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해
상이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직접 행하였다.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유생의 시권(試券)을 편전(便殿)에서 평가해 뽑았다. 함흥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위광조(魏光肇)와 영흥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이후(金履垕)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허락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합격자 명단과 수석을 차지한 답안지를 엮을 때에 맨 먼저 환조(桓祖)를 제향(躋享)한 사실을 써넣고 경축하는 연구시(聯句詩)를 기록하게 하였으며, 인쇄해 반포하면서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으로 명명하라고 하였다.
5월 2일 임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관동 암행 어사(關東暗行御史) 한치응(韓致應)의 별단(別單)을 보건대, 영춘현(永春縣) 창고 곡식의 일은, 이노(吏奴)가 포흠(逋欠)한 것이 그처럼 낭자하고 수령이 꾸어 쓴 것이 어사의 계사(啓辭)에 드러났으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엄히 조사한 다음 제대로 다 받아들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원주(原州)에서 현륭원(顯隆園)에 바치는 향(香) 및 탄(炭)에 관한 일과 영춘현에서 진전(陳田) 조사를 마친 뒤 더 늘어난 진결(陳結)에 관한 일은, 해도(該道)의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자세히 조사해서 계문(啓聞)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향과 탄에 관한 일은 따로 조목을 설정하는 것이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실로 합당할 것인데 지금 이 별단에서는 영춘현의 진결에 관한 일과 합쳐 한 조목으로 만들었으니 자못 미안한 일입니다. 어사를 추고(推考)해야 하겠습니다.
영춘현 군액(軍額)에 대한 일은 도신에게 분부하여 편리한 대로 조처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관동 지방의 삼(蔘)의 폐단에 관한 일은, 삼의 품질이 점점 떨어진다거니 삼상(蔘商)이 갈수록 영락해지고 있다느니 하는 잗단 문제를 가지고 조정을 귀찮게 하고 있는데, 도신에게 분부하여 좋은 방향으로 변통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원주와 영춘의 호적법(戶籍法)에 관한 일은, 민호(民戶)가 누락되는 것이야말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마는, 이는 원주와 영춘 두 고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마침 식년(式年)을 맞았으니 숨겨진 민호와 누락된 장정들을 일일이 찾아내도록 양도(兩道)의 도신에게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승문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신진(新進) 문관(文官)들이 이문 학과(吏文學科)와 한어 학과(漢語學科)에 들어와 소속되고 나서는 처음부터 강습을 하지 않고 옛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각사(各司)에 분부하여 각자 평상시에 익히게 함으로써 소기(所期)의 실효를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옛날의 사례에 따라 승문원과 사역원 양원(兩院) 중에서 초계(抄啓)148) 하는 일과 감하(減下)149) 하는 일을 맡아서 처리하되 매년 몇 차례씩 하는 것으로 확정해 규례를 삼도록 하라. 내각의 초계 문신에 대해서 요즘 들어 모두 전경(專經)150) 의 강(講) 및 제술(製述)·삭사(朔射)151) 를 면제해 준 것은 본래 내각의 강과 제술·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문학과 한어학은 이와 다르니 똑같이 초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5일 을묘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 보았다.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한 노인들에게 모두 가자(加資)해 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영흥 본궁에 환조(桓祖)의 신위(神位)를 제향(躋享)하던 날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조관(朝官)은 90세에서 79세까지, 사서(士庶)는 1백 세에서 80세까지 모두 1백 74인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3일 뒤에 예당(禮堂)이 함흥부에 도착하여 본도 관찰사와 함께 또 풍패루(豊沛樓) 아래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조관은 80세에서 70세까지, 사서는 1백 세에서 80세까지 모두 3백 43인이 참석하였다. 이에 노인들의 성명을 기록해서 보고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5월 8일 무오
영남에서 진휼(賑恤)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좌수우후영(左水虞候營)·창원부(昌原府)·김해부(金海府)·대구부(大丘府)·밀양부(密陽府)·동래부(東萊府)·인동부(仁同府)·칠곡부(漆谷府)·거제부(巨濟府)·함안군(咸安郡)·고성현(高城縣)·경산현(慶山縣)·남해현(南海縣)·하양현(河陽縣)·청하현(淸河縣)·진해현(鎭海縣)·현풍현(玄風縣)·연일현(延日縣)·영산현(靈山縣)·창녕현(昌寧縣)·사천현(泗川縣)·웅천현(熊川縣)·자인현(慈仁縣)·칠원현(漆源縣)·경주부(慶州府)·상주목(尙州牧)·진주목(晋州牧)·성주목(星州牧)·선산부(善山府)·청도군(淸道郡)·초계군(草溪郡)·영천군(永川郡)·흥해군(興海郡)·양산군(梁山郡)·곤양군(昆陽郡)·합천군(陜川郡)·금산군(金山郡)·개령현(開寧縣)·의령현(宜寧縣)·용궁현(龍宮縣)·함창현(咸昌縣)·고령현(高靈縣)·군위현(軍威縣)·신령현(新寧縣)·장기현(長鬐縣)·기장현(機張縣)·삼가현(三嘉縣)·예천군(醴泉郡)·비안현(比安縣)·진보현(眞寶縣) 등 고을과 송라(松羅)·자여(自如)·장수(長水)·김천(金泉)·성현(省峴)·황산(黃山)·소촌(召村) 등 역(驛)과 부산(釜山)·다대(多大)·가덕(加德)·미조(彌助)·귀산(龜山)·포이(包伊)·두모포(豆毛浦)·관운(關雲)·서평(西平)·지세(知世)·제포(薺浦)·옥포(玉浦)·평산(平山)·영등(永登)·당포(唐浦)·사량(蛇梁)·안골(安骨)·조라(助羅)·천성(天城)·가배(加背)·율포(栗浦)·삼천리(三千里)·신문(新門)·남촌(南村)·구소비(舊所非)·청천(晴川)·장목(長木)·포항(浦項)·적량(赤梁)·금오(金烏)·독용(禿用) 등 진(鎭)과 진주(晋州) 감목관(監牧官) 등을 대상으로 기민(飢民) 1백 42만 4천 8명에게 각종 곡식 10만 5천 4백 7석(石)을 나누어 진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4면
【분류】구휼(救恤)
5월 9일 기미
이병정(李秉鼎)을 한성부 판윤으로, 민종현(閔鍾顯)을 판의금부사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병정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10일 경신
전라도 안핵 어사(全羅道按覈御史) 이희갑(李羲甲)이 나주 목사(羅州牧使) 조시순(趙時淳)을 봉고 파출(封庫罷黜)시킬 일로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암행 어사의 입장에서 봉고하고 싶으면 봉고하기만 하면 되고 사실을 조사하고 싶으면 사실을 조사하기만 하면 될 뿐인데, 사관(査官)의 성명까지 써서 형식을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파출 및 죄상(罪狀)에 대해서 품처(稟處)토록 청하다니, 이런 격례(格例)가 있다는 말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원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받아들이다니 이는 더욱 놀라운 일이다. 정원에 있었던 승지 모두를 체차(遞差)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사람을 죽게까지 하다니 이 말을 듣고는 그지없이 놀랍기만 하다. 이런 수령에 대해서는 무슨 율(律)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장계를 돌려주라고 명했다마는 먼저 이 장계를 가지고 무슨 율을 적용해야 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물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나주 목사 조시순을 규례에 따라 파출시켰다고 치계하니, 하교하기를,
"특별히 가려 차견한 암행 어사의 계사(啓辭)와 조사를 행하고 올린 계사가 나오고 보니, 조정이 너무나도 존엄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규례를 어기며 장계를 올린 것쯤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한다. 사람이 죽은 것이 그토록 많았는데, 처음부터 실제로 알고 있으면서 덮어둔 것인가, 아니면 몰라서 물어보지 못했던 것인가. 전자이거나 후자이거나 그 죄가 가볍지 않다. 당해(當該) 어사 이희갑이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려 엄히 처치하도록 하라. 조시순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여 엄히 신문토록 하라. 그리고 전에 단속하라고 내린 유시가 어떠했던가.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덮어두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당해 도신에게 함사(緘辭)를 받고 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익(具㢞)을 한성부 판윤으로, 홍수보(洪秀輔)를 판의금부사로, 민종현(閔鍾顯)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5월 11일 신유
제주(濟州)에서 진휼(賑恤)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제주·대정(大靜)·정의(旌義)의 기민(飢民) 72만 5천 3백 29명에게 2만 5천 9백 5석(石)의 곡식을 들여 진휼하였다.】 목사 이우현(李禹鉉)이 장계를 올리기를,
"이번에 진휼하는 일로 1만 석을 원래 획급(劃給)해 주신 것만도 우례(優例)에 의거한 것이라고 할 것인데 또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어 5천 포(包)를 따로 내려 주셨고 게다가 기대 밖으로 정리소(整理所)의 돈으로 곡식을 바꿔 1만 석이나 특별히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구렁텅이에 뒹굴던 백성들이 집안에서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임금의 위령(威靈)이 미치는 가운데 대대적인 진휼 사업이 완결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전(移轉)해 준 곡식에 대해서는 미역으로 대신 바쳤던 전례(前例)가 본래 있는데, 현재의 민간 형편이 예전과는 크게 다르니, 내년 봄까지 기한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토록 해 주소서.
본주(本州) 사람으로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은 곡식을 무역해 진휼에 보탠 것이 무려 3백 석이나 되고, 장교(將校)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梁聖範)은 자원해서 납부한 곡물이 각각 1백 석이나 되니, 가상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제주 목사 이우현이 진휼을 끝내고 올린 장계를 보건대, 진휼청의 환곡(還穀)을 받은 백성에게까지 똑같이 무상으로 지급하면서 한 때의 생색낼 밑천으로 삼았는데, 한 번 이런 예가 생겨나면 뒷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해(該) 목사를 나문(拿問)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미역으로 대신 바칠 때 횟수를 끌어 정퇴(停退)시키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만, 지금은 이미 절기(節期)가 지났으니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계를 올린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굶어 죽은 자가 많다는 말을 어려워하지 않고 보고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기만 하다. 엄히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마는, 사실대로 자수한 것이 그래도 숨기거나 속인 것보다는 나으니, 잡아와 처리하는 일은 우선 참작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의 공로가 죄과(罪過)를 덮어줄 만하다고 해서 벌써 승서(陞叙)한 것은 지나치다. 전에 내린 시상(施賞) 전지(傳旨) 및 승전(承傳)을 취소하여 시비를 분명히 드러내도록 하라.
전 현감 고한록이 매번 사재(私財)를 내놓곤 하는데 바다 밖의 풍속으로 볼 때 백성들을 사랑할 줄을 알고 있으니 정말 가상한 일이다. 특별히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임명했다가 이어 군수(郡守)의 경력을 쌓게 하라. 홍삼필과 양성범이 1백 석을 자원해서 납부한 것은 육지에서의 1천 포(包)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를 병조로 하여금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켜 임명토록 하라.
정리소(整理所)의 곡식을 1만 포나 특별히 획급(劃給)한 것은 바로 자궁(慈宮)의 은혜를 먼 지방에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어찌 의례적으로만 생각하여 배로 운반해 준 곡식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미역으로 대신 징수하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고 분부했었는데, 회보하는 사연 속에 어찌 감히 낱낱이 들어 거론치 않았단 말인가. 해(該) 목사를 추고(推考)하라. 그리고 완전히 탕감해 준다는 사유를 대소 민인(民人)들에게 거듭 유시함으로써 이것 역시 자궁의 은혜를 확충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끔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지은 고(故) 충신 이순신(李舜臣)의 상충 정무비(尙忠旌武碑) 인본(印本)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앞서 상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지었다. 그리고 송(宋)나라 부필(富弼)의 묘비(墓碑) 제목을 전자(篆字)로 썼던 예를 본따 그 비의 제목을 전자로 써서 ‘상충 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고, 내각에 명하여 안진경(顔眞卿)의 가묘(家廟)의 비(碑)에서 글자를 모아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호남의 도백(道伯) 이형원(李亨元)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어 그 묘에 세우게 하였는데, 갑인년에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내각이 탑본(榻本)을 바치자 다섯 군데의 사고(史庫) 및 관각(館閣)과 태학(太學)에 나누어 보관토록 명하였다.
5월 12일 임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강원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니, ‘갑술년에 상정례(詳定例)152) 를 개정한 뒤로 상진곡(常賑穀) 5만 석(石)을 비국에서 이관받아 관리하면서 전량을 나누어주고 그에 대한 모곡(耗穀)을 취하여 연례적으로 급대(給代)153) 해 왔다. 그런데 누차 흉년을 겪는 통에 1년의 모곡조(耗穀條)만으로는 더 늘려 책정된 액수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야 고작 1천 2백여 석밖에 되지 않으니 지난 해의 상정가(詳定價)도 급대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지금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달리 강구해 볼 방도가 전혀 없다. 본도(本道)에서 환곡(還穀)을 내주고 매년 원래의 분량 외에 모곡조를 회록(會錄)한 것이 많을 경우에는 5, 6천 석이 되고 적어도 3, 4천 석은 밑돌지 않으니, 이 모곡조 중에서 적당히 급대하게 한다면 실로 공사(公私) 양쪽이 모두 편하게 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토록 했으면 한다.’ 하였습니다. 우선은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계책을 세워 지출할 방도에 대해 절목(節目)을 상세히 작성해서 본사(本司)에 보고하는 한편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서유린(徐有隣)을 판의금부사로, 이시수(李時秀)를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5월 13일 계해
상이 재계(齋戒)하면서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18일 무진
경모궁(景慕宮)에 갔다가 그대로 재전(齋殿)에 머물렀다. 기신(忌辰)은 22일이었으나 이 해는 다른 해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5월 21일 신미
환궁하였다.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호남에서 진휼(賑恤)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공곡(公穀)으로 구제한 지역은 전주(全州)·나주(羅州)·광주(光州)·남원(南原)·장흥(長興)·순천(順天)·여산(礪山)·고부(古阜)·영암(靈巖)·영광(靈光)·진도(珍島)·김제(金堤)·임피(臨陂)·만경(萬頃)·용안(龍安)·부안(扶安)·함평(咸平)·강진(康津)·옥구(沃溝)·흥덕(興德)·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무안(務安)·곡성(谷城)·화순(和順)·흥양(興陽)·해남(海南) 등의 고을과 병영(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과 벽사(碧沙)·경양(景陽) 등 역(驛)과 법성(法聖)·사도(蛇渡)·임치(臨淄)·군산(群山)·가리포(加里浦)·방답(防踏)·고금도(古今島)·고군산(古群山)·임자도(荏子島)·위도(蝟島)·회령포(會寧浦)·여도(呂島)·마도(馬島)·녹도(鹿島)·발포(鉢浦)·검모포(黔毛浦)·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어란(於蘭)·남도(南桃)·금갑도(金甲島)·이진(梨津)·지도(智島)·신지도(薪智島)·격포(格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위봉산성(威鳳山城) 등 진(鎭)과 나주(羅州)의 감목(監牧)과 순천(順天)·진도(珍島)·흥양(興陽) 등의 목관(牧官) 등으로 기민(飢民)이 총 2백 20만 7백 52구(口)였고 진휼한 곡식은 10만 9천 9백 69석(石)이었다. 사곡(私穀)으로 진휼한 지역은 담양(潭陽)·순창(淳昌)·보성(寶城)·함열(咸悅)·남평(南平)·태인(泰仁)·순천(順天) 등 고을로 기민은 총 6만 1천 6백 64구였으며 나누어 진휼한 각종 곡물이 도합 3천 5백 47석 6두(斗) 6승(升) 5합(合)이었다. 응급 구제한 지역은 익산(益山)·창평(昌平)·금구(金溝)·광양(光陽)·옥과(玉果)·임실(任實) 등 고을과 삼례(三禮)·오수(獒樹) 등 역으로 기민은 총 4만 9백 95구였으며 진휼한 곡식은 2천 19석이었다.】 호서(湖西)에서 진휼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공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수영(水營)·태안(泰安)·석성(石城)·평택(平澤)·연기(燕岐)·서산(瑞山)·비인(庇仁)·서천(舒川)·직산(稷山)·신창(新昌)·은진(恩津)·노성(魯城)·영동(永同)·당진(唐津)·면천(沔川)·한산(韓山)·천안(天安)·아산(牙山)·예산(禮山)·남포(藍浦)·해미(海美)·부여(扶餘)·임천(林川)·홍산(鴻山)·보령(保寧)·결성(結城)·덕산(德山)·청주(淸州)·회덕(懷德)·청풍(靑風)·대흥(大興)·홍주(洪州)·목천(木川) 등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 등 진과 성환(成歡)·율봉(栗峯) 등 역으로 기민이 총 62만 6천 4백 70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만 5천 3백 40석이었다. 사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연산(連山)·청산(靑山)·연풍(延豊) 등 고을과 병영(兵營)으로 기민이 총 2만 1천 9백 95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1천 4백 89석 6두 8승 1합이었다. 응급 구제한 지역은 충주(忠州)·공주(公州)·단양(丹陽)·온양(溫陽)·괴산(槐山)·문의(文義)·음성(陰城)·진잠(鎭岑)·청안(淸安)·영춘(永春)·청양(靑陽)·정산(定山)·전의(全義)·진천(鎭川)·회인(懷仁)·황간(黃澗)·제천(堤川) 등 고을과 평신진(平薪鎭)과 이인(利仁)·금정(金井)·연원(連原) 등 역으로 기민이 총 8만 4백 84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천 9백 77석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74면
【분류】왕실(王室) / 구휼(救恤)
호서(湖西)에서 진휼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끝마쳤다. 【공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수영(水營)·태안(泰安)·석성(石城)·평택(平澤)·연기(燕岐)·서산(瑞山)·비인(庇仁)·서천(舒川)·직산(稷山)·신창(新昌)·은진(恩津)·노성(魯城)·영동(永同)·당진(唐津)·면천(沔川)·한산(韓山)·천안(天安)·아산(牙山)·예산(禮山)·남포(藍浦)·해미(海美)·부여(扶餘)·임천(林川)·홍산(鴻山)·보령(保寧)·결성(結城)·덕산(德山)·청주(淸州)·회덕(懷德)·청풍(靑風)·대흥(大興)·홍주(洪州)·목천(木川) 등 고을과 안흥(安興)·소근(所斤)·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 등 진과 성환(成歡)·율봉(栗峯) 등 역으로 기민이 총 62만 6천 4백 70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만 5천 3백 40석이었다. 사곡으로 진휼한 지역은 연산(連山)·청산(靑山)·연풍(延豊) 등 고을과 병영(兵營)으로 기민이 총 2만 1천 9백 95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1천 4백 89석 6두 8승 1합이었다. 응급 구제한 지역은 충주(忠州)·공주(公州)·단양(丹陽)·온양(溫陽)·괴산(槐山)·문의(文義)·음성(陰城)·진잠(鎭岑)·청안(淸安)·영춘(永春)·청양(靑陽)·정산(定山)·전의(全義)·진천(鎭川)·회인(懷仁)·황간(黃澗)·제천(堤川) 등 고을과 평신진(平薪鎭)과 이인(利仁)·금정(金井)·연원(連原) 등 역으로 기민이 총 8만 4백 84구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천 9백 77석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74면
【분류】왕실(王室) / 구휼(救恤)
5월 22일 임신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희갑(李羲甲)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나주목(羅州牧)에서 기민(飢民)이 목숨을 잃은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관을 별도로 정한 뒤 입회하여 사실을 규명하게 하였더니, 본주(本州)의 동문(東門) 밖에 매장한 곳이라는 데가 바로 하나의 논두렁으로서 이리저리 넘어져 있는 시체 위에 흙도 덮지 않았는데 그 숫자가 도합 26구(軀)였으며, 그 밖에 뼈가 드러나 있는 곳이 아홉 곳이었고, 남문(南門) 밖에 쓰러져 죽은 시체가 4구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직접 감독하여 다시 묻어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창(外倉)에 속한 각 면리(面里)에서 전후에 걸쳐 죽은 기민의 숫자가 또한 64명이었는데 이들은 진휼(賑恤)을 시작한 초기에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진휼하는 일에 전혀 힘을 쏟지 않았을 뿐더러 시체도 일체 그냥 내버려 두었으니 이는 정말로 차마 못할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곡물을 마련했다고 하는 일도 스스로 마련했다고 칭한 것일 뿐 사실은 본읍(本邑)에서 진휼용으로 내놓은 사곡(私穀)을 가져다가 쓴 것인데, 이를 가지고 상(賞)을 청하는 소지로 삼았으니, 이 역시 불법(不法)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목사 조시순(趙時淳)을 우선 봉고 파출(封庫罷黜)시켰습니다.
익산군(益山郡)에서 창고에 남겨둔 곡식을 꺼내어 판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관을 정해 사실을 규명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 군수가 재임할 당시에 지난해의 환곡(還穀)을 전혀 독촉하지 않은 채 받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물어물 마감(磨勘)해 버리기까지 하였고, 그 뒤 영문(營門)에서 획급(劃給)해 보내준 각종 곡물을 돈으로 환산해낼 때에도 미처 상쇄(相殺)시키지 못한 것이 1천 7백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현재의 군수가 부임하고나서 돈으로 바치기가 어렵자 가분(加分)154) 의 명색(名色)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창고에 남겨 두었던 곡물 가운데에서 벼 1천 석과 미곡 4백 석을 꺼내어 창고 담당 아전에게 준 뒤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만한 액수를 채우게 하였습니다. 사세(事勢)를 논한다면 부득이한 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지만 가분을 얻어내고 창고 곡식을 꺼내어 파는 등 서로 바꿔치기한 것은 역시 법의 뜻에 어긋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영(巡營)에 낱낱이 보고할 수도 없는 일이겠기에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희갑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익산의 환곡 사건은 과연 어떻게 된 것인가?"
하니, 희갑이 아뢰기를,
"당시의 수령이 영문에 보고하고 가분(加分)해 달라고 청하였는데도 지난해에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을 지금 여전히 독촉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색이 환곡인데 지금도 여전히 독촉하며 받아들이고 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암행 어사가 출도(出道)도 하지 않은 채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왔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시체가 구렁에 뒹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출도를 하지 않은 탓으로 다시금 가서 조사를 벌이는 일이 있게까지 하였다. 물론 생소한 탓도 있겠지만 그지없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겠다. 처음과 두 번째 올린 계사(啓辭)의 체례(體例)도 모두 착오를 범했는데, 그 잘못된 것이 임금의 명만 욕되게 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해당 어사 이희갑에게 서용(叙用)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일념으로 백성의 일을 보살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혹시라도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재일(齋日)도 이미 지났으니, 어찌 한 시각이라도 지체시키면서 남쪽 백성들을 위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주(羅州)의 굶주린 백성들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뒹군 한 사건에 대해서는 해당 수령의 공초(供招)를 받은 뒤에야 법을 적용해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니, 판금오(判金吾)를 오늘 정사(政事)에서 차출한 뒤 먼저 개좌(開坐)하고 나서 사은(謝恩)하도록 하라.
암행 어사의 초계(初啓)는 우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봉고(封庫)했을 때의 장계(狀啓)나 조정에 돌아온 뒤에 올린 서계(書啓) 등에 모두 증거가 있으니 한때 전해진 소문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암행 어사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을 보건대, 조사해서 뽑아낸 숫자만 해도 오히려 그처럼 많았다고 하니, 그 수령의 행위를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지난해 가을과 겨울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노심초사해 온 것이 저 무리들 때문에 허물어지고 말았으니, 통분스러운 심정이 불법 행위를 범한 불량한 자들에 대한 것보다 백 배나 더 심하다. 각별히 엄하게 신문하여 기필코 바른 대로 공초를 받아내어 보고하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변명하며 승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엄히 형신(刑訊)을 가하여 공초를 받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이러한 뜻으로 엄히 신칙토록 하라."
호남 암행 어사 정만석(鄭晩錫)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렸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면휘(李勉輝)와 해남 현감(海南縣監) 정간(鄭杆)과 장흥 부사(長興府使) 허명(許溟)과 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종정(朴宗正)과 영암 군수(靈巖郡守) 최길헌(崔吉憲)과 우수사(右水使) 정언형(鄭彦衡)과 여산 부사(礪山府使) 이점운(李漸運)과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한동(金翰東)에게 모두 불법 행위를 범했다 하여 차등있게 죄를 매겼다. 만석이 또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1. 호남 전체가 가장 전정(田政)이 문란합니다. 능곡(陵谷)에 재변(災變)이 발생했는데도 예전처럼 세금을 징수하고 있으니, 이는 한 번 변통시켜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행하게 하소서.
1. 올해 호남 연해(沿海) 지방에서 죽은 자가 매우 많은데, 호적을 작성할 때 가능한 한 실제 숫자에 입각해서 해야만 잡역(雜役)을 생판으로 물리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게 하는 한편 군사 등록 장부에 등재되어 있는 사망자들도 아울러 특별히 바로잡게 해야 하겠습니다.
1. 양인(良人)의 역(役)과 관련된 폐단으로 말하건대, 가령 영장보(營匠保)·읍장보(邑匠保)·사색보(四色保)·삼색보(三色保)·죽보(竹保)·칠보(漆保)·지보(紙保)·향보(鄕保)·이보(吏保)·통인보(通引保) 같은 따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규정 이외에 함부로 책정한 것들이니, 이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바로잡아 고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호남의 도 전체에 고을마다 각각 계방촌(稧房村)이니 원당촌(願堂村)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관가에 소속되기도 하고 향청(鄕廳)에 소속되기도 하여 해마다 돈을 바치고 온 마을이 부역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부유한 집의 건장한 장정들이 종신토록 한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를 일체 혁파하여 모두 군사 등록 장부에 채워넣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진도(珍島)·영암(靈巖)·강진(康津)은 아마도 1백 년에 처음 보는 최악의 흉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는 가을에 농사가 풍년이 든다 할지라도 환곡(還穀)·결전(結錢)·대동(大同)·신포(身布) 및 기타 잡역(雜役)으로서 예전에 정퇴(停退)되었던 것들과 새로 납부해야 할 것들을 한꺼번에 독촉해서 받아들인다면 형세상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 뻔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서 조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어세(漁稅)를 균청(均廳)에서 관장하게 한 것은 대체로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인데 오히려 그 폐단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세(元稅)를 납부했는데도 또 어피(漁皮) 같은 물건을 바쳐야 하는가 하면, 어선(漁船)이나 어전(漁箭)이 혹 부서지거나 망가져도 즉시 면제받는 혜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파손되는대로 면제해 주고 잡다하게 납부하는 것들도 영구히 면제받도록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1. 균청에서 관장하고 있는 어전·어선·염분(鹽盆)155) 등의 경우 만약 새로운 것이 없을 때에는 감면을 허락해 주지 않는 것이 규례이긴 합니다만, 이미 오래 전에 부서지고 망가진 데다가 그 당사자마저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데 친족과 이웃에게 징수하는 등 폐해가 극심한 형편입니다. 오래 전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상세한 숫자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지난해 가을 풍랑에 부서진 것이 또한 매우 많으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면제해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균청의 포세(浦稅)는 포구의 가구가 아니면 세금을 물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포구의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도 납부해야 할 세금 총액은 감소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중으로 징수하는 경우마저 있는 형편입니다. 진도(珍島)를 예로 든다 하더라도 마흘포(麻屹浦)와 염장포(鹽場浦)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더욱 심하니, 해청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적당히 감면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청대죽(靑大竹)을 진상(進上)할 때 사서 가져오라고 하면 꼭 관청 하인을 시켜 백성의 밭에서 강제로 찍어내게 하고는 돈은 한 푼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당초 그 값을 받아놓고도 뒤에 가서 다시 대나무를 바치게 하니 이것은 바로 두 번 거두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다른 물품을 봉진(封進)하는 예에 따라 그 대가(代價)에 대한 돈을 참작하여 정하고 별도로 공인(貢人)을 둔 다음 각 고을의 본전(本錢)을 거두어 모아 공인에게 맡긴다면 일이 편리해질 듯합니다.
1. 전생서(典牲署)와 사복시(司僕寺)의 황두(黃豆)를 돈으로 만들 때에 모리배(牟利輩)가 좌지우지하며 간섭을 하면 반드시 값이 엄청나게 비싼 고을로 떼어내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엄금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외방 고을에서 서울 아문에 바치는 정채(情債)156) 를 보건대, 각 영문(營門) 중에서도 훈국(訓局)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군포(軍布)와 보미(保米) 등을 위에 납부할 때 원래 납부해야 할 액수에 정비례하여 꼭 3분의 1의 정채를 요구하고 있으니, 해영(該營)을 단속하여 즉시 적당히 줄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도에서 바치는 군포의 정채가 다른 도에 비해서 많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말하기를 ‘태가(馱價)에 드는 비용이 멀고 가깝고 간에 차이가 없다.’고 하는데, 가령 진도(珍島)나 전주(全州)를 보더라도 그 액수에 차이가 없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견감(蠲減)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열읍(列邑)의 창고에서 사용하는 승(升)과 곡(斛)은 모두 유척(鍮尺)157) 에 맞게 하였는데, 유독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곡만은 조금 커서 거의 1말이나 더 들어갑니다. 심지어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까지도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낙인승(烙印升)이 있고 봉상승(捧上升)이 있고 장시승(場市升)이 있는데 장시승의 경우는 또 읍마다 다른 형편입니다. 열읍에 신칙하여 일체 낙인승을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각 고을에서 역참(驛站)의 보인(保人)들을 빼앗아 군역(軍役)에 충정(充定)시키고 있으므로 실로 역로(驛路)가 부지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찰방(察訪)이 바뀌어 임명될 때마다 각종 차임(差任)에 대한 값이 모두 정해져 있는 등 이미 잘못된 예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통렬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1. 전주에 있는 양향청(糧餉廳) 둔전세(屯田稅)를 편중되게 납부시키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경작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세금을 줄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전주 상관(上官) 고을의 화전(火田) 68결(結)은 곡물 대신 돈으로 호조와 내사(內司)에 상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토지에서 두 개의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되니 해조로 하여금 내사의 토세(土稅)는 면제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소안도(所安島)는 바로 연령군방(延齡君房)의 둔전(屯田)이 있는 곳인데 결세(結稅)가 치우치게 무겁고, 노도(露島)는 토세(土稅)를 호조에 반절 내고 내사에 반절 내고 있으며, 궁방(宮房)의 차인(差人)과 도장(導掌)에게 대접하는 것이 그야말로 두 섬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호조와 내사로 하여금 세금의 비율을 줄여주고 대접하는 일을 줄여줌으로써 백성의 힘이 펴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남원(南原)에서의 종이로 인한 폐단은 더 불어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간색지(看色紙)158) 에 관한 일을 이미 혁파하였는데도 그대로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 배나 더 받아들이고 있으니, 다시 엄하게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1. 진도(珍島)의 곡식 장부에 올라 있는 각종 포흠(逋欠) 액수를 다 채워 상쇄시킬 기약이 보이지 않으니 특별히 바로잡아 고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진도는 흉년이 가장 혹심하게 들어 죽은 자가 워낙 많습니다. 따라서 세초(歲抄)159) 를 행할 때에 군정(軍丁)을 대면(代免)시킨다는 것은 가죽도 없는데 털을 붙이려는 것과 같다고나 할 것입니다. 그 허다한 한정(閑丁)을 어디에서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고을에서 옮겨 와 본군(本郡)에 있게 한 군병들을 도로 각각 해당되는 고을에 돌려 보낸다면 하나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가사도(加士島)에서 우수영(右水營)에 납부하는 푸른 칡을 돈으로 내는 것과 인정모(人情牟)160) 가 섬 백성들의 폐단으로 되고 있다 하니, 견감시켜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1. 애도(艾島)·사량도(四梁島)·초도(草島)·죽도(竹島)·지오도(之五島)·평도(平島)·거문도(巨文島)·적이도(赤爾島)는 바로 좌수영(左水營)의 둔전(屯田)이 있는 곳인데 세금 납부 액수가 민결(民結)보다 배나 되는 데다가 감영(監營)의 비장(裨將)들이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매우 많으니 바로잡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진도(珍島)의 감목관(監牧官)은 해남(海南)의 화원 목장(花源牧場)에 있는데 진도와는 70리(里)나 떨어져 있으므로 거행하는 일에 대해서 일체 검찰(檢察)할 길이 없으니 목관(牧官)을 옮겨 설치하거나 혹은 본군(本郡)에 합쳐 설치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1. 소안도(所安島)는 바로 내해(內海)와 외해(外海)가 서로 접하는 곳으로서 사람의 목구멍에 해당하니 지세와 형편으로 볼 때 실로 진영을 설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1. 전선(戰船)을 3년마다 수리토록 하는 법을 폐지하고 8년마다 새로 만드는 규정을 창시한 것은 사전에 미리 대처해 둔다는 뜻에 어긋나는 일인 듯하니, 옛사람이 만든 법을 고치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소안도(所安島)는 제주(濟州)를 왕래할 때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봉명 사신(奉命使臣)이나 수령의 차원(差員)들이 왕래하는 데 따른 음식대접의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제주의 진상품을 가져온 감색(監色)이나 선격(船格) 등의 대접 비용도 한결같이 모두 섬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묘당에 유시하기를,
"내일 경들이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비국에 모여서 암행 어사의 별단을 조목 별로 사리에 맞게 초기(草記)해서 어사를 차임해 보낸 실효가 백성에게 미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나주(羅州)의 일에 대하여 방백이 공초(供招)를 받고 엄히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호남 어사 정만석(鄭晩錫)이 조정에 돌아와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을 듣건대, 도내의 진휼(賑恤)을 실시한 고을에서 죽어 나뒹구는 백성들의 시체가 열이나 백으로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갔다가 온 암행 어사들치고 증거를 대지 않는 자가 없는데 뒤에 갔다온 어사의 말일수록 전에 갔다온 어사의 말보다도 심각하기만 하다. 그러니 일로(一路)의 공전(公傳)을 가릴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도에 도백(道伯)이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술취한 사람처럼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상식 밖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먼저 해당되는 율명(律名)을 묘당에 물어보라고 한 것인데, 지금 이 초기(草記)를 보아도 별로 새로운 견해가 없다. 그리고 더구나 읍마다 이잡듯이 조사해 볼 수도 없는 형편이고 보면 마땅히 도를 안찰(按察)하고 있는 자부터 먼저 중전(重典)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도사(都事)와 선전관을 파견하여 전라 감사 이서구(李書九)의 부신(符信)을 뺏은 다음 그를 잡아오는 동시에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구초(口招)를 받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거든 영해(嶺海)에 유배보내는 율을 속히 시행하여 하소연할 곳 없이 죽어간 호남 백성들의 원통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
충청도 병마 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서정수(徐鼎修)를 전라도 관찰사로 특별히 제수하고, 하교하기를,
"삼남(三南) 지방에서 진휼(賑恤)을 끝내고 올린 장계가 오늘 일제히 도착해서야 영남의 부유한 백성들이 자원해서 곡물을 바쳤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묘당에마저 알리지 않은 채 제멋대로 바치는 것을 허락하고는 곧바로 나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렇다면 지난해에 반포한 윤음(綸音)을 준수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양남(兩南)의 보고 사항 가운데에서 유독 영남만 하지 않았는데, 번신(藩臣)의 도리로 볼 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라의 기강으로 헤아려 볼 때 어찌 그냥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영남의 전 도신 조진택(趙鎭宅)을 파직하라."
하였다.
교리 김선(金銑)이 상소하기를,
"난역(亂逆)이 거듭 발생하고 변고가 없는 때가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령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기필코 성상의 덕을 무함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던 것으로는 오늘날의 정동준(鄭東浚) 사건만한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저를 파헤쳐 보면 정경순(鄭景淳)이 남몰래 주도한 것이니, 대체로 그는 정동준과 동일한 거괴(巨魁)라고 할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다시 재삼 생각하시어 속히 결단을 내려 주소서.
아, 정창순(鄭昌順)이 소를 내놓았는데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저 창순으로 말하면, 처음에는 후겸(厚謙)에게 빌붙었다가 끝에 가서는 김시위(金始偉)와 홍상간(洪相簡)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남을 해치려는 수작을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얽어맨 흔적을 가리울 수가 없었는데 다만 그의 품성이 교활한 나머지 토끼처럼 잘도 빠져 나가 그만 잡히지 않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정동준을 의탁하고 그를 기화(奇貨)로 삼고는 그와 이웃에 살면서 밤낮으로 모의하였는데 백발이 되도록 친밀하게 지내면서 아부하여 받들어 모셨습니다. 동준이 가진 진귀한 새와 기이한 화초치고 창순이 아첨하며 바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자녀들의 옥백(玉帛)도 반절은 창순이 애써 마련해 보내준 것들이었는데, 마침내 그가 권세를 휘어잡게 되어서는 스스로 그의 모주(謀主)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대간의 말이 너무도 관대했던 탓도 있습니다만 가볍게 귀양을 보냈다가 도로 취소시킨 것 역시 짐승 같은 자를 교화시켜 보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창순은 그만 거꾸로 밖으로는 자기 변명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암암리에 비호할 목적으로 감히 ‘나라 편[國邊]’이라는 이야기를 동준에게 귀속시키는 한편 ‘패거리를 지어 다른 편을 친다.[黨伐]’는 지목을 대간에게 돌렸습니다. 아, 통분스럽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심장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까. 나라 편이라고 하는 말을 비록 동준의 입을 빌려서 하긴 했습니다마는, 지금 그의 죄악이 이미 드러난 뒤에 와서까지 어려움없이 끄집어내어 용이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평소에 동준을 진짜로 나라 편이라고 인정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생각건대 그는 교화시키기 어려운 사나운 성품의 소유자로서 과거의 일에 연연한 나머지 은연중에 동준을 위해 깃발을 치켜들고는 국시(國是)를 어지럽힐 계책을 꾸미려 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당벌(黨伐)이라는 설을 지어내어 감히 빠져나갈 마음을 내고는 아무 말이나 부르짖고 내뱉으면서 동준의 혈당(血黨)과 일이 관계되기만 하면 기필코 당벌의 조목으로 모두 몰아넣음으로써 한 세상의 공론(公論)으로 하여금 감히 어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꾸미고 있는 계책이 어찌 더더욱 교묘하고 참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정창순에게 속히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충청 감사 조윤대(曺允大)는 본래 어리석은 성품의 소유자로서 그저 벼슬을 얻고 잃는 데에만 마음을 쏟으면서 남몰래 요망한 적(賊)에게 빌붙어 은밀히 자기 사욕(私慾)을 채웠으므로 세상의 지탄을 받아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한 번 상소를 한 것을 보더라도 지조를 지키는 의리는 전혀 없이 눈가릴 계책만을 내놓았으므로 지금까지도 공의(公議)가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벼슬살이한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일찍이 서쪽 지방의 고을에 보임(補任)되었을 때에는 그를 비방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고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인끈을 풀어놓자마자 탐욕스럽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다시 관찰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부당하니, 그에게도 견책하여 삭직(削職)시키는 처벌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고(故) 중신(重臣)의 일을 논했을 때에도 하교한 바가 있다마는, 우연적인 일을 가지고 밝히기 어려운 무함을 가하고, 또 격식 밖의 율(律)을 청하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정창순의 일을 논한 소의 사연을 보건대, 예리한 칼날을 매섭게 휘둘러대고 있었다. 중신의 말투가 본래 그러한데 오히려 이것을 꼬투리 삼아 얽어매고 주석까지 많이 달면서 ‘저쪽 편을 위해 이기려 대든다.’는 조목으로 몰아넣고 있는데, 말하는 사람은 쉽게 여겨 하더라도 그 말을 듣는 입장에서는 필시 원통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을미년 연간에 곧바로 승지에 제수되었었고 보면 빌붙었다고 배척한 것은 대체로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한 조목만 보더라도 율을 신중하게 적용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그대는 파직시켜야 하겠다.
조윤대의 일로 말하면, 번신(藩臣)의 체모가 얼마나 중한 것인데 어떻게 풍문만 듣고서 논단할 수 있겠는가. 사조(辭朝)161) 할 날이 멀지 않았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얼버무리고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서쪽 지방 고을에 있을 때와 강화에 있을 때의 일과 관련하여 과연 진달한 것과 같은 자취가 있거든, 정원에서 그대에게 물어 아뢰도록 할 것이니 그때에 가서 그대는 곧장 조목별로 대답하도록 하라.
오늘날 말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중신에 대해서만 단단히 논박을 가하고 이제는 충청 감사의 일까지 덧붙였으니, 패거리를 지어 다른 쪽을 친다고 혐의한 중신의 소가 꼭 맞는 내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대와 같은 무리가 있다니, 이 어찌 요즘 교화시켜 일신시켜 보려는 고심의 결과라고 하겠는가. 정말 놀랍기만 하다."
하였다.
현재 갇혀 있는 죄수 조시순(趙時淳)을 사거리에서 엄히 형장(刑杖)을 친 뒤 절도(絶島)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5월 23일 계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전 교리 김선(金銑)에게 물어서 아뢴 계사(啓辭)를 보건대, 충청 감사 조윤대(曺允大)가 서쪽 지방 고을에 있을 때 더러운 비방을 받았다는 것과 강화에서의 탐욕스러운 소문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합니다. 풍문으로 전해진 이야기라고 한다면 일단 확실한 증거로 채택할 수도 없으니 사조(辭朝)하라고 신칙한다 한들 안될 것도 없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를 말한 자가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는 신하이고 이 말의 대상자가 경재(卿宰)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고 보면 그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일단 이런 일을 당한 이상 예우하며 부려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억지로 시키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니, 충청 감사 조윤대는 체차를 허락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5월 24일 갑술
유강(柳焵)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25일 을해
장령 장석윤(張錫胤)이 상소하여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는 이야기를 진달하고, 이어 정경순(鄭景淳)에게 속히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할 것과 김선(金銑)을 파직시키도록 내린 명을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명유(明諭)를 지금까지 내리지 않고 미루게 된 것은 바로 김선이나 송문술(宋文述) 같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연석(筵席)에서 내린 분부를 모두 듣게 되었을 것인데, 그럴 경우 그들이 어떻게 반좌율(反坐律)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그대야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따라가는 자이니 깊이 꾸짖을 가치가 있는가. 그러나 임금이 한 말은 금석(金石)처럼 믿어야 할 것이다. 좌상과 우상을 거듭 복상(卜相)하던 날에 연석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이 아래에서 차차 전파되기를 우선 기다리고 있는데 거의 모두 들어 알게 되었다고 인정된 다음에는 장소(章疏) 사이에 섣불리 그런 문자를 한 번이라도 쓸 경우엔 요청한 그 율(律)을 가지고 반좌(反坐)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살리기 위해 죽이는 방도로 삼고 한편으로는 사람 대접할 자와 귀신 대접할 자를 분별토록 할 것이다.
그대에 대해서는 그대 집안이 훈척(勳戚)이었던 옛정을 생각해서 우선은 처분을 내리지 않겠다. 그 대신 3년 동안 휴가를 줄테니 강 밖에 있는 옛 정자에 가서 매년 경서 한 권씩 달달 외도록 하라. 3년이 지나고나면 내각으로 하여금 도로 초계(抄啓)하는 대상에 부치게 하되 삼경(三經)에 대한 강을 바쳐서 틀리지 않아야만 분간(分揀)162) 해 주도록 할 것이요 분간해 주기 이전에는 아직 벼슬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의 예로 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함흥부(咸興府)에 창의사(彰義祠)가 있는데, 이는 현묘(顯廟) 병오년에 임진 왜란(壬辰倭亂) 당시 본부(本府)에서 의리를 떨친 자 및 순절(殉節)한 증 병조 판서 유응수(柳應秀) 등 12인을 위해 세운 사당으로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액(賜額)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흠전(欠典)이라고 할 것이니, 지금 만약 특별히 사액하도록 허락하신다면 충성을 바친 사람을 표창하는 성전(盛典)을 빛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영흥부(永興府)에 있는 정충사(精忠祠)는 증 참판 김경복(金慶福)과 증 첨정 이몽서(李夢瑞)를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임진 왜란 당시 창의(倡義)한 공로가 모두들 매우 탁월하였기 때문에 숙묘조(肅廟朝) 을묘년에 이 사당을 창건하였는데 아직 사액해 주기를 청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에 들어와 60돌을 세 번째 맞게 되었으니 특별히 사액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영흥의 정충사를 창건한 것이 지난 을묘년이었고 사당에 봉안한 사람들을 표창하여 추증한 것도 같은 해였다고 하니 뜻을 보여줌에 있어서도 의당 자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게판(揭板)한 날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주어 치제(致祭)하고 아울러 사액하는 일도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흥 창의사에는 12의사(義士)를 함께 제사드리고 있는 외에 또 안팎으로 일컬을 만한 자가 8인이 있어 그들의 사적(事蹟)도 같이 기록하여 곁채의 현판에 걸어놓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8인에 대해서 비록 배향(配享)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모두 표창해 주어야 마땅할 것인데, 8인 중에서 좌랑 문덕교(文德敎)와 부장(部將) 주응무(朱應武)는 이미 증직(贈職)되었습니다만 그 밖에 직장(直長) 문원(文黿)과 참봉 유응춘(柳應春)과 사과(司果) 한밀(韓謐)과 생원 최덕익(崔德益)과 유생 이언통(李彦通)은 모두 증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계남(柳繼男)은 첫 번째로 제향을 올리는 증 병조 판서 유응수의 아들로서 몸을 바쳐 의(義)에 나아갔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이 6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증직하는 의전(儀典)을 베풀어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비변사가 화성(華城) 협수군(恊守軍)의 제도(制度)에 관한 절목을 올렸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성지(城池)에는 반드시 협수군을 두어야 하니, 이는 대체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성원(聲援)해야 하고 힘을 합쳐서 방어해야 하기 때문인데,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 그리고 송도(松都)와 강화(江華)에서의 예를 상고할 만합니다. 이번에 화성의 행궁(行宮)이 낙성되고 성곽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상께서 삼군(三軍)의 조련 상황을 직접 살펴보시고 완전한 요새지로서의 형세를 이루어 놓으셨는데, 주위의 가까운 지역에서 협수(恊守)하는 제도가 아직까지 구비되지 못했으니, 이는 보장(保障)을 중히 하고 사전에 예방하는 뜻이 전혀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본부(本府)와 접경하고 있는 용인(龍仁)·안산(安山)·진위(振威) 등 3개 고을은 소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고 개 이빨처럼 맞물린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관장(官長)과 병민(兵民)이 서로 왕래하며 친숙한 처지인 만큼 절제(節制)하기 편리하고 원만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보다 나은 데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상 세 고을의 수령들을 협수장(恊守將)으로 정하고 또 각각 그 경내에 있는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속오군(束伍軍)을 타졸(垜卒)로 정하여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힘을 합쳐 방어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시행해야 할 사항들을 절목으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조목별로 진달드립니다. 1. 용인 현령을 동성 협수 초관(東城恊守哨官)으로 정하고, 진위 현령을 남성 협수 초관으로 정하고, 안산 군수를 서성 협수 초관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1. 세 고을을 일단 협수하는 속읍(屬邑)으로 정한 이상에는 초관이 전령(傳令)을 차출한 뒤 즉시 갖추어 보내 와서 보고토록 할 것이며, 세 고을 수령이 새로 도임(到任)한 경우에는 도임장(到任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전령을 보내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협수 군졸을 용인에 있는 수어청의 속오군 5초(哨)와 진위에 있는 수어청의 속오군 3초(哨)와 안산에 있는 총융청의 속오군 4초를 화성으로 옮겨 소속시켜서 타부(垜夫)로 정하고, 출동시켜야 할 때가 오면 신지(信地)에 따라 성에 오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협수 초관은 경보(警報)를 듣는 즉시 성으로 와야 할 장수인 만큼 호령이 전일해야만 효력을 거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용인 현령처럼 금영(禁營)의 향군(鄕軍)까지 겸해서 맡고 있는 경우에는 파총(把摠)을 다른 고을로 옮겨 떼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좌계(左契)의 표신(標信)이 없더라도 반드시 전령의 영기(令旗)로 동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세 고을의 속오군으로서 전적으로 타부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은 보통의 성정군(城丁軍)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군안(軍案)을 작성하여 1건(件)은 군영(軍營)에 놔두고 1건은 되돌려 준 뒤 궐원(闕員)이 생기는대로 채워넣도록 함으로써 빈 장부만 안고 있는 폐단이 없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1. 군문(軍門)은 일의 절차와 순서가 중요하니, 세 고을 수령이 일단 협수 초관(恊守哨官)의 직책을 띠고 있는 각 방면에 모두 신지(信地)를 갖고 있는 이상 조련할 때에 명령을 받고 전달하는 등의 절차를 일체 해당 방면 성장(城將)의 호령대로 준수함으로써 잘못되는 폐단이 없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1. 대소(大小) 사부(士夫)·군(軍)·민인(民人) 등을 막론하고 성가퀴를 계산하여 나누어 지키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병가(兵家)의 불문율입니다. 따라서 군사 대장에 등재된 세 고을의 속오군 이외에 성 가까이에 있는 사대부와 백성들도 경보를 듣는 즉시 입보(入保)케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평상시에 조련을 행할 때에도 부근의 남정(男丁)들을 대상으로 이수(里數)를 한정하여 떼어붙이고 그들의 신지(信地)를 알게 함으로써 급할 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장용영(壯勇營)이 향군(鄕軍)을 추가로 뽑아 정하는 절목을 올리니, 10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장용영이 아뢰기를, "본영에서 향군을 추가로 뽑아 정하는 절목을 작성하여 방금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런데 금위영(禁衛營)에 상번(上番)하는 향군 중에서 매번(每番)에 1초(哨)씩 10년 기한으로 화성(華城)의 성쌓는 곳에 투입시켜 공사를 돕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에 정군(正軍)과 보군(保軍)을 덜어내고 떼어주어 대오를 작성하고 군포(軍布)를 거두는 데에 구애되는 요소가 자연히 많게 되었으니, 그 연한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장용영에서 기전(畿甸)의 제읍(諸邑)에 향군(鄕軍)을 설치하게 된 것은 경군(京軍)이 징번(徵番)과 수가(隨駕)하는 데에 치우치게 고생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노고를 균등하게 해 주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신년부터 계축년에 이르는 동안 먼저 지평(砥平)에서 수원(水原)에 이르기까지 15초(哨) 3군(軍)의 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초를 여태 단속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은 양정(良丁)을 수괄(搜括)하는 과정에서 소요를 일으키기 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병은 물론 정예를 위주로 해야지 수효만 많아지게 힘써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자라는 인원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위영(禁衛營)의 향군(鄕軍) 1백 25초(哨)에서 각초마다 정군(正軍) 및 관보(官保)와 자보(資保)를 각각 약간 명씩 덜어내어 본영에 떼어 보내도록 하는 동시에 또 정군 1천 2백 70명을 엄선하여 10초를 만들었습니다. 대개 이 향군의 경우는 사체(事體)가 자별한 만큼 관리하는 면에 있어서 기강과 군율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한강 남쪽과 한강 북쪽을 막론하고 옛 대오와 새 대오를 골고루 배치해서 전후 좌우로 고기 비늘 형태로 초(哨)를 만들고 경군(京軍) 중사(中司)와 합쳐 5사(司)의 편제에 맞춤으로써 규율을 엄히 하고 지휘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을 뽑아 정하고 사용하는 규례를 사목(事目)으로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금위영의 향군으로 6도(道)에 산재되어 있는 것이 1백 25초인데, 각 초마다 정군(正軍) 10명과 함께 관보(官保) 1명, 자보(資保) 1명씩 덜어내어 떼주도록 합니다. 1. 떼어받은 정군은 1천 2백 50명이고 관보는 1천 2백 50명이고 자보는 1천 2백 50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떼어받은 것을 소중히 관리해야 할 텐데 6도에 산재해 있는 만큼 어떻게 단속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군의 경우에는 한강 남쪽으로 과천(果川)에 1초, 시흥(始興)에 1초, 광주(廣州)에 2초, 용인(龍仁)에 1초, 양성(陽城)에 1초, 진위(振威)에 1초, 안산(安山)에 1초를, 한강 북쪽으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에 각각 1초를 분산 배치하는 것으로 마련해서 각각 그 고을의 소재지에다 군포(軍布)를 납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군(良軍) 가운데 내력과 주소가 확실하고 힘이 센 자를 가려 융통해서 서로 바꾼 다음 고기 비늘 형태로 초(哨)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 사(司)·초(哨)의 단속이 일단 완료되면 군사를 기르는 일을 우선 행해야 합니다. 보군(保軍)에게서 예전대로 군포를 거두어 정군에게 지급하는 자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신군(新軍)과 구군(舊軍)으로 이미 1영(營) 5사(司)의 군제를 편성하였으니, 소재지의 5초는 전사(前司)에 소속시키고, 광주·용인·진위·양성의 5초는 좌사(左司)에 소속시키고, 경군(京軍)의 5초는 중사(中司)에 소속시키고, 시흥·과천·안산·고양(高陽)·파주(坡州)의 5초는 우사(右司)에 소속시키고, 양근(楊根)·가평(加平)·지평(砥平)·양주(楊州)·장단(長湍)의 5초는 후사(後司)에 소속시켜서 고리처럼 연결해 에워싸게 함으로써 서로 의지하고 돕는 형세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 정군(正軍) 10초를 합하면 모두 1천 2백 70명이 되는데 이들을 고기 비늘 형태로 편성한다 하더라도 편할 대로 초를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군(保軍) 2천 4백 80명에게서 신포(身布)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각 해당 고을 수령들은 반드시 10월 안에 상납을 마치고 감히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각각 해당 고을 소재지에 포목을 바치게 하고 양군(良軍)과 서로 융통하여 바꾸게 하는 일을 앞서 개략적으로 논의하기는 했습니다만, 사(司)에서 초(哨)를 선발하고 초에서 기(旗)를 선발하고 기에서 대(隊)를 선발하고 대에서 병(兵)을 선발하는 법이야말로 병가(兵家)의 요결(要訣)이니, 만약 단속할 즈음에 혹시라도 구차하게 충원시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을 법대로 치죄(治罪)해야 할 것입니다. 1. 전사(前司)·후사(後司)의 파총 2인과 전사·후사의 초관(哨官) 각 5인에 대해서도 본영 절목의 내용대로 준수하여 화성(華城)의 관직을 가지고 하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입니다. 1. 파총과 초관을 일단 차출했으면 각사(各司)마다 별무사(別武士) 4인과 표하군(標下軍) 30명씩 채워넣어야 할 것인데 그 규정은 한결같이 다른 사(司)나 초(哨)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패(書牌) 각 1명은 표하군 중에서 정해 쓰도록 할 것이며, 전사(前司)의 표하군 역시 본영의 절목에 따라 수원에 있는 군사 중에서 뽑아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7면
【분류】군사(軍事) / 사법(司法)
장용영(壯勇營)이 향군(鄕軍)을 추가로 뽑아 정하는 절목을 올리니, 10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장용영이 아뢰기를,
"본영에서 향군을 추가로 뽑아 정하는 절목을 작성하여 방금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런데 금위영(禁衛營)에 상번(上番)하는 향군 중에서 매번(每番)에 1초(哨)씩 10년 기한으로 화성(華城)의 성쌓는 곳에 투입시켜 공사를 돕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에 정군(正軍)과 보군(保軍)을 덜어내고 떼어주어 대오를 작성하고 군포(軍布)를 거두는 데에 구애되는 요소가 자연히 많게 되었으니, 그 연한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장용영에서 기전(畿甸)의 제읍(諸邑)에 향군(鄕軍)을 설치하게 된 것은 경군(京軍)이 징번(徵番)과 수가(隨駕)하는 데에 치우치게 고생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노고를 균등하게 해 주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신년부터 계축년에 이르는 동안 먼저 지평(砥平)에서 수원(水原)에 이르기까지 15초(哨) 3군(軍)의 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초를 여태 단속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은 양정(良丁)을 수괄(搜括)하는 과정에서 소요를 일으키기 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병은 물론 정예를 위주로 해야지 수효만 많아지게 힘써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자라는 인원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위영(禁衛營)의 향군(鄕軍) 1백 25초(哨)에서 각초마다 정군(正軍) 및 관보(官保)와 자보(資保)를 각각 약간 명씩 덜어내어 본영에 떼어 보내도록 하는 동시에 또 정군 1천 2백 70명을 엄선하여 10초를 만들었습니다. 대개 이 향군의 경우는 사체(事體)가 자별한 만큼 관리하는 면에 있어서 기강과 군율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한강 남쪽과 한강 북쪽을 막론하고 옛 대오와 새 대오를 골고루 배치해서 전후 좌우로 고기 비늘 형태로 초(哨)를 만들고 경군(京軍) 중사(中司)와 합쳐 5사(司)의 편제에 맞춤으로써 규율을 엄히 하고 지휘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을 뽑아 정하고 사용하는 규례를 사목(事目)으로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금위영의 향군으로 6도(道)에 산재되어 있는 것이 1백 25초인데, 각 초마다 정군(正軍) 10명과 함께 관보(官保) 1명, 자보(資保) 1명씩 덜어내어 떼주도록 합니다. 1. 떼어받은 정군은 1천 2백 50명이고 관보는 1천 2백 50명이고 자보는 1천 2백 50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떼어받은 것을 소중히 관리해야 할 텐데 6도에 산재해 있는 만큼 어떻게 단속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군의 경우에는 한강 남쪽으로 과천(果川)에 1초, 시흥(始興)에 1초, 광주(廣州)에 2초, 용인(龍仁)에 1초, 양성(陽城)에 1초, 진위(振威)에 1초, 안산(安山)에 1초를, 한강 북쪽으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에 각각 1초를 분산 배치하는 것으로 마련해서 각각 그 고을의 소재지에다 군포(軍布)를 납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군(良軍) 가운데 내력과 주소가 확실하고 힘이 센 자를 가려 융통해서 서로 바꾼 다음 고기 비늘 형태로 초(哨)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 사(司)·초(哨)의 단속이 일단 완료되면 군사를 기르는 일을 우선 행해야 합니다. 보군(保軍)에게서 예전대로 군포를 거두어 정군에게 지급하는 자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신군(新軍)과 구군(舊軍)으로 이미 1영(營) 5사(司)의 군제를 편성하였으니, 소재지의 5초는 전사(前司)에 소속시키고, 광주·용인·진위·양성의 5초는 좌사(左司)에 소속시키고, 경군(京軍)의 5초는 중사(中司)에 소속시키고, 시흥·과천·안산·고양(高陽)·파주(坡州)의 5초는 우사(右司)에 소속시키고, 양근(楊根)·가평(加平)·지평(砥平)·양주(楊州)·장단(長湍)의 5초는 후사(後司)에 소속시켜서 고리처럼 연결해 에워싸게 함으로써 서로 의지하고 돕는 형세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 정군(正軍) 10초를 합하면 모두 1천 2백 70명이 되는데 이들을 고기 비늘 형태로 편성한다 하더라도 편할 대로 초를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군(保軍) 2천 4백 80명에게서 신포(身布)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각 해당 고을 수령들은 반드시 10월 안에 상납을 마치고 감히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각각 해당 고을 소재지에 포목을 바치게 하고 양군(良軍)과 서로 융통하여 바꾸게 하는 일을 앞서 개략적으로 논의하기는 했습니다만, 사(司)에서 초(哨)를 선발하고 초에서 기(旗)를 선발하고 기에서 대(隊)를 선발하고 대에서 병(兵)을 선발하는 법이야말로 병가(兵家)의 요결(要訣)이니, 만약 단속할 즈음에 혹시라도 구차하게 충원시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을 법대로 치죄(治罪)해야 할 것입니다. 1. 전사(前司)·후사(後司)의 파총 2인과 전사·후사의 초관(哨官) 각 5인에 대해서도 본영 절목의 내용대로 준수하여 화성(華城)의 관직을 가지고 하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입니다. 1. 파총과 초관을 일단 차출했으면 각사(各司)마다 별무사(別武士) 4인과 표하군(標下軍) 30명씩 채워넣어야 할 것인데 그 규정은 한결같이 다른 사(司)나 초(哨)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패(書牌) 각 1명은 표하군 중에서 정해 쓰도록 할 것이며, 전사(前司)의 표하군 역시 본영의 절목에 따라 수원에 있는 군사 중에서 뽑아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7면
【분류】군사(軍事) / 사법(司法)
구익(具㢞)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정창순(鄭昌順)을 판의금부사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5월 26일 병자
정창순을 특별히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창순이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변득양(邊得讓)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비변사가 호남 어사의 별단(別單)을 가지고 복계(復啓)하니, 하교하기를,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백성의 고통과 고을의 폐단을 살펴보게 한 결과 실질적인 혜택과 효과가 끝까지 미치지 못한 것만 같다. 이는 성실하게 일을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서 남쪽 백성들을 보기가 부끄럽다. 그래서 내가 경들로 하여금 본사(本司)에 일제히 모여 개좌(開坐)해서 강구하게끔 한 것인데, 이는 실질적인 혜택과 효력이 나타나도록 조목별로 진달하는 내용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한 줌도 넘는 이 두루마리를 보고서 깜짝 놀랄 내용이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촛불 아래에서 살펴보며 몇 시간을 경과하는 동안 눈에 눈꼽이 낄 정도라서 옆에서 보고 대신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거의 30조목이나 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조목 하나의 사항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실질적인 혜택을 끼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실효가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말해 주는 내용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이쯤 되어서는 경들이 당초 자문을 구했던 나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훌륭하다. 연전에 상참(常參)하던 날 건의했던 이 판부사(李判府事)의 말이여. 긴요치도 않은 사례로 신칙하는 서울 관아의 관문(關文)을 외방에 내려보내면 공연히 외방에서 조정을 경시하는 풍조만 조장하게 된다고 한 그의 말이야말로 격언(格言)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말을 잊지 않고 참고 자료로 하려는 것이다. 이 초기(草記)를 관문으로 베껴서 알려준다면 이 판부사가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던 말과 흡사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며칠 동안이나 안에 놔두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임금의 뜻을 선양하는 도리상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대략 말하게 되었다.
경들은 다시 더 사리를 따져 각 조목별로 놔둘 것은 곧장 놔두자고 청하고 조사해야 할 것은 곧장 조사하자고 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한 번 더 물어보아야 할 것은 다시 물어보게 함으로써 어사를 파견한 일이 한바탕 숨바꼭질을 벌인 결과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실제를 힘쓴 효과가 나타나 백성들에게 자연히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모쪼록 이런 뜻을 알고서 다시 초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8일 무인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남 암행 어사의 별단(別單)에 대하여 다시 초기(草記)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첫째, 전정(田政)과 관련하여 진전(陳田)을 조사하거나 다시 양전(量田)을 행하라는 일과 둘째, 호적(戶籍)과 군부(軍簿)를 재정비해 주기를 청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양전하는 일이 물론 법전에 실려있기는 합니다만, 소요를 일으키기 쉬운 폐단만 있을 뿐 아직껏 바로잡히는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본도(本道)의 경우는 대대적으로 진휼(賑恤)을 행한 뒤인 만큼 더욱 경솔하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놔두소서. 진전을 조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을 엄히 신칙하여 각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기경전(起耕田)을 조사하고 진전은 면제해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호적과 군정(軍丁)에 관한 문제는 원래 정해진 사목(事目)과 법률이 있으니, 각각 수령들로 하여금 성심껏 조사활동을 펴 하나하나 찾아낸 다음 허호(虛戶)를 대신하게 하고 궐호(闕戶)를 채우도록 하되,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법대로 처리하게 하소서.
셋째, 각 고을의 보인(保人) 문제와 넷째, 각 고을의 계방촌(稧房村)에 대해서 청한 일입니다. 이 일은 너무도 자질구레해서 조가(朝家)에서 지휘할 성격의 것이 아니니 본도에 맡겨 일체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섯째, 진도(珍島) 등 제읍(諸邑)의 예전에 정퇴(停退)해 준 곡물과 새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요청한 문제입니다. 예전에 정퇴해 준 것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나열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추수 시기가 아직도 먼 만큼 시기에 앞서 논열(論列)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기상조라고 할 것이니, 이 한 조목은 그냥 놔두도록 하소서.
여섯째, 어세(漁稅) 및 잡물(雜物)에 관한 일과 일곱째, 선세(船稅) 및 풍랑으로 부서진 것들을 조사해 감면해 달라는 일과 여덟째, 먼저 진도(珍島)의 포세(浦稅)부터 조사해 줄여달라고 청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균청(均廳)의 사목(事目)이 그지없이 엄격한 상황에서 각종 명목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규정 이외에 징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영이나 고을이나 진(鎭)을 막론하고 일체 혁파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풍재(風災)를 입은 뒤로 어전(漁箭)과 어분(漁盆)과 선박이 부서졌을 것은 형세로 볼 때 필연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금년에는 관례적으로 장부 조사나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실제 상황에 따라 조사해서 면제해 주도록 도신에게 엄히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도군 서포(西浦)에서 납부할 때 값을 더 쳐서 받는 돈부터 우선 헤아려 줄여주고, 나머지 고을에도 감해줄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치라는 뜻도 아울러 분부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 푸른 대나무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인 만큼 무턱대고 의논할 수가 없으니 지금은 우선 그냥 놔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나무 밭과 관련해서는 연전에 절목을 내려보내 신칙했었으니, 봉진(封進)할 때의 잘못된 사례나 정채(情債)를 금단하는 일은 도신이 한 번 호령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런 일까지 묘당에서 지시한다는 것은 더욱 잗단 일이 될 듯하니, 이것도 아울러 그냥 놔두도록 하소서.
열째, 전생서(典牲署)와 사복시(司僕寺)의 위태작전(位太作錢)163) 에 관한 일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자질구레한 일이니 해시(該寺)와 해서(該署)에 분부하여 도신과 왕복해서 가격을 공평하게 하고 폐단을 없애는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열한째, 훈국(訓局)에 납부하는 군포(軍布)·보미(保米)·정채(情債)를 적당히 줄여달라는 일과 열두째, 도내의 군포와 정채를 조사해서 줄여달라고 청한 일입니다. 전후에 걸쳐 신칙하였는데도 지금까지 예전 버릇을 답습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훈국에 분부하여 각영(各營)의 군포를 바로잡아 고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태가(馱價)에 대한 일로 말하면, 전주(全州)와 진도는 그 거리가 각각 현격히 다른데도 태가가 서로 같다니, 이는 분명 잘못된 규례입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즉시 조사해 개정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열셋째, 장시(場市)의 두(斗)와 승(升)을 낙인(烙印)한 것으로 쓰게 해 달라고 청한 일입니다. 이는 대대적으로 경장(更張)하는 일에 관계되니 지금은 우선 그냥 놔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열넷째, 역참(驛站)의 폐단에 대한 일입니다. 이 문제는 엄히 신칙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냥 놔두소서. 그리고 찰방(察訪)이 바뀌어 임명될 때 가격을 정하는 문제 같은 자질구레한 폐단까지 똑같은 예로 번거롭게 아뢰다니 이는 자못 온당치 못한 일인 듯합니다. 도신에게 맡겨 바로잡아 고치도록 하소서.
열다섯째, 전주(全州)의 양향청(糧餉廳) 둔전(屯田)에 관한 일과 열여섯째, 전주 상관면(上官面) 화전(火田)의 전세(田稅)를 두 곳에 내는 일과 열일곱째, 소안도(所安島)와 노도(露島)의 토지세에 대한 문제입니다. 양향청의 둔전은 원래 세금이 면제되는 토지인데, 이 경우는 필시 둔전을 감독하는 무리들이 다른 핑계를 대고 침탈하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해도(該島)의 둔전세와 노도의 토지세에 대해서도 도신으로 하여금 구별하여 바로잡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관의 차인(差人)이나 도장(導掌)이 데리고 가는 사람의 숫자와 이들을 대접하는 등의 절목에 대해서도 참작해서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열여덟째, 남원(南原)의 간색지(看色紙)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시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서 특별히 더 금단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열아홉째, 진도(珍島) 곡물 장부에 대한 일과 스무째, 다른 고을에서 진도군에 옮겨온 군병들을 자기 고을로 돌려보낼 것을 청한 일입니다. 진도의 곡물 장부는 벌써부터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도 그냥 놔둔 채 논하지 않고 있었으니, 속히 도신으로 하여금 관원이 포흠(逋欠)한 것과 아전이 포흠한 것을 상세히 조사해내게 하는 한편 추수할 때를 기다려 그 수량만큼 받아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포흠한 해당 아전에 대해서는 별도로 더 엄히 치죄(治罪)하고 죄를 범한 해당 수령도 나문(拿問)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옮겨 온 군병을 돌려보내는 일은 어사의 별단(別單) 내용대로 시행하라고 분부하소서.
스물한째, 가사도(加士島)에서 푸른 칡을 돈으로 내는 것과 인정모(人情牟)164) 에 관한 일과 스물둘째, 애도(艾島) 등 여덟 곳의 둔전세(屯田稅)에 대한 일입니다. 이 두 조목의 일은 곤수(閫帥)가 살피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신이 금단하는 것이 마땅하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상세히 조사한 다음 혁파하게 하소서.
스물셋째, 진도의 목장에 관한 일과 스물넷째, 소안도(所安島)에 진(鎭)의 설치를 청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지세(地勢)와 사정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상세히 살핀 다음 혹 태복(太僕)에 공문을 띄우거나 혹 본사(本司)에 일일이 보고하게 하여 품처(稟處)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스물다섯째, 전선(戰船)을 예전대로 3년마다 수리하도록 청한 일입니다. 연전에 소나무가 마구 벌목되는 것을 특별히 염려한 나머지 일단 80개월을 기준으로 정했으니 지금 잇따라 바꾸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그냥 놔두도록 하소서.
스물여섯째, 소안도의 섬 백성들에게 잡비(雜費)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일입니다. 강진(康津)과 해남(海南) 두 고을을 돌려가며 도회관(都會官)으로 정해서 탐라(耽羅)에 공무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접제(接濟)하도록 원래 사목으로 정하고 있는데, 섬 백성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이다니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이 뒤로 도회(都會)에 관한 규례를 거듭 밝히되 공무를 행하는 사람을 접대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오래 머무르건 빨리 떠나건 따질 것 없이 모두 본읍(本邑)에서 마련하고 섬 백성들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해서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어사가 논열한 것이 매우 자세하긴 합니다만 간혹 자질구레한 사안도 많아 사체로 볼 때 온당치가 못하니 어사 정만석(鄭晩錫)을 추고(推考)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초기(草記)는 전번 초기의 부본(副本)인 셈이다. 그런데 전에는 폐단을 바로 잡아보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거꾸로 그냥 놔두자고 청한 것이 많다. 나의 ‘긴요치 않다.’고 한 한 마디 말 때문에 남쪽 백성들의 기대하는 마음을 막아버리고 말았는데, 이 판부사가 좋은 뜻에서 건백(建白)했던 것과는 더욱 상반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지금 만약 관례적인 비답만 내리면서 이 전편을 관문(關文)에 베껴 보낸다면 가사 유목지(劉穆之)165) 가 도백(道伯)으로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거행해야 할지 어리둥절해진 나머지 차라리 모두 그냥 놔두어 번거로움을 덜고 거짓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할 것이다. 이 초기도 어찌 말이나 된다 하겠는가. 오늘 고질적인 폐단 하나를 고치고 내일 실효성있는 정책 하나를 시행할 수 있도록 경들은 다시 더 이치를 궁구하여 기필코 임금의 뜻을 선양해 나가도록 하라. 오늘날 풍속이 완전히 참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진정 실제를 힘쓰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의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번거롭게 분부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듣건대, 이 초기는 여러 당상관들이 본사(本司)에 와서 모여 써 바친 것이지 경들의 손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하기에 비답하는 어투에서 공경하고 예우하는 뜻이 많이 결여되었다. 그러니 모쪼록 이것 때문에 인혐(引嫌)하는 차자를 올려 명을 기다림으로써 나로 하여금 번거롭게 수응(酬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런데 묘당의 고사(故事)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달포 전에 연석(筵席)에서 내렸던 분부가 또 어떠하였던가. 그런데도 당상관들이 대신을 대신해서 일을 행하다니 부당하기 짝이 없다. 당시 아문에 나아갔던 유사 당상(有司堂上)들을 일체 추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다시 옛날 습관을 답습한다면 경들을 곧장 위제율(違制律)로 치죄(治罪)하여 옛날의 규정을 복구시킬 것이다.
그런데 절목 가운데 지난해에 정퇴(停退)해 준 환곡(還穀)과 신역(身役)을 한꺼번에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야말로 사리로 따져보아도 그럴 뿐만 아니라 형세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미 그 속에 확정해 놓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기한에 앞서 미리 관문(關文)을 띄워 물어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해의 풍재(風災)에 대해서는 백발 노인들도 드물게 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를 조사해 면제해 주라고 특별히 명했었으니, 이는 더욱 백성의 고통을 보살펴 주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일이었다고 하겠다. 다른 일은 우선 놔두고라도 이 일과 관련하여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다면 신용을 보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먼저 이 조목을 가지고 삼남(三南)의 도신에게 관문을 띄워 물어보도록 하라. 그리고 뒤따라 성실하게 했는지 태만하게 했는지 별도로 조사해 살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불성실하게 행했을 경우에는 해당 차원(差員)을 각각 가장 거리가 먼 연읍(沿邑)으로 정배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엄히 신칙하라. 어사가 아뢴 것에 대해서는 그만들 이야기하라. 번거로운 느낌은 있으나 일을 잘못 그르치지는 않았다. 근래의 어사 중에는 쟁쟁(錚錚)한 편에 속하니 해(該) 어사는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관서(關西) 지방에서 정월부터 진휼(賑恤)을 시작하여 이 때에 와서 끝마쳤다.
【강계(江界)·초산(楚山)·위원(渭原) 등 고을과 만포(滿浦)·상토(上土)·고산리(高山里)·신광(神光)·아이(阿耳)·우현(牛峴)·차령(車嶺)·평남(平南)·외질괴(外叱怪)·추파(楸坡)·벌등(伐登)·종포(從浦)·산양회(山羊會)·오노량(五老梁)·마마해(馬馬海)·직질동(直叱洞)·가을헌동(加乙軒洞) 등 진(鎭)이었는데, 기민(飢民)은 총 15만 3천 4백 62 구(口)였으며 진휼한 곡물은 4천 8백 82석(石)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7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78면
【분류】구휼(救恤)
강진(康津)의 고(故) 참봉(參奉) 황대중(黃大中)과 영암(靈巖)의 신술현(愼述顯)에게 정려(旌閭)해 주었다. 어사(御史) 정만석(鄭晩錫)이 표창해 주기를 청하자 특별히 시행한 것이었다.
5월 29일 기묘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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