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1795년 9월

싸라리리 2025. 8. 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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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기유

상이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교리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한 데 따라 도헌(都憲)253)  의 자격을 제한하는 일과 관련하여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더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은 의논드리기를 ‘도헌의 직책으로 말하면 육경(六卿)에 비교해 보더라도 더욱 중한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연관(經筵官)이나 반장(泮長)254)  에 이미 통청(通淸)된 사람들 가운데 풍도(風度)가 있고 언론이 확립된 사람으로 대상을 한정하여 의망(擬望)하게 한 뒤 오래도록 그 직책을 수행하도록 한다면 선발을 신중히 하고 실효를 책임지우는 방도에 있어 합당하게 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는 의논드리기를 ‘도헌의 직책이 지위와 명망으로 볼 때 자별(自別)하기는 하나 단지 한 세상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명성과 풍도를 갖춘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직책을 부여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전조(銓曹)에서 통망(通望)하는 예까지 끌어당겨 그 한계를 정하게 한다면 이는 손발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과 흡사하게 될 것이니, 차라리 전조에 맡겨 두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조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가리게 하되 이 세상에서 최고의 명망을 가진 자를 기준으로 하게 하면 관청의 기율도 자연히 중해지면서 옛날처럼 복구되는 효과도 그런대로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의논드리기를 ‘관직에 적임자를 뽑는 일은 모두 전형(銓衡)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지금 관청의 기율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여 자리마다 한계를 정한다면 화살이 떨어지는 곳마다 표적을 세워놓는 것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 도헌을 제대로 택하려면 먼저 전조(銓曹)의 관원을 가려 뽑아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김이소(金履素)는 의논드리기를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이 전관(銓官)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신중하게 가려 뽑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한계를 정하기로 한다면 이미 통망(通望)된 사람들을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되, 연전에 대사성을 변통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의논드리기를 ‘도헌의 직책이야말로 지위나 명망으로 볼 때 지극히 높은 곳인데 만약 예전처럼 되도록 하려면 전조(銓曹)의 격례(格例)를 다시 밝히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경술(經術)이나 덕망(德望) 면으로 보거나 혹 언론이나 풍도 면으로 볼 때 한 세상에서 최고의 명성을 지닌 자를 기준으로 하게 한다면 모든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이 자연 도헌이 거쳐야만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도헌에 합당한 자가 꼭 전조의 마음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없고 전조에 합당한 자가 꼭 도헌의 마음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둘로 나눌 수도 없는 일이니, 이는 전조를 담당한 자의 권형(權衡)에 맡겨 두는 것이 온당할 듯도 싶습니다.’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의논드린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도헌의 직임으로 말하면 예로부터 도를 행하는 직책이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경악(經幄)의 우두머리로서 계옥(啓沃)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도 오히려 풍헌(風憲) 쪽이 더 중하다고 하여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하였고,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이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한 뒤에 처음 도헌에 임명되자 그 기쁨을 고모(姑母)인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의 부인에게 고하였던 것인데, 지금까지도 이것이 미담(美談)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질이 시대에 따라 낮아지면서 직책도 이와 함께 가벼워졌으니, 지금 비록 한 시대의 최고 가는 인물을 선발한다 하더라도 관청의 기율은 점점 예스럽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한계를 정함으로써 이에 의지하여 다행히 죄스럽지 않게끔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뒤로 도헌을 통의(通擬)할 때에는 대사성이나 전조의 당상관이나 경연관이나 문임(文任)255)  에 통망(通望)된 사람들 중에서 다시 더 가려 의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도헌으로 통망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전에 대사성과 예조 참의의 길을 둘로 나눈 뒤에 정했던 제도대로 따르게 하되 지금은 당분간 의망하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림(山林)의 명망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제한에 구애받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밖에 승지나 외임(外任)에 대해서도 계청한 뒤에 의망할 수 있게 하고 이망(二望)으로 의망해 들일 경우에는 아전(亞銓)256)  과 삼전(三銓)257)  의 예처럼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 규정을 정하도록 한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초기(草記)의 끝에 나오는 말대로 시행해야 하겠다. 그런데 한계를 정해 규정을 세우는 것은 그 관직을 중히 여기고 선발을 엄히 하는 의리가 결코 못된다 할 것이니, 이 점은 한두 대신이 말한 것이 옳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일들 대부분이 모양을 만들어 주어야만 그럴 듯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경들이 한계를 정해놓자고 청한 것일텐데, 오늘날 사람들이 아무리 옛날 사람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스스로 나아지려고 하는 사람을 특별히 찾아본다면 어찌 혹시라도 비슷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는가. 또 설령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문제는 어떻게 배양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한계를 정해두지는 말고 우선 특별히 가려 임명하도록 하라. 그 밖에도 격양(激揚)할 즈음이면 반드시 몸과 이름을 아끼고 명분과 의리를 중히 여겨 꽤나 진퇴(進退)에 담박한 자세를 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임용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도헌을 의망할 때 그 대상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오게 될 것이다. 정사(政事)를 행할 때마다 이 점을 유념하고 빈 자리가 나올 때마다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구임(久任)시키며 경에게 기대하는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4일 임자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와 전시(殿試)를 행하였다. 문과(文科)에서는 이경윤(李卿尹) 등 10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는 김성학(金聲鶴) 등 5백 1인을 뽑았다.

 

9월 6일 갑인

직접 전시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 윤명렬(尹命烈)의 응시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다. 명렬의 면시(面試) 시험 답안지가 상의 뜻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환지(沈煥之)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민종현(閔鍾顯)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9월 7일 을묘

하교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계류된 살옥(殺獄) 문안(文案)과 관련하여 수응(酬應)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요즘 들어 해조(該曹)에서 죄인에 대한 의논을 수렴해 들이면서 기한을 어기고 넘기는 것이 신칙하기 전과 다름이 없다. 당해 당상을 추고하라.
또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 옛날에는 조지(朝紙)에 내지 않더라도 가령 살옥 등의 문안을 판하(判下)할 경우 이는 대간과 서로 관계가 있는 일인 만큼 발계(發啓)258)  할 것이 있으면 발계했다고 하는데 요즘 들어서는 이 규정이 전연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대신들마저 사람을 죽인 옥사(獄事)를 어떻게 처결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한다. 그러고 보면 관아 안에 따로 검상청(檢詳廳)을 설치한 본의와 서로 어긋나는 것이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의견을 모아서 규정을 만든 뒤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고, 대신과 대간으로 하여금 일률(一律)259)  과 관련된 옥사에 같이 참여토록 하라."

 

9월 8일 병진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10일 무오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문과·무과의 방방(放榜)260)  을 행하였다.

 

9월 11일 기미

이재학(李在學)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2일 경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국가의 중대사로는 대벽(大辟)을 결절(決折)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신은 단지 계복(啓覆)할 때에만 연석(筵席)에 올라가 논의에 참여하기 때문에 일률(一律)에 대해 의논드린 것이 이치에 합당한지를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검상(檢詳)은 대신의 낭청(郞廳)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살옥(殺獄) 문안을 살펴보게 하고 있는데, 더구나 대신인 신분으로서 대벽을 결절하는 것을 간여할 필요가 없는 일쯤으로 간주한다면 이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이번에 전교를 내리시면서 일단 인명을 중히 여기는 방도에 관심을 갖게 하고 또 국체(國體)를 존엄하게 하는 도리를 힘쓰도록 하신 만큼, 지금부터 형조의 살옥 문안을 의논드릴 때에는 반드시 대신의 눈을 한 번 거친 뒤에야 입계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으로 하여금 혹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때마다 논열토록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대간에 대해서는 판하하고 계하된 뒤에 시임 대간들에게 돌려 보임으로써 공의(公議)를 채집한다 해도 안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뒤로 형조의 살옥 문안과 관련, 서울의 완결(完決)된 것과 지방의 녹계(錄啓)된 것은, 병조에서 상가(賞加)하는 예에 따라 반드시 대신의 손을 거친 뒤에 입계토록 하고, 판하한 뒤에 공람에 돌리도록 하라. 기타 제도(諸道)의 사계(査啓)나 품계(稟啓) 등의 일로서 살옥과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도 계하된 뒤에는 돌려 보이도록 하고, 이상의 내용을 규정으로 정하도록 하라. 그리고 시임 대간에 대해서는 단지 완결된 것과 녹계된 것 그리고 기타 사수(死囚)를 참작해서 판결해야 할 것 등에 한하여 판하한 1건을 등사하여 여러 대간들에게 돌려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4일 임술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발간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에 명하여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遺稿)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편찬해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內帑)의 돈 5백 민(緡)과 어영(御營)의 돈 5백 민을 내려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6일 갑자

이방일(李邦一)을 특별히 제수하여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9월 18일 병인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호(廟號)를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사체상으로 외람스럽기만 합니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이나 평양(平壤)의 숭령전(崇靈殿)과 같은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으로 하여금 편액(扁額)의 이름을 정하게 한 뒤 본부에서 써서 현판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后王)을 제사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전호(殿號)가 없다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공사(公私) 간의 문적(文跡)에 이름을 가지고 임시로 일컫는 것은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그런 줄 안 이상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쳐야 마땅하니, 숭렬전이라는 칭호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대전통편(大典通編)》·《오례의(五禮儀)》 등 책을 즉시 세보개정(洗補改正)토록 하라. 그리고 마침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대신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현판을 거는 날에는 수신(守臣)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9월 19일 정묘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에서 쓸 의대(衣襨)와 향촉(香燭)을 봉한 뒤 이문원 문 밖에서 지송(祗送)하였다.

 

9월 20일 무진

경상우도의 분곡(分穀)261)  과 유곡(留穀)262)  을 적간(摘奸)한 문관 비변랑(備邊郞) 정만석(鄭晩錫)이 아뢰기를,
"환곡(還穀)과 관련된 아문(衙門)의 명목(名目)이 엄청나게 많은데, 원회곡(元會穀)의 경우는 그 명목이 무려 80가지나 되고 상진곡(常賑穀)의 경우도 그 명목이 14가지나 됩니다. 똑같은 미두(米豆)인데 어찌하여 어떤 아문으로 나누고 똑같은 조속(租粟)인데 왜 그 명목을 따진단 말입니까. 가져다 쓸 때에는 나누어 구별하는 것이 없는데 장부를 보면 눈이 어지럽기만 하니, 수령은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운 반면에 간사한 아전들은 농간을 부리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문서를 전적으로 아전의 손에 맡기는 것이 본래 습관화되어 고질적인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환곡 장부의 경우 제 아무리 수령이 열심히 보살피려 해도 아전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곡물이 점점 축나면서 백성과 나라가 피해를 받게 되는 이유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곡(耗穀)을 취하는 것도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똑같은 원회곡인데 모곡을 10분의 1만 받기도 하고 4분의 1을 받기도 하며 전액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개색(改色)하기도 하니, 그 폐단으로 말하면 앞의 것보다도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80가지의 명목으로 된 원회곡을 통틀어 원회곡이라고 일컫고 14가지의 명목으로 된 상진곡을 온통 상진곡이라고 부르게 한다면 관청에서 제대로 장부를 살피고 아전이 농간을 부릴 수 없어 가져다 쓸 때 축나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곡을 취할 때에는 많은 곳은 덜어주고 적은 곳은 더 내게 하는 법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중간을 취하여 이쪽이나 저쪽이나 일방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규정을 만든다면 위로 손해보는 일이 없고 아래로 새어나가는 일이 없게 되면서 문란한 폐단을 그런대로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안이 변통하는 일과 관계되는 만큼 묘당에 문의하여 처리케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문의 곡물 명목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런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책문(策文) 제목을 내어 음관(蔭官)에게 물어 보았던 것인데, 그대의 말이 지극히 조리가 있으니, 거조(擧條)를 내도록 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의 방책을 강구하여 확정토록 하겠다. 그리고 가령 상평청(常平廳)과 진휼청(賑恤廳)도 합쳐서 하나의 관청으로 만든다면 폐단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두루 제도(諸道)에 미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런 뜻을 잘 알고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1일 기사

경상도 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을 삭직시키고, 이여절(李汝節)을 위원군(渭原郡)에 유배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조진택의 원정(原情)을 가지고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좌의정 유언호(兪彦鎬)는 의논드리기를 ‘이여절이 두 정가(鄭哥)의 일에 대하여 이미 모두 감영에 보고했다고 한다면 참작해서 용서해 줄 길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조진택은 원래 예전에 조사를 세밀히 하지 못한 잘못이 있어 유배된 만큼 그것으로 그의 죄를 징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의논드리기를 ‘이여절이 감영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은 사실이 일단 명백해진 이상 함부로 형을 가해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목숨을 내놓도록 단안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조진택은 잔혹하게 형을 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한 번도 사실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 관찰사의 책무가 정말 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조정의 기대를 저버린 죄에 대해 엄히 논하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의논드리기를 ‘이여절이 감영에 보고한 내용을 보니 왕부(王府)에서 공초(供招)한 것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무턱대고 일률(一律)로 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차율(次律)의 중전(重典)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여러 대신이 의논드린 내용이 모두 그러할 뿐만이 아니고 경들의 의논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함부로 형을 가한 율(律)로 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죄를 적용하면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니, 어찌 너무도 관대한 형벌이 되지 않겠는가. 이여절은 이 판부사가 의논드린 대로 차율(次律)을 적용토록 하라.
조진택의 경우는 당초 유배보낸 것이 이여절의 범행이 사적(私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술을 들어보건대 감영에 보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분간(分揀)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감영에 보고했건 공적(公的)으로 행한 일이건 간에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놔둔 죄는 용서받기 어렵다. 우상이 의논드린 대로 관찰사의 책무에 불성실하여 조정의 뜻을 저버린 죄를 적용하되, 이 율로 유배보내는 것은 지나친 점이 있으니 유배는 용서해 주고 삭직하는 처벌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3일 신미

선전관(宣傳官)이 내금위(內禁衛)를 겸대(兼帶)하는 규정을 회복시켰다.

 

9월 24일 임신

심환지(沈煥之)를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와 어영 대장 이한풍(李漢豐)을 시골로 쫓아보내라고 명하고, 이주국(李柱國)을 특별히 훈련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을 설립한 뒤의 등록(謄錄)을 삼가 상고해 보건대, 옛날 효묘조(孝廟朝) 때 본조(本曹)에서 아뢴 내용 가운데 ‘겸 선전관(兼宣傳官) 11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최초에 이 제도를 만들어낸 의도와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모두 상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숙묘조(肅廟朝) 병인년에 이르러 지중추부사 신여철(申汝哲)이 계청하기를 ‘옛날 규정에 의거하여 선전관 20인 가운데 10인은 기사(騎射)를 잘하고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차출해서 겸 선전관이라고 이름붙이고 내금위(內禁衛)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하자, 상이 허락했었습니다. 그리고 선대왕 정사년에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금군(禁軍)이 날이 갈수록 점점 쇠잔해지고 있다는 이유로 계청하기를 ‘선천(宣薦)263)   취재(取才) 출신(出身) 40인과 부장(部將) 취재 출신 15인과 수문장(守門將) 취재 출신 15인 등 도합 70인을 금군 7번(番)에 매번당 10인씩 배정하고, 참하(參下) 선전관 두 자리와 참하 무겸(武兼) 한 자리와 참하 부장 한 자리와 참하 수문장 한 자리는 선천(宣薦)·부천(部薦)·수천(守薦) 취재의 부류들로 채워 금군의 임무를 부여하되,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마다 의망(擬望)해서 차임하도록 규정을 정해야 한다.’고 하여 윤허를 받았고, 그 뒤에 절목을 작성해서 계하받았었습니다.
지금 숙묘조 때 고(故) 장신(將臣)이 아뢴 것을 가지고 보면 옛날에 겸 선전관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선왕조 때 고(故) 중신(重臣)이 아뢴 것과 그 절목을 참조해 보건대 선전관 후보로 추천되는 사람들은 모두 금군의 액수(額數) 안에서 나왔던 옛날 규정을 또한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인 지금에 와서 당초 겸 선전관 제도를 창설한 것이나 중간에 이 제도를 폐치(廢置)하게 된 문적(文蹟)을 상고해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정유년에 특별히 하교하신 뒤로는 내금군(內禁軍)을 일체 선천(宣薦)의 자리로 정하였고 지벌(地閥)있는 무사로서 처음 벼슬길에 나와 선전관이 된 자들을 보면 모두가 이 가운데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의 겸 선전관이라는 관직을 다시 설치한다는 이름은 없었어도 실제로는 다시 설치한 뜻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참하 선전관 및 액수(額數) 이외의 장용위(壯勇衛)를 자리 숫자대로 나누어 배정하되 몇 자리는 내금위에 소속시키고 몇 자리는 액수 이외의 내금위에 소속시킨다면 참작해서 행할 만한 방도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가지고 오래된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물어보아도 귀일되는 명백한 주장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단 금석(金石)과 같은 법전이 있는 이상 고례(古例)를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수문장과 부장의 실직(實職) 역시 7번(番)에 그 자리를 배정해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주국(李柱國)과 조심태(趙心泰)를 제외하고는 명색이 무장(武將)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하다니 이따위 장신(將臣)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정말 형편이 없으니 모두 그들이 차고 있는 병부(兵符)를 환수하고 시골로 쫓아보내되 한성부 낭관을 나누어 보내 즉시 압송토록 하라. 그리고 전 대장 이주국을 훈련 대장에 제수한 뒤 패초(牌招)하여 명소패(命召牌)를 전해 주고 어영 대장의 후임을 임명할 동안 훈련 대장이 겸임하여 그 업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가 또 아뢰기를,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용호영(龍虎營) 속조(續條)를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금군청(禁軍廳)에 선천 취재 출신 40인과 부장 취재 출신 15인을 뽑아 소속시킨다는 글만 있을 뿐 수문장 취재 출신 15인은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고 중신이 품(稟)하여 절목을 정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거행해야 합니까? 그리고 금군을 7번(番)으로 하는 것으로 말하면 지금은 감소되어 6번으로 하고 있는데, 자리를 정해서 나누어 배정할 즈음에 매번당 선천은 몇 자리를 배정하고 부천은 몇 자리를 배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7번이라고 한 것은 옮겨 소속시킨 1번까지 합쳐서 계산한 것이다. 그리고 비율을 나누어 자리를 정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할 일이니, 훈련 대장 및 수원 유수(水原留守)와 함께 상의해서 하도록 하라. 《통편》과 영성(靈城)264)  의 아뢴 내용에 차이가 나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 자리를 정하고 나서 초기(草記)한 뒤에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6일 갑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진법(陣法) 훈련 및 겨울철 시사(試射)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을 행하였다.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송환기(宋煥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29일 정축

어영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잉임(仍任)시켰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득신(李得臣)을 특별히 병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한용귀(韓用龜)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재실(齋室)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내년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고 하니, 우리 나라 입장에서 행해야 할 절목들을 미리 강구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직제학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건대, 호조 판서가 방물(方物)을 보내는 일과 관련하여 미리 강구해서 마련할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는데 그 말이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래도 내년 봄 이후의 일에 속하니, 지금부터 미리 강구해 둘 필요가 있겠는가.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하게 전해 온 기별이 있는데, 새 황제의 연호(年號)까지 벌써 정해졌다는 말이 들려온다. 이는 그야말로 대국(大國)에 있어 전에 없는 경사라 할 것이니, 별사(別使)를 보내어 경하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례(前例)가 일단 없는 만큼 이번에 보내는 사행(使行)을 정해진 기일보다 먼저 들여 보냄으로써 보통의 해와 조금 다르게 하는 뜻을 보여준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대국에서 만약 혹시라도 왜 사행이 보통 때보다 조금 일찍 들어왔느냐고 의문을 가질 경우 다른 해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대국에서도 필시 그럴 듯하게 여길 것이다. 무릇 대국이 외국에 대해서 특별히 우대하는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대(事大)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본래 당연한 일인데, 더구나 지금의 황제가 우리 나라를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니,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황제가 우리 나라를 우대해 준 것이야말로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60년 동안 태평스러운 정사를 펼친 것은 진(秦)나라나 한(漢)나라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인데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세(一世)265)  를 가운데 두고 모두가 60년의 태평시대를 향유하였는데, 강희(康熙)266)  에 비해 건륭(乾隆)267)  이 더욱 왕성하다고 하겠다.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벌써 25세였는데 즉위한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에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으니 이는 과거 역사를 상고해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강희는 60년이었는데 건륭은 앞으로 또 몇 년이나 더 향유할지 모를 일이다. 옛날 한(漢) 무제(武帝)가 가장 오랫동안 나라를 향유했다고 일컬어져 오지만 그것도 54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밖에 양(梁) 무제(武帝)나 송(宋) 고종(高宗) 같은 경우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사행(使行)을 기일에 앞서 들여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널리 물어보고 나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약 여러 의논들이 일치될 경우에는 즉시 거조(擧條)를 낸 뒤에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금위 대장 이방일(李邦一)을 삭직하였다.
이방일이 본영(本營)에서 봉급으로 지급할 미곡을 마련할 길이 전혀 없다면서 임금 앞에 나아와 주달하였는데,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연석(筵席)의 체례(體例)가 지극히 엄한 만큼 이방일이 이처럼 시끄럽게 떠든 것만도 해괴하고 망칙스럽기 그지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난번에 전교하신 것이 얼마나 준엄하셨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이런 일을 제기하여 아뢰면서 마치 조정에서 변통해 주기를 청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더욱 방자하다고 할 것입니다. 속히 삭직시키는 처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 것이었다.

 

구윤명(具允明)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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