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유
명하기를,
"강계(江界) 옥동(玉洞)의 삼강덕(三江㯖)은 【서북 지방 사람들은 산마루가 평탄한 것을 덕(㯖)이라고 한다.】 은 10년 동안 부세를 면제해 주고, 삼천방(三川防)은 5년 동안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삼강(三江)과 삼천(三川)은 모두 새로 개척한 땅이지만 삼천은 백성들이 자원하여 들어갔고 삼강은 백성을 모집하여 들였으므로 부세를 면제해준 연도가 다른 것이다. 이어서 명하기를,
"이후로 백성들이 자원하여 개척한 사군(四郡)의 토지에 대해서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3년 동안만 부세를 면제해 주는 것을 규례로 삼고, 이것도 호조로 하여금 장고(掌攷)에 싣게 하라."
하였다.
10월 3일 을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각신(閣臣), 약원 제조를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원자가 글장난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성벽에 가깝다. 이곳에는 아무 책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각신의 좌목(座目) 현판을 한 번 훑어보고는 바로 외어버렸다. 시험삼아 여러 대신들의 세파(世派)를 가르쳐주었더니 그것도 한 번 듣고는 다 외었으며, 송(宋)나라의 여섯 군자와 우리 조정에서 문묘에 종사한 자 및 상신록(相臣錄)도 다 알고 있었다."
하고는 원자에게 글을 읽으라고 하였다. 원자가 꿇어앉아 《대학》의 경(經) 1 장을 읽었는데, 소리가 낭랑하고 구두가 분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학》은 일찍이 가르쳐서 잘 외우지만 《대학》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외웠다. 일전에는 내가 《시경》 보전장(甫田章)을 읽는 것을 옆에서 한 번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 나이였을 때와 비교하면 숙성한 편은 아니다."
하였다.
10월 4일 병자
대내로 돌아왔다. 혜경궁(惠慶宮)의 차비, 입직한 약원(藥院), 분사의 신하들, 의관, 액정서의 원역(員役), 군병 및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입직한 약원 제조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10월 7일 기묘
장령 정최성(鄭最成)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영남에서 불러들인 이수인(李樹仁)과 우재악(禹載岳)이 아뢴 말은 듣기에 놀라웠으니, 침랑장(寢郞將)에 제수한다는 명을 다시 거두어 들이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이어 전교하기를,
"불러들인다는 명목으로 올려보내게 하여 관직에 제수까지 해놓고는 그로 하여금 낭패를 보고 돌아가게 한다면, 미처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자들이 장차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 자취를 감추기에 급급해 할 것이다. 이후로는 더욱 힘을 기울여 장려함으로써 명령을 믿을 수 있게 해야만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도에서 미처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분부하여 속히 올려보내게 하라. 표창하고 부르는 사람 속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부름에 응하지 않고 한결같이 망설이기만 하는 자를 어찌 의리에 맞게 처신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체모가 달려 있는 일이라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호서와 영남의 관찰사를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9일 신사
부교리 고택겸(高宅謙)이 상소하여 삼남(三南) 수령이 환곡으로 입본(立本)하는 죄에 대하여 아뢰었다. 입본이란 관에서 꿔주게 되어 있는 곡식을 제멋대로 비싼값에 팔아서 그 이익을 챙기고 돈을 조금 남겨두었다가 곡식값이 싼 가을에 사서 채워넣는 것인데, 이것을 입본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도성 백성의 의장(儀章)에 구별이 없는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다. 비답하기를,
"수령으로서 탐욕을 부려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어사의 보고와 대신(臺臣)의 상소에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심지어 입본까지 하는 폐단이 삼남에 낭자하다는 사실을 이 상소에서 진술하고 있다. 진실로 백성을 편하게 하고자 한다면 탐욕을 부리는 무리를 징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근래에 법이 날로 무너져가고 간사함이 날로 심해져 명색이 수령이라는 자들이 아전들의 간사함을 엄히 단속하지 못함으로써 외밭[瓜田]이라는 비난을 달게 받고 있다. 만약 나타나는 족족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을 징계하고 뒷사람들을 면려하겠는가. 이미 창고를 열기 시작하여 한창 세금을 독촉하고 있는 마당이니, 별도로 면려하는 조치가 있어야만 극심한 폐단을 제거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먼저 어사를 뽑아 아뢰라고 했지만 어떻게 어사가 몰래 다니며 조사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관찰사가 조금도 위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여러 고을을 관할한다면 저절로 그런 폐단이 없어져 법을 준수하게 될 것이다. 금년에는 먼저 관찰사의 근무상태부터 살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는 즉시 먼곳으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겠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삼남 관찰사를 신칙하게 하라. 끝에 아뢴 신분의 귀천에 따른 의장의 구별이 없다는 문제는 너의 말이 옳긴 하지만 제대로 금지하지 못하면 백성들만 어지럽혀 놓을 뿐이다. 이는 전적으로 조정의 기강이 서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10월 12일 갑신
정민시(鄭民始)를 규장각 제학으로, 김처한(金處漢)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13일 을유
우레가 쳤다.
전교하였다.
"우르릉거리는 우레소리가 겨울에 들려왔으니 지금부터 3일간 반찬 수를 줄임으로써 반성하고 수양하는 도리를 다하겠다. 봄부터 여름을 지나 추수할 때까지 항상 기상이 순조로왔는데, 이제 추워지기 시작하는 절기에 이런 경고가 있었으니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이 점이 더욱 두려우니, 재앙을 그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곧은 말과 옳은 논의를 각각 숨기지 말고 진술하라는 뜻을 언론에 관한 책임을 지고 논사(論思)하는 신하에게 말하라."
승정원이 의논해 아뢰어 언로를 열고, 인재를 등용하고, 기강을 세우고, 사치를 금하고, 선비의 취향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펴주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지루하게 진술한 여섯 가지 조항은 전교에 응하여 올리는 글로 볼 수 없다. 언로가 진정으로 넓게 열려있다면 어찌 참소하는 말이 있겠는가. 대부분 정당하지 못하여 남을 헐뜻는 말이 아니면 모함하는 말이니, 선을 드러내지 못하는 마당에 악을 또한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삽시간에 싸움터가 되어버리곤 하는 상황에서 누가 남을 추천하는 모양을 갖추겠는가. 이에 화타(華佗)와 편작(扁鵲)이 밖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을 치료하던 의술을 모방하여 대증요법(對證療法)으로 투약을 하게 되었다. 한 말 식초를 마시기만을 좋아하여 누룩이 술이 되기를 기다릴 겨를이 없는 격이라서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은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 폐단은 오로지 자만하여 으쓱거리는 것이니, 이 점은 내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재가 진정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면 어찌 고쳐야 할 규례가 있겠는가. 어진 이를 도외시하고 외척을 우대한 본의는 도리어 서한(西漢)에게 부끄러울 정도이니, 깊은 밤중에 생각하다보면 매번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 속임수를 쓰는 풍토가 생기고 화와 복을 주는 권한이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옮겨가 풀밭에 숨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다 입을 다물고 있다. 연래로 큰 폐단부터 제거하여 크게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인재를 구하기 어렵고 부족하여 어제 오늘 그저 그대로 날만 보내고 있으니, 《주역(周易)》에 이른바 결단을 내려 왕정(王庭)에 드날리는 아름다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나름대로 노팽(老彭)이 우물을 보던 뜻에 견주어 고요히 진정시켰는데, 단지 잡탕만을 만들었을 뿐이지 띠 부리가 얽히고 설켜 한꺼번에 뽑혀 나오는 뜻046) 과는 전혀 상치되고 말았다. 지금의 인사가 과연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과연 편파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군자의 도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사라져가며, 사대부가 예의를 알아 서민들이 다투어 본받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내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대가 말한, 기강이 서지 않고 사치가 없어지지 않고 선비들의 취향이 이와 같고 백성들의 고통이 저와 같다는 것은 모두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들이다. 너희들은, 내가 여섯 가지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전교한다고 해서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먼저 너희들부터 각자 윤허하는 때에 반성하도록 하라. 아울러 모든 관리들이 다 스스로 반성하는 나의 뜻을 본받아 준다면 옛날로 되돌아가고 재앙을 돌려 상서를 만드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언로를 열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밤이 깊어 오경이 지난 뒤에 등불을 가져오라고 하여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읽어보았는데, 한 편의 요지는 ‘참소하는 말로 취급해서 올린 글을 되돌려주게 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들은 오한원(吳翰源)의 상소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그의 소는 전혀 귀착되는 바가 없이 하루 전에 헌부가 올린 소의 부본을 그대로 베껴쓴 것이었다. 한원의 이러한 습관은 근래 바로잡고자 하는 일 가운데 한 가지이다. 대개 대간(臺諫) 하나가 입을 열면 뭇 동료들이 다투어 흉내내어 마치 인쇄를 하거나 탁본을 하듯이 함으로써 맑은 조정의 수치가 되어 온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앞서 있었던 징토(懲討)에 관계된 일도 그러한 잘못된 습속을 기필코 금하고자 했었는데, 한원의 상소는 그보다 더 심하다. 더구나 이의필(李義弼) 등의 행동은 얼마나 큰 폐단을 끼치고 있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렇게 말을 구하는 때에 이러한 자들을 거론하는 글을 올려 재앙을 없애는 방법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의필 등을 구하려고 하는 한원 때문에 몸을 던져 신원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될 일인가? 소를 돌려준 한 건은, 신칙한 전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형이 제멋대로 혐의를 무릅쓰고 행동했기 때문이니, 명색이 대간의 상소라도 물리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10월 14일 병술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말로 인해 지은 죄를 용서해주기를 청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의필(李義弼)을 먼저 거론하는데, 의필이 사학(邪學)을 공격한 말이야 어찌 옳지 않겠는가마는, 최헌중(崔獻重)을 논죄하면서 조속히 나라의 형벌로써 다스리자고 청하기까지 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조진정(趙鎭井)의 소를 가지고 보면 더구나 말이 되는 소리인가? 습속이 이와 같기 때문에 모든 일에 손을 대기 어려운 것이니 이런 조정의 기상으로서야 어떻게 음양이 제 궤도를 따르고 추위와 더위가 때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어제 내가 으르릉거리는 우레소리를 듣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일로 인하여 말을 구하여 훌륭하고 옳은 논의를 듣게 되면 다행이겠다.’ 하였으니, 만약 이번에도 무슨 폐단이 있는지 모르게 된다면 도리어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언로를 열기를 청하던 자들은 매번 강화도에 관한 일과 대궐문을 단속하는 일에 대하여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또 말로 인해 죄를 지은 자에 관한 한 조항을 첨가해 넣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언로를 여는 요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현재의 잘못된 정사와 당장의 급무에 대하여 언급한다면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어찌 실제적인 보탬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또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에게 이르기를,
"사학(邪學)을 만약 형벌로써 금하고자 한다면 도리어 소란을 불러 일으키는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또 집에다가 요망한 책을 보관해 두는 것도 극형에 해당되는 판국이니, 어떻게 그들이 개과천선하여 바른 데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극형으로 처벌할 수 있겠는가. 유교가 밝지 못하고 이단이 떠들썩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면 이는 전부 교화가 밝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이 실로 내가 두렵게 생각하는 점이다. 이교(異敎)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대개 이치에 더욱 근사하기 때문인데,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사학이 이치에 근사하다고 여기겠는가. 그러나 저 무리는 그저 그 이름만 듣고 실상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이 정말 좋은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쏠리듯이 따르는 것이다. 만약 정말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찌 고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반드시 감화시켜 스스로 고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들이 이미 이런 일을 하는 데는 틀림없이 같은 패거리가 많이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만약 정말 깨우치는 기미가 보인다면 기한을 정해 놓고 풀어주어 서로서로 깨우쳐 기어코 전부 고치게 하라. 그들의 가족이나 패거리를 막론하고 만약 하나라도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시 가두겠다는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의사를 물어서 원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본 후에 좋은 쪽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가 이복윤(李福潤)에 관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의 이전부터 내려오는 각종 묵은 토지 및 임자년에 6등급으로 낮추었던 냇가와 개펄의 모래땅 1만여 결에 대하여 옛 법전을 다시 적용하여 3년 동안 조세를 감면해 주소서."
하니, 비변사가 청한 대로 시행하자는 내용으로 복계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묵혀오던 토지의 등급을 낮추고 조세를 감면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실로 조세의 부담을 덜어주어 농사를 권면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근래에는 등급을 낮추어준 명목만 있지 조세를 낸 실적은 없습니다. 영남 한 도만 보더라도 묵은 토지가 9만여 결에 이르니,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조세는 3년이 지난 후에 내더라도 당해 연도에 개간한 땅은 우선 수조안(收租案)의 끝에다 기록하게 해야겠습니다. 7도(道)와 4도(都)에도 아울러 통보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大臣)에게 물었는데, 우의정 윤시동도 편리하겠다고 하자, 따랐다.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와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때 일호와 윤집을 강화도 충렬사(忠烈祠)에 추후로 배향하면서 함께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우규(李羽逵)가 상소하여 수양하고 반성하기를 청하니,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렸다.
정언 윤함(尹涵)이 상소하기를,
"성실하도록 힘쓰고 실질적인 정사를 행할 것이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염치를 장려하소서. 상으로 내리는 벼슬을 신중히 하고 언로를 넓힐 것이며, 곧은 기상을 장려하고 법관을 제대로 택하소서. 하례(下隷)를 단속하고 평민을 보살필 것이며, 군정(軍政)을 신칙하고 기강을 세우도록 하소서."
하고, 이어 경외의 폐단을 조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대책을 제각기 아뢰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였다.
10월 15일 정해
교리 박규순(朴奎淳)이 상소하기를,
"세선(稅船)이 전복되었을 때에 아래에서 개색(改色)하는 폐단을 금하고, 왜국(倭國)의 물건과 중국의 물건을 무역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령을 다시 엄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 자급(資級)을 주는 일을 신중히 함으로써 관방(官方)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간 민태혁(閔台爀)은 언로를 열고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고, 장령 정최성(鄭最成)은 사람을 쓰는 정사를 잘 살펴서 하기를 청하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들 모두에게 비답을 내리고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10월 16일 무자
춘당대에 거둥하여 서총대 시험에 합격한 자들에게 상을 내렸다. 이어 선전관·별군직(別軍職)·내금위·무예청 등의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다.
유생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였다. 상재(上齋)의 유생으로서 송(誦)에 응시한 자가 1백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잘하였고, 사학 재임(四學齋任)들은 모두 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학 재임들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여 반촌(泮村)에서 송을 익히게 하고, 잘 하게 되면 다시 시험을 보이도록 하였다.
증 영의정 김인후(金麟厚)의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쳐 내렸다.
증 영의정 변협(邊協)에게 양정(襄靖)이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 유형(柳珩)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증 좌의정 유림(柳琳)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 유혁연(柳爀然)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형조 판서 유병연(柳炳然)에게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판돈녕부사 조원명(趙遠命)에게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판중추부사 조관빈(趙觀彬)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양대박(梁大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양지(梁誌)에게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증 이조 판서 윤형갑(尹衡甲)에게 충강(忠康)이라는 시호를, 증 좌찬성 이태화(李泰和)에게 영민(榮敏)이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여영원(呂榮元)에게 양장(襄壯)이라는 시호를, 지돈녕부사 유언술(兪彦述)에게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변응성(邊應星)에게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무풍군(茂豊君) 이총(李楤)에게 소민(昭愍)이라는 시호를, 우참찬 이익원(李翼元)에게 충희(忠僖)라는 시호를, 한성부 판윤 한사직(韓師直)에게 정혜(靖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10월 17일 기축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과강(課講)을 행하여 전강(殿講)한 유생들과 비교하고, 상재생(上齋生)의 응제를 실시하였다.
장령 오한원(吳翰源)의 이름을 대선(臺選)에서 빼버리라고 명하였다. 이전에 한원이 소를 올려 징토하는 의리에 대해서 진술하였는데 남의 글을 그대로 베껴쓰는 속된 습관이라고 문책하였으며, 오정원(吳鼎源)은 그때 승지로 있으면서 자기 동생의 소를 받아들였다고 하여 은대(銀臺)의 명단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였다. 한원이 이로 인하여 대궐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는데, 전교하기를,
"대신(大臣) 이하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그가 감히 하였으니 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한 것이 너무 심하다. 전에 내린 처분대로 대선(臺選)에서 이름을 빼버리도록 하라. 그러나 형제가 한 가지 일로 한꺼번에 처벌받는 것은 분수에 조금 지나치다 할 수 있겠으니, 지웠던 정원의 이름은 다시 써넣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10월 18일 경인
상참(常參)이 있었는데 차대(次對)도 겸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와 부사를 불러 접견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금화(金貨)에 대한 금령을 엄격하게 정해놓긴 했지만, 역관과 장사치들이 금령을 범해가며 저들 나라와 화폐를 유통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또 은화(銀貨)는 점차 귀해지고 금화로 얻는 이익은 크기 때문에 은은 규정으로 정해 놓은 수량도 채우지 못할 우려가 있으나 금을 몰래 팔았을 때에 얻는 이익이 적지 않으니 단지 저들 나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금을 엿보게만 할 뿐입니다. 신은 간사한 짓을 할 여지를 만들어 놓아 나라의 금령을 우습게 보도록 만들기 보다는 차라리 화폐를 유통하여 국가의 경비에 보탬이 되게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나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이익을 좇는 것을 막기란 흐르는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려운 법이다. 화폐를 다루는 방법은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그 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인도해야만 한다. 또 금은 우리에게는 실로 쓸데없는 물건이니, 우리에게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저들 나라의 유용한 물건과 바꾸는 것이야말로 화폐를 유통하는 방법일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은폐(銀幣)가 점차 귀해져 사신이 가지고 가는 것조차 정해진 수량을 충당해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금을 은으로 바꾸어 실용으로 돌리는 것은 바로 시세에 따라 알맞게 처리하는 요령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므로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송경 유수(松京留守) 조진관(趙鎭寬), 정사 심이지(沈頤之) 등에게 두루 물어보았는데, 모두 이번 사신의 행차 때부터 시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이지에게 이르기를,
"이번 사신 행차가 돌아올 때에 서책에 관한 금령을 금번에도 특별히 더욱 신칙해야 할 것이다. 이단과 잡술(雜術)에 관한 책만이 아니라 경서, 사류(史類), 문집류 등의 모든 책들도 우리 나라의 판본이 조금 커서 강독하는 자료로 적합하다. 중국 판본은 누워서 보기에는 편하지만 넘기면서 보기는 어렵다. 다리를 펴고 앉아서 마음이 태만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는 법이다."
하였다.
상참(常參)에 참석하지 않은 양사의 대신(臺臣)들을 파직하였는데, 부교리 정내백(鄭來百)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부교리 정내백이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무신년에 아뢴 봉사(封事) 여섯 조항은 강령이 가장 절실합니다. 거기에서 말한 큰 근본이라든가 긴급한 일이라는 것 등은 어느 한 글자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재이를 막고 화목한 기운을 불러들이는 방도로 볼 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두려움으로 몸을 사리면서 하는 말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호남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조사하여 찾아내게 하였다.
사간 이우규(李羽逵)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은 구경(九經)의 첫번째 도리입니다. 영의정은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 때문에 오늘 상참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서(中書)의 사무가 오랫동안 중지되고 있으니 진실로 염려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일전의 비답중에 있었던 ‘잘못된 시정(時政)을 경이 비록 바로잡고자 한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전교는, 비록 우리 성상께서 늙은 신하를 염려하여 편한 대로 조리하게 하고자 하는 훌륭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겠지만, 만약 대신에게 과연 관청에 누워서라도 도리를 논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면 어찌 시정을 바로잡을 대책이 없겠습니까. 이번에 비답으로 내린 전교는 예의로써 신하를 부리는 성조(聖朝)의 도리로 볼 때 미진함이 있는 듯합니다. 비지를 다시 거두어들여 구경(九經)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문세(文勢)를 다시 궁구해보면 네가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였다.
10월 20일 임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아간(亞諫)이 아뢴 말은 틀리게 베낀 기별을 잘못 보아서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인데 경이 어찌 심각하게 인혐한단 말인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어용겸(魚用謙)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민시(鄭民始)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21일 계사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와 경모궁의 납향(臘享)이 선릉(宣陵)의 기신제와 겹치므로 직접 제사지내도록 취품하는 것을 의례대로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예조 판서 민종현(閔鐘顯)에게 장고를 조사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종현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을유년에 하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사직과 문묘는 봄가을의 대제(大祭) 및 석채(釋菜)의 날짜가 원래 정해져 있어서 감히 변경할 수 없지만, 태실(太室)의 납향 이외에 봄·겨울·가을 제사를 지내기로 잡은 날짜가 만약 국기(國忌)와 상치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의식을 행하게 된다면 혼령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정원은 일기를 상세히 조사하여 전부터 규례가 이렇게 잘못되어 온 것이라면 지금부터 바로잡도록 하라. 아, 날짜를 잡는 것이 뒤를 이은 임금이 선조들의 마음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뒤를 이은 임금의 마음에 그 경중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앞으로 납일(臘日)도 날을 잡아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규정을 정하고 만약 전례가 없는데도 이번에 잘못하여 날을 잡았다면 해당 예조의 관리가 처분을 받아야 할 것이니, 예조의 관원은 즉시 조사하여 들여오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을유년 7월 8일에 태묘에 참배하고 돌아와 숭현문(崇賢門)에 거둥했을 때에 하교하였는데, 예조의 관원이 전례를 조사하여 아뢰기를 ‘두번 지나간 병자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를 대리로 지냈는데, 그날은 바로 헌릉(獻陵) 기신제(忌辰祭)를 올리기 위하여 재계하는 날이었습니다. 병술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와 갑인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는 모두 대리로 지냈고, 을묘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는 직접 지냈으며, 갑자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와 계미년 7월 9일의 가을 제사는 모두 대리로 지냈습니다. 두 번 지나간 을유년 12월 5일의 납향과 무자년 12월 5일의 납향은 모두 대리로 지냈는데, 바로 숭릉(崇陵)의 기신제를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병술년 12월 23일의 납향과 기축년 12월 23일의 납향은 모두 대리로 지냈는데, 바로 선릉(宣陵)의 기신제를 올리기 위하여 재계하는 날이었습니다. 무술년 12월 4일의 납향을 대리로 지냈는데, 바로 숭릉의 기신제를 올리기 위하여 재계하는 날이었습니다. 병자년 12월 8일의 납향을 대리로 지냈는데, 바로 장릉(長陵)의 기신제를 올리기 위하여 재계하는 날이었습니다.’ 하였다.】 금상(今上) 임자년에 태묘에서 납향을 지내기 위하여 이미 맹세하는 의식을 행하였는데 온릉(溫陵)의 기신제가 바로 납일이었기 때문에 하교하시기를 ‘영녕전(永寧殿)의 인종실(仁宗室)과 명종실(明宗室)의 밝은 혼령이 음악을 연주하고 희생을 올리는 것으로 인해 놀라지 않겠는가? 납향을 만약 대리로 지낸다면 두 실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우러러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태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면서 영녕전만 빼놓는 것은 감히 하지 못하겠고, 주원(廚院)에서는 소선(素膳)을 올렸는데 종묘 안에서는 제사지낸 고기를 받는 것은 감히 하지 못하겠다. 복주(福洒)와 포와 고기를 제 1실에서부터 다 받았다면 제사지낸 고기를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으니, 인정이나 예에 어긋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조종(祖宗)의 마음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큰 일이다.’ 하고는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대리로 지내게 했던 일이 기거주(起居注)에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자년에 납향을 대리로 지내게 한 이후에 이것을 그대로 규례로 삼았으며, 선조(先朝)의 하교가 예조 등록(謄錄)에 실려 있기까지 하니, 금년 종묘의 제사를 모두 직접 올리지 못하는 것이 인정이나 예로 보아 매우 서운한 일이기는 해도 수교와 새 규례를 따라야만 하겠다. 납향을 대리로 지내도록 하되, 동지나 납일 중에 직접 남전(南殿)에서 제사를 올릴 것이니 예조는 때에 맞추어 여쭙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갑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장용영(壯勇營)의 추동 시사(試射)를 실시한 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상이 비국 유사 당상 이시수(李時秀)에게 일렀다.
"재용(財用)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이다. 《대학》에서는 재물을 다루는 것을 천하를 평정하는 중요한 도리로 삼았으니, 재용이 다스려져야만 근본을 바로잡아 정사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대개 거두어들이는 명색이 적어야만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될 수 있는 법이다. 우리 나라의 건국 초기에는 호조 하나만 있었는데, 그 이후로 세 군문(軍門)이 생겨나고 또 균역청이 생겨났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떻게 쪼들리지 않을 수 있겠으며 국가의 경비가 어떻게 넉넉할 수 있겠는가. 대개 나라의 경비를 축내는 것으로는 군량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훈국(訓局)의 군료(軍料)만 하더라도 좁쌀이 변하여 쌀이 되고 겸사복(兼司僕)에게 주는 요미가 점점 많아지는 등으로 해서 국가의 경비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미 정해진 인원을 갑자기 감축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이미 먹던 요미(料米)를 갑자기 덜기도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어찌 점차적인 방편으로 필요 없는 인원을 줄이고 지나친 지출을 절감하는 방법마저 없기야 하겠는가. 또 지난날의 효과를 가지고 말해보자면, 화성(華城)의 성을 쌓는 공사를 3년 만에 완공시키면서도 백성들을 번거롭게 동원하지도 않았고 국가의 경비를 축내지도 않았었다. 이는 비록 종전부터 내탕고에 비축해 두었던 저축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중 40만은 바로 금위군 10여 초(哨)의 번을 10년 동안 중지함으로 얻은 효과였다. 10초의 번을 10년간 중지해서 40만이 남은 것을 보면 우리 나라 경비가 대부분 군인을 양성하는 데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학문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고, 우주의 일은 모두 내 직분안의 일이며, 전곡(錢穀)과 군대는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이름난 석학인 김육(金堉)·민유중(閔維重) 같은 자는 다 경제를 자신의 일로 삼았었고, 근세의 이성중(李成中) 같은 이도 재물을 다스리는 것을 급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풍토는 자기만 알고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심지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같은 것은 쓸데없는 일로 여기고 있기까지 하니, 이래서야 나라가 무엇을 믿겠는가."
사간 이우규(李羽逵)를 삭직하였다. 우규가 상소하여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논핵하였는데, 그 소에,
"신이 며칠 전 재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거두어들이도록 청하였는데 진실로 기별 중의 한 글자를 잘못 본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은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의정이 비록 휴가를 내어 집에 있더라도 이미 그 직책을 맡고 있는 이상 차자나 소로서 정사를 도모할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대로 다 버려둔 채 관할하거나 검속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 해서 국가의 체면이 손상되고 일의 꼴이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거두어들이기를 청했던 것은 위로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를 돕고 아래로는 신하가 그 직책을 다하는 의리를 권면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방금 재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신이 본뜻을 몰랐다는 내용으로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더욱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돌아보건대 지금이 진실로 어떠한 때입니까. 하늘이 기뻐하지 않아 재변이 거듭 일어나고, 백성들은 농사가 매우 어려워져 곤란과 근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의 자리에 있는 신하가 모든 힘을 다하여 보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의정의 차자를 보건대 병 때문에 일을 볼 수 없다고 하니 그래도 핑계거리는 되겠습니다만, 좌상이 멋대로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의리란 말입니까.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몇 년이 지나도록 빈대(賓對)에도 참석하지 않고 비변사의 자리에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중요한 직책만 차지하고서 한 가지 계책도 내놓지 않으면서 마치 할 일 없는 관청의 한가한 직책의 관원이기나 한 듯이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니, 조정이 삼공(三公)을 둘 때 진실로 이러자고 한 것이겠습니까. 옛날의 중서(中書)는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조롱을 받았는데047) , 지금은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요양이나 하고 있으니 과연 이게 무슨 재상의 일입니까. 게다가 백여 리에 가까운 추운 노정은 탈없이 왕래하면서도 지척에 있는 조정은 잊어버린 듯이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재변을 만나자 성상께서는 수양하고 반성하는 뜻으로 반찬 수를 줄여가면서 도움이 되는 말을 구하셨는데, 그때 이미 시정(時政)을 바로잡아 구제하지도 못하였고 자기의 허물을 반성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희희낙락 나날을 보내며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행동한 것은 천재(天災)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염치는 사람의 큰 제방으로서 이것이 없이는 사대부의 뜻과 기상, 명예와 절개가 세워질 수 없으며 더불어 나라를 운영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삼가 보건대 근래 염치가 날로 무너져 하루라도 빨리 벼슬에 나아가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조바심을 내고 벼슬자리를 잃을까봐 걱정하는 무리이며,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가기는 쉽게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는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깨끗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본받으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예의를 숭상하고 명예와 절개를 굳건하게 세움으로써 세상을 면려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세도(世道)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마땅히 너부터 삭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면직시켰다.
10월 24일 병신
전교하기를,
"경진년 온천에 행차할 때에 배종했던 사람들을 이번 봄에 찾아내어 기록하는 조치가 있었는데, 지방에서는 경기와 호서(湖西) 두 도가 비로소 나란히 보고해 왔다. 그중 나이 90세인 경기 포천(抱川)에 사는 정헌(正憲) 이세걸(李世傑)과 통진(通津)에 사는 정헌(正憲) 조흥복(趙興馥)은 가자하여 실직 동지(同知)에 단독으로 천망하고, 백 살에 가까운 충청도의 서두금(徐豆金)은 첨지에 단독으로 천망하라. 아울러 경기인(京畿人)의 예대로 한 대(代)만 추증하도록 하라. 그 밖에 지방 관아의 아전, 향임(鄕任) 이하와 경기의 84세 12명과 충청도의 82세 17명에게 첩지를 내리고, 경기와 호서의 7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쌀 세 말을, 6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두 말을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4백30명이었다.
전교하였다.
"지금 경기도 관찰사의 말을 듣건대 ‘여러 해 동안 미루어 오던 노비 선두안(宣頭案)을 올해에는 정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제 남쪽에서 올라온 수령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전교가 있었지만, 다행히 올해 농사가 흉년은 면했다 하더라도 올해 환곡과 묵은 환곡의 독촉과 공사(公私)의 징수에 민간이 괴로움을 당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러니 만신창이가 다 된 지경에서 어떻게 지탱해 나가겠는가.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경기 관찰사의 보고가 나의 뜻과 일치하지만 선두안의 정리는 다음 식년(式年)으로 미루도록 특별히 명한다. 호서(湖西)도 이에 준하도록 하라."
10월 25일 정유
김한동(金翰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6일 무술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황해 감사 서매수(徐邁修)를 파직하였다. 매수가 상소하여 지난번에 윤허해주지 않았던 재결(災結) 5백여 결을 허가해줄 것을 다시 청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서(海西)는 흉년으로 조세를 감해준 토지가 팔분의 일 가량이나 되니 과다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사가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며 반드시 윤허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28일 경자
대사성 윤득부(尹得孚)를 체차하고 이만수(李晩秀)를 후임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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