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임인
경모궁으로 가서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나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영남 바닷가의 간사한 백성들 중에는, 흉년을 만나면 처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방도를 마련해 놓고 패거리를 지어 일부러 왜국의 국경 안으로 표류해가는 방법을 써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배가 크건 작건 사람이 많건 적건 관계없이 배 한 척이 표류했다 하면 반드시 차왜(差倭) 하나가 오곤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오는 예단은 하나도 쓸모가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돈 8백 냥과 쌀 2백 섬을 떼주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표류의 문제로 왜인이 온 것이 모두 일곱 차례나 되었으니, 놀랍고 통탄스럽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습니까. 표류했다가 돌아온 후에는 사공과 격군을 곤장을 쳐서 귀양보낸다고 정해진 법이 있었는데, 선조(先朝) 갑자년에 특별히 명을 내려 지워버리게 했으므로 그후로 간사한 백성의 무리들이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조사해서 만약 일부러 표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관찰사와 동래부(東萊府)에 분부하여 각별히 엄하게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한 고을에서 같은 해에 두 번 이상 표류했을 경우에는 금지하지 못한 고을 원을 관찰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장계를 올려 처벌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일 계묘
경모궁의 겨울 제사를 직접 지냈다.
11월 3일 갑진
차대(次對)가 있었다.
유지걸(柳智傑)을 당하의 직책에 추증하고 그의 고향에다 정려하라고 명하였다. 지걸은 바로 증 영의정 유형(柳珩)의 서자로서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목숨을 바친 자이다. 이보다 앞서 표창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예조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서자의 예에 따라 관직을 추증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또 정려하라고 명하였으나 지걸은 정문을 세울 만한 묘나 사당이 없었다. 예조가, 여러 유씨들이 원하는 대로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공주(公州) 땅의 종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세워주기를 청하자, 따랐다.
관서(關西) 및 양남(兩南)의 감영에 명하여 《무원록언해(無冤錄諺解)》를 간행하여 배포하게 하였는데, 형조 판서 이득신(李得臣)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무원록》은 원(元)나라 왕여(王與)가 편찬한 책이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최치운(崔致雲) 등에게 명하여 주해를 하게 한 후 모든 살인 사건의 조사에 이 책을 근거로 하였었는데, 선조(先朝) 때에 다시 구택규(具宅奎)에게 명하여 더 윤색하게 하였었다. 상이,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이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형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에게 명하여 율관(律官) 김취하(金就夏)를 데리고 그 책을 언해한 후 활자로 인쇄하여 진상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본조의 지방미(支放米)는 금년 조세 수입이 조금 나은 편이었기 때문에 근근이 10월까지 지탱해올 수 있었습니다만,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의 경비는 나누어 주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위군의 번을 중지할 경우 여섯 차례 번을 면제하는 데에 상당하는 자보전(資保錢)과 향군(鄕軍)이 번을 서기 위해 올라올 때에 응당 지급해야 하는 전포(錢布)를 합하면 3만 6천여 냥이 됩니다. 5백 전으로 쌀 1곡(斛)을 산다고 가정하면 7천여 섬을 살 수 있으니, 향군의 요미(料米) 4천여 섬과 합하면 1만 1천여 섬이 됩니다. 금위영 군사들의 번드는 것을 1년간 그대로 중지하게 하고, 균역청의 급대미(給代米) 8천 섬과 이월해 준 대동미 2천 섬을 합한 1만 섬을 저희 호조에서 가져다 쓰게 해 주소서. 선혜청 공가미(貢價米)를 미리 사들이는 것은 바로 조정이 금한 것이지만, 호조의 경비는 다른 관청과는 다른 것이며, 공인(貢人)도 팔기를 원하는 자가 많습니다. 선혜청의 올 겨울과 내년 봄·여름의 공가미를 1만 섬에 한하여 본조가 정한 규정대로 대금을 지불하고 사서 쓰게 해준다면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청한 대로 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선혜청 제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호조가 사들이는 값이 본청보다 비싸니, 만약 이것을 한 번 허락하게 되면 공인들이 비싼 값을 받고 팔려고 들 것이므로 본청으로 이납(移納)하는 길이 저절로 막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시수가 아뢰기를,
"저희 호조가 일찍이 기유년에 선혜청의 쌀 2만 섬을 가져다 쓰고 균역청이 쌀을 사들이는 값대로 계산해서 7만 4천 냥의 돈을 지불했었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따른다면 두 쪽이 다 편리할 듯합니다."
하자, 따랐다. 민시가 그래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자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국가의 경비는 호조나 선혜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은 남는데 저쪽이 모자라면 본래부터 가져다가 쓰는 법이 있었는데, 근년 이래로 조세의 수입이 조금 못해진 탓으로 서로 돕지 못하여 호조의 경비가 구차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호조는 요청을 윤허받기에 급급하고, 선혜청은 규례를 지키기에 엄격합니다. 선혜청은 쌀을 사들이거나 공가미를 미리 사는 방법으로 융통할 수가 있지만 호조는 이밖에는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혜청 당상은 줄곧 방계(防啓)만 하고, 호조 판서는 미리 사는 길이 막힐까봐 값에 준하지 않고 사들이려고 하고 있으니, 모두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혜청의 쌀 1만 섬을 호조로 하여금 가져다 쓰도록 허락하되 값은 호조가 정한 대로 돈 4만 냥을 선혜청으로 보내주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5일 병오
이보다 먼저 선전관에게 여러 고을들의 형구(刑具)를 조사하여 적발하라고 명하였었는데, 선전관이 용인(龍仁)에 이르러 창고를 봉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이 파면하여 내쫓아야 한다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용인 등 다섯 고을의 형구가 규격에서 벗어나기는 하지만 아주 작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 곤장의 길이가 규격보다 조금 긴 것은 짧아서 폐단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해당 고을 원을 우선 용서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옛터에다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따라 비석을 세워서 기록하라고 명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이다.
11월 6일 정미
육상궁(毓祥宮)에 술잔을 올리는 예를 행하고, 봉안각(奉安閣)과 연호궁(延祜宮)에 참배하고 선희궁(宣禧宮)에 술잔을 올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는 창의궁(彰義宮)으로 가서 참배하고, 의소묘(懿昭廟)로 가서 술잔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문묘 수복(守僕) 네 자리 중의 한 자리는 묘궁(廟宮) 수복의 예에 따라 입계하여 낙점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서재(西齋)의 장의(掌議) 심윤지(沈允之)의 생각은, ‘동쪽 곁채와 서쪽 곁채에 종사(從祠)하는 제도는 먼저 위차(位次)로 순서를 삼되 위차가 서로 같은 경우에는 동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지금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를 올려 배향한 뒤에 선정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동쪽 53위로 옮겨 배향하고, 선정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서쪽 53위로 옮겨 배항하고, 선정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동쪽 54위로 옮겨 배향하고, 선정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서쪽 54위로 옮겨 배향하고, 선정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동쪽 55위로 옮겨 배향하고, 선정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서쪽 곁채 55위로 옮겨 배향한 뒤에야 동서 위차의 선후가 제대로 될 것이다.’는 것인데, 재유(齋儒)의 생각은 진실로 근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묘에 종사하는 일의 체모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니, 예조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조사한 후 한 가지 의견으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문묘에 제사 지낼 때의 위차는 동쪽을 윗자리로 삼지만, 또한 대부분 동쪽 곁채와 서쪽 곁채를 통틀어 신위의 순서를 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문묘 향사도(文廟享祀圖)를 가지고 살펴보면, 사성(四聖)의 위차는 안자(顔子)가 동쪽 1위에 있고, 증자(曾子)가 서쪽 2위에 있으며, 자사(子思)가 동쪽 3위에 있고, 맹자(孟子)가 서쪽 4위에 있어서 동서를 통틀어 안자·증자·자사·맹자의 차례로 되어 있으며, 송조(宋朝)의 여섯 현인과 우리 동방 유학자도 모두 이 예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문정공 김인후를 서쪽 곁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아래에다 올려 배향하고 시대의 선후에 따라 차례를 정하여 봉안하라는 일을 이미 계하하셨으니, 자연히 서쪽 곁채 문성공 이이 이하 세 신위는 동쪽 곁채로 옮겨 배향하고 동쪽 곁채의 문간공 성혼 이하 세 신위는 또 서쪽 곁채로 옮겨 배향해야만 차례가 질서정연해질 것입니다. 성균관 재유의 견해는 달리 이의을 제기할 소지가 없으니, 본관에 통보하여 그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주의 순서는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여섯 신주를 서로 바꾸어 놓는 것은 매우 신중히 처리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본관에 통보하여 거행하게 하라.’고만 청한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아침에 성균관 대사성을 만난 자리에서 이미 ‘지방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까지 두루 다 물어보기는 어렵겠지만, 서울에 있는 대신들에게는 헌의하게 한 후에 하나로 의견을 통일함으로써 그 일을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를 보이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더구나 전에 간행되었던 《오례의(五禮儀)》·《속오례의》·《문헌비고》 등의 책에 동서의 위차가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조(先朝)의 어제(御制) 《문묘종사록(文廟從祀錄)》도 변경할 수 없는 중요한 간행본이니, 이번에 바로잡은 후에는 《종사록》을 다시 간행함으로써 선조가 제도를 정해 놓은 훌륭한 뜻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고유(告由)하는 한 가지 일만 놓고 보더라도 평범하게 개수하는 경우에도 다 먼저 고하는 법이니, 여러 유신들의 신주를 다른 곁채로 옮겨 봉안하는 이번 일은 예로 보아 그 내용을 축첩에 적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서울에서 공무를 보고 있는 대신들에게 수의하도록 하라.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배향하는 예에 어찌 태묘와 문묘의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경의 예조가 조사하여 아뢴 말을 듣건대 ‘교서를 바로 본가에 전달하고 종사할 때에 교서를 선포하는 절차는 없다.’ 하였는데 이는 필시 드물게 있는 의식이라서 문헌에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제 만약 태묘에 배향하는 전례를 대략 모방하여 먼저 대성전에 사유를 고하고 나서 그대로 문묘의 뜰에서 소리내어 읽은 후에 해당 곁채에 올려 놓았다가 의식이 끝난 후에 그 교서를 본가로 가지고 가서 전해준다면 의식 절차에 거의 맞게 될 것이다. 이 한 조항도 함께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올려서 배향하는 절차를 서울에서 공무를 보고 있는 대신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은 ‘배향된 신주의 위차를 동서로 옮겨 안치하는 것에 관한 일은 재유(齋儒)의 의견과 해조가 여쭌 것이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종사록》을 다시 간행하는 일과 신위를 옮겨 봉안한다는 내용을 축첩에 써넣는 일과 대성전에 사유를 고하는 일은 비답으로 내린 전교가 진실로 전례(典禮)에 맞는다 하겠습니다. 다만 교서를 문묘의 뜰에서 소리내어 읽는 것은 과연 윗사람의 위엄에 눌리는 혐의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태묘에 종사할 때에 이미 전례가 있다면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였고, 영중추부사 김이소(金履素)는 병을 앓고 있어서 논의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위차를 바꾸어 봉안하는 일은 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지만 그 차례가 제대로 되어야만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곁채를 서로 바꾸어 봉안한다는 내용을 축첩에 써넣는 일과 문묘 뜰에서 교서를 소리내어 읽은 후에 해당 곁채로 올려놓았다가 의식이 끝난 후에 본가로 가지고 가서 전한다는 것은 절차가 훌륭하여 자세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신이 어찌 감히 거기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 민종현(閔鐘顯)은 ‘곁채를 서로 바꾸어 봉안하는 것은 예로 보아 마땅히 신중을 기해야 할 일입니다. 이번에 만약 문정공 김인후의 신위를 문원공 이언적의 위에다 봉안하고 서쪽 곁채의 네 신위만 차례차례 내린다면 편리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문원공과 문정공은 시대로 보아 조금 전후의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서쪽 곁채의 여러 신위들을 이미 차례대로 내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문원공 이언적이 문순공 이황의 다음에, 문성공 이이가 문간공 성혼의 다음에, 문원공 김장생이 문정공 송시열의 다음에, 문정공 송준길이 문순공 박세채의 다음에 있게 되어 신위의 차례가 뒤섞이기는 매일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잡는 것이 합당할 듯한데, 만약 바로잡고자 한다면 성상께서 전교하신 대로 축첩에다 그 내용을 써넣어야 하겠습니다. 교지를 선포하는 의식 절차로 말하자면, 태묘에 배향하는 공신에게만 행하고 문묘에 올려 배향하는 선대의 훌륭한 신하에게는 이러한 의식 절차가 없었던 것은 실로 종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전례입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전교하신 대로 마련하여 거행하고 지금부터 문묘에 올려 배향할 때에는 이것을 규례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교서를 소리내어 읽은 뒤에는 그 자손으로 하여금 본가로 가지고 가게 하고, 사판(祠版)에다 제사를 올리는 시기는 배향하기 전에 앞서 행하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듯 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자, 경의 논의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1월 7일 무신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판으로, 김면주(金勉柱)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이번에 임술년과 정유년의 예에 따르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교서의 반포는 권정례(權停禮)로 하고 유생들이 반열에 참여하는 절차는 빼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갑신년에는 직접 참석했기 때문에 특별히 제술 시험을 치루었지만 그전에는 어느 해든 제술 시험을 치룬 예가 없었다. 여기에 대해 예조는 잘 알고 있도록 하라."
11월 8일 기유
문선 왕묘(文宣王廟)에 술잔을 올린 후에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였다. 그 교서에,
"참된 유자(儒者)가 천년 후에 나왔으니 진정코 높이 보답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인데, 공론이 백 년을 기다려 정해졌기에 이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바이니, 표창하여 드러내는 것은 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내가 임금과 스승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 유학을 숭상하는 것을 지표로 삼아 왔다. 정학을 붙들어 유지시키고 사학을 억제하는 계책은 역대의 훌륭한 왕들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과거를 계승하여 뒷사람을 인도하는 학문은 자나 깨나 전대의 현인들을 생각해 왔다. 유학을 크게 떨쳐서 온 나라 사람들을 모두 법에 이르도록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근래에 선비들의 취향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우리 유학의 도통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세도(世道)의 낮고 높음이 이와 관계되는 것이니 만회할 방법을 서둘러야 할 텐데 옛날 현인들의 전형이 멀기는 해도 법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경은 해동의 염계(濂溪)이자 호남(湖南)의 공자이다. 성명(性命)과 음양(陰陽)에 관한 깊은 식견은 아득히 태극도(太極圖)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고,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요지는 먼저 《소학》에 힘을 쏟는 것이었다. 시를 지어 뜻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는 천지 사이에서 두 사람만을 추대하였고, 이치를 연구하고 근원을 탐색하여 일찍이 《역상편(易象篇)》을 저술하였는데 여러 학설들이 탁월하였다. 홀로 대의(大意)를 보아 추구해 나감에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으니, 도(道)와 기(氣)가 하나로 섞여 있다고 주장한 여러 학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단연코 내쳤고, 이(理)와 기(氣)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변론은 동지들의 의심을 후련하게 풀어 주었다. 내면에 쌓인 강건하고 곧고 단정한 성품은 엄동 설한의 송백(松栢)이었고, 밖으로 드러난 빛나고 온화하고 순수한 자태는 맑은 물위의 연꽃이었다.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다행히 크게 해보고자 하던 효릉(孝陵) 시대를 만나 순수한 유신(儒臣)이 내면에 지닌 아름다운 덕을 펼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동궁이 깊이 신임하여 이미 그림에다 뜻을 담아서 주었고, 숙직하는 관서로 찾아와서 강론하는 이외에 특별히 마음을 털어놓곤 했었다. 보필하는 신하로서 은연중에 마음이 부합한 것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은 것과도 같았고, 임금과 백성들에 관한 책임을 스스로 맡고 나선 것은 이윤(伊尹)이 성탕(成湯)을 만난 것과도 같았다.
아, 하늘이 아직 평안하게 다스려지기를 바라지 않아 대 현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원(內院)의 의원과 약을 보내주자던 요청도 가슴 조이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지는 못하여, 끝내 깊은 산속에 그를 묻는 슬픔으로 피눈물을 뿌렸었다.
생각건대 변함없는 충성과 곧은 절개 또한 학문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지극히 바르고 정밀한 출처(出處)는 의리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는 중대한 윤리를 몸소 맡고 나섰고 세상에서는 널리 배워 자신을 단속하는[博文約禮] 공부를 칭찬했었다. 비 개인 날의 맑은 달과 잔잔한 바람처럼 본래부터 도리를 터득한 사람의 기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순수하고 온화한 성품에 여사로 문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성대하게 많은 사람들의 명망을 두루 갖추었으니 여러 선비들의 본보기가 됨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건대, 그 깊은 조예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이었음에도 아직까지 표창하는 법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법전으로 보았을 때 결함이 되는 것이기에 번번이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개탄하곤 했었다. 하늘이 분명 도와줄 생각을 가지고 있어 백 세를 뛰어넘은 느낌이 유달리 간절하니 지금 이때는 우연이 아닌 듯한데 어떻게 일통(一統)을 크게 여기는 규례를 늦출 수 있겠는가. 윤리를 지탱하여 풍속을 바로잡은 문장은 진실로 격렬하면서도 절실하게 부합됨이 있었고, 도리를 밝혀 뒷사람을 깨우치는 가르침은 밝게 융합되어 거리감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마음에 둔 사람을 간택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뜻을 먼저 결정하였으니 어찌 중언부언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논의 또한 모두 일치되어 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경을 문묘의 곁채에 종사하는 바이니, 이단을 물리치고 편파를 배척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때에 속하며, 문묘에 종사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는 것은 실로 선비들의 기풍을 격려하는 기회이다. 덕을 지닌 선대의 훌륭한 신하들과 함께 차례에 따라 배향했으니 주선하는 데에 거의 어김이 없을 것이며, 성사(聖師)의 신위(神位)와 함께 배향하였으니 우러러 존경하는 대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맑은 용모와 곧은 기상의 아름다운 영혼을 문묘에 봉안하며, 깨끗한 제수와 정결한 제사로 멀리서 술잔에 정성을 담아 올리는 바이다.
아, 당시에 뜻을 다 펴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후세에 영원토록 명성을 남겨놓게 되었다. 선을 밝히고 정성을 다하였던 그의 행동을 후세에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인바, 공을 살펴보고 덕을 헤아려 볼 때 전대의 성인에게 물어본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이런 뜻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하였다.
다음날 인정전(仁政殿)에서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하늘이 참된 유신(儒臣)을 내려 문명의 운을 크게 열어주었으니 그 은덕을 크게 보답해야 하겠기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바이다. 이는 사람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뜻이 정해졌었다. 생각건대 문묘에 훌륭한 유신을 배향하는 의식은 실로 유학을 위하여 도통을 밝히는 요지이니, 성스러운 덕을 지닌 자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높은 공자의 담장 안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후학의 모범이 여기에 있으므로 바른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종(祖宗)의 큰 터전을 이어받은 이후로 임금과 스승으로서의 큰 책임을 저버릴까봐 늘 염려해 왔다. 그러나 말세의 세태는 너무도 고루하여 추구하는 바가 갈라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였고, 선대 철인들의 경지는 엿보기 어려워서 논의가 잘못되기 쉬운 형편이었다. 큰 도(道)로 함께 귀의하는 교화를 기약하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는 방도에 더욱 마음을 기울여 왔었다.
옛날의 큰 유학자인 하서(河西)는 해동의 우뚝한 정학(正學)이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시로 단풍나무를 노래하여 일편 단심을 담았고, 성인에 가까운 자질에다 근원을 파고들어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였다. 평생 동안 마음에 맞아 추대한 자는 천지간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으며, 본원적인 공부는 전적으로 《대학》과 《소학》 두 책에 있었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현한다는 변론은 대현(大賢)의 학설을 절충한 것이었고, 도(道)와 기(氣)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잘못된 논의를 분석해 내었다. 윤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지극히 공명정대한 입장을 지켜나갔으며, 법규만을 따라 하학 상달(下學上達)을 실천하였으므로 ‘백세의 스승’이라는 평이 이미 한 시대의 공론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도는 뒷사람에게 길을 열어준 염(濂)·락(洛)의 공적을 계승하였으며, 시대는 태평의 치적을 크게 이루었던 효릉(孝陵) 때였다. 임금과 신하로서 뜻이 이미 합치되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신임을 받았고, 은연중에 기약이 이루어져 뜻을 담은 묵화를 직접 하사하였다. 다행히도 왕의 교화를 보필하는 적임자가 있어 크게 빛나는 아름다운 정사를 당시에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마침내 지방에서 영영 세상을 떠나고 말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7월 깊은 산중에서 창오(蒼梧)의 원통한 눈물을 부렸고, 한 조각 붉은 깃발에 옥과 현령(玉果縣令)의 옛 직함을 그대로 썼었다.
아, 당시에 미처 사업을 펴지는 못했으나 공로와 교화는 아직도 후학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성대하게 겸비한 도덕과 절개는 분명 삼대(三代) 때의 전형이었고,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의 윤리를 밝힌 것은 진실로 천년 동안 이어갈 표준이 되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큰 강령을 길이 수립했기에 바로 어제의 일처럼 큰 감동을 주고 있는데,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새와 같은 위의는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한을 갖게 하며, 순수하고 온화한 자질은 실로 알아주는 자가 적은 것에 대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오직 의리만을 보았으며, 세상에 나가거나 들어앉는 때에는 온화한 태도로 일관하여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맹자(孟子)의 학통이 전해지고 자사(子思)의 공이 크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녔던 오산(鰲山)048) 을 바라보면 영혼을 봉안한 사당이 없지는 않지만,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반열을 돌아보자니 종사하는 예를 갖추어야만 하겠다. 일이 우연치 않아 다행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일치되었으니, 드러내어 표창하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려는 의사가 있는 듯하다.
이에 이달 8일에 증 영의정 문정공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는 바이니, 나라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고 선비들이 모두 귀의할 곳이 생겼다. 공자·정자·주자의 도통을 접하여 그 연원이 멀기에 정암(靜庵)·퇴계(退溪)·우계(牛溪)·율곡(栗谷)의 반열에 올려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바이다. 아, 문(文)이 여기에서 충분히 징험되고, 도가 이로 말미암아 추락하지 않게 되었다. 선비들을 양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진작시키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며, 벼슬아치를 고무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감동하지 않을 자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는 바이니, 이런 뜻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하였다. 【모두 예문관 제학 구상(具庠)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677면
【분류】사상(思想)
[註 048] 오산(鰲山) : 김인후의 고향 장성(長城)을 말함.
11월 9일 경술
차대(次對)가 있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완성되었다. 상이 화성 유수(華城留守)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1월 9일 경술
전 참의 이성보(李城輔)를 서용하고 경연관 직책도 그대로 맡게 하였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얼마 전에 있었던 한 유신의 일은 좀더 잘하게 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이제 종사하는 일이 잘 끝났으니 마땅히 그에 대해 조절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금 이미 서용하기로 하였으니 경연관 직책도 그대로 맡게 하라. 유신(儒臣)이 일로 인하여 파면되거나 삭직되는 것도 좋은 규례이다. 옛날에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으면 드러나는 대로 체직하거나 파면시킬 것을 보고하였고 또한 유신이라고 하여 예외로 하지 않았으니, 관직이란 본래부터 조정의 체모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고루하여 필시 지난번에 견책한 조치를 눈에 거슬리게 여길 것이지만, 유신이 이것을 가지고 깊이 인혐할 단서로 삼지 않을 줄로 안다. 이러한 뜻으로 하유하라."
하였다.
정거(停擧)한 유생 윤현대(尹顯大) 등의 죄명을 모두 씻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 서용보(徐龍輔)를 체차하였다.
고 판돈녕부사 김성응(金聖應)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때 판돈녕부사 김지묵(金持默)이 휴가를 청하여 성묘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전교하기를,
"국구(國舅)의 선산이니 소전상(澆奠床)을 지급하라."
하고, 이렇게 명한 것이다.
11월 11일 임자
화성부(華城府)에서 환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였다.
11월 13일 갑인
이때 응봉(鷹峰) 근처에 호환(虎患)이 있자 여러 군영이 성밖으로 나가 호랑이 사냥을 하겠다고 아뢰었는데, 전교하기를,
"성밖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것은 제 살 곳을 얻은 때문일 것이니, ‘험윤(玁狁)을 쳐서 태원(太原)까지만 쫓아냈다’049) 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엄동설한의 사냥은 그 폐단이 맹수보다 심할 것이니 즉시 사냥을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5일 병진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찾아내게 하였는데, 날이 춥기 때문에 거듭 명한 것이다.
전교하기를,
"임금이 보는 책에 현토(懸吐)하라는 명이 내려지면 옥당이 한자리에 모여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교정하는 것이 바로 홍문관의 고사이다. 그런데 이 규례를 폐지해버려 이런 고사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 지 오래되었다. 근래에 밤이 길어 경서를 과송(課誦)하느라고 언해를 살펴보았더니 내각과 옥당에 소장되어 있는 책의 현토가 본래부터 서로 다른 곳이 많았다. 명색이 옛일을 상고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고루하다면 어떻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후로 임금이 보는 책에 토를 달 때는 옥당이 일제히 나오는 이전의 예를 거듭 밝혀야 할 것이며, 내각만 하더라도 직각(直閣) 이하가 일제히 나와야 할 것이다. 만약 권질이 많아 시임 각료만으로는 인원이 부족할 때는 원임 직각 이하 초계 문신 중에서 몇 명의 인원을 여쭈어 정하여 함께 교정을 보도록 하라. 이 전교를 장고에 적어 각각 그대로 행하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경서에 토를 달 때에 모두 한자리에 모여 교정을 보는 규례에 대해 방금 하교하였으나, 권질이 방대하다 보면 엉성하거나 빠진 곳이 있게 마련이다. 경서에 밝은 유신 중에서 강(講)에 능한 몇 명이 책의 수를 보고 적당히 헤아려 초계(抄啓)하고 그들에게 대조하게 하라. 또 관학(館學)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幼學) 중에서 강을 잘 하는 자를 불러와서 다시 대조하게 할 일도 아울러 규정을 정하여 때에 맞추어 여쭙도록 하라. 이 일을 내각으로 하여금 잘 알고 있게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정사
전교하였다.
"성후(聖后)의 기일이 어제 지나갔는데, 풍릉(豊陵) 【조문명(趙文命).】 의 본가에 요사이 관직을 맡고 있는 자가 없다. 풍은(豊恩) 【조재호(趙載浩).】 사건이 있은 이후에도 그의 아우 조시보(趙時溥)가 보름마다 문안을 하였으며 홍 봉조하(洪奉朝賀)가 연석에서 강력하게 청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직함을 줄 것을 허락하였었다. 그런데 무고한 때에 어찌 관직에 종사하는 자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전 부사 조관진(趙觀鎭)에게 군직(軍職)을 주어 문안하는 반열에 출입할 수 있게 하라.
문형(文衡)을 지냈던 자의 경우에 문집을 자력(自力)으로 간행해 내지 못하면 운각(芸閣)에서 간행하여 주도록 국가의 법에 규정되어 있다. 더구나 풍릉은 임금의 장인이자 일등 공신으로서 장수의 직책을 지내고 좌의정의 자리에 있었던 자이니, 그 체모가 특별한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익정(翼靖) 【홍봉한(洪鳳漢).】 의 연보와 함께 인쇄하여 나누어주려고 하는데, 그 편질이 간략하니 《학암집(鶴巖集)》을 가을에 정서하여 먼저 인쇄하도록 하라. 인쇄가 끝난 후에는 승지를 보내어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봄에 김 충정공(金忠靖公) 【김재로(金在魯).】 과 조 충효공(趙忠孝公) 【조현명(趙顯命).】 두 재상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어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대대로 도와주려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인데, 해조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미안한 일이다. 더욱 엄히 신칙하여 먼저 사과(司果) 한 자리씩을 주어 영구히 녹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라. 또 생각건대, 전 첨지 조내진(趙來鎭)은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존해 있다고 하는데, 재작년에 수용한 이후로는 다시 천거하지 않았으니 돈령 도정(敦寧都正)을 가설하여 단독으로 천망하도록 하라. 수길원(綏吉園)의 기일도 지나갔는데, 이장옥(李長玉)과 이양옥(李良玉)의 후손 중에 관직에 종사하고 있는 자가 없으니, 증 찬성 집안의 후손을 병조 판서로 하여금 참하(參下)에 해당되는 자리를 가설하여 의망해 들이도록 하라."
11월 17일 무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과강(課講)을 실시하였다.
11월 18일 기미
춘당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의 친시 및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후손 김직휴(金直休)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문정공의 유집(遺集)이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다고 하여 다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유생 송계간(宋啓榦)과 김직순(金直淳)을 잡아들여 신문하고, 영남에서 불러올리는 사람들을 엄히 신칙하여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영남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안동(安東) 생원 이정국(李楨國), 예안(禮安) 생원 김태익(金台翼), 성주(星州) 유학 정위(鄭煒)가 병으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이조에 보고하자, 전교하기를,
"이전에 군직(軍職)을 준 경기의 유생 두 명 【계간(啓榦)과 직순(直淳).】 이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선발되었다고 하여 자만하고 있는 듯하길래 일찍이 처분하려고 했지만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또 어떻게 감히 흉내를 낸단 말인가. 대개 산림(山林)을 뽑는 데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음로(蔭路)로서 뽑히기도 하고 백도(白徒)로서 천거되기도 하는데, 그런 후에 삼공과 여러 당상들이 빈청에 모여 논의해서 이름을 나열해 써서 들여보내어 재가를 받은 연후에야 비로소 경연관에 임명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진실로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거니와, 이밖에는 비록 처음 임명하는 자리라 하더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군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으며, 관직이 없는 자야 더더구나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군직에 임명되어서 올라오지 않은 사람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들여 처리하게 하라. 그밖의 유생들은 해당 도에 각각 엄히 신칙하여 병이 차도가 보이는 즉시 올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경신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대신을 면직하였다가 다시 제수하게 되면 《매복록(枚卜錄)》에 반드시 거듭 복상(卜相)하였다고 써야 할 것이니, 애당초 사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공무를 보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이번에 영상과 좌상의 사직을 허락했던 교지를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것이니, 동지 때가 되면 애써 출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우규(李羽逵)의 소가 나온 데 인하여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언관(言官)이 대신(大臣)을 논하는 것이야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말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이것도 근래에 오랫동안 물들어 온 습관 중에서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투이다. 말이 혹 옳은 것이라면 직접 임금을 비난해도 오히려 장려할 것인데, 더구나 힘써 대신을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겠는가. 그의 소에서 논한 것은, 하나는 일을 전폐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대궐에 누워 몸조리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붓 하나로 두 재상을 극심히 비난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바른말로 간언하는 기풍이겠는가. 그 당시에 엄중히 처리하고자 했지만 언로가 막힌다는 말이 나올 것이 염려되어 짐짓 참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열성조(列聖朝)가 전수해 오던 심법(心法)을 내가 잘 이어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겠으나, 또한 본래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다.
병신년 이후로 어쩔 수 없이 어진 신하를 우대하고 외척들을 멀리하여 직접 선비들을 접하고 있지만, 선비라고 하는 자들도 모두 다 어질다고 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어서 도리어 무한한 폐단이 생겨 점차 간사한 무리들의 계책이 먹혀들어가게 되었다. 들어와서는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면서 아첨하며 기미를 살피고, 나가서는 권세를 농락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세도(世道)를 무너뜨림으로써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작년 봄 권유(權𥙿)의 상소가 나온 후에 한번 크게 처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의 내용이 당시의 병통을 정확하게 지적한 데에는 또한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으니, 그 당시 연신(筵臣)들을 만날 때마다 오랫동안 칩거하다가 등용된 두 제학 같은 자들이 누차 조정의 기상이 위태롭다는 말을 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권유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권유의 소가 나온 후로 간사한 역적에 관한 일은 《명의록(明義錄)》을 다시 짓기에 이르렀으나, 경들이 또한 어떻게 그 상세한 내막을 알겠는가. 그후로 깨끗이 쓸어내 버릴 절호의 기회를 만났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에 일신한 효과가 하나라도 있는가? 애석한 일이다. 조정이 분열되어 저렇게 하려고 하면 저런 병통이 생기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이런 폐단이 생기곤 한다. 진실로 잘못된 관습을 크게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어진 이와 함께 해야 할 것인데,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탄식이 지금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 만약 외척들을 등용한다면 이는 바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된다. 외척들을 이미 쓸 수 없는 입장이라면 한 쪽 명색의 쫓겨난 사람들을 어떻게 등용할 수 있겠는가. 이때의 사람들을 등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른바 근신(近臣)이라는 자들은 경전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고 역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사를 해나가는 일과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질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이 다섯 가지에 이미 말할 것이 없다면 자주 불러서 만나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나는 평소의 언동을 삼가해야 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나의 성품이 간혹 말을 할 때에 지나치게 드러내놓고 하는 결점이 없지 않다. 한번 불러 만나면 도리어 한번의 폐단이 생기니, 근래 이들을 자주 만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책을 보는 여가 시간이 재작년부터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정무를 직접 처리하는 데에 소홀하여서 그런 것이겠는가. 지금부터 나라의 정사를 잘 처리하는 책임을 다른 데에서 구하지 않겠으며, 오로지 대신에게만 구할 것이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경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할 것이니, 경들은 나의 뜻을 잘 알아서 받들어 처리해 나갈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라. 바로잡아 나가는 책임을 이미 대신에게 위임한 이상 우규와 같은 자가 감히 뒤흔들어 놓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말로 인하여 죄를 얻었다고 하는 한두 사람은 특히 더 지극히 통분스러우니 나는 법대로 처분하여 조금 그칠 줄을 알게 하고자 했으나 여러 각도로 생각하면서 지금은 우선 그냥 둔 채로 보고 있다. 경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선포하여 이후로는 잘못된 묵은 습관을 완전히 고쳐 감히 다시 또 그런 짓을 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성인도 그 도를 오랫동안 행하고 나서야 능히 천하를 감화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근래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점차 나아지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화시켜나가는 일에 진념하여 유구한 도의 경지로 모두 몰아넣는다면 잘못 물든 묵은 습관이 저절로 일신될 것이며, 훌륭한 세상의 다스림이 진실로 표준을 세우는 아름다운 경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표준을 세우는 경지에 어찌 감히 견줄 수 있겠으며, 교화가 이루어지는 것 또한 어찌 용이한 일이겠는가. 《대학(大學)》에서 말한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것도 반드시 모가 나고 단단한 물건을 만나야만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인품은 다 나약하고 가벼우니 비록 훌륭한 기술자가 있다고 한들 어떻게 손을 댈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김면주(金勉柱)를 체직하였다. 유신 박재순(朴載淳)이 소를 올려 가까이에서 모시는 문무 관리들은 10년 동안 변경 고을에 임명하지 말 것을 청하자, 면주가 인혐하여 사임한 것이다.
후주진(厚州鎭)을 설치하고 어면 파수(魚面把守) 이건수(李健秀)를 첨사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후주진의 설치에 대하여 논의할 때에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임금을 뵌 자리에서 아뢰기를,
"후주에 진을 설치하는 일은, 중신 정민시(鄭民始)가 일찍이 북도의 관찰사를 지내어 형편을 잘 알고 있으므로 지금 상의하여 결정해야만 되겠습니다."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후주에 진을 설치하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은 북도(北道)에 속한 땅이기는 하지만 삼수(三水)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폐지한 4군(四郡)과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설치한 지 4년 만에 고 재상 윤지완(尹趾完)이 아뢰어서 없앴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전에도 설치하였다가 60년 만에 폐지하였다고 들었다."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국토 안은 막히는 곳 없이 두루 통하는데, 유독 서북(西北) 양계(兩界)만은 후주와 폐지한 4군이 버려진 채로 비어 있는 까닭에 그 일대가 서로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 재상 남구만(南九萬)이 기필코 후주를 설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만 후주는 삼수(三水)에서 수백 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봉우리와 고개가 첩첩으로 가로막혀 있고 길이 험한 탓에 그 사이의 진영과 보루들이 다 쇠잔해 있습니다. 어면(魚面)만은 상황이 조금 나아서 후주와 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삼수의 읍을 어면으로 옮기고 또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읍을 설치한다면 충분히 후주의 성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연의 상파평(霜坡坪)을 후주에 예속시키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여연의 땅 중에서는 오직 이 상파평만이 넓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후주에 예속시킨다면 다시 여연의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게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마마해 파수(馬馬海把守)가 강을 따라 올라와 곧장 삼수의 지경에까지 이르곤 하는데, 후주를 설치한다면 마마해 파수가 절대로 다른 지역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주를 설치한 후에 서쪽 6진(六鎭)도 요량하여 없애야 할 것인데, 강구(江口)는 비록 쇠잔한 진영이라고는 하지만 후주강(厚州江)과 오매강(烏梅江)이 모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없애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신방(神方)과 묘파(廟坡)와 같은 진은 가까운 곳은 40, 50리, 먼 곳은 80, 90리가 되는데, 만약 이곳을 없애버린다면 수백 리 사이에 사람의 자취가 반드시 끊어지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후주는 토지가 기름지고 인구가 많으므로 지금 진을 설치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삼수가 쇠잔한 것은 전적으로 표범과 인삼으로 얻던 이익을 잃어버린 때문이니, 어면으로 고을을 옮기자는 논의는 나중에 상의하여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파평을 떼어서 예속시키는 것은 비록 여연을 다시 설치하기 전이라 하지만 조금은 지장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후주는 강변에 자리잡고 있고 남쪽을 향해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지세가 조금 낮은데다가 토지도 기름지므로 진을 설치하기에 정말 적절합니다. 그리고 삼수의 읍을 옮기자는 논의는 백성들이 다 원하는 것입니다. 다만 진을 설치한 후에 민호를 모두 진의 백성으로 소속시킨다면 반드시 다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토(上土)의 예대로 한다면 혹 폐단이 없겠는가."
하자, 민시가 아뢰기를,
"상토는 강계(江界)의 별중영(別中營)으로 되어 있어서 진영 내 백성들의 일을 다 주관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주도 삼수 땅에 예속시키고 그대로 하나의 별중영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다. 진영의 장수는 이건수(李健秀)를 그대로 임명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하자, 시동이 아뢰기를,
"연석에서 물러난 후에 편리할 것인지의 여부를 중신들과 상의해야만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전에 어면 파수장 이건수가 서면으로 아뢴 책자로 인하여 함경도 수신(帥臣)이 논리적으로 따져 아뢰고 나서 ‘일찍이 수신을 지냈던 신하에게 문의한 후에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드린 논의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중 갑산(甲山)의 오매강(烏梅江) 서쪽을 삼수에 이속(移屬)시키는 것, 삼수의 별해진(別害鎭)을 장진(長津)으로 이속시키는 것, 강계(江界) 폐사군(廢四郡)의 상패평(祥覇坪)을 후주로 이속시키는 것, 삼수부의 읍을 어면으로 옮기는 것, 묘파(廟坡)·어면(魚面)·신방(神方)의 진영을 없애는 것 등의 일이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습니다.
중신 정민시는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때에 삼수와 갑산의 여러 진영과 보루들을 두루 돌아다녀 형편을 상세히 알고 있는데, 한결같이 다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주에 이미 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면 상패평을 우선 이속시키도록 하여야만 어염(魚鹽)의 길이 통하여 백성들이 자리잡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후주는 독립된 진영으로 승격시키고 경력이 있는 첨사를 두어 법성(法聖)의 예대로 조세·부역·옥사를 전담시키고 상패평을 후주에 이속시키는 일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소서. 그밖에 오매강 별해진을 이속시키는 일, 삼수부의 고을을 옮기는 일, 묘파·어면·신방을 없애는 일에 관한 조항들은 진영을 설치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내년 봄이 되거든 더 알아보기로 하고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물어 논리적으로 아뢰도록 한 다음에 다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진영의 장수는 어면 파수장 이건수를 오늘 정사 때에 해조로 하여금 의망해 넣게 하라. 백성들은 필시 진영의 백성이 읍의 백성보다 못하다고 여길 것이니, 관서(關西) 상토(上土)의 예대로 속읍 별중영으로 삼아 진영의 군졸이라고 부르지 말도록 해야 할지, 아니면 직접 관청을 설치해야 할지도 마땅히 물어보아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이런 것을 낱낱이 들어 분부하고, 여러 신하들의 수의(收議)를 뒤에다 적어 내려보내어 해당 도의 장고로 갖추어 놓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조상진(趙尙鎭)과 북도 절도사 정관채(鄭觀采)가 아뢴 장계에, ‘명천부(明川府) 관할인 재덕보(在德堡)는 높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토지가 메말라 농사를 지을 길이 없는가 하면 샘이 고갈되어 우물을 파서 마실 물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산안개와 비바람에 성가퀴와 공해(公廨)가 날로 무너져내리고 활·화살·기계들이 그대로 썩어가고 있는데, 수리할 때만 되면 반드시 지역 군졸들에게 일을 시키곤 하므로 모두 떠나버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장백산(長白山) 아래 삼대동(三大洞)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옛터 사아동(斜丫洞)은 바로 옛날에 변경 오랑캐들이 왕래하던 때의 요충지입니다. 토지가 기름진데다가 성지(城池)도 옛날 그대로 있고 백성들도 많으니, 저쪽의 것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진실로 편리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재덕보를 옛터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토지의 기름짐과 척박함, 샘물의 풍부함과 부족함이 이미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나는데다가 이쪽은 성지·공해·기계도 썩고 둔한데 저쪽은 견고하고 예리하니, 백성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이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관방(關防)의 형편상 크게 긴요하지 않다면 이쪽을 버리고 저쪽을 취하는 것이 실로 실정에 합당하니, 장계대로 시행할 것을 허락하소서. 옛 성의 수축과 관청을 옮겨 짓는 일은 내년 봄이 되고 나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상의하여 편의대로 조처하게 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다시 장계로 아뢰라는 내용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사직을 허락한 전교를 취소하라고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다시 명소(命召)를 전하게 하였다.
경연관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였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소(疎)니 서(書)니 하는 것들을 이미 지나간 일로 돌려 버렸는데 지금에 와서 굳이 다시 입에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너의 소에 ‘아비와 아들이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을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엄하게 배척하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조사해보고 알았다.’고 하였는데, 깨달았다는 사실이 정말 중요한 것이니 늦게 깨달았다 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대개 의심할 것이 없는 데서 의심할 것을 찾고, 의심을 만들어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학문의 첫번째 도리이다. 더구나 의식 절차를 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을 옛사람은 송사하는 것에 비겼으니, 이는 진실로 미리 터득한 정확한 논리이다. 나는 지난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니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후원(喉院)에서 숙직하던 밤에, 새벽 북소리가 울리자마자 사약(司鑰)이 와서 문을 열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괴상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은 ‘성상께서는 초하루와 보름마다 어김없이 새벽에 진전(眞殿)에 참배하신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빠지는 일 없이 20년을 하루같이 해오고 계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은 감격과 찬탄으로 그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으며, 개인적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조상을 받드는 데 효성을 다하는 것은 임금의 성대한 예절이자 사람의 큰 근본입니다. 큰 근본이 서고 나면 모든 법도가 다 바로잡히는 법이니, 성인의 높은 경지를 알고자 한다면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매번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느라 제물을 받들고 나아갈 때마다 정성스러운 눈빛과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임하셨으므로 어렴풋한 사이에 신명이 내려와서 흠향하곤 하였습니다. 종묘에서 직접 강신제(降神祭)를 지낼 때에는 위엄스런 용모에 두려워하는 기색을 띠었고 향이 피어올라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셨으며 문을 나와 주선함에 어렴풋이 모습을 보는 듯하여 눈물을 흘리셨으므로 시종하는 관리들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50이 되도록 부모를 사모하는 분을 신은 여기에서 보았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관원을 보내어 대리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경우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재계하며 촛불을 밝힌 채로 밤을 지새워 마치 제사지내는 자리에 계시는 듯이 온갖 정성을 다하고 계시다가 제사가 끝났다는 보고가 있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귀신과 사람의 마음을 다 만족시키고 큰 덕을 넓게 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신은 또 보건대, 주무시고 거처하시는 곳은 서까래 몇 개를 얹은 데에 불과하고, 평소 드시는 음식은 몇 가지 반찬에 불과하며, 평상복은 서너 번씩 세탁한 것이고, 수레와 의장들은 붉은 색이 변하고 푸른 장식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창호지는 구멍을 바르고 먹칠을 하였으며, 대청의 자리는 왕골이나 부들을 엮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누추하고 초라하여 보기에 민망스러웠습니다. 신은 늘 이런 사실들을 시골에 가서 이야기하곤 하였는데, 먼 지방의 난잡하고 속된 사람들은 임금이 사는 곳은 필시 금과 옥으로 대궐과 누각을 짓고 구슬 주렴과 비단 휘장을 드리우는 등 가지가지 기이하고 화려한 것들이 인간 세상 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터라서 처음에 이 말을 듣고는 놀라며 믿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온 세상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효과와 교화가 미치는 바는 전혀 상반되기만 한단 말입니까. 전해 들은 사람 중에는 전하의 인도하는 방법에 미진한 점이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진실로 옳지 않습니다. 유언 비어가 징계되지 않아 사람들을 더욱 현혹시키고 있으며, 백성들을 착취하여 제 배를 채우는 탐관오리는 모두 권력자를 팔아대고 세력가들과 결탁하여 눈짓 손짓을 하면서 어리석은 세속을 속이고 있습니다. 신은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아파 진실로 간사한 사람의 내장을 도려냄으로써 성상의 덕을 천하에 높이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당당한 성조(聖朝)는 학자와 사대부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바로 사방에서 우러러 경모하여 본받아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관을 삐뚤게 쓰고 띠를 늘어뜨리고 있기도 하고 혹은 걸음을 경망스럽게 걷거나 한쪽 발로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는 품계를 받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품평하고, 천거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비교하며, 어느 변경에는 먹을 것이 많고 어디는 적다는 둥, 어느 고을에는 무엇이 많이 나고 무엇이 나지 않는다는 둥, 동료들끼리 모여서 날이면 날마다 이런 일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며칠만 새벽 일찍 출사하게 되면 괴로운 표정을 짓고, 하룻밤만 숙직을 하게 되면 마치 죽으러 가기나 하는 듯이 여기니, 습속이 물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기강이 서지 않는 원인은 또한 마땅히 안으로는 궁액에게서, 밖으로는 여러 신하들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니, 신이 그 대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액례(掖隷)가 방자하게 날뛰는 것을 본래부터 엄히 금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을원이 새로 나갈 때마다 첩지를 가지고 가서 돈을 요구하는 잘못된 관행이 일반화 되어 수치를 끼치는 경우가 실로 많습니다. 저들은 비록 천인들이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들이니, 가까이에 있는 자가 이와 같다면 멀리 있는 자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염의 부자들이 경사스러운 모임으로 손님을 청할 때면 채화(綵花)와 금승(金勝)이 좌우에서 번쩍거리고 쌓아 놓은 유밀과의 높이가 한 길이 넘는 등 낭비가 날로 심해지고 저마다 사치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광묘(光廟) 원년에는 외국 사신들을 위한 연회 때에만 유밀과를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모두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우리 선조(先朝)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혼례나 사대부의 혼례를 막론하고 모두 유밀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며, 금색 은색의 노포화(露布花)를 사용하는 자는 형장 80대로 처벌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훌륭한 덕을 갖춘 열성(列聖)께서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함으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정립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쁘게 생을 영위하느냐 근심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생업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 식량을 넉넉하게 해 주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균역청이 공미(貢米)를 미리 사들이는 것은 바로 하나의 큰 병통입니다. 풍년이 드는 해마다 팔고 사는 양이 더욱 많아지기 때문에 쌀을 생산한 고을에서는 그 피해가 더욱 커져 흉년이나 다름없이 쌀값이 뛰어오르게 됩니다. 이제 유사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정해진 수량 이외에는 비록 작은 양이라 할지라도 더 사들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풍년이 든 해의 즐거움을 알게 하고 은택이 피부 깊숙이 스며들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서서히 변통을 논의하여 잘못된 규례를 영원히 없애는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형옥을 심리하는 정사는 전하의 고심과 지극한 덕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미심쩍고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은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전하께서 친히 작성된 문서에 근거하여 분명하고 신중하게 처리하곤 하므로 판결문이 나오기만 하면 백성들이 신명(神明)에 복종하곤 합니다. 심리를 제대로 하려는 우리 전하의 뜻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을의 수령 중에는 멋대로 폭력을 써서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자도 간혹 있습니다. 이는 모든 지방이 다 그러하지만 영남이 특히 더 심합니다. 소송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문서로 죄상을 꾸며가지고는 남몰래 폭력을 써서 자백을 받아내곤 하는데, 과거 한두 수령의 경우가 바로 그 실제 예입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절로 따라간다.’는 것은 그저 빈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이전부터 한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충신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는 것은 사대부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삼사의 시종하는 관리 중에 녹봉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이는 관리의 정원이 녹봉을 받기로 정해진 인원보다 배나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삼사의 직책은 임명되기도 어렵지만 순리적으로 교체되기도 쉽지 않으므로 명색은 돌아가며 차례대로 받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질없이 군직(軍職)에 매어 있기만 할 뿐 일년이 다가도록 녹봉을 받지 못하는 자도 있고, 병조에 애걸복걸하여 몇 달만에 겨우 한 번 받게 되는 자도 있습니다. 당당한 제후국에서 임금을 시종하는 신하에게 녹봉을 다달이 주지 못하고 있는 탓으로 모두가 호시탐탐 휘어잡을 기회만 엿보고 있으며, 그러다가 운이 좋아 얻게 되면 마구 탐욕스럽게 낚아채곤 합니다. 저들에게도 진실로 죄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1년에 호조로 들어오는 쌀은 10만 섬에 불과합니다. 과거에는 세입은 이보다 많고 지출은 이보다 작았으므로 근근히 경비를 충당해 왔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세입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이보다 많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경비를 가지고 관리들의 녹봉을 마련하자면 줄어들었으면 줄어들었지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다른 경비는 다 줄일 수 있어도 사대부들의 녹봉은 지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군문(軍門)에는 필요 없는 사람이 아직도 많으니, 조금 변통할 것을 의논하여 호조에 소속시킨다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과거 제도로 말하자면, 지금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데에 인원의 제한이 없는데다가 시골에서 선비를 올려보내는 데도 공법(貢法)이 없습니다. 선비들의 취향이 단정하지 못하고 과거가 혼잡스러운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정원을 정하고 천거하는 법을 다시 밝혀서 문사(文詞) 이외에 학행을 보아서 뽑고 버리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삼물빈흥(三物賓興)의 교화050) 도 장차 오늘날 다시 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관리를 뽑는 법은 국가의 큰 정사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숨은 인재를 모두 발탁하여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인재가 없으니, 과거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적체되어 있던 인재를 지금처럼 다 등용한 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낡고 오래된 습속과 관념을 개혁하는 것에 힘을 기울여 밤낮으로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자세로 신하들을 바로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일을 맡은 사람들이 대부분 전하의 뜻을 알맞게 체득하지 못한 탓에 내치거나 승진시키기를 제대로 못한 경우도 더러 있고, 격양(激揚)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모든 사람을 고무시키지도, 한 시대의 정신을 집중시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두려워하고만 있게 내버려 둔다면 세상의 도리와 조정의 기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니, 지금 거듭 신칙하여 원대한 계획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학문은 포의(布衣)의 선비와는 다르겠지만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고 체(體)를 보존하여 응용해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하였습니다. 유자(儒者)의 학문은 경전을 근본으로 삼으면 바르고 참되게 되고, 새롭고 기이한 것을 힘쓰게 되면 삐뚤고 거짓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교육은 반드시 추구하는 바를 제대로 살피게 하였는데, 근세의 선비는 시율(詩律)이나 교묘하게 하고 새롭고 기교스러운 것을 겨루는 방법으로 출세를 하려고 듭니다. 경서를 연구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괴기한 일로 여기고, 위의를 가다듬고 절개를 지키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러한 속된 폐습은 모두 어릴 때의 교육이 단정하지 않고 예의에 관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주자가 《소학》의 가르침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횡거(橫渠)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예를 우선으로 하였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소학》 책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인재의 배양에 힘을 기울이면서 오직 여기에만 우선 순위를 두었던 책입니다. 지금 다시 조항을 엄히 세우도록 유사를 신칙하여, 안으로는 교관으로 하여금 한 달에 세 번 공해(公廨)에 모여 고강(考講)을 하게 하고, 밖으로는 문학으로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숙사(塾師)로 삼아서 그 고과(考課)를 맡기게 한다면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예(禮)에 관한 가르침은 옛날과 지금이 다르겠지만, 삼대(三代)의 예로서 상고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은 향음례(鄕飮禮) 뿐입니다. 대개 술잔을 상대방에게 올리고 사양하며 단에 오르내리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느껴서 지켜갈 줄 알게 하자는 것이니, 공자가 말한 ‘향음주(鄕飮洒) 의식을 보고 난 후에 왕도(王道)가 아주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옛날에 고을을 맡아 향숙(鄕塾)에 거처하였던 우리 나라의 이름난 석학들도 모두 이 예를 시행하였으니, 지금 거듭 옛 규례를 밝혀 안으로는 성균관과 사학(四學), 밖으로는 향교와 서원에서 봄 가을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여가에 향음례를 익히게 함으로써 좋은 것을 보고 본받게 한다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분별하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네가 말한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지금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니, 곳곳마다 너의 말을 실행해 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재자관(齎咨官) 김재수(金在洙)가 북경(北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보고서를 비변사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에서의 싸움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습니다. 호남의 묘비(苗匪)는 태학사(太學士) 복강안(福康安)과 총독 화림(和琳)·복녕(福寧)·강성(姜晟)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였는데, 1년 가량이나 서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지리에 밝지 못한 때문에 제압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무렵에 염탐꾼을 매수하여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화림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여러 차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는 곧장 적의 소굴을 공격하여 그들의 두목인 석삼보(石三保)와 석대갈(石代噶) 등을 연달아 사로잡았으며 그밖에도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올해를 넘기기 전에 평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북의 교비(敎匪)는 모두 민가로서 기근 때문에 소동을 일으켰는데, 자기들 패거리를 백련(白蓮)이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를 교주(敎主)라고 하면서 사악한 방법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고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또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일삼는 바람에 호남의 당양(當陽) 등 수십 고을이 모두 그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태학사 손사의(孫士毅), 장군 명량(明亮)·서량(舒亮), 총독 혜령(惠齡)·성덕(成德) 등이 군대를 나누어 토벌하러 나섰는데, 중간에 더러 사로잡기는 했지만 큰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8월 12일 혜령과 성덕 등이 적과 교전하여 적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고 적의 성루로 진격해 가서 목책을 불태우고 그 괴수 장정모(張正謨)와 유홍택(劉洪鐸) 등을 사로잡았습니다. 적은 형세가 몰리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지만 머지 않아 소탕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비의 한 갈래 적당들이 사잇길로 빠져나가 하남성(河南省) 남양부(南陽府) 당현(唐縣)을 포위하여 장리(長吏)를 살해하고 거주민을 약탈하였습니다. 급한 보고가 올라가자 황제가 부도통(副都統) 태포(台布)에게 특명을 내려 수도 군영의 병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내려가면서 직례성(直隷省) 산동성(山東省) 등의 군대 8천 명을 수합하여 미리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군이 하남(河南)의 지경으로 들어가자마자 적은 소문을 듣고 달아나버렸습니다. 관군은 호북과 인접한 지방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호남과 호북의 첩서(捷書) 등본 한 통씩을 사놓았지만 번거롭게 여기에 첨부하여 올리지 않고 소인이 돌아가서 보고할 때에 바칠 생각입니다.
복강안(福康安)·손사의(孫士毅)·화림(和琳) 등은 습한 기운 때문에 풍토병에 걸려 하나하나 죽어갔는데,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내탕고의 은 1만 냥씩을 하사하였으며, 복강안과 화림의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어 자손들이 세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공로에 보답하였습니다. 황제는 호남과 호북 백성들이 적들의 소동 때문에 삶을 영위해 나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위로하는 교지를 내렸고, 아울러 올해와 내년에 내어야 할 조세를 모두 감면해 주었습니다. 황제는 호남 총독 강성(姜晟) 등에게 명하여 묘비(苗匪) 지역에서 가까운 고을에다 성지(城池)를 쌓게 하는 한편, 그 지방 관청과 묘민들의 무기를 모두 거두어서 불태우게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60세 이상인 사람은 동지 향관(冬至享官)으로 임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신유
민태혁(閔台爀)을 황해도 관찰사로, 이성보(李城輔)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대각이 대각 구실을 못해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외척들이 위세를 부리면 그들을 겁내어 머뭇거리고, 외조(外朝)에서 은총과 권세를 독차지하면 그들을 겁내어 할 말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니 비록 탄핵하는 긴 글을 다투어 올린다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 드러내어 말하지 말아야 할 문제를 심하게 건드리는 것이 아니면 마치 죽은 중 매치듯 힘없는 자들에게 위세를 부린 것들이다.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수백 편에 달하는 《어정장차휘편(御定章箚彙編)》과 《공거문총(公車文叢)》을 경도 한 번 살펴보도록 하라. 수십 년 동안에 그 주장의 경중과 긴요한 정도는 따지지 않더라도 권력가의 정수리에 손을 댈 생각을 한 자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른바 수백여 책에 쓰여져 있는 깨알 같은 글자들은 단지 견강부회하는 주장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하여 지위가 날로 높아가고 기세가 날로 등등해지고 나면 이 즐거움을 길이 누리고 이 이익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의리를 매번 소홀히 하여 죄악이 가득해지는 것을 면치 못하곤 한다. 《시경》에 ‘처음은 누구나 다 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자는 드물다.’고 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조정이 이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들이 국가를 저버리면서 떼를 지어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름이 끼치곤 한다. 만약 대각이 일에 따라 부지런히 공격한다면 사람들이 다 즐거운 마음으로 듣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어찌 대각이 대각 구실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 작년 봄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는 처분이 있은 이후로는 강등시키거나 승진시켜 악을 배척하고 선을 드러내는 자리에 있는 자들이 표창하고 탄핵하기를 제대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되었다. 한 사람을 장려하여 백 사람을 권면하고 열 사람을 권면하여 천 사람의 잘못을 막은 결과 낡은 풍속이 일신되어 시끄럽던 풍속이 조용하게 되었다. 만약 씻어낼 만한 결함이 없고 끄집어낼 만한 단점이 없다면, 날마다 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넌즈시 말하는 자를 등용하고 과감히 말하는 자를 발탁할 것이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오늘의 규모가 분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야만 봉조하(奉朝賀)의 소에서 말한 ‘성상의 덕을 삼대(三代)의 수준으로 높인다.’는 말에 대하여 경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경이 어떤 정사를 알맞게 하고 어떤 일을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경의 손을 통해서 임명된 대각은 다 말을 하기만 하면 죄를 짓게 되는 무리이니, 이것이 과연 경은 바른말을 하는 선비를 등용하였는데 내가 도리어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진실로 그렇지 않다면 경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것을 저버림이 얼마나 크겠는가. 어찌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지금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대사간의 고루하고 평범한 말은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침에 접견했을 때에 한 하교를 듣고서도 서둘러 시행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모두 전적으로 주도한다는 데에 혐의하여 경 등이 말을 해야 할 데에서 말하지 않고 물러나 입을 다물고 있다면, 경의 낭패는 그만두고라도 이것은 작년 봄 이전의 모양 그대로이니 경등의 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마땅하겠는가."
하였다.
홍수영(洪守榮)을 사포 별제(司圃別提)로 삼았는데, 이조 참의 한용귀(韓用龜)가 구전정사(口傳政事)를 직접 쓴 것이었다.
장릉(長陵) 헌관 이유경(李儒敬)이 지방에 있으면서 향을 받는 때에 맞추어 오지 못하였다. 상이 이조를 엄히 문책하고 참의 한용귀(韓用龜)를 의금부에 내렸다.
11월 21일 임술
이조 참의 한용귀를 삭주(朔州)로 귀양보냈다. 전교하기를,
"저렇게 행동이 깨끗하지 못한 자를 진흙탕에서 꺼내어 죄명을 씻어주고 관직에 등용하였으니, 그나마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래도 어리석은 돼지나 물고기, 하찮은 참새나 쥐새끼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 한번 조금이라도 고마운 줄을 알고 은혜에 감격하여 분수와 의리를 두려워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는가. 내가 비록 악을 미워하는 성질이 너무 지나치기는 하지만, 자나깨나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을 허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잘못을 숨겨주며,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 죄에 빠지려는 것을 구해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실로 개과천선하여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종전의 잘못은 전부 지나간 일로 돌려버리곤 했는데, 그에게도 그렇게 대했었다. 그런데도 근래에 자못 거리낌없이 굴었으니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던 것이다. 어찌하여 낡은 버릇을 고치지 않고 법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의 허다한 죄를 예전에 깨우쳐 주지 않았던 것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특별히 너그럽게 조처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어찌 굳이 결함을 찾아내어 깨우쳐 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사실로 말을 해보면, 처음 등극했을 때에 올린 한 통의 소는 경황없이 갑작스레 올린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보여서 나라의 편에 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엄한 형벌로 그를 가차없이 처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단지 멀리 귀양만 보내고 끝내 그의 죄로써 처벌하지 않았었으니, 그 첫 번째 이유는 그의 형을 생각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그 형을 가련히 여겨서였다. 그러나 그 후로도 그의 행동은 모두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척혜(跖惠)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에게 마음을 털어 놓고 말하기까지 함으로써 징계할 줄 알게 하고자 했었다. 그런데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으니 이는 참으로 교화시킬 수 없는 자이다. 결국 어제와 같은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고 보면 그의 마음에는 조심한다거나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야 더이상 말할 것도 못되겠지만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은 바로 이조 참의이다. 악한 자를 배척하고 선한 자를 장려하는 것이 그가 맡은 일이니, 그로 하여금 그의 생각대로 행동하도록 버려두고 그대로 용납해 주기만 한다면 조정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재관(齋官)을 임명하는 일을 그가 이미 전날 밤에 제 손으로 정서하여 입계하여 놓고는, 밤이 지나고 정오도 지난 후에 갑자기 한 통의 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두어 마디의 말을 집어넣어 놓았다. 이것은 병신년에 갑작스레 올린 상소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수완이 다 드러나 정상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신칙하는 전교를 받고 들어와서 허둥지둥 이름을 불러 천거하면서 황급히 직접 쓴 행동은 다 이해관계에 얽매여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으니, 또 어쩌면 그리도 조정을 심하게 욕보인단 말인가.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며, 만물을 살게 하는 이치로서 인(仁)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인자(仁者)만이 악한 사람을 미워하여 먼 변경에 귀양보냄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명예와 행실을 갈고 닦아 성심으로 임금을 섬겨 모두 함께 조화로운 원기의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으니, 인의 쓰임은 작은 인정을 베푸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금부 동쪽 칸에 엄하게 가두어 둔 죄인 한용귀를 삭주부(朔州府)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조 판서의 일은 말이 되는가.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의리인데, 한용귀의 일을 가지고 보면 오직 항복한 자를 불러들이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여 패거리를 만들고 뜻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만을 일삼았으니, 이런 행동을 만약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밝은 의리를 안고 웃음을 머금은 채 땅속으로 들어갈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뜻을 그로 하여금 잘 알게 하라."
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재시(再試) 및 과강(課講)을 실시하였다.
선전관 이정회(李鼎會)가 시사(試射)에서 규정만큼 적중시키지 못하였는데, 그를 훈련 도감 군졸로 강등시키고, 담당 대장으로 하여금 유엽전(柳葉箭)으로 다시 시험을 보여 10순(巡)을 쏘아 15발을 적중시킨 후에 초기(草記)하도록 하였다. 또 명하기를,
"남행 선전관(南行宣傳官)의 6품 승진은, 기한이 찼는데도 시사(試射)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정회의 예대로 시행함으로써 남행 선전관의 6품 승진 규정을 엄하게 하는 동시에 무남(武南)051) 이라는 칭호를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김한동(金翰東)의 소를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1월 22일 계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묘(廟)·전(殿)·능(陵)·원(園)·궁(宮)의 향과 축문을 직접 전해주고 동쪽 뜰에서 경건하게 전송한 후 영희전(永禧殿)으로 가서 참배하였다.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풀어주었는데, 날이 춥기 때문이었다.
11월 23일 갑자
영희전(永禧殿)의 동지제(冬至祭)를 직접 지냈다. 어가가 돌아오다가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렀을 때에 공인(貢人)과 시전(市廛) 사람들을 불러 전교하기를,
"오늘이 동지이므로 특별히 폐단에 대해서 물어보고자 하는 바이니, 제각기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고는 환궁하여 선원전(璿源殿)에 참배하였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을 돈독히 타이르고 사직소를 봉하여 돌려주었다.
11월 24일 을축
시임과 원임 대신들을 불러 만나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책봉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작년 동지에 경들이 청하였을 때에 ‘내년도 좋고 그 다음 해도 좋고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다.’고 내가 말했었는데, 내 생각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책봉하여 영원을 기원하는 근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원자가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상하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지 벌써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듯이 이렇게 단정히 앉아 눈 한번 돌리지 않고 있으니, 《소학》의 공부가 이미 이루어졌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경이 지나야만 잠자리에 들며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꿇어앉아 응대하는 것 등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왕조의 가풍이 원래 그렇다. 학문을 하고 덕에 들어가는 문으로는 《소학》보다 우선적인 것은 없는데, 근래에 듣자니 사대부 집안에서 《소학》을 읽는 자는 전혀 없고, 성균관의 《소학》 강(講)도 폐지해버리고 하지 않는다고 하니, 여기에서도 세상의 도의를 볼 수 있다. 선조(先朝)의 교정본은 활인(活印)이라서 널리 배포되지 못하였었다. 나는 중간(重刊)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세상일이란 규모가 없는 것이 없는 법인데, 나의 규모는 이미 정해졌다. 영의정은 늙었으니 대궐에 누워 있기나 해야 할 형편이며, 좌의정도 중서(中書)의 고사로 인하여 규례대로 조정에 나오려고 하지 않기에 나는 강요하지 않고 있다. 대신(大臣)은 일반 관료들과 달라서 대체(大體)가 중요한 법인데 어찌 자질구레한 업무를 요구하겠는가. 영돈녕은 비록 언어와 문자에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확고하게 지키는 점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부터 감탄해 왔었다. 판부사는 문학과 정사에 대해서는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두 대신은 지금 마침 현직에 있지 않으니 내가 맡겨서 성과를 기대할 자는 바로 우의정이다. 예로부터 신하가 자기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견제당하거나 두려워하는 근심이 있어서였는데 지금은 외척들이 정사에 간여하거나 간신들이 권력을 도적질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조정의 현안 문제들을 나는 모두 경들에게 맡기고 있는데, 경들은 무엇을 꺼려 하지 않고 있는가. 입시하는 승지도 근신(近臣)인데, 나는 10여 년 동안 근신이라는 무리들에게 기만을 당해왔다.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조용히 생각해 보면 한밤중에도 머리카락이 치솟곤 한다. 이번의 하교를 나는 오늘날의 제일 중요한 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경들은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11월 25일 병인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11월 27일 무진
양전(兩銓)에 명하였다.
"한 자리에 오랫동안 근무하게 하는 규례를 다시 밝히도록 하라. 명성과 업적이 있는 수령은 임기가 차는 대로 승진시키고, 임지를 서로 맞바꾼 수령은 처음 임명하는 예대로 근무 일수를 계산하고, 영장(營將)과 우후(虞候)로서 정해진 달을 채우지 못한 자는 천전(遷轉)시키지 말라."
대사성 이만수(李晩秀)를 체직하고 남공철(南公轍)을 후임자로 삼았다.
11월 28일 기사
대사헌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근간에 승지의 말을 듣고 경이 기어코 상소문을 쓰고야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다해 쓴 글자를 볼 때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구나 종사(從祀)하는 예를 거행하여 유교가 더욱 빛나게 된 지금은 바로 경같은 자가 마음을 돌려 함께 나와야 할 때이다. 경은 즉시 길에 올라 봉황새가 춤을 추는 아름다운 징조가 이루어지게 하라."
하였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실시하였다. 전교하기를,
"경(經)의 뜻에 대하여 이렇게 잘 대답하니, 익숙히 공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경서를 윤송(輪誦)하는 것을 일과로 정해놓고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었는데, 과연 알고 있던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모든 문체가 전아하고 근엄하여 저속한 투에 빠지지 않았다. 초계 문신 신현(申絢)에게 초피(貂皮)로 만든 액엄(額掩) 하나를 하사하라.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의 성(性)을 드러내어 밝혔으니, 기특하고도 기특하다. 교남(嶠南) 학자들이 실질적인 문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초계 문신 유태좌(柳台佐)에게 서피(鼠皮)로 만든 이엄(耳掩) 하나를 하사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재시(再試)에 합격하지 못한 문신들에게 문목(問目)을 써서 내려보내어 조목조목 대답하게 하라."
하였다. 그들이 제출한 내용을 가지고 내각이 논계하였는데, 홍문관에 내려보내어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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