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유
태묘에 배알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9월 22일에 전하의 탄신을 하례하는 일이 공교롭게도 국기일의 재계(齋戒)와 서로 겹치니, 이 일을 마땅히 다른 날로 물려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전부터 이와 같은 때에는 계품한 뒤에 거행하는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는 24일로 물려서 시행하도록 조목을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권정례로 하라고 명하였다.
9월 2일 병술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에게 강(講)과 제술 시험을 보였다. 제술에서 일등을 한 진사 임천상(任天常)과 강에서 일등을 한 생원 박정검(朴廷儉)을 모두 직접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동지 정사에 홍양호(洪良浩)를 도로 임명할 것을 명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의 말을 따른 것이다.
9월 3일 정해
정학경(鄭學畊)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 체차하고 이보한(李普漢)으로 대신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예조에서 첨부한 조목을 보건대 동래 부사 윤필병(尹弼秉)의 장계 내용을 낱낱이 들면서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 ‘재판 차왜(裁判差倭)가 공작미의 한도를 물려달라는 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애당초 공작미의 한도를 물려준 것은 실로 한때의 특별한 은덕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전례로 간주하여 해마다 나오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다시 책망과 타이름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접대하는 일은 이전부터 해오던 전례이니 잔치를 베풀어주고 예단으로 줄 여러 가지 물건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내려보내 주도록 말하였습니다. 재판(裁判)하기 위하여 나온 자가 어떤 일을 주관하는 자인가를 막론하고 우선 접대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차왜(差倭)들에 대해서는 본부 및 해조에 분부하여 접대하는 일을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공작미의 한도를 물려주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게 해서는 불가합니다. 만일 물려주면 응당 행하여야 할 일로 여기고 매번 한도를 물려주기를 청할 것입니다. 엄하게 꾸짖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즉시 돌아가게 하고, 예단 등의 물건은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이런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공작미의 한도를 물려주는 일은 이미 특별히 허락한 전례가 많으니, 이번에도 허락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4일 무자
고령 현감 임제원(林濟遠)을 불러서 보았는데, 이는 제원이 승지로서 패초(牌招)를 어겨 특별히 지방에 보임되어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바로잡아야 할 일은 상소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근일에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한 가지 있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한만유(韓晩裕)가 지금 함경도에 귀양가 있는데, 듣자니 그의 노모가 돌아간 중신(重臣)과 60년을 해로하여 함께 살아오다가 이제 나이가 82살이 되었는데 아침 저녁 끼니를 잇기 어려워 날마다 아들을 찾아 헤매므로 사람들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급하고 가엾은 정리에 대해서는 응당 참작하여 주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또한 그가 범한 죄를 생각하건대, 비단 만유 한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그날 여러 사람들이 다 금령에 저촉됨을 면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한갓 징벌하여 치는 것의 중함만을 생각하고 도리어 금령을 범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것입니다. 한(漢)나라 법이 관대하여 곡진하게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해 주었는데, 이러한 것이 널리 은전을 베푸는 법에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용서하여 돌아오도록 명하시어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를 넓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만유에게 노모가 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으나 나이가 그렇게 많고 정상이 저와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쩌면 이리도 늦게 깨닫게 되었는가. 경의 차자가 옳다. 즉시 용서해주도록 하고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삼현령(三懸鈴)으로 명을 내려 즉시 돌아와서 어미를 만나게 하라.
비록 보통 정도의 귀양을 보낼 죄인이라도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모두 속전으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죄가 같은 자를 다른 자의 부모의 나이 때문에 그들도 함께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를 시행하기 위하여 함께 뒤섞어 용서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차자 가운데에 ‘광탕(曠蕩)’ 두 글자는 말 밖에 가리키는 바가 있는 듯한데, 그가 범한 죄를 따져본다면 실로 용서하여 줄 수 없다. 한나라 법이 관대하기는 하였으나 불경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다는 것을 경은 모름지기 양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식년시의 문무과 초시를 행하였다.
9월 5일 기축
차대를 하고 나서 인하여 일차 유생(日次儒生)들에게는 전강시(殿講試)를, 초계 문신들에게는 친시(親試)를, 상재 유생(上齋儒生)들에게는 제술 시험을 보였다.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명호(洪明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좌윤 조진관(趙鎭寬)이 상소하기를,
"선신(先臣)이 화난을 당한 이래로 전하의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니, 무릇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베풀어주신 은혜만 해도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6월 16일의 처분으로 말하면 바로 선신이 다시 살아난 날입니다. 신이 외로운 몸으로 죽지 않고 이날을 보게 되니, 우리 모자와 집안 사람들이 덮개를 벗고 하늘을 보게 되어 꿈인 듯, 바보가 된 듯이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였습니다.
아, 도목 정사(都目政事)의 주의(注擬)하는 한 가지 일은 선신이 드러내기 어려워하던 문제였는데 하늘의 해가 위에 있어 밑바닥까지 환하게 밝혀준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저 평안도에서 있었던 한 가지 일은 다만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누에고치실은 바로 스스로 성의를 다한 것인데도 원망이 쌓이고, 많은 재물은 제대로 조처한 것이었는데도 무함이 심하여 마침내 전곡(錢穀)에 대한 안건이 북두성과 같이 되었습니다.
아, 장당(蔣堂)이 인심을 잃은 것은 다스리기를 너무 엄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임안(臨安)의 관전 70만 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세상에 정이(程頤)를 변명하여 주는 이가 없었으니 또한 그 누가 기꺼이 길양(吉陽)을 위해서 원통함을 호소하려 하겠습니까.
신이 이렇게 원통한 마음을 품어온 것이 19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혈서를 상에게 올렸는데, 측은하게 여기시는 비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나라가 천 년만에 한 번 있는 큰 경사를 만나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가 베풀어짐에, 특별히 신칙하여 먼저 암행 어사를 보내 핵실하게 하고 비변사에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수백 마디의 은혜로운 말씀을 내림에 밝음이 해와 별 같아 비단 그 무함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드러내었으니, 비록 신의 몸이 아주 가루가 된다 한들 어찌 천지와 같은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천만부당한 처지에 비변사에 새로 임명되고 급기야 선신이 다하지 못한 뜻을 거행하라는 은혜로운 하교를 받음에 신은 엎드려 채 반도 읽지 못하고서 통곡과 눈물을 함께 쏟았습니다. 진실로 선신이 전하에게 알아줌을 받은 것이 이와 같이 깊었기에 단서(丹書)를 닦자마자 뒤 곧이어 표창을 더하시어 신을 못났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그 뒤를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아, 신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는 것은 바로 선신이 만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선신의 뜻과 일은 또한 신의 오늘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선신은 내외직을 두루 거쳐 경력이 진실로 많으나 신에게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원래 사리에 어둡고 엉성한 데다가 곤궁한데 처함이 더욱 심하거늘 갑자기 묘당의 계책에 참여하게 하시니, 어찌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고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날 차대에 좌의정 김이소(金履素)는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으며, 비변사의 당상관들 중에도 병들었다고 말한 자가 7명이나 되니, 엄교를 내리고 인하여 대신들과 비변사의 당상관들에게 명하여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이에 좌의정 김이소와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명을 기다리니, 상은 명을 기다리지 말라 하고 다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도에서 올라온 장계를 가지고 보건대, 백성들의 일이 참으로 절박하고 민망하다고 이를 만하다. 알지 못하겠으나 경들이 듣고 본 바는 어떠한가?"
하니, 김이소가 아뢰기를,
"일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온 뒤로 호남 사람들에게 듣고 또 관서의 소식도 들었는데, 모두들 전에 없던 큰 재해라고 하였습니다. 흉년이 든 해의 환자에 관한 정사는 더욱 중대하니, 수확한 뒤에 거두어들이는 환자 곡식을 정하고 알찬 곡식으로 거두어들인다면 거의 구황하는 데에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해 추수는 절기가 늦으니, 아직 일제히 일을 끝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때에 임박해서 급하게 서두르기보다는 미리 강구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니, 이런 뜻을 경들이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이소가 아뢰기를,
"금령을 철회하기를 청한 것에 대해 이미 삼사에 회부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에 대한 금령이 즉시 철회된다면 어젯밤에 내린 처분을 철회하는 문제는 저절로 그 가운데에 들어 있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금령이라고 이름했으면 감히 알고서는 일부러 범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하된 직분에 당연한 것이다. 하물며 이 금령은 구두로 하교하여 비록 조칙으로 반포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나 그때에 하교한 것을 어찌 여느 심상한 금령에 견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어 말을 꺼내는 것은 실로 신하된 직분에 감히 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자, 이병모가 아뢰기를,
"일전의 조보에 갑자기 김종수(金鍾秀)의 일을 우선 정계한다는 내용의 글이 나온 것은 크게 대간이 잘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릇 대간이 말을 아뢰는 규례는, 말을 고치기만 했으면 여전히 이전 계사이다. 그런데 전편이 순전히 다 새로운 말이고 ‘청(請)’ 자 아래의 내용을 모두 고쳤으니, 이것은 새로 아뢴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른바 봉해둔 계사를 도로 들여다 비답을 내려줄 것을 아뢴 것은, 본래 아뢴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그것이 네 번째 건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편이 새 말이고 끝머리의 말도 고쳤으니, 이것은 곧 처음으로 발하여 아뢴 것이다. 그러니 응당 삼사에서 아뢴 내용의 끝머리에 붙여야 할 것이다. 끝머리의 내용은 이미 새로 아뢴 것인데 김종수의 일은 내용을 고쳐서 첨부하여 넣어 다만 놓아주는 것을 철회할 것을 청한 것에 불과하고 발사(跋辭)도 또한 전날 청했던 형벌의 등급을 올리기를 청한 데 불과하니, 이것은 이전에 아뢴 것이다. 그날 대신(臺臣)이 애당초 구계(舊啓)의 유무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다가 봉해두었던 계사의 일을 우선 들고 나와서는 연석에서 물러난 뒤에 느닷없이 우선 정계한다는 글을 조보에 내어 호소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하니,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신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김종수를 용서해 주어 돌아오게 하라는 명을 취소하는 일을 가지고 발계하여 상주하였으며, 그날 삼사에서도 합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이미 비답을 받지 못하였으니, 김종수의 일을 마땅히 연계하여야 함은 분명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우선 정계한다는 글이 조보에 나오니, 신은 놀라움과 의혹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종수가 전후로 범한 죄는 한두 명의 대신이 잘못 처리한 것 때문에 곧바로 정계하는 데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네 번째 건과 다섯 번째 건의 일은 마땅히 이전대로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네 번째 건과 다섯 번째 건에 관한 일은 마땅히 차례를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김종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바로 대간의 체모를 위한 것이다. 차례를 바꾸는 것이 죄를 처벌하는 경중에는 무관하나 새로이 아뢰는 것을 이전에 아뢴 것 위에 놓는다는 것은 관례를 손상시킴이 있다. 그런데 이익운은 이에 있어서 차례를 바꾸는 것이 처벌을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니, 어찌 심히 가소롭지 아니한가."
하니, 익운이 아뢰기를,
"새로이 아뢴 것은 본래 네 번째 건에 관한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또한 말을 고친 데 불과하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새로이 아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새로 아뢴 것은 여전히 네 번째 건 그대로이니, 김종수의 일은 마땅히 다섯 번째 건이 되어야 합니다."
하고, 심흥영(沈興永)이 아뢰기를,
"한 옥당 관원과 두 승지가 지난번에 차자를 올려 아뢴 것은 바로 자기 직분 안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이른바 직분 안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금령을 한 쪽에 제쳐두고서 봉입한 것을 두고 이르는 것이냐? 그때의 금령이 과연 어떠했느냐. 신하된 자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직분 안의 일이거늘 너의 말은 크게 상반된다. 너를 마땅히 추국청을 차려 놓고 엄하게 신문하리라."
하니, 흥영이 물러갔다. 김이소와 이병모가 아뢰기를,
"흥영이 만약에 그것이 금령임을 알았다면 어찌 그와 같이 아뢰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단 신문한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니, 추고방 승지(推考房承旨)는 판의금부사와 함께 나가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익운이 아뢰기를,
"옥당도 또한 직언을 하는 직책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운은 이 일 저 일 막론하고 모두 간섭하고자 하니,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한 일이다. 나국하여 실정을 밝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그때에는 금령에 대해서 감히 서로 전할 수 없었습니다. 신들도 이번에 승지와 옥당이 죄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흥영도 또한 다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행동한 것이니,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은 듯하다. 그가 만약에 알지 못하고서 말한 것이라면 혹 용서하여 줄 만하니, 다시 흥영을 부르라."
하였다. 상이 묻기를,
"이것은 인(人)·귀(鬼)의 관두(關頭)이니 알고 있었건 모르고 있었건 간에 너는 모름지기 정직하게 아뢰어라."
하니, 흥영이 아뢰기를,
"신은 실로 전날에 하교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까 그렇게 아뢴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추국청을 차리도록 한 전교는 철회한다."
하였다. 김이소가 아뢰기를,
"이익운에 대한 처분은 진실로 중도에 지나칩니다. 신이 익운을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김종수가 저지른 죄범이 어찌 대번에 정계하자고 의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일은 옳지 않다. 좌상은 김종수의 일에 대해서 어찌하여 미워함이 이와 같은가. 익운이 앞장서서 남의 말을 표절한 것은 원래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상의 말도 또한 어찌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종수에게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내가 지금까지 의뢰하고 있는 것은 그래도 김종수의 의리에서 힘을 얻은 것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좌상은 나에게 무엇을 보답한 것이 있으며, 나는 좌상에게 또한 무슨 도움을 받은 것이 있는가. 김종수의 요즘의 처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고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들 하나 나는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경은 그에게 무슨 혐의가 있으며 무슨 틈이 있는가. 결단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좌상의 일은 유감스럽다."
하자, 이소가 물러갔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어째서 나갔는가? 아까 하교한 것은 김종수의 일을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말하는 병통을 책망한 것인데 등연해서 처음 아뢴 것은 오로지 말하는 데서 나오는 병통으로 조심하고 자제하는 모양은 보지 못하겠고 그저 장황한 말만을 들었다. 내가 원래 그를 그르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익운을 구원하려 하는 데서 더욱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박종래(朴宗來)를 파직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삼사의 합계는 사체가 엄중한데 지난번 빈대할 때에는 김종수의 일에 대해서 애초에 거론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연석에서 물러간 뒤에 우선 정계한다는 글을 내어 조보에 싣기까지 하였습니다. 정계든 연계든 모두 근거한 바가 없어 거조가 전도되고 착란됨을 면하지 못했으니, 해당 대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더없이 엄격한 것은 대간의 체모인데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온 한 조각의 낡은 종이를 가지고 백대의 엄한 위엄을 대신하려 하였으니, 관계되는 바가 또한 중대하지 않은가.
근자에 만부득이한 사정에서 금령을 세움으로 인해 대간의 체모가 날로 낮아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만약 목이 멘다고 해서 음식 먹는 것을 폐하고 쓰러지는 것을 붙들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대간을 둔 본뜻이겠는가. 만약 남해에 귀양갔다가 용서받아 돌아온 사람에 대해 예전에 아뢴 것을 정지시키지 않는다면 그 형세가 장차 앞으로 계속하여 아뢸 것이요, 계속하여 아뢰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날 새로 발하는 합계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니, 이것은 곧 바꿀 수 없는 전례이다. 그런데 생소한 소치로 미처 주선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연석에서 물러간 뒤에 조보에 글을 내어 전례에도 없는 우선 정계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말이 되는 것인가. 경의 말이 사체에 맞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제관이 입는 관복을 모두 관청의 것을 쓰는 것은 올봄에 특지를 받들어 법을 정하였습니다. 납향 제사를 친히 행할 때를 당해서는 마땅히 들여와야 할 것이 2백 33벌입니다. 그런데 정례를 취하여 살펴보면, 제복의 원 수량이 2백 15벌인데, 1백 44벌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어 차차 수선해서 쓰게 하고, 71벌은 제용감에 내주어 쓸 때에 다다라 진상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경비를 줄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바로잡아 고칠 때를 당해서 의당 정례에 따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비변사에서 그 관청의 풍족함과 부족함을 정하여 부족한 관청에 대해서는 호조에서 한 번 만들어주어 수선해서 쓰게 하고, 조금 넉넉한 아문에 대해서는 각기 그 관청에서 이전처럼 장만하여 갖추어서 쓰게 하되 빛깔과 품질은 한결같이 제용감과 공조의 것을 따라서 차이가 없게 할 일에 대하여 정식을 거듭 밝혀주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헌 이갑(李𡊠)을 체차하고 홍명호(洪明浩)로 대신하였다. 수찬 심흥영이 아뢰기를,
"삼사가 합계한 것 가운데에 김종수의 일은 갖추어 써서 상주하지 않고 다만 단초(單抄)만을 들였으니, 대사헌 이갑을 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익운을 흑산도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자에 방자한 습관이 너무 심하다. 일전에 대간들의 거조도 두려움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인데, 오늘 연석에서 그가 어찌 감히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을 가지고 앞장서서 남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단 말인가. 말하는 모양이 지극히 가증스러우니, 결코 진신(搢紳)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 없다. 나국하는 것만으로는 가벼우니 흑산도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고 사면령이 있어도 용서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에게 하유하기를,
"짐이 말을 조심하지 않고 입을 열어 한 번 말한 것이 경의 마음에 크게 저촉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러나 연석에서 처음 아뢰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다가 듣기에 거슬렸다. 승지를 구원한 그 뜻은 너무도 어두웠다. 그러니 어찌 끝까지 입을 다물고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큰 의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경이 먼저 물러간 것은 장차 명을 기다리려고 한 것이나 너무 지나친 듯하다.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이 아뢰기를,
"좌의정 김이소는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리던 중에 내리신 전교를 받들어 보고는 회유(誨諭)하신 것이 절엄함에 자신이 저지른 죄가 지극히 중하다는 것을 더욱 깨닫고 그대로 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삼사가 김종수의 일을 정계하였다.
9월 6일 경인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이소에게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유하였으나 이소는 그 길로 방향을 바꾸어 고을의 옥으로 갔다. 하교하기를,
"명을 기다리지 말라. 지금 경기 고을 백성들의 일이, 대신이 그곳에 체류하게 되면 어찌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겠는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를 더욱 깨닫겠고 다시 눈치를 살펴야 하는 괴로움까지 더하게 되었으니, 곧 도성으로 돌아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법령을 한 번 정한 뒤에는 마땅히 금석과 같이 미더워야 하니, 하물며 과규(科規)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철전(鐵箭)과 목전(木箭)을 쏠 때에 다만 물러난 보수(步數)만을 계산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방패와 물러난 보수를 아울러 계산하도록 할 것을 장전(帳殿)에서 시사(試射)할 때에 이미 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모든 과장에서 이것을 따르라는 하교를 받은 것이 정녕하고, 올봄의 정시(庭試)에서도 이대로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 방목을 보니, 다만 물러난 보수만을 계산하였으니 심히 해괴하다. 상시관 및 훈련원의 공사(公事) 당상관을 파직하고, 참시관들은 해당 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처리하게 하라. 이후로는 병조로 하여금 과거 및 시사 절목(試射節目)에 등재하게 하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하라."
9월 7일 신묘
통제사 이득제(李得濟)를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받은 것이다.
고(故) 봉조하 정존겸(鄭存謙)에게는 문안(文安)이라는 시호를, 고 이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에게는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김홍익(金弘翼)에게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증 시산군(詩山君) 이정숙(李正叔)에게는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고 강녕도정(江寧都正) 이기(李祺)에게는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정운유(鄭運維)에게는 익정(翼靖)이라는 시호를, 고 돈령부 판사 정창성(鄭昌聖)에게는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기정(朴基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유효원(柳孝源)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조신에 대한 시호는 비록 특별히 하사하는 명이 있더라도 자급이 만약 정2품이 못되는 경우에는 계품하여 시행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 강녕 도정 이기는 품계가 바로 정3품이니, 비록 시호를 추증하라는 명이 있었더라도 응당 한 번 계품을 거쳤어야 했는데 처음에 이미 전례대로 시장(諡狀)을 지었고, 이제 또 시호를 의논하는데 의망되어 입계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시장을 지어 보낸 사람과 시좌(諡坐)에 진참한 옥당과 도목 정사에 의망하여 입계한 전당(銓堂)에게 다같이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모두 아울러 추고하소서. 원래의 망단자에서는 이미 낙점을 받았으므로 분부를 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시법(諡法)이 지극히 엄하니,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시장을 짓지 않았더라면 어찌 추가로 추증하지 않았겠는가. 시장을 지은 자를 파직하고 옥당 및 전당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도록 하라. 강녕 도정 이기의 절행을 지금까지 증직하지 않은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오늘 정사에서 증직하고 시장 및 정망(政望)에는 군의 칭호로 부표하라."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과장의 사체는 얼마나 엄격하고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번에 식년 문과 초시의 이소(二所)에서 우등한 시권에 등차를 쓰지 않았으니, 이것은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신이 어리석게도 그대로 봉입하였으니, 황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해당 여러 시관(試官)들을 중하게 다스리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제 그 사실을 들어보니, 비록 잘못된 전례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하나 임금에게 보일 것이라고 칭하고서 일등의 시권(試券)을 지동관(枝同官)이 2장을 써놓았다고 하니, 명색이 과장인데 어떻게 주초(朱草)한 것이 2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등차를 쓰는 것을 잊어버려서 현장에서 드러나게 되었으니 두 죄가 모두 드러났다고 이를 만하다. 해당 시관을 잡아 가두어 신문하여 처벌하되 율명(律名)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물어 초기(草記)하게 하라. 잘못된 전례는 잘못된 전례이고 과규는 과규인데 지동관과 등록관이 한결같이 시관의 분부를 따라 거행한 것도 또한 매우 해괴한 일이다. 일체 나국하여 처리하라. 또한 예조로 하여금 이 조목을 일일이 들어서 과거 절목에 등재하여 잘못을 답습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동당 시관(東堂試官) 김재익(金載翼)과 윤제동(尹悌東), 신서(申漵) 등을 처벌하는 율명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물어 보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말하기를 ‘율문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별로 합당한 법률이 없고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제과조(諸科條)에 「시험관이 시험성적을 붉은 글씨로 표시하면서 부정을 한 경우에는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낸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이 시관이 저지른 죄가 비록 부정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시관이 붉은 글씨로 표시된 것을 정서하는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답습하여 써낸 것은 또한 심히 해괴한 일입니다. 마땅히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등제(等第)를 쓰지 않은 죄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여 그 사리가 중한 경우의 법률[不應爲事理重之律]을 시행하는 것이 법의 뜻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중추부 영사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이번에 시관이 붉은 글씨로 표시된 것을 정서하는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답습한 죄를 만약 《대전통편》에 실려 있는 주초용간율(朱草用奸律)을 해당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시권을 살펴볼 때에 시관이 붉은 글씨로 표시하면서 혹은 지우기도 하고 혹은 점을 찍기도 하여 난잡해서 분명하지 못하니, 이것을 임금이 보시도록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등제를 다 쓴 뒤에 일등에 들어간 것은 따로 정한 종이를 가려서 정자로 쓰게 하되 지운 곳과 점을 찍은 곳을 한결같이 원래 초안대로 옮긴 연후에야 진상하는 가자(架子)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것이 비록 잘못된 전례라고는 하나 일이 공경하고 삼가는 데 관계가 되니,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니라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신도 또한 일찍이 시험에 관한 일을 맡았을 때에 이대로 시행하였으니, 제 자신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면서 이제 어찌 감히 법률을 상고하여 다른 사람의 죄를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등차를 쓰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기는 어려우니, 불응위사리중지율(不應爲事理重之律)을 시행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은 말하기를 ‘율문을 상고하여 보았으나 다른 것은 합당한 것이 없고 굳이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비추어 본다면 등차를 쓰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신도 또한 영의정의 뜻과 같습니다. 붉은 글씨로 된 것을 정서하는 잘못된 규례를 그대로 답습한 데 이르러서는 본래 공경하고 삼가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굳이 논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이병모는 말하기를 ‘《대전통편》의 제과조에는 다만 주초용간율만 있고 다른 것은 비교할 만한 율문이 없습니다. 붉은 글씨로 된 것을 정서하는 잘못된 규례를 답습한 죄에 대해서는 불응위사리중지율(不應爲事理重之律)을 시행하는 것이 법의 뜻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등차를 쓰지 않은 죄는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같으나 붉은 글씨로 표시된 것을 등서한 일은 제과(諸科)가 그렇지 않은데 유독 동당(東堂)에서만 잘못된 전례가 이와 같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일은 영부사의 뜻이 진실로 옳다. 그런데 박 판부사가 헌의한 가운데에 잘못을 답습한 죄를 공경하고 삼가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일컬은 것은 이 무슨 말인가. 이와 같다면 이보다 더한 부정을 한 자에 대해서는 또한 무슨 구실의 말을 쓰겠는가. 근자에 이 대신에 대하여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여러 가지였으나 참고 있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제 대답한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든다. 시관들에게 법을 적용하는 일은 다수의 의논을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의정 홍낙성과 우의정 이병모는 다같이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과 불응위사리중률(不應爲事理重律)을 적용할 것을 헌의하였습니다. 김재익·윤제동·신서 등은 두 가지 죄가 모두 동시에 드러난 것에 관계되어 중한 쪽으로 논죄해야 하니, 제서유위율을 적용하여 각기 장 일백에 처하여 속죄시키고 고신은 모두 추탈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8일 임진
하교하였다.
"절일제(節日製)는 으레 당일에 명을 내려 그날로 시취(試取)하는 것은, 원점 유생(圓點儒生)들의 경우에는 천 명을 당하고 백 명을 당하는 인재가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명을 듣고는 곧 달려나가 제목이 내리자마자 곧 시험지를 바치니, 대비과(大比科)의 과장과는 차이가 있다.
근자에 과작을 보면 변려문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으므로 비록 시한을 늦추어 준다 하더라도 번잡하기가 이를데 없어 도리어 지난해보다 못하였다. 내일 9월 9일에 보이는 국제(菊製)에 마땅히 표문 제목을 내야 할 터인데 이번에는 시간을 8각(刻)으로 한정하도록 할 것이니, 미리 원점 유생들에게 잘 알려주도록 하라."
의금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지평 남이익(南履翼)의 상소로 인하여 창원 부사 이여절(李汝節)이 인명을 함부로 죽인 곡절을 자세히 조사하여 장계로 아뢰라는 뜻으로 본도에 공문을 보내니, 경상 감사 조진택(趙鎭宅)이 조사하여 아뢰기를 ‘해부의 우두머리 아전과 형리들을 힐문하여 사실을 조사하였는데, 각각의 사람들이 공술한 바에 의하면 김강(金鋼)·김상룡(金尙龍)·정중현(鄭重鉉) 등이 가짜 어사를 사칭한 실정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니, 엄하게 조사하고 끝까지 핵실하는 사이에 비록 형장을 맞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 죄인들이 전후로 죽은 것이 모두 전염병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은 증인의 공술이 한결같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정중현은 애당초 형장을 한 대도 치지 않고 단지 가두어 놓기만 하였고, 병으로 인해 죽은 사실이 여러 사람들의 공초에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감사가 조사하여 아뢴 것이 이와 같이 간곡하니, 함부로 죽인 것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해당 부사를 논죄하는 한 가지 건은 그대로 내버려두소서.
어사라고 칭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꾀고 위협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원래의 범인 세 명이 비록 이미 다 죽었다고 하나 나경기(羅褧奇)와 김삼용(金三用) 등이 몰래 비밀리에 음모를 꾸민 정황은 명백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전의 내력으로 보아 추핵할 만한데 이번에 자세히 캐묻기를 한 차례만 하고 그치는데 불과하였으니, 안핵하는 방도가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해당 도의 감사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각인들을 신문하는 데 대해서는 다시 더 엄히 핵실하여 진상을 밝혀낸 뒤에 상주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원래의 범인 세 명이 모두 죽었다고 하니, 따라서 뜻을 같이 한 여러 놈들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야 굳이 상주할 것이 있겠는가. 도의 감사가 등급을 나누어서 엄하게 처벌하여 쇠락한 풍속을 가다듬고, 국법을 엄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9일 계사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차대하고, 인하여 초계 문신들에게는 친시를, 선전관들에게는 시사(試射)를 보였다.
전 금위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유임시켰다.
구일제(九日製)를 성균관에서 치뤘다.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선릉(宣陵)의 능관(陵官)이 잡초를 뽑다가 능 뒤의 수풀 속에서 오래된 술단지와 술잔을 각각 하나씩 얻었다 하므로 신이 본 능을 살펴본 뒤에 그것을 취하여 보니, 모양과 크기는 근래에 만든 것과 다름이 없었으나 만들 때에 제련을 잘하여 구리의 빛깔이 새것과 같으니, 틀림없이 난리 때 잃어버린 것이 이제야 나타난 것으로 그것이 본 능의 제기라는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능관에게 명하여 따로 궤를 만들어서 제기를 받드는 곳에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을 체차하고 이재학(李在學)을 대신 임명하였다.
신사운(申思運)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9월 10일 갑오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날 이익운이 연석에서 취한 행동거지를 신이 비록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전교를 보고 그 광경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근래에 신진 젊은이들이 법의 기강이 삼엄함을 알지 못하고서 더러 조정의 체모를 설만히 여기거나 어기는 일을 저지르니, 조정에서는 비록 용서해 주더라도 신하로써 어찌 도리어 그를 위하여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그 정리가 한만유(韓晩裕)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다같이 한결같이 대해주는 정사로써 마땅히 참작하여 주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범한 죄가 사형죄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풍토 사나운 바다 속의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혹 중도에 지나친 듯합니다. 더구나 만유는 이미 천은을 입었으니, 익운도 또한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서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성명께서는 헤아려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첨부하여 진술한 일은 경도 또한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로 ‘범한 과오가 사형죄에 이르지 않았는데 한 사람은 용서를 받고 한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으니,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서 마땅히 한결같게 보아 처리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경의 말을 어기기가 어렵다. 특별히 경의 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유공(柳戇)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1일 을미
윤대(輪對)를 하였다.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장계를 올리기를,
"유구국(琉球國)에서 표류하여 온 사람들에게 실정을 물어보니, 반드시 육로를 따라 복주(福州)로 가서 거기에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일이 지극히 해괴하여 마땅히 반복해서 힐문해야 하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들이 모두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표류해 온 사람들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그 실정을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물길로 돌아갈 것을 언급하기만 하면 표류해 온 사람들이 모두 곧 손을 휘두르고 머리를 저었으며, 국법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타일러도 사력을 다해 거부하고 있습니다. 표류해 온 사람들이 처음에 배에 뛰운 것은 애당초 장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조각의 조그만 배에 실은 것도 의복과 문서에 불과하며 죽은 자가 과반수이고 네 사람만 살아 남았습니다.
이제 물에 익숙하지 못한 몇 명의 사람들을 저 자그마한 배에 태워 만리창파에 내놓는다는 것은 또한 심히 불쌍하고 가엾은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을 공문으로 통보하여 중국에 들여 보내는 것은 반드시 전례가 없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배를 고쳐주고 양식으로 쌀을 많이 실어준 뒤 억지로 배에 태워서 죽든 살든 간에 자기들 마음대로 가게 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의 내용을 보니 품처할 것도 없다. 육로로 돌아가는 인편을 따라 가게 하는 것은 전례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11명이 표류하다가 생존한 자가 다만 한두 사람인데 또 배를 주어 바다에 내칠 수 있겠는가. 일의 상황을 갖추어 쓰고 공문을 가지고 갈 관원을 따로 정하여 북경에 들여보내어 복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것이 이웃 나라를 사귀고 인명을 중히 여기는 의리에 합당할 듯하다. 더구나 지금 사행(使行)이 멀지 않았으니, 만약 빨리 통지하여 제때에 압송해 와 사신이 가는 편에 따라가게 한다면 저곳에 이르러 넉넉히 주선할 수 있을 것이다. 승문원에 명하여 도제거(都提擧)와 원임 대신들에게 물어보게 하라."
하였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도제거와 원임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도제거 홍낙성(洪樂性)은 말하기를 ‘유구국에서 표류하여 온 사람들의 소원대로 육로로 돌려보내는 것은 전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과 먼 곳의 사람들도 구휼해 주는 전하의 훌륭한 생각에는 흠모하고 우러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절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편에 따라가게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고,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판충추부사 박종악(朴宗岳)·김희(金憙), 도제거 이병모(李秉模)는 모두 낙성의 의논과 같았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본원에서 빨리 통지하여 두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가기 전에 그 편에 따라가게 하도록 하라. 10월에는 박초풍(舶趠風)이 부니, 가는 것이 날아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기일을 넘기지 말도록 하되 만약 기일을 넘기게 되면 공문을 가지고 갈 관원을 정하여 사행이 도착한 곳에 압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치계하기를,
"유구국에서 표류해 온 사람 세 명이 영암(靈巖)의 이진(梨津)에 이르러 상륙하였습니다. 제주 통사 이익청(李益靑)이 일찍이 제주에 표류해 왔던 유구 사람에게서 그 나라 말을 배웠으므로 익청을 시켜 실정을 물어보니, 표류하여 온 사람이 익청과 함께 동행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실정을 물은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구국 안에 있는 팔중산도(八重山島) 사람들인데 공문을 가지고 여나국도(與那國島)에 가기 위하여 7월 11일에 출발하였다가 동풍을 만나 표류해서 이 나라에 당도하였다.’ 하였습니다. ‘여나국(與那國)이란 어느 곳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섬의 이름이지 국호가 아니다. 도주(島主)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각 섬에서 공문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여나국에는 관장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번을 들고 있는 세 사람의 선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천촌(新川村)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배를 탄 사람은 몇 사람이었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11명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의 성명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 성은 미정(米精)이고 이름은 겸개단인야(兼个叚仁也)이다. 7명은 한 달 남짓 표류하던 도중에 굶주리고 지쳐서 쓰러져 죽고 4명만이 살아서 이곳에 도착했는데, 한 사람은 또 병들어 죽고 지금은 3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세 사람의 성명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배의 우두머리는 이름이 미정겸개단인야(米精兼个叚仁也)인데 나이는 28세요, 겸(兼)은 나이가 47세이요, 진세(眞勢)는 나이가 26세인데, 이들은 모두 살아 남았다. 그리고 삼야지(三也之)는 나이가 41세인데 병들어 죽었고, 행야(行也)는 나이가 25세요, 근당(謹當)은 나이가 54세요, 고당월(古當月)은 나이가 31세요, 여행(如行)은 나이가 38세요, 고당야(古當也)는 나이가 46세요, 저월(渚月)은 나이가 29세요, 수(壽)는 나이가 45세인데, 모두 다 굶주리고 지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근당(謹當)·고당월(古當月)·여행(如行)의 나이가 표류하여 왔을 때 문답한 것과 어째서 서로 틀리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 쓴 것이 진짜이다.’ 하였습니다.
‘너 한 사람은 성이 있는데 나머지 10명은 어째서 성이 없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다른 10명은 밑에 있는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천촌(新川村)은 너의 나라 도읍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중산왕(中山王)의 도읍은 물길로 3백 80리이고 여나국도(與那國島)와의 거리는 물길로 48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타고 온 배는 공선(公船)인가, 사선(私船)인가?’ 하고 물으니, 공선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체는 어떻게 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표류하다가 도착한 섬 가운데에 묻어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시일에 따라 문서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더러 농사를 짓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하고 목수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없고 다만 상투를 틀은 다음에 정수리 가운데에 동곳을 꽂는다. 윗사람은 동곳을 은으로 하고 아랫사람은 동곳을 주석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팔중산도(八重山島)에는 관장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번을 들고 있는 세 사람은 본국에서 정해서 온 사람들로서 3년마다 교체한다. 우두머리 세 사람은 본도 사람들로 죽은 뒤에 대신 세우는데, 모두 선비들이다.’ 하였습니다. ‘농사짓고 수확하는 것은 어느 계절에 시작하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벼·보리·조·콩 씨를 10월에 파종하고 다음해에 가서야 수확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수(歲首)는 어느 달을 쓰는가?’ 하고 물으니, 인월(寅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호송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곳 사람들은 말이 같지 않다. 우리를 데리고 온 섬 사람이 우리 말에도 익숙하니, 그 사람과 함께 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배가 고프면 마땅히 먹을 것을 줄 것이요, 추우면 마땅히 옷을 줄 것이다.’ 하니, 대단히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유구국에서 표류하여 온 사람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섬 안에 마침 말을 아는 통사가 있어서 실정을 물을 수 있었으니, 이 뒤로 차차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고 따로 요과(料窠)를 마련하여 각별히 권장하라는 내용으로 목사에게 분부하라. 해당 통사 이익청(李益靑)은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해조로 하여금 따로 상을 주게 하라. 옛날에는 유구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왕래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그곳의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근자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른바 제주에 들여 보낸 역학(譯學)이라고 하는 자들은 아무 데도 쓸모없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사역원으로 하여금 특별히 젊고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을 정하여 그들을 데리고 의주에 이르게 하라. 혹 저들 속에 있게 하면 그 나라 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미진한 것이 있으면 유구에서 조공을 바치는 해에 다시 들여보내어 그 말의 음운을 번역하여 알게 할 일을 도제거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고, 이어 또 하교하기를,
"유구국에서 사람들이 표류하여 온 것은 곧 공물을 바쳐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처음에는 홍제원(弘濟院)에서 접대하고자 하였는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그 돌보아주는 바에 마땅히 특별한 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연신(筵臣)의 말을 들으니 10월 10일에 고달도(古達島)에 와 닿게 될 것 같다고 하니, 며칠 후에는 마땅히 올라올 것이다. 날씨가 춥기가 이와 같으니, 경기 감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의복과 털로 된 방한구 등의 물건들을 만들어 두었다가 한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려 새 감영에 맞이해 두고 몸소 가서 위로하여 주도록 하라. 그리고 떠나보낼 때에도 정해진 것 이외의 노자를 후하게 주어 사행 편에 따라가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구국에서 표류하여 온 사람들이 서울에 이르려 하니, 하교하기를,
"제주(濟州)의 자제들이 올라올 때에도 승지가 나가서 선유(宣諭)를 거행하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이 오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유구국 사람들로 말하면 옛날에 우리 나라에서 벼슬을 한 사람도 있었다. 특별히 총관(摠管)의 벼슬을 주어 보검직(寶劍職)과 차비직(差備職)으로 근시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과 2백 년 전의 일이다.
이번에 오는 표류하여 온 사람들에게도 회유하는 뜻에서 특별히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의리에 가할 것이다. 승지 한 명은 그들이 관소에 머물게 되기를 기다려 경기 감영에 가서 감사와 함께 위로하여 주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몸을 가릴 물건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유경(李儒慶)과 경기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신이 삼가 전교대로 당일로 표류하여 온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새 감영에 나아가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의복을 준 뒤에 조정의 덕의로써 일일이 위로하고 교유하니, 그들은 모두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다른 나라에서 표류하여 온 사람들로서 해로로는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전혀 없는데 육로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여 주니, 이미 특별한 은덕을 받은 것이요, 오는 도중에 연로(沿路)의 고을에서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은 일도 또한 상례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상륙한 지 10여일 만에 별탈없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하늘같이 높고 땅같이 두터운 성상의 큰 은덕이 아님이 없거늘 더구나 이렇게 특별히 의복과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상을 가까이 모시는 귀한 분까지 임하여 주시니, 이것이야말로 더욱 상례를 벗어난 은덕입니다. 감격스러운 심정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고무하고 기뻐하여 백번 절하면서 칭송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접대하고 공급하는 것과 잡인을 금지시키는 등의 일은 따로 더 신칙하고 인하여 동지사 편에 딸려서 들여보내도록 하였습니다."
9월 12일 병신
예조 판서 서정수(徐鼎修)를 체차하고 민종현(閔鍾顯)으로 대신하고, 이갑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우현(李禹鉉)을 제주 목사로 삼았다.
병조가 아뢰어 고 봉조하 정존겸(鄭存謙)의 묘를 만들 군사를 내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근자에 들으니, 고 정승 조경(趙璥)의 집안에서 무덤을 옮겨 다시 장사지내는 일을 행한다고 하니, 당일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그밖에 거행하는 것은 고 정승 조현명(趙顯命)과 정홍순(鄭弘淳)의 집안에 연전에 특별히 하교했던 근례를 참고하도록 경기 감영에 잘 알려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정유
선원전(璿源殿)의 차례를 친히 지내면서 백관들에게 명하여 안팎의 뜰에서 반열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날은 영종(英宗)의 탄신일이었다. 인하여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배알하였으며 봉안각(奉安閣)에 나아가 개수한 곳을 살펴보고 어진(御眞)을 도로 받들어 모셨다.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宣禧宮)에도 들러 배알하였다.
9월 15일 기해
차대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수원 유수 조심태(趙心泰)가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본부의 기병과 보병에 대하여 계하한 절목 가운데에 봄가을에는 조련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기병은 2월과 10월에, 보병은 동짓달에서 정월달까지 석 달 동안 방어하러 들어갈 때를 타서 무예를 익히고 훈련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큰 조련을 폐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10월에 타작을 끝낸 뒤부터 2월에 밭갈이를 하기 전까지는 정한 식대로 군사를 훈련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2월과 10월로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되 시기에 앞서 장계를 올려 품의하는 것은 한결같이 모든 도에서 하고 있는 예대로 하게 하소서. 올해에는 모든 도에서 이미 모두 조련을 정지하였으니, 본 수원부의 습진(習陣)과 조련도 일체 정지한다는 내용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사간원이 【정언 이원팔(李元八)이다.】 아뢰기를,
"합계한 글 가운데에서 끝부분의 두 가지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관청의 벽장 속에 있으며 들여보내 청한 것도 오래도록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오늘날 신민들이 다같이 억울하고 원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 만일 각각 마음에 있는 말을 다하고 힘써 정성을 쌓는다면 거의 전하를 감동시켜 돌이킬 수 있을텐데 공무를 행하는 양사에서는 날마다 사직하는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이미 지극히 의아스럽고 이상합니다. 하물며 이번 빈대에서 명이 있었으니 더구나 마땅히 서둘러야 하거늘 또한 이렇게 나오지 않고 있으니, 사체로써 헤아릴 때 어찌 구경거리 보듯 한다는 혐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오지 않은 여러 대간들을 모두 견책하여 삭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가 공도회(公都會)를 시행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해 주기를 청하니, 예조에 명하여 일찍이 유수를 지낸 적이 있는 자에게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수를 지낸 적이 있는 자들에게 물으니,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은 ‘무장을 유수로 삼을 경우에는 서울에서 유신 가운데에서 문명(文名)이 있는 자를 파견하여 시취(試取)해야 한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은 ‘별도로 서울에서 파견하는 시관을 정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전에 유수를 지낸 정승 가운데 일찍이 규장각의 직책을 거친 자는 영부사이다. 규장각에 명하여 패초하도록 한 뒤 제목을 내어 내려보내도록 하고, 인하여 현임 유수에게 명하여 사흘로 나누어서 시취(試取)한 뒤에 시권을 규장각에 올려 보내게 하고 규장각에서는 미품(微稟)한 뒤에 전언하여 그로 하여금 들어와서 시험지를 조사하게 하라. 시험에 참가하는 대독관(對讀官)은 초계 문신 가운데에서 승시례(陞試例)에 의하여 시관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정하게 하라.
이 뒤로 유수가 이번과 같은 경우에 있을 때에는 현임 및 원임 규장각 관원과 문임(文任) 가운데에서 예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초기해서 한 사람을 차출하여 이번의 예대로 고시(考試)하는 일을 법식으로 정하라. 복시(覆試)에 이르러서는 본 수원부에서 과장을 베푸는 것과는 다르고 또한 경기에 본받을 만한 예가 있을 것이니, 그 사람들을 제수하여 우수한 사람들을 취하여 획수를 계산하여 방을 내도록 하라."
하였다.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6일 경자
영남에 보냈던 경시관을 불러 보았다. 상이 삼남(三南)에 흉년이 든 것을 걱정하여 매번 경시관들이 복명할 때마다 불러들여서 피해의 정도를 물어보곤 하였다.
9월 17일 신축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비변사 유사 당상 심이지(沈頤之)·윤행임(尹行恁), 제주 목사 이우현(李禹鉉)을 불러 만나보았다.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남쪽 바다 연안의 곡식을 실어다 구휼하게 하고 1년 동안 공물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전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올해 세 고을의 농사는 간간이 단비를 만나 크게 풍년이 들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8월 27일과 28일에 동풍이 강하게 불어서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이 날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은 것 외에도 바다의 짠물에 마치 김치를 담근 것같이 절여졌습니다. 80, 90세 되는 노인들도 모두 이르기를 ‘전전 계사년에 이런 재해가 있었는데 올해에 또 이런 재해가 있다.’고들 하였습니다.
대정(大靜)과 정의(旌義)의 피해가 더욱 심한데, 온 섬 안의 각면과 리(里)에 좀 낫고 못한 등급을 나눌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은 큰 흉년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식량은 여름철에 보리가 조금 풍년이 들어 우선 굶주림은 면할 수 있으나 10월 이후에는 형세가 장차 조정에 먹을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쌀로 쳐서 2만여 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곧바로 묘당에 명하여 제때에 조처하게 하여 10월 안으로 6, 7천 섬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 나머지 1만여 섬은 정월부터 계속 도착하게 한 연후에야 죽는 것을 서서 바라보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본 제주도 백성들의 일이 진실로 절박하고 불쌍하나 2만 섬의 곡식을 청한 것은 멀고 가까운 등록(謄錄)을 두루 살펴보아도 그 전례가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전전 계사년에 특례로 넉넉하게 구휼해준 덕의로써 보더라도 그때에 나누어준 것도 1만 섬에 불과합니다. 한결같이 전전 계사년에 나누어 준 수량에 따라 쌀과 보리를 합하여 1만 섬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도백에게 명하여 연해(沿海)의 넉넉한 고을의 창고 속에 남아 있는 것을 편의대로 배에 실어 보내되 5천 섬은 10월 안으로 들여보내고 그 나머지 수량은 초봄까지 계속 실어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 목사가 이제 막 내려가니, 그로 하여금 배를 통솔하여 들어가게 하고, 그 나머지 배로 운반하는 것은 차원(差員)을 정하여 근례(近例)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순풍을 기다려서 조심하여 건너가도록 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떠나 보내도록 하며, 도착한 뒤에는 일의 전말을 그로 하여금 도착하는 즉시 장계로 아뢰게 하소서."
하고, 영중추부사 채제공은 아뢰기를,
"본도의 연해 고을들의 피해도 제주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설사 창고에 곡물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곧 굶주린 백성들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 물건인데 여기 있는 것을 빼앗아 저기에 준다는 것은 이미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곡물은 반드시 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등에 져서 나르게 한 뒤에야 배에 실을 수 있고 운반할 수 있으니, 백성들이 또한 수고로울 것입니다. 섬 백성들이 먹을 것을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돌볼 겨를이 없으나 육지의 백성들이 지쳐 있는 것을 보면 또한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곡식을 청한 것이 2만 섬인데 등록을 상고하여 보아도 전에 없는 숫자입니다. 그러니 전전 계사년에 나누어 준 수량에 따라 겨울과 봄철로 나누어 적당하게 헤아려서 배로 실어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 목사로 하여금 환자곡식을 내주어 진휼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마치 자식처럼 정성껏 보살펴 주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체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남의 연안 고을들이 가뭄과 강풍의 재변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하다. 백성들의 황급함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고 오로지 이 생각이 마음에 걸려 자나깨나 맺혀 있는 듯하다. 어젯밤에 제주 목사가 곡식을 청한 장계를 보았는데 섬 안에서 피해를 입은 것을 어찌 불쌍하고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만 명의 생명을 구원하여 살려주는 것이 이 배로 곡식을 실어다 주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부사가 상주한 ‘이것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다.’고 한 것이 진실로 절실한 말이다. 육지의 백성들은 그래도 옮겨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이것이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섬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더욱 급하다. 우상이 아뢴 대로 곧 도백에게 분부하여 먼저 곡식을 나누어 새 목사에게 주어 운반선을 통솔하고 들어가게 하라.
각년의 전례에 비록 2만 섬을 나누어 준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장계의 내용을 보면 사실보다 지나치게 청한 것은 아닌 듯하니, 각박하게 절반을 줄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더구나 내년은 어떤 해인가. 구제하여 살려주는 정사가 더욱 경사를 장식하는 도에 부합될 것이다.
처음에는 내탕(內帑)의 돈과 호초(胡椒)를 내려 주고자 하였으나 새 목사의 말을 들어 보니, 섬 안에서는 그것으로 곡식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니 본도의 정해진 부세와 공화(公貨)에서 5천 포대의 수량을 덜어 두었다가 거기에 특별히 어느 정도 수량을 보탠 뒤 대궐에서 내려주는 구제 물품이라고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주는 구제 물품이 내년에 있을 경사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목사에게 명하여 봄이 온 뒤에 정해진 법식 외에 별도로 한 번 순행하여 후하게 음식을 먹이면서 조정의 본의가 허리 굽고 부황든 무리들로 하여금 북쪽으로 대궐을 향하여 배를 두드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선유하고, 이것이 자전과 자궁의 은택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
배에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대한 계획이 이미 결정되기는 하였으나 목이 메인 듯이 마음이 놓이지 않고 불안한 것은 연안 백성들이 곡식을 나르고 뱃사람들이 곡식을 운반하는 것이니, 진휼하는 데에 특례가 없다면 어찌 섬과 육지를 한결같게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도백에게 신칙하여 운반할 때에 기꺼이 달려 나아가고 앞을 다투어 나서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정성을 다하여 편의대로 거행하고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게 하라.
섬 백성들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흰 쌀밥이 어떻게 입에 달 수가 있겠는가. 상례로 바치는 공물이 비록 중하나 마땅히 융통성 있게 조절하여야 할 것이다. 본 섬에서 상에게 바치는 물건 및 경사(京司)에 바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관청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천신(薦新)하는 데 쓰는 것 외에는 일체 내년에 보리가 익을 때까지 탕감해 주도록 하라. 자전과 자궁에 바치는 것도 이미 하교를 받았으니, 일체 모두 정지시키고 면제하도록 하라.
바다를 건널 때에 잘 건너도록 비는 것도 백성을 위한 고심과 혈성에서 나온 것이니, 연전의 전례에 따라 향과 축문을 목사가 가는 편에 보내어 제사를 지낸 뒤에 배를 뛰우도록 하라. 바다는 천지 사이에서 가장 크며 예로부터 남해를 더욱 소중히 여겨왔다. 벼슬의 등급이 가장 귀한 사람이 만약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가지고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경히 빌면 비단 한 척의 배가 무사히 갈 뿐만 아니라, 돌아올 때도 갈 때와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해마다 풍요롭고 화락하게 함에 있어서도 축융(祝融)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제문을 마땅히 지어서 내려 보내고 목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정결하게 재계하고 나서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8일 임인
춘당대(春塘臺)에서 내시사(內試射)를 행하였다.
9월 19일 계묘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에 제사에 쓸 의대(衣襨)와 제물을 친히 전해 주었다.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에서 묵은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시켰다. 하교하기를,
"농사 형편은 등급을 나누어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거의 넉넉히 알 수 있지만, 면과 리가 이미 피차 다르다고 한다면 고을마다 각기 다르고 도마다 서로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고 생업을 안정시키는 제반 방법에 대해서는 형세가 장차 등급을 나누어 아뢰는 것을 기다려야 하나 요컨대 올해의 농사는 동서 남북을 막론하고 조세를 독촉하여 햇것과 묵은 것을 모두 다 받아들이는 것을 결코 의논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팔도와 삼도에서 받아들일 묵은 환자곡식을 금년에는 특별히 모두 받지 말게 하라."
하였다.
9월 20일 갑진
하직 인사를 하러 온 곤수(閫帥)를 불러들여 만나보고 나서 경상도 수군 절도사 이보한(李普漢)과 황해도 수군 절도사 이해우(李海愚)를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상은 이보한이 연로한 것을 가엾게 여겨 이런 명을 내렸던 것인데, 얼마 안 있어 이해우가 어버이가 연로하여 명에 응하여 부임하기 어렵다 하므로 그를 체차시키고 심녕(沈鑏)으로 대신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정범조(丁範祖)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비변사가 서북 지방에 연례로 내려보내는 목면을 씨를 제거하고 저고리와 종이옷에 두어 금군을 정하여 나누어 보낼 것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금령을 신칙한 지가 조금 오래되었으니, 해이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두 도의 도백들을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살펴 검사하도록 하여 변경을 수비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솜옷을 입는 공효를 입게 하라."
하였다.
9월 21일 을사
형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9월 22일 병오
팔도와 삼도에 다음과 같이 윤음을 내렸다.
"오늘은 바로 나의 생일이다. 우러러 경축함이 올해따라 더욱 심하니, 굽어 살펴 운수가 길기를 비는 마음이 이날따라 더욱 지극하다. 이해 이날에 마음속에서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고 그들을 품어주고 보전하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한 것은 어째서인가.
모든 도의 농사가 7월에는 가물다가 8월에는 강한 바람이 불어서 한창 자라던 곡식이 다 쓰러지고, 바다에 가까운 수십 리의 땅은 바닷물이 덮쳐서 벼와 목면이 모두 소금에 절인 것처럼 되었다. 먹을 것을 바라는 백성들의 정상은 수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대략 알 수 있다. 이후로 내가 어찌 밥을 달게 먹고 잠을 편안히 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 백성의 부모가 되어 그들을 구제하고 살려주며 또 그들을 평안하게 할 계책에 새벽부터 밤까지 이것을 생각하고 걸음마다 이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고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제반 일에 대하여 방촌의 사이에서 걱정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았으니, 정성이 지극하면 또한 금석도 꿰뚫을 것이다. 백성들이 비록 어리석다고 하나 또한 신의 뜻에 밝은 자이니, 일점의 영서(靈犀)가 팔방을 두루 비추듯이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는 나름대로 일정한 전례가 있는 것이니, 도백들이 등급을 나누어 아뢴 뒤에야 장차 조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연석의 신하에게 들으니, 각도의 도백들이 내년은 다른 해와는 다르다 하여 백성들을 진휼하는 일에 대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한다 하니, 어쩌면 그리도 도리에 어두운가.
내년으로 말하면 바로 조정에서 천년만에 한 번 만나는 전에 없는 경사스러운 기회이다. 무릇 우리 백성들과 그 즐거움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진실로 어떻게 해야겠는가. 우리 자전과 자궁을 위하여 천세를 불러 경사를 칭송하고 존호를 받들어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술잔을 올려 축수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
저 위에서 이른바 먹을 것을 바라는 저 만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며 찡그리는 것을 되돌려서 웃게 하여 멀고 가까운 온 나라의 지붕 아래에서 즐거워서 서로 축하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옛날의 밝은 은덕과 대비의 숨은 은공을 비로소 일분이나마 선양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나라의 근본을 근본으로 삼는 지극한 뜻에 대하여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경사를 축하하는 것도 여기에 있고 국운이 길기를 비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으니, 이 이치는 《시경(詩經)》 천보편(天保篇) 구여(九如)의 시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옛사람이 군부(君父)를 송축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뭇 백성들이 두루 그대의 은덕을 입는도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책하면서 또한 반드시 이르기를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과 여러 사람들과 음악을 즐기는 것이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임금을 도로 인도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와 일체 상반된다. 만약 저 말대로 행하려 하여도 미리 대비하는 데에 힘을 다하지 못하여 일반 백성들이 제 살 곳을 잃어 쇠락하게 된다면 감사나 고을 원을 어디다 쓰겠는가.
모든 도의 도백들은 모두 모름지기 민정의 완급에 대해 자세히 듣고 살펴서 만일 지극히 곤궁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겨울에 그 호구를 계산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뽑아 두었다가 봄에 가서 창고를 열어 궁핍한 자들을 진휼하는 것을 각기 법식에 맞게 하도록 하라. 비록 그러나 구제하기를 옳은 도로써 하지 않으면 이는 구제하지 않는 것이다.
가만히 연래의 구제하는 법규를 살펴보면 태반은 되질하여 장사를 하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는 것 같으나 그 속을 살펴보면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을 모두 곤궁하게 한다. 나는 되질하여 장사하는 해독이 흉년보다 더 심하다고 여긴다. 올해에는 구제한 공적이 비록 온 도에서 으뜸이라 하더라도 그 자취가 털끝만큼이라도 되질하여 장사하여 농간을 부린 데에 관련이 되었을 경우에는 해당 고을 원을 다소를 불문하고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법을 적용할 것이니, 법조문을 대궐 문에 내걸어 혹시라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기근을 구제하는데 부지런하였는가 부지런하지 않았는가, 죄를 범하였는가 범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범같은 암행 어사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 부월을 잡고 가게 할 것이니, 힘쓸지어다. 일전에 재변을 숨기지 말 것을 여러 도에 특별히 신칙하였으나 남은 뜻이 속에 있어 또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 곡식과 신포(身布)의 기한을 연장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은 백성들의 형편을 세밀히 헤아려서 등급을 나누어 아뢰도록 하라.
강계(疆界)를 구분하는 것은 호구를 뽑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거늘 하물며 내년은 더욱 고르게 시행해야 한다. 그러니 미리 구제하여야 할 곳의 대소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아 절대로 안고 이끌고서 사방으로 떠나가지 말고 구제하여 줄 때를 기다려 함포 고복하기를 풍년든 해처럼 하여 나와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하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음이 바로 내가 배부른 것이요, 백성들이 춥지 않음이 또한 내가 따뜻한 것이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이것을 일러 가장 상서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침에 장차 자전과 자궁에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옷을 단정히 하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므로 먼저 열 가지 행해야 할 것을 경들에게 펴는 것이다."
하교하였다.
"가을 행차를 아직까지 미루고 있는 것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타작 마당을 치우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올해는 성조(聖祖)가 상의 자리에 오른 해요, 이달은 바로 성후(聖后)가 탄신한 달이니, 달은 진실로 해마다 거듭 돌아오지만 해는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해 이달에 이 능을 배알하는 것은 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곧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올해에 능에 알현하는 것은, 마땅히 명릉(明陵)에 알현하고 나서 인하여 친히 제사를 지낼 것이니, 해조에 명하여 이달 안으로 길일을 가리게 하라. 지금 여러 도의 역마를 전례대로 징발하여 올 수 없으니, 모두 본 사복시의 말을 대기시키도록 할 것을 사복시에 분부하라."
9월 23일 정미
임시철(林蓍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이미 그 사람을 제대로 만들려고 했다면 잘해야지 어찌 구차하게 임시 변통으로 미봉하려 하는가. 근자에 명색은 비록 입직한다고 하나 이른바 함께 들어와 입직하는 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한두 명의 관원들뿐이니, 해괴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여러 총관들을 다같이 죄명을 기록하되 본 당번 외에는 모두 수직하는 관원의 이름을 생기(省記)하고 하교하기를 기다려 체직하게 하라. 부총관 이주혁(李周爀)을 별군직에 임명하여 제시간 안에 현신하여 처벌로 번을 들게 하되 총관이 출직한 뒤에는 별군직청에서 입직하게 하라.
별군직청의 고사는 새로 제수된 자가 있을 경우에는 으레 새로 차임된 자에게 시사(試射)를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은 명색이 별군직의 원임자이니, 장수 이하로부터 모두 참가하게 하라. 그리고 만일 지체하는 경우에는 다같이 엄하게 곤장을 치고 잘못을 기록하고 명령을 기다리게 하도록 하라."
9월 24일 무신
《인서록(人瑞錄)》이 완성되니, 편전에 납시어 친히 받았다.
이에 앞서 상은 올해가 바로 자전은 오순(五旬)이 되고 자궁은 육순(六旬)이 되는 해로써 천 년에 한 번 있는 큰 경사라고 하여 정월 초하루에 백관들을 거느리고 자전과 자궁에게 하례하고 큰 은덕을 베풀었다. 중앙과 지방의 조관은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 되는 사람들 및 80세는 되지 않았지만 부부가 해로한 자들에게 차등 있게 작위를 하사하였는데, 모두 7만 5천 1백 45명이었다.
이어 기신(耆臣)과 육경(六卿) 이상을 불러서 의례(義例)를 가르쳐 주고 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 새로 취진판(聚珍板)에 새겨 찍어내어 반포해서 길이 전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일이 완성되었으므로 기신들이 전(箋)을 갖추어 올렸다. 기신인 홍낙성(洪樂性)·채제공(蔡濟恭)·구윤명(具允明)·이민보(李敏輔)·홍억(洪檍)·홍양호(洪良浩)·김지묵(金持默)·조경(趙瓊)·변득양(邊得讓)·홍수보(洪秀輔)·김상집(金尙集)·신사운(申思運)·정존중(鄭存中)·한광계(韓光綮)·유공(柳戇)이 각기 아들·조카·손자·증손자를 따라서 들어와 자리에 나갔다. 상이 홍낙성 등에게 이르기를,
"오늘 경 등이 5백만의 축수를 받들고 와서 나의 원자에게 바치니, 나의 기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하니, 홍낙성 등이 일제히 소리를 모아 아뢰기를,
"신 등은 모두 기로소의 신하들로서 손에 《인서록》을 받들고 문폐(文陛) 앞에 나와서 모두 7만여 명의 수명인 50여억 년을 들어 우리의 성상과 원자궁에게 바칩니다. 이것을 화서국(華胥國)의 기사(紀事)로 삼고 남국(南國)의 역서(曆書)로 삼으며 요(堯)임금의 섬돌에 있는 상서로운 풀로 삼아서 대대 손손 많은 자손을 둘 것입니다.
이것을 점침에 풍성하고 영원한 큰 복이 있으며, 이것을 준칙으로 삼음에 끝없이 아름다운 복을 받을 조짐이 있으며, 또한 이것을 수명으로 삼아 곱으로 더하게 되면 백억, 천억이 되고, 다시 곱하면 만억, 억억이 될 것이니, 그 뒤로는 교묘한 월력으로도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기쁨에 겨워 춤을 추며 칭송하고 축하하고 싶은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어제는 비가 밤새도록 계속 내리다가 새벽에는 날씨가 화창하게 개이고 구름과 해가 맑으니, 이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한 늙은이들이 한 대청에 잔뜩 모였는데 따라 들어온 아들·손자·증손자·현손자까지 합하면 넉넉히 백여 명은 넘을 것이니, 이 또한 태평성대의 훌륭한 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연석에 등대한 기신들은 모두 수를 누리고 지위도 재상을 이미 지냈는데, 혼인한 지 60돌이 되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지 60돌이 되는 해를 맞이한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비록 대를 걸러 한 번 있을 만한 일이지만 특이하고 상서로운 일이라고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20여 명이나 되니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인서록》에 들어 있는 7만여 명이 어찌 인서(人瑞)가 아님이 없겠습니까마는 지금 연석에 등대한 자들을 놓고 볼 때 지난날의 역사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큰 상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으나 시인들이 칭찬하였던 수고(壽考)한 문왕의 교화를 과연 오늘날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늙은 여러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어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자궁이 하사하는 것이다. 오늘 경들이 들어올 때를 위해서 이것을 차려놓고 기다렸던 것이니, 경들은 모름지기 각기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게 들라. 그리고 나머지는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주어 품고 갈 만한 것은 품고 가서 처자와 더불어 함께 하여 오늘의 이 즐거움을 빛나게 하라."
하니, 기신들이 일어나서 사례하며 아뢰기를,
"이미 술에 취하고 은덕에 배불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런 시를 읽었습니다마는 천 년 뒤에나 바랄 수 있으리라 여겼고, 오늘에 제 자신이 직접 맞이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낙성 등이 말하기를,
"원자가 절하고 읍하는 따위의 모든 행동이 절문(節文)에 맞고, 위엄 있는 모습은 엄숙하여 마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니, 매우 기쁜 심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천 년에 한 번 있는 이런 기회를 만났으니, 화주(華州) 땅을 지키던 사람들이 요(堯)임금에게 수(壽)·부(富)·다남(多男)을 축원하였던 옛일을 본받고자 합니다."
하고, 전각에서 마침내 천세를 세 번 부르니, 상하가 모두 천세를 세 번 불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일이 얼마나 성대한가. 그러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먼저 한 운자를 낼 것이니, 경들은 각기 운자를 나누어 이어서 올려 한 편의 연시(聯詩)를 완성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어제 소서(御製小序)를 내렸는데, 그 내용에,
"《인서록》을 찍어서 바침에 나는 원자와 함께 편전에서 친히 받으니, 이는 《주례(周禮)》에 유사(有司)가 백성들의 수를 왕에게 바치면 왕이 두 번 절하고 받은 예를 본받은 것이다. 무릇 백성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삼왕(三王)들이 모두 높였던 연세가 많은 분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그 은혜를 자전과 자궁에게 돌리고, 그 일을 간책에 밝히는 데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날은 때가 9월 무신일이니, 내가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날씨는 청명하며 경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기신들과 교열을 보았던 자 20명이 각기 아들·손자·증손자·현손자들의 부액을 받으며 들어와 허리가 굽은 노인들을 앞에서 이끌고 곁에서 도와 질서 정연하니, 매우 장관이다.
예가 끝나고 내 원자와 더불어 여러 늙은 재상들을 인견하고서 위로하여 이르기를 ‘오늘의 예는 경사를 축하하는 것이요, 국운이 길기를 비는 것이다. 그러니 늙은이를 공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뜻도 여기에 붙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늙은 재상들과 여러 늙은이들이 길이 어진 은덕에 무젖고 함께 태평시대를 즐거워하며 모두 여러 자손들을 거느리고 억천만 년 장수하기를 축원하였고, 우리의 자전과 자궁 및 나의 원자를 위하여 공경히 축하해 주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와 같이 되게 하고, 장수하는 땅이 되기를 공경히 축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세 번 천세를 불렀던 것이다.
이윽고 자궁이 음식을 베풀어 축수하는 술잔을 번갈아 들었는데 윤택한 얼굴과 화려한 머리가 술병과 그릇에 어리비치었다. 또 그 나머지가 어린이들에게까지 미치니 《시경(詩經)》의 기취(旣醉)의 시를 노래하고 담로(湛露)의 은혜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물러갈 때에는 머리에 꽃을 꽂아서 영화를 자랑하고 아악이 거리를 메우니 구경하는 자들은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며 왕왕 사사로이 그림을 그리는 자까지도 있게 되었으니, 나는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먼저 한 운을 붙여서 선창하니,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연구(聯句)를 지어 이었는데, 기신들은 고체시를 짓고 전각에 올라와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은 근체시를 지어 모아서 한 시첩을 만들고 또 《인서록》의 서문을 시첩의 머리에 붙였다. 그리고 《인서록》의 실지 사적을 기록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남극성은 쌍으로 빛나니 보병성 무녀성은 번성하는데
인서록을 널리 베풀어주어 중광을 칭송하도다
하였다. 이어 기신들은 고시를 짓고, 규장각의 신하들과 승지와 사관, 시위하는 신하들은 율시를 지었으며, 기신의 아들과 손자들 가운데서 6, 7세 이상 되는 자에게도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인하여 여러 기신들에게는 각기 정악(正樂) 악대 1부를 주어 집까지 인도하게 하였다.
어정(御定) 《인서록》을 서울과 지방 및 교열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한 1부를 제주에 내려보내어 관청에 보관하게 하였다.
9월 25일 기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서총대(瑞蔥臺)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9월 26일 경술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정수(徐鼎修)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9월 27일 신해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상소를 올려 사면해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9월 28일 임자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경릉(敬陵)·익릉(翼陵)·창릉(昌陵)·홍릉(弘陵)과 순회묘(順懷墓)에 들려 배알하였다.
명릉(明陵)에 친히 제사를 지낼 때에 아헌관(亞獻官) 박종악(朴宗岳)과 종헌관(終獻官) 이병모(李秉模)에게 호피 1장씩을 하사하고, 찬례(贊禮) 민종현(閔鍾顯)에게 반숙마(半熟馬) 1마리를 내려주며, 집례(執禮) 이상황(李相璜) 및 대축(大祝) 홍대협(洪大協)은 가자하고, 능사(陵司) 이종명(李宗明)은 품계를 올려주고, 이득양(李得養)은 6품으로 승급시키라고 명하였다.
어가가 돌아오다가 양철평(梁鐵坪)에 머물러 진치는 것을 익혔다.
강원 도백에게 명하여 철원(鐵原)에 있는 동지(同知) 지일휘(池日輝)에게 음식물과 옷감을 넉넉히 보내주고 그 자손들이 업으로 삼고 있는 바를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인하여 묘당에 명하여 을묘년의 소과와 대과에 합격한 자들을 찾아가 보게 하였다. 지일휘는 을묘년에 경과(慶科) 증광시에 등과하였고 일찍이 오위 장(五衛將)을 지냈는데, 나이는 지금 85세이었다. 경술년에는 장수한 자에게 주는 벼슬을 했고 갑인년에는 자헌 대부 동지가 되었는데, 내년은 바로 과거에 합격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9월 29일 계축
해당 관청에서 올려 보낸 53건의 문건을 해당 관청에 재가하여 내려보냈다.
9월 30일 갑인
고 참판 유몽인(柳夢寅)에게는 이조 판서를, 고 위솔(衛率) 유찬(柳澯)에게는 이조 참의를 특별히 추증하고, 고 수찬 유약(柳瀹)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교하기를,
"‘스산한 비바람이 낚시터를 스칠 제, 고기 새 함께 기심(機心) 잊던 위천 땅 태공망은, 어인 일로 늘그막에 응양 장군 되어서, 속절없이 백이(伯夷)·숙제(叔齊) 고사리 캐게 하였다.[風雨蕭蕭拂釣磯 渭川魚鳥共忘機 如何老作鷹揚將 空使夷齊餓採薇]’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응양(鷹揚)이라고 한 것은 정난 훈신(靖難勳臣)에 견준 것이고 백이·숙제는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처사 김시습(金時習)의 제위천수조도(題渭川垂釣圖)라는 시와 같은 뜻이 있다.
대저 신하의 충성과 여자의 정절은 마찬가지이다. 임금이 비록 무례하다고 하더라도 신하는 충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또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도 같다. 비록 남편이 어질지 못하더라도 여자는 정절을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원(屈原)은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임금으로 섬기다가 떠나가게 되었을 때 못가에서 읊조린 것이 슬프게 원망하며 부르짖은 것이었는데, 문득 모두 부부에 비기었다. 더구나 고 참판 유몽인의 노부사(老婦詞)는 굴원의 이소경(離騷經)이 남긴 뜻을 깊이 체득하여 김시습의 시와 백중지세가 되니, 신하와 여자로서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이 모두 이 절조다. 마음이 강개한 것과 조용한 것 사이에는 굳이 높고 낮음을 구별할 필요가 없으나 조용한 것은 강개한 것에 비해 더욱 어렵다. 지난번에 몽인이 당한 치욕을 씻어줄 것을 재가하는 말 중에 특히 단종의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서 시습 한 사람만을 끄집어낸 데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몽인은 일찍이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대제학으로 올라갔다. 자기의 지혜를 나타내지 않고 속세를 따랐다면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흉악한 의론을 돌아보고는 명리를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고 기꺼이 강호 사이에 자신을 맡겼으며 시에 능하고 도를 깨달은 승려와 어울려 승려처럼 지냈으니, 이는 시습이 속세를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는 청광(淸狂)한 본색을 보인 것과 같은 것이다.
잡히게 되자 형리를 대하여 서산(西山)093) 에 대한 한 마디 말을 하고는 태연하고 화락한 자세를 견지하였으니, 김시습의 위천시와 그 취향이 일반인 것이다. 그런데 상론(尙論)하는 사람들이 설악산과 같은 시습과 금강산과 같은 몽인을 차이나게 보아서야 되겠는가. 만약 당시에 옥사를 맡은 관원이 성조(聖朝)의 관대한 가르침을 체득하여 몽인의 죄과를 더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서산의 고사리를 캐고 서산의 물을 마시면서 그 몸을 마쳐 김시습처럼 오점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습과 몽인 저 두 사람이 흠모한 것은 백이와 숙제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서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자취와 때일 뿐이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의리를 취한 그 지극한 혈성은 백년 뒤에 가서 대조하여 보아도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을 것이니, 조정에서 시습에게 이미 베푼 것을 몽인에게 베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세상에 필사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구해서 시와 글 몇 편을 보니, 태반이 굴원의 이소경과 같은 것으로 억울하고 불평스러운 심정을 토로한 것이어서 책을 덮어도 감흥이 일어났다. 이에 특별히 등급을 더하여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럴 즈음에 마침 행차하는 길가에서 호소하는 그의 족속을 불러서 만나보고 그의 아들과 조카의 실정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약(瀹)은 아버지와 함께 죽었고, 그의 조카 찬(澯)은 내쫓긴 임금 때에 벼슬을 하지 않고 갓을 벗어 버리고 북관(北關)으로 달아나 들어갔다가 그의 숙부의 일이 생기게 되자, 연루되어 귀양간 뒤로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의 아들이며 조카라고 이를 만하다. 일찍이 시행하자고 하던 것인데 다시 더 신중하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고 이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 유몽인에게 판서의 벼슬을 추증하고 좋은 시호를 주고, 그의 아들 약은 벼슬을 회복시켜 주며 그의 조카 찬도 당상관 3품의 벼슬을 추증하라. 그리고 호조와 충훈부를 막론하고 몰수하여 들인 노비를 계산하여 즉시 내주되 충신 박호(朴箎)에게 시행했던 전례대로 하고 여러 유씨(柳氏)들에게 명하여 방계의 친족 중에서 뒤를 이을 자손을 정하여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여기에 써넣을 것이다.
또한 누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의릉(懿陵)에 딸린 조포사(造泡寺)를 장차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무덤 자리 곁에 옮겨다 세운다고 하는데,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면 관청에서 금하지 않은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매해 3월에 별도로 내시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는 뜻이겠는가. 곧 유사로 하여금 그 중을 형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고을원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나무하러 들어오거나 짐승을 방목하는 것을 거듭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대를 하였다. 상이 정승들에게 이르기를,
"선유들이 이르기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시선을 높이 우러러 본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두 다리를 뻗고 앉았으면서 마음이 거만하지 않은 자는 없다.’고 하였다. 《시경》의 억편(抑篇)에 이르기를 ‘치밀한 위의는 덕의 단면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단면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 모서리를 말하는 것이다. 덕은 형체가 없어서 보기가 어렵지만 위의는 밖에 드러나서 쉽게 볼 수 있다. 그 밖을 관찰하여 그 속을 징험하는 것이 마치 집의 칸살을 얽어놓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모퉁이를 기다리고서야 저절로 분명해지는 것이다.
조신들의 반차에 이르러서 위의는 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며칠 전 진치는 것을 익힐 때에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여서 서 있는 것이 거의 구경꾼 같았으니, 이는 모두 지금의 풍속이 집에서는 전혀 행실을 닦고 신칙하는 학문이 없고 조정에 나와서는 존경하는 의를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해괴하게 보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내 비록 덕은 없으나 어찌 인도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들도 유의하여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춘추관에 명하여 광해군 때의 사초를 정리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신이 연전에 태백산 사고에 사책을 보관하러 갔다가 광해군 때의 《일기》를 조사하여 보니,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고 사초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세월이 오래되어 닳고 파손되어 장차 16년 간의 역사를 신빙할 곳이 없게 되고 명신과 재상의 절행과 언의(言議)가 다같이 인멸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잘못된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춘추관에서 《일기》를 가져다 즉시 수정하여 《연산군일기》의 예대로 기름먹인 종이에 찍어서 각처의 사고에 보관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서유성(徐有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큰 기근이 들었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삼남의 농정에 대한 장계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은 절기가 늦어짐으로 말미암아 재해를 입은 전답을 아직 사리에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한 때문인 듯합니다. 흉년이 든 해의 민정은 반드시 연사에 대한 장계를 받아 보아야 비로소 명확하게 결단하여 정할 수 있으나 재해를 입은 전답으로 말하면 추후에 아뢴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삼남의 도백들에게 명하여 연사에 대한 장계를 먼저 아뢰고 재결(災結)에 대한 장계는 조용하고 소상하게 차례로 치계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였다.
"지난번에 내린 윤음에서는 먼저 등급을 나누어서 받아들이는 기한을 연장하는 것과 돈으로 대신 받아들일 것에 대하여 말하였고, 다시 호구별로 뽑는 것이 요긴한 방도가 됨을 거듭 말하였다. 고을 호구에 대하여 등급을 나누는 것은 도에서 조목별로 열거하여 아뢰기를 기다려야 하나 기한을 연기하는 것과 돈으로 대신 물게 하는 비율을 미리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는가. 미리 알게 된 뒤에야 짐을 지고 있는 자의 어깨를 쉬게 할 수 있고 황급한 자들을 조금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삼남에서 가장 심한 호구는 새 환자 곡식 및 군사·백성·종·역부들에게서 나올 신역 대신 무는 쌀·베·돈은 모두 절반에 한하여 기한을 물려주도록 하라. 【만약 쌀인 경우에는 6말 가운데에서 3말은 기한을 연장해 주도록 하고 3말은 돈으로 대신 물게 하며, 베인 경우에는 1필 가운데에서 20자는 기한을 연장해주도록 하고 20자는 돈으로 대신 물게 하며, 돈인 경우에는 2냥 가운데에서 1냥은 기한을 연장해주도록 하라.】 가장 심한 호구의 다음 가는 호구는 등차를 두어 1분씩 차례로 감하라. 【 가장 심한 호구는 3분의 1로 하고 그 다음 가는 호구는 4분의 1로 하라.】 대신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등급을 나누는 한 조목도 위의 것에 따라 정례를 삼도록 하라. 【가장 심한 고을에서 가장 심한 곳에 다음가는 면과 리는 절반으로 하고, 가장 심한 고을에서 약간 소출이 있는 면과 리, 다음가는 고을에서 다음가는 면과 리, 조금 소출이 있는 고을에서 가장 심한 면과 리는 3분의 1로 하고, 다음가는 고을에서 조금 소출이 있는 면과 리, 조금 소출이 있는 고을에서 다음가는 소출이 있는 면과 리는 4분의 1로 하라.】 군보(軍保)로부터 쌀을 거두어들이는 폐단은 베를 바치는 것보다 더 심하니, 하물며 올해와 같이 흉년이 든 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상의 항목에 이미 들어 있는 기한을 연장해주는 분량 이외에 마땅히 바치게 되어 있는 나머지 수량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되 상정(詳定)으로 쳐서 돈으로 대신 물게 하라.
이번의 이 윤음은 이전에 내려보낸 윤음을 다시 강조한 것인데, 그 의도는 감사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고 등급을 나누게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고 본고장에 안정하도록 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눈앞의 실제 정사 중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가한다. 그러니 즉시 묘당에 명하여 삼남의 도백들에게 공문으로 알리도록 하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환자 곡식에 모곡(耗穀)을 더 받는 제도는 만약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기한을 연장해주게 되면 그와 함께 그 해의 모곡으로 더 받는 곡식도 아울러 기한을 연장해주는 가운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각 고을에서는 대부분 잘 살펴서 신칙하지 않고 아전과 향리들이 농간을 부리도록 일임하여 두어 원래의 환자곡은 기한을 연장해주면서 모곡으로 더 받는 곡식은 기준대로 받아내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관청 비용으로 돌리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올해에 기한을 연장해주는 것은 이미 호구를 뽑는 일까지 하였으니, 구별이 저절로 분명하거늘 만약 한 호구라도 기한을 연기하여 주기로 한 환자 곡식에 대하여 그에 해당한 모곡을 받아들인다면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각도에 엄하게 신칙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하교한 것 아래에 첨부하여 엄하게 신칙하여 공문으로 알리도록 하라. 그리하여 도백들로 하여금 각 고을에 반포할 때 힘써 자세하고 엄격하고 명백하게 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실제 혜택을 받게 하라."
하였다.
삼남의 호적 및 도안(都案)을 이듬해 가을에 만들기를 명하였으니, 비변사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서 금위영과 어영청에 번들러 올라오는 군사를 내년 보리가 익을 때까지 번들러 올라오는 것을 중지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좌의정 김이소의 말을 따른 것이다.
남한 산성과 북한 산성의 군량미로 매해 받아들이지 못한 4만 2천 3백 섬이 각 고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기한을 연기하여 주며, 각도에 묵은 군량도 묵은 환곡에 대한 예대로 특별히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아울러 기한을 연기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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