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1권, 정조 18년 1794년 12월

싸라리리 2025. 8. 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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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갑인

차대를 하였다.

 

전교하였다.
"작년 겨울 정청(庭請)했을 때에 자궁의 마지못한 허락을 받아 하의(賀儀)는 금년 봄에 먼저 거행하고, 존호를 올리는 것과 술잔을 바치는 예는 내년 봄이 되거든 거행하기로 조정의 신료들에게 분명히 유시했었다. 어제가 바로 동짓날이라 대신이 예조의 당상관을 거느리고 청대를 하여 날짜를 가리는 일로써 품지(稟旨)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경하하고 송축하는 나의 마음은 여러 신하들보다 만 배는 될 것이다. 그러나 금년 가을 농사가 이러하고 백성들의 형편이 이와 같자 자전과 자궁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나치게 더하셔서 심지어 ‘작년에는 금년의 가을 농사와 백성들의 형편을 몰랐기에 군정(群情)에 몰려서 부득불 허락했었으나 지금와서는 결코 존호와 잔치를 받을 수 없다.’는 하교까지 하셨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다시 힘써 청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도리와 사체상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성을 쌓고 감동시켜 마음을 돌리는 것에 어찌 조정의 호소를 기다리겠는가. 나 소자가 성의로 우러러 감동시키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혼정성신하는 겨를에 바야흐로 간절히 청할 것이다. 만일 혹시라도 허락을 받는다면 즉시 대신과 대제학과 육조, 삼사의 장관을 명초하여 공경히 존호를 의논할 것이다. 경모궁의 존호를 의논하는 것은 자전에게 존호 올리는 것이 허락을 얻은 뒤에 해야 할 것이다. 그 아래에서 거행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형을 갖추지 않는다면 어찌 이러한 나라의 체모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별도로 전교를 내려 대제학의 권점을 내일 하라고 하였으니 응당 참여해야 할 신하들을 문이 열리는 대로 패초하여 모여 권점을 찍게 하라."

 

김종수(金鍾秀)의 죄명을 씻어주어 중추부에 도로 임명하고, 이어서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막중한 예는 모름지기 문형이 있어야만 행할 수 있다. 그 도리에 있어 어찌 아직 청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하여 인원을 갖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일각이라도 비워둘 수 없으니 전 문형이 국경을 나가기 전에는 형편상 전 문형이 마땅히 거행하여야 한다.
지난번의 일에 대해서 본심은 다름이 없었다는 것은 내가 알 뿐만 아니라 일이 이미 오래 되어서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 더구나 존호를 의논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문형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에 달려 있으니 관계된 것의 중함이 어떠하겠는가. 귀양을 갔다가 석방된 사람인 김종수의 죄명을 깨끗이 씻어주고 도로 중추부에 임명하라. 이어서 정원으로 하여금 그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와 회권(會圈)하라는 뜻으로 하유하게 하라. 대신의 처치는 오늘 정사에서 하겠다. 어찌 굳이 별도로 유시할 것이 있겠는가. 모두 형식적인 상투일 뿐이니 이 전교 한 장이 별도로 윤음을 구비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모쪼록 존호를 의논하는 일의 막중함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본정(本情)을 통촉해준 뜻을 체득하여 마음을 바꾸어 서둘러 올라와서 그날로 사은 숙배하라는 내용으로 입시한 사관으로 하여금 김 판부사에게 전유하여 그와 함께 올라오게 하라."

 

동짓날과 정월 초하루 진하(陳賀)하는 절목을 《오례의》에 따라 조하(朝賀)로 개칭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진하(陳賀)와 조하(朝賀)는 《오례의》에 기록된 체제가 각기 다릅니다. 근래에 계하하는 문자에서는 모두 진하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후로 동짓날과 정월 초하루에는 한결같이 《오례의》의 입계 절목에 따라 조하(朝賀)라고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겸춘추 김양척(金良倜)이 장계로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유시를 받들고 판부사 김종수가 있는 곳에 가서 전유하였더니, 그가 아뢰기를 ‘신이 스스로 죽을 죄를 범하고도 오랫동안 한가닥 목숨을 이어왔는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감격에 겨워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도 죄를 씻어주고 예전대로 중추부의 직함에 임명한다는 명을 내리시니 창황하고 두려워 다른 삶을 사는 듯 의심스러웠습니다. 사관이 이어 와서 성상의 유시를 선포하였는데 심지어 함께 들어와 숙배하라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이는 대개 존호를 의논하는 일이 중하고 문형의 회권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작년 이때 명정전에서 자전의 비답을 삼가 받들었던 사람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손가락을 꼽으면서 오늘을 기다려 왔었는데, 오늘 이 하교를 받드니 뛸듯이 기쁘고 마음이 저절로 설레였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어서 병든 몸을 싣고 도성문 밖까지 오는 계책을 하였지만 신이 이 생에서 다시 사람 축에 끼일 수 없음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아아, 신의 쌓인 죄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신도 알고 있습니다. 초봄 이후로는 만에 하나도 바라는 것이 없었는데, 삼가 6월 1일에 내리신 전교를 보니 마음속으로 번민하고 억울해하던 누명을 환히 통촉해 주시고 전후의 흉악한 무함이 햇살에 눈 녹듯이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밝게 씻어준 도리는 신이 그 사이에 말 한마디도 할 여지가 없게 하였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 성상을 뵌 뒤에 물러나 죽는다면 거의 눈을 감고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미천한 신의 거취가 실로 유독 천하의 대방(大防)에 관계되는데야 어쩌겠습니까. 겨우 성 밖에까지 나왔는데, 삼가 마땅히 저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겠으니, 천지 부모께서는 가련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양척이 또 대신이 지금 막 흥인문 밖에 도착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경이 사관 편에 붙여 아뢴 말을 보니 경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초봄에 그대를 꾸짖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허공을 지나가는 뜬구름 같을 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찌 경을 버리고자 했겠는가. 매번 거조에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인해 왕왕 남의 말에 쏠려 말을 경솔히 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내가 경을 저버린 것인가. 아니면 경이 나를 저버린 것인가. 그러나 이미 일이 지나가고 시일이 오래된 뒤에는 사냥꾼을 바라보고 절로 옛 생각이 나듯이 하는 것을 금치 못하여 고요한 밤에는 마주 대하고 말을 하고 싶었고 매양 한가한 때에는 발돋움하며 그대를 기다리곤 하였다. 때때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간간이 급한 상황을 구해 주기도 하였었는데, 반년 동안 묵묵히 참고 있으며 지금까지 소식을 하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경을 위한 고심 중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정말로 경을 버린 것이라고 여겼던가.
지금의 얘기는 우선 한편으로 제쳐 놓고 단지 수레에 멍에를 메거나 신발 신을 사이도 없이 황망히 달려와 명을 받들어야 할 것이니 그것이 천리와 인정의 당연한 것이다. 만일 혹시라도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마땅히 별도로 반드시 오게 할 거조가 있을 것이다. 백 명의 기병이 고삐를 나는듯이 잡고 밤에도 성문을 잠그지 않고 있으니 또한 어찌 보통의 분수로서 감히 편안히 여길 바이겠는가. 함께 온 사관은 이 별도의 유시를 가지고 기어이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서 하교하기를,
"전전 대제학 김종수를 명초하고 삼공 이하로 응당 회권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을 모두 명초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상소하기를,
"신이 다행히도 성명의 시대를 만나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망령되이 성덕을 하(夏)·은(殷)·주(周) 시대처럼 높이고 의리를 일세(一世)에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니 밝은 일편단심은 설령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성품이 이미 꽉 막혔고 지혜가 두루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아 왕왕 무지망작하는 것이 마치 풍병을 앓는 사람이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지와 같이 어지신 성상께서 허물을 감추어주고 살 길을 지시해주기를 곡진하고도 지극하게 하셨습니다.
초봄에 있었던 일로 말하자면, 스스로 한 잘못이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는데도 ‘그가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내용의 은혜로운 하교를 내리시어 특별히 신의 속마음을 인정해 주셔서 죽을 상황에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명하여 밝혀보라고 했더라도 그간에 입을 놀릴 여지가 없었을, 전후 사람들의 지극히 참담하고 불측한 말들이 이로부터 모두 저대로 일어났다가 저대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다시 살려준 은혜를 받은 신하가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신처럼 뜨거운 국에 이미 놀라고도 끓는 물을 더듬고 어깨가 부러졌는데도 치료하지 않은 채 스스로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위로 군부를 번거롭게 했는데도, 임금께서 백방으로 구해주어 끝내 살아나게 해준 경우는 신 외에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이 성밖에 있는데 성상께서 갈수록 더욱 전무후무한 하유를 하시니 진실로 한 걸음이라도 옮길 만한 형편이 된다면 어떻게 감히 꼴 사납게 꼼짝도 않은 채 마치 앉아서 은혜를 바라는 자처럼 하겠습니까. 다만 살아서는 덕을 저버린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혼이 될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초봄에 한강을 건너갈 즈음에는 ‘밝히고 드러낸다.[明暴]’는 두 글자를 말하였고, 여름에 돌아오라는 유시를 내리면서는 ‘죄를 안다.’는 한마디로 가름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큰 결단을 내린 것은 일의 체모가 막중한 데 따른 것으로 거듭 본래의 마음은 다름이 없음을 언급하였다. 대개 내가 통촉해주고 양찰하는 것은 명명백백하여 혹시라도 틀리지 않으니 경의 상소 중에 ‘형적으로 드러난 것 밖에서 마음을 허여해 주어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해 주었다.’고 한 것은 도의 참된 경지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란에 빠졌으면서 이러한 은혜를 만난 자가 유사 이래로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내가 경에게 은혜를 갚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나 경은 마땅히 나에게 갚기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은 갚지 않음이 없고 좋은 말에 대해서는 좋은 말로 답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 의리를 생각하여 들어와서 권점을 찍는 데 참가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박종갑(朴宗甲)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관각(館閣)이란 칭호는 송나라 때에 비롯된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회의할 때 춘추관을 임시로 관각이라고 칭했었다. 그러다가 내각을 설치한 뒤에 비로소 관각의 제도가 갖추어졌다. 무릇 패초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내각이 모두 의논에 참여하는데 하물며 막중한 존호를 의논하는 회의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각 제학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되니 정관(政官)들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패초해서 정사를 해 의망해 들이라."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서천(舒川)에 사는 노인 권연(權挻)이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년에 회방(回榜)을 맞이한다고 탐문하여 보고하니, 특별히 첨지중추에 붙여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지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을묘

이문원에 나아가 판중추부사        김종수를 소견하였다. 종수가 21번이나 패초했는데도 나오지 않자, 하교하기를,
"어제 특별히 하교한 말이 있었는데 내 어찌 식언을 하겠는가. 마땅히 돈화문(敦化門)에 나아가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인접하겠다."
하고는, 가마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갔다. 영의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지금의 이 거둥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문까지 나가서 판부사를 보려고 한다."
하였다. 낙성 등이 아뢰기를,
"판부사를 인견하는데 어찌 반드시 몸소 문에까지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대신은 바로 다시 기용하여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어찌 특별한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말은 미덥지 않아서는 안 된다. 판부사가 들어와 명을 받들기 전에는 어찌 대내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소차(小次)에 들어가 그가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릴 터이니, 이러한 뜻을 정경을 보내 돈독히 유시하라."
하고는, 마침내 가마를 돌려 이문원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에게 명하여 돈독히 유시하게 하였다. 치중이 돌아와 아뢰기를,
"대신이 말하기를 ‘중추부의 직함은 삼가 이천(伊川) 선생이 서감(西監)의 직책에 한 번 사은했던 의리에 비기어 이제 사은 숙배하고자 합니다만 권점을 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의 형편상 명을 받들 가망이 만무합니다. 다만 신이 이번에 귀양가 있던 곳은 신의 돌아가신 종숙(從叔)이 귀양가 있던 곳과 서로 비슷한데 종숙이 용서를 받은 후에 이어서 즉시 치사하였으니, 신도 이 예에 의거해서 만약 곡진히 살펴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권점하는 일도 나아가 참여하겠습니다. 치사를 청하는 소장은 이미 지어 두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이천이 서감의 직책을 사은했던 의리를 취하고, 권점의 일을 무릅쓰고 맡는 조건으로 기어이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얻으려고 하였다. 사직을 원하는 청을 어찌 가볍게 허락해줄 수 있겠는가. 모쪼록 군신간의 대의를 생각하여 즉시 일어나 사은 숙배하고, 이어서 권점의 일을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 명하여 돈독히 유시하도록 하였다. 이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대신이 들어와서 숙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종수가 장전(帳殿)에 나아와 사은 숙배하였다. 상이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오늘 경이 예전처럼 등연한 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애초에 예상도 못하였다. 첫번째 돈유한 것과 어제 내린 비답에서 대략 이미 말하였지만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나와 같고 지금의 경은 옛날의 경과 같다. 그런데 경이 번번이 일에 저촉되어 스스로 화에 걸렸으니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지난번 경이 만난 화가 과연 어떠하였던가. 그때의 교시 중에 ‘그 죄를 밝히고 그 마음을 드러냈다.’는 여섯 글자로 일전의 돈유 중에 있었던 ‘죄를 안다.’는 두 자의 장본(張本)을 정하였고, ‘죄를 안다.’는 두 자로 또 오늘 서로 만나는 계기를 삼은 것이다. 나의 고심을 경은 아는가, 모르는가. 이번에 돈독하고 절박하게 하였던 것이 비록 막중하고 막대한 일로 인해서였지만 또한 경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조리(條理)를 마친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경이 평소에 일처리 하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너무나 조급했고 좋게 말하면 양기(陽氣)가 지나치게 강해서 경이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계획하는 것이 매우 요긴하지 못했다. 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경의 자취를 가지고 경의 죄를 논한다면 경이 과연 무슨 말로 스스로 해명할 것인가. 경을 살리고자 하여 먼 변방으로 귀양보낸 것이니,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6월까지 오래 끌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온 조정에 파란이 일어나는 때를 당하여 갑자기 경을 위해 주선을 해준다면 한갓 무익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월에서 4월까지 이르렀는데 4월에 풍파가 있어 경의 일 같은 것은 부차적인 일이 되었으므로 6월까지 기다려서야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귀양을 가던 초기에 또한 어찌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경의 죄 때문에 경이 귀양을 가는 것이니 비록 소식을 묻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경이 떠나는 것을 생각하니,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으므로 그 동안 이에 대해서 많이 근심하였다. 지금 거의 일년 가까이 지난 후에 만났으니 지난 일은 말하지 말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의 일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겠다. 경이 소에서 진술한 마음과 소 중에 쓴 말은 경의 말이 없어도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 남들의 말은 우선 차치하고라도 신하가 되어 이런 죄명을 받게 되었는데 반드시 나의 설명이 있은 뒤에야 경의 마음이 밝혀질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찌 해괴하지 않겠는가. 1월 22일 연석에서 아뢴 것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또 연석에서 아뢴 내용과 상반되는 소를 올렸으니, 경이 무슨 말로 해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에 의하면 경이 연석에서 아뢴 것은 일체 전의 견해와 상반된 것으로 일에 따라 항복을 청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경이 아뢴 것은, 단지 막중한 일에 대해서 감히 다시 제기할 수 없다는 뜻이었음을 알고 있다. 상소가 나오자 또 스스로 범하였으니, 내가 비록 경을 안다고 하나 어떻게 경을 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정말로 옳습니다. 신의 본뜻은 과연 9월 소매에서 꺼내 올린 차자의 일은 감히 제기하여 아뢸 수 없다는 것으로 내용을 삼았는데, 외간의 의논은 신이 채제공에게 항복을 청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어찌 다시 아무개의 이름을 꺼낼 필요가 있겠는가. 대저 그때 조보의 잘못 쓴 한 글자는 공교롭다고 하겠다. 또 경이 비록 소를 올리고자 했더라도 어찌하여 조보를 상세히 보지도 않고 지레 마음 내키는 대로 소를 올렸단 말인가. 경은 유독 ‘쥐를 잡고 싶어도 그릇을 깰까 저어된다.’는 의리를 모르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그릇을 깰까 저어된다는 하교는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신이 소의 내용을 이미 윗조항에서 진달하였으니, 그렇다면 마무리짓는 말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래 조항을 마무리하는 말로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도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나 보다. 무슨 시급한 일이 있다고 이렇게 소를 올렸는가. 전날 연석에서 아뢴 것과 다음날 소로 올린 것은 참으로 그 까닭을 찾아보아도 알 수 없다고 하겠다. 유배갈 때부터 용서받아 돌아오게 될 때까지, 또 용서받아 돌아와서부터 마무리가 지어질 때까지 노심초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이 거의 죽을 뻔한 죄는 바로 윗항목에서 써서는 안 될 글자를 잘못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모함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의 자취가 드러나기 전에는 어떻게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있겠는가. 또 그 때에 영상을 함께 언급하였는데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이제야 경을 보니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경이 본래 말을 삼가하지 않는데다가 집안이나 몸을 돌아보고 연연해 하지도 않으니, 다시 사단에 걸릴 염려가 없다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경이 비록 ‘진실로 사리를 알았다.’고 말하지만, 부자[烏啄]는 먹을 수 없고 고기는 맛있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진실로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경이 참으로 알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지금의 제일 가는 대책은 신의 사퇴하려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퇴를 한다면 경은 마땅히 일민(逸民)이 될 것이고 세상도 군평(君平)103)                  을 잊을 것이니 모두 무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경이 조금 전에 인용한 경의 종숙의 일은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본래 이 일은 서로 같지 않은데 곡진히 양찰해 주시기를 바란 까닭에 이런 말을 덧붙여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 봉조하와 경의 종숙은 바로 위에서 시종 보전해주는 은택을 내린 것이고, 경이 청한 바는 바로 아래에서 간절하게 사퇴하기를 청한 것이다. 치사(致仕)라는 이름은 마찬가지이지만 어찌 혐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정(鄭) 봉조하는 병으로 물러나 쉬면서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고 시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안하는 반열에 참여하는 일에 있어서는 봉조하도 들어와 참여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경이 비록 사퇴한다 하더라도 어찌 전과 같은 말버릇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경이 만약 다시 소차를 올리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허락해줄 수 있지만 그 또한 굳이 경의 종숙의 일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 직함은 중추부의 직함과는 다르니 신이 어찌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사퇴를 청한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단지 현재 화를 만났기 때문에 간절히 진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 그 명예를 이루어 주고자 하면서도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것은 경의 종숙의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장차 경이 또 다시 망발을 한다면 명색은 치사라 하나 치사의 실질은 없을 것이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니 무슨 혐의쩍을 것이 있겠습니까. 역대 군신 사이의 일을 가지고 보건대, 공훈이 있고 서로 마음이 맞으면 종당에는 반드시 치사로서 결말을 지었습니다. 이제 신이 만약 봉조하라는 직함을 얻어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어찌 신하와 임금 모두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또 신이 이미 이러한 종시토록 살려주고 이루어주는 은혜를 받았으니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망령된 짓을 다시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본래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만약 치사를 허락해 준다면 명예를 이루었다고 여기겠는가?"
하니, 종수가 그렇다고 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비록 명예를 이루는 것으로 다행스럽게 여길지라도 나는 서글픈 마음이 없지 않다."
하자,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어찌 성상을 알현할 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은 바로 섣달 3일이다. 선 대왕의 천지와 같이 감싸주는 덕과 일월처럼 비추어주는 밝음 덕분에 나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이요, 경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명예를 이루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것을 얻으면 살고 이것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내일을 넘길 수 있겠는가. 해마다 섣달 3일에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경의 치사를 허락한다면 그 또한 굳이 어렵게 여길 것은 없다. 그런데 선마(宣麻)104)                  할 때에는 내가 마땅히 전각에 임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큰 예절이다. 날이 비록 늦었지만 선마하고 전문을 올리기를 기다린 후에 빈청에 모여 권점하는 일을 완결하도록 하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문형을 의논하여 천거하는 것은 신과 같은 처지로는 무릅쓰고 담당하기를 바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문형의 천거는 전 문형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논핵을 입었으면서도 대신할 자를 천거한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혐의할 필요는 없다. 대저 문형은 지극히 중요한 직임이므로 전에 천거했던 의망을 가지고 낙점할 수도 없고 도당에서 의논하여 천거할 수도 없다. 때문에 반드시 경으로 하여금 회권(會圈)의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가 치사하니, 전교하기를,
"아, 옛적 동궁에 있을 때에 이 대신을 주연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그때 《상서》와 《한서》를 강하면서 한두 번 토론하였는데, 대개 묵묵히 마음에 합치되는 것이 있었다. 즉위한 초기에 제일 먼저 발탁하였는데 한 해 만에 등급을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엄숙하게 부월을 가지고 나의 《춘추》의 대의를 게시하였고 빛나는 문장으로 나의 정사를 빛내었다.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이르러 돌보아주고 예우해 주어 곧 신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그의 형적일 뿐이요 내가 취한 것은 그의 마음이니, 단점을 살펴보아 그 장점을 알았고 비방이 일어나면 명망도 뒤따랐다. 함정에 빠지고 돌맞는 식으로 거듭 화를 당할 때에도 오직 나만은 그의 편에 있었고 스스로 잘못해서 비난을 받을 때에도 오직 내가 있었으니, 전후로 이 대신의 처지를 위하여 스스로 많이 생각하였다고 하겠다. 헤아려 보건대, 초봄에 사단이 일어난 이후로 곁에서 엿보는 자들이 얼마간 있었지만 모두 일소에 붙여 버렸다.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나와 같고 지금의 경은 옛날의 경과 같다.
이미 면대하여 사퇴를 청하는 즈음에 다시 십수 년 동안의 간절한 소원을 거듭 말하고 평생 동안의 만남을 일일이 서술하면서 남은 생애나마 보전해 주기를 원하였는데, 그 뜻은 절실하고 그 말은 간절하였다.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회권의 일을 완결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진퇴의 큰 결단을 삼았으니, 비록 내가 결코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나 그의 물러갈 생각만 있고 나올 뜻이 없는 마음은 빼앗기 어렵다. 그런즉 그의 명예를 온전히 해주고 그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주어 신하와 임금이 함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더구나 내일이 어떤 날인가. 작년 이 날에 ‘매화에 붙이는 시[寄梅花詩]’ 한 편을 지어 만년을 보호하려는 뜻을 표시하였으니, 이 대신이 이 때에 이러한 청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아랫사람의 청을 윗사람이 따라주는데 어찌 헛된 형식을 쓰겠는가. 행 판중추부사 김종수에게 특별히 간절한 치사(致仕)의 청을 허락하여, 전(殿)에 나아가 선마(宣麻)하고 그의 가는 길을 전송하노라."
하였다.

 

김종수를 봉조하로 삼았다. 인정전에 거둥하여 선마하고 직접 사은하는 전문을 받았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대제학의 권점을 하였다. 【10점은 서유신(徐有臣), 9점은 심환지(沈煥之)·서정수(徐鼎修)·김재찬(金載瓚)이다.】  전 대제학 김종수가 천거하여 서유신(徐有臣)을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심환지(沈煥之)를 규장각 제학으로 삼았다.

 

12월 3일 병진

대제학 서유신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선친은 나의 스승이었다. 내가 경전에서 힘을 얻은 것에는 경의 선친의 도움이 가장 많았다. 경의 선친은 경전을 외기를 자기 말을 외듯이 하여 소주(小註)까지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옛날의 공을 되새겨 보아도 그것을 갚을 길이 없었는데 지금 경이 바로 문형에 선발되었으니, 나의 허락하는 비답이 경에게 내리지 않으면 누구에게 내리겠는가. 더욱이 주연에서 경에게 명하여 《좌씨전》의 구두를 정리하는 일을 맡기고 나서 경에 대해 칭찬하고 인정한 자가 있었는데, 이제서야 과연 말을 실천하게 되었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명에 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6일 기미

대제학 서유신이 세 번째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소명을 어기니, 전교하기를,
"이렇게 패초하는 명을 어긴다면 비록 오늘 자전과 자궁께 허락을 얻는다 하더라도 존호를 의논하는 거조를 누가 담당하여 거행하겠는가. 사체와 도리로 헤아려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제학 서유신을 중하게 추고하고 다시 패초하라."
하였는데, 패초를 어기고 전지를 받들지 않았다.

 

영의정 홍낙성이 2품 이상의 대신을 거느리고 빈청에서 아뢰기를,
"양덕(陽德)이 숨은 가운데 빛나고 하늘의 음덕을 내리시어 자전께서 51세가 되셨고 자궁께서는 천수를 누릴 기회를 여심에 상전 벽해(桑田碧海)를 헤아릴 정도의 장수를 더하시어 장차 회갑 때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성상의 정성이 아름다움을 드날리는 데에 이르렀으니 경사를 꾸미고 싶은 신들의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경모궁의 지극한 덕은 멀고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두루 다 무젖었고 숨은 빛은 우주에 두루 빛나 신령스럽고 장구한 운을 크게 열었고 창성할 상서를 영구히 내려주셨으니, 이에 높이 보답할 예를 상고하고 돈독히 도와주시던 은혜를 크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자 좋은 경사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송축하는 소리가 일제히 드높습니다. 성상께서 어버이의 나이를 기억하여 기뻐하는 마음과 다함이 없는 효성스런 생각으로 어버이의 덕을 선양하고 천명하여 눈앞에서 밝게 살피신 것은 반드시 동짓날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양하고 천명하는 방법은 자전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데 있고 자전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 것은 천지와 조종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데에 있습니다. 신들이 오늘날의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만둘 수 있는 것이라면 동짓날 연석에서의 하유를 감히 즉각 우러러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서로 이끌고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데는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신하들이 임금의 덕을 찬양한 것이 당(唐)·우(虞) 시대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聖)이니, 신(神)이니, 무(武)니, 문(文)이니 하였고 또 ‘임금의 덕에 허물이 없어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존호를 올리는 시초였습니다. 그런데도 후세에서는 익(益)과 고요(皋陶)를 아첨한다고 여기지 않았고 요·순의 성명함으로써 의당 성인을 자처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말을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하기를 ‘임금답구나! 순이여. 높고 높도다. 천하를 두었으되 간여하지 않았구나.’ 하셨는데, 그 역시 간여하지 않았을 뿐으로 지나치게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 성상의 성덕과 대업, 크고 우뚝한 공렬에 대해서 신들이 작년에 아뢴 것은 바닷물을 표주박으로 헤아리듯이 그 만분의 일 정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지금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감히 다시 일을 장황하게 벌여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나 그 신명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뼛속까지 무젖어들어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진달해 보겠습니다.
제왕의 덕은 효성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타고난 효성과 선대의 뜻을 이으려는 정성을 지니시고 몸소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효행을 실천하시고 덕은 문왕과 무왕에 필적할 만합니다. 탕약을 시중드는 10년 동안 옷을 벗지 않아 선왕께서 독실히 사랑한다고 유시하셨고, 서무를 대리 청정 하는 동안 밥먹을 여가도 없이 부지런히 하여 종국(宗國)이 영원히 중함을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으니, 효손(孝孫)이라는 은인(銀印)과 유서(諭書)가 빛나고 빛납니다. 자전과 자궁의 뜻을 잘 받들어 밤낮으로 즐겁고 화락한 마음이 풍성하게 하였고 경모궁에 대한 참배를 언제나 공경히 하여 《궁원의(宮園儀)》를 찬정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늘이 보살펴주시고 신이 도와주신 덕분에 마침내 용이 서린 듯한 땅을 가려뽑아 묘소를 영구히 봉안하고, 새로운 고을을 만들어 풍읍(豊邑)을 옮겨놓는 뜻을 담고서 어진(御眞)을 받들어 문안하는 예를 대신하였으니,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이 완비되었고 온 나라가 효에 흥기되었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 하였으니, 아아, 전하의 효성은 성대하십니다.
제왕의 도는 학문을 주로 하는 것보다 먼저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우임금처럼 촌음을 아끼시고 탕임금의 반명(盤銘)처럼 날로 새로워지려는 뜻에다가 성명(性命)의 근원을 통관하고 공(孔)·맹(孟)의 학을 곧바로 계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육경(六經)을 드러내어 빛내자 이단이 사라지고 주자의 학을 발휘하자 정학이 밝아졌습니다. 한 글자 한 마디에도 뭇 성인들의 깊은 뜻을 드러내었고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실천하여 만세의 법도가 되셨습니다. 그 하늘을 섬길 때에는 조심스럽고 공경스러우며 조정에 임할 때는 위의가 있고 근엄하니, 공경과 위의가 확립되어 겉과 안이 서로 바로잡히고 온화하고 순한 기운이 쌓이여 영화가 겉으로 드러났습니다. 덕은 은하수와 같이 하늘에 빛나고 도량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경위(經緯)가 찬란하게 이루어졌고, 행동은 옛 법도와 합하였으니, 백성이 생겨난 이래로 학문이 전하의 시대보다 성한 때는 없었습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시종일관 학문에 주로 할 것을 생각하니 그 덕이 저도 모르게 닦여진다.’ 하였으니, 아, 훌륭합니다.
제왕의 법은 의리를 밝히는 것보다 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타고난 용맹과 지혜로 기미를 환히 통촉한 뒤 먼저 용단을 내려 부정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인륜을 닦아 해와 별처럼 밝게 하셨습니다. 한 부의 《명의록》은 우임금이 정(鼎)에 탐학한 짐승을 그려 게시한 것처럼 삼엄하였으니, 소리를 크게 하거나 기색을 엄히 하지 않고도 나라의 형세를 태산 반석과 같이 안정하게 두었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춘추》가 지어지자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하였다.’ 하였으니, 아아, 훌륭합니다.
성인의 공은 백성을 보호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혹 제대로 살지 못하지나 않나 염려하는 덕으로 적자를 보호하듯이 하는 은혜를 미루어 내수사에서 노비를 추쇄하는 법을 폐지하고 궁방의 절수전도 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늙도록 시집 장가가지 못한 자들은 모두 짝을 맺게 되어 옹안(㴩鴈)의 시를 부르게 되었고, 맨 몸으로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모두 가혹하게 착취하는 고통을 면하게 되었으니, 자손을 두고 먹고 살 수 있게 되어 가난한 집에도 상서롭고 온화한 기상이 넘치고 관가에는 가혹하게 긁어들이는 정사가 없어졌습니다. 열성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하고 선조께서 신포를 감하였던 은전에 부합하여 그 은혜와 덕이 천지와 함께 영구히 내려갈 것입니다. 게다가 형벌을 삼가고 어루만져 사랑함으로써 거듭하며 법칙을 선포하여 안정시키고 품어주니 우리 나라의 근본이 이미 공고해져 이 해에 억만년 무궁하게 이어갈 큰 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모든 백성들이 다 너의 덕을 본받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백성들을 화목하게 하라.’ 하였으며, ‘하늘에 영구한 국운을 기원한다.’ 하였으니 아아, 성대합니다.
성인의 교화는 법을 세우는 것보다 융성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하늘의 이치를 우러러 살피시고 기자의 홍범의 가르침을 묵묵히 지켜 바람과 비로 북돋고 윤택하게 하며 풀무로 도야하고 녹여주듯이 하셨습니다. 습속이 형기(形氣)에 국한된 것은 그 찌꺼기를 씻어주고, 상대와 나라는 사사로운 뜻이 얽혀 있는 것은 그 고질적인 병통에 침을 놓고 뜸을 떠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직접 명하고 귀를 끌어당겨 타이르지 않아도 자연히 봄날에 얼음이 녹듯이 융화되었고, 시고 짠 맛이 함께 큰 조화를 이루듯이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떨어져 지내던 사람들이 화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글방과 상서(庠序)의 훌륭한 선비들이 여러 가지 기예를 달리하면서도 법도를 하나로 통일시키게 되었고, 중문을 활짝 열어 온 천지를 뜰안처럼 여기는 큰 기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개 전하께서 위에서 법도를 세움에 사방의 법이 따라서 본보기를 취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천하의 사람들은 각자의 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가 없으나 능히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성인이 나와서 아래로 오행(五行)을 펴고 위로 오륜(五倫)을 맞추어 모든 일거일동이 다 표준이 되기를 기다린 뒤에야 사람마다 가지고 있던 법이 다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극(皇極)의 설인데 예로부터 임금들 중에 이 뜻을 분별하고 이 도를 행한 사람이 드물어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영고(寧考)의 큰 계책을 이어받고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정밀한 의리를 부연하여 이미 그 법을 세우셨고 그 효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수부강녕(壽富康寧)의 순수하고도 큰 복이 냇물이 흘러내리듯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또 경사(卿士)와 서민들에게까지 베풀어 내려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부강녕의 즐거움을 흠뻑 누리게 하셨으니, 위대합니다. 황극의 쓰임이 전하를 기다려서 비로소 넓어지고 성신(聖神)의 능력과 더할 나위없는 공효가 이에 완비되었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기 성명을 바로잡으니 이에 이롭고 바르다.’라고 하였으니, 아아, 훌륭하십니다.
생각건대 덕이 있는 자는 지위와 장수와 복록과 명예를 얻는 법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20년이 되어가니 주왕과 같이 오래 살며 교화를 베푸는 천수를 누리시는 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 가지 상서로운 일이 다 모여들고 만 가지 복록이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그 명예를 차지하고자 하지 않으신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의 윤허하지 않는 비답과 일전에 유시에서 보여준 성상의 의도를 신들이 아무리 미련하다 하나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들이 갈수록 강력하게 청하고 간절하게 고집하는 것은 바로 작년의 비답과 일전의 유시 때문입니다. 대개 성상의 효성을 드러내는 데에 이 비답과 이 유시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잘 드러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전하의 천지와 같고 일월과 함께 할 만한 성대한 덕업과 풍성하고 높은 공렬은 진실로 역사에 다 쓸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제일 먼저 성상의 효성에 대해 진달한 것은 그것이 모든 행실에 있어서 근본이고, 다스리는 법과 정사하는 계책은 그것을 들어 미루어 시행하는 데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진달한 것은 오히려 성상의 효성 중에 하찮은 절목들일 뿐이고, 그 지극히 정미한 의리와 지극히 조심스러운 일념은 오직 선왕의 뜻을 빛내고 선왕의 훌륭한 덕을 천명하는 데에 있으니, 연석에서 하교하신 내용을 중외에 반포한다면 목석도 감동시키고 어리석은 돼지나 물고기조차 미덥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펴야 할 정리에 대해서는 의식 절차가 허여되는 한도 내에서 힘써 노력하고, 본받아야 할 예에 대해서는 절차와 형식을 성대하게 하여, 인정에 따라 그 예를 제정하고 예를 제정하되 인정에 근본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버이에게 보답하려는 정성을 인하여 성상께서 직접 실천하시고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미루어 성상의 마음에 간직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이 돌보는 바이고 인심이 함께 하는 바이며, 삼대 때부터 이미 강명한 바이고 선조들께서 일찍이 받으셨던 바로 응당 행해야 할 큰 전례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다시 지나치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한 조항을 거절하는 것으로써 미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고자 한다.’고 하교하시기까지 하셨으니, 성상의 효성은 볼수록 더욱 빛나십니다. 신들이 이른바 갈수록 더 강력하게 청하고 더 간절하게 고집한다고 한 것은 바로 성효가 갈수록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주상이 밝고 성스러운데 덕이 널리 펴지지 않는 것은 유사의 잘못이라고 한 것은 다만 범범하게 지적한 논의일 뿐인데, 오히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들이 볼수록 더욱 빛나는 성효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청하고 더욱 간절하게 고집하지 않거나 대서특필하여 역사책에 실어 천하 만세에 알릴 방법을 생각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스스로 군자들의 비난에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그 이름을 차지하지 않고자 하시는 것은 성효 때문이며, 신들이 반드시 전하께서 그 이름을 받게 하고자 하는 것도 성효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이름을 차지하지 않고자 하시는 전하의 그 마음 때문에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는 것이요,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기 때문에 신들이 반드시 전하께서 기필코 그 이름을 받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인륜과 사물의 법칙이 말미암아 확립되는 바요, 천리와 인정의 필연적인 것이며, 자전과 자궁께서 반드시 기대하고 기다리는 바요, 천지와 조종이 반드시 기뻐하실 일이니, 전하께서 아무리 굳게 마음을 지키고 강경하게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되겠습니까.
신들이 그러므로 감히 작년의 비답과 일전에 내리신 유시를 가지고 성상의 아름다움을 천명하고 현호(顯號)를 드날릴 제일의 의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성대한 덕업과 풍성하고 높은 공렬은 장차 천명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천명될 것이므로 신들 역시 감히 그 말을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익(益)과 고요(皋陶)가 후세에 비난을 받지 않았고 요·순이 익과 고요의 말을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전하를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전하께서 어찌 간여하실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존호를 올리려는 청을 윤허하시어 자전의 마음에 답하시고 조종의 마음을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작년에는 그래도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하였던 전례를 가지고 청하였기에 비답을 내려주고 연석에서 하교하면서 목메인 소리로 유시하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결코 받고 싶지 않다는 본뜻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 경들의 계사를 보니 도리어 작년의 비답과 연교를 가지고 유양(揄揚)하는 단서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 무슨 말인가. 이는 모두 나의 성심(誠心)이 경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이것은 말만 가지고 굳게 거절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다시 등연할 때에 분명히 유시하겠다."
하였다.

 

빈청이 아뢰기를,
"양기가 이미 회복되어 때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자전과 자궁에 존호를 올리고 축수의 술잔을 올리는 것이 이 때에 있으며, 유사가 규례를 살펴보아 거행하는 것도 이 때에 있으며, 중외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것도 오직 이 때입니다. 그런데 자전과 자궁께서 재해가 든 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분부를 받들고 나자 신들은 머리를 모으고 서로 돌아보며 남몰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아, 아름답고 성대한 일입니다. 우리 자전의 연세가 50이시고 자궁의 춘추는 환갑이 되셨는데 실로 이는 국조 이래 없었던 것으로 지난 역사에도 드물게 보이던 일이니 이 기쁨을 장식하는 방도를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작년 이 달에 이미 윤허를 받은 것인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천히 할 수 없는 일이고 늦추어서는 안 되는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농사가 풍년이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런 지나치게 겸양하시는 분부를 내리시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천지 부모에게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무릇 도리에 합하는 일이면 덕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숭상하는 것도 지나친 유양(揄揚)이 아니요, 인정에 맞는 예라면 연회를 열어 하례하고 즐기는 것도 장황하게 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을 세상이 평화롭고 백성이 즐거울 때나 하는 거조라고 돌려버린 적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건대 자전과 자궁께서는 건원(乾元)에 짝할 만한 덕화로 일찍부터 내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셨고, 덕은 문왕의 어미를 이어 그 대를 이은 아름다운 덕에 모두들 우러러 칭송하였습니다. 연세가 모두 높아 진실로 선조(先祖) 때 옥책을 올렸던 나이에 합하였는데, 성효는 지극하여 임금으로서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게다가 문손(文孫)의 키가 점점 자라나고 육궁(六宮)의 온화한 기상이 바야흐로 흡족한 상태입니다. 백료들이 전에 이미 힘껏 간청한 데 대하여 자전과 자궁께서 끝까지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 어찌 도리에 합하고 인정에 맞기 때문에만 그런 것이겠습니까. 도리나 인정에 있어서 이와 같이 진실로 잘 합치되었는데도 바로 한때의 농사 때문에 욕의(縟儀)를 정지하게 된다면 뭇사람들의 놀랍고 실망스런 마음은 진실로 말할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과 효성으로 반드시 전궁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릴 방도에 대해 익숙히 강구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도 측은하여 견감하고 구휼하는 방도는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니 혜택이 널리 미쳐 재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좋은 경사가 거듭 겹치는 때를 만나 천양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의식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하늘의 화기를 이끌어들이고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길 것입니다. 더구나 계해년 경사를 치를 때에도 제도에서 진휼하는 정사를 펴던 해가 아니었습니까. 선조의 백성을 사랑하던 마음으로서도 오히려 성대한 예를 거행하였고, 성후(聖后)의 온화하고 겸손한 덕으로도 끝내 힘써 따르셨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은 오직 선조의 뜻을 따라야 하며, 자전께서 본받아야 할 것은 오직 성후께서 하신 일을 받들어야 합니다. 신들은 다만 예에 의거하여 전하께 청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마땅히 정성을 쌓아 자전과 자궁께 청하신다면 자전과 자궁께서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시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반드시 힘써 마음을 돌릴 방도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날을 헤아려가며 앙축하기를 바라던 나머지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고 또한 느긋하게만 있어서도 안되겠기에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전하 아래에 와서 일제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전과 자궁께 여쭈어 기어이 믿어 따르게 하소서.
새해 첫날의 하례(賀禮) 같은 것은 본래 상례(常禮)로서 어느 해이고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른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또 선조 때에 이미 행했던 전례가 있어 상고하여 따를 정식이 있는 데이겠습니까. 삼가 성모께서 환갑을 맞이하시던 해를 살펴보건대, 그해 초에 먼저 만세를 축원하며 직접 축수를 올리는 보기 드문 전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큰 복은 옛날과 똑같이 부합되고 옛 의식은 바로 뒤따라야만 하니, 동짓날 예조 당상이 아뢴 것은 실로 근거 없는 말이 아닙니다. 이 역시 단연코 따라야 하고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빨리 하례와 존호를 아울러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셔서 신민들이 함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동짓날 연석에서 경들에게 말하였다. 내년 봄에 존호를 올리는 것과 연회를 올리고 진하하는 것 등의 예를 아울러 거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와 경들이 이미 자전과 자궁께 허락을 받은 것인데 자전과 자궁께서 이처럼 강경하게 거절하시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농사 때문이다. 옛날 선조 계해년105)  에 바로 춘추 50세의 경사를 치렀는데, 그때 4도(道)에서 진휼을 베풀고 있었으나 또한 마지못해 연례(宴禮)를 허락하셨다. 그 후 계사년에도 4도에 진휼을 베풀 때를 만났으나 또 팔순을 맞는 연례를 행하였다. 정묘년 인원 성후(仁元聖后)의 회갑이 되던 해에도 4도에 진휼을 베풀 때였는데 의식대로 경사를 치렀으니, 이 고사를 원용하여 내가 자전께 온종일 힘껏 청하였다. 그런데 또 경들이 모두 나와 일제히 호소하는 것을 만났으니 다시 뭇사람들의 심정을 가지고 자전과 자궁께 들어가 아뢰겠다."
하였다.

 

차대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해 겨울에 한 비답과 동짓날의 유시에서 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텐데 나의 성의가 부족한 탓에 또 오늘의 거조가 있게 되어 장황하게 떠벌리며 마치 응당 청해야 할 일인 것처럼 하였다. 무릇 일에는 뭇사람들의 마음에 못이겨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 있기는 하나, 이 일이 어찌 마지못해 따를 일이겠는가. 경들도 내가 반드시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에는 봉선(封禪)의 법이나 유양(揄揚)의 거조가 없으니 바로 존호를 올리는 이 절목은 경솔하게 먼저 의논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빈청의 계사는 체모가 중하여 시작하였다가 바로 중지하는 예가 없으니, 숙묘 때부터 규례가 그러하였다. 조정이 이러한 체면을 헤아리지 않고 이 성사시킬 수도 없는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 것인가.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시작했다가 바로 중지하는 것은 옛 규례가 아니라는 말을 하겠는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경들로 하여금 무익한 거조를 하지 말고 일찌감치 중지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만일 재계하고 삼계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면 자전과 자궁의 존호를 의논하는 중요한 일도 마땅히 응대하지 않을 것이다. 경들은 이 점을 양찰하여 빨리 중지하라."
하니, 영의정 홍낙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전하의 겸손하신 마음을 알기 때문에 즉위하신 지 20년이 되도록 일찍이 한 마디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년이 어떤 해입니까. 좋은 경사가 겹쳤으니 신들의 오늘의 청은 바로 온 나라 시민들의 소원입니다. 어찌 감히 성상의 하교로 인하여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영중추부사 채제공, 좌의정 김이소, 판중추부사 김희, 우의정 이병모 등이 계속해서 앙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결코 억지로라도 따를 리가 없다. 내 두 번 말하지 않겠으니 경들은 마음대로 하라. 자전과 자궁에 대한 예를 의논하는 것도 오히려 응대할 겨를이 없다고 한 것은 또한 알아듣기 쉽도록 말한 것이니, 경들은 알도록 하라. 또 예를 의논할 것을 곧바로 자전과 자궁께 청하는 것은 본래 옛 규례에 없으니 경신년의 전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즈음 규례에 혹 처음부터 곧바로 청하는 거조가 있기는 하나 사체상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궐 뜰에서 호소하기 전에는 경솔하게 먼저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경모궁에 전배한 뒤 대신으로 2품 이상인 자와 삼사, 모든 문관, 음관, 무관에게 명하여 재전(齋殿) 문 밖에 와서 기다리고 있게 하였다. 명하여 기다리고 있던 대신과 신하들을 궁전 뜰로 불렀다. 하교하기를,
"오늘 의논하는 거조는 문자로 반포하여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작년 겨울 빈계(賓啓)한 뒤와 올해 동짓날 청대(請對)하던 때에 연교가 있었다는 것을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널리 백료들에게 묻는 것은 아름다운 말을 듣고 다시 오늘 연석에서 하교하고자 해서이다. 입시한 승지는 뜰에 들어온 백관들에게 전하여 의논을 거두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를 대신 이하의 사람들에게 내보이게 하고, 또 구전(口傳)으로 하교하기를,
"내년이 어떤 해인가. 그믐이 머지않아 마치 내년을 맞은 듯하니 이때 내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작년의 연교와 동짓날의 연교에서 나의 뜻을 이미 대략 말하였다. 대신과 경재(卿宰)들은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것이나, 연교는 전교와 달라서 뜰에 있는 백관들은 반드시 두루 다 듣고 분명히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재전에 와서 특별히 대소 신료들에게 유시하는 것이니 나의 뜻은 더욱 의도하는 바가 있다. 대개 나의 정사(情事)는 차마 말할 것도 없고 차마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전후의 연교에서 말한 대강의 뜻은, 바로 막중한 전례에 대해서는 의로써 예를 제정한만큼 감히 의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한 등급 낮은 것으로 나의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은 혹 이리저리 조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책(顯冊)을 이미 올리고 나서 또 올리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유양하는 방도를 삼았으니, 오늘 제신들이 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굳게 거절하여 미처 효성을 바치지 못한 애통한 심정을 담고자 하는 것이니, 단단한 이 마음은 겸손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제신들이 이 하교를 듣고도 나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다면 신하로서의 분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전과 자궁의 휘호를 드날리는 은전과 경모궁을 추상하는 예에 대한 이 해의 이 요청은 하루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제신들이 만약 과인의 몸에 관련된 일을 가지고 억지로 시끄럽게 굴고 그치지 않는다면 막중한 호를 의논하는 일도 장차 응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사에 상호(上號)를 청하는 빈청의 계사는 원래 시작한 뒤에 바로 정지하는 예가 없다. 그러므로 후중(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는 뜻으로 오늘 제신들에게 특별히 유시하는 것이니, 이는 나의 뜻을 받들어 따른다는 말을 듣고자 해서 하는 것이다.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문무음관 및 서료와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각기 헌의하여 아뢰게 하되, 매 품마다 각 한 명이 대신 앞에 나오거든 대신은 이 하교를 가지고 상세하게 포고하여 차례차례 알려서 한 사람이라도 듣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한 뒤에 수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헌의는 모두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것이었다. 또 대신에게 하유하기를,
"그 일을 중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일제히 백료들을 모아서 각기 헌의하게 하는 거조가 있었는데 여러 의논 중에도 한두 가지 일치되지 않는 논의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영향을 끼치기에 부족한 것이었다. 오늘의 거둥에서 나의 뜻은 이미 굳건하게 정해졌다. 자전과 자궁에게 여쭈니, 자전의 분부도 나의 고집을 옳게 여기셨다. 여러 신하들이 만일 나의 뜻을 따른다면 경모궁의 상호를 내일 의논해서 정할 것이다. 참여해야 할 신하들도 응당 패초로 부를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열흘이건 한달이건 일년이건 상관없이 내 뜻을 따르기 전에는 가마를 돌리지 않을 것이니, 제신들은 알도록 하라."
하였다. 백관들이 먼저 물러가고 대신 이하도 물러갔으며 단지 승지 한 사람만이 합문 밖에 남아 있었고, 시위들도 임시로 물러가게 하였다. 시임 대신, 원임 대신, 각신, 약원 도제조, 승지들과 삼사의 제신들이 청대하니,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이 계사는 모두 돌려주겠다. 순군이나 감군의 의망과 같은 일반 공사도 모두 들이지 말라."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합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또 하교하기를,
"아까 이미 하교하였듯이 나의 뜻은 굳게 정해졌다.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추운 전각에 앉아 있자니 격기가 또 일어날 것 같다. 대신이 만약 나라의 뜻을 체득하였다면 어찌 이처럼 억지로 소란을 떨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밤이 이미 3경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궁문을 잠그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엄숙하고 공경스런 곳인데 제신들은 아직도 물러가지 않았느냐."
하니, 영의정 홍낙성 등이 대답하기를,
"전후로 보이신 간절한 성상의 뜻을 신들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신 등이 청하는 바는 바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비록 누누이 하교를 받들었으나 실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 엄동설한을 당하여 이어하신 곳에서 밤을 지내신다는 것은 더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니, 속히 가마를 돌릴 것을 명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곳에서 밤을 지내는 것이 어찌 쟁집할 일이겠는가. 진실로 청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내일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밤새도록 합문을 지키고 있어서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가. 대신의 일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니, 제신들이 마침내 물러갔다.

 

12월 7일 경신

재전(齋殿)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경모궁에 올릴 존호를 오늘 의논해 정하라고 명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하유하게 하기를,
"나의 뜻이 굳게 정해졌다는 것은 어제 이미 하교하였다. 오늘은 경모궁의 존호를 정해야 하는데 막중한 일인만큼 여러 신하들이 나의 뜻을 따라준 뒤에야 오늘 거행할 수 있다. 상하간에 서로 버티는 것은 한갓 나라의 체모만 손상시킬 뿐이니 즉시 회주(回奏)하라."
하니, 영의정 홍낙성과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 등의 성의가 보잘것 없어서 끝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누차 하교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신들이 앙청(仰請)한 이유는 대개 성상에게 영광이 있게 하고자 해서 한 것인데 도리어 걱정을 끼쳐 드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추운 전각에서 밤을 지새는 바람에 격기가 치밀어 오른다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셨으니, 신들은 이에 이르러 더욱 민망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뜰을 가득 메우고 일제히 호소하는 성의로서는 진실로 뜻을 받들어 따르겠다고 감히 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 것은 이미 한시가 급한 일이니 감히 계속해서 번거롭게 굴어 회궁이 혹시라도 늦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김이소, 판부사 김희, 우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영상이 이미 감히 번거롭게 주달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신들이 한소리로 힘껏 청할 수는 없겠지만 구구한 소견으로 말하자면 실은 전날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백관들에게 물어볼 때, 15명이 헌의한 중에 다른 의논을 가진 자도 있었으니 인심이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대신 이하도 또한 모두 나의 뜻을 따랐으니 애초에 하교한 대로 경모궁에 올릴 존호를 오늘 내로 의논해 정하도록 하고, 의논이 정해진 후에 전배하는 예를 행하고 나서 그대로 백관들이 전문(箋文)을 올리는 예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시임 대신, 원임 대신, 각신, 대제학, 양관의 제학 및 이조와 호조와 예조의 판서를 재전(齋殿)에서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의논을 수합한 것은 뭇사람들의 마음을 알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두 명이 나의 뜻을 받들어 따랐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제 본궁에 존호를 올리는 데 대해 예를 의논해야 하는데, 참여해야 할 신하들을 모두 명초하여 진하(陳賀) 등의 절차를 마련해 들이도록 하라. 그리고 국조의 전례에 휘호(徽號)는 4자를 쓰고 존호(尊號)는 8자를 써왔는데, 이번에는 존호를 추상(追上)하는 규례를 써서 8자로 의논해 정하라."
하니, 영의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빈계를 갑자기 철회한 것이, 비록 성상의 하교가 너무도 간절하고 측달하여 무지한 짐승조차도 감동시킬 만한 것이었기에 부득불 명을 받들었던 것이나, 뭇사람들의 앙축하는 마음을 조금도 풀 길이 없으니 실로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 제조를 전조는 의망해 들였는가? 그리고 도제조도 천거하여 아뢰었는가?"
하니, 이조 판서 이치중이 아뢰기를,
"옛 규례에는 대부분 호조와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의망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의 경중에 따라야지 반드시 전례에 구애될 것은 없다. 이번에는 4명으로 정하고 도제조를 추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상호 도감(上號都監) 도제조로 삼았다. 경모궁에 추상할 존호를 ‘융범희공개운창휴(隆範熙功開運彰休)’라고 의논해 정하였다.

 

전배례(殿拜禮)를 행하고 다시 재전(齋殿)으로 나아가 백관이 올리는 전문(箋文)을 받았다.

 

상호 도감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감의 당상을 4명으로 차출하라는 연교를 받들었습니다.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행 부사직 이득신(李得臣), 행 성균관 대사성 이가환(李家煥)을 아울러 임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궁으로 돌아왔다.

 

12월 8일 신유

봉조하 김종수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 밖으로 유배가게 되었던 것은 스스로 취한 화라 하겠으니 내가 보낸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이 보낸 것이다. 결국에는 돌아오게 한 뒤에 즉시 치사(致仕)하겠다는 청을 허락한 것은 경의 본심이 소탈하고 딴 뜻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반드시 종시(終始)토록 보존해주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한 것이다. 또 생각건대 경은 여러 차례 풍상을 겪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진실로 하루아침에 풍토병이 많은 남쪽 변방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될까 걱정스러웠는데 이제 정력이 쇠하지 않은 것을 보니 매우 기쁘다. 경이 유배가던 날에 지은 시 가운데에 ‘신을 아는 이는 신을 죄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귀양갈 적에 정말 이러한 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 1일에 사면해 주시는 전교에 ‘그를 알기에 그를 죄주는 것이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 일은 참으로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고자 한다.’고들 합니다. 대등한 신분 이하에 대해서도 한 번 죽음으로써 자기를 알아주는 것과 바꾸고자 하나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군신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이 우연히 읊조린 것이 마치 신령이 서로 감응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되었으니 이는 비록 야사(野史)에 쓰더라도 반드시 기이한 일로 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수의했던 일을 경은 이미 들었는가? 작년에 인정(人情)에 따라 예문을 제정하겠다는 하교를 경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텐데, 나의 주장은 본래부터 이러하였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존호는 바로 후세의 신하들이 임금의 덕을 유양하는 일이기에 삼대 이전에는 비록 요·순과 같은 성인으로서도 존호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은 요·순의 일이 아니면 아뢰지 않겠다는 뜻으로 일찍이 이 일을 의논했던 것이 한두 차례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조정의 가례(家禮)에 있어서는 열성조께서 이미 행하였던 전례인데, 성상의 분부에서는 매양 고집하는 것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아랫사람들이 감히 들을 것이 아닙니다. 신의 소견은 전부터 이러하였습니다. 경모궁에 존호를 올릴 때에 옥책(玉冊)을 쓰는 것이 예의에 합당한 듯한데, 이번에는 또한 죽책 제술관(竹冊製述官)을 차출하라고 하셨으니 옥책과 죽책의 분별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의제(儀制)의 본의에 대해서는 신도 미처 상세하게 고찰하지 못했는데, 마침 어리석은 의견이 있었으므로 감히 진달드립니다."
하였다.

 

영남 위유사 이익운(李益運)이 장계로 아뢰기를,
"칠곡 부사(柒谷府使) 유진혁(柳鎭爀)은 상을 바라는 의도에서 관사를 수리한 것으로 사찰이나 민가를 모두 공해(公廨)라 칭하고 농철기에 백성들을 부려 한 장정당 사흘씩 일하게 했습니다. 또 남창전(南倉錢) 8백 냥을 억지로 부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나서 4개월 만에 5할의 이식을 거둔 뒤 경영(京營)에서 작전(作錢)하는 것이라고 속여 보고하여 이익을 취했습니다.
김해 부사 정동신(鄭東愼)은 작년 상진곡의 가모분(加耗分)에 대해 작전(作錢)한 8백여 냥을 모두 사사로운 용도로 써버렸고, 관모(官耗) 보리 40석을 민간에게 내주고는 진맥(眞麥)으로 바꾸어 받아서 창고 관리에게 억지로 높은 값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전 부사가 진휼하고 남은 돈 1천 7백 냥은 바로 공공의 재화인데 제멋대로 갖다 썼습니다. 본부의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여 상으로 줄 돈 1백 90냥을 내려보낸 군기를 수리한다는 핑계로 모두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통영(統營)에 이전하는 곡식을 바칠 때에도 축난 것을 보충한다고 칭하고는 민호(民戶)에서 거둔 조미(租米)가 4백 석이나 됩니다. 심지어는 총애받는 기생이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호를 뽑으라는 윤음을 덮어두고 반포하지 않기까지 하였으니, 모두 극도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울러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합천 군수(陜川郡守) 황운조(黃運祚)는 가는 곳마다 혼모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지 못하여 아전들의 포흠을 살피지 못하고 진휼 정사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부득이 한결같이 파출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대임자를 각별히 골라 임명하여 말을 주어서 내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12월 9일 임술

차대를 행하고, 상호 도감의 제조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마음이 겸손하셔서 빈계를 오늘 승락받을 수 있을지 기필할 수 없다."
하니, 도감 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들의 성의가 부족하여 일전의 빈계를 시작하였다가는 바로 정지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섭섭해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8자의 존호를 받지 않는 것이 8만 자의 존호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경모궁의 존호를 이미 의논하여 정했으니 자전과 자궁께서도 어찌 힘써 따르시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내달에 자전과 자궁의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연고로 아직까지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바야흐로 성의를 다해 기어이 마음을 돌려 들어주시도록 하겠지만, 또한 경들이 온종일 일제히 모여서 아뢰는 것도 혹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 방도가 될 듯하다."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뭇 신하들이 기뻐하는 중이라도 자전과 자궁의 마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존호를 올리는 예를 옛날에는 시호의 예를 썼는데 두 글자에 불과하였다가 효묘조 때부터 네 글자를 썼고 그후에는 여덟 글자를 썼다. 이번에 여덟 글자를 쓰는 것이 또한 글자 수에도 알맞은 것이다."
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민종현에게 이르기를,
"내년 정월 탄신 참배 때에는 자전과 자궁께서 장차 몸소 나가시는 것이 나의 마음에도 위로가 된다. 그러나 내전이 종묘를 알현하는 예는 참조할 만한 옛 규례가 없는데, 숙묘조 때부터 비로소 행하였다. 선정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의논한 바에 의하면, 삼대의 예를 인용하여 종묘 제향 때에 내전이 아헌(亞獻)하는 의식을 행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논할 것이 아니다. 또 내년에 자전과 자궁이 경모궁에 나가는 전례는 종묘를 알현하는 예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무릇 의절(儀節)에 관계되는 것을 반드시 충분히 강정(講定)한 연후에야 인정이나 예문에 합치될 수 있을 것이다. 경들은 모쪼록 문적이 반포되기 전에 미리 널리 상고하고 익숙히 헤아려서 절목을 마련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데 쓸 책(冊)과 인(印)은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도감의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책(冊)에는 옥을 쓰고 인에는 금을 쓰는 것이 그 일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에는 맞을 듯하나, 이 또한 제향례(祭享禮)에 울창주를 쓰고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것처럼 바른 예가 아니라는 뜻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도감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책문은 죽책(竹冊)을 쓰고 인은 옥인(玉印)을 쓰는 것이 예의 뜻으로 헤아려 볼 때 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옥책과 금인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고, 제조 심이지(沈頤之)·민종현(閔鍾顯)·이득신(李得臣)·이가환(李家煥) 등도 모두 옥책과 금인을 쓰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0일 계해

자궁과 자전께 휘호를 올릴 길일을 택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빈청이 아뢰기를,
"신들의 오늘날 청하는 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그 예로 말하자면 응당 행해야 할 떳떳한 전례요 그 일로 말하자면 이미 윤허하여 명하신 것입니다. 다만 농사가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자전과 자궁께서 근심하고 계신 것인데, 빈청이 계속 아뢰었으나 겸손하신 마음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 자전과 자궁께 아뢰겠다는 성상의 분부를 듣고 며칠을 기다렸는데 아직 허락을 얻지 못했다는 비답이 어제 아침에 또 내렸으니, 아, 훌륭하십니다.
우리 자전과 자궁께서 깊은 궁중에 거하시면서도 백성들을 염려하시어 만물을 도와 키워주는 인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할까봐 몹시 걱정하시니, 두터운 덕과 겸손하신 마음을 누군들 흠양하며 찬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전부터 경사를 만나 기쁨을 장식하던 거조가 반드시 모두 풍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선조(先朝)의 전례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연하(宴賀)의 예가 더러는 여러 도에 진휼을 베풀 때에 있기도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큰 경사는 해를 넘겨서는 안 되고 성대한 예는 때를 지체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혜택이 널리 미치고 부세를 견감하고 구휼하는 은전이 두루 미쳐 만 백성들이 풍년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태평의 기운이 바야흐로 이르고 상서로운 화기가 널리 흡족하며 납일(臘日) 전에 눈이 내려 이미 내년의 풍년을 점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감의 경비는 본래 해당 유사가 일찍부터 마련해 놓았고 풍정(豊呈)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함에 있어서도 민력을 조금도 번거롭게 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일정치 않은 한때의 풍흉(豊凶) 때문에 천년에 만나기 힘든 경사스런 모임을 미룰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다시 전례(典禮)를 원용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정리로 보나 예로 보나 허락하지 않을 수 없고, 일의 체모로 보아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다시 진달드리겠습니다.
조모께 축수를 올리는 것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일이라고 일컬어졌고 어버이의 회갑은 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입니다. 비록 민간의 미천한 사서인들이라도 있는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벌여 빈객을 불러 즐기고, 복을 빌고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 시문(詩文)을 구하여 화려하게 하곤 합니다. 하물며 우리 전하의 타고나신 효성으로서 산과 같이 장수하시기를 축원하고 일국의 부와 임금 자리의 존귀함을 가지고 봉양하며 밤낮으로 손꼽아 기다린 것이 바로 오늘이었습니다. 비록 부상(扶桑)의 가지를 꺾어다가 상전벽해의 장수를 헤아리고, 곤륜산의 옥을 다 캐어다가 휘호를 첩에 아로새기며, 강남의 벼를 다 가져다 술을 빚고 천하의 진미를 다 갖추어 음식을 올린다 하더라도 성상의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에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연히 행해야 할 전례까지도 아울러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전하께서는 어디에다가 조금이라도 정성과 예를 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베풀어주신 교화가 팔방에 입혀져 있고 인자하게 덮어주는 은택이 만물을 길러주고 있습니다. 7만여 명이나 되는 지팡이 짚은 노인들과 4백 고을의 즐비한 민가의 백성들이 목을 빼고 발꿈치를 들고서 하루를 일년 같이 기다리며 말하기를 ‘내년은 나라의 처음 있는 경사이니, 아마 왕실의 아름다움을 널리 선양하고 모두 함께 빈당(豳堂)에게 축수를 바쳐서 우리 자전의 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인심이 같이 하는 바에는 하늘도 반드시 따르는 법이니, 이것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삼가 작년 겨울 뜰에서 호소할 때 내리신 자전의 비답을 상고해 보건대, ‘내년은 자궁의 회갑이고 대전께서 등극하신 지 20년이 되는 해이니 나라의 큰 경사가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느냐. 그 때 경들이 오늘의 청을 가지고 다시 청한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그런 연후에는 자궁도 당연히 연회와 존호를 받을 것이고 대전도 즉위 20년의 진하를 받을 것이니, 내가 어찌 굳이 사양하겠는가.’ 하셨습니다. 신들은 바로 자성(慈聖)의 어린 자식입니다. 지금와서 갑자기 지난해에 허락하셨던 것을 어렵게 여기신다면 어찌 항상 속임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리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자전의 연세가 51세가 되시니 영고(寧考)의 갑자년의 나이와 딱 들어맞고 갑자년부터 지금까지가 또 마침 51년이니 전후가 똑같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경사스런 예는 비단 선대의 일을 계승하는 데에 빛나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경모궁에 존호를 올릴 길일을 택하여 성상의 효성이 깊이 드러났으므로 뭇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자전과 자궁에 대한 전례를 동시에 아울러 거행하여 큰 아름다움을 발양(發揚)하고 욕의(縟儀)를 시행하여서 성상은 옥을 받들어 올리며 축하하고 문손(文孫)은 반열에서 춤추며 술잔을 올린다면 화기가 가득 넘쳐 흘러 천지 사이에 충만할 것이니, 이는 진실로 태평 만세로 즐거움이 이보다 더한 경사는 없을 것입니다.
삼가 우리 자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신들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윤허를 하실 것입니다. 신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서로 이끌고 와서 거듭 호소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우러러 하늘의 경사에 답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굽어 따라서 다시 자전과 자궁께 여쭈어서 빨리 윤음을 내리시게 하소서. 그래서 한결같이 작년에 내리셨던 전교에 따라 길일을 택해 거행한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일 힘껏 청한 나머지 다행히도 마지못해 따르겠다는 분부를 받았으나 ‘연회와 존호 올리는 것을 한꺼번에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이는 다만 백성들의 일을 염려해서만이 아니라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데 속하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하교하셨다. 이제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상 먼저 존호를 올리는 예를 거행하고 나서 내년 가을걷이가 되기를 기다려 다시 연례(宴禮)를 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진실로 인정이나 예문에 합당하다.
자전과 자궁께 올릴 존호는 해조로 하여금 다음달에 길일을 택하여 거행하게 하고, 대신 이하로 응당 참여해야 할 신하들은 패초 받기를 기다려서 즉시 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어제 연석에서 이미 상세히 하유한 것이 있는데 다음달 21일 경모궁에 전알할 때에는 자전과 자궁께서도 궁에 나갈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마땅히 행해야 할 의식 절차를 대신에게 묻게 하고 이어서 예관의 의견을 갖추어 초기하라. 중궁전의 행례는 한결같이 《속오례의》의 종묘를 알현하는 의례에 의거하여 마련하도록 하라.
내년이 어떤 해인가. 오직 한푼이라도 나의 사모하는 마음과 정성을 풀 방법은 여기에 달려 있으니, 국조의 전례를 참작해 보면 원래 근거할 만한 규례가 있을 것이다. 내년 봄의 원행에서는 자궁이 전성(展省)의 예를 행할 것이다. 매해 원소에 행차할 때마다 비록 정리사(整理使)라는 명목을 없애고 장용영 외사(壯勇營外使)로 하여금 으레 겸하게 하였으나, 내년에는 별도로 정리 당상을 차임한 후에야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호조 판서가 원래 주관하는 사람이고, 사복 제조 및 원행 정례 당상, 경기 관찰사, 장용영 내사를 아울러 정리 당상으로 차임하여 나누어 맡아서 관할하게 하라. 경비와 민력을 막론하고 모두 미리 먼저 조치해야 할 것이니, 정리 당상에게 명하여 나의 이러한 뜻을 알리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왕대비전에 올릴 존호를 ‘수경(綏敬)’이라고 의논하여 정하였고, 혜경궁에 올릴 존호는 ‘휘목(徽穆)’이라 하였다.

 

상이 자전과 자궁의 존호 단자를 편전에서 직접 받고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문을 올렸다.

 

자전과 자궁의 가상 존호 도감(加上尊號都監)을 경모궁 추상 존호 도감(追上尊號都監)에 합설하였다.

 

심이지(沈頤之)·서유방(徐有防)·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서유대(徐有大)·윤행임(尹行恁)을 【행임(行恁)은 행임(行任)의 고친 이름이다.】  정리사로 삼았다.

 

12월 11일 갑자

호남 위유사 서영보(徐榮輔)를 소견하였다.

 

12월 12일 을축

차대를 하고 정리 당상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리소에 낭청을 나누어 정한 것은 각 고을의 차원(差員)을 없애고자 해서일 뿐이다. 비록 사소한 물건이라도 사사로이 마련해 갖추는 자가 있으면 엄히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자궁의 연세가 회갑이신데 존호를 더 올리고 경사를 축하하며 진하를 할 때에 경외에서 올릴 전문 및 백관이 올릴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裡) 등의 절차를 이미 각각 마련해 두었으니, 경외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마땅히 각각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궁에 봉진(封進)할 것만 하되 그 중에서도 진휼을 베풀고 있는 도의 봉진은 자궁의 마음을 받드는 도리가 아니니, 서울의 관청에서 호서 물선례(湖西物膳例)에 의거해 봉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수(李時秀)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14일 정묘

형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을 소견하여 여러 도의 살인 사건을 심리하였다.

 

12월 15일 무진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12월 16일 기사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을 시행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재찬(金載瓚)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18일 신해

차대를 하였다. 상호 도감(上號都監) 도제조 당상관과 낭청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모궁에 추상하는 존호 중에 ‘개운(開運)’이라는 글자는 다시 의논할 단서가 없지 않다. 옛날 선조 임진년에도 비록 성상이 받는 존호의 글자였지만 오히려 세 번이나 다시 의논하는 거조가 있었다. 더구나 내가 선대의 아름다움을 뒤미처 드러내려는 마음에 있어서는, 오직 지극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두 글자는 이미 어떠하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다시 더 널리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옥책문도 우선 계하하지 않는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어제야 비로소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대의 사책(史冊)을 조사해 보니 우리 나라 열성(列聖)들의 존호와 시호가 서로 비슷한 곳은 일일이 꼽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굳이 이것을 가지고 혐의쩍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이미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중대한 일에 대해서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그 공경하고 삼가해야 할 도리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이번에도 임진년의 전례에 의거해 다시 의논하여 충분히 유감이 없도록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이소와 우의정 이병모도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의견도 다름이 없으니 다시 존호를 의논하는 것을 잠시도 늦출 수 없다. 6일에 하던 규례대로 마땅히 먼저 전배례를 행하고 나서 직접 재전에서 존호를 정한 단자를 받도록 하겠다. 이제 따로 전교를 내릴 터이니 경들은 참여해야 할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먼저 나아가 존호를 의논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임진년 존호를 의논해 정할 때에 세 차례나 다시 의논한 일이 있었다. 이번 경모궁의 존호 글자에 대해서도 이미 임진년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니, 성의를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려는 나의 도리상 어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니, 여러 의논들도 그러하였다.
다시 의논하는 일을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의논해 정한 후에는 또한 마땅히 규례에 따라 친히 받는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모궁에 전배하는 예를 먼저 거행할 것에 대해 해조에 분부하도록 하고 전문을 올리는 것은 처음 의논할 때와는 다르니 그냥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황승원(黃昇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부제학에는 조상진(趙尙鎭)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경모궁 재전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전각 당상들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명(基命)’이란 두 글자는 매우 좋으니, 이는 바로 ‘천명의 터전을 닦음이 너그럽고도 은밀하다.[基命宥密]’는 뜻이다. 누가 의논해 정한 것인가?"
하니, 낙성(樂性)이 아뢰기를,
"바로 우상이 제의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의논했던 존호의 글자들도 흡족하고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나의 마음에는 혹 올려야 할 글자가 있는데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이번에 다시 의논한 것이 지극히 훌륭하고 아름다워 충분히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니, 낙성이 아뢰기를,
"이 모두 성상의 효성으로 이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은 물러나서 참여해야 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재전 문 밖에서 모여 의논하여 단자를 즉시 써서 올리도록 하라. 예전 선조(先朝) 때에 존호를 의논한 단자를 직접 모시고 나아간 거조가 있었으니, 내 마땅히 직접 받은 후에 홍화문(弘化門) 밖에까지 모시고 가겠다. 책보(冊寶)를 안에 들일 때의 규례에 따라 도제조와 제조, 낭청 등은 차례대로 반열을 이루어 용정(龍亭)을 어가 앞에서 받들어 모시고 가고 예조는 의장과 고취(鼓吹)를 미리 정돈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경모궁에 올릴 존호를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고 의논해 정하였다. 경모궁에 올릴 존호 단자를 재전에서 직접 받고 그대로 환궁하였다.

 

하교하였다.
"자전과 자궁께 책보(冊寶)와 책인(冊印)을 올리는 장소는 마땅히 수정당(壽靜堂)으로 해야 한다. 이곳은 바로 대내의 삼엄한 곳이니, 문과 길을 개수(改修)하고 보계(補階)를 배설하는 일을 모두 날을 가려서 거행하도록 하라. 효묘(孝廟) 갑오년에 장렬 대비(莊烈大妃)께서 계실 곳을 위해 이 당을 세웠는데, 지금 자궁의 환갑 잔치와 존호를 올리는 것을 또 이 전에서 행하게 되었으니, 매우 희한한 일이다. 더구나 자전과 자궁의 상호(上號)를 함께 이 전에서 거행하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또 이곳은 자전께서 현재 거처하고 계신 전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도감으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여 전호를 습의하는 날에 써서 게시하게 하고 입계하는 문서에도 수정전(壽靜殿)이라고 호칭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임신

상호 도감(上號都監)의 당상 및 예조 판서 민종현, 상의원 제조 서유방(徐有防)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사스런 예가 목전에 닥쳤으니 나의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에 있어서 어찌 정성과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일이 혹 너무 크게 벌이는 데 가깝게 되면 자전의 하교를 받드는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에 따라 참작하여 자전의 뜻에 따르는 방도가 되도록 할 것이다. 다만 수정전에 책보(冊寶)를 올릴 때에 채여(彩轝)를 받들고 들어가야 할 문과 길이 너무 좁은데, 이곳은 또한 정양문(正陽門) 밖이니 이곳도 합문의 하나이다. 그 소중한 바가 어떠하겠으며 사체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개수하여 주선할 만한 곳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호조 판서와 낭관은 공장을 거느리고 직접 살필 때에 살펴보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옛날 우리 성묘조(成廟朝) 때에 정희(貞熹)·인수(仁粹)·안순(安順) 세 대비를 위하여 명정전(明政殿)을 세우고, 매년 정월 초하루와 동지가 되면 군신들을 거느리고 세 분의 대비께 하례를 올렸었는데, 바로 이 전에 거둥하여 하례를 받으셨다. 그 후에 자전의 대례를 매양 이 전에서 거행하였으니, 이번에도 명정전에서 하도록 하라."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이번 자전과 자궁께 존호를 올릴 때에 내·외 명부(內外命婦)를 모두 참여시키지 말도록 하였으나 막대한 경사에 의식 절차를 완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전의 행례 절차(行禮節次)는 특별히 오래된 의궤를 참고하여 예문을 마련하도록 하라.’는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삼가 본조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를 상고해 보니, 숙묘(肅廟) 병인년 장렬 대비(莊烈大妃) 회갑으로 경사를 칭송하고 존호를 올리며 진하를 할 때에 우리 성조께서 특별히 예조로 하여금 중전이 치사(致詞)와 표리(表裏)를 올리는 의주(儀注)를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또 해조의 아뢴 바로 인하여 대신에게 물어 절목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때 대신 김수흥(金壽興)·민정중(閔鼎重)·정지화(鄭知和)가 헌의한 것 중에, 혹 《통전(通典)》이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인용하기도 하고 더러는 《오례의(五禮儀)》나 성종 때의 고사를 인용하여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상께서 《오례의》의 왕세자가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모방하여 마련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의궤에 실려 있는 바가 분명하여 의거할 바가 있습니다. 이 전에 없던 큰 경사를 당하여 바야흐로 행해야 할 성대한 의전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의주(儀注)를 백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 준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지금 자전과 자궁께 존호를 올릴 때에 중궁전에서 행례할 의주는 일체 병신년 인현 성모(仁顯聖母)가 장렬 대비(莊烈大妃)에게 행하였던 것에 따라 마련해 들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전에서 이 예를 행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축하하는 아랫사람의 심정은 배나 더하다. 의식 절차는 한결같이 그 때 품정했던 조건을 따르도록 하라. 당시의 의궤를 가져다 보니, 내·외 명부가 그때 한결같이 반열에 참가했다는 것이 기록에 실려 있어서 외명부로는 부부인(府夫人)·공주(公主)·옹주(翁主) 이외에 문무관 정2품 이상의 처 및 6승지의 처가 으레 모두 들어와 참여하였다. 그러나 백여 년 동안 일찍이 규례대로 거행했던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인하여 의논을 거두게 하였던 것인데 조관(朝官)의 처는 들어와 참여한 문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임시로 제외한 것이니 이것에 따라 할 것을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내년 봄 현륭원에 행차하실 적에 정해진 규례에 따라 과거를 베풀 것 등의 절목을 품정해야 하겠습니다. 경술년에 문무과 정시를 설행하고 그날로 방방(放榜)을 하였으니, 이번에도 이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술년에는 수원·광주·과천 세 고을에 원래 살고 있던 유생들에게 시험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금천(衿川) 유생들에게도 일체로 응시를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0일 계유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 참판 심환지(沈煥之), 참의 한만유(韓晩裕), 병조 판서 구상(具庠)이 참가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진관(趙鎭寬)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갑(李𡊠)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2월 21일 갑술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12월 22일 을해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정범조(丁範祖)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바로 명하여 체차시키고, 신광리(申光履)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벼슬에서 떨어진 지 가장 오래된 사람을 수용하는 것과 오랫동안 적체되었던 사람을 소통(疏通)시키는 것이 바로 근래에 유의하여 살펴오던 점이다. 그런데 이번 정사에서 벼슬에서 떨어진 지 가장 오래된 자로는 단지 한 사람만 다시 분별하여 서용하였으니, 소홀함이 너무 심하다. 적체된 이를 소통시켜주는 것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이전에 제기하고 신칙했던 뜻이겠는가. 별도로 양전(兩銓)을 신칙하여 기어코 나의 뜻을 대양(對揚)하게 하라. 만일 이와 같이 했는 데에도 대양하는 실효가 없다면 오늘 차대한 대신들이 고찰하여 바로잡고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청(李晴)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오익환(吳翼煥)을 사헌부 집의로, 이익수(李益洙)·이심전(李心傳)을 사헌부 장령으로, 이인채(李寅采)·박시수(朴蓍壽)를 사헌부 지평으로, 김약련(金若鍊)을 사간원 헌납으로, 윤영희(尹永僖)를 사간원 정언으로, 이겸빈(李謙彬)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소통시킨 것이다.

 

 

차대를 하였다. 양전의 장관을 소견하였다. 이조 판서 이치중이 아뢰기를,
"이번에 대간으로 통청(通淸)된 사람 중에 이안묵(李安默)의 죄는 관계된 바가 적지 않은데, 신 등이 흐리멍덩하여 미처 살피지 못하고 동료 당상들의 말만 믿고서 서둘러 청선(淸選)에 의망했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원래의 망통(望筒)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도승지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말이 이왕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이번에 대간에 특별히 제수하신 몇몇 사람은 범한 죄가 어떠하며 관계된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경들은 물러가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번거롭게 아뢰어서는 안 될 것을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오늘 입시한 승지는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도목 정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으니 양전이 정망(政望)한 것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논할 겨를이 없으나, 신들이 밖에서 들어올 때에 들으니 전망(前望)으로 낙점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전망(前望)이 아니라 바로 중비(中批)이다."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근래 한두 가지 일로 인해 제방(隄防)이 다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신들의 죄입니다. 오늘 중비로 임명하신 사람들은 모두 지극히 중한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전하께서 매양 경사스런 예로 인하여 번번이 은택을 베풀어 주시면서 이러한 무리들까지도 일률적으로 용서해 주시니 세도(世道)와 조정의 기상에 아마도 장차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승지가 아뢴 것은, 그 직분이 진실되게 하는 데에 있으므로 토벌을 엄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체차하는 것이 비록 중한 감죄(勘罪)는 아니더라도 어찌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지금 만약 환수한다면 애초 무엇 때문에 굳이 특별히 제수했겠는가."
하니, 사직 이병정이 아뢰기를,
"대신이 이미 말했듯이 신이 전조에 있을 때에 이겸빈(李謙彬)을 간장(諫長)의 의망에서 빼버렸는데, 그가 올린 상소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한밤중에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오익환(吳翼煥)의 경우는 역적 김하재(金夏材)와 마찬가지이고, 윤영희(尹永僖)는 기현의 그림자와 같은 자입니다. 또 이청(李晴)은 성한(星漢)의 소굴인데 어찌 이러한 사람들을 대번에 죄를 씻어주고 벼슬길을 열어줄 수 있겠습니까. 또 이안묵에 대한 일은 이조 판서가 한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중비로 제수한 사람들은 내가 경사를 만나 소탕(疏湯)시켜 준 것이 아니다. 대개 오익환의 상소 중의 말은 비록 이랬다저랬다 하며 둘러대었지만 그가 운운한 바는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것이다. 익환은 자취가 소원한 사람으로서 그가 들은 바를 소장(疏章)에 그대로 진달하였으니, 한갓 그런 마음만 품고 있으면서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 무리들에 비하면 도리어 깊이 죄줄 것도 없다. 대체로 만약 나의 언행이 천하의 법칙이 될 만하여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부터 먼 곳의 사람들까지 순수하게 서로 믿었다면 어찌 이런 말이 있었겠는가.
윤영희의 일은 그 한 사람 때문에 혹 무고한 사람이 중상을 당할까 염려하여 굳이 말을 꺼낸 것인데, 이것도 풍속이 쇠퇴한 후세의 일이다. 옛사람들이라면 이런 일을 어찌 큰 죄로 삼겠는가.
이청의 일은 더욱 애매하다. 유성한(柳星漢)이 올린 상소의 윗조항의 말이 비록 막중한 곳에 관계된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애초에는 깨닫지 못하였다. 아랫조항의 말은 그 지적하는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가 운운한 바는 모든 사람들이 본 바이니 변론하지 않아도 저절로 판별될 것이다. 전후로 대간에 내린 비답에서 윤허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그의 마음과 태도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한의 관직이 예전 그대로인데 이보다 한층 더한 이청에 대해서 중한 법률을 적용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차술(借述)을 했다느니 집을 빌렸다느니 하는 등의 일은 본래 논할 것도 없다. 또 작년에 한 번 소통시켜 주었는데 다시 도로 중지한다면 이것이 어찌 내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유신(維新)하려고 고심하는 뜻이겠는가.
이안묵의 일은 그 곡절을 상세히 모르겠으나 또한 어찌 동생 때문에 그 형까지 아울러 적체시켜서야 되겠는가."
하고, 상이 치중에게 이르기를,
"경은 나의 궁료이다. 전조의 직임에 제수됨에 미쳐서 반드시 그대로 하여금 한 번 도정을 거치게 하고 싶었는데 지금 도정이 이미 지났다. 곡진히 살펴주는 도리에 있어서 반드시 해유 단자(解由單子)를 기다릴 것은 없다고 생각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치중이 아뢰기를,
"지금 곡진히 살펴주겠다는 분부를 받들었으니 신은 이루 다 감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가 두 번이나 도정을 지낸 것은 과하였다. 내년 원행(園幸)이 목전에 닥쳤는데, 경의 근력으로 보아 아마도 억지로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그대도 잘 살펴주고 싶으나 다만 한 자리에서 양전을 모두 체차한다는 것이 혹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니, 구상이 아뢰기를,
"체차될 수 있다면 신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감축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체차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하였다.

 

 

정언 정노영(鄭魯榮), 수찬 윤서동(尹序東)이 아뢰어, 소통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치중과 병조 판서 구상을 체차하고,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판서로, 조종현(趙宗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중비로 전 현감 조덕윤(趙德潤)을 교리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주연(胄筵)에서 도움받은 힘이 박유선(朴諭善)에 다음 갔으니 여러 사람 중에서도 매양 이 사람에 대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다. 대개 그가 품고 있는 바는 본래부터 가전(家傳)의 학문이 있었는데, 주자의 글에 더욱 능하였다. 옛날에 이 책을 강하면서 그와 더불어 토론할 때마다 번번이 시간을 넘기곤 하였다. 그가 붉고 검게 점을 찍어 평론한 책을 아직도 책상 머리에 남겨두고 때때로 쓰다듬고 있는데, 마치 이 사람을 보는 듯하다. 요즘 인쇄하고 있는 《주서백선(朱書百選)》의 새 판본을 그의 집안에 주고자 하며, 연전에 그의 원고를 징수해서 또한 정리해 인쇄해서 주고자 하는데, 이것이 어찌 충분한 보답이 될 수 있겠는가. 고 빈객 조명정(趙明鼎)의 아들 전 현감 조덕윤을 교리에 제수하라."

12월 23일 병자

윤대하였다.

 

 

 

12월 24일 정축

수정문 밖에 나아가 수정전의 보계(補階)와 수정문을 개수하는 공사를 친히 살폈다.
예조가 아뢰기를,
"‘다음달 21일 경모궁에 전알할 때에는 자전과 자궁께서도 함께 나아가실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행하여야 할 의식 절목을 대신에게 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영의정 홍낙성은 말하기를 ‘평소 예학에 어두워서 실로 억측으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이소는 말하기를 ‘이미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면 오직 인정에 따라 예를 정하여 합당한 쪽으로 귀결되도록 힘써야 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이병모는 말하기를 ‘삼가 《가례(家禮)》의 사당장(祠堂章) 및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다가 어리석은 의견을 보태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대비전은 마땅히 정로(正路)를 따라 올라가서 정문(正門)으로 들어가 상탁(床卓)의 북쪽으로 가까운 서쪽에 나아가 남향으로 서고, 혜경궁의 배위(拜位)는 중궁전의 배위 앞에서 특별한 자리를 설치하여 혜경궁이 자리에 나아가 재배례를 행한 뒤에 서쪽 계단으로부터 올라가 서쪽 협문을 따라 들어갑니다. 왕대비전이 궁내를 두루 살피고 혜경궁도 따라서 봉심을 마치고 나면, 왕대비전이 먼저 정문을 통해 나갔다가 이어서 정문을 따라 내려와 자리로 돌아옵니다. 혜경궁은 다음으로 서쪽 협문을 통해 나가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혹 예의 뜻을 어기는 데는 이르지 않을 듯하니 상께서 결정하소서.’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은 말하기를 ‘단지 억견으로 말하자면 곤전(坤殿)은 본래 묘정(廟庭)의 판위(版位)에서 재배례를 행하여야 하고, 자궁은 곤전과 차이가 있으니 상탁의 앞에서 재배례를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자전은 묘내에 나아가 살피지 않을 수는 없으나 예에 있어서 절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상탁 앞에 친히 앉아서 술 한 잔 올리고 전작례가 끝나고 몸을 일으킨 뒤에 각전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린다면, 인정으로 보나 예문으로 보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왕조의 예는 사사로운 가문과는 다르니,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장애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와 지금을 참작하여 중도에 맞게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판중추부사 김희는 말하기를 ‘삼가 《가례》의 사당장을 살펴보건대, 「비록 존장이라 하더라도 서쪽 계단을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특별한 자리를 설치한다.」 하였습니다.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속소뇌하편(續少牢下篇)의 주인이 방안에서 잔을 올리는 장[主人獻于房中章]에서는 「그 오른쪽에서 남면한다.」 하였고, 그 주에 이르기를 「존장은 빈주의 예를 하는데 참여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존장은 쉰다.」느니 「존장은 앉는다.」느니 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전하께서 전알하실 때에 마땅히 궁내의 상탁 서쪽으로 북쪽에 가까운 곳에 특별히 자리 하나를 마련해 놓고, 왕대비전은 서쪽 계단을 통해 올라가 정문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나아가 남향으로 앉습니다. 신이 또 《가례》 사당장을 살펴보건대, 「주인은 조계(阼階) 아래에서 북면하고 주부(主婦)는 서쪽 계단 아래에서 북면하며, 주인에게 어머니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주부의 앞에 자리를 만든다.」 하였습니다. 신의 선조 김장생이 찬술한 《가례집람》의 서립도(敍立圖)에서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서쪽 계단 아래에 있는 중궁전의 배위 앞에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혜경궁이 자리로 나아가 북면하여 재배례를 행하고 나서 주위를 세 번 도는 것이 또 《가례》의 묘제장(廟祭章)에 보입니다. 묘(墓)와 사(祠)는 마찬가지로 예에 두 가지가 없으니 또 그것을 왕조의 예에 미루어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전알하고 나서 봉심할 때에 왕대비전은 특별히 설치한 자리에서 일어나 궁내를 두루 살펴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혜경궁은 배위에서 서쪽 계단을 통해 나아와서 서쪽 협문으로 들어가 예대로 봉심을 마칩니다. 왕대비전이 먼저 정문을 통해 나가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자리에 돌아오고 혜경궁은 다음으로 서쪽 협문을 통해 나가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인정과 예문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참판 이집두(李集斗)는 말하기를 ‘자전은 비궁(閟宮)에 대해 어머니의 의리가 있으니 배례가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갈 때에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서 임하여 살펴보는 것이 인정과 예문에 합당할 것입니다. 자궁은 대등한 체모이니 기둥 밖에서 먼저 배례를 행하고 사당 안에서 그대로 봉심례를 행하는 것이 사의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참의 김이익은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자전은 어머니로서 자식에게 임하는 것이니 정문을 통해 묘내에 들어가 바로 임하여 살펴보도록 하고, 자궁은 대등한 체모니 정문 밖 조금 떨어진 서쪽 계단 위의 기둥 안에다가 특별히 배위를 마련하여 먼저 배례를 행하고, 그대로 정문을 통해 묘내로 들어가 봉심례를 행하는 것이 사의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신 종현의 뜻으로는 자전께서 궁으로 나아가실 때에는 정문을 통해 들어가고 대략 선조께서 묘에 임하시던 의식을 따라 묘내의 중앙에 욕위(褥位)를 배설하여 잠시 동안 서서 둘러보고 나오게 합니다. 자궁께서는 동쪽 협문을 통해 들어가 문 밖에 자리를 설치하고 중앙에서 재배례를 행한 뒤에 봉심하고 나옵니다. 이것이 장애도 없고 인정이나 예문에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예조 판서의 설이 선유들의 논의와 왕조의 의식에 합당할 듯하나, 이것이 처음 행하는 전례(典禮)인 만큼 두루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지방에 있는 대신과 유신들에게도 낭관을 파견하여 수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김이익(金履翼)을 이조 참의로, 이치중(李致中)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5일 무인

부수찬 한광식(韓光植)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경모궁에 존호를 올리는 예는 바로 우리 전하의 지극한 슬픔이 맺힌 바이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바로서, 반드시 인정과 예문을 극진히 하여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게 하고자 한다는 것은, 비록 어리석은 부부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피고 조심하는 방법을 극진히 힘써 존호를 다시 의논하는 거조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록 실제의 덕이 크게 빛나고 지극한 행실이 널리 선양되긴 하였으나 그중 한두 글자로는 너무 간결하고 엄하여 단지 큰 강목만 게시하였을 뿐입니다. 글자의 뜻을 연역하여 해석해서 후세에 밝게 보여주는 것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실상을 책문에 실어놓아야 은미한 덕을 천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어제 책문의 등본을 보았는데, 그 대체를 근원해 보자면 미덕을 찬양하는 뜻이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고친 존호의 글자에 대해서는 발휘하는 말이 빠졌습니다. 이것이 혹 당초 존호를 의논할 때 결정한 것인데 의논한 후에도 그대로 구본을 써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지금 비록 아름다운 옥을 엮어다가 새기는 것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지만 이 일은 지극히 중하여 구차하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빨리 밝은 명을 내려 우리 경모궁의 실제의 덕과 지극한 행실이 밝게 빛나서 억만년토록 영원히 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책문(冊文)을 개찬(改撰)하는 것은 관계된 바가 막중하고 또 그 가부를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공의를 따라야 할 것이니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사관을 보내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묻도록 하고, 문형과 양관의 제학에게도 수의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이 완성되었다. 상이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주자의 글 읽기를 좋아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대해서는 손수 휘선(彙選)을 가하여 《선통(選統)》·《회선(會選)》·《회영(會英)》 등의 여러 책들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주자의 편지들을 모아 《주서백선》을 만들었는데, 첫머리에 ‘이 연평 선생에게 올리는 글[上李延平書]’를 싣고 ‘황직경에게 주는 글[與黃直卿書]’을 말미에 실어서 도통(道統)의 전수를 보였다.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각신 이만수(李晩秀), 전 승지 한만유(韓晩裕), 초계 문신 최광태(崔光泰), 호조 좌랑 이시원(李始源)에게 명하여 인명·지명·훈고·출처 등을 교감하게 하고 나서 본문 위에 적어놓았고 정유자(丁酉字)를 써서 창경궁의 구 홍문관 자리에서 인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감인소(監印所)라고 이름하였다.
후에는 주자소(鑄字所)라고 하여 모든 책의 편찬과 인쇄를 다 여기에서 하였다. 을묘년 이후에는 거처하시는 영춘헌(迎春軒)에 가까워 편리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인접할 때에 감인소를 경유하여 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책이 완성되자 여러 신하들에게 반포하고, 또 호남·영남·관서의 감영에 명하여 번각(飜刻)하고 판본을 보관하게 하였다.

 

 

 

호남 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별단을 올려 아뢰기를,
"병영의 외창(外倉)이 강진(康津)의 남당포(南塘浦)에 있는데 그 창고의 3천여 석이 넘는 각종 곡식을 현(縣) 안의 한 면(面)에다 환곡으로 나누어 주기 때문에 한 호(戶)당 받는 것이 거의 수십여 석이 넘습니다. 그 환곡을 받아들일 때가 되면 병영에서 감색(監色)을 정해 보내서 기한을 정해 놓고서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바람에 이웃을 침해하고 일가붙이에게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이것이 현 안에 사는 백성들에게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변통하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1. 병영에는 성에 붙어 사는 2천 호가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군정(軍丁)을 침징(侵徵)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 고을과 다른 각 고을의 백성들이 역을 피해 차차 투입해 들어와서 세월이 갈수록 증가하여 이제는 병영에 속한 4개 면의 가구가 4천여 호나 됩니다. 당초 설치한 목적은 병영을 위해 백성을 모집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미 영속(營屬)이 있는데다가 또 2천여 호의 한정(閑丁)이 있으니 충분히 완전하고 견고합니다. 지금 한량없이 그대로 놔둔다면 장차 1만 호, 2만 호나 되어 강진의 다른 면들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심장과 배가 아무리 실하더라도 어깨·등·수족이 병들어 마비가 되면 심장과 배가 어찌 혼자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2천여 호는 예전대로 특별히 병영에 붙이는 것을 허락해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본 고을에 소속시키되 이것을 정식으로 삼아 2천 호에서 더 늘지도 줄지도 않게 한다면 영과 읍에 모두 편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1. 강진(康津)의 저치미(儲置米)는 원래 새로 받아들인 대동미에서 남겨둘 분량을 제외해 두지 않고, 단지 환곡을 용도에 따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영이 삼명일(三名日)에 봉진(封進)하는 진상물의 가미(價米)와 본현이 봉진하는 진상물의 가미(價米) 및 기타 회감(會減)하여 응당 내려주어야 할 수량이 2백 80여 석입니다. 병영이 받는 가미는, 해당 병영에서 매번 영에 속한 4개 면이 바쳐야 할 대동미 중에서 먼저 떼어내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 각사(各司)의 저치미(儲置米)를 마련할 때에는 윗 조항의 가미를 단지 다른 고을이나 본현의 환곡에서 떼주어야 합니다. 때문에 다시 되질하고 방아찧고 하느라 줄어드는 것이 번번이 매석당 4, 5두씩 되는데 결국은 그때마다 민결(民結)에다 나누어 징수하곤 하여 폐단이 막심합니다. 각읍 진상물의 가미(價米)는 이미 저인(邸人)이 덧붙여 도와주는 것도 있으니 약간의 묵은 쌀이 서로 섞이더라도 오히려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영·병영·순영의 진상에는 보태주는 것이 없어 오직 햅쌀만을 쓰는데 햅쌀이 아니면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칩니다. 경비가 어렵겠지만 진상은 더없이 중대한 것이니 먼저 병영의 진상가에 따라 3백여 석을 한계로 법식을 정해 새로 떼어주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1. 진도(珍島)의 목관(牧官) 소재지인 장내면(場內面)은 행정상 해남현(海南縣)에 속한 땅인데 관치(官治)와의 거리가 90여 리나 되고, 삼촌면(三村面)은 바로 진도에 속한 지역인데 진도와의 거리는 바다 너머 1백여 리나 되고 해남과의 거리는 불과 십여 리로 해남 땅 가운데에 끼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두 읍은 모두 서로 방해되는 점이 있습니다. 또 삼촌면(三村面)에는 진도의 외창(外倉)이 있는데 바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허류(虛留)가 반이 넘는 등 갖가지 폐단을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목관으로 말하자면 목장이 대부분 진도에 있는데 목관은 해남에 있으니 명실(名實)이 서로 괴리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두 고을로 하여금 편리하고 가까움에 따라 서로 바꾸어서 붙여주고, 아울러 군보(軍保)들도 바꿔준다면 두 고을과 목관이 모두 편의를 얻을 것입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편리한 쪽으로 처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장흥도(長興島)와 내덕도(來德島)의 궁결 세전(宮結稅錢)은 임자년 정식을 정한 뒤로부터 영저리(營邸吏)가 받는 진상물의 가미와 서로 바꾸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섬들이 다 재해를 입었는데 급재(給災)도 얼마 안 되는데다 또 환곡·향곡·신포(身布)의 견감도 육지 백성들에 비하면 은혜를 입은 것이 없습니다. 6개 읍의 진상물은 이미 가을 추수 때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였고 원가(元價)도 이미 본읍으로 하여금 받아들여 남겨두게 하였고 보면 이 세전(稅錢)을 진상품 가미(價米)와 서로 바꾸는 것도 마땅히 융통하는 것이 있어야겠습니다. 둔전의 세전(稅錢)도 내년 가을까지 절반을 기한을 물리는 것이 똑같이 사랑하여 돌봐주는 정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흥양현(興陽縣)의 정미년 조의 상납 곡물을 실은 배가 영광(靈光) 지방에 이르러 전복되었습니다. 그때 한 석도 건져낸 것이 없었는 데에도 애초 나누어 징수하고 책을 작성하여 놔둔 일이 없었으며, 뱃사람들은 곡물을 실어보낸 주인 고을에 가두어 놓았는데 후에 경술년 대사면령을 인하여 풀어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미 나누어 징수하고 문서를 만들어 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본읍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 금년에 경사(京司)가 관문(關文)을 보낸 것을 통해서야 비로소 사실을 조사해내어 알게 되었으니, 일의 허술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와서는 감색은 모두 이미 죽었고 사공과 격군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대로 놔둘 수 없으니 관찰사로 하여금 내년 봄이 되거든 직접 사실을 조사해내게 하여 만일 징수할 만한 곳이 있으면 받아내고 없으면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 흥양현의 경술년 조세곡을 실은 배가 영광 지방에 이르러 전복되었는데, 이것 역시 한 석도 건져내지 못하였고 선척은 간 곳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신인 정민시(鄭民始)가 관찰사로 있을 때에 영을 순시하며 직접 조사하였는데, 선주라고 하는 이덕기(李德起)가 4백 석을 훔쳐먹은 사실을 조사해내어 장계로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선주를 서울에서 잡아와 곡물 주인 고을에 가두었는데 얼마 뒤에 탈출하여 도망가 버렸습니다. 당시 관찰사가 누차 형조와 포도청에 이문(移文)을 하였으나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받아내야 할 막중한 세곡을 아직도 징수하지 못하고 이러저리 핑계만 대고 있으니 법의 기강으로 헤아려 볼 때 극히 한심한 노릇입니다. 포도청과 형조에 분부하여 체포하게 해서 다시 흥양현에 가두고 바쳐야 할 수대로 받아내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1. 해남(海南)·흥양(興陽)·보성(寶城) 등의 고을은 모두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 바쳐야 할 패선미(敗船米)가 있는데 오랫동안 바치지 못하여 나중에는 도리어 포흠(逋欠)이 되어 막심한 폐단이 되고 있으니 변통해 주어야만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패선미의 규례는 장계로 보고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막론하고 증미(拯米)는 배가 빠진 지방에 물품으로 나누어 주고 열미(劣米)는 곡물 주인 고을에서 다시 징수하며, 건져내지 못한 쌀은 감색(監色)·사공(沙工)·격군(格軍)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것이 본래의 법전입니다. 햇수가 오래되어 더러 탕척받은 전례가 있기도 한데, 이것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만약 한 석 값도 징수하지 않은 채 다만 햇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탕감해 준다면 은혜상으로는 지극하다 하겠지만 법에 있어서는 어긋나는 것이니, 논할 일이 아닙니다. 금년에는 삼남과 경기가 모두 흉년이라는 이유로 증미와 열미를 기한을 물려주는 쪽으로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풍년이 든 후에 한 번 조사하여 영원히 민폐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내년 봄이 되거든 직접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래된 증미와 열미는 2냥으로 친다는 정식의 예에 따라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받아내야 할 곳에서 받아냄으로써 영원히 폐단의 근본을 뽑아버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1. 흥양현의 계축년 조세로 낸 대두(大豆)는 전생서(典牲署)에서 지방에서 직접 받아가는 세로 떼어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해는 막 대대적인 진휼을 겪은 다음이라 백성들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대두 1석에 2냥 5전으로 값을 쳐서 쌀을 사서 대신하는 예에 따라 가을이 되거든 쌀 1석에 가모(加耗) 분까지 아울러 갖춰서 납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후 화성(華城)에서 공인(貢人)에게 쌀을 사들였는데, 금년에 갑자기 전에 없던 흉년을 당하였으니, 선운(船運)은 우선 차치하고라도 쌀을 갖추어 바칠 가망이 만무합니다. 비록 내년 이후에 크게 풍년이 들더라도 곡식으로 상납케 한다면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관전(官錢)은 2할의 이식을 받는 예에 따라 2냥 5전에 5전을 더하여 합쳐서 3냥을 거두어들여 올려보내게 하여 민폐를 쾌히 제거하소서. 비단 흥양현만 그럴 뿐만이 아니라 도내에 능주(綾州) 등 몇 개의 고을도 역시 이러한 명색의 곡물이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한결같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1.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적에 강진·해남·영암이 도회(都會)를 나누어 정해서 각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신이 출입할 때에는 매양 영암의 고달도(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리기 때문에 영암의 경우는 이진창(梨津倉)에 6방을 설치하여 접대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진·해남 두 고을이 도회를 맡은 해에는 다른 고을의 지경을 넘어 접대를 해야 하므로 모두 큰 폐단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영암의 고달도 또한 길목이 되는 섬[孔島]이 되어 비록 영암이 도회를 맡은 해가 아니더라도 섬 백성들이 받는 폐단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영암(靈巖)의 고달도(古達島), 강진(康津)의 남당포(南塘浦), 해남(海南)의 관두포(館頭浦)는 모두 제주로 가는 길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니, 이후로는 차례로 돌아가면서 분배하여 영암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종전대로 고달도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강진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남당포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해남이 도회를 맡는 해에는 관두포에서 바람을 기다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의 세 고을의 수령 및 사신의 행차도 이 정식에 따른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1. 제주로 이전할 곡식을 들여 보낼 때에 바닷신에게 제사 지내는 장소는, 임자년 곡식을 옮길 때에 소안도(所安島)에 들러 행하였으니 올해에도 따라서 이곳에서 행할 것입니다. 바다 너머 1백여 리를 건너가야 하므로 순풍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갈 수 있고, 바닷신에게 제사하는 것도 반드시 길일을 택해서 제사를 행하는데, 만약 순조롭지 못한 풍세를 만나 배를 뛰우지 못하면 허다한 제관들이 섬 안에 머무르게 되니, 끼치는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또 이진(梨津)에서 소안도까지도 1백여 리나 되는데 바다를 건너면서 기도하지 않고 배를 출발시킨다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이 모두 여러 가지 어려운 폐단입니다. 또 장애되는 점은 소안도는 제주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거리에 불과하므로 한 번 바람에 돛을 달면 닿을 수 있습니다. 만약 소안도에 들어간 뒤에 순풍을 만나게 된다면 장차 제사를 아직 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만나기 어려운 바람을 내버려두고 배를 뛰우지 않을 것입니까? 아니면 제사 전이라도 배를 뛰울 것입니까? 신(神)은 어느 곳이든 이르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이왕 배를 출발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고달도 해변에서 제사를 행한 후에 배를 출발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바다 한가운데서 제사한 연후에야 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임자년과 금년에는 다행히도 왕령(王靈)에 힘입어 일마다 순조롭게 성사되었지만 후일의 염려를 깊이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후 곡식을 옮길 때에는 각기 도회관(都會官)이 바람을 기다리는 곳에다 제단을 설치하고 곡식을 실은 배가 다 도착하기를 기다린 뒤에 날을 가려 제사를 행하고서 배를 출발시킨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1. 진도군(珍島郡) 조도면(鳥島面)은 뱃길로 1백여 리나 되는 동떨어진 바다에 위치해 있는데, 바닷길이 매우 험하여 바람을 기다려야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고을원이 된 자들이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섬에 본군의 창고가 하나 있는데 거의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일체 감색에게 맡겨두고 있어 읍의 창고에 손을 댄 더러운 수령이나 곡식을 갖추어 바칠 계책이 없는 포리(逋吏)들이 번번이 이 창고에다 기록을 옮겨 놓기 때문에, 이른바 곡부(穀簿)라는 것은 모두 거칠고 형편없어 실제 곡식은 없고 빈 장부만 있을 뿐이니 진실로 절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연해의 섬들 중 진장(鎭將)이 있는 곳 외에는 비록 영암의 추자도(楸子島)나 보길도(甫吉島), 강진의 청산도(靑山島), 흥양의 삼도(三島)처럼 멀고 큰 곳이라도 창고가 설치된 적이 없는데 유독 이 섬에만 있습니다. 지금 와서는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겼으니 그대로 계속 소홀히 간수하게 놔두어 도둑질을 가르치는 요행의 구멍을 열어놓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도창(鳥島倉)을 남도진(南桃鎭) 부근 경내의 육지와 연결되는 곳으로 옮겨 설치하고, 조도의 백성들 중에서 환곡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 또한 배로 운반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영구히 폐단을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좋은 쪽으로 조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 완도는 바로 황칠(黃柒)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본도의 감영·병영·수영 및 본도의 지방인 강진·해남·영암 등 세 읍에다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 것이 있고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금년에 바람의 재해를 입은 후에 큰 나무는 또한 말라 죽은 것이 많고 겨우 어린 나무 약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칠(黃柒)은 또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1. 완도에서는 우수영에 매달 15파(把)의 땔나무와 한 달 걸러 한 번씩 20석의 숯을 바쳐야 합니다. 땔나무는 1파에 2위(圍)의 길이를 격식으로 삼고 있는데 땔나무 묶음의 길이와 둘레는 모두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곧은 줄기를 골라서 가지와 잎을 잘라버리고 단단하고 빽빽하게 묶어야 하며 감히 짧고 가는 나무를 그 사이에 섞지 못합니다. 때문에 1파의 땔나무를 갖추려면 골라내고 버리고 하는 과정에서 잘라 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숯은 또 2석을 1석으로 치기 때문에 들어가는 나무가 또한 매우 많습니다.
산의 채벌을 금지하는 것은 사체가 얼마나 중한 것입니까. 어찌 오랜 세월 동안 길러온 나무로 하여금 해당 병영의 땔나무가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땔나무와 숯을 배정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초의 정식은 썩은 가지와 떨어진 나뭇잎을 긁어모으는 데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속(營屬)들이 이를 틈타 농간을 부리고 퇴짜를 놓는 것이 나날이 심해져서 점차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만한 재목이고 가서목(哥舒木)은 더욱이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기(軍器)의 중요한 수요인데 유독 이 섬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토산물 중의 기이한 보물입니다. 또 단단한 나무는 자라는 것이 매우 느려서 한 번 잘라 버리고 나면 금새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애석하게 여기고 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은 쓸모없는 재목들과 마찬가지로 땔나무가 되어버리니 앞으로는 각별히 금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수영에서 쓰는 땔감과 숯을 급대(給代)해 주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장애가 될 것입니다. 현재 곡물이 텅 비었다고는 하지만 수천 석의 쌀이나 5천 석의 보리를 떼어 넘겨서 모곡(耗穀)을 취해 급대(給代)하게 하고 땔나무 한 조항에 대해서는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인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수량을 참작하여 마련해서 그 묶음 수를 줄이고 그 파와 위를 덜어야 합니다. 또 가서목(哥舒木)은 일체 소나무의 금지 규례에 따르고 경외에서 부득이하게 쓸 곳이 있으면 소나무의 규례에 의거하여 비국에 보고하고 낙인을 찍어 가져다 쓰도록 정식을 마련해 시행하소서. 보길도(甫吉島)도 땔나무를 나누어 정한 폐단이 있는데, 이 섬이 비록 완도와는 사체가 다르지만 배 만들기에 적당한 소나무가 있는 산에 대해서는 또한 진념하여 마찬가지로 신칙하고 바로잡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1. 사도진(蛇渡鎭)에는 통영이 문목(紋木)과 가판(椵板)을 복정한 규례가 있는데, 본진 근처에 있는 섬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돈으로 대신 납부하고 있습니다. 매번 좌수영이 배를 만들 때를 당하여 노야목(鑢冶木)이라고 일컫는 배 만드는 재목의 말단목(末端木)을 이웃 진으로 하여금 수납케 하고 나무의 다소는 해당 수영에서 정해 보낸 장교가 그 파(把)와 위(圍)를 측량합니다. 그러나 수납할 때가 되어서는 내버려둔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나무가 썩고 줄어들고 부러졌는데도, 해당 수영에서 받을 때에는 한결같이 당초 정했던 파와 위의 수치에 따라 기준대로 바칠 것을 요구하므로 어쩔 수 없이 돈으로 대신 충당하니, 이는 모두 잔약한 진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좌수영이 전선(戰船)의 닻줄에 쓸 산마(山麻) 6백 근을 해마다 복정하는 규례가 있는데 닻줄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개비(改備)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마다 바칠 것을 독촉하는 것은 실로 쓸데없는 짓으로 한갓 폐단만 끼칠 뿐입니다. 노목(櫓木)을 납입하는 규례도 옛날에는 2년에 한 번씩 나누어 정했던 것이 근래에 갑자기 매년 갖추어 바치는 것으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대개 각 진의 고질적인 폐단은 전적으로 통영과 수영에서 복정하는 것이 절제가 없고 뇌물을 주는 명색이 많은 데 따른 것입니다. 진장의 늠료도 태반이 여기로 돌아가고 있으니, 진민이 곤궁하고 초췌한 것은 실로 이 때문으로 일의 형편없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문목(紋木)과 가판(椵板)을 복정하는 규례는 10년을 한하여 방색(防塞)하고, 노야목은 배를 만들 때에 즉시 수납토록 하고, 치수를 트집잡아 퇴짜 놓는 폐단은 일체 엄금하소서. 닻줄과 노목(櫓木)은 모두 한 해 걸러 한 번씩 복정(卜定)하는 것으로 정식을 마련해 시행하라는 뜻을 통영과 수영 양 병영에 분부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 근래 창고에 실제 곡식은 없으면서 빈 장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진실로 하나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만일 한 석도 축난 것이 없는 곳을 찾아본다면 열에 한둘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폐단은 병영과 수영보다 더 심한 곳이 없습니다. 병사는 새로 부임하였으니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은 없을 듯하지만 우수영은 해당 곤수가 부임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감히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의 체면으로 논해 보더라도 극히 옳지 않습니다. 듣건대 한창 힘을 다해 보충하고 있다 하니, 과연 그렇다면 거의 허물을 대속(代贖)할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영의 재물은 바로 영진(營鎭)의 장교와 군졸들에게 재해가 들 경우 급대해 줄 자본이니, 이 무리들이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라도 곡식은 없이 빈 장부만 있다면 실로 군사들의 사기에 관계되는 바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엄히 신칙해서 기한을 정해 주고 친히 비장을 파견하여 헛되이 빈 장부만 끼고 있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1. 내년은 전선을 개조하는 해입니다. 전선을 개조할 때에는 배 만드는 재목을 찍어 운반하는 데에 전적으로 백성들의 힘을 씁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대부분 직접 역에 나갈 수 없으니, 그럴 경우에는 호마다 돈을 거두어 방역(防役)을 하기 때문에 매번 개조할 때마다 실로 연안 백성들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호적법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해를 입은 해라는 이유로 또한 기한을 물려 행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전선의 개조를 내년 가을이나 내후년으로 물려 행하는 것도 안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융정(戎政)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니 묘당에 물어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1. 금년에 다행히 6개의 읍을 견감하고 구휼해 주신 은전 덕분에 백성의 힘이 크게 펴질 수 있었으므로 새해가 되기 전에는 살아나갈 계획을 세워 거의 지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만 지나면 쌀독이 텅 빌 것이니, 사람들을 진휼하는 것을 막론하고 농민의 생계가 진실로 아득하게 되었습니다. 세곡(稅穀)이나 종자나 농사철의 식량을 모두 약간의 환곡으로는 구제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국력이 다 없어져서 널리 베푸는 구차스런 방법을 할 수 없으니, 널리 미곡 상인을 모아서 민간의 식량이 스스로 여유가 있게 하고 국가의 계책에 손상이 없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천곡(千穀)의 식량이 시장에 있고 온 시장의 가격이 공평하다면 한 지방의 식량은 절로 풍족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한 말입니다.
지금 완도의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보건대 배를 만드는데 적합한 재목이 2백 그루쯤 되는데, 이것은 바로 배의 밑판에 적합한 큰 소나무입니다. 삼판(杉板)의 경우에는 조금 더 작더라도 쓸 수 있으니 가령 배 1척을 40그루를 들여서 마련할 수 있다면 6, 7백 석을 실을 수 있는 배 10여 척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본도(本道) 지방인 강진·해남·영암 등 세 고을에 허락해 주어서 포구 마을의 배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부호(富戶)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척을 만들게 하고 관가에서는 그 물력을 헤아려 도와 줍니다. 그리고 부호로 하여금 본전을 내어 곡식이 있는 다른 고을이나 다른 도에서 곡식을 사서 본 지방에 가져와 팔게 하되, 다른 재물을 사오거나 다른 고을에서는 곡식을 팔 수 없도록 관가에서 검칙해야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헤아려 보건대, 배 만드는 공사를 섣달에 시작해서 정월에 완료하고 선척의 사용은 2월부터 시작하여 4월까지 하게 하면 3, 4 차례 왕복할 수 있으니, 수만 석에 가까운 곡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백성들의 식량은 절로 풍요로워지고 진휼할 인구도 줄어들 것이요, 시장에는 곡식이 있게 되어 부세도 받아들이기 쉬울 것입니다. 더구나 사오는 것은 쌀뿐만이 아니라 콩·팥·종자까지 반드시 아울러 사올 것이니, 각종 곡식 종자를 마련하기 어려운 근심도 조금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종자에 여유가 있고 농사 식량도 여유가 있으면 내년 농사도 또한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큰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묘당에 물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1.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명신(名臣)인 서광계(徐光啓)가 찬술한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수천 마디를 늘어놓으며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말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반드시 속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구마 종자가 우리 나라에 나온 것이 갑신년이나 을유년 즈음이었으니 지금까지 30년이나 되는 동안 연해 지역의 백성들은 서로 전하여 심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먹기 좋고 기근 구제에 효과가 있는 것은 중국의 민(閩)·절(浙) 지방과 마찬가지였으나, 우리 나라 풍속에 처음 보는 것이어서 단지 맛있는 군것질 거리로만 여기고 있을 뿐 식량을 대신해서 흉년을 구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신은 항상 한스럽게 여겨왔습니다. 이 곡물은 단지 민(閩)·절(浙) 지역에서만 성하고 우리 나라가 종자를 얻은 것도 일본에서였으니, 이것의 성질이 남방의 따뜻한 지역에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이번 길에서 연안의 군과 여러 섬들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러한 곳에 반드시 고구마를 많이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에 곡식이 없는 것을 목견하고는 구제할 방도가 없어 시험삼아 고구마의 유무를 찾아보다가 그 사실을 갖추어 알았습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따라서 이르면서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습니다. 관에서 백 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좋은 물건이 있어 다행히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文益漸)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갑자기 가렴주구를 행하여 어렵사리 해외의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좋은 종자를 오래 자랄 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촉나라에는 토란이 있어 백성들이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고, 우리 나라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소나무 껍질과 칡부리로 크게 기근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징험할 만한 일로 이미 시험해 효험을 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남의 도신 및 각 해당 수령에게 분부하여 먼저 연해안 고을부터 번식시키도록 신칙하고, 그 과정을 엄하게 하여 마을마다 일을 주관할 사람을 한 사람 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하여서 어느 마을 어느 집이든 다 심게 하고,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이임(里任)을 태장(笞杖)을 쳐서 죄를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들이 감히 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만세토록 영원히 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나라 제도에 집에 나무를 심지 않는 자에게 옥속(屋粟)을 내게 하였고 《서경》에서는 아홉 가지 공[九功]을 서술하면서 ‘위엄으로 감독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한다.’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잘사는 방도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권장하는 것과 위엄을 세우는 것 그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겠습니까. 남방의 토지 성질은 어디든 고구마 심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은 산밭이나 돌밭에는 더욱 심기가 좋습니다. 그러니 우선 삼남 연해안 고을과 섬 지방부터 널리 심기를 권장하고 차차 토질이 알맞은 곳에 보급시켜 나간다면 서북 지역 외의 6도에는 심지 못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3읍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섬이라 호령이 행해지기 쉬울 것이고 또 대마도와 마찬가지여서 토질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 심으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거의 배로 곡식을 실어나르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심는 자가 많으면 종자가 부족할 걱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고구마라는 곡물은 넝쿨이 뻗어나가면서 열매가 생기기 때문에 종자를 전하기가 매우 쉬우니 한 치의 덩쿨이나 고구마 한 알이면 한 묘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차차 이식하면 한없이 전해질 수 있으니 종자가 적다는 것은 근심할 게 못됩니다. 이왕 이것을 계획하는 김에 영과 읍의 토색질하는 폐단에 대해 먼저 과조를 세워 엄하게 금지를 가한다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지금의 담배나 수박처럼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물이나 불처럼 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색질하는 폐단도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훗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강진의 남당포에 있는 병영의 외창에 관한 일은, 한 호가 받는 환곡이 거의 수십 석이 넘는다 하니 이웃을 침범하고 종족에게 징수해가는 폐단을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營屬)이 이익을 보는 자본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바로잡아 고치지 않고 있지만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현(縣) 내의 일면에는 호수를 계산하여 곡식을 헤아려 주되 줄이는 쪽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그 나머지 수는 본관(本官)에 넘겨서 부근의 읍창(邑倉)으로 이송하여 그대로 부근의 면리(面里)에 나누어 주게 하고, 색낙조(色落條)는 값을 돈으로 바꾸어 정해서 본관에서 해당 병영으로 보낸다면 이익을 누리는 것은 전과 같고 민폐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 지방의 이해를 직접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바로잡고서 즉시 보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병영에 소속된 성의 2천 호 외에 나머지 민호를 모두 본래의 고을에 소속시키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서 역을 피하려고 하는 이러한 때에 그 성 밑에 사는 자에 대해서는 영원히 첨정(簽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투탁할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이니, 서계 중에 이른바 다른 면들이 장차 텅 비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2천 호는 예전 대로 병영에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본관에 소속시켜 다른 백성들처럼 첨정하는 것이 과연 둘 다 편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누어 소속시키는 즈음에 반드시 분란스러운 단서가 많을 것이니, 이 또한 도신으로 하여금 곤수와 읍재와 충분히 왕복하며 상의한 뒤에 규정을 정하고 실태를 보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병영에서 진상하는 물품의 가미(價米)를 3백 석으로 제한하여 새 저치미로 떼어 줄 것에 대한 일입니다. 강진에 이 폐단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어사의 계사에도 들어 있었습니다. 해당 관청에서 매년 2백여 석의 햅쌀을 저치미로 떼어주는 것을 지금까지 준행해 오고 있는데 지금 환곡을 떼어준다는 설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반드시 중간에서 쌀을 바꾼 소치이니 엄하게 관문으로 조사한 뒤에 처리하고 새로 떼어주는 한 조항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진도의 목관(牧官) 소재지인 장내면(場內面)과 진도의 삼촌면(三村面)을 바꾸어 소속시키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논열한 바는 실로 편의에 부합한 것이나 토지를 나누고 합하는 것은 중요한 정사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하게 사정을 탐문하여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한 후에 품처(稟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장흥도(長興島)와 내덕도(來德島) 등의 궁결(宮結)에 대한 일입니다. 섬의 백성들이 재해를 입은 것이 육지에 비해 더욱 심하다면 섬 백성들이 입어야 할 혜택도 마땅히 똑같이 보살펴주는 정사를 받아야 할 것이니 청한 대로 시행할 것을 허락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흥양현(興陽縣)의 정미년 조 상납해야 할 곡물에 대한 일입니다. 이는 도신으로 하여금 봄이 되기를 기다려 사실을 조사해서 받아내든 탕감해주든 간에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게 한 후에 품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흥양현의 선주 이덕기(李德起)를 잡아서 도로 가두는 일은, 속히 포도청과 형조로 하여금 도로 잡아가두고 절취한 곡식을 받아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해남(海南)·흥양(興陽)·보성(寶城) 등 고을이 호조와 선혜청에 납부해야 할 패선미(敗船米)에 대한 일입니다. 증미(拯米)와 열미(劣米)의 오래되고 가까운 시기를 구별하여 돈 2냥이나 3냥으로 징수해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전례가 있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연조(年條)를 구별해서 그 분수(分數)를 정하고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와 선혜청에 보고하게 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이것을 살펴보아 받아들여서 영원히 근본을 뽑아버리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흥양현의 계축년 조 세로 내야 할 콩에 관한 일입니다. 위유사가 이미 민정을 탐문해 보고 이러한 결론을 아뢰었으니 이에 따라 시행하라는 뜻을 해당 부와 도에 분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제주도 세 읍의 수령 및 사신들이 왕래할 때에 강진·해남·영암 세 읍이 도회를 나누어 정하는 데에 관한 일입니다. 바닷길이 편하고 순조롭다면 각기 도회를 맡은 해에 따라 그 읍의 포구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편하고 좋겠습니다. 이것에 따라 법식을 정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고 바람을 기다리는 곳의 편부도 다시 상세하게 탐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러한 뜻을 일체 분부하여서 만일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한 단서가 있으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해서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제주도로 옮겨가는 곡식을 들여 보낼 때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에다가 제단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령이 이르는 것은 물에서나 땅에서나 마찬가지이니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논한 바가 매우 마땅합니다. 이후로는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도군(珍島郡) 조도(鳥島)의 창고를 남도진(南桃鎭) 근처로 옮겨 설치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각읍의 여러 섬들에는 창고를 설치한 적이 없는데 이 섬에만 유독 설치했던 것은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오래된 뒤라서 도리어 섬의 폐단이 되고 있는 것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좋은 쪽으로 옮겨 설치한 후에 보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완도(莞島)의 황칠(黃柒)을 10년을 기한으로 해서 면제해 줄 것에 관한 일입니다. 지금 영과 읍의 가렴주구로 인하여 생산지에서 도리어 계속 잇대기 어려운 근심이 있다고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영읍에 바치는 것은 일체 모두 10년을 한하여 임시로 감면해주고, 비록 10년이 지난 뒤라도 그 동안 얼마나 자라났는지와 얼마나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웠는지를 논하여 본사에 보고한 연후에야 비로소 옛날대로 회복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완도에서 우수영에 바치는 땔나무와 숯을 급대(給代)해 줄 것과 가서목(哥舒木)을 낙인찍은 뒤에 가져다 쓸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진실로 급대(給代)만한 것이 없으나 병영에서 급대해 주는 폐단은 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니 가벼이 허락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별도로 바로잡을 대책을 강구하여 사리를 따져서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서목(哥舒木)을 낙인찍어 가져다 쓰는 것은 번잡스러울 혐의가 있으니 그냥 놔두도록 하십시오.
사도진(蛇渡鎭)의 문목(紋木)과 가판(椵板)을 방색(防塞)하는 데에 대한 일입니다. 문목과 가판이 이미 본진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데 돈으로 대납케 하는 것은 바로 억지로 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10년을 기한으로 하는 것은 의의가 없을 듯합니다. 영원히 혁파하든 수를 줄이든 간에 하나로 결정해서 정식을 정한 후에 사리를 따져 보고하게 하십시오.
풀무에 쓸 땔나무의 규격을 정하는 법은 일절 엄히 금하고 드러나는 대로 중하게 다스리십시오. 그리고 닻줄과 노목(櫓木)은 아울러 한 해 걸러 한 번씩 복정하는 것으로 정식을 정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우수영의 빈 곡식 장부를 검열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곤수가 되어서 어찌 군교나 병졸들에게 급대할 자본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입니까.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기한을 정해서 장부를 채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보고된 이상 그대로 놔둘 수 없으니, 해당 곤수는 파직하여 다른 곤수를 징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내년 전선을 개조하는 것에 대한 일입니다. 전선의 개조는 융정에 크게 관계되는 일인 만큼 호적법에 비교해 보더라도 시급한 점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의논하기 어려우니 그대로 놔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완도의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로 배를 만드는 데 관한 일입니다. 구황(救荒) 정사는 곡식을 사서 옮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로 배를 만들자는 논의는 참으로 일리가 있는 의견이니, 특별히 허락해 주어서 편한 대로 힘써 모으게 한 다음 만든 배가 몇 척이나 되고 곡물을 사서 옮긴 실효가 있는지 없는지를 또한 일일이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읍과 진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는 바가 없고 민정(民情)이 진실로 기꺼이 부역에 나오려고 할지는 헤아릴 수 없습 니다. 아울러 이 점을 엄히 신칙하여 도리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연해 지역 고을과 제주도에 고구마를 널리 심을 것에 관한 일입니다. 고구마가 처음 전해졌을 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 말하기를 ‘이것이 만약 풍속이 된다면 곡식이 흙처럼 천해질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서계의 내용을 보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영읍의 가렴주구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이웃 나라가 듣게 해서는 안 되니, 양남의 도신 및 제주에 분부하여 관에서 침탈하고 토색질하는 폐단을 지금부터 통렬히 개혁하고, 많이 심고 많이 수확한 자는 연역(烟役)을 감해주어 권면할 바를 알게 하소서. 그래서 일단 풍속이 이루어진 후에는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져서 나라 안에 두루 퍼질 것이니, 우선 이로써 흥기하고 권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2월 26일 기묘

영의정 홍낙성이 사관을 통해 덧붙여 아뢰기를,
"방금 사관이 와서 부수찬 한광식(韓光植)의 소본과 성상의 비답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은 옥책문(玉冊文)을 보고 단지 그것이 극도로 성덕을 찬양했다는 것만 알았지 글자의 뜻을 발휘하는 데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즉 옥책문을 지어 올린 자도 반드시 그 심려와 재능을 다 쏟았을 것이지만 천지 일월과 같은 광대함과 광명함은 실로 문자로써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것을 본 자가 또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해서 더더욱 유양(揄揚)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신자로서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신이 어찌 다른 의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영중추부사 채제공은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물음을 받고 다시 옥책문을 펼쳐 두세 번 읽어보니 그 슬기로운 덕을 유양한 바가 성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온 나라의 여정이 두 자의 존호를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한 것은 대개 하늘에서 타고난 순전한 행실을 묘사해 내어 만세에 밝게 게시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문의 내용은 너무 범범한 데 가까운 듯하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유감이 남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천억년토록 전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옥당의 소에서 개찬하기를 청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인 듯합니다. 신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이소는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성덕을 유양(揄揚)하고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글을 옥에 새겨서 천억년토록 밝게 보이는 것은 전장(典章)의 지극히 중한 것이요 인정으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의당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데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바가 있으면 개찬해서 새기는 것이 비록 어렵긴 하지만 마땅히 한결같이 공론을 따라서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당연한 데에 귀결되도록 힘쓰고 상세한 내용을 빠짐없이 담아 흠결이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희는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경모궁의 옥책문 등본을 얻어 보았는데, 삼가 올린다는 말 위의 두 구절은 바로 8자의 뜻을 발휘한 것인데, 지금 유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그 말이 성덕을 찬양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책문을 개찬하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이 관계된 바가 막중하니, 신이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병모는 아뢰기를,
"천지의 위대함과 일월의 광명은 실로 문자로서 만분의 일이라도 묘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나 충분히 유양(揄揚)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유감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신자로서 지극한 소원입니다. 찬술하여 올린 사람은 반드시 정성과 재주를 다하였겠지만 유신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일이든 다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다른 의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제학 서유신은 아뢰기를,
"신은 옥책문을 지은 사람으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엄한 주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물어보시는 데에 대해 감히 답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 제학 구상(具庠)은 아뢰기를,
"경모궁에 추가로 올리는 존호의 옥책문이 만약 글자의 뜻을 연역해 풀이하는 데에 미진한 점이 있다면 새기는 것이 이미 끝나간다는 이유로 그대로 놔두고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즉시 원본을 가져다가 다시 발휘하는 것이 진실로 정리와 예문에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예문관 제학 이병정은 아뢰기를,
"경모궁에 올릴 존호를 다시 의논하는 것은 우리 성상께서 공경하고 삼가하며 진선 진미하게 하여 우리 경모궁의 성대한 덕과 순수한 행실을 밝게 천명하여 후세에 영원히 남겨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고자 하는 통달한 효성과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옥당의 소에서 이미 책문에 대하여 유감을 가졌습니다. 이전에 찬술하여 올린 것이 뜻을 극진히 하여 묘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저의 의견으로는 문장은 고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일은 다같이 동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얼마나 막중한 일이며 얼마나 막중한 글입니까. 문형에게 거듭 명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여 실제의 덕을 발휘하고 숨겨진 빛을 펼치도록 하되 고치고 또 고쳐서 극도로 훌륭하게 하여 천하만세의 하찮은 백성들까지도 다시는 다른 의견을 내지 않게 한다면, 이는 곧 당초 다시 의논하게 한 성상의 뜻에 부합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유양(揄揚)을 형용하는 즈음에 능히 진선 진미(盡善盡美)하였다는 것을 어찌 감히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옥당의 상소에 이렇게 진술한 바가 있으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야 하는 자식된 나의 도리상 한 편, 한 장, 한 구절을 짓는 데도 원만하고 좋게 되도록 힘쓰는 것이 당연한 사리이다. 옥당의 상소에서 지적하는 것이 어떤 구절인지 문형으로 하여금 해당 옥당의 관원과 왕복하며 상의해서 뜻을 다해 다듬어 다시 부표(付標)하게 하라. 옥당의 상소에서 이미 침범하거나 지적하는 말이 없었고 보면 문형이 어제 저녁에 피혐한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다. 대제학 서유신을 다시 즉시 패초하여 공무를 보도록 신칙할 것을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소명을 어기니, 하교하기를,
"사람들의 견해란 종래로 같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지은 것을 어찌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소중하고 막중한 분을 위하는 것이니, 문장을 윤색하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이것이 혐의스럽게 여기지 말고 즉시 나와 개찬(改撰)하게 하여, 반드시 원만하게 귀결되도록 힘쓰게 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패초를 어기고 거행할 뜻이 없다면 이 어찌 소중한 바를 높이고 막중한 것을 위하는 도리이겠는가. 다시 패초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과 관련되는 것이니 전의 패초하라는 전지(傳旨)는 시행하지 말고 다시 더 엄하게 신칙하여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문형의 개인적인 의리는 개인적인 의리이고, 이때 나의 마음은 본래 나의 마음이다. 이 ‘나의 마음[予心]’이란 두 자를 듣고 구구한 개인적인 의리를 변명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이러한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영남 위유사(嶺南慰諭使) 이익운(李益運)을 소견하였다.

 

12월 27일 경진

수찬 한광식(韓光植)이 상소하기를,
"어제 문형이 전교를 인하여 왕복한 말이 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미 원소에서 다하였으니 문형이 스스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구절이 흠이 되고 어떤 말을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문형이 반드시 이미 다 점검했을 터인데 학문이 하찮고 말단 관료인 신이 어찌 감히 막중한 글을 초하는 의논에 참여하여 온 세상의 비난을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문장가가 글을 짓는 법은 만약 한 자 한 구절에 조금이라도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손 가는 대로 점화(點化)하기를 철을 단련하여 금을 이루듯이 하는 것이 진실로 문장의 도리입니다. 명맥과 정신이 모여야 할 것이 혹시 하나라도 빠졌으면 반드시 전편(全篇)을 개찬하여 별도로 기축(機軸)을 세운 연후에야 바야흐로 혼연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원만하고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평범한 과거 문장도 오히려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거늘, 하물며 이 더할 나위 없이 중하고도 엄한 빛나는 옥책문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속히 문형으로 하여금 뜻을 다해 개찬하게 하여 성대한 의전을 중하게 하고, 이어서 신이 명을 거스른 죄를 다스려 조정의 기강을 엄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아무리 논사(論事)하는 직위에 있어 의리상 말하지 못할 일이 없다 하지만 감히 분의(分義)와 도리를 벗어난 것을 가지고 가볍게 따지고 드는가. 너의 일을 네가 모름지기 생각해 보라. 진실로 전편을 개찬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으면 전편의 잘못된 점을 가지고 마땅히 처음 소에서 분명히 말했어야 할 텐데 소의 말은 극히 얼렁뚱땅 얼버무린 것이었다. 문형으로 하여금 왕복하며 뜻을 결정하여 고쳐서 부표하라고까지 한 것은 국체가 존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반드시 공사(公私)가 모두 편하게 하고자 하여 이러한 구차한 거조를 한 것이다. 지금 너의 소를 보니 갑자기 전편을 개찬할 것을 청하였다. 그렇다면 처음 소에서 청했던 것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인데 네가 또한 스스로 알고서 그런 것인가. 이 얼마나 비할 데 없이 중대한 일인데 공공연하게 의심할 데 없는 글에 대해 의심을 일으켜 놓고, 이어서 또 조였다 풀었다 하며 중언부언하여 두려워하거나 삼가하고 어렵게 여길 줄을 모르니, 너의 일은 참으로 놀랍다. 너 같은 자를 논사하는 반열에 그대로 놔두고도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먼저 이름을 삭제하는 형전을 시행하여 사체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경계로 삼겠다."
하였다.

 

하교하였다.
"애초의 생각에는 수의하는 일까지 거행하고 싶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겠기에 수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미 수의를 하였고 또 여러 의논을 따라 개찬한 구절을 부표하게 하였다. 막중한 문자의 사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런데 매우 설왕설래하며 설만하고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나라의 체모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와서 왕복하며 부표하게 하는 것을 결코 다시 할 수 없고 또한 반드시 거행할 이유도 없다. 옥책문의 제술관을 다시 부표하도록 하라."
12월 28일 신사

상호 도감이 경모궁 옥책문 제술관으로 우의정 이병모를 다시 부표하였다.


 

 

 

12월 29일 임오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경모궁에 정월 초하루 제사를 친행(親行)하겠다는 명을 그만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년 정월 초하루에 경모궁의 제향을 친행하는 것은 곧 천리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경은 모쪼록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30일 계미

대제학 서유신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자책하고 있는데, 삼가 경모궁의 제문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만, 신이 어찌 명을 받들 형편이겠습니까. 신의 거취는 이미 한광식이 첫번째 소를 올리던 날에 결정되었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에 따라 광식에게 편지로 물었는데 그 답에 별로 말하는 것이 없더니, 두 번째 소가 나오자 전편을 고쳐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형세가 갈수록 긴박해졌고 수단이 더욱 드러나서 신의 처지는 더욱 위태로웠습니다. 다행히도 처분이 엄명하였고 제술의 임무는 숙망을 지닌 이에게 다시 주어졌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조정의 사체가 지극히 정대해졌고 신 또한 수치스럽게 탄핵받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니, 비록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게 했더라도 이에 미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옥당의 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의심할 데 없는 문자에서 의심을 일으켰다.’고 하신 말씀이 있었으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신은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듯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앞으로는 글을 짓는 자리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신의 직명을 거두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한 바가 지나치다.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남 위유사 이익운(李益運)이 별단을 올려 아뢰기를,
"1. 통진부(通津府)에서 패몰된 밀양(密陽)의 조운선에 실었던 미두(米豆)의 수량은 모두 4천 3백 14석 7두 남짓이었습니다. 짐을 실은 배가 전복했을 경우 곡물을 나누어 징수하는 법[臭載穀物分徵法]에는 증미(拯米) 1석 중에서 9두 1승 2합은 배가 패몰된 지방의 고을에서 새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열미(劣米) 5두 8승 8합은 본래 곡물을 냈던 고을에서 납부하여야 하며, 건지지 못한 수량은 감색·사공·격군에게서 징수하는 것이 본래부터 《통편(通編)》에 실려 있는 바꿀 수 없는 일반적인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번 통진에서 전복된 배의 곡물을 나누어 징발한 법은 이와 달라서 이미 건져냈는지 못 건져냈는지를 불문하고 말린 쌀과 열미의 전 수량을 배에 탔던 감색 및 사공·격군 등에게서 나누어 받아들였습니다. 신이 밀양 경내에 도착하자 길을 막고서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백성들의 태반은 바로 사공과 격군들의 이웃이나 친족이었습니다. 삼랑창(三浪倉)에 다다르고 보니 이 창고는 조운하여 옮기는 곳인데 부락이 쇠잔하고 인가도 드물었습니다. 그 까닭을 그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친족에게 징수하는 데에 시달려서 도망간 자가 이미 많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침탈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부에 들어간 뒤에 곡절을 상세하게 탐문해 보니, 4차례의 조운선이 통진에서 패몰된 뒤로 해도에서 즉시 규례대로 장계로 보고하지 않고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새 쌀로 바꾸어 내겠다고 핑계대었습니다. 이미 건져낸 쌀 9백 89석 남짓을 매 석당 2냥 2전으로 발매하여 돈을 거두고 그 나머지는 전 수량을 새 쌀로 바꾸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조에서는 쌀 한 석당 값이 4냥이고 대두는 한 석당 값이 2냥이며, 선혜청은 쌀 한 석당 가격이 6냥입니다. 통진에서 발매한 2냥 2전 외에 부족한 수는 모두 사공과 격군에게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웅천(熊川)에서 바쳐야 할 것이 4천 7백 16냥이고, 김해(金海)에서 바쳐야 할 것이 3천 3백 93냥이고, 영산(靈山)에서 바쳐야 할 것이 1천 2백 50냥이고, 밀양에서 바쳐야 할 것이 1만 1천 7냥으로 합쳐서 1만 9천 3백 67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사공과 격군이란 자들은 모두 포구에 사는 지극히 가난한 무리들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을 겪으면서도 입에 풀칠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한 되의 쌀이나 한 푼의 돈이라도 실로 독촉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임자년 이후로 죽는 이가 계속 잇달았으니 이웃과 친족에게 징수하는 것이 형세상 부득이 한 것이었지만 3년 동안 독촉하여 거둔 것이 3천 2백 냥에 불과하였습니다.
대개 이 조운법은 본래 엄중하여 범한 자에게 법을 시행한다는 것이 《통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해당 도신이 조법(漕法)대로 시행하지 않고 새 쌀로 바꾸어 바친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내어 감색과 사공·격군에게 두루 거두고 있는데, 이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의 혜택은 전에 없던 것이어서 온 도가 모두 기뻐하여 고무되었는데, 증열미두(拯劣米豆)도 정지하거나 감면해 주는 쪽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통진의 쌀은 거론되지 않아 4읍의 사공과 격군만 유독 감면해 주는 은혜를 받지 못했으니,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곡식의 명칭이 열미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지극히 쇠약해진 백성들에게서 저 적지 않은 돈과 쌀을 징수한다면 비록 피부를 긁어내고 골수를 빼낸다 할지라도 실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혹 다른 고을로 옮겨가 살려고 하면 이웃에게 징수하는 피해를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떼로 일어나 공격해 내쫓아서 살 수 없게 만든다고 하니, 듣기에 참혹하고 보기에 불쌍합니다. 똑같은 백성이고 똑같은 은전인데 누구는 은혜를 받고 누구는 빠지는 것은 균등하게 보살펴 주는 정사에 흠이 될 것입니다. 법전에 따라 증열미(拯劣米)로 옮겨 기록하여 일체 감면토록 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조금씩 나누어 받아들인다면 백성들도 힘을 펼 수 있는 방법이 되고 경비도 크게 손실을 가져올 염려가 없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양전(量田)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세금을 징수당하는 것과 경상 부세가 줄어드는 것이 모두 경계가 바르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10년마다 한 번씩 다시 양전하는 법은 바로 옛사람의 원대한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도를 막론하고 경자년 이후로 지금까지 옛것을 인순해 오기만 하여 전제(田制)의 문란함과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든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한데 영남 지방은 더욱 심합니다.
이번에 신의 행차에 달려와 호소하는 백성들은, 모두 임자년 수재로 땅이 뒤집어지고 모래가 덮인 곳이 많았는데 작년에 도로 기경(起耕)한 것으로 쳐서 백징(白徵)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일컬으며, 여러 읍의 백성들이 한결같은 소리로 억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임자년 이전에도 수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천이 뒤집어지고 모래에 덮인 땅으로 쳐서 영원히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경우에 포함시킨 토지가 이처럼 많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 이번에 기경된 토지를 원장부와 비교해 보건대 3분의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영원히 면제해 주는 토지는 해마다 증가하고 새로 기경한 토지는 전혀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현재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개간되지 않은 토지가 없으니 수천여 리를 두루 돌아다녀 봐도 한 평의 버려진 황무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토지를 개량(改量)한 지가 지금 이미 70여 년이나 되었으니, 연수가 오래된 포구 땅에는 반드시 진흙이 생겨난 곳이 많을 것이고, 연해 지방의 제언(堤堰)에도 반드시 새로 개간된 곳이 많을 것이며, 내가 뒤집어져 모래에 덮였던 곳도 반드시 도로 기경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 새로 기경된 곳과 그 묵어 버려진 토지를 비교해 봐서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면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묵은 곳은 있으나 개간한 곳은 없고 줄어든 곳은 있으나 더 늘어난 곳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았건 줄었건 간을 막론하고 영남의 백성들이 이처럼 원통하다고 하고 있으니, 한 번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먼저 제대로 된 수령을 얻은 후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니, 온 도를 한꺼번에 개량하는 것은 비록 의논할 수 없다 하더라도 먼저 정도가 심한 곳부터 시작하여 1년에 십여 고을씩 차차로 개량해 나간다면 3, 4년을 지나지 않아서 일을 완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년 가을을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거행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소서.
1. 도내에 통영(統營)의 창고가 있는 곳이 다섯 군데인데, 바로 진해의 창포(倉浦), 남해의 곡포(曲浦), 밀양의 삼랑(三浪), 하동(河東)의 목도(鶩島), 고성(固城)의 고성창(固城倉)이 이것입니다. 이 다섯 마을은 본래부터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환곡의 폐단이 고질적인 것이 되었는데 별도로 통영 창고를 설치하자 곡식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도내의 고을에 쌓여 있는 통영 곡식의 수량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일체 본읍에 맡기고 단지 모곡만을 취해가기 때문에 환곡을 받아가고 들일 즈음에 별로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군데의 통영 창고는 본읍에서 전혀 간섭하지 않고 감색과 고자(庫子)도 모두 영문에서 임명해 부리는 사람들로서 이들에게 창고 장부를 일임하여 그들이 하는 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곡식 색에 대해서는 일부러 퇴짜를 놓고, 섬을 말질할 때는 반드시 높이 넘치게 하며, 환곡을 받을 때 감모분으로 받는 것을 절제 없이 하고, 환곡을 흩어줄 때는 사납게 구는 등 멋대로 농간을 부리며 한갓 매질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환곡 한 석을 바치는 데 거의 20두가 넘으니 이것이 진실로 환곡을 바치는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순영의 용당창(龍塘倉)과 좌병영의 경주창(慶州倉)도 모두 병영의 교리가 주관하기 때문에 모두 이런 폐단이 있습니다.
대개 이 창고의 곡식을 당초 설치했을 때에는 무슨 의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곡식도 수백 포에 불과하였고 창고도 너댓 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창고 밑에 사는 약간의 민호들에게만 환곡을 나누어 주고받아들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설치한 지가 오래되자 곡식 장부도 점점 복잡해지고 모곡 위에 또 모곡이 생겨나 해마다 증가하면서 옛날에는 약간의 민호에게만 나누어 주던 것을 지금은 거의 절반의 고을 민호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7개 창고 부근에 있는 몇 군데의 면리는 이미 본읍의 환곡을 먹고 또 해당 창고의 환곡을 받는 바람에 두 군데서 독촉을 받는 것이 이미 쌓인 폐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통영 창고 보기를 마치 범이나 이리 보듯이 하여 봄에 환곡을 받으면 가을에 갚을 것을 미리 근심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통영 창고가 저기 있으니 쇠그물이 풀리지 않는구나. 불쌍하다, 우리 백성들이여. 언제나 편히 살꼬.’ 합니다. 이것은 신이 목격한 바로 바로잡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흉년을 당하여 연해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서는 곡식 장부가 크게 줄어들어 받아들이는 것이 많지 않으니, 백성들을 진휼하고 민호에 환곡을 나누어주는데 두루 배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쪽 것을 옮겨다 저쪽을 보충하여 차차 옮겨 보내면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곳을 보태주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통영 창고 근처에 사는 백성들의 뼈에 사무친 폐단도 조금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순영의 용당창과 좌병영의 둔창도 일제히 혁파하고, 이전한 곡식은 그대로 각 해당 고을에 맡긴 뒤에 순영의 곡식이든 통영의 곡식이든 병영의 곡식이든 상관말고 ‘순영 별도회계 규례[巡營別會例]’에 의거하여 내년부터는 본읍에서 받아들여 머물려놓고 단지 모곡분만을 각 해당 영문으로 수송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라고 분부하소서.
1. 기장현(機張縣)은 대마도(對馬島)와 가장 가까워 표류한 왜인들이 와서 정박하는 일이 거의 없는 달이 없습니다. 변방의 보고 규례는, 처음에는 드러난 형상을 멀리서 관찰하여 알리며, 다음은 어느 곳에 정박했는지를 보고하며, 세 번째는 무슨 일로 왔는지 실정을 물어 보고하고, 네 번째로는 어느 날 배가 출항할 것인지 보고하고, 다섯 번째는 어느 지경에서 교체하였는가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풍세가 좋지 못하여 즉시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있으면 거의 제한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보고를 전해야 하며 감히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아문이 아홉 군데나 되므로 공사(公事)를 맡은 자가 다시 고을의 사방에 사는 백성들을 돌아가며 차역시키는데, 일을 맡은 자의 노자는 경내에 사는 백성들에게 똑같이 거둬들여서 거리를 계산하여 지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선이 한 번 정박하면 온 경내가 소란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돈을 거두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고용하는데 매번 드는 비용이 많을 경우에는 80, 90금까지 가고 적을 때도 70, 80냥을 내려가지 않으니, 1년 동안 드는 비용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거의 1천금이나 됩니다. 저 불쌍하고 쇠잔한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지탱하며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때때로 물에 막히거나 해서 시각이 지체되면 각영에서 추고해 다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인정(人情)에 들어가는 비용을 전적으로 일을 맡은 자가 부담하니 한 번 일을 맡은 사람은 집안 망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옛날 전성하던 민호가 날로 점점 쇠잔해져가고 온 고을이 근심에 쌓여 모두 짐 싸들고 떠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 기장현 백성들의 절실하고 고질적인 폐단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기장현이 이와 같으니 다른 연안의 고을들은 미루어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좌우도를 막론하고 왜선이 정박한 뒤에 첩보하는 규정을 단지 수계 아문(修啓衙門)에 때맞춰 치보(馳報)하는 것만 규례대로 하고, 그 외의 각처에는 단지 처음 발견했을 때와 어느 곳에 정박을 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에 대해서 세 차례만 보고하도록 규식을 정하여 시행한다면, 변방의 보고가 소홀해질 염려도 없을 것이고 연안 백성들의 짐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변방의 정세에 관계되는 것이라 사안이 중대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채해(菜海)는 바로 어선이 모이는 곳인데 얼마간의 폐단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신이 본 지역에 도착하여 여러 방면으로 염찰해 보았더니, 좌수영에서 진상하는 청어(靑魚)와 서울과 지방의 잡비가 진실로 모든 바닷가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었습니다.
매번 겨울철이 되면 해영에서 각 포구로 교리(校吏)를 내보내는데 한 달이 넘도록 머물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음식을 대접하게 하고 각 배가 잡아들인 것은 비록 한두 마리라도 잡는 대로 영중에 바치게 하는데 그 값을 내주는 일은 없습니다. 또 서울에서 쓸 비용이라 칭하고 경내의 해선(海船)과 강선(江船)에 대해 배가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1척당 3냥씩을 거두어들이는데, 비록 한줌의 담배를 실은 배라 할지라도 징수하지 않는 선박이 없습니다. 연해안 각 고을의 배도 또한 같은 예로 수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세한 곡절을 알고자 하여 기장 현감 이현원(李賢遠)으로 하여금 조사관을 정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영에서 청어를 진상하는 총수는 모두 1백 69마리이고 동서강의 각 포구에 있는 배는 모두 1백 54척이다. 매척마다 3냥의 돈을 대신 받아들여 모두 4백 95냥인데, 그중에서 1백 69냥은 청어 1백 69마리를 잡는 대로 값을 주고 70냥은 사옹원의 뇌물이고 2백 2냥은 병영의 경비로 보내고 그 나머지는 색리들의 사사로운 용도가 되었는데,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 보니 바로 잘못된 규례가 되어버렸다. 청어를 봉진하는 데는 본래 정해진 기한이 있어 각 포에서 잡은 것을 얻는 대로 모두 바치게 하는 것은 기한에 맞추어 봉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른바 값을 준다는 것이 모두 아전의 손에 빼앗기게 되니 바닷가 백성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배마다 3냥을 거두는 것도 이미 법 밖의 일인데 하물며 2백여 냥이나 영의 용도에 소속시키며 원래 봉진하는 물품의 값은 중간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색리들이 이를 인연하여 해독을 끼치고 있으니 모두 매우 놀랍기만 하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본영에 도착하여 일체 혁파하고 절대 다시는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히 해당 수사에게 신칙하고 연해안의 각읍에도 한결같이 관문으로 신칙하였습니다.
또 해역전(海役錢)이란 명색이 있는데 이는 더욱 바닷가 민호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에 수영에서 6백 80냥을 떼어내어 본전을 소관하는 각포에 나누어주고 매 1냥마다 2푼씩 이식을 취하여 지금까지 거두어들여 영문에서 필요한 경비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해마다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른바 원전(元錢)을 최초로 받아간 사람의 이름 아래에 기록해 놓아 그대로 누인 부채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행한 지 오래되자 받아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죽고 자손에게 대대로 전습되어 오고 있는데 유망하거나 호가 끊길 경우에는 이웃과 친족에게 두루 미치어 해독이 포구에 흐르고 원성이 바다에 가득 찼습니다. 50년 동안 달마다 이자를 계산해 보면 거의 1만 냥에 가까우니 영의 비용이 아무리 어렵고 구차하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사정이 진실로 불쌍합니다. 엄히 본영에 신칙하여 부채를 탕척하게 하여 바닷가 백성들의 폐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합니다.
1. 본도에서 전세와 대동세를 돈과 목면으로 상납하는 규례에는, 산군(山郡)과 영(嶺) 밑 고을을 등급을 나누어 구별하여 영 밑의 여러 고을들의 경우 전세는 모두 돈으로만 상납하고, 대동세는 돈과 목면을 반씩 섞어서 납부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목면이 흉년이 든 해를 당하더라도 상납하는데 기한을 어길 근심이 없으니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방도입니다. 영양(英陽)은 죽령(竹嶺)의 옆에 있고 안동(安東)·예안(禮安)과 땅이 서로 접해 있으므로 토산물도 별로 다른 점이 없으니 제반 토지에 따른 공물도 두 고을의 규례에 따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본현이 중간에 신설된 고을이라 당초 분정(分定)할 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세의 상납은 일체 산군의 예를 따르고 있으니, 실로 영양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본현은 과연 영 밑 고을과 접해 있고 목화도 토질에 적합한 곳이 아니니, 영 밑 고을의 예에 따라 시행하여 홀로 은혜에서 소외되어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도록 분부하소서.
1. 본도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한 것은 관동·관북 지역에 흉년이 들 경우 곡식을 옮겨줄 자본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초에는 연일(延日)·흥해(興海)·장기(長鬐)·경주(慶州)·청하(淸河) 5개 읍이 각각 한 개의 창고를 차지하고 봄가을로 조적(糶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주와 장기 두 고을은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본읍의 경계에 옮겨 설치하고 단지 연일·흥해·청하 3개 읍의 창고만 있습니다. 연일·흥해 두 읍은 접해 있는 지경이 서로 가까워 폐단이 되는 줄을 모르나 청하만은 다른 고을의 경내를 넘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하며 서로 간의 거리가 40여 리나 되므로 조적하느라 왕래하는 데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읍민의 무리들은 이것을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본현은 동북으로 곡식을 실어 옮기는 배가 지나가는 길목입니다. 포항창에서 짐을 꾸려 출발한 뒤에 매번 본현의 포구에 도착해서 배가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리곤 합니다. 만약 이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창고 안에 저축해 두고 배가 포구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편의에 따라 더 실으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멀리 40리나 떨어진 곳에 두었다가 싣고 와 다시 이곳에 정박하기보다는 여기에서 곡식을 내다 싣는 것이 훨씬 편리할 것입니다. 더구나 경주·장기 두 고을의 전례도 있으니, 청하도 본현의 포구에 창고를 설치하게 하여 봄가을로 조적을 하게 함으로써 불시의 필요에 대비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조령과 죽령은 얼마나 중대한 관방(關防)입니까. 조령 성안에서는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따위의 절목을 별장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법을 범하고 베지 못하여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합니다. 그런데 성밖에 이르러서는 원근의 거민들이 집 지을 재목이라 칭하고 날마다 도끼로 찍어대는데 금지하지 않으니, 어떻게 벌거숭이 산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죽령은 이보다 더욱 심합니다. 소나무·회나무·잡목 등을 찍어내지 않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불을 질러 밭을 개간하기까지 합니다. 신이 봄 사이에 사명을 받들고 가는 길에 그 상황을 목견하였습니다. 그 관방(關防)을 중히 하고 송금(松禁)을 엄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이와 같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서 일체 금단하게 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따라 중하게 다스리게 하며, 이를 신칙하지 않은 수령은 장계로 보고하여 논죄하게 하소서.
1. 동래(東萊)는 변방의 독진 아문(獨鎭衙門)이니, 군제와 관계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본부의 유황군(硫黃軍) 3백 명이 27개 고을에 산재해 있는데 매년 바치는 신포(身布) 각 1필 대신 돈 2냥을 거두어 들여서 장교와 군사들의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혹은 한두 명씩 또는 서너 명씩 얼마 안 되는 숫자가 각 고을에 산재해 있는데 먼 곳은 5, 6백리가 되고 가까운 곳도 3백 리 이하인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년 본부에서 장교를 정해 보내서 고을마다 다니며 거두어 오고 있는데 여러 읍들이 제때에 거두어 주지 않아서 더러는 3, 4차례 왕복하기까지 하고 혹은 한 달도 넘게 머물기도 하니, 이와 같은 즈음에 이 읍이나 저 읍이나 간에 모두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영의 방군(防軍)은 여러 고을에 두루 퍼져 있으나 신포를 각자 그 고을에서 거두어 받아 직접 영문에 납부합니다. 이 유황군 3백 명을 본부에 나눠준 방군으로 바꾸어 본부의 역에 응하게 한다면 수영에 있어서도 별 손해가 없을 것이고 본부에 있어서도 실로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해당 수신과 해당 부사에게 분부하여 바꾸어 정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통진부에서 패몰된 밀양의 조운선 쌀에 대한 일입니다. 증열미(拯劣米)를 나누어 징수하는 것은 본래 그 규례가 있는데, 밀양에서 미두(米豆)를 새 쌀로 바꾼다는 명색하에 수량대로 변상하도록 독촉함으로써 그 폐해가 온 사방의 이웃과 친족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당초의 곡절은 잘 모르겠으나 금년에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고 견감해 주는 은혜를 모든 도가 똑같이 받았는데 유독 한결같이 베풀어주는 은택을 입지 못하여 이렇게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4읍의 증열미두(拯劣米豆)는 다른 예에 의거하여 기한을 물려주고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게 하되 그 연조(年條)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3냥이나 2냥 5전을 받는 것이 본래부터의 정식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연조를 상고하여 증열미로 옮겨 기록해서 다른 예에 따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전지를 개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양전(量田)에 대해서는 조정의 명령이 이미 오래 전에 있었고 다른 도의 여러 고을에서도 이미 시험해 본 적이 있으나 혹 농사가 흉년이 들었거나 혹은 고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관계로 아직까지 차례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정의 명령을 이미 반포하였고 백성들의 소원도 간절하니 영읍에 신칙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들 편리한 방도를 상의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독촉하여 거행하게 할 것이 아니니, 다시 조령(朝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놔두소서.
통영 창고에 대한 일입니다. 통영의 창고가 폐단이 된 것은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읍이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연로 고을의 민정(民情)이 정말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7개의 창고를 한꺼번에 혁파하는 것은 어렵고 삼가해야 할 일입니다. 통영의 창고이든 순영이나 병영의 창고이든 막론하고 영의 비장이나 군교를 보내지 말고 단지 해당 고을로 하여금 감색을 차출하게 한 뒤, 해당 고을에서 다른 아문의 예에 의거하여 환곡을 출입시키고, 그중 곡부가 가장 많은 곳은 곡식이 적은 고을로 적당한 양을 헤아려 옮겨서 무역을 하거나 전운(轉運)하게 한다면, 비록 혁파한다는 이름은 없으나 저절로 폐단이 제거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통영·병영과 왕복하며 별도로 자세히 의논하여 좋은 쪽으로 선처해서 연읍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장현의 표류해 오는 왜인의 상황을 보고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왜선이 표류하다 정박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기한이 없으니 쇠잔한 고을이 거행하자면 형세상 궁박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아홉 군데에 다섯 차례씩 보고하는 것이 읍의 폐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변방의 보고가 오고가는 것은 본래부터 엄중한 일이고 첩보를 올리는 아문은 모두 관할하는 바가 있으니 그 중요도를 나누어 선뜻 의논해서 줄일 수 없습니다. 노비(路費)를 거두는 것은 크게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공사(公事)를 맡은 자에게 줄 고가(雇價)가 만일 부족하면 보태서 주는 방도에 대해서 영읍과 상의해서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비용을 거두는 문제는 엄히 금단을 가한다는 뜻으로 해도의 수영과 병영에 분부하소서.
좌수영에서 청어를 진상하는 것과 경향(京鄕)의 잡비를 혁파하고 해역전(海役錢)의 부채를 탕척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선세(船稅)를 함부로 징수하여 영의 용도로 써버리다니 진실로 놀랍습니다. 참으로 엄하게 금지하고 통렬히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위유사가 이미 관문을 보내서 영과 읍에 신칙하였으니, 스스로 영원히 견감하고 제거할 것으로 다시 번거롭게 조정에서 명령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역전에 대해서는 50년 동안 누인 부채로 해마다 그 자손들에게 징수해 왔으니 명색이 바르지 못하고 폐단도 고질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다시 침징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여 해도의 수신에게 분부하소서.
영양현(英陽縣)의 전세와 대동세를 한결같이 영 밑에 사는 고을의 예에 따르게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똑같은 영하읍인데 순전히 돈으로만 내고 혹은 목면으로 바친다니 일이 혼란스러워 억울하다고 일컫는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체모가 중하여 갑자기 변통할 수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민정과 일의 형편을 살펴보고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한 뒤 품처하게 하소서.
청하의 포항창(浦項倉)에 대한 일입니다. 40리나 지경을 넘어서 환곡을 내오고 들이는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폐단이 됩니다. 관동과 관북으로 가는 뱃길의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 또 같은 현 포구에 있으니 창고를 옮겨 곡식을 쌓아 두는 것이 진실로 편리할 듯합니다. 그러나 포구를 넘어 창고를 설치한 데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니, 포항(浦項)의 곡물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 역시 도신으로 하여금 관문으로 본현에 물어서 사세를 참작하여 의견을 갖추어 장문으로 보고한 뒤 품처하게 하소서.
죽령의 일은, 비록 심상한 산일지라도 나무의 채벌을 금지하고 기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조령과 죽령은 얼마나 중요한 곳입니까. 전후로 관문을 보내 엄하게 신칙했을 뿐만이 아닌데 마음대로 채벌을 하고 심지어 화전까지 일구니, 그 관방(關防)을 중히 하고 뒤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통렬히 금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과조를 엄하게 세워서 거듭 금령을 밝히고 만일 전처럼 법을 어기고 나무를 베는 폐단이 생기면 양도의 지방관을 드러나는 대로 논죄하겠다는 뜻으로 엄히 신칙하고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소서.
동래의 유황군(硫黃軍) 3백 명을 본부에서 나누어 놓은 방군(防軍)과 서로 바꾸어 역에 응하게 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수영의 방군과 본부의 유황군이 모두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데 방군은 열읍에서 신포를 거두어 바치기 때문에 애초 폐단이 없었고 유황군은 본부에서 교리를 보내어 포를 거두기 때문에 폐단이 매우 많은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방군을 열읍에 있는 유황군과 바꾸어 정한다는 것은 둘다 편리한 방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군액을 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수신과 해당부에 분부하여 익숙히 그 편부를 상의해서 이치를 따져 보고하게 한 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경모궁에게 재숙(齋宿)하였다.

 

이해 겨울에 전 정언 유성한(柳星漢)이 죽었다. 성한의 자는 원명(原明)이고 정유년 문과 출신으로 어려서 김원행(金元行)을 따라 배웠다. 성격이 엄격하고 꿋꿋하여 기성랑(騎省郞)이 되었을 때에 홍국영(洪國榮)의 종에게 곤장을 쳤다. 국영이 만나보고 사죄하였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국영이 크게 화를 내었다. 얼마 뒤에 소란을 금지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을 맞고 배척당해 10년 동안 조용되지 못하였다. 오래 되어서야 대간에 통망되었는데 얼마 뒤 정언으로서 상소하여 장용영에서 연등절에 놀이를 한 것에 대해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으나 더러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 상이 이를 불쾌하게 여기자 일을 주도하는 자가 장차 법으로 얽어 죄를 주려고 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자복(自服)할 것을 권하였는데 성한은 정색을 하여 꾸짖고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얼마 후에 사방에서 성토가 일어나 그의 아비 사문(師文)도 다른 사람을 대하여 부도한 말을 하였다고 연좌되어 형조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대간의 계사에 올라 거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상은 끝까지 그를 죄주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프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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