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1798년 3월

싸라리리 2025. 8. 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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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경오

규장각에 나가 재숙(齋宿)하였는데,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의폐(衣幣)와 향촉(香燭)을 봉과(封裹)할 날이 다음날이기 때문이었다.

 

일차 전강(日次殿講) 및 춘도기 유생 전강(春到記儒生殿講)을 행하였다.

 

3월 7일 신미

김한동(金翰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8일 임신

식년 문과의 생획시(生畵試)를 베풀었다.

 

액외 금군(額外禁軍) 윤이열(尹而烈)이 대궐에 들어와 북을 친 일로 병조가 그에게 곤장을 엄히 치면서 사문(査問)하니, 윤이열이 말하기를,
"무과의 복시에서 활을 쏘아 맞춘 것이 모두 팔십일분반 사보(八十一分半四步)이었으나 합격이 되지 못했는데, 이윽고 방목(榜目)을 보니, 팔십일분반 일보인 자가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책(試冊)을 가져다 보니 내가 기추(騎芻)에서 두 번 맞춘 것을 한 번 맞춘 것으로 개서(改書)하였으므로, 이를 시관(試官)에게 호소하였으나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대궐을 함부로 뛰어들어간 죄를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병조가 아뢰기를,
"윤이열의 일은 사건(四件)051)   밖의 일이니, 형조로 하여금 법대로 마감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팔십일분반 일보인 자가 합격이 되었는데 팔십일분반 사보인 자가 합격권에서 빠졌다면, 당사자가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과장(科場)의 사체가 그 얼마나 지엄한데 이같은 전에 없던 일이 발생했단 말인가. 이는 기강에 관계가 있을 뿐만이 아니다. 당초에는 설령 일을 세심하게 처리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이미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감시관(監試官)은 사헌부에 나아가 시관(試官)을 논계했어야 하고, 시관은 또한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했어야 했다. 그런데 모두 이런 방도를 내지 않음으로써 호소하는 거조가 당사자에게서 나왔으니, 사건(四件)의 안이고 밖이고는 우선 그만두고, 의당 먼저 과장이 엄격하지 못했던 것부터 핵실해야 한다. 그러니 입문관(入門官)·차비관(差備官)에 대해서, 경(卿)은 즉시 개좌(開坐)하여 똑같이 곤장을 엄히 쳐서 공초를 받아내되, 초기(草記)에 참으로 이런 사실이 있거든, 시관의 초기와 아울러 엄격히 감정하라. 그리고 이쪽이나 저쪽이 모두 잡란(雜亂)한 것으로 보아 감대(監臺)가 매우 직무를 태만히 했음을 알 수 있으니, 해소(該所)의 감시관의 이름을 물어 전지(傳旨)를 받들어서 먼저 체차한 다음 의금부에 내려서 추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윤이열은 이름이 금군에 편입되었으니, 비록 잡인(雜人)이 대궐을 난입한 것과는 다르나 어쨌든 죄가 없을 수 없다. 또한 이미 곤장을 엄히 쳤으니, 우선 그를 파면하도록 하라.
대저 신문고(申聞鼓)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매양 한 번은 깨우쳐주려고 하면서도 아직 그러하지 못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집한 이후에 특별히 명하여 쟁(錚)을 고(鼓)로 대신하였다. 그리하여 옛날 협양문(協陽門)·광달문(廣達門) 밖에서 치던 쟁을 치우고, 지금은 진선문(進善門)·건명문(建明門)에다 북으로 대신 설치하였다. 북을 설치한 법의(法意)는 대체로 억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알리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듣건대, 연전에 한 문신(文臣)의 후예는 북을 싸매었고[裹鼓], 한 중신(重臣)의 후예는 북을 높이 달아매었다[掛鼓]고 하니, 진실로 이 말대로라면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경은 내사(內司)를 엄히 신칙하여 입직 당랑(入直堂郞)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답습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는 사건(四件) 안에 든 절박한 일로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입직 당랑이 그의 원정(原情)을 확인한 다음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여 상헌(常憲)을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병조가 또 아뢰기를,
"곡절을 조사해보니, 윤이열이 한 번 맞춘 것을 호창관(呼唱官)이 잘못 두 번 맞춘 것으로 호창함으로써 여러 시관들의 시책(試冊)에 모두 두 번 맞춘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이윽고 각 추(芻)의 과녁[貫革]을 들어올리어 화살을 뽑아 이름을 확인함에 이르러서는 윤이열의 이름이 적힌 화살은 하나뿐이었으므로, 여러 시관과 감대(監臺)가 서로 의논하여 고쳐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사(試事)를 만일 엄히 신칙하였다면 어찌 이렇게 잘못 부르고 잘못 기록하여 거자(擧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도록 하겠습니까. 해소(該所)의 시관들을 아울러 파직하고, 잘못 호창한 차비관에 대해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율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과거의 체모는 지극히 엄격한 것이다. 잘못 호창한 차비관을 즉시 치죄했다면 당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들은 자도 의당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고관(考官)과 감시관은 파직하고 참고관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3월 9일 계유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서북(西北)의 별부료 군관(別付料軍官) 및 무예청(武藝廳)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3월 10일 갑술

지돈녕부사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적수들이 세상에 넘쳐서, 작년 섣달에 대간이 꾸짖어 모욕한 말도 이미 여지가 없었는데, 금년 초봄에 상신(相臣)이 제기하여 상주한 것은 도리어 한층 더 심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엄히 핵실하여 실정을 얻어내는 일은 바로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청했던 것이고 보면, 지금 이 상신의 상주가 신에게는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진술한 말이 마치 붙드는 듯도 하고 억제하는 듯도 한 가운데 너무도 급하게 견지하여, 신을 좌우로 이리저리 밀쳐대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이 대신에게 죄를 얻은 지가 오래인데, 이 말이 또 묘당(廟堂)에서 나와 문득 공안(公案)이 되었으니, 지금 만일 그럭저럭 덮어두고서 끝내 한번도 그 실정을 조사해내지 못한다면 신이 어떻게 천일(天日)의 아래에 낯을 들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사실을 분명하게 조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대간이 피혐한 것은 청조(淸朝)를 모욕시킨 일이었다. 이 때문에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 같이 여겨 다시는 이 일을 제기하려 하지 않은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1일 을해

윤대(輪對)가 있었다.

 

함경도 관찰사 이정운이 장계하기를,
"영흥(永興) 본궁(本宮)의 둑 쌓는 거대한 역사를 완성하여 다시는 무너져 터지는 염려가 없게 되었습니다. 매우 노고가 많았던 비교(裨校)들 중에서도 자원해서 물자를 바친 사람들을 별단(別單)에 기재하여 올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궁에 둑을 쌓은 지 49년 동안에 해마다 보수를 해왔는데, 금년에 이르러서는 역사가 매우 거대하였으나 다행히 곧 완성을 보았다. 도백(道伯)으로서는 자기 직분 안의 일에 불과하고 또 몸소 가서 감독한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지방관이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해서 조치를 일목요연하게 하여 일을 쉽게 성취하면서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구나. 영흥 부사 김희조(金熙朝)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도간역(都看役) 가의(嘉義) 김경응(金敬膺)에게는 그에 상당한 직을 제수하며, 역사를 감독한 읍교(邑校)에게는 체지(帖紙)를 내주고, 부리(府吏)와 궁속(宮屬)에게는 도백으로 하여금 상을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중에 돌을 자원해서 바쳐온 것은 그 값이 비록 수백 금(金)에 불과하다고 하나, 연전에 기읍(畿邑)에서 봉조봉(鳳鳥峯)의 역사에 민력(民力)을 쓰면서 고정(雇丁)의 대가(代價)를 방급(防給)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자원해서 물자를 바치는 데 대한 폐단이 그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지라,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이번 본궁의 둑 쌓는 일은 소중하기가 더욱 자별하니, 자원해서 바쳐온 것이라 하여 그냥 받아 쓰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 이 또한 도백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환급(還給)하고 나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 함경도 관찰사 이정운과 전 평안도 병마 절도사 임률(任嵂)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민세(民勢)가 요즘에는 과연 어떠한가?"
하니, 이정운이 말하기를,
"8년 동안 연속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흙 같이 흔하여 일로(一路)가 편안하더이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곡식 저축하는 도리를 어찌 근년에 조금 풍년이 들었다 하여 일호라도 방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도는 정유년 이후로 창름(倉廩)이 풍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환곡(還穀)을 설치하는 것은 곧 다음해에 백성을 먹이기 위함인데, 근년에 이미 약간 풍년이 들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썩 힘이 될 수 있겠다. 풍년든 해에 축적을 많이 해두면 이것이 곧 백성들의 흉년 양식이 되는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운이 또 아뢰기를,
"종성(鍾城)에 행영(行營)을 설치한 것은 곧 육진(六鎭)을 제어하여 번호(蕃胡)가 몰래 일어나는 걱정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번호가 물러간 뒤에는 변경에 아무런 경계도 없는데, 병사(兵使)는 1년에 한 차례씩 행영에 이주(移住)하다 보니, 한갓 민읍(民邑)에 폐만 끼칠 뿐, 방어하는 방도에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형편으로 말하자면, 행영(行營)은 사면으로 적(敵)을 받는 곳인데 고작 두어 초소에 번드는 군졸만이 있을 뿐이니, 비록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장차 어떻게 적을 막겠습니까. 경성(鏡城) 본영(本營)의 경우는 지형(地形)이 사방으로 요새처가 되어 있고 인민이 번성하며 강가의 읍진(邑鎭)들을 관할하고 있어, 전진하여 싸우고 물러나서 지킬 수 있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작년 가을 순심(巡審)할 때에 산천의 형승을 두루 관람하고 북로(北路)의 여론을 채탐한 결과, 남곤(南閫)에도 옛날에 행영이 있었는데, 그 또한 폐단이 있어서 중간에 폐지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남곤의 전례에 의거하여 행영에는 주둔하지 말고 경성에 앉아서 진무하는 것이 편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복주(覆奏)하게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행영을 철파하자는 논의는 전후로 한두 번만이 아닙니다. 대체로 건주(建州)가 웅장(雄長)이 된 이후로는 연변에 모여있던 부락들이 모두 철거해 갔고, 연화(煙火)가 바라보이는 곳이 있어도 그들 또한 두려워하여 복종함으로써 피차의 경계가 백년 동안 평온하였으니, 의당 행영에 이주하는 일을 일삼을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시세이고 무궁 무진한 것은 일의 변천인데 지금 만일 행영을 철파한다면, 10년도 채 안되어서 온갖 시설들이 기필코 씻은 듯이 남은 게 없을 것이니, 만분의 일이라도 이주하지 않을 수 없는 때를 만난다면 그때는 비록 일도(一道)의 힘을 기울이더라도 갑자기 온갖 시설을 수선(修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왕래할 때의 민폐가 고통이 안된다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민읍(民邑)이 오랫동안 해오던 것이니, 이것 때문에 갑자기 이미 이루어진 제도를 폐기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이정운이 또 아뢰기를,
"갑산부(甲山府)에서 1백 20리쯤 되는 곳에 검천거리(劍川巨里)라는 곳이 있는데, 피변(彼邊)과의 사이에 압록강 상류가 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피지(彼地)에 가가수동(可哥水洞)과 거전수동(車前水洞) 두 가닥의 빠른 길이 있어 피인(彼人)들이 이 길을 따라 쉽게 왕래하므로, 마치 항상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지형으로 말하자면, 허항령(虛項嶺)으로부터 검천거리까지가 족히 수백 리나 되는 빈 땅인데, 토질이 극히 비옥하고 지대가 낮아 서리도 일찍 내리지 않아서 잘 안되는 곡식이 없습니다. 관방(關防)이 이렇듯 긴중하고 인민 또한 모두 그곳에 가서 살기를 좋아하니, 변방을 긴중히 여기고 방어를 튼튼히 하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그곳을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갑산부의 열진(列鎭) 가운데 동인보(同仁堡)는 진(鎭)의 모양이 가장 잔폐할 뿐만 아니라, 자못 내지(內地)와 같아서 그리 긴관(緊關)하지 않으니, 지금 만일 검천거리로 진을 옮긴다면 모집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반드시 스스로 모여들 것입니다."
하니, 이 또한 묘당에 명하여 복주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도(地圖)를 상고해보고 여러 의논을 참고해 본 결과, 피인들이 몰래 넘어와 인삼을 캐는 길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현재 거주하고 있는 민호(民戶)만도 이미 40호를 넘었고, 또 동인보가 소재한 곳으로 말하자면 비록 옛날 적로(賊路)가 우연히 한번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기는 하나, 그 지역이 이미 궁벽하고 또 멀어서 자못 의의가 없습니다. 이쪽을 옮기어 저쪽에 설치하는 것은 굳이 의심을 가질 것이 없으니 아뢴 말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률이 아뢰기를,
"본도의 군폐(軍弊) 가운데 양삼수(良三手)와 노삼수(奴三手)의 폐단이 있는데, 이들은 다같이 단속군(團束軍)으로서 이 중에도 노삼수가 가장 고질적인 폐단이 됩니다. 양삼수와 노삼수가 똑같은 군(軍)이로되, 양삼수는 양인(良人)으로 일컫고, 노삼수는 사천(私賤)이라 하면서 노삼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삼수는 모두 항오에 들기를 싫어하여 도주함으로써 항오가 태반이 비어버린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혹 해당관이 진문(鎭門)에 모아놓고 점열(點閱)할 때나 병사가 조련(操鍊)을 시킬 때에는 그 숫자 채우는 일을 오로지 주호(主戶)에게 맡기므로, 주호에서 혹 사람을 고용하거나 타인의 이름을 빌리는데, 그 고가(雇價)가 수십 냥씩입니다. 이것이 곧 서도 백성들의 뼈에 사무친 원통한 일이니, 지금 만일 양(良)과 노(奴)의 명색을 혁파하여 통틀어 삼수라 일컫고, 결원이 생기는 대로 충정(充定)한다면, 군정(軍政)에 있어서는 항오가 비는 폐단이 없게 되고, 서도 백성에게는 지탱 보존시키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기왕 그런 말을 듣고 나서야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거조(擧條)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다.

 

전교하였다.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위토(位土)는 모름지기 해당 고을의 한지(閑地)를 사들인 다음에야 면세(免稅)를 해주는 것이 정해진 법전이니, 고을 경계를 넘어서 망정(望呈)을 한 것은 대단히 법 밖의 일이다. 더구나 절수(折受)의 법이 어찌 서원에 있을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평생 경륜한 것이 궁방(宮房)의 절수를 혁파하는 데에 있었고 보면, 향교도 그렇게 해서는 안될 터인데, 더구나 서원이겠는가. 또 더구나 천리 밖 변방의 험한 산지(山地)에 나무를 베내고 개간하는 것은 필시 간민(奸民)이 작폐하는 일일 터인데, 원유(院儒)가 어떻게 간민을 고발할 줄 알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수교(受敎)의 정식(定式)에 의거해서 그를 엄히 다스린 뒤에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윤홍렬(尹弘烈)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2일 병자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문과 전시(文科殿試) 및 춘도기 제술시(春到記製述試)를 거행하고, 인하여 춘당대로 나아가 무과 전시를 거행하였다. 이날 문과에서는 진사 이경삼(李敬參) 등 53인을 취하였고, 무과에서는 강이팔(姜利八) 등 4백 29인을 취하였다. 도기 유생 중에 강(講)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유학(幼學) 문상중(文尙中)이고, 제술(製述)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진사 김계온(金啓溫)이었는데,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식년 전시에서 반드시 원방(元榜)을 장원(狀元)으로 삼는 것이 구례(舊例)이니, 이번에도 구례에 의거하여 원방 중에서 점수가 많은 사람을 장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3일 정축

명하여 식년 문과 합격자 중 나이 70세가 넘은 문봉익(文鳳翼) 등에 대해서는 전적(典籍) 자리를 가설(加設)하여 신은정(新恩政) 때 의망하여 올리고, 나이 60세가 넘은 권창익(權昌益) 등에 대해서는 승륙(陞六)시키도록 하였다.

 

전교하였다.
"제릉(齊陵)052)  의 국내(局內)에 인근한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집 선영에 대해서는 매양 대신이나 혹은 예조 당상의 제주(提奏)로 인하여 그 가인(家人)으로 하여금 재랑(齋郞)과 함께 묘역을 수치(修治)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근래에 오랫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전에 시흥(始興)에 있는 강문정(姜文貞)053)  의 묘소에는 특별히 관원을 보내 적간(摘奸)하고 제치(除治)한 다음 치제(致祭)하였고, 또 온릉(溫陵)054)  의 국내에 있는 부원군의 묘소 이외의 여러 성씨(成氏)의 묘까지 아울러 특별히 소제(掃除)하여 사릉(思陵)055)   근처에 있는 여러 정씨(鄭氏)의 묘소에 망제(望祭)한 고사를 따랐고 보면, 여흥 부원군 집 선산이야말로 소중하기가 자별한데도 금호(禁護)하는 것은 도리어 정(鄭)·신(愼)·성(成)·강(姜)씨 등에게보다 못하니, 어찌 매우 황송하지 않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관문(關文)을 보내 수신(守臣)을 신칙하여 일체 구례에 의거해서 해마다 단오일(端午日)에 말끔히 정리하게 하고, 재랑 및 수신으로 하여금 등록에 자세히 기록하여 해마다 법식으로 삼아서 혹시라도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라."

 

3월 14일 무인

명하여 문과 전시 때 법식에 어긋나 빼버렸던 경원(慶源)의 거인(擧人) 박찰원(朴察遠)과 함흥(咸興)의 거인 이행(李珩)을 특별히 방미(榜尾)에 붙여 같이 창명(唱名)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과거의 체모는 지엄한 것이니, 봉서(封書)가 규격에 어긋났으면 빼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통정(通政) 밑에 대부(大夫)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가선(嘉善)에다 행직(行職)을 병서(並書)한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필시 그들의 죄가 아니리라. 근래에 관적(官籍)의 법이 예스럽지 않아서 직함을 쓰는 데에 비록 격식에 어긋난 것이 있어도 관장(官長)이 이를 살펴서 바로잡지 못한 소치이니, 두 고을 수령에게 현고(現告)를 받고 죄를 정하라. 그리고 두 유생은 모두 북쪽 변방 사람으로, 한 사람은 곧 어고(御考)로 사제(賜第)한 자이고, 한 사람은 바로 나이가 70이 넘은 자이니, 어찌 본인의 죄도 아닌 것으로 공연히 복시를 후기로 물릴 수 있겠는가. 박찰원과 이행을 특별히 방미에 붙여 일체로 창명하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김이익(金履翼)이 낭천현(狼川縣)의 민가 41호가 불에 탄 사실을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해읍(該邑)의 40호의 소실은 큰 고을의 80호보다도 심한 재난인지라,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의 정상을 생각하니 지극히 불쌍하고 측은하구나. 도백으로 하여금 해당 수령을 엄히 신칙하여 각별히 이재민들을 돌보아서 속히 집을 지어 안주하게 하라. 소호(小戶)와 잔호(殘戶)에 대해서는 신역(身役)을 없애주고 신역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환곡을 징수하지 말며, 각 대호(大戶)와 중호(中戶)의 환곡도 징수하지 말게 하라. 지난달에 화재를 입은 강릉(江陵)·통천(通川)의 민호에 대해서는 월말에야 보고를 해온 때문에 이미 때가 늦어서 하교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목이 메인 듯이 가련하구나. 그 동안에 과연 집을 짓고 안주하였는가? 이 일 또한 해당 수령을 엄히 신칙하여 안주를 끝낸 뒤에 낭천의 형편과 아울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타도(他道)는 불탄 집이 많을 경우에는 그 즉시 관례를 초월해서 장문하고 있는데, 오직 관동(關東) 일로(一路)만은 고 관찰사 이형규(李亨逵)가 승지로 있을 때 연주(筵奏)하여 정한 법식을 지금까지 굳게 지키어 별도로 장문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곳도 타도의 예에 의거해서 할 일로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5일 기묘

돌아온 동지 정사 김문순을 불러 접견하였다. 김문순이 아뢰기를,
"양성조(兩聖朝)의 기적비(紀蹟碑)를 정주성(定州城) 밖에다 새로 세웠는데, 큰길과의 거리가 몇 걸음도 채 안 되었습니다. 여기는 바로 북경 사신이 왕래하는 곳인데, 비문(碑文) 가운데는 또한 피인(彼人)들이 보아서는 안될 것도 있습니다. 한편 이 성 안에는 선묘(宣廟)께서 주필(駐蹕)하신 구기(舊基)가 있는데, 여기에는 백성이 거주하지도 않고 전답에 관세(官稅)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이 두 기적비를 이곳으로 옮겨 세우자면, 새로 짓는 건물에 예전 건물의 재목과 기와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으니, 비용이 드는 것은 고작 물자 수송과 건물 짓는 공역(工役)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주(本州)에는 양성(兩聖)께서 주어(駐御)하신 옛 터가 있는 바, 하나는 성 밖 달천(㺚川) 땅에 있어 아직도 원수대 전장평(元帥臺戰場坪)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니, 이는 국초(國初)에 승첩을 거두었던 옛터이고, 하나는 성 안의 탁씨(卓氏) 집에 있으니, 이는 곧 선조(宣祖)의 숙소(宿所)의 옛 터이다. 그렇다면 비를 세우는 일에 있어 하나만 세우고 하나는 안 세울 수가 없는데, 달천에만 세우고 탁씨 집에는 미처 세우지 못한 것은 실로 흠사(欠事)요 궐전(闕典)인 것이다. 성 밖에 있는 비는 비각(碑閣)을 세워 성 안으로 옮겨 봉안하고, 성 밖의 이미 세워진 비각에 대해서는 의당 그 사연을 비면(碑面)에 공경히 기록하여 새겨서 세우도록 하라. 이렇게 한 다음에야 양성께서 주필하신 옛터에 대하여 각각 징신(徵信)할 만한 기적(紀蹟)이 있게 되어, 체모가 비로소 존엄해질 수 있고, 사체가 더욱 완비될 것이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이런 뜻을 도백과 그곳 수령에게 알려서 당장 공사를 시작하게 하되, 먼저 비석의 척수(尺數)를 기록해서 내각(內閣)에 상송(上送)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6일 경진

차대가 있었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유선(諭善)이 올라오지 않아서 강연(講筵)을 철폐한 지가 이미 3개월에 이르렀다. 강연에 관계되는 일이 그 얼마나 긴중한데, 좌유선은 우유선이 오지 않은 관계로 그 역시 따라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 태자(太子)의 요속(僚屬)에 대해서는 비록 고사(古史)에 실려 있기는 하나, 또한 그리 특별한 직명이 아니다. 우리 숙묘조(肅廟朝) 때부터 임시로 설치한 직명이 있었는데, 내가 강학(講學)할 때에 이르러서는 박성원(朴聖源) 같은 경우는 당하관으로서 유선이 되었고, 서지수(徐志修)의 경우는 재신의 반열로서 유선이 되어 품계에 따라 겸대(兼帶)하였다. 그리고 행 유선이나 겸 유선의 직에 있어서도 모두가 요속임에는 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요속이 된 것을 초선(抄選)인 양 알고서 또한 즉시 나오지 않으니, 경이 그들을 잘 타일러서 이렇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 가운데 54만 3천여 석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일로(一路)의 곡식 수량인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이것은 원환향(元還餉)의 실수(實數)만 가리켜 말한 것으로, 외아문(外衙門)의 곡식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화진(金華鎭)·정민시(鄭民始)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그곳 도백으로 있을 때는 원곡(元穀)의 수량이 얼마나 되었던가?"
하니, 정민시가 말하기를,
"신이 그곳에 있을 때는 1백 20만 석이었습니다."
하고, 김화진은 말하기를,
"신이 그곳에 있을 적에도 1백여 만 석이 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곡식 수량이 전보다 이렇듯 크게 줄었는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곡식이 많다고 여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로지 진분곡(盡分穀)이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대체로 병신년 이후로 점점 더 많아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환곡의 모조(耗條)를 취해 쓰는 것은 이미 옛 제도가 아닌데, 근년 이래로는 이것을 경상 비용으로 만들어 모든 폐단을 막고 대가를 지급할 데가 있으면 그때마다 모곡(耗穀)을 취해 쓰면서 당연한 일처럼 간주하고 있다. 진분곡이 이 때문에 날로 더욱 많아진 것인데, 이 곡식은 아무리 흉년을 만나더라도 수용(需用)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견감이나 정지가 허락되지 않으니, 이러고서야 백성이 그 폐단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해결책을 강구하자면, 진분곡은 모조리 혁파하고 일체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는 것을 법식으로 삼은 다음에야 적폐(糴弊)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정민시가 말하기를,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마는, 조정의 경비만 오로지 모곡에 의존할 뿐이 아니라, 경외(京外) 각처의 용도(用度)도 모두 여기에서 나오고 있으니, 또한 갑자기 변통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關西) 지방은 1년에 세(稅)로 받은 소미(小米)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화진이 말하기를,
"9천 석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 지방이 의례적으로 바치는 공물은 타도에 비해 가장 헐하도다."
하니, 정민시가 말하기를,
"관서 일로는, 전세(田稅)의 경우는 각읍의 것을 회록(會錄)하여 그대로 향환곡(餉還穀)으로 만들고, 대동(大同)의 경우는 애당초 징수하지 않고 영읍(營邑)에 붙여서 민고(民庫)의 수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관서 일로에서 나온 것이 조정의 경비에 도움을 주는 것은 본래부터 많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때문에 관서 지방의 민력(民力)이 타도에 비해 조금 펴진 것이다."
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김화진에게 이르기를,
"경이 주전(鑄錢)을 관장하였는데, 옛날 돈은 크고 두꺼웠는데 지금 돈은 얇고 작은 까닭이 무엇인가? 시험삼아 고사(古史)에서 보건대 아안전(鵝眼錢)이나 연환전(綖環錢)056)  은 가벼워서 물 위에 뜨기까지 했는데, 모두 잘 다스려진 시대의 일이 아니었다. 이런 물건의 제작은 시대상(時代象)에도 관계가 있는 것인데, 어찌 이해 관계를 따져 오래도록 쓸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상호군 정민시가 진언하기를,
"주전에 대한 제도가 옛날에는 10분의 7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10분 2밖에 안되면서도 도리어 돈 모양이 옛날 것만 못한 것은 대체로 동(銅)이 귀함으로 인연하여 공장(工匠)이 협주(挾鑄)할 때에 동을 얻기가 어려우면 매양 관주(官鑄)의 돈에다 연(鉛)을 많이 섞고, 거기에서 남은 동을 취하여 협주를 한 데서 연유된 것이니, 그 작간의 폐단이 오로지 이 협주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협주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김화진이 말하기를,
"관(官)에서 용광로 10개를 설치하고서 5일 동안은 관전(官錢)을 주조하고, 하루는 그 장수(匠手)들로 하여금 물력(物力)을 준비하여 자기 기관의 돈을 주조하도록 허락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협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모두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장수들인가?"
하니, 정민시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금위영과 어영청의 공채(公債)를 어떻게 충당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장수들로 하여금 협주를 해서 공화(公貨)를 충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에는, 군문(軍門)의 장수를 쓰지 말고 호조(戶曹)에서 다른 장수들을 모집하여 써서 그 협주를 없애버리면 돈의 모양을 복구시킬 수 있고 이익도 적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이익을 말하는가. 돈의 모양만 두꺼워지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김화진에게 이르기를,
"경이 두꺼운 돈 수만 냥을 주조하여 본조(本曹) 및 각사(各司)에 저장해 두어서 사람들이 내가 임어한 때의 아무 해에 아무가 주조한 돈이 마치 김성응(金聖應)이 무인년에 주조한 돈과 같음을 알게 한다면 어찌 미사(美事)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명하여 서매수(徐邁修)·박종갑(朴宗甲)에게는 정경(正卿)을 가망(加望)하고, 이태영(李泰永)·이의강(李義綱)에게는 아경(亞卿)을 가망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의정 이병모의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황승원(黃昇源)에게 영불서용(永不敍用)의 법전을 시행하였는데, 이윽고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지평 이홍달(李弘達)이 아뢰기를,
"적성 현감(積城縣監) 이언희(李彦熙)가 차사원(差使員)으로 가는 도중에 송도(松都)의 하리(下吏)가 제멋대로 그를 능멸하여 심지어는 옷을 잡아당겨 그를 말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는데도, 유수(留守)는 개성부 하리의 말만을 듣고서 끝내 그 하리를 엄히 처벌하지 않았으니, 해당 수신(守臣)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명칭은 비록 분사(分司)의 관리라고 하나 그는 일개 하인에 불과하고, 저 적성 현감은 비록 세력 없는 먼 데 사람이지만 그는 곧 명리(命吏)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하리가 관장(官長)을 능멸하여 손을 대기까지 해서 대간의 논핵이 있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풍문의 사실 여부는 논할 것도 없이 수신이 된 자로서는 다만 삼가 감죄(勘罪)를 기다리면서 조사하는 일의 결과나 기다려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적성읍의 관속을 잡아다가 힐문한 것은 행동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의 사직소를 보니, 그 말에 분심(忿心)이 담겨 있었다. 이 수신의 처사가 저렇듯 비뚤어질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날에 대간 노릇 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이미 하리를 놓아서 관장에게 손을 대게까지 해놓고는 이를 풍화(風化)가 무너진 데에 탓을 돌렸고, 끝에 가서 또 때늦은 변장(辨章)을 올린 것은 또한 조정의 체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론을 돌아보지 않은 처사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어찌 매우 해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개성 유수 황승원에게 영불서용의 법전을 시행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제 해방(該房)이 품주한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개성 유수가 이 일을 스스로 조사한 사실을 알았다. 개성 유수의 일이야말로 죄 위에 죄를 더했다 이를 수 있겠다. 자기의 일을 자기가 조사하다니, 염찰하고 방비하는 이외에 어찌 이러한 격례(格例)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전 개성 유수 황승원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용귀(韓用龜)를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서매수(徐邁修)를 지돈녕부사로, 박종갑(朴宗甲)을 공조 판서로, 이태영(李泰永)을 공조 참판으로, 이의강(李義綱)을 한성부 우윤으로 삼았다.

 

3월 18일 임오

농산정(籠山亭)에서 재숙(齋宿)을 하였으니, 다음날이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다.

 

윤행원(尹行元)을 이조 참의로, 김문순(金文淳)을 공조 판서로 삼았는데, 이윽고 김문순을 체직하고 조진관(趙鎭寬)을 그 대신으로 삼았다.

 

각신(閣臣) 이시원(李始源)이 막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는데, 들어와 연석에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 것은 본디 융정(戎政)을 다스리고 경비(經費)를 감소시키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미 군영을 설치했으면 또 둔전(屯田)도 설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해서(海西)의 봉산(鳳山) 등 여러 군에도 또한 훈련원·총융청 등 여러 군영의 제도를 모방하여 둔소(屯所)를 나누어 설치해서 장사(將士)들에 대한 봉급의 수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데는 3분의 1만을 취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와서 소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재능을 과시하여 집복(執卜)의 법057)  을 새로 만들고, 수확기가 되면 농사 현장을 직접 가서 보고는 짐[卜] 수를 강제로 정하고 받아들이는 두곡(斗斛)을 매우 넘치게 하고 있으니, 명칭은 비록 3분의 1만을 취한다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른바 종자조(種子條)니 수세조(水稅條)니 하는 것도 백성들에게만 모조리 담당하게 하므로, 원망의 소리가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모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사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비록 소중한 경상 비용에 관계가 되더라도 매양 차라리 법을 느슨하게 해주는 실책을 범하리라는 뜻에 진념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저 둔감(屯監) 무리들이 오직 제 뜻대로 조종하여 끝내 백성들과 서로 이익을 다투는 꼴이 되었는데도, 해당 수령들은 또한 본영(本營)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면서 감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본의이며 성상께서 고심하신 뜻이겠습니까. 신이 마침 그 이웃 고을을 지키면서 이런 폐단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감히 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백성의 고통에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비록 일정하게 수납하는 정공(正供)에 대해서도 경상비의 부족함은 고려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주어 어느 고통이든 모두 견감해서 일체 나의 고심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하찮은 둔감 무리들이 백성을 침해하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으니, 그 소행이 매우 가증스럽도다. 해당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일체 백성의 뜻에 따라서 세법(稅法)을 개정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교한 뒤에도 혹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여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인습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먼저 해당 수령부터 현고(現告)를 받고 이에 따라 엄격히 감죄(勘罪)하도록 하되, 묘당으로 하여금 이런 사실로 관문(關文)을 작성하여 해당 도신에게 신칙하도록 하라. 그런데 해서 지방이 이러하다면 관서 지방도 알 수 있으니, 또한 관서의 도신으로 하여금 둔전이 있는 각읍의 둔전에 대한 폐단을 조사하여 사실에 의거해서 장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계미

대보단(大報壇)의 봉실(奉室)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나서 영돈녕부사 김이소, 우의정 이병모, 이조 판서 민종현과 황조인(皇朝人)의 자손 및 여러 충량가(忠良家)의 자손들을 어가 앞으로 불러 접견하고, 전교하기를,
"오늘 충신의 후손과 삼가 봉실에 배알을 하고 나니, 풍천(風泉)의 생각058)  이 매우 간절하다. 그리고 충무공(忠武公)의 심하(深河)의 전쟁059)  에 대해서는 무오년을 다시 만남으로써 나의 감개가 더해진다. 작년에 비록 이미 제향을 내리고 인하여 그의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으나, 서사(筮仕)의 연한이 차지 않은 관계로 아직까지 수용(收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히 무오년인 올해에야 이 집에 대해서 어찌 평상적인 격례를 따르겠는가. 황조(皇朝)에서 요동백(遼東伯)을 추증한 충무공 김응하(金應河)의 봉사손(奉祀孫)인 유학(幼學) 김택기(金宅基)는 권무 군관(勸武軍官)으로 삼고, 인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당일 이내에 한 차례 모여 월천(越薦)하게 한 다음, 병조로 하여금 남행 선전관(南行宣傳官)을 가설(加設)하여 의망해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증 병조 판서 충장공(忠壯公) 최효일(崔孝一)060)  의 봉사손인 최성렬(崔性烈)에 대해서는 권관(權管)으로 낮추어 붙인 것을 분간(分揀)하여 금위영이나 어영청 두 군영 가운데 한 곳의 파총(把摠)으로 임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 여러 충신의 집 사람들을 불러 접견함으로 인하여 대신의 말을 들으니, 윤 문정(尹文正)061)  의 집에서 그의 사판(祀版)을 곧 체천(遞遷)하려 한다고 하는데, 특례(特例)를 윤 문정의 집에 베풀지 않고 어디에 베풀겠는가. 증 영의정 문정공 윤황(尹煌)의 사판에 대해서는 특별히 부조(不祧)062)  의 특전을 거행하여 이 날[比日]063)  을 잊지 않는 뜻을 부치도록 하라."
하였다.

 

북원(北苑)에 나가 내시사(內試射)를 거행하고, 전교하기를,
"오늘이 어떤 날인가. 더구나 이 해를 만나서 감개를 일으킴에랴. 특별히 요동백의 후손을 녹용하되, 당일에 월천(越薦)하여 남행 선전관을 제수하고, 먼저 북영(北營)에서 시사(試射)하여 유엽전(柳葉箭)으로 합격하고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하건대, 올해 식년(式年)의 방방(放榜)이 모레 있으니, 만일 이 날에 과제(科第)를 결정하여 또 이 해에 그를 창명(唱名)하게 된다면, 이 어찌 이 날을 만나 이 해를 기억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피곤함도 꺼리지 않고 북원의 시사에 임하였는데, 화살이 날고 북소리가 울리자 과연 뛰어난 점수를 얻었으니, 더욱 기특하구나. 남행 선전관 김택기를 특별히 전시에 직부하게 하고, 그를 방미(榜尾)에 붙여 금년 무오 식년 무과에서 함께 창방하도록 하라. 요동백의 집은 작년에 이미 치제(致祭)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하지 않을지라도 또한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하고는, 시장(詩章)을 써서 내리면서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철원부(鐵原府)에 있는 포충사(褒忠祠) 안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3월 19일 계미

참반(參班)했던 제신(諸臣)들에게 명하여 문정공 윤황에게 부조(不祧)의 특전을 내리고 나서 지은 어제시(御製詩)와 충무공 김응하의 봉사손에게 사제(賜第)하고 나서 지은 어제시에 대해서 각각 창화하여 올리도록 하였다.【문정공 윤황에게 부조의 특전을 내리고 나서 상이 시를 지었는데, 그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이날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니, 풍천(風泉)의 생각이 북받쳤다. 인하여 척화(斥和)하던 여러 신하들이 항소(抗疏)하고 죽기를 다투던 충렬을 생각하니, 그때가 완연히 어제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창의(倡義)를 한 사람이 바로 문정공 윤황인데, 작년에 사람을 시켜 치제(致祭)하여 대략 한스러운 생각을 부쳤었다. 그런데 부조(不祧)의 특전만은 아직 거행하지 않았다 하니, 이는 매우 흠사(欠事)인지라, 특별히 체천하지 말도록 명하고, 마침내 시 한 수를 지어 유묘(侑廟)의 뜻에 갈음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상이 이르기를 팔송의 절개는 푸르고 푸른 고죽과 같다 하네 삼학사와 마음을 같이 하였고. 만언의 상소로 의리 밝히었네   북해의 이름은 오히려 남았거니와064) 동창의 계획엔 서툼을 어찌하랴065)   백세토록 제사를 받드는 일은 단에 배알한 때로부터 시작했네066) 충무공 김응하의 봉사손이 등제(登第)한 뒤에 또 상이 시를 지었는데, 그 소서(小序)에 "황조(皇朝)에서 요동백(遼東伯)을 고증(誥贈)한 충무공 김응하가 심하(深河)의 전쟁에 참가한 지 1백 80년째가 되는 모춘(暮春)에, 장렬 황제(莊烈皇帝)의 휘신(諱辰)에 여러 충신 집 후손들과 대보단(大報壇)의 봉실(奉室)에 지배(祗拜)를 하고 나서, 먼저 명하여 선전관에게 충무공의 봉사손 김택기를 단천(單薦)하도록 해서 당일에 선전관을 제수하고, 또 명하여 무장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충숙공(忠肅公) 조정익(趙廷翼)의 후손들에게 북영(北營)으로 가서 유엽전(柳葉箭)을 시험하게 하여 초시(初試) 합격을 내리고 인하여 북원(北苑)으로 가서는 친히 시험하여 사제(賜第)하고서, 특별히 무오 식년의 방방(放榜)에 붙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이 마치 때를 기다림이 있은 듯하니, 어찌 옛일에 대한 슬픔을 이루 다 감당하랴. 만일 영령(英靈)들이 앎이 있다면 반드시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시 일절(一絶)을 써서 철원(鐵原)의 포충사(褒忠祠)에 걸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남아의 높은 명성 사이에까지 알려져 천자의 고명 요동백이 해동에 내리었네 심하의 늙은 버들이 사람마냥 서있노니 장군이 칼 기대고 서 있던 모습일레라.】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74면
【분류】인물(人物) / 어문학(語文學)


[註 064]【문정공 윤황에게 부조의 특전을 내리고 나서 상이 시를 지었는데, 그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이날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니, 풍천(風泉)의 생각이 북받쳤다. 인하여 척화(斥和)하던 여러 신하들이 항소(抗疏)하고 죽기를 다투던 충렬을 생각하니, 그때가 완연히 어제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창의(倡義)를 한 사람이 바로 문정공 윤황인데, 작년에 사람을 시켜 치제(致祭)하여 대략 한스러운 생각을 부쳤었다. 그런데 부조(不祧)의 특전만은 아직 거행하지 않았다 하니, 이는 매우 흠사(欠事)인지라, 특별히 체천하지 말도록 명하고, 마침내 시 한 수를 지어 유묘(侑廟)의 뜻에 갈음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상이 이르기를 팔송의 절개는 푸르고 푸른 고죽과 같다 하네 삼학사와 마음을 같이 하였고. 만언의 상소로 의리 밝히었네   북해의 이름은 오히려 남았거니와 :  절개가 뛰어났음을 비유한 말. 한 무제(漢武帝) 때에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흉노(匈奴)에 사신갔다가 그대로 억류되어 북해(北海) 가로 옮겨져서 19년 동안이나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고 절개를 끝까지 지켰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권54.[註 065] 동창의 계획엔 서툼을 어찌하랴 : 윤황(尹煌)이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극력 배척하였음을 뜻한다. 북송(北宋) 때 진회(秦檜)가 동창(東窓)에서 자기 아내 왕씨(王氏)와 은밀히 계획을 하여 금(金)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고, 이어서 척화신이었던 충신 악비(岳飛)를 죽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註 066] 단에 배알한 때로부터 시작했네 : 정조(正祖) 자신이 대보단(大報壇)을 배알하고 나오면서 여러 충신 집 후손들을 접견하던 끝에, 윤황(尹煌)의 사판(祀版)을 그 집에서 체천(遞遷)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윤황에게 부조(不祧)의 특전(特典)을 내렸으므로 한 말이다.

 

3월 20일 갑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殿拜)하였다.

 

3월 21일 을유

우유선 이성보(李城輔)가 광주에 이르러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배에 오르자마자 질병이 더쳐서 정신없이 강촌(江村)에 거꾸러져 있다가, 갑자기 온화하신 하유를 받고 나서는 더욱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또 강연(講筵)을 오래 비웠다 하여 특별히 대신의 상주를 윤허하시어, 먼저 좌유선(左諭善)을 명해서 속히 강연을 열도록 하시었으니, 앞으로는 우리 원량(元良)의 빛나는 공부가 다행히도 중단될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쳐 쓰러져가면서라도 달려가서 성상의 분부에 우러러 보답하고 원량의 출충한 의표를 한번 보고서 신의 학수 고대하던 정성을 대략 펴보고자 하는 마음은 대체로 신의 천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풍질(風疾)이 점점 심해져서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워있기만 하다가, 월초(月初)에 성상의 비답을 받고 나서부터는 감히 집에 누워 있을 수 없어 억지로 출발을 하여 겨우 중로에 이르렀는데, 풍한(風寒)을 범한 것이 대단히 상해가 되어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가 이 하찮은 목숨이나마 조금 연장해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신이 즐겨 하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반드시 경을 오게 하려는 것은 내 뜻이 어찌 경을 초연(招延)하는 데에만 있어서 그러겠는가. 경을 꼭 오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일마다 편리한 대로 좇아서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의 직함을 면해달라고 청하면 경연의 직을 체면해주었고, 해래(偕來)의 관원을 보내지 말라고 청하면 해래의 관원을 소환하였었다. 그리고 간간이 봄추위가 아직 매서운 때문에 힘써 기한을 늦추어주어 지금 벌써 수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강학(講學)은 하루만 중단하는 것도 어찌 참으로 민망하지 않으랴마는, 경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강학을 시작하고자 하여, 일찍이 머뭇거리고 있는 요원(僚員)에게도 애써 나올 것이 없다는 뜻으로 전하였었다. 그리하여 새로 제수된 여러 요속들까지도 아직껏 강석(講席)에 드나들지 못하고 있으니, 경의 더딘 발걸음이 관계된 바가 과연 어떠한가. 경은 한강 밖의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다고 하는데, 경의 상소문에서는 또 어찌하여 이토록 질병을 말하는가. 반드시 경을 오게 하려는 마음이 지금에 더욱 간절하므로, 입시한 사관(史官)을 보내어 먼저 몹시 기다린다는 뜻을 전하노라."
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평안도 관찰사로,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서매수(徐邁修)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22일 병술

차대가 있었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지돈령(知敦寧)의 직임은 본디 중한 직임이기에, 옛날에는 이미 판서를 지내고 나서도 이 관직을 하지 못한 자가 또한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중하기가 지중추(知中樞)만도 못하여 심지어는 지중추에도 의망이 안된 사람도 이 관직을 하고 있으니, 명기(名器)가 어그러지고 외람됨이 요즘같은 때가 없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고 봉조하(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은 문형(文衡)을 한 지 3년 만에야 비로소 형조 판서가 되었습니다. 또 참판으로 제조(提調)가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에 고 참판 원의손(元義孫)은 본디 이력(履歷)과 지벌(地閥)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섬시 제조의 말망(末望)에 들었을 적에 스스로 과분하게 여겼습니다. 옛사람은 명기를 아끼고 중히 여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여 문과와 무과의 신방(新榜) 가운데 70세 이상된 사람들에게는 전(殿)으로 올라서게 하였다. 그리고 명하여 문봉익(文鳳翼) 등 6인에게는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특별히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이시수가 아뢰기를,
"전 훈융진 첨사(訓戎鎭僉使) 박류(朴瑬)가 성첩(城堞)·공해(公廨)·군기(軍器) 등을 모두 수리하고, 또 자신의 녹봉을 출연하여 토지를 사서 이 수확을 가지고 진속(鎭屬)들의 봉급을 보충한 일에 대하여, 상전(賞典)을 품처할 일로 하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훈융진 첨사의 일에 대하여는 연전에 대신이 거론만 하였을 뿐 일정한 법식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경상우도 병사 안숙(安橚)이 훈융진 첨사의 이력을 가지고 바로 곤수(閫帥)에 의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박류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 도신(道臣)이 이미 목격하고 돌아와 아뢴 일이니, 의당 안숙의 예를 끌어다 적용하여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시수가 또 아뢰기를,
"박류에 대해서는 비록 안숙의 전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아직 일정한 법식이 없기 때문에 매양 번거롭게 품복(稟覆)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에는, 훈융진은 본시 변방의 자리인만큼 앞으로는 반드시 지벌과 재주를 갖춘 사람으로 가려서 차임하되, 임기 만료를 기다려서 기록할 만한 실적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고찰하여 계문하게 한 뒤에 바로 방어사로 의망하도록 한다면, 관제(官制)에도 구애될 것이 없고 차송(差送)된 당사자도 반드시 기꺼이 부임하여 정성을 다하리라 여깁니다."
하니, 또 따랐다. 이시수가 또 아뢰기를,
"지중추(知中樞) 이하의 원과(原窠) 이외에 특별히 가설(加設)에 부쳐진 자리의 경우는 1개월이 지나면 감하(減下)하는 것이 본래의 정해진 규식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법이 폐각되어, 한번 차제(差除)되면 비록 3, 4년이 되어도 한결같이 헛되이 가지고 있음으로써 가설된 지중추 및 동지 중추가 무려 12인에 이르니, 일체 아울러 감하하고, 앞으로 가설되는 자리에 대해서는 정례(定例)에 의거하여 1개월이 지난 즉시 감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 조진관이 아뢰기를,
"일전에 원(苑)을 배알하고서, 무오년이 거듭 돌아온 것과 요동백의 위대한 절의에 감개가 무량하사 조서(詔書)를 발표하시어 은혜가 그의 후손들에 미쳤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일이라 그 누가 흠송(欽誦)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이 연전에 명을 받들어 철원(鐵原)의 구가(舊家)에 치제(致祭)를 하였는데, 문려(門閭)가 썰렁하고 정려(旌閭)도 되지 않았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온 경내의 선비나 무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정의 숭보(崇報)의 은전이 매우 극진하였으나,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성명(成命)을 입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저 우뚝한 큰 절의는 진실로 어떤 꾸밈을 거쳐서 중(重)함이 더해질 바는 아니지만, 국가의 전례로 헤아려보면 끝내 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신에게 분부하여 즉시 정려의 은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동지사의 서장관        홍낙유(洪樂游)가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
"1. 작년 10월,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에 화재가 나서 해관(該管) 대신에게 신칙하여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재료를 수집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작년 섣달부터 지안문(地安門) 안에 점붕(簟棚)을 넓게 설치한 가운데 공장(工匠)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밤낮으로 재목과 석재를 다듬고 있습니다. 그중에 정전(正殿)의 양목(樑木)은 남목(楠木)을 쓰되, 그 길이가 9장(丈)이 되어야 하므로, 두루 구하여도 얻지 못하다가, 오직 융복사(隆福寺) 불전(佛殿)의 재목이 곧 남목으로 척수(尺數) 또한 걸맞았기 때문에 그 불전을 헐고 그 재목을 취해다가 정전을 짓기로 하였는 바, 그 공역(工役)은 금년 5,6월쯤에 마칠 수 있을 것이고, 융복사는 다른 재목으로 바꾸어 뒤에 다시 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황제가 등극한 뒤에 수릉(壽陵)을 가려 정하고서 이를 ‘만년길지(萬年吉地)’라고 이르는 것은 관례입니다. 그리하여 태상황(太上皇)의 길지(吉地)는 일찍이 이미 동로(東路) 효릉(孝陵)·경릉(景陵)의 국내(局內)에 정하였으므로, 작년 신황제(新皇帝)의 길강(吉岡)을 선택할 때에는 태상황이 분부를 내려 서로(西路) 태릉(泰陵)의 국내에다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효릉·경릉은 곧 순치제(順治帝)067)                  와 강희제(康熙帝)068)                  의 능을 말하고, 태릉은 곧 옹정제(雍正帝)069)                  의 능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동·서 양릉(兩陵) 밑에다 대대로 손(孫)을 조(祖)에 합부(合祔)하여 마치 태묘(太廟)의 소목(昭穆) 차례와 같이 해서, 다시 별도로 다른 땅을 가려 백성의 토지를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불역지전(不易之典)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작년 2월에 황후가 훙서하고 나서 황귀비(皇貴妃) 유호록씨(鈕祜祿氏)가 당연히 황후로 책봉될 것이라는 설이 비록 더러 전파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뚜렷한 문적(文跡)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1. 태상황의 용모와 기력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다만 건망증이 최근 들어 심해져서 어제 한 일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고 오전 중에 행한 일도 석양에 혹 잊어버리곤 하므로 좌우에 시어하는 신하들이 일을 거행하는 데에 현란을 가져오게 되고, 이로 인해 권신 화신(和珅)의 전천(專擅) 또한 전일보다 심해져서 사람들이 모두 곁눈질을 하며 감히 그를 힐문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1. 황제는 평상시나 조정에 임어했을 때나 항상 묵중하여 희로(喜怒)를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고, 경연(經筵)을 열 때에는 신하들을 정성스럽게 인접(引接)하여 사심을 텅 비우고 그들의 말을 잘 받아들이므로, 문의(文義)를 아뢰는 연신(筵臣)들이 모두 뜻을 남김없이 개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도 각로(閣老)인 유용(劉鏞)의 말을 가장 많이 채납하여 황상(皇上)의 돌보아줌이 다른 신하들과 달랐습니다. 대체로 유용은 일찍부터 조야(朝野)의 인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정직하여 유독 그만이 화신에게 아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1. 묘비(苗匪)는 본디 사천(四川)의 유적(流賊)이었는데, 맨 처음 흉년이 든 데다 이어서 관장(官長)들의 침학(侵虐)이 있음으로 인하여 자기 도당들을 불러 모아 서로 민중을 선동하고 유혹함으로써 그들의 무리가 수십 만에 이르렀고, 건륭(乾隆)070)                   58년부터는 이들이 더욱 창궐하여 호남(湖南)·호북(湖北)·사천 등 지역을 겁략해서 그들의 소굴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전후로 관병(官兵)이 누차 토벌을 했으나 그들을 소탕하지 못했습니다. 복강안(福康安)과 화림(和琳)이 전사한 뒤로는 적세(賊勢)가 다시 치성해지자, 재작년에 소릉아(蘇凌阿)를 보내어 적을 정벌하게 했는데, 그가 많은 공로를 세웠으므로 작년에 그를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또 명량(明亮)·늑보(勒保)·악휘(鄂輝) 등을 보내어 직례(直隷)·산동(山東)·산서(山西)의 군졸 4천 5백 명을 징발하고, 또 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의 군졸 3천 명을 징발하여 싸워서 크게 적을 격파하고, 적의 괴수인 왕낭선(王囊仙)·왕화명(王化明)·위칠우수(韋七綹鬚)·위포저(韋泡渚) 등 4인을 사로잡아 경사(京師)에 바치니, 태상황이 문에 임어하여 포로들을 접수해서 순직문(順直門) 밖에서 이들을 베어 죽였습니다. 대체로 묘비의 반란이 일어난 지 이제 5, 6년이 되었는데, 군졸의 징발과 군량의 조달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져서 이제 몇 백만이 되는지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아직껏 토평(討平)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또 금비(黔匪)·양비(洋匪)·교비(敎匪)의 무리가 있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무상하여 잠시 토평되었다 이내 다시 반란이 일어나곤 하나 중외(中外)가 평온하여 조금도 소란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수역관(首譯官) 장렴(張濂)이 또 문견별단을 올렸다.
"1. 작년 4월 초하룻날에 태상황제가 칙지(勅旨)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황제가 임어한 초년에 적전을 갈고[耕籍] 태학에 임하고[臨雍] 군대를 사열하는[大閱] 모든 전례에 대하여 군신 백관(羣臣百官)은 시부(詩賦)를 지어 올려서 태평성대의 성전(盛典)을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황제가 임어한 초년에는 즉시 몸소 적전을 가는 전례를 행하였으나, 제신들이 미처 시책(詩冊)을 만들어 올리지 못하였다. 이는 그때에 군무(軍務)가 끝나지 않아서 짐(朕)은 군무로 근로(勤勞)하였고 황제는 나날이 훈정(訓政)071)  을 들었던 터라, 제신들이 짐과 황제의 소의 한식하고 노심 초사하는 것을 우러러 본받느라, 관례에 따라 칭송 선양하는 시문 짓는 일을 감히 선뜻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호남 지역의 묘비(苗匪)는 일찍 평정이 되었고, 금비(黔匪)와 초비(楚匪)도 누차 관군의 초포(勦捕)를 겪어 형세가 이미 궤산되었으니, 얼마 후에 괴수가 체포되고 나면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일을 완료할 것이다. 그리하여 명년 중춘(仲春)에는 황제가 응당 태학에 임하여 학사(學事)를 시찰하는 전례를 거행할 것이고 겨울에는 즉시 군대 사열하는 일을 거행할 것이니, 여기에 따르는 일체의 사의(事宜)를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서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신들은 온화하게 칭송하여 시책을 만들어 올려서 태평성세를 빛내는 성대함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 유구국(琉球國)은 3년에 한 번씩 조회를 하다가 신황제가 즉위한 뒤로는 작년에야 처음으로 와서 경하하였습니다. 유구국 정사(正使)의 성명은 동방정(東邦鼎)인데 중산왕(中山王)072)  의 장인으로 2품관(二品官)이고 신구좌(申口座)라 호칭하며, 부사(副使)의 성명은 모정주(毛廷柱)인데 3품관으로 정의 대부(正議大夫)였고, 종관(從官)은 3인인데 첫째는 사자(使者)이고, 둘째는 도통사(都通事)이고, 셋째는 왕구통사(王舅通事)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세자(世子)를 태세자(太世子)라 일컫고, 즉위한 뒤 5,6년 만에야 비로소 봉전(封典)을 주청(奏請)하는 것이 곧 구례(舊例)이기 때문에 그 나라 세자는 자리를 승습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명년에 장차 다시 특사(特使)를 보내서 봉전을 주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묘비(苗匪)와의 싸움으로 인하여 전후로 운반한 군량이 몇 백만 곡(斛)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고, 지난 10월 사이에는 광서 순무(廣西巡撫) 태포(台布)의 상주로 인하여 남녕(南寧) 선화현(宣化縣)의 삼강구(三江口)로부터 백색(百色) 지방에 이르기까지 무려 6백 80리나 되는 길을 장정(壯丁)을 내어 운하를 파는 작업을 하면서 날마다 고은(雇銀)을 지급했다고 하였습니다."

 

3월 23일 정해

조진관을 형조 판서로, 서매수를 공조 판서로, 정민시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월 24일 무자

중비(中批)로 임희존(任希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 판서 이주국(李柱國)이 죽었다. 전교하였다.
"이 장신(將臣)은 바로 내가 즉위한 직후에 맨 먼저 대장의 직임에 발탁 제수했던 사람이다. 풍채가 훌륭하고 인품이 확고 부동하였으므로 내가 항상 의지하며 돌보던 사람인데 이제 그가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매우 애통하구나. 지위는 숭질(崇秩)에 올랐고 나이는 80에 육박한데다, 증손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현손도 있다고 하니, 복이 많은 완인(完人)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이로다.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조제(吊祭)의 상전(常典) 이외에 기념하는 거조를 보이자면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해조로 하여금 졸한 판서 원임 훈련 대장(原任訓鍊大將) 이주국의 손자인 진사 이응오(李應五)가 복(服)을 벗기를 기다려서 그를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전라도 암행 어사 김이영(金履永)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김이영이 복명하였다. 김이영이 서계(書啓)를 올려 옥구 현감(沃溝縣監) 윤행철(尹行喆)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서계수(徐季修) 등이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한 상황을 논핵하여, 각각 차등있게 감죄(勘罪)하였다.

 

3월 25일 기축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가서 하향(夏享)의 서계(誓戒)를 받았다.

 

원자(元子)가 처음으로 강학(講學)을 행했는데,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가 강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 경인

권유(權𥙿)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7일 신묘

상이 우유선 이성보가 오지 않기 때문에 누차 사관을 보내어 반드시 오게 하려는 뜻으로 하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성보가 올라와 흥인문(興仁門)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상이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기를,
"듣건대 이미 성 밖에 와서 머물고 있다 하니, 가까운 시일 안에 연석에 나올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쁘고 바라던 일인가. 그러나 경이 올라온 것은 강학의 자리에 참여하기 위함인데, 이미 이를 위해서 올라와 놓고도 유독 유선이란 직명에 대하여 자꾸만 후퇴하고 사양하는 것이 옳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이런 사리를 생각하여 종전의 견해에 집착하지 말고, 유선으로서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기양(李基讓)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작년 겨울 부임하는 도중에 경유했던 촌리(村里)들이 거개가 흩어져 적적하였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뜸 대답하기를 ‘거급(擧給)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거급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문득 대답하기를 ‘환곡이 점점 많아짐으로써 가호(家戶)마다 강제로 나누어주는 것을 거급이라 하는데, 해마다 이것이 증가됨으로써 백성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하루에도 열 명, 백 명씩 떼를 지어 호소한다.’ 하고, 또 대뜸 말하기를 ‘거급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다 흩어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삼가 곡식 장부를 가져다가 폐단의 근원을 거슬러 헤아려보니, 거급이 이루어진 까닭은 오로지 진분조(盡分條)가 너무 많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본부(本府)의 곡식은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는데, 이는 다만 군향(軍餉)과 상평곡(常平穀)뿐이고, 기타 각 아문의 곡식은 모두 진분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반분조(半分條)를 위주로 하였고, 이른바 진분조는 아주 소량(小量)이었습니다. 다만 그 후로 매년 본부의 응하조(應下條) 및 전후 정퇴(停退)·탕감(蕩減) 등의 곡식을 으레 모두 반분조로 계감(計減)하고 있기 때문에 반분조는 자연히 날로 점점 줄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나머지 각 아문의 곡식은 해마다 불어나서 모(耗) 위에 모를 더하여 계속 증가하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으므로, 이에 진분조는 날로 점점 불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는 또 무신년073)  에 처음으로 본주(本州)의 환곡미 8백 석을 장용영(壯勇營)에 옮겨 붙였고, 임자년 겨울에는 또 균역청(均役廳)의 쌀 4천 2백 석을 더 붙였으며, 갑인년 봄에는 또 균역청의 쌀 1천 9백 60여 석을 더 붙였는데, 이를 다 나누어주고 모곡을 받아들여 현재 당연히 나누어주어야 할 본영의 곡식이 이미 1만 3백 40여 석이나 됩니다.
그리고 본주의 곡식은 으레 많이 피곡(皮穀)으로 나누어주고 이를 찧은 쌀로 환산하여 쌀이라 일컫기 때문에 환곡의 이름을 총칭 절미(折米)라 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기준한다면, 나누어주어야 할 영곡(營穀)은 비록 1만 석이라 하지만 실수는 수만 석이 넘습니다. 이리하여 진분조는 또 대단히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받기를 원하는 백성은 적은데 나누어주어야 할 곡식은 많기 때문에 강제로 분배하는 법이 생김으로써 거급의 병폐가 고질화되어 근래 3, 4년 동안에 흩어진 백성이 이미 10에 2, 3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시급한 사정이 이러한데도 일체 유랑하여 흩어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만도 이미 몹시 위태롭고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변방 지역에 저축을 중히 여기는 것은 뜻밖의 재난에 대비할 수 있어서인데, 진분곡이 이미 많기 때문에 창고에 유치된 것은 아주 소량이어서, 변방의 저축이 또한 공허한 실정입니다.
현재의 병폐를 바로잡는 방도는 다만 진분의 법을 통렬히 혁파하고, 여러 아문의 곡식들을 모두 가져다 일체 군향(軍餉)에 붙여 이 중에서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도록 한다면 거급에 대한 걱정이 절로 제거되고 저환곡(儲還穀)이 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르기를 ‘아문의 곡식을 서로 바꾸는 일은 조정의 금법(禁法)이 있고, 장영(壯營)의 곡식은 사체가 절로 중대하여 의당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아문의 곡식을 서로 바꾸는 일에 대한 조정의 금법은 다만 곡식 장부에 농간을 부릴까 염려하는 뜻에서 설치한 것이니, 만일 일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관계된다면, 이는 의당 이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장영을 설치한 것은 다만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국세(國勢)를 튼튼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전하의 지성으로 백성 위하시는 생각이 한번도 이 가운데에 선행(先行)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보면, 지금 이 본읍의 환곡 폐단이 이미 저와 같고 영곡(營穀)이 환곡 폐단을 가중시킨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만일 이런 상황이 한번 전하께 보고가 된다면 우리 전하께서는 반드시 크게 경악하시어 즉시 폐단을 개혁하셔서, 차마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그 병폐를 받게 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즉시 본주에 있는 각 아문의 진분곡을 모두 군향에 소속시켜 법에 따라 반은 나누어주고 반은 유치하며, 장영곡의 모곡(耗穀) 징수하는 명색에 대해서는, 본주의 경우 특별히 두터운 휼전을 내리시어 각읍에 나누어 유치하는 것을 면해주셔서, 변방 백성들로 하여금 유랑하는 걱정을 면하고 길이 적자(赤子)처럼 보호하시는 은택을 입도록 하여주시면 매우 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또 삼가 보건대, 본주에 옛날에는 양하진(楊下鎭)이 있어 만호(萬戶)를 설치했었는데, 중간에 조폐(凋弊)로 인하여 대신이 연석에서 계품하여 혁파하고, 진(鎭)의 관속 및 진의 둔전(屯田)은 본부에 소속시키고서, 별장(別將)을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처분은 대체로 또한 본주를 위하고 변방의 일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삼가 듣건대, 본 둔전을 경사(京司)에 이속(移屬)시키자는 의논이 있고, 또 본주에 장차 둑을 쌓고 둔전을 설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진과 이 둔전은 이미 본부에 딸린 것이고 보면 의당 본부에서 주관하여야 할 터인데, 떼어내는 것을 꺼리지 않고 편의의 여부도 묻지 않고서 지금 갑자기 경사로 이속시키는 것은 이미 변방 고을의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그 의논을 취소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제로(諸路)의 백성들이 어느 누군들 보호할 백성이 아니겠는가마는 유독 서로(西路)에 뜻을 치중하는 것은 그곳이 피경(彼境)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요, 그중에서도 본부에 더욱 뜻을 치중하는 것은 또한 그곳이 변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곳 백성들의 고통받는 일 중에 적폐(糴弊)가 가장 심하였으므로, 연전에 누차 칙교(勅敎)를 내려 평균하게 나누어 베풀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오히려 명령을 내린 지 오래되어 일이 해이해질까 염려하여,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민호를 따져서 곡식 수량을 계산한 문안(文案)을 작성 계문하여 편람(便覽)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에는, 영읍(營邑)에서는 내 뜻을 태만함이 없이 준수할 것이고, 백성들 또한 몸을 조금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경의 상소문을 보니, 내가 헤아리던 것과 어쩌면 그리도 서로 어긋났단 말인가. 이른바 거급(擧給)이라는 잘못된 규정과 환곡에 첨가된 석수(石數)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별도로 신칙하여 우선 영곡(營穀)부터 나누어주지 말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사항도 조속히 하나하나 시정하게 하도록 할 것이니, 시정이 된 다음에 다시 계문하라. 그리고 양하진 및 본부의 둑 쌓는 일을 본부로 환속시키는 일은 상소문의 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박종갑(朴宗甲)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28일 임진

차대가 있었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총재(冢宰)는 막중한 직임인데 의망에 넣고 빼는 일이 너무 잦아서 심지어는 누가 들고 누가 빠진지조차도 모를 지경이다. 지난번 한 중신(重臣)이 의망에 빠졌을 적에는 오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었고, 지금 또한 의망에서 빠진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범범히 간과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예로부터 전관(銓官)이 탄핵 받는 일은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한번의 대론(臺論)에 의해 갑자기 전관의 의망을 빼버리다니, 어찌 이런 사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가사 대신의 뜻이 진실로 그가 전직(銓職)에 합당치 않다고 여겼다면, 주선한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 이제껏 한마디 말도 없다가 신진 대신(臺臣)들의 한때 질책하는 말로 인하여 갑자기 뺀단 말인가. 설령 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익히 서로 상의한 뒤 확정하여 힘써 공론에 따라 결정해서 온 세상이 빼는 이유를 환히 알 수 있도록 한다면, 당사자 또한 반드시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고 듣는 자들도 거의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의 경우는 인사를 담당한 전관도 이 사실을 참여하여 알지 못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중서(中書)의 고사(故事)이겠는가. 좌상의 일은 어떻게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마는, 경은 이미 요석(僚席)에 있었으면서도 어찌하여 말 한마디도 없었는가. 그리고 전후로 의망에서 빠진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있는가?"
하니, 상호군 정민시(鄭民始)가 말하기를,
"정창순(鄭昌順)·서호수(徐浩修)·김사목(金思穆)·서정수(徐鼎修)·서유방(徐有防)·이병정(李秉鼎) 등 6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봄에 의망할 때 이병정은 이미 서용된 처지인데도 그 의망 가운데 들지 않았으므로, 이 일을 이조에 물으니, 대신이 서용된 문적을 보지 못하여 의망하지 않았다고 하였었다. 그렇다면 이번의 경우는 과연 어찌하여 빼버렸는가. 대론(臺論)에 의해 개정(改正)되었던 고 상(相) 정유길(鄭惟吉) 같은 사람은 10년 뒤에야 다시 상직(相職)에 제배되었거니와, 이조의 당상으로 대신에 의해 의망에서 탈락된 자의 경우는 그가 다시 행공(行公)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끝내 행공할 수 없는 사람인 다음에야 비로소 빼는 여부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규모는 명기(名器)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청관 미직(淸官美職)을 세상 사람 면려하는 도구로 삼았는데, 지금은 명기의 문란하기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전망(銓望)에 넣고 빼는 것을 범범히 간과하는 것 또한 너무 많은 까닭에 연유된 것이니, 그 의망하는 것이 이와 같이 가볍기 때문에 빼는 것도 저렇듯 쉬운 것이다. 그리고 병조 판서의 의망에 이르러서는 남용(濫冗)함이 더욱 심하여 겨우 경(卿) 반열에 오른 사람이면 누구나 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이 또한 어찌 명기가 점점 가벼워진 탓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김화진이 말하기를,
"주전(鑄錢)의 일로 이미 하교를 받았으므로 좋게 주조할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고 있습니다마는, 근래에 유랍(鍮鑞)이 극히 귀합니다. 만일 유랍을 쓰지 않고 향랍(鄕鑞)만 쓰면 예전과 같이 얇아서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변통하는 방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책(史冊)을 상고해보면, 또한 당천전(當千錢)·당백전(當百錢) 같은 대전(大錢)도 있었는데, 이것은 지금 의논할 것이 아니거니와, 당십전(當十錢)·당오전(當五錢) 정도는 또한 그 예가 많으니, 이는 오직 묘당에서 익히 강구하여 상확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과연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도다. 제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일시에 화권(貨權)을 수취하는 방도는 진실로 여기에 벗어나지 않으나, 사주(私鑄)의 폐단을 또 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돈을 많이 푼(分)·문(文)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당오전·당십전은 반드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불편할 것이고 구전(舊錢)과 아울러 폐기하게 될 염려도 있다. 또 어찌 꼭 이(利)를 말하랴. 돈 모양이 두껍게만 만들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김화진이 말하기를,
"구례(舊例)에는 돈을 주조할 때에 5일 동안은 관주(官鑄)를 하고 1일은 협주(挾鑄)를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협주를 허락하여도 협주를 하려 하지 않으니, 대체로 동(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미 협주를 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이익을 얻고자 하면 잡철(雜鐵)을 많이 넣으므로, 돈 모양이 얇아지는 것은 또한 반드시 그럴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차라리 돈을 주조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옛날에도 50년 동안 돈을 주조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어찌 근래처럼 자주 주조를 했었겠는가."
하자, 김화진이 말하기를,
"동이 귀한 폐단이 또한 요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고급 자기(磁器)에 대한 금령이 있은 이후로 자기의 값이 갑자기 헐해졌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물가의 비싸고 헐함은 사치하냐 검소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시골 구석의 상천(常賤)들도 모두 유기(鍮器)를 쓰고 있으니, 동이 어떻게 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마디로 말해서 분수를 지키지 않은 때문이다. 상하 귀천이 모두 등급의 차이가 있는만큼, 일체 법금(法禁)으로 재단하는 것이 좋기는 하겠으나, 금하는 것이 요령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백성을 소요시키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먼저 이 연석에 모인 사람들부터 유기를 쓰지 않는다면, 윗사람이 행한 일을 아랫사람이 반드시 본받아 금하지 않아도 절로 금지될 것이다."
하자, 김화진이 유미(留米)를 바꾸어 쓰는 일을 제거하기를 주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바로 본조(本曹)의 경상비용 이외의 것이다. 경상비용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또 이것으로 호조에 폐를 끼치는 것은 더욱 의의가 없다. 금년에는 우선 구분하여 처리하고, 앞으로는 모름지기 개혁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자, 김화진이 말하기를,
"지금에 와서는 그만두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지경이라 이를 만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여러 가지 방도로 구분하여 처리하고 있으나 이것이 어찌 해마다 하는 일이겠습니까. 대저 경상비용이 부족할 때는 특별히 변통의 대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용관(冗官)을 도태시키고 주현(州縣)을 병합시킨 정사가 있었으니, 훈부(勳府)의 면세(免稅)된 전결(田結)의 경우는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세금을 받아들여서 이를 호조에 소속시키면, 소요의 단서는 조금도 없고 경상 비용에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사(耆社)의 면세전(免稅田)도 1천 결(結)이나 된다고 하니, 이 또한 어찌 과다하지 않는가. 궁방(宮房)의 절수(折受)를 혁파한 것이 바로 병신년의 첫 정사였는데, 당시에 얻은 것이 거의 2만여 결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 후로 감한 전결의 총수가 이보다 더 많으니, 만일 그당시의 소득이 없었다면 더욱이나 어찌될뻔 하였겠는가."
하자, 상호군 정민시가 아뢰기를,
"호조가 지금까지 유지해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 힘입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이시수에게 말하였다.
"총관(摠管)의 직임은 중대한 것이므로, 옛날에는 숭품(崇品)의 중신이나 왕자 대군(王子大君)이 하였고, 일찍이 아장(亞將)을 지낸 무신도 총관에 한 번 제배되면 문득 이를 영광으로 여기었다. 그런데 지금은 심지어 단수사(單水使)로서도 총관이 되고 있으니, 이는 또한 명기를 너무 가벼이 다루는 한 가지 단서가 된다. 그 의망은 의당 시행하지 말아야 하고 그를 의망한 병조 판서 또한 죄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선 이 문제는 차치하라. 그리고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으로 말하더라도 비록 무직(武職)이라고는 하나 본디 청환직인데, 이따금 어느 족속인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또 근래에는 병조의 정사를 맡은 자로서 심지어는 무관에게 색목(色目)을 묻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분배하여 무관을 삼는다는 자도 있다. 쓸 만하면 쓰는 것이지 어찌 이른바 색목이라는 것이 있으며, 만일 사람을 가려서 임용하지 못하고 오직 분배할 줄만 안다면 장차 그런 병조 판서를 어디에 쓰겠는가."

 

좌의정 채제공이 빈대(賓對)에서의 연교(筵敎) 때문에 명을 기다렸는데, 전교하기를,
"총재(冢宰)의 천망은 매복(枚卜)의 단자(單子)에 다음가는 것으로, 예모가 지극히 엄중하니 넣고 빼는 일을 힘써 신중히 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개가 날카로운 연소한 전랑(銓郞)이 대간의 의망을 넣고 빼고 하는 것에 비교하면 그 경중의 차이가 티끌과 태산(泰山)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그러니 설령 공론을 애써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면 그의 결점이 이렇고 저렇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다음에 전당(銓堂)에게 말하고 요상(僚相)과 의논해서 처리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복종하게 하고, 당사자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을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중서(中書)의 고사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의망이 개정된 상신(相臣)으로서 10년 뒤에 다시 재상이 된 경우는 비록 있었으나, 의망에서 탈락된 이조 판서의 경우는 탈락된 뒤에 다시 행공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상신의 거취가 혹시라도 이조 판서보다 가벼워서 그런 것이 아니요, 진실로 대간의 말과 묘당의 의논은 절로 경중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 전관의 직임이란 비방하는 말을 초래하기 쉬운 것이라, 예로부터 대간의 탄핵을 받은 전관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때마다 조정이 그를 비호해주고 묘당이 이를 불식시켜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모두 그 사람을 편들어주는 마음에서였겠는가. 무능한 관원의 수치는 곧 조정의 수치인 것인데, 더구나 중대한 총재의 직임이겠는가. 조연(朝筵) 때 마침 말의 단서를 인하여 내가 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세히 상량하지 못한 경에 대해서만 개탄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한자리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알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우상에게도 의혹이 없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첫째는 나라의 체통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평상적인 격례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경이 명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3월 29일 계사

어용겸(魚用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30일 갑오

우유선 이성보(李城輔)가 이르자, 호조에 명하여 쌀과 고기를 보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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