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7권, 정조 17년 1793년 4월

싸라리리 2025. 8. 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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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해

인정전에 나가 태묘의 하향 서계(夏享誓戒)를 행하였다.

 

윤대하였다.

 

민이현(閔彛顯)을 사헌부 장령으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일 갑자

서영보(徐榮輔)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승(李祖承)으로 대신 임명한 다음 편전으로 불러 보고서 속히 출발하도록 재촉하였다.

 

4월 3일 을축

비변사가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가 올린 첩지(牒紙)에 의거해서 강계(江界) 묘단황(苗丹黃)의 세 차례 파수(把守) 때에 부족한 식량의 숫자를 장부에 올라 있는 환곡에서 더 나누어 주고 그것에서 받은 모곡(耗穀)으로 채울 것을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묘단황이란 바로 강계 연변을 막아 지키는 것을 이름하는 말로, 묘(苗)라는 것은 산삼이 막 싹이 돋은 것을 이르고, 단(丹)은 열매가 익어 붉어진 것을 이르고 황(黃)이란 것은 가을이 깊어 잎이 누렇게 된 것을 말한다. 산삼을 몰래 캐가는 자들이 꼭 이 때에 우글거렸던 까닭에 매양 이 때가 되면 붙어 앉아 막아 살폈으니 이것이 이른바 묘단황의 세 차례 파수라는 것이다.

 

전 강화 유수 유당(柳戇)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이에 앞서 대신(臺臣) 신광리(申光履)의 말에 따라 유당이 범한 여러 가지 조항에 대해서 기백(畿伯)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도백이 유수의 책임을 겸하게 된다면 유당과 서로 직임을 이어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자, 묘당이 형조로 하여금 강화도의 응당 신문해야 할 사람들을 잡아다가 왕부(王府)로 하여금 조율하여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폐단을 끼칠까 염려한 나머지 의금부에 명하여 조사해서 의논해 아뢰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의 고신을 빼앗게 하였다.

 

4월 4일 병인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많은 군사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038)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4월 5일 정묘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조에 신칙하여 벼슬이 떨어진 지 가장 오래된 사람을 뽑아 등용하도록 하였다.

 

4월 6일 무진

김문순(金文淳)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가 이내 교체하여 이갑(李𡊠)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4월 7일 기사

태묘에 나가 하향(夏享)의 희생과 제기들을 살피고 망묘루(望廟樓)에서 재숙하였다. 이때 비가 많이 내리자 대신과 약원의 여러 신료들이 섭행(攝行)의 의식을 청하려고 뵙기를 요구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8일 경오

태묘에서 직접 제향을 올렸다.

 

남평현(南平縣)에 정배했던 죄인 정만시(鄭萬始)를 석방하였다. 상이 그가 상(喪)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명하여 놓아보낸 것이다.

 

갓난 옹주(翁主)의 태(胎)를 내원(內苑)에 묻었다. 우리 나라의 옛 고사에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날 때마다 유사가 태를 묻을 곳 세 곳을 갖추어 올려 낙점을 받아서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곤 하였다. 그런데 영종 갑술년에는 명하여 군주(郡主)의 태를 묻을 적에 안태사를 보내지 말고 다만 중관(中官)을 시켜 가 묻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을유년039)  에 태를 담은 석함(石函)을 경복궁의 북쪽 성 안에서 얻고서야 비로소 중엽 이전의 옛 규례는 내원에 묻었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명하여 앞으로 태를 묻을 때는 반드시 내원의 정결한 땅에 묻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유사가 옹주의 태 묻을 의식 절차를 품하자, 상이 선왕조의 수교(受敎)를 준행하여 이 날 주합루(宙合樓)의 북쪽 돌계단 아래에 태를 묻게 하였다.

 

4월 9일 신미

춘당대에 나가 관동(關東)의 공령 유생(功令儒生)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생원 신재화(申在和) 등 네 사람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에 앞서 임자년 6월에 상이 도목 정사(都目政事)하는 자리에 임하여 전관(銓官)들에게 당부하여 관동 사람들을 거두어 등용하라고 하자, 전조가 아뢰기를,
"관동의 토박이 문관(文官)으로는 통청(通淸)되지 못한 두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관동은 바로 해가 돋는 문명(文明)의 지방인데도 도리어 무예를 숭상하는 서북 지역보다 못한 것은 진흥시키는 방법이 없었던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기고, 도신에게 하유하여 경공(經工)에 밝은 자 몇 명, 공령문(功令文)에 밝은 자 몇 명, 오죽헌 주인(烏竹軒主人)의 후손 몇 명을 찾아내서 함께 조목별로 나열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2월에 도신 윤사국(尹師國)이 공령생 74인, 경공생 8인, 오죽헌 주인의 후손 권한위(權漢緯) 등 12인을 보고하였다. 이에 상이 경공생으로 초계(抄啓)된 사람들은 오로지 경학만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뽑혀졌다 하여, 다시 명해서 경서를 탐구하고 글을 많이 읽어 의의(疑義)를 통달해서 한 지방의 추중을 받는 자들을 성심껏 찾아내서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5월에 도신 신기(申耆)가 전 참봉 안석임(安錫任) 등 6인을 뽑아 아뢰었다.
이에 상이 사서 오경(四書五經)과 《효경》·《이아》에 대하여 어제(御題)한 의의 조문(疑義條問) 1백여 조목을 내려 보내 경공생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고, 또 어제(御題)한 시(詩)·부(賦)·책(策)·의(義) 네 가지를 내려보내면서 도신과 도내 문신(文臣) 출신의 수령 2인에게 3일에 나누어 공령생에게 시험보여서 역말로 시권(試券)을 올려보내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직접 점수를 매겨 40인을 뽑고 오죽헌 주인의 후손 권한복(權漢復) 등 2인에게는 따로 시(詩)와 의(義)로 시험하여 뽑아서 도백으로 하여금 모두에게 식량과 말과 배를 탈 수 있는 증서를 주어 올려보내게 하여 태학의 식당에서 묵도록 허락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공령생이 모두 이르자, 상이 춘당대에 나가 부(賦)와 책(策) 두 제목을 나누어 게시하고 다시 그들을 시험보여 대신과 문임들에게 시권의 점수를 매기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관동 선비들을 시취(試取)하는 일을 1백 66년 뒤에 실시한 것이 어찌 관동 사람들만 위로하여 기쁘게 할 뿐이겠는가. 그러나 도과(道科)와는 조금 다르므로 부와 책으로 각각 한 사람씩 뽑아 급제를 내렸다. 그리고 영동(嶺東)인지 영서(嶺西)인지를 시권의 머리에 쓰도록 명하였는데, 시권의 점수를 매기면서 보니 영서는 모두 등수가 높았으나 영동은 유독 빠져 있었다. 그래서 영동에서 맨 먼저 올린 부와 책의 두 시권을 특별히 아울러 뽑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면 옛날 과거를 보일 때 네 사람을 뽑던 고사(故事)를 우러러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에서 1등을 한 원주 생원(原州生員) 신재화(申在和), 책에서 1등을 한 횡성 생원(橫城生員) 정원선(鄭元善), 부에서 1등을 한 삼척 유학(三陟幼學) 홍인조(洪寅祚), 책에서 1등을 한 강릉 유학(江陵幼學) 심보영(沈普永)에게는 모두 급제를 내리고, 다음 등급의 세 사람에게는 각기 분수[分]를 주고, 그 나머지 유생들에게는 내려갈 때에 해당 관청에서 양식과 노자를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관동의 경공생에게 경서의 뜻을 조목별로 묻고, 공령생에게 과거의 체제에 비겨 시험을 보인 것은 한 지방의 인재를 찾아내기 위한 이선(里選)과 향선(鄕選)의 옛 제도를 본딴 것이었다. 공령생 몇 사람에게는 이미 급제를 내렸고, 경공생들이 대답한 강의(講義)가 올라왔을 때에도 마음을 두어 찬찬히 살피느라 누차 촛불이 다 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또 그들의 대답에는 간혹 제시하여 깨우쳐 주는 곳도 있었다. ‘열 집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경서의 뜻에 밝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같이 분석할 수가 있겠는가. 근래에 이른바 서울 선비로서 경서에 밝다는 것으로 천거받은 사람일지라도 또한 그의 실상을 확인해 본다면 어찌 이만하겠는가. 조정이 실상에 힘쓰는 도리에 있어 어찌 선비를 진흥시키는 일을 늦출 수 있겠는가.
횡성의 전 참봉 안석임(安錫任), 춘천의 전 주부(注簿) 박사철(朴師轍)이 가장 우수한데, 석임은 나이가 74세이고 사철의 나이도 70에 가까우니 그들에게 억지로 벼슬을 맡기기 어려운 점이 애석하구나. 특별히 아울러 돈녕 도정(敦寧都正)에 올려 제수하고 각각 영동과 영서의 분교관(分敎官)에 임명하여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고서 도백으로 하여금 녹료(祿料)를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스스로 서울까지 올 수 있거든 그들에게 서울에 올라와 숙배(肅拜)하도록 권고하라. 그 다음은 양양(襄陽)의 진사 최창적(崔昌迪)이다. 더구나 이 사람은 죽은 정언 최규태(崔逵泰)의 아들인데, 그가 대답한 《주역》의 뜻을 보고서 아는 것이 소종래가 있었음을 더욱 징험할 수 있었으니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의망해 들이도록 하라. 이 사람도 나이는 늙었으나 능히 길에 나설 수 있거든 두 선비와 함께 역말을 지급해 주고, 그 나머지 유생들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지필묵(紙筆墨)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내각에 명하여 전후의 전교(傳敎)·주계(奏啓)·방안(榜眼)040)  ·괴권(魁券)을 가져다가 차례를 매기고, 경서의 뜻을 조목별로 대답한 것들을 간추려 조문(條問) 아래에 붙여서 관동 감영에 내려 보내어 인쇄해 올리게 한 다음 이를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이라 명명하여 입격한 제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판각(板刻)은 원주목(原州牧)의 관아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조종현(趙宗鉉)을 파직하였다. 상이 막 전각에 나왔는데, 승지와 사관이 아직 오르기 전에 시위하는 사람이 앞질러 올라왔기 때문에 명하여 판서를 파직하고 김문순(金文淳)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4월 10일 임신

초계 문신에게 친시(親試)를 실시하였다.

 

윤대하였다.

 

명하여 호서와 영남에서 따로 여제(厲祭)를 지내되 정성들여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두 도에 전염병이 한창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학을 이조 참판으로, 정창순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과 삼도 수군 통제사 이윤경(李潤慶)을 파직하였다. 비변사가 윤경의 장계에 의거해서 복계(覆啓)하기를,
"영남 각진(各鎭)의 환곡과 전포(錢布)는 거짓된 농간과 헛된 기록들이 없는 곳이 없는데도, 해당 통제사가 3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결같이 내버려 두었다가 임기가 거의 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뢰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또 순영(巡營)이 관장하는 곳이요 그 숫자도 적지 않은데 도신이 이를 적발해내지 못하였으니, 그의 죄도 통제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가, 금방 진휼 정사가 한창임을 감안하여 진휼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전지를 받들라고 명하였다.

 

4월 12일 갑술

행 사직(司直) 김화진(金華鎭) 등이 《담은록(覃恩錄)》 1책을 올렸는데, 이는 설날 아침 진전(眞殿)에 친히 제사를 올린 뒤에 품계를 올려 준 여러 신료들과 시를 짓고 화답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었다. 전교하기를,
"지금 세초(歲初)에 가자한 여러 신료들이 편찬한 《담은록》을 인쇄해 올린 것을 보니, 여러 신료들 중에 조진관(趙鎭寬)·정환유(鄭煥猷)는 아직까지 한번도 정목(政目)에 의망되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지난 날을 추억하여 품계를 더하여 준 뜻이겠는가. 전조에 신칙하여 모든 길을 터주는 정사에 관계되는 일에 더욱 마음을 두어서 나의 뜻을 잘 선양하라."
하였다.

 

4월 13일 을해

춘당대에 나가 별군직(別軍職)과 무예청(武藝廳)에 활쏘기를 시험보였다.

 

4월 15일 정축

비변사 당상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조 판서 서유방(徐有防)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여러 신료들이 올린 《담은록》을 보니 한두 사람이 아직까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자가 있었다. 대저 한 사람이라도 막힘을 당하고 있다면 어찌 성명한 세상에는 버려진 인물이 없다는 의리와 맞겠는가. 전후로 벼슬길을 터주라는 전교가 보통 진지하게 내린 것이 아니었건만 아직까지 나의 뜻을 선양해 주는 실효를 보지 못했다. 이는 오로지 전선(銓選)을 맡은 여러 신료들이 홍병찬(洪秉纘)의 일에서 지레 겁을 먹은 소치이다. 그러나 만일 병찬의 죄를 일러 벼슬길을 소통시키는 일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나의 본의이겠는가. 병찬의 정사는 소통을 시킨 것이 아니고 바로 제 사심을 부린 것이었다.
옛날 신축년과 임인년 이전에는 각기 의논을 주장하여 서로 서로가 막고 틔우고 한 까닭에 한 사람이 진출하면 앞 사람이 막았던 사람을 틔우고 앞 사람이 틔웠던 사람을 막았다. 이것이 비록 사욕을 성취하는 일이긴 하였으나 이는 그래도 준일한 기풍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병신년 이후로는 크게 달라졌다. 이른바 막음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사람이 막은 것이며 또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런 거리낌 없는 정사를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후일의 정관(政官)들은 병찬의 일에서 지레 겁을 먹고 소통시키는 일까지 아울러 폐해버리고 있다. 그러나 병찬의 죄가 어찌 소통시키는 데에 있었겠는가.
나의 본뜻은 지금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라도 갓에 먼지를 털고 벼슬에 나오지 않은 자가 없게 하여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기원하는 한가지 방도로 삼고자 함이었다. 대저 영원한 운명을 기원하는 것이 본디 사람들에게 관작을 주는 일에 있는 것은 아니나 화기(和氣)를 맞아들이는 길은 또한 반드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큰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사해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경릉(敬陵)041)  에 세운 비(碑)의 음기(陰記)에 왕후의 출생에 대해서 해는 쓰지 않고 달과 날짜만을 썼는데 그것도 9월 8일을 3월 12일로 잘못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릉(昌陵)042)  에 세운 비의 음기에는 왕후가 돌아가신 날짜 12월 23일을 24일로 잘못 기록하였습니다. 막중한 일이라서 참으로 미안스럽습니다. 당연히 고쳐 새겨야 할 듯한데, 빗돌을 갈아서 추후로 새기는 것은 또한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그러니 지금 주석을 달아 그 사실을 신중히 기록해서 후면 공간에 새기도록 하되, 만일 공간이 없으면 비석 옆면에 새기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모든 경비에 드는 것들은 많고 적고를 막론하고 각 관아가 올려오면 신의 조(曹)에서 회감(會減)하는 것을 한결 같이 정례(定例)에 따라 하는데, 다만 정례란 것이 반포 시행된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쓰이는 것들이 옛날과 오늘이 각기 다르고, 있고 없고 많고 적음이 전후가 같지 않은데도 정례에 실린 것은 어길 수가 없으니, 시대에 따라 알맞게 제정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지금부터 각종의 공물 중에서 응당 써야 할 물건이 아닐 경우에는 비록 정례에 실려 있다 할지라도 각사(各司)가 빙자하여 가져다 쓰지 못하도록 하고, 공인(貢人)들도 감히 정례와 같이 바치지 못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해서(海西)의 전미(田米) 1천 석을 개성 감영에 떼주어 그 모곡을 받아서 공공의 모자라는 비용에 보태 쓰게 하였는데, 이는 호조 판서 심이지의 말을 따른 것이다.

 

비변사 당상 김문순이 아뢰기를,
"연전에 북도 감진사(北道監賑使) 이재학의 별단(別單)에 따라 교제창(交濟倉)을 북관(北關)에 설치하고 곡식 10만 석을 비축시켜 수재와 한재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본도가 그것을 애당초 구별하지 않고 본시 대장에 잡혀있던 곡식과 섞어서 환곡을 출납함으로 인하여 창고를 설치해서 곡식을 쌓아두는 법규가 지금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법을 세운 본의로 헤아려볼 때 극히 놀랍습니다. 엄히 도신을 신칙하여 이 뒤로는 환곡을 출납할 때에 다시 섞어지는 일이 없도록 각 고을들을 바로잡은 다음에 이를 낱낱이 본 비변사에 보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6일 무인

일차 유생(日次儒生)에게 전강(殿講)을 보여 1등한 유학(幼學) 정취선(鄭取善)을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임시철(林蓍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윤사국(尹師國)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이 때에 경사가 겹치고 조정과 민간이 조용하고 편안하였다. 그러자 상이 화기를 맞아들이고 하늘의 명을 이어가는 방도는 막힌 자들을 소통시키고 침체한 자들을 진작시키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조와 병조에 신칙하여 죄명을 벗겨주는 정사를 크게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경재(卿宰)로는 한광계(韓光綮)·이보온(李普溫)·민백분(閔百奮)·이의직(李義直)·조진관(趙鎭寬)·정환유(鄭煥猷)·윤홍렬(尹弘烈)·신광리(申光履)와, 통정 대부로는 이의봉(李義鳳)·이동형(李東馨)·이겸빈(李謙彬)·조흥진(趙興鎭)·김이용(金履容)·이평(李枰)·유한녕(兪漢寧)·유갑기(柳甲基)·심기태(沈基泰)와, 시종(侍從)으로는 이종섭(李宗燮)·조홍진(趙弘鎭)·이청(李晴)·민양현(閔養顯)·김관주(金觀柱)·심낙수(沈樂洙)·오정원(吳鼎源)·오한원(吳翰源)·이의준(李義駿)·황장(黃樟)·심갱(沈鏗)·박종정(朴宗正)·심협(沈埉)·오익환(吳翼煥)·윤재순(尹在醇)·최수로(崔守魯)·유악주(兪岳柱)·홍시보(洪時溥)·유협기(柳協基)·김기상(金箕象)·김우국(金遇國)·조항진(趙恒鎭)·유숙(柳)·이심전(李心傳)·김양근(金養根)과, 참하(參下)로는 이건원(李健源)·박시수(朴蓍壽)·이인채(李寅采)·김약련(金若鍊)·박능원(朴能源)과, 무신으로는 백사은(白師誾)·이홍규(李弘逵)·이인수(李仁秀)·손극복(孫克福)·최운우(崔雲羽)·어도채(魚道采)·정충달(鄭忠達)·신대익(申大益)·김노범(金魯範)·권침(權綝)·이상직(李尙直)·허근(許根)과, 음관으로는 이재함(李在咸)·이하영(李河永)·김우(金愚)·조중첨(趙重瞻)·이윤명(李潤明)·이재형(李在亨)·윤문동(尹文東)·홍낙현(洪樂顯)·홍낙순(洪樂舜)을 혹은 전조에 명하여 검토해서 의망하게 하고, 혹은 어필(御筆)로 망단(望單)에 보태 써넣기도 하고 혹은 전망(前望)에 넣기도 하여 비점을 내려서 차례로 서용하니, 수십 년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비로소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더러더러 있었다.

 

병조가 이연필(李延弼)·이인수(李仁秀)·정준채(鄭駿采)·최운우(崔雲羽)·이의빈(李義彬)·이영수(李永秀)·권침(權綝)·조몽석(趙蒙錫)·손극복(孫克福) 등을 순장(巡將)으로 정원 밖에 더 뽑아 아뢰었는데, 이는 모두 벼슬길을 터준 것이었다. 상이 한번 뽑아 아뢰기만 하고 다시 벼슬자리에 검의(檢擬)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죄를 씻어주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빈 자리가 나는 대로 검의하도록 신칙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늘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김이준(金履準)이다. 비록 폐단을 막고 금령을 굳게 하려는 뜻에서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지만, 그 때의 일은 조금이나마 용서해 줄 만한 정상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그를 잡아들였다가 바로 용서해 준 까닭이다. 그가 비록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한들 초목과 함께 썩어가야 하는 처지임에야 어쩔 수 있겠는가. 옛 성왕들의 죄를 풀어주는 정사에서 찾아본다 하더라도 결코 이런 일은 없었다. 전 영장 김이준을 충익위(忠翊衛)나 충장위(忠壯衛)의 장수로 의망해 들이도록 하라.
또 그 다음으로는 윤형렬(尹衡烈)과 이상직(李尙直)이다. 형렬은 사실을 모르고서 체포하기 직전의 죄인에게 음식물을 준 것인데, 20년 동안이나 매장을 당했으니 그의 무식해서 망녕된 행동을 한 데에는 징계가 되기에 충분하다. 죄명을 특별히 씻어주고 우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거두어 쓰도록 하라. 상직의 경우는 그에게 죄범이 없었던 것이 그 증거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 사람만 유독 관대한 정사를 크게 벌이는 이 때에 빠트린다면 버려진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체로 순장 자리에 붙여주어 죄를 씻어주고 등용하는 계기로 삼으라.
이준 등 세 사람은 바로 이미 요지부동의 고폐(錮廢)를 당한 자들이다. 이 세 사람을 이같이 처분한 뒤에 다시 어떤 사람이 이 세 사람보다 어려울 것이 있어 검의하는 데에 주저할 바가 있었던가. 이는 전관(銓官)들을 위해서 하나의 지침을 내려 보인 것이니, 두 전장(銓長)은 모름지기 나의 고심(苦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김희(金憙)가 영흥부(永興府) 산골의 네 부락 유민(流民)으로서 지난 3월 중으로 되돌아온 수효를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만일 고을 원들을 거듭 신칙하여 성심으로 불러들였다면 제 고장으로 되돌아온 사람이 어찌 이같이 드물었겠는가. 전례를 뛰어 넘어 부역을 면제시켜 준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도신을 추고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행회(行會)를 엄히 신칙해서 간성(杆城)보다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한성 우윤 조진관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의 망부(亡父)가 30년 가까이 조정에 있는 동안 한 가지 생각으로 임금을 섬겼고 진실된 마음으로 일을 해나가면서 그 지론(持論)은 권세에 굽히지 않았고 일에 대해서는 원망과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절로 중한 죄에 걸려들었으니, 우리 성상께서 정상을 통촉하시고 불쌍히 여겨 살펴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온 집안의 도륙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 번의 은혜스런 하교는 해와 별처럼 환하여, 망부가 전관(銓官)으로 있으면서 속임을 당한 실상이 남김없이 풀렸습니다. 가슴 속의 본심을 형체 밖에 환히 드러내 주시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의리를 판명해 주시었으니, 이는 실상 죽은 신하가 다시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이 세상에 잔약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신으로서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이 때에 당연히 어떠한 마음이었겠습니까.
서관(西關)의 일 한 가지는 신의 아비가 죄를 받은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헤아려 내리신 덕음(德音) 가운데 ‘그 마음을 알 수 있다.[其心可見]’는 네 글자를 늘 외면서 ‘이 말씀을 간직하고 눈을 감으니 어찌 여한이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에게는 더욱 아픈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 죄명이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극에 이르지는 않았었는데, 다만 신이 지난 해에 슬피 호소하면서 사정을 말씀드리기에만 급급하여 유독 이 일을 부차적인 사건으로 간주함으로 인연해서, 말씀을 명백하게 올리지 못하고 일을 미처 조목 조목 열거하지 못함으로써 끝내 자신을 변명하려던 말이 도리어 씻기 어려운 죄안이 되었습니다. 머리를 짓찧고 가슴을 도려낸들 어디에 미치겠습니까.
지난번에 어가(御駕) 앞에서 슬피 호소하여 회계(回啓)하라시는 은지(恩旨)를 입기는 하였으나 유사(有司)가 아뢰지 않음으로써 이내 사실(私室)의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만일 성상의 총애만을 믿고 망부의 죄를 까맣게 잊은 채 재신의 반열에 태연히 앉아 있다면 이는 바로 일개 어버이를 버린 물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핑계를 삼아 군주를 섬길 것이며 또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죽은 아비를 뵙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죽은 경(卿)이 을미년043)  에 전관으로 있을 때의 일은 이미 속임을 당한 실상이 환히 드러나 자상하게 해명되었고, 서관(西關)의 일은 의당 한번 공론에 부쳐야 하는데, 묘당에서 아직까지 아뢰어 조처하지 않은 것은 비록 늦어짐을 면치 못한 것이나, 경은 마음을 억제하고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4월 18일 경진

심진현(沈晉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9일 신사

경모궁에 전배(展拜)하였다.

 

우참찬 정민시가 아뢰기를,
"말을 치는 방법은 우선 암말을 고른 다음에야 좋은 종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경》에도 이르기를 ‘큰 암말이 3천 필이다.’ 한 것이니, 말 치는 일은 반드시 좋은 암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국초에도 일찍이 빈달마(牝達馬)를 널리 구해다가 제주와 각 목장에 나누어 보내서 종자를 받는 말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 법이 오랫동안 폐해졌으니 목장에 좋은 종자가 없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북관 개시(北關開市)의 여러 금지 조항 중에는 빈달마를 내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시(開市) 때에 처음부터 많이 사들이지 않았고 저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서 가져오지 않았거니와 간혹 가져오더라도 매우 희귀하였습니다. 북관 개시의 암말 금지 조항을 삭제하여 말 장삿군들이 구애없이 사올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흥양(興陽)의 조세곡을 싣고 출발한 뒤에 전 감목관(監牧官) 정종주(鄭宗柱)가 급한 기민(飢民)을 구원한다고 말하며 중도에까지 뒤쫓아와서 쌀 1백 51석을 멋대로 가져갔습니다.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히 감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옛날에는 임금의 조서를 위조하여 창고문을 열게 한 자도 있었다. 상사(上司)의 체모가 비록 엄하다지만 조서에 비한다면 그 경중이 어떻겠는가. 더구나 몇 만 결(結)의 목장 세곡이 없어진 데 대해서도 그 까닭을 힐문도 하지 않는 판에 하필 구구하게 기민의 입으로 들어간 약간의 곡식에 대해서이겠는가. 잡아들이지 말고 원곡(原穀)에서 탕감하라."
하였다.

 

4월 20일 임오

조윤대(曺允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서구(李書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이 장계하기를,
"법성포(法聖浦)의 조운선 2척이 쌀 2천 70여 석을 싣고 교하(交河)의 통진(通津) 경계에 이르러 침몰하였습니다. 건져낸 쌀 1천 3백 29석과 황두(黃豆) 1백 26석은 법전에 따라 민간에 나누어 주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상납하는 쌀과 황두는 병오년044)  , 연품(筵稟)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한결같이 작년의 영남 조운선이 침몰되었을 때 다른 곡식으로 바꾼 규례와 같이 하여 각각 해당 고을들로 하여금 스스로 원하는 것을 좇아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 이르기를,
"기백의 장계 내용은 해괴하다. 이미 ‘건져낸 조악한 쌀은 규례에 따라 나누어 징수하겠다’ 하고서, 또 말하기를, ‘해당 고을들로 하여금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납부하게 하겠다’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두 번 세 번을 백성들에게 징수한단 말인가."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건져낸 쌀은 배가 침몰한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상납할 고을에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징수하기를 청했으니, 어찌 이러한 법조문이 있겠는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백성들이 장차 두 번 세 번 징수당하는 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기백의 장계 내용은 천만 해괴하다. 의당 파직하고 붙잡아들이는 법전을 급히 시행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하나, 자꾸 교체하는 것도 의당 염려할 바이니, 우선 함사(緘辭)로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우원의 장계에 ‘병오년 연품에서 정한 규정’이라는 것은 바로 서유방이 기백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마침 유방이 각신으로 등대해 있다가 아뢰기를,
"신의 처음 뜻은, 큰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거나 일부러 꾀를 써서 범행을 저지른 것을 제외하고, 이와 같이 일시적인 침수로 온 배의 곡식을 다 버릴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수령과 감색배(監色輩)의 소원을 그대로 따라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백성과 나라 양쪽을 위하는 도리가 될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관문(關文)을 묘당을 통해 연변의 고을에 보내어 알게 하였던 것이며, 과연 약간의 배가 다른 곡식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들으니, 각도에서 비록 큰 바다에서 전선(全船)이 침몰한 경우라도 일체 억지로 일시 침수한 것으로 돌려서 애당초 장계도 올리지 않고 다른 곡식으로 바꾼다고 이름하여 백성들을 소요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신이 애당초 신중하지 못하고 지레 시험부터 해본 것이 마침내 점차로 더욱 그릇된 일이 발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만일 이 일을 즉시 바로 잡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공문을 내서 엄히 신칙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법을 야박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 폐단은 탐욕스럽게 되는 것이다. 하(夏)의 충(忠), 은(殷)의 질(質), 주(周)의 문(文)도 또한 보태거나 더는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법이라 이름한 것으로서 오래도록 폐단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혹 일분의 이익이라도 된다면 수시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처음부터 허락을 아꼈던 것은 바로 당장의 이익은 적고 후일의 폐단은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침몰하여 썩은 것을 침수한 것이라고 혼동해 말한다면 이는 명칭은 비록 다른 곡식으로 바꾼다 하나 실상은 재차 징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령은 이로써 벼슬을 보전하는 데에 유리하게 여기고 선격(船格)들은 이로써 죄를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오직 고통과 곤궁을 겪는 사람은 백성들 뿐이다. 그 당시의 열거한 조항들을 애당초 계하하지 않았더라면 여러 도의 이같은 행위들이 어디에서 기인되었겠는가. 여러 도에 거듭 단속시켜 한결같이 법전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1일 계미

윤대하였다.

 

우의정 김이소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우리 성상의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히는 방도와 죄를 씻어주는 정사에 있어 전후의 하교는 더없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웠습니다.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들로서 누군들 감히 깨끗한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받들어 선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히 제수된 사람의 경우는 모두가 애당초 수용(收用)하는 논의조차에도 용납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밝으심으로 어찌하여 이같은 과중한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익환(吳翼煥)의 흉악한 상소문은 속셈이 남김없이 드러났고, 이청(李晴)의 죄상은 온 나라 안에 떠들썩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이겸빈(李謙彬)·심협(沈埉) 같은 부류들의 경우는 관계되는 바가 또한 어떠한데, 그들을 일례로 등용시켜 마치 아무런 죄과가 없었던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그 밖에도 큰 역적의 가까운 친척이나 흉악한 역적 집에 무상 출입하던 문객들이나 각종의 범죄로 흠이 있는 무리들이 모두가 제목(除目) 속에 끼어들었습니다. 이는 곧 법의 제방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라, 듣고 보기에 당혹스러워 신은 참으로 근심과 개탄이 번갈아 격절함은 물론이요 성상의 조정을 위해 이 일을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일전에 이조가 연거푸 정사를 벌여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진실로 성상의 인(仁)을 펴고 화기를 인도하려는 훌륭한 뜻을 우러러 본받은 데서 나온 것임은 알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두 건의 망단(望單)은 혹 완급(緩急)과 선후(先後)를 헤아리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막 개탄하며 괴이쩍게 여기던 참이었는데, 지금 이 10여 자리를 일시에 상께서 특별히 제수한 것은 모두가 천만 뜻밖이었습니다. 이같이 하여 마지 않는다면 장차 의리를 천명하고 국시를 밝혀낼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내려진 명을 거두소서. 그리고 승지가 관례에 따라 명을 반포해버리고 한번도 그 어려운 점을 아뢰지 않았으니, 임금의 명을 진실하게 출납하는 직책에 있어 어찌 이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해당 승지에게 파직의 법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오. 봄에는 나고 여름에는 자라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를 하는데 그 가운데 계절이 서로 바뀌는 자연의 묘리가 있는 것이다. 백성의 군주가 된 자도 법도에 순응하여 위엄과 복으로써 선한 자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가려내며 죽이고 살리는 것으로써 선한 자를 드러내고 악한 자를 억누르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내가 분발 독려할 적에는 눈서리가 가득하듯 엄한 기운이 넘쳤고, 내가 죄과를 널리 씻어 주는 데에는 봄버들이 무성하듯 화기가 넘치고 있다. 각각 그 시기에 따라 알맞게 조치를 한 것이니, 그러므로 ‘하늘의 일을 군주가 대신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형조가 전교를 위조한 죄인 이진(李軫)을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할 것으로 아뢰었다. 진이 전교를 위조하여 함열 현감(咸悅縣監)에 특별 제수되었다고 자칭하고서 고을 사람들을 속여 유혹하다가 포도청 기찰(譏察)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자백을 받아 죄안을 결정한 것이다.

 

4월 22일 갑신

부사과(副司果) 이유수(李儒修)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병정(丙丁)045)   연간의 여러 역적들은 전해주고 물려 받은 것이 뿌리가 있어 모든 흉심을 같이 한 무리들로서 대부분 머리를 달고 다니는 귀신들입니다. 그렇다면 전주(銓注)할 즈음에 의당 엄히 구별지어야 할 터인데도 인한(麟漢)·후겸(厚謙)의 결사적인 도당과 지해(趾海)·술해(述海)의 가까운 인척들로서 후익(後翼)과 관련된 자나 유성한(柳星漢)과 이리저리 걸린 자들을 차례로 검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흉역의 잔당들이 서로 줄을 이어 벼슬길에 나오게 될 것이니, 《명의록(明義錄)》은 읽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저 전관(銓官)들도 오늘날의 신자들인데 어찌 이런 의리를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버젓이 이렇게 한 것은 왜 까닭이 없겠습니까. 대체로 이 득실거리는 소인배들은 모두 지기가 같은 자들끼리 모인 패거리로서 겉으로는 공의에 눌려 감히 드러내놓고 두호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옛 소굴을 그리며 매양 기회만 닿으면 이끌어 올리기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가슴 속에 가로막혀 있어 제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히 드러난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엄한 처분을 내려서 죽기로써 도당을 위하고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상소문을 물리쳤다.

 

정언 심봉석(沈鳳錫)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막힌 것을 터주고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참으로 나라를 가진 이의 아름다운 정사입니다. 그러나 까닭없이 침체되었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입어 벼슬길이 막힌 자들에 대해서 공도(公道)를 넓히어 모두 수용하는 것이 바로 이른바 막힌 것을 터주는 것이요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의 정목(政目)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서 흉악한 무리와 역적 종자의 친·인척들에 대하여 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급급하게 의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유숙(柳)과 같이 역적 유성한(柳星漢)의 일에 관련된 자까지도 어려움 없이 의망되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 역적 성한은 무신·기유 연간의 역적을 전해 이어받고 을미·병신 연간의 역적의 뒤를 선 자로서 그 진상이 남김없이 발로되었고 역모의 절차가 환히 드러났으니, 그가 아직까지 이 세상에 머리를 달고 다니는 것만도 이미 충신 의사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이나 어떻게 감히 이런 역적들과 관계된 무리를 버젓이 등용하여 의리와 힘껏 싸움을 벌이면서 전혀 두려워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그날 정사에 참여한 전관들에게는 일체 모두 먼저 삭출(削黜)의 법을 시행하고, 유숙에 이르러서도 사단이 이미 제기된 이상 그대로 덮어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역적 성한과 아울러 자세히 조사하도록 할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신이 또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허다한 중비(中批)들을 보니 태반이 역적의 잔당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같이 너무도 지나친 일을 하십니까. 이 무리들이 아직까지 국법의 집행을 면한 것만도 이미 형벌을 대단히 잘못 시행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차례로 특별히 제수하여 안으로 청현(淸顯)의 직에서부터 밖으로 수령의 직까지 내렸습니다. 이같이 하고도 어떻게 군주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난적들이 두려워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제 내린 중비를 특별히 중지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유숙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유성한의 죄가 참으로 너의 말과 같다면 숙이 먼저 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를 갑자기 그들 부류로 몰아붙여 전관들까지 아울러 삭출하라는 청을 엉터리없이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사리가 있단 말인가. 벼슬길을 터주는[疏通] 한 조항에 이르러서도 명칭을 소통이라 한 이상, 묶여 있는 자를 터주지 않고 막혀 있는 자를 통해주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군주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양하겠는가. 더구나 요사이 검의(檢擬)한 것들은 오히려 너무도 어렵고 신중한 생각을 가지고 한 일이다. 어제 과연 규례를 벗어난 한두 임명이 있었기는 하나 중비를 어떻게 환수할 수 있겠으며 전관이 또한 무슨 죄가 있겠는가. 너 같은 자는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하루에 백 번씩 소를 올린다 하더라도 너희들만 수고로울 뿐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니, 우선 너를 체차한다."
하였다.

 

승지 이보온(李普溫)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지난 연간에 규탄을 받은 죄목은 바로 ‘의당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한 마디 말이었다. 그러나 전혀 증거가 없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완전한 사람이 아주 드물 것이다. 전망(前望)에 낙점한 뒤로 전조(銓曹)가 공공연하게 정목(政目)에 올리지 않음으로써 옛날 그대로 애매한 속에 있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면죄가 된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어찌 사사로이 경을 좋아해서이겠는가. 바로 조정의 하는 일이 타당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경은 즉시 사진(仕進)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대간의 소에서 이미 견삭(譴削)을 청하였는데 어찌 억지로 행공(行公)하게 하여 예로 뿌리는 의리를 어그러뜨릴 수 있겠는가. 일단 체면을 세워주고 천천히 참다운 대양(對揚)의 효과를 책임지워야 할 것이다. 이조 판서 서유방, 참판 이재학, 참의 이면응을 지금 우선 체직한다."

 

승지 심진현(沈晉賢)·유강(柳焵)·이익운(李益運)·이사렴(李師濂) 등이 아뢰기를,
"일종의 흉악한 무리들이 나라에 화를 빚은 지 몇 해가 지났습니다. 무신·기유 연간에 근원이 시작되어 그 지류(支流)가 끝없이 넓어져서 병신·정유 연간에 소탕을 당하고도 뿌리가 아직 남아 있어, 머리를 붙이고 숨을 죽이며 기회만 노리는 무리들이 진실로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방(堤防)이라는 두 글자가 있음을 힘입어 그런 대로 구차하게나마 편암함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의리가 날로 어두워져서 혹은 천지의 법도에 배치되기도 하고 혹은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적에게 깃발을 세워주기도 하니, 의당 전하께서 환히 굽어 살펴 공평의 도리를 엄히 지켜서 국가의 터전을 공고하게 하고 난의 싹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막힌 것을 소통시켜 화기를 인도하는 일로 인하여 도리어 하늘에 가 닿는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바로 청요(淸要)의 좋은 자리에 앉혀진 자들이 태반은 흉역의 잔당들이어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홍국영(洪國榮)·송덕상(宋德相)과 생사를 같이한 자들이 아니면 바로 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유성한(柳星漢)·윤구종(尹九宗)을 성원하는 자들입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지 거의 20년을 헤아리는 동안 정사에 흠이 없고 덕화로 다스림이 맑고 깨끗하여 태평의 정치가 조석 간에 이르게 되었는데, 강강(剛强)함으로 이겨낸다는 경계를 소홀히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호령하는 것을 깡그리 잃어 굳건히 지켜야할 규율이 하루 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별의별 괴상한 무리들이 온갖 길을 통해서 한꺼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들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벼슬에 있으면서 예전에 없던 그릇된 일을 목도하고서 근심하고 개탄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후의 특별 제수를 일체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럭저럭 스무 해 동안에 승진을 못하고 뒤쳐져 있던 자들이 과연 몇 사람이겠는가. 억울함은 오래될수록 더욱 불어나기만 하고 정성과 신의는 오래될수록 더욱 막히기만 하였다. 혹 소통시켜 준다고 말만 하고서 부싯돌처럼 번쩍하다가 말고 신기루(蜃氣樓)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사람들의 눈만 어지럽힌다면 그 실상을 공평하게 고찰해볼진대 도리어 일을 해치게만 될 뿐이다. 지나치면 위엄을 부리는 조짐이 있게 되고 미치지 못하면 누를 끼치는 탄식이 있게 되는데, 어찌 일찍이 충심으로 나라를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참다운 대양(對揚) 정책에 분발 노력하여 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은 자를 한 번이나 보았던가. 이렇게 하면서 백성의 욕망을 따라주는 정치를 해보려는 것은 또한 오활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할 죄인이 아닌 경우에는 오래거나 가깝거나 경하거나 중함을 막론하고 모두 섞어서 등용하도록 하라. 이것이 곧 정사를 닦아 밝히는 새로운 법식이다. 경들의 녹록한 속된 견해야 어찌 유무에 관계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법식을 새롭게 하는 초기에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런 무리들이 당당한 상서성(尙書省)에 드나들어서는 안 되니, 일체 모두 도성 밖으로 쫓아내서 대궐문에 법령을 게시한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남소 위장(南所衛將)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차자를 올려 승지들의 무죄함을 변호하고 쫓아내라는 명을 중지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모든 일이 치우치면 병통이 생긴다. 그래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의 처분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니고 다만 마지 못해서일 뿐이니, 그러므로 ‘허물을 보고서 어짊을 안다.[觀過知仁]’고 한 것이다. 경이 만일 지금 나의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나의 고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고질병에는 독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효험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지금의 풍속을 통해서 지금의 폐단을 구원하려면서 어떻게 대승기탕(大承氣湯)에 좌사(佐使)의 두 맛을 가미(加味)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046)   승지를 내쫓은 것은 법령을 게시하는 뜻에 불과한 것인데, 무어 지나치게 걱정하고 탄식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3일 을유

행 부사직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오익환(吳翼煥)은 바로 흉적(凶賊)의 시초가 된 자이고 이청(李晴)은 바로 극악한 역적과 마음이 서로 연결된 자로서 맥락이 서로 얽히어 한 꿰미에서 나온 자들이고, 이겸빈(李謙彬)의 패악한 상소는 바로 위간(偉簡)의 은밀한 사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음험하고 참혹하기가 그지없어 생각하면 비통하고 분개스럽습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이 아직까지 죽음을 면한 것만도 이미 형벌이 크게 잘못 시행된 것인데 지금 갑자기 한 장의 전망(前望)만 가지고 아무 어려움 없이 근밀(近密)의 지위와 삼사(三司)의 자리에 특별히 낙점하시니, 성명의 세상에 이토록 비상한 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김관주(金觀柱)와 심협(沈埉)처럼 관계가 매우 긴중한 자와 윤재순(尹在醇)과 유협기(柳協基)처럼 역적 측근의 졸개들과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조홍진(趙弘鎭)과 군부에게 무례했던 이의봉(李義鳳)이 혹은 승정원에 들어 가고 혹은 가까이서 모시는 반열에 끼었으니, 어찌 물정에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내리신 명을 빨리 중지시키소서."
하였는데, 비답하지 않았다.

 

행 부사직 정범조(丁範祖)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근일 정사의 주의(注擬)는 이 무슨 변괴입니까. 이의직(李義直)과 민백분(閔百奮)은 본시 극역과 숙질간의 관계로서 혹은 낯을 바꾼 계능(啓能)이기도 하고 혹은 머리가 달린 상간(相簡)이기도 한데 이들을 정사 때마다 별러 의망하였고, 이심전(李心傳)과 이보온(李普溫)은 흉악한 역적의 인척들로서 혹은 후익(後翼)과 마음이 서로 통하였고 혹은 홍섭(弘燮)과 무리지어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마음대로 선발하여 관직에 복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정목(政目)이 한번 반포되자 온 세상이 크게 경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만으로 이미 물정을 크게 거스른 것인데, 어제의 허다한 전망에는 또 어찌하여 낙점을 하신단 말입니까.
오익환과 이겸빈의 상소 내용은 지극히 참혹하고, 김기상(金箕象)과 이춘보(李春輔)는 관련된 것이 매우 중하고, 심협과 유악주(兪岳柱)는 답습한 것이 나온 데가 있고, 이경심(李敬心)과 민양현(閔養顯)은 흠점을 숨길 수가 없는데도 모두 다 죄명을 씻어주어 다 같이 벼슬길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중도에 벗어난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해당 전관들을 특별히 엄하게 감죄하시고 전후의 제지(除旨)들은 일체 모두 환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답하지 않았다.

 

특명으로 승지 이의직(李義直)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이보온(李普溫)을 영종진 병마 첨절제사(永宗鎭兵馬僉節制使)로, 이평(李枰)을 월곶진 병마 첨절제사(月串鎭兵馬僉節制使)로 보임하였으나, 의직 등이 의리를 끌어대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어필(御筆)로 이동형(李東馨)을 양주 목사로 삼는다고 덧붙여 쓰고서 도백에게 명하여 장교(將校)를 지명해서 임소까지 직접 수행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대간의 논박을 입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하늘의 법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법도를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경들과 같은 규모를 가진 자가 이러한 때에 양전(兩銓)의 장관이 되어 옛 전장(銓長)들이 감히 행하지 못했던 큰 정사를 행한 것은 첫째도 군주의 뜻을 받아 선양한 것이요 둘째도 군주의 뜻을 받아 선양한 것이다. 더구나 일전에 연석에서 반시(頒示)한 것을 어느 관원인들 듣고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간의 소장에서 논한 말들은 어리석은 촌사람 중에 촌사람의 말이니, 굳이 말을 허비하며 깊이 인책할 필요가 없다.
또 조정이 아랫사람들을 수족과 같이 생각하는 도리로 말하더라도, 그날 내린 전교가 이미 엄하고 준절하였고 또 다시 반복하여 곡진하게 타일렀었다. 그리하여 경들이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몸소 앞장서서 맨먼저 이 일을 감당하였다. 만일 나라를 향하는 충성심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내기가 쉽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이로 인해서 경들이 낭패를 당한다면 이것이 어찌 경들이 스스로 취한 것이겠는가. 필부(匹夫)가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마치 자신이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처럼 여기는 것인데, 더구나 이조·병조의 장관인 경들에게 있어서랴. 경들은 위엄과 복의 권병이 군주에게 있다는 것만 믿고 날로 더욱 군주의 뜻을 받들어 선양하여 규모를 굳게 정하라. 이 같이 하교하였는데도 두 전조 가운데 만일 머뭇거리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나라에 일정한 법이 있는 만큼 나는 말을 거듭하지 않겠다."
하였다.

 

4월 26일 무자

전교하기를,
"스스로 확고한 주견이 있으면 어찌 뭇사람의 말에 흔들릴 수 있겠는가. 한번의 주의(注擬)가 모두 군주의 뜻을 선양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기회를 타서 흔들어대는 말들이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곧 지난번 비답에서 이른바,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때 이 전관들에게 만일 위임하여 성공을 책임지우지 않는다면 고심하는 일이 질서를 잡아 나가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등용길을 넓히고 죄명을 씻어주고자 한 정사가 도리어 무고한 전관들에게 해만 끼치게 될 것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미 나의 뜻을 보여주었고 의리에 처하는 것도 이미 펴이도록 하였으니, 전 이조 판서 서유방, 참판 이재학, 참의 이면응에게 다시 전당(銓堂)의 직임을 제수하고 감히 의리를 끌어대는 일이 없도록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방 등이 상소하여 의리를 이끌어대서 피혐하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정사를 보도록 재촉하였다.

 

4월 27일 기축

특별히 서유방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이재학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이면응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보임하였다가, 이내 명하여 다시 전직을 제수하였다. 유방 등이 대궐 밖에 거적을 깔고 앉아 대죄하면서 누차의 부름을 어기고 정사에 나오지 않자, 상이 분의와 기강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세 전당을 곤임에 특별 보임하였다가, 조금 뒤에 전교하기를,
"이들 세 전당에게 다시 정사를 보도록 이미 은미한 뜻을 보였으니 말이란 신의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거조는 신하의 본분과 크게 관계되는 것인데 한결같이 독려하고 신칙만 한다면 어찌 이러한 국가의 기강이 있겠는가. 이것이 첫째의 이유이다. 총재란 이 얼마나 중요한 직임인가. 그렇다면 잠시 체직하였다가 이내 유임시키는 것이 의리상으로는 시원스럽게 펴인 것은 아니지만, 설사 오늘은 그냥 공무를 수행하더라도 또 장차 후일의 정사에서 사사로운 사정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의 이유이다. 금방 보임했다가 바로 환수하는 것 또한 본말이 전도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같은 조처는 기왕의 관례에도 분명히 있었던 일이거니와, 이렇게 한 다음에야 일의 면모가 바르게 되고 명령이 신의가 있게 되고 규모가 정해질 것이다. 통제사 서유방을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병사 이재학은 참판에 제수하고, 수사 이면응을 참의에 제수하노니 그들을 패초하여 정사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조경(趙瓊)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화진(金華鎭)을 판의금부사로, 조진택(趙鎭宅)을 경상도 관찰사로, 백사은(白師誾)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이동식(李東植)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이득제(李得濟)는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가 이내 금군 별장으로 유임시키고 신대현(申大顯)으로 대신 임명하였다.

 

4월 28일 경인

승지 이서구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형방(刑房)의 일을 맡고 있어 대신(臺臣)의 거취를 신이 주관해야 하는데, 오익환(吳翼煥) 같은 무리도 헌부의 직책에 있으므로 다시(茶時)의 접대를 의리상 규례대로 거행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그의 상소문을 물리쳐버리고 특별히 익환을 성환 찰방(成歡察訪)에 임명하여 체면을 세워주었다.

 

특별히 심협(沈埉)을 수양 산성 별장(首陽山城別將)에 보임하였는데, 이는 협이 집의(執義)로 부르는 명을 어겨서였다.

 

승지 민백분(閔百奮)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047)  의 고택(故宅)에 경이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기에 옛날을 생각하는 뜻에서 특별히 제수하였던 것인데, 나이가 이미 지났으므로 특별히 한가한 곳으로 옮겨 제수하노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고, 이어 동지돈녕부사를 제수하였다.

 

상이 이의명(李義明)·이윤명(李潤明)·이하영(李河永)·김우(金愚)·이재형(李在亨)·윤문동(尹文東)·허근(許根) 등을 망단(望單)에 덧붙여 써넣고서 차등있게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어 전당(銓堂)과 담당 승지에게 신칙하기를,
"오늘 특별히 낙점한 자들에 대해서 만일 번거롭게 떠들어대는 일이 있을 경우 어제 지방관으로 보임했던 전당들에게는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할 것이고, 해당 승지는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할 것이다."
하였다.

 

4월 29일 신묘

지평 홍시보(洪時溥)가 상소문을 지어 기강을 무너뜨린 전관의 죄를 논박하였다. 이 때 시보도 소통시켜 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미 올렸다가 후회하고는 곧 이어 찾아갔다. 상이 그 일을 은밀히 듣고는 연신들에게 이르기를,
"들으니 새로 임명된 한 대간이 상소문을 가지고 승정원에 왔는 바, 소통시킨 일을 가지고 전관들을 배척하여 바로 역적으로 몰아붙여서 자못 심봉석(沈鳳錫)보다 더 심했다고 하였다. 그도 소통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그의 처지에서 도리어 소통시켜 준 전관들을 논박하다니 어찌 이러한 기강이 있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명월 만호(明月萬戶)에 보임시키라."
하였다가, 이내 그에게 팔순의 노모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서지전(不敍之典)만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승지를 보내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에게 치제하였다. 인녕군(寅寧君) 정인환(鄭寅煥)이 시골에서 올라왔다. 상이 그의 숙사 단자(肅謝單子)를 보고 물어보아 그가 철의 7세손임을 알고는 마침내 철에게 치제하도록 명한 것이다. 또 인환에게도 쌀과 고기를 하사하며 옛 어진이의 후예를 기억하는 뜻을 보였다.

 

장연(長淵)의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사짓고 살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앞서 좌참찬 정민시가 아뢰기를,
"서북의 폐사군 지역인 후주(厚州)의 서남쪽 섬들은 처음에 야인들이 들어와 살고 해적들이 침략해옴으로 인해서 그 땅을 버려두었지만, 지금은 야인이나 해적의 걱정이 없어진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백성들이 농사짓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말에 날로 백리의 땅을 넓힌다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유용하게 쓸 땅을 노는 땅으로 두고 있으니 극히 무의미한 일입니다. 고려 때 조운흘(趙云仡)은 ‘대청과 소청 등의 섬은 모두 비옥한 땅과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이익이 있다.’ 하였고, 고 상신 유성룡은 ‘신미도(身彌島) 등은 땅이 넓어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장연의 대청도와 소청도를 황해 수사로 하여금 자신의 비장(裨將)을 보내 둘러보아 장문하게 하고, 선천(宣川)의 신미도와 철산(鐵山)의 대가차리도(大加次里島)·가도(椵島)는 선천 부사가 직접 둘러보아 장문하게 한 뒤에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가 아뢴 말을 합당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황해도 수군 절도사 이우현(李禹鉉)이 치계하기를,
"대청도는 동서의 거리는 3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20리입니다. 동쪽으로 소강 행영(所江行營)과의 거리는 뱃길로 2백 리이고, 북쪽으로 백령진(白翎鎭)과의 거리는 30리이며, 동북쪽으로 장연(長淵) 무룡포(舞龍浦)와의 거리는 1백 30리입니다. 겹겹의 산과 봉우리가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내동(內洞)·고사동(庫舍洞)·사언동(沙堰洞)·판안구미(板案仇味) 등 네 개의 큰 골짜기가 있습니다.
내동은 북쪽의 높은 산봉우리 아래 부스러진 기와 조각들이 있는데, 세속에 전해오는 말로는 원(元)나라 황제가 살았던 옛터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는 바로 옥자포(玉子浦)로 길이는 10리쯤 되고 너비는 수리(數里)쯤 되는데 좁은 곳도 2백여 보(步)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윗쪽은 토질이 척박하여 다만 사이 사이로 밭을 만들 수 있었고, 아랫쪽은 모래땅이 기름져서 개간할 만하였습니다.
고사동은 길이가 3리쯤 되고 너비는 2백여 보쯤 되는데, 윗쪽은 층을 이루는 바위와 널려진 돌들이 묻혀 있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경작할 만한 땅이 없고 아래쪽은 지형이 조금 평평하면서 흙빛이 거무스레하여 개간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골짜기 어귀의 포구와 잇닿는 곳에 가로막은 뚝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가 돌무더기라서 매양 밀물이 들 때이면 짠물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사언동은 하나의 긴 골짜기에 불과합니다. 양쪽의 벼랑은 모두 암벽이고 가운데 작은 개울 하나가 구불구불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어 전혀 개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판안구미는 너비가 사언동과 대략 서로 같은데, 골짜기 막바지에 땅이 평평하여 백여 말[斗]의 곡식을 부릴 만하였습니다.
대체로 네 골짜기 중 내동이 가장 개간하기에 적합하고 그밖의 세 골짜기는 산이 아니면 골짜기이고 골짜기가 아니면 벼랑이며, 솔·느릅·뽕·상수리·개암·오동·떡갈·노나무 등이 곳곳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사면의 바다 기슭은 가파른 벼랑이라서 방어 시설을 할 수 없고 어살을 칠 곳도 없으며 소금이나 굽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소청도는 대청도 남쪽 뱃길로 30리쯤에 대청도와 마주하여 있습니다. 남북이 10여 리이고 동서가 5리인데 북쪽으로 백령진과의 거리는 60리이고, 동쪽으로 소강 행영과의 거리는 1백 80리이며, 동북쪽으로 장연의 무수룡포(舞袖龍浦)와의 거리는 1백 50리입니다. 네 개의 산봉우리가 늘어서 솟아 있는데, 동북쪽으로는 사대구미(寺岱仇味)·경생동(鯨生洞)·모전구미(茅田仇味)·탑동(塔洞) 등 네 개의 골짜기가 있으나 밑바닥까지 다 석벽(石壁)이어서 한뙈기도 경작할 만한 땅이 없고, 남쪽으로는 능동(能洞)과 왜진동(倭津洞)이 있으나 모두 바닷가에 바싹 붙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우모진(牛毛津)·죽전현(竹田峴)·내진(內津) 등 세 곳이 있으나 또한 모두 높고 험준하여 씨를 뿌려 가꿀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섬의 서남쪽은 땅이 비옥하므로 개간해서 전답을 만들만합니다. 나무들은 대체로 떡갈나무가 많고 동백(冬栢)과 춘백(春栢)이 십중 칠팔이었습니다."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백성의 수효가 날로 늘어가는 때에 모든 이용 후생에 관계되는 도리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두 섬의 면적이 이미 광활하니, 백성들에게 경작을 허락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또 해상의 방어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이 출몰하여 고기를 잡아가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만일 지금부터 땅을 개간하고 백성을 모아들여 그들을 추격하여 잡고 감시하게 하기를 마치 연해의 여러 곳과 같이 한다면 또한 변경을 굳건히 하는 정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백성을 모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고, 농우소와 종자 곡식을 편리할 대로 도와주게 하되, 우선은 나무를 베어 팔아서 개간하는 데에 드는 물력(物力)에 보탬이 되도록 하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평안도 청북 수군 방어사(淸北水軍防禦使) 정학경(鄭學畊)이 치계하기를,
"신이 신미도·가도(椵島)·대가차리도를 달려가서 살펴 본 형편을 별단(別單)에 갖추어 보고합니다. 그리고 탄도(炭島)·소가차리도(小加次里島)·대화도(大和島)·소화도(小和島)·웅도(熊島)·우리도(牛里島)·진도(眞島)는 비록 비국의 관문(關文)에 열거한 것은 아니나, 이미 이 세 섬의 근방이므로 일체 조목조목 나열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별단은 다음과 같다. "신미도는 선천부(宣川府)의 남쪽에 있는데,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는 20리입니다. 본부(本府)의 남면(南面) 돌사리(乭泗里)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면 본도(本島)의 당후포(堂後浦)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5리이고, 남북은 50리이고 사방 둘레는 1백 40리이며, 살고 있는 백성은 94호이고,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고 있는 밭은 2백 97일 갈이이고,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고 있는 논은 61석 5두 2승 지기로 모두 세전(稅錢) 7백 50냥을 사복 시에 상납합니다. 이보다 더 경작하고 있는 밭은 41일 갈이이고 더 경작하고 있는 논은 1석 11두 4승 지기로 모두 세전 73냥 9전을 선사진(宣沙鎭)에서 받아들입니다. 상등(上等)의 밭에서는 1일 갈이당 8, 9석을 수확할 수 있고 상등의 논에서는 마지기당 30말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노는 땅으로 밭을 개간할 만한 곳은 1백 83일 갈이이고 노는 땅으로 논을 개간할 만한 곳은 30석 7두락입니다. 나무는 잡목이 많고 샘은 1백 30개이며, 곡식은 벼·기장·피·보리·밀·콩·팥·조·목화·참깨·들깨·녹두·메밀이 잘되고, 물고기는 숭어[秀魚]·진어(眞魚)·조기[石魚]가 잡힙니다. 가도는 철산부(鐵山府)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는 30리입니다. 선사진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예사포(汭泗浦)에 이르게 되는데, 동서의 거리는 15리이고 남북은 10리이며 사방 둘레는 30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47호입니다.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는 밭은 96일 갈이이고,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는 논은 2석 5승지기로 모두 세전 1백 84냥을 사복 시에 상납하고 있습니다. 더 경작하고 있는 밭은 70일 갈이이고, 더 경작하고 있는 논은 3두 2승지기로 모두 세전 1백 23냥을 선사진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곳의 상등 밭에서는 1일 갈이 당 6, 7석을 수확할 수 있고, 상등의 논에서는 1두락당 22, 23두(斗)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노는 땅으로 밭을 개간할 만한 곳은 1백 97일 갈이이고, 노는 땅으로 논을 개간할 만한 곳은 13두락입니다. 샘은 48개이고, 곡식은 벼·조·콩·팥·목화·보리·밀·메밀이 잘되며, 고기는 숭어·민어(民魚)·조기가 잡힙니다. 대가차리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는 35리입니다. 본부 수청면(水淸面) 대변정리(待變亭里)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북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리 반이고 남북은 2리이며 사방 둘레는 6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7호이고, 현재 경작하고 있는 밭은 10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면적이 좁아서 개간할 만한 노는 땅은 없습니다. 나무는 수십 그루 밖에 없고 샘은 4개입니다. 곡식은 조·콩·팥·메밀이 잘되고, 백성들은 대부분 조개를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습니다. 탄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는 65리입니다. 본부 수청면 대변정리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서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7리이고 남북은 3리이며 사방 둘레는 15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20호입니다.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는 밭은 22일 갈이이고, 대장에 올라 있는 현재 경작하는 논은 2두 8승지기인데, 사복시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더 경작하고 있는 밭은 15일 갈이인데 선사진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노는 땅으로 밭을 개간할 만한 곳은 22일 갈이입니다. 소가차리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도 40리입니다. 본부의 수청면 대변정리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서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리이고 남북은 1리이며 사방 둘레는 7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4호이고, 현재 경작하고 있는 밭은 9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웅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40리이고 뱃길로는 60리입니다. 본부의 수청면 대변정리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동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리이고 남북은 1리이며 사방 둘레는 7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6호이고, 현재 경작하는 밭은 9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대화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30리이고 뱃길로는 85리입니다. 본부의 태산면(台山面)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북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리이고 남북은 6리이며 사방 둘레는 15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7호이고, 현재 경작하는 밭은 7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 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소화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30리이고, 뱃길로는 80리입니다. 본부의 태산면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북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2리이고 남북은 6리이며 사방 둘레는 15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7호이고, 현재 경작하는 밭은 7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우리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30리이고 뱃길로는 1백 10리입니다. 본부의 태산면 유사리(楡沙里)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서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5리이고 남북은 1리이며 사방 둘레는 13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5호이고, 현재 경작하는 밭은 5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진도는 선천부의 남쪽에 있는데, 본부에서 육로로는 30리이고 뱃길로는 1백 20리입니다. 본부의 태산면 유사리에서 배를 타면 본도의 서쪽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의 거리는 4리이고 남북은 2리이며 사방 둘레는 12리입니다. 거주하는 백성은 2호이고, 현재 경작하는 밭은 5일 갈이인데, 본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대체로 탄도·소가차리도·웅도·대화도·소화도·우리도·진도는 땅이 이미 협소하여 개간할 만한 빈땅이 없고, 이밖에 또 횡건도(橫建島)·첩도(蝶島)·갈도(葛島)·자리원도(赭里院島)·오도(梧島)·유도(杻島)·지도(芝島)·호도(虎島)·옥지도(玉池島)·어영도(魚暎島)가 있으나 모두 인가와 전토가 없고 개간할 만한 땅도 없습니다. 첩도에만 두세 인가와 약간의 전토가 있는데, 모두 원 장부에 올라 있어 세금을 내는 땅들입니다.".】 관찰사 이병모가 치계하기를, "신미도 등 세 섬의 개간할 만한 땅들은 모두 목장 안의 산 중턱 윗쪽에 있으므로, 목장을 옮긴 다음에야 비로소 경작하는 것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밖의 보를 막아 논을 만들 만한 곳은 비록 그 숫자가 적다고는 하더라도 섬 사람들이 이익을 입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중지되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85면
【분류】과학(科學) / 호구(戶口) / 농업(農業)
관찰사 이병모가 치계하기를,
"신미도 등 세 섬의 개간할 만한 땅들은 모두 목장 안의 산 중턱 윗쪽에 있으므로, 목장을 옮긴 다음에야 비로소 경작하는 것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밖의 보를 막아 논을 만들 만한 곳은 비록 그 숫자가 적다고는 하더라도 섬 사람들이 이익을 입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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