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1권, 정조 18년 1794년 10월

싸라리리 2025. 8. 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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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묘

윤대를 하였다.

 

10월 2일 병진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장계로 아뢰기를,
"제주도에 옮겨갈 곡식 5천 석을 바다에 가까운 장흥(長興)·해남(海南)·강진(康津)·영암(靈巖) 등의 여러 군에 나누어 놓고 별도로 능주 목사(綾州牧使) 조익현(趙翼鉉)을 정하여 운반을 감독하여 새 목사가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다 넘겨주도록 하였습니다. 짐을 싣는 인부들에게는 양식을 주고 연역(烟役)을 면제해 주었으며, 각 배의 사공과 격군(格軍)·감관·색리들에게도 원래의 뱃삯 외에 값을 넉넉하게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해신(海神)에게 제사지낼 날짜는 다음달 13일로 받아 놓았으니, 향과 축문을 규례에 따라 마련하여 내려보내 주소서. 아직 나누어 주지 않은 곡식과 별도로 내려보내기로 한 진휼품 각 5천 석은 내년 봄에 나누어 주어서 제때에 받아 실어가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장계를 보니, 배에 곡식을 싣는 날을 이미 정하였고 바다에 제사지내는 날도 길일을 가려서 13일로 정하였으며 모든 것을 안배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부터 배가 정박할 때까지 한동안 염려하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다. 이런 때 바닷가 백성들과 섬 백성들을 위하여 어떻게 이 마음을 나타내고 이 정성을 담아야 하겠는가. 축문과 폐백과 향을 봉하여 마땅히 기한에 맞춰 내려보내겠다. 그리고 애초에는 새 목사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배를 출발시키게 하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편리한 대로만 하려고 한 듯하다. 근시의 신하 중에 일로 인하여 쌀을 실어 내는 지방에 보낼 자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죄를 진 채로 속죄하게 한다면 그 마음을 다하는 바가 반드시 목사보다 나은 점이 있을 것이다. 전 승지 겸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귀양보내는 것을 특별히 분간하여서 즉시 쌀을 실어 내는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백성들의 폐단을 살피고 곡물을 조사한 뒤 배가 떠나는 곳까지 운반을 감독하게 하라. 이어서 또 바다를 건너가 바다에 제사지낼 곳에 이르러 헌관이 되어 목욕 재계하고 제사를 받든 연후에 뱃길이 내내 편안하거든 즉시 조정으로 돌아와 복명하되, 지나온 연해 고을의 백성들을 위유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상세히 물어 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영보가 승지로서 잘못을 저질러 강진에 귀양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가 가는 김에 명한 것이다.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4일 무오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사직 김이성(金履成)이 상소하기를,
"분수 밖의 은혜로운 자급이 도리어 온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입신 출세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한 소원이지만 선조를 영광스럽게 하는 은전도 감히 받을 수 없으니, 이와 같고서 어떻게 사대부의 반열에 스스로 설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바라는 것은 눈을 감고 속히 죽어서 세상의 시비와 함께 먼지와 흙이 되어버린 뒤에 위로 천제에게 호소하여 순수하게 명을 받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우리 전하를 섬기며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서 전하의 큰 공을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후생이 소원대로 될지를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원은 승정원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고 2품의 직명으로 말하자면 단연코 스스로 단념해왔으니, 원컨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현직을 체차해주소서.
아, 근래 조정에 사유(四維)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하께서 조정을 다스리시는 것은 대개 전일의 근심이 외람되고 방자한 데서 생겨난 것을 징계해서 대신 이하로부터 조금도 가차없이 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의 시기에 따라 적절히 처리하는 의리입니다. 그런데 저 성인의 마음을 모르는 자들은 ‘뜻을 받든다.[承奉]’는 두 자만으로 의리를 삼아서 ‘부지불식간에도 제왕의 법을 따른다.’고 하니, 저들이 과연 요임금의 백성들이 요임금을 믿는 것처럼 전하를 독실하게 믿는 것이겠습니까.
아, 임금의 도는 인(仁)을 주로 하고 신하의 절개는 의(義)를 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는 너르고 공평하게 하는 것을 도로 삼고 아래에서는 유지하고 지키는 것으로 절개를 삼으니, 상하가 비록 어긋나는 듯하나 인의는 원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닙니다. 당(唐)·우(虞) 시대에 반대하여 의견을 냈던 것이 바로 당·우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소이연입니다.
신이 봉심하던 길에 마침 교파(交坡)의 백성들을 만났는데 길을 막고 호소하는 것이 대개 성의 향곡(餉穀)을 고을 창고로 옮겨 바치게 해달라는 일이었습니다. 막중한 향곡의 일을 창고를 옮기기는 어렵겠지만 만일 전례가 있다면 수량을 나누어서 허락해주어 그들의 뜻에 부응해주는 것도 백성들의 힘을 덜어주는 데에 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이 민정에 관계된 것이기에 감히 말미에 진달드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유(四維)에 대해 말하면서 폐단을 논한 것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러나 경이 이른바 이미 공무를 행했던 2품직에 대해서 의리를 지켜 내놓겠다고 한 것은 전혀 사리에 닿지 않는 것이다. 비록 용서해줄 것을 믿고 가벼이 번거롭게 군다만 유독 국가의 체모와 조정의 기강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경을 무겁게 추고하겠으니 이 후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
성의 향곡을 받아서 남겨두는 일에 대해서는, 일전의 차대에서 좌상이 방계(防啓)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옮겨나르는 폐단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것이 있겠는가마는 새로운 법식을 이제 막 반포한 데다가 도백이 청하지도 않았으므로 우선 조금 기다려보는 것이다."
하였다.

 

이건수(李健秀)를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5일 기미

차대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수확은 열흘 사이의 한바탕 비바람으로 흉년이 들 것을 미리 알았다. 이 때문에 밤낮없이 근심 걱정하는 한 가지 생각뿐이나,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 경들이 나의 뜻을 잘 체득하여 백성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구제해줄 방도에 필시 좋은 계책이 있을 것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술빚는 것을 금지한다면 곡식을 넉넉히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술이 곡물을 허비하는 것이 많으니 금지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행하기 어려운 명령은 결국 할 수 없는 것이다. 술병을 끌고 다니며 사고 파는 자들은 거의 다 양반집이어서 법리들이 감히 조사할 수 없고, 붙잡아들이는 자는 가난하여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뿐일 터이니, 어찌 이런 금법이 있을 수 있는가. 가체(加髢)를 금한 것은 또한 요즘에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 엄하게 법조문을 세워 정해진 규격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반드시 행해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규중에 있는 부녀자의 뒷머리가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아내서 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굳이 계속해서 거듭 금할 것 없이 지금 여기 연석에 오른 신하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정해진 제도를 어기지 않게 다스리고 신칙한다면 사서인들도 반드시 서로 본받게 될 것이다."
하였다.

 

동지 정사에 홍양호(洪良浩)를, 진하 부사에 정대용(鄭大容)을 도로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이소의 말을 따른 것이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난번 총관(摠管)의 허물을 기록하라고 하신 하교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의도하신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갑작스레 조보(朝報)를 본 신은 후손에게 남겨줄 좋은 계책에 결점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여러 재신들이 만일 과연 죄줄 만하다면 파직하건 나문하건 귀양을 보내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호위의 직책을 이유로 삼으셔서 허물을 기록하는 율을 적용하십니까.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깊이 유념하셔서 특별히 환수할 것을 명하여 기주(記注)에 기록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개성부 유수 이면응(李冕膺)이 아뢰기를,
"선전관 이현도(李顯道)는 명을 받들고 본부에 들렀을 적에 하찮은 일로 하리에게 곤장을 쳤습니다. 선전관은 군기에 관해 적간하는 일이 아니면 감히 곤장을 쓸 수 없다고 연전에 엄하게 칙교하신 것이 비국의 등록에 실려 있으니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찌 감히 금법을 어긴단 말인가.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엄히 처단케 하라."
하였다.

 

10월 7일 신유

장령 심수(沈銖)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김이성의 상소에 대해 매우 놀랐는데, 온 종이 가득 늘어놓은 말들이 어지럽고 요사스러워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까지 있었습니다. 심지어 위로 천제에게 호소하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겠다는 등의 말은 바로 불가의 윤회술(輪回術)로서 이단의 허탄하고 기괴한 의논인데 그가 감히 이것을 임금에게 고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불경스럽단 말입니까.
그가 직급이 올랐을 때는 황망히 나와서 숙배하더니 영선(榮先)의 은전에 대해서는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진실로 전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나중에는 무슨 마음입니까. 그의 속이고 교묘한 꾀를 부리며 방자하고 무엄하게 구는 습관을 더더욱 볼 수 있으니, 변방으로 물리치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이성의 일은 망령되고 경솔하기는 하다. 다만 그의 장점은 상소의 말이 또한 그 사람됨과 같아서 간간이 채택하여 살필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단번에 한 마디로 천고의 제일가는 소인으로 지목하였으니 사람을 논하는 것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변방으로 물리치는 율은 더더욱 적당하지 않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최경악(崔景岳)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정치순(鄭致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사헌부가 【집의 이병철(李秉喆)이다.】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진실로 명백하고 바르게 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김이성의 상소는 전편의 내용이 음험하고 흐리멍덩하였습니다. 지난번 아경으로 승진하여 발탁하였던 것은 참으로 우리 성상의 곡진한 교화로 그를 등용하여 사람을 만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로서는 감격하여 송축하였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듯이 보고 스스로 말하기를 ‘2품의 직명을 부끄럽게 여기어 단연코 스스로 단념할 것이며 영선의 은전 또한 받들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무슨 뜻이며 무슨 연고입니까. 그 부정을 막고 치우침을 바로잡아야 하는 도리상 그냥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지의금부사 김이성에게 변방으로 물리치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에 각궁의 노속(奴屬)들이 갖가지로 폐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전에 본부의 금리(禁吏)가 사사로이 도살을 했다는 죄인 한 명을 잡아왔는데 조사시켜 봤더니, 어의궁(於義宮)에서 무역하는 것이라 핑계대고 싼 값에 현방(懸房)의 고기를 강제로 사서 몰래 스스로 팔다가 잡힌 자였습니다. 그 죄상을 따져보면 사사로이 도살한 것보다 더 지나치기에 우선 엄히 다스리고 단단히 가두어 놓은 뒤 바야흐로 형조로 이송하려는 즈음에, 현방의 무리들이 와서 하소연하기를 ‘이러한 놈들이 위세를 빙자하고 가탁하여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며 빼앗아 각 현방에서 하루에 잃는 것이 그 숫자가 적지 않으므로 허다한 전복(典僕)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발각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방자하게 횡포를 부린 것이 이들에게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흉년까지 들어 곡식이 귀한 이때에 이러한 폐단이 다시 다른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유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중하게 다스리게 하고 또한 엄히 법조문을 세워 간악한 폐단을 끊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이성의 일은, 무릇 사사로운 의리가 있어서 벼슬을 사직하고자 하는 자가 어찌 이성 한 사람뿐이겠는가. 영선을 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한 것은 또한 굳이 사양하려는 가운데 튀어나온 말에 불과한 것이니, 이 어찌 이토록 중대한 안건으로 삼을 일이겠는가. 더구나 양사가 함께 발론하였으니 도리어 대각의 체모에 어긋나는 것이다. 너희들을 추고하겠다. 이 계사를 만약 예대로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면 장차 베껴다 전하는 낡은 종이쪽지가 될 뿐이다. 이성의 상소 말 가운데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설은 과연 소홀하였으니 파직의 형전을 시행하라. 아울러 이 계사의 끝에 있는 법궁(法宮)의 노복들과 차인(差人)들에 대한 일은 전후로 신칙하여 금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범한단 말인가. 해조로 하여금 엄형으로 다스리게 하고 그 나머지 제궁의 같은 죄를 범한 무리들에 대해서도 엄하게 사실을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치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헌납 어석령(魚錫齡)이다.】  아뢰기를,
"이번에 김이성이 올린 상소는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어둡고 흐리멍덩하단 말입니까. 전일의 상소도 이미 극히 놀랍고 패려스러웠는데 요행히 엄한 주벌을 면하고 특별히 은혜롭게 자급이 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감격해서 송축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인의(引義)하면서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설과 요임금의 백성이 요임금을 믿듯이 하겠느냐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의도적으로 기롱한 것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동의금부사 김이성에게 속히 먼 변방으로 물리치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이성의 일에서 전생 후생 운운한 것은 비록 법에 맞지 않은 듯하나 요임금의 백성이 요임금을 믿듯이 하겠느냐고 운운한 말은 가히 이성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니, 이것이 그의 장점을 취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망령되게 법도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장주에 진술한 것은 문책받아야 마땅하니, 파직하도록 하라. 양사가 합계 발론한 것은 대각의 체모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너 또한 추고한다."
하였다.

 

고령 현감(高靈縣監)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본읍의 금년 농사는 재해를 입을 정도로 가물지는 않았으나 전처럼 곡식이 익은 것은 2,3할에 불과합니다. 그 나머지 물이 부족한 곳에서는 논으로 말하더라도 예년에 비해 수확이 반으로 줄었고, 목화 농사는 간혹 완전히 흉년을 면한 곳도 있으며, 황두는 간간이 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웅덩이가 깊은 지역은 곡식이 익은 곳이 있지만 넓은 들판은 혹심한 재해를 입은 곳이 많으니, 이곳을 가지고 저곳을 비교하면 중과부적이어서 백성들의 일에는 실로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습니다.
흉년을 만나 진휼을 베푸는 것이 비록 당연히 해야 할 절목 안의 일이기는 하지만 구구한 제 생각에는 매번 진휼하는 정사를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환자곡을 받는 백성이나 진휼미를 받는 백성이나 다 마찬가지이고, 조정에서 나누어주는 것이나 수령이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나 요즘 이른바 사사로운 진휼로 급한 이를 구제한다는 것이나 모두 환자곡 중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은 제 살을 떼어다가 배를 채우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영남은 평소 곡식 장부가 여유가 있다고 일컬어졌지만 근년 이래로는 점차 예전 같지 않습니다. 신의 고을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4만여 석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극히 한심스러울 정도이고 새로 받아들일 것도 또한 흉년을 면치 못했으니, 진휼이든 환곡이든 막론하고 장차 요리해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견감해주는 일만이 남쪽 지역 백성들을 위한 가장 시급한 일인데 재해 정사가 일단 묘당에 넘겨진 뒤에는 그 조치하는 바가 매양 깎아서 줄이는 것만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신이나 읍재(邑宰)가 된 자도 그것이 이와 같은 줄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절약하고 또 절약하지만 결국 떼어받는 것은 또 처음 예상했던 것과 어긋납니다. 평년에도 오히려 이에 대해 말을 하는데 하물며 크게 흉년든 때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본 고을의 일에 대해 감히 별도의 은택을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원근의 사정을 미루어 헤아리시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에 대해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군정(軍政)이란 한 가지 사항은 가장 절실하고도 급한 폐단인데 상세히 조사하고 충분히 상의한 것이 아니기에 감히 갑작스럽게 아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직분 내의 일에 있어서 환자곡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관에서 지급한 것도 징수해야만 하며, 신공(身貢)으로 받는 포도 독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신의 정성을 다하고 백성의 힘을 다하게 해야 할 뿐,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또한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오직 중하게 법대로 처분해주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흉년을 만나 기근을 구제하는 것이 어느 해인들 어렵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금년처럼 두루 베풀기 어려운 것은 즉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 하겠다. 어제 연석에서 내린 전교 중에 ‘민간에 설사 쌓여 있는 곡식이 좀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큰 흉년으로 인정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에 심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이른 것은 실로 과장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이런 즈음에 마침 경이 갖추어 진술한 소(疏)를 보니 더욱 분명해졌다. 소본(疏本)은 대신과 비국 당상들로 하여금 자세히 보게 하였다. 이후에도 백성들의 실정에 대해 다시 듣고 보는 대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9일 계해

춘당대에서 차대를 행하였다. 이어서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 상재생(上齋生)들의 응제(應製)를 행하였고, 전경 문신(專經文臣)들의 전강과 문신 제술 시험, 전경 무신(專經武臣)들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비변사가 경기 지역의 재해를 입은 실상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복주(覆奏)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금년에는 기근을 진휼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마땅한 방도를 얻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 때문에 나는 마음에 근심되어 침식을 잊다시피 하고 있다. 하물며 경기는 도성과 지척에 있는 지역으로 백성들이 장차 신음하게 되었는데 만약 별도로 돌보고 구휼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으로 미루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곡식이 잘되어 거두어들일 것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물이 한 번 휩쓸고 가버리자 모두 낫을 댈 곳조차 없게 되었다. 여러 도들이 다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용히 들어보니, 두루 다 재해를 입은 중에서도 경기 지역이 더욱 심하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은 차라리 명령이 미덥지 못하게 될지언정 차마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굴러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산성의 향곡(餉穀)은 비록 체모가 중요하다 하나 절목을 융통성 있게 주선하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일이다. 또 사리로 말하더라도 그 영구히 준수하는 것은 금년에 받아들이는 것을 남겨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산의 상평창 향곡은 받아들여 남겨두고 각 고을의 모곡은 돈으로 대납케 하여 병농(兵農)의 선후의 구별을 보이도록 하라.
이밖에 교동·풍덕 지역의 작년에 신공(身貢)으로 받는 포의 기한을 물려주었던 것은 그대로 기한을 물리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하라. 새 환곡과 신공포의 기한을 물려주거나 대납케 하는 것은 이미 장계를 올려 청한 데 대해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으나, 오히려 미처 두루 주선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눈앞의 황급함은 계묘년보다 몇 곱절 더하니 그 구휼해주는 것도 자연 그중에서 참작하여 헤아려야 할 것이다.
더욱 심한 고을에 다음 가는 고을에서 별도로 가장 심한 민호를 뽑아서 그 새 환곡 및 돈이나 포로써 관에 바쳐야 할 것들은 아울러 절반을 기한을 물려주도록 하고, 더욱 심한 호의 다음이 되는 자는 3분의 1을 기한을 물려주라. 본도는 비록 보공(保貢)이나 미포(米布)를 본색으로 상납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수어청과 총융청의 보수미(保需米)와 같이 백성들의 절실한 폐단이 되는 것들을 이러한 때에 어찌 태연히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위 항목에서 물려주기로 한 사항에 포함된 것 외에 조금 실한 호가 아닌 경우에는 돈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라. 새 환곡을 대신 받아들이는 일은 온 도를 통틀어 가장 심한 곳에는 또한 절반을 허락하여 백성들의 힘을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도록 경기 관찰사에게 분부하라.
오늘의 유시와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감사된 자가 무슨 낯으로 다시 향안(香案) 앞을 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교 직제학 김재찬(金載瓚)에게 벼슬에 서용하지 않는다는 법을 시행하고, 심이지(沈頤之)를 수어사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근시의 직책에 있는 자가 근일 내가 백성들의 일에 마음을 쓰느라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밥먹는 것도 반으로 줄였다는 것을 모르는가. 보통 행해야 할 직분 내의 일조차 감히 편한 대로만 가려서 직무를 비워두고, 심지어는 한밤중 잠시 쉴 때에 번거롭게 구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근래 임금이 지은 글을 편수하고 교정하는 직무를 담당한 자들도 한편으로 제쳐놓은 지 오래이다. 아울러 하찮은 일까지 수고를 끼침이 이와 같으니 이는 모두 벼슬이 너무 성하고 직책이 너무 번다해서 규장각 내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시임 각신 중에 내각의 직 외에 직임을 본래 겸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개차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각의 직무에 전심할 수 있도록 하라.
직제학 서용보(徐龍輔)는 관찰사의 사체가 중하니 내각의 직함을 체차하고 처분한 뒤에 아뢰어라. 검교 직제학 정대용(鄭大容)도 똑같이 삼가지 않은 죄를 지었다고 어젯밤에 번거롭게 여쭙기까지 하였는데, 이미 시관(試官)이 아니면 당해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신칙하고 이미 용서해 주었다. 이번의 잘못은 첫째도 김재찬이요 둘째도 김재찬이다. 벼슬을 잘한다는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인가. 비록 옛일을 생각한 데서 나왔다 하더라도 당초 특별히 장수를 준 것은 후회막급이라 하겠다. 검교 직제학 김재찬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리라."
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가 수어사가 되었을 때 강과 제술 시험을 잘못 거행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병정(李秉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대사성 이만수를 체차하고 이가환(李家煥)으로 대신케 하였다.

 

10월 11일 을축

좌의정 김이소, 우의정 이병모, 유사 당상 심이지·윤행임, 영남 구관 당상 정창순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 때문에 내 어떻게 심력을 수고로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름과 가을 이래로 먹고 자는 것이 다 편안치 않아 심지어 요즘에는 몇 시간 자고 몇 숟갈 먹는 것에 불과하다. 우러러 생각해보건대 열성조들은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백성들의 피부에 젖어들어 그 성대한 덕과 큰 사업을 백성들이 잊지 못할 정도였는데도 일단 흉년을 만나면 오히려 견감하고 진휼하는 정사에 간절하게 근심하고 부지런히 애쓰셨다. 하물며 후사에게 있어서 수성(守成)의 책임은 바로 조상의 업을 잘 계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더더욱 어찌 감히 하루라도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맹자는 이르기를 ‘남을 다스리는 자는 남이 농사지은 것을 먹는다.’고 하였으니,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대개 삼대 이후 천하를 가(家)로 삼은 뒤로부터 당세의 군주로서 창업수통한 자는 오히려 말할 만한 공덕이 있었다. 그러나 수성을 하는 후사들에게 있어서 백성을 보존하는 요점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노심 초사한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직 백성들의 추위 보기를 내 몸의 추위처럼 여기고 백성들의 굶주림을 나의 굶주림처럼 여겨야 할 것이니, 내 한 몸의 수고를 돌아볼 겨를이 있겠는가. 오늘 경들을 인견한 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견감하고 구휼할 방도를 묻고자 해서이다.
금년의 황정(荒政)은 즉위한 뒤로 처음 있는 것이다. 설령 농사를 지은 곳에 조금 수확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이곳이나 저곳이나 대체로 흉년이다. 연해 지역의 고을 중 더욱 심한 곳은 늦봄이 되기 전에 필시 굶주림에 신음하다 죽을 걱정이 많을 것이다. 반드시 별도의 계획을 세운 연후에야 조금 덜어줄 수 있을 터인데, 지난번 윤음 중에서 이미 기한을 물려주고 대신 받아들이는 전교가 있었지만 기한을 물리고 대신 받아들이는 요점은 또 호를 뽑는 데 있는 것이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현재의 중요한 방도로는 호를 뽑는 것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를 뽑는 것은 전적으로 도신과 수신의 능부(能否)에 달려 있는데 현재 먹여주기를 바라는 민정은 조정의 견감하고 구휼하는 혜택을 고대하고 있다. 진실로 등급을 나누어 장계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견감하고 구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아마도 늦어서 일에 미치지 못할 듯하다. 그러니 지금 만약 먼저 행회하여 각호의 등급에 따라 기한을 물리고 대납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참작해 헤아려 분배해 주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알게 한다면 믿어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서 등급을 나눌 것을 계하한 뒤에 영과 읍이 스스로 조사해서 행한다면 이고 지고서 흩어지려 했던 자가 거의 안심하고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등급을 나눈 장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렇게 미리 시행하는 것은 실로 상례가 아니므로 내가 지금까지 하고자 하면서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니, 이소 등이 아뢰기를,
"성교가 간절하고 측은합니다. 금년의 민사는 조금도 늦출 수 없는만큼 특별히 상례 외의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는 것이 또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보미(軍保米)가 우리 백성들의 가장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된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영부사 채제공이 좌의정이었을 때 변통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결국에는 단지 십여 년 동안 쌀을 바치는 자에게 겨우 한두 말을 감해주었다고 한다. 이 폐단은 끝내 제거할 수 없는 것인가? 보미(保米)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금년 같은 경우에는 더욱 적당히 융통을 해야 하고, 계묘년의 예 또한 근거할 만하니 수량을 나누어 기한을 물리거나 대납케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어영청에서는 비록 넉넉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지만 금위영이 좀 여유가 있으니 똑같이 기한을 물리고 대납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소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좋다고 하였다.

 

부사직 김이성이 상소하기를,
"근래 신을 제수하신 명은 모두 특별 교지에서 나온 것인데, 전조 같은 데서는 바로 의망을 정지해야 할 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미 전조의 뜻을 몰랐으니 비록 일이 공사의 격식에 관계된 것이라 하더라도 범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하물며 영선(榮先)의 사적인 바람을 가지고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슬프고 원통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외람되게 무리한 말을 진달한 것이니 스스로 불경(不經)의 주벌을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천고의 소인의 항목을 모아다가 반드시 신을 빠뜨리고야 말려 하니 이 무슨 심보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제수하신 명을 거두시어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소의 내용 중에 전생이니 후생이니 한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남들의 비난과 책망은 모두 스스로 취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죄를 진 것이 이러한데 다시 무슨 말로 스스로 해명하겠는가. 예에 따라 비답을 내릴 수 없다. 특별히 지방으로 물리쳐 영동현(永同縣)에 보임하라."
하였다.

 

충청도 수군 절도사 유심원(柳心源)이 장계로 아뢰기를,
"8월의 대풍으로 비인(庇仁)·보령(保寧)·서천(舒川)·결성(結城)·남포(藍浦)·홍천(洪川)·태안(泰安)·대흥(大興)·한산(韓山)·서산(瑞山) 등의 10개 고을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 1백 16명이나 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이처럼 많다니 나도 모르게 놀랍고 측은하다. 호남에도 이미 구휼하는 은전을 시행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그런데 지금에야 비로소 장계로 아뢰니 태만하고 소홀함이 심하다. 그 당시의 수신을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처결하게 하라. 전라도 관찰사는 장계로 보고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충청도 관찰사는 아직도 한 마디도 없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12일 병인

상이 비국 당상 조진관(趙鎭寬)을 소견하고 이르기를,
"경의 선친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그때의 일은 대개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했던 것이니, 이는 형적만을 가지고 논한 것에 불과하다. 본심을 궁구해보면 그렇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전후의 전교에서 거듭 당부한 까닭이다. 지금 경사스런 때를 당하여 이미 다 밝혀내었으니 경의 집안은 무고한 집안이 되었고 경의 선친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하니, 진관이 울면서 사례하였다.

 

검교 직각 서영보에게 유시하였다.
"조정의 연석에서 하교하여 행회하도록 하였는데 이미 소상하게 말을 만들었는가. 바람을 기다려 배를 출발시킬 곳으로는 소안도(所安島)나 추자도(楸子島)에 뜻을 두었기에 지난번 출발을 감독하라는 전교에서 비록 바다를 건너가라는 등의 말을 하기는 하였다. 지금 들으니, 마땅히 고달도(古達島)에서 배를 출발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배에서 제사를 행한 뒤에 그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려 돌아오도록 하라.
근래 바닷가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 자나깨나 가장 근심하고 있다. 각신이 이미 명을 받고 연로의 고을에 있으니, 그가 나의 근심 걱정하는 뜻을 선유하고 진달되지 못한 민정(民情)을 상세히 탐문하는 데 있어 털끝만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조정에 돌아온 후에 일일이 아뢰도록 하라. 옛사람은 오히려 황제의 명을 사칭하면서까지 창고를 열어 기민을 구제해준 자도 있었는데, 하물며 황급히 민정을 진무하여 안정시킴에 있어서랴. 어제 전교하여 삼남에 은택을 시행한 것을 과연 이미 보고 곳곳마다 효유하였는가. 예컨대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으로 조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까지 늦추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모쪼록 자신의 의견을 사리에 맞게 논하여 성화같이 아뢰도록 하고, 지나는 길이 비록 멀리 둘러오는 길인 듯하여도 재해를 만약 가장 심하게 입었다고 하면 추솔(騶率)들을 놔두고 두루 다니면서 순시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백성들을 반드시 안집시킬 대책을 갖추어 말하고, 견감해줄 이익을 상세히 효유하여 한 사람이라도 전전하며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일이 없게 하라."

 

10월 13일 정묘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연경에 가는 세 사신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나라의 풍속이 전적으로 신분만을 숭상하고 사로(仕路)에서는 더욱 신분을 중하게 여기는데, 사대부 외에는 의원과 역관이 그 다음이다. 사대부 집안이라야 경대부가 될 수 있는데, 사대부 집안이 아니면서도 경대부의 자격이 되어 무소뿔 띠를 띠고 옥관자를 꽂을 수 있는 사람은 의관과 역관이다. 옛적에는 사무를 잘 알고 일을 아는 역관을 곧바로 사신의 임무로 보낸 적이 있으니, 이는 대개 역관을 특별히 대우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듣건대, 사신의 일행이 연경으로 갈 때에 수석 역관의 볼기를 벗기고 곤장을 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긴다고 한다.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만 못하여 스스로 몸가짐을 잘하여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수석 역관으로 말하면 사신의 다음 가는 자리인데 그와 같이 처리하는 것은 자못 위중(威重)함을 빌려준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고사를 듣건대, 사신 일행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수석 역관이 죄를 범하여도 곤장을 치지 않고, 돌아와 강을 건너와서야 보고하고 죄를 처분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았다고 한다.
이번에 배표(拜表)하는 것으로 인하여 사신들을 불러들여 만나보고 법식을 준수할 것으로 유시하기는 했지만 조금 지나면 또다시 규례를 그르치는 일이 생기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번에 내린 이 전교를 판에 써서 사역원에다 게시하도록 하라. 이 거조는 사신의 일을 중히 여기고 나라의 체면을 높이기 위한 것이니, 뒤에 수석 역관이 된 자들이 맡은 직책을 잘 수행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이 전교를 빙자하여 태만하게 구는 경우에는, 일행 중에 두 사신과 행대(行臺)094)  가 있고 사역원에는 도제거와 제거 겸교수가 있으니 응당 나타나는 대로 보고하도록 하라. 그러면 징계하고 면려하는 것이 곤장을 치는 것보다 반드시 배가 될 것이니, 이 뜻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기사

상참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정(財政)이란 나라의 큰 일이다. 만약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지 않게 되면 앞으로 닥쳐올 우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걱정스럽다. 옛날 선조 계축년095)  에 견감하고 구휼해주는 은전을 널리 베풀었는데 이것은 대개 해마다 흉년이 든 뒤에 연유한 것이었다. 올해로 말하면 계축년의 계속된 기근과는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나는 일념으로 근심하고 골몰하면서 한 백성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견감하고 구휼하는 은전을 어떻게 상례에 벗어나게 널리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세(帽稅)를 관서에서 내라고 책임지우는 것은 실로 딱한 일이다. 경 등은 반드시 그것을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라."
하니, 호조 판서 심이지가 아뢰기를,
"모세가 평안 감영으로 옮겨진 것은 근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더러 칙고(勅庫)까지 범하면서 독촉에 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부터 사신이 갈 때 단단히 신칙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마련한 은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갈 때 양식과 반찬을 풍성하게 갖추기를 집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이 하고, 심지어는 소금이나 장 따위의 물건까지도 모두 실어간다고 하니, 다른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도 폐단의 하나이다."
하니, 이소가 아뢰기를,
"소금과 장 따위의 물건은 저 나라에 있는 것이 입에 맞지 않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의 음식이 비록 식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먹지 못할 정도일 리가 있겠는가. 부귀한 집안의 자제여서 만약 먹을 수 없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차임해 보낼 필요가 없다. 이는 바로 사치한 습관이 점차 성해진 결과이니 가령 옛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반드시 이처럼 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사신이 갈 때에 잡물을 싣고 가는 것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검교 직각 서영보(徐榮輔)를 강진(康津) 등 고을의 위유사로 삼고 윤음을 내렸다.
"검교 직각 서영보를 전라도 강진·해남·장흥·흥양·영암·진도 등 고을의 위유사로 삼는다. 제주로 가는 배에 곡식을 싣고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에 운반하는 것을 감시한 뒤 그 돌아오는 길에 여러 고을에 가서 백성들을 다음과 같이 위유하라. ‘이 천리나 떨어진 남쪽 바다에 대해 아득히 잊지 못하는 일념으로 왕래하며 구휼하는 것은, 진실로 바람이 쓸고간 뒤의 재해를 입은 정상에 대해 감사의 장계로는 혹 요점을 알 수 없고 대간의 상소도 오히려 헛다리를 짚는 듯하므로, 마을마다 동네마다의 민정과 물색에 대해 끝내 그 상세한 점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니, 내 잠을 자도 편치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이달 13일은 바로 제주도로 곡식을 운반하기 위해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배를 뛰우는 날이다. 정성껏 재계하고 묵묵히 기도하는 것은 오직 바다를 무사히 잘 건너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하여 생각건대, 이 곡식이 비록 관에서 나왔다고 하나 그 실제는 연로 백성들의 입 안의 물건일 뿐이다. 너희들이 부득이한 사정을 알고 입으로는 감히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이쪽에서 빼앗아다 저쪽에 주니, 내 무슨 마음이 들겠는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배가 있는 곳으로 운반해다가 다른 사람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도리어 내 몸이 고생하는 정상을 상상해 보건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 먹을 것 없이 고생만 하는 것이 애처롭다. 연로 고을의 백성들이 쌓아놓고 창고에 넣은 것은 아니지만 그 설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해마다 모곡(耗穀)을 계산해보면 몇 배나 될지 알 수 없다. 몸에 반드시 용역(庸役)이 있는 것은 본래 그들의 분수이지만 혹은 쌀로 혹은 포로 대납하며 일생 동안 고생해서 반드시 45년을 채워야만 하니, 백성들이 힘을 바친 것이 또한 많다 하겠다. 적곡(糴穀)과 쌀과 포를 1년에 한 번 견감해 주는 것이 무슨 득실이 되겠는가. 백성이 있은 연후에 국가가 있는 것이니, 내 은혜를 나의 백성에게 베풀어 주겠다. 밥이 목을 내려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오직 혜택이 시행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 비상한 흉년을 만나 비상한 은택을 내리는 것은 왕정에 있어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니 유사의 신하가 감히 경비 때문에 어렵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일전에 견감하고 대납케 하라는 하교를 대략 삼남에 행하였으나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지방이 마침 모두 가장 재해의 손상을 많이 입은 호남 연로 고을에 몰려 있으니, 어찌 차마 일전의 견감하고 대납케 한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다했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저 척박한 땅과 광막한 들을 돌아보건대, 눈닿는 데는 모두 쓸쓸하여 온전히 익은 곡식을 볼 수 없다. 면(綿)이나 박[壺]이나 과실이나 채소같이 힘입어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거둘 것이 없는데, 들이나 계곡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황급하기는 매 한가지이니, 어떻게 적곡을 마련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포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강진·해남·장흥 등의 지역은 곡식을 운반하는 고을이고, 영암·흥양은 배를 뛰우는 고을이니, 신역으로 내는 쌀·포·돈으로서 서울과 지방에 바치는 것은 진곡에 붙이건 환곡에 붙이건 계산하지 말고 기근이 더욱 심한 부류에게는 전체 수량을 탕감하라. 환곡과 향곡은 전에 이미 기한을 물려주었는데 그 외에 나머지 수량도 모두 기한을 물려주도록 하라. 그리고 그 피해가 다음가는 호에는 쌀·포·돈은 절반을 탕감해주고 절반은 그대로 기한을 물려주어라. 환곡과 향곡은 3분의 2를 기한을 물려주라. 대동미는 3등급의 면(面)과 리(里) 중 우심한 곳에 대해서는 3두(斗)를 감해주고 나머지는 두의 수를 차등 있게 감하라. 결전(結錢)은 내년 가을 추수 때까지 물려 받도록 하라. 모든 읍에서 마련하는 것과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따위로 제사에 올리는 물건과 관에 바치는 것은 내년 가을까지 아울러 감면하도록 하라. 【방물(方物)과 삭선(朔膳), 어약(御藥)에 필요한 것, 어용 화살대, 군수 물자 등 각 항목의 진상품 및 이밖에 서울과 지방의 아문(衙門)과 영문(營門)에 납부하는 것들이다.】  5개 고을에 속한 진으로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곳은 위의 규정을 보아서 준례로 삼으라. 속한 진도 이와 같는데, 재해를 입은 지역과 접경하여 연로 고을 중 가장 심한 홍양과 진도 같은 데에 균등하게 시행하는 예를 허여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보살펴주는 정사가 아니니, 그 견감하고 기한을 물려주는 것을 또한 위의 예를 적용하도록 하라. 금년에 바닷가 사람들이 혹시 하늘의 하사를 받아 물고기가 통발에 걸리고 소금이 염정(塩井)에서 나오며 배가 순조롭게 다니고 파도가 일지 않으며 바람이 일지 않는다면 거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들로 하여금 본업에 전념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역역(力役)과 세금을 덜어주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균역청(均役廳)에 내는 어염세(魚鹽稅)와 선세(船稅)를 내년 가을까지 절반을 기한을 물리도록 하라. 그리하여 우리 바다와 육지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안도할 수 있게 하라. 겨울밤 해가 저물도록 밤을 지새우는 데 익숙하여 밝은 촛불 아래서 부르고 쓰다보니 벌써 아침이 되었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방금 진하 정사 박종악(朴宗岳)의 장계를 보니 ‘별사(別使)의 공비는 은자 4천 5백 냥인데 모세조(帽稅條) 중에 현재 남아 있는 은은 단지 2천 9백 35냥 남짓이니,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지(批旨)에 여쭈어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근래의 예에 의하여 관서에 저축해둔 은 중에서 이 수량대로 빌려주고 모세(帽稅)가 조금 여유가 있기를 기다려 도로 갚게 하라는 뜻으로 명을 내려 알려주소서."
하니, 따르고, 전교하기를,
"이로 인해서 하교할 것이 있다. 연전에 역관의 폐단을 개정하는 일로 특별히 연교를 내렸는데 지금까지 오래도록 결정해 처분하는 것을 늦추고 있으니, 이 어찌 신의를 보이는 뜻이겠는가. 묘당이 사역원에 왕복하면서 기어이 좋은 쪽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공비로 쓸 은자를 해마다 관서에서 내라고 책임지우는 것은 일이 이미 의리가 없고 경비 또한 없다. 영부사가 시임으로 있을 때에 또한 이 문제로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본원의 제거를 겸임하고 있어서 반드시 국가의 재화를 손해나지 않게 할 대책을 강구하여 초기하게 하였었다. 이번 연석에서 또 사신 일행이 반찬과 양식을 끌고 가는 것이 번잡하다고 하여 얼마간 하교를 내린 것이 있었다. 만약 문적(文跡)이 없었다면 밖에 있는 제거 이하의 관리가 어떻게 들어 알 수 있겠는가.
일찍이 옛 규례를 듣건대, 이와 같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사치한 풍습이 점차 번성하고 제 몸을 봉양하는 폐단이 더욱 심해져서 밥해 먹을 쌀과 반찬 도구를 가지고 가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다하니, 지금은 길의 역참에서도 그릇을 낭자하게 늘어놓는 것이 집에서 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 습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뒤에는 당연히 더욱 심해질 것이다. 책문에 들어간 뒤에는 양식과 반찬을 가지고 가는 것을 엄히 금하라. 만약 그 평상시의 식성이 너무 높아서 현지의 음식을 먹어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혹 의망되어 낙점을 받았다 하더라도 애초 억지로 참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전혀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 하겠다. 옛사람들은 3일을 머물게 되더라도 양식을 싸가지 않았거늘 하물며 천리의 먼 거리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부유한 자제들이 만약 이 명령 때문에 가기를 어렵게 여긴다면 차라리 역관으로 하여금 사신의 임무를 대신 맡게 하겠다. 이 영은 반드시 행하고자 하니, 물러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충분히 의논한 뒤에 나중에 품처하라. 그리고 이번 사행에 조금의 쌀과 고기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선 영을 내리기 전의 일에 속하므로 비록 거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 거조와 비답을 가지고 두 사신의 행차와 의주 부윤에게 엄히 신칙하라. 그리고 이번의 사행에서 중요하지 않은 짐바리들을 먼저 일체 엄금하여 그것이 행할 만한지를 시험해보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대사헌 임시철(林蓍喆)이 소회를 진달하기를,
"지난번 승지와 유신(儒臣)이 금령을 무릅쓰고 범하면서 잇따라 진달하고 호소했던 것은 그 직분을 거행하려고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유배를 보내어 사람들의 기상이 쓸쓸하고 꺾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또 더구나 한만유(韓晩裕)는 어버이의 나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대신의 청을 따라 석방해 주었습니다. 같은 죄를 진 한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오직 이 두 사람만이 아직도 귀양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형법으로 논해보더라도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서배수(徐配修)와 서유문(徐有聞)을 특별히 석방해 주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자리로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시철이 아뢰기를,
"신이 아직 비답을 받들지 못했으니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사간 허질(許晊)이 소회를 진달하기를,
"헌장의 주달은 진실로 체모를 얻은 것입니다. 승지와 유신이 똑같이 유배를 당하였는데 한 승지는 이미 석방해주어 용서를 받았으니 차이가 없어야 할 듯합니다. 신은 서배수와 서유문을 아울러 석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 한 명은 부모가 늙어서이니, 유배가 있는 두 사람과 상관이 없다. 어찌 같은 죄를 졌는데 이들만 풀려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부수찬 임희존(任希存), 사간 허질(許晊), 정언 최시순(崔時淳) 등이 소회를 진달하기를,
"대신의 체모는 중한 것이니 비록 불가한 점이 있더라도 오히려 비답을 내려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전 대사헌이 두 신하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한 말은 좋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비답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차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대성인의 간언을 용납하는 덕에 흠이 될까 걱정됩니다. 신이 생각건대, 전 대사헌 임시철을 체차하라는 명을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비답을 내리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이 어찌 잘못한 것이 없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정배한 죄인인 전 승지 서배수와 전 교리 서유문을 석방하였다. 도승지 심환지가 아뢰기를,
"신은, 대사헌이 소회를 아뢴 말 중 지난번 귀양간 승지와 유신을 풀어줄 것을 청한 말에 대해서 실로 황공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때 신은 본원에 있었는데 밤에 내린 처분을 듣고 새벽에 관청에 들어가 좌기하여 옥당의 차자와 정원의 계사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말하기를 ‘이응혁(李應爀)은 그 동생에 대해 잘못이 없다고 하였는데 죄를 논해 결정함에 차등이 없는 것은 진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개 성조(聖朝)를 위하여 임금이 빠뜨린 것을 보충하고 미리 법도를 엄히 하고자 한 것인데 여름 사이에 감히 듣지 못할 엄한 하교가 내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죄과를 범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중죄가 아니고 더구나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는 때에 연소한 선비의 풍모를 장려해야지 꺾어서는 안 되겠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어보건대 두 사람이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한 것이 과연 분명하다 하니 그렇다면 그대로 정배하는 것은 지나쳤다. 특별히 경의 말을 따르겠다."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신대현(申大顯)을 옥리에게 내렸다. 대현이 연석에서 행동을 무엄하게 하였기 때문에 상이 진노하여 나문할 것을 명하고 구술로 공초를 받도록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총융사 신대현이 공초하기를 ‘본래부터 지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통영에 있을 때 망령되이 백성들이 호소하는 말을 믿고 또 사사로운 안면에 구애되어 절로 중한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연석에서는 하늘에 혼을 빼앗겨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망극한 죄를 범한 것이니, 오직 빨리 형벌을 받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혼이 나갔다고 핑계대고 끝내 곧이곧대로 공초하지 않으니 증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소서."
하니, 판부하기를,
"특별히 공초를 받으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이러한 말도 되지 않는 허튼소리를 공초라고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으니, 두 당상을 특별히 제수한 뜻이 과연 어디 있는가. 만약 엄히 물었다면 그가 아무리 담이 크다고 하더라도 혼이 몸에 붙어 있을 겨를이 없을 터이니 감히 변명하는 데 입을 놀릴 수 있었겠는가. 경들이 처분하지 않고자 한 것이다. 해당 수석 도사(都事)는 서간(西間)에 엄히 가두고, 큰소리 치는 것을 엄하게 신칙하지 못한 수석 나장(羅將)은 엄히 형신하여 정배하라. 다음에는 형조에 넘겨주고 다시 개좌(開坐)하라. 그가 연석 중에서 머리를 쳐들고 자주 쳐다본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다. 엄하게 신칙을 내린 뒤에도 무신으로서 창의(氅衣)를 입고 어전을 출입하였으며, 제사를 대행하느라 향축을 전할 때에는 대문 세 칸에 기와를 덮은 것을 가지고 감히 상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단지 현재 드러난 일에 따라 먼저 엄히 신문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만일 사실대로 공초하지 않는다면 어찌 형추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교관(郊館)에서 군율을 적용하여 무너진 기강을 면려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즉시 공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신대현이 다시 공초한 내용을 가지고 아뢰니, 판부하기를,
"그가 폐해졌다가 기용된 몸으로 다시 어좌의 곁에 오르게 되었으니 두렵고 떨려서 주선하다가 잘못을 한 것이라면 혹 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고 무엄하게 군 것으로 성정각(誠正閣)과 빈연(賓筵)에 있을 때에 이미 처분하고자 하다가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당한 상참(常參)과 조회의 자리에서 그가 감히 더욱 거리낌없이 여기저기 돌아보고 쳐다보는가 하면 왼쪽 사람과 소곤대다가 오른쪽 사람과 떠들었고, 대신으로 하여금 살펴 신칙하도록 한 다음에도 들은척 만척 하였으며, 부절(符節)과 모자를 빼앗고 내보낸 다음에도 걸음을 비틀거리지 않았고, 금오랑에게 내다 맡긴 뒤에는 때가 지났는데도 합문 밖에 있다가 선전관이 나가 내쫓은 뒤에야 비로소 궐문을 나갔으니, 이는 바로 등연한 신하들이 목격했던 바이다.
이 중에서 한 가지 죄만 있어도 죽을 죄가 아닌 것이 없는데 허다하게 조사하고 자백 받아내는 것을 한결같이 소략하게 하였으니, 그 받아들인 바의 공초가 과연 처음 공초와 무엇이 다른가. 금부의 행동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다시 엄하게 물어서 기어이 자복을 받은 뒤에 아뢰도록 하라. 또 혹시 전과 같이 한다면 여러 당상들에게는 마땅히 별도의 엄한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17일 신미

신대현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교하신 내용으로 신대현에게 다시 문목(問目)을 내어 조목조목 캐묻고 엄하게 조사를 가하였으나, 그가 바치는 공초에는 번번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할 뿐 무슨 심정으로 여러 가지 죄를 범하였는지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그 거조를 보건대 무엄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원사(爰辭)를 보니 다시 물을 것도 없다. 만약 허물을 씻어줄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처분이 어찌 처음에는 엄했다가 나중에는 느슨히 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칩거했던 벌레가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생성시키는 은택을 내려주어 우선 삭탈 관직하고 풀어보내라."
하였다.

 

10월 18일 임신

구익(具㢞)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한 달에 한 번은 전배해야 대강이나마 정(情)과 예(禮)를 풀 수 있는 것인데 7, 8월 두 달 동안은 알현을 빠뜨렸으니, 이것이 어찌 《전성록(展省錄)》을 재소(齋所)에 두고 예를 행할 때마다 반드시 공경히 기록하려 한 본뜻이겠는가. 내일 유첨문(逌瞻門)을 통해 전배하러 가겠으니 해방 승지는 알아두어라."

 

전교하였다.
"장계의 마지막 말에서 임금을 찬양하는 폐습에 대해서 일찍이 엄하게 신칙하였는데, 지금 강화 유수의 장계를 보니 ‘성은(聖恩)이 따뜻한 봄날과 같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이것이 찬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당 유수를 무겁게 추고하라."

 

10월 19일 계유

경모궁에 전배한 뒤에 재실에서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인견한 것은 수원의 성쌓는 공사에 대해 묻고자 해서이다. 당초 성쌓는 공사를 시작한 것은 본부가 소중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결정하여 공사를 시작한 것인데, 지금 와서 돌아보건대 전에 없던 흉년을 만나 백성들 사정의 황급함이 가을, 겨울에도 이와 같으니 내년 봄의 사정을 알 만하다. 지난번 위에서 스스로 어공(御貢)을 절감하는 일을 가지고 연석에서 하문하였던 것은 대개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할 수 있는 방도를 다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성쌓는 공사를 정지하는 것이 현재 황정(荒政)의 가장 큰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 공사는 민력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는 것이니, 흉년에 먹을 것 없는 백성들이 도리어 이에 힘입어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중지한다면 일꾼들의 실망이 오히려 클 것이다. 또 이 성은 소중한 점이 있으니 사소한 일로 갑자기 공사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내 뜻은 그렇지 않다. 소중한 것으로 말하자면 실로 원소(園所)의 공사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고, 또 값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기 때문에 비록 민사(民事)에 방해가 없다고는 말하나 혹독한 추위와 더위에도 한결같이 공사를 감독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여름 동안 특명으로 공사를 정지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제 생각해보건대, 여러 도시에서 흉년을 알리고 백성들의 사정이 황급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부세를 견감하고 보호해줄 대책을 강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공사를 일으켜 운반하고 쌓는 일을 행한다면 결국 이는 행해질 수 없는 정사가 될까 걱정된다. 하물며 백관의 녹봉과 군인들의 봉급에 드는 앞으로의 경비가 구차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성쌓는 공사가 비록 경비와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이것을 미루어 저것에 보태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른바 공사를 정지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공사를 정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들으니 남문과 북문의 공사는 자못 두서가 잡혔다고 하니 내년 봄 현륭원에 행차할 시기까지 거의 공사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사를 마친 뒤에 일단 정지하여 감독과 일꾼과 공장들로 하여금 1, 2년 동안 휴식하게 하고, 재력이 모아져 여유가 생기거든 그런 뒤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하는 사람들과 공장들은 옛날 맡았던 일을 그대로 시켜서 시종 혜택을 입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 공사를 중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의 공장과 모집한 일꾼들은 팔도에서 모은 사람들인데, 지금 만약 돌려보낸다면 몇 년 후에 다시 모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또 자원하여 공사에 나와 입에 풀칠하고 몸이나 겨우 가리던 자들에게 있어서는 명줄이 관계된 것인데, 공사를 중지하고 돌려보낸다면 그 낭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쌓는 공사도 흉년을 구제하는 한 가지 정책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소를 세내어 돌을 운반하고 시설한 것이 적지 않은데 갑자기 중지한다면 훗날 물력의 소비는 반드시 처음보다 배가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성쌓는 공사는 반드시 중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유수도 큰 공사를 이미 시작했다가 갑자기 중간에서 그만두면 사람들이 듣고 좋지 않게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국가나 개인이나 모두 재력이 결핍된 시기를 당하여 급하지 않은 일에 관계된 것으로 그만둘 수 있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공사를 어찌 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당초 이미 10년을 기한으로 잡았으니 반드시 시일이 급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공인과 모집한 일꾼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이소,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 쌓는 공사는 비단 소중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일의 형세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중지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나누어줄 녹봉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근심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과 이것은 각기 다른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성쌓는 공사는 흉년에 조금도 해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남과 호서의 금위영·어영청 두 영의 상번군을, 호남의 예에 따라 보릿 가을까지 번드는 것을 정지하였다. 우의정 이병모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윤국(李潤國)을 파직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근래 듣건대, 도둑이 일어나는 근심이 호서가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이를 엄히 신칙하지 않는다면 후일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니,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윤국을 먼저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서매수(徐邁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유방(徐有防)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대사헌 임시철(林蓍喆)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사헌이 그때 연석에서 아뢴 것은 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주선하는 즈음에 대간의 체모에 대해 자못 익숙하니, 지레 체차하기는 아깝다."
하고는, 이어서 전지(傳旨)를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0월 21일 을해

윤대하였다.

 

10월 23일 정축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장계를 올리기를,
"8월 27일 큰바람이 분 뒤에 온 섬이 비로 쓴 듯하여 피차간에 별로 구별할 만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나누어 세 등급으로 만들어 보면, 본주의 78개 리(里) 중에 피해가 심한 마을이 32곳이고 대정현과 정의현도 모두 더욱 심한 편입니다. 환곡 중 기한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 1만 4백 60여 석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2천 2백 90여 석이며, 번이 면제된 군관의 신역에 대해서는 그 수량의 반을 기한을 물려주고, 노비 신공으로 바치는 쌀과 남정(男丁)의 대동미는 그 반을 탕감해주고 군병도 조련을 정지해야 할 것입니다.
논의 올벼는 자못 수확이 실한 것이 있었으므로 군영과 읍의 수미(需米)를 대략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백성들의 사정은 시일이 급하여 늙고 병들어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을 뽑아 공해(公廨)나 토굴에 머무르게 해놓고 있으며 봄 사이에 그냥 나누어주고 남은 곡식 1백 50석과 다른 데서 떼어온 1백여 석을 가지고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죽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피해가 아주 심하여 빌어먹는데도 가호(家戶)가 있어서 기민을 뽑는 데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봄 동안에 환곡으로 나누어주고, 남은 곡식 2백여 석과 보리 환곡의 남은 곡식 2천여 석으로 올 10월 초부터 인구를 계산하여 환자로 나누어주어 우선 살려내고 있습니다. 환자를 주어야 할 자가 장정 3만 7천 9백 18명이고, 노약자가 2만 4천 7백 80명입니다. 10월부터 내년 보리가 익을 때까지 우선 빌어먹고 있는 가호부터 차차로 더 주어 한 달에 세 번씩 돌려가면서 배정할 경우에 들여와야 할 쌀이 2만 2천 2백여 석입니다. 본토의 곡식은 남아 있는 것이 2천여 석이고, 새로 받아들인 환곡이 2천여 석인데, 이것은 종자(種子)와 공미(公米)로 돌려야 합니다. 장계에서 옮겨줄 것을 청한 2만 석이 차차 들어오기를 온 섬의 백성들이 날마다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계의 말을 보니, 바람이 쓸고 간 뒤로 백성들의 사정이 한층 더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새 목사를 엄하게 신칙하여 배로 운반한 곡물 및 이미 떼어준 것 외에도 다시 부족한 것이 있거든 도신에게 연락하여 더 청하라고 하라."
하였다.

 

위유사 서영보(徐榮輔)가 치계하여 아뢰기를,
"이달 10월 13일 해신제를 설행한 뒤 15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정북풍을 얻었는데 풍세가 편리하고 순하였으며 바다의 파도는 고요하였습니다. 신이 몸소 배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장흥·영암·강진·해남 등 4개 고을에서 옮겨온 곡식 5천 석을 실은 배 12척을 일일이 점검하였습니다. 같은 날 술시(戌時)에 제주 새 목사 이우현(李禹鉉)이 배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는데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리니 잠깐 사이에 천리를 갈 기세였습니다. 왕령(王靈)이 함께 하는 바이니 편안히 가 닿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우선 날이 맑기를 기다렸다가 장차 풍세를 살펴보고 소안도에서 도로 돌아가는 길을 떠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장계의 내용을 보건대, 상서로운 바람이 돛을 보내어 저너머 해안까지 옮겨가 닿게 하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바다와 육지의 백성들을 위하여 천만 다행스럽다. 그 여정을 헤아려보니, 네가 별도로 유시한 것과 윤음을 받는 것이 당연히 길을 떠난 뒤일 것이다. 별도로 유시한 것에 의하여 돌아오는 길에 두루 살펴보고 위유할 수 있겠는가. 복명이 지체될까 염려하지 말고 더욱 나랏일을 굳건히 살피는 의리를 다하여 기어이 실제적인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라. 여러 섬들 중 두루 살펴보기 어려운 곳이 반드시 있을텐데, 네가 데리고 간 군관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인 구강(具絳)이 특별히 선전관으로 차임되었다는 것을 너도 알 것이다. 그로 하여금 여러 섬들을 두루 위유하게 하고 너는 올라올 때에 연로의 백성들의 사정을 상세히 살펴서 일일이 위유하고, 호서 연해 지방의 구불구불한 내포와 외포에 이르기까지 일체 위유하고 오도록 하라. 만약 직접 두루 가보지 못하는 곳에는 호남의 예에 따라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위유하라."
하였다.

 

10월 24일 무인

번개가 쳤다.

 

비국 당상 조진관과 한성부 판윤 구익을 소견하였다. 구익이 아뢰기를,
"금년과 같은 농사 상황에서 곡식을 허비하는 해로는 술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금령을 설치한다면 조그만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이란 물건은 금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지금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였으니 비록 금령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의 명령을 금석처럼 믿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또 더구나 삼해주(三亥洒)가 이미 다 익었으니 이제 와서 이미 다 빚어놓은 술을 공연히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은 보통 해와 달라서 온 세상이 기뻐하며 춤출 것이므로 더욱 술 빚는 것을 금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안주를 풍성하게 마련하는 것이나 술을 법도에 넘게 많이 빚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연전에 묘당의 금칙이 있었으니, 어찌 아래에서 금지할 방법이 없겠는가. 이것은 유사가 거행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상이 진관에게 이르기를,
"편찬하고 있는 《십이황정년표(十二荒政年表)》는 바로 백성을 위하여 흉년을 구제하려는 뜻이다. 선조 50년 동안의 등록을 이미 상고해 내었으니, 숙종갑인년096)   이전의 여러 조정의 등록으로 본사에 있는 것도 상고해 내어 내가 즉위하던 병신년 이후 각년의 것과 아울러 함께 편성하여 올리고 한 건은 본사에 보관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매년 신칙하는 전교를 얼마나 내렸는가. 심지어 금년에도 묘당으로 하여금 기한 전에 엄히 신칙하게 했었는데, 그저께와 어제 추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기에 선전관을 보내어 마을을 적간하게 하였더니, 좌포도청이 관할하는 길 옆에서 추위에 몸을 가리지 못하여 입김을 불고 있는 남녀가 밤마다 반드시 있다고 한다. 장신(將臣)된 자가 만약 성심으로 엄히 신칙하였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포도 대장을 무겁게 추고하라. 성 안팎으로 움집을 설치하여 한결같이 법전대로 지어주되 튼튼하고 실속 있게 하기를 힘쓰고 묘당은 비국의 낭청을 보내어 살피게 하라."

 

10월 25일 기묘

팥만한 우박이 내렸다.

 

10월 28일 임오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3일 동안 반찬을 줄이라고 명하고, 삼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기 수성(修省)할 대책을 진달하게 하였다.

 

승정원이 교지에 응하여 아뢰기를,
"오늘 이렇게 우르릉거리는 우레 소리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 등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현재의 금령(禁令) 한 가지가 바로 위로 하늘의 상도를 거스르고 아래로 백성의 천성을 끊어버려 재이를 불러온 하나의 큰 실정(失政)입니다. 아, 하늘을 버티고 있고 땅에 뻗쳐 있어서 소멸시키려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의리입니다. 의리가 밝혀지는가 어두워지는가 하는 것은 실로 나라의 안위에 관계된 것인데, 한 줄기 윤리 기강이 추락되지 않는 것은 오직 이 대간의 계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대궐에 금령을 베풀어서 대간의 입을 막을 자료로 삼으시니, 올바른 법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막혔으며 흉악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발호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한 번 바뀌고 두 번 바뀌는 가운데 변괴가 거듭 일어나 조금이라도 이 일을 거스르면 문득 금령을 설치하곤 하였습니다. 대각은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납해야 할 바인데도 조금이라도 충분에 북받친 말을 하면 지나치게 꺾어버리시고, 재상들은 전하께서 예우하셔야 할 바인데도 숙위(宿衛)에 나오라고 독촉하시기를 속박하듯 하시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분위기가 꺾이어 근심스러워합니다. 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금령을 환수하시어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이 【교리 임희존(任希存), 부교리 남이익(南履翼)·윤익렬(尹益烈)이다.】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아, 거두어 간직해야 할 겨울철에 좋지 못하고 편안치 못한 재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겠습니까. 아, 역적을 징토하는 것이 이 얼마나 엄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삼사의 합사가 아직도 윤허받지 못하였고 말단의 두 가지 계사는 아직 보고되지도 않았으니, 난적(亂賊)이 징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흉당은 기회를 엿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이것이 족히 재앙을 불러올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삼사의 청을 따르소서.
입을 다물고 있는 폐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정에 격앙(激昻)하는 풍조가 없고 세상에 나약한 습관이 많아서 한 마디 할 때마다 기휘(忌諱)를 범할까 두려워하고 한 가지 일을 논할 때마다 기괄(機括)에 저촉될까 염려합니다. 평소에 담론할 적에도 감히 시정(時政)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부형들이 경계할 때에도 반드시 말조심하라고 하니, 집에서도 감히 말하지 않는 것을 누가 능히 조정 위에서 드러내고 말할 수 있겠으며, 사사로운 자리에서도 감히 논하지 못하는 것을 누가 감히 군부의 앞에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말하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임금에게 죄를 얻더라도 조정에서 그를 인정해 주고 공의가 훌륭하게 여겼는데 오늘날의 말하는 자는 성명께서 죄주지 않아도 친지가 버리고 조정이 배척하니, 명절(名節)이 무너져 없어지는 것이 이와 같고 풍기(風氣)의 비루하고 나약함이 이와 같아서 대단히 힘쓰고 특별히 격양한 것은 제쳐두고라도 곧은 말조차 끝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간언을 구하시는 도리가 혹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바라건대 마음을 다하여 간언을 오게 하여서 하늘의 견책을 그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힘쓰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6, 7월의 가뭄을 만난 뒤로 밤낮 근심하며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느라 침식할 겨를도 없으시자 하늘도 기쁜 징조로 응하더니 겨울철에 또 우레의 소리가 있게 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재이는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신처럼 늙고 병든 이가 수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한결같이 병이나 치료하도록 맡겨두시고 책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이 어찌 맑은 조정에서 정승을 두는 도리이겠습니까. 또한 어찌 하늘이 경계를 고하는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신을 물리치시고 어질고 덕 있는 재상을 다시 뽑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어찌 이처럼 지나치게 인피하는가. 이 재이는 첫째도 내가 부덕해서요, 둘째도 내가 부덕해서이다. 만약 내가 부덕하지 않았다면 7월의 가뭄과 8월의 바람으로도 부족하여 또 오늘의 우레가 치는 변고가 있겠는가. 잠시도 몸을 편안히 못 하고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이러한 때에 보상(輔相)이 어찌 다만 스스로 인피하는 것만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모쪼록 안심하고 일을 보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와 우의정 이병모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 등은 지금 자신을 책하시고 음식을 줄이겠다는 하교를 보고 수성하시려는 성의에 대해 실로 이루 다 흠앙하고 칭송할 수 없었습니다.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리치는 것이 실로 오늘날 수성하는 데 있어 제일가는 급선무입니다. 신 등이 전례를 갖추어 면직되기를 청하는 것이 비록 대관(大官)으로서 자처하는 혐의가 있으나 그 직분이 정승이니, 또한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속히 신들을 물리쳐 주소서.
하늘에 본래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는 법이어서 일일이 그것을 사람의 일에 부회하기는 어려우나, 전하께서 오히려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그 연유를 궁구해 본다면 그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구구한 바람은 오직 27일과 28일의 바람을 잊지 마시라는 데 있으니 감히 이로써 경계하는 말을 올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8월 27일과 28일의 바람이 금년 흉년의 관건이 되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의 차자에서 ‘구구한 바람은 오직 그날의 태풍을 잊지 말라는 데에 있다.’ 하였는데 반드시 별도로 부회하는 은미한 뜻이 있다. 한나라의 유생들도 부끄럽게 여기는 바를 경들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경들을 위하여 개연히 여기는 바이다. 명색이 도움을 구한다고 해서 훌륭한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정원의 계사에 답하자마자 상신의 차자 또한 그러하니 곧 모두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다. 이것이 어찌 하늘의 견책에 실제로써 응한다는 도리이겠는가. 경들이 스스로 인피하는 청도 지나치다. 상참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경들은 사직하지 말고 아침이 되거든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대사헌 임시철(林蓍喆)을 체차하고 대사간 서매수(徐邁修)의 직을 파하였다. 그리고 이득신(李得臣)과 심진현(沈晉賢)으로 대신케 하였다.

 

10월 29일 계미

상참하였다. 동지사로 가는 세 명의 사신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대신의 연명 차자는 우상의 글이었는가?"
하니, 좌의정 김이소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자 중에 8월의 태풍을 잊지 말라고 말하였는데, 경들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부회하였는가. 지난번 대간의 계사를 벽에 걸어놓은 것이 어찌 위로 바람과 우레의 상(象)을 범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조정의 기상이 날로 저하되고 대간의 체모가 날로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날 대청의 거조가 족히 재앙을 부르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 말 또한 부회하는 것에 관계된 듯하나, 만약 경들이 8월의 태풍을 그날의 처분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긴다면 진실로 지나친 것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8월의 태풍에 대해서 신은 정녕코 그날의 처분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그 연유를 궁구해보면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하늘의 경고가 어찌 우연히 맞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봄부터 가을까지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 거의 풍년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한 줄기 바람이 재앙이 되어 갑자기 흉년이 되었으니 신은 그 바람이 오게 된 연유를 분명히 압니다. 신 등의 차자는 실로 부회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정사 홍양호가 아뢰기를,
"유구국의 표류인들이 만약 황성에서 저지를 당한다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제는 만민을 사랑하시니 어찌 막고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국경 밖의 일은 장수가 제재한다 하였으니 경들은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조정에 번거롭게 아뢰지 말고 편리한 대로 처리해서 기어이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문헌의 나라인데 서책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근래에 갖고 나오는 책들은 바로 패관류(稗官類)의 소품(小品)들이다. 요즘 사람들이 소품에 빠져 좋아하여 이러한 것들을 사오니 어찌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성인의 경서와 현인의 전으로 이미 나온 것들로도 외우고 읽기에 충분하다. 이번의 사행에서는 경서를 비롯하여 책을 절대 사가지고 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의 절목 정식(節目定式)과 수교 정식(受敎定式)을 모두 《통편(通編)》에 실어놓았는데 간혹 《통편》에 실리지 않은 것이 있고 또 《통편》을 편찬하여 반포한 뒤에 나온 새로운 정식도 있습니다. 비국 중에서 편집 당상을 차출하여 삼가 《수교집록(受敎輯錄)》의 예에 따라 일일이 수집하게 하고 이어서 매 3년마다 첨가해 편찬하여 영원히 계속해가는 것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실로 준봉(遵奉)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변경의 수령이나 첨사로서 임기가 차기 전에 체차되어 돌아오는 자에 대해서는 폄하되어 파직된 것인지 병으로 파직된 것인지를 막론하고 이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 선조 때의 고 정승 유척기(兪拓基)가 아뢰어 정식으로 삼은 적이 있고, 성상의 초년에도 고 정승 정존겸(鄭存謙)이 연석에서 아뢰어 거듭 정식으로 밝혔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법이 없어져서 부임하자마자 체차되더라도 모두 이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비록 ‘변방의 수령은 1년이 된 뒤에는 자리를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는 글이 있지만, 이것은 바로 잘 다스려서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자에게 특교를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빙자하여 기한 전에 지레 체차된 자들까지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병조에 명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했는데도 변방의 이력을 인정해 준 사람을 조사해 내어 아울러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이후로는 특교 외에는 한결같이 정식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헌 이득신(李得臣)과 대사간 심진현(沈晋賢)이 소회를 진언하기를,
"지금 돌아보건대, 성상께서 신하들을 집안 사람 보듯이 하시니 군신간에 의논하는 성대한 정사가 어찌 당(唐)·우(虞) 시대에 뒤지겠습니까. 다만 금령을 설치해놓은 한 가지 일만은 크게 평소에 우러러 바라던 바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금령이란 것은 사납고 어지러운 것을 금하는 것인데 지금은 충성스럽고 곧은 말조차도 금령으로 인하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이로 인하여 의리가 없어지고 형장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속히 재삼 생각해보시고 금령을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성명을 철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이득신을 체직하였다. 주대(奏對)를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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