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3권, 정조 19년 1795년 12월

싸라리리 2025. 8. 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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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무인

경모궁(景慕宮)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12월 3일 경진

고(故)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에게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12월 4일 신사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5일 임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치제문(致祭文)을 친히 지은 뒤 통제사(統制使) 이득제(李得濟)에게 명하여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12월 6일 계미

강계(江界)의 효녀(孝女) 김 조이(金召史) 형제의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평안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치계(馳啓)하기를,
"방금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인수(李仁秀)의 첩정(牒呈)을 받아 보건대 ‘김씨의 딸 형제는 바로 평남진(平南鎭)의 백성 김막손(金莫孫)의 딸인데 장녀는 나이가 18세이고 차녀는 15세이다. 그 어미 이 조이(李召史)가, 행인이 얼음을 밟고 가다가 얼음이 깨져 익사하려는 광경을 보고는 급히 달려가 구원하려고 하던 도중에 얼음이 또 꺼져 물 속에 빠졌다. 이때 두 딸이 강 언덕에 함께 있었는데, 장녀가 얼음을 밟고 먼저 달려가 그 어미를 구원하려다 얼음장이 꺼지는 바람에 모녀가 함께 빠지고 말았다. 이에 차녀가 또 뛰어 들어가 왼손으로는 어미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언니를 잡고서 모두 살려 내려다 한꺼번에 모두 물 속에 잠겨 끝내는 운명을 같이 했다. 얼음을 깨고서 시체를 건져내고 보니 세 모녀가 손을 꼭 잡고 솥발처럼 앉아서 죽어 있었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보고하여 확실한 증거가 있을 뿐만이 아니고 다사(多士)가 올린 글을 보아도 한 마디 다른 말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김씨 딸 형제가 목숨을 버리고서 어미를 구하려 한 것만도 뛰어난 행동이라 할 것인데 두 딸이 어미를 부둥켜 안고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정상이 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이 특별한 행적을 묻히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김씨의 세 모녀와 관련된 일은 옛날 조아(曹娥)368)                  의 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특별히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집에 정문을 세워주고 ‘효녀지문(孝女之門)’이라고 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9일 병술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10일 정해

무과 급제 60돌을 맞은 이후검(李厚儉)에게 연회 비용을 지급하고 한 등급 올려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기언정(奇彦鼎)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2일 기축

전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을 한산군(韓山郡)에 정배(定配)하고 이조원(李祖源)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본도(本道)의 곡물을 내다 팔 때 예전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며 기록을 변조한 죄 때문이었다.

 

수찬 박길원(朴吉源)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최헌중(崔獻重)이 올린 상소를 얼른 외면만 보면 그 내용이 사학(邪學)을 배척하고 임금의 덕을 권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와 계획한 것을 세밀히 뜯어보면 온통 사당(私黨)을 비호하고 임금의 덕을 무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양의 학술로 말하면 천리(天理)를 파멸시키고 인륜(人倫)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보다도 못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지금 의관(衣冠)의 반열에 속한 사람 가운데 이른바 교주(敎主)라고 하는 자가 있고 이른바 거괴(巨魁)라고 하는 자가 있어 바람이 불면 풀이 한 쪽으로 쓸리듯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날수록 계속 그 무리를 번식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중에게 참으로 사학을 배척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당연히 먼저 가장 불량하여 덮어둘 수 없는 자를 논하면서 준엄한 내용으로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어야 하고, 이와 함께 정학(正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공효(功效)를 가지고 군상(君上)을 면려시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직접 해당되지도 않는 한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면서 끝내 한 사람도 지적하여 배척하지 않은 채 은연중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해치는 무리들을 일컬어 신기한 것을 애써 찾아 좋아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는 그들을 위해 막아서면서 미봉(彌縫)하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결국 그의 숨겨진 뜻을 살펴보면 암암리에 허물을 성상의 몸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저 ‘푯대가 곧아야만 그림자도 곧아진다.’고 하는 말을 이적(夷狄)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때에 내놓을 수 있습니까. ‘몸을 돌이켜 보고 마음속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을 금수처럼 사람을 집어삼키는 무리에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 중에 더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고 하였는데, 성상 역시 그 사학을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그가 말하기를 ‘도서실 서가에 기이한 책들이 쌓여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성상께서도 보신 일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가 근일에 올린 소를 가지고 논해 보건대, 해당되지도 않는 비유를 끌어다 쓰고 자기 과시를 하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오로지 자기 견해의 정당성만 입증하려 하여 공의(公議)와 각축을 벌이고 있을 뿐 마치 진정으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준 것이 있는 듯이 행세하며 자기 비판하는 뜻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사당(邪黨)을 옹호하고 성상의 덕을 무함하는 것이 명약관화하니 어떻게 이를 숨길 수 있겠습니까. 대저 우리 전하로 말하면 학문이 고명하시고 식견이 탁월하시어 공자(孔子)나 맹자(孟子)가 아니면 스승으로 삼지 않고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책이 아니면 읽지도 않으시는데 그만 이처럼 근거도 없는 조롱을 일개 헌중으로부터 당하셨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찌 가슴이 써늘해지고 간담이 떨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의필(李義弼)이 그를 논핵(論劾)한 것은 대개 그의 속마음을 간파한 데에서 발로된 것이지 각박하게 몰아세우려고 해서 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학을 옹호하고 성상을 무함한 자는 곧바로 총애를 받아 발탁되고, 의리에 입각하여 그 죄를 성토한 자는 거꾸로 유배당하는 처벌을 받았으니, 성명(聖明)의 세상에 그만 이처럼 상벌(賞罰)의 시행이 타당성을 잃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삼가 이를 개탄하는 바입니다. 헌중에게 우선 유배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의필의 상소 내용이 만일 유사(有司)의 법에 저촉되지만 않았다면 어찌 의필 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을 어렵게 여겼겠는가. 그러나 대궐문에 새 명령을 게시해 놓자마자 맨 먼저 범하고 나섰으니, 그를 유배보낸 조치야말로 기강을 세워보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일 뿐 꼭 최헌중의 입장을 위해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12월 13일 경인

형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도형 정배(徒刑定配)된 죄인의 경우 사면을 받으면 곧바로 석방시키도록 법전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혹 범죄 사실이 조금 중하여 섣불리 석방해선 안될 자에 대해서는 연한(年限)을 한정하지 않는 항목으로 옮겨 기록해 놓도록 한 것이 바로 근래에 만든 규정입니다.
그러나 도형 정배는 가벼운 죄에 속하는데 만약 사면령이 반포될 때에 거꾸로 연한을 한정하지 않는 항목에 놔둔다면 이는 그야말로 가벼운 죄에서 무거운 죄로 들여보내는 격으로서 율명(律名)을 낮췄다 높였다 하는 혐의가 있게 될 뿐만이 아니라 경사를 널리 베푸는 조정의 뜻에도 위배되는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앞으로 사면령을 내릴 때 도형 정배된 자들 가운데 범죄 사실이 조금 중한 자에 대해서는 본율(本律)을 그대로 적용하여 품(稟)하는 대상 속에 놔두게 하고 기한이 만료된 뒤에 다시 장계를 올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석방할 것인지의 여부를 아뢰는 계본(啓本)을 작성할 때 같이 포함시키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홍억(洪檍)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14일 신묘

공조 판서 홍억을 체차시키고 김상집(金尙集)을 대신 임명하였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12월 15일 임진

경모궁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상이 이 해는 다른 해와 다르다고 하여 비궁(閟宮)에 대한 시향(時享)·절제(節祭)·삭망제(朔望祭)·고유제(告由祭) 등을 모두 직접 행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하교하였다.
"올해와 같은 해를 만나 조금이라도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사모하는 마음을 펼 수 있는 길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것뿐이다. 새해 초부터 지금까지 궁(宮)에 갔던 날짜를 계산해 보니 51일이나 되는데, 건강에도 이상이 없는 가운데 정례(情禮)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 돌보아주신 덕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늘 생각나는 것은 바삐 뛰어다니며 나를 호종(扈從)하기 위해 무더위와 혹한을 견디면서 피곤하게 수고했던 사람들이다. 어찌 잠시라도 마음이 편안했겠는가. 무릇 대례(大禮)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어버이를 위하려는 뜻을 보이며 거조를 취하곤 했었는데 1년에 50일이나 임금이 행차했던 적이 옛날에 어찌 있기나 했겠는가. 일을 맡아 수고한 관원 중 그 날수가 많았던 사람에 대해서는 판하(判下)한 대로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라. 그 나머지 호위 구역 안에서 행차를 수행했던 무신과 무사들에 대해서는 내정(內庭)에서 시사(試射)하는 예(例)에 따라 시취(試取)할 것이니, 시사해야 할 사람들을 춘당대(春塘臺)에 대령시키도록 하고, 시방(試放)과 시예(試藝)는 3일 뒤에 남소영(南小營)에서 시취토록 하라."

 

12월 16일 계사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답답하게 막힌 것을 풀어 주려는 정사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서 금군(禁軍)으로 녹봉을 받는 자리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병비(兵批)에 떼어주는 동시에 6품(品) 이상의 자리를 훈련원(訓鍊院)과 총융청(摠戎廳) 등의 제사(諸司)에 더 설치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함만 갖고서 승륙(陞六)된 자들 및 몇 년 동안 산직(散職)에 있는 자들을 변통해서 처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으니 이는 성대하기 그지없는 거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녹봉을 받지 못한 채 적체되어 있는 무사들만 성은(聖恩)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문관과 음관 출신 조사(朝士)들 중에도 적체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비(吏批)를 통해 거두어 녹용(錄用)해야 할 자들 역시 무과 출신 숫자보다 밑돌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번 대정(大政)에서 각 분야별로 임기가 만료되어 관례에 따라 승륙시켜야 할 사람들을 헤아려 보건대, 문관·음관·무관을 통틀어 16, 17인인데, 관직에 배치할 자리가 태반이나 부족합니다. 지금 만약 병비(兵批) 소관인 6품의 녹봉을 받는 자리 10개 중에서 별도로 떼어내어 자리 4개를 신의 조(曹)에 부쳐주고, 한산한 관아 몇 곳에 각각 1, 2원(員)씩 관직을 더 설치해서 적체된 자들을 뽑아 녹용(錄用)할 여지를 삼게 하고, 나머지 여섯 자리는 또 병비에서 무신 당상 및 아직 통청(通淸)이 되지 않은 문신, 수 년 동안 파산(罷散)되어 소속된 곳이 없는 자들을 위해 각각 그 품계에 따라 녹봉을 받는 자리를 서반(西班)의 제사(諸司)에 더 설치함으로써 차례로 거두어 임용케 하는 등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넓혀준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도 일리가 있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마친 뒤에 경과 병판(兵判)이 상의해서 결정토록 하라. 그리하여 등대(登對)할 때 하나로 확정해 품처(稟處)함으로써 시행 과정에 폐단이 생길 여지가 없게끔 하라."
하였다.

 

좌의정 유언호(兪彦鎬)가 잇따라 장문(長文)의 사단(辭單)을 올렸는데 30번째 사단을 올리니, 하교하기를,
"내가 경에 대하여 어찌 혹시라도 물아(物我)의 구별을 두어 형식적으로 규례만 갖추면서 대우할 수 있겠는가. 경의 건강 상태로 보아 하루이틀 사이에 일을 보게 하기가 어려우니 집무를 하지 않으면 조섭하는 데 유익하고 공연히 얽매이게 하면 오히려 병에 해로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더욱이나 삼공(三公)은 물론이고 원임(原任) 정승들까지도 마침 모두들 병을 앓고 있고 나머지는 외방에 있거나 연경(燕京)에 가 있는 상태이니, 이와 같은 국체(國體)가 옛날에도 있었던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경의 입장을 이해해 준다면 30번이나 정고(呈告)하기 전에 결정을 내려주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편파적으로 되어 가고 기회만 엿보는 풍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때에 이러한 정승의 직책을 사직하는 것을 아무 어려움없이 따라 줄 경우 세상 풍속을 진정시키는 뜻과는 다른 점이 있게 된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 전유(傳諭)하고 돌아온 중신(重臣)으로부터 경이 부대(附對)한 말을 상세히 듣고 보니,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면서 너무 오활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체차시켜 주기를 바라는 일념(一念)이 이토록 독실한데도 계속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경은 필시 내 마음이 자기 마음과 같지 않다고 여길 것이니, 어찌 다시 뒤돌아보기라도 하겠는가. 그리고 더구나 연석(筵席)에서 언젠가 경에게 들려준 말을 경이 기억하고 있을 테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은 모쪼록 지금 내가 이렇게 유시하는 것을 몸받아 안심하고 뜻을 편히 가지고서 따뜻한 봄날이 되거든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사직한 정승 직책은 지금 당분간 해면(解免)을 허락한다."
하였다.

 

복상(卜相)하였다. 【구복(舊卜)은 김종수(金鍾秀)·김이소(金履素)·김희(金憙)였으며 신복(新卜)은 윤시동(尹蓍東)이었다.】 윤시동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았다.

 

충청도를 적간(摘奸)하러 간 문비랑(文備郞)369) 정관휘(鄭觀輝)가 치계(馳啓)하기를,
"비인(庇仁)에서는 정리곡(整理穀)을 나누어 줄 때 한 가구에 배당한 것이 무려 10냥(兩)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고 기타 하리(下吏)들에게 1냥이나 2, 3냥씩 나누어 주었으며 2냥을 관에서 꾸어다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풍족한 가구라고 해도 다 부유한 집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데 끝내 억지로 배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사세상 필연적인 일이라 할 것입니다.
남포(藍浦)에서는 가구를 뽑고 돈을 나눠 줄 즈음에 농간을 부려 돈을 떼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4개 면(面)의 면임(面任)이 제일 많이 농간을 부려 1냥당 8전(錢)씩만 나누어 주었으며 기타 면임들도 돈을 줄 때마다 거두어 먹었습니다. 또 이번 가을에 받아들일 때 백성들에게 석(石) 단위로 바치게 하는 대신 각각 두(斗)로 납부하게 하는 등 함부로 받아들인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범죄 사실이 이처럼 형편없으니 당해(當該) 두 고을의 수령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중하게 처벌토록 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신이 자세히 조사해서 아뢰지 않고 그만 감히 어물쩍 넘겨버리려고 말을 늘어 놓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정리곡을 팔도에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백성들과 함께 경사를 나누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가. 그런데 지난번에 묘당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호서(湖西)의 여러 고을에서 조정의 명령을 무시한 채 민간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 하였기에 너무도 놀라워 초기에 따라 사문(査問)토록 하였었는데, 도신이 아뢴 것을 보니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묘당에서 어찌 불분명한 이야기를 가지고 나에게 보고했겠는가. 그래서 비랑(備郞)을 차송(差送)하여 먼저 몇 개 고을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에 장계로 보고토록 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한두 고을이 이 모양이라면 다른 곳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앞서 사계(査啓)를 올릴 때 소홀하게 처리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당해 감사 유강(柳焵)에게 먼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함사(緘辭)를 띄워 진술을 받아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죄상을 자백하게 하고 대면시켜 공술을 받은 다음에 품처(稟處)토록 하라.
비인 현감(庇仁縣監) 정운달(鄭雲達)이 돈을 떼고서 나누어 주었고 함부로 받아들였다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록 낭자(狼藉)한 자취가 없기는 하나 원하지 않는 백성에게 억지로 분담시켜 백성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형편없기 짝이 없는 일이다. 먼저 파직시킨 뒤에 나문(拿問)토록 하라.
남포 현감(藍浦縣監) 신성진(愼性眞)이 정리곡을 나누어 준 뒤에 임명되었다고는 하나 함부로 받아들인 것과 감영에 숨기고서 보고하지 않은 죄로 말하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우선 파출(罷黜)하고나서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와 공초(供招)를 받게 한 뒤 만약 더 이상 밝혀 낼 사안이 없을 경우에는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속인 율(律)을 적용토록 하라. 그리고 떼어낸 뒤 지급하고 죽은 사람에게까지 거두어들인 해당 전임 수령의 이름을 해조(該曹)에 물어 정배(定配)의 율(律)을 시행함으로써 아직 발각되지 않은 도내의 여러 고을 및 다른 도들을 징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7일 갑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경모궁(景慕宮)에 상이 행차했을 때 수행한 장신(將臣)과 무사 등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사복시가 아뢰었다.
"팔도(八道)의 각 목장에서 금년 현재 방목(放牧)하고 있는 암수의 말이 모두 6천 8백 76필(匹)입니다."

 

12월 18일 을미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조원(李肇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구상(具庠)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12월 19일 병신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돈유(敦諭)하였다.
"정승의 자리가 경을 얻음으로써 중하게 되었다. 내가 경을 인정한 뒤로 언제 기대를 저버린 적이 있었던가. 여론을 들어보아도 식견과 업무 처리 솜씨가 빼어나다고 하였다. 자신을 단속하고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과격하게 하려 하지 않으니 나의 정승이 될 사람이 이에 정해졌다고 하겠다. 새 명을 받고 융숭한 위임을 받았는데 이 남다른 사은(私恩)에 보답할 방도가 따로 있겠는가. 그것은 즉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하게 하고 평정하기 어려운 것을 평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분발하고 연마하여 나의 소원이 풀어지도록 하라. 그리하여 오늘날 임금을 도와 조화시키는 일을 경은 한 번 나와서 시험해 볼 것이다."

 

박종갑(朴宗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이원(李源)을 삭직(削職)시켰는데, 솜옷을 제대로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임에 정관채(鄭觀采)를 임명하였다.

 

12월 20일 정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강(講)과 제술(製述) 및 선전관(宣傳官)의 활쏘기와 강을 행하였다.

 

박종갑(朴宗甲)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종갑이 주연(胄筵)370)  의 오래된 관원으로 오랫동안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임용한 것이었다.

 

양전(兩銓)의 신하들에게 칙유(飭諭)하였다.
"대정(大政)371)  에서는 관원들을 신중하게 선발해야 한다. 어느 정사에선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마는 지금의 정사야말로 더욱 그러해야 하고, 어느 해의 정사인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마는 지금의 정사야말로 더욱 어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수령들과 처음 벼슬길에 나오는 사람들을 인재 중에서 선발하고 충신과 청백리의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사를 행할 때마다 으레 신칙하곤 하였으니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마는 잘 알아서 유념하여 나의 뜻을 제대로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금년의 이번 정사에서는 적체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모두 녹봉을 지급하는 벼슬에 임용토록 하라. 그리하여 답답하게 막힌 사람들의 울분이 풀어지게 한다면 이 역시 금년에 화기롭게 해 주려 한 뜻에 부응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대저 명령이란 마땅히 사계절처럼 믿을 만한 점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일전에 먼 지방의 사람을 거두어 쓰라고 교서를 내려 곡진하게 일렀었다. 지금 행하는 정사는 그야말로 대정(大政)인데 대정에서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조목들은 다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도 믿음성이 없으면 행세를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명령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뜻을 가지고 양전(兩銓)에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춘당대(春塘臺)에서 행하였다. 【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참판 황승원(黃昇源),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 행하였다.】 서유신(徐有臣)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상도(李尙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송환기(宋煥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권유(權𥙿)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유강(柳焵)을 파직시켰다. 정리곡(整理穀)을 수령들이 억지로 나누어 주었는데도 제대로 알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정운(李鼎運)을 충청도 관찰사로, 이상황(李相璜)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명규(李明奎)를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1일 무술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유시에서도 대략 언급했었다마는 경이 나와서 나를 보좌하며 나의 뜻을 선양하는 길은 오로지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완악한 풍속을 진정시켜 조정을 존엄하게 하고 사람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본래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 뭐 때문에 정치를 도와달라고 수고를 끼치겠는가. 그리고 지금 백성의 생활이 고달프기 그지없어 춥거나 덥기만 해도 원망하는 소리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들을 보호하여 즐겁게 해 줄 방도에 있어서도 역시 경이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경은 모쪼록 경을 기필코 정승으로 삼으려 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제대로 몸받아 다시는 사직서를 올리지 말고 즉시 시원스럽게 일어나 나랏일을 잘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2일 기해

정호인(鄭好仁)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 정만석(鄭晩錫)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한성양(韓聖養), 당진 현감(唐津縣監) 서유승(徐有升), 전 대흥 군수(大興郡守) 유전(柳烇), 천안 군수(天安郡守) 윤후동(尹厚東), 전 덕산 현감(德山縣監) 김직휴(金直休), 직산 현감(稷山縣監) 조중진(趙重鎭), 온양 군수(溫陽郡守) 변위진(卞緯鎭), 전 홍주 목사(洪州牧使) 정동유(鄭東愈)는 모두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차등있게 죄를 논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정동유는 정명(精明)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암행 어사가 이렇게 아뢰었으니 혹시 원한 탓으로 빚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변위진의 일과 함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고, 윤후동의 일에 대해서도 규찰하여 장계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정만석이 아뢰기를,
"호서 백성들의 고통 가운데 환곡(還穀)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연말에 가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자 돈으로 대신 거두는데, 여기에는 원래의 상정가(詳定價)와 다시 내린 상정가로 받아들이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봄에 나누어 주는 것은 약간의 돈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간사한 아전들이 또 농간을 부려 자기들이 포흠(逋欠)한 것까지 그 속에 첨가해 넣고는 헐가(歇價)로 매입(買入)하여 입본(立本)372)  을 하고 있으며 게다가 탐욕스러운 수령들이 그들과 함께 장삿꾼 노릇을 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실제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막심한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금단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남 고을에서 이 폐단으로 백성들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받았는데 호서에서 또 이런 폐단이 발생했으니 다른 지방들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단 보고를 받은 이상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심상하게 보아 넘길 수가 없다. 이 뒤로 다시 발각될 경우에는 도백까지도 아울러 중한 처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관문(關文)을 띄워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문관 출신 재상들에게 호군(護軍)의 직함을 부여하는 규례를 다시 밝히도록 하였다.
이날 녹 도목(祿都目)373)  을 행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늘 예전의 규례를 다시 밝혀 잘못된 습속을 조속히 개혁하려고 했었다. 관직에는 본래 품수(品數)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관(大官)에 비해 1등급 뒤지는 숭록(崇祿)의 직함에 대해서는 판서 이하가 비록 편오(編伍)374)  에 속하는 직함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야 할 텐데 숙배(肅拜)하는 정과(正窠)를 수치로 여기고 있다.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서 금석지전(金石之典)처럼 관례로 굳어진 나머지 사직(司直)375)  이라는 직함이 홀연히 잘 안 팔리는 직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심지어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부호군(副護軍)과 같은 진짜 녹과(祿窠)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천하게 여긴 나머지 무신과 중서(中庶)에게나 으레 제수하는 관직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보다 더 직품(職品)이 거꾸로 되고 관방(官方)이 파괴되는 것이 없다.
옛사람은 당하(堂下) 대부가 낭관의 위계 차서를 혹 뛰어넘을 경우라도 오히려 도둑 벼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이 직함들의 경우는 무단히 격례(格例)를 무너뜨리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결단코 하는 대로 일임할 수가 없다. 정조(政曹)에 보관된 문적(文蹟)과 비문(碑文)·행장(行狀)·기실(記實) 등을 보면 전례(前例)가 어떠했는지 알기가 어렵지 않을 텐데, 선정(先正)인 문정공(文正公)의 경우에는 오히려 호군(護軍)으로 있으면서 복상(卜相)의 망(望)에 들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이 편할 도리만 취하면서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한가. 이번 달부터 녹봉을 반급(頒給)해 주는 일을 다시 밝히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에 상호군을 1품으로, 대호군을 정2품으로, 호군을 종2품으로, 부호군을 당상 정 3품으로 대우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유수(留守)·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방어사(防禦使)에서 체직되어 온 사람들 및 각도(各道)의 영장(營將)에 새로 제수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호군(護軍)의 직함을 부여받은 자들은 모두 사은 숙배(謝恩肅拜)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3일 경자

전 동지(同知) 이응거(李膺擧)를 지중추부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가 연로하기 때문에 극진히 임용하지 못했다는 뜻을 유시하게 하였다. 응거는 전에 대신의 천거로 직책을 제수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80이 되었다 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12월 24일 신축

충청도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을 불러서 만나 보았다.

 

12월 25일 임인

하교하였다.
"내일 밤 서계(誓戒)를 받는 정시(正時)를 3경(更) 4점(點) 자시(子時) 정각(正刻)으로 하라.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근력이 옛날 사람과 같지 않고, 또 서계로 말하면 향사(享祀)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기곡대제(祈穀大祭)의 서계를 받는 일이 매번 섣달의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때에 있게 되곤 하는데, 그 시각을 단지 그날 조금 이르게 정한다 해서 예(禮)에 안될 것은 없을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의 시각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요즘 궁(宮)에서 제사를 올릴 적에 두 본궁(本宮)에서 제사지내는 시각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궁에서 제사지내는 일과 관계되는 만큼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두 본궁의 구례(舊例)를 준행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서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금 이후로 서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면 전정(殿庭)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든 정부(政府)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든 따질 것 없이 모두 자시 정각에 하는 것으로 종백(宗伯)의 고사(故事)에 기재해 놓도록 하라."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서유린(徐有隣)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군영(軍營)이 진(鎭)으로 나온 뒤에 부윤(府尹)이 겸대(兼帶)하고 있던 전영장(前營將)의 임무를 이천(利川)으로 옮겨 보내자는 뜻으로 비국이 아뢰어 계하(啓下)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읍(營邑)에는 반드시 7, 8인의 장교(將校)와 2백 명의 표하군(標下軍)을 두게 되어 있는데, 만약 이 모두를 이천에서 그 숫자대로 새로 설치하게 한다면 지금의 재력과 군정(軍丁)을 가지고 어떻게 7, 8인에 대한 급료와 2백 명의 군액(軍額)을 마련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본부(本府)의 판관(判官)이 일단 영하(營下)에 있는 이상 판관에게 그대로 전영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면 군제(軍制)로 보나 일의 체면으로 보나 모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지방의 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관서(關西)의 가산 군수(嘉山郡守)나 관북(關北)의 홍원 현감(洪原縣監)이 모두 당하관으로서 전영장을 겸하고 있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의 경우 역시 당하관으로서 친기위(親騎衛)의 위장(衛將)을 겸하고 있으며, 전례(前例)를 또한 허다하게 상고할 수가 있으니, 수어영(守禦營)의 전영장은 본부의 판관이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판관이 그 동안 겸대해 왔던 종사관(從事官)의 임무는 일단 영장을 겸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대로 갖고 있기에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총부(摠府)에만 유독 설치할 필요가 또한 없으니 특별히 없애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계묘

상참(常參)을 행하고 아울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과 선전관(宣傳官)의 성적 점수를 합산하여 시상하였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경이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점이 바로 경이 공효(功效)를 거둘 곳이라 하겠다. 지금 정승으로 임명된 초기에 모쪼록 더욱 스스로 면려토록 하라."
하였다. 시동이 아뢰기를,
"현재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만, 그중에서 성상의 몸을 보전하는 일만큼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성인의 지기(志氣)야 쇠해지는 때가 없다고 하더라도 혈기(血氣)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쇠해지는 법입니다.
삼가 성상을 살펴 보건대, 밤 늦은 시각에도 잠자리에 들지 아니하시고 새벽부터 정무에 임하시면서 부서기회(簿書期會)376)  까지도 몸소 점검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살옥(殺獄) 문안(文案)처럼 방대하고 복잡한 서류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피고 세밀하게 따져 가면서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되지 않을까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생각건대 천부적으로 총명한 재질을 타고 나시어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시겠습니다만 조절하며 건강을 도모하셔야 하는 방도로 볼 때에는 아무래도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왕(文王)이 혼자서 일을 도맡아 처리하지도 않았고 감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377)  는 말이야말로 영원히 인군(人君)이 귀감으로 삼을 내용이라 할 것인데, 감히[敢]라는 한 글자의 의미를 더욱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옥사(獄事)와 같은 중대한 일도 오히려 그와 같이 했고 보면 유사(有司)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야 더더구나 모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벼리를 들면 그물코가 모두 펴지는 법이니 몸을 뒤로 숨기면서 안을 살찌우라고 한 훈계를 깊이 유념하시어 국가를 위해 무궁한 기틀을 마련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늘이 우리 동방을 보우(保佑)하시어 원자(元子)를 내려 주셨는데 점점 장성함에 따라 억조 백성들이 모두 기대를 걸고 있으니 현재의 급무로 본다면 원자를 바르게 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르게 기르는 방법으로 말하면 원래 한(漢)나라 신하의 보부전(保傅傳)에 실려 있는 내용에 다름이 아닌데, 쉽게 이끌어 들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날이 갈수록 선하게 되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또 전하께서 직접 솔선수범을 보이시며 가르쳐 주시는 것보다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자전(慈殿)과 자궁(慈宮)께 자식으로서의 효성을 다 바치고 내정(內庭)을 법도로 교화시키며 선조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받들고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며 의복을 검소하게 하고 음식을 간소하게 하며 아침에 정무를 집행하고 저녁에 명령을 수명(修明)하는 일 등 어느 한 가지도 원자의 귀감이 될 수 없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만하고 사벽(邪僻)한 일이 원자의 이목(耳目)에 접해지고 심지(心志)에 머물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좋은 습관이 지식과 함께 이루어지고 장성함에 따라 마음도 성숙하게 한다면 만세토록 태평스러운 세상이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노생(老生)이 늘상 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신이 맨 처음에 드릴 말씀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더욱 좋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 경외(京外)에 비축된 것이 하나도 없어 대소 백성들이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사치를 서로 숭상하고 탐욕스러운 풍조가 이루어진 데 말미암은 것이니, 식자(識者)들의 걱정이 어찌 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하는 것이야말로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입니다. 생존해 있는 자에게는 직질(職秩)을 높여주고 이미 죽은 자의 경우에는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한 세상을 용동(聳動)시킬 방도로 삼게 한 그 법 정신이 매우 좋은데, 숙묘(肅廟) 갑술년 이후로는 다시 선발한 일이 없었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도 연신(筵臣)의 건백(建白)에 따라 추천하는 일을 의논토록 했었는데 미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마침내 쓸모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 탄식할 일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특별히 성명(成命)을 내리시어 규례에 따라 각각 몇 사람씩 추천하게 하는 동시에 묘당으로 하여금 회의를 갖고 결말을 짓도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를 장려하고 관료들을 경계시키는 뜻을 보여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대로 가까운 시일 내에 거행토록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미천한 신의 재소(再疏)에 대해 비답을 내리신 가운데 책면(責勉)하신 분부를 보건대 신처럼 우매한 자로서는 감히 받들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만,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백성의 뜻을 귀일시킨 다음에야 빛나는 공적이 이룩되고 백관들이 바로잡힐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명의록(明義錄)》 한 책으로 말하면 성스러운 임금들께서 마음을 전해 온 큰 계책을 드러내고 난적(亂賊)을 성토한 《춘추(春秋)》의 큰 법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인데, 그 흐름을 소급해서 따져 본다면 이 책의 의리와 모년(某年)의 의리는 전후로 일관(一貫)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상의 유시 가운데 ‘인경(麟經)378)  의 필법을 가탁하여 《명의록》을 편찬했다.’는 말씀이야말로 정밀하고 극진한 인의(仁義)의 정신에 입각하여 대성인께서 보여주신 공명 정대한 평가로서 영원히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나라에 이것이 없다면 나라가 될 수 없고 사람에게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전하를 섬기면서 이 의리를 모른 체한다면 전하의 신하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 을미년의 역변(逆變)으로 말하면 그 시발점이 모년(某年)에 비롯된 것이었고, 노(魯)와 희(禧), 인(麟)과 겸(謙)으로 말하면 그 방법은 달랐으나 모의한 것은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모년(某年)에 역적 행위를 한 것이 형세로 볼 때 을미년의 역적 행위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우리 성상께서 지니고 계시는 대중 지정(大中至正)하고 지극히 엄한 의리와 배치되었고 나중에는 선대왕(先大王)께서 전해 주신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심법(心法)을 조롱하였으니, 이것이 전후에 걸쳐 의리가 일관되고 난역(亂逆)의 방법은 달랐으나 모의한 것은 같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아, 《명의록》 한 책의 의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밝게 드러난 뒤에야 충신과 역적의 경계가 판연히 구분되고 임금과 신하의 윤기(倫紀)가 크게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조신(朝臣) 가운데 뒤에 진출한 연소배(年少輩)들도 모두 난역의 뿌리가 있다는 것과 의리가 일관된 것을 환히 알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소장 굴신(消長屈伸)을 멀리 내다보고 길이 계책을 꾀하실 즈음에 직접 조치를 취하고 홀로 생각을 하시는 가운데 의리가 밝혀지지 않을까 두려워 하시는 마음과 이륜(彛倫)이 허물어지게 될까 늘 경계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오늘날 혈기(血氣)를 지닌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굳게 정해지신 성상의 의중을 깨닫게 하신다면 마치 파발마로 소식을 전하듯 세도(世道)가 안정되고 백성의 뜻이 귀일될 것이니 어찌 일 년이나 몇 달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성상의 뜻을 받들어 주선하면서 위로 성상의 청명한 정치의 교화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렇게 말하는 뜻은 입각처(立脚處)와 착수할 곳을 마련하여 이에 부응하는 규모를 만들어 보기로 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는데 나 역시 수시로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의필(李義弼)의 상소 내용이 타당한지의 여부는 우선 따지지 않더라도 새로 공포한 금법(禁法)을 맨 먼저 범했다는 이유로 정배(定配)보내는 처벌을 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의필에게 죄가 없다고 신이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정의 체모를 가지고 말씀드리건대 헌장(憲長)379)  이란 직함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예우를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색이 언관(言官)으로서 할 말을 한 것인데 제대로 잘 살펴 어구(語句)를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 장차 한 해를 넘기려 하고 있으니, 어구를 잘 살펴 표현하지 못한 그 잘못은 작은 반면 말한 일 때문에 도헌(都憲)을 유배보내면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찌 듣는 자들을 의혹케 하여 정치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석방해 돌아오도록 특별히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대리 정사를 행하실 때 선대왕께 올렸던 글을 읽고 누군들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신묘년 한유(韓鍮)의 일에 대해서는 공사(公私)간의 문적(文跡)은 물론이고 석실(石室) 비부(秘府)에 소장되어 있던 것들까지 모두 세초(洗草)380)   대상 속에 포함시키도록 했었는데, 금오(金吾)381)  의 죄안(罪案)만은 똑같이 세초했다는 말을 유독 듣지 못하였습니다. 선조(先朝)께서 처분하실 때 내린 분부가 해와 별처럼 빛나고, 병신년 초에 당시 같은 죄를 받았던 사람을 신원(伸冤)해 주신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도 간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유가 초야의 포의(布衣)로서 목숨을 바쳐가며 쟁론을 하였고 보면 조정에서 형정(刑政)을 행하는 도리로 볼 때 누구는 신원시켜 주고 누구는 그대로 죄를 받게 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해부(該府)에 명하여 그에 대해서도 세초(洗草)해 주게 함으로써 그를 신원시켜 주는 동시에 의리를 드러내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병신년 초에 재신(宰臣)의 소에 대해 내린 비답의 한 구절을 사람들 모두가 보았을 것이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분명해져 유감이 없게 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만 세초해 주는 일을 빠뜨린 것이 이와 같다면 역시 그때 비답을 내린 본의가 아니라 할 것이다. 해부에 문의하여 세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오정원(吳鼎源)과 지평 신현(申絢)이 전계(傳啓)하면서 유사문(柳師文)의 일을 언급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게 할 성격의 일이 아니다. 오늘은 정계(停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현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단연코 정계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만약 끝까지 규명하려면 그 당시에 발계(發啓)한 대신(臺臣)을 추궁하며 사실 조사를 벌여야 할 텐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공연히 분란만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속히 정계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유사문의 일을 정계하라고 여러 차례나 수고스럽게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사문이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무거운데 그중에서도 성상을 매도하면서 흉측한 말과 패려스러운 이야기를 지껄여 간장(諫長)382)  의 소에 올라오게까지 한 한 조목으로 말하면 더더욱 변할 수 없는 그의 죄안(罪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엄히 조사하여 결말을 보기 전에는 정말로 정계할 수가 없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辭避)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봄 절기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대사간 서미수(徐美修)가 상소하기를,
"신이 본원(本院)의 계사(啓辭) 가운데 유사문(柳師文)의 일을 논한 것에 대해 나름대로 소견이 있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립니다.
그의 아들 유성한(柳星漢)이 연전에 올린 하나의 소로 말하면, 놀랍고 망령스러운 이야기가 많아 보는 자마다 통분스럽게 생각했으니 그 누군들 엄히 토죄(討罪)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를 트집잡아 그에 대한 단안(斷案)으로 삼고 역적의 죄과로 몰아넣는다면 그의 원정(原情)을 제대로 헤아려주는 방도가 못될 듯싶습니다.
습속이 오래도록 잘못되어 사람들의 뜻이 귀일되지 못한 나머지 하나라도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있기만 하면 문득 악명(惡名)을 뒤집어 씌운 채 조금도 객관적으로 규명하려고는 하지 않고 점점 확대시켜 인순고식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며 탄식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신이 올린 하나의 차자로 말하면 그 마음과 자취를 상호 참작하면서 위로는 포용해 주시는 성상의 덕을 천명하고 아래로는 오염되어 가는 세도(世道)를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이라서 신이 정말 탄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누가 감히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사문의 죄안(罪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실(私室)에서 매도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약 간적(奸賊)이 중간에서 과장되게 떠들어 댄 것 때문에 애매한 죄목을 적용한다면 이 어찌 분명히 규명해서 처리해야 할 조정의 정사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엄히 조사한다면 사문의 죄안이 과연 성립되는지의 여부가 자연히 밝혀질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밝게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못하겠는가. 사면을 내린 일에 대해서 대부분 이런 식으로 대들고 있으니, 이 또한 형정(刑政)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12월 27일 갑진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기곡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12월 28일 을사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 병조 참판 서유대(徐有大),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 조심태(趙心泰),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서유린(徐有隣),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면응(李冕膺)을 불러서 만나 보았다. 병조 판서 이득신이 아뢰기를,
"무신(武臣)의 참상(參上)383)   자리를 늘리는 일과 관련하여 신이 여러 장신(將臣)들과 터놓고 상의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참상의 경우는 선전관(宣傳官) 한 자리, 수문장(守門將) 여섯 자리,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두 자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한 자리, 훈련원 판관 두 자리·훈련원 주부 여덟 자리 등 도합 20자리를 가지고 분정(分定)하고, 무신 당상의 경우는 오위 장(五衛將) 세 자리를 증설하고, 문신 당하관 세 자리는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있는 대로 훈련원 첨정·판관·주부에 각각 한 자리씩 차임하여 옛날의 규정을 복구시키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였는데, 대신의 의견 역시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목(節目)을 만들어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 심환지가 아뢰기를,
"이번에 이조와 병조의 음관(蔭官) 6품(品) 자리를 네 개 더 늘려 설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모저모로 헤아려 본 결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두 자리와 조지서(造紙署)·활인서(活人署)의 별제(別提)를 각각 한 자리씩 증설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대신의 뜻도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 이대로 증설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훈련원 첨정 이하의 관원들을 묘(廟)·사(社)·전(殿)·궁(宮)의 수문소(守門所)에 돌려가며 입직(入直)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 아뢴 말을 따른 것이었다. 득신이 또 아뢰기를,
"관제(官制)에 대한 일을 가지고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참상(參上) 무신으로서 벼슬길에서 떨어진 채 선발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야말로 가장 애달프다고 할 수 있다. 자리 20개 중에서 그와 같은 자들을 위한 자리를 덜어내어 소통(疏通)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을 헤아려 보는 것이 참으로 온당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무겸(武兼)·부장(部將)·수문장(守門將)에서 각각 한 자리씩 덜어낸 다음 그중 한 자리는 벼슬길에서 떨어진 지 가장 오래된 사람에게 부쳐주고, 두 자리는 선부수(宣部守)384)   출신 참상(參上)의 전함(前啣)을 가진 자를 대상으로 활 솜씨를 겨뤄 뽑은 다음 자리가 나는 대로 후임에 임명한다면, 그런 대로 적체된 사람들을 진작시키고 무예를 권장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였다.
"형조에서 구류(拘留)시키는 한 조목을 보건대 정말 놀라운 점이 있다. 옛날부터 이에 대한 법금(法禁)이 지극히 엄하기만 한데, 요즘 들으니 계속 법금을 무시하고 있다 한다. 그리하여 전옥(典獄) 외에 따로 형조 안에다 감옥을 만들어 놓고는 칼을 씌우고 결박을 지우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하니, 어찌 이와 같은 기강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매일 구속하는 상황을 매순(每旬) 5일 이전에 녹계(錄啓)하는 규정도 쓸데없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일단 이런 일을 듣고나서 어떻게 그대로 놔둘 수가 있겠는가. 해조(該曹)를 엄히 신칙하여 오늘부터 옛 법전을 다시 밝히고 잘못된 습관을 통렬히 개혁하도록 하라.
그런데 따로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놓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방치해버리고 말 것이니, 해방(該房) 승지는 연석(筵席)에서 물러난 뒤에 판당(判堂)385)  을 패초(牌招)하여 연석에서 내린 분부를 상세히 전해 주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당(亞堂)386)  ·삼당(三堂)387)  과 함께 개좌(開坐)한 뒤 이른바 구류시키는 옥칸[獄間]을 허물어버리고 그 재목과 기와를 전인(廛人)들에게 내주어 가옥을 짓게 하고 나서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에 다시 혹시라도 잘못을 답습할 경우에는 당해 당상에게 위제율(違制律)을 적용하고 낭관에게도 동일한 율을 시행할 것이다. 이 전교를 사구(司寇)388)  의 공당(公堂)에 현판으로 걸어놓도록 하라."

 

이경무(李敬懋)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29일 병오

경기 수군 절도사 정창순(鄭昌順)을 내직(內職)으로 옮겨 주라고 명하였는데, 내년에 그가 기사(耆社)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세적(具世勣)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12월 30일 정미

이조가 아뢰기를,
"전 판서 이민보(李敏輔)가 나이 80세가 되었으니 가자(加資)해야 마땅한데, 여기에 또 시종신(侍從臣)의 아비라고 가자한다면 가자를 중복되게 하는 셈이니, 그것은 따지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자계(資階)인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한 등급 더 올려 가자할 경우 마땅히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삼아야 하는데, 훈신(勳臣)·척신(戚臣)·부원군(府院君)을 제외하고는 음관(蔭官)으로 출사(出仕)해서 이 자계를 받은 자가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에 음관 출신 정승이 있었고 보면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올려준다 해도 구애될 것이 없을텐데, 보국 숭록 대부를 가지고 주저하다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이 뒤로 음관으로서 육경(六卿)을 거치고 판돈녕(判敦寧)의 경력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보국숭록 대부에 구애받지 않도록 규례로 정하도록 하라. 그러나 한 사람에게 중첩되게 가자해 줄 수는 없으니, 그 일은 초기(草記)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한성부가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 숫자를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부(五部). 원호(元戶) 4만 3천 8백 90호(戶). 남자 9만 7천 87명, 여자 9만 4천 4백 14명.
경기. 16만 6백 27호. 남자 33만 4천 5백 22명, 여자 31만 7천 8백 71명.
황해도. 13만 6천 6백 27호. 남자 31만 2백 6명, 여자 26만 6천 8백 85명.
전라도. 30만 8천 2백 69호. 남자 54만 9천 7백 39명, 여자 61만 2천 9백 20명.
경상도. 35만 9천 3백 14호. 남자 72만 3천 3백 72명, 여자 85만 3천 4백 57명.
충청도. 21만 9천 6백 60호. 남자 42만 6천 2백 60명, 여자 44만 4천 5백 96명.
강원도. 8만 1백 29호. 남자 16만 4천 4백 65명, 여자 16만 1천 2백 75명.
평안도. 29만 7천 8백 89호. 남자 63만 4천 2백 73명, 여자 64만 4천 6백 80명.
함경도. 12만 84호. 남자 33만 1천 9백 35명, 여자 34만 2백 37명.
팔도(八道). 원호 1백 68만 2천 6백 2호. 남자 3백 47만 4천 7백 73명, 여자 3백 64만 1천 9백 21명.
경외(京外) 총수. 1백 72만 6천 4백 92호. 남자 3백 57만 1천 8백 60명, 여자 3백 73만 6천 3백 3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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