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진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6월 2일 신사
이성보(李城輔)를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삼았다. 상이 성보에게 특별히 유시하기를,
"옛사람은 초선(抄選)166) 의 반열에 있게 되었을 경우 부름을 받기 전이라도 수령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나와서 명에 숙배했었다. 전조(銓曹)에서 차의(差擬)한 것이 매우 체례(體例)에 합당하다. 마음에 늘 두고 생각해 왔었으니 어찌 기대하는 마음이 끝이 있겠는가. 그대는 속히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니 연석(筵席)에 오른 즉시로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조 참판 이석조(李奭祚)가 상소하여 《집설(輯說)》 내·외편 4책을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집설》 내·외편 4책을 보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뜻이 바로 성(誠)이라는 하나의 글자에 있었다. 내편의 수기(修己)·치인(治人)·질경(質經)·감사(鑑史)와 외편의 인재(人才)·궁방(宮方)·민산(民産)·군정(軍政)·향제(鄕制)·시조(時措)·풍교(風敎)·법도(法度) 모두가 학문과 정치의 요결(要訣)인 동시에 실용적인 내용들이었으니, 그 말을 받아들여 가슴 속에 간직하고 그 실마리를 더 세밀히 뽑아내어 노신(老臣)의 성의에 보답하려 한다.
그런데 인심을 유지시키고 세도를 일으켜 세우는 방도로는 풍속을 돈후하게 하고 윤기(倫紀)를 중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리고 오상(五常)167) 을 밝히려면 먼저 오품(五品)이 순조롭게 되어야 한다.168) 그래서 ‘우리 오전(五典)169) 을 바르게 하시어 그 오전을 돈독히 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이에 내가 초봄에 특별히 한 번 유시하여 향약(鄕約)에 담긴 뜻을 다시 복구하고 선왕의 옛법도를 밝히려고 하였는데 계속 미루어오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속으로 은근히 탄식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온갖 흐름을 막고 거꾸로 흐르는 물을 되돌리려고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열 사람 중에 여덟 아홉 사람은 그저 말하기를 ‘자신을 반성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해서 구하는 것이 제일이다.’고만 할 뿐,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면 곧장 반응이 나오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를 않고 있다. 바로 이런 즈음에 경이 상소를 올렸는데 깜짝 놀랄 의견을 보고 깊이 감동되었다."
하고, 특별히 발탁하여 지중추부사를 삼았다.
6월 3일 임오
충청도 관찰사 유강(柳焵)을 소견(召見)하였는데,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6월 4일 계미
차대를 행하였다. 경성(京城)의 기호(飢戶)를 뽑은 뒤 총융청(摠戎廳)과 상평창(常平倉)의 미곡을 풀어 모곡(耗穀)을 면제해 주고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울릉도는 본래 산삼(山蔘)이 생산되는 지방입니다. 그런데 한 해 걸러 산삼을 찾는 일이 늘 3, 4월 사이에 있기 때문에 캐낼 절기가 아니라서 번번이 쓸모없는 물건이 되곤 합니다. 내의원의 의원들 모두 그 산삼의 품질이 매우 좋다고 말하는 만큼 괜찮은 물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예전에 하던 대로만 하여 버린 물건 취급을 하고 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한 번 시험삼아 캐내게 하더라도 손해될 것은 없으니, 내년 봄에 찾아내기로 예정된 일을 금년 6, 7월로 앞당겨 정한 뒤 삼척(三陟)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채삼군(採蔘軍) 약간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채취하게 했으면 합니다. 거행할 사례에 대해서는 일단 해영(該營)에 문의하면 보고해 올 것이니, 비국에서 편할 대로 통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대하는 날을 오늘로 앞당겨 정한 것은 곧 백성의 일 한 가지 때문이다. 동이 트기 전에 옷을 찾아 입고서 아침이 되자마자 소견(召見)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한 때 얼굴이나 보이려고 하는 일이겠는가. 요즘 듣건대 도하(都下)의 시장 가격이 날이 갈수록 높이 뛰어오르고 있다 하니, 가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들이 굶주린 나머지 얼굴이 누렇게 떴을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날 경성에 환곡을 나누어 준 예도 있는데, 진휼해 줄 좋은 방법에 대하여 각자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공물용(貢物用) 미곡 값이 9냥 남짓이나 되는데 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지금 사세를 보면 환곡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진휼청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손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고 총융청에 남겨둔 양향(糧餉) 역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 정말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이 이처럼 간절하신만큼 재정이 부족하고 어려운 것쯤이야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겠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강구하여 가난한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구제받는 혜택을 똑같이 입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환곡을 나누어 주고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자고 제신이 이미 아뢰었는데 신 역시 다른 의견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온당하게 강구해 정해서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에 미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하교하신 것이야말로 경사스러운 해를 만나 혜택을 널리 베푸시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도성 백성들과 사서(士庶)들이 들으면 반드시 감격하여 축원을 올릴 것입니다. 신에게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물러가서 연석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대신 및 선혜청 당상들과 함께 상의한 뒤 시행할 방도를 사리에 입각해 초기(草記)함으로써 부황든 백성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끔 하라."
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제할 대책을 가지고 연석에 미처 참여하지 못했던 시임·원임 대신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이어서 또 선혜청 당상과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말하기를 ‘이렇듯 국조(國朝)에서 처음으로 맞게 된 경사스러운 해에 널리 혜택을 베풀어 주시려는 거룩한 덕과 백성을 위하시는 지극한 뜻에 입각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극진히 하셨다. 그리하여 누추한 집에 사는 빈한한 선비와 곤궁한 민간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인자한 은택을 흠뻑 입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천명을 맞아들이고 화기를 이끌어들일 수 있는 일대 계기가 된다고 하겠다.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즉시 거행할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상평창의 곡물을 나눠주는 데에 무슨 별다른 의견이 있겠는가. 다만 몇 차례 실시하며, 몇 말씩 나누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창고의 미곡이 얼마나 남아 있고 구제 대상인 민호의 총수는 얼마인지를 알아야만 마련해서 분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말하기를 ‘지금 이렇게 곡물을 나누어 주라는 연석에서의 분부야말로 뭇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저절로 배가 불러질 일이니, 단지 이 뜻을 기리면서 선양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곡물을 얼마나 내주고, 몇 차례나 하며, 동(洞)과 호(戶)를 어떻게 나누고 뽑아내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유사가 거행하기에 달려 있다.’ 하고, 선혜청 당상 이명식(李命植)은 말하기를 ‘시장 가격이 높이 치솟은 것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늙고 병든 반호(班戶)가 처한 절급한 상황은 다시 더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만약 총융청의 환곡을 가지고 각 동(洞)의 굶주림에 부황이 든 자들을 대상으로 대충 나누어 주기로 한다면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혜택은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밖에 특별히 다른 의견은 없다.’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들과 선혜청 당상의 의견이 이와 같고 보면 ‘모든 사람의 계책이 똑같다.[詢謀僉同]’고 한 격이라 할 것입니다. 속히 경조(京兆)로 하여금 오부(五部)의 관원 및 각동(各洞)의 존위(尊位)170) 에게 신칙하여 유념해서 구제받을 가호를 뽑게 하소서. 그리고 총융청의 창고에 남겨둔 미곡도 미리 마련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구제 대상 가구가 장부로 작성되어 보고되면 시행 횟수와 말 수를 정한 다음 나누어주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명색이 일단 조곡(糶穀)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된 이상에는 모곡(耗穀)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번의 은택은 실로 보기 드문 은전이라 할 것이니, 상량해서 모곡을 면제해 주는 일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모곡을 면제해 주는 일은 더욱 특별한 은혜에 속하니 가을철이 지난 뒤에 다시 상의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한성부 판윤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조곡을 나누어주는 일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은 대상 가호(家戶)를 정밀하게 뽑느냐 못 뽑느냐에 달려 있는데 가호를 뽑는 절차 가운데에서 존위(尊位)를 정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내다 팔 적에도 이미 시행했던 예가 있습니다만, 이번에도 경재(卿宰) 이하의 사람을 존위로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뽑아 해당 부(部)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각 부에서 하나하나 적간(摘奸)하고 나서 장부를 만들어 신의 부(府)에 보고하도록 오부(五部)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상이 이르기를,
"존위에 대한 한 조목이야말로 가장 요결이라 하겠다. 아침에 연석에서도 이미 하교했다만, 연석에 참여했던 경재(卿宰)부터 먼저 스스로 찾아본다면 나머지도 자연히 찾아지게 될 것이다."
하였다. 총융청이 아뢰기를,
"오늘 가호를 뽑아 환곡을 나누어 줄 때, 신은 한성부 판윤 이재학과 평창(平倉)에서 개좌(開坐)하고, 우윤(右尹) 홍인호(洪仁浩)와 본청의 중군(中軍) 신대겸(申大謙)은 하평창(下平倉)에서 개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부(中部) 2백 29호(戶), 동부(東部) 5백 29호, 서부(西部) 2천 5백 95호, 남부(南部) 1천 1백 42호, 북부(北部) 8백 61호와 연융대(鍊戎臺) 66호 등 도합 5천 4백 18호에 대해 두 곳으로 나누어 한 가호당 3두씩 도합 1천 83석 9두의 미곡을 완전히 도정(搗精)한 백미(白米)로 일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북한(北漢)의 1백 12호에 대해서도 한 가호당 3두씩 도합 22석 6두의 미곡을 특별히 영교(營校)를 정해 맡긴 뒤 관성장(管城將) 유진풍(柳鎭豊)의 입회하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한편 한성부에서 가호를 뽑은 별단에 의하면, 중부(中部)의 원호(元戶) 4천 84호 가운데 구제 대상으로 뽑힌 가호가 2백 60호이고, 동부의 원호 7천 4백 19호 가운데 뽑힌 가호가 6백 9호이고, 서부의 원호 1만 6천 4백 59호 가운데 뽑힌 가호가 2천 8백 3호이고, 남부의 원호 9천 7백 47호 가운데 뽑힌 가호가 1천 2백 77호이고, 북부의 원호 5천 2백 85호 가운데 뽑힌 가호가 9백 19호로서, 총 원호 4만 2천 7백 94호 가운데 뽑힌 가호가 5천 8백 68호였다.
이형원(李亨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영남 암행 어사 유경(柳畊)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렸다. 이에 진주(晋州)의 전 병사(兵使) 백사은(白師誾)과 상주 목사(尙州牧使) 유한돈(兪漢敦)과 자인 현감(慈仁縣監) 박효성(朴孝成)과 현풍 현감(玄風縣監) 현중조(玄重祚)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정택창(鄭宅昌)과 의령 현감(宜寧縣監) 구충원(具忠元)과 소촌 찰방(召村察訪) 김기보(金基普) 등에게 모두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등있게 죄를 매겼다. 유경이 또 아뢰기를,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여절(李汝節)은 행동이 거칠고 패려스러운데다 성격마저 잔인하고 혹독해서 곤장을 치고 형벌을 가해 수년 동안 목숨을 잃게 한 숫자가 무려 31인이나 됩니다. 그 중에서도 황하윤(黃河允) 삼부자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일과 정현(鄭鉉) 등 3인이 아무 죄없이 피살된 일과 양가(兩家)의 독자(獨子)인 정준(鄭埈)이 형장을 맞다 목숨을 잃은 일은 더더욱 참혹하기만 합니다. 나문하여 엄하게 치죄하소서."
하였다.
공미(貢米)를 2만 석을 한도로 나눠 주거나 내다 팔도록 명하였다.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 윤시동(尹蓍東)이 시장 가격이 높이 치솟는다는 이유로 계청했기 때문이었다.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5일 갑신
정범조(丁範祖)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신사운(申思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옥에 갇혀 공초를 바치니, 판하하기를,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문제는 도대체 따질 것이 못된다. 죽어서 나뒹군 시체가 많았다는 것은 어사가 아뢰어 논열한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 있을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가을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근심하는 가운데 위임해 보내며 독려했던 나의 뜻을 제대로 받들어 행했다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종전에 장계를 올리면서 명백하게 보고하지도 않았으니 이 또한 죄를 진데다가 더 죄를 졌다고 할 것이다. 그 환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위법 행위라는 것에 대해서조차 어찌 감히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목조목 나의 뜻을 저버렸으니 먼 지방에 귀양간다 해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서구를 영해부(寧海府)에 유배하였다.
6월 6일 을유
서유린(徐有隣)을 판의금 부사로 삼았다.
구상(具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7일 병술
영의정·예조 판서·장용위 제조·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궁께서 회갑을 맞는 탄신일이 머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는 마냥 기뻐 축하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연회나 진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자궁께서 옛날 일을 슬퍼하시어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규례처럼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만약 진하나 연회와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고 실제로 축하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행한다면, 내가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나 경사를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양쪽 다 온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마땅히 18일에 치사(致辭)를 직접 올릴 것이며 표리(表裏)171) 와 전문(箋文)도 직접 올리겠다. 그리고 음식 차리는 일도 그날 행할 텐데, 찬품(饌品)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정리소(整理所)에서 차려 올렸던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본영(本營)에서 거행하되 제조(提調)가 잘 살피도록 하라.
자궁의 내·외 친족으로서 이번에 반열에 참여시킬 대상자는 동성(同姓) 10촌(寸)과 이성(異姓) 6촌으로 제한하라. 그러나 홍희영(洪喜榮) 부자는 모당(慕堂)을 받들어 제사올리는 사람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들도 자리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건대, 이는 그야말로 내용은 다 구비하면서 형식만 차리지 않는 것으로서 어버이의 뜻을 따르려는 성상의 효심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우러러 찬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자궁께서 환갑을 맞으시는 경사스러운 탄신일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이는 그야말로 국조(國朝)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그러니 진하하고 연회를 차려드리는 등 경축하는 절차에 대해서 어느 예(禮)인들 거행할 수 없겠는가마는 자궁의 마음으로 헤아려 볼 때 억지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은 경사스러운 탄신일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하나하나 통지해 주어야만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진하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묘년에 행했던 전례를 분명히 근거할 수 있을 뿐더러 그 일이야말로 또한 매년 행해야 할 예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자궁께서 마음 속으로 매우 난처하게 여기고 계시므로, 진하한다는 형식은 차리지 않고 실제로 진하하는 형태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궁의 마음을 몸받게 되는 동시에 나의 정성을 펴는 방도가 될 수 있겠기에 예당(禮堂)이 진달하여 청한 때에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18일 자궁께서 회갑을 맞이하시는 탄신일에 진하하는 일은 치사(致辭)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올린다고 호칭을 붙이도록 하라. 그날 예식은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거행할 것이다. 그리고 함(凾)을 전하고 만세를 부른 뒤 내전(內殿)으로 돌아와 직접 올리는 예식을 거행할 것이다. 백관이 진하할 때에도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올린다고 호칭하도록 하라. 영상은 내전의 반열에 나아와 참여해야 마땅하다. 궁궐 뜰에서 예식을 행한 뒤에야 직접 내전의 반열에 와서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전해 들이도록 할 것이다.
제도(諸道)에서 올리는 전문(箋文)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 주었으니 알아서 거행할 것이다. 경외에서 올리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자궁께서 분부하신 대로 놔두도록 하되 탄신일 명목의 물선만은 봉진토록 하라. 그리고 전각(殿閣)에 임하여 교서를 반포하는 일과 각 전(殿)에 진하하는 일에 대해서는, 선조(先朝) 정묘년에도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 모두 임시로 정지했었는데, 더구나 금년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모두 정묘년의 예에 따라 그냥 놔두도록 하라.
또 연회를 차려드리는 예식으로 말하면 이 시점에서 자궁께서 마음 속으로 굳게 거부하시는 것이 진하하는 의식보다 훨씬 간절하실 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정묘년에도 연회 대신 음식상을 차려드리는 일로 그 이튿날 대행했었다. 자궁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볼 길이 없는 이상 한결같이 곧장 그 뜻을 억지로 어기기보다는 그 뜻을 따르고 받들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다가 가을철이 되면 다시 자전과 자궁께 아울러 청하여 아랫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주시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연회를 차려드리는 예식은 형편으로 볼 때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니 그날은 음식상만 간단히 차려 올리고 내전 뜰의 반열에 참여한 자들과 함께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는 술잔을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문(儀文)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유사가 내전에서 예식을 행하면서 이날 장수를 축원하는 뜻을 펼치도록 하라.
치사(致辭)와 전문(箋文)은 즉시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바치도록 하라. 오늘부터 예행 연습을 하되 백관이 밖에서 행하는 예행 연습과 여관(女官)이 안에서 행하는 예행 연습은 모두 없애도록 하라. 대궐 뜰에서 예를 행할 때에는 예를 없앨 수 없지마는, 내전 뜰에서 행할 때에는 자궁의 뜻을 몸받아 해야 할 것이니 역시 금년 봄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예에 의거하여 고사(瞽師)와 여령(女伶)의 주악(奏樂) 절차는 모두 없애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이번 자궁의 회갑 탄신일에 올리는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직접 전해 주신 다음에 내전(內殿)에서 친히 올리는 절차를 마련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종현이 아뢰기를,
"상께서 직접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올린 다음에 전각에 임하여 하례를 받는 일과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는 일 등의 절차도 마련해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정묘년의 예에 의거하여 그냥 놔두라고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종현이 아뢰기를,
"치사와 전문과 표리를 올리는 것으로 호칭을 붙이라고 명하셨습니다만, 이렇듯 더없이 큰 경사를 맞이하여 예식을 행할 때 만세를 부르고 머리를 조아리는 절차만은 전례대로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종현이 아뢰기를,
"효묘조(孝廟朝) 정유년에 내전에서 술자리를 벌였을 때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위에서 음악을 전혀 연주하지 않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시자, 다시 대신인 정태화(鄭太和)와 홍명하(洪命夏) 등이 고사(瞽師) 약간 명만으로는 제대로 모양을 갖출 수 없다는 이유로 여령(女伶)을 쓰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이번에 음식상을 차려 올릴 때의 음악도 이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더구나 정묘년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시점에서 자궁의 마음을 억지로 돌리시게 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뿐더러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나의 마음으로 볼 때에도 감히 전례대로 갖추어 판을 크게 벌이지는 못하겠다. 기필코 생략하시려는 자궁의 마음을 몸받는 뜻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처음에 하교했던 대로 그냥 놔두도록 하라. 그리고 의절(儀節) 문제에 대해서는 유사를 귀찮게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경이 이미 봄철 음식상을 차려 올릴 때에 참여했었으니 그 당시의 정리소(整理所) 당상들과 함께 상의하여 절목을 작성토록 하라."
하였다.
총융청의 부(部)의 사(司)에 각각 4초(哨)씩 두도록 편제를 정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본청의 전영(前營)인 남양(南陽)의 속오군(束伍軍) 20초(哨)는 본래 좌·우 부(部)의 좌·우 사(司)에 각각 5초씩 배정하는 것으로 규례를 삼았는데, 그 속에는 안산(安山)의 4초도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안산군의 속오군을 화성(華城)으로 옮겨 소속시키게 됨에 따라 1사(司)의 경우도 5초로 편성되어 있다가 4초가 감축되고나니 단지 1초만 남게 되어 군제(軍制)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16초를 융통해서 다시 마련해야 할 것인데, 남양의 속오군 10초 가운데 8초는 좌부(左部)의 좌사(左司)와 우사(右司)에 소속시키고, 남은 2초와 과천(果川)의 2초는 우부(右部)의 좌사에 소속시키고, 시흥(始興)의 3초와 양천(陽川)의 1초는 우사에 소속시킴으로써 2부 4사에 각각 4초씩 배정하는 군제로 만드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6월 8일 정해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9일 무자
하교하였다.
"설날과 동지(冬至)에 조하(朝賀)하고 탄신일에 진하하는 일을 만일 예법대로 할 때에는 조정에서 문안하는 일을 으레 행하지 않는 법이니, 이번에도 이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탄신일에 조정에서는 당전(當殿)에만 문안을 하고 오직 정원(政院) 이하의 관원만 각전(各殿)과 궁(宮)에 모두 문안하도록 하고 있는데, 고례(古例)가 바로 그렇긴 하지만 조정과 정원 이하의 관원에 대해서 어찌 규례상의 차이를 둘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탄신일에 문안할 때 조정에서도 각전과 궁에 문안을 드리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하라."
서유신(徐有臣)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11일 경인
전 정언 유경(柳畊)을 창원 안핵 어사(昌原按覈御史)로 삼았다.
전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창원 사람 정준(鄭埈)의 처가 격쟁(擊錚)하며 원정(原情)을 바친 일과 관련하여 사관(査官)을 정해서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문을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 사계(査啓)를 보건대, 도백(道伯)의 일처리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공적인 일이었건 사적인 일이었건 따질 것이 없고 또 우연히 그렇게 되었건 의도적으로 했건 따질 것이 없다. 어쨌든 함부로 죽인 것은 함부로 죽인 것이고 목숨을 잃게 한 것은 목숨을 잃게 한 것인데 그것도 허다한 인명을 잃게 한 사건이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는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폐(斃)’라고 하는 용어를 썼고 보면 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인 것이다. 가령 수십 명 중에서 모두 소생되고 한 사람만 죽었다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을 죽인 죄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이 사계(査啓)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로 이여절(李汝節)이 자기 변명을 한 내용에 불과하다. 그리고 각 사람들이 공초(供招)하여 사실을 털어 놓으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끝까지 조사해보지 않은 채 오직 우연히 조치를 잘못했던 대목에 대해서만 계속 고집하여 주장하면서 기필코 모두 그 증거로 삼아 반복해서 그런 결론으로 유도하려 하는 등 흡사 이여절을 위해 앞장서서 해명해주려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조사하는 체례(體例)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관(査官) 등을 두고 말하더라도 그렇다. 사람 목숨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얼마나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가. 그리고 특별히 분부하여 조사토록 했으니 그 사체가 지극히 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신문하는 조목을 내놓은 것이나 공초를 받은 것을 보면 오직 도백의 말만 준수해 따르면서 일의 전모가 밝혀지지 못하도록 막고 흐지부지해 버리려는 데에만 온갖 정신을 쏟고 있다. 그리하여 이여절의 하속(下屬)이라고 이름이 붙은 자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형장(刑杖)을 가하지 않은 채 오직 사실을 자백할까 두려워하기만 하였다. 그들의 소행이 그지없이 놀랍고 통분스러우니, 왕부(王府)172) 에 잡아들인 뒤 형추(刑推)하여 사실을 캐냄으로써 국법을 우롱하고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경계시키도록 하라.
그런데 맞고 보내고 하다 보면 그 폐단이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기에 그 관직을 빌려주어 그 뒤의 일을 책임지우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 사계(査啓)는 시행하지 말라. 전 정언 유경을 안핵 어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행장을 꾸리게 하되 20일 후에 인사를 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새로 임명된 도백과 함께 동행하면서 회추(會推)173) 한 뒤 조정에 돌아와 계문(啓聞)토록 함으로써 영외(嶺外)로 하여금 조정에서 샅샅이 조사하였다는 것을 알게끔 하라.
조정에서 방백을 둔 것은 외방에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시행케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그런데 호남 방백은 진도(珍島)와 나주(羅州)에서 굶주려 죽은 시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고, 영남 방백은 창원(昌原)에서 함부로 죽인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소홀히 여겨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일이 탄로되었는데도 또 감히 두둔하고 나섰다. 호남의 일은 그래도 공적인 일과 관련된 죄라고 하겠지만 영남의 일은 너무나도 임금의 뜻을 저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감사 조진택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와 구초(口招)를 받은 뒤 법대로 엄히 치죄(治罪)토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진정으로 실제를 힘쓰려면 먼저 인사를 초빙해 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가 오지 않을 줄을 뻔히 알면서 겸직(兼職)으로 불렀다가 그가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본직(本職)을 체차하고 말았다. 그 사람의 얼굴마저 보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도 실제를 힘쓴 보람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유신(儒臣)이 본직을 받아들였다고 할 경우에도 그가 겸직 때문에 마찬가지로 머뭇거리게 된다면, 비록 직접 대궐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필시 경연관(經筵官) 자격으로 연석(筵席)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을 불러놓고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다르겠는가.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성보(李城輔)의 경연관 직책을 지금 우선 체차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그를 꼭 불러오려는 뜻에서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해도(該道)에 엄히 신칙하여 조속히 올라와서 숙명(肅命)한 뒤에 사조(辭朝)하고 부임토록 하라."
6월 13일 임진
윤사국(尹師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14일 계사
하교하기를,
"어제 차대(次對)를 행하도록 명한 것은 백성의 먹을 것에 대한 조처를 문의하기 위함이었다. 경조(京兆)에서 구제 대상 가호(家戶)를 뽑는 일이 대략 두서가 잡힌 것 같으니, 몇 차례 실시하며 몇 말씩 나눠줄 것인지 묘당으로 하여금 확실히 마련해서 총융청에 분부한 다음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라. 그런데 분기(分期)를 앞당긴 공미(貢米)와 환상(還上) 미곡을 나누어주되 모두 17일에 우선 한 차례 지급함으로써 경사스러운 탄신일에 모두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리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일도 묘당으로 하여금 알려 주게 하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한성부의 첩정(牒呈)과 구제 대상 가호를 뽑은 장부를 보건대, 오부(五部)에서 뽑은 구제 대상 가호가 5천 8백 68호였습니다. 이에 거행할 횟수는 6월에 한 차례 하고 7월에 한 차례 하는 등 모두 두 차례로 정하였고, 나눠 줄 말[斗]의 수는 한 가호당 첫 번째는 세 말, 두 번째는 두 말씩으로 마련하였으며, 6월에 거행할 때에는 하교하신 대로 17일에 나누어주고 7월에 거행할 때에는 10일 전후로 날짜를 정해서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곡물은 총융청과 상평창의 미곡을 나누어주되 곡물의 품질과 말[斗]의 용량은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기준에 꼭 맞게 하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곡물을 나누어주는 날에는 오부의 관원이 각부에서 뽑히 민인(民人)을 이끌고 와 먼 곳에 사는 사람부터 먼저 주고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뒤에 주는 식으로 해서 차례로 받아가게 할 것이며, 경조(京兆)의 판당(判堂)과 총융사 역시 나와서 함께 입회하여 검칙하게 함으로써 뒤섞이고 누락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뽑힌 민호(民戶) 중에는 원래 협호(挾戶)174) 로서 호적에 올라 있지 않은 부류가 들어있는데, 그 숫자가 1천여 호나 됩니다. 호적법이 지극히 엄중한만큼 그 부류는 대상으로 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만, 연전에 미곡을 내다 팔 때 특별히 분부하시어 함께 뽑아주도록 하신 전례가 있고 또 이번에 환곡을 나누어주는 일이야말로 전에 없이 혜택을 베풀어주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만큼 이번에도 받아 먹게 할 뜻을 아울러 알려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5일 갑오
하교하였다.
"경사스러운 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에 경축하는 정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데, 이 경사를 함께 나누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화성(華城) 백성들에게 이미 행했었으니 서울에서 그런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18일 자궁께 음식상을 차려 올리는 예식을 마친 뒤에 홍화문(弘化門)에 가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미곡을 나누어 주어야 하겠다. 이번에 뽑힌 민호 가운데 가장 빈한한 가호를, 선혜청 도제거(宣惠廳都提擧)와 삼공(三公)이 각방(各坊)의 존위(尊位)를 엄히 신칙하여 진휼청에 뽑아 보고하게 한 다음, 진휼청 당상관 및 경조윤(京兆尹)이 데리고 와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전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옥에 갇혀 공초를 바치니, 판하하기를,
"어사(御史)의 계사(啓辭)와 진휼청의 계사가 서로 상반되게 평가한 것과 비장(裨將)을 풀어 교제를 트려고 한 일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따지지 않겠다. 그러나 공적인 일이었건 사적인 일이었건 간에 관하(管下)의 수령이 그토록 낭자하게 함부로 형벌을 가해 억울한 백성들을 죽였는데 임금의 뜻을 받들어 교화를 펼쳐야 하는 임무를 담당한 신분으로서 한결같이 그 수령이 하는 대로 내맡겨 두고 있었으니, 이 어찌 그의 포학함을 조장해 준 것과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일단 듣고난 뒤인데도 만약 법을 엄히 하여 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억울한 백성들의 한을 풀어줄 수도 없고 뒷날의 폐단을 막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가 제대로 금하지 못한 죄를 따진다면 어떻게 유배당하는 처벌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조진택을 낙안군(樂安郡)에 유배하였다.
6월 16일 을미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성보(李城輔)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실제를 힘써야 하는 정사의 도리로 볼 때 공연히 직함으로 얽어맬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시로 겸직을 체차시켰다. 이번에 연석(筵席)에 올라왔으므로 정말 기대하던 마음이 위로된다. 겸직을 체차하긴 했으나 초선(初選)만큼은 그대로 있는데 첫 연석에 올라 이야기하게 된 마당에서 그 첫 번째 의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대체로 근래의 인심과 풍속을 보면 질박하고 정직한 기품은 전혀 없이 약삭빠르고 잘난 체만 하고 있으니 삼가 이 점이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풍속은 오히려 두 번째 일에 속한다. 조정이야말로 교화가 나오는 곳인데 오늘날 조정을 보면 그 모양이 어떠한가. 만약 그 근본을 따진다면, 임금의 한 마음이야말로 온갖 교화의 근원인만큼 임금이 한 번 바로잡혀야 나라가 바르게 될 것이다. 필시 그 마음에 병통이 있기 때문에 일을 조처하고 정령(政令)을 내놓을 때에 광범위하게 응하면서도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공부가 실제로 부족한데다 또 아침 저녁으로 보필하고 훈도해 주는 신하들의 도움도 없다.
초야에서 독서하는 사람 중에 또한 어찌 적임자가 없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일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또 어떻게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만약 근본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해야 한다.[淸化源]’는 세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본원(本源)의 경지에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공부가 비록 귀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요즘 세상을 보면 독서라는 두 글자를 문득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평소 공령(功令)175) 을 공부하는 선비들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인데, 더구나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 줄 책임을 지닌 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단 천거 대상에 올랐고 보면 분명히 온축된 학문이 있을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나를 개발시켜 주고 이끌어 줄 좋은 도리가 있다면 하루아침에 활연 관통(豁然貫通)할 수 있게 해 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고(故) 참판 김양행(金亮行)이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것은 한 몸의 주재(主宰)인데,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공부에 이르면 한 생각이 발동될 때에 문득 친절하게 착수할 곳이 있게 된다.’고 하였답니다. 지금 연석(筵席)에서 하문하시면서 정치를 내는 근본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셨는데, 삼가 원하건대 한 생각이 발동될 때마다 반드시 성찰(省察)하시어 한결같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기준으로 삼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에 합치되면 행하시고, 요임금과 순임금에 합치되지 않거든 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정치를 삼대(三代)에 미치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가 구차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오늘날의 습속을 보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모두 공허한 이야기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공허한 이야기라고 하여 그대로 버려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존양(存養)과 성찰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한 쪽을 일방적으로 없애버릴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존양하려 한다면 경(敬)을 놔두고 무엇을 가지고 하겠는가. 그리고 늘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려면 전적으로 위의(威儀)를 지니는 데에 유념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의관(衣冠)을 단정하게 하고 시선을 존엄스럽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위 무공(衛武公)이 90세 되었을 때 스스로를 단속한 시를 보아도 ‘위의를 신중하게 단속하는 것이 바로 덕(德)의 우(隅)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 우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하면 바로 모퉁이처럼 각(角)이 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대체로 외면 공부(外面工夫)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아무 조짐이 없이 텅 빈 것 같은 속에 온갖 물상(物象)이 성대하게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한 말이야말로 경(敬)이라는 글자로 주재를 삼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텅 빈 가운데 신령스럽고 맑기만 한 것이 본래 본지(本地)이긴 하지만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려면 위의(威儀)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자(程子)가 ‘밖을 제어하여 안을 안정시킨다.’고 한 것이나 ‘두 다리를 뻗고서 앉은 사람치고 마음이 거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니, 그야말로 이 점에 힘을 쏟아 움직일 때에도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공경하는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참으로 오래도록 공력을 제대로 쏟지 못해 오늘은 그렇게 하다가 내일은 그만두어버리고 만다면 역시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제멋대로 하려고만 들어 온 세상이 마치 광대나 꼭둑각시처럼 건들거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외면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그 내면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을 팽개쳐두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세상을 결코 맑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부자(程夫子)가 사람들에게 정좌법(靜坐法)을 가르치려고 했던 이유가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마른 나뭇가지나 식어버린 재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었겠는가. 이는 대체로 사람들이 완전히 전도된 세태를 본받을까 우려한 나머지 먼저 자신부터 수습케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이미 평소에 통속적인 폐단을 불식시키려고 다그치는 공부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와서도 그 성과를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조정의 의문(儀文)에 있어서조차 그것이 비록 지엽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점차로 더욱 놀랍게 되고만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만 외면을 단속시키는 방법이 되겠는가.
내가 어찌 이런 습속을 바로잡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이 사람들에게 위엄있게 받아들여져야만 실제로 일에 효과가 있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천언(千言) 만어(萬語)가 한갖 말싸움하는 결과로 귀착되고 있는 형편이다. 대저 붕우간에 있어서도 서로 보고서 본받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는 것인데 더구나 군신(君臣) 관계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실덕(實德)이 정말 있기만 하다면 어찌 보고서 느끼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 모두가 바로 내가 반성하며 살펴야 할 것들로서 마땅히 병통이 되는 곳을 알아 즉시 고쳐야 할 점들이라고 할 것이다.
군수(郡守)가 비록 연석에 올라오기 전이라 하더라도 정령(政令)을 내고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서 내가 혹 외면에만 힘쓰고 실제에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연석에서의 이야기는 바로 의원을 불러다 병을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병에는 한열(寒熱)·허실(虛實)의 차이가 있고 약에는 군신(君臣)·좌사(佐使)의 구별이 있는 법인데, 지금 논한 것이 겉면의 증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런 증세를 보고 처방을 내리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약석(藥石)이 될 말을 나는 듣고 싶다."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요(堯)·순(舜)의 심법(心法)이라는 것도 원래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듣고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다 드러내 밝히고 계시는데 평소 실제를 힘쓰며 성찰하는 공부를 해 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아까 진달드린 것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일 뿐만이 아니라 유정 유일(惟精惟一)하는 공부를 참으로 절실하게 여겨 착수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정(惟精) 공부는 선(善)을 택하는 것이고 유일(惟一) 공부는 굳게 잡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선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단단히 지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아는 것은 쉽고 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더러 아는 것은 충분한데 행동이 부족한 자도 있다.’고 말하였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확실히 알아 터득했다면 아무리 그렇게 행하지 않으려 해도 될 수 없을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본 사람은 말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고 오훼(烏喙)176) 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실로 타당한데, 이 모두는 선유(先儒)가 말한 것이다. 나의 경우도 필시 철저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나름대로 선하게 행동하려고 해도 모두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신은 시골에 있었던 탓으로 오랫동안 조정의 정령(政令)을 듣지 못하였고 이번에 또 이렇게 하문하실 줄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서 창졸 간에 뭐라고 답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삼가 곡진하신 하교를 듣고 보니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어 어떤 임금보다도 탁월하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따라서 이를 실제로 잘 행하시기만 한다면 요(堯)·순(舜)의 경지도 어렵지 않게 성취하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그저 수령으로 임명해 주신 데 대해 숙배(肅拜)하려고 한 것일 뿐 이렇게까지 하문해주실 줄은 정말 꿈 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참으로 알고 있다면 어떻게 이를 행함에 효과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 오직 아는 것이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될 따름이다. 요즘 들어 연석(筵席)에서 보통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을 보면 모두 이러한 일들과 관계되어 있다. 가령 그대가 경연관(經筵官)의 신분으로서 책을 끼고 연석에 올라왔다면 혹시 두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와 다른데 어찌 지나치게 사양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데 신료 중에 어찌 또한 직언(直言)하는 신하가 없겠습니까. 만약 직언하는 신하들을 장려하여 뽑아 쓴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과연 제대로 장려하여 뽑아 쓰지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조정의 거조가 하나의 직자(直字)와 전연 상반되고 있으니 탄식이 나올 뿐더러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나 내가 마음 속으로 정말 좋아하지 않아 거만한 기색을 보임으로써 천 리 밖에서부터 사람들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인가?"
하였다. 성보가 아뢰기를,
"임금이 거룩하면 신하도 곧바른 법이니 어찌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더 장려하여 뽑아 쓴다면 반드시 들을 만한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은 세신(世臣)으로서 항상 의리를 다하고 충성을 바칠 뜻을 품고는 있습니다만 소견이 어리숙한데다 외람되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기도 하여 감히 진달드리지를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 리 되는 고을이 비록 작다고 하더라도 대략 포부를 펼쳐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고성(高城) 한 고을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진정으로 대하고 신임하며 녹(祿)을 중히 하는 것은 학자(學者)를 대우하기 위함이다. 학(學)이라는 한 글자야말로 후세의 말이기는 하지만 실로 좋은 제목(題目)이 되는 것으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커서 행하려 함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 한 글자에 종사하게 되면 마침내 일생토록 불우한 생활을 하고 당사자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면 그 얼굴조차 볼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겸직(兼職)을 체차하도록 허락한 것이 비록 정상적인 규례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근래 허위(虛僞)가 판치는 풍조를 바로잡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일단 당사자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은 이상 외람된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의리에 입각하여 누차 주저하고 있는만큼 억지로 윽박지르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만, 내려간 뒤에 민읍(民邑)의 일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꺼리지 말고 진달해 올리도록 하라. 장려하여 따르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자, 성보가 아뢰기를,
"신이 부족한 사람입니다마는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사(歷辭)177) 하려고 하는가?"
하니, 성보가 아뢰기를,
"신이 변변치 못한 음관(蔭官)으로서 감히 조정의 격례(格例)를 어기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사옹원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물러가서 먹은 뒤에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7일 병신
정원이 아뢰기를,
"검열 오태증(吳泰曾)은 입시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한 나머지 일어나려다가 도로 쓰러지곤 하여 기주(記注)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온 나라가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을 당하여 취하는 것도 상서로운 일에 방해가 된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잠필(簪筆)178) 의 임무를 수행하는 신하로서 술을 조심해야 하는 경계를 소홀히 한 탓으로 이렇듯 예전에 없는 놀라운 일이 있게끔 하였으니, 사체(事體)를 돌아볼 때 중히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원(本院)에서 추고를 청하는 외에는 달리 적용할 처벌 규정이 없습니다."
하니, 추고하라고 하교하였다.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18일 정유
명정전에 거둥하여 치사(致辭)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친히 전해주고, 내전(內殿)에 가서 직접 올리는 예(禮)를 행한 뒤 자궁(慈宮)에게 음식상을 차려 올렸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내전에 자리를 설치하였다. 자궁의 자리는 남쪽을 향해 설치하고, 대전(大殿)의 자리는 자궁 자리의 동쪽에 서쪽을 향해 설치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자리는 자궁 자리의 서쪽에 동쪽을 향해서 설치하였다.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의 시위(侍位)는 자궁 자리의 남쪽에 서쪽 가까이 설치하되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고, 또 의빈(儀賓)과 척신(戚臣)의 시위는 앞 기둥의 발[簾] 바깥에 좌우로 설치하되 북쪽을 위로 하여 서로 향하게 하였다.
이날 상침이 대전의 배위(拜位)를 내전 동쪽 뜰 섬돌 위에다 동쪽 가까이 북쪽을 향해서 설치하고, 중궁전의 배위를 내전 서쪽 뜰 섬돌 위에다 서쪽 가까이 북쪽을 향해서 설치하였다. 그리고 의빈과 척신의 배위를 대전의 판위(版位) 뒤에 설치하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배위를 중궁전의 판위 뒤에 설치하였다. 또 내명부·외명부 및 의빈·척신의 외위(外位)를 동쪽과 서쪽 뜰 가운데에 설치하고, 사찬(司贊)과 전빈(典賓)의 자리를 발 안에 설치하고, 전언(典言)과 전찬(典贊)의 자리는 남쪽으로 약간 물려서 설치하고, 찬창(贊唱)과 여집사(女執事)의 자리는 내전 아래 동쪽 섬돌 위에다 서쪽 가까이 북쪽을 향해서 설치하였다.
상식(尙食)이 수주정(壽酒亭) 둘을 마루 안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고, 또 주정(酒亭) 둘을 기둥 밖에 설치하고, 명부 및 의빈·척신의 주탁(酒卓)을 섬돌 위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였다. 내명부와 외명부가 각각 예복(禮服)을 갖추고 곁채 밖에 집결하였다.
2각(刻) 전에 전빈(典賓)이 명부(命婦) 및 내빈(內賓)을 인도하여 외위(外位)로 가고, 여집사(女執事)가 의빈(儀賓)과 척신(戚臣)을 인도해 들어와 외위로 나아갔다.
1각전에 중궁전(中宮殿)이 적의(翟衣)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상궁(尙宮)이 앞서 인도하는 가운데 나와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상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여집사가 인도하는 가운데 나와 소차에 들어갔다. 자궁(慈宮)이 적의 차림에 머리 장식을 하고 상궁이 앞서 인도하는 가운데 나와 자리에 올랐다.
전빈(典賓)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을 인도하고 각각 들어와 배위(拜位)로 나아갔다. 상궁이 인도하는 가운데 중궁전이 소차에서 나와 배위로 나아간 뒤 북쪽을 향해 섰다. 여집사가 인도하는 가운데 전하가 소차에서 나와 배위에 간 뒤 북쪽을 향해 섰다. 여집사와 사찬(司贊)과 찬창(贊唱)의 인도에 따라 상이 재배(再拜)한 뒤 무릎을 꿇고 중궁전이 재배한 뒤 무릎을 꿇었으며 상식(尙食)이 수건과 음식상을 올리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났다.
여집사가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북쪽을 향해 서서 상이 지은 노래의(老萊衣) 악장(樂章)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노래자(老萊子) 색동옷 입게 됐으니 만년토록 이 경사 빛이 나리라. 날이 밝았다고 시간을 알려옴에 원량(元良)과 함께 전당(殿堂)에 올랐도다. 오늘은 자궁께서 회갑을 맞으신 날 만백성이 장수를 축원하누나. 맛있는 술 잔에 철철 넘치고 선도(仙桃) 복숭아 안주로 올렸다네. 한잔 한잔 또 한잔 자궁께 드리나니, 한잔에 1만 년씩 3만 년을 사소서."
하였다. 다 부르고나서 여집사가 대전(大殿)을 인도하여 기둥 밖까지 이르자 여관(女官)이 이를 받아 인도하여 내전(內殿) 동쪽의 수주정(壽酒亭)으로 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상식(尙食)이 수주(壽酒)의 첫째 잔을 따른 뒤 무릎을 꿇고서 상에게 올렸다. 상이 그 잔을 받고서 자궁의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상식에게 주니 상식이 이를 전해 받아 자리 앞에 놓았다. 상이 엎드렸다가 일어나 나가서 기둥 밖에 이른 뒤 이어 배위(拜位)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여집사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서 무릎꿇고 앉아 치사(致詞)를 대신 읽었는데, 그 내용에,
"궁궐에 흘러 넘치는 축복, 회갑날 술잔을 가득 올립니다. 선대(先代)의 덕 이어받아 어머님 장수 누리시고, 융숭한 보살핌 덕분으로 자손들 번창하옵니다. 여러 빈객들과 만세주(萬歲酒) 절하고 바치면서 삼가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였다. 다 읽고나서 여집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기둥 밖까지 이르자 여관이 이어받아 인도하여 자궁의 자리 앞까지 가서 무릎을 꿇게 하였다. 상의(尙儀)가 무릎을 꿇고서 분부를 내릴 것을 아뢰었다. 이어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서 자궁의 분부를 전하였는데 "전하와 함께 경사를 같이 하겠다." 하였다. 자궁이 술잔을 들자 상식(尙食)이 나아가 빈 잔을 받은 뒤 주정(酒亭)에 다시 놓았다. 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상궁의 인도로 중궁전이 내전 서쪽의 수주정(壽酒亭)에 가서 북쪽을 향해 섰다. 상식이 수주(壽酒)의 둘째 잔을 따른 뒤 무릎을 꿇고 바치니 중궁전이 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상식에게 주었다. 상식이 이를 전해 받아 자리 앞에 놓자 중궁전이 엎드렸다가 일어난 다음 배위(拜位)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전언(典言)이 자리 앞으로 나가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치사(致詞)를 대신 읽었다. 다 읽고나자 상궁의 인도로 중궁전이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상의(尙儀)가 무릎을 꿇고 분부를 내릴 것을 아뢰었다. 여집사가 섬돌에 임하여 서쪽을 향해 선 뒤 분부를 전하였는데 "왕비와 함께 경사를 같이 하겠다." 하였다. 자궁이 술잔을 드니 상식이 나아가 빈 잔을 받아서 주정(酒亭)에 다시 놓았다. 중궁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상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 만세를 부른 뒤 두 번 절하였는데, 중궁전과 내명부·외명부·의빈·척신들 모두가 함께 하였다. 여집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기둥 밖에 이르자 여관이 이어받아 인도하여 발[簾] 안으로 가서 서쪽을 향해 앉게 하였다. 상궁이 중궁전을 인도하여 발 안으로 가서 동쪽을 향해 앉게 하였다. 상식이 수건과 음식상을 올리고 술잔을 올렸다.
여관(女官)이 명부(命婦)의 반수(班首)를 인도하여 수주정 동쪽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상식(尙食)이 수주의 셋째 잔을 채워 명부의 반수에게 주었다. 명부의 반수가 잔을 받아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상식에게 주니 상식이 전달받아 자리 앞에 놓았다. 명부의 반수가 나가 배위(拜位)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전언(典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치사를 대신 읽었다. 상의(尙儀)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서 분부를 내릴 것을 청한 뒤 섬돌에 임하여 서쪽을 향해 서서 분부를 전했는데 "명부의 잔을 고맙게 들겠다." 하였다. 자궁이 술잔을 들자 상식(尙食)이 나아가 빈 잔을 받아서 주정(酒亭)에 다시 놓았다. 명부의 반수가 일어나니 전빈(典賓)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여 각각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다.
여집사가 의빈(儀賓)과 척신(戚臣)의 반수(班首)를 인도하여 수주정 동쪽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여관이 수주의 넷째 잔을 채운 뒤 의빈과 척신의 반수에게 주었다. 의빈과 척신의 반수가 잔을 받은 뒤 자궁의 자리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여관에게 주니, 여관이 이를 전달받아 자리 앞에 놓았다. 의빈과 척신의 반수가 나가 배위(拜位)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여집사가 자리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은 뒤 치사(致詞)를 대신 읽었다. 상의가 자리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서 분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여집사가 섬돌에 임하여 서쪽을 향해 서서 분부를 전하였는데 "경들의 잔을 고맙게 들겠다." 하였다. 자궁이 잔을 들자 상궁이 나아가 빈 잔을 받아서 주정에 다시 놓았다.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의 반수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다. 여관이 내명부와 외명부에게 찬탁(饌卓)을 각각 내오고 여집사가 의빈과 척신에게 주탁(酒卓)을 각각 내왔다.
여집사가 섬돌 위에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서서 상이 지은 만년장(萬年章)을 불렀는데, 그 내용에,
"삼만 년에 또 억만 년, 해마다 이 날이 오면 이 자리 펼쳐지리. 첫째 소원 우리 국가 반석(磐石) 위에 놓이기를, 둘째 소원 우리 자손 훌륭하게 번성하길. 정겨운 이야기에 흥겨운 잔치, 빈객들 구름처럼 와서 모였네. 태평시대 술잔들 흘러 넘치고 소리없는 음악소리 은은하도다. 자궁의 덕 천심(天心)에 합치되니 우리 자손들 많은 복 받으리라."
하였다. 다 부르고나자 상식(尙食)이 각전(各殿)의 자리 앞으로 가서 상을 치웠으며, 전선(典饍)은 내명부와 외명부의 탁자를 치우고 여집사는 의빈과 척신의 탁자를 치웠다. 전찬(典贊)이 일어나도 좋다고 외치니, 전빈(典賓)이 내명부와 외명부를 인도하고 여집사는 의빈과 척신을 인도하여 내려가 각각 배위(拜位)에 나아가게 하였다. 상궁이 인도하는 가운데 전하가 배위에 나아가고, 상궁이 인도하는 가운데 중궁전이 배위에 나아갔다. 상이 재배(再拜)하고 중궁전이 재배하였다. 예식이 끝나자 여집사의 인도로 전하가 나가고 상궁의 인도로 중궁전이 나갔다. 여관 및 여집사가 내명부·외명부 및 의빈·척신을 인도하고 나갔다.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릴 때마다 모두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교대로 연주하였다. 술잔을 올리며 예를 행할 때에 원자(元子)가 발 안으로 나아가 술잔을 올렸으며, 배위(拜位)에 따라가서 재배(再拜)하였는데, 배위는 상의 판위(版位) 뒤쪽 조금 남쪽에 있었다. 원자가 절하고 무릎꿇고 만세부르는 것 모두가 의젓하게 절도에 맞았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이 경사야말로 천 년을 가도 만나기 어려운 기막힌 기회이다. 기뻐하면서 경축하고 싶은 나의 심정으로야 하의(賀儀)나 연례(宴禮)를 거행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겸허하게 억제하시는 자궁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감히 행사를 크게 거행하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의빈과 척신을 초청하여 간단하게 술자리를 마련하고 오래 사시기를 축원하는 정성을 함께 펼치기로 한 것이었다. 경들은 모쪼록 각자 마음껏 취하고 배불리 먹으면서 오늘 맞은 나의 경사를 빛내도록 하라. 오늘 음식상을 마련한 것은 보기 드문 경사라 할 것이니,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빈객들은 취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지 말 것이며 각자 남은 음식들을 싸 가지고 돌아가 집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라."
하고, 외정(外庭)의 신하들에게 음식을 차려주도록 명하였다. 2품(品) 이상 및 삼사(三司)는 명정전(明政殿) 동쪽 곁채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시종(侍從)인 당상관과 당하관은 명정전 북쪽 곁채에서 대접하고, 문신 당상관과 당하관으로서 시임(時任)과 전임(前任)들 모두에게는 광정문(光政門) 안에서 대접하고, 당상관 이하의 문관·음관(蔭官)·무관 및 잡직(雜職)으로서 을묘년에 출생한 자들에게는 영청문(永淸門) 안에서 대접하고, 무신 중 변어(邊禦) 이하 및 당상관과 당하관으로서 시임과 전임들 모두에게는 명정문 바깥 길 북쪽에서 대접하고, 잡직으로 시임과 전임들에게는 금청교(禁淸橋) 가에서 대접하고, 각신(閣臣)·승지·사관은 연희당(延禧堂) 문 밖에서 대접하면서 초계 문신(抄啓文臣)도 그 자리에 끼게 하고, 가승지(假承旨)는 교태문(交泰門) 밖에서 대접하고, 전문(箋文)을 올린 유생(儒生)에 대해서는 대사성으로 하여금 명륜당(明倫堂) 앞 뜰에서 감독하여 먹이게 하고, 장용영(壯勇營)의 장관(將官)·원역(員役)·침약(鍼藥)·화사(畵師)·궁인(弓人)·시인(矢人)·호위 별장(扈衛別將)·국 별장(局別將)·금군장(禁軍將)·화성 장교(華城將校)·각 군문(軍門)의 장관·친경전(親耕田) 노인·금군(禁軍)과 국 출신(局出身)으로서 어가(御駕)의 앞과 뒤를 호위하는 군관·문을 지키는 갑사(甲士)·한려위(漢旅衛)와 충익위(忠翊衛)와 충찬위(忠贊衛)와 충장위(忠壯衛)의 유청 군관(有廳軍官)·무예청(武藝廳)의 각문을 입직(入直)하는 파총(把摠)·초관(哨官)·군졸 등에 대해서는 각기 책임자가 인솔하고 궐내에서 나눠 먹이게 하고, 각사(各司)의 이예(吏隷)에 대해서는 장용영에서 각각 떡을 먹이게 하였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습시키고 중외(中外)에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월이 계속 흘러 회갑을 맞는 것이야말로 보기 드문 큰 경사이다. 어버이의 연세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를 경축하며 기쁨을 표시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로서는 정말 당연한 것이다. 정중하게 음식을 대접하며 술을 따라 올리는 것은 서인(庶人)들이 하는 일이요, 잔치를 베풀고 자리를 마련하여 여러 아저씨와 외삼촌들을 초청하는 것은 경대부(卿大夫)들이 하는 일이요, 정사로 베풀어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임금이 하는 일이다.
나 소자(小子)는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의 보살핌을 받아 국조(國朝)에 처음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6, 7개월 동안 어느 달이고 기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어느 날이고 축하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옥에 새기고 금으로 엮은 것은 자궁(慈宮)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남산을 바라보며 만세를 부른 것은 자궁께서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으며, 창고에서 엄청난 곡식을 꺼내 섬과 육지의 백성들에게 두루 나누어 준 것은 자궁의 은혜를 널리 베풀기 위함이었고, 노인들과 사민(四民)에게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게 한 것은 자궁의 은덕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늘과 같이 무궁하게 되기를 바라는 나의 입장에서는 늘 날이 부족하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자궁의 탄신일을 맞은 때에 어찌 풍성하게 차려 성대하게 즐기는 일을 꺼릴 여지가 있겠는가. 그런데 선조(先朝) 정묘년에는 인원 성모(仁元聖母)에게 승락을 얻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는 우리 자궁에게 허락을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축하하는 의절(儀節)도 갖추지 못하고 음악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채 그저 내외의 빈객과 척신들과 함께 조그마한 음식상을 공손히 올리면서 노래의(老萊衣) 악장(樂章)을 노래부르고 만년장(萬年章)에 맞추어 술잔을 올리게 되었다. 이 모두가 또한 즐거움을 끝까지 다하지 않고 여운을 남겨 두시려는 자궁의 지극한 뜻을 우러러 받든 것이다.
그러나 장황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널리 베푸는 정사조차 오늘날 행하지 않아서야 말이 되겠는가. 이에 반열에 참여한 신공(臣工)과 전문(箋文)을 올린 장보(章甫)로부터 아래로 군병과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날의 술을 마시고 이날의 즐거움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서 61세가 되어 내정(內庭)에 들어온 자들에게 대략 우상(虞庠)에서 노인을 대접했던 뜻179) 을 붙여 각각 음식상을 별도로 차려주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경사(京師)의 빈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들도 소외당한 상태에서 배불리 먹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여겨지니 내가 문에 나가서 미곡을 하사해야 하겠다.
남해(南陔)와 백화(白華) 등 시편(詩篇)은 바로 효자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내용으로 지어진 것인데, 향인(鄕人)이 술을 마실 때에 꼭 이 음악을 연주했던 것은 대개 효도를 권장하고 널리 사랑하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향인이 술을 마실 때의 예가 없어지면서 백성들의 풍속이 점점 투박해져 주려(州閭)와 교상(膠庠) 사이에서 보고 느끼며 돈후하게 되는 기풍이 까마득히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삼대(三代)의 정치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좌하는 신하들을 책망하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내려준 양심으로 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멀거나 가깝거나 변함이 없을진대 어찌 어지럽게 된 풍속을 순박하게 되돌릴 방도가 업기야 하겠는가. 현주(玄酒)는 담담하지만 묘한 이치가 그 속에 들어 있고 대악(大樂)은 성기지만 정성(正聲)과 합치가 된다. 옛사람이 말한 바 ‘하루라도 예(禮)를 행하면 사방이 감화를 받아 변화된다.’고 한 것이 꼭 여기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외(京外)의 목민관으로 하여금 이를 강습하여 다시 밝히게 할 것이며 거듭 경계하는 말도 마땅히 반포해 보여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죄명(罪名)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써서 들이게 하되, 도류(徒流)의 처벌을 받은 자 중에서도 석방해주는 데에 합당한 자가 있거든 승인을 받는 대로 시행토록 하라. 포흠(逋欠)한 것을 탕감해 주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 일을 초봄에 실시했었다마는, 내가 바야흐로 경축하며 기쁨을 나누려고 하는 이때에 어찌 중복된다고 꺼리겠는가. 서울에서는 공인(貢人)의 구유재(舊遺在) 2천 석과 저자 거리의 백성에게 부과된 요역와 반인(泮人)의 속전(贖錢)을 10일 기한으로 탕척(蕩滌)해 주도록 하고, 외방에서는 화성(華城)·기전(畿甸)·삼남(三南)을 대상으로 지난해에 정퇴(停退)해 준 신공(身貢)과 보미(保米)·보포(保布)·보전(保錢)을 일체 탕감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나머지 4도(道)와 양도(兩都)는 오래된 환곡(還穀) 중 최근 1년의 조목을 대신 감해 주도록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궁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는 일이고 자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일이고 자궁의 은혜를 널리 베푸는 일이고 자궁의 은덕을 드러내는 일이다."
하였다.
홍화문(弘化門)에 친히 임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미곡을 내려주고, 진찬소(進饌所)의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전문(箋文)을 올린 태학(太學) 유생들을 대상으로 비천당(丕闡堂)에서 시험을 실시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심후진(沈厚鎭)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허락하였다.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된 죄인 이현도(李顯道)를 석방하고, 장연현(長淵縣)에 정배된 죄인 홍낙술(洪樂述)을 풍덕(豊德)으로 이배(移配)하였다.
6월 19일 무술
규장각 제학 심환지(沈煥之)가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방금 강화부(江華府)에서 기영(畿營)에 보고해 온 문첩(文牒)의 내용을 듣건대, 선전관이 본부(本府)에 내려가 유수(留守)의 병부(兵符)를 빼앗고 중군(中軍)까지 아울러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가뒀으며 내사(內司)의 별제(別提)가 죄인을 이끌고 나루를 건너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그 일을 숨기고 그 자취를 비밀스럽게 하려 하셔도 한 나라의 대소 백성들이 동요되면서 피눈물을 머금고 있는 상황인데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오늘날과 같은 거조를 무릇 몇 번이나 취하셨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자기 몸을 잊고 나라에 몸 바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당초 어떻게 이렇듯 천만 뜻밖의 거조를 취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가 호흡 사이에 박두해 있는 상황에서 대신(大臣)은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고 경재(卿宰)는 궐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수문장이 출입을 엄금하고 있어 상하(上下)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니, 신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차마 한 시각도 심정을 억누르고 있을 수가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거듭 번거롭게 해드렸으니, 삼가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시어 속히 전에 내리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강화 유수는 지금 벌써 도로 일을 보게 하고 있다. 강화에 유배된 사람은 어제 이미 불러 왔다. 그대는 무엇을 두고 일을 숨긴다고 하는 것이며 또 무슨 이유로 자취를 비밀스럽게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대신·정원·내각·옥당·경재가 모두 간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6월 20일 기해
북영(北營)180) 에 거둥하여 그곳에서 묵었다.
이때 영숙문(永肅門)181) 에 전좌(殿座)를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대신과 경재(卿宰)가 청대(請對)하였으나 모두 성 밖으로 쫓겨났다. 각신(閣臣)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궐외에 있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날이 개인 뒤 더위가 물러갔으니 그야말로 회포를 풀기에 적당하다. 북영의 몽답정(夢踏亭)에 가서 묵으며 답답한 심사를 풀 것이니 그렇게 분부토록 하라."
하고, 이어 가마를 타고 요금문(耀金門)을 나갔는데, 한림(翰林) 오태증(吳泰曾)이 가마 앞에서 행차를 돌릴 것을 청하니,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신하들이 뒤따라 작문(作門) 밖에 이르자, 상이 작문을 엄히 단속하여 한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고, 신하들이 청대해도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 부총관(副摠管) 김한로(金漢老)가 상소하기를,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또 전에 볼 수 없던 지나친 거조를 취하시어 몰래 역종(逆宗)을 빼낸 뒤 도성 안에 들여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봄철에 강변 정자에서 불러다 보신 것만도 천만 뜻밖의 놀라운 거조였다고 할 것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이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아, 이 적(賊)이 전하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서 틈을 엿보고 있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전하께서 우애하는 마음이 돈독하시다 하더라도 어찌 이를 통찰하지 못하시고 늘 자기와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법을 무시한 채 은혜를 베푸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심지어는 가두어 둔 자를 몰래 끌어들인 뒤 바로 옆에다 두시고도 의심하지 않으시니, 어쩌면 전하께서 이토록까지 스스로 가볍게 행동하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그동안 자전(慈殿)께서 분부하신 뜻이 간절하고 긴박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지성껏 이 분부를 받들어야 할 성상의 입장으로 볼 때 어찌 차마 자전의 마음을 어겨가면서 거듭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던 뜻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속히 엄명을 내리시어 도로 본도(本島)로 축출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자전의 뜻을 우러러 몸받고 자전의 분부를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로서 섬에 유배한 그 사람은 풍토병이 심한 그곳에 아직도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때때로 불러보곤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따지는 것인가. 경이 상소에서 한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전의 뜻을 어겨가면서 기필코 억지로라도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이 청대(請對)한 것은 더욱 잘못되었다.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과 내각·삼사가 또 차자를 올려 환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1일 경자
환궁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서울 소식을 얻어 듣고는 정말 깜짝 놀라며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신이 비록 조정에서 물러난 몸이긴 합니다만 한 가닥 충정(忠情)만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를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삼사의 원계(原啓)를 따르심으로써 국가의 형세를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앓던 병이 장차 나을 기약이 있게 되었다 하니 그야말로 서로 기별하여 축하해야 할 일과 같다고 하겠다. 강화(江華)에 유배된 사람의 일로 말하면 지금 그쪽에 안치되어 있다. 이렇게 한 것은 위로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따르려 한 때문만도 아니고 아래로 여러 신하들의 주장에 억지로 굽히려 해서만도 아니다. 특별히 그를 위해 진장(鎭將)이 온전하게 보호하게 하기 위한 계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나의 뜻에 대해서는 일찍이 경과 대면하여 조용히 이야기했을 때 이미 상세하게 언급했었는데 경도 필시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다가 지난해 연석(筵席)에서 분부할 때에는 1년에 한 번씩만 불러오겠다고까지 말을 했었는데, 이는 그 당시 결말을 짓기에 급한 나머지 먼저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장차 그에게 길을 틔워주려고 한다면 어찌 꼭 한 번만으로 그치겠는가. 두 번도 좋고 세 번도 좋고 열 번 백 번이라도 좋을 것이다. 하고 또 해서 눈에 익고 귀에 익숙하게 되면 그가 왔다갔다 하더라도 그다지 문제삼지 않게끔 될 것이다. 그러면 꼭 용서받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돌아오는 것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통쾌하게 살 길을 찾아 영원히 무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이 비록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나의 고심(苦心)을 몰라준단 말인가. 어느 일이고 간에 점진적으로 하지 않으면 일을 해치게 마련이다. 더구나 골육(骨肉)간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6월 22일 신축
하교하였다.
"강화 유수의 일은 어찌 말이 된다 하겠는가. 그끄저께 올린 장계에서는 떠난 사유를 분명히 말했었는데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기에 비국에 물어보았더니 중도에서 가마 한 채를 만나 이를 데리고 부(府)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권속(眷屬)을 서울과 외방에 나눠 두려고 여러 가지로 꾸민 뒤 가마와 말에 태워 보냈는데, 이는 바로 그 지역이 그의 시골 장원(庄園)이나 별장과 같은 곳이기에 그로 하여금 가서 머물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전(慈殿)의 분부를 우러러 받들고 또 한편으로는 뭇사람들의 주장을 따르는 방도로 삼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성 안의 저택에다 때때로 데려다 놓고 나의 부끄러운 심사를 해소하는 동시에 나의 울적한 회포를 풀어보자고 한 것인데, 이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또 은혜로 보나 법으로 보나 안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수(留守)는 사정을 알지 못한 나머지 길 가를 분주히 싸돌아 다니면서 배행(陪行)하는 역할을 달갑게 도맡았으니 그 곡절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또한 너무도 피곤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수의 말 꽁무니 뒤로 또 추가로 보낸 가마가 어제와 오늘에 걸쳐 계속해서 오갔을텐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또 어떻게 판별해 내겠는가. 공연히 영등(影燈)182) 처럼 맴돌기나 하고 윷 말을 쫓듯 뒤따라 다니면서 가마가 오면 따라 오고 가마가 가면 따라 갔을 테니, 그 행동거지가 놀라운 것은 우선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무더위 속에서 꽤나 더위를 먹었을 것이다.
정녕 직질(職秩)이 높은 중신(重臣)의 입장에서 진영(鎭營)을 나오고 관아에 머무는 그 체모가 본디 어떠한 것인데 그만 감히 이처럼 전도(顚倒)되게 행동한단 말인가. 강화 유수 권엄(權𧟓)을 우선 체차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그가 차고 있는 밀부(密符)와 병부(兵符)를 빼앗은 뒤 밀부는 도로 바치고 병부는 기영(畿營)에 전하도록 하라. 이와 함께 가도사(假都事)로 하여금 즉시 잡아와 의금부에 넘기도록 한 뒤 그처럼 처신한 행동거지와 즉시 조정에 관문(關文)으로 보고하지 않은 죄를 추문(推問)하여 아뢰도록 하라."
관학(館學) 유생들이 상소하여 토역(討逆)하고 이어 권당(捲堂)하였다. 대사성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상소를 올린 유생들이 권당한 것과 관련하여 명을 받들고 반궁(泮宮)에 들어가서 제생(諸生)이 4배(拜)를 올리고 물러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는 밤새도록 서성이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어찌 감히 낱낱이 성심(誠心)에서 우러나와 자기 몸을 잊고 나라에 목숨을 바치려는 충정에 입각한 것이라고야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마는, 그 사람들로 말하면 조종(祖宗)이 수백 년 동안 북돋아 길러낸 선비들이고, 그 말로 말하면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에 직결된 것이고, 그 의리로 말하면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어진이나 불초(不肖)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똑같이 양심에 간직하고 있는 영원히 변치 않을 떳떳한 의리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궐문에서 호소하며 부르짖자 꾸짖으며 물리치셨고 성균관을 비우자 모두 내쫓아버리셨습니다. 소리나 안색을 크게 하여 밖으로 드러내시지 않는 우리 전하의 성스러운 덕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갑자기 이렇듯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강루(江樓)에 두 차례 행행(行幸)하신 것이나 산영(山營)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 행차하신 것 모두가 또한 성인의 허물이십니다. 그러나 성인의 허물은 일단 허물이 있다가도 고쳐질 수가 있는 법입니다. 만약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하늘 한복판에 밝게 빛나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동조전하(東朝殿下)183) 께서 종국(宗國)을 보위하고 성상을 보호하시려는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뜻에 입각하여 연전에 내리신 자애로운 분부가 해와 별처럼 빛나고 금석(金石)도 꿰뚫을 만하였으니, 나라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자성(慈聖)께서 내려주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평소 통촉하고 계시는 전하의 성스러운 효심에 비추어 볼 때 어찌하여 전하께서 우리 자성(慈聖)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삼가 그 뜻을 받들어 따르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위로는 공경 대부로부터 아래로는 하인들과 부녀자·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간담이 떨어지고 넋이 달아나 길거리를 분주하게 쏘다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년에 한 번 있을 경사스러운 운세를 당하여 조야(朝野)가 노래하고 춤을 추어야 할 이 날이 마치 사방 교외에 보루를 많이 쌓고 전진(戰陣)에 임하여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처럼 되고만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선비의 기상이 일체 꺾여지고 있는 가운데 조정의 정사와 백성의 고통도 자연히 내팽개쳐지고 있는 결과를 빚고 있는데, 성스럽고 밝은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 점을 생각하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이 감히 미천한 공인(工人)도 간언(諫言)을 올릴 수 있다는 의리에 입각하여 피를 머금은 간절한 정성을 대략 개진하였는데, 만약 전하께서 살펴 주시어 작금(昨今) 이전에 내리신 하교와 비답을 모조리 즉각 환수하심으로써 도성 안이 안정되게 하고 위기상황이 사라져 도로 편안해지게 해 주신다면, 이는 한 나라 신민(臣民)의 행복이 될 뿐만 아니라 바로 천하 만고에 걸쳐 윤상(倫常)과 의리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무너졌다가 다시 확립되는 일대 계기가 될 것이니, 다사(多士)를 넉넉히 포용하고 권장하며 타일러 다시 성균관에 들어오게 하는 일은 그 다음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충성스럽고 돈후하여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겠다. 문장은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그 내용이 사람을 감동시켜 되돌리기에 충분하다. 이치로 볼 때 즉시 승락하는 것이 합당하니 어찌 하루가 지나기를 기다리겠는가. 경은 반궁에 달려가서 제생(諸生)을 들어오도록 권유하고 이어 식당(食堂)을 설치한 뒤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의 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고 하교하기를,
"제생(諸生)을 권유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마는 비답을 주어야만 명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생들의 소가 거둥했던 장소에서 행해졌고 보면 금법(禁法)을 범했다고 할 수도 없다. ‘소를 보고 잘 알았다.[省疏具悉]’는 내용으로 써서 내려 주어 성균관을 중시한다는 뜻을 보여주고 시끄럽게 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헌조(申獻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시동(尹蓍東)을 판의금부사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궐문에 엎드려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곧 이어 모두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임인
하교하였다.
"여러 날이나 명을 어기는 것은 오히려 도리에 위배된다. 이번에 모양을 통해서도 의리와 분수를 알았을텐데 이번 일은 허구한 날 이런 식으로 버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입시한 승선(承宣)은 가서 명소패(命召牌)를 전하고 명을 기다리지 말라는 일도 아울러 대신들에게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그리고 도성과 대궐의 문금(門禁)을 잠시 유보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보낸 여러 재신(宰臣)들을 용서해주되, 내일 새벽 이후부터는 다시 예전의 금령(禁令)을 밝혀 감히 추후로 제기하지 말도록 하라."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위원리(魏元履)에게 보낸 주부자(朱夫子)의 글을 삼가 보건대, 국가의 존망(存亡)과 안위(安危)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라도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한낱 군(郡)을 담당한 관리에 불과하니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조정의 일에 대해서 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으로 말하면 위기일발의 상황으로서 벼슬하지 않은 선비도 말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대로 녹봉(祿俸)을 받는 집안의 후예인 신의 신분으로서 어찌 차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침묵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 취하신 거조가 지난 역사책을 들추어 볼 때 과연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전하의 평소 성학(聖學)에 비추어 볼 때 이런 거조야말로 정말 상도(常道)에 어긋난다는 것을 어찌 모르시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신들이 모조리 쫓겨나고 뭇신하들이 온통 동요되고 충직한 말이 일체 거부당하고 있으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는 사이에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이 이런 때에 얼굴을 쳐들고 소장을 올릴 생각을 하니 대도(大道)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운 느낌이 듭니다. 이에 감히 간단하게 문자(文字)를 들이고 나서 시골집으로 도로 내려갈까 합니다. 삼가 책임을 회피하고 오만하게 군 신의 죄를 다스려 필부(匹夫)의 신조를 온전하게 해 주소서. 만약 일식과 월식 현상이 바뀌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신이 비록 물러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다시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의 말을 채용하지도 않고서 떠나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돌려 세우려 하는 것은 선비를 예우하는 도리가 못된다. 소본(疏本)은 우선 머물려 두도록 하라. 승락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먼저 역참(驛站)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가 떠나는 것을 잡아두게 하고, 일이 이제 타결되었으니 속히 올라와서 사조(辭朝)하고 부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권유(權𥙿)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은모(李殷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이, 명을 기다리지 말라는 분부를 삼가 받들었으면서도 의리로 보나 분수로 보나 감히 도성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점점 강변 쪽으로 향하면서 삼가 엄한 처벌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안심하고 명을 기다리지도 말고 즉시 도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4일 계묘
홍수보(洪秀輔)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시임·원임 대신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
"신들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형편이 없어 위로는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모두 쳐다보는 기대에 부응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를 보나 위를 보나 부끄러울 따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승지와 함께 오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열성(列聖)께서 대신을 대우할 때 베푸신 특별한 예(禮)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 예를 신들에게 베푸셨습니다만 예는 옛 예로되 사람을 돌아보면 그 예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다른 때라도 오히려 감히 감당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오늘날 신들처럼 죄를 진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옛사람이 정세(情勢)가 궁박해져 어디에고 의지하며 호소할 데가 없게 되면 문득 도성에서 빠져 나와 교외로 가고 교외에서 다시 시골로 간다고 하였는데, 이는 감히 자신만을 중히 여기고 명을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바로 미천한 신조나마 온전히 하고 분수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신들이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고 취할 방도를 강구해 본 결과 어쩔 수 없이 짤막한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고 곧장 시골로 향하기로 하였습니다. 삼가 속히 엄한 처벌을 내리시어 멋대로 행동한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덕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더럽히고 있어 구경(九經)184) 이 닦여지지 않은 결과 친친(親親)의 도리가 모두 없어지고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가 무너졌으니 경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멀리 떠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나의 정성이 얕은 탓으로 경들의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으니 몇 줄의 비답이나 내려 하직할 때 말해주는 의례를 경건히 펼칠까 한다. 경들은 도중에 식량을 넉넉히 가지고 편안히 향리에 이르러서 은근히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25일 갑진
승지를 나누어 파견해서 외방에 있는 대신들에게 전유(傳諭)케 하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28일 정미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 영중추부사 김희(金憙),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를 파직하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정승직을 해면(解免)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은 정도(正道)로 임금을 섬기다가 안되면 그만둘 뿐이다. 그만둘 수는 있을지언정 언제 떠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또 떠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렇다. 옛날 사람들은 주(周)나라가 안될 것 같으면 노(魯)나라로 떠났고, 노나라가 또 안될 것 같으면 제(齊)나라나 송(宋)·진(秦)·초(楚)나라 등으로 떠나갔으니, 어디를 간들 안될 것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대마도(對馬島) 북쪽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이르기까지 팔역(八域)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 간다 한들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발끈 성을 내는 태도에 대해서는 추성(鄒聖)185) 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잗달게 구는 것에 대해서는 한유(漢儒)도 부끄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독서했다는 재상들이 그만 이렇게 위배되는 행동을 할 줄이야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는가.
태부(台府)186) 의 고사(故事)를 보면 조정에서 승락을 얻지 못할 경우 성 밖의 강가로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오늘날의 행동처럼 고삐를 손에 쥐고서 한꺼번에 시골로 향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설령 제대로 계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말을 채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옛 관례에 따르면서 상법(常法)을 삼가 지키는 것이야말로 대신의 직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지위와는 동떨어진 행동을 취하면서 이렇듯 예전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거조를 만들어 내면서도 그다지 주저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직분이 어떻게 되겠는가. 좌의정 유언호, 영돈녕 김이소, 영부사 김희, 판부사 이병모를 파직하라.
같이 갔으면 같이 물러간 것이다. 그러나 저쪽 물가로 완전히 건너갔다는 것은 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갈 때도 양식을 준비하지 않은 채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으니 모두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두 원로(元老)의 노숙한 지혜야말로 감탄하기에 족하지만 같이 갔었고 보면 한 통속이었다는 혐의도 지울 수가 없다. 책망하며 힐난하는 것은 완전해지기를 요구하기 위함이니, 영의정 홍낙성과 우의정 채제공을 정승직에서 해면하라."
하였다.
6월 29일 무신
제도(諸道)의 묵은 환곡(還穀)을 탕감해 주었다. 【수원부(水原府) 2천 6백 33석(石), 강화부(江華府) 2천 9백 45석, 개성부(開城府) 2백 81석, 경기 7천 6백 71석, 평안도 11만 9천 2백 석, 함경도 15만 4천 9백 8석, 경상도 9만 9천 2백 56석, 전라도 2천 6백 96석, 강원도 5만 6천 1백 89석, 충청도 4만 2천 8백 7석, 황해도 7천 8백 36석.】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8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84면
【분류】구휼(救恤)
6월 30일 기유
하교하기를,
"어제 견책하며 파직시킨 거조로 말하면, 조정을 위해서는 약간의 체면이나마 조금 살려주고, 국가의 체모상 약간의 기강이나마 조금 진작시키고, 의정부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사(故事)라도 조금 회복시키고, 대신(大臣)을 위해서는 약간이나마 의리로 처신할 수 있는 것을 조금 열어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첫째도 대신을 위해서요, 둘째도 대신을 위해서였다.
대신이 뜻밖의 횡액을 당한 것도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요, 대신의 위치가 존엄해지지 못한 것은 내가 무능한 탓이다. 어느 겨를에 대신에게 완전하게 되기를 요구하겠는가. 나는 정말 두렵기만 하다. 더구나 이 달로 말하면 함께 경축해야 할 달이다. 그러니 설사 대신에게 사소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속히 타결을 지어 예전처럼 화목하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오늘을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시임·원임 대신을 처분한 전교는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 이 하교를 가지고 여러 대신들에게 전유(傳諭)케 하는 한편 명소패(命召牌)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차례로 도성에 들어왔으나 영중추부사 김희(金憙)만은 그대로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김이익(金履翼)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충청도 유생 박주환(朴柱煥) 등이 상소하여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는 설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아랫사람의 도리상 올린 상소이니 어찌 분명히 유시해야 하겠는가. 이것이 우선 유보해 두려고 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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