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0권, 정조 18년 1794년 6월

싸라리리 2025. 8. 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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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진

하교하였다.
"천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경삿날인데 이러한 때에 축하하려는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써 다 할 수 있겠는가. 경사를 빛내는 도리로는 은전을 베푸는 일이 가장 크므로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달로 보면 월초이고 또 세초(歲抄)가 다가왔으니 잡범인 모든 죄수들을 다 함께 석방하여야할 것이다. 국법이 있고 등위(等威)가 있는 만큼, 이것을 범한 자에 있어서야 어떻게 금방 유배시켰다가 금방 석방할 수 있겠는가. 이때가 과연 어느 때인가. 장성부(長城府)에 유배한 죄인 김이소(金履素)를 특별히 석방하고 이어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법률을 시행하라. 그의 죄를 밝히고 그의 마음을 폭로한 것은 곧 그에게 죄를 주고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한 덩어리의 폐석(肺石)으로서, 본 사건의 내용을 스스로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상소하기 하루 전날의 연주(筵奏)가 증안(證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적을 잡고서 그 죄를 논하여 서둘러 배가의 죄율을 적용하여,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도 그만큼 크다는 뜻을 암시하고 오늘의 처분을 내리고 싶어서였다. 남해현(南海縣)에 안치한 죄인 김종수(金鍾秀)를 특별히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법령을 엄수하라는 뜻에서 내린 처분이기는 하나 이렇게만 한다면 의정의 자리를 어느 때에나 메우겠는가. 진실로 옛날 이윤(伊尹)과 같은 사람이 위에 있다면 분란을 가라앉히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는가. 전 우의정 이병모를 서용하라.
법규를 설치하여 금지한다는 것은 격례로 볼 때 가소로운 일일 뿐이다. 이경일(李敬一)과 같은 자가 1백, 1천 무리가 있기로서니 어찌 저 격례로써 그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그의 관직을 생각하여 보면 삼사(三司)이다. 삼사란 곧 공론의 소재처이므로, 삭직이니 파직이니 하는 것은 그 직명을 중시하고 아낌과 동시에 예우의 뜻을 보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 한 번의 책교(責敎)로도 족한데 무엇하러 많은 말을 허비하며 자꾸 교지를 내렸겠는가. 그의 거조가 모욕을 끼친 일만은 전무후무한 일이기는 하나 이것 역시 무어 책할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 대사면을 함에 있어 그들만 빼놓을 수는 없다. 제주도에 유배한 죄인 이경일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내라.
처분은 이처럼 처분대로 내리고 언사(言事)는 저처럼 언사대로 하여도 굳이 안될 것은 없다. 다만 금지령을 범하지는 않았어도 그 행위가 금지령을 범한 자보다 더 심하게 하여 이처럼 엄중한 처분을 내렸으나 그 사람을 영원히 버리는 것은 끝내는 애석한 노릇이다. 강화도로 축출한 죄인 이익운(李益運)을 특별히 분간하라.
죄는 하찮은 과실인데 군호(軍號) 문제로 유배된 죄인 박종갑(朴宗甲)·홍수호(洪受浩)를 석방하여 보내라."

 

전교하였다.
"남해 죄인의 일은 애당초 이때를 기다려서 뭍으로 내보내려던 것이었으므로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은 복받친 데가 있어서 내린 처분이다. 이번의 처분이 내려진 뒤에 연석에서 감히 궁금해 하는 자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때의 이 석방이 내가 이달이 무슨 달인 줄도 모르고 내린 것이라는 말인가.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죄명에 관련되니, 석방하여 보내는 것으로 거행하라고 분부하라."

 

전교하기를,
"이처럼 경사스런 달의 초하루를 맞은 만큼, 경사를 빛낼 정치로는 먼저 은전의 정사를 펴야 하는데, 은전이라는 것이 어찌 나에게 고마워하고 나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이겠는가. 내가 증자(曾子)의 교훈을 들었는데, 한 그루의 나무를 제때에 심어 가꾸는 것도 효도라고 하였다. 지각이 없는 초목에 대해서도 그러하거든, 더구나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인륜이겠으며, 또한 세신(世臣)이겠는가. 갇힌 자를 풀어 주고 막힌 자를 터 주며 유배된 자를 석방한다면, 당사자는 차치하고 당사자의 자제나 부형의 심정이 어찌 서로 손뼉을 치며 경사스런 이날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밤잠을 설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날이 밝기도 전에 옷을 찾아 입고서 비를 무릅쓰고 임전(臨殿)하여 땀을 흘리며 소결(疏決)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외면에 속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공부를 함에 있어 남을 위하여 한 데 가깝고 자신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내가 또 듣건대 맹자(孟子)의 말씀에 ‘부귀(富貴)도 걱정을 풀기에 부족하고 오직 부모에게 사랑받아야만 걱정을 풀 수 있다.’고 하였다. 팔방의 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여 깊고 넓은 은택을 베푸는 것이 어찌 조금이나마 자궁(慈宮)의 마음을 누그러뜨림으로써 나의 마음이 흡족하여지는 것만 하겠는가. 자전께서 사심이 없어서 사가(私家)에 대한 사은(私恩)을 끊고 있기는 하나 천리와 인정상 그럴 수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어찌 아픔 마음을 사색(辭色)에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인한의 범죄는 공법(公法)에서 도피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문(私門)에서도 역시 팔을 잘라 벌을 줄 일이다. 하나의 인한이 봉조하 홍봉한과 홍용한(洪龍漢) 형제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며, 유안세(劉安世)가 연고가 많은 것이 안세에게 무슨 누가 되고 유하혜(柳下惠)가 남다른 것이 유하혜에게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 그리고 근세의 선례로 말하더라도 이사명(李師命)이 병조 판서로서 처벌받을 적에 그의 아우 고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곧장 거리낌없이 관직에 행공하였다. 성조(聖祖)께서는 세가(世家)에게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는데, 더구나 이 집이 어떤 집인가. 어찌 이사명과 이이명의 관계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홍용한 형제를 녹용하는 것은 바로 봉조하가 무사하다는 것이고 봉조하가 무사하게 되면 자궁의 기쁜 마음은 반드시 열 번 올리는 옥책(玉冊), 백 번 올리는 헌수(獻壽)보다 더 나을 것이요, 또 소자(小子)가 문안을 드릴 적에 비로소 쌓였던 갑갑증이 가시며 마음속이 흐뭇해질 것이다.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그 어느것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전 승지 홍준한(洪駿漢)·홍용한(洪龍漢)을 동돈령에 제수하여 이번 정사에서 자리를 더 만들어 하비(下批)하여 탄신의 축하 반열에 참여하도록 하라. 이렇게 한다면 자궁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마음도 위로되며, 대의(大義)가 확고하여지고 사은(私恩)이 신장될 것이니 비록 성인에게 질정받더라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또 신칙할 것이 있다. 여러 의논 외에도 사정이 비슷비슷하여 어사로 하여금 초계(抄啓)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뒤 말들이 모순되어 아직 그냥 놓아 두고 있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집안의 작질(爵秩)은 여전하다 할지라도 사안의 조사를 서로 밀고 당기고 함으로 인하여 자전의 탄신 하례 반열에 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궁에게 두 고모가 있는데, 경평군(景平君)에게 출가한 한 분은 지금 거론할 수 없으나, 이 집으로 출가한 한 분은 나이가 이미 80에 이른 노인이다. 이러한 때에 만약 자궁을 뵐 수 있게 된다면 자궁의 마음이 이 노인을 봄으로 해서 마치 봉조하를 보는 것 같을 것이니, 그 위로되고 기쁜 것이 두 돈녕부사가 들어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연좌에 관계된 만큼 나의 특교(特敎)로써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신원의 여부는 공론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고 감사 조엄(趙曮)이 논핵을 받은 관서의 사안 중, 아직 판정하지 못한 소미(小米)를 내다 판 건은 과연 상정법(詳定法) 이외의 조문에 속하는 것인지의 여부와 그 밖에 조사해야 할 단서가 있는 것은 모두 어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오게 하여야 문권(文券)을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회계에 첨부하여 올린 모든 서류들을 함께 가지고 가서 관찰사의 입회 아래 조사하여 계문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상황(李相璜)을 평안  감영 안사 어사(平安監營按査御史)로 삼았다.

 

전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전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를 승상직에 다시 제수하고, 이소에게 하유하기를,
"저번의 처분은 천하 만세를 위하여 큰 예법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경은 필시 그 죄를 환히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경 혼자만의 소행이었겠는가. 다만 경의 지위와 녹봉이 제일 높기 때문에 처분이 경에게만 미친 것이다. 이처럼 경사스런 날을 만나서 이처럼 크나큰 은전을 베풀고 있는만큼, 하례하는 반열에 삼정승의 자리가 겸비되어야겠기에 승상직을 다시 제수하여 소명을 받도록 재촉하는 것이니 경은 역마를 타고 올라와서 숙명(肅命)하라."
하고, 병모에게 하유하기를,
"초연(初筵)의 처분은 어쩔 수 없어서였다. 이번에 다시 제배하는 것은 이런 경사스런 날에 의정부가 충원이 되고 나서야 나름대로 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니 경은 부디 입성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숙명하라."
하였다.

 

예조가 혜경궁 탄신 진하 절목(惠慶宮誕辰陳賀節目)을 가지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자궁의 탄신 진하는 궁내에서 표리(表裏)를 올리는 것으로 하도록 자전께서 간곡히 하교하기는 하였으나 이달이 어떠한 달이라고 전례대로 하례를 거행하여 축하하는 성의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이어 이 절목을 앙청하여 하교를 받들어 들이라."
하였다.

 

김이익(金履翼)을 이조 참의로,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큰비가 때때로 내리는 계절인 만큼 밤낮으로 내리는 비가 삼농(三農)에는 크게 다행이나 급류가 휩쓸고 간 뒤에는 반드시 토지의 유실과 가옥의 붕괴가 있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갓 눈앞의 고통만을 가지고서 더러 물에 빠져 죽게 되지 않나 걱정할 것이다. 좋은 비라고 해서 어찌 좋기만 하겠는가. 판윤으로 하여금 각부(各部)를 엄칙하여 가옥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을 경우 일체 새로 반포된 법규대로 즉시 보고하여 행여라도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6월 2일 정사

이조 판서 이병정이 상소하기를,
"삼가 전교를 본 바, 홍용한·홍준한을 동돈령 자리를 더 만들어 제수한 데 대하여 하비(下批)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전하의 과오가 될 뿐만 아니라, 행여 나라를 위하여 사은(私恩)을 끊고 있는 자궁의 거룩하신 덕행과 훌륭하신 도량에 우러러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 《명의록(明義錄)》 한 부는 바로 우리 동방의 《춘추(春秋)》인데, 책을 펼치면 제일의 의리가 바로 역적 홍인한(洪麟漢)의 흉모 역절(凶謀逆節)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에 처벌을 받았다가 마침내 은전을 받은 이사명(李師命)의 경우와 어떻게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봉조하의 처지는 용한 등과 아주 다르고 보면, 지금 전하께서 조금의 구별도 하지 않은 것 역시 신에게는 의혹의 일단이 됩니다. 지난 여름 신이 이 관직에 있을 적에 상겸(相謙)을 견복(甄復)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신은 그때 그가 상복(相福)의 아우라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습니다. 지금 용한 등의 경우가 지난해 상겸의 경우와 비교할 때 그 경중이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지난날 상겸의 일에는 이미 반대해 놓고서 오늘날 갑자기 용한 등에 대한 하명을 받든다면 이는 신하가 되어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어떻게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라 하는가. 의당 딴 생각 없이 한마음을 가지도록 권면하여야 된다. 또 어찌 굳이 전교할 것이 있겠는가. 이조 판서 이병정을 고향으로 내쫓되, 물간사전(勿揀赦典)하라."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입대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홍낙성(洪樂性) 등이 아뢰기를,
"금년의 큰 경사는 실로 우리 동방 초유의 경사입니다. 18일의 진하는 필시 궁내에서 성의를 다하여 앙청할 것이므로 신들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절목을 품정할 생각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큰 경사는 장렬 왕후(莊烈王后)·정성 왕후(貞聖王后) 이후 처음 있는 일인데, 또 이달을 당하였으니 나의 기쁜 마음이 더더욱 어떠하겠는가. 18일의 칭경(稱慶)에 대해 어찌 경들의 계청을 필요로 하겠는가마는, 자궁의 겸양의 덕으로는 크게 벌이려 하지 않으시므로, 원로인 경들이 들어올 것 같으면 자궁께서 원로를 대우하는 생각으로써 허락하실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경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을 기다려 들어와서 앙청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낙성이 아뢰기를,
"칭상(稱觴) 역시 함께 앙청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의 진연(進宴)에 대해서는 연초에 이미 시행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나, 금년의 칭상례는 자궁께서 크게 벌이는 것을 더욱 우려하시므로 허락받기 어려울 듯하다."
하자, 종현(鍾顯)이 아뢰기를,
"칭상례는 효종조에 이미 시행한 선례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차례로 앙청하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6월 3일 무오

영의정 홍낙성 등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에서 아뢰기를,
"이번 같이 좋은 경사는 사첩(史牒)들을 상고하여 보아도 아직 없었고 국사를 상고하여 보아도 역시 드문 일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주공(周公)의 달효(達孝)로써 위로는 태사(太姒)를 받들고 문왕(文王)의 무우(無憂)로써 아래로는 후손에게 훌륭한 방책을 남기고 계신데, 더욱이 자궁의 봉력(鳳曆)에 주갑(周甲)이 돌아와서 탄신의 가절(嘉節)을 만나게 되었으니, 모든 신민이 누구인들 손뼉쳐 축하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어제의 시석(侍席)에서 천안(天顔)을 우러러본 바 희색이 만면하였으나, 자궁의 겸손한 마음에서 크게 벌이고 싶지 않은 나머지 여태 윤허를 아끼고 계시는데, 성상의 독실하고 지극한 효도로 반드시 성의를 쌓아서 감동시키고 말아야 할 것입니다. 탄일의 칭하는 바로 우리 나라의 바꿀 수 없은 전례(典禮)인데, 더구나 이달의 이날은 천년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날이므로 날마다 칭경을 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겸양의 덕이 높으신 자궁이라 하더라도 성상의 효성을 받아들이고 뭇 신하들의 소청에 보답할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자궁께 앙청하여 기어코 윤허를 받아낼 생각이나, 역시 성상께 여쭙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술잔을 올려 헌수하는 일은 이것이 바로 경사를 빛내고 기쁨을 표현하는 상절(常節)이므로, 내년의 진연(進宴)에 대해서는 이미 성명(成命)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의 진작(進酌)은 일의 체모나 의례 절목이 진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만큼, 우리 자궁의 겸양의 덕과 우리 성상이 부모의 뜻을 잘 받드는 효도가 이에서 양쪽이 다 아름다움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혜경궁에게 아뢰기를,
"이해의 이달은 바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궁한 경사의 달입니다. 조정에서는 경·사대부, 조정 밖에서는 농부·베짜는 아낙네·공장·상인·나그네 할 것 없이 나라 안에서 먹고 사는 그 모두가 서로들 기뻐하고 손가락을 꼽아 기다리며 ‘어느 해인들 경축의 해가 아닐까마는 경축은 이해부터이고, 어느 달인들 경축의 달이 아닐까마는 경축은 이달부터이고, 어느 날인들 경축의 날이 아닐까마는 경축은 이날부터로다. 이달의 탄신날이여, 태산과 같은 장수도 이날로부터 시작되고, 하해와 같은 복록도 이날로부터 시작되었도다. 아마도 전정(殿庭)에서 삼축(三祝)의 의식을 거행하고 궁연(宮筵)에서 만세의 축배를 올리리라.’ 하니, 성인이 온갖 물품을 갖추어 봉양하고 자손이 색동옷을 입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정히 만나기 어려운 기회로서 모두들 이런 일을 빨리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니, 이는 실로 떳떳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기뻐 춤추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월초에 내려진 전교에서 ‘진하 절목은 하교가 내려지기를 기다려서 마련하여 들이라.’고 분부하시고, 또 ‘연이어 앙청하라.’는 하교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 자궁께서 겸양하는 충정에서 응당 행해야 할 전례에 대한 허락을 여태 아끼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 신하들이 입대를 청하여 진달하자 성상께서 아직 자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서로 돌아보며 우울해 하면서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감히 빈청에 모여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올리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굽어살피소서.
우리 자궁께서 장경(莊敬)하기만을 생각하는 왕실의 부덕(婦德)으로 만년에 와서 무궁한 복을 받아, 기쁜 표정으로 자전에서 안녕을 누리고 번창한 경사로 나라에 덕을 끼치셨기에 온갖 축복 속에서 만복이 깃들고 있는데다 또 기후의 조화로움으로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온 나라를 장수의 지역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가 황천과 조종(祖宗)이 보이지 않게 묵묵히 도와서 반석같이 튼튼한 기반을 닦아 주고 무궁한 복락(福樂)을 누리게 한 것이고 보면, 이해 이달 이날에 축배를 올려 헌수하는 것은 바로 위로 황천과 조종의 하사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효도를 더 한층 빛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겸양하고 복을 조심하는 생각에서 크게 벌이지나 않을까 염려하신다 하더라도 갈망하고 있는 조야의 대소 신민들의 심정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크게 벌인다는 것은 상례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탄일의 진하는 국조(國朝)의 떳떳한 전례인데 이것 역시 크게 벌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궁내에서 축배를 올려 헌수하는 것은 본래 풍정(豊呈)이 아닌데도 이것 또한 크게 벌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크게 벌인다고 말할 만한 근거가 조금도 없는데도 이토록 윤허에 인색하신 것은 원조(元朝)의 하례를 미리 거행하였으므로 이날에 재차 거행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원조의 하례는 이해를 축하하는 것이고 이달 이날의 하례는 이달의 이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성상의 축하하는 심정이나 온 나라의 기대하는 정성으로 볼 때 어떻게 원조의 하례를 이미 거행하였다 하여 이달 이날의 축하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자전의 마음을 돌리시어 특별히 따뜻한 윤음을 내리소서. 축수의 환호 속에 칭상(稱觴)의 전례를 거행하여 어리석은 백성들 모두가 이달의 이날이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궁한 경사의 날이라는 것을 알도록 한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혜경궁이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이러한 때의 나의 심정은 하례를 받기가 난처한 것뿐이 아니다. 칭상의 절차는 대전의 성효(誠孝)로도 오히려 나의 뜻을 체득하여 크게 벌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니 경들은 이 점을 유념하라."
하였다.

 

빈청이 재차 계달하기를,
"감히 여정(輿情)을 진술하고서 삼가 유음(兪音)을 기다렸으나 비답을 받아보니 윤허는 커녕 ‘경들은 이 점을 유념하라.’고까지 하시니, 신들은 실로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뭇 신하들이 아무리 미혹하기로서니 자궁의 뜻하는 바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오늘의 소청은 실로 그것이 크게 벌이자는 것에 가까운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금년에 접어들고부터 기뻐 경축하며 손꼽아 기다린 것은 오직 이달이 빨리 와서 거룩한 축하의 행사 속에 만수무강의 축배를 받들어올리는 일입니다. 지난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경사를 장식하여 성상의 천부적 효성을 이루어 주는 일이야말로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럼에도 지금 하루 이틀 성상께서 안에서 간절히 진달하여도 여태 소청을 얻어내지 못하고, 뭇 신하들이 일제히 나아가서 호소하여도 또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자궁의 겸손하고 신중한 미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정리로 보아 말 수 없고 예절로 보아 꼭 거행하여야 할 것으로 우리 열성조의 성모(聖母)께서도 누차 윤허하신 적이 있습니다. 태사(太姒)와 같은 미덕으로 열성조에서 이미 거행한 예를 따르시어, 자궁의 마음을 돌리시고 성전(盛典)을 거행함으로써 위로 하늘이 내린 큰 복에 답하고 아래로 성상의 사무친 효성을 드러내어 주신다면, 역시 전대에까지도 영광이 미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삼조(三朝)의 공봉과 일국의 봉양으로도 늘상 효성이 모자람을 아쉬워하던 중 다행히 이해의 이달을 당하였으므로, 경사를 빛내고 장수를 비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다 노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화기가 널리 퍼지고 덕택이 사방에 미치어 팔방의 모든 백성들이 죄다 좋아서 날뛰며 자궁의 덕화라고 합니다. 성효가 이다지 간곡하고 지극하신데도 여태 예식을 갖춘 헌하(獻賀)와 축배의 헌수를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면, 몇 십 년을 두고 기대를 쌓아 온 성상의 마음을 장차 어떻게 후련히 이루어 줄 수 있겠습니까. 경축을 빛내자는 소청을 동짓달 초승에 제의하여 놓고서도 겸손하신 자궁의 심정을 우러러 생각하여 지금까지 끌어왔고 보면, 우리 자궁의 지극히 자애로운 마음으로써 어찌 성상의 오늘의 간곡하신 소청을 깊이 이해하여 굽어 들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혜경궁이 언문으로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은 벌써 하유하였으니, 소청을 그만두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자궁의 전교에서 ‘이처럼 무덥고 비가 오는 때를 당하여 대신과 재신이 연일 들어오니 매우 민망하다.’고 자상하게 하교하셨으니, 이러한 때에 굳이 소란을 피우는 것도 자궁의 겸양의 마음을 본받는 도리가 아니다. 이틀 동안이나 면대를 청하여 빈청에서 아룀으로써 제신(諸臣)의 성례(誠禮)는 이미 다 닦았고, 허락을 얻어내는 일은 나의 성의가 자궁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자궁의 뜻을 잘 따르는 것도 역시 순종의 일단이니 내일의 빈청에서의 아룀은 와서 열지 말라. 하의(賀儀)이건 칭상(稱觴)이건 간에 허락이 내려지기를 기다려서 내일 예조 당상에게 하교할 터이니, 이 뜻을 대신과 재신은 알고 있고 예조 당상은 하교를 받도록 와서 기다리라."

 

정대용(鄭大容)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서용보(徐龍輔)·정대용을 규장각 직제학으로 삼았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홍문록(弘文錄)에서 【부제학 정대용(鄭大容), 부응교 최헌중(崔獻重), 수찬 윤서동(尹序東), 부수찬 성덕우(成德雨)·김희조(金熙朝).】  사점(四點)을 받은 사람은 이승운(李升運)·서유문(徐有聞)·남이익(南履翼)·홍낙유(洪樂游)·이희갑(李羲甲)·박종순(朴鍾淳)·강빈(姜儐)·한용탁(韓用鐸)·박길원(朴吉源)·임한호(林漢浩)·채홍원(蔡弘遠)·김근순(金近淳)·유상조(柳相祚)이다.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沈晉賢)이 장계하였다.
"울릉도의 수토(搜討)를 2년에 한 번씩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거행하기로 이미 정식(定式)을 삼고 있기 때문에, 수토관 월송 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에게 관문을 띄워 분부하였습니다. 월송 만호의 첩정(牒呈)에 ‘4월 21일 다행히도 순풍을 얻어서 식량과 반찬거리를 4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학(倭學) 이복상(李福祥) 및 상하 원역(員役)과 격군(格軍) 80명을 거느리고 같은 날 미시(未時)쯤에 출선하여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는데, 유시(酉時)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레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22일 인시(寅時)에 거센 파도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바다 멀리서 두 척의 배 돛이 남쪽에 오고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참에 격군들이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 안개 속으로 은은히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아마 섬 안의 높은 산봉우리일 것이다.’ 하기에, 만호가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그것은 섬의 형태였습니다. 직접 북을 치며 격군을 격려하여 곧장 섬의 서쪽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에 정박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살펴보니, 계곡에서 중봉(中峰)까지의 30여 리에는 산세가 중첩되면서 계곡의 물이 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논 60여 섬지기의 땅이 있고, 골짜기는 아주 좁고 폭포가 있었습니다. 그 왼편은 황토구미굴(黃土丘尾窟)이 있고 오른편은 병풍석(屛風石)이 있으며 또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는데, 예전에 한 해 걸러씩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지고 있습니다.
24일에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고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닷속에 있는 그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하여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25일에 장작지포(長作地浦)의 계곡 어귀에 도착해보니 과연 대밭이 있는데, 대나무가 듬성듬성할 뿐만 아니라 거의가 작달막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조금 큰 것들만 베어낸 뒤에, 이어 동남쪽 저전동(楮田洞)으로 가보니 골짜기 어귀에서 중봉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 사이에 세 곳의 널찍한 터전이 있어 수십 섬지기의 땅이었습니다. 또 그 앞에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북쪽의 것은 방패도(防牌島), 가운데의 것은 죽도(竹島), 동쪽의 것은 옹도(瓮島)이며, 세 섬 사이의 거리는 1백여 보(步)에 불과하고 섬의 둘레는 각각 수십 파(把)씩 되는데, 험한 바위들이 하도 쭈뼛쭈뼛하여 올라가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서 자고 26일에 가지도(可支島)로 가니, 네댓 마리의 가지어(可支魚)가 놀라서 뛰쳐나오는데, 모양은 무소와 같았고, 포수들이 일제히 포를 쏘아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구미진(丘尾津)의 산세가 가장 기이한데, 계곡으로 십여 리를 들어가니 옛날 인가의 터전이 여태까지 완연히 남아 있고, 좌우의 산곡이 매우 깊숙하여 올라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어 죽암(竹巖)·후포암(帿布巖)·공암(孔巖)·추산(錐山) 등의 여러 곳을 둘려보고 나서 통구미(桶丘尾)로 가서 산과 바다에 고사를 지낸 다음,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대저 섬의 둘레를 총괄하여 논한다면 남북이 70, 80리 남짓에 동서가 50, 60리 남짓하고 사면이 모두 층암 절벽이며, 사방의 산곡에 이따금씩 옛날 사람이 살던 집터가 있고 전지로 개간할 만한 곳은 도합 수백 섬지기쯤 되었으며, 수목으로는 향나무·잣나무·황벽나무·노송나무·뽕나무·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아욱·쑥·모시풀·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충(羽虫)으로는 기러기·매·갈매기·백로가 있고, 모충(毛虫)으로는 고양이·쥐가 있으며, 해산물로는 미역과 전복뿐이었습니다.
30일에 배를 타고 출발하여 새달 8일에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섬 안의 산물인 가지어 가죽 2벌, 황죽(篁竹) 3개, 자단향(紫檀香) 2토막, 석간주(石間朱) 5되, 도형(圖形) 1벌을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 하였으므로,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냅니다."

 

6월 4일 기미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과 이조 참판 정범조(丁範祖)를 체직시켰는데, 재찬과 범조는 대대로 내려오는 원한과 미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도당록(都堂錄)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홍문관 제학 정창순(鄭昌順), 좌참찬 홍수보(洪秀輔), 우참찬 이성규(李聖圭), 이조 참판 황승원(黃昇源), 이조 참의 이면긍(李勉兢).】  육점(六點)을 받은 사람은 이승운(李升運)·서유문(徐有聞)·남이익(南履翼)·정이수(鄭履綏)·홍낙유(洪樂游)·이희갑(李羲甲)·박종순(朴鍾淳)·강빈(姜儐)·한용탁(韓用鐸)·박길원(朴吉源)·윤행직(尹行直)·윤익렬(尹益烈)·임한호(林漢浩)·채홍원(蔡弘遠)·김근순(金近淳)·유상조(柳相祚)·김선(金銑)이다.

 

중비(中批)로 임희존(任希存)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판서로, 이윤겸(李潤謙)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6월 6일 신유

소대를 하였다.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9일 갑자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와 과강(課講)을 거행한 다음, 돈령 도정 박사철(朴師轍), 동몽 교관 최창적(崔昌迪)을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오늘 과강 때에 경학(經學)으로 선발된 관동 사람들과 한나절 동안 토론을 한 바, 그들의 소양이 조대 문자(條對文字)와 똑같다는 것을 더욱더 실감했으니, 요사이 오랫동안 경(經)과 시(詩)를 담론하지 못하였던 나머지 퍽 기뻤다. 그중 도정 박사철(朴師轍)은 지금 나아기 67세나 되어 연한이 멀지 않으니 지금까지 그냥 늙어 온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 사람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안 이상 어떻게 그냥 돌려 보내어 실망의 탄식을 자아내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정사에서 특별히 수령의 자리를 하나 주어서 조정에서 인재를 평범한 사람 속에서 구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경사를 빛내려는 것 이외에 그 뜻이 특별한 데 있으니, 이렇게만 한다면 대의(大義)도 확고하여지고 사은(私恩)도 갚게 될 것이다. 상례를 초월한 특별 제수에 어찌 상격(常格)을 논할까마는, 한 자리를 두 사람이 동시에 차지하는 것은 일의 체모상 어떨지 몰라서 동돈령 홍준한(洪駿漢)·홍용한(洪龍漢)의 본직 교체를 윤허한다.
자궁의 휘지(徽旨)를 외정에서 선언하는 일은 감히 못할 뿐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나의 본뜻이 이러한 만큼 이것을 한 번 하유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전에 이조 판서의 항지(抗旨)로 인하여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자궁께서 어찌 모르셨겠는가. 나 소자에게 하교하기를 ‘그가 그처럼 하는 것은 직분으로서 도리를 다하여 간하는 것에 불과하니 조정으로서는 기쁜 소식이다. 해감(解勘)하기 전에는 독촉하지 말고서 당사자를 사사로이 들어와 보게 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지금까지 지연된 까닭이다. 다시 생각하여 보니 처분도 역시 조금 지나쳤다. 전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의 죄명을 깨끗이 지워버리라."

 

6월 10일 을축

차대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아뢰기를,
"신들이 그저께 빈청에서의 아뢴 것은 실로 온 나라 사람이 같은 심정이었고 전하 역시 정성을 쌓아 힘껏 청한 바였습니다. 다만 자궁의 겸양하는 덕 때문에 아직도 휘지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답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해의 이달에 나의 기원하는 심정으로는 날마다 칭상(稱觴)을 하더라도 나의 마음에는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의식에 있어서 행여라도 크게 벌이게 된다면 이는 자궁의 마음을 순종하는 도리가 아니다. 성인의 말씀에도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一喜一懼]’고 하였는데, 나의 기쁨과 두려운 심정 또한 의당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하례의 의식을 크게 벌이려 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칭상의 한 절차에 있어서도 이것이 크게 벌이는 것이나 아닌가 싶어서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대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란 한결같이 뜻을 잘 따르는 것으로 최선을 삼아야 하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반드시 증자(曾子)와 같이 섬기고 나서야 효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 왕조 병인년063)  의 고사만 해도 선왕의 생각은 정묘년이 병인년에 비하여 더 큰 경사의 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병인년에는 하례를 그만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선 대왕께서 자전의 뜻을 잘 따른 일이다.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선왕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보나 옛 법을 따르는 의리로 보나, 나 역시 뜻을 잘 따르는 것으로 제일의 도리를 삼아야 한다."
하자, 낙성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큰 기대는 오직 하례의 의식을 빨리 거행하는 데에 있을 뿐인데, 삼가 하교를 받들고 나니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어느 해이고 경사 없는 해가 없으니, 올해에 미처 칭상을 못하였더라도 올해에 미처 칭상하지 못한 남은 경사를 가지고 내년을 기다려서 칭상하고 그 내년에 또 칭상하여 이렇게 천년 만년에까지 나간다면 이것이 국가의 끝없는 복이 아니겠는가. 왕안석(王安石)의 시에 이르기를 ‘옛사람은 단 하루의 봉양을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았다.[古人一日養不以三公換]’ 하였거니와, 나는 한결같이 뜻을 잘 따르는 것으로써 어버이 섬기는 도리로 삼겠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내가 듣자니 ‘어버이의 나이는 알아 두지 않을 수 없으니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가 해석하기를 ‘이미 오래 사신 것을 기뻐하면서 또 이제는 쇠로(衰老)할 것을 두려워하는데, 날을 아끼는 지극한 효성으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닌가. 성현의 말씀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지금 내가 자전의 나이를 알고 세월을 아끼며 기뻐도 하고 두려워도 하는 나머지 매번 끝없는 축수를 드리려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늘상 여지를 두라는 경계를 유념하여 응당 행해야 할 의절을 생략하는 쪽으로 따르기가 일쑤였다. 구구한 이 마음은 신민들에게 향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육순의 경사스런 날을 만나서 축하의 칭상례(稱觴禮)를 거행하려고 하는 것은 곧 인정으로 보나 천리로 보나 당연한 일이나,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느껴져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당황해하는 것이니 이는 감히 늦추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자궁께서 겸양의 마음이 하도 완고하시어 날이 갈수록 더 완강히 거절하고 계시는데, 날마다 번거롭게 간청히면서 한결같이 무리하게 떠들어대는 것을 혐의쩍어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어버이의 뜻을 순종하는 방법이라 하겠는가. 삼가 우리 나라의 선례들을 상고하여 본 바 옛날 우리 인원 성후(仁元聖后)의 육순에 탄신의 하례와 축하연을 모두 자지(慈旨)를 받들어 그만두었으니, 오늘에 있어서도 이 선례를 따르는 것이 합당하겠다. 후하게 잘 차려야 할 경사에 뜻과 물건으로 봉양하는 것은 외면으로 크게 벌인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이에 자궁의 이때의 마음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고 또 선 왕조 병인년의 전교를 따르고자 한다. 이 뜻을 예조 당상에게 알리어 오는 18일 자궁의 탄신 하의(賀儀)는 표리(表裏)를 올리는 것만으로 마련하도록 하라."

 

6월 11일 병인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15일 경오

평안도 안핵 어사 이상황(李相璜)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이달 1일에 삼가 평안 감영을 안사(按査)하라는 분부를 받들고서 본도 관찰사 김사목(金思穆)과 함께 그의 입회 아래 조사한 바 강동 현감(江東縣監) 신대우(申大羽), 순안 현감(順安縣監) 김기풍(金基豊)도 조사에 동참하였습니다.
경인·신묘년 감사 조엄(趙曮)의 장안(贓案)으로서 도사(道査)에 오른 것에 세 가지 조항이 있는데, 하나는 징채전(徵債錢) 10만 냥을 사사로운 용도에 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변사에 청하여 얻은 별향 고전(別餉庫錢) 7만 8천 냥을 허위 문서로 거래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전 46만 2천여 냥을 발매하여 사사로이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우윤(右尹) 조진관(趙鎭寬)이 그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한 내용은 모두 이와 상반되었습니다. 징채전의 경우는 곡물 3만 2천여 석을 사들여서 각 창고에 첨부하여 장사(將士)들의 지방(支放) 물자에 보태어 주었다고 하고, 비변사에서 내준 별향고전의 경우는 배삭(排朔)이 창설되된 초기에 먼저 꾸어온 것으로서 그 이듬해에 이미 다 비변사에 갚았다고 하고, 소미(小米) 8만 석을 발매한 것의 경우는 낮은 값으로 여러 강변 고을들에게 내주었으므로 1석에 10냥씩 받았을 것이라는 말은 애당초 그럴싸하지도 않은 말이라고 하고, 또 경사(京司)의 곡물 1만 5천 1백 10석의 경우는 애당초 해사에 요청해서 얻은 일이 없었고 또 해사가 사람을 보내어 발매하였고 보면 그 잉여의 다소(多少)에 대해서는 애당초 간섭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말이 서로 어긋나 일이 믿고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을 규명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더욱더 각별히 신중을 기하여야 하나, 돌이켜 보면 신은 경력도 없는데다 본 사안이 또 햇수가 오래된 것이어서 물어볼 만한 사람도 다섯 명 뿐이기 때문에 우선 문목(問目)을 발부하여 데려다 공초하고 나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등서하여 아뢰는 바입니다.
경인년 호방 영리(戶房營吏) 송재심(宋在心)의 초사에는 ‘비변사로부터 얻어 내었다는 8만 석 중 3만 2천여 석은 상정 원가(詳定元價)로 장사(將士)들의 지용을 위해 각 창고에 사들여 놓았고, 그 나머지는 경인년에 강변의 농사가 큰 흉작을 면치 못하여 곡가가 뛰어서 백성들이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1석당 3냥 5전으로 값을 정하여 강변의 여러 고을에 발매하였으니, 분표(分俵)한 석수(石數)와 발매한 고을은 그때의 등록에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별향고전 7만 8천냥을 꾸어다 쓴 일은 애당초에 별향고에서 곧바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닙니다. 별향고전에 대해서는 단지 봉부동(封不動)의 조례만 있어서 옮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별향고에서 가져다 쓴 것처럼 비변사에 보고만 하였을 뿐, 사실은 다른 각 창고의 돈을 가져다 쓴 것으로, 그 이듬해에 스스로 마련하여 각 창고에 갚았습니다. 또 경각사(京各司)에서 직접 발매한 경우 각 차인(差人)이 관문(關文)을 가지고 내려오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열읍(列邑)에 분정(分定)하는 것이니, 차인들이 중간에서 잉여분을 취하는 데 대한 것은 영문(營門)에서 알 바가 아닙니다. 장적지(帳籍紙)·호적지(戶籍紙)·속안지(續案紙) 등의 값은 식년(式年)마다 영문에서 각 고을에 내어 주는 것인 바, 경인년에도 역시 그렇게 내어 주었습니다. 강계(江界)에 발매한 소미를 1석에 10냥씩 받았다는 말은 더더욱 맹랑한 말입니다. 흉년이 더 심한 강변 고을에 발매한 쌀값은 모두 3냥으로 정하여 관문을 띄워서 분배하였고 보면, 강계 한 고을에 대해서만 어떻게 10냥씩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아전과 비장들의 거짓된 공초입니다. 가령 소미를 발매하고 남은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 당시 영문에서 스스로 진휼곡(賑恤穀)을 마련하여 열읍에 분표한 것 5천 석과 별향고전을 갚기 위하여 스스로 마련한 돈 7만 8천 냥과 서장대(西將臺) 영건비 3천 냥이었을 것입니다. 이 밖에는 달리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고, 보선고 색리(補膳庫色吏) 옥순찬(玉純贊)·오진권(吳辰權) 등의 공초에는 ‘맡고 있는 바 보선고에서 조엄의 재임기간 중에 쌀을 사서 획속(劃屬)한 수는 6천 6백 60석인 바, 그 모곡(耗穀)을 가지고 상정례(詳定例)에 따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고, 보군고 별장(補軍庫別將) 조창대(趙昌大)의 공초에는 ‘맡고 있는 바 보군고에서 조엄의 재임기간 중에 쌀을 사서 획속한 섬수는 다 기억할 수 없으나 쌀을 사들여서 첨부한 사실만은 확실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그들의 초사를 대번에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신이 또 직접 문서를 가지고 다시 더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강변의 고을들에게 비변사의 소미(小米) 5만 7천 석을 값을 낮추어서 발매한다는 관문이 있었는데, 관문의 내용에서 ‘각 고을들이 보고한 시가가 많게는 4냥 5전, 혹은 4냥이거나 3냥, 8, 9전이므로 만약 시가대로 값을 받아들인다면 민간의 형편상 필시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는 환절미(還折米)를 매석당 3냥 5전으로 값을 낮추어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 밖에 10만 냥을 가지고 상정례에 따라 3만 2천 6백 석을 사들여서 각 창고에 분표(分俵)한 것도 그 당시의 중기(重記)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각 창고에서 돈 또는 쌀로 내어준 비변사의 대전(貸錢) 7만 8천 냥 역시 도로 갚는다고 비변사에 보고한 문서가 있었습니다.
감영 별치곡(別置穀)의 항식(恒式) 외에 취한 잉여분을 가지고 감영의 용도에 보태어 쓴 일에 있어서는 이것이 바로 본영의 잘못된 관례이므로 기어코 더 조사할 필요는 없으나, 그때 발매한 문서 역시 증거삼을 만한 것이 더러 있기에 함께 진열합니다. 이를테면 덕천(德川)·맹산(孟山)·양덕(陽德)·상원(祥原)·운산(雲山)·강동(江東)·희천(熙川)·박천(博川)·귀성(龜城)·삭주(朔州)·태천(泰川)·창성(昌城)에는 3냥 7전, 영변(寧邊)에는 3냥 6전, 초산(楚山)·평남(平南)·개천(价川)·순천(順川)에는 4냥, 은산(殷山)에는 3냥에 발매한 사실 역시 다 닳아 해어진 건기(件記) 안에 들어 있으므로, 비록 인적(印跡)의 증거는 없다 하더라도 당초의 발매한 값이 7, 8냥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의 초사에다 또 문서들을 가지고 참고하여 조진관(趙鎭寬)의 원정(原情)에 비교하여 볼 때 말들이 대개 서로 들어맞고 또 각기 연관이 있습니다. 다만 그중 각 창고에 첨부한 쌀 3만 2천여 석을 사들였다는 10만 냥의 돈에 대해서는 진관은 징채전(徵債錢)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하고 도사(道査)에서는 이리저리 굴려 잉여를 낸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어느 곳에서부터 굴려 내었다는 흔적도 없고, 징채전 24만 냥을 구처한 건기에는 분명히 10만 냥으로써 쌀을 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관의 원정을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것이 인장을 찍은 문서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감히 단정짓지는 못하겠습니다.
비변사의 쌀과 본영 별치의 쌀을 분정(分定)하여 돈으로 바꾼 일은 더러 관문도 있고 더러 건기도 있어서 모두 증거를 삼을 수 있으나 경사(京司)의 곡물을 얻어다 발매하였다는 일은 애당초 한 장의 관문도 한 장의 건기도 없으므로, 그것이 본 영에서 주관하여 발매한 것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대저 발매를 하고 그 나머지를 취득하는 자체가 벌써 본영의 잘못된 관례인데, 잘못된 관례를 가지고 장안(贓案)을 심의하였으니, 그 아들의 억울하다는 호소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송재심(宋在心)의 초사 중 제반의 자비(自備)와 수보(修補)에 들었다는 것도 실제로 들어간 숫자가 과연 초사의 말과 같은지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실제 이러한 자비와 수보의 일은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비변사에서 꾸어간 돈을 상환한 데는 증거할 만한 문서가 분명히 있고 보면, 이른바 발매하고 남은 돈도 자신이 차지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잉여분을 가져다 쓰는 것이 비록 잘못된 관례를 답습한 것이라고는 하나 항식(恒式)을 어긴 것은 자연 불법에 해당되므로, 이미 발각이 된 이상 전혀 죄가 없는 것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사는 이 서계를 가져다 비변사에 전하고 대신 및 전임 관찰사들과 충분히 논의를 한 다음, 대신이 의견을 모아 점련(粘連)하여 회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치순(鄭致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6일 신미

날씨가 너무 더워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고 감사 조엄(趙曮)의 관서 장안(關西贓案)을 탕척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임·시임 대신 및 전임 관찰사들에게 상의한 바,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은 ‘지금까지 조진관(趙鎭寬)이 그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한 데에는 세 가지의 조항이 있는데, 징채전을 사사로운 용도에 썼다는 것과, 별향 고전을 허위 문서로 거래하였다는 것과, 곡물을 발매한 돈을 사사로이 가져다 썼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사의 계본에서 이 세 조항에 대해 논열(論列)한 것이 꼭꼭 들어맞으니, 이 말을 근거로 할 때 징채전을 사사로운 용도에 썼다고 할 수는 없고, 별향 고전 역시 허위문서로 거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발매하고 남은 돈은 비록 쓴 곳에 대해 증거삼을 만한 문적은 없으나 자비와 수보에 대해서는 실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하며, 말미에 결론짓기를 「비록 잘못된 관례의 답습이고 또한 자신이 차지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항식(恒式)을 어긴 이상 기어코 전혀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것에 대하여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장죄(贓罪)를 범한 것이라 하여 이것을 철안(鐵案)으로 삼고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조엄만이 이 죄율을 적용받는 것이 어찌 참으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판중추부사 김희(金憙)는 ‘어사의 계본에서 논열한 바를 볼 때 조엄이 억울하게 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여기에서 판명될 수 있습니다. 신은 실로 별다른 소견이 없습니다. 다만 어사의 계본을 증거삼을 만한 문안이라고 여긴다면, 그 일의 사실을 아는 자로는 일찍이 관찰사를 지냈던 사람만한 이가 없으니, 그의 회계를 기다려서 과연 어사의 사계(査啓)를 옳다고 하면 특별히 처분을 내려서 분명히 밝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률(贓律)을 준엄하게 하고 억울함을 살피는 도리에 다같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는 ‘어사의 사계가 모두 조리에 맞으니 감히 별도의 의견을 내어 논단할 바가 없습니다.’ 하고, 행 사직 정민시(鄭民始)는 ‘고 감사 조엄의 일은, 본도에 재임했던 때로부터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자세히 듣지 못했으므로 지금 어사의 사계에 대해 감히 무어라 지적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는 ‘지금 어사의 사계를 가지고 그 당시의 도계(道啓)에 비교하여 보면 사실은 크게 서로 어긋나는데, 다만 별향전 7만 8천 냥을 이듬해에 다 충당하여 갚았다는 것은 비변사에 이미 거래된 문서가 있고, 징채전 10만 냥으로 곡물을 사들였다는 것은 본영에 또 인장이 찍힌 중기(重記)가 있고 보면 증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잉여분을 가져다 썼다는 것만은, 그 수치가 46만 20냥이나 된다는 것은 근년 이래 본도의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잉여분이 그토록 많은 데는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어사의 사계 내용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사안이 오래된 것이고 또 인장이 찍힌 장부도 없고 보면 감히 억측으로써 지적하여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혐의스럽다 하여 의논드리지 않았고,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질병으로 해서 의논드리지 않았고, 좌의정 김이소(金履素)는 아직 숙배하지 않았습니다.
신 병모(秉模)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사의 계본에서 논한 바 세 조항 중, 징채전으로 3만 2천여 석의 쌀을 사들인 것은 나름대로 중기에 실려 있고, 비변사에서 꾸어준 돈 7만 8천여 냥은, 그 당시 배삭(排朔)의 창설이 5월에 있었고 본도의 추봉(秋捧)은 으레 9월 이후에 있으므로 5월에서 8월까지의 각종 항목에 지급할 7만 8천 3백여 냥을 어디서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수치대로 별향고의 돈을 꿀 생각으로 본사에 논보(論報)하니, 본사에서는 매년 특별히 마련해 둔 것 중에서 1만 냥을 감록(減錄)하여 준 다음 그 감하여 준 1만 냥을 상환하되, 8년 안에 다 상환시킬 생각으로 연품(筵稟)하여 시행을 윤허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해도 관찰사 조엄이 본사에 보고한 문장(文狀) 내에는 ‘조정에서 대출을 허가한 것은 참으로 본 일을 성취시키려는 좋은 뜻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본도의 도리로서는 의당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공전(公錢)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자체로 돈을 마련하여 모두 전년에 꾸어온 수치를 충당하여 갚는 데에 썼습니다.’ 하였고, 상환한 내용 역시 중기(重記)에 수록되어 있고 보면, 허위문서로 거래하였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저 허위문서로 거래한다는 것은 반드시 눈앞에 당장 상환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그 수치를 다 채울 길이 없고 나서야 허위문서를 꾸미는 법인데, 참으로 일시의 무사함만을 바랐다면 무엇하러 매년 1만 냥씩 상환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이듬해에 다 상환할 것을 자원하여 이러한 허위문서를 남겨서 뒷날 반드시 발각될 죄를 스스로 짓겠습니까.
곡물을 발매하고 남은 잉여분 46만 2천여 냥을 사사로이 가져다 썼다는 일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의혹스럽고 가장 빠져나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 비변사의 발매분과 본영의 연례 발매분을 합산할 경우 도합 11만여 석으로서, 상정(詳定)의 원가로 쳐도 벌써 33만여 냥이나 되는데, 이 밖에 또 40여만 냥을 잉여분으로 취하였다면, 1석마다 취한 잉여가 거의 모두 4냥 남짓 되니 내지(內地)의 사정으로 논하여 볼 때 너무도 근사하지 않은 말입니다. 또 더구나 강변의 여러 고을들 가운데 돈이 고갈되지 않은 곳이 없고 보면, 1석마다 7, 8 냥 또는 10 냥씩을 매길 경우 아무리 살을 벗기고 골수를 뽑는다 해도 1년 안에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어사의 계본에 이른바 감가 관문(減價關文) 또한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평안도 감영의 배삯으로는 비록 늠전(廩錢)을 다 턴다하더라도 1년 안에 7만 8천여 냥을 마련할 수가 없음에도 비변사에서 꾸어간 7만 8천여 냥을 상환한 것이 바로 그 이듬해이고 보면, 발매할 당시에 약간의 잉여라도 없었을 것 같으면, 모르기는 하나 어디에 손을 써서 이 물량을 상환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40여만 냥의 잉여를 취하였다는 말은 아마 내용을 모르고서 상정 원가와 함께 40여만 냥 속에 뒤섞어 계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저쪽의 입장을 생각하여 잉여분의 취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또한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대저 상정 원가 외의 잉여 취득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 있는 관찰사가 이처럼 법외(法外)의 일을 하였다는 데는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잘못된 관례에 대하여서는 한 사람도 파헤치려 들지 않고 이 문제만을 가지고 장안(贓案)으로 논하고 있으니, 억울하다는 논의가 간혹 나오는 것도 괴이쩍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엄한 것이 장법(贓法)이고 막대한 것이 장안인 만큼, 어사의 사계와 도신의 장계가 이미 앞뒤가 서로 다르고 신문에 응한 각 사람들도 살아 있는 자가 거의 없는 이상, 이제 와서 근20년 뒤에 네댓 사람의 초사를 가지고 죄안을 갑자기 뒤집는다는 것은 애당초 논의할 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형정(刑政) 중에 백성과 나라에 가장 깊이 관계되는 것이 역안(逆案)과 장안(贓案)이니, 법률을 제정한 의도에서 볼 때 백성과 나라가 일체하는 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억울함을 없애주는 데 대한 논의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인가. 중신(重臣)이 연루된 바는 장죄(贓罪)가 아니다. 그때 또 다른 밝히기 어려운 무고가 있어 화가 당장 눈앞에 닥쳐왔고 또 한 고가(故家)를 버릴 판이었는데, 때마침 관서의 사건이 먼저 발로되어 먼저 발로된 사건부터 처리한 바, 행사(行査)는 관찰사에게만 맡겨두고 치대(置對)에 추신(推訊)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찰사로 있을 적에 너무 엄하고 혹독하여 축난 곡식을 배정하여 바치게 하는 과정에서 관서 지방 백성들의 원성을 많이 샀으니, 대동문(大同門) 밖에서 선유(宣諭)를 거행한 것도 특별히 들끊는 원성을 진정시키자는 의도였다. 그 뒤 앞서의 밝히기 어려운 무고가 별다른 내용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나서 곧바로 복관(復官)과 함께 아들의 녹용(錄用)을 명하였던 것이다. 그 중신이 연루된 바가 과연 참으로 장죄라고 한다면, 앞뒤의 처분이 어떻게 이처럼 순탄하고 완곡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관서의 사계(査啓) 중 셋째 안건, 즉 상정(詳定)의 값으로 발매한 이외의 몫인 40만 냥의 돈이 어디로 귀속되었는가 하는 일이 분명치 않은 단서가 되었으므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공론의 일치를 기다리고 있다. 잉여분을 가져다 쓴 일은 잘못된 관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면서도 의례적으로 발매한 각사에 귀속시켰고, 또 10만 포(包)에 가까운 상환곡을 갚고 또 그 나머지의 수량을 수선의 비용에 넣었으니, 장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다. 이와 같고 보면 그 나머지의 수치는 얼마 안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값을 낮출 분명한 증거의 인장 찍힌 관문이 완연히 있고 값을 낮추는 데는 구애받지 말라고 연주(筵奏)를 한 사람이 있어서, 1포에 10꿰미씩 받고 팔았다는 말이 이미 허황된 말이고 보면 잉여분의 실제 수치도 의당 줄어들었을 것이고, 또 비장(裨將)의 공술이 허위로 결론나고 아전의 장부도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안사(按査)를 한 관찰사 역시 이미 말하였다. 그때 관찰사의 한 마디 말이 20년 후 한 어사의 어슴프레한 탐색보다야 어찌 백 번 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일찍이 이 도의 관찰사를 지낸 사람들에게 들으니 ‘가령 잉여분이 참으로 전하는 말과 같다면 사정과 사리가 다같이 서로 근사하지 않습니다. 사정과 사리 밖에 어찌 범법 행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 역시 간략하면서도 극진한 말이다. 그럼에도 누차에 걸쳐 자문을 구하고 금방 어사를 보내고, 또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여 품주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것이 형정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고 아울러 사람마다 사실을 분명히 알도록 한 뒤에 처분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이번 어사의 사계(査啓)에서 닳아 해어진 건기(件記)를 일일이 직접 보고서 긴요하고 확실한 것만을 극력 말하였는데, 이제 와서 어찌 꼭 의심을 갖겠는가. 고(故) 감사 조엄의 관서 사건 셋째 건을 첫째·둘째 건과 아울러 모두 분간(分揀) 사안에 넣어 둘 것을 분부한다."
하였다.

 

6월 18일 계유

일차 유생 제술(日次儒生製述)을 반궁(泮宮)에서 거행하여, 수석을 한 진사 신봉조(申鳳朝)·이시원(李始源)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주었다.

 

6월 20일 을해

도목정을 거행하여 【 이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참판 정범조(丁範祖), 참의 정치순(鄭致淳), 병조 판서 구상(具庠).】 홍낙성(洪樂性)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가 금방 체직시키고 박종악(朴宗岳)으로 대신하였으며, 이의필(李義弼)을 부사로, 심흥영(沈興永)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보임하고, 이조 참판 정범조(丁範祖)에게 다시 서용하지 말도록 하는 법률을 적용하고, 승지 이익운(李益運)은 금추(禁推)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벼슬에서 떨어진 지가 가장 오래된 사람을 거두어 쓰라는 명령을 얼마나 거듭 엄히 일렀는가. 그런데도 오늘의 정사에서 한 사람의 천거도 올라오지 않고 하나의 의망(擬望)도 보이지 않는다. 근래 이 일을 맡은 신하들이 무릇 정령(政令)이 있으면 오직 한두 번의 미봉책으로 면전에서 책임을 때우려고 드니 이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파급되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 이조 판서의 처사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다. 이와 같이 정사를 행한다면 몇 년 전부터 내린 칙교(飭敎)가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총재의 직임이란 대신에 버금가는 것으로, 조정의 의뢰가 막중한 데도 그처럼 저버렸다. 이조 판서 민종현을 경원 부사에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하던 일을 다 끝낸 뒤에 조정을 하직하도록 함으로써 불성실하고 무엄한 자를 경계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장난기 있는 처사에 가까운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만인에게 공평하게 널리 베풀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인 만큼 사소한 외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위로는 사사로운 은총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체면을 고려하여 가부(可否)·취사(取舍)의 즈음에 있어 남의 이목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당연한 사리인데도, 개정(開政)을 하여 아직 망통(望筒)을 들여오기도 전에 이조 참판이 망통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승선을 시켜 전품(轉稟)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국체(國體)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원래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고 나라의 기강은 또 나라의 기강이니, 참판 정범조에게 다시 서용하지 말도록 하는 법률을 속히 시행하라.
도목정이 비록 큰 정사이기는 하나 수응(酬應)에 비교하면 경중이 아주 다른 것이다. 근일에 와서 날마다 양제(涼劑)를 마시고 있는데 수응의 번거로움도 따지지 않고서 오전에 일을 다 마치도록 하라고 이미 하교를 하였다. 그런데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승지는 감히 입을 열어 재촉하지 못하였다. 이 승선은 일의 추이를 조금 아는 승선이라 여겼는데, 오늘의 소행은 너무도 놀랍다. 우선 금추(禁推)하고, 탕제를 중지한 뒤 공초를 받고 내보냄으로써 방자한 습속을 깨우치도록 하라."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경원부에 유배시키고, 전교하기를,
"민종현이 사심을 이루려고 하는 통에 밤이 이르도록 수응을 하느라고 탕제를 두 번이나 마시었다. 조금이라도 신하의 분수가 있었다면 의당 머리를 파묻고 대명(待命)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전혀 모르는 체하고 버젓이 정사를 시행하였으니,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한갓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하명을 듣고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죄율을 마감하였는데도 두려워할 줄 모르니 과연 신하의 분수라는 말인가. 대저 근래 조정의 형상이 이렇게 된 까닭은 오로지 종현과 같은 무리들이 뒤헝클어 놓은 데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민종현은 당장 그를 외직으로 보임하려던 지방인 경원부(慶源府)에다 귀양 보내는 법률을 시행하라. 성문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곧장 압송하여 무너진 풍속을 깨우치도록 하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을 간행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6월 24일 기묘

전교하였다.
"송사를 맡고 있는 아문이 잇따라 5일 동안 나와 일을 보지 않을 경우 정원에서 올려 추고할 것을 청하는 것은 고사가 그러하다. 형조·한성부·사헌부·사간원이 까닭없이 나와 일을 보지 않고 있는데도 해방(該房)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다. 해방 승지를 체차하고 이 뒤로는 옛 규례를 거듭 밝혀 두라."

 

6월 25일 경진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김이익(金履翼)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내년은 바로 황제의 즉위 60주년이므로 표문을 올려 진하(陳賀)하여야 된다. 진하사를 별도로 차출하라."

 

이재학(李在學)을 예조 판서로, 김이소(金履素)를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정대용(鄭大容)을 진하 부사로, 정상우(鄭尙愚)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6월 28일 계미

전교하였다.
"내가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것은 봉선(奉先)인데, 사전(祀典)은 봉선 중의 한 가지 일로서, 향기롭게 정성을 다하는 것을 일러 명사(明祀)라 하고, 제사를 정결히 하는 것을 일러 효향(孝享)이라 하니, 여기에서 하나라도 부족한 점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묘궁(廟宮)·능원(陵園)의 솜씨 좋은 일꾼들을 따로이 70과(窠)나 창설한 것이 어찌 그들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 이것은 실로 사전을 중시해서이니, 향축(香祝)에 관계되는 일은 제물을 만드는 일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 묘호와 존호를 쓰는 일은 오로지 서사 충의(書寫忠義)에게만 위임하고 있으므로 서사 충의를 마땅한 사람을 얻고 나서야 축판(祝板)과 향봉(香封)을 십분 정결히 할 수 있다. 어제 마침 추동(秋冬)의 여섯 달 동안 전궁·능원에 으레 바치는 향단(香單)에 대하여 서명 날인을 주청함으로 인하여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지극히 엄중한 문서가 해서와 초서로 뒤섞여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이 일을 고역(苦役)으로 여겨 기어코 회피하려고 하는 데 말미암은 것이니,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그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빈참(賓參)과 수봉(守奉) 1과(窠) 씩을 서사 충의에 소속시키는 것은 바로 그들을 위하여 답답함을 풀어주는 대정(大政)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서사 충의 및 입번하는 여러 충의를 융통하여 실직에 차의(差擬)하라. 다만 많고 적음의 차이가 심하니, 마땅히 배정하는 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충훈부로 하여금 사리를 논하여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취재(取才)를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신중히 하여야 되는데, 을유년의 수교(受敎)가 그렇게 준엄했음에도 근래에 와서 다시 이전처럼 가려내지 않고 있다. 지금 이후로는 해부의 우두머리 당상관이 해방 승지의 입회 아래 취재토록 하라. 전사(傳寫)할 때에는 반드시 손을 씻고 대준(對準)할 적에는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어 감히 어김이 없도록 하라.
향실(香室)은 본시 교서관(校書館)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교서관 관원들의 번서는 장소로 되었고 근래에는 또 내각과 외각으로 나뉘어졌으니 입직 관원의 근면과 태만을 내각 제학 이하 예겸(例兼) 제거(提擧)·부제거(副提擧)와 교리·정자가 어떻게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전교를 향실 및 내각과 충훈부의 게시판에 걸고 승정원 《예방편람(禮房便覽)》에 기록해 두도록 하라."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전 이조 판서의 일은 내가 그 지경에까지 갈 줄을 생각지 못하였다. 이번의 정사는 바로 사람을 위하여 벼슬자리를 가렸다고 하겠다. 윤확(尹㬦)한 사람을 놓고 말하더라도 10일의 차대에서 보여 준 늠름한 모습은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인데도 전 이조 판서는 이 사람을 두고 말하기를 ‘수령의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고 본다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감당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구차스레 숫자나 채운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처사다.’고 하였다. 내가 평소에 그 사람의 성품이 유약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의 거조는 용맹이 맹분(孟賁)·하육(夏育)과 같다고 말하여도 될 듯하였다. 누가 주장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사람을 잘못 가르쳤다고 말할 만하다. 2천 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은 처분이 과중하기에 이제 와서 나름대로 참작은 하였으나 그날의 일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면 너무 관대하게 처리했다고 하겠으나, 외면으로만 볼 때는 천리 뜨거운 길로 귀양보내는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처분이다. 지금 연석(筵席)에서 우상에게 내린 전교를 귀가 있는 자라면 다 들었을 터이므로 우선 과중한 처분이었던 것으로 돌리려 한다. 민종현(閔鍾顯)을 귀양보내는 데에 대해 참작하라."

 

새로운 처방의 척서단(滌暑丹) 4천 정(錠)을 화성(華城)의 역소(役所)에 내려주고, 전교하기를,
"불볕 더위가 이 같은데 성역처(城役處)에서 공역을 감독하고 공역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먹은 자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따로이 한 처방을 연구해 내어 새로 조제하여 내려보내니, 장수(匠手)·모군(募軍) 등에게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 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 이 밖의 구료할 처방도 각별히 유의하여 구중궁궐에서의 염려를 덜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묘당에 명하여 화성 성역에 백성을 부역시키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널리 자문하여 보도록 하였는데,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무릇 국가에 공역이 있을 경우 반드시 민력(民力)을 쓰는 것은 유사가 비용을 아끼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공사(公事)에 앞다투어 부역하는 의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으로, 국조에서 이미 시행한 일들을 볼 때 역력히 입증됩니다. 오늘날 화성의 성역이야말로 그 소중함이 어떠하고 관계가 어떠합니까. 그러나 민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는 성상의 고심(苦心)과 지극한 뜻에서 공역을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부역을 자원하는 무리들까지도 일체 부역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어찌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까. 다만 자식이 어버이의 일에 달려 나가는 도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에 큰 공역이 있는데도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모르게 한다면, 외양으로 논할 때는 백성에게 편의를 주는 일인 듯 하나 대체로 볼 때는 폐단을 끼치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대저 백성을 적절한 시기에 부려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이 민력을 사용하는 공명 정대한 원칙입니다.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부려서 농사철을 빼앗지 말라는 말이, 어찌 백성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부려서 좋은 시기를 빼앗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 백성을 부리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는지도 모르는데, 오늘날의 너무도 중대한 공역에 한결같이 백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공명정대한 원칙이 크게 무너질 뿐만 아니라 백성이 타성에 젖어서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삼가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투입해야 될 역정(役丁)을 감안하여 규례에 따라 모든 도에 분배하는 일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여러 대신 및 비변사 재신(宰臣)들에게 널리 물어보아서 처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러한 사리를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대저 성왕(聖王)의 정치란 사람을 사랑하면서 백성을 부리는 것이 그 전부이다. 사랑하면서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에 맞게 부리면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은혜와 사랑을 극진히 하였는데도 풍속과 습성이 퇴폐해지고 있다. 지금의 모양에서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니, 이 공역에 이 백성을 부린다는데 어찌 반드시 윤허를 아끼겠는가. 그럼에도 주저하고 있는 것은 먼저 대민(大民)·소민(小民)으로 하여금 신중히 하고 있는 본의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미 누누이 힘껏 청하였으니, 본사에서 널리 물어보아서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운관(芸館)에 명하여 《무원록언해(無冤錄諺解)》를 인쇄 반포하라고 하였다. 이는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6월 30일 을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를 하고, 전교하기를,
"전배 때 월근문(月覲門)과 유첨문(逌瞻門)을 거치는 경우 궐내에서 전좌(殿坐)하는 관례를 따르고 있는데, 이 뒤로는 월근문·유첨문을 거치는 거둥 때에 각사(各司)가 관례대로 개좌(開坐)를 하라."
하였다.

 

충훈부가 서사 충의 천전 절목(書寫忠義遷轉節目)을 올렸다. 【1. 향실(香室)의 월령 충의(月令忠義)를 반드시 공신의 적장자로 차하(差下)하는 것은 당초에 정해진 제도로서 이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서사 충의와 입번(入番)하는 모든 충의를 융통하여 실직(實職)에 차의(差擬)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이것이 어찌 그들의 노고에 보답할 바탕을 마련하자는 의도뿐이겠는가. 실로 우리 성상의 사전(祀典)을 존중하여 성경(誠敬)을 다하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전교에 따라 절목을 작성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할 길잡이를 삼도록 할 것이다. 1. 서사 충의는 공신의 적장자 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선택하되, 역시 지벌(地閥)과 인물도 보아서 본부 당상이 해방 승지의 입회 아래 취재(取才)한 다음, 옛 규례에 따라 승정원이 단자(單子)를 올려서 계하(啓下)를 받을 것이다. 1. 충의 중 서사(書寫)를 할 만한 자는 부록(付祿)·미부록(未付祿)을 막론하고 본부에서 미리 넉넉한 수를 선발하여 매월 연습을 시킨 다음, 성적 등수를 매겨 제학(諸學)의 취재 규정과 마찬가지로 등수가 좋은 자는 따로 부록하여 서사 충의의 결원이 생긴 뒤에 다시 시험을 거쳐 차하할 바탕을 마련하여 둘 것이다. 그러면 근본을 바루고 권장을 하는 데 다 같이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록의 자리를 더 늘리는 일은 거론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므로 입번 충의 18자리 중에서 3자리를 덜어내어 매월 발탁되는 우등자를 부록할 자리로 삼을 것이다. 충의가 옮겨갈 관직으로는 수봉관(守奉官)과 예빈 참봉(禮賓參奉) 두 자리가 있는데, 수봉관은 유서(諭書)·은인(銀印) 차비(差備)로 순차에 따라 천의(遷擬)하고 예빈 참봉은 부록 충의로써 근무한 일수에 따라 천의하되, 서사 충의의 경력도 근무 일수에 넣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정식(定式)은 바로 그 일을 존중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려는 의도이고 보면, 종전대로 근무 일수에 따라 돌아가며 차하하여서는 안되므로, 지금부터 시작하여 유서 은인 차비와 함께 서로 돌려가며 번갈아 수봉관에 천의하되, 그중에 6품직을 지낸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천전을 논할 것이 못되는 만큼 9백 일의 근무 일수가 찬 뒤에는 본청의 입번하며 녹봉을 타는 자리에 이부(移付)할 것이다. 1. 유서·은인 차비 역시 적장 충의(嫡長忠義) 중에서 차하하되, 본부에서 지벌이 확실하고 인물이 정명(精明)한 자로 3사람을 선발하여 내각으로 이송한 다음 내각에서 그중 한 사람을 각별히 선발하여 단자를 올려 계하를 받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82면
【분류】인사(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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