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을해
일식이 있었으나 구름이 끼어 보이지 않았다.
이한풍(李漢豊)을 좌포도 대장으로, 유효원(柳孝源)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6월 3일 정축
집의 이성보(李城輔)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송계간(宋啓榦)·김직순(金直淳)을 부사용(副司勇)에 부록(付祿)하였다. 이성보에게 유시하기를,
"어전에 가까이 있는 반열에 발탁한 것은 직함을 호사스럽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은 목이 말라 물을 기다리는 정도만이 아니니 역마를 타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대신들이 경연에서 아뢴 두 선비는 현재 비어 있는 자리가 없어 즉시 의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옛날 규례를 상고할 수 있으니, 두 산림처사(山林處士)는 모두 서연(書筵)과 경연에 출입하던 인물이며 지금에 그 손자들은 규례를 넘어 임용하였으니 어찌 먼저 그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군직에 부록하여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계간은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이고, 직순은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이다.
영남에서 천거한 이수인(李樹仁)·이정국(李楨國)·우재악(禹載岳)·정위(鄭煒)·김태익(金台翼)에게 역마를 주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는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5인의 행실과 학식이 뛰어난 것으로 추천하여 올렸기 때문이었다.
상이 개성부 유수 조진관에게 묻기를,
"고려조의 여러 능(陵)에 대하여 현묘조(顯廟朝)에서 제례를 올리는 의식을 늘려주고 왕씨(王氏)의 자손들이 수호하도록 하였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왕씨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진관이 답하기를,
"그 수가 매우 많으나 모두 고려조 중엽 이전의 자손들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전(經傳)에 보면 ‘우순(虞舜)의 빈상(賓相) 자리에 있어 여러 제후의 왕들이 서로 겸양한다.[虞賓在位群后德讓]’ 하였고, 또 ‘그 나라에 있을 때에도 미워하는 이 없고 이곳에 있어도 싫어하는 이가 없네.[在彼無惡在此無斁]’라고 하였으니, 성인의 뜻을 대략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송도 사람들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름이 조정의 관적(官籍)에 있는 자가 거의 없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에서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뜻에 맞는 것이겠는가. 경은 꼭 인재를 찾아내어 등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하였다.
6월 4일 무인
수찬 정이유(鄭履綏)가 상소하기를,
"근년 이래로 조정의 모양이 조금 혁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공사(公私)와 호오(好惡)의 분변에서 명백하고 정직한 뜻이 없고 모호하고 구차한 단서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종 감싸서 봐주고 좌우에 용인하면서 이것으로 조정(調停)하고 이것으로 화합을 요구하니, 신의 생각에는 치도의 효과가 갈수록 멀어지고 사람들의 뜻은 더욱 이상하게 변할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인물을 쓰거나 버릴 때에 더욱 공정성을 넓히고 편향되거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너의 말은 근자에 귀에 질리도록 듣고 있는 것과 같은 말이어서 한 번의 웃음 거리에도 차지 않는다. 작년 봄 좌상이 경연석상에서 올린 말 가운데서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있다.’라고 한 것이 있었으며, 이는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너는 말하기를 ‘호오(好惡)가 명백함이 없다.’ 하였는데 너의 뜻은 과연 어떤 것인가? 조정 위에 큰 의리로서 천명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조정과 화합을 어디에다 시행하겠는가? 저와 같기 때문에 좋게 볼 자는 좋게 보고 밉게 볼 자는 밉게 보아야 되는 것이다.
사물은 제각기 그 사물대로 치부하고 사물이 오면 순리대로 대응해야 된다. 좋게 여기는 자라도 죄가 있으면 배척하고 밉게 보는 자라도 오래된 뒤에는 기용해야 된다. 그리고 사심을 가지고 영합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고 안과 밖의 구분을 두지 않으며, 선인을 장려하고 무능한 자를 가긍스럽게 여기며, 성내는 것을 잊고 사리를 관찰하며,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오직 나의 눈으로는 주의깊게 보아도 좋게 여길 사람들이 밉게 볼 사람이 아니었으며, 구별을 하려 해도 어떤 자가 음(陰)인지 양(陽)인지, 누가 저쪽이고 누가 이쪽인지, 어떤 경우가 반쯤의 양인지 어떤 경우가 반쯤의 음인지, 어떤 경우가 저쪽에 가까운 것인지 어떤 경우가 이쪽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바대로 의리(義理) 앞에서 결론을 내릴 만한 구체적인 형체가 없는 것이다.
애석하다. 너의 말은 어찌하여 두리뭉실하고 애매하기가 마치 캄캄한 밤중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같으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를 않는가. 나는 울화가 치미는 병이 있어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에 대하여 이러니 저리니 언급하고 들어주느냐 마느냐 하는 즈음에 하교하는 말을 허비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다.
너의 본직을 바꾸어 차임하여 분란과 소요를 종식시키는 데에 일조가 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6일 경진
제주에 기민 진휼을 실시하였다. 을묘년 10월에 진휼을 시작하여 이 해 4월에 끝마쳤다. 【세 고을의 기민 5만 1천 3백 3명에, 소요된 곡식은 3만 5천 1백 23석이었다.】 이 일을 목사 유사모(柳師模)가 계문하니, 제주 판관 조경일(趙敬日)은 논상(論賞)하고, 대정 현감(大靜縣監) 고한록(高漢祿)은 승품하여 서용하고, 정의 현감(旌義縣監) 홍상오(洪相五)에게는 아마(兒馬)를 하사하고, 진휼을 보조한 전 순장(巡將) 홍삼필(洪三弼)은 도중의 두 고을 수령 중에서 한 곳에 차송하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계미
차대하였다. 좨주 송환기(宋煥箕)를 아경(亞卿)에 올려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윤시동이 아뢰어, 송환기가 산림의 중한 명망을 받고 있고 나이도 칠순이니 품계를 올려 발탁하여 불러오는 방편을 극진히 해야 된다고 하였으므로 따른 것이다.
좨주 송환기를 예조 참판으로, 승지 이성보(李城輔)를 예조 참의로 삼고,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송환기에게 하유하기를,
"발탁해 올리는 것이 어찌 다만 경의 선대를 생각한 것일 뿐이겠는가. 정승의 추천은 내가 목타게 기다리는 것과 같으며 그 추천은 뜻이 따로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현직은 한가한 자리이고 무더위가 이토록 심하니, 서늘한 기후가 되는 것을 조금 기다렸다가 선뜻 몸을 일으켜 올라와서 경연에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전 승지 이성보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밤낮으로 국사에 진력해야 될 사람을 오랫동안 직책이 없게 하였으니 도리어 예(禮)를 차려서 일을 시키는 뜻에 흠이 되었다. 예조 참의에 특별히 발탁하였으니, 기필코 불러 올리려는 나의 뜻을 생각하고 즉시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서도록 하라."
하였다.
중비(中批)로 순천 군수(順川郡守) 박재순(朴載淳)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이어 전교하기를,
"후세의 음악은 시(詩)에다 그 뜻을 가탁(假託)하니 세도(世道)와 관계됨이 매우 크다. 만약 문체가 경박한 것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먼저 가르칠 만한 뛰어난 음악을 가지고 시의 입문으로 제시해 주어야 한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 읍취헌(挹翠軒)036) 의 시로 거듭 증명하였는데 그것이 어찌 시작(詩作)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보다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근자에 눌제(訥齋)037) 의 시를 중간한 것도 그런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더욱이 두 사람의 명망과 의리가 훌륭하니 그들의 시를 외면 그들의 인품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고 목사 박상(朴祥)의 후손을 관직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고 교리 박은(朴誾)의 경우에서도 어찌 어떤 경우는 관직을 제수하고 어떤 경우는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6월 10일 갑신
봉조하 김종수(金鍾秀)가 관동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나는 경이 금강산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하여 지나친 처사라고 여겼는데, 지금 경이 정신을 쓰는 것을 보니 전보다 매우 나아졌으므로 참으로 경을 위하여 기뻐한다."
하였다. 이어 그의 손자 김동선(金東善)을 불러놓고 종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으로 하여금 경의 손자가 사모(士帽)를 쓴 모습을 보게 하려고 한 것이다."
하고, 초사(初仕)에 임용하라고 명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방면하였다. 병정은 월곶진(月串鎭)에 유배중이었는데, 김종수가 그에게 노모가 있다 하고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뜻을 미루어 시행하라고 청하여 따른 것이다.
전 총융사 서유대(徐有大)를 유임시켰다.
팔도 유생 박한흠(朴漢欽)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종향(從享)하도록 청하였다. 그 상소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상고하건대, 조헌은 천지의 굳세고 큰 정기를 타고 나서 사물을 궁구하여 앎을 터득하는 성현의 공부를 힘써서,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경지를 통달하였고 도(道)는 수사(洙泗)038) 의 근원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앞날을 꿰뚫어 보는 혜안은 점괘를 잡는 것과 같았고 이치를 보는 명철함은 실이나 털을 쪼개는 듯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성현처럼 되기를 기약하고, 항상 스스로 격앙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사내 대장부를 낸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고 하면서 경사(經史)에 침잠하여 참되게 알고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도체(道體)의 오묘함을 통찰하고 학문의 올바른 길을 확실하게 찾았습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수양하는 것은 반드시 공(孔)·맹(孟)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였고, 본체를 완전하게 갖고 큰 작용(作用)을 쓰는 데에는 주자(朱子)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좌우에서 근원을 탐색하여 시종(始終)의 맥락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 마음과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도(邪道)를 배척한 뜻은 또한 평소 가슴 속에 쌓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중국 조정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공자의 사당에 배향한 신주의 위차(位次)가 틀리고 어그러졌다고 극력 논하고 여러 현인들의 도학(道學)에 대한 출처(出處)를 차례대로 논변하여, 중국인들의 지대한 감복을 받았습니다. 사행에서 돌아와 복명하게 되어서는 맨 먼저 여덟 가지 일로 아뢰었으니, 그것은 곧 공자 사당의 배향, 내외의 모든 관직, 귀천에 따른 의복, 연회의 음식, 사대부의 읍양(揖讓),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 민간의 풍속, 군대의 기강과 법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다음으로 16조를 진술하였으니, 그 내용은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성, 근본을 추모하는 효성, 능침(陵寢)의 제도, 제사의 예절, 경연의 규례,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의 의례(儀禮), 언론을 받아들이는 도리, 인물을 취하는 방법, 음식의 절도, 녹봉을 알맞게 맞추는 일, 생식(生息)을 번성하게 할 일, 사졸의 선발, 군사들의 훈련을 부지런히 할 일, 성곽을 견고하게 쌓을 일, 출척(黜陟)을 분명하게 할 일, 명령을 엄격하게 할 일 등이었습니다.
그의 논설을 개괄하여 보면, 한결같이 모두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에 근본하고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으며, 당면한 급선무에 너무나 적중한 내용으로서 모두 다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임금의 학문을 밝히며 풍속을 바르게 하고 예교(禮敎)를 두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가졌던바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려는 뜻이자 국가를 다스릴 계책으로서 성현의 사업에서 질정받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자의 사당에 지성스런 관심을 가져, 육구연(陸九淵)과 두예(杜預)는 마땅히 방출(放黜)해야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예장(豫章)과 면재(勉齋)는 마땅히 배향해야 되는데도 배향하지 않았다고 상소하여 분명하게 변론하였고, 또 계성사(啓聖祠)를 옮겨 세워야 된다고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성인을 돕고 도를 호위한 공로는 더할 것이 없었습니다.
애당초 왜인의 사신이 와서 우리 사정을 염탐할 적에 격한 상소를 하여 참수를 청하여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는 대의를 밝혔습니다. 또 그의 지성과 선견지명이 반드시 왜국의 침략이 있으리라고 염려하였으니, 그 당시 그의 말이 실행되었더라면 어찌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났겠습니까. 임진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맨 먼저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1천여 명의 변변찮은 병력을 가지고 청주에서 수만 명의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결국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7백 명의 의사들도 같은 날 함께 죽었는데, 국가는 그들의 순국의 공을 힘입어 양호(兩湖)를 보전할 수 있었고 나아가 중흥의 업을 이룰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합니다. 조헌의 도덕과 학문과 경륜과 지략이 당시에 쓰여져서 태평성대의 치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대의에 나아가 살신성인하는 길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조헌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실로 국가 전체의 불행입니다.
이러한 것은 조헌의 도학과 공렬을 대략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신들이 또 상고하건대, 김집(金集)은 단정하고 신중하고 정밀한 자질로 온화하고 점잖고 순수한 기품을 타고나 청렴하면서도 격렬하지 않고 개결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습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아버지로 두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아 학문의 연원이 있었고, 조금 성장하여서는 성리학에 전심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문에 힘쓰고 실천에 독실하였습니다. 더욱이 성품은 깊고 담박하여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행적을 초야에 묻고 뜻을 기르면서 마치 그런 생활로 일생을 보낼 듯이 하였습니다.
만년에 인묘조를 만나 맨 먼저 부름을 받고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하였습니다. 두 원로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사방이 모두 좋아하여 눈을 닦고 다시 볼 정도였으나, 행함과 중지함은 명이 있기에 의리로 행실을 꾸미고서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중년에 부모봉양을 위하여 낮은 고을에서 시속에 묻혀 부침(浮沈)하였으나 본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효묘(孝廟)가 즉위하게 되어 특별히 교지를 내려 부르니 은혜와 배려가 더욱 융숭하였고, 천위(天位)를 함께 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왕공(王公)이 현인을 존대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타이르니, 김집이 이에 훌륭한 임금을 만나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감격하고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맨 먼저 훌륭한 정책을 진달하였으니, 곧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기미를 밝히려면 본원(本源)을 함양하는 일에 힘써야 되고 마음을 다스리고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의 요체를 논할 때에는 경(敬)과 성(誠)을 극진히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당시의 급선무에 대하여 극력 논하면서 ‘천하의 큰 근본은 하나이니 곧 전하의 마음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오늘날의 급선무가 여섯 가지이니, 곧 덕성과 도량을 넓히는 일,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 궁중의 기풍을 엄숙하게 할 일,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기용할 일, 백성들의 고통을 돌볼 일, 관리들이 실효를 내도록 질책할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합치되게 하려 한 정성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계책은 어느 것이라도 학문을 통하여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알면 꼭 말하였고 말하면 언제나 이치에 들어맞았습니다. 다만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가슴에 품었던 뜻을 만분지일도 시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후학들로서 깊이 한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편으로 유탁(柳濯)이 도당을 모아 반란을 도모하고 이웃고을에서 거사를 하면서 그의 집앞은 지나갈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인묘가 대단하게 감탄하면서 ‘흉도들도 현자를 경외할 줄 안다.’ 하였습니다. 자점(自點)이 이자들과 몰래 내통하여 뇌물을 쓰고 참소를 행하고서 김상헌과 김집이 영수라고 말하여 화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효묘께서 친히 임시변통으로 잘 처리하여 드디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난적들도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고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도 전파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예학(禮學)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의 문화와 의례법칙의 표준이고 국가가 백성을 교화함에 있어서 전범(典範)이 되는 것입니다. 김집은 이 예학에 더욱 많은 공력을 쏟아, 밤낮으로 예경(禮經)에 침잠하여 반복하여 비교 상고하고 구석구석까지 두루 통탈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심스러운 조문(條文)이나 가변적인 예절로서 고증할 곳이 없는 것에 대하여 모두 김집에게 가서 올바로 질정받았으니, 이것이 그가 평생 동안 가장 긴요하게 전공한 공부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묘가 승하했을 때에 《상례이동의(喪禮異同議)》를 지어올려 전대의 오류를 남김없이 바로잡아 국조의 정례(定例)를 완성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문인들과 문답한 내용을 가지고 분야별로 나누어 고증 수정하고 《비요(備要)》를 참조하여 《의례문해(儀禮問解)》라고 이름붙여 세상에 간행하였는데, 《속문해(續問解)》란 책은 김집이 평소 지구(知舊) 간에 문답한 내용으로 하였으니, 그의 예학이 세상의 교화에 보탬을 주고 만세에 법도를 내린 것이 어떠합니까.
그의 학문하는 방법과 실천에서의 요체는 마음을 깨끗하게 갖고 묵묵히 앉아서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이었으며, 또 자신이 거처하던 방을 ‘신독재(愼獨齋)’라 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힘을 쓴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원근의 학자들이 흡족히 여기면서 스승으로 모셨고,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도 문원공(文元公)을 섬기던 뜻으로 그를 섬겨 흡사 정명도(程明道)의 문인이 정이천(程利川)한테서 학업을 마친 것처럼 하였으니, 송시열과 송준길의 성취는 실상 김집의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김집의 도덕과 학문으로서 대략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가르침의 진수를 얻고 그것을 전한 자는 오직 김장생(金長生)과 조헌(趙憲)인데, 이는 흡사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증자(曾子)와 같은 경우입니다. 김집은 또한 장생의 아들로서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학통(學統)을 접하였으니, 대개 그들의 고명한 학문, 순전하고 깊은 도덕, 넓고 큰 경륜과 뜻과 사업은 두 현인이 동일한 법도를 가져 처지를 달리하였더라면 다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조헌은 한 마음을 가지고 많은 성인들의 지결(旨訣)을 전하고 한 몸으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난리에 임하여 대의를 쫓아 순절한 것은 단지 여사(餘事)일 뿐이며, 그 웅장한 경륜과 위대한 공렬은 백대 사람들의 이목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조헌이 당시에 큰 공을 끼친 사실입니다.
김집은 독실하게 실천하는 공부를 위주로 하면서 조금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고 성리(性理)의 본원을 궁구하면서 세밀하게 분석하여, 예법에 대한 논의와 책의 저술로 한 시대의 일정한 제도를 증명하여 완성함으로써, 천하의 의심스러운 조문과 변하는 예법에 대하여 그의 논증을 가지고 만세를 두고 참작 요량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김집이 후학들에게 큰 공을 끼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조예의 향방은 다르지만 도는 동일한 곳으로 귀결하여 똑같이 성인들의 도통(道統)을 잇고 백세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조헌과 김집이 아직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한 것이야말로 어찌 성스런 세상의 하나의 중대한 결함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험삼아 옛날 이름난 학자들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조헌에 대하여 논한 말로는,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은 그의 묘지명에서 ‘국가가 인재를 양성한 지 2백 년이 되어 선묘조에 이르러 충효와 절의와 도덕을 겸비한 선비로는 오직 조헌 한 사람이 있었다.’ 하였고, 선정신 송시열은 뇌문(誄文)에서 ‘주돈이(周敦頤)의 기미(幾微)에 대한 관찰, 장재(張載)의 선견지명, 정자(程子)의 경(敬), 주자(朱子)의 성(誠)을 겸비하였다.’ 하고, 또 묘표에서 ‘높은 하늘 넓은 땅 밝은 태양과 달처럼 만세에 걸쳐 이지러짐이 없다.’ 하고, 또 《화양문견록(華陽聞見錄)》에서 ‘충분히 문묘에 종사(從祀)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또 유계(兪棨)는 ‘조헌의 도덕과 공렬은 마땅히 현재 종사된 제현의 앞에 있어야 된다.’ 하였습니다.
김집을 논한 것으로는, 선정신 송준길은 뇌문에서 ‘하늘이 우리 동방에 선생을 낳아서 그로 하여금 옛 성현의 도를 계승하고 후학의 앞길을 열게 하여 천추만대로 영원히 도학의 맥이 전해지게 하였다.’ 하였고, 송시열은 ‘경건(敬虔)과 의리를 좌우로 끼고 총명과 지성 양쪽으로 진보하였다.’ 하였고, 유계는 ‘일월은 칭찬하지 않아도 절로 밝고 화산(華山)과 대산(岱山)은 칭송하지 않아도 절로 높은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종향(從享)에 대한 논의는, 이미 문원공 김장생을 종사할 때부터 사론이 흡족하게 찬동하고 이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이른바 오늘 종사에 대한 요청은 신들의 말이 아니고 1백 세 동안 바뀌지 않은 정론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역대 선조 이래로 선비들의 상소를 누차 받았는데도 그때마다 모두 조헌과 김집을 함께 거론하였으니, 대개 이는 그들의 도덕이 비등하고 이동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선정(先正)의 도학에 손해나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학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은 실로 국가의 원기(元氣)를 유지하는 것이 됩니다. 진실로 도학을 가진 현자가 있고 그들을 문묘에 종사하는 예를 거행한다면 성인의 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고 선비들의 지취(志趣)가 변질되었다가 다시 순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른 학문이 밝아지고 간사한 말이 저절로 종식된다면 국가가 문명(文明)으로 변화되는 것이 장차 이 일에서 시발될 것이니 어찌 빛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 나라 역대 성조의 가법이었습니다. 5현을 종사한 이후로 누차 성대한 의례를 거행하였으니, 숙묘 임술년에는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종향하였고 정유년에는 또 김장생(金長生)을 종향하였고 선조(先朝) 병자년에 이르러서는 송시열·송준길을 종향하자는 요청을 특별히 허락하였으며, 그 당시 10행의 윤음은 선왕들의 뜻을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정성스럽게 하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묘년에 도학을 숭상하는 유림의 선비들이 또 다시 조헌과 김집을 종사하자는 요청으로 선세자(先世子)가 대리 청정을 할 때에 수차 글을 올렸다가 윤허받지 못하였기에, 사림의 억울한 마음은 아직까지도 격앙된 채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고 성효(聖孝)가 독실하시어 늘 유교를 부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을 면려하는 근본으로 삼아서 역대의 선조에서 미처 행하지 못한 전례에 대하여 남김없이 거행하셨습니다. 지금 신들의 요청에 대하여도 반드시 깊은 배려가 묵묵히 닿을 것으로 믿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역대의 성왕들이 이미 시행하였던 규례를 가지고 한 나라의 크게 하나로 통일된 논의에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열(文烈)·문경(文敬) 두 선정의 도덕과 학문은 그 조예와 연원이 실로 문묘종사의 대열에 넣는 것으로 적합하다고 본다. 그들을 평한 말에 ‘주돈이(周敦頤)의 기미(幾微)에 대한 관찰, 장재(張載)의 선견지명, 정자(程子)의 경(敬), 주자(朱子)의 성(誠)을 겸비하였다.’라고 한 것과, 또 ‘경건(敬虔)과 의리를 양쪽에 끼고 총명과 지성(至誠) 양쪽으로 진보하였다.’라고 한 것은 낮은 곳에서 공부하여 차츰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간다는 뜻으로서 천만 마디의 말 중에서 가장 정곡을 꿰뚫은 것이며 정수이다. 또 옛사람도 두 사람에 대하여 정론을 내린 말이 있었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일은 막중한 전례여서 예로부터 매우 어렵고 조심스럽게 여겼다. 지금 어찌 너희들의 요청에 즉각 한마디로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봉조하 김종수가 아뢰기를,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원당(願堂)은 세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곳인데, 연전에 큰물이 져서 건물이 떠내려갔으므로 승려들이 불전 뒤에다 임시로 위패를 모셨으니, 일의 체모가 매우 무례합니다. 따라서 국가에서 다시 건축하는 방도가 나와야 합당합니다.
대개 이 산중에는 사찰이 적지 않게 있으나 곳곳마다 물력이 바닥나서 승사(僧舍)들이 대다수 퇴락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더욱 심한 곳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힘이 닿는 대로 물자를 보조하여 개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표훈사 원당은 다른 사찰과는 격이 다른 점이 있으니 국가에서 곡물을 보조하여 보수한 뒤에 위패를 제자리로 돌려 봉안할 일로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6월 12일 병술
형조 당상관 이득신(李得臣)·윤필병(尹弼秉)·한용귀(韓用龜)를 파직하였다. 지평 홍광일(洪光一)을 삼례 찰방(參禮察訪)으로 출보(黜補)하였다가 다시 곧바로 전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광일이 진소하여 도리어 대각을 질책한 박성태(朴聖泰)의 죄를 논하고서 삭직하여 내쫓는 벌을 시행하라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광 군수(靈光郡守) 이제만(李濟萬)은 권세가에 아부하는 데에 교묘하고 남을 빙자하여 뜻을 이루는 데에 습관이 들어 그 요사스럽고 교만한 꼴은 도리어 성태보다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세력에 뜻을 맞추고 이욕에 끌려 암암리에 죄악의 발단을 만드는 일 등, 벼슬하는 사대부들로서 다투어 저급한 쪽으로 치닫는 것은 모두 다 이 사람의 속임수에 빠진 것이며, 온 세상이 지목하여 반드시 이(李)·박(朴)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그의 평생의 행적을 논하더라도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정도인데도, 3년 동안 풍요한 고을에서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몰두하였고 고향의 집을 크게 짓느라 제목과 기와를 실어나르는 배가 강을 뒤덮었으며, 전원(田園)을 넓게 차지하여 기름진 땅이 몇 고을에 연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제만에게 속히 유배하는 처벌을 시행하여 한편으로는 악(惡)에 대하여 고통을 주고 한편으로는 탐욕을 징계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배수(徐配修)는 본래 능한 기량이 오직 의리를 배반하는 곳에 기치를 세우고 이익을 도거리하는 곳에서 장사나 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작년에 대사간으로서 앞뒤로 눈치를 보면서 징토에 대한 논의에서 일부러 늑장을 부려 이미 은연중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을 드러냈으니, 그의 마음과 행적은 이미 가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르지 못한 무리에게는 좋게 여기고 미워하는 분명한 대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배수에게 변방으로 유배하는 처벌을 내려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주고받은 말에 대하여 오늘의 신하들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인옥사의 완결에 대하여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기필코 오늘에 와서 올렸으니 형관(刑官)들이 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담당한 형조의 해당 당상관을 모두 파직하라.
소위 홍광일이란 자는 이런 때에 또 탄핵하는 소장을 올렸는데, 그의 사람됨됨이에 대하여는 수년 동안 사관을 겸직하였을 때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지어낼 수 있었겠는가. 광일에게 시키고 광일을 사주한 자를 광일보다 더 심하게 해괴하고 통분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이는 하찮은 박성태의 무리 때문에 부질없이 하교하는 것이 아니다. 근래로 일어나는 이런 모양과 작태는 병신년 이후로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전날 기용하였던 전 이조 판서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역시 모르겠다고 하였다. 중신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그렇다면 알게 된 것은 사람의 소행인가, 귀신의 소행인가?
세도(世道)가 세도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상하의 계급이 유지되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와 반대로 되어 위복(威福)을 내리는 권한이 좀도둑 같은 무리들에게로 옮겨 내려갔는데도 대신들이 바로잡지 못하고 전관(銓官)들도 격양(激揚)하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서 임금인들 어떻게 그들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들의 의욕에 맞추겠는가.
또 그렇게 되면 원성이 일어나고 국문하는 옥사가 터질 것이며 옥사가 터지면 조정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 이조 판서가 비록 ‘가사(家事)’라는 두 글자의 뜻으로 가슴에 새기고 고심을 한들 어떻게 스스로 보존 할 수 있겠는가. 근자에 중신들이 세도(世道)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으로 경연이 열릴 때마다 우려하고 탄식하였고 암암리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논의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이른바 당소(堂疏)니 대장(臺章)이니 하는 것이 수치를 만드는 단서가 되기에 딱 알맞을 뿐이다. 그러면서 감히 ‘좋게 여김과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다.’라는 말로 경연석상에서 말하고 상주하는 글에 써서 사람으로 하여금 쓴웃음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하늘이 언제 말을 하였는가. 그러나 사계절은 어김없이 운행되고 만물은 성장한다. 속인들의 육안으로 어떻게 오늘 비가 오다가 내일은 개일 것을 알겠는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의리를 전혀 무시하고 도리어 조장하는 계략을 꾸미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줄을 모르고 있으니 입에 물었던 밥을 내뿜는 것도 부족하여 곧장 남에게 게워내고 싶다.
혹은 준엄한 비답을 내렸고 혹은 처분을 내렸는데, 만약 광일과 같은 자를 질책할 것이 못 된다고 치부하고 논하지 말도록 한다면, 유독 애석한 것은 관직이 아니겠는가. 성태 등 3인은 설사 늦춰서는 안 되고 시급히 다스려야 할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제 이미 말하고서 오늘에 또 논한다면 너무 잗달게 처리하는 혐의가 없겠는가? 더구나 일필(一筆)로 3인을 논박하기를 마치 당쟁을 할 때의 양상과 같이 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강직하여서 이런 것을 할 수 있었는가? 하지만 이는 틈을 타서 엿보던 중에 발이 미끄러져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도의가 이러하기 때문에 좋게 여김과 미워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옛날의 사단이 다시 찾아올까 두렵다.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도에 있어서 절대로 엄중하게 처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외면으로 나타난 것은 탄핵한 것에 불과하니 형정(刑政)으로 따져 보더라도 특별히 무거운 형벌을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광일을 삼례에 전보하여 당일로 내려보내라. 그리고 형조의 문안과 광일의 소장은 모두 돌려주라."
하였다. 광일이 즉시 숙배하지 않자, 전주(全州)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박성태를 승지로 보임하였는데, 즉시 숙배하지 않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전보하였다.
6월 14일 무자
예조 참의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기를,
"이 직책에 음관(蔭官)으로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비록 덕망이 높은 최고의 선비라 하더라도 다 주저하면서 사양하였고 또 기필코 사양하고야 말았습니다. 신이 무슨 특별한 인물이라고 옛날 훌륭한 분들도 감당하지 않았던 자리를 감히 무턱대고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초선(抄選)으로서 예조에 제수된 경우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너는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6월 16일 경인
정리 당상(整理堂上)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영춘헌(迎春軒)은 매우 협소하고 또 비가 많이 새니 개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 건물은 옛날의 양식에 따라 처마를 달았기 때문에 서까래의 경사가 평평하고 따라서 처마로 흐르는 빗물의 속도가 느리게 된다. 빗물이 새게 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다. 굳이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시수가 또 아뢰기를,
"내일 음식상을 영춘헌에서 차려야 될텐데 도배가 더러워진 곳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종이를 가지고 대강 기워서 보수하라."
하였다.
심환지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임제원(林濟遠)이 도내 각읍에서 거둬들이지 못한 세곡(稅穀)을 가을이 되는 것을 기다려 맞추어 봉납하도록 하자고 소청하니, 허락하였다.
6월 17일 신묘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자궁(慈宮)의 생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성인은 한 편은 기쁘고 한 편은 두렵다는 교훈039) 을 내렸는데, 나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다. 모든 의례 절차를 되도록 간략하게 거행하여 복을 아끼고 경사를 축복하는 데 일조가 되게 하라. 다만 이 날을 기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내일 직접 의복을 올리겠다. 세속에 이른바 환갑(還甲)·진갑(進甲)이 이것이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신에게도 노모가 있는데, 그다지 연로하기 전에는 기쁨보다 앞서 두려움이 있었으나, 차츰 백 세에 이르자 오직 기쁨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훗날 성심(聖心)도 이와 같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또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에게 이르기를,
"자궁(慈宮)의 탄신일에 전년에도 축하의례를 거행하지 않았는데, 금년에도 절약하는 뜻을 보이려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상용의 취타악(吹打樂)도 연주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의복을 진상할 때 용정(龍亭)에 봉안하고 의장을 세우고 음악을 연주하는 등의 일을 진하(陳賀)할 때의 의주(儀注)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종현이 아뢰기를,
"의주(儀注)를 둔 것은 앞으로 길이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이번에 음악을 쓰지 않는 것은 후세에 관례로 남길 뜻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이와 같이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안변부(安邊府)에 정배되었던 이우진(李羽晉)을 석방하였다.
6월 18일 임진
상이 친히 혜경궁(惠慶宮)에 의복을 진상하였다. 이어서 음식을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남여를 타고 만팔문(萬八門)을 나와 남여에서 내려 임시처소로 들어갔다. 종친들과 문무 2품 이상들이 【각신(閣臣), 옥당·정리소(整理所)의 당상과 낭관, 외교관인 중국 관리들이다.】 먼저 영춘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때가 되어 남여를 타고 천오문(千五門)으로 들어가 남여에서 내려 영춘헌 섬돌 위의 판위(版位)에 나아가 재배례(再拜禮)를 거행하였다. 원자(元子)도 당계(唐髻), 청포(靑袍), 흑화자(黑靴子) 차림을 하고 판위의 동쪽에서 재배례를 거행하였다.
뜰안에 들어온 모든 신하들이 예를 다 거행한 뒤에, 제용감이 예물함을 가져다가 꿇어앉아서 근시(近侍)에게 【승지 이만수(李晩秀).】 주었고, 근시가 상에게 올리니 상이 꿇어앉아서 받았다. 다시 근시에게 되돌려 주어 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의례대로 예식을 거행하였고, 예식이 끝난 뒤에 내전으로 돌아와 자궁에게 음식을 진상하였다. 또 이 예식에 참여한 모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내렸다. 이는 낙남헌(洛南軒)의 운자(韻字)를 써서 지었다. 각신, 승지, 사관, 2품 이상의 문무신들에게 모두 그 운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우의정 윤시동의 모 조씨(趙氏)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그 전교에,
"대신이 기로소에 들어갈 날이 가까운데 1백 세에 가까운 대부인(大夫人)이 아직 건강하게 생존하니 국사를 상고하더라도 고 정승 홍섬(洪暹) 이후로는 처음 듣는 일이다. 지금 자궁의 경사를 축복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 선(善)을 여러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應製)에서 유학 이근호(李根祜)가 1등을 차지하여,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하사하였다.
6월 20일 갑오
관학 유생 이광헌(李光憲)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요청하니, 비답하기를,
"두 어진 이를 문묘에 종사하라는 요청을 하였으나 이는 1백 년을 두고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계속하라."
하였다.
6월 21일 을미
승지 이서구(李書九)가, 홍낙신(洪樂信)의 상(喪)에 부의(賻儀)를 보내고 조문하는 제전(祭奠)을 올리라고 명한 것과 관련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얼마 전에 승정원에 있으면서 삼가 전교가 내린 것을 보니, 홍낙신의 집에 부의를 보내고 조문하는 제전을 올리라는 하명이 있었습니다.
아, 《명의록(明義錄)》이란 책 하나는 곧 전하의 《춘추(春秋)》입니다. 대의(大義)가 은미하면서도 드러나고 완곡하면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면하였으니, 그 글은 역사이고 그 뜻은 경서(經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그 대의(大義)가 실추된다면 난적을 두렵게 만들고 윤리를 바르게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대개 인한(麟漢)의 반역은 만세의 신자들이 가차없이 원수로 삼고 있는데, 그 반역의 근원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낙신의 처지에서 관직을 차지하고 문적(文籍)040) 을 쓰게 한 것은 이미 명의(名義)를 천명하고 국시(國是)를 존엄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어찌 군왕의 융숭한 표창을 더해주고 죽음을 애도하는 성대한 전례를 베풀기를 마치 평상의 친척들에게 영예와 애도를 극진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와서 세도가 각박해지고 인심이 못된 곳으로 빠져, 양편의 경계에서 관망하고 충(忠)과 사(邪)의 구분에 현혹되어 거의 의리가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하며, 한 가지 두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이목에 습관이 들어 대충 지나쳐 넘기기를 어렵게 여기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점을 중지시키지 않는다면 《명의록》은 장차 읽힐 때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니, 신은 나름대로 이런 점을 개탄하고 한심하게 여깁니다. 내린 명을 중지시켜 대의를 밝히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승정원의 하례를 시켜 그 상소문을 대루원(待漏院)에 던져놓게 하였다.
6월 22일 병신
도승지 홍명호(洪明浩)가 상소하기를,
"신이 동부승지 한용귀(韓用龜)가 올려 승정원에 도착한 상소문의 내용을 보았는데, 신이 작년 가을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허적(許積)을 복관시키는 일을 거행한 것과 관련하여, 신을 관직에 두지 말라고 배척한 적이 있기에 같은 승정원에 함께 재직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아, 신은 그 당시에 준엄한 하명에 두려움을 못 이기고 공의의 비난을 받아 스스로를 자책할 겨를도 없었으며 닥치는 탄핵을 그대로 받으면서 사죄할 뿐이었습니다. 다만 저번의 상소문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그 내용이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제수되기만 하면 즉시 응하여 아무런 사고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였으니, 수치스러움으로 몸둘 곳이 없는 점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상소를 철회하고 나간 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모르겠으나, 신이 이미 그 상소문을 보았으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태연하게 같은 석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승지 한용귀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작년 겨울 사간원에 재직할 때 허적의 복관에 관한 일로 울분스러운 심정을 대략 진술하였고, 또 이어서 당시 이조 당상 홍명호가 태연히 그 일을 거행한 것을 논박한 뒤에 그를 관직에 두지 말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그와 같이 논척하고서 지금에 한 승정원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비록 상대는 혐의를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의 마음으로는 편안하게 여길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략 소장을 지어 승정원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명호가 동료로 함께 있게 된 혐의로 갖고 의리를 내세우고 나갔고 곧바로 교체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상소를 철회하고 하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명호가 신이 전에 상소하여 논한 내용을 지금에야 처음으로 알았다고 하고 도리어 진소하여 인혐하고 한 자리에 함께 있기 어렵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처지에서도 어찌 염치없이 무턱대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팔도의 유생 이명채(李明采)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 조헌과 문경공 김집을 문묘에 종사토록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사문(斯文)을 육성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나는 기필코 흔쾌한 마음으로 듣고 찬성하였다. 더구나 이 두 선정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이야 어찌 너희들의 누차에 걸친 소청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그 시행을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처리하면서 다각도로 고려하는 이유는, 전에 문원(文元)을 종사하였기에 지금에 문경을 덧붙이면 부자가 함께 제향을 받게 되며 이는 전례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례로서 염경(冉畊)과 염옹(冉雍)이 비록 공자의 제자로서 열 명의 철인(哲人)에 들어 문묘에 올려 종향하였지만 이는 오래 전의 일이어서 지금에 비교하여 논할 수는 없다.
전에 선정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는 의리의 큰 근원을 통찰하고 홀로 그 종지(宗旨)를 체득하였다. 그러나 그 고고한 충절이 왕왕 풍소(風騷)로 표현되었던 것은 그리 대단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옛사람들이 국조의 인물을 논할 때에,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에 따라 품평의 차이가 있으나 그 세 가지를 겸비하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이는 오직 선정이 가장 근사하다 하였고, 나도 또한 그렇다고 여겼다. 지금에 너희 선비들의 상소가 세 차례나 올라왔는데도 문정공을 맨 앞에 내세우지 않았으니 이는 유자(有子)가 성인 공자와 근사하였으면서 열 명의 철인(哲人)과 함께 종향되지 못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초야의 선비와 더불어 강명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이 상소하기를,
"상진곡(常賑穀)을 여러 도에 분산시켜 두는 것은, 한편으로는 흉년의 진휼용으로 쓰고 한편으로는 갑작스런 일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곡식의 수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고 쓸데없이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만 모든 경비가 저절로 여유롭게 되니, 백성과 국가가 미리 준비하는 계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개 진휼청을 설치한 이래로 물자가 부족한 데 대한 한탄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축적된 곡물의 수량을 아껴 다른 곳에 떼어준 것이 없었고 지출을 절약하면서 남용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호조가 원회계부(元會計簿)에 부록(付錄)된 곡물이 고갈되었다고 고하면 이 상진곡을 옮겨 떼어주고 묘당이 특별히 나누어 줄 곳이 있으면 이 상진곡을 옮겨 떼어주었습니다. 또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세금을 면제하거나 탕감하는 명이 내리게 마련이어서, 경아문(京衙門)에서 곡물이 적어 일을 착수하기 어려운 경우나 감영과 병영에서 모곡(耗穀)이 줄어들게 되어서 원래의 수량을 감소시키지 않으려 하면 그때마다 모두 상진곡을 옮겨 해결하여 줍니다. 이밖에도 기민에게 무상으로 지급하거나 환민(還民)에게 으레 나누어 주거나 원곡(元穀)을 환수하지 못했거나 할 때 이 상진곡에서 지출하지 않는 적이 없어, 각종 명목의 곡물이 점차로 감축되었으며 미곡(米穀) 부분은 더욱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년의 회계안(會計案)을 가져다 상고하니, 임자년 겨울 회계안에 잡힌 피잡곡(皮雜穀)이 합계 2백 77만 4천 4백 64석이었으며 그중에서 쌀은 7만 2천 3백 70석이었습니다. 그 뒤 을묘년 겨울 회계안의 것은 각종 잡곡이 2백 33만 6백 77석이었으며 그 중에서 쌀은 3만 5천 1백 90석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보면 임자년에서 을묘년까지 불과 4년 동안에 감소된 수량은 각종 잡곡이 40만 3천 7백 99석이었고 쌀이 2만 7천 1백 80석이었으니, 이런 식으로 간다면 몇 년 뒤에는 다시는 상진곡이란 이름조차 볼 수 없게 될 상황입니다. 그리고 각종 곡물도 그 영향을 받아 여분이 없게 되어, 국가회계의 엉성한 문제도 이미 말할 수 없는 실정이지만 눈앞에 당장 쓸 비용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문제를 바로잡고 기울 대책으로는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으니, 오직 모든 것을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곧 호조도 옮겨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묘당도 다른 곳으로 떼어주지 말며, 세금을 면제하거나 감축하더라도 이 상진곡은 주지 말게 하며 곡식을 받아내지 못한 경우라도 이 곡물은 채워넣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피잡곡(皮雜穀) 가운데서 해마다 일정량씩 나누어 쌀로 받아들여 항상 지출은 적고 수입은 많게 한다면 해마다 받는 모곡(耗穀)이 점차로 풍부하게 늘어나 어느 정도 복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이 사안에서 나름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진휼하는 일을 시행하면 사람 수를 세어 무상으로 곡물을 배급하게 되는데, 이는 옛부터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있어 온 것입니다. 이때 10일에 몇 되 되는 곡식은 비록 노약자들로서도 겨우 연명할 정도여서 한창 건장한 아이는 한 번 실컷 배부르게 먹을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소원은 모두(牟豆)를 최상으로 치고 쌀과 좁쌀을 최하로 치는데, 대개 그 이유는 보리는 껍질까지 함께 먹을 수 있고 콩은 볶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죽을 만들면 한 대접으로도 충분히 요기를 할 수 있으나 쌀은 이러한 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여러 도에서 구제한 기록을 매번 취하여 보게 되면 쌀은 많고 피잡곡은 적었으며, 피잡곡 중에서도 조(租)는 많고 콩과 보리는 적었으니, 이것이 바로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각도의 상진곡에 모두 축이 난 수량을 계산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근자에 생겨 이미 규례로 굳어진 것입니다. 대저 피잡곡을 받아들일 때에 비록 키로 까불게 하더라도 다 쭉정이가 없이 충실하기가 어려운데다 다시 말[斗]로 출급하니 축이 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쌀에 있어서는 반 년 내에 어찌 섬[石]이 부족할 문제가 있겠습니까. 3, 4월 사이에는 창고에 있는 쌀이 봄날의 생장(生長)하는 기운을 받으니 남는 것이 생기고 축이 나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이치입니다. 어찌 축이 났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항입니다. 대체로 지방관들은 오직 널리 구제한다는 명분만 취하고 실속있는 도리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데에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휼할 때에 응당 자세히 요량하여 취사선택하는 조치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선혜청이나 여러 도에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상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고, 다른 청(廳)은 대략 참작하여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호서청(湖西廳)은 원래 부족하여 쌀은 1만여 섬, 전(錢)은 2만여 냥, 면포(綿布)는 1백여 동(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해마다 가감이 있어 남는 것과 부족한 것도 때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으니, 그 구차하고 어려운 점은 더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이는 오히려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경기의 진휼청보다 더 못합니다. 금년의 현황을 가지고 말하면, 세금으로 들어올 것은 쌀이 2만 2천 1백 81섬, 전이 1만 5천 냥, 면포가 1백 50동인데, 응당 지출해야 할 것은 쌀이 2만 2천 2백 섬, 전이 4만 냥, 면포가 2백 70동이니, 받아들일 수량으로 응당 지출할 것에 비교하니 사계절 어느 때를 논할 것 없이 늘 빌려야 될 판입니다. 애당초 진휼하는 제도를 설치하였을 때 외읍의 서리들이 이를 가지고 이익을 챙기는 계기로 삼아, 장황하게 논하여 보고하고 빙자하여 장부에 올려, 역(役)은 작으면서 비용은 막대하게 드는 것이 거의 한계가 없습니다. 본청이 간혹 규례를 상고하고 자세하게 비교하여 일마다 바르게 조정하기는 하였으나, 능침(陵寢)을 보수하는 일과 같은 것은 사안이 매우 중대하여 똑같은 사례로 삭감하기란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여타 허다한 역사에 대하여 먼 외지에서 가늠하는 것으로는 마음대로 존폐를 결정할 수 없으며, 결국 고을에 비축되었던 물자가 다 바닥나게 되면 혹은 상납할 것 중에서 더 떼내거나 혹은 서울 진휼청에 보낼 돈으로 대신 지급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런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해마다 5, 6천 석의 쌀을 마련하여 해도의 감사에게 넘겨주고 모든 역사가 닥칠 때마다 사안에 따라 요량하고 용의주도하게 단속하여 간사한 행위가 통하지 않고 공사와 비용이 서로 일치되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렇게 되면 1년 동안 떼어주는 것이 1년의 비용을 당할 듯하며 또 이쪽은 부족하더라도 저쪽은 여유가 있게 되어 절로 알맞게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는 절대로 달리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개 해도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본청이 어찌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해도가 단속할 수 있는 것을 본청이 어찌 단속하지 못할 것입니까. 다만 처한 입장이 같지 않고 갖고 있는 형세가 본래 다른 점입니다. 가령 고을의 아전도 해영(該營)을 속이다가도 통제 아래에서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또 사찰할 때에 간혹 탄로날까를 두려워하게 되어, 숱하게 마구 축내고 잠식하던 폐단을 꼭 중지시키려 하지 않아도 절로 중지되리니, 그 이해득실의 차이가 어찌 열배 백배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다만 곡물장부에 잡힌 것이 매우 적어 만약 한 해에 5, 6천 포(包)를 떼어준다면 나머지가 거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공물가(貢物價)로 내린 것에서 전부터 꾸어 쓰는 사례가 있었으니 마땅히 상황에 따라서 해야 될 것입니다.
곡물을 비축하는 사항은 지금에 변통하여 본도의 감영으로 옮겨 주어 충분히 요량하고 논의하도록 하며, 혹시라도 뜻밖에 특별히 내려보낼 수량이 수백에서 천에 이르는 정도라면 이 또한 알맞게 요량하여 더 떼어주며 이것으로 일정한 법제로 삼는다면 어찌 얼마간의 이익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또 하찮은 소견이나마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서울은 사방의 중심인데, 근래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 문제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안이나 성밖의 허다한 민가가 식량을 살 곳이 없어 모두 관청의 창고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군병(軍兵)과 서리들의 늠료(廩料)와 시장과 경저리(京邸吏) 공납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도 적지 않다고는 하나, 이밖에 직업이 없는 사람들과 부양해 줄 자가 없는 자들이 그 수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대충 의관을 갖추고 막일을 하지 않는 자와 지방사람으로서 경저(京邸)에 체류하는 자가 태반이어서, 반드시 쌀값이 치솟지 않고 관청의 비축이 여유가 있고서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 수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관청의 창고는 바닥이 났고 상인들의 배는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어 곡물가는 마구 치솟아 귀하기가 옥과 같습니다. 조운선(漕運船)이 와서 정박할 즈음이나 공미(貢米)를 출급할 때에 겨우 한 되에 가까운 수량을 첨가하고서, 작년 한 포(包)의 값이 꼭 8, 9 꿰미에 이르니,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저 서울은 농사를 짓는 곳이 아니어서 곡식이 생산되지 않지만 사방의 물자가 교역되어 이곳에 집중되고 있으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와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은 자본이 없는 것을 걱정할 뿐 곡식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균역법이 시행된 이후로 미곡이 품귀하여 옛날에 한 포에 3, 4냥 하던 것이 지금은 몇 배에 이르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러한 점 때문에 호조와 선혜청 두 아문에서 전부터 축적되어 내려오던 쌀이 그 과정에서 다 탕진되어, 1년 동안 의지하여 살아가는 데에도 반드시 유사의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불행하게도 어느 해에 흉년이 들게 된다면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겠습니까.
지금 먹을 것을 충분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면, 10만 석의 쌀을 항상 서울의 창고에 유치하게 해야 됩니다. 그런 뒤에 모든 물자 사용부분에 쌀을 사용하고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면, 민간으로 자연히 곡물이 유포될 것이고 시장에서도 예전처럼 1석에 석 냥의 값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10만 석의 쌀을 유치하는 것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만약 옛날 상평법(常平法)과 같이 한다면 어렵다고 할 것만은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균역청(均役廳)의 전(錢)이 어떤 해에는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여러 도 중에서 풍년이 든 지역에 가서 사전에 결정한 값으로 편리하게 사들이며 서리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본전을 깎아먹는 일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기꺼이 부응하여 비록 1만 석이 넘는 수량이더라도 하루 아침에 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밖에 관청에서 쓸 곡물을 시가로 매출하였다가 다시 사들이면 3, 5년을 넘지 않아서 10만 석을 곧장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들이는 쌀의 품질이 삼세(三稅)와는 차이가 있어 상납할 즈음에 폐단이 없지 않다.’ 하였으나, 이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시장에 매출하는 쌀은 본래 열악한 품질이 없으며, 비록 타도의 삼세(三稅)에는 조금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기호(畿湖)의 삼세와는 역시 대등합니다. 그리고 간혹 오히려 폐단이 있다고 한다면 모곡(耗穀)의 반을 떼주어 품질이 떨어지는 것을 보상하면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값을 정하여 사들인 1석 내에서 반수의 모곡과 조운선의 잡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곡물이 흔할 때에 돈으로 사들여서 농사를 손상시키지 않고, 쌀을 사들인 뒤에는 헛된 비용이 드는 것을 없애니 이로운 바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서울에다 곡물을 축적하기를 해마다 변함없이 하여 10만 정도의 많은 수량이 축적되는 데에 이르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균역청의 부족한 쌀과 해마다 사들여 이납(移納)하는 쌀에 대하여 논하는 자들은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고 합니다만, 이납하여 생긴 소득은 수량이 많지 않아 단지 균역청의 부족분에 대해 지급할 뿐이어서 축적할 수 있는 여분의 쌀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더구나 이미 공물로 나눈 것을 또 취하여 거의 제 살을 베어 먹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도무지 쌀을 사서 옮겨오는 상책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반하여 올 때 소소하게 장애가 되는 사안이 있으니 때에 따라 합당한 조처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본을 견고하게 하고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 세 조목을 묘당에 물어서 결재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비축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상평창과 진휼청의 곡식이 전부인데, 임자에서 을묘년까지 4년 동안 이와 같이 감소되어 그 수가 거의 50만에 가깝다고 하니,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청원을 통하여 연로한 신하가 국사를 도모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논의한 뒤에 사례를 들추어내고 사리를 논하여 품처하게 하라.
경기청(京畿廳)에 비축해 두는 일도 개정해야 할 일인데, 경기청에 항상 10만 포의 쌀을 사다가 비축할 일을 덧붙여 진술하였다. 대저 균역청에 이납(移納)하는 폐단을 개혁하지 않으면, 설사 한 말에 3전씩 하더라도 저 쌀을 고르게 펴고 값을 정하게 하는 일에 무슨 해결책이 있겠는가. 더구나 해마다 몇 만 섬의 쌀에 대하여, 실제로 쌀이 선혜청에서 지출되지 않으면서 장부는 이미 이납(移納)한 것으로 회계를 하니,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저절로 백성을 속이는 결과가 된다. 이것 때문에 나는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즉위했을 때 조참일(朝參日)에 먼저 은미한 뜻을 보였었는데, 그후로 마음속으로 한두 가지 경영하고 요량하던 것으로서 비록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두 가지 가다듬은 것이 있기는 하였다. 경이 지금에 쌀을 사와서 비축하자고 한 요청은 또한 백성들의 식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청에 대한 조목과 함께 묘당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의견일치를 보아 회계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복주(覆奏)하기를,
"상진곡(常賑穀)에서 축이 난 것이 이토록 많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4년 동안 곡물장부에서 감소된 것이 47만 석이나 되니 국사의 망극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 보면, 각 아문에 옮겨 등록한 것과 각 연도에 과세를 정지하거나 탕감하여 점차적으로 축이 난 것뿐만이 아니라, 각도의 감영과 병영의 채무 탕감과 폐단을 구하기 위하여 대신 지급하는 물자를 모두 상진곡에서 취하였기 때문인데, 지금 대신 지급한 것을 통계하면 그 수량이 14만여 석이나 됩니다. 다른 아문으로 옮겨 등록한 것은 그래도 공용(公用)에 속하고 각 연도에 과세를 정지하거나 감면한 것은 특별한 은택에 관계되지만, 오직 이 추가로 나누어 주거나 대신 지급하는 명목은 원래 조정과 상관이 없으니 애당초 시행을 허락한 것이 잘못된 처사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곡물장부에서 이토록 감축되고 있어 마땅히 모두 본 상진곡으로 되돌려 등록해야 되나, 다년간에 시행해 오던 상황에 갑자기 중지하게 하면 감영과 병영의 사정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앞으로 특별한 논의를 거쳐 다시 조처할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급대(給代)라는 두 글자를 감영과 병영에서 감히 요청하는 일이 없고 묘당도 시행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는 뜻으로 분명하게 정식을 세우소서.
아문에 옮겨 등록하는 것과 각 연도에 과세를 정지하거나 감면하는 것은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진곡(常賑穀)에서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묘당과 호조와 선혜청이 서로 경계하여 조금도 착오없이 준수하게 해야 됩니다. 지출하는 것은 적고 첩입되는 것은 많아 해마다 수량이 늘어나 등록된다면 4, 5년이 안 되어 임자년에 회계된 문건의 수량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 뒤에 피잡곡(皮雜穀)을 가지고 상소에서 건의한 내용대로 해마다 적당한 수량을 떼내어 쌀로 바꾸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는 당연히 해청(該廳)이 실행하는 때에 임하여 계품하여 지시받고 사리에 맞게 거행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청컨대 이러한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시동이 또 청하기를,
"명식의 말에 따라 경기 감영에 비축할 쌀 7천 석을 떼주어 각읍의 경비로 충당하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만들고, 풍년이 든 해를 만나면 10만 석의 쌀을 사들여 항상 서울의 창고에 비축하는 일도 또한 우선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울러 따랐다.
전교하였다.
"내가 선정(先正) 문정공(文靖公)에 대하여, 위로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창명한 도학(道學)의 단서를 터득하고 아래로는 문순공(文純公)과 문성공(文成公)이 발명한 공업을 계발(啓發)하였다고 여겨, 크게 흠모하는 마음이 비할 데 없이 간절하다. 그 선조들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한 여러 선정들의 후손들에 대하여 그들의 분수에 넘치는 것으로 화려하게 높여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국가에서 인재를 기용하는 데에 어찌 원근에 차이를 두겠는가. 가정에 있을 때의 학행(學行)은 여러 방백과 어사에게서 익히 들어 이미 알고 있으니 마땅히 기용해야 될 것이다. 전 참봉 김수조(金壽祖)를 해조로 하여금 6품직에 의망하여 들여보내게 하라."
서울과 지방의 경범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는 날씨가 무더웠기 때문이었다.
6월 23일 정유
영동현에 정배한 죄인 김직휴(金直休)를 석방하였다. 직휴는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었는데, 이 때에 석방하여 더없이 감모(感慕)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6월 24일 무술
차대가 있었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전 승지 이서구(李書九)의 상소는 그 말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답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루원(待漏院)에 던져버리라는 하교가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맑은 조정에서 간언(諫言)이 이르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을 하니, 마땅히 다시 하교하겠다."
하였다. 대호군 심환지(沈煥之)가 이어서 아뢰기를,
"이서구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시 들여보내게 하고 비답을 내려 조정의 신하로서 의리에 어두운 자들로 하여금 《명의록(明義錄)》 한 책에 춘추 대의(春秋大義)가 있음을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춘추의 의리는 은미하면서 완곡한 점을 아는 자는 다 안다.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내가 김하서(金河西)에 대하여 특별히 흠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대저 도학(道學), 문장(文章), 절의(節義)를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윤시동이 아뢰기를,
"문묘(文廟)에 종향하는 것은 공화(功化)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하서는 학문도 높지만 평생 행한 절의의 자취가 더욱더 현저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는 그가 《중용》과 《대학》을 표리(表裏)로 한 공부가 매우 정밀하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고 말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다. 따라서 절의 한 쪽으로만 치중하여 보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예조 참의 이성보(李城輔)를 체직시켰다. 당시에 예조에서 대마도(對馬島)의 서계(書契)에 대한 회답을 할 참이었는데, 관례적으로 참의가 주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신에게 물으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전날 선조조에서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예조 참의였는데 대마도 서계에 관한 일로 체직된 적이 있습니다. 옛 관례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따른 것이다.
이사룡(李士龍)의 충렬사(忠烈祠)에 현판을 하사하고 방백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충렬사는 성주(星州)에 있었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무의공(武毅公) 유극량(劉克良)의 숭절사(崇節祠)의 사례에 따라 똑같이 현판을 내릴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증 목사 이사룡의 충렬(忠烈)에 대하여 모든 후하게 표창하는 방법에서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비록 유극량의 숭절사와 같은 이왕의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의리에 흥기되어 시행해야 될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어찌 금법(禁法)의 유무를 따지겠는가. 특별히 현판을 하사하라."
하였다.
증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하사하는 날에 증 참의 차예량(車禮亮)·안극함(安克誠)에게도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예량과 극함에게 아경(亞卿)을 더 추증하고, 증 군기시 정 장후건(張厚健), 증 군자감 정 차충량(車忠亮), 증 장악원 정 차원철(車元轍), 증 예빈시 정 차맹윤(車孟胤)에게 한 품계를 더 추증하고, 후건 등 4인을 똑같이 현충사(顯忠祠)에 추배(追配)하라고 명하였다. 후건·충량·원철·맹윤과 효일·예량·극함은 동시에 절의를 세워 서방의 백성들이 칠의사(七義士)라고 일컬었는데, 장후건·차충량 4인은 똑같이 제향(祭享)하는 데에서 누락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의 건의에 따라 동시에 모두 제향하게 되었다.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를 현충사에 추향(追享)하고 이어서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그 전교에,
"관서의 칠의사(七義士)를 추배한 일을 계기로 생각해 보니, 황 충렬(黃忠烈)의 비분강개하여 순절한 행적은 지금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충렬이 용만(龍灣)을 수비할 적에 온 천지의 오랑캐들을 모두 섬멸할 뜻을 갖고, 매번 수자리의 누각에 올라 오랑캐의 기병들이 매일 관문밖을 짓밟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천조(天朝)를 위하여 의리를 내세우고 우환을 물리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서, 밤새도록 비분강개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칠의사가 정도(正道)로 회귀시켜야 된다는 의리를 앞장서서 부르짖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흔쾌히 협동하기로 하였는데, 결국 계획이 누설되어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저 칠인이 의사가 된 것은 곧 충렬이 계발(啓發)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7인은 똑같이 향사되었는데 유독 충렬만 빠졌으니, 어찌 흠이 아니겠는가. 그 지역에 그 사당이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당을 세우고서 충렬을 향사하지 않는다면 비록 7의사의 영령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저 세상에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증 좌찬성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를 의주(義州)의 현충사에 추향하고 당일에 치제하라."
하였다.
6월 25일 기해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유학 김무순(金懋淳)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상소에서 아뢰기를,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기를 요청한 것은, 20년에 걸쳐 6, 7차례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정성이 두텁지 못하여 전하께서 아직까지 윤허를 아끼고 있어서 문정공과 같이 뛰어난 덕망과 절개를 가진 이가 공자 70제자의 대열에 끼여 배향되지 못하고 있으니, 풍속을 순화하고 세도를 교화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개탄스럽고 흠이 되는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문정공의 도학과 출처(出處)의 높은 모범은 우리 전하께서도 종향할 만하다고 여기셨고, 대부들과 백성들도 모두 종향할 만하다 하였는데, 다만 문묘종향이라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다는 이유로 시행을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처리할 바라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도덕(道德)은 향사할 만한데도 단지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향사하지 않는다면, 이는 옛부터 지금까지 큰 현인의 성대한 덕에 대하여 끝내 향사할 만한 일이 없을 것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문정공의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절의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이미 더없이 감모하던 터였고, 신들도 남김없이 진술하여 더 남아있는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다시 조목을 들어 열거할 일이 없기에, 종사하는 데에 절대로 합당한 이유를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도덕과 의리는 비할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선정신 이황이 문정공을 찬양한 것이고,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河西)를 탄생시켰다고 한 말은 선정신 송시열의 말입니다. 하서(河西)는 곧 문정공의 호(號)입니다. 선정들이 앞뒤로 창명(倡明)하고 서로 도운 것이 이토록 성대하고 지극합니다. 또 더구나 ‘큰 근본이 중정(中正)을 얻었다.’라고 한 교지와 ‘한 손으로 삼강(三綱)을 부지하였다.’고 한 유시는 해와 별처럼 밝고 단청처럼 빛나고 있으며, 우리 전하의 큰 성인의 자질과 지공무사한 지혜로 더없이 감모하고 미덕을 표창하기를 이토록 극진하게 하였으니, 만약 대단한 현자(賢者)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성대한 도덕에 아름다운 절의(節義)를 겸비한 자야말로 고금에서 찾아보더라도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금일에 종사를 요청하게 된 것은 실로 너무 늦은 잘못이 있다 할 만합니다만, 대개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기다린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 되지 못하고 선비들의 취향이 어그러져, 바른 학문이 번성하지 못하고 간사한 말이 활개를 치고 있으니, 이는 어찌 현인과의 시대가 날로 멀어지고 남긴 교화가 점점 아득해져 본받을 대상이 없어 어디로 향할까 갈피를 못잡게 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속히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여 사람마다 높게 우러르고 존모(尊慕)하며 보고서 감동을 받아 의귀하게 하지 않는다면, 큰 성인이 도학(道學)을 높여 호위하고 공덕을 높이고 보답하는 교화에 있어서 어찌 참으로 중차대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선정신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요청에 대해 특별히 윤허하여 사도(斯道)를 부지하여 세우고 원기를 배향할 방도로 삼게 하소서.
신이 상소문을 갖추어 올리려 할 즈음에 8도 유생의 상소에 대하여 내린 비답을 보고서 손을 모아 쥐고서 감복해 마지 않았습니다. 대개 신들이 도를 높이는 데에 정성이 부족하여 우러러 요청하는 것이 늦어졌음을 깨닫게 되니, 위를 우러러보나 아래를 굽어보나 부끄러움과 한탄이 일어 더욱이 용납될 곳이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선정 문정이 바로 바른 맥을 찾고 여러 현자들을 창기(倡起)하였으며, 문순(文純)처럼 참되게 학문을 쌓고 실천한 행실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그에게 나아가 질정받아 의문을 해결하였으니, 문순이 이른바 그의 도학은 비할 이가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격언이다. 너희들의 요청을 누가 가당치 않다고 말하겠는가마는 태학(太學)에서 ‘알았다’고 쓰지 않아 지금에서야 비로소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으니 상황을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들이 일전에 올린 글에 대한 비답이 내린 뒤에 이 글을 마련했다고 여길 것이다. 성균관의 일은 타당치 않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화성부(華城府)가 신천군(信川郡)에서 흙을 사들여 제방을 쌓으려 하면서, 감교(監校)가 백성들의 농지에 댈 보(洑)의 물을 빼앗았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니,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사실을 밝혀 보고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조사하라고 한 명은, 한편으로는 일이 화성부와 관계되어 하나의 민폐라도 끼치지 않으려 한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궁(宮)의 제방뿐만이 아니라 정히 백성들의 전답을 위해서였다. 수령이 된 자가 금단하지 못하고 도신(道信)이 된 자가 상세히 조사하지 못하니 감영과 고을의 일에 제각기 직분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찮은 차인(差人)이 제멋대로 폐단을 만들고 있는데도, 화성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서는 감영과 고을이 그 사이에서 가부에 대한 언급을 하려들지 않았다. 조정의 본의와 고심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해당 수령은 비록 혹시라도 몰랐다고 하더라도 해당 감사가 어찌 소홀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인가. 해당 도신은 추고하고 해당 수령은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처치하게 하라.
앞으로는 이 도나 저 도를 논할 것 없이 화성부 소관의 일이라고 칭탁하고서 하나라도 폐단이 있는데도 즉시 보고하지 않는 경우 도신과 수령은 엄중한 문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이른바 감교(監校)는 감사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가하여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의 제각(祭閣)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 전교에서 이르기를,
"고려 태조는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가 있다. 그런데 어제 수신 조진관(趙鎭寬)이 아뢴 바를 들으니 능앞에 있는 제각이 거의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역대 선조에서 잘 보호하도록 신칙한 뜻을 지킨 것인가. 수신에게 분부하여 가서 수리하고 일을 마친 뒤에 장계를 올리게 하라. 그러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할 것이다.
옛날 숙묘조 30년에 가을 제사의 제물을 본부에서 봉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역대 왕의 능침에 혹시라도 향을 내리는 곳이 있다면 마땅히 이동이 없이 똑같이 시행해야 될 것이다. 고려 태조의 현릉에 봄가을 향사를 지낼 때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는 일을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조가 수로왕릉(首露王陵)을 향사하는 관례에 따라 시행하자고 아뢰었다.
6월 28일 임인
제주도의 암말을 함부로 반출하는 일을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제주 목사 유사모(柳師模)가 금지시켜야 된다는 뜻으로 장계한 것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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