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5권, 정조 20년 1796년 12월

싸라리리 2025. 8. 1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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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신

전교하였다.
"대신(大臣)과 신하들이 면대를 요청하여 책봉하는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에 대해서는 경술년 이후로 귀신과 사람들이 부탁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바라왔었지만, 책봉하는 조처로 말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외면적인 의식 절차에 속하는 것이다. 조종조(祖宗朝)의 전례와 훌륭한 뜻을 지금 내가 우러러 본받으려고 한다는 근본 취지를 여러 신하들과 만나서 이야기하였었다. 또 내년이 이미 사부를 정해주어야 할 나이이니 우선 내년에 개강(開講)을 해놓고 보자는 뜻으로도 말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접견하는 자리에서 영의정이 거행할 조목을 제시할 것이니,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알고 있도록 하라."

 

대사헌 송환기(宋煥箕)의 품계를 자헌(資憲)으로 높여 원자 사부(師傅)로 삼았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삼가 사례를 살펴보건대, 3세 이전에 보양관(輔養官)을 임명하고 5세 이후에는 사부를 임명하여야 하는데, 원자의 사부는 정2품으로 임명하는 것이 또한 선조(先朝) 때부터 정해 놓은 규례입니다. 조야(朝野)의 명망을 받아온 사람은 바로 대사헌 송환기인데, 그는 현재 아경(亞卿)의 반열에 있으니 정경으로 승진시켜 발탁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이성보(李城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원자 사부 송환기에게 개강할 날짜에 맞추어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전교하기를,
"‘숙묘(肅廟)의 어린 시절에 현묘(顯廟)가 보양하는 관원을 선발하게 하고 강학청(講學廳)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때 경의 집안의 두 선정(先正)이 이 직책을 맡았었다. 그런데 경이 지금 선조의 뒤를 이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점을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점은 경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 경이 마음을 돌리는 데 어찌 나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비록 경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오랜 덕망과 바른 지조에 대해서 늘 듣고 있었다. 어찌 단지 경이 경의 집안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일을 맡기는 것이겠는가. 내년은 사부를 정해주어야 하는 나이이므로 내년 초에 길일을 정하게 하려고 하니, 경은 기일에 맞추어 길에 오르도록 하라.’는 뜻으로 사관은 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원자와 사부의 상견례(相見禮) 절차를 아뢰었다. 【1. 원자가 사부와 만날 때에 원자는 동쪽 벽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사부는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어 입고 서쪽 벽으로 가서 동쪽을 향하여 선다. 1. 원자가 먼저 절을 두 번 하고 난 다음 사부가 두 번 절을 한다. 1. 원자와 사부는 한 달에 세 번 만난다. 1. 강학하는 때에 사부가 거처하는 곳은 만팔문(萬八門) 안 공해(公廨)나 감인소(監印所)를 융통해 사용한다.】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82면
【분류】왕실(王室)

 

12월 2일 계유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실시하였다.

 

12월 3일 갑술

대신(大臣)과 각신(閣臣)들을 불러 만나보았다. 이때 동지 정사(冬至正使) 심이지(沈頤之)가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설유참(薛劉站)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정사(正使)를 다시 뽑아 보내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무진년에는 고 재상 정석오(鄭錫五)가 심양(瀋陽)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었으므로 우리 나라가 정사를 다시 뽑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문(柵門)에 들어간 뒤 하룻길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니, 우리 나라가 모르는 체하고 부사와 서장관만 들여보내는 것은 미안한 듯합니다. 또 올해는 가경(嘉慶)052)   첫번째 정지(正至) 하례이니 무진년의 예를 끌어다 써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자,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즉시 정사를 뽑아 속히 길을 떠나게 한다면 따라잡지 못할 우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갑자기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놀라움과 애석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연경으로 사신 갔던 길에 갑자기 죽었던 고 참판 김용경(金龍慶)과 해흥군(海興君)의 경우는 모두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고, 고 재상 이행원(李行遠)은 강을 건너기 전에 죽었으며, 고 재상 정석오(鄭錫五)는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중신(重臣)의 상(喪)은 책문(柵門)에 들어선 뒤에 났으니, 이에 관한 위의 예가 제각기 다르므로 인용해서 쓸 수는 없겠다. 그러나 판중추를 곧장 임명한 것은 해당 품계의 정사(正使)와 다름이 없으니, 조정에서는 각별하게 돌보아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묘당은 두 재상의 예를 참작하여 그보다 조금 낮은 수준으로 마련한 후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행회하여 영구를 운반하는 절차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의 죽음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진년 고 재상이 연경으로 갔다가 갑자기 서거하였을 때 후손을 녹용한 전례가 있으니, 그의 자손들을 돌보아 주는 일에 있어서 특례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삼년상을 마친 후에 등용하여 쓰도록 하라."
하였다.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에게 제사를 지내주고,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鐘秀)에게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전교하기를,
"백 대 전이나 천 년 후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으니 간사함이 정의를 침범하지 못하고 사람이 귀신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의리는 없어지는 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자(程子)의 ‘요(堯)·순(舜)이 지금 살아있다 하더라도 될 것이다.’는 말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니, 오늘 이 시점에서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아, 그 인(仁)은 천지와 같고 그 밝기는 일월(日月)과 같으셨으니,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다 선왕(先王)이 주신 것인데, 그 당시 충헌공이 한 손으로 떠받들어 신령스러운 계책을 힘써 도왔었다.
대개 의리는 강구하면 밝아지고 강구하지 않으면 어두워지는 법이니, 밝히고 또 밝혀 마치 거울처럼 텅비게 되어야만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풍이 날로 못해지고 습성이 날로 저속해진 탓으로 엿보기나 하는 풍속이 생겼으니 미약한 소인이라도 근심할 만하다. 한 권의 《춘추》를 읽은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옛날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정사에 수시로 더 유의함으로써 이날을 잊지 못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며,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한 가지 단서가 되는 데에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고 영의정 충헌공 서명선(徐命善)의 사판(祠版)에 아직까지도 그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하니, 그의 아들 감찰 서노수(徐潞修)를 오늘 정사에서 수령으로 임명하여 내려보내어 그 사판이 관아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제사를 지내주게 하라. 제문은 직접 지을 것이다."
하였다. 봉조하 김종수(金鐘秀)에게 하유하기를,
"해마다 이날을 한 번이라도 그냥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을 경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기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입시하는 사관을 보내어 경의 안부를 물어보게 하면서 그 편에 음식물을 전하는 바이다."
하였다.

 

황해도 절도사 김사목(金思穆)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임명하여 하직 인사를 생략하고 연경으로 가게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임명하였고, 윤득규(尹得逵)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가 곧바로 통제사 이유경(李儒敬)과 맞바꾸게 하였다.

 

12월 6일 정축

이만수(李晩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7일 무인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의 어필(御筆) 비각(碑閣)을 관찰사와 예조 당상이 함께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새로 인쇄할 삼경(三經)과 사서(四書)의 구두를 교정하게 하였는데, 이조가 뽑아 아뢴 경에 밝은 문신 10명과 성균관이 뽑아 아뢴 경에 밝은 유생 10명이 대조해 가며 검열하고 교정하였다. 대교 서유구(徐有榘)와 초계 문신 김희조(金熙朝)가 이 일을 주관하였는데, 일이 끝나자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12월 8일 기묘

초계 문신의 과강(課講)을 실시하였다.

 

유학 송계간(宋啓榦)을 불러들여 만나본 후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전교하기를,
"지난 계미년에 고 찬선이 올라왔을 때에 내가 빈례(賓禮)로 만나기를 청하자 찬선은 사양하다가 완강히 말한 후에야 받아들였었다. 만나는 자리에서 도움이 되는 계책을 많이 아뢰었는데, 이 일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34년이 지난 지금 그의 손자를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볼 것도 없이 모습만 대하고도 그가 훌륭한 선비임을 즉시 알겠다. 선정신의 집안을 위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옛날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응당 보여주어야 하겠으니, 고 찬선 송명흠의 집안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유학 송계간을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라."
하였다.

 

예조 참의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돈독히 타이르는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이조 참판  이익운(李益運)과 예조 참의 이성보(李城輔)를 체차하고, 황승원(黃昇源)과 성덕우(成德雨)를 후임자로 삼았다.

 

《무원록(無冤錄)》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2월 9일 경진

차대(次對)가 있었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지난해에는 《주서백선(朱書百選)》을 읽었었는데, 금년에는 또 경서에서 1백 편을 뽑아 30일 만에 다 읽었다. 얻은 것이 있는 것처럼 부듯하기에 근래에는 또 《좌전》에 뜻을 두고 있다."
하였다.

 

이형원(李亨元)·이서구(李書九)·이익운(李益運)을 비변사 제조로 삼았다.

 

명하였다.
"각도의 영장(營將)은 수령의 이력이 있는 자를 의망하고 금군의 장수도 일찍이 수령을 지낸 적이 있는 자를 의망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이재학(李在學)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신사

춘당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시사(試射)를 실시하고, 선전관의 사강(射講) 및 장용영(壯勇營)의 내년 봄철 시사를 실시하였다.

 

이조 참의 채홍원(蔡弘遠)을 파직하였다.

 

권유(權𥙿)를 이조 참판으로 삼고, 신기(申耆)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 한만유(韓晩𥙿)로 대신하였다.

 

12월 11일 임오

전교하였다.
"초계 문신이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갈 때 역참의 인부와 말을 규정된 수보다 더 늘려 대기시키기까지 한다고 한다.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가는 신하의 행차일지라도 역마를 함부로 탔을 경우에는 해당되는 법률이 있는 법이니, 개인적인 걸음으로 가는 초계 문신에게 말 한 마리와 인부 두 명을 제공하는 것만도 전에 없던 은전이다. 그런데 깃발과 의장을 가지고 나아가 맞이하고 음식물을 접대하는 것 등을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가는 신하와 다름없이 하고, 역참의 인부와 말을 스스럼없이 더 대기시킨다고 한다. 앞으로는 법령을 그대로 준수하여 말 한 마리와 인부 두 명에다 개인적으로 데려가는 노비 한 명과 말 한 마리 외에는 제공하지 말도록 하고, 지경 밖에 나와 기다리는 것과 각 역참에서 음식을 접대하는 것도 모두 없애도록 하라. 법을 위반한 문신과 명령을 어긴 고을의 역참은 관찰사가 보고하여 처벌을 청하도록 하라."

 

이조 참의 한만유(韓晩裕)를 파직하고 성덕우(成德雨)를 후임자로 삼았다.

 

이병정(李秉鼎)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으며, 이조 참판 권유(權𥙿)를 체직하고 서용보(徐龍輔)를 후임자로 삼았다.

 

12월 12일 계미

전교하였다.
"《소학주해(小學註解)》의 의례(義例)가 일정치 않아서 매번 정리하려고 했었으나 인본마저 희귀한 형편이니, 이것은 모두 잘 다듬어 밝히지 못한 하나의 단서이다. 과거 선조(先朝) 때에는 《소학》의 가르침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나는 9세 이전에 반복해 읽곤 하여 다섯 번 이 책을 강독했었는데, 한 차례 강독할 때마다 1백 번 이상 읽도록 규정을 정해 놓았었다. 그런데도 3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구두를 점검해보니 초학자나 다름이 없다. 근래에 밤이 길어 경전을 공부하다가 이 책에까지 손이 가게 되다 보니 의례를 교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붙여 놓은 훈의(訓義)를 소주(小註)에다 실어 놓은 것은 더더구나 존각(尊閣)의 도리가 아니다. 나라 안팎에 거듭 타일러 강구하고 익히게 하는 방도는 교정하여 인쇄한 후에라야 가능할 일이다. 더구나 대신(大臣)의 주의와 대간(大諫)의 상소도 이미 기꺼이 듣고 허락하였으니 《소학》 의례를 교정하는 일을 내각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하게 하라. 청을 설치하는 것은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듯하므로 사부의 자리에 있었던 신하들과 옛날을 상고할 수 있는 옛 관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한다. 원임 직제학 판부사 이병모(李秉模), 직제학 이만수(李晩秀), 원임 직각(直閣) 남공철(南公轍), 봉조하 서유신(徐有臣), 행 호군 이의준(李義駿), 춘천 부사(春川府使) 한용화(韓用和),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술원(李述源)은 내일 입궐하여 규장각에서 교정을 보게 하고, 더 임명해야 할 사람은 다시 여쭙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별운검(別雲劒)은 임무가 막중하므로 옛날에는 대신(大臣)과 같은 품계라야만 임명하였고 대신보다 높은 대군(大君)도 임명하였었다. 나중에는 비록 옛날의 규례대로 하지는 않았어도 정경 이상의 높은 품계에 해당되는 사람만을 갖추어 의망하였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전혀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니 더이상 외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 별도로 엄중하게 신칙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별운검 의망 단자를 보니 아전(亞銓)을 지내지 않은 참판들도 의망에 포함시켜 놓았다. 담당 병조 판서를 엄중히 추고하라. 지금부터는 대신과 의논해서 일정한 제한을 두도록 정하여 그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되, 정경 중에서 일찍이 육조의 장관이나 정부의 서벽(西壁)을 지냈던 사람 및 참판 중에서 일찍이 아전(亞銓)을 지냈던 사람을 뽑아 의망하도록 하라."

 

12월 13일 갑신

차대(次對)가 있었다. 판부사 이병모(李秉模)에게 하교하기를,
"경이 60에 가까운 나이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소학》을 읽고 있다고 하니, 나는 매우 가상히 여겨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봉조하 서유신(徐有臣)은 서 문청공(徐文淸公)의 아들이고, 직각 남공철(南公轍)은 남 문청공(南文淸公)의 아들이다. 부총관 이의준(李義駿)은 내가 고 재상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두 직제학 가운데 이만수(李晩秀)는, 기묘년 책봉되던 때에 고 재상이 익선으로, 이명즙(李命楫)이 장사(長史)로 있었는데, 내가 이 강당에서 《소학》을 읽었었다. 한용화(韓用和)와 이술원(李述源)도 계방(桂坊)에서 나의 질문에 답하던 자들이다. 그러니 이번 일을 경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또 전교하기를,
"책을 펼쳤을 때의 첫번째 의의는 바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다. 옛날의 교육은, 궁궐과 수도로부터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입학하였고, 자라서는 대학에서 가르쳤었다. 지금의 이 《소학》 책은 비록 옛날의 소학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 가르침은 마찬가지이니, 《소학》을 잘 가르치면 《대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선왕이 이 책에 정성을 쏟았었기 때문에 나도 반복해서 읽었었는데, 기묘년에 이 당(堂)에서 읽은 것이 다섯 번째로 숙독한 것이었다. 그때는 익숙히 익혔었는데도 지금은 구두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으니, 이번에 교정하라고 명한 데에는 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먼저 의례(義例)를 정하여야 할 것인데, 붙여 놓은 훈의(訓義)를 소주(小註)에 실은 것도 미안한 일인 듯하다. 여러 학자들의 집해(集解) 중에 선정의 주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함경 감영 판본에 과연 선정의 주가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훈의소학(訓義小學)》에는 주자(朱子) 본주가 없으니 이것은 헤아려서 집어넣고, 집주 중에서 쓸데없이 긴 것은 전부 빼서 소주에 넣는 것이 좋겠다. 또 《소학》은 주자 혼자서 만든 책이 아니고 대부분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서 편집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등백도(鄧伯道)의 일 같은 경우는 유청지(劉淸之)가 실은 것인데, 주자는 그것을 빼버리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었다. 이런 곳은 주자의 본의를 표출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볼 만한 곳이니, 주자의 말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첨가해 넣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주자의 천마디 만마디 말은 다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에 관계된 것이므로 실로 취사선택을 할 여지가 없으며, 또 함부로 논의할 수도 없다. 본문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손을 대서는 안 될 것이니, 권수를 줄이는 것도 좋겠지만 초학자들에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과강(科講)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다. 이 두세 가지의 의례를 먼저 검토하여 정한 후 오늘부터 당장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지훈련원사 이경무(李敬懋)에게 이르기를,
"무경 칠서(武經七書) 가운데에 아직도 읽을 만한 본이 없는 것은 무(武)를 숭상하는 정사에 결함이 되는 동시에 문(文)을 높이는 뜻도 아니다. 경이 맡고 있는 훈련원은 바로 옛날의 무학(武學)이다. 이미 그 학교를 세우고 이 관청도 세웠는데도 유독 강독할 책에 있어서만은 판본마저도 보관되어 있지 않으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우의정이 현재 무고(武庫)에 관한 책임을 맡아 편집 교정하는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있으니, 경은 감독하는 일을 맡아서 하도록 하고, 편집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을 대신이 뽑아 아룀으로써 빨리 정리할 수 있게 하라. 책이 완성된 후에는 활인(活印)하여 본원에 보관하고, 이어서 관서 감영으로 하여금 모각(摹刻)하게 하라."
하고, 또 경무에게 이르기를,
"무경 칠서의 주석이 소략하니 반드시 이들 책을 잘 익힌 자를 찾아서 편집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손무자(孫武子)》와 《사마법(司馬法)》과 같은 책들은 모두 먼 옛날에 쓰여진 것이므로 문체가 매우 좋아서 팔대가(八大家) 보다 나으니, 무를 갖추는 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지훈련원사 이경무가 아뢰기를,
"훈련원 절목을 이제 계하받아 게시하려고 합니다. 능마아(能麽兒) 당상을 만약 삼영(三營)의 중군(中軍)이 전례대로 겸임하지 않고 날마다 순번에 따라 임명된 시험관이 의례대로 거행하게 된다면 고강(考講)하는 데에 있어서 본래부터 정해진 당상이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있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판중추부사        이병모가 아뢰기를,
"순번대로 돌아가며 시험관을 임명하면 아마도 문신들에게 달마다 활쏘기 시험을 보이는 것과 같이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릴 것이니, 본래부터 정해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종전대로 삼영의 중군을 훈련원 능마아 당상으로 삼고 돌아가며 고강하여 장려하는 데만 힘을 기울인다면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선왕 을유년에 홍 봉조하(洪奉朝賀)가 능마아청(能麽兒廳)을 훈련원과 통합하자고 아뢰면서도 당상의 변통에 대해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다. 대개 삼영의 중군과 훈련원 도감은 비록 지위가 있는 사람으로 임명하지만 두 군영은 이력이 훈련원보다 조금 떨어지니 만약 삼영의 중군으로서 훈련원 도정의 일을 겸임한다면 어떻겠는가. 비록 전처럼 삼영의 중군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훈련원 능마아 당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또 훈련원 당상은 계삭(季朔)에 있는 선전관의 봉강(捧講)도 겨를이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능마아 강은 겸하여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4일 을유

유학 김직순(金直淳)을 불러 만나보고 나서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에게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또 한 명의 훌륭한 선비를 얻게 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그의 조부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던가. 바로 내가 일찍이 존경하고 신임하면서 크게 장려하던 사람이었으니, 단지 그가 산림의 선비라는 것 때문에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경연에서의 담화와 여강(驪江)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속에 생생하기만 있다. 김양행의 집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송계간(宋啓榦)의 예를 적용하여 김직순을 교관에 제수하라."
하였다.

 

12월 15일 병술

황감(黃柑) 및 도기유생(到記儒生)의 가을철 강(講)과 제술을 실시하였는데, 감제(柑製)와 도기를 겸하여 실시한 것이었다. 제술 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경삼(李敬參)과 강 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민덕기(閔德基) 모두에게 전시(殿試)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경적(經籍)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弓裔) 때에는 금서성(禁書省)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 3년에 별도로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典籍)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가 있었고, 문종조(文宗朝)에는 임신자(壬申字)가 있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을해자(乙亥字)·을유자(乙酉字)가 있었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신묘자(辛卯字)·계유자(癸酉字)가 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책은 다 궁중에서 인쇄한 것이니, 비부본(秘府本)이라고 불리워지는 본국 초기의 판본들이 다 정밀하고 보기에 편리한 것은 까닭이 있다. 내가 동궁으로 있던 때에 교서관에 명하여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바로 《경서정문(經書正文)》의 인본이다. 즉위하던 해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갑인자를 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바로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새로 인쇄한 《경서대전(經書大全)》의 인본이다. 갑인년에 직접 주자(朱子)의 편지 백 편을 골라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鑄字)를 가지고 인쇄하여 배포하고자 하여 창경궁에 있는 옛 홍문관을 수리하여 주자를 옮겨놓으라고 명하였었다. 을묘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수연(壽筵)에서 돌아온 후 《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인역(印役)을 설치하여 동으로 3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먼저 《지희갱재축(志喜賡載軸)》과 전후의 갱재시(賡載詩)를 인쇄하고, 또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내려보내어 인쇄한 후 그 판각을 보관하게 하였다. 올해는 또 정유자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어정서(御定書)의 간인(刊印)이나 활인(活印)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여기에서 했던 것은 국초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명칭은 내가 일찍이 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신들이 우선 감인소(監印所)라고 불러 왔다."
하고, 이때에 와서 국초에 설치하던 때의 옛날 호칭을 그대로 써서 주자소(鑄字所)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12월 16일 정해

고 현령 정기수(鄭麒壽)의 후손 정성적(鄭聖鸐)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전교하기를,
"일찍이 《용성쌍절록(龍城雙節錄)》을 본 적이 있는데, 양무(襄武) 형제의 아름다운 공렬은 온 나라에 빛나고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지금 그 손자를 만나보니 그 사람의 전형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의 옛 자취가 담긴 글을 어루만지면서 오랫동안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유학 정성적을 해조로 하여금 선발하여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성덕우(成德雨)를 개차하였는데, 이조가 장용영(壯勇營) 종사관 홍수영(洪守榮)을 제관(祭官)으로 임명한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크던 작던 명색이 법식인 것을 한번이라도 변경하게 되면 제도를 어겼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균역청 낭관 및 양향청(粮餉廳) 종사관을 제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게 하였으면 그것도 법식인 것이다. 장용영 종사관도 그와 마찬가지인데, 특별 전교나 초기(草記)도 없는 상황에서 행동이 당돌하지 않을까 겁이라도 내는 듯이 제도와 전례를 어겨가면서 이렇게 서둘러 임명하여 보충한 것은 또 무슨 고집인가. 이조 담당 당상을 우선 개차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서용보(徐龍輔)를 체직하고 홍명호(洪明浩)를 후임자로 삼았으며,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관서 관찰사와 수신(帥臣)에게 신칙하였다.
"여러 고을의 무사 중에서 무경(武經)에 통달한 자,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한 자, 힘이 남보다 센 자를 선발하여 세 가지 기예 중에서 한 가지 만이라도 뛰어난 자가 있으면 뽑아서 아뢰도록 하라."

 

12월 17일 무자

창고를 맡은 관리가 횡령하였을 경우에 해당 당상도 같이 논죄하는 것을 법규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전 참의 성덕우(成德雨)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경명(李景溟)이 상소하기를,
"전관(銓官)이 홍수영(洪守榮)을 제관(祭官)으로 임명한 일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견책하여 파면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8일 기축

이조 참판  홍명호(洪明浩)를 체차하였다.

 

12월 19일 경인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20일 신묘

춘당대에 거둥하여 윤대(輪對)를 하고 도목 정사를 하였으며, 【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참판 이경일(李敬一), 참의 채홍원(蔡弘遠),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과 영남(嶺南) 무사의 사강(射講)을 실시하였다.

 

대사간 김한동(金翰東)을 체차하고 서욱수(徐郁修)로 후임자를 삼았으며, 이경일(李敬一)을 동지경연사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23일 갑오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종묘·사직·전(殿)·궁(宮)의 납향제에 쓸 향과 축문에 직접 압인하고 대궐 뜰에서 경건히 전송하였다. 그리고는 경모궁(景慕宮)으로 가서 의식을 연습하였다.

 

12월 24일 을미

장악원 제조 민종현(閔鐘顯)을 엄중히 추고하고 협률 낭관(協律郞官) 윤우열(尹羽烈)을 파직하였으며, 제사를 감독하였던 승지 이면긍(李勉兢)을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 상이 납향제(臘享祭)의 헌관인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에게 납향제를 지낼 때에 신을 맞이하는 음악을 언제 시작하였는지를 물었는데, 시수가 아뢰기를,
"사경(四更) 일점(一點)에 시작하였으며, 다 연주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경고(更鼓)를 두 번 치는 정도에 불과한 듯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성(成)이 4박(拍)이니 9성을 통틀어 계산하면 36박이 된다. 박의 수가 그렇게 많은데도 다 연주하는데 걸린 시간이 그렇게 짧았으니, 만약 성 수를 줄이지 않았다면 필시 빼먹고 연주했을 것이다. 박을 맡은 전악(典樂)을 형조 판서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게 하라. 앞으로 만약 고의로 지나치게 느리게 연주하는 경우가 있으면 그와 마찬가지로 처벌할 것이니, 이러한 뜻도 아울러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재자관(齎咨官) 김재수(金在洙)가 호남(湖南)의 첩서(捷書)를 베껴서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에,
"9월 15일 신 화림(和琳)은 보고합니다. 주동자인 역적 두목 석대갈(石代噶)을 사로잡아 엄히 심문하여 처리한 문제와 대 병력이 현재 평롱(平隴)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는 정세를 삼가 보고하는 바이니, 황제께서는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평롱을 공격하여 쳐부순 다음 차례차례 지세가 험준한 곳을 빼앗으며 진격하였습니다. 봉풍요(捧風坳)와 강호초(强虎哨) 두 방면 적의 소굴과 긴요한 문호를 차례차례 공격하여 이기고 나자 부근 삼분평(三岔坪)과 노신채(勞神寨) 등지의 큰 목책에서도 연달아 나와 투항하였습니다. 신은 평롱 적의 형세가 점차 고립되면 적의 우두머리 석유등(石柳鄧) 등이 몰래 달아날 생각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방면 진영에서 지키고 있는 주차 대원(駐箚大員)에게 명하여 역적의 우두머리가 틈을 타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물샐틈없이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은 강호초를 공격하여 쳐부수고 난 다음 융단(隆團)·화원(花園)·수수(水樹) 등지로부터 연속적으로 보고를 받았는데, 한결같이 ‘묘비(苗匪)가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진영에 공격을 가하고 있으며, 틈을 타서 백성들의 부락을 불지르며 노략질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 보고에 근거하여 항복해 온 묘족을 자세히 심문하였더니 그들은 모두 ‘현재 석유등이 평롱을 본거지로 삼아 수비하고 있는데, 관병의 포위가 날로 긴박해지자 역적 두목 석대갈(石代噶)을 시켜 비적(匪賊) 패거리를 화원 일대에 규합하게 함으로써 대병력의 세력을 분산시키려고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범인 중의 하나인 석대갈이 석유등과 연계하여 선두에 서서 변란을 일으켜 멋대로 검천(黔川) 경계 지방을 어지럽혀 놓고, 관병이 대당신(大塘汛) 지방 묘비의 목책을 쳐부수자 그 범인은 석유등과 함께 달아나서 황과채(黃瓜寨)에 이르렀는데, 그 이후로 도처에서 묘비들을 규합하여 관병에 항거하면서 항복한 묘적들을 불태워 죽이는 등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洵)은 역적 두목 중에서도 죄가 가장 크고 악독한 자이므로 지난해에 일찍이 황제 폐하의 유지를 받들고 대원들을 나누어 보내어 엄히 잡아들이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력이 적의 소굴로 깊이 들어갔는데도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리를 나누어 노략질을 일삼고 있으니, 반드시 계책을 써서 사로잡음으로써 역적을 돕고 있는 우익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심문을 거쳐 이런 정보를 얻은 것은 화원 일대와 제진(提鎭) 등에 은밀히 신칙하여 빈틈없이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한 후였습니다.
신은 2, 3월에 액륵등보(額勒登保)·덕릉태(德楞泰)·흥조(興肇)·아합보(阿哈保)·서진태(西津泰)·화련포(花連布)·달음태(達音泰) 및 파도로(巴圖魯)의 시위·장령 등과 함께 강호초로부터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파신채(坡新寨)·마리만(麻里灣) 등 10여 곳에서 지키고 있던 적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평롱까지는 아직도 14, 15리나 남아 있었는데, 주위의 산량(山梁)에다 체성(砌城)과 목성(木城), 석잡(石卡) 등을 설치하여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힘은 계책을 써서 공격하여 쳐부수어야만 했습니다. 곧 총병 원국황(袁國璜)이 보고한 ‘화원 일대에서 먼저 반역을 일으켰던 묘비들이 무수히 많은 무리를 규합해서 날마다 몰려오고 있다.’는 말에 근거하여 당장 관병과 향용(鄕勇)을 인솔하고 가서 격퇴하였습니다. 아울러 항복한 묘비를 통하여 알아본 결과 ‘이들은 바로 역적 두목 석대갈이 규합한 사람들이다. 마침 관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었는데, 지금은 노왕채(老旺寨)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항복한 묘족들에게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는 등 협박을 가하는가 하면 많은 인원이 해당 진영을 재차 공격해 오고 있다.’라고 했으므로, 이 정보에 의거하여 즉시 묘비의 지리를 잘 아는 유용(劉勇)과 장종무(張宗武) 및 항복한 묘족 석온유(石蘊裕)를 비밀리에 파견하는 한편, 노왕채의 묘족 장자귀(張子貴) 및 그의 아들 장정요(張廷耀)·장정왕(張廷旺), 소채(小寨)의 묘비인 석사관(石士寬)·석사록(石士祿) 등을 비밀리에 매수해서 계책을 써서 포위하여 잡게 하였습니다. 해당 진에서는 유격 양홍신(揚洪新), 수비 이시방(李時芳), 황당(黃塘)의 간천록(干天祿), 천총 장붕(張朋), 파총 하호(夏瑚) 및 융단(隆團)의 양원(粮員) 도원(桃源), 지현(知縣) 왕술주(王述周) 등이 이매배루파(里梅排樓坡) 일대를 경유하여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응하였습니다. 노왕채 지방에서 그 범인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에 경로를 통해 소식을 들었는데, 긴급히 파견했던 파도로(巴圖魯) 장수 등이 길에서 염탐꾼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압송하여 16일에 진영에 도착했기에 신이 직접 신문을 하였는데, 그들은 석유등을 따라서 불태우고 노략질한 일과 관병에 항거한 각 사실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았습니다.
요사이 평롱에 대한 공격과 포위가 긴박해지자 석유등은 영유(永綏)·화원(花園)·융단(隆團)·수수(水樹) 등지와 내통하여 항복한 묘족을 협박하면서 각처를 공격하고 있는데, 요컨대 대병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각처의 병영을 공격하거나 맞이하여 싸우러 나오지는 못할 것같습니다. 각 묘비의 부상당한 다소의 인원이 우왕채(尤旺寨)로 달아났다가 관병과 향용에게 잡혔습니다. 지금 석유등 수하에는 아직도 범인 중의 하나인 농장수(隴長受)가 남아 있어서 함께 항거하고 있는데, 오정의(吳廷義) 형제 등과 함께 십수 만의 무리를 모아 피를 마시며 맹약하여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주위에다 체성(砌城)과 목성(木城) 석잡(石卡)을 갖추어 놓은 채 주둔하면서 수비하려 든다고 하니, 이것은 실(實) 등의 말입니다. 따로 공초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해 올려 황제께서 보실 수 있게 하는 바입니다. 현재 해당 범인을 목롱(木籠)에다 가둔 채 관병을 파견, 압송하여 각 목책에 두루 돌려보이고 있는데, 어느 곳에서 목을 베어 죽일 것이며 죽은 후에는 어느 곳에 효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각에 석대갈은 이미 사로잡혔으니, 검천(黔川)의 큰 역적 하나가 제거되어 양쪽으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유등의 수하에서 괴수 하나를 또 제거한 것이 되어 마음이 조금 후련해집니다.
신은 현재 그대로 긴급히 군대를 독려하면서 부대를 나누어 배치한 후 곧장 평롱을 쳐부수어 기필코 석유등과 오정의 형제 및 두목 농장수 등을 낱낱이 사로잡아 묘비 지경을 숙청함으로써 성명(聖明)을 위로하려 하고 있습니다.
향용(鄕勇)과 묘비인들을 조사하여 후한 쪽으로 상을 주어 장려한 일 외에도 병사들을 독려하여 싸운 일 및 역적 두목 석대갈을 사로잡게 된 경위 등을 삼가 기록하여 아뢰는 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보아주소서. 삼가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호북(湖北)의 첩서(捷書)에,
"9월 18일에 신 성덕(成德)과 혜령(惠齡) 등은 무릎을 꿇고 아룁니다. 황제폐하의 위엄에 힘입어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역적 장정모(張正模)와 유홍택(劉洪澤) 등을 사로잡은 각각의 경위를 보고하는 바이니, 황제폐하께서는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들은 병사를 파견하면서부터 낭평(榔坪) 사람으로 가장하여 적을 소굴에서 나오게 유인한 후 대대적으로 쳐부수었는데, 적은 그 후로 형세가 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였습니다. 신들은 8월 12일에 군대를 일으키면서부터 장수와 병사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공격하다가는 후퇴하곤 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번갈아가며 공격하자 묘비들은 곳곳에서 미리 방어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닷새 밤낮을 보내고 난 후 17일에 각 군영에다 밀령을 내려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방면을 나누어 진격하게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날쌔고 건장한 병사 1백 명을 뽑아서 파견하되, 각기 건초 한 단씩과 분통(噴筒)과 인화물을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들은 화승(火繩)을 감춘 채 적의 소굴에 매복하여 도랑 안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다가 삼경이 지난 후 적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바깥의 견고하지 못한 흙담장 곳곳에다 건초단을 쌓아놓고는 바로 산 중턱으로 달려가서 분통으로 화탄에 불을 붙여서 일제히 던졌습니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으로 제때에 불이 붙어 불길이 공중으로 타 올라가는가 하면 지뢰와 연결된 화약선에 타들어가서 산골짜기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불길이 번져 적이 지키고 있던 녹각(鹿角) 책문까지 완전히 불태워 버렸습니다. 신 성덕(成德)은 협령(協領) 대명(岱明), 유격 장회원(張會元), 도동(都同) 임조보(林朝輔), 동지 정성기(鄭成基), 지현(知縣) 양천과(楊千果) 등을 통솔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정북쪽으로 진격해 가서 쳐부수었고, 신 문도(文圖)는 후보 참장 주사증(朱思曾), 유격 진재덕(陳載德), 도사 소노생(蘇老生), 지현 양계전(楊界傳)을 통솔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정남쪽으로부터 진격하여 쳐부수었습니다. 신 부지나(富志那)는 부장 장시(張時)·허문담(許文淡), 참령 탑사합(塔斯哈), 지현 유태증(庾泰曾)·흡해(翕奚) 등을 통솔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정서쪽으로부터 진격하여 쳐부수었고, 신 혜령은 참장 정붕익(程鵬翼), 전 봉교 왜십혼(倭什琿), 도사 유귀조(劉貴朝), 통판 고거(高擧), 지현 종응창(鍾應昌) 등을 통솔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정남쪽으로부터 진격하여 쳐부수었으며, 다시 시위 관등(關騰)·선복(先福)을 파견하여 천총·파총과 좌잡(佐雜) 각 인원을 나누어 데리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오가면서 응수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지뢰가 한 발 터지자마자 연기와 불길을 무릅쓰고 돌격하여 벌떼처럼 에워싼 채로 올라가 그대로 전진하며 공격하였는데, 각 역비(逆匪)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내걸고 저항하여 화탄과 돌덩이를 비오듯이 던져댔습니다. 역비들이 언덕과 밭두둑에 숨어서 창을 던지고 포탄을 쏘았으므로 우리 병사들은 대부분 방패로 막으면서 창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 그 즉시 무수히 많은 적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역비들은 여전히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신 혜령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갑자기 손을 쓰기가 어려워서 서쪽과 남쪽 양 방면의 병사들을 잠시 산중턱으로 철수하도록 밀령을 내림으로써 모든 역비들이 동쪽과 북쪽에 힘
을 쓰도록 유인하였습니다. 아울러 관등(關騰)과 선복(先福)을 기당산(箕壋山) 도랑으로 보내면서 그곳을 지키는 적들이 나오기만 하면 그 즉시 부대를 나누어 공격해서 탈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신 성덕과 신 혜령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곧장 적의 담장을 공격하였는데, 서쪽과 남쪽 양 방면의 적이 몰래 와서 응수하는 것을 보고 신 혜령이 달려가서 소기당(筲箕壋)의 적을 포위하였고, 역비들이 동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구원하는 것을 보고는 즉시 관등과 선복으로 하여금 양쪽으로 진격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산허리에 이르자마자 역비가 돌덩이와 화탄을 던져댔는데, 수비 주괴(朱槐), 천총 호보국(胡報國)이 행영(行營) 밖의 수재(秀載)·흥조(興朝)·소연귀(蕭連貴) 등을 거느리고 힘을 다해 그대로 전진하여 녹각(鹿角)을 열어제친 후 에워싼 채로 뛰어들었고, 전 봉교 왜십혼(倭什琿), 통판 고거(高擧)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 창과 작은 칼을 들고 싸워 8, 9백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남은 적들이 놀라 허둥대며 어지러이 달아났는데, 바위에서 떨어지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신 혜령은 한편으로 먼저 수비 이진기(利振紀), 천총 양사신(楊士臣), 행영 파수 이향규(李向葵)를 시켜 적의 담장을 무너뜨리게 하고 나서 사방에서 에워싼 채 공격해 들어갔는데, 창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대자 역비들은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이도장(二道墻) 안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즉시 적의 시체로 참호를 메우고는 모조리 죽이면서 이도장 밖에 이르러 초붕(草棚)을 태우고 승승장구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역비는 비록 흩어진 자들을 불러들여 항거하긴 했으나, 인심은 흩어지고 형세는 이미 기울어진 후였습니다. 신들은, 역적의 괴수들이 빈틈없이 포위된 상황을 보고 만에 하나라도 처벌을 두려워하여 자살하지나 않을까 정말 두려웠습니다. 만 번의 죽음으로도 속죄하기 어려울 죄의 괴수를 사지가 멀쩡한 상태로 죽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면 절대로 인심을 만족시키고 국가의 법을 빛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장정모(張正模)와 유홍택(劉洪澤)을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잘 말해서 소굴에서 나오도록 꾀어내기만 한다면 수도로 압송하여다가 국가의 형벌을 바로잡을 수 있는 동시에 군대의 위엄을 크게 떨쳐 낭평(榔坪)의 역비들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향용을 거느린 신사(紳士) 중에서 생원 맹우녕(孟宇寧)과 후보수비소의 천총 주대훤(周代暄)이 일찍부터 그 두 범인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사해 내고는 바짝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비의 남녀 노소가 아직도 1만여 명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만약 조금이라도 병력을 늦추게 되면 또 다른 변고가 생길까 염려되었으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격하였습니다. 신 혜령은 장수와 병사들을 통솔하여 소기당(筲箕壋)으로부터 한쪽 길을 통하여 곧장 이도(二道)의 역적 담장으로 육박해갔습니다. 각 방면의 창과 포탄과 함성 소리가 산을 울리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역비들은 버티지 못하여 어지러이 무너져 갔습니다. 백여 명의 역비들이 담장 안에서 땅에 꿇어앉은 채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았는데 신 혜령은 그 범인들이 관병이 이미 소굴을 쳐부수고 곧장 육박해가자 항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제서야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꿇어앉은 사람 중에 장정모와 유홍택 두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고 맹우녕이 보고한 말에 근거하여 즉시 불러내게 하였는데, 맹우녕은 피해를 입을까봐 겁을 내어 관병을 파견하여 함께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후보 도사 유귀조(劉貴朝)와 후선 천총 주대훤(周代暄)을 신칙하여 적당한 수의 병사를 거느리고 적의 담장을 부수고 들어가게 하였는데, 맹우녕이 불러낸 장정모와 유홍택 등 10명을 유귀조가 전부 압송해 왔습니다. 신들은 즉시 대영(大營)으로 압송하라고 명하면서 조심해서 지키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 나머지 비적들은 우두머리 역적이 결박되는 것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살아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습니다. 신은 북치는 병사에게 명하여 곧장 전진하게 하고는 이도장 담장을 따라 일제히 공격하여 쳐부수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자는 사로잡거나 칼로 찌르고 멀리 있는 자는 창으로 치거나 화살로 쏘게 하였으며, 아울러 적의 소굴에 있는 집들은 모두 불지르게 하였습니다. 타 죽은 자, 즉석에서 죽은 자, 달아나 물로 뛰어들어 죽은 자를 대략 계산하면 모두 1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 밖에도 두목인 중 광녕(廣寧), 섭위(聶渭), 섭반(聶泮) 및 유방만(劉芳萬), 종상(宗相) 등 48명과 잔당인 남녀 노소 7백49명을 사로잡았습니다. 빼앗거나 찾아낸 물건으로는 대포가 2문(門), 이창(怡鎗)이 8자루, 조창(鳥鎗)이 3백78자루, 장모(長矛)가 1백49자루, 요도(腰刀)가 72자루, 쌀·보리·잡곡이 수백 섬이었습니다.
17일 축시(丑時)부터 18일 유시(酉時)까지 모조리 죽이거나 수색하여 사로잡음으로써 적의 소굴을 평정하였는데, 황제폐하께서 위엄으로 복종시키고 은혜를 베풀어 심복시킨 데에 힘입어 한 명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로잡은 역적 두목들은 능지 처참하였고, 그 밖의 각 범인 중에서 비록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역적을 따른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겠기에 즉시 처단하였으며,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별도로 처리하였습니다. 두목 장정모와 유홍택 두 범인은 신들이 조사 신문하여 공초를 받았으나 교활하게도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수도로 압송하여 처리해야지 형장을 가하며 국문하는 것은 온당치 않겠기에 삼가 공초 단자를 기록하여 황제폐하께 올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후보 동지(候補同知) 의창부(宜昌府) 통판 고거(高擧), 무표 수비(撫標守備) 이진기(利振紀), 후선수어소(候選守御所) 천총 주대훤(周代暄)에게 위임하여 8월 21일에 지강(枝江)을 출발하여 두 범인을 수도로 압송하여 조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장정모의 공초에서 나온 백배상(白培相)·유홍금(劉洪錦)·유방만(劉芳萬)·종상(宗相)·이흥방(李興榜)·부연승(傅聯陞)과 유홍택의 공초에서 나온 공금서(龔金鋤)·조안영(朝安榮)·등대재(鄧大才)·공호인(孔好仁) 등은 각 고을에서 잡아다가 처형하기도 하고 즉석에서 붙잡아 죽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다 보고했던 문서가 있어 명확한 증거가 되므로 다시 더 논의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관만뇌(灌灣腦) 일대는 도로가 분분히 갈라지고 산길이 은밀한 관계로 그곳을 조사하면 아직도 틈을 타서 달아난 범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현재 장수와 병사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사방에서 수색하여 잡아들이고 있는데, 찾아내는 즉시 처단함으로써 그 부리를 완전히 잘라버려 잔당을 남겨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역적 두목을 사로잡고 역적의 소굴을 평정한 경위를 급히 보고하여 황제폐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도리로 보아 마땅한 일이라 하겠으니, 폐하께서는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12월 25일 병신

승지 어용겸(魚用謙)이, 홍수영(洪守榮)을 첨가해 써넣어 낙점을 받은 것은 의리와 법도에 해가 된다고 하면서 잘못을 바로잡는 말을 진달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오늘 이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일전에 있었던 성덕우(成德雨)의 일은 과연 어떤 뜻이었는가? 《명의록》의 의리는 바로 천지 사이에서 마멸될 수 없는 것인데, 덕우가 도리어 이 의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운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외척에게 박절하다고 하여 일부러 그런 것인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째서 논의가 전도되는 것인가. 삭주부(朔州府)에 귀양보낸 죄인 한용귀(韓用龜)의 죄명을 씻어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성덕우의 일로 인하여 가상히 여겨 장려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대사간 서욱수(徐郁修)를 체차하였다.

 

청나라 달력을 나누어주는 규정을 정하였다. 전교하기를,
"시임 대신(大臣), 원임 대신, 각신(閣臣), 의빈(儀賓), 정부의 서벽(西壁), 육조 판서, 시임 장수, 원임 장수, 삼사의 장관, 시임 승지, 실직 주서와 한림의 명단을 적어 올려서 나누어주는 데에 관하여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신기(申耆) 등이 상소하기를,
"방금 병조가 뽑아 올린 청나라 달력을 나누어줄 단자를 보니 홍낙임(洪樂任)이란 세 글자도 그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아, 한 권의 《명의록》을 그나마 없어지지 않게 하자면 세상이 낙임을 성토하기를 엄하게 해야 하겠습니까, 엄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동안 위에서 특별히 은혜를 내린 데에 대하여 힘을 다해 간쟁하여 전하의 정사를 잘못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하된 모든 자들이 마음 아파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런데 다시 의리의 중함을 망각하고 법도의 엄함을 무너뜨리면서 도리어 아래에서 그를 아무 잘못이 없는 자처럼 대하여 그 이름을 벼슬아치의 반열에 넣었으니, 장차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올린 것입니까? 어제 저녁에 단자가 정원에 도착했을 때에 의리상 봉입할 수 없다는 뜻으로 물리쳤었으며, 신들이 출사한 후에도 여러 차례 주고받았었습니다. 그런데도 병조의 수석 당상관은 고집을 부리면서 끝내 빼버리지 않다가 결국 처음에 만들었던 본을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아, 온 세상이 엄히 토벌하는 의리를 거행하기를 오늘날 함께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라고자 하는 신들의 의도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한 권의 《명의록》은 읽을 여지조차 없게 되었으니, 어찌 섬뜩하고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거듭 대의를 밝힘으로써 떳떳한 윤리가 점차 어두워지고 법도가 점차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여 올린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태백산·오대산·적상산 세 산성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남·호남·관서에 명하여 그대로 다시 새겨서 올리게 하였다.

 

관기교(觀旗橋)에서 영접하였던 유생의 응제(應製) 성적을 매겨서 내려보내고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장령 장지면(張至冕)이 소를 올려 성학(聖學)에 힘쓸 것, 세자를 가르칠 것, 관리들을 감독할 것, 징벌을 엄하게 할 것, 언로를 열어 놓을 것, 훌륭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을 분별할 것, 백성들의 질고를 살필 것 등 일곱 가지 조항을 아뢰었는데,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12월 26일 정유

한용귀(韓用龜)를 이조 참의로, 심기태(沈基泰)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7일 무술

대사간 심기태(沈基泰)가 상소하여 병조 판서 정호인(鄭好仁)을 견책하고 삭직할 것을 청하였다. 그 소에 아뢰기를,
"《명의록》은 바로 밝은 시대의 한 권의 《춘추》입니다. 인심이 나빠지고 의리가 막혀 소인이 군자를 해치려는 조짐은 오래 전부터 식자들의 걱정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일전에 제관(祭官)을 잘못 임명했던 전관(銓官)을 탄핵한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달력을 나누어주는 단자를 멋대로 제출하였으니, 어찌 이렇게도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 통분스러운 것은, 이 중신은 의리를 세웠다는 이유로 특별히 장려하고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게 하였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갑자기 자기의 지조를 버리고 기꺼이 저쪽편에다가 기치를 세워 태연스레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도의에 대한 우려는 말로 다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빨리 호인을 견책하고 삭직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정호인을 지금 당장 엄히 처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장령 장지면을 문책하기를,
"일전에 올린 대신(臺臣)의 상소는 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올릴 바에야 어찌 이렇게 나약할 수 있는가. 이른바 ‘개탄한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너희같은 대간을 나는 보고 싶지 않으니 빨리 대청으로 물러가 피혐하도록 하라. 《명의록》의 의리는 바로 모년(某年)의 의리이다. 이 의리가 바다처럼 마르지 않고 산처럼 무너지지 않아야만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에 한용귀(韓用龜)의 일은, 비록 저런 이유로 처벌하기는 했었지만 사실은 이 의리에 엄격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지럽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단서가 있었으므로 그날의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성덕우(成德雨)의 문제는 내가 외척에게 너무 박절하게 한다고 여겨 후하게 서용하는 도리에 힘쓰게 하려고 그런 것인가? 오늘 아침 정호인의 상소에서 ‘피차의 구별이 분명하다.[涇·渭]’ 운운한 것은 과연 무슨 말인가? 그가 비록 을미년에 절개를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번의 행동과 불순한 상소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니, 까닭을 알아보려고 하여도 알 수가 없다고 하겠다. 오늘 경연에 참석한 대간들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저들의 자리로 돌아갔는데, 이와 같다면 《명의록》은 읽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서 판부(徐判府) 시호의 충(忠) 자도 환수해야 한단 말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오늘날의 대간 중에서 이면승(李勉昇)은, 그 형의 아우로서 더욱이나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성덕우를 처분하는 교지를 받아쓴 자가 그의 형이었고, 또 그날 연석에서 한 하교도 그의 형이 다 들었으니, 그도 분명히 그의 형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오늘은 그로 하여금 서경을 받기 전에 공무를 보게 하였는데, 이미 연석에 나왔으면서 어찌 한 마디 말도 없단 말인가. 그의 형 이면긍(李勉兢)을 응당 덕우의 무리와 함께 국문해야 하겠지만, 다만 그와 연계되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대간들은 즉시 물러가라. 어찌 감히 모자를 쓰고 있단 말인가. 모두 모자를 벗고 물러가라."
하였다.

 

명하였다.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의 일번기사(一番騎士) 중에서 천망된 자는 금군(禁軍)과 수부(守部) 두 청으로 옮겨보내고, 처음 벼슬의 임명에는 금군을 지내지 않은 자는 의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규로 삼으라."

 

심기태(沈基泰)를 특별히 발탁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고는 전교하기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정사가 있어야 하겠기에 이번 임명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응교 이경명(李景溟) 등이 대신(臺臣) 정경조(鄭景祚)·민사선(閔師宣)·조장한(趙章漢)·이면승(李勉昇)을 국문할 것을 청하자,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정경조 등이 정호인의 처벌을 청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장용위(壯勇衛) 대장 김지묵(金持默)을 파직하고 정민시(鄭民始)를 후임자로 삼았다.

 

이경무(李敬懋)를 한성부 판윤으로, 정민시(鄭民始)를 판의금부사로, 이시수(李時秀)·이병정(李秉鼎)·심환지(沈煥之)를 지의금부사로, 이서구(李書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득신(李得臣)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숙장문(肅章門)에 거둥하여 정호인(鄭好仁)과 성덕우(成德雨)를 직접 국문하였다. 묻기를,
"《명의록》 한 책은 무엇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무너진 윤리를 진작시키고 미친듯한 물결을 막아 세상의 큰 법을 세우고 만고의 큰 기강을 제시함으로써 귀신과 물여우를 산 사람으로 만들고 오랑캐를 중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는 《춘추》가 있었고 지금은 이 책이 있으니, 이로 인하여 삼강이 거의 무너졌다가 다시 서고 백성들의 뜻이 이미 떠났다가 곧 합쳐지게 되었다. 을미년의 큰 의리는 바로 모년(某年)의 큰 의리이다. 다만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제시할 수 없는 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성인의 수십 가지 큰 의리 중에서 은미하면서도 드러나는 깊은 뜻을 나름대로 취했던 것이다. 처단한 자는 모년의 흉악하고 추악한 자들이며 타파한 것은 지난날의 음습한 그늘이었으니, 그 일을 알고 있는 당세 사람이나 이 책을 읽는 후세 사람으로서 자신의 거취를 분명히 정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녹봉을 타 먹으면서 조정에서 벼슬살이 하는 사람은 그냥 두고라도,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일러주지 않아도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 없어지지 않는 양심은 본래부터 다 그렇게 가지고 태어나는 것임을 이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정호인, 너는 70에 가까운 나이에다 지위 또한 높을 뿐만 아니라 을미년 겨울에 세운 주장은 탁월하다고 할 만하다. 너도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어찌 의리의 분기점에서 털끝만큼 소홀히 하여 난에 기꺼이 참여한 것과 같은 결과를 스스로 초래한단 말인가. 더구나 너의 타고난 성품이 반역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조정에서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고 늘 말해 왔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는 자가 지난번과 같은 죄를 저지르고 오늘과 같은 소를 올려 사납고 강개하는 무리들도 감히 마음 먹지 못할 일에 대하여 변명하려 하였으며, 스스로 성덕우의 뒤를 이어서 행여라도 그 행위나 말이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너같이 유순하고 착한 자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너보다 조금 심한 자들은 장차 뒤를 이어 큰 의리에 대해 창을 들이대며 멸시하고 원수보듯이 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서리가 내리면 곧 얼음이 얼고053)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오려 하는054)   정도에 그치겠는가. 본래의 일은 아주 작은 데에 불과하지만 의리로 보면 더 이상 중요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앞서 다른 사람이 특별 전교를 받고 거행한 것이나 공문서를 조사하여 바친 것의 여부는 막론하고 이미 후원(喉院)에서 다른 논의가 나와 이틀 동안 왕복한 것이 몇 차례만이 아니라고 하니, 그렇다면 너는 또 무슨 배짱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듯이 변론하여 마치 절개를 세우고 행위를 드러내려는 듯이 행동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죄 없이 형벌을 받는 것을 가련히 여기고 무지하여 함정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저께 이후로 그냥 용인하면서 승지의 상소를 반포하지 않고 이조 참의를 부르는 특별 전교를 내렸던 것이다. 이는 네가 스스로 빠져나와 속죄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으니, 너에 대한 조정의 비호는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너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도리에 벗어나는 소를 올려 감히 조롱하고 무시하는 말투와 침범하는 수완으로 스스럼없이 계판(啓板) 앞에다 올려 놓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말을 들은 자와 이 일을 알고 있는 자라면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발이 치솟고 눈꼬리가 찢어질 것인데, 나라의 법을 맡고 있다는 자들이 수수 방관하며 입을 꽉 다문 채 새매가 참새를 쫓듯 배척할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두둔하려고 하고, 더 나아가 기꺼이 덕우와 저의 잔당이 되려 하였다. 이는 또 무슨 일이며 또 무슨 까닭인가. 그렇다면 이 책과 이 의리를 너의 무리들이 훼손하여 점차 임금이 임금 구실을 못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야 말지 않겠는가. 옛날에 형세를 잘 파악하던 자는 먼저 막외(膜外)의 그림자를 살폈는데, 근래 너희들이 범한 죄가 어찌 그림자 정도에 그치는 것이겠는가. 이것을 손에 넣어 간여하게 된 자초지종을 우선 사실 그대로 말하라.
또 엄히 조사하여 자복을 받을 단서가 있다. 조정에서 지성으로 마음을 다하는 일은 대를 이어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를 보전하는 것이다. 대를 이어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도 보전하려고 하는데 친족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돈독히 서용하려는 국가의 교화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은 막론하고 너는 조정에 선 10여 년 동안 접견하는 자리에 드나들었으니, 파악하고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분명히 덕우처럼 소원한 자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으로 봤을 때에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그의 집안이 연전에 죄에 걸려들었으나, 그 이후로 편리를 봐주고 너그럽게 대해주면서 지나간 일은 거론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이런 사리에 대하여 너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인데, 어떤 생각 어떤 계획으로 지금과 같이 감출 수도 없고 달아날 수도 없는 때에 너희들 자신의 일로 간주하여 갑과 을이 옥신각신하는 마당에서 서로 겨룸으로써 20년 간 세상을 다스려온 규범과 법도를 여지없이 실추시킨단 말인가. 아울러 대를 이어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를 보전하는 일조차도 완전히 소용없게 만들었다. 이 한 가지 사안에 관한 너의 죄는 더구나 어떠하겠는가?
성덕우, 네가 큰 의리에 죄를 지은 것과 관련하여 위에서 말한 여러 조항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네가 감히 손을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곳에서 법을 어겨가며 제관(祭官)을 임명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자신은 이조 참의와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해서였다. 만고 천하의 큰 의리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하여 기탄없이 이론(異論)을 내세웠으니, 이것은 그 마음이 을미년·병신년 이전의 무지 망작한 무리보다 더 흉악한 것이며, 범한 죄로 따져본다면 극형에 처하더라도 오히려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먼저 고문하면서 신문할 것이니 감히 숨기지 말고 낱낱이 사실대로 바르게 공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문랑(問郞)에게 명하여 죄인에게 유시를 읽어주게 하고, 또 성덕우를 고문하라고 명하였다. 또 의금부 당상에게 명하여 수색해온 성덕우의 문서를 대신들 앞에서 조사해서 의리와 무관한 것은 그냥 두게 하였다. 호인이 공초하기를,
"《명의록》의 의리가 지극히 엄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김상묵(金尙默)은 바로 신의 사촌입니다."
하니, 묻기를,
"묻는 것 이외의 사연은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자, 호인이 공초하기를,
"우매한 소치로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입니다. 신과는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명의록》은 을미년의 역적을 토벌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모년의 역적을 토벌한 것이니, 이 의리에 관계된 것이면 설사 불변의 법전이라고 해도 자신의 견해를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자신의 견해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을 승지에게 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처벌을 청하게 한단 말인가. 오늘 상소에는 또 감히 ‘피차가 다르다.[涇·渭]’는 두 글자를 넣었는데, 의리에도 경(涇)·위(渭)가 있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을미년에 절개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오늘 범한 것은 바로 모년의 의리인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호인이 공초하기를,
"정원이 서리(書吏)에게 분부하여 빼게 했기 때문에 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자, 묻기를,
"서리에게 분부했다 하더라도 너는 죄를 자복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을 것인데 어찌 감히 대항한단 말인가. 설사 네가 당초에는 몰랐다 하더라도 어제의 처분을 봤다면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겨루어 보려는 계책을 가지고 함부로 소를 올렸단 말인가."
하니, 호인이 공초하기를,
"상소한 것은 정말 잘못한 행동이었으니 여러 말 하지 않고 자복하겠습니다."
하였다. 민시(民始)에게 하유하기를,
"저처럼 나약하고 용렬한 자도 이런 행동를 했고 보면 저만도 못한 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성인은 서리가 내리는 것을 보고 앞으로 얼음이 얼 것을 안다고 하였으니, 환란을 방지하려면 조짐이 있을 때에 막아야 한다는 뜻을 알 수 있다. 《춘추》 필법(筆法)은 지극히 냉정하고 엄한 것이니, 오늘 문에 나와서 자세히 신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그 조짐을 막고자 해서이다. 그의 나이와 지위로 보면 며칠 있지 않아서 기로소로 들어가야 할 것이며 을미년에 절개를 세웠던 것도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내가 생각을 하고 또 하면서도 처벌을 그만둘 수 없는 까닭은 의리란 지극히 중요한 것이라서 나도 내 마음대로 융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소를 그가 어떻게 스스로 마련하였겠는가. 누구에게서 짓고 누구에게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면려시키고자 할 뿐이기에 다른 것은 묻지 않겠다.
호인은 우선 놔두고 덕우에게 묻도록 하되, 덕우에게도 반드시 심문하는 조목을 자세히 들려주어 하나하나 사실대로 말하게 하라. 우선 형장을 치면서 신문하도록 하라."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찌 큰 의리를 모르겠습니까. 그날의 일은 귀신이 혼을 뺏아가서 그랬던 것입니다. 즉시 향색 서리(享色書吏)로 하여금 빼버리게 했는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지난번 한용귀(韓用龜)를 처분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전에 벼슬을 그만두었던 사람으로서 지난번의 거조가 있었는데도 확고한 태도로 일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준엄한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더구나 이 의리에 배치되는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도 천지간에 있는 사람이면서 기어코 의리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은 과연 무슨 마음인가?"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어찌 감히 의리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치로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아무리 어리석다고 해도 어찌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명의록》이 모년의 큰 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네가 기꺼이 배치되는 행동을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지극히 중요한 것도 의리이고 지극히 엄한 것도 의리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춘추》를 만들면서 마음을 벌하는 법을 두었던 것이다. 네가 기어코 의리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려 했던 마음을 먼저 사실대로 말하라."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우매하여 초래한 일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네가 스스럼없이 한 것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는가?"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 생각없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하자, 묻기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이라면 무심히 따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어떻게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할 리가 있겠는가. 선조(先朝)는 효성스러운 성품을 천성적으로 타고 나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이라는 네 글자를 상소장에 쓰는 자가 있으면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사형에 처했었다. 지금 이 의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네가 기탄없이 다른 주장을 내세운단 말인가. 의리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자를 어떻게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네가 의리를 원수 보듯 하며 다른 주장을 내세운 죄를 즉시 자복하라."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의리를 원수 보듯이 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만은 죽어도 자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민시 등에게 하유하기를,
"저와 같은 자들이 다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과연 지금 세상이 어떤 꼴이겠는가. 이러쿵저러쿵 할 것없이 의리에 관계된 일에 대하여 함부로 손을 대어 기필코 남들과 다른 주장을 내세우려 한 것만으로도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지금 또 도리어 하리(下吏)에게 핑계를 대고 있다. 만약 사실대로 자복한다면 용서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덕우 하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무고한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시 빨리 자복시키라."
하고, 승지에게 전교하기를,
"형조 낭관에게 명소패(命召牌)를 보내어 명을 기다리게 하고, 전옥서의 관원도 명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묻기를,
"《명의록》은 즉 모년의 큰 의리이므로 이것을 범하면 바로 사형죄를 짓는 것이다. 외척에 대해서 왕실이 돈독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의리로써 반드시 보전해 주고자 하는 문제는 애당초 바깥 조정에서 간여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네가 감히 자기의 일로 삼아 공공연히 장차 보전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하더라도 어찌 죽을 죄가 아니겠는가."
하니, 덕우가 아뢰기를,
"무지하여 함부로 행동하였으니 죽고도 남을 죄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것이 어떤 일인데 어찌 감히 무지하여 함부로 행동했다는 등의 말로 모호하게 공초하는가. 너의 죄 중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막중한 의리에 대하여 스스로 다른 주장을 내세운 것이 그 첫 번째이며, 작년 이후로 해마다 경사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기쁜 시절을 만나 어떻게든 조정의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해주려고 애썼는데, 너는 나의 이러한 뜻을 생각하지 않고 기어코 일을 만들고야 만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이 두 가지 조항에 대하여 사실대로 자복하라."
하니, 덕우가 공초하기를,
"앞의 물음에 대해서는 감히 자복하지 못하겠으나 나중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복하겠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 마음은 비록 다른 주장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한 너의 행동으로 보면 결국 다른 주장을 내세운 것인데 어찌 감히 자복하지 않는가? 또 다른 말은 제쳐 두고라도 이 천지간에 있는 오늘날의 신하된 자로서, 모년의 큰 의리에 대하여 마음속으로는 배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행위가 배치된다면 사슴을 쫓으면서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는 격이 될 것이다. 《춘추》에는 오히려 마음을 벌하는 법까지 있는데, 그 행위가 이미 나타난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빨리 자복하도록 하라. 이 물음에 대하여 두 죄인은 다 자복하라."
하니, 호인이 공초하기를,
"마음으로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행위는 저절로 반대하는 것처럼 되었으니, 저절로 그렇게 된 점에 대해서는 삼가 자복하겠습니다."
하고, 덕우는 공초하기를,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행위는 그러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자복하겠습니다."
하였다. 죄인 정호인은 본의 아니게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운 것처럼 되어버린 죄에 대하여 자복하였고, 죄인 성덕우는 고문을 가하면서 한 차례 신문하고 형장을 치면서 열 차례 신문한 후 결박을 풀어 주자 본의 아니게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운 것처럼 되어버린 죄에 대하여 자복하였다. 상이 문사 낭청에게 명하여 정호인에게 이르기를,
"오늘 만세(萬世)를 위하여 큰 법을 세우고자 임시로 이런 처분을 내리게 되었는데, 특별히 을미년에 절개를 세웠던 점을 생각하여 우선 죄를 경감해 주어 먼저 귀양을 보내는 바이니, 가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하고, 덕우에게 이르기를,
"네가 범한 죄로 말하자면 죽는 것으로도 부족하겠지만 이번의 조치는 단지 만세를 위하여 큰 법을 세워서 대의를 위해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뜻을 보이고자 함이다. 비록 사형에 처한다 하더라도 강하지 못한 자를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겠기에 특별히 귀양을 보내는 바이다."
하였다. 이어 압송해 가는 도사(都事)에게 명하여 속히 하직하고 두 죄인을 즉시 출송(出送)하도록 명하였다. 친국(親鞫)을 명하고, 이어 정경조(鄭景祚)·민사선(閔師宣)·조장한(趙章漢)·이면승(李勉昇)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의금부 당상에게 명하여 이면승에게 묻기를,
"다른 죄인들은 우선 그냥 두더라도, 이면승 너는 궁궐에 드나든 행적으로 보자면 소원한 자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이다. 더구나 제보부(祭報府)055)  를 봉납한 자는 바로 너의 형이었고, 성덕우(成德雨)를 파직하던 때에 입시한 승지도 바로 너의 형이었다. 그 당시에도 대화를 나눌 적에 덕우의 일에 관하여 뜻을 내보였었는데 너의 형이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관직에 제수되고 나서 새벽에 빈대(賓對)에 나왔으면 형제가 서로 의논하여 반드시 사리에 맞도록 말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접견하는 자리에 나와서 놀랍고 통분스러운 일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며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다른 사람이라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인데 네가 감히 어떻게 그런단 말이냐. 그 죄로 보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말하지 않은 곡절을 낱낱이 사실대로 말하라."
하니, 면승이 아뢰기를,
"대간으로서 접견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생소하고 우매하여 미처 주선하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너를 대간으로 새로 제수한 후에 서경(署經)을 생략하고 들어오게 했던 것은 너의 행동을 시험해보고자 해서였는데, 과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너의 형이 가까운 곳에 드나들었으니 그 은혜와 신임이 어떠했겠는가. 그렇다면 좋아하고 미워하기를 같이하는 것은 인정상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네 형의 행동은 저러했으며, 오늘은 또 네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네 형제가 호인이나 덕우보다 더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 전교를 받아쓰던 때에 썼다가 지워버린 구절의 내용을 너의 형이 알고 있는데 어찌 너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하니, 면승이 아뢰기를,
"어찌 성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접견하는 자리에 처음 나갔기 때문에 황송하여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밖의 세 죄인도 말하지 않은 죄를 각각 사실대로 공초하게 하라."
하니, 정경조는 아뢰기를,
"집이 외떨어진 곳에 있어서 미처 조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접견하는 자리에 나가서도 전혀 무슨 일인지 몰라서 미처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민사선(閔師宣)과 조장한(趙章漢)은 다 두서를 몰라 미처 주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이 경조 등 네 사람을 모두 삭직하여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 우의정 윤시동 등이 아뢰기를,
"오늘 전하의 신하된 자로서 《명의록》이 춘추 필법(筆法)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모를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어 천명(闡明)할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호인과 성덕우도 오늘의 신하이면서 어떤 심장을 가졌길래 감히 큰 의리에 관한 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단 말입니까.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인데, 정상이 다 밝혀지기도 전에 귀양보내라는 명을 갑자기 내리시는 것은 형정(刑政)으로 헤아려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것입니다. 죄인을 귀양보내라는 명을 빨리 취소하고 국문하여 정상을 밝혀내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간(臺諫)에게 내릴 비답에 말할 것이다."
하였다.

 

의금부가, 죄인 정호인을 온성부(穩城府)로 귀양보내고 성덕우를 금갑도(金甲島)로 귀양보낼 것에 대하여 아뢰니, 정호인은 북청부(北靑府)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명의록》 한 책은 무엇을 위하여 만든 것인가. 무너진 윤리를 진작시키고 거꾸로 흐르는 물결을 막아 천하의 큰 법을 세우고 만고의 떳떳한 법을 제시함으로써 귀신과 물여우를 사람으로 만들고 오랑캐를 중화(中華)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옛날에는 《춘추》가 있었고 현재는 이 책이 있으니, 이로 인하여 무너졌던 국가의 기강이 다시 서고, 갈라졌던 백성들의 뜻이 다시 합쳐지게 되었다.
대개 을미년의 큰 의리는 바로 모년(某年)의 큰 의리이다. 다만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제기할 수 없는 데에 관계된 것이라서 나름대로 성인의 수십 가지 큰 의리 중에서 은미하면서도 드러나는 깊은 뜻을 취해서 천명하여 드러내었던 것이니, 처벌한 자는 모년의 흉악하고 추악한 자들이며, 타파한 것은 지난날의 그늘이었다. 그러니 그 일을 알고 있었던 당시 사람이나 그 책을 읽는 후세 사람으로서 그 누가 재량하여 거취를 정하는 때에 감격하지 않는가. 지금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녹을 타먹으면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냥 두고라도, 나라 안의 혈기 있는 무리로서 이 천지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저 정호인이란 자는 은퇴할 때에 가까운 나이이고 지위도 숭품(崇品)에까지 올랐다. 을미년에 주장을 세운 것은 과연 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의 인품도 교활하거나 간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는 자가 3일 전과 같은 죄를 저지르고, 오늘과 같은 소를 올려 사납고 강개하는 무리조차 감히 마음 먹지 못할 일을 변명하려 들었고, 발벗고 나서서 성덕우의 뒤를 이어서는 그 행위와 말이 드러나지나 않을까봐 염려하듯이 행동하였다. 그처럼 유순하고 선량한 자가 이와 같다면, 그보다 더 사납고 독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큰 의리에 창을 들이대며 멸시하고 원수처럼 보고야 말 것이니, 이를 어찌 다만 ‘얼음이 얼려 한다.’거나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오려 한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섬뜩하여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한 채 서성거리곤 하였다. 이 일은 매우 사소한 듯하지만 본래의 의리는 더없이 중요하다. 전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특별 전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따져보지 않고 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석과 같은 법전도 따져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입장의 논의가 이미 후원(喉院)에서 나와서 이틀 동안에 왔다갔다 한 것이 여러 차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또 어떤 생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논쟁하여 마치 절개를 세우고 행위를 드러내기나 하려는 듯이 행동했단 말인가. 참으로 까닭을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다고 하겠다. 그가 죄없이 처벌을 받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무지하여 함정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3일 전부터 그대로 묵인한 채 승지가 올린 소도 보류해 두고 대신(臺臣)의 상소도 내려보내지 않았으며 이조 참의를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벗어나서 속죄하여 살 길을 찾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으니, 그에 대한 조정의 비호가 특별했으며 너그럽기가 지극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소를 올린단 말인가. 조롱하고 무시하는 말투와 업신여기고 침범하는 수완을 스스로 감출 수 없었으니, 이것을 듣고 보는 자는 모두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고 눈꼬리가 찢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잘못을 바로잡고 규찰하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자들은 수수방관하며 입을 다문 채 의리를 밝힐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두둔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서로 이끌고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옛날에 형세를 잘 관찰하던 사람은 막외(膜外)의 그림자를 잘 살폈는데, 근래의 징조가 어찌 그림자 정도에만 그치겠는가.
또 조정에서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다하는 부분은 바로 대대로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를 보전하려는 데에 있으니, 대대로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도 보전하려고 한다면 친척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으며, 친척도 그렇다면 이 집안 사람이야 더더구나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두터이 서용하는 교화는 비록 펴지 못했지만, 조정에서는 이 집안에 대하여 편리를 봐주고 너그러이 대해 주어 지나간 일은 거론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작년 이후로 조정의 기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날이 커져가 지각없는 초목들까지도 재배하여 단단하게 부리내리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 집안 사람을 사랑하여 구제하고자 했던 것은 남을 헤아려주는 도리 중의 하나이다. 외조(外朝)의 신하는 외조의 신하대로, 안에서는 안에 대로 서로 간여하지 않아 갈등을 빚지 않음으로써 노년을 보존하기를 도모하고 수룡(水龍)의 영화를 굳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을 구가하고 관가(官家)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 가까이 조정에 있었던 그라면 이러한 사리를 응당 알고 있을 것인데, 이런 때에 갑자기 자기들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갑과 을이 옥신각신하는 마당에서 그와 함께 겨룸으로써 20년 간 세상을 다루어 온 규범과 권도가 모조리 없어지도록 만들었다. 그와 아울러 대대로 벼슬살이를 해온 신하를 보전하는 방도마저 전부 없어지게 만들었으니, 호인의 죄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성덕우는 호인과 일심동체가 되어 만고 천하의 큰 의리라고 이름지어진 부분에 대하여 반대되는 주장을 기탄없이 내세웠으니, 덕우의 죄 또한 용서할 수 있겠는가. 국문하는 조치를 두 사람에게 취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문에 나갔겠는가. 격식을 갖추어 신문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가지고 벌을 주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아서 영원토록 법으로 삼게 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상서》에 ‘형벌이 모두 제대로 적용되어야 경사가 있는 것이니, 왕의 착한 백성을 받은 제후들은 이 상서로운 형벌을 잘 살필지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의 처분은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훈국청(訓鞫廳)이 잡아들인 죄인 정호인은 을미년에 세운 공로로 보아 사형을 경감하여 북청부(北靑府)로 귀양보내고, 성덕우도 자복하였으니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오늘 이후로는 모두 대궐 높이 달아놓은 나라의 법을 알아서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내일부터는 이 일을 위에 아뢰는 문서에 다시 거론하지 말라. 본래 작년에 제정해놓은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니 다시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대사간 이서구(李書九), 집의 이시원(李始源), 사간 이경명(李景溟), 장령 장지면(張至冕), 정언 심규로(沈奎魯)·한용탁(韓用鐸).】  아뢰기를,
"정호인의 죄를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한 권의 《명의록》은 바로 우리 나라의 《춘추》입니다. 을미년과 병신년의 흉악한 역적은 그 근원이 모년에 있었으니, 이 큰 의리는 실로 천지를 지탱하고 우주에 뻗어있어 마멸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쩌다 한번이라도 그냥 소홀히 여긴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하된 자가 만약 이 큰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앞장서서 기치를 세워 기꺼이 그들과 한편이 되려고 한다면 난적을 비호하여 윤리를 무너뜨리는 죄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아, 저 호인은 발탁을 어떻게 했으며 벼슬이 어떠했습니까. 그렇다면 큰 의리에 관계되는 일을 어떻게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처벌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을 하면서 사납게 대항함으로써 겨루어 보겠다는 뜻을 드러내어 표현한단 말입니까.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참으로 불측합니다. 대간의 상소가 잇따라 나와 엄하게 성토하는 때라면 진실로 황공해 하며 위축되어 살 길을 찾기에 급급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리석게 행동하며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끼는 것 없이 도리에 어긋나는 소를 올려 공론과 혈전(血戰)을 벌였습니다. 신들이 아직 상소문의 원본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문목(問目)의 ‘경(涇)·위(渭)’ 등 구절을 가지고 보면 도리에 어긋나는 그러한 정상이 바로 그의 판결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전(帳殿)에서 전하가 직접 신문했을 때 그가 이미 여러 말없이 자백한 이상 국가의 법으로 볼 때 해당되는 법률의 적용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서둘러 귀양보낸다는 것은 형벌을 제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겠습니다.
신들은, 귀양보내라고 명한 죄인 정호인을 다시 의금부에 명하여 국청을 설치해서 엄히 심문하게 하여 기필코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오늘이 바로 처분한 날이기에 비답을 내리긴 했지만 내일 이후에는 어찌 금령을 무릅쓰고 계사나 차자를 올릴 수 있겠는가. 《명의록》의 의리는 바로 모년의 의리이니, 그 일을 참작하여 처리하면서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일을 처리하자마자 계사와 차자를 번갈아 올리는 습관은 근래에 와서야 조금 그쳤었다. 더구나 감히 말할 수 없는 막중한 이 의리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번의 이 처분은 뒷날을 징계하기에 충분할 것이니, 내일 이후로 어찌 다시 감히 제기하여 아뢰겠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덕우의 죄를 어찌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도 오늘날의 신하로서 시종하는 반열에 드나들며 전형(銓衡)의 임무를 보좌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감히 큰 의리를 질시하고 바른 논의에 반대하면서 엿보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감히 시험해 보고, 시험해 보는 것도 부족하여 끝내는 수완을 드러내어 스스로 반대하는 흔적을 내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도 채 되지 않아서 정호인이 또 도리에 어긋나는 소를 올려 기꺼이 덕우의 뒤를 이었습니다. 장전(帳殿)에서 신문했을 때에 정상이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귀양보내는 것은 법을 엄하게 하고 난의 근원을 막는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신들은 섬에 귀양보내기로 한 죄인 성덕우를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국청을 설치해서 엄히 국문하게 함으로써 기필코 정상을 밝혀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또 아뢰기를,
"요사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의리가 막힌 것에 대하여 식자들이 근심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 저 정호인과 성덕우가 이번에 저지른 죄는 어떤 변괴입니까. 그렇다면 법을 집행하는 반열에 있는 자들은 이미 그 일이 명의(名義)에 관계된다는 것을 안 이상 진실로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어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엄하게 성토함으로써 참새를 쫓는 사나운 매처럼 하는 의리를 다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양사의 대신(臺臣)들은 접견하는 자리에 나란히 올라와서는 그저 오래된 문서나 전할 뿐이지 눈앞의 의리에 대해서는 도리어 남의 나라 일 보듯하였습니다.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나 할 뿐 토벌하기를 청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이것이 어찌 단지 대각을 욕보이고 조정을 수치스럽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큰 의리가 밝혀지지 않고 인심이 안일만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무너진 풍속을 경각시키고 도리에 어두운 사람들을 깨우치는 방도로 볼 때 삭직하여 내쫓는 가벼운 형벌로는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신들은 삭직하여 내쫓은 죄인 정경조(鄭景祚)·민사선(閔師宣)·조장한(趙章漢)·이면승(李冕昇) 전부에게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삭직하여 내쫓는 것으로 충분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사간 이서구(李書九), 집의 이시원(李始源)을 체차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정호인과 성덕우를 귀양보내라는 명을 취소하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이경명(李景溟), 장령 이정운(李貞運)·장지면(張至冕), 정언 심규로(沈奎魯)·한용탁(韓用鐸)을 체차하였다. 경명 등이 아뢰기를,
"국청(鞫廳) 죄수의 정상이 다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참작하여 처분한다는 명을 갑자기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이처럼 중대한 의리가 이로부터 더욱 어두워지고 이처럼 엄한 법도가 이로부터 점차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장차 얼마나 많은 괴상한 귀신이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나와서 끝까지 조사하여 밝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인데, 윤허를 받기도 전에 갑자기 대내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신들은 일제히 대궐문 밖으로 와서 뵙기를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후원(喉院)의 저지를 받게 되어 밤 늦도록 방황하면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국문하는 정상이 다 밝혀지지 않은 것만도 극히 한심한 노릇인데, 대간의 체면마저도 여지없이 손상시키고 말았으니, 이것은 다 신들의 사람됨이 하찮고 말이 경솔하여 초래된 일입니다. 신들을 체직하여 물리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승지와 사간은 대궐로 오지도 않았는데 너희들만 대궐 밖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이만저만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아니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재학(李在學)을 형조 판서로, 윤득부(尹得孚)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28일 기해

예조 판서 민종현(閔鐘顯), 참판 이조승(李祖承), 참의 이정덕(李鼎德) 등이 효자와 열녀의 별단을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상을 내리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정려하고 추증하는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뽑아서 아뢴 사람이 69명이나 되는데, 이건 너무 많지 않은가? 경들은 감히 상을 주는 것을 가지고 은혜를 베풀어 생색을 내는 밑천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전혀 없다. 대개 이것은 예조 판서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병통이니, 판서의 녹봉을 5등급 감봉하고 당상들은 추고하라. 그 중에서도 일의 체모가 크게 송구스러운 것이 있으니 막중한 곳은 정려문을 세우는 일인데, 종백(宗伯)이라는 신하가 이렇게 알기 쉬운 듯한 일의 체모를 모르는 것은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다. 별단은 이미 지워서 내려보냈으니, 판서의 녹봉을 감봉하는 조치는 오히려 가벼운 편에 속한다는 뜻을 잘 알도록 하라. 내려보낸 별단은 오늘 안으로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정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예조의 초기(草記)에, 고 판돈녕 이풍(李灃)의 처 강씨(姜氏)를 정려하자고 청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예조 당상과 글을 올리는 데 앞장을 선 지중추부사 이민보(李敏輔)를 모두 삭직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묵자는 고을의 이름이 조가(朝歌)라고 해서 고을에 들어가지 않고 수레를 돌렸던 고사가 있고, 증자는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라고 하여 그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던 고사도 있는데, 묵자(墨子)는 분명히 이단(異端)이지만 증자(曾子)는 아성(亞聖)으로서 성인이 배우기를 원했던 자이니 지나치게 혐의한 것이라고 말할 것은 없다. 《오례의》 속편을 살펴보면 대원군(大院君) 사당을 참배하는 의식에 대한 조에 대가가 대궐을 나오는 데에 관한 글이 실려 있는데, ‘연(輦)에서 내리는 장소는 대문 밖에 설치하고 여(輿)에서 내리는 장소는 중문 밖에 설치한다. 시종하는 신하가 대가를 인도하여 제사를 도울 때에는, 아헌관(亞獻官) 이하 종친과 문무 백관은 동구 밖에서 말에서 내린다.’ 하였다. 개인집 사당에서 받드는 제사 의식의 규모가 대향(大享)과 차등이 있는 것은 바로 대부(大夫)의 예로서 제사지내기 때문이다. 아, 훌륭한 조상께서 예법을 만든 깊은 뜻을 알 수 있으니, 개인집은 관청이나 대궐이 아니지만 예법은 왕조(王朝)와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문의 문미(門湄)에다가 갑자기 ‘열녀 아무개의 문’이라고 쓴다면 이 문을 지나면서 이 글을 바라보는 자들은 강열녀(姜烈女)의 정문인 줄로만 알게 될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매우 송구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또 어떻게 정문 아래에서 연(輦)을 내릴 수 있겠는가. 꼭 해야 한다면 그 집 문앞에 세우지 말고 그 마을에다 정문을 세우는 것이 또 한 가지 방편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법 이외에는 진실로 유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은 예조 당상에게 있으니, 해당 당상을 우선 엄중히 추고하라. 글을 올리는 데 앞장선 중신(重臣)은 주제넘게 글을 올렸을 뿐이지 상을 내리는 등급은 그가 알 바가 아니니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는 그냥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를 엄중히 추고하였는데, 능관(陵官)을 제대로 임명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어 전교하기를,
"참봉의 자리가 나면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을 의망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30일 신축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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