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2권, 정조 19년 1795년 3월

싸라리리 2025. 8. 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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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임자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직접 거행하였다. 대내(大內)로 돌아오는 길에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직접 전하였다.

 

3월 2일 계축

하교하였다.
"조정의 의식은 국가의 기강과 관계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어제 축문(祝文)을 전하고 향(香)을 영접할 때에 노부(鹵簿)098)  를 제대로 정돈하고 대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고(嚴鼓)099)  가 시각을 넘기게 하는 결과를 빚었고 이에 따라 외부의 반열에 있는 신하들이 자리에 나아가는 일 역시 지체되고 말았으니, 나라의 기강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나는 대신이 가마 앞에 나아와서 경책(警責)하라는 청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으니 내가 대신해서 말을 하며 분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노부사(鹵簿使) 심환지(沈煥之)를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 홍낙유(洪樂游)는 나문(拿問)하여 중한 율(律)을 적용토록 하라. 그리고 뜰에 들어온 시신(侍臣)들도 그냥 보고만 있었으니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도 모두 출두시켜 진술서를 받고 체차시킴으로써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은 잘못을 경책하도록 하라."

 

함경도 관찰사 김화진(金華鎭)이 치계(馳啓)하기를,
"경흥부(慶興府)에서 화재가 발생해 민가 1백 95호(戶)가 연소되고 한 명이 죽었으며 각종 곡식 3천 5백 97석이 소진되었습니다. 경흥 부사 김양화(金養和)를 파직해 쫓아내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경흥 부사의 죄를 다스리되, 그로 하여금 새로 수리하게 해서 모두 안정된 생활을 하게끔 한 뒤에 잡아와 엄히 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경 역시 엄히 단속하여 기필코 빠른 시일 안으로 고쳐 짓도록 하고, 화재를 당한 민호(民戶)에 대해서는 부역(賦役)을 견감해 주는 동시에 환곡(還穀)을 면제해 줌으로써 즉시 집들을 짓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3월 3일 갑인

사간 이현도(李顯道)를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였다.
의금부가 사간 이현도를 지도(智島)에 정배시킬 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큰 죄 중에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작은 죄 중에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그 말을 명백하게 논리적으로 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의 말을 보면 온통 음험하게 흑막을 쳐놓고 있어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조정에 참으로 그런 부류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곧장 그들의 성명을 끄집어내어 각각 시행해야 할 율(律)을 적용하라고 청하지 않고서 이런 식으로 잗달고 간사하고 음험하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아래의 조목에서 논한 대신(臺臣)의 일도 그렇다. 그의 죄로 말하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만하지만 그는 본래 깊이 꾸짖을 가치도 없는 자이다. 물어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이런 습관을 통절히 깨달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어찌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연전에 연석(筵席)에서 한 분부에 대해서는 그들도 아마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지금 드러난 자부터 엄히 처리해야 할 것인데, 이렇듯 관계가 막중한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야 어찌 추자도(楸子島)나 흑산도나 탐라(耽羅) 여부를 따지겠는가. 이현도를 흑산도로 정배하여 즉각 압송토록 하고 도백(道伯)에게 엄히 신칙하여 일체 천극(荐棘)100)   죄인을 다루는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의 하나 소홀하게 처치할 경우에는 그 담당 진장(鎭將)에 대해서 병사(兵使)가 해변가에 위의(威儀)를 크게 펼치고서 곤장(棍杖) 50대를 친 뒤 진병(鎭兵)에게 조리돌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 판의금부사 홍양호(洪良浩)에게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는 형전(刑典)을 추가로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옳지 않게 행동한 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 현재 드러난 자부터 먼저 처분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기에 일전에 대략 견책하여 삭직(削職)시키는 처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나이는 비록 많이 들었어도 외모가 그다지 쇠하지 않았고 보면 그 속의 정신 기운도 어떠할지 추측해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번에 취한 행동을 보면 엄하고 두렵게 여기는 태도가 전혀 없었다. 부드럽고 착한 저 중신(重臣)마저 이런 식이니, 오늘날 조정의 기강이야말로 한심스럽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처분을 너무 관대하게 내린 잘못을 면할 수가 없으니, 전 판의금 홍양호에게 문외 출송하는 형전을 더 적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을묘

의궤청(儀軌廳) 당상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윤행임(尹行恁)과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금위 대장(禁衛大將) 김지묵(金持默),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한풍(李漢豊), 금군 별장(禁軍別將) 유효원(柳孝源)을 파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이 축성 공사와 관계되고 보면 얼마나 중하다 하겠는가. 그리고 자궁(慈宮)에게 연회를 베풀어드리기 위해 수고하는 일이고 보면 그 중대함이 더더욱 어떠하다 하겠는가. 그런데 당초에 분명하게 거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초기(草記)하면서도 그만 감히 넣고 빼고 하였으니, 그것만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감히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거나 저렇거나 간에 내가 정성을 다 쏟고 온 힘을 기울인 것이 오직 이 중대한 일 때문이었고 보면, 오늘날 신하가 된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경우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대저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남의 어버이를 감히 등한히 여기지 않는 법이며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의 어버이에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는 법이다. 대등한 자 이하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한 법인데, 하물며 경(卿)과 대부(大夫)의 반열에 있으면서 임금과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태만하게 굴고 일마다 무기력하게 처리해서야 되겠는가. 백관들이 비록 저 모양이라 하더라도 만약 조금이라도 보고서 느끼게 해야 한다는 의리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감히 그 지경에까지 가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의궤청 당상들을 파직하는 것은 정말 가벼운 처벌이라 할 것이다.
진장(鎭將)을 지고(枳錮)시키기가 일단 어렵다고 한다면 형세로 볼 때 이 정도로밖에는 처리할 수가 없을 것이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모두 마찬가지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일이건 간에 단지 눈 앞에서 거행된 일을 가지고서 잘하고 못한 것을 따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금위영이나 어영청이라고 해서 어찌 형편없이 처리한 일이 없다고야 하겠는가마는, 상식적인 도리로 헤아려 본다면 어찌 고의적으로 규정을 범했다고야 하겠는가.
그런데 근래 습속을 보면 날이 갈수록 더욱 각박해지기만 하는데 두 대장의 잘못된 거조 역시 이를 잘 조종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나 이런 식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그들의 선조(先祖)를 보겠는가. 연전에 제사를 지내주게 하고 비석을 세워주게 한 것이 지금 와서는 더욱 후회만 된다. 이한풍과 김지묵이 이 분부를 듣고 나면 어찌 감히 선조의 묘소 아래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서 자기의 허물을 토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병조 판서의 일은 조목조목 놀랍기만 하다고 하겠다. 그저께의 일을 겨우 마감하고나자 어제 일이 또 터졌고 어제 낮에 단속하는 분부를 내린 뒤에 또 어제 밤에 이르러 잘못 처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은 대체로 너무 급속도로 승진하여 관직이 워낙 높아진데다가 겸직(兼職)하는 일이 너무 많아 너무도 소홀하게 거행하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그런데 용호영(龍虎營)의 경우는 어떤 일이고 간에 별장(別將)이 모두 주관하고 있는데, 하찮은 금군(禁軍)을 구전(口傳)하는 일에 있어서조차 제때에 봉행을 하지 못했으니, 별장만 유독 처벌에서 제외된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세 장수를 견책하여 파직하라는 청을 이미 따른 이상 별장의 죄에 대해서는 똑같이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각영(各營)에서 승전(承傳)을 거행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린 것이었다.

 

이유경(李儒敬)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3월 6일 정사

밤에 불같은 기운이 있었다.

 

황단(皇壇)을 참배하고 제기(祭器)와 희생(犧牲)을 살펴보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을 파직하였다. 이태영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이 순시(巡視)하러 떠난 뒤에 귀환하는 정사(正使)의 상구(喪柩)가 황주(黃州) 접경에 도착하였기에 서흥 부사(瑞興府使) 이서영(李舒永)을 가도사(假都事)로 차출해서 배행(陪行)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계의 사연은 놀랍기 그지없다. 조정의 사체나 일의 체면으로 볼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근래 습속이 야박해진 탓으로 생시보다 사후에 더 후하게 해야 하는 예법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가령 《오례의(五禮儀)》만 상고해 본다 하더라도 이런 경우 특별히 넉넉하게 대우하며 맞아야 하는 예법이 다른 것에 비해 또 얼마나 월등한가. 습속을 돈후하게 하고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로 볼 때 이런 도신(道臣)을 방백(方伯)의 반열에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황해 감사 이태영을 파직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신하들의 마음을 살펴준다.[體群臣]’고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구경(九經)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일이 감히 말해서는 안될 성격의 것이기에 그냥 놔두고 그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총재(冢宰)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진퇴 유곡의 지경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이미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살펴주는 정사에도 어긋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중하게 생각해서 구태여 말하지 않으려 했던 본래의 뜻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연전에 중신(重臣)을 처분했던 것은 바로 중신이 소(疏)와 서(書)를 잘못 인식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본심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서 두려운 마음으로 속 시원히 전석(前席)에서 위로해 풀어주었으니, 그 중신에 대해서는 이미 할 일을 다해 주었다고 할 것이다.
대저 조덕린(趙德隣)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깨끗이 해준 것은 덕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아들 조진도(趙進道)의 경진년 때의 일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위로는 그 당시의 사실을 해명해 주고 아래로는 중신(重臣)이 마음을 쓴 자취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으니 한 번의 일에서 양쪽 다 타당성을 얻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박기정(朴基正)이란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연석(筵席)의 가까운 자리에서 자세히 유시할 때에 그 사이의 일에 대해서 왈가 왈부를 했단 말인가. 그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써 다스렸었다.
그런데 이현도(李顯道)가 상소한 말을 보건대 거듭 반복해서 으르렁대며 마치 각축전을 벌이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우선 분명하게 지적해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수범(首犯)으로 몰기는 곤란한 점이 있으나 그가 ‘외면의 거친 흔적[外面粗跡]’이라는 네 글자를 글로 쓴 그 행위를 끝까지 따져 들어간다면 죽어도 남는 죄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네 글자를 어떤 사람에게 해당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감히 말해서는 안될 일에 관계된다 하여 그냥 덮어둔다고 하더라도 내가 놀라면서 두렵게 여기는 것은 바로 ‘외면의 거친 흔적’이라는 의미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도가 무슨 말로 용서를 받을 수 있겠으며 중신이 무슨 일로 인혐(引嫌)할 수 있겠는가.
형정(刑政)이 거꾸로 된 듯하지만 거꾸로 된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의혹 역시 굳이 풀어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소될 것인데, 이 또한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데에 하나의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와서 중신에게 의리를 지키는 일은 자연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조 판서와 참판을 다시 패초(牌招)하여 정사(政事)를 열도록 하라."

 

황단(皇壇)의 망배례(望拜禮)에 불참한 유생과 무인들을 가을철의 과거 시험을 보일 때까지 정거(停擧)시키고, 조관(朝官)은 잡아와 처치하는 동시에 각 가문의 어른들은 조사해서 먼저 관직을 가진 자부터 잡아와 치죄하라고 명하였다. 이와 함께 경조(京兆)101)  에서는 반열에 참여한 사람들이 명단을 받아 입계(入啓)하고 매년 3월에 내다가 수정(修整)하도록 청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맑은 날에는 서로 다투어 많이도 오다가 비가 오는 날에는 편리할 대로만 하여 오지를 않는데, 이번에 반열에 참여한 것을 보면 더더욱 놀랍기만 하다. 조관(朝官)과 유생·무인을 합쳐서 1백여 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람의 정리(情理)로 헤아려 볼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선조들의 마음을 생각이라도 해 본다면 비가 오든 날이 맑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과 무인들에 대해서는 일체 똑같이 금년 가을까지 정거(停擧)시키고, 조관은 잡아와 처리하도록 하라.
그리고 외직(外職)에 있는 사람과 실제로 병이 있는 것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각각 그 가문의 어른들이 경조(京兆)에 단자(單子)를 올리도록 한 뒤 해방(該房)에서 조사하여 취사(取舍)하도록 하라. 그들 따위야 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마는 단속하지 못한 죄를 그 가문의 어른들이야 어떻게 감히 면할 수 있겠는가. 각 가문의 어른들을 조사해 낸 뒤 먼저 관직을 지닌 자들부터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치죄하는 처벌을 시행케 함으로써 비풍(匪風)과 하천(下泉)102)  의 생각에 잠을 자다가 일어나 내가 탄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하라.
그리고 한성부의 책임자로 하여금 각 가문의 어른들에게 물어 단자를 받은 다음 그것을 한 책으로 묶어 기록하게 할 것이며, 1건(件)은 입계(入啓)하고 1건은 해방(該房)에 비치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하되, 매년 3월에 내다가 수정할 것을 청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나라를 나라답게 하는 것은 기율(紀律)과 법령(法令)을 제대로 확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옛날 사람은 귀신을 쫓고 도깨비를 막을 때에도 ‘기율과 법령대로 행할 것이다.[如律令]’는 세 글자의 부적만을 사용했었다. 근일 조정이 아무리 존엄해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명령을 유독 음관(蔭官)인 무장들에게 시행시키지 못하고 기율을 유독 경군문(京軍門)에 확립시키지를 못한단 말인가. 나는 어느 일이건 간에 노여움은 문득 잊어버리고 사리가 옳고 그르냐만 살펴보려고 애쓰고 있다. 일전에 견책하여 파직하는 정도로 처분을 내렸던 것도 형정(刑政)을 자세히 살펴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뒤에 다시 생각해 보건대, 훈국(訓局)에서 처리한 일은 분명히 성실하게 노력한 것이었고, 총융청(摠戎廳)의 일도 넉넉히 죄를 면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용호영(龍虎營)의 경우 판당(判堂)과 별장(別將) 역시 충분히 용서해 줄 만한 단서가 있었는데, 그들이 금여(禁旅)에 도로 소속되기를 원치 않고 있으니 어떻게 억지로 차임(差任)할 수가 있겠는가.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한 자리[窠] 뿐인데 이에 대해서는 신칙하여 이미 시행하였다.
인원을 배정하는 막중한 문제에 있어서도 본디 수종(首從)103)  의 구별이 있게 마련인데, 의궤청(儀軌廳) 당상 및 병조 판서·금위 대장(禁衛大將)·어영 대장(御營大將) 등이 처리한 일이 이쯤 되어서는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할 것이니, 각자 입으로 변명하게 하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가. 견책하여 파직한 것만으로는 아무래고 너무 관대할 듯싶다. 인원을 뽑아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분부를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렇다면 비록 1백 명이 되고 1천 명이 된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더 뽑아낸 뒤에 사유를 갖추어 초기(草記)하는 것이 곧 사리상으로 보나 도리상으로 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감히 자리가 없어 궐원(闕員)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물어서 아뢰라고 한 상황에서 제멋대로 입술을 나불거리고 혓바닥을 놀려댔으니 이 두 장수가 두려워할 줄을 안다고 하겠는가.
아, 고(故) 장신(將臣) 김성응(金聖應)은 30년 동안 군무(軍務)를 담당하면서 한결같이 연석(筵席)에 오를 때마다 직접 지휘하고 독려하느라 땀이 조의(朝衣)에 흠뻑 젖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장(禁將)의 이번 일을 고 장신의 일에 비교해 본다면 금장의 마음에 두려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두 군영(軍營)의 일이라는 것도 이 모양이니 어떻게 기율을 엄하게 알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가 있으며 명령 일하에 사력을 다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모욕적이라도 포용할 것은 포용해야 하겠지만 경책해야 할 때는 또 경책해야 마땅하다. 전 금위 대장 김지묵과 전 어영 대장 이한풍에게 삭직(削職)하는 처벌을 추가하여 시행함으로써 다른 군영들로 하여금 기율과 명령대로 해야 한다는 의리를 알게끔 하라."

 

3월 7일 무오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상이 도총관(都摠管) 이민보(李敏輔)에게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에 경들과 함께 올라왔었다. 신해년104)   봄에 내가 지은 시(詩) 가운데 ‘자리에 앉은 많은 백발 노인들,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 들으리.[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라는 구절이 있었고, 그 이듬해의 이 모임에서 지은 시 가운데에도 또 ‘마음에 맞는 동서울 노인, 탈없이 시짓고 술잔 드누나.[會心東洛老 無𧏮又詩樽]’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경을 가리킨 것이었다. 오늘의 놀이 역시 경이 전담케 해야 하겠다."
하고, 이어 편여(便輿)를 타고서 선희궁(宣禧宮) 북문(北門)을 나갔다. 나이 6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하여 산을 오르는 데에 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옥류천(玉流泉)을 따라 수십 보(步)를 지나가서 세심대에 이르렀다. 상이 장막을 친 자리에 올라가 앉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매년 이 때가 되면 꼭 이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은 대개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가 있고나서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이 여러 경재(卿宰)와 함께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었다. 그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太平酒) 들며 길이 취하리.[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이다. 경들은 혹시 그런 일을 들어 알고 있는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해이다. 경들이 고사(故事)를 엮어 기술하면서 옛사람들과 아름다움을 짝하여 오늘날의 태평스러운 기상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달 안으로 날을 잡아서 이곳에 와 모였고 보면 올해의 이 놀이 또한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의 갑자년은 바로 경모궁의 중근(重巹)105)  이 되는 해이다. 그 때에 자궁(慈宮)께서 현륭원(顯隆園)에 가시어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정리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번에 자궁의 행차를 모시고 갔다가 환궁한 뒤에 수라(水剌)에 사용하는 기명(器皿) 등속을 그냥 본부(本府)에 놔두도록 하였는데 이것도 나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뒤에 경들이 다시 행차를 모신다면 어찌 희귀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경들의 근력(筋力)을 보건대 모두 걱정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이어 초계 문신(抄啓文臣) 김근순(金近淳)에게 명하여 세심대 밑에 거주하는 조관(朝官)과 유생들을 불러와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또 승지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상이 직접 지은 소서(小序) 및 칠언(七言)의 소시(小詩)를 쓰라고 하고, 신하들에게 회답하도록 명하였다. 또 세심대 남쪽에 작은 표적을 설치한 뒤 자리에 참석한 무신 및 문신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또 세심대 아래에 거주하는 무신 및 행차를 따라 온 장교(將校)들도 모두 활쏘기 시합을 벌이게 하고 상을 나눠주도록 명하였다.
꽃을 넣어 지진 떡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이우진(李羽晋)·유사모(柳師模) 등에게 명하여 유생 등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한껏 취하고 배불리 먹게 하는 동시에 이 날의 즐거움을 기록하게 하였다. 남복래(南復來)에게 대내(大內)의 주방에서 만든 음식 한 소반을 특별히 내리면서 하교하기를,
"그대의 아비가 일찍이 계방(桂坊)106)  에 있었던 일이 특별히 생각난다. 돌아가서 처자들과 함께 나누어 먹도록 하라."
하였다. 또 승지에게 명하여 종이와 붓과 먹을 아동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나는 이곳을 이웃 동네처럼 여기고 있다. 이 뒤로 행차가 도착하면 서인(庶人)이나 사인(士人)이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와서 모이되 각각 그 가문의 어른이 이끌고 와서 지영(祗迎)토록 하라."
하였다. 이날 날씨가 맑게 개이고 경치도 산뜻하였는데, 의장(儀仗)을 구경하고 음악 소리를 들으려고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양쪽 기슭에 빽빽히 모여들었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이 해에 이 놀이를 하면서 골고루 혜택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떡과 밥을 나누어 먹이게 하였다. 또 영상과 우상에게 각각 법악(法樂) 1부(部)씩을 보내 집까지 인도하게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8일 기미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영흥(永興) 본궁(本宮)에 위판(位版)을 추제(追躋)할 때 제사 날짜는 12일로 하고 제품(祭品)이나 의절(儀節)은 숙묘조(肅廟朝) 을해년에 추부(追祔)했을 때의 예를 준수하여 별대제(別大祭)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대신(大臣)을 초헌관(初獻官)으로 삼고 예당(禮堂)을 아헌관(亞獻官)으로 삼고 도백(道伯)을 종헌관(終獻官)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연석(筵席)에서 분부를 받들었으니 이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함흥(咸興)과 영흥 두 본궁의 위판을 서사(書寫)하는 의식과 관련, 이미 베껴온 것을 삼가 조사해 보건대, 영흥 본궁의 경우는 글자를 떼어서 썼고 함흥의 경우는 붙여서 썼습니다. 지금 이 위판을 추제(追躋)할 때 서사하는 의식은 삼가 영흥 본궁 국초실(國初室)107)  의 의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3월 9일 경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서북(西北) 지방의 별부료 군관(別付料軍官)108)  에 대한 시사(試射)를 거행하고, 반궁(泮宮)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設行)하였다.

 

3월 10일 신유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였다. 여러 각신(閣臣)의 아들·조카·형제들도 참여하였는데 모두 54인이었다. 또 특별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직부(直赴) 이시원(李始源)을 불렀는데, 영상은 연치(年齒)나 덕망(德望)에 있어 모두 높기 때문에 매년 이 모임에 번번이 불러들여 참여시켰으며, 시원은 인망을 쌓아 규장각의 관리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매년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놀이에 초청된 각신의 자질(子姪)이 아들이나 아우나 조카에만 한정되다가 올해에 들어와 재종(再從)과 삼종(三從)으로까지 그 대상이 확대된 것 역시 대체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뜻에서이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상이 말을 타고 나가면서 신하들에게 말을 타고 따라 오도록 허락하였다. 어수당(魚水堂) 앞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였다. 천향각(天香閣)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다. 대신과 각신(閣臣)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상이 다시 존덕정(尊德亭)의 서쪽 태청문(太淸門) 안의 막차(幕次)로 거둥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예로부터 내원(內苑)의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外臣)을 내연(內宴)에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이라 하겠다.
옛날 장릉(長陵)109) 계해년110)   이후로 훈신(勳臣)을 보살펴주어 곡연(曲宴)에서 모시고 노닐게 하며 가족처럼 예우해 주었었다. 그러다가 효묘(孝廟)께서 즉위한 초기에 훈귀(勳貴)의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며 사림(士林)의 인사를 초빙한 뒤 합심하여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의논하였는데, 어수당과 천향각에는 아직도 송 문정(宋文正)111)  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정이 분열되는 환란이 또 일어났으므로 숙묘조(肅廟朝)로부터 선조(先朝)에 이르기까지는 척련(戚聯)의 신하에게 속마음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궁중의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가 아니게 되었는데 이는 단지 그 때의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따름이었다.
나는 춘저(春邸)112)   때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리(戚里)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 위주로 장식하려 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 하려는 뜻에서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좋은 작위(爵位)로 잡아매두고 예우하여 대접하면서 심지어는 한가로이 꽃구경하고 낚시질할 때까지도 각신(閣臣)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고 그들의 아들·조카·형제 역시 모두 연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법을 간소화하여 은혜로 접하고 한데 어울려 기뻐하고 즐기는 것을 매년 정례화하고 있으니 이런 대우와 사랑이야말로 예로부터 인신(人臣)으로서는 얻기 힘든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필경 귀근(貴近)의 폐단이 일어나더니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극(極)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아오면 물러가게 되고 느슨해지면 펼쳐지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이치라고 할 것이니, 척신(戚臣)이 이 뒤를 이어 나아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려는 것이야말로 나의 평소의 성격인 동시에 내가 고심하는 것이니, 수십 년 동안 행해 온 일을 지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여 오늘 내가 유시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니,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훌륭한 사대부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임금이 좋은 정치를 펼치는 요체이다.’고 하였습니다. 근신(近臣)이 죄를 지은 것은 그들 자신이 나라를 저버렸기 때문일 뿐이니, 우리 성상께서 인재를 쓰시는 정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영광이라 할 것인데, 더구나 오늘 은혜로운 유시를 받들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서로들 권장하며 조금이라도 성상의 뜻을 선양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한(漢) 문제(文帝)는 바로 삼대(三代)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밝은 임금이었다고 할 것인데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자들은 늘 두광국(竇廣國)을 제후로 삼지 않은 한 가지 일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야말로 《서경(書經)》의 이훈(伊訓)이나 열명(說命)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글이라 할 것인데 그 한 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면 또 궁궐과 조정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몇 구절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본다면 제왕의 성덕(盛德)으로는 척행(戚倖)을 억누르고 사문(私門)을 막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신 20년 동안 일찍이 척리(戚里)로서 진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보고 듣는 이들치고 그 누가 우러러보며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들로 말하면 직접 성대한 이 기회를 만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상이 세심대의 대자(臺字) 운(韻)을 써서 입으로 칠언(七言)의 소시(小詩) 한 수(首)를 지어 읊은 다음 대신과 제신(諸臣)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용정(芙蓉亭)의 작은 누각으로 거둥하여 태액지(太液池)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상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3월 11일 임술

고(故)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올해는 자전(慈殿)의 나이가 51세가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용진(洪龍鎭)을 거제부(巨濟府)에 충군(充軍)하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왕도상(王道常)을 기장현(機張縣)에 충군하였으며, 문장(門將)에게 엄히 신칙하여 경기 감사의 소계(疏啓)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당초에는 그들도 사람인지라 필시 왕명을 받든 일인 줄을 모르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따질 것 없이 하찮은 벼룩과 같은 여종 따위를 양인(良人)으로 놓아주는 문제를 가지고 그들이 어찌 감히 고을의 책임자라고 하면서 머리를 디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단 말인가.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는 일인 만큼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잡아온 죄인 홍용진은 거제부에 충군하고, 왕도상은 기장현에 충군토록 하라.
해목(該牧)에 귀양보내었던 자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 지가 지금 거의 10년이나 된다. 그를 풀어준 조치가 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 뜻은 정녕 절영(絶纓)113)  에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줄 아는 자라면 그 누가 이런 뜻을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비록 무변(武弁)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불성실하게 사실도 아닌 일을 허위로 꾸며 기괴하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대략 충군하는 처벌 정도는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기 감사의 장계나 상소가 성문이나 궐문을 넘어오게 될 때에는 해당 문장(門將)에게 군율(軍律)을 적용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 등이 구대(求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정상우(鄭尙愚)가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어찌 여종 하나를 놓아준 일 때문에 이렇게 청대한단 말인가. 이에 앞서 눈감아 준 것도 조정을 위한 것이었고 이번에 죄를 씻어준 것도 조정을 위한 것으로서 깊이 헤아려서 취한 조치였다. 경 등이 청대한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에서 구대(求對)한 제신(諸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臺臣)이 연석(筵席)에 올라왔으면 마땅히 합계(合啓)를 해야 할 것이다."
하니, 대사헌 민태혁(閔台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구대한 이유는 바로 당면한 문제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계(傳啓)하지도 않고서 먼저 다른 말을 진달하다니 이것이 어찌 대간의 체례(體例)라 하겠는가."
하였다. 태혁이 아뢰기를,
"일에는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고 때에는 완급(緩急)이 있는 법입니다.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놓아보낸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신들이 어느 겨를에 전계(傳啓)와 같은 정상적인 체례를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즉시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들이 구대한 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달의 처를 놓아보낸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로서 무식한 일반 백성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렇게 등대(登對)하여 토죄(討罪)를 청하다니 이것이 과연 성심(誠心)으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고 하겠는가. 놓아보낸 지 거의 10년이 되도록 모르는 체하면서 심상하게 간주해 왔는데, 나는 경들을 위해 이 점을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삼사의 인원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즉시 전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민태혁(閔台爀), 대사간 유한모(兪漢謨), 응교 윤광보(尹光普), 부교리 엄기(嚴耆), 정언 신대윤(申大尹)·윤익렬(尹益烈), 부수찬 이정운(李貞運).】  합계(合啓)하기를,
"지금 삼가 내리신 전교를 받들건대, 죄인 정치달(鄭致達)의 처가 쫓겨나 안치된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놀랍고 뼈에 사무치는 통분스러움이 또 어떻다 하겠습니까. 정치달의 처를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배소(配所)로 돌려보내게 함으로써 통쾌하게 전형(典刑)을 바루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현재의 피폐된 풍습과 고질적인 병폐치고 불성실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모두 무너져 없어져서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계사(啓辭)도 바로 그중 하나의 큰일이라 하겠다. 이것이 물론 입시(入侍)한 삼사의 관원들만 유독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경들이 마침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이런 계사를 연명(聯名)으로 진달하다니 경들의 얼굴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치달의 처가 지금 과연 유배 중에 있는가. 유성한(柳星漢)이 살아서 이 땅위에 있는가. 그의 처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환히 알면서도 태연히 모르는 척하고,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듣지 못한 것처럼 하면서 옛날의 종이를 베끼는 일을 어려움없이 하고 있으니 예의와 염치가 땅을 쓴듯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데도 한결같이 벙어리처럼 행세하면서 흐지부지 넘겨 버리기만 한다면, 이는 결코 요즘들어 고심하며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려 한 뜻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한 장의 전교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대체로 정치달의 처를 용서하여 돌려보낸 것은 나 스스로 재량(裁量)한 바도 있지만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뜻을 살핀 점도 있다 하겠다. 그래서 은택을 대대적으로 베푸는 이 해를 당하여 배소(配所)에서 빼낸 다음 마음대로 가게 하고 해마다 의복과 양식을 주면서 있는 곳을 묻지 않게 한 것이었다. 이는 사은(私恩)과 공법(公法)을 모두 병행시키면서 어긋나지 않게끔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자꾸만 흘러 사람들 모두가 그 일을 망각 속에 묻어두게 되었으니 허구한 날을 이런 식으로만 한다면 오히려 구차스럽게 될 듯하였다. 그러니 한 번 분명하게 유시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와서 경들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이 일이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꺾어버려야 할 일이겠는가. 그리고 더구나 유배보내는 일을 기필코 이 밤을 넘기기 전에 시행하여 통쾌하게 전형을 바루라고 하고 있는데, 이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소로 돌려보내는 일은 여정(輿情)을 펴주는 일이라 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양사가 유성한(柳星漢)의 일에 대한 전계(前啓)를 아뢰니, 비답하기를,
"유성한이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가 연석(筵席)에서 몇 차례나 언급되었는데 오늘 입시한 삼사의 관원들은 모두가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가 과연 잘못 들은 것인가. 그렇다면 억지로 정계(停啓)하게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경들은 연석에서 물러난 뒤에 다시 더 해부(該府)와 해도(該道)에 사문(査問)하여 기어코 속히 정계토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피혐(避嫌)하며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파주 목사(坡州牧使)와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처분하신 전교를 보고 정말 놀란 나머지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원계(原啓)에 대한 비지(批旨)를 받들고 보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분부를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여지없이 나무라시면서 불성실하다는 죄목까지 가하셨습니다. 신들이 외람스럽게 언책(言責)을 담당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당년(當年)에 제대로 쟁집하지 못한 채 이제 와서야 비로소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고 청하였으니 그야말로 불성실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태연히 대간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체척(遞斥)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본디 경들처럼 오늘 입시한 삼사의 관원이나 경들 이외에 그동안 대청(臺廳)에는 나오면서 연석(筵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유독 의리를 내세우며 인혐(引嫌)할 일이 아니다. 대간 하나가 그러더니 두 명으로 늘어나고 급기야는 대간 전체에 파급되어 사람들마다 잘못을 본받고 있으니, 폐단의 근원을 따진다면 참으로 이른바 ‘일엽 편주(一葉片舟)로 건널 수 있는 바가 아니다.’114)  는 것이다. 오늘날의 습속을 생각하면 밤중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곤 하는데 경들 몇 사람을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사피(辭避)하지도 말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도 말라.
지금 이후로는 자기 자신을 속이다가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다가 임금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다가 자연히 하늘까지 속이고 있는 요즈음의 잘못된 풍조를 서로들 일깨워주며 더욱더 닦아 나감으로써 괄목(刮目)할 만한 효과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경들부터 스스로 유념하는 동시에 중외(中外)에서 조지(朝紙)를 보는 자들로 하여금 새로 자세를 가다듬을 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정창순(鄭昌順)은 간적(奸賊)에게 빌붙어 제멋대로 독기를 부리고 남몰래 모함하며 암암리에 부추기는 등 최고의 복심(腹心) 노릇을 하였으니, 삭직(削職)하는 전형(典刑)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근래 대청(臺廳)에 나가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 계사(啓辭)도 미결(未決) 상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어느 일이고 간에 실정과 자취에 차이가 날 경우 자취를 통해 실정을 따져본다면 어찌 드러나지 않을 단서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눈에 띄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보면 또한 어찌 전연 죄가 없다고야 할 수 있겠는가. 율명(律名)을 너무 가볍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조속히 마무리를 지으려 하고 있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 판서 정창순은 총애받는 권신(權臣)에게 빌붙어 선량한 인사들을 모함해 해쳤으니, 이 자야말로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을 때 소인(小人)을 써서는 안된다.’고 한 말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사헌부가 아뢰어 이미 윤허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삭직하는 전형은 너무 가볍게 된 잘못이 있으니, 유배보내는 형벌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율명(律名)이 지나치기는 하다만 그래도 영원히 지고(枳錮)시키는 것보다는 나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김사목(金思穆)은 총애받는 권신(權臣)이 있는 줄만 알았지 국가가 있는 줄은 알지 못했으니 단안(斷案)이 이미 구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멀리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결같이 두려워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야 어찌 피차(彼此) 간의 차이가 있겠는가. 이 계사 역시 오늘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인데 그 처지에서 그토록까지 심하게 공의(公議)에 죄를 얻었고 보면 어찌 정말 형편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배가(倍加)하여 율(律)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 주는 뜻이 못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다시 그 일에 대한 전말을 들어 보건대, 파주 목사(坡州牧使)의 경우는 왕명을 받든 일행이 내려가기도 전에 군졸을 동원하여 그 빈 집을 포위했다고 한다. 그가 과연 그 속에 정치달(鄭致達)의 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겠는가. 이 한 조목만 가지고도 그 죄가 중률(重律)을 적용받아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왕명을 받든 일행에 대해서는 맞서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죄를 범한 것이 앞서 전교를 내린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겠다. 그런데 왕명을 받든 일행이 돌아올 적에 그 집의 방과 마루와 문과 창을 하나하나 모두 열어두어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집이라는 것을 알게끔 하였는데도 오히려 감히 파수를 세우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하였다. 그가 아무리 무부(武夫)라고 하더라고 사람의 마음을 갖추고 있을텐데 어쩌면 그토록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거제(巨濟)에 충군(充軍)시킨 것도 관대한 은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고양(高陽)의 경우, 처음에 막고 나서려 했다는 이야기는 풍문에 불과한 것으로서 왕명을 받든 일행을 접대하면서 분명히 격례(格例)를 갖추었다고 한다. 따라서 똑같은 예로 처분한다면 애매하게 뒤섞어넣은 것과 가깝게 될 것이니, 군수 왕도상(王道常)은 분간(分揀)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해군(該郡)을 상세히 조사하게 하되, 막고 나섰다는 한 조목의 일이 만약 사실일 때에는 사유를 갖추어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그러면 다시 엄히 처분하는 조치가 있을 것이다."

 

검교(檢校) 직각(直閣) 이만수(李晩秀)와 남공철(南公轍)을 추자도(楸子島)에 유배하였다.
정치달의 처를 풀어주어 돌려 보낸 뒤에 각신(閣臣)들이 장차 청대(請對)하려 한다는 말을 상이 듣고서, 각신이 한 사람이라도 대궐 문에 들어오면 섬에 유배보내는 율을 시행할 것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만수와 공철이 미처 이 분부를 듣지 못하고서 들어오자, 하교하기를,
"혹시 미처 듣고 알지 못한 듯도 하다마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내려진 것이니 어찌 꼭 사실 조사를 해봐야 하겠는가. 이만수와 남공철을 추자도에 정배하여 명령에 믿음성이 있게 하라."
하였다. 그 뒤 곧바로 또 하교하기를,
"과연 들어서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면 용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3일 갑자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전시(殿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는 신봉조(申鳳朝) 등 49인을 뽑고, 무과에서는 왕도항(王道恒) 등 2백 2인을 뽑았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서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배소(配所)로 도로 돌려보내라는 명을 삼가 받들기는 하였습니다만, 해부(該府)에서 거행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가의 체면상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대개 어느 일이고 간에 처분을 내리실 때에는 그야말로 공명정대해야 마땅한데 늘 밀지(密旨)로 거행하시는 바람에 막중한 관계가 있는 죄인이 남몰래 제멋대로 왕래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나라가 어떻게 나라답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의 말을 채용하실 수 없다고 한다면 유배를 보내시거나 죽이시거나 해도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전교를 내리신 뒤에 신들이 궐하(闕下)로 달려갔더니 부관(部官)이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다고 하면서 중도에서 길을 차단하고 막았으니 사체(事體)가 놀랍기만 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어떤 조치를 취하시든 간에 마음을 평안히 하고 기운을 가라앉히신 다음에 타당한 처분을 내리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은 옳다. 나는 사람을 꼭 들어오게 할 것은 없다는 뜻으로 전하게 했을 따름이지 당초 저지하여 막으라는 분부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부관(部官)의 일이 정말 놀랍기만 하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성인은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유사(有司)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예로부터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폐단의 근원을 생각하면 정말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는 실로 신들이 평소 성상에게 기대해 왔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홍수보(洪秀輔)를 판의금부사로, 조종현(趙宗鉉)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14일 을축

전 판서 정창순(鄭昌順)을 유배보내라는 명을 취소하였다.

 

의금부가 전 감사 김사목(金思穆)을 단천부(端川府)로 유배보낼 일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멀다면 또한 멀고 가깝다면 또한 가까우나 어찌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있는 것이겠는가. 버리지 않는다는 뜻을 특별히 염두에 두는 동시에 법 정신을 떨어뜨리지 않는 방도에 신경을 쓴 것이니, 율(律)을 배가(倍加)하도록 한 것은 옛날을 생각해서요 시비를 가려 형전을 시행토록 한 것은 타인을 면려시키기 위함이었다. 충주목(忠州牧)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정치달의 처를 파주목(坡州牧)의 배소(配所)로 돌려보낼 것을 아뢰었다.

 

이득신(李得臣)을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15일 병인

윤사국(尹師國)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신은 정치달의 처를 배소로 돌려보낼 것을 청한 합계(合啓)는 윤허를 받았지만 금오(金吾)의 초기(草記)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늦게야 비로소 얻어 들었습니다. 대저 정치달의 처가 범한 바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으로 볼 때 경기의 섬으로 가볍게 유배보낸 것이야말로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니 다시 도성 가까이 오게 하는 것은 애당초 의논할 성격의 일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경술년 가을 이후의 거처를 명확하게 조사하지 못한 일로 말하면, 조정 신하들이 불성실하게 처리한 죄를 진정 면할 길이 없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우리 전하의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로 말미암아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어찌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오랜 세월 쟁집해 오던 대간의 계사가 다행히 청한 대로 윤허를 받기는 하였지만 끝내 실효를 볼 수 없게 귀결되었고 보면 귀신과 사람이 품은 통분함을 더욱 조금이나마 씻을 길이 없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금오의 초기가 결국에 가서는 중도에 취소되게끔 된 상황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극악한 역적에 대해서 율을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1부(部) 《명의록(明義錄)》을 평생 귀감으로 삼고 있는 처지에서 감히 물러난 몸이라고 하여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오직 성상께서는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미 물러난 몸이라고 하여 피하지 않고서 오히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바 정치달의 처를 배소로 돌려보내는 일에 대하여 할 말을 다하며 논하였는데, 경의 고심하는 바가 1부 《명의록》의 의리에 있다는 것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전지(傳旨)를 저번에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해부(該府)에서 알아서 거행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경은 미처 이에 대해서는 들어 알지 못하고서 이렇게 상소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

 

3월 16일 정묘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문과·무과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운관(雲觀)115)  에서 《협길통의(協吉通義)》를 올렸다.
이에 앞서 상이 운관에 명하여 일가(日家)116)  의 서적들을 모아 편집하되 번거로운 내용은 삭제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은 뒤 10문(門)으로 분류해 참고하는 데에 편하게 하도록 하였다. 모두 22편(編)으로 완성되었는데, 《협길통의》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중외(中外)에 간행하여 반포케 하였다.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기를,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가볍게 처분하여 경기 가까운 지역으로 내쫓은 데 대해 귀신과 사람이 함께 통분스럽게 여겨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더구나 몸을 숨기고 남몰래 빠져나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어떤 변고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전일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는 청에 대해 비답을 내려 윤허하시기는 하였습니다만, 금군(禁軍) 기마병들이 돌아다니며 찾아보아도 종적을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죄인은 태연히 숨어있으면서 그 죄를 자복(自伏)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또 어떠한 변고라고 하겠습니까.
그가 비록 완악하고 사나운 일개 여자라 하더라도 임금의 명은 두려운 것이고 나라의 법은 지엄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그만 감히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는 곁눈질로 조정을 훔쳐보면서 마치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장난처럼 하고 있으니, 이 죄 하나만 보더라도 어떻게 이루다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금오(金吾)의 신하들이야말로 국법을 시행하고 왕명을 받드는 자들인데 죄인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그 죄에 대해서는 엄히 율을 적용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겠습니다만, 상께서도 속히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그 여자로 하여금 즉각 자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은 반드시 옛일을 존중해야 하고 정사는 옛정사를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법이다. 오늘날 정치달의 처를 처분한 것은 바로 효묘(孝廟)께서 세룡(世龍)의 처를 처분했던 고사(故事)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미 있었던 사례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겠다.
세룡의 처는 정치달의 처와 처지가 일단 흡사할 뿐더러 범죄에 걸려든 것도 서로 같다. 그렇다면 효묘조(孝廟朝)에 세룡의 처를 처분했던 일을 오늘날 만약 정치달의 처에게 방불하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옛일을 존중한다고 할 수 있겠으며 옛정사를 따른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일찍이 고로(古老)의 이야기를 듣건대, 세룡의 처를 제주(濟州)의 적소(謫所)에서 탈출시켜 경희궁(慶熙宮)의 비변사 조방(朝房)에 남몰래 우거하게 하면서 조정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이는 아름다운 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조정에서 좌우에 벌여 서있었던 사람들을 보면 과연 모두가 얼마나 유명한 석학들이었던가.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이를 지적하며 연석(筵席)에서나 장독(章牘)을 올릴 즈음에 맞서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뜻에서였겠는가.
그러나 옛날과 지금의 습속이 다른 점을 감안하여 애써 나의 뜻을 굽히고 뭇사람들의 청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유사가 형편없이 즉시 거행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희극적인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과 관련해서는 경이 한 말이 옳다.
그러나 즉시 자수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부분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할 것이다. 그가 자전(慈殿)으로부터 용서받는 명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 이상 그의 종적은 뜬구름과 같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의복이나 양식과 관련된 비용을 해마다 지급하게 하였을 뿐 그가 있는 곳이나 간 곳을 한 번도 따져 물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자수하고 싶다 하더라도 어디에서 들어 알고서 그런 일을 하겠는가.
북산(北山) 아래와 서성(西城)의 밖과 경기 읍내와 해변가 고을에 각각 집을 매입한 것이 있는데 금부에서는 그것조차도 모른다고 하니 이 또한 남이 듣게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겠다. 삼사에서 잇따라 차자를 올려 쟁집한 것 모두에 대해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3월 17일 무진

만팔문(萬八門)에 거둥하여 문과·무과에 새로 급제한 자들의 사은(謝恩)을 받고 선온(宣醞)하였다. 예(禮)를 끝낸 뒤에 하교하기를,
"강물은 넘실거리고 무부(武夫)는 많기도 한데 물가의 꽃들은 비단처럼 펼쳐지고 강가의 버들은 솜털을 뿜어대니, 곤명(昆明)에서 전투 훈련을 벌이고 망원(望遠)에서 무예를 시험했던 그때가 바로 이런 때였다고 할 것이다. 일전에 8강(江)의 선박을 점검해 보건대 현재 체류하고 있는 것이 3백 수십여 척이었는데 이것을 가지면 충분히 대오를 편성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군무(軍務)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에 차등을 두어서는 안되는데, 요즘의 규례를 보면 육군에만 힘을 쏟고 수군은 소홀히 하고 있으니, 이는 수군과 육군을 병행시키는 뜻이 못된다고 할 것이다.
내일 읍청루(挹淸樓)의 공해문(控海門)에 직접 나가서 지휘하는 절차를 시험해 볼 것이니, 5강(江) 진도(津渡)의 별장(別將) 등은 각자 관하(管下)의 군병과 공사(公私)의 선박들을 이끌고 풍월정(風月亭) 앞 바다에 집결해서 대기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승지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수군의 훈련을 거행케 하는 일은 유사(有司) 한 사람에게 맡기면 충분하니 지극히 존엄하신 몸을 굽혀 직접 행하실 일이 결코 못됩니다. 더구나 지금 날씨를 보면 춥고 따뜻한 것이 맞지 않으니 그저 구중 궁궐에 편히 계시면서 조섭하는 방도를 깊이 강구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처럼 강가에 행차하시겠다고 명을 내리시다니 중외(中外)에서 얼마나 놀라며 당혹해 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속히 취소하는 명을 내리소서."
하고, 승지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전교를 이미 받아 쓰기는 하였습니다만, 이 분부가 한 번 내려가면 반드시 뭇사람들이 당혹해 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니, 신은 감히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무엇을 안다고 감히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만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물론 감히 억측을 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연전에 강루(江樓)로 행차를 옮기셨던 일을 지금 와서 생각을 하면 꿈 속에서도 오히려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행차하시는 명이 또 그 지역에 가신다고 하는 것이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까."
하고, 공철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런 거조야말로 정말 중도(中道)에 지나치신 것입니다. 경강(京江)의 수군 훈련에 직접 나가시겠다니 이는 태평시대를 장식하는 거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로(諸路)에서는 이미 모두 훈련을 정지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불시에 훈련을 거행한다면 이 어찌 더더욱 보고 듣는 이들에게 좋지 않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전교를 환수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모두 체차시켜야 하겠다. 즉시 물러들 가라."
하였다. 공철 등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체차되었다 하더라도 아직도 다시 각신(閣臣)의 직함을 갖고 있으니 전교를 환수하시기 이전에는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신의 직함도 면직시키겠다. 속히 물러가라."
하고, 이어 거듭해서 엄한 분부를 내렸다. 이에 승지들이 비로소 물러갔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이 경재(卿宰)를 이끌고 와서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영돈녕 김이소(金履素), 판중추부사 김희(金憙)·이병모(李秉模)가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전교를 내리신 것을 보건대 수군 훈련에 친히 임하겠다고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중하게 여겨야 할 일이 바로 군대를 정비하는 것인 만큼 수군과 육군의 훈련을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경강(京江)의 수군 훈련을 행하는 것이 제도상으로 매우 드문 것인데, 어떻게 창졸간에 절목(節目)을 갖추며 잠깐 사이에 호령을 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제로(諸路)의 훈련을 정지시키고 있는데, 비록 서울의 훈련은 지방의 훈련과 다르다 할지라도, 공사(公私)의 선박들을 불시에 집결시킨다면, 이 어찌 더더욱 중외(中外)의 보고 듣는 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친히 수고롭게 거둥하시어 멀리 강가에 임하신다면 조섭하는 방도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 듯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成命)을 속히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단지 군사를 정비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수년 전부터 속앓이 증세가 늘 가슴과 폐 사이에서 일어나곤 하는데, 작년과 재작년에 내가 그런 증세를 겪었던 것을 경들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피곤한 증세가 상당히 나타나고 있는데 하루쯤 바람을 쏘이면 몇십 일 정도는 그 효력을 보게 될 것이다. 내 병을 치료할 겸 이런 거조를 취하게 된 것인데, 경들은 오히려 조섭하는 방도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하는가."
하였다.

 

전(前) 금장(禁將) 김지묵(金持默)과 전 어장(御將) 이한풍(李漢豊)을 서용(叙用)하되 모두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홍성연(洪聖淵)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서유성(徐有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유린(徐有隣)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18일 기사

별영(別營)으로 가서 읍청루(挹淸樓)에 거둥하여 수군(水軍) 훈련을 행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신전(信箭)을 가지고 가서 후위부대 마병(馬兵)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갑사(甲士)을 이끌고 동구(洞口)에 작문(作門)117)  을 설치한 뒤 엄히 약속(約束)118)  을 밝혀 한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였다. 그래서 대신(大臣) 이하 배종(陪從)한 신하들이 모두 들어가지 못한 가운데 오직 승지 두 사람과 사관(史官) 두 사람만 따라 들어갔다.
상이 읍청루에 올라갔다. 읍청루 앞 일대의 강 위에 집결된 공사(公私)의 선박 3백여 척을 나누어 선대(船隊)를 형성하였는데 다섯 척씩 연합하게 하였다. 악대(樂隊)를 나누어 싣고서 일제히 연주토록 명하였다. 수군 훈련을 끝낸 뒤에 별영(別營)의 직소(直所)로 돌아와 대신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등이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문안을 여쭈었는데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이곳에 행차한 것은 참으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경들이 차자를 올려 명령을 도로 취소하라고 하는 등 지나친 염려를 하는 듯하기에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또한 이미 자세히 유시했었다. 지금 비로소 관례대로 불러서 접견을 하고 바야흐로 환궁하려 한다. 그러니 경들이 염려한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병사(兵事)에서는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시방편으로 행하되 중도(中道)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록 병사가 아닌 일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속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임시방편[權]이라는 한 글자야말로 성인이 아닌 한 무턱대고 의논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내가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소망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만약 임시방편을 행할 적에 상도(常道)에 어긋나지 않게만 한다면 권(權)이 경(經)과 합치되는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강구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있다.
지금 경들을 대하여 이렇게 말을 했으니 경들이 어쩌면 나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혹시라도 특별히 하교할 일이 있어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치 말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또한 지나치게 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일이 원만하게 타결되어 환궁하게 되었으니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친히 타위(打圍)119)  를 행하시는 일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있기는 합니다만 옛사람 중에는 또한 정지하기를 청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행차하신 일과 관련해서는 신들이 죽을 죄를 짓고 과연 함부로 헤아리며 지나치게 염려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실제로 차자를 올려 도로 명령을 취소하시라고 청했던 것인데, 지금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분부를 받들고 보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타위(打圍)란 바로 수렵을 일컫는 말이다. 고(故) 상(相) 남구만(南九萬)도 일찍이 타위를 정지하도록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수군 훈련을 친히 살펴보는 것은 타위와는 벌써 다른 점이 있다. 그렇다면 쟁집(爭執)할 단서가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내가 그동안 계속 마음 속에 두어온 일을 이제 일단 뜻대로 풀었는데, 나에게도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없었고 조정의 입장에서도 소요를 일으킬 단서가 없었으니, 이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들을 속일 이야기를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올해의 큰 경사는 나에게 있어서는 천 년에 한 번 기회를 맞게 되는 그런 경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속 마음을 감안해 본다면 경사스러운 해가 똑같이 이 해에 들어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스럽게만 여겨진다. 만약 경사스러운 해가 각기 다른 해로 되었다면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자궁(慈宮)의 행차를 모시고 가서 술잔을 올리며 장수(長壽)하시기를 기원하였는데, 노인들을 우대하고 백성들을 구휼(救恤)해 준 모든 일이 기쁨을 장식하고 경축하는 마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보면 초목(草木)과 금수(禽獸)까지 모두 같은 즐거움에 동참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저 심도(沁島)120)  에 유배되어 있는 자만은 일찍이 한 번도 연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그에게 죄가 있고 없고는 우선 따질 것 없이 인정(人情)과 천리(天理)로 헤아려 본다면 내가 어떻게 심회(心懷)를 금할 수 있겠는가. 잔을 올리는 의식이 일곱 순배로 이루어졌는데 한 잔씩 올릴 때마다 안주 한 조각 입에 대지 않았었던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한 바이다. 이는 경들을 대하고서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단지 술만 들고 안주는 입에 대지 않음으로써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한 것일 따름이다.
이 때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기다려 온 것이 오늘이었다. 대체로 성인이야말로 인륜(人倫)의 최고 기준이라 할 것이다. 내가 비록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야 어찌 인륜의 최고 기준을 행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겠는가. ‘실수를 보고서 그 사람의 인(仁)한 정도를 알 수 있다.’는 성인의 가르침도 있다. 그러니 주공(周公)께서 잘못하신 것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미 나의 생각을 다 쏟아놓았으니 경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일단 주공의 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성인에게 과오가 있는 것은 과오가 없는 것만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공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적인 은혜를 돌아보아 공적인 법을 굽힌다면 어떻게 주공의 과오와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야말로 원칙에 입각한 정론(正論)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중도에 맞게만 한다면 원칙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리고 지금 위에서는 지나친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지나친 걱정이 해소된 가운데 날이 채 저물지 않은 때에 좋은 분위기에서 행차를 돌리게 되었으니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또 있겠는가."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청대(請對)했다가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이제 일단 속 마음을 펼칠 여지가 마련되었으니 진달드리고 싶었던 일을 다 말씀드리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지금까지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있게끔 한 것이야말로 아랫사람들이 불충(不忠)한 죄라고 할 것인데, 중간에서 도망쳐 나온 변고를 이번의 사단(事端)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대간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여 주셨기에 여정(輿情)을 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했었는데, 전지(傳旨)가 계하(啓下)된 지 지금 며칠이 지나도록 아직껏 죄인을 못잡고 지체시킴으로써 성명(成命)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행을 지체시킨 죄를 유사(攸司)에게만 돌린다면 어찌 너무나도 불성실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속히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그가 자수하게 해 주소서. 이것이 신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는 여인의 몸인데 어떻게 조보(朝報)를 알겠는가. 그러니 자수시키려 한들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일은 급하지가 않으니 지금은 우선 놔두도록 하라. 이 일이거나 다른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조금 전에 ‘임시방편으로 행하여 중도(中道)를 얻는다.’라고 한 분부나 ‘과오를 보고서 인(仁)한 정도를 안다.’고 한 분부야말로 나의 고심(苦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이 늘 의지하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오직 《명의록(明義錄)》 1부(部)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명의록》을 보건대 의리가 장차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침묵만 지킨 채 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늘 《명의록》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정치달의 처를 처분한 것이 어찌 《명의록》에 비추어 볼 때 흠이 되는 일이겠는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옛사람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았었다. 가령 송 선정(宋先正)121)   같은 경우야 오래된 일이라고 하겠지만 고(故) 상(相) 이경여(李敬輿) 역시 단연코 은혜를 온전히 해주는 것을 위주로 삼았었다. 이들과 같은 유명한 석학들이 어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처분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경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성인보다 한 등급 아래에 있다고 보지 않는 듯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따질 것이 없다. 임시방편을 써서 중도에 맞게 한다는 말을 통해 대체로 나의 뜻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지금은 이미 돌려보내었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경들은 우선 물러가 있도록 하라. 그러면 장차 분부를 내려 나의 뜻을 보여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의 신하들에게 유시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이 해의 이 경사로 말하면 경사스러운 일이 한 해에 모여든 것이었다. 여드레동안 삼가 자궁(慈宮)의 행차를 모시고서 장수를 기원하는 성대한 예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의 돌보심에 응답하고 나라의 행복을 크게 기렸다.
음식을 백관들에게 두루 대접해 주었음은 물론이요 삼군(三軍)에까지 꽃을 나누어 주었으며, 낙남헌(洛南軒)에서 주연(酒宴)을 베풀어 노인들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였는가 하면 신풍루(新豊樓)에 미곡을 쌓아두고 사민(四民)을 배불리 먹였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솥에 죽을 쑤어 기아(飢餓)를 구제하였고 험한 파도를 헤치고 대규모 선단(船團)으로 쌀을 운반해 흉년이 든 지방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배와 말을 동원하며 돈을 가득 싣고 가서 구원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삼도(三都)로부터 팔로(八路)에 이르기까지 은혜가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초목과 금수가 모두 스스로 즐기게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써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동방이 온통 환희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저 강화도에 귀양가 있는 사람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끝내 자리에 한 구석이나마 참여하여 술잔 하나도 같이 나누게 할 수가 없단 말인가. 지팡이 짚은 시골 노인이나 백발이 성성한 마을의 하인들에 비교해 보아도 오히려 그보다 못하다 할 것이니, 내 마음에 어찌 섭섭하지 않을 것이며 허전하지 않을 것인가. 이에 그를 보고 싶은 생각에 취한 듯 깬 듯하여 음식을 대하다가 몇 번이나 젓가락을 놓곤 하였으며 밤중에 자다가 탑전(榻前) 주위를 돌아다닌 지가 여러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한 번 그를 만나기만 하면 번번이 풍파(風波)가 일어나곤 하는데, 이렇듯 전에 없이 좋은 날을 맞이하여 만약 예전의 분위기처럼 되고 만다면 이 또한 대중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려 했던 본래의 뜻이 못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兵事)에는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과 ‘권도(權道)를 써서 중도(中道)에 맞게 한다.’는 말이 또한 있지 않던가. 속임수는 임금이 된 자로서 말할 성격의 것이 못되지만 권도는 그래도 혹 성인께서 쓰신 방편인데, 내가 소원하는 것은 성인의 언행을 배우는 것이다. 더구나 1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이 때에 지키지 않고 장차 언제 실행에 옮길 것인가.
이에 어제 저녁에 그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강루(江樓)에 나오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회포를 풀게 되었는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여 어떻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5강(江)의 선박을 집결시키고 8영(營)의 악대를 모이게 하였으며, 내부(內府)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액원(掖垣)에서 장막을 설치하였으며, 악공은 연주하고 기녀(妓女)는 춤을 추면서 앞뒤로 화답하고 아름다운 비단옷 차림이 좌우로 교차해 비치는 가운데, 전날의 즐거움을 계속하고 이 밤의 환락을 길이 간직할 수가 있게 되었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와 물결을 일으키는데 돌려보낸 자가 온 것만 같아 섭섭했던 마음이 채워지고 허전했던 심정이 기뻐지기만 한다.
돌이켜 생각건대 지난 겨울 이곳에서 만났을 때는 그 어렵고 고달픈 상황이 과연 어떠했던가. 《시경》의 ‘옛날 내가 떠난 때는 흰 눈이 펑펑 내렸는데 이제 내가 돌아오니 버들가지 휘휘 늘어졌구나.’라는 시는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지금은 일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져 장차 환궁하려 한다.
그런데 대신(大臣) 이하를 부처(付處)하고 파직·삭직시키는 일이 연례 행사처럼 되어 왔는데 이 일만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올해로 말하면 어떤 해라고 할 것인가. 아무리 아래에서 궂은 일을 하는 미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털끝 하나 다치게 하고 싶지가 않은데 더더구나 예우해야 할 신하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신하들을 관례처럼 불러들여 접견하면서 특별히 이런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중외(中外)에서 이 조지(朝紙)를 볼 경우 만약 안목이 갖추어진 자라면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각자 잘 알아듣도록 하라."
하니, 신하들이 이 유시를 반절도 채 보지 않아서 번갈아가며 아뢰기를,
"이것이 얼마나 지나친 거조이십니까. 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옵니다. 오늘 행차하신 데 대해 신들이 실제로 의혹을 가졌습니다만 조금 전에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셨기 때문에 그저 금석(金石)처럼 믿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전교를 보고서야 전하께서 이토록 지나친 거조를 취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까 연석에서 내린 분부와 전교를 통해서 이미 말하였다. 올해처럼 전에 없던 경사스러운 기회를 당하여 행차를 수행(隨行)하는 군병으로부터 유리 걸식(流離乞食)하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를 입어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유독 저 강화도에 유배된 자만은 좌석에 참여하여 술 한 잔을 들지도 못하였다. 내가 비록 소중한 경사를 기리기 위해 애써 감정을 억누르기는 하였다마는 일곱 차례나 술잔을 드는 동안 안주를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제신(諸臣)이 눈으로 본 사실이다. 오늘 취한 거조에 대해서 나는 지나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권도(權道)를 써서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라 할 것인데 이렇게라도 해야만 내 뜻을 표시할 수 있었고 내 심회를 풀 수가 있었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은 역적이 올라온 것을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까마득히 알지 못했고 지금 일단 알고 나서도 곧바로 죽지를 못했습니다. 전하의 궁궐에 올곧은 충신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전하께서 어찌 혹시라도 이런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와 판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서 이렇게 비상(非常)한 거조를 취하시다니, 임금의 말은 반드시 믿음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렇게 하셔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죄인이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상이 채찍으로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저 배 위의 군막(軍幕)에 있다."
하였다.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신들이 차마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죄를 지고 있는데, 지금 또 악대를 강 복판에 띄우고 기녀(妓女)와 악공을 가득 실은 광경을 보고도 당장 죽지를 못하였으니,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른데 이것이 무슨 거조인가. 내가 지난해부터 영돈녕의 이런 꼴을 보아왔는데 나도 모르게 심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경들은 빨리 물러들 가라."
하였다. 대신이 부득이 물러나온 뒤 승지로 하여금 들어가 품(稟)하게 하기를,
"신들이 너무도 놀랍고 통분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방금 금오(金吾)로 하여금 죄인을 압송(押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품계(稟啓)를 들인 이상 제멋대로 처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된 자로서 다시 감히 이런 발언을 하며 이런 품계를 들이는 자가 있단 말인가. 경들이 이런 품계를 올리다니 장차 천하 후세에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 같은 자들의 길을 틔워주려 하는 것인가. 생각건대 저 사흉(四凶)들도 감히 이런 마음을 품고 이런 발언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고, 이어 행군(行軍)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말을 타고서 대신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다시 명한 뒤 하교하기를,
"아까 이미 말했다마는 내가 이번에 취한 거조에 대해서 나 자신은 권도(權道)에 알맞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성인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들의 입장에서야 요(堯)·순(舜)과 같은 임금을 만들려고 목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지극히 개탄하는 바이다. 요즘 들어 강화에 유배된 자의 일을 가지고 제신(諸臣)이 하나의 기가 막힌 아첨용 자료를 삼고 있다. 그리하여 한 번 사단이 일어나기만 하면 분의(分義)나 예절을 범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듯 부르짖고 소란을 떠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도리인가."
하니, 언호가 아뢰기를,
"신들이 만약 옛날의 대신과 같은 기절(氣節)을 갖고 있었다면 필시 전하로 하여금 오늘날처럼 지나친 거조를 취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환궁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9일 경오

조정에서 익일 문안(翌日問安)122)  을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대신이 금부에 분부했다는 내용으로 들어와 품하게 하였는데, 김 영돈녕과 이 판부사 중에 어떤 대신이 먼저 이런 의논을 꺼내었는지 사관을 보내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가주서(假注書) 서준보(徐俊輔)가 회주(回奏)하기를,
"신(臣) 김이소(金履素)가 금오에게 통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으로 먼저 그 의논을 꺼내었고 신 이병모(李秉模)가 이 의논을 받아 마침내는 들어와 품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데, 분부를 엄하게 내리시자 두려움에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른 나머지 현재 관(冠)을 벗고 거적을 깔고서 대죄(待罪)하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경사를 기리고 기쁨을 표시해야 할 이 때에 이런 식의 거조를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다시 사관을 보내 만류하게 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와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
"올봄 초에 상께서 분부를 내리시어 조정 분위기가 일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들도 외람되이 대관(大官)의 직책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름대로는 만 분의 일이나마 상의 뜻을 선양하고 옛날의 버릇들을 소탕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형편없이 불충하고 돼지나 물고기처럼 미욱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이제 그만 또 분의와 예절을 어긴 죄목에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으니, 신들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 구전(口傳)으로 내리신 분부를 삼가 받들건대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내용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살아서 또 뭐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속히 처단하는 형벌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전적으로 경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겠는가. 두 대신 가운데 한 사람은 지난해 이 때의 대신이었고 한 사람은 최초의 연석(筵席)에서 함께 은혜를 입었던 대신이다. 어제와 오늘 신칙하며 유시했던 것은 내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경사를 기려야 할 때에 조정의 분위기는 의당 화기롭고 태평스러워야 할 것이다. 경들은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 신위 앞에 신고하고 속히 구습(舊習)을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0일 신미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헌조(申獻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정존중(鄭存中)을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21일 임신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징계하고 토죄(討罪)하는 하나의 일이야말로 이 세상을 바르게 유지시키는 큰 의리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대로 바로잡지를 못했을 뿐더러 기미를 보고서도 제대로 막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극악한 역적으로 하여금 태연히 배에 올라 타고서 낭자하게 술판을 벌이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만고에 볼 수 없었던 큰 변고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이 반열의 첫째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으면서 멍청하게 알지를 못했으니, 다시 어떻게 감히 대관(大官)으로 자처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심회(心懷)로 볼 때 이 해를 만나고 이 때를 당하여 다시 어떠하겠는가. 올해가 바로 자궁(慈宮)의 갑년(甲年)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내가 경축하는 마음으로 날을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단지 올해가 경모궁(景慕宮)123)  의 갑년만 된다면 내가 장차 어떻게 감당해 낼 수가 있겠는가.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것이 완전무결한 경례(經禮)는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찌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단연코 행하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바야흐로 예전에 없던 경사를 맞아 온 누리가 똑같이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강화(江華)에 유배된 그 사람만 소외되는 탄식이 있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근년 이래로 이에 관한 일이 한 번 나오기만 하면 조정이 문득 소란스러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올해가 어떤 해인가. 비록 하인이나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갈 때나 돌아올 때나 기필코 온 조정으로 하여금 일을 원만하게 타결짓도록 하였던 것이었다.
대저 의리에 대해서는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다투는 법이다. 그런데 경들은 역적을 토죄하는 것이 의리라는 것만 알았지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의리가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어느 일이고 간에 그렇게 해야 할 타당성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의(義)이고 하늘의 뜻과 합치되면 그것이 바로 이(理)인 것이다. 나는 이런 의리에 입각하여 마음 속으로 단안을 내렸다. 그러니 경들이 이야기하는 의리와 나의 그것은 서로 모순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지나친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조처하는 과정에서 중도를 벗어나게 행했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을 허물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장 요체가 되는 의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본디 굳게 잡아야 할 곳이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비록 성인에게 물어본다 하더라도 필시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다는 인상을 줄 것 같은 거조를 취하면서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주공(周公)의 허물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령(禁令)으로 말하더라도 그 지극히 중요한 것이 과연 어떠하다 하겠는가. 옛날 효묘(孝廟) 때에 송 문정(宋文正)은 임금의 신임이 그렇게 두터웠는데도 정유년에 봉사(封事)하는 과정에서 삼중(三重)으로 밀봉(密封)한 다음에야 그 속에서 비로소 금령에 속한 일을 말하였었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獄事)와 관련하여 김홍욱(金弘郁)이 금령을 어기고 말을 하자 그에게 중한 형전(刑典)을 적용했었다. 또 인평 대군(麟坪大君)에 대하여 유도삼(柳道三)이 망령된 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유철(兪㯙)이 상소하여 더 율(律)을 가하자고 청하자 하옥(下獄)시켰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유철 한 사람 뿐이었고 김홍욱 한 사람 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 모두가 유철이 되려 하고 김홍욱이 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 번 금령을 설치할 때마다 이를 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지고만 있다.
대저 제멋대로[專]나 번번이[輒]라는 두 글자는 좋은 제목이 못되는 것들이다.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런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안될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차원이 낮은 사람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라는 것도 본래의 목적은 임금을 임금답게 하고 신하를 신하답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역적을 토죄한다고 하면서 그만 거꾸로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스스로들 허물어뜨리고 있다. 지난해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합문(閤門)에서 부르짖으며 고함을 지르고 궁궐 뜰에 함부로 뛰어들어 왔었는데,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현재 조정에 가득한 신료들을 보건대, 아무리 하찮은 일이나 사소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누구 하나 감히 한 마디라도 내놓은 사람이 없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모두 충성심에 불타 분개하는 사람들이 된단 말인가. 이 모두가 습속으로 위의 뜻을 함부로 헤아린 탓으로서 ‘겉으로는 금령을 설치하셨지만 속으로는 문을 밀치고 들어가고 합문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을 진정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여기고 계시는 것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와서는 법으로 금한 것이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하게 되고 말았다.
생각건대 나의 본심을 제대로 드러내 밝히지 못한 탓으로 이런 지나친 행동이 있게끔 된 것이니 이는 모두가 유사(有司)의 잘못이다. 습속의 폐단이야말로 한 마디로 말해서 가슴아픈 일이라고 하겠다. 오늘날의 일은 오직 먼저 습속을 바로잡은 뒤에야 옛날 이상 정치 시대로 조정을 높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강화도 역적의 죄야말로 종묘 사직과 관계된 것인 만큼 전하께서 생명을 보전시켜 준 은혜만도 이미 지극하다 할 것입니다. 더없이 엄한 것은 왕법(王法)이고 그지없이 중한 것은 국체(國體)입니다. 그렇다면 신하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남몰래 빠져나오게 한 일이야말로 정말 보통을 뛰어넘는 지나친 거조였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른바 주공의 허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근래의 습속을 보면 부끄러움을 끼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소장(疏章)을 내놓는 것들도 모두 놀랍기 그지없다. 송문술(宋文述)의 봉입(捧入)되지 않은 소만 하더라도 어떻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행동거지가 모두 이런 식이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근일 정치달(鄭致達)의 처에 관한 일 역시 안타깝기만 합니다. 금부 당상이 찾아낼 방도가 없을 듯하니, 삼가 바라옵건대 속히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즉시 자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도 이제 와서는 문득 희롱조의 연극으로 귀착되었으니 더욱 처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였다.

 

3월 24일 을해

신사운(申思運)을 형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한성부 판윤으로, 송영(宋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5일 병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심환지(沈煥之)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강루(江樓)에서 호종(扈從)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두려워지는 점이 있었습니다. 대저 올해 장수(長壽)를 축원하며 술잔을 올리고 경축했던 것은 천 년에 한 번 볼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지극히 성대한 인덕(仁德)을 발휘하시어 차마 공적(公的)인 것 때문에 사적(私的)인 것을 떨쳐버리시지 못한 나머지 지극한 정성으로 측은하게 여기며 내리신 분부를 보고 신은 정말 감격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제왕(帝王)의 가법(家法)은 여항(閭巷)의 경사(卿士)와는 달라 종묘 사직을 크게 여기고 관석 화균(關石和均)124)  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祖宗)께서 마련해 놓으신 터전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느닷없이 험준한 길로 행차를 내모시어 강루(江樓)에 친히 임하신 뒤 군대를 사열한다는 이름을 붙이심으로써 온 나라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고 의혹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성토한 의논을 속습(俗習)이라고 배척하고 아첨을 떤다고 단안을 내리셨습니다.
아,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풍속이 투박해져만 가는데 선비들은 정론(正論)을 세우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역적을 성토할 때를 당할 적마다 지레 먼저 두려워하고 의심하면서 주모자와 추종자를 가리지 못하고 경중을 분별하지 못한 채 한결같이 몰아세워 무함을 하고 배격하는 일을 다투어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해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이를 그냥 권세를 휘두르고 영향력을 과시하는 밑천으로 삼고는 징계하고 성토하는 즈음에 융통성을 부리고 작위와 상벌을 시행하는 사이에서 주고 뺏으면서 어떤 때는 ‘성상의 뜻이 이러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정의 논의가 그러하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제신(諸臣)의 장주(章奏) 가운데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는 내용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트집잡아 역적 편으로 몰아세우면서 극률(極律)을 적용하는가 하면 또 난적(亂賊)의 근본 요인은 그냥 내버려둔 채 그저 지엽말단적인 것만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단지 사소한 것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타고나신 성품을 극진히 발휘하여 인륜을 지극히 행하고 계시는 우리 전하의 성대한 덕업(德業)까지도 이 무리들에 의해서 기만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난해와 금년에 한 번 있었던 지나친 거조에 대해서까지 감히 말하기를 ‘전하께서 겉으로 꾸미시는 것이지 실제 마음은 아니다.’고 하는가 하면, ‘역적의 성토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는 비록 분의(分義)를 범하고 예절을 어기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성상께서 엄히 분부하시는 듯하지만 성상의 마음 속으로는 꼭 싫어하시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이야기가 서로 전파되면서 뭇사람들이 듣고 서로들 휩쓸린 나머지 전하께서 좋아하고 명령을 내린 것과 반대되는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야말로 성상을 무함하는 것 중에 첫째 가는 일이기에 신들이 꼭 성상께서 분명하게 유시를 내려주는 것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금 조신(朝臣)이 역적을 성토하고 있는 일에 대해 혹 ‘위의 뜻을 아첨해 따르려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 ‘무리 가운데에 두각을 나타내려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혹은 ‘분의(分義)를 극진히 한 것을 과시하려 한다.’고 하기도 하는 등 역적을 성토하는 한 시대의 사람들을 통틀어 속투(俗套)라고 이름을 붙이셨는데, 이와 같은 성인의 한 말씀은 또한 천하 후세에 무궁한 폐단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신은 삼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대저 의리에 입각하여 징계하고 성토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에서 품부받은 떳떳한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인신(人臣)이 감히 듣지 못할 분부를 조정에 내리시고 부월(鈇鉞)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시며 영해(嶺海)에 귀양보내겠다고 겁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왕망(王莽)·조조(曺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이야말로 천고의 극악한 대역적들인데, 어떻게 역적을 성토하는 주장을 거꾸로 이 네 역적의 과조(科條)로 귀결시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아무리 뒷날의 폐단을 막으려는 뜻을 가지고 이렇게 아랫사람들을 억누르는 분부를 하시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턱대고 이 네 역적의 이름을 신들에게 억지로 뒤집어 씌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삼가 원컨대 속히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전후에 걸쳐 내려진 금언(禁言)에 관한 여러 조목 및 중도에 지나친 분부들을 환수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유시하시어 중외(中外)에 반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야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상소문을 가져다 보노라니 간혹 절실히 깨우쳐 주고 격앙(激昂)케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 글이 남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으니, 표현상 나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것은 사소한 문제로서 모두 가혹하게 평하지 않기로 하겠다.
경이 차자에서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내가 강루(江樓)에 행차한 것과 금조(禁條)를 환수하라는 것과 분명한 유시를 내리라는 것 등 몇 가지 사항이었으며, 끝에 가서 풍속을 바로잡고 무함을 해명하는 것으로 한 편의 요지를 삼으면서 결론을 맺었다. 그러나 금조를 환수하는 것은 논할 성격의 일이 아니고 분명한 유시를 내리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강에 배를 띄우고 주연(酒宴)을 베푼 거조로 말하면, 이는 대개 땅 속의 물과 하늘 위의 구름을 취해 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나 자신은 내성 외왕(內聖外王)의 경지에서 권도(權道)로 원리 원칙과 합치시킨 것으로서 그 일이야말로 마치 일월 성신(日月星辰)이 높이 떠서 길을 환히 비쳐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황(皇)·왕(王)·제(帝)·패(覇)나 대대적으로 펼칠 수 있는 일인 만큼 내가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말은 아니고 내가 우러러 계술(繼述)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가법(家法)이다.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동교(東郊)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양녕 대군(讓寧大君)을 적소(謫所)에서 불러와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다음 연회가 끝나자 다시 적소로 돌려보내고 환궁하신 일이 있었으며, 이밖에도 망원정(望遠亭)과 희우정(喜雨亭)에서 수군(水軍) 훈련을 행하신 일이 있었는데, 모두 국승(國乘)에 실려있다. 참으로 경과 같은 자라면 이런 일에 대해서도 성인의 거조와 관련하여 감히 따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이기 때문에 이렇게 온유한 비답을 내리는 것이니, 이는 경이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면서 진실된 속 마음을 스스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경 이외에 다시 너절한 말들을 주워 모아 상소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금령(禁令)대로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7일 무인

이경무(李敬懋)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8일 기묘

하교하였다.
"나라에 있어 막중한 일로는 형정(刑政)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일 정치달(鄭致達)의 처에 관한 일을 처음에는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또 공(公)에 입각하여 사(私)를 억누르게 되었는데, 명색은 비록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무기한 강역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형적(形跡)이 불성실하게 되고 말았으니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사자야 무슨 수로 자수를 하겠는가. 그리고 위에서도 결단코 조사하려 하지 않았으니 금오(金吾)의 당상이나 낭관이 과연 무슨 죄가 있으며 오부(五部)의 관원과 하례(下隷)들이 또 무슨 죄가 있는가. 하루 이틀 계속 이런 식이 되면 도리어 국가의 체모만 손상되고 이를 듣는 이들이 의혹에 잠길까 두려워진다. 그래서 누차 생각한 끝에 이런 분부를 내리게 되었는데, 만약 혹시라도 쟁집하며 소란을 피우면 그 때는 곧장 석방하여 서울에 있는 그의 옛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근거로 제시할 사례(事例)가 있다. 먼저 이러한 내용으로 조정 신하들이 알게끔 하라.
금방 내시(內侍)를 보내 정치달의 처가 있는 곳에 전하여 파주(坡州)로 도로 떠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한 만큼 형벌을 한 등급 낮추어 다시 편할 대로 거주케 하는 형전(刑典)으로 고쳐서 예전대로 도성 밖에서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공법(公法)도 신장되고 사은(私恩)도 행해졌으며 형정(刑政) 역시 잘못되었다는 탄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승지들이 정치달의 처에 관한 일로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이끌고 구대하니, 하교하기를,
"신하 노릇을 하려면 신하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 순(舜)이 요(堯)를 섬겼던 대로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에게 불경(不敬)을 범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덕이 없다 하더라도 경들이 나를 섬기면서 요임금을 섬기던 도리에 입각하여 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대저 이렇게 해야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되고 저렇게 하면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경우, 경들처럼 정승의 지위에 있는 처지로서는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간에 그저 의리만을 살펴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근고(近古)에 있었던 세룡(世龍)의 처의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가 범한 죄악이 얼마나 넘쳐 흘렀던가. 그런데 그 당시에 은혜로 온전히 보전시켜 주는 주장과 의리로 처단하는 주장을 보건대, 옛 대신들이 일을 처리한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세룡의 처가 통천(通川)의 적소(謫所)에서 용서받고 돌아올 때 송 문정(宋文正)이 말하기를, ‘세룡의 처가 흉악한 짓을 행한 것은 회남왕(淮南王)125)  이 모반(謀反)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회남왕 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촉(蜀) 땅으로 옮겨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통천이나 촉 땅이나 지독하게 살기 어려운 지역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는 죽고 이 자가 죽지 않은 것은 행(幸)과 불행(不幸)의 차이일 뿐이다. 만약에 불행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주자의 비난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문정공(文正公)은 대유(大儒)인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다. 이것 역시 신하된 도리에서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해 그런 것이겠는가. 오늘날의 습속을 보면 이런 일들에 대해서 오직 성토가 혹시라도 느슨하게 될까 걱정하고 주장하는 것이 맹렬하게 되지 못할까 염려하면서 못하는 일이 없이 서로들 다투어 온 힘을 경주하고 있다. 그리고는 조정에다 하나의 함정을 파놓고 있으니 설사 문정공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의 박직(樸直)함이 필시 그 당시와는 같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습속을 대대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의리를 내가 맨 먼저 제기했던 이유이다.
좌상과 우상을 두 번째로 임명하면서 가졌던 최초의 연석(筵席)에서 내가 경들을 대면하고 이야기했던 그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분명히 유시하는 일을 당분간 미루기로 했던 내막에 대해서는 외부 사람들이 들어 알 길이 없을 듯한데 경들이 나의 뜻을 선양하기로 한다면 바로 이런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경들은 모두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고 있으니 의리상으로 행과 불행을 같이 해야 할 처지이다. 그러니 어찌 혹시라도 자신의 안위(安危)만 돌본 채 습속을 갑자기 고칠 수 없다는 데에 구애된 나머지 요(堯)임금을 섬기던 도리에 입각하여 나를 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성조(聖朝)의 성대했던 시대에 선정(先正)이 말했던 것을 자신의 임무로 담당하지는 않고서 전석(前席)에서 간절히 타일러 준 천언 만어(千言萬語)를 마치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막연하게만 들어서야 되겠는가. 오늘 아름다운 일을 따르다가 내일 탄핵을 받더라도 경들의 입장에서 보면 만년(晩年)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경들은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인가. 애석한 일이다.
일전에 배소(配所)로 도로 돌려보내라는 계사(啓辭)를 애써 따랐다가 아침에는 등급을 낮추어 편한 대로 거주하게 하라고 하였다. 나도 귀양보내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구차하게 미봉(彌縫)하는 행동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가령 옛날 대신이 이를 본다면 나의 정령(政令)을 두고 어떻게 간주하겠는가.
내가 경들에게 요구한 것은 부차적인 사안으로 따르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경들이 조정에 나와 접견을 요청한 것도 부족해서 또 경재(卿宰)를 이끌고 청대(請對)를 하고 있으니 개탄스러운 생각만 들 뿐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이 된다면 형세상 장차 아까 내린 유시대로 실천하면서 곧장 옛일을 원용하여 옛날 살던 집으로 용서해서 돌려보내는 것 외에는 다시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두 번 말하기 어려우니 경들은 말없는 가운데 깨닫도록 하라.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입시한 승지는 이 초본(草本)을 가지고 가서 대신에게 전하라."
하였다.

 

삼사(三司)의 제신(諸臣) 및 금오(金吾)의 당상들이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시임·원임 대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정치달의 처를 육지에서 경기 지방으로 오게 한 것만도 이미 크게 실형(失刑)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는 일조차 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만 이렇듯 편할 대로 거주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어찌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밖으로 내쫓으라고 한 것이고 보면 완전히 풀어주도록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공법(公法)이나 사은(私恩) 모두 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인데, 경들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경들이 만약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까 내린 유시를 실천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언호 등이 여전히 쟁집(爭執)하여 마지않으니, 상이 오열(嗚咽)하면서 이르기를,
"견강부회하는 일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부득불 말해야 하겠다. 당초 그를 풀어주던 날 밤에 꿈 속에서 선왕(先王)을 뵈었는데 드넓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경들이 이런 말을 듣고난 뒤에야 어찌 감히 다시 말을 하겠는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완전히 놓아줄 수밖에는 없다. 《명의록(明義錄)》에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이상 그의 죄는 원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겠지만, 선조(先朝)께서 사랑을 쏟아주신 뜻을 몸받고 우리 가법(家法)상 인륜을 돈독히 하는 정리(情理)를 계술(繼述)하여 그로 하여금 편한대로 거주하게 한 것이야말로 경(經)이나 권(權)에 있어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라고 할 만한데, 경들이 쟁집할 단서가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언호 등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 승인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무작정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단 쫓아내기로 한 이상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배소(配所)를 바꾸거나 석방해 보내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였다.

 

3월 29일 경진

화성(華城)의 직로(直路)에 파발참(擺撥站)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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