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술
윤대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전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서용하였다. 세초 단자(歲抄單子)를 인해서 전교하기를,
"그의 죄는 그의 죄이고 은혜를 내리는 일은 은혜를 내리는 일이다. 은혜는 끊임없이 베풀어 주는데도 죄지은 것은 산더미처럼 크다. 그도 역시 타고난 성정이 있으리니 한밤중에 조용히 생각해본다면 죄를 그만 지을 줄 알고 은혜에 감격할 줄 아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서용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종수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신이 연석에서 채제공의 극히 흉악한 정상을 통렬하게 말씀드렸는데도 처분을 받들지 못하였고, 연석을 물러 나와서는 상차하여 채제공의 상소문을 반포해서 제때에 성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해 주실 것을 빌었으나 한 글자의 비답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번거롭게 사관을 보내 차자를 되돌려 주셨습니다. 신이 명색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흉악한 역적 하나를 논하였는데, 윤허를 내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고에 없던 극악한 역적으로 하여금 버젓하게 숙배하고 등대하게까지 하셨습니다. 신이야 무어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켰으니 이것도 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제공의 상소 내용을 여기 저기서 얻어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놀라고 뼈가 저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난신 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마음 쓰는 것이 흉특하고 참독하여 마구 욕설을 해대는 것이 어찌 이 역적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맹세코 이 역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서도 지금까지 성토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상소가 아직까지 반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반포할 것을 명하여 그의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아서 종묘 사직과 신민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가령 신에게 전부터 상직에 나올 수 없는 내세울 만한 조건이 없다 할지라도 이 역적이 토벌되기 이전에는 의리상 차마 한 하늘 밑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같은 관료로 한 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신이 당연히 물러가야 하는 한가지 단서이기도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승정원에 명하여 싸서 되돌려 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종수가 말이 채용되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는 의리를 내세워 도성 밖으로 물러가면서 녹사(錄事)를 보내 명소 패(命召牌)를 들이니, 상이 명하여 받들어 들이지 말고 승정원에서 가져다 전하게 하였다.
영남에서 진휼을 베풀었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진휼을 끝마쳤다.
【원 진휼 대상은 좌도 병마 절도영·우도 병마 절도영·좌도 수군 절도영의 경주(慶州)·상주(尙州)·성주(星州)·대구(大丘)·진주(晉州)·울산(蔚山)·김해(金海)·영해(寧海)·밀양(密陽)·동래(東萊)·창원(昌原)·선산(善山)·칠곡(漆谷)·순흥(順興)·하동(河東)·거제(巨濟)·영천(永川)·예천(醴泉)·합천(陜川)·청도(淸道)·초계(草溪)·영천(榮川)·흥해(興海)·양산(梁山)·함안(咸安)·곤양(昆陽)·영덕(盈德)·고성(固城)·남해(南海)·의령(宜寧)·용궁(龍宮)·청하(淸河)·진해(鎭海)·지례(知禮)·현풍(玄風)·연일(延日)·장기(長鬐)·영산(靈山)·창녕(昌寧)·사천(泗川)·기장(機張)·웅천(熊川)·칠원(漆原)·언양(彦陽)·함창(咸昌)·고령(高靈)·단성(丹城)·군위(軍威)·삼가(三嘉)·비안(比安) 등의 고을과 부산(釜山)·다대(多大)·서생(西生)·가덕(加德)·미조항(彌助項)·적량(赤梁)·구산(龜山)·포이(包伊)·두모(豆毛)·개운(開雲)·서평(西平)·지세(知世)·제포(薺浦)·옥포(玉浦)·평산(平山)·영등(永登)·당포(唐浦)·사량(蛇梁)·안골(安骨)·조라(助羅)·천성(天城)·포항(浦項)·가배량(加背梁)·율포(栗浦)·삼천(三千)·신문(新門)·남촌(南村)·구소비(舊所非)·청천(晴川)·장목(長木) 등의 진과 금오(金烏)·독용 산성(禿用山城)과 성현(省峴)·황산(黃山)·소촌(召村)·송라(松羅)·창락(昌樂)·자여(自如) 등의 역과 진주·울산 등의 목장이었고, 급하게 구제한 곳들은 안동(安東)·청송(靑松)·인동(仁同)·함양(咸陽)·풍기(豊基)·금산(金山)·의성(義城)·경산(慶山)·거창(居昌)·개령(開寧)·봉화(奉化)·진보(眞寶)·하양(河陽)·자인(慈仁)·의흥(義興)·신녕(新寧)·예안(禮安)·영양(英陽)·문경(聞慶)·산청(山淸)·안의(安義) 등의 고을과 조령 산성(鳥嶺山城)과 안기(安奇)·장수(長水)·유곡(幽谷)·김천(金泉)·사근(沙斤) 등의 역이었다. 굶주리는 백성이 총 2백 82만 9천 5백 96에 진휼곡은 20만 5천 7백 56석 남짓이었다.】 상이 도신 정대용(鄭大容)의 장계를 이조·병조에 내리고 연석에 나와 품처하도록 명하여, 부유한 백성으로 1천 석을 자원 납부한 가선 대부 김상형(金相泂)에게는 실직을 제수하고, 5백 석 이상을 납부한 절충 장군 유덕기(劉德基) 등 6명에게는 상으로 품계를 올려주고, 1백 석 이상을 납부한 전 영장 김노범(金魯範)은 승진 서용하고, 절충 장군 이전(李烇) 등 26명에게는 체가(帖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95면
【분류】구휼(救恤) / 인사(人事)
상이 도신 정대용(鄭大容)의 장계를 이조·병조에 내리고 연석에 나와 품처하도록 명하여, 부유한 백성으로 1천 석을 자원 납부한 가선 대부 김상형(金相泂)에게는 실직을 제수하고, 5백 석 이상을 납부한 절충 장군 유덕기(劉德基) 등 6명에게는 상으로 품계를 올려주고, 1백 석 이상을 납부한 전 영장 김노범(金魯範)은 승진 서용하고, 절충 장군 이전(李烇) 등 26명에게는 체가(帖加)하였다.
6월 2일 계해
명하여 구례(求禮) 전 현감 이재천(李在天)은 승진 서용하고, 태인 현감 조진규(趙鎭奎), 담양 부사 이유칭(李惟稱), 금구 현령 한홍유(韓弘裕), 임실 현감 이윤서(李潤瑞)는 파출하였다. 지난 겨울에 호남 어사가 돌아와 수령들의 치적 여부를 아뢰자, 상이 진휼 정사가 한창 거행중이라 하여 도백에게 명해서 진휼을 끝마치는 대로 다시 조사해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도신 권엄(權𧟓)이 낱낱이 열거해 아뢰었다. 그리하여 재천은 자신의 녹봉을 내놓아 진휼에 보탠 일로 승진 서용되었고, 진규 등은 고을이 다스려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 신대현(申大顯)을 불러 보았다. 하직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6월 4일 을축
의정부의 영의정 채제공과 좌의정 김종수를 파직하였다.
6월 5일 병인
이면응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6일 정묘
특별히 이신회(李身晦)를 발탁하여 한성부 우윤으로 삼았다.
6월 8일 기사
북관(北關)에 신칙하여 짝을 지어 활쏘기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김이성이 무산 부사(茂山府使)로 있다가 갈려와 아뢰기를,
"북관은 무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니 의당 짝을 지어 활쏘기를 하게 하되 고을 별로 짝을 짓고 기예로써 서로 겨루게 한 다음 특별히 상을 내려서 격려하고 권면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에 명하여 수신(帥臣)에게 관문을 띄워 그 편리 여부를 물어보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절도사 최경악(崔景岳)이 치계하여 매우 편당한 일이라고 말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6월 10일 신미
이최원(李最源)을 밀양부에 귀양보냈다. 최원이 밀양 부사로 후조창(後漕倉)의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되었는데, 배에 곡식을 실은 것이 때가 늦음으로 인해 안흥진(安興津) 뒤쪽 바다에서 파선되었으므로, 특명으로 그 고을에 정배한 것이다.
6월 11일 임신
윤대하였다.
전교하였다.
"근래에 이른바 거조(擧條)라는 것이 또한 실속없는 글 중의 한 가지이다. 고사에는 여러 신하들이 연석에서 아뢴 말로 조보(朝報)에 낼 만한 것들을 승지가 뽑아내서 조지(朝紙)에 실어 반포하는 것이 이른바 거행 조건(擧行條件)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주관(記注官)의 재주가 점점 옛날만 못해져서 초잡은 책으로 계하(啓下)받는 법식이 나왔고, 또 그 뒤로는 간통(簡通)을 당사자에게 써서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자구(字句)를 고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근래로는 이른바 간통이라는 것이 ‘아무 일은 무슨 일인가[某事何事]’라는 서너 글자를 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답통(答通)은 문득 한 편의 글이 되어 이리저리 갈고 닦다보니 소계(疏啓)가 아닌데도 소계 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것이 옛 규례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쓸데없는 군말들이 잗달기 그지없다. 지금부터서는 거듭 옛 제도를 회복시켜 대소 조회와 연석에 나왔을 때 연신이 아뢴 말로서 당연히 거조로 내야 할 것들 중에서 단지 거행할 대략만을 일체 연설(筵說)의 예에 따라 써서 들이고 문장을 잔뜩 늘여서 엮는 버릇은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호서 암행 어사 윤노동(尹魯東)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리니, 이조·병조에 명하여 복계하게 해서 예산 현감 유전(柳烇)은 진휼 정사를 여러 고을 가운데 가장 잘했다 하여 승진시키고, 옥천 군수 김종범(金宗範), 대흥 군수 이관수(李觀秀), 보은 현감 심공저(沈公著), 보령 현감 오정근(吳正根)은 모두 고을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하여 파출하였다. 별단(別單)에 아뢰기를
"송치(松峙)의 샛길은 신이 지나다닐 적에 직접 찾아가 보니, 지난번 신칙한 이후로 통행하는 길이 전보다 조금 막히어 소나 말은 그리 빈번하게 다니지 않았으나 보행자나 나무꾼들의 발길은 계속 끊이지 않았고, 송상(松商) 무리들이 밤을 틈타 몰래 넘나드는 것은 아직도 예전과 같았습니다. 비록 병영에서 수시로 적간은 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조금 멀어서 제재하여 다스리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또 그 지형으로 논한다면 요충의 험준함이 조령(鳥嶺)에 못지 않아 참으로 호서와 영남 사이의 일대 요새지였습니다. 그래서 신의 생각에는 조령의 예에 따라 별장을 두어 파수하게 한다면 단지 잡인들의 통행을 금단하는 방도가 될 뿐만 아니라 국방의 일조도 될 수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송치의 샛길은 본시 단속하여 금하는 법이 있으니 수신(帥臣)과 고을 원이 스스로 의당 사찰해야 할 일이므로 굳이 전에 없던 진장(鎭將)을 다시 설치하여 한갓 백성이나 고을에 폐만 끼칠 필요가 없습니다. 병영과 고을에 엄히 신칙하여 거듭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3일 갑술
호서 어사 윤노동을 파직하였다. 앞서 어사 이조원(李肇源)이 복명하였을 적에 상이 조원이 자기 담당 이외의 고을을 두루 살핀 것은 사목(事目)에 어긋난 것이라 하여 여러 어사들이 복명하기를 기다려서 처분하겠다고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어사에게 내리는 봉서(封書)는 그 사체가 지극히 엄중한 것이다. 만일 연로 고을들을 아울러 탐지하라는 말이 없으면 지나는 지방 고을들의 원도 감히 일체 열거해 논박할 수 없는 것인데, 이번 어사들의 행차에서 이조원이 봉서를 잘못 보았다는 말이 이미 대단히 소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어사 노동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담당 이외의 고을들을 감히 제맘대로 취사 선택하여 산간이나 연해의 고을들을 광범하게 다니었고 심지어는 다른 어사가 이미 출도한 지역을 거듭 들어가기까지 했으니, 받든 사명을 크게 그르쳤다고 이를 만하다. 더구나 종적을 숨기고 다녀야 하는 신분으로서 관첩(關帖)에 서명(署名)까지 하여 보낸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일이다.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경솔하였으니 불서(不敍)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선산 부사 박유원(朴綏源)에게 표리를 하사하고, 양산 군수 성종인(成種仁)은 통정 대부에 발탁하고, 창원 부사 이여절(李汝節)은 승진시키고, 울산 부사 이민형(李敏亨)은 파출하였다. 이에 앞서 어사의 서계에 따라 도신으로 하여금 진휼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수령들의 치적을 하나 하나 열거해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도신 정대용(鄭大容)이 치적을 열거해 치계하였다. 유원은 자신의 녹봉을 떼어 진휼에 보태었고, 종인은 진휼 정사가 한 도의 으뜸이었고, 여절은 치적이 크게 드러났고, 민형은 진휼곡을 사들이면서 원성을 받았으므로, 출척(黜陟)에 각각 차등이 있었다.
호서 안핵 어사 홍대협(洪大協)이 복명하자 편전으로 불러 보고서 구순(具純)을 신지도(薪智島)에, 이광섭(李光燮)을 영동현(永同縣)에 유배하고,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을 파직하였다. 대협의 서계에,
"신이 공주목(公州牧)에 도착해서 응당 신문해야 할 사람들에게 차례로 따져 물었습니다. 사노(私奴) 명업(命業)의 공초에 ‘나는 구순의 집 계집 종 남편으로서 그 집의 바깥 사랑에 들어 살았다. 그런데 2월 22일 밤에 구순의 집 종 나복(羅卜)이 찾아와 부르면서 도적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 나복이 말하기를 「도적 30여 명이 횃불을 들고 갑자기 들이닥쳐 자칭 지세 대감(知世大監)이라 하면서 안방에 있던 돈과 물품을 훔쳐갔다.」고 했다.’ 하고, 또 공술하기를, ‘김명신(金命新)이 본시 구순과 친숙하여 날마다 상종하였는데, 올 2월 초순에 박거사(朴居士)의 일로 명신이 편지를 보내 힐책한 일이 있어 이로부터 다시는 왕래가 없었다. 구순이 소장(訴狀)을 올려 체포령이 내려진 뒤에 장교와 나졸들이 찾아오자 구순이 한 장교를 안 행랑으로 불러들여 조용히 이야기하였는데 그들의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리고 병영의 뜰에서 공초를 받을 때에, 처음에는 사실대로 고하였으나 나중에는 위협을 주는 데에 겁이 나서 도적을 맞지 않은 것으로 공술하였다.’고 했습니다.
청주진 장교 이진욱(李震郁)의 공초에는 ‘2월 28일 밤에 병영에서 나를 비장청(裨將廳)으로 오라고 하여 가니, 비장 한재욱(韓再郁)이 나를 방안으로 불러들여 조계완(趙繼玩) 등과 함께 덕평(德坪)에 가서 변지돌(卞之乭)과 정원돌(鄭原乭)을 잡아 오라고 하였다. 또 철편(鐵鞭) 네 개를 만들어 주면서 「이 두 사람은 바로 처남 매부 사이인데 지돌은 힘이 남보다 뛰어나니 모름지기 각기 조심들 하라.」고 하였다. 철편을 만들 즈음에 하늘이 이미 밝아졌기에 새벽을 기다려서 나갔더니, 지돌은 이미 공주진(公州鎭)에서 잡아가버렸으므로, 지돌의 아우 재돌(才乭)의 처 자미덕(自美德)만을 잡아 그 길로 구순의 집으로 가서 도적맞은 상황을 물으니, 구순이 자기가 잃은 물건들을 낱낱이 세어 말하고, 또 말하기를 「도적이 스스로 지세 대사(知世大師)라고 자칭했다.」 하였는데, 이른바 지세 대사라는 말이 혹 도적들의 은어(隱語)인가 싶었다. 그뒤 3월 4일에 병사가 또다시 풍각(豊角) 김 생원(金生員)과 흥덕(興德) 김 생원을 가서 잡아오라 하였는데, 풍각은 바로 김명신(金命新)이고 흥덕은 바로 김갑득(金甲得)이었다. 그래서 병사의 분부에 따라 이들을 잡아왔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계완의 공초에는 ‘풍각 김 생원을 잡아오는 걸음에 구순의 집을 지나다 들어갔더니, 구순이 「무슨 일로 다시 왔느냐.」고 묻기에, 「풍각의 상주(喪主)를 잡으려고 왔다.」고 대답하자, 순이 말하기를 「이제야 도적을 다스리는 일이 비로소 바른 길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서찰을 꺼내주면서 병사에게 전해달라고 요구하였다.’고 했습니다.
자미덕의 공초에는 ‘내 남편 재돌이 아산(牙山)에 나간 뒤에 병영의 장교가 갑자기 찾아와서 나를 병영으로 붙잡아 가더니 도적이라며 한 차례 따져 신문한 뒤에 비장청의 다모방(茶母房)에 구류시켰다. 그 후로는 한 비장(韓裨將)이 매일 방안으로 나를 불러들여 조용히 말하기를 「너의 남편은 이미 체포되었으니 네가 만일 정원돌(鄭原乭)·이집거(李執莒)·김갑득(金甲得)·김성손(金成孫)·김흥득(金興得) 등을 큰 도적들이라고만 말해 주면 네 남편과 함께 내일 당장 무죄 석방하겠다.」 하면서 이어 떡도 주고 밥도 주었다. 그래서 집거와 대질할 때에 한 비장의 지휘에 따라 거짓으로 꾸며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재욱의 공초에는 ‘구순의 집에서 도적맞았다는 것을 진영에 정소(呈訴)한 뒤에 도적의 진상을 탐지하고자 병영의 아전 유제희(兪濟禧)를 내보냈더니, 제희가 변지돌·변재돌·정원돌·김명신·김성손·김흥득·김흥길 등의 성명을 적어가지고 와서 자기가 스스로 염탐해서 알아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자미덕을 방안으로 불러들인 일은, 마침 먹고 남은 밥이 있기에 과연 불러들여 그에게 주어 먹이고 있는 즈음에 유제희가 와서 말하기를 「석단(石丹)의 공초에서 김명신이 도적의 괴수라고 하였으니 다시 자미덕에게 물어서 그 말이 사실인지를 가려보라.」 하기에, 그의 말에 따라 따져 물으니 자미덕이 모른다고 하였다. 애당초 자미덕을 은밀히 사주한 일도 없고 또 구순과는 평생 모르는 사이다.’ 하였습니다.
유제희의 공초에는 ‘당초 그 곳에 가 탐문할 때에 구순이 말하기를 「풍각 김상제(金喪制)도 극히 수상하다.」 하기에 원돌 등의 이름과 함께 과연 기록해서 올렸다.’ 하였습니다.
이번 옥사의 핵심은 오로지 구순이 도적을 참으로 맞았는지의 여부와 김명신이 참으로 원통하게 죽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고 지세(知世)라는 두 글자의 흉언(凶言)은 더욱 관계가 있습니다. 신이 내려가는 도중에 널리 탐지해본 결과로는 모두들 애당초 도적을 맞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조사를 벌일 때에 미쳐서는 명업 등 세 사람의 공초가 이렇게 정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초 약간 도적맞은 것은 과연 적실한 것이었으나 이는 보통 좀도둑에 불과한 것이니, 사실대로 소장을 올렸더라면 어떤 사람이 믿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데에 마음을 다하고 의혹시키는 것만을 오로지 일삼다가 마침내는 미운 사람에게 악감을 행사하여 날조된 옥사를 사주하여 이루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지세’ 두 글자의 흉언에 이르러서는 당연히 신문해야 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위엄을 보이며 여러 차례 따져 조사하였으나 끝내 그 단서를 얻지 못하였고, 또 다른 방법으로 채탐해 보았으나 그 말들이 각기 달랐습니다. 그 실정을 제대로 캐내는 일은 오로지 죄인 당사자에게 달려 있으니, 죄인 구순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얻어내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 병사 이광섭은 구순의 터무니없이 떠벌리는 말만을 믿고 또 간악한 아전의 거짓 보고를 곧이들어, 이미 도적맞은 물건을 찾아내지도 못하고서 큰 도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을 따져본다면 백성들을 억울하게 해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취를 가지고 말한다면 옥안(獄案)을 강제로 만든 결과가 되었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김명신이 죽게 된 것이 비록 질병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통하게 죽었다고 이르는 것은 그 형세가 그럴 듯합니다. 광섭이 한쪽 말만을 듣고 잘못 판결한 죄는 중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청주 영장 이문협으로 말하자면 도적을 잡는 정사는 우선 장물부터 확보한 다음에야 비로소 도적을 찾아 체포하는 것인데도, 장교와 나졸을 많이 풀어서 평민들만 억울하게 잡아들였고, 한결같이 병영 비장의 말만을 좇아 오직 죄를 얽는 것만 일삼았으니, 그 또한 죄를 감안하여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번에 공주목을 자세히 조사한 일은 세 가지 큰 의안(疑案) 때문이었으니, 첫째는 구순이 도적을 맞지도 않고 도적을 맞았다고 하는지의 여부이고, 둘째는 김명신이 위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죽었는지의 여부이며, 셋째는 이른바 지세 대감 혹은 지세 대사 혹은 지세랑이라는 호칭을 구순이 백지 날조한 것인지의 여부를 알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서계를 보니 도적을 맞은 것은 분명하다 하겠는데 그것은 세 사람의 공초가 충분히 증거의 문건이 될 수 있겠고, 김명신 부처(夫妻)의 죽음은 전염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하겠는데 그것은 명신이 곤장 한 대도 맞지 않았고 평범한 신문까지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구순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꼭 십분 적실하다 할 수 없겠다. 그리고 이른바 호칭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무식한 좀도둑들이 일찍이 써왔던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세 가지의 조사한 일이 모두 단락이 졌다. 그러니 이제는 비록 날마다 구순에게 열 번의 공초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끝나는 날이 있겠는가. 대저 저 사람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갈등을 일으키어 병영의 염탐하는 구실아치에게 성명을 적어 줌으로써 이에 명신이 횡액에 걸려 원통하게 죽은 것이니, 이렇게 된 원인을 규명해 본다면 첫째는 구순이 무상한 탓이요 둘째는 구순이 불량한 때문이다. 그가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이러한 죄를 지어 조사한 문안들이 낭자하니 많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입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를 변명할 수 있겠는가. 대감이니 대사니 하는 등의 상스럽기 그지없는 말들에 이르러서는 그가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죄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에게는 다시 살게 되는 기회라 이를 만하다. 그리고 이미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별도로 다시 그에게 물을 것이 없겠다. 금부에 엄히 가둔 죄인 구순을 감사(減死)하여 외딴 섬으로 정배시킴으로써 김명신 부처의 원한에 사죄하도록 하라. 말이 비록 저속하기는 하나 참으로 이른바 큰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광섭의 일은 바로 인정이 아니라서 가까이할 수 없다는 말에 해당한다. 그가 구순과 대대로 품어온 혐의를 막 씻자마자 당장에 앞장서서 구순의 편을 들고 나와 마치 자신이 도적을 맞은 것처럼 생각하고 철퇴 네 개를 밤새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니, 어쩌면 행위가 그토록 어긋났단 말인가. 이러고 저러고를 막론하고 도적도 사람인 것이니, 기분을 가라앉히고 너그럽게 관찰하여 의심이 없는 곳에서도 의심점을 찾고 반드시 죽게 된 데서 살릴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이와 같이 옥사를 다스려야만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되고 부득이 죽는 사람도 원통함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광섭은 유독 무슨 심술로 아전들을 풀어놓고도 거짓을 살피려 들지 않았고, 비장에게만 맡겨두고서 마치 구순의 지시만 기다린 것처럼 하였으니, 저 명신이 죽게 된 원인을 규명하자면 순과 광섭의 책임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또 더구나 그의 집은 장수의 집안이다. 장수의 종자는 절로 남과 다르기는 하나 처신을 유별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고 기특할 것이 못 된다. 현재 그가 죄를 저지른 것은 또한 단지 도백과 겨루어보자는 생각이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급 감영의 진장(鎭將)을 어떻게 붙잡아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무관을 만일 엄한 법으로 무겁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을 막고 그의 집안을 살려주는 뜻이 아니니, 먼 곳에 무기한으로 정배하라.
이른바 병영 비장 한가(韓哥)는 도백으로 하여금 엄히 세 차례 형장을 쳐서 먼 섬으로 종을 삼아 보내도록 하라. 예사로운 옥송에도 자상하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더구나 반복하는 사이에 죽고 삶이 나뉘이는 일이겠는가. 구순이 도적을 맞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도신의 장계와 어사의 보고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없지 않으니 이같이 처분한 뒤에 어찌 도신에게 죄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청 감사 이형원에게 파직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4일 을해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광리(申光履)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남 암행 어사 이상황(李相璜)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리니 이조·병조에 명하여 복계하게 한 다음 상주 목사 이지채(李趾菜), 선산 부사 박유원(朴綏源), 거창 현감 유한기(兪漢紀)에게는 모두 고을을 다스리지 못했다 하여 차등있게 죄를 내리고, 지례 현감 이채(李采)는 환곡 정사를 정밀히 하고 진휼을 널리 폄으로써 실적이 크게 드러났다 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의 품계에 발탁시켜 선산 부사로 삼았으며, 개령 현감 이학영(李學永)은 강직하고 엄격하며 분명하고 엄정함이 한 도에 으뜸이었다 하여 승진 서용하고, 금오 산성 별장 진덕리(陳德履)는 녹봉을 떼내서 진휼에 보탰다 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의 품계를 가자해서 가리포 병마 첨절제사로 삼았다. 처음에 이조가 아뢰기를,
"이채에게는 승진 서용의 은전을 의당 시행해야 할 것이고, 이학영은 신과 처남 매부 사이라서 피혐해야 하므로 가부를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매양 한제(漢帝)의 ‘오직 어진 이천석[惟良二千石]’이라는 말076) 을 외우면서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깊이 알았음을 감탄해왔었다. 수령의 적임자를 얻는 것은 만 자루의 곡식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훌륭한 정사가 저와 같고 훌륭한 진휼이 또 이와 같으며, 또 더구나 이 사람이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집안인가. 지례 현감 이채를 어찌 군수의 이력에 구애하겠는가. 특별히 본 도의 3품직의 빈 자리에 발탁하라. 그리고 어사의 계단에서 논한 것이 매우 정밀하고 간략하였으니, 그의 칭찬과 꼬집음은 반드시 요량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오랫 동안 곁에서 시종하였던 보람이 아니겠는가. 이미 그 사람을 가상하게 보았다면 의당 그 사람의 말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개령 현감 이학영에게는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군수직에 으뜸으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별단에 아뢰기를,
"
1. 진휼 곡식을 스스로 준비하는 한 가지 일은 환곡을 먹는 백성들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허다한 곡식을 판출할 길이 없다 보니 그 형세가 부득불 환곡 중에서 가져다 쓰게 되고, 그래서 환곡 장부가 이미 축이 나면 그것을 또 채울 길이 없어 그 형세가 또 부득불 요리(料理)하여 채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른바 요리라는 것은 미리 사들이거나 입본(立本) 【수령으로서 불법으로 창고의 곡식을 가져다 쓴 자가 매년 초봄 환곡을 낼 때에는 싼값으로 환산해서 돈으로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에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모조까지 아울러 쌀로 거두어 들이는 것을 입본이라 한다.】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강제로 헐한 값을 매겨서 환곡을 먹는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그 이득을 취해 진휼의 밑천으로 삼아서 그 곡식의 석수(石數)를 불리는 것이니, 명칭은 스스로 준비한다[自備]고 하나 실상은 임금의 은총을 구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이미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금년 가을 농사가 불행하게도 크게 풍년이 들지 않을 경우에는 헐한 값으로 환산해서 환곡을 돈으로 받았던 백성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신이 가본 곳으로 말하자면 바로 거창 현감이 그러하였습니다. 한 고을이 이러하면 다른 고을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도백으로 하여금 구별지어 조사해서 아뢰게 하여 논상하는 대열에 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후인을 경계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거창 사람으로 대사헌에 추증된 이술원(李述源)이 무신년077)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에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죽은 현감 이우방(李遇芳)이 자기 아비의 시체를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와 겨우 반함(飯含)과 염(斂)을 마치고는 흉적을 죽이기로 맹서하고 곧바로 진주(晉州)로 달려가 영장에게 말하기를 ‘저 역적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공의 선봉이 되어 아버지를 죽인 역적을 내 손으로 직접 도륙하겠다’ 하니, 영장이 그를 의롭게 여기어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방이 선봉이 되어 안의(安義)에 이르러 적들과의 거리가 멀지 않자 높은 곳에 올라가 거창 장교로서 흉적을 수행하는 자를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나라를 배반한 역적을 포박지어 바치지 않느냐.’ 하니, 이때 과연 여러 역적들이 포박지어졌습니다. 그러자 우방이 흐느끼며 말하기를 ‘만번 죽기를 각오하고 군인이 된 것은 오로지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원수인 역적을 이에 사로잡았으니 내가 스스로 역적의 목을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 하고는 몸을 날리며 칼을 뽑아서 여러 역적들의 배를 갈라 그들의 간을 꺼내서 씹어 삼키고 그제야 돌아가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가 역적을 토벌하기로 마음에 맹세하고 아비를 위해 복수한 것은 일이 매우 기특하고 장한 일이며 충과 효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다고 이를 만하니, 의당 정문을 세워 주는 은전을 내려서 표창하는 방도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진휼 곡식을 스스로 갖추는 폐단에 대해서는 도신을 신칙하여 따로 조사해서 바로잡도록 하고, 이우방에게 정문을 세워 주는 은전은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휼 곡식의 경우 전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청한 대로 모두 허락해 준 것은 요리하는 폐단을 금하고자 했던 것인데, 여러 수령들의 범법 행위가 이러하다니 도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남이 이러하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우도 알 수 있겠다. 삼도에 엄히 신칙하여 이미 드러난 고을 이외의 각 고을의 환곡 장부를 모두 샅샅이 조사해서 만일 일을 소홀히 한 도백이 있으면 나타나는 대로 중죄로 다스릴 것이다. 죽은 현감 이우방에게 정문을 세워주는 일로 말하자면 연전에 이와 비슷한 자들을 일체로 시행하고자 하였다가 사람 숫자가 너무 많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서 우선 그대로 두게 하였는데, 우방에게 정문을 세워주는 일이야 그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특별히 정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문순을 체직하고 이문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재학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5일 병자
병조 판서 서유방이 이조 판서 이문원과 처남 매부 사이라는 혐의가 있다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수보(洪秀輔)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6월 16일 정축
전교하기를,
"지금의 풍속으로 만일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조정의 일을 할 수가 없다. 근일에 전장(銓長)을 임명한 은미한 뜻도 바로 그 가운데 한 가지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인재가 없다 할지라도 하필 이렇듯 구차한 일을 하여 이조 판서로 하여금 그의 처남·매부와 함께 삼조(三曹)의 긴요한 직임에 있게 하였겠는가. 세속의 폐단이 온통 허위가 풍속을 이루어 편한 곳을 차지하려는 생각이 지나쳐서 교묘한 꾀를 내기에 이르고 교묘한 꾀로도 부족하여 더할 수 없이 엄격한 공격(公格)마저도 어려움 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내가 보고 기억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옛날 대신 중에는 아우를 비국의 당상에 단망(單望)으로 천거하고 매부를 비국의 부제거(副提擧)에 천거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척 사이까지 아울러 피혐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또 종질(從姪)과 아우를 바로 전장과 감사직에 의망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성씨만 같을 뿐 촌수도 따지지 않는 먼 일가까지 아울러 피혐을 하고 있다. 그러니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까닭이 이런 곳에 연유되지 않는다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래서 격식 밖의 혐의를 가지고 당돌하여 번거롭게 할 경우 위에서도 하나하나 잘못 부응해 주게 되는데, 갑(甲)에게 이미 이렇게 해주고 나면 을(乙)에게도 부득불 전례를 원용하여 허락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때문에 이렇게도 할 만하고 저렇게도 할 만하여 거취를 의롭게 대처하기가 조금이라도 어려운 점이 있으면 바로 회피하기만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 젊고 직위가 낮은 사람이 관례에 어두워 고집부리는 것이라면 그래도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전장이라는 중요한 직임을 맡은 자로서도 이 같은 행위를 본받으려고 한다면 사리로 따져볼 때 대단히 옳지 않다. 선배들이 한 일들은 참으로 빈 틈이 없었다. 그래서 종형제 사이로도 오히려 양전(兩銓)에서 행공을 하였으니, 그들이 감히 사적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이번의 임명은 그 사람을 분수 밖에 키워 주고자 해서가 아니고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내가 기필코 바로잡고야 말려고 하였을진대 비록 하루에 열 번의 소명을 어긴다 할지라도 나는 오직 독촉하여 나오게 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애써 나의 뜻에 부응하여 일을 하다가 서서히 체직을 도모한다면 내 또한 어찌 한결같이 억지로 막아서 도리어 아랫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예(禮)로 부리는 방도를 어그러뜨리겠는가. 병조 판서 서유방을 추고만 하고 패초(牌招)를 어긴 일로 전지를 받들지 말라."
하였는데, 유방이 끝내 명에 응하지 않자, 명하여 과실을 기록하게 하였다가 바로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다.
채제공과 김종수를 서용하여 판중추부사로 삼고, 전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정배하였던 죄인 이조원(李祖源)·맹지대(孟至大)·김이익(金履翼)·박재순(朴載淳)을 방면하였다.
6월 17일 무인
병조 판서 서유방과 이조 판서 이문원을 체직하였다가 이내 서유방에게는 병조 판서를 그대로 맡게 하고 이갑(李𡊠)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애초에 상이 유방에게 정사를 볼 것을 독촉하였으나 유방이 여러 차례 부름을 어기자 상이 죽은 중신(重臣) 오재순(吳載純)이 문원과 함께 양전에서 벼슬한 일을 이끌어 대면서 유방도 그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하여 정원에 명해서 물어서 아뢰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재순이 또 문원의 매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방이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가 중신 이창수(李昌壽)와 4촌 처남 매부 사이라서 영종(英宗) 계미년에 함께 양전의 장관이 되자 문청공이 피혐하여 체직된 일을 원용해 대답하니, 상이 서 문청공의 일은 특별 은전에 관계된 일이요 철칙이 아니라 하여 정사를 볼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유방이 머뭇거리며 교지를 받들지 않자 상이 두 사람을 체직시켰다가 바로 유방에게 앞서의 벼슬을 그대로 맡게 한 것이다.
6월 18일 기묘
일차 유생(日次儒生)들에게 반궁에서 제술 시험을 보여 우등을 한 진사 유지우(柳之羽)와 오태증(吳泰曾)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 때에 초계 문신들이 대독관(對讀官)으로 연석에 참여하자, 유생들의 응제 제목으로 각기 칠언 사운(七言四韻)의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엄기(嚴耆)가 지은 글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홍문관 수찬을 제수하였다.
6월 19일 경진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상차하여 대관에게 중추부의 직함을 주는 데 있어 종전에는 구전(口傳)으로 하는 예가 없었음을 말하였다. 그것은 일전에 자신을 서용하여 중추부 직함을 줄 때에 병조에는 인사 행정을 한 전관(銓官)이 없었으므로 종수가 그것을 구전으로 거행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상이 그의 차자가 정원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전교하기를,
"대신의 체통이 중한데 어떻게 구전 정사로 직함을 내릴 수 있겠는가. 두 원임 대신에게 중추부 직함을 내릴 때에 해조의 송서 초기(送西草記)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 전교로 내렸으니, 그것을 은례(恩禮)라고 하는 것이 옳지, 강등시킨 관례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구전 운운한 말은 더욱이나 크게 서로 반대되는 말이다. 그 때 인사 행정의 자리가 열린 지 이미 하룻밤을 지나 이비(吏批)는 이미 끝났으나 병비(兵批)는 판서가 의리를 내세워 사직한 것이 아직 미결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비에 찍은 도장[寶]으로 병비에 우선 찍어 내려보내서 입직한 참판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정한 격식이다. 승지는 이 전교를 두 원임 대신에게 알려주어 사실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종수가 그 사실을 듣고는 황공하여 그의 차자를 찾아갔다.
신대승(申大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병정(李秉鼎)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0일 신사
수원 유수 이명식(李命植)이 아뢰기를,
"본부의 공도회(公都會)는 아직 정해진 제도가 없으므로 온 경내(境內) 사람들에게 모두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나면 먼 데 사람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오가야 하는 점이 염려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봄날의 온화한 때나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일 때에 연일 삼장(三場)을 열어 초택(初擇)078) 을 하고 다시 날을 가려 복시(覆試)를 보여서 뽑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과장에는 혼자서 고시관이 될 수 없다는 규례가 있으니 의당 본부의 판관을 대독관으로 삼아야겠으나, 음관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니 과거 시험 날짜가 정해진 뒤에 경기 감영에 공문을 띄워 문반 출신의 수령이나 혹은 찰방 중에서 뽑아 보내어 함께 시험보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참판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이조 참의로, 조윤대(曺允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비변사 제조인 김사목(金思穆)·민종현(閔鍾顯)·이병정(李秉鼎)·이득신(李得臣)을 파직하였다. 그것은 빈대(賓對)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월 21일 임오
차대하였다. 앞서 호서 암행 어사 이조원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해미(海美)는 홍주(洪州)와 지역이 서로 인접해 있어 장교와 군졸들이 드나듦으로 백성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해미 현감이 겸하고 있는 영장의 직임을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이 품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홍주와 해미에 모두 진영을 둔 것은 당초 제정하여 둔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또 5영(營)의 제도에서 한 곳도 뺄 수 없으니, 혁파하자는 한 가지 일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금은광(金銀礦)의 설치를 금지한 것은 실로 민폐를 진념하신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폐단을 막고자 염려하여 마련한 방도가 재물을 생산하는 근원을 영원히 막아서 끝내 방해되는 바가 있습니다. 또 현재의 사세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정은(丁銀)은 이미 씨가 말랐고 광은(礦銀)도 캐는 곳이 드무니, 만일 이 시기에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사세는 참으로 대단히 민망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금·은·동·철을 막론하고 만일 그 광맥이 풍부한 곳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신의 호조에서 먼저 관문을 해당 도에 보내 물어 보고 이어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서 그 광맥이 풍부한 지의 여부를 살핀 뒤에 광산을 설치할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묘당을 통해 연석에서 아뢰고 비로소 광산을 설치하도록 한다면 거의 민읍에 폐단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한 공사간에도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이에 우의정 김이소가 아뢴 대로 시행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연전의 칙교는 폐단을 염려하고 농간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십분 명백한 증거가 있어 공사간의 용도에 모두 도움이 된다면 또한 어찌 꼭 그 근원을 막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무단히 금령만 느슨하게 하였다가는 반드시 분잡함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른바 믿을 만한 사람을 먼저 보내 시찰하게 한다는 것도 여기를 가거나 저기를 가거나 예전대로 폐단만 되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 뒤로 분명히 광물을 캐내기에 적합한 곳이 있으면 연석에서 품하여 사람을 내보내되, 만일 혹시라도 보고한 바가 부실하였을 경우에는 보고한 사람을, 전장(田庄)을 거짓으로 아뢴 자에 대한 형벌에 따라 다스릴 것으로 새로 법령을 정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지가 또 아뢰기를,
"지난 계사년079) 에 영선(營繕)에 소속된 군계(軍契)의 원공(元貢)을 혁파하고 해당 선공감으로 하여금 삯군을 사서 거행하게 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간위가 점점 불어나서 도리어 공인(貢人)들을 일에 동원시킬 때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초의 정한 법대로 공인들에게 되돌려 주어 예전처럼 거행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을 파직하였다. 병조 판서 서유방이 아뢰기를,
"지난 번에 들으니 북한 산성을 쌓을 때에 묘당에서 공명첩을 떼어 주었는데, 각 군문의 교련관(敎鍊官)들이 많은 수가 이를 사들여 옥관자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대체로 이를 인연으로 실직을 노려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의 병조에서 그 첩지(帖紙)를 거두어 불살라버렸습니다. 각 영문의 대장들이 이를 살펴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총융사 이방일은 영문을 주관하면서 처음부터 이를 금단하지 않았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또 훈국 장교의 수범(首犯)에 대해서는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에게 명하여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였다. 유방이 또 계청하기를,
"순장(巡將)을 뽑아 아뢸 때에 정식 자급이 병조의 관안(官案)에 등재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의의(擬議)할 수 없도록 법을 정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문원을 예조 판서로, 윤사국을 형조 판서로, 이치중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2일 계미
우의정 김이소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가장 소중한 일은 바로 정승을 두는 일이다. 그런데 근래에 삼공의 자리가 채워지지 않아 묘당의 책략이 오랫동안 비었었다. 지금 정승을 뽑으려고 하는데, 인재를 추천하는 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대신의 직책이니, 경은 반드시 유의해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좌참찬 정민시가 자급이나 이력이 이 직임에 적합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공신(功臣)으로 삼공을 삼지 않은 것은 참으로 후세에 본받을 만한 일이니, 경은 다른 사람을 말해보도록 하라."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수원 유수 이명식의 자급과 이력과 지벌과 명망이 또 이 직임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수의 막중한 임무는 정승직에 비하여 못하지 않으므로 가벼이 체직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대저 재상은 당연히 글을 읽은 사람으로 등용해야 한다. 지금 함경 감사가 어떻겠는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경륜이나 학식이 실로 보좌의 직임에 합당합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나의 정승을 결정하였다."
하였다.
정승을 가리었다. 【예전에 추천된 사람은 홍낙성·유언호·채제공·김종수·박종악이었고 새로 추천된 사람은 김희(金憙)였다.】 홍낙성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김희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영의정 홍낙성에게 하유하였다.
"나라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승과 장수이다. 내가 먼저 장수의 일로 말하겠다. 곽자의(郭子儀)는 복장(福將)이고 이광필(李光弼)은 지장(智將)이었다. 광필의 용병(用兵)은 귀신 같아서 때때로 자의도 따를 수 없었으며 호령이 한 번 내려지면 진중(陣中)에 광채가 더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벼슬이 한껏 높고 공이 천하를 덮으면서도 일신에 탈이 없고 집안이 온전한 사람으로는 1천 3백 62년 동안 오직 자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래서 지모가 복의 힘을 덮을 수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장수도 그러한데 더구나 정승이겠는가. 경은 백에 한 가지의 흠도 없고 만에 천 가지의 기쁨만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곽 영공(郭令公)이다. 곽 영공이 중서성에 있으면서 모두 24회의 고과를 받았는데 경도 중서성에 들어와 거의 24회의 고과에 이르렀으니, 또 어찌하여 그 일마다 이와 같이 방불하단 말인가. 당(唐)나라의 제도는 한 해에 한 번의 고과를 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두 번의 고과를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것이 이른바 주(周)나라의 7, 8월이 하(夏)나라의 5, 6월080) 이란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복 많은 경을 얻어 정승 자리에 두고 그 복이 뭇 신하들에게 펴지고 수많은 백성들에게까지 미쳐서, 궁중으로부터 조정에까지, 조정으로부터 향당 주려에까지 모두 한덩이의 화기(和氣) 속에 싸이게 된다면 수많은 집들의 문(門)에 정월 초하룻날 써붙이는 글들은 바로 경 영의정의 덕을 우러르는 글로 일색이 될 것이라고 여기노라. 지금 길상(吉祥)을 맞아들이는 공을 경 한 사람에게 맡기노니, 나에게 수와 복을 누리게 하여 두터운 기대에 보답하라."
우의정 김희에게 하유하였다.
"재상은 아무쪼록 글 읽은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데 글은 경전(經傳)을 이르는 말이다. 그것의 쓰임새는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일이며, 그 맛은 다반(茶飯)과 양육(梁肉) 등 일상의 음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실상의 지경에 마음을 기울이면 군자가 되고 사화(詞華)에 맛을 들이면 문사(文士)가 된다. 그런데 근세의 사대부들은 어려서부터 그것을 익히지 않아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방종을 즐기고 명검(名檢)을 천하게 여겨 스스로 자신을 낮게 처신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받음으로써 크게 세도의 누가 되고 있다.
경은 경대부 가문 사람으로 일찍이 경전에 대해서 논하는 얘기들을 들었었고, 궁중을 드나들 때도 책을 끼고 다니어 많은 보탬을 얻었었다. 더욱이나 산간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친히 불을 지피어 그 구들이 검어지도록 공부를 했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바이니, 여기에서 나의 정승이 결정 된 것이다. 현재 영의정은 원로라서 자주 예절을 차리기가 어렵고, 좌의정도 직무를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지금이야말로 경을 기다리는 생각이 목마름에 비길 뿐이 아니니 인수 인계를 기다려서 바로 길을 나서도록 하라."
중비(中批)로 김화진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유언호를 영돈녕부사로, 이재학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도정(都政)을 행하는 날에 양전에 칙유하는 것은 응당 행해야 할 옛 규례이다. 그러나 도정에 임하여 망통(望筒)들을 늘어 놓은 다음에 전교를 하는 것보다는 일에 앞서 면려시키는 것이 더 실다울 것이다. 모든 일은 시작을 안했으면 그만이거니와 이왕에 시작을 하였으면 당연히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효험이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을 터 주는 일에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이고, 둘째는 멀리 있는 사람들을 거두어 등용해서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을 양전에 엄히 신칙하여 명심해서 나의 뜻을 받들어 펴도록 하라."
전 훈련 대장 서유대의 고신 2등을 삭탈하였다.
6월 23일 갑신
종묘의 서쪽 월랑(月廊) 서남쪽 아래 벽돌로 만든 계단이 무너져 승지를 보내 봉심하게 하고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이문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24일 을유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도정을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이갑, 참판 이재학, 참의 윤행임, 병조 판서 서유방이 실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임금이니 신하이니 하지만 신하는 임금의 얼굴을 혹 어가가 길에 나섰을 때 깃발 속으로라도 볼 수가 있겠으나, 임금은 그들의 눈과 코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우리 나라와 같이 조그마한 나라에서는 비록 벼슬의 은택을 받지 못한 자라 할 지라도 군신 사이에 서로 막혀 있다는 것은 흠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조관(朝官)이란 사람들이겠는가. 그리고 이미 조관으로 일컬어진 사람이라면 문관이나 음관이나 무관에 대하여 또한 어찌 꼭 그 사이에 구별을 두겠는가.
근래에 산관(散官)이 된 사람의 성명을 문안에서 열람해 보니, 문무관의 참상(參上)·참하(參下)와 음관의 참하 등 여러 사람들이 내가 즉위한 뒤로 아직 한번도 벼슬을 받아보지 못하였는데 그 수효가 제법 많았다. 생각하건대 그들 중 잘못으로 인해 벼슬길이 막혀서 오랜 세월을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들도 오히려 관례를 뛰어넘어 벼슬길을 터 주었는데, 더구나 벼슬이 있던 사람에게서 벼슬을 떼버렸거나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이 있는 것처럼 되어 내가 즉위한 뒤로 조정 반열에 서지 못하게 된 자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남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대저 도목(都目)을 대정(大政)이라 이르는 것은 그 등용하거나 버리는 것이 산정(散政)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의 정리(政吏)로도 충분할 터인데 무어 꼭 삼당(三堂)을 갖추어 전각에 나와 앉아서 직접 하나하나 권점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 당장 빈 자리가 비록 매우 적다 하더라도 꼭 하려고만 한다면 응당 6품에 올려야 할 사람들에게 우선 허함(虛啣)의 사과(司果)를 붙여줄 경우 어찌 구처할 방도가 없겠는가. 조관의 삼반(三班)081) 가운데 병신년082) 이전에 산관이 된 자들을 일체 모두 뽑아내 서계하여 이번 정사에서부터 우선 거두어 등용할 일을 양전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날 정사에서 음관 김열택(金說澤) 등 11명과 무신 오경적(吳景勣) 등 13명에게 차등있게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집에서 지낸 지 가장 오래된 사람들로서 그 중에 가장 오래지 않은 자도 20년이 넘었다.
채제공을 동지 겸 사은 정사로, 이홍재(李洪載)를 부사로, 정동간(鄭東幹)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영의정 홍낙성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유시는 바로 치사(致仕)한 노대신의 복록과 장수를 기원하는 한 편의 전서(全書)였다. 내가 이미 경에게 그러한 글을 주었으면 경도 의당 나에게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周)나라의 시인(詩人)은 그의 임금이 훌륭한 손을 맞아 잔치할 때를 당해서도 오히려 천보장(天保章)의 아홉 가지와 같으라는 축원으로 녹명(鹿鳴) 이하 5편에 대하여 화답하였다.083) 그런데 더구나 원로이자 영의정인 경의 경우이겠는가. 경(經)에 이르기를 ‘말에는 반드시 대답이 있고 덕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다.’ 하였으니 곧 경을 두고 이른 말이다. 경은 또 너무 노쇠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경보다 더 많은 나이로 정승에 제수된 사람들의 고사를 상고할 수 있으니, 권중화(權仲和)는 나이가 83세였고, 강순(康純)은 79세였고, 장순손(張順孫)은 78세였고, 정호(鄭澔)는 장순손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 좌의정과 우의정에 제수된 사람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또 거듭 정승을 지낸 사람 중에서 찾아본다면 경과 나이가 같은 사람이 둘이고 경보다 두 살이 많거나 혹 세 살이 많은 사람도 있었다. 경은 모름지기 내가 경에게 국사를 위임하는 권우를 잘 따라서 다시는 사직하겠다는 말을 말고 바로 묘당으로 나와 나의 홍범(洪範) 구오(九五)의 정치를 도우라. 낯빛을 온화하게 가지면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084) ."
하였다.
어영 대장 조심태(趙心泰)를 훈련 대장에 옮겨 임명하고, 이경무(李敬懋)를 어영 대장으로, 정민시를 총융사로 삼았다.
이문원에 보관되었던 공자의 진본(眞本)085) 을 화성의 궐리사(闕里祠)에 옮겨 모셨다.
6월 25일 병술
경모궁을 전배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김화진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정대용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호남 암행 어사 정동간(鄭東幹)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리자, 상이 불러서 보고, 이조·병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연석에 나와 복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순천 부사 홍술조(洪述祖)는 진휼 정사와 치적이 한 도내에서 최고라 하여 목사에 승진 의망되었고, 흥양 현감 이성중(李性重)과 용담 현령 이면휘(李勉輝)는 모두 잘 다스렸다 하여 벼슬이 승진되었고, 능주 목사 윤기동(尹耆東), 여산 부사 김명익(金命益), 전주 판관 조익현(趙翼鉉), 임실 현감 이윤서(李潤瑞), 낙안 군수 홍채주(洪采疇), 남평 현감 송흠서(宋欽書), 강진 현감 성언즙(成彦檝)은 모두 고을을 잘못 다스렸다 하여 차등있게 벌이 적용되었다. 앞서 도신 권엄이 장흥 부사 원영주(元永胄)의 고과를 쓴 글에 ‘틈틈으로 책을 읽는다.’고 지목한 말이 있었는데, 상이 ‘사람마다 극곡(郤縠)086) 이 아닐진대 실없는 글에 대해서는 의당 책망을 해야 한다.’ 하고서 특별히 그에게 고과의 하등을 매겼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어사가 그의 진휼 정사가 가상했다고 말하자, 상이 특별히 그의 죄를 씻어버리고 검토해 의망하라고 명하여 조였다 늦추었다 하는 방법을 보였다. 어사의 별단에 말하기를,
"나주(羅州)의 개인 집 사내종 판돌(判乭)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초란도(草蘭島)에서 빠져 죽었는데, 그의 처 최(崔)가 부음을 듣고 섬으로 가서 시체를 찾았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하자 밤낮으로 슬피 울면서 늘 하는 말이 ‘대상(大祥)을 마치면 빠져 죽어서 죽은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하더니, 대상을 치르고는 최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 다음 밥을 뿌린다[散飯]며 갯가에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며느리가 급히 가서 보니 신짝을 갯가에 벗어두고 물에 빠져 죽은 지 벌써 오래였었습니다. 그의 곧은 마음과 굳센 행실이 참으로 매우 뛰어납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복주하여 급복(給復)의 은전을 내릴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남 암행 어사 정동간을 파직하였다. 그것은 제비에 뽑힌 이외의 고을들을 두루 다니면서 염찰한 것이 규례에 어긋난 때문이었다.
전교하였다.
"우로(雨露)는 땅을 가려 내리지 않는 것이다. 등용하고 버리는 일에 어찌 문벌 만을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먼 데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라는 전교는 그 뜻이 사람을 차별 없이 보는 데에 있었는데, 어제의 정사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선양한 효험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 곳은 바로 탐라(耽羅)이니, 탐라의 문신 강봉서(姜鳳瑞)·변경우(邊景祐)에게 장령을 제수하라."
김문순을 판돈녕부사로,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때 상이 여러 차례 양전을 신칙하여 벼슬길을 넓히고 죄과를 씻어 주는 정사를 크게 펼쳐 문관·음관·무관으로 병신년 전후에 벼슬에서 떨어진 자들을 찾아내서 모두 등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급기야 사람은 많고 자리는 부족하므로, 혹은 자리를 더 늘리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음관의 자리와 무관의 자리를 서로 바꾸기도 하고 혹은 음관과 무관으로 응당 품계를 올려야 할 사람에게는 우선 군직(軍職)을 붙여 주어 자리를 만들도록 허락하기도 하여 무릇 전후로 선발 복직된 자가 무려 수십 수백 인이었다.
6월 26일 정해
영변부의 약산 동대(藥山東臺)에 봉화대를 다시 설치하였다. 전 영변 부사 민태혁(閔台爀)이 승지가 되어 연석에서 아뢰기를,
"영변은 본래 천연의 요새지인데 병영을 혁파하면서 중간의 봉화대를 설치하지 않아 단지 40리 밖의 덕산(德山) 봉화대만 있으므로, 그 사이에 가로막힌 것은 많고 중간의 봉화대가 없기 때문에 정묘년 안주(安州)의 변란도 5일이 지난 뒤에야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을 지키는 막중한 지역의 방비가 이를 데 없이 소홀하니 의당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 도신 홍양호에게 묻자 양호의 의견도 같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 이석하(李錫夏)가 상소하여, 윤응렬(尹應烈)은 승렬(承烈)의 아우인데 특별히 지방 수령에 제수되어 여론을 크게 놀라게 했다고 논박하고, 또 당시 정사에 참여한 전관과 정청의 승지에게 모두 삭직의 벌을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장용영이 아뢰기를,
"본영의 별무사(別武士)는 각영에 비해 노고가 많기 때문에 원래부터 오래 근무하게 하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금위 삼번(內禁衛三番)의 금군(禁軍)이 혁파된 뒤로는 해당 번의 오래 근무한 정령(正領)을 별무사에 이속시켜 각 해당 번의 정령들과 공통으로 다섯 번의 도목 정사에 한 번씩 옮겨져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별무사의 수는 처음 설치했을 때보다 배가 늘었으나 정령은 7번으로 번을 설 때보다 줄어들어서 근무 연한이 전보다 조금 짧아졌습니다. 그러니 당초 내금위 삼번에서 이속된 장기 근무자들은 다시 각번의 정령에 소속시켜 그들을 전에 사진(仕進)한 것까지 통틀어 계산하는 유로 인정해주어 도목 때마다 옮겨지게 하되, 전에 근무한 일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근무 연한이 오래인 자는 다시 본영의 별무사에 이속시키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7일 무자
영의정 홍낙성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철모를 체직하고 서유성(徐有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철모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윤응렬은 승렬의 아우로서 특별히 수령에 제수되었고, 이의명(李義明)은 역적 노(輅)의 당내간 친척임에도 대각의 청선(淸選)에 그 이름이 첨서(添書)되어 내려졌습니다. 두 망단에 첨서된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속히 명을 거두어들이고 도목 정사에 참석했던 전관은 꾸짖어 삭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의 상소를 물리치고 전교하기를,
"근일에 벼슬길을 넓히고 죄과를 씻어주는 일은 한 사람도 버려지지 않게 하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어떻게 매사마다 매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또 한 사람이 시작하면 열 사람이 따라 해서야 되겠는가. 국사를 말한 것이라 하여 애써 용서해 줄 수 없다. 대사간 이철모를 체차하라."
하였다.
청주 목사 이낙배(李樂培)를 숙천부(肅川府)에 유배시키고, 영동 현감 김이석(金履錫)을 영암군(靈巖郡)에 충군(充軍)시켰다. 앞서 호서 어사 윤로동(尹魯東)이 돌아와서 낙배 등의 불법 행위를 아뢰고 또 청주에서는 황백(黃白) 【어린이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황구(黃口)라 하고 죽은 사람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것을 백골(白骨)이라 한다.】 때문에 찾아와 호소하는 자가 하루에 천여 명이나 되며 영동도 이 수효에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니, 전교하기를,
"황백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폐단에 대해서 조정의 명령이 매우 엄할 뿐만이 아닌데, 열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천 명을 넘는단 말인가. 옛날 선왕조 때에는 기읍(畿邑)의 군정을 뽑는 일에 불찰이 있었다 하여 어가가 직접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매우 엄하게 조처를 내렸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호서의 고을에 천여 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징수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니, 우러러 선왕조의 일을 본받는 도리에 있어 감히 예사롭게 잡아다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낙배와 김이석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거듭 엄히 조사해서 기어코 진상을 밝힌 다음 중한 벌로 다스려서 다른 원들에게도 징계가 되게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두 고을의 군적을 도백으로 하여금 별도로 강명(剛明)한 조사관을 정해서 지방 수령과 함께 바로잡아 실지 수효가 과연 그러한지의 여부를 우선 조사해서 아뢰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해본 결과 이름만 올라 있는 군사가 청주는 1천여 명이었고 영동은 3백 명이었으므로, 의금부가 벌을 의논하여 청하기를,
"낙배는 숙천부에 햇수의 기한 없이 귀양보내고 이석은 영암군에 햇수의 기한 없이 충군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28일 기축
지평 정인(鄭𣲚)을 체직하였다. 정인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근일의 도목 정사에서 주의(注擬)한 것을 모두 다시 거두어 들이고, 이를 봉행한 전관과 승지 및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대신(臺臣)들에게 모두 꾸짖어 파직시키는 벌을 내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주국(李柱國)은 오랫동안 대장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버려진 자들을 끌어들였고, 기유년087) 에 사도 세자의 원(園)을 옮길 때에는 일부러 배[舟]들을 내보내버렸고 관(棺) 만드는 일도 훼방놓았었으니, 거두어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비록 본시 시골 사람이기는 하나 들으니 서울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근일에 처분한 일의 본의를 몰라서 감히 이것저것 주워 모아 번거롭게 한단 말이냐. 이주국의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논열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 일에 나아가 그 일만을 논해서 평범한 말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앞에서는 남을 흉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뒤에서는 말이 경위에 맞지 않는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냐. 너를 체직한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갑, 참판 이재학, 병조 판서 서유방을 체직하였는데, 이는 대간의 비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처남 매부가 양전을 함께 차지해 있는 것이 사사로운 의리에 있어 편안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번의 신칙하는 전교를 내린 것은 한편으로는 풍속을 바로잡자는 뜻에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세한 혐의를 금하자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다만 양전이 공통으로 피혐하는 법이 《경국대전》에 실려 있으므로 옛사람들이 이를 꼬투리로 말을 했던 것도 혹 근거가 될 수 있다 하겠다. 이 뒤로는 만일 처남 매부가 양전을 동시에 차지하게 되는 경우에는 옛사람들이 이미 행했던 전례에 따라 처음에는 비록 잠시 응하더라도 곧 한 사람을 체직하여야 할 것이다. 전조의 장관 자리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각기 이 사실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이문원을 이조 판서로, 정호인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9일 경인
윤사국을 강화부 유수로 삼고서 전 유수 정호인에게 명하여 새 유수가 도착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인수 인계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형조 참판 이가환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바로 듣건대, 강화의 전 유수에게 새 유수가 도착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인수 인계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아, 생각하건대 지금의 강화가 그 어떠한 지역입니까. 종래에 법규를 굳게 정하여 반드시 정해진 곳에서 인계를 받게 한 것은 실로 기미를 알아서 조짐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부득이한 일이 있기에 반드시 그로 하여금 새 유수가 도착해 있는 곳으로 급급히 나아가서 인수 인계를 하게 한단 말입니까. 지난 일이 거울삼을 만하니 새로 생기는 걱정은 더욱 깊기만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을 환수하도록 하시고 수신(守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방수(防守)하는 일에 더욱 뜻을 쏟게 하소서."
하니, 상이 권한 밖의 일로 번거롭게 떠든다 하여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김상집(金尙集)을 예조 판서로, 조종현(趙宗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6월 30일 신묘
호서·호남·영남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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