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사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4월 2일 임오
북관(北關)의 봉명(奉命) 사관(史官) 윤치영(尹致永)이 정평(定平) 백성들의 금(金) 캐는 폐단에 대해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금을 캐는 데 따르는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보배를 간직하고서 쓰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계책이 못된다.’고 하는데, 나는 매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명령이 행해져 풍속이 아름답게 된 상태에서 빈 땅을 뒤져 캐낸 뒤 백성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관청에서는 납부한 세금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어찌 양쪽 다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그만 이와는 반대로 되어 이른바 개점(開店)한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의 간악한 수단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연전에 엄히 금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영변(寧邊)에서의 폐단을 듣자마자 정평에서도 또 이렇다 한다. 호조 판서가 만약 충분히 살피고 신중을 기해 차인(差人)을 차송(差送)했던들 이런 폐단이 무슨 수로 나오겠는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양도(兩道)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폐단을 일으킨 차인을 엄히 다스려 쫓아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규장각에서 직각(直閣)에 대한 회권(會圈)126) 을 행하였다. 【제학(提學) 심환지(沈煥之), 검교(檢校) 직각(直閣) 남공철(南公轍), 검교 대교(待敎) 서유구(徐有榘)이다.】 이시원(李始源)이 4점을 얻고, 박종순(朴鍾淳)·김근순(金近淳)이 3점을 얻었다.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시원(李始源)을 규장각 직각으로 삼았다.
4월 6일 병술
영흥(永興) 본궁(本宮)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날에 부로(父老)와 사민(士民) 모두에게 와서 관람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이어 어제(御題) 및 무과(武科)의 규구(規矩)를 내리면서 대신에게 명하여 본부(本府)의 유생과 무인들을 시취(試取)한 다음 상전(賞典)을 내려주도록 하고 함흥(咸興)의 유생과 무인들도 모두 영흥에 집결시켜 시취하게 하였다. 또 영흥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날에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양로연(養老宴)을 행하게 하였다.
호서(湖西)의 유생 민혁수(閔赫洙)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정호(鄭澔)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현손(玄孫)으로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입니다. 가학(家學)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을 뿐더러 사승(師承) 또한 학문의 요체를 이어받아 행동이 독실했고 조예 역시 정밀하고 심오하였습니다.
아, 선정신 송시열은 평생토록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종의 음험하고 사악한 기운이 그 사이에서 싹터 창을 거꾸로 잡고 정도(正道)를 엄폐하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성인에게 모욕을 가한 결과 세도(世道)가 혼란스럽게 되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호만은 외롭고 위태로운 단 하나의 몸으로 성내어 부르짖으며 찢어 발기려는 세력과 맞서면서 한 번도 화복(禍福) 때문에 동요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진퇴(進退) 때문에 혹 태도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임 사화(辛壬士禍)를 당하여 흉악한 패거리들이 무함하면서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자, 정호는 팔십 노인으로 시골집에 물러가 있다가 병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환첩(䆠妾)과 결탁하여 국본(國本)127) 을 동요시키고 있는 정상을 극진하게 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흉악한 무리들의 모함을 받아 서쪽 변경과 남쪽 섬에서 3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지면서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여 입조(入朝)하게 되자 맨 먼저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고 나라의 적을 성토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연석(筵席)에서 아뢰거나 차자를 올려 논할 때에 간절한 정성을 바치면서 끝내는 거취(去就)를 결정짓는 데에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대의(大義)를 밝히고 종사(宗社)를 보위하는 방도를 모두 강구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문득 진달하며 다하지 않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도(世道)가 비록 낮아졌어도 태반의 사류(士類)가 이 의리야말로 하늘과 땅을 지탱시켜 주고 만고토록 행해져야 할 것으로서 추락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정호의 힘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문(斯文)을 주장하며 세도를 구해 준 공로는 실로 선정(先正)이 돌아가신 뒤로 오직 이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올려 높이 받드는 일이 한 세상의 공의(公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비록 따로 사당을 새로 세워 추모하는 정성을 길이 표한다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또한 장차 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충주(忠州)의 누암 서원(樓巖書院)이야말로 문정공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인 동시에 정호가 노년을 보낸 곳인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호가 죽은 이듬해인 정사년에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면서 따로 사당을 건립할 것 없이 여기에 배향(配享)하자고 하였는데, 스승과 제자를 함께 한 자리에 모시게 되면 마치 마루에 올라가 수업을 받는 것처럼 될 것이니 법에 비추어 보아도 구애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호는 문충공(文忠公) 신(臣) 민정중(閔鼎重)과 문순공(文純公) 신 권상하(權尙夏)와 더불어 모두 문정공의 고제(高弟)로서 세상에서는 정자(程子) 문하의 양시(楊時)·사양좌(謝良佐)와 주자(朱子) 문하의 황간(黃幹)·채침(蔡沈)에 비겼습니다. 그런데 민정중은 서원이 건립된 초기에 때를 같이하여 배향되었고, 권상하 역시 지난 을사년에 이미 상소로 청하여 제배(躋配)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정호를 함께 배향하는 것이야말로 어찌 더욱 순서로 볼 때 당연히 행해야 할 의전(儀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윤허를 내리시어 국가에서 덕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 이를 본받게 하는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의 사연을 해조(該曹)에 내려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충청도 유생 민혁수 등이 상소한 것을 보건대, 문경공(文敬公) 정호를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을 향사(享祀)하는 누암 서원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정호는 강직하고 방정한 자질과 정대한 학문의 소유자로서 선정(先正)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종신토록 준수한 것은 오직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요결(要訣)인 하나의 직(直)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문(斯文)이 그 덕택에 더욱 중해지고 의리가 천명(闡明)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선조(先朝)께서 유시를 내려 태산 북두(泰山北斗)에 비유하시고 백발 단심(白髮丹心)이라고 표창하셨으며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융숭하게 추장(推奬)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누암 서원으로 말하면 선정을 제사드리는 곳일 뿐더러 또 정호가 옛날 살던 마을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정호의 학문과 사업으로 볼 때 이 서원에 배향하는 것이 타당한데, 이는 공의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근거로 삼을 만한 최근의 사례도 있는 일입니다. 배향하는 한 조목을 특별히 허락하여 시행케 하는 것이야말로 어진 이를 본받게 하는 성전(盛典)을 빛내는 일이 될 듯싶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추배(追配)하는 의전(儀典)은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을 이 서원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는 일에 대해서 백 사람이 비록 어렵게 여긴다 하더라도 이 사람만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고(故) 상(相) 민정중과 고 유신(儒臣) 권상하를 함께 배향하고 추후에 배향할 당시에 이 대신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미처 함께 행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함께 제사지내자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야말로 사림(士林)의 흠이 될 뿐만이 아니라 조정의 궐전(闕典)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청한 것도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할 것이니,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토록 하라. 그리고 추배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본사(本祠)에서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3일 계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행궁(行宮)을 보수하는 물력(物力)을 응당 마련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행행(幸行)하실 때의 포진(舖陳)128) 이나 도배(塗褙) 등의 일을 일단 탁지(度支)129) 에 맡기지 않은 이상 본부(本府)에서 거행케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밖에 성첩(城堞)을 수선하고 군영에 보급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내도록 해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일정량의 곡물을 구획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본사(本司)에서 관장하는 곡물 중에서 정곡(正穀) 1만 석(石)과 피곡(皮穀) 2만 석을 기준으로 하고 그곳의 토산물과 곡총(穀摠)130) 에 따라 적당히 마련하여 ‘화성 행궁 정리 수성곡(華城行宮整理修城穀)’이라고 이름붙인 뒤 팔로(八路)에 나누어 배치토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가령 조적(糶糴)하여 모곡(耗穀)을 취하는 방도나 이를 팔아 수요에 대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로 하여금 본사와 왕복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낸 뒤 영구히 준행케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15일 을미
비변사가 화성 행궁 정리 수성곡(華城行宮整理修城穀)의 조적 절목(糶糴節目)을 올렸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화성에 유수(留守)를 두고 나서 또 정리사(整理使)를 겸하게 한 것은 장차 행궁의 수리를 위임하고 성지(城池)의 수선을 책임지우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소요되는 재력에 대해 아직 조치해 주지 못한 결과 형식과 내용이 서로 부응하지 못하니 사체(事體)로 볼 때 미안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건물이 낙성되고 누각과 망루가 완성을 본 뒤이니 더더욱 제때에 강구하여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화성의 일과 관련해서는 경비를 축내지 않게 하려는 것이 성상의 의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칸 되는 건물을 짓거나 몇 천 보(步) 되는 곳을 뚫고 쌓아올릴 때 일찍이 조금이라도 대농(大農)의 자본을 가져다 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행행(幸行)하실 때의 접대 비용이나 유생과 무인을 시험보이고 나서 상을 주는 것까지도 모두 별도로 비축해 두었다가 수시로 들여와 쓰곤 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행궁을 수리하고 성지를 수선하는 하나의 일로 인해 그만 거꾸로 그동안 해오던 데에 따라 유사에게 마련하여 쓰도록 하거나 이웃 고을의 창고에서 끌어다 쓰도록 한다면 성상의 뜻을 받드는 도리가 결코 못될 것입니다. 삼가 품(稟)하여 떼어주기로 결재를 받은 3만 석의 곡물을 팔로(八路)의 주현(州縣)에 배정한 뒤 그 모곡(耗穀)을 취하여 돈으로 만들고 창고를 설치해 보관하게 하면서 수요에 충당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가령 곡물을 조적(糶糴)하고 돈으로 만들어 주선하는 등의 사항에 대해서는 따로 절목을 만들어 영구히 준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정곡(正穀) 1만 석과 피곡(皮穀) 2만 석을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곡물 중에서 떼어주어 팔로에 골고루 나눠주되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은 물론이고 주현의 규모를 감안하여 차등있게 배정한 뒤 그 곡식을 내주고받아들이면서 모곡(耗穀)을 취하는 한편 이를 내다 팔아 수요에 대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이 곡식은 그 의미가 소중할 뿐더러 수요 역시 모두 정수(定數)가 있으니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늘거나 감축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흉년을 만났다 하더라도 정퇴(停退)시키거나 견감(蠲減)하는 대상에 포함시키는 일은 절대로 거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준대로 받아들인 상황을 매년 말에 비변사에 보고하고 화성부에 공문을 발송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내다 팔 즈음에 차인(差人)이 왕래하다 보면 자연히 폐단이 생길 것이니, 이 곡식에 대해서는 본부(本府)의 교리(校吏)를 보내지 말고 각기 그 도의 감영에서 주관하여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읍(列邑)에서는 내다 파는 데에 따라 편리할 대로 감영에 수송하고 태가(馱價)를 마련해서 모두 모아 화성부에 옮겨 납입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지금 이 곡물을 설치한 것은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돈으로 만들어 올려보낸 뒤에는 별도로 창고 하나에 쌓아두고 엄히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쓸 데에만 쓰면서 수요를 절약하여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음으로써 기필코 저축하는 효과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쓰고 남은 것들은 그 수효를 매년 말에 낱낱이 기록하여 장부를 만든 뒤 비변사와 내영(內營)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궁에서 임금이 사용하는 기용(器用)·집물(什物) 및 도배하고 자리를 깔고 장막을 치는 일 등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종전에 호조에서 거행하던 것들을 일체 정지시키고 본부(本府)에서 가능성있는 수입을 헤아려 전담해서 조치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마련하거나 바꾸는 연한(年限)에 대해서는 일체 정해진 규례(規例)를 따라 시행하게 함으로써 어긋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각종 물품은 원래 공가(貢價)와 시가(時價)가 다른 만큼 참작하여 절충해서 융통성있게 가격을 정해야 할 것인데, 각각 연한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미리부터 경영하여 조치해 둠으로써 써야 할 시기를 당하여 군색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궁을 수리하거나 성첩(城堞)을 보수할 때에는 해야 할 일이 생기는 대로 장계로 보고하거나 연석(筵席)에서 품(稟)한 뒤 회답을 기다려서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감히 연한을 넘기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해당 유수가 직접 집행하여 단속하면서 가능한 한 절약하게 하고 혹시라도 지나치게 쓰는 폐단이 있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1년에 들어올 수입을 적당히 헤아려 마련해서 3천 냥(兩)은 행궁의 물력에 소속시키고 2천 냥은 성역(城役)의 물력에 소속시키되, 수리하고 보수할 즈음에 피차간에 족하고 부족한 상황을 살펴서 서로들 조정하게 함으로써 혹시라도 한쪽에만 편중되게 쓰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돈으로 환산되는 원래의 숫자가 일단 일정하게 매년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각종 조치도 대부분 햇수를 띄워 거행하게 되어 있고 보면 지출한 금액을 빼고도 남는 돈이 자연히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숫자를 계산해서 제해 두었다가 소상하게 기록하여 연말에 장부로 작성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원소(園所)131) 의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의 수리 및 홍전문(紅箭門) 내외의 공해(公廨)에 대해서는 예전대로 완천고(筦千庫)에서 거행하게 하되 역시 수리하는 물력(物力)과는 뒤섞여 쓰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10년마다 행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되 정리소(整理所)의 물력을 따로 책정하여 거행하고 본고(本庫)의 물력은 가져다 쓰지 못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전체 숫자를 회록(會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물품 가격과 수리 및 보수한 연한(年限)에 대하여 일정한 규정을 만들어 따로 책자를 만든 뒤 이를 본부에 내주어 영구히 준행토록 하고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궁을 수리하고 성지를 보수할 때 감독한 편장(褊將)·비장(裨將) 및 교리(校吏)·공장(工匠)의 성명을 상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뒷날 근무 태도를 상고해 장려하고 징계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1면
【분류】사법(司法) / 왕실(王室) / 재정(財政) / 구휼(救恤)
[註 131]【절목은 다음과 같다."화성에 유수(留守)를 두고 나서 또 정리사(整理使)를 겸하게 한 것은 장차 행궁의 수리를 위임하고 성지(城池)의 수선을 책임지우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소요되는 재력에 대해 아직 조치해 주지 못한 결과 형식과 내용이 서로 부응하지 못하니 사체(事體)로 볼 때 미안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건물이 낙성되고 누각과 망루가 완성을 본 뒤이니 더더욱 제때에 강구하여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화성의 일과 관련해서는 경비를 축내지 않게 하려는 것이 성상의 의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백 칸 되는 건물을 짓거나 몇 천 보(步) 되는 곳을 뚫고 쌓아올릴 때 일찍이 조금이라도 대농(大農)의 자본을 가져다 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행행(幸行)하실 때의 접대 비용이나 유생과 무인을 시험보이고 나서 상을 주는 것까지도 모두 별도로 비축해 두었다가 수시로 들여와 쓰곤 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행궁을 수리하고 성지를 수선하는 하나의 일로 인해 그만 거꾸로 그동안 해오던 데에 따라 유사에게 마련하여 쓰도록 하거나 이웃 고을의 창고에서 끌어다 쓰도록 한다면 성상의 뜻을 받드는 도리가 결코 못될 것입니다. 삼가 품(稟)하여 떼어주기로 결재를 받은 3만 석의 곡물을 팔로(八路)의 주현(州縣)에 배정한 뒤 그 모곡(耗穀)을 취하여 돈으로 만들고 창고를 설치해 보관하게 하면서 수요에 충당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가령 곡물을 조적(糶糴)하고 돈으로 만들어 주선하는 등의 사항에 대해서는 따로 절목을 만들어 영구히 준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정곡(正穀) 1만 석과 피곡(皮穀) 2만 석을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곡물 중에서 떼어주어 팔로에 골고루 나눠주되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은 물론이고 주현의 규모를 감안하여 차등있게 배정한 뒤 그 곡식을 내주고받아들이면서 모곡(耗穀)을 취하는 한편 이를 내다 팔아 수요에 대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이 곡식은 그 의미가 소중할 뿐더러 수요 역시 모두 정수(定數)가 있으니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늘거나 감축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흉년을 만났다 하더라도 정퇴(停退)시키거나 견감(蠲減)하는 대상에 포함시키는 일은 절대로 거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준대로 받아들인 상황을 매년 말에 비변사에 보고하고 화성부에 공문을 발송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내다 팔 즈음에 차인(差人)이 왕래하다 보면 자연히 폐단이 생길 것이니, 이 곡식에 대해서는 본부(本府)의 교리(校吏)를 보내지 말고 각기 그 도의 감영에서 주관하여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읍(列邑)에서는 내다 파는 데에 따라 편리할 대로 감영에 수송하고 태가(馱價)를 마련해서 모두 모아 화성부에 옮겨 납입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지금 이 곡물을 설치한 것은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돈으로 만들어 올려보낸 뒤에는 별도로 창고 하나에 쌓아두고 엄히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쓸 데에만 쓰면서 수요를 절약하여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음으로써 기필코 저축하는 효과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쓰고 남은 것들은 그 수효를 매년 말에 낱낱이 기록하여 장부를 만든 뒤 비변사와 내영(內營)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궁에서 임금이 사용하는 기용(器用)·집물(什物) 및 도배하고 자리를 깔고 장막을 치는 일 등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종전에 호조에서 거행하던 것들을 일체 정지시키고 본부(本府)에서 가능성있는 수입을 헤아려 전담해서 조치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마련하거나 바꾸는 연한(年限)에 대해서는 일체 정해진 규례(規例)를 따라 시행하게 함으로써 어긋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각종 물품은 원래 공가(貢價)와 시가(時價)가 다른 만큼 참작하여 절충해서 융통성있게 가격을 정해야 할 것인데, 각각 연한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미리부터 경영하여 조치해 둠으로써 써야 할 시기를 당하여 군색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궁을 수리하거나 성첩(城堞)을 보수할 때에는 해야 할 일이 생기는 대로 장계로 보고하거나 연석(筵席)에서 품(稟)한 뒤 회답을 기다려서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감히 연한을 넘기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해당 유수가 직접 집행하여 단속하면서 가능한 한 절약하게 하고 혹시라도 지나치게 쓰는 폐단이 있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1년에 들어올 수입을 적당히 헤아려 마련해서 3천 냥(兩)은 행궁의 물력에 소속시키고 2천 냥은 성역(城役)의 물력에 소속시키되, 수리하고 보수할 즈음에 피차간에 족하고 부족한 상황을 살펴서 서로들 조정하게 함으로써 혹시라도 한쪽에만 편중되게 쓰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돈으로 환산되는 원래의 숫자가 일단 일정하게 매년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각종 조치도 대부분 햇수를 띄워 거행하게 되어 있고 보면 지출한 금액을 빼고도 남는 돈이 자연히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숫자를 계산해서 제해 두었다가 소상하게 기록하여 연말에 장부로 작성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원소(園所) : 현륭원(顯隆園).
4월 18일 무술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하교하였다.
"옛날 경진년132) 7월에 온양(溫陽) 행궁에 행행(幸行)하셨을 때 서쪽 담장 안에서 표적을 정해 활쏘기를 한 뒤 품(品)자 형태로 세 그루의 회나무를 심어 뒷날 그늘을 드리우게 하라고 명하셨었는데, 지금 36년이 지나는 동안에 뿌리가 서리고 줄기가 뻗어 뜰에 온통 그늘이 지게 되었다. 이에 그 고을 수령이 도백(道伯)과 수신(帥臣)에게 말하여 그 나무 둘레에 축대를 쌓아 보호하게 하였다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올해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경사스러운 의식을 위하여 비궁(閟宮)에 가서 재숙(齋宿)하고 환궁한 날이다. 그런데 이날 이런 말을 들은 것 또한 뭔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처창(悽愴)하고 감동되는 마음을 어떻게 금할 수가 없다. 이미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날을 넘길 수가 있겠는가. 축대 공사가 이미 완공되었는데 사적(事蹟)도 본읍(本邑)에 기록되어 있지 않겠는가. 그 당시의 도신(道臣)·수령 및 분부를 받들고 나무를 심은 사람의 성명을 조목별로 장계를 올리도록 충청 감사에게 하유하라. 또 삼가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을 축대 옆에 세워야 할 것이니, 이 뜻도 아울러 알려 주도록 하라."
4월 19일 기해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제도(諸道)의 임기가 만료된 감사가 경계에 이르러 진상(進上)하는 법을 없앴다.
4월 20일 경자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를 서원(書院)에 추배(追配)하는 날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4월 22일 임인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과 참판 황승원(黃昇源)과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 박종순(朴鍾淳)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종순이 서계(書啓)를 올리면서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이계(金履銈)와 평택 현감(平澤縣監) 성정주(成鼎柱)가 모두 불법(不法)을 행했다고 하니, 나문(拿問)토록 명하였다.
4월 25일 을사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재전(齋殿)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였다.
"외방에서 제품(祭品)을 양 대신에 염소를 쓰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일단 단생(單牲)인 상황에서 제품을 대신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보면 염소나 돼지를 가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뒤로는 있는 데에 따라 편한 대로 통용토록 하라. 또 만약 염소와 돼지를 제품으로 함께 쓸 때에는 사슴 식혜 대신에 또 육장을 쓰도록 선조(先朝) 때 분부받은 사항을 준수토록 하라. 그리고 두 그릇을 피하는 법의(法意)를 돌아보지 않은 채 돼지고기 두 가지를 쓰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거나 혹은 닭고기로 대용(代用)하는 곳이 있다 하는데, 이 경우는 옛날의 제품 그대로 하게 하는 것이 갖추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면 사체(事體)도 구차스럽게 되지 않을 뿐더러 법 정신에도 맞고 옛 법도를 따르는 것이 되어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분부토록 하라."
4월 26일 병오
환조 대왕(桓祖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永興) 본궁(本宮)에 추제(追躋)하고 별대제(別大祭)를 행하였다.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4월 27일 정미
사직(司直) 정창순(鄭昌順)이 상소하였다.
"신은 적준(賊浚)133) 과는 인척도 아니고 친족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몇 대에 걸쳐 이웃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의 부조(父祖) 때부터 또한 서로 친숙하게 지내왔습니다. 따라서 그도 같은 동네의 자제로서 가끔 내방하였으므로 그가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면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측근의 반열에 끼이면서부터는 스스로 나라 편이라고 칭탁하고 하였는데 끝에 가서 그지없이 흉악한 짓을 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축하하고 위문하여 안부를 물어오는 일에 대해서 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는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신은 그를 대할 때 단지 마을 소년으로 보았던 데 반해 그가 신을 논할 때면 늘 고풍(古風)이 풍겨서 쓸모가 없다고 일컫곤 하였습니다. 서로 알고 지낸 전말이라야 이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지 같은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이유로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마구 뒤집어 쓴 나머지 예전부터 턱없이 죄인시되었다가 끝내는 함정에 떨어져 돌 세례까지 받는 원통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신의 언행이 평소 인정을 받지 못해 시기와 질투를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신이 없는 일을 날조해 부추기며 선인을 모함해 해쳤다는 지목으로 말하면, 그것이 비록 당파 싸움으로 신을 얽어넣기에 급급해서 나온 행동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엉뚱한 말을 꾸며대어 위로는 성상을 기만하고 아래로는 듣는 이들을 미혹하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선량한 사람이 신으로부터 모함을 받았단 말입니까. 참으로 그런 사실이 있다면 어째서 곧장 진달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성상께서 밝게 살피고 계신 상황에서 만약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 신으로부터 모함을 받는데도 그대로 놔둔 채 물어보지도 않았다면, 신이 소인이 되고 참소하는 자가 되는 것이야 진정 돌아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고 세도(世道)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신을 사패(司敗)에 내리시어 엄히 사실을 규명토록 하는 동시에 그런 말을 한 자에게 분명히 지적하여 고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만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나라의 형벌로 복주(伏誅)시켜 사람들의 말에 사죄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분명히 이 일을 해명하여 성스러운 시대의 밝은 교화를 드러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월 28일 무신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의식(儀式)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초기에 도성에는 계성전(啓聖殿)을 두고 함흥과 영흥에는 본궁을 두었는데, 이는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위판(位版)을 모시기 위한 것으로서 대개 원묘(原廟)의 제도를 적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내수사에서 별도로 사람을 차송(差送)하여 제사지내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고 종백(宗伯)134) 과 태상(太常)135) 은 관여할 수가 없었는데 그 결과 예전의 규정을 어기고 잘못된 예를 답습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이에 상이 특별히 명하여 의절(儀節)을 바로잡아 정리하게 하고 제기(祭器)를 새로 바꾸도록 하는 한편 매년 의복·폐백·향·촉을 내주고 반드시 재전(齋殿)에서 밤을 지내면서 그 일에 직접 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환조(桓祖)를 제향(躋享)하는 예를 마치고 나서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서영보(徐榮輔) 등에게 명하여 의식을 편찬하게 한 뒤 직접 재결(裁決)하여 확정하였는데 모두 2권(卷)으로 12목(目)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자 이를 인쇄하여 두 본궁에 보관하였는데, 이 책의 첫머리에 상이 친히 지은 서문에 이르기를,
"북관(北關)의 함흥과 영흥부에 본궁이 있는 것은 대체로 태실(邰室)과 풍사(豊社)로 기반을 확립한 것136) 과 비슷하니, 이는 바로 궁(宮)인 동시에 묘(廟)가 되는 것으로서 의관(衣冠)의 월유(月遊)137) 를 상징하고 칠(漆)·조(沮)의 제천(祭薦)138) 을 모방한 것이다.
함흥의 본궁은 운전사(雲田社)에 있는데 이는 국초(國初)139) 께서 잠룡(潛龍)140) 때에 사시던 옛집으로서 북쪽을 순행(巡行)하실 때 늘 거하셨던 곳이다. 여기에는 목왕(穆王)과 효비(孝妃)·익왕(翼王)과 정비(貞妃)·도왕(度王)과 경비(敬妃)·환왕(桓王)과 의비(懿妃)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고 유명(遺命)에 따라 태조 대왕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위판을 봉안하였으며 숙묘조(肅廟朝) 때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위판을 추부(追袝)하였다.
영흥의 본궁은 순령사(順寧社)에 있는데 이는 국초께서 탄강하신 옛터로서 아직 이름이 나지 않았을 때에 별을 제사했던 곳이다. 여기에는 태조 대왕과 신의 왕후의 위판을 봉안하였고 숙묘조 때 신덕 왕후의 위판을 추부하였는데,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인 을묘년141) 에 환갑이 되는 해를 거듭 맞이하여 환왕과 의비의 위판을 추제(追躋)하였다. 본궁에서 제사지내는 의식은 다음과 같다.
함흥에서는 해마다 모두 32차례의 제사를 올리는데, 별대제(別大祭)는 10월과 4월에 올리고, 정조(正朝)에는 별소제(別小祭)를 올리고, 2월은 춘절제(春節祭), 6월은 반행제(半行祭), 7월은 추절제(秋節祭), 8월은 산제(山祭)와 추석제(秋夕祭), 11월은 동절제(冬節祭)와 동지(冬至) 다례(茶禮)를 올리고, 삭제(朔祭)와 망제(望祭)는 정조와 추석 때만은 중복해서 행하지 않는다.
영흥은 해마다 모두 31차례의 제사를 올리는데, 별대제·별소제·삭제·망제는 함흥의 예와 같으며, 정조에는 소제(小祭)를 지내고, 춘절(春節)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추석 때에는 망제의 의례을 적용한다.
기품(器品)은, 대제(大祭)의 경우 함흥은 51품(品)이고 영흥은 63품이며, 소제(小祭)의 경우 함흥은 39품이고 영흥은 31품이며, 삭제와 망제의 경우 함흥은 23품이고 영흥은 22품이다.
양궁(兩宮)의 대제에는 음악을 사용하고 각각 의복과 폐백이 정해져 있는데, 음악은 향악(鄕樂)을 쓰고 의복은 붉은색의 그 지방 비단을 쓰며 폐백은 누렇고 붉은 면포(綿布) 2단(端)을 쓴다. 초[燭]는 홍랍(紅蠟)을 쓰는데 10월과 4월에만 그렇게 한다. 향(香)은 모두 자단(紫檀)을 쓴다. 과일과 건어물은 토산품 대신 내주(內廚)에서 마련한 것을 쓰는데, 의복·폐백·향·초와 함께 동시에 가져 간다.
주발에 단술을 담고 사발에 자성(粢盛)을 올려 놓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은(銀)을 쓰고 나머지 그릇은 오지 제품이나 틀로 만들어낸 것 대신 놋그릇을 쓰는데, 함흥은 5백 85개에 부차적인 것이 70개요, 영흥은 3백 22개에 부차적인 것이 33개이다. 진설(陳設)에도 도(圖)와 표(標)가 있는데, 함흥은 6도에 68표이고 영흥은 6도에 74표이다. 재관(齋官)으로는 근래의 규례에 따라 정부·내각·예조의 신하를 두고, 본 도백(道伯)이 봉심(奉審)하는 일을 행하다가 제사올리는 날 헌관(獻官)이 된다.
태백제(太白祭)가 있는데 제성단(祭星壇)에서 제사를 올린다. 제성단은 함흥 도련포(都連浦)에 있는데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이곳에서 태백성에 제사지내었다. 개국 초기부터 어의(御衣)와 안마(鞍馬)를 가지고 매년 단오(端午)에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이달 안으로 제사지내도록 하고 있다. 하루 전에 기(旗)·둑(纛)·산(繖)·개(蓋)를 갖추고 퉁소·피리·징·북소리에 맞추어 제사지내는 곳까지 인도한 다음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는데 대제(大祭)의 의례와 동일하게 한다. 이날 또 그 옆에서 오상제(五箱祭)를 지내며,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또 제성단 서쪽에서 가사제(袈裟祭)를 지낸다. 영흥에서는 본궁 담 안쪽에 있는 단(壇)에서 태백제를 지내는데 오직 오상제와 가사제만은 지내지 않으며, 기품(器品)은 64개로 함흥에 비해서 20개가 많다.
또 야백제(夜白祭)와 야흑제(夜黑祭)가 있다. 함흥에서는 정월과 9월에 야백제를 지내고 12월에 야흑제를 지내는데 기품은 각각 36개이다. 영흥에서는 정월에 야백제를 행하고 12월에 야흑제를 행하는데 기품은 각각 21개이다. 오직 야흑제 때만은 돼지고기 한 그릇을 더 놓는데 궁의 뜰을 소제한 다음 진설한다. 함흥에 있는 제단은 별차(別差)142) 가 그 제사를 주관한다.
시일은 정조(正朝)·동지·추석·삭망(朔望) 외에는 전 해 12월에 길일(吉日)을 가려 놓는다. 대제 때 쓰는 의복·폐백·향·초·과일·건어물 등과 모든 의장(儀仗)은 새로 마련하게 하되 이 모두를 재계하고 목욕한 뒤 친히 전해준다. 이상의 내용들을 뚜렷이 법제화하여 책으로 엮어서 상세히 기록한 다음 그 책을 인쇄하게 하고 이름을 《본궁의식(本宮儀式)》이라 하였다.
대저 의식의 절문(節文)을 감히 고치지 않은 것은 조종(祖宗)께서 행해 오시던 것을 따르고자 함이요 물품을 간혹 정비해 놓은 것은 나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대충이나마 나타내려 함이다. 그런데 규정이 대부분 임시방편에서 비롯되다 보니 제관(祭官)이 종백(宗伯)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 편찬한 이 책 한 권을 나의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바이니 이를 바꾸지 말고 자자손손 계속 이어 나가면서 나의 마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삼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를 제대로 준수하면서 기필코 공경스럽고 근실하게 함으로써 우리 조고(祖考)께서 기쁜 마음으로 제사 음식을 흠향하게 한다면, 혼령이 뜰에 임하시어 그대들에게 많은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시경(詩經)》에서도 ‘선왕께서 그대들에게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후손들에게 억만 년토록 축복이 내려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두 본궁의 현판에 게시할 사목(事目)에 대한 일로 치계(馳啓)하기를,
"두 본궁의 의식을 인쇄하여 반포한 뒤에 보건대, 예전에 해오던 대로의 절목이 찬연하여 다시 바로잡을 만한 것이 없을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예당(禮堂) 및 봉명(奉命)한 승지와 함께 특별히 더 상의하여 확정하는 과정에서 단지 유지(有旨) 중의 3조(條) 및 기타 몇 개 조에 대해서만 따로 사목을 만들었습니다. 맨 먼저 유지를 내걸고 다음에 사목을 써서 함흥과 영흥 두 본궁의 현판에 게시함으로써 늘 보면서 영구히 준수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사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1. 크고 작은 제향에 있어서 별차(別差)가 헌관(獻官)이 되기는 하지만 신주궤(神主櫃)를 열고 닫는 절차를 겸하여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아 신주궤를 열고 닫는 일을 별차가 봉행(奉行)하게 하고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제물(祭物)을 차리고 치우는 것은 원래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의 잘못된 예를 답습하여 음식을 차려놓는 일을 혹시 시간 전에 하거나 음식을 치우는 일을 혹시 밤을 지낸 뒤에 한다면 이보다 더 불경스럽고 불결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태묘(太廟)에서 제물을 차리고 치우는 예를 모방하여, 진설(陳設)은 초저녁부터 시작하되 먼저 과일과 건어물 등을 차려 놓은 뒤 굽고 지지고 끓인 것들은 제사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차려놓도록 할 것이며, 제물을 치우는 일은 제사가 끝난 뒤 즉시 모두 치우면서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시키는 일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차리거나 치우는 일을 막론하고 별차(別差)가 직접 살펴 감독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불성실하게 하는 폐단이 없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신주궤를 열고 닫는 일과 제물을 차리고 치우는 이 두 가지 조목과 관련해서 만일 잘못된 예를 답습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함흥 본궁에서는 도신(道臣)이 삭제(朔祭)·망제(望祭) 및 절향(節享)이 있을 때마다 특별히 더 살펴서 드러나는 대로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영흥에서는 부사가 살펴 드러나는 대로 도신에게 보고함으로써 장계로 보고할 수 있도록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함흥 본궁에서 제사드릴 때의 유생 집사(執事)는 한결같이 영흥 본궁의 예에 의거하여 본궁에서 실차(實差) 5인과 예차(豫差) 1인을 가려 정한 뒤 나아와 참여하게 함으로써 수복배(守僕輩)가 예전처럼 술잔을 갖다 놓고 술잔을 올리는 절차 등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왕조(王朝)의 파계(派系) 가운데 적합한 사람에 대해 그 보파(譜派)를 상고한 뒤 각별히 가려 정함으로써 잡되게 뒤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크고 작은 제사가 있기 이틀 전에 별차가 직접 제정(祭井)을 감독하여 각별히 소제함으로써 완전히 깨끗하게 해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궁 뜰의 풀을 뽑거나 눈을 치울 때 그저 수복(守僕)들에게만 맡겨놓기 때문에 백성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 뒤로는 별차(別差)가 직접 단속하여서 떠들어대는 폐단이 없도록 엄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제사드릴 때 구경하는 백성들이 간혹 본궁 뜰에 마구 들어오는 폐단이 발생하고 있는데 일의 체면상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뒤로는 내삼문(內三門)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를 영구히 준수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시간마다 순찰하는 법은 전적으로 정전(正殿)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흥에서는 정전의 담 밖을 순찰하는 데 반해 함흥에서는 그저 별차(別差)의 재사(齋舍)만을 순찰하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일 뿐더러 서로 일치되지 못하는 결점이 되고 있으니, 이 뒤로는 함흥 본궁에서 순찰할 때에도 영흥 본궁의 예에 의거하여 정전 담 밖을 두루 순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정전의 자물쇠를 여는 일을 수복(守僕)에게 맡겨두는 관계로 제멋대로 열고 닫는 때가 더러 없지 않은데, 이것 역시 외람스럽게 행하는 잘못된 예라 할 것이니, 이 뒤로는 별차(別差)의 차지(次知)가 보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72면
【분류】왕실(王室) / 출판(出版)
[註 134] 종백(宗伯) : 예조 판서.[註 135] 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註 136] 태실(邰室)과 풍사(豊社)로 기반을 확립한 것 : 왕업의 기틀을 마련한 시조(始祖)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함. 태실은 주(周)나라 시조인 후직(后稷)이 처음 봉(封)함을 받은 태 땅에 그를 위해 세운 사당이며, 풍사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인 풍 땅에 세운 그의 사당임.[註 137] 의관(衣冠)의 월유(月遊) : 한 달에 한 번씩 한 고조의 의관을 꺼내어 바람을 쐰 것을 말함. 《한서(漢書)》 숙손통전(叔孫通傳).[註 138] 칠(漆)·조(沮)의 제천(祭薦) : 칠수(漆水)와 조수(沮水)는 모두 위수(渭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서 주(周)나라의 선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처음 터잡고 살던 곳인데 여기에서 그를 제사지냈었음.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絲).[註 139] 국초(國初) : 태조를 말함.[註 140] 잠룡(潛龍) : 왕위에 오르기 전을 말함.[註 141] 을묘년 : 1795 정조 19년.[註 142] 별차(別差) : 특별 파견 관리.
옥당이 【교리 김선(金銑), 부교리 이우제(李遇濟), 수찬 홍수만(洪秀晩)·장지현(張至顯), 부수찬 박길원(朴吉源)이다.】 연명(聯名)하여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정치달(鄭致達)의 처에 관한 일로 올린 대간의 계사(啓辭)를 윤허하신 뒤로 국법(國法)이 조금 신장될 수 있겠다고 여겼는데, 홀연히 며칠이 지난 뒤에 그만 성 밖에 내보내라는 명을 내리시면서 편할 대로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룡(世龍)의 처에 대한 일로 말하면 수종(首從)143) 의 경중(輕重)이 현격히 다를 뿐만이 아닌데 그만 전하께서 은혜를 펼치기에 급하신 나머지 억지로 끌어다 비유로 삼으셨는가 하면 또 말한 대로 실천하겠다는 분부를 내리시면서 아무 소리도 못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대성인께서 사령(辭令)을 이런 식으로 하셔서는 안될 듯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전명(前命)을 속히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경악(經幄)에서 논사(論思)하는 반열에 있다. 그런데도 편할 대로 거주케 하는 율명(律名)을 모르다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관동 암행 어사(關東暗行御史) 한치응(韓致應)과 호남 암행 어사(湖南暗行御史) 이희갑(李羲甲)이 복명(復命)하였다. 치응이 서계(書啓)를 올렸는데, 원주 판관(原州判官) 이협성(李協聖)과 영춘(永春)의 전 현감 이명성(李明誠)에 대해 모두 불법(不法) 행위를 했다 하여 차등있게 죄를 매겼다. 또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1. 영춘의 각종 원회부곡(元會付穀)144) 1만 2천여 석 가운데, 유망(流亡)해서 받아들이지 못한 조목과 이노(吏奴)가 포흠(逋欠)한 조목과 임자·계축년 이후의 정퇴(停退)한 조목과 전 현감 이명성이 꾸어 쓴 조목을 제외하고나면 남는 것이 고작 5천여 석 밖에 되지 않습니다. 명성이 꾸어다 쓴 것과 이노가 포흠한 것들을 조속한 시일 내에 독촉해서 받아들이는 동시에 크게 변통하고 크게 쇄신하는 정사를 행해야만 소생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1. 원주의 동쪽 4개 면(面)은 바로 현륭원(顯隆園)에 향(香)과 탄(炭)을 바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현재 민호(民戶)가 감축된 결과 한 가구에서 3, 4가구의 세를 담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좋은 방향으로 변통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춘은 기해년에 진전(陳田)을 조사한 뒤로 진결(陳結)이 1백 37결(結)이나 되고 유망(流亡)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데 지목해서 거둬들이는 것은 예전과 동일하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견면(蠲免)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영춘의 군액(軍額)은 도합 8백여 명인데 현재의 민호(民戶)는 6백에도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 이름으로 이중의 군역(軍役)을 지우고 있는 숫자가 무려 3백여 명이나 되니, 이는 변통해서 다른 곳으로 소속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 공삼(貢蔘)을 감영에서 바치도록 정한 때부터 삼 캐는 절목을 전혀 단속하지 않은 탓으로 값은 날마다 치솟는 반면 캐는 사람들은 더욱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릉(江陵)과 춘천(春川) 두 고을의 삼 수량이 다른 고을에 비해 제일 많기 때문에 삼상(蔘商)이 배겨내지를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바로잡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원주와 영춘의 원호(元戶)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것은 오로지 누락된 호수가 매우 많은 데에 연유합니다. 이제 호적법을 다시 밝혀 인구 계산할 때 누락된 호수를 뽑아 올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희갑이 서계(書啓)를 올렸는데, 익산 군수(益山郡守) 윤행순(尹行醇)에 대해 불법 행위를 범하였다 하여 죄를 매겼다. 또 나주 목사(羅州牧使) 조시순(趙時淳)이 곡식을 나누어 실효성있게 진휼(賑恤)하지 못한 탓으로 유랑민 및 진휼을 받아야 할 백성 가운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사람이 10여 인이나 된다고 논하였다. 상이 희갑에게 이르기를,
"바로 출도(出道)해서 사실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는 종당에 죄를 매겨 처분해야 하겠다마는, 본 사건을 엄히 조사해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 안으로 다시 내려가 본목(本牧)에서 출도한 뒤 따로 조사관을 정해 상세히 본말을 조사해내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이번에 수의(繡衣)145) 4인을 차견(差遣)할 때 그들이 연소하고 경험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억지로 몇 개 도(道)에서 고을을 골라 조사해 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명색이 수의이면서 출도(出道)하지 않았던 때가 옛날에 있었던가. 대체로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오는 경우는 그 예가 매우 희귀하다. 특별히 분부한 특별한 예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감히 아랫사람들 멋대로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만도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데, 그중에서도 호남 수의의 경우를 보면 더욱 놀랍기만 할 뿐이다. 이들 모두 결말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처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선 충주(忠州)와 평택(平澤) 두 고을 수령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어떤 수의는 잘한다고 하고 어떤 수의는 못한다고 하는 등 그 평가가 하늘과 땅처럼 판이하였다. 한 고을의 공론(公論)을 제대로 취합했다면 어찌 혹시라도 그처럼 상반될 수가 있겠는가. 충주와 평택 두 고을의 수령이 비록 진휼(賑恤)하는 일을 다 끝냈다 하더라도 우선은 잡아오지 말고 사계(査啓)146) 에 대한 분부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신사운(申思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동직(李東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30일 경술
약원(藥院)의 3명의 제조(提調)를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삼가 외간에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원자궁(元子宮)께서 요즘 들어 상당히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문자(文字)에 재미를 붙이고 계신다 하니, 아랫사람으로서 흠앙하는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마다 《당음(唐音)》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 시(詩)의 어느 글자이고 간에 한 번 보기만 하면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초중종(初中終)147) 놀이처럼 전구(全句)를 암송해 내곤 한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문자에 관한 일은 별로 힘쓰지 않아도 잘 할 것도 같다."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영중추부사 김희(金憙),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병모에게 이르기를,
"전후로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면 날씨가 번번이 맑아지곤 하여 마음 속으로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는 서로 날씨가 흐리고 맑는 등 다르기가 일쑤인데 재계(齋戒)하던 날 밤에는 여기나 거기나 똑같이 청명했습니다. 이 모두는 성상의 정성이 위에 이른 결과로서 찬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궁(本宮)의 궁제(宮制)는 멀리서 헤아리던 바와 과연 같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왼쪽과 오른쪽 칸[間]을 가운데 칸[正間]과 비교해 보면 제도상으로 조금 협소할 뿐만이 아니라서 익실(翼室)이나 협실(夾室)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따라서 두 신위(神位)를 가운데 칸에 함께 모신 것이야말로 정리상으로나 예법상으로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기(祭器)와 관련된 의식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밥·국·술잔·소반 등은 각각 정위(正位) 앞에 위치했고 조금 밖으로 나온 것은 국수 그릇과 과일 등속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사가(私家)의 예법으로 말하더라도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릇 수를 옛날 그대로 써도 구애될 것이 없겠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가운데 칸이 워낙 넓기 때문에 큰 상탁(床卓)을 설치하고 제기를 많이 올려놓아도 넉넉하게 진설(陳設)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릇 수가 함흥보다 많더라도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준수하는 도리로 볼 때 실로 합당하다 하겠다."
하였다. 병모가 아뢰기를,
"이번에 함흥과 영흥에 조부(租賦)를 감해 준 것이야말로 더없이 큰 은전이었습니다. 토지가 있건 없건 모두 균등하게 혜택을 입은 것으로는 금년에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을 감면해 준 것만한 경우가 없을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관(北關)의 고산(高山)과 남산(南山), 관동(關東)의 신안(新安)과 직목(直木) 이 네 곳의 역참(驛站)과 관련된 폐단을 지금 제때에 구제해 주지 않으면 장차 역참이 끊어질 염려가 있으니, 양도(兩道)의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변통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변통시킬 조목들을 논열(論列)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분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고산역의 경우 각참(各站)의 호구(戶口)를 3년에 한 번씩 점고(點考)하여 궐호(闕戶)가 생기는 대로 돈을 바치게 한 목적은 대체로 숨기고 누락시키거나 도피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본역이 잘못된 규례를 적용하여 해마다 바꾸는 때에 있어서까지 꼭 매 분기(分期)당 한 번씩 점고를 행하고 있는데, 이는 법의 정신에 크게 위배될 뿐만이 아니니 역의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옛제도를 다시 밝혀 3년에 한 번씩 행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고, 이를 본역의 현판에 걸어두어 영구히 준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를 어길 경우에는 해당 찰방(察訪)에 대해 곧장 법제를 위배한 율(律)을 적용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영흥 본궁에 왕명을 받들고 갔던 대신 이하에게 상을 주었다. 판중추부사 이병모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면급(面給)하고 그의 아들·사위·동생·조카 중에서 한 사람을 임용하게 하였다. 본도 관찰사 조종현(趙宗鉉)과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과 도승지 이조원(李祖源)은 가자(加資)하고, 대축(大祝)과 수령 등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이와 함께 함흥과 영흥의 금년도 전조(田租)를 감면해 주고, 연로(沿路)에 있는 3도(道) 각 고을의 오래된 환곡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몫을 탕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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