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2월 1일 계미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직접 행하였다.
하교하였다.
"9일에 자궁(慈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서 참배드린 다음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 가서 자궁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이어 양로연(養老宴)을 행할 것이다. 상이 성묘(聖廟)에 가서 선성(先聖)을 참배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행궁에 들러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고, 다음날 장대(將臺)에 올라 직접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를 본 다음 장사(將士)를 먹일 것이며, 16일에 환궁할 예정이다. 정리소(整理所)로 하여금 잘 알아두도록 하라."
정리소가 아뢰기를,
"예전에 반궁(泮宮)에서 알성(謁聖)할 때에는 으레 작헌례(酌獻禮)를 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반궁과 차이가 있으므로 품지(稟旨)하여 거행할까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참배하는 예만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천 현감(黔川縣監)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邑號)를 시흥(始興)으로 바꿨는데 이는 옛 읍호를 따른 것이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필병(尹弼秉)이 장계를 올리기를,
"차왜(差倭) 평창상(平暢常)이 겉으로는 빙문(聘問)을 의논한다고 하면서 의논해서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4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기 때문에 사리로 꾸짖기도 하고 약조(約條)를 확인시키기도 하는 등 굳게 거절하고 물리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였는데도 교활한 성질을 바꾸지 않고 한결같이 고집부리며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사리상으로 꿀린다는 것을 알고는 글을 역관에게 부치면서 허접(許接)해 주기를 바라는 대신 그저 답장만 받기를 원해 왔습니다.
이에 신의 부(府)에서 비변사에 보고하였더니 단지 서계(書啓)만 받으라고 답장을 써서 내려보내는 동시에 돌아갈 양곡도 지급해 줄 일을 계하(啓下)받아 행회(行會)해 왔습니다. 그래서 회답하는 서계와 바다를 건널 식량을 관문(關文)에 있는 내용대로 마련해서 들여보내 주었더니 이제야 비로소 배를 타고 순풍(順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규정을 무시하고 나온 왜인을 즉각 쫓아보내지 못하여 오랜 기간 지체시키는 폐단을 야기시켰으므로 신은 황공한 심정으로 처벌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대가 잘 다스린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겨 왔다. 더구나 조정의 명령을 잘 받들면서 규정을 벗어나 번거롭게 청해온 왜인의 요구를 사리에 입각하여 물리침으로써 왜선(倭船)을 돌아가게 하였고 보면, 그야말로 일 하나하나마다 제대로 직분을 수행했다고 할 것인데, 어찌 대죄(待罪)할 일이 있겠는가. 듣건대 몇 년 간이나 풍토가 사나운 지방에 근무했기 때문에 대궐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니 본직(本職)의 체차를 허락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번의 사마시(司馬試) 급제자 가운데 옛날에 합격한 사람의 자손인 25명에 대해서는 당일 창방(唱榜)하는 예에 따르도록 하고 관에서 연건(軟巾)067) 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재의 증손인 이광헌(李光憲)이 이때 급제자 명단 중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윤2월 2일 갑신
서유신(徐有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2월 3일 을유
이조가 남공철(南公轍)을 예조 참의로 통의(通擬)하니, 하교하기를,
"예조 참의를 근래 이조 참의의 앞 단계 경력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본다면, 남공철은 이미 대사성을 거친 사람인데, 모두가 겸 대사성인 사람들로 될 경우 새로 규정을 만들어 다르게 해 보려는 뜻이 결코 못될 것이니, 시행하지 말라.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만수(李晩秀)를 이조 참의로 통의했을 때에도 하교했었다. 이 뒤로는 예조 참의를 대사성으로 통의하거나 대사성을 이조 참의로 통의하는 일을 십분 살펴 신중히 하라고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우현(李禹鉉)이 옮겨 전운(轉運)해 주는 곡식을 실은 배 5척(隻)이 파선된 일을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탐라(耽羅)에 두 번째로 전운해 주는 곡물 1만 1천 석(石)이 또 일제히 그쪽 언덕에 닿게 되어서 먹여주기를 원하는 섬 백성들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줄 수 있게 되리라고 여겼었는데, 밤에 장계가 올라온 것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5척의 배가 파손되어 수백 포(包)에 달하는 곡식이 못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고, 다시 결론 부분의 말을 보다가 감관(監官) 1명이 익사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더욱 놀랍고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백 명에 가까운 사격(沙格)이 개별적으로 살아 돌아온 것만은 크나큰 다행이다. 익사한 사람에 대해서는 도백(道伯)을 엄히 신칙하여 각별히 그 가족들을 위로하며 보살펴 주는 동시에 그 족속을 뽑아 천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사격들 가운데 신역(身役)을 진 자가 있거든 일체 덜어 주도록 분부하라.
뒤떨어진 5척의 배가 침몰한 원인을 어찌 바람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영운(領運)하는 차원(差員)이 부적격자였다면 전운하기 이전에 벌써 고려했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그 책임은 도백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무슨 낯으로 차원의 죄를 청하겠는가. 당해(當該) 도신(道臣)을 먼저 월봉(越俸)토록 하고, 당해 차원에 대해서는 병사(兵使)로 하여금 해변가에 크게 위의(威儀)를 펼쳐놓은 다음 그를 잡아들여 엄하게 곤장을 치도록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원통한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일깨우도록 하라고 분부하라.
그저께 세 번째 조운해 주는 곡물이 충분한 것인지의 여부를 모르겠기에 묘당으로 하여금 막 관문(關文)을 띄워 목사에게 물어보도록 하였는데, 그 목사가 완백(完伯)068) 에게 먼저 보고한 이야기를 듣고서 이제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이번에 특별히 내려보내는 곡물의 양이 목사가 더 청한 숫자보다 많은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뽑아낼 즈음에 균등하게 하지 못한 나머지 혹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걱정은 없겠는가.
세 번째 조운해 주는 1만 포의 곡식이 그 해안에 닿기 전까지는 내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는데, 이를 어찌 처음 조운할 때나 두 번째 조운할 때의 심경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향과 축문을 보내어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경건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만, 자주 하면 번독(煩瀆)스럽게 되기가 쉽고 번독스럽게 되면 소홀하게 대하기 십상이니, 지금은 내 마음속에 돌이켜 구함으로써 나의 심향(心香)이 멀리까지 이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전교를 가지고 별도로 도백과 목사에게 관문을 띄워 엄히 신칙토록 하라.
낱알 하나 기구 하나라도 섬 백성들에게는 천금(千金)과 맞먹을 수가 있다. 그러니 만약 9백 포의 곡식을 못쓰게 만들었다 하여 본 목사가 요청한 수량 이외의 다른 곡식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조정의 본의이겠는가. 완백으로 하여금 이 수량에 맞춰 차례로 들여보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섬의 사정은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진도(珍島)의 대동미(大同米)를 이미 감해주도록 하였다마는, 이런 춘궁기(春窮期)를 당하여 형세상 독촉하면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니, 추수 때까지 연기해 주어 조금이라도 백성의 힘을 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윤2월 4일 병술
영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이 죽었다. 종악의 자(字)는 여오(汝五)로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조카이다. 영종(英宗) 병술년에 급제하였으나 그의 형 박종덕(朴宗德)이 탄핵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소외된 채 거의 10년 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기유년에 비로소 발탁해서 등용하였고 임자년에 이르러 금백(錦伯)069) 에서 정승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그의 숙부의 공로를 생각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은 것이다. 이에 하교하기를,
"나라 밖으로 나간 대신이 미처 복명(復命)도 못한 채 중도에서 갑자기 죽었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상례(喪禮)를 치를 제반 도구를 마련하고 특별히 차원(差員)을 정해 보내는 일 등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게 하라고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라. 그런데 연경에 간 대신이 갑자기 죽었을 경우에는 으레 도신이 직접 호송하거나 도사(都事)가 대신 그 일을 행하도록 되어 있다. 먼저 도사를 보내 점검하고 호송해 오게 한 뒤에 도백은 영하(營下)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정필조(鄭弼祚)와 사간 유운우(柳雲羽)는 의금부에 내려 절도(絶島)에 유배보내도록 하고, 대사헌 이조승(李祖承)은 북청부(北靑府)로 멀리 유배보내고, 나머지 행공(行公)한 대신(臺臣)들은 대간으로 선발될 자격을 박탈해 버리고, 승지 박성태(朴聖泰)는 경기 지방 해안가로 정배하고, 서매수(徐邁修)에게는 서용(敍用)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적용하고, 임희존(任希存)과 이조원(李肇源)은 모두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곧이어 이조승은 전지(傳旨)에서 제외시키고, 유운우는 방방(放榜)할 때까지 3일 동안 기다렸다가 도로 가둔 뒤 죄를 심사해서 방송(放送)토록 명하였다.
이때 정필조 등이 정동준(鄭東浚)의 처자를 노비로 삼고 재산을 적몰(籍沒)할 것을 아뢰어 청하니,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조정이 존엄해지지 못하고 국법이 엄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전적으로 불성실한 이 자들 때문이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법이 금석(金石)처럼 믿음성이 있게 된 뒤에야 민심이 안정되는 법인데, 어제 양사가 올린 신계(新啓)의 결어(結語)를 보건대, 선조(先朝) 때부터 내려온 금령을 범하였고,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또 어떻게 하자고 청한 것인지를 모르겠으니, 정말 후세에 부끄러움을 끼칠 일일 뿐만이 아니라고 하겠다.
병신년 초에 윤음(綸音)을 반포한 뒤로는, 가령 문성국(文聖國) 같은 자에 대해서조차 ‘이미 죽었으니 추후로 벌을 가하는 것에 가깝다.’고 하여 대각(臺閣)이 감히 쟁집(爭執)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어제의 대신(臺臣)들도 그런 금령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 연계(連啓)도 아니고 신계(新啓)도 아닌 계사(啓辭)를 슬쩍 내놓으면서 그저 시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긴급하지 않은 일을 응수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저 그 즉시로 되돌려주어 입계하지 못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써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 된다면 조정이나 국법의 모양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죄를 따진다면 어떻게 중률(重律)을 피할 수 있겠는가.
대각에 나아갔던 양사의 당해 대간들을 먼저 체차시켜 의금부에 내린 뒤 선조(先朝)의 금령을 무시한 율을 적용해서 절도에 유배보내도록 하라. 신분이 사헌부의 우두머리이고 또 행공(行公)한 사람이고 보면 이와 같은 법률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 듣고 본 것만으로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이 없었으니, 대사헌 이조승을 북청부로 멀리 유배보내고 참여하게 된 곡절을 먼저 사문(査問)하는 것으로 전지를 받들라. 그 나머지 행공한 대간들은 일체 대간에 선임될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라. 양조(兩朝)에 걸친 금령과 칙교(飭敎)가 막혀서 행해지지 못하는 결과를 면치 못했으니 출납(出納)의 직분을 수행하는 자들이 어찌 중한 처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해방(該房) 승지를 먼저 경기 지방 해변가로 정배하라. 그리고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사간원의 최고 책임자에게는 속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승정원에 있었던 승지들은 모두 체차시켜라."
하였다. 곧 이어 이조승에 대해서는 당초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전지에서 빼도록 하고, 유운우에 대해서는 방방(放榜)할 때까지 3일 동안 기다렸다가 도로 가둔 뒤 사실을 조사하여 방송토록 하였다.
윤2월 6일 무자
천오문(千五門)에 거둥하여 사마시(司馬試)에 새로 합격한 자 및 문과·무과·사마시에 합격한 지 60돌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방방(放榜)하는 일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이 연건(軟巾)을 두르고 난삼(襴衫)을 입은 가운데 방방하는 일이 의절(儀節)대로 진행되었다. 낙성과 윤명에게 꽃 한 가지를 내려주어 그것을 연건에 꼽도록 명하는 동시에 또 승지와 사관에게 각각 명하여 선온(宣醞)하게 하였다.
윤2월 7일 기축
천오문에 거둥하여 문과·무과·사마시에 합격한 지 60돌이 되는 사람과 새로 합격한 생원·진사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조경(趙瓊)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용인(龍仁)·안산(安山)·진위(振威) 등 3읍을 화성(華城)의 속읍(屬邑)으로 삼았다. 총리사(摠理使)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본부(本府)는 평소 경기 지방 중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만, 모든 것이 초창기일 뿐더러 당초부터 성원을 받을 만한 의지처가 없어 요새지로 삼는 측면에서 논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부와 경계를 나란히하여 땅을 맞대고 있는 곳으로는 바로 용인과 안산이 있고 진위 역시 40리(里)의 거리 안에 있으니 이를 속읍으로 삼아 성을 지키도록 규정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사체(事體)로 보아도 원만해지고 절제(節制)하는 면에서도 편해질텐데 이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장차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서로 구원하는 형세를 이루고 서로 도우며 의지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면 엄연히 억만 년토록 무너지지 않을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이니 그 계책이 어찌 대단찮은 것이겠습니까. 군제(軍制)를 짐작해서 절충하는 일같은 것은 삼가 성명(成命)을 기다렸다가 차례로 절목(節目)을 만든 뒤 거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토록 하라. 경이 묘당의 신하들과 함께 절목을 만들고 별단(別單)을 갖추어서 논리적으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2월 8일 경인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윤2월 9일 신묘
상이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행행하였는데, 두 군주(郡主)070) 가 따라갔다.
용양(龍驤) 봉저정(鳳翥亭)에서 잠시 머물러 점심 수라를 들고,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서 유숙하였다. 예조 판서를 보내어 공자(孔子)의 영전(影殿)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하였다.
각신(閣臣)·승지·사관·종신(宗臣)·재신(宰臣)·무신을 나누어 보내, 민회 묘(愍懷墓)와 연령군(延齡君)·명빈(䄙嬪)·양녕 대군(讓寧大君)·후령군(厚寧君)·수천군(秀川君)·청기군(靑杞君)·함천군(咸川君)·창원군(昌原君)·덕진군(德津君)의 묘소 및 김간(金幹)의 묘, 그리고 충현 서원(忠賢書院)·매곡 서원(梅谷書院)·명고 서원(明皐書院)과 청해백(靑海伯)의 사당 및 팔달산(八達山) 처사(處士)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시흥 현령(始興縣令) 홍경후(洪景厚)에게 3품(品)의 직책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윤2월 10일 임진
사근(肆覲)의 행궁에서 잠시 머물러 점심 수라를 들고 화성(華城)의 행궁에 머물렀다. 이날 비가 왔는데, 험한 길이 나오기만 하면 상이 번번이 말에서 내려 자궁(慈宮)의 가마 앞으로 나아가 안부를 묻곤 하면서 옷이 비에 젖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저녁 때 유여택(維與宅)에 머물렀는데,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오늘 온 비에 군병들의 옷이 젖은 것은 민망한 일이다마는, 이번의 행차야말로 지극히 성대한 거조이고 이 예(禮)야말로 크나큰 의절(儀節)이니, 일마다 완전히 원만하게 되기만을 구할 필요는 없다. 잠깐 비가 왔다가 바로 개면서 앞길을 깨끗이 청소해 주었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더구나 농삿일이 시작될 즈음에 토지를 적셔 주었으니 어찌 농부에게 기쁜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2월 11일 계사
화성(華城)의 성묘(聖廟)를 참배하고 새로 간행한 사서(四書) 삼경(三經) 및 노비를 내려주었다.
우화관(于華觀)에서 선비를 시취(試取)하고 낙남헌(洛南軒)에서 무관을 시취하였다. 이어 친림(親臨)한 자리에서 급제자를 발표하였는데, 문인 중에서는 최지성(崔之聖) 등 5인을 뽑고 무인 중에서는 김관(金寬) 등 56인을 뽑았다.
윤2월 12일 갑오
상이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참배하는 예식을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성 서쪽의 장대(將臺)에 올라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를 살펴보았다. 어제(御製)로 오언(五言)의 4운(韻) 율시(律詩)를 내리고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화성의 축성 공사를 착수하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국가의 재정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이후에 또한 당분간은 서서히 하면서 재물을 모은 뒤에 다시 시작하려 했던 것도 모두가 스스로 생각해서 중도에 맞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 남쪽과 북쪽의 성루(城樓) 및 수각(水閣)·장대(將臺) 등을 보건대 날아갈 듯 아름답고 깎아지른 듯 가파르게 잘 쌓았으니, 어찌 삼보(三輔)071) 의 중요한 요새지만 될 뿐이겠는가. 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고 공사를 감독한 여러 사람들의 성명을 나열해 써서 만년토록 역사 속에 기억되도록 하라."
하였다.
윤2월 13일 을미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혜경궁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소속 인원을 이끌고서, 자궁(慈宮)의 자리를 행궁(行宮)의 내전(內殿) 북쪽 벽에 남쪽으로 향하게 설치하고, 인안(印案)을 자리 동쪽에 설치하고 향안(香案) 두 개를 앞 기둥의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자궁의 자리 동쪽에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섬돌 위에 북쪽을 향하게 배위(拜位)를 설치하고, 내전 안쪽 한중앙에 북쪽을 향해서 욕위(褥位)를 설치하였다.
전찬(典贊)이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의 시위(侍位)를 앞 기둥의 발[簾] 안쪽에 북쪽을 위로 해서 서로 마주보게 설치하고, 배위(拜位)를 내전의 앞쪽 오른편과 왼편에 설치하고, 외위(外位)를 뜰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고 서로 대칭되게 하였다. 또 의빈(儀賓)과 척신(戚臣)의 시위(侍位)를 앞 기둥의 발 바깥쪽 좌우에 설치하였는데 북쪽을 위로 해서 서로 마주보게 하였으며, 배위(拜位)를 내전의 앞쪽 좌우에 설치하면서 북쪽을 위로 하고 서로 대칭되게 하였다.
전의(典儀)가 모시고 따라온 백관들에게 음식상을 차려 줄 자리를 중양문(中陽門) 밖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였는데 북쪽을 위로 하고 서로 마주보게 하였으며, 배위(拜位)를 길의 서쪽에 북쪽을 향해 서로 대칭되도록 설치하였다. 그리고 인의(引儀)가 의빈과 척신의 외위(外位)를 중양문 밖에 설치하고, 모시고 따라 온 백관의 외위를 좌익문(左翊門) 밖에 설치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여관(女官)이 사찬(司贊)·전빈(典賓)·여관의 자리를 발을 드리운 안쪽에 설치하였는데 전찬은 남쪽으로 조금 뒤에 있게 하였다. 여집사(女執事)가 좌통찬(左通贊)·우통찬(右通贊) 및 치사(致詞)를 대신 읽을 여집사의 자리를 섬돌 사이에 설치하고 찬창(贊唱)의 자리는 그 남쪽으로 조금 뒤에 설치하였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 뒤 모두 북쪽을 위로 삼게 하였다.
또 악장(樂章)을 선창(先唱)하고 후창(後唱)하는 여악공(女樂工)의 자리를 발의 바깥쪽으로 북쪽을 향하게 설치하고, 여집사 및 정재(呈才)072) 담당 여악공의 자리를 동쪽과 서쪽 모서리의 섬돌 부근에 설치하였는데, 여집사는 좌우로 나뉘어 북쪽을 위로 해서 서로 마주보게 하였고 여악공은 북쪽을 향하게 하면서 서로 대칭되게 하였으며 박자를 맞추는 여악공은 또 그 앞쪽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여집사와 여악공의 외위(外位)를 뜰 한복판에 장막으로 막아 설치하고, 악공의 자리를 장막 밖에 설치하였다.
여관이 자궁의 술그릇 탁자를 앞 기둥의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 남쪽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 상의 술그릇 탁자를 자궁의 술그릇 탁자의 동쪽 앞에 설치하고, 명부(命婦) 및 의빈(儀賓)·척신(戚臣)의 술그릇 탁자를 시위(侍位) 남쪽에 설치하였다.
또 꽃을 바칠 때 올려놓는 탁자를 발 안의 동쪽에 설치하고, 휘건함(揮巾函)을 올려놓은 탁자를 그 다음에 설치하고, 꽃을 흩뿌리는 소반을 올려놓은 탁자를 발 바깥의 서쪽에 설치하고, 꽃병을 올려놓은 탁자를 섬돌 위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고, 치사(致詞)를 올려놓은 상을 임금의 배위(拜位)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때가 되자 정리소의 대신 이하가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제위(諸衛)를 독촉하여 내전의 문 바깥쪽 뜰에 벌여 세웠으며, 내전의 뜰 왼쪽과 오른쪽에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다. 산선(繖扇)·청개(靑蓋)·홍개(紅蓋)·정절(旌節)·봉선(鳳扇)·작선(雀扇)을 각각 두 개씩 앞 기둥의 발 바깥쪽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였다.
행사 시작 3각(刻) 전에 여관·여집사·여악공 등이 각기 복장을 갖추고 외위(外位)로 나가 있다가 조금 뒤에 각각 자기 자리로 나아갔다. 정리사(整理使)가 뜰 한복판의 장막 바깥쪽에 악대(樂隊)를 벌여 세웠다. 의빈·척신·수행한 백관들은 융복 차림으로, 유생들은 청금(靑衿) 복장으로 각각 외위에 나아갔다.
행사 시작 2각 전에 내명부와 외명부가 각기 예복을 갖춰 입고 외위로 나아갔다. 인의(引儀)가 수행한 백관들을 나누어 인도하고 들어가 배위(拜位)로 나아가게 하였다.
행사 시작 1각 전에 여관 등이 모두 내합(內閤)으로 나아갔다. 여관이 무릎을 꿇고서 ‘준비하셔야겠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조금 뒤에 또 무릎을 꿇고서 ‘바깥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자궁이 예복 차림으로 나오자 여관이 앞으로 인도하였다.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였는데, 자리에 오른 다음 향로의 연기가 피어 오르자 연주를 그쳤다.
여집사가 내합(內閤)에 가서 무릎을 꿇고서 ‘대기하셔야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가게 했다. 여관이 ‘재배(再拜)’라고 말하자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국궁(鞠躬)’ ‘재배’ ‘흥(興)’ ‘평신(平身)’이라고 외치는 데에 따라 내명부와 외명부가 몸을 굽히고 두 번 절을 하고 일어나고 몸을 펴니 음악이 멎었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각각 시위(侍位)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인도하고 들어가 배위(拜位)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집사가 무릎을 꿇고서 ‘바깥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상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나오자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였다. 여집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하니 연주를 그쳤다.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였다. 상이 몸을 굽혔다가 절을 두 번 하고 일어나서 몸을 펴자 음악이 그쳤다. 상이 무릎을 꿇었다. 여관이 휘건(揮巾)을 올리라고 외치니 정리사가 장막 밖으로 가서 휘건을 바쳤다.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였다. 내시가 휘건을 전해 받아 여관에게 주었는데 여관이 전해 받아 자궁의 자리 앞에 올리니 음악이 그쳤다.
음식상을 올릴 때에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고 음식상을 다 올리자 연주를 그쳤다. 꽃을 올릴 때에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고 다 올리자 연주를 멈췄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몸을 폈다. 여악공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와 발 바깥쪽 한복판에 멈춘 뒤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북쪽을 향해 서서 어제(御製)인 장락장(長樂章)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성대한 연회는 태평 시대에나 있는 법, 오늘날 태평 시대의 기상이 넘쳐 흐르도다. 그 기상을 묻노니 어떤 것인가. 노인성(老人星)이 중천에 떠 밝게 빛나네. 봄철 장락궁(長樂宮)에 노인들 모여들고, 화봉인(華封人)073) 처럼 축하하러 부인들 참석했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 올리며, 세 차례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오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 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 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 신선주(神仙酒) 따라 올리면서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하였다.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자 여관이 이어 인도해서 자궁의 술그릇을 놓은 남쪽까지 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하니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술을 따른 뒤 무릎을 꿇고서 상에게 바치니 상이 술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여관에게 주었다. 여관이 술잔을 넘겨받아 자리 앞에 놓았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니 연주를 그쳤다.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 이르니 여집사가 앞장서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간 뒤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으니 여집사가 상의 배위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은 뒤 치사(致詞)를 대신 읽었는데, 그 내용에,
"국왕 모(某)는 삼가 건륭(乾隆) 60년 윤2월 13일의 경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 저하(邸下)께서는 우리 왕실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시어 장수하는 복을 받으셨으니 복록은 자손에게 흘러 넘치고 경사로움이 어머님에게 미쳤습니다. 삼가 축하하는 자리에 모시고서 경건히 술잔을 따라 올리오니 어머님의 연세를 아는 이 기쁜 날 칭송하는 소리 높이높이 울려 퍼집니다.
아, 즐거운 이 잔칫날 만물이 모두 다 은혜를 입고, 화창한 봄날 맞이하여 하늘의 도우심에 보답합니다. 어머님은 더욱 오래 사시어 크나큰 복록 받을 것이며 태평 시대는 끝없이 이어져 가리이다. 경하하는 마음 누를 길 없어 삼가 만세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립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어 올렸다.】 상이 엎드렸다 일어나서 몸을 펴자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관이 이어 인도하여 전각 안의 욕위(褥位)로 나아갔다. 상이 무릎을 꿇었다. 여관이 자궁의 자리 앞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분부를 내리소서.’ 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에 분부를 내리기를 ‘전하와 경사를 함께 하겠다.’ 하고 자궁이 술잔을 드니 악대가 여민락의 천세만세곡(千歲萬歲曲)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나아가서 빈 술잔을 받아 자궁의 술그릇 탁자 위에 다시 놓자 음악이 그쳤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니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집사가 앞장서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이르렀다. 상이 무릎을 꿇었다. 여집사가 외치기를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또 외치기를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손을 마주 잡고 이마 위에 올리며 ‘천세’라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천세’라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천천세’라고 하였다. 천세를 부를 때마다 명부(命婦)와 여관(女官) 이하가 모두 선 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 다시 일어나 몸을 펴니 연주가 그쳤다.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관이 그 뒤를 이어 인도하여 내전 안 욕위(褥位)로 가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여집사가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을 나누어 인도해서 각각 자기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자 정리사(整理使)가 수건을 바쳤다.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였다. 수건을 바치고 나니 연주가 그쳤다. 음식상을 차례로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였다. 음식상을 다 올리자 연주를 그쳤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음식상을 차리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의 음식상을 차렸다. 여관과 여집사와 산화(散花)를 담당하는 자들이 백관에게 술과 음식을 차리고 꽃을 뿌렸다. 백관이 자리에서 나와 술을 다 마신 다음에 네 번 절을 하였다. 인의(引儀)가 수행한 백관을 인도하여 나왔다. 자궁에게 탕(湯)을 올렸는데, 전해 받아 올리는 절차는 음식상을 올릴 때의 의례와 동일하였다.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다가 탕을 다 올리자 연주를 그쳤다. 첫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선도(仙桃)를 바친다[獻仙桃]’는 정재(呈才)를 연희(演戱)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자궁의 술 탁자 앞으로 나아갔다. 여관이 장수를 축원하는 술을 따른 뒤 무릎을 꿇고 상에게 올리니 상이 술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나아갔다. 여관이 외치기를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여관에게 주니 여관이 건네받아 자궁의 자리 앞에 올렸다. 자궁이 술잔을 들어 다 마신 다음에 술잔을 여관에게 주었다.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은 다음에 상의 술 탁자 앞으로 가서 술잔에 술을 따라 자궁에게 바쳤다. 자궁이 술잔을 받아 여관에게 주니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은 다음 상에게 올렸다. 상이 무릎꿇고 술잔을 받아 다 마신 다음 잔을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술 탁자 앞에까지 오니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았다. 상이 자리로 돌아가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에게 술잔을 돌리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에게 술잔을 돌렸다. 상에게 탕을 올렸는데 건네받은 절차는 위에서의 의례와 같았다. 여관과 여집사가 분담하여 내명부·외명부 및 의빈·척신에게 탕을 공급했다. 정재(呈才)의 연희가 끝나면서 연주가 멎었다. 두 번째 잔을 올릴 때 ‘금척(金尺)’이라는 정재와 ‘하늘의 밝은 명을 받고 황제의 은혜를 입었다[受明命荷皇恩]’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청평악(淸平樂)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명부(命婦)를 인도하여 자궁의 술 탁자 남쪽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여관이 장수를 축원하는 술을 술잔에 따라 명부에게 주었다. 명부가 술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여관에게 주었다. 여관이 건네받아 자궁의 자리 앞에 올리니 명부가 자리에 엎드렸다. 자궁이 술잔을 든 뒤 여관이 빈 술잔을 받아 명부에게 주니 명부가 술잔을 받아 자궁의 술 탁자 위에 다시 놓았다. 여관이 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세 번째 잔부터 일곱 번째 잔까지는 명부와 의빈·척신 중에서 자궁의 유지(有旨)를 받든 사람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렸는데, 그 절차는 위에서의 의례와 같았다. 의빈과 척신은 자궁에게 잔을 올린 다음에 상의 술 탁자로 가서 술을 따라 상에게 올렸는데, 상이 술잔을 들어 마신 다음 술잔을 주면 다시 술잔을 받아 술 탁자 위에 놓고 물러갔다.】 탕을 올리고 술잔을 돌리는 절차는 첫 번째 잔을 올렸을 때의 의례와 같았다. 정재가 끝나면서 음악도 멈췄다. 세 번째 술잔을 올릴 때 ‘포구락(抛毬樂)’이라는 정재(呈才)와 ‘무고(舞鼓)’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與民樂)의 오운개서조곡(五雲開瑞朝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멈췄다. 네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아박(牙拍)’이라는 정재와 ‘향발(響鈸)’이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천세만세곡(千歲萬歲曲)을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으로 번갈아가며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멈췄다. 다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 ‘학무(鶴舞)’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유황곡(惟皇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여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연화대(蓮花臺)’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일곱 번째 술잔을 올릴 때에 ‘수명을 연장한다[壽延長].’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하운봉곡(夏雲峰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처용무(處容舞)를 추자 악대가 정읍악(井邑樂)과 여민락을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으로 번갈아 연주하였다. 첨수무(尖袖舞)를 추자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여악공(女樂工) 두 사람이 나와 발[簾] 밖의 한복판에 이르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서 북쪽을 향해 선 다음 상이 지은 관화장(觀華章)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자궁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大地)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말없이 은혜 널리 베푸심이여, 태평 시대 열리게 도와주셨도다. 온갖 복록이 모여듦이여, 마치 강물처럼 흘러 넘치도다. 자손들 갈수록 번창함이여, 해마다 경사가 이어지도다. 북두성마냥 밝으심이여, 숭산(嵩山)처럼 높고 높도다. 보책(寶冊)에 상서(祥瑞)를 기록함이여, 봄날 잔치 열어 술을 따르도다. 아, 자궁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 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네. 떠 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만년토록 오래 사소서." 하였다. 여악공이 노래를 마치고 내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관이 자궁의 앞에 나아가고 또 상의 앞에 나아가서 상을 치웠다.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였다. 여관 및 여집사가 명부 및 의빈·척신의 상을 치웠다. 음악 연주가 그쳤다. 여관이 ‘일어나실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외쳤다.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자 여집사가 앞장서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이르렀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인도해 내려와 배위로 나아가게 하였다.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였다. 상이 몸을 굽혀 두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니 연주가 그쳤다.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나가니 악대가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연주하였다. 합문(閤門) 안에 이르니 연주를 그쳤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나누어 인도해서 나갔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나누어 인도해서 도로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니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였다. 내명부와 외명부가 몸을 굽혀 두 번 절을 하고 몸을 펴니 연주를 멈췄다. 여관이 자궁의 자리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예식이 끝났다고 아뢰었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나누어 인도해서 나갔다. 자궁이 자리에서 내려오자 악대가 여민락령을 연주하고, 다시 합문 안에 이르자 연주를 멈췄다. 상이 직접 연회를 베푸는 의절(儀節)을 정하였는데 모두 7칙(則)으로 되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57면
【분류】왕실(王室)
[註 072] 정재(呈才) : 춤과 노래 등의 연예.[註 073] 화봉인(華封人) : 요(堯)임금 시대에 화(華) 땅에 봉해진 사람으로서 수(壽)·부(富)·다남자(多男子)의 세 가지 일로 요임금을 축원했다 함. 《장자(莊子)》 천지(天地).
상이 엎드렸다 일어나서 몸을 펴자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관이 이어 인도하여 전각 안의 욕위(褥位)로 나아갔다. 상이 무릎을 꿇었다. 여관이 자궁의 자리 앞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분부를 내리소서.’ 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에 분부를 내리기를 ‘전하와 경사를 함께 하겠다.’ 하고 자궁이 술잔을 드니 악대가 여민락의 천세만세곡(千歲萬歲曲)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나아가서 빈 술잔을 받아 자궁의 술그릇 탁자 위에 다시 놓자 음악이 그쳤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니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집사가 앞장서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이르렀다. 상이 무릎을 꿇었다. 여집사가 외치기를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또 외치기를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손을 마주 잡고 이마 위에 올리며 ‘천세’라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천세’라고 하였다. 또 외치기를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 하니, ‘천천세’라고 하였다. 천세를 부를 때마다 명부(命婦)와 여관(女官) 이하가 모두 선 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 다시 일어나 몸을 펴니 연주가 그쳤다.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렀다. 여관이 그 뒤를 이어 인도하여 내전 안 욕위(褥位)로 가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여집사가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을 나누어 인도해서 각각 자기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자 정리사(整理使)가 수건을 바쳤다.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였다. 수건을 바치고 나니 연주가 그쳤다.
음식상을 차례로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였다. 음식상을 다 올리자 연주를 그쳤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의 음식상을 차리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의 음식상을 차렸다. 여관과 여집사와 산화(散花)를 담당하는 자들이 백관에게 술과 음식을 차리고 꽃을 뿌렸다. 백관이 자리에서 나와 술을 다 마신 다음에 네 번 절을 하였다. 인의(引儀)가 수행한 백관을 인도하여 나왔다.
자궁에게 탕(湯)을 올렸는데, 전해 받아 올리는 절차는 음식상을 올릴 때의 의례와 동일하였다.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다가 탕을 다 올리자 연주를 그쳤다. 첫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선도(仙桃)를 바친다[獻仙桃]’는 정재(呈才)를 연희(演戱)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자궁의 술 탁자 앞으로 나아갔다. 여관이 장수를 축원하는 술을 따른 뒤 무릎을 꿇고 상에게 올리니 상이 술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나아갔다. 여관이 외치기를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여관에게 주니 여관이 건네받아 자궁의 자리 앞에 올렸다. 자궁이 술잔을 들어 다 마신 다음에 술잔을 여관에게 주었다.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은 다음에 상의 술 탁자 앞으로 가서 술잔에 술을 따라 자궁에게 바쳤다. 자궁이 술잔을 받아 여관에게 주니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은 다음 상에게 올렸다. 상이 무릎꿇고 술잔을 받아 다 마신 다음 잔을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술 탁자 앞에까지 오니 여관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았다.
상이 자리로 돌아가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에게 술잔을 돌리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에게 술잔을 돌렸다. 상에게 탕을 올렸는데 건네받은 절차는 위에서의 의례와 같았다. 여관과 여집사가 분담하여 내명부·외명부 및 의빈·척신에게 탕을 공급했다. 정재(呈才)의 연희가 끝나면서 연주가 멎었다.
두 번째 잔을 올릴 때 ‘금척(金尺)’이라는 정재와 ‘하늘의 밝은 명을 받고 황제의 은혜를 입었다[受明命荷皇恩]’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청평악(淸平樂)을 연주하였다. 여관이 명부(命婦)를 인도하여 자궁의 술 탁자 남쪽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여관이 장수를 축원하는 술을 술잔에 따라 명부에게 주었다. 명부가 술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여관에게 주었다. 여관이 건네받아 자궁의 자리 앞에 올리니 명부가 자리에 엎드렸다. 자궁이 술잔을 든 뒤 여관이 빈 술잔을 받아 명부에게 주니 명부가 술잔을 받아 자궁의 술 탁자 위에 다시 놓았다. 여관이 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세 번째 잔부터 일곱 번째 잔까지는 명부와 의빈·척신 중에서 자궁의 유지(有旨)를 받든 사람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렸는데, 그 절차는 위에서의 의례와 같았다. 의빈과 척신은 자궁에게 잔을 올린 다음에 상의 술 탁자로 가서 술을 따라 상에게 올렸는데, 상이 술잔을 들어 마신 다음 술잔을 주면 다시 술잔을 받아 술 탁자 위에 놓고 물러갔다.】 탕을 올리고 술잔을 돌리는 절차는 첫 번째 잔을 올렸을 때의 의례와 같았다. 정재가 끝나면서 음악도 멈췄다.
세 번째 술잔을 올릴 때 ‘포구락(抛毬樂)’이라는 정재(呈才)와 ‘무고(舞鼓)’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與民樂)의 오운개서조곡(五雲開瑞朝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멈췄다.
네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아박(牙拍)’이라는 정재와 ‘향발(響鈸)’이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천세만세곡(千歲萬歲曲)을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으로 번갈아가며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멈췄다.
다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 ‘학무(鶴舞)’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유황곡(惟皇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여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연화대(蓮花臺)’라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일곱 번째 술잔을 올릴 때에 ‘수명을 연장한다[壽延長].’는 정재를 연희하고, 악대가 여민락의 하운봉곡(夏雲峰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처용무(處容舞)를 추자 악대가 정읍악(井邑樂)과 여민락을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으로 번갈아 연주하였다. 첨수무(尖袖舞)를 추자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정재가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여악공(女樂工) 두 사람이 나와 발[簾] 밖의 한복판에 이르러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서 북쪽을 향해 선 다음 상이 지은 관화장(觀華章)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자궁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大地)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말없이 은혜 널리 베푸심이여, 태평 시대 열리게 도와주셨도다. 온갖 복록이 모여듦이여, 마치 강물처럼 흘러 넘치도다. 자손들 갈수록 번창함이여, 해마다 경사가 이어지도다. 북두성마냥 밝으심이여, 숭산(嵩山)처럼 높고 높도다. 보책(寶冊)에 상서(祥瑞)를 기록함이여, 봄날 잔치 열어 술을 따르도다. 아, 자궁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 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네. 떠 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만년토록 오래 사소서."
하였다. 여악공이 노래를 마치고 내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관이 자궁의 앞에 나아가고 또 상의 앞에 나아가서 상을 치웠다.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였다. 여관 및 여집사가 명부 및 의빈·척신의 상을 치웠다. 음악 연주가 그쳤다.
여관이 ‘일어나실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외쳤다. 여관이 상을 인도하여 발 밖에까지 이르자 여집사가 앞장서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이르렀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인도해 내려와 배위로 나아가게 하였다.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였다. 상이 몸을 굽혀 두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니 연주가 그쳤다. 여집사가 상을 인도하여 나가니 악대가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연주하였다. 합문(閤門) 안에 이르니 연주를 그쳤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나누어 인도해서 나갔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나누어 인도해서 도로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니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였다. 내명부와 외명부가 몸을 굽혀 두 번 절을 하고 몸을 펴니 연주를 멈췄다. 여관이 자궁의 자리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예식이 끝났다고 아뢰었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나누어 인도해서 나갔다. 자궁이 자리에서 내려오자 악대가 여민락령을 연주하고, 다시 합문 안에 이르자 연주를 멈췄다. 상이 직접 연회를 베푸는 의절(儀節)을 정하였는데 모두 7칙(則)으로 되어 있었다.
상이 칠언(七言) 4운(韻)의 율시(律詩)를 지어 내리면서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연회를 베풀 때 반열에 참여한 노인으로서 70세 이상이 되는 자 및 61세가 되는 사람들에게 각각 비단 1필(匹)씩을 하사하는 동시에 누런 명주를 주어 구장(鳩杖)074) 에 매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현륭원(顯隆園) 밑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2년 동안 더 급복(給復)해 주고 수원부(水原府) 성 내외에 사는 백성들에게 1년 동안 더 급복해 주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락당(長樂堂)에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낙남헌(洛南軒)에서 술자리를 베풀면서 경건히 북두성 자루에 술을 붓고 남산(南山)처럼 장수하시기를 축원하였다. 이튿날에는 또 노인들을 섬돌과 뜰 사이에 불러 모아 자궁의 덕에 흠뻑 배부르게 하였으니 오늘 밤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아래에서 이미 화봉인(華封人)의 축하를 올렸으니 위에서 어찌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입각한 선물을 아낄 수 있겠는가.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이하 나이 70세 이상인 노인들과 61세가 되는 사람들에게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는 동시에 누런 명주를 주어 구장(鳩杖)에 맬 수 있도록 하고, 본부(本府)에서 연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각각 한 등급씩 가자해 주도록 하라.
한 고조(漢高祖)는 풍패(豊沛)에 대해서, 그리고 광무제(光武帝)는 남양(南陽)에 대해서 각각 탕목읍(湯沐邑)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부역을 면제시켜 주었었는데, 이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아름다운 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더구나 이 화성(華城) 지역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물렀던 곳인데다 선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자궁을 모시고 올 적에 길 양쪽으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섰었고 임금의 행차를 보는 기쁨과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려는 정성을 안고서 곳곳마다 노래가 거리에 흘러 넘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감회를 이야기하였으니, 만약 지금과 같은 때에 특별히 혜택을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방법으로 이 지역의 부로와 자제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앞서 이미 급복(給復)해 준 이외에 현륭원 밑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특별히 2년을 더 급복해 주도록 하고 성 안팎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도 1년을 더 급복해 주도록 하라.
그런데 남의 노인에게까지 은혜가 미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 네 가지보다 먼저 행해야 하는 일로서 이것이 바로 선왕(先王)께서 확대 적용하여 은혜를 베풀던 인정(仁政)이었다고 하겠다. 이번의 일을 보건대 시기로 말하면 자궁께서 회갑이 되시는 해이고 절기로 말하면 따뜻한 봄철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때로서 자궁께서 건강하실 뿐더러 성대한 예식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므로 산천 역시 영광을 입고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에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체득하여 크나큰 은혜를 대대적으로 베풀어서 노인들을 일단 은혜롭게 대접한 뒤에 문관의 시험과 무관들의 훈련을 또한 사열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저 누더기 옷을 입고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유독 같이 즐기고 기뻐하는 가운데에서 소외된다면 어찌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 행하는 뜻이 될 수 있겠는가. 내일 신풍루(新豊樓)에 가서 사민(四民)에게 쌀을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동시에 거리가 조금 먼 마을에는 승선(承宣)을 나누어 보내 창고를 열어서 먹여주도록 할 것이다. 지금 이때에 죽을 먹이고 전대를 채워줌으로써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게 하는 것은 털끝만큼이라도 모두가 자궁께서 내려주시는 것이니, 백성이 아무리 식견이 없고 무지하다 하더라도 어찌 기쁜 마음으로 서로들 이야기하며 크나큰 은혜에 감격해 자궁의 덕을 칭송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술을 따르며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는 것이 또한 나의 오늘 심정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건대 인정(仁政)이란 은혜를 넓혀가는 데에 있을 따름이니, 맹자(孟子)가 말한 바 ‘이 마음을 들어 저쪽에 가해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제 화성 한 고을에 시행한 것을 7도(道)와 양도(兩都)에 넓혀서 시행해야 하리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만약 이번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화성 한 고을에만 미치고 팔도(八道)와 양도에는 미치지 않게 되거나 금년 1년만 이렇게 행하고 천년 만년토록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어찌 넓혀서 시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한 예가 옛날에 언제 있기라도 했던가. 이는 참으로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면서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경상 비용을 축내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위로는 대내(大內)의 음식물 공급에서부터 중간으로는 수행한 관원들의 노자와 아래로는 군마(軍馬)와 여도(輿徒)의 식량·사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리소에서 마련해 내도록 한 것이니, 그래서 10만 꿰미의 돈을 특별히 내려주어 그런대로 충당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한 액수를 가지고 이만한 일을 치뤄내자면 오히려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행차를 서울로 돌리려 하는 시점에서 수형(水衡)075) 에 아직 남은 것이 있게 되었다. 이를 대농(大農)076) 에 귀속시켜 몇 달치의 비용으로 쓰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전국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데에 쓰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 액수대로 곡물을 마련하여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이라 명명하고, 3백 주현(州縣)에 나누어 유치(留置)시킨 다음 매년 이자를 취해 늘려나갈 경우 거의 수만 포(包)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자궁이 베푸는 은혜를 입게 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저축하여 영구히 전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이 곡물을 가지고 농사짓고 수확하여 공사(公私) 간에 모두 풍요롭게 쓰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은혜를 넓혀 시행하는 뜻이 얼마나 크게 되겠는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는 그 뜻을 따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뜻을 따르는 것으로는 은혜를 널리 베푸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아, 그대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서 잘 알아듣고 삼가 이 일을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화성(華城)의 축성 공사를 감독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
총리사(摠理使)인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감독한 신하로서 당상관인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심태(趙心泰)는 가자(加資)해 주고,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에게는 안에서 갑주(甲胄)를 하사하고, 책응한 도청인 수원 판관(水原判官) 정동협(鄭東恊)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특별히 감독한 독성 중군(禿城中軍) 김후(金㷞)는 곤수로 의망(擬望)케 하고, 부사(府使) 이방운(李邦運) 등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윤2월 14일 병신
신풍루(新豊樓)에 거둥하여 사민(四民)에게 쌀을 나눠주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먹여주었다. 【수원부의 사민 5백 39구(口)에게 미곡 1백 98석(石) 10두(斗)를 주고, 진휼(賑恤) 대상인 백성 4천 8백 13구에게 미곡 1백 69석 9두(斗) 7승(升)과 소금 12석 12두 9승 9합(合)과 죽을 쑬 미곡 9석 9두 2승과 미역 9백 25립(立)과 간장 1석 12두 7승 4합을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59면
【분류】왕실(王室) / 구휼(救恤)
낙남헌(洛南軒)에 거둥하여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행궁(行宮) 정전(正殿)의 북쪽 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정리소(整理所)에서 악대(樂隊)를 앞뜰의 남쪽 가까운 곳에 북쪽을 향하여 진열해 놓고, 선전관이 깃발드는 자리를 서쪽 섬돌 위 동쪽 가까운 곳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본 고을에서 노인들의 좌석을 낙남헌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였다.
행사 당일에 상이 낙남헌으로 가서 자리에 오르자 선전관이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고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자 연주를 그쳤다. 근시(近侍)와 일을 집행하는 관원들이 먼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행차를 따라온 노인인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15인과 일반 서민인 노인 3백 74인이 차례로 뜰에 들어왔다. 찬의(贊儀)가 ‘국궁(鞠躬)’ ‘재배(再拜)’를 외쳤다. ‘흥(興)’ ‘평신(平身)’에 이르렀을 때 노인들이 지팡이를 놓고 몸을 굽혔는데 이때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노인들이 절하는데 한 번 앉아서 두 번 머리를 숙이고 일어나 몸을 펴자 연주가 그쳤다.
인의(引儀)가 전(殿)에 올라올 노인들을 나누어 인도해서 동쪽과 서쪽 섬돌로 올라와 들어오려 할 즈음에 상이 이르기를,
"나도 노인들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좌탑(座榻)을 악차(幄次)077) 의 앞에 설치함으로써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였다.
홍낙성·채제공(蔡濟恭)·김이소(金履素)·이명식(李命植)·이민보(李敏輔)·심이지(沈頤之)·이조원(李祖源)·서유신(徐有臣)·조윤형(曺允亨)이 차례차례 지팡이를 짚고 전각으로 올라왔다.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상에게 아뢰면서 노인들을 위해 일어나라고 청하였다. 상이 탑(榻) 위에서 일어섰다가 도로 자리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누런 명주 수건을 나누어 주어 노인들의 지팡이 손잡이에 매게 하고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였다.
악사(樂師) 2인이 동쪽과 서쪽 섬돌로 올라와 기둥 밖까지 와서 멈춘 뒤 북쪽을 향해 서서 화일곡(化日曲)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길고 긴 봄날, 지팡이 짚고 늙은이들 천천히 오네. 조정에서 뽑혀 온 신하도 있고 시골에서 온 노인도 섞여 있구나. 노인들 헝클어진 누런 머리칼, 임금이 웃으며 바라보시네. 그대들 어찌 알랴, 자궁이 내려주신 은택인 것을. 하늘의 복을 받은 우리의 자궁, 어느새 회갑을 맞이하셨네. 그 교화 두루두루 펼쳐졌나니, 집마다 나이 많은 늙은이일세. 임금님 어버이 뜻을 받들어 조상의 묘소를 찾아 왔어라. 성대한 연회 차려 드리니, 한 고을 온통 그 은혜 입었도다. 노인들 실컷 먹고 취하여 절하며 나름대로 정성 바치네. 바치는 그 정성 무엇이던가, 부디 오래 사시도록 비는 것일세."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지었다.】 상이 거문고와 비파의 연주를 명하니, 악공과 가인(歌人)이 섬돌에 올라와서 먼저 천보(天保)를 연주한 다음에 관저(關雎)와 녹명(鹿鳴)을 연주하였다. 정리사(整理使)가 수건과 술 그릇을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고 올리기를 마치자 연주를 그쳤다. 음식을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고 일을 진행하는 자들이 노인들의 음식을 차리자 연주를 그쳤다.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니 일을 진행하는 자들이 노인들에게 꽃을 뿌렸으며 그 일이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상이 이르기를, "백발 노인들이 자리에 가득하고 검버섯 돋은 이들이 뜰을 온통 채웠으니, 이날 이 저녁이야말로 노인들 세상이라 하겠다. 어제 모두에게 꽃을 꽂아주기는 하였다마는 오늘 반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꽃을 하나씩 더 꽂아줌으로써 보통이 아닌 성대한 모임임을 알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리사가 첫 번째 잔을 올리려 하자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와 같은 경사스러운 모임을 맞이하여 선물을 주시는 은혜가 신들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구구하나마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고 싶은 마음이 배나 더 절실해집니다. 술잔을 따라 올리며 축하드리는 의리를 따라서 만세를 불렀던 예(禮)078) 를 본받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늙은이들 중에서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며 올리는 술잔을 신이 가장 먼저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경이 맨 먼저 하고 그 다음은 우상 그 다음은 영돈녕, 그 다음은 판부사 이하 3중신(重臣)이 각각 한 잔씩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홍낙성이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樂賓樂)의 녹명(鹿鳴)·천보곡(天保曲)을 연주하였다. 상이 일어나서 잔을 받았다. 채제공이 두 번째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의 관저(關雎)·작소(鵲巢)를 연주하였다. 김이소가 세 번째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의 남유가어(南有嘉魚), 남산유대곡(南山有臺曲)을 연주하였다. 이명식과 이민보와 심이지가 차례로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의 성대한 행사는 천 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태평성대에 늙은이들이 오래 산다는 말을 옛 글에서나 보다가 지금 다행히 직접 보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하게끔 변화된 것도 자궁의 덕에 말미암은 것이고 노인들이 배불리 먹고 취하게 된 것도 우리 자궁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오늘 노인들이 술잔을 올리며 오래 살기를 축원하는 것 모두를 자궁의 덕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상이 직접 지은 시(詩) 한 편을 써서 내려 홍낙성에게 낙남헌(洛南軒)에 게시하도록 하고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음식을 하사받은 노인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다. 노인들의 음식 상을 치우라고 명하였다. 이에 남은 음식들을 각기 싸가지고 나갔다가 모두 배위(拜位)로 돌아오니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노인들이 절을 하는데, 한 번 앉았다가 두 번 머리를 숙이고 일어나 몸을 펴기를 처음 했던대로 하자 연주를 멈췄다.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서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59면
【분류】왕실(王室) / 윤리(倫理)
[註 077] 악차(幄次) : 장막을 친 임금의 임시 휴게소.[註 078] 만세를 불렀던 예(禮) :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라가 봉제(封祭)를 올릴 때 어디선가 만세(萬歲)를 삼창(三唱)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고사를 말함.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상이 거문고와 비파의 연주를 명하니, 악공과 가인(歌人)이 섬돌에 올라와서 먼저 천보(天保)를 연주한 다음에 관저(關雎)와 녹명(鹿鳴)을 연주하였다. 정리사(整理使)가 수건과 술 그릇을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령(與民樂令)을 연주하고 올리기를 마치자 연주를 그쳤다. 음식을 올리니 악대가 여민락 만(與民樂慢)을 연주하고 일을 진행하는 자들이 노인들의 음식을 차리자 연주를 그쳤다. 악대가 여민락 령을 연주하니 일을 진행하는 자들이 노인들에게 꽃을 뿌렸으며 그 일이 끝나자 연주도 그쳤다. 상이 이르기를,
"백발 노인들이 자리에 가득하고 검버섯 돋은 이들이 뜰을 온통 채웠으니, 이날 이 저녁이야말로 노인들 세상이라 하겠다. 어제 모두에게 꽃을 꽂아주기는 하였다마는 오늘 반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꽃을 하나씩 더 꽂아줌으로써 보통이 아닌 성대한 모임임을 알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리사가 첫 번째 잔을 올리려 하자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와 같은 경사스러운 모임을 맞이하여 선물을 주시는 은혜가 신들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구구하나마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고 싶은 마음이 배나 더 절실해집니다. 술잔을 따라 올리며 축하드리는 의리를 따라서 만세를 불렀던 예(禮)078) 를 본받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늙은이들 중에서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며 올리는 술잔을 신이 가장 먼저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경이 맨 먼저 하고 그 다음은 우상 그 다음은 영돈녕, 그 다음은 판부사 이하 3중신(重臣)이 각각 한 잔씩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홍낙성이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樂賓樂)의 녹명(鹿鳴)·천보곡(天保曲)을 연주하였다. 상이 일어나서 잔을 받았다. 채제공이 두 번째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의 관저(關雎)·작소(鵲巢)를 연주하였다. 김이소가 세 번째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낙빈악의 남유가어(南有嘉魚), 남산유대곡(南山有臺曲)을 연주하였다. 이명식과 이민보와 심이지가 차례로 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니 악대가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번갈아 연주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의 성대한 행사는 천 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태평성대에 늙은이들이 오래 산다는 말을 옛 글에서나 보다가 지금 다행히 직접 보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하게끔 변화된 것도 자궁의 덕에 말미암은 것이고 노인들이 배불리 먹고 취하게 된 것도 우리 자궁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오늘 노인들이 술잔을 올리며 오래 살기를 축원하는 것 모두를 자궁의 덕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상이 직접 지은 시(詩) 한 편을 써서 내려 홍낙성에게 낙남헌(洛南軒)에 게시하도록 하고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음식을 하사받은 노인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다. 노인들의 음식 상을 치우라고 명하였다. 이에 남은 음식들을 각기 싸가지고 나갔다가 모두 배위(拜位)로 돌아오니 악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였다. 노인들이 절을 하는데, 한 번 앉았다가 두 번 머리를 숙이고 일어나 몸을 펴기를 처음 했던대로 하자 연주를 멈췄다.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서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었다.
상이 옹성(甕城)을 두루 관람하고 장안문(長安門) 누각에 올라갔다가 도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가서 용연(龍淵)을 굽어본 뒤에 도로 낙남헌 길을 따라 안으로 돌아왔다.
상이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을 쏘고 매화포(埋火砲)를 관람하였다.
윤2월 15일 정유
상이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행차를 서울로 돌렸다. 사근(肆覲) 행궁에서 잠시 머물러 점심 수라를 들고 밤에 시흥(始興)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윤2월 16일 무술
상이 혜경궁을 모시고 용양(龍驤) 봉저정(鳳翥亭)에서 잠시 머물러 점심 수라를 들고 환궁하였다.
행차가 시흥을 지날 때 부로(父老)를 불러 보고 백성의 고통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하교하기를,
"그냥 보통으로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풀 방도를 생각해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더구나 오늘의 경우는 자궁의 행차를 모시고서 재차 시흥 행궁에서 묵기까지 하였고 돌아가는 길이 모두 편안하기만 한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사스럽고 다행스럽게만 느껴지는 나의 마음으로 볼 때 백성들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시흥 백성들을 위해 반드시 요역(徭役)을 견감해 주고 폐단을 제거해 줌으로써 자궁의 은혜를 펼쳐 보여주는 동시에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더구나 행차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그저 행차의 위의(威儀)를 구경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은택을 입고자 기대하는 심정들이라 할 것이다. 그들이 이미 행차를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들을 불러 물어보게 된만큼 정말 고질적인 병폐와 제거해야 할 폐단이 있다면 숨김없이 모두 진술토록 하라."
하고, 이어 지난해 추수 때 상환 기한을 연기시켜 주었던 환곡(還穀)을 일체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수원부 성역(城役)을 총리(摠理)한 대신 채제공(蔡濟恭)에게 유시하였다.
"이번에 화성(華城) 백성들에게 햇수를 늘려 급복(給復)해 주는 것과 노인들에게 가자(加資)하는 교지를 내려주는 일에 대해서는 경이 조정에 돌아오기 전에 유수(留守)와 상의해서 즉시 효유(曉諭)하기도 하고 더러 나눠주기도 하도록 하라. 그리고 현륭원(顯隆園) 아래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성곽 안팎에 사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경이 유수와 함께 가서 전교(傳敎)의 본뜻을 하나하나 효유해 주도록 하라.
매번 현륭원을 참배하고나서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당도할 때면 고삐를 멈추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하였다. 이번 행차에서 미륵현의 윗쪽에 앉은 자리를 빙 둘러 대(臺)처럼 되어 있는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이 뒤로는 행행(幸行)하는 노정(路程)에 미륵현 아래에다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할 일을 본부(本府)와 정리소(整理所)에서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
서유린(徐有隣)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천 년을 가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맞이하여 국조(國朝)에서 처음 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백관이 술잔을 올리고 노인들이 장수하기를 축원하였는데 행행(幸行)한 8일 동안 자궁의 행차가 편안하기 그지없었으니 이보다 더 큰 국가의 경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쁘고 다행스럽기만 한 지금의 나의 심정으로 볼 때 자궁의 행차를 수행하고 호위한 사람들이라면 비록 말단 관리나 하인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그 수고에 보답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 더구나 정리소의 신하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또 나아가 정리소를 설치한 목적이 경상 비용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계속 조처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는데, 백관을 관장하는 사무를 진행시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개월 동안이나 명을 받들어 집행해 왔고 보면, 그 체모의 중대함이 정리사(整理使)를 으레 겸했던 경우와는 더더욱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낭청(郞廳)과 아전, 장교와 나졸(羅卒)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다니면서 각자 정성을 바쳤는데, 이것 역시 모두가 자궁의 덕이 미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니 자궁의 뜻을 받들어 보답하고 격려해야 할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어찌 일반적인 의전(儀典)만 따를 수 있겠는가.
총리(摠理)한 대신 의정부 우의정 채제공(蔡濟恭)과 술을 따라 올린 대신 의정부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匹)을 면급(面給)하라. 정리소 당상인 행 사직(行司直) 심이지(沈頤之)와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과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와 행 부사직 서유대(徐有大)·서용보(徐龍輔)·윤행임(尹行恁)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을 면급하라. 음식상을 담당한 당상인 경기 감사 서유방과 호조 판서 이시수와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심태(趙心泰)와 행 부사직 서유대, 그리고 수건을 올린 당상인 행 부사직 서용보와 꽃을 올린 당상인 행 부사직 윤행임, 그리고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심이지 등에게는 모두 반숙마(半熟馬) 1필을 사급(賜給)하라.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시상하라."
윤2월 17일 기해
연경(燕京)에서 돌아온 서장관(書狀官) 정상우(鄭尙愚)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첫째, 저쪽 지역의 지난해 농사는 관내(關內)와 관외(關外)를 막론하고 모두 엄청난 흉작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각성(各省) 역시 모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명하여 진휼(賑恤)해 주고 견감시켜 주도록 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한 것을 모조리 탕감해 준 것만도 그 액수가 은(銀)으로 수만 냥(兩)이나 됩니다. 그리고 각 성(省)에서 물난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에는 기와집은 한 칸당 은 5전(錢)을 주고 초가집은 한 칸당 은 3전을 주어 다시 집을 짓고 살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황제가 내년에 제위(帝位)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중외(中外)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를 계승할 사람은 분명히 속으로 결정해 놓았을 것이라고들 말하기에 역관들을 시켜 조사(朝士)와 민간을 통해 알아보게 하였더니 거의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대체로 듣건대 황제의 열다섯째 아들인 가친왕(嘉親王) 영염(永琰)이 사람됨이 침착하고 일처리가 강명(剛明)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야(朝野)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였습니다. 올해 1월 2일에 황제가 내외의 자손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모두에게 상을 주었는데, 유독 영염에게만은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야 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더욱 여론이 영염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각로(閣路) 화신(和珅)은 권세가 막강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주는 행위가 성행하고 있으며 일반 관직에도 모두 정가(定價)가 매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아들들이 모두 말하기를 ‘화신의 집 재산을 모두 가질 수만 있다면 천자도 귀할 것이 없다. 연전에 일어난 돈 문제도 화신이 훼방을 놓아 그렇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넷째, 근래 저쪽 나라는 법 질서가 많이 문란해져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도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각 창고를 지키는 관원들이 공무를 핑계대고 개인의 이익만 도모하고 있기 때문에 비단에도 규격에 미달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금과 은 역시 다른 물건으로 대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황제가 하사하는 물건을 시장에서 사오기까지 하는 형편인데, 내고(內庫)에 소장된 물품은 모조리 담당 관원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이 관청의 책임자들과 결탁하여 아문(衙門)을 드나드는 행위는 원래 저쪽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봄에 회서(淮西)와 회남(淮南) 사이에서 왕조태(汪肇泰)와 홍광순(洪廣順)이란 자가 염정사(鹽政司)를 왕래하며 불법 행위를 많이 저지르다가 법관에게 적발되어 장차 중률(重律)을 적용받게 되었는데, 조태와 광순이 은을 바치고 속죄(贖罪) 받기를 원하자 각각 은 10만 냥씩을 벌금으로 부과해 후일의 경계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벌금은 내무부(內務部)에 바치게 해 공적인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그 대신(大臣)이 바로 화신(和珅)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신이 재간을 부리면서 부국 강병(富國强兵)을 핑계대고 오로지 아래에서 거두어들여 위를 살찌게 하는 것만을 일삼았으므로 부유한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습니다."
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유학(幼學) 김응일(金應一) 등이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영흥(永興)의 본궁(本宮)은 바로 우리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옛날 저택이 있었던 곳인 동시에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탄강(誕降)하신 곳인데, 우리 환조 대왕께서 그 후비(后妃)와 함께 이곳에 집터를 정하고 왕업(王業)을 일으킬 발판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조(聖祖)께서 임금이 되시리라는 비기(秘記)079) 와 이승(異僧)이 점(占) 풀이를 했던 자취080) 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서로 전해오면서 세월이 오래 흘러도 어제 일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운 공적을 말해 주는 유적이 천 년토록 영원히 남아 있어 우리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있으니, 우리 국가에 있어 이 터전이야말로 마치 주(周)나라의 빈(邠)이나 기(岐), 그리고 한(漢)나라의 풍패(豊沛)와 정말 똑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태조 대왕의 영정(影幀)을 이미 준원전(濬源殿)에 봉안(奉安)해 놓았고, 태조 대왕의 위판(位版) 및 신의(神懿)·신덕(神德) 두 분 성비(聖妃)의 위판도 모두 본궁에 봉안해 놓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유독 오르내리는 환조 대왕의 혼령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은(殷)나라에서 제곡(帝嚳)에게 체(褅) 제사를 지냈던 것이나 주(周)나라에서 강원(姜嫄)에게 제사를 지냈던 예법과도 이미 다를 뿐더러 유적지에 제사를 올리는 아조(我朝)의 성대한 뜻에 비추어 볼 때에도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환조 대왕과 의혜 왕비(懿惠王妃)를 본궁에 추향(追享)하는 한편 태조 대왕 및 신의·신덕 두 성비를 한 궁(宮)에서 함께 제사드리게 되면, 그런대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혼령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게 될 뿐더러 그야말로 옛날 저택에 본궁을 설치한 본래의 의도에 합치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영흥 본궁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한 책자(冊子)에 전사청(典祀廳)의 옛 사실을 기록한 것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선대왕(先大王) 을사년081) 4월에 전사청을 중건(重建)할 때 옛날 청사(廳舍)를 철거하고 보니 예전의 대들보에 먹으로 쓴 글씨가 완연히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홍무(洪武) 29년인 병자년082) 에 창건하였고, 숭정(崇禎) 5년의 임신년083) 에 중건하였으며, 강희(康熙) 4년인 을사년084) 에 다시 중수(重修)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연조(年條)에 의거하여 주의깊게 따져 보았더니, 홍무 병자년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때는 오래 사시리라는 기대가 한창 끝이 없었을 때였고 보면, 자신을 대상으로 제사드리며 제수(祭需)를 차리는 전사청을 미리부터 건립하셨을 리는 없으니, 이는 필시 우리 태조께서 환조를 위하여 본궁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렸던 곳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병란(兵亂)을 겪는 통에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게 되자 환조를 제사드리는 예를 단지 구전(舊傳)에 의해서만 거행한 채 지금까지도 태조에게만 국한하여 예법대로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으니, 조가(朝家)의 사전(祀典)에 얼마나 흠이 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올해 을묘년은 환조가 탄강하신 뒤로 거듭 회갑을 맞이하는 해로서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환조께서 왕업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자취를 다시 돌아보시고 태조께서 전사청을 설치하신 효성스러운 뜻을 추모하시어 제사드리는 예법을 다시 마련하심으로써 영구히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성상께서 선대의 뜻을 효성스럽게 계승하시고 한편으로는 신민들이 기대해 마지않는 소망을 위로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태조 대왕께서 탄생하신 옛 저택에서 환묘(桓廟)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예로 볼 때에도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더러 그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문적(文蹟)도 나와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더구나 올해와 같은 때를 당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그지없이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다. 만약 올해의 감흥을 계기로 하여 환묘 이상의 신위(神位)에 대한 의절(儀節)을 마련하기로 한다면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 예조로 하여금 널리 상고한 뒤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2월 19일 신축
두 분의 성조(聖祖)가 개선하고 머물렀던 정주(定州) 달천(㺚川)의 옛터에 비석을 세우고 사적(事蹟)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김사목(金思穆)이 정주의 유학(幼學) 고인기(高仁基)가 ‘정주 달천은 태조(太祖)가 개선한 곳인 동시에 선조(宣祖)가 행차를 머물렀던 사적지’라고 상소한 것과 관련, 당해 목사(牧使)의 첩보(牒報)에 따라 널리 상고해서 보고드리니, 하교하기를,
"호남(湖南)의 팔량치(八良峙), 해서(海西)의 약마지(躍馬池), 관서(關西)의 이화정(利花亭), 북관(北關)의 독서당(讀書堂)·치마대(馳馬臺)에 혹은 비석을 세우고 혹은 누각을 설치하여 먼 조상을 추모하는 뜻을 붙였던 것에 대해서는 열조(列朝)께서 이미 행하신 사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정주 달천의 승첩지(勝捷地)와 행차를 머무신 곳에 대해서만 어찌 유독 사적을 기록하는 일을 빠뜨려 둠으로써 그 고을의 부로(父老)와 인사(人士)들이 자기들끼리만 알고 전해오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회계한 대로 시행토록 하라. 비석에 써 넣을 글은 입시(入侍)하는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심획(心畵)이 진실하여 요즘의 방정맞은 글씨체와 같지 않은 경우는 오직 이만수(李晩秀)에게서 볼 수가 있으니, 비석의 글씨는 검교(檢校) 직각(直閣) 이만수에게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윤사국(尹師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이어 체차(遞差)하고,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운(李鼎運)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유학(幼學) 김응일(金應一)이 상소한 데 따라, 해조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보고토록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원묘(原廟)의 제도는 한(漢)나라 때부터 비롯되었는데 혹은 군국(郡國)에 행차했을 때의 지역이나 혹은 원침(園寢)이 있는 곳에 설치하면서 대대로 이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가령 송(宋)나라의 신어전(神御殿)도 원묘의 옛 제도를 적용한 것이었으며, 송 진종(宋眞宗) 5년에 성조(聖祖)가 강림하신 곳이라 하여 경령궁(景靈宮)을 지은 것이나 아조(我朝)에서 본궁(本宮)을 창설한 것도 모두 이러한 의리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흥(永興)의 본궁으로 말하면, 우리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잠저(潛邸)로서 우리 태조 대왕께서 탄생하신 곳이기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제사를 지내오면서 예에 어긋나지 않게 해 오고 있습니다만, 유독 우리 환조 대왕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사전(祀典)을 거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미처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우리 숙종(肅宗)병자년085) 에 북평사(北評事) 민진후(閔鎭厚)가 서계(書啓)한 것을 계기로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비로소 이 궁에 부묘(袝廟)했었는데, 그때 임금이 직접 지은 제문(祭文) 가운데에 ‘저 영흥을 바라봄에 묘의(廟儀)가 엄숙하기만 합니다. 태조 대왕께서 탄생하신 경사가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는데, 더구나 지난해는 회갑의 주기를 맞은 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는 구절이 있었고 보면, 숙종께서도 탄생하신 해를 거듭 맞아 감흥을 일으키셨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성조(聖祖)께서 탄생하신 여덟 번째 회갑을 맞아 이미 심향(心香)을 전달하고 향기로운 제수(祭需)를 새로 올린만큼 이 해를 기점으로 추향(追享)하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먼 조상을 추모하고 선대(先代)의 업적을 빛나게 해야 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 일일 듯합니다.
그런데 가령 비지(批旨)에서 언급하신 바 ‘환묘(桓廟) 이상의 신위(神位)에 대한 의절(儀節)’ 문제를 말씀드린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지금 이 본궁이 일단 환조께서 옛날에 거주하셨던 집이고 태조께서 탄생하신 곳인만큼 두 분 성조를 이 궁에서 함께 제사드리는 것이야말로 한나라와 송나라의 옛 제도에 비추어 볼 때 부합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환묘 이상의 신위로 말하면 이미 어떠한 의리도 취할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두 분 성조에게 잠저가 되고 탄생지가 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감히 무턱대고 의논드릴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상소문에 판하(判下)한 것이 1백 27건이나 되었다.
윤2월 20일 임인
이문원(摛文院)에 거둥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각신(閣臣)·문임(文任)·춘추관 당상·삼사의 장관들을 소견(召見)하고 환조 대왕(桓祖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 본궁에 추향(追享)하는 예를 의정(議定)하였다. 위판(位版)은 본궁에서 조성하고, 여름철 첫째 달에 길일(吉日)을 택한 뒤 도신으로 하여금 두 본궁에 고유제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24일에 태묘(太廟)에 가서 고유제를 직접 거행한 뒤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영흥의 본궁에 대한 막중한 의문(儀文)과 관련, 북쪽 지방 유생이 상소한 데에 따라 예조가 회계(回啓)하였기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었는데, 어젯 밤 꿈에 마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곡진하게 타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만약 하늘에 계신 조상들의 혼령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어리석기만 한 나로서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었겠는가. 날이 밝는 대로 옷을 차려 입고 뭇 의견을 들어 결정지으려 하니, 시임 대신·원임 대신·각신·문임·삼사 장관들 모두 와서 대기토록 하라. 내가 마땅히 진전(眞殿) 근처로 가서 소견(召見)하고 의정한 뒤에 진전을 참배할 것이니, 해방(該房)은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이문원에 나아가서, 춘추관 당상 민종현(閔鍾顯)·심환지(沈煥之)·서용보(徐龍輔) 등을 춘추관으로 보내어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보고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종현 등이 아뢰기를,
"숙종 대왕(肅宗大王) 21년인 을해년 12월 19일 정미에 소대(召對)하였을 때 시독관(侍讀官)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함흥 본궁은 바로 태조 대왕의 잠저(潛邸)인데, 익조 대왕(翼祖大王)으로부터 태조 대왕에 이르기까지 4조(祖)의 위판(位版)을 여기에 봉안하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한(漢)나라 때의 원묘(原廟)의 제도를 본뜬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지 않고 향사(享祀)하는 절목(節目)을 내사(內司)에서 마련토록 하였는데 이렇게 하도록 한 조종(祖宗)의 은미한 뜻이 분명히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체(事體)로 볼 때 태묘와 다른 점이 없고 보면, 어찌 내사의 소관이라 하여 사전(祀典)을 바로잡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袝廟)한 지 지금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본궁에는 아직 추부(追袝)하지 않았고 영흥의 본궁 역시 그러하니, 어찌 미안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신이 모두 진후의 말이 옳다고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같은 달 28일 병진에 상이 함흥과 영흥의 두 본궁에 신덕왕후를 추부(追袝)하는 제문을 직접 지어 보내면서 하교하기를 ‘함흥과 영흥의 두 본궁에 제사드리는 일을 예전에는 따로 차지(次知)를 보내 거행하게 하였고 제문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신덕 왕후를 추부하는 예를 일단 바깥 조정에서 진달해 온 데 따라 거행하게 되었고 또 본도 감사를 제주관(題主官)으로 삼게 된 이상 사체의 중대함이 예전과는 자별하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두 본궁의 제문을 직접 지어서 보내는 것도 사체를 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제물(祭物)은 별차(別差)로 하여금 예전대로 차리게 하고, 헌관(獻官)으로는 본도 감사를 임명하고, 집사(執事)들은 본 고을 수령 및 참봉을 임명토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등대(登對)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내린 전교 및 유생의 상소와 이에 덧붙여 아뢴 예조의 계사(啓辭)를 경들은 모두 상세히 보았는가.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사전(祀典)에 관한 하나의 일이다. 함흥과 영흥 두 본궁의 향사(享祀) 의절(儀節)에 대해서는 연전에야 비로소 절목을 정하고 의식(儀式)을 엮어 만들었었고, 올해는 바로 환조께서 탄강하신 지 여덟 번째 회갑을 맞는 해인데 겨우 대신을 보내 향사를 섭행(攝行)하게 함으로써 먼 조상을 추모하는 나의 뜻을 조금 표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북쪽 지방 유생의 상소가 마침 도성으로 돌아왔던 때에 이르렀는데, 그 말에 근거가 있었고 예(禮)의 측면에서도 타당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먼저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였는데, 예판(禮判)의 말을 보니 또 고사(故事)를 널리 인용하면서 거행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실로 국가로 볼 때 더없이 중대한 예전(禮典)에 속하는 일이라 할 것이니, 열조(列朝)에서 지금까지 강구하여 행하지 않아 온 것이 어찌 다만 그럴 겨를이 없어서였겠는가. 그래서 중히 여기고 신중을 기해야 할 듯하기에 즉시 결정을 짓지 못한 채 그저 관례대로 비답을 내려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토록 한 것인데, 이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기는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그럼에도 결단을 내려 행하기에는 감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지난밤에 꿈을 꾸니 곡진하게 이끌어주시며 가르쳐주신 것이 한두 번 뿐이 아니었는데 이 일이 견강부회하는 것이 될 듯도 하여 자세히 일러주지는 못하겠다만, 옛날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광무(光武)를 배알한 뒤에 그날 능(陵)으로 올라가서 오르내리는 혼령과 가까이 접하면서 한 이치로 감통(感通)했던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꿈에 나타난 일을 본래 황당무계한 일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지는 점이 있기에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특별히 경들을 불러 의논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옛날 선조(先朝) 때에 직접 법전(法殿)에 거둥하시어 조경묘(肇慶廟)의 의절(儀節)을 의논해서 정하셨던 일이 있기에 이번에도 선대의 뜻을 받든다는 뜻에서 진전(眞殿)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문원으로 자리를 옮겨 경들을 불러서 의논해 정한 다음 진전을 참배할 작정이다.
위판(位版)을 조성하는 하나의 문제로 말하면, 만약 조경묘에 봉안하는 의례를 따를 경우에는 별전(別殿)에서 조성한 다음에 연여(輦輿)와 의위(儀衛)를 갖추어 성 밖까지 배행(陪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궁의 사체는 원묘(原廟)와는 조금 차이가 나는 만큼 의문(儀文)을 너무 번거롭고 화려하게 한다면 ‘예를 간소하게 하면서 뜻을 참되게 해야 한다.’는 뜻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춘추관에 소장된 실록에서 상고해 낸 내용을 살펴보건대, 숙묘(肅廟) 을해년에 신덕 왕후를 본궁에 추부(追袝)할 때 도신(道臣)으로 제주관(題主官)을 삼았다고 했고 보면 위판을 본도(本道)에서 조성했음을 알 수가 있으니, 오늘날에도 바로 그 뜻을 계승해서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을해년은 태조 대왕께서 탄강하신 해이고 올해는 또 환조 대왕께서 탄강하신 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이 이미 서로 부합되고 예를 또한 본떠 행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더욱 세상에 보기 드문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각각 추부해야 할지의 여부 및 위판을 어디에서 조성해야 할지에 대해서 의견을 진술토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상고(上古) 시대에는 내용을 중요시했고 중세(中世) 이후로는 내용과 형식 양면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만, 시대에 따라 온당하게 조처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영흥의 본궁에 지금까지 추향(追享)을 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시왕(時王)086) 의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 뒤로 성스러운 임금들이 계속 뒤를 이어 나와 의문(儀文)이 크게 갖추어지고 부족하거나 빠진 전례(典禮)를 보충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조경묘에 처음 봉안하게 된 것 역시 간절한 심정에서 발로되어 행동으로 옮긴 것이고 보면 심정이 우러나오게 되면 바로 그에 따른 의식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금년에 마침 성조께서 탄강하신 지 여덟 번째 회갑을 맞았고 보면 지금에 와서 추향하는 것이야말로 심정적으로나 예법으로나 합당하다 할 것입니다.
삼가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듣고 보니, 전하의 정성이 위로 오르신 결과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셔서 한 이치로 감통(感通)시켰다는 것을 알겠기에 더욱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격동됩니다. 속히 성명(成命)을 내리시어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의 본래의 뜻으로 말하면 의절(儀節)을 성대하게 하는 데에 있지는 않으니 복잡하게 하려 하지 말고 가능한 한 간소하면서도 엄숙하게 하는 것이 실로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판을 조성하는 절목에 대해서는, 숙묘조(肅廟朝)에 신덕 왕후를 추부할 때 도신을 제주관으로 삼았고 보면 위판을 본궁에서 조성했다는 것을 유추해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사가(私家)에서의 예를 보더라도 혹 사당의 신위를 추가로 조성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마땅히 묘소에서 행해야 한다는 선유(先儒)의 정론(定論)까지 나와있는데, 이는 실로 정미로운 의리가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본궁을 보면 또 능침(陵寢)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이곳에서 조성토록 하는 것이야말로 예의 본뜻에 더욱 합치된다고 할 것입니다."
하고, 다른 신하들도 같은 내용으로 의논을 드리니, 하교하기를,
"올해로 말하면 성조께서 탄강하신 해이고 이 본궁으로 말하면 성조께서 왕업의 기틀을 닦으신 곳이다. 향기로운 제향을 태조 대왕에게만 올리고 환묘의 위판에 대해서는 아직껏 함께 제향을 올리지 않아 왔는데, 이는 필시 국가의 예로 볼 때 지극히 중한 일이기 때문에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려워서 그랬던 것일 뿐일 것이다. 나 역시 유생의 상소가 올라오고 예조의 회계가 잇달아 올라왔어도 너무 중대하고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라서 감히 갑자기 의논해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조상의 혼령께서 곡진하게 이끌어 가르쳐 주시면서 꿈속에까지 나타나 우둔한 나를 깨우쳐 주셨다. 대저 예라는 것이 본디 심정에 근거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기 역시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늘 마음속으로 못잊어 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조종(祖宗)의 마음을 체득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날이 밝자 옷을 찾아 입고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 접견했던 것인데 신하들의 의논 역시 순일하여 다른 말이 없었다. 이것을 일컬어 대동(大同)이라고 하는 것이니, 《서경》에 ‘너의 마음에도 합당하고 거북점도 부합되고 시초점도 일치하고 경사(卿士)도 따르고 서민(庶民)도 순종하면 너의 몸이 강령해지고 자손도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리(情理)에 부합되면 예에 합치되는 것이고 예에 합치되면 또 어디에 질정해 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올해 이 예를 거행하는 것이, 숙조(肅祖) 을해년에 고 유신(儒臣) 민진후의 건의를 채택하여 특별히 태조께서 탄강하신 해에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배(追配)하는 의식을 강구한 기왕의 사례와 부합되는 점이 있고 보면, 어찌 더더욱 희귀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위판을 조성하는 절목이야말로 가장 공경스럽게 마련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숙묘의 실록에서 상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본궁에서 위판을 조성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생각건대 《예기》에 ‘대종(大宗)의 집안에서 시조(始祖)가 친진(親盡)087) 이 될 경우에는 그 신주를 묘에 보관하고 해마다 종인(宗人)을 이끌고 가서 제사지내며 백세토록 바꾸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선유(先儒)가 해설하기를 ‘그 묘소에는 반드시 사당이 있게 마련이다.’ 하였고, 선정(先正) 역시 ‘신주를 묘에 보관한다는 것은 묘에 사당이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궁은 본릉(本陵)과도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까우니 이곳에서 위판을 조성한다 해서 의리상으로 안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좌상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내용이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일치가 되니 정말 말하지 않았어도 깨달은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성대한 예를 거행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환조 연무 성환 대왕(桓祖淵武聖桓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의 본궁에 추배(追配)토록 하고, 행해야 할 의절(儀節)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강정(講定)해서 보고토록 하라. 그리고 길일(吉日)을 여름철 첫달 가운데에서 가려 뽑아 먼저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함흥과 영흥의 본궁에 고하도록 하라. 이 예야말로 조종(祖宗)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것인만큼 우러러 생각건대 하늘에 계시는 태조 대왕의 혼령께서도 아마 강림하셔서 기뻐하실 것이다. 이달 24일에 내가 삼가 태묘(太廟)에 가서 직접 고하는 의식을 거행해야 하겠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정전(正殿)에 임하여 중외(中外)에 교서를 반포할 것이니, 이 모든 내용에 대해서 예조로 하여금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환묘(桓廟)를 추향(追享)하는 데 따른 경사스러운 과거 시험을 다섯 가지 경사스러운 과거 시험과 합쳐 실시하면서 정시(庭試)의 이름을 6경(六慶)이라고 부르라고 명하였다.
윤2월 21일 계묘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현륭원(顯隆園) 행차 때 수행한 장사(將士)들을 호궤(犒饋)하였다.
윤2월 22일 갑진
동지사 서장관 심흥영(沈興永)을 소견(召見)하였다. 흥영이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저쪽 지역의 농사 상황을 보건대, 지난해 봄과 여름 사이에는 비가 적게 내린데다가 가을철에는 오래도록 장마가 진 관계로 관내(關內)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벌거숭이 땅이 되어 미곡 값이 예년의 배나 뛰어올랐고, 관외(關外) 역시 흉년을 면치 못해서 길가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 붉은 옷을 입은 죄인들이 쇠사슬에 목을 묶인 채 길에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 도적질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 지난 여름에 직례성(直隷省)에 큰 가뭄이 들었으므로 황제가 강주(江州)와 광주(廣州)에서 뱃길로 운반해 온 60만 석의 곡식을 떼어 주도록 명하고, 또 부고(部庫)에서 은(銀) 80만 냥을 꺼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토록 했다고 합니다.
1. 지난해 5월에 가뭄 때문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하였는데도 예부(禮部)가 거행하는 일을 지체시켜 잘못되게 하자 황제가 유시하기를 ‘이처럼 혜택을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때를 당하여 내가 밤낮으로 노심 초사하면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맡은 관원이 그만 제사를 지내는 중대한 예전(禮典)의 처리를 지체시켜 잘못되게 하였으니 실로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관아의 문으로 달려와서 처분을 기다리며 인구(引咎)했어야 할 것인데 즉시 오지도 않았다. 군기처(軍機處)에서 행주(行走)088) 한 왕걸(王杰)은 제외시켜 우선 관대하게 처벌을 면하게 해 주고, 덕명(德明)과 철보(鐵保)에 대해서는 모두 화령(花翎)089) 을 뽑아버리도록 할 것이며, 기균(紀均)·유권지(劉權之)·유약운(劉躍雲) 등에 대해서는 모두 2년 동안 벌봉(罰俸)090) 하여 징계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 현재 살아 있는 황제의 아들은 네 사람입니다. 여덟째 아들인 영선(永璇)은 성격이 괴팍스러워 몇 번이나 황제의 뜻을 어겼습니다. 열한째 아들인 영성(永瑆)은 유약하기만 하고 결단성이 없습니다. 열다섯째 아들인 영염(永琰)은 도량이 활달한데다 생김새가 기걸찬데 황제가 자기를 닮았다 하여 가장 총애하고 있으며 중외(中外)에서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열일곱째 아들인 영린(永璘)은 경박하여 위의(威儀)가 없습니다.
1. 황제가 자손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법도가 있습니다. 하루 동안에 독서하고 습자(習字)하는 것으로부터 말타고 활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감히 조금도 그 일과(日課)를 어기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1. 황제는 침식(寢食)과 기거(起居)를 즉위한 때부터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똑같이 하고 있다 합니다. 묘시(卯時)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나서는 먼저 중외(中外)의 정사(政事)들을 훑어본 다음 공경(公卿) 대신들을 불러들여 함께 의논해 결정하다가 오시(午時)가 되면 자리를 파합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완결짓지 못한 공사(公事)를 처리하는데 간혹 책을 보거나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다가 밤이 깊어야 잠자리에 듭니다. 평생 술을 마시지도 않고 진기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식사하는 것도 몇 수저 들다 마는데 기력은 여전히 쇠하지 않고 왕성하다 합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몇 차례나 정사를 물려주겠다는 분부를 내렸으므로 공경 등이 몇 년 뒤에나 하시라고 청했지만 황제는 듣고도 응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대개 정사를 물려줄 시기를 이미 병진년 정월 초하루로 잡아놓고 있는데, 주고받는 의절(儀節)에 대해서조차 감히 품정(稟定)하지 못한 채 그저 황상의 분부만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1. 황제가 각 성(省)으로 하여금 7대(代)가 한 집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상서로운 일로 드러내도록 하였는데, 강서성(江西省)과 하남성(河南省)에서 각각 한 사람씩 올렸습니다.
1. 지난해 가을에 황제가 유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 시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건대,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한 제왕(帝王)이 많지 않았는데, 한두 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혹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이었다. 나는 나이 25세에 처음 즉위해서 지금 84세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몸으로 복을 누리면서 5대(代)가 한 집안에 살고 있으며 나라를 향유한 기간도 요행히 60돌을 맞게 되었다. 이 모두는 위로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제후국들이 제대로 따라 주어서 이렇듯 복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나는 이에 감격스러운 심정이 드는 한편으로 더욱 두려워지기만 할 뿐이다.
일찍이 흠천감(欽天監)에서 천문(天文)을 관측한 데에 따르면, 60년이 되는 해의 정월 초하루에 일식(日食) 현상이 있고 정월 대보름에는 월식(月食) 현상이 있으며 다음해 정월 초하루 아침에는 해가 밝게 비칠 것이라고 하였다. 51년이 될 때까지는 새해에 정전(正殿)에도 나가지 않았고 조하(朝賀)도 받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는 예전에 제왕(諸王) 및 황자(皇子)·황손(皇孫) 등을 대상으로 안 뜰에서 집안 연회를 베풀었던 예에 따라 51년 새해 아침에 보였던 일식 현상이 사라진 뒤에 거행한 적이 있었다. 다음해는 즉위한 지 60돌이 되는 해이지만 안 뜰에서 행하는 집안 연회는 모두 일체 정지할 것이다. 나는 이 날에도 예복(禮服)을 입지 않고 매년 해오던 예에 따라 삼가 봉선전(奉先殿)과 당자(堂子)091) 및 선사재(先師齋) 등에 가서 예를 행할 때에만 곤룡포를 입었다가 일식이 나타날 때가 되면 즉시 평상복으로 갈아 입음으로써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보일 것이다.
다행히도 하늘이 은혜를 내려 도와주신 결과 해와 달이 이지러지는 현상이 모두 다음 해에 있게 되었다. 이 해로 말하면 짐이 즉위한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로서 하나의 주기가 일단락되는 시기라고 할 것이니, 스스로 하늘의 뜻을 공경스럽게 받들어 염증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병진년이 되는 해야말로 다음 황제가 즉위하는 원년(元年)이 될 것인데, 성대하게 길한 행사를 거행함에 있어 오히려 부족한 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하늘이 나를 돈독히 도와주신 것이나 우리 자손들까지 번성하게 해 주신 그 은혜가 지극히 우악하셨으므로 하늘의 은택에 감사드리는 한편으로 더욱 마음이 조심스러워지기만 한다.
다음해인 을묘년에는 본래 만수절(萬壽節) 이전에 열하(熱河)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중외(中外) 신민들의 간청에 따라 경사스러운 행사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지난해 겨울에 눈이 충분히 오지 않은데다 봄에는 또 비도 적게 왔다. 따라서 이미 분부를 내려 선포했다마는 내년에 경사스러운 행사를 거행하기로 한 것은 정지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경술년에 80세 되었을 때의 예를 그대로 따라 만수절 이전에 경사에 돌아올 경우에는 왕공(王公)·외번(外藩)으로부터 대소 신료들에 이르기까지 간청해 올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내가 이번 봄에 내린 분부가 참되지 못한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열하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만수절이 지난 뒤에 다시 경사로 행차를 돌리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병진년 정월에 다음 황제에게 정사를 물려줌으로써 정월 초하루에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던 의리에 부합되게 하려 한다. 그때 주고받을 절차를 빠짐없이 의논하여 성대한 의식이 더욱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음 황제가 신민들을 거느리고서 천하를 가지고 봉양해 주면 그 축복받는 것이 엄청날 것이며 경사가 하늘에까지 뻗칠 것이니 더욱 천고(千古)의 성대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모두에게 유시토록 하라.’
1. 중국 조정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상(首相) 아계(阿桂)는 사람됨이 꼿꼿합니다. 올해 나이 79세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나이를 이유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殿)에 올라 올 때에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은혜를 내려주었는데도 아계는 늘 황제 앞에서는 종종걸음으로 걷곤 합니다.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소한 일을 일체 화신(和珅)에게 위임하고 큰 일에 대해서만 이해관계를 따져 지적하곤 하기 때문에 화신도 그를 두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황제가 천단(天壇)에 갈 때 보건대 누런 지붕의 가마 뒤에 팔인교(八人轎)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기에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가 바로 아계였습니다. 그의 아들 아적(阿迪)이 지금 낭관(郞官)으로 있는데 그도 꽤나 근실하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서(尙書) 기균(紀均)은 문예(文藝)가 남보다 월등한데 청백(淸白)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총애를 받는 점에서는 화신보다 못하지만 황제가 그를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기고 있는데, 다 떨어진 갓옷 하나를 가지고 7, 8년을 지내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사명(使命)을 받들고 2만여 리나 되는 먼 길을 끝까지 추적해서 비로소 근원을 발견하고는 《하원기략(河源紀略)》을 찬술했다고 합니다.
1. 하란(荷蘭)092) 은 바로 서양(西洋)에 속하는 나라인데 연경에서 9만 8천 리나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머리카락에 모두 분을 발랐으며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지 않은 채 머리 뒤에 꼬불꼬불하게 젖혀놓고 그 끝을 천조각으로 묶어 아래로 늘어뜨렸습니다. 모자 쓴 것을 보면 검은 모직물로 연꽃 잎사귀 모양을 만들고 앞뒤로 모두 말려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 위에 하얀 깃털을 꼽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흰 색의 부드러운 가죽으로 장갑을 만들어 양 손에 끼고 있었습니다.
의복을 보면 거의 모두 붉은 색이었고 간혹 검은 색도 있었는데 비단에 금실로 둘러 만들었습니다. 윗옷과 아래 바지는 실로 꿔매지 않고 단추를 매달았는데 통이 매우 좁아 사지(四肢)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붉은 색 모직물로 우리 나라의 유삼(油衫) 같은 것을 만들어 몸 앞 부분을 가렸는데 손으로 안에서부터 잡아내어 가슴 앞 부분에 대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의 행차를 맞을 때에는 그것을 벗었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눈이 깊이 들어가고 코가 튀어나와 생김새가 괴이하였으므로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웃고 떠드는 등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사신의 이름은 덕승( )이고 대반(大班)의 이름은 범라람(囉囕)이었습니다. 그들이 공물(貢物)로 바친 물건의 단자(單子)를 가져다 보니, 만년여의팔음악종(萬年如意八音樂鍾) 1대(對), 시각보희각식금과(時刻報喜各式金顆) 4대, 양감금소합(鑲嵌金小盒) 1대, 산호주(珊瑚珠) 1백 8과(顆), 양감대판(鑲嵌帶板) 4부(副), 호박주(琥珀珠) 1백 8과, 천리경(千里鏡) 2매(枚), 풍창(風鎗) 1대, 금안선(金眼線) 30근(斤), 호박(琥珀) 40근, 각종 꽃 담요 10매, 각종 우단(羽緞) 10판(板), 각종 대니(大呢) 10판, 서양포(西洋布) 10필(匹), 지담(地毯) 2장(張), 대파리경(大玻璃鏡) 1대, 화파리벽경(花玻璃壁鏡) 1대, 파리계등(玻璃桂燈) 4대, 연와(燕窩) 1백 근, 단향(檀香) 5백 근, 두구(荳蔻) 1백 근, 정향(丁香) 2백 50근, 단향유(檀香油) 30병(甁), 정향유(丁香油) 30병 등 모두 24종이었습니다.
대체로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면전(緬甸)093) 과 서양의 하란은 가장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공물을 바치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란은 일찍이 강희(康熙) 60년094) 에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이번에 또 60주년을 축하하러 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윤2월 23일 을사
태묘(太廟)에 가서 재숙(齋宿)하였다.
윤2월 24일 병오
영흥(永興) 본궁(本宮)에 환조(桓祖)를 제향(躋享)하게 된 것과 관련하여 태묘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상이 직접 행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재전(齋殿)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환조 대왕의 위판(位版)을 추부(追袝)할 때 태조 대왕의 방을 사당 한가운데로 옮겨 모시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이에 대한 의절(儀節)을 경은 의궤(儀軌) 중에서 상고해 본 바가 있는가?"
하였는데, 종현이 아뢰기를,
"미처 상세히 상고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의궤 중에는 근거할 만한 문적(文蹟)이 별로 없고, 단지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의논드린 것 가운데 ‘사당의 예법에 낮추어 모시는 절차는 없다.’고 말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본궁(本宮)의 경우는 태묘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니, 추부할 때 태조 대왕의 방을 잠깐 사당 가운데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오는 길에 명정문(明政門)으로 거둥하여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왕은 이르노라. 밝은 운세를 맞이하여 우리 나라가 거듭 빛나는 복을 받게 되었다. 성대한 의식을 치르게 된 이때에 북쪽 지방의 사당에 아울러 추향(追享)하는 일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정리(情理)로 보나 예문(禮文)으로 보나 모두 합당한 일이기에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바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환조 연무 성환 대왕(桓祖淵武聖桓大王)께서는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왕업(王業)의 터전을 마련하셨다. 태조 대왕이 탄생할 때에는 탕왕(湯王)의 탄생 설화와 같은 상서로움이 펼쳐졌고, 임금이 될 꿈은 나라의 복으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성대한 운세를 열게 되었다. 그러니 저 흑석(黑石)의 사저(私邸)야말로 주(周)나라 칠수(漆水)의 옛터와 비견된다 하겠다. 아름다운 기운 서려있는 그곳의 지세(地勢)는 용(龍)이 날아오를 형상을 갖추었고, 남몰래 쌓아온 경사스러움에 하늘은 제왕(帝王)의 고향으로 점지하였다.
다만 생각건대 패궁(沛宮)에 고황(高皇)을 제사하면서도 우묘(虞廟)의 황제(黃帝)에 대한 체(褅) 제사는 미루어 왔었다. 시조(始祖)를 탄생시킨 조상을 추앙(推仰)하는 것이야말로 예(禮)의 본뜻으로 볼 때 바로 그러해야 하리라는 것을 참으로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몇 대(代)의 조정을 거쳐 오면서도 미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대체로 그 사체(事體)가 워낙 중했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환조 대왕의 여덟 번째 회갑이 되는 해에 또 하늘로부터 다섯 가지 경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어느덧 4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탄생하신 그 해가 다시금 돌아왔고, 억만 년 운세 시작되는 시점에서 장수를 축원하는 소리 드높았다. 이처럼 큰 복을 계속 받게 된 것이 모두 보살펴주신 은덕이기에 심향(心香)을 멀리 전달하여 이제 막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침 선비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한 기회에 원묘(原廟)에 함께 제사드릴 것을 비로소 의논하게 되었다. 태조 대왕께 제사를 올리는 예를 원용(援用)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오늘날 따라야 할 일이라 할 것인데, 성조(聖祖)를 추숭(追崇)하여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어찌 다만 이 해에 감흥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조상들 혼령의 목소리에 한밤중 꿈속에서 정성이 발현되고, 아득히 생각하는 똑같은 심정에서 점괘와 합치되는 길일(吉日)을 택하였다.
생각건대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부(追袝)한 것 역시 똑같이 탄생하신 해에 감회를 일으켜 그렇게 된 것이니, 경령궁(景靈宮) 사당을 처음 세운 일같은 것에만 어찌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열성조(列聖朝)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부과된 책임이라 할 것인데, 오르내리는 선왕(先王)의 혼령께서도 이 일을 아마도 기뻐하실 것이다.
이에 예조의 관원에게 명하여 좋은 날을 가려서 환조 대왕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永興)의 본궁(本宮)에 올려 제향토록 하였다. 소목(昭穆)의 차서가 이루어졌으니 의관(衣冠)이 왕업의 터전을 닦은 고향에 통하게 되었고, 향기로운 제사를 같이 올리게 되었으니 강산도 터를 잡았던 고장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일을 경건하게 태묘(太廟)에 고하고 나서 다시금 팔도에 크게 알려주는 바이다. 아, 천 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이 일로 경사를 하나 또 첨가하게 되었다. 받들어 제사를 올리게 된 이 예야말로 본디 간절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것이니, 너희는 모두 더욱더 번창하며 영원히 효성(孝誠)이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62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윤2월 25일 정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영흥 본궁에 추제(追躋)할 때의 의절(儀節)에 관하여 삼가 기묘년의 의궤(儀軌)를 상고해 보건대, 승부(陞袝)하는 날에 과연 이안(移安)095)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본궁에 추제할 때 태조 대왕의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그런데 본궁은 일단 태묘(太廟)와는 차이가 있는 만큼 그저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분부하신 대로 전(殿) 안의 욕위(褥位)로 이안했다가 승부하는 예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의절대로 환안(還安)096)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윤2월 26일 무신
천오문(千五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서자(庶子) 박만영(朴萬榮)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자, 하교하기를,
"영성군의 정성에 대해서야 어느 날인들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현륭원(顯隆園) 행차와 관련된 과거 시험에 그의 아들을 직부(直赴)하게 했었는데, 이는 그의 직질(職秩)이 낮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부친의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이 해 이 행차 때에 보인 이 과거 시험에서 그 도리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충헌공(忠憲公) 영성군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합격자 발표일에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급선무로는 풍교(風敎)를 세우는 것 이상의 것이 없다. 충민공(忠愍公)은 탁월하였고 충무공(忠武公)은 늠름하기만 하였으니 이들의 후손들 모두 대대로 녹봉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직분으로 볼 때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증(贈)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사룡(李士龍)의 후손 3인과 증 병조 판서 충장공(忠壯公) 제말(諸沫)의 후손을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찾아내어 경영(京營)에서 급료를 줘 가며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가 과거 시험을 보게 한 것도 대개 그 두 사람의 충성과 절개가 온 누리를 환히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그들에게 보답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지처(地處)를 보아서야 되겠는가. 감격스럽고 우러러보는 심정으로 마치 그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소시(召試)에서 네 무관(武官)의 후손들이 모두 성대하게 높은 점수를 얻었으니 속이기 어려운 것은 대접받고 보답하는 이치라 할 것이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을 기다려 이사룡의 후손 한 사람과 제말의 후손에 대해서는 무겸(武兼) 자리를 더 설치하여 단부(單付)토록 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일내(一內)097) 의 시험에 직부(直赴)토록 하라. 그리고 증 참판 시문용(施文用)의 후손에게 급료를 주며 활쏘기를 권장하게 한 것도 관직을 추증(追贈)하신 거룩한 뜻을 받들어 모시려는 뜻에서 발표된 것인데 역시 제대로 시험을 치르었으니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똑같이 일내에 직부토록 하라고 분부하라."
윤2월 27일 기유
지평 최시순(崔時淳)이 상소하기를,
"간적(奸賊)의 죄악이 이미 대각(臺閣)의 계사(啓辭)에서 다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경순(鄭景淳)이 간적을 사주하여 흉론(凶論)을 주장하게 하다가 같은 때에 죽었고 보면 더욱 단안(斷案)을 삼아야 할 것인데 옥당에서 상소한 뒤로 지금까지 대각에서 계사를 올리지 않고 있으니 성토를 엄하게 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경순이 간적의 부리가 되는데도 그 부리를 아직 못뽑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창순(鄭昌順)이 간적의 복심(腹心)이 되어 암암리에 일을 다 꾸몄는데도 대각에서는 삭직(削職)할 것만을 청하였으니 너무도 가볍게 율(律)을 적용한 잘못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창순이 적의 소굴이 되고 있는데도 그 소굴을 아직 소탕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경순에게는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고 정창순에게는 유배보내는 형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밖에 방백과 연수(連帥)가 뇌물질을 행한 것이나 지속(支屬)과 친당(親黨)들이 서로 결탁한 사례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도 줄곧 덮어주며 비호하기만 하고 한결같이 노닥거리며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고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크게 위벌(威罰)을 행하시어 악역을 담당한 자들이 징계되고 복종하게끔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최시순 같은 무리가 있어 조정이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대각이 언제쯤이나 존엄해질 수가 있겠는가. 그가 상소하여 논한 바 생존해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두 중신(重臣) 모두 털끝만큼도 지적당할 꼬투리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척 놀라운 일일 뿐더러 나라의 기강과 크게 관계되는 일이라 하겠다.
고(故) 중신 정경순에 대해서 율(律)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게 법 이외의 율을 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엄히 조사하는 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고 소본(疏本)을 도로 내주라고 한 상황에서 지금 고쳐서 올린 소를 보면 첫번째 소보다도 배나 되는데, 징계하는 형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조정을 욕되게 하고 대각에 누(累)를 끼친 그 죄가 가볍지 않다. 조정의 기상이 이 모양이고 대각의 체통이 이 모양인데도 한 사람도 계책을 내고 걱정을 하며 바로잡아 고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세도(世道)를 생각하면 한심하고 한심하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이라도 힘쓰게 하면 그래도 혹 전광 석화(電光石火)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었는데, 요즘 진행되는 일을 보노라면 나 스스로 크게 부끄러운 생각만 들 뿐이다. 연초에 재전(齋殿)에서 차대(次對)할 적에 한 번 분명히 유시하여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대신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었다마는 그저 말싸움한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으니, 그렇다면 분명히 유시한 내용을 가지고 널리 경고하기로 한 한 조목의 일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는가? 이런 내용을 비랑(備郞)으로 하여금 시임(時任) 대신들에게 전하도록 하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적(賊)을 토벌했던 것이나 승종(承宗)이 손을 쓰지 못한 채 땅을 깎이고 만 것은 역시 조정에서 조치를 올바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을 보면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온당함을 잃고 있다. 심지어는 당당한 대각에서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하는 말들을 보면 희롱조에 가까우니 저 시골뜨기인 일개 시순을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지닌 직책을 돌아보면 대각의 신하이니 그 조정이 어떤 모양이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연명(聯名)으로 상차하기를,
"삼가 전교를 보건대, 대신(臺臣) 최시순(崔時淳)이 상소를 올리면서 율(律)을 잘못 적용한 것을 가지고 지극히 엄하게 책망하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사람들로서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를 외람되게 점거하고 있으면서 간적(奸賊)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무너진 풍속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재전(齋殿)에서 인대(引對)하셨을 때 이미 간절한 면유(面諭)를 받들었는데도 시치미를 떼고 침묵만 지킨 채 제대로 성상의 뜻을 드러내 밝히지 못하였고 그저 인순 고식적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탓으로 장차 면유하시기 이전의 상태와 매일반이 되게 하고 말았으니, 옛날에 이른바 ‘저런 재상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라고 한 말은 바로 신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 대간의 상소가 비록 공분(公憤)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 결어(結語)를 자세히 살펴 하지 못하고 거조를 온당하게 취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관(大官)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고서 바로잡아 고치라는 분부를 직접 받들었던 신들로서는 더욱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속히 배척을 받고 물러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최근 분명히 유시했던 것을 대궐 문에 궤범(軌範)으로 게시하려고 했다마는, 법이란 그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에 있는 삼정승이 어떻게 보필하고 힘을 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고 한 것인데, 그대들은 바로 바람이요, 아래 백성들은 바로 풀이라 할 것이다. 내가 물론 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풀을 눕힐 만한 교화 능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바람을 직접 받는 반열에 있는 경들부터 나의 말을 하찮게만 듣고 있었으니, 어떻게 일에 앞서 바로잡고 일을 당하여 나의 뜻을 드러내 밝히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렇게 해서 마치 털옷이 거꾸로 들리듯 거울에 거꾸로 비취듯 하여 경솔한 자는 제멋에 취하여 마구 망신이나 주고 졸렬한 자는 몽롱한 채 잠에만 빠져들고 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기율이 잡히지 않은 무질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조정에 날마다 분부를 내리며 분명히 유시한다 할지라도 말은 말대로 행동은 행동대로 제각각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정말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할 것인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 했던 것은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실천하려는 뜻에서요 여러 의견을 모아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경들이 상차한 말을 보건대 분명히 유시했던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를 않았다. 이 지경이 되어서는 또한 도대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고 할 만하니, 분명히 유시한 일과 관련한 한 조목은 정녕코 시행하지 말 일이다. 거듭 경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재전(齋殿)의 연석(筵席)에서 분부했던 나의 본래의 뜻을 힘써 드러내어 세도(世道)를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다. 이런 때에 사직을 하다니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다시 바라건대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구익(具㢞), 장령 홍수호(洪受浩), 지평 이윤행(李允行)·이동면(李東冕)이 대청(臺廳)에 나아가 장차 정동준(鄭東浚)의 여러 아들들을 분산시켜 유배보낼 일로 계사(啓辭)를 내놓으려 하였는데, 상이 이를 듣고 하교하여 준엄하게 꾸짖으니, 구익 등이 상소하여 인죄(引罪)하였다. 상이 대각(臺閣)을 욕되게 한 율(律)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의금부가 아뢰기를,
"대각을 욕되게 한 율에 대해서 율문(律文)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근거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대명률》의 불응죄(不應罪)에 대한 율을 적용토록 하소서."
하니, 판부(判付)하기를,
"불응죄는 《대명률》에나 나오는 것이니 송(宋)나라 때야 어찌 그런 율이 있었겠는가. 율을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체직하거나 파직하는 것보다도 못하니, 그렇다면 율을 적용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판의금을 파직하라."
하고, 이어 구익 등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유한모(兪漢謨)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홍양호(洪良浩)를 판한성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윤2월 28일 경술
정리소(整理所)에서 쓰고 남은 돈을 삼도(三都)와 팔도(八道)에 나누어 보내 을묘년 정리곡을 만들게 하는 한편 탐라(耽羅)의 진휼(賑恤) 곡식을 보태주고 화성(華城)의 둔전(屯田)을 설치케 하라고 명하였다. 【경기에 2천 냥(兩), 호서(湖西)·호남(湖南)·관서(關西)에 각각 3천 2백 냥, 영남(嶺南)에 4천 냥, 화성(華城)·관동(關東)·해서(海西)·관북(關北)에 각각 1천 냥, 개성(開城)·강화(江華) 양도(兩都)에 각각 2백 냥씩 보내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63면
【분류】재정(財政) / 구휼(救恤) / 농업(農業)
사간 이현도(李顯道)의 직명을 체차하여 멀리 떨어진 험악한 절도(絶島)에 유배보내고, 피혐(避嫌)한 계사(啓辭)를 받아들인 승지 유한녕(兪漢寧)은 경기 연해로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는 이현도가 상소하여 윤시동(尹蓍東)의 직첩(職帖)을 돌려주라고 논하였기 때문이었다.
윤2월 29일 신해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재전(齋殿)에서 재숙(齋宿)하였다.
판의금부사 홍양호(洪良浩)를 삭직하였다. 이현도(李顯道)에 대해 적용할 율(律)을 잘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종현(趙宗鉉)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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