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갑신
일식(日食)이 있었는데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정조제(正朝祭)를 경모궁(景慕宮)에서 친행(親行)한 뒤 명정전(明政殿)으로 환어(還御)하여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거행하고 서계(誓戒)를 받았다.001)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1면
【분류】왕실(王室)
[註 001] 정조제(正朝祭)를 경모궁(景慕宮)에서 친행(親行)한 뒤 명정전(明政殿)으로 환어(還御)하여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거행하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 정조제는 음력 1월 1일에 행하는 제사. 기곡 대제는 1월 첫째번 신일(辛日)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서계는 국가의 대제(大祭) 7일 전에 결재(結齋) 목적으로 백관들이 의정부에 모여 서약하는 것으로서 술·고기를 안먹고 노래·춤·조상(吊喪)·문병(問病)·형벌·형살(刑殺) 등을 금하기로 하는 것임.
1월 2일 을유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에 윤음(綸音)을 내렸다.
"풍년을 축원하는 일을 어느 해인들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올해의 경우는 더욱 절실하기만 하다. 대저 농사의 효과는 온 힘을 다 기울인 뒤에야 창고마다 상자마다 가득가득 채울 수가 있게 되는 법인데, 이는 얼마나 성실하게 힘들여 농사지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 그대 방백(方伯)과 유수(留守)를 맡고 있는 신하들이여. 이 지극한 뜻을 몸받아 장리(長吏)를 권면하고 단속함으로써 그들 각자 전농관(田農官)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토록 하라. 그리하여 제때에 농부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올해 수확할 때에는 듬뿍 추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라."
조신(朝臣) 가운데 을묘생(乙卯生)인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이하에게 세찬(歲饌)을 내리고, 각 해부(該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존문(存問)하도록 명하는 한편,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행하는 예(例)처럼 매년 세찬을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이 해는 바로 현륭원(顯隆園)002) 과 혜경궁(惠慶宮)의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한성부가 노인에게 세찬을 내리는 것과 관련된 별단(別單)을 아뢰었는데, 그 대상자가 모두 5백 90인이었다.
조참(朝參)에 대한 일은 환궁한 뒤에 다시 품하라고 명하였다. 무릇 대향(大享)과 관련하여 치재(致齋)할 경우 이후의 일차 조참(日次朝參)에 대해서는 조사(措辭)하여 계품(啓稟)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3일 병술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고 이어 영희전(永禧殿)으로 가서 전알하였다. 대가(大駕)가 돌아오는 길에 종가(鍾街)에 잠깐 머물면서 한성 판윤에게 명하여 부로(父老)를 위문하게 하였다.
정릉(定陵)의 작헌례(酌獻禮)를 대신을 보내 섭행(攝行)토록 하고, 이 행사에 따른 적절한 의절(儀節)에 관하여 종백(宗伯)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한 뒤 보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올해 을묘년은 바로 우리 환조 연무 성환 대왕(桓祖淵武聖桓大王)께서 탄강(誕降)하신 때로부터 8회째 태세(太歲)가 되는 해이다. 그래서 실내에 들어가서 주선하는 동안 부조(父祖)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는데, 내가 제1실(第一室)에 계신 성조(聖祖)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는 이상 금년은 마땅히 정성을 펴 사모하는 마음을 보여드려야만 할 것이다. 함흥(咸興)의 정릉이 바로 우리 환조의 능침(陵寢)이니, 대신을 보내 작헌례를 섭행하게 하되 먼저 그 사유를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과 함흥의 본궁(本宮)에 고하게 하고, 거행해야 할 합당한 의절(儀節)에 관하여 종백(宗伯)의 신하로 하여금 전례를 널리 상고하여 강정(講定)한 뒤 보고하게 하라."
1월 4일 정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세수(歲首)의 호궤(犒饋)를 행하였다.
1월 6일 기축
예조가 왕대비(王大妃)와 혜경궁(惠慶宮)이 비궁(閟宮)에서 행례(行禮)하는 의절(儀節)에 관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을 구하였다. 이에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는 의논드리기를,
"정적(情跡)으로 볼 때 황공하여 감히 답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는 의논드리기를,
"신의 억견(臆見)으로는 우상과 예판의 주장이 대체로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자궁(慈宮)이 배위(拜位)를 오르고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우상의 발언이 비교적 나은 듯하고 자전(慈殿)이 주심(周審)을 일찍 하고 늦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판의 발언이 비교적 나은 듯합니다. 그런데 다만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의논드린 내용 가운데, 주위를 세 바퀴 도는 것은 묘(墓)와 사(祠)가 똑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싶습니다. 대개 묘사(廟祠)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여 묘의 경우와는 현격히 다를 뿐더러 세 바퀴 돈다는 《가례(家禮)》의 문구 역시 꼭 맞는 예가 못되는 듯합니다."
하고, 전 집의 송환기(宋煥箕), 전 장령 이성보(李城輔)는 의논드리기를,
"감히 답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영돈녕이 의논드리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 다시 예랑(禮郞)을 보내 의논을 거두도록 하라. 그리고 내각(內閣)과 옥서(玉署)의 신하들로 하여금 여러 의논들을 취하게 하는 한편 왕조(王朝)의 예를 널리 상고하여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산릉(山陵)을 섭행(攝行)하게 하는 의논과 관련, 《개원례(開元禮)》003) 에 ‘천자가 직접 참배하지 않을 경우에는 태상경(太常卿)이 능에 가서 예를 행한다.’는 글이 있으나 그 의례(儀禮)가 매우 간략하고, 송조(宋朝)에서 제정한 제도를 보면 ‘매년 봄과 가을 가운데 달에 태상경·종정경(宗正卿)을 보내 능을 참배하게 하는데, 3일 동안 먼저 재계(齋戒)하고 희생으로 소뢰(小牢)를 쓰며 1헌(獻)만 행한다.’고 하였으나 역시 명백하게 근거할 만한 예는 되지 못합니다. 삼가 아조(我朝)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건대, 상께서 능을 참배하며 친제(親祭)를 행하실 때 그 구역 안의 제릉(諸陵)에는 대신을 보내 섭행케 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 의절(儀節)을 이번 정릉(定陵)에도 준용, 대신을 보내 제사를 섭행하게 하는 것이 가장 온당할 듯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이 예를 끌어다 쓰되 오르고 내리며 3헌(獻)을 행하는 것이 예(禮)로 볼 때 완전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함흥(咸興) 본궁(本宮)에 사유를 고하는 제사와 관련, 새로 제정한 의식(儀式)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이안(移安)004) 이나 환안(還安)005) 할 때의 고유제(告由祭)도 모두 3헌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이 고유제는 본궁에서 평상시 행하던 예와는 조금 성격이 다를 듯합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살펴 보건대, 진전(眞殿)에 사유를 고할 때의 의식 및 그 뒤에 조경묘(肇慶廟) 및 경기전(慶基殿)에서 행할 때의 의식에 모두 1헌의 예를 사용하였으니, 지금 이 경우에도 이 예를 준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먼저 사유를 고하는 것은 이 달 15일에 망제(望祭)와 겸행(兼行)하게 하되, 5경(慶)을 합쳐 경고유제(慶告由祭)라고 일컬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7일 경인
사직(社稷)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과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를 재실(齋室)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모궁(景慕宮)의 옥책문(玉冊文)을 아직 계하(啓下)하지 않은 것은 경들을 불러보고 나서 하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 옥책문에 대해 일단 옥당에서 소를 올렸고 보면 나의 입장에서는 이를 소중히 여겨 극진하게 할 방도를 모두 강구하면서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신중을 기해 유감이 없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우상을 불러 다시 짓도록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 초본(草本)을 보건대 중간에 ‘원백지행(源百之行)’ 이하의 몇 구절은 아무래도 진선(盡善)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개 정축년006) 에 여막(廬幕)에 거처했던 일은 바로 효심에서 우러나온 행동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장구(長句) 두 구절로 온통 이 일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우리 선조(先朝)를 섬긴 순일한 정성과 바른 행동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나마 언급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실덕(實德)을 드러내 보여주는 뜻이 되겠는가. 고 재상 이 영부사(李領府事)가 일찍이 옥책문을 지으면서 ‘주나라 문왕(文王)처럼 하루 세 번 침소에 문안했고 등 나라 세자처럼 5개월 동안 여막 생활을 하였다.[周寢三朝滕廬五月]’라고 대구(對句)를 놓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체례(體例)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신묘년007) 에 홍 봉조하(洪奉朝賀)008) 에게 처분을 내리실 때의 하교와 갑오년009) 에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내리신 하교를 보면 정녕 가엾게 생각해 슬퍼하시면서 궁명(宮名)과 대명(臺名)으로 분부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나 소자(小子)가 피눈물을 머금고 폐부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인륜에 독실했던 지난날의 행동을 천양(闡揚)하려고 한다면 이 두 해의 성교(聖敎)를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추술(追述)해야만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구(字句) 사이에도 반드시 그 전체(全體)를 암시하면서 둥글둥글 매끄럽게 이야기해 나가야만 근엄한 분위기가 배어 나오는 옥책문의 성격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우상은 물러가서 영부사와 서로 충분히 상의해 먼저 초본(草本)을 입계(入啓)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은 뒤 정서(正書)하여 계하받도록 하라."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이 병을 앓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막중한 문장을 작성할 임무를 졸지에 받게 되었으므로 말을 만들 즈음에 전혀 점검을 하지 못했다가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 황공한 심정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호서 위유사(湖西慰諭使) 홍대협(洪大恊)이 서계(書啓)를 올려, 연풍 현감(延豊縣監) 김홍도(金弘道)와 신창 현감(新昌縣監) 권상희(權尙熺) 모두에게 다스리지 못한 죄를 차등있게 매기라고 청하고, 또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아산(牙山)에서 조선(漕船)을 새로 만들거나 개조할 때 안면(安眠)의 송목(松木)을 정수(定數) 외로 마구 벌채한 뒤 운반해 와 내다 팔고 있으니 이 폐단을 지금부터 법을 엄하게 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내포(內浦)의 제읍(諸邑)은 본래 면(綿)에 적당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군포(軍布)를 매번 무역해 옮기는 폐단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천(舒川) 등 7읍만 순전(純錢)010) 의 규정을 적용하고 있고 덕산(德山) 등 9읍은 아직 고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포보(砲保)에 대해서는 반절씩 섞어서 내게 하더라도 좋을 듯한데 병조 및 각 아문에서는 순전(純錢)의 규정을 정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해미(海美)의 선창(船艙)이 여울에 있으므로 조련(操鍊)을 행할 때면 포구를 파고 배를 예인(曳引)하는 등 민력(民力)을 허비하고 있는데, 홍주(洪州)의 사기소(沙器所) 1리(里)야말로 천연적인 창소(艙所)라 할 것이니 해미에 떼주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도신(道臣)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때 으레 청과(淸果)와 어물(魚物) 등을 진상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 식해(食醢)와 수어(秀魚)를 포구의 민호(民戶)에 분담시키는 것이 수십 두(斗)에 이릅니다. 그런데 1두에 들어가는 용량이 최소한 70미(尾)를 밑돌지 않으니 이 뒤로는 말[斗]로 재지 말고, 주원(廚院)과 예조에 왕복하여 미수(尾數)를 참작해 정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동현(永同縣)은 실제 호수(戶數)가 1천여 호를 넘지 못하는데 각읍의 군보(軍保)를 보면 2천 3백여 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궐액(闕額)을 채우기가 어려워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일어나고 있으니, 특별히 도신에게 신칙하여 별도의 조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안면도(安眠島)의 소나무에 대한 일은 도신에게 분부, 남벌(濫伐)한 곡절을 조사해서 본사(本司)에 보고하게 한 뒤 죄를 심리해 처단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덕산 등 9읍에 대해 순전(純錢)의 규정을 두는 일은, 보포(保布)야말로 군수(軍需)와 관계된 일인 만큼 섣불리 의논할 수 없고, 포보(砲保)의 경우도 관계가 더욱 중하기만 하니, 그냥 놔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해미의 선창에 대한 일은 도신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을 띄워 해읍(該邑)에 물어보고 나서 논리적으로 장계하게 한 뒤에 품처(稟處)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도신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때 젓갈과 숭어를 분담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도신에게 분부하여 포구 백성들이 원망하는 사연을 상세히 조사해서 견제(蠲除)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동의 군보에 대한 일은 도신으로 하여금 명심해서 바로잡도록 함으로써 실제로 효과가 있게 하고, 이밖에 각 읍에 대해서도 똑같이 엄하게 단속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아산의 조선(漕船)과 관련하여 남벌하는 폐단에 대해서 먼저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아산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폐단을 바로잡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두 타당하게 되는 그런 방책이 분명히 있을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참작해서 헤아리도록 하라. 도신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때 진상하는 젓갈이나 숭어는 달리 말할 만한 물종(物種)으로 바꿔 봉진(封進)하라고 도신에게 분부하라. 영동에 역(役)이 중첩되는 일에 대해서는 도신에게 분부하여 기필코 바로잡아 고친 뒤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1월 8일 신묘
사단(社壇)에서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고 환궁(還宮)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렀을 때, 산천신(山川神)의 위판(位版)에 시향(時享)하는 예(禮)를 끝내고 그 위판을 도로 신실(神室)에 봉안(奉安)하는 일을 만났으므로 상이 연(輦)에서 내린 뒤 길 좌측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승지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지금 길가에서 지영하느라 심야에 연에서 내리셨는데, 본병(本兵)의 우두머리가 별시위(別侍衛)의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도 대령(待令)하지 않았으니, 병조 판서 조종현(趙宗鉉)을 중하게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사체와 기강으로 볼 때 정말 놀라운 일이다. 파직하라."
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1월 9일 임진
병조 판서 김재찬이 아뢰기를,
"이 뒤로 단전(單殿)이 거동하는 일이 아닐 경우 분사(分司)를 품(稟)하지 말고 차출하라고 일찍이 전교하셨습니다.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중궁전(中宮殿)께서 경모궁(景慕宮)에 가실 때의 시위(侍衛)를 분병조(分兵曹)·분총부(分摠府)로 마련케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분사를 예에 따라 차출하고 승지와 사관도 차출토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21일 날이 밝은 뒤에 먼저 동가(動駕)하여 재전(齋殿)에 들어가 있다가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께서 출궁(出宮)하신 뒤에 나와 장경교(長慶橋)에서 지영(祗迎)하고, 환궁할 때에도 이대로 하여 재전에 도로 들어가 있다가 자전과 자궁께서 대내(大內)로 돌아오신 뒤에 환궁토록 해야 할 것이다. 경유하는 문과 길은, 출궁할 때 홍화문(弘化門)을 통해 이현(梨峴)의 대로(大路)를 거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자전의 동가는 수정문(壽靜門)을 통하고 자궁의 동가는 영청문(永淸門)을 통하고 내전(內殿)은 선화문(宣化門)을 통하게 하되 문을 나온 뒤의 길은 모두 홍화문과 이현의 대로를 경유하는 것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가(隨駕)하는 백관의 경우, 네 곳으로 나누어 배종(陪從)케 하다 보면 필시 구차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니, 당하(堂下) 시종(侍從) 및 무신으로 변장(邊將)·어장(禦將) 이상, 음관(蔭官)으로 목사(牧使)·부사(府使) 이상인 자들 중에서 현재 직명(職名)이 없는 자들에게 오늘 정사(政事)에서 군직(軍職)을 주어 미리 배정한 뒤 계하(啓下)받도록 하라."
1월 10일 계사
이정규(李鼎揆)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은모(李殷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11일 갑오
첨지 권유(權𥙿)가 상소하기를,
"신은 단지 하나의 소원한 천품(賤品)일 뿐인데 조관(朝官)의 명단에 끼어 궐내를 드나든 지 거의 3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서는 빠진 것을 보충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세상의 습속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였기에 머리가 희어지도록 시대를 걱정하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단심(丹心)으로 한밤중에 일어나 눈물을 흘리다가 통곡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조정이 어떤 조정이라고 생각하시며 오늘날의 습속이 어떤 습속이라고 여기고 계십니까. 조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기강이 허물어지고 습속은 하루가 다르게 점차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하늘을 뒤덮는 큰 물이 되어 삼강(三綱)이 침몰되고 구법(九法)011) 이 허물어졌으니,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이렇게 되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이런 기막힌 지경에 이르게 하였단 말입니까. 신이 주제넘은 짓을 한다는 혐의를 우선 제쳐두고 형벌을 받아 복주(伏誅)되는 것도 사양치 않으면서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을까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자태가 신무(神武)하고 영명(英明)하시며 학문도 천부적인 자질에 힘입어 날로 발전하고 계시는데, 천 년에 한 번쯤 있을 아름다운 계기를 맞아 구오(九五)012) 의 보위(寶位)에 오르신 뒤로 기필코 요(堯)·순(舜)·공(孔)·맹(孟)과 같은 덕을 펼치고 당(唐)·우(虞)·삼대(三代)의 정치를 행하려 하셨습니다. 아, 초기에 행하신 정사를 보면 그 어떤 임금들보다도 탁월하기만 하였는데, 요기(妖氣)를 소탕하여 의리가 밝게 빛나고 휘황한 보불(黼黻)에 성명(聲明)이 가득 흘러 넘쳤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서로 쳐다보며 기대하는 등 태평성대가 될 분위기가 울연히 진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 16년이 지나면서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고 민지(民志)가 날로 미혹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귀근(貴近)의 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척행(戚倖)이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환첩(宦妾)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통렬히 징계하시어 경자년013) 에 대대적인 처분을 내리신 뒤로 기상이 씩씩하고 밝게 되어 천추(千秋) 만세(萬世)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귀근(貴近)이 또 한두 명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상께서 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이 대한 것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민지(民志)를 귀일시키려는 뜻에서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귀근들은 거꾸로 척행(戚倖)의 예전 수법을 본받기만 할 뿐 환첩(宦妾)이 보여준 자그마한 충성심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일개 시정(市井)의 무뢰한으로서 윤기(倫紀)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망각한 무리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로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권세와 이익을 키워 나갈 생각만 하면서 한 숟가락의 밥에도 굶주림과 배부름이 관계되는 양 행동하고 한 마디 말에도 기뻐하고 슬퍼하는 안색이 금새 나타나곤 하는데, 더 좋은 위치로 올라가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더 많이 차지하면서 뺏기지 않으려고 눈이 뒤집힌 채 배[腹] 속에서 욕심만 부풀어 오르고 가슴 속에는 의심만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뇌물을 바치는 문을 크게 열어놓자 청부(靑趺)가 밤에 날아오고 간사한 구멍을 일찌감치 뚫어놓자 쉬파리 떼가 날마다 윙윙거리고 있습니다. 말끝마다 거만스레 천위(天威)를 희롱하고 사사건건 조정의 명령을 가차(假借)하면서 은혜가 융숭해질수록 보답할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위치가 근밀(近密)해질수록 감히 배타적으로 도모할 생각만 품고 있습니다. 지척(咫尺)에서 주선케 하면 친닐(親暱)처럼 호흡을 잘 맞추다가도 방자한 행동을 단속이라도 할라치면 급급해 하는 것이 마치 전광(顚狂)과 같은데, 패거리를 심어 두고 요인과 결탁하여 성가(聲價)를 높이는 자료로 삼는가 하면 수염을 치켜올리고 입을 나불거리는 것치고 원망하는 말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천고(千古)에 볼 수 없는 은총을 받고 천고에 듣지 못하던 지위를 차지하고서도 천고에 듣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흉칙하고 극악한 정절(情節)을 보이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시면서도 금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시지 못한다면 이는 명철하신 면에 손상되는 점이 있는 것이고 알고도 금하지 않고 계시는 것이라면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는 면에 결핍된 점이 있다고 할 것인데, 신이 이에 대해 피눈물을 씻으면서 진달드려볼까 합니다.
악역(惡逆)에 대해서는 천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개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소융(小戎)의 부녀자도 오히려 수치를 씻는 용기를 알았고014) 무의(無衣)의 시인도 함께 전쟁터에 나가는 의리를 알았던 것입니다.015) .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 않아 겉으로는 성토(聲討)하는 척하면서도 여우처럼 꼬리를 흔드는 작태를 서슴치 않고 안으로는 실제로 상투적인 수법을 답습하면서 거세게 몰아부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혹은 말하기를 ‘누구는 관직이 너무도 분수에 넘치기 때문에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좋게 여기지 않고 계시는데 그 죄가 죽음에 이를 것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누구는 권세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성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데 형벌을 받으면 역적죄가 적용될 것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누구는 말로 의논하기를 좋아하고 계속 명망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성상께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문득 제거해 버리려 하신다.’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악역(惡逆)이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 선창(先倡)하면 모두가 화답하면서 심지어는 경성(京城)의 거마(車馬)를 항서(巷誓)에 올리기까지 하고 궁궐의 관원들을 시역(弑逆)할 인간으로까지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익환(吳翼煥)이 말한 바 ‘장차 취하려 하면서 우선 그냥 놔두고 있다.’라고 한 것인데, 오익환은 단지 이를 문자로 표현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자들은 돌려가며 서로 일러주고 경계하면서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말하는 자는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반면 이를 비밀로 하는 자는 여전히 영예와 총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익환이 성상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무슨 수로 얻어 듣고 그만 이런 주장을 했겠습니까. 그도 귀가 있으니 귀로 들을 때 맹랑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한 번 듣고 두 번 듣는 사이에 점점 잘못된 유언비어에 오염된 나머지 스스로 써서 바치게까지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서로 돌려가며 일러주고 경계한 저자들이야말로 익환이 그렇게 행동한 근저(根柢)가 되지 않는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습속이 괴상하게 변한 것이 이와 같고 조정의 형정(刑政)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그 죄가 그야말로 위로 하늘에까지 통했다고 할 것인데, 사문(私門)에 대한 법을 걸어놓고 금조(禁條)를 설치하기를 소 터럭과 누에고치 실처럼 세밀하게 해 놓아도 제 몸 보전하기에 능하고 처세술에 달통한 사람들이라서 모두가 샛길로 통하고 구멍을 뚫으면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흡사 거수(渠率)016) 가 단(壇)에 오르자 군교(軍校)가 일제히 발방(發放)017) 을 듣는 것처럼 되는가 하면 여정(閭井)의 일반 서민들까지도 온통 그 모양으로 되어가고 있는데, 그 대략적인 것만 거론해서 말해 본다 하더라도 ‘뇌물은 숨겨 놓아야 하니 상께서 아시면 염증을 낼 것이다.’ 하고, ‘갔다왔다 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니 상께서 들으시면 꺼리실 것이다.’ 하고, ‘피차 간에 친하게 지내는 것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니 상께서 아시면 필시 싫어하실 것이다.’ 하고, ‘동배(同輩)끼리 잔치를 열고 즐기는 것을 꾀해서는 안되니 상께서 들으시면 필시 미워하실 것이다.’ 하고, ‘경상비를 축냈는데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하고,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었는데도 감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고, ‘장영(壯營)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하고, ‘화성(華城)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고 있다.’는 등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밤이 이슥하도록 등불을 들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데 눈을 깜빡여 말을 하고 손짓을 하여 그치게 하면서 하나의 그럴 듯한 묘결(妙訣)을 만들어내고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얕은 곳에서 깊은 데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유음(諭音)이 내리면 엿보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연석(筵席)이 한 번 파하고 나면 별별 추측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죄로 배척받을 자를 은혜받을 자라 하고 표창받고 등용될 자를 외방으로 멀리 나갈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갑(甲)에게 해당되는 사항을 을(乙)에게 돌려 주석을 달고 동쪽에 귀결될 바를 가지고 서쪽이라 지목하는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는 동안 궁벽한 시골에까지 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앞뒤가 초(楚)·월(越)처럼 판이하게 달라지고 맙니다.
군상(君上)의 모든 동정(動靜)이나 언행과 관련, 없었던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고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이 허황한 지경으로 몰입하고 인심이 미혹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외(中外)에서 들을 때에는 귀근(貴近)의 말만 믿고 있는데 귀근은 터무니없이 속이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고 있으니 속이는 짓이 점점 치성해질수록 듣는 자들 역시 점차 미혹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를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상께서 정녕 저렇게 분부하셨는데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상의 뜻은 분명 저러하신데 그대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는데, 소위 어떤 사람이란 바로 귀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걱정하고 탄식하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자가 있고 분개한 나머지 안색이나 말로 드러내는 자도 있는데 그들 모두 문득 말하기를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는 일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하께서 간절하게 분부를 내리신 것이나 웅대하게 규모를 세우신 것에 대해서도 일체 불성실한 것으로 돌려버리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와언(訛言)이 꼭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나면서 흉측한 무함이 갈수록 더욱 괴기해지고 있으므로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고 흰 옥에 흠이 생기고 있는데 장차 이런 내용이 야사(野史)에 실리고 국승(國乘)에 기록된다면 뒷사람들이 과연 지금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처음 지니셨던 마음을 가지고 시험삼아 맑은 밤 옥루(玉樓)에서 엄숙히 성찰하며 점검해 보신다면 분명히 두렵고 놀라운 마음이 들면서 번쩍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 흠명문사(欽明文思)하신 것은 대요(大堯)의 성품이고, 온공윤색(溫恭允塞)하신 것은 대순(大舜)의 자태이며, 검소하고 근면하신 것은 우(禹)의 공적이 빛난 것이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증식하지 않으신 것은 탕(湯)의 덕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늘 학문에 뜻을 두고 생각하심은 상(商)나라 고종(高宗)과 부합이 되고, 공경할 자를 공경하고 위엄을 보일 자에게 위엄 보이며 우리 백성들을 품에 안고 보호하심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본받으신 것이며, 오른 손에 백모(白旄)를 들고 왼손에 황월(黃鉞)을 쥔 채 한 번 노하여 세상을 편안케 한 것 역시 과거 주나라 무왕(武王)만 아름다움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한두 귀근(貴近)이 관가(官家)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보좌하며 선양케 하는 일은 본디 이 자들에게 기대하기가 어려운데 여기저기서 주워모아 날조해 내는 것이야 그 자들에게 무슨 부담이 되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이렇게 되어 허물어지고 백성의 뜻이 이렇게 되어 쓸쓸해졌습니다. 전하께서 매번 마음 먹은대로 정치가 안된다고 조정에서 탄식하곤 하십니다만, 이 자들의 죄를 바로잡지 않는 한 오늘날의 조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이 자들의 무함을 변별해주지 않는 한 오늘날의 습속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들을 그냥 놔두고서 차마 법대로 적용하지 못한다면 전하께서 비록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때의 중간 수준쯤 되는 임금이 되어 보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들의 터럭 하나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난역(亂逆)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이는 큰 것을 놓치고 작은 것만 살피는 것과 거의 가까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택(澤)·율(瑮)·우(宇)·간(簡)의 흉악한 말과 흉측한 마음도 이 자들보다 심하지는 않았는데 그러고 보면 참으로 이른바 ‘9만 번 귀양보내도 꿋꿋하게 끝내는 아무 일도 없게 된다.’고 하는 것과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저 소위 귀근들 중에 누가 와주(窩主)인지 신이 그 이름을 가리켜 배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대각(臺閣)과 논사(論思)의 위치에 있는 이들 중에서 불끈 일어나 그 죄를 성토할 이가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만 추호도 다른 마음이 없이 근심스럽고 사랑하는 심정을 해소할 길이 없어 이에 감히 속마음을 펴 보이며 전하를 번거롭게 해 드렸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소장(消長)의 기틀을 환히 살피시고 존망(存亡)이 나뉘어지는 계기에 관심을 쏟으심은 물론 성상에 대한 무함을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세도를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백성의 뜻을 하나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시어 속히 벌을 내리심으로써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소서. 그러면 신이 비록 가루가 되어 세상에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정말 유감이 없겠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오늘 조참(朝參) 때 자리에 나가 극론(極論)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조참하는 기일이 뒤로 물려졌다는 말을 추후에 듣고서 신의 외로운 충정을 차마 억누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정상이 서글프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느 시대이고 귀근이 없었겠는가마는 도리에 맞게 그들을 부렸기 때문에 신하와 임금 모두가 영예롭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이것과 반대로 된다면 한·당의 중간쯤 되는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반성해야 할 점이다. 그대가 소원한 처지에서 귀근이라는 두 글자를 제대로 언급했는데 정말 타당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당시 정동준(鄭東浚)이 사관(史官)의 직책에 있으면서부터 두터운 은총을 받아 근밀한 위치에 출입하며 재신(宰臣)의 반열에까지 관직이 올랐다. 그런데 상이 특별히 그를 곡진하게 보호해주려는 마음에서 늘 권요직(權要職)을 피하게끔 하였는데, 이에 동준이 욕심대로 되지 않자 갈수록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는 되지도 않는 말을 꾸며내면서 성덕(聖德)을 훼손하였다. 상이 그 간사한 정상을 이미 통촉했으면서도 오래도록 부려온 정 때문에 미처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권유가 그 일을 논한 것이었다. 그러자 동준이 스스로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얼마 뒤에 목숨을 끊었는데 혹은 음독(飮毒)했다고도 한다.
1월 12일 을미
김지묵(金持默)과 신대겸(申大謙)을 방면하고, 지묵에게는 다시 금위 대장(禁衛大將)을 제수하고 대겸은 도감(都監) 중군(中軍)을 잉임(仍任)시켰다. 이어 경재(卿宰) 시종(侍從)으로 파삭(罷削)된 인원 및 정배(定配) 전지(傳旨)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죄명(罪名)을 씻어주고 모두에게 군직(軍職)을 부여하여 습의(習儀)에 참여케 하라고 명하였다.
제도(諸道)의 봄철 군사 훈련을 정지시켰다.
1월 13일 병신
명정전(明政殿)에 거둥하여 자전(慈殿)에 상호(上號)하는 습의(習儀)를 거행하고, 다음으로 경모궁(景慕宮)에 상호하는 습의 및 친제(親祭)의 이의(肄儀)를 거행하고, 다음으로 자궁(慈宮)에 상호하는 습의를 거행하였다. 이어 수정문(壽靜門) 밖 악차(幄次)로 나아가 전궁(殿宮) 안에서의 습의를 친행(親行)하였다.
대신을 가마 앞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가마 앞으로 가서 문후(問候)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권유(權裕)의 상소를 보고서 정말 그지없이 놀라운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상소 속에서 그 성명(姓名)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누구를 지목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논열(論列)한 것을 보면 그야말로 역사 책에서도 볼 수 없는 극악한 역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귀근(貴近)의 반열에 있는 사람 가운데 과연 이처럼 흉측한 자가 있다면 결코 한 시각이라도 용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의 직책 역시 귀(貴)하고 근(近)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소가 한 번 나옴에 따라 가까운 반열에 출입하는 사람들 모두 애매하게 뒤집어 쓴 채 한데 뒤섞일 염려가 실제로 있으니, 소를 진달한 사람에게 그 성명을 분명히 말하라고 속히 명하고 통쾌하게 왕법(王法)으로 처단토록 하는 일을 조금이라고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고, 병모가 아뢰기를,
"사람을 논한 소장에 대해 그 말의 출처를 끝까지 캐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마는 이 경우는 말의 출처를 따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소에서 일단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겠다고 말한 이상 이는 그야말로 신자(臣子)로서 눈을 크게 뜨고 당차게 나와야 할 대목인데, 그럼에도 성명을 진달하지 않았고 보면 성토(聲討)를 행한 것도 없고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한 것도 없으니, 지금의 입장으로서는 권유에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에서 논열한 것이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배척한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원악(元惡) 대대(大憝)로 논하기에는 부족하다. 귀근(貴近) 중에 만약 이와 같이 지극히 요망스럽고 간사한 무리가 있다면 내가 아무리 무(武)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어찌 혹시라도 용서야 하겠는가. 내가 다시 바른 대로 진술하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만약 그가 성명을 털어놓을 즈음에 혹시 무고한 사람들까지 뒤섞여 언급된다면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세신(世臣)을 보호하는 뜻이 또한 못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속으로 주저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지금 경사스러운 예식(禮式)이 목전에 박두한데다 원(園)에 거둥할 날이 머지 않았는데, 이 일이 또 호흡 간에 안위(安危)가 결정될 일도 아니다. 어찌 명백하게 규명하여 엄하게 처리할 때가 없겠는가. 경들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전유(傳諭)를 받고나서 부주(附奏)하기를,
"신의 죄는 신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죄로서 혼백마저 날아가 버렸다 할 것입니다. 본심도 자취가 있는만큼 드러낼 길이 없어졌는데 법으로 볼 때 그 죄는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늘과 땅 같은 지극한 인덕(仁德)으로 위태로운 목숨을 곡진히 보전해 주신다 하더라도 이런 죄명(罪名)을 지니고서야 어떻게 스스로 보통 사람들처럼 당돌하게 벼슬길에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천한 신분으로서는 감히 나갈 수 있는 일이 못되니, 속히 위벌(威罰)을 내려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더구나 오늘 습의(習儀)하는 일에도 참석하지 않다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의리상으로나 명분상으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즉시 도성 안으로 들어 오라."
하였다.
1월 15일 무술
선원전(璿源殿)을 전배하고, 이어 대봉심(大奉審)을 행하였다.
규장각이 아뢰기를,
"이달 21일에 자전과 자궁께서 비궁에 가실 때 거행해야 할 의절(儀節)과 관련하여, 신들이 여러 신하가 올린 의견을 가져다 서로 비교해 보건대,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올린 의견 가운데 ‘자전께서 예를 행하실 때는 선조(先朝) 때에 종묘를 참배하던 예를 적용해야 한다.’고 한 것이야말로 가장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 자궁께서 예를 행하실 때의 의절에 관해서는 역대(歷代)의 예서(禮書)를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참고할 만한 확실한 예증(例證)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황명(皇明) 가정(嘉靖) 5년018) 에 장성 태후(章聖太后)가 흥헌(興獻)의 사당에서 예를 행한 일이 있는데, 장성 태후는 바로 흥헌의 후비(后妃)였습니다. 그리고 만력(萬曆) 8년019) 에 황제가 효정(孝定)·효안(孝安) 등 두 명의 태후를 모시고 소릉(昭陵)을 참배하였는데, 효정과 효안은 바로 소릉의 두 후비였습니다. 그 당시의 의주(儀注)를 상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기(傳記)에 섞여 나오는 제유(諸儒)의 논설을 가져다 종류별로 비교해 볼 것 같으면 그래도 대략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삼가 《도서집성(圖書集成)》을 상고해 보건대, 대정기(大政紀)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가정 5년에 황제가 태후를 모시고 흥헌의 사당을 참배할 당시에, 제신이 당(唐)나라 개원(開元)020) 연간의 예법(禮法)에 황후가 사당을 참배한 의주(儀注)가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국초(國初)의 예법에 「황후가 태묘(太廟)를 참배할 때에는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가 제사에 배행(陪行)한다.」는 글이 있는 것을 인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의주를 이상과 같이 갖추었고 보면 장성 황후가 흥헌의 사당을 참배할 적에 곧바로 태묘를 참배할 때의 예법을 적용하였으며 동격(同格)인 몸이라고 해서 그 의주를 간략하게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해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황명 만력 연간에 황제가 직접 능침(陵寢)을 참배했던 기록을 상고해 보건대, ‘만력 8년에 황제가 양궁(兩宮)의 황태후를 모시고 후비를 인솔하여 영릉(永陵)을 참배하였다.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자 여관(女官)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라고 아뢰었다. 이 일이 끝나자 분향하라고 아뢰니 황태후가 세 번 분향하였으며, 분향을 마치자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무릎을 꿇으니 황제가 황태후의 좌측에서 무릎을 꿇었다. 독축관(讀祝官)이 축문을 다 읽자 일어나서 사배례를 행하라고 아뢰었다. 그 다음에 소릉(昭陵)으로 갔는데 예를 행한 것은 영릉과 같았다.’고 하였는데, 그러고 보면 효정과 효안이 소릉에 갔을 때에도 제릉(諸陵)을 참배할 때의 예법을 적용하였으며 동격인 몸이라고 해서 그 예법을 낮추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추측해 알 수가 있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자궁께서 예를 행하실 때 배위(拜位)는 전하의 판위(版位) 우측에서 조금 앞으로 나가 서쪽에 설치하고, 출입은 좌측 문으로 하며 오르내리는 것은 동쪽 섬돌을 통하도록 하여, 모두 한결같이 《명사(明史)》에 나오는 사당 참배의 예법을 따라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절을 하는 숫자에 대해서는, 황명에서 사당을 참배하는 의례(儀禮)에 따를 경우에는 재배(再拜)를 해야 마땅하고, 황명에서 능을 참배하는 의례에 따를 경우에는 사배(四拜)를 해야 마땅한데, 능과 사당의 예가 서로 다른만큼 절충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만 생각건대 고례(古禮)를 보면 남자는 재배를 하되 일어났다가 엎드리는 방식을 취하고 부인은 사배를 하되 무릎을 꿇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의 절은 협배(夾拜)라고도 하고 숙배(肅拜)라고도 합니다. 《사혼례(士昏禮)》에는 ‘부인이 절을 할 때 손을 땅에 짚는다.’는 글이 있고, 《주례(周禮)》에는 아홉 가지 절 가운데 숙배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주석에 이르기를 ‘부인의 절이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건대 자궁(慈宮)이 예를 행할 때와 중궁전(中宮殿)이 예를 행할 때에는 모두 사배례를 행해야 마땅할 듯합니다만, 나라의 예법이란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는만큼 감히 단정하여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예를 행할 날짜가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널리 상고하고 의견을 거두어 보았다마는 그러는 사이에 공연히 날짜만 허비하고 말았을 뿐 의견의 일치를 쉽게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의문(儀文)에 대해서는 일찍이 강구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때 근거를 상고해 보고 내놓은 주장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니, 차라리 아조(我朝)에서 이미 행한 의문을 따라서 그대로 본받아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자전께서 사당에 임하실 때의 절차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에 어긋나는 것이 없으니 중론(衆論)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다. 자궁께서 배례(拜禮)를 행하는 처소는 종묘를 참배하는 옛 의례를 적용하여 섬돌 위에 자리를 설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배례를 행할 때 재배로 하느냐 사배로 하느냐 하는 문제 역시 현재 쓰고 있는 제도를 따라야 선대(先代)의 것을 준행하는 도리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 또 오르내리고 드나들 때 황조에서 사당에 참배할 때의 예를 적용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압존(壓尊)해야 하는 것과 관련되는 혐의가 있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모두에 대해서 예조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알고 의주(儀注)를 마련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비궁에 가실 때에는 선조(先朝) 때에 사당에 임했을 적의 의례를 대략 모방해서 정로(正路)를 통해 올라가고 정문(正門)을 통해 들어간 뒤 중앙에 잠깐 서서 두루 살펴보고 나와야 할 것이니,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의 의논이 정리(情理)나 예문(禮文)으로 볼 때 합당할 듯합니다.
자궁께서 비궁에 가실 때 배위(拜位)를 위로 하느냐 아래로 하느냐에 대해서 삼가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 보건대 ‘후비(后妃)의 배위는 향안(香案) 앞으로 정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황명(皇明)의 예의(禮儀)에서는 황제의 배위가 일단 향안 앞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후비의 배위 역시 향안 앞으로 정해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조(我朝)의 전례(典禮)에 의하면 전하의 판위(版位)가 섬돌 아래에 있고, 또 《가례(家禮)》의 사당장(祠堂章)을 상고하건대 ‘주인에게 어미가 있을 경우에는 주부(主婦) 앞에 특별히 자리를 설치한다.’고 하였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자궁의 배위는 섬돌 아래에 두되 중궁전(中宮殿)의 배위보다는 조금 앞에다 설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재배할 것인지 사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독례통고(讀禮通考)》의 묘제장(廟制章)에는 ‘무릇 절을 할 때 남자가 재배하면 부인은 사배를 하니 이것을 협배(夾拜)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궁의 배례(拜禮)는 사배로 해야 한다는 상신(相臣)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와 함께 자궁께서 사배례를 행한 뒤에 서쪽 섬돌로 올라가 서쪽 협문(挾門)을 통해 들어가서 봉심(奉審)하는 일을 끝내고 이어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예제(禮制)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내각의 초기(草記)에 내린 비지(批旨)에 입각하여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명에 숙배(肅拜)하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이 의리에 쫓겨 외람되게 전석(前席)에 오르기는 하였습니다만, 죄를 지고 있는 신의 입장으로 볼 때 감히 스스로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규례(規例)에 따라 문후(問候)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나치다. 돈유(敦諭)할 때 이미 다 말했다마는, 대체로 그때엔 사실을 미처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단지 그 일이 막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처분을 내렸던 것이었다. 대관(大官)의 신분으로서 귀양을 갔던 자들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집에서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비록 그런 전례(前例)가 이미 있었다 하더라도 그 예를 원용(援用)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더욱 후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내가 일단 더욱 후회한다고 말한 이상 경이 어찌 다시 이것을 개의(介意)해서야 되겠는가."
하자, 언호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형편없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내겠습니까. 다만 염치와 관계된 일이라서 감히 다시 반열을 더럽히지 못한 채 그저 스스로 선(線)을 긋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진휼 업무를 행하고 있는 제도(諸道)의 방백에게 신칙하는 유시를 내렸다.
"대례(大禮)가 내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백성에 대한 애틋한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해지기만 한다. 작년 가을에 윤음(綸音)을 내릴 때 이미 말했었고 그때에 또 제도에서 진휼을 개시한 상황을 잇따라 치계해 왔었는데, 만일 지금 관례에 따라 간과해 버린 채 특별히 징계하고 권장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유념하라고 하는 것인데, 방백과 수령이 된 자들이 마음을 다해 보호할 생각을 갖는다면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구는 환란을 그런대로 면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이 갑인년의 회계 장부를 올렸는데, 호조·양향청(糧餉廳)·선혜청·병조·훈국(訓局)·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수량이 황금(黃金) 3백 1냥(兩), 은자(銀子) 42만 2천 6백 99냥, 전문(錢文) 80만 3천 76냥, 면주(綿紬)021) 1백 6동(同) 38필(疋), 면포(綿布)022) 4천 8백 32동 5필, 저포(苧布)023) 39동 6필, 포자(布子)024) 1천 3백 28동 2필, 미곡 27만 1천 5백 55석(石), 전미(田米)025) 1만 1천 8백 25석, 콩 3만 1천 5백 63석, 피잡곡(皮雜穀) 1만 1천 3백 11석이었다.
1월 16일 기해
왕대비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렸다. 상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직접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고, 수정전(壽靜殿)에서 치사(致詞)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바쳤다.
명정전에 가서 네 번 절한 뒤 무릎을 꿇고 옥책과 금보를 받아서 이를 상전(尙傳)에게 주어 상에 놓게 하였다. 상이 또 네 번 절하고 나서 서쪽을 향해 서자 상전이 책함(冊凾)과 보록(寶盝)을 받들고 나왔다. 상이 이를 지영(祗迎)하고 나서 수정문 밖에 마련된 소차(小次)에 이르렀다. 자전(慈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수정전에 오르자 장락곡(長樂曲)이 연주되었는데, 그 곡의 내용에 이르기를,
"영원한 이 즐거움 우리 대모(大母) 편안하리. 융성한 그 교화 하늘처럼 자애롭고 화합시키는 그 덕화 땅처럼 두텁도다. 옛적에 영고(寧考)026) 도우시며 여자 중 요(堯)·순(舜)이었어라. 속에 간직된 바른 그 덕 음공(陰功)으로 나타났네. 훌륭한 손자 도와주며 종사(宗社) 안정시키셨지.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027)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028) 오십 넘긴 귀한 연세 해옥(海屋)029) 처럼 장수 누리소서. 옥에 새겨 노래하며 경사를 드날리나이다."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정창순(鄭昌順)이 지었다.】 옥책문(玉冊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만물을 대지처럼 포용해 주신 그 공 아름다운 노래로 널리 퍼뜨리고,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030) 옥책문 지어서 융숭함 더하는 이 때, 성대한 의식 거행하며 전범(典範)대로 따를까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 왕대비 전하께서는 장락궁(長樂宮)에 높이 임하시어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계승하셨습니다. 말씀을 주렴(珠簾)과 장막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셔도 조야(朝野)가 그 교화를 받고, 행동은 도서(圖書)와 사적(史籍)대로 준수하시어 궁중이 그 덕을 흠뻑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소자(小子)가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때에 아, 태모(太母)께서는 육순(六旬)을 바라보는 춘추에 접어드셨습니다. 봄볕을 음미하며 서루(西樓)를 생각하니 첩자(帖子)를 써 붙이던 해가 마침 지금의 춘추를 맞으신 때와 서로 부합되는데, 선대(先代)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자궁(慈宮)을 받들어 모심에 그 주갑(周甲)을 맞게 되는 기쁨 또한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천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기회로서 그야말로 태평시대가 도래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할 것인데, 지금부터 영원히 지속될 이 경사를 어떤 방법으로 아름답게 장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전께서 지나치게 겸퇴(謙退)하고 계십니다만 그래도 존호(尊號)만은 올려야만 이 경사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 일반 서민들이 노년(老年)을 축하할 때에도 오히려 풍성하게 진행하는데, 더구나 온갖 물건을 갖추어 봉양해야 할 왕가(王家)에서야 더더욱 성대하게 기쁨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전께서 흉년이 들었다고 사양하시니 풍정(豊呈)은 우선 늦춘다 하더라도 이 날을 아끼고 싶은 심정에 비추어 볼 때 존호 올리는 일만큼은 우선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031) 을 누리시어 앞으로 백 세 넘게 살으시고 사제(思齊)의 주범(周範)032) 을 끼치심 한결같이 엄숙하고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기에 사관(史官)의 붓도 더욱 신이 나고 옥첩(玉牒)도 함께 빛납니다. 이에 삼가 옥책문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수경(綬敬)이라는 존호를 더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내려준 길일(吉日)을 맞게 되었으니 이는 지년(知年)의 정성033) 과 부합된다고 여겨집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순일한 복을 받아 장수하시고, 번성하고 번창하여 영원히 남은 경사가 이어지게 해 주소서."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에서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아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높은 덕 지니시고 장락궁에 임하심에 우리 동방 그 교화에 흠뻑 젖었도다. 남몰래 두루두루 큰 은혜 내리시고 보배로운 계책 더욱 융성하셨도다. 옥같은 법도 더더욱 바르시고 아름다운 분부 크게 드러내셨도다. 빛나게 옥책문에 이를 밝히면서 옛 제도 따라서 거행하나이다. 대궐 뜰 만세 소리 진동을 하고 온 누리에 경사가 흘러 넘치네. 장수와 강녕함 누리셨기에 즐겁고 기쁜 마음 그지없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 지었다.】 그리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자전을 모시면서 늘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마음 간절하였는데, 옥첩(玉牒)으로 아름다움 선양하면서 삼가 미천한 정성 바치나이다. 이 해에 다섯 가지 경사 겹치게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만세를 부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 왕대비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의 모친처럼 되려 하시었고 멀리 여중요순(女中堯舜)의 자태를 보이셨습니다. 대지에 짝하는 덕으로 부드럽게 교화시켜 왕대비의 미덕을 퍼뜨리셨고, 장락궁(長樂宮)034) 을 융숭하게 모신 그 범절은 임금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춘추가 더욱 높아지시면서 덕음(德音)이 널리 전파되길 원하옵니다. 선조(先朝) 때 갑자년035) 의 성대한 일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예(禮)를 상고해 볼 때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궁(閟宮)036) 과 자위(慈闈)037) 에게까지 존호를 올리게 되었으니 오늘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옥책문을 올리라는 윤허를 힘들여 받았기에 감히 하례(賀禮)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하늘과 같이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기에 뜻을 갖추어 올릴까 합니다. 탁룡(濯龍)038) 에 나아가 문안드릴 때마다 기거가 편안하심에 마음이 기뻤는데, 술잔 올려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운 뜻을 따를까 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에게 바치니, 상이 함을 받아 상궁(尙宮)에게 주면서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상이 절을 네 번 하고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한 뒤에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동조(東朝)039) 의 복록 하늘에 잇닿았고 만수무강하여 51세 되셨도다. 옥책문 올리니 범절 더욱 빛이 나고 육궁(六宮)에 기쁨 드날려 칭송하는 소리 양양하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26] 영고(寧考)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처럼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영조(英祖)를 가리킴.[註 027]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 : 주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처럼 어진 덕을 갖추었다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나라 왕실의 며느리 되었는데,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어받았도다." 하였음.[註 028]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 : 함이(含飴)는 만년에 은퇴하여 손자를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조황후기(明德鳥皇后紀)에 "나는 다만 사탕이나 입에 물고[含飴] 손자와 놀 뿐이요 이제 정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하였음.[註 029] 해옥(海屋) :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말임. 노인 세 사람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열 개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임. 《통배편(通倍編)》 축송(祝誦), 해옥첨주(海屋添籌).[註 030]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 : 대연수는 50이니, 즉 나이가 51세가 되었다는 말임.[註 031]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 : 기주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九疇)를 말하는데, 그 5복(福) 가운데 강녕(康寧)이 들어 있음. 《서경(書經)》 홍범(洪範).[註 032] 사제(思齊)의 주범(周範) : 사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편명(篇名)인데, 주(周)나라 왕실의 부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음.[註 033] 지년(知年)의 정성 :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하였음.[註 034] 장락궁(長樂宮) : 황태후인데 여기서는 대왕 대비를 뜻함.[註 035] 갑자년 : 1744 영조 20년.[註 036] 비궁(閟宮) :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뜻함.[註 037] 자위(慈闈) : 혜경궁(惠慶宮)을 뜻함.[註 038] 탁룡(濯龍) : 왕대비의 처소를 말함.[註 039] 동조(東朝) : 왕대비를 말함.
옥책문(玉冊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만물을 대지처럼 포용해 주신 그 공 아름다운 노래로 널리 퍼뜨리고,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030) 옥책문 지어서 융숭함 더하는 이 때, 성대한 의식 거행하며 전범(典範)대로 따를까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 왕대비 전하께서는 장락궁(長樂宮)에 높이 임하시어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계승하셨습니다. 말씀을 주렴(珠簾)과 장막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셔도 조야(朝野)가 그 교화를 받고, 행동은 도서(圖書)와 사적(史籍)대로 준수하시어 궁중이 그 덕을 흠뻑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소자(小子)가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때에 아, 태모(太母)께서는 육순(六旬)을 바라보는 춘추에 접어드셨습니다. 봄볕을 음미하며 서루(西樓)를 생각하니 첩자(帖子)를 써 붙이던 해가 마침 지금의 춘추를 맞으신 때와 서로 부합되는데, 선대(先代)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자궁(慈宮)을 받들어 모심에 그 주갑(周甲)을 맞게 되는 기쁨 또한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천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기회로서 그야말로 태평시대가 도래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할 것인데, 지금부터 영원히 지속될 이 경사를 어떤 방법으로 아름답게 장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전께서 지나치게 겸퇴(謙退)하고 계십니다만 그래도 존호(尊號)만은 올려야만 이 경사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 일반 서민들이 노년(老年)을 축하할 때에도 오히려 풍성하게 진행하는데, 더구나 온갖 물건을 갖추어 봉양해야 할 왕가(王家)에서야 더더욱 성대하게 기쁨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전께서 흉년이 들었다고 사양하시니 풍정(豊呈)은 우선 늦춘다 하더라도 이 날을 아끼고 싶은 심정에 비추어 볼 때 존호 올리는 일만큼은 우선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031) 을 누리시어 앞으로 백 세 넘게 살으시고 사제(思齊)의 주범(周範)032) 을 끼치심 한결같이 엄숙하고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기에 사관(史官)의 붓도 더욱 신이 나고 옥첩(玉牒)도 함께 빛납니다. 이에 삼가 옥책문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수경(綬敬)이라는 존호를 더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내려준 길일(吉日)을 맞게 되었으니 이는 지년(知年)의 정성033) 과 부합된다고 여겨집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순일한 복을 받아 장수하시고, 번성하고 번창하여 영원히 남은 경사가 이어지게 해 주소서."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에서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아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높은 덕 지니시고 장락궁에 임하심에 우리 동방 그 교화에 흠뻑 젖었도다. 남몰래 두루두루 큰 은혜 내리시고 보배로운 계책 더욱 융성하셨도다. 옥같은 법도 더더욱 바르시고 아름다운 분부 크게 드러내셨도다. 빛나게 옥책문에 이를 밝히면서 옛 제도 따라서 거행하나이다. 대궐 뜰 만세 소리 진동을 하고 온 누리에 경사가 흘러 넘치네. 장수와 강녕함 누리셨기에 즐겁고 기쁜 마음 그지없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 지었다.】 그리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자전을 모시면서 늘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마음 간절하였는데, 옥첩(玉牒)으로 아름다움 선양하면서 삼가 미천한 정성 바치나이다. 이 해에 다섯 가지 경사 겹치게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만세를 부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 왕대비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의 모친처럼 되려 하시었고 멀리 여중요순(女中堯舜)의 자태를 보이셨습니다. 대지에 짝하는 덕으로 부드럽게 교화시켜 왕대비의 미덕을 퍼뜨리셨고, 장락궁(長樂宮)034) 을 융숭하게 모신 그 범절은 임금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춘추가 더욱 높아지시면서 덕음(德音)이 널리 전파되길 원하옵니다. 선조(先朝) 때 갑자년035) 의 성대한 일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예(禮)를 상고해 볼 때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궁(閟宮)036) 과 자위(慈闈)037) 에게까지 존호를 올리게 되었으니 오늘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옥책문을 올리라는 윤허를 힘들여 받았기에 감히 하례(賀禮)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하늘과 같이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기에 뜻을 갖추어 올릴까 합니다. 탁룡(濯龍)038) 에 나아가 문안드릴 때마다 기거가 편안하심에 마음이 기뻤는데, 술잔 올려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운 뜻을 따를까 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에게 바치니, 상이 함을 받아 상궁(尙宮)에게 주면서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상이 절을 네 번 하고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한 뒤에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동조(東朝)039) 의 복록 하늘에 잇닿았고 만수무강하여 51세 되셨도다. 옥책문 올리니 범절 더욱 빛이 나고 육궁(六宮)에 기쁨 드날려 칭송하는 소리 양양하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26] 영고(寧考)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처럼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영조(英祖)를 가리킴.[註 027]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 : 주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처럼 어진 덕을 갖추었다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나라 왕실의 며느리 되었는데,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어받았도다." 하였음.[註 028]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 : 함이(含飴)는 만년에 은퇴하여 손자를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조황후기(明德鳥皇后紀)에 "나는 다만 사탕이나 입에 물고[含飴] 손자와 놀 뿐이요 이제 정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하였음.[註 029] 해옥(海屋) :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말임. 노인 세 사람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열 개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임. 《통배편(通倍編)》 축송(祝誦), 해옥첨주(海屋添籌).[註 030]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 : 대연수는 50이니, 즉 나이가 51세가 되었다는 말임.[註 031]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 : 기주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九疇)를 말하는데, 그 5복(福) 가운데 강녕(康寧)이 들어 있음. 《서경(書經)》 홍범(洪範).[註 032] 사제(思齊)의 주범(周範) : 사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편명(篇名)인데, 주(周)나라 왕실의 부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음.[註 033] 지년(知年)의 정성 :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하였음.[註 034] 장락궁(長樂宮) : 황태후인데 여기서는 대왕 대비를 뜻함.[註 035] 갑자년 : 1744 영조 20년.[註 036] 비궁(閟宮) :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뜻함.[註 037] 자위(慈闈) : 혜경궁(惠慶宮)을 뜻함.[註 038] 탁룡(濯龍) : 왕대비의 처소를 말함.[註 039] 동조(東朝) : 왕대비를 말함.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에서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아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높은 덕 지니시고 장락궁에 임하심에 우리 동방 그 교화에 흠뻑 젖었도다. 남몰래 두루두루 큰 은혜 내리시고 보배로운 계책 더욱 융성하셨도다. 옥같은 법도 더더욱 바르시고 아름다운 분부 크게 드러내셨도다. 빛나게 옥책문에 이를 밝히면서 옛 제도 따라서 거행하나이다. 대궐 뜰 만세 소리 진동을 하고 온 누리에 경사가 흘러 넘치네. 장수와 강녕함 누리셨기에 즐겁고 기쁜 마음 그지없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 지었다.】 그리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자전을 모시면서 늘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마음 간절하였는데, 옥첩(玉牒)으로 아름다움 선양하면서 삼가 미천한 정성 바치나이다. 이 해에 다섯 가지 경사 겹치게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만세를 부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 왕대비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의 모친처럼 되려 하시었고 멀리 여중요순(女中堯舜)의 자태를 보이셨습니다. 대지에 짝하는 덕으로 부드럽게 교화시켜 왕대비의 미덕을 퍼뜨리셨고, 장락궁(長樂宮)034) 을 융숭하게 모신 그 범절은 임금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춘추가 더욱 높아지시면서 덕음(德音)이 널리 전파되길 원하옵니다. 선조(先朝) 때 갑자년035) 의 성대한 일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예(禮)를 상고해 볼 때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궁(閟宮)036) 과 자위(慈闈)037) 에게까지 존호를 올리게 되었으니 오늘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옥책문을 올리라는 윤허를 힘들여 받았기에 감히 하례(賀禮)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하늘과 같이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기에 뜻을 갖추어 올릴까 합니다. 탁룡(濯龍)038) 에 나아가 문안드릴 때마다 기거가 편안하심에 마음이 기뻤는데, 술잔 올려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운 뜻을 따를까 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에게 바치니, 상이 함을 받아 상궁(尙宮)에게 주면서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상이 절을 네 번 하고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한 뒤에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동조(東朝)039) 의 복록 하늘에 잇닿았고 만수무강하여 51세 되셨도다. 옥책문 올리니 범절 더욱 빛이 나고 육궁(六宮)에 기쁨 드날려 칭송하는 소리 양양하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26] 영고(寧考)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처럼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영조(英祖)를 가리킴.[註 027]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 : 주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처럼 어진 덕을 갖추었다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나라 왕실의 며느리 되었는데,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어받았도다." 하였음.[註 028]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 : 함이(含飴)는 만년에 은퇴하여 손자를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조황후기(明德鳥皇后紀)에 "나는 다만 사탕이나 입에 물고[含飴] 손자와 놀 뿐이요 이제 정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하였음.[註 029] 해옥(海屋) :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말임. 노인 세 사람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열 개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임. 《통배편(通倍編)》 축송(祝誦), 해옥첨주(海屋添籌).[註 030]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 : 대연수는 50이니, 즉 나이가 51세가 되었다는 말임.[註 031]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 : 기주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九疇)를 말하는데, 그 5복(福) 가운데 강녕(康寧)이 들어 있음. 《서경(書經)》 홍범(洪範).[註 032] 사제(思齊)의 주범(周範) : 사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편명(篇名)인데, 주(周)나라 왕실의 부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음.[註 033] 지년(知年)의 정성 :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하였음.[註 034] 장락궁(長樂宮) : 황태후인데 여기서는 대왕 대비를 뜻함.[註 035] 갑자년 : 1744 영조 20년.[註 036] 비궁(閟宮) :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뜻함.[註 037] 자위(慈闈) : 혜경궁(惠慶宮)을 뜻함.[註 038] 탁룡(濯龍) : 왕대비의 처소를 말함.[註 039] 동조(東朝) : 왕대비를 말함.
그리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자전을 모시면서 늘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마음 간절하였는데, 옥첩(玉牒)으로 아름다움 선양하면서 삼가 미천한 정성 바치나이다. 이 해에 다섯 가지 경사 겹치게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만세를 부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 왕대비 전하께서는 문왕(文王)의 모친처럼 되려 하시었고 멀리 여중요순(女中堯舜)의 자태를 보이셨습니다. 대지에 짝하는 덕으로 부드럽게 교화시켜 왕대비의 미덕을 퍼뜨리셨고, 장락궁(長樂宮)034) 을 융숭하게 모신 그 범절은 임금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춘추가 더욱 높아지시면서 덕음(德音)이 널리 전파되길 원하옵니다.
선조(先朝) 때 갑자년035) 의 성대한 일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예(禮)를 상고해 볼 때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궁(閟宮)036) 과 자위(慈闈)037) 에게까지 존호를 올리게 되었으니 오늘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옥책문을 올리라는 윤허를 힘들여 받았기에 감히 하례(賀禮)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하늘과 같이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기에 뜻을 갖추어 올릴까 합니다. 탁룡(濯龍)038) 에 나아가 문안드릴 때마다 기거가 편안하심에 마음이 기뻤는데, 술잔 올려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우선 마음을 비우고 아름다운 뜻을 따를까 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에게 바치니, 상이 함을 받아 상궁(尙宮)에게 주면서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상이 절을 네 번 하고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한 뒤에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동조(東朝)039) 의 복록 하늘에 잇닿았고 만수무강하여 51세 되셨도다. 옥책문 올리니 범절 더욱 빛이 나고 육궁(六宮)에 기쁨 드날려 칭송하는 소리 양양하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26] 영고(寧考)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처럼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영조(英祖)를 가리킴.[註 027]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 : 주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처럼 어진 덕을 갖추었다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나라 왕실의 며느리 되었는데,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어받았도다." 하였음.[註 028]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 : 함이(含飴)는 만년에 은퇴하여 손자를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조황후기(明德鳥皇后紀)에 "나는 다만 사탕이나 입에 물고[含飴] 손자와 놀 뿐이요 이제 정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하였음.[註 029] 해옥(海屋) :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말임. 노인 세 사람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열 개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임. 《통배편(通倍編)》 축송(祝誦), 해옥첨주(海屋添籌).[註 030]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 : 대연수는 50이니, 즉 나이가 51세가 되었다는 말임.[註 031]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 : 기주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九疇)를 말하는데, 그 5복(福) 가운데 강녕(康寧)이 들어 있음. 《서경(書經)》 홍범(洪範).[註 032] 사제(思齊)의 주범(周範) : 사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편명(篇名)인데, 주(周)나라 왕실의 부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음.[註 033] 지년(知年)의 정성 :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하였음.[註 034] 장락궁(長樂宮) : 황태후인데 여기서는 대왕 대비를 뜻함.[註 035] 갑자년 : 1744 영조 20년.[註 036] 비궁(閟宮) :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뜻함.[註 037] 자위(慈闈) : 혜경궁(惠慶宮)을 뜻함.[註 038] 탁룡(濯龍) : 왕대비의 처소를 말함.[註 039] 동조(東朝) : 왕대비를 말함.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에게 바치니, 상이 함을 받아 상궁(尙宮)에게 주면서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상이 절을 네 번 하고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한 뒤에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동조(東朝)039) 의 복록 하늘에 잇닿았고 만수무강하여 51세 되셨도다. 옥책문 올리니 범절 더욱 빛이 나고 육궁(六宮)에 기쁨 드날려 칭송하는 소리 양양하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26] 영고(寧考)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처럼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영조(英祖)를 가리킴.[註 027] 주실(周室)의 아름다움 그대로 이어받고 : 주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처럼 어진 덕을 갖추었다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나라 왕실의 며느리 되었는데,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어받았도다." 하였음.[註 028] 한전(漢殿)의 태후(太后)처럼 함이(含飴)를 하셨도다. : 함이(含飴)는 만년에 은퇴하여 손자를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조황후기(明德鳥皇后紀)에 "나는 다만 사탕이나 입에 물고[含飴] 손자와 놀 뿐이요 이제 정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하였음.[註 029] 해옥(海屋) :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서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말임. 노인 세 사람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열 개가 되었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임. 《통배편(通倍編)》 축송(祝誦), 해옥첨주(海屋添籌).[註 030] 대연수(大衍數)에 일책(一策)이 더해졌기에 : 대연수는 50이니, 즉 나이가 51세가 되었다는 말임.[註 031] 기주(箕疇)의 강녕(康寧)함 : 기주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구주(九疇)를 말하는데, 그 5복(福) 가운데 강녕(康寧)이 들어 있음. 《서경(書經)》 홍범(洪範).[註 032] 사제(思齊)의 주범(周範) : 사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편명(篇名)인데, 주(周)나라 왕실의 부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음.[註 033] 지년(知年)의 정성 :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부모의 나이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하였음.[註 034] 장락궁(長樂宮) : 황태후인데 여기서는 대왕 대비를 뜻함.[註 035] 갑자년 : 1744 영조 20년.[註 036] 비궁(閟宮) :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뜻함.[註 037] 자위(慈闈) : 혜경궁(惠慶宮)을 뜻함.[註 038] 탁룡(濯龍) : 왕대비의 처소를 말함.[註 039] 동조(東朝) : 왕대비를 말함.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여관(女官)과 맞들고서 상궁에게 준 다음 자전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절을 네 번 하였다.
경모궁(景慕宮)의 책문(冊文)과 인장(印章)을 영청문(永淸門) 밖에서 지송(祗送)하고 이어 경모궁에 가서 참배한 다음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 보았다.
1월 17일 경자
장헌 세자(莊獻世子)에게 추가하여 존호(尊號)를 올렸다.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상이 직접 책문과 인장을 올리고 이어 친향(親享)을 거행하였다.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版位)에 들어가 두 번 절한 다음 치사(致詞)를 올렸다. 상이 자리로 돌아와 두 번 절하고 서쪽을 향해 서자 청하곡(淸河曲)이 울려 퍼졌는데, 그 내용에,
"환히 드러난 아름다운 덕, 속에 쌓인 것이 밖으로 비춰짐이로다. 효성과 우애를 근본삼아 신명(神明)과 통하였도다. 왕성한 그 기운 막을 수 없어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도다. 맑은 강물 저리 흐르듯 우리 동방 운수를 열어 주었네. 보우(保佑)하며 정중하게 내리신 그 명, 자전과 자궁에 이르렀도다. 어느새 주갑(周甲)의 해 맞고서 보니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어라. 금에 쓰고 옥에 새겨서 아름다운 그 이름 드러내도다. 만년을 축수하는 저 음악 소리, 복록이 와서 함께 하도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어 올렸다.】 여러 집사(執事)가 각각 옥책문과 인장 및 상을 받들고 나아가니, 상이 지영(祗迎)하고, 이어 섬돌 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서 꿇어앉았다. 도제조(都提調)가 이를 받들어 무릎꿇고 바치니, 임금이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주었다. 근시가 이를 마주 들고 봉책인관(捧冊印官)에게 주자 봉책인관이 무릎꿇고 받은 다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승지가 받들어 봉안하였는데, 옥책문의 내용은, "천천히 퍼지는 관현악 연주 소리, 올해가 과연 어떤 해입니까. 옥첩(玉牒)에 밝은 덕 기록하며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바치니 이는 백세토록 징험될 일로서 나라 전체가 장엄하게 칭송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숙부(皇叔父)이신 사도 수덕 돈경 홍인 경지 장헌 세자(思悼綬德敦慶弘仁景祉莊獻世子) 저하께서는 하늘과 땅을 본받아 박후(博厚) 고명(高明)하셨으며, 인지(仁智)하시고 철문(哲文)하심은 훈화(勛華)와 어울리셨습니다. 한(漢)·당(唐) 이래의 규모가 비좁을 만큼 그 큰 도량 넓게 틔었고 끝을 볼 수 없는 강물과 바다마냥 그 속마음은 한없이 깊으셨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구가(謳歌)하며 모두 귀의하였는데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할 때의 그 업적 빛나기만 하옵니다. 말을 듣는 그 자세는 추요(蒭蕘)까지도 반드시 통하게 하였고, 곧다는 훌륭한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아, 규모가 엄청난 제왕의 대경(大經) 대법(大法)도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성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정축년040) 에 어린 나이로 끝없이 사모했던 것이야말로 이미 성자(聖慈)께서 굽어살피시기에 충분하였는데 갑오년041) 에 연석(筵席)에서 분명하게 분부하셨던 것만 보아도 효성이 위를 감동시켰음을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아, 근년에 눈물이 나는 말들을 보아도 모두가 이를 드러내 밝히고 있는데, 나라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다만 이해 타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자(小子)가 자나깨나 지극히 원했던 것은 조금이라도 성대한 덕을 형용하는 것이었는데, 전후에 걸쳐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려고 명호(名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소라 껍질로 바다를 재듯 하였으므로 감추어진 덕을 기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북두칠성의 자루가 인방(寅方)에 놓이면서 바로 만나기 어려운 구갑(舊甲)의 해를 맞았습니다. 무지개가 중화(重華)의 물가에 비쳤던 것042) 이 돌아보면 이 해 이 달이었고 별이 일주(一周)하여 요(堯)의 명협(蓂莢)이 되었으니,043) 이때에 사모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누겠습니까. 자궁(慈宮)께서 칠순(七旬)의 나이를 바라보게 되신 것도 실로 돌보아 주심을 받든 것이요, 변변치 못한 몸이 20년 동안 정치를 해 온 것 또한 빛나는 업적이 끼쳐 준 나머지 경사라 할 것인데, 돌아보면 우리 집안이 더 융성해지는 전범(典範)을 시행해야 할 책임이 지금에 와서 부과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예(禮)란 본래 인정(人情)에 따르는 것이니 인정과 부합되어야만 예가 되는 것이고, 명호(名號)는 실제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니 실제 내용이 있다면 명호를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일곱 줄 면류관 끈을 생각하면 추연(愀然)히 다시 뵙는 것만 같고, 온 나라에서 칭송하는 것들을 모아들이다 보니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더욱 높아지기만 합니다. 어찌 감히 완전하게 생전의 자취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렇게라도 해야만 인정상으로나 절문(節文)상으로 그런대로 갖추어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정성을 쏟고 애모(愛慕)하신 것은 독실하고 지극하여 인륜이 이로 말미암아 밝게 되었고, 규모와 도량은 높고도 깊어 우주와 넓이를 같이했으며, 하늘로부터 역년(歷年)과 길(吉)함을 명받아 태산과 반석처럼 큰 기업을 열어 놓았고, 해가 떠오르듯 달이 차오르듯 후손을 편케 해 준 위업이 빛나기만 하옵니다. 이에 삼가 옥책문을 받들면서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는 존호를 추후로 올리게 되었는데, 삼가 깊이 살피시어 미천한 정성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만물이 그 교화를 입도록 해 주시고, 상제의 좌우에서 오르내리시면서 그 공이 천지(天地)와 하나가 되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상이 도로 자리에 돌아와 두 번 절하고, 친향(親享)을 행한 뒤에 환궁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4면
【분류】왕실(王室)
[註 040] 정축년 : 1757 영조 33년.[註 041] 갑오년 : 1774 영조 50년.[註 042] 무지개가 중화(重華)의 물가에 비쳤던 것 :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중화(重華) 즉 순(舜)임금에게 시집오던 때를 말하는 것으로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사도 세자에게 시집온 것을 뜻함.[註 043] 별이 일주(一周)하여 요(堯)의 명협(蓂莢)이 되었으니, : 새해가 찾아와 정월이 되었다는 말임. 명협은 요임금 때 조정에 난 상서로운 풀 이름으로서 초하루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자라다가 15일부터는 매일 한 잎씩 졌다고 함.
여러 집사(執事)가 각각 옥책문과 인장 및 상을 받들고 나아가니, 상이 지영(祗迎)하고, 이어 섬돌 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서 꿇어앉았다. 도제조(都提調)가 이를 받들어 무릎꿇고 바치니, 임금이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주었다. 근시가 이를 마주 들고 봉책인관(捧冊印官)에게 주자 봉책인관이 무릎꿇고 받은 다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승지가 받들어 봉안하였는데, 옥책문의 내용은,
"천천히 퍼지는 관현악 연주 소리, 올해가 과연 어떤 해입니까. 옥첩(玉牒)에 밝은 덕 기록하며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바치니 이는 백세토록 징험될 일로서 나라 전체가 장엄하게 칭송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숙부(皇叔父)이신 사도 수덕 돈경 홍인 경지 장헌 세자(思悼綬德敦慶弘仁景祉莊獻世子) 저하께서는 하늘과 땅을 본받아 박후(博厚) 고명(高明)하셨으며, 인지(仁智)하시고 철문(哲文)하심은 훈화(勛華)와 어울리셨습니다. 한(漢)·당(唐) 이래의 규모가 비좁을 만큼 그 큰 도량 넓게 틔었고 끝을 볼 수 없는 강물과 바다마냥 그 속마음은 한없이 깊으셨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구가(謳歌)하며 모두 귀의하였는데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할 때의 그 업적 빛나기만 하옵니다. 말을 듣는 그 자세는 추요(蒭蕘)까지도 반드시 통하게 하였고, 곧다는 훌륭한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아, 규모가 엄청난 제왕의 대경(大經) 대법(大法)도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성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정축년040) 에 어린 나이로 끝없이 사모했던 것이야말로 이미 성자(聖慈)께서 굽어살피시기에 충분하였는데 갑오년041) 에 연석(筵席)에서 분명하게 분부하셨던 것만 보아도 효성이 위를 감동시켰음을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아, 근년에 눈물이 나는 말들을 보아도 모두가 이를 드러내 밝히고 있는데, 나라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다만 이해 타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자(小子)가 자나깨나 지극히 원했던 것은 조금이라도 성대한 덕을 형용하는 것이었는데, 전후에 걸쳐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려고 명호(名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소라 껍질로 바다를 재듯 하였으므로 감추어진 덕을 기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북두칠성의 자루가 인방(寅方)에 놓이면서 바로 만나기 어려운 구갑(舊甲)의 해를 맞았습니다. 무지개가 중화(重華)의 물가에 비쳤던 것042) 이 돌아보면 이 해 이 달이었고 별이 일주(一周)하여 요(堯)의 명협(蓂莢)이 되었으니,043) 이때에 사모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누겠습니까.
자궁(慈宮)께서 칠순(七旬)의 나이를 바라보게 되신 것도 실로 돌보아 주심을 받든 것이요, 변변치 못한 몸이 20년 동안 정치를 해 온 것 또한 빛나는 업적이 끼쳐 준 나머지 경사라 할 것인데, 돌아보면 우리 집안이 더 융성해지는 전범(典範)을 시행해야 할 책임이 지금에 와서 부과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예(禮)란 본래 인정(人情)에 따르는 것이니 인정과 부합되어야만 예가 되는 것이고, 명호(名號)는 실제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니 실제 내용이 있다면 명호를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일곱 줄 면류관 끈을 생각하면 추연(愀然)히 다시 뵙는 것만 같고, 온 나라에서 칭송하는 것들을 모아들이다 보니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더욱 높아지기만 합니다. 어찌 감히 완전하게 생전의 자취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렇게라도 해야만 인정상으로나 절문(節文)상으로 그런대로 갖추어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정성을 쏟고 애모(愛慕)하신 것은 독실하고 지극하여 인륜이 이로 말미암아 밝게 되었고, 규모와 도량은 높고도 깊어 우주와 넓이를 같이했으며, 하늘로부터 역년(歷年)과 길(吉)함을 명받아 태산과 반석처럼 큰 기업을 열어 놓았고, 해가 떠오르듯 달이 차오르듯 후손을 편케 해 준 위업이 빛나기만 하옵니다.
이에 삼가 옥책문을 받들면서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는 존호를 추후로 올리게 되었는데, 삼가 깊이 살피시어 미천한 정성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만물이 그 교화를 입도록 해 주시고, 상제의 좌우에서 오르내리시면서 그 공이 천지(天地)와 하나가 되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지었다.】 상이 도로 자리에 돌아와 두 번 절하고, 친향(親享)을 행한 뒤에 환궁하였다.
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렸다. 상이 직접 책문(冊文)과 금인(金印)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올리고, 치사(致詞)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수정전(壽靜殿)에서 바쳤다.
상이 소차(小次)에 들어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특별히 경들을 부른 것은 의논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바로 전에 없던 경사스러운 날인데, 온 나라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혜택을 베푸는 일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경들은 이러한 뜻을 받들어 시행할 방도를 생각해 보도록 하라."
하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베풀어 준 은택이야말로 예로부터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은혜였던 만큼 다시 더 은혜를 베풀 방도가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기쁜 경사에 백성에게 별도로 혜택을 줄 방도를 강구하지 않고서는 안될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생각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정묘년044) 에 특별히 나이 많은 이를 우대하는 뜻으로 가자(加資)해 준 전례(典禮)가 실제로 있긴 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지난해에 먼저 널리 경축하는 뜻에 입각하여 사서(士庶)까지도 모두 가자하라는 명을 내렸다마는, 돌아보건대 지금 금옥(金玉)이 가득 차 있는 형편이니 이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61세 된 사람들까지 모두 가자해 주도록 허락한다면 나이를 속일 폐단이 생길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단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에게만 가자해 주도록 허락하되, 그 중에서도 문관 가운데에서는 시종(侍從), 음관 가운데에서는 목사(牧使)와 부사, 무관 가운데에서는 방어사(防禦使)로 한정을 하여 가자해 준다면 어떻겠는가?"
하니, 홍낙성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렇게 한정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 등이 아뢰기를,
"영상이 아뢴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올해는 만나기 어려운 해로서 그야말로 아랫사람들 모두가 기뻐하고 경축하는 때이니, 올해를 귀하게 여기는 도리에 입각해서 가자(加資)하는 은전을 사서(士庶)에까지 두루 미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홍낙성이 아뢰기를,
"이 뒤로도 즐거운 경사가 매년 있게 될 것이고 보면 앞으로도 베풀 혜택을 남겨두면서 늘 부족한 듯 여기게 하는 것이 진정 경축하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소차(小次)를 나와 명정전(明政殿)으로 갔다. 두 번 절한 뒤 무릎을 꿇고 책문(冊文)과 금인(金印)을 받아서 상전(尙傳)에게 주어 상에 놓게 하였다. 상이 또 두 번 절하고 서쪽을 향해 섰다. 상전이 책함(冊函)과 인록(印盝)을 받들고 나오자 상이 이를 지영(祗迎)한 다음에 수정문(壽靜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갔다.
이때에 자궁(慈宮)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수정전(壽靜殿)의 자리에 오르자 경운곡(卿雲曲)이 연주되었는데, 그 내용에,
"아, 자애로운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 빛나도다. 부모의 뜻 임금 봉양하고 자손들 화기애애하네. 세성(歲星)이 돌고 돌아 환갑을 맞이함에 복록(福祿)은 더욱 더 창성하여라. 어찌하여 이렇듯 밝은 운세 맞았는가. 깊고 성실한 덕 간직했기 때문일세. 근면한 우리 자궁 임금님 뜻 이어받아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심원하여 이에 그 덕음(德音) 드날렸네. 연주 소리 화기롭고 책문(冊文) 또한 빛나도다. 만세 불러 축수(祝壽)하며 이 경사 함께 하리."
하였다. 【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지었다.】 죽책문(竹冊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덕망이 태양보다도 더 밝으시기에 세 차례나 존호를 올렸었는데, 어버이 오래 사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기에 예(禮)에 따라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큰 경사에 성대한 예식, 지금만 있을 뿐 옛날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惠嬪邸下)께서는 왕세자의 배필이 되시어 나라 전체의 봉양을 받게 되셨습니다. 왕실의 며느리로서의 자질은 성대한 의식을 받기에 합당하여 시어머니의 귀여움을 흠뻑 받았었고, 도산(塗山)045) 처럼 훌륭한 아들을 낳아 극진히 길러냄으로써 그 명성이 퍼져 왕위를 잇게 하셨습니다. 세자가 대리로 정사를 보며 교화를 폈던 14년 동안, 우러러보면 남 모르게 협찬(協贊)하신 공이 지대하였고, 억만 년 아름다운 운세를 열어 인자하게 보호받는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아, 큰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장수하게 되는 법으로서 그 순일한 복이 하늘로부터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이에 나라 전역에서 오래 사시라고 축원하는 노래 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올해로 주갑(周甲)을 맞이하시게 되었고, 왕손(王孫)과 한가한 노년을 즐기시는 가운데 오늘이 또 강경(降庚)046) 과 맞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겸손해 하시는 덕을 따라야 됨을 모르지 않으나, 오늘이 어떤 날인데 소자가 정성을 다 바칠 방도를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정의(情宜)와 예문(禮文)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된 이때에 다시 경사가 겹쳐 이르는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궁(閟宮)에게 여덟 글자의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그 덕을 다 표현하기는 어려웠고, 장락궁(長樂宮)의 연세가 쉰을 넘으셨기에 또한 융숭한 예로 더 존호를 올려드렸습니다. 참으로 어버이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덕을 드러내 보일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천만 사람의 똑같은 심정을 특별히 살펴 주신 덕분으로 다행히 승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법을 준수하여 정문(情文)에 맞게끔 하면서 복록(福祿)에 상응하여 더욱 빛나게 할 존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휘(徽)’야말로 아름다움이 한데 모인 칭호로서 자손의 번성을 크게 상징하는 글자이고, ‘목(穆)’이야말로 마지않는다는 뜻으로서 천세(千世)토록 대대로 이어간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글자이기에, 삼가 옥책문을 받들면서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옥책문을 성대하게 올리는 것은 더욱 많은 복을 받으시도록 하는 데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옥첩(玉牒)이 빛나도록 정성 담은 의식을 빠짐없이 거행하려고 노력했으니 위에서도 편안하게 받으시고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시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홍문 제학 구상(具庠)이 지었다.】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은 다음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큰 덕에 따른 순일한 복이 우리 자궁에게 내려졌도다. 만수무강하시어 봄빛을 길이 비춰 주소서. 아름다움 크게 드러내는 옥첩(玉牒)이 밝게 빛나도다. 경사를 맞이함에 온유한 덕 더욱 빛나누나. 겸허하신 마음 억지로 굽히시어 옥책문 받으셨네. 예식이 이루어짐에 만세 삼창 부르나니 환호하는 소리 온나라에 넘쳐 흐르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치사를 올리고 나서 상이 두 번 절하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을묘년이 되는 올해, 그야말로 다섯 가지 경사가 겹치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성대하게 예를 거행하는 지금은 또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정월입니다. 만세 삼창하며 축하하는 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 나라 가득 효심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후한 덕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하시고 부드러운 교화를 펼치며 아름다운 덕을 속에 간직해 오셨습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강물처럼 옥체가 강건하심이 기쁘기만 한데, 복록을 얻고 이름을 얻고 수명을 얻으셨으니 그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자가 20년에 걸쳐 정치를 해 온 이 해는 자궁의 춘추가 칠순을 향해 내닫는 첫 해이기도 합니다. 비궁에 존호를 함께 올린 것은 실로 어버이에게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며, 장락궁(長樂宮)에 성대한 의식을 같이 행한 것은 뛰어난 덕을 계승한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옥책문을 받들어 삼가 올리면서 자궁을 우러러보니 기쁨이 넘쳐 흐르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는 올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으면서 이 날을 아끼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소원을 굽어 살피시어 겸허하게 물리치는 마음을 그래도 애써 돌려 주셨기에,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순종하며 풍정(豊呈)047) 만은 우선 늦출까 하나이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서 무릎꿇고 바치니, 상이 차례로 함을 받았다. 이를 여관(女官)이 마주 들어 상궁(尙宮)에게 주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자궁의 좌석 앞에 놓았다. 상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로 나아와 두 번 절한 뒤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아, 우리 자궁에게 백 가지 복록이 따라왔도다. 큰 덕의 소유자는 장수를 누리나니 보배로운 춘추 환갑을 맞으셨네. 이에 옥책문 올리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오니, 천년 만년토록 경사가 궁궐에 넘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044]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45] 도산(塗山) : 우(禹)임금의 비(妃)요, 계(啓)의 모친.[註 046] 강경(降庚) : 생일이라는 말임. 《이소(離騷)》에 "경인에 내가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인(寅)은 양정(陽正)이기 때문에 남아가 태어나면 인(寅)으로 하고, 경(庚)은 음정(陰正)이기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경(庚)으로 한다."하였음.[註 047] 풍정(豊呈) : 궁정 연회.
죽책문(竹冊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덕망이 태양보다도 더 밝으시기에 세 차례나 존호를 올렸었는데, 어버이 오래 사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기에 예(禮)에 따라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큰 경사에 성대한 예식, 지금만 있을 뿐 옛날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惠嬪邸下)께서는 왕세자의 배필이 되시어 나라 전체의 봉양을 받게 되셨습니다. 왕실의 며느리로서의 자질은 성대한 의식을 받기에 합당하여 시어머니의 귀여움을 흠뻑 받았었고, 도산(塗山)045) 처럼 훌륭한 아들을 낳아 극진히 길러냄으로써 그 명성이 퍼져 왕위를 잇게 하셨습니다. 세자가 대리로 정사를 보며 교화를 폈던 14년 동안, 우러러보면 남 모르게 협찬(協贊)하신 공이 지대하였고, 억만 년 아름다운 운세를 열어 인자하게 보호받는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아, 큰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장수하게 되는 법으로서 그 순일한 복이 하늘로부터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이에 나라 전역에서 오래 사시라고 축원하는 노래 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올해로 주갑(周甲)을 맞이하시게 되었고, 왕손(王孫)과 한가한 노년을 즐기시는 가운데 오늘이 또 강경(降庚)046) 과 맞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겸손해 하시는 덕을 따라야 됨을 모르지 않으나, 오늘이 어떤 날인데 소자가 정성을 다 바칠 방도를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정의(情宜)와 예문(禮文)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된 이때에 다시 경사가 겹쳐 이르는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궁(閟宮)에게 여덟 글자의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그 덕을 다 표현하기는 어려웠고, 장락궁(長樂宮)의 연세가 쉰을 넘으셨기에 또한 융숭한 예로 더 존호를 올려드렸습니다.
참으로 어버이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덕을 드러내 보일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천만 사람의 똑같은 심정을 특별히 살펴 주신 덕분으로 다행히 승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법을 준수하여 정문(情文)에 맞게끔 하면서 복록(福祿)에 상응하여 더욱 빛나게 할 존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휘(徽)’야말로 아름다움이 한데 모인 칭호로서 자손의 번성을 크게 상징하는 글자이고, ‘목(穆)’이야말로 마지않는다는 뜻으로서 천세(千世)토록 대대로 이어간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글자이기에, 삼가 옥책문을 받들면서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더 올리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옥책문을 성대하게 올리는 것은 더욱 많은 복을 받으시도록 하는 데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옥첩(玉牒)이 빛나도록 정성 담은 의식을 빠짐없이 거행하려고 노력했으니 위에서도 편안하게 받으시고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시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홍문 제학 구상(具庠)이 지었다.】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은 다음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큰 덕에 따른 순일한 복이 우리 자궁에게 내려졌도다. 만수무강하시어 봄빛을 길이 비춰 주소서. 아름다움 크게 드러내는 옥첩(玉牒)이 밝게 빛나도다. 경사를 맞이함에 온유한 덕 더욱 빛나누나. 겸허하신 마음 억지로 굽히시어 옥책문 받으셨네. 예식이 이루어짐에 만세 삼창 부르나니 환호하는 소리 온나라에 넘쳐 흐르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치사를 올리고 나서 상이 두 번 절하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을묘년이 되는 올해, 그야말로 다섯 가지 경사가 겹치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성대하게 예를 거행하는 지금은 또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정월입니다. 만세 삼창하며 축하하는 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 나라 가득 효심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후한 덕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하시고 부드러운 교화를 펼치며 아름다운 덕을 속에 간직해 오셨습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강물처럼 옥체가 강건하심이 기쁘기만 한데, 복록을 얻고 이름을 얻고 수명을 얻으셨으니 그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자가 20년에 걸쳐 정치를 해 온 이 해는 자궁의 춘추가 칠순을 향해 내닫는 첫 해이기도 합니다. 비궁에 존호를 함께 올린 것은 실로 어버이에게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며, 장락궁(長樂宮)에 성대한 의식을 같이 행한 것은 뛰어난 덕을 계승한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옥책문을 받들어 삼가 올리면서 자궁을 우러러보니 기쁨이 넘쳐 흐르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는 올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으면서 이 날을 아끼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소원을 굽어 살피시어 겸허하게 물리치는 마음을 그래도 애써 돌려 주셨기에,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순종하며 풍정(豊呈)047) 만은 우선 늦출까 하나이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서 무릎꿇고 바치니, 상이 차례로 함을 받았다. 이를 여관(女官)이 마주 들어 상궁(尙宮)에게 주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자궁의 좌석 앞에 놓았다. 상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로 나아와 두 번 절한 뒤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아, 우리 자궁에게 백 가지 복록이 따라왔도다. 큰 덕의 소유자는 장수를 누리나니 보배로운 춘추 환갑을 맞으셨네. 이에 옥책문 올리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오니, 천년 만년토록 경사가 궁궐에 넘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044]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45] 도산(塗山) : 우(禹)임금의 비(妃)요, 계(啓)의 모친.[註 046] 강경(降庚) : 생일이라는 말임. 《이소(離騷)》에 "경인에 내가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인(寅)은 양정(陽正)이기 때문에 남아가 태어나면 인(寅)으로 하고, 경(庚)은 음정(陰正)이기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경(庚)으로 한다."하였음.[註 047] 풍정(豊呈) : 궁정 연회.
상이 수정전(壽靜殿)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은 다음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큰 덕에 따른 순일한 복이 우리 자궁에게 내려졌도다. 만수무강하시어 봄빛을 길이 비춰 주소서. 아름다움 크게 드러내는 옥첩(玉牒)이 밝게 빛나도다. 경사를 맞이함에 온유한 덕 더욱 빛나누나. 겸허하신 마음 억지로 굽히시어 옥책문 받으셨네. 예식이 이루어짐에 만세 삼창 부르나니 환호하는 소리 온나라에 넘쳐 흐르도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치사를 올리고 나서 상이 두 번 절하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을묘년이 되는 올해, 그야말로 다섯 가지 경사가 겹치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성대하게 예를 거행하는 지금은 또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정월입니다. 만세 삼창하며 축하하는 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 나라 가득 효심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후한 덕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하시고 부드러운 교화를 펼치며 아름다운 덕을 속에 간직해 오셨습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강물처럼 옥체가 강건하심이 기쁘기만 한데, 복록을 얻고 이름을 얻고 수명을 얻으셨으니 그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자가 20년에 걸쳐 정치를 해 온 이 해는 자궁의 춘추가 칠순을 향해 내닫는 첫 해이기도 합니다. 비궁에 존호를 함께 올린 것은 실로 어버이에게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며, 장락궁(長樂宮)에 성대한 의식을 같이 행한 것은 뛰어난 덕을 계승한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옥책문을 받들어 삼가 올리면서 자궁을 우러러보니 기쁨이 넘쳐 흐르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는 올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으면서 이 날을 아끼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소원을 굽어 살피시어 겸허하게 물리치는 마음을 그래도 애써 돌려 주셨기에,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순종하며 풍정(豊呈)047) 만은 우선 늦출까 하나이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서 무릎꿇고 바치니, 상이 차례로 함을 받았다. 이를 여관(女官)이 마주 들어 상궁(尙宮)에게 주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자궁의 좌석 앞에 놓았다. 상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로 나아와 두 번 절한 뒤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아, 우리 자궁에게 백 가지 복록이 따라왔도다. 큰 덕의 소유자는 장수를 누리나니 보배로운 춘추 환갑을 맞으셨네. 이에 옥책문 올리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오니, 천년 만년토록 경사가 궁궐에 넘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044]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45] 도산(塗山) : 우(禹)임금의 비(妃)요, 계(啓)의 모친.[註 046] 강경(降庚) : 생일이라는 말임. 《이소(離騷)》에 "경인에 내가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인(寅)은 양정(陽正)이기 때문에 남아가 태어나면 인(寅)으로 하고, 경(庚)은 음정(陰正)이기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경(庚)으로 한다."하였음.[註 047] 풍정(豊呈) : 궁정 연회.
치사를 올리고 나서 상이 두 번 절하고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을묘년이 되는 올해, 그야말로 다섯 가지 경사가 겹치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성대하게 예를 거행하는 지금은 또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정월입니다. 만세 삼창하며 축하하는 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 나라 가득 효심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께서는 후한 덕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하시고 부드러운 교화를 펼치며 아름다운 덕을 속에 간직해 오셨습니다. 언덕처럼 묏부리처럼 강물처럼 옥체가 강건하심이 기쁘기만 한데, 복록을 얻고 이름을 얻고 수명을 얻으셨으니 그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자가 20년에 걸쳐 정치를 해 온 이 해는 자궁의 춘추가 칠순을 향해 내닫는 첫 해이기도 합니다. 비궁에 존호를 함께 올린 것은 실로 어버이에게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며, 장락궁(長樂宮)에 성대한 의식을 같이 행한 것은 뛰어난 덕을 계승한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옥책문을 받들어 삼가 올리면서 자궁을 우러러보니 기쁨이 넘쳐 흐르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는 올해를 기쁜 마음으로 맞으면서 이 날을 아끼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소원을 굽어 살피시어 겸허하게 물리치는 마음을 그래도 애써 돌려 주셨기에,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순종하며 풍정(豊呈)047) 만은 우선 늦출까 하나이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서 무릎꿇고 바치니, 상이 차례로 함을 받았다. 이를 여관(女官)이 마주 들어 상궁(尙宮)에게 주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자궁의 좌석 앞에 놓았다. 상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로 나아와 두 번 절한 뒤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아, 우리 자궁에게 백 가지 복록이 따라왔도다. 큰 덕의 소유자는 장수를 누리나니 보배로운 춘추 환갑을 맞으셨네. 이에 옥책문 올리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오니, 천년 만년토록 경사가 궁궐에 넘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044]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45] 도산(塗山) : 우(禹)임금의 비(妃)요, 계(啓)의 모친.[註 046] 강경(降庚) : 생일이라는 말임. 《이소(離騷)》에 "경인에 내가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인(寅)은 양정(陽正)이기 때문에 남아가 태어나면 인(寅)으로 하고, 경(庚)은 음정(陰正)이기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경(庚)으로 한다."하였음.[註 047] 풍정(豊呈) : 궁정 연회.
상기(尙記) 등이 각각 치사와 전문과 표리(表裏)의 함(函)을 받들고서 무릎꿇고 바치니, 상이 차례로 함을 받았다. 이를 여관(女官)이 마주 들어 상궁(尙宮)에게 주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자궁의 좌석 앞에 놓았다. 상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 소차(小次)로 돌아왔다.
내전(內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자리로 나아와 두 번 절한 뒤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아, 우리 자궁에게 백 가지 복록이 따라왔도다. 큰 덕의 소유자는 장수를 누리나니 보배로운 춘추 환갑을 맞으셨네. 이에 옥책문 올리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오니, 천년 만년토록 경사가 궁궐에 넘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044]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45] 도산(塗山) : 우(禹)임금의 비(妃)요, 계(啓)의 모친.[註 046] 강경(降庚) : 생일이라는 말임. 《이소(離騷)》에 "경인에 내가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인(寅)은 양정(陽正)이기 때문에 남아가 태어나면 인(寅)으로 하고, 경(庚)은 음정(陰正)이기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경(庚)으로 한다."하였음.[註 047] 풍정(豊呈) : 궁정 연회.
상기(尙記)가 표리함을 받들어 올리니, 내전이 함을 받아 상궁에게 준 다음 자궁의 좌석 앞에 놓게 하였다. 내전이 두 번 절을 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거둥하여 자궁의 환갑을 경축하는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바쳤는데, 치사의 내용에,
"온유한 범절로 아름다운 선대(先代)의 덕을 계승하시어 도타운 경사를 길이 펼치게 된 결과 뜨는 해 차오르는 달처럼 번성하고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자궁의 춘추 환갑을 맞이하심에 이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라서 기쁜 마음으로 문안드리며 노후를 편히 보내시도록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옥체 강녕하시어 자모(慈母)의 은택 길이 내려주시옵고, 만세 삼창 부르오니 풍성한 복록 받으옵소서."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승문원의 관원이 치사를 담은 함을 받들고 오니 승문원 도제조가 무릎을 꿇고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주었다. 근시가 전달받아 무릎을 꿇고 바치니 상이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도록 하였다. 예조 정랑이 전문(箋文)을 담은 함을 올리니 승문원 도제조가 무릎을 꿇고 바쳤다. 상이 그것을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게 하였다. 제용감(濟用監)의 관원이 표리(表裏)를 담은 함을 받들고 오니 제용감 제조가 무릎을 꿇고 바쳤다. 상이 이것을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게 하였다. 이 모두를 위에서 행한 의식대로 하였다. 상이 몸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 부르는 의식을 행하자,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 및 뜰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불렀다. 근시(近侍)가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담은 함(函)들을 용정(龍亭)048) 에 봉안하여 나가니 상이 이를 지영(祗迎)한 뒤 소차(小次)로 도로 들어갔다. 근시가 용정을 수행(隨行)하여 자궁의 합문(閤門) 밖에 가서 상전(尙傳)에게 주고 들어왔다. 전문(箋文)의 내용에, "천 년에 한 번 있을 우리 집 경사 날, 복이란 복은 모두 모여들고 있는데, 억만 년토록 축복받을 자궁의 환갑날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니, 구중 궁궐에 기쁨이 흘러 넘치고 하늘과 땅과 사람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의 정선 희목 혜빈 저하께서는 크나큰 덕에 당연히 따르는 수명을 얻으시고 지극한 교화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노후를 편히 즐기시면서 백세토록 경사가 자손 만대에 끼쳐지도록 하셨고, 문안드릴 때마다 화락하게 대해 주시면서 홍범 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강녕(康寧)한 복을 거두셨습니다. 생각건대 이번에 환갑을 맞으신 것은 실로 정묘년049) 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로 처음 맞는 일입니다. 식기(食器)를 씻고 음식을 차리며 효성껏 봉양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나이 드신 어버이를 모시는 아들로서는 똑같은 심정일 것인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져 이 날을 아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만 합니다. 이에 만세 삼창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물이 계속 흘러내리듯 하는 복을 더욱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정성을 바쳐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고 나라에서 해 드릴 수 있는 봉양을 갖추어 행하면서, 자궁의 안색이 펴져 화창해지신 것을 우러러 뵈옵고 쉽게 늙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노래하게 됨에 기쁜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근시(近侍)가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상이 소차에서 나와 판위(版位)로 가서 두 번 절하였다. 명정전에 거둥하여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백 가지 상서(祥瑞)가 모두 집결하여 대대로 아름다운 운세를 이어가게 되었고, 다섯 가지 경사를 한꺼번에 맞이함에 떳떳한 예전(禮典)을 빛나게 거행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된 데 따라 대대적으로 윤음(綸音)을 내리노라.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모(太母)의 아름다운 법도는 진정 옛날 훌륭한 후비(后妃)들의 뛰어난 생각을 능가하고 계신다 하겠다. 충신(忠信)한 곤덕(坤德)으로 존엄한 건극(乾極)의 배필이 되심에 무녀성(婺女星)에 상서로움이 응하였고, 여관(女官)이 궁중 다스리시는 덕을 드러냄에 여중 군자(女中君子)라는 칭송이 널리 전해지게끔 되었다. 선조(先朝) 때에는 훌륭한 계책으로 협찬(協贊)하셨고, 오늘날에는 하늘과 같은 자애로움을 입게 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만세토록 종묘 사직이 공고해지게 하면서 덕이 모자란 나를 보우(保佑)하시고, 세밀한 내용으로 교시하시어 대의(大義)를 일으켜 세우셨다. 이에 하늘로부터 백 가지 복을 받으시는 한편 춘추도 어언 예순을 바라보시게 되었다. 옥체가 더욱 강건하시어 장락궁(長樂宮)에서 만년토록 즐거움을 누리시도록 일제히 축원하는 가운데 연세가 더욱 높아져 대연수(大衍數)에 1책(策)을 더하시게끔 된 것이다. 강물이 흐르듯 큰 복을 계속 받으시게 된 것은 선조(先朝) 때 행했던 경사스러운 예식과 부합되는데, 여정(輿情) 역시 태양과 같은 그 덕을 그려내고 싶어하거늘, 더군다나 높이 떠받들고 싶어하는 나의 속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 비궁의 성대한 덕은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훌륭하다는 소문은 세자로 계실 때 이미 일찍부터 드러났다. 밤 수레를 준비해 두고 늘 공경한 태도를 지니면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하루 세 번씩 문안올렸고, 운병(雲輧)050) 을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오월장(五月葬) 치른 등(滕)나라 세자보다도 거상(居喪)을 엄숙히 행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대리하여 정사를 행하실 때에는 참으로 해와 달이 거듭 빛나는 듯하였고, 반우(盤盂)와 장벽(帳壁)의 경계를 속에 간직하며 도량은 하늘과 땅처럼 드넓기만 하였다. 그래서 갑오년051) 에 연석(筵席)에서 내리신 분부가 분명하여 잊을 수 없는데, 자손을 편안케 해 줄 계책을 꾀하시어 길이 창성하게 될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었다. 어느덧 구갑(舊甲)이 되는 을묘년을 맞이하였는데, 탄신하신 날이 또한 바로 지금의 1월에 해당한다. 오랜 세월이 한 바퀴 돌아 올해 바로 이 달에 아름다운 시기를 맞았는데, 임금이 된 자식으로서의 효성을 생전에 미처 바치지를 못했으니 이때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왕가에 거듭 이르게 된 경사야말로 돌보아 주신 독실한 덕 때문이 아님이 없으니, 하늘과 같은 그 은덕에 보답하려면 진정 심정적으로나 예법상으로 존호(尊號)를 더 올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생각건대 자궁(慈宮)께서는 궁실의 안주인이 되시어 섭정(攝政)하시던 왕세자를 남몰래 도와주셨으며, 나라 전체에 흡족하게 교화를 펼치시어 자손에게 경사가 끼치도록 길을 밝게 열어 주셨다. 그리하여 상서로움이 해와 달에 화합되고 경사가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된 것이다. 이에 연세가 많아지시는 것을 기뻐하면서 날을 아껴야 하겠다는 정성이 더욱 독실해졌으나, 가까이에서 봉양할 방도를 얻지 못한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즐겁게 해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은덕을 드러내는 일을 극진하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수고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오래오래 사시도록 축원하는 가운데 춘추가 어느덧 61세에 접어 드셨는데, 북두성이 상서로움을 드러낸 것은 자궁의 장수를 기원함이요 해와 달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환갑이 돌아온 것을 축하함이라 하겠다. 하늘과 땅의 지극한 덕에 부합이 되어 홍범 구주(洪範九疇) 오복(五福) 가운데 첫번째인 수(壽)의 복을 받으셨는데, 장렬(莊烈)·인원(仁元) 왕후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4백 년 동안 세 번밖에 없는 경사를 이루셨다. 어버이 봉양하는 것으로는 뜻을 받드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만큼 겸양하시는 그 속마음을 떠받들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일단 장수하시게 된 이상에는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으셔야 할 것이니 성대하게 축하하는 의식을 극진히 거행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돌아보건대 내가 재위(在位)한 20년 동안은 그야말로 여러 경사가 끼쳐준 은덕을 덤으로 받은 때였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자전을 받들어 모시면서 태평시대로 이끌어 천명(天命)을 거듭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하늘의 명에 힘입어 밝은 운세를 맞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내가 다스려 그렇게 되었다 할 것인가. 공경하는 덕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천명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는 요체인만큼 한 생각도 태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복을 내려주는 징험은 사람에게서 그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법인데 만백성과 함께 앞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게 되었는가. 해마다 비답을 통해 보여주신 그 마음이 비록 대중의 소원과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같은 날 대궐 뜰에서 축하를 올리면서 의전(儀典)에 맞게 준행(遵行)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1월 16일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 왕대비 전하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려 수경(綏敬)이라 하였고, 17일에는 사도 수덕 돈경 홍인 경지 장헌(思悼綬德敦慶弘仁景祉莊獻) 세자 저하에게 존호를 추후로 더 올려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고 하였으며, 효강 자희 정선(孝康慈禧貞宣) 혜빈(惠嬪) 저하에게 존호를 더 올려 휘목(徽穆)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전과 자궁께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하며 옥책문을 올렸고, 마음을 다하고 예법을 다하여 여덟 글자를 올림으로써 그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을 빛내기 위하여 옥과 금에다 새기고 썼으며, 시로 전파하여 음악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을 따르시어 자전께서 이런 정도라도 마음을 돌리신 것은 그나마 다행이요, 하늘에 계신 세자 저하의 밝은 덕을 드러내고 난 뒤에야 경모하는 나의 회포를 조금 풀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번에 전각에 임하여 하례를 받는 일을 거행한 것 역시 기쁨을 극대화하고 뜻을 이어받으려는 방도에서 나온 일이었다. 지금 하늘이 끝없는 운세를 지속하게끔 명하신 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경사이겠는가. 해마다 오늘과 같은 날이 있기를 기원하며 온 나라와 함께 아름다운 경사를 나누려 하였는데, 드디어 효심을 일으키게 하는 인자하심에 힘입어 사유(赦宥)하는 은전(恩典)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 화락한 기운이 온 누리에 퍼져 은혜로운 비와 조화로운 바람처럼 지극한 교화에 흠뻑 목욕하고, 길한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이 세상이 태평시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註 048] 용정(龍亭) : 나라의 보배로운 물건을 실어 나르는 교여(轎輿).[註 049]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50] 운병(雲輧) : 천녀(天女)가 타는 우마차, 즉 모후(母后)의 영구차(靈柩車)를 말함.[註 051] 갑오년 : 1774 영조 50년.
승문원의 관원이 치사를 담은 함을 받들고 오니 승문원 도제조가 무릎을 꿇고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주었다. 근시가 전달받아 무릎을 꿇고 바치니 상이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도록 하였다. 예조 정랑이 전문(箋文)을 담은 함을 올리니 승문원 도제조가 무릎을 꿇고 바쳤다. 상이 그것을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게 하였다. 제용감(濟用監)의 관원이 표리(表裏)를 담은 함을 받들고 오니 제용감 제조가 무릎을 꿇고 바쳤다. 상이 이것을 받아서 근시에게 준 다음 상에 놓게 하였다. 이 모두를 위에서 행한 의식대로 하였다. 상이 몸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 부르는 의식을 행하자,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 및 뜰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불렀다.
근시(近侍)가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담은 함(函)들을 용정(龍亭)048) 에 봉안하여 나가니 상이 이를 지영(祗迎)한 뒤 소차(小次)로 도로 들어갔다. 근시가 용정을 수행(隨行)하여 자궁의 합문(閤門) 밖에 가서 상전(尙傳)에게 주고 들어왔다. 전문(箋文)의 내용에,
"천 년에 한 번 있을 우리 집 경사 날, 복이란 복은 모두 모여들고 있는데, 억만 년토록 축복받을 자궁의 환갑날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니, 구중 궁궐에 기쁨이 흘러 넘치고 하늘과 땅과 사람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강 자의 정선 희목 혜빈 저하께서는 크나큰 덕에 당연히 따르는 수명을 얻으시고 지극한 교화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노후를 편히 즐기시면서 백세토록 경사가 자손 만대에 끼쳐지도록 하셨고, 문안드릴 때마다 화락하게 대해 주시면서 홍범 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강녕(康寧)한 복을 거두셨습니다.
생각건대 이번에 환갑을 맞으신 것은 실로 정묘년049) 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로 처음 맞는 일입니다. 식기(食器)를 씻고 음식을 차리며 효성껏 봉양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나이 드신 어버이를 모시는 아들로서는 똑같은 심정일 것인데,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져 이 날을 아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만 합니다. 이에 만세 삼창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물이 계속 흘러내리듯 하는 복을 더욱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정성을 바쳐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고 나라에서 해 드릴 수 있는 봉양을 갖추어 행하면서, 자궁의 안색이 펴져 화창해지신 것을 우러러 뵈옵고 쉽게 늙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노래하게 됨에 기쁜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제학 서유신이 지었다.】 근시(近侍)가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상이 소차에서 나와 판위(版位)로 가서 두 번 절하였다. 명정전에 거둥하여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백 가지 상서(祥瑞)가 모두 집결하여 대대로 아름다운 운세를 이어가게 되었고, 다섯 가지 경사를 한꺼번에 맞이함에 떳떳한 예전(禮典)을 빛나게 거행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된 데 따라 대대적으로 윤음(綸音)을 내리노라.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모(太母)의 아름다운 법도는 진정 옛날 훌륭한 후비(后妃)들의 뛰어난 생각을 능가하고 계신다 하겠다. 충신(忠信)한 곤덕(坤德)으로 존엄한 건극(乾極)의 배필이 되심에 무녀성(婺女星)에 상서로움이 응하였고, 여관(女官)이 궁중 다스리시는 덕을 드러냄에 여중 군자(女中君子)라는 칭송이 널리 전해지게끔 되었다. 선조(先朝) 때에는 훌륭한 계책으로 협찬(協贊)하셨고, 오늘날에는 하늘과 같은 자애로움을 입게 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만세토록 종묘 사직이 공고해지게 하면서 덕이 모자란 나를 보우(保佑)하시고, 세밀한 내용으로 교시하시어 대의(大義)를 일으켜 세우셨다. 이에 하늘로부터 백 가지 복을 받으시는 한편 춘추도 어언 예순을 바라보시게 되었다. 옥체가 더욱 강건하시어 장락궁(長樂宮)에서 만년토록 즐거움을 누리시도록 일제히 축원하는 가운데 연세가 더욱 높아져 대연수(大衍數)에 1책(策)을 더하시게끔 된 것이다. 강물이 흐르듯 큰 복을 계속 받으시게 된 것은 선조(先朝) 때 행했던 경사스러운 예식과 부합되는데, 여정(輿情) 역시 태양과 같은 그 덕을 그려내고 싶어하거늘, 더군다나 높이 떠받들고 싶어하는 나의 속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 비궁의 성대한 덕은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훌륭하다는 소문은 세자로 계실 때 이미 일찍부터 드러났다. 밤 수레를 준비해 두고 늘 공경한 태도를 지니면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하루 세 번씩 문안올렸고, 운병(雲輧)050) 을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오월장(五月葬) 치른 등(滕)나라 세자보다도 거상(居喪)을 엄숙히 행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대리하여 정사를 행하실 때에는 참으로 해와 달이 거듭 빛나는 듯하였고, 반우(盤盂)와 장벽(帳壁)의 경계를 속에 간직하며 도량은 하늘과 땅처럼 드넓기만 하였다. 그래서 갑오년051) 에 연석(筵席)에서 내리신 분부가 분명하여 잊을 수 없는데, 자손을 편안케 해 줄 계책을 꾀하시어 길이 창성하게 될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었다. 어느덧 구갑(舊甲)이 되는 을묘년을 맞이하였는데, 탄신하신 날이 또한 바로 지금의 1월에 해당한다. 오랜 세월이 한 바퀴 돌아 올해 바로 이 달에 아름다운 시기를 맞았는데, 임금이 된 자식으로서의 효성을 생전에 미처 바치지를 못했으니 이때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왕가에 거듭 이르게 된 경사야말로 돌보아 주신 독실한 덕 때문이 아님이 없으니, 하늘과 같은 그 은덕에 보답하려면 진정 심정적으로나 예법상으로 존호(尊號)를 더 올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생각건대 자궁(慈宮)께서는 궁실의 안주인이 되시어 섭정(攝政)하시던 왕세자를 남몰래 도와주셨으며, 나라 전체에 흡족하게 교화를 펼치시어 자손에게 경사가 끼치도록 길을 밝게 열어 주셨다. 그리하여 상서로움이 해와 달에 화합되고 경사가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된 것이다. 이에 연세가 많아지시는 것을 기뻐하면서 날을 아껴야 하겠다는 정성이 더욱 독실해졌으나, 가까이에서 봉양할 방도를 얻지 못한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즐겁게 해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은덕을 드러내는 일을 극진하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수고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오래오래 사시도록 축원하는 가운데 춘추가 어느덧 61세에 접어 드셨는데, 북두성이 상서로움을 드러낸 것은 자궁의 장수를 기원함이요 해와 달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환갑이 돌아온 것을 축하함이라 하겠다. 하늘과 땅의 지극한 덕에 부합이 되어 홍범 구주(洪範九疇) 오복(五福) 가운데 첫번째인 수(壽)의 복을 받으셨는데, 장렬(莊烈)·인원(仁元) 왕후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4백 년 동안 세 번밖에 없는 경사를 이루셨다. 어버이 봉양하는 것으로는 뜻을 받드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만큼 겸양하시는 그 속마음을 떠받들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일단 장수하시게 된 이상에는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으셔야 할 것이니 성대하게 축하하는 의식을 극진히 거행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돌아보건대 내가 재위(在位)한 20년 동안은 그야말로 여러 경사가 끼쳐준 은덕을 덤으로 받은 때였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자전을 받들어 모시면서 태평시대로 이끌어 천명(天命)을 거듭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하늘의 명에 힘입어 밝은 운세를 맞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내가 다스려 그렇게 되었다 할 것인가. 공경하는 덕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천명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는 요체인만큼 한 생각도 태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복을 내려주는 징험은 사람에게서 그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법인데 만백성과 함께 앞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게 되었는가. 해마다 비답을 통해 보여주신 그 마음이 비록 대중의 소원과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같은 날 대궐 뜰에서 축하를 올리면서 의전(儀典)에 맞게 준행(遵行)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1월 16일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 왕대비 전하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려 수경(綏敬)이라 하였고, 17일에는 사도 수덕 돈경 홍인 경지 장헌(思悼綬德敦慶弘仁景祉莊獻) 세자 저하에게 존호를 추후로 더 올려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고 하였으며, 효강 자희 정선(孝康慈禧貞宣) 혜빈(惠嬪) 저하에게 존호를 더 올려 휘목(徽穆)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전과 자궁께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하며 옥책문을 올렸고, 마음을 다하고 예법을 다하여 여덟 글자를 올림으로써 그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을 빛내기 위하여 옥과 금에다 새기고 썼으며, 시로 전파하여 음악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을 따르시어 자전께서 이런 정도라도 마음을 돌리신 것은 그나마 다행이요, 하늘에 계신 세자 저하의 밝은 덕을 드러내고 난 뒤에야 경모하는 나의 회포를 조금 풀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번에 전각에 임하여 하례를 받는 일을 거행한 것 역시 기쁨을 극대화하고 뜻을 이어받으려는 방도에서 나온 일이었다. 지금 하늘이 끝없는 운세를 지속하게끔 명하신 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경사이겠는가. 해마다 오늘과 같은 날이 있기를 기원하며 온 나라와 함께 아름다운 경사를 나누려 하였는데, 드디어 효심을 일으키게 하는 인자하심에 힘입어 사유(赦宥)하는 은전(恩典)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 화락한 기운이 온 누리에 퍼져 은혜로운 비와 조화로운 바람처럼 지극한 교화에 흠뻑 목욕하고, 길한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이 세상이 태평시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註 048] 용정(龍亭) : 나라의 보배로운 물건을 실어 나르는 교여(轎輿).[註 049]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50] 운병(雲輧) : 천녀(天女)가 타는 우마차, 즉 모후(母后)의 영구차(靈柩車)를 말함.[註 051] 갑오년 : 1774 영조 50년.
근시(近侍)가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상이 소차에서 나와 판위(版位)로 가서 두 번 절하였다. 명정전에 거둥하여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백 가지 상서(祥瑞)가 모두 집결하여 대대로 아름다운 운세를 이어가게 되었고, 다섯 가지 경사를 한꺼번에 맞이함에 떳떳한 예전(禮典)을 빛나게 거행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된 데 따라 대대적으로 윤음(綸音)을 내리노라.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모(太母)의 아름다운 법도는 진정 옛날 훌륭한 후비(后妃)들의 뛰어난 생각을 능가하고 계신다 하겠다. 충신(忠信)한 곤덕(坤德)으로 존엄한 건극(乾極)의 배필이 되심에 무녀성(婺女星)에 상서로움이 응하였고, 여관(女官)이 궁중 다스리시는 덕을 드러냄에 여중 군자(女中君子)라는 칭송이 널리 전해지게끔 되었다.
선조(先朝) 때에는 훌륭한 계책으로 협찬(協贊)하셨고, 오늘날에는 하늘과 같은 자애로움을 입게 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만세토록 종묘 사직이 공고해지게 하면서 덕이 모자란 나를 보우(保佑)하시고, 세밀한 내용으로 교시하시어 대의(大義)를 일으켜 세우셨다.
이에 하늘로부터 백 가지 복을 받으시는 한편 춘추도 어언 예순을 바라보시게 되었다. 옥체가 더욱 강건하시어 장락궁(長樂宮)에서 만년토록 즐거움을 누리시도록 일제히 축원하는 가운데 연세가 더욱 높아져 대연수(大衍數)에 1책(策)을 더하시게끔 된 것이다.
강물이 흐르듯 큰 복을 계속 받으시게 된 것은 선조(先朝) 때 행했던 경사스러운 예식과 부합되는데, 여정(輿情) 역시 태양과 같은 그 덕을 그려내고 싶어하거늘, 더군다나 높이 떠받들고 싶어하는 나의 속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 비궁의 성대한 덕은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훌륭하다는 소문은 세자로 계실 때 이미 일찍부터 드러났다. 밤 수레를 준비해 두고 늘 공경한 태도를 지니면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하루 세 번씩 문안올렸고, 운병(雲輧)050) 을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오월장(五月葬) 치른 등(滕)나라 세자보다도 거상(居喪)을 엄숙히 행하였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대리하여 정사를 행하실 때에는 참으로 해와 달이 거듭 빛나는 듯하였고, 반우(盤盂)와 장벽(帳壁)의 경계를 속에 간직하며 도량은 하늘과 땅처럼 드넓기만 하였다. 그래서 갑오년051) 에 연석(筵席)에서 내리신 분부가 분명하여 잊을 수 없는데, 자손을 편안케 해 줄 계책을 꾀하시어 길이 창성하게 될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었다.
어느덧 구갑(舊甲)이 되는 을묘년을 맞이하였는데, 탄신하신 날이 또한 바로 지금의 1월에 해당한다. 오랜 세월이 한 바퀴 돌아 올해 바로 이 달에 아름다운 시기를 맞았는데, 임금이 된 자식으로서의 효성을 생전에 미처 바치지를 못했으니 이때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왕가에 거듭 이르게 된 경사야말로 돌보아 주신 독실한 덕 때문이 아님이 없으니, 하늘과 같은 그 은덕에 보답하려면 진정 심정적으로나 예법상으로 존호(尊號)를 더 올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생각건대 자궁(慈宮)께서는 궁실의 안주인이 되시어 섭정(攝政)하시던 왕세자를 남몰래 도와주셨으며, 나라 전체에 흡족하게 교화를 펼치시어 자손에게 경사가 끼치도록 길을 밝게 열어 주셨다. 그리하여 상서로움이 해와 달에 화합되고 경사가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된 것이다. 이에 연세가 많아지시는 것을 기뻐하면서 날을 아껴야 하겠다는 정성이 더욱 독실해졌으나, 가까이에서 봉양할 방도를 얻지 못한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 즐겁게 해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은덕을 드러내는 일을 극진하게 행하지 못하였으니 수고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오래오래 사시도록 축원하는 가운데 춘추가 어느덧 61세에 접어 드셨는데, 북두성이 상서로움을 드러낸 것은 자궁의 장수를 기원함이요 해와 달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환갑이 돌아온 것을 축하함이라 하겠다. 하늘과 땅의 지극한 덕에 부합이 되어 홍범 구주(洪範九疇) 오복(五福) 가운데 첫번째인 수(壽)의 복을 받으셨는데, 장렬(莊烈)·인원(仁元) 왕후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4백 년 동안 세 번밖에 없는 경사를 이루셨다. 어버이 봉양하는 것으로는 뜻을 받드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만큼 겸양하시는 그 속마음을 떠받들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일단 장수하시게 된 이상에는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으셔야 할 것이니 성대하게 축하하는 의식을 극진히 거행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돌아보건대 내가 재위(在位)한 20년 동안은 그야말로 여러 경사가 끼쳐준 은덕을 덤으로 받은 때였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자전을 받들어 모시면서 태평시대로 이끌어 천명(天命)을 거듭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하늘의 명에 힘입어 밝은 운세를 맞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내가 다스려 그렇게 되었다 할 것인가. 공경하는 덕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천명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는 요체인만큼 한 생각도 태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복을 내려주는 징험은 사람에게서 그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법인데 만백성과 함께 앞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게 되었는가. 해마다 비답을 통해 보여주신 그 마음이 비록 대중의 소원과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같은 날 대궐 뜰에서 축하를 올리면서 의전(儀典)에 맞게 준행(遵行)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올해 1월 16일에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 왕대비 전하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려 수경(綏敬)이라 하였고, 17일에는 사도 수덕 돈경 홍인 경지 장헌(思悼綬德敦慶弘仁景祉莊獻) 세자 저하에게 존호를 추후로 더 올려 장륜 융범 기명 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고 하였으며, 효강 자희 정선(孝康慈禧貞宣) 혜빈(惠嬪) 저하에게 존호를 더 올려 휘목(徽穆)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전과 자궁께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하며 옥책문을 올렸고, 마음을 다하고 예법을 다하여 여덟 글자를 올림으로써 그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을 빛내기 위하여 옥과 금에다 새기고 썼으며, 시로 전파하여 음악으로 연주하게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을 따르시어 자전께서 이런 정도라도 마음을 돌리신 것은 그나마 다행이요, 하늘에 계신 세자 저하의 밝은 덕을 드러내고 난 뒤에야 경모하는 나의 회포를 조금 풀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번에 전각에 임하여 하례를 받는 일을 거행한 것 역시 기쁨을 극대화하고 뜻을 이어받으려는 방도에서 나온 일이었다. 지금 하늘이 끝없는 운세를 지속하게끔 명하신 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경사이겠는가. 해마다 오늘과 같은 날이 있기를 기원하며 온 나라와 함께 아름다운 경사를 나누려 하였는데, 드디어 효심을 일으키게 하는 인자하심에 힘입어 사유(赦宥)하는 은전(恩典)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 화락한 기운이 온 누리에 퍼져 은혜로운 비와 조화로운 바람처럼 지극한 교화에 흠뻑 목욕하고, 길한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이 세상이 태평시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註 048] 용정(龍亭) : 나라의 보배로운 물건을 실어 나르는 교여(轎輿).[註 049] 정묘년 : 1747 영조 23년.[註 050] 운병(雲輧) : 천녀(天女)가 타는 우마차, 즉 모후(母后)의 영구차(靈柩車)를 말함.[註 051] 갑오년 : 1774 영조 50년.
상전(賞典)을 시행하였다. 상호 도감 제조(上號都監提調)인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匹)을, 옥책문(玉冊文) 제술관(製述官)인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와 경모궁 도제조(景慕宮都提調) 홍낙성(洪樂性)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도감 제조인 호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행 부사직(行副司直) 이득신(李得臣), 행 성균관 대사성 이가환(李家煥), 책보(冊寶) 서사관(書寫官)인 행 부사직 조종현(趙宗鉉),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옥책문 서사관인 행 부사직 서유방(徐有防), 옥인(玉印) 서사관인 행 부사직 윤사국(尹師國), 금인(金印) 서사관인 행 부사직 권엄(權𧟓),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대거(對擧)한 승지 이만수(李晩秀)·홍인호(洪仁浩)·홍의영(洪義榮)·강이정(姜彛正)·김이익(金履翼)·이익운(李益運), 도청(都廳) 권평(權坪)·정약용(丁若鏞), 좌통례(左通禮) 이정현(李廷顯), 우통례(右通禮) 신광하(申光河), 경모궁에 친향(親享)할 때의 대축(大祝) 임희존(任希存), 신주(神主)를 출납할 때의 대축 성덕우(成德雨), 독책인관(讀冊印官) 이조원(李肇源)·김희조(金熙朝)에게 가자(加資)하였다.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는 추은(推恩)하며 이미 가자했기 때문에 숙마를 대신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올해는 바로 자궁(慈宮)께서 환갑을 맞으시는 해이다. 게다가 이 해에 다섯 가지 경사가 겹쳐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천 년을 지나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기회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에 따라 옥책문을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오래 사시도록 축원하는 정성을 펴게 되었으니, 이때에 기쁨에 젖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나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작년 새해에 축하드릴 때에도 오히려 추은(推恩)하는 것으로써 널리 경축하는 방도를 삼았었는데, 하물며 올해 이러한 때를 맞았음이겠는가. 문신은 시종(侍從) 이상, 무신은 3품 곤수 이상, 음관(蔭官)은 3품 준직(準職) 이상을 대상으로 나이 61세가 되는 사람들에게 각각 한 등급씩 가자(加資)해 주되, 모두 오늘 안으로 대궐 뜰에서 사은(謝恩)토록 하라.
그런데 추은하는 것은 곧 노인들에게 은혜가 미치게 하는 한 가지 일이라고 한다면, 은혜로운 정사를 베푸는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경사스러운 일을 널리 나누어 갖는 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중외(中外)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이 해 이 때를 알게끔 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난해 가을에 내린 윤음(綸音) 역시 그 말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백성들을 화합시키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뜻을 보이는 일을 날을 넘겨서 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경우는 공계인(貢契人)과 시전인(市廛人)·반인(泮人)052) 의 구채(舊債) 중 남아 있는 것들을 탕감해 주는 동시에 요역을 면제해 주는 일을 일체 작년의 규례대로 하고, 외방의 경우는 각 읍·진(鎭)·역(驛)의 묵은 환곡(還穀) 가운데 가장 오래된 1년치의 분량과 증열미(拯劣米) 가운데 각읍에서 햇수가 가장 오래된 것을 탕감해 주도록 서울과 외방에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이조원(李祖源), 대사헌 이정규(李鼎揆), 행 부사직 정환유(鄭煥猷)·서유신(徐有臣), 전 부사(府使) 정동신(鄭東愼)에게 모두 가의 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한광근(韓光近), 행 부사직 이태형(李太亨)·임도호(林道浩)·정이옥(鄭履玉)에게 모두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부사과(副司果) 심갱(沈鏗)·최진하(崔鎭夏)·유헌주(柳憲周)·조각(趙恪), 삭녕 군수(朔寧郡守) 한덕후(韓德厚), 전 사간 고정헌(高廷憲), 전 지평 최수로(崔守魯)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이들 모두 을묘년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외방에서 노직(老職)을 제수하도록 비답이 내려진 대상 인원은 모두 6백 82인이었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판으로, 이시수(李時秀)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홍국영(洪國榮)을 귀환(歸還)시킨 것은 방축(放逐)한 것과 다른데도 여태 금부의 사문서(赦文書)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격례(格例)는 그렇지가 않으니, 원래 대계(臺啓)가 있었고 보면 이 문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경들은 이대로 잘 알고서 이 뒤로 바로잡아 고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철(有喆)이 연좌율(連坐律)에 걸려 귀양가서 죽기는 하였다만, 어찌 오래도록 귀록(鬼錄) 속에 놔둬서야 되겠는가. 환주(煥周)는 연좌되는 법조문 외에 귀양가는 형벌을 적용받아 죽고 말았다. 후락(後樂)은 생전에도 형벌을 가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죽은 뒤에까지 인색하게 하겠는가. 한채(韓采)와 동빈(東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재간(在簡)이 만약 길에서 죽지만 않았다면 어찌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겠는가. 나문(拿問)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유배보낸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렇듯 대사면령을 내리는 때에 어떻게 미결(未決)인 상태로 놔둬서야 되겠는가. 연(瑓)은 연좌율을 적용받은 데 불과하니 죽은 뒤에는 자연 말소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단지 죄수의 공초(供招)에 나왔다는 것 때문에 여태 사문서(赦文書) 속에 들어 있으니 책망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기현(驥顯)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꼭 죽은 뒤에까지 생전의 일을 소급해서 다스려야 하겠는가. 모두 도류안(徒流案)053) 에서 지워버리도록 하라."
하고, 또 노성중(盧聖中)과 이랄(李㻋)의 명단도 지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승지 황승원(黃昇源)·홍인호(洪仁浩)·이상황(李相璜)·이유경(李儒慶)을 체직하였다. 정원이 죽은 극역 죄인(劇逆罪人)까지 사전(赦典)에 포함시켰다는 이유로 연계(聯啓)하며 분부를 취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복역(覆逆)도 과한데 더구나 승정원에서 이렇게 의논할 수 있는가. 당해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옥당이 연명(聯名)하여 상차(上箚)하기를, 【교리 정동관(鄭東觀)·조덕윤(趙德潤), 부교리 홍수만(洪秀晩), 수찬 정이수(鄭履綬), 부수찬 박길원(朴吉源).】 "지금 이 도류안(徒流案)에 기재되어 있는 적(賊)들로 말하면 극악한 대 악인이거나 흉역(凶逆)의 잔당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미처 처형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남몰래 죽고 말았으므로 여론이 아직까지도 분개하여 마지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풀어주거나 지워버리라는 명을 내리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대체로 경사를 맞이하여 사면해 주는 경우에는 바로 보통의 죄과(罪過)에 걸려 유형(流刑)이나 정배형(定配刑)에 처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화란(禍亂)의 근본이 되는 자를 남몰래 비호하고 직접 악역(惡逆)을 범한 저 한두 명의 극적(劇賊)과 같은 자들까지 거꾸로 사전(赦典)에 포함시켜 의논케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번의 사전 가운데 뒤섞어 포함시켜 용서받게 한 극악한 역적과 흉악한 도당들에 대해서는 일체 명을 환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감안해서 한 일이다. 청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46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왕실(王室)
"지금 이 도류안(徒流案)에 기재되어 있는 적(賊)들로 말하면 극악한 대 악인이거나 흉역(凶逆)의 잔당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미처 처형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남몰래 죽고 말았으므로 여론이 아직까지도 분개하여 마지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풀어주거나 지워버리라는 명을 내리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대체로 경사를 맞이하여 사면해 주는 경우에는 바로 보통의 죄과(罪過)에 걸려 유형(流刑)이나 정배형(定配刑)에 처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화란(禍亂)의 근본이 되는 자를 남몰래 비호하고 직접 악역(惡逆)을 범한 저 한두 명의 극적(劇賊)과 같은 자들까지 거꾸로 사전(赦典)에 포함시켜 의논케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번의 사전 가운데 뒤섞어 포함시켜 용서받게 한 극악한 역적과 흉악한 도당들에 대해서는 일체 명을 환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감안해서 한 일이다. 청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연명하여 상차하기를, 【 대사헌 이정규(李鼎揆), 대사간 이은모(李殷模), 집의 최훤(崔烜), 사간 신우상(申禹相), 장령 정의조(鄭毅祚), 지평 최중규(崔重圭), 헌납 윤행직(尹行直), 정언 장석윤(張錫胤)·김희화(金熙華).】 "방금 전교를 삼가 보건대, 죽은 여러 죄인들에 대해 풀어주거나 도류안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국가의 대계(大計)를 펴지 못하게 막고 나라의 운명을 남몰래 도모한 죄를 범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고(萬古)에 걸쳐 볼 수 없었던 극악한 대 역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미친 까닭에 공개적인 처형을 가하지 못했으므로 신인(神人)이 통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복(復)에게 정법(正法)을 시행한 뒤에 역적 모의를 한 정상이 더욱 드러났으므로 여분(輿憤)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처자를 노비로 삼고 재산을 적몰(籍沒)하라는 요청조차 아직껏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은 이미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두 흉적의 경우는 화란(禍亂)의 장본인을 남몰래 비호하고 직접 악역(惡逆)의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정상을 논한다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그 벌이 가벼운 만큼 그들 역시 사전(赦典)에 뒤섞여 들어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밖에 유철(有喆)·환주(煥周)·후락(後樂)·성중(聖中)·한채(韓采)·동빈(東彬)·날(㻋)·연(瑓)·주경로(朱絅魯) 등 제적(諸賊)의 경우는 지극히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자들인만큼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도 죄는 본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의 심상한 죄를 범해 사면령으로 용서를 받는 자들처럼 취급하고 있으니,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고 예방책이 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볼 때 정말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경사스러운 해를 맞아 대 사면령을 내릴 때는 바로 범상한 죄를 짓고 벌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들까지 천 년에 한 번쯤 있을 특별한 사면의 은혜에 뒤섞여 동참하게 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점점 무너지고 백성의 윤기(倫紀) 또한 갈수록 파괴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더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철회토록 하소서.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승선(承宣)의 임무는 왕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니, 비정상적인 거조를 목도하고서 한 목소리로 제지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직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에게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 또한 어찌 중도에 지나친 처분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시어 성덕(聖德)이 빛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곧바로 또 양사가 아뢰어 명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47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왕실(王室)
"방금 전교를 삼가 보건대, 죽은 여러 죄인들에 대해 풀어주거나 도류안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국가의 대계(大計)를 펴지 못하게 막고 나라의 운명을 남몰래 도모한 죄를 범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고(萬古)에 걸쳐 볼 수 없었던 극악한 대 역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미친 까닭에 공개적인 처형을 가하지 못했으므로 신인(神人)이 통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복(復)에게 정법(正法)을 시행한 뒤에 역적 모의를 한 정상이 더욱 드러났으므로 여분(輿憤)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처자를 노비로 삼고 재산을 적몰(籍沒)하라는 요청조차 아직껏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은 이미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두 흉적의 경우는 화란(禍亂)의 장본인을 남몰래 비호하고 직접 악역(惡逆)의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정상을 논한다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그 벌이 가벼운 만큼 그들 역시 사전(赦典)에 뒤섞여 들어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밖에 유철(有喆)·환주(煥周)·후락(後樂)·성중(聖中)·한채(韓采)·동빈(東彬)·날(㻋)·연(瑓)·주경로(朱絅魯) 등 제적(諸賊)의 경우는 지극히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자들인만큼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도 죄는 본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의 심상한 죄를 범해 사면령으로 용서를 받는 자들처럼 취급하고 있으니,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고 예방책이 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볼 때 정말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경사스러운 해를 맞아 대 사면령을 내릴 때는 바로 범상한 죄를 짓고 벌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들까지 천 년에 한 번쯤 있을 특별한 사면의 은혜에 뒤섞여 동참하게 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점점 무너지고 백성의 윤기(倫紀) 또한 갈수록 파괴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더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철회토록 하소서.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승선(承宣)의 임무는 왕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니, 비정상적인 거조를 목도하고서 한 목소리로 제지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직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에게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 또한 어찌 중도에 지나친 처분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시어 성덕(聖德)이 빛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곧바로 또 양사가 아뢰어 명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1월 18일 신축
전 판서 정경순(鄭景淳)이 죽었다. 경순의 자(字)는 시회(時晦)이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治蹟)이 있었다. 상이 등극하고 나서 그의 이재(吏才)를 인정, 승진시켜 발탁하여 정경(正卿)에 이르게 하였다. 성격이 준엄하고 단정하였으며 이해력이 남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정동준(鄭東浚)은 바로 그의 족질(族姪)로서 이웃에 살았는데도,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볼 때마다 번번이 심하게 책망하였으므로, 동준이 유감을 품고는 기필코 중상(中傷)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동준이 죄를 얻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경순이 마침 중풍(中風)으로 갑자기 죽자,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자들이 동준과 함께 죽었다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탄핵했으나, 상이 실정을 환히 알고서 밝게 해명해 주었다.
1월 19일 임인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옥책문(玉冊文)과 금보(金寶)를 봉안(奉安)하였다.
1월 20일 계묘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기정(朴基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1일 갑진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과 중궁전(中宮殿)이 경모궁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연여(輦輿)가 이를 즈음에 상이 광례교(廣禮橋) 남쪽에 가서 지영(祗迎)하고 백관들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서서 지영하였다. 상이 재실(齋室)로 들어갔다.
상침(尙寢)이 자전의 욕위(褥位)를 궁 안의 한복판에 설치하고, 자궁의 판위(版位)를 섬돌 위 한복판에 설치하고, 대전(大殿)의 판위를 앞뜰의 길 동쪽에 설치하고, 내전(內殿)의 판위를 앞뜰의 길 서쪽에 설치하고, 명부(命婦)의 배위(拜位)를 내전의 판위 뒤에 설치하고 사찬(司贊)의 자리를 동쪽 섬돌 위에 설치하고, 전찬(典贊)의 자리를 동쪽 섬돌 아래에 설치하고,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촛대와 아울러 신위(神位) 앞에 설치하고, 예찬(禮饌)과 술병 등을 차례로 설치하였다.
1각(刻) 전에 내명부(內命婦)가 예복(禮服)을 갖추어 입고 들어와 자리에 나아갔다. 상의(尙儀)가 재실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고, 조금 있다가 또 아뢰기를 ‘바깥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였다.
자궁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나왔다. 상궁(尙宮)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동쪽 계단을 통해 판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섰다. 상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나오니, 상궁이 무릎을 꿇고 아뢰며 규(圭)를 잡기를 청했다. 여관(女官)이 무릎을 꿇고 규를 바치니 상이 규를 잡았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판위에 가서 북쪽을 향해 섰다. 내전이 적의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나왔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판위로 가서 북쪽을 향해 섰다.
사찬(司贊)이 말하기를 ‘재배(再拜)할 차례이다.’고 하니, 전찬(典贊)이 ‘국궁(鞠窮)’ ‘재배(再拜)’ ‘흥(興)’ ‘평신(平身)’을 외쳤다. 자궁이 재배례(再拜禮)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때가 되자 상의(尙儀)가 재실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내명부가 감실(龕室)에 들어가 신주(神主)를 받들고 나와서 자리에 놓았다. 상의가 아뢰기를 ‘바깥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였다.
자전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나왔다. 상궁이 무릎을 꿇고 아뢰며 수레에 탈 것을 청하니 자전이 수레에 탔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수레를 내리는 곳까지 왔다. 상궁이 무릎을 꿇고 아뢰며 수레에서 내릴 것을 청하니 자전이 수레에서 내렸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정면 계단과 정면의 문을 통해서 욕위(褥位)에 올라간 뒤 북쪽을 향해 섰다.
사찬이 말하기를 ‘재배할 차례이다.’고 하니, 전찬이 ‘국궁’ ‘재배’ ‘흥’ ‘평신’을 외쳤다. 자궁이 재배례를 행하고 중궁전이 재배례를 행하였다. 내명부가 궁 안으로 올라가서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받들고 나와 무릎을 꿇고서 바쳤다. 상의(尙儀)가 아뢰며 세 번 향을 올리도록 청하였다. 내명부가 향로를 상에 놓았다. 내명부가 술을 따라서 무릎을 꿇고 올렸다. 상의가 아뢰며 술잔을 잡고 술잔을 드리도록 청하니, 자전이 술잔을 잡고 내명부에게 건네주어 신위 앞에 놓게 하였다.
사찬이 ‘재배할 차례이다.’고 하니, 전찬이 ‘국궁’ ‘재배’ ‘흥’ ‘평신’을 외쳤다. 자궁이 재배례를 행하고 상이 재배례를 행하고 중궁전이 재배례를 행하였다.
상의가 문 밖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서 의식이 다 끝났다고 아뢰었다. 자전이 정면의 문을 통해 나갔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여 수레 타는 곳까지 와서 무릎을 꿇고 아뢰며 수레를 탈 것을 청하니 자전이 수레를 탔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여 재실 앞까지 와서 무릎을 꿇고 아뢰며 수레에서 내릴 것을 청하니 자전이 수레에서 내려 재실로 들어갔다.
자궁이 동쪽 계단을 통해 내려와서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재실로 들어갔다. 상의가 무릎을 꿇고 아뢰며 규(圭)를 손에서 놓도록 청하니 상이 규를 놓았는데, 여관(女官)이 무릎을 꿇고 그 규를 받았다. 상궁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재실로 들어갔다. 상궁이 중궁전을 인도하여 재실로 안내했다. 내명부가 신주를 들여넣고 문을 닫은 뒤 내려와 이내 물러났다. 이어 환궁하였다.
1월 22일 을사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상소하기를,
"신이 8년 동안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전하를 가까이에서 뵙게 되었는데, 말씀이 온화하시고 은덕을 베푸는 뜻이 융숭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뒤로 몸을 빼면서 인자하신 은택을 스스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색이 대관(大官)인 이상 나름대로 처신하는 의리가 일반 관료와는 다른 점이 있는만큼,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사은(謝恩)하는 의리에만 부쳐서 곧장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다면 크게 당돌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돌보아 주는 은택을 내리시어 물러나 본분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이미 더욱 후회한다고 말을 하였다. 또 지나쳤던 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면서 위로하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많이 했었다. ‘꽁하지 않는다.[不藏怒]’는 세 글자야말로 대등한 관계 이하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할 것인데, 더구나 나와 경 사이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서울 집에 길이 거처하면서 조정의 반열에 출입한 뒤에야 내 마음도 풀어지고 경의 마음도 풀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말이 필요없으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첨지(僉知) 권유(權𥙿)가 또 상소하기를,
"신이 전일 한 번 상소를 올리면서 귀근(貴近)의 죄를 대략 논했던 것은 오로지 분개하는 마음이 격발된 나머지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명(聖明)께서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뜻을 한결같이 하기를 우러러 바라면서도 그 성명(姓名)을 지적하여 배척하지 못했던 것은 신이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각(臺閣)과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는 신하들에게서 함께 원수로 여기고 성토(聲討)하는 논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며칠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전하를 위해 한 마디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의 위세에 눌려서 아무도 감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그런 것은 아니었겠습니까.
신이 일단 앞서서 주제넘는 발언을 했는데도 뒤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사람이 없는 이상 신이 그 사람의 이름을 지목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말씀드린 바 귀근(貴近)의 와주(窩主)란 바로 정동준(鄭東浚)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아, 통분스럽습니다. 동준은 위세와 권력을 훔쳐 농락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고 인심을 현혹시키고 세도(世道)를 무너뜨리는 등 온갖 죄악을 한 몸에 모두 구비하였으니 만 번 주륙(誅戮)을 가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가볍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죄악은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헤아리고 남산(南山)의 대나무를 모두 센다 하더라도 다 채우지 못할 것인데, 그 중에서도 신이 가장 통분스럽게 여기고 분개하는 것은 바로 우리 성상을 무함했다는 사실입니다. 대저 신령스러운 문무(文武)의 덕을 갖추시고 공명정대하고 화평한 정사를 펼치고 계시는 전하께서 그만 일개 소인배로부터 희롱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엄중하기 그지없는 곳까지 남몰래 엿보았고 매번 근거없는 비방을 늘어놓았습니다. 정당한 판단에 근거하여 인사 행정이 이루어졌는데도 모두 한결같이 뒤죽박죽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하면 정령(政令)과 조치가 온당하게 되었는데 헐뜯으며 의논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언(流言)이란 소문만 있을 뿐 형체가 없는 것으로서 인심을 현혹시키기는 쉬운 반면 깨닫게 하기는 어려운만큼 장차 이 세상의 보고 듣는 사람들을 이해시킬 방도가 없게 되었으니, 지난번에 이른바 ‘천고(千古)에 있지도 않았고 듣지도 못했던 일이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무례(無禮)하게 구는 일이 있을 때에는 새매가 참새를 쫓듯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동준이 그렇게까지 성군(聖君)을 무함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단지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으로만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조정에는 조용하기만 할 뿐 새매와 같은 기상이 보이지 않고 있으니 신은 실로 이 점을 개탄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성토가 미치기 전에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가했다고 하니, 이를 통해 천벌이 내린다는 것과 이치는 속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득 차서 흘러 넘치는 그의 죄악에 대해서만은 그 몸이 지레 죽었다고 하여 용서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서정수(徐鼎修)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처음 벼슬길에 올랐을 때부터 은총을 받은 것이 어떠하였으며 발탁된 것이 또한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순결한 마음가짐으로 천지(天地)와 같은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만 거꾸로 그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자취를 더럽히면서 급속도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요즘 듣건대 전하께서 그의 마음을 인도하시자 어렴풋이 잘못을 깨닫고는 중도에 손을 씻고 다시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도에 있어서야 물론 구악(舊惡)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이 귀하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를 경책하여 선(善)을 권장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또한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새롭게 될 길을 막아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통쾌하게 단안을 내리시어 그 소굴을 소탕하고 지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세도가 안정되고 백성의 뜻이 한결같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전소(前疏)에 대한 비답 가운데 ‘그대로 하여금 이런 상소를 올리게 한 것이야말로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대가 또 전의 상소에서 말하지 않았던 성명까지 드러내 밝혔는데, 죽은 자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이야말로 이른바 ‘아무리 변명을 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땅 속에 묻혀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따질 수 있겠는가. 이는 따라서 반성해 보고 그저 말하기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못되는 것이며 말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한 일이 되는 것이다.’고 하면 될 것이다. 뒤에 덧붙여 진술한 서정수의 일에 대해서는 ‘중도에 바른 길로 돌아섰다.’고 해놓고는 또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하였다.
1월 23일 병오
정원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서정수(徐鼎修)가, 정사(政事)를 개최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자신에 대한 어떤 사람의 말이 있었다고 하면서 합문(閤門) 밖에 와 거적을 깔고 엎드려 대죄(待罪)한 채 패초(牌招)하여도 끝내 명을 받들지 않고 있으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이 어떤 심경일지는 바로 잘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때에 명백하게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낭패를 당한 그의 처지를 구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 할 것 없이 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대저 ‘바른 길로 돌아섰다…….’고 한 것이 미상불 좋은 제목이긴 하나 그래도 당초부터 돌아섰느니 돌아서지 않았느니 하고 말할 여지가 없는 것보다는 못한 것이다. 그러니 중신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민망스러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어찌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놔둘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고 ‘그에게 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했고 보면, 이제 와서 그에게 변명하는 말을 해 보라고 한다 한들 이보다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이조 판서 서정수를 다시 패초(牌招)하여 엄히 신칙한 뒤 공무를 집행토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정미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고, 돌아와 편전(便殿)에 거둥하여 강경(講經)에 응시한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강경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송응규(宋應圭)와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윤함(尹涵)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였다.
1월 25일 무신
인일제(人日製)054) 를 반궁(泮宮)에서 설행(設行)하였다.
이조 판서 서정수(徐鼎修)가 상소하기를,
"남의 신하가 된 입장에서 이렇듯 망측한 말을 듣고서도 배에 칼을 꽂아 스스로 해명하지도 못했고 또 피를 머금고서 성토하지도 못했으니 이 또한 사리에 어둡고 고루하다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스스로 제 몸을 더럽힌 것이야 본래 돌아볼 것도 없겠지만 장차 무슨 방법으로 한 세상의 보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성상을 그지없이 무함하고 우리의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게 한 저 적(賊)의 흉칙하기 짝이 없는 정상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한단 말입니까.
아, 통분스럽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권유(權𥙿)의 상소가 한 번 나오면서 그의 심보와 자취가 모두 폭로되고 의리가 밝게 드러났으니, 그저 그와 함께 목소리를 같이하여 토죄(討罪)하기를 청하기만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신의 이름이 상소 가운데에 들어 있는 관계로 스스로 변명하기에 급급해서 이렇게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겠습니까. 첫째 이유도 성상께서 받으신 무함을 밝히기 위함이요 둘째 이유도 성상께서 받으신 무함을 밝히기 위함이니, 신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분명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 신은 그와는 의견이 같지 않았을 뿐더러 기풍 역시 사뭇 달랐습니다. 그러다가 기해·경자년 무렵부터 비로소 정원과 규장각의 반열에 같이 있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로 헤아려 볼 때 조금이나마 나라를 위해서 보통을 뛰어넘는 은총에 보답할 길을 모색하리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말과 하는 행동을 서서히 관찰해 보건대 급속도로 엇나가는 조짐이 보였는데, 미세한 것에서 점차 심각한 차원으로 진입하며 자꾸만 일을 크게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조각 정신을 암암리에 위복(威福)을 천단(擅斷)하는 데에 교묘하게 쏟아 부었는데,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감히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에 날이 갈수록 간악한 꾀를 생각하고 비밀스런 계책을 거듭 내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만하고 말끝마다 희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부터 상으로부터 편애(偏愛)를 받았다.’고까지 하였는데, 이로부터는 그만 돌아보고 거리끼는 것이 전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비(朱批)를 받은 관원에 대해서는 은연 중에 미덕을 가로채면서 ‘나도 힘을 썼다.’고 하는가 하면, 하늘의 위엄을 가탁하여 자기를 과시하려 하면서 ‘내가 찬조(贊助)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출척(黜陟)하고 여탈(與奪)하는 정사가 행해질 때면 혼란스럽게 미혹시키면서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것도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꾸며대고 듣지 않은 것도 들은 것처럼 둘러대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마음 속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이 조금 어긋나게 되거나 생각한 대로 좋은 관직을 얻지 못하게 되면 원망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는가 하면, 그만 거꾸로 ‘죄로 쫓겨난 자는 반드시 살아나고 상을 받고 임용된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설을 지어내어, 기필코 고관 대작들로 하여금 부귀영화를 모르는 채 각각 의구심을 품게 하여 오직 자기 말만 듣고 따르게끔 하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늘과 땅의 떳떳한 이치로 볼 때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징토(懲討)의 대론(大論)에 대해서조차 종잡을 수 없이 혼동시키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선복(善復)의 무리와 같은 경우는 왕법(王法)에 의해 토죄(討罪)를 행한 것인데도 그만 그의 관작(官爵)이 너무 높아 성상께서 좋지 않게 여기신 탓으로 돌렸으며, 시위(時偉) 등의 경우는 철안(鐵案)이 이미 성립되었는데도 그만 그에게로 위세가 몰리자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미워하신 탓으로 돌렸습니다.
대체로 의리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인심을 어지럽히면서 그가 써먹은 방법을 말한다면 아마도 천 가지 만 가지는 될 것입니다. 한두 대신(大臣)이 누구보다도 예우를 받으면서 곡진하게 보살핌을 받게 되는 것이야말로 어느것 하나 자연적인 이치 아닌 것이 없는데도 그는 그만 거꾸로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의심하고 제거하려 하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의논하기를 좋아하고 명망을 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근시(近侍)들을 지성껏 대해주고 계시는 것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성대한 일이라 할 것인데도 거꾸로 얼굴을 찡그린다고 하고, 의복의 제도에서 푸른 빛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4대(代)의 임금을 거쳐 이루어진 법인데도 제멋대로 흉측한 말을 내뱉았습니다.
친지(親知)에게 선물을 보내며 안부를 묻는 것이야말로 조정의 후덕스러운 기풍인데도 온 나라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뇌물을 은폐하려고 할 때면 말하기를 ‘상께서 들으시면 싫어하실 것이다.’ 하고, 교제하며 왕복하는 것이야말로 성상께서 장려하시는 것인데도 사당(私黨)을 모아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자취를 숨기려고 할 때면 말하기를 ‘상께서 들으시면 틈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기괴망칙한 형형색색의 설을 만들어내어 헤아릴 수 없이 무함하는 일을 그는 다반사(茶飯事)로 여기고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아, 공공연히 위세를 휘두르며 마음먹은 대로 방자하게 굴었던 간특한 괴수들이 예로부터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들의 경우는 행한 일이 알기 쉬웠고 그 죄가 쉽게 드러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토죄(討罪)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효경(梟獍)의 마음을 속에 품고 독사의 독기를 남몰래 내뿜으면서 진상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터무니없이 남을 속이고 명백한 상황인데도 의혹을 부채질함으로써 해와 달의 빛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하고 하늘과 땅의 덕이 막혀 펴지지 않게 한 자를 말한다면, 천고의 사책(史冊)을 거슬러 올라 상고해 보더라도 바로 정동준(鄭東浚) 한 사람밖에는 있지 않습니다.
대저 전하께서는 지극히 밝으신 감식안(鑑識眼)과 천부적으로 뛰어난 안목으로 저 귀신과 같고 물여우와 같은 자의 정상을 모두 통촉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감화(感化)’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지성껏 타일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급기야는 12월 초 연석(筵席)에서 그 수법이 다 드러나고 속마음이 모조리 탄로나고 말았으니 그로서는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정도 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은 땅강아지나 개미같은 미천한 존재이니 이 한 몸이 재난을 당하게 된 것쯤은 여사(餘事) 중의 여사일 뿐만이 아닌데도 전후로 비답을 내리시며 그지없이 분명하게 타일러 주셨습니다. 지금 신이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속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성상에게 가해진 무함을 해명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가 옥중(獄中)에서 글을 올렸던 옛사람의 의리를 본따 피눈물을 흘리면서 우러러 진달하게 되었으니 성상께서는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 소를 올리면서, 삼가 옥중에서 스스로 해명했던 옛사람의 의리를 본딴다고 하였는데, 스스로 해명한 것은 스스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이렇게 되고 만 사실과 전말을 해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소가 한 번 나오면서 경도 할 말이 있게 되었는데, 하물며 연석(筵席)에서 스스로 탄핵했던 일이 또 그와 면대(面對)했을 때 있었고 보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에게는 털끝만큼도 부끄러워해야 할 실마리가 없는데, 어찌 한결같이 깊이 인혐해서야 되겠는가. 속히 들어와서 정사를 열도록 하라."
하였다. 정수가 끝내 명을 받들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다시 머뭇거릴 일이 별로 없는데 이렇듯 심각하게 인혐하다니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매우 한심스럽다. 그러나 곧게 처신하려는 그의 태도를 존중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없도록 해 주는 것도 예(禮)로 부리는 의리에 실로 합당하니, 이조 판서 서정수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에 제수하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매수(徐配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심이지(沈頤之)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재학(李在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6일 기유
인정문(仁政門)에 거둥하여 조참(朝參)을 하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오늘 조참이야말로 새해를 맞은 뒤에 처음 갖게 되는 대 조회(朝會)인 동시에 정령(政令)을 처음으로 펴게 되는 일대 기회라 할 것입니다. 신이 일전에 첨지(僉知) 권유(權𥙿)가 올린 소본(疏本)을 얻어 보니 정동준(鄭東浚)의 죄상을 조목조목 논한 것이었는데, 반절도 채 읽지 않아서 마음이 떨리고 뼛속까지 오싹하였습니다. 그가 저지른 천 가지 만 가지 죄악을 정말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오늘날 신자(臣子)가 모두 분개하고 통분스럽게 여겨 감히 한 시각이라도 토죄(討罪)하는 일을 늦출 수 없는 것은 바로 성상을 무함한 죄입니다. 이목(耳目)의 역할을 담당한 관원이 지금 바야흐로 연석(筵席)에 올라와 있으니, 마땅히 성토(聲討)하는 대론(大論)이 있어야 할 것이요, 행여 그에게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미쳤다고 하여 혹시라도 왕법(王法)을 통쾌하게 시행하는 일을 아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간악한 싹이 튼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구(引咎)하니, 상이 이르기를,
"벌써부터 그러한 일을 알고 있었는데, 어찌 그를 아껴서 그냥 놔둔 것이겠는가. 그동안 경사스러운 예식이 중첩된 관계로 형법을 시행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 처분을 미루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였다.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봄철 군사 훈련을 정지하였다.
양사(兩司)가 【 대사헌 이재학(李在學), 집의 최헌중(崔獻重), 장령 홍수호(洪受浩)·이심전(李心傳), 지평 홍수만(洪秀晩)·이윤행(李允行), 대사간 서매수(徐邁修), 사간 어석령(魚錫齡), 헌납 신직(申), 정언 이중련(李重蓮)·심반(沈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정동준(鄭東浚)의 죄에 대해서 어찌 이루 다 주벌(誅罰)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본래 성격이 험악하고 간특한데다 후천적으로 방자하고 교활한 버릇에 물든 자입니다. 임금을 섬기면서는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는 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하였으며, 권세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벼슬을 얻지 못했을 때에는 못 얻을까 안달하고 일단 얻고나서는 잃을까 걱정하였습니다.
질병이 있다고 거짓 핑계를 대었지만 그의 행태를 보면 그렇게 날쌜 수가 없었는데, 위복(威福)의 권한을 훔쳐 희롱하면서 그의 기세는 갈수록 더욱 치성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온 나라의 재물을 수레에 실어 집으로 들였으므로, 조야(朝野)에서 그를 지목하여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고 하였고 친족들은 그를 손가락질하여 집안을 망칠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래도 사소한 것들에 속합니다. 가장 분통이 터지고 그지없이 가슴이 아픈 것은 바로 우리 성상을 무함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는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전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따라서 만약 조금이라도 양심을 갖고 있는 자라면 죽든 살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원래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빼미 소리를 고치기 어렵듯 그는 갈수록 심하게 효경(梟獍)과 같은 독기를 부리기만 하였습니다.
자기가 꾀하고 있는 일이 욕심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바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곤 하였는데, 그 정상이 전하의 통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점차 배치되는 계책을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꿍꿍이 수작을 꾸미면서 오직 터무니없이 허풍을 치고 농간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정령(政令)과 조치가 천리(天理)에 진정 합당했는데도 헐뜯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사람을 쓰고 안 쓰는 문제와 상벌(賞罰)을 시행하는 일 모두가 자연적인 순리에 따라 이루어졌는데도 은연 중에 그것을 빙자하여 자기의 성가(聲價)를 높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고 등용된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죄를 받고 배척된 자는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는 설을 만들어 내어 진신(搢紳)의 반열에 있는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의구심을 품게 하였는가 하면, 선복(善復)과 같은 역적이나 시위(時偉)와 같은 흉인에 대해서조차 혹은 ‘관직이 너무 높아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고 혹은 ‘권세가 그에게 몰리는 바람에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만 징토한 의리를 결과적으로 의심토록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곡진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대신(大臣) 한두 명에 대해서까지 ‘조정에서 의심을 하고 제거하려 한다.’고 하였고, 조정에서 서로 예물을 보내며 문안하는 것이야말로 후덕스러운 기풍인데도 ‘위에서 듣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친구들끼리 상종(相從)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적인 일인데도 ‘위에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푸른 옷에 관련된 의복 제도야말로 근거가 있는 것인데도 마구 흉측한 말을 내뱉았는가 하면, 엄중하기 그지없는 궁금(宮禁)의 일에 대해서까지 감히 엿보는 짓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상이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하고 사실을 허위라고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며, 말끝마다 ‘성상의 뜻이 이러하다.’고 하고 일마다 ‘성상의 분부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속도로 사태가 진행되면서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할 수 없게 하고 인심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았으니, 그가 범한 이 죄악이야말로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속죄(贖罪)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를 성토하는 상소문이 준열하게 올려지면서 흉악하고 간특한 정상이 모조리 드러났는데 갑자기 먼저 지레 죽어버렸으니 틀림없는 도적임이 더욱 징험되었습니다. 만약 귀신의 주벌이 먼저 가해졌다고 하여 왕법(王法)을 속히 시행하는 일을 반대로 소홀히 한다면, 성상에 대한 무함을 어떻게 통쾌하게 해명할 것이며 인심을 어떻게 안정시키겠습니까. 정동준의 관작을 추탈(追奪)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권유(權𥙿)가 처음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할 말을 다 했다. 죄를 짓지 않으면 함께 즐거움을 향유하게 되는 반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던 몸으로서 이렇듯 성토하는 논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까지 되었고 보면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직첩(職牒)을 환수하여 불태워버림으로써 두 마음을 품는 신하들이 스스로 경계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재학(李在學)을 체직하였다. 재학이 아뢰기를,
"오익환(吳翼煥)의 ‘장차 가지려고 우선 준다.[將取姑與]’는 설이야말로 정동준(鄭東浚)이 무함한 죄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준이 앞서서 죽어버렸다 하더라도 그 정상을 끝까지 캐내려면 아직도 익환이 남아 있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사단(赦單) 중에 제출된 이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라고 이미 타이르며 유시했었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이렇게 감히 말한단 말인가."
하고, 이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서매수(徐邁修)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행해 오신 20년 간의 정치를, 거슬러 올라가 초기의 정치와 비교해 본다면, 위징(魏徵)이 말한 열 가지 조짐이나 가의(賈誼)의 여섯 가지 탄식이 나올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척족(戚族)을 물리치셨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조정이 위세를 휘두르는 척족들보다도 못한 형편이며, 전하께서는 일찍이 환첩(宦妾)을 멀리하셨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풍속이 아첨하려는 환첩들보다도 더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권간(權奸)은 없다고 할지라도 여우와 생쥐같은 무리들이 스스로 구멍을 뚫고 있으며, 위복(威福)을 내리는 권한이 아랫사람에게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할지라도 뱀이나 지렁이같은 무리들이 서로 또아리를 틀고는 떼어놓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흉악한 작자가 농간을 부려 듣는 이들을 현혹시키면서 성상의 덕에 누(累)를 끼치게 할 목적으로 꾀를 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세도(世道)를 오염시킨 방법이 천 가지 만 가지도 넘었습니다. 이에 세태(世態)가 날로 허위(虛僞)로 치달리고 인심이 날로 의심에 빠져들게 된 나머지, 없는 것도 있다고 하고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도회지에 밤이 돌아오면 낮이 된다고 하면서 문득 핑계거리를 삼는가 하면 마을의 어느 집은 밥을 먹고 어느 집은 죽을 먹는 것까지 위에 다 보고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으니,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갈 경우 장차 어떠한 세상이 되겠습니까.
밝고 거룩하신 전하께서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깊이 성찰해 보신다면 야반 삼경에라도 번뜩 눈이 뜨여 회오(回悟)하는 실마리가 열려질 듯도 싶습니다. 이때야말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대 기회가 된다고 할 것이니,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끝까지 신중하게 하시어 성상의 덕을 빛내고 세도를 만회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마다 절실하기만 하니 내가 알고 있던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유념토록 하겠다."
하였다. 매수가 또 아뢰기를,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비록 자리를 비워두고서 말해 주기를 구하고 마음을 비우고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소원(疏遠)한 자들이 다 진달드린다고 보장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요즘 들어와 언자(言者)가 성상의 마음에 차지 않는 말을 하기라도 하면 문득 금령(禁令)을 설치하고는 잇따라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내리시곤 합니다. 그래서 수적(讐賊)과 하늘 아래 같이 살면서 토죄하지도 못하고 충직한 인사들이 울분만 가슴 속에 품은 채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렇듯 천만 뜻밖으로 중도에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줄이야 어찌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제반 금령을 환수하시어 세도를 안정시키고 언로를 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령을 설치한 것이 어찌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집의 최헌중(崔獻重)이 아뢰기를,
"권유가 재차 올린 상소를 보면 정창순(鄭昌順)이라는 세 글자가 분명히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입계(入啓)한 뒤에 칼로 긁고 먹으로 지워버려 반포(頒布)된 소본(疏本)에는 그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비호해 주려는 마음이 급하셨다 하더라도, 공거문자(公車文字)의 구어(句語)를 삭제한 채 국체(國體)에 손상이 되고 무궁한 뒷 폐단이 따르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면 되겠습니까. 창순이 간적(奸賊)에 빌붙어 제멋대로 독기를 부리면서 암암리에 무함하고 은밀히 선동하는 등 누구보다도 복심(腹心) 노릇을 하였으니, 이런 흉악한 무리는 그냥 놔둘 수가 없습니다. 정창순에게 우선 삭직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헌중이 또 아뢰기를,
"오늘 열린 조참(朝參)은 곧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20년이 되는 정월에 갖게 된 큰 조회(朝會)인만큼 그야말로 두려운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크게 분발해서 진작시켜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치의 법도를 행함에 있어 모두 성신(誠信)에 입각하여 하는 것을 힘쓰시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오셨으니, 하찮은 무리들까지도 감동하는 효과를 보여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 저 간사한 무리들은 남모르게 패거리를 모아 결탁하고는 위권(威權)을 훔쳐 농간을 부리면서 지성껏 대하며 복심으로 인정해 준 은혜를 차마 저버린 채 감히 손을 흔들고 눈을 껌벅이는 작태를 일삼곤 하였습니다.
흉악한 무리들이 현혹시키며 허풍을 치는 작태야말로 전하께서 몇 년 동안 춘궁(春宮)에 계시면서 그 험악한 짓들을 두루 경험하신 것일텐데,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 오른 뒤에 와서까지 도깨비와 귀신과 물여우같은 자들이 옛날의 습관을 답습하면서 한결같이 지난날처럼 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무리들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탓을 따져 본다면 또한 전하께서 잘 살피지 않고 임용하신 것이나 온당하게 부리지 못한 데에도 책임이 있다 할 것입니다. 알랑거리며 교태를 부릴 때면 부시(婦寺)들의 조그마한 충정쯤으로 생각하시는 한편 따뜻이 돌보아 주게 되면 언젠가 용으로 변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결단을 내려 조처하시지 않은 나머지 이미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의 본원(本源)에 대한 공부가 아직 미진한 점이 있어 사의(私意)에 끌리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되신 결과 이 하찮은 무리들이 그 틈을 뚫고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성찰하고 극복해 나가는 공부에 더욱 힘쓰시어 사특한 무리들을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성상의 덕이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니 명심토록 하겠다."
하였다.
사간 어석령(魚錫齡)이 아뢰기를,
"정창순(鄭昌順)은 본래 독사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로서 구멍을 뚫고 몰래 엿보는 꾀까지 지니고 있는 자인데, 암암리에 꾸미고 있는 정상이 총애받는 권세자에게 아부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뱃속 가득히 계산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선량한 인사들을 모함해 해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는 것뿐이니, 《주역》에서 말한 ‘나라를 열고 집안을 받드는 데에 소인은 쓰지 말라.’고 한 그 소인에 해당되는 자라 할 것입니다. 정창순이 전형(銓衡)하며 문임(文任)으로 의망(擬望)한 것을 모두 개정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양전(兩銓)의 책임자에 대해서 관원들이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말과는 차이가 있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석령이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바는 인사 행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의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에 이조에서는 불공정하게 주의(注擬)하는 등 편파적으로 행한 일을 은폐하기 어려우며, 병조의 경우는 뇌물이 난무하여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전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과 병조 판서 구상(具庠)을 모두 삭직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납 신직이 아뢰기를,
"교리 안책(安策)이 상소하면서 ‘진휼(賑恤)하는 데에 폐단이 따르고 있으니 그 지역의 책임을 맡은 신하들로 하여금 미리 금령(禁令)을 세워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사람들을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다.’고 하는 데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저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백성이라고 해서 유독 전하의 농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절반이나 되는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짓이니 안책의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수찬 고택겸(高宅謙)은 감히 ‘견감해 주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등의 주장을 가지고 장주(章奏)에 올려 마치 성상의 덕을 저해하려는 것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안책과 고택겸 모두 벼슬을 깎아 바로잡고 다시는 삼사(三司)의 직책에 의망(擬望)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말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안책은 삭직하고 고택겸은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홍수만(洪秀晩)이 계청드리면서 오익환(吳翼煥)의 죄를 탄핵하였는데, 다 아뢰기도 전에 홍수만을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신직이 아뢰기를,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원기(元氣)를 기르는 길입니다. 정동준을 토죄해야 한다고 청한 권유의 소가 나온 것은 실로 오익환을 용서해 주신 우리 성상의 성대한 은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한 가닥 원기가 없어지지 않도록 배양해 주셨기 때문에 이렇듯 할 말을 다하는 기풍이 조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 홍수만이라는 자는 감히 있는 힘을 다하여 익환을 배척하면서 다시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원기를 배양하려는 성상의 덕을 훼방하려는 짓이라 할 것이니, 수만의 죄는 목을 베어도 좋다고 하겠습니다. 홍수만에게 특별히 멀리 유배보내는 형전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표현에 지나친 점이 있긴 하다만, 그 행동이 놀랍기만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최헌중이 아뢰기를,
"오익환의 ‘장차 취하려고 우선 준다.’고 하는 설이야말로 간사한 적이 기만하고 허풍친 흉측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저 신직은 도대체 홀로 무슨 마음을 갖고 있기에 익환을 편들면서 감히 말하기를 ‘전하께서 익환을 상주고 임용하였으므로 이렇듯 권유의 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고 하고, 심지어는 홍수만이 익환을 논했다는 이유로 거꾸로 수만을 멀리 유배보내야 한다고 청했단 말입니까. 이는 참으로 일대 변괴입니다. 신은 홍수만을 멀리 유배보내는 율(律)을 신직에게 옮겨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말이 잘 살피지 못한 것이긴 하다마는, 지금처럼 가식(假飾)이 풍조를 이룬 때에 이렇듯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취하였으니, 홍수만까지도 불문에 부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중련(李重蓮)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김사목(金思穆)은 수년 동안 인사권(人事權)을 쥐고서 주의(注擬)할 때마다 한결같이 간적(奸賊)의 말을 들었으며, 큰 지방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뇌물을 날마다 실어 날랐습니다. 그의 아부하는 행태를 보고는 미천한 하인들까지도 얼굴에 침을 뱉고 있으며,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독기를 부리고 있으므로 길가는 사람들도 주먹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가 척족(戚族)의 반열에 있는 사람으로서 전하의 은총을 차마 저버린 채 도깨비 같은 자에게 기꺼이 귀의하였으니, 김사목에게 우선 파직하는 벌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언 심반(沈鎜)이 또 아뢰며 멀리 귀양보내는 형전(刑典)을 더 적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중련이 또 아뢰기를,
"정리(整理)를 담당하고 있는 낭청(郞廳) 정화순(鄭華淳)은 간악한 적의 이웃집에 살면서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아 오염되었으니 개차(改差)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지평 이윤행(李允行)이 아뢰기를,
"권유의 상소 가운데에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해야 한다.[卞聖誣]’는 세 글자가 들어 있는데, 신하가 된 자의 도리로서는 이를 분명히 밝히는 일을 한 시각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사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미적미적 세월만 보내면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었으니, 모두에게 견삭(譴削)하는 형전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언 심반이 글을 읽은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초치(招致)할 것을 계청하고, 또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쓸모없는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계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심반이 또 아뢰기를,
"전 참의 한만유(韓晩裕)는 자기 아버지가 지닌 본래의 풍도를 지키지 않고 거꾸로 요즘의 혼탁한 풍조를 본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조 참의가 되고 나서는 더욱 험악한 마음 씀씀이와 사리에 어긋난 주장들을 드러내고 있으니, 한만유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정말 그렇다면 자기 선인을 등졌다고 할 만하다. 풍문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일단 이런 제목을 얻었고 보면 지극히 잘못되었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이소(金履素)와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의 정승 직위를 해면(解免)하고, 영돈녕 유언호(兪彦鎬)를 의정부 좌의정으로, 영중추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조참(朝參)에 임해서 훌륭한 말을 듣게 되기를 기대했었는데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는 무슨 말을 한 것이 있는가. 간장(諫長)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것은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라 하겠다. 좌의정 김이소와 우의정 이병모 모두 정승에서 면직시키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영돈녕부사 유언호와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정승으로 임명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연두(年頭)에 조참을 행하는 날이니 지금이야말로 한 번 처음으로 크게 진작시켜야 할 때라고 하겠다. 그런데 서로 이루고 서로 도와주는 공효를 고굉(股肱) 대신에게 위임하지 않고 누구에게 위임하겠는가. 백성의 뜻에 맞는 정치를 행하지 못하고 백성이 원하는 풍속을 조성하지 못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삼군(三軍)과 백공(百工)의 어느 한 사람도 일을 일답게 하지 않아 수고롭고 편한 처지가 바뀌게 되고 말았는데, 그리하여 부박(浮薄)한 풍조가 날로 심해지고 허위가 날로 증가하고 참소가 날로 불어나고 기만 행위가 날로 가해지고 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조정이 장차 조정답지 못하게 될 것인데, 더구나 10여 년 동안에 이러한 사태가 겹쳐 일어나기도 하고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하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뒷날 양심적인 사관(史官)이 간책(簡策)에 기록할 경우 오늘날 이런 상황을 두고 어떠한 세상이었다고 평가할 것인가. 스스로 정치의 꼴을 돌아보건대 처음 지녔던 마음과는 너무도 어긋나 있는데, 한밤중에 탑전(榻前)을 돌아다니노라면 나도 모르게 깨달아지곤 한다.
정승의 책임이 어느 때인들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늘 거듭 정승으로 임명하게 된 의도는 더욱 범범한 것이 아니니, 오늘날의 상황 때문에 오늘날의 규정까지 바꾸게끔 되었다. 눈을 씻고 목을 늘이고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하는 효과가 있게 되기를 경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정승의 위치에서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맑은 기운을 거양하며 건져주고 구해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처음 지녔던 뜻을 성취하게 하고 삼고(三古) 시대 때보다 조정이 높아지도록 하라. 그렇게 되면 경들이 누리게 되는 영예가 또한 어떠하겠는가. 정승을 임명하는 날 먼저 내 마음속의 생각을 일부분을 펼쳐 보였는데, 경들은 즉시 명에 숙배(肅拜)한 다음 나의 면유(面諭)를 듣도록 하라."
하고, 승지를 보내어 이를 좌상과 우상에게 전유(傳諭)토록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특별히 총융사(摠戎使)로 임명하고 이어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차임하였다. 하교하였다.
"대신이 인구(引咎)한 말을 이미 들었는데 너무도 점잖은 듯하다.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서유방(徐有防)을 특별히 기백(畿伯)에 보임(補任)하라."
특별히 윤시동尹蓍東)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환지沈煥之)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시수李時秀)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가환李家煥)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이조 판서 윤시동을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조정을 보건대 물러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경을 일찍 등용하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벌써 몇 년이나 지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승지의 말을 듣건대 경이 연전에 있었던 김우국(金遇國)의 상소 때문에 지금까지 스스로 인책하고 있다 하였는데, 우국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근래의 엿보는 습속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고상(故相) 서명선(徐命善)도 언젠가 말하기를 ‘외간에 윤시동을 우선 등용하기로 했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에 우국이 그런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라 감사로 있을 때 발생한 신기현(申驥顯)의 일을 뒤에 들은 바에 의하면 한두 명의 수령 때문에 그런 낭패를 당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 수령들이 실제로 누구인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우규(李禹圭)와 영광 군수(靈光郡守) 정치순(鄭致淳)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 일을 뒤에 와서 제기할 필요는 없다. 경은 모쪼록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대양(對揚)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배수(徐配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7일 경술
판의금(判義禁) 심이지(沈頤之)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처벌을 내리고, 전 승지 이익운(李益運)과 승지 유한녕(兪漢寧)을 파직하고, 금부 도사(禁府都事) 강세정(姜世靖)을 중죄로 다스렸다.
이때에 정동준(鄭東浚)의 직첩(職牒)을 불태우라는 전지(傳旨)를 아직 계하(啓下)하지도 않아서 금부가 앞질러서 먼저 수색하여 가져가자, 조사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금부에서 해조가 거행할 일을 가로채어 담당한 곡절 및 전지가 계하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서 먼저 수색해 가져간 한 조목에 대하여 하교하신 데 따라 사실을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원래의 전교를 반하(頒下)할 때 당직(當直) 도사(都事)에게 잘못 분부하여 승전(承傳)을 받들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판의금 심이지가 도사를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거두어 가져오게 하였으며, 금오(金吾)로 가서 자기가 직접 단속하며 불태웠다고 합니다. 의금부에서 전지가 계하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서 먼저 거두어 간 것은 크게 격례(格例)에 어긋나는 일인 동시에 뒷날의 폐단과도 관계된다 할 것인데, 신들이 당초 자세히 살펴 단속하지 못한 채 혼동해서 분부하고 말았으니 황공스러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직첩을 불태우는 일부터가 의금부에서 주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설령 의금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써서 계하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또 해방(該房)의 승전(承傳) 문서를 기다리지도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뒷날 말할 수 없는 폐단을 야기시키게 될 일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어젯 밤에 처분을 내린 데 이어 사실 조사를 하도록 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내용을 보건대 의금부에서 행한 일은 조목조목 놀랍기만 하다. 중죄인을 잡아와 가두는 예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다. 구서(具書)와 전지(傳旨)와 승전(承傳) 등 이 세 가지 문서가 모두 규례에 맞게 계하(啓下)된 뒤라고 하더라도, 판당(判堂)이 종이와 붓을 가지고 직접 위관(委官) 앞에 가서 위관으로 하여금 잡아와야 할 사람의 성명을 직접 쓰게 한 다음에, 그가 쓴 것을 가지고 탑전(榻前)에 나아가 그 종이를 상이 열람토록 하고 나서 형방 승지에게 다시 주어야 하고, 그러면 승지가 하위(下位)인 동의금(同義禁)을 불러내 준 다음 도사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다. 왕부(王府)의 격례는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어제의 일은 도사를 보내 체포하는 일도 아니었고 또 수색하라는 성명(成命)도 내리지 않았었는데 하찮은 자가 고신(告身)을 거두어왔다. 어찌하여 격례를 무시하면서까지 도사를 보냈단 말인가. 그런데도 초기(草記)에서는 ‘수색해서 찾아냈다…….’ 하였으니, 그 잘못된 것으로 말하면 앞질러서 먼저 거행한 것보다도 크다 할 것이다. 게다가 승지의 말을 듣건대 이조에서 규례에 의거하여 의금부에 가서 직첩을 내달라고 요구했는데도 내주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예전에 듣지 못했던 일이라고 할 만하다. 분통이 터지는 것도 분통이 터지는 것이지만 상헌(常憲)도 상헌이니 결코 체차하는 정도로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판당에게는 서용되지 못하는 처벌을 가하도록 하라.
해방(該房)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렇다. 승정원의 하례(下隷)를 단속하지 않아 지레 당직(當職)에게 가게 하였고, 그뒤의 초기(草記)에도 이에 대한 한 마디 말이 없었는데 봉입(捧入)하였으니, 당해(當該) 승지들도 파직시켜라. 도사는 책망하기에도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가볍게 줄 수는 없으니 의금부로 하여금 율(律)을 상고하여 중하게 죄를 주도록 하고 부리(府吏)에 대해서도 엄한 처벌을 내려 징계시키도록 하라. 이상의 일을 해조에 분부하라. 그리고 이 전교를 또한 《고사등록(故事謄錄)》에 기재하여 장차 끝없이 있을지도 모를 폐단을 예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8일 신해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파직하였는데, 향례(享禮)의 길일(吉日)을 잘 살피지 않고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종부시(宗簿寺)가 새로 간행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바치니,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종부시 제조인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에게 반숙마(半熟馬)를 내려주고, 어첩 서사관(御牒書寫官)인 안창군(安昌君) 이경(李燝)과 교정관(校正官)인 서청군(西淸君) 이성(李煋)과 도청 정(都廳正) 최경악(崔景岳)에게 모두 정묘년의 예에 의거하여 가자(加資)해 주었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상소하여 사면(辭免)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주자(朱子)의 봉사(封事)를 보다가 ‘천명(天命)의 돌보아 줌이 바야흐로 새로워지고 인심의 지향하는 바가 바야흐로 절실해지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면 미상불 옷깃을 여미고는 삼복(三復)했던 고사처럼 읽고 또 읽곤 하였다. 그런데 경이 거듭 정승으로 임명된 것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이 말을 맨 처음에 거론하여 전편(全篇)을 관통하는 주요한 뜻으로 부각시켰는데, 경이 이런 말을 하다니 경의 말은 곧 나의 말이라고 하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힘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을 실천으로 옮겼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하늘의 뜻을 몸받고 인심에 순응하게 된 기회를 맞아 위로는 아름다운 하늘의 명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에 보답하게 되었으니 그 출발이 매우 좋아 점차 양(陽)의 기운을 회복하게 되리라고 여겨진다. 기회란 얻기는 어려운 반면 잃기는 쉽고 일이란 망치기는 쉬운 반면 이루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도 단단히 마음을 먹겠다마는 경도 물러서지 말도록 하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형세를 이용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다시 경을 위해 외워 주려 한다. 경은 모쪼록 즉시 일어나 명에 숙배(肅拜)하고 널리 나랏일을 성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에게서 취하고 싶은 것은 기상이다. 좌절되지도 않고 녹아 없어지지도 않아 뜻을 펴지 못했을 때에도 여전하였고 드날리게 되었을 때에도 똑같기만 하였다. 어찌 일찍이 조정에 있을 때나 향리에 있을 때나 그 기개가 바뀐 적이 있었던가. 참소하는 자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었고, 험난한 길이 곧 평탄하게 된 것도 나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당초 경을 공격했던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항간에서 이야기하고 속으로 비방한 것도 참으로 경을 아첨한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정승을 임명하던 날 길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보고서 통쾌하게 여겼으니 내가 경을 등용한 것은 단지 민심을 따른 것일 뿐이다. 대체로 볼 때 지금의 시대는 그러한 기상이 없기 때문에 허탈 상태에 빠졌다고 할 것이다. 언젠가 몹시 추운 겨울날 이불을 안고서 입김을 호호 부는 늙은이를 지조가 고상하지 못하고 차원이 저열한 자의 비유로 들었던 일이 있는데, 경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장수가 모두 용감한 나라도 없고 군사가 모두 용감한 군대도 없다. 따라서 별안간 갑작스럽게 비상을 걸어 징과 북을 울리고 갑옷과 병장기를 번뜩이며 함성을 지르면서 성지(城池)를 공격하게 하는 일은 꼭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기상을 일깨워 사람들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일어서고 잠꼬대하던 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흐느적거리던 자가 꼿꼿하게 달라져서 우물쭈물하는 습기(習氣)가 하루 아침에 눈에 띄게 바뀌어지면서 허탈한 상태가 충만한 분위기로 되고 삼고(三古) 때보다 조정의 차원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기상을 장수로 삼아야 한다.[氣爲帥]’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조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거꾸로 해치게 될 것이니, 서둘지도 말고 느긋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완전하게 되기를 채근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며, 편파적으로 기울거나 한 쪽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승리하는 것만을 힘써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서로들 용납하지 못해 합쳐지기 어려울 듯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공평무사하게 되어 모두 귀일(歸一)되고 말 것이니, 이렇게 되면 처음 지녔던 뜻이 관철되고 일을 성취할 수 있음은 물론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펼치면서 아무 일이 없게 되는 시대로 거침없이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책임이야말로 돌아보면 고굉(股肱)의 반열에 있는 경들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은 즉시 마음을 바꿔먹고 이 시대를 생각하며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를 호조 판서로 옮겨 임명하고, 심환지(沈煥之)에게 병조 판서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하교하였다.
"죄명(罪名)을 완전히 씻어 주는 것은 사령(赦令)의 의미를 중하게 하기 위함이요, 아뢴 대로 하게 하는 것은 공의(公議)를 펼치게 하기 위함이다. 왕의 말에 믿음이 있게 하고 경사스러운 예를 중하게 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오랫동안 그냥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금부(禁府) 사문서(赦文書)의 탕척(蕩滌) 대상이 되는 부류에 대해 처음 하교했던 대로 거행하라고 분부하라.
금령(禁令)이 원래 그럴 뿐만이 아니고 일단 그렇게 처분을 내린 뒤이니, 다시 트집잡아 말할 단서가 뭐가 있겠는가. 만약 혹시라도 이 일을 다시 제기할 경우에는 비록 금법을 어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직접 자신의 성명을 기재한 자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대로 엄히 처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차(堂箚) 이하에 대해서 정원에서 감히 불러들여 천망(薦望)한 것은 어찌된 노릇인가. 해방(該房)은 잘 알아두도록 하라."
1월 29일 임자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상소하기를,
"신의 죄에 대해서는 신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불초한 신이 망극한 은혜를 지나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리가 어두워져 막히고 인심이 부정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태연히 세월만 보내며 지각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 간적(奸賊)이 나와 그 흉악한 정상이 낭자하였는데도 성상의 무함을 해명하지도 못했습니다. 대신의 직책에 몸 담고 있으면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그 싹을 잘라버리지 못하였고, 은혜를 입은 그 의리가 중하기만 한데도 오히려 부끄럽게 소원(疏遠)한 사람으로부터 충언(忠言)이 나오게 하고 말았으니, 그 죄를 논한다면 죽임을 당해도 가볍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정에 얼굴을 들고서 대관(大官)으로 자처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런 상황을 당하다 보면 정신이 없기 마련이니 지나간 일은 이야기하지 말라.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명에 숙배(肅拜)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기를,
"일전의 조참(朝參)이야말로 우리 성상께서 새해 들어 처음으로 맑고 밝게 첫 정사를 펴실 기회였는데도 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가 무리를 쫓아 물러나고 말았으니, 신의 죄가 이쯤 되어서는 더욱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통분스럽기만 합니다. 예전에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던 요망스럽기 그지없는 간적이 근밀(近密)한 반열에 잠복하여 성상의 덕을 무함하고 맑은 분위기를 오염시키면서 귀신과 물여우같은 속셈을 낭자하게 드러내 놓았는데, 신은 그 간악한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일에 앞장서서 토벌하지도 못한 채 거꾸로 충성심에 분개한 논의가 소원(疏遠)한 사람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말았으며, 가마 앞에서 한 번 아뢰었을 때에도 명백하게 곧바로 배척하면서 피눈물을 머금고 통렬하게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하나도 신의 죄요 둘도 신의 죄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후에 걸쳐 등졌던 신의 죄를 따져 속히 처벌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에 간(諫)하지 못하였다고 하나 어찌 모든 일에 완전할 수야 있겠는가.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명에 숙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예조 판사로, 홍억(洪檍)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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