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1798년 1월

싸라리리 2025. 8. 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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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인

윤음(綸音)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다음과 같이 내렸다.
"풍년이 가장 으뜸가는 상서이고, 상서는 반드시 사전의 징험이 있는 법인데,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반드시 ‘내년에 크게 풍년들 조짐이 납전삼백(臘前三白)001)  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입동(立冬)에서 납(臘)까지 모두 70여 일 동안에 27번의 대설(大雪)이 내려, 3을 세 번 곱하여 9가 된 데에다 다시 3을 곱한 숫자가 되었으니, 풍년상서와 상서의 조짐이 어찌 꼭 태인의 점[大人之占]002)  과 목인의 꿈[牧人之夢]003)  을 기다려 결정할 바이겠는가. 그러나 즉공(卽功)004)  의 방도를 크게 도모하고, 상서를 내려주신 하늘의 권고(眷顧)에 보답하는 것은 오직 ‘권농(勸農)’ 두 글자에 달려있는 것이다. 남묘(南畝)에 점심 내다 먹는 것이 권농관(勸農官)에게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가 가서 기뻐하였던가.005)   심지어 가래·호미 등의 농기구와 하급 농관(農官)들까지 동원되어 미리미리 씨 뿌리고 가꾸는 일을 갖추 다스려주던 사실이 농업을 중시하던 빈속(豳俗)006)  에 나타나 있다.
대체로 농부는 일에 민첩하고 농관은 늘 가서 상담(相談)을 하여야만 벼가 자라 밭이랑에 꽉차서 해마다 많은 수확을 거두어, 장차 곡식이 지붕처럼 높이 쌓이고 곳집이 섬처럼 커져서, 집집마다 배불리 먹게 되고 증손(曾孫)이 노하지 않게 되리라.007)   아, 너희 방백(方伯)과 유수(留守) 등의 신하들은 곧 옛날의 이른바 농관들이므로, 위로는 임금이 노하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농사를 열심히 하도록 하는 책임이 오직 경(卿)들에게 달려 있으니, 경들이 책임을 홀만히 하고자 해서야 되겠는가. 봄에 농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힘과 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한결같이 종사해서 추수 뒤까지 홀만함이 없이 한다면 해마다 풍년드는 경사가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니, 경들은 힘써 하라."

 

1월 2일 정묘

종묘(宗廟)·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공시민(貢市民)들을 수레 앞으로 불러 인견하고 그들의 질고(疾苦)를 물었다.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70이 되도록 해로(偕老)하는 사람들에게 한 자급씩 올려주도록 명하여 윤사국(尹師國)에게는 숭정(崇政)을, 윤홍렬(尹弘烈)·김익휴(金翊休)·강유(姜游)에게는 자헌(資憲)을, 유언수(兪彦脩)에게는 가의(嘉義)를, 목만중(睦萬中)·이평(李枰)에게는 가선(嘉善)을 각각 가자하였다.

 

1월 4일 기사

현륭원(顯隆園)008)  에 행행할 연로(輦路)를 새로 닦게 하되, 길로 들어가는 백성들의 토지를 계산하여 지적(地積) 10보(步)마다 1부(負)의 조세를 면제해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연로 백성들의 길 닦고 눈 쓰는 고통스러움을 민망하게 여기어 사람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돌아와서 아뢰기를,
"매양 눈이 올 때마다 남녀 노약자들이 크고 작은 비를 손에 들고서 관아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일제히 나와 눈을 쓸어 치웠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위하여 어조(御竈)에 바치는 땔나무를 감하게 하고, 이르기를,
"내가 다습게 거처하는 것이 마음에 미안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경기(京畿)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하기를,
"화성(華城) 연로의 제읍(諸邑)은 해마다 어가(御駕) 맞이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 때문에 백성들을 괴롭힘이 매우 극심한데, 그중에서도 길 닦고 눈 쓰는 일이 가장 괴로운 일이다. 팔도의 백성들을 위하여는 삼백(三白)의 풍년들 조짐을 진실로 기뻐하지만, 눈발이 공중에 휘날릴 적에 손을 불며 발을 동동 구르는 고통을 겪는 연로의 농부들을 위하여 이 마음이 먼저 미친다."
하고는, 마침내 그들을 견휼(蠲恤)할 계책을 확의(確議)하도록 명하였다.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 서유린(徐有隣)이 의논드리기를,
"대체로 민역(民役)에는 신포(身布)·호요(戶徭)·결세(結稅)가 있는데, 본부(本府)는 신포의 경우 양반집이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입역(立役)된 군졸로서 신포를 납부하지 않은 자도 있기 때문에 견제(蠲除)의 정사를 고르게 펼 수 없고, 호요의 경우는 1호당 닭 한 마리로서 그 숫자가 매우 적은 데다가 그 중에는 면제 대상이 된 자도 많으니, 모두가 고르지 못합니다.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니, 그 보수(步數)와 결복(結卜)을 따져 각 전부(田夫)들에게 잘 헤아려 고루 분배하기를 일체 천사 복호(遷徙復戶)의 관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경내의 연로를 따라 마을마다 보수를 헤아리되, 지지현(遲遲峴)에서부터 유첨현(逌瞻峴) 화소(火巢)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모두 35리 가운데서 성읍(城邑)과 촌방(村坊)을 제외하고 나머지 길의 양편을 아울러 계산하니, 모두 2만 3백 14보였습니다. 이를 15보마다 1부의 조세를 면제해주는 것으로 헤아려보니, 모두 13결(結) 54부(負) 2속(束)이 됩니다."
하였고,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 홍억(洪檍)은 의논드리기를,
"호역에 대해서는 원래 본부(本府)가 징수한 예가 없고, 신역의 경우는 이쪽을 옮겨 저쪽에 충당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한쪽만 치우치게 고통을 주는 폐단이 있으니, 결역(結役)을 3년으로 분수(分數)하여 감면해 주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경비에 관계된 것이므로, 본부의 치도 전조(治道錢條)에 남아 있는 저축을 적당히 마련하여 각 면리(面里) 방군(防軍)의 신역을 방납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고,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은 의논드리기를,
"신역의 경우는 양반과 천인이 서로 뒤섞여 있어 이미 고루 감면해줄 수 없는 형편인데, 군정(軍丁)마저 극히 충원하기 어려워 또한 옮겨 정할 수도 없습니다. 호역의 경우는 시흥(始興) 백성들은 혹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과천(果川) 백성들은 본래부터 거두는 것이 없으므로 비록 골고루 감면해주고자 하여도 실로 방도가 없습니다. 결역의 경우 또한 편리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전결(田結)에서 수납한 것은 이미 경상비에 관계된 것이고 보면, 이것을 가지고 감면해주는 것은 상의 뜻을 우러러 몸받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두 고을 노변에 있는 민전(民田)의 결수(結數)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시흥 지경은 19리에 14결 35부 5속이고, 과천 지경은 11리에 15결 74부 8속입니다. 그런데 시흥의 도리(道里)가 과천보다 더 많으나 결복은 과천이 시흥보다 많은 것은, 대체로 복수(卜數)의 많고 적음이 토질의 비옥함과 척박함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두 고을의 결수가 이와 같이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나니, 조세를 견감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고루 배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토지가 각기 주인이 있고 보면 견감해 주는 혜택이 토지 주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면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진전(陳田)과 기전(起田)이 서로 같지 않고 보면 진전이 똑같은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은 사리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화성의 연로에 보수(步數)를 따져 결복을 적용시켜서 타당하게 헤아려 조세를 면제해 준다고 하신 것은 정히 신의 어리석은 견해와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두 고을의 이수(里數)와 보수를 헤아려 결복을 적용하자면, 시흥 지경 19리와 과천 지경 11리 중에서 읍내의 빈 취락들을 제외하고, 연로의 양편을 아울러 계산할 경우 모두 합하여 1만 8천 9백 88보인데, 15보마다 각각 1부씩을 적용하자면 시흥이 8결 41부이고 과천이 4결 25부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읍의 면세례(免稅例)에 의거하여 결마다 돈 8냥(兩)으로 대체해서, 각 전부(田夫)들에게 작정 배분하되, 일체 많고 적음이 타당하게 처리된 복호(復戶)의 관례와 같이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복호의 구획 또한 경상비에 관계됩니다. 지난 임자년에 도내 각 고을에 설치한 무조(貿租)는 오로지 현륭원 행행 때의 갖가지 수용(需用)을 위한 것인데, 해마다 모조(耗條)를 돈으로 바꾸었는바, 수입을 헤아려 경비를 절약한 나머지 그 잉여분이 꽤나 있습니다. 지금 이 복호할 12결 66부를 돈으로 환산하면 1백 1냥 남짓하니, 이 돈으로 획급(劃給)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10보마다 1부의 조세를 면제해주되, 화성의 경우는 원결(元結)로 획급하고, 두 고을은 궁결(宮結)로 획급하고, 광주(廣州)도 화성의 관례에 따라서 또한 급복(給復)하도록 하였다.

 

여주 목사와 이천 부사를 수어영 아병(守禦營牙兵)의 좌우부 별장(左右部別將)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이제 광주 유수 홍억의 장계를 보니 ‘친아병(親牙兵)은 본디 대장이 직접 영솔하고, 다만 이미 차출된 각 해당 초관(哨官)들을 파총(把摠)에게 영솔시키던 일은 영원히 혁파하였으며, 부아병(部牙兵)의 경우는, 좌부영·우부영·전영·중영·후영이 오영(五營)의 열에 들었는바, 오영 안에서 삼영의 속오군(束伍軍)에 대해서는 이미 설치한 영장(營將)이 있으나, 좌우부영의 아병에 대해서만 유독 관령하는 장수가 없으므로, 경별장(京別將)을 혁파한 뒤에는 장차 부근의 수령으로 차정하여 관령하도록 하게 될 것이니, 좌부 별장을 여주 목사로 차정하고 우부별장을 이천 부사로 차정할 일을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령으로서 별장의 일을 행하는 데 대하여 군제(軍制)로 논하자면 혹 영부(領付)할 때에 서로 구애되는 단서가 있을 듯하니, 그 고을에 거주하는 무신 가운데서 차출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자리를 더 설치해야 하므로 이 또한 불편한 점이 많으니, 청컨대 우선 그의 장계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1월 5일 경오

인정전(仁政殿)에 나가 친히 기곡대제축(祈穀大祭祝)을 주관하고 사직단(社稷壇)에서 재숙하였다.

 

1월 6일 신미

사직단에 기곡제를 지냈다. 상이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할 적에 마침 날이 추워지고 눈이 내리므로, 대신과 약원(藥院)이 교대로 글을 올려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마침내 사직단에 나아갔는데, 행사할 때에 이르러서는 눈도 마침내 개었다. 그러자 어시(御詩)를 지어 제신들에게 내리면서 모두 화운해 올리도록 명하였다.

 

1월 7일 임신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군졸들을 호궤(犒饋)하였다.

 

1월 8일 계유

제영 장신(諸營將臣)들로서 겸찰(兼察)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부신(符信)을 전교를 듣는 날에 바로 바꾸어 차도록 명문화하여 법식으로 삼았다. 【밀부(密符)와 유서(諭書)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정원에서 부신을 임시 바꾸어 찰 일로 문서를 작성해서 보내도록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0면
【분류】군사-군정(軍政)

 

서매수(徐邁修)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진관(趙鎭寬)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9일 갑술

홍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을 파직하고 민종현(閔鍾顯)을 그의 대신으로 삼았다.

 

인일제(人日製)의 과거를 성균관에서 보였다.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0일 을해

지평 윤함(尹涵)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외람되이 간직(諫職)에 제수되었으나, 아직 서경(署經)이 안된 상태에서는 진실로 의당 언관으로 자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에 말할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삼가 속으로 ‘직(職)은 비록 서경이 안되었으나 관(官)은 간관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일을 당해서 진언을 하더라도 여분(旅賁)009)  의 옛 규정에 해롭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감히 일을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정원이 지평 홍시제(洪時濟)가 서경을 받기 전에 상소 올린 것을 인하여 심지어는 ‘근래 한두 대신(臺臣)이 서경 전에 상소를 올린 것은 예법이 아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대체로 서경 전에 상소를 올리는 것이 언관의 처의(處義)에 있어서는 비록 감히 십분 정당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애당초 조정에서 법을 설치해 이를 금지한 것은 아니고 보면, 정원이 그토록 말을 소모해서 책망을 가한 것은 혹 언로(言路)에 해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또한 물러가 여론을 기다리지도 말라."
하였다.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조윤정(曺允精)을 파직하고 서유병(徐有秉)을 그의 대신으로 삼았다. 조윤정은 북청 부사 신대윤(申大尹)과 어떤 일로 서로 힐난하던 끝에 부리(府吏)를 잡아다 그를 마치 효수(梟首)나 하려는 것처럼 군위(軍威)를 베풀어 그를 협박하고, 결국은 신대윤을 장죄(贓罪)로 얽어서 도신(道臣)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바로 아뢰어 파출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해본 결과, 신대윤의 장죄라는 것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으므로, 묘당에서 파직하기를 청하여 이에 따른 것이다.

 

민종현(閔鍾顯)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에 앞서 사도(四都)와 팔도(八道)에 신칙하여 과년토록 혼인하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혼인을 도와주도록 하였는데, 이때 제도(諸道)의 장문(狀聞)을 살펴본 결과, 충청도가 14인으로 숫자가 가장 적었다. 그리하여 전교하기를,
"지금 이미 봄이 시작되어 만물이 다 소생하는 때이니, 시기를 당하여 명령을 시행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특별한 예로서 인도해 맞이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본도(本道)는 10주(州)에 가까운 넓은 지역이거늘, 과년토록 장가를 못든 자가 어찌 이 숫자뿐이란 말인가.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를 추고하라."
하였다.

 

전 광양 현감 한사진(韓師鎭)은 관직에 있을 때 강제로 양민(良民)을 사서 노비(奴婢)로 삼았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흥양현에 유배되었었는데, 그후 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시 양민 네 사람이 더 드러났으므로, 그를 멀고 풍토가 나쁜 섬으로 바꿔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1월 11일 병자

명정문(明政門)에 나가 조참을 받을 때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예조의 당상관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이해는 바로 우리 자전(慈殿)010)  께서 일국의 국모로서 임하신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니 효성스러운 전하께서는 이해를 당하고 이때를 만나서 경사를 베풀고 아름다움을 선양하여 만년 뒤까지 큰 복을 받으시도록 축하하시려는 마음이 나날이 갑절이나 더하시리라 삼가 생각됩니다. 이날은 바로 또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자전의 마음을 애써 돌리시어 대신들에게 욕례(縟禮)를 의논하도록 명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인원 성후(仁元聖后)011)  의 겸양하시는 덕은 옛사람보다도 훨씬 뛰어났으므로, 선조(先朝)012)  의 큰 효성이 끝내 자전의 마음을 돌리어 인원 성후께서 국모로서 일국을 임하신 지 39년째가 되던 해의 원정(元正)에 욕례를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선왕을 계승하시는 전하의 효성으로 더욱이 자전께서 국모로 일국을 임하신 지 40년이 된 오늘에 이르러, 그 아름다운 덕을 높이 선양하시는 일을 가지고 어찌 뭇신하들의 청을 기다리겠습니까. 존호(尊號)를 올리는 전례를 속히 거행하셔야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서 곧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신유년013)  이 바로 인원 성후께서 국모로서 일국을 임하신 지 40년이 되던 해인데, 선조(先朝)께서 경복을 드러내고 태산같이 큰 복을 비시는 성효(聖孝)로써 특별히 존호 올리는 욕례를 국모로 임하신 지 39년째가 되던 경신년에 거행하시었다. 생각하건대, 지금 경들이 예조의 당상들을 거느리고 청을 한 것은 정문(情文)과 전례상에 있어 말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어버이 나이를 기억하고 날을 아끼는 자식된 정성으로써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리고 아직껏 이렇게 가만히 있었겠는가. 3년 전인 을묘년014)  은 이미 우리 자전께서 만 50세가 된 이듬해였는데, 때마침 자궁(慈宮)015)  의 회갑년을 만나 경사를 합해서 축복하게 되어, 감히 선조 신유년의 경례(慶禮)를 경신년으로 당겨서 거행했던 고사를 따라서 거행했었다. 그러므로 금년에는 또한 선조 신유년에 자전의 뜻을 우러러 받들었던 성의(聖意)를 몸받아 우선 감히 욕례로써 자전에게 귀찮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다. 내 마음의 헤아림은 비록 이와 같으나 경들의 소청이 또한 이러하니, 의당 다시 온 나라가 크게 축복하는 뜻을 갖추 말씀드리어 기어코 자전의 마음을 돌리도록 힘쓸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한용화(韓用和) 등 7인을 원자(元子)의 요속(僚屬)으로 삼을 것을 계하(啓下) 받아 날을 나누어 배강(陪講)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감사 한용화, 목사 정일환(鄭日煥), 부사 이술원(李述源)·박지원(朴知源), 군수 신대우(申大羽), 현감 유심춘(柳尋春), 감역 박윤원(朴胤源)이다. ○ 옛 홍문관을 강학청(講學廳)으로 바꾸고 요속들이 윤번으로 숙직을 하였는데, 유선(諭善)이 원자(元子)를 입견(入見)할 때에는 요속 1원(員)씩이 윤번으로 따라 들어가 먼저 배례를 행하고 원자는 답례가 없다. 사부와 유선의 상견례 때에는 요속 전원이 들어가 참여하되 좌우로 나누어 시립(侍立)하였다. 그리고 원자의 탄일(誕日)·정조(正朝)·동지(冬至)의 문안 때에는 요속 전수가 진참하되 그 좌차는 유선의 뒤에 있었는데, 요속들은 계하(啓下)된 뒤에 숙배(肅拜)가 없이 다만 궁에서 문안만 하고,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가 단자(單子)를 갖추어 사약(司鑰)에게 청하여 들여보내었다.】  이병모가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내직·외직을 두루 시험하는 것은 그 성적을 조사하여 실용을 거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 섣달의 대정(大政) 때에 경외(京外)의 시종신들을 외읍(外邑)으로 많이 발령하시었는데, 다만 지금의 법을 따르고 지금의 풍속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줄을 이음으로써 이민(吏民)들이 그들을 영송(迎送)하기에 지치고 주군(州郡)은 장차 피폐해지게 되어, 도리어 한자리에 오랫동안 유임시키는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이 어찌 이재(吏才)에 문관·음관의 차별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실상은 치효(治效)에 오래고 빠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먼저 시종신을 선발하여 그대로 외방에 시험하는 법을 시행해서, 그의 성적(聲績)에 따라 목사·군수 등의 직을 두루 역임시키기를 일체 음관의 제도와 같이 하고, 치적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한(漢)나라 때의 증질(增秩)하던 고사를 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이로 말미암아 방백(方伯)으로 삼기도 하고 경재(卿宰)로 초탁시키기도 한다면 일군(一郡)만 다스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다는 옛말이 비록 있기는 하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넉넉하니, 어디다 쓴들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공거(貢擧)의 법은 기왕 갑자기 복고시키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과목(科目)으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형편이 비록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마는, 이따금 아름다운 학덕을 온축했거나 재보(宰輔)의 인망을 지니고도 공령(功令)의 글에 익숙하지 못하여 미관 말직에서 늙어가는 자들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을을 다스리게 하여 성적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서 추천(推遷)하는 계제를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유일(遺逸)의 선비들에게는 출신(出身)이 조금 늦어지기는 하나, 과거 출신자에 비하여 어찌 손색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사람 등용하는 길이 이미 넓어져서 어진이를 등용하는 방도가 막힘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간의 도리는 효제(孝悌)보다 우선할 것이 없고, 백성의 근본은 오직 농사를 힘쓰는 데에 있는 것이니, 진실로 효제하고 농사에 힘쓴다면 비록 경세 제민의 도구와 임금을 잘 보필할 만한 능력은 없다 할지라도 한 고을의 풍속을 착하게 만들고 한 고을의 농업을 권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여러 도에 신칙하시어 향론(鄕論)을 채집하여 어떤 이가 효제와 농업에 힘쓴 실상을 겸비하고 있는지 분명히 안 다음, 식년(式年)마다 효열(孝烈)들을 조정에 등문(登聞)할 때에 이들의 사실도 함께 아뢰게 해서, 혹은 지방관을 보내어 후히 예우하기도 하고, 혹은 술과 고기를 내리어 위문하기도 하여, 향당의 기강을 진작시키게 해서 자제들의 표준을 밝게 보인다면 전한(前漢) 시대의 독후(篤厚)했던 풍속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아울러 받아들였다. 이병모가 또 말하기를, "‘능히 예양(禮讓)으로써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한 것은 곧 공자의 밝은 교훈입니다. 진실로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기습을 억제하려면 예양의 기풍을 숭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지금의 사직서는 곧 어진이에게 사양하는 옛 법규인데, 이것이 전하여 형식만 갖추는 빈 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진이에게 사양함으로써 자신의 어짊이 또한 드러나고, 유능한 이에게 미룸으로써 자신의 유능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꼭 모두 남의 훌륭함을 내 몸에 지닌 것처럼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국가에 있어서는 실로 무궁한 이익을 받게 됩니다. 이른바, 상서(尙書)들로부터 양보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을 가려서 등용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8명의 상서가 1명의 상서를 함께 선발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말이 《임결(臨缺)》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지금 주관하는 사람이 8명의 상서를 선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절실한 말입니다. 대체로 사장(謝章)을 낸 관직에 비록 일일이 대신할 자를 천거하도록 하기는 어렵고 도리어 한만하게 될 염려가 있으나, 우선 육조 판서의 높은 벼슬과 감사의 중요한 직임에서부터 시험하여 그의 사직하는 글을 인해서 천거하는 법을 적용한다면 어질고 유능한 자가 빠짐없이 등용되어, 인재가 부족함이 없이 쌓아두고 쓰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천거한 자의 어질고 유능한지의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의견이 있기는 하나, 고금의 사정이 서로 달라서 자대(自代)하는 법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 참의 김약행(金若行) 같은 사람은 습속에 구애받지 않고 당하관으로서 후임을 천거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정식은 아니지만 만일 그렇게 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찌 꼭 금하겠는가." 하였다. 개성부 유수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설치한 분봉상시(分奉常寺)에 해마다 서적전(西籍田)에서 수납한 자성곡(粢盛穀) 및 각읍에서 바쳐온 과품(果品)들을 모두 받들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릉(齊陵)·후릉(厚陵)과 사직단·향교 등의 각 제향에 드는 물품을 분시(分寺)에서 봉진한다면 체모가 자별하겠으나, 감수(監守)하는 관원이 없어 매우 미안하니, 만일 봉상 분관(奉常分官) 2원을 따로 설치하여 경력과 교수의 예겸(例兼)의 직함으로 만든다면 전수(典守)를 근엄하게 하여 비로소 규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력과 교수는 분검(分檢)·분태상(分太常)·분장원서(分掌苑署)의 일을 예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제언 당상(堤堰堂上)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제방을 수축하는 것은 농사를 권장하는 중요한 일인데, 근래에 수령들이 완만하여 여기에 힘을 쓰지 않아 간악한 백성이 남의 땅을 함부로 차지해 농사짓기도 하므로, 아전(衙前)과 향임(鄕任)이 이를 인연하여 그 땅을 은결(隱結)로 두고 있습니다. 호남의 우도 지역인 김제(金堤)·만경(萬頃) 등 고을 수백 리의 평야는 곧 예로부터 수리(水利)의 혜택을 계속 입어온 토지인데, 근년 이래로 도처의 저수지가 날로 메워져서 조금만 가뭄을 만나더라도 번번이 흉년이 들고 맙니다. 지금은 양남(兩南) 지방을 진휼하는 일이 막 시작되었으니, 약간 날씨가 따뜻해지거든 장정들을 초출(抄出)하여 식량을 많이 주어 먹이면서, 모든 경내의 수축할 만한 제방들을 다 수축하게 하되, 해당 수령들로 하여금 몸소 현장에 나가 감독 신칙하여 차례로 넓고 깊게 파내도록 하게 한다면 기민(飢民)들은 먹고 살게 되고 농민들은 수리(水利)를 입게 되어 일거양득이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윤함(尹涵)이 아뢰기를, "원자가 이제 10세가 되었으니, 조기 교육의 방도는 맨 먼저 격언(格言)·지론(至論)을 들려주어야 하고, 배양(培養)하는 방도는 문견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데, 의복·음식·언어·행동에서부터 온갖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하를 보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의당 자신을 더욱 힘써 닦아서 지선(至善)에 이르게 하여, 원자의 듣고 보는 것이 하나도 부정함이 없게 한 다음에야 자손을 편케 해주는 도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윤함이 또 아뢰기를, "염치(廉恥)와 명절(名節)은 곧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는 것인데, 근래의 사대부는 이 도리를 무용지물처럼 버리고, 세력을 얻고 명예를 얻는 일이라면 오직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염려하여 사소한 근신과 청렴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심지어는 연석에서 면박을 하거나 소장을 올려 탄핵하는 것을 보통 일로 간주하고, 공거(公車)의 백간(白簡)016)  이 이미 사람들의 이목에 띄었는데도 궁중에 머물려두고 내리지 않으면 거짓 모르는 체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사람이 이른바 ‘남이야 비웃고 욕하건 말건 나는 좋은 벼슬만 하면 그만이다.’는 격입니다. 또 더구나 10여년 이래로는 우물쭈물 구차함만 꾀하는 무리들이 동서로 진출을 모색하고 좌우를 둘러보며 관망하는데, 은밀히 농단의 술책을 부리는 자가 또 그 사이를 엿보고 있으니, 이는 곧 마음가짐이 매우 비루하고 천한 소치이므로, 도리어 융통성 없이 하나의 법칙만 굳게 지키는 소인만도 못한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주는 천명을 말하지 않고 성인은 시기를 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것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이 바로 임금의 조화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다시 성려(聖慮)를 한층 더 쓰시어 세상에 염치를 권장하셔서 모든 사람이 선도(善道)로 향해가는 효험이 있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적(戶籍)에 관한 일은 국가의 큰 정사인데, 우리 나라의 호적법은 본래도 소략함이 많았던 데다가 근년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의 속임수가 날로 늘어나서 그들이 이임(里任)과 결탁하여 군역(軍役)을 도피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호(家戶)만 있고 호적은 없으므로, 만일 호구(戶口)가 감축될 경우에는 그때마다 허호(虛戶)를 만들어서 누락된 실수(實數)를 충당하곤 합니다. 지금의 민폐(民弊)가 세 가지 고르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군정(軍政)과 조적(糶糴)과 호역(戶役)인데, 이는 모두가 호적법이 문란한 데서 병폐를 가져온 것입니다. 조정에서 비록 특별한 신칙이 있어도 그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는 수령들이 그 일을 이임들에게 위임하는 데 불과하니, 실제로는 신칙한 보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수령들에게 엄격한 신칙을 가하시어 수령들이 직접 부정한 사례를 적발하면서 먼저 호적부터 정리하게 하여 이 세 가지 고르지 못한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각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는 자체에서 경영하여 마련해두는 환곡(還穀)이 있는데, 이를 거둬들이고 나누어주는 절차를 일체 막비(幕裨)·영교(營校)에게 위임해버리고 수령들은 아예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남봉(濫捧)의 폐단과 모축(耗縮)날 걱정이 다른 곡식보다 더욱 심하여 치우치게 민생의 피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읍 수령들에게 출납을 관장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영저(營邸)의 환곡이란 것이 유독 호남에만 있는데, 대체로 그 관하(管下) 각 고을 관례(官隷)로서 영문을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이 영저에서 취식(取食)을 하고, 해마다 각 고을의 환곡을 내어 그 비용을 갚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저에서는 그 곡식을 받아서 돈으로 바꾸어 제멋대로 많은 이익을 챙기고, 나머지 약간의 돈으로 민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는 이를 곡식으로 거둬들여 10배의 이익을 취해서 원곡(元穀)의 숫자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법령으로 금하고 있는 입본(立本)017)  과 다름이 없으니, 의당 금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대사간 이상도(李尙度)가 아뢰기를, "《춘추(春秋)》는 성인이 세상을 경영하는 큰 법칙이므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이 경(經)을 숭상하여, 식년(式年)의 회시(會試)에서는 모두 《춘추》를 고강(考講)시키고, 감시(監試)의 종장(終場)에서도 《춘추》의 뜻을 출제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두 여기에 힘을 들였습니다. 그러다가 1백여 년 전부터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서 모두 《춘추》를 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춘추》를 새로 편찬하시어 경(經)과 전(傳)은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고, 도(圖)와 주(注)로는 예(例)와 요점[要]을 들어놓으시니, 대성인께서 필삭(筆削)하신 자취가 여기에서 다시 밝아졌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강경의 경우에 칠서(七書) 이외의 것은 형편상 더 첨가하기 어려우나, 감시의 종장에서 《춘추》의 뜻을 출제하는 것은 별로 경장(更張)의 폐단은 없고 절로 강습(講習)의 효과는 있을 것이니, 선비들이 만일 이를 강습하여 이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어찌 세상 교화에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 유경(柳畊)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늘 노인을 높이는 뜻으로 매양 높고 낮은 자급을 내리고, 또 혹 흉년을 만나서 재물을 희사하여 진휼을 돕는 백성이 있을 경우에는 옛 전례를 준행하여 반드시 공명첩(空名帖)을 내려서 그를 포상해왔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작질이 남용되는 폐단이 날로 심해져서 나이 70세도 안되어 허위로 차지한 자가 이미 첨추(僉樞)의 직함을 띠었고, 집에 곡식 10포(包)만 있어도 외람되이 도모하는 자는 문득 낭청(郞廳)의 호칭을 얻어, 이것을 가지고 군정(軍丁)을 모면하고 신분의 차등을 능멸하며, 또 혹은 실직(實職)의 품계를 함부로 차지하여 추증(追贈)의 은전까지 외람되이 입기도 하니, 명기(名器)의 외잡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나이 많은 이에게 응당 베풀어야 할 자급과 흉년에 당연히 내려야 할 포상 이외에는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응교 이익모(李翊模)가 아뢰기를,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리지 않고 결국 당세의 인재를 쓸 뿐인 것이고 보면 지금에 와서 인재를 저양(儲養)하는 방법을 강구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인재는 크고 작고 치우치고 온전한 것이 있는데, 그중 크고 온전한 것은 진실로 쉽게 의논할 수 없거니와 작은 인재의 경우도 전일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못합니다. 순(舜)임금은 구관(九官)을 임명하여 일인당 각각 일관(一官)씩을 맡게 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못 맡는 것 없이 이 관직 저 관직을 두루 역임하는 실정이고, 한(漢)나라 때에는 오경 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일인당 1경(經)씩을 전공하였는데, 지금은 모든 경서를 한 사람이 다 통하여 막힘이 없는 듯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관(官)이 빈 데가 많고 학문이 정밀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대하여 한 가지 의논도 내지 못하고, 관이 빈 데가 많기 때문에 온갖 일을 서리(胥吏)의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매우 탄식할 일입니다. 고금의 제도가 서로 달라서 진실로 또한 통하기는 어려우나, 그 뜻을 취하여 잘 이용하자는 뜻에서 본다면, 소식(蘇軾)의 책(策)에서 ‘대사농(大司農)과 경조윤(京兆尹)을 오래도록 유임시키라.’018)  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요, 호학(湖學)의 제도에서 경의(經義)와 치사(治事)와 병(兵)·민(民)·수리(水利) 등을 다스린다는 말019)  이 바로 그것이니, 요컨대, 학자들에게는 모두 쓸모있는 학문이 되게 하고 벼슬하는 자에게는 다 쓸모 있는 인재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科擧) 과목 중의 책문(策問)은 선비들의 포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고, 어려운 경의(經義)를 뽑아서 묻는 것은 실용의 학문을 강구하도록 힘쓴 것이니, 대답한 말이 진실로 볼 만한 것이 있을 경우 현량과(賢良科)의 제도를 모방하여 두세 번 책문을 시험해보면 반드시 그 실효를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선비들은 반드시 실용의 학문에 전념할 것이고, 또 관리가 된 자는 율령(律令)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의 인재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진출되었는데, 그중에 우수한 자는 경술(經術)로 관리의 일을 윤색함으로써 나가서는 훌륭한 지방 장관이 되고, 들어와서는 어진 공경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소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요(堯)·순(舜) 시대의 법 또한 ‘말로써 상주(上奏)하게 하고 일로써 밝게 시험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한나라의 소망지(蕭望之) 같은 뛰어난 경술을 가진 이로도 반드시 지방관을 두루 역임한 다음에야 공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인재는 반드시 한가지를 전념한 다음에 이루어지고, 일은 반드시 많이 알고 오래 단련한 다음에 익숙해진다.’고 한 것이니, 이 또한 인재를 양성하는 한가지 단서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농업(農業) / 윤리(倫理) / 풍속(風俗)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교육(敎育) / 출판-서책(書冊) / 구휼(救恤) / 재정-상공(上供) / 호구-호적(戶籍) / 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註 010] 자전(慈殿) : 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註 011] 인원 성후(仁元聖后) : 숙종의 계비 김씨.[註 012] 선조(先朝) : 영조를 가리킴.[註 013] 신유년 : 1741 영조 17년.[註 014] 을묘년 : 1795 정조 19년.[註 015] 자궁(慈宮) :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이름.[註 016] 공거(公車)의 백간(白簡) : 공거는 관서(官署)의 이름으로, 즉 임금에게 상주하는 글 등을 관장하는 기관을 말하고, 백간은 곧 관리(官吏)를 탄핵하는 상주서를 말한다.[註 017] 입본(立本) : 조선 후기 환곡(還穀)에 대한 폐해의 하나. 즉 지방관이 백성들에게 환곡을 금전으로 나누어 주면서 봄·가을의 쌀값의 차이를 이용하여 사리(私利)를 취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봄에 환곡을 나누어줄 때 쌀 1석의 상정가(詳定價) 3냥 중 1냥을 입본이라는 명목으로 미리 떼어놓고, 나머지 금액만을 민호에 대여하고 가을에는 모전(耗錢)을 합하여 3냥 3전을 수납해서 그 차액을 지방관과 향리가 취식하였던 것이다.[註 018] 소식(蘇軾)의 책(策)에서 ‘대사농(大司農)과 경조윤(京兆尹)을 오래도록 유임시키라.’ : 송(宋)나라 소식이 임금에게 올린 책(策)에서, 대사농(大司農)과 경조윤(京兆尹) 등의 직무는 특히 구임(久任)하지 않고서는 치효(治效)를 이룩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을 이르는데, 자세한 것은 《동파전집(東坡全集)》 권47 책별4(策別四)에 나타나 있다.[註 019] 호학(湖學)의 제도에서 경의(經義)와 치사(治事)와 병(兵)·민(民)·수리(水利) 등을 다스린다는 말 : 호학은 송(宋)나라 호원(胡瑗)이 호주(湖州)의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세운 학교인데, 전하여 호원의 학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호원이 호학에 있을 적에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두었는데, 경의재에는 기국이 탁트인 생도들을 골라서 거처하게 하였고, 치사재에서는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다스리고 또 한 가지 일을 겸하게 하되, 치민(治民)·치병(治兵)·수리(水利) 등의 일을 겸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병모가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내직·외직을 두루 시험하는 것은 그 성적을 조사하여 실용을 거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 섣달의 대정(大政) 때에 경외(京外)의 시종신들을 외읍(外邑)으로 많이 발령하시었는데, 다만 지금의 법을 따르고 지금의 풍속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줄을 이음으로써 이민(吏民)들이 그들을 영송(迎送)하기에 지치고 주군(州郡)은 장차 피폐해지게 되어, 도리어 한자리에 오랫동안 유임시키는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이 어찌 이재(吏才)에 문관·음관의 차별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실상은 치효(治效)에 오래고 빠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먼저 시종신을 선발하여 그대로 외방에 시험하는 법을 시행해서, 그의 성적(聲績)에 따라 목사·군수 등의 직을 두루 역임시키기를 일체 음관의 제도와 같이 하고, 치적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한(漢)나라 때의 증질(增秩)하던 고사를 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이로 말미암아 방백(方伯)으로 삼기도 하고 경재(卿宰)로 초탁시키기도 한다면 일군(一郡)만 다스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다는 옛말이 비록 있기는 하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넉넉하니, 어디다 쓴들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공거(貢擧)의 법은 기왕 갑자기 복고시키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과목(科目)으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형편이 비록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마는, 이따금 아름다운 학덕을 온축했거나 재보(宰輔)의 인망을 지니고도 공령(功令)의 글에 익숙하지 못하여 미관 말직에서 늙어가는 자들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을을 다스리게 하여 성적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서 추천(推遷)하는 계제를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유일(遺逸)의 선비들에게는 출신(出身)이 조금 늦어지기는 하나, 과거 출신자에 비하여 어찌 손색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사람 등용하는 길이 이미 넓어져서 어진이를 등용하는 방도가 막힘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간의 도리는 효제(孝悌)보다 우선할 것이 없고, 백성의 근본은 오직 농사를 힘쓰는 데에 있는 것이니, 진실로 효제하고 농사에 힘쓴다면 비록 경세 제민의 도구와 임금을 잘 보필할 만한 능력은 없다 할지라도 한 고을의 풍속을 착하게 만들고 한 고을의 농업을 권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여러 도에 신칙하시어 향론(鄕論)을 채집하여 어떤 이가 효제와 농업에 힘쓴 실상을 겸비하고 있는지 분명히 안 다음, 식년(式年)마다 효열(孝烈)들을 조정에 등문(登聞)할 때에 이들의 사실도 함께 아뢰게 해서, 혹은 지방관을 보내어 후히 예우하기도 하고, 혹은 술과 고기를 내리어 위문하기도 하여, 향당의 기강을 진작시키게 해서 자제들의 표준을 밝게 보인다면 전한(前漢) 시대의 독후(篤厚)했던 풍속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아울러 받아들였다. 이병모가 또 말하기를,
"‘능히 예양(禮讓)으로써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한 것은 곧 공자의 밝은 교훈입니다. 진실로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기습을 억제하려면 예양의 기풍을 숭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지금의 사직서는 곧 어진이에게 사양하는 옛 법규인데, 이것이 전하여 형식만 갖추는 빈 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진이에게 사양함으로써 자신의 어짊이 또한 드러나고, 유능한 이에게 미룸으로써 자신의 유능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꼭 모두 남의 훌륭함을 내 몸에 지닌 것처럼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국가에 있어서는 실로 무궁한 이익을 받게 됩니다. 이른바, 상서(尙書)들로부터 양보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을 가려서 등용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8명의 상서가 1명의 상서를 함께 선발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말이 《임결(臨缺)》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지금 주관하는 사람이 8명의 상서를 선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절실한 말입니다. 대체로 사장(謝章)을 낸 관직에 비록 일일이 대신할 자를 천거하도록 하기는 어렵고 도리어 한만하게 될 염려가 있으나, 우선 육조 판서의 높은 벼슬과 감사의 중요한 직임에서부터 시험하여 그의 사직하는 글을 인해서 천거하는 법을 적용한다면 어질고 유능한 자가 빠짐없이 등용되어, 인재가 부족함이 없이 쌓아두고 쓰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천거한 자의 어질고 유능한지의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비록 의견이 있기는 하나, 고금의 사정이 서로 달라서 자대(自代)하는 법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 참의 김약행(金若行) 같은 사람은 습속에 구애받지 않고 당하관으로서 후임을 천거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정식은 아니지만 만일 그렇게 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찌 꼭 금하겠는가."
하였다. 개성부 유수 황승원(黃昇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설치한 분봉상시(分奉常寺)에 해마다 서적전(西籍田)에서 수납한 자성곡(粢盛穀) 및 각읍에서 바쳐온 과품(果品)들을 모두 받들어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릉(齊陵)·후릉(厚陵)과 사직단·향교 등의 각 제향에 드는 물품을 분시(分寺)에서 봉진한다면 체모가 자별하겠으나, 감수(監守)하는 관원이 없어 매우 미안하니, 만일 봉상 분관(奉常分官) 2원을 따로 설치하여 경력과 교수의 예겸(例兼)의 직함으로 만든다면 전수(典守)를 근엄하게 하여 비로소 규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력과 교수는 분검(分檢)·분태상(分太常)·분장원서(分掌苑署)의 일을 예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제언 당상(堤堰堂上)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제방을 수축하는 것은 농사를 권장하는 중요한 일인데, 근래에 수령들이 완만하여 여기에 힘을 쓰지 않아 간악한 백성이 남의 땅을 함부로 차지해 농사짓기도 하므로, 아전(衙前)과 향임(鄕任)이 이를 인연하여 그 땅을 은결(隱結)로 두고 있습니다. 호남의 우도 지역인 김제(金堤)·만경(萬頃) 등 고을 수백 리의 평야는 곧 예로부터 수리(水利)의 혜택을 계속 입어온 토지인데, 근년 이래로 도처의 저수지가 날로 메워져서 조금만 가뭄을 만나더라도 번번이 흉년이 들고 맙니다. 지금은 양남(兩南) 지방을 진휼하는 일이 막 시작되었으니, 약간 날씨가 따뜻해지거든 장정들을 초출(抄出)하여 식량을 많이 주어 먹이면서, 모든 경내의 수축할 만한 제방들을 다 수축하게 하되, 해당 수령들로 하여금 몸소 현장에 나가 감독 신칙하여 차례로 넓고 깊게 파내도록 하게 한다면 기민(飢民)들은 먹고 살게 되고 농민들은 수리(水利)를 입게 되어 일거양득이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윤함(尹涵)이 아뢰기를,
"원자가 이제 10세가 되었으니, 조기 교육의 방도는 맨 먼저 격언(格言)·지론(至論)을 들려주어야 하고, 배양(培養)하는 방도는 문견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데, 의복·음식·언어·행동에서부터 온갖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하를 보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의당 자신을 더욱 힘써 닦아서 지선(至善)에 이르게 하여, 원자의 듣고 보는 것이 하나도 부정함이 없게 한 다음에야 자손을 편케 해주는 도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윤함이 또 아뢰기를,
"염치(廉恥)와 명절(名節)은 곧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는 것인데, 근래의 사대부는 이 도리를 무용지물처럼 버리고, 세력을 얻고 명예를 얻는 일이라면 오직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염려하여 사소한 근신과 청렴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심지어는 연석에서 면박을 하거나 소장을 올려 탄핵하는 것을 보통 일로 간주하고, 공거(公車)의 백간(白簡)016)  이 이미 사람들의 이목에 띄었는데도 궁중에 머물려두고 내리지 않으면 거짓 모르는 체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사람이 이른바 ‘남이야 비웃고 욕하건 말건 나는 좋은 벼슬만 하면 그만이다.’는 격입니다. 또 더구나 10여년 이래로는 우물쭈물 구차함만 꾀하는 무리들이 동서로 진출을 모색하고 좌우를 둘러보며 관망하는데, 은밀히 농단의 술책을 부리는 자가 또 그 사이를 엿보고 있으니, 이는 곧 마음가짐이 매우 비루하고 천한 소치이므로, 도리어 융통성 없이 하나의 법칙만 굳게 지키는 소인만도 못한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주는 천명을 말하지 않고 성인은 시기를 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것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이 바로 임금의 조화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다시 성려(聖慮)를 한층 더 쓰시어 세상에 염치를 권장하셔서 모든 사람이 선도(善道)로 향해가는 효험이 있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적(戶籍)에 관한 일은 국가의 큰 정사인데, 우리 나라의 호적법은 본래도 소략함이 많았던 데다가 근년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의 속임수가 날로 늘어나서 그들이 이임(里任)과 결탁하여 군역(軍役)을 도피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호(家戶)만 있고 호적은 없으므로, 만일 호구(戶口)가 감축될 경우에는 그때마다 허호(虛戶)를 만들어서 누락된 실수(實數)를 충당하곤 합니다. 지금의 민폐(民弊)가 세 가지 고르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군정(軍政)과 조적(糶糴)과 호역(戶役)인데, 이는 모두가 호적법이 문란한 데서 병폐를 가져온 것입니다. 조정에서 비록 특별한 신칙이 있어도 그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는 수령들이 그 일을 이임들에게 위임하는 데 불과하니, 실제로는 신칙한 보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수령들에게 엄격한 신칙을 가하시어 수령들이 직접 부정한 사례를 적발하면서 먼저 호적부터 정리하게 하여 이 세 가지 고르지 못한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각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는 자체에서 경영하여 마련해두는 환곡(還穀)이 있는데, 이를 거둬들이고 나누어주는 절차를 일체 막비(幕裨)·영교(營校)에게 위임해버리고 수령들은 아예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남봉(濫捧)의 폐단과 모축(耗縮)날 걱정이 다른 곡식보다 더욱 심하여 치우치게 민생의 피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읍 수령들에게 출납을 관장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영저(營邸)의 환곡이란 것이 유독 호남에만 있는데, 대체로 그 관하(管下) 각 고을 관례(官隷)로서 영문을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이 영저에서 취식(取食)을 하고, 해마다 각 고을의 환곡을 내어 그 비용을 갚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저에서는 그 곡식을 받아서 돈으로 바꾸어 제멋대로 많은 이익을 챙기고, 나머지 약간의 돈으로 민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는 이를 곡식으로 거둬들여 10배의 이익을 취해서 원곡(元穀)의 숫자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법령으로 금하고 있는 입본(立本)017)  과 다름이 없으니, 의당 금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대사간 이상도(李尙度)가 아뢰기를,
"《춘추(春秋)》는 성인이 세상을 경영하는 큰 법칙이므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이 경(經)을 숭상하여, 식년(式年)의 회시(會試)에서는 모두 《춘추》를 고강(考講)시키고, 감시(監試)의 종장(終場)에서도 《춘추》의 뜻을 출제하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두 여기에 힘을 들였습니다. 그러다가 1백여 년 전부터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에서 모두 《춘추》를 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춘추》를 새로 편찬하시어 경(經)과 전(傳)은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고, 도(圖)와 주(注)로는 예(例)와 요점[要]을 들어놓으시니, 대성인께서 필삭(筆削)하신 자취가 여기에서 다시 밝아졌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강경의 경우에 칠서(七書) 이외의 것은 형편상 더 첨가하기 어려우나, 감시의 종장에서 《춘추》의 뜻을 출제하는 것은 별로 경장(更張)의 폐단은 없고 절로 강습(講習)의 효과는 있을 것이니, 선비들이 만일 이를 강습하여 이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어찌 세상 교화에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 유경(柳畊)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늘 노인을 높이는 뜻으로 매양 높고 낮은 자급을 내리고, 또 혹 흉년을 만나서 재물을 희사하여 진휼을 돕는 백성이 있을 경우에는 옛 전례를 준행하여 반드시 공명첩(空名帖)을 내려서 그를 포상해왔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작질이 남용되는 폐단이 날로 심해져서 나이 70세도 안되어 허위로 차지한 자가 이미 첨추(僉樞)의 직함을 띠었고, 집에 곡식 10포(包)만 있어도 외람되이 도모하는 자는 문득 낭청(郞廳)의 호칭을 얻어, 이것을 가지고 군정(軍丁)을 모면하고 신분의 차등을 능멸하며, 또 혹은 실직(實職)의 품계를 함부로 차지하여 추증(追贈)의 은전까지 외람되이 입기도 하니, 명기(名器)의 외잡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나이 많은 이에게 응당 베풀어야 할 자급과 흉년에 당연히 내려야 할 포상 이외에는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응교 이익모(李翊模)가 아뢰기를,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리지 않고 결국 당세의 인재를 쓸 뿐인 것이고 보면 지금에 와서 인재를 저양(儲養)하는 방법을 강구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인재는 크고 작고 치우치고 온전한 것이 있는데, 그중 크고 온전한 것은 진실로 쉽게 의논할 수 없거니와 작은 인재의 경우도 전일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못합니다. 순(舜)임금은 구관(九官)을 임명하여 일인당 각각 일관(一官)씩을 맡게 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못 맡는 것 없이 이 관직 저 관직을 두루 역임하는 실정이고, 한(漢)나라 때에는 오경 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일인당 1경(經)씩을 전공하였는데, 지금은 모든 경서를 한 사람이 다 통하여 막힘이 없는 듯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관(官)이 빈 데가 많고 학문이 정밀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대하여 한 가지 의논도 내지 못하고, 관이 빈 데가 많기 때문에 온갖 일을 서리(胥吏)의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매우 탄식할 일입니다.
고금의 제도가 서로 달라서 진실로 또한 통하기는 어려우나, 그 뜻을 취하여 잘 이용하자는 뜻에서 본다면, 소식(蘇軾)의 책(策)에서 ‘대사농(大司農)과 경조윤(京兆尹)을 오래도록 유임시키라.’018)  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요, 호학(湖學)의 제도에서 경의(經義)와 치사(治事)와 병(兵)·민(民)·수리(水利) 등을 다스린다는 말019)  이 바로 그것이니, 요컨대, 학자들에게는 모두 쓸모있는 학문이 되게 하고 벼슬하는 자에게는 다 쓸모 있는 인재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科擧) 과목 중의 책문(策問)은 선비들의 포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고, 어려운 경의(經義)를 뽑아서 묻는 것은 실용의 학문을 강구하도록 힘쓴 것이니, 대답한 말이 진실로 볼 만한 것이 있을 경우 현량과(賢良科)의 제도를 모방하여 두세 번 책문을 시험해보면 반드시 그 실효를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선비들은 반드시 실용의 학문에 전념할 것이고, 또 관리가 된 자는 율령(律令)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의 인재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진출되었는데, 그중에 우수한 자는 경술(經術)로 관리의 일을 윤색함으로써 나가서는 훌륭한 지방 장관이 되고, 들어와서는 어진 공경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소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요(堯)·순(舜) 시대의 법 또한 ‘말로써 상주(上奏)하게 하고 일로써 밝게 시험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한나라의 소망지(蕭望之) 같은 뛰어난 경술을 가진 이로도 반드시 지방관을 두루 역임한 다음에야 공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인재는 반드시 한가지를 전념한 다음에 이루어지고, 일은 반드시 많이 알고 오래 단련한 다음에 익숙해진다.’고 한 것이니, 이 또한 인재를 양성하는 한가지 단서입니다."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엄(權𧟓)을 형조 판서로, 이성규(李聖圭)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장차 2월 초2일에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려 하면서 경모궁(景慕宮)의 춘향제(春享祭) 또한 친히 지낼 것을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산재일(散齋日)이 행행하여 환궁하시기 전에 있으니, 재계 단자(齋戒單子)를 마련하여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큰 제사에는 날짜를 점치지 않는다는 말이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소중한 곳을 위하여 예를 행하다가 대향(大享)의 재일(齋日)과 상치될 경우 중순(中旬)으로 물려 행하는 것은 묘향(廟享)에 있어서도 당연하거늘, 더구나 궁향(宮享)이겠는가. 경모궁의 춘향 대제 날짜를 중순 안으로 택일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병조가 아뢰기를,
"훈련원의 절목(節目)에 의하면 능마아 당상(能麽兒堂上)은 삼영(三營)의 중군(中軍)이 예겸하게 되어 있는데, 본원(本院)의 경우는 실로 도정(都正)이 또한 이를 겸차하여 윤번으로 고강(考講)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대겸(申大謙)이 도정이 되어서는 그가 훈련원 중군을 겸한 것을 가지고 ‘능마아 당상을 거듭 겸할 수 없다.’ 하여,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 신대겸의 중군직을 아뢰어 체직시켰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훈련(知訓鍊) 이경무(李敬懋)가 아뢰기를,
"도정은 본디 수아장(首亞將)의 실직(實職)이고 삼영의 중군을 겸하지 않은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보면, 관제(官制)로 헤아려 볼 때 구애됨이 있는 듯하니, 이제부터는 도정이 중군을 겸할 때에 능마아 당상을 3원(員)으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 전교하기를,
"당초에 병조 판서가 아뢴 일은 사무를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그를 추고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자에 인동 부사(仁同府使) 최헌중(崔獻重)이 상소로 그 고을 폐단에 관한 여러 가지 조항을 개진한 것을 인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리를 논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포곡(逋穀) 돌려받는 것을 햇수를 한정해서 나누어 봉납할 일에 대해 해당 부사는 10년까지 한정해주기를 청하고, 도신은 7년까지 한정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디 햇수를 한정하는 법이 있으므로 여기에 따라 앞으로 더 청해올 데가 모두 몇 고을이 될지도 모릅니다. 응당 시행되는 관례를 보아 요행으로 도피할 곳을 삼고 있으니, 지금 꼭 7년이나 10년으로 한정을 해주어 한갓 종이 위의 빈말만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당 부사가 만일 수쇄(收殺)하지 못하면 해당 부사는 의당 본율(本律)을 적용해야 하고, 후임 부사가 또 수쇄하지 못하면 전후의 부사에게 똑같이 본율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신의 책임은 오직 그 수쇄의 여부만을 안찰하여 조정에 마감을 요청하는 데에 있을 뿐인데, 어찌 감히 햇수를 한정하는 설을 가지고 관례에 따라 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산성(架山城)의 양곡을 천생 산성(天生山城)으로 옮겨 수납하는 일에 대해서는, 가산성의 설시(設施)가 긴중할 뿐만 아니라, 천생산성은 하나의 공성(空城)일 뿐인데 해당 고을 양곡 장부의 저렇듯 부실한 것을 가지고 유독 그 산성이 완실하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전대로 두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민고(民庫)의 허포(虛逋)에 관한 일은 일체 포곡 돌려받는 관례에 의거하여 수쇄하는 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도신이 청한 바 ‘매년 수납하여 사용한 실수(實數)를 1월·4월·7월·10월의 초하룻날에 각각 순영(巡營)에서 마감해야 한다.’는 말은 아마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말인 듯합니다. 관서(關西)와 관동(關東)은 도가 각각 사정이 다르므로, 순영에서 마감하는 법이 한번 행해지면 민고의 폐단이 반드시 갑절이나 많아질 것이니, 결코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남창(南倉)을 가산(架山)에 설치한 것이 다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힘이 되는 것은 우선 논할 것 없고 당장 눈앞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진실로 애처로운 일이다. 천생산성의 온갖 시설이 비록 가산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거의 죽게 된 지경에서 가까스로 소생하려고 발버둥치는 이 인동(仁同) 백성들에 대해서 특별히 폐단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되니, 해당 부사의 보고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아랫사람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민고(民庫)의 경우는 만일 창곡(倉穀)을 빙자해서 민역(民役)을 범한다면, 온 인동의 대소 인민들이 반드시 조정을 보고 자기들을 속인다고 할 것이니,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이 자리는 곧 세수(歲首)의 조참(朝參)인데, 이른 아침부터 나와 밤 삼경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수응(酬應)을 하였으나, 민생에 유익한 일로서 내 마음에 만족하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없구나. 무지한 백성이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명한 것이라, 내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곧 백성의 뜻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두려운 곳이 아니겠는가. 포곡은 이미 빈 장부가 되었고 숫자 또한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사로 하여금 풍환(馮驩)의 고사020)  를 써서 장부를 모아 불태워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부사의 자리를 특별히 계제가 될 만한 이력의 한 길로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사람들이 그 고을을 선망함으로써 그 고을이 저절로 적당한 인재를 얻게 될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대신과 전형관이 서로 의논하여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1월 12일 정축

함흥부(咸興府)에 명을 받들고 간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복명하였으니, 즉 독서당(讀書堂) 치마대(馳馬臺)에 어제(御製)의 비문(碑文)을 배봉(陪奉)하고 들어온 것이다. 이익운이 아뢰기를,
"북도의 교제곡(交濟穀)은 구치곡(久置穀)과 산재곡(散在穀)의 두 가지가 있는데, 산재곡은 즉 피곡(皮穀)으로서 각처의 창고에 수납 저장되어 있는 것이고, 구치곡은 곧 정곡(正穀)으로서 반드시 교제창(交濟倉)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원곡(原穀)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민폐가 별로 없었으나, 지금은 모곡(耗穀)을 불린 것이 해마다 늘어나 그 숫자가 아주 많아져서 매양 조적 때를 당하면 실로 산간 백성들이 양곡 운반의 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으니, 바라건대, 구치곡도 산재곡의 관례에 의거하여 소재의 각 창고에 조적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에서 품처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남관(南關)의 구치곡은 지금 8만 7천여 석이고, 북관(北關)의 구치곡은 지금 8만 5천여 석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근년 이래 남관과 북관이 모두 연속 풍년이 들어 수입만 있고 지출은 없어서 원수의 곡식이 이렇게 많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민폐가 된 것이 과연 재신(宰臣)의 아뢴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북도가 믿는 것은 오직 이 곡식에 있으므로, 비록 그 곡식을 산재곡으로 많이 만들어 후일의 걱정을 끼칠 수는 없으나, 또한 약간 재감을 가하여 백성들의 운반하는 노고를 덜어주지 않을 수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 곡식은 본디 2분을 유치하고 1분을 내주는 곡식이니, 만일 규정 밖에 더이상 내주지만 않는다면 그 수는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몇 포(包)를 감하면 그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지와, 산간 마을이 받는 것은 모두 몇 포이며, 또는 평야지대 마을만 유독 많이 받아도 치우치게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는지 등이 다시 더 소상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헤아려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여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본도의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이 파직되어 돌아가고, 이집두(李集斗)가 대신 본도 관찰사가 되어 몇 달 뒤에야 모든 사정을 갖추어 논계하였다.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지난번에 이익운이 아뢴 말을 인하여 북도 교제창의 구치곡에 대한 폐단을 제거할 방도를 가지고 관문(關文)을 내어 해당 도에 물어보고, 또 함경도의 전 감사인 이정운이 아뢴 말을 인하여 환곡(還穀)을 더 무역할 일로 복계(覆啓)하였던 바, 비지(批旨)에 ‘각항(各項) 양곡의 총수를 거슬러 조사하여 반드시 예전의 총수를 회복시키기를 생각해야 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함경 감사 이집두의 장계를 보니 ‘북관의 경우는 지난 기유년021)  에 위유 어사(慰諭御史)의 별단(別單)에 대한 회계(回啓)를 인하여 육창(陸倉)과 해창(海倉)에 나누어 수납하였으므로, 실로 폐단이 되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관의 열읍 가운데 안변(安邊)·영흥(永興)·북청(北靑)·단천(端川)의 경우는 산간 마을 백성들의 받아가는 데에 대한 폐단이 가장 백성을 괴롭히는 정사가 되므로, 변통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타 각읍의 도리(道里)는 그리 멀지 않고, 혹 읍내에서 산간 마을로 구별된 곳이 간간이 꽤 있기는 하나, 이런 곳까지 일례로 거론할 수 없으므로, 구치곡을 각읍의 창고에 산재시키자는 논의는 감히 선뜻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남관의 구치곡은 본디 3만 석이던 것이 지금은 8만 8천 2백여 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부곡(會付穀)의 총수가 9만 8천 90여 석인데, 1년의 경상수입은 1만 7천 30여 석이고, 1년의 경상지출은 2만 9백 80여 석이 되므로, 원곡이 점점 줄어서 경상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상진곡(常賑穀)을 취하여 쓰다 보니, 일이 매우 구차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니 산재조(散在條)의 각 곡식 10만 3천 9백여 석 가운데에서 찧은 쌀로 한 3만 석 정도를 회부곡에 옮겨 붙여서 양곡이 부족한 각읍에 나누어 주고, 그 모곡을 받아서 경상비로 쓰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구치곡의 매년 들어오는 모조(耗條)에 대해서는 이를 산재조로 바꾸어 각읍 소재의 창고로 받아들인다면 곡식을 이동하는 폐단이 없는 동시에 문서만 가지고 명칭을 바꿀 수 있게 되니, 산간 백성들에게는 구치곡 운반의 노고를 줄이는 보람이 있고, 각읍에 있어서는 회부곡의 구차하고 어려운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치곡은 점차 많아져서 폐단이 되고 원회곡(元會穀)은 전보다 감축되는 것이 모두 본도의 당장 바로잡아야 할 정사인데, 북관의 구치곡은 일찍이 육해(陸海)의 각 창고에 나누어 받아들였으니 별로 논할 것이 없거니와, 남관의 구치곡은 당초에 3만 석이던 것이 지금은 8만 8천여 석이나 되었고 보면 의당 여기에서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주기는 쉬워도 모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니, 도신의 장계에서 ‘감히 선뜻 의논하지 못하겠다.’고 한 말이 진실로 의견이 있어 보입니다. 원회곡에 대해서는 원회안(元會案)을 거슬러 조사해본 결과, 병신년 이전에 14만 3천여 석이던 것이 정사년에는 실제 총수가 9만 3천여 석뿐이었으니, 4만 9천여 석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산재조 각 곡식 10만여 석 가운데서 도신의 장계에 따라 찧은 쌀 3만 석 정도를 원회곡으로 옮겨 붙인다면 계산상 각 곡식이 병신년 이전 원회곡의 총수를 충분히 넘을 것이고, 또 구치곡의 매년 들어오는 모조를 산재조로 옮겨 붙인다면, 앞서 산재조를 원회부에 옮겨 붙인 만큼의 양이 절로 점차 충당될 것이니, 변통하는 도리에 있어 실로 양쪽이 다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3일 무인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판서로, 조진관(趙鎭寬)을 형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서매수(徐邁修)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윤겸(李潤謙)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월 14일 기묘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재변이 있다 하여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차자를 올려 척퇴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변 중에도 큰 변인데, 근래에는 해마다 이런 변이 있어 마치 하민들로 하여금 항상 보도록 한 것 같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를 헤아릴 수 없어 국가가 한없이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제에 전하께서 자신을 책망하시는 전교를 내리시어 상선(常膳)을 감하시고 직언(直言)을 구하시니, 전화 위복의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재변이 없는 나라는 위태로운 법이다.’ 하였으니, 재변이 없다는 것은 곧 하늘이 그 나라를 잊어버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진실로 위망(危亡)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거니와 만일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데도 수성(修省)을 게을리 한다면, 하늘의 사랑이 노여움으로 변하여 끝내는 잊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전하께서 한 생각을 어떻게 잡아 간직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전전긍긍하시어 그 사람의 선을 알면 버리지 말고 등용하시고, 그 사람의 악을 알면 머물려두지 말고 물리치셔서, 행여라도 진흙을 물에 탄 것처럼 흐리멍덩하여 곧은 사람과 굽은 사람을 분별없이 처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어, 편당에 힘쓰는 자는 죄를 주어 두려움을 알게 하고, 공정을 힘쓰는 자는 포장을 하여 권면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아래로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책임이 대체로 감사와 수령에 달려 있는 것이니, 감사와 수령을 잘 가려 임명하지 않고서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곧 거울을 뒤집어놓고 얼굴이 비치기를 바라는 격입니다. 이상의 두어 가지 말은 비록 늘 쓰는 평범한 말이면서도 이미 시행되지 않는 죽은 법칙과도 같으나, 수성하는 실상은 아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음(陰)이 성하면 양(陽)을 범하는 법인데, 양 중에는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없거늘, 요기가 삼양(三陽)022)  의 계절에 태양을 관통하였으니, 그 상(象)이 양을 범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나는 몹시 의혹되고 두려워서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몸둘 바가 없는 듯이 불안하구나. 경이 차자로 경계해준 말을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끝에 첨부한 인책 사면에 관한 말은 도리어 겉치레임을 면할 수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안심하고 부족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차자를 올려 척퇴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마음 공부를 하다 말다 하다 보니, 오직 천지신명께 보답을 못하는지라 이 때문에 천지신명이 기뻐하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성(誠)한 것은 천도(天道)이고 성하는[誠之] 것은 인도(人道)이니, 깊고 그윽한 기상을 본받으려면 의당 천도와 같이 순수하고 또한 그치지 않는 공(功)을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로 부덕하여 이를 해내지 못하니, 하늘과 사람의 사이에 어찌 서로 감통하는 응험이 있겠는가. 하늘의 이런 경고(警告)가 있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부른 일이라, 매우 두렵고 조심스러워 자못 몸둘 바를 모르겠노라. 재변을 부른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부덕함 때문인 것이니, 경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안심하고 정무를 보기 바란다."

 

제주(濟州)에 표류해온 청(淸)나라 배가 있었는데, 돛대가 대단히 커서 길이는 15장(丈)에 이르고 둘레의 넓이는 2장 남짓하다고 했다. 이 나무는 곧 서양(西洋)에서 생산된 것이다.

 

1월 15일 경진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어제 있었던 무지개의 변은 또 어찌하여 일어났는가. 그런 변이 한 번만 있어도 매우 두려운 일인데, 더구나 3년을 거듭 나타난단 말인가. 어제 정원의 의논과 대간의 계사와 재상의 차자에서 모두 범범한 말만을 열거하여 소략하고 긴요한 뜻이 전혀 없어 일개 거자(擧子)의 상투적인 대책문과 같았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애당초 말을 구하지 않았으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말을 구하였는데도 좋은 말이 한마디도 없었으니, 지금의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도 기록이 되면 후인들이 오늘의 일을 어떻다고 말하겠는가. 경의 어제 차자에서 하늘에 보답하는 도리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하늘에 보답하는 도리는 역시 마음속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경들에게 언론을 극도로 자상하게 하도록 하더라도 겉에 드러난 자취에 불과할 뿐이고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와 선악이 싹트는 단서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어찌 내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내 스스로 반성하여 정령(政令)과 행위의 사이에서 찾아보니, 한 가지도 온당하게 된 것이 없다. 위에서 찾아보면 하늘의 마음이 기쁘지 않음으로써 재이가 계속 일어나고, 아래에서 찾아보면 흉년이 거듭 들어 민생들이 곤궁하고 초췌하니, 비록 풍년이 든 때가 혹 있더라도 소식(蘇軾)이 이른바 ‘풍년이 흉년만 못하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다.
환곡(還穀)의 폐단은 본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병조 및 각 군문의 보포(保布)는 모두 임진년023)   이후에 처음으로 내게 된 것인데, 가련한 지금의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견디겠는가. 더구나 이 징독(徵督)에 시달려서 하늘에 호소하려 하나 호소할 길도 없는 저 수십만 백성들은 모두가 대단히 불쌍한 무리들이다. 하늘의 신령과 조종(祖宗)의 큰 덕을 힘입어 다행히 무사하기는 하나, 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 위태롭고 두려운 마음이 어찌 썩은 새끼줄로 육마(六馬)를 부리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낮에 행한 일들을 밤이면 반드시 생각하여 실로 혼자 있을 때도 하늘이 내려다보는 듯이 근신하는 마음을 갖기는 하나, 하루에도 만 가지나 되는 일의 기틀 가운데 한 가지 일도 마음에 만족한 것이 없으니, 어떻게 재이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상께서 좋은 말을 구하실 때에 아랫사람이 곧은 말을 올린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아랫사람이 상의 명에 대답하여 상의 뜻을 널리 선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구언(求言)을 인하여 감히 협잡의 뜻을 부려서 뜻이 같은 자는 편들고 뜻이 다른 자에게는 공격을 하여, 그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을 올리는 것은 한 가지이나, 행위는 같아도 속뜻은 달라서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나 어긋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과 귀신을 섬기는 것이 그 도리는 한가지입니다. 제사의 예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혹 저기에서 구하거나, 여기에서 구하거나 상하 사방에 구하지 못할 곳이 없는 것이니, 재변을 만나 수성하는 도리도 또한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항상 ‘이 일이 온당하지 못한가.’라든지 ‘저 일에 실수가 있었는가.’ 하면서 한 가지 일, 두 가지 일을 감히 안일하게 지나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하여 오래도록 게으름이 없이 한다면 하늘의 마음이 거의 감동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은미한 사이에 일분이라도 미처 자신을 검속하지 못한 곳이 있게 되면 비록 의리가 정밀하고 인(仁)이 익숙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어쩌다 한 번이라도 도에 어긋나면 문득 그른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상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는 일은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능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진실로 지금의 조정에 능히 이 책임을 담당할 만한 자가 있다면, 상께서 꼭 여러 사람을 찾아가 자문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연 마음을 바로잡는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은 감히 격식이나 갖추어 겉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우의 보필을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누가 성공(聖工)의 성찰(省察)을 도울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모든 공적이 다 빛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처럼 어리석은 자는 속히 척퇴시켜주시는 것이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경례(慶禮)를 인하여 《정원일기(政院日記)》 및 실록(實錄)을 조사해보니, 실록도 간혹 잘못된 곳이 있었다. 병인년 수의(收議) 때의 경우, 고 상(相) 김수항(金壽恒)·남구만(南九萬)은 모두 매우 신중론을 주장했고, 고 상 민정중(閔鼎重)은 신중론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려는 뜻이 있었는데, 실록에는 ‘민정중·김수흥(金壽興) 2인 외에는 모두가 받들어 따랐다.’고 기록되었으니, 어찌 매우 사실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사서(史書)를 만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비록 눈으로 직접 본 일이라 할지라도 일당(一堂) 가운데서도 소견이 각각 다르고 일자(一字)의 착오로 인하여 사실이 완전히 어긋나게 되는데, 더구나 후세의 사서는 온통 사사로운 뜻이 많이 섞여 있으니, 장차 어떻게 전해가며 믿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좌상의 차자에는 ‘진흙을 물에 탄 것처럼 흐리멍덩하여 곧은 사람과 굽은 사람을 분별없이 처리한다.’는 말이 있었고, 원의(院議)와 부계(府啓)에서는 또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는데, 나는 무엇을 가리킨 말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말들이 이미 장주(章奏)에 누차 올라온 것이라, 내 또한 한번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로 음붕(淫朋)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사학(邪學)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은 금하지 않아도 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곧은 자가 있다면 굽은 자도 감화되어 곧게 될 것이고 참으로 대죄(大罪)가 있다면 의당 유방 찬극(流放竄殛)의 율을 쓰면서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는 것은 일삼을 바가 없는 것이다. 또 서로 소소한 의견 차이에 이르러서는 한집에 사는 사람들에겐들 또한 어찌 이런 것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물거품과 같이 절로 일었다 절로 꺼져버리는 데에 불과한 것일 뿐인데, 또한 어찌 출노 입주(出奴入主)024)  의 정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이미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는 기풍을 높이었고, 우리 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건극(建極)025)  의 다스림을 크게 천양하였으니, 지금의 이른바 쟁단(爭端)이라는 것이야 또한 어찌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쟁단이라는 것은 피차가 서로 적대시하는 것을 이르는데, 진실로 군자의 도가 자라고 소인의 도가 소멸한다면 무슨 쟁단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그 원기(元氣)가 부실함으로 인하여 객기(客氣)의 침범이 있게 된 것이므로, 나는 곧 ‘오늘날의 이른바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지 못한다는 말은 도무지 가소로운 일이다.’고 말하는 바이다. 대체로 겉은 서로 친한 것 같으면서도 속은 실상 서로 괴리된 경우가 바로 좋지 못한 모양이니, 만일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밖에는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나리포창(羅離舖倉)의 곡식을 여러 고을에 나누는 것과 한 고을로 합하는 데에 대한 편리 여부를 의논하였는데, 정민시(鄭民始)·서용보(徐龍輔) 등이 말하기를,
"제주(濟州)로 옮겨 운반할 즈음에 많은 폐단이 있게 될 것이어서 각 고을에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으나 그렇게 하여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 이것을 한 고을에 죄다 모아두어 한 고을만 오로지 담당하게 하는 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는 정사이고, 또 운반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체되어 불편한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묘당(廟堂)이 다시 관문을 내어 해당 도신(道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의주부(義州府)는 본디 사람은 많고 땅은 좁은데, 그중 위화도(威化島)는 토지가 비옥한데도 오랫동안 버려져왔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허락해주기를 원하고 있으나, 의논하는 자가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성조(聖祖)026)  께서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또는 ‘연변(沿邊)의 땅이다.’ 또는 ‘오래 버려진 땅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곳 읍지(邑誌)에 의하면 ‘땅이 매우 비옥하여 농사지은 백성이 많았는데, 천순(天順)027)   5년에 우리 농민이 야인(野人)에게 피납당한 일이 있어 이때부터 관(官)에서 농사짓는 것을 금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버려졌다는 것은 곧 야인들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본디 성조께서 군대를 주둔시킨 곳이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소중함은 위화도보다도 더욱 자별하지만 그곳은 오히려 경작을 허락하였고 보면, 유독 이 위화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사실을 자세히 모르고 한 말인 듯합니다. 서쪽으로 강가의 칠읍(七邑)과 북쪽으로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六鎭)은 모두가 연변의 땅인데도 백성들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 위화도에 대해서만 어렵게 여긴단 말입니까. 더구나 이 위화도 밖으로는 또 일곱 개의 섬이 강 가운데에 나열해 있는데, 그 섬들은 모두 농사를 지어먹도록 허락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섬은 저 일곱 섬의 안에 있어 곧 내지(內地)인 만큼 더욱이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오래 버려진 땅이라 한 데에 이르러서는 본디 고식적인 데에 젖어 일을 미처 착수하지 못한 소치일 뿐이요, 별다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자성(慈城)·후주(厚州)도 역시 오래 버려진 땅이지만 지금은 모두 백성들에게 경작을 허락하고 있으니, 더욱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읍지에는 또 ‘섬 가운데 비석이 두 개가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하였으니, 지금 만일 비를 다시 세워서 큰 업적을 표하고, 예전대로 경작을 허락한다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이 섬은 큰물을 만날 때마다 매양 잠기는 걱정이 있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봄·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수확을 해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하고 허술한 단서도 많습니다."
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정지시켰다.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을 파직시켰다. 이조원이 일찍이 품지를 거치지 않고 정련배(正輦陪)에게 요포(料布)를 더 지급하였으므로, 대신이 아뢰어 그를 파직시키고, 이시수(李時秀)를 그의 대신으로 삼았다.

 

제주 명월포(明月浦)에 다른 나라의 배가 표류해 왔는데, 배 전체의 길이는 2백 30척이고, 넓이는 길이의 4분의 1이었다. 돛대는 모두 세 개인데, 그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백 50척이고, 둘레가 25척이며, 그 목재(木材)는 서양에서 생산된 것으로 그 값이 은(銀) 2천 5백 냥에 해당한다고 한다. 모포(毛布)로 돛을 달았는데, 넓이가 1백 척이고 길이는 20척이었다. 돛대마다 각각 대자리로 짠 돛이 따로 있는데, 넓이는 베돛[布帆]과 같으면서 길이만 약간 더 길었다. 키[舵]의 길이는 70척인데, 쇠로 그 자루를 동였고, 닻[碇]은 여섯 개였는데, 목제(木製)가 네 개이고 철제(鐵製)가 둘이었다. 배의 뒤쪽은 층옥(層屋)으로 되었는데 그 옥 안에는 한가운데로 방(房) 네 개가 있었고, 한복판의 돛대 곁에는 또 판옥(板屋)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방 여섯 개가 있었다. 옥상(屋上)에는 누(樓)를 만들고 창을 설치했는데, 난간은 금(金)으로 도장(塗裝)하였다. 또 비단 휘장을 쳤는데, 그 휘장에는 ‘천후성단(天后聖丹)’이란 네 글자가 금서(金書)로 씌어 있었고, 그 안에는 금불(金佛) 세 구(軀)를 모시고 있었다. 거기에 적재한 것으로는, 황두(黃豆)·청두(靑豆)·녹두(祿豆)·오두(烏豆)·조미(糙米)가 모두 1천 1백 61담(担)이었는데, 1담이 우리 나라로 따지면 40두(斗)에 해당한 것이고, 상지(箱紙)가 9천 6백 70상(箱)이며 또 《손방연의(孫龐衍義)》·《설당(說唐)》·《정서곡부(征西曲簿)》·《남강북조(南腔北調)》 등의 서책과 기르는 고양이·개와 길들인 새의 무리가 있었다. 배의 꼬리 부분에는 ‘금보발(金寶發)’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곧 선호(船號)로서 대체로 상선(商船)인 것이다.
본주(本州)의 목사가 선주(船主)에게 사정을 물어본 결과 선주의 이름은 진가서(陳嘉瑞)이고, 타공(舵工)과 수수(水手)는 모두 30인이었다. 본디 복건성(福建省) 장주부(漳州府) 해징현(海澄縣)의 선상인(船商人)으로서 공표(公票)와 부패(部牌)를 차고 있었는데, 수로(水路)를 따라 돌아가기를 원하여 정박한 지 26일째가 되던 날 한낮에 동풍(東風)이 불자 파수장(把守將)에게 말하고는 즉시 돛을 걸고 출항(出港)해서 곧바로 서남쪽의 대양(大洋)을 향해 가더니 순식간에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고 한다.
전라 감사 이득신(李得臣)이 이 사실을 치계(馳啓)로 보고해 왔으므로,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지어서 북경(北京)에 교부하여 장차 예부(禮部)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경각사(京各司)·각영(各營)이 정사년의 회부(會簿)를 올렸는데, 호조의 향청(餉廳)·혜청(惠廳)과 병조의 장영(壯營)·훈국(訓局)·금영(禁營)·총융청(摠戎廳)에 현재 남아 있는 재정은 금(金)이 2백 67냥 남짓이고, 은(銀)은 41만 3천 9백 15냥 남짓이고, 전(錢)이 1백 31만 1천 1백 87냥 남짓이고, 면주(綿紬)가 1백 53동(同) 남짓이고, 면포(綿布)가 5천 9백 82동 남짓이고, 저포(苧布)가 3백 52동 남짓이고, 포(布)가 1천 1백 73동 남짓이고, 미(米)가 25만 9천 1백 46석 남짓이고, 전미(田米)가 8천 8백 82석 남짓이고, 황두(黃豆)가 3만 1천 2백 97석 남짓이고, 피잡곡(皮雜穀)이 8천 5백 61석 남짓이었다.

 

1월 16일 신사

송환기(宋煥箕)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상진(趙尙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우유선(右諭善)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우리 원량(元良)의 빛나는 공부가 조금도 간단이 없었는데, 신이 명을 어김으로 인연하여 오랫동안 공부를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죄가 이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용서받을 길이 없었는데, 지금 다행히도 헌부의 직과 시강원의 직함을 차례로 해면해 주시고 또 함께 오라는 명까지 거두어주시니, 이제부터는 다시 본분을 찾고 마음을 조금 편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이 강학(講學)은 성대한 예절이고 유선(諭善)은 막중한 직임인데, 신 같이 불초한 사람이 장차 어떻게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성상의 명에 대양(對揚)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강청(講廳)의 규정은, 비록 요속(僚屬)이 아닐지라도 배시(陪侍)에는 참여할 수 있는 것이므로, 고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도 부름을 받았을 적에 현직으로 자처하지 않고 경연과 시강원을 출입했었습니다. 선배가 이미 행한 전례를 망령되이 끌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나, 직분을 초월한 부르심에 응할 수 없는 마음은 끝내 변하기 어려우니, 혹시라도 성상의 아랫사람 친애하는 인자하심을 입어 음관(蔭官)인 군함(軍銜)만 가지고 반열 끝에 나아가 참여해서, 총명하신 원량의 얼굴을 우러러 뵐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신이 비록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는다 할지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비록 고 찬선 송명흠이 현직으로 자처하지 않고 경연과 시강원을 출입했던 일을 끌어대서 말하였으나, 그는 궁관의 직함이 체직되지 않아서 궁관 자격으로 시강원에 들어왔는데, 나는 접빈(接賓)의 예로 그를 볼 것을 청하여 절도 앉아서 받지 않고 모두 답례를 했었다. 《일성록(日省錄)》을 상고해보면 월일까지도 증명할 수가 있는데, 경은 어찌 그토록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1월 17일 임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각신(閣臣)·문임(文任)·예당(禮堂)을 소견하고 윤음(綸音)을 내렸다.
"동조(東朝)028)  께 존호를 올리는 것은 장렬 성후(莊烈聖后)029)  의 춘추 63세가 되던 병인년030)  에서 비롯되었는데, 먼저 진풍정(進豊呈)의 큰 잔치를 거행하고 뒤이어 주갑(周甲)의 축하례를 거행하였으며, 예를 거행하는 날에는 또 휘호(徽號)를 불러서 더 높일 일로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한 결과, 대신 김수항(金壽恒)·남구만(南九萬) 등이 ‘국조의 전례(典禮)에는 의거할 데가 없다.’고 대답함으로써, 이에 특례(特例)를 만들어 거행했었다. 그런데 우리 인원 성후(仁元聖后)031)  의 춘추 54세가 되던 경신년032)  에 이르러서는 종신(宗臣)들이 병인년의 고사를 인증하여 욕의(縟儀)를 거행하기를 청하자, 대신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의당 자전(慈殿)의 춘추가 회갑이 꽉 찰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특별히 종신들의 의논을 따라서 거행했었다. 그리하여 나 또한 성지(聖志)를 준거하고 성전(晠典)을 좇아서 우리 자전의 춘추 51세가 되던 을묘년033)  에 존호를 올려 동조(東朝)의 높은 자리에 계시며 장수의 복을 누리시게 하였고 크게 현책(顯冊)을 받들어서 마침내 방례(邦禮)로 삼았는데, 이는 대체로 숙종 대왕께서 그 선조(先朝)를 높이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병인년 이전에는 고증할 데가 없었으므로 그때 대신들의 논의가 진실로 저러 하였으나, 경신년 이후에는 본받을 데가 있게 되었으니 오늘날 경들의 말이 또 당연하도다. 남들이 아첨이라고 하더라도 사리에만 합당하면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내가 그 법만 공경히 지켜서 잃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 여기노라. 소자(小子)가 자전을 위해 날을 아끼고 자전의 춘추를 기억하는 성심으로 해마다 날마다 양금(揚金)034)  에 기록하고 남옥(藍玉)035)  에 새기어 큰 아름다움을 포양하고 큰 경사를 올리며, 기명(基命)의 시(詩)036)  를 계승하고 장락(長樂)의 송(頌)037)  을 이어서, 경사가 있음을 빛내고 무궁한 후세에 내려 보이더라도 어찌 족히 자전의 은덕을 빛내고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예는 비록 인정(人情)에 인연하나 정은 반드시 천칙(天則)에 절제되는 것이요, 어버이를 높이는 데는 아름다움을 천양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거니와, 어버이를 사랑하는 데는 뜻을 순히 받드는 것보다 무엇이 더 크겠는가.
왕실의 덕음(德音)을 이어서 항상 두려워하고 공경하시어, 사소한 데서 기미에 밝음으로써 요행의 길은 영원히 지식되었으나 휘장 안에 빛을 감춤으로써 실상 은택은 멀리 미치지 못하였다. 항상 겸손하시어 스스로 난 체하지 않아서 오늘에 이르기를 하루같이 하였으니, 이것이 곧 자전의 덕이 속에 쌓이어 겉으로 드러난 것이요, 자전의 은택이 나로부터 시작하여 팔방에 입혀진 것인데, 자전의 공이 저렇듯 성대한데도 자전의 마음은 더욱더 겸손하시기만 하였다. 소자(小子)가 근자에 또 곁에서 말씀을 들은 바가 있는데, 을묘년에 애써 따랐던 것은 다행히 선대에까지 빛을 더하는 데에 부합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에 지나치면 옛날에 없었던 것이니, 옛날에 없었던 일은 감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옛날 병인년과 경신년은 바로 지금의 을묘년이요, 지금의 무오년은 바로 옛날의 정묘년과 신유년에 해당한 것이다. 지난해 안창(安昌)에게 내린 비답에서도 ‘30년이 되는 신해년에는 일찍이 거행하지 않았고, 40년이 되는 신유년에도 일찍이 거행하지 않았으며, 유독 39년이 되던 경신년에 거행했던 것은 소중함을 따라서 한 것일 뿐, 경신년이란 데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병인년과 경신년은 40년과 50년에서 똑같이 1년 앞선 해로서 모두가 우연히 서로 일치된 것일 뿐인데, 또 병인년과 경신년 이외에 다시 정묘년과 신유년에는 거듭 거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이른바, 한 가지 일을 두 번 거행하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전의 분부를 받들건대, 경위를 변석하심이 정밀하고도 적절하여 더욱 내 마음에 분명해진 바가 있었다. 존호를 더 높이는 것은 숙묘(肅廟)의 병인년에서 비롯되어 선조(先朝)에게 법칙을 드리웠고, 미리 강구하는 일은 선조의 경신년에서 비롯되어 소자에게 법을 끼쳐주었다. 소자가 오늘날 자전의 뜻을 순히 받들고자 하는 것은 또한 후인들에게 표준을 보이려는 것이니, 자전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곧 자전의 미덕을 포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들을 소견(召見)하여 이렇게 선유(宣諭)하고 모름지기 경들로 하여금 내 마음을 잘 이해하도록 하는 바이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대신(臺臣) 홍치영(洪致榮)이 전 이조 판서 이병정(李秉鼎)을 논핵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많아서 그것을 말하자면 실로 입이 더러워질 지경입니다. 가사 이조 판서의 범행이 논핵한 자의 말과 방불한 점이라도 있다면 그가 조신(朝紳)의 반열에서 쫓겨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분의 일이라도 말한 자에게 잘못이 있다면 아무리 대관(臺官)이라 할지라도 또한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정직한 자를 등용하고 사곡한 자를 배척하는 정사를 함에 있어 한 번 밝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지금은 흑백도 없고 시비도 없이 다만 청환직을 가지고 중신(重臣)을 나오도록 독촉하고 있으니, 후인들이 지금의 일을 본다면 어찌 희한한 세상이었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세도에 관계된 것이니 밝으신 명을 내려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이렇게 처분한 것에 대해서 나는 도리어 이것이 곧 조정을 높인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하자, 채제공이 또 말하기를,
"성교(聖敎)는 비록 이러하시나, 이 일은 끝내 한결같이 덮어 가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총재(冡宰)의 소중함이 어떠하며, 대각(臺閣)의 소중함은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대각이 총재를 논핵하는 데에 있어 심지어는 ‘후한 뇌물을 받으려고 물산(物産)의 목록을 적어 주었다.’는 말까지 있었는데도 끝내 논핵을 받은 두 사람이 모두 다치지를 않았으니, 조정이 높지 못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중신에게 도리어 또 문임(文任)의 청선(淸選)과 서벽(西壁)의 중지(重地)를 연해서 제수하시어 전혀 구애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지 성균(同知成均)의 경우는 또 더구나 성묘(聖廟)의 직인데, 더욱이 어찌 이같은 모욕을 입은 자가 편안하게 출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 사실을 한번 끝까지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경의 차자에서 ‘진흙을 물에 탄 듯이 흐리멍덩하여 정직한 자와 사곡한 자가 서로 혼동되었다.’고 한 말도 이 일을 가리킨 것인가?"
하자, 채제공이 대답하기를,
"과연 이런 일을 가리켜 말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는 절로 체통이 있는 법이요, 대간에게는 본디 풍문(風聞)을 논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이니, 본사(本事)의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여 변핵(辨覈)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아니라면 어찌 언관에게 가벼이 사핵(査覈)을 가할 수 있겠는가. 가사 대간의 말이 실상에 어긋났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한 중신(重臣)을 탄핵한 것 때문에 반좌율(反坐律)을 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중신의 문학과 기백은 진실로 취할 만한 것이 있으나, 다만 그의 품성이 매양 남과 다름으로 인하여 이런 평판을 받게 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후 중신의 상소를 본 결과 사실과 서로 다름을 갖추 진술하였으므로, 그의 말을 믿고 관직에 낙점을 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탄장(彈章)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그것은 한갓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관직을 위하고 조정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황익성(黃翼成)038)  은 대신이었는데도 ‘우각 서혈(牛角鼠穴)’이라는 말이 있었다. 모든 일을 어찌 박절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또 말하기를,
"조정의 사체는 의당 시비를 바로잡고 출척(黜陟)을 엄명히 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거니와, 또 구채(舊債)니 물산(物産)이니 하는 등의 말이 이미 대론(臺論)에서 나왔고 보면 이 사실을 변핵하기 전에 청환직을 어찌 그에게 의의(擬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미 이러하니, 일찍 나와 결말을 지으면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겠거니와, 설령 좌상의 말과 같더라도 이미 저쪽에 물어보고 또 이쪽에 물어보고 한다면 이렇게 하는 사이에 조정의 존엄하지 못함이 더욱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피혐 중에 있는 해당 수령의 성명을 지적하여 진술하게 한다면 혹 중신을 위해 변명해주는 방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밝히는 정사는 진실로 의당 이와 같이 해야 하겠으나, 양쪽으로 물어보는 즈음에 한갓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킬 뿐, 설사 해당 수령의 성명을 조사해낸다 하더라도 결국 결말이 안 나기는 한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사 좌상이 이 일을 담당해서 한다 할지라도 또한 아마 일할 때가 말할 때와는 같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각 고을의 포리(逋吏)와 반민(反民)들에 대해서 반드시 발각한 해당 수령으로 하여금 그 대곡을 충당하게 하려고 하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창고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결코 발각할 리가 없습니다. 또 빈 숫자만 기록된 것이 많아서 혹 1, 2만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것을 반드시 해당 수령으로 하여금 모두 채워놓게 한다면 그들이 백성의 것을 긁어들이는 일 외에 장차 어디에서 이것을 다 거둬오겠습니까."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수령들에게 충당하도록 하는 것은 또한 옛 법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보고하는 공문 한 장만 올린 다음에는 수령은 도무지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징수하지도 못한 곡식을 공공연히 장부에 기록만 해놓을 경우, 그 결과는 반드시 정퇴(停退)039)  나 혹은 탕감(蕩減)에까지 이르고야 말 것이니, 국곡(國穀)이 점점 감축되는 것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채제공이 또 말하기를,
"북청(北靑)의 전 부사 신대윤(申大尹)이 해척(海尺)040)  에게 세금을 가중시킨 일과 소를 밀도살한 죄인을 뒤늦게야 체포한 일로 인하여 그곳 병사(兵使)가 이미 그를 파출하였는데, 비국(備局)이 신대윤을 논단(論斷)하는 데 있어서는 다만 ‘법령을 엄중히 하지 못했다.’는 말과 ‘잘못된 관례를 답습했다.’는 등의 말로, 매우 소략하게 마감을 청하였으니, 이는 너무 경하게 처리한 실수를 면할 수 없습니다. 의당 그에게는 유배의 법률을 더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비국에서 논단한 것은 다만 관찰사의 장계에서 논열한 것에 빙거했을 뿐인데, 지금에 와서 신대윤을 유배까지 시키면 그 관찰사 장계의 세심하지 못한 실수가 절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해당 수령에게 범법한 일이 있는데도 즉시 장계를 올리지 않음으로써 결국 수신(帥臣)이 절차를 밟지 않고 치계(馳啓)하는 망령된 행동이 있게 하였으니, 감사가 그 수령을 엄호한 흔적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관찰사 이정운(李鼎運)을 또한 의당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또 그대로 따랐다. 당초 비국이 신대윤의 죄벌에 대한 마감을 아뢸 적에 채제공은 마침 휴가중에 있어 이병모가 이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이때 채제공이 신대윤에게 죄를 가중시킨 것은 대체로 이병모를 핍박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정운은 곧 채제공의 문객이었으므로, 이정운이 파직되자 채제공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기었다.

 

민종현에게 이조 판서를 다시 제수하였다.

 

1월 18일 계미

전 장령 김종발(金宗發)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창성한 국운이 무궁하여 원자(元子)가 점점 자라나서 덕의 광휘가 이미 안팎에 드러나고 인(仁)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근에서 모두 우러르는 터이니, 진실로 하늘이 낸 훌륭한 자품으로 태평 만세의 기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자를 호위하고 인도하는 방술을 의당 더 갖추고 더욱 신중히 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기구(耆舊)들을 순방하시고 훌륭한 선비들을 구원(丘園)으로부터 맞이하시어, 단결하고 박아한 선비와 엄정하고 근후한 사람들로 하여금 원자의 전후 좌우에 나열하여 주야 조석으로 교대하여 모시면서 기괴하고 허황된 서책을 눈에 접하지 않게 하고, 희학질이나 상스러운 태도를 몸에 베풀지 않도록 하게 한다면 보는 것은 모두 바른 일이요, 듣는 것은 모두 바른 말이며 행하는 것은 모두 바른 도리여서 습관이 지혜와 더불어 자라고 변화함이 마음과 더불어 이루어져 장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날이 선(善)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 시대가 능히 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태자를 보익하는 데에 이런 도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엎드려 생각하건대, 나아가 신하들을 면접할 때에는 비록 모두가 바른 선비들이지만, 들어가 사사로 있을 때에 앞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반드시 환관의 무리들뿐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 무리들은 한결같이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교묘히 아첨부리는 것을 일로 삼아 윗사람의 뜻을 엿보아서 제 기량을 부리므로, 덕성을 기르고 정직으로 인도하는 방도에 매우 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받들어 시중을 드는 일 이외에는 그들을 준엄한 태도로 대하여 조금도 친압하지 말도록 하시는 것이 또한 걱정이 있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한 가지 단서가 될 것이니, 아울러 생각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내용이 모두 절실한 말이니, 의당 체념할 것이다."
하였다.

 

 

 

1월 20일 을유

이태영(李泰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1일 병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殿拜)하였다.


 

 

 

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전병선(戰兵船)의 조운(漕運)의 변통에 관한 조례(條例)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영읍진(營邑鎭)의 전선(戰船) 중에는 대장·중군·파총·초관이 타는 것과 좌우 탐선(探船)과의 구별이 있으니, 각각 그 선체(船體)에 따라서 장광(長廣)의 차등이 있습니다. 본판(本板)의 길이는 15파(把)로부터 시작하여 9파에 그치고, 넓이는 4파에서 시작하여 2파 반에 그치며, 좌우의 삼판(杉板)은 각각 7립(立)씩인데, 그 위에는 층루(層樓)가 있고 귀장(龜粧)이 있습니다. 조운(漕運)할 때에는 부득불 그 상장(上粧)의 여러 가지 도구들을 철거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본체(本體)가 매우 낮아지므로, 본삼(本杉) 위에 동삼(同杉) 1립을 더 첨부하여 그 높이를 약간 증가시키고, 조운을 마친 뒤에는 그 동삼을 떼어서 상장으로 옮겨 얹으면 실로 서로 통용하는 계책에 합당합니다. 이른바 동삼이란 곧 세속에서 일컫는 바 ‘동도돈(同道頓)’이라는 것으로서 본삼의 삭(槊)을 비늘처럼 나란히 부착한 것과는 서로 다른데, 조운할 때는 시렁으로 사용하고 조운을 마친 다음에는 철거하니, 일시적인 사역만이 있을 뿐 별로 논할 만한 폐단이 될 것은 없습니다.
1. 전선(戰船)의 적재량으로 말하자면, 본영(本營)의 일선(一船)과 부선(副船)은 2천 석을 적재할 만하고 중군선(中軍船)은 1천 7백 석을 적재할 만하며, 좌열선(左列船)·우열선(右列船) 및 오사 파총(五司把摠)의 창원선(昌原船), 거제(巨濟)의 일선(一船), 가덕(加德)의 일선, 미조항선(彌助項船), 귀산선(龜山船) 도합 7척의 배가 1천 4, 5백 석을 적재할 만합니다. 그 밖의 초관선(哨官船) 32척 및 좌우 정탐선(左右偵探船) 2척은 혹은 겨우 1천 석 혹은 겨우 8백 석이나 적재할 만합니다. 조운선은 1천 석 정도만 적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해진 규식인데, 전선 10척이 이 숫자를 초과한 데에 대해서는 선체(船體)의 크고 작은 것이 이미 정해진 제도가 있으므로, 지금 어떻게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조운법대로 따라서 1천 포(包)만 적재한다면 진실로 짐이 가벼워서 항해하기가 편리한 좋은 점이 있거니와, 또 조운선으로 말하자면 혹 별상납(別上納)의 때를 당해서는 2, 3백 석 정도를 더 적재하는 경우가 있으니, 전선의 경우도 여기에 의거하여 헤아려 적재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다. 이는 특히 그때그때에 짐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겨우 1천 석이나 혹은 겨우 8백 석 정도만을 적재할 수 있는 배들에 대해서는, 지금 만일 조운의 제도를 일체 따라서 길이는 12파(把)로 하고 넓이는 4파로 하며, 삼판을 높이고 적재의 용량을 확장하는 등 다시 제도를 고쳐 만든다면, 조운하기에는 비록 편리하겠으나 또한 전함(戰艦)으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할 것입니다.
대체로 삼판을 첨부한 것이 너무 높고 배의 중심이 깊고 넓으면 많은 양을 적재할 수는 있으나, 조련(操鍊)할 때의 경우 누옥(樓屋)을 높이 올리고 장졸(將卒)의 기휘(旗麾)를 선상(船上)에 배열하여 세우고 보면, 사나운 파도가 반드시 장차 바람을 따라 심하게 배를 요동시킴으로써 건너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배를 건조할 때에 본판(本板)의 경우는 나무 하나를 더 붙여서 그 넓이를 약간 증가시키고, 삼판(杉板)의 경우는 소나무의 대소에 따라 혹은 7립(立)을 쓰기도 하고 혹은 8립을 쓰기도 하되, 장파(長把)의 대소는 예전 규정을 고치지 않고 다만 동삼(同杉)을 붙여 수시로 두었다 빼냈다 한다면, 1천 포(包)의 조곡(漕穀)도 싣지 못할 걱정이 없게 되고, 전선의 장졸들도 충분히 서로 수용할 수가 있어, 전쟁을 할 때나 조운을 할 때나 모두 적의할 것입니다.
1. 조선의 경우는 목삭(木槊)을 쓰고 전선의 경우는 쇠못[鐵釘]을 쓰는데, 목삭은 햇수를 한정하여 고쳐 수리해야 하고 쇠못은 1백 개월쯤은 무사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선을 가지고 조운을 하면서 그대로 쇠못을 쓴다면, 수천 리 먼 바다를 항해하면서 거센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받을 적에 삼판의 서로 붙인 곳이 혹 틈이 벌어져 들쭉날쭉해지는 걱정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장차 헐어내어 고쳐야 하는데, 움직여 두드리면서 못을 빼고 박고 하는 사이에 배 전체의 재목이 완전한 것이 얼마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배 전체를 새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목삭으로 대용(代用)하여 3년마다 목삭을 고치고, 6년마다 삼판을 고치는 절차를 조선의 관례대로 해야겠습니다.
1. 전선의 비하(飛荷)의 광장(廣粧)과 선미(船尾)의 허란(虛欄)은 오직 미관(美觀)만을 취한 것이요, 험한 바다를 건너는 데는 편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영해(嶺海)는 물이 깊기 때문에 치목(鴟木)을 대단히 길게 하고 상장(上粧)이 높이 걸쳐 있기 때문에 범죽(帆竹)은 약간 짧게 하므로, 조선에 비유하면 모두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비하의 경우는 모두 굽은 나무를 쓰고, 선미에는 허란을 그대로 두며, 치목과 범죽은 또한 참작하여 별도로 준비해서 조운할 때의 수용으로 삼아야겠습니다.
1. 조선은 노젓는 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범풍(帆風)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배 한 척에 노(櫓)가 둘에다 격군(格軍)은 다만 15명일 뿐이니, 전선의 조졸(漕卒) 또한 이 숫자만 써야겠습니다. 그리고 본영(本營)의 일선(一船)·부선(副船)·중군선(中軍船) 이 3척에 대해서는 고치지 말고 예전대로 두어 조운을 하지 말도록 하라는 뜻을 이미 지난번 보고장에 상세히 거론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만일 아울러 통용하도록 하자면 그 배의 몸체가 다른 배들보다 훨씬 크므로 조졸은 20명에 노는 의당 넷을 써야 할 것입니다.
1. 전선을 조창(漕倉)에 영박(領泊)시킬 때에는 의당 각 해당 선장(船將) 및 노군(櫓軍)으로 하여금 기한 전에 운송해오도록 하되, 배의 도구[船械]와 닻줄[維纜]과 관인(官印) 찍힌 치부(置簿) 등을 하나하나 진술을 받고서 내주어야만 이 간악한 행위를 막을 수 있고, 또 조창에서 퇴짜를 놓는 등의 조종하는 단서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창에 영박한 사공(沙工) 1명을 조창으로부터 날짜를 기약하고 출발시켜 해당 읍진(邑鎭)에 운송해서 일일이 사람을 만나 인수인계를 하고 이어 다시 배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되, 조운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도 그 사공과 격졸(格卒)로 하여금 곧바로 해당 읍진에 운박(運泊)하여 숫자대로 반납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의 사공 무리들은 흔히 육로(陸路)를 따라 편리한 데를 가려서 내려와버리고 다만 격졸로 하여금 배를 거느리고 가게 하므로, 간혹 공선(空船)이 파손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반드시 해당 사공으로 하여금 직접 배를 타고 돌아가 정박하게 하여 중도에서 소홀히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할 일로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1. 병선의 경우는, 지금의 제양(制樣)은 길이가 7파이고 넓이와 높이가 각각 1파 반씩입니다. 그런데 앞서 북관(北關)의 곡식을 포항(浦項)으로 운송할 적에는, 배 한 척의 적재량은 2백 석에 불과한 데다 조군(漕軍)은 10명씩을 써야 했으니, 이것으로 조운을 하자면 이미 통용하는 실제 효과는 없고 바다를 건너기 어려운 걱정까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북쪽 조선의 제도를 약간 모방하여 재목을 더 지급해서, 길이는 8파, 넓이는 3파, 높이는 2파로 제도를 고쳐 만들도록 신칙하고, 또 목삭(木槊)을 쓰고 거기에 동삼(同杉)을 더 첨부하여 또한 전선의 제조와 같이 하도록 한다면 5백 석의 곡물을 적재할 수 있고 12명의 조졸(漕卒)을 쓸 수 있어 해운(海運)에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적재량이 적은 것 때문에 병선을 조운에 통용하도록 하지 않고 그대로 철정(鐵釘)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선과 병선은 다같이 전쟁의 도구인데, 혹은 목삭을 쓰고 혹은 철정을 쓰는 것은 진실로 이미 일이 뒤섞인 것이거니와, 더구나 이 병선은 군졸을 싣거나 군량을 운반하는 도구이고 보면, 선체(船體)가 전보다 조금 더 큰 것은 실로 위급한 때의 수용에 타당할 것이요 변통하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1. 본영에서 관장하는 우도(右道)의 주사(舟師)에게는 원래부터 방선(防船)이 없었고, 호남(湖南) 지방 섬진진(蟾津鎭)에 다만 노속(勞屬)의 방선 2척이 있을 뿐인데, 그 배는 곡물 3백 석을 적재할 수 있고 조졸 10명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진(鎭)은 곧 근년에 새로 소모(召募)의 일을 신칙함으로 인하여, 지극히 잔폐한 지역으로서 모든 조치가 다른 지역과 같지 못한 데다가, 배를 건조하는 데 대한 물력(物力)에 있어서는 일찍이 회감(會減)하는 일이 없었고, 또한 배를 타고 조련(操鍊)에 나가는 예도 없어, 다만 수시로 군량 운반하는 용도로만 삼았기 때문에 선제(船制)가 용선(桶船)과 다를 것이 없어, 다른 수영(水營)에 있는 방패선(防牌船)과는 크게 서로 다르니, 이것으로 조운을 하자면 그 형세가 불편할 것입니다.
1. 조선의 닻줄은 갈모(葛茅)를 쓰고 돛은 초석(草席)을 쓰는데, 이는 곧 해마다 새것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선과 병선의 닻줄은 모두 숙마(熟麻)와 산마(山麻) 따위로 하고, 풍범(風帆) 또한 삼승포(三升布)나 혹은 왕골자리[莞席]로 하고 있는데, 각 물건의 개비(改備)는 이미 연한이 있고, 회감(會減)의 가본(價本) 또한 정수(定數)가 있으므로, 헐어질 때마다 개비를 하자면 진실로 군색한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조운의 햇수를 조선의 예에 따라 별도로 조치하여 개비하도록 하고, 그 급가(給價)의 절차 또한 조선에 견주어 예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1. 앞으로 전선과 병선에 모두 목삭을 쓰자고 보면 목삭과 삼판을 개비하는 데에 의당 가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관례가 된 철정의 값을 참고해보면, 본영의 일전선(一戰船)에 2백 50냥, 부선(副船) 및 중군선(中軍船)에 각각 2백 냥씩이고, 기타 여러 가지 배와 읍진(邑鎭)의 배에 각각 1백 50냥씩이며, 병선의 경우는 영진이나 읍진의 것을 막론하고 모두 1척당 50냥씩입니다. 본영이 배를 건조할 때의 역가(役價)에 대해서는 본영에서 편의에 따라 지용(支用)하고 번거로이 품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각읍에 이르러서는 전선의 철정값을 회감한 것이 쌀로 50석이고, 병선은 쌀 5석이며, 각진에 있어서는 원방처(元防處)의 경우는 전선의 철정값을 회감한 것이 목면(木綿) 30필이고, 병선은 목면 5필이며, 소모처(召募處)의 경우는 전선의 철정값을 회감한 것이 목면 1동(同) 25필이고, 병선은 목면 5필인데, 이것을 수시로 예하(例下)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는 1척마다 개삭미(改槊米)가 40석이고 개삼미(改杉米)가 30석이며, 북쪽의 조선은 1척마다 개삭전(改槊錢)이 25냥이고 개삼전(改杉錢)이 28냥씩인데, 이것은 모두 조창에서 회감하고 있습니다. 전선과 병선의 철정값을 1백 개월만에 한 번 회감하는 숫자를 가지고 조선의 10년 이내에 드는 목삭과 삼판의 비용과 비교해보면 그 숫자가 서로 걸맞으니,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저쪽에 쓰더라도 진실로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많고 적은 것이 이미 서로 달라서 이것이 후일 어떤 장애의 단서가 될 것이니, 의당 참작하여 규식을 정하는 방도가 있어야겠습니다.
1. 전선과 병선은 각각 부근에 따라 조창(漕倉)에 분속시켰습니다. 본영은 일전선 1척, 병선 2척, 부전선·부병선 각 1척, 중군 전선·중군 병선 각 1척, 좌열 전선·좌열 병선 각 1척, 우열 전선·우열 병선 각 1척, 귀선·병선 각 1척, 좌우 정탐선 2척과 진주(晋州)의 전선·병선 각 2척, 고성(固城)·사천(泗川)·곤양(昆陽)·미조항(彌助項)·삼천포(三千浦)·당포(唐浦)·사량(蛇梁)·구소비포(舊所非浦)·적량(赤梁)의 각 전선·병선 각 1척인데 이상의 전선 19척과 병선 18척은 우조창(右漕倉)에 소속시키고, 남해(南海)·하동(河東)·평산포(平山浦)는 각 전선·병선이 각 1척인데 이상의 전선 3척과 병선 3척은 우창(右倉)에 소속시켜 남해의 노량창(露梁倉)에 붙이고, 진해(鎭海)·창원(昌原)·가배량(加背梁)·율포(栗浦)·지세포(知世浦)·옥포(玉浦)·조라포(助羅浦)·장목포(長木浦)·남촌(南村)·귀산(龜山)은 각 전선·병선이 각 1척인데, 이상의 전선 10척과 병선 10척은 좌조창(左漕倉)에 소속시키고, 거제(巨濟)의 전선·병선이 각 2척, 영등(永登)의 전선·병선은 각 1척인데, 이상의 전선 3척과 병선 3척은 좌창(左倉)에 소속시켜 거제의 견내량창(見乃梁倉)에 붙이고, 웅천(熊川)의 전선·병선이 각 1척, 가덕(加德)의 전선·병선이 각 2척, 천성(天城)·안골(安骨)·신문(新門)·청천(晴川)·제포(薺浦)의 각 전선·병선은 각 1척인데, 이상의 전선 8척과 병선 8척은 후조창(後漕倉)에 소속시키고, 김해(金海)의 전선·병선 각 1척은 후창(後倉)에 소속시켜 본부(本府)의 해창(海倉)에 붙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전선과 조선을 서로 통용시킬 계책을 가지고 신하들에게 누차 하문한 결과, 통제사에게 명하여 사의(事宜)를 조목조목 진달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일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1월 24일 기축

서정수(徐鼎修)를 도총부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누차 소명을 어기고 의리를 끌어대므로, 특별히 여주 목사에 보임시켰다.


 

 

 

이집두(李集斗)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25일 경인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이에 전교하기를,
"수성(修省)의 도리로는 도움을 구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대간 및 승정원과 논사의 직에 있는 신하들은 이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진언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6일 신묘

차대가 있었다.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오늘 차대를 갖는 것은 1년 결산이나 보고드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요, 진실로 전하께서 수성하시는 생각에서 바르게 보필하는 모책을 듣고자 하심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만일 고인의 서론(緖論)이나 주워모아 한번 아뢰고 그만둔다면 이 또한 어찌 오로지 겉치레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임금의 결루된 점을 진술한 다음에야 도움을 구하시는 성상의 뜻을 그런대로 우러러 부응할 수 있을 것인데, 상께는 전혀 결루가 없으니, 신이 장차 무슨 일을 가지고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보좌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근래에 중외의 신서(臣庶)들이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게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유사(有司)가 임금의 명을 백성에게 선양하는 것이 혹 그 방도를 잃었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대뜸 ‘조정은 겉치레를 먼저하고 실상을 뒤로하는 뜻이 있다.’고 말하고, 목수(牧守)들의 일 집행하는 것이 본뜻[本旨]과 많이 어긋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도리어 ‘조정은 아랫사람을 손해지우고 윗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분에 넘친 것을 엿보는 습관이나 시비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태도는 바로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미워하고 엄히 배척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은 전하께서 말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믿고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두려워하게 되는 공부에 아직도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항상 학문을 힘쓰는 공부가 비록 이미 독실할지라도 더욱더 면려하시고, 가슴속의 마음은 비록 이미 통철할지라도 더욱더 맑게 하시어, 반드시 송조(宋祖)가 중문(重門)을 활짝 열었던 일041)  을 본받아 궁궐의 깊은 곳까지를 밝게 보여서 만물이 다같이 그 곳을 볼 수 있게 하여 엿보는 습관이나 어물어물하는 태도를 가질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대소의 신하들에게도 모두가 엿볼 수 없는 것과 어물어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정이 한번 바루어짐으로 인하여 백관과 만민이 모두 풀이 바람에 쓸리듯이 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절실하도다."
하였다.


 

 

 

1월 27일 임진

광주부(廣州府)에서 군병을 징발할 때에는 경기 감사에게 합부(合符)하지 말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이는 곧 유수(留守)가 진(鎭)에 나가 있을 때는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와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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