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갑진
경기·충청·전라 세 도의 유생 이종호(李種祜)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종사(從祀)하라는 청을 거듭 아뢰었다. 그 상소에 아뢰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문교(文敎)가 크게 밝혀져, 덕이 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법전과 풍속을 세우고 절개를 격려하는 거조가 빠짐없이 차례대로 닦여 밝혀졌습니다. 더욱이 선정(先正)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드문 특별한 은총을 내려 전후로 표창하는 하유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근본이고 치우침 없이 바르다는 하교와 혼자의 힘으로 삼강(三綱)을 부식시켰다는 칭찬은 큰 어진이의 수준이 아니면 어찌 이러한 제목(題目)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 선정에 대하여 진실로 자세히 알고 깊이 좋아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또한 지난번의 비답 가운데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는가.’라고 하교하신 것이 있으니, 선정을 올려 배향하는 거조는 우리 전하께서 진실로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 선정신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은 도덕과 학문이 실로 일세에 뛰어난 큰 어진이요 문성공(文成公)의 적전(嫡傳)이므로, 사론이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고 유생들의 상소 또한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신들의 높여 우러르는 정성을 아울러 거행했어야 하는데, 일전의 도소(道疏)에 대한 비답에 ‘은거해 있는 시골의 선비와 더불어 강구하여 밝히라.’고 하교하시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지금 감히 갑자기 아울러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 신들이 똑같이 사모하여 우러르는 정성에 있어서는 진실로 실망을 면할 수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의 풍습이 날로 낮아져 삿된 말이 더욱 활개를 치니, 이를 타파하는 방도는 오직 정학(正學)을 크게 밝히는 데에 달려 있고 정학을 크게 밝히는 방법도 오직 유현(儒賢)을 높여 숭상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문정공을 배향하는 거조는 실로 오늘날의 첫번째 급선무입니다. 삼가 속히 밝은 법전을 거행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어렵고도 신중히 해야 할 바이다.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다.
7월 2일 을사
대신들이 청대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내각에 긴 편지 한 통을 보내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저는 병으로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근래 양호(兩湖)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심신이 놀라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어찌 차마 수천 년 동안 없었던 흉언(凶言)을 글에 적어 후세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만약 이 문제를 가지고 한결같이 침묵만 지킨다면 우리 성상께서 받은 무고를 변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후자가 중하고 전자가 가벼운 그런 의리를 인하여 이에 여러 군자들에게 두루 고합니다.
근래 호남에서부터 일종의 흉론이 호서로 전파되어 감히 다섯 가지 조항의 망극한 무고로써 은연중에 이를 감히 말할 수 없는 지위에 돌렸습니다. 즉 ‘첫째, 진(秦)나라처럼 축성(築城)을 한다. 둘째, 한(漢)나라처럼 매관(賣官)을 한다. 셋째, 수(隋)나라처럼 사치(奢侈)를 한다. 넷째, 당(唐)나라처럼 여알(女謁)이 성행한다.’는 것이고, 다섯째는 전례(典禮)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봉조하 김모가 이 다섯 가지 일을 가지고 바야흐로 상소를 만들고자 한다.’라고 하며 서로 유언 비어를 만들어 거의 집집마다 전파하다시피 하니, 이 어떠한 변고이며 이 어떠한 흉역(凶逆)입니까. 난신 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심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흉역스러운 심보는 을사·병진년의 여러 역적 및 최근의 역적 준(浚)과 서로 표리가 됩니다. 이에 생각이 미치면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하고 담이 떨립니다. 제가 죽기 전에 성상에 대한 무고가 분변되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나라를 저버린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이에 감히 피눈물을 흘리며 변명하니, 여러 군자께서도 평소에 듣고 본 바를 가지고 그 밝히지 못한 바를 더욱 밝혀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화성부(華城府)는 곧 선침(仙寢)이 자리잡고 있고 경기의 관방(關防)이 되니 경영하여 성을 쌓고 우물을 파는 것은 실로 우리 성상의 원대한 규모와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장정을 고용하여 부역을 시키니 농민들에게는 조금도 방해되지 않고 재물을 저축했다가 분배하여 사용하니 탁지부에는 조금도 손해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택하여 관직을 제수해서 명기(名器)를 아끼는 데 있어서는 성상의 뜻이 뭇 왕들보다 탁월합니다. 전조의 의망 단자가 들어올 때에는 먼저 반드시 그 사람됨이 어떠하며 이력이 어떠하며 명망이 어떠한지를 아랫사람들에게 물어 신중하게 처리하여 낙점을 하였습니다.
또한 검소함을 숭상하는 법은 곧 우리 열성조의 가법인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선대의 가르침을 삼가 지키는 데 더욱 뜻을 기울이고 계시니 이는 모든 신하들이 항상 공경하고 감복하는 것입니다. 침실의 여러 기둥에 고운 색채로 칠을 하지 아니하고 휘장에 푸른 색 목면으로 선을 둘렀고 자리는 띠풀로 만든 것을 사용하고 계시며 어복(御服)은 여러 번 빨아 꿰맨 곳이 혹 터지기도 하였고 평소의 반찬 수도 점점 줄여 맛있는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어찌 저만이 아는 바이겠습니까. 또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듣고 본 바입니다.
넷째 조항에서 운운하여 부도한 말을 떠들어대어 없는 것을 있다 하니, 간사하고 흉악한 계모는 오로지 듣는 사람들을 의심케 하고 어지럽히려는 데에 있습니다. 저 네 임금은 과연 어떠한 군주였습니까. 성스러운 덕과 큰 도량을 지닌 우리 성상께서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무고를 받았으니 맹세코 이 적들과 함께 한 하늘 밑에서 살 수 없으며 다만 살을 씹어 먹고 가죽을 깔고 자고 싶을 뿐입니다.
전례에 관한 일에 이르러서는, 우리 성상이 견지하고 있는 의리가 지극히 정미하고 변란에 대처하는 것이 바름을 얻어 뭇 신하들이 감히 그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땅히 받들어 행하여 찬양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여야 할 뿐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떳떳한 양심이 있다면 어찌 차마 그 사이에서 시비를 따지거나 가타부타할 수 있겠습니까. 인심과 세도(世道)가 비록 침몰하였다 하더라도 성명의 세상에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이러한 흉언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유언 비어를 주장하니 반드시 소굴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즉시 토벌을 청하고자 합니다만, 아직 그 뿌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호남에서 나왔으니 호남의 도신(道臣)은 아마도 끝까지 조사해 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여러 군자들이 이 편지를 밝게 헤아려 그 소굴을 타파할 수 있는 방도를 깊이 생각함으로써 성상에 대한 모함이 쾌히 풀리고 의리가 크게 밝아지도록 한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여러 대신들이 들어와 면대를 청하니, 상이 승지로 하여금 영상에게 전교하게 하기를,
"조정이 본래 무사한데 어찌 면대를 청할 것이 있겠는가. 날씨가 이처럼 무더우니 즉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유시하기를,
"내각에서 돌려가며 보고 있는 편지를 내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이미 사사로운 편지이니 본래 조정에 올릴 만한 일이 아니고 보면 경들이 면대를 청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이번 봄에 민간에서 소요스러운 이야기가 성행하였는데 때때로 와전되는 바도 있어 가경제(嘉慶帝)가 조선에 대해 체발(剃髮)하기를 청하였다는 말이 있었고 심지어 건륭(乾隆) 황제가 비답을 위조하였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봉조하의 의소(擬疏) 또한 이러한 부류이다.
대저 축성에 관한 일은 내 생각 안에 있는 바이니 외간에서 어찌 알겠는가. 사치에 관한 한 조항은, 오늘날과 같은 습속으로는 돌이켜 반성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매관(賣官)에 관한 것과 여알(女謁)에 관한 것은, 이는 사첩(史牒)에 있는 구절을 주워 모은 데에 불과한 것으로 잠꼬대하는 말과 다를 것이 없으니 본래 깊이 살펴볼 것도 없다. 또한 옛사람이 말하기를,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가령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면 이 네 가지 조항으로서 장주(章奏)에 오른 일들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흔쾌히 받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전례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봉조하는 단지 나의 뜻을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봉조하가 궁료로서 제일 처음 연 연석에서 강의 토론한 것이 마침 중훼지고(仲虺之誥)의 ‘예로써 마음을 제어하고 의로써 일을 제어한다.’는 가르침 및 《사기(史記)》 한선제기(漢宣帝紀)의 ‘돌아가신 어버이를 애도한다.’는 말이었으니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봉조하가 혹 우러러 헤아린 바가 있었던 듯하다. 대저 내 어찌 혹 조금이라도 근본에 보답하려는 성의에 부족함이 있어서 그리하였겠는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강구한 바가 있었던 것이니, 지극히 정미한 도리를 구하여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한 보답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대개 제왕가에서 추숭(追崇)한 예가 예로부터 한이 없이 많았는데, 그 식견이 나보다 미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여 강구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의 논의 가운데 근사한 의논에는 이르기를 ‘구양수의 복왕 헌의(濮王獻議)는 의거한 바가 없지 않았다. 더구나 뭇 정사를 대리 청정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으니 더욱이 복왕 헌의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데, 나의 생각에는 추숭하는 한 가지 일이 애당초 대리 청정과는 서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진실로 의리에 합당하다면 주나라에서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존한 바도 있으며 역대의 창업의 군주들도 모두 사친(四親)의 묘를 세운 바 있다. 진실로 그것이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어찌 대리 청정[代聽] 두 글자로써 말할 수 있겠는가. 병신년 초에 있었던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에 대한 처분을 놓고 혹 과중한 것이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역적 재한이 말미암은 지름길이 이미 매우 바르지 못한 것이었고 심지어 끝내는 공갈 협박하는 일까지 벌여 극에 달하였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근거 없는 말의 근원을 어디에서부터 미루어 찾아낼 것인가. 비록 끝까지 조사해 내지 않더라도 자연 사그러들 것이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봉조하의 편지에서 이미 호남으로부터 시작되어 호서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그 말을 전한 사람과 들은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연석에서 물러난 후 곧 비밀히 양호(兩湖)에 공문을 보내어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면대를 청한 후에 문득 조정에 미루어 올릴 일을 만드니, 어찌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이 봉조하를 쳐서 흔들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사자가 이와 같은 것은 비록 괴이할 것이 못 되나, 조정의 처분에 있어서는 마땅히 조용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어찌 위아래가 서로 버틸 일이겠는가."
하고, 양사의 대관들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교리 오정원(吳鼎源)이 봉조하 김종수의 긴 편지를 인하여 상소하여 즉시 자세히 조사토록 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이 이후에 이처럼 조지(朝紙)에도 없고 상소장에도 오르지 않은 일을 대관·소관을 막론하고 만약 입에 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하교에서 말한 법률을 적용할 것이다. 이로써 엄히 신칙하라."
하고, 이어 이를 받아들인 승지들을 모두 성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가 곧 용서해 주었다.
옥당의 신하들이 면대를 청하였는데, 아울러 체차시켰다.
봉조하 김종수에게 올라오지 말도록 유시하였다.
봉조하 김종수가 사람들의 말이 망극하다는 이유로 의금부에서 석고 대죄하고 명을 기다렸다. 이에 하교하기를,
"경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이와 같이 한다면 도리어 떠벌리는 것이 된다."
하고, 명을 기다리면서 올린 계사를 도로 보내었다. 이어 아침이 되거든 입시하라고 유시하였다. 이에 종수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은 실낱 같은 목숨을 부지하고 시골에 물러나 살고 있으면서 온갖 생각이 모두 사라졌고 오직 이 의리를 밝히고 성덕(聖德)을 높인다는 말을 밤낮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있으니, 신이 죽더라도 이 마음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성명의 세상에 일종의 흉도들이 너무도 흉악하고 어그러진 무고를 지어내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까지 미칠 줄 헤아렸겠습니까. 오늘날 신하의 분수로서는 오직 끝까지 조사하여 죄인을 찾아내서 살을 씹어 먹고 가죽을 깔고 자고 싶을 정도의 분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할 것입니다. 저 흉도들이 신의 성명을 빌어 사람들의 마음을 의혹되게 하고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히니, 길에서 듣고 바로 길에서 이야기하는 예사로운 소문이 아니라 집집마다 의도적으로 전달하고 다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죽지 않아 성상의 몸에까지 모함이 미치게 한 것이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모함을 당한 일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오늘날 제가 당한 것과 같이 지극히 참혹하고도 혹독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상에 대한 무고가 해명되지 않으면 신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면대를 청하여 자세히 조사해 볼까 생각하였다가 다시 상소를 올려 토벌하기를 청하려 하기도 했으나 죄를 진 신하로서 끝내 당돌할 듯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묵묵히 숨죽인 채 그만두어 임금을 위하여 앞다투어 목숨을 바치려 하는 의리를 생각지 않는다면 성상에 대한 무고가 해명될 길이 없고 신의 진심 또한 피력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먼저 엉성한 문자로 조정 신하들에게 밝게 고하여 이로써 자세히 조사하여 통렬히 해명할 바탕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대신들이 연석에 올라와 자세히 조사하기를 청하고 유신들이 상소를 올려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엄한 전교를 내려 물리쳐버리셨다 하니, 신은 이에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에 금오문(金吾門) 밖으로 달려나가 엎드려 주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사관이 와서 은혜로운 유시를 전하고 아침을 기다려 입시하게끔 하였습니다. 다만 말의 근원이 확실히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몸은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성상에 대한 무고가 쾌히 해명되는 날이 곧 신이 살 수 있게 되는 때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사관이 돌아옴에 경의 부주를 살펴보았다.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경은 어찌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 부주를 조지에 내어 보인다면 중외의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 의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주는 봉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경은 마음을 편히 갖고 아침을 기다려 사관과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3일 병오
제호탕(醍醐湯)과 청심원(淸心元)을 태묘(太廟)의 향관(享官)들에게 하사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처럼 더운 날씨는 처음 본다. 제품(祭品)의 요리와 진설을 거듭 엄히 신칙하라. 그리고 제사를 올릴 때에는 세탁한 의복으로 다시 갈아 입으라. 그 가운데 연로하였거나 병이 든 자가 있으면 고쳐 차임하거나 혹 편리한 대로 겸하여 행하도록 하라. 오늘 저녁에는 편전에 나가 재계하면서 제향의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겠다."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 내각 제학 심환지(沈煥之)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봉조하의 긴 편지는 사사로운 편지이니 어찌 조정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신이 면대를 청하고 옥당이 상소를 진달한 후에 일이 그만두어 버릴 수 없는 것이겠기에 밤에 비로소 특별히 등본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 자세히 보려고 하였으나 이른바 다섯 조항 운운한 것만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와 이를 땅에 던져버리고는 다시 안중에 두지 않았다. 어제 전교 가운데 ‘묵운(默運)’ 두 글자는 이 편지를 특별히 가져다 자세히 보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전교하였던 것이고, 지금은 ‘묵운’ 운운하는 것도 또한 석양 바람에 날아갔다고 할 만하다.
대저 긴 편지 가운데 다섯 조항 운운한 것을 경들은 흉언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도무지 죄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이는 필시 시골에서 통사(通史) 정도만을 읽은 사람이 우연히 허풍을 떨어 이야기한 것이었고 이것이 이리저리 전파되었던 것인데 너무 가혹하게 간주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옛사람 가운데는 ‘폐하께서는 걸(桀) 주(紂)와 같은 임금입니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도 죄를 주지 않았었다. 이번의 일은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운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시 황제는 물론하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모두 한 시대의 걸출한 군주들이었으니 지금 어찌 반드시 이렇게 볼 것이 있겠는가. 비록 한 조목 한 조목 나누어 말하더라도, 근래의 성역(城役)은 진 시황의 성에 비교해 볼 때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하겠으니 그 말은 개나 닭의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진 시황의 잘못은 반드시 축성(築城) 한 가지 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닌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아래 세 조항의 경우는 자구가 모두 통사에서 뒤섞여 나온 말들이니 이 어찌 깊이 생각한 것으로 간주하여 깊이 죄줄 것이 있겠는가.
다섯 번째 조항에서 운운한 것의 경우에는 어찌 그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봉조하가 자기 주장을 엄하게 견지한 것은 받들어 따르려는 뜻이었는데 그 이면을 잘 모르는 자가 도리어 봉조하가 유독 이 의리에 엄하다고 하여 이내 이 때문에 상소를 쓴 것이라고 하니 또한 어찌 책할 것이 있겠는가. 가령 이 다섯 가지 조항이 장주(章奏)에 올랐거나 어전에서 곧바로 진달되었다면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니 어찌 이 말로써 그 사람을 죄줄 수 있겠는가. 다만 황당한 말로써 무식한 무리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어댄 것이니 습속이 비록 증오할 만하나, 옛사람이 비방목(誹謗木)을 세워 조정과 재야를 비방하도록 했던 뜻으로 따져본다면 또한 모두 책하기에 부족하다고 할 만하다. 나의 뜻이 실로 이와 같으니 경들도 이와 같이 본다면 애당초 이렇게 분란스러운 일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이 전교는 스스로 생각건대 평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힘을 쓴 소치라고 여긴다. 봉조하는 일이 자기에게 관련되어 있었으니 임금의 뜻을 선양하고 임금에게 훌륭함을 돌리는 마음으로써 어찌 분통스러운 마음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만약 연석에 올라와 이 말을 듣는다면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힘이 다할 때까지 받들어 따라야 할 것이다. 더구나 예악 형정(禮樂刑政)은 자연 그 출처가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이 처분은 내가 그 사이에서 저울질한 바가 있는 것이니 경들 또한 어찌 감히 이 전교를 굳이 어겨 형정의 조화가 경들로 인해 막히고 가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이미 밝게 유시하였으니 내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오늘 연석에서의 전교는 조지(朝紙)에 내지 않더라도 대신과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잘 알게 하라."
하였다.
봉조하 김종수가 3일 동안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관을 보내어 명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연석에 올라오도록 유시하라."
하였다. 종수가 성상에 대한 무고가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한 주벌을 받기를 빌면서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성을 나갔다. 이에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서늘해지거든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7월 4일 정미
태묘에 제향을 지낸 후에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봉심하고서 수리하고 청소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이만수(李晩秀)가 아뢴 것을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예조 참판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돈독히 권면하였다.
7월 5일 무신
비가 내렸다.
차대(次對)하였다. 장령 현중조(玄重祚)를 대선(臺選)에서 삭제하였다. 연석에 올라 전계(傳啓)를 하였는데 원계(原啓) 가운데 든 사람을 간통에서 빠뜨려 주서(注書)가 상에게 아뢰지를 못하였다. 이에 정원이 추고를 청한 것을 인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다.
교리 송익효(宋翼孝) 등이 김종수의 긴 편지에 관한 일로 인하여 차자를 진달하였으나 승정원이 금령(禁令)이 있었다고 하여 물리쳐 버렸다. 익효 등이 마침내 상소를 올려 여러 승지들을 논척하였다. 이에 원소(原疏)를 돌려주도록 명하고, 이어 그저께 연교(筵敎)를 내린 후에 금령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다.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6일 기유
이유경(李儒敬)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
7월 7일 경술
칠석제(七夕製)를 반궁(泮宮)에서 설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사성 윤득부(尹得孚)는 정고(呈告)하였고 동지관사 심환지(沈煥之)·서용보(徐龍輔)는 모두 병이 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시제를 존경각(尊經閣)에 보관해 두고 제생들은 물러나 다시 소집하기를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7월 8일 신해
차대하였다.
이태형(李太亨)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에게 이르기를,
"《춘관지(春官志)》는 일찍이 유의양(柳義養)으로 하여금 편집하도록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중지하였으니 경이 뒤를 이어 완성하면 좋겠다. 《탁지지(度支志)》는 박일원(朴一源)이 낭관이었을 때 편집한 것인데, 호조에 그 등본이 남아 있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심이지(沈頤之)가 호조 판서일 때 일을 잘 아는 계사(計士)와 더불어 세 권의 책자로 만들어 탁지의 법례를 갖추어 실어 놓은 것은 신이 막 베껴내었지만, 박일원이 편집한 것은 신이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권의 책자는 베껴낸 후에 내가 볼 수 있도록 들여보내도록 하라. 박일원이 편집한 것은 필시 그 집안에 남아 있을 것이니 이 또한 1건을 잘 베껴서 호조에 두도록 하면 좋겠다. 또 그 사람이 글을 잘 하니 그 후세 사람이 만들더라도 필시 그만하지 못할 것이다. 고(故) 판서 김노진(金魯鎭)이 낭관 박일원과 편집한 《추관지》를 일찍이 하나를 가져다 보니 편집을 잘 했다고 할 만하였다. 여기에 더 넣을 만한 그 이후의 기록들을 더 편집하여 완성시킨다면 간행하여 고실(故實)로 마련해 둘 만할 것이다."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임제원(林濟遠)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괴산에 사는 문씨(文氏) 성을 가진 여인은 상인의 부인으로서, 그 남편이 한번 외출해서는 몇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몹시 빈한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여 시어미를 공양하고 힘을 다하여 자식을 길렀는데, 그 효열(孝烈)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한 동네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우대해 주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의 이파금(李巴金)이란 자가 꼭 욕보이고자 하여 평소 틈을 엿보며 겁탈하려는 흉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스스로 더욱 굳게 맹세를 하고 평소 생활할 때에 단도를 품어 스스로 방어할 뜻을 더욱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내가 끝내 그 음모를 그치지 않자 집을 팔아 소를 빌어 시어미를 데리고 함께 떠날 계획을 세웠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사를 앞둔 전날 밤 화가 갑자기 닥쳐 오두막집 깊은 밤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등불이 갑자기 꺼지고 칼도 빼앗겼으나 늙은 시어미와 약한 오라비는 구해 줄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독하게 구타를 하고 사납게 발길질을 하였으므로 멋대로 유린하도록 놓아둘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목숨을 잃게 되는 참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옥으로 불러들이는 날 이러한 흉악한 자는 그 즉시 만번 죽였더라도 오히려 그 철천의 원한을 위로하기에 부족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복계(覆啓)하니, 판하하기를,
"우뚝한 정조가 옥과 같이 순수하고 이슬과 같이 맑도다. 하호(下戶)의 마을에 이러한 열행(烈行)이 있을 줄 어찌 헤아렸겠는가. 마땅히 그 훌륭함을 드러내는 거조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흉악한 자의 공초 가운데 ‘이전부터 더럽혀진 몸이었다.’고 운운한 것은 실로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횡설 수설한 것임을 안다. 만약 그 정녀(貞女)로 하여금 알게 한다면 또한 지하에서 통한을 머금게 될 것이다. 도백이 고복(考覆)하여 친히 심문할 때에 이 한 조항에 대해 횡설 수설한 것이었다는 자복을 받아 낸 후에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해도에서 이파금의 자복한 공초를 가지고 장문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물어 의논한 후에 아뢰기를,
"문씨 성을 가진 여인은 그 남편이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다잡아 먹고 수절하였으며, 시어미가 늙어 달리 의탁할 곳이 없자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또 포악한 자를 만나 여러 가지 위험과 욕을 겪자 단도를 가슴에 품고서 스스로 맹세하여 목숨을 다하도록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 절열(節烈)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곤궁한 하호의 지극히 미천한 한 여인으로서 성조의 가상히 여기는 분부를 거듭 입었고 보면 고무시켜 권장하는 방도에 있어 정표(旌表)하는 법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군기시 제조 이주국(李柱國)이 아뢰기를,
"무고(武庫)를 처음 설치한 것은 오위(五衛) 때였는데 여러 가지 군수 물자는 모두 본시에서 마련해 왔습니다. 그런데 각 군문(軍門)이 창설된 후로부터 본시가 쓸모 없는 관사로 변하여 세입이 따라서 줄어들었으나 용도는 전에 비하여 줄어든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원역(員役)들의 요포(料布)에 있어서 계속 줄 방도가 없으니 지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파진(別破陣) 및 별 할 일 없는 원역들을 줄여야만 합니다. 화약고를 삼청동에 설치한 것은 염초(焰硝)를 구워 비치해 두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근래 본시의 염초 굽는 법을 없앴는데 화약고 건물은 예전대로 그냥 있고 참군(參軍) 및 원역들도 여전히 수직(守直)하고 있어 비용이 또한 적지 않으니 헐어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화약 7백여 근은 본시로 옮겨다 두면 문제될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우의정 윤시동을 도제조로 삼아 본시의 사무를 바로잡게 하였다. 그후에 시동과 주국이 함께 등대(登對)하니, 상이 이르기를,
"맹자가 제 선왕으로 하여금 명당(明堂)을 허물지 말도록 권한 바 있다. 훈련 대장도 늙었는데, 어찌 반드시 옛사람이 경영한 바를 허물어버릴 것이 있겠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무고의 칼이며 갑옷들이 모두 날카롭고 견고하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실시할 만한 재력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수직하는 관원들을 없애지 말도록 명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수직관을 없애지 않기로 한다면, 그들이 수직하던 화약고는 지금 월과 공인(月課貢人)들이 화약을 찧고 다듬는 곳으로서 무고에서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는 약환(藥丸)을 살펴 신칙할 사람이 없어 일이 매우 허술하니, 입직하는 관원을 두게 된다면 공인이 약환을 만들 때 아울러 신칙하도록 하여 실효를 거두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대개 무고라는 것이 그 체모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그 건물을 헐어 폐단을 바로잡자는 논의까지 나오니 무슨 일이 이보다 더 한심하겠는가. 시양(寺樣)을 복구시키고 시속(寺屬)을 의지하여 부고(府庫)가 충만해지고 기물들이 견고하고도 날카로워져서 확실하게 일신되어 뚜렷한 실효가 있도록 하라. 이 뜻을 가지고 경이 말을 만들어 삼청동의 무고 아문에 써보내라."
하였다.
7월 9일 임자
봉조하 김종수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의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은 곧 의리를 밝히고 성덕을 높이는 데 있었는데, 근거 없는 흉서에 이름이 올라 망극한 위험한 지경에 걸려 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신이 삼가 내려진 연석에서의 말씀을 보니 시골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로 귀결시키고 개나 닭 울음소리로 취급하셨습니다. 진실로 대성인의 가슴속의 진심과 넓은 도량을 우러르니 사악한 자가 착한 백성으로 교화되는 효과를 바로 기대할 만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닌 자라면 누군들 삼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느껴 깨닫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 흉도들이 간교한 계략을 퍼뜨리고 시행한 것이 이미 천리와 인정을 벗어나는 것이고 보면 아마도 이로써 책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삼가 최근의 처분을 보건대 일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번번이 금령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금령이 시행되면 언로가 막히고 언로가 막히면 임금의 총명이 가리워지고 임금의 총명이 가리워지면 그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전 승지 이서구(李書九)의 상소의 경우 실로 온 나라의 공론에서 나온 것으로서 의리의 관건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승정원에 있던 승지가 오히려 봉입하기를 어려워하였고 보면, 이것은 금령의 엄중함이 도리어 의리보다도 더한 것이었으니, 이 어찌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번의 일이 설사 성상의 분부와 마찬가지로 황당한 잠꼬대와 같은 소리를 곧 스스로 부르짖고 스스로 화답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죄가 이미 용서하기 어려운 것을 범하였고 보면 한번 엄히 조사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금령을 시행하여 그 근본을 조사하고 그 죄를 토벌할 수 없도록 하시니 신은 금령이 나옴에 난신 적자들이 장차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신이 당한 바는 곧 한 시각도 차마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자세히 조사할 길이 막혀 드러내 밝힐 수가 없으니 자신을 돌이켜보며 스스로 슬퍼하면서 곧바로 눈을 감고 싶습니다.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대관(大官)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만약 성상의 교화를 선양했다면 흉도들이 유언비어를 지어냈다고 하더라도 다시 누가 믿어 화답하고 퍼뜨려 전파하기를 이 지경에 이르게까지 하였겠습니까. 이는 곧 신이 나라를 저버리고 은혜를 저버린 하나의 큰 죄입니다. 한번 성상을 뵙고 진심을 다 피력하는 것이 곧 신의 간절한 소원입니다만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러한 더러운 몸으로 어찌 감히 예장을 갖추고 다시 성상의 앞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수문(修門) 한 걸음 앞에서 이 삶을 마치렵니다."
하였는데, 봉환(封還)하도록 명하였다.
7월 11일 갑인
호군 서유신(徐有臣)이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경(先卿) 문청(文淸)은 남 문청(南文淸)과 더불어 앞뒤로 계고(稽古)를 도와준 공이 있으니 내가 경들을 마치 집안 사람처럼 여겨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하고 무슨 바람이든 다 이루어주었다. 경은 선경의 아들로서 영화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을 두려워하여 결단코 용감히 물러나 치사하려고 하여 그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았으니, 경의 말은 감동할 만하고 경의 마음은 귀히 여길 만하다. 지금 시속을 바로잡을 기회를 만나 경처럼 관직에 욕심이 없는 자에 대해서 만약 그 간절함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찌 선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소가 간절하여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한다."
하였다. 유신은 영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경술(經術)과 행의(行誼)로써 이름이 났다. 상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에 박종갑(朴宗甲)과 더불어 주연에 나아갔기 때문에 은혜로운 대우가 매우 융성하였다. 병신년 이후에 홍국영에게 중상을 당하여 10년 동안 배척당해 있다가, 경술년에 비로소 용서를 받아 문병(文柄)을 관장하게 되어 앞길이 다시 열렸다. 그 아들 서영보(徐榮輔)가 또 근밀한 자리에 출입하게 되었으나 유신은 더욱 영화로움이 지나친 데 대하여 두려워해서 나이가 아직 차지도 않았는데 치사를 청하였다. 이에 한마디 말로 즉시 윤허하였으니 신하나 군주 모두 빛나게 되었다. 이에 조야(朝野)가 우러러 감탄하였다.
부교리 오정원(吳鼎源)이 상소하기를,
"금법을 만들어 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옛 역사책에도 없는 바인데 한 가지 일이나 두 가지 일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금지시켜 버리십니다. 이에 거의 어떤 일, 어떤 말이건 금하지 않는 것이 없어, 말하는 자가 설혹 할 말이 있더라도 백 번 빙빙 둘러서 하여 혹시라도 저촉되는 바가 있을까 두려워하니 그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치기에는 부족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이런 말은 없어도 될 것입니다.
금령을 설행한 지 이미 오래됨에 눈과 귀에 점차 익숙해져, 승정원의 신하가 한결같이 물리쳐버리는 것을 능사로 삼고 삼사의 관리가 문졸(門卒)에게 눈짓하여 쫓아내버리는 것을 묘한 계책으로 삼는 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이 서로 따라 행하여 일이 권세를 빙자하여 농간을 부리는 데 가까우니 세도(世道)에 해가 되는 것이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여러 대신(臺臣)들이 토죄를 청하기 위하여 금문(禁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장(門將)이 저지하여 서로 여러 시각 동안 버텼는데, 벽제 소리를 내며 나아갔다가 가로막혀 물러나 이러저리 방황하여 보고듣기에 놀랍고 부끄러웠습니다. 기성(騎省)의 신하가 수금(收禁)하기를 상소로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직무를 집행하는 뜻으로서, 설행한 금령과는 무관한데 승정원이 어렵지 않게 배척하여 물리쳐버렸습니다. 일전에 봉조하 김종수가 상소를 진달할 때에도 또한 문장에게 저지당하였고 기당(騎堂)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여 마침내 물러난 바가 있었습니다. 비록 상소의 말 가운데 금령에 저촉되는 무슨 말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대신은 임금이 공경히 예우하는 바인데 멋대로 조절(操切)하였으니 신은 실로 애통합니다. 삼가 아울러 사실을 조사해서 다스려 장래의 일을 징계하도록 하소서.
한 달쯤 전에 대신(臺臣)에 대해 처분한 전교 가운데 ‘쥐새끼 같은 좀도둑’ ‘만족할 줄 모른다.’는 등의 말은,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신은 삼가 성명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도로 거두어 들이도록 특별히 명하여 성덕을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령을 설행한 것은 시조(時措)의 마땅함에 따른 것이다. 궐문을 지키는 것은 곧 기당의 직분 안의 일이다. 상소를 올리거나 물리침에 있어 어찌 대관 소관의 나뉨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대가 구별하여 말한 것은 크게 착각한 것이다. 한 달쯤 전에 대신에 대해 처분한 전교 가운데 ‘만족할 줄 모른다.’ ‘쥐새끼 같은 좀도둑’이라고 한 말에 대한 일은 그대와 같은 안목으로는 당혹해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데 대한 경계는 《맹자》 초권 제1장에 나와 있으니 맹자가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쥐새끼 같다는 비유에 있어서는 그대는 자양(紫陽)의 책을 보지 못하였는가? 도둑이라는 글자를 첨가한 것은 오히려 더 자세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그대가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말하니, 그 말도 옳은 듯하다.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쥐새끼 같은 좀도둑’이라는 것 가운데 좀도둑이라는 글자를 주서(朱書)의 본문대로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장지현(張至顯)을 그 당사자만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지현이 상소하여 금령을 환수해야만 한다고 논하고, 또 봉조하 김종수가 상소하려고 대궐에 왔었을 때 병조의 당상관과 낭청이 저지하였던 죄를 말하였다. 또 여러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였을 때 좌상 채제공이 버젓이 집에 있었던 죄를 논하였다. 이에 엄한 전교를 내리고, 이어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하도록 명한 것이다. 또 상소를 받아들였던 승지 이경오(李敬五)를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끝부분에 붙였던 다른 설도 그 뜻이 바로잡아 구하려는 데 있었으나 해당 당상관에 대해 언급한 일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하고, 옥당 오정원(吳鼎源)도 삭직하도록 명하였다.
7월 12일 을묘
좌의정 채제공이 병을 이유로 물러나니, 어의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도록 하고 곧이어 약물을 주어 보내도록 명하였다.
팔도 유생 채홍신(蔡弘臣)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종향(從享)하기를 거듭 청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성묘에 종향함에 있어 김문정과 같은 도학(道學)과 문장, 절의와 기국(器局)으로서 참여되지 않는다면 사문(斯文)에 어떠하겠으며 공론에 어떠하겠는가. 조문열의 경우는 위대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다. 또 김문경을 아울러 배향하는 것이 근거가 없음에 대해서는 이전의 비답에서 충분히 다 설명하였다."
하였다.
7월 13일 병진
차대하였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
"장지현의 일은, 그의 상소에서 논한 바가 병조 당상과 문장(門將)을 처벌하기를 청한 데에 지나지 않아 비록 작은 일 같으나 관계된 바가 매우 크다. 이러한데도 엄히 처리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읍하고 사양하고 술마시는 사이에도 명하지 아니하여도 엄하고 말하지 않아도 미더워서 윤리 기강이 밝고 풍속이 순박하였다. 이렇듯 성대한 시절에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었는데도 맹자는 오히려 세상의 변화가 무궁한 것을 염려하여 ‘이윤(伊尹)과 같은 뜻이 있으면 괜찮지만 이윤과 같은 뜻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주역》에서도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이유 때문이 아니고 그 유래하는 바가 점차적인 것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인이 은미한 것에 대해 삼가하면서 미리 예견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는 것은 법과 기강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미 금령을 제정했다고 한다면 병조 당상이 법령을 받들어 따른 것은 당연한 직분인데 그가 그 법령을 받들어 따랐다고 하여 도리어 죄를 삼는다면 어디에다 이 법령을 쓰겠는가. 천하의 대방(大防)을 보존하여 만세토록 인간으로서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곳에 달려 있는 것이다. 금령 이 한 가지 일은 나도 부득이한 데서 제정하게 되었으나 진실로 이웃 나라에 알려지도록 하거나 후세에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정사가 뜻하는 대로 잘 되고 사람들이 모두 가르침에 따른다면 또한 어찌 이를 거두어들일 때가 없겠는가. 이번 금령에 있어 비록 문적(文跡)으로써 보여준 바는 없으나 현수(縣首)의 율로써 문장들에게 분부하기까지 하였으니 금령을 설정함에 있어서 그 엄함이 비교적 중하다고 할 만하다. 병조 당상과 낭청의 일은 군사 규율과 같다. 설령 그 말대로 병조 당상과 낭청이 명령을 믿지 않고 또 금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 말류의 폐해가 반드시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과 같은 사람이 잇달아 일어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예로부터 난적(亂賊)을 주벌하여 의리를 밝힌 것은 당시의 군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천하 만세의 인간의 윤리와 사물의 법칙이 유지된 바이다. 몇 해 전의 ‘전첩(專輒)’ 두 글자는 진실로 좋은 말이 아니었는데 오늘날의 나라 기강과 습속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막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매우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삼사와 여러 재신들은 장지현이 법을 범했던 것을 논핵하지 않고서 무슨 얼굴로 연석에 올라왔는가. 나는 장지현에 대해 국청을 설치한 후에야 왕법이 제대로 행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자신의 생각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나라에 법금을 두어 밝게 게시한 가운데 한 가지라도 범하는 바가 있다면 그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이번 일에 대해서는 신들도 미처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금령이 이미 내려진 것을 밖에 있던 삼사들은 혹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문장이 저지하였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병조의 당상을 처벌하도록 청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금령이 내려진 것을 몰랐겠는가. 이것은 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상이 이르기를,
"무릇 일에는 큰 것이라도 용인할 수 있고 작더라도 눈감아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정원의 상소는 장지현의 상소와 그 표현에 있어서 비록 경중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의는 같다. 그러므로 추후에 처분한 것이다. 그 상소에서 전교 중의 단어를 고치도록 청한 데 대해서는 어려워할 필요가 없어서 곧바로 주서(朱書)의 본문대로 삭제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보기에 과연 지난번 것보다 낫다고 여겨지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전교를 곧바로 주서대로 고침에 본문의 체계가 더욱 중해졌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이른바 깊이 보고서 손뼉치며 좋아한다는 무리이다. 대체로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으나 말함에 있어 제재할 줄 모르는 것이 또한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분수를 범하고 절도를 능멸하는 자가 종종 있기까지 하다. 경처럼 높은 관직에 처해 있는 사람이 일에 따라 고하고 경계하여 조금씩 두려워 그칠 줄 알게 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이번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분통스러워하며 죽고 싶어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힘껏 청하여 감히 다시 아뢰지 않을 수 없었으나 분통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연소배들이 그 말을 골라서 하지 않는 것을 괴이쩍어하지 않는데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며칠 전에 연본(筵本)이 나온 후에 우리 성상의 천지와 같은 위대함과 깊은 숲속과 같은 마음을 그 누가 흠앙하여 감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분하여 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도 떳떳한 양심상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지평이었을 때 아뢴 말은 지금에 와서 봐도 별로 과격한 말이 없었는데도 낭패를 면치 못하였다. 훌륭한 말이 날마다 진달될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오늘날 말하는 자들은 전혀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필경에는 스스로 구덩이에 빠지고 마니 어찌 세신(世臣)의 복이겠는가. 또한 옛날에는 말의 시비와 득실을 막론하고 조정의 말과 의논에는 자연 주장하는 사람과 공공의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암암리에 번갈아 말을 하여 산만하게 계통과 기강이 없어서 그 단서를 추측하기 어렵고 그 형세를 막기 어려우니, 이것이 과연 어떠한 모양이며 어떠한 모습이란 말인가. 최근 마음에 들어 등용한 신하 가운데 심환지(沈煥之)와 같은 사람도 허명(虛名)을 무릅쓰다가 실화(實禍)를 받았다고 할 만하니, 내 일찍이 그를 위하여 가슴 아파하였다. 경에게 물어봄에 경이 모른다고 말하고 심환지에게 물어봄에 환지도 모른다고 하니 누가 다시 아는 자인가. 나는 실로 개탄스럽다. 작년 이후로 조정의 분위기 가운데 변화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하게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신들도 진실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나 또한 어찌 감히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정현에 정배하였던 죄인 장지현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명하였다.
7월 14일 정사
전교하였다.
"한번 법금을 세웠으면 긴급하건 느긋하건 크건 작건 막론하고 마땅히 살펴 지키고 따라 행하면 될 뿐인 것이니, 어디에 문금(門禁)을 쓰겠는가. 근래 문장과 병조와 해방(該房)이 차례대로 감찰하는데 그것이 금법에 관련되는지의 여부는 도리어 나라의 기강과 관련되는 것이다. 금령을 범한 자는 마땅히 해당 법률로써 논하고 이후로는 병조 및 수문장 등이 다시는 상소에 관한 일에 관여하지 말도록 하라."
7월 17일 경신
이조에 명하여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후손 정종로(鄭宗魯)를 발탁해 쓰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일찍이 처음 벼슬하러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후에 듣건대 과연 수양한 바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곧 문장공의 봉사손(奉祀孫)이라고 하였다. 그 집안에 행실에 힘쓰는 선비가 있으니 어찌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지금 대정(大政)을 하루 앞두고 있으니 양청(揚淸)의 정사를 전관(銓官)에게 면대하여 신칙하도록 하라. 그 본보기를 보인다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이미 알려진 자부터 시험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18일 신유
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병조가 선부수 삼천(宣部守三薦)을 위하여 참상 작산인(參上作散人)의 별취재(別取才)를 설행하도록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후로 취재에 합격하는 사람의 시수(矢數)는 선천(宣薦) 취재의 예에 따라 써서 들이되 벼슬에서 떨어진 해와 거주지, 천거자의 이름을 일체 주로 달도록 하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혹 관직은 시수로 시험하여 취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과거가 관직보다 중하니 오히려 활쏘기 기예로 시험하여 취하는 데 장원이 된 자는 비록 백도(白徒)나 상천(常賤)이더라도 곧바로 6품으로 올려 동반(東班) 정직(正職)에 제수하라. 신은(新恩) 정사에 있어서 벼슬에서 떨어진 자에 대해 활쏘기로 재능을 비교하는 것으로써 복직시키는 것이 무슨 안 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취한 바가 허다한 자리 가운데 단지 한 자리일 뿐인데이겠는가. 대체로 근래 무관들은 한번 과거에 합격하면 다시는 활을 잡지 않으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이 규정은 매우 좋은 것이다. 도목 정사 때 취재한 후에 복직시킬 만한 자리가 없으면 현재 벼슬하고 있는 6품에 오른 자를 허사과(虛司果)로 내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취재를 우선 수용하여 뭇사람들을 그 무리로 나누고 부류에 따라 모아 각기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조 참판 홍명호(洪明浩)를 체직하고 황승원(黃昇源)으로 대신하였다.
7월 19일 임술
상이 도목 정사에 친히 임하였다. 【이조 판서는 김재찬(金載瓚), 참판은 황승원, 병조 판서는 조종현(趙宗鉉)이다.】 전교하기를,
"《충무전서(忠武全書)》를 읽을 때마다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일을 보고서 일찍이 크게 감탄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이 운대(雲臺)의 전투를 하지 않았다면 명량(鳴梁)의 대첩과 당포(唐浦)의 승리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막 해가 질 무렵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노를 저어 먼저 올라가서,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적선으로 하여금 서로 대항할 수 없게 하고서 정운 자신은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은 역사책에서 찾아보더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자가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 일을 정운이 해내었다. 한 가지 절개를 위하여 비분강개하여 충무공을 권면하여 흥기시킨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다만 하찮은 사람으로서 미천하여 드러나지 아니해서 아직까지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흠전(欠典)이요 궐사(闕事)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운대는 곧 부산 지방이다. 파총(把摠) 정혁(鄭爀)을 오늘 정사에서 부산 첨사로 차임하여 보내고 정운에게는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증하라."
하고, 이어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정혁을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옮겼는데, 정혁이 아비의 일을 이유로 부임하기를 어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개성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본부의 문관·음관·무관으로서 벼슬자리를 지냈던 사람에 대해 널리 여론을 모아 계문하니, 전교하기를,
"교수(敎授) 허유(許鍒)가 오래도록 벼슬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었다. 오늘 정사에서 특별히 거두어 등용하라. 전 중군(中軍) 박형(朴泂)은 일찍이 방어사를 지낸 자의 아들로서 아울러 변방 지역을 맡기려 하였는데 할 수 없었다. 옛날과 지금의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이와 같이 현격히 다르니, 어찌 조정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또한 오늘 정사에서 변방 지역으로 차송(差送)하라. 유학(幼學) 이춘위(李春韡)는 무과 출신 가운데 수위로 천거된 사람이니 오늘 정사에서 또한 거두어 쓰도록 하라. 그 나머지 여러 사람들도 차차 거두어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허유를 지평에 의망하였다.
이조 참의 한만유(韓晩裕)를 체직하고 이성보(李城輔)로 대신하였다.
돈령 판관 서일보(徐日輔)를 통정계(通政階)로 발탁하였다.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齊)의 봉사손이기 때문이었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의 후손 김수조(金壽祖),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후손 정종로(鄭宗魯)를 특별히 시험삼아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집안에서의 행실과 노력한 실적이 능히 향당과 주려(州閭)에 일컬어졌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더구나 문정공과 문장공의 집안 후손으로서 그 할아비의 교훈을 계승한 것이 어찌 더욱 기특하고 귀하지 않겠는가. 만약 장려하여 등용하고자 한다면 어찌 예사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수조와 종로를 지평으로 삼았다.
이의준(李義駿)을 특별히 발탁하여 부총관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주연(胄筵)에서 해박한 지식에 힘입은 바 많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중간에 오래도록 벼슬하지 못하고 파란을 겪었던 것은 다시 따질 것이 없다. 근래 편집·교정의 일에 있어 다시 묵은 문제를 맡겼는데, 그때 연석에 올라온 것을 보건대 백발에 심히 쇠약해진 상태였다. 어찌 널리 보상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 승지 이의준을 오늘 정사에서 총관 현직에 품계를 올려 의망해 넣으라."
하였다.
임도호(林道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 참의 이성보를 체차하고 중비(中批)로 채홍원(蔡弘遠)으로써 대신하였다. 다시 체직하여 성덕우(成德雨)로 대신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무릇 묘(廟)·사(社)·전(殿)·궁(宮)에 거둥하는 날 궁을 나설 때는 전부와 후부의 고취(鼓吹)를 진열만 해놓고 연주하지 않다가 궁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연주합니다. 만약 하루 동안에 그 여러 곳에 모두 거둥하는데 중한 곳에 대하여 먼저 이미 예를 행했으면 예가 이루어진 후에는 마땅히 규례대로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로는 성상의 전교대로 이렇게 마련하되, 사직의 기곡 대제(祈穀大祭) 뒤에 이어 종묘에 가서 전알(展謁)할 경우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종묘에 전알한 후에 이어 영희전(永禧殿)에 갈 경우에는 진열만 해 놓고 연주하지 않는 것 또한 법식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칠일제(七日製)를 반궁(泮宮)에서 설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정사에서 양남(兩南)에서는 남대(南臺)가 나오고 서북(西北)과 송도(松都)에서도 각기 대통(臺通)이 있었으나 유독 심도(沁都) 한 부(府)에서만 빠졌다. 이 부는 서문(西門)의 중요한 방어 지역인데 과거를 통해 벼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자못 애석하였다. 작년에 특별히 과거를 설행한 것은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려는 뜻에서 나왔으며 아울러 인재를 진작시켜 뽑으려는 뜻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토착 고가(故家)의 인재들이 빠져버려 아직까지도 마음으로 잊지 못하고 있다. 또 더구나 황 충렬(黃忠烈)에 대한 추부 제문(追袝祭文)과 최 충장(崔忠壯)에 대한 시고(諡誥), 칠의사(七義士)에 대한 증첩(贈牒)을 가지고 가는 것이 모두 모레에 있을 것인데임에랴. 대체로 충렬은 이 부의 사람으로서 능히 큰 절개를 세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으니 그 후손 가운데 이곳에 살고 있는 자를 어찌 거두어 녹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정사에서 초사(初仕)로 조용하라. 충렬을 만사(灣祠)에 뒤미처 배향한 것은 오히려 의를 일으켜 한 것이고 보면, 본부의 충렬사에 충렬로 하여금 함께 배향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호(祠號) 및 시호(諡號)와 부합하는 점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비록 그 부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또한 한결같이 제사하는 반열에 끼이게 하였다고 한다. 한때 잠시 살았던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황 충렬은 이 사(祠)의 주인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충렬공 황일호(黃一皓)에 대하여 특별히 예조로 하여금 길일을 잡아 강도의 충렬사에 올려 배향하도록 하라. 직임이 종백(宗伯)인데다 문임(文任)을 겸하여 총괄하였으니 홍문관 제학 민종현(閔鍾顯)으로 하여금 사실들을 모아 기(記)를 지어 충렬사의 문미에 게시하도록 하되, 제일 먼저 전교 및 제문을 싣도록 하라. 이를 인하여 예조 판서의 말을 듣건대 충렬 집안의 후손이 의주로 가서 현충사의 치제(致祭)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가난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까지 가기 어렵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고을들에서 먹을거리 및 역말을 넉넉히 지급해 주도록 분부하라.
신황(神皇)의 기신 망배례(忌辰望拜禮)가 모레에 있는데, 모레에는 형세상 반열에 참가할 사람들을 다 정리할 수 없고 경조(京兆) 문적(文跡)의 자세하고 소략함이 공론에 부합하지 않아 취사하는 데 있어서도 의거할 바가 부족하다고 한다. 예조 판서가 우상에게 가서 의논하여 하나의 완성된 법을 만들고 이어 경조로 하여금 이로써 정식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김수조(金壽祖)와 정종로(鄭宗魯)에게 유시하기를,
"인재를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한정된 바가 없어야 빼어난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또한 임금의 일을 대신하게 할 만한 것이다. 오늘날을 위해 생각해 보건대 모름지기 일체 눈과 귀에 익숙한 것을 뒤집어 이를 습속을 바로잡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며 갈고 닦는 방도로 삼도록 해야 된다. 그대들을 특별히 법을 맡은 반열에 두도록 한 것이 어찌 다만 그 노성인(老成人)의 전형(典刑)을 구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듣건대 마음에 보존한 바가 있다고 하니 그 실제를 더듬어 도움을 받는 데 일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역말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양도의 도신들에게 유시하여 말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7월 20일 계해
차대하였다.
돈령 도정 서일보(徐日輔)를 불러 보았다. 전교하기를,
"어제 특별히 자급을 올려준 것은 옛날을 생각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그대 보기를 마치 선조(先朝)께서 김구연(金九衍) 등 여러 사람을 대했던 것처럼 하니 이 또한 우러러 이해해야 할 곳이다. 평소 궁중의 전하는 말을 듣건대, 성모(聖母)께서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며 먼저 나라에 경사가 있기를 소원하고 그 다음으로 본댁(本宅)을 위하여 명인(名人)을 낳기를 원하시면서 일년 삼백 육십일을 하루처럼 하셨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해가 마침 성모의 회갑이 되는 해였으니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본댁에 서용보(徐龍輔)의 탄생이 정축년 2월 15일에 있었던 것도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화성(華城) 성조(城操)를 내년부터 설행하되, 대조(大操)와 윤조(輪操)를 대략 남한산성의 규례에 따라 하도록 명하였다. 비변사가 수원 유수 조심태(趙心泰)의 장계를 인하여 복주(覆奏)하니, 따른 것이다.
봉조하 서유신(徐有臣)을 불러 보았다. 전교하기를,
"4대(代)에 5공(公)이 나오는 것을 옛날엔 드문 일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경의 집안에는 3대 동안에 대신이 계속 나왔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의 입장에서 어찌 영화가 너무 지나친 데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한 번 상소한 것에 대해 즉시 윤허한 것은 대개 선경(先卿) 문청(文淸)을 생각해서였다. 내가 만약 두 문청이 아니었다면 어찌 사리를 분변할 줄 알게 되었겠는가. 이번에 경에 대해 허락한 것은 한편으로는 옛일을 잊지 못해서이고 한편으로는 그 노고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경의 남은 복을 자손들에게 끼쳐 주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조종현(趙宗鉉)을 체직하고 정호인(鄭好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편전에서 재계하며 하룻밤을 묵었다.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가 다음날이기 때문이었다.
7월 21일 갑자
춘당대(春塘臺)에서 황단 망배례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현충사의 위차(位次)에는 이미 고려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과 아조(我朝)의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을 아울러 배향하는 반열에 두었는데, 충렬공 황일호도 아울러 배향해야 합니다. 충장공(忠壯公) 최효일(崔孝一)의 경우는 속국의 배신(陪臣)으로서 대의를 앞장서서 부르짖고 마침내 또한 황릉(皇陵) 옆에서 순절하였으니 실로 천고에 드문 한 사람입니다. 성상의 전교에 의거하여 임경업·황일호 두 충신과 아울러 배향하는 반열에 올리소서. 육의사(六義士)의 경우는 동서로 나누어 배식(配食)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현충사에 사제(賜祭)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장지현의 공초에, 문장(門將) 처소에 엄한 전교를 내린 것에 대해서 전혀 들어 알지 못하고 도리어 감죄(勘罪)를 청하여 스스로 죽을 죄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오정원도 분간(分揀)하도록 하였다.
7월 22일 을축
전교하였다.
"삼학사(三學士)의 사판(祠版)에 대하여 선조에서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리도록 명하여, 훈신이 아닌데도 이러한 거조가 있었으니, 곧 매우 드문 특이한 은전이었다. 그래서 그 관향(官享)을 위하여 고 군수 윤욱(尹煜)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나이 20도 되기 전에 곧바로 수령으로 제수하고 이어 세 집안 출신의 수령에 대하여 모두 연한이나 이력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였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오경원(吳慶元)을 충렬의 봉사손으로서 외임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그럴 겨를이 없어 연일 현감(延日縣監)에 차임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어버이의 나이를 이유로 멀리 부임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경기 고을의 자리와 서로 바꾸었다. 윤 충정(尹忠貞)의 사판에 대해서는 병신년 이후로 아직까지도 관향(官享)하지 않고 있으니 궐전(闕典)이라고 할 만하다. 그 봉사손 윤응현(尹應鉉)이 이미 5품을 거쳤다 하니 수령의 현임에 의망해 넣되 고을에 폐단을 끼치는 데 관계되니 경기 고을의 시종(侍從) 출신 수령 가운데에서 서로 바꾸도록 하라.
어제 이 제독(李提督)과 이 충무공의 일에 대해 감회가 일어나 이를 정익(貞翼)에게까지 미루어서 특별히 배향하고자 하여 붓을 가져다 글을 짓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즈음에 듣건대 그의 봉사손이 궁마(弓馬)에 종사하다가 지방으로 떠돌아다닌다고 하니 어쩌면 이리도 늦게 그러한 일을 전해 들었단 말인가. 대체로 정익의 충성스럽고 맑은 큰 절개는 충무공 이후 이 한 사람뿐인데 영릉(寧陵)을 만나 매우 분명하게 뜻이 맞아 몸소 장상(將相)을 거느려 나라의 안위를 짊어졌으니 차마 기해년 여름 북영(北營)에 직숙했을 때의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매번 유사(遺事)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책을 덮으며 눈물을 닦았다. 더구나 스스로 하찮고 미미한 정성을 부쳐 삼가 배장(陪葬)하는 의리를 본받아, 마침내 그 몸을 능 앞의 상석 가까운 곳에 묻게 하였다. 이러한 은혜로운 대우와 이러한 정성은 지난 역사에 드문 일이니 어찌 사라져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정익이 죽은 후에 그 사판이 한 번도 관향(官享)을 받지 못하였으니 다만 그 봉사손이 승적(承嫡)한 것이 시속에 구애되어 그렇게 된 것이나 승적한 것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 문성(李文成)·김 문경(金文敬)의 집안에는 곤수(閫帥)와 침랑(寢郞)이 되는 데 구애되는 바가 없었는데 유독 정익 집안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어찌 성조(聖祖)의 성의를 몸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 우의정 정익공 이완(李浣)의 봉사손 한량 이득형(李得馨)을 오늘 안으로 남행(南行) 선천(宣薦)에 자급을 뛰어올려 보내고 이어 오늘 정사에서 선전관 가설직에 의망해 넣으라. 이후로 이 계파의 사람들은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 집안의 예에 따라 선전 관청에 자급을 뛰어올려 천거하고 우선 권점을 더하라. 그리하여 이 세 집안을 한결같이 보아 혹 취사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를 해당 관청의 수교(受敎)에 기록하라. 또 정익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길일을 잡아 치제하라."
이조 참의 성덕우(成德雨)를 체직하였다.
7월 23일 병인
황일호의 후손 황면철(黃勉喆)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이번 전교 및 제문을 보았는가. 이곳의 이 사당에 어찌 그대의 선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뒤미처 배향하는 것은 선조께서 그 절개를 장려했던 성의를 몸받아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은전을 닦는 것일 뿐이다. 그대의 선조 장무공(壯武公) 황형(黃衡)은 소리가 몹시 커서 아현(阿峴)에 살고 있었는데도 그 기침 소리가 경복궁에까지 들렸으니 본디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충렬공의 아비 황신(黃愼)은 임진 왜란 때 위대한 공적을 세워 내 항상 우리 나라의 소하(蕭何)라고 여겼다. 충렬공의 아들 황진(黃璡)은 종신토록 스스로 몸을 닦아 더욱 그 누대에 걸친 충렬을 드러냈다. 이것이 내가 그대의 집안에 대하여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
하였다.
《존주록(尊周錄)》을 편집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예조 판서 민종현에게 이르기를,
"존주 문적에 추후에 넣어 기록할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니, 부총관 이의준(李義駿)이 아뢰기를,
"편집하여 다듬는 일은 신이 감히 할 바가 아니고 각신(閣臣) 및 예조 판서가 해야 하는 일이어서 신이 더 뽑아 둔 것을 아직까지 기록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승지 이서구(李書九)와 성대중(成大中)은 범례를 속히 완성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번에 증직한 윤형지(尹衡志)는 넣지 않을 수 없다. 윤황(尹煌)은 맨 먼저 척화(斥和)를 일컬어 특별히 영상에 증직하였는데 더구나 윤형지의 상소가 윤황의 일보다 앞에 있었는데임에랴. 태학생으로서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여 말 뜻이 늠름하였는데, 그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생을 마쳤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특별히 추증을 시행한 까닭이다. 나는 이 사람이 삼학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영부사 김희(金憙)가 병들었는데, 어의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였다.
7월 25일 무진
문신 전강(文臣殿講) 및 일차 유생 강제(日次儒生講製)를 행하였다.
윤대하였다. 하직하는 수령들을 불러 보았다.
대사헌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가정 생활과 학식 이외에도 여사로 하는 문장에 있어서까지 사원(詞苑)의 제생들이 모두 양보하며 허여하니 쓰임에 알맞은 그릇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내가 기대하며 바라는 바가 어찌 적겠는가. 또 더구나 그 지론이 자잘한 규범에 구애되지 않으니 사헌부의 현임에 경이 아니면 누구를 임명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내가 불러들인 것이 인원수를 채우려는 속된 규례에 있지 아니하고 은근히 반드시 오게 하고야 말려는 뜻이 있는 것임을 알고 곧 일어나 뜻을 바꾸도록 하라."
하고, 이어 지방관으로 하여금 유시를 전달하게 하였다.
7월 26일 기사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27일 경오
전라도 수군과 육군의 가을철 조련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한려(漢旅) 3인을 선무사(宣武祠)에 교대로 직숙하도록 하였다. 헌관 이원(李源)의 말을 따른 것이다.
7월 29일 임신
상이 승지 유광천(柳匡天)에게 일렀다.
"지난번 유휘진(柳彙晋)에게 증시(贈諡)한 이후 그 자손이 누구인 줄 몰랐는데 지금 듣건대 그대가 그 손자라고 하니, 언제 시호를 맞이할 것인가? 마땅히 관청의 물력으로써 시호를 맞이하게 할 것이다."
이조 참의 채홍원을 파직하고 이성보(李城輔)로 대신하게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 1796년 9월 (5) | 2025.08.11 |
|---|---|
|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 1796년 8월 (3) | 2025.08.11 |
|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6월 (6) | 2025.08.11 |
|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5월 (7) | 2025.08.11 |
|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1796년 4월 (5) | 2025.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