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을미
대가가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 갔다. 상이 편찮으시자, 대신·각신·약원 등이 안부를 물으며 유여택(維與宅)에 입시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조종(祖宗)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신다면 어찌 예절에 구애되어 성체 보호하시는 도리를 생각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 바로 재전(齋殿)인데 성상의 행차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원소(園所)만 바라보시어도 성상의 사모하시는 마음을 이미 풀으셨을 것인데, 어찌 꼭 재소(齋所)까지 나아가시어 몸소 작헌(酌獻)의 예를 행하신 다음에야 정성을 폈다고 이르겠습니까. 내일 있을 전배(殿拜)를 우선 정지하시고, 성상의 기후가 쾌차하시기를 기다려서 곧바로 환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 때마다 일찍이 한 번이라도 무병하게 왕래한 적이 있었던가. 사세가 그러지 않을 수 없는데, 어찌 몸이 불편하다 하여 번번이 물려 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원침(園寢)을 참배하는 것에 관계되는 일인데, 어찌 감히 일호라도 겉치레로 할 수 있겠는가. 병이 만일 억지로 하기 어렵다면 곧바로 환궁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억지로라고 할 만하다면 기왕 이곳에 와놓고 감히 몸소 전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배의 날짜를 우선 물려 정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조상진(趙尙鎭)을 화성의 교궁(校宮)에 보내어 석채(釋菜)를 행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날 밤이 마침 석채를 행할 때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일 병신
암행 어사 임한호(林漢浩)·정만석(鄭晩錫)을 나누어 파견하여 연로(輦路)의 민폐를 염탐하게 하였다.
유사(有司) 제신(諸臣)을 행궁에서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침(園寢)을 받들어 모셔온 지가 지금 1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이 부(府)와 이곳 백성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베풀지 못한 것이 어찌 나의 본의이겠는가. 성지(城池)가 아무리 튼튼할지라도 결국 민심이 절로 성(城)을 이루는 것만은 못한 것이니, 민심이 튼튼해진 다음에야 공호(拱護)를 오로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주(楊州)·고양(高陽) 등 능침 모신 곳들에 대하여 열성조에서 전세(田稅) 감면의 혜택을 내려주신 것이 또한 오늘날에 내가 우러러 계승해야 할 한 가지 일이다. 그런데 모곡을 면제해주는 한 가지 일은 생각해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껏 단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을 설치할 때에 이것을 화성에 붙여서 모곡을 면제해주고자 하였으나, 여러 의논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부득이 각도에 나누어주고 말았었다. 그런데 정리곡을 설치한 것이 비록 자혜(慈惠)를 널리 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3백여 주군(州郡)에 포치(布置)해 두고 보면, 이것을 거두어들이고 나누어주는 즈음에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런 명색(名色)을 가지고 일호라도 폐단을 끼치는 단서가 있게 되면 이는 대단히 나의 본의가 아니다. 애당초 정리곡이라 이름하였고 보면 다시는 모곡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내가 처음에 이를 설치한 뜻이다. 그러니 이제 이 곡식을 서로 전환(轉換)시켜 본부(本府)의 곡식 이름을 정리곡으로 고쳐서 인하여 그 모곡을 면제해 주어서, 화성 한 부(府)로 하여금 영원토록 모곡의 명색이 없도록 한다면 화성의 백성들에게 막대한 혜택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제신 중에 혹자는 ‘모곡 전체를 감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지출을 계속 대기가 어려우니 의당 모곡의 절반만 감해야 한다.’고 말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2월 3일 정유
제신이 안부를 묻고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을묘년, 정리곡을 설치할 적에 이것을 화성에 붙여서 모곡을 면제해주려고 하였으나, 여러 의논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를 각도에 나누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이 비록 자혜를 널리 펴는 뜻이라고는 하나, 3백여 주군에서 거두어들이고 나누어주는 즈음에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는 대단히 나의 본의가 아니다. 지금 이 곡식을 모조리 본부에 붙여서 화성부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환곡(還穀)에 대한 모곡이 없도록 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신 이하 모두가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서경(西京) 시대는 옛 시대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베푸는 데 있어 매양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달라서, 토지를 소유한 자는 거개가 부호이기 때문에 조세를 감면해주는 혜택이 서민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의 사세로 말하자면 반드시 모곡을 면제해주는 것만이 오로지 서민의 혜택이 될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였다.
"본부에서 원침을 받듦으로부터 나 소자(小子)는 부여잡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하는 비통함을 안고서도 날마다 몸소 가서 쇄소(灑掃)를 점검하여 신혼(晨昏)의 정성을 펴는 것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직 이 부(府)의 백성들이 이 지역에 살면서 길이 재수(宰樹)042) 를 바라보며 함께 원침을 수호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이 부를 제향(帝鄕) 같이 보지 않을 수 있으며 이곳 백성들을 친구 대우하듯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세를 감면하는 정사는 빈부(貧富)간에 똑같이 시행하기 어렵고, 백성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해주는 것은 고금이 각각 그 사의(事宜)가 다른지라, 오직 조적(糶糴)의 모곡을 면제해주는 것으로 인화(人和)의 계책을 삼노라. 그러니 이제부터는 화성의 환곡(還穀)과 향곡(餉穀)을 아울러 정리곡이라 일컫고 인하여 그 모곡을 면제해주되, 이곳이 유사(留司)로 승격이 된 이후로 백성들이 곡식이 많이 출납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수령들로 하여금 거두고 낼 때 이 뜻을 알아서 하게 할 것이다."
수원(水原)의 중군(中軍)을, 곤수(閫帥)나 방어사(防禦使)를 이미 지낸 사람으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원침 밑의 화소(火巢)043) 로 들어간 민전(民田)으로서 3, 4차에 걸쳐 새로 한계를 정한 것에 대하여 그 값을 더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화소로 꺾여 들어간 민전에 대해서는 그 값을 갑절로 지급했었는데, 그후 새로 한계를 정할 때는 유사가 값의 기준을 앞서와 같이 하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 사실을 듣고 특별히 더 지급하도록 명한 것이다.
김후(金㷞)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미리 계하(啓下)한 군호(軍號)는 오늘까지로 끝나니, 내일 이후 3일 간의 군호는 의당 여기에서 계하하여 유도소(留都所)로 봉송(封送)해야 하는데, 금군을 시켜 가져가게 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호의 사체는 지극히 중하고도 비밀하여 병부(兵符)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제승 전령패(制勝傳令牌)로 명령을 전하되, 의당 선전관을 시켜 받들고 가도록 해야지 어찌 금군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명하여 전령(傳令) 한 장을 써서 선전관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가서 유도 대신 및 훈련 대장·어영 대장에게 전하도록 하게 하고, 또 군호를 봉(封)한 것을 내리면서 전교하기를,
"군호를 봉하여 내리노니, 대신은 전령의 말뜻에 의거하여 수궁 승지(守宮承旨)에게 전해서, 그로 하여금 병조의 낭청에게 패(牌)를 발하여 날짜를 나누어서 반포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듣건대, 광주에 진(鎭)이 나간 이후로 속읍(屬邑)에 분치(分置)한 환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성내(城內) 교리(校吏)들의 봉급을 오로지 환곡에 의존하는데 원곡(原穀)이 점차 모축나게 되자 산성(山城)의 환곡 5천 석을 20개 읍에 나누어 유치하고 이를 남성향곡(南城餉穀)이라 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즈음에 기읍(畿邑)이 폐단을 입는 것이 또한 의당 북한산성 환곡의 폐단과 같이 될 것이니, 일찌감치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이 곡식을 각읍에 나누어 유치하여 모곡을 받아 돈으로 만든 것은, 포곡 징수를 막고 교리들의 봉급을 충당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이로 인해 민폐가 이미 많고 작간할 수 있는 길이 층층으로 생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도 이미 그 사실을 환히 아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원곡 절미(折米) 5천여 석을 도내(道內) 유고(留庫)에 소속시키고, 기영(畿營)으로부터 아무 곡식[某樣穀] 가운데 모조(耗條) 3백 석을 해마다 상정가(詳定價) 9백 냥으로 환산하여 바꿔서 편의에 따라 광주로 이송하고, 부족수 2백 석의 대금에 대해서는, 연전에 진(鎭)이 나갔을 때 쓰고 남은 쌀 2백 석을 우선 수신(守臣)에게 붙여둔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충을 하면 여유가 작작하겠습니다. 이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는 아마 이 방도보다 나을 것이 없을 듯합니다. 요즘에 듣건대, 호서(湖西)에 바꾸어 둔 남성향곡 5천여 석도 그 폐단이 경기 각읍과 다름이 없다고 하니, 그 또한 이상의 예에 의거하여 바로잡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현륭원 행행시에, 광주에 향곡을 첨가한 것이 열읍의 민폐가 되었다 하여 특별히 바로잡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비국이 원곡 절미 5천여 석을 도내 유고에 소속시키고, 아무 곡식 가운데 모조 3백 석을 해마다 상정가로 바꾸어서 기영(畿營)으로부터 편의에 따라 광주에 이송할 일로 관문을 발송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원곡을 모조리 유고에 소속시키고서 다른 곡식으로 돈을 만든다면 명색(名色)이 서로 바뀜으로써 작간의 폐단이 생기기가 쉽고, 나누어 주거나 유치하는 일 또한 장애됨이 많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기필코 다른 곡식으로 명색을 바꿀 것이 아니라, 원곡을 가지고 관례대로 조적(糶糴)을 하여 그 모곡을 받아서 돈을 만드는 것이 좋으리라 여깁니다. 그런데 원곡 절미 5천여 석에 대한 모조를 만일 3백 석으로 정한다면 모조리 나누어주거나 절반만 나누어주거나 간에 그 숫자가 워낙 서로 맞지 않으니, 이 또한 편리하지 못한 폐단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도내 각읍에 소재한 광주에서 보태준 향조(餉租) 1만 3천 석을 해마다 절반은 유치하고 절반은 나누어주어, 그에 대한 모조로 절미 2백 60석을 받아들이되, 각읍으로부터 상정가에 의거하여 1석마다 3냥씩으로 돈을 만들어 해부(該府)로 이송하고, 부족수인 절미 40석에 대해서는 해부에서 좋은 방도를 따라 조처하도록 한다면 적법(糴法)을 엄중히 할 수 있고, 민폐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매우 옳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2월 4일 무술
상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므로, 현륭원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고 현륭원 위를 봉심한 다음, 화성의 행궁에 돌아와 머물렀다.
전교하였다.
"화성 성지(城址)의 가기(家基)로서 납세(納稅)를 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납세를 해온 곳 및 화소(火巢)에 추가로 경계가 정해진 전토로서 관천고(筦千庫)에 소속되고도 미처 면세를 받지 못한 곳을 아울러 면세해주도록 하라."
명하여 화성 이외의 제도(諸道)에 유치한 정리곡들을 모두 상진청(常賑廳)에 소속시켜, 해당 청으로 하여금 관례대로 조적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비변사의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심도(沁都)044) 의 경우는 상진청이 없으므로, 군향(軍餉)을 더 만들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8면
【분류】재정(財政) / 행정(行政) / 구휼(救恤)
[註 044]【 심도(沁都) : 강화의 옛 지명.
명하여 제도에 소재한 수성 정리곡(修城整理穀)을 비국의 구관곡(句管穀)으로 옮겨 만들고, 비국의 구관곡이 없는 고을은 명색을 바꾸어 다른 고을에 합하여 기록하도록 하였다. 상이 ‘정리곡은 이제 이미 이환(移換)되어 당초에 설치했던 이른바 수성 정리곡이 본의의 명색이 아니므로 이를 거행하기에 현란스럽고 폐단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제 변통하는 때를 당하여 좋은 방도에 따라 구처(區處)하라.’고 전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묘당이, 이를 비국의 구관곡으로 옮겨 만들어 제도에 행회(行會)하여 수성 정리곡으로 명칭되는 것이 다시는 각도 각읍에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며 그렇게 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한 것이다.
2월 5일 기해
좌의정 채제공에게 명하여 화성의 석채(釋菜) 때 반열에 참여했던 유생들을 시취(試取)하고 차등있게 시상하도록 하였다.
환궁(還宮)하였다.
2월 6일 경자
상언(上言)한 것 73장(張)을 판하(判下)하였다.
전라도 유생 김문택(金文澤) 등이 상언하기를,
"고 참봉 김형진(金亨進)은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을 따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다가 7백 인의 의사들과 함께 죽었으므로, 고 익찬 황윤석(黃胤錫)이 다사(多士)들을 거느리고 순영(巡營)에 정문(呈文)을 내었는데도 아직까지 장문(狀聞)이 안되었습니다. 바라건대 김형진에게 정포(旌褒)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도신(道臣)에게 그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7백 인의 의사 가운데 그 이름이 전해진 자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지헌(持憲)으로 증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호남 유생들이 상언한 것을 보니, 의사 김형진 또한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누락됨을 면치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 익찬 황윤석이 순영에 정문을 낸 것을 증거로 삼았는데, 황윤석은 일찍이 강석(講席)에 출입할 적에도 옛일을 상고하는 데에 내가 도움받은 것이 많았고 보면, 그가 반드시 황당무계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니, 지금 비록 도백(道伯)에게 물어본다 할지라도 결코 황윤석의 말 한 마디에 못 미칠 줄을 알겠다. 고 참봉 김형진을 이미 증직된 다른 의사들의 예에 의거하여 증직할 일로 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전라도 유생 이태규(李台奎) 등이 상언하기를,
"고 영광 군수(靈光郡守) 김익복(金益福)은 능성 현령(綾城縣令)으로 있을 때 왜구들의 대거 침입을 당하여 열읍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누차 전공을 세웠는데, 이 사실이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이 찬수한 국사(國史)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은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의 제문(祭文)에는 ‘살아서는 의당 적을 토벌하여 복수를 할 것이고, 죽어서는 여귀(厲鬼)가 되어 적을 섬멸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글은 양대박의 《창의록(倡義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가 정유 재란 때에 이르러서는 임시로 영광 군수에 보직되어 많은 적을 초토하였는데,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임진록(壬辰錄)》에도 ‘김익복은 열읍에 통유(通諭)하여 끝까지 창의(倡義)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익복의 장자(長子) 김류(金瀏)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 되어 군중에서 먼저 죽었고, 그후 역적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중자(仲子) 김화(金澕)이 계자(季子) 김연(金沇)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격문을 돌려 창의하였으며, 병자년의 강화(講和)가 있은 뒤로는 몸을 결백하게 스스로 지키어, 침랑(寢郞)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계자 연은 정사년045) 에 진사가 되었는데, 당시에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하자는 동방(同榜)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고, 상소문을 초하여, 천륜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극언(極言)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축년046) 호란(胡亂) 때에는 그의 형 화의 아들인 참봉 김지순(金之純)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광교산(光敎山)으로 들어가 일전(一戰)을 하고 나서 강화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고 돌아온 이후 두문 불출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교관(敎官) 김지백(金之白)은 바로 김연의 계자인데, 그는 정축년부터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뒤에 조정에서 대명(大明) 사람인 진득(陳得) 등 90여 인을 연경으로 압송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형인 진사 김지중(金之重)과 함께 연명(聯名)으로 항소(抗疏)를 올렸습니다. 김익복의 집은 한 가문에 칠절(七節)이 났으니, 포증할 것을 윤허하심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예조가, 일문 칠절(一門七節)에 모두 포증할 것을 허락하는 것은 어렵고도 신중히 해야 할 일에 관계된다 하여 김익복 한 사람에게만 증직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고 영광 군수 김익복과 그의 아들 학생 류와 화과 진사 연 그리고 그의 손자 참봉 지순, 진사 지중, 교관 지백 등 한 가문의 조(祖)·자(子)·손(孫) 7인이 대의(大義)를 일으키어 대절(大節)을 이룬 것이 임진·정유·갑자·병자·정사·정축년 사이에 늠름하게 우뚝한 것이야말로 고사에서도 듣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문충공 이항복이 기록한 것과 문정공 이식의 신사(信史)에서 상고하여 그 사적을 알 만하거니와, 요즘 내각(內閣)에 명하여 충장공 양대박의 유집(遺集)을 부집(裒輯)하였는 바, 《창의록》에 실린 김익복의 제충장문(祭忠壯文)이야말로 뜻을 결단하고 몸을 바친 것이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본 듯하였다. 이증(貤贈)의 전례를 이 집에 베풀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고 군수 김익복에게는 품계를 올려 증직하고, 그의 자손 가운데에서 교관 등의 직함이 있는 자에게는 가증(加贈)하고 백도(白徒)에게는 교관을 증직하라."
하였다. 그런데 뒤에 이조의 말을 인하여 김익복 등에게 고명(誥命)을 더 내리면서 숭정(崇禎)의 연호를 써주었다.
장성(長城)의 유학(幼學) 김익현(金翼賢) 등이 상언하기를,
"고 승문원 부제조 조찬한(趙纘韓)의 아내 유씨(柳氏)는 정유 왜란 때에 순절하였는데, 아직까지 포정을 입지 못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고 승지 조찬한의 부인 유씨는 우뚝한 절개가 포정하기에 합당하도다. 이미 현묘조(顯廟朝) 기유년으로부터 숙묘조(肅廟朝) 기사년까지 다사(多士)들의 호소가 있었으니, 일향(一鄕)의 공론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정려(旌閭)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 유생 김양섭(金陽燮) 등이 상언하기를,
"고려 시대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주(金澍)의 충절에 대하여 시호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절의를 세웠고,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절의를 온전히 하였으니, 죽어서도 진실로 광영이거니와 살아서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두 사람에게 모두 충절을 정표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다. 생각건대, 농암(籠巖) 김주는 명(明)나라에 사신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 가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오지 않고 그곳에서 의관만 벗어서 부쳐주고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 형초(荊楚) 지방에 은거하였다. 그러자 황조(皇朝)에서 그를 기특하게 여겨 예부 상서를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그 봉록으로 일생을 마쳤다. 지금 원수(沅水)·상수(湘水) 사이에는 그의 자손이 많이 있다고 한다. 또 일찍이 듣건대, 공이 본디 영남 선산(善山)에 살았었는지라, 선산의 선비들이 장차 공의 사우(祠宇)를 세우고자 하나 대지를 정하기가 어려웠는데, 한번은 갑자기 긴 무지개 한 가닥이 공의 의관과 신이 묻힌 곳에서 일어나 낙동강의 반월암(半月巖)에 꽂히었으므로, 모두들 ‘이는 공이 명한 것이다.’고 말하고, 그곳에다 사우를 세웠다. 그리하여 뒤에 조정에서 그 사실을 듣고는 그 사우를 상의사(尙義祠)라 명명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까지 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열조(列朝)에서 내린 우이(優異)한 은전이야말로 매우 지극하였는데, 시호 내리는 일 한 조항만이 아직껏 논의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리 다행하게도 영남의 유생들이 미처 겨를하지 못한 이 사유를 가지고 일제히 연로(輦路)에서 호소하여 내 마음을 감격하게 한단 말인가. 어찌 하루라도 넘길 수 있겠는가. 즉시 홍문관으로 하여금 좋은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날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할 것이며, 그 제문은 의당 내가 친히 지어서 내릴 것이다.
또 듣건대, 야은의 사우도 그 인근에 있다 하니, 영남 유생을 불러 물어보아서 과연 그렇다고 하거든, 의당 상의사에 가는 승지 편에 똑같이 치제를 하도록 하라. 연전에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김시습(金時習)의 시장(諡狀)에 대해서는 청절사(淸節祠)의 유생으로 하여금 문임(文任)에게서 시장을 구하도록 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지금 올라온 유생으로 하여금 이상의 예에 의거해서 하도록 하되 기한을 어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다. 그의 사우는 선산의 소재지 서쪽 15리 쯤에 있는데, 이름은 오산사(烏山祠)이다. 그리하여 오산사에 대한 사실을 예조가 상께 보고하니, 상의사와 일체로 사제(賜祭)하도록 명하였다.
2월 7일 신축
이조 참판 이경일(李敬一)에게 녹봉 1등을 감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남단(南壇) 향사(享祀)의 재관(齋官)을 각별히 택차하라는 칙교를 얼마나 단단히 했던가. 그런데도 이 제사에 대한 보고 내용을 보니, 매우 해괴하구나. 해당 차제 당상(差祭堂上)을 자진 출두시켜 진술을 받고 우선 녹봉 1등을 감하되 이 뒤로는 비록 시임 각신(時任閣臣)이나 승지·옥당 중에서라도 초기(草記)하여 융통성 있게 전차(塡差)할 일로 다시 엄히 신칙하라. 재관 전차의 일이 이토록 세심하지 못하니, 기타의 일들이야 또한 미루어 알 만하다. 그리고 전사관(典祀官)에게는 패(牌)를 내서 제물(祭物)·제품(祭品) 등을 정결하게 준비하도록 하는 뜻을 해당 영(營)에 엄히 신칙하고, 종사관(從事官)에게는 패를 내어 청도(淸道)047) 등에 관한 절차를 각별히 엄격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이조원(李祖源)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8일 임인
돈을 주조하였다.
2월 9일 계묘
장령 정최성(鄭㝡成)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은 전날 좌상이 아뢴 신대윤(申大尹)의 일에 대하여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당초 계복(啓覆)할 때에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묘당이 작성한 초기(草記)를 시상(時相)으로서 몰랐을 리가 없고, 만일 알았었다면 어째서 그때에 바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가, 헌의(讞議)가 이미 올라가고 처분이 이미 내려진 다음에야 갑자기 이론을 세운단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마는, 대신이 도계(道啓)나 부의(府議) 이외에 별도로 무슨 들은 말이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까. 이미 죄수의 공초에 근거가 있음으로 인하여 사안(査案)이 허황된 것이라는 것이 징험되었고 보면, 한 대신의 앞뒤가 모순되는 견해로 인해 수시로 국법을 오르내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신대윤을 찬배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고 종전대로 조율(照律)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신(將臣)의 경우는 비록 체직되거나 파면이 되어 부절(符節)을 반납하는 때일지라도 병부(兵符)는 해납(解納)하는 관례가 없는데, 전일 여러 장신들이 파면되어 부절을 반납할 적에 당시 겸찰 총융사(兼察摠戎使) 김지묵(金持默)은 자기가 차고 있던 병부까지 혼동하여 해납하였습니다. 그랬는데도 승정원의 신하 또한 잘 살피지 않고 일체로 받아들임으로써 해당 영의 교리(校吏)들로 하여금 도로에 분주하게 하여 소문이 해괴하였습니다. 해당 장신 및 승지에게 아울러 파직의 법을 시행하는 일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의 초기는 특교(特敎)를 인하여 전유(傳諭)한 다음에 품처한 것이고 보면, 좌상·우상이 의당 서로 상의를 하였을 것인데, 그후 경연의 아룀에서 우상에게 책비(責備)를 한 것은 조검(照檢)이 잘못된 소치인 듯하니, 그 일이 지난 뒤에 좌상이 반드시 뉘우쳤을 것이다. 신대윤을 종전의 조율에 따라 마감 조처할 일을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병부를 혼동해서 반납했거나 혼동해서 받아들인 일은 그 실수가 미세하지 않으니, 전 겸찰총융사 김지묵과 해방(該房)의 승지에 관한 일을 아울러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이하보(李夏保)를 다시 취초한 결과, 그가 ‘이집(李潗)이 경기 감영에서 패소(敗訴)한 뒤에 다시 강원 감영으로 옮겨 소송을 하였으므로, 경기 감영의 관문(關文)을 인하여 그의 부정 사실을 적발해서 논보(論報)하였다. 그랬더니 강원 감영의 제사(題辭)에서, 죄수를 옥에 가둔 다음 형추(刑推)하여 그 투장한 묘를 파내도록 독책하라고 하였으므로, 죄수를 형추하고 가두어 둔 지가 7, 8개월에 이르렀다. 그의 집 종상일(終祥日)에 그에게 휴가를 주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실상 내가 함부로 처리하기가 어려워서 과연 휴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任)가의 묘소는 바로 여러 임가의 조상의 산이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임경속(任景涑)이 과연 저에게 편지를 보내 부탁한 일이 있었고, 이천 부사(伊川府使) 임희존(任希存)도 편지를 보내와 부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스스로 남의 청촉을 받은 죄과에 빠진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를 형추하소서."
하니, 판부(判付)하기를,
"조정이 도신과 수령을 설치하여 교화를 펴고 근심을 나누는 것은 곧 풍속을 도탑게 하고 천륜을 중히 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사를 다스리는 일의 경중에 대해서도 그 원리에 따라 송사를 다스려야 할 것인데, 이를 벗어나 국법을 위배한 다소의 거조가 모두 해괴하고 패악스럽다. 심지어는 하룻밤의 말미도 주지 않아서 그 무지한 산골 백성들의 원근 이목으로 하여금 상제(喪制)가 지극히 중대함을 모르게 하였다. 이 때문에 관례를 초월해서 그를 잡아다가 조사하면서 위엄을 보이며 끝까지 힐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지럽고 경박한 세상 풍습이 행검(行檢)을 천히 여기고 명의(名義)를 가벼이 여기는 판이니, 이를 다스려 밝히는 책임을 진실로 그같은 무인(武人) 수령에게 책임지우기는 어려운 일이나, 무인 수령 또한 임금이 임명한 관리이다. 남의 집에 초상이 나도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주는 것이 바로 사람마다 똑같이 타고난 천륜이요, 이는 곧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통행되는 상도(常道)인데, 그는 유독 나몰라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전(虞典)에 이른바, 인류(人類)에 끼워둘 수 없는 존재인데, 방류(放流)의 율을 도피할 수 있겠는가. 이하보를 북쪽 맨 끝으로 내쫓되 즉각 내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감사로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도시 직무를 감당치 못한 것이 되는데, 더구나 10개월 가까이 사람을 가두어두고 달마다 반드시 세 차례씩 형추한 사실이 이미 죄수의 공초에서 나왔고, 이런 일을 또한 해당 수령의 독단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보면, 그 감사 또한 몰랐다는 것도 죄가 될 뿐만이 아니니, 외직이라 해서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다. 해당 도신에게 영불서용(永不敍用)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2월 10일 갑진
이서구(李書九)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는데, 이윽고 그의 상소로 인하여 체직을 윤허하였다.
2월 13일 정미
채홍원(蔡弘遠)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7일 신해
총융사 김지묵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2월 18일 임자
민태혁(閔台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식년(式年)에 행하는 감시(監試)의 복시(覆試)를 베풀었다.
2월 19일 계축
동지 정사(冬至正使) 김문순(金文淳), 부사(副使) 신기(申耆)가 연경(燕京)으로부터 출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신들 일행 중에 김문순은 병이 나서 책내(柵內)에 임시 머물러 있었고, 신 신기가 서장관 홍낙유(洪樂遊)와 함께 표문(表文)·자문(咨文)을 받들고 먼저 출발하여 12월 18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표문·자문을 받들고 예부(禮部)에 나아가 별 폐단 없이 정납(呈納)하였는데, 청나라 예부 시랑 다영무(多永武)가 여러 낭관들을 거느리고서 관례대로 영수(領受)하였습니다. 그 후 신들은 물러나 남소관(南小館)으로 돌아왔습니다.
21일에는 태상 황제(太上皇帝)가 빙희(氷戱)를 관람하였는데, 예부의 통지로 인하여 신 신기 및 서장관이 서화문(西華門) 밖으로 나아가 황제의 행차를 지영(祗迎)하였습니다. 이때 태상황제께서는 황옥 소교(黃屋小轎)를 타고 신들이 지영하고 있는 곳에 당도하여 각로(閣老) 화신(和珅)을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국왕은 평안한가?’ 하므로, 신들이 ‘평안하십니다.’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일국이 다 편안한가?’ 하기에, 또 ‘다 편안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태상 황제가 서원문(西苑門)으로 들어가면서 인하여 신들로 하여금 따라와 영대(瀛臺)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윽고 식사를 내리라는 분부가 있더니, 신들 일행을 인도하여 전문(殿門)의 첨계(簷階) 위에 앉히고 똑같이 반탁(飯卓)을 내리고, 또 신들에게 어탁(御卓) 위에 있던 극식(克食)048) 을 내렸습니다. 조금 뒤에는 태상 황제가 나가서 양룡 설마(兩龍雪馬)를 타고 빙희를 베풀므로, 신들 또한 뒤에 따르면서 빙희를 관람하였습니다. 23일에는 신 신기 및 서장관에게 철갑상어 각각 한 마리씩을 내렸습니다.
신 김문순 일행은 12월 25일에야 연경에 뒤따라 당도하였습니다. 26일에는 신들과 서장관에게 회회국(回回國)의 포도를 담은 조그만 자루를 각각 하나씩 내렸습니다. 29일에는 황제가 태묘(太廟)에서 세모(歲暮)의 협제(袷祭)를 행하였는데,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은 오문(午門) 밖에서 등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황제는 황옥 소교를 탔고 시위(侍衛)는 매우 단촐했는데, 오문에서 나올 적에 신들이 지영하였습니다. 새벽에야 황제가 환궁하였는데, 한참 뒤에 대내로부터 신들에게 극식 및 녹육(鹿肉)과 녹미(鹿尾)를 내리고 인하여 신들을 처소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30일에는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베풀었는데, 신들 두 사람은 반탁 하나를 함께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황제가 먼저 어전(御殿)으로 나가더니, 태상 황제가 어전탑(御殿榻)에 오르기를 기다려 황제는 별도로 소탑(小榻)을 베풀고 서쪽을 향하여 시좌(侍坐)하고서 풍악을 울리고 축배를 올렸는데, 이때 문무관 또한 모두가 배식(陪食)하였고, 또 신들에게는 낙다(酪茶) 한 잔씩을 돌렸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을 이끌고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하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御卓) 위에 있는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近侍)로 하여금 신들에게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연종연이 끝나고 신들은 숙소로 돌아왔는데, 또 신들과 서장관에게 석류와 밀감 각 1통씩을 내렸습니다. 또 내무부(內務部)에서 연탁(宴卓) 2좌(坐)를 반송(頒送)해왔는데, 이는 곧 조연(朝宴) 때 신들이 받았던 반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광록시(光祿寺)에서는 신들 및 서장관에게 세찬탁(歲饌卓)을 수송해 왔습니다.
금년 1월 1일에는 예부의 통지로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및 정관(正官)들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기다렸는데,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당자(堂子)049) 에 행행하였습니다. 조금 뒤 환궁할 적에는 정편(靜鞭)과 풍악을 울렸습니다. 이어 태상 황제가 태화전(太和殿)에 임어하자, 황제는 전내(殿內)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였고, 문무관들은 순서대로 따라 들어갔는데, 이때 신들도 전정(殿庭)으로 따라 들어가 서반(西班)의 맨 끝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오른쪽에 서서 삼궤 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하였습니다. 태상황제가 이내 내전으로 돌아가자 또 정편과 풍악을 울렸습니다. 이어 황제가 태화전에 임어하자, 문무관 및 신들의 행례(行禮)를 일체 처음 의식과 같이 하고, 예가 끝나자 물러나왔습니다.
5일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 행행하여 기곡 대제(祈穀大祭)를 행하였으므로, 신들은 오문 앞에 나아가 지송(祗送)하였습니다. 6일의 환궁 때에는 의당 지영(祗迎)해야 했으나, 이날은 태상황제가 황제와 함께 원명원(圓明園)을 행행하게 되었으므로, 두 곳의 영송(迎送)을 겸행하기가 어렵다 하여, 예부에서 태상 황제의 동가(動駕) 때에만 지영하라는 뜻으로 통지를 해왔기 때문에 신들이 서장관과 더불어 함께 삼좌문(三座門) 밖에 나아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해가 뜬 뒤에 태상 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서 신들의 지영하는 곳에 이르러 한번 돌아보고 지나갔습니다. 잠깐 뒤에 황제는 말을 타고 나왔는데, 황제가 탄 안구(鞍具)는 모두 황색(黃色)을 썼고, 좌우에는 약간의 관기(官騎)가 시위하였습니다. 10일에는 신이 부사와 함께 원명원에 가서 한 여사(廬舍)에 머물러 있었는데, 들으니 전에 이미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 앞에 몽고(蒙古)의 장막을 설치했다고 하였습니다.
11일에는 통역관이 신들을 이끌고 반차(班次)로 들어갔는데, 태상황제가 황옥 소교를 타고 나오므로 신들이 지영하였습니다. 이어서 태상 황제가 몽고의 대막(大幕)으로 들어가 좌정하자, 황제는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고서 풍악을 울리고 잡희(雜戱)를 베풀면서 친왕(親王) 및 몽고왕(蒙古王) 이하에게 모두 연탁(宴卓)을 내렸습니다. 신들 두 사람은 한 연탁에 함께 앉히고, 낙다(酪茶) 한 잔씩을 주었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德明)이 신들을 이끌고 어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하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 위의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로 하여금 신들에게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잔치가 끝나자 태상 황제는 소교를 타고 내전으로 돌아갔고, 황제는 그 뒤를 따라 도보로 환궁하였습니다.
내무부(內務部)에서는 미리 장막 앞 좌우에 상사(賞賜)의 탁자를 설치해 두었다가 친왕 이하 및 각국 사신에게 상을 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 김문순에게는 금(錦) 3필, 장융(漳絨) 3필, 대권 팔사단(大卷八絲緞) 4필, 대권 오사단(大卷五絲緞) 4필, 대하포(大荷包) 1대(對), 소하포(小荷包) 4개를 내리었고, 신 신기에게는 금 2필, 장융 2필, 대궐 팔사단 3필, 대권 오사단 3필, 대하포 1대, 소하포 4개를 내리었습니다. 그런데 매양 연초(年初)마다 자광각(紫光閣)에서 잔치를 베풀고 으레 이 상사가 있었는데, 금년에는 자광각 잔치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몽고막(蒙古幕)의 잔치로 옮겨서 상사를 하였는 바, 유구국의 사신에 대한 상사도 신들에게와 똑같이 하였습니다.
이어서 통역관이 태상 황제의 특지에 따라 신들을 인도하여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으로 나아가서 좌우의 오산(鰲山)을 구경하게 하였는데, 이때 일행 중 역원(譯員)으로서 흑단령(黑團領)을 입은 자는 모두 따라 들어왔습니다. 유구국의 사신에게도 관광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근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전각 안으로부터 난간 밖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꽃무늬의 옥석(玉石)을 깔았습니다. 그리고 오산의 제양(製樣)을 말하자면, 정대광명전 안의 동서벽에 모두 층탁(層卓)이 있고, 탁 위에는 오색이 찬란한 봉래산(蓬萊山)의 모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암학(巖壑)이 높고 널찍하고 누각이 층층이 겹쳐 있으며, 진금(珍禽)·기수(奇獸)·기수(琪樹)·요화(瑤花)가 여기저기 널려서 휘황찬란하여 그 형상을 어떻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밖에서 노끈만 잡아당기면 선관(仙官)·미녀(美女)가 골짜기에서 나오고 수당(繡幢)·보개(寶蓋)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닫혀진 문이 절로 열리는데 그 안에는 사람이 들어 있고, 내리쏟듯한 급한 여울에는 돛대와 노가 일제히 움직였으며, 탁 아래는 작은 장막을 둘러치고 장막 안에 악기(樂器)를 설치했는데, 기괄(機栝)이 잠깐 요동하면 법칙대로 작동하고 그치고 하되, 그 소리는 모두가 생(笙)·관(管)·사(絲)·종(鍾)의 소리였습니다. 신들이 구경을 마치고 물러나온 뒤에는 예부에서 ‘상원사연관등(上元賜宴觀燈)’을 시제(詩題)로 하여 관등시(觀燈詩)를 찬진(撰進)하라고 통지해왔으므로, 신들이 각각 칠언 율시(七言律詩) 1수씩을 지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12일 아침에 예부에서 전날 지어 올린 시를 되돌려주고 또 ‘승은연뢰관등공기(承恩宴賚觀燈恭紀)’라는 시제를 보내왔는데, 이는 곧 전날 지어 올린 시를 미처 황제께 올리지 못하여 이내 다시 출제(出題)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들이 또 칠언 율시 1수씩을 지어 올렸는데, 유구국의 사신도 응제(應製)하였습니다.
14일에는 산고수장각에서 등희(燈戱)를 베풀려고 했으나, 풍세(風勢)가 너무 급한 때문에 우선 정지하였습니다. 15일 아침에는 먼저 방생희(放生戱)를 베풀고, 또 정대광명전에서 잔치를 내렸습니다. 이때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전함(殿檻) 밖으로 들어가니, 태상 황제는 전각 위에 올라 좌정하였고 황제는 서쪽으로 향하여 시좌하였는데, 풍악을 울리고 놀이를 베풀면서 신들에게 각각 찬탁(饌卓) 및 낙다(酪茶) 한 잔씩을 내렸습니다. 또 예부 상서 덕명이 신들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이르니, 태상 황제가 손수 어탁 위의 술잔을 들어 주면서 근시로 하여금 신들의 본반(本班)에 내리게 하고, 또 어탁에 있는 꽃무늬가 찍힌 장병(長餠) 한 그릇과 저양(豬羊) 한 쟁반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잠깐 뒤에 태상 황제가 내전으로 돌아가고 황제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 통역관이 와서 예부의 말을 전하기를 ‘시를 지어 올린 사신은 지금 상을 받게 될 것이니, 머물러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들은 정대광명전 외문(外門)으로 물러와 기다렸습니다. 이때 신들은 동편에 있었고 유구국 사신은 서편에 있었습니다. 이때 예부 시랑 다영무가 전하께 상사하는 망단(蟒緞) 2필, 크고 작은 견지(絹紙) 4권, 복자방전(福字方箋) 1백 폭, 필(筆) 4갑, 묵(墨) 4갑, 연(硯) 2방(方), 피려기(玻瓈器) 4건(件), 조칠기(雕漆器) 4건을 신들에게 전해 주고, 신들에게는 각각 대단(大緞) 1필, 견지 2권, 필 2갑, 묵 2갑씩을 상사하였는데, 유구국왕 및 사신에게 상사한 것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또 산고수장각에서 등희(燈戱)를 베풀었는데,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화장자(花障子) 안의 반열로 나아가니, 태상 황제가 산고수장각에 나와 좌정하고 황제는 전과 같이 시좌하여 각저희(角觝戱)를 베풀면서 낙다 한 잔씩을 내리고, 과합(果盒) 및 저양육(猪羊肉)과 녹미(鹿尾)를 담은 쟁반을 내렸으며, 또 원소병(元宵餠) 각 한 그릇씩을 신들 및 종인(從人)들에게 두루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등화(燈火)의 잡희(雜戱)와 서양(西洋)의 그네뛰기를 차례로 베풀었는데, 매화(埋火)의 폭발하는 소리는 매우 굉렬하여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연기와 화염이 창공에 그득하였습니다.
16일에는 관소(館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19일에는 다시 원명원에 갔는데, 식사가 끝난 뒤에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정 아래에 이르니, 태상 황제는 어좌에 좌정하였고 황제는 시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부 상서 덕명이 특지(特旨)에 따라 즉시 신들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이르니, 태상 황제가 화신(和珅)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너희들이 귀국하거든 내가 평안히 지내고 있다는 뜻을 국왕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고 하므로, 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반차(班次)로 물러나왔습니다. 이어 신들에게 낙다 한 잔씩과 과합(菓盒)과 떡, 고기를 내려 주고, 등희(燈戱)·포구(砲具) 등을 베푸는 것은 일체 상원일(上元日)처럼 하였습니다.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에 황제가 먼저 들어갔고, 잔치가 다 끝난 뒤에야 태상 황제는 내전으로 들어가고 예부의 관원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이때 환시(宦侍)가 손짓으로 통역관을 부르므로, 통역관이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각 안으로 따라들어가 후문(後門)을 따라 나가서 구불구불 돌아 2, 30보쯤을 가니, 태상 황제가 타는 황옥 소교가 작은 배에 실려 있는데, 배 위의 종관(從官)들은 4, 5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때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촛불이나 횃불도 없이 다만 한 사람이 화통(火筒)을 가지고 언덕을 따라 전도(前導)하면서 좌우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화통의 제작 양식을 말하자면, 흙으로 통형(筒形)을 만든 다음 겉에는 채색을 칠하고 안에는 화약(火藥)을 장치하여 차례로 불을 대면 광염(光焰)이 땅을 환히 비추었습니다. 이는 아마 화금(火禁)이 매우 엄격함으로 인하여 촛불을 쓰지 않은 때문인 듯하였습니다.
신들은 작은 배를 타고 따라갔고, 유구국 사신도 따라 들어왔는데, 그 곳의 주위를 살펴보니 극히 깊고 엄하였습니다. 양쪽 언덕에는 모두 산을 만들고 간혹 돌로 가산(假山)을 쌓은 것도 있었으며, 산정(山亭)과 수각(水閣)은 도합 여섯 군데였습니다. 배로 1리(里)쯤 가서야 비로소 언덕에 대어 내렸는데, 여기에 바로 경풍도(慶豊圖)050) 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먼저 이미 와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상 황제를 맞이하여 의식대로 시좌하였는데, 어병(御屛)은 종이를 바르고 그 안을 누렇게 하였습니다. 층(層)마다 시렁을 설치하고 촛불을 환히 밝혔는데, 앞에 등가(燈架)를 설치한 것은 마치 어병의 모양과 같이 하였으되, 높이와 넓이는 몇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등가의 좌우에는 모두 등붕(燈棚)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백탑(白塔)의 모양과 같아서 아래는 넓고 위는 뽀족하였고, 면(面)마다 켜져 있는 등영(燈影)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각로(閣老) 이하 및 신들에게 낙다 한 잔씩을 내리고 정전(庭前)에 잡희(雜戱)를 베풀었습니다. 조금 뒤에 잔치를 파했는데, 따라 들어가는 조관(朝官)은 수십 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신들은 물러나온 뒤에 또 작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가 언덕에 올라서 한 후장(帿場)을 걸어서 갔는데, 이곳이 바로 정대광명전의 뒤편이었습니다. 인하여 그곳을 나왔습니다.
24일에는 예부의 통지를 인하여 신들이 서장관 및 정관들과 함께 오문 앞에 나아가 상사를 받았는데, 어전께 연례로 회송(回送)하는 예단(禮單) 외에 만수성절표단(萬壽聖節表緞) 4필, 이주(裡紬) 4필, 장단(粧緞) 3필, 운단(雲緞) 3필, 표피(豹皮) 70장(張), 마(馬) 1필, 영롱 안접(玲瓏鞍䩞) 전부를 일체로 지수(祗受)하여 상통사(上通事)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신들이 복명하는 날 일시에 정납하도록 하였습니다. 유구국 사신은 25일에 따로 상사를 받았습니다."
2월 20일 갑인
김이익(金履翼)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22일 병진
성균관에서 삼일제(三日製)를 베풀어 50인을 취하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는데,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모두 합격한 자가 있었다.
2월 23일 정사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봉상시의 첩보(牒報)에 ‘무진년 9월 27일에 응교 황경원(黃景源)이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제도에 봉상정(奉常正)이 의시(議諡)를 관장하되, 혹 의시가 불공정한 것이 있는 경우에는 응교 이상으로 하여금 박의(駁議)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근자에는 응교가 의시를 하고 봉상정은 아무런 가부를 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국조의 제도가 본디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의시할 적에 봉상정으로 하여금 협의하여 시호를 정하게 해서 옛 법규를 회복시켜야겠다.」 하니, 이에 대하여 비답하기를 「차후로는 일찍이 옥당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으로 봉상정을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상의해서 시호를 정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 상의 내용이 본시(本寺)의 등록(謄錄)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 의시할 때를 당해서 본시의 정(正) 김회빈(金晦彬)은 이미 일찍이 옥당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 아니니, 계품하여 변통해야겠다.’ 하였습니다. 이미 선조(先朝) 때 수교(受敎)한 것이 있었는데도 본시가 미처 상고하지 못하여, 전에는 옥당을 역임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혹 의시에 참여한 자가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본시에서 등록을 고출(考出)해 보고 봉상정의 체직을 청하였으니, 김회빈을 지금 우선 개차하고 그 대신을 구전(口傳)으로 의망하여 올리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교한 것은 모두 그후로 시행하는 것인데, 거조(擧條)의 비지(批旨)에 의하여 법식을 정한 뒤에도 양사(兩司) 출신의 정(正)을 임명해 왔고 보면 이는 반드시 품지를 거쳐서 그렇게 된 것이니, 다시 초기(草記)를 상고하라."
하였다. 이조가 또 아뢰기를,
"본조(本曹)의 등록을 상고해보니, 비록 무진년에 비지로 수교한 것은 실려 있으나, 그후 양사 출신으로 차출할 일로 품지를 거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봉상시에 물어보니 ‘무진년 이후로 지금까지 51년이 되었는데, 시호를 의정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가 일찍이 양사만 거친 사람들이었고, 일찍이 옥당을 거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은 겨우 8인뿐이며, 품지를 거친 뒤에 다시 법식을 정한 사실은 아예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본다면 무진년 이후로 비록 수교하여 법식을 정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 규정을 그대로 따르면서 새 규정을 즉시 준행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본시의 정 김회빈으로 말하더라도, 그가 작년에는 시호를 정하는 자리에 참여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본시가 그를 체직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강제로 그를 시호 의정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김회빈을 지금 우선 개차하고 정한 법식에 의거하여 일찍이 옥당을 거친 사람을 구전으로 의망하여 올리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품지를 거친 문적(文跡)이 없다 할지라도, 무진년부터 지금까지 51년 동안에 일찍이 옥당을 거친 사람으로 봉상정이 된 자가 8인뿐이라고 하였고 보면, 그 것은 반드시 연석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예전 관례에 따라 거행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시(該寺)의 정(正) 김회빈은 작년에 이미 시호를 정하는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지금 갑자기 본조(本曹)의 문적이 상세하지 못하다는 일로 보고해오는 것은 또한 경솔함에 관계된다. 다시 해시(該寺)로 하여금 본시(本寺)에 소재한, 무진년 거조의 비지가 있은 이후로 이내 예전 규정을 따르게 된 데에 관한 문적을 상고하여, 이를 고출(考出)해서 보고해 오도록 할 일로 분부하라."
하였다. 【그후 이조가 본시에는 끝내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다는 것으로 아뢰었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70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人事)
2월 24일 무오
응교 이익모(李翊模)가, 전 판서 신응현(申應顯)의 시망(諡望)에서 단연히 휘(諱)해야 할 것을 범했다가 승정원이 이를 밝혀냄으로 인하여 나중에 다시 고쳐 보냈고, 또 그의 요관(僚官)인 윤제동(尹悌東)이 자기 선조(先祖)의 일에 대해서 피혐을 잘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인책하여 지레 나가버리는 일이 있기까지에 이르도록 그를 잘 지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였다. 이에 승지 홍인호(洪仁浩)와 김달순(金達淳)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마침 홍문관이 의망하여 들여온 시망(諡望)을 보니, 휘해야 할 것을 범한 글자가 간혹 있었으므로, 홍문관 관원에게 이를 언급하였더니, 이내 홍문관에서 그 글자들을 고쳐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응교 이익모의 상소문 윗부분의 말뜻을 보니, 이 일을 가지고 스스로 인책을 하였습니다. 그때의 사실로 말하자면 비록 돌려준 것과는 경위가 다르나 시호를 의정하는 사체는 정작 중대한 것이고 보면, 홍문관 관원에게 이 일을 언급한 것은 거칠고 경솔함을 면치 못한 것이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더없이 엄중한 것이 시법(諡法)이고 보면, 설령 휘할 것을 범한 곳이 있을지라도 연석에서 일을 상주할 적에 혹 사리를 논하여 추고하기를 청하는 것은 옳겠거니와, 어찌 홍문관 관원에게 사적으로 분부를 할 수 있겠는가. 정원의 일은 극히 해괴하다. 그리고 시망이 정원에 도착했으면 홍문관은 이미 자리를 파했을 터인데, 또 어찌 감히 이미 의정한 것을 이내 다시 고쳐서 홍문관의 규범을 무너뜨린단 말인가. 옥당의 일도 잘못되었다. 그러나 옥당이 스스로 인책한 것은 오히려 용서할 만하거니와 승지가 스스로 변명을 한 것은 더욱 해괴하도다. 해당 옥당을 체차하고 경 등은 파직할 것이다."
하였다.
2월 25일 기미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8일 임술
만팔문(萬八門)에 나가 생원·진사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2월 29일 계해
고려의 예의 판서 김주(金澍)를 충정(忠貞)으로, 증 병조 판서 정운(鄭運)을 충장(忠壯)으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헌숙(憲肅)으로, 이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을 익헌(翼憲)으로, 증 좌찬성 김이주(金頤柱)를 정헌(靖憲)으로 각각 증시(贈諡)하였다.
이문회(李文會)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윤동만(尹東晩)을 그 대신으로 삼았다.
2월 30일 갑자
식년(式年) 동당 문무과(東堂文武科)의 복시(覆試)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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