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1795년 8월

싸라리리 2025. 8. 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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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기묘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이 상소하기를,
"삼가 이가환(李家煥)에게 처분을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특별히 거두어 서용(敍用)하게 하시면서 외읍(外邑)의 수령을 제수토록 하셨으니, 이는 마치 작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가벼운 처벌을 내리신 듯한 인상을 갖게 합니다. 이른바 사학(邪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추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점점 퍼져나가 미혹시키도록 하여 천륜(天倫)이 막혀 통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컴컴한 곳에 소굴을 틀고 그 종족들이 번성하게 한 나머지 심지어는 태양을 향해 스스로 항거하는 자들이 나오게까지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아, 저 이가환으로 말하면 그동안 죄지은 자취를 씻어주는 은혜를 편파적으로 받았는데도 사납고 완악하게 끝까지 감화되지 않은 채 귀신과 물여우 같은 무리들의 소굴에 들어가 사악한 패거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요망한 주장을 떠벌여대면서 성상의 교화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그 정적(情跡)이 이미 탄로난 뒤에도 또 감히 슬쩍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성총(聖聰)을 기망하였는데도 삼척(三尺)231)  의 주벌(誅罰)을 가하지는 않고 오히려 외방 수령으로 제수하는 영예를 내려 주었으니 형정(刑政)이 이것보다 잘못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성명(成命)을 환수하시고 그 도당을 제거하심으로써 혼란의 근본을 끊어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양학(洋學)을 논하면서 하는 말이 불분명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무슨 물건이며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적용한 율(律)을 보면 바로 궁극(窮極)의 죄(罪)로 간주하여 해당시키고 있는데, 이렇기 때문에 조제(調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이렇기 때문에 정도(正道)가 더욱 확립되지 않는 것이다. 사악하고 추악한 무리들도 필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경의 상소가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치계(馳啓)하기를,
"국적을 알 수 없는 배 한 척이 바람에 밀려와 홀연히 오차진(吾叉鎭) 앞에 정박하였기에 해당 첨사(僉使) 장경홍(張景泓)이 군교(軍校)를 이끌고 기계(器械)를 지니고서 급히 포구 가로 달려가 활을 당기고 총을 겨누며 위엄을 보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거꾸로 성을 내면서 일제히 상륙한 뒤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곧장 앞으로 나와 극력 저항하였습니다. 이렇듯 분위기가 위태롭고 공포스럽게 되자 진장(鎭將)과 진졸(鎭卒)들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는데 그럴 즈음에 가지고 있던 활과 칼과 총대 등을 포구 가에 내버리고 갔으므로 그 사람들이 주워서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도 닻을 올리고 바다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습니다. 해당 진장의 죄는 군율(軍律)을 범한 것이니 파출(罷黜)한 다음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을 적용해 처단케 하시고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성화(金聖和)도 아울러 파출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수사(水使) 이보한(李普漢)도 율에 따라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경진

도기 유생을 대상으로 강서(講書)와 제술(製述) 시험을 친히 행하였다. 강서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민령유(閔令儒)와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기양(李基讓)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허락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단천부(端川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이의필이 상소하여, 최헌중(崔獻重)이 척사(斥邪)한다는 핑계를 대고 상을 기롱하며 풍자했다고 논하고, 국청(鞫廳)을 설치해 그를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풍헌(風憲)을 맡은 책임자의 임무가 도대체 얼마나 중한 것인가. 그런데도 그만 감히 이런 식으로 편당(偏黨)짓는 습관을 보이다니 어찌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편당을 지은 것도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한다. 언관(言官)에 대해서 죄를 얽어 무함한 것이야말로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척사(斥邪)하는 것은 물론 좋지만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면 정도(正道)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설령 과거에 범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고치고 난 뒤에는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종적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물처럼 흘러가고 구름도 없어진 상태에서 추후로 따질 수가 있단 말인가. 최헌중에게 가한 율명(律名)은 더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예의지국(禮義之國)인 우리 나라에 요즘 들어 예전에 없던 이단(異端)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가르침이 밝혀지지 않고 교화가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군사(君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대로 바로잡지를 못했고 보면, 설혹 헌중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사(野史)에 쓰고 국사(國史)에 기록할 때 오늘날을 어떤 시대였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그 책난(責難)하는 말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또 설혹 헌중이 도헌(都憲)의 말처럼 진정 기롱하고 풍자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노여워할 요소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니 내가 상관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만 헤아릴 수 없는 죄목으로 흉악하게 배척하면서 극구 말을 쏟아내었으니 예전처럼 또 하나의 유성한(柳星漢)이 나왔다고 해야 하겠다. 이 뒤로 어떤 일을 말하는 소장(疏章)이 일단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화(禍)의 모자를 덮어 씌우고 위태로운 함정에 밀어넣으면서 장차 어떤 일이든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릴 경우 오싹하게 가슴이 떨릴 일이 금방 일어났다 금방 없어질 서양 책의 학설보다도 심하게만 될 것이다. 헌중이야 아깝게 여길 것이 없지만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언관이라는 이름이다.
근일 하나의 정사를 펼치고 하나의 일을 처리할 때마다 오직 한결같이 습속(習俗)을 되돌리려 하는 마음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제신(諸臣)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도헌(都憲)이 올린 이 소야말로 언로(言路)에 도약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모름지기 즉각 좋아하고 싫어하는 뜻을 분명히 보여준 다음에야 근일의 이른바 무함을 해명하려는 뭇사람들의 여론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요 종전부터 말하려고 했던 본의를 또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사헌 이의필을 우선 체차시킨 다음 그 소장을 정원 뜰에서 불사르고 그 사람을 북쪽 지방에 귀양보냄으로써 악을 싫어하여 제거한 뜻을 부치도록 하라."
하였다.

 

경사스러운 해를 맞이하여 보이는 과거와 관련, 정시(庭試)의 초시(初試)를 서울과 지방에서 나누어 행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 해의 큰 경사를 맞이하여 경외(京外)를 위로하고 즐겁게 해 줄 목적으로 제신(諸臣)의 의견을 수합한 뒤에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이득신(李得臣)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정충달(鄭忠達)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3일 신사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선천(宣薦)과 내금위(內禁衛)를 대상으로 가을철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8월 4일 임오

대사간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기를,
"이의필(李義弼)이 상소하면서 무엇을 지적하여 신의 죄를 성토하고 율(律)을 적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삼가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기롱하고 풍자했다[譏諷]는 두 글자가 그 상소의 주요 내용인 듯싶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술(邪術)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다 보니 정학(正學)을 천명(闡明)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동시에 임금의 덕을 힘쓰도록 우러러 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임금에게 말할 만한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잘못된 점을 설정해 놓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며 끝맺는 것이 권면할 때 진달드리는 상규(常規)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상소문에 나오는 말들은 바로 진부한 상투적 예를 주워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흡사 진정으로 직언(直言)하며 항론(抗論)한 자를 대우하듯 은혜를 내려 주셨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지금 논한 것이 상투적인 수법을 답습했는데 은전(恩典)을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내려주셨다고 논열(論列)하며 탄핵했다면 이는 그야말로 조정에 있어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폐단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진달드린 이야기에 대해 거꾸로 기롱하며 풍자한 말이라고 하면서 흉악하고 불측스러운 죄목을 가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을 얽어넣는 데에 급급했다 하더라도 국가에 무궁한 폐단의 길을 열어놓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유독 생각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성상께서 분명히 분부를 내리시어 남김없이 해명해 주시면서 화(禍)의 모자를 덮어 씌우고 위태로운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배척하기까지 하였는데, 만약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어 신의 심정을 모두 통촉해주지 않으셨던들 신이 어떻게 도마 위에 올랐던 위험스러운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직명(職名)을 바꾸고 다시는 이 자리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의필을 북쪽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이 어찌 혹시라도 그대를 위해서 한 일이겠는가. 첫째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함이요, 둘째는 당파를 없애기 위함이다.
설령 그대가 형편없는 마음을 품고서 불측스러운 계책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겉으로 핑계대고 속으로 진행시키며 입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고 마음으로는 부인했다 하더라도 일단 상소하여 아뢴다는 명목 아래 임금의 덕을 바로잡고 당면한 정사(政事)를 지목하여 진달했다면 그 심술은 차치하고라도 그 말만은 정상을 참작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대의 상소문 내용에 기롱하고 풍자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옛날에 비방(誹謗)하는 나무232)  를 설치하자 선비가 비난하고 서인(庶人)이 비방하였는데 유왕(幽王)이나 여왕(厲王) 때가 아닌 한, 위무(衛巫)를 시켜 감시하게 하지 않았었다. 그대가 설혹 진정으로 이의필(李義弼)이 말한 것처럼 기롱하고 풍자했다 하더라도 기롱한 것을 비난한 것과 비교하고 풍자한 것을 비방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그 심각성의 정도 차이가 몇 배나 될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오히려 법으로 확립해 놓고 진정 비방하는 말을 들으려 하였는데, 지금은 말한 자를 붙잡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청하고 있다. 의필이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그만 이렇듯 황당무계하고 법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인심이 이토록 빠져들었다는 것이 두렵기만 할 뿐이다. 이의필 따위야 깊이 꾸짖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대저 임금이 된 자는 남의 목숨을 맡아 처리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생사여탈을 알선하는 즈음에 모든 일이 곡진하고 타당하게 되어야만 도(道)가 깃들이게 되고 군사(君師)의 지위도 확립되어 마치 바람이 불면 풀이 쓸려 눕듯 나라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양학(洋學)이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기에 남쪽으로 복연(濮鉛)233)  에 들어가지 않고 북쪽으로 무체(無棣)234)  에 들어가지도 않고서 동쪽을 향해 압록강(鴨綠江) 서쪽으로 빠져 나왔단 말인가. 그 학술로 말하면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데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무섭게 행사하여 인류를 금수(禽獸)로 만들고 예의지국(禮義之國)을 이면(剺面)235)  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전파된 지 2백 년 동안 그 책들을 묶어서 시렁 높이 얹어두고 보지를 않았었는데 공교롭게도 근래에 들어와서 대 유행을 하고 있으니 그 기미를 보면 파리한 돼지236)  보다도 더 오싹해지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데도 그저 사문(斯文)이 일대 액운(厄運)을 만났다고만 핑계댄 채 만회시킬 수 있는 방도를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경우야말로 ‘우리 임금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고 하는 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대는 나에게 더욱 힘쓰라고 요구했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과연 성인이 말씀하신 적(賊)이라 하겠는가. 이런 의리는 낮과 밤처럼 분명한 것인데, 이렇듯 거듭거듭 말하는 것은 바로 만세토록 이어갈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부총관(副摠管) 권회(權恢)가 상소하여 화성(華城)에 대한 일곱 가지 대책을 올렸는데, 첫째 수성(守城)하는 기계(器械)를 미리 강구해서 완비해 둘 것, 둘째 각처의 공한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비축을 많이 해 둘 것, 셋째 금(金)의 채굴을 다시 허락하여 성의 공사에 보탬이 되게 할 것, 넷째 조졸(漕卒)에게서 포목을 거두어 군수에 보태게 할 것, 다섯째 목장을 혁파하고 둔전을 새로 설치할 것, 여섯째 인근 고을의 가까운 지역을 편리한 방향으로 옮겨 떼어줄 것, 일곱째 본부의 군병을 편의대로 만들어 둘 것 등이었다. 이에 비답하기를,
"일곱 가지 방략 가운데 어찌 채용할 만한 조목이 없다 하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허락한다."
하였다.

 

내각 제학 심환지가 상차하기를,
"아, 저 사학(邪學) 역시 이적(夷狄)의 일개 법술(法術)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몇 차례나 통역을 해야 할 만큼 수만여 리(里)나 떨어져 있는 우리 예의지국(禮義之國)에까지 그 책을 멀리 구입해 와서 그 법술을 떠받들고 믿게 하여 세상을 바꿔 보려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주도했단 말입니까. 이른바 교주(敎主)라는 사람이 본래 있을 것이고 이른바 학도(學徒)라는 자들도 거기에서 파생되어 불어난 부류라고 할 것인데 세상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지목하여 거론하는 것도 전연 헛된 말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최헌중(崔獻重)이 제대로 사학(邪學)을 공격하기 위해 소를 올리려고 했다면, 의리상 마땅히 먼저 사술(邪術)을 떠받들고 백성의 뜻을 미혹시켜 세도(世道)를 혼란케 하는 것을 성토했어야 할 것이요, 그런 다음에 유술(儒術)을 높이고 성도(聖道)를 밝혀 백세 아래에까지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도록 청한다 해서 안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사학만을 논하고 주창한 자는 공격하지 않았으며 사학만을 공격하고 추종하는 자는 논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어찌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의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다시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해야 할 우리 전하의 덕에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이토록 사학이 멋대로 행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깨우치는 말을 아뢰어 임금을 도우려는 말로 삼고자 했으니, 그 말이야말로 참으로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헌중이 은근히 성상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스스로 패거리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벗어날 꾀를 내었으나 교묘하게 하려다가 거꾸로 졸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의필이 사헌부에 있는 몸으로서 군부를 기만하며 농락하는 이 무리의 행태를 목격하고서 그래도 제대로 맞서서 상소를 올려 공격하였으니, 그 의리로 말하면 임금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자를 보고서 새매처럼 공격을 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의필이 말한 것이 어찌 북쪽 지방에 유배보내야 할 죄목에까지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전 대사헌 이의필을 귀양보내라고 내리신 명을 속히 환수하시어 세상의 난민(亂民)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언관의 이름을 가진 자에 대해서 감히 입을 열어 가부(可否)를 논하지 못하게 한다면 장차 충성스러운 말과 참소하는 말이 뒤섞여 나와 사람이 귀신 같이 되고 귀신이 사람 같이 되면서 마치 어두컴컴한 명부(冥府)처럼 될 것이니 어찌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치는 하나로서 도(道)에 두 갈래가 있을 수 없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는 함께 쓸 수 없는 법이요 의리와 이욕(利欲)은 병행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경이 말한 것은 두 갈래나 세 갈래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정자(程子)의 말을 들어 보건대 ‘첫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고 두 번째 자리나 차지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8월 5일 계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이르기를,
"일전에 내가 숨김없이 말하라고 하면서 자문을 구했었는데 경은 숨김없이 아뢰어야 하는 의리에 입각하여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경은 지금 백발 노인이 되었으면서 어찌하여 소년 시절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지금 또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자문을 구할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다는 식으로 경은 변별(卞別)하여 아뢰도록 하라.
최헌중에 대해서 내가 언제 일찍이 아끼고 사랑하여 사정을 봐준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의필이 올린 상소만은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임금의 잘못을 진달하여 소를 올린다고 이름붙인 이상에는 그저 흡족하게 여겨 받아들이며 넉넉하게 표창해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필이 말한 것처럼 그 자가 설령 참으로 사학(邪學)을 위하면서 은연중에 군상(君上)에게 허물을 돌렸다 하더라도 간언(諫言)이 나오도록 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심각하게 그를 죄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꼭 그렇게 볼 수 없는 경우인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저 세도(世道)를 만회시키는 일은 오직 인주(人主)가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다는 내용으로 진달하면서 임금의 덕을 힘쓰도록 요구한다 하여 안될 것이 뭐가 있는가.
그리고 그 책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이미 2백 년이 가까워 오고 책의 종류도 무려 수십 종이나 되는데 그동안 한 사람이라도 이 학술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날에 와서 비로소 유행을 하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정학(正學)을 강명(講明)하지 못한 데에 연유한 것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으면 별이나 달이 나타날 수가 없고 원기(元氣)가 바야흐로 강성하면 질병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는 법이다. 따라서 저 사학이 치성해지는 것도 기운(氣運)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보면, 그것을 깨끗이 물리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위에 있는 임금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최헌중의 상소가 과연 불순한 의도를 개입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선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흉악하고 참람되다고 단안을 내리면서 잡아다가 국문하는 율(律)을 적용하였는데,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어찌 다시 할 말을 아뢰는 자가 나오겠는가. 최헌중에 대해서 죄를 준다면 이는 말하도록 법을 정해놓고 말하지 못하게 금하는 것이 되니, 후세에서 오늘날의 일을 보고 장차 뭐라고 하겠는가. 최헌중이 어제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을 보면 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데 경은 아직 보지 못했는가."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가져 와서 펼쳐놓고 읽으라고 하였다. 언호가 아뢰기를,
"신이 최헌중과 이의필의 상소를 보고나서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헤아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해야 한다.[責難於君]’는 이 네 글자야말로 신하된 자들이 이를 핑계대고 임금을 섬겨 나가는 하나의 밑천이라고 할 것인데, 책난(責難)이라고 하는 말은 임금의 덕의 부족한 면으로써 경계시키고 바로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 사학(邪學)이 치성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면 본디 그 책을 사온 자가 있고 그 학술을 전해 익힌 자가 있는데, 거꾸로 임금이 인도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어찌 원인과 결과가 조금이라도 일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식적으로 혹 이 해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저 헌중의 소에 대해 책난하는 공경스러움의 표현이라고 논하신다면, 신은 그것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라고 여겨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의 본 의도를 끝까지 따져 본다면 통분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고 증오스럽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관의 직책을 가진 자가 어찌 태연히 보고만 있으면서 헌중도 말할 자격이 있는 자라고 하여 배척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의필이 상소하여 율(律)을 적용한 것이 지나쳤다 하더라도 그를 귀양보낸 것은 정말 너무도 지나치신 일입니다. 최헌중을 표창하며 임용하신 것이 비록 간언을 포용하는 도량을 보여주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한 말이 타당해야만 상을 준 것도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미원(薇院)의 장관으로 발탁하셨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관직에 적임자를 임명해야 하는 의리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의필이 옹졸하다는 것은 평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의 일은 정말 놀랍기만 하다. 만약 헌중이 말한 것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면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고 하며 가벼운 처벌을 내리도록 청한다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기에 곧바로 그토록까지 몰아세워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단 말인가. 하나하나 상을 주고 벌을 준 것에 대해서 나는 타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학(提學) 한 사람이 올린 차자를 보면 학경(學卿)의 근일 법문(法門)과 같은 점이 있다. 양쪽 편에 모나지 않게 우물쭈물 덮어버리는 식으로 이야기해 나가면서 최(崔)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배척하지 않고 이(李)에 대해서도 죄를 주려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생각은 대체로 ‘언관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이상 모두 죄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아까 내린 비지(批旨)에서 ‘의리와 이욕은 병행할 수 없고 왕도와 패도는 함께 쓸 수 없는 법이다.’고 하였고, 또 이천(伊川)의 ‘다른 이에게 일등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훈계를 가지고 유시한 것이다.
오늘날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간에 모든 사람들이 일등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한다면 어느 일인들 간할 수가 없으며 어느 말인들 용납할 수가 없겠는가. 경이 오늘 아뢴 것도 전일에 아뢴 것과 똑같다. 최의 상소를 옳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넉넉하게 용납해 주어도 상관없다고 하는가 하면 이의 소에 대해서도 옳다고 하지 않으면서 다만 유배를 보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으니, 끝내 옛날의 상투적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하였다. 부교리 김이교(金履喬)가 아뢰기를,
"최헌중의 상소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흔쾌히 받아들이는 아량을 보여주시어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하는 거조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빈대(賓對)하는 자리에서 또 ‘일등을 양보하지 말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시며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주려고 하셨습니다. 신은 임금과 신하 간에 말을 주고받는 일 등의 의리에 대해서 진달드릴까 합니다.
요(堯)·순(舜)의 도(道)가 아니면 진달드리지 않는 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임금에게 책난(責難)했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익(伯益)은 유묘(有苗)가 완악했던 것을 가지고 순임금의 덕이 펼쳐지지 못한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며, 이윤(伊尹)은 갈백(葛伯)이 제사드리지 않는 것을 가지고 탕(湯)임금의 공경하는 자세가 경지에 오르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어찌 우(虞)·상(商) 때에는 책난하는 방식에 있어서 오히려 일등 가는 의리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음침한 골짜기에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을 가지고 따뜻한 봄 햇볕에 허물을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니 이는 이치상으로나 사세상으로 그러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학(邪學)이 교화를 막아서고 있는 것으로 말하면 유묘나 갈백보다도 심한 점이 있는데, 헌중의 상소 전편(全篇)에 흐르는 취지를 보면 전적으로 위에 있는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것이 유독 무슨 뜻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위 사학이라는 것이 은밀히 서로들 전파하고 유혹하면서 비밀스러운 교리에 빠져들어 스스로 성명(聖明)의 교화를 받지 않으려 하고 있는데, 그만 거꾸로 이렇게 된 이유를 캐면서 혹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성상의 학문이 겉치레가 심한 탓으로 돌리기도 하는 등 되는대로 마구 억측에 의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은연중에 푯대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도 곧지 못하다는 뜻으로 귀결시키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불순한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고 한 일이겠습니까. 전적으로 빠져나갈 계책을 꾸미면서 위에 책임을 전가하는 주장을 내놓고 있으니, 해괴한 궁리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학술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시키면서 그 무리를 늘려가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가령 헌중이 사학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기왕에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 마디도 명백하게 지적해 거론하지 않았고 보면 오로지 임금만 공격했다는 죄목을 또 어떻게 감히 면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를 표창하여 발탁해 주신 것은 실로 상을 함부로 주었다는 탄식을 불러 일으킬 것이니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이의필이 언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몸으로서 우리 임금에게 무례한 짓을 행하는 자를 보고 한 말씀 올리려고 생각한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직분으로 볼 때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귀양보낸 벌 역시 너무도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 할 것이니 환수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로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그 차자의 말을 보고 일등 가는 의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나이도 많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일등 가는 의리를 알도록 요구하겠는가."
하였다.

 

장령 이진택(李鎭宅)이 아뢰기를,
"시골로 쫓아보낸 죄인 박장설(朴長卨)로 말하면 천성적으로 음험한데다 행동마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일찍이 순흥(順興)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가혹하게 학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상소한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서유방(徐有防)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에 대해서 그 누가 탄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갑자기 참혹하기만 한 죄목(罪目)을 적용했으니, 도대체 어떤 심장을 가진 자이기에 이렇듯 나라를 위하는 중신(重臣)을 꼭 함정에 빠뜨리려 했단 말입니까. 그동안의 죄상(罪狀)으로 볼 때 시골로 쫓아보내기만 하고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 신은 박장설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가 탐욕스러운 정상에 대해서 눈으로 보았다고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이상 나문하여 치죄(治罪)케 한다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제도(諸道)의 고을 수령들을 자주 체차시키는 데 따른 폐단과 관련하여 전조(銓曹)에게 품처(稟處)토록 명하니, 이조가 묘당에 나아가 의논한 뒤 광주 부윤(廣州府尹) 서미수(徐美修), 파주 목사(坡州牧使) 서영보(徐英輔), 양주 목사(楊州牧使) 한광근(韓光近), 장단 부사(長湍府使) 신광로(申光輅), 통진 부사(通津府使) 황인영(黃仁煐), 직산 현감(稷山縣監) 조중진(趙重鎭), 전주 판관(全州判官) 윤광수(尹光垂), 함평 현감(咸平縣監) 김기헌(金箕憲), 고창 현감(高敞縣監) 남이범(南履範),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집두(李集斗),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배수(徐配修), 신천 군수(信川郡守) 조후진(趙厚鎭)은 그 지역 수령으로 잉임(仍任)시키고 오래 근무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아뢰었다.

 

8월 6일 갑신

전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를 잉임시켰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이 대궐 밖에까지 왔다가 정세상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끝내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추고토록 하소서."
하니, 물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 서유방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방금 장령 이진택(李鎭宅)이 품고 있는 생각을 알아보건대 정말 여지없이 나를 희롱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내 마음에 놀랍고 분한 것으로 말하면 박장설(朴長卨)에게 당한 모욕보다도 심한 점이 있다. 어찌 차마 얼굴을 쳐들고 다시 궐문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봉변을 당했다고 말할 만한 것도 이미 없는 터에 어떻게 정세(情勢)를 들먹이며 말할 수가 있겠는가. 시골 사람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 탓으로 설령 자구(字句)를 미처 점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이유로 인혐(引嫌)한다는 것은 정말 안될 일이니, 중하게 추고토록 하라. 그리고 즉시 그에게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사국(尹師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필병(尹弼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인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서춘군(西春君) 이엽(李爗)·서청군(西淸君) 이성(李煋)이 관례적으로 굽는 자기(磁器) 외에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을 별도로 구한다는 내용으로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분원(分院)의 폐단으로 말하면, 백성들과 고을에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기기묘묘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날이 갈수록 성해져 백토(白土)와 청회(靑灰)를 공급하느라 먼 지방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
연전에 갑번(甲燔)237)  의 제작을 금하라고 신칙했을 때 전교(傳敎)를 내려 정식(定式)으로 삼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명령이 확립되지 않을까 염려해서 단지 승선(承宣)으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분부하게만 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온갖 꾀를 내어 주선하면서 ‘하속(下屬)에게 불리하니 예전대로 거행하자.’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발언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또 다시 그대로 내맡겨 둔다면 기묘하게 재주를 부려 제작하는 일을 금지할 때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설사 하속에게 조금 불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민읍(民邑)의 폐단을 조금이라도 없애주는 것이 원래 마땅하다.
이른바 갑번(甲燔)의 명색(名色)에 대해서는 연전에 연석에서 내린 분부대로 하되, 이번에는 문적(文跡)으로 혁파하여 금단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년 구워 만들 때마다 경기 감사가 특별히 살피도록 하되, 만약 명령을 위반하는 폐해가 발생할 경우에는 해당 관원을 즉시 그 지방에 정배(定配)하고 나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덮어두었다가 적간(摘奸)할 때 드러날 경우에는 경기 감사가 중하게 처벌받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칙하는 분부를 내린 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하배(下輩)들만 주구(誅求)하는 것이 아니라 관원까지도 명을 위배하다니 도리상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반상(盤床)이나 병(甁)·잔(盞)을 제외한 그밖의 품목과 관련하여 규정을 범한 당상관은 파직하고 낭관(郞官)은 도태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으레 구워내는 품목이라도 쓸데없거나 긴요하지 않은 것들은 일체 만들지 말도록 엄금하라.
요즘 듣건대 각전(各殿)의 차비(差備)들이 다른 핑계를 대고 강제로 사들이는 바람에 온갖 폐단이 발생하고 있다 한다. 이 뒤로는 각전에 별도로 진상할 때, 만약 먼저 아뢰는 수본(手本)을 정원에 올려 점련(粘連)해서 계하(啓下)받지 않았는데도 단지 중관(中官)의 말만 듣고 만들어 줄 경우에는, 당해(當該) 분원(分院)의 관원을 엄히 치죄하고, 당해 각전의 장무(掌務)와 중관은 장 일백(杖一百)의 형에 처한 뒤 분원이 있는 지방에 햇수를 제한하지 말고 정배(定配)토록 하라.
이것이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사기(沙器)에 드는 비용이 유기(鍮器)와 거의 맞먹고 있으니 이 또한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할 것이다. 귀하고 천한 이의 구별이 없이 법금(法禁)이 확립되지 않고 있는 것은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하찮은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 지금 다시 금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 판하(判下) 내용을 주원(廚院)238)  과 분원에 현판으로 걸어두고 늘 보면서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8월 8일 병술

경모궁(景慕宮)에서 추향(秋享)을 친히 행하였다.

 

전조(銓曹)에 오래 근무한 자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도록 한 규정을 혁파하고, 아전(亞銓)239)  과 삼전(三銓)240)  에는 모두 장망(長望)241)  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수십 년 동안 각 품계의 관원에 대해 그 자급을 올려줄 때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혹 위에서의 특별 분부에 따라 하기도 하고 혹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데 따르기도 하였습니다만 이 모두가 조정에서 오래 근무한 신하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 이조의 당상을 차례대로 승격시켜 옮겨 준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저 나라의 대정(大政) 가운데 승진시켜 발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특지(特旨)를 내려 선발하는 경우 외에는 재질과 범절로 볼 때 차서에 관계없이 발탁해 임용하기에 합당한 자가 아닌 한 요지(要地)나 한사(閒司)를 막론하고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 지 오래되거나 경력을 많이 쌓은 자를 대상으로 하여 진신(搢紳)의 공의(公議)를 따른 뒤에 비로소 자급을 올려주어야만 너무 빠르게 승진시켜 올리는 근심이 없어지고 명기(名器)를 조급하게 차지하려고 엿보는 길이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의 규정은 도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한 번 가망(加望)하라는 명이 내려지기만 하면 묘당에서 책임이나 때우려는 자들이 번번이 이조에서 오래 근무한 자들만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이조 참의를 거치기만 하면 몇 년 뒤엔 그런 식으로 아경(亞卿)에 오르고, 한 번 이조 참판의 경력을 쌓게 되면 몇 년 뒤에 이를 인하여 정경(正卿)으로 승진되곤 하니, 구경(九卿)의 반열이라는 것이 일단 내딛기만 하면 이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끔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행히 이조에 몸을 담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조정에 수십 년 동안 있으면서 백발 노인이 된다 하더라도 한 자급도 은혜를 받아 승진될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이조 한 곳에 대해서만 승진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규정이 일단 금석(金石)과 같이 고칠 수 없는 영갑(令甲)도 아니고 보면 어찌 꼭 이를 고수해야만 하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가망(加望)할 때를 만날 경우 이조에서 오래 근무한 자를 위주로 하는 규정을 영원히 혁파하여 이로 인한 고속 승진의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그러나 이조의 관원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오래 근무한 자에 대해서는 역시 승진시켜야 할 것이며 상의 분부로 승진시켜 발탁할 경우에는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사체(事體)가 엄중해지고 조급히 경쟁하는 일이 종식될 것이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이를 알고 준행하게 함으로써 한 왕조의 제도를 성립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9일 정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였다.
"한 해에 두 번 근무 성적을 고과하면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선인(善人)을 승진시키고 불선인(不善人)을 축출하는 일대 기회라 할 것이다. 그런데 가령 사람들이 정사의 결과를 보고서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고 한다면 대정(大政)이 산정(散政)242)  과 다른 점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양전(兩銓)의 책임자로 말하면 모두가 명예를 돌아보고 명기(名器)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인 만큼 임금의 뜻을 선양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할 방도를 아무리 소홀히 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백 리 고을의 수령을 임명하고 처음 출사(出仕)시킬 때 사람을 가리는 일, 그리고 품계를 올려주고 후보자를 추천하는 일로부터 미천한 관직을 임명해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임자만을 취하면서 물아(物我)의 시각을 버리고 경계(境界)를 타파하여 공도(公道)를 넓힐 방도를 극진히 힘쓰되, 충신의 자손과 청백리(淸白吏)의 자손과 표창을 받은 수령과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들도 모두 거두어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저 과거를 통해 벼슬시키는 데 있어서 먼 지방에까지 두루 미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명색이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상황에서 등(滕)나라나 설(薛)나라 같은 소국(小國)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만큼 소규모로만 하는 폐쇄적인 정책을 행해 오다니 어찌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정사에서는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의 백성들 모두 두루 은혜를 입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 분부가 말로만 하는 분부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뜻으로 양전(兩銓)에 신칙하도록 하라."

 

최헌중(崔獻重)을 황해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그가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에 특별히 이렇게 보임(補任)한 것이었다.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 참의 박종갑(朴宗甲),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3면
【분류】인사(人事)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10일 무자

도목 정사를 행하여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승지 이상황(李相璜)을 특별히 제수한 것은 옛날의 일을 생각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상(右相)이 친구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연석(筵席)에서 또한 아뢰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겨를이 없어야 본래 옳은 일인데 아직껏 오고 간다는 말조차 없으니, 영춘 현감(永春縣監)에 제수하도록 하라."

 

경악(經幄)의 직책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버이의 나이가 환갑을 맞은 자들을 해조로 하여금 찾아내 서계(書啓)한 뒤 빈 자리가 나오는 대로 임명해 보내도록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자전(慈殿)에게 승후(承候)하는 사람이 있어야 마땅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30년이 가까워 오는 전 부총관(副摠管) 김한로(金漢老)를 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또 특별히 홍낙신(洪樂信)을 지돈녕부사에 제수하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처분을 내린 뜻이 대개 깊은 것이긴 하다마는 끝내 벼슬길을 막는다는 것도 의리가 없는 짓이다. 급제(及第) 홍낙안(洪樂安)에게 참하(參下)의 벼슬을 주되 먼 지방의 임기가 다 되어 가는 피폐한 역참(驛站)의 찰방(察訪)으로 임명해서 보내도록 하라."

 

한광계(韓光綮)를 공조 판서로, 홍성연(洪聖淵)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성(金履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이어 김이희(金履禧)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유(權𥙿)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정학(正學)을 일으켜 세우려면 먼저 선정(先正)의 집안에서 노성(老成)한 사람의 전형(典型)을 구해야 할 것이다. 정사(政事)의 규례로는 안된다 할지라도 특별히 분부한다면 구애받을 것이 없을 듯하니 전 승지 송환기(宋煥箕)를 예조 참의에 제수하도록 하라. 그러나 관직으로만 잡아둘 뿐이라면 특별히 제수한 뜻이 결코 못될 것이니 속히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라."

 

8월 11일 기축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12일 경인

함창 현감(咸昌縣監)        박재순(朴載淳)이 고을 아전 오계권(吳啓權) 등의 과거 횡령 사실을 조사해 내자 계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그의 형인 오중권(吳重權)·오재권(吳再權)과 조카 오상관(吳相寬)이 계권의 처와 서모(庶母)를 데리고 와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각각 칼을 들고 관아의 뜰에 쳐들어 와서는 장교와 군졸들을 마구 베었는데, 중권은 칼을 들고 곧장 동헌(東軒)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힌 뒤 곧바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내용을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치계(馳啓)하여 ‘죄의 경중이나 남녀를 따질 것 없이 모두 현륙(顯戮)을 가해야 마땅하다.’고 청하고, 형조 역시 도백의 장계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기강이 무너진 결과 점점 겁나는 일만 발생하고 있는 만큼 중한 형전(刑典)을 써야 한다는 의리로 볼 때에는 갑절 더하는 율(律)을 적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선조(先朝) 당시 회령(會寧) 사람이 총을 지니고 부사(府使)를 죽이려고 꾀한 일에 대해 처분하신 판하(判下) 내용 중 본떠서 적용하라는 분부가 이 옥사(獄事)의 경우에는 합당할 것 같기도 한데, 대신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은 의논드리기를,
"회령 백성의 경우는 흉기를 들지 않았고 명백한 증거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율을 적용해야 한다.[罪疑惟輕]’는 의리에 입각해서 《대명률(大明律)》의 조항을 적용하도록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대낮에 관아 뜰에 쳐들어 온 것을 대소 아전과 하인들이 모두 목격하였고 심지어 부상당한 자까지 있는 상황이고 보면 그 정상이 이미 흉악하기 짝이 없는 만큼 옥체(獄體)를 볼 때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범(首犯)이 이미 지레 죽어버린 만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3명의 죄수 가운데 죄가 중한 자를 명확히 조사해 내게 한 뒤 일률(一律)243)                  을 통쾌하게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유언호는 의논드리기를,
"중권(重權)의 무리가 떼를 지어 일어나 곧바로 쳐들어 왔고 보면 앞에 있었거나 뒤에 있었거나 간에 처음부터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중권이 지레 죽은 것을 가지고 이미 완결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흉악한 범행을 저지른 동생과 조카를 법에 처치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기강을 진작시키며 완악한 풍속을 경계시키겠습니까.
회령 백성이 그 고을 수령을 해치려고 꾀했던 일은 중권의 무리가 저지른 범행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체차되어 돌아가는 관원이었던 데 반해 후자의 경우는 관아에 앉아 있던 관원이었고, 전자의 경우는 총을 지니고 몸을 숨겼던 데 비해 후자의 경우는 칼을 휘두르며 직접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재권과 상관 모두 일률로 단안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의논드리기를,
"중권을 지레 죽게 한 것은 형정(刑政)으로 볼 때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재권(再權)이 손에 칼을 쥐고 창문을 친 것이나 상관(相寬)이 칼을 들고 관아에 들어온 것은 모두 단안(斷案)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더구나 아전의 홑바지에 찔린 흔적이 있고 다섯 사람이 동시에 부상을 당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들은 중권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니 재권과 상관을 일률로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경우는 본래 숫자에 끼워주기에도 부족한 자들이니 수종(隨從)의 율을 적용하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는 의논드리기를,
"선조(先朝)께서 회령 사람을 처분하신 것은 대체로 확실한 증거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특별히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쪽으로 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옥사(獄事)의 경우는 정황 증거가 즐비하고 공초(供招)한 내용에서도 분명히 밝혀지고 있으니, 《속전(續典)》의 ‘관장(官長)을 향해 방포(放砲)한 율’로 단안을 내린다 하더라도 안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속전》 속에서는 일단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류해 놓고 있는데 지레 죽어버린 중권이야 어쩔 수 없으니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재권과 상관을 두고 말할 때 어찌 또한 수범과 종범의 구분이 그 사이에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각자 칼을 들고 있었으니 다시 신문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한꺼번에 중한 형벌을 가한다면 또한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재권과 상관에게 형신(刑訊)을 가하여 사실을 알아낸 다음 수범과 종범으로 나누어 처단하는 것이 법의 뜻에 합치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가장 급히 힘써야 할 일로 등급과 위엄을 엄히 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그런데 더구나 이번 함창(咸昌)의 변으로 말하면 옛날의 회령 사건이나 저번의 아이진(阿耳鎭) 사건보다도 중대한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수범과 종범을 구별하지도 말고 죄의 많고 적은 것도 따질 것 없이 모두에게 극형(極刑)을 적용하는 것이 참으로 이 시대 상황에 알맞은 조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조가(朝家)에서도 어찌 생각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고을 수령들의 교화가 일단 무너져 내린 형편이고 보면 그 다음에 닥쳐올 화란(禍亂)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도 알 수 없으니 어찌 더더욱 유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단 법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에는 법대로 따라 단안을 내려 처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법 이외에 다시 특별한 법을 강구한다면 일시적으로 통쾌하게 될지는 몰라도 뒷날의 폐단이 없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진영(鎭營)에 소속된 사람이 병사(兵使)를 살해하려고 획책한 전례(前例)가 이미 북관(北關)에서 일어났는데, 그 당시 어사(御史)        이종백(李宗伯)이 장계로 보고한 것과 처치한 내용이야말로 함창 사건을 처치하는 하나의 판례(判例)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옥을 주관하는 관원들을 보면 법률 조목도 읽지 않고 옛날의 사건들을 상고하지도 않은 채 오직 최고 형을 가해 통쾌하게 하려고만 힘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런 내용으로 판하(判下)하면서 조금 가볍게 처리했던 예를 특별히 인용한 것이다. 정말 유사(有司)가 논한 대로 하기로 한다면, 성주(星州) 백성들이 수령을 죽이려고 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슨 까닭으로 또한 이미 실행에 옮긴 것[已行]과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未行]을 구태여 나누었으며 수범(首犯)과 수종(隨從)으로 나누었단 말인가. 그리고 더구나 난민(亂民)은 난적(亂賊)과 같은 만큼 난적 부도율(亂賊不道律)을 똑같이 적용해야 할 텐데 속인 것과 범행한 것을 각각 나누어 율을 적용했단 말인가. 당초 도백(道伯)의 장계를 보면 조목마다 소루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조(曹)에서는 가타부타 한 마디도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치죄(治罪)와 관련해서 의논드리는 사체(事體)라 하겠는가. 경들은 추고(推考)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이 판부사가 의논한 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이 일단 위에까지 보고된 이상 장살(杖殺)해서도 안될 것이요 《속전(續典)》이 있는 이상 추살(推殺)해서도 안될 것이니,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나눈 뒤 격식을 갖춰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3일 신묘

하교하였다.
"심도(沁都)244)   백성들을 위로해 주는 일을 늦출 수가 없다. 더구나 때때로 어사(御史)를 특별히 보내 관무재(觀武才)를 보이도록 하는 규정이 일찍이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근년에 섬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곤욕을 당했고 보면 보살펴 주는 일을 특별히 거행해야 마땅하다.
최근의 예에 따라 유생은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고 무사는 활쏘기 시험을 보여 급제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유수(留守)와 함께 시험을 보여서 뽑되, 유생의 시험은 과차(科次)를 올려보내고, 무관의 시험은 역시 갑신년의 예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기예에 모두 입격(入格)한 사람이야 물론 급제를 내려주어야 하겠지만 하나의 기예에 합격한 사람에 대해서도 특별히 모두 직부 회시(直赴會試)케 하는 한편 모두 경과(慶科) 정시(庭試)의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여 군병과 이노(吏奴) 모두 시험에 응시하게 되는데 유독 출신(出身)들만 빠지게 된다면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도리가 전혀 못된다 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따로 유엽전(柳葉箭)으로 시험을 보이되 한 차례에 두 번 이상 적중시킨 사람들을 서계(書啓)토록 하라. 그리하여 우등을 차지한 사람들은 진보(鎭堡)와 변방의 장수로 임명해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등급을 나누어 시상토록 해야 할 것이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14일 임진

인정전에 나아가 능(陵)·묘(廟)·원(園)·궁(宮)의 추석 제사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 이문원(摛文院)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문신·유생의 제술(製述) 및 전강(殿講)과 무신의 전강을 행하였다.

 

8월 15일 계사

이시원(李始源)을 강화  시취 어사(江華試取御史)로 삼았다.

 

전 정언 변경우(邊景祐)가 상소하여 탐라(耽羅)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도신(道臣)과 목사(牧使)에게 사리에 맞게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는 동시에 해당 목사에게 명하여 세 고을에 단(壇)을 설치하고 굶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8월 17일 을미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18일 병신

하교하였다.
"듣건대, 경주(慶州)에 군기시(軍器寺)에 납부하는 비상점(砒礵店)이 있는데, 구덩이를 파고 캐내는데 따른 피해가 말할 수도 없다 한다. 일단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어떻게 한 시각이라도 예전대로 할 수 있겠는가. 즉시 혁파하여 구덩이를 채우고 그 점포를 없앨 것이며 군기시에서 쓰는 것은 연경(燕京)에서 사 오도록 하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광주부(廣州府)를 승격시켜 유수(留守)를 두었다. 상이 대신 및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융정(戎政)이 바로 그것이다. 재화를 넉넉하게 하고 양식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군사를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즉위한 초기인 무술년에 여섯 가지 조목으로 자문을 구했을 때에도 맨 먼저 군영(軍營)의 제도를 언급했던 것인데 인순 고식적으로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말만 했지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수어청을 그냥 두거나 혁파하거나 간에 일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내외(內外)가 모두 피곤하기만 하니 이제 와서는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유언호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영(軍營)의 제도는 여러 갈래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의 비용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령 수어청의 존폐(存廢) 문제에 대해서는 선배들도 많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만약 수어사(守禦使)를 없애고 유수를 임명한다면,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 양식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크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를 보면 경군문(京軍門)의 명칭을 갖고 있는 것이 무려 5, 6개나 됩니다. 그중에서 수어사로 말하면 원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절제(節制)할 임무를 띠고 나온 것인데, 지금은 그만 경청(京廳)을 설치하여 도성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 제반(諸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저 남한산성의 재화만 소모하고 있을 뿐 나라에 보탬이 되는 점이 없습니다. 이번에 밤낮으로 생각하시며 계속 헤아려 오신 끝에 경청(京廳)을 혁파하기로 하신 것이야말로 훌륭한 결단이라고 할 것인데, 신에게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할 경우에는 부윤(府尹)은 자연히 감하(減下)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어사를 혁파하고 유수를 차출한 뒤 부윤의 늠곡(廩穀)을 주고 부윤의 일을 행하게 하면서 전일 경청에서 소모하던 비용 일체를 없애버린다면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보탬이 되는 점이 필시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작성해 내게 하소서."
하고, 수어사 심이지는 아뢰기를,
"수어사가 남한산성을 전적으로 관할하게 되어 있는 이상 경청(京廳)을 설치한 것 자체부터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장수가 군사도 없이 그저 약간의 표하(標下)만 거느리고서 외람되게 5영(營)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것은 더더욱 타당하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비록 유영 별장(留營別將)이 있다 하더라도 성안의 일을 광주 부윤이 전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어사가 그 사이에서 책응(策應)한다는 것도 구애되고 난처한 일이 많습니다. 지금 만약 경청을 없애고 남한산성으로 진영을 내보낸다면 유익하게 될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심환지는 아뢰기를,
"수어청의 사세로 볼 때 특별히 변통해주지 않는다면 지탱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나도 일찍이 생각했었다마는 군영(軍營)의 제도를 백년토록 그냥 놔두지 말아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가 정예로워지며 백성이 감당해 낼 수 있고 재화도 풍족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의 군제(軍制)를 보면 늘 예속되어 있는 진영이 없었고 진영도 일정하게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사태가 발생하면 아장(牙璋)245)  으로 육사(六師)를 동원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사졸(士卒)들을 기꺼이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군량을 수송하는 사람들도 고달프지 않았고 성벽도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었다.
우리 나라 초기의 병제(兵制) 역시 그러하였다. 3부(府)가 2사(司)로 되고 2사가 5위(衛)로 되었는데, 위에는 5부(部)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으며 재추(宰樞) 10인이 도총관(都摠管)도 되고 부총관(副摠管)도 되었다가 1년이 되면 체차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가령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246)  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맹부(盟府)247)  에 공이 기록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를 보건대 어찌 근래 5영(營)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바로 즉위 초기에 조참(朝參)을 행하면서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식량을 풍족히 할 계책을 물어 보았을 때에 맨 먼저 5영을 언급하면서 수어청과 총융청(摠戎廳) 2영의 존폐 문제를 끄집어내어 조정 신하들에게 의논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총융청의 중요함으로 말하면 훈련 도감이나 어영청에 버금간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동안 20년 간에 걸쳐 대충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았다마는 총융청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신중하고도 치밀하게 처리해야 하겠다. 그러니 만약 먼저 시험삼아 조금 손을 써 보기로 한다면 수어청의 군영보다 앞설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부터 수어청을 폐지하도록 하라. 대저 수어사의 이름이 반쪽은 안에 있고 반쪽은 밖에 있게 된 것이나 군영의 관아가 나갔다 들어왔다 한 것은 조정에서 서로들 갑론을박한 데에 많은 이유가 있다. 이 뒤에 감히 확정된 의논에 대해 발언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왕법(王法)으로 처리할 것이다."
하자, 좌의정 유언호가 아뢰기를,
"수어청을 일단 혁파하기로 한다면 수어사는 마땅히 유수로 교체시켜 진영에 내보내야 할 것이고 부윤도 감하(減下)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유수를 오늘의 정사에서 임명하여 비답을 내리시고 시행해야 할 규모에 대해서도 잇따라 절목을 작성하게 하여 계하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의 사례를 보면 본따 행할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경청(京廳)을 없애고 아문을 폐지하는 문제는 소상하게 강구하여 정해야만 영구히 전해지면서 폐단이 없이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전(前)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의 문적(文蹟)을 뽑아내 본사의 등록과 비교 검토케 한 뒤 묘당에서 절목을 작성해 내게 함으로써 준행(遵行)할 소지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수어청을 혁파하려고 하는 것은, 첫째 즉위 초기의 조참(朝參)하던 날 내렸던 윤음(綸音)을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요, 둘째 경기 백성들의 폐단을 줄여주고 병폐를 제거해 주기 위함이요, 셋째 경비에 보탬이 되게 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기 위함이다. 그런데 제도를 처음 정할 때 만약 심사숙고해서 마련하지 않는다면 어찌 멀리 이어질 좋은 계책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전에 혹 내보내기도 하고 혹 들여오기도 한 것이나 반 쪽은 지방에 있고 반 쪽은 서울에 있게 된 그 폐단의 원인을 따져보면 전적으로 경청을 혁파하지 않고 그냥 둘 것인지 없앨 것인지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내리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진영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경청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폐단을 바로잡는 요결(要訣)이라 할 것이니, 사목(事目)의 조항들도 이에 의거해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9일 정유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가 병으로 체직되고 서유대(徐有大)가 대신 임명되었다. 김지묵(金持默)을 장용 대장(壯勇大將)으로 삼았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방영(防營)과 토포영(討捕營) 등에 있는 군교(軍校)를 기읍(畿邑)에 있는 수청(守廳)으로 옮겨 배정하고, 서울의 표하보(標下保)와 군수보(軍需保)를 혁파하는 대신, 분사(分司)가 진영으로 나간 뒤에 각종 표하보의 명목을 가지고 다른 고을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혁파한 보군(保軍)의 이름은 여정(餘丁)이라고 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이는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의 요청을 따른 것이었다.

 

수어청을 혁파한 뒤에 전영(前營)의 존폐 여부에 대해 널리 문의한 뒤 확정해서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는 말하기를 ‘수어청과 총융청이 5영(營)의 반열에 끼어 있어 각각 전영(前營)과 후영(後營)이 되고 있으니, 이번에 진으로 내보낸 뒤에도 예전대로 전영으로 호칭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다.’ 하고, 전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는 말하기를 ‘5영 가운데 전영이라는 호칭을 이제 소속시킬 곳이 없게 되었는데, 병법(兵法)에서도 4영의 제도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 훈련원·어영청·금위영·총융청 등 현재 남아 있는 4영을 가지고 다시 차례를 정하는 것이 혹 때에 따라 온당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5위(衛)의 법에 의거해서 현재의 5영의 제도가 만들어졌으니 군기(軍機)를 장악하는 영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관계가 가볍지 않다. 따라서 4영의 제도를 지금 갑자기 의논할 수가 없다면 남한 산성의 유수(留守)를 예전대로 전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고,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는 말하기를 ‘5영 가운데에서 훈국(訓局)을 제외하고는 모두 향군(鄕軍)으로 인원을 채우고 있고, 또 사초(司哨)의 제도로 말하면 원래 수어사가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경오년에 진영으로 내보낸 것이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을 반포한 이듬해에 있었는데, 수어청을 전영으로 삼은 것은 또한 변통시키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하였습니다. 여러 장신(將臣)들의 의견이 이미 모두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니, 신들이 어찌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장신들의 의논이 꼭 타당한 것만은 아니다. 이전에 진영으로 내보내면서 반은 지방에 있고 반은 서울에 있게 하여 서울에 영문(營門)도 있고 군교(軍校)도 있을 당시에는 5영의 숫자에 끼게 한다 해도 원래 안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경영(京營)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경영의 호를 없애는 이상에는 5영이라는 칭호가 존재할 근거가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만약 여러 의논대로 한다면 관리(管理)와 진무(鎭撫) 역시 합동 군사훈련에 참여시켜 7영의 제도로 만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행(五行)보다는 조금 지나치고 팔괘(八卦)에는 미치지 못해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타당성이 없다고 할 수 있고, 또 1군(軍) 10영(營)의 설과도 다른 점이 있게 되니, 어찌 병가자(兵家者)들의 비웃음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속병장도설》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병조 판서를 대중군(大中軍)으로 삼아 삼군(三軍)을 사령(司令)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관하(管下)의 중영장(中營將)인 훈련 대장으로 말하면 허리에 삼군 사명 수기(三軍司命手旗)를 꽂고서도 대중군의 절제(節制)를 받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 만약 공과 죄를 따져야 할 때는 또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런 점이야말로 정말 구애되는 요소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병장도설》을 간행했던 초기에 동가(動駕)했을 당시 행진(行陣)의 거취(去就)에 관한 표신(標信)을 대중군(大中軍)에게만 내렸더니 대중군이 영전(令箭)으로 수가(隨駕)하는 대장에게 분부하였는데 이 때 장신(將臣) 하나가 영을 따르지 못하게 된 결과 엄한 견책을 받았다가 곧바로 사정을 봐 주도록 명한 경우까지 있었다. 그 뒤로는 대중군이 영전으로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헤아려 보건대 《속병장도설》의 제도를 개정할 필요성이 이미 선조(先朝)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5영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야말로 경장(更張)하는 것이 아니요 바로 선조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부터 수어청의 전영(前營)이라는 호를 없애버리는 동시에 총융청의 후영(後營)이라는 이름도 따로 단영(單營)으로 만들어서 삼영(三營)248)  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제도를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남한산성  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를 겸임시켜 진(鎭)에 내보내는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조가(朝家)에서 남한산성을 설치한 것은 대체로 그곳을 보장(保障)으로 삼아 위급할 때 대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산성을 지키는 신하로서는 원래 산성의 공관에 머무르면서 산성의 병무(兵務)를 다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궁(行宮)이 있는 곳마다 수리하고, 때때로 성곽을 보수하며, 병사를 훈련 시키고, 군량을 비축하며, 기계를 수선해야 할 것이니, 어느 것 하나 그 신하의 직분이 아닌 일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수어사가 진(鎭)에 나간 것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모두 두 차례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혹 8년이나 10년 정도만 있다가 곧바로 돌아와 멀리 서울에서 지휘를 하곤 하였으며 순찰하며 살피는 일도 드물기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책응(策應)해야 할 일체의 일들을 거의 모두 포기하고 말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정말 소홀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경영(京營)의 경우는 본래 군제(軍制)에도 없는 것인데 그저 8백 명의 표하군(標下軍)만 가지고서 5영(營)의 전열(前列)에 처해 있는 상태로서 이에 책응하자니 재력(財力)을 모두 밑빠진 독에 붓는 격이 되고, 이에 따른 침해로 말하면 경기 백성들이 치우치게 고통받는 결과를 빚고 있습니다. 이름은 수어사라고 하면서도 서울에 있게 했다가 지방에 있게 했다가 하는 등 실속없이 쓸데없는 하나의 아문이 되고 말았으므로 변통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상께서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고 양식을 풍족히 할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어 20년 동안 궁리해 오신 내용을 유시하시며 윤음(綸音)을 내려 경청(京廳)을 없애버리고 산성에 내보내도록 하셨으니, 이는 특별히 즉위하신 초기에 내놓으신 훌륭한 말씀을 실천에 옮기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하신 뒤에는 또 앞으로 서울로 들어왔다가 금방 외방으로 나갔다가 할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정대한 왕법(王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시면서 이를 공포하여 모든 사람이 주지하도록 보여주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거조를 취하시어 백 가지의 폐단을 모두 고치게 하셨으니, 이 어찌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실행함에 폐단이 없게끔 하신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법제(法制)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경영(京營)을 혁파하고 산성으로 내보내는 데 따른 시행 조건과 관련하여 전례(前例)를 상고하고 새로운 규정을 참작해서 절목을 작성한 뒤 아래에 조목별로 나열함으로써 영구히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1. 수신(守臣)은 광주부 유수라는 칭호를 부여하되, 정2품 이상의 관원을 대상으로 묘당에서 추천하여 낙점을 받도록 하고, 임기는 2년으로 정하도록 할 것입니다. 1. 경기 감사가 으레 유수를 겸하게 하되, 3도(都)의 예에 따라 시행토록 할 것입니다. 1. 사(使)의 호칭은 겸 남한 수어사(兼南漢守禦使)로 하되, 수원 정리사(水原整理使)나 송도 관리사(松都管理使)나 심도 진무사(沁都鎭撫使)의 예에 의거하여 병조에서 비준받아 내려 보내도록 할 것입니다. 1. 유수는 3도(都)의 예에 따라 비국 당상을 으레 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1. 병부(兵符)는 광주부(廣州府)라고 써넣고 밀부(密符)는 3도의 예에 따라 낙점(落點)을 받은 뒤 반급(頒給)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인신(印信)의 경우, 하나는 광주부 유수 인(廣州府留守印)이라고 전자(篆字)로 쓰고 하나는 남한 수어사 인(南漢守禦使印)이라고 전자로 써서 예조가 만들어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지방관(地方官)은 판관(判官)이라고 호칭하고 동시에 남한  수어영 종사관(南漢守禦營從事官)을 겸하게 하되, 문관과 음관(蔭官) 5품 이상을 대상으로 이조에서 차출하고 임기는 30개월로 정하도록 할 것입니다. 고을 다스리는 것을 판관이 주관하는 만큼 물력(物力)이 중하고 토지가 큰 점에 비추어 볼 때 군(郡)이나 현(縣)과 비교해서 따질 수가 없으니, 경력이나 명성을 상고해서 각별히 가려 임명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판관 겸 종사관의 인신(印信)은 광주부 판관 인(廣州府判官印)이라고 전자(篆字)로 써서 통용케 하되 예조에서 만들어주도록 할 것입니다. 1. 중군(中軍)은 광주 유수영 중군이라고 칭호하되 변방의 방어사(防禦使) 이상의 경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병조에서 특별히 가려 차출하게 하고, 인신은 광주부 중군 인이라고 전자로 써서 통용케 하되 예조에서 만들어 주도록 할 것입니다. 1. 경청(京廳)의 중군(中軍) 1원(員), 좌부(左部)와 우부(右部)의 별장(別將) 1원, 천총(千摠) 1원, 파총(把摠) 3원, 초관(哨官) 8원을 모두 없애도록 할 것입니다. 1. 경청의 군관(軍官) 3원,    가출 군관(加出軍官)249)  1원, 교련관(敎鍊官) 8원, 산성입사과(山城入仕窠) 1원 등 도합 13원 가운데에서 산성과 1원만 도로 산성에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도록 할 것입니다. 1. 경 표하군(京標下軍)은 모두 5백 79명인데, 예전에 진(鎭)에 내보낼 때 패두(牌頭)와 사후(伺候) 이하 군졸들은 모두 산성에 소속된 사람들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경청(京廳)의 표하군은 쓸모가 없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 늠료를 받지 않는 자들은 모두 없애버리고, 늠료를 받는 1백 62명에 대해서는 모두 적당히 3군문(軍門) 및 용호영(龍虎營)과 총융청(摠戎廳)에 나누어 소속시킨 뒤 각기 본 늠료를 주면서 사역시키다가 빈 자리가 나오는 대로 실직(實職)으로 올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직으로 오르기 전에 한 자리라도 만약 이 규정을 무시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該) 대장(大將)을 비국에서 초기(草記)하여 논죄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경청의 원역(員役)으로 서리(書吏) 이하 16인과 고직(庫直) 이하 21명은 예전에 진으로 내보낼 때 혹 따라가게 하기도 하고 혹 없애버리기도 하였는데, 이번에는 모두 없애도록 할 것입니다. 1. 경청의 군수물자와 기계 등 모든 종류의 물품들은 모조리 산성으로 수송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경청에 지급하는 미곡 2천 2백 13석(石)과 돈 7천 6백 냥(兩)은 각둔(各屯)에 복정(卜定)하되, 피곡(皮穀) 6백 석 중에서 미곡 1백 35석과 아병(牙兵) 4백 50명은 혁파하고, 수미(需米)의 제미(除米) 1백 20석은 각 둔(屯)의 경세(京稅) 명목으로 예전처럼 호조에 이송(移送)토록 하고, 미곡 1천 석과 돈 3천 냥은 균청(均廳)에서 받아 보관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미곡 9백 50석과 돈 4천 6백 냥은 모두 피곡 등 여러 종류와 함께 산성에 옮겨 떼어줌으로써 각 조목의 수요에 응하여 달 별로 지급할 수 있게 하되, 그 중 1천 5백 냥은 행궁(行宮)과 성첩(城堞)과 군기(軍器) 보수용으로 특별히 비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창고에서 쓰다 남은 것들은 매년 말에 본사(本司)가 관장하게 함으로써 새어나가는 폐단을 방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관서(關西)와 해서(海西)에서 1년마다 돌려가며 군량으로 보충해 주는 소미(小米) 5백 석은 예전대로 떼어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부에 일단 유수를 두기로 한 이상 지위가 자연히 특별해졌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 안에 있는 각 능침(陵寢)을 봄과 가을로 봉심(奉審)하는 일 및 의안 대군(宜安大君)의 묘(墓)를 매년 한 차례씩 살펴보는 일을 꼭 도신에게 시킬 필요가 없으니, 이 뒤로는 모두 유수가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행행(幸行)할 때 기영(畿營)과 분담해서 마련하던 것은 모두 면제해 주고, 다만 경내(境內)의 능침을 행행할 때에는 모든 일을 본부에서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진상품인 살아 있는 게와 살아 있는 붕어와 살아 있는 토끼와 약재(藥材) 등은 경사(京司)에서 통지해주는 대로 모두 본부에서 직접 바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유수가 공무(公務)로 왕래할 때에는 품마(品馬)를 파발마(把撥馬)로 편입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1. 유죄(流罪) 이하의 벌에 대해서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1. 공무와 관계된 일은 공문을 띄워 통지하도록 하되, 각도(各道)와 각읍(各邑)에서 소홀히 여기고 거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관리를 계문(啓聞)하여 죄를 논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광주 부윤을 혁파했으니 그가 겸대(兼帶)하고 있던 방어사(防禦使)도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토포사(討捕使)는 양주(楊州) 토포사가 이미 있는 만큼 중복되게 설치할 필요가 없으니, 똑같이 혁파해버리고, 경내의 도적을 단속하는 일은 중군(中軍)이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전 영장(前營將)은 예전대로 이천부(利川府)에 옮겨 보내야 하겠습니다. 1. 유영 별장(留營別將)과 성기 별장(城機別將)은 모두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1. 단지 중군(中軍)이 부임하거나 교체되어 돌아올 때 그리고 관문(官門)에서 집결하여 점검하고 적간(摘奸)할 때에만 말을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1. 군관(軍官) 4원은 유수가 직접 추천하여 계하받도록 하고, 검율(檢律) 1원은 3도(都)의 예에 따라 차출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좌부(左部)와 우부(右部)의 별장(別將) 및 파총(把摠)·초관(哨官)은 일단 둔병(屯兵)과 아병(牙兵)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만큼 경청의 자리를 없앤다고 하여 그대로 혁파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좌부와 우부의 별장은 경내의 자격있고 경력을 갖춘 사람을 차출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파총과 초관은 선전관(宣傳官)·부장(部將)·수문장(守門將)의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서 원래 그 지역에 거주하는 출신(出身)을 차출토록 하고, 이미 줄인 아병 파총(牙兵把摠) 한 자리와 초관 두 자리는 영원히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1. 군병은 속오군(束伍軍)이든 일반 군사이든 따질 것 없이 이번에 바로잡은 대로 실제 총액(總額)을 별단(別單)으로 작성하여 계하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액수(額數)가 감축된 군병은 기영(畿營)에 붙여두고 허오(虛伍)와 관계된 것은 하나하나 바로잡도록 할 것이며 그러고 나서 남은 액수는 여정(餘丁)이라고 이름붙여 본사(本司)에서 별도로 관장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여 혜택이 아래에까지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수령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고 도신(都臣) 역시 논책(論責)해야 할 것입니다. 1. 합동 훈련·윤회 훈련·순찰 점검 및 마병(馬兵)의 도시(都試) 등 절목은 일체 경오년에 진으로 내보낼 당시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전최(殿最)는 3도(道)의 예에 따라 직접 마감해서 아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소속 고을의 진(鎭)을 관할하는 것은 병오년의 예에 따라 여주(驪州)로 이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수원(水原)에 옮겨 온 돈과 곡식은 마감해 주고 도회소(都會所)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옮겨 보내야 할 것입니다. 1. 본부(本府)에 있는 향곡(餉穀)은 받아들였건 받아들이지 않았건 간에 장계로 보고토록 하고, 기타 경사(京司)에 속한 각 해당 아문의 곡물은 유수영에서 직접 각 해당 아문과 마감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부에서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에는 3도(都)의 예에 의거하여 유수가 시험을 주관하며 거행케 하되, 제술(製述)에서 2인, 고강(考講)에서 1인을 뽑도록 정해야 할 것입니다. 1. 유수영의 사체는 다른 곳과 자별(自別)하니, 객사(客使)에 대한 접대 또한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중국 사신 등에 대한 절목을 예전대로 거행하게 하고, 이와 함께 칙사 대접에 소요된 곡물은 회감(會減)해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사문(赦文)을 지수(祗受)할 때 유수가 유고(有故) 중이면 판관이 대행(代行)하고, 전문(箋文)을 받들고 올라올 때 판관이 유고 중이면 본부에서 기영(畿營)에 이문(移文)하여 가까운 고을의 수령이나 찰방(察訪) 중에서 차원(差員)을 정해 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본부의 하리(下吏)는 서리(書吏)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1. 하급 아문에 나누어주는 절목은 해당 유수가 전례를 참고하여 작성한 뒤 비국에 보고하고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95면
【분류】군사(軍事) / 행정(行政)


[註 249]【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조가(朝家)에서 남한산성을 설치한 것은 대체로 그곳을 보장(保障)으로 삼아 위급할 때 대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산성을 지키는 신하로서는 원래 산성의 공관에 머무르면서 산성의 병무(兵務)를 다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궁(行宮)이 있는 곳마다 수리하고, 때때로 성곽을 보수하며, 병사를 훈련 시키고, 군량을 비축하며, 기계를 수선해야 할 것이니, 어느 것 하나 그 신하의 직분이 아닌 일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수어사가 진(鎭)에 나간 것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모두 두 차례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혹 8년이나 10년 정도만 있다가 곧바로 돌아와 멀리 서울에서 지휘를 하곤 하였으며 순찰하며 살피는 일도 드물기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책응(策應)해야 할 일체의 일들을 거의 모두 포기하고 말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정말 소홀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경영(京營)의 경우는 본래 군제(軍制)에도 없는 것인데 그저 8백 명의 표하군(標下軍)만 가지고서 5영(營)의 전열(前列)에 처해 있는 상태로서 이에 책응하자니 재력(財力)을 모두 밑빠진 독에 붓는 격이 되고, 이에 따른 침해로 말하면 경기 백성들이 치우치게 고통받는 결과를 빚고 있습니다. 이름은 수어사라고 하면서도 서울에 있게 했다가 지방에 있게 했다가 하는 등 실속없이 쓸데없는 하나의 아문이 되고 말았으므로 변통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상께서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고 양식을 풍족히 할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어 20년 동안 궁리해 오신 내용을 유시하시며 윤음(綸音)을 내려 경청(京廳)을 없애버리고 산성에 내보내도록 하셨으니, 이는 특별히 즉위하신 초기에 내놓으신 훌륭한 말씀을 실천에 옮기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하신 뒤에는 또 앞으로 서울로 들어왔다가 금방 외방으로 나갔다가 할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정대한 왕법(王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시면서 이를 공포하여 모든 사람이 주지하도록 보여주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거조를 취하시어 백 가지의 폐단을 모두 고치게 하셨으니, 이 어찌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실행함에 폐단이 없게끔 하신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법제(法制)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경영(京營)을 혁파하고 산성으로 내보내는 데 따른 시행 조건과 관련하여 전례(前例)를 상고하고 새로운 규정을 참작해서 절목을 작성한 뒤 아래에 조목별로 나열함으로써 영구히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1. 수신(守臣)은 광주부 유수라는 칭호를 부여하되, 정2품 이상의 관원을 대상으로 묘당에서 추천하여 낙점을 받도록 하고, 임기는 2년으로 정하도록 할 것입니다. 1. 경기 감사가 으레 유수를 겸하게 하되, 3도(都)의 예에 따라 시행토록 할 것입니다. 1. 사(使)의 호칭은 겸 남한 수어사(兼南漢守禦使)로 하되, 수원 정리사(水原整理使)나 송도 관리사(松都管理使)나 심도 진무사(沁都鎭撫使)의 예에 의거하여 병조에서 비준받아 내려 보내도록 할 것입니다. 1. 유수는 3도(都)의 예에 따라 비국 당상을 으레 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1. 병부(兵符)는 광주부(廣州府)라고 써넣고 밀부(密符)는 3도의 예에 따라 낙점(落點)을 받은 뒤 반급(頒給)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인신(印信)의 경우, 하나는 광주부 유수 인(廣州府留守印)이라고 전자(篆字)로 쓰고 하나는 남한 수어사 인(南漢守禦使印)이라고 전자로 써서 예조가 만들어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지방관(地方官)은 판관(判官)이라고 호칭하고 동시에 남한  수어영 종사관(南漢守禦營從事官)을 겸하게 하되, 문관과 음관(蔭官) 5품 이상을 대상으로 이조에서 차출하고 임기는 30개월로 정하도록 할 것입니다. 고을 다스리는 것을 판관이 주관하는 만큼 물력(物力)이 중하고 토지가 큰 점에 비추어 볼 때 군(郡)이나 현(縣)과 비교해서 따질 수가 없으니, 경력이나 명성을 상고해서 각별히 가려 임명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판관 겸 종사관의 인신(印信)은 광주부 판관 인(廣州府判官印)이라고 전자(篆字)로 써서 통용케 하되 예조에서 만들어주도록 할 것입니다. 1. 중군(中軍)은 광주 유수영 중군이라고 칭호하되 변방의 방어사(防禦使) 이상의 경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병조에서 특별히 가려 차출하게 하고, 인신은 광주부 중군 인이라고 전자로 써서 통용케 하되 예조에서 만들어 주도록 할 것입니다. 1. 경청(京廳)의 중군(中軍) 1원(員), 좌부(左部)와 우부(右部)의 별장(別將) 1원, 천총(千摠) 1원, 파총(把摠) 3원, 초관(哨官) 8원을 모두 없애도록 할 것입니다. 1. 경청의 군관(軍官) 3원,    가출 군관(加出軍官) :  임시로 증원한 군관.

 

심이지(沈頤之)를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신대현(申大顯)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8월 21일 기해

강도(江都) 유생들의 시권(試券)을 심사하여 강화(江華)의 진사 이장후(李章垕), 통진(通津)의 유학 민창려(閔昌呂), 교동(喬桐)의 유학 남궁성(南宮惺), 강화의 유학 정진명(鄭進明) 등을 뽑고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희(金憙)가 상소하기를,
"6월 21일에 부총관(副摠管) 김한로(金漢老)가 올린 두 번째 상소를 보건대, 그 속에 우리 자전(慈殿)의 지극히 간절하고 엄절(嚴截)한 분부 내용이 소개되었는데, 이 어찌 오늘날 조정 신하로서 감히 받들고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더구나 신처럼 불충스럽고 형편없는 자가 대관(大官)의 반열에 끼어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이 그 때 피눈물을 얼굴에 적시면서 간담이 떨어진 나머지 그냥 살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는데, 물러나 시골에 있으면서 엄한 처벌을 내리시기만을 기다려 온지 지금 벌써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병 하나가 지리하게 끌어 온갖 생각이 다 재가 된 가운데 오직 자전의 분부를 밤낮으로 우러러 생각하노라면 신이야말로 천지(天地) 사이의 일대 죄인이라는 느낌만 듭니다. 만약 6, 7년 이래로 머리를 부수어 피를 쏟는 정성을 조금이라도 보이고 그 동안의 언교(諺敎)의 뜻을 약간이라도 체득했던들 어찌 다시 오늘날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리셨겠습니까. 용서받을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는 신의 죄를 분명히 알 수가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얼굴을 쳐들고 조정에 나가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세 번 생각하면 현혹된다.’250)  고 하였는데, 현혹된다는 말은 의심이 가게 된다는 뜻이다. 경이 만약 평온한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다면 전일 마음속에 오락가락하던 생각들이 장차 구름이 걷히고 얼음이 녹듯 하여 밖으로 보내고 안으로 맞아들일 것도 없고 자기 생각에 끌려 따라다니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등에 멈추면 몸을 볼 수가 없어 뜰을 거닐더라도 사람을 보지 못한다.’251)  고 한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서 그만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며칠 사이에 바람 기운이 거세어졌는데 피해 달아나느라 분주했고 보면 건강을 더 해칠 염려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의원(醫院)에 분부하여 약재(藥材)를 싸가지고 가서 전하게 하는 동시에 건강이 어떠한지 진찰해 보게 하였다.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속히 바꿔 억지로라도 일어날 수만 있으면 그 날로 출발해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2일 경자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변득양(邊得讓)을 판의금부사로, 민종현(閔鍾顯)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

 

8월 23일 신축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교리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기를,
"근일 이래로 언로가 펼쳐지지 않아 곧고 바른 말은 적요하게 들리지 않는 가운데 침묵하는 풍조가 이루어져 온통 모두 이런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역(惡逆)으로 지목하여 사람을 몰아세우는 일을 제외하고는 시시비비를 가려 사람을 탄핵하는 일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조정의 말할 수 없는 수치인 동시에 세도(世道)를 위해 나름대로 걱정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각(臺閣)을 임명할 때 추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옛스럽지가 못합니다. 대사헌의 경우는 다른 직책과 자별하게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인데, 어찌하여 요즘 들어서는 만만한 직책으로 여기고서 한 번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들 통망(通望)을 하고 몇 번 중임이 체차되었으면서도 거의 대부분이 함부로 차지하게끔 하고 있단 말입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한계선을 정하게 하여 마치 경연관이나 예조 참의가 아전(亞銓)이나 삼전(三銓)의 전 단계가 되는 것처럼 하도록 함으로써 관방(官方)이 중하게 되고 청선(淸選)이 엄숙해지게 하소서. 그 밖에 삼사(三司)의 신하들 역시 모두 신중히 가리는 동시에 오래도록 근무하게 하되, 근무한 날짜가 많이 지났는데도 끝내 일을 논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파직하는 벌을 시행케 하소서."
하고, 또 당시의 폐단을 조목별로 논하기를,
"6월은 바로 거국적으로 경사를 함께 나눈 날인데, 대신(臺臣)이 간혹 대청(臺廳)에 나가면서도 감히 전계(傳啓)를 하지 않았으니,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각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홍문관의 당직이 교대를 하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나가버렸는데 홍문관의 규정을 보더라도 그런 일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모두 조사해내어 파직시키도록 하소서.
부유한 백성들을 권유하여 분담시킨 일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깔렸는데 추수 때에 소정의 수량을 그들에게 갚아주도록 한다면 명령을 믿음성있게 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에 환곡(還穀)을 돈으로 대신 내게 하는 바람에 가난한 민호(民戶)가 본색(本色)252)  을 적게 받는 등 그 피해를 치우치게 입고 있으니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하여 그 폐단을 기필코 고치게 하소서.
근래 탐욕을 징계하지 않는데다 청렴도 권장하지 않는 등 상벌(賞罰)이 밝지 못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청백리(淸白吏)를 뽑아 아뢰게 하는 한편 탐욕을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밝히게 하소서.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사학(四學)의 재임(齋任)에게 응강(應講)케 하는 것이 거꾸로 요행히 등과(登科)하는 하나의 발판이 되고 있으니, 그 경(經)에 순통(純通)한 다음에나 품지(稟旨)하여 논상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당학(唐學)의 폐단이 점점 심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문체의 분위기가 슬프게 가라앉고 있는가 하면 서법(書法)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 학궁(學宮)에 올릴 때부터 일체 엄금토록 하소서.
기묘하게 재주를 부려 만든 기물을 사오지 못하도록 특별히 상인과 역관을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풍속이 사치스러워져 혼수(婚需)를 마련할 때 무늬있는 비단을 쓰고 있는데 저자에서도 예전대로 매매하고 있으니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다시 옛날의 금법(禁法)을 밝히도록 하소서.
송금(松禁)이 원래 지극히 엄한데 백성의 풍속이 갈수록 교묘해져 벌채하지 않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습니다. 각영(各營)의 장신(將臣)을 중하게 추고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낭관(郞官)을 파견하여 사산(四山)을 두루 살피게 한 다음 근무성적에 따라 상벌을 행하게 하소서.
산 허리 이상이 되는 곳까지 점차 개간하는 바람에 사토(沙土)가 아래로 흘러 내려 개천을 준설하는 공사가 매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경조(京兆)에 신칙하여 일체 개간을 금지하도록 하소서.
늦은 시기에 모를 옮긴 논의 경우 잘 익을 가망이 없으니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사실대로 재전(災田)으로 잡아두도록 함으로써 경사를 함께 나누는 뜻을 보여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체적으로 볼 때 모두가 시무(時務) 가운데 말할 만한 것들이다. 또 근래의 폐습이 사람을 몰아세우면서 악명을 뒤집어 씌운다고 한 그대의 말도 옳다.
그리고 대사헌을 만만한 직책으로 여기고서 대부분 무턱대로 차지하고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제한을 두도록 하라고 청하였다. 풍헌(風憲)의 책임자는 옛날로 말하면 바로 도어사(都御史)이니 그 임무가 얼마나 맑고 중하다 하겠는가.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자격이 없는 자가 차지하게 되었다면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맡아야 할 사람이 맡은 경우가 없기야 하겠는가. 그런데 가령 중하게 선발해야 한다는 이유로 마치 혁파할 것을 논하듯 하면서 제한을 정하도록 하자고 청하기까지 했고 보면 일단 통망(通望)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염치를 숭상해야 할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제한을 정하는 일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조 낭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보게 하는 한편 전관(銓官)의 의견을 갖추어 사리에 맞게 품처(稟處)토록 하라.
언관이 근무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을 경우에는 파직시키라고 청하였다. 송(宋)나라 때에 대간을 욕보이는 벌을 두어 50일을 기한으로 정한 일이 있었다마는, 옛날과 지금은 시대 상황이 각각 다르니만큼 법률로 제정해서 말하도록 요구한다면 오히려 손발을 묶어놓는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다만 전조(銓曹)에 맡겨 과감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표창하여 발탁하고 말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여 축출하도록 함으로써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정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대신(臺臣)이 대청(臺廳)에 나가서 전계(傳啓)를 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는데, 듣고 보니 너무도 놀랍기만 하다.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치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 당해(當該) 대신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홍문관 당직이 교대하지도 않고 나가다니 이는 처음 듣는 일이다. 사람이야 비록 옛날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 직책을 돌아본다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당해 옥당을 파직하라고 청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이처럼 전례에 없는 일을 행하였는데도 정원에서는 나오지 않으면 우선 정지해야 한다거나 교대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당직 교체 당시의 당해 승지를 금부에서 추고하도록 하라.
해도(該道)의 부유한 백성들을 권유하여 분담케 한 것을 돌려주도록 청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진청(賑廳)의 점목(粘目)에 분부를 내릴 때에 역시 신칙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대가 또 이와 같이 말했으니 다시 엄히 신칙토록 하라.
지난해의 환곡(還穀)에 대한 일은, 그것이 정퇴(停退)한 것이든 감면한 것이든 따질 것 없이 일단 돈으로 대신 내게 했다면 분명히 농간을 부린 점이 있을 것이니, 이 일에 대해서도 삼남(三南)의 도신으로 하여금 우선 가장 불성실한 수령 한두 명을 뽑아 보고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징계하는 발판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는 일이야말로 현재 행해야 할 급무라 할 것이다. 탐욕을 징계시키려면 먼저 이 일부터 행해야 하니 아뢴 대로 시행토록 하라. 그리고 탐오죄(貪汚罪)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는 세초(歲抄)의 사령(赦令)에서 따지지 말도록 하였는데 이 역시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니 금부로 하여금 대신에게 문의한 뒤 품처토록 하라.
사학(四學)의 재임(齋任)이 1경(經)에 순통(純通)하였을 경우 다시 그 경으로 응강(應講)케 해서 모두 순통을 얻은 다음에야 품지(稟旨)해서 논상토록 하자고 청하였는데, 이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러나 가령 직부 회시(直赴會試)케 하는 점수를 주는 일이야 1경으로 한다 한들 무슨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는 1경에 순통하거나 통(通)한 자에게는 예전대로 초시(初試)의 응시를 허락토록 하고 약(略) 이하는 처음부터 출방(出榜)하지 못하게 하라. 또 3경(經)을 모두 암송하는 자의 경우에는 약(略)이나 조(粗)의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례대로 출방하고 논상토록 하라.
근래 이른바 당학(唐學)의 일로 말하면 어찌 치세(治世)의 음(音)과 비슷하지 않다고만 하겠는가. 서법(書法)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고 한 그대의 말은 더욱 타당하다. 문임(文任)이나 반장(泮長)으로서 시험을 주관하는 임무를 지닌 자들이 관심을 갖고서 올리거나 내칠 수만 있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엄히 신칙토록 하라.
무늬있는 비단을 쓰지 못하게 금했는데도 진신(搢紳) 집안에서 혼수를 마련할 때 간혹 금법을 범하는 일이 있고 부유한 백성들이 이를 본받고 있다 하였는데, 정말 전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라가 있고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지금 이후로 금법을 범하는 사람들은 포청(捕廳)에서 규찰(糾察)하는 것으로 붙여 인반 사목(印頒事目) 안에 기재하고,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서 포장(捕將)에게 기필코 잡아들이도록 하는 동시에, 이러한 내용으로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토록 하라.
송금(松禁)에 대한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대로 시행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도성 안의 산 허리 이상을 개간한 곳을 없애도록 청한 일도 아뢴 대로 시행하라. 늦게 모를 옮긴 논에 백징(白徵)하는 일은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벌써 염려해 오던 일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에 엄하게 신칙토록 하라.
근래 구언(求言)하기라도 하면 헛소리가 꼬리를 물고 나와 오히려 세도(世道)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그대의 소는 이런 폐단을 제대로 면하였다. 그래서 조목별로 비답을 내림으로써 너그럽게 용납하는 뜻을 보여주는 바이다."
하였다.

 

8월 24일 임인

가산군(嘉山郡)의 갈마창(渴馬倉)을 정묘년의 제도에 따라 고쳐 짓도록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효성령(曉星嶺)은 바로 관서(關西) 관방(關防)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이고 또 옛날에 성진(城鎭)을 두어 진수(鎭守)하던 곳인데 이는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 이룩한 일이었다. 이에 창고를 설치하여 군량을 비축한 결과 순전히 대미(大米)로만 1만 석 가까이 되었는데 이는 삼남(三南)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일로 병사(兵使) 이일제(李日躋)가 경륜한 수고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 형세가 기이하고 웅장한 것으로 말하면, 도신(道臣) 이종성(李宗城)과 수신(帥臣) 장태소(張泰紹)·정찬술(鄭纘述) 등 여러 사람이 그 동안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더라도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대개 구현(駒峴)이 효성령 우측에 있고 그 고개 아래에 있는 창고 앞으로 큰 들판이 펼쳐져 있고 보면 그 제압하는 형세가 좌우로 발 뒤꿈치를 세우고 장강(長江)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점이 있으니, 창고의 이름과 여울의 명칭이 갈마(渴馬)로 전해져 내려온 것도 정말 이유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감히 하찮은 일개 진장(鎭將)이 보잘 것 없는 꾀를 가지고 새로 지으면서 옛날의 것을 없애버리는 바람에 형국(形局)이 바뀌어져 흡사 다리를 묶어놓고 입을 재갈물린 것처럼 되고 말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각읍에서 받아들여 보관해 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창고 아래의 민호(民戶)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다. 관방(關防)을 중히 하고 좋은 형세를 만들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일단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어떻게 복구하여 수선하는 정도로만 끝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연전에 중수(重修)할 당시의 해당 진장(鎭將)을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잡아오게 한 뒤 창해(倉廨)에서 개좌(開坐)하고 엄히 곤장을 쳐서 징계토록 하라. 그리고 이 전교 내용을 해진(該鎭)의 청사 벽에다 걸어놓도록 하라."

 

어사(御史) 이시원(李始源)과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이익(金履翼)이 본부(本府)에서 실시한 무시(武試) 및 별시(別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치계하니,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창원  안핵 어사(昌原按覈御史) 유경(柳畊)이 이여절(李汝節) 사건을 치계하니, 금오랑(金吾郞)을 파견하여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 및 판의금의 의논을 수합하게 하고, 또 금부 당상 및 비국 당상들에게도 각각 의견을 개진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은 의논드리기를,
"이여절이 장살(杖殺)한 인명이 무려 25인이나 되는데, 형구(刑具)도 제도에 어긋나고 형신(刑訊)도 제멋대로 잔혹하게 가하였으니, 목숨으로 갚게 하는 율을 어떻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특명으로 안핵(按覈)하는 상황에서 피살자의 친척들에게 공갈을 치고 하리(下吏)를 위협하면서 오로지 기만하려고만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율(律)대로 처단하소서."
하고, 좌의정 유언호는 의논드리기를,
"곤장을 치면서 한결같이 정해진 제도를 바꾸어 하였고 마구 형신을 가하면서 오직 제멋대로 잔혹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장(官長)이 사람을 죽였을 때에는 혹 정상을 참작해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나올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공적(公的)으로 했느냐 사적(私的)으로 했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사가 아뢴 내용을 보건대 혹 공적인 일로 죄를 판결하느라 그랬다고도 하고 혹 감영에 보고하고 형신할 것을 청했다고도 하였는데, 이 점으로 보면 조금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사자에 한하여 사형을 면해 주고 섬에 유배보내도록 하소서."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의논드리기를,
"관장(官長)에게 목숨을 내놓게 할 경우 신은 조정에서 임명한 관원의 권위가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리하여 아이진(阿耳鎭)이나 함창(咸昌)에서와 같은 변고가 장차 3백 60주(州)에서 계속 일어나 더욱 여지없이 기강이 추락될 것이니, 목숨을 내놓게 한다[償命]는 두 글자는 논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다만 형구(刑具)의 규정을 어겼다는 것으로 중하게 논감(論勘)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김이소는 의논드리기를,
"혹 공적인 일 때문이었다고도 하고 혹 감영에 보고했다고 하니, 아무 이유없이 마구 죽인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는 의논드리기를,
"살인죄는 일률(一律)로 다스리게 되어 있는데 그 사람이야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만 법을 제정한 깊은 뜻을 헤아려 볼 때에는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윤시동은 의논드리기를,
"목숨을 빼앗긴 20여 인 가운데 아무 죄도 없었던 사람이 4인이고 4인 가운데 그 고을의 자제 아닌 사람이 3인이었습니다. 그 정상을 살펴 율(律)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한(漢)나라 약법삼장(約法三章)의 첫째 조목을 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신은 다른 의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심환지는 의논드리기를,
"‘부잣집 아들은 저자에서 죽게 하지 않는다.’는 옛날 속담이 있기 합니다만, 여절이 요행히 살아날 경우 국법은 중도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민종현은 의논드리기를,
"《대전통편(大典通編)》의 형전(刑典)을 보면 관리가 함부로 형신(刑訊)하다가 죽게 했을 경우 목숨을 내놓게 하는 법조문이 없습니다. 또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에 관인(官人)이 장살(杖殺)한 것을 대질 신문하게 해야 하느냐의 여부와 관련,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관하(管下)를 장살한 것은 사죄(死罪)까지 되지는 않으니 대질 신문을 하지 말라.’고 의논드리자 이에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증(李曾)이 시종(侍從)으로서 어떤 사람을 결박지운 채 물에 빠뜨려 죽이자 그를 사형에 처했고, 유신일(兪信一)이 수령으로서 이웃 고을의 사인(士人)을 곤장치다가 죽게 하자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하(管下)가 아닌 경우에는 예전부터 목숨을 내놓게 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여절이 함부로 죽인 것이 비록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일단 피살자들이 경내(境內)의 백성들인 이상에는 그래도 조금 살려줄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현(鄭鉉) 등을 죽게 한 것이 과연 공적인 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적인 일 때문이었는지 하는 것이야말로 여절의 생사(生死)에 관건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하여 완벽하게 조사를 한 뒤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인지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어야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형(刑)을 신중히 하는 방도에 비추어 볼 때 온당한 일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신 정호인(鄭好仁)·조엄(趙𧟓) 등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신과 경재(卿宰)의 의논을 수합해 본 결과 들쭉날쭉하여 같지가 않으니, 신들처럼 견식이 우매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로 확정하여 의논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들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인명을 함부로 살해한 법조문을 적용할 경우 일률(一律)을 섣불리 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알 뿐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개 수령의 목숨을 내놓게 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이렇듯 이쪽 저쪽을 살피는 말을 하다니 왕부(王府)의 체모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 이여절을 죽여야 할지 죽이지 말아야 할지는 공적인 행위였느냐 사적인 행위였느냐에 달려 있는데 경들이 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죽이고 살려야 할 즈음에 처결할 수가 있겠는가. 여러 의논 가운데 예조 판서의 말이 매우 적당하다. 여절은 우선 칼을 씌워 중죄수(重罪囚)의 옥사(獄舍)에 가둬 두도록 하라."
하고, 곧 이어 영남의 전 도신을 나문(拿問)한 뒤에 여절을 다시 엄하게 신문하여 자복(自服)을 받아내라고 명하였다.

 

8월 25일 계묘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별군직(別軍職)·내승(內乘)·선전관(宣傳官)의 가을철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8월 27일 을사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임명하면서 판중추부사에 단망(單望)으로 추천하라고 하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보국 대부(輔國大夫)의 경우는 정1품이기 때문에 판부사를 제수해도 해조(該曹)의 판서를 겸하게 할 수 있지만 숭록 대부(崇祿大夫) 이하의 경우는 판서를 겸대(兼帶)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판부사로 하비된 뒤에는 두 직책이 모두 실직인만큼 판서의 직책을 그대로 갖게 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종1품의 판부사가 예전에는 많이 있었을지 몰라도 요즘에는 드물게 나온다. 그런데 경의 조(曹)에서 거행할 때 이에 어리둥절한 것은 우선 차치하고라도 당사자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가령 부사(副使)에게 정경(正卿)의 직위를 차용하여 제수할 경우 나와서 숙배(肅拜)하지도 않고 그 직함을 써 넣으려고 하지도 않는데 이는 격례(格例)에 어긋나는 일이니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신칙하라. 예조 판서의 자리는 궐원(闕員)으로 하여 후임자를 임명토록 하라."
하였다.

 

윤필병(尹弼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28일 병오

여섯 가지 경사를 합쳐 보이는 정시(庭試)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8월 29일 정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윤영휘(尹永輝)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토록 하고, 그 다음을 차지한 진사 김명순(金明淳) 등 1백 인에 대해서는 모두 이번의 경과(慶科)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토록 하였다.

 

8월 30일 무신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재숙(齋宿)하였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신대현(申大顯)을 삭직시켰는데, 임금 행차 때 표신(標信)을 내달라고 즉시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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