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진
윤대하였다.
부수찬 어용겸(魚用謙)이 상소하기를,
"아,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토역(討逆)에 대한 금령이 있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성상의 성스러우시고 신묘하시고 문덕(文德)과 무위(武威)를 겸비하신 것은 모든 제왕들보다 월등하건만, 불행히도 세상에 사건은 많은데다 전하의 뜻을 헤아려 드리지 못함으로써 매양 번거롭고 괴로움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지나친 정사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이르러 그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함으로써, 병조는 궐문에서 막고 승지는 승정원에서 물리쳐, 성리(省吏)와 대례(臺隷)들이 상소문을 안고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그렇게 하고 두 번 그렇게 하다 보니, 듣고 보는 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어, 옛날에는 놀라워하며 근심하고 탄식하던 자들이 지금은 전례를 따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습니다마는, 성스러우신 전하로서도 또한 어찌 ‘마땅히 금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셔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오직 이는 말하는 자들이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는 전연 아무 것도 살피지 못하다가 막 꿈에서 깨어나면 비로소 처음으로 듣는 것 같아서, 성실과 신의가 바탕이 없어 하는 일이 실수부터 저지르고, 일을 일으키고 중지하는 것이 장난 같아서 나라의 체통이 따라서 손상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아래 있는 자들의 죄입니다.
또한 신이 애석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서슴없이 간할 수 있도록 북을 설치해 두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간하는 자를 막는 문을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옛날에는 말을 받아들이는 관원을 두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말을 거절하는 관청을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성은 비록 지극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은 의로운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 의리를 밝혀서 성실의 경지에 이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로잡는 일을 지나치게 시행해서 그 의리를 밝힐 길까지 아울러 끊어버리고 마침내 성실해질 수 있는 기회를 꺾어버린단 말입니까. 엄혹한 눈 서리에 한 번 꺾이고 나면 화창한 봄바람과 상서로운 구름이 아무리 따스한 김을 불어넣어, 꺾이고 찢긴 것을 깁고 때워 준다 하여도 끝내 완전한 물건은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금령이 아직도 남아 있어 후일의 폐단이 이미 열렸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또 요즈음 소통(疏通)시켜 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담겨지고 충신과 역적이 반열에 나란히 서게 되었습니다. 어제의 일은 전일의 일보다 놀랍고 오늘의 일은 또 어제의 일보다 놀랍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전관들이 번거롭게 떠들어댈까가 염려되면 그들을 먼 곳에 유찬시키기로 작정하시고, 승지들이 즉시 받들어 순종하지 않을까가 염려되면 그들을 머나먼 섬으로 정배하려고 작정하심으로써 뭇 신하들로 하여금 넋이 빠지고 정신을 잃어 스스로 몸둘 곳이 없게 하였으니, 어찌 신하를 예로 부리는 의리에 손상이 있지 않겠으며, 대성인(大聖人)의 말씀하는 즈음에도 어찌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말은 간혹 절실한 곳도 있으나, 금령을 둔 것은 마지못한 것이다."
하였다.
집의 이동직(李東稷)을 파직하였다. 동직이 상소하여 근일의 중비(中批)와 상이 덧붙여 써넣어 벼슬을 제수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상소를 물리치고 전교하기를,
"오늘날 언관(言官)들을 구분지어 처치하기는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조금 너그럽게 대해 주려고 하면 써올리는 글들이 끝없이 몰려들고 너그럽게 않으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듯하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속담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바로 요사이 대신·각신들을 대하기 어려움을 두고 이른 말인 것 같다. 이번 이동직의 상소는 대체로 어용겸(魚用謙)을 엄히 배척하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용겸의 상소는 말이 이렇게 박절한 데는 이르지 않았고 간혹 또한 절실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상소는 그와는 반대로 심지어 ‘용이나 뱀이 달리 변화하는 것은 결코 그럴 이치가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이번에 제수된 사람들을 일러 폐기된 자들을 기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옳을 것이다. 모두가 역적의 죄명을 씻어주고 철칙의 법안을 용해시켜 파격으로 등용시킨 것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일이고 보면, 누가 과연 용이며 누가 과연 뱀이란 말인가. 말하는 사람은 비록 쉽게 하였겠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또한 괴롭지 않겠는가.
또 말하기를 ‘승냥이[豺]나 경(獐)048) 과 같이 사나운 종자들에게 괜히 기세만 돋구어 주는 것이다’고 하였으나, 전망(前望)에 낙점하여 내린 것이나 정망(政望)에 덧붙여 써넣은 자들이 또한 응당 연좌되어야 할 자의 집안 사람들이 아니고 보면 종자라는 말은 또한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같은 상소들을 모두 국사를 말한 것으로 쳐주어 관례에 따라 비답을 내린다면 그 탄핵을 당한 자들의 심정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벼슬을 제수한 일이 도리어 나쁜 뜻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동직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헤아리지 못한단 말인가. 집의 이동직에게 불서(不敍)의 법전을 속히 시행하라."
하였다.
특명으로 응교 조홍진(趙弘鎭)을 웅천 현감으로, 부교리 이의준(李義駿)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교리 이청(李晴)을 임진 별장(臨津別將)으로 보임하였는데, 모두가 의리를 내세워 오만하게 부름을 어겼기 때문이다.
특별히 강서(江西) 사람 김후손(金厚孫)에게 승정원 좌승지·사옹원 부제조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가 강서 현령 유언육(兪彦錥)의 첩정에 의거해 치계하기를,
"《강서읍지(江西邑誌)》에 이르기를 ‘고을 사람 김후손은 부잣집이었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선조 대왕이 용만(龍灣)에 머물러 있다가 계사년 6월 10일에 영유(永柔)에서 본현으로 행행하여 그 해 8월 10일에야 거가가 서울로 돌아가니, 그 기간은 꼭 두달이었다. 전쟁을 치른 끝이라 고을의 물력이 바닥이 나서 수라를 마련할 길이 없었는데, 후손이 직접 어주(御廚)의 책임을 지고서 자기 집 재산을 기울여, 60일 동안 삼궁(三宮)의 어공(御供)과 거가를 호종한 여러 신료들의 접대에 드는 비용을 모두 혼자서 감당하였다. 남자들은 등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서 10리 밖까지 계속 쌀을 날랐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집앞으로 건너다닌 시내를 가리켜 천도천(千渡川)이라 이름하였다.’ 하였고, 그의 후손 김응복(金膺福)이 편찬한 가승(家乘)에는 이르기를 ‘강서현의 아사(衙舍)의 옛 이름은 혜선당(惠鮮堂)이었는데, 선조 대왕께서 머물러 계실 때에 동낙헌(同樂軒)이라 명명하였다. 이 당시 호종했던 신하로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서문과 시를 지어 새겨서 걸었고, 그 뒤에 동악(同岳) 이안눌(李安訥)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화답시를 지어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김후손이 일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60일 동안 접대를 한 일은 한 때 임금을 호종한 노고의 정도 뿐만이 아니니, 국가에서 옛 공을 기념하고 후인을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포증(褒贈)의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장계를 예조에 내렸는데, 예조가 의당 증직의 은전을 내려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의례적인 증직으로는 그의 충성을 보답할 수 없다고 여기어 특명으로 좌승지 겸 사옹원 부제조를 초증(招贈)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행적을 작은 빗돌에 기록하여 천도천 가에 세워서, 원근에서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표창한 본의를 모두 알게 하도록 하였다.
5월 2일 계사
전교하기를,
"모든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시작하고서야 어찌 혹시라도 내버려 두어 시작을 잇지 못한다는 탄식을 초래해서야 되겠는가. 문무(文武)의 청홍첨(靑紅籤)들은 거의 모두가 의망되었으나, 음관(蔭官)에 이르러서는 벼슬길이 막혀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비로소 해방(該房)의 승지로 하여금 뽑아 올리게 하였던바 써 들여온 것을 보니 생각했던 것에 비해 그다지 크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차차로 거두어 녹용하려면 한두 달은 걸려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만일 즉시 조처하지 않으면 결코 가닥을 잡아나가는 효험이 없을 것으로 안다. 이런 뜻을 거듭 밝혀 전조를 엄히 신칙하라. 세속에서 도정(都政)을 일러 전관의 임기가 끝나는 때라고 하는데, 지금의 전당(銓堂)들이 만일 음관을 거두어 등용하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체직시켜 달라는 간곡한 청에 대해서 또한 어찌 계속 안 들어줄 필요가 있겠는가. 아울러 이러한 뜻을 알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임기가 찬 수령과 중앙의 6품 관리로 임기가 찬 사람들에게 우선 사과(司果) 벼슬을 주고, 그 대신은 문관·음관·무관의 자리를 막론하고 아울러 음관을 차례로 거두어 녹용하도록 하였다.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음관인 송계상(宋繼相)·이의화(李義和)·임희묵(任希默)·김기형(金箕衡)·홍병덕(洪秉德)·이지광(李趾光)·박응환(朴應煥)·조중진(趙重鎭)·이현기(李顯紀)·권성응(權聖應)·윤흠렬(尹欽烈)·한태유(韓泰裕)·황은(黃檃)·이의교(李義敎)·이동실(李東實)·김중행(金重行)·이승수(李昇洙)·유회(柳誨)·윤인국(尹寅國)·조시형(趙時衡)·홍양유(洪亮猷)·이인호(李仁祜)·이유간(李有幹) 등에게 아울러 차등 있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특명으로 부교리 유한우(兪漢㝢)를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보임하였는데, 이는 그가 머뭇거리며 벼슬에 나오지 않아서였다.
5월 3일 갑오
특명으로 교리 김관주(金觀柱)를 용궁 현감(龍宮縣監)에 보임하였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 머물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아서였다.
5월 4일 을미
전교하였다.
"지금 뽑아 녹용할 만한 자들은 거의 모두 뽑아 녹용하였는지라, 지금부터는 규모가 거의 정해진 것이니 내쫓았던 여러 신료들의 죄명을 씻어줄 것이다."
이조 판서 서유방, 참판 이재학, 참의 이면응이 사직소를 올려 체차되고, 이병정(李秉鼎)·정범조(丁範祖)·이면긍(李勉兢)으로 대신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신기(申耆)가 치계하기를,
"간성군(杆城郡)의 유랑민으로서 전후로 되돌아와 사는 자와 새로 들어와 사는 자가 모두 5백 4호로서 계묘년049) 의 총수에 비하여 2백 10호가 더 많습니다. 신이 이 고을에 순행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낱낱이 어루만져 위로하고 인하여 각각 그들의 예전에 살았던 곳을 물어보니, 본군에 원래 호적이 있는 민호로서 유랑하다가 되돌아온 자는 매우 적었고 다른 고을과 다른 도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든 자가 반수를 넘었습니다. 다른 도의 백성으로 거져 먹여주기를 바라고 일시적으로 와서 사는 자들은 모여들었다 되돌아 갈 염려가 없지 않으므로, 해당 군에 관문으로 신칙하여, 되돌아온 사람이거나 새로 온 사람을 막론하고 특별히 마음을 써서 돌보아 주어 영구히 편히 살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계묘년에 비해 총수가 2백 10호나 더 늘어났다고 하는데 불러 모으느라 정성을 다한 것이 기쁘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본시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만일 각별히 무마하여 그들이 도착해서 뿌리를 내리게 하고야 말기를 기하지 않는다면 앞서 거듭거듭 당부한 은근한 뜻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미치겠는가. 도백은 예전 영윤(令尹)으로 본을 삼고 본 고을 수령은 옛 태수(太守)로 모범을 삼아 마음을 다해 부지런히 힘써서 빛나는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5월 5일 병신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김상집(金尙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상동(尹尙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6일 정유
하직 인사를 드리는 수령과 찰방들을 불러 보았다. 성현 찰방(省峴察訪) 한태유(韓泰裕)에게 전교하기를,
"오늘 성현 찰방 한태유를 보게 되었으니 의당 옛일을 기억하는 뜻을 보여야겠다. 을미년050) 에 사관을 보내서 하유할 적에 누가 그 본의를 몰랐었겠는가. 대신이 사관에게 부쳐 아뢴 말은 지금까지도 장중하게 외우고 있다. 더구나 그 후 첩지(牒紙)를 되돌려 주는 전교와 후손을 녹용하게 한 연교(筵敎)가 있고 나서는,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자들도 반드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 더구나 작년 이맘 때 번거롭게 떠들어댈 적에는 고상(故相)의 일을 들어 지적해서 또한 거듭거듭 해명을 했었다. 그런데 그 고상의 아들이 지금에야 비로소 거두어 녹용하는 가운데 끼어들었으니 잘못된 일이라 이를 만하다. 수령은 현과(現窠)인 까닭에 해조가 단망(單望)으로 추천하였지만, 이 뒤로는 고상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는 좋은 자리나 그렇지 못한 자리를 막론하고 절대로 구애하지 말아서 조정에서 선한 자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징계하는 정사에 있어 구별하는 바가 있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에게 이르기를,
"오늘 고상 한익모(韓翼謩)의 일에 대해서 이 같이 분명하게 밝힌 것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의 정상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 당시의 일을 한 판부사(韓判府事)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역적 인한의 경우는 그것을 알면서도 감히 저지하는 꾀를 내었으니, 세상에 어찌 이렇게 흉악한 자가 있겠는가. 이번 소통이 있은 뒤로는 넘보는 무리들이 기회를 틈타 기승을 부리는 일이 생기기 쉬우리니, 오늘날 조정의 신료들이 만일 그 내막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반드시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하였다.
5월 7일 무술
상이 승지에게 일렀다.
"근일의 소통시키는 일은 잘 이루어졌다. 병신년에 역적을 다스리면서 이열 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을 썼기 때문에 그래도 남아난 자들이 있는 것이니, 만일 혹시라도 이수 치열(以水治熱)의 방법을 썼더라면 아마 남아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오늘날 소통시킬 사람이 있겠는가. 비록 막아야 할 자는 막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천도(天道)도 오히려 ‘10년이면 조금 변한다.[十年少變]’고 하는데, 더구나 영원히 벼슬길을 막을 필요가 없는 자에 대해서랴."
5월 9일 경자
사헌부 대사헌 김상집을 파직하였다. 상집이 여러 차례 소명을 어겨 오다가 이윽고 밤이 깊어진 뒤에 장차 사은 숙배를 하겠다며 승정원으로 하여금 유문(留門)051) 을 계청해 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상이 처신하는 의리가 전도되었다 하여 특별히 파직하고 전망에 조상진(趙尙鎭)을 더 써넣어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심진현(沈晉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함경도 관찰사 김희(金憙)가 영흥 부사 박기풍(朴基豊)의 첩정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영흥의 산마을 네 곳은 병오년052) 식년 호적 정리 때의 원 호수(元戶數)가 2천 4백 86호였는데, 그 후 무신·기유년 두 해에 흉년이 거듭 들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자들이 5백 70호나 되었다가 작년 5월부터 금년 4월까지 전후로 5백 62호가 되돌아 왔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는 단지 8호 뿐입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5백 70호가 거의 모두 다시 모여든 것은 비록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하필 5백 70호로 한정을 삼겠는가. 만일에 이전의 가장 많았던 총 호수를 상고해 본다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많은 총 호수에 한하여 그들이 모두 다시 모여든 뒤에 장문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관동의 간성(杆城)과 관서의 강계(江界)에 신칙하여 아울러 이 예를 비추어 따르게 하였다.
5월 10일 신축
황단(皇壇)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충신들의 자손을 불러서 보았다.
사헌부 대사헌 조상진의 벼슬을 깎아버렸다. 상진이 사헌부에 나와, 자신의 본래 처지가 합계(合啓)하는 데에 연명하여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피혐하였는데, 그것은 양사가 한창 조시위(趙時偉)를 성토하고 있었는바 상진은 바로 시위의 5촌 친족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근일 기강이 씻은 듯이 사라져서 홍시보(洪時溥) 같은 자가 많이도 있구나. 밤을 지새며 대사헌의 망(望)을 두고 논란을 벌였고 신칙하는 전교도 어떠하였던가. 그렇다면 전계(前啓)에 참여하고 안하고는 잠시 소명에 응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늘, 기상과 지조를 보이는 것으로 간주하고서 여러 차례의 패초(牌招)로 불러도 듣지 않으니, 김상집(金尙集)도 이미 해괴한데 더구나 경이겠는가. 상집은 비록 늦은 시각에라도 바로 응하려 했었는데, 또 더구나 경은 이미 밤을 넘기고서도 굳이 거절한단 말인가. 헌부에 비록 경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장관이 없겠는가. 전망(前望)에 더 써넣은 것이 너무 지나친 일이었음을 스스로 알겠다. 우선 삭직의 벌을 내려 징계할 바를 알게 하노라."
하였다.
5월 12일 계묘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전염병에 걸린 죄수들에게 약을 주어 치료하게 하였는데, 이는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을 삭직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총융청에 급대(給代)할 내년조의 해서(海西) 좁쌀 5백 석을 총융사 이방일이 해당 도에 관문을 보내 미리 가져다 썼다고 하므로, 그 관문을 가져다 보니 비국에 논보(論報)한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겨울에 해당 총융청이 본사에 보고한 것에는 당년의 몫을 초봄에 내달라는 것이었고, 내년 몫을 올해에 당겨다 쓰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방일이 본사에 보고했다 하고서 미리 지출하도록 하였으니 너무도 놀랍습니다. 그를 삭직하소서. 그리고 해당 도신으로 말하더라도 선혜청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단지 총융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지레 내주었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이름을 지적해 현고(現告)를 받아서 잡아다가 신문하여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광섭(李光燮)을 파직하고 잡아 오게 하였다.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장계하기를,
"청주 덕평(德坪)에 사는 전 부사 구순(具純)이 도적을 맞고는, 순의 집 이웃에 사는 반족(班族)인 김명신(金命新)을 도적의 괴수라고 말하여, 병영에서 김명신을 잡아다가 달포 이상을 가두어 두고 조사를 하였으나 끝내 확실한 증거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밖에 무고한 평민들도 많이 모진 형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 진영의 영장들을 시켜 함께 조사하도록 하였더니, 신문에 응답한 사람들의 공초에 모두 ‘구순이 김명신과 본래부터 원한이 있어 항상 그를 기필코 해칠 생각을 품어오다가 음해하는 꾀를 만들어 생판 무근한 말을 지어서 교묘하게 도적을 만난 양 꾸미고서는, 행랑 하인들을 사주하여 밖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교졸(校卒)들과 결탁하여 이들에게 그의 성명을 써서 건네주어 억지로 도적의 괴수라는 누명을 씌운 것인데, 명신 이외에도 전후로 잡혀들어간 여러 사람들이 모두 구순의 집에서 미워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구순의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청주 영장(淸州營將) 이문협(李文協)은 토포(討捕)의 직책에 있으면서 추고하고 조사하는 일을 병영의 비장에게만 전적으로 맡겨놓고 병사의 명령만을 따르면서 수수 방관하였으니 또한 매우 놀랍습니다. 그를 파출하소서. 그리고 병사 이광섭은 터무니 없는 말을 외 곬으로 믿고서 죄도 없는 사람들을 잘못 잡아들여 끝내 원통함을 품고 병들어 죽게 하였으니, 이는 한쪽이 그른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를 승소하도록 판결한 죄과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 죄상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하여 광섭을 파직시키고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감죄하기를 청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이 장계를 보니 구순의 일을 논열한 것이 이와 같구나. 그도 또한 사람일 터인데 보통 인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행위를 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이를만 하다. 약간 도적을 맞고서 숫자를 많이 불리어 관아에 고발하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도적을 맞지도 않고 도적을 맞았다고 말한 것이야말로 그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도에서 올린 장계와 조사 문건이 저와 같이 명백하니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돌릴 수가 없다. 또 더구나 김명신이라는 사람이 원통함을 품고 죽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병들어 죽었는지의 여부는 막론하고 원통함을 품은 것은 사실이요, 구순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미 이 사실을 듣고서야 어찌 예사로 보아넘겨서 지레 처단할 수 있겠는가. 구순을 우선 의금부로 하여금 바로 잡아다가 수금하고 엄히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화성(華城)의 궐리사(闕里祠)가 완공되었다. 진휼청의 창고에 유치된 돈 2천 민(緡)을 떼어 보내서 사우(祠宇)를 세우는 데 든 비용을 갚게 하였는데, 이는 비변사가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전교하였다.
"모든 일은 균평하게 하여야 한다. 더구나 사람을 등용하는 정사이겠는가. 문관·음관·무관들에게 등용의 길을 넓힌다고 이름하여 오랫동안 눌려 지내던 자들을 이미 다 거두어 등용하였고 보면, 이름은 관안(官案)에 올라 있는데도 적자(嫡子)들과 함께 거론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피아의 차별없이 똑같이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거듭 전조에 신칙하여 서자의 무리로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있는 자들을 오늘 정사에서부터 차차로 거두어 등용하고, 중인(中人) 중에서도 만일 그런 자가 있으면 모두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윤국(李潤國)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이 날 정사에서 상이 김상겸(金相謙)을 망단에 더 써넣어서 내렸는데, 상겸은 김상복(金相福)의 서동생이었다. 이조 판서 이병정, 참판 정범조가 상소하여 이를 취소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유한녕(兪漢寧)이 아뢰기를,
"김상복의 죄가 죄안에 명백히 올라 있는데 그의 아우를 벼슬에 임명하는 것은 크게 세도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금지하는 한계가 이미 정해져서 궐문(闕門)에 밝게 게시되었으니, 당연히 연좌시켜야 할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똑같이 대해주는 정사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한 다음에야 《명의록(明義錄)》의 참된 제방(堤防)이 의당 더욱 견고해질 것이고 참된 의리가 의당 더욱 엄격해질 것이다. 이러한 본의를 일반 사람들도 알고 있는데, 자신이 근밀(近密)의 직임에 있으면서도 거듭 신칙한 나의 고심을 알지 못하고 감히 이같이 시끄럽게 떠들어 마지않는단 말인가. 저 아무런 지각이 없는 초목들도 오히려 크고 작은 유(類)로 구별되는 것인데, 더구나 살아 있는 사람의 무리이며 사대부 집안의 후예이겠는가.
김상복의 그 당시 일은 단지 아둔하고 겁에 떨려 죄를 자복하는 것만이 살 길인 줄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었으니, 비록 그의 선대인 죽은 정승과 강화 유수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되었으나, 참으로 이른바 허둥 지둥하는 가운데 모르고 저지른 소행인 것이다. 그러니 처분이 여기에 그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이를 만하다. 기왕 당사자의 죄가 여기에 그쳤고 보면 그밖의 사람이야 다시 무어 연루시킬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들을 거두어 등용하는 것을 가지고 제방과 의리를 지나쳐버린 것이라 하여 이같이 고집해 쟁론한다면 도리어 망발의 폐단이 있어 국시(國是)에 해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 한계를 밝게 보여 주는 도리에 있어 처분이 없을 수 없으니, 동부승지 유한녕에게 파직의 법을 속히 시행하라."
하였다.
승지 서정수(徐鼎修) 등이 진계하여 유한녕을 신구하니, 비답하기를,
"왕의 말이란 미덥기가 금석(金石)과 같은 것이다. 쇠를 용해할 수 있고 돌을 부서뜨릴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백번 불린 다음에야 쇠가 되고 갈아도 닳지 않은 다음에야 돌이 되는 것이다. 요즘에 법으로 공포한 것은 20년 동안 고심의 결과이다. 김상복의 일을 이제 널리 유고(諭告)한 것은 상복을 위해서가 아니요 바로 신의를 보여서 법령을 믿게 하고자 해서이다.
대체로 《명의록》은 하나의 《춘추》인데 대의를 붙들어 세우고 떠받치는 방도는 간당(簡當) 두 글자에 있다. 더구나 연루되어 면직된 자도 죄를 씻어주고 등용시키는 터에 이 사람은 연루되어 면직된 자도 아님에랴. 나도 세상 물정을 오래 겪어보았기에, 근래의 처분들이 혹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넘보는 길을 열어준 것이 될까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는 참으로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나의 뜻이 이미 크게 정해졌으니 뭇사람들의 의혹이 당연히 절로 풀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리가 날로 밝아져서 소오줌이나 말똥까지도 모두 거두어 쓰게 될 것이니, 어찌 좋은 소식이 아니겠는가. 승선에 대한 처분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바로 본의를 밝게 보여주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경들의 취소해달라는 계청도 또한 직책을 잘 수행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한다."
하였다.
수찬 심낙수(沈樂洙)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평생을 곤경에 처한 것은 신이 실상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신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매양 세상의 변고를 볼 때마다 감히 말을 하여서 망녕되이 당쟁을 없애고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마치 물을 막는 것과 같아서 막는 족족 터져 버렸습니다. 처음 생각에는 한줌의 흙으로 약간만 막아서 물살의 힘을 조금 누그러뜨려 평온한 흐름으로 바꾸어 보려고 했었으나, 끝내 그 어지러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거세게 달리는 파도를 돌리지 못한 채, 큰 창고에 한 알의 곡식과 같은 극히 왜소한 존재가 마침내 산더미 같은 파도에 떠밀리어 힘이 다하고 마음도 지쳐서 전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신 유언호(兪彦鎬)가 연석에서 아뢴 말과 대신(臺臣) 조진정(趙鎭井)이 참여한 탄핵은 어느 것인들 마음을 들어내어 시원하게 변명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김한기(金漢耆)의 상소는 국시와 관계된 것이니 더욱 먼저 변명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아, 귀주(龜柱)의 죄상은 한 세상의 이목이 있고 천년토록 전해질 공안(公案)이 있으니, 어느 한 사람이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유 대옥(丁酉大獄)053) 에 이미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가 곧 바꾸어 체포하도록 하였고, 다시 곧 그대로 방치했었으나, 무술년054) 에 종묘에 고유(告由)할 때에는 또한 귀주도 언급하여 위로 고하고 아래로 반포하자 신명이나 사람이 모두 분개해 하였습니다. 양(量)과 익(翼)은 정리가 골육이나 마찬가지라는 공초는 국문 초안에 명백하게 쓰여져 있거니와, 귀주가 그런 위인이 된 까닭은 애당초 양해로부터 연유된 것입니다. 그런데 호서와 서울 사람들이 모두, 귀주의 무리가 성토했던 자는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이었으나 후겸이 오갈 때마다 양후(養厚)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고, 인한이 언뜻언뜻 끌어 당기면 언형(彦衡)이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목하는 바인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아, 선대왕의 지극히 밝으신 덕으로 하늘을 삼키려드는 화난을 미세할 때에 이미 꿰뚫어 보아 먼저 그 기미를 살펴내고 미리 그 싹을 잘라버려서 귀주로부터 당파의 속셈을 자복받아 거듭 외척들을 경계시켰으니, 천지 신명이 귀주의 머리 위에 있다고 하신 하교는 지금까지도 사람마다 외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기(漢耆)를 위하여 상소문을 초한 자들은 유독 상제의 좌우에서 선왕의 신령들이 환히 내려다 보심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감히 국시를 변환시켜 난폭한 말로써 협박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단 말입니까. 그 상소에 이른바 ‘일어난 곳에서 일어났다’고 한 그 흉악한 무리들을 신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는데 신을 그들의 무리라고 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우습기만 합니다.
윤숙(尹塾)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신이 서읍(西邑)에 있을 때에 보았는데, 신이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만 통분해 했을 뿐 감히 함부로 발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에 대해서 상소와 아뢰는 말들이 연달아 터져 나오다가 이내 바로 중지되었습니다. 신이 일찍부터 분통스러워 간간이 다른 일을 말하는 때에 대략 언급한 적이 있었고 그 후 끝까지 소급하여 논의할 때에 다시 낱낱이 말씀드렸었습니다. 허공에 띄워 말하는 의리야 누군들 말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물려받은 수법이라고 욕하면서 전후로 귀주를 성토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정도인데도, 마치 신이 혼자서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은 또한 과연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신이 전후로 남의 말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한쪽 사람들과 합치되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대의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신이 처음 시종(侍從)으로 재직할 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귀주의 죄상을 논렬하면서, 이 역적을 토죄하지 않으면 만사가 다 거짓되어 추악하고 음사한 무리들이 서로 동아리를 이룸으로써 화란이 갑자기 일어날 경우 그 요원의 불길 같은 기세를 막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이 말은 이미 저 파당들의 깊은 미움을 입었으나 그 당시 신의 생각에는 실로 깊은 근심이 있어서였습니다. 이윽고 홍국영(洪國榮)의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오로지 귀주의 무리들에게서 바탕하여 온 세상을 몰아쳐 억제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쫓겨남에 미쳐서는 성토하는 논의들이 송덕상(宋德相)과 환억(煥億)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덕상의 흉악한 말이 바로 국영에 대한 명백한 증거인데도 다른 말만을 지적해서 얼버무리려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신이 일머리 돌아가는 것을 보니 재앙의 기미가 반드시 말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겠기에 환억을 논척하면서 ‘단(丹)을 녹이어 원(元)으로 환원시킨다.[消丹反元]’는 비유를 하였는데, 이는 실로 신의 고심 끝에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한쪽 사람들에게 부합되기를 바란다는 비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덕상이 삭출됨에 이르러서는 시끄럽게 떠드는 말들이 심지어 사화(士禍)라고까지 하면서, 신더러 이론(異論)에 빌붙어 사류를 해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마침내 상소를 올려 흉역의 근본이 의리를 가탁한 데서 빌미가 비롯되었음을 대략 말하면서 삼가 주 부자(朱夫子)의 이른바 ‘나라가 망하기 전에 선비가 먼저 없어진다.’는 뜻에 붙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상하여 말이 깊고 의리가 간절한 나머지 차마 똑바로 볼 수도 없는 오만 가지 기괴한 것들에 대하여 정히 소견은 있었으나 말이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함으로 인해 수고로이 책망하시는 전교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뭇사람의 비방이 신을 가리켜 소인이라 지목함으로써 호해(湖海)의 옥사와 택백(澤白)의 변고가 어느덧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지방 고을로부터 막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갑작스럽게 천지 고금에 없었던 역적의 변고를 보았고, 이 무렵에 또 귀주가 육지로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신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그 그림자는 살피고 있었던 터라 마침 입시하는 기회에 생각했던 바를 대략 말씀드렸던 것인데, 서로 동아리를 지어 틈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 그들의 은밀한 속셈에 크게 저촉되어 남곤(南袞)·심정(沈貞) 같다는 지목과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얼토당토 않다는 배척이 마침내 시끄러이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 같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해 봄에 과연 군사를 일으킨 율(瑮)의 옥사가 역적 하(夏)와 서로 연결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는 신이 다시 사진(仕進)하지 않다가 관북(關北)의 임명을 받고 부임하여 일을 보았으나 묵묵히 마음을 썩이며 참은 것이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미년055) 의 상소에서는 다른 것을 돌볼 여가가 없이 극악한 변고와 흉험한 환란을 경계하는 뜻에서 환란의 근원과 역적의 소굴을 깊이 거슬러 올라가, 신이 종전에 겁에 질려 감히 가벼이 말하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의혹된 말이라고 신을 배척하였는데, 상께서만은 홀로 환란을 염려한 것이라고 이르셨으니 당시 전하의 하교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상소는 이미 징토(懲討)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고 죄를 청함도 파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벼슬길을 막아서 다시 말을 할 수 없도록 하였고, 필경에는 지방관으로 의망하고서 신이 부임하지 않을 줄을 알고는 이조 서리의 머리채를 움켜 잡았다는 꿈에도 없는 말을 아무 어려움 없이 상께 아룀으로써 이로 인해 귀양까지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사람들을 대하여 ‘천하에 말로 인해 쫓겨난 소인은 없고 또 남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류(士流)는 없다.’고 했었습니다.
신이 용서를 받고 살아 돌아와서는 또 다시 말썽이 있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그들은 또 진정(鎭井)의 상소를 꾸며내었습니다. 그 상소에서 논핵한 말들은 모두 헛된 그림자로서 신을 과녁으로 삼아 기어코 맞추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꾀가 또 이루어지지 않자 심환지(沈煥之)가 마침내 나와서 진정을 신구하였고, 이어 한기(漢耆)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13년 동안 겪어온 일들입니다. 신이 성토했던 것은 역적이었을 뿐이니, 이것이 당목(黨目)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을 족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기해년056) 여름에 한 쪽에서 장차 큰 죄안을 뒤집으려 한다는 말을 가지고 덕상(德相)이 연석에서 아뢰기까지 하였고, 유장(柳戇)은 그 말을 세상에 전파시켰습니다. 그 해 겨울에 환지가 신에게 어떤 일을 가지고 한쪽을 논핵하도록 권유하면서 누구 누구를 거명까지 하였으나 신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환지도 신의 뜻이 공정한 견해에서 나온 것이요 사사로운 호오(好惡)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신이 처음으로 환억(煥億)을 논박하자 이 때에 환지가 갑자기 신더러 한 쪽 세력에 부합하기를 바란다는 비방을 일으켰습니다. 남곤과 심정 같다는 얘기도 환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나 신은 일소에 붙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신축년057) 에 신이 상소하여 귀주의 혈당(血黨)들에 대하여 대강 언급하였으나 신의 본의는 꼭 그를 지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환지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 신에게 시와 편지를 부쳐왔기에 신은 또 웃으며 회답하였습니다. 또 유악주(兪岳柱)의 상소에 대해서 환지가 이것은 당로자를 풍자한 것이라고 하면서 역적 율(瑮)을 종용하여 소개해서 사람들을 모아들인 자취가 마치 진흙탕에 빠진 짐승과 같았던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환지를 만나 웃으며 그 사유를 물어보았더니 환지는 말문이 막혀 또한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그 후 대신의 이른바 의혹된 말이라는 배척과 대신(臺臣)의 이른바 일망 타진하려 한다는 말들도 모두 환지가 주창한 ‘한쪽 세력에 부합하기를 바란다’는 말에서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신을 지적하여 증거대기를 이재간(李在簡)의 당여라고 일렀습니다.
신은 본시 우직하여 평생에 당여가 없었는데 당여가 없는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병신년 여름에 귀주와 정이환(鄭履煥)의 명성이 혁혁하였고 이 때에 신은 겨우 벼슬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환지가 귀주와 이환이 서로 사귀고자 하는 뜻을 전하면서 신에게 그의 집에서 서로 만나도록 요구하였으나 신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해년 겨울에는 환지가 낙순(樂純)의 뜻이라며 신을 꾀었으나 신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 당시에 형세가 한 세상을 흔들어댔는데도 신이 빌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미년 겨울에는 전 우상 김종수(金鍾秀)가 사람을 통해서 신에게 말하기를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얼토당토 않다는 배척은 내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안다.’ 하면서 서로 합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신은 당시에 버려져 있는 터라서 거절하고 따르지 못했었습니다. 신이 그 당시 어디에 부합하려고만 하였다면 어찌 부합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도리어 취향도 다른 이재간에게 빌붙었겠습니까.
그리고 환지가 진정을 신구할 적에는 대각의 풍채를 갖추었다고 하면서 짐짓 그의 상소의 맨 끄트머리의 말을 끌어댔는데 실상은 신을 논박한 것입니다. 신이 환지와는 의리로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고 지내는 정리로는 옛 친구입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말과 의논이 현격하게 서로 달라 의리상으로는 구차하게 서로 같을 수 없었지만 정리로는 서로 유지하려고 하였기에, 서로 마주하여 있을 때는 매양 빈정대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그 역시 노여워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변명하며 웃고 대꾸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조정에 있을 때는 번번이 일깨워주었고 그의 친족을 만나서도 그를 위해 근심하고 탄식하기도 하였는데, 신의 뜻은 후하였건만 그는 도리어 원망만 깊었습니다. 신이 악주의 상소를 대해서도 어찌 통렬하게 진술하고자 않았겠습니까마는 환지는 신을 저버리더라도 신은 저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율(瑮)의 옥사가 있은 뒤로 떠도는 풍문에 환지가 말하기를 ‘율은 바로 여립(汝立)이다. 반평생을 속임을 당한 것이니 만일 성상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이발(李潑)과 이길(李洁)과 같은 주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발이 만일 살았더라면 반드시 맨 먼저 조문열(趙文烈)058) 에게 찾아가 사례하였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환지가 진심으로 참회하였다면 의당 맨 먼저 나를 찾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의 이 말은 물론 장난으로 한 말이지만 또한 그가 면모를 바꾸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바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의 상소에서도 만일 진정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또한 환지를 함께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은 환지에 대해서 정성을 쏟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환지는 신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기필코 얽어 무함하고자 합니다. 10여 년 동안 한쪽 세력에 부합하기를 바랐다는 말도 모두 환지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의 상소가 아직 나오기 이전인 기유년 겨울에 환지가 진정이 한 말을 가지고 공공연히 위협하기를 ‘만일 자복하지 않으면 규탄하는 글이 곧 나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듬해 여름에 진정의 상소가 나왔는바 그 상소에서 의도한 것은 오로지 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정의 상소가 환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았는데, 환지가 또 떨쳐 일어나 이어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진정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환지는 반드시 아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역당이라는 죄목은 함부로 남에게 덮어씌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과 환지를 함께 유사로 하여금 거듭 신문하게 하여 신에게 일호라도 역당에 근사한 점이 있으면 신이 의당 복죄(伏罪)할 것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환지가 당연히 무망(誣罔)의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신의 역적 토죄하는 논의를 가지고 매번 한쪽 세력에 부합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함으로써 역적을 토죄하는 뜻이 참으로 한쪽의 사사로운 주장일 뿐이요 공안(公案)이 아닌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끝까지 조사하기를 청한 것은 바로 율(瑮)과 선복(善復) 두 사람의 옥사였습니다. 그런데 신을 일러 ‘화난을 일으킬 생각을 품고 착한 사람을 음해한다.’ 하고, 혹은 ‘온 세상 사람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인다.’ 하고, 혹은 ‘일망 타진하려 한다.’고도 하였으나, 인정으로 헤아려볼 때 기필코 이럴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선창하자 백 사람이 화답하니, 신이 말한 것들은 참으로 의혹을 사기 쉽게 되었고 하고자 한 일도 의심스러운 것처럼 됨으로써, 신은 어느덧 한쪽에 빌붙는 사람이 되어 신의 몸이 당한 추욕은 이미 말할 수도 없게 되었거니와 종전에 징토했던 대의(大義)마저도 장차 신으로 인해서 함께 무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곧 신이 마음을 썩히며 골수에 사무쳐 기필코 변명해 밝히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진정이 말한 정주(政注) 운운한 일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니, 신이 만일 구구하게 떠들어댄다면 아마도 식견 높은 사람의 웃음거리만 될 것입니다. 신은 이미 버림받은 사람으로 자처하는 처지인만큼 변명을 하여도 유익함이 없겠거니와 덧붙여 진술하여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도 신은 또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병을 앓기 시작한 지 5년이니 죽을 날도 머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10여 년 동안 시종하던 신하로서 말이 여기에 이르니, 스스로 감회에 젖어 다시 말씀을 올립니다.
지금 민생의 곤궁함과 선비 기풍의 어긋나고 어지러움과 조정 기강의 무너져 해이함과 국가 경영의 애통함이 어느 것인들 급박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오직 임금과 신하의 큰 의리가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된 것이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있기 시작한 이후로 오늘날의 조정과 같은 조정은 없었습니다.
근년의 일에 나아가서 말하더라도 조덕린(趙德隣)의 일에 대해서 어려움을 아뢸 때에 조진도(趙進道)의 삭과(削科) 때의 일을 가지고 김상로(金尙魯)와 홍계희(洪啓禧)의 일을 본받아서 감히 상을 핍박하고자 한 것이야말로 그 흉악한 의도를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일을 두 가지로 단락지어 의리를 흐리멍덩하게 만들고 서로서로 번갈아가며 거짓말을 지어내서 차츰차츰 옛날의 투를 답습함으로써 거짓과 오류가 온 세상에 퍼지더니, 이윽고 다시 성한(星漢)과 구종(九宗)의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성한이나 구종도 역시 사람의 마음을 지녔을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공공연히 경묘(景廟)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고 또 무슨 까닭으로 공공연히 전하께 무함으로 핍박하려 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귀에 젖고 눈에 익어져 모두 다반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택징(澤徵)이 국문하는 마당에서 나[我]라고 칭한 것이나, 홍징(泓徵)의 흉악한 글에서 상을 범한 것이나, 하(夏)와 율(瑮)의 천고에 없었던 흉악한 말이나, 구선복(具善復)과 우진(宇鎭)의 두 글자를 만들어 낸 흉악한 의도는 기필코 불온한 말을 제창하여 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한 것인데, 그것을 전해받은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상로와 계희 이후, 새로 일어난 일이 점점 전에 있었던 일보다 심해졌으니, 이전의 일을 말미암아 뒷날의 일을 미루어 알 수 있고 뒷날의 일을 말미암아 앞서의 일을 더욱 실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단락마다 서로 통하고 일마다 서로 부합하여 지금까지 40년 동안을 흉악한 역적의 뿌리가 되어, 인심이 동요되고 국시(國是)가 혼란하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일기(一紀)059) 가 지난 지 이미 오래인데도 규모가 정해지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았습니다. 타고나신 슬기를 혼자 운용하시어 흉악한 무리들의 간계와 맞서 나가기도 겨를이 부족한 형편인데, 뜻밖에 변고라도 일어나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면 후회하여도 때는 늦을 것입니다. 신은 상로와 계희 이후 전후로 계승되어온 역적의 소굴을 끝내 소탕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나라꼴이 못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물리쳐버렸다.
5월 13일 갑진
상이 재계하느라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15일 병오
이 때 휘릉(徽陵)060) 의 정자각(丁字閣)을 수리해 고치는 역사가 있었다. 역사를 끝냈다는 서계가 승정원에 이르렀는데도 승지가 상이 재계하는 중이라는 이유로 받아두고 아뢰지 않았는데, 상이 경연의 신하들을 통해 듣고서는, 일의 관계됨이 막중하므로 재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어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파직하고 급히 그 계본을 찾아오게 하여 호조 판서와 능관(陵官) 등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5월 17일 무신
사관과 선전관을 동쪽 교외와 서쪽 교외와 남쪽 교외에 나누어 보내서 농사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5월 19일 경술
호남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끝마쳤다. 【공진(公賑)으로는 병마 절도영과 우도 수군 절도영의 나주(羅州)·장흥(長興)·영암(靈巖)·진도(珍島)·보성(寶城)·낙안(樂安)·용담(龍潭)·만경(萬頃)·흥양(興陽)·강진(康津)·해남(海南)·옥구(沃溝)·진안(鎭安)·함열(咸悅)·구례(求禮)·운봉(雲峰) 등의 고을과 사도(蛇島)·고금도(古今島)·가리포(加里浦)·고군산(古羣山)·군산(群山)·방답(防踏)·위도(蝟島)·임치(臨淄)·임자도(荏子島)·녹도(鹿島)·마도(馬島)·발포(鉢浦)·신지도(薪智島)·어란(於蘭)·여도(呂島)·이진(梨津)·회령포(會寧浦)·남도포(南桃浦)·금갑도(金甲島)·지도(智島)·목포(木浦)·검모포(黔毛浦)·다경포(多慶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섬진(蟾津)·격포(格浦) 등의 진과, 벽사역(碧沙驛)·흥양·진도·순천·나주 등 목장의 기민(飢民) 총 1백 3만 8천 6백 87명에 진휼곡은 6만 3백 53석이었고, 사진(私賑)으로는 좌도 수군절도영의 전주(全州)·능주(綾州)·남원(南原)·순천(順天)·여산(礪山)·영광(靈光)·김제(金堤)·고부(古阜)·익산(益山)·순창(淳昌)·임실(任實)·광양(光陽)·부안(扶安)·무장(茂長)·화순(和順)·임피(臨陂)·곡성(谷城)·옥과(玉果)·용안(龍安)·흥덕(興德)·함평(咸平)·무안(務安)·고창(高敞)·장수(長水)·창평(昌平)·남평(南平)·진산(珍山) 등의 고을과, 법성(法聖)·위봉(威鳳) 등의 진과, 삼례(參禮)·오수(獒樹) 등 역(驛)의 기민 총 20만 1백 72명에 진휼곡은 1만 3천 1백 68석이었다.】 상이 도신 권엄(權𧟓)의 장계를 이조·병조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선 대를 받드는 일과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일전에 능관(陵官)의 일로도 전교를 내린 일이 있지만, 한 도를 통틀어 진휼하는 일이 완결되었다는 보고를 듣고서 어찌 재계하는 일 때문에 회답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청 당상(賑廳堂上)과 이조·병조의 판서는 관아로 나와서 초기(草記)로 회계하라." 하니, 이조·병조가 아뢰기를, "절도사 이수붕(李壽鵬)은 곡식 2천 2백여 석을 스스로 준비했었으니 옥새를 찍은 상장과 표리(表裏)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부유한 백성으로 3천 석을 자원 납부한 가선 대부 장익복(張益福)에게는 가자한 뒤에 실직으로 등용해야 할 것이고, 1천 석 이상을 납부한 가선 대부 하복언(河福彦) 등 9인에게는 실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고, 5백 석 이상을 납부한 장교(將校) 서유원(徐有源) 등 3인에게는 상가(賞加)해야 할 것이고, 5백 석 미만인 절충 장군 김복규(金福奎)에게는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부유한 백성으로 자원 납부한 사람 가운데 전 첨사 장익복은 앞서 진휼을 도운 곡식 숫자까지를 합계하면 만 포(包)에 가깝다. 이런 사람은 의당 관례를 뛰어넘어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수령에 임명하는 것으로 특별히 승전(承傳)하도록 하라. 전 오위 장 하복언도 통계를 내면 또한 매우 많은 곡식이다. 변방 장수로 임기가 찬 자 중에 자리를 내어 임명해 보내도록 하라. 절충 장군 박대채(朴大采)도 숫자가 2천 석을 넘었으니 벼슬만 제수하고 그만둘 수 없다. 특별히 가자시키도록 하라. 절충 장군 정언희(鄭彦禧) 등 7인도 모두 1천 석이 넘었는데, 이번에 실직을 내려야 한다는 청을 관례에 따라 윤허만 하고 그대로 휴지가 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세상 사람들을 권장하는 뜻이겠는가. 가까운 예에 따라 오위 장이나 혹은 실직 중에서 차차 등용하도록 하라. 그 나머지 체가를 받은 사람들 중에도 만일 이미 실직을 지낸 자가 있으면 역시 가까운 관례에 따라 상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89면
【분류】구휼(救恤) / 인사(人事)
상이 도신 권엄(權𧟓)의 장계를 이조·병조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선 대를 받드는 일과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일전에 능관(陵官)의 일로도 전교를 내린 일이 있지만, 한 도를 통틀어 진휼하는 일이 완결되었다는 보고를 듣고서 어찌 재계하는 일 때문에 회답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청 당상(賑廳堂上)과 이조·병조의 판서는 관아로 나와서 초기(草記)로 회계하라."
하니, 이조·병조가 아뢰기를,
"절도사 이수붕(李壽鵬)은 곡식 2천 2백여 석을 스스로 준비했었으니 옥새를 찍은 상장과 표리(表裏)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부유한 백성으로 3천 석을 자원 납부한 가선 대부 장익복(張益福)에게는 가자한 뒤에 실직으로 등용해야 할 것이고, 1천 석 이상을 납부한 가선 대부 하복언(河福彦) 등 9인에게는 실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고, 5백 석 이상을 납부한 장교(將校) 서유원(徐有源) 등 3인에게는 상가(賞加)해야 할 것이고, 5백 석 미만인 절충 장군 김복규(金福奎)에게는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부유한 백성으로 자원 납부한 사람 가운데 전 첨사 장익복은 앞서 진휼을 도운 곡식 숫자까지를 합계하면 만 포(包)에 가깝다. 이런 사람은 의당 관례를 뛰어넘어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수령에 임명하는 것으로 특별히 승전(承傳)하도록 하라. 전 오위 장 하복언도 통계를 내면 또한 매우 많은 곡식이다. 변방 장수로 임기가 찬 자 중에 자리를 내어 임명해 보내도록 하라. 절충 장군 박대채(朴大采)도 숫자가 2천 석을 넘었으니 벼슬만 제수하고 그만둘 수 없다. 특별히 가자시키도록 하라. 절충 장군 정언희(鄭彦禧) 등 7인도 모두 1천 석이 넘었는데, 이번에 실직을 내려야 한다는 청을 관례에 따라 윤허만 하고 그대로 휴지가 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세상 사람들을 권장하는 뜻이겠는가. 가까운 예에 따라 오위 장이나 혹은 실직 중에서 차차 등용하도록 하라. 그 나머지 체가를 받은 사람들 중에도 만일 이미 실직을 지낸 자가 있으면 역시 가까운 관례에 따라 상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삼도 수군 통제사 이윤경이 진휼을 마친 전후 내용을 치계하고 또 진휼을 감독한 비장과 장교 및 재물을 내놓은 부유한 백성들에게 포상의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였는데, 병조가 아뢰기를,
"진휼하는 정사는 도신이 주관합니다. 그러므로 수신(帥臣)이 스스로 준비하거나 부유한 백성이 자원 납부한 것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도신이 열거해서 올리게 되어 있고 원래 수신이 보고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 통제사 이윤경이 진휼한 일을 가지고 상을 청한 일은 평상시의 법규와 어긋난 것이거니와 그가 아뢴 말 가운데도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아예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직 비장과 장교의 포상에만 뜻이 있었습니다. 전에 없었던 일이며 구절 구절이 외람스러우니,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조처하고, 부유한 백성으로 꼭 상문(上聞)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에게 맡겨 다시 사실을 조사해서 치계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5월 22일 계축
사간 신우상(申禹相)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조상진(趙尙鎭)은 조시위(趙時偉)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죄를 씻어주는 큰 은택을 두터이 받아 구덩이 속에서 발탁되어 풍헌(風憲)의 장관 자리에 앉혀졌으니, 그로서는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의리를 두려워하여 죽기로써 은혜의 보답을 도모하기에 의당 남보다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합계에 연명하여 참여하는 것을 가지고 이미 그럴 형편이 아니라는 말을 함부로 피혐하는 말 속에 써넣어서, 군부(君父)에게 힘을 다해 대항하여 자신의 주견을 완강하게 세웠습니다. 그의 방자하고 무엄함이 어찌하여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무리 군상을 업신여기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본시 제 집안의 법규가 되어있고, 의리를 배반하고 당여를 위해 죽는 것을 명예와 절개로 삼는 무리일지라도, 잠시 모시고 참여하는 데에 무어 그리도 나가기 어려운 사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밤새도록 대사헌의 망(望) 놓고 논란하며 노고를 끼친 데 대한 송구함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역적 친족을 굳게 보호할 줄만 알아서 지중한 임금의 명령과 승부를 겨루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삭직된 죄인 조상진에게 외땀 섬으로 정배하는 죄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상진이 한창 기세가 있을 때에는 이렇게 요란한 말을 듣지 못하겠더니, 지금 우연한 거취 문제로 인해서 죄가 없는데도 죄를 성토하여 이렇게 과중한 형벌을 주장하는 것은 또한 무슨 곡절인가? 상진 한 사람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체통으로 헤아리더라도 천만 부당한 일이다. 원소(原疏)는 궁중에 유치시키고 너는 체직시키노라."
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총융사로, 이면응(李冕膺)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제주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지난 해 12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제주·대정(大靜)·정의(旌義)의 굶주리는 백성이 총 6만 1천 4백 53명으로 진휼곡은 2만 2천 1백 82석이었다.】 목사 이철운(李喆運)의 장계를 이조·병조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진휼 정사가 완결되었으니 백성의 일이 매우 다행스럽다. 명월 만호(明月萬戶) 고한록(高漢祿)이 5백 석을 자원 납부하여 진휼을 도왔으니, 이것이 어찌 섬 안의 잔약한 진장(鎭將)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극히 가상하다. 제주도 안에서 임기가 찬 수령 자리에 이 사람을 단망으로 임명하라."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목사 이철운이 진휼곡 6백 석을 혼자서 준비해 냈으니 표리(表裏)를 내려주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판관 이휘조(李徽祚)와 정의 현감 허식(許湜)도 모두 1백 40여 석씩을 각각 스스로 준비해 냈으니 아마(兒馬)를 내려주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윤허하고, 명하여 휘조와 식에게는 모두 벼슬을 올려주도록 하였다.
5월 24일 을묘
호서에 진휼을 베풀었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진휼의 일을 끝마쳤다. 【공진으로는 수군 절도영 관할인 온양(溫陽)·석성(石城)·직산(稷山)·홍산(鴻山)·연기(燕岐)·평택(平澤)·아산(牙山)·신창(新昌)·은진(恩津)·청산(靑山)·부여(扶餘)·정산(定山)·보령(保寧)·비인(庇仁)·남포(藍浦) 등의 고을과, 마량(馬梁)·서천(舒川) 등의 진과, 성환역(成歡驛)의 기민 총 20만 1천 4백 97명에 진휼곡은 1만 5천 9백 84석 남짓이었고, 사진으로는 공주(公州)·충주(忠州)·청주(淸州)·홍주(洪州)·청풍(淸風)·한산(韓山)·면천(沔川)·서산(瑞山)·직산(稷山)·옥천(沃川)·대흥(大興)·단양(丹陽)·임천(林川)·천안(天安)·서천(舒川)·예산(禮山)·황간(黃澗)·이성(尼城)·제천(堤川)·연풍(延豊)·영춘(永春)·문의(文義)·태안(泰安)·음성(陰城)·청안(淸安)·회덕(懷德)·진잠(鎭岑)·연산(連山)·청양(靑陽)·진천(鎭川)·결성(結城)·전의(全義)·보은(報恩)·회인(懷仁)·영동(永同)·목천(木川)·덕산(德山)·해미(海美)·당진(唐津) 등의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평신(平薪) 등의 진과, 연원(連原)·율봉(栗峯)·금정(金井)·이인(利仁) 등 역의 기민 총 25만 5천 8백 51명에 진휼곡은 2만 9천 6백 18석 남짓이었다.】 이조·병조가 도신 이형원(李亨元)의 장계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연기 현감 황운조(黃運祚)는 도신이 치적과 진휼 정사에서 가장 우수하게 드러났다 하여 표창의 맨 머리에 놓았으니 표리를 내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정산 현감 정량채(鄭亮采)는 도신이 비록 차등은 두었지만 스스로 곡식 5백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청산 현감 임정주(任靖周), 은진 현감 윤행진(尹行進), 남포 현감 조윤수(曺允遂)도 모두 치적이 있으니 아마(兒馬)를 내리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진휼한 고을로서 서천 군수 이적(李迪)은 스스로 곡식 1천 1백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숙마(熟馬)를 내려야 할 것이고, 공주 판관 이종휘(李種徽)는 스스로 곡식 1천 60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예산 현감 유전(柳烇)은 스스로 곡식 8백 99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아마를 내려야 할 것이고, 가선 대부 김종철(金宗喆)은 벼 1천 석을 자원 납부하였으니 의당 실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며, 3백 석 이하를 자원 납부한 절충 장군 조명서(趙明瑞) 등 10인에게는 의당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황운조는 4품 벼슬에 등용하고, 임정주는 책을 끼고 다니던 시절에 그의 공부가 있음을 익히 알았었으니 의당 치적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계방(桂房)의 옛 요속들을 모두 관례를 깨고 등용하여 옛 정의를 기념하였는데 이 사람만 유독 빠졌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하라. 그리고 조윤수는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90면
【분류】구휼(救恤) / 인사(人事) / 왕실(王室)
이조·병조가 도신 이형원(李亨元)의 장계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연기 현감 황운조(黃運祚)는 도신이 치적과 진휼 정사에서 가장 우수하게 드러났다 하여 표창의 맨 머리에 놓았으니 표리를 내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정산 현감 정량채(鄭亮采)는 도신이 비록 차등은 두었지만 스스로 곡식 5백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청산 현감 임정주(任靖周), 은진 현감 윤행진(尹行進), 남포 현감 조윤수(曺允遂)도 모두 치적이 있으니 아마(兒馬)를 내리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진휼한 고을로서 서천 군수 이적(李迪)은 스스로 곡식 1천 1백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숙마(熟馬)를 내려야 할 것이고, 공주 판관 이종휘(李種徽)는 스스로 곡식 1천 60여 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벼슬을 올려주어야 할 것이며, 예산 현감 유전(柳烇)은 스스로 곡식 8백 99석을 준비했으니 의당 아마를 내려야 할 것이고, 가선 대부 김종철(金宗喆)은 벼 1천 석을 자원 납부하였으니 의당 실직을 제수해야 할 것이며, 3백 석 이하를 자원 납부한 절충 장군 조명서(趙明瑞) 등 10인에게는 의당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황운조는 4품 벼슬에 등용하고, 임정주는 책을 끼고 다니던 시절에 그의 공부가 있음을 익히 알았었으니 의당 치적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계방(桂房)의 옛 요속들을 모두 관례를 깨고 등용하여 옛 정의를 기념하였는데 이 사람만 유독 빠졌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하라. 그리고 조윤수는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신기(申耆)가 치계하기를,
"영월(寧越) 등 열 고을의 의탁할 곳 없어 위급한 처지에 놓인 백성들을 감영과 고을에서 서로 의논하여 구휼하였는바, 지난 세밑부터 차례로 고을을 돌면서 죽을 쑤어 먹이고 혹은 건량(乾粮)을 지급하여 5월 초순 이전에 진휼을 끝냈습니다."
하였다. 【영월·평창(平昌)·정선(旌善)·울진(蔚珍)·평해(平海)·원주(原州)·횡성(橫城)·홍천(洪川)·강릉(江陵)·삼척(三陟)의 기민이 총 7천 5백 9명이었는데, 감영과 고을에서 스스로 곡식 5천 7백 13석과 돈 8백 12냥을 준비해서 구휼하였다.】 이조가 복계하기를,
"수령으로서 스스로 곡식 4백 석 이상을 준비한 울진 현령 이종헌(李宗憲) 등에게 모두 아마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특명으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전 전라도 수군 절도사 이은복(李殷福)을 사도진(蛇渡鎭)으로 유배하였다. 그것은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베어 팔 적에 나무 장사들이 마구 베어내는 폐단을 살피지 못한 때문이었다.
5월 25일 병진
채제공을 의정부 영의정에, 김종수를 의정부 좌의정에 제배하였다.
영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였다. "금구(金甌)에 점쳐진 사람061) 은 모두 3백 3인이었으나 영의정에 오른 사람은 경까지 합해서 대략 1백여 인이다. 대체로 재상이란 막중한 직임인데, 그중에도 영의정은 더욱 막중하다. 그 적임자를 중난하게 여겨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 때가 있음은 예전부터 이미 그러했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인재 얻기 어려움이 예전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내가 어떻게 자세히 살피고 또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경에게 뜻을 기울여온 지 여러 해이다. 그러면서도 화성(華城)은 바로 선침(仙寢)을 받들어 모신 지방이며 부(府)로 승격된 초기이기에 원로를 얻어 그의 성망(聲望)을 빌어 그 곳을 격상시키려는 생각에서 부득불 번거롭게 경을 한번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경이 직임을 맡은 이후로 큰 강령을 정돈하고 곁으로 자잘한 일들에까지도 밤낮으로 힘을 다하니, 도리어 경을 위해 염려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차에 경이 올린 축성 방략(築城方略)을 보니 늙은 재상의 정신을 쓴 것이 더욱 마음에 감동되었다. 백리를 갈 때에는 90리가 반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것은 바로 시작이 반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같이 경영하여 시작하였으니, 이루어내는 공은 오직 감독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어찌 몸으로 노력하는 일에까지 거듭 수고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에게 영의정을 제수하고 이에 사관을 보내어 속히 돌아오기를 권면하노니 경은 모름지기 당일로 길을 나서도록 하라."
좌의정 김종수에게 하유하였다.
"경은 바로 나의 옛 신하이다. 내가 경을 알게 된 것도 경 때문이고 경을 취하게 된 것도 경 때문이다. 경은 바로 옛사람이 말한 ‘우리 편의 선비’라고 하겠다. 궁연(宮筵)062) 으로부터 정승 자리에 오르기까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마음은 한결같았으니 이 때문에 20년을 하루 같이 지내온 것이다. 지난 섣달 초3일에 내가 시를 지어보낸 가운데 ‘동쪽 성곽에서 매화를 마주한다.’는 싯구가 있었으니, 이것이 이미 앞서 내 뜻을 넌지시 비추었던 것이다.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를 잘 보좌해 줄 일을 경 말고 누구에게 책임지우겠는가.
내가 지금 조정을 훨씬 넓히고 금과 쇠를 한꺼번에 용해시켜 태화단(太和丹)을 세상에 널리 베풀고 구주(九疇)의 복록을 거두어들이려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정승의 보좌이다. 그래서 이에 대청에 나앉아 금구의 점을 쳐서 삼상(三相)을 갖추니, 경도 새로 제배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와서 나의 뜻을 받들어 선양하도록 하라. 그것은 바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한다[平平蕩蕩]’는 네 글자이니, 경에게 있어서는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라 이를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곁에서 영의정을 잘 돕고 우의정과도 잘 조화하여 여러 관료의 모범이 되고 혼탁한 세속의 숫돌이 되도록 하라. 시기의 적절함이 크다 할 것이다. 다시 바라노니 이 때의 조처가 중도에 알맞도록 당일로 뜻을 바꾸어서 경을 알고 경을 취한 나의 본의에 보답하라."
이명식(李命植)을 수원부 유수로 삼고, 이어서 명하여 죽은 중신 조관빈(趙觀彬)이 보국 대부(輔國大夫)에 지중추로 강화 유수에 제배된 뒤에도 지중추의 직함을 그대로 지녔던 전례에 따라 지중추의 직함을 겸대하게 하였는데, 이는 병조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명식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김복인(金復仁)의 상소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그 말이 지극히 패려궂고 참혹하였으니 신하된 자로서 이런 말을 한 마디라도 듣고서야 어떻게 하루인들 세상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가 한 말들이 자못 도리가 없어 실상 족히 변명할 것도 없었던 까닭에 이같은 원통함을 간직한 채 7, 8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은 오로지 징계하고 토죄하는 일을 유독 엄격하게 했던 까닭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연전에 하유가 반포된 뒤로 신이 처음부터 고집하였던 그 의리가 문득 사람을 무함하는 것으로 낙착되어버렸습니다. 대저 징계하고 토죄하는 일이 그 얼마나 관계가 중대한 것입니까마는 일이 이미 실상이 없게 되었으니, 비록 말을 생판 조작한 것이 아닌 때문에 반좌(反坐)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으나, 신이 스스로 처신하는 데 있어서야 어떻게 버젓이 반열의 사이에 당돌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신에게 내려진 벼슬과 품계가 높고 현달한 경우이겠습니까. 그때부터 신은 마침내 버려져 죽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비록 가까운 친척 사이일지라도 왕래하는 일이 없어 사람 사는 도리가 거의 모두 끊어졌고 관직의 거취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한번도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새로 내린 벼슬은 주구(珠丘)063) 를 가까이서 모시고 행궁을 보호해야 하니 사체와 도리에 있어 어찌 혹시라도 머뭇거리며 사피하려는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구구한 신의 의리로서는 옛날에 가졌던 생각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부(府)의 이 직임을 나는 마치 고굉(股肱)이나 주액(肘腋)처럼 여기고 있다. 경은 다섯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고 세 번 관방(關防)을 맡아서 공적이 함께 벼슬하는 사람들 중에 성대히 드러났었다. 내가 경에게 이 부의 직임을 임명한 데에는 또한 깊이 생각한 것이 있었다. 설사 경에게 머뭇거릴 의리는 있다 할 지라도 가서 일하는 것만은 사양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곳 화성에 유수를 둔 데에서는 모름지기 그 제정하여 둔 뜻을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은 바로 선침을 수호하기 위해서이고 행궁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경도 초봄의 행행 때에 내린 윤음(綸音)을 보았을 것이다. 이 부의 이 직임이 어찌 혹시라도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릴 수 있는 자리이겠는가. 경은 바로 일어나 사은 숙배하라."
하였다.
5월 26일 정사
수원 유수 이명식을 불러 보았다. 하직 인사를 드린 때문이었다.
장용영이 연화방(蓮花坊)의 장용영 소속 민호(民戶)에 대한 분계 절목(分契節目)을 올렸다.
【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궁성 밖으로 금군(禁軍)의 집들을 벌려 배치시킨 것은 궁성을 호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효묘조(孝廟朝) 때에도 상사람들과 어부와 훈련 도감의 승호 포수(陞戶砲手)들을 창경궁 동쪽에 나누어 배치하여 채웠던 데에서 효종 대왕의 뜻이 깊고 원대했음을 우러러 알 수 있으나 그것은 실상 옛날 제도에서 모방한 것입니다. 임자년064) 겨울에 선인문(宣仁門) 아래서부터 이현(梨峴) 동구까지 길 동서쪽의 크고 작은 가옥들을 모두 장용영의 장교나 졸병들을 혹 바꾸어 입주시키거나 혹은 집을 사서 이사를 시켜 각자 정착하여 살게 해서 옛날 일과 똑같이 하고 별도로 통호(統戶)를 정하여 서로 살피고 통솔하게 하니 명령이 없어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연화방 한 곳 만은 장용영 소속의 호수가 겨우 반 정도여서 방리(坊里)의 일반 백성들과 부역을 함께 지고 있어 반드시 고르지 못한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역을 구별하여 각기 동계(洞契)를 정하고 호수를 헤아려서 방(坊)의 부역을 나누어 지게 한 다음에야 영구히 폐단이 없게 되겠기에 시행해야 할 일들을 아래에 조목별로 열거합니다. 1. 따로 존위(尊位) 2원을 정하여 동쪽과 서쪽의 통호를 나누어 관장시키고 중임(中任) 2인을 또 동쪽과 서쪽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뽑아 정한다. 1. 위로 선인문부터 아래로 이현의 병문(屛門)까지를 연화방계(蓮花坊契)라 통칭하고 멀리서 서로 통치만 할 뿐 전혀 속박을 할 수 없게 한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장용영 소속 군사가 사는 이현 윗쪽의 동편은 장용영 좌계(壯勇營左契)라 이르고 오른쪽은 장용영 우계(壯勇營右契)과 일러 장용영에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 일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은 따로 계(契) 이름을 지어 해당 부(部)에 그대로 소속시킨다. 앞서 한 방이 돌려가며 지던 부역은 수효를 나누어 균평하게 지움으로써 편중되는 걱정이 없게 한다. 그리고 이미 좌계와 우계 두 계를 별도로 정하여 모두 본영에 소속시킴으로써 한성부의 부(部)에 관장되지 않으니, 좌계와 우계 안에서 서로 송사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소 경중을 막론하고 본영의 제조와 종사관이 주관하여 한성부의 부의 규례와 똑같이 거행한다. 그런데 말일 원고와 피고 사이에 다른 부(部)나 동(洞)에 사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다른 지역 백성의 예에 따라 한성원부의 부에 소장을 낸다. 1. 동편과 서편의 크고 작은 가옥들을 다섯 집씩 묶어 통(統)을 삼으면 동편은 27통이 되고 서편은 26통이 되는데, 통수(統首)는 해당 통의 안에서 부지런하여 일을 감당할 만한 자로 뽑아 정해서 통민을 단속시킬 수 있게 한다. 1. 질병과 오물들은 통에서 단속하여 금지시킨다. 서편은 동영(東營)을 한계로, 동편은 함춘원(含春苑) 동구의 윗쪽을 한계로 정하여 한계 안쪽을 잘 금지시키되, 질병과 오물들을 각 통수가 각별히 단속하여 바로 바로 내보내서 하루 해를 넘기지 않게 하고, 상사(喪事)를 만난 자가 있을 경우에는 3일을 지낸 뒤에 내보내게 한다. 1. 이웃간에 싸우거나 법 밖에 금령을 범하는 등의 금지시켜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각 통수가 낱낱이 살펴 중임(中任)에게 보고하고 중임은 존위(尊位)에게 보고하여, 작은 일이면 중임이 꾸짖고 큰 일이면 존위가 다스리되, 존위가 혼자서 결단할 수 없는 것은 본영에 보고하여 조처할 수 있게 한다. 1. 통 안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행랑에서 곁방살이를 한다 할지라도 혹 행동이 수상하고 내력도 알 수 없는 자를 머물러 살게 한다거나, 떼로 모여 노름을 벌이거나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떠드는 무리들 및 모든 법을 무시하고 분수에 벗어난 짓을 하는 자가 있는데도 어물어물 덮어 두거나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 집 주인과 통수를 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서 결코 용서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위와 중임도 바로잡지 못한 과실을 본영이 중하게 처벌하도록 한다. 1. 길을 손보고 눈을 치우고 도랑을 치고 좌경(坐更)065) 을 하고 화재를 끄는 등의 일들은 법이 매우 엄중하므로 장용영의 소속이라는 이유로 회피할 수 없으니 관계에 따라 착실하게 거행하여야 한다. 만일 혹시라도 회피하거나 거역하면 중죄로 처벌한다. 1. 방역(坊役)은 길을 닦는 것과 좌경이다. 지금부터 그것을 나누어 소속시킨다. 좌경과 영호(營戶)066) 앞의 길을 닦는 일은 영호가 담당하고 본영에서 살펴 단속한다. 위로 선인문에서부터 관현(館峴) 아래까지와 본영 담장 모퉁이에서부터 돌다리[石橋]의 인가가 없는 곳까지의 길을 닦는 일은 일반 백성들이 담당하고 해당 부가 살펴 단속한다. 1. 각통수는 해당 통의 여러 가지 금지 조항들을 규찰하여 15일 간격으로 중임에게 일이 있고 없었음을 보고하고 중임은 한 달 것을 모아서 다음 달 초하룻날 존위에게 보고한다. 1. 각통에 혹 이사를 오거나 가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통수가 존위에게 보고해서 바로 통안(統案)을 수정한다. 통 안의 남자와 여자, 장정과 노약자의 실지 수효에 대해서는 한성부가 백성의 수효를 상께 보고하는 예에 따라 세밑에 수정하고, 원통안(原統案)은 경외(京外)의 군안(軍案)의 예를 참고해서 10년에 한 번씩 바꾼다. 그리고 통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장용영 소속으로서 늠료를 받고 봉공(奉公)하는 사람들이니, 비록 뜻밖에 제거할 일이 있더라도 의당 차차로 바꾸어 들일 것이요 기한을 못박아 내보내서 소란을 일으키는 걱정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1. 식년(式年)마다 좌계·우계에 사는 사람들의 장적(帳籍)을 각 통수가 거두어 모아서 본영의 제조에게 납부하여 경조로 올려 보내도록 한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90면
【분류】군사(軍事) / 호구(戶口)
[註 064]【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궁성 밖으로 금군(禁軍)의 집들을 벌려 배치시킨 것은 궁성을 호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효묘조(孝廟朝) 때에도 상사람들과 어부와 훈련 도감의 승호 포수(陞戶砲手)들을 창경궁 동쪽에 나누어 배치하여 채웠던 데에서 효종 대왕의 뜻이 깊고 원대했음을 우러러 알 수 있으나 그것은 실상 옛날 제도에서 모방한 것입니다. 임자년 : 1792 정조 16년.[註 065] 좌경(坐更) : 밤에 시각을 알리는 일.[註 066] 영호(營戶) : 장용영의 군교가 사는 집.
5월 27일 무오
이조 판서 이병정과 참판 정범조를 체직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전조에 신칙하여 서얼들로 오랫 동안 벼슬길이 막혔던 자들을 검의(檢擬)하도록 하였는데, 병정과 범조가 함께 정사의 자리에 나아가 박종해(朴宗海)와 홍탁보(洪鐸輔) 등을 의망하였다. 그런데 종해는 조시위의 인척이었고 탁보는 홍인한의 가까운 친족이었다. 범조가 물러가서 그 일을 후회하고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자, 병정도 상소하여 아뢰기를,
"범조가 신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였으니 진실로 스스로 인책하고자 한다면 의당 신과 함께 연명해서 말씀을 드렸어야 할 일인데도 신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신을 요당(僚堂)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 두 사람을 이해시켰으나 병정 등이 서로 글을 올려 헐뜯으면서 여러 차례 정사에 대한 명을 어기므로, 전교하기를,
"아전(亞銓)이 이미 정사에 참여하고서 물러나와 다시 상소를 한 것은 사이가 서먹서먹함으로 인한 것 같다. 그러나 요당의 말이 이미 저러하니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 한결같이 다그칠 수만도 없다. 그러니 이조 판서 이병정의 체직을 윤허한다. 그리고 장전(長銓)의 일은 오로지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펴는 데에 있는데 어찌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사 가부를 말하고자 했다 하더라도 때가 늦었음을 면치 못했으니 참판 정범조를 체차하라."
하였다.
호서 암행 어사 이조원(李肇源)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리자, 편전에서 불러 보았다. 이 때 이조의 판서와 참판이 결원이어서 서정수(徐鼎修)를 참판으로 삼고, 아울러 비변사와 이조·병조의 당상들을 불러들여 자리에 나와서 품처하게 하였다. 공주 판관 이종휘(李種徽), 결성 현감 박상춘(朴尙春), 부여 현감 박제가(朴齊家), 덕산 현감 김직휴(金直休), 해미 현감 신계문(申啓文), 비인 현감 임장원(任長源)은 모두 정사를 잘못 하였다 하여 차등 있게 감죄하고, 신창 현감 정문재(鄭文在)는 바로 그 고을에 정배하였다. 그것은 진휼의 죽이 묽었기 때문이다. 상이 조원에게 명하여 별단(別單)을 읽어 아뢰도록 하니, 읽어 아뢰기를,
"
1. 해미현의 병방선(兵防船)이 머물러 있는 선창의 일에 대해서는 전후로 고을에서 올라온 보고가 많이 쌓였을 뿐만이 아니고 끝내는 대신이 연품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그 곳 형편을 보고 물정을 탐지해보니, 이른바 선창이란 곳이 관청의 문에서 10리 지역에 있었는데 지형은 비록 휘어감아 돌았으나 물이 고여 있지 않아 배를 운반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봄가을로 규정을 정해 갯바닥을 파내는데, 여섯 면(面)의 사람들이 일제히 역사에 나가느라 발을 싸매고 식량을 준비하는 폐단이 매우 심했습니다. 가령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출발시킬 일이라도 있게 되면 장차 무슨 방법으로 끌어내서 이동시키겠습니까. 군사 장비에 관계되는 일이 너무도 허술합니다.
홍주(洪州)의 고북면(高北面) 사기소(沙器所)는 본현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곳은 물의 형편이나 땅의 형세가 꼭 하늘이 마련한 것처럼 알맞고 포구의 민호도 조밀하여 수호하는 방도도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홍주 백성들이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오랜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고북면에는 한줄기의 큰 길이 있어 그것이 마치 두 고을의 경계를 가로질러 놓은 듯하니 만일 그 길 위쪽은 옛날 대로 홍주에 소속시키고 길 아래쪽은 본현에 떼어준다면 실상 양쪽이 다 편리할 방도가 되리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그러자 유사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선창의 갯바닥을 파내는 폐단은 바닷가 여러 고을의 곳곳이 다 그러합니다. 또 고북면은 앞서 이미 해미에 떼어주었다가 금방 홍주 백성들의 호소로 인하여 다시 홍주에 붙여주었던 곳이니, 지금에 와서 다시 떼어주는 것을 의논한다면 한갓 번거롭게만 될 것입니다.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원이 또 읽어 아뢰기를,
"
1. 금번 구순(具純)에 대한 일은 비록 어사의 사목 조건(事目條件)과는 관계되지 않으나 이변에 관계되는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분개해 하므로 신이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순의 집은 앞쪽이 큰길을 임해 있고 마을이 매우 커서 애당초 화적(火賊)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왕 도적을 맞았다면 비록 하찮은 좀도둑이었을지라도 사방 이웃들이 당연히 알았을 것이고 노복들도 속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화적이 들었다는데, 어떻게 온 마을이 잠잠하게 한 사람도 알아챈 자가 없었단 말입니까. 바로 이 한 가지 일이 애당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실은 김명신이 구순과 이웃하여 살면서 늘 그의 불효한 죄를 배척하자, 순이 이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서 기어코 해치려고 꾀하다가 이에 도적을 맞은 것처럼 꾸미고서 지세랑(知世郞)이라는 흉악하고 패려궂은 말을 만들어내서 원근에 전파시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허투로 조그마한 궤짝을 가져다가 거기에 넣어둔 돈을 도둑맞았다고 말하고, 거짓으로 종의 등에 난 부스럼 딱지를 가리켜 도적을 막다 창에 찔린 것이라고 늘 말하여 마침내 이것으로 명신의 죄안을 얽어서 병영의 옥에서 원통하게 죽게 하였습니다. 명신이 죽자 그의 아내도 또 따라 죽었으므로, 온 도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눈을 흘기고 있습니다. 그의 죄범을 논하자면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조원이 인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엄히 조사하여 법률대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정민시 등이 아뢰기를,
"구순이 도적맞은 허실에 대해서는 방금 의금부가 사실을 조사하고 있는데, 이제 어사가 아뢴 말을 들어보니, 남을 모함한 일은 그에게는 오히려 하찮은 비행에 해당하고, 불효라는 두 글자만 가지고 논단하더라도 그 죄가 이미 하루도 천지 사이에 스스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세랑이라는 세 글자의 더 없이 패려궂은 말을 그가 이미 만들어냈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경악스럽고 통분하여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구순을 즉시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해서 엄히 신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사로 말하더라도 이미 도적을 맞았다는 일의 진위는 잡아내지 못하고 바로 불효라는 두 글자의 죄목을 씌운 것은 이미 경솔한 행동이며, 이미 들은 다음에는 관계가 엄중한만큼 당연히 그 자리에서 출도를 하고 죄를 조사할 것을 장계로 청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단지 전해 들은 말만을 서계의 끝에 붙였으니 극히 한심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 별단에서 말한 구순의 집안 행실에 대한 한 마디 말을 보건대, 그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을 터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놀랍다. 어사가 이미 그 사실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바로 출도를 해서 실상을 조사하지 않고 이에 지나가는 말처럼 이와 같이 화제를 바꾸는 사이에 끼워넣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나이 젊어 일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소치이겠지만 어찌 사느냐 죽느냐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어사의 일은 참으로 잘못되었으니 다시 제기할 필요도 없다. 지세랑 운운했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어찌 범범하게 듣고 와서 별단에다 범범하게 말한단 말인가. 어사를 파직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구순으로 말한다면 그는 못하는 짓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니 지금 병사(兵使)를 잡아오는 것은 별로 긴한 일이 아니다. 어사의 계문 중에서 이번에 도적을 맞았다고 터무니없이 꾸며낸 한 가지 조항을 가지고 허다하게 열거한 것과 이른바 지세랑 운운한 것을 그가 과연 만들어냈는지의 여부를 의당 그에게 세밀히 캐물어야겠지만 국문하는 것은 지나칠 듯하니,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가두고 당일로 개좌(開坐)하여 거듭 캐물어서 기어코 실상을 얻어내게 하라."
하였다.
홍주 영장(洪州營將) 이현택(李顯宅)을 삭직하고, 아산 현감 윤광심(尹光心)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호서 어사 이조원이 아뢰기를,
"신이 돌아오는 길에 신창(新昌)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신의 행색을 엿보고 빠른 걸음으로 뒤를 밟는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이 몹시 놀랍고 의심스러워 재종형 홍원(弘源)의 온양 임지로 찾아가 그들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홍주 진영의 건장한 장교와 사나운 졸개 10명이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신의 재종형이 불러다 찾아온 이유를 물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게 하고 은밀히 말하기를 ‘홍주 영장이 어제 어사의 비관(秘關)067) 을 보고 말하기를 「결성(結城)에 출도한 어사는 가짜 어사이니 바로 속히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그가 아까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그를 결박지워 가야겠다.’ 하므로, 신의 재종형이 말하기를 ‘그는 나의 가까운 친족이고 가짜 어사가 아니니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니, 진영의 장교가 방안을 엿보며 곧 뛰어들려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머리가 급박하고 사변을 헤아리기 어려워 바로 그 자리에서 출도를 붙여 붙잡아놓고 따져 물으니, ‘영장이 어사의 비관이 있었다고 말하고 우리들을 내보내면서 결성에 있는 어사는 가짜 어사이니 속히 바로 붙잡아 오라고 한 까닭에 과연 뒤를 밟아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바로 진영의 장교를 칼을 씌워 가두고서 홍주 영장에게 관문을 띄워 그로 하여금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아산의 아전과 장교 30여 명이 본군에 들이닥쳐 말하기를 ‘어사가 해당 고을에 출도하여 우리들을 내보내면서 온양에 출도한 가짜 어사를 붙잡아 오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더욱 해악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산에 출도한 어사가 진짜인지 여부를 분별하기가 어려웠고, 또는 혹시라도 간악한 백성이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 종적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일부러 아전과 장교들을 흩어지게 하고는 그들이 비운 사이를 틈타 도망치려는 것인가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변고에 대처할 방도를 두루 생각한 결과 직접 만나서 따져보는 것이 가장 나은 방도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암행 어사의 위의를 갖추고 급히 그곳으로 가보니, 저쪽의 어사도 역시 위의를 갖추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말을 세우고 촛불을 비추어 서로 보니 과연 함께 명을 받들었던 사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음을 책망하니, 그가 말하기를 ‘처음에 나 혼자서 일로(一路)를 다 담당한 것으로 알았기에 출도한 사람이 가짜일 것이라고 잘못 의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서로 얼굴을 보고 의심을 풀었기에 각기 말을 돌려 돌아왔었는데 이때 영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힐문하고 한편으로 꾸짖었더니 겁을 먹고 어찌할 줄 모르면서 꾸며 대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신이 그 때에 만일 길에서 맞닥뜨렸더라면 무한한 위욕(危辱)을 면치 못했을 것인데, 왕의 신령하심이 비춰주심으로 인하여 명을 욕되게 하는 일은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당 영장이 단지 관문만을 의거하여 허실을 따져보지도 않고 전에 없던 일을 저지른 것은 대단히 놀랍고 망녕된 일입니다. 홍주 영장 이현택을 불가불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설사 참으로 가짜 어사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십분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안 다음에야 비로소 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어사의 행차가 그 사체가 어떠한 것인데 믿지 못할 문서를 믿고서 이런 전에 없던 죄를 범하였으니 대단히 놀랍다. 너는 세 곳에서 출도를 한 진짜 어사이고 윤노동(尹魯東)은 출도도 하지 못한 주제에 경솔하게 비관을 뛰웠으니 매우 해괴하고 망녕된 짓이다. 너는 능히 옛 어사 이성효(李性孝)와 같은 곤경을 면하였으니,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영장의 일로 말한다면 비관은 비관이고 신중할 일은 신중할 일이니, 어떻게 중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삭직시키고 바로 의금부로 하여금 붙잡아다가 엄히 취조하여 아뢰도록 하라. 너는 비록 영장의 죄만을 청하였으나 아산의 원이 수십 명의 아전과 장교를 지급해 주면서도 조금도 신중하지 않았던 것은 영장과 똑같은 것이니 그 역시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을 파직하였다. 그것은 내의원에 진공한 인삼의 품질이 나빠서였다.
좌의정 김종수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아, 신은 비록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를 데 없는 화를 당하였으나 천지 부모 같으신 전하의 은덕을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태양이 그늘진 음지까지 비춤에 이르러서는 그 시말과 내력이 남김없이 모두 밝혀졌는데, 신의 도리로 어떻게 감히 지금에 와서 다시 제기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악역(惡逆)이라는 말이 이 어떠한 명목입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근래에 세상 변고가 없는 것이 없어 마침내 악역이란 명칭을 예사로운 제목으로 간주하여 이를 남에게 둘러씌우는 데에 이미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명칭을 남으로부터 받고도 역시 매우 놀라지도 않으니, 이는 천지 사이에 인류가 생긴 이래로 막대한 변괴입니다. 악역이란 명칭이 점점 가벼워지면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점점 무너질 것이니, 이로 인한 폐단은 장차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마음을 썩히고 뼛속 깊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구한 천신의 견해로는 늘 생각하기를, 신하로서 한번 이같은 죄명을 입게 되면 비록 그것이 매우 맹랑하고 애매한 일로서 이미 깨끗하게 누명이 벗겨진 뒤라 할지라도 오히려 반드시 종신토록 스스로 폐인으로 자처하여 사람 축에 끼이지 않은 다음에야 임금과 신하의 분의가 엄격해져서 천하의 큰 제방이 유지될 수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신이 이 말씀을 전석(前席)에서 여쭌 것이 여러 차례였는데, 그 마음은 괴롭고 그 정상은 구슬픈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런 것이 아닐진대 하늘 같은 은혜를 입은 신으로서 횡역(橫逆) 한 번 당한 것으로 하여 감히 스스로 저지할 계책을 낸다면 이는 참으로 개나 말 만도 못한 짓으로 신명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무상하더라도 어찌 차마 이런 짓이야 하겠습니까.
아, 특별히 하유하신 2백 33자의 말씀이야말로 모두가 융숭한 은택입니다마는, 그중에도 ‘우리 무리[吾黨]’라는 두 글자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마음이 한결같았다.’라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신으로서는 감히 참으로 예로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받들어 읽기 시작하여 반도 다 읽기 전에 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아, 신의 평생 주견은 세상과 정히 서로 맞지 않았는데, 신이 성상으로부터 지우를 받은 것이 이 때문이었고 신이 세상에 죄를 얻은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춘추(春秋)》 때문이고 나를 죄주는 것도 《춘추》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선비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비록 대등한 사이의 이하에게도 그러는 것인데, 더구나 신하로서 군부로부터 이같은 지우를 입었을 경우 진실로 일분의 인심이라도 있는 자라면 누군들 감격하여 목숨을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유독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나라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쁜 데로 서로 빠져들어 한 세상의 속임수와 유혹이 달마다 해마다 달라져서 오만가지로 꾀를 부려 기어코 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작년의 일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근심거리도 아직 많거니와, 뒷날 나올 일들은 더욱 교묘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도 지난 일을 미루어 앞일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신의 죽음이 나라에는 보탬이 없고 단지 전하께서 신을 지우해 주신 밝으심을 손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의정에 임명하신 새로운 명을 즉일로 다시 중지시켜 큰 제방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른바 천하의 큰 제방이라는 것은 그 의리가 자신의 직분을 다하여 남에게 할 말이 있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한다.[進思盡忠]’고 한 것이니 성인이 어찌 후세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참으로 경이 운운한 말과 같이 하자면 경훈(經訓)의 자구(字句)에서 진(進)자를 퇴(退)자로 바꾼 다음에야 옳을 것이다. 경이 신하의 직분을 다하고 큰 제방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더욱 나아가고 나아가는 뜻을 생각하여 경훈에 어그러짐이 없게 해서 내가 돌아보고 감싸주는 뜻에 보답하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치계하기를,
"경상우도 연해의 어세(漁稅)를 통영(統營)에 이속시킨 뒤로 농간의 폐단이 해마다 겹쳐 생겨나서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여 한탄합니다. 그런데 이를 논하는 자들 중에는 혹 다시 지방 고을에 소속시키면 그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어세를 통영에 이속시킨 것은 단지 군사와 백성들에게만 은택을 입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실상은 영(營)의 형편이 점점 옛날만 못해져서 상환해야 할 허다한 빚들은 조처할 수가 없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일 각 고을에 다시 소속시켜서 통영이 간여할 수 없게 해버린다면 관방(關防)의 중요한 지역이 실로 낭패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대체로 듣건대 종전에 각 고을에서 관장할 때에도 강제로 징수하는 일이 오늘날의 통영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영에 이속된 초기에는 백성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 금하는 법이 차츰 느슨해짐으로써 간교와 거짓이 수없이 생겨나고 새로 설시한 일이 많음으로 인해 폐단이 날로 불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통영에 이속시킨 지 20년도 채 안 되어서 처음에 그토록 편리하다고 말하던 것이 이제는 또 불편하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니, 각 고을에 환속시켜서 오랜 햇수가 지난 뒤에는 다시 통영에 소속되기 바라는 일이 없으리란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제도를 고쳐서 효력이 없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두고 너무 심한 폐단만 제거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여깁니다."
하고, 이어 폐단을 구제할 여러 조항들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진상하는 마른 전복은 울산의 것이 잘다 하여 매번 사천(泗川)·거제(巨濟) 등지에서 사들이는데, 이는 바로 제주에서 생산된 것으로 여러 곳을 거쳐서 입수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높은 값과 거래 때에 드는 잡비를 바다 백성들이 으레 담당하고 있습니다. 진상의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므로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는 없으나, 그 지방 산물에 따라 봉진하는 것이 본시 공물을 바치는 제도이고 또 관동과 호남에 근거할 만한 전례도 있으니, 의당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계문을 묘당에 내리면서 일찍이 그 도의 도백을 지낸 사람과 확실하게 의논해서 아뢰도록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정유년068) 의 경상우도 연해의 어세(漁稅)를 통영에 떼어줄 때의 거조(擧條)를 가져다 보니, 그 당시 대신과 여러 신료들이 균청 사목(均廳事目)이 지극히 엄격함을 들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가, 끝에 가서 균청의 대장에 올라 있지 않으면서 새로 설치하기에 가합한 곳이나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지만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곳들에 대하여 이 명목을 빌려 마지 못해 허락하였었습니다.
대체로 해세(海稅)를 통영에 떼어주는 것이 매년 1만 냥이고 또 장수와 사졸들의 생계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도 연해의 어세를 떼어주었고 보면 조정에서 통영을 돌보아준 것은 그지없이 곡진하였는데, 균청의 사목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미 제도를 훼손시킨 데 대한 탄식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 장수와 아전들의 간악한 폐단이 극히 심해져서 바닷가 백성들의 곤궁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양쪽을 다 편리하게 하는 효험은 없고 오랫동안 조정에 근심만 끼쳤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본 고을에 환속시킨다면 여러 조목의 고질적인 폐단들을 제거하려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관찰사의 보고에서는 비록 통영의 형편이 옛날만 못한 것을 가지고 고려할 단서로 삼고 있으나, 바닷가 백성들이 매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이 시점에서는 사소한 거리낌들은 족히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생각에는 우도 연해의 어세는 일체 균청의 절목에 의거하여 이전 대로 각 고을에 환속시켜서 통영은 다시 간섭할 수 없도록 하여야만 바야흐로 십분 구제하고 개혁하는 도리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진상하는 전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바닷가 고을에서 응당 바쳐야 할 물품이고 진헌하는 사체는 지극히 중한 것이니, 도신이 이것을 말씀드린 것은 일이 미안한 데에 관계됩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토산물을 봉진하는 데는 대소에 구애하지 않는 것이 이미 호남과 관동에서 폐단을 바로잡았던 가까운 사례가 있으니, 울산의 전복에 대한 일은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고 도신은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8일 기미
특명으로 조상진(趙尙鎭)을 상주 목사에 보임하였다. 상이 상진을 도승지에 제수하였는데, 상진이 부름을 어기므로, 전교하기를,
"너무 심하면 난(亂)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심한 정도를 넘어선 경우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사로움이고 공정한 것이 아니다. 전 이조 판서가 지난번 연석에서 아뢴 말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매우 미워했었으니, 이같이 하였으면 매우 밝게 해명된 것이다."
하고, 거듭 행공할 것을 신칙하였으나 상진이 그래도 머뭇거리자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한 것이다. 이에 앞서 상진이 이병정과 혐의가 있었는데, 상진이 대사헌으로 죄를 입음에 미쳐 병정이 연석에서 그를 통렬히 배척하면서 ‘소인 행위의 조짐이 있다.’고 하였는데, 전교 가운데에서 ‘전 이조 판서가 연석에서 아뢴 말’ 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를 가리킨 것이다.
김문순을 이조 판서로, 심환지를 이조 참판으로, 이익운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익운이 부름을 어기자 특별히 경주 부윤에 보임하고 이면긍으로 대신하였다. 서유방(徐有防)을 병조 판서로, 이의필(李義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서정수(徐鼎修)를 규장각 직제학으로, 김조순(金祖淳)을 규장각 직각으로 삼았다.
홍대협(洪大協)을 호서 안핵 어사(湖西按覈御史)로 삼았는데, 이는 구순(具純)이 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조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좌의정 김종수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상소에서 천하의 큰 제방[大防]을 가지고 말씀드렸는데 성상의 비답에서도 천하의 큰 제방을 가지고 하교하시었고, 천신은 일의 변고를 가지고 말씀드렸는데 성상의 하교에서는 이치의 떳떳함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신이 걸려든 일은 바로 변고 중에도 큰 것인데, 어떻게 감히 신하가 임금 섬기는 떳떳한 도리를 망녕되이 끌어다가 자신의 처지를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본디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여 아직까지 마음을 환히 드러내서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고 겨우 물러나겠다[退]는 한 글자를 마지막 수단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이미 차선(次善)의 의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속으로는 영화를 탐하는 생각을 품고서 겉으로만 충성을 다하는 의리를 칭탁하여 감히 벼슬에 나갈 계책을 낸다면 이는 변고를 만난 사람이 상리에 얽매인 행위로서 마치 큰 강이 뭍으로 변한 때에 배를 뛰우고 평지가 강으로 변한 때에 수레를 모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난 번에 신이 이른바 천하의 큰 제방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신의 한 몸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 실상은 국가의 만세를 위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통촉하시는 전하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붙들어 세우고 개도하는 방법을 생각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그토록 몰아붙여 속박해서 기필코 남김없이 무너뜨리고야 말도록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구구하게 미혹된 고집이 마음 속에 굳게 남아서 죽음이 있을지언정 변동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벼슬을 해임하시고 신의 죄를 무거운 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이어 사관을 보내 하유하기를,
"어제 이른 말들은 급하게 다그친 것이 아니고 신하의 직분을 가지고 권고한 것이었다. 경도 생각해보았다면 어제 이른 말들이 억누르는 데에 가까운 것인가? 대저 도리가 맞으면 바로 이치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언급한 것들은 경이 의리를 항상 눈으로 보아서 모든 일을 의리에 합당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말이었는데, 경은 내 말을 듣고도 완강하게 굳은 고집을 바꾸지 않으니, 이것이 과연 의에 타당하고 이치에 합당한 것인가. 타당함의 반대는 어긋난 것이고 부합함의 상대는 곧 반대이다. 대신이 임금을 섬기는 데는 사소한 신의를 따지는 자잘한 벼슬아치와는 다른 것이고 보면 한쪽에만 얽매여 마치 발끈하면서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간다는 식과 같이 하는 것은 도리어 경이 이른바 천하의 큰 제방이라는 것에 방해됨이 있을 듯하다.
또 더구나 요사이 날씨가 몹시 무더움으로 인해 가슴의 답답증이 점점 심해져서 지금은 수응 수답하는 일들이 갑절이나 어렵다. 그런데 지금 경 때문에 시달리느라 잠시도 조섭을 하지 못하고 날마다 조정에 나오기를 권면하는 일 한 가지로 골머리를 썩히게 되니, 경은 진정 나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참으로 개탄스럽구나. 붙여 아뢴 계문으로 인하여 하고 싶은 수많은 말 중에서 하나를 거듭말하였으니 경은 모름지기 출처의 가부를 깊이 생각하여 여러 날을 허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종수는 고을의 옥[縣獄]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는데, 사관을 보내 타일러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척에 있는 유수(留守)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까닭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입니다. 신은 나라를 위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기에 죽음이 가까워진 이때에 차마 평소의 회포를 속에만 두고 다시 말하지 않아서 끝내 천고에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두려운 마음을 잊고서 그에 대한 말씀을 모두 아뢰려고 하니, 전하께서는 측은한 생각으로 굽어 살펴주소서. 대체로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있는 바탕은 오직 의리뿐입니다. 의리가 행해지면 그 나라는 다스려지고 의리가 행해지지 않으면 그 나라는 어지러워집니다. 이는 꼭 식견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누군들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국가에 대해서 겉모습만으로 말한다면 성명하신 전하께서 임어해 계시고 사방 팔역이 다 평안하니 다스려진 나라라고 이르는 것이 참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관찰해 본다면 당연히 행해져야 할 의리가 행해지지 않은 지가 그럭 저럭 18년이 되었습니다. 신이 기유년069) 현륭원(顯隆園)을 옮길 즈음에 우리 성상께서 입으신 소매자락에 흐른 눈물이 피로 변하여 점점이 붉게 물든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일찍이 옛 글에서 혈루(血淚)라는 두 글자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었는데 부득이하게 군부의 소매자락에서 직접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전하께서 제왕의 효성으로 몸소 증자(曾子)·민자(閔子)와 같은 효도를 행하시는 것은 본디 알지만, 진실로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치고 맺힌 한을 펴지 못한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이 어떻게 참으로 피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가슴 속에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또 억제하여 의리가 크게 천명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단지 혹시라도 선대왕의 훌륭한 덕에 털끝 만큼이라도 관계됨이 있을까 염려하신 때문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사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왕께서 이미 전하를 위해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에 대하여 이름을 들어 말씀하였으니 선대왕께서 확연히 느껴 깨달았음을 이로 미루어 대략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느껴 깨달으심이 이미 이와 같이 정녕하였고 보면 전하께서 속히 천토(天討)를 거행하시어 사도 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야말로 비록 성인에게 질정해보더라도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아, 당시 여러 역적들의 참소와 무함 가운데도 세자를 일러 화리(貨利)와 성색(聲色)을 탐한다는 말과 말 달리며 사냥하기나 즐긴다는 말을 만들어낸 경우는 그 죄가 참으로 하늘에 사무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이를 선왕조에 속한 일이라 하여 꾹 참고 발설하지 않으신 것은 그런 대로 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수십 년 동안 마음을 썩히고 뼈에 사무치는 아픔으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던 까닭은 바로 여러 역적 무리가 무함하였던 일들은 곧 천고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아직까지 미처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서 그 거짓들을 소상하게 변파하여 천하 만세에 알리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끝내 듣지 않으시고 신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끝내 말하지 않았을 경우, 천하 만세에 동호(董狐)070) 의 붓을 잡은 자가 만일 전하와 신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또한 차마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래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역적들의 무함은 흉악한 무리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그것을 밝게 씻어 주는 글은 적막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면 장차 근거해서 믿을 만한 것이 없게 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신이 매번 생각이 이에 이르면 한밤중에도 목이 쉬도록 울곤 합니다. 우리 전하와 같은 효성으로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수원 유수가 되면서부터 한침(漢寢)의 의관(衣冠)071) 을 가까이 모시고 구령(緱嶺)의 생학(笙鶴)072) 을 아련히 바라보면서 우러러 의지하는 나머지에 늘 처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전의 기신(忌辰)에는 신도 제사지내는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촛불이 흔들리고 솔바람이 이는 사이에 절을 하고 꿇어앉았노라니 아련히 떠오르는 성음과 모습과 숙연한 탄식이 마치 보는 듯 듣는 듯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혼자서 말하기를 ‘선세자(先世子)을 직접 섬겼던 이 몸이 늙어서도 아직 죽지 않았으니, 침원(寢園)을 돌볼 사람이 이 몸 밖에 다시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당시의 일을 직접 보아 선세자의 원통함을 환히 알면서도 좌고 우면하면서 머뭇거리는 것만을 일삼아 지난 여름에 한장의 상소를 올린 뒤로는 끝내 다시 속마음을 다 기울여 말씀드리지 못하고 예사롭게 세월만 보내고 있구나. 이는 곧 선대왕의 끝없는 은혜를 저버린 것이요, 우리 전하께서 다시 살려 주신 큰 덕을 저버린 것이며, 또 내 자신의 일편단심을 저버린 것이니, 조석 간에 죽어서 땅에 들어가게 되면 무슨 말을 우리 선대왕에게 아뢰며 무슨 말로 우리 선세자를 위로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신이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세자에 대한 무함이 깨끗이 씻겨져서 징계와 토죄가 크게 시행되기 이전에 신이 만일 다시 관복을 찾아 입고 반열의 한가운데에 선다면 이는 의리를 잊어버리고 부귀를 탐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가 신을 영의정에 발탁시킨 뜻이 어찌 신을 부귀하게 해 주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신으로 하여금 의리로써 마음을 가지고 의리로써 임금을 섬겨 온 세상을 의리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전하를 섬기는 일 가운데서 이 큰 의리를 버려두고 다시 어디에다 손을 쓰겠습니까.
신이 지난 섣달에 용서를 받고 돌아와서 충심을 다하여 상소를 올리고 머리를 짓찧으며 쟁론할 적에 조정에서 방관하는 자들 중에 신을 일러 미치광이요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한결같은 고심은 사직에 대한 깊고 원대한 염려를 하는 것이었고 흉악한 무리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조짐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이재간과 신기현의 일에서 신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허여하셨습니다. 신은 그래서 후인들이 신의 지금 이 말을 보고서 또한 전하께서 신의 전일의 말을 평하시듯이 할까 두렵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의 국가에 대한 선견은 매우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신을 하찮게만 여기시고 의논을 조금도 채택해 주지 않으시어 신으로 하여금 칠실(漆室)의 근심을 어느 때고 늦출 수 없게 하십니까. 신이 그제 사관에게 붙여 아뢴 말 중에 ‘구구하게 가지고 있는 생각[區區秉執]’이란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의리입니다. 왕께서 그것을 행하시기를 신은 날마다 바랄 뿐입니다.
다음으로 요사이의 일을 가지고 본다면 전하께서는 의리의 제방을 아무 어려움도 없이 무너뜨려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지간의 극악 무도한 자들의 지친과 인척들이 모두 갓의 먼지를 털고 벼슬길에 나와 벼슬아치의 대장을 꽉 메우고 있습니다. 신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세력없는 역적에 대해서는 그 죄가 8, 9촌까지 미치나, 세력있는 역적에 대해서는 국법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는 당사자 이외에는 비록 3, 4촌이거나 사위이거나 처남이거나 매부로써 평소 친숙하게 지냈던 자들까지도 단지 연루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행여나 늦을세라 좋은 벼슬을 주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천하에 역적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그들을 징계하는 데에는 마치 그 사이에 차별이 있는 듯하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모두가 전하께서 큰 의리의 관건에 대해서 끝내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 국법을 시원스레 시행하려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마다 간 곳마다 제방이 날로 허물어져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는 실로 충신과 지사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옛사람들은 자기 말이 쓰여지지 않는데도 떠나가지 않는 것을 신하의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말중에 가장 중대한 것으로는 의리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명색이 대관(大官)으로 이상에서 말한 두 가지의 큰 의리를 군부(君父) 앞에 진언하였으되 끝내 일분이나 반분도 채용된 실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로 평소의 집념을 굽히어 태연하게 명을 받든다면 이보다 더 큰 신하의 수치는 없을 뿐아니라, 세도와 국가에 끼치는 해독은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부적합한 실상과 병에 찌든 상태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 것입니다. 오직 이 큰 의리만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나갈 것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대로 간직한 채 황천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수상직을 체직하시어 하찮은 신의를 온전히 지키도록 해주시고, 이어 신의 말을 채택하여 의리가 크게 밝혀지도록 하신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제공이 상이 즉위하던 병신년에 사도 세자를 추숭(推崇)하자는 논의를 제창하였다가 김수현(金壽賢)의 옥사에 말이 관련되어 거의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의 비호를 힘입어 죄를 면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비로소 공의에 용납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서 숨을 죽이고 감히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그가 흉악한 꾀를 가슴에 품고 국시(國是)를 뒤바꾸려는 책략은 진정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자년073) 여름에 영남의 패거리들을 불러모아 만인소(萬人疏)를 꾸며내서 장차 군부를 협박 제어하는 꾀로 삼으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상이 연석에 임어하여 분명하게 하유해서 전형(典刑)을 밝게 보이자, 제공이 크게 두려워하여 다시 여러 대신들과 연명 상소를 올려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맹세의 말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급기야 특별 전지로 화성 유수가 되었고, 또 이어 수상으로 부름을 받자, 상의 마음을 넘보며 기세를 돋구어 묵은 감정들을 일으켜서 전혀 기탄 없이 붓을 휘둘러 자기 속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상이 그의 상소문을 보고는 진노하여 사관을 보내 되돌려 주게 하고, 또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에서 ‘구구하게 가진 생각은 바로 이 두 가지 의리 운운’ 하였다. 그런데 첫째의 일은 바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난 해 이달 22일의 구교(口敎)를 내릴 적에 눈물 섞인 먹물에 붓을 적시고 통곡을 삼키며 입으로 부르다가 한참 동안 숨이 막혔다가 겨우 소생했던 일을 경은 앞자리에 있으면서 목격했었다. 대저 그때 한번 하유한 것은 본의를 밝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하 만세에 길이 할 말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번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요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인데,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그 일을 오늘날 다시 제기할 수 있겠는가. 경도 그 뒤로는 감히 다시 꺼내지 않았던 것은 곧 몰랐던 것을 알고 깨닫지 못했던 바를 깨달아 나의 마음을 경의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일도 역시 방금(邦禁)에 속한 것이다. 붙여 진술한, 벼슬길을 넓히고 죄를 씻어준 데에 관한 폐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더듬어 자세히 답할 여가가 없다. 아, 나는 매우 무능하나 알고 있는 것은 천지의 큰 원칙이고 지키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윤리이다. 그래서 마음에 부끄러울 것도 없고 남에게 요구할 것도 없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간장과 피가 거꾸로 치오르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겠다. 경도 나의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역시 마음이 두렵고 정신이 몽롱해질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행장 채비를 기다리지 말고 즉일로 상경하라."
하니, 제공이 사관에게 붙여 아뢰기를,
"신이 어제 올린 한장의 상소가 우리 성상을 슬프게 할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황송스런 작은 일이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천지의 큰 법도입니다. 작은 일을 가지고 큰 법도를 방해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첫째 의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감히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이 충심을 다해 상소문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관이 달려와서 성상의 비답을 전해주어 읽어보니 말씀의 내용이 매우 슬프고 펴 보이심이 분명하고 간절하였습니다. 신이 받들어 읽다가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였습니다. 아, 전하가 간직하여 지키시는 것과 신이 굳게 간직한 것이 범연하게 보면 비록 조금 다른 것[差殊] 같을지라도 그 귀추를 돌아본다면 전하의 고심과 혈성이 어찌 일찍이 그 사이에 차이[異同]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옛날의 대신들은 도를 가지고 진퇴를 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옛사람에 비기는 것은 아니나, 명색은 대신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올려 윤허를 입지 못하고서 얼굴을 쳐들고 나아가 은명(恩命)에 숙배하는 것은 결코 의분(義分)에 있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속히 엄한 처벌을 내려서 신하의 분의를 독려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조금 다르다느니 차이가 있다느니 한 말들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고 마음이 오싹해진다. 반드시 노망 중에 미처 점검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 계문을 봉함하여 돌려 보내라."
하였다.
5월 29일 경신
경기 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을 파직하였다. 그것은 좌의정 김종수에게 보내는 별유(別諭)를 양주(楊州)로 보냈어야 할 것인데 잘못 수원으로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면응을 이조 참의로, 정창순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5월 30일 신유
차대하였다. 상이 좌의정 김종수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벼슬길을 넓히고 죄를 씻어준 정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였다. 나와 너의 구분도 없고 구별짓지도 않아서 비록 분수에 너무 지나친 듯하기는 하나, 나는 응당 연좌해야할 사람을 제외하고는 진실로 경중이나 천심을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경은 가장 의리를 주장했던 사람이니, 이러한 때에 정승의 자리는 경이 아니고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 경이 어찌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 영상의 상소는 이미 싸서 되돌려 보냈다.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제학(提學) 한 사람이 대략 들어 알고 있으니 경이 나와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작년 5월 22일 구전으로 하교하실 때에 심지어 ‘사(師)·한(翰)074) 두 글자의 흉언(凶言)’이란 말씀으로 하교하셨습니다. 그때 이 하교를 친히 받들었던 신하들 중에는 지금까지 연석에 나오는 자도 있거니와, 대신들의 연명 차자와 선비들의 연명 상소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하된 자로 어떻게 감히 다시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조정의 일이 모두 이러하다. 금령이 버젓이 있는데 비록 대신의 상소라 할지라도 승지가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받들어 들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비록 낮은 벼슬아치라 할지라도 감히 다시 제기할 수 없을 터인데 더구나 대관의 경우이겠습니까.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잣대입니다. 지극히 중대한 의리에 대해서 이미 성상의 뜻을 명백하게 보이셨는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다니는 신자로서 어떻게 감히 전하의 앞에서 이런 말을 다시 꺼낼 수 있단 말입니까. 영남 유생들이 입시한 연석에서 한 말씀과 구전한 하교는 모두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고 신들이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밖에서 하교를 전해들은 여러 신하들도 그러하였는데 더구나 그 당시 현직 정승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상소는 늙어 정신이 흐린 소치에서 빚어진 것인 듯한데, 무어 꼭 이같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지난 2월에 신이 채제공과 득중정(得中亭)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그때 신이 묻기를 ‘여러 해 동안 독상(獨相)으로 있으면서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없었다가 지난 겨울에 수차(袖箚)를 올린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지난 겨울 삼사(三司)의 합계 속에서 한 구절을 지워 없앤 것이 실로 원통했기 때문에 부득이 발뺌의 계책을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어찌 대단히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역적 이덕사와 조재한이야말로 바로 두 글자의 흉언이요 그들이 남의 형세를 빙자한 말은 더욱 몹시 흉패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자로서 다시 흉악한 역적의 자취를 밟는 자는 단지 ‘역적을 비호한 자도 역적이라’는 법률로만 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역적 종실의 일에 이르러서도 영남 사람 만여 명이 모두 ‘우리가 종실의 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간섭하지 않았다……’ 하고 있으니, 그들의 속셈을 헤아려보면 바로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의 역모 사건과 맥락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남 사람들의 이 말에 대해서는 들은 자와 전한 자가 다 따로 있으니, 대체로 수현(壽賢)·흥록(興祿) 무리와 서로 체결한 자들이 모두 이 부류입니다. 그런데 만여 명을 즉각 불러모을 수 있는 힘이란 반드시 변괴가 있게 마련이니, 이것이 어찌 대단히 놀랍고 두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소 중의 말들은 내가 비록 하나하나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나, 비답 중에 대략 의중을 내비친 것이 있으니 경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오늘 한번 나온 것은 오로지 충신과 역적을 엄격히 구분하고 의리를 분명히 하려는 뜻에서였는데, 성상의 하교가 옳게 여기지 않으시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몸을 붙들어 회피할 뿐입니다. 당당한 정승 자리가 과연 어떠한 지위입니까. 이미 저 사람과는 의리상 차마 한 하늘 밑에 있을 수 없는데, 어찌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료가 될 리가 있겠습니까. 원소(原疏)는 비록 반포되지 않았지만, 조지(朝紙)에 실린 비답을 가지고 말한다면 상소문의 내용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조정에는 적막하게 한 마디 말도 없습니다. 세도가 이러하니 변괴가 어떻게 겹쳐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부교리 어용겸(魚用謙)이 말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간직하신 대의는 바로 지극하고 정미한 인의(仁義)로서 길이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도가 불행하여 변괴가 겹쳐 나와서 감히 이런 의리를 왜곡시키는 계책을 하고 있으니, 그 조짐이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곧 얼게 되는 정도 뿐만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의 용단을 크게 발휘하소서."
하였다. 종수가 물러간 다음 상이 채제공이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거적자리에 앉아 명령을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숙배 사은할 것을 재촉하고 이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제공이 관을 벗은 채 뜰 아래 엎드려서 스스로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니, 상이 명하여 자리로 오르게 하고 하유하기를,
"경이 스스로 죄에 빠져든 것이 이번 상소의 일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경이 이 상소를 낸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상소문을 펴들고 두어 줄도 못 읽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오싹하고 뼈가 저리었다. 이것을 중외에 반포하였다면 장차 경을 어떤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지금의 입장에서는 종전에 경을 살려낸 뜻이 허사로 돌아갔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목하 터져 나올 의논들을 막을 수가 없으니 비록 애써 감싸 주고자 하여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서계(書啓)에서 한 말들은 또 무슨 말인가? 이것이 만일 전파되면 경의 죄안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를 것이다. 오늘 좌상이 자리에 나와 첫 마디의 제일의(第一義)가 바로 경을 성토하는 한 가지 일이었는데, 말뜻이 준엄하였고 바로 그것을 좌상 직임의 거취에 연관시켜 쟁론하였다. 이는 좌상 한 사람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의 공공의 논의이니, 경이 이 시점에서 장차 무슨 계책으로 죄를 면하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의 죽을 죄는 신이 스스로 압니다. 죽음이 있을 뿐인데 다시 무슨 말로 우러러 대답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눈물을 삼키며 엎드려 손바닥을 모으고서 아뢰기를,
"신은 천지간에 혈혈 단신으로 아비도 어미도 없고 오직 우러러 믿는 곳은 오직 전하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일호라도 말을 꾸며내서 거듭 스스로 죽을 죄에 빠져들겠습니까. 작년에 구전으로 하교하신 의리는 지극히 정미하고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때 시임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다짐을 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보니 기필코 물러나야 하는 의리를 말씀드리려다가 죽음이 임박하여 그만 다시 이런 죄에 빠졌습니다. 속히 죽기만을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명한 상소에서 맹서한 말이 그 얼마나 명백한데 지금 갑자기 이런 상소를 올려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나로 하여금 다시 듣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늙고서도 죽지 않아 종전에도 번거롭게 건져주시는 노고만 끼쳐드렸고, 지금 또다시 스스로 죽을 곳으로 나아갔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끝마다 죽어야 한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상이 되어 나와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이러한 광경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나치도다."
하였으나, 제공이 그래도 계속 가슴을 치므로, 상이 이르기를,
"아침 연석에서 좌상의 말에 ‘그러한 처지에서 염치를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온 자에게는 징계와 토죄를 시급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허다하게 늘어놓은 말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으나, 올 봄에 좌상이 경과 수원에서 서로 만났을 때, 지난 겨울 선비들이 상소한 일을 가지고 경에게 질문하자, 경이 대답하기를 ‘지난 겨울 합계한 내용 중에 글귀 하나를 지워 없앤 것이 참으로 원통하였다. 그래서 수차(袖箚)의 일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과연 발뺌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고 했다기에 나는 듣고서 놀라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관이 대관을 대해서 선뜻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과연 좌상과 이러한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인가?"
하니, 제공이 손으로 앞 자리를 치면서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올 봄에 신이 좌상과 처음으로 득중정(得中亭)에서 서로 만났는데,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는 즈음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과 같다.’는 말에 언급하여 좌상이 말하기를 ‘수차 중에 호해(湖海)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등의 말들은 무슨 뜻으로 쓴 것인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호해라는 말은 지난 겨울 호서(湖西)의 한씨와 윤씨 집안에 대한 일075) 이고 산동은 바로 관동(關東)의 일을 지칭한 것일 뿐 특별히 다른 뜻은 없었다.’ 하였더니, 그도 다시 대답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원소(園所)에서 작별할 때에 좌상이 신에게 ‘소생이 대감과 정분은 진실로 여전하지만 이번 주고받은 말이 만일 서울에 퍼진다면 반드시 말들이 자자하게 될 것이니 신중히 하여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하기에 신은 의당 경계시킨 대로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서울에 들어오자 이익운(李益運)이 찾아와서 김 판부사와 서로 만났을 때 어떤 얘기를 나누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그와 서로 약속한 일을 번거롭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록 이익운이 물었어도 말을 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작별할 때의 약속을 저버리고 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연석에서 아뢰기까지 할 줄을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그리고 합계 중에서 한 구절을 지워 없앴다는 말은 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고, 발뺌하려 했다 운운한 말에 이르러서는 이야말로 하천배의 말투입니다. 어떻게 사부로서 이런 말을 할 자가 있겠습니까. 이 한 마디에 대해서는 그와 대질을 하고 싶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두 대신이 대질을 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좌상이 여러 사람이 모인 빈연에서 아뢰었던 말인데 지금 경이 이렇게 놀라고 의아해하니, 이 일은 뒷날 서로 만나서 설파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좌상이 연석에서 아뢴 말에 또 ‘영남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종실에 관한 일에는 처음부터 한 번도 손을 쓴 일이 없다.」고 하니 대단히 놀랍고 두렵다.’고 하였고, 또 경의 발뺌에 대한 말은 지난 겨울에 당한 일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였다. 대저 경의 지난 겨울의 일은 어찌 경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윤영희(尹永僖)를 왜 그다지도 싸고 돌면서 하마터면 큰 죄에 빠질 뻔했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제공이 아뢰기를,
"윤영희가 죄를 벗어나거나 못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신이 하필 영희를 애써 감싸주려 하였겠습니까. 신의 본래 버릇이 남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희의 일을 가지고 신을 몰아세우려고 하자 신이 과연 격분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신이 만일 남을 따라 처신하면서 뜻을 굽혀 자신만을 꾀하였다면 어떻게 누차 재앙의 그물에 빠져들었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김종수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신이 수상과는 결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조정에 설 수 없는 의리를 전석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아, 작년 5월 22일에 구전하신 하교는 곧 성상의 효성에서 나온 것으로 열어 보임의 명백함과 우려의 심원하기가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몹시 슬퍼하시고 애통해하시는 성의가 충분히 귀신을 울리고 돼지나 물고기까지도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의 대신으로서 ‘이 뒤에 만일 다시 이 일을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바로 난역(亂逆)이다.’는 말로 소장에서 다짐을 했던 자가 겨우 한 해가 지난 이 때에 그가 도리어 수범(首犯)이 되었으니 이는 천고에 없었던 세상의 변괴입니다. 군부도 안중에 없는 그의 심술은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아는 바입니다. 비록 전하의 비답 내용과 그의 상소문을 돌려 보내고 반하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상소의 말들이 매우 흉패하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세를 본다면 그가 다시 군부를 협제하는 계책을 써서 역적들의 앞잡이가 되려고 한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몹시 놀라고 분개하여 나라의 여론이 물끓듯하니 실로 어떤 화란이 조석 사이에 닥쳐올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뼈가 저리고 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으신 생각으로 확연히 넓게 살피시어 그의 원소를 특명으로 다시 가져다 반포하셔서, 제때에 성토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안정시키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 차자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경기 관찰사 정창순(鄭昌順)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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