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을사
이보다 먼저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篇)》을 영남에 내려보내어 계서 영리(啓書營吏)를 시켜 잘 베껴쓰게 하고 도내의 유생을 시켜 교정을 보여서 올려보내게 하였는데, 이는 본도의 유생이 경(經) 공부에 조예가 깊고 영리의 서법이 전아하면서 충실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므로 관찰사가 올려보냈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상소하기를,
"본도의 군민(軍民)은 몇 년 동안 거듭 흉년을 겪었으므로 올해 농사가 좀 잘 되었다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중단하였던 군무(軍務)를 갑자기 요구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더구나 군정(軍政)은 바다나 육지가 마찬가지이지만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면에 있어서는 육지에서의 훈련이 바다에서의 훈련보다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훈련을 하게 되면 같이 하고 하지 않으면 같이 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번에 바다에서의 훈련은 중지하면서 육지에서의 훈련만 하게 한 것은 이미 공평하게 다스리는 정사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또 여러 도의 훈련을 다 중지한 마당에 본도의 군민들만 푸대접 받는다는 탄식을 품고 있는 것은 매우 불쌍한 노릇이라 하겠습니다. 본도의 육지에서의 훈련을 다른 도와 같이 우선 중지하는 것이 일로 보아 합당할 듯합니다.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세월을 누려오면서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지방 고을에서 군사들을 모아 점검하는 것을 임시로 보고하는 것이 규례로 되었고, 두 군영에서 순회하며 훈련시키는 것은 폐지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으니,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지금부터 특별히 여러 도의 고을들을 신칙하여 큰 흉년이 든 해가 아닌 한 각 관문에서 군사들을 모아 개별적으로 훈련을 시키게 하되, 해당 도의 수신(帥臣)이 가까운 부하 장수를 별도로 파견하여 훈련에 임하는 자세를 살펴 만약 전처럼 임시로 보고하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보고하여 파면하게 하소서. 이런 방법으로 매년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상규로 삼는다면 군대의 인원은 빈 대오가 없고 무기도 정돈될 수 있을 것이며, 또 먼 길을 달려가서 집합하는 괴로움이나, 각 고을이 비용을 소모하는 폐단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후에 수신이 연한(年限)에 관계없이 민력(民力)만을 살펴보아 수시로 바다와 육지의 대대적인 훈련을 행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는다면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의 형편이 정말 그렇다면 어찌하여 여러 도에 물어보던 초기에 바로 말하지 않았으며, 바다에서의 훈련을 특별히 중지하였던 그 당시 즉시 청하지 않았던가. 북관(北關)과 서관(西關)의 훈련을 중지하자는 청은 서관에 관한 것이 더욱 놀라웠으므로 조사 신문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백성을 위하여 허락했으면서도 경에게만 유독 망설이는 것은, 동일하게 처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지와 변방은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편상 우선 경의 청을 따라서 백성들을 소생시키려고 하니, 이러한 뜻을 장차 묘당으로 하여금 경과 수신(帥臣)에게 행회하도록 하겠다.
대개 사(司)의 훈련은 부의 훈련보다 전일하고, 초(哨)의 훈련은 사의 훈련보다 나은 법이다. 올해 고을에서 하는 점검이 과연 실상이 없는 지경까지 가지 않는다면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경들이 점검하고 신칙하기를 부지런히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일이다. 끝에 첨부한 의견은 설령 일의 형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병사(兵使)도 겸하고 있는 경이 어떻게 감히 이런 법에 없는 청을 하면서 군정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국가의 체모로 헤아려보면 잡아들여 문책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할 것이나 군대의 점검이 눈앞에 닥쳐 속죄할 방도를 강구해야 하므로 경에게 우선 녹봉 5등을 감하는 벌을 시행하는 바이다."
하였다.
9월 4일 병오
성주(星州) 충장사(忠莊祠)에 다시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충렬사(忠烈祠)에서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새겨서 게시하였던 제문을 본도의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한 부 찍어서 올려보냈다. 그런데 거기에 청(淸)나라 연호가 쓰여 있었으므로, 전교하기를,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제사를 다시 지내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예방 승지(禮房承旨) 및 향실(香室)의 관원을 파직하고, 관찰사는 녹봉 3등을 감하도록 하라. 제문은 고쳐 써서 게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관서 관찰사 박종갑(朴宗甲)의 삭직을 계청하였는데, 이는 만부(灣府)에 수재가 난 후에 여러 날 동안 향산(香山)을 유람하며 돌아다니느라고 보고를 소홀히 하고 지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선 정상을 참작해 주어 앞으로 힘을 다해 노력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황해 관찰사 서매수(徐邁修)의 장계를 보건대, ‘순회하여 황주(黃州)에 이르자 절도사 김사목(金思穆)이 전임자라고 내세우며 공장(公狀)과 연명(延命)을 일체 폐지하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체통을 손상시킨 그의 행동은 이미 극히 놀라운데다 특히 더 중요한 연명의 예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는 것은 진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처벌하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지방 관직에 관계된 일이라서 감히 함부로 논하지 못하겠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병사(兵使)는 감사에 대해서 그 체통이 상하 관원과 같은 법이고, 연명의 체모는 원래부터 중요한 것이며, 군무(軍務)의 거행은 또 군율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찍이 관찰사를 지냈다고 내세우며 완전히 폐지해 버리고 하지 않은 행동은 진실로 지극히 놀랍습니다. 고사를 가지고 예를 들어 보더라도, 신 윤시동(尹蓍東)의 선조 문정공(文靖公) 신 윤두수(尹斗壽)가 융경(隆慶) 경오년041) 에 황해 감사로 있다가 만력(萬曆) 기묘년에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자 감영으로 달려나아가 연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전임 관찰사라는 이유로 시임 관찰사가 앞에다 군대를 사열시켜 놓고 5리 밖까지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여 들어갔습니다. 이 일은 그 일대에 아름다운 일로 전해졌고, 그림으로 그려 기록해 감영의 연청(椽廳)에 보관해 왔으므로 지금까지도 상고해볼 수 있습니다. 본도의 전례가 이미 이와 같고 보면 해당 수신(帥臣)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파면하고 잡아들이는 처벌을 시행해야 하겠으나, 중신(重臣)을 특별히 지방 관직에 임명하여 일의 체모가 자연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경우이므로 감히 전례대로 논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옛사람이 그림으로 전해준 아름다운 일을 본받지 않고 요즘 풍속인 전임자의 제수 전례만을 믿고 갈등을 빚어 결국 번거롭게 상주문이 올라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잘못은 놔둔다 하더라도 체통을 훼손시킨 책임은 면하기 어려우니 조정의 체면상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관에 임명되는 경우를 ‘귀양간 고을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죄명이 먼 지방으로 귀양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니, 파면하거나 잡아들이는 것은 자못 무겁게 논죄하는 도가 아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문책하지 않는 것이 ‘다시 귀양보낸다.’는 법조문과 합치될 듯하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수신(帥臣)에게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9월 6일 무신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을 체차하고, 이면응(李冕膺)을 후임자로 삼았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이한풍(李漢豊)에게 그대로 어영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정리 당상(整理堂上)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심이지(沈頤之) 등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원자가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상이 원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연로하고 품계가 높은 재상들이 들어왔으니 절을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답례하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 심내영(沈來永)이 상소하기를,
"아! 선정(先正)신 김인후(金麟厚)의 조예와 깊이에 대하여 신들이 지난번 소에서 논한 것은 오히려 만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내린 2백 50여 자 가량의 비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참되면서도 간절하고 구절 구절이 정밀하고 은미한 것이었으니, 선대의 훌륭한 유학자들이 미처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을 전하께서 발휘하시고, 공사(公私) 전적(典籍)이 미처 천명하지 못하였던 것을 전하께서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 비답을 듣고서도 흥기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있다면 인간 본연의 양심을 잃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비답이 내려진 후에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鐘秀)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글을 보내기를, ‘혈기가 있는 무리는 모두 군사부(君師父)의 은혜로 살아가기 때문에 똑같이 섬겨야 하는 의리가 있다. 우리 임금은 성인으로서 그 총명함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승을 겸하고 있으니, 종수는 머리가 하얗게 센 지금까지도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만 하여 내 임금이 바로 내 스승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한수재(寒水齋) 선생께서 일찍이 「오늘날 사림의 영도자가 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실로 선생께서 먼저 깨달으신 점이 있다 하겠다. 우리 유학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성상의 계획이 당당하며 광대하고 정밀한데 누가 감히 입을 놀려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근래 성상의 비답에 문정 선생(文靖先生) 김 하서(金河西)를 공자 사당에 종사(從祀)하고자 하는 뜻을 간곡히 내비치셨다고 하는데, 이는 보잘것없는 신이 오래 전부터 간절히 소망해 오던 것이다. 그런데 성상께서 이미 명하셨으니 신이 무어라고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둔암(遯巖)042) 의 비유는 검토하고 조사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하며, 성담(性潭)043) 의 논의는 들을 만한 것이 있다. 성상의 비답에 문정공(文靖公)만을 거론한 것으로 보면 성상의 본의가 특별히 드러내어 표창하고자 하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대사성 윤득부(尹得孚)가 대사헌 송환기(宋煥箕)에게 보낸 편지에 ‘근래 문묘에 종사하는 논의가 제기되자 성상께서 교지를 내려 하서(河西) 김 선생을 먼저 배향하고자 하는 뜻으로 여러 차례 간곡하게 말씀하셨으니,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그리하여 이유(李儒)의 상소가 올라가자마자 몽합(夢閤)의 글이 또 나와 우리 임금을 우리 스승으로 삼아 뜻을 그대로 받들어 따를 뿐이었으니, 이것을 누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일종의 반대되는 논의가 틈을 타고 튀어나와서 영합(迎合)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으니, 이 무슨 말인가. 영합하는 것과 뜻을 따르는 것은 같은 듯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진실로 임금의 훌륭한 뜻을 따르는 것을 영합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상서(尙書)》에서 말한 「크게 임금의 뜻에 응한다.」는 것 또한 영합이라고 몰아세울 것인가. 아, 너무도 이상한 일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셔서 천고에 미처 강구하지 못했던 의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밝히시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힌 책 한 부를 완성하셔서 해와 달처럼 밝게 제시하셨는데, 그 당시에 전후로 찬양하던 자들도 영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저들이 궁지로 몰아넣기에만 급급했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예로부터 영합하는 일이 어떤 일이었으며 영합하는 임금이 어떤 임금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몽합(夢閤)의 글은 몽합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았던 논의이며,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았던 논의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삼가 듣건대 이것은 성상이 강구하여 밝힌 몇 건의 큰 의리중의 한 가지 일로서 선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보거나 이 일에 대하여 들은 자라면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인 자는 도리어 「잗다랗게 비위나 맞춘다.」는 말로 평소에 날조하여 모함하려던 마음을 실현시키고자 하니, 그 또한 매우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위로 우리 임금의 훌륭한 덕을 밝히고 아래로 유학의 대통(大統)을 정하는 것은 오직 집사의 한 마디 말에 달려 있으니, 집사는 깊이 생각하고 먼 앞날을 내다보아 설파하여 물리치도록 하라. 그래서 함께 큰 도에 이를 수 있다면 매우 다행스럽겠다…….’ 하였습니다.
두 대신의 문답과 한 유현(儒賢)이 주고받은 글에서 한결같은 말로 흠송한 것에 대하여 팔방(八方)이 눈을 비비며 바라보고 있으니, 무릇 오늘날 유자의 반열에 있는 자라면 손을 모으고 발꿈치를 들고서 성대한 의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괴상한 귀신들이 안으로 간사한 뜻을 품고 밖으로 영합한다는 말을 내세우면서 함부로 입을 놀려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고 있으니, 아아! 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신들은 성대한 예가 혹 지체될까 염려하고 사악한 말이 마구 떠도는 것에 통탄하여 감히 이렇게 목욕 재계하고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백한 교지를 내려 특별히 선정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바른 학문을 보호하고 간사한 싹을 꺾어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 안팎의 선비들이 문정공을 공자 사당에 종사할 것을 청해온 지 오래 되었다. 전에 신중을 기했던 것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였고, 근래에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대개 ‘몇 건의 큰 의리중의 하나’라고 한 너희들의 상소는 간결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한 것이라 하겠으니, 누가 너희들을 소원한 자들이라고 말하겠는가. 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였으니 감탄스럽고 감탄스럽다. 그러나 막중한 예를 한 장의 상소가 있었다고 하여 가볍게 허락하기는 곤란하니, 너희들은 물러가 더욱 학업에 힘을 기울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7일 기유
장릉(章陵)에 배알하기에 앞서 경기 도사(京畿都事) 유경(柳畊)을 어사로 임명하여 거둥할 때에 길을 닦고 다리를 만들기 위하여 백성들을 동원하는 폐단을 살피게 하였다.
형조 판서 윤사국(尹師國)과 참의 오정원(吳鼎源)을 파직하고 참판 이서구(李書九)를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형조의 노예 중에 부민(部民)에게 뇌물을 요구하면서 구타하여 죽게 만든 자가 있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서구를 잡아들여 심문하고 낭관을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득신(李得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8일 경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때 문순공의 종손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에 임명되어 신주를 가지고 경성에 들어왔는데, 예관에게 명하여 유생들을 인솔하고 가서 강 부근의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9월 9일 신해
성균관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실시하였다.
9월 10일 임자
병조 정랑 여준영(呂駿永) 등을 어사로 임명하여 거둥할 때의 연로의 민폐 및 배종하는 신하들의 범법 행위를 살피게 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이 아뢰기를,
"어가가 지나갈 양천(陽川)의 도로도 인근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힘을 합하여 보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양천과 김포의 백성에게 해마다 폐를 끼치고 있는데 또 어떻게 노역을 시키겠는가. 전부 삯군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화성(華城)에 성을 쌓는 데에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총리 대신인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대호피(大虎皮) 한 벌을 내리고, 수원 유수(水原留守) 조심태(趙心泰)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으며,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에게 갑옷 한 벌을 내렸다. 아울러 작년 봄에 미리 상을 주었던 자를 제외하고, 공장들까지도 모두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관학 유생 이광헌(李光憲)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거듭 청하였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렸다.
충희공(忠僖公) 임성(任珹)의 연시일(延諡日)에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하였다.
9월 11일 계축
고 충신 양지(梁誌)를 추증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양지는 임진 왜란 때 삭녕(朔寧)에서 순절한 3명의 종사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관찰사 심대(沈岱)와 약속하고 함께 목숨을 바친 자이다. 이보다 먼저 특별히 명하여 삭녕에 사당을 세워 표절사(表節祠)라는 현판을 달고 네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으며, 아울러 그들을 추증하고 정려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손자 양성묵(梁性默)이 절제(節製)에서 수석을 하여 나아가 뵙게 된 자리에서 상이 그의 조부만 누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윤경원(尹慶元)과 강수남(姜壽男)의 예에 따라 이조 판서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9월 13일 을묘
호서(湖西)에서 특별히 추천한 온양(溫陽)의 유학 이건주(李建胄)를 불러 만나본 후에 해조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뽑아 쓰게 하였다. 건주는 고 유신(儒臣) 이간(李柬)의 손자이다.
9월 15일 정사
차대(次對)가 있었다. 이조 참의 이성보(李城輔)를 파직하였다. 이때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종사하려고 하자, 성보가 처음에는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도 함께 종사해야 한다.’고 하였다가 곧 상의 뜻이 문정공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또 문정공만 거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서 연신(筵臣)에게 개의치 않는다는 뜻을 보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성보의 앞뒤 논의가 전혀 확고한 주장이 서지 않았으니 파직하여야 한다고 아뢴 것이다.
고 재상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을 천묘(遷廟)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김육의 대동법과 상정법(詳定法)은, 벼슬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연구해 오다가 정승의 자리에 오르게 된 후 건의하여 시행한 것인데,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국가에 이러한 공을 세웠으니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 등 여러 사람들의 예에 따라 천묘(遷廟)하지 말게 함으로써 그 충성과 노고를 기리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고 충신 좌의정 유임(柳琳)과 영의정 유혁연(柳爀然)에게 시호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유임은 금주(錦州)의 싸움에서 중국을 위하여 절개를 다 바쳤었고, 혁연은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의 추천으로 당시 중요한 모의에 참여했었는데 아직까지도 미처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시동이 또 아뢰기를,
"얼마 전에 유효걸(柳孝傑)의 서제(庶弟) 유지걸(柳智傑)이 순절한 일에 대하여 문헌을 상세히 조사해서 아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걸의 일은 증 영의정 김경서(金景瑞)가 성책안에서 쓴 소본(疎本)과 그의 가전(家傳)에 실려 있습니다.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다 데리고 투항하자 홍립의 휘하에 있던 자들은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지걸은 항복하기를 원하지 않고 백기(白旗) 아래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정묘년에 홍립이 돌아와서 효걸을 보고 ‘나는 지걸의 죄인이다.’ 하였으니, 그가 관례도 치르지 않은 나이로 몸을 던져 의롭게 순절한 행적이 매우 상세하여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정려하고 추증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동기(童踦)는 상례(殤禮)로 치르지 않았는데도 기량(杞梁)의 관044) 은 여묘에 데려오지 못하였으니 성조(聖朝)의 은전을 베풀 곳이 없어, 이것이 도리어 난처한 점입니다. 그 아비 증 영의정 유형(柳珩)의 묘 아래에 문 하나를 세워 표시한다면 의를 일으키는 데에 해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전례를 널리 조사한 후 다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고 통정 대부 윤형갑(尹衡甲)에게 시호를 내렸다. 형갑은 계축년과 무오년에 의롭게 행동하다가 죽은 자이다. 이에 앞서 천묘하지 말도록 특별히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이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충신 정기남(鄭奇男)을 선천(宣川) 의열사(義烈祠)에 추후로 배향하였다. 기남은 창성 부사(昌城府使)로서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김응하(金應河)와 같은 날 죽은 자이다. 이미 정려하고 추증하는 법전을 베풀었으며, 선조(先朝) 무인년에 그의 후손이 글을 올려 의열사에 배향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는데 본도가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역시 윤시동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윤허한 것이다.
상토진(上土鎭)을 곤장평(昆長坪)으로 옮겨 설치하고 강계(江界) 방어영(防禦營)의 중군(中軍)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이번 거둥 때에 어가가 구포(鷗浦)를 지나고 난 다음부터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의 전례를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장릉(章陵)으로부터 현륭원으로 가서 배알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제릉(齊陵)·후릉(厚陵) 두 능의 기신제(忌辰祭)에 관계된 헌관과 집사들은 송영(松營)에서 차출하고, 헌릉(獻陵)·선릉(宣陵)·정릉(靖陵) 세 능을 보수할 때에는 광주부(廣州府)에서 제수를 마련하고 제관도 그 부에서 차출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민종현(閔鐘顯)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이조승(李祖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6일 무오
대사간 이조승(李祖承)을 체차하고 송전(宋銓)을 후임자로 삼았으며, 성덕우(成德雨)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17일 기미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 및 친시(親試)를 실시하였다.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거듭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정(先正) 문정공은 바로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 이정(二程)·장재(張載)·주자(朱子)를 먼저 공자 사당에 종사하면서 주자(周子)만 홀로 종사하는 반열에서 빠뜨린다면 이정·장재·주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오늘 너희들이 청하는 것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마음이다. 윤허를 오늘까지 짐짓 미루어 온 뜻은 그 예를 중하게 다루고 그 일에 신중을 기하자는 데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소가 이미 세 번이나 올라온 이상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선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선왕(文宣王)의 사당에 배향하자는 너희들의 청을 시행하도록 윤허하는 바이니,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조사한 후 날을 정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여러 도와 고을들에서는 다 금년 안에 거행하되, 고유(告由)하는 절차는 달리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대략 서울 문묘의 동쪽 곁채와 서쪽 곁채에 술잔을 올리는 고사를 따라 선성(先聖)의 신위에 고유한 후 해당 신위에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수는 술잔에 청주 한 잔을, 나무 제기에 미나리김치 한 접시를, 대나무 제기에 제철에 나는 과일 한 접시를 담으라는 내용을 뒤에 덧붙여 써서 내려보내어 예가 번거롭고 일이 귀찮다는 탄식이 없게 하라. 일찍이 듣건대 지방에서는 예를 치른 후에 제사를 따로 마련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무의미한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규례를 만들어 하루 빨리 잘못된 관습을 고치도록 하는 일을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어서 명하기를,
"증 이조 판서 김인후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천묘하지 않고 영구히 제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소두(疏頭)인 홍준원(洪準源)을 불러 만나보았다. 전교하기를,
"내가 선정(先正)들을 배향하는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오래 전부터 생각을 해왔었다.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 문성공(安文成公)·정 포은(鄭圃隱) 이 네 현인 가운데에서 정 포은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도학을 처음으로 일으켜 우리 동방의 기자(箕子) 이후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그 공이 매우 크니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최치원과 설총도 동방 유학자로서 두드러진 자이지만 종사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나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최치원의 경우는 좀 지나친 듯하다. 안 문성공은 공자의 사당에 큰 공이 있으니 사현사(四賢祠)와 같은 사당을 별도로 세워서 종사하는 법전으로 보답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한 일일 것이다. 김 문정공(金文靖公)은 《대학》과 서명(西銘)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敬)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아 실로 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깊이 감격하며 삼가 경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문정공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은 모두 도학과 절의(節義)와 문장을 같이 꼽지만, 배향하는 중대한 법전에서는 마땅히 유학과 도학을 가지고 논해야 할 뿐이지 절의나 문장과 같은 것은 오히려 그 나머지 일에 속하는 것이다. 김 문정공의 절의를 나머지 일에 속한다고 하면 그의 도학의 경지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였다.
이조 참의 성덕우(成德雨)를 파직하였다.
9월 18일 경신
춘당대에 거둥하여 서총대(瑞蔥臺)의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다.
9월 19일 신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할 때에 대성전(大成殿)에서 고유(告由)만을 행하고 술잔을 올리는 의식은 하지 말도록 하고 이것을 훗날의 법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능에 거둥할 때 병조와 도총부의 유도 당상(留都堂上)과 낭관은 모두 궁을 지키고 있도록 하는 것을 규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송전(宋銓)을 체차하였다. 접견하는 자리에서 전계(傳啓)하는 데에 잘못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조중첨(趙重瞻)을 형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중첨이 임금이 거둥하던 때에 백성들에게 마구 거두어들이고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어사 정만석(鄭晩錫)이 논계하였기 때문이다.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을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임명하였는데, 수령을 제대로 뽑아 임명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판서로 삼고, 이조 참판 홍명호(洪明浩)를 체차하고 황승원(黃昇源)을 후임자로 삼았으며,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20일 임술
이문원에 거둥하여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에 보낼 옷·폐백·향·초를 봉심하고서 이문원의 문을 나와 경건히 전송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9월 22일 갑자
상이 원자와 함께 이문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옹주가 두질(痘疾)을 앓자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이 거처를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총부(摠府)로 거처를 옮기는 일은 숙묘(肅廟)의 어린 시절에 이미 행하였던 예인데, 궁중에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의 내각이 곧 옛날의 총부라고 하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정묘
능원(陵園)의 거둥을 중지한다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청하였기 때문이다.
9월 27일 기사
비가 내렸다.
여러 도의 묵은 환곡(還穀)을 4분의 1을 기준으로 하여 가장 오래된 것부터 거두어들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신미
시임과 원임 대신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 박종갑(朴宗甲)이 올해 농사가 조금 잘 되었다고 하면서 이전에 꿔주었던 곡식을 전부 거두어들이기를 계청하였으나 상은 곤란하게 여겨 4분의 1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우상이 이전에 꿔주었던 곡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부터 먼저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나쁠 것은 없지만 필경에 탕감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또 그 다음으로 오래된 것부터 탕감해 주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탕감이라는 것은 아전과 향임(鄕任)에게 다 돌아가게 마련이다. 금년에 바치는 묵은 환곡이 어느 해에 바치지 못했던 것인지를 백성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묵은 환곡에 대해서는 아는 백성이 없습니다. 세 말을 바쳐야 하는데 다섯 말을 거두어들인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구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배들의 문집을 보아도 ‘차라리 탕감을 해줄지언정 거두어들이는 것을 중지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이는 거두어들이기를 중지하는 이익은 당장의 급함을 해결하는 데에 불과하기 때문인데, 이듬해에는 새 환곡을 거두어들이자마자 곧바로 전년도에 남은 환곡을 요구하게 되어 백성들은 도리어 쪼들리게 됩니다."
하였다. 약방 제조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당해 년도에 거두어들이기를 중지한 것을 또 한 해 동안 거두어들이지 않아야 묵은 환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임진 왜란 이전에는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8년 동안의 전란을 겪고 나서도 군자감 창고에 4만여 섬의 곡식이 쌓여 있었다. 그때에는 호조에 별무(別貿)가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별영(別營)의 방료(放料)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지에게 이르기를,
"호조의 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는 것은 백년을 소급해 계산해 본다고 하더라도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니, 크게 풍년이 든 해를 제외하고는 틀림없이 모두 부족할 것이다."
하니, 이지가 아뢰기를,
"근년은 경자년의 총 전결과 비교해서 7, 8만여 결이 감소했습니다. 현재 총 전결을 가지고 논해 보면 크게 풍년이 든다고 하더라도 십 만의 조세를 거두어 들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 이전에 궁방에서 떼어 받은 몫으로 나간 것만도 얼마나 되었던가. 그런데도 《대전》에 정한 결수만을 근거로 삼아 매번 결수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더 떼어 주었으니 그 잘못이 크다."
하니, 이지가 아뢰기를,
"병신년 이후에 내준 전결도 2만여 결이나 되니 곡식으로 환산하면 2만여 섬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효묘조(孝廟朝)에는 전총(田總)을 3 등급으로 구분하였었는데, 그 중 중급과 하급의 총 전결을 조사하여 선조(先朝)의 총 전결과 비교해 본다 해도 차이가 없었다."
하자, 시동이 아뢰기를,
"다시 측량을 하게 하여 매번 예전의 총 전결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전제(田制)에 달려 있는 법인데, 지금은 9등급의 제도가 명확하지 않아서 전결이 모두 최하등급인 실정이다. 경들은 이전에도 개량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지만 나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대개 어진 정치란 반드시 토지 경계를 바로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거의 없고 우선 백성들에게 거두어서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려는 데에 마음을 쓰고 있으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것이 낫다.’045) 는 말이 참으로 옳다. 개량하게 한다 하더라도 미처 개량도 하기 전에 백성들이 유언비어에 크게 동요하게 될 것이다. 장횡거(張橫渠)는 ‘정전(井田)은 한 지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큰 난리를 겪은 후에 비로소 시행할 수 있다.’ 하였으니, 주자의 말은 실로 때와 형편을 헤아려서 한 말이다. 연전에 창원(昌原)에서처럼 시작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둔다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정전제(井田制)를 지금과 같은 때에 갑자기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들의 자산이 같지 않은데다가 토지에 제각기 주인이 있으니, 부자의 넉넉한 것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려고 하면 가난한 자는 좋아하겠지만 부자는 원망을 하기 쉽습니다. 주자가 ‘큰 난리 후에 시행할 수 있다.’고 한 것 또한 백성들의 생업이 탕진된 때가 전제(田制)를 개혁하기에 적절한 때임을 지적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토지는 중국과 다르므로 정전법은 애당초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인구가 적으면서 토지가 많아야만 균전법을 쓸 수 있는데, 인구가 지금과 같이 많은 때는 일찍이 없었으니, 설사 균전법이 있다 하더라도 형편상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임제원(林濟遠)이 일찍이 ‘인구가 옛날과 비교하여 점차 줄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그 말은 얼토당토 않습니다."
하였다. 영돈녕 김이소(金履素)가 아뢰기를,
"가옥이 빽빽히 들어선 것도 요사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이 협소하여 말을 타고 지나가지 못하는 곳까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경들의 책임이다. 집을 지으면서 길을 침범하는 경우에 보이는 족족 담당 부서로 하여금 철거하게 했다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는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속임수를 일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게터로 사들였다가 시일이 조금 지나면 안에다가 구들을 놓아 떡하니 집으로 만들어 놓으니, 이는 가게가 금령 안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대궐로 오다가 보니 길에 갑자기 두세 채 새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가게터라고 말해 놓고는 집을 지어 놓았기에 부서의 하인을 불러다가 모두 철거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즉시 발각되었기 때문에 철거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만약 몇 년이 지나 서로 전매한 후에 발각되었다면 다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기강에 달려 있는 일이다. 사치하는 풍조가 날로 심해져 천한 무리까지도 분수를 지키지 않고 기어코 자기 집을 넓게 하려고 하는 바람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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