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신
윤대하였다.
11월 2일 정유
춘당대에 나아가 관궁(官弓)으로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행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전에 활쏘기에서 49발을 맞혔다. 그래서 자궁(慈宮)께서 음식을 준비해 내리셨으니 경들과 함께 하고 싶다."
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3일 무술
관상감이 아뢰기를,
"일관(日官) 최경렬(崔景烈)이 추수(推數)를 잘못하여 절후를 잘못 짚었습니다. 규정에 정해진 대로 죄를 주어 파면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오늘 비 오고 내일 개이고 하는 것은 꼭 맞히기 어렵다 하더라도 달이 필성(畢星)에 접근하고 돼지가 물을 건너면 비가 온다는 것은 경전에도 분명히 있는 말인데, 명색이 일관이라는 자가 풍우부(風雨賦) 하나도 제대로 안 읽고 추수하는 법도 모르니 이러한 무리를 어찌 파면시켜 곤장이나 치고 말 것인가. 법령을 신칙하는 뜻에서 태거시키고 참작하여 형조 판서로 하여금 엄히 곤장을 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어제 관궁으로 중일 시험을 보인 기록에 오위 장(五衛將) 노상추(盧尙樞)가 눈에 띄어 일찍이 병조 판서를 지낸 자에게 물었더니 바로 병사(兵使) 노계정(盧啓禎)의 손자라고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사적은 비록 알고 있었으나 그 손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몰라 찾아 등용했으면 하는 생각은 늘 있었으면서도 그리 못했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 시기(試記)에 올라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운이 있었다고 할 만한 일이다. 어제 저녁에 불러서 그의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더니 과연 수문장으로 있으면서 맡은 바를 잘 수행하여 부장 추천으로 등급을 뛰어 넘어 병사가 됐던 사람이었다. 더욱이나 그의 할아버지가 수문장으로 임명된 것이 옛 임자년 동짓달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또 올 임자년 동짓달에 알게 되었으니 그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모든 것이 어떠한지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병판으로 하여금 불러 만나본 뒤에 과연 감당할 만하거든 당상 선전관 자리를 더 늘려 추천하도록 하라."
내각에 전교하기를,
"그것이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만 역시 형정(刑政)에 관계되니 어찌 죄를 짓고서 요행히 면할 수 있겠는가. 이상황(李相璜)과 남공철(南公轍)은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문계(問啓)하고 김조순(金祖淳)만은 동일한 죄를 지은 부류인데도 죄의 그물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감히 사행길에서 의기양양하였다. 상황과 공철은 어떤 사람이기에 저같이 고생을 겪어야 하고 조순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인가. 상황과 공철에게 물었던 조목으로 그대로 김조순이 도착해 있는 지방의 도신에게 관문(關文)을 띄워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 이전에 답통(答通)을 받고 반성하는 글과 시(詩)도 지어 올리게 하여 공철이 지은 것과 함께 게시판에 써 걸도록 하라. 그리고 심상규(沈象奎)도 요행히 제재를 피하게 할 수 없으니 역시 공함을 띄워 공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전 대교(待敎) 심상규의 함답 내용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구두가 떨어지지 않으니 언문으로 번역하고 주해를 달아 올리게 하라."
하였는데, 대체로 곤욕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상규가 글자마다 주해를 달아 올리자, 상이 그의 재주에 대해 연신(筵臣)들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윤겸(李潤謙)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4일 기해
전교하였다.
"이달 6일이면 해마다 친히 술잔을 올렸었다. 그것은 선왕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나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날씨가 춥다 하여 예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6일에 육상궁(毓祥宮)에 친히 술잔을 올리는 예를 행하겠다고 명하였다.
대사헌 기언정(奇彦鼎)과 대사간 유강(柳焵)을 체직하고, 이홍재(李洪載)와 윤호(尹㬦)로 대신하였다가 곧 둘 다 체직하고, 정창순(鄭昌順)을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으로, 이갑(李𡊠)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11월 5일 경자
서유방(徐有防)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우원(朴祐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박우원과 이병정(李秉鼎)을 발탁하여 도총관(都摠管)으로, 임제원(林濟遠)과 권이강(權以綱)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다. 모두 총관(摠管) 후보에 추가로 추천되어 새 품계를 받은 것이다.
11월 6일 신축
동향(冬享)을 동짓날에 거행하도록 전교하였다. 처음으로 행하는 예였다. 제사를 한밤중에 거행할 수 있도록 마련하게 했는데 동향을 경모궁(景慕宮)에서 친히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병모(李秉模)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홍재(李洪載)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을 체직하고 대사헌 이병모로 대신하게 하고, 박우원으로 병모가 있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대사간 이홍재를 체직하고 윤행임(尹行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부교리 이동직(李東稷)이 상소하기를,
"대계(臺啓) 속의 여러 역적들은 모두 다 천지 사이에서 잠시도 숨을 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청을 윤허하지 않고 한결같이 용서해 주어 소굴이 더욱 공고해지고 뿌리가 점점 뻗어가기만 하여 근일에 와서는 흉악한 역적 무리가 배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토(天討)가 하루 늦추어지면 의리도 하루만큼 어두워지고 천토가 이틀 늦추어지면 의리도 이틀만큼 어두워집니다. 진실로 분명한 전지를 빨리 내려 세상이 모두 알게 육시(戮屍)의 벌을 시행함으로써 대성인(大聖人)이 명령을 미덥게 하는 의도를 보여야 할 것인데 여러 날을 고이 기다려도 아직 아무런 명령이 없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아, 역적 신기현이 남모르게 딴 뜻을 품고 있는데도 암암리에 그와 내통한 자가 누구였으며, 역적 기현이 감히 자성(慈聖)을 속였는데도 그를 도와주어 자기 편으로 삼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과거 시험장에서는 찌를 슬쩍 넘겨주고 옥정(獄庭)에서는 대질 공술을 하면서 그의 죄를 결정짓는 데 영향을 주기 위해 서슴없이 감싸주고 자진하여 딴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였으니 또 무슨 변괴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남몰래 다른 모의를 의도하여 꾸민 지 이미 오래 된 것이고 또 평소에 물려받은 것입니다. 맨 먼저는 재상이 권리를 독단하는 흉악한 논의를 하게 되었고, 두 번째는 자전을 무함하는 역적으로 변했으며, 세 번째는 역적 자식에게 강경 찌를 슬쩍 넘겨주었고, 네 번째는 전하의 앞에서 역적을 두호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몸은 다르나 한통속이어서 앞에서 제창하면 뒤에서 호응하였던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오싹 소름이 끼칩니다. 따라서 그들 맥락과 근원을 규명해 보면 그 역적은 바로 이재간(李在簡)과 기현의 후신이자 채제공(蔡濟恭)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사가 합계하여 아뢰어서 그 부분을 지워버렸으니 어찌 매우 잘못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다시 원래 아뢰었던 것을 나라에 반포하여 그들이 극악한 역적임을 분명히 밝히시고 속히 견책하여 죄를 주소서.
아, 저 채제공이 군주를 저버리고 나라를 등졌으며 역적을 두호하고 악당과 무리를 이룬 죄를 어떻게 다 처벌하겠습니까. 지엄한 자리를 지척에 두고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꺼리는 기색없이 오직 제 가진 마음이 드러나지 아니할까 제 입지가 행여 흔들릴까 그것만을 두려워하면서 마치 역적을 위해 절의라도 세우려는 사람같았으니 그야말로 흉측하고 끔찍합니다. 그의 다른 죄악은 다 그만두고라도 일전에 전하의 비답 속에 ‘그것만 가지고 죄를 성토하더라도 어느 법인들 적용하지 못하겠는가.’ 하신 그 하교에 대해 신은 참으로 흠앙하고 가슴에 새겨 담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삼사의 청원을 따라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소서.
또 이가환(李家煥) 같은 자는 채제공에게 빌붙어 그의 후원을 받아왔으면서도 역모의 진상이 낭자하게 드러난 오늘까지 그는 그의 당여(黨與)로서의 처벌에서 빠져 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외람되이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각의 바른 논박도 무시하고 대신들이 소를 올려 배척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염치 불구하고 부임하여 갔으니, 그 방자하고 기탄없는 것이 비록 그들이 늘 하는 버릇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인간의 수치스러운 일을 모르는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국가에서 전후로 인재 선발을 하면서 단지 문장 한 가지만을 보고 하였지만 괴이한 귀신 같은 무리라면 비록 하찮은 재예(才藝)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죄를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들의 문장이라는 것이 학문상으로는 대부분 이단(異端) 사설(邪說)들이고 문장이래야 순전히 패관 소품(稗官小品)을 숭상할 뿐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경전(經傳)을 언제나 별 쓸모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그들 문장은 문장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지키는 이 때에 그러한 무리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가환에게 성균관을 관리하도록 제수한 명을 아울러 환수하고 이어 사판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 세도를 위하고 명기(名器)를 소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먼저 이가환의 문제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다. 그대는 가환의 문체(文體)가 경전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로 얘기를 삼았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한 마디 하고 싶으면서도 못하고 있던 문제였다. 그런데 그대가 그 말을 하니 참으로 이른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격이다.
대체로 우리 나라가 비록 작으나 많은 백성이 팔역(八域)에 살고 있다. 그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불과해야 날으는 것들은 날으는 것대로 물속에 잠겨 사는 것들은 잠겨 사는 대로 그들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게 하고 모난 것은 모난 대로 둥근 것은 둥근 대로 기량에 따라 쓰면 그뿐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편에 따라 잘 이용하는 방법인 것이다. 주 부자(朱夫子)의 문장은 하늘 같고 땅 같고 바람 같고 구름 같으며, 권도와 정도를 적절하게 쓰고 천지의 기운을 닫았다 열었다 할 수 있는 큰 역량을 소유하여 오계(五季)의 누추함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천 명의 대군을 깨끗이 물리치며, 그 맛이란 고기를 씹는 맛이요, 그 용도는 베나 비단처럼 쓰여져, 그 글을 읽노라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맑아져서 마치 증점(曾點)의 비파 소리와 안자(顔子)의 거문고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리하여 한 번 책을 펼쳐들면 종묘(宗廟)와 백관(百官)을 본 듯이 훌륭하고 장엄한 것이다. 그러나 왕양명(王陽明)은 유도(儒道)에 가까운 자품을 타고났으면서도 너무 지나친 데가 있어 오로지 양지(良知)에만 전력하고 반약(反約)만을 힘쓰면서 문학(問學)이라곤 아예 덮어두었다. 태원(太原)에서 뛰놀던 말이 그 높은 총령(蔥嶺) 사이를 내닫고 어디에서 온 새 깃발이 개울가 보루에 이채를 보이는 듯하였으나 끝내 성인의 문에서 버림을 당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 밑으로 내려와서 비속하고 음란하면서도 그럴싸한 맛을 지닌 자질구레한 패관 소품들을 입 가진 사람이면 한 마디씩 해보지만, 그것은 가령 귀자(龜玆)나 부여(夫餘) 같이 작은 나라들이 제각기 제 나름대로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모기 눈썹이나 달팽이 뿔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을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오류를 바로잡고 사람사람 다 만나서 그 틀린 점을 일정하게 고쳐주기로 들면 그 윗 사람이 된 자가 너무 힘들지 않겠는가.
저 가환으로 말하면 일찍이 좋은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었지만 백 년 동안 벼슬길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알이나 꿰면서 떠돌이나 시골에 묻혀 지내는 백성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러자니 나오는 소리는 비분 강개한 내용일 것이고 어울리는 자들이라곤 우스갯 소리나 하고 괴벽한 짓이나 하는 무리일 것 아닌가. 주위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편파했을 것이고 말이 편파적일수록 문장도 더욱 괴벽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채(五采)로 수놓은 고운 문장은 당대에 빛을 보고 사는 자들에게 양보해 버리고 이소경(離騷經)이나 구가(九歌)를 흉내냈던 것인데 그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짓이었겠는가. 조정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기자의 홍범(洪範)을 길잡이로 하고 거룩한 공적과 신비로운 교화를 남기신 선왕의 뒤를 이어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 팔황(庭衢八荒)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개의 창문 위에다 죽 걸어 두고는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나의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누더기를 걸친 자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는데 가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그대는 가환에 대해 말하지 말라. 가환은 지금 골짜기에서 교목(喬木)으로 날아 오른 것이고 썩은 두엄에서 새롭게 변화한 것이다. 그의 심중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왜 점차 훌륭한 경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근심하는가. 설사 가환이 재주가 둔하여 사흘 동안에 괄목할 만한 성장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또 어찌 번번이 양보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훌륭하게 내지 않겠는가.
맹단(盟壇)에 올라 주도권을 잡고 긴긴 밤 흐리멍덩한 꿈 속에서 대일통(大一統)의 권한을 다시 밝히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으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준수한 백성도 있고 우둔한 백성도 있어 먼저 깨닫고 늦게 깨닫는 차이는 있으나 일단 깨닫고 나면 같은 것이다. 설사 혹 아둔하여 탈을 벗지 못하는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태양 앞에 횃불이며, 군자에게 있어 소인이고, 고니에게 있어 땅 속의 벌레인 것이니 주인은 주인노릇하고 손은 손노릇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시경》 3백 11편을 편집하면서 상간(桑間)·복상(濮上)의 시를 법도에 맞고 의미 심장한 대아(大雅) 사이에다 함께 끼워 넣었던 것이다. 오늘 이 정성이 담긴 깨우침을 들은 자들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에 느낌을 받고 구비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 경계하여 저도 모르는 사이 날로 선한 데로 옮아가 집집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나라의 운명을 영원하도록 하늘에 비는 근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비록 비답은 내렸으나 금령에 저촉되는 말이 많으니 원소(原疏)는 승정원으로 하여금 태워버리게 하라."
하였다.
11월 7일 임인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고서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고 이어 의식을 미리 연습하였다.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8일 계묘
친히 경모궁에 동향(冬享)을 올리고 육상궁(毓祥宮)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서, 하교하기를,
"지금 나의 유일한 생각은 선조의 덕업을 받들고 백성을 위하는 것뿐이다. 오늘은 동지이므로 직접 향불을 피워 올리고 전궁(殿宮)에 배알을 하려고 한다. 환궁할 때 연(輦)을 잠시 멈추고 공시(貢市) 사람들을 불러 보리니 해당 당상관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대령하도록 하라. 공시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서 만나보는 것은 서울 백성 중에서 근본에 해당하기 때문에서이지만 그렇다고 멀고 가까움이 없이 똑같이 보아야 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여러 도의 민생들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같은 추위에 목화가 흉년이어서 몸을 가릴 너절한 옷마저 없을 것이 눈 앞에 선하고 세금 독촉에 배고파 울부짖는 정경도 눈앞에 선하다. 그런데 흉년이 더 심한 삼남 같은 곳은 근래 백성들의 사정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요사이 듣자 하니 수령들이 대부분 정사를 잘 보살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점이 더욱 마음 쓰인다. 그러나 아직 처분을 내리지 않은 것은 도백이 어떻게 수습하는가를 보고 겸하여 그들 스스로 자발적 노력이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새 환자를 유예하고 감해 주도록 이미 모두 배정을 하였는데 백성들도 그 내용을 훤히 다 알고 있는가. 이러한 뜻을 오늘 안으로 삼남과 관동의 도신들에게 알려 환자를 받아들일 때 불가불 변통이 있어야 하겠으면 되도록 변통을 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이날 연호궁(延祜宮)에 들러 전배하고 선희궁(宣禧宮)122) 에 다례(茶禮)를 행하고서 돌아 오는 길에 돈화문에 이르러 연을 멈추고 공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어려운 점들을 묻고 궐내로 돌아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였다.
내각이 동지 서장관 김조순의 함사(緘辭) 내용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어느 사람이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는 대현(大賢)이었으면서도 사냥하고픈 생각을 끊지 못하였고 어린 시절 손자(孫子)·오기(吳起)의 병서(兵書)들을 즐겼었다. 대체로 학자들이 자품이 높다 보면 먼 곳에 있는 것에 마음이 치닫고 재주가 있다 보면 밖으로 내닫는 법이다. 그것이 그름을 알고서 고치기를 꺼리지 않고 고치고서는 다시 범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함답을 보니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고 뜻이 풍부하여 무한한 함축미가 있음을 깨닫겠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고 밤 깊은 줄도 모르게 무릎을 치곤하였다. 저 부들부들하다 못해 도리어 옹졸해진 남공철의 대답이나 경박하게 듣기 좋게만 꾸민 이상황의 말, 뻣뻣하여 알기 어려운 심상규의 공초는 모두가 입술에 발린 소리로 억지로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해 한 소리들이지만 이 사람만은 할 것은 한다, 못할 것은 못한다고 하여 결코 스스로를 속이거나 나를 속이려 함이 없음을 알겠다. 이 판부(判付)를 파발마를 보내 그에게 알려 그로 하여금 마음 놓고 길을 떠나 먼 길을 잘 다녀 오게 하라."
하였다.
11월 9일 갑진
차대하였다. 상이 포도 대장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김 판부사가 윤구종(尹九宗)의 아들을 엄중히 조사할 것을 상소로 청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그 소에 이르기를, 만일 조사를 한다면 직무 수행을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공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종의 아들 한 사람 때문에 어찌 국청을 열 수가 있겠는가. 김동선(金東善)이 억울함을 하소연한 글이 정원에 있다 하니 경이 찾아가지고 가서 사실을 캐묻도록 하라. 그러나 박 판부사(朴判府事)의 말에 대하여는 똑같이 대신인데 어떻게 캐물을 수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구종의 아들을 지금 단지 대신의 일 때문에 포도청으로 하여금 캐묻게 한다면 뒤에 폐단이 있을 것이니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심태가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말이 참으로 일의 체모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이 어떻게 감히 그 같은 도리가 있단 말인가. 지금 의금부 직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는 모양인데 겸임하고 있는 동의금(同義禁) 자리를 체차할 것이니 즉시 나가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영희를 나핵(拿覈)하란 전교를 쓰도록 명하자, 승지 홍의영(洪義榮)이 아뢰기를,
"영희가 저지른 죄가 어떠한데 어찌 나핵하는 것으로 조처를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음직 승지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영희 문제에 대해 지난번부터 소견을 아뢰고 싶었으나 상께서 번번이 파당의 버릇이라고 전교하셨기 때문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었습니다. 영희의 역모 사건은 지금 와서 다시 조사할 일은 별로 없고 바로 국청을 열어 국가의 법을 쾌히 바루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국가로서는 실형(失刑)의 후회가 없을 것이고 인심도 가라앉고 수습이 될 것인데 요사이 내려진 금령에 대해 신으로서는 천지처럼 크신 전하에 대하여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국(拿鞫)과 나핵(拿覈)이 별로 경중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번 캐물어보아서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찌 타당치 않겠는가. 내 어찌 영희 한 사람을 아껴서이겠는가. 그것이 미미한 일이지만 대관이 끌려들어가는 일 아닌가. 전 좌상이 나를 너무 믿었기 때문에 근일에 그러한 낭패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오재순(吳載純) 등이 함께 아뢰기를,
"영희가 그 얼마나 흉험하고 극악한 역적인데 단지 나핵으로 마무리를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평소에는 조용히 잠자코 있다가 지금에 와서 비로소 이같이 번거롭고 시끄럽게 굴며 그대로 갈아 없애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국가 체통으로 보아 과연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채제공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아뢰거나 대답할 때 대부분의 말들이 조심성이 없고 거칠어서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전연 두려워하거나 꺼려함이 없었다. 조정에 만일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짓을 탄압할 만한 사람이 있었던들 어찌 감히 이같이 굴었겠는가. 전후 대신(臺臣)이나 비변사 당상관들 할 것 없이 일언 반구도 바로잡고 경계하는 말이 없었고 단지 한 사람의 중신 정창순(鄭昌順)이 몇 차례 면박을 주면서 혹간은 너무 박절하다 싶을 때도 있었다. 근래에 조신들이 모두 고기나 먹는 배짱들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모두 예사롭게 보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료들은 모두가 정창순의 죄인이다.
대체로 충신과 역적의 구별이 환하여 알기가 쉽다면 어찌 서로 다른 논의가 있겠는가. 신기현이 전첩(專輒)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다소 동요하는 듯도 하였으나 그 때에는 재간(在簡) 이외에도 괴이한 논의를 한 자가 많았었고 나도 그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그가 역적질한 것을 밝혀야만 그 역적이 승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입을 다물었던 것이고 기현을 지금까지 보류해 두고 있는 것도 나로서는 깊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들은 그렇게 고집할 필요가 없다. 지난번 김우진(金宇鎭)의 일만 하더라도 그때 만일 바로 정계(停啓)하였더라면 어찌 지금까지 가까운 섬에다 두고서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고 있겠는가. 근래 대간이 한 일들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병모(李秉模)와 행 부사직 김상집(金尙集)이 아뢰기를,
"영희에 대한 처분이 매번 그러한 까닭에 의리가 점점 어두워져서 지난날 채제공의 일이 벌어지게까지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아울러 잡아다가 심문하여야 하겠으나 우선 그대로 놓아두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일은 그같이 문제삼아 고집할 일이 아닌데 너무나 번거롭게 떠들고 있다."
하고, 이어 여러 대간과 병모와 상집을 중하게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잡아다가 심문하여 그가 만일 아무런 죄가 없음이 드러난다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 아닌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입으로는 그렇다고 하면서 마음은 그렇지 않은 자들도 모두 용서할 것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시 생각해 보고 처분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삼사가 【집의 송민재(宋民載), 장령 김달순(金達淳)·최중규(崔重圭), 지평 박효성(朴孝成), 교리 임도호(林道浩), 정언 한용탁(韓用鐸), 수찬 서유련(徐有鍊).】 장단부에 부처한 죄인 채제공을 우선 외딴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을 계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는 나를 저버렸어도 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합사(合辭)의 비답에서 이미 말하였다. 참으로 이른바 지금의 나는 바로 이전의 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버린 죄가 종시 석연찮은데 한결같이 윤가(允可)를 하지 않고 공론마저 한 번 펼 수 없다면 그를 징계하여서 결말을 맺는 도리가 아닌 것 같다.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헌대(憲臺)가 앞서 장령 유숙(柳)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계청한 데 대하여 비답하기를,
"어제 동지가 지나갔다. 모든 일을 다 새롭게 하고자 하는데 이 계문(啓文)을 지금까지 베껴 돌리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그러나 이미 공론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그날 대청에 나왔던 헌부(憲府)의 대신(臺臣)들 모두에게 간삭(刊削)의 법을 적용할 것을 청한 데 대하여도,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또 전 교리 이청(李晴)에 대하여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열어 그의 속셈을 캐내고 그에 해당하는 형벌을 시원스레 내리게 할 것을 청한 데 대해 비답하기를,
"그 문제는 일단 신문하여 그가 사람인가 귀신인가를 가려야 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처분을 내렸던 여러 중신들을 차례차례 서용하신 데 대해 신들이 정말 전하의 덕을 우러르고 있거니와 다만 중신 이문원(李文源)만은 죄명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저 여러 중신들이 공의를 강력히 지지하고 흉론을 엄히 다스렸던 것이 모두 충성과 의분에 북받쳐 한 일인데 서용의 명령이 한쪽은 내려지고 한쪽은 내려지지 않는다면 그 어찌 만민을 동일시하고 충언을 잘 따르시는 전하의 도량에 흠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문원에 대한 처분을 그대로 두라고 하신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오늘을 세초(歲初)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아룀에 대해 망설일 게 뭐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고 아울러 죄명도 씻어주도록 하라. 오늘로써 윤영희와 연관된 일들은 모두 끝이 났다. 지방으로 보임된 것이나 귀양보낸 것이나 모두 씻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이, 이청(李晴)의 문제로 추국청을 차리라고 한 전지(傳旨)에 대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모두 함께 새로워지자는 뜻에서 일단 심문해 보고 처리할까 하여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본말(本末)이 전도된 듯하다. 유성한(柳星漢)을 심문하지 않고 이청을 먼저 심문하면 모양새도 갖추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친밀하게 지냈는지의 여부는 따질 것 없다 치더라도 그동안의 사실들에 대해 아무것도 파악된 것이 없는데 느닷없이 국청을 열어 캐묻는다면 그 더욱 뭣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냥 둬두라."
하였다.
사헌부가 【집의 송민재, 장령 김달순·최중규, 지평 박효성.】 아뢰기를,
"아, 통탄스럽습니다. 역적 구선복(具善復)은 바로 천지 고금을 통틀어 만번 죽이는 것으로도 오히려 죄가 가벼울 극악한 큰 역적입니다. 그 역적의 친족으로서 사건에 관련되어 귀양가 있는 자들에 대해 지키고 감시하는 방법을 십분 철저히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고금도(古今島)의 죄인 구선형(具善亨)은 남몰래 바깥 사람과 내통하여 그의 첩을 데리고 있은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다는데 방백이나 수령된 자들이 그를 막고 살피지 않고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그 얼마나 놀랍고 분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 자를 내버려 둔다면 의리가 엄숙해지지 않고 규범이 더욱 무너지게 되어 닥쳐올 걱정이 말로 다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정미년 4월 이후의 그 도의 도신에게 책임을 물어 삭탈 관작하고 그 고을 수령과 귀양지 진영(鎭營)의 변장(邊將)에게는 똑같이 귀양의 벌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단부에 부처된 죄인 채제공을 석방하였다. 의금부가 제공을 온성부(穩城府)의 외딴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을 아뢰자, 전교하기를,
"그는 나를 저버렸어도 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았고, 지금의 내가 바로 옛날의 나임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저버린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지난 날 그의 행동이 안면 관계로 그랬다고 한다면 어찌 그다지도 어려워함이 없었고, 사정에 치우쳐 그랬다고 한다면 어찌 그다지도 무엄하단 말인가. 이들 중 어느 하나에만 해당되어도 귀양살이 이하의 형률은 그 죄에 합당하지 아니한 것이다. 오늘 아뢴 대로 하라고 한 의도는 단지 공론을 중히 여겨서 뿐만은 아니다. 귀양지가 이미 정해졌으면 바로 귀양지로 보내면 되지 하필 온성까지 가고 난 뒤라야만 비로소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는가. 또 생각해 보면 안면 관계이건 사정 관계이건 따질 것 없이 그의 본심에 거짓이 없음을 내가 이미 훤히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당초에 왜 그렇게 급급하게 처분을 내려 꼬리가 더 커지지 않게 만들었겠는가. 첫째도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도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나 지금 동지가 되어 함께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날이 아닌가.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동짓날의 밤중은 천심도 흔들림이 없다.[冬至子之半 天心無改移]’고 하였다. 이 초기(草記)는 그대로 두고 장단부에 부처된 죄인 채제공을 특별히 석방하여 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한번 캐물어 보고 처분을 내리겠다고 이미 하교하였으나 어제 이전에는 연일 재일(齋日)과 맞닥쳤고 내일은 또 여느 날과 다른 날이고 17일 이전은 또 재계하는 날과 맞서 있어 오늘 입시한 대신들에게 전에 유시했던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계속 침묵만 하고 있는 것도 신의를 보이는 뜻이 아닌 듯하다. 전지를 먼저 받아두고 재일이 지난 뒤에 거행하더라도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찮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삼사의 반열에 출입하던 자이겠는가. 그의 실정이 이러한지 저러한지 본 사건이 의도적으로 한 일인지 아무 생각없이 한 것인지 그에게 묻지도 않고서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애매한 상태에 있게 한다면 그러한 형정(刑政)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재계하는 기간이 지난 뒤에 해부로 하여금 윤영희를 붙잡아다 형문하고 그 결과를 아뢰게 하여 죄가 있으면서 요행히 빠져나간다거나 죄가 없는데도 잘못 걸려듦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홍명호(洪明浩) 등이 그 전교를 반포하지 않으려고 갑자기 사알(司謁)을 불러 전교를 되돌려 올렸다. 상이, 승지가 되돌려 올리려면 당연히 중관(中官)에게 청하여 구두로 그 뜻을 아뢰어야 하는데도 사알을 시켜 올려온 데 대하여 명분을 무시하고 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진노하고는 여러 승지들을 의금부에 내리고 명호는 위엄을 높여 엄히 책문하였다.
이때 대사헌 박우원(朴祐源)과 대사간 윤행임이 아뢸 일이 있어 각신(閣臣)의 신분으로 자리에 나왔다가 윤영희를 잡아 심문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계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조금 전에 승지가 전교를 되돌려 올리면서 승전색을 통해 구두로 아뢰지 않고 사알을 불러다 올린 것은, 대체로 근래에 조정 신료들이 징계하거나 토죄하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면 비록 남을 놀라게 하는 행동일지라도 서슴없이 하면서 자기 자신 분수를 넘고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지는 것도 모르는 습성 때문이니,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바라건대 현재 수감되어 있는 죄인 홍명호는 외딴섬에 안치시키고 그 나머지 승지들도 모두 귀양보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옳다. 그러나 처분도 다 근거가 있어 한 것이다."
하더니, 조금 후에 전교하기를,
"아까는 매우 옳은 말이다 싶어 가상하다고 하긴 하였으나 그 문제를 그렇게 고집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입시했던 양사의 장관(長官)을 체직하고 이갑(李𡊠)과 서영보(徐榮輔)로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홍명호 등의 공초를 가지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신하가 분수 밖의 짓을 했을 때는 비록 미세한 일일지라도 꺼릴 줄 모를 염려가 있고 비록 미미한 과오일망정 끝없이 되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성인이 그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이시(羸豕)와 견빙(堅氷)123) 의 경계를 보여 천하 만세의 난신 적자(亂臣賊子)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한 것이다. 요사이 분수와 의리를 멸시해 버리는 것이 버릇이 되어 심지어 오늘 승지들의 무엄한 행동이 있기까지 하였다. 이게 어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인가. 윤영희를 잡아서 심문하도록 한 명령에 대해서도 여러 신료들은 단지 그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기에 급급할 뿐 국청을 열 것인가의 여부는 되돌아볼 겨를도 없었어야 했으며 설사 어려운 문제가 있어 전교를 되돌려 올리면 당연히 옛 예(禮)를 따라 했어야지 오늘 한 짓이 과연 어떠한가. 대사헌과 대사간이 아뢴 말이 참으로 옳다. 이렇다 저렇다 막론하고 위엄을 높여 엄히 묻는 것이 그 얼마나 절엄(截嚴)한 일인가. 그런데, 이른바 공초(供招)라는 것은 너무나 거칠고 엉성하다. 오늘날 기강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판의금 홍억(洪檍), 지의금 서유방(徐有防), 동의금 김이희(金履禧)에게 모두 귀양의 형벌을 내리고 홍명호에게는 다시 더 위엄을 높이라. 만일 제 분수를 지나치게 된 곡절을 바른 대로 불지 않으면 바로 형문(刑問)을 실시한다는 뜻으로 초기(草記)하고, 그 나머지 죄수들도 엄히 물어 공초를 받되 그 공초 내용을 적어 그 시각 안으로 들여오도록 하라. 해당 당상을 귀양보내는 일은 다시 받은 공초가 입계되기를 기다려 전지를 받도록 하라. 만일 지체될 경우 기록을 맡은 도사(都事)를 잡아다가 조처할 것이다."
하고, 명호 등이 두 번째 공초를 하자, 형장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신헌조(申獻朝)가 사알을 부르는 것에 반대하였음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고서 극히 가상하게 여기고 또 첫 공초 때 자기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은 더욱 잘한 일이라 하여 그를 우선 석방하도록 명했다. 세 번째 공초를 하자 또다시 형장은 쓰지 말고 다시 물으라고 명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을 이조 판서로, 정호인(鄭好仁)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아, 반역이란 것은 천하의 대악(大惡)입니다. 신하 된 자가 한 번 이런 죄명을 쓰게 되면 종신토록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신은 운명이 기박하여 10여 년 이래로 억울하게 이런 죄명을 쓴 것이 여러 차례입니다. 그러나 모두 망녕스레 행동했던 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들이니 스스로 저지른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신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너무 과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오늘 이 사건의 두 역적과 같이 그것을 기화로 여기고 암암리에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악랄한 솜씨로 완전히 덮어 씌우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는 자들이 있었겠습니까. 가령 그러한 말이 미관 말직(微官末職)에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왔더라도 조사를 하여 완전 허위임이 입증되기 전에는 오히려 다시 사람 축에 끼일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말이 모든 벼슬아치를 감독하고 통솔하는 대관(大官)에게서 나왔으며 불초한 신의 몸도 일찍이 외람되이 대신의 자리에 있던 자임에야 뭐라 말하겠습니까.
아, 저 유성한(柳星漢)과 윤구종(尹九宗) 두 역적의 천지에 다함이 없는 죄악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와 함께 한 하늘 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현재 자신부터 역적이란 죄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신으로서는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의 법으로 토죄하는 일을 오랫동안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고 뭇사람들의 울분도 끝까지 막아둘 수는 없는 일이니 성상의 밝으심으로 행여 마음을 돌려 깨달으시고 조만간 허락하시는 하답을 내리셔 사주한 자와 공모한 자를 끝까지 추궁하여 전모를 밝히게 되면 고발한 자와 고발당한 자의 허실과 곧고 그른 것들이 저절로 남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신이 밤낮으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덮고 있는 저 하늘에 울며 불며 축원하는 것이 그 일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하늘 같으시고 땅 같으시며 부모와 같은 전하께서 굽어 살피시어 빨리 성한과 구종의 자식을 국문하자는 청을 윤허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의 기강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고 신하의 직분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경에게는 특별한 처분을 내렸는데 앞으로 경이 지킬 도리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낱낱이 방향 제시를 해줄 성질의 것이 아님을 경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를 파직하였다. 포도청이 아뢰기를,
"하교에 따라 김동선(金東善)이 격쟁(擊錚)한 내용을 놓고 죄인 윤구종의 아들 윤수(尹穟)와 치(穉)를 엄히 심문했습니다. 동선의 원정(原情) 속에는, 사천(沙川)에서 몽촌(夢村)으로 이사한 뒤로 역적 구종이 충주에서 상경할 때면 지나는 길에 여러 차례 찾아 왔고, 그는 이미 6품직에 오른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이기 때문에 7품 이하 때 일찍이 침랑(寢郞)을 지냈는지의 여부는 그 때나 그 뒤에도 전혀 들어본 일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 수는 공초에서, 제가 병으로 폐인이 되어 오랫동안 시골에만 있었기에 그의 아비가 평소 가까이 지내면서 출입하던 곳을 자세히 모른다고 하면서 제 아우에게 물어보면 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의 공초에는, 늘 자기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별검(別檢)으로 6품직에 오른 지가 올해로 11년이 되었고 대신과 서로 안 것이 어느 해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연수를 헤아려본다면 5, 6년을 넘지는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서울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혹 시골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였으며 연전에는 또 몽촌에서 장례지낼 때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사천에 왕래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구종의 문제에 대해 운운하는 자체가 가소로운 일이다. 그것이 꼭 물어본 다음에야 알 일인가. 대신이 기어코 나로 하여금 다시 규명해 조사할 것을 어거지로 다그치기에, 앞서의 자리에서 여러 차례 따져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비쳤건만 이번 소에서도 하는 말이 옛날 그대로이니 자못 대신을 위해 마음 써가며 사실을 힘써 밝히려고 한 본의가 아닌 것이다. 대신으로서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은혜를 모르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그가 이미 아뢰는 글에 올라 있으니 그를 애써 나오도록 하자면 무슨 결말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번에 캐묻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공초를 보았는데 어찌 별다르게 더 알아낸 것이 있었던가. 그러나 대신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꼬투리 잡을 만한 단서가 없어져 일을 많이 던 셈이기는 하다. 대체로 대신이란 물론 조정에서 예우해야 할 사람이지만 대신 스스로의 몸가짐을 하는 도리로서는 어찌 성상의 총애가 날로 더하여진다 하여 일마다 모두 자기 마음에 다 만족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남의 신하된 도리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 판부사의 상소는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 엄하게 물리치고만 말 정도가 아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 그가 이러저러한지를 누가 모르겠는가. 또 누차 언급했던 도타이 유고한 은혜스런 말들은 과연 어떠했던가. 그것은 대신이 있은 이래로 아직 있지 않았던 은례(恩禮)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불만이 또 있어서 그렇게 중언 부언하면서 도리어 임금을 협박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는 것인가. 지금은 그 일이 이미 마무리되었으니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신하의 분수를 바루는 도리에 있어 결코 한결같이 감쌀 수만은 없다. 판부사 김종수를 파직하고 이 초기와 비답 그리고 상소문에 내린 비답을 바로 중추부 낭관을 시켜 가서 전하게 하라. 그리하여 빨리 잘못을 되돌아보고 허물을 스스로 반성하게 하여 군신의 좋은 사이가 끝까지 변함이 없도록 하고 겸하여 같은 동료들 중에서 분수를 지키려들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두려워할 바를 알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큰 기강을 바루는 한 가지 일인 것이다. 정원은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을사
제릉(齊陵)의 한식(寒食) 이외의 제향 때 찬자(贊者)는 후릉(厚陵)의 능관(陵官) 중에서 번을 서고 나오는 사람을 쓰는 것을 격식으로 삼고,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의 기신(忌辰)에도 그 규례를 준용하라고 명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을 가자하고,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는 삭직하고, 경상·경기·충청·황해·평안·함경 6도의 관찰사들은 모두 봉록 10등(等)124) 을 감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지난번 거듭 명령을 내린 뒤에 여러 도가 그 명령을 받고 올린 장계와 열읍(列邑)에 알린 것들은 모두 관례를 따른 것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내년 봄에 찌를 뽑아 적간(摘奸)할 예정이다. 이번 강원 감사의 장계와 장계에 덧붙인 글을 보건대 그가 제사에 정성을 쏟고 애썼다고 하니 그 정성과 마음이 갸륵하다. 하물며 도백의 몸으로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의리상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그의 직분 안에 있는 일이지만 제사에 정성을 다한 노고에 대하여는 별도로 칭찬하여 권장함이 없을 수 없다. 강원 감사 윤사국을 특별히 가자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여러 도신들을 격려하는 뜻을 보이라. 여러 도 중에는 내각(內閣)의 근신(近臣)이 관찰사로 나간 도가 네 도인데 그들이 거행한 짓들을 보면 너무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지위가 일품이요 평소 사리에 밝다던 전라 감사조차도 도리어 강원 감사에게 선두를 양보하고 말았단 말인가. 그에게 갑절 무거운 율을 가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소소한 일도 그렇게 소홀히 다루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행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큰 도에 버티고 앉아서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게 할 것인가. 전라 감사 정민시에게 빨리 삭직의 벌을 내리도록 하되 말이란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 전지(傳旨)는 진곡(賑穀) 마련에 노력한 장계가 이른 뒤에 받도록 하라.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함경 감사 김희(金憙)·경기 감사 서정수(徐鼎修)는 봉록 10등(等) 치를 감하라. 조정을 무서워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서야 내각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충청 감사 이형원(李亨元)·황해 감사 이경일(李敬一)·평안 감사 홍양호(洪良浩)도 봉록 10등 치를 감하도록 하라. 집을 짓고 수리하고 하는 일들은 조정이 거듭 강조한 엄명이라고 핑계댄다니, 만일 이 혹한을 당하여 백성을 부린다면 그 죄가 더욱 어떠할 것인가.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려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보통 제향에 대해 의례적으로 내리는 조정의 명령도 이처럼 제대로 받들지 않고 있고 보면, 근래 연달아 전교를 내려 경계하고 있는 이 때 흉년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수령들을 한결같이 덮어 주고 있는 삼남 도신들의 일은 너무 형편없다. 치적은 비록 낮더라도 앞으로 기대를 걸 만한 자라면 혹시 얘기가 되겠지만 틀림없이 감당 못할 무리들까지 모두 감싸 주고 있을 것이다.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가 책상에 가득 쌓여 있으니 이같은 국가 기강이 옛날에 언제 있었던가. 무슨 사사로운 정이 있기에 수령 두려워하기를 조정의 명령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인가. 삼남의 도신들 처분에 대해 묘당이 각별히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라. 그 중에서도 가장 줏대가 없는 자는 충청 감사이니 그에게도 엄한 공문을 보내 곡절을 자세히 물어 아뢰도록 하라.
근래 지방을 맡은 신하들이 자신을 살찌우기만 일삼고 백성들의 아픔은 돌보지 않으면서 오직 장계 속의 말들만 잘 꾸며 그것으로 눈앞만 미봉하고 죄를 면하는 방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진짜 청렴하다는 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도백들부터 팽아(烹阿)의 법125) 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법을 어디에 쓸 것인가. 범처럼 무서운 어사를 암행시킨 것은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인데도 한결같이 태연스럽고 무관심하여 죄를 면하고 책임을 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털끝만큼의 효과도 없으니 몹시 놀랍다. 내년 보리 가을까지 각 도의 도신 중에서 가장 청렴하지 못한 자는 도사(都事)를 내보내 붙잡아오게 한 뒤에 혜정교(惠政橋)에 내가 직접 나앉아서 서울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엄히 신문하여 자백을 받은 다음 장오(贓汚)의 형률을 적용하므로써 그 도의 창생들에게 사죄할 것이다.
성안에 혜정교가 있는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해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리 이름도 그러한 것이다. 이 시기에 그러한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의 공문을 내보내 두루 알리고 각 도의 포정문(布政門) 문루에다 게시하여 늘 눈여겨 보게 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각 도의 사직단·성황단·여단(厲壇)의 제사드리는 의식을 손보아 밝히도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국이 맨 먼저 본 도의 열읍에서 봉행한 일들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계문한 것이 상의 뜻에 맞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권엄(權𧟓)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를 파직하였다. 무열사(武烈祠)를 수리할 때 유생들에게서 돈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수에게 불서지전(不敍之典)을 가중 적용하고, 전교하기를,
"근일 여러 신료들 중에는 조금만 칭찬 받고 총애를 받으면 오래지 않아 중한 죄를 범하고 있으니 대체로 지금의 이른바 총애한다는 것이 바로 영해(嶺海)로 귀양보내는 첫길이요 감옥에 가두는 예고문이 되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가령 현재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채제공이 지난번 자리에서 한 일이 과연 아는 것은 모두 말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인가. 첫째는 사정에 끌린 것이고, 둘째는 무엄함이다. 비록 그의 마음을 애써 이해하는 뜻에서 어제 용서하여 돌아오게는 하였지만 임금의 총애는 임금의 총애인 것이고 신하의 직분은 신하 직분인 것이다. 그가 밤중에 홀로 자신을 살펴 본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이 때에서야 전라 감사에 대한 처분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나를 저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과연 들어와서는 경연의 자리에 오르고 나가서는 교화를 선양하려고 마음을 다했다면 나라의 절반을 휩쓰는 풍파가 어찌 이같이 몇 해를 두고 가라앉지 않는가. 그가 도신이 되어 나간 뒤로 원망을 받는다는 소문이 제법 있었기에 처음에는 지나치게 법을 집행하다 보니 헐뜯는 말이 올라오는 것이려니 하고서 그를 위해 민망한 생각을 두기도 했었는데 차근차근 살펴보니 그가 탐오한 수령을 단속하지 않아 백성들이 해를 입었고 그 자신도 내놓을 만한 치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앞서의 처분을 어떻게 그만두겠는가.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미 처분이 된 사람들이지만 더욱 한심스러워 입을 다물고 싶은 자는 전 판부사 김종수인 것이다. 살려주고 또 살려주어 오늘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은덕인가. 그렇다면 시시각각 보답을 생각해야 할 그로서는 마땅히 내밀어도 가지 않는 의리를 생각해야 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여름 사이에 내린 은혜도 그 얼마나 정중한 것이었는데 그 뒤의 거조가 취한 듯 꿈 속에 사는 듯하였으며 심지어는 승지에게 계문을 붙여 올렸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그만하면 기탄이 없기 극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어제 유고 중에 불만을 뜻한 불협(不愜) 두 글자는 바로 신하에게 있어서는 큰 죄인 것이다. 그 말을 들었으면 당연히 왕부(王府)나 주옥(州獄)으로 달려나와 엎드려 분부를 들음으로써 자신을 법의 처분에 맡기는 뜻을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가만히 이틀을 기다려도 전혀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의 나라 기강이야말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할 수 없을 만큼 되어 있는 것이다. 신하로서 저버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일 본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남았다면 이 전교를 듣고서 과연 깜짝 놀라 죽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나는 이 대신 때문에 생긴 폐단이 앞서 이른바 이렇다 저렇다 운운한 사람들보다 더 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만일 빨리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 여생을 고이 마치고자 한다면 나로 하여금 괄목상대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또다시 혹시라도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라면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탄식은 작은 일이고 풍속을 바로잡고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이 더 큰 문제인데 어떻게 다시 이렇다 저렇다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직책이 대신인데 이같이 타이르기만 하고 뒤이어 등급을 높여 처분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있고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 판부사 김종수에게 불서지전을 더 적용하고 중추부 녹사(錄事)를 승정원으로 불러다가 이 전교를 가지고 엄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상차하기를,
"어제 홍명호 등이 범한 죄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더없이 엄한 것이 군주와 신하의 신분 관계이고 더없이 중한 것은 군주의 명령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한계를 넘어서거나 어기게 되면 어떤 법률을 적용시켜도 합당한 것입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자지(慈旨)를 받들어 국가 존망이 호흡에 달려 있을 때 한번 죽기를 다짐했던 것은 사실 사직이 중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리에 관해 신이 처음 모신 자리에서 어리석은 속마음을 모두 털어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명호 무리들은 홀로 어떤 마음으로 감히 사알을 불러 전교를 도로 바치고 스스로 분수를 범하고 기강을 무시하는 죄과에 떨어지는 것을 달게 여긴단 말입니까. 그렇게 계속하다가는 그 결과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리고 저 의금부 당상관들도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당연히 꼭 물어야 할 안건들을 뽑아내 되도록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을 것인데 감히 주제에서 벗어난 흐리멍덩한 얘기를 가지고서 명을 받들어 죄인을 다스리는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요사이 기강이 비록 싹 사라져버렸다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을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는 모두 신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욕되게 뭇 벼슬아치의 윗 자리에 앉아서 위로는 기강을 진작시키라는 유고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감독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조정에 이러한 놀랄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신은 한결같이 혼미하여 망연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성상 홀로 위에서 수고하시도록 만들었으니 신의 죄 이에 이르러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빨리 준엄한 벌을 내리시어 동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홍명호 등의 죄상도 결코 예사롭게 마무리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들 모두에게 외딴섬에 안치하는 벌을 내리고, 의금부 당상관들도 모두 섬으로 유배시키는 것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에게 정승 직책을 제수한 것은 경의 확고한 의지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차자가 사관(史官)을 시켜 구두로 선유한 뒤에 올라왔으니 그것이 어디 경을 알고 경을 등용한 뜻이겠는가. 지난 밤의 수응(酬應)이 어떠하였는데 경처럼 대관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예사로이 보아 넘긴단 말인가. 승지가 제 분수를 모르고 금부 당상이 직무 수행을 제대로 않는데도 지금까지 그를 바로잡기 위한 말 한 마디 없다가 지금 갑자기 견책을 청하고 있으니 매우 서글픈 일이다. 소청을 윤허하지 않겠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교리 김희순(金羲淳)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채제공을 특별히 석방하라 한 명령을 중지토록 청하자,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이갑(李𡊠)과 사간 정동관(鄭東觀) 등이 상차하였다.
"전하의 오늘 처분은 또 어찌하여 그렇게도 비정상적입니까. 아, 저 채제공은 대관에 있는 몸으로 흉험하고 추악한 자들의 편이 되어 상도에 어긋난 논의를 자기 집을 꾸려가는 계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그를 소굴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반 세(世)도 되지 않는 빠른 기간에 모두가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세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신기현과 뒤의 윤영희는 바로 제공의 앞잡이들에 불과하고 그들 소굴의 주인을 따지자면 제공이 그 사람인 것입니다. 악행이 쌓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를 속이기 어려워 그가 역적 무리를 애써 두둔하고 공의와 승부를 겨루던 날 사특한 진상과 음흉한 속셈이 저절로 탄로가 났던 것입니다. 그쯤 되고 보니 위리 안치를 시키더라도 죄가 오히려 남고 그냥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는 것을 성상께서도 일찍이 굽어 살피시고 지난 번에 엄중 조처를 취했던 것이며 그 뒤 대간들의 청원도 차례로 윤허하시고 따랐던 것 아닙니까. 그리하여 신들도 그 명령을 받고는 속으로 이제 국법이 차츰 신장되고 공의에 차츰 부응해가고 있는 것을 다행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오히려 가벼운 형벌이라 생각하고 다시 가중의 벌을 청하고자 신들이 준비를 해두고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완전 석방하라는 명령이 이럴 즈음에 갑자기 내려졌습니다. 부처에서 귀양을 보내는 것이 어쩌면 가중의 벌 같았는데 이미 윤허했다가 금방 석방하여 도리어 죄를 소멸시켜 주셨습니다. 큰 공론이 펴졌다가 다시 굽혀지고 뭇사람들 마음이 조금 풀렸다가 더욱 우울해졌으니 형정(刑政)이 뒤바뀌고 국가의 체통이 이미 여지없이 훼손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선 채제공을 석방하라 한 명령을 거두시고 앞서의 전교대로 빨리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내려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흉도들을 징계토록 하소서."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을 체직하고 정창순(鄭昌順)을 대신 임명하였다.
11월 11일 병오
전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에 대한 처분을 환수하고, 전교하기를,
"이 대신의 문제를 오늘까지 끌고 온 것은 내가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특별히 처분을 내리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명을 듣고는 종전과 달리 의리에 입각한 조화로운 행동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어제 자리에서 여러 차례 물었으나 연이어 아무런 동정이 없다고 아뢰었다. 이에 크게 서글픈 생각이 들어 다시 가중의 처분을 내렸던 것인데 어젯밤에 녹사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과연 내가 예상했던 대로 대신이 그제 파직을 당하고는 도성 밖에서 명을 기다렸고 어제 불서지전의 전교가 내려진 뒤에는 의금부에서 처분을 기다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추부 낭관이 말 한 마디 없었고 의금부에서도 넌즈시 여쭈어본 일이 없었으며 내각에서도 의논이 없었음은 모두 놀라운 일이다. 대체로 그 대신이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나도 그 대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 만일 엊그제 명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다면 왜 어제 불서지전의 명령이 있었겠으며 또 어찌 여러 가지 본의에 벗어난 하교들이 있었겠는가. 지금 이미 도성 안에 들어왔다 하니 몇 해 얼굴을 못 본 나머지라 보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여 이런저런 도타이 타이를 말들은 언급할 겨를이 없다. 그제의 파직 전교 중에서 불협(不愜) 요군(要君) 등의 말은 삭제하고 쓸 것이며 전지는 시행하지 말라. 그리고 어제의 처분에 대한 전교도 역시 환수하도록 하라. 그리고 바로 승지를 시켜 안심하고 처분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들어와 제수의 명에 숙배하도록 유고를 전하게 하라.
단 승지가 가는 편에 우선 언급할 말이 있다. ‘박 판부사 1백 명이 있은들 나와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긴요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을 가려보자고 하여 한번 따져볼 실마리로 삼으려 드는 것인가.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경의 입장에서 만약 효도하는 마음을 임금에게 옮겨 놓으면 충성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조정에 나와 사은 숙배하고 서울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일에 있어서 아마 나의 누누한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다 생각이 있으리라. 나머지는 면대후 말하기로 하자.’ 하였다. 일체를 전달하고 기어이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해인데 오늘 다시 경의 얼굴을 보니 매우 위안이 되고 기쁘다. 경도 나를 못 본 지 이미 오래인데 나의 얼굴이 전에 비해 어떠한가?"
하고서, 이어 얼굴을 들어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여름철에 전 우상이 올린 상소는 참으로 괴이하였다. 홍국영(洪國榮)의 일을 경에게 끌어다 붙이는 것이 될 일인가. 그때 차대(次對)에서 전 우상이, 유성한(柳星漢)의 소굴이라느니 뿌리라느니 하는 말을 슬그머니 끄집어내기에 심히 괴이하게 여겨 그 말의 출처를 물었더니 그제서야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경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말을 하는가.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당연히 반좌율(反坐律)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구종의 일로 인해 전 우상이 갑자기 대동 소이하다는 등의 말을 또 하였다. 그런데 구종 사건은 이미 막중한 범죄가 아니던가. 내가 만약 선대왕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는가. 내 어찌 잠시인들 그 문제를 그냥 둘까마는 그 다음날이 또 재계하는 날이고 해서 밤중에 친히 물어 바로 종결을 지었었다. 만일 그에게, 근래에 서로 친하게 지내며 왕래하는 곳을 묻게 되면 혹시라도 연관되는 곳이 있을까봐 그것도 묻지 않았었다. 경은 나를 이해하겠는가. 그렇고 저렇고를 막론하고 지우(知遇)는 지우이고 그 사람 말은 그 사람 말인데 이제 와서 다시 이러니 저러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경도 마음에 두지 말라. 작금의 전교는 경을 위하여 일을 매듭지으려고 부득이 잠깐 권도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의 결말이 어떻게 이리 빨리 나왔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모두가 성은입니다. 지금 전하의 하교를 받고 보니 신이 어떻게 감히 다시 자세한 말을 늘어놓겠습니까. 그러나 처리하지 않고 머물려 둔 소는 신의 신상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인데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소에는 별다른 말은 없었다. 뒷날 경이 한 번 보게 하리라."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성한이 그 얼마나 극악한 역적인데 지금까지 불문에 붙여두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한 말들은 모두가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정휘량(鄭彙良)·신만(申晩)이 하고 남은 말들입니다. 비록 살리기 좋아하는 덕으로 한 쪽에 내버려둔 것이겠지만 그런 흉악한 역적들을 법대로 처단한 다음이라야 의리가 더욱 밝아지고 인심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보다 갑절이나 더한 자도 이미 불문에 붙여두고 있는데 이같이 하늘도 두려워 않고 땅도 두려워 않고 인사도 모르는 무리를 책망할 게 뭐가 있겠는가. 황해도 도사 시절에 이미 그 사람됨이 괴이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당초에는 나도 범연하게 보고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비답을 내리기까지 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과연 흉악한 말이요 음험하였던 까닭에 처음의 비답을 환수했던 것이다.
이우(李㙖) 등의 소에 있어서는 내 어찌 그렇게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엄하며 감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듣고 싶어했겠는가. 그러나 당초에 금지하지 않았던 것은 한번 시원스레 유고하여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해서였다. 이른바 남학(南學)의 상소에 대해서는 바로 불태워버리라고 했는데 내가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참으로 매우 비참하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 좌상의 문제는 참으로 너무나 개탄스러운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윤영희의 죄는 실로 종사와 관계되는데 지금까지 내버려 두고 있으니 아무리 천지 같으신 도량이라도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로서는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고 또 깊이 고려할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서, 이어 이르기를,
"경은 서울에 있을 것인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의 병세가 사실 서울에 머물러 있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갔다가 때때로 왕래할까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나와 숙배하고 자리에 나오기로 했으니 경의 병세가 그렇다면 마음내키는 대로 왕래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호를 금갑도(金甲島)에, 이익진(李翼晉)을 창성부(昌城府)에 유배하고, 홍의영·홍억(洪檍)·서유방(徐有防)·김이희(金履禧) 등의 고신을 빼앗고, 이경운(李庚運)의 관작도 삭탈하였다. 의금부가 홍명호 등의 공초 내용을 아뢰자, 비답하기를,
"이런 일이 빚어지게 된 까닭은 첫째는 조정 신료가 정성이 없고 무엄해서이고, 둘째는 폐습이 종이에 물 번지듯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뒷날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장차 군주를 군주로 여기지도 않고 신하가 신하 구실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사마의와 환온 같은 인물이 출현할 것이다. 그렇지만 않다면야 저 무용도 없는 두 죄수를 무슨 까닭으로 파리에게 성 낸다는 경계도 생각지 않고 한 번 심문하고 두 번 심문하고 마치 완악한 무리를 다루듯 할 것인가. 그들이 이렇고 저렇고는 논하지 말더라도 직책으로 말하면 승지이고 맡은 책임이 왕명을 들이고 내는 일인데 태연히 임금을 업신여기고 대드는 행동들을 직접 보고서도 그들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 죄를 봐준다면 어찌 조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번 처분이 이만큼 엄정하면 이 뒤에는 대소 신료들이 앞의 일을 징계하고 숨을 죽일 것 아닌가 하고 바라는 것이다. 조정이 존엄해지고 등분을 바로잡는 데 있어 어찌 백 명의 영희를 다스리는 데 비할 것인가. 죄인 홍명호는 외딴섬 금갑도에 햇수를 정하지 말고 정배하고 이익진은 멀리 변경으로 정배하라. 홍의영은 음관(蔭官)에 관한 격례(格例)로 말해도 해당이 되지만 어버이 나이가 70인 자는 자식 한 사람을 남겨 봉양하도록 허락하는 제도가 법전에 실려 있고 또 그는 맏아들이며 더욱이 대신의 아들126) 이니, 정배에 해당하는 속전(贖錢)을 받고 고신을 빼앗은 다음 내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이경운은 새로 승정원에 들어와 동서 분간도 모르고 그 때 일에도 별로 참가하거나 간섭한 일이 없어 보이니 관직만 삭탈하고 내보내라. 경들의 오늘 문목(問目)은 그래도 나의 결점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당상이 나이 많은 자가 아니면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여서 역시 속전을 받고 고신을 빼앗는 것으로 감등하여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송영(宋鍈)은 군직(軍職)에 붙이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그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논하지 말라고 전지하라."
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우포도 대장 조심태(趙心泰)에게 곤장을 쳤다. 그것은 차대하는 날 구종의 아들을 심문하라고 명했었는데 바로 물러나가지 않고 따지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11월 12일 정미
영흥부(永興府) 산골 네 사(社)의 묵은 환곡을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명식(李命植)을 호조 판서로, 이문원(李文源)을 형조 판서로, 이병정(李秉鼎)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11월 16일 신해
대신과 각신(閣臣)을 불러 접견했다. 문안을 위함이었다.
11월 18일 계축
초계 문신에게 일정하게 치르는 강경을 행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상소하기를,
"신이 답답하고 억울하여 제 스스로 죄에 빠졌던 것인데 인자하신 성상께서 신의 미욱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을 위해 모든 은총을 굽이굽이 베푸셨으며 따뜻한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참소와 무함임을 통촉하시고 다시 숨겨진 것이 없이 모든 원인과 곡절을 다 밝히셨으니 신으로서는 그저 감격하고 그 은혜를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다만 사랑의 하교를 받들어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고자 도모할 뿐 무슨 번거로운 소리를 또 감히 하겠습니까. 그러나 꼭 말을 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소를 미루어 두고 처리하여 내려보내지 않은 것과 처음 소에서의 욕된 말이 황천에 있는 조상에게 미친 것으로 그것이 더욱 신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원통한 일인 것입니다.
아, 처음에 올린 소도 그 내용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인데 두 번째 소에서 다시 먼저 했던 말을 다듬어 놓았다면 그 정도의 차이에 있어 비록 전하의 해명을 받았지만 원상소가 내려보내지기 전에는 본 사건은 애매하여 밝히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아, 남의 부형(父兄)을 욕하는 것은 비록 생존해 있는 사람일지라도 몹시 절박한 것인데 하물며 이미 백골이 된 뒤에 그 이름이 탄핵의 글에 오르고 그것이 바로 자제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라면 그 자제 된 자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낯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이 외람되이 중추부 직함을 받고 숙배한 것이 결국 법을 무시하고 천륜을 상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다시 한 번 아주 간절하게 견책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미루어 두고 처리하지 않은 판부사 박종악의 소본(疏本)을 내려보내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아, 저 유성한과 윤구종 두 역적의 더없이 흉험하고 극악한 역모의 죄상은 옛 기록에도 아직 실려진 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 자신이 그 악명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성토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자리에 나아가서야 처음으로 감히 정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의리를 분석하다가 성상께서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는 하교까지 있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불공 대천의 원수를 생각하는 신의 마음으로서는 청원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물러나오지 말았어야 하지만 밤이 너무 깊었던 관계로 그만 궁전을 나왔는데 남은 울분이 가슴을 꽉 메워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옛부터 흉악한 역도들이 핵심을 감춘 얘기로 남을 은밀히 헐뜯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당초에 그렇게 자취가 감춰졌다 하여 끝에 가서 법을 적용할 때 조금도 느슨하게 처벌한 일이 없었던 것은, 사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진실을 숨기는 것이 더욱 교활하고 약삭빠름을 나타내는 일이고 처음에 미봉했다가 나중에 탄로나는 것이 가볍게 처벌해야 하는 의심스러운 죄와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전고에 없었던 극악한 역적이요 일이 막중하고 막엄한 데 관계가 있는데이겠습니까.
역적 성한의 상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어(隱語)로 되어 있어 얼른 보면 내용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사서가 출현되고 나서야 사나운 짐승같은 그의 속셈이 비로소 모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서(私書)가 이미 상소문에 등초되어 공식 문안이 된 이상 그것이 사서라는 이유로 법을 왜곡하면서까지 용서를 의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상의 타고나신 효성으로 다시 더 깊이 생각하신다면 신의 이 말이 끝나기 전에 번뜩 깨닫고 쾌히 단안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랫동안 못 만난 끝에 밤이 깊도록 자리를 함께 하고 마음을 털어 놓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매우 위안이 된다. 올라온 소장 중의 두 가지 문제는 다 그 때 만난 자리에서 얘기했던 것으로 미처 끝까지 말맺음만 못했던 것에 불과한데 비답이래야 무슨 다른 말이 있겠는가. 안에 머물려 둔 박 판부의 두 번째 소는 다음에 조정에 나왔을 때 한 번 내보여 주리라. 그리고 유성한 문제는 오랫동안 결말지어지지 않은 것이나 나의 은미한 뜻은 지난 번 두 중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면 거기에 속속들이 다 나와 있다. 청한 바는 윤허하지 않는다. 경으로 하여금 편한 대로 왕래하도록 한 것은 경을 남달리 대우하는 뜻에서 한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임하지 말라. 그리고 소명이 있으면 수시로 경연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갑인
수원부(水原府)에 명하여, 현륭원(顯隆園) 밖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고 길을 닦고 눈 치우는 일만을 전담하도록 하고, 수호군들에게는 1년 지공에 드는 비용에 준하는 값을 지급해 주고, 원역(員役) 이하에게 준 전답은 감히 바꾸지 말도록 하였다.
날씨가 춥자 승지를 보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대사헌 이갑(李𡊠)을 갈고 이조승(李祖承)으로 대신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장계로, 진곡(賑穀) 6만 석과 공명첩 1천 장을 떼어 보내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어 수령들이 부자들에게서 억지로 빼앗고는 자기가 마련한 것처럼 하는 폐단을 단속하고, 백성들 가운데 재산을 내놓고 나눠 갖도록 권유하는 자는 상을 내린 뒤 등용하라고 하였다.
서장관 김조순(金祖淳)이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한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자, 회유(回諭)하기를,
"지어 올린 이 시(詩)와 문(文)을 보니 문은 사람이 늘상 먹는 곡식 같고, 시는 비단이나 자개 같았다. 이미 전날의 잘못을 깨닫고 또 새로운 보람을 보였으니 이 뒤로는 더욱 더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8발을 맞추었다.
11월 20일 을묘
상참을 받고 겸하여 차대를 행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대각(臺閣)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이 바로 성조(聖朝)의 가법(家法)입니다. 만일 명분과 의리에 관계된 일이거나 공공의 뜻에서 나온 말이면 더 더욱 의견을 종합하여 가상하게 받아들여야지 분명히 가볍게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제 양사의 여러 대간들에 대해 상께서는 계사(啓辭) 내용이 다 밝혀지기도 전에 먼저 체차하라는 명령부터 내리셨으니, 올 것이 오면 좋게 받아들인다고 하는 성인의 도리에 아마 흠이 될 듯합니다. 그 명령을 즉시 환수하여 성덕이 빛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도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역적 윤영희 문제에 대하여 신이 첫 자리에서 이미 소견을 아뢴 바 있거니와 일차 심문을 하라는 하교가 이미 있었다고 했는데 처분이 결국 나핵에 그치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날 재계하며 지낸 끝이라 체증(滯症)이 매우 고통스러워 전지가 미처 내려가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내일 사이에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자, 판의금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전지가 비록 내려진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나핵인데 나핵은 바로 예사스런 죄수에게 으레껏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어디 죄명이 당역(黨逆)인데 나문(拿問)하는 예가 있겠습니까. 신은 준의(準擬) 전지의 재가를 받은 다음에는 비록 법대로 국청을 열지는 못하더라도 당연히 국청 죄수에 관한 규례대로 거행하겠다는 뜻으로 일변 초기(草記)하고 일변 그렇게 거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편리할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서관에 명하여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간행 반포하라고 하였다. 형조 정랑 홍호원(洪浩源)이 아뢰기를,
"《증수무원록》 1권과 언해(諺解) 2권을 이미 편찬하여 등서(謄書)까지 마치고도 아직 인쇄를 못하였으니 교서관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11월 21일 병진
편전에 나아가 무신에게 빈청(賓廳) 강시를 실시했다.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1월 22일 정사
정언 박종정(朴宗正)이 상소하여, 의금부에서 한 죄인을 신국(訊鞫)할 것을 청했는데, 한 죄인이란 바로 윤영희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비답하기를,
"상소문 내에 이른바 한 죄인이란 성씨는 누구며 이름은 누구인가? 당당한 대간의 소장이 도리어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보는 즉시 불태워버리라.’고 한 글체를 본받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던가. 그대의 직명을 생각하여 일일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소청한 한 죄인에 대하여는 즉시 거행하도록 허가할 것이니, 승지들은 그렇게 전지를 받들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신하가 성실하지 못하고 불경스러우면 그 죄며 그 적용법이 과연 어떠한가. 지난번 유의(柳誼) 등에 대한 처분도 얼마나 엄절했던가. 다만 근래의 고질병이자 누적된 폐단을 금방 바로잡기 어려워 그런 것이겠으나 다소나마 자중할 줄을 아는 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오늘 대신 박종정의 소를 보니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것이 어찌 다만 종정만의 죄이겠는가. 한편으로는 조정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습속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렇고서도 나라에 대각이 있다고 하겠는가. 종정의 상소 가운데는 성도 없고 이름도 없이 단지 한 죄인이라고만 말하고서 이어 캐물을 것을 청했는데 고금 천하에 그러한 사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일 금령에 구애되어 감히 성명을 밝힐 수 없다고 하면 그 사건 자체를 쓰지 말았어야 옳지 어떻게 감히 이토록 무엄한 짓을 한단 말인가. 정언 박종정을 우선 체차하고 금부에 넘겨 엄히 묻고 구두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대사간 서영보(徐榮輔)가 상소하여 전 정언 박종정 상소건에 대해 논하고 그의 직명을 사판(仕板)에서 지울 것과 또 이어 종정의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를 책임을 물어 파직할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목전에서 벌어진 일을 곧 바로 논열하니 직분상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윤영희를 무죄 석방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영희에 대해 비록 법대로 국청을 열지는 못했으나 국청 죄수의 예대로 거행하도록 이미 연석에서 아뢰어 윤허를 받은 바 있으니 그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국청 죄수를 체포하자면 비록 판금오(判金吾)가 연석에서 내린 전교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지만, 이 죄수에게 갖추어야 할 격식 문제에 관해서는 일전 경이 아뢴 내용에 대해 특별히 꼭 그렇게 하라고 하는 하교가 없었다. 따라서 이 초기는 경솔하게 앞지른 느낌이 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희의 구두 공초는 이러합니다. ‘역적 신기현과는 얼굴도 모르고 서로 소식도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가 지은 죄가 그러한데 어찌 조금이라도 그를 두호할 뜻을 두었겠습니까. 당초에 역적 자식놈이 밤을 틈타 강경에 응시했기 때문에 전혀 몰랐고 또 그것을 바로 처치하지 못한 것은 언제나 찌를 먼저 주고 명단을 뒤에 보기 때문에 그가 강경에 응시한 여부를 전연 알지 못하고 찌를 먼저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명단을 보고서야 알게 되어 결국 다른 시관을 찾아 의논했던 일이 있는데 그 당시 그 사실들은 이미 전년 공초 때 모두 말해 이미 다 소명된 사실로 성상의 하교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대체로 먼저 찌를 내주고 뒤에야 명단을 보게 되어 있어 얼굴을 모르는 자에게 관례에 따라 강경을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동료 시관들에게 그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는데 가령 마음을 두고 암암리에 그를 두호하려는 자였다면 터놓고 여러 사람을 찾아 처리 방법을 물었을 이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두 문제는 사실 살고 죽고가 갈라지는 길입니다. 그때 지레 나온 것을 가지고 모두들 선수를 써서 남을 제압하려는 술책이었다고 하지만 참으로 선수를 쓰려고 하였다면 강첩(講帖)을 되찾아 여러 사람들 눈 앞에서 지워버렸으면 충분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짓을 하지 않고 서투른 솜씨로 여러 사람 비위를 거스린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사리 밖의 일입니다.
깊은 밤에 강을 받은 것은 기현의 자식이 그 자신 대낮에는 종적이 쉽게 드러날 것을 알고서 한밤중에 강경에 응시한 것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시관된 자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 아비가 아직 있으니 만일 무슨 꿍꿍이 속이 있었다고 생각되면 한 번의 대질로 명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강을 마친 다음 응시자가 자기 성명과 아비의 이름을 강책(講冊)에다 쓰는 것은 그게 바로 응시의 조례입니다. 그가 이름을 썼을 때 비로소 그 아비의 이름을 발견하고 여러 시관들을 찾아 의논할 즈음에 기현의 아들은 이미 강첩(講帖)을 받았고 서리가 이름을 매겨 건네주자 그는 이내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지도 못했는데, 그 때는 넋이 나가버린 때라서 그것을 가지고 죄를 논한다면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일입니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마음을 두고 몰래 두호해 주었다는 것은 천만번 애매합니다.
의금부의 공초에 대하여는 모두가, 역적을 성토한 내용이 없다는 것으로 단안을 삼고 있으나, 죄수의 공초는 대각의 소차와는 다르기 때문에 단지 본 사건에 대한 자기 해명에만 급급하여 미처 역적 성토에 대해서는 언급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술년 겨울에 관직(館職) 제수를 특별히 받고서 그 때 직접 연명 차자를 써서 역적 기현을 엄중 토죄하고 겸하여 조정 신료로서 역적을 토죄하다가 죄를 입은 자들을 구원하기로 했으나 비답을 받지 못해 소장을 올리고 지레 나와버렸던 것입니다. 언지(言地)에 있으면서는 용기를 내어 할 말을 다해보려고 노력했고 갇힌 죄수가 되어서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을 변명하는 일을 하여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보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그것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죽어도 헛된 죽음이어서 오직 원한을 품고 땅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기현의 죄악 중 전첩(專輒)이라는 두 글자는 그 마음의 소재를 길가는 사람도 다 아는데 그렇게 흉악한 역적 죄상을 어찌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요사한 익환(翼煥)과는 죽음을 맹서한 벗이란 말에 있어서는 불행스럽게 익환과 친구였던 관계로 과연 그가 시골로 축출될 때 찾아가 전별하며 술을 대접한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상소를 보고서는 거론한 말들이 섬뜩섬뜩하고 속셈이 악독하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의 그 무지 망작에 대하여는 죽어도 죄가 남지만 그 상소에 참견하였다는 말은 천만 애매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참견한 일이 있었다면 우선 송구스러워 움츠리고 엎드려 있었지 어떻게 찾아가서 전별할 수 있었겠습니까.’ 했습니다.
죄인 윤영희를 반복해서 엄중 심문해도 그의 공초는 오로지 꾸며대기만을 일삼고 단지 연명 차자에 참여했던 것으로 당역(黨逆)에 관해 발명하려고만 했습니다. 말을 들어보거나 모양을 살피거나 조금도 분통해 하는 뜻이라곤 없이 역적 기현과 대질하지 않은 것을 기화로 감히 얼굴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강을 받고 나중에 명단을 보았다는 그 문제는 그의 발명이 전연 말이 되지 않으며 강첩을 만들어 주었다는 그 문제는 그도 그 이상 지만(遲晩)할 말이 없어 기현과 대질시켜 줄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옥사의 체통으로 헤아릴 때 역적 기현은 불가불 국청을 열어 따져 물어야겠으며 영희도 평순하게 물어가지고 자복을 받아낼 길이 없으니 엄히 형문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 추핵(推覈)의 목적은 하나는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이고 하나는 다시 진상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단 일분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나라 법이 지엄한데 어찌 조금이라도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공초 내용을 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조리가 있다. 근래 그의 죄를 성토하는 것이 첫째는, 먼저 강을 받고 뒤에 단자를 살핀 것이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인데 그는 협잡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고, 둘째는 조흘첩(照訖帖)을 만들어 주어 돌려보낸 것이 무슨 생각에서였느냐는 것인데 그는 하급 관리가 알리지도 않고 미리 발급한 것이라고 하였고, 셋째는 지난번 공초에서 사실을 소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인데 그는 연전 성토 때 어느 누구보다도 갑절이나 성의를 다했다고 하나하나 증거를 대며 신기현(申驥顯)과 대질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고, 넷째는 오늘 첫 공초에 분통해 하는 뜻이 조금 모자란다고 말했으나 그의 두 번째 공초를 기다리지 않아도 굽히지 않고 해야 할 모든 말에 있어 대답할 만한 말들은 조목조목 다 대답하였다. 왜 꼭 근래 대간들 소장처럼 그저 베껴 돌리는 형식을 취해야지만 비로소 분통해 한다고 말할 것인가. 하물며 두 번째 공초에서는 그 말이 물이 쏟아져 내리듯 막힘이 없었고 혀 놀림이 파죽지세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말들이 다 근거가 있었다. 이상 네 가지 조항으로 몰아 세우던 죄안이 이제 와서 하나 하나 깨끗이 벗겨진 것이다. 그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귀신이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먹물 연못에서 헤어나 하얀 눈 쌓인 산마루로 올라선 정도가 아닌 것이다. 일반 죄수도 죄 아닌 죄에 잘못 걸려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더구나 일찍이 삼사 서열에 있던 사람이겠는가. 그래서 그의 공초를 본 것이 매우 다행이다 싶어 피곤함도 마다않고 촛불을 밝히고 이를 쓰게 한 것이다. 죄인 윤영희를 특별히 무죄 석방하여 쾌히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또 아뢰기를,
"윤영희를 석방하란 명령이 있었으나 그의 공초가 말마다 구차하고 앞뒤가 안 맞아 그냥 물어서는 진상을 밝혀내기가 어렵겠기에 막 형문(刑問)을 주청한 계를 올렸었는데 지금 뜻밖에도 무죄 석방의 명이 내리고 보니 울분이 더욱 복받쳐 그 명령을 봉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가두어 두고 다시 사실을 캐물으면서 엄한 형문을 가하여 진상을 밝혀내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앞서 공조 정랑 정은상(鄭殷祥)이 아뢰기를,
"신이 종묘서에 있을 때 태묘(太廟)의 제향에 쓰이는 질그릇들의 모양이 일정하지 못하고 제조법이 정밀하지 못함을 보아왔습니다. 때문에 본조에 온 뒤 도장(陶匠)들을 불러 조심하도록 타일렀더니 그들 대답이, 본조의 원 규정은 다섯 큰 제향 때는 그 때마다 새것으로 준비하게 되어 있으나 더러는 전에 쓰던 것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 1년이면 두 세 차례 새것으로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놋그릇이나 사기그릇과는 달라 혹 기름이 엉기면 씻기가 어렵고 때가 끼어 정결하지 못하니 제향 때마다 규정대로 새것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예조 당상관을 명하여 종묘서에 물어서 하나로 지정해 초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서에 물었더니, 종묘의 제향 때마다 쓰이는 질그릇이 원래 1백 25개이고 영녕전(永寧殿)은 매번 제향에 쓰이는 질그릇이 70개인데 지금 공조가 들여오는 숫자는 종묘에 70개, 영녕전에는 50개로 그렇게 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혹간 기름이 엉겼거나 때가 낀 것들은 새로 들여오는 것으로 차근 차근 바꾼다고 했습니다. 제기는 못쓰게 되면 그때 그때 바꾸는 것이 규례인데 지금 만약 제향 때마다 전 숫자를 새것으로 준비한다면 옛날 쓰던 쓸만한 것들도 전부 까닭없이 쌓이게 되니, 옛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제조법이 정밀하지 못한 것은 그 폐단이 모두 해조에 있으니 조심하도록 타이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감서(監書)는 바로 본 내각에 소속된 벼슬아치입니다. 그런데도 받는 것이 녹(菉)도 아니고 요(料)도 아니니 일의 체모가 심히 어떻겠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여 종전에 받아오던 요미(料米)를 사과(司果) 네 자리, 사정(司正) 한 자리, 사맹(司猛) 한 자리로 바꿔 만들면 경비에 있어서 더 축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녹봉 책정 때 그 양을 조절하여 녹을 붙여 주는 것이 온당하겠으니 호조와 병조에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3일 무오
정호인(鄭好仁)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판의금부사 정창순(鄭昌順) 등이 청대하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글로 써 올리도록 명하였다. 창순이 윤영희에게 물을 만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써 올리자, 비답하기를,
"그러면 다시 물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윤영희로부터 다시 받은 공초를 아뢰고 이어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여 기어코 진상을 밝혀낼 것을 청하자, 전교하기를,
"경들이 다시 공초를 받고자 청했던 까닭에 허락한 것인데, 이 공초를 보니 말마다 피눈물을 뿌리며 슬픔을 삼킨 뜻이 담겨져 있고 글자마다 울분하고 원통한 뜻을 띠고 있다. 비록 요사이 준엄한 징토를 했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말하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경들이 지금 무슨 더할 말이 있는가. 종전 판부대로 즉시 석방하라."
하였다.
승지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여 윤영희를 무죄 석방하라는 명을 취소해줄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그냥 석방해버리면 나라 법이 존엄성을 잃을 혐의가 있어 다시 물어보았고 조금도 의심할 만한 점이 없기에 무죄 석방의 명을 내린 것이다. 비록 그보다 더한 죄수라도 죄명이 근거가 없어지면 반드시 무죄 석방하는 것인데 하물며 그 전부터 미심쩍은 사건이 아니던가. 국가 안위(安危)를 몸에 걸머진 대신으로서 분란을 미연에 막는 일에 소홀하여 윤영희에 관한 말이라면 피차가 서로 상대를 격하게 만드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도를 위하고 그 자신들을 위해 지난번 그러한 처분들이 있었던 것이지만 그대들은 직책이 왕명을 출납하는 자들이므로 단지 당면한 일이 사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만 알면 그뿐인 것이다. 의심이 있어 다시 물었고 다시 물어 의심이 풀렸으면 의심이 풀린 뒤에 무죄 석방하는 것은 사리로 보아 당연한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이 어찌 감히 형정(刑政)을 그렇게 함부로 논한다는 말인가. 하물며 영희 사건은 심문하기 이전에 먼저 금령이 내려져 있었으니 지금 와서 더더욱 준수해야 할 것이다. 격례를 벗어난 죄를 특별히 시골 출신이기 때문에 일단 용서하는 것이다."
하였다.
박우원(朴祐源)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앞서 충청도의 품관(品官) 홍입인(洪立人)이란 자가, 결성(結城) 사람 한현세(韓顯世)가 부도(不道)한 말을 발설했다고 고발했는데 윤봉구(尹鳳九)의 아들 윤심약(尹心約)도 그 말을 함께 들었다 하여 전 승지 김이성(金履成)이 입인·심약과 함께 올라와 우의정 김이소에게 말하였다. 이에 이소가 청대하자, 곡절을 글로 써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형조에 내려 형조 참의 윤행임(尹行恁)과 판서·참판이 함께 심문하도록 명했었는데, 이때 와서 해조가 아뢰기를,
"죄인 한현세를 심문하여 공초를 받았는데 현세의 공초가 이러하였습니다. ‘원래 결성 남당(南塘) 땅에 살다가 근래에 태안(泰安)으로 이사하여 유업(儒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홍입인은 병오년에 한 차례 대흥의 과거 시험장에서 상면하였고 그 뒤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에 입인이 홀연히 찾아와 이내 묵으면서 자기 조부와 아비의 묘자리를 잡아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감여술(堪輿術)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내 비록 어버이를 위해 지술(地術)을 대강 안다고 해도 그대는 시골 품관이고 나는 사대부인데 내가 어떻게 너를 위해 묘자리를 잡아줄 수 있겠는가.」 하고서 한사코 뿌리치자 입인이 그대로 3일을 묵으며 계속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끝내 들어주지 아니하였더니 입인이 노여움을 품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이번에 이런 무고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네가 비록 그렇게 해명하나 홍입인 이외에 또 윤심약이 증인으로 있는데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했더니 현세의 공초에 한번 대면만 시켜 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윤심약을 심문하여 공초를 받았는데 심약이 공초하기를 ‘지난 시월에 홍입인이 와서, 결성 사는 한현세가 흉악한 말을 마구 지껄이더라는 말을 분명히 전하기에 마음은 섬뜩했으나 애초에 직접 들은 말이 아니었기에 와서 고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홍입인이 상경하여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는 혹 제 이름도 그 속에 들어갈까 염려되어 부득불 따라온 것으로 그 사이의 사실들이 그저 그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한현세와 윤심약을 대질하였더니 현세가 심약을 향해 말하기를 ‘네가 어디서 무슨 소식을 들었기에 이같은 고변의 일을 저질렀느냐?’ 하니, 심약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홍입인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섬뜩했었는데 그 즈음에 입인이 상경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도 태연히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따라왔을 뿐이다.’ 했습니다. 현세가 말하기를 ‘남에게 역적 누명을 씌우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데 네가 직접 들은 것도 아니면서 입인의 말만 듣고 따라왔단 말인가.’ 하니, 심약이 말하기를 ‘3, 4년 동안 너와 상면도 없다가 지금 이 뜰에서 비로소 보는데 네가 하고 않고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단지 입인의 말에 놀라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홍입인에게 사람을 무고한 속셈을 물어 공초를 받으면서 1차 형장(刑杖)을 치자, 입인이 공초하기를 ‘제가 아비의 묘 이장을 위해 지난 10월 한현세의 집을 찾아가 묘자리를 잡아줄 것을 청하였더니 현세가, 너는 불과해야 시골 품관이고 나는 사대부인데 내 어찌 너를 위해 묘자리를 잡아주겠는가 하면서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천한 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에 분한 감정이 뼈에 사무쳐 윤심약을 찾아가서 현세가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급서(急書)를 만들어 가지고 상경하여 고변하였던 것인데 지금 그 진상이 모두 탄로났으니 무슨 변명을 감히 하겠습니까. 사실대로 자복합니다.’ 하였습니다.
죄인 한현세와 윤심약을 반복해 엄중 문초하였으나 한결같이 승복하지 않으면서 현세는, 묘자리 일로 홍입인에게 미움을 사 터무니 없는 무함을 당했다고 하고 심약은, 현세의 흉악한 말을 제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단지 입인이 전하는 말만 듣고 놀라 겁먹은 소치로 과연 따라오게 됐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죄인을 한 곳에서 대질시켰더니 그들이 한 말이 조금의 착오도 없이 앞서의 공초와 똑같았습니다.
입인을 또 추고했더니, 현세가 저의 미천함을 깔보고 묘자리를 잡아주지 않아 분한 마음이 뼈에 사무쳐서 기어이 마음에 시원한 보복을 하려고 악역(惡逆)의 이름으로 무함하였다고 하면서 낱낱이 바른 대로 불었습니다. 홍입인이 남을 악역으로 무함한 죄를 이미 자복하였으니 상께서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충청도의 사대부로서 명망있는 집안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고 판서 윤봉구(尹鳳九)와 고 장령 한원진(韓元震)은 바로 팔학사(八學士)127) 중의 두 사람이다. 그런데 두 집안의 아들 손자가 서로 원고와 피고가 되었고 고발한 말이나 고발당한 내용이 모두 망측하기 비길 데 없었다. 지난번 대신이 청대(請對)했을 때 끝내 불러보지 아니한 것은 대신 공경을 소홀히 해서가 아니다. 그 뒤 자리에 나왔을 때 그 일에 관해 대략 듣고 그러한 결과가 있으리라고 이미 예측했었지만 지금 그 공초들을 보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다. 대체로 홍입인이란 자가 이같이 자잘한 시골 품관으로서 한현세에게 감정을 품고 윤심약에게 거짓말을 전하여 이번 사건을 빚어낸 것이다. 연전에 이영운(李榮運) 사건 처분 이후로 충청도의 풍속이 다소 자중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더니 입인이 또다시 감히 최가 놈이 영운을 무함하던 악습을 본떠 기어이 현세에게 마음 시원한 보복을 하려면서 그 자신의 고변이 허술할까 두려워 순박하고 조심스런 심약을 충동질하여 그와 함께 올라오고 또 전 승지 김이성에게 부탁하여 대신이 청대하도록까지 만든 것이다. 지금 그의 속셈을 환히 꿰뚫어보고서 특별히 문목(問目)을 내렸던 바 그가 남을 무고한 진상을 하나하나 자복하였으니 반좌율이 본시 법으로 정해진 이상 입인을 그 고을로 내려보내 선비들과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엄히 격식을 갖추어 형문하고 결안(結案)을 받도록 하라.
조정에서 두 유현(儒賢)의 집안에 대해 늘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상소를 주의(奏議)에 편철해 두기도 하고 문집을 본가로부터 가져오게도 했으면서 그들 가문에 근래 벼슬이 없게 하였으니, 그게 어찌 옛정을 생각하는 도리인가. 더구나 현세의 공사는 내용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충효 등의 말에 있어서는 듣고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고, 심약의 공사 역시 매우 성실하였다. 당초에 대대로 의좋게 지내던 우호도 돌보지 않고 추국하는 마당에서 우여곡절을 죄다 말하여 마침내 현세로 하여금 죄없이 벗어나게 만들었으니 그도 만만한 인물은 아닌 것이다. 당초에 수금하지도 않은 상태로 본 사건이 깨끗이 해결되어 석방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 석방이 되었다. 두 집안의 두 사람을 어떻게 그냥 돌아가게야 하겠는가. 부관(部官)·감역(監役) 두 자리를 해조가 구두 추천을 하게 하여 그날로 사은하도록 하라.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일이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인가. 또 더구나 남을 극죄(極罪)로 무함한 일이겠는가. 근거없는 말을 대신 맡아 가지고 와서 하마터면 누대 벼슬해온 두 집안을 불측의 죄에 빠뜨릴 뻔하였으니 지난 일로 보아 경솔하기 짝이 없고 후일로 보더라도 많은 폐단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전 승지 김이성을 경기도 연읍(沿邑)으로 귀양보내 나랏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도록 하라."
하고, 이성을 인천부(仁川府)로 귀양보냈다.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판의금부사 정창순이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본부에 모여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한 사람이 거적 자리를 가지고 와 문 밖에 엎드리기에 도사(都事)를 시켜 물었더니 바로 흉적 신기현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연전의 흉험한 상소는 흉적의 사주를 받고 쓴 것이어서 그 사실을 자백하기 위해 상언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놀랍고 한탄스러워 기현은 우선 구류해두고 와서 청대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상이 불러 접견하자, 창순이 아뢰기를,
"역적 기현이 상언하겠다며 원정(原情)을 지니고 와 본부의 문 밖에 엎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듣고 너무 놀라 우선 도사로 하여금 그를 지키게 하고 원정은 감히 아랫사람들이 뜯어 볼 수가 없어 소매 속에 넣고 청대하였습니다."
하니, 승지에게 명하여 읽어 아뢰라고 하였다. 그 원정의 내용에,
"신은 바로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죄인입니다. 온 나라가 똑같이 성토하는 이때에 어떻게 감히 입을 열어 혀를 놀리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속마음은 지극히 원통하고 너무 분하여 그것을 한 번 속 시원히 말하지 않는다면 살아도 더없이 흉악한 역적이 될 것이고 죽어도 눈을 못 감는 귀신이 될 것이기에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신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몸으로 과람하게 과거에 급제하고 외람되이 높은 벼슬자리를 더럽히다가 죽음이 거의 임박했던지 하늘이 넋을 빼앗아 흉험한 소를 올리고 스스로 구덩이에 빠져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음은 모두 성은이 아님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미욱하나 타고난 양심은 가지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악역의 죄과에 빠져들기를 원하였겠습니까. 그 당시 사실 처음에는 사리에 깜깜하여 남에게 잘못 이용을 당했었고 나중에는 비록 깨달았으나 뉘우쳐도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계속해서 숨기기만 하면 본 죄 이외에 또 속이고 숨기는 죄가 첨가될 터이니 어떻게 감히 바른대로 아뢰지 않겠습니까.
벼슬에 오른 이후로 매번 서울을 왕래할 때에 이재간(李在簡)이 벼슬이 높고 언론을 좌우한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기에 신도 여러 사람들을 따라 상종하게 되었고 저절로 친숙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던 기유년 10월 11일 그의 문병을 위해 그의 집에 갔더니 다른 손님들은 없었습니다. 이말 저말 나눌 즈음에 역적 재간이 신에게 이르기를 ‘요사이의 일을 그대도 들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강 들었지만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하였더니, 역적 재간이 말하기를 ‘신하란 오직 군주의 명을 받들어 행할 뿐인 것이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혹시라도 독단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극죄(極罪)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 섬으로 유배하는 죄수를 쫓아 보낼 적에 대신과 금부 당상이 군주의 명도 아랑곳 않고 단지 자지(慈旨)에 의거해 마음대로 쫓아 보냈다니 거조가 해괴하기 실로 고금에 없는 변괴이다. 대신과 금부 당상이 독단한 죄는 극률(極律)에 처해야 맞다. 수상(首相)은 당연히 약사발을 받아야 할 것이고 금부 당상도 중죄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대는 삼사를 출입하는 사람이니 언지(言地)에 있게 되면 한 장의 상소로 논척하는 일을 결코 그만두어서는 안 되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제가 시골 출신으로 어떻게 그런 일에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역적 재간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과연 겁이 나는가? 대신과 금부 당상의 소행을 전하도 틀림없이 그르게 여기실 것이니 비록 상소를 올린다 하여도 결코 죄를 얻을 염려는 없을 것이고 상께서도 그것 때문에 상소를 올린 자를 죄줄 이유는 없으니 조금도 염려말고 한번 해보게나.’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대감이 저를 잘못되게야 하겠습니까. 만일 언지에 있게 되면 제가 반드시 소를 올리겠으나 다만 본래 소장에 생소한데 어떻게 말을 꾸미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역적 재간이 말하기를 ‘대신과 금부 당상을 똑같은 죄로 논해야 할 것이나 대신은 나의 종형이고 현재 나와 동료라서 싸잡아 논죄하기는 곤란하니 금부 당상만 논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고서 책상 위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것을 보고 소매에 넣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의 초기를 펴보고 소매에 넣어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13일날 정사로 정언(正言)에 제수되었고 겸하여 예전부터 정세(情勢)도 있고 하여 불가불 상소를 올려야만 했기 때문에 상소를 쓰면서 맨 먼저 불안한 사세를 말하고, 다음으로 섬에 유배되어 있는 역적을 토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으며, 금부 당상 논죄 문제에 있어서는 재간의 말이 당연한 듯했기 때문에 그가 준 초기를 그대로 덧붙여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소가 올라가자마자 성토하는 논의가 여기 저기서 터지면서 흉역으로 단정하고 극형의 형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신이 그제서야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 상소문 내용을 다시 세밀하게 점검해 보았더니 과연 신하가 감히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섬에 유배되어 있던 역적이 도성으로 들어와 인심이 술렁거리고 종사가 위기 일발이었는데 해와 별 같은 대비의 전교가 내려졌으니 금부 당상이 대비의 전교를 받들어 섬의 역적을 축출한 것은 천리(天理)로나 신하의 직분으로나 당연한 일이었고 일호도 독단이라는 지목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리석고 미욱한 소치로 역적 재간의 말만을 믿고 전첩(專輒) 두 글자로 금부 당상의 죄안을 삼았던 것은 실로 상도와 상반되고 사리에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처음에 역적 재간의 말을 듣고서 믿어 의심하지 않은 것이 바로 신의 어리석고 어두운 죄였고 의리를 밝혀 나라의 역적을 토죄한 금부 당상을 전첩으로 몰아세웠던 것은 신의 죽을 죄입니다. 다만 신의 본심만은 전첩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역적 재간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서 의리의 지중함을 생각지도 않아 제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죄악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낮과 밤으로 잘못을 자책하면서 죽으려 해도 죽을 수도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보통 인정으로 말하더라도 이런 소를 한번 올린 뒤에는 헤아리지 못할 죄과에 스스로 빠진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단지 신이 몽매하고 지각이 없었던 까닭으로 남에게 속임을 당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늘과 땅 사이에 머리를 들겠습니까.
이토록 지극한 원통함을 지녔으면 즉시 목청을 높여 자기 본마음을 밝혔어야 옳았지만 역적 재간이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사실은 그에게만 핑계대는 것 같은 혐의가 있어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점차 오래되면서 해명할 길이 없었는데 성토는 갈수록 호되고 죄악은 점점 무거워지니 죽기 전에 한번 이 사정을 아뢰지 않는다면 장차 천고에 한을 품은 귀신이 될 것이라서 이렇게 감히 머리를 들고 호소하는 것이오니,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흉악한 그가 지금 갑자기 자진해서 나오다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그의 죄명이 보통 죄명이 아닌데 처음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뒤에는 또 무슨 마음이었던가. 귀신으로 물여우로 둔갑하는 그 꼴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운데 지금 와서는 중도에 길을 바꾼 모양이로구나."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이른바 원정에서 그의 끝없이 흉악한 속셈을 이미 스스로 털어놓았으니 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고 위관(委官)을 차출하여 법대로 국청을 설치해야지만 체면이 서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려면 얼굴 덮어 씌우고 음식 제공하는 것만 놔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국청 죄수 다루는 관례대로 해야 할 것인데 기현 한 사람을 국문하는 데는 금부 당상이면 족하지 위관이 뭐 필요할 것인가."
하였다. 동지의금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신이 포도 대장을 겸하고 있으므로 문서 수색하는 일은 관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신기현을 우선 격식을 갖추어 남간옥(南間獄)에 엄히 수금하고 끌어다가 추국하여 공초를 받도록 하라. 그의 소행이 마디 마디 흉악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초에 승진 발탁시킨 일이 문제를 벗어난 일로서 가소롭게 되었다. 그에게 준 교지를 해조로 하여금 찾아내어 불태워버리게 하라. 사주를 받고 안 받고 따질 것 없고 처음에는 무슨 마음으로 속임을 당했으며 또 무슨 마음으로 자백을 한다는 것인가. 옥사(獄事)의 체통에 있어 그가 의금부에 써올린 내용을 가지고 심문하는 조목으로 삼을 수는 없으니 다시 전교의 내용을 가지고 엄히 심문하여 밤이 깊어지기 전에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비록 나국(拿鞫)이기는 하지만 보통 중한 옥사가 아니니 국청 죄수 다루는 관례와 똑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신기현을 나국하여 공초를 받았더니, 기현이 공초하기를 ‘시골에서 나고 자라 벼슬길에 오른 뒤로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과거에 올랐을 때 이재간이 찾아와 만나 보았고 그 뒤로 대여섯 차례 서로 만나고 나니 저절로 친숙해졌습니다. 기유년 10월 11일날 마침 그 집 문 밖을 지나다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서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얘기가 금부 당상과 대신의 독단을 논죄해야 한다는 데까지 미쳤는데 역적 재간이 하는 말이, 「독단은 신하로서 가장 큰 죄이다. 군주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대비의 전교만을 받들어 섬의 역적을 마음대로 축출하였으니, 금부 당상은 당연히 중죄를 받아야 하고 수상은 약사발을 받아야 맞다. 그리고 언관(言官)으로서도 말이 없을 수 없는데 그대는 삼사를 출입하고 있으니 뒷날 만일 그 직책을 맡게 되면 한번 상소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저는 시골 사람인데 어찌 그 같은 일을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역적 재간이 하는 말이, 「그대가 겁이 나는가? 금부 당상이 독단한 일은 상께서도 틀림없이 그르게 여길 것이며 또 언관을 죄 주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적 재간의 말만 믿고 그럴듯한 일로 생각하고서 그가 내준 상소의 초고를 받아 소매 속에 넣고 돌아왔었습니다.
10월 13일날 정사에서 정언이 되고서는 심정의 사세를 한 번은 말로 밝혀야 했기 때문에 사직소 말미에다 섬의 역적을 토죄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여 아뢰고 그 끝에다 또 역적 재간이 준 초고를 덧붙여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성토가 지극히 엄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었습니다. 역적 재간의 말을 듣고서 전첩 두 글자의 뜻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경솔하게 상소를 올린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고 미욱하더라도 만일 전첩 두 글자의 뜻을 알았더라면 어찌 그 짓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비로소 아뢰는 것은 그 당시에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으나 성토가 한창 엄했기 때문에 감히 방자하게 바로 아뢰지 못하였고 그 뒤로는 귀양살이하는 신세여서 아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은을 입고 살아 돌아온 뒤에는 아뢸 수도 있었으나 그 뒤로는 또 장기(瘴氣)가 빌미가 되어 10개월 씩이나 학질을 앓으면서 죽음과 삶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올해에는 또 연이어 상척(喪慽)을 당해 일찍이 아뢰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나와 아뢰자니 더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거듭 이리저리 따지고 엄하게 캐물었으나 그의 공초는 위의 말과 똑같았습니다. 바로 국청을 열고 엄한 형문으로 진상을 밝혀내도록 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이 공초 내용을 보니 당초 그가 상소하였을 적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성토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의사로 한 것이라 여기고 아주 깊이 생각하여 그를 섬 속에서 빼내다 승지로 발탁 임명하고 또 자전의 뜻에 거슬릴까봐 다시 거론하지 말도록 금령을 내리고는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하여 각기 타당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제 스스로 해명한답시고 사주를 받은 내력과 일자며 상소 초고를 지어서 건네준 일들을 낱낱이 지적해 말하고 있어 당초의 상소 내용과는 온통 상반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전첩이란 말이 어떤 뜻인지 모르고 재간의 말만을 그대로 따랐다느니, 혹은 대신과 금부 당상이 한 일은 신하된 직분상 당연한 것이었는데 제가 그것을 깊이 살피지 못하고 감히 논박을 했다느니 하면서 말이 전후가 딴판이니 참으로 이른바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다. 사주를 받았거나 제 주견대로 했거나 따질 것 없이 그의 상소 중에서는 그 말 한 마디가 바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지금 그 조항이 도무지 귀결이 없으니 그렇다면 조정에서 그를 승진 발탁했던 것이나 불문에 붙였던 것이나가 다 힘만 크게 들이고 헛되이 마음만 썼던 일이라고 하겠다. 그가 올린 원정(原情)이라는 것이 제 손으로 직접 써올린 것일진대 그가 여러 해 동안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재보고 얼굴을 바꾸고 몸을 돌렸다는 것을 미루어 알 만하다. 그래도 일호의 미진한 점이 있을까봐 다시 캐묻도록 했던 바 그가 입으로 분 것이나 써서 올린 것이나 마치 한 판에 찍어낸 듯하다. 지금 와서 제 진상을 제가 모두 드러냈는데도 한결같이 용서만 해준다면 이는 도리어 전날 깊이 생각하여 했던 것과는 또 상반되는 일이다. 죄인 신기현을 엄히 한 차례 형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서영보(徐榮輔)를 체직하고 임제원(林濟遠)으로 대신하였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1월 24일 기미
의금부가 아뢰기를,
"신기현을 엄히 한 차례 형문하였습니다. 국청을 열어 더 엄히 다시 한 번 심문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거칠고 막된 물건이야 새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것 때문에 국청을 열어 당당한 의금부에 누가 되게 할까보냐. 그러나 그도 사람이니 한 차례 형문만으로 그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두 번째는 무슨 마음이었는지 귀신 같고 물여우 같은 그 진상을 다시 한 번 엄히 형문하여 공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현임·전임 대신들이 2품 이상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청대하자, 전교하기를,
"신기현의 소행은 구구절절이 망측하다. 글로 써서 올린 상언이나 공초로 받은 문안이 모두 제 스스로가 제 상소 중의 곡절을 자백한 것들인데 지금에는 이재간이 수괴가 되고 그는 졸개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돌변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자에 대하여 목을 베거나 형벌을 가하거나 무슨 망설임이 있을 것이라고 일개 가소롭고 하찮은 기현을 위해 이같이 경들이 청대를 하는 것인가. 매우 타당치 않은 일이다. 또 경재(卿宰)들까지 청대하는 것은 국가 체면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으나, 대신이 물러가지 않았다. 양사가 또 청대하자, 전교하기를,
"어떤 사물이거나 각기 당연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만일 죄를 가중하기를 바라서라면 이같이 고집하는 것도 옳겠지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국청을 여느냐 붙잡아다 국문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아옹다옹한다면 그는 오십 보 백 보 사이인데 그렇게 번거롭게 군다는 것은 너무나 마땅치 않다. 그리고 어제 밤에 많은 말을 주고받기도 하였으니 경들은 대청으로 물러가 소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고, 얼마 뒤에 지시한 것을 거행하지 않았다 하여 자리에 나왔던 의금부 당상관들을 모두 체직하였다.
신기현을 사형에서 감하여 제주목(濟州牧)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만세를 위한 깊고도 원대한 생각에서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큰 기강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대비의 전교가 소중함을 알면서도 지난번 그렇게 승진 발탁을 했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 그가 갑자기 둔갑을 하여 도리어 전첩을 신하된 직분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심지어는 전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재간이란 자의 망녕된 생각에 의한 협박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의 정상을 생각하면 용서없이 죽여 마땅하다. 지금 와서는 그는 종범(從犯)이 되었고 재간이 수범(首犯)이 되었다. 수범이건 종범이건 똑같이 처단을 해야 하지만 조정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이 변신이고 조정 신료가 다 같이 분개하는 것이 내막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른바 행동은 같으나 속이 다르다는 것이다.
죽어야 할 죄에는 비록 수범 종범의 구별이 있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야 어찌 수범 종범을 따질 것인가. 그러나 형률에 있듯이 범상(犯上)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알고서 고변하지 않은 자는 한 등급을 감해 준다고 하였다. 하물며 알고 고변까지 한 자이겠는가. 다만 고변을 때늦게 했기 때문에 불고지율(不告之律)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이다. ‘사형 다음가는 등급으로 형벌을 감해 주어 삼천 리 밖으로 유배보낸다.’ 한 법조문이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 놓은 조문 같으니 죄인 신기현을 그 형률대로 처리하라. 전첩이 신하로서는 최고의 죄라 하여 그 때 한 번 죽기를 각오했던 그 마음을 내보이려면 모름지기 경중의 구별을 분명히 해야지만 비로소 나라가 있는 것이고 임금도 있는 것이다. 금부 당상을 제수한 것을 보면 내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더 잘 알 것이다. 이것마저 즉시 거행하지 않고 감히 항거하려고 들면 나라에 일정한 법이 있으니 나는 두 번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불러서 보았다. 상이 우의정 김이소에게 이르기를,
"아까, 신기현과 윤영희 문제를 오늘 자리에서는 감히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뜻을 입시한 승지에게 하교하여 경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아마 이미 들었을 것이다. 경은 대신이니 무슨 말을 못할까마는 이번 일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강이 있고 국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내일 경들을 다시 보았을 때는 내 마땅히 과거사를 말하리라."
하고, 또 이소에게 이르기를,
"어제 형조에 내린 판부를 경은 보았는가? 홍입인(洪立人)이 무고로 남을 고자질한 꼴은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그것을 보면 충청도 사람들 버릇이 매번 그런 일을 가지고 남을 망측한 죄에 몰아넣고 있는 것을 알 만하다. 두 집안의 처지가 어떠한데 터무니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다. 이번 처치는 잘한 처치라고 할 수 있다. 김이성(金履成)은 그 사람됨이 엉성하고 경솔한 것을 알지만 홍입인이 이미 무고를 자복하였으니 처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양사가 【대사간 임제원(林濟遠), 집의 김달순(金達淳), 사간 이태형(李太亨), 장령 심규노(沈奎魯), 헌납 남공철(南公轍), 정언 홍대협(洪大協).】 아뢰기를,
"난신 적자가 예로부터 얼마나 많았습니까마는 이재간처럼 그렇게 요사하고 사특하고 흉험하고 악독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나운 짐승같은 버릇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에게서 전해 받았고, 귀신이며 물여우 같은 속셈은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趙時偉)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권세를 휘어잡는 것으로 자신의 가계(家計)를 삼고 의리에 배치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재주입니다. 지난 병오년128) 겨울 대비의 전교가 내렸을 때 온 나라 안이 슬픔에 싸이고 조정 전체가 동요를 일으켜 그 누가 피눈물을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국가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도리어 풍질(風疾)을 핑계하고서 온 신하가 궐정에 모여 호소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의 음흉한 속셈은 그 때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었습니다. 종사 안위가 한 번의 호흡 사이에 달려 있을 때 대신과 여러 신료들이 부득이한 행동을 했던 것은 사실 대비의 전교를 받들고 만번 죽음을 무릅쓴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또 전날의 병을 핑계하고서 일체 피하였으니 그 꿍꿍이 속을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짐작했던 것입니다. 망측하고 흉악한 말을 승정원에서 멋대로 지껄이고 전체가 패악한 상소에는 사주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숨어서 주장을 내세우고 그 주장을 비밀 통로를 통해 배포했던 꼴은 사실 지난 역사에도 일찍이 없었던 극악한 역적이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에게 천벌이 내려지기 전에 귀신이 먼저 그를 죽였지만 온 나라 신민들이 그와 함께 한 하늘 밑에서 참고 살기 지금으로 4년째입니다.
인심이 울분할 대로 울분하고 천도는 매우 명백하여 바로 오늘 신기현이 자수를 함으로써 그가 소굴 속에 물주로 들어앉아 남몰래 사주했던 사실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마디마다 터져나왔습니다. 흉특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고 무함의 상소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말을 주고받던 날짜도 근거가 있고 사주했다는 증거도 문서에 모두 있습니다. 그도 이 나라 신자(臣子)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몰래 불측한 생각을 품고 지극히 참독한 상소를 꾸며내어 감히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 못할 역적의 짓을 했다는 것입니까. 의금부의 공술 초안이 나오자 정확한 범죄 진상이 손바닥을 보듯 환하여 이제 더 의심할 것도 없고 또 더 조사할 일도 없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 육시의 형을 집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오늘이라도 추후의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역적 재간의 관작(官爵)을 우선 추탈(追奪)하고 이어 여러 자식들을 분산하여 귀양보내는 죄를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분산시켜 귀양보내는 일과 추탈하는 일이 만일 전례가 있으면 해부로 하여금 자세히 상고해서 역시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경신
전교하였다.
"채제공 일은 비록 숨김없이 말해야 한다는 뜻이었겠지만 지난번 그에 대한 처분을 지나치게 하여 본 사실 이외의 절목까지 갖추도록 책임을 지웠던 것은 그가 선견지명이 있는 고인들 못지 않게 남보다 월등한 주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을 고집하면서 주인으로 자처했는데, 그렇다면 어제 대계(臺啓)를 따른 뒤에, 선한 자는 세상에 알리고 악한 자는 미워해야 하는 형정(刑政)의 정신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하루도 늦춰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삭출 죄인 채제공을 석방하고 그의 직첩을 되돌려 주라."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홍수보(洪秀輔)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이조 참의 윤행임(尹行恁)을 파직하였다.
11월 26일 신유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초계 문신에게는 친시(親試)·과시(課試)를, 선전관에게는 강(講)과 활쏘기를 시험보였다. 상이 활을 쏘아 연거푸 명중시키고는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고서, 이내 첫 화살을 쏘고 왼쪽의 나머지 네 개를 또 쏘아 모두 명중시켰는데 3순을 쏘아 14발을 맞힌 것이다. 그리고 또 작은 과녁을 쏘아 1순에 세 번을 맞히고, 또 곤봉을 세워 표적으로 삼고 1순에 세 발을 맞히고는 본영의 장교·군병 그리고 내각의 관리들에게 두루 음식을 내려 먹였다. 친시에서 수석을 한 김달순(金達淳)에게는 가자하고, 과시에서 수석한 정노영(鄭魯榮)은 승진 서용하고, 과강에서 수석한 윤인기(尹寅基)는 준직(準職)을 내리고, 선전관 활쏘기에서 수석한 전우성(田遇聖)은 출륙(出六)하기를 기다려 승진 서용하도록 하고, 강에서 수석한 김상구(金相九)는 승진 서용하였다. 이어 내각에 고풍(古風)을 내리고 나서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에게 시험을 보여 과녁 갓쪽을 네 발 맞혔으므로 큰 표범 가죽 한 장을 내리고 병조 정랑 엄기(嚴耆)는 과녁 갓쪽을 두 발 맞혀 승진되었다. 상이 각신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일을 기록으로 남겨놔야겠으므로 경들 및 자리에 있는 여러 신료들과 연운(聯韻)을 해야겠다."
하고, 첫 구절을 상이 지었는데,
문무 모두 법대로 활을 쏘고서
군신이 술자리 함께 했다오
하였다. 제신들이 차례로 지어 올려 시 한 편이 완성되자,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쓰고 각하여 영화당에다 현판으로 걸어 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7일 임술
이재간(李在簡)의 여러 아들 중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거나 양자간 아들은 제외하고 마땅히 귀양보내야 할 자들은 처자와 함께 경기 도내의 섬으로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8일 계해
약원(藥院)이, 날씨가 춥다 하여 태묘(太廟)에 직접 제향드리기로 한 명령을 중지할 것을 청하자, 전교하기를,
"내가 밤낮으로 정성껏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제사인데 어떻게 날씨가 춥다 하여 대신하도록 할 것인가."
하였다.
형조 판서 홍수보(洪秀輔)를 체직하고 이문원(李文源)으로 대신하였다.
11월 29일 갑자
양산 군수(梁山郡守) 성종인(成種仁)에게 유고(諭告)하였다.
"근간 암행 어사 장계를 통해 그대의 치적(治績)을 들었다. 경악(經幄)으로부터 내보낸 특별 임명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 극히 가상하다. 오래 있으면서 성과를 올리게 하기 위해 우선은 논상하지 않으니 그대 더더욱 힘써 방법을 다해 백성을 돌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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