돈이 우리 나라에 나온 뒤 모든 사행과 자행(咨行) 및 높고 낮은 벼슬아치가 오고 가면서 혹시라도 중국 돈을 가져가는 일이 있을 때는 우리 나라 돈을 몰래 빼돌리는 죄와 똑같은 죄를 적용하여 극형에 처하기로 한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3면
【분류】무역(貿易) / 외교(外交) / 금융(金融)
[註 117]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118] 육부(六府)가 잘 다스려지고 구서(九敍)를 노래하며 : 육부는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에 곡식[穀]을 합해 이른 말이고, 구서는 육부에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합한 아홉 가지가 차례가 잡힌 것을 이른 말이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역원(譯院)이 곧 돈 무역에 관한 절목을 올렸다. 【절목은, 1. 이번에 사들여올 중국 돈[唐錢]의 수량을 정하지 않고 많고 적음을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저쪽에서 사들일 때 값이 폭등하는 폐단이 발생하기 쉽고, 돌아온 뒤에는 지나치게 많아 천하여지는 걱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을 방책으로는 1년에 사서 내올 수량을 정해 저쪽에서는 귀하고 우리쪽에서는 천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해야 수시로 적당하게 사용되어지는 물건이 될 것이다. 매년 절사(節使)와 역행(曆行) 두 차례에 회문(回門)에서 중국 돈을 무역하여 오되 합하여 10만 냥으로 정한다. 1. 각 원역(員役) 개개인이 가지고 가는 원래 정하여진 포대의 수효에 따라 무역해오되 만일 절행(節行) 때 원역의 수가 일정하지 않은 때는 역행에서의 9천 냥은 제외하고 원래 정하여진 포 중에서 혹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여 9만 1천 냥으로 맞춘다. 1. 별사(別使)나 별자행(別咨行)은 본래 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무역해올 돈의 수량은 가지고 가는 8포의 실제 수량에 따라 무역해오게 한다. 절행·별행(別行)과 황력행(皇曆行)·별자행을 막론하고 원래 정하여진 8포 정수(定數) 이외의 공사(公事)를 위한 별포(別包)는 거론하지 않는다. 1. 사사로운 상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은 법전에 더없이 엄하게 규정되어 있으나 중국 돈 무역이 정식으로 정하여진 뒤에는 그 금지법이 더더욱 자별하여야 될 것이니 정한 숫자 이외에는 비록 한 푼이라도 더 사들일 수 없도록 하여 책문(柵門)을 나올 때는 하나하나 숫자를 대조해가며 수색 점검하고 법을 범한 자는 경중에 따라 논죄(論罪)하되 1백 냥 이상은 극형에 처하고 1백 냥 이하는 외딴섬에 정배(定配)하기로 한다. 1. 저들 나라에는 돈을 취급하는 점포가 없는 곳이 없는데 저쪽에는 값이 비싸고 이쪽에는 값이 쌀 수도 있으므로 무역을 할 때 만일 조종하여 값을 더 요구하는 일이 있으면 절대로 값을 더주고 사지는 말 것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범했다가 적발이 되면 외딴섬에 정배하는 법을 적용하기로 한다. 1. 만부(灣府)는 바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아문이다. 중국 돈을 무역하도록 하였으면 다른 물화(物貨)의 예에 따라 적당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매 1백 냥에 1냥씩 세금을 거두도록 허락한다. 1. 두 나라가 화폐를 유통하는 일은 사체가 지중하여 의당 국가가 거둘 세금을 조절해야 할 것이나 금년은 법을 정한 초기라서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를 미리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번 법식의 결정은 순전히 국가가 사원을 깊이 생각하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니 이번 절행에는 논하지 말고 앞으로 형편을 보아 다시 의논해 결정한다. 1. 전폐가 서울과 지방에서 통용된 후 각 아문에서 만일 부득이 써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아문이 연품(筵稟)하거나 서장을 올려 아뢴 다음 사들여오되 수량의 다소에 관계없이 본래 정한 10만 냥 이외에 별도로 무역하게 하고, 이는 특별 무역의 예로 하여 만부에서는 이를 거론하지 않는다. 1. 중국 돈이 우리 나라에 나온 뒤 모든 사행과 자행(咨行) 및 높고 낮은 벼슬아치가 오고 가면서 혹시라도 중국 돈을 가져가는 일이 있을 때는 우리 나라 돈을 몰래 빼돌리는 죄와 똑같은 죄를 적용하여 극형에 처하기로 한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3면
【분류】무역(貿易) / 외교(外交) / 금융(金融)
[註 117]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118] 육부(六府)가 잘 다스려지고 구서(九敍)를 노래하며 : 육부는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에 곡식[穀]을 합해 이른 말이고, 구서는 육부에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합한 아홉 가지가 차례가 잡힌 것을 이른 말이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좌의정 채제공이 두 번째 정사(呈辭)하자,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7일 임신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세 번째 정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을 향리(鄕里)로 방출하였다. 그것은 문원이 상소하여 채제공을 논죄하며, 너무도 꺼리는 바가 없다느니 손발이 이미 드러났다느니 그의 속셈을 알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직을 삭탈하도록 명했다가 곧 향리로 방출하는 법을 적용하고 그의 상소문은 불태워버리도록 한 것이다.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를 파직하였다. 이때 도총부 낭청(都摠府郞廳)에게 곤장을 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병모가, 서유린(徐有隣)과 자기가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르다 하여 인피하였다. 상이 병모가 겸직하고 있는 비변사 당상 직함을 해임하고서 다시 거행하도록 명하였으나 병모가 또 상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자, 규율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파직시킨 것이다.
춘당대에 나아가 무예청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10월 8일 계유
대사헌 정존중(鄭存中)이 상소하기를,
"아, 전하가 대신을 공경한다[敬大臣]는 세 글자를 가지고 뭇 신하들에게 재갈을 물려 감히 정승에게 따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군주의 잘못을 신하가 바로잡지 않음도 오히려 죄가 되는 것인데 하물며 대신의 거조가 사람들의 마음과 합치되지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닌데도 경재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애당초 감히 그를 따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어제 경연에서 대신이 공의(公議)에 극력 맞서면서 자신의 친척을 두호하려 하였다는 것을 신이 어떤 사람의 상소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대략이나마 알았습니다. 요사이 있었던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지 않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지영(李祉永)을 연거푸 세 번씩이나 검상(檢詳)에 추천한 것은 그가 자기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흔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지영이 옥서(玉署)119) 의 장관을 협박하여 권점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막중한 관록(館錄)에 끼인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인의(引義)하도록 하여 표직(豹直)이 오랫동안 비게 하고 결국 중비(中批)로 구차하게 그 자리를 메꾸게 하였으니, 그 모든 것이 다 이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취할 것이 있어서 급급히 입김을 불어넣기를 마치 조보(趙普)가 세 번이나 주문(奏文)을 다시 맞춰 올리듯이 한단 말입니까120) . 《시경》에 ‘사람이 말이 많으면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발언과 처사에 공경과 조심이라곤 전연 없는데 그렇고서도 기탄이 없다는 지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사람을 희롱하면 덕을 손상시킨다.’ 하였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도 그렇다는 것인데 하물며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야 하나라도 그와 근사한 점이 있다면 그 죄는 불경(不敬)이 되는 것이다. 정존중의 소를 한번 보니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놀랍고 다시 보고서는 할 말을 잊었다. 그의 상소가 과연 희롱에 가깝지 않다는 것인가. 요사이 대신을 공격하는 자들은 대부분 실정에서 벗어난 말들을 하고 있어 이미 엄히 문책하고 통렬하게 금지하고 있으나 존중의 상소에 있어서는 비록 실정에서 벗어난 말들과는 상반되지만 그것도 공격은 공격인데 공격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고작 이지영을 연거푸 세 번이나 검상에 추천하였다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다가 금방 또 말을 바꾸어 조보가 주문을 세 번 다시 맞춰 올린 얘기를 인용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그를 칭찬하자는 의도인가 공격하자는 의도란 말인가? 칭찬하자고 한 말이라면 왜 기탄없다고 말했으며 공격하자고 한 말이면 무슨 일을 공격하자는 것이란 말인가. 그가 두터운 은총을 입고 지위가 거기까지 이르고서도 백발이 희다 못해 누렇게 된 나이에 감히 자신의 향배(向背)로 양쪽의 승패를 가늠하고 좌우로 눈을 껌벅이는 보잘것없는 정태(情態)를 취한다는 말인가. 그가 참으로 검상에 의망했던 일을 말하려고 하였다면 어찌하여 지금의 상소에 처음으로 거론하는 것인가. 이는 대체로 요사이 대신 이하가 상대를 존경하고 무서워할 줄을 몰라 그 결과 존중의 상소가 있게까지 된 것이니, 이를 내버려 둔다면 세상을 북돋고 인재를 양성하는 칼자루를 임금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행 대사헌 정존중의 본직을 체차하고 곧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들여 추국하여 속셈을 캐내도록 하라. 잡아들여 추국하기를 나문(拿問)하는 예와 같이 하려면 서간(西間)에다 가두어야 하지만 존중이 지은 죄는 일에 관계됨이 가볍지 아니하니 남간(南間)에다 엄히 가두고 지금 당장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 출송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이, 제공의 처지가 점점 더 위축되어 감히 계속해서 정고(呈告)하지 못하고 도성문 밖으로 물러나가 공손히 엄한 벌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명소패를 반납했다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나라에 소중한 존재는 오직 군주와 정승인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군주만 바로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 하였다. 나는 ‘정승이 바로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그 대신에게는 참으로 옛날에 드문 후한 대접을 해왔는데, 오늘의 은총이 그것이다. 은총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차마 외면을 못하고 아무 일도 숨김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현재의 일만은 하유를 하고 싶어도 못하여 세상에 해를 끼치고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려 처우가 점점 처음만 못하다고 하는 고인의 말대로 되게 만드는 것인가.
요사이 시끄러운 것은 바로 윤영희(尹永僖) 일 때문인데 처음 영희를 공격한 자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끼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하고 죄를 내리고 하여 되도록 시끄러움을 없애려고 한 것이지 조금이라도 영희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오늘 나를 보좌하는 자들이라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고 털끝 하나도 끼어들 틈새가 없이 일심 동체가 되어 아주 공평하고 지극히 공적이여서 사적인 감정이 없는 나의 이 마음과 성의를 도와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난달 차대(次對) 때 영희를 위해 한 짓은 어쩌면 《시경》에 이른바, 징잡이가 북 친다는 말과 그리도 비슷하단 말인가. 영희가 당한 것이 억울하고 않고는 공론이 있으므로 좌상이 시끄럽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변경 장수가 주장(主將)에게 무례하게 군 것은 또 딴 사건으로 그 문제라면 그 일의 잘잘못만 따질 것이지 세력이 있고 없고, 경악(經幄)이고 경악이 아니고 하는 말들은 그 문제와는 상관없는 말들 아닌가. 더군다나 영희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집안의 지친(至親)이며 지친 중에서도 자식 같고 조카 같은 자이니, 그렇다면 좌상이 한 말들은 사사로운 의도로 한 말인 것이다.
내가 영희에 대하여는 믿는 바가 있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었다. 이번 일은 체례(體例)상의 사소한 일로 좌상이 입을 열 일이 아닌데 열면서 중론도 무시하였다. 그래도 입 다물고만 있을 것인가. 처음에는 대신을 위하는 뜻에서 부득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비호하고 숨겨주며 결과나 보자고 하였던 것인데 일전 빈대 때 보니 여러 경재(卿宰)들의 하는 짓들이 매우 한심스러웠다. 옛날 대신들이 많은 공박을 즐겁게 들어주고 그것을 자신의 허물로 받아들였던 그 태도에 비춰볼 때 좌상이 그 자리에서 취한 행동이 과연 눈에 거슬렸겠는가 거슬리지 않았겠는가. 내가 풍자하는 뜻으로 말하기를 ‘뭇사람들이 배척해도 끄덕 않는 것을 보니 경이야말로 도량이 넓군.’ 했던 것도 사실 나는 그로 하여금 의롭게 처신할 길을 알라고 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는 도리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흘기면서 마치 설전이라도 하려는 자세였었다. 여러 말들이 놀랍고 놀랍지 않고는 고사하고라도 한마디로 말해 오늘 임금과 신하 사이의 기강과 명분은 좌상이 허물어 버린 것이다. 후한 대접과 은총은 그것일 뿐이고 임금과 신하사이의 기강과 명분은 그것대로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한 재상이 조정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해서 죄가 있어도 묻지 말고 법을 범해도 그냥 둬야 할 것인가.
공조 판서의 상소나 이조 판서의 말은 또 대신의 본심과는 너무 거리가 먼 주장들이어서 그것은 그것대로 이미 공정한 원칙에 따라 처분을 내렸지만 대신의 도리로서야 어떻게 감히 그들을 따라 운운하면서 겉으로는 태연한 체하고 하루 이틀 끌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억지로 도성 밖으로 나갔단 말인가. 그리고 녹사(錄事)라는 자가 와서 한 말도 황공하거나 몸 둘 곳을 몰라하는 빛은 조금도 없었다. 이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오늘 조정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좌의정 채제공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시켜 신하로서 임금의 후한 대접과 은총을 저버린 자의 경계가 되게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서매수(徐邁修)를 체임하고 신기(申耆)로 대신하였다.
이조 참의 신기를 울산부(蔚山府)로 유배하였다. 그때 이조 판서 후보자로 종전에 추전된 자 중에서 서울에 거주하며 문제가 없는 사람을 써서 올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기가 윤시동(尹蓍東)과 이치중(李致中)을 써서 올리자, 하교하기를,
"시동은 문제되는 점이 한 가지가 아니며 또 지방에 있다. 더군다나 대신의 추천 명단에도 빠져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비록 이조 판서라도 감히 추천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가 일개 참의로서 이렇게 빼고 넣기를 마치 조정이 뒤바뀔 때와 같이 행동하고 있으니 그것은 당에 물든 버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동은, 처음 죄를 범하고 뒤에 상소했던 사건이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아 대신으로서도 그 문제라면 당연히 신중을 기했을 것인데 그가 어떤 자이기에 감히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신기는 귀양을 보내고 이조를 엄히 경계하여 시동을 다시는 이판의 전망에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의로, 이갑(李𡊠)을 이조 판서로, 조윤대(曺允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존중(鄭存中)을 구성부(龜城府)에 유배하였다.
10월 9일 갑술
홍억(洪檍)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서매수를 방답진 첨사(防踏鎭僉使)에 보임하였다. 수령 후보자 추천을 잘 살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0일 을해
채제공을 풍천부(豊川府)에 부처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조윤대, 대사간 유강, 집의 유광천(柳匡天), 사간 정동관(鄭東觀), 장령 정이옥(鄭履玉), 지평 송준재(宋俊載), 헌납 심흥영(沈興永), 교리 김희조(金熙朝), 정언 엄기(嚴耆)·정의조(鄭毅祚), 수찬 송익효(宋翼孝).】 아뢰기를,
"아, 슬프고 통탄스럽습니다. 채제공의 죄를 어떻게 다 다스리겠습니까. 양조(兩朝)의 은총이 어떠하였으며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습니까.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건져 내어 삼공의 대열에 올려 두었으니 그는 참으로 나라만을 염두에 두고 사사로움은 잊어버려 자기 자신은 생각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옛날처럼 재간이나 부리면서 국가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제멋대로 위복(威福)을 휘두르고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한 짓은 그것이 무슨 변괴입니까. 신기현은 역적의 우두머리이고 윤영희는 바로 그 역적의 무리로서 그들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자 하나인 자들입니다. 오늘 조정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너나없이 두려워 피하는 바 없이 피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될 정도로 난국 타개에 진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재상 지위에 있는 자로서는 더더욱 준엄한 성토를 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영희는 바로 그의 종조카입니다. 대의 앞에서는 친족관계를 단절시켜야 하는 법이어서 그 자신이 단호한 조처를 취했어야 했는데도 토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꼈고 아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감싸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세력이 없다는 등의 말로 함부로 아뢰더니 나중에는 차자를 올리는 데도 참여했다고 하면서 기어이 죄가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애써 구원하려는 뜻을 드러내보이고 감히 상대를 떠보려고도 하였습니다. 재상들이 번갈아 성토하였는데도 태연하게 꿈쩍도 하지 않았고 전하가 은근히 일깨워 주었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상이 계시는 자리를 지척에 두고서도 전연 기탄없이 머리를 돌려 상대를 거만하게 흘겨보며 공의와 맞섰으니 그의 외람되고 교활한 성품이며 방자한 버릇은 한(漢)나라 법으로 다스릴 때 대불경(大不敬)의 율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의도와 주된 생각을 따져보면 오로지 역적 영희를 편들어주기 위하여 그런 것이지만 그렇다고 군주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리며 역적을 두호하고 원수 잊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고서도 태연스레 집에 있으면서 으레 하는 대로 정고(呈告)하고 사흘을 끌다가 마지 못해 도성 밖으로 나간 것은 명분과 기강을 더욱 여지없이 무너뜨린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난적들이 멋대로 횡행하는 이 시기에 그렇게 역적편만 드는 무엄한 죄를 삭출(削黜)이라는 가벼운 벌로 마무리짓고 말 수는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한 죄인 채제공에게 우선 중도 부처의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채제공의 일은 내가 제공을 저버린 것인가, 제공이 나를 저버린 것인가? 나라가 있으면 나라의 기강이 있고 조정이 있으면 조정의 법도가 있는 것이다. 어찌 평소의 후한 대접과 은총으로 인해 혹시라도 사랑이 위엄을 능가하면 안 된다는 경계를 소홀히 했겠는가. 천하의 도리는 하나뿐인 것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법도인 것이다. 본래의 마음이야 이렇든 저렇든 간에 젖혀놓고 그가 한 말은 망발이요, 그가 한 짓은 놀라우니 사직(司直)의 주장을 막을 수가 없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승 후보자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정부에 현임 정승이 없었으므로 정원이, 영부사(領府事) 홍낙성(洪樂性)과 판부사(判府事) 박종악(朴宗岳)을 명소패로 부를 것을 계청하자, 낙성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정승을 뽑는 일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여 현임 대신이 아니고서는 감히 거행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정부의 옛 규례입니다. 신들이 어떻게 감히 전례를 무너뜨리는 일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또 계묘년에 원임들만으로는 정승 뽑는 일을 거행할 수 없다고 여러 원임들이 아뢴 바 있었고, 성상께서도 그 일을 굽어 살피시어 바로 윤허를 내리고 《매복록(枚卜錄)》에 싣도록 명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전망(前望)의 단자에다 낙점하였었습니다. 신들이 더구나 어떻게 감히 의리와 명분만을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덮어둔 채 받들어 응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부(相府)의 규정이 그러하니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들은 안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참찬 김이소(金履素)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특별 임명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11일 병자
윤대하였다. 봉상 판관(奉常判官) 이동식(李東埴)이 아뢰기를,
"본 봉상시 원역(員役)은 전복(典僕)이 아니면 보충 임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왕조에서는, 태학의 전례에 따라 잘못 편입된 자들은 모두 태거(汰去)시키라는 전교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거듭 이를 밝혀 준행토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특별히 엄하게 단속하고 이 뒤로 그 규정을 어길 경우 그들로 하여금 능행(陵幸) 때 상언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이소에게 하유하였다.
"경을 정승으로 임명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공적으로는 적임자를 얻어 다행이고 사적으로는 구가(舊家)라서 감회가 깊다. 내가 경에게서 취한 점은 무게가 있는 것이고, 바라는 바는 기강을 진작시켜 달라는 것이며, 권면하고 싶은 것은 모두 화합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니 경이 내가 취한 바를 가지고 이에 호응해 준다면 힘들이지 않고 공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경도 내가 경에게 권면한 점을 가지고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돕기에 더 노력하라. 그리하여 화합하고 더욱 화합하며 서로 돕는 일에 힘을 다한다면 오늘의 국가는 그것으로 절반 넘게 다스려진 셈이 될 것이다. 밤낮으로 옆자리를 비워두고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 목이 마른 정도가 아니니 경도 경을 정승으로 임명한 근본 취지를 이해하고서 바로 나와 숙배하고 이 어려운 시기를 타개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조윤대, 대사간 유강, 집의 유광천, 사간 정동관, 장령 정이옥, 지평 송준재, 헌납 심흥영, 정언 엄기·정의조, 수찬 송익효.】 합계하기를,
"의리가 차츰 어두워져가며 제방이 엄중하지 못해 흉악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기현과 윤영희 두 역적은 더욱이나 신자들이 기어이 살점을 씹어 삼키고 살가죽으로 이불을 만들고자 한 자들입니다. 아, 저 채제공은 두 조정의 망극한 은혜를 받았고 5년 동안 두터운 신임을 받은 자로서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내 정승 자리에다 올려놓았으니 진실로 나라만을 생각하고 개인의 사사로움은 잊고서 더욱 엄하게 징토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외람되고 교활한 성격이 그대로 버릇이 되어 위세와 복록을 독차지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여 공도를 무시하고 당여를 심는 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보고서 군주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후원해 그들의 연수(淵藪)가 된 것이 이번 영희를 돕고 나섬으로써 극에 이르렀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기현이 그 얼마나 극악한 역적입니까. 그런데도 영희가 몸을 던져 역적과 패거리가 된 것은 참으로 전고에 없는 변괴였습니다. 이같은 흉적이 종조카라는 친척 관계에 있다면 피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될 정도로 힘껏 성토하기를 남들보다 갑절은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껴주고 두호해 주면서, 처음에는 세력이 없다는 등 경악이 어떻다는 등의 말을 전하 앞에서 함부로 늘어놓더니 끝에 가서는 차자에 참여하였다는 분명하지 않은 일을 인증하여 흉악한 자취를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더없이 사특한 정상과 음험하기 짝이 없는 마음씨는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바이며 수많은 눈들이 주시하고 있어 숨길 수 없이 되었는데도 여러 경재들이 그 죄를 성토해도 끄덕하지 않고 전하가 은근히 일깨워 주었는데도 한사코 못들은 척하며 하늘 같은 위엄을 지척에다 두고 전연 꺼려함이 없이 머리를 돌려 오만하게 흘겨보며 공의와 승부를 겨루었으니 그의 안중에는 군부도 없는 것입니다.
흉악한 역적을 힘껏 변호하다가 으레 하는 대로 정고를 하고는 버젓이 집에 있으면서 여러 날을 끌다가 마지못해 도성 밖을 나간 거만스런 그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하지만 전날의 그 죄에 비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잘것없는 죄인 것입니다. 그를 가까운 지역에 부처한 것만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줄 수 없으니 중도 부처한 죄인 채제공에게 빨리 극변 안치의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채제공의 일에 대해 주장들이 지나치다. 더군다나 대신이라면 법 적용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유배도 청하지 않고서 지레 극변 위리 안치를 청한다는 것은 뒷날에 폐단을 남기는 처사이다. 경들도 추고하리라."
하고, 원계(原啓)를 되돌려 내려보냈다.
사헌부가 【 대사헌 조윤대, 장령 정이옥, 지평 송준재.】 아뢰기를,
"박규순(朴奎淳)이 역적 윤영희를 떠받들어 패악한 입을 멋대로 놀린 것은 더더욱 얼마나 변괴스럽습니까. 그가 부끄러움 없는 부류로서 저 자신 권문의 하수인이 되어 턱으로 지휘하고 기세를 부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옳은 것이건 그른 것이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하여 세상의 지목을 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 저 역적 신기현이라면 뉘라서 손으로 그의 몸뚱아리를 찢고 입으로 그의 살점을 뜯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영희는 몸을 던져 힘껏 보호했고 함께 악당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였으니 그의 흉악한 속셈을 규명해 본다면 똑같이 극악한 역적들입니다. 그가 감히 후원(喉院)의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처음에는 얼굴이 어떻다느니 재주가 어떻다느니 하고 극구 칭찬하더니, 나중에는 대간의 논계가 두려울 게 뭐냐고 하면서 공론을 무시하고 흉악한 자를 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평소 서로 결탁하고 지냈던 정상이며 남모르는 곳에서 어울렸던 자취가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전 승지 박규순에게 빨리 외딴섬에 유배시키는 벌을 내리소서.
진언(進言)은 명백하게 올려야 하고 징토라면 더더욱 시비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은 최초의 상소에서 ‘따라 참여할 것인가의 여부는 오직 신의 견해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여 그때 이미 음밀하고 방종한 자태가 보였습니다. 그가 다시 올린 상소문에서는 징토한다고 하면서도 말이 이미 흐릿하고 뜻도 모호하여 이른바 ‘악당들 무리가 그 사이에서 싹트고 있다.’라고 한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섬뜩하기만 합니다. 그는 채제공의 심복으로서 원래 온 세상의 지목을 받아 왔었고 전후 노력에 관계없이 벼슬이 뛰어올랐던 것도 오로지 그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말하기 어려운 입장이라면 움츠리고 엎드려 있으면 될 것인데 지금 와서 핵심을 감춘 어리벙벙한 말을 꺼내어 이리저리 혼미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을 섬기면서 숨김이 없어야 하는 도리는 생각지 않고 기회를 보아 상대를 현혹시키려고만 하고 있으니 그의 정상을 살펴보면 참으로 더없이 교활하고 흉악합니다. 이처럼 귀신 같고 물여우 같은 부류를 의관(衣冠)의 대열에 끼여 있게 할 수 없으니 승지 이익운에게 빨리 변경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내리소서.
정존중(鄭存中)의 죄는 그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머리가 흰 늙은 대간으로서 명색이 무슨 문제를 논한다고 하면서 내용을 얼렁뚱땅 넘기고 진의를 숨기려고 한 그 꼴은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채제공의 이치에 어긋난 행동과 흉악한 논의는 낭자한 정도가 아닌데 그의 죄를 논하자면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첫번째 상소에는 근본 문제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었고, 두 번째 상소에서는 완전히 우롱하는 태도로 그가 역적을 두호하고 명분을 무시한 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다만 검상(檢詳) 추천 과정의 별것 아닌 일만 거론하여 겉으로는 공격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허물을 숨기고 미화했습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주문(奏文)을 세 번 올렸던 조보의 얘기를 인용하여 드러내놓고 그를 찬양하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친밀하게 지냈던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현재도 아부하고 있는 몰골이 분명하여 가릴 수 없었습니다. 이같이 무엄한 악당의 무리를 평범하게 법으로 처리하고 말아서는 안 될 것이니 유배가 결정된 죄인 정존중에게 외딴 섬에 안치하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박규순의 경우, 공적인 자리가 비록 사석과는 다른 것이나 그가 말한 것은 분명 사사로운 얘기였다. 지난번 승선들이 그 말을 집어내 죄상을 규탄한 것이 편당(偏黨)에 가깝기에 비록 엄한 처분을 내렸지만, 규순으로 말하면 윤영희의 본심을 그가 어떻게 자세히 알고서 그렇게 기염을 토하고 입증을 하면서까지 사사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여 자칫 엉뚱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일을 거리낌없이 했다는 말인가. 그 역시 편당의 여파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한 말 때문에 요사이 조정에서 끝없는 분규가 야기되고 있으니 그 같은 무리를 징계하여 세상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뢴 대로 처리하라. 이익운의 경우, 그의 처음 상소에 무슨 꼬투리 잡을 만한 단서가 있었겠으며 나중의 상소도 말의 귀추가 분명하였다. 교활하고 악독하다는 지목은 얼토당토 않은 말이니 빨리 그만두고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이며, 정존중의 경우, 절대 옳은 주장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대사간 유강(柳焵), 사간 정동관(鄭東觀), 헌납 심흥영(沈興永), 정언 엄기(嚴耆)·정의조(鄭毅祚).】 아뢰기를,
"의리가 차츰 어두워지고 징계와 토죄가 행해지지 않고 있지만 박규순이 공공연하게 패악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역적 윤영희를 떠받들고 자랑한 일에 이르러서 세도의 변괴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본시 이익을 탐하는 비루한 자로 권력있는 집안에서 스스럼없이 부리는 문객이 된 것을 기꺼워하며 그들의 비위나 맞추는 하수인이 되었기 때문에 온 세상의 조소와 손가락질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아, 역적 신기현의 극악 무도한 죄악에 대해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의 살점을 먹고 사지를 찢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유독 저 영희만은 마음을 서로 통하고 있다가 그 정상이 훤히 드러났으므로 오늘 조정 신료들이 일제히 그를 성토하는 것은 바로 역적 기현을 성토하는 일입니다. 그도 사람일텐데 혼자 무슨 심보를 가졌기에 국론을 등지고 공론과 싸우면서 세상이 다 보는 자리에서 앞장서서 그를 두둔하는 말을 하고 이어 공회 석상에서도 그를 찬양하는 말을 계속하는 것입니까. 그는 심지어 ‘비록 대간의 논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어찌 두려워하겠는가’라고까지 하면서 현저히 큰소리를 쳤으니 어쩌면 인심이 나쁜 데로 빠져든 것이 이다지도 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까. 지금 논의가 한창 전개되고 있는 이때 그 같은 역적을 두호하는 무리라면 당여(黨與)로서의 책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전 승지 박규순에게 빨리 외딴섬으로 유배하는 벌을 내리소서.
지난번 승정원이 연명 상소를 올렸을 때 이의봉(李義鳳)이 허튼 수작을 하면서 회피할 획책을 한 행동은 놀랍습니다. 그가 정당한 공론을 외면했던 것이 훤히 드러났는데도 급기야 자기 변명의 상소를 하면서 또다시 감히 전하의 총명을 기만하려고 하였으니 그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그는 이르기를 ‘요란하게 굴 때가 아니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연명 상소는 요란하게 구는 것이고 자신이 앞질러 상소한 것은 요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준엄한 성토의 상소를 일러 일과 삼아 올리는 글이라고 하고 다 함께 분통스러워하는 논의는 제멋대로 기피했습니다. 그의 속셈을 헤아려본다면 몰래 두호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무엄하고 패륜한 무리를 도성 안에 그냥 둘 수 없으니, 전 승지 이의봉에게는 빨리 변방으로 유배시키는 벌을 내리소서. 신하로서 왕의 말씀을 대신 쓰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며 의리에도 관계됩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 중에는 혹 마고(麻誥)를 찢기도 하였고 혹은 고칙(誥勅) 초안잡는 일을 굳이 사양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군주의 명령을 소홀히 했다 하여 죄를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원칙은 물론 누구에게나 똑같이 책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난 번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지어 올리라는 명령이 이미 두 차례 빈대를 거쳐 그의 죄악이 이미 드러난 뒤에 내려졌으니 지제교(知製敎)로서는 당연히 충분히 사실에 맞게 꾸몄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이상으로 상대를 찬양하고 타당치 않은 말을 인용하여 마치 아무런 탈이 없는 대신이 평소에 정도를 수호하고 사특함을 물리치기에 힘쓰다가 조용한 틈을 타 사의를 고한 사람처럼 꾸몄으니 그 내용 자체가 이미 사실과는 틀리고 태도 역시 앞뒤를 재는 듯한 인상이어서 조지(朝紙)가 일단 반포되자 사람들의 놀라움과 의혹은 점점 더해갔었습니다. 전후 지어 올린 여러 신하들에게 똑같이 간삭(刊削)의 벌을 내리소서.
지난 번 빈대하는 자리에서 흉패한 논의가 소위 재상의 입에서 마구 터져나왔는데 그 때 만일 엄중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더라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충의에 의한 분노의 논의가 앞자리에서 번갈아 나왔고 성토하는 글이 여러 경재들에게서 연이어 나왔던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온 나라의 공론인 것인데도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파면을 당하기도 했고 혹은 방출(放黜)을 당하기도 하여 조정의 분위기가 스산하기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과중한 처분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까. 중신들에게 내린 처분을 다시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박규순의 경우는 아뢴 대로 하라. 이의봉의 경우는 처음에는 무슨 마음이었고 나중에는 무슨 마음이었단 말인가. 그 자취가 그처럼 수상하다면 그 마음이 진실한지의 여부도 분간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비록 그를 끝까지 보호하기 위하여 시종 돌보아주고 싶어도 그가 스스로 죄를 범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그로 하여금 새 길을 찾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결론을 짓는 것이 좋겠으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불윤 비답을 지어 올린 지제교의 경우, 말을 만들면서 책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아 대신 짓게 한 원의에는 물론 어긋났으나 나라의 체면으로 볼 때 어떻게 감히 지어 올리지 않을 수야 있었겠는가. 그 중 윤치성(尹致性)은 별도로 지명하여 독촉한 일도 없었는데 자진해서 맡아 나섰고, 김희조(金熙朝)가 한 짓도 늘 옳지 않게 여겨왔었는데 이번에 대신 쓴 글과 소차(疏箚)도 구구절절 놀라운 사실뿐이다. 아뢴 대로 하라.
중신에게 내린 처분을 환수하는 문제에 있어서, 채제공에게 처분을 내렸던 것은 그가 사사로움에 치우친 것이 미워서였다. 여러 중신들이 경연에서 아뢴 장소(章疏)들도 비록 경중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역시 편당에 가까웠었다. 어찌 제공에게 벌을 내린 것이 혹시라도 여러 중신들을 감화시키는 지극한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경연에서 여러 사람들이 대신의 무엄함을 눈으로 보고서는 직위를 벗어나서 직언으로 논하는 성의를 보였는데 그 후 대신이 한 행동을 보면 여러 말들이 너무 지나쳤다고만 할 수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 그 중에 전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과 전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의 상소는 내용이 아무래도 실정에 부합되지 않는 것 같고 전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는 처신이 옳지 않았으니 우선 그대로 놓아두라."
하였다. 김효건(金孝建)이 박규순을 규탄하면서 자기 집에서 상소문을 지어가지고 홍의영(洪義榮)에게 연명을 요구하자 의영은 이를 승락하였고, 대루원(待漏院)에 이르러 좌승지 이의봉에게 요구하니 의봉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핑계대기를, 자기 직위가 두 사람 위인데 만일 상소를 올리기로 들면 자기 이름이 첫 자리에 있어야 옳고 또 상소문도 당연히 자기가 썼어야 했는데 지금 미리 써놓은 상소문에 연명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경시당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연명에 응하지 않고 소를 올리고는 지레 나가버렸고, 이익운도 지난 밤 승정원에 입직했었는데 역시 소를 올리고 지레 나가버렸다. 그의 상소에는 ‘참여하느냐 참여하지 않느냐는 오직 신의 소견 여하에 달려 있지만 함께 승정원에 있으면서도 애당초 오고 가고 참견하고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한 말이 있었다. 채제공이 빈대하는 자리에서 주대(奏對)한 뒤에 익운이 다시 승지로 있으면서 종전 문제의 상소 내용을 인용한 일이 있었으나 제공과 영희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제공이 사직소를 올리자 윤치성(尹致性)·박장설(朴長卨)·김희조(金熙朝)가 불윤 비답을 지어 올렸는데, 치성이 대신 지은 글 속에는 ‘한 조각 괴로운 마음에 머리털이 희다 못해 누래졌다.’라는 말이 있어 김달순(金達淳)에게 논박을 당했고, 장설이 대신 지은 글속에는 ‘논의가 서로 들쭉날쭉하여 난을 일으킨 자를 성토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혹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때 와서 양사가 발계(發啓)하자 희조만이 상차하여 제공을 논박하다가 기각을 당하고 뒤에 또 송익효(宋翼孝)와 연명으로 상소하면서 또다시 언급했다고 하였다.
양사가 합계로 아뢰기를,
"아, 신기현이 이 얼마나 극악한 역적입니까. 오늘 조정 신료들이 머리를 짖찧고 힘껏 토죄하면서 맹세코 한 하늘밑에서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타고난 천성이 같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 저 윤영희는 본래 요괴 오익환(吳翼煥)과 죽음을 맹세한 벗으로서 상소문을 지을 때에도 간여하였고 강을 건너갈 때도 눈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죄상을 살펴보면 참으로 그지없이 교활하고 악독한 자인데 또 무슨 심보로 역적 기현과 암암리에 결탁을 하고서 여러 신료들의 성토속으로 제 몸을 던지고 그와 같은 죄악을 범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것입니까. 역적 자식의 단자를 직접 받고 또 강경(講經)의 찌를 슬쩍 건네 주기도 하여 힘을 다해 구원해 주고 마음껏 두호하면서 더구나 동료 시관의 배척을 당하면서도 당여로 지목받을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였습니다. 평소 얼마나 친밀했고 내심이 서로 통하고 있었음은 열 손가락이 다 가리키는 바이며 눈이 있는 사람이면 다 본 사실이니 그의 무장(無將)한 마음과 부도한 발자취는 기현과 더불어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자 하나입니다. 그렇게 흉악한 심보와 반역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시도 용서해서는 안될 것이니 빨리 왕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고 윤영희를 엄히 국문하게 하여 전형(典刑)을 쾌히 바루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영희의 경우는 그에 해당하는 금령(禁令)이 따로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계가 아니라 바로 법에 의해 처벌하자는 청이다. 어찌 국가의 체통상 허락할 수 있겠는가. 원계(原啓)는 그대로 머물려두고 처리하지 않을 것이고 경들은 체차할 것이며, 그를 받아들인 승지는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무열사(武烈祠) 재임 유생을 무반으로 대신 하자면 난처한 점이 있다고 치계한 데 대해 회유하였다.
"경이 이와 같이 아뢰니 경장(更張)의 뜻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고 하겠다. 그 도는 원래 무(武)를 숭상하는 지방이다. 근래 문만 숭상하는 폐단이 심해 간교한 구멍이 날로 뚫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文)만 가지고 대간 시종을 넘보기도 하고 유자라는 것만으로 향임(鄕任)을 차지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반을 천시하고 무예 닦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활을 잡던 자가 붓대를 잡고 무예를 익히던 자가 읍양(揖讓)하는 바람에 관서 일대가 앞으로는 무예를 모르는 지방으로 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관심을 갖고 힘을 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곳 풍속을 일변시켜 다시 옛날대로 되게 하려면 비록 십분 강마(講磨)를 하고 백방으로 권장한다고 하더라도 무인을 천대하는 폐단을 통렬하게 개혁하지 않고서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경을 비롯해서 이하 모두가 그러한 사실을 뻔히 보면서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도신(道臣)이 그러한데 수령들이야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만일 무사들이 조두(俎豆) 일에는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그렇게 염려한다면 그것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가령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문관이고 자제가 향임(鄕任)을 맡고 있는 경우이거나 또는 무반으로서 이름난 명족(名族)의 경우는 그들을 특별히 권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사 일을 주관하게 하고 겸하여 사우(祠宇)까지 수호하게 할 것이다. 일단 그 일을 맡았던 사람이나 그 원에 소속된 사람에 대해서 향중에서 특별 대우를 하고 서울 관아에서도 특별 수용을 하면 어찌 아무리 작은 것일망정 보탬이 없겠는가. 제사 때 입는 옷에 있어서도 봉액(縫掖)을 입자고 한 경의 요청은 너무나 현실과 맞지 않는다. 갑옷과 투구 차림의 무사가 술잔을 올리고 뜰에서는 호드기와 나팔을 불면 그것이 바로 신을 이르게 하는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또 독축(讀祝) 문제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식년(式年) 정도 되면 《사서(四書)》·《무경칠서(武經七書)》·삼감(三鑑)·삼전(三典)만 읽는 정도가 아니다. 거기에다 만일 정성을 다해 기예가 뛰어난 자들을 별도로 뽑아 쓴다면 그들 모두가 다 문무 겸전의 사람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무관 참봉을 두는 일, 동서재 재생들을 무관 반열로 하는 일 그리고 기타 별도로 권장할 수 있는 방안들을 다시 강구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도내 유사(儒士)로서 돈을 내어 경비를 보탠 자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한 말은 경으로서 그러한 망발이 어디 있는가. 일이란 할 만하면 하는 것이고 해서 안 될 일이면 않는 것이다. 가령 그들의 노고에 대해 보답을 하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어떻게 감히 재물을 출연했다는 등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다 번거롭게 진술하는 것인가. 국가의 체통으로 보아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경에게는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는 법을 적용하겠다. 그들이 이미 재물을 내놓았으면 반드시 본원에 정성을 바치게 해야 할 것이니 그중에서 그 지체가 원임(院任)이나 원생(院生)으로 합당한 자가 있으면 모두 권무 군관으로 이속시킨 다음 장문하도록 하라."
무열사(武烈祠) 제사의 헌관(獻官)이자 참여한 무사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인 시험관 행 부호군 이원(李源)과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가, 시사에 합격한 인원수와 성명을 치계하였다. 【유엽전(柳葉箭) 삼중(三中)의 4분(分)과, 기추(騎蒭) 삼중과 철전(鐵箭) 1백 30보(步) 이상 93명은 직부 전시(直赴殿試), 그다음 2백 50명은 직부 회시(直赴會試), 그 나머지 입격자 4백 5명에게는 등수를 나누어 시상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46면
【분류】군사(軍事)
10월 12일 정축
승지 이득제(李得濟)·윤호(尹㬦)·홍의영(洪義榮)·김효건(金孝建) 등이, 합계(合啓)한 것 중에서 채제공에 대한 계는 되돌려 내려보내고, 윤영희에 대한 계는 그대로 머물려 두었으며, 양사의 여러 대신(臺臣)과 받아들인 승지를 체직 파면한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니, 불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장용영이 아뢰기를,
"본영의 둔전(屯田)이 관서의 가산(嘉山)·정주(定州)·안주(安州)·박천(博川) 등지에 있는데, 조세를 받아쓰는 데 불과하고 환곡(還穀)으로 출납하고 보관하는 제도는 아직 마련되지 못해 일이 매우 어설프게 되어 있습니다. 듣건대 가산에 있는 병영 소속 갈마창(渴馬倉)의 회외곡(會外穀) 제도는 정묘 연간에 창설한 것으로 1만 석이 찬 뒤에 진영 한 곳을 설치하기로 하였던 것인데 현재 겨우 5천여 석 정도인 곡물을 감색(監色)에게 모두 내맡겼더니 온갖 협잡을 다 부린다는 것입니다. 진영 설치 문제의 경우, 곡물을 금방 1만 석 채우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형편으로나 사세로 보아 꼭 그렇게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를 일이어서 진영 설치는 기약할 수 없고 민폐만 점점 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갈마창은 본 장용영 소속 고성진(古城鎭)과는 서로 마주보는 거리입니다.
올해부터 본영에서 본 갈마창을 관리하고 아울러 둔전에서 수확되는 것을 본영의 군향곡으로 만들어 환곡 출납제도를 운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2분의 모곡(耗穀)으로 병영에서 가져다 쓰던 것은 대신 지급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인데 관서 지방의 돈 가뭄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 병영의 기류전(記留錢)으로 해마다 받아들인 것이 조금은 여유가 있으니 각 창고의 돈에서 3만 냥을 떼내어 빚을 놓고 이자를 받아 좋은 조건으로 이용하되 이자의 절반은 유치시켜 10년 한정으로 본전 액수를 채운 다음 특별 탕감을 허락하고 이어 또 그 전 액수만큼 빚을 놓아 매 10년을 주기로 늘 되풀이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신이 중국에 갈 때 쓰는 쇄마의 수와 소용되는 비용을 재감하였다. 이전에는 사신이 중국에 갈 때면 모두가 쇄마를 【각 고을의 역말을 일컫는다.】 이용해 짐을 운반했는데 말을 부리는 자들이 대부분 무뢰배이거나 떠돌이 부류여서 책문에 들어간 뒤면 연도에서 싸움과 도둑질을 일삼았으나 사신과 역관이 말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저들이 보기를 도둑처럼 하여 사행에 수치를 남겼으므로 전후로 사행이 복명할 때면 그 폐단을 말하는 자가 많았었다. 그랬는데 지난해 서장관 성종인(成種仁)이 건의하여 쇄마로 짐을 운반하는 법을 혁파하고 그들을 고용하는 은화(銀貨)로 수레를 세내어 운반하자고 하였다. 이번 겨울에 상이 동지사 세 명에게 명하여 의주 부윤과 함께 그 편리 여부를 강구해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의주 부윤 조진택(趙鎭宅)이 비국에 보고해오기를,
"중국에 갈 때 동원되는 쇄마는 모두 82필로 한 필당 삯이 은화로 환산해 7냥이며, 말 모는 사람 82명에게는 한 사람당 여비로 쓸 종이와 모자세 중에서 으레 은화 7냥 3전 1푼 5리를 지급합니다. 말 값과 여비를 합하면 모두가 순은으로 1천 5백 15냥 9전 4푼이 되는데 중국 상인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짐 1백 근을 운반하는 삯이 6냥이라 하였습니다. 말 한 필에 실을 수 있는 무게가 불과 2백 근이니 82필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은 총 1만 6천 4백 근이 됩니다. 그런데 그 물량을 수레를 세내 운반하게 되면 그 값은 은으로 9백 84냥이 되며 이는 왕래할 때 한 편에 드는 운임입니다. 돌아올 때의 운임은 들어갈 때의 절반이면 되므로 나머지 5백 31냥 9전 4푼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운임 관계를 잘 조절만 하면 해묵은 폐단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간 뒤에 세 사신에게 필요한 짐을 싣고 타고 할 말의 수는 넉넉잡아 41필이면 될 것이니 그 나머지 41필을 줄이고 그 삯으로 줄 은 7백 57냥 9전 7푼으로 책문에서부터 수레를 세내 운반하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우선 절반을 줄여 폐단이 없는가를 충분히 보고 나서 내년부터 완전히 없애는 것이 역시 신중을 기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의주 부윤이 한 말이 신중을 기하자는 이쪽 말과 역시 합치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巡)에 41발을 맞혔다.
10월 13일 무인
춘당대에 나아가 활쏘기를 하였다. 시신들에게 명하여 짝을 지어 쏘도록 하였는데,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다섯 발을 쏘아 다섯 발을 맞혔고 어영 대장 조심태(趙心泰)는 네 발을 맞혀, 유대는 품계를 올려주고 심태에게는 직접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대사헌 홍명호와 장령 권중헌(權中憲)이 아뢰기를,
"엊그제 여러 중신들에게 내린 처분을 환수하도록 아뢴 바에 대해 바로 윤허를 내려주셔서 신들은 너무나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중신이 아직 서용을 받지 못하고 있어 신들로서는 민망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들 세 중신은 혹은 상소를 올려 더없이 사특한 자들의 흉패한 논의를 엄중하게 토죄하였고 혹은 법연에 나아가 역적을 두호하려는 태도를 보고 면전에서 배척하였는데 그 모두가 충성심과 의분에 북받쳐 마치 송골매가 참새를 덮치듯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은 서용되고, 혹은 서용되지 않아 죄명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어찌 차별없이 대해야 하고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큰 법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 중신에 대한 처분을 아직 그대로 두라 하신 명령을 다시 철회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상소하여 사직하자, 비답하기를,
"옛날, 산동(山東)에서 정승 난다는 말이 있었듯이 정승 집안에서 정승감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경의 가문은 4대 동안에 다섯 명의 정승을 배출해내었다. 그런데 경이 또 재상에 임명되었으니 내 마음의 기쁨을 미루어 두려워하는 경의 마음을 짐작하겠다. 경이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새로 내린 명령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면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요, 위에서 보면 대대로 사랑하고 돌보았던 사이인 것이다. 그러한 처지라면 상투적인 의례만을 따를 일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지금 사행이 떠날 날이 임박하여 바로 길 떠날 채비를 해야 하므로 지금은 재상이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는 형식을 갖출 시기가 결코 아닌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바로 나와 숙명(肅命)하도록 하라. 그밖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질서를 세우며 사람들로 하여금 적재 적소에서 기지를 발휘하게 하고 만민의 뜻에 순응하면서 조정이 화락 태평하고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게 만드는 일은 바로 내가 자나 깨나 늘 가슴에 담고 있는 진실한 정성이요 애틋한 마음이어서 아마 내가 다 말하지 않더라도 알 것이다. 경은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자이니 나를 돕기에 더욱 노력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10월 14일 기묘
승지 박우원(朴祐源)·홍의영(洪義榮)·김효건(金孝建)이 연명으로, 채제공을 가까운 지방에 부처토록 한 명령을 철회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들은 체하지 않았다. 그 전 제공이 유배지로 떠날 때 상이 압송 도사(都事)에게 비밀 봉서(封書)를 내리면서 장단부(長湍府)에 도착하면 열어보라고 하였다. 도사가 장단에 도착해 열어보니 바로 밀유(密諭)였다. 그 밀유에 이르기를,
"죄가 있으면 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법의 정신이지 유배지가 멀고 가깝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늙고 병든 자를 돌보는 뜻에서 늙은 장수에게도 이미 온정을 베푼 바 있는데 그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비록 그보다 더 큰 죄라도 강 밖에다 유배한다고 하고서 양천(陽川)에다 부처한 미담(美談)이 옛날에도 있었다. 충성을 숭상하고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 나라 법이다. 지금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나는 남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곳에 도착하는 즉시 그 죄명대로 부처하고 돌아오라."
하였다. 이에 도사가 제공을 장단부까지 압송하여 부처하고는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였는데, 우원 등이 그제서야 알고 간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비답도 받지 않은 채로 계사(啓辭)를 지레 반포하였다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고 우원도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삼남의 흉년든 고을 수령들을 보리가 익는 철이 될 때까지는 자리를 옮기지 말도록 명하였다.
10월 15일 경진
태묘(太廟)의 망제(望祭) 때 11실(室) 축문에 글자 한 자가 빠졌던 관계로 향실(香室)의 입직관(入直官)을 삭직하여 향리로 내쫓고, 축문을 쓴 자와 충의위 수복(守僕)은 곤장을 쳐 귀양보냈으며, 헌관은 해부로 하여금 붙잡아다 심문하게 하고, 이어 명하기를,
"이 뒤로 축문을 쓸 때에는 헌관과 대축(大祝)과 태묘의 유사가 함께 낱낱이 대조해보도록 하라."
하고, 묘(廟)·궁(宮)·원(院)·묘(墓)에도 똑같이 하도록 규정을 정하였다.
의금부가, 정존중(鄭存中)을 삼화부(三和府)로 귀양지를 옮길 것을 아뢰자, 전교하기를,
"존중을 귀양보낼 때 정경(正卿)에 하는 예우를 적용하지 않았는데 귀양지를 옮기면서 무엇하러 도사를 지정해 보낼 것인가. 그 곳에다 그대로 두고 벌을 가중시켜 안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또 박규순을 흑산도(黑山島)로 정배할 것을 아뢰자, 조금 나은 고을로 정하라고 명하였다가, 위도(蝟島)로 할 것을 아뢰자, 서북 지방으로 귀양지를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유사가 법을 지켜야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고 벌을 당한 자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일시적 공분에 의하여 마음대로 법의 적용을 넓혔다 좁혔다 하면 법이 날로 가벼워져 그 결과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뒤로는 특별 하교가 없었는데도 추자도·흑산도·탐라도로 유배지를 정한 자는 해부나 해조를 막론하고 수당(首堂)에게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할 것이니 그것을 각별히 염두에 두고 그대로 고사(故事)와 등록(謄錄)에 기록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세 번째 소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홍명호(洪明浩)·대사간 윤행원(尹行元) 등이 연명으로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방금 내려진 전교를 보니 풍천부(豊川府)에 부처하기로 한 죄인 채제공을 장단부에 유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아, 저 제공은 바로 나라를 저버리고 역적과 패거리를 이룬 극악한 큰 죄인입니다. 벌을 가중시켜야 한다는 청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라의 법이 곧게 시행되지 않고 뭇사람들이 더욱 답답해 하는데, 늙은이를 돌봐주고 되도록 너그러워야 한다는 전교가 어찌 그렇게 흉패한 무리에게까지 논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 제공 같이 흉험하고 제공 같이 악독한 자에게 당연히 적용해야 할 법을 즉시 적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서울 근교 하룻밤 자고 올 수 있는 지역에 버젓이 머물러 있게 놓아둔다는 것은 고금 천하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계속 가다가는 장차 나라도 나라 꼴이 안 될 것이며 사람도 사람 꼴이 안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어찌 소름이 끼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고 쾌히 삼사의 청을 윤허하여 난의 조짐을 막고 뭇사람들의 분노를 풀게 하소서.
신들이 차자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지평 한치응(韓致應)이 합문에서 말씀드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어려서부터 스승으로 섬겼다느니 극악한 역적의 죄가 아니라느니 하는 말들을 감히 방자하게 지껄였다니, 아, 통분할 일입니다. 만약 그의 안중에 임금이 있고 조정을 두려워했다면 설마 그렇게까지 기탄이 없었겠습니까. 현재 제공이 지은 죄가 어떠하며 관계된 바가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그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은혜를 끊어버리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임없이 공공연하게 토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굽어 물으시는 지척의 자리에서 두려워하는 뜻이라고는 전연 없이 감히 흉패한 수작을 부리려고 하였으니, 이를 엄하게 징계하지 아니하면 흉악하고 추물스런 귀신 같은 무리들이 앞으로 연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신들은, 지평 한치응을 빨리 왕부(王府)에서 잡아들여 엄히 국문하여 그의 끝없이 흉한 속셈을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10월 16일 신사
초계 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여 유학(幼學) 공윤항(孔胤恒)에게 급제를 내리고, 전교하기를,
"오늘 일차 유생들에게 전강을 보일 때 유학 공윤항이 《시전》의 주남(周南)에서 순통(純通)을 받고 《서전》의 요전편(堯典篇)을 거침없이 외웠다. 선성(先聖)의 후예로서 이같이 월등한 강경을 하였으니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옛날 선왕조 기묘년 전강에서 유생 신익빈(申益彬)이 총각으로 거재(居齋)하고 있었는데, 수편(首篇)을 읽도록 명하고는 특별히 급제를 내렸었다. 더구나 윤항의 처지이겠는가.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로 급제를 내린다고 법전에 실려 있으니, 특별히 그가 곧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게 하라."
하고, 이어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여 반궁(泮宮)에 가 전당을 한바퀴 돌도록 명했다.
우의정 김이소를 돈유(敦諭)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아뢰기를,
"일찍이 전에 대규모로 진휼할 때는 진휼곡이 금방 수십만 석에 달했고 근년으로 말하더라도 무술년에는 청곡(請穀)이 14만 6천여 석이었고 신축년에도 청곡이 13만 1천여 석이었습니다. 본도는 사진(私賑)·비황(備荒)·첩가(帖價)를 모두 합해야 원 수량이 2만여 석에 불과하고 그나마 그의 반에 해당되는 수효는 또 대부분 재해가 든 고을에 몰려 있어 기한을 물려주거나 감해준 양을 제하고 나면 나머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종전에는 흉년이 들면 비국의 군대용 보리며 벼를 청곡한 예가 많았지만 지금은 쌓여 있는 것이 1만 자루 미만이어서 형편상 병자년 전례대로 상진곡(常賑穀)을 당겨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세 종류의 진휼곡과 비국의 군대용 보리와 벼, 상평창·진휼청의 쌀과 콩 각 1만 석, 합계 10만 석을 특별히 더 떼어주게 한다면 분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10월 17일 임오
민종현(閔鍾顯)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김이소를 돈유하였다. 이소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고 승지를 보내 함께 오게 하였다.
10월 18일 계미
차대하였다. 상이 우의정 김이소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세호(世好)·세록(世祿)을 들어 비답한 바 있는데 대체로 《춘추》에서는 비록 세경(世卿)에 대해 비웃었지만 송(宋)나라 조정에서는 세경을 인정하고 그 제도를 활용했던 것이다. 나는 선왕의 손자이고 경은 선경(先卿)의 손자이다. 이 때를 당해 재상을 물색하자면 경의 집안사람을 놔두고 그 누구를 택하겠는가. 경은 힘을 다해 나를 보좌할 방법을 강구하고 나라와 기쁨을 함께 하도록 하라."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신기현과 윤영희 사건이 있은 이후부터 나라의 법이 행해지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도 들떠 있어 서로가 깊은 물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대체로 의리란 곧을 뿐이고 지켜야 할 명분은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곧고 하나이면 그는 충신이고 구불구불하고 두 길을 가는 자는 역적입니다. 충신과 역적은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인데 몇 해 전 섬에 있던 역적이 뛰쳐나와 돌아왔던 변고로 종묘 사직이 위기 일발에 있었고 온 나라가 출렁이는 파도 속에 휩싸여 조석을 지탱 못할 듯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자성(慈聖)께서 명확한 교지를 내려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듯하였고 당시 나라를 맡은 신하들도 대비전에 다짐을 하고서 그 뜻을 받들 것을 마음에 맹세하였으므로 비록 빨리 난의 부리를 제거하여 화근을 도려내기를 《예기》에 실린, 책임 맡은 신하가 대경 대법(大經大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 같이는 못하였지만 위험한 고비가 그로 인하여 조금 풀렸고 나라의 형세도 그로 인하여 조금은 안정되었으니 그만하면 신하의 직분을 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저들 따로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역적 기현의 더없이 패악스럽고 흉험한 상소를 만들어내 마침내 권력을 독단한다는 그 말로 변란을 선동하는 꼬투리를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자성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정승들을 무함하여 역적 윤구종(尹九宗)을 위해 딴 주장을 내세울 꾀를 만들었으니 천하에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루 이틀 저들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자 이번에는 영희란 자가 나타나 또 다시 감히 역적 기현의 편을 들고 나섰고, 영희를 또 내버려 두자 이번에는 또 영희를 편드는 자가 나타나 앞에서 선창하고 뒤에서 화답하고 동서로 날뛰면서 더욱 섬 안의 역적과 암암리에 기세를 연결시켜 맥락이 서로 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漢)과 적(賊)은 이미 판명이 났는데도 충신과 역적은 뒤섞여져 있으니 이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섬의 역적이 화근이라는 것을 이들인들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연연한 정을 버리지 못하고 한사코 두호하기만 하여 국가와 승부를 겨뤄보려고 하면서도 한편 그 짓을 감히 드러내놓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마침내 권력을 독단하고 있다고 내세워 장차 자성의 전지(傳旨)를 받들어 역적을 토죄하는 사람들을 일망 타진함으로써 저들 흉계를 성공시키는 묘방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차츰차츰 규합하여 서로 어울리고 급기야 호흡이 착착 맞아, 그야말로 몸은 다르나 속은 같고 탈을 서로 바꿔 쓴 그들이 바로 자성을 지켜보고 있다[照管]는 흉악한 말로 백여 년이 지난 뒤에 한 조각의 말을 만들어 냈으니, 아, 또한 흉악하고 참혹스럽습니다. 대저 전첩(專輒)이란 말은 위세와 복록을 멋대로 농단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농단한 일이 있었다면 이는 신하로서 극악한 죄이지만 그 일이야 소위 그들이 말하는 전첩과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방불한 데가 있습니까. 설사 그 일을 재상 독단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의리로 따져볼 때 십분 공명 정대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자성의 분명한 하교를 받들어 단연 거행한 경우이겠습니까. 우리 조종조의 고사(故事)가 역사에 분명히 실려 있어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그 의리야말로 더더욱 역사에 기록하여도 빛이 있고 성인에게 진정하여도 의혹될 것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먼저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큰 의리가 있음을 알게 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정령(政令)이 시행될 것입니다. 오늘의 급선무는 빨리 삼사의 청을 따라 먼저 화근부터 없애버리고 모든 당여(黨與)까지 차근차근 찾아 없앰으로써 이미 어두워진 천리(天理)를 다시 밝히고 점점 나빠져가는 인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중 잘못 물들었던 자들도 아마 두려워하고 후회하면서 역(逆)과 순(順)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니, 그 어찌 백성을 살리기 위한 방도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성상의 지극히 어질고 훌륭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선배들에게 들은 말이지만, 예전에도 역모가 있은 뒤에는 무릇 그 사람 범죄의 정도에 따라 벼슬길을 막거나 트거나 그 모두를 성상의 재가에 의하여 하였고 제 아무리 이름 있는 선비 훌륭한 경재가 조야(朝野)에 줄지어 서 있을 때라도 애당초 아래서는 감히 주장을 못했고 그들 중 다시 등용한 사람들도 모두 선별해서 취사를 결정했다고 하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국가 기강을 세우는 법은 법대로 유지되고 성상의 덕화는 덕화대로 빛이 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어떤 괴이한 말들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찾아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는 말을 만들어내, 냄새와 맛이 같거나 다르거나 지은 죄가 가볍거나 무겁거나 따지지 않고 자기에게 붙어 아부하기만 하면 모두 다 받아서 감싸주고 그리하여 생색을 내고 패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명기(名器)도 그 때문에 날로 문란해지고 법도 그 때문에 없는 것처럼 되어버려 조화의 권리가 군상에게 있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은혜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하면 원망은 누가 당하라는 말인가.’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일전에 받은 특별 유시 내용 중에서 힘주어 강조하신 것은 해화(偕和) 두 글자였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 것 없으나 이미 성은을 받은 이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주선해 보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지금 왕실을 돕고 있는 자들이 서로 돕고 서로 난국을 타개하기에 마음을 써 마치 수레를 밀듯이 성상의 교화를 돕는다면 굳이 화목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그들이 서로 마음의 간격을 두고 의견이 엇갈려 헛되이 세월만 보낸다면 신이 비록 애틋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다해 서로 화목하려고 해도 그 형세가 마치 남쪽을 가려면서 수레채를 북쪽으로 돌린 격이 될 것이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의 화목이 논의되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서로 화목하는 방법은 신 한 사람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일 세상을 안정시키고 조정 전체가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게 하려고 하신다면 그 방법은 의리를 밝히고 단속을 엄히 하는 것뿐입니다. 이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삼가 옛분들이 서로 노력하자고 했던 그 뜻으로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처음 나온 자리에서 그렇게 누누이 아뢰는데 더러는 나라의 금령에 저촉되는 말이 있다 하여 답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조정이 조정 구실을 하게 만드는 것은 형정(刑政)인 것이다. 요사이의 처분을 얼핏 보면 다소 전도된 느낌이 드는데 이제 경의 말에 따라 나의 본의를 대략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신기현(申驥顯)을 승지로 발탁하라. 윤영희에 대해서는 아직 결말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 즈음에 전 좌상에 대한 처분이 있었던 것은 형정을 겉으로 보기엔 비록 판이한 것 같으나 처분의 본의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기현을 발탁한 것은 유폐(流弊)의 깊고 길어짐을 염려해서였으나 한번 발탁하고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자전께 저촉될까 염려스러워서였었다. 더구나 기현이 한 말이 제 뜻으로 한 말도 아니며 게다가 또 기현보다 먼저 그러한 말을 공공의 자리에서 발설한 것은 역시 양궁(兩宮) 사이를 잘못 헤아리고 한 것으로서 그것이 결국 자신도 모르게 정상적인 도리를 벗어난 죄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일의 실상이 대략 그렇게 된 것인데 그것이 어찌 오늘 여러 신료들이 감히 입을 놀리며 마치 편당하여 서로 다투듯이 해야 할 일인가. 영희가 비록 아주 애매하고 억울하며 영희를 공격하는 자들이 비록 아무리 사적인 감정을 두고 또 아무리 공론을 빙자하여도 진상이 드러나기 전에 먼저 의심부터 하기 시작하여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을 받는 쪽이나 저들끼리 한 무리를 이루고서는 갈수록 더 격렬해가기만 하니 장차 무슨 꼴이 될 것인가. 그러한 즈음에 직책이 재상이라는 자가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취하여 오늘의 자리가 어제의 자리보다 더 심하고 일절이 일절보다 더하여, 세신(世臣)은 그만두고라도 대신에 대한 관리 문제가 우선 급급해서 일전에 그러한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끝부분에 언급한 문제는 내 마땅히 염두에 두리니, 경도 정성을 다해 나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호서 지방의 금년 환곡 상환량의 8분의 1을 연기해 주도록 명하였다.
영천군(榮川郡)의 마군(馬軍)과 보군(步軍) 감액(減額) 문제는 본도에서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남단(南壇) 주위에 경작을 금지하는 정계석(定界石)을 세우고 단(壇) 주위의 백성들 전답을 사들여 나무를 심고 경작을 금하였다. 단의 문으로부터 50보(步)를 한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표(禁標) 두 글자를 돌에 새겼다.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를 비변사 유사 당상으로 임명하였다.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윤호(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서유린(徐有隣)을 장용영 제조로 삼았다.
10월 19일 갑신
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상이 종악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책문의 제목 하나를 내어서 위서(僞書)의 폐단에 관해 설문을 해보았다.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文風)도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 과문(科文)을 놓고 보더라도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사람들이 모두 모방하여 경전 가운데 늘상 접하여 빠뜨릴 수 없는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의 문장 같지 않다. 세도와 유관한 것이어서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고심 끝에 책문의 제목으로까지 내었던 것인데 만일 그 폐단만을 말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리려면 애당초 잡서(雜書)들을 중국에서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리하여 앞서의 사행 때도 물론 누누이 당부해 왔었지만 이번 사행에는 더욱더 엄히 단속하여 패관 소기(稗官小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당판(唐板)인 경우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널 때 하나하나 조사해서 군관이나 역관 무리라도 만일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널리 유포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경사(經史)는 잡서와는 다르므로 이렇게 엄금한다면 다소 지나친 것 같으나 우리 나라에 있는 것만도 빠진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어 그것만 외우고 읽어도 무슨 일인들 참고하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장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서책은 종이가 질겨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으며 글자가 커서 늘 보기에도 편리한데 하필 종이도 얇고 글씨도 자잘한 당판을 멀리서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꼭 찾는 이유는 누워서 보기에 편리해서인 것이다. 이른바 누워서 본다는 것이 어찌 성인의 말씀을 존숭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를 받자오니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바른 학문을 부양하여 만세를 두고 영원한 장래를 염려하시는 위대한 전하의 말씀임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흠앙스럽습니다. 신도 당연히 엄히 금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성 김방행에게 이르기를,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 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 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남공철(南公轍)의 대책(對策) 중에도 소품(小品)을 인용한 몇 구절이 있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 나도 문청(文淸)121) 에게서 배웠지만 지성으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기에 비로소 글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문체는 고상하고 전중(典重)하여 요사이의 문체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 문체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문체를 본받는다면 되겠는가.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였다.
"신이 삼가 조지(朝紙)를 보니 사역원 초기(草記)에 의해 이번 절사(節使) 편에 중국 돈을 무역해오게 하기 위해서 묘당과 의논한 끝에 자문(咨文)을 꾸며 들여보내기로 하였다고 했는데 신은 삼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한 나라의 재보의 원천이며 백성들의 생명줄입니다. 그 권한을 위에서 쥐고 있고 아래서는 그 혜택을 받는 것이라서 남에게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남에게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전폐(錢幣)를 만들었고 태공(太公)은 구부(九府)를 두어 돈과 물가를 관리해 왔으나 삼대(三代)의 화폐 제도는 같지 않았고 한(漢)·당(唐) 이후로는 나라를 새로 세우면 국호도 바꾸고 곧 새 화폐를 주조하여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사방의 이권을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 나라에 주는 영향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에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들도 각기 자기 나라 화폐를 사용하였으며 가령 거북등딱지·자개·칼·가죽 같은 것들을 나라의 돈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다른 나라와 서로 유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기씨 시대부터 이미 돈이라는 것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은병(銀甁)을 화폐로 사용하거나 혹 쇠돈을 주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구리가 생산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고려와 원나라는 의복이며 관직이 한 집안처럼 같았어도 일찍이 중국 돈을 빌려다 쓰지는 않은 것을 보면 형세가 서로 걸맞지 않고 구애됨이 있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숙종조 때 와서 옛날 제도를 고증하여 비로소 동전(銅錢)을 주조하였는데 나라의 재용이 이로 인해 넉넉해지고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으며, 시행한 지 1백여 년이 되었어도 위아래가 다 편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왜동(倭銅)의 값이 비싸고 주조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돈의 품귀가 근래에 심해졌고 은의 생산도 줄고 하여 장사치와 역관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러한 변통책을 쓰려고 한 것이지만 중국 돈의 문제라면 선왕조 만년에 이미 그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사실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쓰고 있는 통보(通寶)는 본시 한 왕조가 제정한 제도로서 마치 의관이나 물건처럼 각기 제도와 법칙이 있어 다른 나라와 서로 혼동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소견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연경이나 요동과 가까워 중국 본토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전폐를 통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봉강(封疆)이 이미 나뉘어져 있고 명분과 제도가 각기 다른 이상 규제가 한번 무너지면 갖가지 농간이 쏟아져 나올 것이어서 그것이 첫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국토는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면적이 몇 천리이고 산을 끼고 바다에 둘러쌓여 있어 강국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겸하여 수륙 물산도 풍요롭고 은과 철(鐵)의 자원도 얼마든지 있어 비록 다른 나라와 유통하지 않더라도 재정을 제대로만 운영한다면 국가 재용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을 것인데 하필 중국에서 빌리겠습니까. 지금 만일 돈을 빌어 나라 재용에 보태 쓴다면 이는 남에게 빈약함을 내보이는 꼴이어서 장차 우리 국력을 넘겨볼 것이니, 그것이 두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시험 삼아 이해 관계를 말해 보더라도, 지금의 역관 무리들이 중국 동전들이 거리에 가득 널려 있는 것을 익히 보았으므로 이것을 곧 기왓장이나 돌맹이 같이 여기고 교환하는 값도 갑절이나 5배의 싼 값으로 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적은 물건을 가지고서 많은 양을 사들여 10에 5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그러함을 깨닫고서 차츰 그 파는 횟수를 줄여 가격이 서로 대등하게 해버리면 결국 이권은 다른 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조종하는 것도 남의 손에 달려 있어 몇해 못가서 이익이라곤 없을 것입니다. 또 서쪽 변경의 백성들이 목전의 많은 이익을 보고서 다투어 은이며 삼이며 비단이며 베 등의 물품을 가지고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몰래 국경을 넘어 중국 돈을 사들여 오는 것이 마치 터진 시냇물 같고 달리는 사마(駟馬) 같아 막아 낼 수가 없게 된다면 우리 나라의 갖가지 물품들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가게 되어 백성들의 일용이 날로 궁핍해 질 것이고 나라 재정도 날로 줄어들 것이니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뒤를 잘 마무리할 것입니까. 그것이 세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불가한 점이 있는데도 단지 사행의 팔포(八包)를 채워주기 위해서 전대에 없었던 일을 갑자기 만들어 내어 뒷날 무궁한 폐단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그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 《대청회전(大淸會典)》을 보았더니, 동철(銅鐵)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이나 보국(寶局)에서 주조한 전폐가 쉽게 새나가도록 길을 열어놓아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은 없어도 그대로 내버려두겠습니까. 구구하고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지금 비록 자문를 보내 요청하더라도 거절을 당할 염려가 있는데 그리되면 나라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점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직책이 지방관으로서 조정의 논의에는 참가할 입장이 못 되지만 신이 있는 지역이 서쪽 관문이고 문제도 변경의 정사와 관계되기 때문에 백성과 국가의 이해(利害)를 눈으로 보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잘 생각하시어 처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중국 돈의 통용문제는 세 가지 불가한 점을 지적한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전혀 폐단이 없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화천(貨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두루 유통시켜 막힘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 길을 트자는 것은 물정에 따른 것이고 그 폐단을 바로잡자면 현실에 맞게 하면 될 것이다. 허락한 것은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므로 그만두는 것도 호령 한 번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소견을 곧바로 아뢴 점은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10월 20일 을유
여러 신료들과 춘당대에서 짝을 지어 활쏘기를 하였다. 이때 각신(閣臣) 서용보(徐龍輔)와 김조순(金祖淳)이 중국에 가게 되어 내일이 중국 황제에게 보낼 표문을 다시 살펴보고 봉해야 할 날이었는데 상이 현임 원임 각신들을 모두 춘당대로 불러놓고 이르기를,
"오늘 두 사신을 전송하기 위해 조그마한 술자리를 준비하였으니 경들도 일제히 모여 함께 활쏘는 구경을 하며 즐겁게 보내도록 하라."
하고, 그 자리에 나온 각신 오재순(吳載純)·서유방(徐有防)·이병모(李秉模)·박우원(朴祐源)·서정수(徐鼎修)·서용보(徐龍輔)·윤행임(尹行任)·서영보(徐榮輔)·김조순과 승지 홍의영(洪義榮)·김효건(金孝建), 주서 서유문(徐有聞)에게 짝을 나누도록 명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은 장용영 제조로서, 김문순(金文淳)은 주교 당상(舟橋堂上)으로서 참가하였고 유방·행임·영보·조순은 왼쪽 자리에, 문순·병모·의영·유문은 오른쪽 자리에 있었으며 재순 등은 활을 못 쏘아 활쏘는 것을 감시했다. 상이 과녁을 쏘아 10순(巡)에 41발을 맞히자 병모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제왕이 훌륭한 일이 있으면 전상(殿上)에서 곧 만세를 불렀습니다. 오늘 전하가 활쏘기를 하여 많은 수를 맞혔는데 이는 역사에 드문 일입니다. 만일 옛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어도 틀림없이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였고, 문순은 말하기를,
"신이 활쏘는 기예를 조금 아는데 전하께서 쏘시는 것을 보니 그것은 거의 천부적인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감히 고풍(古風)을 아뢰겠습니다."
하니, 【아랫사람이 웃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서 그 기쁜 마음을 표시할 것을 청하는 것을 고풍이라 한다.】 상이 그를 승락하고 채필(彩筆)과 화묵(畵墨)을 자리에 있는 여러 신료들에게 내려주었다. 재순과 유방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외람되게 모시고 활을 쏘았고 또 많은 선물까지 내려주시니 오늘의 이 훌륭한 만남은 지난 역사를 다 더듬어봐도 유례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오늘 모시고 활쏜 여러 신료들과 함께 연명으로 전(箋)을 올려 전하의 만수 무강을 빌고 이어 하해 같은 은혜에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비록 그렇더라도 나는 그렇게 크게 벌리고 싶지 않다."
하여, 여러 신료가 또다시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음식을 차려 올리고 음악을 울려 권주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용보와 조순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멀리 떠나야 하니 어찌 연연(戀戀)한 마음이 없겠는가. 사내 자식을 낳았을 때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천지 사방에 쏘는 것은 사방에 뜻을 두라고 해서인 것이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며 남의 나라에 사신 가는 일 또한 책임이 막중하니 각기 노력하도록 하라."
하여, 용보 등이 일어나 사은하고 한껏 즐기다가 저물어서야 파하였다.
성균관의 우등 시험지는 내각으로 올리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삼사가 【대사간 윤호(尹㬦)·장령 유이현(柳頤玄)·부교리 심흥영(沈興永)·수찬 서유련(徐有鍊).】 채제공 사건에 대해 말을 바꾸어 아뢰기를,
"군주의 원수요 국가의 역적들을 후원하여 그들 소굴 노릇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드러난 것으로 말씀드린다면 역적인 종친이 도망나왔을 때 죄를 입은 두 정승은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오기까지 하였으나 그만은 파직되었다는 핑계로 단란하게 술잔을 기울였고, 역적 김우진(金宇鎭)의 귀양지를 옮길 때도 조정에 나와 있는 모든 신료들은 모두 성토하였는데 그는 또 병을 이유로 뒤로 쳐져 머뭇거리며 교묘하게 회피하였습니다."
하고, 【‘그 중 가장 드러난 것’에서부터 ‘머뭇거리며 교묘하게 회피하였습니다.’까지는 지워 없앴다.】 또 적용한 법조문을 바꾸어 아뢰기를,
"가까운 곳에 부처하는 것으로는 뭇사람들의 감정을 조금도 풀 수가 없습니다. 당초에 아뢸 때 충성된 의분이 북받쳐 위리 안치의 율을 적용할 것을 지레 청했다가 그 청을 되돌려 받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이미 여러 날이 되도록 연이어 아뢰지 못했는데 지금 당장 엄중 토죄해야 하기 때문에 규례에 따라 응당 그에게 과해야 할 법을 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게 중한 죄를 범한 역적을 단 일각이라도 서울 근교에다 부처해두고 말 수는 없는 일이니, 바라건대 장단부에 부처한 죄인 채제공에게 빨리 외진 변경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빨리 그만두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0월 21일 병술
비변사 당상과 동지 정·부사와 서장관을 불러 접견하고, 상이 박종악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공자 후손을 찾아내어 녹용(錄用)한 것은 실로 성인을 존숭하고 어진이를 사모하는 뜻에서 한 일이다. 공자의 세계(世系)나 기타 참고가 될 만한 고적들이 있으면 유의해서 사오도록 하고, 사행 왕래 때 있어왔던 허다한 폐단과 책문을 드나들 때 그들이 조종하는 버릇은 이번에 특별히 더 살피고 단속하여 기어이 바로 잡도록 하라. 그리고 중국 돈 문제는 일찍이 전교한 바가 있으니 그대로 형편을 보아가며 잘 처리하되 만약 그 쪽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통화(通貨) 문제에 대해서 물으면 굳이 숨기려 하지 말고 기자 시대부터 돈을 사용해 왔고 지금까지 그대로 통용하고 있다고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고, 상사(上使)에게는 작별 인사로 칠언 절구를 지어 내려주었다. 그 시에,
그대 숙부 사행 길을 몇 번이나 오갔던가
지금 또 경을 시켜 상사로 보내네 그려
아름다운 명성이 북경 거리에 자자하리
어진 부마 집안에 대신이 또 있다고
하였고, 오언 절구에는,
경의 자랑거리 돈후 그것인데
문장으로 명예 낚아 뭘하겠나
돌아올 때 꼭 점검하여
경서 아닌 것은 가져오지 말게나
하였다. 부사에게 내린 칠언 율시에는,
젊은 나이에 대부 되어 노성한 모습이로세
관진의 집안에서 높은 명성 길렀다네
우리 나라 사신으로 중국 사람 대접받고
돌아올 때 행장도 갈 때처럼 가벼우리
요동의 넓은 벌이 가슴 안에 드나들고
삼천 리 연경 길을 뜰안처럼 여긴다네
이번 걸음 평생 두고 장쾌한 여정이리니
헤어진다고 아쉬운 정 느낄 것이 뭐겠는가
하였고, 서장관에게 내린 오언 율시에는,
오대에 여섯 번을 사신으로 갔으니
충성 근면을 겨룰 자 없으리
아름다운 전통을 후손이 이어받아
올해에도 그 길을 또 간다네
눈 쌓인 길 고생인들 오죽하리
얼음 위의 여가는 술맛도 새로웠지
가거든 그 나라 잘 살펴서
중국에 사신간 명예 저버리지 말지어다
하였다.
10월 22일 정해
모시고 활 쏘았던 여러 신료 오재순(吳載純) 등과 초계 문신 안정선(安廷善)이 전(箋)을 지어 올렸다. 전에 상이 초계 문신들에게 친히 시험 보인 시권에 직접 점수를 매기는데 원자(元子)가 곁에 있다가 주필(朱筆)로 크게 이중(二中) 두 글자를 정선의 시권에다 썼다. 이때 원자의 나이 겨우 세 살이었다. 상이 속으로 기뻐 특별히 정선을 6품으로 올릴 것을 명했는데, 이때 와서 그도 전을 올려 사은한 것이다. 상이 처음에는 친히 그 전을 받으려고 했다가 일이 크게 벌려질까 싶어 그만두고 합문 밖에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춘당대로 나아가 과녁을 쏘아 10순에 46발을 맞히고는 전을 올린 여러 신료들과 활쏘기에 동참했던 초계 문신들에게 고풍(古風)을 내렸다. 초계 문신 김달순(金達淳)과 엄기(嚴耆) 두 사람은 활을 잘 쏘아 일찍이 6품에 올랐었으므로 그들을 활쏘기에 동참하게 하였다.
집의 윤행리(尹行履)가 아뢰기를,
"징토하는 문제라면 당연히 의견을 함께 해야 하는데도 간신(諫臣) 유운우(柳雲羽)는 버젓히 집에서 쉬고 있으면서 회피하려는 기색이 현저했습니다. 그에게 귀양보내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만일 참여하지 않으면 아뢴 대로 처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전계(傳啓)하지 말라."
하였다.
전 대사간 윤호와 전 장령 유이현을 파직하고 전교하기를,
"일전의 합계에 몇 구절을 지워 뭉갠 일이 있었는데,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직 비답을 받지 않은 계(啓)인 까닭에 조지(朝紙)에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경연에서 입시한 여러 신료들의 말을 통해 각 관아의 조지에 실려 있지 않은 곳이 없었고 먹으로 약간 지워져 있었다고 처음 들었다. 비록 승선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아니겠으나 뒷날의 폐단이 될까 싶어 너무 놀랍다. 들으니 대청(臺廳)에서 본 초안을 등초하여 내주어 그리 되었다고 하니 해당 대신(臺臣)은 파직시키고 하리(下吏)는 유사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귀양보내게 하여 훗날의 징계가 되게 하라.
지금 조지가 이미 나왔으니 본 사건의 곡절을 대략 말해주지 않을 수 없겠다. 몇 해전 한강 근교로 나들이 갔을 때 혹은 파직 혹은 삭직하도록 우선 명했다가 그 뒤 시끄러워져서 다시 부처를 하도록 하교했고 전 좌상에게는 별도로 감히 들을 수 없는 엄한 전교를 내렸었는데 비록 들어오고 싶어도 그가 감히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우진(宇鎭)에게 휴가를 준 문제를 놓고 이의를 제기하며 고집하여 다툰 당시 사건은 더욱 맹랑한 것이었다. 그때 형편이 가슴앓이 증세가 있어 조용히 조섭하는 중이었는데 고 영부사(領府事)가 자기 아들의 절박한 문제로 인해 염치 불구하고 청대한 것이 아무래도 잘못된 행동이었으므로 엄히 처벌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이어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다른 대신에게도 내리고서 소에 대한 비답도 내리지 않았었으니 비록 들어오고 싶어도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두 사건 내용이 대략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일로 죄안을 삼는다면 본인은 겉으로는 냉소 정도가 아닐 것이고 속으로는 속이 타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한 문제 밖의 죄안이라면 비록 하찮은 관리들이라도 억지로 몰아 씌울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일찍이 대관(大官)의 반열에 참여했던 자이겠는가.
전 좌상이 이번에 한 일은 첫번째도 나를 저버린 것이고 두 번째도 나를 저버린 것이다. 다른 속셈이 있었다면 말할 것이 없지만 딴 뜻도 없이 그런 짓을 한 것이 더욱 놀랄 일이다. 그 문제만 가지고 죄를 성토하더라도 왜 말거리가 없어 걱정이며 무슨 법조문인들 적용하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하필 사실과 상반되는 말들을 주워모아 가지고 위로는 나로 하여금 측은한 마음을 갖게 만들고 아래로는 본인에게 자기 변명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인가. 이는 상대를 공격하기에 급급하여 벗을 수 없는 큰 감투를 덮어 씌우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 조정에서 감히 그러한 버릇을 행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러하기 때문에 하는 일에 대해 상대가 더욱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삼사는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고 여러 신료들은 우선 중하게 추고토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전 참봉 공윤도(孔胤度)의 후손 한 사람을 초사(初仕) 자리가 비면 바로 추천하도록 하라."
이의행(李義行)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3일 무자
대사간 이경오를 체직하고 유강(柳焵)으로 대신하였다.
양사가 【집의 윤행리(尹行履)·사간 신우상(申禹相).】 합계하여 윤영희의 문제를 효주(爻周)할 것을 아뢰고, 사헌부에서는 이익운(李益運)·유운우(柳雲羽) 등의 사건에 대해서 계를 정지할 것을 아뢰었다.
10월 24일 기축
양사가 【장령 조명업(曺命業)·헌납 김효진(金孝眞)·정언 강문회(姜文會)·홍병신(洪秉臣).】 합계한 중에서 윤영희 문제에 대해 당분간 중지하도록 하교하였다.
전 승지 이익운을 삭직하고 집의 유운우는 벌을 한 등급 높여 조처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오늘 헌대(憲臺)의 처사는 너무나 놀랄 일이다. 일에는 경중과 피차의 구별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절의로 보고서 한결같이 항거만 하는 것도 매우 우스운 일이지만 기왕 정계하는 것이 마땅한 처분이라고 말을 했으면 그 말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처음의 소장이 만일 모호하지 않았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말을 했겠는가. 병조가 여러 날을 두고 처분을 기다리고 그 뒤 다시 소를 올려 사실을 거듭 밝혔지만 그것이 과연 무슨 도움을 주고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물며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함께 하고, 벼슬자리에 나오기는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사대부의 미풍이라지만 구차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구차히 함께 할 것이 없는 것이고 결정을 내려야 할 곳에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왜 꼭 빠지면 함께 빠지고 뛰면 함께 뛴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찌 그를 알고 그를 등용한 본의이겠는가. 그렇게 나라를 저버린 사람에게 처분이 없어서는 안 된다. 전 승지 이익운을 삭직하라. 그 같이 잔약한 대간으로서는 전 좌상 보기를 의당 칠십 제자가 공자를 우러러보듯 하겠지만 우러러보는 것은 우러러보는 것이고 일은 일인 것이다. 삼사가 죄를 성토하기 위해 아뢰는 말이 만약 자기 견해와 다르면 아뢰는 일에는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소(疏)도 올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역시 파당 습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 집의 유운우의 죄를 가중시켜 처벌하여 대청에 나온 대신들에게 신의를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이 서학 교수(西學敎授) 이상황(李相璜)의 함답(緘答)에 관해 아뢰자, 전교하기를,
"일전에 보니 초계 문신 남공철의 대책문은 패관 문자(稗官文字)를 인용하고 있었고, 상재생(上齋生) 이옥(李鈺)이 지은 표문(表文)은 순전히 소품(小品)의 체재를 본받고 있었다. 이옥이야 한미한 일개 유생이므로 그렇게 심하게 꾸짖을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반장(泮長)을 특별히 단속하여 승보 시험의 시부(詩賦)에도 그렇게 불경(不經)스런 문체는 엄히 금하도록 아울러 명했었다. 명색이 각신이고 또 문청공(文淸公)의 아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도 저버리고 그렇게 금령을 범하는 일을 하다니 어찌 몹시 놀랍지 않겠는가. 옛날 유자(儒者)들도 이단(異端)의 글들을 인용하는 일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주인을 꼭 물어 무엇하리’인 것이다. 이단은 물론이고 비록 패관체의 글이라도 그 글이 혹 이치에 가깝다거나 그 말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 구미에 맞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별 생각 없이 그냥 써 본 것이라면 이는 공적인 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공철이 대책문 중에 인용한 골동[古董] 등의 말은 그것이 비록 그를 배척하는 뜻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 학문을 즐기지 않았다면야 그 책을 볼 리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 출처를 따져보면 이치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음란한 음악이나 사특한 여색 정도가 아닌 경우이겠는가. 특별히 초계 문신을 불러 더욱 엄하게 신칙하고 이어 공철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어 바른 길로 돌아오기 전에는 대궐에 들어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대궐을 나가서도 감히 집안 사당에 절을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다만 공철 한 사람의 문체 때문에 그랬겠는가.
또 이상황 등에게도 연전에 역시 엄히 경계한 일이 있었다. 마음으로 생각하기에 아직 옛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 못한 때문이라고 여겨서 먼저 그가 맡고 있던 상임(庠任)을 해임시키도록 명하였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물어서 아뢰게 하였더니 그 대답이 그러한데 설마 입으로만 그렇게 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악을 버리고 선으로 향하는 정성이 말 이외로 나타나고 있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야말로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는가. 문제는 허물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직급이 낮은 최필공(崔必恭)에게도 칭찬을 해 주었는데 하물며 경악을 출입하던 신하이겠는가. 전 교수 이상황에게 전직을 그대로 맡기고 대신 임명하려던 후보자 추천은 그만두도록 하라. 다시 생각해 보니 공철 역시 애매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각으로 하여금 공함(公緘)을 보내 공초를 받아 올리게 하라."
하였다. 앞서 정미년에 상황과 김조순(金祖淳)이 예문관에서 함께 숙직하면서 당(唐)·송(宋) 시대의 각종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 등의 서적들을 가져다 보면서 한가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상이 우연히 입시해 있던 주서(注書)로 하여금 상황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였던 바 상황이 때마침 그러한 책들을 읽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가져다 불태워버리도록 명하고서는 두 사람을 경계하여 경전에 전력하고 잡서들은 보지 말도록 하였었다. 상황 등이 그때부터 감히 다시는 패관 소설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남공철이 대책(對策)에 소품의 어투를 인용한 것을 인하여 마침내 공함을 보내 그의 답을 아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이 젊고 재주가 있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실학에 힘쓰도록 하여 그들의 뜻과 취향을 보려 함이었다.
10월 25일 경인
내각이 부사과(副司果) 남공철의 함답에 대해 아뢰자, 비답하기를,
"대답 내용이 비록 장황한 느낌이 드나 문체는 소품을 본따지는 않았다. 그냥 되돌려 주지 않고 그대로 판하(判下)한다. 그가 이 뒤로는 단 한 마디 반 마디라도 혹시 옛 버릇이 묻어나오기만 하면 이는 참으로 어버이를 저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것이라고 다짐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나무꾼이 벼슬아치가 되고 미천한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듯한 일대 좋은 소식이다. 공함 발송에 관한 전교와 답통(答通)의 공초(供招)를 조지(朝紙)에 반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 보게 하라. 그가 비록 전철로 되돌아가고픈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야 하겠는가. 그러니 법을 적용할 필요 없이 그냥 직에 임하게 하여 그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하라.
지금 이 처분은 생각없이 한 일이 아니다. 문풍(文風)이란 세도와 관계되는 것이기에 남공철 한 사람으로 많은 선비들이 타산지석을 삼게 하고자 함이다. 직책으로나 지위로 보아 나와 아주 가까운 각신들도 조금도 가차없이 금지하고 꾸짖고 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데, 더구나 나이 젊은 유생으로서 승보시(陞補試)의 과제(課製) 사이에 발을 내디디고 후일 모두 경·사대부가 될 자들이겠는가. 우선 반시(泮試)에서부터 만일 전교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한결 같이 태학의 법전 격례(格例)에 따라 바로 선비들이 모이는 곳에다 죄과를 쓴 판자를 매달아 두고 더 심한 자는 북을 치며 성토하고 그 다음가는 자는 매를 때리고 그 사실을 기록하여 괄목할 만한 실효가 있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 재가한 사항을 대·소과의 과거 규정에 기록해 두도록 예조가 잘 알아서 처리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신묘
이조 참의 윤행임(尹行任)을 체직하였다가 곧 다시 유임하게 하였다.
10월 27일 임진
상이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7발을 맞혔다.
10월 28일 계사
경모궁(景慕宮)에 배례를 올렸다.
10월 29일 갑오
상이 승지 이신회(李身晦)에게 이르기를,
"내가 등극한 뒤로 그대는 한번도 경연에 오른 일이 없었던가?"
하니, 신회가 그러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수십 년간 시종 반열에 있었는데 군신 사이에 아직 얼굴도 모르다니 그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 먼 시골 출신으로서 그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 이어 얼굴을 들어 쳐다보도록 명하고, 또 다시 이르기를,
"그대 얼굴을 보니 먼 시골 인물 같지 않은데 묻혀 있는 것이 애석하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말을 줄 것이고 따뜻한 봄날이 되면 그대를 꼭 부르리라."
하였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이날은 상이 작은 과녁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크기가 손바닥만하였다. 다섯 발을 쏘아 모두 맞혔다.
10월 30일 을미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서정수(徐鼎修)가 공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포도 대장 조규진(趙圭鎭)과 마주쳤는데 규진이 말을 돌려 길을 양보하지 않아 감사를 수행한 하인들이 나무라며 그가 영솔한 하인들을 붙잡자 규진이 화를 내서 바로 포졸을 풀어 감사의 하인들을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아장(亞將)이나 포장은, 일찍이 이조 참의나 비변사 당상관을 지낸 사람에게는 말을 돌려 길을 양보하는 것이 상례인데 규진이 제 스스로 체모와 예의를 무너뜨렸으니 놀랄 일입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경관(京官)이나 외관(外官)이 길에서 만났을 때 서로 취해야 할 절차가 《대전통편》의 경외관 상견(京外官相見) 조항에 자세히 실려져 있습니다. 문·무관을 따질 것 없이 품계가 서로 대등한 사람이면 《대전통편》에 있는 그대로만 하면 길 피하는 문제로 서로 옥신 각신하는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준행토록 거듭 밝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가 아뢰기를,
"김한동(金翰東)의 상소 가운데 안총(安寵) 건에 대해 해당 도에 공문을 보내 물었더니 사실이 상소 내용과는 상반되고 있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저절로 나겠는가. 영남 유생들이 비록 사사로운 감정을 두었다 하더라도 만일 꼬투리 잡을 만한 단서가 없다면야 무엇 때문에 가죽도 살도 서로 상관이 없는 안총을 끄집어 내어 그렇게까지 야단법석이겠는가. 본 사건과의 관련 여부는 논할 것 없이 그 일을 한 투로 섞어 놓을 수 없을 터인데도 올 적에도 함께 오고 갈 적에도 함께 간 실상은 불을 보듯 훤하다. 더구나 그게 얼마나 중대한 사건인데 감사의 경우는 노루를 쫓다 태산을 보지 못한 격이요, 안총이 처음부터 끝까지 탈이 없었다는 것도 잘못이다. 그가 명명백백하게 행동을 못하고 남들이 말을 하게 만든 죄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엄히 해당 법을 적용하고 그 결과를 장계로 아뢰게 하라. 그렇게 하였는데도 영남 유생 중에 오히려 만족스럽게 생각지 않고 다시 전날과 똑같은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따질 것도 없이 바로 형문하고 귀양보내는 법을 적용하여 분쟁의 불씨를 아주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장악원 제조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외방에서 올라온 악공(樂工)으로서 그 자신이 공역(公役)에 나올 수 없으면 전악(典樂)이 그와 가까운 붙이 중에서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골라 삯을 주고 들여 대행하게 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규례인데, 근래에 와서는 혹 관에서 차출하기도 하여 간혹 폐단이 되고 있기 때문에 몇 해 전부터 빈 자리가 나면 반드시 세 명의 보증인을 세워 빈 자리를 메우며 메워진 사람이 만일 내력이 부실하거나 재예를 잘 익히지 못한다면 세 보증인까지 죄주는 것으로 정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오래되자 폐단이 다시 예전과 같습니다. 다시 옛날 규례대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장악원 소속은 태상(太常)이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자기들 부류의 가까운 붙이가 아니면 방외(方外)의 인사를 채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바꿀 수 없는 규례이다. 그런데 일전에 들으니 태상 소속의 아랫 것들 중에는 방외의 무리가 많이 섞여있다 하더니 오늘 또 듣건대 장악원도 그렇다고 하니 만일 이렇게 가다가는 성균관 하속들도 방외의 것들로 섞어 놓을 것 아닌가. 더군다나 선왕조 때 얼마나 그리 말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감히 그렇게 하고 있단 말인가. 오늘 새벽 이전까지의 일들은 굳이 하나하나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부터 이후로는 옛 규례를 거듭 밝히고 엄한 과조(科條)를 세워 혹시라도 법규를 위반하는 자가 있을 때는 해당 당상관은 제서 유위(制書有違)의 법으로 다스리고, 그러한 상관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는 낭관은 잡아들여 신문 조처할 것이며, 뒤에 부임한 당상관으로서 그것을 바로잡지 않은 자도 역시 법규 위반자와 똑같은 죄를 내릴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엄한 단속령을 별도로 내리고 태상시와 장악원에도 그렇게 게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기언정(奇彦鼎)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또 작은 과녁은 1순 전부를 모두 맞히고 각신들에게 고풍(古風)을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여러 신료들과 연구시(聯句詩)를 지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하늘이 내신 뛰어난 무예로 활 쏘시는 솜씨가 신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백 번 싸워 대업을 이룩하셨다. 그 활과 화살이 지금도 풍패(豊沛)의 옛 궁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그것을 마치 한(漢)나라 고조가 뱀을 베어버린 검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 얼마나 훌륭한가. 그로부터 성스럽고 거룩한 임금이 대를 이어 오면서 선업을 더욱 빛내고 백성들에게 흡족한 덕을 베풀었기에 문치(文治)의 아름다움이 삼대(三代)에 비길 만하였다. 그러나 사예(射藝)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때는 없었던 것이다. 역사와 야승(野乘)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것들은 그만두고라도 궁중에 전해 내려 오는 얘기들과 또는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것만 하더라도 활 쏘는 기법의 신묘함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 쏘는 것이 사실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인 것이다.
나도 천성이 활쏘기를 좋아하고 또 그것이 선업을 이어가는 한 가지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 젊은 시절에는 활쏘기를 자주 했고 쏘았다 하면 40여 발을 맞힌 적이 자주 있었으나, 중간에 10여 년은 그만두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10여 년 동안에도 때로 혹 활쏘기를 하긴 했어도 매번 몇 순(巡)에서 그쳤고 10순을 다 쏘아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달 12일 을해에 처음으로 10순을 쏘아 그날은 41발을 맞혀 50점을 얻었고, 5일을 지나 16일에는 39점을 얻었고, 다음날 17일에는 32발을 맞혀 38점을 얻고, 18일에는 41발을 맞혀 52점을 얻고, 20일에는 41발을 맞혀 51점을 얻었는데 그 날이 바로 전(箋)을 지어 올린 제신들이 함께 모시고 쏘았던 날이다. 22일에는 46발을 맞혀 58점을 얻었고, 26일에는 47발을 맞혀 51점을 얻었는데 그 날은 내각에 고풍으로 붓 한자루를 내리고 이르기를 ‘이 뒤로는 49발 안쪽으로는 모두 이 격례(格例)를 쓰리라.’ 하였던 날이다. 28일에는 또 41발을 맞혀 52점을 얻었고, 29일에는 45발을 맞혀 57점을 얻었으며 또 작은 가죽 과녁을 쏘아 한 순에 모두를 명중시켰고 또 작은 베과녁도 쏘아 한 순에 4발를 맞히고는 전일과 같이 고풍을 내렸다. 처음 10순을 다 쏘기 시작한 지 모두 9일 동안에 많이 맞힌 때도 있었고 혹 적게 맞히기도 하였으나 요컨대 옛날의 성적과 비교하여 솜씨가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그 날은 또 유엽전(柳葉箭)으로 작은 과녁을 쏘아 10순에서 앞 4순은 연이어 전 수를 명중시켰고 제5순에서 또 연거푸 네 발까지 명중시켰다.
보통 활쏘기를 하는 자들이 49발을 맞힐 것을 목표로 할 경우 제4순부터 이후에는 네 발을 명중시키면 중지하고 매번 남은 그 한 발을 두었다가 제9순을 지나 따로 모아 둔 것으로 1순을 쏘아 모아 둔 바의 숫자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 관례에 따라 남은 화살을 모아 두고 쏘지 않았으며 순기(巡旗)도 눕혀두고 세우지 않았었다. 제6순도 그리 하였고 제7순도 그리 했으며 제8순과 9순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9순을 다 쏘고서 따로 1순을 쏘아 모든 화살을 명중시켜 채우고 난 뒤에야 순기 다섯 개를 함께 세웠던 것이다. 제10순에 와서 연거푸 맞히다가 네 번째 화살을 쏘려면서 좌우에 이르기를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서 왼쪽 제5시(矢)를 쏘아서 명중시켰다. 통틀어 10순(巡)을 쏘아 49발을 맞히고 72점을 얻었는데 제1순에 다섯 발 명중에 8점, 제2순은 다섯 발 명중에 7점, 제3순은 다섯 발 명중에 7점, 제4순은 다섯 발 명중에 7점, 제5순은 다섯 발 명중에 6점, 제6순은 다섯 발 명중에 8점, 제7순은 다섯 발 명중에 8점, 제8순은 다섯 발 명중에 7점, 제9순은 다섯 발 명중에 7점, 제10순은 네 발 명중에 7점이었고 또 작은 가죽 과녁을 쏘아 한 순에 다섯 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또 유엽전 한 순을 쏘아 다섯 발을 맞히고 6점을 얻었다. 이쯤 되고 보니 더 이상은 얻을 수 없는 많은 점수를 획득하여 마치 무엇인가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이에 각신들에게 【오재순·서유방·이병모·박우원·서용보·정동준(鄭東浚)·윤행임·서영보·남공철·김조순.】 고풍으로 각기 길이 덜 들여진 말 1필씩 내리고 검서관(檢書官) 이하는 선물을 차등있게 내렸으며, 고풍 지면에다 글을 써서 내리기를,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법이어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데 10여 년 이래로 10순을 다 쏘는 일은 계속하지 않다가 근일에 와서 팔의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 몇 차례 10순을 다 쏘아보았는데 10순에 40여 발이 명중되어 고풍을 내렸더니 경들이 전을 올려 축하하기에 내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49발까지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을 청하라.’ 했었는데 오늘 명중한 화살 수가 약속했던 그 수와 맞아떨어졌기에 문방(文房) 용구와 마첩(馬帖) 등을 제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들이 이미 축하 전을 올렸으니 또 고풍으로 답을 해야겠다. 그리고 겸하여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은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뜻인 것이다."
하고, 또 끝에다 낙관하기를,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제신들과 연구(聯句)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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