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7권, 정조 17년 1793년 1월

싸라리리 2025. 8. 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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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미

선원전(璿源殿)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했으니 그것은 선왕의 보령(寶齡)이 꼭 백세가 되어서였다. 예를 모두 마치고 전교하기를,
"올해가 어떤 해인가? 선원전 문에 들어와 작헌례를 행할 즈음에는 어린애마냥 솟는 사모의 정을 더욱 억제할 수가 없었으니, 어떻게 오늘을 기념해야겠는가? 서울과 지방의 백세 이상 노인들에게 각기 한 자급씩을 높여 주고 도백으로 하여금 쌀과 비단을 내려주게 하라.
오늘 축문(祝文) 가운데 ‘설날 공경히 절을 드리니 꼭 새벽에 문안올리는 듯하고, 뜰에 나아온 머리 허연 노인들 중에는 또한 기구(耆舊)의 신하들이 많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러니 옛일을 기념하는 뜻이 의당 선왕의 조정을 섬긴 신하들에게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왕조 병신년001)   이전에 경대부나 아경(亞卿)으로 작질이 오른 신하로서 오늘 작헌례의 반열에 참여한 사람은 바로 김화진(金華鎭)·정창순(鄭昌順)·홍양호(洪良浩)·임희증(任希曾)·구상(具庠)·심이지(沈頤之)·조종현(趙宗鉉)·어석정(魚錫定)·홍수보(洪秀輔)·이성규(李聖圭)·변득양(邊得讓)·이풍(李灃)·한광계(韓光綮)·이진익(李鎭翼)이니, 이들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무신(武臣) 최동악(崔東岳)·최조악(崔朝岳)도 특별히 가자할 것이며, 하대부(下大夫)로 지금까지 본 품계에 그대로 있으면서 반열에 참여한 정환유(鄭煥猷)·강유(姜游)·서유신(徐有臣)·이방영(李邦榮)도 일체로 가자하고, 반열에 참여한 대신 홍 영부사(洪領府事)002)  ·채 판부사(蔡判府事)003)  의 집에는 음식물과 옷감을 실어 보내고,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은 바로 선왕조 실록을 편찬한 사람이니 역시 음식물과 옷감을 주도록 하라. 우리 선대왕께서 재위하신 오기(五紀)004)   동안의 훌륭하신 덕과 지극하신 선정은 백성들을 감싸 안아 보호하심에 있었다. 공인(貢人)들에게 예부터 남아 내려온 부채 2천 석, 시민(市民)들의 요역 20일, 성균관에서 푸줏간을 하는 사람들의 10일 간의 부역, 여러 도의 병신년 이전 옛 환자 등을 모두 탕감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여 대축(大祝) 남공철·성정진(成鼎鎭)과 예방 승지 심진현(沈晋賢)에게는 가자하고, 찬례(贊禮) 이하 여러 집사들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하도록 하였다.

 

종묘·영녕전·영희전·경모궁에 전배(展拜)하였다. 종로 거리에 행차를 멈추고서 공인(貢人)과 시인(市人)들을 불러 보고 괴로움을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홍화문(弘化門)에 멈추고 각 고을에서 설날 문안을 하러 온 호장(戶長)들을 불러 보면서 삼남의 진휼을 실시해야 하는 고을의 호장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하유하였다.
"구제할 방법은 이미 도신과 수령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정월 초하룻날에 묘전(廟殿)에 공경히 예를 올려 우러러 선대왕들의 백성을 구휼한 훌륭한 덕을 본받고서 전례를 따르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내탕(內帑)에서 특별히 진휼 물자를 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특별히 너희들을 불러놓고 대궐문에 나아와 유시를 선포하니 모름지기 각기 돌아가서 장리(長吏)005)  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가 우러러 선대왕의 뜻을 본받아서 백성들을 위하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지극한 뜻을 알리도록 하라."

 

전교하기를,
"설날 묘궁(廟宮)에 나아가 공경히 예를 올렸으니 이 해 이 배례(拜禮)를 올린 날에는 더욱 선대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다. 저 세 지방의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백성들이 능히 구렁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이나 면했을까 하는 생각에 밤낮으로 염려하는 것이 어느 때인들 간절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이날의 이 마음은 이 해에 이런 배례를 드리고 난 나머지라서 더욱 간절하구나. 연(輦)을 홍화문에 멈추고 호장들을 불러서 보았던 것은, 하나는 바로 그 문이 선왕이 사민(四民)에게 쌀을 내려주었던 문이여서였고, 하나는 진휼청에 내탕의 물자를 내려서 규정에 따라 두루 배분하는 일 이외에 특별히 지급해주는 뜻을 그들로 하여금 먼저 돌아가 장리에게 반포하게 하고자 함에서였다. 내탕고의 보민(保民) 조항의 돈 4천 민(緡)과 호초(胡椒) 5백 근을 삼남에 나누어 내려보내서 각 해당 도신들로 하여금 교지 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돈과 호초를 몫지어 나누니, 영남은 돈 1천 6백 민, 호초 3백 근이고, 호남과 호서는 각기 돈 1천 2백 민, 호초 1백 근이었다. 이것을 봄철 해가 길 때에 양을 정해 별도로 순방해서 지급해 구제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0면
【분류】왕실(王室) / 구휼(救恤) / 재정(財政)

 

명하여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서계군(西溪君) 이습(李熠)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였다. 인점은 선왕의 의빈(儀賓) 중 나이가 많아서이고, 습은 종친 중에서 가장 노인으로 직첩을 받은 지 60년이 되어서였다. 또 명하여 기사 당상(耆社堂上)으로 부부가 해로한 사람에게는 모두 쌀과 고기를 지급해 주어, 이 해에 늙은이를 높이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여러 도의 1백 세 이상 노인에게 가자하는 일을 하비(下批)하니 모두 56명이었다.

 

윤음을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내렸다.
"농사는 군주가 백성들을 이롭게 해주는 것이며 백성들은 또한 하늘로 삼는 것이다. 풍년을 비는 소원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마는, 더구나 지금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나깨나 잊지 않고 연연해 하는 것이 오직 풍년에 있다. 그러나 풍년이 풍년이 되게 된 까닭은 오직 농사에 힘쓰는 것이라고 이를 것이다. 아, 너희 수령들은 농사일에 마음을 다 쏟아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토록 하라."

 

1월 2일 병신

춘당대에 나아와 군사들을 호궤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월 3일 정유

전라도 관찰사 권엄이 상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이 때 호남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상이 그를 불러 보면서 진휼 정사에 정성을 다해 백성 한 사람도 보금자리를 잃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을 단속해 하유하였다. 엄이 막 강계(江界)로부터 돌아온 터라 상이 묻기를,
"강계에 소속된 진영의 각종 공공 비용을 대동미(大同米)라 칭하여 민간에게서 내게 하던 것을, 응당 집집마다 납부하게 되어 있는 호부(戶賦)와 아울러 일체 면제시켜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하니, 엄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상이 말하기를,
"다른 진영들은 모두 면제해 주었는데 유독 강계부에 소속된 여러 진영들에 대해서만 절반을 면제해 준다면 어찌 홀로 서운해하는 탄식이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도내 여러 진영들의 폐단을 구제한 뒤의 실효는 어떠한가?"
하니, 엄이 아뢰기를,
"관서의 여러 진영들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을 파하고 그 몫만큼을 대신 지급해 주기로 한 것은 실로 폐단을 구휼하고 백성을 보호하자는 특별한 은혜와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터 각 진영의 공공 비용과 사적인 비용들을 매양 환곡으로 미리 지급하고는 가을에 가서 그 수효를 환곡의 대여(貸與) 대장에 함께 올려서 받아들여왔던 것이 이미 잘못된 전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 조정에서 지급해 준 것은 바로 임자년의 모조(耗條)로서 당연히 계축년에 분배해 써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거두어들이는 것을 파한 것이 임자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미리 써버린 환곡을 만일 모두 받아들이려고 든다면 저절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니, 부득불 떼어준 모조를 가져다 채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계축년 한 해 동안의 비용은 바로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보기에 매우 민망하니 의당 변통의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비변사 당상 서유린 등이 도백으로 하여금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의견을 제시해서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엄이 또 아뢰기를,
"강계 만포진(滿浦鎭)의 옥동(玉洞)과 상토진(上土鎭)의 마전령(麻田嶺)에는 노는 땅으로 개간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본시 기름진 곳으로 일컬어졌었으나 옛날에 금표(禁標)를 세워서 폐군(廢郡)의 경계로 정하였으므로, 진영이나 고을에서 감히 마음대로 허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표를 옥동 북쪽 수십 리 밖과 마전령 남쪽 7리 밖으로 옮겨서 자성(慈城)의 경계를 한정시키고, 특별히 금표를 물려 개간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종포진(從浦鎭)의 황수덕(黃水㯖)은 바로 강계부 경내 산마루의 요해지로서 경작을 금하는 곳인데, 백성들이 개간을 원하고 있으니 또한 경작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일찍이 평안 감사를 지낸 심이지(沈頤之)에게 편리 여부를 묻자, 심이지가 아뢰기를,
"옥동과 마전령의 금표를 물려 개간을 허락하는 것은 변방을 채우는 도리에 진실로 적합합니다. 그러나 종포의 경우는 산마루의 요해처로 경작을 금한 뜻이 가볍지 않으니, 의당 도신으로 하여금 편비를 내보내 살펴본 다음 편리 여부를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 명하기를,
"옥동과 마전령을 금년부터 개간을 시작해서 땅을 개척하고 백성을 모으는 실효가 있게 하되, 어느 해까지를 한정하여 경작을 권하고 절대 세금을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엄이 또 아뢰기를,
"강계의 내노(內奴)들의 세공(歲貢)은 으레 정은(丁銀)을 써왔는데 값도 비싸고 사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지방에서 생산되는 천은(天銀)으로 바꾸어 납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에게 하유하였다.
"근자에 듣건대 관서의 변경 백성들이 조정에서 그들을 속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니, 전 도백 홍양호(洪良浩)의 일이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당초 그로 하여금 조목조목 나열하여 장문하게 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신분이 군주의 명을 받들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펴는 자리에 있는 자가 능히 자세히 살피고 듣지 못하고서 모호하고 허술한 말로 경솔하게 보고하여 장차 생판 백지에 세금을 징수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이미 듣고서야 일각도 지체할 수 없으니, 경이 가서 잘 타이른 뒤에 즉시 바로 잡아서 일체로 대신 지급해주게 하라.
오늘 자리에서 또 들으니 여러 진장(鎭將)들이 당초부터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에 겁을 먹고서, 응당 받아내야 할 명목이면서 당연히 면제의 대상 항목에 들어가야 할 것들을 혹 줄여 보고하기도 하고 혹 숨겨두기도 하였다가, 이제 특별히 면제를 허락하고 별도로 대신 지급해 주는 지경에 이르르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볼 수 없고 없애거나 그대로 두기도 모두 어려워서 심지어는 다시 민간에게서 거두는 곳도 있다고 하였다. 경이 하나 하나 직접 착수하여 낱낱이 조사해서 민간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은 되돌려 주고 두어야 할 곳은 좋을대로 구분 확정하여 일체 대신 지급해준 다음에 절목에서 바로 잡도록 하라. 이렇게 누누이 전교하면서 촛불까지 밝히고 거듭거듭 당부하는 것은 모두 시작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탄식을 면하고, 겸하여 변방 백성들에게 영영 부담을 줄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십분 명심하여 전 도백과 같은 잘못이 없게 하라."

 

1월 4일 무술

의빈(儀賓)을 보내 증 영의정 최효원(崔孝元)을 치제하였다.

 

1월 6일 경자

사직단에 나아가 제사에 쓰일 희생과 그릇들을 살피고 재계하면서 묵었다.

 

1월 7일 신축

사직단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냈다.

 

차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왕대비전의 보령이 내년이면 꼭 50세입니다. 예법에 의당 휘호를 더 올려서 경사를 축하하고 잔치를 베풀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음 다음 해는 자전(慈殿)006)  의 망륙(望六)007)  이 되는 해이며 자궁(慈宮)008)  의 환갑이 되는 해이니 바로 국가의 큰 경사이다. 지금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는 하나 올해와 내년에 연거푸 우러러 청하기는 또한 조금 번거로울 듯하다. 내가 신중하여 우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체로 뜻을 둔 데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호조 참판 김지묵(金持默)을 정경(正卿)으로 승진 발탁하고, 행 부사직 서매수(徐邁修)와 황해도 관찰사 이경일(李敬一)을 함께 아경(亞卿)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우의정 김이소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조승(李祖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성규(李聖圭)를 공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인일제(人日製)를 반궁(泮宮)에서 보였다.

 

1월 9일 계묘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고, 황해도 관찰사 이경일(李敬一)을 내직으로 옮기고, 김방행(金方行)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서유린(徐有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0일 갑진

심환지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영보(徐榮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보가 정언 안정선(安廷善)과 사사로운 혐의가 있어 부름에 응하지 않자, 상이 그가 회피하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특별히 한강 별장(漢江別將)에 보임하고 이면응(李冕膺)으로 대신하게 하였다가, 이윽고 정선이 사실에 의거하여 스스로 그 잘못을 인책하므로, 서영보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거두었다.

 

1월 11일 을사

이재학(李在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기(申耆)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주교사(舟橋司)가 주교 절목(舟橋節目)을 올렸다.
【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봄 가을로 능원(陵園)을 배알할 적에 나루를 건너야 할 때를 만나면 선창에서 물을 건너는 데에 쓰이는 크고 작은 선박의 숫자가 4, 5백 척에 달하므로, 서울과 지방에서 배를 찾아 구하다 보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뱃사람들이 받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해마다 한 번씩의 행행에 나루를 통해 건너야 했으므로, 이에 성상께서 뱃사람의 폐단을 깊이 진념하시어 특별히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만듦으로써 배를 찾아 다니는 일은 영원히 혁파하고 단지 경강(京江)의 큰 배들만을 가져다가 연결시켜 교량을 만들어 놓으니, 폐단은 사라지고 일은 간단해졌으며, 공력이 줄고 비용도 적어져서, 실로 이것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도구인지라 이에 영구한 법으로 삼는 바이다. 1. 배다리의 배치는 당연히 물길이 좋은 곳을 가려서 해야 한다. 동호(東湖)로부터 그 하류로 강폭이 좁고 양쪽 언덕은 높으며 여울진 곳과 멀어서 물의 흐름이 완만한 곳으로는 노량(露梁)이 제일이다. 또 연(輦)의 거둥 길도 평탄하고 곧아 우회됨이 없으므로, 물길은 노량 나루로 정한다.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현륭원에 행행할 때와 온천에 행행할 때에도 모두 이 길을 이용하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을 행행할 때에는 광진(廣津)에 옮겨 설치한다. 1. 선창의 배설은 으레 큰 배를 강가에 대놓고 언덕의 좌·우측에 긴 나무를 늘어 세우고서, 그 안에는 모래와 흙으로 채워 배의 높이와 수평을 이루게 한다. 그 일에 드는 비용은 극히 많이 소요되었으나 행사를 치르고 나면 헐어버리고 매년 이를 다시 설치해야 하니, 그 비용을 지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돌로 그것을 대신 쌓기로 하고 강가의 잡석을 모아 고기 비늘 모양처럼 가지런히 맞물려 높게 쌓아 올리고 석회로 그 빈 틈들을 메꾸면 그것이 완고하고 튼튼하여 한번 쌓아서 영구히 쓸 수 있게 되겠기에 이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1. 교량에 쓰일 선척에 대해서는 남북으로 선창의 거리가 1백 90발[把]이므로 여기에는 큰 배가 의당 36척이 소요될 것이니, 경강의 개인 배와 훈국(訓局)의 배를 택일하여 쓰기로 한다. 1. 경강의 큰 선박이 지금 현재 도합 80척이니 교량에 소요될 새로 만든 완고한 배 36척 이외의 배들은 모두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하는 구실에 쓰이도록 한다. 1. 배다리의 제도는, 배치하여 연결시킬 즈음에 먼저 여러 배 가운데서 몸체가 가장 크고 뱃전이 가장 높은 것을 골라 강 한복판에 정박시켜서 중심의 표적을 삼게 한다. 그리고 이어 크고 작고 높고 나직한 것들을 차례로 왼쪽과 오른쪽에 줄지어 연결시켜 선창에 닿게 함으로써, 다리의 모양새를 가운데는 높고 양쪽은 낮은 것이 궁륭교(穹隆橋)의 모양이 되게 한다. 1. 늘어세워 묶는 방법은, 배를 먼저 상류를 향해 닿을 내리게 하고 가룡목(駕龍木)은 양쪽의 끝이 서로 닿지 않도록 어긋나게 배치하여 서로 끼어들게 해서 바로 이 배와 저 배의 뱃전 판자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틈새가 나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 남쪽과 북쪽 선창의 항선(項船)을 먼저 큰 밧줄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잡아매고, 다음에 종보와 버팀목을 묶고 다음에 가로로 판자를 깔고 다음에 난간과 조교(吊橋)와 홍살문을 설치한다. 1. 배들을 늘어세운 뒤에, 이전에는 돛대를 배 위에 가로로 놓고 각 배들을 묶었는데, 돛대 기둥이 밑둥은 크고 끝쪽은 가늘어서 가로로 놓고 묶기에 불편하였다. 그리고 또 크고 긴 것을 가로로 여러 배에 뻗혀 잇게 함으로써 배 한 척에서 탈이 발생하면 묶은 줄을 풀기가 또한 어려웠다. 그러니 별도로 장산곶(長山串)에서 길이 35자 가로 세로의 넓이 1자 되는 소나무를 구해다가, 배마다 각기 다섯 주(株)씩을 배에 깔아놓은 판자의 길이를 헤아려 분배해서 세로로 묶되, 두 쪽 끝이 뱃전을 걸쳐 밖으로 나가게 한다. 그리고 두 배의 종보 머리는 서로 마주 잇닿게 하고 말목을 맞세워 박은 다음 칡 밧줄로 야무지게 묶는다. 그리고 또 버팀목을 배 위에다 세워 배가 흔들리는 걱정이 없게 한다. 1. 이전에는 배 위에다 발[芭子]을 깔고서 모래와 흙을 채우고 그 위에 잔디를 깖으로써, 설치하고 철거할 때에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만일에 비라도 만나게 되면 언제나 매우 질척거려서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양호(兩湖)에 나누어 맡긴 장송판(長松板)으로 너비는 한 자, 두께는 세 치, 길이는 어가(御駕)의 길 너비 4발[把]의 폭에 한정된 것을 고기 비늘처럼 나란히 종보 위에 가로로 깔고, 두 판자가 맞닿는 곳에는 드러나지 않게 못을 박아 서로 맞물리게 한다. 또 아래쪽에는 견마철(牽馬鐵)로 두 판자가 맞닿는 곳에 걸쳐 박고, 또 판자의 양쪽 끝에는 보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 삼 밧줄을 꿰어서 왼쪽과 오른쪽의 종보에 묶어 움직이거나 노는 폐단이 없게 한다. 1. 깔판의 좌우 양쪽에는 먼저 중방목을 설치하고 다음으로 짧은 기둥을 매양 한 칸에 한 개씩 늘어 세우고, 벽련목(劈鍊木)을 가지고 가로로 열십자 모양의 난간을 만들어 두 기둥 사이에 연이어 박아넣되, 먼저 기둥 한쪽에 서로 맞보게 변석(邊錫)을 뚫어서 난간이 서로 맞붙고 드나들게 하는 뒷받침으로 삼는다. 1. 노량 나루는 바로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밀물이 많으면 수위(水位)가 3, 4자가 높아지고 적어도 두어 자는 높아져 배다리가 물에 떠받치어 선창보다 높아지고, 조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위아래로 층이 갈라져 길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비록 선창을 더 쌓고자 하여도 밀물과 썰물의 출입으로 인하여 수위가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므로, 때에 따라 일을 하고 중지하고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대략 조교(吊橋)의 제도를 본떠 널다리를 만들되, 세로로는 종보를 배치하고 가로로는 넓은 널빤지를 깔아 다리 모양처럼 똑같이 만든다. 그리고 널다리의 종보 머리를 항선(項船)의 종보 머리에 연접시키되, 요철(凹凸) 모양으로 깎아 서로 잇대서 비녀장 지르는 것을 마치 삼배목(三排目) 궤도와 같이 하여 자유자재로 구부러지고 펴지도록 한다. 그렇게 할 경우 조수가 밀려들어 다리가 높아지면 널다리의 한쪽 머리가 배를 따라 들려져서 한쪽은 약간 높고 한쪽은 낮아지는 형세가 되겠지만 경사가 가파르기까지는 않을 것이고, 조수가 밀려나가면 평평해져서 선창의 위가 판판하게 도로와 연결이 될 것이다. 1. 남쪽과 북쪽의 선창에 각기 한 개의 홍살문을 설치하여 배다리의 경계를 표시하고 가운데의 가장 높은 배에도 홍살문을 세워 강물의 복판임을 표시한다. 1. 배다리를 놓고 철수하는 일을 보아 지키고, 거둥이 있을 때 벌여서서 호위하는 일에 군졸이 없을 수 없다. 배 한 척의 격군(格軍)이 12명으로 도합 80척의 격군이 거의 1천 명에 가까우니, 이들로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 명부를 작성하여 본 주교사에 비치한다. 그리하여 배다리를 놓고 철수할 때는 이들 격군을 돌아가며 부리고, 거둥 때는 주교사 소속의 배 한 척당 12명씩의 격군에게 전건(戰巾)을 씌우고 청·황·적·백·흑 빛깔의 더그레[號衣]를 입혀 좌우 난간 밖 뱃머리에 벌려 세우고, 협선(挾船)의 격군은 좌우 협선에 벌려 세워서 호위로 삼는다. 1. 이미 창설하여 군대의 대오를 지었으면 영솔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배다리의 중심에서 남쪽은 전부(前部)로, 북쪽은 후부(後部)로 삼아 배 세 척으로 1개의 선단[䑸]을 구성해 전후 각기 다섯 개의 선단을 이루어서 오사(五司)의 제도를 대략 본뜨고, 나머지 배들은 중앙에 배속시킨다. 협총(協總) 한 사람을 두어 전후를 통솔하게 하되, 본 주교사의 도청(都廳)으로 겸임시키고, 전·후부에는 각기 영장(領將) 1명씩을 두되 주교사의 감관(監官) 두 사람으로 임명하며, 매 선단에는 각기 선단의 우두머리 1명씩을 두되 주교사의 영장 10명으로 임명해서 단속하고 통제하게 한다. 1. 군졸이 있은 다음에는 당연히 표시하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진영을 짜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굳이 큰 깃발을 쓸 필요가 없다. 의당 배와 물의 의미를 상징하게 해서 육군(陸軍)의 깃발 제도와 구별지어야 할 것이다. 중앙의 홍살문 양쪽에는 큰 두 개의 깃발을 세우되, 하나는 황색으로 하여 중심을 표시하고 하나는 흑색을 써서 수덕(水德)을 상징한다. 배마다 이물에는 각기 한 개의 깃발을 세우되, 청·황·적·백·흑의 빛깔로 5개 선단의 차례를 상징한다. 그리고 깃발의 띠는 중앙을 상징하고, 기각(旗脚)은 해당 부(部)를 상징하며, 깃발 앞면에는 아무 선단의 몇째 배라는 것을 써서 대오를 표시한다. 배마다의 고물에도 역시 각기의 깃발을 한 개씩 꽂되, 청·황·적·백·흑의 빛깔과 깃발의 띠와 기각은 이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깃발의 앞면에는 새매나 물새를 그려 옛부터 내려오는 화선(畵船)의 제도를 상징한다. 배마다에는 또한 각기 바람을 살필 수 있는 깃발[相風旗] 한 개씩을 세워 바람을 점칠 수 있게 한다. 1. 대가가 물을 건너는 때에 있어서는 이미 장령(將領)과 군졸을 설치하였으니 총 감독할 대장이 없을 수 없으므로, 대가를 수종하는 이외에 군영에 남아 있거나 부대에 남아 있는 대장을 병조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어 들여서 낙점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해당 군영의 대장이 거가를 따라갈 때에는 인원을 갖추어 의망(擬望)할 수 없으니,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수어사나 총융사를 임시로 계청(啓請)하여 합해서 의망해 들인다. 1. 배다리를 놓을 때나 평상시에 있어 선창의 석축(石築)과 창고에 쟁여놓은 목재들은 반드시 오로지 관장해서 살피는 사람이 있어야만 거의 소홀하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노량진(露梁鎭)을 본 주교사에 이속시키고 본 주교사가 별장을 차출하여 착실히 관장하게 해야 할 것이며, 해당 노량진의 진영에 있는 환곡과 돈은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유치시켜 모든 것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한다. 1. 나룻길을 건널 때에는 으레 나룻머리에 어가가 머물 처소[大次]가 있어야 하나, 그것을 준비하려면 드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노량진의 진영 막사를 본 주교사의 관사로 정해서 행행하실 때에 어가의 처소로 삼는다. 1. 배다리에 드는 종보·깔판·난간 등속의 나무로 된 물품들은 반드시 거두어 보관하는 곳이 있어야만 썩거나 손상될 걱정이 없을 것이다. 노량 나루의 본 주교사 근방에 별도로 창고 70칸을 지어 각종의 나무로 된 물품들을 보관해 두도록 한다. 1. 어가의 처소를 지키고 수리하고 청소하고 군불을 지피는 등속의 일을 해당 노량진에서 주관해 거행하도록 하려면 자연 급료로 지급할 베[布]나 비용의 수요가 있어야 하니, 금위영(禁衛營)의 돈 1천 냥을 본 노량진에 대출해 주어 이식을 받아 비용의 수요로 삼게 한다. 1. 배다리를 놓거나 철거할 때에 각 선박의 격군(格軍)을 돌아가며 쓰기로 한다면 별로 재용이 많이 들어갈 것이 없겠지만 또한 어지간한 잡비는 들지 않을 수 없으니, 호남에 감해준 조세 운반 비용의 무명 6동(同) 26필을 본 주교사에 소속시키고, 호조가 그것을 받아 넘겨주어 비용의 수요로 삼게 한다. 그리고 쓰고 남은 것은 차츰 저축해 두어 불시의 비용에 쓰도록 한다. 1. 노량진 남쪽과 북쪽의 언덕 근처에 살면서 배를 만드는 장인들은 하나같이 본 주교사의 대장에 올려 잡역을 면제해 주고 다리를 놓을 때 부릴 수 있게 한다. 1. 배다리가 이미 정해진 뒤에 공조가 선창을 쌓는 일이 없으면 본조 소속의 각강(各江)의 관령(管領)들을 모두 본 주교사에 이속시켜 부린다. 1. 다리를 놓거나 다리를 철거할 때에는 당연히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나, 각 군문의 장교(將校)들을 빌어 쓰게 되면 폐단만 있을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일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 또한 익숙한 뱃사람들만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배의 주인 가운데 근간하고 사리를 아는 사람으로 도감관(都監官) 1명, 감관(監官) 2명, 영장(領將) 10명을 가려 뽑아 배를 분담해 관리하고 격군을 통솔하여 착실하게 감독하도록 한다. 1. 대가가 나루를 건널 때에 다리 위에서 신호하는 깃발은 당연히 배 위에 꽂아둔 깃발을 사용하되, 깃발을 드는 사람은 좌우에 벌려 선 격군을 쓴다. 1. 깃발은 노량 나루의 본 주교사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임시해서 내다 쓴다. 그리고 수리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등의 일은 본 주교사가 거행한다. 상풍기(相風旗)와 격군이 쓰고 입는 전건(戰巾)·더그레[號衣]와 띠는, 처음에는 본 주교사가 만들어 지급해주고, 뒤에 수리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에 대해서는 배의 주인들이 담당해서 거행하도록 한다. 1. 감관(監官)은 영장(領將) 중에서 권점(圈點)으로 차출하고 영장은 각배 주인들 중에서 근간하고 사리를 아는 자를 가려 그들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권점으로 차출하게 하되, 감관은 2년마다 바꾸기로 한다. 1. 깔판자·종보·난간·철물(鐵物) 등속은 착실히 살펴서 손상을 입히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10여 년은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개비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데에서 가져다 쓰고, 혹 많은 수효를 개비해야 할 때에는 종보는 장산곶(長山串)에서 가져다 쓰고, 깔판자는 삼남의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 쓰고, 철물 등속은 본 주교사에서 마련한다. 1. 경강(京江)의 개인 배를 다리 공사에 동원시켰으면 수고에 보답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뱃사람의 일이란 오로지 양호(兩湖)의 세곡을 실어나르는 것이 위주인데,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토색질하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익을 잃게 되었으니, 각항의 폐단을 특별히 금하여 없애도록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이를 준행하도록 한다. 1. 배를 부림에 있어 요긴하거나 헐후할 때가 있고 각 고을의 배삯에도 또한 후하고 박함이 있으니, 등급을 나누어 구별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감관과 영장은 그 자신은 이미 감독의 일을 맡았고 배도 또한 배다리에 편입되었으니, 노역이 가장 많은 그들을 1등으로, 배다리에 편입된 배를 2등으로, 좌우의 협선(挾船)을 3등으로 삼는다. 그리고 각 고을에는 그들 고을의 후하고 박함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지어 공정하게 추첨하여 각 고을에서 등수 나눈 것을 버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헤아려 대장을 준비하게 했다가 다음번 추첨 때에는 당상관이 직접 관장해서 거행하도록 한다. 훈국의 배들도 역시 다른 배들의 규례에 따라 추첨하여 예전과 같이 스스로 가리는 폐단이 없게 한다. 1. 배들이 곡식을 싣거나 행상을 하기 위해 수시로 멀리 출행함으로 인해서 갑자기 모으기에 어려움이 있다. 봄·가을로 능에 행행하는 데는 본시 정해진 달이 있으니, 기한에 맞추어 일제히 와 기다리게 하라는 뜻을 미리 각 배 주인들에게 거듭 단속시켜 감히 기일을 놓치는 일이 없게 한다. 그래서 만일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은 자가 있으면 배 주인을 엄히 징계하고 추첨에서 제외시킨다. 1. 주교사의 도제조는 삼공이 예겸(例兼)하고, 제조는 삼군문의 대장이 예겸한다. 그리고 주관 당상(主管堂上) 1원(員)은 비국에서 별도로 계하(啓下)를 받아서 준천사(濬川司)의 주관 당상까지 겸관(兼管)하게 하고, 도청(都廳) 1원은 삼군문의 천별장(千別將) 중에서 가려 계하를 받아서 역시 준천사의 도청까지 겸관하게 한다. 1. 다리를 놓을 때 사람들을 부리고 재용(財用)을 관장하는 일은 본 주교사의 주관 당상이 모두 관장해서 거행하고, 예겸 당상은 다리를 놓을 때 번갈아 오가면서 일을 감독한다. 1. 큰 밧줄로 배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매어두는 일은 위에서 논한 바가 있으나, 밧줄이 끝내 튼튼하지는 못하고 또 해를 지내다보면 썩어 상하게 되는 폐단이 없지 않다. 그러니 쇠줄 열 발[把]짜리와 다섯 발짜리 각각 네 개씩으로 남쪽과 북쪽 항선(項船)의 이물과 고물을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걸어매어 고정시킨다. 1. 다리 위의 깃발에는 대군물(大軍物)의 제도와 소군물(小軍物)의 제도가 있는데, 대군물은 황색 대기(大旗)와 흑색 대기 각각 1개, 상풍기(相風旗) 72개, 종선기(䑸船旗) 36개, 골익기(鶻鷁旗) 36개이고, 소군물은 황색 대기와 흑색 대기, 상풍기·종선기는 수대로 늘어 세우고 골익기는 두지 않는다. 대군물과 소군물은 주사 진영으로부터 임시해서 지휘를 받는다. 그러나 다리 위의 군물이 만일 대군물로 명이 내리면 주사 대장의 해당 영의 군물도 대군물로 거행하고, 만일 소군물로 명이 내리면 해당 영의 군물도 소군물로 거행한다. 해당 영의 대군물은 주사영의 인기(認旗) 1개, 대·중·소의 오방기(五方旗) 각 5개, 문기(門旗) 10개, 각기(角旗) 8개, 청도기(淸道旗)·금고기(金鼓旗) 각 2개로 도합 38개이고 순령수(巡令手)·뇌자(牢子) 각 15쌍(雙), 취타수(吹打手) 33명, 당보수(塘報手)·별파진(別破陣)·난후아병(攔後牙兵) 각 20명이다. 그리고 소군물은 주사영의 인기 1개, 큰 오방기 5개, 각기 4개, 황문기(黃門旗)·청도기·금고기 각 2개로 도합 15개이고, 순령수·뇌자 각 10쌍, 취타수 19명, 당보수·별파진·난후아병이 각 10명이다. 1. 선창 머리에 혹시라도 모래가 쌓여 맨 머리에 있는 배와의 거리가 현격하여지면 그 형편에 따라 당연히 선창 앞쪽으로 물려 만들어야 한다. 전면에 먼저 몸체가 크고 길이가 40자 정도 되는 두 개의 방목(方木)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나누어 뚫고 다섯 개의 기둥을 박되, 기둥 나무 양쪽 끝에는 각각 가로로 비녀장을 박아서 5층 사다리 모양처럼 되게 한다. 하방목(下方木)을 물 속에 3자쯤 한정하여 내리되, 기둥나무 사이사이 네 곳에 각기 8, 9자쯤 되는 작은 말목 두 개의 윗쪽에 구멍을 뚫어 하방목 좌·우에 꽂고 비녀장을 말목 위쪽 구멍에 가로질러서, 하방목이 떠서 이동하거나 솟아오르는 폐단을 막는다. 그리고 이어 모래를 빈 가마에 담아 방목의 상단 양쪽에 늘어 쌓아서 석축(石築) 밑쪽을 누르고 있게 한다. 뒤쪽에는 기둥나무를 곧게 세우고 이어 걸치는 종보를 얹고, 사면을 두 층으로 나누어 가로 세로로 중방목을 박아서 마치 집을 짓는 모양과 같게 한다. 버팀목과 종보와 깔 판자와 드러나지 않은 못과 견철(牽鐵)과 끈으로 얽는 것은 모두 배다리의 구조와 같게 한다. 그리고 다시 몸체가 큰 가름대의 가장 긴 것 두 개로 좌·우측 깔 판자의 양쪽 가장자리에 덧대어 물러나지 않게 한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1면
【분류】교통(交通)

 

1월 12일 병오

상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하였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하였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같이 융성할 것이다. 오직 이 곳을 잘 수호할 방도를 더욱 애써 치밀하게 하여 체모가 존엄하고 제도가 엄숙하여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 소자(小子)의 정리로나 예법으로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종묘의 예절을 두고 먼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소중함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다.
이곳 수원부는 〈현륭원〉 자리를 마련한 뒤로부터 관방(關防)이 더욱 중하여졌다. 아름다운 이 자연의 요해처에 달마다 꺼내 볼 〈사도 세자의〉 의관(衣冠)들을 길이 봉안하리라. 미리 행궁을 세워 먼저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붙였고, 영정을 그려 걸어서 혼정 신성의 정성을 대신하니, 어린애처럼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북받쳐 올라 절제할 줄을 모르겠다. 매년 3백 일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손꼽아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 오로지 예를 행하는 하룻동안에 있었기에, 이미 배알을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수원부의 경계가 다하는 고갯마루에 거가를 멈추고 우러러 바라보며 머뭇거리노라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어지곤 하였다. 그래서 번번이 수신(守臣)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정성을 다해 수호하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당부했었다. 그러나 그의 직책은 한 고을의 원이요 그의 품계를 물어보면 3품직의 자리이다. 적임자를 얻어 그 일을 맡기는 것이야 벼슬의 높낮이에 관계될 것이 아니겠지만, 조정의 거조란 지위가 높지 아니하면 위엄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관방에 대해서는 우선 제쳐두고라도 나의 행궁을 정리하는 여러 가지 임무를 어찌 3품의 고을 원에게 맡겨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은 옛날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남한 산성은 단지 방위하는 성의 역할만이 있을 뿐인데도 대신이 사(使)가 되고 유수는 문반의 경재(卿宰)로만 오로지 차임하면서도 방위의 일을 위해서는 무장(武將)이 남한 산성에 통의(通擬)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이 곳 이 수원부의 소중함이겠는가.
지금부터는 수원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어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오직 대신이나 무장으로 특지를 받아 〈유수에 임명하고〉 또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라. 장용영을 설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장용영 장수의 칭호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은 외사(外使)가 나오기를 기다린 때문이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기를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어영 대장이라 호칭하는 것처럼 하며,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그 법식을 갖추되 역시 경리영(經理營)의 도제거를 삼공이 예겸하는 것처럼 하고 호위 대장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키라. 그리고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의 군수 물자와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하고 조처하는 것에는 모두 경비에 의존하지 않게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재용을 저축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나는 자나깨나 한 마음이 선대를 사모하는 데에 있다. 백성을 보호하는 것도 비록 길은 다른 것 같으나 거기에 쓰여지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이 백성은 곧 선왕의 백성이다. 그러니 지금 이 백성들을 감싸 보호하려면 의당 먼저 폐단을 제거해야 하는데, 가장 큰 폐단은 군영(軍營)이 많은 것을 덮을 것이 없다. 그래서 내가 설날 조참(朝參) 때에 네 가지 항목을 들어 하유하였는데, 네 가지 항목 중에서 군(軍)과 민(民)이 그 두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 말을 한 것은 앞으로 행하고자 함에서였다. 선왕이 드나드셨던 문에 임하고 선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말만 하고 능히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욕스럽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이 전교를 길이 새겨 보고 은미한 뜻을 자세히 헤아려서, 내가 이 일을 경영하여 우리 후인들을 계도해서 우리 국운이 억만년토록 영원하기를 비는 본의를 알게 하라."

 

앞서 임인년009)                  에 명하여 무예 출신(武藝出身)과 무예 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30명을 가려서          【숙묘(肅廟) 을축년에 무예 별감 30명을 훈련 도감의 국출신(局出身)의 3개 번(番)에 번갈아 임명한 제도를 따른 것이다.】         번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회랑에 입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을사년010)                  에 장용위라 호칭하고 20명을 늘리니 이것이 장용영이 설치된 시초이다. 이때부터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척씨(戚氏)011)                  의 남군(南軍)012)                   제도를 본받아 5사(司)에 각기 5초(哨)를 두는 것으로 규례를 삼고 3초는 초마다 1백 15명으로 하였다.          【정규 군인 90명, 기총(旗摠) 3명, 대장(隊長) 9명, 서자적(書字的) 1명, 패두(牌頭) 1명, 고수(鼓手) 1명, 인기수(認旗手) 1명, 화병(火兵) 9명이다.】 정미년013)                  에 처음으로 27명을 두기 시작해서 무신년에 88명을 증원하여 좌초(左哨)를 만들었고, 신해년에 우초(右哨)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중초(中哨)를 늘렸다.
5초는 서울에 있었으니 초마다 1백 23명이었다.          【정규 군인·기총·대장은 위와 같고, 복마군(卜馬軍) 9명이 많았다.】         정미년에 전초(前哨)를 처음으로 두고 무신년에 중초와 후초를 늘렸으며 계축년에 좌초와 우초를 늘렸다. 5초는 수원에 있었는데, 기유년에 창설하였다. 5초 중 전초는 진위(振威)에 있고, 좌초는 양성(陽城)에 있고, 중초는 용인(龍仁)에 있고, 우초와 후초는 광주(廣州)에 있다.
2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우초는 고양(高陽)에 있고 후초는 파주(坡州)에 있으며, 3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전초는 안산(安山)에 있고 좌초는 과천(果川)에 있고 중초는 시흥(始興)에 있다. 3초는 무신년에 창설했는데, 전초는 지평(砥平)에 있고 좌초는 양근(楊根)과 가평(加平)에 나뉘어 있고 중초는 양주(楊州)에 있다. 우초와 후초는 을묘년에 증설했는데, 우초는 양주에 후초는 장단(長湍)에 있다.          【초마다 정규 군인 90명, 기총 3명, 대장 9명, 서기(書記) 1명, 능마아(能麽兒) 1명, 고수 1명, 인기수 1명, 사후(伺候) 2명, 부엌일하는 사람 1명, 화병 9명, 복마군 9명이다.】         96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訓局技藝軍)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7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元軍)이 85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5명, 회자수(劊子手) 4명이다.】 92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3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이하는 위와 같고 회자수가 없다.】 95명은 정미년에 25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5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88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92명은 임인년에 훈국 기예군 15명이 이속된 것을 비롯하여 을사년에 15명을 증원하고, 무신년에 13명을 증원하고, 기유년에 5명을 증원하고, 경술년에 9명을 증원하고, 신해년에 5명을 증원하고, 임자년에 9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21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이하는 위와 같고 회자수가 없다.】 95명은 정미년에 25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5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88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95명은 정미년에 25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5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88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1백 명은 정미년에 28명으로 창설하여 경술년에 23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9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은 93명이고 서자적 이하는 위와 같다.】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65명은 무신년에 16명으로 창설하여 신해년에 7명을 증원하고, 계축년에 42명을 증원한 것이다.          【원군 51명, 서자적 1명, 패두 1명, 복마군 2명, 원역(員役) 10명이다.】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45명·50명·57명이 있다.          【등롱군(燈籠軍) 이하의 세 종류 군대로서 모두 정미·무신년부터 차례로 늘린 것이다.】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별장은 표하군이 40명, 사(司)는 표하군이 30명, 선기장(善騎將)은 표하군이 18명이고, 초관(哨官)·지구관(知彀官)·교련관(敎鍊官)·통장(統長)·장용위의 패두는 모두 사후군(伺候軍)을 두었다. 공장(工匠)의 아병(牙兵)이 29명, 수송을 맡은 복마군이 40명이다.
5초는 6백 5명이고 표하군은 1백 64명이다. 배봉진(拜峰鎭)           【기유년에 설치하였다.】        은 아병 2초, 표하군 23명, 향취수(鄕吹手) 30명이고, 고성진(古城鎭)은          【임자년에 이속되었다.】         아병 2초, 표하군 58명이고, 노량진(鷺梁鎭)           【계축년에 이속되었다.】        은 좌우 아병 1백 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다.
그리하여 기병과 보병이 총 5천 1백 52명인데, 여기에 도제조          【1원.】        는 계축년에 처음 두어 대신 중에서 당시 호위 대장을 겸임한 사람을 예겸시키고, 호위청을 장용영에 통합하였다.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        는 호조나 선혜청의 시임 당상관이나 일찍이 역임한 사람을 갖추어 의망한다. 사(使)          【1원.】        는 일찍이 장수를 지낸 사람에게 제수한다. 계묘년에 처음으로 둔 병방(兵房)은 장수의 직임이나 포도 대장을 지낸 사람을 일찍이 임명하여 병방이라 이른 것이니, 그것은 정원의 병방 승지가 오위(五衛)의 습조(習操)와 점고를 관장하는 예를 본뜬 것이다. 계축년에 사(使)          【문서에서는 대장(大將)이라 칭했다.】        로 호칭을 바꾸고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을 제수하였다.          【으레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했다.】                종사관(從事官)                  【1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음관(蔭官)으로 임명하였다. 선기 별장(善騎別將)                  【2원.】        은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아장(亞將)으로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나 중일 시사회(中日試射會) 때의 행 중군(行中軍)·행 파총(行把摠)                  【5원.】        은 무신년에 처음으로 두어 기유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2품 절도사에서부터 방어사까지의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선기장(善騎將)          【3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신해년과 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상 3품관으로 임명하였다.
초관(哨官)                  【25원.】        은 정미년에 처음으로 두어 무신년·기유년·계축년에 증설하였는데, 당하 3품관 이하로 임명하였다.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5원.】        는 신해년에 처음으로 두어 장수 집안의 자손이나 지벌이 두드러지거나 여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가려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지구관(知彀官) 21원, 무예 통장(武藝統將) 2원,           【무예 별감을 거느려 숙위에 대비한다.】         별부료(別付料) 2원,           【 글을 알고 계산에 밝은 자로 삼아서 본 장용영의 회계를 맡게 한다.】                교련관(敎鍊官) 20원은 본 장용영에 출사하는 것을 면제한다. 패장(牌將) 8원          【전각의 계단 아래서 일을 맡는다.】        , 약방(藥房) 1원, 침의(鍼醫) 1원, 화원(畵院) 1원, 사자관(寫字官) 1원, 별무사(別武士) 36인, 부료 무사(府料武士) 16인,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3인, 대령 서리(待令書吏) 3인, 조보 서리(朝報書吏) 1인, 서원(書員) 7인, 고직(庫直) 13명, 대청직(大廳直) 1명, 도방자(都房子) 4명, 궁시인(弓矢人) 2명, 도변수(都邊首) 2명, 사령(使令) 41명, 구종(驅從) 14명, 우장직(雨裝直) 2명, 다모(茶母) 2명, 의막 군사(依幕軍士) 2명, 제약군(劑藥軍) 1명, 문서직(文書直) 12명, 방자(房子) 15명, 소방자(小房子) 22명, 군사(軍士) 5명, 사환군(使喚軍) 30명, 역인(役人) 15명, 복직(卜直) 5명, 사고직(私庫直) 4명, 기영 겸감색(畿營兼監色) 4명, 향군 구관 감색(鄕軍句管監色) 26명이었다.          【각 고을의 향무사(鄕武士) 13명, 읍리(邑吏) 13명이다.】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상이 또 군대가 있으면 군량이 있어야 하므로 매번 하나의 영(營)을 둘 때마다 백성들이 그 해를 받아, 훈국을 설치하면서는 3년 동안의 세금으로 2필의 포(布)가 생기었고,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을 설치하면서는 보미(保米)와 보포(保布)가 6도에 편만해졌는데, 지금 다시 각영이 하던 대로 한다면 원대한 도모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탕전을 내놓아 여러 도에 곡식을 사들여 두게 하고, 내사(內司)의 전장 토지로 조세를 비싸게 받던 것을 폐지시켜서 그들의 요역을 가볍게 해주어 양서(兩西)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심지어는 진상품이 첨가된 것과 상격(賞格)이 남용되는 것과 액정서 하례의 남아도는 인원과 군제(軍制)의 법에 어긋난 것들과 선혜청에 저장된 갑주가미(甲胄價米)와 호조에서 가져다가 내사에서 급대(給代)하던 것 등까지를 혹은 바로잡아 떼주기도 하고 혹은 모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이런 종류들을 미루어 찾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을 많이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있으면 돈으로 만들어 바치게 해서 그들의 힘을 펴이게 해주고, 유치된 환곡이 많아서 농민들을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더 나누어 주어 그들의 양식을 넉넉하게 해주며, 혹은 상정(詳定)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혹은 값을 주고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창고의 곡식이 총 43만 1천 6백 91석이었는데, 이를 관서·해서·호서·호남·영남·관동에 나누어 두었고, 3진(鎭)의 곡식은 총 9천 9백 48석이었는데, 매년 한 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쌀은 2만 5천 8백 90석이고, 대두는 4천 6백 90석이고, 돈은 7만 8천 8백 95냥이고, 무명은 3백 67동 19필이고, 삼베는 26동 25필이었다.
수원부를 이미 외영(外營)으로 삼고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호칭한 전례에 따라 친군위 3백 6인을 두고 탐라에서 기르던 말을 가져다 한 사람에게 한 필씩을 준 다음 훈국의 말 지급 규정에 비추어 해마다 모자라는 수를 채웠는데, 그 수가 매년 30, 40필을 내리지 않았다.          【화성의 군제는 끝내 오위의 제도를 본떠 따로 절목을 만들어서 윤하(允下)되었다.】         이것이 내영과 외영의 시말이다.
기유년에 현륭원을 옮기고서 옛 원(園)터는 바로 28년 동안 궁검(弓劍)을 모셨던 자리이므로 차마 황폐해지게 버려둘 수 없다 하여 파주(坡州)의 옛 장릉(長陵)014)                   예에 따라 위전(位田)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해주고, 진둔 별장(鎭屯別將)을 두어 배봉진이라 칭하여 장용영에 소속시켜서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으로 삼고 아병(牙兵) 2초를 두었다.
노량(鷺梁)은 현륭원 행행의 초입로에 주필하는 곳이므로, 옛날 금위영에 소속되었던 별장을 장용영에 이속시키고 군제를 배봉진과 같이 하여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삼았다. 관서의 고성진(古城鎭)은 관방의 중요 지역임에도 피폐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총융청의 덕지둔(德池屯)의 예에 따라 장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삼아서 네 개 고을의 둔전을 관장하게 하고, 5초의 군교(軍校)를 정하여 별중사 파총(別中司把摠)이라 호칭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박천 군수(博川郡守)를 겸파총(兼把摠)으로 삼아 장용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삼진(三鎭)의 시말이다. 그리고 12년인 무신년에 상이 경기도의 산간 백성들이 처음에는 꿩 사냥에 시달렸다 다시 섣달 멧돼지 사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꿩 사냥을 중지시키고 다음으로 섣달 멧돼지 사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양근(楊根) 등 네 고을의 수어청 둔전 아병 15초에서 매 초마다 25명씩을 떼내서 초를 만들어 몰이꾼을 대신하게 하고, 양주와 고양(高陽)에 2초를 설치하고 아울러 둔전을 병사가 있는 고을에 설치하였다. 축령산(祝靈山)과 용문산(龍門山) 두 산을 사냥하는 장소로 삼아 그 산을 봉산(封山)015)                  으로 정하고 팻말을 세웠는데, 그것은 군사를 농사에 붙여 두는 뜻에서이다.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도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세 고을의 경내는 둔전을 설치하기에 합당하지 않아 거기서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었다. 을묘년에 수어청이 진영을 두면서 마병(馬兵)은 짐의 양에 비추어서 2천 4백여 명을 줄였으나 속오군은 따지지 않았고 마병 2백 명은 그 대신의 아병으로 대신하고 표하군 8백 명은 일이 헐후한 곳으로 정해서 각 군문에 급대(給代)하였다. 그리고 6초의 군사를 광주(廣州)·안산·용인·시흥·과천 다섯 고을에 그대로 두고 돈 2만 민(緡)을 내주어 그들 군사가 있는 곳에 따라 둔전을 벌여 두도록 했는데, 이것은 향군(鄕軍)의 시말이다.
장용위(壯勇衛)라는 호칭을 내린 것은 오위의 한 위를 본딴 것이고, 삼부(三部)를 설치하지 않고 오사(五司)를 설치하여 서울과 시골에 나누어 둔 것은 〈중국〉 남방의 군제를 본뜬 것이며, 장용위를 혹은 군사들 속에서 뽑고 혹은 취재(取才)하기도 하고 혹은 출신자로 하기도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본뜬 것이고, 정원 밖에 무반 집안의 자제를 뽑은 것은 장수 재목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선기대(善騎隊)를 혹은 말타는 재간을 가진 자를 뽑고 혹은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본뜬 것이고,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은 훈국에서 본뜬 것이나 7도(道)에 두루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왕도의 근기(近畿)를 중히 여겨서이며,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으로 일컫게 한 것은 어영을 본뜬 것이고,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을 본뜬 것이며, 중군을 두지 않고 별장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광묘(光廟)016)                   때의 좌상(左廂)·우상(右廂)과 숙묘(肅廟) 때의 정초청(精抄廳)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로되 천총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옛 제도를 본뜬 것이고, 강서(講書) 시험에 《병학통(兵學通)》을 사용하고 기예 시험에 《무예보(武藝譜)》를 사용한 것은 영묘(英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유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며, 내사와 외사가 차는 부신(符信)과 밀부(密符)는 통용하면서 병부(兵符)만은 특별히 호부(虎符)를 쓰는 것은 잔뜩 성을 내어 으르렁거리는 범에서 뜻을 취함과 동시에 국초(國初)의 일을 이어받자는 데서 온 것이다.          【병방을 설치한 초기에 하교하기를, "명소(命召)하는 제도는 특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부신(符信)만이 있었다. 그래서 장신(將臣)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도 부신(符信)이 없는 데에 대하여 예전부터 경륜 있는 인사들의 의심스럽게 여기는 논의가 있었으니, 지금은 이를 참작해서 호부(虎符) 1개와 전령패(傳令牌) 1개를 만들어 지급해야겠다." 하였다.】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2면
【분류】군사(軍事)


[註 009]          임인년 : 1782 정조 6년.[註 010]          을사년 : 1785 정조 9년.[註 011]          척씨(戚氏) : 척계광(戚繼光)을 이름.[註 012]          남군(南軍) : 중국 남쪽 지방 군사.[註 013]          정미년 : 1787 정조 11년.[註 014]          장릉(長陵) : 인조와 인조비 한씨의 능.[註 015]          봉산(封山) : 벌채를 금하는 산.[註 016]          광묘(光廟) : 세조를 이름.
대장은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해서 병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재용에 대해서는 향색 제조(餉色提調)가 주관한다. 이재간(李在簡)·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가 서로 이어 향색 제조가 되었으나, 서유린과 정민시가 가장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모든 재용에 대한 조치와 계책들이 모두 이들 두 사람에게서 나왔고 이명식이 또 그 다음이었다.

 

 

 

명하여 수원부 유수를 정경 이상으로 의망해 차임하고, 판관은 5품 음관(蔭官)으로 의망해 차임하되, 유수는 기백(畿伯)이 예겸하고, 장용영 도제거는 현재 호위 대장을 겸대한 대신 한 사람만을 추천해 올리는 것을 법으로 정하게 하였다.
특별히 판중추부사 채제공을 수원부 유수로, 전 수원 부사 이경무(李敬懋)를 형조 판서로, 김지묵(金持默)을 장용사로,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13일 정미

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돌아와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화성부 고을의 유생들을 직접 시험보여 우등한 윤지승(尹持昇)에게 급제를 내리고, 무사들은 유수와 훈련 대장과 어영 대장에게 시취하도록 명하여 김진희(金鎭禧) 등 2명에게 급제를 내렸다.
수원·광주·금천·과천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내렸다. 【수원의 굶주린 백성은 1천 1백 40명이고, 금천의 굶주린 백성은 1백 46명이고, 과천의 굶주린 백성은 3백 60명이고, 광주의 굶주린 백성은 1백 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4면
【분류】왕실(王室) / 구휼(救恤)


 

 

 

비변사가 아뢰기를,
"수원의 지역이 광활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영읍(營邑)을 설치한 뒤로 모든 조치가 전과 크게 달라졌으니, 근방의 소속된 고을들을 합병시켜 보충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안산군(安山郡)을 합병하여 수원에 이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명하여 호남에서 상번(上番)할 금위군을 금년에는 번을 정지시키고, 대동 면포는 금년 10월까지로 기한을 물려 납부하도록 하되, 흥양(興陽)과 진도(珍島) 두 고을의 대동미 절반에 대해서는 가을까지 한정하여 정퇴(停退)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해당 도에 흉년이 들어 전 도백 정민시의 말을 따른 것이다.


 

 

 

1월 14일 무신

거가가 수원 행궁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과천에서 주정하고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언(上言)한 문건 39가지를 판하하였다.
1월 15일 기유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각사와 각영이 임자년의 회계 장부를 올렸다. 황금이 3백 냥 남짓이고, 은이 41만 9천 2백 65냥 남짓이고, 돈이 1백만 5천 1백 62냥 남짓이고, 명주[綿紬]가 90동 4필 남짓이고, 무명베가 2천 9백 96동 40필 남짓이고, 모시베[苧布]가 45동 48필 남짓이고, 삼베가 1천 4백 79동 28필 남짓이고, 쌀[大米]이 29만 6천 77석 남짓이고, 좁쌀[小米]이 1만 9백 42석 남짓이고, 콩[黃豆]이 3만 3천 6백 29석 남짓이고, 피잡곡(皮雜穀)이 9천 78석 남짓이었다.

 

1월 16일 경술

서운관(書雲觀)이 아뢰기를,
"이날 새벽에 월식이 있기는 하나 시작하는 시간이 해가 뜨는 시간과 1각 남짓에 불과하므로 정전(正殿) 앞 섬돌과 본 관상감의 첨성대(瞻星臺)에서는 모두 볼 수가 없으니 이는 달이 진 뒤에 하는 월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식(救食)의 의식을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승지와 서운관 제조에게 명하여, 함께 첨성대에 나아가 관망해가지고 만일 넘어가기 전에 1, 2분이나마 볼 수만 있다면 바로 첨성대에서 구식의 의식을 행하도록 하였다.

 

 

 

명하여 경기 좌방영(京畿左防營)을 남양(南陽)의 독성(禿城)으로 옮겨 설치하고, 중군이 겸하던 토포사(討捕使)도 새로 설치한 곳의 방어사가 예겸하도록 하였다. 수원을 승격시켜 유수부로 삼은 뒤에 상이 방어사와 토포사를 어느 고을로 옮겨야겠는가를 묘당에 물은 결과 묘당이 남양에 옮겨 설치하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른 것이다.
1월 22일 병진

정민시(鄭民始)를 장용영 제조로,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임시철(林蓍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희증(任希曾)을 공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영남·호남·호서의 도신들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효를 치계하자 회유하기를,
"굶주림을 구휼하는 일이 한창인 때에 전염병의 기세까지 이러하니,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먹고 자는 것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구휼의 근만(勤慢)도 감시하여 당연히 살펴야겠지만 구료(救療)하는 일은 더욱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결같이 작년의 칙유(勅諭)대로 거행해서 수재(守宰)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각별히 살펴 단속하라."
하였다.
1월 24일 무오

명하여 양호(兩湖)의 세곡(稅穀)을 두 번으로 나누어 조운(漕運)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가 치계하여 아뢰기를,
"경강(京江)의 선박이 본래 부족하여 양호의 세곡을 한 번에 실어 운반하기가 어려운 형세입니다. 호남의 아랫녘 지방 여러 고을들의 세곡을 먼저 실어 운반하고 나머지 윗녘 고을과 호서의 세곡을 다음으로 실어 운반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했었다. 그런데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호서의 여러 고을들 중에는 간혹 받아둘 창고가 없어서 세곡들을 땅바닥에 노적해 두는데, 만일 다시 운반할 때까지를 기다리자면 위는 비에 젖고 아래는 습기가 차서 금방 썩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으로 나누어 운송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하자, 상이 우선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민시를 불러 보고 다시 그 편리 여부를 물으니, 민시의 대답이 앞서의 말과 같으므로, 상이 마침내 명하여 그 사목(事目)을 반하(頒下)하도록 하였다.


 

 

 

명하여 개성부 유수 이가환(李家煥)을 입시하게 하였다. 가환이 사람들의 논핵을 입은 것 때문에 여러 차례 소명을 어겨오다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지금 세상과 본시 원망이나 미움을 살 일이 없건만, 전후로 신을 논핵하는 자들이 한사코 신을 미워하여 마지않는 것은 대체로 신의 종조부 일로 인해서입니다. 신의 종조부 신(臣) 이잠(李潛)이 당시에 보호에 관한 상소를 올린 것은 피를 뿌리고 충심을 토로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 몸을 던져 뜻을 이루고자 한 것으로 열성조에서 이를 변석하신 하교가 국사에 밝게 실려 있어 사람들의 눈에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또 신이 삼가 《어정황극편(御定皇極編)》을 보니, 이 사실을 낱낱이 서술하고 남김없이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천하 후세에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되었는데, 어느 겨를에 저들 무리와 시끄럽게 이러쿵 저러쿵 계교를 하겠습니까. 신은 오직 몸을 잘 간수하여 깨끗이 물러나서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고자 할 뿐입니다. 엄한 벌을 내리시어 속히 견책을 가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1월 25일 기미

우의정 김이소가 상차하여 말하기를,
"신이 삼가 이가환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들어보니, 감히 흉악한 이잠의 일을 장황하게 늘어 말하여 그의 더없이 패악스럽고 무엄하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불측하기가 한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 보(溥)와 잠의 상소는 더없이 흉험하고 극악하며 지극히 요망하고 끔찍하여, 의리를 원수처럼 보았고 국시(國是)와 승부를 겨루었으니, 이는 실상 기사년017)  의 여러 역적들의 뒤를 따른 것이자 신임 사화(辛壬士禍) 때의 뭇 흉험한 역적의 선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숙종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급히 토죄하셔서 대의를 밝히고 난의 싹을 잘라버렸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을 일인 것입니다.
대체로 잠의 흉험한 상소문이 처음에는 민암(閔黯)·장희재(張希載)와 흉역의 심술을 똑같이 부린 것으로서 마침내는 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역적의 장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신임 연간에 추악하고 흉험한 무리들이 걸핏하면 선견지명이었느니 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었느니 하면서 그 흉험한 잠을 추켜 세우며 그에게 포장할 것을 청하기까지 한 데에서 이미 맥락이 은밀히 통하고 일의 기맥이 서로 이어졌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에 가서는 역적 김일경에 대한 교문(敎文) 속에서 바로 잠의 성명을 거론하여 곡돌 사신(曲突徙薪)을 말한 무릉(茂陵)018)  이라고까지 하였으니, 가슴이 섬짓하고 뼈가 아픔을 더욱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숙묘(肅廟)의 성교(聖敎)에서는 ‘잠은 보보다 백배나 더하다. 이를 만일 심상하게 처리한다면 반드시 훗날 무궁한 염려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친국을 하게 된 동기였는데 끝내 자복하지 않고 죽어버렸다. 세도가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국가의 깊은 염려가 된다.’고 하였고, 또 보의 죄는 당연히 사형에 처하여야 하는데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잠의 상소가 또 나왔으니, 잠의 헤아릴 수 없는 음흉함은 결코 한 사람의 소위가 아니라고 여기시고서, 인하여 다시 역적 보를 국문하라고 명해서 전형(典刑)을 통쾌히 시행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문충공(文忠公) 이이명(李頤命)을 상직(相職)에 발탁하면서 어필로 직접 써서 전교하기를 ‘흉험한 자들이 경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하였으나 내가 그들의 속임수를 잘 알고 경을 재상의 자리에 발탁하노라.’ 하였습니다. 무릇 이러한 성교들이 태양과 별처럼 환히 빛나고 있어, 오늘날에 상하가 준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는 역적의 집안 사람으로 조그만 문묵(文墨)의 기예를 지녔다 하여 과람하게 죄를 씻어줌을 입고 벼슬이 재신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의당 흠을 용인하여준 성은을 우러러 알아차리고서 몸을 움추리고 두려워 떨면서 한쪽으로는 은혜의 보답을 도모하고 한쪽으로는 허물을 덮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힘을 다해 공론과 싸우면서 방자하게 공공연히 시비를 다투어 일의 본 모습을 변화시키고 충직과 사특함을 혼동시켰습니다. 근래에 예법이 비록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어찌 이처럼 경악스러운 일이야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려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가환의 상소는 무단히 원통함을 하소연한 일과는 다르다. 바로 지난번에 특지로 벼슬이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밀어닥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장을 올려 변명한 것이니, 오히려 딱하고 안타깝다고 말할 일인데 어찌 꼭 경의 말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왕조 임술년019)   9월의 하교와 다음 해 여름의 하교가 기거주(起居注)의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거니와, 잠의 조카 이맹휴(李孟休)의 일에 관해서도 성교가 오히려 아래와 같이 정중하고 간곡하였다. 그 성교에 ‘내가 죄를 씻어주고자 하면 그를 등용할 수 있다. 전일의 성상020)  께서는 기미를 막고자 하는 뜻에서 처분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그 뒤에는 진달(陳達)하여 증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그를 표창하려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고 그를 헐뜯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다. 만일 그의 조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시었다. 내가 승선을 시켜 이 성교를 찾아내게 해서 본 뒤에야 비로소 가환을 등용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여긴다."
하였다.


 

 

 

처음 이가환이 부름을 어겼을 적에 상이 그가 상소문을 작성하여 곧 올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그 상소가 승정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합문 밖에서 바로 올리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승지 이서구(李書九)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장주(章奏)의 출납에 대한 책임은 승지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급한 때일지라도 승지들에게 두루 보이고서야 비로소 입계가 허락되는 것이 본디 바꿀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어제 재촉하는 전교가 거듭 내림으로 인하여 그의 상소를 바로 합문 밖에서 올리게 됨으로써 승정원에 있던 여러 승지들은 전혀 알지 못해서, 이같이 해괴한 상소문이 아무런 까닭 없이 올려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승정원의 고사(故事)가 신들로부터 무너지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엄한 벌을 속히 내려주소서."
하니, 상이 그 상소문을 물리쳐버렸다.
장용영이 내영과 외영의 새로 정한 절목을 올렸다.
【내영의 절목은 다음과 같다. " 1. 본영의 설치는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호칭들도 정해지지 못하였다. 지금 내·외영을 함께 두고 규모를 크게 마련하는 때를 당해서는 당연히 호칭을 바로잡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병방(兵房)에 대한 일은 당연히 다른 영문의 규례에 따라 대장이라 호칭해야 할 것이나 본영의 사체가 지극히 엄중하니, 의당 어영사(御營使)의 옛 제도를 본떠 병방을 장용 내사(壯勇內使)라 하고 크고 작은 문서들에서의 호칭도 역시 어영사를 어영 대장이라 호칭하는 규례를 본떠 대장이라 호칭한다. 이미 내·외영을 두었으니 내사(內使)는 그대로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임하되 비국 당상이 역시 예겸하도록 한다. 1.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은 시임 호조나 선혜청의 당상을 이조가 의망해서 낙점을 받는 것으로 하되, 만일 세 사람을 의망에 갖추지 못할 경우에는 이전에 지낸 사람을 계청하여 통의(通擬)하도록 한다. 1. 본영의 대장은 일찍이 장신(將臣)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제수한다. 1. 각영의 장신들이 혹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 혹은 밀부(密符)를 차기도 하나, 군중에서의 호부(虎符)는 곧 국초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영의 일은 전보다 더욱 자별한 만큼 부신(符信) 등의 절차도 의당 옛날 제도를 써야 할 것이니, 본영사(本營使)가 차는 것은 호부를 쓰도록 한다. 1. 군향색(軍餉色)의 낭청(郞廳)은 다른 군문(軍門)의 예에 따라 종사관(從事官)이라 호칭하고, 음관으로 일찍이 군수를 역임한 문벌과 이력이 있는 사람을 본영에서 품지하여 삼망을 갖추어 제수한다. 그리고 직인(職印) 하나를 장용영종사관인(壯勇營從事官印)이라고 새겨서 사용한다. 1. 각영에 중군(中軍)을 둔 것은 조련할 때에 호령을 승접하는 직무를 행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므로, 그것을 두고 안 두는 것이 그리 긴중할 것이 없다. 또 광묘조(光廟朝) 때에 후원(後苑)에서 습진과 조련을 할 적에도 윤사로(尹師路)와 양성지(梁誠之)가 좌상(左廂)·우상(右廂)의 대장이 되어 이를 거행하면서 중군을 설치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용대장(龍大將)·호대장(虎大將)을 창설할 때에도 그들이 열무정(閱武亭) 조련에 참여한 때문에 역시 중군은 두지 않고 대장이 직접 호령을 받아 거행하였다. 그리고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였을 때에도 대장 아래 별장만을 두어 금위영에 합속시키고 금군의 좌·우 별장으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깃발을 흔들고 북소리를 울리며 호령을 주고받게 했었다. 본영의 군제(軍制)가 대부분 국초의 제도에서 본뜬 것이고 보면 중군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으니 본영에는 중군을 두지 않는다. 1. 별장(別將) 1원은 일찍이 포도 대장이나 훈련 도감의 중군이나 금군의 별장을 지낸 사람 중에서 차출한다. 1. 군제는 각기 근거한 바가 있으니, 3부(部) 6사(司)의 제도가 있고 5영(營) 3사(司)의 제도가 있다. 3부는 바로 북방의 군제이고 5사는 곧 남방의 군제이다. 부(部)에는 천총(千摠)이 있고 영(營)에는 영장(營將)이 있는데, 본영은 5사를 두어 척씨(戚氏)의 남방 군제를 본떴으니 천총은 두지 않는다. 1. 기왕 천총을 두지 않은 바에는 본영의 파총(把摠)이 바로 다른 군문의 천총이니 이력(履歷)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에 준해야 할 것이다. 파총은 가선 대부인 병사(兵使) 이하로 일찍이 방어사를 지낸 사람에 이르기까지 융통해서 차출하되, 일찍이 변경을 다스린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특별 전교에 의해 제수된 자는 이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방어사의 이력을 가지고 바로 곤임(閫任)에 의망하는 규례를 적용한다. 1. 선기장(善騎將)은 일찍이 변경이나 중앙과 지방의 장수를 지낸 사람으로 차출한다. 1. 초관(哨官)은 당하 정3품 이하 관원의 천거가 있는 출신인(出身人)으로 차출한다. 1. 본영에 방위하는 친위병으로 이미 마군(馬軍)·보군(步軍)을 두었으나 보군은 단지 3초 뿐이라서 1사(司)의 제도에 차지 않으니, 2초를 더 두어 1사 5초의 제도에 맞게 한다. 그리고 어가가 지나게 되는 지방 고을에서나 섣달 공물 마련을 위해 사냥을 하는 곳에서는 향군(鄕軍) 20초를 나누어 배치해서 4사를 만들어 5사의 제도를 갖춘다. 1. 난후 창검군(攔後槍劍軍)은 이미 본영에서 대령하게 되어 있으되, 혹 60명이나 혹 30명을 임시해서 품지를 받아 거행토록 한다. 그리고 임시해서 금위영의 아병(牙兵) 중에서 70명 정도와 어영청의 겸내취(兼內吹) 30명까지 도합 1백 명을 본영에 이속시키고, 요포(料布)와 수요 물자들도 인원수에 따라 떼내어 이속시킨다. 1. 가초 군병(加抄軍兵)의 수용에 드는 비용은 불가불 구분지어 조처해야 할 것이니, 부족한 수효로 돈 8천 냥, 무명 80동(同), 쌀 4천 석을 좋을 대로 힘써 마련하여 그들 비용의 뒷받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처의 향군을 각기 그 지방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처음 정한 규정에 따라 거행한다. 1.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한 데에는 그 의의가 가볍지 않다. 일찍이 선왕의 능을 모셨던 곳이니, 각영의 참군(參軍)에게 맡겨 소홀하게 하는 폐단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게 진둔(鎭屯)을 설치하여 그곳을 금지하고 보호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한 것이니, 해당 진의 별장은 본영이 스스로 임명하되, 전직의 직함이나 또는 이미 출신한 자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부천(副薦)과 말천(末薦)으로 추천된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 임명한다. 1. 노량진은 매년 현륭원에 행행할 때에 거가가 들러서 주필하는 곳이고 보면 사체가 다른 곳과는 자별하다. 그러니 해당 진의 별장은 본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바꾸고, 별아병(別牙兵) 1초는 부근의 백성들 중에서 뽑아 통솔하되, 배봉진의 아병 2초와 합해서 3초의 제도로 만든다. 그리고 배봉 별장의 깃발은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이라 호칭하고, 노량 별장의 깃발은 별아병장(別牙兵將)이라 호칭한다." 외영의 절목은 다음과 같다. " 1. 수원부에 현륭원을 모신 뒤로 보호하는 절차를 한껏 다하고 있으나, 3품 고을 원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체모를 높이는 뜻이 아니다. 또 군사 일로 본다면 본영의 내영·외영이 함께 설치되었고, 직무로 본다면 행궁의 정리 책임이 주어져 있으니, 이점이 전하의 마음속에서 영단을 내려 특별히 유수로 승격시킨 연유라 할 것이다. 관을 임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미 결정한 데에 따라   양도(兩都)021) 에 비겨 한 등급을 높여서 문신인 경우는 정2품 이상으로 한정하여 묘당이 의망해 추천하고, 대신 무장(大臣武將)의 경우는 특지에 의한다. 그리하여 수원부 유수로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의 호칭을 겸한다. 1. 외영의 군제를 금방 바로잡았는 바, 조련에 참가하는 군사는 별효사(別驍士) 2초, 마병(馬兵) 4초, 속오군(束伍軍) 26초, 각종의 표하군 5백 47명, 치중군(輜重軍) 2백 명인데, 이것은 이미 훈련 도감의 군제를 본뜬 것이니, 더 이상 가감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둔다. 그리고 근래에 조련이 오랫동안 중지되어 군정(軍政)이 허술해졌다. 그러니 지금 크게 경장(更張)하는 때를 당하여 병든 마필(馬匹)과 지쳐 있는 군사들을 특별히 찾아내어 기어코 진작시켜서 일신되도록 해야 한다. 조련은 본부가 전적으로 관장하여 거행하되, 가을이 된 뒤에 다른 군문의 예에 따라서 품지하여 조련을 행한다. 그리고 비용의 쌀로 양인(良人)의 봉족(奉足)이 낸 2천 석은 그대로 외영에 소속시켜 받아 유치한다. 1. 본부는 삼남의 요충으로 현륭원을 이미 이곳에 모셨고 또 행궁을 두었으니, 그 체모를 높이고 요새지를 중히 하는 도리가 전보다 자별하여야 할 것이다. 성을 축조해야 한다는 의논은 예전부터 있어 왔는데, 더구나 유수부로 승격된 뒤이고 보면 더욱 당연히 바로 시설해야 할 것이다. 성을 축조할 물력(物力)을 먼저 구획하여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니, 본부와 안산창(安山倉)에 소재한 환곡과 군량 등 각종 곡물들을 모두 축성곡(築城穀)으로 명목을 지어서 매년 그 모조(耗條)를 거두어 들여 차차로 경영해나갈 뒷받침으로 삼을 것이다. 1. 본부에 아직은 성을 축조하지는 못하나 앞으로 경영하는 것이 이미 순서가 정해진 일이고 보면 성정군(城丁軍)을 불가불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전에 총융청의 소관으로 집에 머무는 군관 1백 50인, 본부의 소관인 방어사영의 번을 면제받은 군관 2백 90인, 토포사의 소속으로 번을 면제받은 군관 4백 59인을 수첩 군관(守堞軍官)으로 호칭을 바꾸고, 본부의 군수 별무사(軍需別武士) 2천 2명에서 마사(馬士) 2백 4명을 감하고 유방군(留防軍) 7백 2명을 성정군이라 명칭하여 성을 수비하는 제도를 이루도록 한다. 1. 독성 산성(禿城山城)은 이미 요새로서의 중요한 지역이자 또 군량을 쌓아둔 곳이니, 방어하는 도리를 소홀하게 할 수 없다. 전에 총융청의 소관이었던 장초(壯抄) 2초, 아병 1초, 둔장초(屯壯抄) 68명, 군수보(軍需保) 1백 25명을, 본성의 소관 아래 모집해 들인 군관 30인, 수첩군관 1백 30인, 아병 2초, 봉족군(奉足軍) 4백 명, 별무사 1천 5백 23명과 합해서 성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본성에 전속시키고, 그 중 장초 2초, 아병 1초, 둔장초 68명, 군수보 1백 25명은 본래 쌀을 납부하는 군인들이었으니, 그 납부한 쌀은 외영에서 받아 유치한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75면
【분류】군사(軍事)


[註 021]【내영의 절목은 다음과 같다. " 1. 본영의 설치는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건만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호칭들도 정해지지 못하였다. 지금 내·외영을 함께 두고 규모를 크게 마련하는 때를 당해서는 당연히 호칭을 바로잡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병방(兵房)에 대한 일은 당연히 다른 영문의 규례에 따라 대장이라 호칭해야 할 것이나 본영의 사체가 지극히 엄중하니, 의당 어영사(御營使)의 옛 제도를 본떠 병방을 장용 내사(壯勇內使)라 하고 크고 작은 문서들에서의 호칭도 역시 어영사를 어영 대장이라 호칭하는 규례를 본떠 대장이라 호칭한다. 이미 내·외영을 두었으니 내사(內使)는 그대로 군색 제조(軍色提調)를 겸임하되 비국 당상이 역시 예겸하도록 한다. 1. 향색 제조(餉色提調) 1원은 시임 호조나 선혜청의 당상을 이조가 의망해서 낙점을 받는 것으로 하되, 만일 세 사람을 의망에 갖추지 못할 경우에는 이전에 지낸 사람을 계청하여 통의(通擬)하도록 한다. 1. 본영의 대장은 일찍이 장신(將臣)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제수한다. 1. 각영의 장신들이 혹은 명소패(命召牌)를 차고 혹은 밀부(密符)를 차기도 하나, 군중에서의 호부(虎符)는 곧 국초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영의 일은 전보다 더욱 자별한 만큼 부신(符信) 등의 절차도 의당 옛날 제도를 써야 할 것이니, 본영사(本營使)가 차는 것은 호부를 쓰도록 한다. 1. 군향색(軍餉色)의 낭청(郞廳)은 다른 군문(軍門)의 예에 따라 종사관(從事官)이라 호칭하고, 음관으로 일찍이 군수를 역임한 문벌과 이력이 있는 사람을 본영에서 품지하여 삼망을 갖추어 제수한다. 그리고 직인(職印) 하나를 장용영종사관인(壯勇營從事官印)이라고 새겨서 사용한다. 1. 각영에 중군(中軍)을 둔 것은 조련할 때에 호령을 승접하는 직무를 행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므로, 그것을 두고 안 두는 것이 그리 긴중할 것이 없다. 또 광묘조(光廟朝) 때에 후원(後苑)에서 습진과 조련을 할 적에도 윤사로(尹師路)와 양성지(梁誠之)가 좌상(左廂)·우상(右廂)의 대장이 되어 이를 거행하면서 중군을 설치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용대장(龍大將)·호대장(虎大將)을 창설할 때에도 그들이 열무정(閱武亭) 조련에 참여한 때문에 역시 중군은 두지 않고 대장이 직접 호령을 받아 거행하였다. 그리고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였을 때에도 대장 아래 별장만을 두어 금위영에 합속시키고 금군의 좌·우 별장으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깃발을 흔들고 북소리를 울리며 호령을 주고받게 했었다. 본영의 군제(軍制)가 대부분 국초의 제도에서 본뜬 것이고 보면 중군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으니 본영에는 중군을 두지 않는다. 1. 별장(別將) 1원은 일찍이 포도 대장이나 훈련 도감의 중군이나 금군의 별장을 지낸 사람 중에서 차출한다. 1. 군제는 각기 근거한 바가 있으니, 3부(部) 6사(司)의 제도가 있고 5영(營) 3사(司)의 제도가 있다. 3부는 바로 북방의 군제이고 5사는 곧 남방의 군제이다. 부(部)에는 천총(千摠)이 있고 영(營)에는 영장(營將)이 있는데, 본영은 5사를 두어 척씨(戚氏)의 남방 군제를 본떴으니 천총은 두지 않는다. 1. 기왕 천총을 두지 않은 바에는 본영의 파총(把摠)이 바로 다른 군문의 천총이니 이력(履歷)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에 준해야 할 것이다. 파총은 가선 대부인 병사(兵使) 이하로 일찍이 방어사를 지낸 사람에 이르기까지 융통해서 차출하되, 일찍이 변경을 다스린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특별 전교에 의해 제수된 자는 이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방어사의 이력을 가지고 바로 곤임(閫任)에 의망하는 규례를 적용한다. 1. 선기장(善騎將)은 일찍이 변경이나 중앙과 지방의 장수를 지낸 사람으로 차출한다. 1. 초관(哨官)은 당하 정3품 이하 관원의 천거가 있는 출신인(出身人)으로 차출한다. 1. 본영에 방위하는 친위병으로 이미 마군(馬軍)·보군(步軍)을 두었으나 보군은 단지 3초 뿐이라서 1사(司)의 제도에 차지 않으니, 2초를 더 두어 1사 5초의 제도에 맞게 한다. 그리고 어가가 지나게 되는 지방 고을에서나 섣달 공물 마련을 위해 사냥을 하는 곳에서는 향군(鄕軍) 20초를 나누어 배치해서 4사를 만들어 5사의 제도를 갖춘다. 1. 난후 창검군(攔後槍劍軍)은 이미 본영에서 대령하게 되어 있으되, 혹 60명이나 혹 30명을 임시해서 품지를 받아 거행토록 한다. 그리고 임시해서 금위영의 아병(牙兵) 중에서 70명 정도와 어영청의 겸내취(兼內吹) 30명까지 도합 1백 명을 본영에 이속시키고, 요포(料布)와 수요 물자들도 인원수에 따라 떼내어 이속시킨다. 1. 가초 군병(加抄軍兵)의 수용에 드는 비용은 불가불 구분지어 조처해야 할 것이니, 부족한 수효로 돈 8천 냥, 무명 80동(同), 쌀 4천 석을 좋을 대로 힘써 마련하여 그들 비용의 뒷받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처의 향군을 각기 그 지방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처음 정한 규정에 따라 거행한다. 1.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한 데에는 그 의의가 가볍지 않다. 일찍이 선왕의 능을 모셨던 곳이니, 각영의 참군(參軍)에게 맡겨 소홀하게 하는 폐단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게 진둔(鎭屯)을 설치하여 그곳을 금지하고 보호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한 것이니, 해당 진의 별장은 본영이 스스로 임명하되, 전직의 직함이나 또는 이미 출신한 자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부천(副薦)과 말천(末薦)으로 추천된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 임명한다. 1. 노량진은 매년 현륭원에 행행할 때에 거가가 들러서 주필하는 곳이고 보면 사체가 다른 곳과는 자별하다. 그러니 해당 진의 별장은 본영이 스스로 임명하는 자리로 바꾸고, 별아병(別牙兵) 1초는 부근의 백성들 중에서 뽑아 통솔하되, 배봉진의 아병 2초와 합해서 3초의 제도로 만든다. 그리고 배봉 별장의 깃발은 별후사 파총(別後司把摠)이라 호칭하고, 노량 별장의 깃발은 별아병장(別牙兵將)이라 호칭한다." 외영의 절목은 다음과 같다. " 1. 수원부에 현륭원을 모신 뒤로 보호하는 절차를 한껏 다하고 있으나, 3품 고을 원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체모를 높이는 뜻이 아니다. 또 군사 일로 본다면 본영의 내영·외영이 함께 설치되었고, 직무로 본다면 행궁의 정리 책임이 주어져 있으니, 이점이 전하의 마음속에서 영단을 내려 특별히 유수로 승격시킨 연유라 할 것이다. 관을 임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미 결정한 데에 따라   양도(兩都) :  개성부와 강화도.


 

 

 

1월 26일 경신

전교하였다.
"본부의 모든 일은 다 공사간에 서로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어찌 일호라도 구차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 의견들이 안산(安山)을 합속시키는 것을 타당하게 여기나, 나는 그것이 십분 편리하고 좋을지를 모르겠다. 절목을 아직 반시(頒示)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매달 20포(包)의 쌀을 가져다 쓰고 해마다 1백 냥의 금을 받아들이는 것이 꼭 큰 이익이 되지는 못할 것이요, 다른 고을 경계를 20리나 넘어 차지하는 것도 꼭 편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곳을 이곳에 합할 즈음에는 현아(縣衙)의 아전 붙이가 자기 고장을 그리는 연모와 촌 백성들이 멀리 가야 하는 폐단이 있을 터이니, 그것이 편리하지 못함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안산을 합속시키는 일은 그만두라."
1월 27일 신유

우의정 김이소가 다시 차자를 올려 이가환에게 엄한 처분을 내리고 중한 형벌을 시행하도록 청하자, 사관을 보내 봉한 채 되돌려 보냈다.


 

 

 

대사성 심환지가 상소하여 이가환의 상소문의 말이 흉패함을 논박하고 변경으로 내칠 것을 청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그가 열거한 말은 진실로 의리를 밝히고 세도를 안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다만 그가 일의 시비를 말할 직책에 있지도 않으면서 바로 형률을 적용하여 말한 것은 격례에 어긋납니다. 원소(原疏)는 퇴각시켰으나 격례에 어긋난 실수에 대해서는 불가불 경고가 있어야 할 터이니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9일 계해

약원(藥院)의 여러 신료들을 불러서 보았다.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의 키가 점점 자라고 슬기도 숙성하니, 책봉하는 예를 지연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숙묘조(肅廟朝)의 옛일이 실로 우러러 계승해야 할 단서이며 또 이미 황제에게도 주청하였거니와, 나의 뜻은 조금 더 장성하기를 기다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우리 숙종 대왕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을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거니와, 특히 역(逆)과 순(順), 사(邪)와 정(正)의 구분을 가장 엄격히 다스리어 후손에게 끼쳐줄 좋은 계책으로 삼으신 그 일이야말로 비유하자면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도깨비 같은 요괴도 자취를 숨길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흉험한 이잠(李潛)의 상소가 들어오던 날에 그의 불측한 말들이 오로지 두 분 성상의 인자하신 어버이와 효성스런 자식과의 사이를 이간시키고 한 시대의 충현(忠賢)들을 도륙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임을 통촉하시고 바로 법에 따라 처벌하시었으니, 이 일은 더욱 광명하고 뛰어난 처사였습니다. 급기야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의 변이 터지자, 온 나라 신민들이 ‘아, 옛 임금을 잊을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에서 더욱 대성인(大聖人)022)  의 깊은 걱정과 원대한 염려가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음을 우러렀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연교(筵敎) 가운데 ‘은미했을 때 막고 조짐을 막아야 한다[防微杜漸]’는 네 글자가 대체로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가환이 아무리 흉악한 창자를 물려받았다 할지라도 또한 선왕조의 한 신하인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서 어떻게 감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등의 말을 글로 써서 전하의 앞에 올린단 말입니까. 세도를 생각하면 곧장 통곡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아, 조덕린(趙德隣)에 대한 처분이 성상의 생각에서 한 가지 실수가 된 것에 관해서는, 5, 6년 이래로 신이 이미 남김없이 통렬하게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작은 정성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철회의 명이 아직까지 안 내림으로써 흉도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신이 무신년에 올린 차자에서 ‘파리한 돼지가 아니다.’고 했던 그 돼지가 지금에 와서는 제자리서 팔짝 팔짝 뛰는 것을 넘어서 사람에게 덤벼드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늙어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 성명(聖明)의 세상에서 또 이러한 일대 변괴를 보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려서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화란의 싹을 막으소서."
하였는데, 사관을 보내어 그 상소문을 봉한 채로 되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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