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3월

싸라리리 2025. 8. 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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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미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상이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세자로 책봉한 해와 달이 거듭 돌아온 데에 슬픈 마음이 들어서 장차 15일에 다시 전성(展省)의 예를 펴고자 하였다. 그래서 명하여 고 대신 김흥경(金興慶)·김재로(金在魯)·조현명(趙顯命), 고 중신 김시환(金始煥)에 대해서는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후손을 찾아서 녹용하게 하고, 고 대신 송인명(宋寅明)·유척기(兪拓基)는 증질(贈秩)하고, 대신 김치만(金致萬)과 고 중신 윤순(尹淳)·이진망(李眞望)·남유용(南有容)·박사익(朴師益), 고 재신(宰臣) 홍경보(洪景輔)의 집에는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이 여러 신하들은 옛날에 혹 궁함(宮啣)이 있었거나 혹은 돈장(敦匠)·제술(製述)·서사(書寫) 등의 일로 각각 분주하게 주선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명하여 녹용된 후손의 숙배와 치제하는 집의 수제(受祭)를 아울러 15일을 기다려서 하도록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고 대신 김재로의 손자인 급제 김종순(金鍾純)과 고 대신 조현명의 손자인 조노진(趙潞鎭)은 모두 사로에 천거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모두 죄에 연루됨이 있어서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상신은 조정에 큰 훈로가 있었으니, 두 집안이 괴로움을 돌려 웃게 되는 기회를 당하여 어찌 혹시라도 융통성 없이 상전(常典)만 고수하겠는가.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의 집은 지체가 자별하여 전례를 근거할 만하고, 고 정승의 집은 친속 관계가 또한 먼데 더욱 어찌 반드시 그만두어야 하겠는가. 전당(銓堂)을 추고하고 즉시 의망해서 들이라."
하였다. 이에 이조 판서 심환지, 참판 황승원이 연명으로 소를 올리어 성명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심환지 등을 불러서 타이르자, 환지 등이 아뢰기를,
"제방(隄防)이 한번 무너지면 의리가 장차 어두워지게 되니, 성교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신들은 감히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3월 2일 무신

황단에 가서 희생 그릇을 살피고, 재전(齋殿)에서 재숙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는, 솥을 살피고 제기가 깨끗한가를 보고 정화수를 살피는 일을 모두 직접 한다고 하였는데, 단향(壇享)의 의주에는 섭행하는 것으로 마련되었으니, 자못 종국(宗國)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 내가 친히 가서 살필 것이니 의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황조 사람의 자손 및 본조 충신의 자손이 임금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반열을 백관의 뒷자리에 두는 것은 자못 전조(前朝)의 후손을 대우하는 예의가 아니다. 지금부터 법식을 정하여 헌가(軒架)의 동서로 나누어 정하라."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황단에 제사지내는 예는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인데, 세월이 점차 멀어짐에 따라 인심이 보통으로 여기게 되어 《춘추(春秋)》의 존왕(尊王)하는 의리가 거의 강명(講明)할 곳이 없게 되었다. 사대 교린(事大交隣)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이런 마음을 일으켜 한 줄기의 양춘(陽春)이 이에 힘입어 떨어지지 않게 하고자 한다. 비록 의식 절차의 말단적인 것에 있어서도 또한 그 당시를 상상하고 느끼는 단서가 될 수 있으니, 오늘 집사(執事)하는 제신들은 모름지기 이런 뜻을 본받으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황단의 배향(陪享)은 본디 아주 높은 의리가 있어 사체가 중대하니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니, 직각(直閣)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유언에 따라 문인들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울 때에도 역시 이런 의논이 있었으나 끝내 일의 체면이 존엄한 때문에 감히 선뜻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을사년에 비로소 고황제(高皇帝)012)  와 열황제(烈皇帝)를 함께 제사하는 의례를 정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막 강신의 술잔을 올릴 적에 흰구름 한 줄기가 북쪽에서 일어나 단 위에 와서 머물고 바람이 솔솔 불면서 신령스런 비가 조금 내렸었다. 《국조보감》에 그 일을 특별히 기록하였는데 오늘의 바람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하고는, 마침내 숙묘와 영묘 양조의 지감운(志感韻)을 삼가 차운하여 짓고, 배향한 제신 및 황조인(皇朝人) 자손과 본조 충신의 자손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했는데, 모든 배향한 제신이 1백 56인이었다.

 

3월 3일 기유

황단의 춘향(春享)을 친행하였다.

 

의소묘(懿昭墓)의 헌관(獻官)을 당상 3품으로 하였다. 전교하기를,
"축문(祝文)에 ‘소고(昭告)’라 하고, 향(香) 역시 친히 주관한 흔적이 있는데, 헌관의 직품을 당하로 하는 것은 자못 고상(故相)이 효묘조(孝廟朝)에 건의하여 소현묘(昭顯墓)의 의식을 바로잡은 뜻이 아니다."
하고,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전교하기를,
"밤에 단의 제사를 지내느라 주선하는 즈음에 더욱 비풍(匪風)·하천(下泉)013)  의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사헌에 추증된 신만(申曼)에 대해서 특별한 감개가 있다. 어진 아비의 아들로서 선대의 발자취를 이어 일부(一部)의 《춘추》를 가계(家計)로 삼았었다. 병자·정축년 이후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벼슬을 끊고서 강해(江海) 사이에 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왕래하였는데, 마치 장차 일엽편주를 타고 만경 창파를 건너 남도(南渡)한 조정으로 갈 듯이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자 죽을 때까지 깨끗하게 의리를 지켜서 마침내 해외의 일민(逸民)이 되었다. 연전에 정려(旌閭)한 것을 가지고 어찌 높이 보답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의 집안은 대대로 풍도와 기절을 지켜 지금 1백여 년에 이르도록 산중에서 농사지어 먹고, 앉을 때에도 서쪽을 향하지 않았으니, 신만의 집처럼 상하가 서로 전수한 의열(義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절의가 우뚝하여 영원히 천년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되겠는가. 조가에서 포장하는 전례에 있어 아직껏 시호가 없어서, 흠된 일이라 할 수 있으니, 특별히 가증(加贈)해야 한다.
내일은 비록 선대왕의 휘신(諱辰)이어서 재계를 해야 하나, 일이 충절을 표창하여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공(功)에 관계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철저하게 천발(闡發)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도 종주국을 높이는 지성과 고심에서 재계하는 날에도 정사를 행하셨으니, 이 또한 우러러 본받아야 할 한 가지 도리이다. 또 감회를 일으킨 것이 있다. 세상에서 절의를 일컬을 때는 먼저 삼신(三臣)014)  을 꼽는데, 삼신 가운데서 홍 학사(洪學士)가 살신성인한 날이 마침 모레이다. 두 학사와 함께 각기 살신성인한 날에 관원을 보내 사제(賜祭)하라. 선조 때에는 여러 차례 제문을 친히 지어 총애했는데, 나는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이번 치제하는 제문은 의당 친히 짓겠다."
하였다. 신만에게는 뒤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호서에서 천거된 성시주(成時柱) 등 3인을 소견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이 분부에 응하여 세 사람을 천거해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창(新昌) 사람 성시주는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7대손이고, 제천(堤川) 사람 김형(金珩)은 고 승지 김해일(金海一)의 현손이고, 온양(溫陽) 사람 이건주(李建胄)는 고 자의(諮議) 이간(李柬)의 손자입니다."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장계하기를,
"본영의 환자 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8천여 석인데, 그중 생존자에 대해서 돈으로 대신 받은 것은 겨우 4천 민(緡)이고 구채(舊債)가 2만 8천 민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받아낼 곳이 없기 때문에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지출할 것이므로 그 대신을 충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칙수전(勅需錢) 9천 민을 대여해서 첨가했으니, 절반은 빚놀이를 하고, 절반은 곡식으로 장리를 한다면 한 5년 동안에 부족한 것을 보탤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신이 조정에 청하지도 않고 공화(公貨)를 대여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도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문을 통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후일의 폐단과 관계되나, 그의 마음은 백성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니, 해당 도신을 단단히 추고하여 폐단을 방지하고 속죄하기를 기하라."
하였다.

 

3월 4일 경술

명하여 증 참판 최효일(崔孝一)과 신만(申曼)에게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에게 사제하였다.

 

3월 6일 임자

부름을 받고 온 이만운(李萬運) 등을 인견하였다. 이때 만운은 칠곡(漆谷)에서, 남기만(南基萬)은 영해(寧海)에서, 위백규(魏伯珪)는 장흥(長興)에서, 최곤(崔崑)은 남원(南原)에서 왔으므로 입시를 명한 것이다. 상이 만운에게 이르기를,
"먼 데 사람을 거두어 쓰는 것이 바로 내가 고심하는 바인데, 너희들은 글을 잘한다는 칭찬이 평소 영외(嶺外)에 드러났으니 먼저 시험해 보는 뜻에서 법종(法從)의 반열에 두겠다."
하니, 만운이 어버이가 늙은 것으로써 사양하였다. 기만에게 이르기를,
"너는 바로 법종이니, 후일에 의당 자문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백규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환영지(環瀛誌)》 한 책을 보았는데 역시 박식함을 증험할 수 있었다. 나이가 이미 노쇠하니 비록 객지에 와서 벼슬하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우나,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에 대해서 평소 마음에 강구한 바가 있으면 모름지기 연석에서 물러난 후 한 통의 문자로 써서 올리라."
하고, 인하여 호조에 명하여 필찰(筆札)을 주게 하였다. 이만운을 안의 현감(安義縣監)에 제수하였다.

 

부름을 받은 영남 사람 장윤종(張胤宗)이 노병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자, 군직(軍職)으로써 녹미(祿米)를 실어 보내라고 명하고, 감사 이태영(李泰永)은 천거를 게을리한 것으로써 중추를 명하였다.

 

무과 출신의 부방(赴防)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판의금부사 홍억(洪檍)이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빌고, 인하여 아뢰기를,
"상께서 모든 정사에 부지런하시어 부서(簿書)와 옥정(獄情)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소 들어 친히 결재하시니, 보양(保養)하는 방도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하늘이 원량(元良)을 주시어 점차 자라고 있는데 슬기로운 자질이 숙성하고 훌륭한 풍도가 자연스레 이루어져서 강서(講書)를 하면 소리가 우렁차고 맑으며 운필(運筆)을 하면 심획(心畵)이 바르고 곧습니다. 기도가 굉원하고 지려가 뛰어나니 교도하여 성취시키는 방도는 오로지 우리 전하께서 주야로 좌우 주선하는 사이와 기거 동작하는 즈음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몸으로 가르치고 말로 가르쳐 귀와 눈에 익숙해지게 하는 데에 진실로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보모(保母)나 가까이 모시는 무리와, 거느리는 노복이나 배종(陪從)하는 무리들 역시 노숙하고 근신한 자를 가려 써서 그들로 하여금 감히 기이한 노리개나 민간의 저속한 이야기로 혹시라도 시청(視聽)을 현란시키지 못하게 한다면, 바로 기르고 미리 가르치는 도리가 또한 심상한 일상생활 속에 있게 되어, 서연에서 강독하는 공부와 함께 표리(表裡)가 서로 닦아지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가지 일은 마땅히 체념하겠으나, 사직하겠다는 청에 대해서는 경 같이 근력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허락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이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치사하겠다는 소를 열 번 가까이 올렸으나, 자기를 단속하고 법도를 지키기를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청한 바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사간 이의강(李義綱)이 상소하여 조노진(趙潞鎭)과 김종순(金鍾純)을 등용하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비지 가운데 ‘찡그리던 것을 돌려 웃게 해야 한다. 촌수(寸數) 역시 멀다.’고 하교하신 것은 실로 보는 사람을 놀라고 미혹되게 하였으니, 성비 가운데 두 구절의 말은 의당 환수하셔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단향(壇享) 때 처음에는 충량(忠良)의 후손으로 배향(陪享)하는 자의 숫자가 거안(擧案)에 든 이름보다 적었다가 끝낼 무렵에 이르러서는 어지러이 문앞을 메워 마치 장옥(場屋)과 같았습니다. 만약 한성부로 하여금 미리 정돈하여 기다리게 했더라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었겠습니까. 해당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견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재상 집안의 일은, 만약 금년 이달 이날을 만나지 않았다면 후대에까지 상을 주고 후대에까지 죄를 용서하는 은전도 오히려 그들에게 의의(擬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벼슬을 주어 조관(朝官)의 열에 끼게 한 것은 은혜를 옛날로 돌리고자 한 것으로 부득이 법을 잠시 굽힌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 말대로 따르지 않는가. 한성부의 당상과 낭청을 견파하라는 일은, 선비와 무인들을 반열에 참여시킨 것은 법식을 정한 이후 처음 행한 것이니, 의당 분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당상과 낭청을 이미 추궁하였다."
하였다.

 

교리 김근순(金近淳), 정언 심반(沈鎜)이 모두 상소하여 김종순과 조노진을 수용하라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대하였다. 돌아온 정사 민종현(閔鍾顯), 부사 이형원(李亨元) 등을 소견하였다. 상이 종현에게 이르기를,
"새 황제는 어떻던가?"
하니, 종현이 아뢰기를,
"어질고 효성스럽고 단정하고 묵중하여 제왕(諸王) 가운데서 아름다운 명예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연향할 때에 보니, 상황(上皇)의 옆에 모시고 있는데 단지 상황의 동정만 볼 뿐 한 번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로 보아 또한 그의 인품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형원에게 이르기를,
"조칙을 인편에 부친다는 기별을 선래(先來)가 오기 전에 들을 수 있었으니, 경이 모든 일에 두루 통민함은 원래부터 익히 아는 바이지만, 이번 일은 크게 광채를 냈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는데, 앞서 형원이 북경의 관소에서 칙서를 인편에 부친다는 소식을 언서(諺書)로 의주 부윤 심진현(沈晉賢)에게 알려서 조정에 전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또 이르기를,
"8월 성절(聖節)에 별도로 하사(賀使)를 보내자는 논의가 있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종현 등이 아뢰기를,
"세전에 하사 일행을 기일 전에 차출해 보낸 것은 성상의 뜻으로 결단한 것인데, 기일에 미쳐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이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사대(事大)하는 정성에 대하여 태상황 역시 그 정성이 감동할 만하다는 뜻으로 곡진하게 말하였습니다. 이번 조칙을 인편에 부치게 하고 사은을 정지하라고 명한 것은 모두 하사를 먼저 보낸 효과가 아님이 없으니, 만리를 밝게 보시는 성감(聖鑑)에 대하여 신들은 천만 흠앙해 마지 않습니다. 다만 사은사도 발송시키지 않았는데 동지(冬至)에 가서야 비로소 절사(節使)가 가게 되면 그 기간이 너무 멀게 되니, 만약 8월 성절(聖節)에 이르러 하사를 꾸려 보내면서 사은사를 겸하게 하면 무방할 듯합니다."
하므로,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시동 역시 무방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상황의 성절에 이미 하사를 보내고 나면 새 황제의 성절에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사신 행렬이 길에 서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금년의 성절은 이미 육순이나 팔순과는 다른데 어찌 전례가 없는 일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탐라(耽羅)의 진자(賑資)를 운반하는 일은 민읍(民邑)이 모두 곤란을 겪게 되므로, 성상께서 매양 섬과 육지가 모두 편리할 정사를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섬 백성들을 구제해 살리고자 하면 바다를 건너 수송하는 폐단이 저절로 연안 백성들에게 돌아가 바로잡아 구제할 좋은 계책이 실로 없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나리포(羅里鋪)에서 환무(換貿)하여 곡식으로 만드는 법을 쓸 수 있는데, 이는 풍년·흉년을 막론하고 편리할 대로 곡식을 무역하여 돌려가면서 들여 보내야 합니다. 호서와 교차되는 경계인 임피현(臨陂縣)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당초의 법의가 아주 치밀했던 것인데, 중간에 폐단이 생겨서 인하여 버려두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옛 제도를 복구하여 요컨대 이익은 오로지 섬 백성들에게로 돌아가면서도 피해가 연안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대로 시행해서 괄목할 만한 효과가 있기를 기약하라."
하였다. 또 청하기를, "형조 참판 조진관과 호군 서용보를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차출하여 마음을 기울여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김재찬의 장계에 신광 첨사(神光僉使) 유화원(柳和源)이 보고한 바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본진(本鎭)은 적유령(狄踰嶺) 아래에 있는데, 수백 호에 지나지 않은 민호가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한번 삼천방(三川坊)을 새로 개간하면서부터 모두 옮겨 갈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안착시킬 방도가 있으니, 본진의 명당곶(明堂串) 청자개(靑者介)란 곳이 적유령과 30리 거리에 있는데, 그곳 땅이 매우 기름지고 수백 호를 용납할 수 있어 백성들이 개간하기를 청원하여 부진(府鎭)에서 개간을 허락하자는 논의가 있어온 지 오래입니다. 고갯마루의 남쪽에서부터 희천(熙川)의 백산(白山)까지 금표(禁標)를 세운 것이 15리요, 고갯마루의 북쪽에서부터 강계(江界)의 신광(新光)까지 금표를 세운 것이 30리인데, 옛날 이른바 삼협곡(三峽谷)이란 곳이 30리 금표 안에 있어 한 영(嶺)의 금표가 남북이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이곳의 금표를 물리되 한결같이 희천의 15리를 한계로 한 것처럼 한다면 15리를 개간할 땅을 얻을 수가 있고, 관방(關防)이나 삼정(蔘政)에도 전혀 방해됨이 없겠으며, 절도사와 해당 부사의 보고에도 모두 편리하다고 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자성(慈城)에 경작을 허락한 후로 가까운 진의 산골 백성들이 모두 옮겨 갈 생각을 두는 것은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제 신광진의 금표를 물려 백성들에게 개간을 허락하라는 청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삼정과 영애(嶺隘)에 조금도 방해됨이 없으면서 백성들을 끌어모아 살리는 데는 크게 이익됨이 있을 것입니다. 도신·수신과 해당 부사의 논의가 모두 이구동성으로 편리하다고 일컬으니, 그에 의해서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김재찬이 장계를 올려, 강계 부사 이인수(李仁秀)가 보고한 바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이제 만약 읍을 설치하자면 객관과 관청을 짓는 데에 드는 돈과 곡식이 얼마의 민력(民力)과 얼마의 공화(公貨)가 소비될지 모릅니다. 또 삼(蔘)을 캐는 계절에 새 읍의 백성들에게 이 일을 책임지우면 반드시 지탱해 보존할 수가 없을 것이니, 진을 설치함만 못합니다. 지롱괴보(知弄怪堡)의 옛터가 삼천(三川)과 자성(慈城) 사이에 있으면서 서북쪽으로 압록강을 임해 있는데, 각파(各把)를 호령하는 요지이니 옛날에 진을 설치한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에다가 마마해보(馬馬海堡)를 옮겨 설치한다면 관청을 건축하는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화세(火稅)로 비용을 보충할 수 있고 외방을 견제하는 방도에도 이익됨이 있을 듯합니다. 대체로 마마해에 보(堡)를 설치한 것은 이미 영애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또 적로(敵路)의 요해처도 아니기 때문에 혁파해야 한다는 뜻을 이미 장계로 청하였으니, 저쪽을 이쪽으로 옮기면 실로 양쪽이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새로 들어온 백성들에게 갑자기 자기들을 통제하려는 뜻으로 관장(官長)을 두는 것을 보인다면 반드시 돌아보고 의심하여, 이미 들어간 자는 쉽게 다시 흩어지고 장차 들어가려는 자는 반드시 물러서게 될 것이므로, 차라리 들어가는 대로 안정시켜 완전히 정착된 뒤에 서서히 진을 설치하기를 의논하는 것이 나을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그리고 도신이 논한 말이 참으로 의견이 있으니, 읍을 설치하는 일은 청에 의해서 보류해야 합니다. 3천여 호가 모여 사는 곳에 관부(官府)가 아주 멀어서 그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폐단이 그 안에서 생길 것이니, 해당 부사에게 신칙하여 허술하게 되는 근심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일찍이 이 판부사(李判府事)가 그 도를 안찰할 때에 상토(上土)에 진(鎭)을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지형과 사세로 말하자면 긴중하고 핍절함이 역시 마마해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에 삼정(蔘政)을 단속할 적에도 상토(上土)를 중요한 목으로 삼았었는데, 더구나 땅을 넓혀 백성을 옮기는 즈음에 유의할 바가 마마해에 비교하겠는가. 상토가 더 낫다. 그런데 해당 원이 상토는 말하지 않고 마마해만 거론한 것은 어찌 진장(鎭將)의 세력과 안면을 보아 이쪽은 긴중하고 저쪽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어 이처럼 중요한 곳은 버려두고 가벼운 곳을 취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은 연석에서 물러간 후에 이 판부사에게 의논하여 관문으로 도신·수신에게 물어서 별도로 의견을 갖추어 장문하게 한 후에 품처하라."
하였다.

 

삼사가 김이소를 문외 출송하라는 전계(前啓)를 거듭 올리니, 비답하기를,
"당초에 비답 내리기를 어렵게 여긴 것은 대간의 기풍을 존중하고, 후일의 폐단을 막으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아직껏 정계(停啓)하지 않아 결말이 날 기약이 없으니 도리어 대신을 위하는 방도가 아니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심이지를 판의금부사로, 이조원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 판서 구익이 아뢰기를,
"훈련원에 새로 세 자리를 늘려서 문신(文臣)에게 붙여준 것은 실로 막힌 것을 진작시키기 위한 정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전에 훈련 판관 한 자리를 이비(吏批)와 서로 바꾼 것은 더욱 문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기를 문겸(文兼)의 예(禮)를 사용하면 더욱 짧으니, 이비의 예에 의해서 30개월을 기한으로 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이를 대신에게 물은 결과, 우의정 윤시동이 우선 그 아뢴 대로 따르기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전 의금부 당상 윤사국(尹師國)·송영(宋鍈)·이익운(李益運)을 모두 먼 변방으로 안치하였다. 전교하기를,
"법이란 세상을 격려하고 둔한 것을 연마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법관이 법을 지킨 다음에야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된다. 오늘 사유(赦宥)하는 문서를 인해서 금부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그 가운데 연전에 죄를 씻어준 사람의 성명이 있었고, 또 법전 이외의 죄명을 부당하게 써서 다시 빼버리게 했던 자의 성명도 쓰여 있어 얼른 보매 눈이 휘둥그래져서 찬찬히 보니 해괴하였다. 그때에 다시 한 마디 검다 희다는 말도 없었기에 나는 이미 거행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성명이 아직껏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나라의 기강과 옥사의 체모가 있겠는가. 근래에는 비록 모든 일에 책임을 모면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지만 당당한 의금부의 금석 같은 막중한 법을 집행함에 있어 마치 길거리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듯 하는 습성이 있으니, 나라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한 후일의 폐단을 생각하니 서리가 내리면 장차 얼음이 얼게 된다는 비유로만 말할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이 명을 내리어, 윤사국을 울산(蔚山)에, 송영을 길주(吉州)에, 이익운을 강진(康津)에 안치하였다.

 

민종현을 예조 판서로, 서용보를 이조 참판으로, 임제원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7일 계축

선공 부봉사 위백규(魏伯珪)가 상소하여 시무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등극하신 첫 해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를 걱정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구언(求言)하는 전지를 내리신 것은 우순(虞舜)이 사방 만민의 소리를 다 들은 것과 같고, 여러 차례 진휼하는 은전을 베푸신 것은 한(漢) 문제(文帝)가 전조(田租)의 절반을 내려준 것015)  과 같으며, 재상(災祥)을 두려워하신 것은 은 고종(殷高宗)이 자신을 반성하여 닦은 덕016)  을 추구한 것이고, 과거(科擧) 규정을 엄히 신칙한 것은 《주관(周官)》의 빈흥(賓興)하는 뜻을 본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종묘와 원침에 공경을 다하고 양궁(兩宮)을 섬기는 데에 직분을 다하심으로써 그 큰 효성이 본보기가 되어 만민이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이룰 수 있다고 한 기한017)  이 두 번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주(周)나라의 유신(維新)과 같은 효과가 없어 교화가 진흥되지 않고 지극한 정치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에는 노숙한 덕망을 지녀 나라의 안위에 관계될 만한 자가 적고 산야에는 학문과 지조로써 한 시대의 시귀(蓍龜)가 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가 폐지되어 선비들에게는 모범이 되려는 습속이 없고, 군사들이 게을러져서 나라에는 활 잘 쏘는 군졸이 없으며, 병기(兵器)가 무뎌져 못쓰게 되어서 창고에는 변란에 대응할 만한 병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운(漕運)하는 배는 해마다 패몰되고, 저축은 항상 고갈되며,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산업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며 장사나 하고 인심은 들뜨고 어지러워 역옥(逆獄)이 해마다 일어나며, 날이 가물고 전염병이 만연하여 고을은 잔패해지고, 산은 민둥민둥하고 못은 말라버려서 모든 산물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달관(達官)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의리가 없고, 목백(牧伯)들은 임금과 근심을 나누는 생각이 없으니, 비록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말기의 폐단도 지금보다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전하를 위해서 한 마디도 직진(直陳)한 자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을 위해 말하는 자가 만일 일만 지적하여 논하고 만다면, 비록 하루에 만 마디를 하더라도 진실로 나라에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만약 근본으로 돌아가 대요(大要)를 논하자면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상의 뜻을 세우는 것인데, 뜻을 어떻게 세우는가 하면 바로 요(堯)·순(舜)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보필을 가리고 현능한 자를 거용하는 것인데, 보필을 가리는 데는 관원의 숫자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적임자를 찾아야 합니다. 셋째는 염치를 장려하고 기강을 떨치는 것이며, 넷째는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서로 다투어 출세하려는 습관을 억제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탐오한 행위를 단속하고 사치를 금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옛 제도를 따르고 나쁜 정사를 고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본디 전렵을 즐기거나 주색에 빠지는 일이 없으시고, 천품이 영명하시어 천도의 강강함을 발휘하시니, 이는 오제 삼왕의 자질을 가지시고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잘못된 패덕(敗德)을 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성덕과 공경이 날로 광명한 지역에 오르고 훌륭한 정치가 이미 태평성대에 이르렀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은 전하의 몸이 이미 요·순처럼 되고, 전하의 다스림이 이미 요·순 시대처럼 되었는지 감히 알 수는 없으나, 신의 생각에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요·순의 뜻을 세우지 못했고, 아직 요·순의 학문을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필도 아직 요·순 때의 신하 같은 자를 얻지 못했고, 현능함도 아직 요·순 때의 융성함을 따르지 못함으로써 법령과 정교가 아직도 겉치레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데도 그럭저럭 미봉해 가며 세월이나 보내고 있으니, 전하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순임금과 문왕이 편안하게 여기던 것이 아닙니다.
정자·주자 이후로 선비들이 임금에게 진언한 것이 몇 천만 마디인지 알 수 없고 책으로 묶어서 올린 것이 몇 천백 편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임금으로서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는 쓸 수 없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말도 거의 만 마디나 되는데, 비단 고인이 남긴 찌꺼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잡란하고 질서가 없어서 진실로 예람(睿覽)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스스로 미나리를 임금께 바치려던 농부의 하찮은 정성과 베짜던 과부가 국사를 걱정하던 일을 본받아, 이에 감히 요·순 우(禹)·탕(湯)의 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요임금의 공손하고 사양한 것[允恭克讓]과, 순임금의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른 것[舍己從人]과, 우임금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克勤克儉]과, 탕임금의 간하는 말을 따라서 어김이 없었던 것[從諫弗咈]과, 문왕 무왕의 덕을 밝히고 형벌을 엄정하게 한 것[明德信罰]을 가지고 전하를 위해 올리오니, 이는 바로 제왕이 지켜야 할 20자(字)의 법칙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여 실지로 몸에 간직하셔서 마음을 언제나 여기에 두어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신다면 그 덕을 공경하는 데에 빠르고 백성들과 화합하는 것이 능히 하늘로부터 영원한 명을 얻게 되어 종사(宗社)의 큰 복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나이가 7순에 이르러 공직(供職)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진서산(眞西山)018)  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선정신 이이(李珥)가 엮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가지고 전하의 보결(寶訣)로 삼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 문충(眞文忠)019)  과 이 문성(李文成)020)  이 영원히 전하의 좌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여 후한 말로 장려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70세에 부름을 받았는데 단지 소원에 의하여 환향하게 한다면 참으로 이른바 ‘왕래하면서 무엇을 듣고 보았느냐.’는 격이 될 것이고, 또 기다려서 벼슬을 시키자면 이것은 또한 노년에 중랑으로 있었던 한(漢)나라 풍당(馮唐)보다 더 늦은 감이 있으니, 우선 한 고을을 주어 평소 온축해 온 것을 시험하게 할 것이다."
하고는, 이튿날 위백규를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삼았다.

 

정릉 직장(靖陵直長) 신사준(愼師浚)과 순릉 직장(順陵直長) 소수중(蘇洙中)이 각기 소회 10여 조를 진달하니, 상이 조목마다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3월 9일 을묘

사관을 보내 영돈녕부사 김이소를 입성하도록 돈유(敦諭)하였다.

 

3월 10일 병진

선전관으로서 시사(試射)하여 3차에 화살 네 개를 맞히지 못한 자에 대해서 병조에서 다시 시험보이기를 청하니,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엄히 곤장을 친 다음, 새 출신의 예에 의해서 변방에 부방(赴防)하게 했다가 활솜씨가 능숙해진 다음에 분간할 것이요, 그 전에는 비록 머리가 백발이 되었더라도 감히 철령(鐵嶺)과 패강(浿江)을 넘지 못하게 할 일로 서북의 수신(帥臣)에게 분부하도록 하였다.

 

3월 11일 정사

비가 내렸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선잠단(先蠶壇) 제향 축문의 빈 곳을 채울 때에 헌관(獻官) 안창군(安昌君)의 성명을 의당 갖추어 썼어야 하는데, 대축(大祝)이 성(姓)자를 쓰지 않아 비록 즉시 바로잡기는 했으나 이미 일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대축 한용탁(韓用鐸)을 중추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2일 무오

이문원에서 재숙하였다.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봄이 이미 저물어 가는데도 날씨가 아직껏 차서 꽃소식이 막연하니, 사관이 충분히 기록할 만한 일이다."
하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정월의 추위는 천하가 다 같다고 하니, 꽃이 필 기운이 전혀 없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아침에 북악산을 쳐다보니 또 눈빛이 있었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눈 역시 제 철이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시동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무학(武學)이 있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일찍이 무학 교수(武學敎授)가 되었는데, 그 사실을 우리 나라 양성지(梁誠之)의 상소에서 상고할 수가 있다. 무학을 폐지하면서 훈련원으로 고쳤는데, 만약 무성묘(武成廟)를 세운다면 무학이 크게 갖추어질 것이다. 주자가 일찍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일러 예악(禮樂)을 거의 통했다고 하였으니, 공명은 실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에 합당하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담박명지 영정치원(譚泊明志寧靜致遠) 여덟 글자는 후학들에게 큰 공이 있기 때문에 고 중신 김만중(金萬重)이 일찍이 ‘공명을 문묘에 종향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가정(嘉靖) 연간에 일찍이 문묘에 종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청 감사 임제원(林濟遠)이 하직 인사를 할 때에 말하기를 ‘민호(民戶)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었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어찌 민망스럽지 않은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제원이 아뢴 말은 너무 과중한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토지는 더 넓히지 못하지만 인구는 날로 번성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진년 이전에는 성 안에서부터 강 밖에 이르기까지 인가가 즐비하였다고 하는데, 근년 이래로 옛날 즐비하던 가호가 태반이 비어버렸는데도 어찌 호구가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하기 전에는 외읍(外邑)의 이속(吏屬)들이 경성에 많이 올라와서 시일을 오래 경과하게 되었기 때문에 집을 사서 그대로 사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그때에 강 밖의 인가가 즐비했음은 사세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사치하는 폐단이 음식이 의복보다 심하니, 바라건대 성궁(聖躬)께서 몸소 검소함을 숭상하시어 크게 변화하기를 도모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朝士)의 장복(章服)에 반드시 갑사(甲紗)를 쓴 것은 30년 사이에 불과하며 전에는 상방(尙方)에서 구하더라도 얻기가 어려웠으니, 어찌 매우 귀하지 않았겠는가. 단사(單紗)는 역시 가볍고 약하여 오래가지 못해서 생초(生綃)와 다름이 없으니 입을 만한 물건이 못된다. 내가 일찍이 보니 고 상신 이복원(李福源)이 익선(翊善)으로 있을 때 남색 장복을 입었었다. 그러니 지금 이후로는 4품 이상은 남색이나 초록색으로 통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일찍이 조신(朝臣)의 화상(畵像)을 보건대 남색 장복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조정이 규모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당면한 급선무는 장원한 계책을 가지는 것 만한 것이 없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대신 뿐이다. 상업(相業)의 ‘업’ 자는 바로 성사(成事)·성공(成功)의 뜻인데, 내가 경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실로 규모를 정하고 사공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크게 변화시키거나 작게 변화시키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은 다음에야 군덕을 협찬하고 상업을 이룰 수가 있으니, 경은 힘쓰라. 내가 8년 동안 마음을 써서 겨우 좌상을 얻었고, 또 8년이 되어서야 겨우 경을 오게 하였다. 만약 경이 종래에 나와서 세상과 부침(浮沈)을 같이 했더라면 오늘날의 인망을 성취하기를 보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앞으로 8년 뒤에 또 어떻게 경과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동이 아뢰기를,
"금부의 문안(文案)에 ‘특교(特敎)로써 지워버린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홍국영(洪國榮)과 이재간(李在簡)처럼 흉역한 자의 죄명을 어찌 깎아내서 씻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겉으로 보면 비록 온당치 못한 듯하나 나 역시 근거한 바가 있다. 국영에 대한 대계(臺啓)의 율명(律名)은 바로 처자를 노비로 만들고 재산을 몰수하라는 것이었고, 의금부에 있는 문서에는 ‘귀환 전리(歸還田里)’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귀환은 기왕 죄명이 아니고 보면 아직껏 의금부에 머물러 두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는 것이다. 이재간의 죄는 좌상 및 김 봉조하가 상소하여 처음 알았는데 한번 추문하기도 전에 길에서 지레 죽었다. 그런데 그에게 극률을 가하는 것은 끝내 법 밖의 처벌에 관계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이렇게 하였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심이지·심환지·이형원 등이 서로 이어서 극력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군장(軍裝)의 사치를 금하였는데 훈련 대장 이주국이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군교(軍校)가 입는 대단(大緞)·갑사(甲紗) 등속도 모두 금지하고, 석새로 된 저포(苧布)를 허용하였으며, 화살통에는 미전(尾箭)을 제거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영교(營校)의 군복을 기왕 검소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별군직(別軍職)과 선전관 등이 대단·갑사·단사로 계절에 따라 바꾸어 입는 사치 풍조부터 엄금하라."
하였다.

 

돌아온 진하사 이병모 등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상황의 근력은 평안하던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 황제가 인효하고 성근하다는 칭찬이 멀리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모습이 화평하고 쇄락하였으며, 종일 연희(宴戱)를 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딴 데 돌리지 않고 태상황을 시좌하였는데, 태상황이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웃으면 같이 웃었으니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서에 대한 사은을 정지하라 하였는데 만약 동지에 으레 보내는 사행을 기다리자면 너무 늦어지게 되므로, 조정의 의논 중에 혹은 성절사를 보내면서 사은 예를 겸하여 닦는 것이 타당하겠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헤아려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로 상황의 성절에 이미 사신을 보냈으면 새 황제의 성절에도 빠뜨릴 수가 없고, 또 금년의 성절은 환갑과는 다르니, 굳이 전례가 없는 일을 새로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성교가 지당합니다. 사신을 꼭 별도로 보낼 필요는 없고 절사(節使)를 조금 일찍 들여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의 표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신 역시 여러 차례 그곳에서 물어 보았더니, 각각 할 필요가 없고 단지 ‘황상예람(皇上睿覽)’이라 쓰거나 혹은 ‘황제 폐하’라고만 쓰면 태상황이나 새 황제가 스스로 보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분명하게 알려준 말은 아닙니다. 대체로 태상황이 모든 사무를 전일과 다르게 하고자 않기 때문에 아래서 거행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규모는 비록 생략하고자 하더라도 아랫사람의 일 처리에 있어서야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3월 13일 기미

함흥·영흥 두 본궁(本宮)에 의대(衣帶)와 향촉(香燭)을 지송하였다.

 

전교하였다.
"묘궁(廟宮)의 향사를 친행하는 것은 비록 사시(四時) 및 납일(臘日)이 아니더라도 모두 대향의 예를 쓴다는 것이 예전(禮典)에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는 궁향(宮享)의 삭망(朔望)에 생략하는 뜻으로 헌작(獻酌)의 의식을 임시로 쓰고 있는데, 모레 망제(望祭)의 친행 때에는 예(禮)에 따라 악(樂)을 쓰고 태뢰(太牢)를 쓰라."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과 은성 부부인(恩城府夫人) 고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에게 사제(賜祭)하였다.

 

역관(譯官)으로서 《궐리지(闕里志)》·《궐리문헌고(闕里文獻考)》 등의 책과 성묘도(聖廟圖)와 공씨비본(孔氏碑本)을 연경에서 구입해 온 자가 있어 상가(賞加)를 명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이소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번 일은 첫째도 신의 죄이며,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자물쇠를 지레 내놓음으로 인해 어가가 길에 머물게 되자, 군졸들은 성 아래서 서성거리고 사녀(士女)들은 길에서 놀라 의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황급하던 당시의 광경과 나라 기강이 파괴된 것은 지난 역사에서 찾아 보아도 실로 듣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신 자신이 유도 재상(留都宰相)으로 내외의 사무를 총괄하고 있으면서 이미 사전에 살펴 단속하여 그대로 머물라는 전지를 기다리지 못하였고, 또 제때에 계달하여 지레 궐문을 닫은 죄를 청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가운데 스스로 큰 죄에 빠졌으니, 참으로 그 율(律)을 논하자면 나라의 법이 지엄한 것입니다. 그런데 궁을 지키던 병조 판서와 군사를 거느린 수신(帥臣)은 번갈아 죄를 받아서 변방의 험한 곳으로 찬배되어 혹은 이미 과오를 처결받았고 혹은 아직껏 죄적(罪籍)에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만이 유독 요행히 면하여 당초에 특감(特勘)한다는 명이 견파(譴罷)에 그쳤고, 잠시 동안 대계(臺啓)를 윤허했다가 인하여 즉시 나오도록 하였으니, 구별하는 즈음에 성념(聖念)을 굽혀 쓰시어 사사로이 용서하신 은혜를 신만이 입게 되었습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도리어 죄를 영화로 돌려서 이토록 거듭 은혜로 살려 주심을 입는단 말입니까? 범한 죄가 이미 중하고 탄핵하는 글의 먹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감히 양양하게 나가기를 마치 하찮은 과오로 이미 처단을 받은 사람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근일의 돈유에서 빠짐없이 다 말하였다. 다만 병조 판서가 아직 사유를 받아 돌아오지 못한 것이 혹 경이 나오기 어려운 단서가 된다고도 하겠으나 이는 그렇지 않다. 경이 비록 한편으로는 인죄(引罪)해야 하나 의리상 한편으로는 죄주기를 청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병조 판서가 사유를 받는 것으로써 경이 조정에 나오는 계제로 삼으려고 한다면 도리어 경 때문에 법을 굽혔다는 혐의가 있게 되니, 경은 모름지기 안심하고 즉일로 입성하라."
하였다.

 

3월 14일 경신

경모궁에 가서 재숙하였다.

 

명하여 경진년 온천(溫泉) 행행 때 행차를 따랐던 군교(軍校)와 액속(掖屬)에게 가자하고 차등있게 쌀을 내리도록 하였다. 궁인(宮人)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얼마 후 또 명하여 배종관(陪從官) 전 현감 권성응을 돈령부 도정으로 올려 제수하고, 온양군에서 일을 감독한 이교(吏校) 등에게도 각기 한 자급씩을 올려주도록 하였다.

 

3월 15일 신유

경모궁의 망제를 친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만약 오늘을 넘기고 나면 소중히 여겨 특별한 예(例)로써 뜻을 보이는 의미가 없게 되는데, 전조에서 거행하려고 하지 않아 이조 판서가 어제 연석에서 아뢰기까지 했으니, 비록 지나치다 하겠으나 그 또한 소중함을 내세웠는지라, 강제로 하기 어려운 일을 강제로 할 수가 없다. 조노진(趙潞鎭)·김종순(金鍾純)은 해조로 하여금 먼저 군직에 부쳐서 녹을 주고 모자를 쓰고 입시하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고 정승의 집을 자별하게 보는 것은 계유년과 무인년에 수립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맘때 고 정승의 부자가 희정당(熙政堂)에 입시했을 때의 은례(恩禮)가 분명하게 기주(記注)에 실려 있는데, 어찌 차마 이날을 헛되이 보내겠는가.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의 집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라.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다. 또 고 정승 이태좌(李台佐)에게도 치제하라."
하였다.

 

3월 16일 임술

홍산현(鴻山縣)의 지인(知印) 이돌석(李乭石)이 일찍이 아객(衙客)에게 허물을 지은 관계로 하찮은 죄로 관에 고발되어 장(杖)을 맞았다. 그리하여 매양 앙심을 품고 관장(官長)을 내쫓아 아객도 떠나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본관(本官)이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동헌의 방안이 텅 비어 사람은 없고 병부(兵符)가 벽에 걸려 있자 마침내 이를 훔쳐 나와서 불이 한창 타고 있는 관아의 아궁이에 이를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때 아객이 우연히 변소를 갔다가 부(符)에 달린 뼈로 된 고리를 버려진 재 속에서 찾아냄으로써 절도사가 그 사실을 염탐하여 계문하였다. 얼마 후에 또 충청도 관찰사 임제원이 계문하기를,
"병영에서 조사한 이외에 우포도청에서 비밀히 이문하여 말하기를 ‘기찰하는 포교들이 홍산에 이르러서 병부의 변(變)을 듣고는 의심스런 사람 이응준(李應駿)을 찾아냈는데, 그의 공초에 「내가 누차 곤장을 맞아 매양 복수할 계책을 품고 있다가 밤중에 본관의 침방(寢房)에 들어가 병부를 훔쳐 곧바로 관아 아궁이 불속에 던졌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병부는 하나인데 범인은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법에 의해 처단하고, 해당 현감 김사석(金思䄷)을 우선 파출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수령을 파출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패(殿牌)에 변이 생긴 고을의 수령은 감죄하지 않는다’는 논의에 의해 분간하고, 병부는 새로 만들어서 주라."
하였다.

 

3월 17일 계해

부교리 김근순(金近淳)이 상소하기를,
"일전에 의금부의 문안을 상께서 지워버리셨으니 이것이 얼마나 과중하고 비상한 거조입니까? 세월이 오래되어 의금부의 법을 펴지 못해 형벌이 아직껏 지체되고 있으므로 인심이 매우 분개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직 일부(一副)의 문안이 해당 관청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갖추 나열되어서 그 죄가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비록 지금 형벌을 내려 인심의 분개함을 당장 풀지는 못할지라도 오히려 만세 이후까지 대방(大防)을 엄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일필로 지워버리고 마침내는 금령을 만들어 말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나라가 나라 꼴이 될 것인지 신은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금령부터 일체 환수하소서."
하니,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언 남기만(南基萬)이 상소하기를,
"환향(還餉)의 폐단을 없애는 일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을 살펴 가리는 일은 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상이 환곡의 폐단을 걱정하여 친히 어제(御製)를 내서 문관과 음관 제신에게 책문으로 물어 환향책(還餉策)이라 이름하였던 바, 환향은 곧 조적이었다. 그래서 이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또 아뢰기를,
"서명(西銘)021)  은 군도(君道)에 가장 절실한 교훈이 되기 때문에 목릉(穆陵)022)  의 때에 선정신 이황(李滉)이 일찍이 그림으로 그려 바쳤으니, 이 글은 실로 전하의 가법(家法)이 됩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효릉  참봉(孝陵參奉) 유심춘(柳尋春)이 상소하기를,
"신은 시골에 있을 때부터 삼가 우리 전하께서 주자(朱子)의 글에 깊이 유의하시어 외고 연구하시느라 밤이 깊도록 일찍이 한번도 중지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성인이 되는 기본이요 백성들의 복으로, 만세의 태평을 거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가 한스러운 것은, 위에는 요·순 같은 임금이 계시나 아래에는 후직(后稷)과 설(契) 같은 보좌가 없어서 충성스런 말과 곧은 논의가 앞에 이르지 않고 옥당 같은 직책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천하 후세에 반드시 전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며, 전하의 마음을 알고 나면 또 반드시 이에 대해서 유감을 갖게 될 것이니, 오늘날 전하의 신하 된 자가 어찌 차마 경연을 열자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록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열거나 소대(召對)하는 일은 못한다 하더라도 만기(萬機)를 보시는 여가에 옥당의 제신과 만나서 민생의 질고와 여염의 어려움과 인재의 현부와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자문하여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서 남의 좋은 점을 취한다면 어찌 성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백성들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은 환곡 정사가 가장 심합니다. 곡(斛) 위에다 또 곡으로 받고, 말 위에다 또 말로 받아들여, 한 해 동안 노고한 곡식을 모조리 관고(官庫)로 실어다 바치는데, 곡식을 내줄 때에는 모래와 겨가 태반이라 먹을 수가 없고, 흉년이 든 해에는 힘입어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환정의 폐단이 바로 이러합니다.
양역(良役)으로 말하자면 필포(匹布)로 바치는 것은 본디 징수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지금은 태평한 지 이미 오래여서 민물(民物)이 매우 번성한데 어찌 군정(軍政)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른바 별군관(別軍官)·재가군관(在家軍官)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명목입니까? 큰 고을은 1천여 명이 되고, 작은 고을도 수백 명은 되는데, 그 가운데서 부유하고 실한 자를 가려서 번(番)을 면제해 주고 돈을 받으며, 군교(軍校)와 이서(吏胥)는 또 이른바 계방(契房)의 소속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가의 역에 응하는 백성은 실로 번한한 거지나 떠도는 무리일 뿐인데, 그나마 이들이 잇따라 죽기 때문에 한갓 빈 장부만 가지고서 죽은 자의 몫으로 징수하는 것이 이웃마을에까지 미침으로써, 열 집에서 해야 할 역을 한 집에서 응하고, 열 사람이 응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이 당하고 있습니다. 양역의 폐단이 바로 이러합니다.
전정(田政)으로 말하자면 근년 이래로 연달아 홍수를 만나서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번 조정에서 다시 개간하라는 명이 있자, 모래밭과 진펄을 마구 조세 징수하는 대상으로 섞어 넣어서 그럭저럭 그대로 숨겨놓은 것이 한갓 은결(隱結)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정(籍政)으로 말하자면,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이 환정(還政) 때문에 곤궁하고 양역(良役) 때문에 지쳐서 집이 없이 아침에는 동쪽으로 저녁에는 서쪽으로 떠돌고 있는데도 구차하게 그 숫자를 채워 허호(虛戶)가 절반을 차지합니다.
소금 판매하는 일로 말하자면, 당초에 설시한 뜻은 대체로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들에게도 해가 없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방백과 현읍에서는 문득 전매하는 술책을 쓰고 편비(褊裨)와 장리(長吏)들은 이익을 노리는 밑천으로 삼아서, 심지어는 식구를 계산하여 나누어 주고 강제로 백성들에게서 돈을 받아들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노비(奴婢)로 말하자면, 우리 성상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신 은혜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서리들이 그것을 인연하여 농간을 부려서 그들을 끝없이 침범하여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외로 받아들이고, 이미 죽은 자에게서 징수하는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족속에게까지 미치고 마구 양민까지 침범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호소하고 집집마다 소란스럽습니다. 이상의 것이 근일 민폐의 대략입니다.
대저 이런 고질적인 폐단은 모두 수령이 탐오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지금의 수령들은 백성을 마치 닭이나 돼지처럼 보아 침해하기만을 능사로 여기고 긁어 모으는 것을 기량으로 여깁니다. 견감하라는 하교와 돌보아 주라는 뜻이 여러 차례 윤음(綸音)에서 나왔으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서로 숨기고 가리어 전하의 인애하신 혜택을 빠뜨리고 행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겠으며, 폐단이 어떻게 자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는 도리는 의당 수령을 가리는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 수령의 근본은 감사에게 달려 있고, 감사의 근본은 묘당과 전조에 달려 있으며, 묘당과 전조의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國初)부터 시작하여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詩)》·《서(書)》·《좌전(左傳)》의 글자를 대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이천(李蕆) 등에게 명하여 이를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섬밀(纖密)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隲)》 등의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字本)으로 삼아 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인데 이를 사용한 지 3백 년이 되었다. 내가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앙청하여 대내에 있던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과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으로 삼아 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이다. 내가 즉위한 원년인 정유년에는 관서백(關西伯)에게 명하여 본조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여 역시 내각(內閣)에 보관하였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동체(銅體)가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주묵(朱墨)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었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자본을 취해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및 《원행정례(園幸定例)》 등의 책을 장차 편찬·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이름하여 규영(奎瀛) 신부(新府)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3월 18일 갑자

농산정(籠山亭)에서 재숙하였다.

 

3월 19일 을축

황단(皇壇)에 가서 망배례를 행하였다.

 

차대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증 참판 최효일(崔孝一)에게 증시(贈諡)하는 일을 성명(成命)이 이미 내렸으나, 시호를 내릴 수 있는 품질로 증직하지 않고 증시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은 그 예가 없는 듯합니다. 또 최효일·차예량(車禮亮)·안극함(安克諴)은 사적이 뛰어나고 충렬이 빛나서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고 보면, 한 자급을 가증하는 것이 아까울 것이 없으니, 최효일에게는 정2품직을 가증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상이 이르기를,
"차예량·안극함의 뛰어난 절의와 기특한 행적 역시 최효일·황일호(黃一皓)와 백중지세라 할 수 있는데 추배(追配)하는 은전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사호(祠號)를 현충(顯忠)이라 한 것은 이미 절의를 장려한 뜻인데, 기백(箕伯)의 장문(狀聞) 가운데서 그 사호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매우 소루하였다."
하고는, 인하여 전교하기를,
"오늘 봉실(奉室)에 절을 하니, 더욱 비풍(匪風)의 감회가 간절하였다. 우상의 연주(筵奏)를 인하여 고 충신 최효일에게 관품을 가증하였는데, 또 예조 판서의 말을 듣고서 도신이 장청(狀請)한 바가 있음을 알았으니, 고 충신 증 병조 참의 차예량과 증 병조 참의 안극함을 고 충신 증 판서 최효일을 추배한 예에 의해서 일체로 현충사에 배향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평안도 관찰사 김재찬이 장계하기를,
"고 훈련부 정 안극함은 용천(龍川) 사람이고, 고 교수 차예량은 선천(宣川) 사람인데, 젊어서부터 인품이 탁월하고 기절이 있었습니다. 병자년 이후로는 명나라를 회복시킬 뜻을 두었는데, 의주 사람 최효일이 평소 기략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사우(死友)를 맺어 ‘청북삼호(淸北三豪)’라 호칭하였습니다. 하루는 극함과 예량이 효일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노중련(魯仲連)023)  이 있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니, 효일이 말하기를 ‘좋다. 나에게도 뜻이 있었는데 그대가 감히 말을 하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서로 모의하기를 ‘한 사람이 등주(登州)로 들어가 천조(天朝)의 여러 장수를 설득해서 곧장 심양(瀋陽)을 치고, 한 사람은 심양으로 들어가서 내응(內應)하며, 한 사람은 청북(淸北)의 의사(義士)를 동원하여 들어가면 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극함이 말하기를 ‘내부(內附)하는 데는 최군이 제일이고, 정탐하는 것은 차군이 제일이며, 동지들을 창솔(倡率)하고 기회를 보아 북쪽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내가 그대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몰래 죽기로 결심한 지사 1백여 인을 모집하여 기묘년에 효일이 미관(彌串)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서 등주로 향하였는데, 이때 세 사람이 시(詩)를 지어 눈물을 흘 리면서 작별하였습니다. 신사년에는 예량이 몰래 강을 건너 곧장 심양으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극함은 날마다 전구(戰具)를 다스리면서 북쪽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마침내 발각되어 예량은 체포되어 심양 옥에서 혹형(酷刑)을 받았는데, 죽음에 임하여 한 손가락을 깨물어 줄줄 흐르는 피로 글을 써서 집안 식구에게 부치고는 계속 적을 꾸짖다가 죽었습니다. 극함은 형구를 쓴 채로 서울로 송치되어 황일호와 함께 저자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형을 받을 때에도 안색을 변치 않고 정명수(鄭命壽)를 크게 꾸짖기를 ‘너를 먼저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효일은 오삼계(吳三桂)의 군영으로 갔는데, 북경이 함락되자 숭정황제(崇禎皇帝)의 능에 올라가 7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습니다.
뒤에 효일에게는 여러 차례 증직하여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가 충렬(忠烈)이며, 예량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극함에게는 호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같은 때에 나라 일로 죽은 사람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증직하였는데, 이 사실은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의 주의(奏議)와 고 중신 정실(鄭宲)의 도계(道啓) 가운데 매우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효일을 의주(義州)의 사당에 추향하면서부터 청북의 많은 선비들이 글을 올려 도신에게 고하기를 ‘신사년에 나라 일로 죽은 여러 사람이 나라의 포상하는 은전을 받은 것은 진실로 지당하며, 더군다나 최효일을 사당에 제향하게 한 것은 백세까지 의리를 흥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의사(義士)라고만 하기는 하나 그 뜻이 같았고, 그 일이 같았으며 그 죽음이 또 같았으므로, 만약 태사(太史)로 하여금 사서에 쓰게 한다면 장차 세 의사가 전(傳)을 같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이제 효일만을 유독 제사받는 열에 배향하고, 극함과 예량은 참여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수양(睢陽)의 묘(廟)024)  에 장순(張巡)은 제사하고 허원(許遠)은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대체로 의리를 맺고 계책을 세운 이는 극함인데 특별히 효일의 죽음이 우뚝하고 광대하여 두 의사에 비해 한 급이 높기 때문에 고을 선비들이 정문(呈文)에서 먼저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입장이 바뀌었으면 모두 그렇게 했을 것이다. 효일은 이제 제향을 받게 되었으니, 극함과 예량도 같은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이 실로 한 도의 여론이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신이 관할 지역을 순행하는 길에 의주를 들렀는데, 여러 유생들의 연장(聯狀) 내용이 한 마디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번의 추배하자는 논의는 실로 이구동성인 공의(公議)에서 나와 막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효열(孝烈)에 대한 장계를 쓰면서 자세히 사실을 채탐하여 아뢰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향(祀享)은 사체가 중하므로 신이 감히 하나를 지적하여 아뢰지 못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주어(奏御)하는 문자는 그 얼마나 잘 살피고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평안 감사 김재찬은 장계에서 고 충신 최효일은 증 호참(贈戶參)인 사실을 잘못 알고 ‘여러 차례 증직되어 찬성에 이르렀다.’ 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근래에 특교(特敎)를 인해서 거행하는 중인데도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잘못 말하여 대단히 미안하니, 중히 추고하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송도(松都)를 매양 잊지 못하는 것은 서울에 가까운 웅부(雄府)로서 급한 일이 있을 때 의지할 만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산천이 웅장하고 토지가 광활하여 그곳에 사는 백성 가운데 이따금 기이한 재능을 지닌 사람과 남다른 성품과 기개를 지닌 사람이 많아서 성대히 고도(古都)의 유풍이 있어 진실로 숭상할 만하다. 또 더군다나 모든 물화가 집중되고 팔도 사람이 모여드는 곳으로서 바로 대동강 동쪽의 제일가는 도회이다. 다만 그곳이 장사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론하기를 싫어하고 아울러 그곳 사람들까지 배척하여 상대해 주지 않은 것이다. 대체로 주(周)나라 옛 도읍지도 그 풍속이 장사를 숭상하였는데 더군다나 몇 백년 동안 황폐된 고을이겠는가.
근년 이래로 나라에서 수습하는 것이 전만 못하여 부내(府內)의 인사들이 재능을 품고도 헛되이 늙어가고 가끔 등제(登第)한 자가 있어도 스스로 발탁될 길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열성조에서 진휼하신 성의(聖意)이겠는가. 또 더군다나 폐막은 자심하게 일어나고 재물과 돈은 줄어들기만 하는데, 이것이 과연 자모전(子母錢)의 창고 저축이 점차 줄어듦으로 말미암아 관(官)은 의지할 데가 없고, 백성들은 꾸어 먹을 데가 없게 된 소치인가, 아니면 그 한 부의 강계(疆界)가 사방 이웃 고을에 끼어 있어 좁고 트이지 못해서, 그 도로·개천·성읍·여묘(廬墓)를 제외하고 나면 결국 백성은 많고 땅은 좁음으로써 땅의 소출이 관청의 공급에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근래에 금천(金川) 고을을 옮기는 일로 인하여 송도 유수가 변통할 방책을 보고하였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개성 유수 이면응(李冕膺)이 아뢰기를,
"금천 고을을 옮기는 일은 오로지 수토(水土)의 폐해를 피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다만 금천 경내에는 한 곳도 청량(淸凉)한 땅이 없어서 전에도 고을을 옮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세월이 조금 오래되면 문득 전처럼 되고 말았으니, 후일에 또 오늘날처럼 되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대체로 금천이 송도와의 거리가 3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송도의 수토를 가장 청량하다고 일컬으니, 참으로 영원히 수토의 폐해를 피하여 구원의 계획을 삼게 하고자 한다면 금천을 떼내서 송도로 옮기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해서 또 개성부의 폐해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개성부의 온갖 폐막에 대하여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재정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궁하고 땅은 좁은데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수십년 이래로 관의 저축이 날로 탕갈되고 이민(吏民)은 날로 더욱 조폐해지니, 이는 그곳을 지키는 자만이 걱정하여 어쩔 줄을 모를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금천의 몇 개 면(面)이 굽이돌아 대흥 산성(大興山城) 뒤쪽으로 들어와 있는데, 길이가 40, 50리나 되는지라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어 세가 무겁고 부역이 번거롭기 때문에 거주민이 날로 떠나서 점차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도 사람들은 지척에서 서로 바라다 보면서도 감히 그곳에 눌러 살면서 개간할 계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세와 역이 번중할 뿐만 아니라 역시 다른 고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배척을 받는 것을 싫어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쪽 저쪽에서 다 버림받아 거의 모두 황폐해졌으므로, 본부의 백성들이 모두 이 몇 개 면(面)을 본부로 이속시켜 개간하여 먹고 살 방도로 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후의 유수들이 상소나 계문으로 조정에 보고한 것이 또한 여러 차례였으나 아직껏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 금천 고을을 옮길 때에 그 소재지를 송도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치하도록 허락하고 군수를 본영에 소속시켜 판관으로 삼아 종사(從事)의 직임을 겸행하게 하기를 마치 지금 경력(經歷)이 하는 것과 같이 하게 하고, 우선 경력의 관직을 없애서 경력의 늠료와 경비로써 지금의 부족한 비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천에서 경사(京司)에 상납하던 것은 전처럼 상납하고, 순영(巡營)에 상납하던 것은 환산해서 다른 물품으로 대신 지급하여 줄어든 것이 없게 한다면, 경사와 순영에는 조금도 손해됨이 없고 송도에는 크게 도움이 있을 것이니, 이는 실로 송도나 금천 두 곳에 다 이득이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송도 사람들이 장차 집을 짓고 개간을 하여 묵은 땅이 옥토로 변하게 되고, 텅 빈 땅에 인가가 즐비하게 되어 반드시 성취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새로 개간한 땅을 둔전(屯田)으로 만들고 개성부의 대장에 올려서 개간하는 대로 세를 받으면 역시 재물을 생산하여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일이 경장(更張)하는 데에 관계되고 또 관제(官制)에 관련되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대신의 뜻은 어떤가?"
하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개성부는 옛날 도읍지여서 지리적 조건이나 백성들의 형편이 보통 지방과는 비할 바가 아니요, 실로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반드시 의지할 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인재는 배척해서 쓰지 않고, 관부는 잔폐하기가 아주 심하여 지금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그곳 유수로 있을 때에도 역시 금천의 크고 작은 남쪽의 면들을 얻기를 청하는 일로 전석(前席)에서 말을 꺼냈었고, 또 장차 물러가서 상소로 진달하려고 했었으나 곧 이직되어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송도의 사세가 10여 년 전에 비해 또 훨씬 더 감손되었다고 하니, 반드시 큰 변통이 있은 다음에야 영과 부의 체제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송도 유수가 아뢴 말은 실로 경장하는 도리에 합당하거니와, 마침 금천 고을을 옮기는 때를 당하여 이처럼 하문하신 것은 또한 한 부(府)가 흥왕할 기회인 듯합니다. 금천을 개성부에 이속시키고 그 관장을 판관으로 삼는 데에 대해서는 폐단이 생기는 원근을 막론하고 신은 송도의 사세를 잘 알기 때문에 감히 그 사이에 이의를 하지 않으니, 두루 여러 대신에게 물으시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고 목사(牧使) 임형수(林亨秀)에게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었다. 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영종(英宗) 신사년에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 상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그에 대한 총애와 발탁이 다른 신하들과 아주 달라서, 몇 년 동안에 화요직을 두루 거쳐 정경(正卿)에 뛰어 올랐고 정미년에 정승이 되었다. 무신년 조덕린(趙德隣)을 복관(復官)시킬 때에는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으나 뜻을 크게 지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비록 외진 섬으로 정배되는 엄한 견책을 입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사면을 받아 다시 정승에 임명되어 상의 권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전교하기를,
"지우를 받음이 동료들 가운데 가장 앞섰고 칭찬을 받은 것도 끝내 변함이 없었으니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아오겠는가. 이제는 죽었는지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애석하고 불쌍한 마음에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의 행적과 나를 정성으로 섬긴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공의가 있다. 그러니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칭찬에 가깝고, 하지 않으면 또한 사실을 매몰시키게 되는데 어찌 명정(銘旌)을 쓸 때까지 늦추겠는가. 의당 사관으로 하여금 군신간에 서로 잘 만난 전말을 갖추 기술하여 징신할 증거로 삼아야 한다. 시호를 내리는 은 전은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려서 속히 거행할 것이요, 조문하고 자손을 녹용하는 일은 관례에 의해서 거행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전교하기를,
"듣건대, 갑오년 이후에 주대(奏對)한 것과 그 사실들을 대신이 손수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가묘(家廟)에 보관해 두었는데, 비록 집안 사람이라도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하였다. 상이 또 예조 판서 민종현에게 얻기 어려운 애석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유시하니, 종현이 아뢰기를,
"이 대신의 자품은 도에 가까워 조행이 결백하고, 또 험한 일과 변란을 겪으면서도 오래도록 더욱 뜻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가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도 신기가 흐트러지지 않아서 후사를 처리함이 모두 도리에 맞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모는 비록 청수하고 허약한 듯하였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아주 확고하였었다. 연전에 탐라로 귀양보낸 일은 내가 부득이해서였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를 손상시키려고 했겠는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그 자신의 실수였으나 제우의 융숭함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하니, 종현이 아뢰기를,
"시종 지우를 받은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조우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장례 때에 이르러 그 집에서 유계(遺戒)가 있다 하여 감히 예장(禮葬)을 받지 않으므로, 전교하기를,
"시호를 청하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더라도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으레 모두 받는 법인데 더구나 예장이겠는가. 상주의 집에 유시하여 관례에 따라 받도록 하게 하라."
하니, 그 집에서 그제야 받았다.

 

위백규(魏伯珪)가 상소하여 사습(士習)을 논하고, 아울러 태학 제생(太學諸生)에 대해 언급했는데, 장옥(場屋)이 옛 폐습에 물들었다는 것이었다.

 

3월 20일 병인

상이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어제 황단(皇壇)에 망배(望拜)하였는데, 이제 책 하나를 편찬하여 존주(尊周)의 뜻을 붙이고자 한다. 맨 첫머리에 열성조의 윤음 및 어제 시문 가운데서 춘추 대의를 나타낸 것을 게재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당시 충신·지사의 의리를 천명한 작품으로 소장이나 시문을 막론하고 아울러 편입하며, 충절로 정포를 입은 자에 이르러서는 사원(祠院)의 소재 및 사적의 본말을 하나하나 갖추어 실을 것이다. 이 책이 완성되면 거의 천하에 대의를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미덥게 하는 방도에 있어 사적을 의당 실록에서 상고해 내야 하니, 한림(翰林)과 동춘추(同春秋)가 함께 예문관에 가서 자세히 초록해서 편집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얼마 후에 명하여 조진관(趙鎭寬)을 동지춘추관사로 삼고, 초계 문신 김근순(金近淳) 등 11인을 등록랑(謄錄郞)에 임명하여 실록을 상고해 내게 하였다.

 

3월 22일 무진

우의정 윤시동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번 시호를 서경(署經)하는 일에는 검상을 의당 차출해야 하겠고, 개성 유수와 평안 병사 역시 이미 교체되었으므로, 신이 또 연교(筵敎)를 받들어서 영상에게 전했더니, 영상이 ‘월전에 진소하여 은비(恩批)를 받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신더러 의망하여 들이게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정부의 낭료는 본디 사람을 가려 뽑는 직임이거니와, 송도 유수와 평안 감사는 매우 중한 직임이어서 비록 요식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의당 신중히 가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상은 지금 휴가를 받았고, 좌상 역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택을 입어 휴가중이므로, 신이 비록 잠시 대신 일을 처리하고는 있으나 특히 사람을 천거하여 의망하는 일은 수상이 의당 주관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좌상이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자리를 뛰어넘어 무릅쓰고 감당하겠습니까. 왕복하는 즈음에 저절로 지체되어 성명(成命)이 내린 지 오래도록 거행이 늦어지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영상은 이미 옛 정승들의 고사로써 아뢰었고, 좌상 역시 집에 있으면서 조섭하는 중이다. 영상은 휴가를 내면 으레 일을 보지 않는 것이니, 비록 연석에서 아뢴 것이 아니더라도 경이 의당 대신해서 천거해야 한다. 좌상은 휴가와는 다르니, 경이 모름지기 왕복하면서 정당하게 처리해야 한다. 두 정승이 조정에 나오기 전까지는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훈련 대장 이주국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우리 나라 군제(軍制)인 속오(束伍)의 규정은 주(周)나라의 병농제(兵農制)를 모방한 것이요, 번(番)을 나누는 법은 당(唐)나라의 원정(遠征)하는 예를 채택한 것입니다. 임진란 이후에 오위(五衛)가 변하여 제영(諸營)이 되었으니, 조종조에서 때에 따라 고친 뜻이 성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성이 팔도의 근본이 되는데 도성에 현재 있는 군사가 1만 명에도 차지 못하여 신이 항상 도성의 군제가 허술함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양 선정신 이이(李珥)가 군사 10만 명을 길러야 한다고 한 말을 생각할 때마다 일찍이 되풀이하며 길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 숙위군이 잔약한 점에 진념하시어 특별히 장용영 하나를 설치함으로써 이제부터는 경사의 방어할 곳에 사전의 대비가 강화되게 되었으니, 전성(前聖)·후성(後聖)의 법도가 같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금위영과 어영청 두 영의 상번(上番)하는 법은, 하나는 수어하는 방도이고 하나는 교련하는 방법이니, 당초에 설시한 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번하는 규정이 5년에 한 차례씩으로 되어 있는데 그 번을 교체하는 것은 2개월에 불과하여 그 조련하는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리하여 앉았다 일어났다 나갔다 물러섰다 하는 동작은 남의 턱 놀리는 것만 따라 하고 지휘와 호령에 있어서는 남의 입 놀림을 보고 하니, 교련하는 법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왕래하는 즈음에 한갓 양식과 여비만 허비하고, 농사와 생업을 폐지하게 되니 상번하는 폐단이 이러합니다.
이제 어영청으로 논하더라도 각도에 있는 향군(鄕軍) 1만 6천 3백 명 가운데 복마군(卜馬軍) 1천 1백 75명은 매번에 5초(哨)씩 돌려가면서 상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군인은 1인당 자보(資保)가 1명이고 복마군은 1인당 자보가 2명씩이어서 원군(元軍)과 자보의 합계가 3만 3천 7백 15명이 되니, 이제 만약 모두 군보(軍保)에 충당시켜 신포(身布)를 거둔다면 6만 7천 5백 50냥이 됩니다. 또 서울에서 접제(接濟)하는 요미(料米)가 4천 8백 50석이고 여수전(旅需錢)과 회량목(回糧木) 등으로 내리는 것이 6천 8백여 냥으로 이를 통계하면 9만 8천 6백여 냥이 됩니다. 그리고 금위영의 군액과 자보도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영원히 향군의 상번하는 규정을 혁파하여 신포와 보미를 거두어 올려보내게 하고, 영의 군액은 각영 장교의 자손 및 5부의 양민으로 부리를 내리고 사는 자를 각각 1천 명 정도를 충원하여 2사(司) 10초(哨)의 제도로 만들어서 항상 도성에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1년의 접제하는 비용이 가령 원료(元料)를 합쳐서 쌀이 1만 4백여 석이 되고, 봉족(奉足) 및 초가(草價) 등으로 내리는 것이 2만 3천 4백여 냥으로 합계가 7만 5천 3백여 냥이 되는 경우, 그 받아들인 것으로써 그 쓰임을 계산하면 남은 것이 각기 2만여 냥이 됩니다. 그리고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군에 재물이 없으면 군사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재물을 저축해서 쓰는 것이 실로 부강의 술책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면서 식(食)·병(兵)이 족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향군은 농사를 폐하면서 왕래하는 괴로움이 없게 되고, 도시민은 늠료를 받아서 먹고 살 길이 있게 되니, 어찌 양편이 다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자고로 번을 들게 하는 것은 법의가 있는 것이니 갑자기 혁파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향군의 무익한 폐단은 이상에서 진달한 바와 같거니와, 그들이 비록 상경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명부가 이미 각도의 병영에 있고 향(鄕) 자체로 단속하는 것도 원래 옛 규례가 있으니, 만약 급한 일을 당하면 당장 대오를 편성할 수 있는데 어찌 공연히 군액을 잃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도에 수군과 육군을 설치한 것은 급할 때에 각각 쓰기 위해서입니다. 남쪽 사람은 배에 익숙하고, 북쪽 군사는 말타는 데에 익숙하니, 이는 그 익힌 바가 그러하고 이치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영에서 관할하는 수군의 대부분이 수영과의 거리가 3백, 4백 리나 멀리 떨어진 산읍(山邑)에 있어 명친만 노젓는 군사일 뿐 전혀 키를 잡을 줄 모르므로 급할 때에 멀리서 징병해야 하니, 장차 이런 수군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수군으로 산읍에 있는 자를 육군으로 연해에 있는 자와 서로 바꾸어 정한다면 편리한 정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궁장(宮墻)의 순찰이 허술하니, 그 칸수(間數)를 계산하여 군포(軍舖)를 설치하고, 표내(標內) 각영의 입직군을 나누어 배치시켜서 야경을 엄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장 직임의 긴중함은 두 영보다 배나 더한 것이다. 근일에 경을 다시 제수하면서 늙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참으로 내가 경이 의지할 만함을 알아서이다. 내가 경을 임용하고 버리는 데서 다른 장수와 다르게 한 것을 보면 경의 밝은 안목과 통달한 식견에 대해서 내가 반드시 서로 친근한 즈음에 엿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이 아뢴 한 두 조항은 바로 내가 일찍이 바로잡아 경륜을 넓혀서 쉽게 행할 방법을 찾고 시행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며 밤낮 일념으로 자나깨나 마음에 맺혀 있어 언젠가 한번 시행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던 것이다. 만약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이보다 더 큰 데에 미치게 된다면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성지(聖志)를 밝힐 수 있고, 내가 즉위한 처음에 말을 실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삼군과 만민이 모두 나라의 은택을 입게 되어 경이 말한 바 상번(上番)을 정지하고 군포(軍舖)를 벌여 설치하는 등의 방략은 채택하기를 기하지 않아도 채택하게 될 것이니, 그때를 당해서는 경에게 영광스러움이 클 것이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다 둘러보아도 누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그래서 한번 듣고 마음에 환히 와닿아서 크게 가상히 여기는 것이다. 부쳐 진술한 수군과 육군을 바꾸어 정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동몽 교관 최곤(崔崑)이 소회 8조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제1조는 풍속을 바로잡으라는 것인데, 대저 위에서 융성하게 다스린 다음에야 아래의 풍속이 아름답게 됨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교화가 쇠퇴해지고 습속이 퇴폐해져서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이 없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성품의 고유한 것을 알아서 온전하게 하지 못함으로써 금수와의 구별과 기강·명분·의장·법도가 재빨리 날로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은 다만 차례로 닥쳐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두렵고 한심하지 않겠는가. 내가 근래에 향약(鄕約)을 밝히는 데에 유의하고자 한 것은 이를 물불 속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요도로 삼고자 함이니, 오활하여 사정에 절실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말라. 상담(常談) 가운데 절로 묘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향(鄕)에서 보고 왕도가 매우 쉬운 것을 알았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이를 경외에 거듭 유시하여 그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겠다.
제2조는 학교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도(道)가 있는 곳에는 사(師)가 있게 마련이어서 학교를 저렇듯 넓게 설치한 것이다. 소학(小學)을 세워서 청소하고 응대하는 예절을 가르치고 대학(大學)을 설립하여 몸소 실천하고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요점을 근본으로 삼아서 그 차례와 절목을 환히 기술할 수가 있다. 이에 능한 자는 남을 다스리고 능하지 못한 자는 남의 다스림을 받게 되니, 사도(師道)가 위에 있어야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학(學)’이라는 한 글자를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겨 모든 학교의 공부하는 형식조차 울타리 가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성균관이 이러하니 향교를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조정에 모범이 될 만한 어진 선비가 없어서 사람마다 방종하기를 좋아하고, 일마다 단속하는 법이 문란하여 군신·부자사이의 사생활 속에 당연히 행해야 할 법칙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학이 이를 말미암아 밝혀지지 않고, 사도가 이를 말미암아 높아지지 않아서, 심지어는 이른바 서양에서 전래한 양학(洋學)이 나와 장차 선비가 오랑캐로 변하게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주야로 걱정이 되어 편안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네 말을 들으니, 아주 가상하다. 내 생각에는 먼저 경지(經旨)를 크게 밝히고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킨 다음에야 그밖의 정치와 교화를 비로소 말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이 일을 누누이 하교하였으나 매양 말로만 그칠 뿐 하루 이틀에 괄목할 만한 효과가 보이지 않으니, 후일에 오늘을 보는 자가 어떤 시대라고 하겠는가. 다만 특별히 유의하고자 한다.
제3조는 과거 제도를 변혁하라는 것이었다. 과거 제도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은 말단의 방법이다. 그러나 만약 풍속이 바르고 학교가 진흥되어 조정 사이에 예의 염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강(講)으로 뽑거나 제술(製述)로 뽑거나 사람을 얻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상의 두 조항에 깊이 마음을 쓰는 바이다.
제4조는 전정(田政)을 밝히라는 것인데 네 말이 옳다. 먼저 본도의 갯바닥이 되어 버린 땅이나 이미 묵어 버린 전답으로 다시 개간할 수 없는 것부터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엄칙해서 기어코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할 것이다.
제5조는 조적(糶糴)을 고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조적은 본디 백성을 위해서 설치한 것인데 지금은 도리어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근래에 책제(策題)를 내어 두루 묻고 인하여 대신과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명해서 바로잡는 정사를 강구하게 하였으니, 우선 그 품결(稟決)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한다.
제6조는 군정(軍政)을 닦으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훈련 대장의 상소로 인하여 열 줄의 비답을 내렸으니, 너는 모름지기 조지(朝紙)를 가져다 보아라.
제7조는 사치를 억제하라는 것이었다. 검소하고도 다스려지지 않은 나라는 없고 사치하고도 위태롭지 않은 나라는 없었으니, 어찌 지혜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온갖 많은 병폐들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이는 대체로 내가 솔선하는 것이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매양 생각이 이에 이르면 어찌 먹고 쉬는 것이 편안하겠는가. 근래에 바로잡고 변혁시킬 방책을 특별히 연석에서 자문한 적이 있으니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잘 단속하기를 기하도록 하되, 만약 특별히 힘쓰는 정책이 없으면 효과를 책임지우기 어려우니 다시 십분 마음을 쓰려고 한다.
제8조는 시폐(時弊)를 고치라는 것이었다. 비록 지폐(紙弊)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연전에 조정의 명령이 대단히 엄하였는데도 순창(淳昌)·남원(南原) 등의 고을에서 예전대로 폐단이 있었다. 기강으로 헤아려 볼 때 놀랍기가 막심하니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관문으로 물어서 즉시 엄히 조사하여 장문하게 할 것이다. 또 청대죽(靑大竹)의 폐단 같은 것은 또한 별도로 단단히 금하고 있으나 가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치지 않고 쓸데없는 비용이 한이 없어서 대[竹] 하나의 비용이 중인(中人) 몇 집의 재산과 맞먹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묘당에서 잘 알아서 일체로 조사하여 신문할 것이다."
하였다.

 

윤숙(尹塾)의 품계를 보국(輔國)으로 특별히 올려 판중추부사로 삼았는데, 온천 행행 때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시상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3월 23일 기사

이조 판서 심환지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우의정이 명에 응한 처음에 맨 먼저 건의한 것이 바로 《명의록(明義錄)》의 대의였는데, 그의 말에 ‘《명의록》 한 부의 책은 열성(列聖)들의 심법을 전하는 큰 모책을 천명하고 난역을 토벌하는 《춘추(春秋)》의 큰 법칙을 포괄하고 있는데, 그 근원을 소급하여 논하자면 이 책에 실린 의리는 바로 아무 해에 천명한 의리와 전후가 일관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의 유시 가운데 《춘추》의 필법을 빌어서 《명의록》을 편찬했다고 하신 것은 대성인의 정미하고 익숙해진 인의(仁義)에서 나온 대공 지정의 법칙으로서 영원히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를 섬기는 조신으로서 이 의리를 버리면 전하의 신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을미년의 역적은 아무 해에서 비롯된 것이니 아무 해에 역적질을 한 자가 그 형세상 어떻게 을미년에 역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한유(韓鍮)가 초야의 외로운 충성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소 한 장을 올려 토역할 근본으로 삼았으니, 그를 설원(雪冤)시켜 의리를 천명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어서 연석에서 논하여 특별히 성명의 윤허를 받았으니, 그날 연석에 오른 신하로서 그 누가 흠송하며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하여 서로 말하기를 ‘대신이 첫 연석에서 수립한 것이 참으로 당금의 첫째 가는 사업이다.’ 하였고, 성교에서는 ‘이 한 조항은 별도로 비답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글로 갖추어 반포하기를 기다리면서 거의 한 세상이 취하고 버림을 분명히 함으로써 대의가 다시는 흐려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승지가 대신이 아뢴 8조 가운에서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한 조항을 잘라내어 별지에 써서 올렸고, 비답이 내렸을 때는 또 숨기고 반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대신이 원리(院吏)를 가두고 공의가 경사들에게서 나오기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깃발을 세워 대항하고자 수다스레 여러 말을 꾸며대면서 은연중 남의 힘을 빌리려는 의도가 있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아, 세도가 이미 무너지고 사기가 쇠퇴하여 다시 책상에 《명의록》 한 편이 있음을 알지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신은 이를 두려워하여 이에 세상을 경계하는 뜻에서 그 사람을 승지의 망(望)에서 빼어버렸으니, 신기(申耆)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찌 사사로이 미워해서 그랬겠습니까. 이제 들으니 신기가 스스로 변명하는 글을 올렸다고 하는데, 신이 비록 그 전편을 보지는 못했으나 조지(朝紙)에 나온 개요를 보건대 이조의 벌칙을 기괴(奇怪)한 일로 돌리고 마치 자신을 옳게 여기고 도리어 신을 그르다고 배척한 것처럼 하였으니, 어쩌면 그 의기가 이렇게 호건하단 말입니까. 대저 승정원이란 곳은 왕명을 믿음성 있게 출납하는 것이 그 직임입니다. 더군다나 또 대신이 진달한 한 조항은 실로 의리를 밝히는 큰 관건인데 이에 감히 중간에서 잘라내어 감추어 두고 반포하지 않았으니, 믿음성 있게 출납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타던 불꽃이 전염되어 이미 고질이 되고 세속의 폐단이 굳어서 고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성명께서 즉위하신 모처럼의 청명한 기회를 만나서, 의리를 천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뒤로 물러서서 관망만 하는 근심이 있고, 성토를 준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역시 용감히 전진하여 적개(敵愾)하는 형세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처럼 용암하고 천루한 것이 감히 사람을 징계하고 등용하고 해임시키는 직임을 맡아서 조금이나마 우리 성상께서 위임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다 보니, 아득하게도 마치 일엽편주에 의지해서 큰 바다의 풍랑을 건너게 되어 호호망망하여 나루를 찾을 수 없어 닻줄 맬 곳을 모르는 것과 같은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망녕되이 구구하게 전형의 붓대를 잡고 조금이나마 스스로 주고 뺏고 하는 의리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우직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조의 벌은 예로부터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치 오늘날 신의 일과 같이 벌을 받은 자로부터 전관이 능멸을 받은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조에 부끄러움을 끼치고 조정의 체모를 상한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밤의 서계(誓戒)에서 신이 서문(誓文)을 읽어야 하고 더구나 인사행정을 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천패(天牌)가 엄연하게 임해 있는 곳에 이같은 처지는 실로 얼굴을 들고 반열에 나갈 가망이 없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개성부 유수로, 임률(任嵂)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월 24일 경오

비가 왔다.

 

인정전에 나아가 태묘(太廟)에 하향(夏享)의 서계를 행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의 보토(補土) 및 식목(植木)을 감독한 수령 이하에게 차등 있게 논상하였다.

 

상이 돌아온 서장관 조덕윤(趙德潤)을 소견하고 사행 도중의 폐단에 대해 물으니, 덕윤이 아뢰기를,
"역관의 폐단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오로지 인마(人馬)의 숫자가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부 3백 9명에 말이 2백 19필인데 쇄마(刷馬)의 역참 인부들이 해마다 의주에서 빚을 지므로 금년에 포흠이 쌓인 자가 명년에 또 들어가게 되니, 지금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인원 수를 줄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3월 25일 신미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재변이 있어 감선(減膳)하였다. 전교하기를,
"덕이 없는 내가 자리에 있은 지 20년 이래에 재변과 요기를 초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무지개가 해를 꿴 재이는 처음 있는 일이다. 몸둘 바를 모르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모든 방도에 대하여 어찌 감히 예사롭게 허식으로 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선조(先朝)에서는 서운관(書雲觀)에서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는 보고가 있자, 직언을 구하고 인재를 얻는 뜻에서 시사(試士)는 비록 중지하지 않았으나 대향(大享)은 섭행(攝行)할 것을 명했었다. 대저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에 어찌 두 가지 뜻이 있겠는가마는, 마음을 재계할 때에는 전일하게 갖는 것이 귀중하니 이번 하향 대제는 섭행의 의식으로 하고, 내일은 도움을 구하는 뜻으로 차대를 행하겠다."
하였다.

 

박종갑(朴宗甲)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6일 임신

영의정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인책하고, 여러 가지 금지 조항을 일체 모두 환수하고, 전후로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 역시 의당 아울러 사유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인자한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날을 당하여 훌륭한 말이 나오기를 꼭 삼사(三司)에만 책임지울 것이 아니요, 의당 승정원으로 하여금 왕언(王言)을 대신 짓게 하여 중외에 포고해서 미천한 사람들의 말이 모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좌의정 채제공 역시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아울러서 비답하기를,
"내가 부덕한 소치인데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였다.

 

제도 도신에게 초야의 선비들에게 당금의 정사와 백성의 고통에 대하여 묻도록 하였는데, 영의정 홍낙성의 말을 따른 것이다.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무지개가 해를 꿴 변고는 바로 내가 등극한 이후에 처음 보기 때문에 배나 두려운데, 전(殿)에 임하여 묻는 것이 도리어 허식에 관계된다 하여 폐지할 수는 없으므로 아침을 기다려 옷을 찾아 입고 훌륭한 말을 들어보려고 생각하였다. 올봄에 기후가 어긋나서 겨울철 추위와 다름이 없었고, 또 꽃이란 천기(天機)를 발산하는 것인데 봄내 꽃이 없어 매우 상도에 어긋났었다. 경들은 각기 소멸시킬 방도를 진달하라."
하니, 영돈녕부사 김이소가 아뢰기를,
"어제 성교를 받들었는데 맨 먼저 언로가 막힌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대저 언로란 나라의 혈맥이어서 언로가 막히고도 나라가 잘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비록 곧은 말과 훌륭한 논의로써 성의(聖意)의 만분지일도 선양하지 못했더라도 어찌 한두 가지 채택할 만한 말이야 없었겠습니까마는, 혹시라도 성상의 뜻에 맞지 않으면 허심 탄회하게 청납하시는 실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고 공공한 극론이라 하더라도 문득 꺾어 억제하고, 금령까지 설치했으니, 거두어 받아들이는 본의가 어디에 있으며 비록 참으로 훌륭한 말이 있더라도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해서 말하겠습니까. 참으로 언로를 넓히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금령을 환수해야 하니, 오늘날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가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좋으나 금령을 설치한 것에 이르러서는 내가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다. 고금 이래로 언로가 막힌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며, 금령을 설치한 것도 진실로 옛날에는 있어 본 적이 없고 후일에는 폐단이 있을 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는 어찌 임금의 잘못과 당금의 정사에 대하여 말할 것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모든 관리 천거의 득실이나 언론의 시비 사이에서 혹시 미처 성찰하지 못하여 이처럼 빠뜨린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일식·월식처럼 다시 밝아지는 아름다움이 있을 가망이 있으나, 이제 전하께서는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미봉만 하고 말의 실마리를 이해하여 따르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천지처럼 크신 전하께 유감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성하여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는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지금의 습속을 돌아다 보면 투박하기가 이와 같으니,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으며 사람이 어찌 사람꼴이 되겠는가. 방금의 급선무는 오륜의 차례를 도탑게 하여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어 순박한 정치를 하도록 기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근일의 습속은 이와 상반되므로 이것이 내가 기어코 만회하고자 하여 마치 물불에서 사람을 구해내듯이 급하게 여기는 바이다. 요컨대 그 귀추는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세신(世臣)을 보호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데, 매양 한번 직언을 구하고 나면 문득 한번 풍파가 일어난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풍속이 돈후해진 다음에야 언로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요, 풍속이 돈후하지 않으면 비록 상소문이 날로 쌓이더라도 의론이 바람처럼 일어나 그 흐름이 반드시 세도가 조용하지 못하고 세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리라고 여긴다. 그러니 참으로 이른바 이렇게 하기도 어렵고 이렇게 하지 않기도 어려운 것이다. 만약 야박한 풍속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순후한 풍속을 만회하지 않는다면 비록 아름다운 상서가 날로 이르고, 재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다행으로 여기기에 부족하다. 《서경(書經)》에 ‘나에게 3천 명의 신하가 있으나 오직 한 마음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이 된 것인데, 지금은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도 그 마음이 각기 다르니, 이렇게 되면 비록 백성의 소망대로 다스리려고 한들 되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가 아뢰기를,
"지난 봄 이후에 사람들이 모두 모처럼의 청명해질 기회라고 말하였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 역시 이로써 바랐었는데, 지금의 세도와 조정의 기상을 보면 비단 크게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도리어 미치지 못한 탄식이 없지 않으니, 신은 참으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저 세도가 높아지고 낮아짐과 재변이 생기는 것은 사람을 쓰고 버리는 즈음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옛날 역사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충후한 선비가 나오면 풍속이 절로 충후한 데로 돌아가고, 부화한 사람이 나오면 풍속이 절로 부화한 데로 돌아가니, 이는 필연의 징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 즈음에 아주 신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참으로 식견이 있으니, 염두에 두겠다. 작년 봄에 권유(權𥙿)의 상소가 있은 후, 사람들이 모두 눈을 닦고 일변하는 효과가 있기를 바랐었는데 우물쭈물 하다가 지금까지 그전 꼴로 있는 것이 과연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스스로 인책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세상을 구제하는 약으로는 실제에 힘쓰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는데, 내가 몇 년 동안 시행해 온 것은 스스로 돌아다 보아도 부끄러움이 많지만 경을 임용한 한 가지 일만은 스스로 제일 잘 된 실정(實政)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시동이 아뢰기를,
"세도를 만회시키는 데는 실제에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근일에 습속이 효박한 것은 오로지 전날의 기상이 점차로 흘러온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하나의 ‘실(實)’ 자야 말로 바로 지금의 증세에 맞는 약처방입니다. 지금의 시기에 지금의 풍속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손 쓸 곳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소대한 것은 오로지 재이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여러 재신들의 공사 아뢰는 일은 우선 천천히 하고, 삼사가 먼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장령 현중조(玄重祚)가 아뢰기를,
"심의지(沈儀之)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참으로 초야의 의사(義士)였기에 충성된 뜻을 지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눈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세초의 빈연(賓筵)에서 대신이 건백하여 특별히 신설하라는 은전을 입었는데, 의지의 처 조씨(趙氏) 또한 하나의 절부(節婦)입니다. 그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거제(巨濟)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었는데 13년 동안을 하루같이 햇빛을 보지 않았고, 계묘년 초에 이르러 거제에 큰 기근이 든 때문에 그를 지도(智島)로 이배하라는 명이 있자, 의지의 처가 다시는 원통함을 품고 부끄러움을 참으면서 다른 고장을 전전하지 않으려고 마침내 8일 동안 먹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그가 도류안(徒流案)에 들어있으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죄명을 씻어주게 해서 필부(匹婦)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한다면 어찌 재이를 없애는 한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씨는 누구 집안의 딸인가?"
하므로, 이조 판서 심환지가 아뢰기를,
"이는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방손(旁孫)입니다."
하니, 상이 금부당상에게 이르기를,
"여자의 이름은 더욱 남자와 다르니, 도류안에서 이미 지웠더라도 즉시 세초(洗草)해야 한다."
하였다. 현중조가 또 아뢰기를,
"근일에는 법이 엄하지 못하고, 관원의 법도가 문란합니다. 주서(注書) 유원명(柳遠鳴)은 바로 유경유(柳慶裕)의 현손인데 경유는 일찍이 목호룡(睦虎龍)의 초사에 나왔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원명이 나갔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잘 안다. 만약 경유가 흉역의 초사에서 나왔다면 참으로 역적이겠으나, 무고(誣告) 안에 들었으니 이는 충신이다. 경유가 찬축을 입은 것은 무고 때문이었지 초사 때문이 아니었으니, 충과 역이 여기에서 판가름된다. 더군다나 갑진년에 즉시 방면을 입은 자인 경우이겠는가. 설혹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세대가 멀어졌으니, 한창 자라는 것을 꺾지 않는 뜻에 있어서 일부러 흠을 잡아낼 필요가 없다. 더구나 그 본디의 일이 대관의 말과 상반되는 것이겠는가. 남의 집 선대의 일을 논하여 벼슬길을 틔우고 막고 하려면 의당 자세히 알고 분명하게 고증한 다음에야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 대신(臺臣)이 아뢴 말은 아주 그르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대저 이런 일을 만약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시기하여 모함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접촉이 없는 외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이 역시 야박한 풍속의 일단으로 내가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아뢰기를,
"지난날 반사할 때에 두 흉적의 죄명을 지워 없애게 한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였습니다. 거조가 이러하고도 오히려 어찌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명을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금조(禁條)에 해당하니, 비답을 내릴 수 없다."
하였다. 정언 신귀조(申龜朝)가 아뢰기를,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은 금령을 설치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이 작년 봄 이후로 매양 처분과 말씀이 과중한 것을 보았는데, 법이 이 때문에 엄하지 못하고 난적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강화도의 방수(防守) 역시 허술하니, 지금의 수신(守臣)은 어찌 우리 나라의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령에 관계된 일을 어찌 감히 스스럼없이 진달하는가. 행동이 해괴하다."
하였다. 응교 이명연(李明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정령과 거조에 있어 너무 지나치게 익숙하고 수단이 점차 매끄러워져서 모든 하고자 하는 일이면 반드시 이루고서야 그만두십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어렵게 여기는 도리에 있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려 하겠는가."
하므로, 명연이 아뢰기를,
"심지어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역적까지도 혹 살려주는 데만 뜻을 두시고 또 따라서 금령까지 엄하게 설시하여 여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니, 이것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 나의 부득이한 일이었다. 어찌 하기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이것은 모두 나의 고심이 들어 있는 곳이다."
하였다. 현중조가 아뢰기를,
"대계(臺啓)를 정지시키거나 계속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그러므로 공의가 이미 일어나 죄명이 한번 가해지면 쉽게 죄를 올리거나 내려서는 안 되며, 설혹 공의를 거치지 않고 죄를 용서할 만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의당 그 사실을 조사하여 무죄인가 유죄인가를 변석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에 의심이 없게 한 다음에야 그 계사를 정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채로 두고 억지로 정지하게 해놓고서 정계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유사문(柳師文)의 죄명은 바로 신하로서의 제일 큰 죄안인데, 발론한 사람이 지금까지 있으니, 대신(臺臣)이 조사하기를, 청하여 아뢴 것은 사헌부의 체모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문계(問啓)한 것을 길에서 들은 말처럼 여기고 문득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버려 두게 하였으며, 한 대신이 거조를 잘못 한 것 때문에 문득 ‘전계를 이미 정지했다.’고 하여 결말을 내버렸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정계한 까닭없이 철저히 조사하기도 전에 갑자기 정계한 것이니, 대신의 체모를 훼손한 것으로만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복윤(李福潤)에게는 특별히 간개(刊改)하는 법을 시행하고, 유사문에 대한 일로 헌부에 정계하라고 한 명을 속히 환수하고서 인하여 당초에 발론한 사람을 엄히 끝까지 조사하여 인심이 복종하고 공의가 펴지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의 사체는 비록 생소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이미 정계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시속은 하나의 투식이 되어서 깨뜨릴 수가 없는데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온 세상만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 전하의 정령과 처사 역시 이런 투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사치를 억제하고자 하나 사치하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억제하지 못하고, 전하께서 인재를 얻고자 하시나 사람을 임용하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며, 전하께서 생민을 구제하고자 하시나 백성을 다스리는 투식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구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저 오늘날의 시폐를 바로잡으려면 오늘날의 습속을 깨뜨리고 옛 도를 회복한 다음에야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비란 나라의 원기입니다. 우리 조종조에서 인재를 부식하고 배양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별시(別試) 때에는 단속이 너무 지나쳐서 파장(罷場)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별시는 대비과(大比科)인데 바야흐로 경향(京鄕)에서 모두 모일 때에 갑자기 파장하여 선비들이 모두 사기가 꺾이었으니, 이는 참으로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또 문에 들어가는 즈음에 칼을 씌우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새끼줄로 매기까지 하였으므로 그 광경이 선비들의 기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사습을 바로잡고 과장을 엄히 하는 도리로써 규정만 분명하게 세울 것이요 지나치게 단속을 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본디 과거의 규정이 있는데 어찌 별도로 규정을 세우겠는가."
하였다. 정원(鼎源)이 아뢰기를,
"전년에 여러 금부 당상들이 죄명을 지워버리라고 거듭 당부한 처분에 대해서 충분(忠憤)이 격발하여 받들어 거행하지 않은 것은 신하의 분의에 있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상소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뜻을 거듭 진달한 것은 실로 까닭없이 덮어 둔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지난번 여러 금부 당상들을 안치시킨 처분을 특명으로 환수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설시한 것은 전에 없던 지나친 처사입니다. 대궐문에 법을 게시해 놓고서 수문장이 물리치고 조리(曹吏)가 손을 내저으며 사알(司謁)이 물리쳐서 말하는 자로 하여금 감히 손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책(史冊)에 이 일을 써놓으면 장차 어떤 세상이라고 하겠으며, 또 어찌 천만 년 후손에게 물려줄 모책이 되겠습니까. 작년 겨울에 우레의 이변이 경계를 알리자 한두 대신(臺臣)이 분부에 응하여 상소한 일로 이내 죄벌을 받았는데, 이제 사유의 은전을 내리는 때를 당해서도 사유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당초에 직언을 구한 뜻이겠습니까. 지금의 급선무는 언로를 넓히는 한 가지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난번에 설치한 금령을 속히 환수하도록 명하고, 작년 겨울 직언을 구한 이후로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우선 사유해서 돌아오게 하여 와서 간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금령을 설치한 일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작년 겨울에 한두 대신(臺臣)을 처벌한 것은 바로 풍속을 돈독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직언을 구한 것은 절로 직언을 구한 것일 뿐인데, 어찌 잠깐 죄를 주었다가 이내 사유해서 조정의 기상을 날로 더욱 무너뜨리고 세도를 갈수록 더욱 분란해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지금 천심이 편치 못해서 작년 겨울 이래로 이미 삼백(三白)의 조짐이 없었고, 삼춘(三春)의 날씨가 또 어긋나는 현상이 많아 꽃이 피지 않은 것으로써 보리가 되지 않을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성교와 같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양남 지방의 보리는 비록 조금 나아질 조짐이 있으나 기호 지방의 가을 보리는 이미 큰 흉작으로 판가름났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화성(華城)의 토목 역사를 우선 정지하였다가 보리가 나오고 가을 농사가 잘 되기를 기다려서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묘당에 자문하여 나라의 비용을 저축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 백성들의 힘을 늦춰주어서 농상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매우 옳다. 요컨대 올가을에 완성할 수 있다고 하는 바, 워낙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남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데, 네가 있는 생각을 숨김 없이 말하였다. 일을 감독하는 신하로 하여금 이런 뜻을 알게 하여 정지할 만한 곳은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臺臣)의 이 말은 참으로 귀하다. 화성의 성역(城域)은 본디 중한 바가 있지만 이런 큰일에 어찌 찬반의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옛날 조 풍원 부원군(趙豊原府院君)025)  이 전주성(全州城)을 쌓을 때에 원망을 무릅쓰고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못할 말이 없었으나, 선조에서 위임하여 완성하기를 책임지웠기 때문에 전주부의 성문에 ‘명견문(明見門)’이란 편액을 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재작년에 임제원(林濟遠)이 말을 잘했는데, 이제 또 이 대신의 말이 있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학(邪學)이 날로 기승을 부려 영남·호남 사이에 점차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물든 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사형에 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학이 점차로 치성해지는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금지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는 하나, 요컨대 교인(敎人)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는 것이 곧 이단(異端)을 토벌하는 방도이다. 어찌 한결같이 사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만약 윤상(倫常)을 무너뜨리는 무리가 있으면 적발되는 대로 이미 사형을 시행했으니, 연전의 일이 이것이다. 이제 대신의 말이 이와 같은데, 근래에는 과연 어떻다고 보는가?"
하므로, 김이소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어리석은 백성들 사이에 서로 전해서 만연되고 있으므로 심히 우려됩니다."
하였다. 장령 박서원(朴瑞源)이 아뢰기를,
"근래에 금령을 설시하였기 때문에 소위 대간의 상소라는 것은 말의 시비와 일의 곡직을 막론하고 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병조의 당상과 낭관에게 분부하여 대간의 상소를 막지 말게 해서 언로를 열어 성총을 넓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옳은 말과 곧은 일이 모두 궁문에서 저지된다면 도리어 금령을 설치한 뜻이 아니니, 이는 병조에 신칙하겠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직언을 구한 것은 직언을 구한 것이고 거조는 거조일 뿐이다. 대신 신귀조는 체차하고, 현중조 역시 유경유(柳慶裕)의 일을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체직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선정신 조헌(趙憲)은 도학과 연원으로 보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으니 순절한 것은 다만 그 나머지의 일입니다. 같은 때 사람으로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증 판서 김성일(金誠一)은 모두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文) 자 시호를 얻었으나 선정 조헌은 근학 호문(勤學好問)의 문(文) 자와 강극 위벌(剛克爲伐)의 열(烈) 자로 되어 있어 마치 대중을 따라서 전사(戰死)한 자에게 한 가지 절개를 포증한 것처럼 되었으므로 사문(斯文)의 불행과 사림(士林)의 수치가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바야흐로 성조에서 글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게 하는 때를 당해서 이와 같은 결여된 전례는 의당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비록 고사로 말하더라도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은 처음 시호가 문개(文介)였는데 고 정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반박하고 건의하여 시호를 고쳤으므로 지금까지 이를 칭도하고 있으니, 선정의 시호 역시 다시 의논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은 결과, 제신이 다른 말이 없으므로 우상의 말에 의해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참의 이사룡(李士龍)의 서원(書院)이 성주(星州)에 있는데, 이는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목사로 있을 때 그 유허(遺墟)에 창건한 것입니다. 그후 고 판서 오도일(吳道一)이 그 비문까지 지었는데, 다만 그의 지벌이 미천한 때문에 아직껏 표장(表章)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만약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수(祭需)를 마련해 주게 한다면 족히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사룡 한 사람이 없었다면 천하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경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손자 최성렬(崔性烈)이 방금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있으나 고을의 힘이 시호를 맞이하기 어려우니, 서관(西關)의 상당한 자리로 해조에 분부하여 서로 바꾸게 해서, 그로 하여금 관에서 시호를 맞이하게 하여 서쪽 지방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첫 번의 연석에서 나이가 젊고 경서를 깊이 연구한 선비들을 북돋아주고 장려하여 등용할 일로 아뢰었었습니다.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 김직순(金直淳)과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 송계간(宋啓榦)은 경학에 대한 식견과 훌륭한 행실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문벌 좋은 가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실로 성조에서 인재를 배양한 효과이니, 이 두 사람을 특별한 예로 등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옛날 세자 익위사의 관원으로 서연(書筵)에 출입하던 자로서 지금에 세 사람이 남아 있는데, 이민보(李敏輔)는 지위가 숭품에 이르렀고, 정존중(鄭存中) 역시 기로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신광리(申光履)만 중간에 유락(流落)하여 불우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나이 또한 70세가 찼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 재신은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그 사람됨을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특별히 지중추를 제수하고, 두 중신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보내주게 하라."
하였다.
승지 조상진(趙尙鎭) 등이 아뢰기를,
"언로를 열고 수령을 가리며, 사치를 억제하고 검소를 숭상하소서."
하니, 유의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응교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데 있어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바로 응당 행해야 할 한 가지 일입니다. 그리고 진실로써 하늘의 뜻에 응답하는 도리는 ‘성(誠)’ 자 하나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 자의 뜻은 하늘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는 것[旡妄]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不欺]이며, 공부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쉬지 않는 것[悠久不息]입니다. 그러므로 성하면 거짓이 없고, 성하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데, ‘거짓’의 반대는 곧 ‘참’이니 참되면 그 본심의 바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풍속이 날로 더욱 투박해져서 나라를 걱정해서 위태로운 정치를 밝혀 말하면 비방하는 것으로 돌리고, 말이 임금을 범하면 무함하고 거스르는 행위로 몰아붙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에 진언하는 자들이 대부분 부드럽고 모나지 않는 말만을 골라서 대략 책임만 메꾸고 마는 습관이 수십년 이래로 점차로 굳어졌으니, 이런 풍속을 고치지 않으면 곧은 말이 들릴 수도 없고 백성의 소망대로 다스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이 위로 대신에서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언로를 여는 것을 제일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고작 ‘위에서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 감언(敢言)하는 선비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병통을 받게 된 근원은 또한 전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간언을 물리치는 군주는 도거(刀鋸)와 정확(鼎鑊) 등의 형구를 차려놓고 말하는 자를 기다렸으나 직간하는 신하들이 서로 이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조에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덕에 대해서 신은 비록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고 어기지 않는 것이 우(禹)·탕(湯)과 똑같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으나, 어찌 오만하게 간언을 거절하던 임금하고야 일호나마 방불하겠습니까. 그러나 입을 다물고 있는 습성이 한결같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곧장 임금의 잘못을 지척하여 꺼림없이 말을 하면, 겉으로는 비록 너그럽게 용서하는 듯하나 마침내는 죄를 얻어 몸이 함정에 빠지고 말게 된다.’고 생각하여, 의심이 이미 쌓여서 걸핏하면 두려워서 그만둘 생각을 합니다. 작년 봄 이후로는 생각하기를 요사스러운 기운이 없어지고 하늘이 맑고 탁 트여서 세도와 정치가 일대 변혁의 기회에 당하리라고 여겼었는데, 이제 1년 남짓이 되었으나 옛날의 모습 그대로이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두려워서 움츠림이 쌓인 소치입니다.
대저 깊은 병은 독한 약이 아니면 고쳐지지 않는데, 이제 입에 맞는 평온한 약제로써 소략하게 시험해 보고 있으니, 어찌 그 효험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지금 성교에서 ‘풍속이 돈독해지면 언론이 절로 열린다.’고 하셨는데, 이 하교가 천만번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이를 비유하자면 마치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부를 한데 아울러서 해나가야지, 가만히 앉아서 격물·치지 공부를 다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성의·정심 공부를 착수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또 어찌 반드시 풍속이 돈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언로를 열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보이고 덕의(德意)를 널리 펴서 앞에 이르는 모든 말이 비록 광망하고 괴격하더라도 채용하여 장려하소서. 그리하여 오늘 한 사람을 용납하고, 내일 한 사람을 장려해서 1년 2년 차차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이면 뭇사람의 의심이 이에 사라지고 백성의 뜻이 크게 안정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풍속을 바로잡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 방도가 한 가지만이 아니지만 의리와 이끗을 밝히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곧장 선과 이끗 사이로써 순(舜)의 길과 도척(盜跖)의 길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 신하들은 어떤 일을 만나거나 어떤 사람을 논할 때마다 문득 이리저리 관망하고 돌아보면서 의리가 있는 곳은 돌아보지 않고 먼저 자신의 편리할 계책만을 생각하여 진실로 이끗만 도모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령 이끗이 임금과 어버이를 뒷전으로 미루는 데에 있다 한들 또한 어찌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언로가 막힌 것 역시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니니, 앞서 신이 이른바 ‘언로를 열고 풍속을 돈독히 하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유의하소서. 그리고 모든 믿음을 보이는 도리에 있어 최선을 다하시는데도 만일 추종하거나 회피하는 데에 능숙하여 기회를 보아 교묘히 변덕을 부리는 무리가 있으면 선한 자를 드러내고 악한 자를 억제하는 정사를 밝게 펴시어 무너진 풍속을 바로 잡음으로써 다스림이 융성해지게 하소서."
하니, 의당 유의하겠다고 비답하였다.
부수찬 이기양(李基讓)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급하게 여기시는 것은 직언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하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환향(還餉)에 대해서 대책(對策)한 자가 수백 명이었는데도 아직껏 고쳐 바로잡는 정사가 없고, 염백리(廉白吏)를 뽑자는 말을 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가려 뽑는 일이 없으며, 전후하여 역적을 징토하자는 논의는 상소문이 쌓이고 혀가 닳을 정도였는데도 한 번도 윤허한다는 명을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직언을 성심으로 구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성심으로 구하기만 하고 채용하는 데에 힘을 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중 한 가지만 있더라도 전하의 한 마음에 지성 순일(至誠純一)의 공부가 미진함이 있어 하늘의 견책에 답할 수가 없고 백성들의 바람을 채울 수가 없으며 모든 정사에 기강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근심은 재이를 소멸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誠)을 닦는 데 있으며, 현재의 급선무는 직언을 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쓰는 데에 있다고 여깁니다. 한 가지 정사나 일에 대한 하찮은 득실에 이르러서는 급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하니, 온후한 비답을 내렸다.


 

 

 

3월 27일 계유

판중추부사 윤숙(尹塾)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초야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은 임금의 성대한 예절입니다. 그런데 다만 부름을 받고 온 사람들이 성상의 마음을 만에 하나나마 살피지는 못하더라도 수많은 말을 올린 것 중에 어찌 한두 가지라도 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체를 논하자면 겉으로는 박식함을 보이지만 속에는 포부가 없어서 ‘도산(倒産)’이라는 등의 말까지 감히 향안(香案)에 올렸습니다. 이런 말을 비록 향리의 서민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지식이 있는 자라면 의당 하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인데, 이미 글 읽은 선비라는 자가 도리어 이처럼 저속한 말을 한 데 대하여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기며, 이 한 마디 말로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또 더군다나 잡술(雜術)이 범람하여 보고 듣는 자들을 현혹시킨다는 말을 전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어찌 이런 백도(白徒)에게 수령의 직임을 함부로 맡길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들으니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이 군제(軍制)에 대해 상소하였다고 하는데, 그 2조(二條)에 대해서는 조금의 견식도 없기 때문에 감히 가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맨 처음 진달한 양영(兩營)의 향군(鄕軍)에 대한 일은, 병농(兵農)으로 논하자면 그 말이 이치가 있는 듯하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대략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오위(五衛)를 혁파한 후에 먼저 훈영(訓營)을 설치하고, 그 다음에 금위영·어영청 두 영을 설치한 지가 전후하여 거의 2백 년이 되는 바, 병자 호란과 무신년의 변란에 모두 이 군사를 사용하였습니다. 대체로 향군이 상번(上番)하는 제도가 5년에 한 번 오르는 것은 대략 당(唐)나라 부병(府兵) 제도에서 안을 중히 하므로 밖을 가볍게 하는 뜻과 일반입니다. 먼 고장의 백성이 비록 나갔다 물러섰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동작에는 익숙하지 못하나 우직한 성품에 한갓 위를 향하는 굳은 마음만을 알 뿐 교사(巧詐)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급한 일이 있을 때 향도(嚮導)가 길만 가리켜 주면 천리 먼 곳에서 둔한 발이 나는 듯이 달려오고, 과거시험장이나 신문하는 곳에서도 한결같이 법을 지켜 간사한 꾀를 부리지 않고 남의 종용을 받지 않으니, 참으로 쓸 만한 군사입니다. 그런데 몇 10리도 가기 전에 발이 부르트고 급할 때에 간사한 꾀를 부리는 경군(京軍)과 같은 수준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경사에 10만의 군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은 비록 국가를 위한 장원한 계려이기는 하나, 지금 서울 백성들이 단약하고, 경비가 텅 빈 때에 어떻게 10만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서울에 사는 백성은 비록 군액에 뽑아 넣지 않더라도 모두 군사 장부에 올라 있어 일반 백성이나 종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무료군(無料軍)과 다름이 없으니, 혹 급한 일을 당하면 모두 쓸 수가 있는데, 어찌 꼭 일에 앞서서 넉넉하게 의식을 주어 많은 자용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번하는 향군이 이런 소식을 듣고나서부터,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삼보(三保)는 모두 아들이나 동생·조카들이어서 관에 납부하는 것이 없고, 5년에 한 번씩 올라와 무기나 수리하면서 후한 요식을 받아먹으며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궐내에 입직하여 일심으로 수위하다가, 혹 임금님이 거둥할 때를 당하면 멀리서 모습을 우러러보고 은혜롭게 내리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 그리고 하번(下番)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처자와 친척을 대해서 그 영광스러움을 크게 자랑하고, 또 경시(京市)에서 사온 물품 포대를 끌러서 이웃 동리에까지 자랑해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이런 길이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으니, 임금님의 위엄있는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며 서총대(瑞蔥臺)에서 군사들에게 내리는 음식은 어떻게 맛볼 것이며, 또 해마다 납부할 신포(身布) 및 삼보(三保)가 10냥에 가까운데 가난한 백성이 어떻게 지탱해 갈 것이며, 호구에 딸린 잡역은 반드시 수없이 많을 것인데 또한 어떻게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몹시 실망하고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듯이 서운해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먼 데 백성들의 나라를 향한 정성을 크게 볼 수 있으니, 그들의 마음을 거스르기가 어렵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朝宗)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이미 조종조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서 별로 생긴 폐단도 없었는데, 이처럼 태평 무사한 때를 당해서 어찌 갑자기 변혁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노성한 장수로서 억지로 이와 같이 서울의 호강자제와 같은 기습을 부리니, 신은 그것이 온당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덧붙여 진술한 몇 조항에서 노신(老臣)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올린 일을 말하자면, 2백 년 이래로 과거하여 벼슬한 사람이 모두 도성 안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경륜과 사업을 온축한 자들이 부질없이 초야에서 늙어가고 있으니 형편이 그렇기 때문이다. 근일 부름에 응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우대한 것은 곽외(郭隗)026)  로부터 시작하여 실효를 책임지우고자 해서였다. 그 가운데 비록 상소의 말을 살피지 못한 것이 있기는 하나 이는 반드시 시골 사람이 장주(章奏)의 체례에 익숙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주국의 상소 가운데 한 조목의 말은, 내 뜻 역시 어찌 상번의 제도를 혁파하는 데에 있겠는가. 경이 소회를 숨김 없이 말한 데 대하여 더욱 가상함을 느끼겠다."
하였다.
주서 유원명(柳遠鳴)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의 선조는 포의(布衣)였기에 세상과 관계됨이 없었고 황천에 간 지 이미 7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친·인척이 되는 사람이라도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는데, 저 대신(臺臣)의 말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신축년의 무고(誣告)에 걸린 것을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신의 선조가 그때에 당한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근신하게 산 조행 때문에 흉적에게 제일 미움을 받아 뜻밖에 변서(變書) 가운데 이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오서종(吳瑞鐘)과 서로 해명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고, 그때 대신(臺臣) 이광보(李匡輔)가 다른 의견을 극력 주장함으로써 끝까지 조사하였으나 시종 허위로 드러났는데, 다만 무죄로 석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주(羅州)에 찬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선대왕이 등극하신 첫 해에 이르러 즉시 은사를 입었으니, 신의 선조의 전후 본말은 여기에 불과합니다. 목호룡(睦虎龍)에게 무함을 받아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을사년에 풀려나왔으니,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은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신의 선조가 무함을 받은 것은 오로지 목호룡이 거짓으로 얽은 데서 나온 것인데, 이제 이 대신이 어찌하여 다시 이처럼 허위날조된 말을 한단 말입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고서(告書)에 이름이 든 자는 충신이고 공초에 이름이 나온 자는 역적이니, 이 두 가지에서 흑백을 알 수가 있다. 그후 당쟁의 화가 점차 요원의 불길처럼 성하였으니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서로 부호하고 억누르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일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여파가 친족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고 상신 이천보(李天輔)는 힘껏 구원하였고, 고 상신 조재호(趙載浩)와 고 판서 심각(沈瑴)은 이의를 제기하여 상소를 올렸으니, 누가 그 전말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그가 어찌 감히 지레 금문(禁門)을 나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한단 말인가."
하였다.


 

 

 

명하여 모든 관청이 묘시에 출근하여 유시에 퇴근하는 규정을 비록 감선(減膳)할 때라 하더라도 구애받지 말도록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김재찬을 파직하였는데, 최효일의 일에 대한 장계의 조어에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묘당에 하교하기를,
"비록 국경을 지키는 직임이 중하다 해도 절로 중앙과 지방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래로 그 직임을 차제(差除)해 온 것이 전조(銓曹)에 출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개가 가까운 반열이나 높은 반열로 하였으니, 이에서도 역시 시속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이런 뜻을 잘 알라."
하였다.

 

3월 28일 갑술

고 충신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에게 사제(賜祭)하고, 조금 뒤에 검열 오태증(吳泰曾)에게 유시하기를,
"선조 병자년에 옥당 홍익삼(洪益三)이 차자를 올린 데 대하여 비답을 내려 예문관에 봉해 두었다는데, 그 차자는 과연 무슨 일을 논한 것인가?"
하니, 태증이 아뢰기를,
"바로 삼학사(三學士)를 황단(皇壇)에 배향해야 한다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한림에게 배껴오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병자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삼학사의 집에 사제하고, 마침 이날 또 이 상소를 열람하니,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도총관 서유방(徐有防)을 강원도 관찰사에 특보하였는데, 여러 차례 소명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3월 29일 을해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풍속을 돈독히 바로잡은 다음에야 정치의 상황이 조용하게 될 것인데, 좌상이 지난번에 말한 ‘곧은 자를 거용하면 지나치고 굽은 자를 버리면 부족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크게 관계된 것 이외에는 보합(保合)할 수 있는 곳은 보합하는 쪽으로 힘써야 하는데, 그중에도 주객(主客)의 구별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주객의 구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야박한 풍속을 돌려 순박하게 하고 기강을 부식하여 상하가 다 힘쓴 다음에야 치도(治道)가 크게 새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옥당 이명연(李明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유신(儒臣)이 입고 있는 창의(氅衣)는 비록 옛 규례이기는 하나 세속에 어울리기에는 부족할 듯하다."
하니, 명연이 아뢰기를,
"국조의 옛 제도에 당상관은 자색(紫色)을 입고 당하관은 비색(緋色)을 입어 이를 답호(褡護)라고 하였는데, 신이 입고 있는 것 역시 비색 답호입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세속과 구차하게 같이 하고자 하지 않아서 모두 이 옷에 맞게 입는 것은 진실로 좋으니, 역시 주견을 가져야 한다. 만일 주견도 없이 한갓 세속과 어긋나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다면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편전에서 재숙하였는데, 우단(雩壇)의 제사가 내일 있어서였다.

 

이해 봄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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