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을축
제주에 기근이 들어 호남의 곡식 1만 석을 운송해 진휼에 보태게 하였다. 그리고 본부에서 올리는 삭찬(朔饌)과 방물을 보릿가을 때까지 정지시키고 경사(京司)가 납부하는 각종 노공(奴貢)의 당해년 몫도 함께 견감했으며 묵은 환자는 기한을 물리고 새 환자는 수효를 나누어 기한을 물렸다.
호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을 체직하고 심이지(沈頤之)로 대신하였다.
12월 2일 병인
태묘의 납향(臘享)을 섭행하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납일(臘日)이 바로 온릉(溫陵)129) 제사날이다. 납향은 시향(時享)과는 달라 날짜를 당기거나 물릴 수 없다. 태묘의 제5실(室) 이상도 참으로 소중한 바이나 삼가 생각하건대 영녕전(永寧殿)의 인종실(仁宗室)·명종실(明宗室)에 계시는 영령들이 종고(鍾鼓)와 생뢰(牲牢)로 제향올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무릇 태묘의 제향은 봄 첫달과 가을 첫달 이외에는 여름 제사 겨울 제사 및 납향을 오직 친히 올릴 때에만 영녕전까지 함께 올리게 되어 있다. 올 납향을 만일 섭행하게 되면 자연 위안이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시는 인종과 명종의 혼령이 오르내리면서 어머님을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우러러 본받는 폭이 될 것이다. 더구나 두 실과 본 능과의 사이야 그 얼마나 가깝고 절실한 사이인가. 인륜이 지극하신 효릉(孝陵)으로서 온릉을 섬김에 있어 정성과 사모의 정이 아마 희릉(禧陵)과 차이가 없을 것이고 또 온릉이 복위(復位)가 되고 안 되고로 달리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태묘의 제7실 이하의 제향은 제례 절차를 상고해 보면 절차가 분명히 나와 있고 더구나 생전에 섬겼느냐 미처 섬기지 못했느냐에 따른 교훈이 경전에 분명히 실려 있다. 신도(神道)나 사람이나 생각은 같은 것이니 태실(太室)에서 행하는 것이 십분 지당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태묘에서만 직접 제향을 올린다면 감히 못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왕 직접 제향을 드리면서 유독 영녕전에 함께 올리는 제사를 빼놓는다는 것이 감히 할 수 없는 점이고, 둘째는 사옹원에서는 소선(素膳)을 봉하는데 태묘에서는 제육(祭肉)을 받는다는 것이 또 감히 못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음복주와 제육은 모두 제1실의 제물에서 받기 때문에 그 체모가 존엄하여 제육을 받지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고 보면 제사를 섭행시켜 인정과 예절에 서운함이 있는 것은 작은 문제이고 조종(祖宗)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대로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왜 제향을 앞두고 이미 모든 다짐을 했다 하여 주저할 것인가. 태묘의 납향을 대신을 보내 섭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에게 불서지전(不敍之典)을 적용하라고 명했다. 대향(大享)을 앞두고 취품(取稟)하지 않았다는 연유에서이다.
판중추부사 채제공에게 유고하기를,
"경의 속마음과 선견지명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조정 전체의 벼슬아치들 중에 자진해서 바른말 하는 자는 유독 경 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경이 이번에 받은 처분이나 사람들의 입질에 올려진 것이 전혀 턱에 닿지 않는 것들로서 어쩌면 선방(禪房)에 앉아 고량 진미를 얘기하는 것보다도 심하다고 하겠는데 그것이 내가 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도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일까? 그게 다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경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원로로 경을 예우하고 국사(國士)로 대우했는데 경이 나에게 보답하는 데 있어서는 털끝만한 것이라도 모두 아뢰어야 하는 그 점에 있어 혹 직분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심과 선견지명은 그것대로 본심과 선견지명이고 겉에 나타난 사실은 역시 겉에 나타난 사실인 것이다. 보통은 마음이 중한 것이니 겉에 나타난 하찮은 형적이 무슨 구애가 될까마는 대신은 여러 일반 백집사(百執事)들과는 달라 한 번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세도와 국가 기강의 쇠퇴와 융성이 달려 있고 한 번의 행동에 따라 사람들이 떠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잠잠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경의 지난번 행동이 만일 나를 너무 믿고 마음만 믿고 입만 믿고서 그랬다고 한다면 옛날 대신들이 놀란듯이 하고 위험을 잊지 아니하였다는 것에 비해 다소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괴이쩍게 여기다 못해 호되게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호되게 책망하는 뜻으로 준엄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기회를 보며 틈을 노리던 자들이 혹 느슨할세라 전후 좌우에서 쇠뇌를 쏘아대고 돌을 굴렸던 것이다. 그것이 모두 다 지공 무사한 마음으로 한 짓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의 마음을 제쳐두고 경의 자취만을 꼬집어서 하루라도 자기 책임을 보이기에 급급해서 한 자들인데 어떻게 그 말들이 하나 하나 꼭 맞기를 바랄 것인가. 그렇다면 경이 비록 자기 해명을 하더라도 중신 정창순(鄭昌順)·이문원(李文源) 등의 상소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애써 따지려고는 말았어야 했다. 일전의 큰 끝맺음이 있고부터 그날 새벽 이전의 문제들은 금령을 설치해 다시는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내가 듣기로 임금과 정승은 한 몸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정승에 대하여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찌 금령에 구애되어 우물우물 할 수야 있겠는가. 그리고 조정 신료들이 만일 그 때문에 다시 경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걱정을 말도록 하라. 내가 수중에 태아검(太阿劍)을 꽉 잡고 있어 내 비록 심히 부덕한 사람이나 결코 대신이 아무 까닭없이 낭패를 당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임금 허물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하기에 더욱 노력하라. 그리고 사람들의 말은 어느 정도 내 허물로 받아들이고 중첩해 내린 처분은 경을 옥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라. 즉일로 길을 떠나 서울 집에 돌아와서 아직 못다 말한 충성을 모두 털어놓으면 나로서는 마음을 쏟아 경을 임용한 데 대해 할 말이 있게 되고 경으로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나를 섬김에 있어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에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이 유고를 작성하게 하고 이어 초본을 사관(史官)에게 주어 경에게 전하게 한 것이니 경은 그 뜻을 잘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진심으로 말한 이 유고를 듣고 몸을 돌보지 않을 생각을 했다면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도 길을 나설 것이므로 나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김 판부사가 해낸 일을 결코 그 대신이라고 뒤지지 않을 것인데 사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게 뭐 있겠는가. 채 판부사가 올라올 때 탈 역말과 배행(陪行) 등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맡은 차사원들이 관례대로 거행하고, 도백은 하직을 고하는 일을 그만두고 즉각 달려가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공주 판관(公州判官) 이종휘(李種徽)가 곤장을 함부로 쳤다 하여 파직시킬 것을 아뢰니, 회유(回諭)하기를,
"허다한 용렬한 원이며 허다한 잘못된 정사에 대해 일체 눈을 감고 수수 방관만 하였다. 이낙배(李樂培) 같이 과장만 많이 하는 자, 정동민(鄭東閔) 같이 병치레만 하는 무리들은 언제 아전 하나 꾸짖고 무슨 일 하나 주장이라도 해보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어사 장계에 자주 등장하는 칭찬 절반 헐뜯음 절반인 감영의 판관을 그렇게 몰아내려 하니, 이 어찌 한 사람의 고을 원을 징계함으로써 열 사람의 고을 원을 조심하게 만드는 뜻이겠는가. 이 장계를 되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3일 정묘
승지를 보내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이어 내각 제학 정민시(鄭民始)에게 어제(御製)를 내리고 전교하기를,
"그 날이 어느 날이었던가. 하늘과 땅, 해와 달 같으신 그 덕 그 밝으심을 참으로 잊을 수가 없는데 그 때 위험한 상태를 붙잡아 유지해 준 그 사람의 공로를 내 어이 잊을 수가 있으랴. 세월이 많이 흘러 보고 들음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역적의 무리들이 달려들 조짐이 있는 것을 한스러워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홀로 마수(馬燧)130) 가 아니었던가. 서 충헌공 집에 승지를 보내 당일로 치제하도록 하라. 제문은 당연히 지어 보내겠지만 마침 감회를 읊은 시가 있으니 이 전교 1통을 등서하여 내린 시와 함께 내각으로 하여금 제학 정민시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제 소서(御製小序)에 이르기를,
"그 날이 어느 날이었던가. 하늘과 땅, 해와 달 같으신 그 덕 그 밝으심을 잊지 못하겠는데 그 때 그 위험한 상태를 붙잡아 유지해 준 그 사람의 공로를 잊을 수가 있으랴. 세월이 많이 지나 보고 들음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역적의 무리들이 달려들 조짐이 있는 것을 한스러워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홀로 마수가 아니었던가. 내 뜻을 시로 적어 멀리 주남(周南)의 태사(太史) 편에 부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시에,
하늘을 떠받든 충절의 그 상소문
섣달 초사흘은 해마다 지나가네
간단한 한잔 술을 충헌 댁에 보냈는데
햇귤 가지고 돌아올 그대 소식 반가워라
하였다. 이때 민시는 호남의 구임 방백으로서 아직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각 소속의 벼슬아치를 보내 어제시(御製詩)를 원임 제학 김종수(金鍾秀)에게 전하게 하였다. 임금이 지은 소서에 이르기를,
"충헌 댁에는 제주를 내렸고 호남 방백에게는 시를 부쳤다. 그날을 잊지 않고 있는 마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경과도 자리를 함께 못한 지 오래기에 역말을 달려 칠언시 한 편을 부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시에,
경에게 일찍이 취하도록 마시게 한 자리
그 달 그 날짜는 해마다 오건마는
호남으로 내려가고 지금 없는 그 한 사람
동곽의 한매를 마주보고 앉았으리
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이 홍제원에 이르러 돈유(敦諭)를 가지고 간 사관(史官)을 통해 병이 나 나올 수 없는 정황을 아뢰자, 비답하기를,
"대신이 이미 서울 가까운 지역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기쁘다. 그러나 사현(沙峴)은 큰 재이다. 재의 동쪽과 서쪽은 주 부자(朱夫子)가 비유한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관문과 다를 것이 없으니 경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관문을 넘어서야지만 나라뿐이며 공도를 위할 뿐인 대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기다렸다가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4일 무진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판중추부사 채제공이 상소하였다.
"남의 신하로서 가장 큰 죄는 임금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신 같은 자가 차마 우리 임금을 저버렸다는 것은 국가의 형정으로 보아 백 갑절도 더한 형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연전에 걸려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번이라고 꼭 죽게만 되어 있었지 살아날 길이라고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 마음과 힘을 다 써주시고 국법을 굽혀가시면서 구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울부짖는 것을 건져내 조정의 고굉(股肱) 자리에 발탁해 주셨습니다. 이는 실로 역사에 있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5년 동안 재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예우가 더욱 도타와 국정을 위임하시면서는 잘 다스려 주기를 기대하셨고 서로 의지하기는 마치 물과 물고기였습니다. 등우(鄧禹)가 말한 ‘의리로는 비록 군신 사이지만 정으로는 부자와 같다.’고 한 것이 바로 신의 오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하는 신을 그렇게 믿어주시는데 신이 만일 전하를 쉽게 저버린다면 이는 천지가 다하도록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하늘의 이치가 여기에서 끊어지고 만 것이니 죽이고 또 죽이더라도 어찌 그 죄가 조금이나마 속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것이 군주를 저버린 것임을 분명히 아시고서도 군주를 저버린 데 대한 형률을 적용하지 않고 단지 삭출(削黜)하여 부처하는 정도로 약간의 책벌을 내리셨습니다. 깊은 마음을 헤아려 다시 살려주시고 또다시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하여 끝까지 돌보아주는 하늘 땅 같은 전하의 덕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숨겨만 두고 말하지 않으면 이는 전날 마음을 쏟아 그를 대우하던 본의가 아니다 싶으셔서 이에 자상한 말씀을 크게 내려 미욱함을 하나하나 자세히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아, 사람이 이웃 사람의 자제(子弟)에게서는 비록 과실을 발견하더라도 반드시 꾸짖으려 들지 않지만 자기 자식에게 과오가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반드시 엄히 질책하는 법입니다. 사실 꾸짖지 않는 것은 그를 외면하는 것이고 꾸짖는 것은 지극한 정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았을 때 신은 지극히 보잘 것 없어 우리 전하를 저버렸는데도 전하는 지극한 사랑과 성스러움으로 신 보기를 자식 같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입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서해(西海)로의 귀양길을 마치 살기 좋은 고장 찾아가듯 하였는데 기전(畿甸)에서 백여 리쯤 거리에 이르렀을 때 압송해 가던 관원이 소매 속에서 밀지(密旨)를 꺼내 보고서는 귀양지를 그 곳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다 육지를 얻음이요 이미 뼈만 남은 데에다 살을 붙여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어 장단(長湍)에 묻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이를 터인데 몇 달도 채 못 되어 완전 석방의 명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졌고, 완전 석방으로도 부족하여 직첩을 돌려주었으며, 직첩을 돌려주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거두어 서용해 주었고, 거두어 서용해 주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그 날로 서추(西樞)에 다시 부록(付錄)하라는 명이 내려져 마치 조례에 따라 대신에게 당연한 예우를 하듯이 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이 어떻게 감히 거기에야 미쳤겠습니까. 황량한 집에서 서성이다가 손모아 천지에 빌며 감격의 눈물이 천 갈래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사관이 별유(別諭)를 전해오기 두 번 세 번에 이르러 신은 이에 떨리고 두려워 마음의 안정을 잃었다가 한참 지나서야 겨우 스스로 내심 말하기를, ‘전후 성상의 전교는 사실 너를 옥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에서 하신 것이다. 지난 날 함정에 빠진 자에게 돌을 던지는 식의 상상 밖의 별의별 망측한 말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것은 다 불문에 부쳐버려야지 어찌 감히 죄의식에만 푹 빠져있으면서 어쩌면 꼭 의리를 자처하는 사람처럼 하고 있을 것인가’ 하고서는 이에 병든 몸을 이끌고 밤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서울 가까운 곳에 와 밤을 묵었더니 하룻밤 사이에 기식(氣息)이 차츰 소생했습니다. 도성 문 밖을 나와 보니 상서로운 구름은 예와 같이 궁궐을 싸고 있고 대비전의 종소리가 완연하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부모가 매우 가까이 계셔 비록 그날로 생명이 다하더라도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구마(狗馬) 같이 천한 몸의 병이 달로 더치고 날로 심하여져 오랜 기간을 요와 이불 속에서 지내고 있으므로 식지만 않았을 뿐 바로 시체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머리를 조아려 사은하려고 하여도 전혀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슬픈 눈물을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신의 사사로운 입장을 말씀드린 것일 뿐이고 나라의 법으로 따져서는 군주를 저버린 죄를 사면받을 길은 끝내 없고 명령대로 즉시 거행하지 않은 벌도 늦출 수가 없는 것이기에 이에 감히 나그네 길목에서 짚자리를 깔고 피눈물로 소장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전후 죄와 잘못을 들어 엄한 벌을 내리심으로써 죄 지은 자가 요행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신이 여기에서 더더욱 깊이 맺힌 원한이 또 하나 있는데 신이 만일 말하지 않고 홀연히 죽고 만다면 이는 신이 신의 마음을 스스로 밝히지 못한 것이고 전하가 전교 속에서 ‘마음을 안다. 마음을 안다.’ 하셨던 것도 장차 세상에 밝혀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 윤영희가 맨처음에 죄를 범한 것은 역적 신기현과 관계가 되어서입니다. 신이 누구보다 먼저 역적 기현을 성토한 사람으로서 송골매가 참새 쫓는 마음이야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은 더한 것입니다. 더욱이나 신이 그와는 구구한 척분(戚分) 관계였으니 그를 배척하고 인연을 끊는 데 있어 남들보다 갑절은 더했어야 했습니다. 그날 빈대 때 여러 경재(卿宰)의 마음이 바로 신의 마음이고 여러 경재의 말이 바로 신의 말이었습니다. 단지 신이 믿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 말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신을 의심하는 논의들이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만든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길이 없다.’ 했듯이 신 스스로 한 짓인데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마음이란 속에 있는 것이어서 지난 번에 성상께서 만약 해와 달 같은 밝으심으로 여지없이 통촉해 주시지 않았던들 신의 마음이 징토에 있어 원래 그렇게 엄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기현으로 말하면 그는 영희의 뿌리입니다. 삼가 전하의 유고를 읽었을 때 말씀하시기를 ‘임금과 정승은 일체인 것이다. 임금이 정승에 대해 혹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찌 금령에 구애받아 우물쭈물 할 것인가.’ 하셨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성인의 말씀이셨습니다. 임금이 정승에 대해 금령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면 정승도 군상에게 어찌 할 말을 못 다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재간을 징토한 것은 그가 기현을 사주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역적들의 모의가 매우 비밀스러워 그들 속셈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데 오늘날 기현이 왕부에 자수한 것은 기현이 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이 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간은 섬에 유배되어 있는 역적에게 또 딴 마음을 품은 자였습니다. 그가 기현을 사주했던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들과 한 데 얽혀 모의한 자가 어찌 기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귀신의 벌이 먼저 가해지는 바람에 그 소굴이 다 파헤쳐지지 못했던 것인데 만약 기현마저 입을 다물고 죽었더라면 흉악한 상소를 사주했던 것 이외에는 탄로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다행스럽게도 기현이 자수하여 그들 속셈을 이리 저리 캐물을 수 있는 길이 환히 열린 것인데 어찌하여 의금부가 신문할 때 문목을 따로 내지 않고 대충 대충 형신하여 빨리 끝내는 것을 위주로 해서 끝내 그 단죄가 섬에 정배하는 정도에 그치게 했단 말입니까. 그것이 어찌 섬 역적의 끝없는 흉악한 맥락을 파내는 길이겠습니까.
신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천도가 밝고 밝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자수하게 하였는데 사람들 하는 일이 느슨하여 끝까지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게다가 또 금령(禁令) 두 글자를 두어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전하는 신의 말을 노망한 말이라 여기지 말으시고 크게 단안을 내려 역적 기현을 잡아들여 국청을 열고서 엄히 전말을 따져 물으심으로써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질서를 바루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음은 신명(神明)의 집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훤히 알아 천지가 아무리 넓어도 한 자리나 마찬가지인 것인데 더구나 나와 경 사이이겠는가. 상전 벽해가 천백번 바뀌어도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나와 같고 옛날의 경이 바로 지금의 경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지자면 오직 마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오직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권우와 대접도 해준 것이고 책망과 면려도 했던 것이다. 세상에 만일 눈이 밝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경의 사이를 관찰할 때 탄탄대로는 제쳐두고 거센 파도가 이는 곳에서 둘 사이의 천심(淺深)과 성위(誠僞)를 말할 것이다. 남들이 경을 두고도 혹 그렇게 말할 것인데 더더욱 경이 나에 대해서이겠는가. 대신의 출처는 숫자나 채우는 신하들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지 말라. 임금과 대신이 한 몸이 되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천하가 한 책상 위나 같다면 일개 선비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인데 경이 어떻게 차마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엇인가 지키겠다고 옹졸하게 굴 것인가. 보내온 소장 속의 그러저러한 말들은 너무 속된 말들로서 당당한 대방가들의 비난을 받을까 염려된다. 그리고 기현이며 영희를 차근차근 끄집어내면서 금령을 내렸던 옛날 일까지 언급했는데 그것은 더더욱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리니 경은 모름지기 모든 것을 일소하고 즉시 마음을 바꾸어 전에 고심하고 뒤에 와서 진심을 보이는 나의 성의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 기사
각신 남공철(南公轍)을 보내 판중추부사 채제공에게 유시하였다.
"어제의 상소에는 금령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으나 군주와 정승은 일체라고 내 이미 격식을 깨고 돈유(敦諭)에서 언급한 이상 대신이 금령을 무릅쓰고 상소 속에 언급한 데 대해 똑같이 물리치기는 어렵게 되었다. 또 이번의 갈등은 모두가 금령에 관계되는 것들인데 본마음을 털어놓으라고 하고서 그로 인해 원래의 소를 받아들이지 아니한다면 이는 마치 들어오라고 하고서 길을 막아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또 다시 생각해보니 일전 김 판부사가 승정원에 보내온 차자는 승지로 하여금 밖에서 주고받다가 즉시 되돌려 주게 하였었는데 그렇다면 한 대신에게는 금령을 지키고 한 대신에게는 금령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어 누구에게는 옥죄고 누구에게는 풀어준 혐의가 없지 않기에 주저하며 난감해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물었더니 아직 중추부 녹사로부터 성문에 들어왔다는 보고가 없다고 하여 답답한 나머지 더욱 염려가 된다. 찬 날씨를 헤치고 어렵게 오는 길에 기운이 더 손상됨은 없었는지? 각신을 보내 이 유고를 가지고 도성 밖의 채 판부사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 전해 주고 그의 기거(起居)를 묻고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지 탐문한 다음 뒤 이어 아뢰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 오도록 하라."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변복규(卞復圭)가 보고 들은 일들은 이러하였다.
1. 작년 10월 사이에 총독(摠督) 복강안(福康安)이 후장 부락(後藏部落)을 치러 갔는데 길이 요원하고 산천이 험준하여 병졸과 장수 모두가 걸어서 전진하였고, 올 5월에는 장마를 틈타 군사가 진격하여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로 적의 소굴을 들이치자 그 추장 확이객(廓爾喀)이 형세가 군색해 항복을 청하면서 두목 감포(堪布) 등을 보내 악공(樂工) 1부(部), 순상(馴象) 5척(隻), 번마(番馬) 5필(匹), 공작(孔雀) 3쌍, 산호·서각(犀角)·보석 등의 물품을 바쳐왔으며, 9월에 항복 표문과 승리하였다는 글이 먼저 이르자 황제가 복강안의 공을 가상하게 여겨 내각 태학사(內閣太學士)에 승진시켰다고 하였다.
1. 8월에는 대만(臺灣)에 3일 동안 지진이 발생하여 집들이 무너졌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2, 3만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1. 관(關) 밖은 약간 풍년이었으나 관 안은 흉년이었고 하남(河南)과 직례(直隷) 등지는 여름철의 가뭄과 가을철의 메뚜기로 흉년이 들어 황제가 민망히 생각하고서 6월부터 진휼소를 설치해 내년 3월에 가서야 그친다고 하였는데 길가에 굶주린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서 관동(關東)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선 무리들이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12월 6일 경오
인정전 뜰에 나아가 납향(臘享)의 향과 축문을 공손히 맞이하고, 전교하기를,
"납향을 섭행토록 명한 것은 비록 온릉(溫陵)의 기제삿날과 날이 겹쳐서이지마는 인정이나 예절로 따지자면 실로 제사드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향과 축문을 친히 점검해서 친히 전하는 것도 어려워서 혹 하기도 하고 혹 하지 않기도 하는데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살피는 일마저 대신하게 한다면 너무 서운한 일이 아니겠는가. 종묘·사직·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의 납향 대제에 향과 축문을 전할 때에는 미리 전각의 뜰 위에 나가 있다가 향과 축문이 지나갈 때 공손히 맞이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펴야겠으니 해당 방에서는 그리 알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이르기를,
"태묘 제향의 강신례와 초헌·아헌·종헌 때 제5, 6실(室) 이후로는 향관(享官)과 수복(守僕)들이 모두 해당 실(室) 신위 앞에서 바쁘게 제사일을 돕기 때문에 제1실 앞에는 수직하는 사람이 없어 극히 미안스럽다. 이 뒤로는 태묘의 대소 제향과 영녕전(永寧殿) 제향 때 묘사(廟司) 1명·수복 1명이 제1실 기둥 밖에 엎드려 있다가 예가 끝난 뒤에 물러가는 것으로 영원한 격식을 정하여 태묘의 등록(謄錄)에 등재하고 그대로 준행하게 하라. 그리고 친히 제사 올릴 때와 춘·추향(春秋享)을 양전(兩殿)에 함께 제향할 때에는 묘사가 합해서 4명인데 촛불 손질과 문을 지키는 일들을 나누어 맡기자면 인원이 부족할 때가 있으니 그러한 때는 본서의 도제조와 제조가 나가도록 하라. 이를 일체 격식으로 정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각궁의 내시는 불과해야 수직하는 일과 문을 지키는 일을 할 뿐이다. 제향 때는 이것을 주관하는 이로 헌관(獻官)이 있고 전사관(典祀官)이 있어서 저들이 감히 간섭할 바 아닌 것이고 정결 여부는 적간(摘奸) 때 자연 그 범주에 들어가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근래 각궁의 제향 때 내시들이 제물과 저주지(楮注紙)·폐백(幣帛) 등을 저들 멋대로 점검 퇴각하는 폐단이 끝이 없다고 한다. 너무 놀랍고 통탄스런 일이다. 이 뒤로는 내시들이 제물·폐백·종이 등 제사에 관계되는 일을 만일 혹시라도 종전과 같이 간섭을 하면 해당 내시를 귀양보낼 것이다. 이 뜻을 내시부(內侍府)에 엄히 분부하여 단속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수복들로 말하더라도 더더욱 어떻게 감히 막중한 일에 혀를 놀릴 것인가. 역시 각별히 엄중 단속하고 이 전교를 태상의 등록에 등재할 것이며 또 각궁의 수직 내시와 내시부로 하여금 베껴서 벽에 붙여두게 하라."
12월 7일 신미
춘당대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시험보였다. 진사 이치훈(李致薰)이 수석을 하여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하게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이날 응시한 유생(儒生)들로 예모를 어긴 자들이 많자, 상이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잡아다가 문초하라고 명하고 동성균(同成均) 서유방(徐有防)에게 이르기를,
"선비란 나라의 원기(元氣)인 것인데 오늘 선비들의 버릇은 한심하다 할 만하다. 군주가 지척에 있는 궁전 뜰에서 어떤 자는 흰옷을 입고 어떤 자는 휘양[揮項]을 쓰기도 하였으니 이것부터가 너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시위하는 군병에게 이미 털가죽의 방한구들을 착용하도록 명했으니 추워서 휘양을 쓰는 정도는 그래도 말이 되겠지만 시험 제목을 내걸 때의 예를 거행함에 있어서는 전연 질서가 없으니 그런 사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오늘 표(表)와 부(賦) 두 가지 시험 제목을 걸어 각각 뽑고 또 연말에는 매번 응제(應製)의 전례가 있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응제 시험 제목을 함께 낼까 했다가 선비들의 버릇이 하도 놀라와 단지 표제(表題)만 내고 응제는 않기로 하였다. 이 뒤에도 친림하여 시취할 때 선비들의 버릇이 다시 종전과 같다면 당연히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이다. 성균관 당상관은 이 하교를 시험 제목이 내걸린 현판 앞으로 가져가서 많은 선비들을 불러 모아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반관의 장을 이미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상 재임(齋任)이라고 태연히 시험에 응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름을 묻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8일 임신
차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판중추부사 채제공을 불러 접견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신하로서 군상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자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만 전하께서 신에게 내리신 망극한 은혜는 하늘과 땅, 강과 바다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5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의리로는 군신이었으나 은혜로는 실상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 전하를 그렇게 저버렸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사랑으로 돌보시고 도로에서 죽을까를 안타깝게 여겨 기전(畿甸)에다 두셨으니 그것을 어찌 귀양살이라 하겠습니까. 삼사가 들고 일어나 신의 죄악이 낭자하게 드러났지만 그래도 성은에 감격하여 일체 남들 말은 여사(餘事)로 접어두고 신은 지금 아침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죽기 전에 한번 전하의 빛나신 모습을 뵙고 물러가려고 지금 이렇게 체면 무릅쓰고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말하였으니 나도 대략 말을 하겠다. 대체로 대관(大官)은 세상을 두루 다스려 나갈 때 그 한마디 말의 정도에 따라 인심의 향배가 결정되는 것이다. 윤영희가 죄가 있고 없고는 그만두고라도 면전에서 지킬 도리는 지켜야지 어떻게 서로 다투듯이 편파적인 논리를 내세울 것인가. 경의 지난 날의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서 말한다면 당연 노망이라 할 것이고, 책임을 추궁해 말한다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어 서글프기도 했고 매우 괴상하기도 했었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고 정승 김치인(金致仁)이 조정의 자리에서 자신이 입은 탄핵 상소를 가지고 논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논하기에 신이 고 정승 이성원(李性源)에게 이르기를 ‘그 정승이 3, 4년 전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년 뒤에는 나도 아마 그런 망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때 그 정승의 나이가 지금 신의 나이였습니다. 신이 과연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그렇기는 하였으나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이 닥치는 곳마다 죽을 죄를 범했는데도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굽어 살펴주셨습니다. 신은 지금부터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면서 비록 세시 문안 때라도 감히 조정에 나올 생각은 하지 않으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지나친 말이다. 지금부터 경이 조섭하면서 다시는 공격하거나 공격받을 만한 구실이 없게 한다면 그 어찌 세상을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돌아갈 때를 당해 가슴 속으로는 국가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재앙의 뿌리가 캄캄한 속에 잠복해 있는데 신이 어찌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소차(疏箚)로 승정원에 올리고 싶어도 금령을 범하는 일로 역시 죽을 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신이 감히 전하께 직접 차자를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승지 이익운(李益運)을 명하여 읽어 아뢰도록 하였다. 그 대략에,
"천지가 있고 군신이 있어 온 이래로 더할 수 없이 엄한 것이 군주에 있어서는 기강이고 신하에 있어서는 직분입니다. 군주가 그 기강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되고 신하로서 그 직분을 지키지 않으면 자손을 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변하지 않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큰 성인이셨으나 《시경》과 《서경》을 산삭(刪削)하는데 그쳤고 직접 저술한 것으로는 《춘추》 한 책이 있을 뿐인데 공자는 거기에서 신하가 딴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목을 베야 한다는 의리를 엄히 세워서 난신 적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원할 길이 없고 군신간의 큰 질서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는 오늘을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몇 십년 동안 음기가 엉겨 얼음이 굳어지듯 큰 재앙을 빚어왔던 역적이 전하의 영명하심을 꺼려하여 종사를 전복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 하늘을 업신여길 정도로 큽니다. 전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어 성색(聲色)을 크게 나타냄 없이도 문벌이 높은 집안의 흉악한 괴수들을 거의 다 뿌리뽑고 국가가 태평을 누린 지도 거의 20년이 가까워오므로 어리석은 자들은 모두가 다 나라 안에 걱정이 없다고 말하지만, 신만은 앞으로 닥칠 재앙이 이미 지나간 것보다 더하고 아직 드러나지 아니한 기미가 이미 드러났던 것보다 참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난의 근원이요 재앙의 뿌리는 바로 인(䄄)이 그 사람입니다. 외람된 생각을 품고 역적 담을 자식으로 삼았고 온전히 보호해 준 은혜를 잊고서 흉도들을 모았습니다. 왕실 지친으로서 불궤(不軌)를 몰래 도모하였음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고이 죽고 또 한 사람은 가까운 섬에다 두었으니 날이 갈수록 불안이 더해지고 국가 형세도 날이 갈수록 위태하리라는 것은 명철한 자가 아니고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맨 먼저 화를 빚어낸 자들은 홍국영(洪國榮)과 송덕상(宋德相)이지만 그 뒤로 역적 조시위(趙時偉)가 비밀리에 추대했던 것이나 역적 정후겸(鄭厚謙)이 거기 동조했던 일들이 어느것 하나 뼈가 떨리고 쓸개가 흔들리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요사스러웠던 김우진(金宇鎭)은 수상(首相)의 아들로서 그들과 무르익게 결탁하고 있었고 역적 구선복(具善復)은 훈련 대장으로서 밤을 이용하여 그들과 사전 준비를 했었는데 그 때야말로 국가 존망이 일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말없는 속에 전하를 돕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공도로 처리하지 않고 사사롭게 다스리셨고 의리로 하지 않고 은혜로 하여 숨겨주고 덮어주므로 해서 난의 뿌리가 그대로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요망하고 참혹하기 그지없는 역적 이재간이 감히 내심 이리저리 재다가 결국 공공연하게 제 주장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대체로 그들이 소굴로 알고 모여드는 것이 첫째도 역적 인이요 둘째도 역적 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숨기고 덮어줄 뿐이 아니고 혹은 도망쳐 도성으로 되돌아와서 자취를 숨기고 제멋대로 출몰하게 하고, 혹은 강의 경계를 뛰어들어와서 굴레벗은 말처럼 마구 가까이 하게 하여 민심이 들끓고 식을 줄을 모르게 만드신 것입니까. 다행히 우리 자성(慈聖)이 대의를 꿰뚫어 보시고 우리 국가를 붙들어 세우기 위해 언문 교서를 반포하셨던 까닭에 위험이 변하여 안정으로 돌아섰던 것이니 이 나라에 생명을 가진 무리치고 그 누구라서 흠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온 모진 독기가 일개 신기현이라는 자를 만들어내어 감히 전첩(專輒) 두 글자를 가지고 조정 신료를 논박하면서 터놓고 발붙일 자리를 만들려고 나섰으니 천하에 이보다 더 큰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는 역적 인과는 인척 관계가 직접 맺어져 있고, 또 역적 재간으로부터는 원래 지휘를 받아온 자로서 그가 죽음을 달게 여기고 머리를 숨긴 채 사주를 받았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지난 날 신이 한 말은 그것이 바로 길에 떠도는 공공연한 말로서 사전에 선견지명으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천도가 매우 밝아 오늘에 와서 그로 하여금 사실을 토로하게 만들었으니, 아,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을 기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문제가 다시 발론되고 그 동안의 공론이 과연 사실로 입증되었다면 당초 사주를 받을 때 그 허다한 모의며 허다한 내용들 그리고 전후 당여(黨與)는 누구 누구이며 마무리 조치의 이렇고 저렇고를 파내어 물을 만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인데 어찌해서 전하는 심문할 조목을 내게 하지 않고 바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실시해서 급급히 마무리하는 것만을 위주로 하셨습니까? 혹시 명철하신 전하께서 그것이 필경에는 역적 인과 밀접히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벌써 헤아리시고 그렇게 예방책을 쓰신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전하의 마음은 단지 사사로운 은혜만을 아신 것이고 나라의 법은 생각치 않은 것입니다. 신이 그래서 밤중이면 가슴을 치면서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쟁집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기현 한 사람에 그친다면 신이 그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광운(匡運)의 공초에 분명한 지적이 있었는데도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엉킨 당여들을 캐묻지 않았고, 흉악한 익노(翼魯)에 있어서도 밀접한 관계를 서로 가지고 있었으나 서로 화답하는 사나운 새 같은 무리들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혹은 일개 도를 맡아 다스리면서 역적 무리에게 음식 거마 등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혹은 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방자하게 못된 무리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이것만 하여도 이미 깊은 근심과 끝없는 염려가 되는데 게다가 또 산골에 그림자를 숨기고 있고 강이나 바다에서 무리를 끌어모으는 자들도 있어 예측할 수 없는 속에 잠복하여 있는 화란의 싹이 백 명의 기현이 있는 정도인데도 전하께서는 그것들을 좁은길을 따라 지름길을 찾아내고 실마리로 실을 뽑아내어 큰 주토(誅討)를 가하여 요악스런 기운을 말끔히 쓸어버리려고 않으시니 이 역시 성상의 생각에, 그 맥락이 역적 인과 연결되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줄곧 비호하려는 것입니다. 전하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지금 명철한 성상이 위에 계셔 은택이 넘쳐 흐르고 있는데 저들도 똑같이 천성을 가졌다면 무엇이 괴로워서 반기를 들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국가를 등지고 의리를 원수처럼 보는 뿌리들이 모두 역적 인에게 의지하고 가지고 놀면서 그를 하나의 이용물로 삼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 저 역적 인을 일각이라도 천지 사이에 머물러두는 것이 종사에 있어 복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성상으로서는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하가 대비의 뜻을 받드는 도리로서도 잘 받드는 것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차라리 말을 그만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한스러운 것은 역적 기현이 옥으로 걸어나와 사실을 자수한 것이 더할 수 없는 좋은 기회였고 중대한 관계였건만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심혈을 기울여 그 사건의 뿌리를 캐낸 자가 있었다고 듣지 못한 그 일입니다. 결정이 난 뒤에는 그래도 금령에 핑계할 수도 있겠지만 국문하고 다스릴 그 때 어찌해서 한 사람도 충성과 의분을 느끼는 자가 없었단 말입니까. 전하의 조정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다른 날 급한 일이 발생하면 누구를 믿으시렵니까? 신은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나 군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재앙의 뿌리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음을 눈으로 보고서 그대로 입 다물고 몸을 바칠 생각을 않는다면 나라를 저버린 귀신이 되어 지하에서도 용납받기 어려울 것이기에 망녕되이 큰 의리를 내세워 짧은 차자를 지어 보았습니다. 다만 지금 금령이 아직 철회되지 않아 올릴 길이 없기에 감히 소매 속에 넣고 나와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위로 조종의 소중한 부탁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미천한 신의 괴로운 충정을 살피시어 빨리 역적 인을 법에 따라 처단하란 명을 내리시고 그의 여러 아들들에게도 모두 분산시켜 귀양보내는 법을 적용하실 것이며 이어 의금부로 하여금 기현을 잡아다가 역적 당여를 끝까지 캐물어 빨리 하나 하나 뿌리를 뽑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4백 년 동안 내려온 이 나라가 태산 반석 위에 길이 길이 안정되게 하소서."
하였다. 익운이 인의 사건에까지 읽어오자 상이 익운에게 읽기를 중지하도록 명하고 차자를 앞으로 가져오게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전하가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숨 돌릴 사이 없이 종묘 사직에 화가 닥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는 이렇게 말로 주고받을 문제가 아니다. 경은 먼저 물러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이 차자를 혹 미루어 두고 처리하지 않으신다거나 혹은 비답이 없으시면 신은 궁전 섬돌에다 머리를 깨트리고 말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보지 않아서 그렇지 만일 끝까지 본다면 위 아래 사이에 틀림없이 좋지 못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니 그 어찌 난처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이 비록 대신이라지만 이미 금령을 마련해 두고 있는 이상 내 어찌 그것을 보면서 이 구절은 어떻고 저 구절은 어떻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난처라는 두 글자를 하교하시면서 4백 년 종사의 중함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이것 저것 수작하다 보니 기운이 몹시 좋지 못하다. 경은 바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기운이 좋지 못하시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신은 물러가겠습니다."
하고서, 뜰에 내려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자 상이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부축해 나가게 하였다. 이에 이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예조 판서 박우원(朴祐源), 병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신들이 아까 판부사가 전하께 직접 올린 차자 중의 한 구절을 들어보았는데 바로 온 나라 신민들이 다 같이 토죄하는 큰 의리 그것이었습니다. 그 차자에 담겨진 기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비록 모르겠지만 명색이 대관으로서 이미 전하께 직접 차자를 올렸으니 삼가 보여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보지는 못했으나 아까 들은 그 한 구절은 아마 불태워버려야 할 내용 같았다."
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그것이 일국의 공론일 뿐만 아니라 대신이 직접 올린 차차를 미루어 두고 반포하지 않으시면 뭇사람들 마음에 어찌 의혹이 일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전체를 보지는 않았으나 알만한 내용이지 어찌 별다른 말이야 있겠는가."
하였다. 익운이 아뢰기를,
"대신이 직접 올린 차자라면 그 의의가 막중한데도 전하가 끝까지 반포하시지 않으려고 하면 신은 옛사람이 임금의 잘못을 충간했던 그 일을 본받아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익운이 아뢰기를,
"징벌 토죄는 중대한 의리인데도 오늘 자리에 나온 여러 신하들 중 한두 중신 이외에는 성심으로 토죄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말이 채 판부사에게서 나왔다 하여 그러는 것이라서 신으로서는 서글픕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운이 아뢴 말이 극히 놀랍고 망녕스럽다. 파직하라."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오늘 조정의 신료들이 역적 괴수와 아직까지 한 하늘을 이고 있음이 바로 여러 신하들의 죄이기는 하지만, 익운이 한 나라 공공의 논의를 자신의 사사로운 의리로 간주하여 여러 신료를 성실하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몰아붙이니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였고, 창순은 아뢰기를,
"익운의 말이 극히 잘못되었습니다. 오늘 조정의 신료로서 그 누가 그 문제를 놓고 가슴 썩히고 아픔이 뼈에 사무치지 않은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아뢴 말은 마치 판부사 혼자만 그 의리를 아뢴 것처럼 하면서 여러 신료들은 모두 성실하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몰아붙이니, 그렇다면 판부사가 5년 독상(獨相)을 하면서 묵묵히 말 한 마디 없다가 이제 와서 비로소 직접 차자를 올린 것은 성실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익운이 이 기회를 틈타 그 말을 꺼낸 것은 사실 아직 허약한 멧돼지가 머뭇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조짐을 보이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익운의 말은 과연 망녕스럽다. 그러나 이는 실상 경들이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난번 채 판부사 문제가 일어난 뒤에 그를 정당한 방법으로 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병판과 형판의 상소는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그 뒤로 대간들이 아뢴 내용에는 심지어 역적을 편들었다는 등의 말까지 있었으니 이것은 사실 그 사람만 공격하고 그 당여는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잃은 일이었다."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익운이 불성(不誠)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상대를 일망 타진하려고 하는 속셈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였고, 창순은 아뢰기를,
"지금 비록 그 당여는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하교하였으나 채 판부사의 지난 번 사건이 있은 뒤에도 조정에서는 그의 당여를 등용하기를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나 똑같이 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그의 당여를 공격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으며, 이소는 아뢰기를,
"지난번 강교(江郊) 거둥으로 온 조정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을 때 채 판부는 파직을 핑계하고 홀로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것을 성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차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자리에 나와 앉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허물을 삼는다면 신이 달게 받아들이겠지만, 승지가 여러 신료들을 성실하지 못하다고 몰아붙인 것은 참으로 괴이쩍고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교 거둥 때에는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명하였고 지난번 잘못 때는 꼬리가 크면 흔들기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처분을 내려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오재순(吳載純)이 아뢰기를,
"대신이 직접 올린 차자는 바로 온 나라가 일제히 토죄하는 내용입니다. 빨리 반포하소서."
하자, 이에 여러 신료들도 번갈아 가며 반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 모두가, 외간에서 반드시 의혹을 할 것이라고 하니 내보이겠다."
하고, 차자를 가져다 보여 주었다. 이소 등이 다 읽고서 다같이 아뢰기를,
"이 문제는 바로 신들이 평소 눈을 치뜨고 담력을 발휘하여 해결하고 싶었던 일이요 또 피로 얼굴을 씻고 울음을 삼켰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따를 것을 윤허하소서. 그리고 그 중의, 도를 맡아 다스리면서 역적 무리에게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고, 대장 자리에 앉아 못된 무리들을 끌어모았다고 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캐물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를 맡아 다스리면서’ 운운한 것은 아마 신기현이 역말을 타고 올라올 때 감사 윤시동(尹蓍東)이 전후 사실을 장문(狀聞)하지 않은 일을 지칭한 듯하다."
하자, 유린이 아뢰기를,
"그것은 과연 윤시동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 당시 시동이 수령에게 일임하고 일부러 모른 체 한 것은 극히 잘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 이 일 때문에 파직을 당했지만 음식과 역말 제공 운운한 것은 듣기에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그 일이 바로 대신이 재상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그 때는 말 한 마디 없다가 이제 와서 비로소 직접 차자를 올리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이소 등이 또 허락을 빨리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문제는 금령이 내려져 있을 뿐만 아닌데 어떻게 내 앞에서 말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이나 하는 것처럼 하는가."
하고, 인해서 엄한 전교를 【엄한 전교는 기주관(記注官)이 전하지 않았다. 아래도 마찬가지다.】 내렸다. 이소 등이 아뢰기를,
"왕의 말씀은 신중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지나친 전교를 내리십니까."
하니, 또다시 엄한 전교를 내리고, 물러가도록 재촉하였다. 삼사가 앞으로 나오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옥당은 오늘 조정의 신료가 아니란 말인가. 모두 체직하라."
하였다.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날씨가 추워서였다.
12월 9일 계유
부사직 이동욱(李東郁) 등이 【우윤(右尹) 권이강(權以綱), 부사직 이방영(李邦榮)·김한동(金翰東), 부사과 이지영(李祉永)·권평(權坪)·권실(權實)·심규노(沈奎魯), 전 교리 강침(姜忱), 전 수찬 최헌중(崔獻重), 전 지평 한치응(韓致應).】 연명하여 상소하기를,
"아, 오늘의 국가는 위에 있는 군주는 외로운 상태이고 난신 역도가 아래서 횡행하여 겉으로는 비록 평온한 듯하나 숨어 있는 걱정이 금방이라도 닥칠 것만 같은데 그 근원을 캐보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일개 역적 인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괴수입니다. 아, 그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몰래 딴 생각을 품었고 반역의 정상이 여러 차례 탄로났으며 흉한 무리들이 번창하여 단서가 층층으로 드러나고 맥락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홍계능과 양해의 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역적 홍국영과 덕상이 몰래 왕권을 바꿔놓을 음모를 꾸몄고, 구선복과 정후겸의 죄가 하늘을 업신여길 정도로 큰데도 역적 김우진과 조시위가 죽음을 각오한 당여를 맺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후익과 김상로가 사전 준비에 힘을 다했고 광운이 설계를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 모두가 뿌리는 역적 인이며 머리를 쓴 것도 역적 인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아들 담이 밤중에 지레 죽었을 때 그 진상이 이미 다 드러났는데 그의 죄안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결정이 된 것입니다. 그 밖에 그가 도성에 잠입한 것이라든지 한강의 군영(軍營)에서 독대한 것들은 또 얼마나 위급하고 불안한 때였습니까. 다행히 우리 대비께서 국가를 지키려는 성덕과 전하를 보호하려는 고심으로 십행(十行) 언문 교서를 해와 별처럼 밝게 내리셨기 때문에 나라를 위기 일발에서 구하셨습니다. 아, 저 역적 이재간은 무슨 마음을 가졌기에 감히 공공의 자리에서 드러내놓고 배척하고 몰래 흉악한 상소를 올리도록 사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역적 괴수는 저버리지 않겠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전후로 여러 역적들이 길은 달라도 궤도는 함께 하면서 정체를 숨기고 탈을 바꿔 써왔는데, 그들은 모두 역적 인을 의지하고 그를 수중에 가지고 노는 이용물로 삼아왔습니다. 때문에 인심은 여우에 홀린 듯하고 적세는 올빼미가 날개를 펴듯 팽창하여 앞서는 해조의 당상관이 자진해서 의식을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유수라는 자는 모른 체하고 문을 열어 역적을 놓아 주었으며, 뒤에는 윤시동이 음식과 역말을 제공하면서 역적 일행을 정중히 호송하였고, 이주국은 그들의 숙소가 마음에 걸려 제멋대로 당여를 배치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라의 벼슬아치들 절반이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고 우리가 모르는 속에 엄청난 재화의 조짐이 잠복해 있음을 알 만합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얼마나 섬뜩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지 못하시고 한결같이 덮고 감싸 주기만 하여 보전 못할 은혜를 기어이 보전하려고 하고 어겨서는 안 될 법을 꼭 어기시려고 하십니다.
아, 전하의 밝고 지혜스러움으로 틀림없이 공과 사의 경계와 한(漢)과 적(賊)의 상황에 대해 통찰하고 계실 터인데 어찌하여 4백 년 종사의 소중함을 생각지 않으시고 이같은 재앙의 뿌리를 바로 지척의 거리에다 남겨두심으로써 두고 두고 걱정을 끼치려고 하십니까. 지금 전하께 은혜를 끊고 법대로 해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걸핏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목벤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고 있으나 신들은 주공·관숙·채숙의 일을 가져다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관숙과 채숙의 죄는 왕실에 떠도는 말을 퍼뜨려 주공을 무고한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공은 일개 대신이었으니 관숙과 채숙의 죄가 너무 가볍지 않습니까. 또 주(周)나라 백성들이야 언제 오늘 같이 난역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그 뿌리와 맥락이 바로 역적 종실과 닿고 있던 자가 있었습니까. 신들은 그런 연유에서 관숙과 채숙은 오히려 베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의 역적 인은 결단코 베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가 한 점의 의혹 없이 단안을 내리고 모두가 알도록 분발하시어 저 역적 괴수를 목 베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크게 알리신다면 이는 전하가 베신 것이 아니라 바로 대비의 뜻을 받들어 벤 것이며 또 천지 귀신이 함께 죽인 것일 것입니다. 더구나 근일에 와서 사건이 거듭 발생하여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는 데도 대충대충 마무리짓고 급급하게 미봉하여 단락들이 이미 탄로되었다가 다시 흐지부지해지고 소굴들이 터져나올듯 했다가 다시 숨겨지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직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는 자들이 함께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정에 가득한 벼슬아치들 중에 일찍이 한 사람의 의로운 선비도 없었던지 전하의 문 앞에서 부르짖으며 피를 뿌리고 정성을 바친 자라곤 없었으니 그들이 그러고도 과연 어물어물 재앙이나 면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 죄가 없겠습니까.
신들이 방금 듣건대 어제 자리에서 머리가 흰 원로 대신이 임금에게 직접 차자를 올려 역적 인의 토죄를 청하고 이어 대궐 계단에다 머리를 짖찧은 일이 있었다 합니다. 그 자리에서의 말은 엄격히 비밀에 붙여져서 비록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대신이 평소 가진 마음이 나라의 형세가 위태위태한 것을 통탄하고 온 조정이 침묵하고 있는 것을 민망히 여긴 끝에 한 목숨을 던져 국가의 역적을 토죄하려고 했던 혈성과 고충을 알 만한데 전하께서는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끝내 허락의 말씀을 아끼셨으니 난의 뿌리와 재앙의 빌미가 이로부터 제거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 사람 역적 괴수에게 사사로움을 두기 위해 피를 뿌린 대신의 청원을 돌보지 않으시니 이 종묘 사직을 어찌하리까. 충성과 의분이 북받쳐 뜻을 같이한 자들과 함께 나와 큰소리로 호소하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깊고 멀리 헤아려 대신의 청원을 빨리 윤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제 대신이 직접 올린 차자와 승지에게 내린 전교가 모두 금령에 관계되는 것일 뿐이 아닌데 감히 좌지 우지하면서 북 치고 꾕과리 두들기며 혹시라도 뒤질세라 하고 있으니 행동이 두서가 없고 듣기에 놀라운 것은 물론하고라도 금령을 무엇으로 보고 하는 짓들인가. 소두(疏頭)인 행 부사직 이동욱을 우선 삭직하고 그 소는 정원에서 불태우도록 하라.
수문장이 막고 금지하는 일은 근래 와서 어떤 이유로 이미 철수해버렸다. 이 뒤로는 대관(大官)이나 소관(小官)이나를 막론하고 차자이건 상소이건 또는 공격하는 자이건 공격을 당하고 변명하는 자이건 일단 금령에 저촉되는 일이면 더욱 엄중히 금하도록 병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전 사간 한광식(韓光植) 등이 【전 교리 이석하(李錫夏).】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제 자리에 나갔다가 비상한 일을 목격하고서 충성의 적심(赤心)을 드러내는 뜻에서 윤허하실 것을 청하였다가 순식간에 준엄한 하교를 받고는, 난간을 부러뜨리고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 끌면서 직간(直諫)하였던 옛사람들의 기풍을 감히 본받지 못하고 서로 휩쓸려 물러났으니 신들의 죄 더욱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했던 생각을 대략 말씀드려 반드시 토죄해야 하는 의리를 조금이나마 펴볼까 하니 전하의 밝으심으로 잠깐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지금이 참으로 어떠한 시기입니까. 인심이 위태 위태하기 오늘 같은 때가 없었고 국가 형세의 위급함도 오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첫째도 인(䄄) 때문이며 둘째도 인 때문입니다. 인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고금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적 구선복(具善復)이 극악한 큰 죄인이었으나 인의 부류이고 역적 김우진(金宇鎭)의 갖가지 요사하고 악독함도 그 뿌리는 인입니다. 담(湛)을 자식으로 두었기에 여러 역적들의 이용물이 되었고, 광운(匡運)의 흉악한 공초와 후익과 김상로의 음흉한 기도는 그것이 일맥 상통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로서 종사에 연관된 죄요, 귀신과 사람들이 통분해 하는 일인데 그것들을 어떻게 다 글로 써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더욱이나 연전에 자세한 대비의 전교가 해와 별처럼 빛나고 있어 그야말로 바로 우리 국가가 재앙의 뿌리를 뽑고 인륜 기강을 붙잡아 세울 때였는데도 어찌하여 난신 역도는 날로 더욱 방자하여지고 의리는 날로 어두워져 갔습니까. 역적 이재간 같은 자가 출현하게 되어 나라의 공론을 원수처럼 여기고 공공연하게 으르렁대면서 몰래 역적 무리를 사주해 흉악한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뭇사람들이 그를 꼭 손으로 찢고 입으로 살점을 씹으며 맹세코 함께 살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져온 지가 여러 해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하늘이 그의 마음을 돌리게 했는지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사실대로 자수하고서도 무슨 속 뜻이 따로 있어 터놓고 흉당을 위해 절개를 세우려고 국법에 의해 죽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난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어 넘겨다 볼 곳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행하게도 나라를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원로 대신이 평소에 간직해왔던 마음으로 오늘의 기회를 잃을까 염려되어 피를 짜내는 차자를 직접 올리고 대궐 계단에 머리를 짓찧음으로써 행여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빨리 천벌을 내리기를 바랐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여러 신료들을 물리치시고 차마 듣지 못할 엄한 전교를 거듭 내리셨습니다. 전하가 어찌해서 그런 행동을 취하시는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확고한 전하의 용단을 내려 역적 인을 법에 따라 처단하라는 명을 빨리 내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제 자리에 나와 앞으로 나오려다가 견책을 받고 나갔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나 가소롭다. 그 상소는 옥당(玉堂) 문 앞에서 불태워버리고 모두에게 삭직의 벌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 정언 심달한(沈達漢)이 상소하기를,
"아, 섬에 있는 역적이 그 얼마나 흉악한 역적입니까. 어찌 오늘날 신하로서 하루인들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자입니까. 이재간은 판세를 손에 쥔 문벌 집안으로서 그들의 와주(窩主)이자 소굴이라는 것이 탄로났고, 주국(柱國)은 병권(兵權)을 쥔 장수로서 기꺼이 도당이 되었으며 바로 구선복(具善復)·정후겸(鄭厚謙)·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후익(後翼)·김상로(金尙魯)·윤시동(尹蓍東) 무리들과 한통속이 되어 섬의 역적과 서로 통하고 있는데도 하늘의 벌이 지금까지 내려지지 않아 인심은 차츰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고 의리는 다 무너져 온 나라 사람들이 4백 년 된 종묘 사직이 위기 일발에 처해 있는 것을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어제 빈대에서 머리털이 누런 원로가 성의를 다해 차자를 준비해 직접 향안(香案)에다 올리고 죽기를 맹세하고 역적을 토죄하려고 머리를 궁궐 계단에 짓찧었습니다. 전하의 조정에도 그렇게 사직을 위한 신하 한 사람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이야말로 국가의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이 매인 일대 전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일토록 귀기울여 들어도 전하의 윤허 전교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고 또 조정 신료들이 뒤따라 토죄했다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이며 이것이 무슨 변고입니까. 오늘 일을 놓고 본다면 군주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롭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역적들의 형세는 기세 좋게 번져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역적을 만일 시급히 처리하지 않으면 국가 장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신이 차자로 청한 일을 빨리 윤허하여 나라의 재앙 빌미를 영원히 제거하소서.
그리고 삼가 길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전하의 앞자리에서 역적 토죄를 강력 주장했던 일로 하여 파직의 명이 있기까지 하였다는데, 그의 그런 행동은 윤리와 기강을 붙들어 세울 만한 일이었는데도, 윤허는 내리지 않고 도리어 꺾어버렸으니 신은 못내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익운이 이전의 직함으로 올렸던 상소도 해괴하고 망녕된 일이었는데, 심달한 이 또 어찌 감히 이전의 직함으로 익운을 구원한다는 말인가. 또 더구나 금령에 저촉되는 부분이 낭자하니 그 소는 불태워 버리고 달한은 시골로 쫓아버리라."
하였다.
승지 임도호(林道浩)를 파직하도록 명했다. 이동욱(李東郁) 등의 상소를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이동욱이 상소에서 온 조정이 입 다물고 있다고 배척한 일로 하여 의금부에서 처분의 명을 기다리고 있자, 전교하기를,
"비록 대신이라지만 어찌 거두어 불태워버린 상소를 가지고 추후에 제기해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12월 10일 갑술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전교하였다.
"전번 부(部)의 첩문(牒文)이 검안(檢案)의 격식에 어긋났던 일로 하여 《대명률(大明律)》을 읽지 않는 폐단을 걱정했던 나머지 우선 해당 벼슬아치들부터 이달 초순까지 기한을 주어 외우고 익히게 하였었다. 그리고서 그가 와서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시험하였더니 《대명률》의 이·호·예·병·형·공 6부(部)의 원(元)·형(亨)·이(利)·정(貞)으로 된 4책을 거침없이 줄줄 외웠고, 각편에서 뽑아 물어도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욱 통달하였다. 총명도 총명이려니와 그의 성실함과 노력이 가상하였다. 그같은 성실함과 노력에다 대명률까지 익혔으니 현재 수령감으로는 이 사람이 적임자일 것이다. 공조 좌랑 남학현(南鶴玄)을 수령에 등용토록 하라."
태복시(太僕寺)가, 올해 목장에서 기르고 있는 말의 숫자를 올렸다. 각도 목장의 암말과 숫말 총수가 8천 6백 18필이었다.
12월 11일 을해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巡)에 49발을 맞혔다.
12월 12일 병자
판중추부사 채제공의 차자를 되돌려 주고 전 사직(司直) 이동욱 등의 고신을 빼앗고서 시골로 추방하도록 명하고, 이어 중외(中外)에 거듭 명하여 혹시라도 금령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그것이 과연 의리라면 천하의 공물(公物)인 것이다. 천년 뒤에도 백년 전에도 대여섯 벼슬아치들이 연명 상소로 종용한 적은 없었다. 만약에 또 혹 편당이라면 그것은 나라를 두 쪽 내는 사사로운 뜻이다. 다른 사람 입만 따라서 여럿이 어울려 떠들어대는 것이 어찌 신하의 직분으로서 감히 할 일인가. 일전에 보통으로 대응했던 것은 사건을 각기 그 사건 돌아가는 대로 맡겨두고 조용하게 마무리 지으려고 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승지에게 들으니,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중추부 서리가 차자를 껴안고 이틀이나 서성이다가 병조의 신료가 새로 내려진 금령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올리지 못했다고 운운하였다. 대략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바로 문지키는 일을 철폐할 것과 자기가 직접 올린 차자를 반포해 보일 것을 청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 그 대신이 늙었단 말인가. 이미 상소했고 또 차자를 냈으면 그의 생각은 드러난 것인데 이같이 끈질기고 시끄럽게 굴어 나로 하여금 많은 말을 허비하고 가슴 치미는 증세까지 더하게 만드니 나라를 내 몸처럼 받들려면 꼭 그래야만 되는 것인가. 이는 순전히 조이고 늦추고를 잘못해서 그리 된 것으로 관대하지 않아야 할 자리에다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이른바 조용하게 마무리 지으려 했던 본의가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 오활하였던 것이다. 원 차자는, 녹사를 궐문으로 불러다가 병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녹사에게 분부하여 대신에게 곧장 달려가 바로 와서 가지고 물러가도록 알리게 하고, 전 사직 이동욱은 연명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신을 빼앗고 시골로 추방할 것이며, 전 사간 한광식 등에게도 같은 법을 적용하라. 나라에는 법이 있어 그 엄하기가 부월(鈇鉞)과 같으니 거듭 중외에 명하여 혹시라도 감히 범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12월 13일 정축
친히 수원 유생들의 응제 시권(應製詩券)에 점수를 매겼다. 유학(幼學) 이석조(李奭祚)가 나이 80으로 삼상(三上)의 등급에 오르자, 상이 장원으로 뽑고 전교하기를,
"오늘 시권에 점수를 매기고서 이름을 뜯어 보았더니 바로 나이 80의 늙은 유학 이석조였다. 그래서 그를 장원으로 뽑았으니 내년 봄 행행 때에는 전시(殿試)에 입격한 규례에 따라 대(臺) 위에 따로 앉아서 지어 올리게 하고 맨 먼저 회시에 바로 응시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무인
유생들이 전강(殿講)을 볼 때는 전지를 받은 날부터 전강에 응하는 전날 아침까지 식당에서 응시자들의 명함을 바치게 하고 나서 지방의 생원 진사 응시를 허락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도록 하라고 하였다.
상주(尙州) 유학 맹진태(孟鎭泰)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은혜로운 전교가 내려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상주의 세 충신을 충렬사(忠烈祠)에 함께 봉향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 고을에 살고 있는 신들로서 다행히 이런 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 섬 오랑캐들이 창궐하던 때 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 증 도승지 이경류(李慶流), 증 직제학 박호(朴箎)가 함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막하에 있으면서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상주의 증연(甑淵)에 이르렀을 때 적들이 나타나자 이일은 도망쳐버리고 세 신하가 맨주먹을 들어 힘껏 치다가 힘이 다하여 적을 꾸짖으며 죽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 땅을 이름하여 학사담(學士潭)이라 하였습니다.
고을의 선비 김준신(金俊臣)은 본시 얽매임이 없는 자품으로 관리들의 추증을 받아 언제나 선봉이 되었는데, 칠곡(漆谷)의 석전(石田) 전투에서 준신이 여러 장사들을 타일러 본진으로 돌아가서 그 곳을 지키기로 했다가 성은 외롭고 군사는 적어 증연에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실로 세 신하와 한날 죽은 것입니다. 그의 피에 젖은 시체를 묻은 곳이 지금도 완연하기에 고(故) 참봉 성이한(成爾漢)이 몇 칸 사옥(祠屋)을 지어 네 충신을 함께 제사 지내다가 조정의 금령으로 철거하였고 이한의 손자인 성최열(成最烈)이 그 곳에다 단(壇)을 쌓고서 사사로이 경절단(景節壇)이라 이름하고는 그들이 순절한 날을 기해 술을 부어 제사를 드려온 지도 여러 해 되었습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세 신하를 다시 생각하시어 그 이웃 사우(祠宇)에다 함께 제향을 드리도록 하였으니 듣고 본 사람이면 감격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충렬사는 함께 제향받는 분들이 원래 많은데 게다가 네 충신을 함께 모시게 되면 원우(院宇)를 다시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지어 영령을 새로 모시는 것보다는 그 제단 자리에다 한두 칸의 집을 지어 세 충신을 제향하고 준신을 배향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혹자는 서원을 새로 세우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함부로 논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서간사(西磵祠)는 나무와 돌만이 남아 있었는데도 이미 특별 하교에 의해 원우를 세웠던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그 도에 명을 내려 증연 옆에다 원우를 세워 세 충신을 제향하고 이어 김준신을 배향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세우는 데 대해서는 금령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모시면 양쪽 다 매우 편리할 것이다. 영남의 서원에 관한 폐단이 주세붕(周世鵬)이 서원을 세웠던 본래의 뜻과는 상반된다. 옛 선왕조 때부터 별도의 금령을 두었던 것도 그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서간사에 사액(賜額)한 것은 특별한 예로서 그 예를 인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12월 15일 기묘
윤대하였다.
초계 문신과 선전관에게 획수[劃]를 모두 계산하여 상을 내리는 일을 행하였다.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을 실시하였는데, 시문을 지어 올린 유생들에게 내일 와서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지어 올린 시문이 출제한 의도에 빗나갔기 때문에 준엄한 하교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총융청(摠戎廳)의 오영(五營) 제도를 개정하고 관성장(管城將)의 호칭을 별아병 천총(別牙兵千摠)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교하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의 관직 제도를 바로잡는 것은 그 일의 중대성으로 보거나 수도 방위의 요새지인 점으로 보거나 꼭 바로잡아야 할 일이기에 일전에 우선 별중영(別中營)으로 당분간 부르기로 하교했었다. 총융청 영제(營制)에 있어서도 일정한 명칭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수어청(守禦廳) 예에 따라 삼영(三營) 제도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성소는 그대로 별도의 한 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묘당이 병판(兵判) 또는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던 사람들과 상의하여 의견을 모아 초기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때 와서 비국이 아뢰기를,
"신이 병조 판서와 일찍이 총융사를 지낸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였더니 모두들, 수원은 지금 총융사에 통속되어 있지 않으니 총융청의 영은 의당 수어청의 전영·중영·후영 제도를 모방하여 남양(南陽)의 전영과 장단(長湍)의 후영은 예전대로 호칭하고 파주(坡州)의 우영을 중영으로 호칭을 바꾸어 삼영 제도를 갖추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어청의 군제(軍制)를 보면 좌별장·우별장이 각기 아병(牙兵)을 거느리고 임시로 오영 군제로 호칭되고 있는데 총융청에도 이미 좌아병 천총·우아병 천총이 있으니 그 역시 수어청의 좌·우별장 예에 따라 임시로 오영으로 호칭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성장을 중부 천총(中部千摠)으로 호칭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은 단지 오영 호칭을 갖추자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수어청 예를 따라 좌·우아병 천총을 두고 오영으로 부른다면, 관성소를 별도의 1영으로 둘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 딸린 군대래야 아병 5초(哨)와 승군(僧軍) 3백여 명에 불과하여 군인 총 숫자가 천 명도 차지 못하므로 그 자체 1개 영이 될 수도 없으니 앞서 말한 중부 천총을 별아병 천총으로 고치고 옛날대로 관성소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변통은 군사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호칭을 바꾼 것에 불과한데 수어청 제도가 이미 근거가 되고 있고 장수들의 의견도 서로 다르지 않으니 이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였다.
"오늘 윤대에서 유헌주(柳憲周)를 보고서 생각해보았다. 종묘서·경모궁의 영(令)을 가려 뽑아 임명하도록 거듭 당부한 것은 그 곳이 소중한 곳이기에 적임자를 골라 자기 맡은 일에 노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조가 사람 쓰는 방법은 보통 차출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그게 어디 거듭 당부한 근본 취지이겠는가. 이 뒤로는 더욱 더 엄히 경계하여 앞으로 삼사에 출입할 만한 사람을 특별히 가려 임명하고 달수가 차면 그때 그때 바로 승진시키도록 하라. 유헌주 등 이미 종묘서 영을 지내고도 아직까지 법사와 시종의 반열에 있지 못한 여러 사람들에 대해 우선 오늘 정사에서부터 조처하도록 하라."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6일 경진
관서(關西)의 청천강 이북 각 고을과 청천강 이남 산골 고을의 신해년 치 환자곡 상환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전 감사 홍양호(洪良浩)가 본도의 어려운 상황을 아뢰어왔기 때문이었다.
평양부(平壤府)의 무열사(武烈祠)에 참봉 2명을 두고 제향의 의식과 무사들의 공부를 권면하는 방법을 정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應製)에 직접 임어하였다. 상이 제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사(君師)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교화가 그대들에게 비록 행하여지지는 못하였으나 요사이 그대들이 군주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니 그 죄 어떠한가. 또 대궐 뜰에서 담뱃대를 물고 다니면 그 죄도 가볍지 않은데 그것들을 엄히 다스려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냥 참아두는 것이다. 옛날 정자(程子) 문하에서는 제자가 종일토록 모시고 서 있다가 그가 물러 나갔을 때는 문 밖에 눈이 석 자[尺]나 쌓여 있었다 한다. 사도(師道)란 그렇게 엄한 것이니, 이 때문에 그대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대궐 뜰에 서 있게 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도록 한 것이다. 오늘의 응제는 이미 내려진 명령이기에 그대로 실시할 것이니 그대들은 감히 떠들지 말고 성의를 다해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히고 또 작은 부채를 매달아 놓고 다섯 발을 쏘아 네 발을 맞혔다.
12월 17일 신사
전교하였다.
"지금 나는 자나깨나 밤낮없이 오직 한 생각이 영호(嶺湖)의 오두막집들에 줄곧 쏠리고 있다. 얼어붙는 추위는 위세를 떨치고 해는 저물어 세모가 곧 닥치는데 뒤주는 바닥나 있고 세금 독촉에 시달리고 있을 일을 생각하면 밥맛이 달리가 있을 것이며, 베틀에 북은 텅텅 비었는데 부세 바치기에 파리해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감히 따뜻한 옷을 바라겠는가. 풍년이 든 해에도 무명옷도 없고 너덜한 옷도 없으면 어떻게 해를 넘길까 하는 형편인데 더구나 올해에는 곡식이 흉년이요 연이은 목화 흉년까지 겹쳤으니, 수의(繡衣)의 복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누더기로 정강이 뼈를 가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오늘밤 눈이 내린 뒤에는 무서운 추위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 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 살이 얼어터지지나 않을런지.
처음 생각은 내년 봄에 백성들의 실정을 자세히 살피고 난 뒤에 조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또 도성의 백성을 위한 고심에서였다. 모든 일은 사전 준비가 제일인 것이다. 따라서 미리 융통성을 보이면 시장 물가도 내리게 되어 일거 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유사에게 물을 것이 무엇이며 본도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삼남 중에서도 영남이 가장 심하니 각 고을에서 내년 봄에 바치게 되는 대동법에 의한 무명은 특별히 모두 돈으로 바치도록 허락하고 만일 수량을 나누어 바쳐도 될 경우 적당히 수량을 나누어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라. 그 밖에도 양남(兩南) 각 고을 중에서 부득불 수량을 나누어 돈으로 대신 받아야 할 곳은 역시 각기 의견을 갖추어 전례에 의거하여 장문하도록 하라.
세밑 가까이에 환곡을 나누어 주는 것이 세속에서 이른바 설먹이[歲食]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의 백성들 상황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연기해 주고 감해 주고 수량을 나누어 받고 하는 문제들은 이미 반포한 명이 있으므로 다시 제기해 전교할 필요가 없고 창고를 봉하였거나 아직 봉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이 세시(歲時) 때를 맞춰 각기 특례로 즉시 창고 문을 열고 환곡을 나누어 줌으로써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힘이 펴지게 하고 한편으로는 설먹이를 마련하게 하라.
도목 정사는 큰 인사 행정이다. 수령 자리가 비기를 우선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당일로 역말을 주어 내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비록 역말을 준다고 하여도 만일 하루에 보통 사람의 갑절의 길을 달려서 부임하지 않는다면 돈으로 대신 받으라고 한 영과 설먹이 나누어 주는 일을 장차 겸임한 수령에게 맡길 것인가, 그 고을 좌수에게 맡길 것인가. 묘당은 그 뜻을 십분 이해하고 당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새로 제수된 자는 숙배 단자와 하직 단자를 한꺼번에 올리게 하고 아직 서경(署經)을 거치지 못한 무리들은 모두 숙배 단자가 내려지기 전에 사헌부에서 서경을 거치도록 하라."
궁궐에서 수직하는 여러 신료가 성상의 명령에 응하여 시문을 지어 바쳤는데, 좌승지 임제원(林濟遠)이 수석을 하자 상이 기재(奇才)라 칭찬하고 특별히 표범 가죽을 하사하여 자급을 승진시켜 주는 것에 대신하였다.
12월 18일 임오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참판 이재학(李在學), 참의 이면응(李冕膺), 병조 판서 정창순(鄭昌順).】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고 김효건(金孝建)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교체하고 김이희(金履禧)와 유한모(兪漢謨)로 대신하였으며, 이병정(李秉鼎)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비록 씻은 듯이 무너졌다지만 저들이 만일 조금이나마 두려워할 줄 안다면 그렇게 무릅쓰고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중 몇 고을은 도백에게 별도로 유고하여 그로 하여금 엄히 경계시켜 효과를 올리게 하도록 하였으나 작년에 백성들을 위하여 환곡의 상환을 잠정 물리게 한 조정 명령에 대해 차마 그렇게 농간을 부린 그러한 수령들에게야 어찌 갑절 중한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산 부사(鐵山府使) 신재문(申載文)을 해당부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도내 문관 출신의 원들 중 국법을 받들고 사무에 익숙하기로는 용강(龍岡) 원 만한 자가 없다. 조정의 표창과 형벌 제도를 의당 그런 곳에다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 곳 현령 유경(柳畊)을 오늘 정사에서 철산 부사로 승진 보임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용천(龍川)과 철산 등지에 대해 작년에 환자곡을 잠정적으로 연기해 주었을 때 백성들이 혜택을 입지 못한 사실은 조사해서 엄히 조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창고 검열을 맡은 어사(御史)에게 재가를 내리고 그로 하여금 달려가 사실을 조사해서 장문하도록 하였다.
특별 지시로 성정진(成鼎鎭)을 응교로 삼았다. 전조(銓曹)가 정진을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추천하자, 전교하기를,
"큰 인사 행정에서는 의당 격양시키는 거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꼭 대정을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사람이 세운 공로가 얼마나 남달랐는가. 그런데도 아직 본관록에 오르지도 못하였고 또 당상관이 되지도 못하였으니 조정에서 인재 등용하는 방법이 한심하다 하겠다.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외직(外職)에 추천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판(吏判)의 처사가 가상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노고를 충분히 보답했다고야 하겠는가.
이달 초순의 전교 가운데 ‘아, 무뢰한들이 달려들 조짐이 있을 때 다행히도 그 홀로 마수(馬燧)가 아니었던가’라고 했던 말은 이미 나의 뜻을 암시한 것이었다. 그 뒤 약원(藥院)의 제거(提擧)를 특별 제수한 것도 바로 항거의 소장을 올렸던 공로를 생각해서였으며, 홍문관 제학의 전망(前望)에 낙점했던 것도 조참(朝參)하던 날의 공을 생각해서였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사람이겠는가. 덕천 군수 성정진을 응교에 제수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어진이를 높이고 충신을 기념하는 일은 바로 옛날을 기억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라는 뜻인 것이다. 조 빈객(趙賓客)과 박 유선(朴諭善)의 집안에 근래 벼슬아치가 없으니 전 지평 조덕윤(趙德潤)을 수령에 제수하고 전 현감 박종간(朴宗幹)은 복직시키는 것으로 추천해 올리도록 하라."
홍시보(洪時溥)와 오한원(吳翰源)을 등용하고, 이심전(李心傳)과 이의명(李義明)은 6품으로 승진시키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전 지평 조덕윤에 대해서는 옛날을 생각하는 뜻에서 특별히 전망에 우선 낙점을 했었지만 홍시보·오한원 같은 자를 아직도 등용하지 않는다면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써 등용하도록 하고 그 중 이미 6품에 오른 사람은 모두 허함(虛啣)의 사과(司果)를 주도록 하라. 어젯밤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정안(政案)을 살펴보았더니 크게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이심전과 이의명의 이름이 아직도 승문원 참하(參下) 속에 있는 것이다. 왜 이리 늦게야 알았을까. 오늘의 정사에서 일체 6품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조정에 선 지 30년이요 당상관에 오른 지도 20년이 지났으니 오랜 벼슬 생활을 했다고 하겠으나 중간에 불운하게도 뜻을 얻지 못해 지금까지 침체되어 있었구나."
하고서, 행 도승지 이득신(李得臣)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추천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서유린이 아뢰기를,
"충간공(忠簡公) 이동표(李東標)는 그가 세운 공로가 높다 하여 일찍이 선왕조 시절에 증직을 하고 그 후손을 녹용한 일이 있었고 연전에 그에게 시호를 내린 것 역시 성상이 선왕의 뜻을 이어받고 세상을 선으로 권장하려는 훌륭한 뜻으로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뒤 그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해조가 아직 지시한 문안을 받지 못했다고 하기에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 정사에 등용하도록 명한 것이다.
이조 판서 서유린을 체직하고 정민시(鄭民始)로 대신하고, 병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을 체직하고 이문원(李文源)으로 대신하였다.
금위영과 어영청 두 영에 새로이 둔 일번 기사(一番騎士)의 새 제도를 파하였다. 그것은 비국의 아룀에 의한 것인데, 일번 이외의 무사들이 적체되어 억울해 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12월 19일 계미
예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을 체직하고 민종현(閔鍾顯)으로 대신하였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작은 과녁을 쏘아 모두 맞혔고, 또 곤봉을 과녁 삼아 2순에 10발을 쏘아 모두 맞혔다.
12월 20일 갑신
약원(藥院)의 도제조 홍낙성(洪樂性), 제조 신응현(申應顯), 부제조 심환지(沈煥之)를 불러 보았다. 낙성이 아뢰기를,
"삼가 듣자하니 가순궁(嘉順宮)이 태기(胎氣)가 있은 지 지금 여러 달이라 합니다. 신들은 기쁨을 누를 길 없습니다. 산청(産廳)을 준비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데 그 전에는 두 달 전 혹은 석 달 전에 산청을 설치했었습니다. 이달부터 산청을 설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달부터 산청을 설치하는 것은 너무 떠벌리는 듯하니 내달에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1일 을유
황해도와 평안도에 더 지급했던 군량미인 좁쌀 1천 5백 석을 총융청에 떼 주어 수원부가 납부할 쌀을 대신하게 하였다.
12월 22일 병술
장용영이 관장하는 호남 곡식을 균역청에 떼 주고, 균역청이 관장하는 관서의 상평청과 진휼청의 곡식을 이에 맞먹을 양만큼 장용영에 떼주었다.
선혜청 당상 서유린이 아뢰기를,
"총융청이 지출하는 쌀은 매번 넉넉하지 못해 걱정입니다. 만일 미처 사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혹시라도 군량미를 손대는 일이 있게 된다면 군량을 중시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선혜청이 매년 수송하기로 하여 매월 바치는 쌀 8백 석과 균역청이 한 해 건너 수송해 오는 4백 석을 본 선혜청에서 돈으로 환산하여 월별로 정해진 물건을 준비할 때에 가져다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융통하여 배정하고 매년 1천 석씩 수송해서 지출 조항으로 9백 석을 쓰게 하고 그 나머지 1백 석과 이번에 대신 지급해 준 황해도와 평안도의 좁쌀 1천 5백 석을 월별로 정한 쌀 대신 돈으로 환산해서 가져다 쓰게 하면 돈과 쌀이 각각 다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원(李祖源)에게 귀양의 벌을 내리고 전교하기를,
"세전에 지난 해에 처결하지 못한 일들을 모두 처결해야 할 것이다. 근래 정안(政案)에서 오랫동안 이조원의 성명이 보이지 않았는데 해조의 전형(銓衡)에 대해 비록 억측하기는 어렵지만 여름에 여러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자리에 나왔을 때 아뢴 말 중 한 구절은 무엄하고도 보잘것이 없어서 거의 방종에 가까웠었다. 한결같이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하고 계속 내버려둠으로써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리는 죄가 더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순장(巡將) 이조원에게 속히 귀양의 벌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우(李㙖)가 소를 올린 뒤에 상이 접견 자리에서, 아무 해에 죄를 저지른 여러 역적들을 징토하면서는 모두 은미하고 완곡한 뜻을 썼다고 하교하였는데, 이에 대해 조원이, 큰 길을 두고서 오솔길을 취한 것이라고 비유했었다. 그 후 박하원(朴夏源)의 상소가 나오게 되자 한때 요란하게 전파되는 말이, 조원이 실상 그 상소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고, 거기에 연좌되어 이조에서는 다시 그를 추천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 이런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흡곡현(歙谷縣)으로 귀양보냈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2월 24일 무자
상주(尙州)의 고(故) 충신(忠臣) 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박호(朴箎)가 싸우다 죽은 곳에 제단을 세워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 이름하고 비를 세워 기념하게 하고서 전교하기를,
"고 충신 윤섬·이경류·박지 등을 함께 제향하는 것과 따로 제향하는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 영남 유생들의 소에 비답을 내렸었다. 근자에 들으니 권길(權吉)의 사우(祠宇)에다 합향하려고 하면 신위의 차례며 사우의 공간 등이 과연 불편하다고 하고, 또 들으니 상주 선비들이 그들이 충절을 세운 곳에다 단을 쌓고 제사를 올리고 또 따로 제단을 쌓아 장수와 사졸들을 함께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만일 그 땅에 그러한 제단이 있음을 알았다면 왜 상소를 올려 호소했을 때 윤허를 않았겠는가.
서원 세우는 일이 비록 나라의 금령에 저촉되나 옛날 민충단(愍忠壇)에서 했던 것처럼 그 단에다 제를 올린다면 그 어찌 두 쪽 다 편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단호(壇號)를 내려 충신의사단이라 하고 이어 본 고을에서 해마다 봄 가을로 약간의 술과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돕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 처음으로 제향을 드릴 때는 내 마땅히 향을 내리고 제문을 직접 지어 내릴 것이다. 도백이 순행 길에 그 곳에 갔을 때는 헌관(獻官)이 되어 제사를 설행하도록 하고, 또 짧은 빗돌을 제단 위에 세워 전면에는 제단 이름을 쓰고 뒤에는 지금 내린 유지(有旨)를 기록하여 조정이 충의를 숭상하고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각도와 개성·강화의 대장에 올라 있는 배와 소금가마와 어살 등의 세(稅)를 조정하였다. 【충청도는 대장에 오른 배가 1천 3백 58척인데 고장난 배를 제외하고 세가 7백 29냥이고, 그물터는 2백 76개소로 세금이 6백 1냥이고, 온돌(溫堗)―온돌은 바닷가의 고기를 잡는 곳이다.―의 세는 37냥이고, 그물[綱子] 1백 43개 중에서 13개는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고 남은 1백 30개에 세가 86냥이고, 청어(淸魚) 어살 32개소에 세가 1천 1백 47냥이고, 민어(民魚) 어장 한 곳에 세가 6냥이고, 방구렴(防口簾) 12개소에 5개소는 오래되어 못 쓰고 남은 7개소에 세가 13냥이니, 도합해서 세로 거두는 돈이 8천 2백 57냥이다. ○평안도는 중화(中和) 등 13고을의 배는 바람에 부서진 것과 해가 오래되어 썩고 낡은 것이 67척이고 새로 찾아 대장에 올린 배가 24척이며, 순안(順安) 등 10개 고을의 소금가마는 오래되어 못 쓰게 된 것이 38좌(坐)이고 신설한 곳이 3좌이며, 어망(魚網)은 오래되어 못쓰는 것이 6부(浮)이고 새로 만든 것이 1부이며, 어살은 오래되어 못 쓰는 것이 2개소이고, 새우 어살은 오래되어 못 쓰는 곳이 3개소이다. ○함경도는 바람에 부서진 배가 42척이며 썩고 낡은 배가 75척이며 세를 낮추어 준 배가 20척이고, 파손된 소금구이 쇠가마가 40좌(坐)이고 폐기된 소금구이 토기가마가 46좌이며, 방렴(防簾)이 43좌이고, 후릿그물이 18좌이고, 가는 그물[細綱]이 6좌이고, 굴을 따는 막[石花幕]이 27좌 등으로 이에서 감해준 세가 1천 4백 54냥이고, 새로 만들어 더 찾아진 배가 1백 1척이고 세를 올린 배가 66척이며, 소금구이 쇠가마가 26좌이고 소금구이 토기가마가 45좌이며, 방렴 18좌 중에서 줄어진 곳이 1백 51좌이고 더 나타난 곳이 1백 13좌이다. 이전의 총 숫자와 비교하면 배는 38척이 줄고 세는 1백 4냥 7전(錢)이 준 것이며, 소금가마와 어살의 오래되어 못 쓰고 더 나타난 것들을 일체 실지 대로 조사하여 대장에 올린 세금은 총 7천 7백 47냥인데 이번에 조사해 바룬 것에는 배는 줄었으나 어살과 가마는 늘었다. 그러므로 통틀어 상쇄하면 부족분이 78냥이다. 내년 봄 고기잡이 이익으로 생산이 늘 때를 기다렸다 조사해서 숫자를 채우도록 한다. ○전라도 각고을과 진영은 부서진 배가 3백 41척이며 세를 낮추어 준 배가 97척이고, 오래되어 못 쓰게 된 소금가마가 17좌이고, 어살이 46개소이고, 어조(漁條)가 1개소이고, 파손된 어망이 1백 7개이고, 어렴(漁簾)이 2건(件)이고, 세를 낮추어 준 소금가마가 37좌이고, 어살이 30개소이고, 어조가 2개소이고 미역밭이 1개소이고, 김밭이 1개소이고, 청태밭[苔田]이 1개소 등으로 이에서 줄어든 세가 1천 5백 17냥 5전이고, 새로 조사된 것으로는 배가 1백 69척이고, 소금가마가 16좌이고, 어살이 43개소이고, 어조가 1개소이고, 어장[漁基]이 1개소이고, 어망이 51건이고, 어렴이 2건이고, 세를 올린 배가 4백 51척이고, 소금가마가 83좌이고, 어살이 25개소이고, 어망이 3건 등 더 나타난 세가 1천 4백 58냥 6전이다. ○경상도는 대장에 올라 세를 내는 배의 원래 총 숫자가 6천 1백 63척으로 그 중 새것과 낡은 것에서 축난 것이 1천 5백 42척이고 더 나타난 것이 6백 33척이며, 세가 면제된 배 2백 91척 내에서 새것과 낡은 것에서 축난 것이 17척이고 더 나타난 것이 1척이며, 소금가마 8백 5좌 내에서 새것과 낡은 것에서 축난 것이 1백 47좌이고 더 나타난 것이 14좌이며, 미역밭은 3백 17개소 중에서 오래된 것에서 축난 곳이 12개소이고, 어조는 2천 3백 57개소 내에서 새것과 낡은 것에서 축난 것이 1백 6개소이고 더 나타난 곳이 85개소이며, 방렴은 8백 95개소 내에서 새것과 낡은 것에서 축난 것이 1백 17개소이고 더 나타난 것이 28개소이며, 어장은 23개소이다. 신해년 실지 총 숫자와 비교하면 부족한 것은, 세를 내는 배가 3백 76척이고 세를 면제해 준 배가 7척이고 소금가마가 4좌이고 방렴이 28개소이며, 미역밭은 총 숫자에 준하고, 어조는 10개소가 늘었다. ○황해도는 대장에 오른 각고을과 진영의 원래 배는 1천 1백 75척으로 그 중 23척은 다른 고을로 옮겨 갔고 21척은 썩어 손상되었고 79척은 풍랑에 부서졌고, 현재는 1천 52척에 22척이 다른 고을에서 옮겨 오고 69척이 더 나타나 도합 1천 2백 13척으로 세가 2천 5백 99냥이고, 소금가마는 3백 12좌 내에서 7좌가 오래되어 못 쓰며 더 나타난 것이 도합 3백 11좌로 세가 1천 8백 44냥이고, 여러 어살은 3백 7개 내에서 22개소가 오래되어 못 쓰며 더 나타난 것이 도합 28좌이고, 후릿그물은 19좌이고 가는 그물이 6좌이고, 굴 따는 막이 27좌 등으로 더 나타난 세가 1천 2백 11냥이다 ○개성부는 본 개성부의 임자년 대장에 오른 배가 1백 25척으로 그 중 해가 오래되어 썩고 손상된 것이 1척이고 폭풍에 휩쓸려간 배가 1척이고 부서진 배가 23척이며, 찾아낸 배가 2척이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69면
【분류】재정(財政)
12월 25일 기축
이조 참판 이재학(李在學)과 이조 참의 이면응(李冕膺)을 체직하고 심환지(沈煥之)와 서매수(徐邁修)로 대신하였다.
12월 26일 경인
비국 당상 서유린이 아뢰기를,
"안면도(安眠島)의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들을 신임 수사(水使)에게 넘겨 주어 지금 팔고 있는 중인데, 예전에 바람에 쓰러져 장마를 두 번 지낸 것들은 단지 소금 굽는 데나 알맞고 기타 가지와 잎은 모두 다 버리게 되어 아깝다고 합니다. 관에서 가마를 설치하고 비장과 군교를 따로 정하여 그들의 입회하에 일제히 소금을 굽고 일제히 철거하게 하면 송정(松政)에 있어서도 잘못될 것이 없고 흉년에 바닷가 고을의 백성들은 소금을 구워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충청도 수사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쓸모 있는 물건을 쓸모 없게 버려서야 될 것인가. 더구나 이런 흉년에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기도 할 것이니 일거 양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뒤로는 접견 자리에서 여쭈어 윤허가 내려진 특별 전교에 의해 공문으로 알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이 일을 전례로 하여 원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7일 신묘
전교하였다.
"명년 계축년은 바로 선대왕이 탄생하신 갑술년 이후 꼭 1백년이 되는 해이라서 깊은 사모의 정이 더욱 새로워짐을 느끼겠다. 설날 아침에는 진전(眞殿)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는 예를 행하고 또 종묘에 나아가 봄철 참배의 예를 행할 것이니 예조는 그리 알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옛날 선왕조에서는 언제나 《세종실록》에 있는 글귀를 외우시고 진전에 갈 때면 그 규례를 쓰곤 하셨다. 이제 이 곳에 갈 날이 바로 설날 아침이므로 3군을 자기네 집에서 편히 쉬게 해야겠는데, 이 역시 옛날 하셨던 일을 그대로 따르려는 것이다. 훈련 대장은 장용영·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에서 궁궐 안팎에 입직하는 기병과 보병의 중앙군·지방군만을 거느리고 앞뒤로 배열하고, 표하군(標下軍)도 입직군만으로 마련할 것이며 문을 지키는 파수병은 세우지 말고, 구경하는 사람도 금하지 말라. 연을 호위할 군사는 금호문(金虎門)의 군량을 지키는 군사 60명으로 하고, 유진(留陣)과 유영(留營)은 두지 말도록 하고, 창검군(槍劍軍)과 호위 군관과 유청 군관(有廳軍官)도 제하고, 금군으로 입직한 50명이 거가를 따르도록 하라."
이조 참의 서매수(徐邁修)를 체직하고 윤행임(尹行任)으로 대신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호(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각도의 병사·수사에게 경계를 내려 군량 창고를 연 일 이외에는 형신(刑訊)을 쓰지 말도록 하고 이를 법으로 정하였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광섭(李光燮)이 부임하면서 연원(連源)과 율봉(栗峰)의 역리(驛吏)를 형신했는데, 감사 이형원(李亨元)이 그가 법을 어겼다 하여 병영(兵營)의 아전을 추고하자 광섭이 직무를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원이 장계로 그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하여 사건이 묘당에 내려졌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병사·수사가 형신을 쓸 수 없음은 비록 전해 내려오는 규정이 있으나 애당초 《대전통편》에 실려져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곤수에게 죄를 내린다면 공평한 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뜻에 어긋나는 일이며, 만일 그가 너무 지나치게 의리를 인용했다 하여 그것을 가지고 법을 내린다면 그의 청렴한 체하는 태도만 키워 주고 오만함을 길러 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를 중죄로 처리하자면 당연히 일정한 법을 만들어 각도의 병사·수사들로 하여금 법을 무시하고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뒤로는 군량 창고를 연 일 외에는 형신할 수 없게 하고 만일 혹시라도 그것을 어겼을 때는 한결같이 남형률(濫刑律)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윤허한 것이다.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20순에 98발을 맞혔다.
12월 28일 임진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이조 판서 정민시(鄭民始)를 체직하고 오재순(吳載純)으로 대신하였다.
12월 30일 갑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풍년을 비는 큰 제사에 대한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원임 이조 판서 오재순이 죽었다. 재순의 자(字)는 문경(文卿)으로 고 대제학 오원(吳瑗)의 아들이다. 풍채가 청수하고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이 여기지 않았다. 영종(英宗) 임진년에 급제하고 상이 등극하자 내각에 들어와 이조·병조 판서를 지내고 대제학을 역임했는데, 상이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愚不及齋)라는 호(號)를 내리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전에 마음을 기울였고 행실이 지극히 독실하였다. 시문을 빨리 짓지는 못하였으나 문장이 간결하고 옛 정취가 있었다. 이때 와서 앓은 일도 없이 죽자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갔다고들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이조 판서로, 정민시(鄭民始)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한성부가 올해의 백성 숫자를 올려왔다.
서울은 집이 4만 3천 9백 63호이고 인구는 18만 9천 2백 87명에 남자가 9만 5천 8백 79명, 여자가 9만 3천 4백 8명이다.
경기도는 집이 16만 27호이고 인구는 74만 8천 9백 18명에 남자가 33만 3천 2백 34명, 여자가 31만 5천 6백 86명이다.
황해도는 집이 13만 6천 77호이고, 인구는 56만 8천 9백 67명에 남자가 30만 9천 9백 78명, 여자는 25만 8천 9백 89명이다.
전라도는 집이 30만 8천 6백 1호이고, 인구는 1백 16만 1천 7백 57명에 남자가 55만 3천 8백 22명, 여자가 60만 7천 9백 35명이다.
경상도는 집이 36만 3천 3백 49호이고, 인구는 1백 58만 2천 3백 68명에 남자가 72만 8천 2백 18명, 여자는 85만 4천 1백 50명이다.
충청도는 집이 22만 1천 8백 78호이고, 인구는 87만 3천 1백 80명에 남자가 42만 9천 6백 40이고 여자는 44만 3천 5백 40명이다.
강원도는 집이 7만 9천 40호이고, 인구는 32만 2천 1백 61명에 남자는 16만 3천 2백 17명이고 여자는 15만 8천 9백 44명이다.
평안도는 집이 29만 8천 5백 3호이고, 인구는 1백 27만 5천 2백 44명에 남자가 62만 8천 5백 4명, 여자는 64만 6천 7백 40명이다.
함경도는 집이 11만 9천 1백 78호이고, 인구는 65만 9천 7백 92명에 남자가 32만 9천 4백 67명, 여자는 33만 3백 25명이다.
제주는 집이 1만 7백 79호이고 인구는 6만 4천 5백 82명에 남자가 2만 7천 8백 70명, 여자는 3만 6천 7백 12명이다.
경외에는 총 집이 168만 9천 5백 96호이고, 인구는 743만 8천 1백 85명에 남자가 362만 6천 1백 8명, 여자는 381만 2천 7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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