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7권, 정조 17년 1793년 2월

싸라리리 2025. 8. 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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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갑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희생과 제기들을 살피고서 친히 춘향(春享) 예행 연습을 하였다.

 

2월 2일 을축

황해도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해서는 지방 풍속이 사나우니 모름지기 강(剛)으로 다스리는 방도를 힘써서 한 지방을 맡겨준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2월 3일 병인

심풍지(沈豊之)를 한성부 판윤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4일 정묘

전교하기를,
"지금 구휼하는 일이 한창인 때를 당하여 이에 대한 계책을 내는 곳에서 백성의 우환에 대하여 아뢰는 말들을 듣지 못하겠으니, 자못 답답하구나. 구휼하는 일에 부지런한지의 여부와 환곡 먹은 백성들의 인심에 대하여 암행 어사를 보내서 제비를 뽑아 살피게 함으로써 도백과 고을 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 또한 지금의 급선무이다. 구휼책을 펴고 있는 여러 도에 보낼 암행 어사를 뽑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이조원(李肇源)·정동간(鄭東榦)·이상황(李相璜)·유한우(兪漢㝢)·이명연(李明淵)·이석하(李錫夏)·윤노동(尹魯東)을 뽑아 아뢰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75면
【분류】구휼(救恤) / 행정(行政)

 

2월 5일 무진

차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이가환의 상소는 천고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이잠(李潛)의 상소가 신임 사화(辛壬士禍) 이전에 나왔던 까닭에 비록 법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연유로 그의 조카 이맹휴(李孟休)가 급제한 뒤에도 감히 억울함을 하소연할 계책을 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가환은 제 종조부를 위해 하 많은 흉악한 말들을 거침없이 하였으니, 국가의 법도가 해이해졌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임 사화 이후에 충신과 역적이 이미 나뉘어지고 나니, 내가 의리를 천명하고 예법을 엄격히 세우는 일이 바로 일단의 고심거리가 되어서이다. 내가 어찌 한낱 가환을 아껴서이겠는가. 임술년023)  에 이맹휴가 급제했을 때 특명으로 한성 주부(漢城主簿)를 제수하는 성교에서 ‘잠은 비록 역적이었지만 내가 죄를 씻어주고 등용하고자 했는데, 더구나 역적이 아닌 사람이겠는가.’ 하시었고, 대신 김재로(金在魯)가 심수경(沈守慶)의 일을 인용하여 그의 죄를 씻어주자는 뜻을 말했을 적에는 또 ‘정(貞)024)  이 비록 역적이기는 하지만, 잠은 또 정과는 다르다.’고 하교하시었으며, 《천의소감(闡義昭鑑)》을 편찬할 때에 와서 영부사(領府事) 김재로가 남(南) 정승과 유(柳) 정승 및 보(溥)와 잠(潛)의 일로써 근원을 캐내는 논의로 삼자, 성교가 대단히 엄하였고 사흘 동안 수라를 물리었다. 선왕의 타고나신 효성과 마음에서 우러난 우애로써, 갑술년025)  은 성모(聖母)026)  에 속한 일이었고 신사년027)  은 황형(皇兄)028)  에 관한 일이었기에, 남 정승·유 정승과 보·잠을 막론하고 전후의 성교가 이런 곳에서 반드시 엄하였던 것은 진실로 그 말이 갑술년과 신사년의 일에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조정 신료가 어찌 감히 이 일을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약간 포폄을 붙여, 제방(隄防)으로 명분을 세운 때문에 심환지의 상소는 비록 금령에 어긋났으나 반포해 보였고, 비답을 내리고자 아니했던 때문에 이가환의 상소에 대해서는 으레 하는 비답으로 소략하게 하였던 것이니, 내가 천명하고자 하는 뜻을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뒤에 가환을 이어서 다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처분은 당연히 잠보다 배나 중하게 할 것이다. 내가 어찌 의리를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명하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 삼도 수군 통제사 이윤경(李潤慶), 경상우도 절도사 이건수(李建秀)에게 구휼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 그것은 우의정 김이소가 구휼하는 일은 이제 한창인데 임기가 모두 가까워졌으므로 더 유임시키기를 주청한 때문이었다.

 

여러 도에 신칙하여 물에 떠내려간 전답들을 수축하고 방죽들을 파게 하였는데, 이는 우의정 김이소의 말을 따른 것이다.

 

명하여 함열 현감(咸悅縣監)이 두 해 동안 조운선을 영솔한 데 대하여 아산(牙山)의 전례에 따라 승천(陞遷)시키도록 하였다. 앞서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가 장계로 청하기를,
"성당창(聖堂倉)의 조곡(漕穀)은 함열 현감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영솔해 운반하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그대로 허락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민시가 등대해서 아뢰기를,
"두 해 동안의 조운을 무사히 영솔해 납부하였으니, 해당 관원은 당연히 아산의 전례에 따라 승천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은 결과 대신의 의견도 같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재작년 세밑에 경학에 밝고 행의에 뛰어난 자를 천거해 올리라는 일로 은근하고 진지하게 특별히 하교하셨는데도 이미 한 해가 지나도록 아직껏 추천해 올리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에게 거듭 신칙하시어 성심으로 구해 찾아서 바로 천거해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앞서 병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이 아뢰기를,
"훈융진(訓戎鎭)은 저들의 경계와 가장 가까워서 육진의 요충이 되는 곳인데도 진의 형세가 잔폐하여 허술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첨사(僉使)를 반드시 적임자로 가려 임명하되, 성적의 고과에서 상등을 맞은 자에게는 방어사의 이력을 쳐주기로 한다면 관아의 위신도 높아지고 변경의 방어도 믿음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문벌과 이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되, 정(正)·부정(副正) 또는 중앙과 지방의 장수를 일찍이 지낸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의망에 갖추도록 허락하고, 임기가 찰 때까지 옮길 수 없게 하여 성적이 뚜렷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서 바로 방어사의 직임에 의망하도록 할 것이며, 해당 진의 피폐함을 구제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또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서로 도와 주도록 하여 기어코 실효가 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제도의 봄 조련을 중지하였다.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아뢰기를,
"영숙문(永肅門)에 입직하는 국출신(局出身)의 원래 숫자는 합해서 1백 50인인데, 이들을 세 번으로 나누어 번마다 45명씩으로 규정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예 출신(武藝出身)의 자리 30인에 대해서는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말도록 한 뒤로 지금까지 줄어든 인원이 16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과 같이 입직시키려해도 분배할 길이 없습니다. 금군에서 행하는 조번(助番)의 예에 따라 1국·2국·3국을 막론하고 서로 융통하여 이리저리 옮겨 번들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마다 36명으로 규정을 정하고 나머지 4명은 번을 쉬게 하라."
하였다.

 

수어사 정민시를 체직하고 이문원(李文源)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병조 판서로,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6일 기사

이조의 세 당상관을 체직하고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7일 경오

서유방(徐有防)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2월 8일 신미

차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흉년에 곡식을 허비한다는 이유로 주금(洒禁)을 거듭 엄히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백성들을 소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난색을 짓고, 다만 한성부에 명하여 성심으로 효유해서 각기 술 빚는 것을 절제하게 하도록 하였다.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의 자손으로 서자가 맏집을 이어가는 자에게는, 선정신 이이(李珥) 후손의 예에 따라 첫벼슬로 주어지는 침랑(寢郞) 자리나 송사(訟事)를 다루는 서울에 있는 관청을 모두 구애하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우의정 김이소의 말을 따른 것이다.

 

윤행임(尹行恁)을 특별히 비변사 부제조에 임명하였다.

 

이문원을 판의금부사로, 심환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9일 임신

인정전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의 제술 시험을 직접 보이고, 돌아와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에 대한 친시(親試)와, 문신들의 제술 시험과, 전경 문무 신 전강(專經文武臣殿講)과, 도기 유생과 관학(館學)의 재임(齋任)들에 대한 전강(殿講)과 석채(釋菜)에 참여한 유생들에 대한 응제시(應製試)를 거행하였다. 도기 유생의 제술시에 1등한 진사 최광태(崔光泰)와 강(講)에서 1등한 유학(幼學) 윤치영(尹致永) 등에게는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고, 2등을 한 강준흠(姜浚欽)에게는 정시(庭試)의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광태는 일찍이 응제에 우등을 하여 정시의 회시에 직부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또 도기에 응시하여 1등을 차지하였으므로, 상이 여러 시관들에게 묻자 제신들이 모두 다시 급제를 내려야 한다고 말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다시 광태가 이미 재차 합격을 함으로써 오늘 시험에는 합격자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여 특명으로 2등을 한 사람을 정시의 회시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윤대하였다.

 

김로영(金魯永)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2월 10일 계유

춘당대에 나가서 무신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2월 11일 갑술

이서구(李書九)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발탁하였다. 도기 유생에게 전강을 보일 때 서구가 집책 승지(執冊承旨)가 되었는데, 그의 망단자(望單子)가 바람에 날려 바로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것이 마치 명나라 위령 백(威靈伯) 왕월(王越)의 고사029)  와 같았다. 그리하여 상이 우연치 않는 일이라고 여겨 특별히 그를 가자하여 승진 발탁시키고 이어 ‘본조의 집책 승지 이서구가 왕월의 고사를 인용하여 대사헌에 발탁시킨 것을 사례한다.[本朝執冊承旨李書九謝引王越故事擢拜大司憲]’는 말로 전(箋)의 제목을 삼아 각신·승지·사관·옥당·초계 문신·병조의 당상과 낭청들에게 응제하게 하였다.

 

2월 13일 병자

차대하였다. 심환지를 비변사 제조로 삼았다.

 

초계 문신의 제술 시험과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을 직접 시험보여 강(講)에서 1등한 유학 이치호(李致祜)를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2월 14일 정축

제주 목사 이철운(李喆運)이 옮겨 오는 곡식을 실은 배들이 일제히 도착했다고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탐라의 민중들을 살리기 위해 만포(萬包)의 곡식을 운반한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특별히 재신과 수령을 보내 별도로 희생 등 제물을 갖추게 하고 축문을 지어 내려보내서 해신(海神)에게 잘 운송시켜줄 것을 빌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동안 남쪽으로 쏠리는 염려 때문에 한갓 꿈자리만 고달팠었는데, 이제 해당 목(牧)의 장계를 보니, 순풍에 돛을 달고 무사히 도착했다고 이를 만한지라, 그 신기하고 다행스러움을 말로 형용하기 어렵구나. 운반을 맡은 차사원(差使員) 흥덕 현감(興德縣監) 조화석(趙華錫)을 가자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무인

장용영 제조 정민시가 아뢰기를,
"배봉진은 물자가 넉넉하지 못하여 감관과 산지기 무리들을 접제할 계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복시 소관인 마장면(馬場面) 목리(目里)는 바로 전날 배봉산(拜峰山) 아래 살던 백성들을 이주시킨 곳으로 약간의 개간한 전답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을 배봉진에 이속시켜 저들을 접제하는 데에 보탬이 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본영의 가초 군병(加抄軍兵)들을 접제하는 데에 드는 비용도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관서와 영남의 곡식 흔한 고을의 환곡 모조(耗條)로 돈 8천 냥을 만들고, 평안 감영에 별도로 비치해둔 무명베 80동(同)을 매년 옮겨와 쓰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겸료조(兼料條)에서 매년 쓰고 남은 것이 많으면 천여 석이고 적어도 8, 9백 석은 되므로, 해마다 남은 것을 저축한 것이 현재 모두 5천 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매년의 겸료조에서 한 5백 석 정도를 본영에 떼내 보내서 가초 군병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18일 신사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치계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대년(申大年)의 첩정(牒呈)에 ‘영비(營裨)와 함께 황수덕령(黃水㯖嶺)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깎아지른 벼랑과 깊은 골짜기에 겹겹이 산이 둘려 있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좌우쪽 벼랑을 끼고 드문 드문 묵은 밭 흔적이 있어 부로(父老)들에게 물었더니, 지난 병술년030)  ·정해년 연간에 10여 리 안팎에 사는 백성들이 잠시 들어와서 개간을 해보았으나 땅도 메마르고 서리도 일찍 내려 바로 묵힌 자리이니, 지금 개간을 허락해 준다 하여도 결코 실효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황수덕령을 지나 그 북쪽은 바로 폐군(廢郡)의 경내인 데다가 또 여러 곳의 삼장(蔘場)을 침범하게 되어 있으니, 요새지와 삼장을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 개간을 허락하는 문제만은 논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토진(上土鎭)의 마전령(麻田嶺) 7리 지역은 과연 인삼을 캐는 지역에는 방해될 것이 없으나, 여러 백성들이 그곳이 협착한 것을 탐탁잖게 여겨 마전령 북쪽 50리쯤에 있는 자작령(自柞嶺)에 푯말을 물려 세워줄 것을 힘써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삼장에 방해되어 가벼이 허락할 수 없고, 단지 7리쯤에 푯말을 물려 세울 경우에는 또한 널리 개간하여 호수를 늘릴 가망도 없으니, 굳이 애써 허락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포진(滿浦鎭)의 옥동(玉洞)은 이미 수십 리 밖으로 푯말을 물려 세울 것을 공문으로 알렸고 별다른 요새지의 한계도 없으니, 삼강(三江)의 구비보(仇非堡)까지 20여 리 밖으로 푯말을 옮겨 개간을 허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땅을 비록 더 개간한다 하더라도 삼 캐는 것을 줄일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만일 변경의 금령을 엄하게 하여 우리 백성이 이익을 독차지하게 할 수만 있다면 버려둔 네 군(郡)의 땅들을 모두 회복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무한한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급선무는 변경을 채우는 데에 있으므로, 매양 땅을 개간한다는 말을 듣기 좋아하였고 삼을 캐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황수(黃水)와 마령(麻嶺)이 설사 해당 고을 원의 보고와 같더라도 어찌 대신할 만한 적합한 곳이 또 없겠는가. 이는 지금 당장 긴급한 일이 아니니, 모름지기 재임하는 동안에 다시 더욱 마음을 다해 찾아보고 또 수신(帥臣)들이나 고을 원들에게 세세히 물어서 만일 시행할 만한 계책이 있으면 후일에 방안을 마련하여 진달하라."
하였다.

 

2월 19일 임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이의필(李義弼)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0일 계미

차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지난날 해서 진영의 군량을 허위로 기록한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 특별 전교를 내려서 도내 여덟 진영과 다섯 산성의 허다한 환곡의 폐단을 도신에게 맡겨 하나 하나 바로잡아 고친 다음에 사유를 갖추어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 도신이었던 이경일(李敬一)이 군사는 정원 수에 빠짐이 없고 환곡도 폐단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조목조목 진술하여 보고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산산진(蒜山鎭)의 본래 곡식이 없어진 것과 예전부터 포흠된 것으로 현재 드러난 것이 자그마치 5백 50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도신이 애당초 조사해 보지도 않고 감히 환곡은 폐단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거리낌없이 위에 아뢴 것도 그 죄가 이미 가볍지 않거니와, 돌아올 무렵에 당해서 갑자기 해당 진영의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이미 받은 데에다 섞어 기록한 것은 더욱 매우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만으로는 가볍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감죄해서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해서의 백성들에게 사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남의 진휼 정사가 차츰 두서가 잡혀가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가엾은 것은 바로 양반 집안 부녀들 중에 진휼 문서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차마 얼굴을 내놓고 문 밖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과, 고아나 과부로 병에 시달려 자신의 힘으로 진휼 장소에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관가(官家)가 모른 체하고 이웃에서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끝내는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찾아가 진휼해 주도록 하고 이어 암행 어사의 사목(事目)에도 첨가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선혜청 제조 정민시가 아뢰기를,
"올해는 조세로 거둔 것이 크게 줄어들어 겨우 가장 낮은 총계[下摠]가 확보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절약할 수 있는 방도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진실로 그 방도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헌하는 것은 사체가 중하여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국(內局)에 납부하는 삼남에서 내는 약재(藥材) 값의 경우는 그 값이 이미 적지 않은데다 내국에 이르러서는 쓸데없는 비용으로 소비된 것이 많으니, 여기에서 절반 정도를 우선 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제신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내의원 제조 김문순(金文淳)이 내국의 약용(藥用)은 사체가 자별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므로,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위하는 일인데 어찌 약용을 고려하겠는가. 선왕조에서는 강계(江界) 한 고을에서 응당 납부해야 할 삼 값[蔘料]도 감면시킨 혜택이 있었다. 더구나 세 도의 백성에 관한 일이겠는가. 우선 절반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휼청에 저축된 쌀은 본시 많지 않고 균역청에도 저축해 둔 것이 없어 서로 뒤섞어 가져다 쓰고 있으니, 머지 않아 다 떨어질 염려가 있는데도 아직 변통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호남에는 정미년의 별비미(別備米) 1만 석이 있어 여기서 나온 모조(耗條)를 한성부에 떼어주고 있고, 또 기유년에 사들여 놓은 쌀 8천여 석과 별검미(別檢米) 9천여 석이 있는데, 별로 긴요히 쓸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별비미 1만 석과 기유년에 사들여 놓은 쌀과 별검미 둘 중에서 또 1만 석을 취하여 도합 2만 석을 진휼청에 떼어주어 이를 별회록미(別會錄米)라 이름하고, 매년 모조의 곡식을 가져다 바꾸어 기록해서 쌓아두고 이를 옮겨다 쓸 수 있도록 하여야겠습니다. 한성부가 쓰는 것은 이미 돈으로 만들어 가져온 것이니, 진휼청에서 돈으로 지불한다면 두 쪽이 편리한 일이라 이를 만합니다. 이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연전에 강삼(江蔘)031)  의 문제를 변통할 때에 미삼(尾蔘) 20근을 임시 왜역(倭譯)으로부터 넘겨 받으면서 돈중[錢] 당 1냥 1전씩을 얹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원가까지를 합하면 4냥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미삼이 예전에 비해 조금 넉넉한 편이니 원가로만 사서 쓰더라도 부족할 염려가 조금도 없습니다. 지금과 같이 재용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3천여 금(金)을 무단히 얹어 주는 것은 더욱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또 듣건대 사람들의 생각도 만일 미삼을 영원히 공물로 만들어 준다면 값을 얹어주지 않아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이미 공물로 만들어 줄 것을 원하고 있고 매년 천포(千包)의 쌀을 떼어 보관하는 일도 관계가 적지 않으니, 이대로 다시 규정을 정해서 공물로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어보고 그대로 따랐다.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윤사국(尹師國)을 공조 판서로,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신기(申耆)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21일 갑신

윤대하였다.

 

안동 선비 유홍춘(柳弘春)의 처 김씨(金氏)에게 정려(旌閭)를 내리고, 안동 부사 김이익(金履翼)을 철산부(鐵山府)로 유배하였다. 앞서 안동 선비 유정조(柳井祚)가 상언하기를,
"아버지 홍춘이 부사 김이익의 지나친 형장(刑杖)을 맞고 운명함으로 인하여 어머니 김씨는 원수를 갚지 못함을 이유로 음식을 끊고 자진하여 수십 일 사이에 부모가 모두 비명에 죽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목숨으로 보상하는 법전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므로, 상이 도백에게 명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장계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아뢰기를,
"작년 10월에 해당 부사가 양반집으로서 환곡 납부를 거부한 자들을 추문하여 다스릴 적에 유홍춘도 그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5말[斗]을 납부하지 않았다고 하여 곤장 15대를 치며 형신(刑訊)하였던 바, 11월에 홍춘이 그로 인한 병으로 죽자 그의 처 김씨도 남편이 죽은 뒤로는 곡기(穀氣)를 끊고 자진하였습니다. 홍춘의 죽음이 이미 형장을 받은 지 20일 이내에 있었고 김씨의 죽음은 또 남편이 죽은 보름 뒤에 있었으니, 환곡의 법이 매우 엄하여 비록 단속하는 방도를 귀히 여기고는 있지만, 형정(刑政) 또한 막중한 것인데 신중해야 하는 뜻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김이익은 왕명을 받든 관리로서 흉년에 환곡 받아들이는 일을 가지고 사사로운 인정을 쓰거나 노여움을 푸는 도구로 삼아 상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저지름으로써 억울하게 사람을 죽게 하였다. 죽은 자의 품은 한이야 우선 그만두고라도 그를 따라 목숨을 끊은 자의 그 원통함은 무엇으로 위로하겠는가. 안동 선비 유홍춘의 처 김씨에게 정려의 은전을 내리고, 해당 부사 김이익은 먼 곳으로 유배하여, 한편으로는 고아가 된 자의 속히 억울함을 씻지 못한 비통함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구천에 있는 열부(烈婦)의 답답함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영남 지방 사족(士族)들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을유

암행 어사의 장계에 의해 순수하게 표창된 수령이 만일 그 후 장오죄를 범했을 경우에 표창을 건의한 어사에게 삭직의 법을 시행한다는 것을 수의 사목(繡衣事目)에 실어 법령으로 정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명하여 장오죄를 범한 벼슬아치를 천거한 사람까지도 함께 죄를 연좌시키는 법을 거듭 밝히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행 사직(行司直)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수령 중에서 만일 어사의 순수한 표창에 들었다가 다시 뒷날 장오죄를 범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어사는 속인 죄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의당 정률(定律)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묘당에 명하여 일정한 규정을 정하도록 하였던바, 이 때에 이르러 비변사가, 수령을 잘못 천거한 형률보다 한 등급을 높여 삭직의 법을 시행할 것을 계청하자, 이를 윤허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어사의 장계에 잘못 표창을 말한 자를 논감(論勘)하기로 이미 이같이 새로 법률을 정한 이상 본시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려 있는, 수령을 잘못 천거한 천주(薦主)를 어떻게 그대로 두고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거듭 옛 법을 밝혀서 천주를 법률에 연좌시켜 파직하되, 해당 수령을 조율(照律)할 때에 일체로 감률(勘律)하도록 하라."
하였다.

 

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부사 서용보(徐龍輔)가 연경에서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이 지난해 12월 22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23일에 예부(禮部)의 통지 안에 ‘전지를 받자오니 「짐이 서화문(西華門)에 나가 외국의 사신들을 만나보고 영대(瀛臺)의 난실(蘭室)에서 아침을 먹고 일을 살핀 다음 잠깐 얼음타는 것을 보겠노라.」 하였다.’ 하고, 이어 서화문으로 나와 신들로 하여금 〈황제의 행차를〉 공경히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24일 오경(五更)에 신들이 서화문 밖에서 행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예부 상서 상청(常靑)·기균(紀昀)과 시랑 철보(鐵保)가 함께 와서 반열을 주관하였습니다. 안남(安南)·섬라(暹羅)·후장(後藏) 세 나라의 사신들도 반열에 참석하였는데 모두 신들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후장은 새로 귀순한 나라로서 모두 나마승(喇嘛僧)이었는데, 붉은 비단으로 머리부터 허리까지 휘감고 있어 모양이 매우 추악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황제가 누른 빛의 작은 가마를 타고 나오더니, 신들이 맞이하는 곳에 이르러서 가마를 멈추고는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묻기를 ‘국왕은 평안하시느냐?’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세자도 평안하느냐?’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평안합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신들에게 서원문(西苑門)으로 따라 들어오라 하였습니다. 영대에 이르자 전지를 내려 음식을 하사하는데, 예부의 관리가 신들을 인도해 근정문(勤政門) 안쪽에 앉혔고 내무부(內務府)의 관리가 밥상을 차려 주어 수행한 정관(正官)들까지도 일일이 밥을 먹였습니다. 황제가 아침을 든 다음에는 나와서 용(龍) 모양의 썰매에 앉아 빙희(氷戱)를 구경하였는데, 신들도 따라 가서 함께 구경하였습니다.
26일에는 황제가 어선방(御膳房)의 관리를 시켜 회회국(回回國)의 포도 한 상자를 보내 왔는데, 모양이 잘고 씨가 없었으며 맛은 매우 달았습니다.
29일에는 황제가 태묘(太廟)에 나가 친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들은 오문(午門) 앞에 나아가 맞이하고 배웅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어선방이 또 황제의 분부에 의해 석류(石榴)와 감귤(柑橘) 한 상자를 보냈는데, 남쪽에서 공물로 올린 것으로 갓 도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0일에는 황제가 보화전(保和殿)에서 제석연(除夕宴)을 열었는데, 신들도 보화전 동쪽 계단 윗쪽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황제가 전각 안의 어탑(御榻)에 나와 앉자 내무부가 음식상을 올리고 또 술잔을 올렸으며, 이어 여러 나라의 각종 유희가 벌어졌습니다. 전각 안의 여러 신료들에게는 개개인 앞에 식탁 하나씩이 놓여졌고, 전각 밖에는 두 사람 앞에 식탁 하나씩이 놓여졌습니다. 낙다(駱茶)가 한 순배 돌고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예부 상서 상청(常靑)이 신 종악(宗岳)을 인도해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에 있는 술을 하사하므로 신 종악이 머리를 조아리고 마신 다음 다시 제자리로 나와 앉으니, 황제가 또 어상(御床)에 놓인 떡 한 그릇을 집어서 신들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초하룻날에는 신들이 오문 밖 조방(朝房)에 들었는데, 날이 아직 밝기 전에 황제가 당자(堂子)032)  에 행행하였다가 바로 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명에는 신들이 태화전(太和殿)의 뜰에 들어가 설날의 하례에 참석하였는데, 안남·섬라·후장의 사신들도 참석하였습니다.
7일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서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지냈는데, 하루 전에 단 아래서 재계하며 밤을 새우고 이어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들은 초엿샛날 새벽에 오문 앞에서 황제의 행차를 맞았고 초여드렛날 새벽에도 오문 앞에서 맞이하였습니다.
8일에는 황제가 자광각(紫光閣)에서 세초연(歲初宴)을 열게 되어 신들은 그날 이른 새벽에 자광각의 계단 아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황제가 아직 나오기 전에 떡과 돼지고기 등의 음식물이 상으로 내려졌고 조금 뒤에 황제가 누른 빛의 작은 가마를 타고 나왔습니다. 신들은 공경히 맞이하고 이어 동쪽 계단 위로 올라갔는데, 음식을 차리고 놀이를 벌이는 것은 보화전의 잔치와 대략 같았습니다. 예부 상서 상청이 신 종악을 인도해 어탑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 위에 있는 술을 내리었고, 시랑 철보(鐵保)가 다음으로 신 용보(龍輔)를 인도해 어탑 앞에 이르자 황제가 역시 손수 상 위에 있는 술을 내리고 묻기를 ‘너희들은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하기에 신들이 벼슬 이름을 들어 대답하고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니, 황제가 또 어상의 떡을 집어 신들에게 내려 주었습니다. 조금 뒤에 잔치가 끝나자 신 종악에게는 비단 16필과 멜주머니 5개를 하사하였고, 신 용보에게는 비단 8필과 멜주머니 4개를 하사하였습니다.
9일에는 신들이 오문 앞에 나아가 상으로 내리는 선물을 받았는데, 연례적으로 내리는 회송 예단(回送禮單)과 그외에 비단 2필, 견전(絹箋) 4권, 복자지(福字紙) 1백 방(方) 옻칠한 찻상[茶盤] 4개, 호필(胡筆) 4갑(匣), 휘묵(徽墨) 4갑, 벼루 2개를 더 보내 주었습니다.
12일에는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행행하는데, 신들이 삼좌문(三座門) 밖으로 나가 있으니, 황제가 신들이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 따라오라고 하므로, 신들이 수행하여 원명원에 가서 그 근처에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13일에는 황제가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서 등희합자(燈戱盒子)를 베풀었는데, 신들은 내반(內班)에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낙다(駱茶)를 한 잔 주고 또 과일 상자와 대보름 음식 등을 주었습니다. 14일 저녁에는 신들이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가 내반으로 나아갔는데, 놀이하는 것이나 음식 준비들은 또한 13일과 같았습니다.
15일에는 황제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서 방생연(放生宴)을 열었는데, 신들은 전각의 계단 위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 황제가 전각 위에 나와 앉자 음식이 차려지고 차가 나왔고, 또 방생(放生) 등의 놀이를 베풀었습니다. 예부의 상서와 시랑이 차례로 신들을 인도하여 어탑에 이르자 황제가 손수 상 위의 술을 내려 주었고, 잔치가 파하자 내무부가 황제의 분부에 의해 양(羊)고기와 꿀떡[蜜糕]을 전해 주었습니다. 저물녘에 또 산고수장각의 내반에 들어가니, 폭죽이며 불꽃놀이며 등불놀이 등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더 성대하였습니다. 음식을 대접할 때에는 내무부 대신 화신(和珅)과 김간(金簡)이 매번 와서 살폈습니다.
16일에는 내각(內閣)의 통지에서 신들에게 은혜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므로, 신들이 각각 칠언(七言)의 사운 율시(四韻律詩) 한 수씩을 지어 예부에 보냈습니다. 18일에는 또 원명원에 갔습니다.
19일 저녁에는 산고수장각에 들어가 내반으로 나아가니, 황제가 신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귀국하면 꼭 국왕에게 안부를 전해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너희 나라 세자가 지금 몇 살인가?’ 하기에 ‘4세입니다.’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국왕에게 다른 아들은 있는가?’ 하기에 ‘아직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내무부 대신 화신 등이 누른 함에 담은 상품을 주면서 시를 지은 데에 대한 상으로 내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들에게 각각 비단 1필, 견지(絹紙) 2권, 붓 2갑, 먹 2갑이었는데 바로 어좌 앞에서 전해 주었고, 전날과 같이 놀이를 베풀고 음식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이르러 황제가 산고수장각에서 경풍도(慶豊圖)로 들어가자,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해 경풍도로 따라가서 계단 위에 앉았습니다. 차를 한 차례 대접하고 등불을 켠 무대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물러나왔습니다. 전폐(錢幣)의 무역을 청하는 일은 신들이 표문과 자문을 올린 뒤 여러 길로 탐색해 들어보았더니, 동철(銅鐵)은 외국에 내보내는 것을 금한다는 규정에 관계되는 일이고 또 외국에 이미 시행한 규례가 없었다 하여 여러 가지로 꺼리고 의심하며 논설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정월 18일에 재차 원명원에 가보고 나서 또 들으니, 관리예부사(管理禮部事) 각로(閣老) 왕걸(王杰)이 우리 나라 자문의 말을 아뢰었다가 많은 책망을 들었는데, 지금 예부에서 바로 회자(回咨)를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날로 정문(呈文)을 따로 작성하여 왕걸이 머문 곳에 올리고, 또 다음날에는 왕걸이 관아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예부의 조당(朝堂)에 올렸으며, 또 다음날에는 관소(館所)로 되돌아와 예부에 올렸습니다. 또 24일에는 예부가 잔치를 주관하여 베풀 때에 얼굴을 마주해 말을 나누어보았는데, 관리(管理) 왕걸과, 상서 상청(常靑)·기균(紀昀)과, 시랑 철보(鐵保)·유권지(劉權之), 승(僧) 보주(保住) 등의 전후 대답에 달갑지 않게 여기는 뜻이 현저하여 만회할 수 있는 형세가 만무하였습니다. 2월 초하룻날에 이르러서야 회답 자문이 비로소 도착했는데 말들이 온당치 않은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예부를 찾아가 그대로 새벽까지 머물면서 감히 규례에 따라 수령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다시 글을 갖추어 올리고 여러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시랑 철보가 처음에는 마치 숨기는 것처럼 하다가 끝에 가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이 이같이 말을 하였겠는가. 바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지시하는 말을 받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실로 본 예부가 감히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 몇 구절의 말을 배신(陪臣)들이 어찌하여 묵묵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버티며 운운하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형세와 나중의 일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실로 말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었으므로, 부득불 회자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신들의 성의가 족히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지혜가 족히 일의 기회를 잘 주선해 내지 못하여, 필경에는 자문의 일에 대하여 비준을 얻지 못하였고 회답 자문의 내용은 또 저렇게 괴상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소치인지라, 황공하고 부끄러워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예부의 자문에 이르기를,
"주객사(主客使)가 조선 국왕의 자문을 접수하고 올린 문서에 이르기를, ‘「소방(小邦)이 우러러 황제의 사랑을 입어 백성들의 일상 용품들을 모두 상국에 의뢰하고 있는데, 유독 이 전화(錢貨)만은 저희 사신이 황경(皇京)에 조회갈 때에는 통해 쓰는 전례가 있으나, 그것은 단지 사행 도중이나 관사(館舍)에 머무는 동안에만 쓸 수 있고 관(關)을 벗어나 귀국한 뒤에는 쓸 수가 없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바로 〈황제에게〉 아뢰어서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전화를 바꾸어 주어 본국에 가지고 돌아와 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 예부가 《대청회전(大淸會典)》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안에 ‘군인이나 민간인 등이 외국인을 대신해서 금령에 위반되는 물품들을 사들이거나, 일체 병기(兵器)나 동철(銅鐵) 같은 금령에 위반되는 등속의 물품들을 외국인에게 팔아 이익을 도모한 자에게는 죄를 묻는다.’ 하였고, ‘서양 선박에 대하여 환매(換買)해 준 돈이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음으로써 판매의 이익이 줄어드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항구를 지키는 벼슬아치에게 힘을 다해 살펴서, 만일 간사한 상인이 이익을 도모해 많은 돈을 싣고 해외로 나가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잡아다가 죄를 다스린다.’는 등의 갖가지 말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당 국왕이 전화를 환매할 것을 자문으로 청한 것은 정해진 규례와 크게 부합되지 않은 일입니다. 또 전화의 값은 늘 오르내리어 때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인정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저울의 눈금 하나를 다투는 것이니, 만일 해당 나라의 환매 요청을 들어준다면 반드시 간사한 장사치가 중간에서 값을 제멋대로 높이고 낮추고 하면서 밀매를 하여 이익을 챙기는 각종의 폐단이 차츰 불어나서 자못 불편한 일이 많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천조(天朝)에 신하로 복종하는 나라가 매우 많은데, 한번 해당 나라의 소청을 허락해 주고 나면 장차 여러 나라들 중에서 혹 남는 이익을 계산하여 편리하고 이익됨을 도모해서 또 다시 분분하게 간절히 요청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형편상 들어주거나 반대하는 것이 모두 어렵고, 옛 법을 바꾸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라서 분변해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나라가 전화를 사들일 것을 요청한 곳에 대해서는 대신해서 아뢰기가 온편치 못합니다.
그리고 해당 나라에서 직접 표문을 갖추어 올린다 하더라도 본 예부를 통하여 황제께 상달될 것이고, 이어서 황제의 분부가 내려져 본 예부에서 토의하도록 한다 하여도 이같이 정한 규례에 위반되는 일은 본 예부의 의논이 또한 반드시 반대를 하게 될 것이니, 윤허하여 들어주지 못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해당 국왕이 사리에 어두움을 무릅쓰고 청하는 말을 아뢰었지만, 중국 조정의 법제가 삼엄하니 이로 인해 허물을 얻을까 아울러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회답의 자문을 보내노니, 해당 국왕은 앞으로 힘써 정해진 제도를 삼가 준수할 것이요 은혜를 믿고 망녕되이 함부로 말을 아뢰어 미편한 일을 스스로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우리 나라가 다시 회답 자문을 보내는 것이 타당할지의 여부를 대신들과 여러 재신들에게 물으니, 좌의정        김이소, 지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 좌참찬        정민시 등은 예부의 자문이 법으로 금지한 것을 준수하란 것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황제의 뜻을 받든 것이 아닌 만큼 다시 사례하는 자문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판중추부사        채제공·김종수 등은 사례하는 자문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상이 회답 자문을 지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2월 23일 병술

전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를 파직하고, 남궁갑(南宮玾)을 장연부(長淵府)로, 신재문(申載文)을 강릉부(江陵府)로 유배하였다. 철산부(鐵山府)의 창고를 하나 하나 조사하러 나간 어사 유경(柳畊)이 전 부사 남궁갑과 신재문 등이 견감하고 정퇴시켜 주는 일로 인연해서 환곡을 사취한 죄상을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수만 석의 곡식 장부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단지 1천 석 뿐이라니, 해당 도에 만일 도신이 있었다면 어찌 정퇴하고 감면해 주는 것을 이같이 흐리멍덩하게 하였겠는가. 해당 도에는 감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찌 임금의 명을 매우 욕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해당 도의 도신 홍양호를 파직하라."
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유문식(柳文植)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2월 24일 정해

심환지를 이조 참판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성(金履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6일 기축

어영 대장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양호에서 상번(上番)하러 온 향군(鄕軍)들 중에 전염병을 앓는 자들이 많아서 차례로 도성문 밖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어영 대장의 말을 들으니 향군으로 상번하는 자들 중에 도성문 밖으로 내보내지는 사람의 숫자가 적지 않고 금위영은 그보다 갑절이나 많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모두 두 도의 진휼하는 고을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병의 경중을 어찌 논하겠는가. 내보내진 사람들은 바로 내려 보내되 미처 병이 낫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해당 군영이 마음을 써서 치료해준 뒤에 내려 보내어 도중에서 고통을 당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황해도 병마 절도사 유문식(柳文植)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불러 보고 하유하기를,
"해당 영의 바로잡기 어려운 폐단으로는 환곡의 출납이 가장 심하다. 그러나 저축도 중요하지만 백성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니, 너는 기어코 샅샅이 세밀하게 검토하여 환곡 정사의 면모를 일신시켜서 백성들이 안도하도록 하라. 하나라도 혹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된다면 도리어 그대로 두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하였다.

 

2월 28일 신묘

춘당대에 나아가 명하여 각신·승지·사관과 장용영·약원의 여러 신료들에게 짝을 지어 활쏘기를 하도록 하였다. 상이 친히 손바닥만한 과녁에 4발을 쏘아 맞혔고, 또 편곤(片棍)을 쏘아 3발을 맞혔다. 술과 음식을 내리고 여러 신료들에게 내원(內苑)의 여러 경치를 두루 구경하게 하였다.

 

2월 30일 계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전폐(錢幣)의 일이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자문을 올릴 때에 먼저 사정을 탐지하여 염려가 없을 것을 안 다음에 올렸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이는 모두 통역 무리들이 주선을 잘못한 소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역관 무리들의 폐단을 구제해 주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줄은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대저 은수(恩數)는 은수이고 기강은 기강이어서, 한편으로는 술을 내릴 즈음에 은혜를 베풀고 한편으로는 전화를 청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니 저들의 기강을 볼 수 있겠다. 이미 아랫 관아인 예부가 회답 자문을 보냈으니 우리 나라로서는 별로 다시 말할 단서가 없다. 회답 자문을 잘 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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