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6권, 정조 21년 1797년 1월

싸라리리 2025. 8. 1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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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임인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전알(展謁)하고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잠시 머물러 정월 초하루에 문안하기 위해 각도에서 올라온 호장(戶長)을 불러 보았다.

 

중외에 다음과 같이 유시를 내렸다.
"내가 들으니, 부자(夫子)001)  께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보고 왕도(王道)가 참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는데 정사(政事)는 조정을 보아야 하고 풍속은 민간(民間)을 보아야 한다. 정사가 미치는 것은 얕지만 풍속에서 얻는 바는 깊기 때문에 남의 나라를 잘 살필 줄 아는 자는 반드시 민간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조정을 보는 것이다. 이에 내가 하늘이 주신 큰 임무를 맡아서 자궁(慈宮)002)  의 주갑(週甲)을 만났으므로003)  , 팔방의 신민들과 함께 그 즐거움을 같이 하고자 나이 많은 이를 높이고 효자를 표창하는 의식에 최선을 다하여 왔다. 그런데 조정의 정사를 보면 기록할 만한 것이 없고 민간의 풍속을 보아도 새로워진 것이 없으니, 이는 오직 나 한 사람의 부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선왕과 비교하여 볼 수 없다. 그래서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자꾸만 일어나 생각하는데, 풍속을 바로잡기 어려움에 대해 민망히 여기고 당초에 마음먹었던 것을 많이 저버린 것을 개탄하였다. 내가 스스로 기약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이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편안하면 놀고 싶고 놀면 즐기고 싶고 즐기다 보면 방종하고 허탕해져서 마침내 빠져버리고 만다. 오랫동안 태평한 즐거움 속에 살면서 어려서는 올바르게 양성되지 못하고 자라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바람에 절도를 지키는 것을 오활하게 여기고 방탕 사치한 것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여기므로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천지 자연의 질서와 예의 법도를 모른다. 그러니 삼배 읍양(三杯揖讓)은 물론이고 풍류(風流)를 도타워지게 하는 일도 한 번 변모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가 남을 미워할 수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가 남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은 근본으로 인해 널리 공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虞)·하(夏)·상(商)·주(周)가 서로 이어받음에 있어 덕(德)을 부(富)하게 하거나 작(爵)을 친히 하는 차이가 있지만, 나이 많은 사람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나이를 귀중하게 여김이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를 저버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륜(五倫)을 따르지 않는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 《효경(孝經)》에 말하기를, ‘선왕(先王)은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가 있어서 천하를 따르게 했다. 그러므로 이로써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고 어른에게 순종할 수 있고 관에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애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받들면 천하가 편안하여진다.’고 하였으므로 공경을 넓히고 근본을 따르도록 하는 책임을 지금 내가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다.
만물은 계절이 다하면 그 본모습을 드러내고 잘못된 버릇을 없애면 참된 마음이 나타나는 법이니, 날로 새롭게 하여 밝은 세상을 만들 계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여긴다. 《소학(小學)》이란 글은 학교에서 처음에 가르쳐야 할 단계적인 과목이다. 나같은 변변찮은 자도 선대왕께서 이끌어주신 은혜를 입어 어릴 때에 배워서 그런대로 날마다 익힌 효과를 보았으니, 세상의 자제(子弟)들이 미처 육경(六經)을 모두 통달하지 못하더라도 사람이 되기 위한 도리를 열심히 따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배우는 일은 날로 더욱 희미하여지고 가르치는 일은 날로 더욱 느슨해짐에 따라 이 책이 시렁 위에 버려져 있으니 나는 이것이 걱정이다. 그래서 내각(內閣)의 신하에게 명하여 훈의(訓義)에 따라 고증하게 하였다. 그리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004)  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005)   같은 책도 정치를 돕고 세상을 권면하는 도구로서 《소학》과 함께 버릴 수 없는 책이므로, 하나로 정리하여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라고 명명하였다.
내 또 생각건대, 하루 예를 행하면 그 영향이 사방에 미칠 수 있는 것은 향음주례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 예는 노인을 보살피고 농민을 위로하며, 기쁨을 가져오고 나이를 구별지으며, 귀천을 밝히고 높고 낮음을 분간하게 하는 것이니, 몸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편안케 하는 요결(要訣)이 이것을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종(世宗)의 융성하던 시절에 양로연(養老宴)을 처음으로 실시하였으며,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것도 그때였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친한 이를 친히 하고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고 그 즐거운 것을 즐기고 그 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기는006)   생각이 절실하여 잊지 못하고 있는데, 나 소자(小子)가 이를 밝혀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향약(鄕約)도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 쉽게 도움이 된다. 주 부자(朱夫子)007)  가 일찍이 초하루에 향약을 읽어서 삼대(三代)의 제도를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백성을 옛날의 풍속으로 바꾸어서 인의(仁義)로 감싸고 근본의 진실을 보여주는 데는 향약의 효과가 향음주에 못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 규례도 강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기에 정무를 보고 난 여가에 향음 의식(鄕飮儀式)과 향약 조례(鄕約條例)를 편찬하였는데, 내용이 자상하고 진지하며 형식과 실질이 갖추어져서 우리 동포인 백성들과 함께 가슴이 뭉클하게 느끼고 숙연히 질서를 깨닫도록 하고자 하였다. 만약 이 일이 법이나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면 어떤 고집장이가 감히 버틸 것이며 어떤 못난이가 현명하여지지 않겠는가.
아, 백성들이여! 옛 가르침을 업신여기거나 나의 말이 실정과 거리가 멀다고 여기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오직 이 향음주례와 향약을 강론해 따른다면 군자는 마치 하·상·주 삼대에 태어나서 주례를 지키듯, 소인은 승시(乘矢)008)  를 받들고 확상포(矍相圃)009)  에서 공자의 활쏘기에 따라 모시듯 하여 모두가 곡식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를 모시고 어른을 받드는 일은 잠시라도 버리지 않아야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찾겠는가. 이렇게만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통일되고 세상의 교화가 안정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너희 백성들과 함께 끝없는 복을 누리면서 천지의 덕택에 보답하고 조종의 공업(功業)을 계승하게 되리라. 이러한 정성을 다한다면 영원한 장래가 보장되리라. 조정과 민간을 살펴볼 때 어우러져 새롭게 보인다면, 풍성한 복을 받고 업적의 보람을 누리는 일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그래서 ‘노인을 잘 모시면 백성들이 효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하였고, 또 ‘우리 노인을 잘 받들어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파급시킨다.’고 하였다.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만 년까지 사시라고 자궁(慈宮)을 축수하노라. 건강하신 얼굴을 뵈오니 늙지 않으심이 무척 기쁘다. 이를 미루어 넓혀서 모든 노인들을 기쁘고 편안하게 하고자 하노라. 모든 노인들이 기쁘고 편안하려면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풍성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농민을 위로하는 일은 노인을 기쁘게 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제4일에 신일(辛日)을 맞으면010)   곡식이 잘 익고, 제10일에 신일을 맞으면 곡식이 잘 영근다고 한다. 이미 지난해에 징험하였으므로, 금년에도 잘 영글 것으로 예상된다. 하늘이 나에게 태평한 세상을 주었으니 나 또한 농사일에 부지런히 하여야겠다. 소망에 따른 감응을 질정할 수 있으니 해마다 작년이나 금년과 같을 것이고 만 년이 가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농부의 경사는 자식된 자의 경사요, 자식된 자들의 경사는 조정의 경사이다."

 

전교하였다.
"영상(領相)이 금년에 팔순이 꽉 찼는데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노란 머리털이 다시 자라 건강하고 평안하니, 나라의 상서요 조정의 복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상고하여 보건대, 나이가 팔순이 넘고 지위가 영상에 오른 자가 12인이며 궤장의 하사를 받은 자가 4인이었다. 그러나 네 영상이 팔순으로 궤장을 받았지만, 지금 영상처럼 시임(時任)으로 있으면서 이 나이를 누렸던가. 나이를 존중하는 성대한 의식은 나라의 일반 노인에게도 베푸는 법인데, 하물며 영상으로서 원로(元老)까지 겸한 자이겠는가. 더구나 자궁(慈宮)의 가까운 친척으로서011)   자궁의 홍복(洪福)을 받들어서 이러한 지위에 이르고 이만한 나이를 누림이겠는가. 의당 우대하는 특별한 예로써 이 드물게 있는 아름다운 일을 빛내어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초하루에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팔방에 복록을 펴고 새로운 경사를 이저(貳邸)에서 맞이함이겠는가. 의정부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에게 줄 궤장을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만들도록 하라. 하사하는 날 전(殿)에 나가 친히 주겠으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전례에 따라 잔치를 내리겠다."

 

기로 대신(耆老大臣)·종신(宗臣)·경재(卿宰)에 대하여 기본적인 세찬(歲饌) 외에 쌀·고기·면주(綿紬)를 차등있게 추가로 하사하였다.

 

1월 2일 계묘

예조에서 영의정 홍낙성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의절에 대하여 품지(稟旨)하니, 고 재상 이원익(李元翼)과 이경석(李景奭)의 예에 따라 1등의 법악(法樂)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하교하기를,
"옛날 숙묘(肅廟)정사년012)  에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수연(壽宴)을 행하였는데, 지금 세 번째 돌아오는 구갑(舊甲)에 맏집으로 제사를 받드는 영상이 궤장을 받게 되었으니, 마치 기다렸던 일 같다.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그때 당해 귀주(貴主) 내외의 사판(祠版)에 제사를 드리되, 영상은 헌관이 되고 전 승지 홍의영(洪義榮)은 수향(受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온(李普溫)을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부 도총관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기묘년013)  에 강원(講院)을 처음 개설했을 때 찬독(贊讀)을 하였으므로 그 인품과 학식을 안 지 이제 40년이 되었는데 나이가 70에 찼구나. 전 찬독 이보온을 도총관에 제수하라."
하였다.

 

서매수(徐邁修)를 이조 참판으로, 한만유(韓晩裕)를 이조 참의로, 오태현(吳泰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종현(趙宗鉉)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경외(京外)의 1백세 노인에 대한 가자(加資)의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네 사람이었다.

 

1월 3일 갑진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성균관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設行)하였다.

 

1월 4일 을사

영의정 홍낙성이 소를 올려 궤장을 내리는 명을 사양하고 이어서 치사(致仕)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자(元子) 사부(師傅)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기를,
"우리 원자궁(元子宮)이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서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높아가므로 신이 비록 시골 구석에 묻혀 지내면서도 시골 노인네들과 사중(四重)014)  을 칭송하는 노래를 화답하며 기대하는 마음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스럽게도 사부에 취임하여 한 달 앞으로 개강(開講)할 날짜를 잡았으니, 이것은 진정 억만 년 끝없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사부란 벼슬은 지극히 책임이 무거운데, 미천한 신은 사람됨이 매우 보잘것없는 천품(賤品)입니다. 이 지극히 무거운 책임을 못난 신에게 부과하였으니, 옛날의 성왕(聖王)이 교훈(敎訓)으로 인도하고 덕의(德義)를 가르쳐서 보필하는 도리를 다하려 한 것이 어찌 이같은 것이었겠습니까.
미천한 신의 거취야 무슨 논의할 만한 것이 되겠습니까만, 죽을 죄를 지은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자를 가르쳐서 종사와 백성의 만 년 대계를 세우시면서 어찌 옛날의 성왕(聖王)을 본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소홀하다는 옛사람의 탄식을 면하지 못하십니까. 이 때문에 신이 놀라고 당황하였으나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조(先祖)의 발자취를 따르고 선조의 훌륭함을 계술(繼述)하라는 하교에 있어서는 더욱 신도 모르게 등에 땀이 나고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신의 선조와, 덕이 같은 선현(先賢)들은 물론 여기에 뽑히어 이 책임을 맡을 수 있습니다만, 신처럼 지극히 용렬하여 가는 곳마다 선조를 욕되게 하는 자가 어찌 감히 세상의 손가락질과 백세의 공론을 돌아보지 않은 채 당돌하게 선조의 자취를 이어서 그 아름다움을 계술한다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 내린 품계와 관직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올라온 뒤에 길일(吉日)을 받겠다. 새해의 햇살이 포근하여 노인이 길을 떠나기에 적당한 때이니 경은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1월 5일 병오

상이 가슴에 환후가 있어서 대신에게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의식을 대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였다.

 

1월 6일 정미

제주 목사 유사모(柳師模)가, 고관(考官)이 미비하여 본도(本島)의 유생(儒生) 승보시(陞補試)를 설행할 수 없다고 아뢰니, 회유(回諭)하기를,
"아직 승보시를 설행하지 않았으면 경이 시(詩)·부(賦)·논(論)·잠(箴)·명(銘)·송(頌) 중에서 출제하여 도중(島中)의 문관 시종과 함께 시험을 치르도록 하라. 그리하여 점수가 많은 자를 등수를 나누어 지필묵(紙筆墨)을 상으로 주되 으뜸을 한 세 사람은 대내(大內)에서 내린 《주서백선(朱書百選)》·《팔자백선(八子百選)》·《사기영선(史記英選)》을 하사하고, 그 다음의 세 사람은 《규장전운(奎章全韻)》을 각각 한 권씩 하사하라. 그리고 방목을 수정(修正)하여 올려보내라."
하였다.

 

제주목에서 갑인년에 기한을 뒤로 물렸던 환곡 5백여 석을 견감하여 주었다. 목사 유사모(柳師模)가 치계(馳啓)하기를,
"갑인년에 기한을 뒤로 물린 것 중에 절호(絶戶)015)  가 먹은 5백 98인 분은 징수할 곳이 없습니다. 탕감하여 주는 관례가 있기는 하나, 특은(特恩)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잠시 중지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그 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 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제주목의 갑인년 민사(民事)를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수백 포(包)의 이름만 있는 빈 문서로 해마다 곤욕을 주어 섬 백성들의 미결된 안건으로 남아 있으니, 지난 봄에 만금의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이라도 아끼지 않겠다고 한 뜻과 어찌 상반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환곡 장부에서 삭제하여 혜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7일 무신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서울은 전국의 얼굴이므로, 연말에 임하여 담당관을 나누어 보내어 늙어서 살기 어려운 자들을 두루 조사하여 진청(賑廳)에 보내고, 또한 각도로 하여금 이에 준하여 거행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세전(歲前)에 조사하여 넘긴 자들은 큰길에서 듣고 보는 자들에 불과하다. 이 밖에 이목이 닿지 않는 외딴 곳에 그 수보다 얼마나 더 많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각부(各部)016)  에 엄하게 주의시켜 다시 조사하여 구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요즈음에 반포한 명령이 자못 해이해졌으니 이 또한 엄히 주의시켜 찾아보게 하라."

 

1월 8일 기유

하교하기를, "대례(大禮)나 대향(大享)에서 영(令)이니 낭(郞)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태상시의 정(正)을 경적령(耕籍令)이라 하여 친경(親耕)에 쓰고, 장악원의 정을 협률랑(協律郞)이라 하여 사향(祀饗)에 쓰고, 전생서의 관원을 장생령(掌牲令)이라 하여 성생(省牲)에 쓴다. 성생하는 예절은 《오례원의(五禮原儀)》에는 임금이 친행(親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선조(先朝) 때에 와서 《대명집례(大明集禮)》에 따라 처음으로 임금이 몸소 살피는 예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적령이나 협률랑에는 모두 정3품의 정(正)의 품계를 쓰면서 유독 장생령만 옛날의 예에 따라 낮은 품계 그대로이며 지금까지도 인습하고 있다. 이번 기곡대제의 집사관(執事官)은 서계(誓戒)를 들은 자들을 그대로 쓰는데 생관(牲官)017)  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잡기주부(雜歧主簿)라고 하는데, 주부는 그 관서(官署)의 장관(長官)이며 그 밖에는 모두 참외(參外)의 7, 8품의 관원들이다. 설령 지벌(地閥)이 좀 괜찮다고 하더라도 오대(烏帶)의 말음(末蔭)이 어찌 감히 희생을 이끌고 판위(版位) 앞에 가서 고돌(告腯)할 수 있겠는가. 정(正)의 벼슬자리를 더 설치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하면 그 벼슬을 좀 높이고 그 사람을 특별히 가릴 수 있겠는지,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널리 문헌을 찾고 관제(官制)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와 예조가 아뢰기를,
"희생을 살펴보는 예는, 한(漢)나라 이래로 큰 제사에는 천자가 직접 석생(夕牲)018)   하였으며, 진(晋)나라 태시(太始) 6년에도 이 예를 썼습니다. 그러나 장생관(掌牲官)의 품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곳이 없습니다. 개원례(開元禮)에는 늠희령(稟犧令)이 고돌하고 태상경(太尙卿)이 시생(視牲)한다는 글이 있고, 송(宋)나라 제도에는 광록경(光祿卿)이 순생(巡牲)하여 잘 갖추어졌음을 고하고 광록승(光祿丞)이 순생하여 고돌하였습니다. 당(唐)나라의 늠희령은 곧 태상시(太尙寺)의 속관(屬官)인데, 당나라의 태상경이 정3품이므로 늠희령은 당연히 3품 이하일 것이며, 송나라의 광록경은 종3품이므로 고돌하는 광록승은 역시 당연히 종3품 아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유사(有司)가 성생(省牲)하는 의식이며 천자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직품(職品)의 높고 낮음에 대해서는 지금의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대명집례(大明集禮)》에 황제가 제향 하루 전에 친히 성생하는 예를 행하고 나서 집사관(執事官)이 희생을 끌고 주간(廚間)으로 간다고 되어 있는데, 이른바 집사관이란 지금 《회전(會典)》에 실려 있는 것을 참고한다면 태상시나 광록시(光祿寺)의 벼슬인 것 같으나 품질의 높고 낮음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원 《오례의》에는 유사(有司)가 성생한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장생령(掌牲令) 밑에 전생서의 주부가 유고(有故)하면 직장이 대신한다고만 하였습니다.
선조(先朝)의 을축년019)  에 와서 처음으로 ‘주(周)나라의 제도를 따르겠다.’는 공자의 뜻을 따라 특별히 성생하는 예를 친히 행하게끔 명함으로써 의문(儀文)이 완전히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장생관은 예전대로 종6품의 주부를 쓴 것은 아마도 미처 겨를이 없어서 그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생서는 이미 종6품 아문(衙門)으로 《경국대전》에 실려 있고 주부가 장관으로 되어 있으므로, 지금 만약 태상시나 장악원의 두 정(正)의 예에 따라 정의 벼슬자리 하나를 더 설치한다면 6품 아문의 장관을 정3품으로 하는 것이 되므로 《경국대전》의 관제(官制)에 어긋날 듯합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주부 한 자리를 판관으로 승격시키고 태상 판관의 예에 따라 삼사(三司)를 거친 사람으로 통틀어 의차(擬差)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전생서의 세 낭관이 소·양·돼지를 분장하는 것은 정(正)의 자리를 따로 설치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쓸데없는 관직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인 것이다. 경들이 올린 의논은 그 아문이 3품이냐 6품이냐 하는 것에만 매달려 있으면서 도리어 주부를 5품의 판관으로 승격시키자고 하니, 어찌 그처럼 스스로 모순된단 말인가? 아무튼 경들이 의논한 바에 따라 시행하되, 희생의 살찜에 대한 판단에는 문음(文蔭)이 관계가 없으니 전과 같이 음관(蔭官)으로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2일 계축

한성부에서 60세 이상의 빈한(貧寒)한 자 70인을 뽑아서 아뢰자, 승지와 한성부의 좌·우윤(左右尹)을 진휼청에 보내어 쌀과 목면을 차등있게 지급하고, 늙고 병들어서 스스로 받아가지 못하는 자는 낭관이 집을 찾아가서 지급하게 하였다.

 

1월 13일 갑인

상이 가슴의 환후가 있었다. 내의원의 제조와 시임 및 원임의 각신(閣臣)이 문안하기 위하여 뵙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4일 을묘

함경도 관찰사 조상진(趙尙鎭)이 장계를 올리기를,
"후주(厚州)에 대하여, 관서(關西)의 상토(上土)의 예에 따라 속읍(屬邑)의 별중영(別中營)을 삼을 것인가 아니면 바로 관부(官府)를 설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이수붕(李壽鵬)과 후주 첨사 이건수(李健秀)에게 공문을 보내 문의하였더니, 모두 후주의 백성들은 읍(邑)을 원하고 진(鎭)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척이 넓게 되지 않았고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호구가 4백 호에 불과하므로 민사(民社)의 문제는 서둘러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이미 진을 설치하여 부역과 송사를 전담시켜서 삼수(三水)가 관할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이름은 비록 속진(屬鎭)이지만 사실은 읍치(邑治)인 것입니다.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게 해서 그 효과가 분명히 나타난 다음에 관부로 승격시키되, 무산(茂山)·장진(長津)의 예와 같이 한다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별중영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후주와 삼수는 같은 변방 지대로서 아문은 대등하지만 체통이 보잘것없고 관양(官樣)이 지극히 잔열하여 배치(排置)할 길이 없습니다. 먼저 변방 지대의 이력(履曆)으로 독진(獨鎭)을 만들어서 군(軍)·전(田)·적(籍)의 삼정(三政)을 해진(該鎭)에 일체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되, 별중영은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해첨사(該僉使)는 장진의 방수장(防守將)을 본진(本鎭)으로 이정(移定)하자고 하지만, 장진의 관방(關防)은 후주에 손색이 없을 뿐더러 설치하였다가 금방 파하는 것은 한 고조(漢高祖)가 인(印)을 새겼다가 곧바로 녹여버린 일과 비근하니 그냥 두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후주는 이미 독진(獨鎭)을 만들었으니 옥사를 주관하고 백성들을 안접(安接)시키는 일이 명칭은 진장(鎭將)이지만 내용은 고을 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변지(邊地)로 승격시킨다고 해서 경중이 있지는 않을 것이니, 앞으로 보아가며 설치 여부를 다시 의논해 정하소서. 그리고 방수장을 이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도신(道臣)은 번거롭게 자꾸 바꾸어서는 안된다고 난색을 표하였지만 해첨사(該僉使)가 이미 장진 부사를 거쳤으니 형편과 사세를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후주진과 장진부에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게 한 다음에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15일 병진

이성보(李城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호조가 조운 절목(漕運節目)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조운에 관한 정사는 군사적인 성격을 겸하는 것으로, 옛날 주관(周官)의 제도로부터 한(漢)·당(唐)·송(宋)·명(明)에 이르기까지 조선(漕船)을 전선(戰船)으로 사용하였으니, 이 또한 군사와 농사가 서로 의지하는 일단이다. 우리 나라의 조창(漕倉)에 관한 법이 군사와는 무관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양영(兩營)의 것을 대동청(大同廳)에서 옮겨오는 것과 훈국(訓局)의 삼수량(三手糧)은 그 의미가 같은 것으로, 급할 때의 수용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옛날에는 소나무에 관한 정사가 소홀하지 않아서 삼남(三南)에 순차로 조선(漕船)을 건조하였으나 지금은 저처럼 민둥산이 되었으니 조창이 결단코 배를 내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이보다 더 큰 일이라도 시폐를 바로잡는 정사는 따로 때에 적절한 사의(事宜)가 있을 터인데, 유독 조운의 일에만 융통성이 없고 고집스러워 감히 말을 꺼내거나 손을 쓰지 못하니, 어떻게 그런 사리가 있단 말인가.
지난 겨울의 빈대(賓對)에서도 시험삼아 전선(戰船)을 써보자는 뜻으로 말이 나왔으니, 묘당이 자연히 별도로 요리(料理)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목(事目)을 하달함에 있어, 먼저 준비에 대한 명령을 내려 배를 건조하라고 엄히 주의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감·곤·읍·진(監閫邑鎭)들이 앞으로 식량 공급의 길이 있겠는가. 경은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먼저 배를 견고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서 조곡(漕穀)을 운반할 방도에 대해 3도의 도수신(道帥臣)에게 공문을 보내라. 그리고 전선으로 시험해 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절목(節目) 중의 세부 항목이니, 그리 알라."
하였다.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이 병진년의 회계부(會計簿)를 올렸다. 황금이 2백 67냥, 은이 38만 4천 8백 24냥, 전(錢)이 66만 1천 7백 28냥, 면주(綿紬)가 1백 32동 6필, 면포(綿布)가 4천 5백 80동 18필, 저포(苧布)가 61동 12필, 마포(麻布)가 1천 2백 96동 32필, 쌀이 13만 4천 9백 80석, 좁쌀이 4만 7천 9백 90석, 황두(黃豆)가 2만 4천 1백 96석, 피잡곡(皮雜穀)이 8천 1백 16석이었다.

 

1월 17일 무오

호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전선으로 조곡을 운반하는 문제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상과 좌상은 별다른 의견이 없고, 우상은 배의 제도가 조선(漕船)과 다를 경우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전선의 제도는 어떠냐고 물었다. 시수가 조선보다 조금 작고 철정(鐵釘)을 사용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시 자세히 논의해 보겠으니, 우선 새로 만드는 배는 철저히 견고하고 정밀하게 만들라는 뜻으로 신칙하라."
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문간공(文簡公) 조관빈(趙觀彬)의 제사를 지냈다. 이는 상이, 그 집에서 장차 시호를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치제를 명한 것이다.

 

집의 이명연(李明淵)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성상께서 가슴 사이에 치밀어 오르는 기로 인하여 화기(和氣)를 잃은 지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은 초조하고 근심스러워 새해의 기쁨이 없이 썰렁하기만 합니다. 이 기운은 한갓 외감(外感)만이 아니라 역시 내상(內傷)에 연유한 것입니다. 성상의 뜻에 격동된 바가 있을 때마다 기약이나 한 듯이 찾아오곤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병이 되는 줄 알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약인 것입니다. 지금 쓰는 흩어지게 하는 약제나 맛이 매운 약은 잠시만 구제하고 원기(元氣)만 손상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크게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하의 격한 고뇌 또한 어찌 자제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신하들의 죄이니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성인이 나오면 만물이 우러러 보아서 모든 생활이 죄다 순조로운데, 이는 지난 역사로 징험해 보아도 틀림없고 경전을 대조하여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하늘에 해와 달이 밝아도 쳐다보지 않고 사시(四時)가 질서에 따라 운행하여도 믿지를 아니하는가 하면 때맞추어 비가 내려도 반가워하지 않고 천둥 번개가 쳐도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목석같은 완악(頑惡)한 것과 용사(龍蛇)의 변괴가 번갈아 가로막아 큰 덕화(德化)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사방이 감화하여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신시켜 도(道)에 이르도록 하는 일도 막연하여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뜻하였던 사업은 되지 않고 세월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으니, 성상의 뜻에 때때로 격발하고 번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 백성들의 마음이 각각 다르기에 우(禹)임금도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고, 백성들이 걱정하여 따르지 않자 반경(盤庚)은 맹세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도 더러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격한 번뇌로 인하여 항상 건강을 해치시니 성명(聖明)께서 어떻게 이러할 수 있습니까. 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가슴 사이에 접때 대간의 비답에 말씀하신 것처럼 태양증(太陽證)이 주된 증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 불평이 있으면 그 기운이 솟구쳐 올라서 안정하려 해도 잘 가라앉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이런 증상은 대현(大賢)도 참으로 있는 것이지만 성인에게는 없습니다. 전하와 같은 분에게 이런 증상이 있는 것이 어찌 뭇 신하들과 백성이 평소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신이 마음속으로 가장 답답하게 여기는 바를 아뢰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지난 여름 이래로 신하들의 말이나 일들이 더러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으시면 말씀에 간중(簡重)함이 결여되고 처분을 내리실 때마다 엄하고 급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만세 동안 우러러 볼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잘못되신단 말입니까. 일전에 문(門)에 납시어 신국(訊鞫)하신 조처에 있어서는 너무나 조급한 실수를 하셨습니다. 저 기회나 엿보는 잔재주나 도리에 어긋나는 버릇은 참으로 천하고 가증스러우므로 일찌감치 베어 끊어버려야 하겠지만, 그의 지체를 생각하면 그래도 모두 현인(賢人)의 후손이며, 그 벼슬을 보면 병조 판서와 재상입니다. 그런데 대각의 계사와 의금부의 건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유독 위엄을 부리자 보고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의리를 밝히고 한계를 엄히 하는 데 있어서는 신의 생각으로는 겨우 목전의 조그만 효과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정사의 체통에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이런 증상이 자주 일어나면 이런 기가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용히 요양하는 날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으니, 종사(宗社)와 백성의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증세에 맞는 귀중한 약제를 쓰고 신비한 처방에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날 아침에 반포하신 유시를 읽어보니 성주께서는 이미 이에 대해 터득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양의(良醫)가 기술을 다하고 충신이 지혜를 다하더라도 그 부근에나마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경하와 탄식을 금하지 못한 나머지 감격하여 소리 높여 읽었습니다.
아, 이 백성들은 삼대(三代)의 백성들과 같습니다. 실로 잘 교화하기만 한다면 고금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근본에 힘쓰고 농사에 힘쓰며 어버이를 섬기고 노인을 모시게 해서 다시금 부랑(浮浪)하고 패만(悖慢)한 버릇이 없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왕자(王者)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다시 향약(鄕約)의 조목을 반포하여 따라서 지킬 근거가 있게 되었고, 오륜(五倫)을 합쳐 편찬하여 보고 느낄 바탕이 마련되었으며, 향음주례를 행함으로써 온갖 선(善)이 모두 일어나고, 《소학(小學)》의 책을 펴내어서 모든 어리석은 자들이 다들 깨달을 것이니, 그 성대하고 찬란함이 더없이 극진합니다. 집집마다 상을 내릴 만한 옛날의 세상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전하께서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어도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지키어 만물이 화육(化育)될 것입니다. 무엇이 성명의 뜻에 어긋나 성명에게 고충을 끼치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기는데, 이는 공로의 효과가 더디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조정의 용사(用捨)에 따라 백성들 마음의 향배(向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덕행을 앞세우고 잔재주를 뒤로 미루면 백성들이 진실해질 것이고, 둔박한 것을 귀히 여기고 공교로운 것을 억누르면 백성들이 거짓을 부끄러워하여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 마치 북채와 북처럼 어우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조정이 숭상하는 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예의가 드러나지 못하고 염치가 신장되지 못하여 어른이란 말은 쓸데없는 칭호가 되어버리고 독서(讀書)가 부끄러운 사목이 되어버렸습니다. 염담(恬淡)하고 검약(儉約)한 자가 의심을 받고 공평한 자가 도리어 기롱을 당하여, 너그럽고 대범한 것을 날렵한 것보다 천하게 여기고, 법을 지키는 선량한 관리를 각박한 관리보다 낮게 여깁니다. 누적된 버릇이 제거되지 않고 고질은 고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윤음이 내렸을 때에, 깊이 감동하고 잘 합치하여 기필코 위의 교화를 선포하고 아래를 이끌어서 임금님의 아름다운 말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조정을 볼 때 이러한데 재야의 선비에게 의논하려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수고를 하고서도 효과가 더디다고 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거듭 벼슬아치들을 경계하여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거나 완고한 아이에게 비교하지 않도록 하여 집에 들어가면 인륜(人倫)만 닦고 밖에 나가면 직사(職事)에만 부지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옛사람처럼 뜻을 크게 세우고 꼿꼿하여 몸가짐이 구차하지 않게 하소서. 바탕이 이미 아름다운데다 배움으로 성취되어 훌륭한 인물이 성조(聖朝)에 많아지면 하늘에 가리는 것이 없고 불길한 분위기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며, 사해(四海)가 맑아져서 사특하고 괴이한 것이 저절로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종요로우면서도 또한 쉽지 않겠습니까. 《시경(詩經)》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도다. 그래서 문왕(文王)이 편하다네.’라고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임금이 따르고 벼슬아치들이 따르고 백성들이 따르면 이것을 일러 대동(大同)이라고 하는데, 임금 자신이 편안하고 자손들이 창성하여 길(吉)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임금의 환후가 쾌유하는 기쁨만 있겠습니까. 하늘의 명이 무궁하기를 빌고 자손을 편안히 보호하여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일들이 모두 예정된 듯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의가(醫家)에서 말하는 겉만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속을 다스리고 근본을 밝히는 일은 오로지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지난 봄에 감히 너그럽고 느긋함에 힘쓰실 것을 청한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너그럽고 느긋하면 천천히 연구하게 되고, 천천히 연구하면 이치가 밝아지고 이치가 밝아지면 시비(是非)가 저절로 가려지므로 자신은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저울대를 바르게 하여 달아보고 거울을 맑게 닦아 비춰본다면 사물이 각자 경중(輕重)과 곡직(曲直)에 따라 구별될 것입니다. 눈·비·이슬·서리가 내리는 것이 하늘이 작위적으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마음이 태연하면 온 몸이 명령을 따르는 것이므로 천지의 화기가 응하고 모든 복이 빠짐없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조정을 바로잡을 것을 걱정할 것이 뭐가 있으며 백성을 바로잡을 것을 걱정할 것이 뭐가 있으며 당(唐)·우(虞) 시절처럼 융성하지 못하다고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요(堯)·순(舜)·우(禹)·탕(湯)과 문(文)·무(武)·주(周)·공(孔)은 이런 증상이 없었는데, 또한 다만 이러한 도리를 따랐을 것입니다. 거듭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보시고 유념하시어 미약한 자의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그러면 종사의 큰 다행이고 백성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런데 신에게는 또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병을 조리하는 도리는 마음을 열어서 답답함을 풀어주는 일이 귀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약물의 효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상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할 때마다 대신(大臣)이나 각신(閣臣) 및 약원(藥院)의 의례적인 문안조차 전혀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성명(聖明)께서 침실에서 접견하는 것이 예모(禮貌)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과 같습니다. 아비에게 병이 있으면 자식은 조금이라도 그 옆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에 아비가 어찌 근엄한 모습으로 성인이 자식을 멀리 한 것을 본받아야 되겠습니까. 침실에 불러들이면 서로 수응하는 즈음에 빛이 나고 평복으로 만나보더라도 공경히 대우하는 예절에 지장이 없습니다. 왜 굳이 추운 전각(殿閣)에 나와야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시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조용히 묻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덧 피곤함을 잊게 하소서. 그러면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되고 크게 요양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 생각한 바를 숨기지 않고 말하니 매우 가상하다만, 올바르게 하는 도리를 너 또한 깊이 궁구하도록 하라. 그리고 대신 이하를 침실에서 자주 접견하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는 본디 생각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1월 18일 기미

승지 어용겸(魚用謙)이 상소하기를,
"아, 저 이명연의 소가 무슨 이유로 나온 것입니까? 《명의록(明義錄)》 한 부를 지은 지 이제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두들 오늘날의 《춘추(春秋)》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변란이 거듭 생겨서 갈수록 더욱 기이하고 보면 대성인(大聖人)이 만세를 염려하여 만든 큰 법을 아직도 지금 사람들이 확신을 못하여 미완성의 사안으로 삼는 것인데, 《춘추》라고 한 것은 단지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지난해의 대처분(大處分)을 의심하면서 적변(賊邊)을 편드는 논의가 나온단 말입니까. 아, 그날 문(門)에 납시어 신국(訊鞫)한 일이 어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까.
전하께서 조용히 요양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문에 나오시는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으신 까닭은 어두운 거리를 일성(日星)처럼 밝히고 천추(千秋)에 엄중히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명연이 이른바 ‘너무 조급하게 대처하는 실수를 하였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명연이란 자는 다만 현인(賢人)의 후손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현인의 후손이 대의를 등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이게 더욱 통탄스럽고, 병조 판서나 재상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병조 판서나 재상이 적변에 가 빌붙는 점이 더욱 가증스럽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어찌 그 말씨가 구구절절이 어긋나기만 한단 말입니까. 대체로 그의 상소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상의 건강이 불편한 점에 관심을 둔 것 같았으나 걱정하고 슬퍼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오로지 농간과 술수를 부리는 말만 일삼아, 감히 매우 공평한 처분을 두고 증후(症候)가 격발(激發)한 소치로 돌려버렸으니, 이게 어찌 오늘날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임금의 굳건한 판단에 분발하시어 속히 처분을 내리심으로써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리를 배반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백성의 도리가 일정한 분수가 있고 임금의 기강이 크게 두렵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집의 이명연의 소에 대한 비답에서, 숨김이 없음을 가상하게 여기고 규범을 지키라고 권면한 것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려는 고심(苦心)을 쓴 것이다. 대체로 명연은 항상 법도를 벗어나려 하고 말투 또한 광대와 같다. 어제의 상소는 지난 봄에 올린 것과 똑같다. 그러나 진실로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어찌 한낱 명연을 아껴서 만인이 서로 나쁜 곳으로 빠지는 것을 구제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아울러 석란(惜卵)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승지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이명연에게 엄한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융통성 있게 본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관계되는 바가 있다면 그에게 무엇을 고려하겠는가?"
하였다.

 

부수찬 박재순(朴載淳)이 상소하여, 국청을 설치해서 이명연을 국문하여 실정(實情)을 캐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물리쳤다.
옥당이 【응교 윤서동(尹序東), 부교리 정내백(鄭來百)·이희갑(李羲甲), 수찬 이기양(李基讓), 부수찬 김근순(金近淳)·박종순(朴鍾淳)이다.】  차자를 올려 이명연을 속히 해당하는 법으로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실로 말이 의리를 핍박하였다면 그에게 무엇을 아까워하겠는가. 더구나 형정(刑政)은 나라를 가진 자가 신중히 해야 하는데, 어떻게 처음에는 엄격히 하였다가 곧바로 느슨하게 하여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대사간 구태현(具泰賢), 장령 윤제동(尹悌東)이다.】  차자를 올려 이명연을 외딴 섬에 안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더없이 엄한 것이 격례(格例)이다. 한 번 어기면 말류의 폐단이 적지 않다. 옥당의 차자와 양사가 연명한 차자는 체모가 판이하다. 논사(論思)의 직책에 있으므로 작은 일이라도 말해야 하는데, 차자가 아니면 할 길이 없으므로 비록 하루에 두 번 올리더라도 혐의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양사는 이와는 반대이다. 더구나 연명하여 올린 것이겠는가. 본사에 있어서는 일개 대각의 신료가 올린 상소 중 구절의 말에 불과한 일인데, 이런 일에 연명하여 차자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스스로를 가볍게 여긴 것이다. 양사의 연명한 차자를 돌려주고 대간들은 체차하라. 금제(禁制)에 관련되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슬러 따져본다면 역시 금제에 관련되는 일이다. 그리고 어찌 이렇게 하였다가 저렇게 하였다가 할 일이겠는가. 정원의 상소와 옥당의 차자에 대하여 이미 비답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이 뒤로는 더욱 엄하게 경계하여 다시는 시끄럽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시임 및 원임 대신이 【영의정 홍낙성,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형벌을 주면서 주모자만 처벌하는 것은 성인의 큰 덕입니다. 지난해 섣달에 문에 임하여 처분을 내린 것은 상설(霜雪)처럼 엄숙하고 일성(日星)처럼 밝아서 흐려져 가던 의리가 그로 해서 수립되고 인멸하지 않는 인륜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열 줄의 전교가 《춘추》처럼 게양되어 하찮은 백성들이라도 금석(金石)처럼 받들며 상위(象魏)에 내건 법령처럼 두려워하였습니다. 두 사람을 죄주어서 많은 목숨을 살렸으니 형벌을 온당하게 한 의리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명연의 소는 무엇 때문에 나왔단 말입니까? 의리는 본래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앞에서 다툼을 벌이려 하기도 하고, 인륜은 참으로 똑같이 얻은 것인데도 뒤에서 서로 무너뜨리려고도 합니다. 피차간에 동조하고 관계가 먼 사람들이 세력을 합하여, 마음속에 품은 것으로는 부족하자 입을 놀려대고 입을 놀려대는 것으로는 부족하자 방자하게 상소를 써서 올렸습니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변괴가 있었습니까마는 어찌 명연처럼 무엄하고 불칙한 자가 있겠습니까. 어찌 하루라도 용서해 둘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명연을 빨리 먼 변방으로 내쫓는 조치를 도저히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십분 온당한 것을 의(義)라 하고, 당연하고 틀림없는 것을 이(理)라고 한다. 그런데 당연하고 틀림없는 일도 십분 온당해야만 비로소 천지에 세우고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으며 백세(百世)를 기다려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조금도 결함이 없는 진정한 큰 의리라고 할 것이다. 털끝만한 차이가 천 리만큼 어긋나는 것은 은미한 것을 소홀히 한 까닭이요, 아침에는 향기롭다가 저녁에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세밀한 것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미할수록 더욱 삼가고 미세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니, 지난해 섣달의 용기 있는 결단도 이것이고 오늘의 관대함 또한 이것이다. 그런데 조솔(粗率)한 자취에 대하여 관대함과 용단을 대충 내려서 경들의 말을 억지로 따른다면, 의(義)로 제어하고 이(理)로 미루어서 그 법칙을 따랐던 평소의 뜻이 아닌데, 명연에게 아까울 것이 뭐가 있고 명연에게 돌아볼 것이 뭐가 있어서 이런 하교를 내리겠는가. 다만 아끼는 것은 그의 벼슬이 언관(言官)이고 그의 상소가 일을 말한 점이다.
그의 소에서 앞 부분은 두 죄수를 성토하였고 뒷 부분은 오로지 당금의 정사를 공격하였다. 만약 두 죄수보다 10배나 더 많은 죄를 짓고서 법전에 대하여 두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할 경우, 그에 대해 느슨하다느니 급박하다느니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의논을 했을 때 그냥 편드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목하여 동정(同情)한다는 율로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도리어 진정한 큰 의리에 흠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외복(畏服)시킬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명연이 정상적인 본성을 잃고 임금의 은혜를 저버린 채 나쁜 쪽에 붙어서 마음에 불만을 품고 겉으로 일을 말하는 데에 가탁(假托)하였다 하더라도, 이 또한 분노하여야 할 일은 그 자에게 있는 것이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월 19일 경신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20일 신유

제릉(齊陵)의 전사관(典祀官)을 개성부(開城府)의 경력으로 차출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임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1월 22일 계해

안창군(安昌君) 이경(李燝)이 상소하기를,
"신이 선조(先朝)의 고사를 상고하여 보았더니, 지난 경신년020)   봄에 인원 성후(仁元聖后)021)  의 휘호(徽號)를 올리고 또 그해 가을에 휘호를 더 올렸는데, 이 해가 성모(聖母)께서 국모(國母)로 계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금년에 이르러서는 왕대비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햇수가 인원 성후께서 임어하신 햇수와 꼭 같습니다. 전하께서 선양하려는 뜻과 계술(繼述)하려는 효심으로 영고(英考)022)  께서 이미 행한 예를 다시 행한다면 오늘날의 어버이를 위한 기쁨일 뿐만 아니라 지난 일이 또한 빛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선조(先朝)의 경신년에 왕대비에게 휘호를 올린 것은 따로 중히 하여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 경신년 때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번 무신년에 감히 그런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재작년 을묘년에 와서 자전의 연세가 오순이 되자 비로소 아름다운 칭호를 올렸던 것이다. 지금 해동의 신민으로서 그 누가 나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더구나 이것은 막중한 의식인데, 경은 근거없는 설로 분수를 지키지 않고 앞장서서 상소하였으니, 불찰이 크다. 지난 선조(先朝) 때에 어떤 종신(宗臣)이 이와 비슷한 소를 올렸다가 엄한 처분을 받은 일은 우리가 본 바이다. 경에게 서용하지 않는 처분을 내려서 나라의 예를 함부로 말하는 자의 경계를 삼는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금 임금의 잘못이나 시정(時政)에 대하여 논한 말에서 당부(當否)를 막론하고 널리 받아들이려고 힘쓰고 있다. 그러나 선열의 성덕(盛德)을 선양하는 예절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나의 정성이 어찌 신민들에게 뒤지겠는가. 이 뒤로는 전례(典禮)라는 명분으로 감히 분수를 넘어 올리는 소는 정원에서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설날 아침에 내린 유시는 풍속을 고치고 근본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을묘년023)   탄신일의 전교에서 이미 그 단서를 보였는데, 그뒤로 자꾸 미루어 오다가 올해까지 이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도(世道)와 속습(俗習)이 날로 야박해지고 있으므로,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바로잡는 도리를 삼고자 그믐날 밤에 촛불을 밝히고 이 유시를 작성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충분히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유시가 내렸을 때 누가 우러러보고 탄식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으로 세도(世道)를 바로잡는다면 미치는 효력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시동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 두 죄인을 처분하여 많은 목숨을 살린 것은 실로 지극히 어진 성덕과 깊고 먼 성상의 사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과격하게 노하신 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명연이 ‘가슴의 기[胸氣]’라는 두 글자로써 마음에 노렸던 것을 글로 썼습니다. 이를 엄히 처분하지 않는다면 세도(世道)에 대한 걱정이 어느 지경까지 이를지 모를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명연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그는 법도를 따르지 않고 유별난 이론(異論)을 좋아한다. 지난번의 상소 역시 남과는 다르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그 귀추를 따져보면 전적으로 격례(格例)에 어두운 소치이다. 대체로 상과 벌은 곧 나라의 큰 권한이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지나치게 온정을 베풀다 보니 상을 주는 쪽은 항상 많고 벌을 주는 쪽은 드물었기 때문에, 요즈음 사람들은 역률(逆律)을 범하여야만 비로소 임금이 직접 국문하는 조처가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게 중대한 범죄가 아니더라도 죄수를 친히 문초하였고 보면 의금부도 으레 모두 격식을 갖추어 거행한 것이다. 예를 들면 김만중(金萬重)·윤봉조(尹鳳朝)·조관빈(趙觀彬)·이광덕(李匡德)·송익휘(宋翼輝) 등 여러 사람도 모두 이 비슷한 처분을 받았는데 그때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격례였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처분을 내릴 때는 대의(大義)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그랬던 것만도 아니고, 살리는 도리를 위하여 사람을 죽인 것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로 지금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격례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그날 성안 가득히 모인 인파가 뒤숭숭하여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하였다고 하였다. 명연이 말한 바 ‘처분이 너무 다급했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 말미암은 것일 것이다."
하였다. 상호군 심환지(沈煥之)와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 등이 교대로 속히 엄한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상소 상단은 정호인(鄭好仁)과 성덕우(成德雨)를 엄중히 성토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하단에서 논한 것은 다만 처분을 너무 다급하게 한 것과 법의 적용을 지나치게 한 것을 말한 것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곧장 그들을 옹호하였다고 몰아붙인다면 온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지나온 일로 보면 가슴의 화가 빌미가 되어 말을 하는 사이에 가끔 격발되어 지나친 경우가 있는데, 명연의 말이 반드시 나의 병에 약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만약 명연을 죄주었다가, 남들이 ‘임금의 잘못을 말하였다가 죄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뒷날 사람들이 오늘을 어떻게 보겠는가.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시동이 아뢰기를,
"바다를 건너갔다가 돌아온 역관(譯官) 편에 들은 대마도의 소식에 의하면, 통신사의 교환 요청이 몇 년 이내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가야 할 단삼(單蔘)이 거의 2백 근이나 된다 하니,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편리한 대로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접때 금 채굴을 금하지 말 것을 경연의 자리에서 아뢰었습니다만, 장사꾼들의 밀매를 이미 모두 금할 수 없고 보면 토산을 캐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경기 고을의 산골에 금이 나는 곳이 많다고 하므로 군기시에서 먼저 시험삼아 채굴해 보고자 하는데, 그 결과 실효가 있으면 의당 호조가 주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채취를 하자면 남잡(濫雜)하여 폐단을 끼칠 염려가 없지 않으니, 경기 감영에 공문을 보내어 주의시켜 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마조(馬祖)의 제단이 동교(東郊)에 있는데, 《오례의(五禮儀)》에 중춘(仲春)의 중기(中氣)024)  가 지난 강일(剛日)에 제사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전(祀典)에 실린 것 중에 폐할 수 없는 것인데 옛날에는 제사를 지내고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올해부터 예에 따라 설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득부(尹得孚)와 이성보(李城輔)를 원자(元子)의 좌우 유선(左右諭善)으로 삼았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원자의 사부가 조정에 나가는 시기를 물으니, 확실한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고사를 상고하여 보니, 책봉하기 전에 또한 요속(僚屬)의 인원을 갖춘 일이 있는데, 대체로 좌우의 보익(輔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지금 원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하는 때를 당하여 사부가 한 사람뿐이니, 너무 소홀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야의 선비와 조정의 인사 중에서 학식과 지위 및 명망이 있는 자를 골라 요속 몇 사람을 추가로 뽑되, 벼슬 이름은 유덕(諭德)이나 유선(諭善)으로 하고 품계는 3품 이상으로 하여 품지하여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간택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벼슬 이름은 유선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근래에 열조(列朝)의 고사를 보았다. 예를 들면 두 송 선정(宋先正)이 있을 때에 고 정승 김수항(金壽恒)과 고 중신(重臣) 김좌명(金佐明)이 함께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았는데, 재야의 숙덕(宿德)과 조정의 명신(名臣)을 고루 써서 좌우에서 인도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조종조의 융성하던 시절의 아름다운 일로서, 이 또한 이어받아 발전시켜갈 만한 하나의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얻어야만 그 직책을 수행할 것인데, 누가 합당하겠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재야의 선비 중에 이성보(李城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진실하여 귀히 여길 만하였으니, 이 선발에 꼭 적합하다. 조정 신하 중에도 합당한 자가 있는가?"
하니, 시동이 아뢰기를
"겸 대사성 윤득부가 이 직임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의리를 실천함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좋겠다. 이 두 사람을 오늘 정사에 계하하겠다."
하였다.

 

송환기(宋煥箕)를 공조 판서로 삼고,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체차하고 이경무(李敬懋)로 대신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금위 대장으로, 김사목(金思穆)을 총융사로, 이득제(李得濟)를 좌포도 대장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기·호서·호남·영남·관동의 수군 조련을 정지하였다.

 

1월 22일 계해

원자(元子) 사부 송환기와 우유선 이성보를 정중히 불렀다.

 

1월 23일 갑자

봉조하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보았다. 상이 종수의 가난함을 유념하여 그의 손자를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제수하자, 종수가 장차 손자의 임소로 가기 위하여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1월 24일 을축

승지 홍대협(洪大協)을 김포 군수(金浦郡守)로, 최헌중(崔獻重)을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교리 정동관(鄭東觀)을 강령 현감(康翎縣監)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이는 부른 명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25일 병인

총융사 김사목을 체차하고 김지묵(金持默)을 대임시켰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아뢰기를,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날 남단(南壇)과 모든 산천(山川)의 제향을 동시에 시행하는 것은 미안할 듯하여 늘 따로 길일을 가려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일순(一旬) 안에 이미 가장 길한 날을 선택하였으니, 동시에 행사하는 것도 구애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같은 날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길일만 택해서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따랐다.

 

병조가, 금군(禁軍)의 겸사(兼仕)와, 참하 수문장(參下守門將)의 승륙(陞六)하는 삭수(朔數)와, 기사(騎士)를 금려(禁旅)에 이속(移屬)하는 절목에 대하여 아뢰었다. 【하나는, 선전관이 내금위에 겸속(兼屬)된 것은 조종조의 성헌(成憲)이고, 내삼청(內三廳)에 천거된 자를 반드시 금군(禁軍)을 거친 뒤에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하는 것 또한 효묘(孝廟) 때에 수교(受敎)한 것이므로, 이제부터 구제(舊制)를 다시 복구하여, 선전관·무겸(武兼)·부장(部將)·수문장(守門將)·참군(參軍)의 참하(參下) 62인을 아울러 내금위에 속하게 하여 수교한 대로 따르도록 복구하는 것이고, 하나는 각청의 참외관(參外官) 62원(員) 내에서 선전관 14원, 무겸 12원, 참군 3원, 부장 3원을 합하여 32원을 일내금위(一內禁衛)에 속하게 하고, 나머지 30원은 5번(番)에 고루 배분하되, 선전관으로 액외(額外)의 장용위를 겸한 자를 물론하고 그 겸대한 것의 다과(多寡)에 따라 선천 부장(宣薦部將) 중에서 일내(一內)로 이속(移屬)하여 32원의 숫자에 준하도록 하고, 이내(二內) 및 일우(一羽) 이우(二羽)와 일겸(一兼) 이겸(二兼)의 5번(番)은 매번의 겸사(兼仕)를 6인이 넘지 않도록 하여 취재(取才)할 때에 적체(積滯)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면
【분류】군사-군정(軍政)

 

1월 26일 정묘

정문재(鄭文在)를 예산현(禮山縣)에 정배하고,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과 전 삼도 수군 통제사 이득제(李得濟)를 파직하였다. 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우후를 보내어 곤양군(昆陽郡) 봉산(封山)을 적간(摘奸)하였던바, 소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2천 5백여 주나 되니, 그 군수(郡守) 정문재를 파직하여 내쫓으소서."
하였다. 이에 상이 문재를 정배하라 명하고, 도신과 수신(帥臣)도 즉시 조치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파직한 것이다.

 

황승원(黃昇源)을 이조 참판으로, 신기(申耆)를 이조 참의로,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한풍(李漢豊)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월 27일 무진

신광리(申光履)를 한성부 판윤으로, 이서구(李書九)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응교 이종섭(李宗燮)을 특별히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보임하였다. 이는 부르는 명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28일 기사

원자 사부 송환기가 상소하기를,
"동궁의 개강(開講)은 참으로 더없이 중차대한 일입니다. 연초에 길일을 택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가까워지자 남은 추위가 차츰 풀리고 햇살이 점차 길어져 갑니다. 오늘의 신하 중 그 누가 감히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를 갖고 강연이 열리는 소식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변변치 못한 일개 신하가 명에 응하지 않으므로 인해 스승에게 나아가야 할 때인데도 아직 보익(輔翼)하는 방도가 지연되고 있으니 이에 이르러 신의 죄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신의 나이가 70이 꽉 찼습니다. 오랜 병증(病症)이 더욱 위독하여 아무리 무릅쓰고 억지로 나아가려 하여도 형편이 도저히 되지를 않습니다. 또 설사 신의 병이 어느 정도 무리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초야에서 나와 대궐 문을 무릅쓰고 들어간다면 아둔한 한 늙은이가 영광과 총애를 탐하고 연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무엇을 빙자하여 얼굴을 들고 원자의 서연(書筵)에 나가 강론을 한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중하게 다스리고, 반드시 견문이 넓고 도술(道術)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보도하는 책임을 맡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날마다 경이 올라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경의 소를 보건대, 경의 뜻이 더욱 견고하여 아직도 마음을 바꿔먹지 않고 있으니, 경은 재상의 집안 사람으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경이 길을 떠나는 때에 가서야 길일을 택할 것이니, 경은 곧 올라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자의 우유선(右諭善) 이성보가 상소하기를,
"원자의 개강에 대한 명이 이미 있었으니, 이는 국가의 더없는 큰 경사입니다. 임금의 의표(儀表)가 서연의 휘장에 비춘 것은 장차 성학(聖學)을 계승해 밝혀서 억만년 태평성세의 터전을 삼으려고 한 것이니, 응당 영명한 요속(僚屬)을 잘 가려 뽑아서 좌우에 두고 경전을 강명하여 덕성(德性)을 보양하는 도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과 같이 못난 자에게 이런 임무를 특별히 맡기시니,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 신에게 취할 것이 뭐가 있기에 이런 잘못된 은혜를 내리신단 말입니까? 신에게 조금이나마 이를 감당할 만한 가망이 있다면 강석(講席)에서 가까이 모시고 온윤(溫潤)하고 문아(文雅)하심을 우러러 보는 것이 어찌 신하로서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수와 의리를 헤아려 볼 때 감히 무릅쓰고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직명(職名)을 체차하고 이를 거스른 죄도 아울러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처럼 대부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 직책에 꼭 들어맞다. 더구나 재야의 근칙(謹飭)한 선비가 조정에서 일하던 사람보다 나은데 말할 게 있겠는가. 요원(僚員)을 갖춘 다음에 길일을 택하겠으니, 그대는 곧 올라오라."
하였다.

 

1월 29일 경오

상이 현륭원(顯隆園)을 전알하기 위하여 어가(御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렀을 때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수직관(守直官)을 변장(邊將)으로 파견할 것을 명하였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이르러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출발하여 시흥(始興)의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다가 저녁에 화성 행궁(華城行宮)에 유숙하였다.

 

상이 성을 순행하였다. 화양루(華陽樓) 북쪽에서 시작하여 화서루(華西樓)를 지나 공심돈(空心墩)에 이르러 각신(閣臣)과 승지에게 이르기를,
"공심돈은 우리 동국(東國)의 성제(城制)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
하였다. 장안문(長安門)을 지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이르러 조그만 과녁을 설치하고 임금이 화살 삼순(三巡)을 쏘아 삼시(三矢)를 맞힌 뒤 각신(閣臣)과 장신(將臣)에게 짝지어 활을 쏘라고 명하였다.
상이 정자 아래에서 백성들이 꽉 둘러서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에게 명하여 그중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활쏘기를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을 한 1인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고 풍악을 내려서 보내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임금이 칠언 소시(七言小詩)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서유린(徐有隣)에게 이르기를,
"고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훈련 도감에서 경기 지방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훈국의 군사 1만 명 중 5천 명은 서울에서 조련하고 5천 명은 둔전에 나가 경작하게 하여 군대와 농사가 서로 의지하는 의의를 살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취지가 매우 좋았으나 중지되어 실행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장용영(壯勇營)에 대하여 이 제도를 대략 모방해 경기의 고을에 향군(鄕軍)을 설치하여 일영 오사(一營五司)의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대개 서로 빙 둘러싸고 수레바퀴와 덧방이 서로 도와주는 것과 같이 하려는 취지에서 나왔던 것이다. 원소(園所)에 행차할 때 본부(本府)의 5개 초군(哨軍)만으로 돌아가며 어가를 따르게 할 경우 항오(行伍)가 단약(單弱)하고 군용(軍容)이 미비하다. 그래서 수어청의 출진(出鎭)하는 군제를 바로잡아 고칠 때 여정(餘丁) 8백여 인이 남기에 연(輦)이 지나가는 광주(廣州)·시흥·과천 및 화성의 속읍(屬邑)인 용인(龍仁)·안산(安山) 등지의 길에 6개 초(哨)를 설치하였다가 어가가 지나갈 때 징발하여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어청의 소관으로 선혜청에 떼어 놔둔 쌀 1천 석과 돈 3천 냥을 본영(本營)에 갈라 주어 상번(上番)하는 군인의 급료에 쓰게 하고, 이어서 향군이 있는 각 고을에 둔전을 설치하여 그 세입(稅入)으로 군인들이 왕래할 때의 양식과 의복의 비용으로 삼으려 하였다. 먼저 산 토지에서의 소출이 군수(軍需)로 들어가는 비용에 맞먹는가?"
하니, 유린이 대답하기를,
"광주 둔전의 수입은 부족할 염려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 더 사들여야만 수입과 쓰임이 비로소 같게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영(本營)에 향군(鄕軍)을 설치한 것은 그 의의가 있다. 최초에 양근(楊根)·가평(加平)·지평(砥平)에 먼저 2개의 초(哨)를 내었는데, 이는 둔전이 군인들의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군대와 농사가 서로 의지할 수 있다. 파주(坡州)에 또 1개의 초를 내었는데 양근 등 세 고을의 예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토지가 너무 적고 군인들도 각처에 흩어져 있어서 가까이 있는 자는 스스로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멀리 있는 자는 스스로 지을 수 없다. 이것은 벌써 세 고을의 예와는 좀 달라진 것이다. 그 뒤 또 양주(楊州)에 1개의 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대뜸 세력이 있는 백성들에게 동요되고 만다. 양주에는 서울의 사대부 토지가 많아서 사들이기로 결정하여 값을 치르기도 전에 반드시 먼저 소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부득이 우선 늦추면서 차츰 시작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경기 감영의 무조(貿租)할 것 중에서 약간의 돈을 떼어내어 경기 고을의 환모(還耗)를 바꾸어서 1개 초군(哨軍)을 먹일 방도로 삼았다. 그 뒤 고양(高陽)에 또 1개의 초를 두고 총융청의 법외(法外)의 보군(保軍)을 참작해 감한 뒤 거두어들인 신전(身錢)의 여분으로 먹일 방도를 삼았으며, 그 뒤 또 수원에 5개의 초를 설치하고 3만 냥의 공화(公貨)를 나누어주어 해도(該道)의 좁쌀 1만 석을 사들여서 모곡을 취하여 먹이도록 하였다.
대체로 양주·고양·수원의 군대를 먹이는 데에 쓰이는 군수(軍需)의 조달 방법은 그 명분이 나의 본래의 뜻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최초에 양근 등의 고을에 설치하였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바로잡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공사간(公私間)의 용도를 모곡으로 시작하는 것은 크게 좋지 않은 방법이다. 쥐나 새가 축낸 모곡을 관장(官長)이 주관하는 것도 이미 매우 구차한 일인데 하물며 나라이겠는가. 이것을 한번 바로잡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동장대(東將臺)에 나아가 대에 올랐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성제(城制)가 고루(固陋)하여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본래부터 치첩(雉堞)의 제도가 없었다. 그런데 정승 김종서(金宗瑞)가 쌓은 종성(鍾城)의 성제가 유일하게 중국의 제도를 대충 모방하였는데, 그 형상이 규형(圭形) 같고 안이 상당히 넓고 위는 처마를 얹은 듯하여 내려다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이 역시 치첩의 제도만은 못하다. 대개 옛날의 성 제도는 치첩으로 첫째를 삼았을 것인데, 우리 나라의 성은 전체가 둥글어서 모서리가 없다. 그래서 성 위에 담벼락처럼 죽 둘러서서 지켜야만 비로소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새로 쌓은 성은 처음으로 치첩의 제도를 도입하여 거리를 계산하고 따로 모서리를 만들어 성 전체를 싸안았으므로, 매 치첩에 두서너 사람만 세우더라도 좌우를 살피기에 편리하여 적의 동태를 엿보기 쉽고, 밑에서 쳐다보면 도리어 치첩을 지키는 사람의 수를 분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제야 우리 나라도 성의 제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초루(譙樓)나 돈대(墩臺) 등속은 가끔 엉뚱한 모양만 낸 것 같아서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유수(留守)와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이 다투어 논란하던 것으로 결국 도청의 주장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지만 나의 본뜻은 아니다."
하였다.
각건대(角巾臺) 앞길을 거쳐서 창룡문(蒼龍門)의 곡성(曲城) 밖으로 나가 남수문(南水門)의 초돈(譙墩) 윗길을 지나 팔달문(八達門)에 이르러서 문루(門樓)에 올라 쉬고는 서장대(西將臺)에 이르러 대 뒷쪽의 소랑(小廊)에 들러서 신하들에게 식사를 베풀었다.
밤에는 장대(將臺)에 올라 연거(演炬)를 관람하였다. 선전관이 꿇어 엎드려서 아뢰고 나서 신포(信炮) 세 발을 터뜨리고 횃불 세 개를 붙여서 올리자 대 위에서 네 개의 횃불을 올리면서 모든 성가퀴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렸다. 호포(號炮)를 한 방 터뜨리고 천아성(天鵝聲)을 불고는 횃불을 점검하며 납함(吶喊)하기를 세 차례 하였다. 그리고는 지금(止金)으로 일호(一號)를 장(掌)하고 이호를 장한 뒤 연거가 끝났다.
행궁에 돌아와서 하교하기를,
"화성 서장대에서 오늘 밤 훈련은 생략하고 연거(演炬)별로 호령만 실시하였지만 응접(應接)함이 격식에 맞고 구율(彀率)025)                  에 차착(差錯)이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이 성의 정군(丁軍)으로 단속이 잘 된 입방군(入防軍)과는 더욱 다르다. 그런데도 이처럼 잘 익숙히 훈련되었으니, 장수에 적임자를 얻은 효과를 보게 되어 매우 가상하나 이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이다. 그리고 조련이 있기 전에 새 성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공로가 크고 많다. 어찌 말을 달려 전쟁한 공로에 뒤지겠는가. 화성 유수        조심태(趙心泰)에게 특별히 전지와 백성을 떼어준다. 성첩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이다. 잘살도록 하는 방법을 지금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강구하여 마련하는 중이다. 그리고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 또한 사람을 화락하게 하는 한 방법이니, 성 안팎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당년의 군향곡(軍餉穀)과 환곡(還穀)에 대한 모곡(耗穀)을 특별히 면제해 주어 그들의 기대하는 마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1월 30일 신미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올렸다. 상이 원사(園司) 조용진(趙用鎭)에게 이르기를,
"능원(陵園)의 제도에 더러 왼쪽을 비워 놓고 동봉(同封)하지 않는 일도 있으나, 나는 남다른 정리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후일에 상례(常例)를 따르지 않으려고 회격(灰隔)은 만석(蔓石)까지만 하고 복부형(覆釜形) 이상은 당초에 석회를 쓰지 않아서 왼쪽은 곧 전지(全地)이다. 그런데 난간석(闌干石)이 더러 작은 틈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용진이 아뢰기를,
"석물(石物)은 오른쪽에 힘을 썼기 때문에 왼쪽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에 대하여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지 최고의 제도를 쓰려다 보니 준수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어 지경 안에 심은 나무를 두루 돌아보고 성황산(城隍山) 밑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여러 신하들에게 식사를 하게 했다. 저녁에는 화성 행궁에 머물렀다.

 

이제부터 원향(園享) 때의 집사관(執事官)은 화성의 판관·중군(中軍)과 영화 찰방(迎華察訪) 및 성 내외의 문·음·무(文蔭武)의 조관(朝官)으로 통틀어 차출하되, 왕래할 때 노자를 알맞게 지급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상규(沈象奎)·여준영(呂駿永)·정만석(鄭晩錫)을 화성·광주·과천·시흥 고을의 어사로 파견하여 행차 때 연로(沿路)의 폐해를 살피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와서 복명하였다. 상이 그들을 불러 보고, 범법한 서예(胥隷)들을 해당 관사에 회부하여 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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