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갑오
옹주(翁主)가 태어났다. 가순궁(嘉順宮)의 소생이다. 산실청(産室廳)을 두고 약원이 연생문(延生門) 안으로 옮겨 숙직하였다. 홍양호를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약원의 여러 신료들을 불러 보았다. 원자가 곁에 모셔 앉았다. 상이 도제조 홍낙성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글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혹 안에서 글자 한 자라도 배우면 매양 잊지 않는다. 또 관저장(關雎章)033) 을 외면서 제 유모를 가리켜 ‘요조 숙녀이다.’고 말하였으며, 또 능히 갈담(葛覃)·문왕(文王) 등 여러 편을 외고 있다."
하니, 낙성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우리 동방의 억만 년 끝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7일 경자
약원이 산실청의 숙직을 철수하였다. 약원의 여러 신료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도제조 홍낙성의 아버지인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갑술년034) 에 권초관이 되었는데, 낙성이 또 경술년035) 원자가 탄생했을 때에 도제거(都提擧)로 숙직하였고, 이번에 또 그의 아들 예방 승지 홍의영(洪義榮)과 함께 숙직하게 되자, 상이 매우 희귀한 일이라며 특명으로 의영을 아경(亞卿)에 승진시켜 의망하라 하고, 제조 김문순(金文淳)과 부제조 서매수(徐邁修)를 함께 가자하였다.
신광리(申光履)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강오성(姜五成)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3월 9일 임인
이조 참판 심환지를 국자감(國子監)의 전임 벼슬에 유임시키고, 정범조(丁範祖)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3월 10일 계묘
차대하였다. 수원 유수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저자 백성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물건을 팔 수 있게 한 일에 대하여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연전에 이를 실시하던 처음에 수백 명의 저자 백성들이 신이 조정에 나오는 길을 막고 호소하기에, 신이 타이르기를 ‘지금 성명하신 군주가 위에 계시고 온 나라 백성은 똑같이 군주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행상(行商)이건 좌판(坐販)이건 서로 있고 없는 것을 무역하는 것은 진실로 떳떳한 일이다. 그런데도 저자의 가게 자리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매매하는 것을 구속하거나 내쫓아서 도성(都城)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너희들도 백성이고 저들도 백성인데, 조정에서 다독여 구휼하는 도리에 있어서야 어찌 피차의 차이를 두겠는가.’ 하고 엄한 말로 나무라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갑자기 다시 소요를 일으켜 저자 백성 70여 명이 수원까지 와서 호소하기에 모두 바로 쫓아보냈습니다. 나라의 기강과 백성의 풍습이 참으로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일 시정의 백성들이 무엄하게 자신의 사리 사욕만 챙기려는 풍습에 흔들리어 바른 도리를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조정의 위신을 높이고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말들이 하도 많고 비방과 칭찬이 반반이라서 그 이해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없었는데, 이제 경이 아뢴 말을 듣고 보니 백성들의 풍습이 놀랍다. 대저 공인(貢人)과 시인(市人)은 바로 도성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진실로 다독여 구휼해야 하겠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당연히 기강을 소중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명하여 수원부에 승보시(陞補試)를 보이되 온 고을을 통틀어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강경(講經)은 송도(松都)의 예에 따라 제술(製述)에 떼넘기며, 무장이 유수가 되었을 때에는 시험을 치르지 말고 문반(文班)의 유수 때를 기다려서 합설(合設)할 것이며, 만일 대비과(大比科) 보일 때를 당하면 별도로 품지하도록 하였다. 유수 채제공의 품지를 인해서 이 명이 내려진 것이다.
집의 정택부(鄭澤孚)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중국 돈[唐錢]을 우리 나라에 시행하는 것은 비록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해롭기만 하지 이로움은 없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라를 욕되게 하고 부끄러움만 남기는 것입니다. 신은 전후로 내려진 전하의 하교에서 우리 전하의 슬기로우신 통찰력이 매우 뛰어나심을 흠앙해 왔습니다. 대체로 돈이란 것은 연호(年號)를 표시해 새기고 연대에 따라 모양도 달리하는 것이어서 예나 이제나 통행되는 비단·금·은·주패(珠貝)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근 2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을 이제 새로 시작하여 화천(貨泉)의 유통을 중국의 내륙이나 다름이 없게 하고자 하시니, 그것이 옛날에 이른바 박부득이(迫不得已)의 의리에 있어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 저 용렬하고 비천하여 송곳 끝을 다투고 전혀 의리를 모르는 통역 무리들이야말로 비록 도끼로 찍어서 거리에 매단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어내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묘당에서 국사를 도모하는 신료들마저 전하의 뜻을 받들어 돕지 못하고 나라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으니, 신은 속으로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사행(使行) 길에 나선 자들이 진실로 사령(辭令)을 잘하여 임기 응변의 도리를 힘써 다하였더라면 반드시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사방으로 사신이 되어 나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선비의 도리를 진실로 누구에게나 책임지울 수는 없겠지만, 어찌 당당한 천승국(千乘國)의 사신으로서 임금의 명을 이다지도 욕되게 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분개함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의 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비록 연교(筵敎)와 비지(批旨)로 난색을 표한 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이미 한편으로 자문을 가져가도록 허락한 것이었으니, 어찌 꼭 묘당만을 책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때 시임(時任)이 의리를 내세워 그만둘 것을 말함으로써 정사(正使)가 갈리게 된 사실을 사역원이 초기(草記)까지 하였음에랴. 사행이 저 나라에 가서 바로 그 자문을 올린 것에 이르러서는 형편에 따라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남긴 것은 작지 않으니, 그들이 복명하기를 기다려서 자세히 물어 처리하고자 한다. 너는 우물우물 넘어가는 요즘 세상 풍속 가운데서 관잠(官箴)의 의리를 능히 본받았으니 자못 가상하도다."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의로, 이의행(李義行)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1일 갑진
윤대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신기(申耆)를 불러 보았으니 하직 인사를 드린 때문이었다.
3월 13일 병오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춘당대에 나가 궐내에 입직한 무신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여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거재 유생(居齋儒生)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1등을 한 이윤겸(李允謙)을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이날은 원자(元子)가 탄생한 지 1천 일이 되는 날이었다. 상이 한참 친히 점수를 매기고 있는데, 윤겸의 시권에 이르자 원자가 주필(朱筆)을 잡고서 10여 글귀에 비점을 찍고 이어 등급은 삼중(三中)이라고 썼다. 그러자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고 마침내 급제를 내렸다.
동지사 박종악이 돌아 왔다. 대간의 논박을 입은 것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자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4일 정미
돌아온 동지사 박종악을 불러서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돈에 대한 일은 애당초 통역 무리들의 소원에 따라 부득이 자문으로 청하였던 것이니, 이렇게 될 줄을 이미 예상하였었다. 은례(恩禮)는 은례이고 법금(法禁)은 법금인 것이다. 60년 동안 중국 정치가 평안한 것은 실로 기강이 문란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영명(英明)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홍양호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월 15일 무신
대사간 신광리(申光履)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 겨울 사행들이 중국에 들어갈 적에 중국 돈을 환무(換貿)해 주도록 청한 일은 그것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긴 하나, 애당초부터 잘 주선하지 못하고 불쑥 자문을 바쳤다가 끝에 가서는 공손히 회답 자문을 받아들고 전전긍긍하며 돌아 왔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 더할 수 없습니다. 사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전에 올린 헌신(憲臣)의 상소는 참으로 체통을 얻었다 하겠으니, 엄한 처분을 내리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 강화 유수 유당(柳戇)은 재임하는 동안 삼남의 배들이 나루를 지나갈 때면 조사한다 빙자하여 모든 배를 붙잡아 두고 수색을 함으로써 아전이나 군교(軍校)들이 이를 인연하여 못할 짓이 없이 농간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여러 가지 물품들을 공적인 비용에 보태 썼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뱃사람들의 원망하는 소리만 서울과 지방에 낭자하게 되었으니 엄히 감죄하여 죄를 징계하소서.
전 황해 감사 이경일(李敬一)은 조정의 칙교(勅敎)를 따르지 않아 산산진(蒜山鎭)에 허위로 기록된 곡식이 5백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초의 장계에서는 감히 환곡은 폐단이 되지 않는다고 용이하게 상달하였고, 돌아올 즈음에 이르러서는 해당 산산진의 받아들이지 못한 환자를 장계 속에다 불분명하게 뒤섞어 열거하였으니, 이는 절로 상을 기망한 죄과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직의 가벼운 벌로 그의 죄상을 마감할 수는 없으니, 속히 견삭(譴削)의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의 일로 말하자면 대체로 돈을 유통하자는 자문은 사신 스스로가 구해서 가지고 간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묘당에 물었던 일이며 또한 묘당이 마음대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바로 조정이 막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회답 자문의 내용과 자문을 올린 사실들을 미처 들어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복명을 기다려서 엄히 조처하고자 하였었다. 그런데 어제 회답 자문을 보니 그 몇 구절의 말이란 것이 마디 마디가 절실히 옳을 뿐만이 아니라 별로 눈에 거슬리는 곳도 없었다. 더구나 회답 자문의 전례를 따라 금령을 지킨다는 말뜻도 황제의 칙지가 아니었으니, 이미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였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고 또한 우리 나라 기강에도 관계 될 것이 없었다. 유당의 일은 과연 소문과 같다면 더욱 조정의 명을 저버린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고, 이경일의 일도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내버린 아이들을 찾아 돌보아줄 일로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봄에 해는 길고 먹을 것은 없는 상황이 눈에 선히 보이는 것 같다. 건장한 자들이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도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늙은이나 어린아이들이겠는가. 다시 해당 진휼청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에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7일 경술
돌아온 동지사의 서장관 김조순(金祖淳)을 불러서 보았다.
3월 18일 신해
춘당대에 나가 선발된 신구(新舊)의 초계 문신들과 서북(西北)의 별부료(別付料)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였다.
반궁(泮宮)에서 삼일제(三日製)를 보였다.
대사헌 이의행(李義行)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유성한(柳星漢)이 아직까지 머리를 붙이고 있는 것만도 이미 형벌이 잘못 시행된 것인데, 그가 감히 전관의 직함으로 자처하면서 향리를 드나드는 것이 죄인이 아닌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세속을 더럽히고 변란을 선동하는 재앙이 암암리에 자라고 있지나 않은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방 수령이 막아 금하지 않고 도백도 살펴 단속하지 못한 것도 모두 그 죄가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성한의 부자에게는 대간의 아룀을 속히 윤허하여 화란의 근본을 끊어야 할 것이고, 그와 상종한 자들에게도 조사하여 중한 벌을 내려야 할 것이며, 도백과 해당 수령에게는 지난 겨울에 호남 도신과 변방 장수에게 시행한 전례와 똑같이 죄를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기백(畿伯)을 형벌에 처하자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어찌 도백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겠는가. 경기도 안에 살지 않고 다른 도였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반은 강바람 속으로 들어가고 절반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상소문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라서 관례대로 비답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이조 참판 정범조(丁範祖)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도승지 서매수(徐邁修)가 일전의 정망(政望)이 자신의 뜻에 거스린다 하여 정리(政吏)를 묶어 가두었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그가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윤치성(尹致性) 의망을 정지했었으니, 신이 마음대로 의망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 관장(官長)에게 노여움이 있어서 그 하리를 죄주는 일은, 지방에서는 감영과 고을 사이에나 있고 중앙에서는 당상관과 낭청 사이에나 그러합니다. 그러나 매수가 신에 대해서는 어떤 체통(體統) 관계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매수가 대관도 아니면서 정리를 대신 죄준 것이나 범조가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지도 않고 바로 의망한 것에는 모두 살피지 못한 실수가 있다 하여 함께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매수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북원(北苑)의 농산정(籠山亭)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3월 19일 임자
황단(皇壇)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전교하였다.
"묘당의 정사에서 소중하기로는 백성들의 일보다 더할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흉년이 거듭 든 나머지에 부황이 나서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어갈 염려가 있다. 부황난 모습이 눈에 넘치고 유랑하는 자들이 길에 늘어서 있는 형편이니, 이런 때에 조정과 묘당에서는 비록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물불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듯이 급하게 서둘더라도 요즈음의 풍습으로는 나라 일을 제집 일처럼 여겨 조금의 보탬이나마 이루어 주기를 바라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더구나 사정에 캄캄하고 조금도 걱정이 없어 마치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 여윈 것 보듯이 하여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을 울타리 가에 붙여버린 채로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날이 감에랴.
묘당의 정사에 별로 강구할 만한 것이 없고 백성들의 일에 별로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진실하여라. 옛사람의 말에 ‘쓸데없는 일에 얽매여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는 서실(書室)에 가서 책상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여도 좋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그의 뜻이 책에 있기만 하여도 바로 학문이 되는 것임을 깨우쳐 준 말이다. 그러니 빈대(賓對)나 주좌(籌坐)에서 한 가지도 꾀한 것이 없는 것이 비록 형식이나 갖추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런데 듣자니 대신에게 병이 나서 열흘 안으로는 힘을 차리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일의 일차(日次)도 정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정사에 애쓰는 도리이겠는가. 여러 신들 중에 품할 일이 있는 자들은 와서 대기하도록 하라. 이것도 옛날의 규례이다. 대신이 출사할 동안은 우선 이대로 하도록 하라."
3월 20일 계축
비변사 당상관들을 불러서 보았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충주(忠州)의 충신 의사단(忠臣義士壇)에 순절한 날짜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영남 인사들의 말을 듣건대, 김준신(金俊臣)은 문벌이 드러나서 일찍이 사사로 단향(壇享)을 설행할 적에 세 종사관(從事官)과 동렬로 향사되었는데, 지금 만일 하단(下壇)으로 내려서 사졸들과 함께 향사한다면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상단(上壇)에 배향하는 것이 편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내원(內苑)에서 꽃 구경을 하려고 시임과 원임의 각신과 아울러 그들의 자제들을 부르고, 또 일찍이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약간 명을 특별히 불러서 39명의 숫자를 채웠는데, 이는 대체로 이 해가 계축년이고 이 달이 늦봄이어서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하는 뜻에서였다. 여러 신료들에게 명하여 내원의 여러 경치를 마음껏 둘러보게 하고 옥류천(玉流泉)이 굽어도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서 술과 음식을 내리고 각기 물가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하였다. 그리고 상이 진(晋)나라 사람들의 난정 모임에서 지은 시부(詩賦) 사언(四言)·오언 두 편을 여러 신료들에게 명하여 자신의 소장에 따라 짓게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그리하여 한 때에 태평 시대의 훌륭한 일이라고 전해졌다.
3월 21일 갑인
구성부(龜城府)에 안치시켰던 죄인 정존중(鄭存中)을 석방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를 체직하여 박우원(朴祐源)으로 대신하게 하고, 홍억(洪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22일 을묘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보고 남양부(南陽府)에 방어사 진영을 두기로 한 의논을 중지시켰다. 이에 앞서 상이 수원에 있던 방어사 진영을 남양으로 옮기고 나서 어영 대장 조심태를 보내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심태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남양에 달려가서 두루 형편을 살펴보니 대부(大阜)와 영흥(靈興) 두 섬이 바닷길의 요충에 걸터앉아 있어 해상 방어의 일로 논한다면 실로 요해지라 할 수 있으나, 남양은 본시 육군(陸軍)의 영장(營將)을 두는 고을이었으므로 해상 방어의 일은 의논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육로(陸路)에 대해서는 호서의 여러 길에서 양성(陽城)·평택(平澤)으로 나갈 적에 궁포(宮浦) 아래쪽 및 당진(唐津)·면천(沔川)·대진(大津)의 윗쪽을 경유하는 길은 수원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남양의 사잇길로 질러가며 안산(安山)·금천(衿川)을 모두 지나가게 되는데, 지역이 매우 평탄하고 모두 막힌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고을 소재지를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저팔리(楮八里)의 구포(鳩浦) 근처로 옮겨 방어의 요새로 삼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방어영을 새로 두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방어사의 직책이란 본시 한쪽 지방을 방어하는 것인데, 본 남양부는 이미 총융청 전영(前營)의 보병과 기병에 의지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급한 때를 만나면 당연히 총융사의 절제를 받아야 하므로 이 점이 걸리는 단서입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료들에게 물었는데, 모두가 수원이 지금 장용영의 외영(外營)이 되어 있어 요새지로서의 소중함이 전에 비해 더욱 강화되어 있으므로 다시 방어영을 남양에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3월 25일 무오
심환지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여러 도에 신칙하여 단(壇)과 사당의 의물(儀物)들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3월 28일 신유
춘당대에 나가 장용영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3월 29일 임술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보았다. 동지성균관사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이성현(尼城縣) 궐리사(闕里祠)에 공자의 유상(遺償) 1폭을 봉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신년036) 이후로 전하의 전교로 인하여 여러 곳에서 봉안하고 있던 유상 4폭과 주문공(朱文公)의 유상 1폭을 받들어 옮겨 와 도합 6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우(祠宇)가 이미 매우 좁은 데다가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이 퇴락하였기 때문에 지난 무신년에 유학(幼學) 공재겸(孔載謙)이 이를 상언(上言)하였으며, 이에 도신으로 하여금 물력(物力)을 헤아려 도와서 제때에 수리하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6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도신을 신칙하여 앞서의 판부(判付)에 따라 장마가 들기 전까지 원상대로 속히 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북경(北京)의 예부에 이자(移咨)하였다.
"배신(陪臣) 박종악(朴宗岳)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귀 예부의 자문을 당직(當職)037) 이 삼가 받들어 읽어 본 결과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전화를 무역하려는 것이 정해진 규례에 크게 부합하지 않아서 대신 황제에게 아뢰어 주기가 불편하고, 또 중국의 법제가 삼엄하니 이 뒤로는 힘써 정해진 규례를 삼가 준수할 것이요 은혜를 믿고 망녕되이 거듭 말하여 스스로 온편치 못함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정당하고 깨우쳐 주심이 간절하여 몇 번을 공경히 읽노라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웠습니다.
바닷가의 조그만 나라가 황상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으니 비록 변방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상은 경내의 땅이나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오직 돈만은 유통해 쓰는 은혜를 입지 못하니, 우로(雨露)는 천지 사이에 고르게 미치는데 돈만은 유독 강역의 사이에 막혔는지라, 우러러 황상의 먼데 사람을 편케 해주시는 덕화를 믿고서 감히 한 지역 모두의 똑같은 소원을 말씀드렸던 것이니, 실로 무역하는 잇속을 계산함이 아니고 다만 안과 밖을 똑같이 보아주시는 은혜를 입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시끄럽게 구는 것이 될까 두려워서 감히 바로 표문을 갖추어 올리지 못하고 우선 귀 예부에 우러러 간청을 드렸던 것인데, 지금 여러 대인들께서 자상하게 가르침을 내리시고 편리의 여부를 일일이 열거하시어 처음에는 이미 법전을 밝게 알려주시고 또 힘써 정해진 규정을 삼가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저희 나라를 위하여 이와 같이 주도하고 자상하심에 대하여 황연히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이어서 감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해외의 풍속이 궁벽하고 고루하여 문견이 넓지 못함으로 인하여 중국의 법전을 미처 보지 못하고서 갑작스럽게 번거로운 말씀을 드렸던 것인데, 다행히 여러 대인들의 애써 가르쳐 주신 후은에 힘입어 비록 너그러운 용서는 입었으나 감히 마음이야 스스로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회답 자문을 갖추어 번거롭게 올리는 바이니, 바라건대 귀 예부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참착해 주시고 아울러 감사할 줄 아는 뜻을 양찰해 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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