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1795년 10월

싸라리리 2025. 8. 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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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인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평안도 유생 양택구(楊澤九) 등이 상소하기를,
"태사(太師)268)  의 유상(遺像)을 인현 서원(仁賢書院)에 봉안하고 중정일(中丁日)269)  에 제사드리고 있는 것은 더없이 숭상하는 예법이 못됩니다. 태사께서 남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정치를 행하셨으니 그 지위로 보면 임금이요 그 치도(治道)로 보면 스승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원이라고 일컫고 중정일에 제사드리는 것은 지방의 현인(賢人)을 기리는 예를 적용한 것이니 어찌 예법에 맞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태사의 옛 궁궐 터가 기성(箕城)에 있어 팔교(八敎)의 문(門)과 구주(九疇)의 단(壇)이 완연히 서 있는데 그 아래가 바로 태사께서 토지를 직접 구획하신 곳입니다. 인현 서원을 옛 궁궐 터로 옮겨 세우면서 서원의 명칭을 학관(學館)으로 고치고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드림으로써 부자(夫子)의 사당에서 하는 것처럼 본뜨게 한 뒤에야 태사를 높이 받드는 도리에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효묘(孝廟)께서 서원에 거둥하셨을 때 남기신 필적 역시 따로 어서각(御書閣)을 세워 소장케 함으로써 성조(聖祖)께서 도를 높이신 위대한 일을 드러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태사의 활과 칼을 보관해 둔 곳에 짤막한 비석을 세우고 기자묘(箕子墓)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는데, 왕자(王者)의 묘는 모두 능(陵)이라고 부르는 법입니다. 더구나 태사로 말하면 바로 우리 동방에 표준을 세워주신 임금님인데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묘라는 이름을 능으로 고치고 지키는 관원을 두는 동시에 재실(齋室)을 세우는 것이 또한 태사를 높이는 의리에 맞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서원이든 묘이든 옛날 그대로 부른다 해서 의리에 어긋날 것은 없다."
하였다.

 

10월 2일 기묘

천둥이 쳤다.

 

하교하였다.
"방금 운대(雲臺)의 보고를 보니 진시(辰時)에 천둥이 약간 쳤다고 했는데 나는 듣지를 못하였다. 가령 내가 일심으로 상제(上帝)를 대하듯 했다면 소리없는 곳에서 들을 수 있었을 테니 성균관 생도들도 들은 것을 내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는가. 더구나 천둥이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이 계절에 은은하게 천둥소리가 들렸으니, 자사(子思)께서 전한 계구(戒懼)의 공부270)  야말로 지금 더더욱 맹렬히 살펴야 할 제일의(第一義)라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감선(減膳)하는 것은 형식적인 일이요 절실한 말을 듣는 것이 바로 실제적인 일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마음을 부단히 닦지 못한 것이 위에서 스스로 비판한 것과 같은데 그 결과 잘못된 점이 정령(政令)을 발하고 조치를 취하는 밖에까지 숨었다가 나타나고 적어졌다가 커지곤 한다. 아, 그대 후설(喉舌)과 논사(論思)와 언책(言責)의 직책에 있는 신하들이여, 숨기지 말고 할 말을 다하여 어둡기만 한 나의 생각을 계발시켜 주도록 하라. 그리하여 실속이 있게 하고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일조(一助)를 하라."

 

하교하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탐라(耽羅) 백성에 관한 일이다. 지난해 진휼(賑恤)하면서 있는 힘과 정성을 다했는데도 보고해 온 바에 따르면 굶어 죽은 사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모두가 나의 죄이고 나의 탓이라 하겠지만 마음은 허탈해지고 슬퍼지기만 한다. 그런데 지금 수신(守臣)의 장계를 보건대 농사가 또 흉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하니 섬 백성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들을 구제해 줄 방도를 서둘러 강구하고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 겨울 제때에 구제해 주지 못한 교훈이야말로 어찌 오늘날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호남 연해(沿海) 고을의 농사가 지난해와 다름없이 흉년이 들었고 보면 저 섬 백성들만 위하고 이 연해 백성들은 소홀히 한다는 것도 정말 차마 못할 일이다. 그리고 섬 백성들 역시 이 육지의 백성들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도신과 수신이 제대로 마음을 다해 경영하면서 공사(公私)의 배들을 집결시키고 무역할 길을 열어주되 배를 띄웠다는 형식만 갖추지 말고 배를 띄운 실효가 있게 한다면 정말 다행이겠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라면 먼저 호남으로 하여금 1만 포(包)의 곡식을 연해 고을에 비치하게 한 뒤 운반해오건 수송해가건 간에 일체 편리할 대로 방책을 강구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절목(節目)에 대한 일은 오직 도신과 수신이 어떻게 조치하느냐와 묘당이 또 어떻게 지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아침에 우상의 말을 들어보니 좋았는데, 저녁에 이조 판서의 주장을 접하고 보니 조목조목 대답한 것이 더욱 상세하기 그지없었다. 즉시 유사 당상(有司堂上) 중에 이조 판서가 첨가해서 의논드린 둘째, 셋째, 넷째 조목을 가지고 도신과 수신에게 관문(關文)을 띄워 물어보도록 하라. 밤중에 촛불을 밝히고 이렇게 거듭 유시하는데도 도신과 수신이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나머지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이 나라에 조정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정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뜻도 아울러 엄히 밝혀 분부하도록 하라."

 

승정원이 【승지 김이정(金履正)·이의준(李義駿).】  의계(議啓)하기를,
"아, 시험삼아 최근에 정령(政令)을 발하고 조치를 취한 것들을 보면 형식적인 것이 많고 실제적인 정사는 적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기강이 확립되지 않아 백관이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있고 밖으로는 훌륭한 수령을 가려 보내지 못해 탐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백성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되면서 온갖 폐단이 겹겹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형식만 추구하는 병폐가 빚어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천둥이 약간 치면서 경계시켜 주었는데, 그것이 꼭 무슨 일에 반응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대체로 태평 성세에 있어서는 안될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천변(天變)을 재(災)라 하고 인변(人變)을 해(害)라 하는데 지금을 두고 말을 한다면 천재(天災)는 비록 은미해도 인해(人害)가 매우 드러났다고 할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시기를 늘 오늘처럼 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범범한 듯하고 들어맞는 점이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격언(格言)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니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이 천둥친 이변이 있었다는 이유로 잇따라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3일 경진

대사간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공경스럽게 왕업을 계승하여 훌륭한 정치를 펼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이시면서 음흉한 패거리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근원을 파헤치시고 척완(戚畹)이 정사에 간여하는 폐단을 깊이 징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즉위하신 초기에 간악하고 흉측한 무리들이 축출되고 사류(士類)가 모여들었는데, 참으로 《명의록(明義錄)》 1편(篇)이야말로 천지를 바로 세우고 귀신에게까지 질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천하 후세에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이 의리를 지니면 충신이 되고 이 의리에 어긋나면 역적이 된다는 것을 알아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으니, 모두가 이 책의 공로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와서는 종묘 사직과 관련된 죄를 지은 자들이 요행수로 사은(私恩)을 바라게 되고 탄핵 명단에 오른 자들이 외람되게 높은 벼슬을 넘보게 되는 등 그 폐단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선악(善惡)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풍속을 오염시키고 잘못되게 하는 첫째가는 속류(俗類)들이 따로 자기들의 진영을 차려놓고 좌우에 발판을 마련하고는 기만하는 것을 기량으로 삼는가 하면 여기저기 틈을 엿보며 법문(法文)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십여 년 동안 변함없이 내려온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利害)에 관한 설을 암암리에 주장하여 패거리들을 굳게 결속시키면서 말과 행동을 꼭 정론(正論)과는 반대되게 행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대로 자립(自立)하지 못한 자들은 옳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조금 지식이 있는 자들은 이간질하는 데에 이력이 붙게 되면서 이랬다저랬다 하고 갈팡질팡하는 무리들이 거의 온 세상을 뒤덮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의리대로 행하지 못하면서도 면역이 되어 반성할 줄을 알지 못하고 방자한 행동을 단속받아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을 알지 못한 채 서로들 그런 식으로만 보고 들으면서 목소리와 안색까지 모두 동화되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면 전하의 조정에 서서 《명의록》의 의리를 드러내 밝힐 자가 다시 몇 사람이나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현재의 속폐(俗弊) 가운데 대의(大義)와 가장 관련이 있는 것들을 여섯 조목으로 나누어 대략 진달드릴까 합니다.
첫째, 의리가 밝혀지지 않아 사람의 기강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사람의 기강을 붙들어 세우려고 노력하셨으니, 복주(伏誅)시키고 토죄(討罪)하는 법을 둔 것은 이 의리를 행하게 하려 함이었고, 《명의록》이라는 책을 내놓은 것은 이 의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덕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게 한 것은 이 의리를 강론케 할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의 속습을 보면 일체 이와는 반대로 나가면서 이익을 쫓아 걸(桀)을 따르고 요(堯)를 짖어대는가 하면 세력있는 자의 부림을 받아 백이(伯夷)를 도척(盜跖)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향초(香草)와 악초(惡草)가 공존하고 사람과 귀신이 서로 뒤섞인 상황에서 교묘하게 재주를 부리려 하는 자들은 이쪽 저쪽을 돌아보며 행동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그 몸을 천만 가지로 변화시키면서 사람의 기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와 별처럼 빛나는 천경 지의(天經地義)에 대해서조차 의심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어디에 이를지 모르게 된 가운데 흉악한 잔당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오고 있으니, 너무나도 속습을 변화시키기 어렵게 되었고 의리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언로(言路)가 확장되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일찍이 한 명의 간관(諫官)도 배척하지 않으시고 일단 대간의 이름을 가진 관원이면 모두 법을 굽혀서라도 목숨을 붙여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성상의 마음도 한결같지 않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른 말을 요구하시는 것이 비록 절실하지만 간혹 허여하고 박탈하신 즈음에 지나친 점이 있었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비록 넓긴 하시지만 간혹 재단하고 억누르실 때 과도한 면이 있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취향이 다른 발언을 하기라도 하면 혹 자기 패거리를 응원하고 다른 쪽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셨고, 화근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혹 바로잡으려다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린 것처럼 이단을 배척하는 소를 한 번 올린 자는 무턱대고 견책을 받았고, 곡영(谷永)271)  처럼 아첨하면서 오로지 성상을 공격하려 했던 자는 총애를 받아 발탁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권도(權度)를 발휘하시어 잡아당기고 풀어준 것이 어찌 일찍이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셔서 그런 것이겠습니까마는, 일종의 잘못된 이야기들이 가까운 곳에서 서로 전해지는 바람에 흐뭇한 기색으로 흡족하게 받아들이시는 성상의 덕이 은폐된 채 드러나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침묵을 지키는 풍조가 이루어지면서 편리할 대로 교묘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끔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셋째, 잘못된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아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을사·병오년 이래로 일어난 와언(訛言)의 화(禍)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을사·병오년의 화란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따진다면 호법(護法)272)  이 지령을 내려 씨 뿌린 위에 또 씨가 뿌려졌던 것임을 역력히 지적할 수가 있는데 적준(賊浚)273)  이 기만한 것도 판에 찍은듯 똑같았습니다.
아, 저 적준은 귀근(貴近)의 세력을 옆에 끼고 이를 의지하여 기염을 토하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교묘하게 위장하여 보고 듣는 이들을 너무나도 기만하였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총애받는 것은 그가 독점한 것처럼 행동하고 구중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자기 패거리들을 통해 은밀히 과시하다가 끝에 가서는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급속도로 달라붙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늘과 같은 성상의 덕에 대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겉치레가 아닌가 의심케 하고, 동아줄같은 임금의 말에 대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그 본래의 의도를 은폐한 채 변화무쌍하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가운데 어중이떠중이들이 서로 모여들게 하고 청탁(淸濁)이 구분되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새해 초에 처분을 내리신 뒤로 그 동안에 오염된 습속이 바르게 될 희망이 생겼는데 통렬하게 따지면 엄히 토죄(討罪)하는 일이 그 사람에게는 적용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럭저럭 꺼리고 숨기면서 대다수가 옛날 버릇으로 돌아가게 된 나머지 책임이나 떼우려 하는 자들은 공연히 헛소리만 늘어놓고 암암리에 비호하려는 자들은 곧장 나라쪽[國邊]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앞과 뒤, 마음과 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오직 재간이나 부려보려는 풍조가 다시 이루어진 가운데 풍속이 바로잡히지를 않고 있으니, 이렇게까지 된 속폐(俗弊)를 어떻게 말로 옮길 수가 있겠습니까.
넷째, 사술(邪術)을 물리치지 않아 화의 근원이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양학(洋學)의 패륜은 말하기에도 추하니 정말 입을 더럽히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차자를 올리면서 중국 사람의 말을 가탁한 것을 보건대 더욱더 오싹해지면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을 꾀이는 것도 부족해서 중국 사람까지 가탁한단 말입니까. 그 시발점과 이후 뻗어나가는 면을 참작할 때 종국엔 치성해질 것이 분명하니 때려잡고 발본색원하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대신이 논한 바 갑(甲)과 을(乙)이 서로 빠져들 것이라는 염려가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갑과 을이 시끄러운 사태를 야기시키리라고 지나친 걱정을 한 나머지 잡아들여 다스리지 않은 채 서로들 모방하도록 놔두어서야 또한 어찌 되겠습니까. 또 더구나 근일의 잘못된 습속으로 말하면 이단의 주장들이 시끄럽게 맞부딪치고 있을 뿐만이 아닌데, 거기에 또 이적(夷狄)의 한 법술(法術)이 다시 제멋대로 행해지고 있으니, 잠복하고 있는 걱정거리로 말하면 실로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도 더 큰 것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섯째, 작위와 상을 신중하게 주지 않아 조정이 엄숙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몇 년 이래 죄과(罪過)를 씻어주는 것이 너무도 지나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번번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여론을 도외시한 채 안에서 비답을 내리시는가 하면 전망(前望) 가운데에 더 써넣게 하기도 하시고, 청요직(淸要職)을 통의(通擬)할 때에도 간혹 특별한 분부로 임명하시는가 하면 죄인을 용서해주는 것도 조정의 의논을 따르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명교(名敎)에 배척을 받은 사람인데도 변함없이 총애를 베풀어주시고 제방(隄防)과 관련이 있는데도 발탁해주시는 일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방의 관원으로 보임(補任)하는 것은 조정에서 견책하여 벌을 내리기 위함인데, 간혹 외람스러운 직임을 부여하면서 억지로 외보(外補)라고 명명하시기 때문에 당사자도 그것이 죄를 받은 것인줄 알지 못하고 보는 자 역시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는 실정입니다. 명기(名器)가 외람스럽게 되어 조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기야는 아랫사람들까지 연줄을 타고 직책을 얻는 경우가 또한 많습니다. 명기가 이 모양이고 사풍(士風)이 이 모양이니, 장차 무엇을 의지하고 나라를 다스려 나가겠습니까.
여섯째, 선비의 취향이 단정하지 못해 풍속의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비의 기풍이 옛날같지가 않아 이를 본받게 하는 일이 점점 아득해지기만 합니다. 1경(經)으로 급제를 내려주도록 한 것이야말로 격려시키기 위한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도 오히려 조급하게 벼슬하려는 풍조를 열어주고 있고, 제술(製述)을 하게 하고 기예를 시험하게 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업을 익히게 하는 좋을 규정인데도 규피(規避)하는 때가 간혹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초봄에 실시한 식년시(式年試)의 경우를 두고 말하더라도, 남궁(南宮)의 체지(帖紙)를 빼낸 뒤 불법으로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관례에 따른 죄만 주고 그쳤으니, 신은 삼가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전하의 고명하고 박학하신 학문의 경지로 볼 때 위대한 덕업(德業)에 뜻을 세우신 것이 분명 오늘날에 성취된 것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런 여섯 가지 폐단이 있게 된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명의록(明義錄)》 1부(部)야말로 하늘을 지탱시키고 우주에까지 뻗치는 일대 강령(綱領)으로서 온갖 일처리에 따른 법도는 모두 조목(條目)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속히 처음 즉위하셨을 때의 법도를 따르시어 《명의록》을 편찬하셨던 그 의리를 드러내 밝히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이에 입각해서 의리를 밝히고 이에 입각해서 언로를 열고, 이에 입각해서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고 사술(邪術)을 물리치며, 이에 입각해서 작상(爵賞)을 신중히 하고 선비의 취향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그러면 국가가 만년토록 누릴 복이 실로 여기에 기초하게 될 것입니다.
일전에 이방일(李邦一)이 연석(筵席)에서 취한 거조로 말하면, 방자하고 무엄하게 행한 그 버릇이야말로 분수를 뛰어넘어 능멸하였다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흠집이 많은 몸으로 오늘날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고 보면 의당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데 아무 거리낌없이 또 이런 잘못을 범했으니, 삭직(削職)의 가벼운 처벌만으로는 너무도 형전(刑典)에 어긋난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속히 유배보내는 형전을 적용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해 주기를 바라는 날 그대가 천언 만어(千言萬語)의 소를 올리면서 정성을 바쳐 기대에 부응했으니 정말 가상하기 그지없다. 분명히 이해시킨 곳은 당연히 내 몸을 반성하고 성찰하겠지만, 이해가 잘 안되는 곳이라고 해서 또 어떻게 거드름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기야 하겠는가. 말미에 진달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5일 임오

이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을 체직시켰다. 시동이 병을 이유로 연석(筵席)에서 간청하였으므로 특별히 허락한 것이었다.

 

10월 6일 계미

사직(司直) 홍수보(洪秀輔)가 치사(致仕)하였다. 수보가 상소하기를,
"아, 우리 경모궁(景慕宮)께서는 천부적인 성덕(聖德)을 지니시고 날로 새롭게 학문을 발전시키신 결과 그 위대한 덕성은 요(堯)·순(舜)과 부합되고 그 효성은 신명(神明)에까지 통하였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대리 정사를 펼치신 14년 동안 그 정치의 법도와 모범적인 거조 등 영원히 빛을 드리울 만한 것들을 비록 천일(天日)처럼 모사(摸寫)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대서특필하여 한 부(部)의 책으로 편찬해 내었다는 말은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아, 대성인의 한 글자 한 마디를 보면 모두가 금석(金石) 같은 모범이 되고 전모(典謨)에 비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을 당해 돌아보건대, 구신(舊臣)의 집에 기술되어 있거나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필시 채집할 만한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세교(世敎)와 관련이 있는 14년 동안의 영지(令旨)와 비사(批辭) 및 성인의 말씀과 부합되는 찬란하고 보배스러운 문장들이 시강원(侍講院)의 기록과 승정원의 기록 속에 실려 있는데, 이것들 역시 사필(史筆)로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사(公私) 간의 문적들을 널리 상고하여 한데 모아 책으로 펴내는 것이 정말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장을 모실 때에는 열성(列聖)의 어제(御題)를 편찬하는 예를 본받고 드러낼 때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한 규례에 의거하여 반드시 올해에 관아를 설치하고 일을 감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고 책이 완성되는 날 경모궁과 현륭원(顯隆園)에 바친 뒤 조야(朝野)에 반포함으로써 팔도 백성으로 하여금 전해가며 읽게 하고 백대(百代)의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생각건대, 신이 한 번 물러나기로 한 것은 원래 신이 스스로 맹세했던 바인데, 신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기를 오직 하늘같으신 전하만 믿고 있습니다. 속히 윤허를 내리시어 시골에서 여생을 마치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삼가 상고하여 편찬해 내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로서 신중히 처리해야 할 일인 듯싶다. 그 말이 진정 감격스럽기는 하나 다시 더 생각해 보고 싶다. 경이 치사(致仕)하는 일로 말하면, 경의 부친도 나이가 되기 전에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었으니, 지금 경에 대해서 어찌 혹시라도 인색하게 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안묵(李安默)이 상소하기를,
"아, 간흉(奸兇)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인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임 무옥(辛壬誣獄)과 같은 적이 어찌 있기나 했겠습니까. 일종의 올빼미 같은 무리들이 대책(大策)274)  을 원수처럼 여겨 온갖 방법으로 무함하였고 심지어는 북정(北庭)275)  에까지 진주(陳奏)하였는데 이른바 진주한 글은 역휘(逆輝)276)  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서 충신과 역적을 헷갈리게 하고 국시(國是)를 어지럽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글이 후세에까지 전해진다면, 흉역(凶逆)의 무리가 날조하여 무함했다는 것을 누가 알 것이며, 또 대책(大策)을 세운 신하들의 충성심을 그 누가 알 것이며, 또 대책을 정한 대의야말로 어긋나지 않게 천지를 바로세운 것이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신을 급히 보내 무함한 문서를 뒤늦게나마 변론하게 한 뒤에 위로는 선대왕(先大王)에게 그 사유를 고하고 아래로는 여러 충신들에게 유시하며 제사지내주는 것이 실로 오늘날 당면한 급선무라고 여겨집니다.
요즘 들어 사학(邪學)의 폐단으로 인해 그 무리들이 마구 불어나고 있습니다. 일종의 사족(士族)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민간의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 유혹에 넘어가 권속을 이끌고 따라붙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두 지방에 그 학설이 더욱 유행하고 있는데, 더러는 수백 가호나 되는 큰 마을이 휩쓸리듯 모두 빠져들어 한 통속이 되어버리고 만 곳도 있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변고입니까.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한결같이 거드름만 피운 채 바로잡아 다스릴 방도는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령 한두 사람을 외직에 보임하거나 유배보낼 때에도 꼭 사설(邪說)이 성행하고 있는 지역에 놔두곤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섶을 안고 불속에 뛰어들게 하는 격이라고 할 것입니다.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앞으로 온 나라가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온통 빠져들고 말 것이요 반드시 떼로 일어나 도적이 되는 환란이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유사에게 특별히 신칙하여 별도의 조목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가(人家)의 숫자를 나누어 몇 개의 통(統)을 정하고 통 안에 각각 존위(尊位)와 중임(中任) 등의 인원을 배치한 뒤 그들로 하여금 통 안의 사정을 살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술을 배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이름을 알아내어 한성부에 보고하게 하고 그 책들은 관청 뜰에서 불태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관부(官府)로 하여금 그 집에 표식을 하도록 하여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게 하고, 귀천(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관청의 노비(奴婢)로 편입시킴은 물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시행하면 그 뿌리를 영원히 뽑아버릴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 묘당에 문의하여 법으로 확정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의필(李義弼)을 처분하신 것은 또 어찌 그렇게도 중도(中道)에 지나치셨습니까. 생각건대 저 습속(習俗)을 숭상하는 무리들이 겉으로는 공격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호하였고 보면, 의필이 대간의 지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계사를 올려 배척한 것이야말로 일을 말하는 체례(體例)를 얻었다고 할 것인데, 그만 거꾸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대저 말을 살펴야 하는 군상(君上)의 도리에 있어서는 단지 타당한가의 여부만을 보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그가 습속에 물들지 않았나 지레 의심하고 그 말이 어떠한지는 다시 살펴보려 하지 않으셨으니, 허심탄회하게 따라 주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이렇게 하셔서는 안될 듯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교를 환수하시는 동시에 의필을 용서하시어 성스러운 덕이 빛나게 하소서.
포청(捕廳)에서 세 사나이를 체포하여 단서를 묻지도 않은 채 지레 때려 죽였다는 소문이 도로에 전해지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수군대면서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방방곡곡에 방(榜)을 내어 붙인 뒤에야 뭇사람들의 의심이 풀리면서 지레 죽인 일은 바로 아래에서 제멋대로 행한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포장(捕將)에게 직접 진술서를 받은 뒤 해당되는 율을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신은 전 지평 이진택(李鎭宅)의 계사를 보고는 세도(世道)를 위하여 걱정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충(忠)이라는 한 글자로 말하건대, 예로부터 그 이름에 걸맞는 실제 내용을 갖춘 이로 가령 송조(宋朝)의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사마광(司馬光)·여이간(呂夷簡) 등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흔히 볼 수가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진택이 충신이라고 일컬은 서유방(徐有防)을 보건대, 정성을 바쳐 이룩한 사업이 뭐가 있기에 옛날의 석보(碩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런 이름을 얻었단 말입니까.
그 평생의 행적을 돌아보면 단지 간특하고 사악한 일개 소인(小人)일 따름입니다. 그의 기량으로 말하면 권간(權奸)에 아첨하며 빌붙어 같은 목소리로 화답이나 하는 것이었고, 그의 심술(心術)로 말하면 선류(善類)를 미워하여 일망타진할 꾀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밤낮으로 궁리하는 것은 세력과 이익을 얻을 구멍을 찾는 데 벗어나지 않았고, 좌우로 불러다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시정(市井)의 무리배들 뿐이었습니다. 자기를 따라 빌붙는 자에게는 좋은 벼슬자리를 던져 주고, 자기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 함정속에 빠뜨렸습니다. 사람에게 악명(惡名)을 뒤집어씌워 번번이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사용하였고, 기회에 편승해 틈을 엿보는 것으로 협박하는 묘결(妙訣)을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정 인사들의 절반 가량이 모두 그의 농락을 당하였고, 한 세상이 온통 그의 위협에 벌벌 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알랑거리며 섬기기를 잘하여 교묘하게 부시(婦寺)의 작태를 보여주곤 하였는데, 임금 앞에서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면서 갖은 재주를 부려 환심을 사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집안 간에 서로들 권면할 때면 빼놓지 않고 늘 말하기를 ‘임금 앞에서는 모름지기 죽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 말 한 마디를 통해 그가 토로(吐露)한 진짜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있는데, 정인(正人)으로 하여금 그 옆에서 보게 한다면 차마 보지 않으려 하는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나와서 제 마음대로 구는 짓을 보면 또 어쩌면 그렇게도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까. 그는 안과 밖이 모두 간적(奸賊)으로서 방자하게 위복(威福)의 권한을 희롱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수레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이임보(李林甫)277)  의 집 문안으로 다투어 들어가려 하고, 뇌물이 폭주하여 온통 원재(元載)278)  의 창고 속으로 실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방의 송옥(訟獄)까지도 모두 그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팔도에 임명하는 것도 모두 그의 지휘를 받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익은 사실(私室)에 의해 독점되는 반면 피해는 국가에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간인(奸人)은 비록 옛날의 여혜경(呂惠卿)이나 가사도(賈似道)라 하더라도 능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충신이라는 두 글자를 무턱대고 이 사람에게 가하면서 임금에게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이런 간특하고 종잡을 수 없는 무리를 법종(法從)의 반열에 놔둘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진택의 대망(臺望)을 개정하고 속히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유방(有防)의 형인 서유린(徐有隣)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그 형에 그 아우라 할 것입니다. 본래 흠이 많은 몸으로서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후하게 입고 구덩이에서 빠져 나와 낭묘(廊廟)에 몸담게 되었고 보면, 그의 분의(分義)로 볼 때 진정 그 크나큰 은혜를 감사하며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려고 노력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거꾸로 은총을 핑계삼아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을 멋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권세를 주무르려 할 경우에는 못된 동생을 풀어놓아 간적(奸賊)의 뜻을 떠받들게 하였고, 위세를 굳히려고 할 경우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을 모아 사사로이 패거리들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종용하여 전날의 잘못을 답습하게 하고 사류(士類)를 원수처럼 여겨 의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리게 하였습니다. 취향이 같지도 않은 의론에 빌붙어 기꺼이 창귀(倡鬼)의 역할을 담당하고 마음이 같은 친구들을 묶어 서로들 번갈아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킴은 물론 다른 이의 조소가 뒤따르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혼자의 몸만 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들 이끌고 함께 빠져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 그라고 해서 어찌 명교(名敎)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세력과 이익을 쫓아 거리낌없이 천만 번 몸을 바꾸어 나타낸 것이니, 그야말로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언로(言路)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십여 년간에 걸쳐 관원이 서로 바로잡아주던 아름다운 기풍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기절(氣節)이 소진되고 풍습이 크게 변하여 습속이 날로 오염되어 가는데도 수습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또 누구의 죄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기타 뇌물을 받고 이익을 독차지한 더러움과 감정을 풀려고 남을 밀어뜨린 버릇으로 말하면 그들의 가법(家法)이 되었다고 할 것으로서 형제간에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남의 환심을 사고 명예를 낚아 약간 시동(市童)의 동정심을 얻었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천한 부류들이 간혹 그의 술수에 떨어지곤 하였으니, 충성스러운 듯한 그의 엄청난 간사함으로 말하면 또 그의 아우에 비길 수 있을 뿐만이 아니어서 식자(識者)들이 깊이 탄식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풍속을 그릇되게 하며 현인을 질시하고 이익을 탐하는 정상과 관련해 그 죄악을 논한다면 머리카락을 다 뽑아 속죄한다 해도 어려울 것이니, 실로 소인의 우두머리요 세도(世道)의 적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직접 맡겨두고 일찌감치 배척해 멀리 내쫓지 않는다면 나라의 위급함이 금새 닥쳐오고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서유린과 그 아우 유방을 모두 유배보냄으로써 같이 한 나라에 있지 못하게 하신다면 국가로 보나 세도로 보나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아, 이여절(李汝節)이 고을 수령으로 백성을 다스리면서 오로지 형(刑)을 과도하게 시행한 나머지 함부로 죽인 인명(人命)이 무려 30인이나 되고 보면 목숨을 내놓도록 한 법 규정을 그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질 신문을 한 지 몇 십 일만에 결국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당당한 국법(國法)을 그 누구라서 신임하겠습니까. 속히 목숨을 내놓도록 하자는 청을 윤허하시어 백성의 목숨에 사죄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로 말하면 연전에 그 당시의 주문(奏文)과 자문(咨文) 등 문적(文蹟)을 조사해 낼 때 사람들이 모두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다시 거론하여 운운(云云)하는 것인가. 그 밖에 몇 가지 조목들도 어찌 너의 말을 기다려서야 할 수 있는 것들이겠는가. 이진택을 논한 일로 말하면 뜻은 동쪽에 두고서 서쪽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기백(畿伯)에 대해 찌르듯 논한 것도 부족해서 그의 형까지 싸잡아 언급하다니, 이는 정말 악착스럽고 잔인한 일로서 너의 혓바닥이 가래 날같기만 한데 인인(仁人) 군자(君子)라면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논하고 사람을 배척하려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마는, 맑은 조정의 도타운 풍조로 볼 때 어찌 그와 같은 짓을 용납하겠는가. 더구나 기백 형제가 그동안 세상의 미움을 받고 도와주는 사람이 적은 처지로 떨어지고 만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환란이 조금 진정되자 곧바로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대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다니 사람됨이 너무도 잔인하다 하겠다.
현재 마음을 쏟아 고심하고 있는 것은 오직 파란(波瀾)을 막아 그치게 함으로써 기필코 조정의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실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조정에서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묵은 혐의와 개인적인 감정을 끼고서 때를 틈타 돌멩이를 던지며 못할 짓 없이 재주를 부리고 있단 말인가. 교언(巧言)에 대해서는 성인께서도 멀리 하신 바이다. 내가 말해 주기를 요구한 것은 요구한 것이고 고심하고 있는 것은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대간 직책을 깎아버리고 시골로 내쫓음으로써 이렇게 하는 것이 도야(陶冶)시키는 대관건임을 보여줄 것이다."
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을 특별히 판의금부사에 제수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장악원 정 조진정(趙鎭井)이 상소하기를,
"아, 저 적준(賊浚)279)  이 권세를 독점하고 나라를 등져 위복(威福)을 행사하는 권한이 아래로 옮겨지는 바람에 전하의 세도(世道)가 무너져 혼란스럽게 되고 전하의 백성들의 뜻이 좋지 않게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먼저 죽여버리는 통에 왕법(王法)이 펼쳐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여론이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준적(浚賊)을 위해 소굴을 제공해 주면서 안팎으로 호응하여 성상의 덕을 무함하였는데 항상 경재(卿宰)의 반열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있으니, 서유린(徐有隣)과 서유방(徐有防)이 바로 그들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의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선(善)으로 말하면 백성들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에 걸쳐 중외(中外)에 반포해 보여주신 윤음(綸音)과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보더라도 의리가 명백하고 그 뜻이 간절하기만 하였으니, 양심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군들 성상의 덕을 우러러보며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 저 서유린과 유방의 무리들은 근밀한 자리에 있는 것을 핑계대고 권세를 도둑질하여 서로 패거리를 만들고는 나오는 대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듣는 이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한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네들의 울타리 안으로 모여들게 하는가 하면, 우리 성상께서 나라를 경륜하시는 큰 뜻과 투명하기만 한 큰 근본이 천한 사람들의 눈과 귀에 찬란하게 비쳐지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심보란 말입니까.
그리고 가령 우리 성상께서 몇 년 전부터 다른 곳으로 거둥하신 지나친 거조로 말하면, 그것이 비록 지극한 우애(友愛)의 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실로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와 직결되는 것이었고 보면, 오늘날 신자(臣子)된 입장에서는 단지 정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성상께서 마음을 돌리시도록 청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유린의 무리만은 제멋대로 헤아리기 어려운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겉치레로 꾸미는 것이라고 기롱하는가 하면 실제 마음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비난하는 등 억측으로 결론을 내리고 소리내어 퍼뜨리면서 뭇사람들이 부화뇌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 부류들마저 오해하는 결과를 빚게 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그런 빌미를 차마 만들어낼 수 있으며 신하의 분의(分義)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무리들의 죄야말로 위로 하늘에 닿는 것으로서 바로 준적(浚賊)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유린으로 말하면 을사·병오년에 법망(法網)을 빠져나온 몸으로서 죄를 씻어주는 성상의 은혜를 받고 숭질(崇秩)에 발탁되어 권세있는 자리를 부여받게 되었으니, 의당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노력하며 얼굴을 고치고 마음을 씻어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천성적으로 간특하여 국가를 등지고 치달리면서 아첨떠는 행동을 하며 못된 무리들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죽이고 살리는 일이 자신의 입에 달려있고 주고 뺏는 일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고 여기면서 암암리에 권세욕을 성취시키며 턱짓을 하고 기세로 남을 부렸습니다. 그리하여 유방과 같은 간인(奸人)도 그의 지도를 받게 되고 동준(東浚)과 같은 흉인(凶人)도 그의 농락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이런 식으로 위세가 확립되자 파리처럼 앵앵거리고 이처럼 빌붙는 자들이 단지 유린이나 유방이 있는 것만 알았지 전하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게 된 나머지 차라리 군상(君上)을 거역하여 처벌을 받을지언정 감히 유린이나 유방의 마음을 거슬렸다가 벼슬길이 막히려고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위세를 계속 쌓아 올려 몰아부치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동화되었고, 큰 세력으로 압력을 가하자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막론하고 모두 녹아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적준(賊浚)이 앞질러 죽게 된 뒤로 그들의 진짜 범죄 사실이 남김없이 모두 드러났는데 성토(聲討)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가 박장설(朴長卨)이 최후의 한 상소를 올리면서 겨우 그 단초(端初)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진택(李鎭宅)이 몸을 던져 저쪽 편을 들고 나왔으니, 그 형세로 볼 때 이것이 어찌 다만 인주(人主)의 권세를 기울이고 그만둘 성격의 것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사흉(四凶)에게 죄를 주었던 형전(刑典)을 제대로 본받으시어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시고 속히 처벌을 내리도록 하소서.
아, 요즈음 이른바 사학(邪學)이라는 것으로 말하면, 세도(世道)에 해를 끼치는 것이 홍수나 맹수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의 무리들이 몰래 서로 전하였으니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최헌중(崔獻重)이 지난번에 올린 하나의 상소를 보건대, 명분상으로는 척사(斥邪)한다고 하면서 한 글자나 반 구절도 이가환과 정약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그만 감히 임금의 잘못이라고 둘러대었습니다. 그리하여 온갖 별별 말을 다 끄집어내면서 변죽을 울리고 비밀스럽게 하며 오로지 성상에게 허물을 돌리려 노력하였으니, 그 의도의 헤아리기 어려운 점과 정상의 흉칙함으로 말하면 법술(法術)을 전한 이가환이나 정약용보다도 더 심한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생각 자체를 복주(伏誅)시키는 《춘추(春秋)》의 율(律)을 적용한다면 그를 처형하는 일이 당연히 이가환이나 정약용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그만 거꾸로 마치 진정으로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를 대우하듯 그를 칭찬하며 발탁하셨단 말입니까. 형정(刑政)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세도가 진정되기를 바랄 것이며 어지러운 습속을 소제(掃除)할 가망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벽을 안고 돌면서 장탄식을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까닭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깊이 유념하시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소서."
하니, 그 소를 내주고 그 직책을 박탈하라고 명하였다.

 

10월 7일 갑신

이경무(李敬懋)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10월 8일 을유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어제 전조(銓曹)의 참판이 판서의 추천 후보자 단자(單子)를 영상에게서 받아 좌상에게 가서 보인 뒤 신에게 왔기에, 신이 참판에게 묻기를 ‘서호수(徐浩修)의 이름이 몇 년 이래로 인사 추천 명단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가?" 하니,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의 자리로 말하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데 몇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던 사람을 갑자기 중한 지위에 추천한단 말인가. 내 생각에는 단지 그의 명단을 빼버려야만 옳다고 여겨지고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였더니, 참판이 말하기를 ‘그러면 영상에게 보고드려야겠다.’ 하고는 그 즉시로 작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날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전조의 관리를 보내 말을 전하기를 ‘영상이 말하기를 「이 경우는 중한 지위에 추천하는 예와는 다른 점이 있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후보 추천 명단을 방금 분부로 재촉하셨기 때문에 입계(入啓)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국조(國朝) 사백 년 동안에 과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의정부의 규정에 따르면, 의천(擬薦)할 경우 수상(首相)이 비록 그 일을 주관하기는 하지만 동료 정승 가운데 누가 혹시라도 ‘누구는 포함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할 때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기 전엔 수상이라 할지라도 자기 생각대로 추천하는 일을 완결지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자라 하더라도 추천하는 일을 의논하면서 일단 뭐라고 말을 했었고, 수상이 또 ‘꼭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고 보면, 전조의 당상관 입장에서는 마땅히 다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신에게 와서 말한 뒤 의견이 일치되기를 기다렸다가 위에 보고드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그렇게 하지 않은 관계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평소 공평하게 집행해야 하는 일과 관련되는 만큼 차마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당 참판에게 파직하는 처벌을 내리고 서호수를 이조 판서로 추천한 것을 속히 취소하도록 명함으로써 의리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세 정승끼리 갑론을박하는 일이 있었고 보면, 의견이 일치되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망통(望通)을 써서 들인 참판의 행동은 크게 잘못된 결과를 면할 수가 없다. 파직하는 일을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러나 서호수를 추천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의리로 볼 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오직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 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 재실(齋室)에 있던 날 밤에 눈물을 훔치며 분부를 내리면서 화합해 받아들이는 큰 도량을 지닐 것을 천명하였고 화목하게 되는 아름다운 범절을 거양(擧揚)했었는데 새벽 전후의 일이 환하게 기억될 뿐만이 아니다. 그러니 서호수는 그대로 두도록 하라. 이 자는 이른바 태학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기 이전의 사람이다. 진정 복잡하게 구분을 지어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병신년 초에 또한 어찌하여 서호수 부자(父子)를 막지 않았었단 말인가. 윤허하지 않는다.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기양(李基讓)을 특별히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하였다. 고(故) 상(相)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윤시동(尹蓍東)을 규장각 제학으로, 구상(具庠)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가도(呵導)280)  하는 것에도 각각 정해진 제도가 있다. 옥당의 관원 역시 법을 집행하는 반열에 있는 사람이고 금명(今明) 간에 내각(內閣)이나 은대(銀臺)에 들어올 사람들도 모두 그 곳에 들어 있다 하겠다. 이와 같은 자잘한 절목(節目) 속에도 혐의를 분별하고 기미를 밝게 살펴야 하는 의리가 내포되어 있는 만큼 규정을 무시하고 혐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근래에 행공(行公)한 옥당을 모조리 체차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병조에서 또 다시 살펴서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입직(入直)한 당상과 낭관이 중한 처벌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신칙할 것이 있다. 대간과 승지에게 가도(呵導)를 하며 합문(閤門) 밖에까지 오게 한 것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관직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 잘못된 예를 답습하여 간혹 가도를 멈춰서는 안될 곳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어제 승지로 하여금 거듭 신칙한 분부를 하나하나 거론하여 승정원 고사(故事)에 기재하게 하였다마는, 이와 함께 해방(該房)으로 하여금 엄히 양사(兩司)에 신칙하여 잘못된 예를 답습하지 말게 하라."

 

10월 9일 병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상차하기를,
"방금 우상이 상차한 계본(啓本)을 보건대, 서호수(徐浩修)를 이조 판서에 복망(復望)한 일을 두고 극력 논열(論列)하면서 정관(政官)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는데, 신이 대략 그 일에 대해서 진달드릴까 합니다.
며칠 전에 이조 참판이 와서 천망(薦望)을 받아가지고 갔는데, 조금 있다가 글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보고하기를 ‘우의정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를 의망(擬望)하는 것이라면 구애될 것이 없겠지만, 이조 판서의 경우는 바로 중통(重通)인데 어찌 뜻밖의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의견은 이러이러하다.」고 하였다.’ 하기에, 신이 과연 글로 답하기를 ‘복망하는 것은 중통과 다르다. 이것은 바로 관례적으로 하는 일이니 써서 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정서(正書)해서 입계(入啓)토록 하였습니다.
대체로 묘당에서 추천하는 규정을 보건대, 동료 정승 중에서 혹시라도 이견(異見)을 제시할 경우에는 왕복하여 상의하는 것이 본래의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전관(銓官)을 다시 보내 충분히 상의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관을 머물러 둔 뒤에 글로 써서 왕복하게 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그 뜻만을 전관에게 보여주어 그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는 일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신이 전관의 글을 보고는 말을 주고받은 곡절을 보고만 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뿐, 그것이 바로 우상이 신에게 왕복하게 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신이 병들고 혼미한 탓으로 빚어진 일로서 죄는 정관(政官)에게 있지 않고 신에게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처벌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실이 조금 다른 듯하기는 하다마는 전관이 잘못 전한 실수가 더욱 드러났으니 파직만 한 것도 오히려 가볍다 할 것이다. 경은 모쪼록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치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어제도 분부를 내렸었다마는, 요즘 들어 전조에서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겁을 먹고 조심하면서 모두 특별한 분부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근일 전조에서 의망(擬望)한 일 같은 것이 있게까지 되었다.
연전에 윤음(綸音)을 반포한 뒤로는 여러 집안들 모두가 관직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었는데 유독 중신(重臣)의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만 분별을 해 주지 않고 있으니 이는 조정의 체례(體例)로 볼 때에도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다. 일찌감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신칙하려 했었다마는 요즘 번거롭고 귀찮아서 하지 못했었다. 전조로 하여금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정해

동지(冬至) 정사(正使) 민종현(閔鍾顯)과 부사(副使)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書狀官) 조덕윤(趙德潤)을 소견(召見)하였다. 그들이 하직 인사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무자

선희묘(宣禧墓)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사잇길을 통해 태창(太倉)으로 행차한 뒤 서강(西江) 제일루(第一樓)에 거둥하였는데, 또 이인(李䄄)을 소환(召喚)하였기 때문이었다.
앞뒤 부대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엄히 작문(作門)을 방어하며 신하들을 들여보내지 말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신하들 중에서 만약 청대(請對)한다고 하면서 와서 시끄럽게 할 경우에는 오늘 행차를 돌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환궁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각신(閣臣)·삼사(三司) 및 약원(藥院)의 제조(提調)가 세 차례 청대했으나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행차를 수행한 경재(卿宰)가 청대하였으나 역시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승지와 각신에게 문에 들어와 반열을 정돈하라고 명하니, 각신 등이 제일루 섬돌 아래로 나아왔다. 내각 제학 윤시동(尹蓍東)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또 무슨 목적으로 이 강루(江樓)에 오셨습니까.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장계를 보니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더욱 심해집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즉시 행차를 돌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막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경들이 정지시켰다."
하고, 이어 출발하였다. 의소묘(懿昭墓)에 이르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환궁한 뒤 내각과 정원에 명하여 감히 금령(禁令)을 어기고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게 하였다.

 

누런 빛깔의 신전(信箭)을 각영(各營)에 통용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5영(營)의 제도가 갖추어졌다면 다섯 가지 색깔의 신전(信箭)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영(前營)이 일단 진(鎭)으로 나가 후영(後營)이 단영(單營)으로 되어 있는 만큼 붉은 색과 흑색의 두 색깔을 써서는 안될 것이다. 이 뒤로는 누런 색깔의 신전을 각영에 통용토록 하라."

 

10월 12일 기축

상언(上言) 55통을 판하(判下)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상주(尙州)의 생원(生員) 이지권(李之權)이 징을 쳐서 호소한 것은 그의 증조부 이봉징(李鳳徵)의 작위(爵位)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고, 충주(忠州)의 유학(幼學) 허복(許澓)은 그의 5대조인 허적(許積)을 신원(伸冤)시켜 주고 관직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춘천(春川)의 유학 남로(南鑢)는 그의 아비인 남옥(南玉)의 신원에 대한 일 때문이었고, 안동(安東)의 유학 김시전(金始全)은 그의 조부 김성탁의 관직을 복구시켜 달라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지권이 호소한 일로 말하면, 고상(故相) 및 고 중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일이 있기도 하였다마는 이는 기사년의 의리와 관계된 일이라서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혹시라도 망각할까 두렵기조차 한 일이니 관계가 지극히 중하다. 어찌 관례적으로 시행하지 않기만 하고 그만둘 수 있겠는가. 엄히 신칙하여 다시는 귀찮게 호소하지 말도록 하라.
허복이 호소한 일로 말하면, 어찌 그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판하(判下)한다면 도리어 차차 새로워지게 하는 뜻이 못될 것이니, 우선은 시행하지 말고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남로가 호소한 것으로 말하면, 그의 아비 남옥(南玉)에 대해서 늘 측은하게 생각해 왔었다. 만약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지극히 인자하신 성조(聖祖)의 덕으로 볼 때 어찌 참작하여 놓아주는 처분이 없으셨겠는가. 특별히 그가 원하는 대로 시행토록 하라.
김시전이 호소한 것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금년 세초(歲抄)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때 세초 문서(歲抄文書)에 기재된 문적(文跡)의 고사(故事)가 선조(先祖)의 처분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을 안 나머지 감히 경솔하게 언급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뒤에 다시 문적을 상고해 보고서야 죄를 완전히 씻어주는 것이 과연 합당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조부 성탁은 벼슬길에 나오기 전부터 여러 차례나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어 표창되고 발탁을 받았었다. 그리하여 일명(一命)으로 벼슬길에 나섰을 때에는 은일(隱逸)을 대우하는 예를 베풀면서 도신(道臣)에게 하명하여 그를 권유해서 수레에 태워 올려 보내라고까지 하였고, 급기야 그가 연석(筵席)에 올라오자 특별히 고을 수령으로 임명했었다. 그러다가 을묘년 경과(慶科)를 당해서는 급제를 하사하고 또 어시(御詩) 2구(句)를 내리면서 특별히 옥당으로 임명하였는데, 조정에서 이에 대해 별로 쟁집(爭執)하는 논의도 나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뒤에 대질 신문하는 일로 인하여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어떤 승지 하나가 갑자기 논계(論啓)하면서 점점 사건이 얽히는 바람에 사단(事端)이 거듭 발생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밝게 해명되는 은택을 입고 죄를 모두 용서받았으나 이름만은 그대로 세초 문서에 남게 되었다. 올해와 같은 해를 만나 과거(科擧)의 명칭을 생각하건대 어찌 조절해 주는 일을 그의 호소를 듣고서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일이 의리와 관계가 있는 만큼 이 때문에 저것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선조의 처분 내용을 받들어 읽다가 고상(故相)의 차자를 취해 보건대, 그 속에 ‘아직도 세초 문서에서 완전히 씻어주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 만약 금년을 넘긴다면 이 어찌 과거의 명칭을 생각하는 뜻이 되겠는가. 시골로 돌아갔던 고(故) 교리 김성탁의 죄명(罪名)을 분간(分揀)해 줄 것이라는 뜻을 그에게 분부토록 하라.
그의 조부가 올바른 행실로 선조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다마는 그의 부친 역시 행실이 이에 못지 않게 일컬어졌었는데 생전에 미처 임용되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뜻도 아울러 그에게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라도의 생원 박찬민(朴燦玟)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은 학행(學行)과 절의(節義)가 뛰어나니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에게 이미 시행했던 예에 따라 부조지전(不祧之典)281)  을 행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로 놔두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문간공 박상에 대해서는 실로 남다른 감회를 특별히 느끼고 있는데, 그의 꿋꿋한 충절과 높은 지조를 늘 탄복해 왔을 뿐만이 아니고 그의 문자나 행동에 나타난 의논과 지기(志氣)를 보더라도 필부가 일시적으로 비분강개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기걸차고 씩씩하며 성대하여 시(詩) 삼백편(三百篇)의 남긴 뜻을 잃지 않고 있는 것으로 말하면 그의 시가 바로 그렇다고 하겠다.
말세가 되어 풍속이 비하되면서 예(禮)와 악(樂)도 모두 무너지고 말았는데, 지금 세상에 와서 옛날의 풍속을 찾으려면 악(樂)의 가르침을 당연히 시에서 상고해야 할 것이니, 그래서 더더욱 문간의 시가 마음에 깊이 계합(契合)되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 사람됨을 생각하노라면 그의 조예(造詣)가 어느 영역에까지 이르렀을지 알지 못하겠다고 여겨지곤 하였다.
훈신(勳臣) 이외에 부조지전을 행하는 일이 법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간혹 특별 분부에 따라 절행(節行)이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시행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니 유독 감회가 남다르고 깊이 계합되는 박 문간(朴文簡)에 대해서만 한 번 허락하는 것을 아낀다면 이 마음을 표시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특별히 부조지전을 허락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이것과 관련하여 생각되는 점이 있다.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학행(學行)과 감식(鑑識)으로 말하면 과연 어떠하였던가. 늘 한 번 제사지내 주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가령 선정 김인후(金麟厚), 고(故) 충신 고경명(高敬命), 증 이조 판서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사람의 후손은 거의 모두 거두어 임용시켰는데, 조 문열(趙文烈)의 후손만은 조정에 나오게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사손(祀孫)을 찾아낸 뒤 그의 성명과 나이를 뒤에 기록해서 장계를 올리도록 분부하고, 똑같이 관원을 보내 문열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진도군(珍島郡)에 산배(散配)된 죄인 후전(後傳)의 처(妻) 정녀(鄭女)가 상언하기를 ‘제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는데 제 남편이 연좌(連坐)되어 산배되는 바람에 아직 남편의 얼굴도 모르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도형(徒刑)이나 유형(流刑)을 당한 자의 처첩(妻妾)에게는 같이 따라가도록 하라는 명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제 남편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와 늙은 시어미가 서로 의지하고 사는 형편에서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막지 말고 고부(姑婦)가 함께 가도록 하라고 명을 내려주시어 병든 남편을 한 번 보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이미 하교가 있는 이상 막아 지키는 일은 막아 지키는 일이고 새 규정대로 하는 일은 또 그 규정대로 해야 할 것인데, 해도(該道)에서 어찌하여 금지한단 말인가. 경의 조(曹)에서 말미에 점련(粘連)하여 도신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라. 지난번 행차하던 도중에 슬피 통곡하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는데 화기(和氣)를 해치기에 충분한 점이 있었다. 더구나 이미 규정으로 삼으라고 분부를 내렸다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뜻도 아울러 도신에게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허적(許積)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교하기를,
"이 대신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깊이 헤아려 왔다. 의리라고 하는 것은 공적(公的)인 물건으로서 그 체(體)로 말하면 거울처럼 텅 비어 있고 그 용(用)으로 말하면 저울대처럼 공평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라도 사의(私意)가 개입된다면 어떻게 의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경신년의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공사(公私)의 문적(文蹟)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니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것을 모르겠는가. 그의 속 마음을 볼 때 용서해 줄 만하고 그 자취로 볼 때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첫째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고, 둘째 죄수로서 공초(供招)한 것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당화(黨禍)로 막혀 사람마다 주체적인 정견(定見)을 갖지 못하게 된 나머지 1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고상(故相)에 관계된 일이라면 제기해서는 안될 조목으로 내팽개쳐 두어 왔다. 이것이 어찌 의리이며 도리라고 하겠는가.
가령 고상이 두 마음을 품고서 다른 행동을 하였다면, 고 대사헌 이익상(李翊相)이나 고 대사간 김만중(金萬重) 같은 사람들이 어째서 사형에서 감해 주는 율(律)을 받들어 따랐겠는가. ‘칙철지명(則哲之明)282)  을 다칠 우려가 있다.’고 하신 성조(聖祖)의 분부를 통해서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금년이 어떤 해인가. 바로 우리 성조께서 처음 즉위하신 해로부터 두 번째 회갑을 맞는 해이다. 그 당시 원상(院相)283)  으로 있었던 사람에게 올해 죄를 씻어주는 은전을 베풀어준다면 이 역시 성조의 뜻을 우러러 몸받는 하나의 일이 될 것이다. 고상 영의정 허적을 신원(伸冤)시키고 삭직(削職)한 처벌을 용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이 【승지 이만수(李晩秀)·성종인(成種仁)·김계락(金啓洛)·정상우(鄭尙愚).】  의계(議啓)하기를,
"아, 저 허적(許積)으로 말하면 역적 허견(許堅)의 아비로서 체부(體府)를 설치하여 이정(李楨)284)   및 이남(李柟)285)  과 결탁하는 등 그 죄가 종묘 사직과 관련되어 단안(斷案)이 이미 갖추어졌고 처분이 지엄할 뿐더러 공의(公議)가 크게 정해졌으니 왕부(王府)에 있는 단서(丹書)의 견고함이 금석(金石)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 남은 그의 후손이 호소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변고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따로 특별한 분부를 내리시어 그의 죄를 씻어주기까지 하시다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의리에 입각해서 막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비상한 거조를 취하시는 것입니까. 거듭 생각하시어 속히 전에 내리신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체부(體府)의 권한은 모두 부체찰사(副體察使)에게 있었고 도상(都相)286)  은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데 불과하다. 모든 사무와 군정(軍政)은 전적으로 부사(副使)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때의 부사는 바로 청성(淸城)287)  이었다. 체부를 설치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주관했던 부사가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아니면 극력 사양하여 인수(印綬)를 받으려 하지 않았던 도상이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더구나 도상이 관장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20명의 군관(軍官)과 20명의 기졸(旗卒) 뿐이었다. 그러니 이를 비유컨대 평장 군국사(平章軍國事)를 평장 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로 올리면서 그 명칭만 높여 주었을 뿐 실권(實權)은 빼앗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이토록까지 전고(典故)에 어둡단 말인가. 옛날의 재상(宰相)들은 다른 나라의 연호(年號)까지도 잘 알았는데, 지금의 사대부들은 1백 년 전의 당파싸움조차 알지를 못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楨)·남(柟)과 결탁하였다는 것도 애매한 말이다. 협방(挾房)에서 독대(獨對)했을 때 성상의 몸을 보호하고 가까운 종친들을 살펴 예방할 목적으로 은밀히 아뢴 내용을 보면,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처분을 내리면서 어떻게 충분히 헤아린 것이 없이 그저 그의 후손이 상언한 말만을 얼른 듣고서 경솔하게 판하(判下)할 리가 있겠는가. 경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곤 그저 색목(色目)이라는 두 글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당하기만 하면 늘 드높은 식견과 활달한 기상을 보이지 못한 채 옳고 그른 타당성 여부를 논하지도 못하면서 오직 막으려고만 애쓰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대방가(大方家)의 비웃음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경들이 만약 이 사건의 전말(顚末)도 알지 못한다면 책상 머리에 상고할 만한 책이 있는데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아뢴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13일 경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서(關西) 지방의 멀리 활쏘는 무사들을 시험하였다. 봉조하(奉朝賀) 홍수보(洪秀輔)와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심태(趙心泰)를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와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잇따라 차자를 올려, 허적을 복관(復官)시킨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원 차자를 봉해서 돌려주라고 명하고, 비답하기를,
"차자의 말투가 이미 원만하지 못한 흠이 있는데다가 사실 문제에 있어서도 어긋나는 점이 있는데, 기주(記注)에 등록(謄錄)되어 있는 것과 난보(爛報)에 반포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이 차자를 보면 사람들이 기롱할 것 같기에 원 차자를 부득이 봉해서 돌려주는 것이니, 이것은 격례(格例)를 소홀히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옛날 대신 허목(許穆)이 차자를 올려 영상 허적을 논했을 때에 성조(聖祖)께서 준엄하게 비답을 내리시면서 심지어는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여 사실을 자복(自服)하게 하신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신하를 예우하시던 성조의 위대한 덕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대신에게 비답을 내리셨던 그 뜻 또한 우러러 헤아려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성조께서 이미 고(故) 대신에게 시행하셨던 것을 나도 경들에 대해서 적용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와 같이 돈유(敦諭)했는데도 만약 뒤에 가서 다시 이 일을 언급한다면 대신을 공경히 예우해야 한다는 상전(常典)을 돌아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니, 경들은 미리부터 잘 알아듣도록 하라.
오늘날 사람들로 말하면 고루하고 무식해서 당화(黨禍)의 찌꺼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정원에서 의계(議啓)한 것을 보면 느닷없이 있지도 않은 남(楠)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법으로 복주(伏誅)된 남(柟)이라는 이름은 거꾸로 빠뜨렸으니, 이를 통해서도 얼마나 꿈에서 빠져나오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조정의 분위기로 보나 세상 풍속으로 보나 정말 안타까운 생각만 든다.
다른 사람들은 우선 놔두고라도 유감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영돈녕이다. 경은 어찌하여 경의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지 않는 것인가. 경의 선조(先祖)인 문충공(文忠公)은 오직 정성스럽게 충성을 바치면서 나라만 알았지 개인적인 일은 잊었던 인물이다. 그가 허적에 대해서 애석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기에 주달해 답변드리면서 ‘체부(體府)를 설치한 것이 역모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까지 하였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 말이야말로 1부(部)의 공안(公案)이라고 말할 만하다. 경의 할아버지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기에 결국에는 정인(正人)을 해치는 흉악한 무리들에게 화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니, 그 단락이 각각 달랐던 것이 또한 그와 같았던 것이다.
경들도 혹 그 당시의 전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러 적들에 대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끝까지 추궁했어도 모두들 말하기를 ‘영상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고 하였고, 대간의 탄핵문이 교차해 나오면서 그렇게 엄하게 추궁했었는데도 역시 ‘그의 아비만은 모르는 사실이다.’고 하였으니, 몰랐다[不知]는 이 두 글자야말로 이 일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의리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는 밤낮으로 신중하게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제 처분을 내린 것으로 말하더라도 바로 ‘상형(上刑)에 속한 사건이라도 정상을 참작할 만하면 하형(下刑)의 처분을 내리도록 하라. 세상에 따라 가벼운 형을 쓸 때도 있고 무거운 형을 써야 할 때도 있으니 오직 일정하지 않은 가운데 권도(權道)를 발휘하라. 모두 중도(中道)에 맞게 되면 그것이 경사이니 이 상형(祥刑)을 잘 살필지어다.’288)  라고 한 은미한 뜻을 취해서 나온 조처였다. 많은 말을 해 줄 것도 없다. 스스로 짐작하고 헤아려서 덧붙여 진달하도록 하라.
고(故) 교리 김성탁(金聖鐸)의 일로 말하면, 당초 승지가 취한 거조는 아첨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복잡한 사태가 야기되어 심지어는 역적 희(禧)가 풍원(豊原)289)  을 반박하는 일까지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성탁의 본심을 헤아려 본다면 연전의 조덕린(趙德隣)의 일에 비해서 헐하고 또 헐할 뿐만이 아니다. 올해와 같은 해를 만나 경과(慶科)의 명칭을 생각하고서 비로소 죄를 씻어주게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성인이란 이치에 따라서 자기의 천성을 온전하게 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이치로 미루어 나간다면 성인의 일이라고 해서 어찌 헤아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일전에 허적을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을 이치에 맞지 않게 내리셨단 말입니까.
대저 허적이 죽은 것으로 말하면, 첫째는 체부(體府)를 설치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역적인 아들이 역적 괴수와 얽혀들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듣건대, 그 당시에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의 행위야말로 하늘을 뒤덮고도 남는다면서 허적을 앞에 놔두고 못할 말없이 엄하게 꾸짖으며 곧장 성토하였다고 합니다. 나라를 책임진 수상(首相)의 신분으로서 대의(大義)로 단안을 내려 의연히 석작(石碏)290)  처럼 행하지 못한 채 끝내는 불궤(不軌)를 도모하게 하고 말았는데, 그 집안에서 음모가 빚어졌는데도 집안에 있으면서 알지 못했다고 하다니 신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허적에 대한 단안(斷案)은 다른 데에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단서(丹書)에 아무런 흠도 없는데 작질(爵秩)을 예전처럼 복구시켜 주셨으니, 이 어찌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일이라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내리신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이름이 세 정승의 차자에 들어 있지 않기에, 경만은 내 뜻을 체득하고 나를 이해하여 무리를 따라서 파란을 조장하려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바로 뒤이어 나온 경의 차자를 보건대, 이야기한 것이 오히려 세 정승보다도 심하기만 하다.
허적이 석작처럼 행동을 하지 못한 나머지 끝내 불궤를 도모하게 하였으니 그 집안에서 빚어진 음모를 집에 있으면서 몰랐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공척(攻斥)하였는가 하면, 일전에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경이 지금 늙어 백발이 된 나이에 어찌하여 옛날의 습기(習氣)에 휘감긴 채 이런 식으로 색목(色目)에서 나오는 말만 하고 아름다운 명(命)을 드날릴 방도는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세 정승에 대한 비답에서도 이미 말했다마는, 경이 오늘 말한 것은 바로 고상(故相)291)  이 옛날에 말했던 것이었다. 그 때 고상은 이것 때문에 누차 성조(聖祖)로부터 엄한 분부를 받고는 도성 문 밖으로 쫓겨나 정신없이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성조 때에 있어서는 사안(事案)이 성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었는데도 혹시 형정(刑政)을 공평하게 행하지 못할까 염려하시고 처분을 또 그렇게 내리셨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내가 경중(輕重)을 참작하고 성조의 마음을 본받으려고 하면서 기필코 일을 아름답게 처리해 빛낼 목적으로 일전의 처분을 내렸으니, 일의 체면으로 볼 때 감히 언급해서는 안되고 도리로 볼 때 감히 제기해서는 안될 성격의 것이 어찌 고상이 차자로 논했던 때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경이 그만 조금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꾸로 갑자기 상차하여 기세 등등하게 마구 퍼부어대면서, 억만년토록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될 나의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거조를 가지고 이치에 어긋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며 이것이 정말 무슨 심보란 말인가. 나름대로 경을 위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하였다.

 

규장각 제학 윤시동(尹蓍東)이 상차하기를,
"아, 허적(許積)은 위복(威福)의 권한을 멋대로 희롱하며 권세를 휘어잡고는 체부(體府)를 설치하여 흉악한 무리들의 소굴로 삼는가 하면 역적의 괴수를 비호하며 아들 허견(許堅)의 음모를 도왔습니다. 차옥(次玉)의 옥안(獄案)이 나오면서 함께 동화되어 참여했던 자취가 숨길 수 없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숙조(肅祖)께서도 처음에는 주저하시다가 끝내는 처분을 내리시게 되었으니 금석(金石)과 같은 그 단안(斷案)이야말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기사년에 복관(復官)되었으나 다시 갑술년에 삭직(削職)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 1백여 년이 흐르면서 네 분의 임금을 거쳐 오는 동안 감히 고쳐 변화시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형(典刑)의 공명정대한 것이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손자가 외람스럽게 호소해 온 것 때문에 어려워하시는 기색도 없이 신원(伸冤)시키고 복관시켜 주셨으니, 아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후원(喉院)에 대한 비답을 보니, 체부(體府)에 관한 일과 밀주(密奏)에 관한 일을 가지고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체부를 설치한 일로 말하면, 분명히 역적 휴(鑴)가 역적 견(堅)과 결탁하여 부사(副使)가 되려고 획책했던 것인데 척신(戚臣)을 중비(中批)로 부사에 임명하시어 그 은밀한 의도를 확실하게 깨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밀주(密奏)했던 일은 병진년 여름 자전(慈殿)의 건강이 좋지 않으실 때 있었는데 병진년으로부터 경신년까지는 이미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사태가 여러 차례 변하고 단서가 겹겹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옛날에 밀주했던 정신도 끝내는 견제를 당한 나머지 과거와 딴판인 마음으로 돌아서고 말았으니, 이렇게 본다면 그야말로 더욱 죄를 주어야 할 것으로서 용서하는 일을 논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허적을 신원시키고 용서해 주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속히 허락하소서.
그리고 김성탁(金聖鐸)의 죄명(罪名)을 분간(分揀)해 주도록 하셨는데, 또 어쩌면 이다지도 느닷없이 명하셨단 말입니까. 성탁은 ‘이현일이 스승[玄逸爲師]’이라는 네 글자의 흉언(凶言)을 소장에 드러내 공공연히 칭송하였고, 또 기사년의 일을 없었던 이야기로 돌리자고 감히 선조(先朝)께 진달드렸다가 국청(鞫廳)에서 형신(刑訊)을 받고 유배된 자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그가 비록 시골에 돌아가 죽기는 하였지만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만은 결단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니, 그에 대해서도 아울러 처분을 환수토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사를 중비로 임명한 것을 진달하고 밀주했던 연도를 지적해서 말하는 등 요즘의 소차(疏箚) 중에서는 경의 말이 가장 상세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 처분한 본의로 말하면 깊이 헤아린 바가 본래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처분인데 어찌 혹시라도 범범하게 듣고 경솔하게 응하면서 일전의 판하(判下)를 내렸겠는가. 덧붙여 진달한 일도 마찬가지다.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의금부사 권엄(權𧟓)과 동의금부사 윤필병(尹弼秉)이 잇따라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신원(伸冤)시킨 명을 취소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김희순(金羲淳)이 상소하기를,
"아, 역적 허적이야말로 얼마나 극악한 역적이었습니까. 나라의 권세를 훔쳐 희롱하고 역적의 괴수와 결탁하였으며 끝내는 패륜아인 아들로 하여금 남몰래 불궤(不軌)를 주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사년에 복관(復官)된 때에 권대운(權大運)이나 목내선(睦來善)처럼 기꺼이 당파를 비호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오히려 허적이 유사(有司)의 처리를 받는 일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였고 보면, 왕법(王法)은 낮췄다 올렸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성탁(金聖鐸)의 경우로 말하면, ‘이현일(李玄逸)이 스승이다.’는 말을 가지고 감히 남몰래 비호하려는 계책을 이루었습니다. 그 네 글자의 흉악한 말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역안(逆案)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만 전하께서 이들 모두에게 죄를 씻어주는 은전을 가하셨으니, 난신(亂臣) 적자(賊子)들이 장차 거리낄 것이 뭐가 있겠으며, 또 장차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내리신 명을 취소하시고, 허복(許澓)과 김시전(金始全)이 호소한 죄를 속히 유사로 하여금 율(律)에 따라 엄히 징계하게 하소서.
아, 10여 년 이래로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날이 갈수록 부정적인 방향으로 빠져든 결과 풍속이 잘못되고 명의(名義)가 빛을 잃어 사대부의 기상과 풍도가 흡사 땅을 쓴듯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새해 초에 한 번 처분을 내리신 뒤로부터 그들의 소굴이 탄로가 나고 요망한 적이 죽으면서 기강이 떨쳐져 온 사방이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탁하고 있는 형세가 예전과 같고 훈습(薰襲)되어 있는 것이 워낙 고질적이라서 그들이 성기(聲氣)로 누르자 공의(公議)가 펼쳐지지 못하고 공갈 협박을 제멋대로 하자 물론(物論)이 그 동안 들끓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안묵(李安默)의 상소가 나온 것이야말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그 원본(原本)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아무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하던 서유린(徐有隣) 형제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안묵이 처음 제대로 언급함으로써 임금을 잊고 나라를 등지며 의리를 위배하고 이익만 좋아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장차 경계할 줄을 알게끔 해 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세도(世道)의 면에서 사람들을 꿈에서 깨게 한 일대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아, 그가 간사함을 제거하고 사특함을 배척한 공이야말로 표창해 주어야 하지 꺾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양(陽)의 기운을 일으켜 세우고 음(陰)의 기운을 억제하는 방도로 볼 때에는 마치 동짓날에 관문(關門)을 닫아 거는 의리와 마찬가지로 양의 기운이 돌아오는 처음에 더욱 배양하며 보호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를 억제하는 것이 이다지도 지나치십니까. 상소를 중도에서 그만두게 하시는가 하면 또 그를 배척하고 내쫓아 조양(朝陽)에서 한 번 울어제낀 한 선비로 하여금 교외 밖으로 쫓겨나 방황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재변을 만나 말해 달라고 청하신 우리 전하의 성대한 뜻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이안묵을 들판으로 내쫓도록 하신 명을 특별히 취소하시고 원소(原疏)를 반포해 보여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가지 조목의 일을 지금 와서 문득 진달하곤 하는데 어찌 꼭 거듭 번거롭게 해야 하겠는가. 이안묵에 대한 처분을 환수하라고 한 일을 만약 조정 신하들에게 보인다면 이와 같은 정적(情跡)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불똥이 튀고 말 것이다. 그대가 이런 행동을 취하게 된 이유로 중신(重臣)인 서유린 형제를 연석(筵席)에 올리며 끌어들인 것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남의 벼슬길 막기를 좋아하는 습속(習俗) 때문일 것이니, 그대와 같은 자가 공평한 안목으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기야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대에 대해 꼭 표창하며 발탁할 생각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지난 봄철 연석에서 두 제학(提學)과 말을 주고받았던 까닭이다. 그대는 옛날의 잘못을 통렬히 고쳐 맑은 조정에서 버린 물건이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신묘

우박이 왔다.

 

하교하였다.
"판부(判付)할 때에 이미 말했다마는, 시(詩)야말로 악(樂)이 남은 것이니, 시가 세상의 교화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우리 나라의 시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 박은(朴誾)과 증 이조 판서 박상(朴祥)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박은의 시에 대해서는 일찍이 금싸라기같은 작품들을 주워모아 1부(部)의 책으로 엮어 내었었다. 그런데 문간(文簡)292)  의 시는 그 판본(板本)이 떨어져 나가 볼 수가 없으니, 내각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행회(行會)하게 하여 《눌재집(訥齋集)》을 중간(重刊)한 뒤 인쇄해 올리도록 하라."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기를,
"전일 적신(賊臣) 허적(許積)을 신원(伸冤)시키고 삭직(削職)한 것을 원상태로 복구시키라는 전지(傳旨)를 삼가 받들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까.
신이 제학 윤시동(尹蓍東)의 차자를 삼가 보건대, 허적의 흉악한 모의와 역모를 행한 정상을 손을 짚어가며 문서를 조사해 내고 그 증거를 지목해 아뢰었는데 그것이 명료하기가 마치 눈앞의 일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그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허적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겠습니까, 용서해주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신은 성상께서 의리를 확고히 정하시고 형정(刑政)을 융통성있게 처리하시면서도 오히려 다시 전일의 분부만은 굳게 고집을 부리고 계시는 뜻을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셨으면서 시원스럽게 생각을 바꾸는 도량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천지와 같이 커야 할 성상의 도량에 비추어 볼 때 유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 지난해에는 하나의 적신(賊臣) 김상철(金尙喆)을 용서해주셨고 또 지난 해에는 하나의 적신 오시수(吳始壽)를 용서해주셨는데, 그것도 부족하게 여겨 김성탁(金聖鐸)까지 아울러 그 죄안(罪案)을 씻어주시고 말았습니다. 요즘 들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만 하면 번번이 농락하며 뒤집어 버리는 권한을 행사하시어 나라의 체통이 무너지게 하고 뭇사람들이 의혹케 하고 계십니다. 하나의 사건이 겨우 진정되자마자 곧바로 또 하나의 일이 터져 나오고 있으므로 조정에 늘 동요하는 근심이 있게 되고 온 나라에 태평시대의 교화가 입혀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일을 그만두실 수 없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듣건대, 역적 허견(許堅)이 그 아비가 거처하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그 도당을 모이게 하고 바야흐로 불궤(不軌)를 도모할 적에 크게 차일(遮日)을 쳐 마치 어악(御幄)의 의절(儀節)처럼 참람되게 하는 등 사태가 매우 급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때 성조(聖祖)께서 친히 후원(後園)에 올라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 보시고는 금군에 명하여 체포토록 하였다 합니다. 이 일이 아직도 고로(故老) 사이에 전해지고 있고 보면, 허적의 마음으로 볼 때 용서해 줄 만하고 자취로 볼 때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신 분부를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마음 속으로 근심하며 길이 탄식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 적신 하나가 큰 죄안(罪案)에서 빠져 나오는 것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이후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윤휴(尹鑴)·민암(閔黯) 등의 살아남은 족속들이 모두 감히 마음을 내어 틈을 엿보다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꼬리를 물고 호소해 와서 우리의 국법을 희롱하고 우리의 세교(世敎)를 어지럽게 한다면, 뒷날 종묘 사직의 근심거리가 되는 것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허적과 김성탁의 죄를 용서하도록 하신 명을 특별히 취소하시어 국청(鞫廳)의 죄안이 엄히 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義)와 음붕(淫朋)은 각기 성격이 다른 문제이다. 대의로 말하면 일단 밝힌 뒤에도 불분명할까 염려하며 더욱 밝혀야 하는 것이고, 음붕으로 말하면 일단 깨뜨린 뒤에도 완전히 깨뜨려지지나 않았을까 염려하여 더욱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선대(先代)의 뜻을 이어받고 일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관지장(觀志章)의 장구(章句)를 보지 못했는가. 황극(皇極) 한 편(篇)이야말로 내가 금 저울처럼 여기는 글이다. 경신년의 일로 말하면 상세하기 그지없는데, 허견이야 물론 역적이지만 고상(故相)이야 거기에 관계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청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뒷날 정사(政事)를 행할 때 고상을 복관(復官)시키는 교지(敎旨)에 어보(御寶)를 찍어서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한용귀(韓用龜)와 헌납 민사선(閔師宣)과 정언 정로영(鄭魯榮)이 잇따라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복관시킨 명과 김성탁(金聖鐸)을 분간(分揀)해 주도록 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5일 임진

우박이 내렸다.

 

정배(定配)한 죄인 민병현(閔秉顯)·민상현(閔相顯)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하교하였다.
"지금 진도(珍島)에 유배된 죄인을 지난해 호남의 우우우심(尤尤尤甚)했던 고을로 이배(移配)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도류안(徒流案)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올해가 어떤 해인가. 꿈틀거리는 미물들도 모두 살아 움직이게 해 주는 해이다. 그런데 고상(故相)으로 말하면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집안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찍이 신사년의 사건을 그 해의 두 이 정승(李政丞)에게서 들었었는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병현·민상현 형제의 일을 발계(發啓)293)  한 것은 바로 대신(臺臣) 강문환(姜文煥)이었다. 문환이 대간을 욕보인 놀라운 거조는 대체로 진평(陳平)처럼 사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으로서 급기야는 대망(臺望)을 특별히 깎아버리는 일까지 있게 된 것이었다. 병현의 일로 말하더라도 그렇다. 뱃놀이를 한다고 이름을 붙이긴 하였다마는 그때는 바로 그가 상복(喪服)을 입었던 초기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유배를 시키는 것은 정말 타당한 율(律)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금성(錦城)의 집안을 생각할 때면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것 같기만 한데 또 이 경우는 응당 받아야 할 죄도 아니니 두 사람을 방송(放送)토록 하라."

 

택수(澤遂)의 아들·조카·동생들을 이배(移配)하고, 정배된 죄인 이필(李淧)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10월 16일 계사

서유린(徐有隣)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17일 갑오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하교하였다.
"번개와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치면서 새벽이 될 즈음에 경고(警告)해 주었으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재변이 닥치거나 상서(祥瑞)가 오는 것은 모두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나 한 사람이 덕이 부족하여 하늘의 마음을 제대로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탓으로 불안하고 좋지 못한 현상이 때 아닌 때에 일어났으니, 재변을 소멸시키고 좋은 방향으로 돌리는 방책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오늘부터 3일 동안 감선(減膳)294)  을 하도록 하라. 언관의 직책에 있는 자들은 나의 말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말을 해 줄 것이며, 기타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도 각기 자기 위치에서 진달하도록 하라.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조용히 살 때에는 그 상(象)을 보면서 그 해석을 음미하고, 활동하게 될 때에는 그 변(變)을 살피면서 점(占)을 음미한다.’고 하였다. 하늘과 사람은 이치가 하나이니 두드리면 응하는 법이다. 그러니 어찌 감히 인사(人事)를 다함으로써 기필코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수뢰둔괘(水雷屯卦)의 상사(象辭)에는 ‘경영할 때이다.’고 하였고, 뇌지예괘(雷地豫卦)의 단사(彖辭)에는 ‘양(陽)의 기운이 응해 온다.’고 하였으며, 택뢰수괘(澤雷隨卦)의 단사에는 ‘시대를 따르는 의리야말로 큰 것이다.’ 하였고, 화뢰서합괘(火雷噬嗑卦)의 상사에는 ‘처벌을 분명히 하고 법규를 신칙할 때이다.’ 하였으며, 지뢰복괘(地雷復卦)의 상사에는 ‘관문(關門)을 닫고 사방을 살피지 말라.’ 하였고, 천뢰무망괘(天雷无妄卦)의 상사에는 ‘천시(天時)에 합하여 만물을 기를 때이다.’고 하였으며, 산뢰이괘(山雷頤卦)의 상사에는 ‘언어를 신중하게 하고 음식을 절제하라.’고 하였고, 뇌풍항괘(雷風恒卦)의 상사에는 ‘중정(中正)한 위치에 서서 방향을 바꾸지 말라.’고 하였으며, 뇌천 대장괘(雷天大壯卦)의 상육효사(上六爻辭)에는 ‘숫양의 뿔이 울타리에 걸쳤으나 어렵게 여길 줄 알면 길하리라.’ 하였고, 뇌수해괘(雷水解卦)의 상사에는 ‘허물을 이해하고 죄를 용서하라.’고 하였으며, 풍뢰익괘(風雷益卦)의 단사에는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줄 때이다.’고 하였고, 중뢰진괘(重雷震卦)의 상사에는 ‘두렵게 여기고 몸을 닦으며 반성하라.’고 하였으며, 뇌택귀매괘(雷澤歸妹卦)의 상사에는 ‘길이 같이 살 길을 도모하며 허물어질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고, 뇌화풍괘(雷火豊卦)의 단사에는 ‘천지(天地)의 성쇠(盛衰)도 때와 더불어 진퇴(進退)한다.’고 하였으며, 뇌산소과괘(雷山小過卦)의 상사에는 ‘지나칠 정도로 씀씀이를 절약하라.’고 하였다.
나의 마음속 은미(隱微)한 곳으로부터 시행하고 조처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일이 이치대로 따른 것이고 어떤 정사가 이치에 어긋난 것이겠는가. 이것은 이미 내가 내놓은 행동을 보면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까지도 충분히 징험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잘못을 바로잡고 어떤 허물을 고쳐야만 15괘(卦)의 단사와 상사와 효사의 뜻에 제대로 부합되어 재변을 상서로움으로 돌리고 태평시대의 기상이 퍼지게 할 수 있겠는가. 섭리(燮理)하는 위치에서 나를 도와주는 말을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니, 경들은 한 마디 말을 아끼지 말라."

 

승정원이 【승지 신기(申耆)·이유경(李儒慶)·김면주(金勉柱)·유한령(兪漢寧)·이경운(李庚運).】  의계(議啓)하기를,
"삼가 성상 자신을 책망하시는 분부를 받들건대 정성이 흘러 넘치면서 가슴아파 하셨습니다. 보통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말을 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시니, 신들이 어찌 감히 대략적으로나마 어리석은 소견을 토로하여 아름다운 명을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재변이 도래한 원인을 생각해 보더라도 어찌 한두 가지 덧붙여 진달드릴 것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허적(許積)과 김성탁(金聖鐸)을 한꺼번에 용서하여 사면하시고 역얼(逆孽)들을 같은 고을에 이배(移配)시키신 것이야말로 전에 볼 수 없던 지나친 거조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원에서 이미 거듭 논란하였고 제신(諸臣)이 쟁집(爭執)하였던 만큼 감히 중복되게 더이상 아뢰지는 않겠습니다만, 신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걱정스럽고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보다도 금령(禁令)을 내리시는 한 가지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한 번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때면 번번이 한 차례 금령을 내리시곤 합니다. 그리하여 언로(言路)가 막혀 상하의 뜻이 통하지 않게 되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이(災異)를 불러오는 이유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강창(江倉)으로 행차를 옮기셨을 때에는 갑작스럽게 명령을 내리시어 호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고, 강화(江華) 나루에서 꾸짖으며 금지시킨 것은 직분에 관계된 일이었는데도 곧바로 엄한 견책을 내리셨습니다. 조정은 반목하여 갈등을 빚고 있어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할 희망이 전혀 없고, 백성들은 갈수록 곤궁해져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재정이 고갈되었는데도 수요는 한 해가 다르게 증가하는 바람에 호조에서 비용을 마련하느라 도처에서 꾸어다 쓰고, 태창(太倉)에서 지급하던 녹봉까지 다른 관사(官司)로 이관하였으니, 이는 옛사람이 말한 바 ‘국가의 회계를 생각하면 애통스러울 따름이다.’고 한 것으로서, 식자들이 이보다 더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 고을의 과객(過客)이 잔혹한 관리의 손에 걸려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의논 끝에 목숨을 붙여 주었고, 변방의 사나운 군졸이 몽둥이로 진장(鎭將)을 겁주었는데도 군율(軍律)로 복주(伏誅)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놀랍고 근심스러운 일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보면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어찌 우리 전하에게 간절히 고해 줌으로써 크게 깨우치고 크게 진작시켜 재변을 상서로움으로 바꾸게 하는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엄숙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시고 자세를 완전히 바꾸시어 몸을 닦고 성찰하는 방도를 강구하시고 재변을 소멸시킬 방책을 극진히 하도록 힘쓰소서."
하니, 유념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차하기를,
"이번에 하늘이 전하에게 경계할 것을 보여주어 기필코 크게 분발시키고 크게 진작시키려고 하였는데, 그 뜻을 살펴 본다면 전하로 하여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금 진일보(進一步)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천하 만물을 보면 이치가 내재되지 않은 물건이 있지 않고, 천하 만사를 보더라도 이치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을 응접해야 할 인주(人主)의 입장에서는 오직 내재되어 있는 그 이치를 궁구하고 힘껏 실행하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대저 인주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 표준을 확립시킨 뒤 부드럽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을 각각 마땅하게 베풀게 되면, 권세를 훔쳐 오로지 사욕(私慾)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구는 신하가 나오지 않게 되니, 이것은 바로 이치상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주가 마음을 비우고 바른 말이 들어오게 하면, 혹 남몰래 편당(偏黨)의 계책을 꾀하면서 암암리에 자기 사욕을 채우려 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배척하여 물리칠 것이니, 이것 또한 이치상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확충시키는 것은 오직 인주가 한 마음으로 분발시키고 진작시키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그 요체(要體)로 말한다면 보좌하는 정승을 신중히 가려 임금의 뜻을 받들어 돕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실제로 위에서 말한 바 이치상 당연한 것들에 마음을 다 쏟고 계신다면 어찌하여 정승을 가려서 두는 일을 소홀히 하시어 신처럼 자격이 없는 자를 배척해서 쫓아보내게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더욱더 치열하게 성찰하시는 동시에 신을 내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떻게 백척간두에서 다시 진일보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학(下學)에도 어두운데 더구나 상달(上達)이야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돌아 보건대 나의 도(道)를 향한 일념(一念)이 정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건만은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고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보아도 오직 단계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탄식만 하게 될 뿐 몇 길 되는 담장도 아직 뛰어넘지 못한 형편이므로 이따금 점검해 볼 적이면 겸연쩍게 얼굴만 붉어질 따름이다.
그래서 정치도 백성의 뜻을 맞춰 주지 못하고 교화하는 일 역시 희망대로 되지 않아 위에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에서는 백성이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종 재난이 눈에 가득히 들어오고 걱정과 근심으로 애태우는 가운데 소강(少康)의 세상 정도라도 만들어 보려 해도 쉽게 되지 않고 있는 것인데, 첫째도 내가 덕이 없는 탓이요 둘째도 내가 훌륭하지 못한 탓이다. 경이야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경이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 경이 그만 이를 자기 잘못으로 돌리면서 책임을 면하려는 형식을 취하려고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은 그저 다시금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 아뢴 말은 물론 윤허하지 않는다.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돈녕 김이소(金履素)가 상차하기를,
"아, 지난번 강창(江倉)에 행차하신 일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스스로 잘못이라고 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고 계십니까. 여름철 북영(北營)에 행차하고 돌아오신 뒤에 전하께서 다시는 이런 거조를 취하지 않겠다고 전석(前席)에서 유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이런 거조를 다시 취하셨으니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훈계의 뜻도 없어지고 법도가 무너졌다는 탄식만 더욱 깊어질 따름입니다. 전하의 거조로 말하면 이처럼 전도(顚倒)되고 있습니다.
《명의록(明義錄)》 한 책이야말로 우리 동방의 인경(麟經)295)  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방(隄防)이 점차 무너진 나머지 극악한 역적의 아들을 시골에 편안히 살게 하면서도 징토(懲討)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양헌(養獻)의 얼자(孼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헤아려 이배(移配)토록 하였으니 의리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필(李淧)처럼 구족(九族)을 멸해야 할 역적의 죄안(罪案)까지도 완전히 없는 것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전하께서 처분을 내리신 것이 이토록 비정상적이니 오늘날의 재변이야말로 어찌 사람이 잘못해서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전에 연차(聯箚)에 대한 비지(批旨)를 삼가 받들건대, 특별히 신의 고조(高祖)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을 거론하시며 간절히 깨우쳐 주셨는데, 신이 무디고 불초하여 옛날의 일을 들은 것이 적었으므로 사실 그렇게 아뢰었던 데 대한 전말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옛날의 사적을 담당하는 집으로부터 그 당시의 사정을 알아보건대, 신의 고조가 그렇게 아뢴 것은 단지 무슨 일 때문에 일반적으로 논했던 것이었을 뿐 허적(許積)의 죄안(罪案)을 조정하기 위해 아뢴 말은 아니었으니, 비지에서 이를 인용하여 유시하신 뜻과는 본래 차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허적을 위해서 발언한 것도 아닌, 연석에서 일시적으로 아뢴 말을 가지고, 마치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 내놓은 말처럼 귀결시켜 그것으로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하나의 증거로 삼으려 하신다면, 그야말로 신의 고조의 본래 의도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역적 윤휴(尹鑴)를 국문(鞫問)할 때 고조가 또 문목(問目) 가운데 체부(體府)를 다시 설치한 한 조목을 첨가해 넣자고 청하였습니다. 이 일이 진정 역모(逆謀)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면, 체부를 설치한 것은 매한가지 일인데, 윤휴와 허적을 처리함에 있어 어찌 혹시라도 이 사람에게는 그 죄목을 적용하려 하지 않고 저 사람에게는 꼭 적용하려고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본다면 그 당시 연석에서 아뢴 것은 아뢴 것이고 허적이 죄를 지은 것은 지은 것으로서 애당초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증거로 삼았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지금 만약 한 번 전하에게 우러러 질정함으로써 그렇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 체부의 설치에 간여되어 경신년의 역안(逆案)에 오른 얼자(孼子)들이 이를 핑계대고 망령되게 엿보는 생각을 낼까 나름대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김성탁(金聖鐸)의 경우로 말하면, 그가 급제한 과거(科擧)의 명칭이 이 해였던 것은 단지 우연히 맞게 된 그의 행운일 뿐이고, 상소를 올리면서 부도(不道)한 말을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의도적으로 범한 실죄(實罪)이니,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다시 더 거듭 생각하시어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뢴 천언 만어(千言萬語)가 모두 부지런히 공격한 것이기에 촛불을 밝히고 옷깃을 가다듬으면서 몇 차례나 반복해 읽었다. 그런데 차례로 서술한 나의 잘못 가운데 대부분이 몽답정(夢踏亭)과 제일루(第一樓)에 행차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 다시 범해서는 안될 그런 잘못이 아니다. 나는 세 번 하고 네 번 하고 나아가 열 번을 하고 백 번이라도 해서 기필코 사람들이 보는 데에 익숙하고 듣는 데에 면역이 생기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이밖에 정령(政令)을 내고 거조를 취하는 사이에 번번이 균평(均平)해야 할 도리를 잃곤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본래 권도(權度)에 입각해 한 일일 뿐, 내가 어찌 차마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덧붙여서 세세하게 또 진달하였는데 숨김없이 말해 준 그 정성이 감탄할 만하다.
그런데 한 가지 경에게 다시 해 주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경이 비록 ‘체부(體府)에 대한 일은 매한가지인데 어찌 이 사람에게는 그 죄목을 적용하지 않으려 하고 저 사람에게는 꼭 적용하려 하였겠는가.’라고 말하였지만, 나보고 말하라고 한다면 ‘체부를 재차 설치했고 보면 주객(主客)이 각각 다르다. 따라서 이쪽과 저쪽에 적용할 때에 서로 달리 경(涇)·위(渭)가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겠다. 경은 어찌하여 경의 선조의 마음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실수로 저지른 죄는 그 죄로 처리하고 역적을 처형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처리해야 하는 분한(分限)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기사년의 일에 대해서야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경의 선조를 생각하면 그지없이 원통한 일인데 환히 빛나는 그 의리야말로 해나 별과 견줄 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경신년의 한 죄안에 대해서만은 그 동안 왜곡되어 온 점이 있다고 나름대로 여겨지기에 며칠 전 처분을 내릴 때에 대략 나의 뜻을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천 년 뒤에까지 성조(聖祖)의 뜻을 밝힐 것이며 오늘날에 임금의 기강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공족(公族)은 보존되지 못하고 권세있는 척족(戚族)이 거리낌없이 굴 것이며 또 대로(大老)가 당한 기미년의 수치를 통쾌하게 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나의 마음은 저울대와 같아 사람들에게 차별을 두지 못한다.’라고 한 옛사람의 말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벽에다 크게 써놓고는 아침 저녁으로 돌아보곤 하는데 나의 마음은 즉 옛사람이 말한 바로 그 마음이다. 경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나는 실로 의혹을 갖고 있지 않다."
하였다.

 

대사간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기를,
"역적 택수(澤遂)의 아들·조카·동생들을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시는가 하면 또 역적 홍섭(弘燮)의 두 동생들을 방송(放送)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아, 더없이 엄한 것은 국법이고,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뱀 같은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역적의 살아 남은 족속들로 하여금 좋은 곳에서 단란하게 모여 살게 하기도 하고 좋을 대로 고향 마을에 돌아가도록 하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천하에 법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니, 법을 관장하는 반열에 있는 사람치고 그 누구라서 감히 명을 받들 성격의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해부(該府)와 해조(該曹)에서는 애당초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서 무턱대고 행회(行會)하고 말았으니, 놀랍고 분통스러운 점이 또 더욱 어떻다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전에 내리신 명을 환수하시고, 해부와 해조에서 행회한 해당 당상관 모두에게 견책하여 파직하는 처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돌아보건대 지금 《명의록(明義錄)》 한 부는 읽을 여지도 없게 되었습니다. 난적(亂賊)이 제멋대로 굴고 세도(世道)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꾸만 빠져드는데, 택수나 홍섭처럼 《명의록》과 가장 관계가 깊은 역적들에 대해서조차 그 친족들을 평민으로 만들어 주려 하고 계시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신이 아무리 뻔뻔스럽게 얼굴을 쳐들고 백관의 반열에 있고 싶다 한들 장차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면직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각기 참작하고 헤아려서 한 일이다. 하나는 법과 상관없는 일이고 하나는 제목 자체가 어긋나는 일인데, 《명의록》의 대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정로영(鄭魯榮)이 상소하기를,
"아, 허적을 복관시키도록 명하신 것과 김성탁의 죄명을 분간해 주도록 분부하신 것이야말로 정말 상도(常道)에 어긋난 처분이요 형정(刑政)이 타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서 더 이상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그런데 택수의 지속(支屬)을 이배(移配)하라고 분부하시고 홍섭의 두 동생을 완전히 풀어주도록 명하셨는데, 또 어찌하여 이렇듯 중도(中道)에 지나친 거조를 취하신단 말입니까. 지금 이후로 《명의록》 한 부는 장차 읽을 여지도 없게 되었습니다. 의리가 무너져 내린 것이 이와 같으니, 재변이 발생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이필(李淧)을 석방하라고 하신 명으로 말하면 더더욱 통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어찌 보잘 것 없이 비천하기만 한 그까지 용서해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역시 원하옵건대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신이 일전에 허적의 일과 관련하여 간단하게 상소를 한 번 하여 대충 쟁집(爭執)하는 의리를 본받았는데, 대간들이 연명(聯名)으로 소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로 내주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대각(臺閣)의 소로 말하면, 오직 그 말이 타당한가의 여부만 살펴야 할 따름이지 연명으로 올리든 단독으로 진달드리든 격례(格例)에는 실로 구애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야 물론 정성이 천박해서 거들떠 볼 가치도 없으시겠습니다만, 바른 말이 들어오게 해야 하는 성스러운 조정의 도리가 혹 신 때문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은 부끄럽고 황송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조목들을 한 마디로 결론내리면 조각조각 베껴 쓴 글이라고나 할 것이니 채택할 만한 것이 어찌 있겠는가. 다만 예전에 올린 소를 도로 내주라고 한 것은 바른 말이 들어오게 하는 도리에 흠이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만은 정말 옳은 말이다."
하였다.

 

10월 18일 을미

우박이 내렸다.

 

한성부 판윤 서유린(徐有隣)이 여러 차례나 소명(召命)을 어기니, 하교하기를,
"어제 내린 분부를 듣고도 고칠 줄을 알지 못한 채 패소(牌召)를 할 때마다 성밖으로 나갔다가 곧 이어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몸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의리에 입각한 행동이겠는가. 그리고 조진정(趙鎭井)에게 도로 내준 소를 가지고 인혐(引嫌)하는 단서로 삼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반포하지도 않은 소본(疏本)을 전파해 이야기하는 것은 법으로 지극히 엄하게 금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다. 그 상소의 말이 순전히 헛소리였기 때문에 도로 내주도록 하였던 것인데, 가령 중신(重臣)에게 그것을 보게 했더라면 오히려 그 말로 인하여 미처 드러내지 못한 본정(本情)을 통쾌하게 드러내게 된 점을 다행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경자년 이후의 국면을 가장 먼저 파악한 자가 늘 중신을 칭찬하기를 ‘남쪽 변방에서 체차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항상 말할 때면 번번이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자에게 아무리 저 죄목을 뒤집어 씌우려고 한들 승려를 보고서 고기 먹는다고 터무니없이 꾸짖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과거에 인정을 받게 된 것도 이 한 조목 때문이요, 오늘날 중신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한 조목 때문이다.
그런데 조진정을 반좌율(反坐律)로 처벌하지 않은 것은 상소 전편의 글이 너무나도 두서가 없어 상정(常情)이나 상리(常理)로 꾸짖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신이 된 도리에 있어서 또 이렇게 특별히 내리는 은유(恩諭)를 듣고서도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달려 오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분수도 모르고 도리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일테니 어찌 차마 이런 행동이야 할 수 있겠는가. 판윤 서유린에게 전의 패초(牌招)를 가지고 재촉하여 속히 명에 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살피건대 올해 가을철과 겨울철이 된 뒤로 날씨가 화창하고 기후도 적당해서 그야말로 태평 시대의 기상이 감돌았습니다. 그런데 이달 10일 이후로는 그 동안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하여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가 하면 음산하고 궂은 날씨가 계속되어 광경이 보기에 좋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심지어는 어제 새벽에 이르러 천둥과 번개까지 치면서 극에 달했습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인 만큼 이런 현상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이달 10일 이후로 지나친 거조를 취하신 것이 어떠했던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소서. 하늘이 경고를 내려준 것이 어찌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나타난 것이겠습니까. 상도(常道)에 어긋난 거조를 취하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흉역(凶逆)의 종자들이 종묘 사직과 관련된 죄를 범했는데도 관작을 복구시켜 주는가 하면 그 죄명(罪名)을 씻어 주기도 하였고, 혹은 먼 지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는가 하면 유배된 상태에서 석방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형체를 볼 수 없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재이(災異)에 대하여 오늘날의 거조를 통해서 반성해 본다면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가 그야말로 북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심사 숙고하시어 그 동안 행했던 잘못을 일체 반복하지 않으신다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하늘이 마음속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경들에게 근실히 자문을 구하고 나서 좋은 말을 해 주기를 옷깃을 여미고 기다리는 동안 아침이 밤이 되고 밤이 새벽이 되었다. 차자의 내용이 모두 꼭 맞는 말은 아니다만 경들은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황승원(黃昇源)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의논하여 천망(薦望)할 일로 신이 영상의 집에 가서 천망 명단을 받은 뒤 좌상에게 돌려 보이고 나서 그대로 우상의 집에 갔더니, 우상이 천망 명단을 보고는 말하기를 ‘서호수(徐浩修)가 병조 판서에 복망(復望)되었지만 그 뒤에 전조(銓曹)에서는 여태 검거(檢擧)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묘당에서 이조 판서에 중통(重通)하다니, 어찌 느닷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수상(首相)에게 갔다 와야 하겠습니다.’ 하니, 우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나의 소견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관(銓官)이 일단 천망을 받은 상태에서 대신의 집에 두 번 가고 세 번 간다는 것도 과거의 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이 마침내 조방(朝房)에 돌아와 우상의 의견을 가지고 영상에게 왕복하였더니, 영상이 답하기를 ‘봄철에 이미 서전(西銓)296)  에 복망되었던 자를 동전(東銓)297)  에 복망한다고 해서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는가. 복망과 중통은 다르니 써서 입계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우상이 이론을 제기한 것이 중통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영상이 이에 대해 분명히 대답해 주었으므로 신이 이에 수상의 의논대로 써서 망통(望筒)을 들이는 한편 정리(政吏)를 시켜 우상에게 갔다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우상이 정리를 꾸짖어 물러가게 하면서 정사(政事)를 열지 말라는 뜻을 가서 전하게 하였다고 하기에 신이 그 자리에서 짤막한 소를 엮어 바친 뒤 대궐 문을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사정은 진정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대신의 금석(金石)과 같은 법 규정을 무너뜨렸다는 것으로 죄를 삼았으니, 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말을 늘어놓으며 변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저 대신이 백관을 통솔하면서 공적인 체례(體例)에 입각하여 차자를 올려 파직시키거나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추고하게 한다는 것은 옛날부터 또한 들어온 일입니다. 그러나 가령 정사(政事)에 임한 전관(銓官)에게 정사를 행하지 말라고 분부한 것으로 말하면 신이 처음으로 당한 책벌이라 할 것입니다. 신이 물론 일을 잘 주선하지 못해서 이런 낭패를 불러들였습니다만, 신도 청명한 조정에서 사유(四維)298)  를 아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신의 직책을 깎아 개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설사 재촉하는 분부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슬쩍 품(稟)하지도 않았는가. 이것은 경의 잘못이다. 정사를 열지 말라고 한 것은 차자로 파직시키거나 아뢰어 삭직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전하는 자가 필시 잘못 전했을 것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19일 병신

한성부 판윤 서유린(徐有隣)이 상소하기를,
"이안묵(李安默)의 상소를 보니 정말 내용이 급박하기만 하였습니다. 사람을 탄핵하며 몰아 세운 일이 예로부터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참혹하고 악독하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한 이야기를 보면 간사하고 사특하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원악(元惡)이요 거간(巨奸)이라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가운데 온갖 죄악치고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계책이 참으로 교묘하고 치밀합니다만 거꾸로 소루하고 오활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대저 소인으로서 원악이나 거간이 되려면 그만한 배짱과 그만한 기력을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신의 형제로 말하면 그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이 어떠한지 성상께서 훤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무슨 배짱이 있고 무슨 기력이 있어서 영예로운 작록(爵祿)으로 사람들을 낚아 올리고 함정을 파서 빠뜨리며 사방의 송옥(訟獄)을 결판내고 온 나라의 인사권을 장악하며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온 세상을 뒤바꿔 놓는단 말입니까.
인물과 제목이 너무나 흡사하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보고서 그 누가 수긍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일단 지적을 했다면 반드시 그러한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어떤 사람이 질시를 받아 원수처럼 여긴다는 말입니까. 또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신들에게 내쫓기고 밀려났단 말입니까. 억울하게 죄에 걸렸다가 빠져 나왔다고 하신 은혜로운 말씀이 환히 비춰주고 몇 마리의 고기가 누구의 패거리냐고 하신 성상의 분부가 명백한데도 반성할 줄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억지로 뒤집어 씌우려고만 하면서 죄많은 몸이라느니 아첨해 빌붙는다느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가정 내에서 서로 권면했다는 주장으로 말하면, 가정 내라고 했을 때는 지극히 비밀스럽다고 할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며 누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단 말입니까. 권(權)이라는 한 글자는 예로부터 사람을 죽이는 칼자루를 상징하는데 신들이 아무리 형편없기로서니 어떻게 감히 농락하고 방자하게 구는 짓을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끼를 던져 명예를 낚아 사람들이 잘못 걸려들게 한다고 하였는데 또 어쩌면 이렇게까지 주워 모았단 말입니까. 기타 뇌물을 받아 먹는다느니 잇속을 따른다느니 좋지 못한 패거리를 형성하여 같이 빠져들고 있다느니 허다하게 논열(論列)한 것 모두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짜 맞춘 것들인데, 세상에서 공정한 안목을 가진 자라면 자연히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의리에 배치된다.[背馳義理]’고까지 하였는데, 이 네 글자를 어쩌면 그렇게도 쉽게 사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는 계속해서 ‘창귀(倀鬼)299)   노릇을 감지덕지하며 교대로 소장을 올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말한 자가 알고서 말했다면 이는 잔인한 짓이고 모르고서 말했다면 이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 지난 임자년 여름에 영남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대궐 문 앞에서 부르짖었는데, 대성인의 인자함과 의리에 대해서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점이 많았고 또 공공(公共)의 의리를 마치 나라의 반쪽 지방에서만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나름대로 이를 분개한 나머지 외람되게 하나의 상소를 올리면서 맨 첫 머리에 지극히 크신 성상의 덕을 진달드린 다음 군신(君臣) 상하가 강구해 밝힐 사실들을 설명드렸으며, 이어 병신·정유년에 무신·기유년의 일을 토죄(討罪)했던 것이 《명의록(明義錄)》에 밝게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죄를 성토함으로써 의리를 드날리고 천명시킬 것을 청했었는데, 이는 비단 영남 유생들로 하여금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확실히 알아 저울대의 눈금처럼 맞게 되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한 것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이 과연 그가 이른바 취향이 다르다고 한 사람들에게 영합한 것이겠습니까, 떨어져 나간 것이겠습니까. 지금도 그때의 상소문이 귀에 쟁쟁한데, 무함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말을 바꿔가며 혼란스럽게 하였으니, 정말 차마 못할 짓을 잔인하게 하고 감히 해서는 안될 짓을 당돌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진정(趙鎭井)의 소가 한꺼번에 같이 나왔는데 이 또한 겁나는 내용이리라고 대체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 내주라고 명하셨으므로 신이 해명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특별히 그 소를 내려주시어 한 번 드러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오늘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정말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박장설(朴長卨)의 소가 나오면서 경의 동생의 마음이 역력히 드러났고 조진정의 소가 나오면서 경의 정성이 확실하게 드러났으니, 사람들이 화를 입게 하려 한 것이 경에게는 도리어 복이 된 셈이다. 이치는 어디를 간들 회복되지 않는 법이 없고 어떤 일이건 굽혀진 뒤에는 반드시 펴진다는 말은 경의 집안을 두고 한 것인 듯하다. 더구나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天可畏]’는 세 글자야말로 경에게 있어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증명서라 할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교리 이청(李晴)을 잉임(仍任)시켰다.

 

10월 20일 정유

교리 심규로(沈奎魯)와 수찬 이기양(李基讓)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이청(李晴)은 바로 성한(星漢)과 죽음을 같이 하기로 한 친구요 피로 맹세한 패거리입니다. 역적 성한이 흉악한 상소를 올릴 때 머리를 맞대고 참여해서 논한 자가 이청이고, 사문(師文)이 패악스러운 주장을 할 때 무릎을 맞대고 수작한 자가 이청입니다. 대론(臺論)이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해 여정(輿情)이 바야흐로 분개하고 있는 때에 지금 이렇게 홍문관의 직책을 잉임(仍任)시키라고 명을 내리시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그 자가 감히 의기양양해서 나와 숙배(肅拜)를 할 경우, 신들이 어떻게 차마 동료로 간주하여 그와 함께 짝이 되어 당직을 서겠습니까. 그래서 대략 충분심(忠憤心)을 쏟아내고는 곧바로 대궐 문을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가 참여해서 논하고 수작한 자취를 그 누가 보았단 말인가. 그런데도 머리를 맞대었느니 무릎을 맞대었느니 하고 이야기하다니 어쩌면 그렇게도 무리한 말을 하는가. 이청의 일이 이미 분명하게 해명된 것은 우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서 감히 이와 같은 소를 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당초에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본래 있는데, 그 동안 이청이 공초(供招)한 것을 통해서도 옥석(玉石)을 구별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대들이 한 일이 어찌 말이나 되겠는가."
하였다.

 

장령 오한원(吳翰源)과 헌납 민사선(閔師宣)이 아뢰기를,
"죄인 허적(許積)이 범한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 어찌 차마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 안에서 빚어내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한 그의 자취가 단서(丹書)에 분명히 실려 있고 그에 대한 공안(公案)이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자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간청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원악(元惡)을 신원(伸冤)시키라고 명을 내리시다니 이것이 어찌 된 거조이십니까. 설사 허적 자신이 직접 범한 죄악이 없다 하더라도 허견(許堅)이 그의 아들인 이상 연좌(連坐)시키는 형전(刑典)을 반드시 적용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신원시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역적 허적을 신원시키고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을 속히 취소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장령 오한원이 아뢰기를,
"택수(澤遂)의 지속(支屬)을 이배(移配)시키고 홍섭(弘燮)의 두 동생을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받고 경악과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더없이 엄한 것은 제방(隄防)이고 동요시킬 수 없는 것은 형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흉측한 잔당들로 하여금 모두 좋은 곳에 모여서 살게 하고 고향 마을로 돌려 보낸다면 공법(公法)이 씻은듯 없어져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택수 등의 지속을 이배시키고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취소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납 민사선이 아뢰기를,
"아, 김성탁(金聖鐸)으로 말하면 역시 종묘 사직의 죄인일 따름입니다. 이현일(李玄逸)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목내선(睦來善)의 행위를 옹호하면서 감히 네 글자의 흉언(凶言)으로 따지고 들며 정사년의 상소문을 불쑥 올렸으니 그 불칙스러운 뜻이야 말로 숨길 수 없이 분명해졌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조(聖祖)께서 크게 노하시어 유배보내는 형벌을 명하셨던 것인데, 지금 그 손자가 원통함을 호소했다고 하여 죄명(罪名)을 분간(分揀)해 주도록 명하시기까지 하다니, 왕법(王法)이 허물어질까 염려되는 가운데 흉적의 잔당이 틈을 엿볼 조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김성탁의 죄명을 분간해 주게 한 명을 속히 취소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날씨가 추워지자 승지에게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병들을 위문하게 하였다.


 

10월 21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시사(試射)를 행하고 상재생(上齋生)의 제술(製述) 시험을 직접 보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을 체직시켰다.
서유린(徐有隣)을 특별히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에 보임(補任)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심이지(沈頤之)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신계(新啓)에 대해 아뢴 대로 하라고 한 것 모두를 예전에 하교했던 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정래백(鄭來百)이 상소하기를,
"지금 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말하면 진정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방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허적(許積)과 김성탁(金聖鐸)이 범한 죄와 관련하여 단안(斷案)이 일단 확정되었고 국시(國是)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죄명(罪名)을 특별히 씻어주시는 바람에 형정(刑政)이 타당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택수(澤遂)와 홍섭(弘燮)의 지속(支屬)과 같은 자들까지도 양이(量移)300)  하거나 석방해 주도록 하셨으니, 이것은 또 어찌 된 거조이십니까. 만약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흉역(凶逆)의 잔당들이 필시 앞으로 꼬리를 물고 헛된 생각을 품으면서 머리를 맞대고 억울함을 따지려 들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지기만 합니다.
기강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무엄하기만 한 습속과 분의(分義)를 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함창(咸昌)의 아전이 관청 뜰에서 칼을 빼들었으니 그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여태 법을 적용하지 않고 있고, 통진(通津)의 백성이 임금의 행차 앞에서 외람되게 하소연을 한 그 일이야말로 예전에 없었던 것인데도 통렬하게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등위(等位)와 관계가 있는 일인데 작은 일이 점점 커지다 보면 무슨 변인들 생기지 않겠습니까.
언로(言路)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징토(懲討)하는 일이야말로 조정의 대론(大論)이라 할 것인데, 공(公)을 사(私)가 가리기도 하고 은혜가 거꾸로 의리를 엄폐시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금령(禁令)으로 비호해 주기도 하고 엄한 분부로 입을 막아버리기도 하시기 때문에, 마음들이 이로 말미암아 서로 막히고 분위기가 이로 인해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재용(財用)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태창(太倉)에서 녹봉을 반급(頒給)해 주는 것도 늘 부족한 걱정이 있고 외방 고을 창고에 남겨 둔 것도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객사(客使)가 장차 이를텐데 그 지공(支供)하는 비용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호남의 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진휼(賑恤)할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傳)에서 이른바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과 불행히도 근사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백성의 근심거리로 말하건대, 신(新)·구(舊)의 환곡(還穀)을 바야흐로 급히 독촉하여 거두면서 인족(隣族)을 침해하는 등 갖가지로 고달픔을 당하고 있는데, 관아에서는 백성의 주름살을 펴줄 정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고 마을에서는 대부분 공포의 분위기만 감돌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조목 모두가 현재 당면한 급무(急務)이니, 오직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시고 통분스러운 심정으로 분발하시어, 제방의 측면에서는 엄밀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시고, 기강의 측면에서는 엄숙하게 진작시킬 방도를 강구하시고, 언로의 측면에서는 그 길을 넓혀 줄 방도를 강구하시고, 재용의 측면에서는 넉넉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시고, 백성의 근심거리에 대해서는 생활을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조항에 대해서도 유사(有司)로 하여금 차례차례 거행하게 하소서.
한편 신이 달포 전에 명을 받들고 동래부(東萊府)에 다녀왔는데 나름대로 진달드릴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즉 본부(本府)의 군교(軍校)들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정사(政事)에 있어 실로 소루한 점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서쪽 변방 및 북쪽 변방의 고을과 경기도 안의 독진(獨鎭)을 두고 말하더라도 혹은 급료를 주는 군관(軍官)을 두기도 하고 혹은 오래 근무하는 변장(邊將)이 있기도 한데 동래부만은 유독 이런 규정이 없습니다.
중년(中年)에 조정에서 별기위(別騎衛)를 설치하고 매년 좌병영(左兵營)에서 기예를 시험한 뒤 우수한 자를 뽑아 장계로 보고해서 직부(直赴)토록 했습니다만, 일단 벼슬길을 찾아 발신(拔身)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출신(出身)한 경우도 흐지부지되도록 방치해 두고 있는 형편입니다. 심지어 한산 군교(閑散軍校)의 경우는 애당초 특별히 격려하는 방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습할 의욕이 없어진 가운데 활쏘는 기예 역시 점점 서툴어지고 있으니, 변방에서 무예를 숭상해야 하는 법도로 볼 때 소홀하기가 그지없다 하겠습 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후로 매달 기예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뽑은 뒤 그들 모두에게 급료를 받는 군교와 오래 근무하는 장교의 자격을 부여하되 서쪽과 북쪽 변방의 예대로 해서 차차 거두어 쓰게 하고 변장(邊將) 한 자리와 말천(末薦) 한 자리를 허락해 주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실로 그들을 격려시키고 위로하는 요결이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품처할 만한 것은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기를,
"어제 신계(新啓)에 대해서 윤허를 받았었는데, 갑자기 예전에 분부했던 대로 거행하라고 하교를 하시다니, 성조(聖朝)의 처분이 이처럼 뒤바뀔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성명(成命)을 취소하소서.
그리고 신이 인사(人事) 명단을 얻어 보았는데, 아, 어떻게 된 전관(銓官)이 그만 감히 역적 허적(許積)을 복관(復官)시키는 일을 이토록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태연하게 거행한단 말입니까. 솥에도 귀가 달려 있는데 전관이 된 입장에서 나라에 들끓고 있는 여론을 혼자서 듣지 못했단 말입니까. 더구나 대계(臺啓)가 어제 막 발동된 상황에서 복관시키는 임명장을 오늘 아침에 무턱대고 내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 조정이 말할 여지도 없게 된 것이 이와 같으니, 신은 지극히 놀랍고 떨리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해당 전관 홍명호(洪明浩)에게 마땅히 직책을 깎아 개정하는 처벌을 시행하고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0월 22일 기해

광주 유수(廣州留守) 서유린(徐有隣)을 춘당대(春塘臺)에서 불러 보았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상차하기를,
"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탄식이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마는, 지존(至尊)의 위치에서 홀로 수고하며 조정에서 탄식한 경우로 요즈음 성상과 같은 때는 없었습니다. 임금만 있고 신하는 없게 된 요즈음의 상황이야말로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뜻을 받들지 못한 소치이긴 합니다만, 진정 선(善)을 진달드리고 어려운 일을 요구할 때의 첫째 가는 의리로 말한다면, 오직 성상에게 일심으로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하는 공부를 힘쓰시라고 우러러 간청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주자(朱子)가 당시의 임금에게 고한 말 가운데 ‘세월은 흘러만 가는데 한 번 가면 다시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만 얼굴이 창백해지고 머리가 희어져 이미 노년(老年)에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가만히 전하의 용안을 쳐다보니 역시 옛날의 모습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다행히도 즉위하신 초기부터 청명한 정치를 뵙게 되었는데 지금 벌써 20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감히 이런 말을 전하의 앞에 드리는 이유는, 두려운 마음을 갖고 분발하시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도록 꾀하심으로써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백성의 마음에 부응하실 것을 더욱 원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전일 허적(許積)을 복관시키라고 명을 내리셨는데, 삼가 성상의 비답 및 아래에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나름대로 한두 가지 아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대체로 당시에 그를 성토한 소장을 보면, 비록 체부(體府)를 설치한 것과 역적 괴수와 결탁한 것으로 허적에 대한 대안(大案)을 삼기는 하였습니다만, 체부의 설치에 대해서는 노성(老成)한 이들이 간혹 그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논하기도 하였고, 결탁한 자취에 대해서는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를 보아도 대부분 ‘그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취를 통해 마음속을 따져 본다면, 역적 윤휴를 부사로 임명하여 역적 허견(許堅)이 의지할 발판을 마련하려 하였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아 소굴을 형성하는가 하면 오로지 체부를 재차 설치한 목적이 암암리에 사병(私兵)을 양성하려는 것이었으니, 그 당시 대간의 계사(啓辭)에 나오는 바 ‘자기 자식인 허견의 손에 군국(軍國)에 관한 일을 일체 맡기고 무부(武夫)를 불러모아 화란(禍亂)을 빚어 내었다.’고 한 말을 통해서도 그가 으뜸가는 죄를 범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적 괴수가 틈을 엿보며 일을 진행시키면서 역적 허견만 의지했을 뿐이 아니라 그 아비가 남몰래 도와주는 것을 힘입으려 하였고 보면, 대간의 계사에 나오는 바 ‘허적이 흉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실히 보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이야말로 사정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할 것입니다.
또 가령 독대(獨對)하여 밀주(密奏)를 올렸다는 일로 말하면, 그 내용이 단지 고(故)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개인적으로 기록해 놓은 문자에만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그 뒤 4, 5년이 지나는 사이에 적(賊)의 세력이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더욱 급하게 흉모를 진행시켰고 보면, 그가 위세에 겁을 먹고 이익에 끌린 나머지 밖으로는 딴판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실제로 친밀하게 들어붙고 처음에 배척하는 듯하다가도 결국 어울리게 된 것 역시 대개 사세(事勢)로 볼 때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설령 그가 밀주를 올린 하나의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그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겠습니까.
대개 허적이 죽게 된 것은 그 아들의 죄 때문만이 아닙니다만, 가령 그 자신이 범한 죄가 없이 단지 연좌율(連坐律)만 적용받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허견의 흉역 사건과 관련하여 그 아들만 사형에 처하고 그 아비를 아무 관계가 없는 양 신원시켜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김성탁(金聖鐸)의 일로 말하더라도 막중한 관계가 있는 일로서 불측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선대왕(先大王)께서 분명하게 처분을 내리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일단 대간의 계사를 윤허하셨다가 곧 이어 예전에 분부했던 대로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의리를 밝히고 제방을 엄히 하는 도리가 못되니, 삼가 원하옵건대 이 모두에 대한 명을 즉시 환수하시어 영원토록 이어질 군신의 기강을 확립토록 하소서.
전일 재이(災異)를 만나 말해 주기를 요청하신 분부야말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실(內實)이 있는 것이라서 신하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해 주기를 청할 때의 요결(要訣)은 비단 말하지 않았던 말을 널리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말했던 말을 넉넉하게 용납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말하는 자들이 바야흐로 할 말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덕을 드러내 밝히고 언로(言路)를 이끌어 열어주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서 못내 가슴에 품고 감히 침묵만 지킬 수 없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유성한(柳星漢)에 대한 일입니다. 대체로 그의 상소문을 보건대, 위의 조목에 대한 일은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따질 것 없이 대신과 왕복했던 글의 내용이었고 그 외에 이른바 사실(私室)에서 수작했던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막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 이상에는 성토하는 일에 어찌 다른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보면 더욱 허황하기 짝이 없으니 사실과 어긋난다고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치고 그 누가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만 까마귀나 소리개의 알을 깨뜨리지 않은 뒤에야 봉황새가 모여들듯이 비방한 죄를 벌주지 않아야만 좋은 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니 설령 말한 자가 분명히 사심(私心)을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국가에서 포용하는 도리로 볼 때에는 아무 사심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 주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만 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에게 사심이 있는지 사심이 없는지 넘겨 짚을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私室)에서 수작했다는 것도 본래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단지 우려되는 것은 간적(奸賊)들이 이런 틈새를 엿보고서 안으로는 사욕을 부릴 꾀를 생각하고 밖으로는 성상을 무함하는 습관에 길들여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아가서 성상의 근밀한 동정(動靜)을 자기만 아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기 과시를 하는 말을 늘어놓는 한편 화(禍)와 복(福)에 큰 관련이 있다고 겁을 주면서 온 조정의 관원들로 하여금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하여 감히 의논드리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상께서 환히 아시어 간악한 정상을 은폐할 수 없게 되자 죄상을 가려 볼 자료를 만들어 보려고 허위로 공분(公憤)을 야기시킨 뒤 대궐로 들어가서는 곧장 칼로 찔러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며 전하 앞에서 아뢰는가 하면 밖에 나와서는 글을 올렸다가 죄명(罪名)을 얻게 되었다는 설을 바깥에 흘려보내곤 하였으니, 그 지극히 요망하고 사특한 정상이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습니까.
연석(筵席)에서 은밀히 말해진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가 등 뒤에서 비난하고 앞에서는 기만하는 정상에 대해 성상께서 매우 증오하며 통렬하게 배척한 분부를 보면 추상(秋霜)과 같고 부월(鈇鉞)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에 내리신 비지(批旨)나 그 뒤의 사륜(絲綸)을 가지고만 미루어 보더라도 성상께서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러러 헤아릴 수가 있는데, 그가 독기를 부린 효과가 여전히 남아 있는 바람에 그 전말(顚末)을 설파(說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무함하는 일이 망극하게 벌어지고 언로(言路)가 날로 막히게 되었으니, 식자(識者)들의 입장에서 통분스러운 심정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이 문제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속히 명백하게 펴 보이시어 한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포용해 주시려 했던 성상의 도량과 그 속에서 은폐하려 했던 간적(奸賊)의 자취를 환히 알게 하여 성상의 덕을 드러내고 언로가 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급선무라 할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유념하시고 살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자나 깨나 영걸스럽고 호걸스러운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자양(紫陽)301)  과 계합(契合)되어 깊이 깨달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자양이 황제에게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만 얼굴이 창백해지고 백발이 되어 이미 말년(末年)에 접어들었을 뿐만이 아니고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 보아도 옛날과 같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아뢴 말을 밤도 깊은 이때에 촛불을 켜놓고 낭낭히 읊어 보노라니 그 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천 년이 지난 뒤에 와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다.
나 역시 20년 동안 베푼 정치의 법도와 정책 사항들을 점검해 본다마는 귀감이 될 만한 법도가 무엇이 있으며 들려 줄 만한 정책이 무엇이 있었는가. 스스로 처음에 다짐했던 마음을 뒤돌아 보면 최소한 이런 지경에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객관적으로 사실을 따져 보건대 만족할 만한 것은 적고 온통 불만투성이이다. 며칠 전 옥당의 소에 대한 비답에서도 더욱 후회만 되는 생각을 말했었는데, 지금 경이 또 자양의 말을 인용하여 나를 면려시켜 주었으니, 깊이 명심하도록 하겠다.
덧붙여 진달한 첫째 조목으로 말하면, 극진하게 말을 하긴 했다마는 별로 색다르게 여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소위 운운(云云)하는 두 가지 일에 대해 간여할 일이거나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크게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고상(故相)이 만약 느낄 줄을 안다면 역시 경의 공정한 마음에 탄복할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쓴 어구(語句)를 인용한 것으로 말하면 혹 지레 거짓으로 인정한 듯하기도 하고 억측한 것 같기도 한데 이 점은 옥(玉)의 티가 되지 않겠는가.
둘째 조목에서 해 준 경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아직 말해 주지 않은 말을 부지런히 묻기보다는 이미 말해 준 말을 넉넉하게 용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처음에 내린 비답의 본의가 막힌 채 드러나지 않은 것은 본디 유사(有司)의 죄이다. 그리하여 그 동안의 간악한 정상을 사람들이 알 수 없게 되었는데, 경이 ‘독기를 부린 효과가 여전히 남아 있는 바람에 이를 설파(說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 말이야말로 진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기막힌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혹시라도 변론하는 것이 불분명하게 되면 도리어 맑은 하늘에 구름이 낀 것처럼 되어 바른 말을 받아들이는 인주(人主)를 위한 도리가 되기 어려울 것이고, 이야기를 미처 상세하게 하지 못하면 대의(大義)를 가리우는 혐의가 있게 될텐데, 숨김없이 말하는 성격의 경이 금령(禁令)에 저촉될까 경계한 나머지 괘일(掛一)의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음을 그 누구라서 이해나 하겠는가.
대저 경들이 나의 소신과 합치된다는 것은 말로 하기는 쉬운 일이다. 노력해서 모쪼록 같은 조정에 있는 인사들과 보좌하는 일을 극진히 힘쓰도록 하라. 그리고 보건대 유성한(柳星漢)의 직명(職名)을 고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우선 사문(師文)의 직명을 휴지로 만든 것처럼 속히 연석에서 유시했던 대로 따를 것과 이 밖에 나의 뜻을 펼쳐 보이라고 아뢰었는데, 그 책임으로 말하면 역시 경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경은 모쪼록 안심하고 차도가 나는 대로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영돈녕에게 내린 비답을 보지 못했는가. 기미년의 일이 있은 지 1백 17년 뒤에 치욕을 씻어주며 문정(文正)302)  에게 보답하였다. 그대가 문정의 후손으로서 이 해를 맞아 이 직책을 맡게 되었고 또 이런 거조를 보게 되었으니, 가령 교서(敎書) 문안을 작성해 준 그 당사자에게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국가의 기강을 바르게 하고 말류(末流)의 폐단을 염려해 준 것에 대해 감격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대로 말하면 직접 눈으로 보고 더불어 다행스러운 일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겠는가. 그래서 거룩한 뜻을 밝히는 것이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오한원(吳翰源)과 헌납 민사선(閔師宣)에게 속히 서용(敍用)을 금하는 처벌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가령 대신(臺臣)이 논열(論列)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말짓는 말에 법식(法式)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성씨(姓氏)도 무시한 채 이름 위에 적(賊)이라는 한 글자를 쓴다는 것은 대간의 체통을 오히려 낮추는 것이다. 일전에 발계(發啓)한 해당 대신들에게 서용을 금하는 처벌을 속히 시행토록 하라. 이는 단지 고상(故相)을 위해 주려고 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속습(俗習)을 바로잡는 하나의 계기가 되겠기 때문이다."
10월 23일 경자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상차하기를,
"삼가 좌상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유성한(柳星漢)의 일에 대해서 자못 상세하게 변증(辨證)을 하였습니다만, 한두 어구(語句) 중에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없지 않았고 의혹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좌상이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 듣고 본 것이 확실치 않고 두서(頭緖)와 단락(段落)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말한 것처럼 못내 잊혀지지 않는 회포가 마음에 쌓인 나머지 기필코 한 번 이야기해 보겠다고 한 것일까요.
아, 유성한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깜짝 놀라게 되고 말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 옵니다. 신이 그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오늘날 편안히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분이 내려주신 은혜 덕분입니까. 그런데 차자에서 이른바 ‘대신과 왕복한 글 내용’ 운운한 것은 바로 연전에 있었던 신의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사건의 본말(本末)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스스로 해명한 소장에 구체적으로 밝혀놓은 만큼 이미 오래 전부터 성상께서 훤히 아시는 바이고 조정에서도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느닷없이 사정을 뒤바꿔놓고는 신의 글 내용과 그가 대답한 말이 모두 그의 상소 중 윗 조목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아뢰었으니, 신이 사실과 어긋났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리고 차자를 보건대, 처음에 말을 꺼낼 때에는 ‘대신과 왕복한 글의 내용과 기타 사실(私室)에서 주고받은 말들이 모두 막중한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성토하는 일에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일단 두 일을 거론하면서 같이 인용하였는데, 결말을 지어 말할 때에는 ‘사실에서 주고받은 말이야 본래 분명히 증거할 길이 없다.’ 운운하면서 홀연히 하나만 제기하여 유독 배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글의 내용’ 운운한 것은 있으나마나 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글의 내용’ 운운한 것이야말로 요긴한 대목이라는 말입니까. 상단(上段) 첫머리에 인용하여 언급한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으며, 하단(下段)에서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은 것은 또 무슨 이유라는 말입니까. 어쩌면 글을 작성할 때에 우연히 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말하지 않는 가운데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같이 포함시키려 한 것일까요. 자기 자신은 필시 속으로 짐작해서 그렇게 한 것일텐데, 신이 의혹이 가는 부분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식견이 밝은 이 대신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에 대해 역순(逆順)을 단정짓고 일에 대한 시비를 논하면서 아뢰는 말을 작성할 즈음에 이런 점을 소홀히 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쪽은 놔두고 저쪽은 배척한 것이야말로 속으로는 무척 증오하면서도 겉으로는 서로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은미(隱微)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하게 말해 주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이른바 글을 왕복했다는 하나의 일 역시 증거가 없어 허망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그 의도를 따져 본다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 신은 이 일 때문에 예전에 벌써 주워 모아 모함하는 일을 혹독하게 당하여 거의 죄망(罪網)에 빠질 뻔하였는데, 지금 또 억지로 상황을 뒤틀어 바꾸는 일을 당해 장차 허망한 결론으로 유도되어 함정에 빠졌으니, 구제해 주시는 전하의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허황된 말에 대해서는 장차 또 누구를 통해 해명을 한단 말입니까. 아, 또한 너무나도 불행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신이 평소 형편없이 처신하고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못한 나머지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볍게 여김을 받아 빚어진 일이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차를 봉하여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중비(中批)303)  로 서유방(徐有防)을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전 한성부 판윤 구익(具㢞)을 잉임(仍任)시켰다.

 

10월 25일 임인

약방 도제조를 불러 보았는데, 원자(元子)가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영특한 자태를 우러러 뵙게 되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놀 때에도 법도가 있다. 그리고 아침에도 추위를 겁내지 않고 밤에도 잠자려 하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낙성이 아뢰기를,
"추운 바람 기운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실로 원기(元氣)가 충만하기 때문이고 잠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역시 정신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원자궁(元子宮)의 자태가 날로 의젓해지고 있는 만큼 책봉(冊封)하는 예식을 내년에 진달드려 청할 생각인데, 만 백성이 목을 빼고서 기다리고 있으니 봄이 되는 대로 즉시 거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은 바로 숙묘(肅廟)께서 책봉되신 해인데, 내 생각에는 아직 이르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내년부터 우선 밖에 나가 선생에게 배우도록 할 생각이다. 책봉하는 예식은 꼭 급급하게 할 것이 없다."
하였다.
10월 28일 을사

온양군(溫陽郡) 행궁(行宮)의 영괴대(靈槐臺)에 어제비(御製碑)를 세웠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감제(柑製)를 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조황진(趙璜鎭)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자격을 주었다.

 

10월 29일 병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유시하였다.
"경들이 소신대로 하는 것이나 임금에 따르는 것이나 모두 이 의리에 속하는 일이다. 옛날에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던들 어찌 내가 즉위한 초기에 나를 따르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일전에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임금이 요(堯)·순(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작년 여름 재실(齋室)에 있으면서 내렸던 윤음(綸音)과 표리(表裏)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는 것이야말로 자식된 직분상 당연한 일이요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는 것이야말로 신하된 직분상 당연한 일이다. 경의 말은 나의 말이요, 나의 마음은 곧 경의 마음이라 하겠다.
연전에 유성한(柳星漢)을 성토했던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충성심과 지려(智慮)가 어찌 혹시라도 경보다 못하겠는가마는, 저들은 그만 저런 식으로 운운하고 있는데 반하여 경만은 이런 방식으로 운운하고 있다. 그를 공격하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특히 경의 경우는 내 말이 도(道)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이치에 타당하게 하려는 나의 마음에 계합(契合)되고 있다. 죽이지 않는 것이 무(武)요, 노하지 않는 것이 용(勇)이다. 경이 평소 소신으로 삼는 바 하늘과 땅을 지탱시키는 진정한 대의리(大義理)가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거나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없이 계속 나의 뜻에 합치시켜 나가면서 천 년 억 년토록 영원히 할 말이 있게 되기만을 바라고 싶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경은 분명히 한 차원 높은 사람이기에 면대(面對)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나름대로 한 번 터놓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듣건대 경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가까운 시일 안으로는 정무를 살피게 할 수 없겠다고 하기에 마침 병 문안하러 가는 사람편에 마음속에 있던 말을 우선 위에서 한 것처럼 털어놓았다.
전에 내린 비답 가운데 펼쳐 보이는[敷示] 일과 관련하여 끝내 파헤쳐 보이는 한 마디 말도 없다면, 증험(證驗)할 길이 막막해져 사람들의 의아심만 야기시킨 나머지 성한(星漢) 부자(父子)의 그 당시 죄안(罪案)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니, 어떻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며 후세의 비난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상소 외에도 따로 죄를 지은 간악한 정상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파다하게 전해졌고 심지어는 공거(公車)304)  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피를 머금을 정도로 통분함을 느꼈던 것은 그들의 분의(分義)로 볼 때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두 명의 문관과 음관 중신(重臣)들이 올린 소장이 계발(啓發)해 주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경(麟經)305)  의 사필(史筆)을 나름대로 본받아 《명의록(明義錄)》까지 편찬해 놓은 상황에서 20년을 지내오는 동안 말하고 싶어도 끝내 차마 하지 못했던 은미(隱微)하고 오묘한 뜻을 무슨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잠시 시끄러운 대로 놔두었던 것은 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곧바로 화란의 계제(階梯)를 방비한 것은 간악한 정상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내가 강구해 밝힐 방도를 부지런히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반복해 헤아리는 점이 있으니, 경은 이문원(摛文院)의 전석(前席)에서 내가 유시했던 내용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30일 정미

구상(具庠)을 홍문관 제학으로, 윤시동(尹蓍東)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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