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1795년 7월

싸라리리 2025. 8. 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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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경술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예조가 선희궁(宣禧宮)187)  의 생신일에 전배례(展拜禮)를 행하는 의절(儀節)에 관하여 품(稟)하니, 하교하기를,
"이 해에 이 궁에 대해 이 달 이 날에 전배하는 것은 정리(情理)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당연한 일이다. 경술년188)  에도 자전(慈殿)을 모시고 육상궁(毓祥宮)에 가서 예를 행했었는데 더구나 올해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땅히 이 날에 자궁(慈宮)을 모시고 선희궁에 가서 예를 행해야 하겠는데, 내전(內殿)과 명부(命婦) 가운데 본궁(本宮)과 가까운 친속(親屬)이 되는 사람들도 전배할 때에 배행(陪行)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늦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으니 날짜는 다시 하교를 기다리도록 하라. 그런데 경술년에는 하루 전에 궁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다음날 아침에 지영(祗迎)하였으며 환궁할 때에는 자전의 행차를 모셨었는데, 이번에는 그때 가서 다시 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만수(李晩秀)를 규장각 직제학으로 삼았다.

 

전 승지 정대용(鄭大容)·김희조(金熙朝)를 삭직(削職)하고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파직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우의정 명소부(命召符)를 좌의정에게 잘못 전달했으니 해당 승지에게 견책하고 삭직하는 처벌을 내리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어제 전유(傳諭)하는 일과 합문(閤門)에 나아가는 일로 정원 안이 어수선했으니 싸 가지고 갈 즈음에 바꿔서 전한 것이 사세상으로 보면 괴이할 것이 없을 듯도 하다만 명소(命召)하는 사체가 지극히 엄중한만큼 해당 승지를 견책하고 삭직하는 일을 아뢴 대로 시행하라.
대저 명소하는 한 조목은 바로잡아야 할 점이 있다. 그래서 일전에 규정을 만들려고 하다가 미처 못했는데 과연 착오가 발생하고 말았다. 명소부와 밀부(密符)에는 어압(御押)이 찍혀 있기 때문에 으레 방어사(防禦使)를 겸하는 첨사(僉使)라 할지라도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을 때에는 대신이 말에서 내려야 할 뿐만이 아니다. 나도 춘저(春邸)에 있을 당시 길에서 밀부를 받아 찬 무변(武弁)을 만났을 적에 연(輦)에서 내려서 있다가 그가 지나간 뒤에 비로소 갔던 경우가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응당 행해야 할 금석지전(金石之典)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연전에 한 포장(捕將)이 한 대신을 보고는 지레 먼저 말에서 내리자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그 포장의 죄를 청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소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단지 세 줄만 쓴 것이라도 문이 잠긴 뒤에는 감히 들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근래에 듣건대 잘못된 관례가 이루어져 명소부나 밀부를 막론하고 문틈을 통해 내고 들인다 하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다 하겠다. 이 뒤로는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와서 바치도록 하고, 상부(相符)나 장부(將符)처럼 지체시킬 수 없는 것은 해방(該房)에서 유문(留門)189)  하기를 계청(啓請)하고 나서 출납토록 하라.
명소부에서 좌상과 우상의 것이 바뀌기 쉬운 것은 원래 말할 것도 없지만 표식(標識)이 없는 장부나 상부의 경우는 바꿔 차기가 또한 지극히 쉽다. 지금부터 어압이 찍혀 있는 표(標)·패(牌)나 명소부·밀부 등에는 각각 그 인끈에다 써서 확인하기에 편리하도록 하되, 경들부터 잘 알아서 받아 찰 적에 해방 승지로 하여금 이를 써넣어 전달하도록 하라.
대신이 부(符)를 바친 뒤에 도로 대신에게 부를 주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다. 이번에 정원과 정부 모두 거행을 잘 하지 못하기에 묘당(廟堂)에 물어 보았더니 역시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경강(京江)을 건넌 다음에는 으레 도로 전해주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만약 한수(漢水) 북쪽을 건너서 전해줄 수 없다고 한다면, 연경(燕京)에 가는 대신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을 때에도 모두 그대로 차고 왕래하는 상황에서 정말 고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도 더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강외(江外)에서 명을 기다리며 부(符)를 바쳤을 때에는 마땅히 예에 따라 도로 전해주어야 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규정을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처럼 여러 대신들이 시골로 내려간 경우는 의정부에 처음 있었던 일인만큼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따로 규정을 만들 필요는 없겠다마는, 대신이 도성 밖에 있을 때 부(符)를 전할 경우에도 모두 성문을 잠그는 일을 계청하고 나서 출납하는 것으로 일체 규정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신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아뢰기를,
"신들이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운 죄를 졌는데 상께서 여러 차례나 수고스럽게 분부를 내려 주셨고 더더군다나 신들이 조정에 나아올 길을 열어 주시려고 다시 곡진하게 애를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전후에 걸쳐 내리신 비답과 분부를 모두 환수하셨으니, 이는 신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신민들이 함께 흠앙(欽仰)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죄인을 배소(配所)로 돌려보낸 것에 대해서는 당초 분명히 확인할 문적(文跡)이 없기에 그저 기백(畿伯)190)  이 베껴 보낸 것만 믿었었는데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한 마디는 동아줄과 같은 것인만큼 신들은 이 말씀을 마치 사계절처럼 받들어 믿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가지 않은 것을 갔다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권도(權道)가 아니라 바로 속임수이고 거짓말인데 어떻게 속임수와 거짓말로 경들에게 알려 주겠는가.
그런데 경들의 이번 행동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가. 대신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시골로 향했는데 이것은 바로 나라를 비워두고 떠난 것이다. 일전에 전교를 통해서도 내 뜻을 보여 준 바가 있었다마는 경들을 위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대저 이 일과 관련하여 기유년 이후부터 독단적으로 행동하던 것이 호위를 밀치고 들어오는 상황으로 변했고 호위를 밀치던 것이 합문(閤門)을 밀치고 들어오는 행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올해에 이르러서는 대신이 한꺼번에 도성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놀랍기만 한데 그 행동을 보면 갈수록 한 단계씩 심각해지고만 있다. 대체로 대신은 모두가 우러러 보는 위치에 있는데 이렇듯 사승(史乘)에서도 볼 수 없는 행동을 하다니 이러고서도 체면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하자, 언호가 아뢰기를,
"독단적으로 취한 행동이나 호위를 밀치고 들어갔던 일이나 모두가 아랫사람들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리신 성상의 분부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는 사이에 무릇 몇 번이나 되었으니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취하신 거조가 어찌 빈번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 추후로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닥칠 걱정을 생각하면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성상의 뜻을 깊이 머물려 두심으로써 공의(公議)가 조금이라도 펴지고 세도(世道)가 다시 안정을 찾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성보(李城輔)를 체직하였다.
좌의정 유언호가 아뢰기를,
"유신(儒臣)이 일단 의리를 앞세우며 지레 돌아갔으니 필시 현직(見職)으로는 다시 조정에 나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것을 이미 알면서 부임하라고 독촉하는 것은 넉넉하게 대우하는 방도가 되지 못할 듯하니 양해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내 뜻과 바로 합치된다. 그가 현임(見任)으로 다시 오려 하지 않을 줄을 뻔히 알면서 한결같이 독촉한다면 예(禮)로 부리는 방도에 오히려 어긋날 것이다. 고성 군수 이성보의 체차를 지금 우선 허락한다."
하였다.

 

성덕우(成德雨)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김희(金憙)를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이형원(李亨元)을 부사(副使)로, 조덕윤(趙德潤)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7월 4일 계축

국자(國子)191)  와 전조(銓曹)192)  는 상호 의망(擬望)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다시 밝혔다.
하교하였다.
"전관(銓官)과 국자는 통청(通淸)할 때 상호 다르게 하도록 규정을 정했었다. 그런 뒤에는 예전과 판이하게 된 만큼 문장이나 정사에서 출중하게 뛰어난 자가 아닌 한 파격적으로 함께 겸하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앞서 정대용(鄭大容)이 함께 겸하게 되었을 때에 바로잡으려 하다가 그렇게 하지 못했었는데, 그 뒤에 이만수(李晩秀)와 남공철(南公轍)을 의망하지 못하게 했던 것도 바로 그런 뜻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서영보(徐榮輔)가 이미 대사성을 역임한 사람인데도 또 다시 그를 전조에 의망한 것은 아직 대사성을 역임하지 못한 윤행임(尹行恁)을 의망한 것과는 다르게 되었다고 하겠다. 서영보가 의망에서 빼버린 죄명을 비록 탕척(蕩滌)받았다 하더라도 상호 의망하지 못하도록 단속한 분부를 준수하게 해야 할 것이니 서영보를 전관에 의망하지 말도록 하라. 이렇게 한다면 윤행임과 국자(國子)의 관계도 마땅히 서영보·남공철과 전관의 관계처럼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 뒤로는 더욱더 엄히 전조를 신칙하여 이대로 준수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혹시라도 두 직임(職任)에 함께 통청하여 상호 왕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도를 정한 실효를 거두는 동시에 그릇대로 부리는 의리를 붙이도록 하라. 그리고 아무리 출중하게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신(大臣)과 전관(銓官)이 상의해서 특별히 천거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거론치 말도록 하라.
이 전교를 관아의 장부에 기록해 두어 감히 일개 전관의 의견으로 경솔하게 규정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하기를,
"달포 전에 포장(捕將)이 세 사나이를 타살(打殺)하였는데, 듣건대 이들은 사학(邪學)193)  의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품(稟)한 뒤 포장을 지휘하여 그렇게 하였다고는 하나 이는 심상하게 볼 변고가 아닐 뿐더러 비밀스럽게 감춰둘 일도 아니니, 그 근본 원인을 끝까지 추궁하여 전형(典刑)으로 분명히 바로잡음으로써 사람마다 이 사실을 알게 하고 사람마다 성토(聲討)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급히 서둘러 잡아 죽이면서 마치 단서가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입을 막고 자취를 엄폐하려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이며 이것이 무슨 법이란 말입니까.
사학의 씨가 한 번 뿌려진 뒤로 남몰래 불어나고 은밀히 자라나면서 아직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장차 하늘에까지 닿는 큰물과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세도(世道)를 위해 걱정하노라면 신도 모르게 오싹해지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곤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당 포장을 나문(拿問)하여 엄히 치죄(治罪)하는 동시에 중외(中外)로 하여금 특별히 더 규찰(糾察)하여 기필코 정화시키도록 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는데, 세 사나이란 바로 사학 죄인 지황(池潢)·윤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이었다. 비답하기를,
"달포 전에 포장이 사학에 종사하는 세 사나이를 타살한 일과 관련하여, 경이 심지어는 ‘포장이 단서가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입을 막고 자취를 엄폐하려 하였다.’고까지 하면서 나문(拿問)하여 치죄하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말 뜻을 보면 은연중에 대신을 핍박하고 있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알지도 못하고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인가.
그때 대신이 연석에서 말한 내용은, 그들을 법조(法曹)에 회부하여 법대로 처단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기시(棄市)함으로써 다른 자들을 징계하고 뒷날을 경계토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막판에 가서 미처 이송(移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이 어찌 입을 막고 자취를 엄폐하려 했다는 것과 조금이라도 근사하기나 하겠는가. 포장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다만 앞질러 죽게 한 관계로 사람들이 이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게 되었고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속할 줄 모를 염려가 있을 듯하다는 이 점만은, 경의 소가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경계에 비추어 볼 때 그리 해롭지 않다고 할 것이니, 경조(京兆)에 분부하여 세 사나이의 성명과 범죄 사실을 방곡(坊曲)에 분명히 유시하게 함으로써 감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쪽으로 인도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것은 사유(師儒)와 사사(士師)194)  와 감사와 수령의 책임이니, 모름지기 각자 유념하여 모두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5일 갑인

관북(關北)에서 진휼(賑恤)을 1월부터 실시하여 이때에 와서 끝마쳤다. 【북영(北營)과 안변(安邊)·덕원(德源)·문천(文川)·함흥(咸興)·정평(定平)·북청(北靑)·이원(利原)·단천(端川)·삼수(三水)·갑산(甲山)·영흥(永興)·길주(吉州)·무산(茂山)·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성(鏡城)·부령(富寧)·경원(慶源) 등 고을과 거산역(居山驛)과 폐무산(廢茂山)·묘파(廟坡)·풍산(豊山)·양영(梁永)·성진(城津) 등 진(鎭)을 대상으로 총 기민(饑民) 4만 9천 5백 75구(口)에게 곡물 1만 1천 3백 32석(石)을 나눠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85면
【분류】구휼(救恤)

 

경기에서 진휼을 1월부터 실시하여 이때에 와서 끝마쳤다. 【교동(喬桐)·남양(南陽)·부평(富平)·인천(仁川)·통진(通津)·풍덕(豊德)·안산(安山)·김포(金浦)·교하(交河)·양성(陽城) 등 고을과 영종(永宗)·화양(花梁)·덕포(德浦)·주문(注文)·덕적(德積)·장봉(長峯) 등 진(鎭)을 대상으로 총 기민 14만 8천 4백 90구에게 곡물 1만 2천 3백 30석을 나누어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86면
【분류】구휼(救恤)

 

수원(水原)에서 진휼을 1월부터 실시하여 이때에 와서 끝마쳤다. 【기민 5만 2천 7백 4 구에게 곡물 3천 3백 99석을 나누어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86면
【분류】구휼(救恤)

 

7월 7일 병진

지평 신귀조(申龜朝)가 상소하여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는 설을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조정의 분위기가 안정되지 못하고 대각(臺閣)의 체통이 존엄해지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이런 무리들의 소행 때문이다. 조정을 욕되게 하고 대각의 체통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비록 날마다 좋은 말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무리들의 잡스러운 상소부터 엄하게 단속해야만 그런대로 실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소(原疏)를 되돌려 주고 우선 대선(臺選)을 깎는 동시에 체직시키도록 하라.
근래 머리를 바꿔 교대로 나오는 것들을 보면 바로 이런 식으로 분부를 따르지 않는 것들 뿐이다. 이러고서야 언제 맑고 공평한 정치를 펼칠 수 있겠는가. 삼사(三司)에 엄히 신칙하여 감히 다시는 제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요즈음 이른바 무함을 해명한다고들 하는데 무함을 해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너무나도 기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해명해야 할 일이 무슨 일이기에 해명할 수가 있으며 이른바 무함했다는 것은 무엇을 무함한 것이기에 무함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선조(先朝) 무신년의 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무함을 해명한다[卞誣]는 두 글자를 섣불리 말할 수 있겠는가. 설령 잗달게 구는 간사한 무리들이 혹 남몰래 주둥이를 놀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태양이 중천(中天)에 떠 있는만큼 요사스러운 기운이 스스로 모습을 감출 것이요 또 드러나는 대로 제 때에 즉시 복주(伏誅)시키고 유배보내면 될 것인데 또 어찌 꼭 저들의 입을 빌려 무함을 해명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대각에서 베껴서 전한 상소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논하는 것을 보면 개인적인 뜻을 멋대로 개입시켜 죄에 걸리게도 하고 누락시키기도 하는 등 무질서하게 행하고 있기 때문에 한갓 물정(物情)을 우울하게 만들고만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직(前職) 관원의 소까지도 각양각색으로 튀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더더욱 당폐(堂陛)195)  의 관계가 존엄해지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변무(卞誣)라는 두 글자를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라. 또 그 일과 가까운 쪽에서 탄핵하고 반박하는 소장을 올리거든 절대로 호망(呼望)196)  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금령(禁令)을 어기고서 소장을 가슴에 안은 채 정원이 바라다 보이는 문 근처에서 왔다갔다하는 자가 있거든 법사(法司)에 회부하여 형신(刑訊)하며 치죄(治罪)토록 하라. 금령을 어기는 삼사(三司)나 이를 금하지 못하는 승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엄히 단속할 것이다. 그리고 전직 관원으로서 요행수를 바라고 소장을 올리다니 그 정상이 매우 통분스럽다. 이 뒤에도 전직 관원의 신분으로 와서 그런 식의 소장을 올리려고 할 때 연영문(延英門)이나 금호문(金虎門)에 발을 들여놓게 할 경우에는 해방(該房) 승지와 당해(當該) 당상 역시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적용할 것이다. 이 전교 내용을 이른바 육선루(六仙樓) 벽 위에 크게 써놓도록 하라."
하였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의 이름을 조적(朝籍)에서 삭제하고 시골로 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박장설이 상소하기를,
"신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통분스럽게 여기고 개탄하는 점이 있습니다. 신이 봄철 무렵에 흑산도(黑山島)에서 용서받고 돌아온 죄인 이현도(李顯道)의 소장에 내리신 비답을 삼가 얻어 보건대 ‘연전에 연석(筵席)에서 내린 분부의 내용을 그 무리들도 아마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인데, 이런 습관을 만약 통렬하게 개혁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무리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겠는가.’라고 하시는 등 매우 준엄하게 말씀하시면서 곡진하게 깨우치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에 신이 땅에 엎드린 채 넋이 달아나면서 스스로 슬픈 생각이 잇따라 밀려 왔습니다. 신과 현도는 똑같이 나그네 신하[覊旅之臣]라고 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 신들을 충의(忠義)는 하나도 없는 신하로 간주하시고 이렇듯 엄한 분부를 내리시고 이런 처분을 내리시다니,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간적(奸賊)이 천태만상으로 요사스러운 악행을 저지르며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하게 우리 성상을 무함해 헐뜯고 우리의 한 세상을 혼란케 한 죄에 대해서는 제신(諸臣)이 전후에 걸쳐 소장을 올려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앞서서 먼저 죽여버리는 바람에 왕법(王法)을 펼치지 못하게 된 결과 그 패거리들이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고 인심이 날이 갈수록 더욱 미혹되고 있습니다. 성상에 대한 무함이 망극한데도 이를 풀 기약이 없고 의리가 더욱 어두워졌는데도 이를 밝힐 날이 없게 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충신(忠臣)과 지사(志士)가 목숨을 바쳐 극력 성토(聲討)해야 할 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공경(公卿)들은 모두 팔장을 끼고 앉아 구경만 할 뿐, 지금까지 한 사람도 핵심 부분을 격파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성상에 대한 무함을 해명하고 세도(世道)를 정화하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 안 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이 면역이 된 나머지 마침내는 점점 퍼져 나가면서 방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후세에서 오늘날의 조정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서유방(徐有防)을 역적 정동준(鄭東浚)과 비교해 말한다면, 작위(爵位)의 높음으로 볼 때에도 어찌 그와 같지 않으며 총애를 융숭하게 받는 면에서 볼 때에도 어찌 그가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만 거꾸로 달갑게 그 패거리에 빌붙어 성원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어깨만 두드려도 뒤따라 나서고 눈만 찡긋해도 그 뜻을 받들었으며, 이쪽에서 청하는 것이 있으면 혹 그의 뜻을 어기게 될까 두려워하고 저쪽에서 원할 경우에는 곡진히 따라주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흡사 거간꾼이 값을 흥정하고 모리배가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듯 제멋대로 농락하고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뱃속이 통해 서로 호응하며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리라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한 채 급속도로 혼탁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으므로 유식자들이 걱정하며 탄식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지 천도(天道)가 밝게 드러나 간적(奸賊)의 행태가 탄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참(朝參)을 행하던 날 소장과 계사(啓辭)가 교대로 일어났으니,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할 마음을 가졌다면 진정 남보다 앞서서 엄하게 성토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가로막고 나설 심산으로 조금도 놀라거나 통분해하는 기색이 없이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한 마디도 발언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잊고 패거리를 비호하려 했던 마음이 숨길 수 없이 환히 드러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성상께서 분부를 내리시며 조용히 꾸짖고 은혜로 용서하며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해 주셨고 보면, 그의 도리로서는 즉시 머리에 진흙칠을 하고 죄를 자인하면서 견책을 내려 달라고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변방의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과 똑같이 행동했으니, 그의 마음 됨됨이나 행태를 따져 볼 때 일시적으로 가벼운 견책만 내리고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은 달포 전에 일어난 포청(捕廳)의 일과 관련하여, 몇 년을 두고 마음속으로 혼자 조심해 왔기에 갑절이나 더 격발(激發)되는 점이 있습니다. 아, 저 이가환(李家煥)이란 자는 단지 하나의 비루하고 험악하고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일 따름입니다. 약간 글재주가 있어 세상을 기만하며 이름을 훔치고 있으나 의리를 뒤바꿔 혼란시키고 행동거지를 종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단안(斷案)이라고 할 것인데, 사학(邪學)을 앞장서서 주도하고 우리 유가(儒家)의 도와 배치되게 치달리고 있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대 죄목(罪目)이라고 하겠습니다.
아, 서양(西洋)의 요술(妖術)이 윤상(倫常)을 파괴하고 가정과 국가에 화를 끼치는 점으로 말하면 양주(楊朱)·묵적(墨翟)·노자(老子)·불교(佛敎)의 도보다도 심한 점이 있습니다. 만력(萬曆)197)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 온 뒤로 서남(西南)의 여러 오랑캐 지역에 두루 유행하였고 급기야는 일본(日本)의 종문(宗文)의 당(黨)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런데 화란(禍亂)의 요소를 조장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점이 실로 미적(米賊)198)  이나 풍각(風角)199)  보다도 심한 점이 있고 보면, 그들이 얼마나 좌도(左道)를 끼고 요망한 말을 뇌까리며 화란을 퍼뜨리는 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환은 바로 태평 성대에 나온 한 물건인데 그만 감히 천륜을 허물고 성상의 교화를 막는 일을 어쩌면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리석은 조카를 내보내 몇 권의 요서(妖書)를 사오게 한 뒤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허다한 재화를 속임수로 획득하는 한편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그 요술을 확대 전파하면서 남의 자식을 해치고 남의 제사를 끊어버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을사년 봄에 이르러 추조(秋曹)200)  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는 문자(文字)를 지어내어 스스로 빠져 나오려고 하였으니 정말 봄 꿩이 절로 운 격이라고 할 것입니다.
연전에 성상께서 책문(策問)을 내시며 역상(曆象)에 대해서 물으셨을 때 감히 청몽기(靑濛氣) 등의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신법(新法)이라고 하면서 방자하게 지어 올렸는가 하면, 주시관(主試官)으로서 책문의 제목을 오행(五行)으로 내었을 때 해원(解元)이 대답한 것을 보면 오로지 서양 사람의 설에 입각해서 오행을 바꿔 사행(四行)이라고 하였는데 그 해원은 바로 가환의 도제(徒弟)입니다. 과시(科試)의 문체(文體)로 말하면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한만큼 비록 심상한 패설(稗說)이라도 감히 따다가 사용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옛날에도 없고 지금에도 없는 요사스러운 말과 사리에 어긋난 내용을 일종의 관절(關節)201)  로 간주한 채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어려워하지도 않고 발탁하였습니다.
이 몇 가지 일만 가지고도 그가 앞장서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세상의 교화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굴러서 을사년 추조의 옥사를 만들어내고 두 번 굴러서 신해년 양적(兩賊)의 변을 만들어내고 세 번 굴러서 또 이번에 포청(捕廳)의 제적(諸賊)이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후에 걸쳐 처분을 내리신 것이 지극히 엄정(嚴正)하여 서리와 눈을 내리고 비와 이슬로 적셔 주셨으므로 최필공(崔必恭)202)   같은 완악한 자도 감화를 받았는데, 이 무리들만은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여 씨 뿌린 데에서 다시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가환에게서 오염된 탓이고 가환에게 고질적으로 걸려든 결과이니, 그 죄안(罪案)을 따진다면 그가 어떻게 감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요도(妖道)를 배척하려 하면서 그 괴수를 놓아준다면 비록 백 명 천 명을 죽인다 하더라도 아마 징계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포청의 일을 가지고 엄히 과조(科條)를 세운 뒤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류해 각각 해당되는 죄로 다스리게 함으로써 정도(正道)를 일으켜 세우고 사술(邪術)을 물리치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국가의 기강이 비록 진작되지 못하고 조정이 비록 정돈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의 해괴하고 사리에 어긋난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력이 점점 쇠해져 어제 일어났던 일마저도 망각하곤 한다마는 그의 소에서 이른바 그 무리[渠輩]라고 하는 두 글자를 부연한 것을 보고서 그때 비답한 분부 내용이 그래도 희미하게 나마 기억난다. 이것이 꼭 그와 이현도(李顯道)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거배(渠輩)라고 말하고 나서 또 신 등(臣等)이라고 일컫고 끝에 가서는 ‘신과 현도는 똑같이 나그네 신하이다.’고 말했고 보면 의심이 나고 아리송해서 무슨 말인지를 이 해할 수가 없다. 임금에게 아뢰는 말을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 소장(疏章)이 있은 이래로 이런 경우는 보기가 드물다고 하겠다.
그리고 더구나 그로 말하면 역시 이 나라에서 벼슬하는 관원이고 유구(琉球)나 일본(日本)에서 어제나 오늘 귀화한 무리도 아닌데, 나그네라고 하는 표현을 어떻게 감히 마음속으로 생각해서 입으로 발설하고 붓으로 찍어 소장에 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 대접을 해 주며 책망할 자격도 없는 자이지만 분의상(分義上)으로 볼 때는 역시 전적으로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린다.[不治治之]’는 과조(科條)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대체로 이현도를 앞질러 석방해 주자 그가 그 꼬리를 밟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소에서 겉으로는 현도를 배척했으니 그의 마음과 입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알 수가 있다.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사를 하려면 현도를 도로 배소(配所)로 떠나보낸 뒤에 그의 죄를 적용해야만 일이 참으로 온당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도를 용서해 준 것이 효리(孝理)에 입각한 혈구지도에서 나온 것인만큼 지금 와서 도로 배소로 보낸다는 것은 딴 곳에 화풀이하는 것과 비슷한 격이 될 것이니 현도는 우선 그냥 놔두도록 하라. 그리고 그는 우선 조적(朝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시골로 쫓아보냄으로써 임금에게 신중하지 못하게 아뢰는 인신(人臣)의 경계가 되도록 하라.
그가 말미에 논한 일을 보건대 어쩌면 말이 그렇게 악착스러운가. 듣기에 놀랍기만 하다. 거의 물고기 신세와 비슷한데 어떻게 패거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기백(畿伯)203)  의 속마음은 내가 훤히 알고 있다. 어떤 일 내기 좋아하는 무리가 그를 사주하여 이렇게 하게 했단 말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어찌 기백의 위치를 동요시킬 꾀가 되기에 충분하겠는가. 정말 이른바 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는 격이라고 하겠다.
공조 판서도 당했는데 이 경우 역시 기회를 엿보다가 돌팔매질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홍낙안(洪樂安)에 대해서 통쾌하게 바로잡았다고 표창하는 일을 아직껏 시행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그 마음 됨됨이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 역시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묵적(墨翟)의 구들이 검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만큼 생판으로 무함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연전에 이동직(李東稷)의 소에 비답을 내릴 때에 골짜기에서 높은 가지 위로 날아 오르고 썩은 것이 변화되어 새롭게 된다는 비유를 들어 스스로 새롭게 될 길을 열어 주는 동시에 상식 밖의 일에 대해서는 물리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윽박지른 것이 이동직보다도 열 배나 되는만큼 공조 판서의 입장도 민망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공조 판서가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인께서 해 주신 훈계204)  에 깊이 징계되고 있다는 것은 요즘 연석(筵席)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바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물결처럼 흘려보내고 다시 남이 열 번을 하면 나는 백 번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해 나간다면 중신(重臣)에게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경기 도사(京畿都事) 조득영(趙得永)이, 본도 감사 서유방(徐有防)이 업무를 폐한 채 죄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먹물 통으로 떨어질 뻔하다가 눈덮인 산 위로 올라갔고 보면 기백(畿伯)의 입장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진정으로 사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구하게 의리를 내세우며 처신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적인 일에 속한다고 할 것인데, 성명(成命)이 내려진 상황에서 어떻게 감히 도사에게 일을 대신 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예우하며 부려야 하는 방도로 볼 때 사유(四維)205)  를 급선무로 삼아야 하니, 독촉해서 임무를 수행케 하는 것은 풍속을 돈후하게 해야 하는 조정의 도리가 못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속히 그 경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도 결말을 짓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니 경기 감사 서유방의 체직을 지금 우선 허락한다. 그런데 정경(正卿)인 기백의 경우는 으레 추함(樞啣)의 실직(實職)을 갖고 있으니, 차고 있는 밀부(密符)와 병부(兵符)는 후임자가 나갈 동안 임시로 도사에게 맡겨 두고 즉시 추함의 신분으로 들어 와서 숙배(肅拜)하라고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달 19일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사죄(死罪)에 해당되는 것만도 8, 9가지나 됩니다.
엄한 명에 쫓긴 나머지 나아가고 물러감을 뒤죽박죽으로 하였고 한밤중에 길거리를 서성이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옛날에 대신이 도에 입각하여 몸을 바치고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면서 일찍이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것이 사죄(死罪)의 하나입니다.
다음날 엄한 분부를 또 내리시어 마침내 성문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하시고 잇따라 대가(大駕)를 움직이시어 하룻밤을 묵는 거조를 취하셨으므로 신은 놀랍고 황급해지면서 그냥 죽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금(門禁)을 감히 범할 수 없었던 까닭에 한두 차례 차소(箚疏)만 올렸으니 이는 바로 책임이나 메꿔보려는 행태와 같습니다.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문금이 비로소 풀리면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한 채 물러가 강교(江郊)에 엎드려 있으면서 깊은 밤에 부주(附奏)206)  하였고, 또 동이 튼 뒤에 미처 비지(批旨)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레 앞질러 시골로 향하면서 미천한 신념이나마 온전히 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소에 대한 비답과 전교 모두가 인신(人臣)으로서는 감히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정신이 혼미하여 변통시킬 줄을 알지 못한 나머지 흡사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거적을 깐 채 지방 옥사(獄舍)에서 명을 기다리다가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금방 태도를 바꿔 올라오는 등 거취가 사리에 어긋나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의혹케 하였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가볍게 처분을 내리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그 처분도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만, 신은 불충(不忠)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라서 티끌만큼도 보답하는 일이 없었을 뿐더러 정성이 천박해서 바로잡지도 못한 채 필경 계책을 세웠다는 것이 그저 자기 몸 하나 처신하는 의리에 불과하였고, 또 여전히 관직을 차지하고 있음으로써 거꾸로 영화(榮華)를 탐하고 염치를 잃어버리는 죄목에 빠져드는 결과를 빚고 말았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처음에 강변 교외에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신도 여러 대신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조정에 나아간 상황에서 신만 유독 지체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사죄의 하나입니다.
신이 이렇듯 허다한 사죄를 지고 있는만큼 오직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으나 몸 속의 혈성(血誠)이 달아올라 어떻게 걷잡을 수가 없으니 감히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을까 합니다.
신이 평소에 늘 말할 때면 으레 우리 임금은 성인이라고 하곤 하였는데, 성인께서도 이런 허물을 지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의 허물은 지나친 것 같으면서도 지나친 것이 아닌 반면 전하의 허물은 지나쳐서 중도(中道)를 잃는 것입니다. 일식(日食)과 월식(月食) 현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다가도 원래의 상태로 바뀌어지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법입니다. 진정 전하께서 해와 달이 변화되는 것을 제대로 본받으시어 성인의 허물을 속히 고치신다면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방금 여러 대신들에게 내리신 별유(別諭)를 삼가 보건대, 전일에 내리신 비답과 분부를 환수하시라는 청을 특별히 윤허하시어 따르셨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일단 이런 분부를 내리신 상태에서 또 어찌하여 다시 어느 때고 권도(權道) 아닌 것이 없었다고 분부하신단 말입니까. 대저 어느 때고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사물이고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야말로 경(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반면에 권(權)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곤란한 법인데 더구나 두 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천고(千古) 이래로 성인들께서 반드시 대경(大經)을 지키시면서 권도를 행하기에 급급하지 않으셨던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오늘날 행하신 권도가 앞으로 다시 뒷날의 권도로 될 우려가 있을 듯한데, 잠시 정상으로 돌아오셨다가 곧바로 예전대로 하시고 일단 예전대로 하시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시는 등 정말로 어느 때이고 간에 권도 아닌 경우가 없는 식이 되고 만다면, 오늘 이후로 대관(大官)이 진퇴(進退)하고 거취(去就)하는 것도 바로 전하께서 수시로 권도를 쓰시는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성인의 경법(經法)을 굳게 지키시고 한 때 편리하다고 해서 권도를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홉 가지 조목이나 자신의 잘못을 늘어놓다니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이 너무도 지나치다. 경이 이렇게 된 것은 실로 내 탓이다. 내가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풍파가 이미 지나간만큼 비답과 분부도 결말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지금 와서 추후로 제기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환수할 것을 윤허한 전교 가운데에서 ‘어느 때이고 권도 아닌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범범하게 말한 것일 뿐이니 꼭 사리로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으로서 괜히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 될 듯하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으니 경은 양해하라. 신중히 생각하던 것을 옳은 쪽으로 바꾸어 다시 돌아오려 한다는 말을 들으니 지금 느끼는 기쁨과 기대가 목마른 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특별히 승지를 보내 이 비지(批旨)를 전하게 하는 동시에 여행 중의 기거를 묻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연석(筵席)에서 만나 모두 이야기할 것이다."
하였다.

 

판돈녕부사 이풍(李灃)이 죽었다. 하교하기를,
"대원군(大院君) 내외(內外)의 시향(時享)을, 전(前) 목사 이언식(李彦植)을 도정(都正)에 부쳐주기 이전에는 그 장손(長孫)인 전 정(正) 이희(李爔)에게 공복(公服)을 갖추게 하여 대행시켜야 하겠다. 그런데 그에게 직책이 없을 때 3년 기한으로 구전(口傳)으로 군직(軍職)에 부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자문을 구해 처리할 일이 있다.
고(故) 장신(將臣) 이홍술(李弘述)이 권무(勸武)207)  로 될 당시를 보건대, 그의 형은 ‘대원군의 주사자(主祀者)를 무신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안되었고 그 대신 아우가 권무로 되었었다. 이것을 본다면 이희가 권무 출신인 것부터 규정에 위배되는데다가 또 무과(武科)까지 거친 상태이니 어떻게 변통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대신과 전관(銓官)에게 물어서 아뢰어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희에 관해 변통해서 처리할 일을 대신과 전관에게 문의하였습니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는 말하기를 ‘대원군의 주사자(主祀者)를 무신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이미 규정이 정해져 있는 이상 이희가 당초 무관의 길을 택한 것 자체가 규정에 위배되니 무과(武科) 급제를 환수하고 음관(蔭官)으로 벼슬시켜 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무과 급제자를 감히 주사자로 삼을 수 없다고 이미 규정이 정해져 있다고는 하나 이미 과거에 급제한 자를 파삭(罷削)하는 것도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후로 무직(武職)은 어떤 것이든지 영구히 의망(擬望)하지 말고 단지 음관의 예를 적용하여 임용토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김이소(金履素)는 말하기를 ‘이희가 일단 권무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상 지금 와서 다시 변통하기는 어렵다. 이 뒤로 그에게 직책을 제수할 때 무신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혹 뒷처리를 잘 하는 방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말하기를 ‘음관과 무관의 관방(官方)을 서로 뒤섞이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전(祀典)과 비교하면 경중(輕重)에 차이가 있다. 음직(蔭職)으로 변통해서 처리한 뒤에야 구애되는 바가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은 말하기를 ‘이희가 일단 후계자로 나가 언식(彦植)의 아들이 된 이상 권무(勸武)가 규정에 위배된다고 하여 종계(宗系)를 옮기는 일을 섣불리 의논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종영(宗英)이 친진(親盡)이 된 상태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했을 경우 혹 친진이 안된 종영에게 후계자로 나갔을 때에는 정(正)이나 도정(都正)을 차례로 군(君)으로 봉(封)하는 것이 마땅하지 다시 과적(科籍)에 구애받아서는 안될 듯하니, 이것도 혹 참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희의 과거 급제는 환수하고 벼슬을 음관의 예에 따라 제수함으로써 종법(宗法)을 엄하게 하는 한편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대원군의 제사를 무신으로 주관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으로 정했고 보면 이희가 무과 시험에 응시했던 것부터가 부당한 일이다. 과거에 관한 법을 보건대 불법으로 응시하거나 격식에 위배된 자에 대해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한 뒤에라도 합격을 취소하게 되어 있다. 이 예를 가지고 잘라 말한다면 이희의 과패(科牌)를 환수하여 사전(祀典)을 엄히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상의 의논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여러 의논들을 들어보면 모두 그의 과명(科名)까지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중한 쪽을 중시해야 하는 도리상 일 처리를 할 때에는 중한 쪽을 위주로 해서 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또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속대전(續大典)》208)  이 선조(先朝) 때에 나왔는데 ‘대원군의 봉사인(奉祀人)에게는 으레 돈령부의 관직을 제수한다.’는 조목에 ‘문관·무관은 구애받지 않는다.’는 글이 실려 있다. 무릇 법문(法文)은 대부분 시기가 뒤인 것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상의 의논을 따라 과명(科名)은 그대로 놔둔 채 의망(擬望)하여 차임(差任)할 때만 특별히 다르게 한다면 안될 것이 진정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정의 의논 대부분이 ‘비록 《속대전》의 소주(小注)가 있다고는 하나 이미 수교(受敎)한 것이 있는 이상 수교를 더 중시해야 마땅하다.’고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만 마땅하겠는가.
중삭 제향(仲朔祭享)209)  이 내일 밤에 있으니 오늘 결말을 지어야만 일을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낭관(郞官)을 나누어 파견해서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는 동시에 문임(文任)과 전관(銓官)에게도 의논을 거두도록 하라. 그런 뒤에 경들이 의견을 갖추어 정리해서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신과 문임 및 전당(銓堂)에게 의논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좌의정 유언호는 말하기를 ‘과거는 무과로 급제했는데 벼슬은 음관으로 제수한다면 관제(官制)로 헤아려 볼 때 결국은 구차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속대전》의 소주에 ‘문관과 무관은 구애받지 않는다.’는 글이 있다 하더라도, 수교(受敎)로 말하면 또 고(故) 장신(將臣)이 권무(勸武)로 될 때 정해진 규정인만큼, 지금 이희의 일을 처리할 때에는 더더욱 수교를 중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말하기를 ‘과명(科名)이야말로 지극히 중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할 때 하자만 발생하지 않았다면 원래 조정에서 탈삭(奪削)하는 규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봉사(奉祀)하는 일 때문에 갑자기 삭과(削科)시킨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김이소(金履素)는 말하기를 ‘과거 급제를 무효화시킨다면 또한 어떻게 되겠는가. 그저 음관(蔭官)의 길을 통해 임용하는 것이 온당하겠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는 말하기를 ‘수교(受敎)에 그런 규정이 분명히 있고 보면 《속대전》을 편찬할 때 제신(諸臣)이 품재(稟裁)하는 과정에서 혹 상고하지 못한 채 소주(小註)에 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과명(科名)을 환수하는 것으로 영원히 성전(成典)을 삼는 것이 수교를 준수하고 《속대전》을 정비하는 방도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隣)은 말하기를 ‘《속대전》을 편찬할 때 모두 임금의 재결(裁決)을 거친만큼 이에 따라 시행한다 해서 의심할 만한 것은 없을 듯하다. 그러니 과명은 그대로 두고 임명만 별도로 하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 하고, 규장각 제학 심환지는 말하기를 ‘《속대전》의 소주에 입각해서 본다면 이미 정해진 의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전장(典章)은 모두 수교를 더욱 중시하고 있고 보면, 당초에 의논드린 외에 더 이상 다른 의견은 없다.’ 하였습니다.
이조 판서 윤시동은 말하기를 ‘《속대전》은 일반론이고 수교는 확정된 제도이다. 성조(聖朝)에서 준수해야 할 의리로 볼 때 마땅히 일반론을 버리고 확정된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고, 이조 참의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속대전》이나 수교나 똑같이 조정에서 준수하며 받들어야 할 제도이다. 그런데 무관으로서 음관의 벼슬을 제수받는 것은 상례(常例)에 저촉되니 법에 비추어 과거 급제를 취소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신(臣) 종현(鍾顯)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교를 마땅히 중시해야 하겠습니다만, 《속대전》 역시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주(小註)에 실린 글이라고 해서 거들떠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희의 과거에 대한 일로 말하건대 만약 그가 일체 수교에 따라 처음부터 무과에 응시하지 않았다면 물론 아무 문제도 없었겠습니다마는, 지금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3품의 직책을 갖고 있는데, 과명(科名)을 환수하고 직품(職品)을 낮춰 임명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는 아무래도 감히 자신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국조(國朝)의 관제(官制)를 보건대 음관과 무관은 원래 융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음관을 무관의 직책에 임용하는 것은 오히려 구애되는 점이 있지만 무관을 음관으로 임용할 때에는 상당히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과명은 《속대전》을 따라 그대로 놔두고 임용할 때에는 수교를 준수하여 음관의 벼슬을 제수하되 그 품계에 맞는 다른 직책으로 옮겨주는 것이 양쪽 다 온당하게 되는 길인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처음에는 다시 의논할 것도 없이 숙묘조(肅廟朝)의 수교(受敎)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단 《속대전(續大典)》에 분명한 글귀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이상에는 이것도 필시 선조(先朝) 때의 수교를 수록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수교라는 점에서 똑같이 중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뒷시대의 것을 따르는 예로 말한다면 당연히 《속대전》을 따라야 하겠지만, 의논들이 이처럼 들쭉날쭉하고 보면 어떤 수교를 더 중시해야 할지 지금 와서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다. 《속대전》에 실린 내용이 과연 수교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인지 자세히 조사해 본 다음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우선 정원으로 하여금 그 당시의 당후일기(堂后日記)를 가져다 조사해 보게 한 뒤 만약 혹시라도 근거를 찾아낼 수 있거든 수교에 의거하여 시행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절충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내일 제사지내는 하나의 조목으로 말하면 항렬(行列)을 미루어 대신 거행하는 일에 불과하니 별로 트집잡아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태묘(太廟)의 삭제(朔祭)나 망제(望祭)로 말하더라도 무장(武將)이라고 해서 어찌 헌관(獻官)이 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능원(陵園)의 절목(節目)을 보아도 제향을 드리는 헌관으로 무신 역시 모두 참여하게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이희가 자기 아비를 대신해서 한때 섭행(攝行)하는 일은 문관·음관·무관을 구별해야 하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을 듯하다. 이런 내용으로 주관하는 집에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칠일제(七日製)210)  를 반궁(泮宮)211)  에서 설행(設行)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장렬(尹長烈)이 장계를 올리기를,
"6월 21일에 관백(關白)이 후계자를 세운 경사를 알리러 대차왜(大差倭) 평창조(平暢朝)가 나왔기에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관백이 차자(次子) 민차랑(敏次郞)을 갑인년 9월 15일에 저군(儲君)으로 세웠는데, 나이는 3세이다. 명자(名字)는 우선 아명(兒名) 인민차랑으로 부르고 있으며 관명(冠名)은 장성한 뒤에 명명하기로 하였다.’ 하였습니다. 차왜가 가지고 온 서계(書契)의 별폭(別幅) 등본(謄本) 한 통을 해조(該曹)에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접위관(接慰官)을 차임해 보내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무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치계(馳啓)하기를,
"금년 5월 26일에 초산 부사(楚山府使) 조흥진(趙興鎭)이 치보(馳報)하기를 ‘방금 아이진(阿耳鎭)의 아객(衙客)212) 김흡(金熻)의 보고를 접하였는데 「 본진(本鎭)의 첨사(僉使)가 사소한 일로 본성(本城)의 이장(里長)인 최봉덕(崔奉德)에게 곤장을 세 번 치고 구속하려 하자 그 놈이 못할 말없이 첨사에게 욕을 퍼부었으므로 집장 나졸(執杖羅卒)이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곤장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그 놈이 곤장을 뺏아서 분질러 내던져버린 뒤에 칼을 빼들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동헌(東軒)에 돌입하여 곧장 첨사에게로 왔다. 이에 첨사가 미처 피신할 틈도 없이 여러 차례나 혹독하게 몽둥이질을 당한 결과 어깨 가죽이 벗겨지고 양쪽 뺨도 상처를 입었다. 좌우에 있던 장교와 졸개들도 칼을 휘두르는 데에 겁을 먹은 나머지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으므로 그 놈이 그대로 도망가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본부(本府)가 최봉덕을 본진(本鎭) 경내에서 찾아내 체포한 뒤 엄히 형신하며 진술을 받았는데, 그가 공초하기를 「누이가 진(鎭)의 여종으로 있다가 도주하자 나를 시켜 찾아내 잡아오게 하고 곤장을 치면서 가두려 하였다. 그래서 과연 술이 취한 김에 돌입하여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때리고 돌로 치고나서 그대로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미와 처 및 고용살이하는 최우택(崔右宅)도 공초하기를 「기왓장과 자갈을 봉덕에게 집어주었다.」 하였고, 진의 장교·아전·종들도 공초하기를 「그를 대적하지 못해 모두 중상(重傷)을 입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진졸(鎭卒)이 진장(鎭將)을 구타한 일이야말로 조대립(趙大立) 사건 이후로 처음 발생한 변고입니다. 진장과 진졸 사이의 분의(分義)는 관원과 백성들 사이의 그것보다 더욱 엄한 것인데, 흉악한 짓을 자행한 정상에 대해서도 그가 이미 자복(自服)하였습니다. 만약 속히 전형(典刑)을 가하지 않는다면 당(唐)나라 때에 일어났던 번졸(藩卒)의 변란이 반드시 오늘날 다시 발생하고야 말 것이니, 율문(律文)대로 시기를 기다릴 것 없이 처형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그리고 고가(高哥) 성을 가진 여자와 이가 성을 가진 여자 및 최우택에 대해서는 신의 감영에서 등급을 나누어 처단할 예정입니다. 또 해(該) 첨사 이신형(李信馨)으로 말하면 평소에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나머지 이런 변고가 있게 하였으니 죄를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법으로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죄를 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결말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죄를 적용할 계획입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봉덕은 효수(梟首)하고 그의 처 및 고용살이하는 자는 모두 형장(刑杖)을 가한 뒤 정배(定配)하고 진의 아전과 장교 등 3인은 정배하라고 하였다.
상이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이르기를,
"아이진의 일로 도백(道伯)이 올린 장계를 어제 해조에 내렸는데 경은 그 일을 들었는가? 선조(先朝) 갑오년 연간에 회령부(會寧府)의 백성이 자기 아비가 본부의 부사 조규진(趙圭鎭)에게 곤장을 맞고 죽었다는 이유로 복수한다고 칭하면서 총(銃)을 가지고 해칠 목적으로 상경하기까지 했었다. 그 당시에 적용할 율문(律文)을 의논할 때 《대명률(大明律)》의 ‘부민(部民)이 지부(知部)와 지주(知州)를 죽이려고 꾀한 경우, 그런 계획을 세운 자는 형장을 쳐 유배를 보내고 부상당하게 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죽인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조문(條文)을 인용하였는데 장물(贓物)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그런 계획을 세운 경우의 율만 적용했었다. 그러나 아이진의 일로 말하면 회령 백성에게 드러난 장물이 없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중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선조 갑인년에 또 북병사(北兵使)를 해치려고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어사(御史) 이종백(李宗白)이 장계로 보고하여 사형에 처했었다. 그런데 아이진의 일로 말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니 또 해치려고 꾀한 것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진장(鎭將)과 진민(鎭民)은 군율(軍律)로 맺어진 관계이니 보통 관원과 백성의 관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변괴가 발생했으니 어찌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저 이력(履歷)을 쌓는 자리에 오래 근무할 자를 차임해 보낸 뒤로 진졸(鎭卒)마저 진장을 많이 경시하는 폐단이 자연적으로 빚어지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변방으로 말하면 바로 군사 작전이 행해지는 곳인만큼 한 번 크게 경동(警動)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말을 만들어 판하(判下)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위에서 번거롭게 제기할 성격의 일이 아니기에 유사(有司)에게 회부한 것이다. 그리고 옥체(獄體)를 중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했던 것이다."
하니, 언호가 아뢰기를,
"진장이 진에 소속된 여종을 찾아내 붙잡도록 하는 것이야 본디 예사로 있는 일이고 진민(鎭民)이 죄를 받아 세 차례 곤장을 맞은 것도 당초 중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백성의 신분으로 관원에게 대들면서 심지어는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던 변고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되는 율로 단죄(斷罪)하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서유방(徐有防)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0일 기미

형조 판서 서유방을 귀양보내는 의미로 경기 관찰사에 보임(補任)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유방이 누차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형조 판서 서유방을 체차(遞差)하고 귀양보내는 뜻으로 경기 지방에 보임토록 하라. 도신(道臣)이 외방에 보임되는 것과 동시에 귀양가게 되었고 보면 어찌 꼭 하고 싶지 않은 숙배(肅拜)를 하라고 시킬 것이며 또 그의 입장에서도 감히 하지 못할 사조(辭朝)를 어찌 감히 하겠는가. 금부에 분부하여 도사(都事)를 파견해 영부(營府)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 또 선전관을 보내되 표신(標信)과 밀부(密符)의 좌측 한 짝을 싸가지고 함께 가도록 하라. 그리하여 먼저 도사(都事)와 부(符)를 맞추어보고 나서 옛 패(佩)를 가져다가 기백(畿伯)에게 전해주도록 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좌측 한 짝을 부와 맞추어보아 아무 의심이 없게 한 뒤에 복명(復命)하도록 분부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귀양보낼 겸 외방에 보임시키게 된 관계로 금부의 낭관(郞官)을 떠나 보내기는 하였다마는, 지금 일단 감영에 도착하고 나면 귀양보낸다[謫]는 한 글자를 환수해 주어야만 감사의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니, 전교 중에서 특별히 이 글자는 환수하도록 하라. 그리고 외방에 보임된 것이 귀양을 온 것이라는 뜻을 인식하고 감히 다시는 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원(李祖源)을 형조 판서로, 서유린(徐有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1일 경신

서유린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12일 신유

평안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치계(馳啓)하기를,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 변의 민가(民家)가 무너지고 깔린 것이 1백 16호입니다. 그리고 넘쳐 흐르는 물이 수구(水口)로 몰려드는 바람에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에 이틀 밤 낮 계속 쏟아진 빗물이 고인 채 빠지지 않아 남쪽 제방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곳의 민호가 무너지고 깔렸는데 그 곳만도 47호나 됩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지방관과 수신(帥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보살펴 주도록 하고 병사(兵使)와 해(該) 목사(牧使)도 무너지고 떠내려간 곳에 가서 이 판부(判付) 내용으로 위로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안정시키는 일을 모두 끝낸 뒤에 그 상황을 장계로 보고토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갑자

태묘(太廟)를 참배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화성(華城)의 성역(城役) 및 물역(物役)과 관련하여 직접 획급(劃給)한 것과 꾸어온 것과 도로 갚아야 할 것 등의 수효를 조목별로 구별하여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되기를 기다렸다가 이대로 거행할 뜻을 화성 본부(本府) 및 경외(京外)의 각 해당 아문에 통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별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접 획급한 것. 평안 병영의 2만 냥(兩), 관서(關西)의   소미(小米)213) 를 작전(作錢)214)  한 2만 5천 냥, 본부(本府) 기부(記簿)의 1만 6천 냥, 각도(各道)에서 을묘년에 가분(加分)215)  한 모조(耗條)216)   8천 석(石)을 돈으로 대신 낸 2만 4천 냥, 영남(嶺南) 병영의 별별비(別別備) 2만 냥, 기영(箕營)217)  의 별별비 2만 냥, 완영(完營)218)  의 별비(別備) 1만 5천 냥 등 13만 냥. ○꾸어온 것. 장용영(壯勇營)의 25만 냥, 균역청(均役廳)의 30만 냥, 어영청(御營廳)의 4만 냥, 금위영(禁衛營)의 4만 냥 등 63만 냥으로 직접 획급해 준 것과 합치면 도합 76만 냥. ○도로 갚아야 할 것. 1. 장용영의 25만 냥. 5만 냥은 영남 병영의 남창(南倉) 별비전(別備錢)을 을묘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5천 냥씩 10년 기한으로 갚고, 7천 냥은 금위영의 을묘년 반 년 동안의 정번전(停番錢)219)  으로 갚고, 6만 3천 냥은 금위영의 정번전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임술년까지 매년 9천 냥씩 7년을 기한으로 하고, 4백 냥은 금위영의 계해년 정번전으로 갚고, 7천 냥은 어영청의 을묘년 반 년 동안의 정번전으로 갚고, 5만 6천 냥은 어영청의 정번전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계해년까지 매년 7천 냥씩 8년 기한으로 하고, 5천 냥은 통영(統營)의 연례(年例) 별비전(別備錢)으로 갚되 을묘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5백 냥씩 10년 기한으로 하고, 1만 8천 냥은 4 영문(營門)의 월과미(月課米)220)  를 돈으로 대신 내게 해서 갚되 병진년에서 경신년까지 매년 3천 6백 냥씩 5년 기한으로 하고, 1만 냥은 선혜청(宣惠廳)의 별하고전(別下庫錢)으로 갚되 을묘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1천 냥씩 10년 기한으로 하고, 5천 냥은 호조 작지색전(作紙色錢)으로 갚되 을묘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5백 냥씩 10년 기한으로 하고, 1만 냥은 기영(箕營)의 을묘년 별비전(別備錢)으로 갚고, 1만 2천 6백 냥은 기영의 연례 별비전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1천 4백 냥씩 9년을 기한으로 하고, 6천 냥은 각도(各道)의 을묘년 가분(加分) 모조(耗條) 2천 석을 돈으로 대신 내게 하여 갚음. 2. 균역청의 30만 냥. 10만 냥은 완영(完營)에서 부채를 상환하는 곡식을 돈으로 대신 내게 하여 갚되 8년 기한으로 하고, 7만 7천 4백 냥은 기영(箕營)의 연례(年例) 별비전(別備錢)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갑자년까지 매년 8천 6백 냥씩 9년 기한으로 하고, 3만 5천 냥은 금위영의 정번전(停番錢)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임술년까지 매년 5천 냥씩 7년 기한으로 하고, 1만 3천 6백 냥은 금위영의 계해년 정번전으로 갚고, 7만 냥은 어영청의 정번전으로 갚되 병진년에서 을축년까지 매년 7천 냥씩 10년 기한으로 하고, 4천 냥은 어영청의 병인년 정번전으로 갚음. 3. 금위영의 4만 냥. 1만 4천 냥은 해영(該營)의 갑인년 정번전(停番錢)으로 이미 갚았고, 1만 4천 냥은 어영청의 정번전으로 갚되 갑자년에서 을축년까지 매년 7천 냥씩 2년 기한으로 하고, 1만 4천 냥은 어영청의 병인년 정번전으로 갚고, 8천 냥은 어영청의 정묘년 정번전으로 갚음. 4. 어영청의 4만 냥. 1만 4천 냥은 해영(該營)의 갑인년 정번전으로 이미 갚았고, 1만 2천 냥은 해영의 정번전으로 갚되 병인년에서 정묘년까지 매년 6천 냥씩 2년 기한으로 하고, 1만 2천 냥은 해영의 무진년 정번전으로 갚음.】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89면
【분류】과학(科學)


[註 213]【별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접 획급한 것. 평안 병영의 2만 냥(兩), 관서(關西)의   소미(小米) :  좁쌀.[註 214] 작전(作錢) : 곡물을 돈으로 환산해서 받는 것.[註 215] 가분(加分) : 환곡(還穀)을 정수(定數) 이상으로 대출받는 것.[註 216] 모조(耗條) : 환곡을 갚을 때 그 이자로 원곡의 10분의 1을 내는 것.[註 217] 기영(箕營) : 평안 병영.[註 218] 완영(完營) : 전라 병영.[註 219] 정번전(停番錢) : 입번(入番)을 정지시키는 대신 받는 돈.[註 220] 월과미(月課米) : 중앙에서 지방 관아에 매월 부과하는 세미(稅米).

 

7월 17일 병인

제도(諸道)의 가을철 군사 훈련을 정지하였다.

 

7월 18일 정묘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선희궁(宣禧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이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를 이끌고 의식에 따라 예를 행하였다.

 

7월 22일 신미

망위례(望位禮)를 열천문(冽泉門)에서 행하였다. 승지를 보내 선무사(宣武祠)를 살펴보게 하고, 오 학사(吳學士)의 사손(嗣孫)을 처음 벼슬시키는 데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명하였다.

 

7월 24일 계유

관학(館學)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하기를,
"아조(我朝)의 예악(禮樂) 문물(文物)은 중화(中華)와 같다고 불리워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가 서양(西洋)의 서적을 구입해 와 스스로 교주(敎主)가 된 뒤 이단(異端)의 학설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자유친(父子有親)과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의리를 끊어버리고 무시하는가 하면 남녀의 구별을 없애 부부의 윤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도 모두 없애 귀신과 사람의 이치가 끊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함께 정욕(情慾)대로 누구나 행하게 하는 바람에 예악(禮樂)으로는 교화할 수가 없게 되었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설이 일어나면서 형정(刑政)으로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禮)·의(義)·염(廉)·치(恥)야말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큰 제방(堤防)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와 아래를 뒤섞어 귀천(貴賤)을 구분하지 않는가 하면 벌거벗고 소리쳐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고 보면 그 교설(敎說)이 행해지기가 쉽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과 이성(異性)이야말로 사람에게 있어 커다란 욕망의 대상이라 할 것인데 돈과 곡식을 서로 나누어 주어 빈한한 자와 구걸하는 자들이 생활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내외(內外)의 구별을 없애 제멋대로 간음(姦淫)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 무리들이 쉽게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재주와 지식이 있는 사부(士夫)가 이 교설을 빌려다가 우매한 대중을 현혹시키자 멍청하게 아무 식견도 없는 무리들이 그 도를 좋아해 신명(神明)처럼 떠받들면서 서로들 유혹해 백 명 천 명의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도(白蓮敎徒)가 일으킨 그런 변란이야 필시 없으리라는 것은 신이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어버이를 버리고 벗을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패거리를 불러모아 결탁한 다음 살기 싫은 세상을 떠나 빨리 저 세상으로 가자면서 유혹하고 선동한다면 어떤 변인들 일으키지 못하겠습니까.
몇 년 전 윤지충(尹持忠)의 변을 생각하면 뼛속까지 오싹해지는데, 경기와 호남 사이에 기맥을 서로 통한 결과 도성 안에서까지 패거리를 결성하는 등 매우 번성하여 올해에 또 인길(仁吉) 3적(賊)의 변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괴(巨魁)가 아직도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가 하면 패거리들도 약간의 형륙(刑戮)만 받았을 뿐이니, 어찌 대간(大奸)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대 저 이가환이 당초에 깊이 빠져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끝에 가서 이단의 교설을 조금 물리쳤다고 하는 무슨 명백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조정의 주벌(誅罰)을 어떻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령 정약전(丁若銓)의 대책(對策)에 대해서는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든만큼 감히 다시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형제가 본래 가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신도로서 사학(邪學)의 우익(羽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만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이승훈(李承薰)이 요서(妖書)를 구입해 와서 그 흉악한 외삼촌을 학습시켰다고 한세상이 모두 전하고 있고 보면 그 패거리로서의 주벌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경기 지방의 권일신(權日身)과 호서(湖西)의 이존창(李存昌)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刑獄)에서 모두 자복(自服)했었는데 옥문(獄門)을 나오자마자 또 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먼저 가환의 무리부터 전형(典刑)으로 분명히 바로 잡음으로써 그 패거리들이 단속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현관(賢關)221)  에 끼어 있으면서 정학(正學)을 밝히려 하는 그 말은 옳다. 그러니 어찌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은 저 거울이 밝게 비추고 저울대가 평평한 그 체성(體性)을 아는가. 그 본연(本然)의 체성을 온전히 보전하는 까닭은 바로 공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공정하다고 하는 것은 생각마다 일마다 물건마다 말하는 것마다 한결같이 천리(天理)의 바름에서 나와 어긋나거나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고 편파적인 요소도 없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라는 훈계를 몸받아 치열하게 공부해 나가면서 공정한 안목으로 사물을 관찰한다면, 공의(公議)에는 누(累)를 끼치더라도 외부의 사특한 것을 배척하는 일에 대해, 그 누구라서 감히 모범을 보이고 언론(言論)이 나오는 곳인 성균관을 두고 딴 소리를 할 수가 있겠는가. 현관(賢關)이 존엄해지기만 한다면 정학(正學)에 대해서 진정 위청(衛靑)이나 곽거병(霍去病)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물러가서 《중용(中庸)》 서문(序文)과 《맹자(孟子)》 호연장(浩然章)을 읽되 글자마다 그 글자의 뜻을 이 해하고 구절마다 그 구절의 뜻을 이 해하도록 노력하면서 침잠하여 음미하고 반복하여 연구해서 깊이 창명(倡明)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현관이 존엄해지지 못하는 것은 다사(多士)의 수치요, 사습(士習)이 옛스럽지 못한 것은 학관(學官)의 수치이다. 오늘 태학(太學)의 상소문을 보니 척사(斥邪)하는 내용으로서 근래 대각(臺閣)의 일을 떠맡아 행하는 잘못된 규례와는 같지 않기에 상소문을 보는 즉시로 비답을 내려 주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무슨 말 끝에 물어보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중에 행공(行公)하는 재임(齋任)이 없는 가운데 재유(齋儒)들이 제멋대로 상소문을 작성한 다음 상소 첫머리에 관학 유생이라고 썼다고 하는데, 이는 현관이 생긴 이후로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다. 장의(掌議)222)  가 유생들을 통솔하는 체모로 말하면 총재(冢宰)가 백관을 총괄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중한 점이 있으니, 장의의 위차(位次)가 미처 정돈되지 않았다면 태학의 질서가 정비되었다고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상소를 올리는 일이라면 얼마나 중대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아뢰려고 하는 사안(事案)이 일단 그날 바로 결정을 내려 쟁집(爭執)할 성격의 것도 아니고 보면 장의가 행공(行公)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봉장(封章)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예전에 없던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일전에 비답을 내려 유시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고 하였는데, 교라고 하는 것은 형정(刑政)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제생(諸生)의 일이 교를 따른 것인가, 따르지 않은 것인가. 성묘(聖廟)의 성문법을 삼가 지킨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분명히 드리워 준 가르침을 아랑곳 하지도 않고 관원의 임무를 침해하는 데 따른 혐의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장의(掌議)가 할 일을 대신 행한 재생(齋生)에 대해서 반장(泮長)223)  으로 하여금 엄히 벌을 주게 한 뒤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사유(師儒)의 우두머리인 신분으로 성균관에서 예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고서도 사전에 제대로 금지하지 못했으니 직무 수행에 불성실한 죄가 작지 않다. 심지어는 하나의 일로 각자 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얼마나 심했다 하겠는가. 그런데 사세(事勢)를 보건대 그 동안 대신(臺臣)이 취했던 행동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런 일에 비교하면 예사(例事)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에 한 일이건 뒤에 한 일이건 경책(警責)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당해(當該) 대사성을 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장의(掌議)가 없는 상태에서 상소를 올릴 경우, 유생에게는 태학의 성전(成典)에 기재되어 있는 벌 중에서 중전(重典)을 적용하고, 반당(泮堂)에게도 역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는 것으로 성전에 기재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5일 갑술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기를,
"아, 지금의 이른바 서양의 학술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요법(妖法)이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다지도 신속하게 그지없이 미혹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어 보면 ‘우리는 하늘을 받든다.’고 하기도 하고 ‘우리는 하늘을 공경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 하늘이란 단지 하나의 실리(實理)일 뿐입니다. 무릇 일상적인 온갖 행동 가운데 이치에 합치되게 하면 그것이 순천(順天)이 되는 것이고 이치에 어긋나게 하면 그것이 역천(逆天)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이 언제 일찍이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받들지 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서양인이 하는 것처럼 형상으로 본뜨고 기도하여 복을 구한 일이 있기라도 했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예법(禮法)을 제정하시면서 장례(葬禮)로 마지막 가는 길을 삼가하게 하고 제례(祭禮)로 자기가 나온 근본에 보답하게 하셨으니 이는 효(孝)를 넓히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장례를 치르면서 내던져 버리듯 하고 제례하려고 들지를 않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애(至愛) 지정(至情)의 대상으로는 부모만한 것이 없는데 부모에 대해서조차 이런 식으로 하고 보면 사람의 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심술(心術)을 가지고 그 무리를 불러 모아 처음에는 요망한 짓을 하고 훔치는 짓을 하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적(賊)이 되고 역(逆)이 되게 하고 있으니 장차 못할 짓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더구나 이들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형벌도 감수(甘受)하기 때문에 위에서 금할 수도 없고 법이 시행될 수도 없는 형편이고 보면 이들이야말로 국가에 대해 극력 항거하는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이단(異端)의 경우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지만 그래도 금수(禽獸)라고 이름붙여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학(邪學)의 경우는 소멸되지 않는 한 그 형세가 반드시 온 세상을 요망하고 사특한 귀신의 영역으로 빠뜨리고 말 것이니, 정인 군자들이 의당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내고 물 속에서 건져내듯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세손(世孫)으로 계실 때부터 경전(經傳)에 침잠하시어 어느 임금보다도 탁월하게 성학(聖學)이 고명하십니다. 그리하여 승니(僧尼)의 도성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무격(巫覡)을 모두 시골로 내쫓으시는 등 어느 것 하나 유학을 높이 받들고 사도(斯道)를 중히 여기는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런 하나의 사설(邪說)에 대해서만은 그만 제멋대로 하도록 놔둔 채 교화를 막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신이 일찍이 그 근본 원인을 소급해 올라가 탐구해 보건대, 이는 다른 말을 할 것 없이 단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힘쓴다[好新務奇]는 네 글자 때문이라고 귀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성인의 학문은 곡식과 옷감처럼 날마다 쓰면서도 평상시에는 신기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혹 지리(支離)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간혹 진부(陳腐)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해서 ‘호기무신(好奇務新)’하는 마음이 점점 수승(殊勝)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자(朱子) 때에 이미 육학(陸學)224)  이 주창되었는데 그 뒤에 왕수인(王守仁)이란 자가 육학을 조술(祖述)하여 하마터면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뻔하였으며 그 뒤에 또 청(淸)나라 사람 모기령(毛奇齡)이란 자가 그 못된 입을 놀려 정학(正學)을 헐뜯는 바람에 성도(聖道)는 세월이 흐를수록 날마다 쇠퇴하고 사설(邪說)은 더욱더 신기한 것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육학이나 양명학(陽明學) 같은 부류도 이제 와서는 오히려 진부한 옛것에 속하게 되어 새롭고도 기이한 것이 되기에 부족하게 되었고 보면 이제 이 서양의 학술이라는 것이 쉽사리 들어와 현혹시키면서 멋대로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주공(周公)·공자(孔子)의 학문으로 군사(君師)의 위치를 엄히 하고 계시는만큼 만약 한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학문에 뜻을 두게 하려고만 하신다면 이런 일 정도는 전하께서 잠깐만 수고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조정 위에는 허위(虛僞)가 풍조를 이루고 민간에서는 이를 업(業)으로 일삼는 일이 없어 온 세상이 금방 꺼질 것 같은 물거품 모양이 되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인심이 어떻게 잘못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사설이 어떻게 선동시키며 현혹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추성(鄒聖)225)  이 말하기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더 좋아하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말하면 우리 전하만한 분이 없는데, 위와 아래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이처럼 상반되고 보면, 신이 어리석긴 하나 죽을 죄를 무릅쓰고 ‘푯대가 바르게 되어야만 그 그림자도 바르게 된다.’는 면에서 전하를 책면(責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자기 몸에 반성해 보고 마음속으로 원인을 찾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대학(大學)》에서는 백성을 새롭게 하기에[新民] 앞서 반드시 자신의 덕을 밝히는[明德] 실효를 거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백성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전하의 학문이 아직도 덕을 밝히는 데에 이르지 못하신 것입니다. 하룻 동안이라도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하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는 이치가 있는데,226)   전하의 나라를 보면 인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전하의 학문이 아직도 극기복례를 하는 데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문장(文章)은 부차적인 일인데 전하의 문장으로 말하면 대지(大地)가 만물을 실어주듯 하고 바다가 널리 적셔주듯 하여 사람들이 그 한계를 알 수가 없으니 전하의 학문이 이미 수식적인 데로 빠져든 것을 면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임금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만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인데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개재된 나머지 간혹 중도(中道)에 지나친 분부를 많이 하시니 전하의 학문이 아직도 함양(涵養) 공부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강서(講書)와 제술(製述)하는 규정을 둔 것은 장차 큰 계책을 빛내려 해서인데, 강서가 과정을 메꾸는 데에 불과하고 글을 짓는 것도 허풍을 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보면, 전하께서 문(文)을 숭상하는 정치에 있어 과연 실효가 있다 하겠습니까. 선비들의 취향은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유자(儒者)의 가르침은 경의(經義)를 도외시하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수렴(收斂)하려고 하는 자가 나오기만 하면 번번이 뭇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곤 하니, 전하께서 사람들을 진작시키는 교화에 있어 이루어진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북경(北京) 시내에서 책을 사오지 못하도록 금한 것에 대해 그 누군들 근원을 막아버리는 보살핌이라고 생각하여 우러러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유방(酉房)227)  에 한우 충동(汗牛充棟)으로 쌓여 있는 서적 가운데 거두어들여야 할 기문(奇文)들이 없다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연전에 그 책들을 불사르라고 내리신 명령이 얼마나 엄했습니까. 그런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철을 답습하고 있고 보면 전하의 법과 기강이 또한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 몇 가지의 병통들은 결국 전하의 마음이 순일(純一)하지 못해 여전히 간단(間斷)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 성학(聖學)이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더 스스로 가다듬으시어 무신 호기(務新好奇)하는 잘못부터 통렬히 고치도록 하소서. 그리고 명(明)나라 말기와 청(淸)나라 초기 이래로 비뚤어진 인사들이 저술한 것 및 소설(小說)·패기(稗記) 등 신기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은 일체 축출해 버리고 오직 고금(古今) 성현들의 문자만 가지고 전적으로 강습(講習)하도록 하소서. 이와 함께 온 나라에 분명히 유시하여 엄히 금하며 살피게 하고, 그래도 옛날에 물든 습관에 연연하여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주부자(朱夫子)가 황벽승(黃蘗僧)을 논하며 전형(典刑)으로 바로잡았던 율(律)을 적용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한 번 소탕하여 선한 이들이 오염되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의 도를 일으켜 세우고 세도(世道)가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즈음 대간과 옥당의 반열에 있는 자들을 보면 그저 치고 때리는 습관만 보여줄 뿐 충성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간혹 구언(求言)을 하더라도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듯 하기나 하고 혹은 조그마한 장애 때문에 긴요한 일을 그만두자고 하거나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하면서 더욱 못쓰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놔둔 채 멋대로 되게 한다면 골짜기에 밀어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신중하게 돌아보아도 어떻게 해야만 현재 양쪽 다 좋은 방책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대가 올린 만언소(萬言疏)를 보니, 이단(異端)이 정상적인 법도를 해치고 어지럽게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폐단을 설명하고 구제할 방도를 제시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간절한 정성에 입각하여 교화의 근원을 우선 맑게 하는 공부를 하라고 직간을 하며 요구하였다.
나의 백성이 새롭게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문이 덕을 밝히는 데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우리 나라가 인(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공부가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에 독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밖에 함양하는 공부가 부족한 것과 겉치레에 치중하는 데 따른 폐단과 정시(程試)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과 선비의 취향에 내실(內實)이 결여되어 있는 것 등에 대해서도 모두 푯대가 바로 서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가 곧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내 몸을 반성하고 내 마음속을 따져보라고 하였는데, 그대가 해 준 말이야말로 구구절절 모두가 약석(藥石)으로서 흡사 한 첩(貼)의 청량산(淸凉散)과 같다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말을 약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서 가슴속 깊이 새겨두지 않겠는가.
이밖에 잡서(雜書)의 폐단에 대해서 말한 것은 더욱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하겠다. ‘잡서를 보지 말라. 정력(精力)이 분산될 우려가 있다.’고 한 것은 주부자(朱夫子)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더구나 저 기괴하고 사설로 가득찬 책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야말로 모조리 태워 재로 만드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내부(內府)에 소장된 것 가운데 패관소설(稗官小說)로 이름붙여진 것들은 옛날 편적(編籍)에 들어 있었던 것까지 아울러 서가 사이에서 없애버리도록 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되었는데 가까운 반열에 출입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듣고 보았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까지 거두어 모아 불태우게 하는 것은 한갓 소요만 일으킬 뿐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우려도 있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의 비뚤어진 인사들이 지은 문자에 대해서는 안으로 오부(五部)로부터 밖으로 팔역(八域)에 이르기까지 일체 없애버리고 감히 집안에 놔두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부자가 황벽승을 논하면서 전형을 분명히 바르게 한 율을 적용토록 할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대저 말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장차 그 말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장차 그 말을 시행하기 위함인데, 일단 말을 시행한 뒤에는 그에 따른 포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밝은 임금은 간하는 신하에게 상을 준다.’고 하는 것인데,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아무리 못해도 어둡게는 되지 않겠다고 목표하고 있다. 특별히 그대를 발탁하여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함으로써 그대의 말을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뜻을 보여주는 바이다."
하였다.

 

이가환(李家煥)을 특별히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보임(補任)하였다. 가환이 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으로서 누차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이때 호서(湖西) 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邪學)에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충주가 가장 심했으므로 특별히 가환을 그곳의 수령으로 삼고, 또 정약용(丁若鏞)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삼은 뒤 각각 속죄하는 실효를 거두도록 한 것이었다.

 

7월 26일 을해

이승훈(李承薰)을 예산현(禮山縣)으로 정배(定配)하였다. 하교하였다.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사람을 고무시키고 사람을 단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상만 주고 벌은 안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바른 이를 들어 쓰기만 하고 잘못된 이를 내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도리에 대해서 우상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는데 그래서 지금 이를 기꺼이 듣고 조치하는 즈음에 짐작해서 행하는 것이다.
현재 소란스럽게 된 사태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렇다. 서양의 서적이 우리 나라에 출현한 지가 벌써 수백 년도 더 된다. 그런 관계로 사고(史庫)와 옥당에 예전부터 소장해 오던 것 속에도 모두 들어 있었는데 그 숫자가 몇 십 편질(編帙) 정도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전에 특명으로 이것들을 모두 거두어서 내다 버리라고 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서양의 책을 구입해 온 것이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故) 상(相) 충문공(忠文公)의 문집 속에도 서양인 소림대(蘇霖戴)와 왕복하면서 그 법서(法書)를 구해 본 일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상제(上帝)와 대면한 가운데 자신의 온전한 성품을 회복하려 하는 점에서는 애당초 우리 유학과 다를 것이 없는 것같다. 그러니 청정(淸淨)을 주장하는 황(黃)·로(老)228)  나 적멸(寂滅)을 주장하는 구담(瞿曇)229)  과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익만을 꾀하는 삶을 방불케 하고 보응(報應)에 관한 주장을 거꾸로 취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천하를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였으니, 고 상의 말이 그 이면까지 상세히 변론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간혹 순전히 공격하며 배척한 경우도 있었는데, 고(故) 찰방 이서(李溆)의 시를 보면 심지어 ‘야만인이 전한 이상한 학술 도덕을 해칠까 두려워지네.[夷人傳異學恐爲道德寇]’라고까지 하였다.
대저 근일 이전에도 박아(博雅)한 인사들이 미상불 한 마디씩 평가하는 말을 하였지만 완만하게 하든 준열하게 하든 간에 그 당시에는 별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학(正學)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폐해가 사설(邪說)보다도 심하고 맹수보다도 더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에 있어서는 정학을 더욱 밝히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착한 일을 표창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정사를 펼친 뒤에야 그런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습속을 바로잡는 데에 형륙(刑戮)의 방법을 쓰는 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인데, 더구나 그 학술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어제 이미 최헌중(崔獻重)을 발탁해 임용하면서 정도(正道)를 일으켜 세우고 사도(邪道)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한 뒤이고 보면 연전에 서양의 책을 구입해 온 이승훈에 대해서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건 무의식적으로 했건 따질 것 없이 그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감히 그의 집에서 편안히 있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형정(刑政)에 관계되는 일이다. 승훈의 아비가 책을 불사른 증거와 그 뒤 승훈이 글을 작성하여 자기 죄를 털어놓은 사실이 또한 공가(公家)의 문서에 드러나 있기는 하다마는,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은 고쳐 먹은 것이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인만큼 일단 그의 이름이 공거(公車)230)  에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즉시 처분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역시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대우해 주는 의리가 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정배하라. 이 밖에 민간의 서민들 가운데 상을 주고 벌을 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는 바로 유사가 처리할 문제이니 묘당에서 유사를 신칙하도록 하라. 진정 성심으로 권면시키고 징계시키되 들쑤시지도 말고 따라가기만 하지도 말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않는다면 그 효과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토록 하라. 이와 같이 펼쳐 보여줬는데도 뒤에 다시 그 학술에 대한 문제로 수응(酬應)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런 조정을 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7월 27일 병자

윤행원(尹行元)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9일 무인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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