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 1796년 8월

싸라리리 2025. 8. 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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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계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희생물과 기물들을 살펴보았다.

 

경모궁의 대향·소향에 있어 자시(子時) 반(半)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종묘와 사직의 제사는 축시에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오례의》에 실려 있다. 그런데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의 제사를 자시 반에 행하는 것이 곧 국초의 구식이었다. 작년에 두 본궁의 행례(行禮)와 경모궁에 고유(告由)하면서 제사지낼 때에 특별히 이 예를 쓰도록 전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민종현의 말로 인하여 정식을 삼게 된 것이다.

 

임자도(荏子島)의 목장에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고 그곳의 말들을 도내의 여러 목장으로 옮기고 새로 개간하는 데 따른 세입은 화성(華城)의 내용고(內用庫)에 귀속시키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수의 아룀으로 인하여 호남의 도신에게 관문(關文)으로 물은 후에 본도의 민정에 의거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다.

 

8월 2일 갑술

서울과 지방의 유생 정대현(鄭大鉉)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김인후, 문열공 조헌, 문경공 김집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거듭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월 3일 을해

명정문(明政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의 친시와 문신 제술을 행하였다.

 

8월 4일 병자

고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충절공(忠節公) 유검필(庾黔弼),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의 사당에 ‘삼태사사(三太師祠)’라고 사액하고, 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고려 왕조의 능침(陵寢)과 제각(祭閣)을 수리하여 고치는 일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공을 도운 사람들이 이 세 공이다. 평산부(平山府)의 태백산성에 그 모습을 본떠 만든 동상이 있어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었는데, 이의 중건을 아조(我朝)에서 행하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액(祠額)을 내리지 않았다. 종백(宗伯)이 문임(文任)을 겸하고 있으니 사호(祠號)를 지어 올리고 길일을 잡아 이 호를 걸도록 하라. 호를 거는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되, 일찍이 무장(武將)을 지낸 바 있는 장절공의 자손 가운데에서 보내라. 제문은 친히 지을 것이고, 제품(祭品)은 두주(斗酒)와 생 돼지를 쓰라. 이어 가고(茄鼓)로 분위기를 돋우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에게 유시하여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8월 5일 정축

이조 참의 이성보가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8월 6일 무인

판충추부사 이병모에게 거듭 유시하여 서늘해지거든 올라오도록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장계하기를,
"금천군(金川郡)의 두 개의 남면(南面)을 이속하는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송영(松營)에서는 반드시 이를 얻고자 하고 신의 영(營)에서는 반드시 잃지 않고자 하여 마치 송사가 벌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금년에는 묘당의 의논이 통일되어 성명(成命)이 내려졌는데, 본군의 사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백성들의 호소와 읍보(邑報)를 참고해 보면 대로변에 위치한 고을의 물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지급해주는 일도 어려운 점이 많은데, 읍보에 이른바 토지로써 서로 바꾸자고 한 것은 헤아린 바가 있는 듯합니다. 대체로 금천군이라는 고을은 남북으로 겨우 30리이고 동서로 꼭 백여 리가 되는데 이 두 개의 남면(南面)이 실제로 한 고을의 삼분의 일을 차지합니다. 그동안 죽 쇠잔해진 고을이 지금 또 이곳을 잃게 된다면 본군은 그야말로 형편없이 될 것입니다.
신이 도형을 가져다 보건대, 수룡산(秀龍山)이 장단(長湍)과 토산(兎山)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6백 70리를 뻗어 있는데 험준하고 길이 막혀 있으며 백치진(白峙鎭)의 북쪽에 이르러 황계령(黃鷄嶺)이 되고 또 서쪽으로 상정령(上頂嶺)·나비령(羅比嶺) 등이 되는데 한쪽 기슭이 대흥 산성(大興山城)이 됩니다. 또 서쪽으로 제석산(帝釋山)·두석산(豆石山)이 되고 청석동(靑石洞)이 되며 또 서쪽으로 봉명산(鳳鳴山)이 되는데, 북쪽으로 돌아 마답현(馬踏峴)이 되고 전포(錢浦)에 이르러 끝이 납니다.
일대의 산세는 실로 이른바 남북을 한계짓는 것입니다. 지금 수룡산에서부터 마답현에 이르기까지를 고갯마루로 구분지어 그 남쪽은 송도(松都)에 귀속시키고 그 북쪽은 금천에 귀속시킨다면 금천의 두 개의 남면 및 백치진 근처의 백리의 땅이 자연 송영으로 귀속되어, 토지는 좁고 백성은 많은 해영(該營)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도의 고개 너머 금천에 가까운 10여 리의 땅을 금천에 귀속시키면 해읍(該邑)이 다행히 견사(繭絲)의 수입을 전부 잃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곳 산림의 벌채를 금하고 초목을 보호하는 책임도 고개 이남은 송도에 맡기고 고개 이북은 본도의 병영에 맡겨 각자 규찰하게 한다면 그 실효를 거둘 수 있고 송도와 금천이 서로 침범하고 괴롭히는 폐단도 아울러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대신 지급해 줄 밑천이 들지 않게 되어 송영에 있어서도 좋은 계책이 될 수 있고, 조정에서 평등하게 대우하는 처분에 있어서도 거의 균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개성 유수 조진관(趙鎭寬)에게 묻기를,
"해백(海伯)의 장계는 무슨 연고로 온 것인가?"
하니, 진관이 아뢰기를,
"해백도 금천군의 두 개 남면을 이속하는 것이 안 될 것이 없다고 여기는데 다만 금천군의 이속(吏屬)과 향임(鄕任)들이 가만히 앉아서 땅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혐의쩍어하면서 반드시 대토(代土)를 얻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해백이 장계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지급해 줄 만한 대토가 있다면 어찌 다른 토지를 취해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8월 7일 기묘

좌포장(左捕將) 신응주(申應周)를 찬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응주가, 그 동생 신홍주(申鴻周)가 효경교(孝經橋)를 지나다가 낙상하였다는 이유로 심야에 사람들을 모아 그 석교를 헐어버렸다. 이에 비변사가 응주를 무겁게 처벌하도록 아뢰어 청하니, 응주를 찬배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어 훈련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야금(夜禁)을 제대로 살펴 신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득제(李得濟)를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경무(李敬懋)로 대신하였다.

 

8월 8일 경진

관북(關北)의 군사 훈련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진대(賑貸)한 뒤끝에 백성들이 어렵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 이규남(李奎南)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김인후, 문열공 조헌을 문묘에 종향하고 문경공 김집을 아울러 배향하는 일을 다시 공의에 물어보도록 청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문경 부자를 아울러 배향하는 것을 놓고 정중하여 문경공에게 더욱 빛이 날 일이라고 하였고 또 유현(儒賢)과 왕복한 편지를 이끌어다 증거를 대었으니, 사림의 공론이 미리 도모하지 않고도 합치됨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나도 두 말 하지 않았다. 문정·문열을 종사하라는 요청이 어찌 두 현인에 대하여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아조(我朝)에 들어선 이후 맨 먼저 성리학을 천명하여 비로소 큰 근원을 보고 하늘과 땅 사이에 중니(仲尼)와 자양(紫陽) 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던 것은 곧 문정 한 사람뿐이었다. 비록 오현(五賢) 이하 종사된 유현들이 오늘날 살아 있더라도 모두 필시 문정에게 양보하였을 것이다. 추가로 배향하는 전례를 거행하고자 한다면 단연코 문정 한 사람만을 들어올린 연후에야 사문(斯文)에 공이 있고 후학에게 혜택을 준,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크나큰 공적과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나깨나 힘쓰며 한 가지 생각으로 부지런히 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修道之爲敎]’는 한 구절이니, 어찌 부덕한 자로서 혹시라도 ‘인(仁)에 관한 일을 당하여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라는 의리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스승이 있는 바에 도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나의 말이 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다시 초야에서 덕을 쌓고 있는 선비들을 찾아가 이 비지(批旨)를 가지고 그들과 더불어 자세히 묻고 깊이 연역하여, 문정만을 들어올리는 것이 참람되거나 지나치지 않게 되는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두(疏頭) 이규남 등을 불러보고 이르기를,
"김문정의 도학(道學)의 진정함과 독실함은 내가 평소 높여 숭상하던 바로서, 그 실행을 먼저 하고 앎을 뒤로 하는 것과 안은 곧게 하고 밖은 반듯하게 했던 공으로 말한다면 실로 우리 동방의 첫번째 사람이니, 문장이나 절의는 오히려 그 다음 일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대신들을 면대했을 때 이미 언급한 바가 있었다. 대체로 스승이 있는 바에 도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처해 있으니 스승과 도에 대한 책임이 실로 나에게 있다. 사문(斯文)을 천명하고 세교(世敎)를 부식하는 것에 대해 일찍이 깨우쳐 주고 교도함에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습속이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이 옛스럽지 못하여 크게 변화되어 도를 따르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도를 닦고 가르침을 세우는 방도로서 덕을 높이고 유교를 숭상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문정이 종향하기에 진실로 합당하다는 것을 어찌 그대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겠는가.
지난번의 비답과 오늘의 상소한 말에 딱 들어맞는 바가 있으니 진실로 가상하다. 지난번 유생들의 상소에 처음에는 두 선정만을 거론하였다가 비답을 받들고 나서야 비로소 문정을 첨가해 넣어 마치 지시를 받아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이 이후로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함에 베껴서 전달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성실치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끝에 가서야 김무순(金懋淳)이 상소하여 문정만을 거론하였는데 상소의 말이 엉성하고 문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만 선정에게 수치를 끼치고 사림에게 부끄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그후 유생의 상소에 대하여 단지 ‘물러나 학업이나 닦으라.’는 말로 비답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 선비들에게 부끄러움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상소는 과연 뭇사람들을 따라 구차히 동조하지 않았고 문장 또한 잘 되었으니, 배양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해도 되겠다.
아조(我朝)의 유현과 도학의 성대함에 있어서는 먼저 오현(五賢)을 칭하는데, 종향의 논의에 있어서는 이문성(李文成)이 조문정(趙文正)과 이문순(李文純)을 놓고 진실로 올려 배향하기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삼현(三賢)에 대해서는 서로 평가가 어긋나는 논의가 없지 않았다. 비록 아래에 있는 문성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말했는데 더구나 지금 사문의 대일통(大一統)의 도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종향하는 중요한 전례에 대하여 참작하여 재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두 선정에 대하여 진실로 높여 숭상하는 바가 있으나 문경 부자를 아울러 배향하는 것은 전례에 있어서도 상고할 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성무(聖廡)와 사원(祠院)은 체제가 자연 다른 것이니, 파산 서원(坡山書院)의 아울러 배향한 예는 끌어다 의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정중히 하고 어렵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8월 9일 신사

차대하였다. 비변사가 호서 어사(湖西御史) 정만석(鄭晩錫)의 서계로 인하여 아뢰기를,
"전방선(戰防船)을 개조할 때 부유한 백성들을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는 일 및 정채(情債)에 관한 일을 대신 맡아보게 하는 잘못된 규례를 각 해당 도신들로 하여금 법조문을 엄히 세워 영원히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을 강화도 충렬사(忠烈祠)에 아울러 배향하고, 고 통정(通政) 윤형갑(尹衡甲)에게 부조(不祧)의 은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를 처음 이 사당에 배향한 것은 창건한 초기였는데 중간에 철거되었습니다. 그러다 정미년에 고 재상 김치인(金致仁)이 건의하여 윤계 및 충정공 홍익한(洪翼漢)이 평소 이 지역에 살았었다는 이유로 아울러 배향하기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충정공 윤집은 윤계의 동생이고 또 이 지역에 함께 살았었습니다. 게다가 유허(遺墟)에 세워진 비석까지 있으니, 지금 배향하는 곳에 훌륭한 형제를 한 사람은 배향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음은 아마도 잘못된 전례가 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정공 윤집에 대해서도 아울러 충렬사에 배향하도록 명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전교하기를,
"문열(文烈)·충간·충정에 대해서 모두 특별 전교로 인하여 부조의 은전을 내렸는데, 충간·충정이 아들이고 문열이 아비가 되어 계축년에 절의를 분변하고 무자년에 의리에 나아갔으니, 진실로 이른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할 수 있겠다. 고 통정 윤형갑도 이와 같으니, 한결같이 체천(遞遷)하지 않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의병장 양대박(梁大樸)과 그 아들 양경우(梁慶遇)에 대하여 사후 포상하는 은전이 베풀어지지 못하였으니, 증직을 더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사람이 의를 부르짖은 것은 증 영상 고경명(高敬命)보다 앞서고 그 용단은 충무공 이순신보다도 뛰어났으며 자기 몸을 던져 충성을 바친 것은 이 두 사람과 같았다. 유집(遺集)을 한 번 보니, 빼어난 바가 드러나, 마치 말을 올라타서는 적을 토벌하고 말에서 내려서는 격문을 짓던 그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 지난번에 예조 판서가 입시하였을 때에, 조정에서 높여 보답하는 바에 있어 아직까지 알맞게 하지 않았고 그 유집의 판본까지 화재를 조심하지 아니하여 태워버린 데 대하여 안석 위의 조각난 등편(謄編)을 가리키며 한탄한 바가 있었다. 경이 아뢴 바가 바로 나의 뜻과 합치되니, 증 호조 참판 양대박에게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시제(諡祭)를 내려주라. 그리고 안에 보관되어 있는 《청계집(靑溪集)》 및 《창의록(倡義錄)》을 내각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내려보내어 판본을 만들어 인쇄하여 올리도록 하라. 그 아들 태상시 정 양경우도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굳세고 곧으니 바로 그 아비를 닮은 사람이라 하겠다. 문장과 필한(筆翰)은 오히려 여사에 속한다. 더구나 무자년에 관직을 버리고 계축년에 은둔하여 절의가 아주 완전하니 어찌 혹시라도 민멸되겠는가. 한 품계를 더하여 주고 그가 지은 《제호집(霽湖集)》도 똑같이 인쇄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고 통제사 유형(柳珩)과 고 훈련 도정 유병연(柳炳然)은 할아비와 손자로 모두 송나라 신하 악비(岳飛)의 일처럼 ‘진충 보국(盡忠報國)’ 네 글자로 등에 문신을 했었습니다. 유형은 본래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노량 해전을 도왔는데 탄환을 맞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자취가 매우 위대하였습니다. 유병연은 효종조 때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의 천거를 받았는데 선정신 송시열이 비밀 유시를 받고는 그로 하여금 와신상담하는 성상의 의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의 지혜롭고 용감하며 청백했던 사적이 모두 선정이 찬술한 비문 가운데 실려 있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칭한 바 ‘중국에는 천고에 한 사람의 무목(武穆)만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한 집안에 두 무목이 있다.’는 말은 또한 그를 드러내 빛낸 명언입니다. 성상의 조정에서 정전(旌典)을 시행함에 조그마한 선이라도 반드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신하에 대해서만은 아직까지 드러내 주는 거조가 없습니다. 호서의 유생과 선비들이 연명으로 신들에게 단자를 올려 그것을 진달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증시(贈諡)의 실적이 이미 이와 같고 공의 또한 민멸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감히 이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리도 충신과 명장이 많은가. 대체로 증 영상 유형과 그 손자 증 판서 유병연은 곧 충무공 이순신과 정익공 이완이 혹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기도 하고 혹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천거하기도 한 사람들이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진충 보국’ 네 글자로 등에 문신을 한 충성은 할아비와 손자가 똑같았으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우리 나라의 두 무목에게 시행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특별히 아울러 증시하라. 고 총융사 유림(柳琳)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금주(錦州)의 싸움에서 절개를 온전히 하여 저들이 아직까지도 칭찬해 마지 않고 있다. 유효걸(柳孝傑)은 유형의 아들로서 강홍립의 부름에 굴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서제 유지걸(柳智傑)이 20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상투를 틀고 스스로 대신 가기를 청하여 심하(深河)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효걸의 아들 가운데 또 고 훈련 대장 유혁연과 병연이 모두 정익공에게 천거받아 중요한 정사에 모두 참여하였는데, 사람들이 서로 호흡이 잘 맞는 것을 두고 마치 오른손과 왼손 같다고 비유하였다. 지난번에 무사들을 시험보이는 일로 인해서 가마가 태평교(太平橋)를 지날 때 길 곁으로 고 장가(將家)의 유허가 나타났는데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였었다. 유지걸에게 만약 정증(旌贈)한 바가 없으면 상세히 상고하여 초기하라. 이로 인하여 또 생각건대, 충무공의 아들 이면(李葂)이 정유년에 순국하고 이훈(李薰)이 갑자년에 순국하였으며 이신(李藎)이 정묘년에 순국하였는데 정증하는 전례가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유지걸을 정증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는 때에 차마 충무공의 집안에 이를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각기 화함(華啣)을 증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9일 신사

예조 판서 민종현이 아뢰기를,
"효종조 후궁 안빈(安嬪)에게 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금평위(錦平尉) 옹주입니다. 지난 정축년에 안빈은 심양(瀋陽)에까지 모시고 가 남자 옷으로 갈아 입고서 10년 동안 섬겼었으니 수고로움이 매우 많았습니다. 숙종조에 이르러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리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는데, 숙녕 옹주(淑寧翁主)가 박씨 가문의 맏며느리여서 안빈의 묘를 별립(別立)하기 어려워 안빈의 묘에 대해 드디어 그 사위인 이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빈의 제사를 봉안하게 하여 여러 대 동안 그대로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씨 집안이 지금 매우 잔약해져 제사를 장차 폐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제사를 주관할 곳을 금평위의 자손에게로 고쳐 정한다면 예의 뜻이나 일의 형편으로 볼 때 두 가지 다 편한 것이 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금평위의 집안으로 다시 붙이는 것이 예의 뜻으로 볼 때에는 그러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듣건대 안빈에게는 숙녕 옹주 한 분밖에 없는데 옹주의 딸이 이수철(李秀喆)의 처가 되었다고 한다. 안빈이 장수를 누려 숙종조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때 그 자신의 후사(後事)를 묻자 안빈이 ‘금평위의 집안에다 의탁하고 싶으나 그 집안이 대종(大宗)이어서 일의 형세가 편치 않으니, 금평위의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이수철의 집안에 명하여 안빈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어 부조의 은전을 내리도록 명하였었다. 그런데 그 집안의 절수전토(折受田土)가 대진(代盡)한 궁결(宮結)로서 세금을 거두는 데로 들어가게 되어 제사를 계속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제수(祭需)는 매년 해조로 하여금 쌀과 돈을 헤아려 지급해 주고 또한 집을 사서 주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유학(幼學) 윤현대(尹顯大)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 조헌, 문경공(文敬公) 김집에 대한 종사(從祀)의 은전을 내리기를 거듭 청하였는데, 상이 진노하여 엄한 분부를 내리고 그 상소를 도로 주었다.

 

8월 10일 임오

약원 제조 심이지(沈頤之), 부제조 황승원(黃昇源), 예조 판서 민종현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유생의 상소는 너무도 놀랍고 가슴 아팠다. 그저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거나 ‘스승이 있는 바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이 어찌 한때의 범연한 전교이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사도(師道)의 책임이 나에게 달려 있다. 무릇 사문(斯文)에 관계된 일에 있어 그 의리를 참작하여 헤아리고 의문(儀文)을 재단하여 절제하는 것이 자연 알맞은 바가 있으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다만 복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될 터인데 이에 감히 스스로 의견을 세워 쉽사리 이야기하였다. 그처럼 무식하고 교화를 가로막는 무리가 어찌 감히 사문의 대일통(大一統)이 위에 달려 있는 때에 입을 놀린단 말인가.
대체로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는 것은 하늘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요,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는 것은 곧 군사(君師)의 일인 것이다. 주자가 예악 형정(禮樂刑政)으로 교(敎) 자의 뜻을 풀이하였으니, 예악으로써 가르쳐 그래도 따르지 않음이 있으면 부득불 형정으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師道)요 군도(君道)이다. 저 종향(從享)이 얼마나 중대한 예전인가. 내가 이 일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정중하고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비롯되긴 하였으나, 반드시 문정공을 맨 먼저 천양하는 데로 중함을 돌리려 하였기 때문에 문열공에 대하여 아울러 거행할 겨를이 없었으며, 또한 아비와 자식을 아울러 배향하는 것에 있어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문경공에 대하여 갑자기 의논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이다. 이러한 정미한 뜻은 백세가 지난다 하더라도 의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 창명(倡明)하는 것이나 신중히 하는 것이 모두 사도(師道)가 있는 바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그처럼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얕은 자가 군사(君師)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기꺼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잘못을 범하면서 망령되이 종향하는 중대한 예전에 대하여 별다른 의견을 세워 마치 대결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 어찌 도리나 분의상 감히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일에 대해 나만을 위해 그렇게 고심해온 것은 아니다.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사의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무릇 인재를 양성하고 교도할 방법에 대하여 항상 마음을 써왔는데 이내 이처럼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이것은 조정(朝廷)의 책임이다. 대체로 요사이 인재를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서로 뒤섞여 시비가 밝지 못하고 은덕이 너무 지나쳐 조정이 존중되지 못하고 있다. 세도(世道)의 조짐이 예전처럼 괴리되어 그 말류의 폐단이 이러한 무리들로 하여금 오늘날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게끔까지 하였으니 경들은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하늘은 특별히 친히 하는 바가 없고 오직 덕 있는 이를 친히 하는데, 오늘날 조정에 누가 능히 덕을 지니고 있는가. 내가 장차 살펴볼 것이다."
하였다. 또 예조 판서 민종현에게 이르기를,
"아비와 자식을 아울러 배향했던 예가 있는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안자(顔子)와 증자(曾子) 이외에는 다시 이러한 예가 없으니, 내가 어려워하며 신중하게 하는 것이 그럴 만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조 참판  홍명호를 체직하고 황승원(黃昇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유학 윤현대(尹顯大) 등 두세 사람이 궐문에 와서 신문고를 두드리고자 한다고 하였으므로 병조가 이를 가지고 아뢰니, 성균관으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하였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두 유생을 불러다가 조사하니, 말하기를 ‘그저께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아비와 자식을 아울러 배향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유신(儒臣)들의 글을 원용하여 소를 올려 위로 보고한 뒤에 내리신 비지(批旨)에 해와 별처럼 밝게 게시하셨으니, 사문의 의리가 크게 밝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림의 의논도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는 것과 스승이 있는 곳에 도가 보존된다는 등의 하교를, 마음을 다해 정중하게 반복하신 것은 미혹한 자를 깨우쳐 주려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생들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이내 감히 이미 만들어 놓은 상소를 가지고 서둘러 다음날 아침에 올려서 마치 그저께 있었던 유생들의 상소와 대결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만도 이미 죽을 죄를 진 것입니다. 또 더구나 아비와 자식을 아울러 배향하는 것이 근거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좨주 송환기(宋煥箕)가 문자로 써서 성균관에 왕복했던 글이 분명히 있는데, 소생들이 상소에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여 뜻을 모두 잃어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소생들의 죄는 스스로 성훈(聖訓)을 따르지 않아 사문에 죄를 얻은 데로 귀결되고 말았으니 두렵고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습니다. 이에 삼가 충정을 한번 드러내고자 하여 궐문 밖까지 와서 감히 신문고를 두드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졸(門卒)에게 저지당하여 자연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소생들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문졸을 때리고 발로 찼다는 일은, 소생들이 비록 매우 미혹하고 어리석긴 하지만 어찌 이처럼 놀랍고 어그러진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소생들이 하늘에 그 혼을 뺏겨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진 소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들이 비록 나이가 어리고 학문도 얕다고는 하더라도 또한 유생의 관을 쓰고 그 옷을 입은 자들이다.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공경스럽고 중히 해야 할 전칙(典則)인가. 진실로 진달할 만한 소견이 있다면 성의를 힘써 쌓아 목욕 재계하고 글을 올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한 바이다. 그런데 동일한 소록(疏錄)으로 말 뜻만 판이하게 한 것을 어제 올리고 오늘 올려 마치 전계(前啓)를 전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현관(賢關)에 수치를 끼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더구나 그저께의 비지(批旨)를 그들도 보았을 것이니 내가 사문에 연연해 하고 전례에 대해 삼가는 본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가령 문경공이나 문열공이 알게 된다면 또한 반드시 감동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성실치 아니하고 꺼리는 바가 없어 느낄 줄을 모를 뿐만 아니라 이내 도리어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비록 혹 표준에는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연 허물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어찌 좋게 대하면서 잘못을 감추어 주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후의 행동이 점점 더 어그러졌으니 사습(士習)의 한심스러움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나 정거(停擧)하는 것도 그들과 윤현대(尹顯大)·이의락(李義樂) 및 그 이외에 피하고서 이름을 들이지 않은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는 시행하고 싶지 않으니, 장보(章甫)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도록 하여,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하는 것의 일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번 여름에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문열공 조헌과 문경공 김집을 사문(斯文)의 전통으로서 여러 차례 성무(聖廡)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아니하면서 문정공 김인후를 거론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 전교하였다. 이에 유생들 간에 논의가 일치하지 아니하여 혹은 세 사람을 아울러 종사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문정공만을 거론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윤행임(尹行恁)이 성상이 문정공을 우선하고자 하는 뜻을 엿보고서 힘껏 그만을 거론해야 된다는 논의를 주장하여 마침내 이규남(李奎南)의 상소가 나오게 되었다. 윤현대가 ‘선비된 자가 선정(先正)을 위하여 종향하기를 청함에 있어 중도에 갑자기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장차 다시 이전의 청을 거듭하려고 하였는데, 이규남이 상소를 올리려 하면서 남이 알까 두려워 소록(疏錄)을 채울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소청(疏廳)에 있는 윤현대의 명첩(名帖)을 훔치도록 하여 죽 베껴서 올렸다. 다음날 현대가 규남이 상소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또 소장을 올렸다. 이에 상이 거듭 진노하여 ‘현대는 군부(君父)를 저버리고 기꺼이 스스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는 모두 그 부형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이다.’고 하고 장차 중벽(重辟)에 처하려 하면서 심이지와 민종현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유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현대가 문을 닫아 걸고 거적자리를 깔고 지내다가 돈화문(敦化門)에서 죄를 기다렸다. 현대가 그 죄가 아비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규남이 상소한 줄을 모르고 소장을 올렸으니 죄가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아비와는 관계없는 일이다."는 내용으로 그 아비를 위하여 스스로 해명하고자 하여 마침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언 윤함(尹涵)이 아뢰기를,
"신응주(申應周)가 남몰래 대교(大橋)를 파괴시킨 행동은 온 성안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 의혹스러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날뛰는 풍조에 대해서는 유배보내는 것만 시행해서는 안 되니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계미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내렸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 운서(韻書)에 있어 삼운(三韻)으로 모으고 입성(入聲)을 따로 두는 것은 운이 사성(四聲)에 근본하는 뜻에 어긋난다. 증운(增韻)과 입성을 운달지 아니하고 과거장에서 증보(增補)를 운달지 않는 것도 통운(通韻)과 협음(叶音)의 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너무도 엉성하고 노둔하다 하겠다. 이 때문에 널리 전거를 대고 증명하여 이 책을 편집하도록 명한 것이다. 이후로 공적인 것이나 사적인 것에서 압운자(押韻字) 및 입성은 이 운서의 의례(義例)와 식령(式令)에 준하도록 하라. 이 일을 서울과 지방의 시험을 관장하는 관사에 분부하도록 하라. 곧 나의 고심은 속습을 바로잡고자 하는 데 있으니, 이 책을 편집한 것이 어찌 음성을 조화롭게 쓰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바로 거짓된 누습을 한번 씻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근년의 인본(印本) 서책에 어휘(御諱)를 산획(刪畵)하는 것은 보기에 매우 놀랍다. 여러 차례 신칙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즉시 옛날대로 회복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글자 음이 어휘와 같은 것까지도 중간에 아울러 휘하여 그대로 답습하여 교정할 만한 단서가 아닌 것이 없게 되었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습속은 일체 엄금하고 운서를 오늘부터 시작하여 통행해 쓰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2일 갑신

상이 승지 한용귀(韓用龜)에게 일렀다.
"읍지(邑誌)에 보니 삼태사사(三太師祠)를 일찍이 상충(尙忠)이라 이름하였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불렀던 것인가? 혹 간판을 게시해 놓은 것이 있으면 제거할 필요 없이 이번에 내려준 간판과 아울러 함께 게시하는 것이 좋겠다. 제문을 마땅히 향실(香室)에 내려야 할 것인데, 일찍이 효종조에 정포은(鄭圃隱)을 치제할 때에 송 선정(宋先正)이 제문에 이름을 써서는 부당하다고 진달했었기 때문에 단지 모공(某公)이라고 쓰고 그 이름은 쓰지 않았었다. 지금도 삼태사의 시호만을 적는 것이 좋겠다."

 

8월 13일 을유

이조 참의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고 그로 하여금 올라오도록 유시하였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와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에게 사제(賜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그끄저께 지평 김수조(金壽祖)의 상소를 보고 선조를 추념하는 뜻으로 비록 선정 문정(文靖)에게 치제하고자 하였으나 근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옛사람에 대한 감동으로 너무나 지나친 칭찬이 두루 미쳐 일이 번독스러운 데 가까울 듯하여 실행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지평 정종로(鄭宗魯)의 상소를 보건대, 또 그 선조 문장공에 대하여 어찌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인하여 또 생각건대 문정공 조식은 규모와 기상이 나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서고 완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해지도록 할 만하였고 능히 심오한 경지에까지 나아가 지킨 바가 탁월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시들해지고 퇴폐해진 풍속에 있어 어찌 문정공을 오도록 하여 이를 연마시키는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문장공 정경세와 문정공 조식의 집안에 써서 내린 제문을 가지고 관리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해에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 호조가, 올해 농사의 형편이 각종 곡식이 골고루 익었는데 모든 곳이 다 그러하니 급재(給災)하는 한 가지 조항을 아울러 거론하지 말자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올해 농사가 다행히 재해를 면했는데, 또 최근 동풍이 불어오던 끝에 오늘 단비가 내렸으므로 추수할 희망에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팔도 3백 6주(州)의 논밭 가운데 낮은 땅이나 협소하고 경사진 땅까지 이것 저것 구분 없이 어찌 다 그러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경술년의 풍년 때에도 오히려 표결(俵結)을 하였는데, 올해의 연분(年分)을 단지 원총(原摠)만을 기준으로 하여 1부(負) 1속(束)도 급재하지 않는다면 위에 있는 것을 덜어 아래를 더해주는 정사에 어긋난다. 경은 계목(啓目)을 자세히 상고하여 부표(付標)하여 계하(啓下)한 후에 각도에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경기·삼남·관동·해서·수원·광주에 2천 8백 결을 급재해 주었다.

 

8월 14일 병술

이문원에서 재계하며 하룻밤을 묵었는데, 진전(眞殿)의 행례가 다음날에 있기 때문이었다.

 

영남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이수인(李樹仁)과 우재악(禹載岳)을 불러 보았다. 재악은 충정공(忠靖公) 우현보(禹玄寶)의 13대 손이고, 수인은 임진난에 순절한 증 참판 이팽수(李彭壽)의 7대 손이다.

 

8월 15일 정해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였다.

 

8월 16일 무자

대사성 윤득부(尹得孚)가 상소하여 면직을 빌고 이어 아뢰기를,
"오늘날 이른바 승보 계획(陞補計劃)과 사학 합제(四學合製)의 법은 대개 학문 탐구를 권장하고 영재를 성취하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심이 옛스럽지 않아 폐단이 거듭 생기고 있습니다. 선비들의 취향은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가고 풍속의 향배는 날로 투박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과제(科第)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이미 향거(鄕擧)·이선(里選)의 제도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인데, 지금 승학시(陞學試)를 보여 선비들을 양성하는 규정은 한 시대의 나이 어린 초학의 선비들을 몰아 단지 매달 경쟁하는 것만을 가르쳐 그 심술(心術)을 무너뜨리게 할 뿐입니다. 만약 이미 허물어진 속습을 바로잡고 이미 무너진 선비의 풍토를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승학(陞學)의 제도부터 변혁시켜야 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덕행을 갖춘 문사를 천거하여 사유(師儒)의 우두머리에 두도록 하여 좋은 방향으로 잘 처리하소서. 무릇 연혁(沿革)을 변화시킬 때에는 먼저 덕행을 근본으로 하고 말단적인 문예만을 취하려고 하지 않은 연후에야 거의 고질적인 폐단을 만분의 일이라도 바로잡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승학의 규정을 없애 선비의 습속을 바로잡자는 것은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폐단이 또한 오로지 법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니 어떻게 폐단을 바로잡으면 좋겠는가?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속히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수의하여 아뢰기를,
"우의정 윤시동은 의논하기를 ‘반상(泮庠)의 과시(課試)가 해만 있고 유익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일찍이 조정에서 한탄하시고 이를 바로잡을 방도에 대하여 특별히 염려하셨는데, 우선 어렵고 신중히 여기시어 아직 일정한 제도가 없습니다. 유사의 신하는 그 직분을 생각하고 일에 따라 공경하고 부지런히 해야 될 뿐입니다. 비록 시취(試取)할 때에라도 자신을 바로잡고 공적인 마음을 지녀 권장하여 발탁하는 것이 마땅하게 된다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고 사습(士習)을 바로잡는 것이 다 행해져서 서로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니,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또한 어찌 이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단지 이에 나아가 직분을 다하면 될 것이고 규례를 넘어 달리 논의를 세울 필요는 없겠습니다. 대사성의 상소 가운데 언급된 연혁을 변화시키는 데 대한 설에 대하여 신은 가벼이 의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전교하였다.

 

8월 18일 경인

화성(華城) 성역(城役)의 장수(匠手)들에게 호궤(犒饋)하고,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였다.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의 역소(役所)에 능관(陵官)으로 하여금 수리 보수하도록 하는 일을 법식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헌릉(獻陵)·정릉(靖陵)·선릉(宣陵)·장릉(章陵) 등 수리하여 고쳐야 할 곳에 대해서도 위의 두 능의 규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8월 19일 신묘

수원부(水原府)의 성이 완성되었는데, 둘레가 모두 4천 4백 보였다.

 

교리 박재순(朴載淳)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선조(先祖)의 유고(遺稿)를 살펴보건대, 어제 서문(御製序文)에 ‘시(詩)에서 악(樂)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셨으니 훌륭하신 왕의 말씀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시가 악에 근본한다는 것으로 이미 신의 선조의 글에 머릿말로 써 주셨고 또 임방(林放)이 예를 물었던 것을 가지고 말을 맺어서 서로 호응되게 하셨으니, 이 어찌 깊은 심중에 최근의 풍속에 대하여 개탄해 함이 있어 그리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최근의 습속이란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가 없는 것입니다. 수십 년 이래로 천한 이가 귀한 이를 방해하고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능멸하여, 평소 한가히 지낼 때 이미 집안 사람으로서의 예가 없고 공적인 모임에 빽빽히 앉아 있는 가운데 조사(朝士)의 위의가 전혀 결핍되어 있습니다. 맨머리에 맨발은 도리어 왕씨(王氏)의 자제들을 본뜨고 비속한 말과 어그러진 이야기는 시(詩)를 공부하여 능통했던 정강성(鄭康成)의 비복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정도입니다. 경학(經學)을 하찮게 여기고 재색(財色)을 마치 농삿일처럼 쫓습니다. 이 때문에 문풍이 날로 쪼그라드는 데로 달려나가는데도 만회하는 것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교화가 펴지지 못하는 것을 개탄스러워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이 기대할 것이 없음을 가슴 아파하여 이렇게 말 밖의 뜻에 마음을 씀이 있게 되셨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지극한 덕성은 진실로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고 예지와 학문은 성인의 경지보다도 우수하십니다. 요(堯)·순(舜) 이하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스스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으실 뿐만이 아니고 온 나라의 신민들이 기대하는 바도 어찌 일찍이 구구한 소강(少康) 정도의 정치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밤 늦게까지 정사에 힘쓰시며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기름진 음식을 달게 여기지 아니하시며 조정에 임하여 훌륭한 정치를 도모한 것이 20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기강이 다 제대로 잡히도록 하지 못하고 치화(治化)가 다 순박해지도록 하지 못하여 선비들에게는 크게 변화하는 풍조가 없고 백성들에게도 눈에 띌 만큼 변화된 풍속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미혹하나 즉위하신 이래로 성상께서 항상 마음 쓰며 염려하는 바에 대하여 삼가 망령되이 헤아리는 바가 있습니다. 환관과 외척이 어리석어 멋대로 하는 폐단에 대하여 깊이 염려하고 충신과 역적이 판연히 갈리는 분계점을 밝게 살피시어 혁혁한 즉위 초기의 정사 때 우리 사류(士流)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배치하였고, 경자년에 역적 홍국영이 나와 조정의 국면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을 때에도 오히려 사류들을 등용하려는 성상의 뜻으로써 한쪽편 사람들을 나아오게 하여 등용하였으니, 대성인의 심원한 염려는 진실로 이미 천고에 탁월한 것입니다. 대개 세록(世祿)의 자손이나 신중히 고른 인재는 척완이나 권세를 탐하는 무리와 비교하여 함께 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듯한데, 저들이 성상의 총명을 속여 가리고 뭇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의혹되게 함에 이르면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태도는 총애를 굳건히 하여 자신을 이롭게 할 만하고 말을 잘 하며 아첨하는 습관은 어진 이를 방해하여 나라를 병들게 할 만한 것이었고 보면, 십수 년 이래로 점차 물들어 온 폐단이 환관이나 외척에 비해 도리어 심함이 있습니다. 이 어찌 성상께서 미처 생각하신 바이겠습니까마는 그 말류의 폐단이 이와 같은 것은 형세상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관(周官)의 통치 때는 세상의 수준이 높고 이욕(利慾)이 불어나지 아니하여 궁백(宮伯)·옹인(饔人)·선부(膳夫)와 같은 근밀(近密)한 신하들도 모두 어진 사대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작을 바로하고 조짐을 막는 법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그 사람이 사대부라 하여 그 사람이 청렴한지 또는 탐욕스러운지를 살피지 아니하고 가벼이 임명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찍이 신임받는 근밀한 신하라 하여 규찰하여 문책하지 아니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상께서 부월(斧鉞)로써 위엄을 드러내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온 조정이 한번의 호령만으로도 청명하게 된 까닭입니다. 작년 봄 이전의 일은 오히려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 눈과 귀에 익히 익은 것은 조석지간에 훈도하여 변화시켜 연마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보고 그 원천을 소급해 보면 또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생활하면서 아비를 섬길 줄 모르니 어찌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는 의리를 알겠으며 벼슬을 하게 되면서는 오로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만 꾀하니 어찌 나라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하는 도를 알겠습니까. 들어가 고하고 나와서 말하는 것이 마치 두 갈래 길처럼 판이하고 겉으로는 은밀히 하면서 속으로는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모두 하나로 귀결됩니다. 친척을 마치 길 가는 사람처럼 여겨 박대함이 날로 심해지고 마음과 입이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서로 연관되지 않아 돈독하고 질박함이 날로 없어지고 있습니다. 활의 그림자가 술잔에 뱀처럼 어리고 산같은 의심이 담소(談笑) 속에 자취를 감추듯 하고 있습니다. 장차 취하려고 우선 준다는 설을 지어낸 것에 대해서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뜻은 동쪽에 두고 있으면서 서쪽을 가리킨다는 무고를 근거 없이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는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근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틈을 엿보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배불리 먹고 굶주리는 것을 때에 따라서 합니다. 충과 효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닌데 저 어려서부터 익히면서 자라고 공부한 자들이 명의(名義)의 정도를 따르지 않고 성현의 훌륭한 말씀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는 단지 공리(功利)만을 일삼고 거간꾼 노릇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부자간이라도 조금의 성실한 뜻도 없기 때문에 점차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의 무고를 선동하는 데에 이르러 마침내 재신(宰臣)에게서 강개한 뜻의 상소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매양 《소학(小學)》 한 책이 곧 선조(先朝)께서 드러내 빛내셨던 바이고 성상께서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성상의 나이 3, 4세 때에 이미 외웠고 춘저(春邸)에 올라 주연(胄筵)에서 개강(開講)하게 됨에 미쳐 돌아가면서 익히고 뜻을 깊이 헤아려 책을 묶은 가죽끈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고 하니, 우리 전하의 천인(天人)을 꿰뚫고 성명(性命)을 통찰하신 학문의 밝음이 어찌 이에 근본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선반에 얹어 놓고 읽지 않으니 이처럼 잘못에 점차 물들어 시들해지고 퇴폐해가는 날을 당하여 전하께서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 것으로써 온 나라의 뭇 백성들에게 미루어 가되, 고금을 돌아다 보며 한 번 그 비루함을 씻어내려 한다면 이 책을 버려두고 무엇으로써 하겠습니까. 무릇 대과와 소과 과장에 다시 《소학》의 강을 설치하여 사적으로는 일을 익히고 공적으로는 승진시키고 출척하는 소지로 만들며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강에 또한 첨가해 넣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이끗을 앞세우는 잗단 무리들이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설로 맑은 조정을 어지럽히니, 수천 년 동안에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전하의 가장 뛰어난 덕으로 더욱 근검에 힘써 침실 몇 칸이 거의 띳집과 같고 섬돌에 깐 겹자리는 항상 노끈으로 매고 목면으로 기운 데가 많습니다. 또 날마다 드시는 반찬이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아니하며 상방(尙方)의 의복이 매번 세 번의 세탁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에 호조에서는 안으로 들이는 물품이 거의 없고 사도시에는 상공(上供)할 쌀이 쌓여 장영(壯營)을 설치하기에 이르렀으니 대개 심원하고 장구한 도모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화리(貨利)를 불리지 아니하고 벽주(璧珠)를 물리쳐버리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에 대하여 누군들 흠앙하면서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허공에 시렁을 매고 구멍을 뚫는 듯한 간사한 꾀가 여러 가지로 나와 번읍(藩邑)의 새로 제수되는 자들에 대해 귓속말을 하고 눈짓을 하여 꾀이고 산업(産業)이 약간 넉넉한 자들에 대해서는 이끗으로 유인하고 위세로 위협하여 눈깜작할 사이에 불측한 행동을 하고는 은연중에 이를 감히 말할 수 없는 지위에 돌립니다. 이에 외임(外任)이 빚을 졌다는 설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고 사사로운 재물을 부정한 길로 모을 수 있는 데 대한 말이 뭇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속아넘어가기 쉽고 삿된 설은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 맨 처음 청명했던 이후 간두(奸竇)와 진적(眞賊)이 비록 아울러 드러났다고는 하나 이 무리들이 전습한 지 오래되었고 뭇사람들이 현혹된 것이 이미 깊고 보면, 무릇 지금 전하의 문신·무신·근신이 되어 충성스러운 뜻을 지니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군들 임금을 위하여 앞다투어 목숨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뜻으로는, 문신·무신·근신을 막론하고 10여 년 간 번읍에 제수하는 것을 거론하지 않은 연후에야 근신이 된 자들이 청명한 조정에 수치스러운 마음을 품고 누를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정치의 교화가 날로 새로워지고 성상의 총명이 날로 발달하니, 이는 바로 음양 숙특(陰陽淑慝)이 나아가느냐 물러가느냐 사라지느냐 더 자라느냐 하는 단서이며, 하늘의 마음과 백성의 뜻이 기대하며 돌아다보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대를 두루 살펴보면 군자는 소원해지기 쉽고 소인은 친해지기 쉬우니, 이 때문에 명철한 임금들이 두려워 경계하면서 편안할 때 위험함을 생각하고 처음 시작할 때 종말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한번 오늘날을 돌아보면, 의리를 천명하고자 하나 여전히 배치되는 자가 있으며 취향을 바로잡고자 하나 아직까지도 머뭇거리며 관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에 성상의 전교가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절한데도 성상의 덕이 해와 달처럼 밝다는 것을 독실히 믿을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감히 엄폐하고자 하니, 그 간사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고 화의 조짐이 잠복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실로 이루 다 가슴치며 통한스러워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전하께서 선행을 드러내고 악행을 처벌하는 방도를 깊이 생각하고 출척(黜陟)의 권한을 더욱 면려하여 한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한 덕의 밝고 위대함을 모두 우러르고 의리의 밝고 바름을 분명히 알게 하여 안정되지 못한 취향이 이로 인하여 안정되고 한결같지 않은 백성의 뜻이 이로 인하여 하나가 되도록 한다면 나라에 있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아뢴 자세한 말은 모두 이 시대의 폐단에 대하여 적중한 것들이다. 풍속의 폐단이 이와 같고 고질적인 풍조가 저와 같은 것을 어찌 반드시 임금을 뒤로 하고 어버이를 저버리는 자에게만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오로지 가르침이 미덥지 않고 교화가 행해지지 아니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대가 《소학》 한 책을 고금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근본으로 삼고 이어 강습하여 닦아 밝히기를 청하였으니 그대의 말이 옳다. 또 문신·무신·근신을 10여 년 간 번읍에 임명하는 것을 거론하지 말자고 청하였다. 대체로 오늘날의 근신들은 옛날의 척신(戚臣)들보다도 심하다. 조정에 있거나 외방에 있거나 각각 그 직분을 다하기만 한다면 누를 끼치는 것이 도리어 빛을 발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인데 10여 년 간 이 무리들에게 훼손당하여 내가 어진 사대부들을 친히하는 본뜻이 막혀 드러나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그중에도 또한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니 외임에 차임하는 것이 마땅할지의 여부는 크게 변화시키는 방도에는 관계되는 바가 없는 듯하다. 또 음양 숙특이 없어지느냐 더 자라느냐 하는 기회라는 것은 그대의 말이 더욱 옳으니 출척할 즈음에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0일 임진

직각 이시원(李始源)을 의주부  위유 어사(義州府慰諭御史)로 차임하였다. 전교하기를,
"기백(箕伯)의 이 장계를 보고 너무도 놀랍고 참혹하여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전에 안주(安州) 등 세 고을의 표호(漂戶)에 대하여, 비록 인명이 상해를 입지는 않았어도 그 황당해 하며 생활 기반을 잃은 정상을 생각하고 너무도 측은하여 특별한 휼전(恤典)을 시행했었다. 그러니 지금 만도(灣島)에 큰물이 들어 재해를 당한 데 대하여 특별히 보호해 주는 방책을 시행하여 그들로 하여금 속히 생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저 물에 빠져 죽은 나머지 생존자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먼저 직각 이시원을 의주부 위유 어사로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즉시 길을 떠나 몸소 침수된 곳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안집시켜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들의 처자식들을 모아 특별히 위문하고 구휼해 주며, 또 한편으로는 그 근처에 단을 설치하여 제문을 가지고 가서 이를 읽어 배향하도록 하라. 해부(該府)는 변읍으로서 조세를 납부하지 않으니 공부(貢賦)를 면해 준다거나 조세를 감면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재해를 입은 민호에게 부과되는 요역이라고 명목이 붙은 것에 대해서는 면제해 주도록 하고 마땅히 바쳐야 하는 신구(新舊) 환곡에 대해서 혹탕척해 주거나 혹은 기한을 줄여주되, 한결같이 이전 장흥(長興)의 수백 명, 명천(明川)의 1천여 호가 물에 빠졌을 때에 면제해 주어 구휼하였던 은전에 의거하도록 하라. 더구나 의주부는 더욱이 특별한 곳이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구하여 살릴 방도에 대하여 특별히 내린 유서(諭書)를 어사는 가지고 가라. 그 자세한 내용이 유서 가운데에 들어 있다.
먼저 이러한 뜻을 가지고 묘당으로 하여금 삼현령(三懸鈴)으로 해도와 해부에 행회(行會)하여 해당 부윤으로 하여금 몸소 판삽(版鍤)을 들고 백성들에게 솔선하여 어사가 의주부에 도착하기 전까지 성화 같이 막사를 지어 백성들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라. 각동(各峒)·육도(六島) 등 여러 곳의 논밭이 내년에 예전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연후에야 안도시킨 효과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어사가 연교(筵敎)를 가지고 면칙하고 아울러 이 뜻으로 모두 알리도록 하라.
기백과 의주 부윤의 일은 너무도 형편없다. 교화를 펴고 근심을 나누는 직임을 받고서는 4일 밤의 일을 한번 둘러본 후에 엉성하게 조정에 아룀으로서 대강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묘당이 초기(草記)로 논죄한 것도 말감(末勘)한 것이라 하겠다. 또 더구나 도백(道伯)이 순시를 나가면 으레 곧바로 조정으로 장계하는 규례가 있고 보면, 일이 변방의 정세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도 예사롭게 도신이 순시하고 있는 곳으로 전보(轉報)하였으니 의주 부윤의 일은 더욱 놀랍다. 곧 그 만상(灣上)으로 귀양가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마는 백성의 일이 위급하니 천천히 처분하도록 하겠다. 의주 부윤 심진현(沈晉賢)을 출대(出代)하는 것을 시행하지 말고 올해나 내년을 막론하고 도민(島民)들이 생업을 회복할 기간 동안에 백의 종사(白衣從事)하는 예대로 우선 그로 하여금 죄를 진 채 직무를 다스리도록 하라.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거처를 얻지 못하고 조그만 면적의 땅이라도 혹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이 있어 조정에 보고된다면 왕부(王府)의 관화(關和)가 이런 사람에게 시행되지 아니하고 어디에 쓰이겠는가. 도백은 잡아와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나, 속죄하여 부지런히 하는지 및 그의 마음이 두려워할 바를 아는지의 여부를 살피고자 한다. 평안 감사 박종갑(朴宗甲)에게 우선 월봉(越俸)의 법전을 시행하고 그 죄상은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을 발하여 엄히 물어 초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주 육도의 수재민들에게 유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올해 기후가 가장 적당하여 비록 습지대의 낮은 땅이라도 물에 침수되는 걱정이 없어 온 집안이 안도하고 곡식은 실하게 열렸다. 이에 각도의 장계를 살필 때마다 실로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관서에서만 수재를 보고해 왔다. 지난번 안주(安州)와 박천(博川)의 강 연안의 집들이 떠내려갔을 때 매우 놀라기는 하였으나 다행히 인물(人物)이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에 의주부에서 1천여 호가 물에 떠내려가고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 무슨 일인가. 의주부는 곧 우리 변방의 중요한 지역이다. 내가 이곳을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중요하게 여기는데 허다한 백성들의 목숨이 유독 이러한 해를 입어 생존자들은 서로들 모두 흩어져 살던 곳을 떠나게 되고 죽은 자들은 바다에 그 시신을 맡기게 되었다. 한 도(島)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의 대부분 홍수의 피해를 입도록 하였으니 한 번 봄에 경악스럽고 두 번 봄에 참담하여 곧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아버리게 한다.
아, 그 생존자는 가옥을 지어 주고 곡식을 표급(俵給)하여 예전처럼 살게 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 죽은 자들은 그 시신이 물에 둥둥 떠다니며 땅에 묻히지 못하고 그 혼이 수면에 떠돌며 안도하지 못하니 혜전(惠典)을 베풀고자 해도 장차 어디에다 하겠는가. 더구나 그 집안 사람들이 물가에서 애절하게 소리쳐 부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아 버린다. 떠내려가버린 가호에 대한 휼전에 있어 비록 응당 시행할 정식이 있긴 하지만 이곳 이 백성들에게 어찌 예사로운 규례를 적용할 수 있겠는가. 의주부의 물에 떠내려가고 남은 생존자들은 대호·중호·소호·잔호(殘戶)·독호(獨戶)를 막론하고 신구 환곡을 아울러 탕감해 주고 올해 납부해야 할 전세(田稅)와 대동세도 옛 규례에 의거하도록 하며, 신역(身役) 포전(布錢)도 생사를 막론하고 징수하지 말라.
생존자에 대해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추워지기 전에 나무를 베고 새끼를 꽈서 살 곳을 마련해 주도록 하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따로 강변에 단(壇) 하나를 설치하여 술과 음식으로 흠향하여 그들로 하여금 벗들을 데리고 와서 흠뻑 술에 취하고 배불리 먹어 음진(陰沴)을 없애고 이로써 상서로운 화한 기운을 인도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 있어 생사의 차이를 둠이 없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이에 통훈 대부 규장각 직각 이시원(李始源)을 어사로 삼아 유서(諭書)를 가지고 가서 대중들에게 분명하게 유시하게 하는 바이니, 아, 너희 백성들은 모두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계사

학생 이면(李葂)에게 이조 참의를 증직하고, 급제 이훈(李薰)·이신(李藎)에게 병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8월 22일 갑오

춘당대에 나아가 가을철 내승 별군직(內乘別軍職)·선전관(宣傳官)의 활쏘기 시험을 시행하였다.

 

8월 23일 을미

경상 좌수군 절도사 심녕(沈鑏)을 유배하였다. 이때 서평  만호(西平萬戶)가 정원을 초과한 배로 훈련에 나갔다가 배가 파선하여 군졸들이 모두 물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비변사가 심녕을 파직해야만 한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배를 만든 만호(萬戶)는 통수(統帥)로 하여금 조사해서 엄히 곤장을 쳐 곧 그 지방에 충군(充軍)하도록 하고 당해 수사는 정배하도록 하라. 이후로 훈련에 나오는 배가 부실해서 침몰하여 인명이 상해를 입게 되면, 해당 도백이 곧장 해당 수신(帥臣)을 정식대로 정배하도록 하라. 이런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장계로 아뢰도록 하게 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초산(楚山) 등 여섯 고을의 상해를 당한 백성들의 신구 적곡(糴穀) 및 신역을 면제해 주고 표호(漂戶)는 안주 등 세 고을의 예에 의거하여 진휼하도록 하였다. 이때 건주(建州) 지방에 큰물이 들어 그 여파가 강 연안 여러 읍들에까지 파급되었다고 한다.

 

8월 24일 병신

우의정 윤시동이 차자를 올려 병의 증상을 진달하고 면직을 빌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5일 정유

공명 승첩(空名僧帖) 2백 50장으로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와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를 중수(重修)하는 일에 원조해 주었다. 예조 판서 민종현의 아룀에 인한 것이었다.

 

이때 호남 수령 가운데 하직 인사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액례(掖隷)가 소매를 잡고 첩자(帖子)를 【돈을 남에게 준 자가 작은 종이에 수결(手訣)한 것을 첩자라 한다.】  뒤졌다. 승정원이 아뢰니, 액례를 병조로 회부하여 엄히 곤장을 치고 호남 도백에게 압송하여 여러 마을에 돌려가며 보이도록 하였다. 이어 이후로 액례 가운데 무례하게 첩자를 뒤지는 자에 대해서는 수령이 승지에게 말하여 이번 일처럼 처치하도록 하였다.

 

8월 26일 무술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의 석물(石物)을 수리하여 고칠 때 송영(松營)의 수신(守臣) 조진관(趙鎭寬)이 감독하고 이어 선공감(繕工監) 일까지 맡도록 하였으니 해당 당상·낭청 및 상지관(相地官)은 가지 말도록 하였다. 또한 능관(陵官)으로 감역(監役)을 겸하도록 하였다. 헌릉(獻陵)·선릉(宣陵)·정릉(靖陵) 세 능을 수리하여 고칠 적에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하여금 송도 유수(松都留守)의 예처럼 거행하도록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능관이 감역을 겸하는 규례는 선조(先朝)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후로 비록 정부에서 내려갈 때라도 모두 이 규례를 사용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근래 모든 일에 있어 비록 미봉하여 속여 가리는 것이 십수 년 이래의 잗단 고질적인 풍조라고는 해도 감히 막중한 제향에 이러한 구습을 부리려 한단 말인가. 미리 경계시키는 뜻으로 일전에 막 신칙하는 전교를 내려 그 이후의 근만(勤慢)이 어떠한가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어제 휘릉(徽陵)의 기신(忌辰) 제향 물품들에 대해 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낼 때 들어가 예가 다 마치기를 기다려 받들고 와 간품(看品)하도록 하니, 정성을 다 들이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러니 종전에 각 능에서 봉납한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들은 따로 간품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헌관(獻官) 성종인(成種仁)을 우선 파직하여 해부로 하여금 잡아와 국문하여 엄히 죄를 주도록 하고 전사관(典祀官)도 같은 율을 적용하고 능관도 우선 도태시킨 후에 잡아 오되 곧 해조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차출하여 교대한 후에 잡아 가두라.
평상시에 능히 검칙하여 십분 두려워 삼가하였다면 어찌 아랫무리들이 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도상(都相)은 비록 처분하지 않더라도 공사 당상(公事堂上)까지 아울러 논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나라의 체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해 제거(提擧) 이만수(李晩秀)를 월봉 일등에 처하라. 구임 낭관 이동식(李東埴)은 곧장 체직시키는 것이 애석하니 우선 말감(末勘)하여 잡아다 국문해서 처치하라. 이후로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다가 혹 발견된다면 당상과 낭청이 감히 저 영해(嶺海)로 귀양가는 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거듭 엄히 신칙하라."

 

8월 27일 기해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내각 제학 심환지(沈煥之), 직제학 이만수(李晩秀)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이성보(李城輔)가 김 선정을 종향하는 일로 성균관에 글을 보내었는데 예전의 설과 크게 서로 모순되었다고 한다. 경들도 이것을 보았는가?"
하니, 환지가 아뢰기를,
"신이 과연 보았는데 당초의 아울러 배향하자는 의논과는 크게 상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승지 이조원(李肇源)의 말을 듣건대, 이성보의 글에 ‘당초에 성균관 유생들이 와서 물을 때 아울러 배향하자는 의논에 대하여 성상의 뜻이 거기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그 설에 대해 우물쭈물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종향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산림(山林)이라고 이름하는 자가 위의 뜻을 망령되이 믿고 그 설을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니 어찌 사림의 수치가 아니겠으며 세도(世道)의 변괴가 아니겠는가. 당초 아울러 배향하자는 설이 이미 위의 뜻을 오인한 것인데 짐짓 우물쭈물거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단독으로 배향하자고 한 의논은 전후의 말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남을 따라 행동한 것이니 이는 눈치를 본 것이다. 이른바 ‘선비란 자가 망극하게도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번 일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말 같다.
최근 세도와 인심이 마치 물처럼 점점 낮아져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은 오로지 아첨하고 눈치를 보는 데에 말미암은 것이니, 이러한 것을 남김없이 없애어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면 그 죄로써 죄를 주고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은 연후에야 세도가 안정될 수 있고 인심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정에서 산림을 우대한 것은 그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는 진정한 유현(儒賢)이기 때문이다. 성보와 같은 자를 또한 산림이라고 하여 죄가 있어도 처단할 수 없다면 어찌 이러한 나라의 체모가 있을 수 있겠는가.
대개 가장 엄한 것이 종향의 예전(禮典)이기 때문에 이문성(李文成)도 일찍이 오현(五賢)을 종향하자는 의논에 대하여 정암(靜庵)·퇴계(退溪) 두 선정 이외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렵고 신중히 여기는 뜻을 가졌었다. 내가 신독(愼獨)과 중봉(重峰)에 대하여 선정으로서 대우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벼이 의논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하서(河西)의 경우 곧 우리 나라의 염계(濂溪)인데 아직까지 성무(聖廡)의 배향에 빠져 있으니 이것이 내가 평소 마음에 연연해 하였던 바이다. 지금 성보의 의논은 문경(文敬) 부자를 아울러 배향하자는 의도로 파산 서원(坡山書院)의 일까지 인용하였는데, 파산 서원의 아울러 배향한 일이 사문(斯文)의 큰 시비거리가 되었던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성보가 이것을 가지고 말을 하니 어찌 더욱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사문의 대일통(大一統)의 의리에 관련이 있다면 인(仁)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나의 뜻이다. 더구나 지금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니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가 있겠는가. 삭일(削逸)이나 파직·삭직 간에서 벌을 줌으로써 그 음양에 따라 향배를 정한 죄를 바루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바이다. 오늘날 조정에 가득 찬 신하들 가운데 어찌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북을 울리며 공박하였던 것과 같이 할 사람이 없겠는가."
하고, 이어 승지 이조원(李肇源)으로 하여금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보의 앞뒤 서찰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가?"
하니, 조원이 아뢰기를,
"현재 신의 소매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찰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그가 비록 변명하고자 한다 해도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이 상소하기를,
"쌀을 사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뭇 의논이 같지 않아 아직까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해 연안의 쌀값은 조금 풍년이 든 해의 경우 1백 전으로 무려 5, 7 두(斗)나 살 수 있으니, 3냥(兩)으로 준절(準折)하여 말한다 해도 모두 안 될 것이 없는데, 올해의 경우 장차 6, 7두를 살 수 있는 것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6두까지는 되지 못한다 해도 관두(官斗)가 시두(市斗)보다 작기 때문에 시두로 13두 남짓이면 관두로 15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3냥의 돈은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3냥이나 되는 돈을 아끼지 아니하고 단지 1포(包)의 쌀만을 얻는다면 그것이 쌀을 파는 사람들에게 이익됨이 어찌 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데도 오히려 백성들의 폐단이 된다고 한다면 값을 어떻게 한 연후에야 폐단이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기일을 정하여 쌀을 매매할 자로 하여금 쌀을 가지고 포창(浦倉)에 와서 기다려 두곡(斗斛)에 준하여 봉납하게 한 연후에 곧바로 눈앞에서 값을 계산하여 준다면 서리나 향임들이 간사함을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혹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일체 ‘감독하는 사람이 스스로 도적질을 한 데 대한 율[監臨自盜之律]’로 벌을 준다면 관석(關石)이 밝게 게시되어 자연 범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무미조례(貿米條例)를 가지고 호남 도신에게 서면으로 물으니 도신이 비용이 많이 들고 쌀을 운반하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답하였으나 쌀을 매매하는 것이 폐단을 끼친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으니 그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가을이 이미 깊어졌으니 관문을 보내어 알려서 의당 미리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능히 1만여 석 정도만 먼저 매매해 볼 수 있다면 또한 가능한지 시험해 보는 일에 해가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생각건대 신은 재주도 없고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그 관직에 있으니 이에 상소의 끝에 다시 이전에 말한 간절한 심정을 다시 아룁니다. 또한 즉시 체차하셔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곡식을 운반하는 것이 어렵다고는 해도 곡식을 매매하는 것은 지극히 쉬우니 근거 없는 의논에 대하여 무슨 상관할 것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백과 더불어 쌀을 창고에서 내지 않고 백성은 수고를 들이지 않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두 편안한 계책을 강구하여 행하라."
하였다.

 

8월 28일 경자

전교하였다.
"지난번에 유집(遺集)을 보고 알지 못했던 바를 더욱 알게 되어 특별히 상경(上卿)의 관질(官秩)을 추증하게 하였다. 천관(天官) 가운데 어떤 것을 추증하든 아끼겠는가. 대체로 우리 나라의 일들은 단지 세력만을 살피니, 이 충무공에게 상경을 추증하지 않고 도리어 그 휘하의 통수(統帥)에게 건네주었다가 몇해 전에 비로소 증직을 가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전조(銓曹)에서 공변되게 하기 어려워 하는 것은 예전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유고를 인쇄하여 출간한 일로 인하여 듣건대 지난 정사 때 증직한 바가 곧 호조 판서였다고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증 판서 양대박(梁大樸)의 증직을 보국 숭록 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 판서로 고쳐 부표하여 계하하라. 문함(文啣)은 경연·문임·성균관·의금부·춘추관의 관직을 겸하고 무함(武啣)은 훈련 도감의 관직을 예겸(例兼)하고 오위의 관직을 별겸(別兼)한다. 선시(宣諡)하고 증고(贈誥)하는 날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되 장문(狀文)은 이조 판서가 이미 문임을 거쳤으니 그로 하여금 곧 지어 보내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건대, 매번 고 충렬(高忠烈)에게 한 번 치제하려고 했는데 아직 못하였다. 이 사람과 충렬은 백중지간인데 이 사람에게 특별히 추증을 하는데 더구나 충렬에 대하여 어찌 모른체할 수 있겠는가. 증 좌찬성 충렬공 고경명의 집안에도 증 판부사 양대박에게 치제할 때 동시에 사제(賜祭)하도록 하라."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8월 29일 신축

장령        주중옹(朱重翁)이 상소하기를,
"전 삭주 부사(朔州府使)        민치신(閔致愼)이 무고한 백성 3형제를 10일 사이에 타살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아내인 과부 세 사람이 가슴에 칼을 품고 손을 맞잡고는 걸식하며 전전하다가 궐문 아래에 와서 머물고 있는데 대궐 안이 깊고도 엄하여 억울함을 펼 길이 없어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늘을 범하는 원망의 기운이 5월에 서리를 내리게 할 만하니 치신의 죄상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취조하여 자복받게 하소서."
하고, 이어 말하기를,
"영흥부(永興府)는 곧 우리 태조 대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곳입니다. 부 안의 선파(璿派) 자손·선현(先賢) 자손·훈신(勳臣) 자손이 충의(忠義)·충찬(忠贊)·충익(忠翊) 등의 명목을 세습하여 제향 때의 집사나 유사시의 시위 등의 일을 오로지 이들에게 책임지우고 있는데, 이는 이미 옛 규례인 것입니다. 지난번 임진년의 변란 때 영정을 부의 서쪽 병풍산(屛風山)으로 호위해 갔다가 난이 끝난 후에 도로 본전으로 안치한 것은 모두 이 무리들이 충성을 바친 덕분이었습니다. 병자년의 난 때 영정을 해도(海島)로 옮겨 안치하였는데, 일이 급작스러워 미처 일제히 나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벌로써 강등하여 난후별대(攔後別隊)라고 이름하고 병영에 소속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짐짓 벌로써 시행한 것인데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역명(役名)을 세습하여 혹 모자와 띠를 착용하고 전내에 입직하기도 하고 혹 모립(毛笠)을 착용하고 군행(軍行)에 나아가 응하기도 합니다. 이 무리들이 일찍이 을해년에 상언하여 윤허를 받게 되었는데도 영읍(營邑)에서 게으름 피워 거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수사로 하여금 한번 모두 면급(免給)하게 하소서.
아, 북로(北路)에 무신년과 기유년에 있었던 큰 수재는 실로 최근에는 없었던 일인데, 수천 명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나갈 즈음에 환상(還上)과 신포(身布)를 책임지워 받아들일 길이 없어 제전(祭田)이나 자기의 토지를 물론하고 혹은 관에서 억지로 팔고 혹은 자기가 척매(斥賣)하여, 본래 가격이 10금 하는 물건을 겨우 1,2냥을 받고 1백 금을 받을 수 있는 토지를 겨우 돈 10꿰미만을 받았으니 곤궁한 백성들의 산업이 모두 부유한 민호(民戶)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윤음을 내려 모든 역을 탕척해 주고 각기 흩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모으셨으니 누군들 기꺼이 살면서 산업을 일으키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부호의 손으로 들어간 사소한 장토(莊土)를 도로 물리고자 하면 부유한 민호들이 혹 넘겨 팔았다고 하거나 혹 서로 바꿨다고 핑계대어 하나도 도로 물릴 수가 없습니다. 아, 이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릇 흉년에 판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무신년부터 경술년 보릿가을 전까지 판 논과 밭은 본래 가격으로 물려주는 일에 대해 다시 신칙하는 전교를 내려 도로 안집하게 된 백성들로 하여금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민치신의 일은 진실로 풍문과 같다면 자연 해당하는 율이 있으니 우선 잡아다 심문하여 취초하고 한편으로는 해도에 내려가 조사를 하라. 덧붙여 진달한 두 가지의 일은 군사 업무와 백성들의 실정에 관계된 것이니, 해도의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양재역(良才驛)을 영화역(迎華驛)으로 고치고 우치(郵治)를 화성 북문 밖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8월 30일 임인

전교하였다.
"제릉(齊陵)의 석물을 고쳐 수리하는 것은 곧 선조(先朝) 병진년에 하려고 했던 일인데, 마침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오는 해에 이렇게 수리하여 고치게 되었으니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하다. 어찌 뜻을 표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수리하여 고칠 때 일을 거행하였던 수복(守僕)과 능군(陵軍) 등에게 도신으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도록 하고, 연경사(衍慶寺)의 승려들에게도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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