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신
경모궁(景慕宮)에서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11월 2일 기유
경모궁을 참배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가마 앞으로 불러 만나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 판부사(李判府事)가 요즘 오랫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기에 어제 반열에 참여하라는 분부를 내렸는데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관서(關西) 지방 곡식 장부의 일 때문에 의리상 인혐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지난번 이안묵(李安默)이 올린 상소의 내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 이안묵의 상소에 판부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의리상 인혐하다니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다.
요즘 연신(筵臣)의 말을 들어 보건대, 이안묵의 상소 가운데에 나오는 ‘의리에 배치된다.’는 한 구절의 말에 대해 보기에 따라서는 혹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한다 하기에, 이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의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천지를 지탱시키고 고금(古今)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일도 없고 두 가지나 세 가지가 될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저런 식으로도 볼 수 있고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는 의리가 있겠는가.
대저 중신 서유린(徐有隣) 형제로 말하면, 《명의록(明義錄)》의 차원에서 볼 때 별로 뚜렷하게 수립한 점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안묵의 소를 보았을 때, 의리라는 두 글자를 《명의록》의 차원에서 말한 의리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경우는 시비를 따지며 말하는 과정에서 의심을 하여 공척(攻斥)한 것에 불과하므로 조정에서 구태여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고 여겨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도 않고 의례적으로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신이 올린 임자년의 상소를 가지고 의리에 배치된 것으로 결론지은 것이라면, 이런 의리는 과연 어떤 의리란 말인가. 안묵이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여 속에 지니고 있던 생각을 글로 써낸 것이라면 그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그 죄는 우선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이에 대해서 처음에 어찌 평범하게 보아 넘겼을 것이며 또 어찌 용서를 하였겠는가.
오늘날 신자(臣子)된 입장에서 이 의리의 관건에 대하여 오히려 조금이라도 의아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없다고 할 것이요 신하의 분의(分義)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일전에 좌상에게 내린 특별 유시에서 ‘경들의 소신’이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하여 그 소신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혹 사람의 견해에 따라 각기 다를 수도 없지 않다고 말한다 하니, 이런 경우 더더욱 말이 되겠는가.
내가 소신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좌상과 여러 사람들이 최초에 나에게서 인정을 받게 되었던 그것을 의미한 것인데, 예를 들자면 첫째 임자년 여름 재실(齋室)에서 내린 윤음(綸音) 가운데 ‘《명의록》에 주벌(誅罰)하고 토죄(討罪)한 자취는 드러내지 않았어도 의리는 저절로 신장된다.’고 한 그런 것이고, 둘째 계축년 겨울 빈계(賓啓)306) 에 대해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 ‘으뜸가는 의리를 공연히 경전에 기재했다고 감히 말해서도 안되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고 한 그런 것이고, 셋째 이번에 좌상에게 준 특별 유시 가운데 이른바 ‘참되고 바른 대의리(大義理)에 비추어 볼 때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 그런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 혹시라도 잘못 인식하고 제멋대로 헤아린다면 처음엔 조금 잘못된 것이 나중에는 엄청난 잘못으로 확대되고 말 것이다. 전후에 걸쳐 내린 하교를 보면 신하들이 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있을 텐데 아직도 이토록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같이 살아가려는 의리에서 대략 이렇게 부연하여 분부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판부사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의리상 인혐할 리는 결코 없다. 경이 혹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어 승지에게 명하기를,
"대향(大享)의 아헌관(亞獻官)인 대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 체통과 크게 관련되는 일이다. 예행 연습은 아헌관이 들어온 뒤에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추부 낭관을 불러들여 아까 분부했던 내용을 판부사에게 전달토록 해서 혹시라도 주저하지 말고 즉시 나와 반열에 참여케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승지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안묵(李安默)의 상소가 과연 금령(禁令)에 저촉되는 것이었다면 정원에서 애당초 어찌하여 감히 봉입(捧入)했단 말인가. 상소에 나오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마는 차마 말할 수도 없고 감히 말해서도 안되는 일과 관계되기에 역시 놔두고서 꾹 참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혹을 해소시켜 주어야 할 것이니 좌우 승지들은 아까 내린 분부의 내용을 가지고 돌아가며 서로 일러주고 경계시켜 각자 통쾌하게 깨닫게 하라. 만약 실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승지의 책임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와 같은 소장을 또 혹시라도 마음대로 올리게끔 내버려 둘 경우에는 승지와 기당(騎堂)307) 부터 처벌을 받을 것이니, 모두들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구상(具庠)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송환기(宋煥箕)를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삼았다.
11월 3일 경술
경모궁(景慕宮)에서 친히 동향(冬享)을 행하였다.
부사과(副司果) 홍극호(洪克浩)가 상소하기를,
"아, 임자년 봄에 흉적(凶賊) 유성한(柳星漢)이란 자가 나왔는데 그의 죄야말로 어느 누구든지 죽여도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이끌고 성토하였고 잇달아 영남의 유생 만여 명이 먼 길을 걸어와 대궐 문에서 호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지(天地)를 지탱시키고 우주(宇宙)를 관통하는 이 지정(至正) 지대(至大)하고 엄중하기 그지없는 의리가 비로소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을 계속 답습해 온 저들과 같은 무리라 할지라도 자세를 바꾸고 마음씨를 고쳐야 마땅할 것이니 유성한을 두고 감히 극악한 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까마귀나 소리개의 알을 깨뜨리지 말아야만 봉황새가 모여든다.’는 비유와 ‘고의적으로 범한 일도 무심하게 받아 넘겨야 한다.’는 변설(辨舌)이 갑자기 대신이라고 하는 자의 입에서 제멋대로 터져나오고 말았습니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을 보면 어리둥절하여 종잡을 수가 없는데, 그가 말하려는 요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오직 성적(星賊)308) 의 입장에 서서 억울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해 주려는 것이므로 이를 본 자들치고 놀라와하며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삼가 전후에 걸쳐 내리신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정말 훌륭하게도 말씀해 주신 수십 마디 수백 마디가 오로지 돼지나 물고기도 깨우치고 용이나 뱀같은 무리들까지도 교화시키려는 고심과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처벌은 하지 않고 은혜만 베푼다면 어떻게 교화시키기 어려운 부류를 끝내 교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가 올린 차자의 뜻은, 간적(奸賊)이 자기 죄를 은폐하려고 한 내용을 가지고 유성한의 용서하기 어려운 죄안(罪案)을 용서해 주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 간적이 범한 별별 요사한 죄악이야말로 죽여도 시원치 않다 할 것인데, 그가 한 말을 자료삼아 유성한이 본래 지은 죄까지 싸잡아 용서해 주도록 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데도 포용하여 용서해 준다면 인심이 어둡게 막히고 세도(世道)가 나쁘게 빠져드는 계기가 이런 무리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할 것입니다.
아, 모두가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에서 이미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 이상 추종하고 빌붙으며 앞장서서 호응하는 저 무리들이 떠들어 댈 것은 당연한 일이니, 저번에 올린 이안묵(李安默)의 상소가 바로 그 하나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안묵이 상소를 올려 중신 서유린(徐有隣)을 논할 적에 감히 중신의 임자년 상소에 대해 의리에 배치된다고 결론지었으니, 이것이 과연 유성한이 원통하다고 송사(訟事)해 주는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신의 일을 허다하게 나열한 것들에 대해서는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만, 중신이 그 상소를 한 번 올렸던 것은 대개 누구나 느끼고 있던 감정에서 나온 것이고 서로 나쁜 데로 빠져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의리에 배치된다고 하다니, 아, 저 안묵이야말로 생래적으로 효경(梟獍)과 같은 종자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이인묵(李寅默)으로 말하면 일찍이 반궁(泮宮)309) 에 있을 때 앞장서서 흉론(凶論)을 제창한 자로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머리칼이 곤두서곤 하는데, 지금 안묵이 또 이런 말을 하였으니, 도대체 남몰래 믿는 바가 뭐가 있기에 이토록까지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따라서 이안묵 형제에게 먼저 전형(典刑)을 속히 가한다면 그런대로 간악한 싹을 끊어버리고 난적(亂賊)을 두렵게 할 수가 있을텐데, 며칠 동안이나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 무리의 위세가 아, 또한 두려울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정원이 금령(禁令)에 저촉되어 봉입(捧入)하지 못하겠다고 품(稟)하니, 명하기를,
"금령과 관계된 금지 사항을 다시 더 신칙하고, 이와 같은 소장을 다시 올릴 경우에는 곧장 당직(當直)에게 회부하여 친국(親鞫)하는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4일 신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단지 일을 품(稟)할 비변사 당상만 입시토록 하였는데, 대신이 유고(有故)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보국 대부(輔國大夫)인 중신으로서 판서를 겸대(兼帶)하거나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상의 중신으로서 감사(監司)를 겸대하는 경우 으레 중추부의 직함을 부쳐주곤 하는데 이는 이비(吏批)에 자리가 없기 때문에 송서(送西)310)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비에 만약 판돈녕이나 지돈녕 같은 자리가 있을 경우에는 이 직함을 가지고 내직(內職)이나 외임(外任)을 겸대하는 것이 바로 옛 규정이니, 지금 이후로는 옛날의 예에 따라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6일 계축
육상궁(毓祥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봉안각(奉安閣)과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민종현(閔鍾顯)과 부사(副使)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연호(年號)를 고치는 문제와 정사를 물려주는 일을 탐문해 보게 하였습니다. 새로 황제가 될 사람은 십오왕(十五王)인 영염(永琰)으로서 일찍이 계사년에 가친왕(嘉親王)에 봉해졌는데 금년 10월 10일에 육경궁(毓慶宮)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원래는 동짓날에 황제의 자리를 전해주기로 했었는데 12월 1일에 일식(日蝕)이 있기 때문에 내년 새해 아침에 물려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永)이라는 글자를 휘(諱)하여 한서(漢書)에는 옹(顒)으로 고쳐 쓰고 청서(淸書)에는 점(點) 하나를 없애기로 했다 합니다. 연호는 가경(嘉慶)으로 정해 이미 헌서(憲書)311) 를 간행하여 반포했는데, 아직 널리 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헌서 하나를 봉성(鳳城)에서 간신히 구한 뒤 함께 봉(封)하여 올려보냅니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사역원 제조 윤시동(尹蓍東), 비변사 유사 당상 이시수(李時秀)를 재실(齋室)에서 불러 보았다. 낙성 등이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의 학문이 일찍 성취되고 신장도 점점 커지고 있으니 미리 세자로 세울 대책을 내년에 추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구나 건륭 황제(乾隆皇帝)312) 가 여러 차례 언급을 했으니 그가 황제로 있을 때 진달하여 청하는 것이 또 온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가 내년이면 7세가 되는데 바로 숙묘(肅廟)께서 책봉되셨던 나이와 같다. 그런데 내가 책봉된 것은 8세 때의 일인데, 전례(前例)는 가까운 것을 따르는 것이 옳고 일은 느지막하게 하는 것이 좋다. 책봉을 좀 늦추었다가 내후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동지사(冬至使)의 별단(別單)을 보건대, 칙사(勅使)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기별이 없었다마는, 가경(嘉慶)이라는 연호(年號)를 이미 새 책력(冊曆)에 찍어서 간행하였고 심지어는 그것을 싸 봉해서 장계로 보고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따라서 재자관(齎咨官)이 갔다가 돌아올 때쯤이면 필시 책력을 반포해 주는 일이 있을 테니 진하(進賀)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진하하는 사신에게 표문(表文)을 부쳐 보내기도 전에 반포하는 책력에 대연호(大年號)를 먼저 써서 회자(回咨)해 주는 일은 널리 서적을 상고해 보아도 과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성대한 일이다. 따라서 사신의 행차는 비록 서서히 들여보내려 한다 하더라도 먼저 자문(咨文)을 보낸 뒤 표문을 보내는 이 한 조목만은 살펴 처리하는 것이 참으로 온당하겠다. 그리고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미리 사신을 차출해 놓고 사신에 관한 일을 요리해 놓는 것이 매우 온당할 것이다.
다만 태상 황제(太上皇帝)의 위호(位號)는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만약 알려주는 자문이 오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곧장 쓸 수가 있겠는가. 책력을 반포하면서 보내오는 자문 편에 알려주기라도 한다면 그날이라도 즉시 행장을 꾸려 출발시켜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체되더라도 칙서가 반포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보통 해마다 절사(節使)를 6월에 차출했다가 12월에 압록강을 건너게 하는 예에 비교한다면 너무 서두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조칙(詔勅)이 나오기도 전에 황력(皇曆)의 연호에만 근거하여 즉시 진하하는 사신을 보낸다면 혹 사체상으로 방해될 듯싶습니다. 그러나 사신을 기일에 앞서 차출해 놓고 해야 할 일을 정비해 두는 것은 참으로 좋게 여겨집니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칙사를 맞이할 때 각종 수요(需要)를 정은(丁銀)313) 으로 지출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규례(規例)로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정은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머지 않아 칙사의 행차가 경내에 들어오게 되었으므로 안으로는 호조로부터 밖으로는 영부(營府)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것 때문에 근심하면서 어떻게 계책을 세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은을 사용할 때는 오직 품질이 좋으냐 나쁘냐만 따져야지 어떻게 색목(色目)만을 보고 쓸지 안 쓸지를 판별해서야 되겠습니까.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 가운데 천은(天銀)314) 과 지은(地銀)315) 을 막론하고 만약 팔성(八星)316) 까지를 한도로 해서 준다면 칙사들도 이것이 정은(丁銀)의 명색(名色)이 아니라고 하여 절대로 퇴짜를 놓지는 않을 것이니, 이렇게 변통하여 처리하는 것이 온당할 듯 싶습니다. 그래서 일전에 조금 일을 처리할 줄 아는 훈역(訓譯)을 불러다가 이런 내용을 말해 주었더니 그들도 감히 받들어 주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후로 칙사의 행차 때에 사용하는 은자(銀子)는 모두 국내에서 생산되는 은을 쓰는 것으로 영원히 정례화하여 시행케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진하 정사(進賀正使)로, 서유방(徐有防)을 부사(副使)로, 유경(柳畊)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오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서 사신에 관한 일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대령(待令)한 역관(譯官)들의 대답이 모두 애매모호하기만 하였다. 진하(進賀)하고 사은(謝恩)하는 두 일의 단락에 대해서조차 정사현(鄭思玄)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진하하는 사신을 들여보내는 한 가지 조목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렇다. 칙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일찍이 전례(前例)를 듣건대, 자문(咨文)이 먼저 나온 뒤에는 별도로 재자 역관(齎咨譯官) 한 사람을 보내어 새 황제의 만수성절(萬壽聖節)이 몇월 며칟날인지 물어보고 진하하는 표문(表文)의 형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일찍이 인본(印本)과 등본(謄本)의 문적(文蹟)을 내온 적이 있으니 이에 의거해서 이자(移咨)한다 해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혹 너무 이른 감이 들면 책력을 가지고 오는 행차를 기다려서 압록강을 건너가게 해야 할 것이다.
태상 황제(太上皇帝)의 칭호를 반포해 보여주는 일이 없을 경우 새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의 형식과 더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난 을묘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전적으로 자관(咨官)을 차견하여 성화(星火)처럼 들여보내 묻는 것이 도리이고 전례라 할 것이다. 따라서 단연코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 먼저 자관을 보내 만부(灣府)317) 에 머무르게 한 뒤, 책력을 가지고 오는 행차의 수본(手本)을 파발마로 급히 올려보내게 하고 그 수본을 보는 대로 자관에게 부쳐줄 자문(咨文)을 파발마로 전해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사역원 제조는 내일 역관을 보내 도제거(都提擧)와 영상에게 문의한 뒤 아뢰도록 하라.
대저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역관이 부족하다는 것을 오늘 와서 대령한 사람들을 보고서 더욱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 때 당해서 찾아낼 성격의 문제가 아니니 그들을 배양할 방도에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을 역시 해원(該院)의 도제거로 하여금 알아두도록 하라. 그리고 진하하는 표문을 미리 내각의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작성해 놓도록 하라."
11월 7일 갑인
진하 정사(進賀正使) 이병모(李秉模), 관상감 제조 정호인(鄭好仁), 사역원 제조 윤시동(尹蓍東)·이시수(李時秀), 정례 이정소(定例釐正所) 당상 서용보(徐龍輔), 승문원 공사 당상(公事堂上) 이만수(李晩秀)를 성정각(誠正閣)에서 불러 보았다. 상이 병모에게 이르기를,
"사대(事大)하는 문서는 본래 신중하게 작성해야만 한다. 이번에 보내는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경이 모쪼록 보살펴 주어야 하겠다. 그런데 근래의 문체(文體)가 점점 옛날과 같지 않으니 매우 걱정이 된다. 경은 식암(息菴)318) 의 시문(詩文)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역시 신으로서는 미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우리 나라에서 명(明)나라 문체의 못된 폐단을 답습하게 한 풍조를 이 글이 실제로 열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은 그런 글을 짓는 것에 대해 꽃과 달을 새긴 비단과 같다고 하면서 동방의 찌든 때를 한 번 씻어내게 되었다고 하였지만, 순일하며 혼후한 점에 있어서는 태허정(太虛亭)319) 이나 사가(四佳)320) 등 제자(諸子)보다도 훨씬 못하다.
그리고 시라는 것은 세상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으니, 보여주는 것이 있고 하소연하는 것이 있어야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잘못을 바로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이는 아비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며 멀리로는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모두 이 시의 효능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근세의 시들을 보면 슬프고 울적한 음조를 띠고 있으니 모두 시를 배우는 본뜻을 잃었다 하겠다.
읍취헌(挹翠軒)321) 이나 박 눌재(朴訥齋)322) 같은 이들의 시를 보면, 처음에는 좋게 여겨지지 않다가도 오래 보면 볼수록 좋아진다. 내 생각에 우리 동방의 시집(詩集)으로는 마땅히 이 두 시가(詩家)의 것을 정종(正宗)으로 삼아야 하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일찍이 예전 홍문관에서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을 찾아내어 간행토록 하였고, 또 《눌재집(訥齋集)》을 간행하여 배포토록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순박한 경지로 되돌리려 했던 나의 고심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삼연(三淵)323) 의 시를 누가 아끼지 않겠는가마는, 다만 그토록 화려하고 번성한 문족(門族)에서 이처럼 산야(山野)의 싸늘하고 파리한 어휘가 나오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또 농암(農巖)324) 의 문장을 그 누가 추중(推重)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자신은 늘 명나라 사람들의 어투를 피하려 힘쓴다고 했으나 가끔 그런 병통을 면하지 못한 곳이 나오곤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문장도 시운(時運)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방물(方物)을 보낼 때 모시·돗자리·종이·모피 등은 모두 토산품을 쓰는데 유독 명주 한 종류만은 중국의 실로 짠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역해 와서 천을 만들어 짤 즈음에 상당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폐단쯤이야 원래 따질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기의 실정에 맞게 사대(事大)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어긋나는 점이 있을 듯하니, 이번에 진하사(進賀使)가 가져가는 방물부터 시작해서 우리 나라의 실로 짠 명주를 각별히 정밀하게 가린 뒤 물을 들여 싸서 보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화성(華城)의 둔전(屯田)이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갑인년에 화성의 축성 공사와 관련하여 공사를 감독하는 신하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성이 뒷날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은 마치 나무에 뿌리가 서리고 집지을 때 터를 다지듯이 견고하고 두텁게 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년 봄에 얼었던 땅이 녹을 때를 기다렸다가 북쪽성 밖의 거리가 가깝고 척박한 땅에다 깊이를 헤아려 1장(丈)이나 반 장 정도 땅을 파고 대략 백 곡(斛)쯤 되는 씨앗을 파종할 만한 경계를 적당히 정한 뒤 그 흙을 거두어 성벽에 달라붙게 하되 말 다섯 필이나 수레 두 채가 그 지역을 종횡으로 달릴 수 있게 하고 그 동남쪽 이랑을 깊이 파 경작하며 쉽게 김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자갈밭을 옥토로 바꿀 수 있어 마치 정경(鄭涇)이나 사업(史鄴)의 경우처럼 성곽을 등진 좋은 토지를 몇천 경(頃)이나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니, 1, 2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비 내린 논에 물꼬를 트는 아름다운 광경을 장차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사를 진행시킬 때에 품삯은 날수로 계산하지 말고 실적을 기준으로 삼되 원근(遠近)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힘이 센 자는 넉넉히 백 전(錢)을 가져가고 약한 자도 한 몸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부(府)의 백성들만 혜택을 받는 일이겠는가. 동서 남북 어디를 가도 마땅한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품팔이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자들 모두가 바람결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올 것인데, 움집이나 상점을 차리고 술도 팔고 밥도 팔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대저 이와 같이 하면, 성은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는 안정의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이고, 백성은 1만 가구가 기름진 땅을 얻게 될 것이며, 창고에는 1만 사람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될 것이니, 이 일 하나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파급될 것이다. 이 어찌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둔(屯)을 설치하는 데 따른 비용을 본부의 유수에게 떼어주었는데, 전후에 걸쳐 떼어준 돈이 모두 2만 관(貫)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유수 조심태(趙心泰)가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본성(本城)의 장안문(長安門) 밖 북쪽 들판에 새로 둔전을 설치하였습니다. 신이 떼어주신 돈을 공경히 받아 시설하고 경영하면서 혹 매입(買入)하기도 하고 혹 새로 개간하기도 하여 두 항목의 논에 1백 석(石)을 파종하는 것을 기준으로 도랑을 파 물을 대고 제방을 설치해 물을 담아놓기 위해 토목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토지는 비옥하고 척박한 토질이 서로 섞여 있고 새로 개간한 토지는 시기가 조금 늦었던 관계로 옛날 토지와 새로운 토지에서 생산된 것이 20두(斗)짜리 전석(全石)으로 7백 66석(石)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입하는 데 든 비용·새로 개간하는 데 따른 물력(物力), 수확한 수량, 종자와 세곡(稅穀)으로 덜어둘 양, 둔전 소속 원역(員役)에 지급한 요미(料米), 도랑을 파고 제방을 축조하는 데 지출된 비용 등을 모두 정연하게 구별한 뒤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내영(內營)에 올려보냈습니다.
내년에는 먼저 교리(校吏)들과 군졸·관예(官隷)부터 그 형세를 헤아리고 다소(多少)를 짐작하여 토지를 나누어주고 경작하게 함으로써 농사짓는 이로움을 알게 하는 동시에 기필코 실효를 거두게끔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빈한하여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자와 게을러서 진작시킬 수 없는 자를 권유하며 신칙하고, 조금 나은 자들에게는 대략 정전(井田)의 조법(助法)을 모방하여 두 사람씩 짝을 지운 뒤 혹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혜택이 넓혀질 수 있는 방도를 삼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8일 을묘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가경(嘉慶)이라는 연호(年號)를 이미 헌서(憲書)325) 에 찍어 보냈으니, 내년 정월부터는 각종 공사(公私) 문서에 모두 새로이 반포된 연호로 개칭(改稱)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가 본원(本院)의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건대, 건륭(乾隆) 원년326) 에 명소(命召) 및 통부(通符)를 고쳐 만든 뒤에 대신과 장신(將臣) 등을 명초(命招)하여 전해 준 전례(前例)가 있었습니다. 신이 마침 해방(該房)에 있기 때문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전례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명소 등 부신(符信)은 건륭 연호를 그대로 써도 안될 것은 없을 듯하다. 또 상서원(尙瑞院)의 마패(馬牌)로 말하더라도 한 번 고쳐 만들려면 수백 개의 철패(鐵牌)를 한꺼번에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례(古例)로 보면 그렇지만 요즘 들어서는 순치(順治)327) 이후의 연호를 모두 그대로 놔둔 채 통용하고 있으니, 이것도 근거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이번에도 새로 만들 것 없이 그대로 썼으면 좋겠는데, 사관(史官)을 보내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자전(慈殿)의 탄일(誕日)에 진하(陳賀)하는 절목을 가지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가서 치사(致詞)와 표리(表裏)328) 를 친히 올리는 의식을 행하고 뒤따라 수정문(壽靜門) 밖에 이르러 들어가서 전해드린 뒤에 대내(大內)로 돌아오겠다. 백관이 치사와 표리를 올리는 의식은 규례대로 동쪽뜰에서 반열을 통합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자전께서 굳이 따르는 것을 어려워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늦추며 기다려 왔으니, 의문(儀文)과 관련된 것들을 가능한 한 간략하게 줄이는 것이 실로 뜻을 따르는 도리가 될 것이다.
대저 올해가 어떤 해인가. 바로 우리 선조(先朝)의 보령(寶齡)이 시작된 해이다. 선왕(先王)을 섬기는 마음으로 자전을 섬겨야 하는만큼 인정으로 보나 예문으로 볼 때 어찌 헛되이 보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날에 꼭 이 예(禮)를 거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습의(習儀)나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가 진하하는 등의 절목은 모두 규례에 따라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9일 병진
비변사가 아뢰기를,
"정리곡(整理穀)을 설치한 법의 뜻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잡곡(雜穀) 1석(石)의 값을 한 냥(兩) 돈으로 정했던 것 역시 혹시라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전해오는 이야기를 듣건대, 호서(湖西)의 두 고을에서 갖가지로 폐단이 발생해 백성들이 상당히 소요하고 있다 합니다. 이는 대개 당초 영문(營門)에서 분배할 때에 큰 고을에 조금만 분배하기도 하고 작은 고을에 많이 분배하기도 하여 불균등한 폐단을 초래하였고 억지로 나누어주고 억지로 징수하는 일도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해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특히 더 불량하게 거행한 자를 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서 내 뜻을 선양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명색이 도신이요 수령인 자들이 감히 이 곡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처럼 소홀히 다룬 나머지 백성들을 윽박지르면서 폐단을 빚어내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숨기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곡절을 특별히 상세하게 조사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정리 의궤청(整理儀軌廳)으로 하여금 득달같이 행회(行會)토록 하고, 만약 혹시라도 조사해 아뢰는 일을 지체시킬 경우에는 모두 단속하지 못한 죄를 적용하여 똑같이 처벌할 것이라는 뜻을 일체 엄하게 신칙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정사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대비전(王大妃殿)에게 치사(致詞)와 표리(表裏)를 친히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이어 수정문(壽靜門)에 나아가 직접 바쳤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사역원 제조 윤시동(尹蓍東)·이시수(李時秀)를 가마 앞으로 불러 만나 보았다. 상이 낙성 등에게 이르기를,
"경 등은 어제 황제가 자리를 전해주겠다고 내린 조서(詔書)를 베껴 온 것을 보았는가. 그 글을 보건대, 처음 즉위했을 때부터 말하기를 ‘61년을 재위(在位)하신 황조(皇祖)에게는 감히 비길 수 없기 때문에 60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때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어찌 희귀하고도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황태자를 책봉한 일과 관련해서도 진하사(進賀使)를 보내야 마땅한데 예부(禮部)의 지휘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진하사를 보낸다는 것도 일의 체면으로 볼 때 안될 일이다. 그리고 진하사가 연경(燕京)에 들어간다 해도 형세로 볼 때 장차 세후(歲後)가 될 것인데, 그러면 가경(嘉慶) 황제가 등극한 뒤일테니, 황태자 책봉을 진하하는 일이 끝나는 시기에 뒤쳐지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번에 황력(皇曆)을 가지고 돌아오는 편에 황태자 책봉과 관련한 칙유(勅諭)를 부쳐보낼 경우에는 진하하는 한 조목을 신중하게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경(嘉慶)을 낳은 생모를 귀비(貴妃)에서 황후(皇后)로 추존(追尊)하였는데 이 경우도 진하하는 절목이 있어야 하겠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금년은 황태자의 모친을 황후로 높였습니만, 내년에 가경의 위호(位號)가 정해진 뒤에는 마땅히 황태후(皇太后)로 높일 것입니다. 그러니 내년 진하사의 진하하는 표문(表文) 속에 이 두 가지 일을 축하하는 말을 아울러 거론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11월 11일 무오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11월 12일 기미
동지(冬至) 제향을 경모궁에서 친히 행하였다.
영의정 홍낙성, 우의정 채제공, 판중추부사 이병모, 예조 참판 이경일(李敬一)을 불러 보았다. 낙성 등이 동궁(東宮)의 책례(冊禮)와 관련하여 예당(禮堂)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니, 상이 일전에 연석(筵席)에서 분부하였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3일 경신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병이 석 달이나 끌면서 하루 이틀 사이에 조정에 나올 수 있는 가망이 아직은 없으므로 우려되어 애가 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 경이 비록 경의 종부(從父) 문익공(文翼公)이 처음 사직소를 올려 즉시 해면(解免)되었던 예를 근거로 원용(援用)하면서 양해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마는, 경은 속에 정화(精華)가 온축되어 있을 뿐더러 근력도 아직 굳세니 며칠 가지 않아서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승 직책이 체차되지 않은 것 때문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지 말고 조리하는 일이나 신중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5일 임술
정배(定配)한 죄인 이서구(李書九)를 방면하였다.
이조 참의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기를,
"기미년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역적놈이 죄를 얻게 되자 더욱 급하게 음모를 진행시켜 기필코 한 쪽의 사류(士類)를 도륙(屠戮)하려 하였는데, 먼저 국가의 우익(羽翼)을 제거할 목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대로 투서(投書)하여 상변(上變)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흉악한 무리들이 저지른 행동인데 그 괴수는 허적(許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허적이 그 당시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은 더욱 흉칙하고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先祖)가 멸족당할 화가 호흡 간에 닥쳐왔었는데, 다행히도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하늘에 뜬 태양처럼 밝게 살펴주신 덕분에 마침내는 도깨비들이 그 진상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신의 집안도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이 늘 이 해의 4, 5월 사이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통분함을 씻을 길이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허적으로 말하면 신의 집안의 원수이지만 바로 국가의 적(賊)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의 선조의 후손이 된 입장에서는 물론 아직도 풀지 못한 통분함이 있습니다만, 신의 선조가 당시에 행한 일을 논한다면 애당초 씻어야 할 수치같은 것은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근래 처분하시고 나서 지금 이렇게 내리신 성상의 분부에 대하여 신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 헤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그가 체부(體府)를 핑계대어 용사(勇士)를 모집해 들이고 역적인 아들에게 권세를 빌려주어 가까운 종친들과 결탁케 한 정상에 대해서는 신이 너무나도 상세히 알고 있고 너무도 귀에 따갑게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또 어떻게 감히 함부로 논열(論列)하기를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대신의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신 바가 있고 지금 미천한 신에게 또 이렇게 분부하셨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신의 선조가 그 당시에 부끄러워해야 할 점이 참으로 있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게 된 것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허적을 복관(復官)시킴으로써 어떻게 신의 선조의 수치가 씻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성상의 비답에 대해서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면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마는, ‘그대는 직접 보게 되었다.’고 하신 것과 ‘다행스럽게 되었다.’고 하신 분부에 대해서는 또 장차 무슨 말씀으로 답변드려야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전에 내린 비답 가운데 ‘부끄러움을 씻어주어 선정(先正)에게 보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지(聖志)를 밝히는 것이 성덕(聖德)을 빛내는 일이다.’라고 한 구절을 살펴본다면, 그대가 그대 집안의 사람이 된 입장에서 필시 말하지 않아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상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니, 혹 전에 내린 비답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는가.
지나간 기미년의 일에 대해서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종묘에 고한 뒤 교서를 반포하라고 청하면서 심지어는 제주(濟州)의 길운절(吉云節)의 사례를 인용하기까지 하였는가 하면, 또 교서의 글을 작성해 올리면서 거꾸로 ‘장가(張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칼을 들었는데 이가(李哥) 성을 가진 두 사람이 목숨을 내놓았다.’는 말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가령 취향이 다른 고상(故相)329) 이 설혹 다른 의견을 미처 제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위에서 말한 바 그런 사람이 같은 방에서 함께 창을 쥐었던 것에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고상이 죽은 것은 기사년의 일이 있기 10년 전의 일이고, 또 최후에 의논을 드린 것이 비록 주저한 것 같은 인상이 들지는 몰라도 스스로 와서 옹호했던 사실이 국승(國乘)에 분명히 실려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선정(先正)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생각해 왔지만 유독 기미년에 부끄러움을 당한 일에 대해서만은 한 번도 언급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고상(故相)을 복관시키는 일로 인해 오늘 처음 말함으로써 후생(後生)의 연소배들로 하여금 더욱 전말(顚末)을 알 수 있게끔 한 것이다. 고상을 복관시킨 것은 위에서 말한 그런 사람을 배척한 것이요 그런 사람을 배척한 것은 바로 선정을 생각해 준 것이니, 내가 선정의 수치를 씻어주었다고 말한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
대저 1백 년 만에 공의(公議)가 크게 정해진 결과 고상의 원통함이 씻겨지고 선정도 더욱 할 말이 있게 되면서 위에서 말한 그런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못이겨 지하에서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가닥은 달라도 함께 꿰어진 것이라고 할 것으로서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조치였다고 할 것이다. 지금 정사(政事)를 시행할 달이 눈앞에 닥쳐왔으니, 그대는 모쪼록 즉시 일어나 마음을 돌리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계해
진하 부사(進賀副使) 서유방(徐有防)이 사명(使命)을 누차 어기고 받들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국가의 체면이 달려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진하 부사 서유방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하고 오늘 당장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방이 하직 인사를 올리니, 하교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사신으로 보내는 일이 견책하여 외방에 보임(補任)시키는 일보다 중하다. 의리에 입각해서 처신해야 하는 도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어찌 고달픈 일을 피하고 수월한 일을 찾아나서야 하겠는가. 지금 일단 연석(筵席)에 온 김에 면유(面諭)하였으니 외방에 보임하게 한 명은 시행하지 말고 즉시 일행에 합류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갑자
하교하였다.
"대소(大小) 과거 시험을 막론하고 어제(御題)를 책자로 베껴 올려 반궁(泮宮)에 보관토록 일찍이 규정으로 만든 것은, 대체로 이미 어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서 감히 흐리멍덩하게 뒤섞어 내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친시(親試)를 보일 때 제목을 내거는 일과 관련하여 들어보니, 승보시(陞補試)의 시(詩) 제목으로 출제한 것이 바로 연전에 표(表)와 부(賦)에 어제로 내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혼동해서 거듭 출제한 것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살피지 못한 잘못은 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기회에 또 알아보건대,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보이는 과시(課試)의 율시(律詩) 제목을 또 이미 어제로 출제했던 율시 제목을 가지고 곧장 맨 첫머리에 제시해 놓았으니 살피지 못한 잘못이 똑같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대사성은 똑같은 잘못을 두 번 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소(大小) 과장(科場)에서는 단지 어제(御題) 중에서 이미 출제한 시(詩) 제목만을 시관(試官)의 시 제목으로 다시 내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각 체(體)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하도록 규정을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만약 살피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내각과 정원에서 조사해 추고하고, 이미 합격자 발표를 했더라도 그 합격을 인정해주지 않음으로써 어제의 체면을 높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방의 공도회(公都會)야 어찌 꼭 구애받게 해야 하겠는가. 단지 경시관(京試官)으로 하여금 어제의 기록을 상세히 상고한 뒤 내려가도록 규정을 정해야 할 것이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장문(長文)의 사단(辭單)을 올리니, 안심하고 조리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서유린(徐有隣),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 조심태(趙心泰)를 불러 만나 보았다. 심태가 아뢰기를,
"본성(本城) 부근의 3개 고을 수령이 동·서·남쪽 성의 협수장(協守將)으로서 그 고을이 본성의 속읍(屬邑)으로 정해졌고 병부(兵符)의 우척(右隻)도 본부에 있는 이상 12월에 그들의 전최(殿最)를 행하는 것이 사체(事體)를 높이고 군율을 엄중히 하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온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내영(內營)에서 장교(將校) 전원을 대상으로 근무 태도를 살펴 포폄(褒貶)하고 있는만큼 외영(外營)에서도 차이를 둘 수가 없으니, 금년 겨울철부터 근무 태도를 평가한 단자(單子)를 똑같이 작성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아문이 세 개나 설치되어 있으므로 원래 폐단이 발생할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그 중에 서울에서 멀리 절제(節制)할 수 있는 것을 뽑아 본다면 바로 중군(中軍)이 이에 해당됩니다. 지금 만약 기영(畿營) 중군의 예에 의거하여 경성(京城)에 머물러 있게 하면서 조련과 전최(殿最) 등의 절목과 관련하여 때때로 와서 참여하게 한다면 관방(官方)으로 보나 군제(軍制)로 보나 합당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11월 18일 을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품(稟)할 일이 있는 비변사 당상만 입시하게 하였다. 유사 당상(有司堂上)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삼강(三江) 삼천방(三川坊)의 백 리(里) 가까이 되는 지역에 민호(民戶)가 들어가 살도록 허락한 뒤에 인구가 1만여 명이 되었고 전결(田結)이 7백이나 되는 등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실질적인 효과가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대체로 보건대 자성(慈城)과 우예(虞芮) 두 군(郡)은 요동(遼東) 심양(瀋陽) 지역의 경계와 매우 가깝고 무창(茂昌)과 여연(閭延) 두 군은 삼수(三水) 갑산(甲山)과 접경하고 있는데, 강 연안 7백 리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은 토지가 비옥한데다 길도 평탄하며 산은 낮고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으니, 자성에서 무창의 경계까지는 모두 백성들을 거주시킬 만한 지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삼정(蔘政)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전에는 충분히 쓸 수 있던 것이 지금은 모자라는 등 해마다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삼정이 예전처럼 되도록 하려면 백성이 들어가 살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그리하여 삼천방(三川坊)에 이미 행했던 예처럼 해서 몇 년 동안에 촌락을 이루게 하고 인가가 밀집되게 하면서 넘나드는 폐단이 스스로 없어지게 한다면, 방수(防守)하는 일도 정지시킬 수 있어 경비도 감소되고 삼밭[蔘場]도 굳이 얻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얻게 될 것이며, 보루를 폐지하고 고을을 설치하는 등의 일도 뒤따라 계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강계부(江界府)에 문의한 다음 그 편부(便否)를 조목별로 나열하고 지형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리에 맞게 장계를 올리게 하고, 이를 근거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국가의 큰 정사(政事)는 바로 사람을 임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정에서는 전적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대소(大小) 청요(淸要)의 관직에 배치하고 있는 만큼 오늘날의 과거에 대한 폐단을 속히 바로잡아야만 그런대로 선비를 시험하는 법을 중히 하고 사람을 임용하는 요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방에서 인재를 뽑아 보내는 일로 말하면 역대(歷代)에서 통용하던 법전이었습니다. 옛날과 지금의 사정이 다른만큼 그 법을 온전히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조목을 정리한 뒤 대략 옛 법전의 뜻을 본받고 오늘날의 풍속을 참작해서 제도로 정한다 해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등대(登對)하기를 기다려 자문을 구한 뒤 재량해서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허가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재차 사직 단자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1월 19일 병인
북경(北京)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60년330) 9월 4일, 내각(內閣)에서 3일에 받은 황상(皇上)의 분부를 초출(抄出)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짐(朕)이 큰 기업(基業)을 공경히 이어받아 온 누리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있는데, 짐이 즉위하던 초기에 바로 향을 피우며 상천(上天)에 묵도(默禱)한 일이 있다. 그것은 곧 짐이 만약 보살핌을 받아 6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게 되면 곧바로 후계자인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감히 위로 61년 동안 재위(在位)하신 황조(皇祖)331) 와 동일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그 당시에도 예상할 수가 없었는데 짐의 나이가 벌써 여든 여섯이나 되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로 하늘이 돌보아 주고 열성(列聖)이 행운을 끼쳐 주신 덕분에 온 누리가 태평시대를 구가하고 대를 이어 기쁨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내가 재위한 햇수도 어언 60년을 맞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것이 지극히 중하고 지극히 크니 왕통을 이어받고 전해 줄 즈음에 어찌 감히 배전(倍前)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짐이 이에 앞서 즉시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유지(諭旨)를 반포하면서 반복하여 거듭 밝혔었다. 대개 사책(史冊)을 두루 보건대, 삼대(三代)332) 이후로는 한대(漢代)를 거쳐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후계자를 한 번 세워놓으면 온갖 폐단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렇듯 역사의 교훈이 모두 실려 있었기 때문에 아조(我朝)의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도 모두 후계자를 미리 세우지 않으셨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직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께서 일찍이 적자(嫡子)인 이밀친왕(理密親王)을 황태자로 삼으셨는데, 뒤에 가서 결국 보잘것 없는 무리들의 유혹에 넘어간데다 고질병까지 앓게 되어 삼가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때 대신 중에서 국본(國本)333) 을 세우는 일을 응당 행해야 한다고 진달하여 청한 자가 있었으나 황조(皇祖)께서 혼자의 생각으로 결단을 내리시어 훈계하며 깨우쳐 주셨고 다시는 황태자를 책봉하여 세우지 않겠다고 특별히 반포하시고나서 황고(皇考)에게 전위(傳位)하실 때까지 13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정치를 행하시면서 내외(內外)를 엄숙하고 맑게 하셨던 것이었다.
‘옹정(雍正) 원년334) 에 황고께서 바로 짐의 이름을 친히 쓰신 뒤 건청궁(乾淸宮)의 「정대 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扁額) 위에 보관해 두시고 또 별도로 써서 봉함하신 뒤 늘 당신 몸에 지니고 계셨다. 짐이 큰 기업을 이어받은 60년 동안 좋은 운세가 펼쳐져 크나큰 은총을 입은 결과 판도(版圖)가 확장되었고 십전(十全)335) 께서 이룩하신 공적으로 5대(代)가 한 집안에서 살게 되었으니, 계속 경사가 이어지고 후손이 번성한 것이야말로 사책(史冊)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 이 모두가 위로 황조(皇祖)와 황고(皇考)께서 후손들을 위해 계책을 세우시어 제대로 보살펴 주신 덕분으로서 이 때문에 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짐이 삼가 가법(家法)을 이어받았으니 즉위하고나서 또한 어찌 적자(嫡子)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지 않았겠는가. 둘째 아들이 효현 황후(孝賢皇后)의 소생(所生)이기 때문에 일찍이 그의 이름을 써서 황고께서 행하신 예대로 「정대 광명」이라고 쓴 편액 위에 보관해 놓았었는데 뜻밖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므로 자리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찍이 대신들과 함께 봉함한 글을 개봉하고 열람한 뒤 「단혜 황태자(端慧皇太子)」라고 추증(追贈)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중외(中外)에서 모두 알고 있을 터이다.
‘그 뒤를 이어 계사년336) 동짓날에 남쪽 교외에 가서 큰 제사를 드릴 때에 자리를 물려주기로 정한 황자(皇子)의 이름을 가지고 경건하게 상제(上帝)께 기도하였으며 아울러 계승하기로 정해진 황자에 대해서도 말없이 기도를 하였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부과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즉시 처벌을 내리고, 신하로 하여금 특별히 훌륭한 인격자를 뽑아 종묘 사직이 영원히 이어지며 무궁한 복을 받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 또 성경(盛京)337) 에서 삼가 선조의 능(陵)을 참배할 때에 하늘에 계신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신령에게 경건히 고하였다. 이렇게 보면 짐이 비록 분명하게 알리며 후계자를 세우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실로 일찍부터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인데, 다만 전대(前代)에 헛된 형식에 힘쓴 나머지 후환을 끼친 예를 본받지 않으려고 했을 따름이다.
‘대저 태자를 세우는 한 가지 일로 말하면, 삼대 이후로 적자를 세우는 것으로 옛날부터 법제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모두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대대로 답습해 온 바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한 일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한다면 짐 역시 글을 읽고 옛날을 상고하는 사람이 못된다고 할 것이다. 가령 태자의 명분이 정해지지 않은 나머지 혹시라도 과거의 역사에 보이는 바 ‘한밤중에 궁중에서 한 조각의 종이가 나왔다.’는 말처럼 되기라도 한다면 그 폐단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강이 엄숙해지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 역대의 권간(權奸)과 부시(婦寺)에 의한 각종 비정(秕政)이 전혀 없어진만큼 단연코 후계자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다른 걱정거리가 야기될 가능성은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 자손들이 과연 제대로 조종(祖宗)과 짐이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을 부지런히 보살피며 기미를 미리 살펴 친정(親政)을 행한 일을 본받기만 한다면, 분명히 조서를 내려 후계자를 세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만년토록 폐단이 없어질 훌륭한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짐이 나 자신에게 물어보아도 감히 옳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만큼 천만 년 후에 가서 이를 비난하는 자가 분명히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저 공평한 마음으로 우리 조종과 짐이 행하여 온 일과 국가가 실제로 얻게 된 이익 및 정치가 태평시대를 구가하게 했는지의 여부만을 보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짐이 크게 대보(大寶)를 받은 지 지금 60년이 되는데, 즉위했을 때 상제에게 묵도(默禱)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하노라니 아울러 추억(追憶)되는 일이 있다. 짐의 나이가 50이 되고나서 언젠가 성모(聖母) 황태후(皇太后)께 정사를 물려줄 일에 대해서 아뢰었었는데, 그때 성모께서 순유(諄諭)하시기를 「막중한 부탁을 받은 몸으로서 천하 신민의 기대가 걸려 있는만큼 나이 60이 되더라도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편하게 지낼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이에 다음날 아침에 짐이 즉시 성모께서 분부하신 것을 가지고 상제에게 묵주(默奏)를 올리기를 「만약 성모를 길이 모시면서 오래 사는 경사를 맞을 수만 있다면 짐도 어찌 감히 예전의 소원을 다시 고집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그만 정유년 이래로 그 소망이 일단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에 즉위 초에 세웠던 뜻이 다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는데 하늘이 은혜를 다시 베풀어 주신 덕분에 마침내 재위 60년을 맞게 되었고 나이도 85세가 되었다. 게다가 정신도 강건하여 피곤함을 느낄 정도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신민들은 물론이요 몽고(蒙古)의 왕공(王公)과 변방의 속국(屬國)까지도 모두 실제로 짐이 곧장 정사를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그저 계속 정치만 잘 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짐의 뜻이 이미 정해진만큼 뭇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10월 초하루에 반삭(頒朔)338) 하기로 한 다음, 이에 따라 길일(吉日)을 물어서 9월 3일에 어문리사(御門理使)가 황자(皇子)·황손(皇孫)·왕공(王公)·대신(大臣) 등을 소집, 계사년에 후계자로 확정하여 봉함해 둔 황자의 이름을 공동으로 보게 하고, 열다섯 번째 황자인 가친왕(嘉親王) 영염(永琰)을 황태자로 세워 정해진 제도대로 분명히 부탁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초하루에 시헌서(時憲書)339) 를 반포하되 다음해인 병진년을 사황제(嗣皇帝)의 가경(嘉慶) 원년으로 하고, 짐이 장지(長至)340) 에 재계(齋戒)한 다음 황태자를 즉시 육경궁(毓慶宮)으로 옮겨 저위(儲位)를 확정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황태자의 생모(生母)는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에서 효의 황후(孝儀皇后)로 올려 추증(追贈)한 뒤 봉선전(奉先殿)에 승부(升袝)하여 효현 황후(孝賢皇后) 다음 자리에 놓이도록 해야 할 것이니, 행해야 할 전례(典禮)에 대해서 해당 아문에서는 정해진 규례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또 황태자의 이름 중에 위의 한 글자는 옹(顒)이라는 글자로 고쳐 쓰도록 하라. 그리하여 기타 형제 및 근지(近支)의 종실(宗室) 일동으로부터 내외(內外)에서 올리는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 글자를 쓰고 영원히 다시 고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청서(淸書)에서는 한 점(點)을 없애고 쓰게 하여 음(音)은 같고 글자는 틀림을 보여줌으로써 글을 작성할 때 편리하도록 하라.
‘짐이 하늘의 돌보심을 받아 강건한 몸으로 길운(吉運)을 만났으니 하루라도 피곤할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감히 해이하게 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사를 물려준 뒤라 하더라도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나 사람을 임용하는 정사를 행하는 일 등 제반 큰일에 대해서 어찌 놔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직접 지시를 내릴 것인데 사황제(嗣皇帝)가 아침 저녁으로 경건하게 훈유(訓諭)를 듣고서 장래에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도리를 알아 잘못이 없게끔 한다면 어찌 천하와 국가를 위해 큰 경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교단(郊壇)과 종사(宗社)에 올리는 여러 제사의 경우, 짐의 나이가 90을 바라보게 되는만큼 오르고 내리며 절하고 무릎꿇는 등의 절차를 행하는 과정에서 정력이 조금 달려 성의와 공경을 표하는 데에 부족한 점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는 사황제가 직접 가서 예를 거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部) 원(院) 아문과 각성(各省)의 구제(具題) 장소(章疏) 및 문무(文武) 관원을 인견(引見)하는 등의 심상한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 사황제가 먼저 열람하는 과정을 거친 뒤 짐에게 아뢰어 처리하게 함으로써 짐의 수고로움을 나누어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더 건강이 좋아져 기이(期頤)341) 에까지 오를 수 있는 행운이 뒤따라 천하 신민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게 되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지금 정사를 물려줄 기일이 이미 박두해 있는만큼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과 같은 일체의 헛된 형식은 모두 거행할 필요가 없다. 내년에 정사를 물려주는 일에 관한 일체의 전례(典禮)와 의문(儀文)은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하여금 각 해당 아문과 회동(會同)하여 근실하게 조목별로 상의하여 보고토록 하고, 이 일을 중외(中外)에 통유(通諭)하여 알리도록 하라. 특별히 유시한다."
황태자가 아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60년 9월 6일 내각(內閣)에서 초출(抄出)한 내용을 보고 아들인 신하가 삼가 자식의 소원을 경건히 호소하오니 살펴주시라는 일로 아룁니다.
이달 3일에 황상(皇上)께서 내리신 분부를 삼가 받들건대 ‘짐이 큰 기업을 공경히 이어받아 온 누리를 보살피게 되었는데, 즉위하던 초기에 즉시 향을 피우고 하늘에 묵도(默禱)를 올렸었다. 그것은 즉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60년 동안을 황제 자리에 있게 되면 그 즉시로 사자(嗣子)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감히 위로 61년 동안 재위(在位)하신 황조(皇祖)와 같이 될 수 없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이토록 하늘이 은혜를 베푸시어 마침내는 재위 60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나이도 85세나 되었다. 그럼에도 정신이 강건하여 피곤한 줄을 모르고 있으므로 천하의 신민(臣民)은 물론이고 몽고(蒙古)의 왕공(王公)과 변두리의 속국(屬國)들까지 모두 실제로 짐이 당장 정사를 물려주지 말고 계속 정치를 잘 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짐의 뜻이 이미 정해진 만큼 뭇사람들의 심정을 따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10월 초하루에 책력(冊曆)을 반포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길일(吉日)을 택한 결과 9월 3일에 어문리사(御門理事)가 황자(皇子)·황손(皇孫)·왕공(王公)·대신(大臣) 등을 소집, 계사년에 정하여 봉함해 두었던 사위(嗣位) 황자(皇子)의 이름을 공동으로 보게 하고, 열다섯째 황자인 가친왕(嘉親王) 영염(永琰)을 황태자로 세워 정한 제도에 따라 분명히 위임토록 하였다. 10월 초하루에 시헌서(時憲書)를 반포할 때 내년인 병진년을 사황제(嗣皇帝)의 가경(嘉慶) 원년으로 하고, 짐이 동짓날 재계(齋戒)를 마친 뒤에 황태자의 거처를 즉시 육경궁(毓慶宮)으로 옮겨 저위(儲位)를 확정토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삼가 읽어 내려가는 동안 너무도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황부(皇父) 폐하께서는 큰 덕을 갖추시어 천명을 받으신 뒤로 오래도록 참다운 도를 행사하시며 풍속을 교화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두터운 복을 받고 열조(列祖)의 아름다운 업적을 계승하신 결과, 즉위하신 이후로 60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시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을 근실히 하고 사람을 임용하는 정사를 행하는 등 제반 큰 일은 물론이요 출입하고 기거하고 호령을 발하고 시행하는 일에 있어서까지 모두 조심스럽게 살펴 공경스럽게 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기강이 엄숙하게 맑아지고 온 누리에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아름다운 문덕(文德)과 씩씩한 무덕(武德)이 이루어지면서 화평스러운 시대가 도래하고 해마다 풍년이 드는 등 갖가지 복이 마치 메아리가 응하는 것처럼 모두 모여 들었으니 천인(天人)이 화합된 이런 융성함이야말로 과거 역사를 들추어 보아도 찾기 힘들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수(聖壽)가 장차 90에 이르려 하시고 황제의 자리에 계신 지 어언 60돌을 맞았는데도 강건하신 몸으로 더욱 정신을 가다듬으시어 날마다 부지런히 애쓰고 계신다는 것은 온 누리의 신민들이 모두 알고 함께 보고 있는 바입니다. 신이 다행히도 만고(萬古)에 보기 드문 성세(盛世)를 만나 위에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황상의 인자한 보살핌을 직접 받고 있으니 환희에 들뜨는 마음을 어찌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삼가 조서의 내용을 읽어 보건대 은총을 내려주시어 신을 황태자로 책립(冊立)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의 재질로 볼 때 아무리 가슴을 어루만지며 뒤돌아보아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분부를 받들건대 장차 내년에 신에게 정사를 물려주겠다고 하셨으므로 신의 오장(五臟)이 모두 벌벌 떨리면서 며칠째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기(神器)의 중함과 천하의 큰일에 대해서 황부께서 고요히 생각하시어 결단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조종(祖宗)을 깊이 생각하시어 개진하신 그 의리가 높기만 하고 훈계를 내려주신 것이 절실하기만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사적(私的)인 구구한 이유 때문에 전대(前代)에 사양하던 투를 답습하여 형식적인 글을 올리면서 군부(君父)를 번거롭게 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신의 지식 수준이란 것이 몽매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독서를 하고 날마다 황상을 모시는 가운데 조금 전요(典要)를 알고 있다고는 하나 나이가 아직 어리고 견문도 일천(日淺)한 까닭에 조치하여 경위를 바로잡고 체(體)를 온전히 하여 용(用)을 확충시키는 일에 있어서는 밤낮으로 관심을 갖고 뒤돌아보아도 제대로 펼쳐낼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떨리는 심정으로 감당해내지 못할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황부께서 팔순에 접어드신 뒤의 모습을 우러러 뵈옵건대 춘추가 높아질수록 더욱 건강하시어 만기(萬機)에 정신을 쓰시면서도 여유가 있으시고 아랫사람들로서는 미치기 어려운 일을 두루 응해주고 계십니다. 미세한 일까지 미리 염려하고 그해의 농사를 살펴 부역을 면제하고 조세(租稅)를 견감(蠲減)해 주는 등 백성들에게 미치는 혜택이 뼛속까지 사무치게 해 주고 계시므로, 신만 아들이 된 마음으로 황부를 길이 모시면서 봄날의 햇빛과 같은 보호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외(內外)의 대소 신공(臣工)은 물론이요 아래로 억조의 백성들과 속국의 번신(藩臣)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드러내면서 황부를 영원히 모시고서 태평성대를 끝없이 구가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리 황부께서는 계속 재위하시는 복을 내리시어 직접 정사를 살펴주심으로써 위로는 하늘의 보살핌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정(輿情)에 부응토록 하소서. 신이 일단 책립(冊立)되는 은혜를 입은 이상 삼가 저궁(儲宮)에 대기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수라를 돌보고 문안드리는 겨를에 가르침을 받으며 스스로 책려(策勵)토록 힘쓰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황부께서 백 세의 춘추를 누리시어 경축하는 의식을 올릴 때까지 삼가 기다렸다가 그때에 가서 위명(威命)을 반포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경건한 마음으로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현재 연호를 개정하고 정사를 물려주는 일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삼가 성자(聖慈)께서 굽어살피시어 윤허를 내려주소서. 실로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호소하면서 삼가 아룁니다."
영은(永恩) 등이 아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 영은 등은 무릎을 꿇고서 조목별로 진달드리며 간청하오니 은혜로운 유음(兪音)을 내려주시라는 일로 아룁니다.
건륭 60년 9월 3일 내각에서 황상의 유음을 받든 내용을 보건대 ‘짐(朕)은……운운’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황상께서는 정치에 힘쓰시어 은혜가 두루 미치고 교화가 융성하시어 온 누리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스럽고 신령스럽고 분명스럽고 씩씩하신 인주(人主)로서 지위와 복록과 명예와 수명을 온전하게 받으시어 빛나는 운세가 드넓게 펼쳐지고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홍범(洪範)342) 의 여덟 번째 서징(庶徵)이 절후(節候)에 맞게 펼쳐지고 십전(十全)의 호(號)에서처럼 모든 공적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5대(代)가 한 집안에서 살고 춘추도 90을 바라보게 되셨으니, 인류의 역사 이래로 큰 복을 받고 공적을 드날린 것 가운데 이처럼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이 다 함께 융성하고 모두가 화목하게 복록을 누린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만 특별히 조지(詔旨)를 반포하시어 저위(儲位)를 정하시고는 장차 내년 병진년에 연호를 새로 정하고 정사를 물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황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신기(神器)가 지극히 중함을 경건하게 생각하시고 하늘에 묵도(默禱)를 올리시면서 즉위한 지 60돌이 되면 감히 위로 성조(聖祖)와 같게 할 수가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상에게서 받은 그 뜻에 입각하여 물려주려고 밝게 공표하신 것이니 그 의미심장한 법도에 대해서야 어찌 신들이 보잘 것 없는 소견을 가지고 만 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내선(內禪)했던 문적(文跡)을 상고해 보건대 과거 역사에 기재된 아름다운 공적은 실려 있는 글이 없어 오늘날의 일과 비교해 볼 수가 없고 오직 훈(勳)·화(華)343) 의 경우만이 주고받은 상의(上儀)로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요제(堯帝)의 경우는 73년 만에 자리를 물려주었고 제순(帝舜)은 30에 징용(徵庸)되어 30년 만에 재위(在位)했다가 또 33년 뒤에 비로소 선양(禪讓)을 행하였으니, 햇수를 따져보면 모두 1백여 년이 되려 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황상께서는 하늘의 신표(信標)를 손에 쥐고 땅의 상서로움이 드러나는 가운데 제위(帝位)에 오르신 60년 동안 하늘의 운행을 본받아 하루같이 행해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춘추가 높아지시는 데에 비례하여 더욱 빛나는 정사가 이루어졌고 의례적으로 혼례를 치루시면서도 나태해지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날마다 엄숙하고 공경함을 힘쓰시어 행여 편안해지려는 마음을 수시로 단속하셨고 밤낮으로 정치의 요체를 부지런히 살피셨는가 하면 춥거나 더울 때는 백성의 생활을 간절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직접 붓을 잡고 장소(章疏)를 펼쳐 보시고 궁궐 뜰에서 인대(引對)하시는 등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시면서 한 시각도 그냥 넘기지 않으셨으며 사방의 일을 두루 살피시느라 정신은 쉴 사이가 없으셨습니다. 생각건대 하늘이 성주(聖主)에게 건강과 후손의 복을 내려주신 것이야말로 성주에게 억만 년토록 황제의 자리에 있게 하려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황상께서 보명(寶命)을 받으셨을 때 분명히 하늘의 뜻을 상고하셨던 것처럼 지금 하늘의 복록을 맞이하심에 있어서도 오래도록 천위(天位)에 계심이 온당한 도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억조 백성의 마음은 곧 상제(上帝)의 마음인 것입니다. 황상께서 은택으로 듬뿍 적셔준 그 은혜가 지극히 넓고 커서 가까이는 부옥(蔀屋)의 편맹(編氓)들로부터 멀리는 변두리 속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와 벌레같은 무리들마저 해와 달처럼 떠받들고 부모와 같이 의지하여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넉넉하게 받은 자애로운 은혜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신들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견마(犬馬)처럼 주인을 사모하는 개인적인 심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고 부득이한 사정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구구하게 호소한 간절한 마음과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온 누리에서 고대하고 있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합쳐 본다면 천심(天心)이 황상을 보우(保佑)하며 거듭 명을 내리고 계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더욱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황상께서는 하늘의 명을 드높이시고 아름다운 계책을 더욱 빛내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영원히 이어질 덕에 근본하시고 정원(貞元)의 상서로움이 교대로 드러나게 하시는 동시에 황상께서도 백 세의 수명을 누리시고 백성들도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전수하시며 성인과 성인끼리 제위(帝位)를 수수(授受)하시어 중광(重光)의 성대한 상서로움을 이룩하시고 태상(太上)의 크나큰 의전(儀典)을 닦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면 인수(仁壽)의 부신(符信)이 전보다 배나 빛날 것이고 향기로운 공적이 앞으로 더욱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몽매함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삼가 합사(合辭)하여 간절히 호소하오니, 황상께서는 뭇사람들의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즉시 유지(兪旨)를 내려주소서. 신들은 간절히 명을 기다리면서 삼가 아룁니다."
건륭(乾隆) 60년 9월 4일 중국 황제가 내린 유시를 9월 6일에 내각(內閣)이 초출(抄出)하여 예부(禮部)에 보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황태자 및 왕(王)·패륵(貝勒)·패자(貝子)·공(公)과 내외 문무 대신·몽고(蒙古) 왕공 등이 각각 섭주(摺奏)하여 호소하면서 ‘뭇사람의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황제께서 춘추 백 세가 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정사를 물려주시는 전례(典禮)를 거행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짐(朕)이 하나하나 펴 보고는 그들의 심정과 표현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워 그야말로 모두 지성(至誠)에서 발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짐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과 조종(祖宗)이 나에게 부탁하신 임무가 중대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즉위한 이래로 위로 보살핌과 돌보심을 받으면서 온 누리를 편안하게 하고, 심신이 강건하고 후손이 번성하는 가운데 정치를 잘 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보내어 왔다. 그러니 짐이 또한 어찌 감히 스스로 틈을 내고 편안해질 생각을 조금이라도 낼 수 있겠는가.
다만 짐이 대통(大統)을 이어 즉위하던 초기에 즉시 향을 피우고 상천(上天)에 묵도(默禱)하기를 ‘만약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6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게 되면 바로 사자(嗣子)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감히 위로 60년을 재위하신 황조(皇祖)와 똑같은 햇수가 되거나 그 이상으로 재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사를 물려줄 수 있게 되리라고는 실로 헤아리지 못했었는데 짐의 나이가 이제 86세가 되려고 한다.
내가 즉위한 지 5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세월이 너무도 느리게 흐르는 듯하여 갑절이나 더 조바심이 나기만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꼭 되리라고는 스스로도 감히 기약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늘이 은혜를 거듭 내려주신 덕분에 마침내 즉위한 지 60년을 맞게 되었고 내 나이도 85세에 이르게 되었으니 처음에 품었던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두가 하늘이 돈독하게 돌보아주시고 열조(列祖)께서 후손에게 복을 끼쳐주신 덕택으로서 이제 짐이 직접 수수(授受)하는 상의(上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과거 역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특별히 조유(詔諭)를 내려 황태자를 책립(冊立)하고 병진년에 연호를 개정함과 동시에 정사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황태자 및 종실·몽고 왕공·내외 대신들이, 짐의 나이가 80이 지난 뒤에도 계속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서 직접 정사를 처리해 줄 것을 청하고 있다. 황태자 및 신공(臣工) 등이 날마다 금정(禁庭)에서 나를 모시면서 우악한 은혜를 받은 나머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호소하면서 미련을 갖고 떠받들고 있는 그 정성을 짐이 미상불 깊이 살피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신민(臣民)들과 변방의 속국들까지도 짐이 베푼 교화에 오래도록 흠뻑 젖은 나머지 실제로 모두들 짐이 즉시 정사를 물려주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짐이 마음을 재계하면서 묵도를 올렸던 그 정성을 두터이 받아들여 오래도록 하늘이 보살펴주신 결과 수십 년을 하루처럼 지내오게 되었는데, 지금 만약 뭇사람들이 못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소원을 애써 따라 준다면, 짐이 처음에 마음을 먹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했던 그 말들이 거꾸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니 허락하기가 어렵다.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는 일을 하지 말도록 하라.
더구나 짐은 하늘의 보살핌을 우러러 받든 이래로 온전한 복을 늘 받아왔기에 하루도 피곤할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감히 게으름을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정사를 물려준 뒤에라도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나 사람을 임용하는 행정 등 제반 큰 문제를 만나게 될 경우 어찌 묻지 않고 방치해 둘 수 있겠는가. 계속 기미를 살피고 하늘의 뜻을 몸받아 직접 사황제(嗣皇帝)에게 교시를 내리는 동시에 아침 저녁으로 경건하게 훈유(訓諭)를 듣게 함으로써 중승(重承)한 의미를 깨달아 감히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대소의 신공(臣工)들 역시 공경하는 마음으로 직분을 다하면서 삼가 뜻을 따라 준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짐의 나이 백 세가 된 뒤에 하는 일이 없이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면 어찌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 다시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황제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만약 짐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정력을 기울여 정치를 잘 해보려고 했던 것처럼 하여 좋은 운세가 길이 이어지게 하고, 나이가 기수(耆壽)에 이르렀을 때 또 짐이 정사를 물려주었던 일을 거행하여 전례(典禮)를 밝히고 대궐뜰에서 황제 자리를 주고받는다면, 더더욱 우리 집안에 있어 억만 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짐이 바라마지 않는 지극한 소원이다.
오늘 면유(面諭)한 황태자·황자·황손 및 왕공·대신은 물론이요, 이 유시를 다시 중외(中外)에 통유(通諭)하여 모두 알게 하라."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의제사(儀制司)의 안정(案呈)에 따르면 ‘11월 10일 내각(內閣)에서 「태상 황제(太上皇帝)의 전위(傳位)를 경하(慶賀)하는 표문(表文)과 사황제(嗣皇帝)의 등극(登極)을 경하하는 표문과 태상 황제의 3대 명절을 경하하는 표문 등 5통을 모두 청(淸)·한(漢) 양식으로 써서 올리도록 하라.」는 황상의 분부를 초출(抄出)한 것을 받았기에 예부에 교부한다. 우선 전위와 등극에 관한 표문의 양식을 인쇄해 보내주어 병진년 원조(元朝)에 발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황상께서 두 번째 병진년 원조를 맞게 된 데 대해 경하하는 표문을 삼가 올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에 태학사(太學士) 공(公) 아계(阿桂) 등이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니 상례(常例)를 참고하여 바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 내용을 다 함께 알아야 하겠기에 알려주는 바이다."
태상 황제가 전위(傳位)하는 대전(大典)을 경하하는 조선 국왕의 표문은 다음과 같다.
"신은 해외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관계로 조정에 있는 제신(諸臣)과 함께 직접 나아가 절을 하고 기뻐할 수가 없기에 삼가 대궐을 멀리서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경하하는 바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성대한 운세가 온전히 펼쳐져 즉위하신 이래로 하늘을 본받는 정치를 행하려 노력하셨고, 대궐 뜰에서 제위(帝位)를 주고받으심에 중도(中道)를 잡으시고 다음 황제를 성스럽게 할 계책을 끼쳐 주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상 황제 폐하께서는 헌원(軒轅)의 비록(秘籙)에 올바로 응하고 기자(箕子)의 구주(九疇)로 복을 내려주셨는데, 하늘이 독실히 보살펴 주자 마음을 재계하며 묵도(默禱)를 올렸고 선조의 발자취를 이어 처음 즉위하신 뒤로 그 공업(功業)을 경건히 계승하셨습니다.
오직 소원하신 것이라면 즉위 60주년을 맞아 황태자를 등극시킴으로써 처음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는데, 신기(神器)를 친히 전해 주시면서 존호(尊號)를 물리쳐 겸허한 덕을 보여 주셨으니 거룩하신 계책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조(制詔)의 내용이 온 누리에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갖가지 부합되는 상서(祥瑞)들이 과거의 문적(文跡)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은 다행히 이런 기막힌 기회를 만나 삼가 성대한 전례(典禮)를 보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백세까지 오래 사시어 화봉인(華封人)의 축하와 같은 기쁨을 누리시고 화락한 분위기에서 길이 노니시며 해악(海嶽)과 같은 천수(天壽)를 누리소서."
사황제(嗣皇帝)의 등극(登極)을 경하하는 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황상께서 등극하시는 기원(紀元)을 맞았는데 신은 해외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관계로 조정에 있는 제신(諸臣)과 함께 나아가 직접 절하면서 춤추지 못한 채 삼가 표문을 받들어 경하드리는 바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바른 부서(符瑞)가 처음 열리면서 상의(上儀)가 옥새의 글로 드높이 거행되고, 대보(大寶)를 계승함에 그 아름다운 운세는 도서(圖書)를 자리로 까는 상서를 드러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전수받으셨는데, 대궐 뜰에서 직접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시는 계책을 행하심으로써 억만 년토록 이어질 길운(吉運)을 열어 주셨고, 보의(黼扆) 병풍으로 만민을 대하는 덕을 표상하시는 가운데 중광(重光)의 성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서운(瑞雲)이 드리우고 별이 빛남에 온 누리 곳곳에서 아름다운 징조가 발현되고, 산과 바다의 진귀한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사절들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공업(功業)이 이제 바야흐로 펼쳐지려 하고 크나큰 계책이 빛을 발하려 하고 있는데, 신 역시 외람되나마 축하하는 반열을 따라 즉위하시는 광경을 기쁜 마음으로 뵙고자 합니다. 좋은 운세가 끝없이 펼쳐져 빛나는 태평시대를 이룩하시고 왕화(王化)를 두루 끼쳐 주시기를 북극성을 향하는 뭇별의 심정으로 경건히 바랍니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이병모(李秉模), 부사(副使) 서유방(徐有防), 서장관(書狀官) 유경(柳畊), 예문관 제학 윤시동(尹蓍東), 정례 이정소(定例釐正所) 당상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 승문원 공사 당상(公事堂上) 이만수(李晩秀)를 불러 만나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황지(皇旨)와 상유(上諭)를 황지(黃紙)에 써서 특별 자문(咨文)으로 보낼 것인데, 태상황(太上皇)이 전위(傳位)한 데 대한 표문(表文)과 사황제(嗣皇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표문의 형식을 관아에서 시무(始務)하여 예부로 보내오는 즉시로 12월에 봉함해서 발송하겠다는 것이 예부(禮部)의 자문 내용이다. 따라서 8일 사이에 일단 나온다고 한다면, 영(令)을 듣는 즉시 떠나보내야 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배표(拜表)하는 의식을 하루 이틀 사이에 거행한 뒤 사신 일행이 성화(星火)같이 길을 떠나 기필코 금년 안에 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황제가 사위(辭位)한 주문(奏文)과 제왕(諸王)·패륵(貝勒) 등의 주문 및 상유(上諭)를 ‘6백 리를 급히 달려가 반포해 주도록 하라.’고까지 한 것이야말로 상국(上國)에서 우리 나라를 특별히 대우해 주는 성대한 예(禮)인 동시에 우리 나라로서는 또한 폐단을 덜게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난 뒤에 어떻게 정조(正朝)에 때맞춰 들어가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전용(專用) 파발(擺撥)을 사용해도 황성(皇城)에서 책문(柵門)까지 7일이나 걸리는데 만부(灣府)344) 에서 원(院)까지는 2일밖에 걸리지 않으니, 파발마의 속도로 보면 우리 나라가 오히려 저쪽보다 낫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신을 중첩해서 보내는 것은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예전에도 먼저 자관(咨官)을 보낸 예가 있으니, 이번의 경우 역시 특별 재자관(齎咨官) 한 사람을 먼저 보내 상유(上諭)를 공경히 받았다는 것과 축하 사절이 정조에 때맞춰 들어올 것이라는 뜻을 예부에 전달케 함으로써 특별히 다르게 한다는 뜻을 보여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들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 보니 정말 합당합니다. 우리 나라 입장에서는 사신을 거듭 보내는 폐단이 없게 되고 저 나라에서도 특별한 예로 사대(事大)하는 의리를 알게 될 터이니 양쪽 모두 편하게 되는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20일 정묘
여러 승지 및 예문관 제학 윤시동(尹蓍東),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 정례 이정소(定例釐正所) 당상 서용보(徐龍輔), 승문원 공사 당상(公事堂上) 이만수(李晩秀)를 불러 만나 보았다.
사신의 명칭은 사은 겸 진하(謝恩兼進賀)로 칭호하되 사은은 태상황(太上皇)에게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표문(表文) 대신 주문(奏文)을 바치라고 명하였다.
특별 재자관(齎咨官)을 차송(差送)하여 하사(賀使)가 급히 길을 떠나게 된 사유를 먼저 보고하게 하였는데, 그 특별 자문의 내용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사정을 갖추 개진하니 전달(轉達)해 주면 좋겠다는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당직(當職)은 귀부(貴部)345) 에서 보내온 자문을 잘 받고 황상의 유시(諭示)를 삼가 받들어 읽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지(天地)가 다시 밝아지면서 일월(日月)이 서로 빛을 이어받았으니, 이는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로 보지 못했던 성대한 전례(典禮)라 하겠습니다.
돌아보건대 소방(小邦)의 군민(君民)은 전적으로 내복(內服)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므로 상국(上國)에 대한 정성이 더욱 절실하기만 한데 손뼉치고 기뻐하며 찬송하노라니 보통 때보다 백 배나 더 정이 새롭습니다. 더구나 소방으로 말하면 어루만져 주는 인자한 은혜를 특별히 받아 알려주는 자문까지도 빨리 받게 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절을 하고 엄숙하게 읽어 내려가는 동안 보잘 것 없는 정성이 더욱 솟구쳐 올랐습니다.
삼가 새로 내려주신 양식에 따라 글을 작성하고 변변찮은 방물(方物)을 갖추어 전개(專价)346) 를 급히 떠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삼원(三元)347) 의 영절(令節)에 때맞추어 도착한 뒤 경하하고 사은하는 글을 바침으로써 만국(萬國)의 끝 반열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이 때문에 행 부사직(行副司直) 정사현(鄭思賢)을 먼저 차송(差送)해 앞서 가서 통고하게 하였으니, 번거롭지만 귀부(貴部)에서 자세히 살펴 전주(轉奏)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지금 예전에 보지 못하던 기회를 만난만큼 응당 행해야 할 절차를 전례(前例)만 상고해서 하기는 어려우니 품재(稟裁)를 거친 뒤에 준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이상 사유를 아울러 갖추어 회답하는 자문을 보내니, 귀부에서도 이를 알고 시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윤시동(尹蓍東)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6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15면
【분류】외교(外交)
[註 345] 귀부(貴部) : 중국 예부(禮部)를 말함.[註 346] 전개(專价) : 사신.[註 347] 삼원(三元) : 정월 초하루.
11월 21일 무진
민태혁(閔台爀)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뒤이어 체차시키고 조윤대(曺允大)를 대신 임명하였다.
진하 정사 이병모(李秉模), 부사 서유방(徐有防), 서장관 유경(柳畊), 승문원 공사 당상 이만수(李晩秀) 및 여러 승지들을 불러 만나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60년 동안 재위(在位)한 것만도 전대(前代)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이렇게 전위(傳位)하다니 이는 더더욱 보지 못한 성대한 일이다. 사신 일행이 연경(燕京)에 도착하고나서 먼저 주문(奏文)을 올린 다음에 축하하는 표문(表文)을 바쳐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체례(體例)로 볼 때 마땅하다. 어떤 이는 주문이 표문만 같지 못하다고 하나, 내 생각에는 표현을 곡진하고 간절하게 하는 점에 있어 주문이 표문보다 낫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사은(謝恩)할 때 주문을 올린 전례(前例)도 이미 있으니 예부(禮部)에서도 순순히 받아줄 것이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상국(上國)의 풍속도 보고 또 황제 자리를 주고받는 성대한 예식에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경들의 이번 걸음이야말로 볼 만하다고 하겠다. 선래 역관(先來譯官)을 내보낼 때에 보고 들은 일체의 사항과 칙사(勅使)의 행차가 언제쯤 오게 될지 세밀하게 알아보고나서 반드시 정월 초이틀 사이에 때맞춰서 떠나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유시(諭示)를 반포해 준 데 대해 사은(謝恩)한 표문(表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로(雨露)와 같은 사은(私恩)을 흠뻑 받았기에 북두(北斗)를 향한 뭇별의 정성을 멀리서 급히 바칩니다. 중륜(重輪)348) 의 자리가 이어져 해와 달처럼 다시 비추게 되었는데, 하늘로부터 온유한 분부를 받들고서 성인(聖人)을 축하하는 성대한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은혜가 온누리에 흘러 넘치는 가운데 당직(當職)은 번방(藩邦)의 일을 맡아오면서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듯 2백 년 동안 소방(小邦)이 행해 온 제후(諸侯)의 법도를 깍듯이 지켜왔습니다. 태양이 중천에 떠서 비춰 준 60년 동안 황상의 은혜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왔는데, 이번에도 바다를 향하는 강물과 같은 소방의 정성을 뒤돌아보아 주시어 훈(勳)·화(華)349) 처럼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물려받는 일을 듣게 해 주셨습니다. 등극하신 지 어언 60년 동안 만년토록 태평시대의 복록(福祿)을 맞게 해 주신 뒤 후손을 위한 계책을 밝게 내려주시어 다음해 봄 정월 초하루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케 하셨습니다. 황제의 지위에 계시면서 막중한 신기(神器)를 부탁한 것은 지금 몸이 피곤해져서가 아닌데, 황상에서 태상황(太上皇)으로 더욱 자리가 높아지셨으니 천복(天福)을 받은 경사에 부합됩니다.
이번에 십행(十行)의 조유(詔諭)를 1만 리나 떨어진 동방에까지 보내주셨는데 처음 즉위하신 때부터 융숭하게 예우해 주셨으므로 온 나라가 목을 빼고 축하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복(內服)과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어 8일 동안 파발로 달려 전해주게 하신 일을 다행히도 직접 보게 되다니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이만큼 성대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삼가 태평시대를 구가할 좋은 운세를 만나 하늘과 같은 지극한 도를 체득하신 결과, 그 대덕(大德)은 기자(箕子)의 구주(九疇)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수렴하시어 복록과 수명을 얻으셨고, 천하는 우공(禹貢)에 구주(九州)의 물산이 집결한 예처럼 이미 다스려지고 편안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외딴 곳에 치우쳐 있는 소방에게도 함께 경축하도록 큰 은혜를 내려주셨으니 어찌 감히 명심하며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경하하지 않겠습니까. 때맞추어 대궐 뜰에 가서 만세 부르는 반열에 참여하도록 삼가 사신을 보내는 한편 만수 무강을 축원하는 시를 바치면서 황상이 계신 곳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유시를 반포한 데 대해 사은한 주본(奏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황은(皇恩)에 감사드리며 미천한 정성을 진달드리는 일로 아룁니다.
건륭(乾隆) 60년 11월 19일 신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그것은 내각(內閣)에서 이달 초6일에 상유(上諭) 한 통을 받았기에 이를 삼가 인쇄하여 신에게 알려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황상께서는 성스럽고 신령스럽고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을 갖추신 것이 그 어느 임금들보다도 높이 뛰어나시어 복록과 지위와 수명과 명예에다 오복(五福)을 겸하여 받으셨습니다. 춘추는 어느덧 1백 세를 바라보게 되셨고 태평시대를 구가하게 한 정치는 어언 즉위하신 지 60돌을 맞게 되었으며, 계속 후손이 번창하는 경사가 줄을 이어 5대(代)가 한 집안에서 살게 되었고 인자하신 명성이 흘러 넘치는 가운데 온 세상이 화락한 시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다 밖의 창생(蒼生)은 물론이요 만방(萬邦)의 백성들이 오로지 황제의 덕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해의 좋은 달 좋은 날에 황태자에게 대보(大寶)를 계승하도록 명하시어 아침 저녁의 수고를 분담케 함으로써 크나큰 계책을 태산 반석처럼 공고하게 하시면서 윤음(綸音)을 먼저 반포하시어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황상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부터 일찍이 좋은 운세를 기원하며 하늘에 묵도(默禱)를 올렸던 일입니다. 그리하여 만기(萬機)를 처리하시는 가운데 깊이 생각하시고 60년 동안 지극한 도를 성취시키면서 성인이 전해 주고 성인이 전해 받은 빛나는 일이 있게 하신 것인데, 이는 헌기(軒紀)와 곡사(嚳禩)를 기약대로 하고 법도대로 한 것이니 그야말로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하늘의 뜻을 위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과거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어느 명철(明哲)한 임금이 훌륭하게 정치를 했다 하더라도 모두 이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고, 오직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전해주고 전해 받은 일만이 오늘날의 아름다움과 짝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가령 춘추가 높아질수록 덕이 더욱 밝게 빛나 정치가 날로 새로워지고 도가 날로 융성해진 일로 말하면, 70년 만에 수고하기에는 피곤해졌던 순임금의 시대와는 또 다른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의 일이야말로 대개 천 년이나 만 년에 한 번 있을 일로서 백성들이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동쪽 변방에 외따로 처해 있으면서 우리 황상의 보살펴 주시는 덕을 너무도 많이 받아왔습니다. 예우해 주시는 것이 특별하여 다방면으로 돌보아 주시면서 내복(內服)과 동일하게 여겨 주셨고, 반사(頒賜)하는 총애 뿐만 아니라 복록까지 내려주시면서 먼 나라를 부드럽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방물(方物)을 견감(蠲減)해 주는 수고를 번거롭게 하셨습니다. 융숭하기만 한 그 은택으로 말하면 고금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서 떠받들고 찬송하며 가슴속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이에 화봉인(華封人)이 올렸던 세 가지 축원의 말씀과 천보장(天保章)에 나오는 아홉 가지 무궁한 물건을 가지고 만수 무강을 기원하오니 천 년 만 년 오래오래 사시옵소서.
지금 역사상 처음 보는 바 온 세상이 환희에 들뜬 날을 당하여 8일 동안 파발마로 멀리 달려가서 십행(十行)의 조유(詔諭)를 특별히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외따로 떨어진 소방으로 하여금 역시 경사스러운 의식을 참여해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으니, 한없는 황은을 내려 용안의 빛을 아래로 비춰 주심에 산이 빛을 뿜고 바다가 일렁이면서 만리 길도 지척처럼 여겨지기만 합니다. 이에 신이 온 나라의 신민들과 함께 북쪽에 계신 황상을 우러러보며 두 손 모아 경건히 절을 백 번 올리노라니 새해 아침의 성대한 예식에 직접 참여해 보는 것만 같습니다.
명하신 날짜에 맞춰 축하 사절을 보내서 삼가 폐백을 올리는 모임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만세 부르고 싶은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려고 합니다. 그런데 경사가 있으면 축하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번방(藩邦)의 정상적인 직분이요 윗분을 섬기는 떳떳한 정이라 할 것입니다. 신이 너무도 기뻐 춤추고 싶은 나머지 감격하며 우러러보는 정성이 갑절이나 더 절실해지는데 몸은 비록 멀리 있어 축하하는 반열에 참여할 수 없어도 마음만은 길이 황상께서 계신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큰 경사가 점점 가까워오면서 절실한 심정이 더욱 격해지기에 토산품 몇 종류를 갖추어 따로 주본(奏本)을 마련한 뒤 사은하는 뜻을 덧붙여 펼치려고 합니다. 으레 바치는 공물(貢物)과 다른 일이라서 참람된 행동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구구하게나마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바치는 것이니 천일(天日)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신은 그지없이 떨리며 황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습니다만 우러러 황은에 감사드리는 기회에 삼가 변변찮은 정성에 대한 일을 진달드리며 위와 같이 사유를 갖춰 주문(奏文)을 올립니다. 이상 삼가 주문을 올리면서 엎드려 성지(聖旨)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11월 24일 신미
금천(金川) 고을 관아를 옛터로 옮겼다.
금천 고을을 옮긴 지 수십 년 동안에 백성들이 수토(水土)로 고생을 하자 도신(道臣)이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옛터로 다시 옮겨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변사가 복주(覆奏)하여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해줄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백성을 병들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늦출 수 없는 일로써 이런 경우는 백성에게 일을 시켜도 꼭 백성들을 동요시킨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신 행차가 한창 줄을 잇게 되고 섣달의 매서운 추위도 곧 있게 될 것이니, 고을을 옮기는 일을 늦게 하든 조속히 하든 일체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하라고 특별히 도백(道伯)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첨지 양주익(梁周翊)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하늘로부터 책임을 부여받고 스스로 마음 속에 다짐하고 있는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정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교화는 뜻대로 펼쳐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순음(純陰)이 작동하는 10월에 밤새도록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쩍번쩍 번개가 치다가 날이 밝아서야 그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우레라는 것은 상제(上帝)의 호령이요 정치라는 것은 전하의 호령입니다. 정치의 호령이 잘못되면 우레의 호령이 곧바로 응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늘과 사람이 서로 어울리는 하나의 이치라 할 것입니다.
옛날에 소옹(邵雍)350) 은 말하기를 ‘우레는 일어날 곳에서 일어나고 그칠 곳에서 그친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 일어날 곳이란 바로 전하의 마음이요 그칠 곳도 전하의 마음이라고 여겨집니다. 전하께서 간이(簡易)한 태극(太極)을 몸받고 탕평(蕩平)한 황극(皇極)을 세우신다면, 천지(天地)가 스스로 자리를 정하고 만물이 자연 신실해질 것이니, 겨울 우레를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 하늘이 성인(聖人)을 내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어서 태평시대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이미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때에 한 번 좋은 정치를 열어놓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어느 세월에 이 동방에 그 누구가 이 일극(一極)의 정치를 펼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일극(一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늘의 태극(太極)과 임금의 황극(皇極)이라고 여겨집니다. 수천 리 둘러싸인 우리 동토(東土)에서 만물(萬物)과 만사(萬事)를 그 누가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전하만이 그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현재 국가의 대계로 보나 백성의 걱정거리로 보나 하나로 통일해야 할 것이 열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빈부(貧富)를 균등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농(兵農)을 합일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양천(良賤)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넷째는 문무(文武)를 동일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과천(科薦)351) 을 귀일시키는 것이고, 여섯째는 중외(中外)를 하나로 대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원근(遠近)을 똑같이 여겨주는 것이고, 여덟째는 부역(賦役)을 균일하게 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붕당(朋黨)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고, 열 번째는 기강(紀綱)을 한결같이 하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예악(禮樂)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성경(誠敬)으로 귀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요체는 먼저 태극(太極)으로 바로잡은 뒤에 황극(皇極)을 세우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황극이 무편무당(無偏無黨)하여 탕평(蕩平)한 일극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 태극이 무사무려(無思無慮)하여 간이(簡易)하기만 한 일극이라는 것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황극이라는 것은 전하의 몸에 있는 것이고 태극이라는 것은 전하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 마음을 우선하고 몸을 뒤로 해야 하는 것처럼 태극을 먼저 하고 황극을 뒤로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12조(條)에 대한 내용은 따로 책자를 마련하였으니 조금이나마 굽어 살펴주소서.
이번에 우리 전하께서는 《주역(周易)》 열 다섯 가지 괘(卦)에 나오는 우레의 상(象)을 가지고 몸을 돌이켜 성찰하는 요체로 삼으셨으니 누구보다도 전하께서 먼저 터득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열 다섯 가지 괘를 추연(推演)한 것 모두가 우레(雨雷)로 경륜(經綸)하고 천뢰(天雷)로 길러주는 뜻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정성스럽게 하늘을 두려워하며 재이(災異)를 해소시킬 방책이 이미 우리 전하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삼가 외경(畏敬)하는 마음으로 위태롭게 여기면서 여러 가지 괘의 뜻을 체득하여 실질적인 내용으로 하늘에 응답한다면 천둥과 번개가 온화하게 변화하여 경운(慶雲)과 화풍(和風)이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한 바 요(堯)·순(舜)의 시대처럼 확연(廓然)한 청명 세계(淸明世界)라고 하는 것도 단지 일극(一極)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일 뿐인데, 예로부터 일극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 임금에게 말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기자(箕子)가 처음으로 황극을 세워 무왕(武王)을 가르쳤기 때문에 간혹 황극을 세워 정치를 잘 하도록 임금을 권면한 자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태극이라는 두 글자가 공자(孔子)로부터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천지를 생성하고 간이(簡易)한 덕을 갖춘 것으로서 위대한 사업을 이룩하며 천하의 이치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고 보면 성인이 해야 할 일이 여기에서 끝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태극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큰 방편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해 본 인신(人臣)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성스럽고 신령스러우며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을 갖추신 가운데 하나의 태극을 우뚝 마음속에 수립하고 계시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런 말씀을 진달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일극(一極)의 정치를 하시라고 줄기차게 전하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무서운 속도로 합치되고 삽시간에 반응이 올 것이니 천지를 경륜하고 만물을 교화시키는 가운데 우리의 대동(大東) 지역을 이 일극의 범위 안에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멀리 떨어져 소외된 몸으로 나이가 70이나 되었는데도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상소를 올리며 이 12개 조목의 경륜을 진달하였는데, 말한 것 가운데 쓸 만한 내용이 많을 뿐더러 정성이 또한 가상하다.
첫째, 빈부(貧富)를 균등하게 하자는 것으로 말하건대, 한전(限田)과 명전(名田)의 내용이 물론 좋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토지 사정을 보면 옛날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던 그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장횡거(張橫渠)의 주장이 단지 종이로만 전해져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늘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직전제(職田制)를 사서(士庶)에까지 확대 적용한다면 삼대(三代)352) 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곤 한다.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적임자를 임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중조(中朝)의 탄식만 자아내고 있을 따름이다. 말하고 싶었어도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그대가 제대로 이야기해 주었으니, 인재란 서울에 살든 지방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을 더욱 깨닫겠다. 그러나 백성을 동요시키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 아래에서 거론한 바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을 견감(蠲減)하도록 청한 한 가지 일로 말하면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있던 일인데 그대가 또 말해 주었다. 그대는 식견이 있고 글을 읽은 선비임이 분명하니 한 번 불러서 물어보고 싶다.
둘째, 병농(兵農)을 합일시키자고 청한 조목으로 말하면,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는가. 매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밤에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근일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 것으로 말하면, 먼저 한 쪽부터 해보라는 자양(紫陽)353) 의 말을 내 나름대로 행해 보려 한 것인데,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경솔하게 말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먼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서 단지 옛날에 군영을 설치한 데 따른 폐단만 알고 있기 때문에 대략 그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양천(良賤)을 동일하게 대우하자고 청한 것으로 말하면, 한 번 크게 바로잡으려고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연전에 만언(萬言)의 유시(諭示)를 내렸던 것이야말로 군병에게 호령을 내린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니 응당 규정으로 확정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대가 혹 노인이라서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넷째, 문무(文武)를 동일시 하자고 청하였는데,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3백 60개 고을의 수령을 교대해서 차임하고 돌려가면서 제수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백성의 입장에서나 국가의 입장에서나 다 편해지고 공사(公私) 간에도 편해질 것인데, 그대가 또 제대로 말해 주었다. 이 말은 정말 옳다고 하겠다.
다섯째, 과천(科薦)을 귀일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어떤 좋은 법이 있다한들 사유(師儒) 한 사람을 얻는 데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거 제도를 통해 사람을 임용하고 있는 실정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인재가 예전과 같지 않아 폐를 끼치는 일만 더욱 고질화되고 있다. 처음 즉위하여 윤음(綸音)을 내리면서 주관(周官)354) 에 나오는 향거(鄕擧)355) 제도의 유의(遺義)를 모방해 보려고 하였다마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오활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 입장에서 말하라면 ‘쓸데없는 이야기는 다 집어치우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경전을 외우고 익히게 해서 의리와 윤강(倫綱)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밖에 이러쿵 저러쿵 제도를 만들고 법문을 제정한다 한들 이는 모두 지엽말단적인 것이라 할 것이니, 족히 말할 게 뭐가 있겠는가.
여섯째, 중외(中外)를 하나로 대하자고 청하였는데, 중궁과 조정이 하나인 만큼 원래 거기에 부응하는 하나의 규모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만 여기에서 폐단이 생겨나고 있으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겠는가. 덧붙여 진달한 상참(常參)과 윤대(輪對)의 규식(規式)이 물론 좋은 말이긴 하다. 그러나 실제로 있는 규정에 따라서 실제 효과가 나도록 힘쓴다면 조사(朝士)의 현부(賢否)나 생민(生民)의 이해(利害) 같은 것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을텐데, 어찌 꼭 매월 초하루에 모임을 가져야 하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일곱째, 원근(遠近)을 똑같이 여겨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 못내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신(遠臣)이니 근신(近臣)이니 하는 칭호로 말하면,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노(魯)나라나 제(齊)나라와 같은 경우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와 같은 경우는 방역(邦域)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한 집안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원근을 어떻게 따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2백여 년에 걸쳐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한 사람들을 보면 점차 향외(鄕外)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심지어 근일에 와서는 성밖에 사는 사람들마저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단속하며 신칙했건만 내 뜻을 제대로 받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덟째, 부역(賦役)을 균일하게 하자고 청한 조목으로 말하면 섣불리 이야기할 성격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삼(蔘)과 관계된 폐단에 대해서는 먼저 유사(有司)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아홉째, 붕당을 하나로 통일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이른바 ‘일이 성사되면 같이 즐길 수 있지만 처음부터 함께 도모할 수는 없다.’고 하는 일이라 하겠다. 처음에야 서로 용납하지 않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열 번째, 기강을 한결같이 하자고 청하였는데, 우선 사치 풍조부터 없애 의장(衣章)이 문란하게 되지 않도록 하고 상하 모두 참람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시폐(時弊)를 바로잡는 현재의 긴요하고도 급한 일이라 하겠다. 나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밤낮으로 유의하고 있는데, 그대가 말한 몇 가지 일로 말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 듯하다.
열한 번째, 예악(禮樂)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예란 시대에 맞게 써야 하는 것으로써 사람의 정리(情理)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인(聖人)은 인정(人情)의 밭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니, 쇠북이나 옥방울이나 한 치 되는 방패나 한 자 되는 피리에만 얽매일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열두 번째, 성경(誠敬)으로 귀일시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소이연은 오직 이 두 글자 때문이다. 내가 거두어 쓰고 있는 것도 오직 이 점에 있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전 첨지 양주익의 소를 보니 말한 것 모두가 가상하다. 더구나 그는 충신(忠臣)의 후예인데다 문양(文襄)356) 의 방손(傍孫)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외방에 있는 병조 참의를 예조 참의로 옮겨 제수하고 그를 그 자리에 대신 임명한 뒤 패초(牌招)하여 입직(入直)케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조종현(趙宗鉉)의 이 장계를 보건대, 후주(厚州)의 산천과 도리(道里)의 원근 등 형세를 빠짐없이 설명하고, 이어 ‘상패평(祥覇坪)은 지역이 광활하니 먼저 진(鎭)을 하나 설치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하다. 삼수부(三水府)를 후주(厚州)로 옮겨 하나의 방어영(防禦營)을 만들고 묘파(廟坡)와 신방(神方)의 강구(江口)에 자작(自作)한 보루 등은 우선 혁파하는 것이 좋겠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신이 논한 대로 상패평에 먼저 진(鎭) 하나를 설치하되, 규모와 제도는 대략 연변(沿邊) 제진(諸鎭)의 예를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밖에 삼수부의 고을을 혁파하고 진을 설치하는 일, 묘파와 신방 등의 보루를 혁파하는 일, 후주의 강 서쪽 강계(江界) 지역을 상패평에 옮겨 소속시키는 일 등은 진을 설치한 뒤에 사세를 자세히 살피고 헤아려서 거행하라고 분부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라. 그런데 새로 진을 설치한 지역에는 적임자인 첨사(僉使)를 얻어야만 자기 의견을 내어 운영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니, 변방의 풍속을 잘 알고 풍토(風土)에 익숙한 자를 차임해 보내야만 할 것이다. 회령부(會寧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이건수(李健秀)의 죄를 감하여 후주 땅 어면(魚面)을 관장하는 파수장(把守將)으로 옮겨 정하되,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예를 적용하여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서 속죄하도록 하고, 그가 편부(便否)를 써서 본사(本司)에 보고한 다음에 다시 품처토록 하라.
또 일전에 관서(關西)의 사군(四郡) 지방에 경계를 정하고 진(鎭)을 설치할 일로 관문(關文)을 보내 문의한 자가 있었다. 위원군(渭原郡)에 정배한 죄인 이여절(李汝節)을 강계(江界) 마마해(馬馬海) 지역의 토병(土兵)으로 충정(充定)시키라고 해도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11월 25일 임신
무과(武科) 장원(壯元)의 회방(回榜)357) 을 맞은 정헌 대부(正憲大夫) 박춘우(朴春遇)에게 한 등급을 가자(加資)하고 연회 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7일 갑술
여러 승지들 및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을 불러서 만나 보았다. 득신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을 모두 내금위(內禁衛)에 소속시키는 것이 원래 조종조(祖宗朝)의 성헌(成憲)인만큼, 옛날의 제도를 준수한다면 실로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고(故) 중신(重臣) 박문수(朴文秀)의 말에 따라 선전관이나 무겸 부장(武兼部將)·무겸 수문장(武兼守門將)을 막론하고 참하(參下) 무신들은 모두 내금위의 원액(原額)에 소속시킨 뒤 그 녹봉을 타 먹으며 무예를 익히도록 해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한다면 옛날의 제도를 다시 밝혀 쓰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실로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금군 별장(禁軍別將) 유효원(柳孝源)에게 문의하였다. 효원이 답변드리기를,
"일단 금군의 경력을 쌓게 한 뒤에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하라고 효묘조(孝廟朝) 때 분부를 받았었으니, 지금 만약 옛날의 제도를 다시 밝혀 시행한다면 과연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선전관과 무겸 부장·무겸 수문장 59인을 모두 내금위에 소속시켜 원액 안에서 녹봉을 받게 하는 동시에 초사케 한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원액 외의 장용위(壯勇衛)도 금군과 비교해 볼 때 아무 차이가 없으니, 초사(初仕)에 제수된 뒤에도 역시 내금위의 예에 따라 그대로 장용위를 겸하게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데, 다만 몇 명이 초사에 제수될지는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득신이 아뢰기를,
"원액(原額) 외의 장용위라 하더라도 일단 명을 전달하는 차비(差備)의 중임(重任)을 맡고 있는 이상 급료를 주지 않는 조목에 부쳐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녹과(祿科)에 마침 여유가 있으니 훈련 주부(訓鍊主簿)나 무겸(武兼)의 자리를 몇 개 더 설치해서 응어리를 풀어주는 방도로 삼는 것이 온당할 듯 싶습니다. 다만 이 일이 관제(官制)를 변통시키는 것과 관련되니, 대신과 장신(將臣)에게 문의하여 처리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였다.
"일전에 병조 참의 양주익(梁周翊)이 상소를 한 일과 관련하여 조목별로 비답을 내려줌으로써 인가한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일단 말하도록 요구해 놓고서 말을 했는데도 채용해 주지 않는다면 말하도록 요구한 뜻이 어디에 있다 하겠는가. 그 가운데 공물(貢物)로 바치는 삼(蔘)이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일과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을 받을 때 됫수[升數]를 감해 주도록 청한 일과 원근(遠近)의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일과 수령을 엇바꾸어 차임해야 한다는 일 등은 참으로 헤아려 볼 점이 있다.
초야에 구해 보면 관인(官人)을 얻을 수가 있는데 어찌 방소(方所)를 두어 지역에 국한시키고 때에 얽매이게 해서야 되겠는가. 궁벽한 곳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는 스스로 청운(靑雲)의 뜻을 펴볼 길이 없는 가운데 조정에서 등용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도성 안의 화려하고 성대한 벌족(閥族) 서너 집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다. 간곡하게 부르며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한 경우가 언제 한강 밖 10리 되는 지점의 사람에게 미친 적이 있기라도 했었던가. 그러고 보면 옛날과 지금 시대를 통틀어 지금처럼 규모가 협착했던 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낚싯배보다도 좁고 연뿌리 구멍보다도 좁으니 정말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심지어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출신을 목사(牧使)나 수령으로 구별해서 파견한 뒤에는 그 기한 동안 그 자리에 꼼짝 못하게 못박아두고 있으니, 비록 산도(山濤)358) 에게 전형(銓衡)하는 권한을 맡긴다 하더라도 감히 이를 어기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런 것을 과연 이전 삼모(二典三謨)359) 에 입각한 규칙이라 하겠는가.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수령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있기에 내가 늘 깨뜨려 부수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멀리서 상소를 올린 사람의 말을 일단 거두어 쓰려고 한다면 먼저 사적(仕籍)에 오른 자부터 시작해서 차차 나머지 사람들에게 미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양전(兩銓)360) 의 신하로 하여금 도와 읍의 인사들을 분류해서 모아 들이게 하되, 성명(聲名)이나 지처(地處)나 구차(久次)361) 를 참작해서 하나하나 거두어 쓰고 달수를 계산하거나 햇수를 계산할 때 여유있게 하여 감히 서울의 화려한 벌족 출신들보다 혹시라도 뒤처지는 일이 없게 할 것이며, 정망(政望)362) 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주(註)를 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초야에 묻혀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각 해당 지방관이 명심하고 찾아내어 도백에게 천거하고, 도백은 천거된 사람들을 더 자세히 살핀 다음 뛰어난 자를 뽑아내어 보고하게 하되, 으레 책임이나 때우듯 하지 말도록 할 것이다. 도백이 만약 성심껏 나의 뜻에 응답하여 선양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니 묘당에서는 이를 제도(諸道)에 두루 신칙하도록 하라.
그런데 수령들을 융통성있게 엇바꾸어 차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막혀서 서로 방해가 되는 경우에 속하는 자를 제외한다면 어떻게 경장(更將)해야 좋을지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전조(銓曹)의 신하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삼(蔘)의 폐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자미(紫微)와 가음(檟蔭)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상고해 보면 오직 우리 동방만 그러하다고 한다. 그런데 뿌리가 산에서 경작하다 손상을 입으면 집에서 심은 것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고 북쪽으로 실어가는 밀수 행위가 이루어지는데다 남쪽에 선물로 줄 것도 계속 대기가 어려운 탓으로 값이 날로 치솟으면서 폐단이 날로 급증하고 있다. 심지어는 당당하게 어약(御藥)으로 쓰는 것에도 삼생(蔘生)이니 삼교(蔘校)니 삼호(蔘戶)니 하는 칭호까지 있게 되었으니 외설스러운 것은 물론이요 정말 형편없기 그지없다. 그러나 서울에서 공납(貢納)하게 하기도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보면, 그 폐단을 또한 어떻게 바로잡아야 한단 말인가.
미곡 1석(石) 당 모곡(耗穀) 2승(升)을 받는 제도가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뒤에 계속 시행해 오면서 점차 늘어나 무려 2두(斗)까지 되었다. 그런데 아조(我朝)의 경우는 1두 반을 받고 있으니 절충한 것인 듯도 하다마는, 옛날부터 모곡을 감해 주어야 한다느니 지급해야 한다느니 의논들이 분분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조가(朝家)에서 늘 바로잡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데도 아직 그 요결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달포 전에 환곡의 폐단 중 부서(簿書)를 통합하는 한 조목과 관련하여 대신에게 문의하였는데 아직도 복주(覆奏)를 올려 품하지 않고 있다. 지금 자문을 구하는 공삼(貢蔘) 문제 및 환곡의 모곡 문제까지 포함해서 널리 중론을 채집한 뒤 따르건 따르지 않건 가부를 결정해서 즉각 아뢰어 품하라고 묘당에 이르라."
11월 28일 을해
북경의 예부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각(內閣)에서 받은 상유(上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태자가 왕과 대신 등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삼가 건륭(乾隆) 61년의 시헌서(時憲書)를 올리오니 내정(內庭)에 미리 비치해 두시고 반상용(頒賞用)으로 쓰소서.」 하였는데, 그 주본(奏本)을 보고 간절한 정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짐이 처음 등극했을 때 바로 하늘에 간절히 기원하였는데, 그것은 즉 재위(在位) 60년이 되면 감히 황조(皇祖)와 위로 대등하게 처하면서 계속 햇수를 늘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례(定例)에 따라 10월에 내년도 시헌서를 반포할 때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려 분명히 하였는데, 그것은 즉 황태자를 세운다는 것과 내년 병진년을 가경(嘉慶) 원년(元年)으로 하고 정사를 물려주는 전례(典禮)를 거행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짐이 삼가 천명을 받고 선조의 발자취를 경건히 계승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십 년을 하루같이 지내오면서 누차 유지를 내려 분명히 보여 준 나의 뜻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황태자 및 왕·대신 등이 아뢰기를 「정사를 물려주시고 연호를 고치게 하신 것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한 전례입니다. 따라서 현재 반포하는 시헌서는 가경의 연호를 적용한다 할지라도 궁정 안에서까지 만약 똑같이 이 시헌서를 쓰게 된다면 실로 미안한 생각이 들기에 특별히 건륭 61년의 시헌서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곡진한 말로 호소하였는데 이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짐이 일단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정(內庭)의 반상용(頒賞用)으로 비치해 두게 함으로써 황자·황손 및 증원배(曾元輩)들과 친근한 왕·대신 등의 간절한 정성이 이루어지게끔 하였다. 그리고 각 직성(職省)과 외번(外藩)에 나누어 주는 것은 그대로 가경 원년의 시헌서를 씀으로써 정제(定制)에 부합되게 하는 한편, 내년에 정사를 물려주고 짐은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다.
‘옛날의 전례(典禮)를 두루 상고해 보건대, 존호(尊號)를 올리는 글들 모두가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상 황제의 경우는, 태황태후(太皇太后)에게 모의(母儀)와 관련하여 높이 휘호(徽號)를 올리는 것과는 비교할 성격의 것이 못된다. 더구나 짐이 즉위한 지 60년 동안 하늘을 공경히 받들고 조종(祖宗)을 본받으면서 정치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강토를 개척해 넓힌 것들을 여러 정사를 통해 분명히 상고해 알 수가 있는데, 또 하필 성신문무(聖神文武) 등의 문자를 빌려다가 헛되이 존숭하는 뜻을 보여야 하겠는가.
‘그리고 신자(臣子)의 입장에서 군부(君父)를 치켜올리는 따위는 본래 후대 세상에서 헛된 형식을 답습해 온 것으로써 이치에 비추어 볼 때에도 원래 타당하지가 못하다. 우리 성조(聖祖) 인황(仁皇)께서 세 곳의 변방을 평정하셨을 때와 경사스러운 명절을 맞으셨을 때 계속 신공(臣工)들이 존호를 올리겠다고 누차 청했으나 성조께서는 모두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그 당시의 빛나는 훈유(訓諭)야말로 만세(萬世)의 법도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 짐이 미리부터 특별히 분부를 내려 존호를 올리는 한 가지 일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바로 짐이 황조(皇祖)의 마음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짐이 즉위한 초년에 마음을 재계하고 묵도를 올리면서 감히 위로 황조의 기년(紀年)과 그 숫자를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마음먹었던 그 당초의 정신에서 발로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앞으로 사황제(嗣皇帝)와 신하들은 모두 짐이 분부한 것을 깍듯이 준수하며 번거롭게 꼭 청하지 말 것이다.
‘짐이 하늘에 경건히 기원한 결과 정신도 온전하고 육체도 강건하며 좋은 운세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사황제가 나의 지시를 잘 받들어 부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여 온누리가 화기에 넘치고 태평 시대를 이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국가에 있어 상서롭고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더구나 태상 황제라는 칭호로 말하면 이보다 더 높은 표현이 있을 수 없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사황제가 직접 신민을 거느리고서 천하를 가지고 짐을 봉양할 것이니 이는 더더욱 고금(古今)에 빛날 기막힌 경사라 할 것이다. 그러니 또 하필 번거로운 형식을 숭상하면서 더 아름답게 하려고 공연히 힘써야 하겠는가. 짐이 정사를 물려준 뒤에는 응당 희자(喜字) 제 1호 옥보(玉寶)로 태상 황제지보(太上皇帝之寶)를 새길 것이요, 옥책(玉冊)은 어제(御製)한 십전노인지보설(十全老人之寶說)을 가져다 새겨 태상 황제 보책(太上皇帝寶冊)을 만듦으로써 빛나는 조정의 성대한 상서로 삼게 할 것이다.
‘앞으로 사황제도 짐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은 것처럼 장수를 누리며 다시 정사를 물려주는 의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되거든 일체의 전례(典禮)를 모두 이에 따라 삼가 준행하도록 하라. 그러면 정말 우리 국가에 있어 억만 년토록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 이 내용을 중외(中外)에 통유(通諭)하여 알리도록 하라.’"
윤득부(尹得孚)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사당에 치제(致祭)하였다.
동지사(冬至使) 민종현(閔鍾顯) 등이 천수연(千叟宴)의 거행과 관련한 상유(上諭)를 가지고 치계(馳啓)하였다.
"신 등 일행은 14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13일에 숙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시헌서(時憲書)와 관련된 재자관(齎咨官) 변복규(卞復圭)가 북경(北京)에서 떠나 보낸 선래 통사(先來通事)가 상유(上諭)의 인본(印本)과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고나서 올려 보냅니다. 황태자를 책봉한 것과 가경(嘉慶)으로 연호(年號)를 바꾼 것은 모두가 전에 없는 큰 경사인데, 이미 예조에서 자문을 보낸 이상 각각 방물(方物)을 갖추어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올리는 사신 행차를 금년 안에 떠나 보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내년 정월 초 무렵에 영수궁(寧壽宮)에서 천수연을 거행토록 한 황제의 유지(諭旨)도 동봉(同封)해서 올려 보냅니다. 상유(上諭)에 따라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가 조목별로 관련 사항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17일에 직접 유지를 받들었는데 「내년 정월 초 무렵에 영수궁 황극전(皇極殿)에서 천수연을 거행할 것이니, 속히 각 해당 독무(督撫)에게 행문(行文)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나이가 70세 이상인 관원·신사(紳士)·기서(耆庶)들을 대상으로 50년의 예(例)를 참고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하되, 원하지 않는 자들은 소원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하셨다.
‘현재 기일이 박두한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성(省)의 지방에서는 기일을 따져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겠거든 꼭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 70세가 넘은 관원과 신사와 기서 중에서 만약 서울에 오고 싶다고 희망하는 자가 있거든 심사하여 공문을 보내도록 하고, 몸이 허약한 사람으로 숫자를 채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거리와 일정을 따진 뒤 관인(官印)을 봉함하고 직무를 위임하고나서 후년에 서울에 온다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주현(州縣)과 향리(鄕里)의 이름과 숫자를 본처(本處)에 자문으로 회답하여 황상께서 물어보실 때 답변을 올릴 수 있도록 하라. 다만 기일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만큼 거리가 먼 지방에서 때에 맞춰 도착하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즉시 지시한 대로 시행하고 꼭 보내지는 말아 노인들이 번거롭게 험한 길을 오고 가는 수고를 덜어주도록 하라. 그리고 이 통지를 받고나서는 그들의 사연 및 참석 여부를 결정한 뒤 제때에 도착시킬 수 있는 곳에서는 본처에 회답 자문을 보내도록 하고 괜히 번잡스럽게 아룀으로써 황상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헌서(時憲書)의 일과 관련된 재자관(齎咨官) 변복규(卞復圭)가 연경(燕京)의 사정을 탐지하여 비국에 보고하였다.
"9월 3일에 황제가 문에 거둥하여 황자(皇子)·황손(皇孫)·왕공(王公)·대신(大臣) 등을 불러 계사년에 정해 두었던 비밀 봉함을 뜯고 공동으로 보게 한 뒤 열다섯째 황자인 가친왕(嘉親王)을 황태자로 삼는 한편 내년 병진년을 사황제(嗣皇帝)의 가경(嘉慶) 원년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10월 초하루에 시헌서를 반포하면서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고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였는데, 상유(上諭)의 인본(印本) 한 통을 구입하여 동봉(同封)해서 올려 보냅니다. 이 날 황태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굳이 사양하였고, 다음날 아침에 또 황태자·황자·왕공 대신 등이 상소를 올려 연호를 바꾸는 일과 정사를 물려주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간곡하게 청하였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또 청하기를 ‘건륭(乾隆) 61년의 시헌서를 올리오니 이를 내정(內庭)에 비치해두고 반상용(頒賞用)으로 쓰심으로써 애틋한 신들의 정성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시고, 각성(各省)과 외번(外藩)에는 그대로 가경 원년의 시헌서를 반포하도록 하시라.’고 하였는데, 이 요청에 대해서는 황제가 특별히 윤허하였습니다.
또 분부를 내려 효유하기를 ‘9월에 황태자의 책봉 의식을 거행하고 나서 바로 동릉(東陵)과 서릉(西陵)을 참배하겠다.’고 하였는데, 동릉은 순치(順治)363) 와 강희(康熙)364) 의 능으로 계주(薊州)에 있고 서릉은 옹정(雍正)365) 의 능으로 이주(易州)에 있습니다. 내년에 등극한 뒤에는 또 태상 황제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가서 선릉(先陵)을 참배한다고 하였습니다.
황태자는 올해로 나이가 36세인데, 용모가 단정하고 자세가 진중하며 품성이 관후하기 때문에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기대해 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10월 6일이 황태자의 생일이었는데 왕공과 대신이 축하할 때 두 번 무릎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새로 정한 의절(儀節)인데, 감히 황제에게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는 것과 대등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황태자가 황제에게 청하기를 ‘유지를 내려 왕공·대신·독무(督撫) 등에게 통유(通諭)해서 병진년부터는 해마다 명절 때 바치는 세 번의 공물(貢物)을 바치지 말게 하시라.’고 하고, 또 시정(時政)에 반영할 21개 조목을 올려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황태자가 처음 정사에 임하면서 황제에게 청한 것인데 이런 내용이 한 번 내려지자 백성들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호남(湖南) 지방에서 묘족(苗族) 오랑캐가 굶주린 백성들을 유혹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이에 황제가 태학사(太學士) 복강안(福康安)과 사천 총독(四川摠督) 화림(和琳)으로 하여금 대군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몇 달에 걸쳐 전투를 벌인 결과 흑타뢰공탄(黑陀雷公灘) 등 3백 77채(寨)에서 연승(連勝)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9월 21일에 반역 괴수 오반생(吳半生)을 사로잡자 남은 패거리인 오롱등(吳隴登) 등이 풍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져 앞으로 소탕하는 것은 시간 문제로써 며칠 사이에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합니다. 이에 황제가 특별히 가상하게 여겨 상을 내리면서 복강안은 진(晋) 땅에 봉하여 패자(貝子)로 삼고, 화림은 일등 선용백(一等宣勇伯)을 삼았으며, 강안의 아들 덕린(德麟)은 은상(恩賞)을 가하여 부도통(副都統)의 직함을 주었습니다.
칙사(勅使)를 보내는 한 조목과 관련하여 예부(禮部)가 처음에는 두 차례 조서(詔書)를 반포하기로 정했었습니다. 즉 금년 11월에는 황태자의 생모(生母)를 효의 황후(孝儀皇后)로 추증(追贈)한 데 따른 조서를 반포하고 내년 정월에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登極)에 따른 조서를 반포하기로 정한 뒤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황제가 외국(外國)에 폐를 끼치게 될 일이라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1월 29일 병자
이조 참판 홍명호(洪明浩)를 체직시키고 황승원(黃昇源)을 대신 임명하였다.
승지 임제원(林濟遠)이 아뢰기를,
"신이 소를 잡지 못하게 하자고 소장을 올린 데 대해 상께서 비답을 내리시면서 금법(禁法)을 거듭 엄하게 밝히라고 분부하셨으므로 금법이 다시 시행되는 효과가 없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조(禁條)가 민간에서만 행해질 뿐 수령들 사이에는 간혹 함부로 소를 잡는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통렬히 더 금단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관상감이 아뢰었다.
"24절기 가운데 10월 입동(立冬)의 날짜를 청(淸)나라 책력(冊曆)에서는 7일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책력에서는 8일이라고 하였고, 9월의 토왕일(土王日)366) 을 청나라에서는 19일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20일이라고 하는 등 1일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망(望)의 시각(時刻)을 청나라에서는 밤 자시(子時) 초 초각(初刻) 12분(分)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밤 자시 초 초각 13분이라고 하였고, 12월 하현(下弦)의 시각을 청나라에서는 인시(寅時) 정3각(正三刻)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인시 정3각 1분이라고 하는 등 1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계절이나 24절기의 분각(分刻)의 경우는 북경(北京)과 원래 조금 빠르고 조금 늦는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현(弦)이나 망(望)의 시각이 무단히 서로 틀리는 것은 필시 추보(推步)367) 를 극진히 행하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역관(譯官)을 엄히 신칙하여 다시 조사한 다음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소서."
11월 30일 정축
관상감이 아뢰기를,
"현(弦)과 망(望)의 시각이 서로 틀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역관(曆官)들을 모아놓고 다시 더 세밀히 확인해 보았으나 끝내 착오가 생긴 이유를 조사해내지 못했으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시진(時辰)을 계산하는 법에 의하면 60초(秒)를 1분(分)으로 하는데, 추보(推步)할 즈음에 절후나 현·망 등의 경우에서 만약 30초(秒) 이상이 될 경우에는 60초에 다 차지 않더라도 1분으로 계산하는 것이 바로 본감(本監)에서 준용(遵用)하는 규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7월의 망(望)이 밤 자초(子初) 초각(初刻) 12분(分) 30초(秒)에 걸리고, 12월 하현(下弦)이 인정(寅正) 3각(三刻) 30초에 걸렸기에 관례에 따라 1분으로 계산해서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역법(曆法)은 모두 저쪽 나라의 것을 본뜨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서(皇書)와 비교해 볼 때 일단 서로 틀린 점이 있게 되었고 보면, 해당 역관에게 경책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감(本監)에서 중하게 처벌을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대저 제거(提擧)에 적임자를 얻어야만 감관(監官)이나 감생(監生)들이 추보(推步)할 때 조심스럽게 하는 법이다. 이 초기(草記)를 보면 비록 1분(分)의 차이가 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과 망의 시각을 차이나게 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상세하게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하고, 이어 서호수(徐浩修)를 특별히 관상감 제조에 제수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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