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병자
이형원(李亨元)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상이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관동 지방을 유람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말과 양식을 지급하게 하고 지방관은 안부를 물어 상문하게 하였다.
4월 2일 정축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서북 지방의 별부료(別付料) 군사에 대한 활쏘기 시험을 거행하였다.
전교하였다.
"근자에 편집(編輯)에 관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들었다만, 증 승지 조정익(趙廷翼)의 충의는 동일한 시기에 시호를 하사한 여러 신하들과 서로 차이가 없다고 하니, 특별히 정경(正卿)의 품계를 추증하라. 증 승지 정백형(鄭百亨)의 절의는 열 개의 정문(旌門)을 세운 것으로 충분히 알 만한데 아직까지 시호를 내리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도 제단의 향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 어찌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향사의 반열에 참가하도록 하라. 고 박사 윤형지(尹衡志)의 척화(斥和)에 대한 상소는 호담암(胡澹菴)027) 에게 뒤지지 않으니, 아직까지 추증하는 은전을 거행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특별히 3품을 추증하라."
4월 3일 무인
전라도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상소하기를,
"탐라(耽羅)에 몇 해 동안 계속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하게 되었으므로, 전하께 밤낮으로 걱정하는 근심을 끼쳤고, 이에 누차 가서 구제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겨울과 봄에 걸쳐 천리에 잇닿을 정도의 운반선을 띄워 물자를 보내 구제하였으므로 온 섬의 생령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되고, 도탄에 빠졌다가 살아나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곡식을 보내 구제하는 일은 일정한 법식이 있고 백성들은 일정한 숫자가 있기에 전후로 이미 운반한 곡식을 가지고 응당 구제받을 인구 숫자와 비교하고 통상적으로 행하는 법식에 준거하니, 돌려가며 안배하고 차례대로 계속 이어주었기에 결코 궁핍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해당 지방관이 더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니, 이 일은 전혀 신이 애당초 요량할 수 없었던 바입니다. 1만에 가까운 궁내의 곡식을 보내는 일이 두 차례나 격식을 벗어나서 나왔고, 이어서 연읍(沿邑)의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적정 수량을 나누어 보내주도록 하였으며, 또 바다에 빠져 유실된 곡식에 대하여 다시 보내주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신은 이 점에 대하여 허둥지둥하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탐라는 비록 바다 건너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또한 관내의 속읍(屬邑)이어서 그곳을 구제하는 것은 신의 책임이니, 어찌 섬과 육지에 차이를 두고 처리하겠습니까. 그러나 피차의 사정을 헤아려보면, 육지의 백성들도 계속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것이 애당초 섬의 백성들이 연이어 기근에 시달리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매번 한 차례의 곡물 수송이 있고 나면 곧바로 한층 더 민폐가 심화되는 바, 해마다 계속 해운(海運)을 하는 과정에서 온갖 폐단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의 창고에도 현재 축적된 것이 거의 없는데 지금 탐라의 요청을 그대로 따라 다 수송하기로 한다면 아마 공사(公私)의 곡물이 모두 바닥나서 육지와 섬이 모두 피폐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계책은, 바다에 빠져 유실된 만큼 다시 보내라고 한 명을 우선 중지시켜 백성들의 힘겨움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주어야 됩니다. 또 창고에 축적된 것을 융통하는 일에 있어서는, 절반의 수량은 이미 각읍에 신칙하여 섬수에 기준해서 내도록 했으나, 그 나머지 절반은 육지의 고을에 무역하여 수송하게 한다면 그 폐단이 연해의 창고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작년 겨울 곡식을 사들였던 사례에 의거하여 해당 고을에 분부해서 휘하의 장교들을 나누어 보낸다면 방편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곡식을 사들여서 배로 운송하는 일은 더욱이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의 폐단이 있습니다. 당해 목사가 현재 영암 도회소(靈巖都會所)에 머물러 있고 본 고을의 선박도 많이 와서 정박하고 있으니, 곡식을 낸 해읍이 당해 제주 목사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 교부하게만 한다면 바다를 건널 때에 섬의 배가 육지의 배보다 훨씬 더 편리한 점이 있게 되고 또한 순조롭게 부쳐 폐단을 없애는 방법이라 할 만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봄 이후로 궁궐 내의 물자로서 2만 냥의 돈에 해당하는 금전·명주·후추 등을 특별히 지급한 것은 규례(規例)에 없는 사례임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대개 연해지역의 백성들이 받고 있는 고통이 섬의 백성들이 기근을 당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이것이 바로 규례가 없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은전이 지나친 것도 구애하지 않고 상용(常用)의 물자를 덜어내어 두 차례나 궁궐의 물자를 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침수되어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대신 보내주고 창고에 남아 있는 곡물을 환급(換給)토록 한 것은 모두 마지못하여 나온 계책이었다. 상소문에서 민간의 폐단을 진술한 것이 이와 같으니, 연해지역의 백성들이 원망할 것을 생각하건대 그 소리가 곧 귀에 들리는 듯하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니,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지금까지 3년 동안 제주에 준비하여 보낸 각 명목의 곡물은 도합 5만 3천 5백 석이나 되니, 배로 곡물을 수송하여 구제한 은혜는 섬의 백성들 쪽에서는 참으로 하해와 같이 큰 것이고, 연해지역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곡물을 수송하느라 누적된 곤궁도 섬의 백성들이 기근을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제주 목사가 장계를 올려 백성들의 실정이 시급한 형편이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요청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로 운송하는 일의 고생스러움에 대하여 전하께서 주야로 염려하여, 제주 군교(軍校)가 형편에 따라 사들여서 제주의 배가 나오는 대로 실어가도록 하며 차송하는 관원은 배를 타지 않게 하고 축이 난 곡물에 대하여는 특별히 보충해주고 배로 운송하는 비용은 궁내의 물자로 특별히 지급하도록 한 것 등은 모두 섬과 육지 양편 백성들의 실정을 모두 염려하여 피차가 동시에 편리하도록 한 정사였습니다. 그러나 관찰사가 상소하여 수량을 헤아려 돌려가며 안배하는 일의 일정한 법식에 대하여 진술하고, 곡물을 사들이는 일의 타당성에 대하여 차례차례 진술하였으며, 또 침수되어 유실한 부분을 다시 보내주도록 한 일을 당분간 취소시키고 새로 부임하는 목사로 하여금 담당하여 거행하게 하도록 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이 사안의 편부(便否)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섬의 농사 형편이 모맥(牟麥)의 파종이 잘 되어 대단한 풍년이 기대된다고 하니, 모두 요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윤허하소서.
다만 작년에 제주도의 호구가 다수 감소된 것은 오로지 요청한 곡물이 풍부하지 못하고 구제할 때 적당한 시기를 놓친 데에서 연유되었습니다.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고 앞날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후에 걸쳐 측은하게 여기는 전교를 내리기에 이르렀고, 두 차례 궁내의 물자를 내주는 은전이 있었으며, 연해지역의 백성들에 대하여 긍휼하는 뜻도 동시에 그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편리한 형편에 따라 사들이고 곡식을 낸 해읍(該邑)이 도회소(都會所)에 교부하는 등의 일을, 다만 아직 부임하지도 않은 신임 목사에게 거행하게 하고 감사가 관장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시기를 놓쳐 일을 그르치는 사고가 형세상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해당 감사가 사안에 따라 지휘하여 기필코 보리가 익기 전에 모두 운송하여 가게 하고, 또 신임 목사가 부임하는 즉시 직무를 교체시킨다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러한 일로 도신(道臣)과 수신(守臣)에게 엄하게 경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침수되어 유실된 곡물은 작년과 금년에 운송한 5만여 섬에 비교하면 넓은 바다 가운데 한 톨의 좁쌀이나 다름없으니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라. 앞서 들인 공력이 아깝다. 모든 백성을 똑같이 보아 사랑하는 뜻에서는 연해지역의 백성들을 위하여서라도 침수된 곡물 대신으로 새로이 징발하여 보내는 일을 할 수 없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어찌 온통 방치하면서 마지막 마무리를 못하여 일을 그르치게 되는 한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명령이란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되는 법이니 보리농사가 유망하다고 소홀하게 처리할 수 없다. 제주에서 궁중음식용으로 바치는 물품을 2개월을 더 늦추도록 하라는 일로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사은사(謝恩使)를 차송하려던 계획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다면, 사신을 차송하지 않는 일, 조서(詔書)를 부칠 일, 방물(方物)을 기준에 맞추어 보낼 일, 하사할 물품에 대한 일, 사신이 연회에 참석하는 데 대한 일, 세 차례 중대한 절일(節日)에 올릴 표식(表式)을 받는 일, 황후에 관련된 세 절일의 표전(表箋)과 방물을 정지시키는 일, 장연(長淵)에 있는 표류민(漂流民)을 떠나보내는 일 등에 대하여 모두 예부(禮部)에 자문을 보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는 해마다 통상적으로 보내는 자문과는 다르기 때문에 만부(灣府)028) 에서 봉성부(鳳城府)로 보내 다시 북경(北京)에 도착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특별히 자문을 가지고 갈 관원을 정하여 자문을 속히 보내는 동시에 사신의 행차가 있은 뒤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역원으로 하여금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을 잘 아는 인물을 간택하여 조만간에 출발시켰다가 6월 내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4일 기묘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군사에 대하여 활쏘기를 시험하고, 아울러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하여 직접 시험을 보였다. 그리고 문신은 좌측에, 무신은 우측에, 장교(將校)와 군병은 전면으로 반열하게 하고 음식을 내려 회식하게 하였다.
의정부에 청백리를 선발하도록 명하니,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청백리를 추천·선발하는 일은, 선조(先朝) 정사년에 숙묘조(肅廟朝)에 행하였던 관례에 의거하여 2품 이상의 관원들이 각각 세 사람씩 추천하게 하여 모두 30여 인을 뽑았는데, 아직까지 도당(都堂)의 회권(會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천 명부의 원본을 공사간 소장본을 대상으로 두루 수소문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숙묘 갑술년 이후의 여러 신하들을 두루 포괄하여 천거하게 하되, 2품 이상은 현임·전임을 합쳐 비변사 당상관, 6조 한성부·양사의 장관에 한하여 제각기 알고 있는 인물을 천거하게 하며, 2인이나 3인 등에 구애하지 말고 의정부에 써서 보내면 의정부가 품달하고 다시 서벽(西壁)과 이조·예조의 당상관을 패초(牌招)하여 그들이 회의하여 취사선택한 뒤에 아뢰게 한다면 고금의 상황을 적당히 참작한 제도가 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이노춘(李魯春)의 죄명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노춘의 일은, 당초에 내린 처분이 어찌 전후의 상소가 서로 판이하게 달랐던 이유에서만이겠는가. 문구 중에도 가리지 않고 쓴 말이 많았었다. 또 생각해 보면, 그때에 무너뜨리고 빼앗을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런 처분을 내렸던 것인데, 즉시 서용하지 않은 것은 역시 세상의 도의를 위한 뜻이 있어서였다.
근래에는 이노춘보다 몇 배나 더 심한 자도 죄명을 면제받곤 하는데 노춘만은 유독 생사의 죄명을 받고 있으니 형정(刑政)이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서가 일도양단에 가까운 것이라 말하지 말라. 이전의 그 처분이나 지금의 이 용서는 모두 각각의 상황에서 요량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노춘을 형벌을 면제하여 살리고 싶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이노춘의 일은 전후의 시비가 어떠한지에 대하여는 논할 것 없이 본래 연소하여 일을 경험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과오였습니다. 지금 성스런 세상을 맞이하여 거의 한 사람도 폐기한 자가 없었는데, 13년 동안 폐인으로 금고되었고 아직까지 살아날 것인지 벌을 받아 죽을 것인지가 불분명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하여는 당나라의 육지(陸贄)가 ‘과오를 뉘우친 자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할 길이 없고 재능을 가진 자가 끝내 용서받아 등용되지 못하니, 이는 왕자(王者)가 흉금을 터놓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큰 체모와 성인이 사람을 교화시켜 선량하게 만드는 훌륭한 계책에 어긋난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지금에 전하의 분부가 이러하니 신은 그저 감격하여 흠앙하고 칭송할 뿐입니다.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노춘의 죄명을 면제하여 함께 서용하는 대열에 넣으라."
하였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고 지사 이정(李瀞)은 바로 이노춘의 조부입니다. 그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절의는 표창하는 전례를 적용해도 합당한데 아직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그와 관련된 일이 언급되었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안은 큰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만큼 아직 정미(精微)한 부분에까지 논의가 이르지 못하였다면 갑자기 표창을 논하는 것은 곤란하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제주의 공마(貢馬)가 본 목장에 있을 때에는 모두 건강하여 걸음걸이가 씩씩하였는데, 진상할 때에 이르러서는 날씨가 매우 더운 계절에다 말을 모는 자들이 마구 몰아대어 말무리가 뒤엉켜 날뛰는 바람에 암말은 새끼가 떨어지고 숫말은 부상하게 됩니다. 또 각 목장의 말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거의 이런 점에서 연유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배에 싣고 육지에 내릴 때에 이미 심히 병들고 허약하며 몰아서 상경하는 과정에서 다수 죽게 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목사가 매년 가을에 연례적으로 두루 순찰하면서 말을 점검하는 것을 큰 법식으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목장마다 말을 점검할 때에 14필씩을 골라내어 외양간에서 사육하여 겨울을 넘긴 뒤에 정해진 때에 바치게 한다면 우도(牛島) 말고도 13개 목장에서 1백 30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숙마(熟馬)는 야성이 길들여져 여물을 먹는 것이 평상시와 같으므로 비록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길에 오르더라도 병이 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조발(調發)할 때에 관민에 생기는 폐단과 몰고 다닐 때에 사고로 감소되는 탈을 없앨 수 있습니다. 신은 전에 본 제주목에 재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의 편부(便否)에 대하여 대략 알고 있고 또 섬 백성들의 말도 들어보았기에 지금 말이 난 김에 아룁니다. 이것으로 탐라의 목사에게 신칙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시동이 또 아뢰기를,
"왜학 역관(倭學譯官)이 단삼(單蔘)을 담당한 지가 40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폐단없이 거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계축년에 미삼(尾蔘)에 값을 덧붙인 것은 실정을 숨긴 점이 충분히 처벌할 만한 것이었고, 이것으로 하여 원공(元貢) 속에서 미삼 조항을 삭제하고서 외방인에게 따로 준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빼앗아 외방인에게 준 것은 소가 밭을 짓밟고 지나갔다고 해서 소를 빼앗아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금년부터는 미삼에 대한 공납을 왜학 역관에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4월 5일 경진
정언 남기만(南基萬)이 상소하기를,
"《홍범(洪範)》의 서징(庶徵)은 반드시 오사(五事)에서부터 유추하여 설명하고029) , 《중용(中庸)》의 위육(位育)의 지대한 공효는 오직 치중화(致中和) 세 글자에 있었습니다. 또 중화를 이루는 것은 칠정(七情)이 중용이 되느냐 못 되느냐에 달려 있고 칠정이 중용이 되는 데에는 오직 ‘성냄’에 가장 어려움이 있으니, 마땅히 성내야 될 때에 성내지 않거나 성내서는 안 될 때에 성내는 것은 모두 이른바 ‘중용을 지켜 알맞게 조절함[中節]’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대순(大舜)이 사흉(四凶)에 대해 성내고 안자(顔子)가 성냄을 옮기지 않은 것과 같이 한 뒤에라야 비로소 성인의 성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지 사이에서 요행스럽게 숨쉬며 살아 있는 자들을 시험삼아 살펴보면 모두 사흉(四凶)의 몇 배나 됩니다. 단호히 형벌을 가하여 많은 이들의 울분을 풀어주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성내야 될 일에 성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의금부가 복주하여 논하고 삼사가 계속 논집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용인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되는 부분인데도 도리어 유배시키고 파면하거나 금령(禁令)을 내려 저지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성내서는 안 되는 일에서 성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하의 성냄은 여기에서 중절(中節)을 유지하지 못하여 중화(中和)의 극치에 이르는 데에 미흡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하고서 천지가 제 위치에 서고 만물이 순리대로 화육(化育)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신에게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 분한 일이 있습니다. 사간 오정원(吳鼎源)이 아뢴 바를 보니, 그는 사학(邪學)의 폐해를 논하면서 호남과 영남지역으로 더욱 만연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영남인입니다만, 이 말이 어떤 연유로 이르게 되었습니까. 지금의 영남이 비록 옛날만은 못하지만, 선비들이 아직도 선성(先聖)들의 책을 읽고 선현들의 훈계를 지키고 있어 천리(天理)를 다하고 인륜을 잡고 있는 인간 본연의 이성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지금 말하고 있는 사학이 과연 어떤 학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오정원은 호남과 영남을 함께 거론하여 은연중에 한 도를 오랑캐와 금수의 지역으로 몰아넣었으니 그 말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세상의 도리가 이러하니 하늘과 시절의 재변(災變)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간이 과연 진실되게 보고 들어 그 일을 지적하여 드러냈으니 조정에서 자연 응분의 처벌이 있을 것이고, 또 영남의 인사들도 곧 가차없이 다같이 성토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저 오정원이 어찌 무망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을 꼭 유의하겠다. 피혐한 것이 지나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6일 신사
서미수(徐美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7일 임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8일 계미
포도 대장 조규진(趙圭鎭)을 삭직하였다. 이전에 헌납 한흥유(韓興裕)가 상소하여, 남영(南營)에 거둥했을 때의 잘못에 대하여 진술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도(道)는 백왕의 으뜸이고 치적은 삼대(三代)와 대등하니 마땅히 하늘의 마음에 들어 아름다운 상서가 끊임없이 이르러야 될 텐데도, 하늘이 이토록 간곡하게 경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반드시 초래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근거없이 견강부회하여 말하지 못하겠으나 목전에 당한 사실을 가지고 대략 진술하겠습니다.
먼저 징계하고 토죄(討罪)할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겠습니다. 파산(坡山) 한 모퉁이는 죄를 도피하는 소굴이 되었고 종적이 의심스럽고 남을 현혹시키고 있는 데도 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수(沁水) 일대는 임금의 은전을 특별히 많이 받았으면서 아직도 일당의 왕래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누구냐고 묻는 이가 없습니다. 이름이 대간의 계사에 들어있는 자는 한 번 윤허를 받기만 하면 겉으로는 법을 시행하는 듯이 하면서 속으로는 실상 용서를 받고, 죄가 의금부의 죄인 명부에 올라있는 자도 한 번 사면을 받기만 하면 문서를 남김없이 삭제해 버리니 법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정원이 논쟁하지 못하고 의금부가 복주하여 반대하지 못하며 삼사가 올바르게 구제하지 못합니다. 한 번이라도 곤란한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금령을 내려 수문장과 병조가 저지하고 승정원의 하리와 사알(司謁)이 대항하고 있는데, 당(唐)·우(虞) 시대에 요·순이 사흉(四凶)을 벌할 때에도 어찌 이러한 점이 있었겠습니까. 속히 이미 내린 금령을 정지시키소서.
이번에는 언로(言路)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총(聖聰)이 비록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에 관대하지만, 올바른 말이 항직(抗直)하다는 데에서 들리는 것이 없고, 관리가 서로 규찰하는 도리가 오히려 침묵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어떻게 임금의 과실을 보조할 수 있겠으며, 기왕의 문헌을 베껴 전하는 것도 오히려 회피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시정(時政)의 잘못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전년에 강루(江樓)와 기영(畿營)에서의 일은 얼마나 비상한 사태였습니까. 이때에는 대궐문을 열어제치고 곧바로 들어간 자도 있었고 도끼를 가지고서 처벌을 청한 자도 있었고 통곡하는 자도 있었고 혈소(血疏)를 써올린 자도 있는 등, 장차 함께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려는 뜻이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전하의 과실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조정의 신료들은 태만하게 대처하여 마치 평범한 일처럼 여겼습니다. 신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날 입이 아프도록 애써 간쟁한 것이 습관처럼 눈과 귀에 익어서입니까.
다음에는 형정(刑政)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정에서는 오로지 관용과 사랑을 숭상하고 있으나 수령들의 침학(侵虐)은 더욱 심해지고 있고 감옥은 거의 빌 정도로 죄수가 없어졌으나 민간에서 함부로 살상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남의 어느 고을 수령은 잔폭하여 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지나치게 사람을 죽였는데, 여행중의 종과 주인이 함께 숨지고 고을의 선비로서 부자가 함께 죽었습니다. 보살펴 살리려는 조정의 논의와 되도록 가볍게 처벌하려는 전하의 뜻은 풍교(風敎)를 보전하려 한 것이었으나 도리어 훗날의 폐단을 열어놓았습니다. 한 고조(漢高祖)의 삼장법(三章法)으로 적용한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연초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변괴입니까. 사건을 조사하여 밝히는 도리상, 마땅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사하여 죄를 범한 자는 요행으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죽은 자는 억울한 원한을 풀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포도청이 사건을 수사하던 초기에 한 일이라곤 죽은 자의 친척을 조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여타 혐의자를 심문하지 않았다고 하니, 결국 일은 애매하게 되었으며 사건을 다룬 자취는 흐지부지하게 되었습니다. 형벌을 다루는 관직에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옥사를 소극적으로 다스렸으니, 분명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새기지 않은 것이며 끝까지 사건을 파헤쳐야 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공직을 맡고서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두 항은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한 부녀자의 원한으로도 오히려 오월에 서리를 내리게 한 일이 있는데, 더구나 영외(嶺外)의 몇십 명의 원혼(冤魂)이 있고 도성 아래에서 죄없는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죄인을 처벌하는 전례가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홍양(桑弘羊)을 처벌해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한 의의030) 에 따라 엄중하게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니 수령에 대하여는 대간의 계청을 윤허하고 포도 대장에 대하여도 유배의 형벌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관직의 기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직 제수에 대한 전교가 너무 빈번하고 관로를 소통시키는 일이 너무 남용되고 있는데, 심지어는 하찮은 대책(對策) 하나로 하여 곧바로 막중한 지방관의 자리를 제수하는가 하면, 선조의 공훈을 특별히 배려하여 갑자기 서얼을 관직에 의망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경관직(京官職)에서 불요불급한 자리를 폐지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닥친 급선무인데도 새로운 자리를 늘리는 것이 많아지고 있고, 문관 수령의 정원을 늘리는 것이 근래의 새로운 법식인데도 음관이나 무관이 다수 차지하고 있고, 대사헌을 엄밀하게 임명하는 일은 대각(臺閣)의 장관을 높이려 함인데 지나치게 피혐하는 뜻을 그대로 따라 도리어 헛되이 구속하는 자리로 귀결시키고 있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오랫동안 재임시키는 것은 인재 양성의 효과를 기하기 위한 것인데 한 번 상식 밖의 말이 나오자 서로 실랑이를 벌이도록 내버려두었고, 중비(中批)로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전하께서 즉위한 초기부터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였던 바인데도 간간이 도리에 맞지 않는 은전을 베풀었고, 첨가하여 써넣고서 낙점(落點)하는 일은 역대의 선조(先朝)에서는 없었던 바인데 새로운 규례를 창설하였고, 남방의 선비가 한 말이 세상을 속인 데에 해당되는데도 도리어 목민관(牧民官)으로 내세워서 사림의 논의가 한창 일어나게 하고 있고, 서쪽 변방의 자리는 국경을 지키는 책임이 중한데도 갑자기 탁핵을 받은 사람에게 제수하여 물정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명기(名器)를 아끼고 신중하게 다루어 정성을 가지고 인물을 등용하소서.
다음에는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 과거를 거치고 나면 형틀이 연이어지고 한 번 전시를 치르고 나면 질책하는 전교가 숱하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비들의 습속이 옛스럽지 않고 과장(科場)이 엄격하지 않으니, 지금 과장의 폐단을 가지고 전날의 시험규정과 비교해 보면 단지 원칙이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고 말할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과거규정을 엄격하게 세워 해묵은 폐단을 통렬하게 금지하여 남의 손을 빌어 지은 자는 스스로 물러갈 줄을 알고 남의 글씨로 쓴 자는 감히 함부로 응시하지 못했으니, 명령하지 않고도 엄격하게 되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중간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에 보이는 시험에서 정원을 지나치게 많이 늘려, 2백 명의 사마시(司馬試) 급제자 이외에 간혹 정원 외의 추가자가 있고, 한두 명에게 급제를 하사하는 경우 외에 간혹 도에서 생원·진사를 뽑는 사례가 있습니다. 또 일차(日次) 강경(講經)에 응하였는데 즉석에서 명단을 부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집에서 제술(製述)에 응하고서 규정을 벗어나서 곧바로 응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전(箋)을 올린 외방의 유생(儒生)을 위하여 별과(別科)를 특설하였고,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거친 성균관 거재생(居齋生)에게 침랑(寢郞)에 제수하도록 윤허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행으로 벼슬길로 들어가는 문이 한번 열리자 조급하게 벼슬에 오르려는 일이 점점 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별시(別試)에 이르러서 많은 선비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무과(武科) 과장의 사례만 말하더라도, 애당초에는 철전(鐵箭)을 1백 10보에서 쏘는 것으로 모든 도에 통보하고는 응시자들이 다 모인 뒤에 갑자기 1백 30보에서 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었고, 심지어는 8도에서 발이 부르트도록 고생하며 온 무사들에게 처음부터 활을 당겨보지도 못하게 하여 결국 한 과장이 전부 방(榜)을 발표하지 못하고 중지되기도 하였습니다. 국가의 법이 어찌 이토록 전도될 수 있습니까. 전하께서 과장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한다면 먼저 시험규례를 분명하게 적용하여 자질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소서.
다음에는 풍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치가 유행처럼 되어 절도없는 소비가 날로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시정배의 건복(巾服)이 관복의 모양과 거의 같고 하인들의 포혜(袍鞋)가 사대부들의 양식과 같으며, 가계(加髻)를 폐지한 것은 사치를 없애려 한 것이었는데 단체(單髢)가 갑절 더 높아졌고, 청창(靑氅)의 복제는 비용을 줄이려 한 것이었는데 주의(紬衣)가 도리어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택을 짓는 규모가 정해진 제도를 위반하고 음식물이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여 더욱이 재물을 낭비하는 심각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조규진(趙圭鎭)을 삭직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에 우부승지 이조원(李肇源), 부응교 이명연(李明淵), 검열 김이영(金履永) 등이 모두 사정과 형편을 일컬으면서 상소하여 진술하고는 곧장 나가니, 하교하기를,
"일차강(日次講)을 통하여 급제를 내리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으며, 초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응시하는 것은 전시(殿試)와 회시(會試)가 마찬가지이다. 제술에 의하여 곧바로 복시에 응시한 것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패초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은 간곡하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유(四維)031) 에 관계된다고 하였고, 대간은 서로 논란을 벌이도록 맡겨둔 것을 가지고 인재양성을 책임지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선 두 견해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현 대사성은 한 가지 정상이 더 있으니 행 대사성 이만수(李晩秀)를 체직시키고 윤득부(尹得孚)로 대신하라."
하였다.
이시원(李始源)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증 우의정 김경서(金景瑞)에게 ‘양의(襄毅)’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 조헌(趙憲)에게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신만(申曼)에게 ‘효의(孝義)’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유몽인(柳夢寅)에게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오정방(吳定邦)에게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윤경원(尹慶元)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조정익(趙廷翼)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임성(任珹)에게 ‘충희(忠僖)’라는 시호를,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에게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각각 추증하였다.
지평 정최성이 아뢰기를,
"유사문(柳師文)의 일을 몇 년에 걸쳐 계속 논계하였으나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었는데, 일전에 지평 이복윤(李福潤)이 경연석에서 전계(傳啓)할 때에 갑자기 이를 누락시켜 결국 정계(停啓)하는 사안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대개 대간의 계사를 정지하느냐 계속하느냐는 사안이 매우 중대한 것인데, 대각의 한 사람이 착오한 것으로 인하여 막중한 죄명에 대하여 갑자기 정계하는 데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대간의 체모상 도저히 설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복윤에 대하여 삼사의 관직을 개정하는 조치를 취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서유대(徐有大)를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4월 10일 을유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배례를 올렸다.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전 부제조 윤행임(尹行恁)을 도로 차임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이 직책을 맡긴 것이 너무 일렀었다. 그의 자질이 노련해진 뒤에 기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 재상 유언호(兪彦鎬)가, 40세에 처음으로 벼슬하고 50세에 대부가 된다는 뜻에서 나이에 제한을 두어 가자(加資)하여 40세 전에는 아경(亞卿)이 되지 못하고 50세 전에는 정경(正卿)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하였고, 장차 이런 것으로 거조(擧條)에 대한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다.
대개 근자에 빨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 습속이 되어 30세도 되기 전에 당상관의 의망에 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 연한을 두어 노숙한 것이 귀한 줄을 알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윤시동이 아뢰기를,
"옛날에 관리를 임명할 때에는 본래 연한이 있어, 40세에 처음 벼슬에 나아가고 50세에 대부에 임명한다는 예법이 예경(禮經)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선배들이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도 못 되어서 당상관에 올랐으니 이것이 으레 논란의 일단이 된 것입니다.
역대의 선조에 관리를 임명할 때에는 대체로 자질이 노숙해진 뒤에 기용하였습니다.
고 재상 유언호가 전에 이 일을 가지고 한 편의 문건을 만들어 전하에게 품달하여 규례로 정하려 하였다가 끝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주상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과 신하가 능력을 바쳐 관직에서 일하는 문제에서 문학과 덕량(德量), 재능과 지모(智謨) 내에서 출중한 자를 뽑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상식이었습니다. 중등 이하의 인물은 연소한 자는 일에 더러 서툴고 나이 들어 성숙한 자는 대다수 주도면밀하며, 재상에 이르러서는 일에 따라서 계책을 만들어내는[方物出謀] 위치에서 나아가 나라의 중대사를 관장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옛 성인이 대부(大夫)를 명할 때에 50세의 중년으로 한 것은 반드시 한정하게 된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신(銓臣)이 방금 연석에 나왔으니 두루 자문하고서 특별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이에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에게 물어보도록 명하니, 심환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조정의 신하들이 차례를 거치지 않고 빨리 승진하는 것이 풍속의 가장 고질적인 폐단인 점에 염려하고, 《예기(禮記)》에서 ‘40세에 처음 벼슬에 오르고, 50세에 명하여 대부로 삼는다.’라고 한 뜻을 가지고 모방하여 제도를 정하여 앞으로 나올 신료들로 하여금 자질과 기량을 성숙하게 갖추도록 하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풍속을 순화시키고 폐단을 구제하는 중대한 단서가 됩니다. 이는 오직 성명께서 치밀하게 선택하고 중도를 취하여 하나의 합당한 규례로 삼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죽은 재상의 말을 차마 잊을 수 없으나 경의 말은 더욱 좋다. 이것으로 거행할 조항을 만들어 훗날 증명할 자료로 삼고 정부 묘당과 이조의 사례집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이면응(李冕膺)을 비변사 제조로 삼았다. 이는 우의정 윤시동의 말에 따른 것이다. 이경무(李敬懋)를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4월 11일 병술
평안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을 체직시켰다. 이는 혐의쩍은 사람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박종갑(朴宗甲)으로 대신하였다. 이조 참판 황승원(黃昇源)을 체직시키고 홍명호(洪明浩)로 대신하였다.
4월 12일 정해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4월 16일 신묘
안산(安山)·용인(龍仁)·진위(振威) 세 고을의 수령을 장용외영(壯勇外營)의 별좌부(別左部)·중부(中部)·우부(右部) 세 부서의 파총(把摠)으로 삼고 아울러 협수장(協守將)을 겸임하게 하였다.
4월 17일 임진
승지 신기(申耆)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이조 판서 심환지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마음과 뼈가 오싹하여 달포가 지나도록 진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논한 바는 오로지 대신의 거조(擧條)를 조보(朝報)에 게재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신이 《명의록(明義錄)》의 의리도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죄과에 몰아넣었습니다. 말로 겁주기를 어찌 이런 정도까지 할 수 있습니까. 대간의 상소에서 먼저 그 단서를 거론하고 인사관리를 통한 벌칙이 뒤따랐으며, 마침내는 한 구절의 말로 결단을 내려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에 흐뭇할 때까지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사건의 단서가 여러 가지로 생겨나고 죄망에 걸려드는 상황이 망극하니 그 전말을 철저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 12월 26일 빈대(賓對)한 뒤에 승정원의 하리가 와서 거행할 안건을 연이어 쓸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였는데, 이는 대개 승정원에서 행해진 근래의 규례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조항은 곧 의금부의 문안(文案)을 세초(洗草)하자는 요청이었고 중간에는 같은 죄인을 이미 신설(伸雪)하였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신은 신묘년에 의금부에 재직하여 본부에 원래 문안이 없었던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또 같은 죄인을 신설하였다는 것도 전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이 일은 의리에 관계되는 바이다. 정승이 처음 아뢴 것에 대하여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잘못 검열한다면 일의 체모에 손상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우선 별지에 써서 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거행할 안건을 차례 차례 공포하는 것은 또한 기왕의 전례가 많았으니, 이는 단지 일에 당하여 신중을 다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날 밤에 또 다시 구두로 하교하여 비답의 내용 중에서 몇 글자를 고치라고 하였고, 이어서 꼭 고쳐서 승지가 관장하여 보관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비답을 고치기 전에는 주상이 보는 조보(朝報)일지라도 써넣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보에 반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튿날 아침 명을 받고 가지고 들어가서는 조보에 내었는지의 여부를 하문하시기에 신이 아직 반포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 다음날 대신이 하리를 가두고 반포를 독촉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으나, 다만 저의 생각에 ‘어제 전하께서 하문하였을 때 이미 아뢴 바가 있었으니 다시 품신하지 않고 제 뜻대로 반포하는 것은 또한 미안한 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연석(筵席)에 나아갔을 때 한 번 품신하여 결정할 작정을 하였는데, 때마침 섣달 그믐날이 닥쳐 감히 번거롭게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초이튿날에 이르러 연석에서 신이 미처 아뢰기 전에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거행할 안건을 조보에 내지 않은 이유를 왜 경연석에서 하교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경연석에서 하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자신의 해명에 급급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경연석에서의 하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감격하고서 물러나왔고, 또 감히 드러내놓고 말해 바깥에 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갖추어 써놓고서 반포하지 못한 전후의 사실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만약 문안(文案)의 유무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별지에 써서 들여간 것이 매우 긴요하지 않은 점에 관련된다고 하면, 사람의 견해가 제각기 다른 법이니 혹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겠지만, 의도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고 종이에 가득하게 늘어놓아 억지로 죄목을 만든다면 공명정대하게 듣는 여론을 어떻게 만족시키고 복종시키겠습니까. 또 무리하게 죄명을 입은 사람으로서는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지금에 와서 제기할 일이겠는가. 엄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강원 감사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의 여행경로에 대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들으니, 경이 대관령(大關嶺)을 넘고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가 오죽헌(烏竹軒)을 거쳐 송담 서원(松潭書院)을 찾아보고 양양(襄陽)으로 향할 것이라 하였는데, 여행길에서 식사를 더 많이 하고 명승지를 두루 찾는다면 세상의 잡념을 시원하게 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금강산 아래의 김 봉조하에게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계사
전경 문무신(專經文武臣)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여,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청백리를 이미 천거하여 선발하였는가?"
하니, 윤시동이 아뢰기를,
"이 청백리 선발은 매번 잘 가려서 뽑는 것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숙묘조(肅廟朝)에서 20인을 천거한 적이 있었으나 그 당시에도 오히려 누락된 자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1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로이 청백리 선발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인원을 천거하게 하려다 보면 그 천거가 도리어 가볍게 되고 선발을 귀중하게 하려다 보면 누락하는 흠을 일으키기 십상이니, 이것이 바로 신중하고 어렵게 대처해야 할 것이며 감히 쉽사리 천거에 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육조의 판서 이하가 청백리를 추천하여 올렸는데, 그 인물은, 고 판윤 이의만(李宜晩), 고 판서 이하원(李夏源), 고 참판 윤광의(尹光毅) 【판중추 윤숙(尹塾)이 추천하였다.】 , 고 군자감 정 박사백(朴師伯), 고 군자감 정 이겸진(李謙鎭) 【판의금부사 정호인(鄭好仁)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정호(鄭澔), 고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고 판서 이태중(李台重) 【상호군 심이지(沈頤之)가 추천하였다.】 , 고 판윤 이의만(李宜晩), 고 우윤 한덕필(韓德弼), 고 승지 임광필(林光弼) 【대호군 이득신(李得臣)이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오도일(吳道一), 고 동돈령(同敦寧) 박사임(朴師任), 고 통제사 김영수(金永綬) 【우참찬 이치중(李致中)이 추천하였다.】 , 고 판부사 조관빈(趙觀彬),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고 영의정 김익(金熤) 【대호군 이병정(李秉鼎)이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정형복(鄭亨復), 고 병사 이방좌(李邦佐) 【상호군 이주국(李柱國)이 추천하였다.】 , 고 병사 최명주(崔命柱), 고 병사 안윤복(安允福) 【대호군 이경무(李敬懋)가 추천하였다.】 , 고 수사 허정(許晶), 고 병사 최명주(崔命柱) 【수원 유수 조심태(趙心泰)가 추천하였다.】 , 고 판사 정언유(鄭彦儒), 고 감사 정옥(鄭玉), 고 참의 김변광(金汴光) 【호군 채홍리(蔡弘履)가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이병상(李秉常), 고 판서 조관빈(趙觀彬), 고 판서 윤심형(尹心衡) 【호군 서용보(徐龍輔)가 추천하였다.】 , 고 병사 이방좌(李邦佐), 고 부사 안상집(安商楫) 【호군 서유대(徐有大)가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이태중(李台重), 고 통제사 김영수(金永綬) 【호군 이한풍(李漢豊)이 천거하였다.】 ,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전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고 집의 박치륭(朴致隆) 【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고 병조 판서 윤지인(尹趾仁), 고 군수 박선(朴銑) 【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추천하였다.】 , 고 감사 김재현(金載顯), 고 감사 김상직(金相稷), 고 판서 권혁(權爀) 【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추천하였다.】 , 고 참판 조명교(曺命敎), 고 통제사 조경(趙儆) 【 병조 판서 구익(具㢞)이 추천하였다.】 , 고 승지 임광필(林光弼), 고 정(正) 박사백(朴師伯) 【 형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김익(金熤), 고 병사 이방좌(李邦佐) 【공조 판서 신사운(申思運)이 추천하였다.】 , 고 판돈녕 홍만조(洪萬朝), 고 승지 이선행(李善行), 고 참판 정언충(鄭彦忠) 【판윤 권엄(權𧟓)이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윤용(尹容), 고 병사 이방좌(李邦佐) 【호조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고 판서 조관빈(趙觀彬), 고 판서 권혁(權爀) 【예조 참판 이조승(李祖承)이 추천하였다.】 , 고 참판 이제(李濟), 고 정(正) 박사백(朴師伯) 【병조 참판 이경일(李敬一)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고 판서 조관빈(趙觀彬) 【형조 참판 이면응(李冕膺)이 추천하였다.】 , 고 판서 엄집(嚴緝), 고 감사 송정규(宋廷奎), 고 대사간 최성대(崔成大) 【공조 참판 김익휴(金翊休)가 추천하였다.】 , 고 참판 이제(李濟), 고 판서 윤용(尹容) 【좌윤 조윤대(曺允大)가 추천하였다.】 , 고 연릉군(延陵君) 이만원(李萬元), 고 부윤 이형상(李衡祥), 고 봉조하 이광부(李光溥) 【우윤 윤필병(尹弼秉)이 추천하였다.】 ,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고 판관 유숙기(兪肅基) 【호조 참의 홍낙항(洪樂恒)이 추천하였다.】 , 고 부사 이동표(李東標), 고 부윤 정간(鄭幹), 고 목사 고유(高裕) 【예조 참의 이정덕(李鼎德)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봉조하 김종수(金鍾秀) 【형조 참의 이철모(李喆模)가 추천하였다.】 , 고 봉조하 이병상(李秉常), 고 지사 신경보(申慶普) 【공조 참의 서욱수(徐郁修)가 추천하였다.】 , 고 좌윤 한덕필(韓德弼), 고 정(正) 박사백(朴師伯) 【함경 감사 조종현(趙宗鉉)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고 판돈녕 정형복(鄭亨復),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전 평안 감사 김재찬(金載瓚)이 추천하였다.】 였다. 의정부에서는 결국 추천하지 않았다.
4월 20일 을미
차대(次對)하였다.
안치된 죄인 송영(宋鍈), 윤사국(尹師國), 이정운(李鼎運)을 석방하였다. 이는 우의정 윤시동의 상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우의정 윤시동이 관동(關東)의 곡물장부에 잡힌 곡물의 수량이 줄어든 일로 아뢰었다. 전 감사 이병정(李秉鼎)이 아뢰기를,
"관동의 곡물장부에 잡힌 곡물이 충분하지 못한 데에 대한 것은 실로 별로 대처할 계책이 없습니다. 고 대신 김종정(金鍾正)이, 비국이 관리하는 곡식 5만 섬을 대여받아 매년 이윤 5천 섬을 취하여 부족한 재용을 보충하자고 요청하였는데, 결국 그 수량으로는 용도에 당해낼 수 없어 원곡(元穀)을 잘라서 쓰지 않을 수 없었고 10여 년이 지나지 않아 원곡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감사 서정수(徐鼎修)가 다시 비국에 요청하여 세전(稅錢)과 번전(番錢)을 취하여 사용하였으나 그 형세가 계속 지탱하기 어렵게 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윤시동이 말하기를,
"이는 정히 나리포(羅里舖)의 일과 같습니다. 대개 나리포란, 곧 고 재상 김창집(金昌集)과 조태채(趙泰采)가 건의하여 공주(公州)에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애당초 호서(湖西)의 곡물장부에 잡힌 수량이 충분하지 못하여 이를 설치하였는데, 10년도 되기 전에 곡물장부에 잡힌 수량에 잉여가 많이 나서 거의 10여 만 섬에 이르러서 한 도 전체가 매우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 뒤에 제주에서 몇 해 동안 기근이 계속된 것으로 인하여 그 곡물로 번갈아가며 구제할 물자로 삼기 위하여 임피(臨陂)로 옮겨 설치하였고, 또 그 뒤에 나주(羅州)로 옮겨 설치하였으나 지금에는 남아 있는 곡식이 거의 없습니다.
삼남(三南)과 같이 곡물이 풍부한 곳에서도 오히려 문제가 이러한데, 더구나 영동과 같이 척박한 지역에서는 사실 곡물이 나올 길이 없습니다. 신임 감사의 상세한 보고를 기다려보아야 되겠지만 결국 좋게 처리할 수 있는 계책이 없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관서(關西)의 은화(銀貨)가 해마다 줄어들어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내내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매우 민망한 노릇이다."
하였다.
4월 21일 병신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23일 무술
이병정(李秉鼎)을 월곶진(月串鎭)으로 유배하였다.
이전에 강화 유수 김이익(金履翼)에게 올라오도록 명하자, 이병정이 상소하여 지방관을 왕래하게 해서는 옳지 않다고 아뢰었다. 이에 전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면서 무엇을 숨기겠는가. 가장 꺼려야 될 것은 미리 속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는 대개 신하의 절개에 관계된다. 전에 지방관이 왕래한 것이 반드시 유사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의심스러운 자취만을 가지고 사실로 만들어 뛰어나와 상소하여 마치 남의 앞에 나서서 남의 의사를 빼앗는 것처럼 하고 있는가. 이는 의리와 분수 밖의 행위이며 조짐이 아름답지 못하다. 이병정을 유배하라."
하고, 이어 상소문을 들여온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황해도 수군 우후(水軍虞候) 조석회(趙錫晦)가 상소하여 시급히 힘써야 할 일 20조항을 진술하였다. 그 내용은, 1.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 2. 하늘의 덕을 본받을 것, 3. 재상을 가려 뽑을 것, 4. 기강을 세울 것, 5. 관직제수를 조심스럽게 할 것, 6. 간쟁을 받아들일 것, 7.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찾을 것, 8. 사정(邪正)을 잘 분별할 것, 9. 충효를 장려할 것, 10. 억울한 죄인을 신원할 것, 11. 상벌을 신중하게 내릴 것, 12. 출척(黜陟)을 분명하게 할 것, 13. 토목공사를 정지시킬 것, 14.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 15. 감사를 가려서 뽑을 것, 16. 무신(武臣)을 중하게 여길 것, 17. 옥송(獄訟)을 공평하게 처리할 것, 18. 부역(賦役)을 고르게 부과할 것, 19. 배우자가 없는 사람들을 배려할 것, 20. 풍속을 바로잡을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는 시종의 반열에서 변방의 막부로 나가, 구언(求言)을 하였을 때 맨 먼저 분부에 따라 20조목의 사실을 열거하면서 매우 착실하고 열심히 하였으니, 영남인(嶺南人)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고 하겠다. 마땅히 조목조목 유의하겠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미 그의 말을 채용하였으니 조석회를 내직으로 옮겨 제수하라."
하였다.
4월 24일 기해
중비(中批)로 조석회를 사간으로 삼았다.
장사랑(將仕郞) 신신(愼信)이 상소하여 군무(軍務)에 대한 8 조목을 진술하였다. 그 내용은, 1. 도성에 성가퀴를 쌓을 것, 2. 서남지역의 【남양(南陽)과 인천(仁川) 등지이다.】 허술한 곳을 방비할 것, 3. 군영이나 변진에 고역(雇役)을 시키는 것을 금할 것, 4. 군읍(郡邑)에 적을 방어할 방법을 강구할 것, 5. 강변의 창고를 내지(內地)로 옮길 것, 6. 산성에 돌을 준비할 것, 7. 군사제도를 복구할 것, 8. 장정을 보충할 것 등이었다. 이에 비답을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계품하여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
4월 25일 경자
상이 약원(藥院) 제조 심이지에게 이르기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저녘 때까지 꿇어앉아 있어서 버선 끝과 바지의 무릎이 모두 헤어졌으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두건을 벗은 적이 없었다. 제왕가(帝王家)의 규범이 꼭 이토록 엄격하게 구속해야 할 필요가 없겠기에 근래에 와서는 적당히 편하게 지낼 방법을 가끔 생각하였으나 습관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이형원(李亨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화성(華城) 유학(幼學) 우하영(禹夏永)이 상소하여 시급히 힘써야 될 일 13조목을 진술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 바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진술한 13조목은 모두 백성과 나라의 실질적인 쓰임에 관련이 있으니, 그대는 분명 재능을 품고 있으면서 쓸 길이 없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무본(務本) 조목에서 ‘각도 각읍에 농관(農官)을 두고 경민편(警民編)을 반포하여 가르치는 옛날의 제도를 새로이 밝혀야 된다.’고 한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그 타당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진술하도록 하였다.
수차(水車)에 대한 제도는 근래에 장용영(壯勇營)에서 다수 건조하여 배치한 것이 있으나, 다만 비용이 매우 많이 들기 때문에 여러 고을에 널리 보급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토지의 경계에 관한 정사는 그대의 말이 타당하다. 올해의 농사가 어느 정도 결실이 되는 때를 기다렸다가 점차 권장하고 신칙한다면 분명히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뽕나무를 심는 데 대한 사항은 안주상(安州相)의 공상고사(公桑故事)를 본받아서 먼저 화성(華城)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근년에 지방관의 보고에 의하면 1년에 1만 그루를 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다만 앞으로 누에고치를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가를 보려고 한다.
풍속을 교화하는 조목 가운데서 《소학(小學)》을 강하는 일은 내가 고심하는 바이다.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에 어찌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즉시 예조로 하여금 그대의 상소문의 내용을 가지고 아울러 평상적인 법식에 나아가서 온당하고 시행하기 쉬운 조항을 가지고 논하여 계품하게 하고, 즉시 서울과 지방으로 반포하게 하라.
사치를 금지하는 일이 목전의 급선무인 것에 대하여 어찌 그대의 말을 듣고서야 알겠는가. 음식에서 허비하는 것이 의복보다 심하며 더구나 유밀과(油蜜果)에 대한 금령(禁令)은 본래 금석같은 법조문이 있으나 기강이 서지 않아 전혀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의복제도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법만 세워놓고 스스로 실행하지 못하면 금령을 내리고 관원을 차송하는 일이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할 뿐이다. 점차적으로 크게 혁신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하여 매번 대신, 담당자들과 더불어 경연석에서 강구한 것을 가지고 특별히 생각해 보겠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금령 형법(禁令刑法)에 속한 조문을 뽑아내어 중외에 반포해야 된다고 한 것은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다. 형조의 관원에게 초록하여 계품한 뒤에 처리하게 하겠다.
공명첩(空名帖)을 발매하는 일은 근자에 새로이 금지하였고, 한 도 전체에 기근을 구제하는 일을 벌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날의 규례대로 하락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혹시 듣지 못하였는가. 그러나 그대의 경륜으로 보아 나름대로 견해가 있는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용인(用人) 조목에서 두 전조(銓曹)가 채용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는 즉시 조목조목 열거하여 회계하도록 하였다.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즉위한 초기부터 열심히 자문하여 온 것으로서 첫 번째 의의를 두고 있으나 지금까지 굳게 보수하고 있는 것은 대개 요량한 것이 있어서였다.
군제(軍制)와 관방(關防)에 대한 여러 조목은 묘당에 송부하여 무장(武將)에게 자문을 구한 뒤에 계품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조적(糶糴)과 조세에 관한 조목은 책문(策文)을 보여 대신들에게 널리 의견을 구하여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에 가서 거행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본부(本府)에 대한 조목은 수신(守臣)에게 송부하여 의견을 갖추어 계문하도록 하겠다.
탐라(耽羅)에 대한 조목과 도적을 금하는 데 대한 조목은 묘당으로 하여금 초안을 작성토록 하겠다.
간세(奸細)한 행위를 예방하는 일에 대한 조목은 허다한 법령은 차치하고서 가장 급선무가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거주민이 도적을 맞는 걱정이 없게 하고 사리에 당치 않는 것으로 송사하기를 좋아하는 습속이 저절로 금지되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 세 조목 중에서 두 조목의 내용은 꼭 그렇다고 여기지 않기에 논외로 두고, 화포(火砲)의 장약(藏藥)에 대한 일은 해고(該庫)의 제거(提擧)로 하여금 자세하게 살펴보고 복주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4월 26일 신축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문제술(吏文製述)을 시행하기 위하여 예조가 친림 이문제술 의주(親臨吏文製述儀注)를 진상하니, 전교하기를,
"소중하게 여길 바가 있으니 제목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의자에 앉아 부르고 쓰는 것과 제판(題板)에 게시하는 것은, 단지 치밀하게 요랑해야 될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목 말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렇다면 궁전 위에 앉아 여러 문신으로 하여금 뜰에서 글을 짓도록 하는 것도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뜻을 괴원(槐院)032) 의 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어오라."
하였다. 이에 채제공(蔡濟恭)이 건의하기를,
"방금 전하의 하문을 받들고 소중하게 여길 바를 생각해 보니 성교에서 언급한 바가 참으로 옳았습니다. 애당초 의심을 하지 않았다면 그만이나 이미 소중히 여겨야 될 바에 대하여 생각이 미쳤으니 의자에 앉아 구두로 제목을 부르고 계단 위에 게재하는 것이나 시관이 전상(殿上)에 앉아 있고 응시자가 뜰아래에서 제술시험을 치르는 것은 모두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상의 어좌에서 네 번의 절을 받은 뒤에 시관은 빈청(賓廳)으로 나가고 응시자는 내병조(內兵曹)나 혹은 상서원 등의 장소로 나가게 합니다. 그런 뒤에 사관으로 하여금 어제(御題)가 든 통을 돌려보인 뒤에 다시 집어 넣고 빈청에서 시권을 거둔다면 외설스러운 데에 가깝다는 한탄은 없게 될 듯합니다."
하였고, 윤시동은 건의하기를,
"이문제술은 지금에 창설하여 거행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왕의 사례에서 의거할 만한 것이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삼가 들은 바로는 선왕조 병자년 봄 절제(節製)에서 주상이 낸 제목이 ‘구장(九章)의 의복과 팔음(八音)의 악기를 하사한 것에 대하여 본조가 사례하는 일을 가상하여[擬本朝謝賜九章八音]’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좌에 친림하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나 제목의 말을 소중하게 다룬 것은 이것에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를 상고하여 의주(儀注)를 정하여 거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건히 생각하건대[欽惟]’라는 말과 ‘삼가 만나서[伏遇]’라는 말의 소중한 바와 서두와 결말에서 호칭하는 말의 막중함은 모두 얼마나 지극히 존경해야 될 문구인가. 이런 점에서 볼 때 결단코 의자에 앉아서 제목을 부르고 땅에 앉아서 시권(試券)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대개 이문제술의 제도가 창설될 때의 법식은 오로지 과거시험의 규칙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지금 만약 존경해야 할 부분을 쓰지 말도록 한다면 과거형식의 변려문으로 평범하게 시험하여 뽑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좌상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되, 시관(試官)은 이미 강시관(講試官)을 겸임하고 있으니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해야 되겠고, 다만 제술에 응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빈청(賓廳)으로 나가 기다리다가 제목을 받은 뒤에 내궐 내의 관사에서 작문하여 올리도록 하라. 또 앞으로 이것으로 규례를 삼도록 하라. 곧바로 예조 판서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알고 즉시 의주(儀注)를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7일 임인
승지 신기(申耆)를 특별히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삼았다가 곧이어 다시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삼았다. 이는 신기가 사정을 이유로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월 29일 갑진
상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약원에 재직하는 자들이 다만 하룻밤의 청재(淸齋)를 하고는 들어왔었는데, 요즘은 한 차례 질병을 접하고서는 반드시 한 달을 지나고서야 대궐로 들어오고 있다. 이런 관계로 매우 가까운 친척간에 조문(吊問)할 일에서도 서로 왕래하지를 못하니, 풍속이 박절하고 여유롭지 못하며 야기되는 문제가 적지 않다. 앞으로는 경연에 오른 자들은 모두 소식을 돌려 알게 하여 잘못된 습속을 꼭 혁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과 강화부 유수 김이익(金履翼)을 나포하라는 명을 내렸다가 곧바로 중지시켰다. 이전에 상이 내수사에 명하여 교자(轎子)와 장정들과 말을 강화도로 보내 비밀리에 인(䄄)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문순이 이런 기미가 있는 정보를 듣고서, 시급히 품신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입대(入對)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어찌 인견해 봐야 알겠는가. 경이 필시 잘못 듣고서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이다. 경이 먼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포하여 심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입대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미 내려갔다. 내가 왜 속이겠는가.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이어서 선전관 네 명을 나누어 보내 여러 규장각의 신하들이 대궐로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도록 하고, 금호문(金虎門)에 입직한 군사들로 숙장문(肅章門)에 벌려 세워 조정의 관리 한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전교하기를,
"강화 유수의 처사가 대단히 경악스럽다. 아무 일이 없는 때에 무엇 때문에 배에 손을 대어 북쪽 해안으로 모아 정박시켰는가. 이는 사안이 범법에 해당되기 때문에 부절(符節)을 빼앗고 잡아다가 엄중하게 처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관가나 민간에 일이 없는 것으로 근자의 수응(酬應)하는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일의 증표가 되는 것이었다. 강화 유수 김이익(金履翼)을 용서하고 밀부(密符)를 되돌려 주라."
하였다.
이전에 김이익이 장계하기를,
"이달 28일 진시(辰時)에 선전관 두 명이 표신(標信)을 받들고 내수사 소속의 관원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이 때 내수사 소속의 관원들은 곧장 방수소(防守所)로 가고 선전관 장현택(張鉉宅)과 이유엽(李儒曄)은 곧장 신이 있는 영문(營門)으로 들어와서, 장현택은 부(府)에서 대기하고 이유엽이 표신을 가지고 유시(諭示)를 전하고 상경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니, 일이 의리에 관계되어 감히 경솔히 군명(君命)을 소홀하게 대하는 죄를 범할 수 없을 상황이 되어 끝내 거부하기 어렵고 또 방비를 손상시키는 일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도 없었습니다. 결국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표신을 공경스럽게 받게 되었고 선전관이 신을 통솔하여 문수진(文殊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신은 부(府)의 경계 밖까지 나왔으니 군명(君命)에 대하여는 수레가 당도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어느 정도 이행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장차 목전에 임박할 판이고 직함은 아직 갖고 있으면서 이쯤에서 가거나 말거나 내맡겨 두고 의기양양하게 나아간다는 것은 의리상 차마 말로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선전관이 신의 부절(符節)을 빼앗아 본 부로 되돌아가 부에 대기하고 있던 선전관에게 전해 주고는 곧바로 돌아와서 신을 압송하여 김포(金浦) 지경에 이르러 점막(店幕)에 구류하였습니다.
당일 유시(酉時) 쯤에 부에 대기하던 선전관 장현택이 뒤쫓아 와서 표신을 전하고 병부(兵符)를 되돌려 주었으며 이어서 속히 내려가라는 하교를 전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하교를 받고 사태의 전말을 치계합니다."
하고, 또 장계하기를,
"신이 점막(店幕)에 구류되어 있을 무렵에, 전날 밤 이경(二更)쯤에 관복(冠服)을 갖춘 별제(別提) 한 명과 내수사의 관속들이 화려한 교자 한 채를 거느리고 곧장 올라가더니 삼경 쯤에 또 다시 관복을 갖춘 별제 한 명과 내수사의 관속들이 화려한 교자 한 채를 거느리고 내려왔습니다. 이번에 교자가 내려온 일은 신이 압송되는 도중이라 병부를 받지 못한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영문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방수(防守)에 대한 모든 조치를 더욱 엄격하게 신칙할 요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전·현임 대신들이 조방(朝房)에 나와 모여 있었다. 상이 지엄한 분부를 내리니, 대신 채제공·윤시동·이병모가 함께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전교하기를,
"이미 강화 유수의 장계를 보았는데 무슨 의심이 더 있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가?"
하고, 이어서 대궐밖에 와 있는 여러 신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도록 명하였다. 규장각 제학 심환지(沈煥之)와 직제학 이만수(李晩秀)가 금표(禁標) 안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의금부 관원들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또 전교하기를,
"수신(守臣)도 이미 용서하였는데 도신(道臣)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김문순을 나문하라고 한 명을 정지시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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