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5월

싸라리리 2025. 8. 1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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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을사

예문관 검열 오태증(吳泰曾)·김이영(金履永)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문한(文翰)을 맡은 직책에 있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한 말씀도 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언일동을 하실 때마다 신들이 모두 기록하면서도 유독 진언하지 않았던 것은 대신이 있고 간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신과 간관이 이미 말할 길이 없는 상황이니 사관(史官)이지만 진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야말로 참으로 목숨을 내놓고 과감하게 간언을 해야 할 때인데, 대신이 들어오지 못하고 간관이 들어오지 못하며 옥서(玉署)033)  가 텅비고 후원(喉院)034)  이 적적하게 되었으니, 신들이 짧은 붓 한 자루를 들고 오늘의 광경을 사실대로 기록해 둔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속히 대문을 막으라고 한 명을 거두고 신료들을 인견할 길을 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

 

전 장령 황진(黃瑨)이 교지를 받고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사정(私情)에 치우치는 일을 제거할 것, 둘째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할 것, 셋째 훌륭한 인물을 구할 것 등이었다. 이에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겼다.

 

5월 2일 병오

승지 황승원(黃昇源) 등이 경연석에 나와 인(䄄)의 일에 대하여 논하려 하자, 승원을 의금부로 보내 남쪽 옥에 가두고 모든 승지들을 체직시키도록 하였다가 곧바로 중지시켰다.

 

이전에, 여러 대신들이 강화 유수의 장계가 올라온 것을 인하여 다시 조방(朝房)에 모였다가 곧이어 그가 영문(營門)으로 돌아갔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돌아갔다. 이에 상이 행동과 처사가 전도되었다고 질책하자, 여러 대신들이 성문을 나가 처분을 기다렸으므로, 또 다시 힘써 돌아오도록 하유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소하여 병으로 동료 재상들과 함께 거취를 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고 강화 중군(中軍) 김선(金璿)이 방수(防守)를 엄하게 조치하지 못한 죄를 논하고 유배의 벌을 내리도록 청하니, 비답하기를,
"중앙이 텅 비어 성(誠)이 되는 형상은 위가 손(巽)이 된 뒤라야 아래가 기쁘게 되고, 중앙이 충실하여 부(孚)가 되는 형상은 불룩한 장부[缶]와 같이 된 뒤라야 길(吉)하다.035)   부덕한 내가 왕위에 올라 성의가 정령(政令)에 두루 펴지지 못하였고 대신의 책임을 맡은 자들도 처사를 극진히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정과 경연에서 숨기는 경우가 없게 하라고 한 하유가 하나의 형세를 더 만들어 대신들이 황급히 도성 밖으로 나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조용히 생각해 볼 때 매우 부끄럽다. 이러한 즈음에 경까지 함께 물러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피하고 있으니 지나치다. 덧붙여서 김선을 유배해야 된다는 뜻을 진달하였는데, 그가 어찌 그 당시에 말을 하고 손을 쓸 수 있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4일 무신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연명으로 상차하기를,
"신들은 어제 죽음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기에 일을 당하여 앞이 캄캄한 것이 마치 혼이 나간 듯합니다. 이에 사륜(絲綸)과 같고 사시(四時)처럼 신실(信實)하고 금석처럼 견고한 전하의 명을 받들어 준수하지 못하고서, 요란하고 분주하게 처신하면서 그것이 불경의 죄가 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비록 불충하고 무상하지만 평소 전하를 흠앙하고 신복(信服)함에 있어서는 남들이 우리보다는 못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매번 이 일이 앞에 닥치기만 하면 정신이 먼저 흐려져 곳곳마다 전도착란되었습니다. 곧바로 깨닫기는 하였지만 이미 그때는 후회막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도성문 밖으로 물러나가 황공한 마음으로 처분을 기다렸는데, 전하의 도량이 하늘처럼 관대하여 형벌을 가하지 않고 수십 행의 은혜로운 교지를 내리니, 이는 인도하여 가르치면서 엄하게 질책한 것으로서 살려서 길러주는 인(仁)이자 추상과 같은 위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들은 둘러앉아 교지를 경건하게 읽으면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고 속히 형벌을 받아 경솔한 행위에 대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하였기에 구구한 처신은 이 즈음에서 더욱 온당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거취를 두서없이 잘못한 과실은 작으나 다시 번독(煩瀆)스러운 일을 계속하는 것은 그 죄가 큰 것이기에, 드디어 허둥지둥 성안으로 들어와 사가(私家)의 처소에서 삼가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유사에게 명하여 신들을 응당 받아야 할 법으로 논하게 하소서. 또 혹시라도, 신들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터뜨려서 처음에는 일을 잘 모르다가 마침내는 후회한 사실을 곡진하게 양해하고서 무거운 죄를 가하지 않으려 하신다면, 간략한 견책이라도 시행하여 신들의 분의(分義)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고 조정의 체모가 더욱 높아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담당자가 일을 잘 몰랐다고 한 말은 격언(格言)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야기시킨 것은 역시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경들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하였다.

 

5월 6일 경술

전 이조 참판 황승원(黃昇源)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박종래(朴宗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신광리(申光履)를 공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5월 7일 신해

하교하였다.
"참하 문신(參下文臣)으로서 한림·주서·초계 문신(抄啓文臣)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경연석에 올라와서 경연의 체모를 알게 하라. 임시직 당후관(堂后官)의 의망이 근자에 와서 한쪽으로 편중되고 있으니, 삼관(三館)의 참하 문신으로서 권지(權知)의 신분으로 시골에 있는 자들도 각별히 찾아서 의망하라."

 

5월 8일 임자

함경도 어면진(魚面鎭) 파수장(把守將) 이건수(李健秀)가 후주(厚州)의 형편에 대하여 써서 비변사에 올리기를,
"백두산의 정맥(正脈)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황초령(黃草嶺)에 이르러서 지령(支嶺) 하나가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가서 설한령(薛罕嶺)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향하여 하나의 국지(局地)를 열었으며, 장진(長津)·갑산(甲山)·삼수(三水)·후주(厚州) 및 지금은 폐지된 네 군이 그 안에 있습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연지봉(臙脂峯) 아래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갑산의 검천(劒川)에 이르러서 다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다가 혜산진(惠山鎭) 앞에 이르러 오매강(烏梅江)과 합수하여 서쪽으로 내려갑니다.
허천강(虛川江)은 후치령(厚峙嶺) 아래에서 발원하여, 호린(呼麟)에 이르러 백계산(白堦山)의 물과 합류한 뒤에 갑산부(甲山府) 앞을 끼고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굽이굽이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위가 허천강이 되고 아래가 오매강이 됩니다.
장진강(長津江)은 황초령(黃草嶺)에서 발원하여 장진부(長津府)에 이르러 한태령(閑台嶺), 설한령(薛罕嶺)의 두 물과 합류하여 삼수(三水)와 후주의 사이를 가로질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갑니다.
후주강의 근원은 오만령(烏蔓嶺)과 희새봉(希塞峰) 사이에서 나와 후주와 강계(江界)의 경계를 통과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갑니다.
한 국면의 전체를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한 뒤에라야 지세(地勢)의 형편과 방비의 긴요 정도와 산천의 갈래와 도로의 원근을 상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삼수와 갑산을 함께 그린 지도와 후주의 지도를 제작하여 올립니다.
대저 본 고을의 연지평(蓮池坪), 동대암(東臺巖)과 건너편의 고미동(古味洞)은 바로 저들이 왕래하는 요로입니다. 회령(會寧)에서부터 오랄(烏喇)까지의 거리는 10여 일의 노정(路程)에 지나지 않으니, 멀리서 지세를 요량컨대 후주에서 오랄까지는 회령에 비하여 반드시 더 멀지는 않을 듯합니다. 강물이 얼어붙을 때가 되어 적이 이 길을 통하여 침입할 경우 군사를 나누어 장진, 후주, 서강(西江)의 길로 동시에 진격한다면 하루 밤낮에 황초령과 부전령(赴戰嶺)의 남쪽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홍원(洪原) 이북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병법(兵法)에 ‘상대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자신의 방비를 믿고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이곳에다 웅대한 진영을 설치하여 저들로 하여금 감히 고미동(古味洞) 근처에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방비가 엄격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일 두 가지가 모두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삼수부(三水府)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차외(仁遮外)의 길을 통하여 강을 끼고 서쪽으로 내려가서 후주 경계의 마전(麻田)에 이르면 바로 충천령(衝天嶺) 밑이 됩니다. 산 뒤로 국면이 열리면서 좌우에 경작할 만한 음지 비탈이 있는데 그 둘레가 약 5리쯤 됩니다. 마전에서부터 돌아서 송전(松田)에 이르기까지가 5리쯤의 거리이며,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작은 벌판이 열리는데 가로 세로의 길이가 합쳐서 5리가 되는 곳이 모두 경작할 만한 땅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옛날의 진영터이던 자취가 있고 물도랑과 참호가 사방에 빙 둘러 있기에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이 지역에서 직접 쌓은 보루의 유지인데 언제 설치되고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송전에서 다시 길을 돌아 유방소(留防所)를 지나 동대암(東臺巖)에 이르면 그곳이 저들의 땅으로서 이른바 고미동(古味洞)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동대암의 안쪽은 곧 연지평(蓮池坪)인데, 강물이 안고 도는 곳에 평지가 펼쳐져서 마치 반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폭과 길이를 합쳐 10여 리쯤 됩니다. 이곳은 비록 비옥하거나 척박한 정도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거의 경작할 만한 땅입니다.
송전(松田)에서 연지평까지의 거리가 25리이며, 그 사이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한 잔도(棧道)가 나 있어 낭떠러지를 따라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지평에서 장항(獐項)을 넘어 5리를 가면 곧 상패평(祥覇坪)이 나오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니 참으로 낙토(樂土)라 이를 만합니다. 강계(江界)와 상패평은 하나의 큰 하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넓은 평지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고 두 평지의 둘레는 거의 20리쯤 됩니다. 만약 뒷편을 떼내어 이곳에 붙이게 된다면 협곡 속의 큰 평야라고 이를 만합니다.
후주의 옛 진영의 터는 강변의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하여 지형이 사방으로 휑하게 노출되었으니 방수하는 진지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소도야(大小都野)는 상패평에서 20리의 거리에 있는데, 강물이 빙둘러 흐르고 첩첩의 산봉우리가 서로 엉기어 뻗고 강계(江界)의 산록이 간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곳의 지세(地勢)를 관찰하면 동쪽은 절벽이 험준하고 서쪽은 조금 평탄한데, 동서로 경계가 구분된 점에 구애되어 서쪽으로 길을 내지 못하고 동쪽의 산을 깎아 길을 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절벽에 의지하여 구비구비 돌아 나무를 잡고 그 길을 넘어서 소도야(小都野) 동구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은 길을 튼 지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좌우의 높은 산에 삼나무와 소나무가 삼[麻]처럼 빽빽하게 들어서서 음침한 그늘이 많아 햇빛이 들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일찍 서리가 내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불에 타다 남은 나무들이 즐비한 사이에서 베어낸 밑둥을 살피고, 그 다음에 밖에 쌓아 놓은 조[粟] 묶음을 취하여 결실한 정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산 밖 평지의 곡식과 품질에서 별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산간에 동떨어지고 북향(北向)을 한 지역에서 이맥(耳麥)을 갈지 않고 오로지 서속(黍粟)을 갈고 있는데도 이토록 알차게 결실하니, 지세(地勢)가 낮고 토질이 곡식 재배에 알맞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소도야(大小都野)는 길이가 7, 8리, 넓이가 1백여 보나 혹은 수백여 보가 됩니다. 대저 마전과 송전은 거의 다 개간되었으나 아직 거주민의 수가 적고, 연지평·상패평·대소도야 등지는 지금에 개간이 시작되어 백성들이 이제 막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아직 개간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금신거리(金申巨里)를 거쳐 동곡(東谷)을 지나 대호지(大好地) 등처에 이르는 곳은 넓이와 길이는 가지런하지 않지만 토질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오만령(烏蔓嶺) 북쪽까지는 4, 5십 리의 거리이고, 상패평의 동구로 후주의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부터는 1백 4, 5십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어서 강서쪽 강계 지방의 산 밖으로 판막동(板幕洞) 이하 문주(文柱)·비회동(非灰洞)·상패평(祥覇坪)·박철(朴鐵)·구비(仇非)·나신동(羅信洞) 등처로 향하면 소도야(小都野)의 동구이며 자지령(紫芝嶺)의 길이 나옵니다. 이 고개 30리는 매우 험하고 가파른데 이곳이 바로 후주의 중심 산맥입니다.
형편을 따져보고 사정을 참작할 때 어면진(魚面鎭)을 옛날의 규모대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상패평으로 옮기게 되면, 본 고을은 본래 삼수 지방이 아니어서 지형이 반쪽의 형국을 면치 못하고 도로가 매우 험악하여 백성들이 그 폐단을 받을 형편이니, 후주의 강 서쪽, 강계 지역의 산 뒤에 있는 경작할 만한 땅을 적당량 떼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토지를 모두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위무하여 차분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다하게 하며, 모든 행정의 규모와 제도는 읍(邑)의 관례에 따르고, 옥송(獄訟)에 관한 일도 모두 직접 처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천천히 백성들이 모이는 정도를 보아 차례차례 읍으로 승격시키게 되면 일과 노력이 번거롭지도 않고 유민(流民)들이 안주할 수 있으며 후주에 있어서도 실로 만전(萬全)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삼수부(三水府)가 세 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방비를 등한히 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은 형편없이 피폐하여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에 현재 살고 있는 백성이 4, 5백 호에 불과하며 그나마 다투어 편한 지역을 찾아서 하나둘씩 후주로 유입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은 호구가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가령 후주에 읍을 설치하고 옛 관청자리에 진영을 설치할 경우, 원하지 않는 토졸(土卒)의 부류들도 뒤따라서 거주지를 옮겨갈테니 그 지역을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갑산부(甲山府)의 넓이가 삼수에 비하여 매우 넓고 백성들의 숫자도 3천 명 정도는 더 많습니다. 따라서 오매강(烏梅江) 서쪽의 길이 30리 정도 넓이 8, 9리의 토지와 호구를 분할하여 삼수에 소속시키면, 갑산으로서는 별로 많은 감소가 없으면서도 삼수로서는 적지 않은 보조가 되니, 경계를 나누고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서 볼 때 매우 타당할 듯합니다.
삼수에서 관장하는 별해진(別害鎭)은 장진강(長津江) 상류의 서안(西岸)과 오만령(烏蔓嶺) 뒷산의 남쪽 산록에 위치하여 후주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고 있기 때문에, 방어의 중요도는 실로 평범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진영의 관사가 본부(本府)와 4백 리나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험준한 산과 강이 가로막혀 있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백성들의 폐해는 이미 말할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본 진(鎭)은 장진(長津)과의 거리가 1백여 리에 불과하고 거주민들도 소속되기를 원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 토지와 민호(民戶)를 떼어내어 장진에 통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성세(聲勢)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폐단을 혁신한다면 어느 정도 둘 다 완전하게 되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또 마전(麻田)과 송전(松田) 두 곳의 개척은 혹은 무신년부터 혹은 임자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거주민 수십여 호는 태반이 신구(新舊) 갈파지(乫坡知)의 토졸(土卒)입니다. 연지평과 상패평은 갑인년에 개척되기 시작했고 대소도야는 을묘년에 개척되기 시작하였는데, 들어가 거주하는 자들이 수백여 호의 많은 수에 이르지만 대충 가옥이라도 지은 자는 4, 5십여 호일 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막사를 지어놓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자들이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며 몸에 지니고 있는 기물이라곤 오직 한 자루의 도끼일 뿐입니다.
각처의 인물들이 오합지졸로 모여 무리를 지었고 습속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당분간 내륙 민간의 의리로 질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모아놓고 소망과 고통을 물어보니, 그들은 모두 고하기를 ‘본 고을은 폐지된 군의 한쪽 모퉁이에 위치하였고, 3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어 외따로 떨어진 지역이 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자지령(紫芝嶺)과 충천령(衝天嶺)이라는 두 큰 령(嶺)에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으며 어염(魚鹽)의 거래는 오직 충천령의 한 길을 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북청(北靑)까지의 거리가 거의 7백여 리에 가까운데, 그 사이에는 가파른 잔도(棧道)와 낭떠러지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다섯 개의 큰 영(嶺)과 세 개의 산계곡의 강이 그 사이에 있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데에 걸핏하면 20여 일의 시일을 소비하게 됩니다. 게다가 장마가 지거나 눈이 쌓이는 때엔 사람이 통행할 수 없고, 또 상인의 출입은 더욱이 길이 없게 됩니다.
민간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전화(錢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서관(西關)의 강계(江界)와 북관(北關)의 장진(長津)이 삼수의 접경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미 모두 전(錢)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독 그들만은 아직까지 동일시하는 은택을 입지 못하고 함북(咸北) 상인들의 조종에 내맡겨 놓고 있으니, 이는 실로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입니다. 본주의 경계인 금신거리(金申巨里)에서 별해진(別害鎭)까지는 1백 45리의 거리이고 옛날에 길이 났던 자취가 있으며, 또 오만령(烏蔓嶺) 내외의 지대는 형세가 평탄하니, 지금에 만약 이곳에 도로를 내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게 하고 전화(錢貨)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물자를 유통시키게 한다면, 함흥(咸興)과의 거리가 5백 리에 불과하고 사이에 황초령(黃草嶺)·장진강(長津江)이 있으나 도로가 모두 평탄하여 출입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함흥의 어염을 앉아서 공급받을 수 있고 서관(西關)의 목면도 무역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유민(流民)들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강계와 상패의 산허리 아래뿐만이 아니라, 소도야(小都野)는 바로 상패의 관문으로서 도로가 위험하여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없기 때문에 강계 지역으로 도로를 뚫어 왕래에 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강계의 산 밖의 지역은 박철(朴鐵)·구비(仇非)·입석(立石) 이상에서부터 판막동(板幕洞) 이하에 이르기까지 산허리를 한계로 하여 떼어내어 넘겨주되, 다만 산허리 이하에는 농사를 짓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골짜기가 조금 깊은 곳에는 엄금(嚴禁)하는 표지를 세워 삼장(蔘場)으로 한 걸음도 범하지 못하게 하면, 강계로서는 삼을 보호하는 울타리를 얻게 되고 후주로서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얻게 되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편리하고 바람직하게 됩니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복계하기를,
"지도와 책자를 보니, 후주·장진·삼수·갑산의 산천 형세와 민호(民戶)의 정황과 조치의 당부(當否)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남김없이 상세하게 논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갑산 오매강(烏梅江)에서 서쪽의 땅을 떼어내어 삼수에 소속시키고 삼수의 별해진(別害鎭)을 떼어내어 장진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한 것은, 토지를 분할하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니, 그가 진술한 여러 가지 조목을 가지고 해도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공문을 보내 문의하고 삼수·갑산·장진 세 고을에 충분히 상의하여 계품케 한 뒤에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晉州)로 흘러가 다시 김해(金海)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咸安)·창원(昌原)·초계(草溪)·영산(靈山)·양산(梁山)·현풍(玄風)·김해(金海)·칠원(漆原)·의령(宜寧)·창령(昌寧)·밀양(密陽)·진주(晉州)·성주(星州)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泗川)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원들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助曲)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어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城池)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의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南江)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본(手本)을 보고서 일의 형세로 유추하건대 지극히 허황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해궁(該宮)의 사체는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하다. 해도에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먼저 결정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이다. 비록 글을 만들어 판하(判下)하였더라도 해도의 장계를 받아 본 뒤에 처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요량했던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간교한 일의 폐단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히 경계했던가. 이른바 ‘고발하는 자에 대하여는 네 번 고발하면 한 차례 상을 내린다.’는 법을 시행하지 말게 했다면 감히 상언(上言)하거나 정소(呈訴)할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의 습속이 가증스러우나 간사한 백성들을 어찌 다 논하겠는가. 당해 차지(次知) 중사(中使)는 내시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 조사하게 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허황된 일에 대한 수본(手本)을 올릴 경우에는 해당 중사에게 등급을 올려 엄중 처치하는 법을 시행하라. 이러한 뜻을 해도에 지시하여 즉시 13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지하게 하라."
하였다.

 

5월 9일 계축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판서 윤용(尹容), 판돈녕부사 정형복(鄭亨復), 좌윤 한덕필(韓德弼), 절도사 허정(許晶)이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선조에서 청백리를 천거할 때에도 비록 사례를 자세히 갖추어 초계(抄啓)하지는 못하였으나, 정묘년 9월에 와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우의정으로서 고 부제학 이병태, 고 판서 윤용, 고 판돈녕 정형복, 고 좌윤 한덕필, 고 병사 허정의 청백한 명성이 조정의 관리들 사이에 자자하다고 진달하고, 살아 있는 이는 품계를 올려주고 작고한 이는 후손을 서용하자고 건의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는 모두 2품 이상으로서 논의하여 천거한 대상에 든 이들로서 이미 초계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지금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5인은 선조의 청백리 녹선안(淸白吏錄選案)으로 참고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비변사 당상 이면응(李冕膺)이 부자(父子)의 이름이 함께 비국의 자리에 들어있다는 것을 이유로 부임을 머뭇거렸는데, 우의정 윤시동이 본사에 이미 전례가 있으니 공무를 보도록 신칙하고 곧이어 나리포 구관 당상(羅里舖句管堂上)에 차임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1백 세의 노인 김시흥(金時興)을 소견한 뒤에 특명으로 가자하여 오위 장(五衛將)에 의망하도록 하고, 그의 아우 김시익(金時翼)은 동지사(同知事)에 의망하도록 하였다. 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해도로 하여금 잔치에 쓸 물품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시흥은 나이 1백 1세이고 시익도 80세에 가깝다고 하였다.

 

전 지평 강석귀(姜碩龜)가 상소하여 10개 조목을 진술하기를,
"바른 학문을 밝혀 풍속을 두텁게 하고,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루고, 언로를 열어 보고 듣는 범위를 넓히고, 공론(公論)을 북돋우어 붕당(朋黨)을 소멸시키고, 자리를 자주 옮기는 것을 경계하여 관직의 제도를 중하게 하고, 수령을 잘 간택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적을 소탕하여 간교한 행위의 근원을 단절하고, 환곡(還穀)의 조적을 합리적으로 개선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고, 기강을 세워 군명(君命)을 높여야 됩니다."
하니, 넉넉한 비답을 내렸다.

 

이상도(李尙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편전(便殿)에서 재계(齋戒)를 하면서 취침하였다. 이는 황단(皇壇)에서의 망배례(望拜禮)가 내일 거행되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갑인

북쪽 후원에 나아가 황단에 대한 망배례를 거행하였다.

 

황단의 궐자패(闕字牌)를 받들고 후원으로 갈 때, 선전관이 신표를 받들고 가서 영숙문(永肅門)을 열고, 수직하는 관원과 예조 낭관이 함께 모시고 뒤따르는 절차는 법식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황단의 망배례에 참석한 중국인과 충량(忠良)한 인물의 자손에게 제술과 활쏘기를 시험보여 합격한 자에게는 소견(召見)하여 시상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5월 11일 을묘

장릉지(莊陵志)를 교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참지 이의준(李義駿)과 전 승지 윤광보(尹光普) 등이 명을 받들어 편집하였으나 미처 교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이의준과 이서구(李書九)에게 명하여 상세히 살펴보고 산삭하여 다듬도록 한 것이다. 전 승지 박기정(朴基正)도 참여하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12일 병진

춘추관 당랑(堂郞)에게 정족산성(鼎足山城)에 가서 실록을 참고케 하였다. 이는 장릉지 가운데 실록에서 참고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고(武庫)에서 《자초신방(煮硝新方)》을 인출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숙묘(肅廟) 무인년 사이에 고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건의하여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북경(北京)을 왕래할 때에 입수한 《자초신방(煮硝新方)》을 무고로 하여금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그 《자초신방》은 전날의 방법보다 공력이 매우 적게 들면서도 화약의 생산은 몇 배나 많고 화약의 품질도 폭발력의 강도가 높았으며, 지하에 두고서 10년 동안 장마를 겪더라도 절대로 습기가 끼어 못쓰게 되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흙을 취하고 초목을 태운 재를 그대로 이용하면 3분의 1의 흙을 줄일 수 있으니 이는 바로 간편한 방법으로서 훌륭한 단서입니다.
화성(華城)에 군기를 비치할 때 이 방법으로 화약을 제조하도록 하고, 또 반포하도록 신칙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곧이어 무고로 하여금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이의강(李義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서울과 지방의 살인옥사를 심리하였다.

 

형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을 파직시키고 이득신(李得臣)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살인옥사를 지체없이 완결하도록 신칙한 분부가 지엄하였는데도, 근래에 옥관으로 있는 자들이 대다수 애처롭게 여기는 의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심문을 행한 지가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두어, 옥사를 결정지은 것도 아니고 결정짓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고 죽이는 것도 아닌 상태에다 두었으니, 옥관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죄수들을 보고, 더운 날씨에 나뒹구는 정상이 안타까워 즉시 옥사를 결단하게 하였다. 이에 서둘러 한나절 만에 심리를 끝내었으니, 그것이 죽은 자나 산 자가 모두 억울한 한을 품는 데에 이르지 않고 타당하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신시(申時)에 한 가지 완결한 결과를 올렸고 유시(酉時)에 한 가지 완결한 결과를 올렸고 술시(戌時)에 또 한 가지 완결한 결과를 올리게 될 판이다. 이렇게 하여 판하하게 됨으로써 바쁘게 대충 보아 넘기고 논리를 엉성하게 갖추게 되니,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된다는 도리상 더없이 소홀하다. 어찌 이런 옥관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호서에 기근을 진휼하는 일을 개설하였는데, 정월에 시작하여 4월에 끝마쳤다. 【국가의 진휼은 신창(新昌)·아산(牙山)·평택(平澤)·직산(稷山)·천안(天安)·면천(沔川)·해미(海美)·대흥(大興)·예산(禮山)·덕산(德山)·당진(唐津) 등의 고을과 성환역(成歡驛)에서 실시하였는데, 기민은 총 11만 8천 1백 71명이었고 소요된 곡식은 5천 3백 11섬이었다. 사적(私的)인 진휼은 목천(木川)에서 실시하였는데, 기민은 6천 3백 21명이었고 소요된 곡식은 4백 18섬이었다. 다급한 구제는 서산(瑞山), 태안(泰安), 서천(舒川), 온양(溫陽) 등의 고을과 안흥(安興)의 소근포(所斤浦)와 서천포(舒川浦) 등의 진영에서 실시하였는데, 기민은 총 1만 9천 8백 97명이었고 소요된 곡식은 1천 3백 73석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51면
【분류】구휼(救恤)

 

5월 13일 정사

상이 재계에 들어가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25일 기사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였다.

 

재계하고 있는 궁전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이 재전(齋殿)은 내가 평상시의 처소와 같이 여기고 태묘와는 사체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신들을 접견하는 것이다. 전날 선조에서는 합문(閤門)이 한 곳만이 아니었다. 환경전(歡慶殿) 등처에서 입시할 경우에는 빈양문(賓陽門)과 집현문(集賢門)이 모두 합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때에는 정원이 합문과 멀고 합문이 편전(便殿)과 조금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전랑(殿廊)을 거치고 층계를 밟아야 되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늘 달려오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또 입시한 지 오래되어 잠시 물러가 있도록 허락하면 승지와 사관들은 제각기 처마 밑이나 섬돌 사이에서 서로 번갈아가며 음식을 날라다 먹었는데, 경들도 그 사실을 기억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답하기를,
"신은 계해년부터 사관으로 재직하였기 때문에 문과 통로의 멀고 가까움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였고, 윤시동이 답하기를,
"문과 통로가 조금 먼 곳에서는 연로한 대신들은 가끔 쉬어가면서 나아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는 새로 벼슬길에 나온 자들이 협양문(協陽門)이 합문인 줄만 알고 있다. 만약 만팔문(萬八門)을 거쳐서 합문으로 나아갈 경우 왕래하기에 간격이 있을 듯하여 먼저 감인소(監印所)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제 입시한 사관들이 땀을 흘리고 숨이 차서 헐떡거렸으니 보기에 매우 놀라웠다. 이 또한 옛사람들이 이상적으로 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경성(鏡城) 판관 홍병신(洪秉臣)을 본도의 먼 지역에 유배시켰다. 이전에 병신은 병영(兵營)이 아전과 향임(鄕任)을 취조한 것에 격노하여 평복차림으로 병사(兵使)의 집무실에 돌입하여 술주정과 욕설을 가하였다. 이에 병사가 장계를 올려 파직을 논하였고, 좌의정 채제공도 유배하는 법을 시행하여 변경의 체모를 존중하라고 요청하였으므로 윤허한 것이다.

 

장령 이태현(李泰賢)이 상소하기를,
"병조 참의 박성태(朴聖泰)는 본래 미천한 신분으로서 한갓 아부한 자의 형세에 의지하여 분수를 넘어 청현(淸顯)의 관로를 통하여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쳤기에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경솔한 성품 위에 수단이 차츰 교활해져서, 변화무쌍한 행태가 습관이 되어 관료들 사이에서 모략을 꾸미고 있으니, 그가 세상의 도의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면 그는 분명 하나의 괴귀(恠鬼)입니다. 속히 박성태에게 삭탈 관직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전 정언 남기만(南基萬)이 지난번 상소에서 대신의 풍문에 대하여 화를 내어 직접 나서서 공공연히 반박하였는데, 이것만으로도 심히 놀랍고 통분스런 것이었고, 나아가서 그 상소의 말이 비할 데 없이 극도로 패악한 것은 역시 세상의 도의가 변한 것으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장에 가득 실은 말은 패악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사학(邪學)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통렬히 배척하는 데는 언급하지 않고서 다만 ‘오늘날 사학이란 과연 어떠한 학문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은연중에 사학을 엄폐·비호하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오기를 부리면서 무례하게 구는 습성을 절대 제멋대로 날뛰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남기만에 대하여는 대망(臺望)을 개정한 뒤에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7일 신미

전교하였다.
"일전에 총수(摠帥)를 병조 참판에 비준하여 내릴 때에, 해방(該房)이 포도 대장을 겸임하면 당연히 체직해야 된다는 뜻으로 은미하게 품신하였기에 처음에는 대충 대응하였다가 다시 법전을 상고하고서야 그만두었다.
대저 총관(摠管)이 포도 대장을 겸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옛날의 총관은 군사를 통솔하는 직책이었고 포도 대장을 설치할 때에 그 당시 법조문 가운데에서 단지 총관을 겸임할 수 없도록 한 내용을 들어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금의 제도가 달라져서 장신(將臣)은 의례적으로 겸임을 하는 데에 구애받지 않으니 포도 대장의 경우도 마땅히 그와 같이 해야 되는 것이었다. 다만 옛날의 제도를 아예 없애버리지 않고 살려둔다는 점에 의의를 두어 개정하지는 않더라도, 병조 참판의 경우는 더욱이 총관과는 다르다. 만약 궐내에서 입직하는 일 때문에 겸임할 수 없다는 논리라면, 역사적으로 염파(廉頗)와 이목(李牧)과 같은 훌륭한 장수도 금중(禁中)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원수(元帥)의 중직은 다 병조 참판을 겸임하는 법인데, 전날에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은 본직이 병조 참판이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온천의 행차에 수행한 적이 있었으니 규례를 취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앞으로는 포도 대장이나 혹은 각 군영의 장수를 물론하고 병조 참판이 된 자는 규례에 따라 입직하여 옛날의 법규를 보존하라."

 

5월 28일 임신

좌의정 채제공이 이조 판서의 천망(薦望)과 관련하여 차자를 올리고 사면하니, 비답하기를,
"가장 존중해야 할 것은 정승의 고사(故事)이다. 따라서 정승이 존중된 뒤에라야 조정이 존중될 수 있다. 더구나 이조 판서[冡宰]는 서열이 정승 다음이고 호조 판서[度支]와 병조 판서[司馬]가 그 다음이다. 이 세 관직을 의망할 때에는 이조 전관(銓官)이 정석(政席)에서 상신의 집으로 찾아가서, 벼루와 종이를 받들고 앞에 나아가 부르는 대로 받아쓴 뒤에, 물러나와 다시 차상(次相)의 집에 찾아가 모두 펴보여서 좋다고 말하면 그제서야 망통(望筒)에 집어넣는다. 이는 변방의 장수를 임명할 때 비변사가 직접 천거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말할 수 없다.
영상이 질병을 치료하느라 집에 있는 것은 비록 서 충헌(徐忠憲)이 정고(呈告)하였을 때의 관례를 적용하였으나, 모두 정관(政官)에게 넘겨주고 천거할 책임을 받고도 응하지 않으니 특히 영의정을 존중하는 뜻에 흠결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정관이 여섯 차례나 방문하면서 아침부터 밤을 세우고 또 익일 정오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영상이 외지에 있어 좌상이 대신한 것은 기왕에 이 문간(李文簡)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또한 경으로 하여금 천거를 논의하게 한 까닭인데, 경 또한 병을 핑계대고 굳이 사양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충헌이 정고한 때도 아니고 문간이 외지에 나가 있던 때와도 다르니, 가령 우상에게 억지로 떠맡긴다 하더라도 우상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는가.
경의 질병[所愼]은 쌓인 것이다. 쌓인 것이란 곧 모여서 대오(隊伍)를 이룬 것이니 모두 기(氣)이다. 기가 내려가면 병이 낫는다. 그러므로 세속에는 꾀병[謀病]이라는 것이 있는데 속말인 듯하나, 차자를 올린 뒤에 기가 오르내리는 징후가 쾌히 문장(門墻)을 트고 나가는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시 정관을 보내고 아울러 비답을 내리는 바이니, 억지로라도 병을 이길 수 있거든 천거하여 올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겠거든 차도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라."
하였다.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송환기(宋煥箕)를 성균관 좨주로 삼았다.

 

이조 참판  홍명호(洪明浩)를 파직하고 황승원(黃昇源)으로 대신하였다.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조정이 존중되는 것은 체통(體統)이 서 있는 것 외에는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하여 대신에게 찾아가서 묻는 것은 사체가 매우 엄숙한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 4차 왕래할 때에 우상의 집에는 단지 2차만 갔다고 하는데, 대신이 사양하느냐 마느냐는 대신의 견해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전관(銓官)이 어찌 자신들의 억측으로 대신의 뜻을 요량하여 취사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당해 당상관을 파직하여 조정의 체통을 높이라."
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사목이 탄핵을 받은 이후로 누차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에 이런 외지로의 전보가 있게 된 것이다.

 

사관과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 도성 안팎의 피폐한 호구를 자세히 조사하게 하고 아울러 구제하는 은전을 베풀게 하였다.

 

5월 29일 계유

차대하였다. 금천군(金川郡)의 대남면(大南面)·소남면(小南面)·백치진(白峙鎭)과 장단부(長湍府)의 사천면(沙川面)을 개성부로 이속시켰다. 이전에 개성부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본부에서 대출해 줄 돈이 줄어들어 영문에서 쓸 경비가 감소되었다는 이유로 금천군의 두 남면과 백치진, 장단부의 사천면을 본부로 이속시키라고 요청하면서 타당성을 논한 책자를 올리니, 묘당에 내려보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이 복주(覆奏)를 가지고 윤허를 청하니, 상이 진관에게 이르기를,
"개성부는 순전히 돈을 대출하여 영문의 살림을 꾸리는데, 이전의 30만에서 지금에 남은 것이 몇십 만이나 되는가?"
하니, 진관이 아뢰기를,
"15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남과 소남 두 면(面)에 호조의 세금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근자에 궁방절수(宮房折受)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헐하게 하고 부역을 견감시켰는데, 이는 장차 송경으로 부속시키는 것을 허락하기 위한 것이었다. 궁방이란 명칭을 붙인 이후로 호구가 날로 더 증가되고 전야가 날로 더 개간되고 있으니, 지금에 만약 두 면을 부속시키도록 허락한 뒤에 이들을 모두 떼준다면 몇 년 안으로 송경의 일 년 소득이 수천 금에 이를 것이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금천의 두 남면과 백치진을 환속하는 일은 의논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다만 대토(代土)가 상당한 것이 없어 매번 해영(海營)의 방계(防啓)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조목대로 대토를 지급하되 가능한 한 상당하게 하도록 노력하여 장애가 될 단서가 없게 한다면 실로 폐단을 바로잡고 구제하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분할하여 준 장단의 송서면(松西面)에 있어서는 혹은 이수(里數)가 조금 많고 혹은 일의 형세가 편리하기 어려웠기에 허락하였다가 누차 중지시키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요청한 사천면(沙川面) 이서 지역은 전에 정했던 경계에 비하여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본부에서 교장(敎場) 등 네 조목으로 청한 것이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 크기는 조금 작으나 백성들의 뜻이 가장 절실하니 편리한 대로 이속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진관에게 하교하기를,
"전에 분지천(分地川)을 경계로 한 것은 숙묘 신묘년에 있었고, 다시 구정현(口井峴)으로 한계를 줄인 것은 기해년에 있었다. 이번에 요청한 내용은 기해년에 정한 경계에 비하여 3분의 2를 감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가서 금천의 지형과 백성들의 뜻이 편리하게 여기는지의 여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진관이 아뢰기를,
"금천의 경내에는 사족(士族)이 매우 많아 송경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이것이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두 남면에는 양반 호구가 매우 적은 데다 서민들은 송도가 세금이 가볍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이속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남면만 떼주면 송도의 영문은 어느 정도 소생할 수 있겠는가?"
하니, 진관이 아뢰기를,
"1년의 세입을 가지고 지출과 비교하면 지금의 소득이 거의 3천을 넘을 정도이니 상당히 지탱해 갈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모든 재상들에게 두루 물어보니 다 편리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송도 백성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방도를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논의하는 자들이 금천의 두 면과 장단의 한 면을 떼어주는 일과 백치진을 환속하는 일로 분분하게 말하였지만, 항상 결정을 짓지 못한 이유는 대개 어가(御駕)가 지나갈 때 특별히 은전으로 베풀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는 부모가 계시면 멀리까지 유람나가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 십여 일 동안 밖에서 묵어야 되는 능행(陵幸)을 하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다.
지난번 경연석에서 말을 꺼내어 열심히 자문하여 시작을 하려는 은미한 뜻을 대략 보였었는데, 신임 수신(守臣)이 진술한 조목이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여 국가에는 손해가 없고 본부에는 이익이 있는 것이었다. 이는 금천군의 두 면을 떼어주는 것에 불과하면서 호조에 바치는 세금과 해서(海西) 감영의 용도를 마련하는 데에 편리하지 않음이 없다. 또 장단에 대신 지급할 토지도 떼어서 부속시킨다고 말할 수 없으니 본부로서는 소득이 적지 않다.
특별히 수신의 요청대로 송도에 이속시키라, 그리고 소원대로 정하도록 우선 허락한 궁방절수(宮房折受)는 백성들이 농사지어 먹도록 하고 부역을 경감해 주었다가 거둥했을 때 장차 본부로 출급(出給)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조항과 함께 본부에 떼어줄 일로 분부하라. 앞으로 거행하는 일은 오직 도신과 수신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바람직한 방법을 정하여 사목(事目)의 편부(便否)를 정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뜻도 아울러 수신과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상이 또 진관에게 이르기를,
"비록 고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습속으로서 누가 기꺼이 관직에 의망하고 의정(議政)을 추증하자고 청하겠는가? 전에 박재희(朴載熙)를 특별히 훈련부정에 제수한 것은 그 의도가 시범[隗始]을 보이는 데에 있었다. 무관도 이러할진대 문신이 어찌 다르겠는가? 수신이 이미 연교(筵敎)를 받았으나, 문무반 외에도 힘이 세고 능력이 뛰어나 충분히 발탁하여 쓸 만한 자가 어찌 없겠는가? 옛날에 유극량(劉克良)은 미천한 신분에서 출세하여 은대(銀臺)의 관직까지 지냈으니 이는 옛날을 본받을 만한 하나의 사례이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관서의 도신에게 인재를 찾아내어 계문하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날 여러 도에다 인재를 찾아내도록 신신당부한 것이 어찌 차마 헛되이 사람들의 이목에 잘보이려 한 것이겠는가. 지금과 같은 풍속에서 지금의 규례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흉금을 터놓고 터전을 넓히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와 같이 하여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국량(局量)이 지금처럼 협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대저 재능이란 족속(族屬)과는 상관이 없으며, 더구나 지역의 원근에 따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도의 인재는 고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悏)과 고 직장(直長) 황순승(黃順承)을 등용한 사실에서 보면 더욱 징험하여 알 수 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한 지방에서 우수하다고 칭송되는 인물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여 찾아내고 장계로 올려, 특별히 임용하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하라."
하였다. 또 시동에게 이르기를,
"서도(西道)만이 아니라, 삼남(三南)은 사대부의 산지인데, 요즈음에 한 사람도 남대(南臺)가 된 자가 없다. 이것이 어찌 합당한 인물이 없어서였겠는가. 다만 추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은 전에 전라 감사를 지냈는데 들은 적이 있는가? 김인후(金麟厚)의 자손 중에 한 고을의 명망을 받고 있는 자가 있다는데 이런 사람이면 남대로 삼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대개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찾아내어 등용한 뒤에라야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근래에 인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산림에 훌륭한 학자가 없었던 것에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에는 관북(關北)에도 산림에 은거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 세상에는 또한 그러한 인물이 있더라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되니, 지금과 같은 풍토 속에서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는가. 이는 모두 당론(黨論)이 일어난 뒤에 사람들이 산림의 인물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여러 도에서 추천하여 올린 사람과 별도로 쓸 사람을, 묘당으로 하여금 전조가 임용하도록 엄하게 신칙하라고 하였다.

 

5월 30일 갑술

개성 유수 조진관에게 하교하기를,
"금천의 두 면을 떼어내어 송도에 부속시키는 일은, 애당초 계획은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전알할 때 어가가 지나가는 곳에서 특혜를 베푸는 형식을 취하려 했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멀리 외유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떼어내어 부속시키도록 허락한 것이니 모두 자전(慈殿)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점이 없다 하겠다. 부디 이러한 뜻으로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분명하게 일러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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