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신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일 정유
이가환(李家煥)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경외(京外)의 살옥(殺獄)을 심리하였다.
12월 3일 무술
부교리 박윤수(朴崙壽)가 상소하여, 정리곡에 관한 죄를 범한 제읍(諸邑)의 수령에게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할 것을 청하고, 또 논하기를,
"영남 감사의 장계가 불성실하고 무엄한데 범한 바를 구명해 보면 죄를 범한 수령보다 더 심함이 있으니 엄히 처분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제도(諸道)의 장계를 비국에 봉하여 두었다가 맥추(麥秋)를 기다린 뒤에 처치하게 한 것은 느슨히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시임·원임 각신(閣臣)을 불러보고 전교하였다.
"오늘은 옛날을 생각하는 의사가 배나 더욱 간절하다. 그런데 금년은 그의 사판(祠板)이 그 아들의 읍치(邑治)에 있으니 이날을 잊지 않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헛되이 지날 수 있겠는가. 작고한 영의정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의 사판이 있는 곳으로 도내의 수령 중 승지를 지낸 사람이나 혹은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라."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鐘秀)에게 유시하였다.
"이 날이 오면 늘 경들을 불러 보고 선대왕(先大王)의 은혜로운 유시를 함께 칭송하였는데, 금년은 경이 시골에 있어서 보지 못하게 되니 매우 서운하다. 입시한 사관을 보내어 추운 철을 당하여 경의 안부를 묻는 바이다."
북청부(北靑府)에 유배한 죄인 정호인(鄭好仁)을 석방하고, 감찰(監察) 이학빈(李學彬)을 4품직으로 뛰어 올려 제수하고 하교하기를,
"근래에 세상 풍습과 조정 분위기가 날마다 더욱 잘못 빠져 들어간 나머지 명의(名義)를 말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큰 기강이 무너지고, 명교(名敎)를 행함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정학(正學)이 거칠어졌으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 사대부가 크게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수치스러운 일은 놔두고라도 목하의 명의(名義)마저 내가 또한 유의하여 권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사람이 명의가 어떠한 물건인지 모르게 될 터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오늘을 당하여 이 날을 기념하고자 한다면 이 날 공적을 세운 집안을 어찌 괄시할 수 있으랴. 일전에 치대(置對)했을 적에 특명으로 용서해주도록 한 것이 어찌 그를 위한 것이었겠는가. 곧 그의 선인(先人)인 충목공(忠穆公)229) 이 당일 공을 세웠던 것을 생각해서이다. 지금까지 낮은 품계에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은 음보(蔭補)하는 의리가 아니다. 감찰 이학빈에게 곧바로 4품직을 제수하라.
그때에 공을 세운 것을 내가 어찌 차마 잊겠는가. 그렇게까지 처분했던 것도 바로 잊지 못한 때문이고 처분이 이에 그치는 것도 잊지 못해 그러는 것이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날을 관외(關外)의 적소(謫所)에서 지내게 한다면 이 어찌 처분을 그렇게까지 하고 처분을 이 정도로 그치는 본의이겠는가. 본사(本事)가 실지 죄정(罪情)이 없는 데에서 나왔음은 이미 장전(帳殿)에서 알았으나, 그가 공을 세웠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기를 요구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북청부(北靑府)에 유배된 죄인 정호인을 특별히 용서하여 석방하라. 그리고 작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도 미처 숙배(肅拜)하지 못했다 하니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지사(知事)에 임명토록 하고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영수각(靈壽閣)에서 예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상소하여, 정호인에게 중추부지사의 직함을 주라는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작년 처분이 이에 이른 것과 오늘날 처분이 이에 그친 것으로 말하면, 일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한 가지이니 곧 이른바 ‘행위는 같으나 실정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찌꺼기와 재처럼 조금밖에 다르지 않은 분부를 가지고 의리에 해가 되고 이치에 어그러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달에 견책을 내리고 이 달에 석방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의리를 붙들어 세우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속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부응교 윤서동(尹序東)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차하여 정호인을 특별 석방하라는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의금부사 민종현(閔鐘顯)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정호인을 특별 석방하라는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4일 기해
윤장렬(尹長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기를,
"신의 진실된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지(聖志)를 밝히고 성덕(聖德)을 높이는 소이가 어찌 천지의 큰 의리를 세우는 데에 있을 뿐이겠습니까. 요즘 정리곡(整理穀)에 관한 일이 또한 그 한 단서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자궁(慈宮)의 경사스러운 생신을 만난 것을 기쁘게 여겨 다같이 즐거워하는 성대한 은택을 크게 펼치셨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 톨의 쌀로서 만 개가 되고 팔도에서 백 대(代)토록 전하게 할 계획으로 정리곡을 3백 60개의 목·부·군·현(牧府郡縣)에 두시자 효도를 일으키는 정사에 서민이 고무되었습니다. 따라서 무릇 도신과 수령이 된 사람이 조금이라도 이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삼가지 않아 백성이 은택을 입지 못하게 된다면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원근 민읍(民邑)에서 전하는 말을 혹 들은 것이 있기에 풍문으로 전하는 것의 허실(虛實)을 논하지 않고 삼가 숨김없이 아뢰어야 한다는 의리에 입각하여 우러러 진달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일전에 제도(制道)의 사계(査啓)가 아울러 이르렀는데 신이야 망령된 말을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진실로 조정 입장에서는 기강이 무너지지 않았음을 축하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 가지라도 허술하게 조사를 시행하여 대충 봉계(封啓)함으로써 죄가 있는 자가 징계되지 않는 일이 있게 된다면 신의 한 마디 말로 인해 기강을 거듭 허물어뜨리는 것이 되니, 이는 더욱 신이 속죄하기 어려운 죄라 할 것입니다.
아, 요즘 풍속을 보면 성지(聖志)를 밝히고 성덕을 높이는 등의 말을 가지고 조롱하고 비방하는 자료로 삼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함을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한다는 성인의 가르침도 있고 보면, 비록 이것을 가지고 만 사람이 신을 비방하더라도 신은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망령된 말을 한 것에 이르러서는 본래 거기에 해당되는 율(律)이 있습니다. 이조 판서의 지위에 있으면서 받아야 할 형률을 받지 아니하면, 사람마다 모두 ‘저 사람은 벼슬은 높고 직무는 친근하여 요행히 죄를 면하였다.’고 할 것이니, 그렇다면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이 도리어 죄를 범한 수령이 죄를 벗어나 무사한 것보다도 심함이 있습니다. 신의 직을 삭탈하고 신의 죄를 감정(勘定)케 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라고 비답하였다.
12월 5일 경자
불운정(拂雲亭)에 임어하여 표적에 13 순배 활을 쏘아 31점을 얻었다. 각신(閣臣)과 승지에게 명하여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임어하여 감제시(柑製試)를 행하였다. 이때 과장(科場) 설치를 워낙 늦게 하여 과거 성적이 나올 때는 바로 깊은 밤이 되고 말았다. 우의정 이병모가 독권관(讀券官)으로 고시(考試)하였는데, 유학(幼學) 김명육(金命堉)이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관례에 의하여 급제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이병모가 물러나와 다시 시권(試券)을 고열(考閱)해 보니 극히 거칠고 졸렬하였으므로 드디어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김명육의 시권을 자세히 보니 염(簾)이 어긋나고 대(對)가 맞지 아니하여 정식(程式)에 크게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자체(字體)가 기울고 비뚤어져서 글씨가 괴이함에 가까왔습니다. 그런데 신은 정신이 모두 나가서 혼동한 나머지 우등으로 매겼습니다. 지금 문체를 바로잡고 필법을 바르게 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시권은 결코 유생들에게 반시(頒示)할 수 없으니, 바라옵건대 명하여 빼내 버리게 하고 이어 신의 죄를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규(科規)가 지극히 엄하니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되, 경은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6일 신축
하교하였다.
"감제시(柑製試) 때에 급제를 하사하는 것이 꼭 금석지전(金石之典)은 아니다. 그런데 어제 선비들의 엄숙하고 장한 모습은 근래에 처음 보는 것인데, 수석을 차지한 사람을 빼내 버림으로 인하여 과장 안의 여러 유생으로 하여금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흥기시키고 권장하는 뜻이겠는가. 옛날 선조(先朝)께서 절제(節制)에 친림(親臨)하셨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서정(西庭)의 유생들이 금령을 범했다고 하여 과거 시험을 정지하게 했다가 이튿날에 또 구궐(舊闕)에 행차하도록 명하여 다시 시험보이면서 벌을 풀어주고 직부(直赴)를 허락했으며 이미 시험본 동정(東庭)의 유생들도 다시 응시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거룩하신 뜻을 우러러 알 수 있다. 내일 춘당대에 친림(親臨)하여 다시 시험보일 것이니, 이를 분부토록 하라."
12월 7일 임인
춘당대에 임어하여 감제시를 다시 행하고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도 겸하여 행하였다. 감제시의 수석을 차지한 유학 이진숭(李鎭嵩)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이의필(李義弼)의 직을 파면하였으니 감제시에 압반(押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만수(李晩秀)를 대신 임명하였다.
12월 11일 병오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납향(臘享)의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았다.
12월 12일 정미
하교하였다.
"호서의 농사 형편이 영남과 호남보다 조금 낫다고 하나, 재난을 심하게 입은 곳은 민정(民情)의 시름겨움이 반드시 영남이나 호남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해가 멀지 않아 바뀌게 되었으니 지금 민간의 형세가 어떠할지 알 수 있다. 재난이 가장 심한 고을로서 신환곡(新還穀)을 마련하기 어려운 부류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수량을 나누어 정퇴(停退)하도록 하라."
12월 13일 무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호남의 유개인(流丐人)이 호서지방으로 흘러 들어감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곳곳에 유둔(留屯)하고 있다 합니다. 호남의 도신과 수령에게 신칙하여 구휼하는 방도를 강구해서 소문을 듣고 도로 모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년 농사와 민간의 정세를 보건대 세금 독촉에 부대끼는가 하면 먹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형편이니, 반드시 유리(流離)하여 다른 곳으로 갈 근심이 있을 것인데, 일념으로 걱정되어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느슨한 적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더욱 몹시 불쌍하고 측은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뒤에 어찌 차마 안고 이끌며 다른 곳으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연전에 관서(關西)에서의 일처럼 혹 쇄환(刷還)하는 일이 있게 되면 도리어 그 본성을 따르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영남과 호남의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위급함을 구제하고 진휼(賑恤)하는 방도에 특별히 힘써서 유리하는 자와 거주하는 자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도로 모여서 마음 편히 고장에 살게 하는 실효가 있게 하도록 하라. 도백과 수령의 근만(勤慢)은 저대로 고찰(考察)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뜻을 아울러 분부하라."
하였다.
훈련원에서 본원(本院)의 절목을 올렸다. 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
【"본원의 설치는 옛날 국초(國初)의 성대할 때에 있었는데, 훈련관(訓鍊觀)으로 일컫다가 관(觀)을 고쳐 원(院)으로 하였으며 군자 좨주(軍諮祭洒)의 직임과 사마 참군(司馬參軍)의 칭호가 질서정연하게 갖추어져 찬란하게 볼 만하였습니다. 한 번 원(院)을 건립하여 관원을 설치한 뒤로부터 무예를 훈련시키고 병사(兵事)를 연습시켰습니다. 예법은 맹추월(孟秋月)에 인사를 선발하는 것을 모방하고 재예(才藝)는 당(唐)나라 장수 학정옥(郝廷玉)이 법을 아는 것보다 많았습니다. 무과를 거쳐 병권을 장악한 이가 모두 이 원(院)과 이 관(觀)에서 출발하였는데 지금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삼가 문양공(文襄公) 양성지(梁誠之)의 비변(備邊) 10책(策)을 살펴 보건대 ‘나이 40 이하의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의 갑사(甲士) 중에 기식(器識)이 있고 문자를 아는 자를 자원에 의해 취하여 훈련관에 입학시키고 입번(入番)하거나 순작(巡綽)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무경(武經)》을 습독(習讀)케 하되 그 격식은 성균관의 예를 본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훈련관은 곧 송조(宋朝)의 무학(武學)과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훈련관에 독소(纛所)와 함께 태공망(太公望)의 사당인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세우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60일 동안 훈련관에 나아가 장(杖)을 연습하고, 방패(防牌) 쓰는 법도 훈련관에서 연습하게 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훈련관 습독관(習讀官)은 《통감(通鑑)》·《무경(武經)》·《장감(將鑑)》·《병요(兵要)》·《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을 읽히고 있는데 《통감》을 제외하고 혹 《병정(兵政)》을 추가하소서.’ 하였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금위(內禁衛)는 병조에서 도총부(都摠府)·훈련원 당상과 같이 시취하며 모든 군사의 시취도 같다. 다만 정병(正兵)의 연재(鍊才)는 훈련원이 시취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과는 문과(文科)의 예에 의하여 제수하되, 별시위(別侍衛) 및 훈련원 권지(訓鍊院權知)를 나누어 차임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2월과 9월의 20일에 본조와 도총부의 당상이 교외(郊外)나 훈련원에서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족친위(族親衛)·각품(各品)의 반당(伴倘)·장용위(壯勇衛)의 병기를 점고(點考)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출직(黜直)하는 군사는 상번(上番)한 군사를 도와 순찰하는 외에는 3 일에 하루는 훈련원에 나아가 진법을 연습하고 활을 쏜다. 이것을 관장하는 부장(部長)은 본원의 당하관과 같이 시험을 점검한다.’ 하였습니다. 《속대전(續大典)》에 이르기를 ‘금군(禁軍)의 취재(取才)와 내삼청(內三廳) 출신의 취재는 병조·도총부·훈련원이 시재(詩才)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릇 거자(擧子)의 정거(停擧)는 훈련원의 참외(參外)인 시임 3원(員)이 모여 의논한다.’ 하였습니다. 또 고(故) 봉사시 정(奉常寺正)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본원의 중창상량문(重刱上梁文)을 살펴보니 ‘병조 판서 월사 상공(月沙相公)이 옛것을 개혁하는 데에 마음을 두고 새롭게 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층계 섬돌과 넓은 뜰은 한(漢)나라의 평락관(平樂觀)보다 넓고, 굵은 기둥과 큰 집은 위(魏)나라의 화림원(華林園)보다 고대(高大)하다.’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관제(官制)의 연혁(沿革)이 일정하지 않고 원해(院廨)의 흥폐(興廢)가 때가 있었다는 것과 도감(都監)의 설치가 이 원(院)에서 비롯되고 종루(鍾漏)의 관장(管掌)을 이 관(觀)에 붙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 17년에 본관(本觀)에서 속전(屬田)을 마련하여 무사를 기르게 할 것을 청하였고, 세조조(世祖朝) 4년에 훈련관에 명하여 진법을 바로잡게 하였습니다. 성종조(成宗朝) 원년에 명하여, 각년(各年)의 무과 출신으로 한산(閑散)하여 소속이 없는 자는 품계에 따라 습독 권지(習讀權知)로 차임하고, 날마다 본원에 나아와 병법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며, 당상이 문·무의 재능이 있는 자를 고찰하여 병조와 도총부에 보고하여 시취(試取)해서 동·서반(東西班)의 수령·첨사(僉使)·만호(萬戶)에 조용(調用)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4년에 본원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어 2품 이상으로 나이 70이 된 사람은 모두 나아오도록 허락하였으며, 도승지에게 명하여 선온(宣醞)하게 하고 드디어 매년 중구일(重九日)을 잔칫날로 삼았습니다. 우리 중종조(中宗朝)에 와서 중흥(中興)의 대업이 실로 본원에 기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한(漢)나라의 남북군(南北軍)이나 당(唐)나라의 천책부(天策府)와 같은 대열에 서면서 존엄해졌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가 능마아청(能麼兒廳)을 설치하여 병서(兵書)의 고강(考講)을 관장하게 하고, 당상과 낭청은 도정(都正)과 습독관(習讀官)이 예겸(例兼)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先朝) 때에 와서 상신(相臣)이 강연에서 아뢰자 본원(本院)에 능마아청을 합하였고 특명으로 중수(重修)하여 단청이 일신되었습니다. 하늘이 옥련(玉輦)을 돌리어 왕의 덕화(德化)를 다시 입게 되고 말위(靺韋)가 영광스럽게 움직이니 초목에 빛이 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문교(文敎)를 크게 펴시어 억조 백성은 형용하기 어려운 큰 교화를 입고 사방은 소리 없는 음악을 듣게 되니, 장수를 누리고 사람을 진작시키는 아름다움이 우주에 성대히 넘쳤습니다. 이윽고 또 한 번 늦추고 한 번 조이는 도를 깊이 생각하시어, 병학(兵學)에 관한 모든 책을 수집하고 무예에 관한 강론을 집성(集成)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구한 도인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니 보고 느껴서 사방이 바람처럼 고무되었습니다. 어가(御駕)가 남영(南營)에 임어하시자 마자, 따뜻한 윤음(綸音)이 북신(北宸)에서 곧 내려졌는데 자세한 건물을 짓는 책임과 간절한 유지의 방도였습니다. 이에 광대한 건물이 함께 이루어지니 한 원(院)이 굉걸(宏傑)합니다. 날아오를 듯한 건물은 고대(高大)하고 화려하니, 아, 성대합니다. 이곳에 있게 된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흥기(興起)하고 분발해서 우리 성상의 도야(陶冶)하고 진작시켜 주시는 성대한 덕과 직극한 뜻에 부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시행해야 할 조건을 아래에 개록(開錄)합니다. 금군(禁軍)을 창설하던 초기에 반드시 이 훈련원에서 무예를 익히고 혹 금중(禁中)에서 열병(閱兵)을 시험하기도 하였으니, 굉원(宏遠)한 계책과 경장(經長)한 도모에 대해 칭송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각영(各營)의 삭조(朔操)와 중일제(中日製)의 예에 의하여 매월 조련(調鍊)을 행하고 가운데 달에는 사습(私習)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병조 판서가 교외에서 군대를 훈련하는 것이 군대를 훈련하는 대요(大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옛날 용장(龍將)과 호장(虎將)으로 나누어 과습(課習)을 훈련시킨 것이 성대하게 성과가 있었으므로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제도로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훈련원의 건물이 다시 새롭게 된 상황에서 전례를 참작하여 다시 달마다 연습하는 옛날 규례를 신명(申明)하는 것이야말로 합당하고 실지를 힘쓰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별장(別將)이 반드시 매월 초하루에 본원(本院)에 모아 나아가고 물러나며 달리고 쫓아가는 절도를 연습시키는 동시에 봄가을에는 병조 판서가 교장(敎場)에서 조련을 시행하여 군대의 위용을 떨쳐야 할 것입니다. 교장을 노량(鷺梁)으로 확정한 것은 본래의 옛날 법이 못됩니다. 남소영(南小營)·사아리(沙阿里)·모화관(慕華館)을 막론하고 편리할 대로 설행(設行)함으로써 구례(舊例)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습(私習) 및 조련(組鍊)과 관련하여 응당 행해야 할 사례(事例)는 병조로 하여금 절목을 찬성(撰成)하여 계하(啓下)받은 다음 거행하게 하소서.".】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6면
【분류】군사-군정(軍政)
12월 15일 경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내년도 춘등(春等)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장용영 제조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호서 환곡(還穀)의 지난해 모곡조(耗穀條) 2천 석을 특별히 구획(區劃)할 곳이 없으니, 금년 모곡 2백 석을 합하여 본영의 군기색(軍器色)에 옮겨 붙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영남의 균역청 무역미(貿易米) 가운데 쓰고 남은 것이 2천 6백여 석이 있으니 본영의 군기색에 옮겨 붙이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6일 신해
조진관(趙鎭寬)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일차(日次) 유생의 전강을 시험보였다.
12월 17일 임자
검열 김이영(金履永)이 주서(注書)로 6품에 올랐다. 검열 오태증(吳泰曾)이 상소하여 도로 강등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하위(下位)에 있는 자가 6품에 오를 경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소장을 올려 그냥 머물러 두게 하는 것이 예문관의 규례라고는 하나 불합리하게 취한 거조와는 차이가 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2월 18일 계축
신광호(申光祜)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의필(李義弼)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19일 갑인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 문신의 친시(親試)와 선전관의 시사(試射) 및 영남·관서·관북 무사의 강사(講射)를 행하였다.
주서(注書)에 조석중(曺錫中)·홍석주(洪奭周) 【정문시(鄭文始)가 천거함.】 ·윤명렬(尹命烈)·구득로(具得魯) 【이서(李垿)가 천거함.】 ·유태좌(柳台佐)가 【유원명(柳遠鳴)이 천거함.】 천거되었는데, 조석중을 승정원 주서로 삼았다.
정언 홍치영(洪致榮)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이 중신(重臣)의 대변(對卞)한 소장을 보건대 감히 태연히 있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아, 이 중신이 인사권을 잡고 있을 적에 속셈을 살피고 이익만 챙기려 하면서 오로지 재주만 부리려 한 것이 하나뿐이 아닙니다만, 시험삼아 수령을 주의(注擬)한 것을 가지고 논해보겠습니다.
문관 수령의 경우야 진실로 이미 물정(物情)에 맞지 않았거니와, 무변(武弁)의 경우도 들을 수 없는 추잡한 말이 더욱 많았습니다. 묵은 빚을 갚기 위하여 부유한 고을에 차임해 보내어 많은 뇌물을 바치도록 요구하고 물산(物産)을 써서 주었으니, 비단을 선물로 받고 가죽신을 보내주었다는 비평도 그 탐욕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심지어 수령을 차출할 적에는 또 매우 놀랍고 통분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점찍어 놓고 있으면서 먼저 규정상 부임하기 어려운 사람을 재차 천거하여 수망(首望)에 의주(擬注)함으로써 짐짓 상의 낙점(落點)을 시험해보고는 결국에 가서는 사정(私情)을 써서 몰래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차지하곤 하였습니다. 당당한 전형(銓衡)의 자리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행태를 보여왔으므로 제목(題目)이 한 번 나오기만 하면 침 뱉고 욕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충후(忠厚)한 뜻으로 우선 일일이 들지 않고 다만 제방(堤防)230) 을 허물어뜨린 잘못을 논하여 관리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의리를 붙였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중신의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허물로 받아들여 속히 개과천선하도록 도모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잘못을 합리화시키는 것도 부족하여 성상을 속이고, 탓하는 것도 부족하여 같은 조정의 사람을 욕하고 있습니다. 신은 얼굴을 들고 같은 반열에 있을 수 없으니 신의 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하는 것을 어찌 저처럼 하여 충후한 풍속을 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한 일이 매우 옳지 못하다. 추고(推考)하라."
하고, 이윽고 하교하기를,
"언관(言官)이기 때문에 엄히 처단하지 않고 완전하게 되기만을 요구하였다마는 피혐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탄핵한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더구나 말을 구성할 적에 갑절이나 심함이 있으니 입버릇이 매우 좋지 못하다. 다시 생각하니 풍속을 돈독히 하는 도리상 언관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으니 체차하라."
하였다.
사복시(司僕寺)가 아뢰었다.
"각도의 목장마(牧場馬)로서 금년에 유방(留放)하고 있는 수효는 총 6천 9백 49필입니다."
12월 20일 을묘
주자소(鑄字所)에서 새로 인쇄한 《춘추(春秋)》를 올리니,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친히 받았는데, 총재관(摠裁官) 이하가 궐정에 들어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의식대로 책을 올렸다. 하교하기를,
"《춘추》는 성인이 대일통(大一統)한 책이다. 삼대(三代) 왕의 심법(心法)이 공자를 기다려 밝아지고 부자(夫子)의 필법(筆法)이 주자(朱子)를 기다려 나타났다. 그런데 다만 현재 행해지고 있는 책은 경(經)과 전(傳)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우리 성조(聖祖)께서 유신(儒臣)에게 나누어 명하여 예(例)를 바로잡고 의(義)를 바르게 하여 경(經)을 강(綱)으로 삼고 전을 목(目)으로 삼아 대일통의 의의를 붙여서 성취한 것을 허물어짐이 없게 하였다. 다행히도 2백 년 동안 미처 겨를이 없어 못하던 끝에 찬술하여 이제 와서 비로소 완전히 인쇄해서 책을 올리는 예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세모(歲暮)를 만나 양(陽)이 회복되는 조짐을 보게 되니 더욱 기쁘다. 올린 《춘추》 1본(本)은 춘추관에 보관하고, 감독한 제신(諸臣)에게 각각 1부씩 반사(頒賜)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총재관 채제공과 이병모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그리고 행 호군 이서구(李書九)는 편집하고 교열한 공로가 있다 하여 특별히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고, 동지돈녕부사 조윤형(曺允亨)과 인천 부사(仁川府使) 황운조(黃運祚)는 모두 경문(經文)을 선사(繕寫)한 공로가 있다 하여 가자(加資)하였다.
초계 문신과 선전관의 1년간 시험 성적을 합산하여 상을 내렸다. 차대(次對)를 행하고 윤대(輪對)를 겸하여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오로지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다. 그런데 시종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인데 두루 시험해 보는 것이 오히려 음관이나 무변보다도 못하다. 대개 무신을 수령으로 임명한 것은 명종 때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음관을 보임하는 법은 그들에게 노성(老成)한 전형(典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일 국조(國朝)에서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은 대경법(大經法)으로 살펴 본다면 어찌 시종신을 도리어 음무(蔭武)보다도 못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근래 시종신은 대부분이 빈궁하다. 수령도 오로지 녹을 받아 먹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마는 시종도 어찌 굶주리고 배고픈 것으로써 마음을 삼겠는가. 그러나 조정의 도리로는 이미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았고 또 선발하여 시종의 반열에 둔 이상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향안(香案) 앞에 출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 대정(大政)을 당할 적마다 누누이 하교하였으나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전관(銓官)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지금 이 성상의 하교는 실로 시종신을 예우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찬탄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이 녹사(祿仕)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 곧 1백여 년 이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왔으므로 대정(大政)을 행하는 날 들어 신칙하였는데 다만 지상(紙上)의 공언(空言)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번에 선소(宣召)하는 일이 있게 되었던 것인데 읍과 도의 천거에서 두루 다 찾아내는 방법을 다하지 못한 까닭으로 갔다왔다 하느라 어지럽고 번거롭기만 할 뿐 마침내 유명무실하다는 탄식이 있게끔 하였다. 그러니 초야의 기국(器局)을 가진 인사를 장차 어떻게 조정에 나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충신은 반드시 효자에게서 구한다.’ 하였고 또 ‘고가 세족(故家世族)을 병풍과 울타리로 삼는다.’ 하였다. 비록 노성한 사람은 없더라도 모범적인 사람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저 호(湖)·영(嶺)의 사방 수천 리 되는 지방으로 말하면 그 풍속은 추(鄒)·로(魯)231) 와 같고 그 업은 시서(詩書)이니, 선배의 유풍(遺風)이 본래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가 세족의 가문에 태어나서 선조의 교훈을 행하고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하여 나와서 벼슬할 만한 적임자가 어찌 없음을 근심하는가. 다만 보고되지 않아서 쓰지 못할 뿐이다. 옥(玉)은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이 이것을 알아줄 뿐이니, 어찌 유사(有司)의 죄인 동시에 조정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영남의 두 이 선정(李先正)232) 과 호서의 두 송 선정(宋先正)233) 의 후손은 그래도 사적(仕籍)에 있는 사람이 많으나, 이밖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이번 정사(政事)에 초사(初仕)의 자리가 매우 적으므로 비록 하나하나 수용(收用)하기는 어려우나, 전신(銓臣)이 이미 직접 분부를 받은 만큼 반드시 이 뜻을 선양해야 할 것이다. 만약 대정(大政)을 한 번 지나쳐 버리고 그대로 전일처럼 한다면, 뒷날 옛일을 논하는 자들이 어찌 오늘날의 조정을 몰래 비웃지 않겠는가.
영남의 고(故)유신(儒臣) 조위(曺偉)·조식(曺植)·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과 호서의 고 유신 유계(兪棨)·윤황(尹煌)·김경여(金慶餘)·김홍욱(金弘郁)과 호남의 고 유신 박상(朴祥)·기대승(奇大升) 및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의 집 자손을 각각 그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 찾아내어 아뢰도록 하라. 이들은 단지 생각이 언뜻 들어 언급한 자들일 뿐이다. 오늘의 하교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고가 세족으로서 진실로 천거할 만한 자가 있으면 모두 천거하라.
전일 경연(經筵)에서 말하던 끝에 장 옥성(張玉城)234) 이 병든 몸으로 공훈을 세운 일을 말하였다. 요즘 듣건대 그 자손 중에 벼슬을 누리는 사람이 없다 한다. 매양 큰 공훈과 위대한 충성을 생각할 적마다 나도 모르게 몹시 서러워진다. 충훈부(忠勳府)로 하여금 그 자손을 찾아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문관 시종(侍從)에게 내·외적을 두루 시험해 보는 것은 대개 명실상부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이에 앞서 누누이 말해온 것을 지금 연석(筵席)에서 다시 강조한다.
대체로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데 시종은 또 급제자 중에서도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관직을 제수하고 주의(注擬)할 적에는 도리어 음관이나 무변보다 열 배나 뒤지니, 이것이야말로 쓰는 바가 그 구하는 바가 아닌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마디 말로 총괄하면 시종신은 서울에 있든 시골에 있든 어느 자리나 일을 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느 날이나 한가로이 집에 있을 일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들어와서는 허물을 바로잡고 잘못을 규찰(糾察)하며 외직에 나가서는 임금의 근심을 같이 나누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게 한다면, 앞으로 관찰사가 되고 묘당(廟堂)에 앉아 정부를 볼 적에 생민과 국가에 미치는 그 효과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하루 안에 꼭 하나하나 수용(收用)할 수는 없겠으나 참으로 이른바 시작이 반이 된다는 것이니, 모름지기 전조(銓曹)의 신하로 하여금 이번 정사부터 힘쓰게 할지어다."
하교하였다.
"오늘은 대정(大政)을 거행하는 날이고 또 《춘추(春秋)》의 책을 올리는 날이다. 황조(皇朝)235) 사람의 자손과 충신의 자손을 맨 먼저 거두어 녹용(錄用)토록 한다면 늠름한 충렬(忠烈)로 볼 때 어찌 의주의 의사(義士)보다 나은 자들이 있겠는가. 최효일(崔孝一)이나 장후건(張厚健)같은 제가(諸家)에 대해서는 일찍이 그 후손을 녹용했으나 오직 차예량(車禮亮)의 집만은 아직까지 미처 하지 못했다. 전일 문관 차신용(車信用)을 검상(檢詳)으로 의망했을 적에 내력을 알지 못하여 낙점(落點)을 건너 뛰었는데 뒤에 듣고 매우 탄식하고 아깝게 여겼다. 그 집의 후손이 몇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하며 생활하는지, 묘당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으로 물어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도정(都政)을 【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 참판 이경일(李敬一), 참의 채홍원(蔡弘遠),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홍의영(洪儀泳)이 연전에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된 뒤로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하여 점차 갈등이 생겼는데 지금 와서는 교서관(校書館)에서까지 거론하지 않은 채 문관도 아니고 유자(儒者)도 아닌 중간 위치에 두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일이 바르게 되려면 곧 제방(隄防)을 엄히 해야 한다. 급제 홍의영을 교서관의 빈 자리에 단부(單付)236) 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21일 병진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차하기를,
"신이 어제 제신(諸臣)의 뒤를 따라 《춘추》를 올리는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성대한 일을 기쁘게 만나니 신의 하찮은 성의가 갑절이나 간절해집니다. 이 책은 우리 공자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이고 오경(五經)의 단례(斷例)이니, 그 공용(功用)은 우(禹)임금이 홍수를 막고 주공(周公)이 맹수를 몰아낸 것보다 더욱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만일 성인이 그 까닭을 깊이 알지 않았다면 그 누가 그것을 찬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성조의 뜻을 계승하여 의례(義例)의 바름을 지시해 주시어 경문(經文)을 높이고 전문(傳文)을 덧붙이며 강(綱)을 엄하게 하고 목(目)을 신중하게 하였습니다. 기사(紀事)는 시초로 거슬러 올라 결론을 이끌어 내었고 주해(註解)는 번다한 것을 깎아내어 요점만 둠으로써 2백 42년의 곤월(袞鉞)237) 과 권형(權衡)으로 하여금 한 번 책을 펼치기만 하면 해와 별처럼 환하게 하였으니, 아, 성대합니다.
그런데 신은 삼가 개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군사(君師)의 지위에 임하신 뒤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화를 펴면서 성내기도 하고 미소짓기고 하여 선비들을 법도 안으로 인도하였는가 하면 강(講)도 하고 시험도 보여 문신을 도주(陶鑄)의 안으로 포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요즘 신진(新進)의 선비를 보면 재주의 고하에 따라 찬란하게 문장이 이루어졌으므로 교화의 효과가 나타난 데 대해 신은 찬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례(詩禮)의 집안과 선비들의 모임을 살펴보면 예악(禮樂)을 강론하고 독서하는 풍습에 있어 오히려 옛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숙(書塾)에서 가르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면서 어린아이 때의 잘못된 버릇을 바로잡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 시험에서 선발되려면 오직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성균관에 올라가고 이로 말미암아 과거에 올라가게 되니, 전하께서 비록 하루 아침에 도야(陶冶)하고자 하나, 거절하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또한 이치로 보아 필연적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가르치는 것보다는 과거에 오르기 전에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집니다.
신의 선조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급제(及第)의 회강(會講)하는 규식을 보면 《역경(易經)》은 점수를 배로 주므로 과거 응시자가 그 편리함을 이롭게 여겨 《춘추》는 얼른 버리고 《역경》을 익힌다. 성균관에 있는 유생 수십 인 가운데 《춘추》를 공부하는 사람은 겨우 한둘 뿐이다. 계속 이런 식이 되면 《춘추》의 학문은 오래지 아니하여 없어질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역경》에 점수를 배로 주지 아니하면 외고 익히는 난이도에 있어 《춘추》와 거의 같으니,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고 《춘추》의 학문도 폐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국가에 일이 많을 때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춘추》의 학문이 장차 없어지게 됨을 깊이 근심하여 조정에 이처럼 말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춘추》의 학문이 존재하느냐 폐해지느냐 하는 것이 세교(世敎)가 융성해지고 저하되는 것과 크게 관계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어리석어 진실로 감히 과거 제도에 대해 의논할 수는 없으나, 먼저 일차(日次) 전강(殿講) 등의 시험으로부터 자원에 따라 《춘추》를 강하게 하여 점차 성취하는 방도로 삼으면 혹 일조(一助)가 됨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經)은 도를 말하고 사(史)는 일을 기록하였는데, 경(經) 가운데 사(史)가 바로 이 책이다. 삼중(三重)238) 의 법칙이 여기에 있으니 만세의 귀감(龜鑑)임을 증명할 수가 있다. 경연에서 쓰면서 은미(隱微)함을 탐색하고 오묘(奧妙)함을 연구하며, 과장(科場)에 사용하면서 집집마다 외고 사람마다 익혀 모두 저 의리를 알게 한다면, 비록 그 정미(精微)함의 극치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내치며, 군자를 안으로 삼고 소인을 밖으로 여기게 하는 데에 일조가 될 것이다. 경이 이에 경의 선조인 문정공(文靖公)이 옛날 건의한 말을 인용하여 오늘날에 시험해 보기를 청하였다. 말이 족히 들을 만한데 감히 받아들여 쓰지 않겠는가.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품재(稟裁)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정사
진곡(賑穀) 4만 석을 호남에 획급(劃給)하도록 허락하였으니,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다.
12월 23일 무오
대호군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기를,
"인신의 극악한 죄로는 임금을 속이는 것이 으뜸이 되고, 사부(士夫)의 지극한 수치로는 뇌물을 받는 것이 으뜸이 됩니다. 신도 일찍이 경대부(卿大夫)의 반열에 들어 있었던 몸으로서 진실로 하늘에 사무치고 땅밑에 사무치는 크나큰 원통함과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이 관문에 대해 어찌 머리를 쳐들고 한번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진두(李鎭斗)의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 소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알지 못한 것도 죄인 이상 이에 대해서는 신이 진실로 자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의 전후 세 명의 처가가 모두 서울에 있었다는 문제로 말하면 처향(妻鄕)이 같은 마을에 있었다는 것은 당초 문제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가(婚嫁)를 중매할 때에는 본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평소 거간(居間)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변방 수령 운운한 것은 서유룡(徐有龍)을 창성 부사(昌城府使)에 주의(注擬)한 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서유룡의 형제는 모두 변지(邊地)의 수령을 지내어 세상에서 억울하다고 일컬었으므로 과연 박광적(朴光迪)·이징만(李澄萬)과 같이 비삼망(備三望)하였습니다. 그가 만일 서유룡을 의망(擬望)한 것에 대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견해는 같지 아니하니 신이 이에 대해서는 진실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신이 언젠가 계청하여 유룡에게 막명(幕名)을 부여했던 점을 단단히 트집잡고는 ‘의중에 촉망(屬望)한 바가 있다.’고까지 말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가 ‘먼저 법률상 부임하기 어려운 사람을 재차 들어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하였다.’고 하였는데 뜻을 만들고 말을 구성하는 것이 어찌 이처럼 교묘하단 말입니까. 오문상(吳文常)에게는 이미 아우 두 사람이 있었으니, 애당초 법전에 구애되는 바가 아니었고, 이요헌(李堯憲)은 적임자라서 곧바로 주의(注擬)하였으니, 실로 공의(公議)가 기대하던 바였습니다. 그런데 ‘짐짓 천점(天點)을 시험하였다.’느니 ‘거간꾼처럼 농락하는 습관이 있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위험 천만한 말을 내놓는단 말입니까.
또 지금 묵은 빚을 갚기 위해 부유한 고을에 차견(差遣)했다는 것과 물산(物産)을 써서 주어 뇌물을 요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이 이미 귀착(歸着)되는 바가 없는데 말하자니 또한 입이 더럽습니다. 만일 적확하게 보고 곧바로 전한 자가 있다면, 어찌 아무 고을 아무 수령이라고 바로 진달하지 않고 이처럼 우물우물하며 허황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이 5개월 동안 전관(銓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문관 수령을 차임한 것이 11인이고 무관 수령을 차임한 것이 8인입니다. 차임한 사람이 모두 적임자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대신(臺臣)이 명백하게 집어내지 아니하고 다만 흐리멍덩하게 말하여 혹은 ‘공의(公議)가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느니 혹은 ‘말하기에도 추잡하다.’ 함으로써 신의 정사에서 주의(注擬)된 문·무의 수령들로 하여금 모두 애매한 죄목에 걸려들게 하였으니, 아 매우 괴이합니다. 바라옵건대 신을 법부(法府)에 내려 엄히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이 운운한 바는 너무 박절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4일 기미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두 영(營)의 군보(軍保)가 정액(定額)보다 초과한 것을 사실대로 조사하여 폐단을 바로잡고, 각능을 수호하는 원군(元軍)의 자손들은 군역(軍役)에 충원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의 말을 따른 것이다.
12월 25일 경신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강원도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간성군(杆城郡)의 유민으로 환접(還接)239) 한 수효를 장계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어느 일이고 간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그만이거니와 일단 시작한 뒤에는 모름지기 별도의 실지 효과가 있어야 한다. 거주하고 있던 사람은 부리를 내리고, 돌아 온 사람은 토지에 안주한 뒤에야 15년간 간절히 칙유(飭諭)한 본의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니, 아직도 수 년의 연한이 남았다 하여 해이해지지 말고 또한 계묘년240) 의 총수에 비해 몇백 호 늘어났다 하여 만족하지 말고서 다시 뜻을 두어 무마하여 참으로 호구(戶口)가 늘어나는 실지 효과가 있게 하라."
하였다.
12월 26일 신유
충훈부(忠勳府)가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의 후손 장상원(張象元)을 찾아내었다고 아뢰니, 특별히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불러 접견하고서 이르기를,
"옥성 부원군이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서 적을 토벌하고 충의를 분발하여 공훈을 세웠으므로 부녀자나 어린아이들도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외고 있다. 적의 군사가 수안(遂安)의 길로 온 것은 아마 옥성 부원군을 두려워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당일의 제신(諸臣) 중에 옥성 부원군을 원공(元功)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데, 조정에서 수록(收錄)하는 일이 후손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결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가 특명으로 찾아내게 한 까닭이다."
하고, 이어서 그 나이를 묻자 72세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연로한 것을 민망히 여겨 충훈부에 명하여 그 두 아들을 충의위(忠義衛)에 먼저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전 판서 김이주(金頤柱)가 죽었다. 김이주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아들이다. 하교하기를,
"문득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거한 사람을 위하여 슬플 뿐만이 아니라 월성위의 집에 생각이 미치니 더욱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지처(地處)가 자별(自別)하니 마땅히 별도로 내 뜻을 표시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작고한 판서 김이주에게 한 품계를 더 올려주도록 하라. 후덕해서 기록할 만한 선행이 있을 것인데 지금 화평스럽게 잘 세상을 마쳤으니 규정상 시호(諡號)를 내려 주어야 할 것이다. 시호 의논을 장사 전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이조에서 그에게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12월 27일 임술
충훈부에 명하여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후손을 찾아내게 하였는데, 충훈부 당상 이경일(李敬一)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 정한철(鄭漢喆)이라고 대답하니, 상이 데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상이 이경일에게 이르기를,
"경이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241) 의 후손으로 금남군의 후예를 데리고 연석(筵席)에 같이 올라왔으니 일이 우연치가 않다. 일찍이 선조(先朝) 정사년242) 에 충청 감사에게 명하여 금남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는데, 그때에도 후손을 녹용(錄用)하라는 전교가 계셨는가?"
하니, 이경일이 아뢰기를,
"그때 과연 후손을 녹용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그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실려 있습니다. 정한철의 조부는 승전(承傳)으로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거쳐 벼슬이 영장(營將)에 이르렀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안현(鞍峴) 전투에서 세운 공이야말로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243) 의 전공에 다음가는데, 공훈을 세운 사람이 바로 금남군이다. 미천한 필부(匹夫)의 신분으로 상장(上將)의 인(印)을 차고서 국가의 안위를 양 어깨에 짊어졌는데 그 용병술과 지략은 오늘날까지 2백 년이 되도록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의 입에 칭송되고 있으니, 북소리를 듣고 넓적다리를 치며 탄식하는 사모가 그 사람들에게 편중된 듯하다. 날을 잡아 옥성 부원군과 금남군 두집에서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듣건대 금남군의 후손 정한철이 현재 예빈시의 관원으로 있다 하고, 또 듣건대 옛날 정사년에 특은(特恩)으로 정한철의 조부 정세흥(鄭世興)을 관직에 제수하였으며, 이어서 호서의 도백에게 명하여 금남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하니, 연갑(年甲)이 서로 부합됨이 마치 때를 기다림이 있는 듯하다. 충절을 기리고 공로를 갚는 성의(聖意)야말로 특히 우러러 전술(傳述)함에 합당하니, 참봉 정한철은 6 품직으로 승진시키고, 그 대임은 옥성 부원군의 후손 현손(顯孫)으로 차임(差任) 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서영보(徐榮輔)를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특별히 보임하였으니, 의리를 내세우며 직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28일 계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무릇 묘궁(廟宮)을 배알(拜謁)하는 날 혹 대향(大享)의 예행 연습과 겹칠 경우 배알을 예행 연습 뒤에 하려 하면 날이 조금 늦어질 것이다. 내 의견으로는, 치재(致齋)하는 첫날 예행 연습한 뒤에 모든 집사자(執事者)가 그대로 재소(齋所)에서 청재(淸齋)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데,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이병모가 앞으로는 영구히 그렇게 하는 것으로 법식으로 삼자고 청하자,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원자(元子)의 우유선(右諭善) 이성보(李城輔)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사관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대사헌을 체임시켰다.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화성의 수신이 태안(泰安)의 전세(田稅)를 이속(移屬)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일이 불편한 점이 많으니, 화성부(華城府)로 하여금 본부(本府)의 전세(田稅)를 가져다 쓰되 삼도(三都)의 사례처럼 하게 하고, 호조에서 태안의 전세를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병정(李秉鼎)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상도(李尙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9일 갑자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기곡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12월 30일 을축
함흥(咸興) 독서당(讀書堂) 치마대(馳馬臺)의 기적비(紀蹟碑)가 준공되었다.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이 인본(印本)을 올리니, 상이 전정(殿庭)에서 지영(祗迎)244) 하고 의식대로 친히 받았다. 집사 승지(執事承旨) 조진관(趙鎭寬), 각신(閣臣) 김면주(金勉柱)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도서(圖書)를 초하고 서사(書寫)한 각신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과 본도의 관찰사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였다.
우유선(右諭善) 이성보(李城輔)에게 올라 오라고 거듭 유시하였다.
화성에서 군제(軍制)와 협수군(協守軍)에 관한 추가 절목 및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올렸다.
○군제(軍制)에 관한 추가 절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영 군제(外營軍制)에 대한 조건은 이미 계축년에 계하(啓下)한 절목(節目) 안에 갖추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외사(外使) 서유린(徐有隣)이 연품(筵稟)하여 전에 부쳐준 속읍(屬邑)인 용인(龍仁)·진위(振威)·안산(安山) 이외에 시흥(始興)·과천(果川) 두 고을도 떼어서 소속시키도록 결정하였으니, 이는 대개 지형이 둘러싸고 있어 군제(軍制)상으로 원만하게 되겠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전에 단속(團束)하던 본부의 경내의 마군(馬軍)·보군(步軍) 및 속읍의 협수 군졸(協守軍卒)에다가 새로 이속된 아병(牙兵)·속오군(束伍軍)까지 계산하면 합하여 42초(肖)가 되어 전일에 비하면 의젓하게 한 대영(大營)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군제를 개정하는 날에 미쳐서 입방(入防)·사초(司哨)의 규식과 협수(協守)·겸파(兼把)의 제도를 다시 더 나누어 배정하되 치밀하게 되도록 하여 한 가지 일도 엉성하고 빠뜨림이 없게 한 뒤에야 에워싸고 보호하여 막아 지키는 방도가 기각지세(掎角之勢)을 이루어 위급할 때에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속읍의 군사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장정을 뽑아내어 어린형(魚鱗形)245) 으로 초(哨)를 만들어 입방군(入防軍)에 소속시키고 혹은 사면의 거리의 가깝고 먼 것을 취하여 남은 인원을 단속하여 견아형(犬牙形)246) 으로 파정(派定)하여 협수군(協守軍)에 부쳐주어야 하겠습니다. 사초(司哨)의 분배(分排)와 거행할 사항들을 아래에 조열(條列)합니다.
1. 계축년에 영(營)으로 승격된 뒤로 보군의 초를 감축하고 단속해서 입방군(入防軍)을 설치한 것은 정예로움을 귀중히 여기는 병가(兵家)의 의의에서 나온 동시에 행영(行營)의 호위가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소속된 초의 액수(額數)가 중다(衆多)한데 거기에 또 노약자를 다시 계산하지 않고 모두 수록(收錄)한다면 허실(虛實)이 혼동되기 쉬워서 도리어 액수의 많음만을 힘쓰는 데에 돌아가게 됩니다. 이 속읍에서 7초의 장정을 뽑아내어 경내에 있는 입방군(入防軍) 13초와 함께 어린형(魚鱗形)으로 사(司)를 만들어 1영(營) 4사(司)가 되게 하고 사(司)마다 각 5초(哨)의 제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1. 장정을 뽑아낼 적에는 형세상 장차 그 각읍에 있는 군사 수효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분배(分排)하여야 합니다. 용인(龍仁)은 10초(哨) 안에 2초 1기(旗)를 뽑아내고 진위(振威)는 5초 안에 1초 2기를 뽑아내고 안산(安山)은 5초 안에 1초 1기를 뽑아내고 시흥(始興)은 4초 안에 1초를 뽑아내고, 과천(果川)은 3초 안에 2기를 뽑아냅니다. 도합 7초를 입방군(入防軍)에 소속시켜 부근으로부터 사(司)를 합병하여 단속(團束)하는 소지로 삼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방군에 대한 법제의 뜻은 다른 군사와는 자별하니 반드시 양정(良丁)으로 뽑아 정하고 감히 사천(私賤)을 뒤섞어 구차하게 충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본부의 경내 남쪽에 있는 5초는 전사(前司)에 소속시키며, 용인의 2초 1기, 진위의 1초 2기와 본부 경내로서 진위·용인의 접계(接界)에 있는 2초 등 합계 5초는 좌사(左司)에 소속시키며, 우사(右司)에 소속시키며, 본부 경내로서 북쪽에 있는 5초는 후사(後司)에 소속시킵니다.
1. 전에 좌(左)·중(中)·우(右) 3사(三司)는 전(前)·좌·우·후로 그 사호(司號)를 고쳐 정하고 파총(把摠) 1원(員)을 더 배정하되, 경내의 이력이 있는 당상(堂上) 무관으로 원절목(原節目)에 의하여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초관(哨官)은 이미 13원을 차출했으니, 그 사람들은 초명(哨名)만 바꾸어 전대로 그냥 두고 나머지 7원은 속읍(屬邑)의 전임 조관(朝官) 및 선부수삼천(宣部守三薦)247) 을 출신을 융통성있게 차출하여 4사(司) 20원의 수효를 채워야 할 것입니다.
아병(牙兵)으로서 난후군(攔後軍)248) 에 소속된 것이 5초(哨)임은 이미 사(司)의 제도가 그러하니 파총(把摠)이 없을 수 없으나 별도로 설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 찰방(迎華察訪)은 북성(北城) 밖에 위치해 있어 행궁(行宮)과 아주 가까운데 소속된 데가 없으니, 아병파총(牙兵把摠)으로 호칭을 정하여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난후아병(攔後牙兵)의 경우는 초수(哨數)의 많고 적음을 본래 정한 제도가 없으니, 비록 10초(哨)의 많은 수효를 1인의 파총이 영솔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본역(本驛)에 소속된 본참(本站)과 각참(各站)의 이졸(吏卒)과 보군(保軍)을 이노(吏奴)의 예에 의하여 일체 모두 단속하여 대오(隊伍)를 만들어 난후군에 예속시키고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등의 절차는 일체 외사(外使)의 약속을 따르도록 할 것입니다.
초관(哨官)은 아병(牙兵)으로 입방 정군(入防正軍)과는 다름이 있으니, 각읍에 있는 출신(出身)을 가려 차출하되, 만일 혹시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량(閑良) 중에서 지벌이 있는 자를 융통성 있게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역속(驛屬)은 명수(名數)에 구애하지 말고 좌·우 초로 대오를 만들고 초관은 외영(外營)의 출신으로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1. 외영(外營)에 이미 4사(司)의 파총(把摠)을 둔 만큼 속읍의 겸사 파총(兼司把摠)은 곧 중첩된 듯하니, 자연히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읍에 있는 군병으로서 성정군(城丁軍)은 비록 이미 협수(協守)에 오로지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그밖에 입방군(入防軍)·아병(牙兵)·유병(遊兵) 등의 명액(名額)이 또한 많으니, 만일 파총의 호칭을 부여하여 절제(節制)의 권한을 맡겨주지 아니하면 실로 소루해질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금위영(禁衞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의 향군(鄕軍)에 있는 고을의 수령이 파총을 겸임하는 예에 의하여 5개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대로 파총을 겸임하여 평상시 단속하는 정무를 전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상시에 단속하고 조련에 임에 영솔하는 대에 지나지 않을 뿐, 외영의 원파총(原把摠)과는 다른점이 있으니 사호(司號)는 마련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이 1영(營)·4사(司)·20초(哨)로써 실제로 입방군을 삼을 경우 1년 안에 전군이 모두 입방(入防)한다면 너무 과다하게 될 듯합니다. 매년 10초(哨)를 5번(番)으로 나누어 만들고 번(番)마다 2초씩 한 해 걸러 입방(入防)하게 하면서 둘려가며 휴식하게 함으로써 단속을 엄히하고 민력(民力)이 펴지게 하는 소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지금 이렇게 단속하는 것은 처음으로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20초를 정군(正軍)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해를 걸러 입방(入防)하게 하고, 그 나머지 20초 안에서 5초는 나누어 외사(外使)의 난후아병(攔後牙兵)에 소속시키고 2초는 주대책응병(駐隊策應兵)에 소속시키고, 3초는 통구 유병(通衢遊兵)에 소속시키고, 10초는 4성(城)에 나누어 소속시켜 혹 배정하여 번을 세우기도 하고 혹은 더 파견하기도 하여 협수(協守)를 책임지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사초군(司哨軍)을 가려 선발하고 입방군(入防軍)의 무예를 훈련시키는 등의 일은 계축년의 원절목에 의하여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협수군(協守軍)에 관한 추가 절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협수(協守)의 제도는 이미 원절목 안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지금 지세(地勢)가 겹겹으로 둘러싸이고 도리(道里)가 균적(均適)해졌을 뿐 아니라 또 과천과 시흥을 소속시켜 한편으로는 북성(北城)을 방비하고 한편으로는 유병(遊兵)을 책임지웠으니, 이로부터 안팎이 공고해지고 국면이 원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따르고 변경시키는 조목을 아래에 기록합니다.
1. 속오군(束伍軍)과 아병(牙兵)으로서 전의 소속이건 새 소속이건 따질 것 없이 장정을 뽑아내어 사(司)를 병합해서 입방군(入防軍)으로 만들고, 나머지를 단속하여 협수군(協守軍)에 소속시키면, 영제(營制)와 성제(城制)가 저대로 구별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별사파총(別司把摠)의 제도를 없애고 다만 협수장(協守將)으로 호칭해야 할 것입니다.
1. 동성 협수장(東城協守將)은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남성 협수장은 진위 현령(振威縣令)으로, 서성 협수장은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북성 협수장은 시흥 현령으로, 유병장(遊兵將)은 과천 현감으로 호칭을 정하여 4성(城) 및 통구(通衢)에 나누어 소속시켜 협수(協守)를 오로지 책임지우는 소지로 삼습니다. 그리고 협수 초관(協守哨官)은 그 군의 수효에 따라 해당 고을의 전적 관원 및 출신(出身)으로 융통성있게 의망(擬望)하여 외영(外營)에 보고하고 전령(傳令)을 작성하여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춘등(春等)과 추등(秋等)의 포폄(褒貶)은 협수장이 일체 마감(磨勘)하여 계(啓)를 작성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용인현은 속오군(束伍軍) 5초 아병(牙兵) 4초 친아병(親牙兵) 1초 가운데 2초 1기는 장정을 뽑아내어 입방군에 소속시키니 나머지가 7초 2기이며, 진위현은 속오군 3초 아병 2초 가운데 1초 2기는 장정을 뽑아내어 입방군에 소속시키니 나머지가 3초 1기이며, 안산군은 속오군 4초 장초군(壯抄軍) 1초 가운데 1초 1기는 장정을 뽑아내어 입방군에 소속시키니 나머지가 3초 2기이며, 시흥현은 속오군 3초 장초군 1초 가운데 장정 1초를 뽑아내어 입방군에 소속시키니 나머지가 3초이며, 과천현은 속오군 2초 장초군 1초 가운데 2기는 장정을 뽑아내어 입방군에 소속시키니 나머지가 2초 1기입니다.
입방군 7초와 외사(外使)의 난후아병(攔後牙兵) 5초를 제하면 실지로 남은 군사는 15초인데, 10초는 4성의 협수군(協守軍)으로 만들고 5초는 주대(駐隊)와 유병(遊兵)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용인현의 남은 군사 7초 2기 안에서 3초는 협수군으로 삼고 2초는 주대병(駐隊兵)으로 삼고 2초 2기는 아병으로 삼으며, 진위현의 남은 군사 3초 1기 안에서 2초는 협수군으로 삼고 1초 1기는 아병으로 삼고 1기는 용인현의 2기와 초(哨)를 합병하며, 안산군의 남은 군사 3초 2기 안에서 3초는 협수군으로 삼고 2기는 아병으로 삼으며, 시흥현의 남은 군사 3초 안에서 2초는 협수군으로 삼고 1초는 유병(遊兵)으로 삼으며, 과천현의 남은 군사 2초 1기 안에서 2초는 유병으로 삼고 1기는 아병으로 삼아 안산군의 2기와 초(哨)를 합병시켜야 할 것입니다."
○수성 절목(守城節目)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을 쌓았으면 반드시 성을 지키는 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3리(里)의 내성과 7리의 외성이라 할지라도 살받이[攔]와 성가퀴[雉]를 계산하여 장정을 선발해서 나누어 소속시키고 장령(將領)을 두어 이를 관할하게 하는 법인데, 하물며 이 본부(本府)로 말하면 바로 원침(園寢)249) 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옹위하는 큰 성지(城池)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누대(樓臺)와 망루(望樓)가 완성된 지 2년이 되었는데도 방어하고 절제(節制)하는 것을 아직까지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병가(兵家)의 파수(杷守)하는 본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된 대로 절목을 만들어 아래에 조목별로 나열합니다.
1. 성지(城池)가 있으면 관성장(管城將)이 없을 수 없으니, 본부의 판관으로 차정(差定)합니다.
1. 성의 제도는 4문(門) 8각(角)으로 되어 있고 중간에 치첩(雉堞)을 설치했습니다. 성장(城將)의 문을 막고 치총(雉摠)은 모퉁이[角]을 지키며 16초관(哨官)은 목적지로부터 나누어 소속되어 절제(節制)를 받으니, 이는 대개 병가(兵家)의 사두팔미(四頭八尾)의 의의를 취한 것입니다. 성장(城將)은 4원(員)이니 경내의 무신 당상(武臣堂上)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을 차출하고, 치총(雉摠)은 8원이니 당하관(堂下官)으로 이력이 있는 전직 관원을 차출하고, 초관(哨官)은 16원이니 출신(出身)으로 선전관(宣傳官)·부장(部將) 수무장(守門將)의 후보자로 추천된 자면 누구든 융통성있게 차출합니다.
1. 수첩 군관(守堞軍官)은 47인인, 본부에 있는 내영(內營)의 향무사(鄕武士)를 소속시켜 절제(節制) 받게 하고 액수(額數)는 많고 적음에 구애되지 말고 그 실수(實數)를 차등있게 녹안(錄案)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영(外營)에 전일 부사(府使)가 있을 때 초관청(哨官廳)의 오래 군무하는 자리로 되었던 곳은 본청에 부쳐주어 친군위(親軍衞)의 정령(正領)과 돌려가며 천전(遷轉)하는 자리로 삼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파수편(派守篇)에서 5타(垜)마다 타장(垜長) 1인을 두도록 한 제도에 따를 경우 타장이 1백 80인이 되니, 이는 부사가 군관중에서 융통성있게 타(垜)를 계산하여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1. 성정군(城丁軍) 8천 6백 20명을 각종 납미군(納米軍)으로 단속하고, 군정(軍丁)의 총수는 한결같이 도안(都案)에 있는대로 배치해야 할 것입니다. 제번 군관(除番軍官)이 9백 97명, 별무사(別武士)가 2천 2명, 보군보(步軍保)가 1천 5백 60명, 수미군(需米軍)이 2천 명, 유방군(留防軍)이 7백 2명, 감마보(減馬保)가 4백 44명, 서고 별무사(西庫別武士)가 3백 명, 둔장초(屯壯初)가 1백 86명, 치중보(輜重保)가 1백 명 둔아병(屯牙兵)이 1백 25명입니다. 그리고 성타(城垜) 9백 13회(回)에 타장(垜長)이 5타마다 1인이니 합계 1백 80인이고 첩(堞)마다 성정군(城丁軍)이 5명씩으로 합계 4천 5백 65명인데, 이를 배치하고 더 파견할 경우 남·북문에 각 1백 50명, 동·수문에 각 1백 명, 상·하수문(上下水門)에 각 1백 명, 남 아문(南暗門)에 1백 명, 3암문(三暗門)에 각 50명, 4각루(四角樓)에 각 90명, 봉대(熢臺)에 50명, 남북 현구(南北縣溝)에 각 40명, 용도(甬度)에 1백 55명, 포루(舖樓)·포루(砲樓)·치노대(雉帑臺)·적대(敵臺)·공심돈(空心墩) 등 합계 22개 처에 6백 60명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됩니다.
1. 첩(堞)에 배치한 것과 더 파견한 것을 합쳐 계산하면 도합 7천 명인데 남은 군정이 아직도 1천 6백 20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타부(垜夫)를 겸설(兼設)하는 것은 정군(正軍)을 단속하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우선은 없는 셈으로 쳐 두었다가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적당하게 임기응변으로 동원해서 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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