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정축
대사간 임제원이 상소하여 유도 대신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일 무인
명하여 장헌 세자가 온천에 행행했을 때 배종관이었던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 안춘군(安春君) 동(烿)에게는 옷감과 음식을 주고, 용은군(龍恩君) 윤염(尹琰)은 가증하고, 함경도 관찰사 조종현(趙宗鉉)에게는 가자하도록 하였다. 또 명하여 예관을 보내 고 중신 조영국(趙榮國)·조운규(趙雲逵)를 치제하고, 고 중신 이담(李潭)의 아들 이정모(李靖模)를 수령으로 조용하며, 그 나머지 차원(差員)으로 간 수령들에 대해서는 해당 도신에게 물어서 일체로 가자하도록 하고, 또 명하여 그 행차를 수행했던 무신 및 군교와 서리·하인들을 찾아서 아뢰도록 하였다.
이조원을 예조 판서로, 황승원을 이조 참판으로, 정상우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3일 기묘
제주 목사 이우현이 곡식을 운반하는 배가 모두 도착했다고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1만 냥의 돈을 구획해서 무역한 곡식이 제석일(除夕日)에 다 도착되었으니, 어찌 그 다행함을 이루 감당하겠는가. 연초에 특별히 내린 어용조(御用條)로 무역하여 보낸 곡물 역시 과연 차례로 도착했는가? 일찍이 매일 밥 한 끼씩을 거르는 것으로 근심을 조금 푼다고 말했었는데, 어찌 차마 섬 백성들을 속이겠는가. 이것은 절약하여 떼어 준 것이니, 경은 이 한 말 한 되의 알알의 곡식이 모두 어공(御供)에서 나온 것임을 명심하여 두루 나누어 주어서 조금도 속이지 않는 보람이 있게 하라."
하였다.
명하여 고 충신 정운(鄭運)의 후손 정계주(鄭繼周)를 사복 내승(司僕內乘)에 주의하고, 궁시(弓矢)를 내려 내시(內寺)에서 무예를 익히게 하도록 하였다.
2월 4일 경진
각부에서 보고한 바 과년토록 결혼하지 못한 남녀들에 대한 별단이 거의가 부실하였으므로, 명하여 한성부의 당상을 추고하고 기한을 5일 더 물려서 특별히 신칙해 찾아내도록 하였다.
정례 당상(定例堂上) 윤행임(尹行恁)이 아뢰기를,
"원행 때 노량(鷺梁) 이남에 횃불을 세우는 것은 자못 원행에 따른 모든 일에 대하여 벼를 무역해서 도와주는 법의(法意)가 아닙니다. 또 선인문(宣仁門) 이하 이현동(梨峴洞) 어귀 이상에 좌우 통계(左右統契)를 설치하여 궁행(宮幸) 때 횃불 대신 등(燈)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 실로 편당합니다. 그러니 이번 원행 때에 노량 이남에 이를 본받아서 등을 단다면 그 비용이 줄고 그 제도가 편리할 것이니, 절목(節目)을 만들어 영구히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역원이 아뢰기를,
"왜학(倭學) 《첩해신어(捷解新語)》는 다만 그 방언(方言)을 언문으로 주석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뜻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역관 김건서(金健瑞)가 왜인들과 여러번 문난(問難)하여 12편을 만들어 《첩해신어문석(捷解新語文釋)》이라 이름하였으니, 이것을 반포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별재자관(別䝴咨官) 정사현(鄭思賢)이 연경에서 돌아와 예부의 자문을 바쳤는데, 그 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에서 자문을 보냅니다. 주객사(主客司)에서 조선국 차래 궤보 재자관(朝鮮國差來跪報䝴咨官) 정사현이 정칭(呈稱)한 ‘태상황제의 전위(傳位)에 따라 삼대절(三大節)에 올릴 표식(表式)에 대해서는 대부(大部)에서 반포해 보낸 것을 받았으나, 황상(皇上)의 만수 성탄(萬壽聖誕) 및 삼절(三節)의 진하(進賀) 표식에 대해서는 반포해 보낸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삼절에 올리는 방물(方物)은 과거에는 연공(年貢) 안에다 합병하여 올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황상이 등극하신 처음을 당했으니 삼절에 올리는 방물을 지난 예대로 연공 안에다 합병해서 올릴 것인지, 아니면 혹 사신을 차견하여 올려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삼가 바라건대 대인께서 자세히 회답 자문을 작성해 주시어 재자관으로 하여금 먼저 출발하여 귀국해서 보고하게 함으로써 조석으로 기다리고 떠받드는 국왕의 정성에 부응하소서.’라고 한 것을 인하여 그 사유를 갖추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국 궤보 재자관 정사현이 정청(呈請)한 만수성절·동지·원조 삼대절의 하는 표식은 본부에서 아직껏 규식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만수 성탄에 이르러서 삼절에 바치는 방물은 지난 예에 의해서 연공 안에다 합병하여 올리면 됩니다. 해당 재자관은 이미 작년 12월 13일에 자문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와서 일을 마친 다음 응당 먼저 떠나서 귀국하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을 일체 조선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자문을 보냅니다."
2월 5일 신사
명하여 호남 방백이 천거한 정충환(鄭忠煥) 등 3인에 대하여 교관(敎官)을 가설하여 단부(單付)할 것을 전제로 말을 주어 올려 보내게 하고, 다시 나이 40쯤 되는 합당한 사람들은 찾아내어 초계할 것을 제도에 일체로 엄칙하도록 하였다.
2월 6일 임오
부교리 이귀운(李龜雲)이 상소하기를,
"이번 별시(別試)에 강(講)과 제술(製述)이 있음은 시험이 임박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었는데, 과장을 설치한 날에 찌를 뽑아 강을 시험한 결과 하나도 왼 자가 없었고 행동거지와 걸음걸이도 분잡하기가 막심하였습니다. 종장(終場)에 이르러서는 문에 와서 방황하다가 절반 이상의 숫자가 스스로 물러갔고 혹은 들어왔다가 곧 나가기도 해서 일소(一所)·이소(二所)에 입장한 자가 3백여 명에 불과하였으니, 과거 제도를 설치한 후로 이런 모양은 전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들어온 자 역시 반드시 모두 강과 제술이 뛰어난 것이 아니요 요행히 무릅쓰고 나온 자가 절반이고, 그 들어오지 않은 자라 하여 반드시 강과 제술을 못해서가 아니라 근신하여 겸퇴한 자가 반이나 됩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모조리 강과 제술을 못하는 무리로 의심한다면 어찌 많은 선비들의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유사(有司)된 신하가 누차 단속하는 즈음에 혹 알맞게 처리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고개를 움츠리고 들어갔던 자들이 많이 수수방관만 하다가 나오게 했으니, 이 법은 아마도 선비들을 바른 데로 인도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폐단을 바로잡는 계책은 오직 먼저 가르치고 뒤에 시험을 보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선조 기묘년 별시(別試) 뒤에 특별히 한 경(經)의 강을 베풀어 여러 해 동안 행한 결과 과연 실효가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구전(口典)을 밝혀서 각기 경 하나씩을 수업하게 하고 무릇 회시(會試)의 과거가 있을 경우 반드시 별시의 예에 따라 시행한다면 선비들이 모두 전공하는 경서가 있게 되고 사람마다 익숙해진 공부가 있게 되어 창졸간에 응시하더라도 거의 오늘날처럼 낭패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2월 7일 계미
장령 이정운(李貞運)이 상소하기를,
"사습이 날로 투박해져서 과거의 폐단이 더 자심해지고 있습니다. 대거(對擧)와 별시(別試)는 법의가 더욱 중한데도 경전의 장구를 통하지 못하고, 표책(表策)의 격식을 익히지 못한 자가 거개 무릅쓰고 응시해서 심지어는 첫날에 파장(罷場)하는 일까지 있으니, 많은 선비들의 수치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시사(試士)하신 법이 이미 엄정하였기 때문에 남에게서 제술을 빌리고 글씨를 빌리는 무리들이 거개가 과거에 응시할 기대를 끊음으로써 거의 일대 변혁의 효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경과(慶科)를 인하여 그들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이 그들을 봐주는 데에 너무 지나친 결과, 심지어는 전정(殿庭)의 지척에서도 질서 없이 앉았다 섰다 하며 듣고 웃고 하는 것이 난잡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친림(親臨)하는 도기과(到記科)를 이미 설치하였다가 다시 철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또 이번 초장(初場)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만일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대면하여 시험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 법식을 정하여 단행한다면 참다운 재사와 학력 높은 선비 이외에는 감히 함부로 나갈 생각을 갖지 못함으로써 절로 분잡할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비록 박절한 데에 가까우나 마침내는 규율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사습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고 과정을 엄숙히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엄숙하게 될 것입니다.
또 신이 이번에 시험을 관장한 여러 신하의 일에 대해서 개탄하는 바가 있습니다. 무릇 책을 끼고 마구 들어온 자들을 적발하여 논죄하는 것은 실로 과장을 엄히 단속하는 도리에 맞으나, 다만 듣건대, 그날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과장 밖에 이르렀는데 입장한 자가 절반도 못되어 갑자기 과장문이 닫혔다고 하니, 이런 광경은 전에 보지 못한 바입니다. 그리하여 종장에 미쳐서는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한 나머지 좌정(坐停)하여 응시하지 않은 자도 있어, 마침내 먼 시골에서 발을 싸매고 온 무리들로 하여금 풍문을 듣고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튿날의 일로 말하더라도 문에 들어간 처음에는 비록 나누어 앉았으나 가랑비가 온 다음에는 문득 다시 뒤섞여 앉아서 그 분란함이 초장보다 거의 더 심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사습을 바로잡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나, 역시 시험을 관장한 신하가 잘 검속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1소와 2소의 시관에게는 아울러 견파하는 법을 써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여러 시관을 중히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2월 8일 갑신
차대하였다. 고 유신 이항(李恒)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고, 고 병사 오정방(吳定邦)에게는 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의정하게 했는데, 이조 판서 심환지가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명하여 호조 판서 이시수를 체직하였다. 다시 전교하기를,
"수십년 동안 염방(廉防)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져서 당사자는 일이 절박하여 억지로 나와 응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번 부응하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상격(常格)에 해당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또 처의(處義)와 분의(分義)의 경중에 관한 말을 가지고 애써 그를 나오게 하는 뒷받침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대저 세도와 조정의 기상이 날로 낮아지는 것이 꼭 여기에 말미암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크게 변혁시켜야 할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른바 탄핵하는 글이란 모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데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매양 조제하기에 급한 나머지 풍속을 바로잡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호조 판서 등 여러 사람이 남의 탄핵을 들은 것은 바로 관잠(官箴)의 아름다운 규례에 불과한 것이지만, 일변하는 도리에 있어서 바로 무단(武斷)를 써야 할 처지를 당했으니, 봉심(奉審)하는 일이 비록 소중하나 의당 잠깐 염방을 펴도록 하겠다. 호조 판서 이시수를 우선 체직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수응하기가 괴로우니 어찌 차례로 인피하기를 기다려 체직하랴. 병조 판서와 형조 참판 역시 우선 체직하도록 허락한다. 더구나 대각의 관원이겠는가. 양소(兩所)에 나갔던 감시관(監試官)의 대함(臺啣)은 일체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가, 곧 다시 호조 판서 이시수와 병조 판서 구익(具㢞)은 잉임하라고 명하였다.
한광근(韓光近)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임제원(林濟遠)으로 대신하였다.
2월 9일 을유
경모궁에 나아가 재숙하고 여러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아뢰기를,
"연초에 삼가 하교를 받들었는데, 원자가 금년에 외부(外傅)에게 나가게 되었으니, 신들은 경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학(小學)》 명륜편(明倫篇)의 ‘행전 매고 신 신고 신끈을 맨다.[偪屨着綦]’와 같은 말들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자세히 해석하지 못한 것이 없다. 그리고 하늘이 밝기 전에 일어나고 삼경이 된 뒤에야 잠자리에 드는 것은 본성이 그런 것이다."
하였다. 낙성이 아뢰기를,
"타고난 기가 양강(陽剛)하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은 아뢰기를,
"옛날에는 8세가 되어야 비로소 소학에 들어갔는데, 7세에 이미 《소학》 2권을 읽었으니 원자의 학문은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것입니다."
하였다.
지평 이시원이 조복(朝服)으로 연석에 나오고 해태관[獬豸]을 쓰지 않았다 하여 승지 황승원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시원이 인피하므로 체직을 허락하였다.
2월 10일 병술
경모궁의 춘향(春享)을 친히 거행하였다.
2월 11일 정해
외정리소(外整理所)에서 절목(節目)을 올렸다.
"정리란 이름은 탁지(度支)에서 시작되었는데, 대개 상의 행차가 행차 도중 밤을 지내는 곳에 탁지가 기일 전에 가서 모든 행전(行殿)의 방롱(房櫳)·완점(筦簟), 장악(帳幄)·궤안(几案) 등속에 관계된 것들을 정돈하고 수리해서 새롭게 만드는 일로서 법을 제정한 뜻이 근엄하였다. 그런데 원(園)을 옮긴 뒤로는 화성에 행행하여 이틀밤을 지내고 돌아오는 것이 해마다 상사가 되어, 비로소 탁지에 명하여 항례에 구애받지 말고 경비를 본부에 조치해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전교하기를 ‘여기에도 비용을 쓰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별도로 경영하게 해서 이름을 ‘정리곡(整理穀)’이라 하였다. 또 비로소 장용 외영(壯勇外營)으로 하여금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게 하였다. 을묘년 봄에 이르러서는 상께서 자전을 받들고 화성에 행행하였을 때 위로 어주(御廚)에 공급하는 비용에서부터 아래로 백관·군병·아전·하인의 노자와 호궤하는 비용에 이르기까지의 총 10여만 냥을 국가의 경비에서 덜어내지 않고 모두 내영(內營)에서 관장하게 하고서 이름을 정리소(整理所)라 하였다. 그래서 이를 이미 대궐 안에 설치하고 또 외소(外所)를 설치하였는데 외소는 화성 유수가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현륭원 행행 때의 반전과 호궤하는 양식 이외에 다리를 수리하거나 길을 닦는 등의 일과 거탄(炬炭), 시초(柴草)의 비용과 금고(金鼓)·기치(旗幟)·화구(火具) 등 군에 사용하는 물건 등을 모두 이로써 마련하였다. 그리고 선품(膳品)과 기명(器皿)·포백(布帛)·저관(楮管)·서적(書籍)·궁시(弓矢) 따위까지도 또한 탕고(帑庫)를 별도로 설치하여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안으로는 영사(營司)의 비용을 없애고 밖으로는 민읍(民邑)의 수고를 덜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외영에서 절목을 만들어 올리면서 총명칭을 ‘외정리소 절목(外整理所節目)’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 가운데 교량 절목(橋梁節目)에 대하여 말하자면, 전에는 교량을 기영(畿營)에서 주관하여 근방에 사는 백성들이 계(稧)를 만들어 놓았는데, 앞으로는 정리소에 부쳐 거행하도록 한다. 외탕고 절목(外帑庫節目)에 대하여 말하자면, 하나는 수원부에 있고 하나는 시흥현에 있어, 유무(儒武)의 권과(勸課)와 시상(施賞)의 비용에 응한다. 내용고 절목(內用庫節目)에 대하여 말하자면, 내용고는 다섯이 있는데, 첫째는 관천고(筦千庫)로서 원소(園所)의 일체 수용에 대비하고, 둘째는 일용고(日用庫)로서 지선(紙扇)과 필묵(筆墨)을 보관하는 곳이며, 셋째는 월용오(月樁廒)로서 서적과 무기를 저장하여 문무가 서로 보완이 되게 한 것이고, 넷째는 무진장(無盡藏)으로서 축수하는 뇌작(罍爵)과 유행하는 화보(貨寶)를 간직하며, 다섯째는 불영탕(不盈帑)으로서 포면(布綿)·금백(錦帛)을 저장한다. 외별고 절목(外別庫節目)에 대하여 말하자면, 행행 때 어주(御廚)를 마련하는 곳이다. 별잉고 식례(別剩庫式例)는 군교(軍校)의 지방(支放)을 지급하는 것이다."
2월 12일 무자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옛날에는 나라의 부(富)를 물으면 말[馬]의 숫자로 대답하였으니, 마정(馬政)은 정사 가운데 큰 정사이다. 근래에는 태복시에 일이 많아서 마정이 진작되지 못하니, 경이 모름지기 마음을 써서 동칙하라."
하였는데, 시동이 이때 사복 제조의 직임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홍낙성이 정사(呈辭)하니, 승지를 보내 유시하기를,
"빈대(賓對)와 진연(診筵)에 참석하지 말도록 허락하니, 안심하고 섭양하여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헌납 유하원(柳河源)을 흑산도로 정배하고, 좌의정 채제공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하원이 여러 대신(臺臣)과 진계하면서 이주석(李周奭)의 일에 이르러서는 의율(擬律)한 것이 법식에 어긋났다고 말하고 인하여 정계(停啓)하고자 하니, 여러 대간이 모두 피혐하였다. 그러나 상이 하원을 흑산도로 정배하라고 명하고, 마침내 전교하기를,
"이주석의 일로 말하자면 그가 아뢴 말은 전도착란된 것이 막심하다. 그러니 하원이란 자가 참으로 소견이 있다면 그의 조어(措語)를 고칠 일로 발론했으면 될 것이다. 그 역시 인륜이 있는 자이니 의당 관계가 막중함을 알 것인데도, 주석의 결어(結語)가 격식에 어긋났음을 빙자하여 함부로 정계한다는 말을 꺼내서 이를 굳게 주장할 일로 간주하고 밤새도록 다투었다. 요사이 나라의 기강이 비록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막중대사를 처분하는 일을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승지를 보내 좌의정 채제공에게 묻게 했더니, 제공이 그를 변호하였다. 그러자 상이 하교하여 그를 책망하니 제공이 마침내 금오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이에 전교하기를,
"경은 조정에 벼슬한 지 이제 54년이 되었으니, 선조(先朝)를 섬길 때에 어전을 드나들면서 선조의 봉선(奉先)하는 성효(聖孝)를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또한 조정에 있는 여러 신료들을 둘러보아도 경처럼 오래되고 친밀한 사람이 드물다. 백성과 사물을 인애(仁愛)하는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돼지나 물고기까지도 감화시킬 만하였고, 봉선(奉先)에 관계되는 일이면 일찍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비록 신묘년 《명사집략(明史輯略)》의 일과, 집상전(集祥殿) 금분(金盆)의 일과 육상궁(毓祥宮) 문장(門帳)의 일 등, 한두 가지 알기 쉬운 일로 말하더라도 정적(情迹)이 용서할 수 있고 없음을 처단하는 즈음에 애써 구별하지 않은 듯한 것도 있었지만, 이것이 어찌 죄인을 신중히 처리하는 성덕에 혹시라도 살피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나는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데 있어 만분의 일도 우러러 계술할 수가 없으니, 경 같은 노신(老臣)이 옛날 우러러본 것을 오늘날 나에게 면려해 주는 것은 천리와 인정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또 더구나 이번에 적발된 재랑(齋郞)의 소위는 정적이 어떠했음은 논하지 않더라도 관계된 바가 과연 어떠했는가? 이러할 즈음에 유하원이 정계하는 일로 소란을 일으켰으니, 그 불측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일찍이 듣건대 하원은 경에게서 글을 배웠다고 하기에 승지를 보내 경에게 물은 것인데, 지금 부주(附奏)한 말을 듣건대, 그의 잘못을 금하지 않은 것으로만 말할 수가 없으니, 경의 처사가 이처럼 한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만일 경이 선조를 섬기던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처분이 의당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경은 이제 늙어서 백수(白首)이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올랐다. 나는 경을 돌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통 정도보다 월등히 하여 자못 은총을 베풀었고 보면, 경이 부주한 내용이야말로 옛날을 이어받고 오늘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기강은 기강이요, 은혜는 은혜이니, 장차 처분을 행할 것이다. 명소패를 정원에 머물러 두라."
하고는, 드디어 파직의 명을 내렸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이정덕(李鼎德)으로 대신하였다.
평안도 선천부 민가 80여 호가 재해를 입었다고 도신이 계문하니, 그들의 신포와 환곡을 면제해 주고, 더욱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창고를 열어 진구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기축
삼사(三司)가 【대사간 이정덕(李鼎德), 지평 신서(申敍), 부교리 이귀운(李龜雲).】 합계하기를,
"아, 근일 세도가 어긋나고 인심이 몰락한 것은 모두 하나의 사(私) 자가 병근(病根)이 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이번 이주석(李周奭)의 일에 이르러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주석의 계사가 나오자 대간이 된 자가 정계하려고 하니, 대료(大僚)인 자는 또 그를 옳게 여기어 영호(營護)가 서로 잇따른 형적이 절로 드러났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성대한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선대왕의 타고난 효성과 봉선의 정성을 그 누군들 감탄하고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50여 년 동안이나 친히 섬기면서 직접 목격하였으니, 그 선양(宣揚)하는 도리가 더욱 남보다 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석의 범행은 관계됨이 막중한데도 비호하기에 급급하여 유하원의 정계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는데도 금지하지 않고 도리어 호응하다가 스스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린 죄과에 빠졌습니다. 그의 죄를 논하자면 실로 놀랍고 통분하니, 전 좌의정 채제공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채제공의 일은, 은혜를 저버린 것과 보필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잘못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설령 이 일이 의당 정계할 일이었다 할지라도 시임 재상이 지휘를 하고 시임 대간들은 그의 눈치나 본다면 이로 인한 후일의 폐단이 참으로 말로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데서 만약 엄히 처분을 내려 분명하게 호오를 보이지 않는다면 후일에는 더 걷잡을 수 없는 사단이 일어나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병을 앓은 나머지 노쇠한 사람이라 하여 부당하게 용서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삭출은 지나치니,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특명으로 전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더 시행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제 새로 나온 삼사(三司)의 합계의 일을 인하여 한번 삼사에 유시할 것이 있다. 대신의 일은 무망간에 나온 일이었고 고의로 범한 죄는 아니다. 그러나 일의 체면으로 보아서는 한 마디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양사에서 격식에 어긋난 차자 하나를 올리고 대사간이 그 일을 약간 언급한 상소 한 장을 올린 뒤로는 서로 미루면서 한 사람도 솔선하여 발계(發啓)한 자가 없음으로써 양사에서 이미 낸 논의를 문득 결말이 나지 않게 하였으니, 국가의 체모와 대간의 기풍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또 사리로 말하더라도 책임이 원수(元帥)에게 있는 것이니, 변변찮은 한 병조 당상으로 마감짓는 것은 비록 대신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아마 더욱 불안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파직했다가 내일 서용한다면 어찌 임명을 취소하는 데에 혐의가 되겠는가. 조정의 거조는 의당 제대로 하기를 힘써야 한다. 근일 행공(行公)하면서 말을 하지 않은 삼사는 한결같이 파직하고, 유도 대신 전 영돈녕부사 김이소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더 시행하여 기율을 바로잡고 조정을 존엄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4일 경인
이날은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기신(忌辰)이다. 전교하기를,
"앉은 채로 밤이 이미 제향할 때가 지났는데, 생각하니 어린애처럼 사모하는 내 마음을 펼 곳이 없다. 성후의 생각으로 생각을 하고자 하면, 의당 성후의 본가(本家) 사람에게 특별히 잘해야 하는데, 그의 생일이 마침 이날임을 매양 기억하고 있었다. 범한 것이 공죄(公罪)에 불과하니, 용천부(龍川府)로 찬배한 죄인 서용보에게 특별히 사유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성덕우(成德雨)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5일 신묘
비가 내렸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차자를 올려 겹쳐 제수된 겸 관 군문 도제거(兼管軍門都提擧)를 사직하니, 윤허하였다.
2월 16일 임진
제주 목사 유사모(柳師模)를 소견하였는데, 하직 인사를 올린 때문이었다.
목면(木綿) 5백 필, 돈 4천 냥, 호초(胡椒) 1백 두(斗), 단목(丹木) 3백 근을 제주목에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였다.
2월 17일 계사
남소영(南小營)에 행차하여 내금위의 춘등(春等)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전날 저녁에 강화 유수 김이익(金履翼)이 와서 주대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명이 있으면 의당 와서 기다려야지 어찌 감히 주대를 청하는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익이 아뢴 내용을 보니,
"신이 양천(陽川)에 도착하여 중군(中軍)의 보고를 받았는데, 내사(內司)의 별제(別提) 두 사람이 가마 셋을 인솔하고서 죄인을 지키는 곳에서 【바로 인(䄄)을 찬배한 곳이다.】 나왔고, 또 가마 두 채는 다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마 한 채의 간 곳을 아직 탐지하지 못해서 천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미 하교를 받들어 부득이 내려갑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포 군수의 첩보에 의하면, 어제 해시(亥時)에 가마 한 채가 또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은 이른바 가마 셋이 온 곳과 간 곳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니, 강화 유수를 다시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이에 각신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의 아룀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분명히 하교하소서."
하고, 여러 승지들이 또 번갈아 아뢰기를,
"전년처럼 뜻밖의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신들이 어찌 일제히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고(嚴鼓)가 이미 울렸다."
하고는, 마침내 환궁하여 여러 승지를 다 체직하고 각신 및 별운검(別雲劍)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주대하기를 요청하니, 물러가라 명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찌 확실치 않은 일을 가지고 연석에서 발설한단 말인가. 또 더구나 궁궐의 가마가 왕래한 것은 예전에도 흔히 있었던 일이니, 특별히 집증할 만한 말이 없고 형적도 없는데 이로써 죄를 가한다면 도리어 일이 전도되게 된다. 오늘 파체한 제신은 아울러 분간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모화관(慕華館)과 훈련원(訓鍊院)은 대소의 시장(試場) 및 조련 교장(操鍊敎場)인데, 오늘 연로(輦路)에 훈련원을 들러 보니 공해(公廨)와 장원(墻垣)이 매우 퇴락하였었다. 해당 당상인 자가 만약 모두 을유년의 고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해 9월에 어가를 모시고 훈련원에 이르러 일신된 모습을 목도했었는데, 이제 30년 뒤에 비로소 보니 다시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이를 만하였다. 이 역시 선대의 뜻을 잇는 한 가지 단서이니, 어찌 치책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행공(行公)한 훈련원 당상 등에게 모두 훈련원을 일신하여 수보하는 기간 동안 감봉 처분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훈련원·모화관을 호조에서 낭관을 정하여 적간하되, 기한 내에 즉시 수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해당 당상을 초기하여 논감하라."
2월 18일 갑오
영의정 홍낙성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일전 강화 유수의 아룀은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신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갔다가 엄교(嚴敎)만 받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나가서는 머리를 부수면서 힘껏 간쟁하지 못하였고, 물러와서는 배를 갈라 자결하지도 못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신이 띠고 있는 여러 직임을 모두 체개하소서."
하고,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병으로 거의 죽게 되어 밖의 일을 살피지 못하는데, 갑자기 들으니 전하께 예사롭지 않은 처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저 강화 유수가 주대를 청한 것이 무슨 일이며 여러 신하들에게 체직과 잉임이 서로 이어진 것은 또 무슨 일입니까. 가마 하나를 꾸며서 노리개의 도구로 삼고, 천승(千乘)의 지위를 가벼이 하여 위의의 중함을 손상시켰으니, 이는 성덕에 누(累)가 됨이 어떻겠습니까. 신은 병으로 얼마 안 가서 죽을 것입니다마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치니 참으로 하루도 세상에 더 살아서 우리 임금의 이런 일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속히 성심(聖心)을 돌려서 특별히 여러 사람의 청을 윤허하소서. 강화부의 여러 관원이나 연로(沿路)의 수령도 이들 역시 전하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그들이 무인지경을 드나들듯 제멋대로 왔다갔다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모두 삭직하여 먼 곳에 정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휴가를 얻어 선롱(先壠)을 가 살폈는데, 지금 경기 감사 김문순의 보고를 보고서야 비로소 강화도 연로에 가마 행렬이 빈번하여 결코 예사로 왕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조보(朝報)를 보니, 강화 유수가 주대를 청하였고 대신과 경재가 모두 예궐(詣闕)하였다가 혹 파체된 자도 있었는데 곧 분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 우리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다시 이처럼 천만 비상한 처사를 하셨단 말입니까. 작년 여름에도 그러하고 금년 봄에도 그러하여 문득 연례(年例)가 되어서 세 번, 네 번 자주 되풀이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매우 걱정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던 일이 점차 모두 익숙해져서 이를 예사롭게 여기며 다만 종말에 가서 구차하게 미봉하고 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여러 아랫사람의 죄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해당 수신(守臣)이 이미 명을 받들고 입경(入京)하였는데, 경력(經歷)과 중군(中軍)이 가마가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도 놀라지 않았고, 연로의 수령은 이를 마치 강 건너 불 보듯 하였으며, 도신은 사유를 예사로이 첩보하여 자신의 책임만을 면하였으니, 조정의 기강과 신하의 분의가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무리들에게 중벌을 내려야 하고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모두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내각 제학 심환지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기유년 이후로 예사롭지 않은 지나친 거조가 매양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한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강루(江樓)의 일에서부터 몽답정(夢踏亭)으로, 몽답정에서 태창(太倉)의 제일루(第一樓)로, 제일루에서 이제 또 남소영(南小營)의 일이 있어 뭇사람들은 의아해 하고 충성된 신하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 전하의 너그럽고 활달하신 성심으로 마치 병가(兵家)에서 기계(奇計)를 내어 적을 속이듯 이처럼 비밀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처사를 하시니, 장차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이 무너져서 사람이 금수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천연요새의 긴 강물이 섬 주위에 빙둘러 있으니 이것도 오히려 버들 가지로 울타리를 만든 채마밭보다는 낫거니와 게다가 장리(將吏)가 방수(防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수사와 액정서의 하리 두셋이 무리를 지어 파도를 가르면서 다니고 있는데도 감히 막은 자가 없었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여기에 익숙해져서 거의 일부러 놓아주고 곁눈질이나 하는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연로에 관을 두어 지키는 법의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연조(年條)를 내리 서술한 데서 어찌하여 기보(畿輔)의 포정사(布政司)의 일은 누락시켰는가? 한 해에 한 번을 하다 두 번을 하고, 두 번을 하다 세 번을 하고, 세 번에서 그 배를 하고, 또 그 배를 하여 매달 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면 비록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으려 해도 되겠는가. 다만 거조가 혹 상전(常典)에 어긋나게 된 것은 참으로 윤승렬(尹承烈)의 과거사에서 겁을 먹은 때문이다. 그러나 한때 임시방편의 일을 가지고 혹시라도 관계 없는 정신(廷臣)이나 죄 없는 유상(留相)을 연루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하였다.
삼사가 【사간 박서원(朴瑞源), 장령 한흥유(韓興裕), 부교리 서유련(徐有鍊)이다.】 합계하여 전 좌의정 채제공, 【계사는 위에 보임.】 전 영돈녕 김이소를 아울러 삭출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채제공으로 말하자면 그처럼 권우하던 사람에게 그와 같은 처분이 있게 된 것은 대개 소중함을 높이고 후일의 폐단을 염려해서였으니, 견파한 것으로 족하다. 또 더군다나 날짜가 오래되면 거두어 서용하려 한 경우이겠는가. 이번에 계사의 말을 고친 것을 보니 말 가운데 혹 지나친 대목도 많으나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 역시 그 사람을 위하는 뜻이 아니니, 어찌 날이 다 가기를 기다리겠는가. 우선 시행하기를 허락한다. 김이소의 일은 아뢴 말이 타당한지의 여부는 논하지 않더라도, 말을 하지 않은 삼사를 막 처분한 때에 나온 것이니, 이 계사는 승전을 받들어 발계(發啓)한 것에 불과하다. 전계(前啓)를 정지하거나 계속하는 일을 현직 대간과 현직 정승 간에 사제(師弟)의 의(誼)가 있어 사실(私室)에서 문답한 것도 오히려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고 여기는데, 명칭은 삼사의 합계라고 하나 승전을 받든 데에 가까운 그대들의 합계에 어찌 관례대로 비답하겠는가. 너희들은 특히 새로 제수한 대직(臺職)이기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발계하지 않던 자가 갑자기 발계한 것과는 다르므로 비록 처분하지는 않으나 이 계사는 속히 정계하라."
하였는데, 얼마 후 채제공의 죄명을 환수하라 명하고, 인하여 명소패를 전해서 입성하도록 유시하였다.
구상(具庠)을 형조 판서로,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9일 을미
영의정 홍낙성, 영돈녕부사 유언호, 우의정 윤시동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삼가 내각 제조 심환지의 차비(箚批)를 보건대, 신들은 더욱 걱정되고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성인의 한 말씀 한 행동은 하늘의 법칙에 합치되고 백성들의 뜻에 순응하므로 마치 해와 달처럼 높이고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여기어 공평한 저울이나 금석(金石)의 법전처럼 받들어 따라서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道)가 되고 말을 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의 이런 거조는 의(義)로써 제단하지 않고 단지 사심을 부린 것으로서 한갓 온 조정이 두려워하고 민심이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이 이르면 사람들이 살고 싶은 뜻이 없고 일이 지나면 마치 병을 앓다가 일어난 것 같아, 장차(章箚)를 번갈아 올리는 자가 있고 충분(忠憤)으로 하여 슬피 탄식하는 자도 있었으니, 대개 이는 인정과 천리에 당연한 것으로서 위엄으로 제압하고 힘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한두 번이면 가하겠지만 세 번을 하고 또 그 곱절을 하고 또 달마다 하는 것으로 과제를 삼는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며, 그 신하는 어떤 죄에 해당하겠으며, 전하의 성덕에 누가 되는 것은 또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마음 깊이 생각하시고 확연히 마음을 돌리시어 속히 심환지에게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서 스물 네 글자의 말010) 을 환수하셔서 성덕을 빛내고 백성의 뜻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내각 제학 심환지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어제의 성비(聖批) 가운데 한 단락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받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 우리 전하께서 근년에 자주 하시는 지나친 거조를 곧장 천리와 인정에 당연하다고 여겨서 해마다 예(例)로 하고 달마다 과제로 삼으시지만, 이것이 순(舜)임금이나 주공(周公)이 각자 윤리를 다한 것에 어긋남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말씀을 한때의 희언(戱言)으로 하신 것입니다. 어찌 성인이라고 희언이 없겠습니까마는, 신은 삼가 의리를 현혹시키고 백성을 놀라게 하여 전하께서 20년 동안 쌓아온 빛나고 큰 성덕 대업을 무너뜨릴까 염려됩니다. 또 전하께서 비록 이 하교를 백관에게 반포하고 팔방에 전파하더라도 대저 천륜을 아직 몸에 지니고 있는 소위 전하의 백성이라면 차라리 만번 죽더라도 차마 이를 눈에 익히고 귀에 익혀서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도량을 넓히시어 성비 가운데 한 단락의 말씀을 환수하셔서 성덕을 밝히고 인륜을 바루소서."
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윤사국(尹師國)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진하사 이병모 등이 치계하기를,
"정월 19일 평명(平明)에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원명원(圓明園)에 갔습니다. 오후에는 동지 정사·부사와 함께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에 들어가서 태상황제가 합내(閤內)에 나온 후 내반(內班)에 입참하였는데,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 및 동지 정사·부사를 인도하여 어탑 앞에 이르러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습니다. 태상황제가 각로(閣老) 화신(和珅)으로 하여금 선지(宣旨)하기를 ‘짐이 비록 정사를 물려주었으나 큰 일은 내가 처리한다.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국왕의 안부를 물으라. 그리고 도로가 머니 굳이 사람을 보내서 사은할 필요가 없다고 하라.’ 하였는데, 통역관이 우리 나라 말로 신들에게 전했습니다. 단지 통역관의 말만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물러나온 후에 즉시 담당역관으로 하여금 덕명을 조방(朝房)으로 가 만나서 황지(皇旨)를 자세히 묻게 했더니, 덕명이 통역관으로 하여금 불러 받아쓰게 하였는데 앞서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내리고 놀이를 베푼 것은 일체 전일과 같게 하였습니다. 황혼 무렵에 태상황제가 산고수장각 뒤에서 작은 배에 오르니, 사황제(嗣皇帝) 역시 작은 배를 타고 따랐으며, 또 신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몇 리를 가서 배에서 내려 경풍도(慶豊圖)로 들어가 태상황제가 누대 아래 탑상에 좌정하고 사황제가 시좌하여 잡희(雜戱)를 베풀고 차를 내려 주었습니다. 내시를 시켜 신들을 인도하여 설마(雪馬)를 타고 1리 남짓을 가서 언덕에 내려 인하여 인도를 받아 물러나와 돌아오니 밤이 2경이 거의 되었습니다. 안남(安南)과 섬라(暹羅) 등의 사신도 처음부터 연석에 동참하였습니다.
20일에는 관소(館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21일에는 예부에서 상(賞)을 받으라고 통지해 왔기 때문에 신들이 서장관 및 정관(正官)들과 함께 당일 이른 아침에 오문(午門) 앞으로 가서 전례대로 상을 받았습니다. 어전(御前)의 가상(加賞) 예단(禮單)은 옥여의(玉如意) 1병(柄), 대단(大緞) 5필, 금단(錦緞) 4필, 섬단(閃緞) 2필, 견전(絹箋) 2권, 연(硯) 2방(方), 필(筆) 2갑(匣), 묵(墨) 2갑이었는데, 이를 받아서 상통사와 역관에게 맡겼으니, 신들이 복명하는 날 원예단(元禮單)을 바칠 때 일체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동지사 일행 역시 함께 상을 받았는데, 반포한 조서는 당일에 동지사 편에 부쳤습니다.
24일에는 예부의 통지를 인해서 신들의 일행 및 동지사 일행이 사시(巳時)에 예부로 가서 하마연(下馬宴)을 받았는데, 상서 덕명이 압반(押班)하여 삼궤 구고레(三跪九叩禮)를 행한 후, 관례대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연회를 마치고 또 일궤 삼고례(一跪三叩禮)를 행하고, 잠깐 신들의 앞에서 머물다가 담당 역관을 불러서 ‘봉작을 청하는 일로써 전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사체가 중대하니, 삼가서 단자(單子)를 갖추어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담당 역관을 시켜 묻기를 ‘앞으로 우리 나라에서 모든 진주(進奏)·진표(進表)할 일이 있으면 태상 황제와 사황제 앞으로 각각 한 통씩 올려야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군기(軍機)가 아직 정례(定例)되지 않았는데, 앞으로 의당 문서가 나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시 이후에 예부에서 또 상마연의 음식상을 관소로 보내왔습니다.
26일에는 예부에서 통지하여 ‘사건을 전유(傳諭)할 일이 있으니 연공(年貢)·경하(慶下)의 각 해당 정사·부사는 내일 부(部)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7일 사시에 신들 및 동지 정사·부사와 담당 역관이 예부로 갔더니, 원외랑 부삼아(富森阿)가 전유 사건을 베껴 보였는데, 이르기를 ‘진하사가 가지고 온 세 조항의 방물(方物)은 이미 칙지를 받들어 다음번 정공(正貢)으로 이준(移準)하였고, 재차 칙지를 받은 결과 앞으로 각 외번(外蕃)에서는 오직 연례대로 하표(賀表)와 공물을 가져오되, 공물을 따로 더 마련하지 말고, 그 공물을 태상황제와 황제 앞으로 둘로 나누어서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28일에는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및 담당 역관과 함께 오문(午門) 앞에 가서 어전(御前)에 가상(加賞)한 각종 비단 50필을 받고, 신들이 예에 의해서 삼궤 구고례를 행하고 즉시 관소로 돌아와 상통사와 역관에게 맡겨 두어 신들이 복명하는 날 일체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당일 오시에 동지사 일행이 먼저 출발하였는데, 신들이 출발할 날짜는 예부에서 2월 초 1일로 정했다는 공문이 도착하였습니다. 그후에 예부의 의제사(儀制司)에서 또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연공(年貢)·진하(進賀) 두 행차의 주표(奏表)·하표(賀表) 등 각 표문을 내각에서 초출한 것이 아직껏 예부에 도착하지 않았다. 부에 자문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역체(驛遞)를 거쳐서 회답하니, 진하사의 출발은 의당 정해진 기일을 준수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28일 가상(加賞)을 영수할 때 예부 시랑 주흥대(周興岱)에게 전언하기를 ‘어제 신들에게 자문은 역체를 거쳐 해당국에 회답하겠다는 말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이를 결코 따르기가 어렵다. 배신(陪臣)이 국경을 나와 일을 마치는 여부는 오로지 회자(回咨)를 받아가는 데 달려 있으며, 더구나 진하하는 주문이나 표문은 사체가 더욱 중한데 어찌 회자를 받지 않고서 빈손으로 돌아갈 이치가 있겠는가. 비록 하루 이틀에서 십수일이 더 걸리더라도 자문을 받기 전에는 실로 감히 출발할 수가 없다.’ 하고, 누차 설왕설래한 뒤에, 주흥대가 말하기를 ‘과초(科抄)가 아직껏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부의 공문에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이제 사신의 말을 듣건대 사리가 참으로 그렇겠으니, 우리들이 내각에 알려서 힘써 반드시 주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9일에는 담당 역관을 예부에 보내 회자에 대한 소식을 탐문하게 했더니, 원외랑 부삼아가 먼저 도착하여 과초가 막 도착하였다는 뜻을 통지해 주고, 제독(提督) 아성아(阿成阿)가 뒤에 도착해서 의제사에 독촉하여 회자문 18통, 동지사의 회자문 8통, 재자관 정사현의 반상(頒賞) 자문 1통을 작성해 주어 이를 함께 받아왔으므로, 신들 일행이 이달 초1일에 북경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동지사의 회자문 8통은 선래 역관(先來譯官)에게 주어 동지사에게 전해 주게 하고, 신이 도착한 곳에서 담당 역관이 얻은 문서의 등본 6통도 동봉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하였다.
2월 20일 병신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문과 중시를 행하고, 인하여 춘당대에 나아가 무과 중시 및 문무과 별시를 행하여 문과에서 진사 김수신(金秀臣) 등 3인과 무과에서 이응태(李應泰) 등 15인을 뽑고, 중시에서는 문과에서 장악 정(掌樂正) 신봉조(申鳳朝) 등 10인을 뽑고, 무과에서 한종헌(韓宗憲) 등 61인을 뽑았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사신의 장계에 ‘태상황제가 각로(閣老)로 하여금 선지(宣旨)하여 사은사를 차송하지 말도록 하였다.’고 하였으니, 형세가 의당 거기에 따라 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반조(頒詔)에 의하면 사물(賜物)에 대한 사은 및 삼절의 방물을 합병한 것과 방물을 이준(移準)해 준 것과 사신을 연회에 참석시킨 데 대한 네 가지 사은을 모두 절사 편에 두 조항의 방물과 함께 인편에 부쳐 들여보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정유
이조 참의 송환기(宋煥箕), 집의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아울러 온화한 비답을 내려 속히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활을 멀리 쏜 관서 사람 표건첨(表建瞻)을 영성 첨사(寧城僉使)로 차임했다. 전교하기를,
"먼 곳 사람을 거두어 쓰는 것을 어찌 다만 문음(文蔭)의 조사(朝士)만 그렇게 하겠는가. 멀리 뛰고 돌을 들어 올리는 무리들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유의하여 장려해 발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육냥(六兩) 무게의 화살을 2백 보나 쏜 북관의 조명재(趙明載)를 뽑아서 장용위에 두었다가 곧 선사포(宣沙浦)에 제수하라. 동시에 수용(收用)된 관서의 표건첨 역시 1백 50∼60보나 쏘았고, 이번 방(榜)의 중시(重試)에서도 1백 50보 가까이 쏘아 입격하였으니, 이런 사람은 예를 초월하여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영성 첨사의 현과(見窠)에 단부(單付)로 하송하라. 이번 방에서 무과 장원과 중시의 장원이 모두 관서에서 나왔는데, 혹은 당상의 실직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西路)의 변장(邊將)을 제수하기도 한 것은, 대체로 대동강 이북 지역의 건장한 수부들로 하여금 담략을 배나 격발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뜻을 관서의 도신과 수신에게 하유하여 각기 흥무원(興武院)과 공무원(貢武院)에 큰 글씨로 써서 붙이고, 인하여 이 전교를 가지고 도내 열읍에 돌려 보여서 국가의 방위에 믿음직한 사람을 둔 보람이 있게 하라."
하였다.
신사운(申思運)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2일 무술
주대를 청한 대신과 예조 당상·각신을 소견하였는데, 이때 원자(元子)가 시립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아뢰기를,
"원자의 모습을 우러러 보니 엄연한 기상이 타고난 것임을 더욱 느끼게 되어 신들은 경축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오늘 신들이 주대를 청한 것은 바로 막중한 경례(慶禮) 때문입니다. 신들이 연초에 이미 진청(陳請)한 것이 있었는데, 그때에 성교(聖敎)에서 ‘금년도 좋고, 명년에 해도 좋으며, 더 늦으면 더욱 좋다.’고 하시어 신들이 감히 더 이상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신의 별단(別單)을 보건대, 저쪽에서 먼저 주청(奏請)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비록 상황(上皇)의 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황지(皇旨)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속히 성례(盛禮)를 거행하고, 인하여 사은사를 주청사로 옮겨 제수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신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이미 정해져서 일찍이 《예기(禮記)》 악기(樂記) 가운데 있는 ‘더디고 더디게 하고 또 오래 끈다.’는 말로써 경에게 말하였으니, 억만 년 유구하게 전할 수 있는 기반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체로 명년을 기다리고자 하는 것은, 오래된 예로써 말하자면 숙묘(肅廟)께서 책봉을 받은 나이이고, 가까운 예로 말하자면 내가 책봉을 받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명년이면 좋고 내명년 역시 좋은데, 이제 하필 사신의 별단 때문에 앞당기고 물리고 하겠는가."
하였다.
2월 23일 기해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병을 진달하고 사직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4일 경자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저 경을 권우함이 돈독하기 때문에 경에게 바라는 바가 깊고, 경을 아는 것이 진지하기 때문에 경을 책망함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 같으면 용서하여 허물하거나 잘못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경에게 있어서는 개탄하고 한스럽게 여기고, 또 탄식하고 질책을 해서, 경례(敬禮)가 부족함도 혹 돌볼 겨를이 없었고 박절한 말도 혹 절제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러니 후세에 오늘날을 보는 자는 나와 경이 서로 잘 만났음을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성으로 보는 세속 사람들로 말하자면 안목이 워낙 흐리어서 우리 사이를 마치 너는 너 갈 대로 가고 나는 나 갈 대로 가서 전혀 서로 부합되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데, 이는 곧 나와 경 사이를 전혀 모르는 소인의 마음이니, 경은 모름지기 경을 알아주는 나의 사사로운 정에 더욱 감사하여 즉일로 집에 돌아가라."
하였다.
2월 25일 신축
춘당대에 나아가 중시와 별시를 방방(放榜)하고,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김이영(金履永)을 검열로 삼았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신은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늘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창고의 전수(典守)를 오직 이서(吏胥)에게 맡기고 있는데, 관장은 자주 바뀌지만 이서는 그 안에서 늙으므로 간악한 폐단이 따라서 생기어 이것이 대대로 포흠(逋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각사(各司)와 밖으로 영읍(營邑)들이 모두 그렇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옛날 서한(西漢)의 성대한 때에 황패(黃覇)는 군읍을 다스리는 데에 귀신같다고 일컬어졌는데도 오히려 부서(簿書)를 훔치고 재물을 훔치는 것을 염려하였는데, 더구나 기강이 떨치지 못하는 이 말세를 당하여 어떻게 이런 것들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 유신(儒臣) 조식(曺植)의 말이 장차 불행하게도 들어맞게 되었습니다. 조식이 이 문제를 ‘금슬(琴瑟)의 줄을 고쳐 매지 않고서는 악곡을 탈 수가 없다.’고 비유하였는데, 지금의 폐단이 극에 이르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백성들의 곡식이 모조리 없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당(唐)나라의 신하 유안(劉晏)은 재물을 다스리는 데에 뛰어나서 고금에 그와 짝할 자가 드뭅니다. 그가 부서를 검열하고, 전곡을 출납하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사류(士類)에게 맡겼는데, 항상 말하기를 ‘선비는 명예를 이끗보다 중히 여기기 때문에 선비는 청렴한 자가 많고 아전은 이끗을 명예보다 중히 여기기 때문에 아전은 탐오한 자가 많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리에 밝고 청렴하고 근신한 선비를 가려서 쓰고, 아전은 오직 부서나 기록하고 말 한 마디도 함부로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병폐를 구제할 수 있는 좋은 법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일찍이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지냈는데, 본읍에는 환향(還餉) 등 각종 곡식이 5, 6만 석이요, 창고가 13, 14개였는 바, 먼 창고는 거의 1백 리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부임한 처음에 마음속으로 없어진 곡식이 반드시 많을 것이라 여겨서 한 부(府) 가운데서 향망(鄕望)이 있는 자를 좌수(座首)로 차출하여 조용히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 고을은 곡물과 창고의 많기가 비록 서관(西關)에서 제일이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원래 1석의 포흠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서서히 살펴보니 과연 그러하였고, 환곡을 바치는 자도 자문(尺文)011) 을 내서 증빙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감관(監官)이 전적으로 창고를 관리하여 받아들이고 나누어 주는 일에서부터 창고를 지키고 문을 열어주는 일까지를 모두 자기가 손수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또 반드시 1년 만에 감관을 교체하여 숫자를 대조해서 인수인계를 하는데, 한 포(包)라도 부족함이 있으면 이미 인계한 후에는 새로 인수받은 자가 축낸 것이 되기 때문에 장부의 기재가 명백하여 농간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색리(色吏)와 고자(庫子)도 있으나 고자는 단지 말로 되고 가마니에 담는 등의 일만 하면서 오직 떨어진 곡식만 먹고 살며, 색리는 일정 기준대로 받아들인 후, 전부의 숫자를 계산하여 여기에서 색곡(色穀)을 떼 받아 먹고 사는데, 모든 권한이 감관에게 있습니다. 감관은 좌수가 차출하는데 반드시 지벌이 있고 가세가 넉넉하여 자신과 집안을 아끼는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였고, 감관이 만일 곡식을 축냈으면 그를 차출한 좌수에게 죄가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략 유안의 법을 모방한 것으로 그 효과가 매우 드러났으니, 고금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반드시 행할 만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생각건대 지금 북도와 관동의 환곡에 대한 폐단은 아주 심한 데는 이르지 않아서 우선 논할 필요가 없겠으나, 호서는 벼슬아치들의 고장이어서 선비들의 고장과 현격하게 달라 이 법을 시행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리고 호남과 경기 지역 또한 선비들의 고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독 영남이 이폐(吏弊)가 가장 심한데, 선비의 고장이므로 향안(鄕案)에 분간되어 들어가지 않더라도 사로(仕路)에 방해됨이 없고, 비록 향임(鄕任)의 자질(子侄)이라 하더라도 벼슬길에 오르기만 하면 청관(淸官)을 얻으니, 관고(管庫)에 사인(士人)을 쓰는 것은 영남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도신이 편부를 헤아려서 먼저 어느 고을부터 시행한다면 비록 유안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공사간에 매우 다행한 일이요, 이배(吏輩) 역시 파산(破産)하거나 친족에게 징수하거나 오랫동안 갇히거나 형배(刑配)되는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영남에서 행해 보아 편리하면 다른 도 역시 본받아서 행할 것입니다. 도신은 현재의 폐단을 구하는 데 있어 이것이 제일 낫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고, 연신(筵臣)에게 물으니, 서유린·심환지·김문순 등이 모두 편리하다고 하므로, 도신에게 물어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2월 26일 임인
춘당대에 나아가 황단(皇壇) 대향(大享)의 서계(誓啓)를 행하였다.
북경 예부에서 황후(皇后)에 대한 삼대절(三大節)의 전하(箋賀)를 영원히 정지하는 데 대한 황제의 유시(諭示) 자문이 도착하였다. 황제의 유시는 다음과 같다.
"건륭 60년 12월 13일에 내각(內閣)이 초출(抄出)한 것이다. 이날 상유(上諭)를 받들고 내각 아문에서 병진년 정월 초4일에 칙서를 내려 사황제의 원비(元妃)를 황후로 책립할 일을 인하여 규례에 따라 은조(恩詔)를 지어 올렸는데, 이와 같은 번거로운 의식을 소청대로 꼭 행할 필요가 없다. 명년 원조(元朝)에 정사를 넘겨준 뒤에는 짐은 태상황제가 되고, 사자(嗣子)는 황제가 됨에 따라 그 적비(嫡妃)는 응당 절로 황후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궁정의 일정한 예의이다. 삼가 의당 지난 규례에 따라서 천지(天地)·종묘(宗廟)에 고하여 제사지내고 성대한 전례(典禮)를 치르면 족할 것이다. 어찌 반드시 은조를 지어 천하에 포고하는 등의 번거로운 의식을 많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황후는 왕궁의 문 안에 중정하게 위치하여 정성껏 내직(內職)을 닦는 것으로서 모후(母后)가 된 황태후처럼 응당 존숭 받아야 할 경우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 조정의 가법은 궁중의 질서가 깨끗하고 엄숙하여 본디 바깥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내년에 황후를 책립하는 전례를 거행할 때에는 비단 은조(恩詔)만 꼭 반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왕공(王公)·대신(大臣)으로부터 외성(外省)의 독무(督撫) 등에 이르기까지도 황후의 책립을 인해서 짐 앞으로나 사황제·황후 앞으로 경하하는 표전(表箋)을 올리지 말 것이며, 또 황후의 수절(壽節) 및 원조(元朝)·동지(冬至)는 외정(外庭)과 관계가 없으니, 이후에는 모두 전하(箋賀)를 영원히 정지하는 것을 규례로 삼아서 체제(體制)를 엄숙히 하여 이 법대로 삼가 지켜나가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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