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1월

싸라리리 2025. 8. 10. 15:09
반응형

1월 1일 무신

경모궁(景慕宮)의 정조제(正朝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 되는 것은 왕자(王者)의 경사이며 농부들의 소원이다. 금년 이달 4일이 신일(辛日)이어서 그 점(占)이 풍년이 들 징조이다. 앞으로 신일에 몸소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곡식이 잘 되기를 빌어 백성들에게 근본에 힘쓰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고자 하니, 서계(誓戒)와 재계(齋戒)를 잘 하여 마음속의 정성이 위를 감동시키기를 바란다. 오직 너희 감사와 수령들은 각자 내 마음을 본받아 농사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풍년이 들어 많은 곡식을 거두는 기쁨이 있게 하라."

 

기로 대신(耆老大臣)과 문무 경재(文武卿宰) 이하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다. 특명으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원임 각신(原任閣臣)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집에 미백(米帛)을 보내고, 사관(史官) 및 각(閣)의 속관(屬官)을 보내 존문(存問)하게 하였다.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은 나이가 많고 복이 많다는 것으로써 미백을 더 주어 훈부랑(勳府郞)이 존문하게 하고, 고 영상 이종성(李宗城)의 부인 심씨(沈氏)와 고 판서 조엄(趙曮)의 처 홍씨(洪氏)에게도 아울러 미백(米帛)을 더 주어 호조의 낭관이 존문하게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는 90세의 노모가 있는데도 증질(贈秩)한 대신의 처여서 세찬의 별단(別單)에 들지 못했는데, 특명으로 금년부터 예에 의해 초계(抄啓)해서 나이 많은 사람과 대신을 존경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장용 대장(壯勇大將) 김지묵(金持默)의 집이 그 어느 집안인가. 추가로 세찬을 보내라."
하였다.

 

북경의 예부에서 새 황제가 등극한 후, 응당 행해야 할 조항에 대한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괴원(槐院)에 명하여 회자(回咨)를 지어 보내게 하였다. 예부의 자문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60년 10월 일에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화신(和珅) 등이 아뢴 내용을 건륭 60년 10월 20일에 내각(內閣)에서 초출(招出)한 것이다. 태학사 공신(公臣) 아(阿)와 태학사 백신(伯臣) 화(和) 등은 삼가 아뢰기를 ‘신들이 병진년에 전위(傳位)의 큰 의식을 거행하게 됨에 따라 각성(各省)과 각 해당 아문(衙門)에서 마련해야 할 일들을 미리 신칙하려고 문건을 작성하여 바칩니다. 삼가 훈시를 기다려서 준행하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라고 하여, 건륭 60년 10월 18일에 ‘거기에 의해서 공경히 시행하라.’는 유지(諭旨)를 받들었다.
1. 병진년에 사황제(嗣皇帝)에게 전위하고 사황제가 등극할 적에 등극을 반포하는 전위 조서(傳位詔書) 한 통에만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옥새를 사용하고 그 다음부터는 황제의 옥새를 사용할 것이다. 있어야 할 은조(恩詔)의 조항은 일체로 기록해 들인다.
1. 태상황제의 유지(諭旨)는 칙지(勅旨)라고 일컫는다.
1. 황제는 으레 응당 짐(朕)이라 일컬을 것이요, 태상황제도 응당 그대로 짐이라 일컬어야 할 듯하나, 삼가 지시를 기다려서 결정할 것이다.
1. 병진년 태상황제의 기거주(起居注)와 사황제의 기거주는 해당 아문에서 삼가 따로 기록하도록 한다.
1. 삼가 태상황제의 생일을 당해서는 만만수(萬萬壽)라 일컫고 사황제의 생일은 만수(萬壽)라 일컬을 것이다.
1. 태상황제의 만만수경절 및 윤조(允朝)·동지(冬至)와 같은 명절을 만나면 경하하는 표문을 내각에서 별도로 삼가 지어 바쳐서 지시를 받들어 거행할 것인 바 표문 양식을 장차 반포하여 일체 그대로 준수할 것이다. 삼가 사황제의 생일과 좋은 날을 만나면 응당 하례의 표문을 올려야 하는데 으레 올리는 표문의 예를 사용하되 중간에 한 연(聯)만 적당히 고칠 것이다. 규례에 따라 양식을 반포할 것이니 기일 안에 올려야 한다.
1. 병진년 원조(元朝)에 내외 신료(臣僚)들이 경하하는 표문은 상례(常例)에 따라 올리게 하되, 태상황제의 전위를 하례하는 표문과 사황제의 등극을 하례하는 표문은 내각에서 별도로 지어 올려 지시를 기다려서 반포할 것이니, 일체 그대로 따를 것이다.
1. 병진년에 삼가 조종(祖宗)들의 실록(實錄)을 올려야 하니, 내각에서 종전의 규례를 살펴서 기일에 맞춰 사황제 앞에 공손히 올릴 것이다.
1. 병진년에 삼가 대사(大祀)를 당하면 각 해당 아문의 구제(具題)001)  를 거쳐 사황제가 친히 임하여 예를 거행할 것이다. 그리고 중사(中祀)와 소사(小祀)는 응당 친행할 것과 대행할 것을 분별하여 거행하되 모두 지난 예를 살펴서 제청(題請)할 것이다.
1. 경연(經筵)·경적(耕籍)·대열(大閱)·전로(傳臚) 등 각종 전례는 기일이 되면 각 해당 아문에서 사황제에게 주청하여 예에 따라서 거행한다.
1. 태상황제와 사황제의 생일과 좋은 날 및 연(輦)을 타고 지방을 순행할 때를 당하면 내외 대신이 삼가 경하와 안부를 묻는 문건을 함께 두 벌을 선사(繕寫)하여 올리고, 아뢰는 일에 따라 안부를 물을 때에는 이 문건을 모두 일반적인 선사의 예에 비추어 한 벌을 작성하여 사황제에게 올려서 열람하도록 한다.
1. 외정(外廷)의 연회에는 각 해당 아문에서 예에 따라 주청하면 사황제가 태상황제를 모시고 연좌(宴座)에 친림하여 사황제가 시좌(侍座)하는데, 그에 따른 일체의 의주(儀注)는 그때에 임해서 갖추어 아뢴다.
1. 각부(各部)·각원(各院) 등 아문의 제본(題本), 개첨(改簽)·방결(放缺)·주파(奏派) 등 각항의 차사(差使)는 모두 예에 따라 제주(題奏)해서 공손히 사황제의 비열(批閱)을 기다려 준행한다. 각부·각원 등 아문 및 각성(各省)의 제주(題奏)하는 일은 모두 상식(常式)에 따라 삼가 황상이 예람(睿覽)하는 자양(字樣)으로 베껴 쓰고, 뒤에다 가경(嘉慶)이란 연호를 지난 예에 따라서 올리는데, 꼭 두 통을 베껴 마련할 필요는 없다.
1. 문(門)에 임어하여 청정(聽政)하는 것은 사황제의 절본(折本)을 기다려서 기일을 알려 주어 그대로 처리하게 한다.
1.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조고(朝考)·산관(散館) 및 일체의 고시(考試) 제목에 대해서는 각 해당 아문에서 예에 따라 주청하면 사황제가 명제(命題)하여 고시한다.
1. 사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응당 태상황제의 칙지를 청하여 황후(皇后)를 책립하되,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 및 축하를 올리는 일 등 갖가지 일들은 각 해당 아문에서 예에 따라 준행한다.
1. 병진년 원조(元朝)에 봉선전(奉先殿) 당자(堂子)에서 행례할 것은 전위하기 이전에 있으니, 황태자가 황상을 따라가 행례한다.
1. 폐현(陛見)하려는 문무 대관 및 새로 제수된 도(道)·부(府) 이상의 관원들은 문안을 갖추어 아뢰어서 태상황제의 은훈(恩訓)을 기다린다.
1. 병진년 신정(新正)에 단서극(丹書克)에서 태상황제에게 아뢰는 사구(詞句)에 관계된 것을 올린다. 또 60주년의 나라 경사를 하례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응당 그대로 태상황제 앞에 공손히 올린다."

 

회자문(回咨文)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이 자문으로 회답합니다. 가경(嘉慶) 원년 정월 초1일에 귀부(貴部)의 자문을 받아 보았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의제사(儀制司)의 보고에 의하면, 내각에서 초출(抄出)한 태학사(太學士) 공(公)인 아계(阿桂) 등이 아뢴 전사(前事) 한 벌을 원주(原奏)의 각 조항과 서로 맞게 간각(刊刻)하여 조선 국왕에게 알려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삼가 이 지시를 받들어 건륭 60년 10월 18일에 내각에서 칙지를 받들어 병진년에 전위(傳位)하는 큰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응당 각성과 각 해당 아문에 그대로 준비할 사의(事宜)를 미리 신칙한다.’고 하였는데, 모두 20조항이었습니다. 이제 60년의 보위(寶位)를 빛나게 전하여 중륜(重輪)002)  의 서일(瑞日)이 바야흐로 떠오르고, 마침 삼양(三陽)이 이른 때를 당하여 천년에 처음 있는 경사를 거행하니, 예의가 환연히 일신되고 기쁜 마음이 널리 미쳤습니다. 이에 한쪽 구석의 나라도 역시 성전(盛典)에 참여하여 각성과 각 아문의 열에 끼게 하였으니, 귀부에서 우리 태상황과 우리 황상이 작은 나라를 돌보아 주고 먼 곳을 회유해 주신 덕을 우러러 본받지 않았다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북쪽을 바라보고 손을 비벼 송축하면서 속으로 깊이 감격합니다. 이렇게 자문에 회답하니 청컨대 조사하여 시행하겠습니다. 위와 같이 예부에 자문합니다. 가경 원년 정월 초1일."
하였다. 【내각 지제교(內閣知製敎)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23면
【분류】외교(外交)


[註 002] 중륜(重輪) : 해나 달의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빛. 제왕의 덕을 상징하는 상서라 함.

 

주교 당상(舟橋堂上) 심이지(沈頤之)와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 광주 유수 서유린(徐有隣) 등을 소견하고 전교하기를,
"원행(園行) 때에 만약 시흥(始興) 지방에서 횃불을 들 때를 만나면 굳이 횃불을 세우지 말고 판전(板廛)의 병문 내외계(屛門內外契)의 예에 의해서 등(燈)으로 대신하라."
하였다.

 

승문원 제조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 표주(表奏)와 자문(咨文)의 글은 으레 극행(極行)부터 평행(平行)까지 무릇 사격(四格)이 있어 ‘사행문서(四行文書)’라 하고 있습니다. 표주는 매격(每格)에 한 자를 낮추고, 자문은 매격에 두 자를 낮추는데 이번 예부(禮部)의 자문에서 새로 반포한 격식에 의하면 황제를 태상황보다 특별히 한 격을 낮추어 모두 오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표주와 자문의 글은 오격으로 해서 ‘오행문서(五行文書)’라고 일컫는 것을 규식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노직인을 하비(下批)하였다. 전 판서 이민보(李敏輔)와 정창순(鄭昌順)을 보국(輔國)으로 올리고, 나이 1백 세인 자는 모두 숭정(崇政)으로 올렸다.

 

심환지(沈煥之)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다시 진산현(珍山縣)을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용인(龍仁)과 순안(順安)의 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켰는데, 세 고을을 강호(降號)시킨 지 이미 10년이 찼기 때문이었다.

 

평안 병사 신응주(申應周)가 강변(江邊)을 파수하는 군졸에게 지의(紙衣)와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고 치계하기를,
"강변의 읍진(邑鎭)에서 동상(凍傷)에 걸릴 근심으로 말하면 파졸(把卒)이 봉군(烽軍)보다 더 심하고, 군졸이 장령(將領)보다 더 심합니다. 봉대(烽臺)와 파막(把幕)을 막론하고 장령에게는 모두 지의를 주고 파졸에게는 모두 유의를 주었는데, 봉군의 유의 숫자는 이미 부족하므로 각 봉대마다 유의 세 벌과 지의 두 벌씩을 주어 번갈아 입게 하였습니다. 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미곶(彌串) 등의 읍진은 내지(內地)이므로 아울러서 지의를 주고, 강계(江界) 등의 읍과 진보의 순라(巡邏) 장졸과 밤에 순찰을 돌거나 성문을 지키는 장졸, 요망군(瞭望軍)·기찰군(譏察軍)·파발군(把撥軍) 등은 군역이 긴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순라 장졸과 요망군이 더욱 긴요하여 아울러 유의를 지급했습니다."
하였는데, 대체로 연말에 유의 3백 85 벌과 지의 4백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편전에서 재숙하였는데, 장차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친행하기 위해서였다.

 

1월 3일 경술

인정전에 나아가 친히 기곡제의 향축(香祝)을 주관하고, 인하여 사직단으로 가는 길에 종가(鍾街)에 이르러 연(輦)을 멈추고 공시인(貢市人) 및 오부(五部)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해 묻기를,
"새해가 되었는데 너희들은 각기 편안하게 살고 있느냐?"
하니, 부로들이 절하고 손을 비비며 축수하였다. 인하여 폐단을 묻고, 사직단에 이르러서 제기(祭器)와 희생(犧牲)을 살펴보았다. 상이 전생서 제조 이득신(李得臣)에게 묻기를,
"한 해에 희생은 얼마나 쓰는가?"
하니, 득신이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소 35두와 거제(巨濟)의 소 5두이면 1년 동안 넉넉하게 차려 놓을 수 있는데, 양(羊)은 중국산 양만 쓰고 우리 나라 양은 쓰지 않기 때문에 매양 구차하게 된 것이 걱정입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는 융통하여 차리도록 하라."
하였다.

 

재전(齋殿)에서 대신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어제 삼가 원자(元子)가 시좌(侍坐)한 것을 보니, 풍채가 뛰어나고 의젓한 가운데 스스로 장원(長遠)하게 온축한 기상이 있어 성인(聖人)의 태양 같은 표상이요 국가의 태산 반석 같은 기반이기에 신은 기뻐 뛰며 축하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원자의 학문이 일찍 성취되어 읽은 글이 이미 많다고 하니 더욱 다행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자(文字)에 관한 일은 면려하지 않아도 잘 해서 《소학》 초권은 빠짐없이 다 외고 《시경(詩經)》의 풍(風)·아(雅)도 과반이나 왼다. 그밖에 《당시(唐詩)》 오언·칠언 2편은 입만 열면 문득 외는데, 읊고 짓는 것은 하지 말도록 금하고 있으나 또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있으니, 그중에 ‘산의 단풍은 해와 같이 붉도다[山楓紅如日]’와 같은 구절에서는 기상의 좋은 곳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문자를 쓰면서 스스로 진부한 것은 버려서 서안(書案)은 꼭 기상(兀上)이라 하고, 본다고 해야 할 곳은 반드시 ‘조(眺)’나 ‘촉(矚)’ 자를 쓰고 있는데, 내가 급하지 않다고 여겨 억제하고 있다."
하므로,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하늘이 낸 분이기에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를 유임시켰다. 영의정 홍낙성이 아뢰기를,
"본부는 성역(城役)을 마치지 못했으니, 임기가 찼다 하여 유수를 체직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에 따른 것이다.

 

내탕전(內帑錢) 1만 민(緡)을 제주(濟州)에 내려 진자(賑資)로 삼고, 명하기를 호남에서 금년에 응당 납부해야 할 상부(常賦) 가운데서 덜어내 남겨 두어 그 곡식을 사서 보내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나는 오직 한결같이 백성들의 식량을 생각하여 자나깨나 걱정이 되어 몸소 방사(方社)에 가서 새벽에 풍년을 빌고자 한다. 마침 호남의 방백이 제주 목사가 보고한 것을 낱낱이 들어 등문(登聞)한 것을 보니 바로 곡물을 더 조치해 달라는 청이었다. 배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에는 수부(水夫)들이 거듭 고통을 받고, 축난 곡식을 보충하는 데는 육지 백성들이 다 폐해를 받는다. 그러나 먹여주기를 바라는 섬 백성들을 어찌 차마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만일 묘당의 서찰만 앉아서 기다린다면 아무리 많은 곡식이 있어도 곤란한 형편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난 겨울에는 한 지아비가 굶어 죽을 경우에는 하룻동안 밥을 먹지 않겠다는 뜻으로 도백에게 칙유하고, 그 후부터는 장선(掌膳)·상의(尙衣)의 물품에서부터 일상 쓰는 경비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절약하여 별도로 한 창고에 저축하였으니, 그것은 정히 백성들에게 신의를 보이고 겸하여 오늘날의 용도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특별히 1만 민의 돈을 내리니, 도백으로 하여금 숫자에 맞추어 곡식을 사서 계속 발송하여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몇 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고도 환곡과 진곡이 부족하면 해당 목사가 조치하고 즉시 치계하라. 재계하는 밤에 촛불을 밝히고 십행(十行)의 교서를 불러 쓰게 하노니, 하나는 도민(島民)을 위해서이고, 하나는 연민(沿民)을 위해서이다. 회남(淮南)의 점(占)에 의하면 동지(冬至)에서 원조(元朝)까지가 50일이 될 경우 곡식이 잘 되어 백성들의 식량이 족하다고 하였는데, 금년의 원조는 동지로부터 계산하면 50일이 꼭 되고 초 4일에 또 신일(辛日)을 만났으니, 풍년을 얻을 징조이다. 내가 이로써 팔방(八方)에 빌어 섬 백성들의 기쁨을 배로 늘릴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전라 감사 서정수(徐鼎修)가 제주 목사 이우현(李禹鉉)이 섬 안에 분진(分賑)한 일을 낱낱이 들어 장계한 내용을 가지고 아뢰기를,
"세전에 자체로 곡식을 마련하여 4천 명을 진구한 일 이외에, 정월부터 4월까지 12번에 걸쳐 장정과 약자를 통틀어 4만 7백 35명에 들어간 쌀이 1만 4천 석입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이미 들여보낸 각종 곡식이 1만 1천 1백 14석이고 이미 마련하여 놓고 들여보내지 못한 것이 5천 석이니, 거기다 절미(折米) 7천 2백 60여 석을 더 조치한 다음에야 해당 목사가 청한 수효에 맞출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호남 연해가 막 대진(大賑)을 겪어 민력(民力)이 거듭 곤궁한데, 이제 또 1만 포(包)에 가까운 곡식을 더 보내게 된다면 장차 관민(官民)이 모두 곤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미처 들여보내지 못한 5천 석은 비록 해당 목의 총계(總計) 가운데 들었지만 이것은 세 고을 수령들이 스스로 마련한 것이고, 가령 5백여 석과 세전에 사사로이 무역해 옮긴 것 수천 석은 총계 이외의 것이라 치더라도 또 봄이 되어 물이 따뜻해서 상선(商船)이 몰려들게 되면 사사로이 무역한 수천 석이 세후에는 의당 더 늘어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도민(島民)들은 타 지역으로 내보내는 것을 허락하여 편리할대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하라는 뜻을 전에 이미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기르는 암말을 만일 육지로 내다 팔도록 허락한다면 역시 곡식을 마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해당 목사가 청한 가운데 7천 2백 석이 부족한 것은 의당 몇 천 석의 숫자를 감한 것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해도에 왕복해서 다시 실제 숫자를 헤아려 장문(狀聞)하게 한 다음에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만약 한 백성이 굶어 죽더라도 1년 동안 하루에 한 끼씩의 식사를 줄이겠다고 이미 말을 했는데, 어떻게 차마 제주도의 백성들을 속이겠는가. 경들은 해당 목사에게 특별히 유시한 것을 보았으면 알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내린 1만 5천 냥으로 설혹 보리와 벼 1만 포를 무역한다 하더라도 역시 차마 강해(江海) 백성들의 힘을 거듭 번거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잉축조(剩縮條)를 내려 백성들의 부모로서 열 손가락을 다 아끼는 뜻을 보인 것이다. 모름지기 이런 뜻을 알아서 도신 및 해당 목사에게 행회하여 미처 운반하지 못한 5천 석과 지금 내려보낸 1만 석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 외에 만일 부족함이 있으면 목사로 하여금 다시 장문하게 하라.
그리고 통상(通商)·행고(行賈)는 본디 급한 일인데, 대저 해산(海産)의 이익은 양대(凉臺)와 달라서 봄날씨가 따뜻해진 후에도 전복과 미역 등속이 많이 채취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도신 및 연읍의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자기의 일처럼 여기고 마음을 써서 권면하게 하라. 인하여 제주목으로 하여금 민간에 효유하여 값을 넉넉하게 주고 무역하게 한다면 풍문을 듣고 몰려들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암말을 내보내는 일은 전에도 행하여 우마(牛馬)가 작년 봄에 거의 바닥이 났으므로 절제 없이 그대로 맡겨 두는 것은 자못 앞으로 번식시켜 기르는 방도가 아니니, 역시 목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각별히 몸소 검칙해서 두 가지 목적을 다 달성하는 이익이 있게 하라. 두 해 동안 흉년이 들어 전야(田野)가 개척되지 않고 있음을 알겠다. 세 고을의 수령들은 고을을 순행하면서 농사를 권장하는 일을 전일보다 1백 배나 힘을 쓴 다음에야 금년 가을에 풍년이 들 것을 기약할 수 있으니, 별도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1월 4일 신해

사직에 기곡제를 지내고, 인하여 태묘(太廟)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윤명이 상소하기를,
"신이 조정에 선 지 이미 50년이 되었고 나이도 90에 가까워졌습니다. 평생 동안 한 일이 옹졸하여 오직 분수를 지키는 것만 알았고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다 보니 점점 조심하는 것만 습관이 되어 깊숙이 기거하면서 출입이 드문 지가 이미 30년이 되었는데, 띠고 있는 삼자함(三字啣)003)  의 미칭(美稱)은 또한 자신을 표방하기에 가까운지라 이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나이가 차서 벼슬을 그만두는 예를 감히 끌어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저 치사(致仕)하는 의리는 예경(禮經)에 실려 있어 선배 등이 행한 바인데, 신 같은 문질(文質)이야 선배들에 비하면 가당치도 않지만 그 나이를 돌아보면 이미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비록 늦었으나 또한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집안이 대대로 은우(恩遇)를 입어 은혜가 산과 같고 덕이 바다와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만분의 하나도 비유되기에 부족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4대가 녹(祿)을 먹고, 5세(世) 동안 연석(筵席)에 올랐으니, 이는 또 고금에 드문 일입니다. 오리나 기러기의 자취는 오거나 가거나 관계될 것이 없고, 견마(犬馬) 같은 신의 정성은 나가거나 물러나는 데에 아무런 간격이 없으니, 윤허를 내리시어 생성(生成)해 주시는 은택을 끝까지 다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나이가 90이고, 등제(登第)한 지도 60년에 가까우며, 자급은 보국(輔國)에 이르렀고, 작질은 대관(大官)과 맞먹게 되었다. 4대가 같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5세가 같은 당(堂)에서 진대(晉對)하고 있다. 경이 회갑 때 얻은 증손(曾孫)이 감귤제(柑橘製) 방(榜)에 합격하였고, 경의 아들은 중신(重臣)으로 주연(胄筵)에서 지우(知遇)를 받아 일찍이 군무(軍務)를 관장하고 문임(文任)도 담당했었다. 장차 내명년 섣달이 되면 경이 기사(耆社)의 요원(僚員)이 되겠기에 설날에 세찬(歲饌)을 보내면서 ‘나이가 많고 복이 많다.’고 일컬은 것은 참으로 지나친 미칭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경의 글을 보니 삼자(三字)의 미칭을 거듭 말하였거니와, 경은 이미 늙어서 진실로 사무를 책임지울 수 없으니, 치사의 청은 예에 있어서 타당하며 또한 자랑할 만한 상서로운 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경의 봉조하(奉朝賀)의 칭호는 의당 편전에 친림하여 선마(宣麻)004)  하겠다."
하였다.

 

1월 5일 임자

비변사가 전라 감사 서정수의 장계를 복주하기를,
"그 하나는 진도군(珍島郡)의 곡식 장부의 빈 수량에 대한 일입니다. 한 고을에 빈 수량이 3천 8백여 석이나 되는데 이른바 관포(官逋)한 것이 더욱 매우 놀랍습니다. 전후로 죄를 범한 수령들과 이 사실을 덮어 둔 도신에 대하여 장부를 대조한 다음 지명해서 현고(現告)하겠다는 말이 있으니, 그의 장계를 기다려서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진도 목장의 일입니다. 해남(海南)과 진도에는 모두 해당 고을에서 관리하는 목장이 있는데, 만일 진도의 목장이 바다가 사이에 있는 것이 폐단이 된다 하여 목관(牧官)을 이설(移設)한다면 바다를 사이에 둔 폐단이 장차 해남으로 돌아가게 되니, 도신의 장계에서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청이 참으로 타당합니다. 수영(水營)에서 송전(松田)을 널리 차지한 데에 대해서도 이미 경계를 엄히 세웠으니 특별히 금단(禁斷)을 가해야 하고, 해당 시(寺)의 정채(情債)가 과외로 과다한 것은 본사(本司)에서 엄히 단속하여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소안도(所安島)의 둔전(屯田)에 대한 폐단입니다. 원세(原稅) 외에 궁차(宮差)의 공궤(供饋)를 결호(結戶)에서 거두는 일 및 과외의 명색(名色)은 법식을 정하여 혁파해야 하며, 궁차가 왕래하는 비용 역시 잡비조에서 취해 쓰게 하면 둔전의 폐단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본사(本司)에서 엄히 내사(內司)를 단속하여 법을 어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소안도와 제주에 공무로 다니는 관원들이 폐단을 끼치는 일 및 섬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이른바 ‘특별히 도민(島民)을 가려 고직(庫直)으로 차정해서 도회(都會) 삼읍(三邑)005)  으로 하여금 미리 공제할 값을 주어 공무 관원의 왕래를 전담하게 하여 더 이상 도민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 말이 참으로 폐단을 구제하는 요령이니, 이에 의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보(軍保)의 고역(苦役)을 헐한 군역으로 바꾸어 충정하고, 도봉(都捧)의 번전(番錢)은 달을 기다려서 상납하게 하며 전선(戰船)을 개조할 때에 배를 끌어내는 등의 역사를 돕는 군정은 더 이상 도민으로 침책(侵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각 청(各廳)의 계방전(契房錢), 본읍의 잡역전(雜役錢), 이진창(梨津倉) 소속인에 대한 예급전(例給錢), 추자도(楸子島) 별장(別將)의 방목전(房木錢) 및 이진에서 갈삭(葛索)006)  을 무납(貿納)하는 등의 일은 본도에서 이미 혁파했었는데, 시일이 조금 오래되자 매양 잘못을 답습하는 근심이 많으니,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영구히 준행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소안도에 진을 설치하는 일입니다. 섬 가운데의 폐단에 대해서 모두 이미 법식을 정하였으니, 굳이 진을 설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을 설치하자는 한 조항은 우선 장청(狀請)에 따라 그대로 두어야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군의 재작년 일은 바로 본군의 일대 변혁으로 계묘년의 간성(杆城)에 비교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이곳 도백은 바로 그때의 관동백(關東伯)으로서 간성 백성으로 떠났던 자는 돌아오고 머물렀던 자가 소생한 것은 도백의 성력(誠力)에 힘입은 바가 많았는데, 그때는 그렇게 하고 이번에는 혹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조가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하는 뜻이겠으며 비국 당상들을 주사(籌司)에 모아놓고 순삭(旬朔) 동안 강마한 본의이겠는가. 도백으로 하여금 먼저 비답과 전교를 쓰고, 그 다음에 폐단을 바로잡은 사건을 기록해서 군아(郡衙)·목관(牧館)·도해(島廨)에 게시하기를 한결같이 간성 건봉사(乾鳳寺)의 예처럼 하라. 그러나 바로잡는 것이 근본을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해당 목장의 이른바 송전(松田)의 명색에 대해서는 경계만 정할 뿐 아니라 즉시 혁파하고, 만약 수영(水營)의 소속인이 하나라도 근처에 발을 들여 놓아 전과 같이 침징하는 일이 있으면 수사를 곧바로 그 땅에 정배하고 목관(牧官)은 엄히 형장을 쳐서 충군(充軍)시킬 것이다. 소안도에서 궁방(宮房)에 납부한다고 하는 것 역시 아울러 호조에 세를 내게 하고, 그 나머지 토지의 소출은 도민에게 주되, 궁차(宮差)니 도장(導掌)이니 하는 자들이 다시 혹시라도 바다에 모습을 나타내면 평민을 해치는 것이 도적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비록 진영(鎭營)에 부쳐서 처치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런 뜻도 아울러 엄히 신칙하라. 이렇게 하고도 진도 한 고을에 다시 ‘폐막(弊瘼)’ 두 글자가 있게 된다면 그곳 수령의 죄가 어떤 율에 이르겠는가. 오직 도백이 어떻게 규제를 엄히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일은 조금 오래되면 매양 해이해진다. 이 때문에 간성은 지금까지도 매년 세말이 되면 민호의 정착해 사는 실상과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인구의 실제 숫자를 장문하게 하는데, 지난 겨울에 그곳 도백이 등문한 것을 보니 계묘년 이전의 실제 호수보다 증가된 것이 과연 많았다. 조령(朝令)이 어찌 관동에서는 행해지고, 호남에서는 행해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역시 도백으로 하여금 5년을 한정해서 매년 세말마다 작년과 금년에 바로잡은 여러 조항 가운데 어떤 것은 효과가 있고 어떤 것은 도리어 폐단이 되었다는 것을 조목별로 열거해서 장문하게 하여 때때로 어사(御史)를 보내 다시 고찰할 뒷받침으로 삼도록 하라. 오늘밤은 대향(大享)을 대신 지내게 한 날인데, 재계하고 앉아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백성들의 일에 관계되기 때문에 열성조에서 백성들을 보호하던 지인 대덕(至仁大德)을 본받아 일분이나마 그 뜻과 일을 계승하는 단서를 붙이노니, 도신과 수령이 된 자들이 비록 소홀히 하고자 한들 되겠는가. 아울러 이런 뜻을 가지고 공문으로 신칙하라."
하였다.

 

편전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태묘의 춘향(春享)이 내일이기 때문이다.

 

장령 정관휘(鄭觀輝)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세전의 상참(常參) 때 정승이 한유(韓鍮)의 일로 진달하여 윤허까지 받아서 입이 있는 자는 모두 전하고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미 많은 날짜가 지나갔는데도 아직껏 조지(朝紙)에 반시(頒示)하지 않아서 도리어 물정을 의혹하게 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조지에 내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이 첫 연석에서 과연 한유의 일에 대하여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없애버리라는 청이 있어 그렇게 할 것을 윤허하였으나, 추후에 들으니 현재 있는 것이 없다기에 거조(擧條)를 반포하지 말도록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1월 6일 계축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아뢰기를,
"유사문(柳師文)이 임금을 욕한 죄는 엄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즉시 끝까지 엄히 조사하는 일은 오직 대신(臺臣)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도 대신에게 허실을 조사하는 것이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 일은 예사로운 죄과와는 다르니 유사문의 일로 진소(陳疎)한 간장(諫長)과 발계(發啓)한 대신을 아울러 함문(緘問)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겨 정원에 명하여 전 대사간 윤행원(尹行元)에게 물어 아뢰도록 하였다. 행원이 아뢰기를,
"사문은 곧 유성한(柳星漢)의 아비로서 감히 성 안에 버젓이 있으면서 손들을 맞이하여 하는 말이 모두가 임금을 욕하는 흉패한 말들이었다는 것이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해지고 있으므로, 우분(憂憤)이 격발하여 과연 성토했습니다. 또 그때 친히 들은 사람을 법조에서 여러 달 동안 잡아 가두었다가 마침내는 유배하기에 이르렀으니, 법조에서도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신(臺臣)의 말이 은연중 허실이 서로 불분명한 사이로 돌렸으니, 대신이 과연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알아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이미 그 사실을 듣고 나서는 친히 보고 듣지 않은 것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짤막한 상소로 징토한 것이니, 이는 오로지 온 나라가 함께 분노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간에게는 비록 풍문만 듣고 탄핵하는 것도 허락하지만, 이러한 일이야 어찌 풍문만 듣고 논열할 수 있겠는가. 친히 들은 증거를, 법조에서 붙잡아 가두었다가 유배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으나, 조당(曹堂)이 만약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았겠는가. 지금에 와서 상소의 말이 경솔했던 데 대하여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미 지적할 만한 증거가 없어 유사문은 깨끗이 죄를 벗어났으니, 스스로 정계(停啓)했어야 한다. 형정(刑政)으로 헤아려 보건대, 해당 대간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삭직(削職)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는데, 그 후에 좌참찬 심이지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임자년 6월 형조에 재직할 적에 형조에 갇힌 죄수 이광태(李光泰)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유사문의 인척이었습니다. 홍억(洪檍)이 판서로 있을 때에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 하여 잡아 가두었던 것인데, 그의 죄상을 전의 당상이 한번도 조사하지 않아서 문안(文案)이 없기 때문에 신 역시 전대로 그냥 두었다가 나중에야 유배하였습니다. 그때 일의 상황은 여기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하직 인사를 올리는 곤수(閫帥)를 소견하였다.

 

1월 7일 갑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세수(歲首)의 호궤(犒饋)를 행하였다.

 

반궁(泮宮)에서 인일제(人日製)를 베풀었다.

 

영춘현(永春縣)의 유절호(流絶戶)007)  의 포흠난 곡식 3천 5백 석을 탕감하고, 군정의 허액(虛額) 1백 석을 다른 고을로 떠넘기도록 명하였는데, 본 현감 이상황(李相璜)의 소진을 인하여 묘당에서 회계하였기 때문이다.

 

1월 8일 을묘

영희전(永禧殿)과 저경궁(儲慶宮)에 전배(展拜)하였다.

 

1월 9일 병진

서유신(徐有臣)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10일 정사

대한(大寒)에 나무가 많이 얼어 죽었는데, 뒤에 중국인이 전한 말을 들으니 온 천하가 같은 날 다 이렇게 되었고 안남국(安南國)의 사신은 북경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였다.

 

경범 죄수를 석방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지난번 강계부(江界府) 자성(慈城) 경계를 점차 개간하라는 일을 도백에게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평안 감사 김재찬(金載瓚)의 장계를 보니 ‘명년부터 자성 동구(洞口)에 40∼50리를 한정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면 수 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을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하자는 논의는 각기 이견을 고집할 뿐 모두 일정한 견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 연안에 50∼60리를 한정해서 더 개간하자는 말에 이르러서는 읍보(邑報)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 이익만 있고 해가 없음을 보장할 수가 있습니다. 압록강(鴨綠江) 상류가 양계(兩界)에 가로질러 있어 만약 한 부대(部隊)의 민호로 하여금 강을 따라서 들어가 살게 한다면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도가 반드시 열 진(鎭)의 잔졸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막론하고 들어가 방어하는 일을 면제할 수 있고, 몰래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할 수 있어서 산삼 캐는 정사도 반드시 전일보다 나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가 살기를 허락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의논할 필요도 없이 1백여 리의 땅에 배나 더 개간하도록 허락할 것으로 청하는 바입니다. 풍문을 듣고 들어갔다가 붙여 살 곳을 잃어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기도 어렵게 된 자가 1천 8백여 호나 되도록 많다고 하는데, 장청(狀請)한 가운데 개간할 토지가 1천 3백여 호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비록 사람은 많고 땅이 좁은 염려는 있으나 우선 개간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들어가 산 백성이 전후로 2천 5백여 호가 되고, 그밖에 또 와서 토지를 차지하지 못한 나머지 호가 5백여 숫자이니, 합치면 3천 70여 호가 됩니다. 이들은 모두 사방에서 온 오합지졸로서 실로 길들이기 어려운 염려가 있고, 본부에서 1백 80리나 되는 거리에 두 개의 큰 재가 사이에 막혀 있어 실로 통제하기도 어려우니, 의당 별도로 관장(官長)을 두거나 혹은 진보(鎭堡)를 이설해서 통제하는 방도로 삼아야겠습니다. 도신과 수신으로 하여금 읍진을 설치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자세히 토의하여 조목으로 나열해서 장문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간 서미수(徐美修)가 상소하기를,
"한 달 전에 우의정이 첫 연석의 건의에서 《명의록(明義錄)》의 의리에 대해서 간절히 말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의 기강을 천명하고 난역(亂逆)의 본말을 소급해 논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세도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뜻을 귀일시키는 큰 요지였는데, 그 중에 한유(韓鍮)를 설원(雪冤)하자는 청도 바로 《명의록》 가운데의 한 가지 일입니다. 사형당한 한 사람의 일을 들고 나서서 원수에 대한 울분을 발설하자,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거기에 따라 시행하기를 윤허하시었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 일을 갖추어서 반포하여 곧 사실이 환히 밝혀지기를 크게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끝내 이를 반시하지 않고 있으니, 정원의 이같은 처사에 대해서 실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헌소(憲疏)의 비답처럼 상께서 반시하지 말게 한 것이라면 대신(大臣)이 서리를 가둔 뒤에야 비로소 반시하려는 것처럼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이로써 당초에 덮어 두려고 한 잘못이 오로지 정원에 있었고 상께서 반포하지 말도록 한 하교는 맨 나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관계되는 바가 얼마나 중대한데 이처럼 머뭇거려서 공의(公議)가 들끓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도록 한단 말입니까. 의금부의 문안(文案)이 있고 없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해당 승지에게 속히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하고, 그날의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즉시 반포하게 해서 중외의 의혹을 풀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해당 승지란 신기(申耆)를 지적한 것인데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팔도의 춘조(春操)008)  를 정지하였다.

 

1월 11일 무오

이에 앞서 우의정 윤시동이 의금부에 있는 심의지(沈儀之)의 추안(推案)과 형조에 있는 엄홍복(嚴弘福)의 문안(文案)을 아울러 없애버리기를 청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의금부가 아뢰기를,
"추안과 문안을 이미 없앴으니, 엄홍복의 일에 간련(干連)되어 귀양간 사람은 놓아보내고 도류안(徒流案) 역시 지워버려야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광주부(廣州府) 설치에 대하여 첨가한 절목(節目)을 올리니, 아울러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본부(本府)에서 달에 따라 배정한 조항의 부아병(府牙兵)&middot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