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1798년 4월

싸라리리 2025. 8. 13. 10:17
반응형

4월 1일 을미

인정전에 나아가 태묘 하향(夏享)의 향축(香祝)을 친히 살피고, 태묘의 영녕전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다음 희생과 그릇을 살피었다.

 

4월 2일 병신

태묘의 하향을 친히 거행하였다.

 

좌유선 윤득부, 우유선 이성보, 요속 정일환(鄭日煥)·신대우(申大羽)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는데, 이때 이성보가 사관(史官)의 뒤에 엎드려 있으므로, 상이 이르기를,
"경은 작질이 2품이니, 의당 경재(卿宰)의 자리에 앉아야 할 것이다."
하니, 이성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의당 승지와 반열을 같이해야 한다."
하니, 이성보가 아뢰기를,
"이 또한 신의 분수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명하여 이성보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연전에 한 번 만난 이후로 누차 불러서 오게 하려 했으나 선뜻 올라올 기약이 없었는데, 이제 강학을 위하여 왔으니, 기다리고 바라던 나머지 자못 매우 기쁘고 다행하구나."
하니, 이성보가 말하기를,
"분수 밖의 직임이라 의리상 받기가 어려우나, 전후로 성교가 정중하시어 감히 저의 정성을 한 번 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을 경연관에서 특별히 체직시킨 것은 대체로 경을 반드시 오게 하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경이 온 것은 오로지 강학을 위한 것이다. 세도(世道)에 대한 책임과 임금 선도하는 직임도 내가 경에게 매우 바라는 바이나, 강학이 더욱 소중하다. 《서경》에 이르기를 ‘어려서 교육을 어떻게 받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하였는지라, 숙덕(宿德) 있는 선비를 불러 들이는 것은 정히 어린 세자를 보도하는 유익함을 힘입고자 함이니, 모름지기 성심으로 그를 가르치고 인도하여 간절한 내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니, 이성보가 말하기를,
"신의 천박한 학식으로는 이 직임에 전혀 걸맞지 않는데, 성교가 이렇듯 간절하시니, 실로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6품복(六品服)으로 연석에 오르는 것은 비록 고인이 이미 행한 예가 있기는 하나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행례(行禮)할 때에 이르러서는 장복(章服)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두 송 선정(宋先正)074)  이 이미 행한 예가 있으니, 또한 상고하여 알 수 있다. 이미 경의 종질(從姪)에게 포대(袍帶)를 내사(內賜)한 것이 있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것을 입고 행례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은 숙배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나가서 먼저 사은 숙배부터 하라."
하니, 이성보가 말하기를,
"신이 강학에 대해서 어찌 감당해낼 가망이 있겠습니까마는, 성교가 여기에 이르시니, 비록 감히 한결같이 사피만 하지는 못할지라도, 신같이 불초한 위인으로 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다면 실로 조정에 수치를 끼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의 직함도 의당 환부(還付)해야 하나, 혹시라도 이로 인해서 거취(去就)의 사이에 미안한 점이 있을까 싶어서 우선 그만두니,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아서 비록 강학의 일 이외의 것이라도 자주 연석에 나와 일에 따라 진술 권면하라. 오늘은 이미 저물었으니 상견례만 행하고, 강학은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행할 것이다. 그리고 회강(會講)이 아닌 경우에는 두 유선이 함께 나올 것 없이 하루씩 윤번제로 나와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성보가 먼저 물러가자, 상이 윤득부에게 이르기를,
"우유선이 이제 이미 직임을 받았으니, 경은 비록 과목(科目) 출신이기는 하나 또한 산야(山野)의 선비이므로, 앞으로 두 유선이 날짜를 번갈아 강석에 출입하게 되면 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정일환에게 이르기를,
"네가 계방(桂坊)075)  에 출입한 것이 어슴프레 어제 같이 느껴지는데, 이제 또 요속으로 들어왔으니, 또한 희귀한 일이다."
하고, 이어 신대우에게 이르기를,
"요속이란 명칭은 곧 춘방(春坊)과 계방에 통칭된 것이다. 그래서 봉책(封冊)하기 이전에는 춘방과 계방의 관원을 관례대로 차출할 수 없는데, 그러므로 고사(古史)를 상고해보아도 태자 유선(太子諭善)과 동궁 요속(東宮僚屬)의 명칭이 있다. 그러나 유선의 직임은 현묘조(顯廟朝) 때 창설한 것으로, 혹은 행직으로도 하고 혹은 겸직으로도 하면서 본디 정해진 품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의 경우, 박성원(朴聖源)은 당하관으로서 이 직임을 행하였고, 고(故) 상(相) 서지수(徐志修)의 경우는 정경(正卿)으로 항상 겸대했었다. 지금 요속을 설치하는 것도 또한 이 뜻을 모방한 것이니, 모름지기 각각 노력하여 원자가 강석에 출입하면서 효험이 드러나도록 기하라."
하였다.

 

원자(元子)가 집복헌(集福軒) 외헌(外軒)에서 우유선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상견례를 행하기 3각(刻) 전에 유선 및 요속들이 모두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강학청(講學廳)에 나아갔고, 2각 전에는 합문(閤門) 밖에 나아갔고, 1각 전에는 요속들이 꿇고 앉아 대내의 차비가 되었음을 사뢰었다. 원자가 동계(童髻)·옥잠(玉簪)·단령(團領)·흑화자(黑靴子)를 갖추고 나와 배위(拜位)로 가서 서쪽을 향하여 서자, 요속들이 배위로 들어가 재배하고 나왔다. 이윽고 행례 시각이 이르자, 요속들이 꿇고 앉아 외간의 일이 준비되었음을 사뢰었다. 그러자 사알(司謁)이 유선을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배위로 나아갔고, 요속들은 좌우로 나뉘어 섰다. 인의(引儀)가 ‘국궁 재배(鞠躬再拜)’ ‘흥(興) 평신(平身)’을 창(唱)하니, 유선이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였고, 원자도 답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였다. 절이 끝나자 사알이 유선을 인도하여 나갔고, 요속들은 꿇어앉아 예가 끝났음을 사뢴 다음 차례로 나갔다.】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7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여러 각신(閣臣)들을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고, 명하여 원자가 강학할 때에는 각신 1, 2원(員)이 윤번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4월 3일 정유

차대가 있었다. 평안도 관찰사 민종현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상께 하직 인사를 올린 것이다.

 

원자가 비로소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서욱수(徐郁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이윽고 체직하고 박종래(朴宗來)를 대신으로 삼았으나 그 또한 이내 체직하였다.

 

4월 4일 무술

조상진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4월 5일 기해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희정당(熙政堂)에 나가 조강(朝講) 겸 차대를 행하였다. 명하여 행 호군 이성보를 입시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성보에게 이르기를,
"경의 경연관 직함을 비록 이미 해면하도록 윤허했었으나, 이제 이미 연석에 올랐으니, 모름지기 문의(文義)를 개진하라."
하니, 성보가 말하기를,
"선유(先儒)가 이 장(章)을 한 부의 작은 《중용(中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절요한 뜻은 오로지 신독(愼獨) 두 글자에 있습니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無聲無臭]는 것은 곧 드러나지 않는 공경[不顯篤恭]의 신묘함을 형용한 말이고, 드러나지 않는 공경이란 곧 천도(天道)의 극치를 형용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일[上天之載]이란 말로 결론을 지었는데, 그 근본을 궁구해보면 실로 신독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호홀(毫忽)의 사이에 쌓고 또 쌓고, 기미(幾微)의 사이에 스스로 성찰하여 한 생각도 조금이나마 소홀함이 없는 다음에야 비로소 천도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이 장의 뜻은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맨 처음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衣錦尙褧]는 것을 말하여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았다가 날로 빛난다[闇然日章]는 뜻을 밝히고, 담담하여 싫지 않다[淡而不厭]는 것으로부터 이하 세 구절로 이었으며, 또 옥루에 부끄럽지 않다[不愧屋漏]는 말로 이어서 신독의 뜻을 밝히었다. 그리고 감응(感應)의 지정 지묘(至精至妙)함을 말하자면 조고(祖考)의 신명이 강림(降臨)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말없이 신명께 나아가 성경을 다한다[奏假無言]는 말로 이었다. 이미 위로 조고의 신명을 감응시키면 스스로 능히 아래로 인민(人民)에게 미쁨을 줄 수가 있어, 이를 미루어서 공경을 두터이함으로써 천하가 평해진다[篤恭而天下平]는 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한 대문, 한 대문이 갈수록 의미가 깊어져서 끝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말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 것이다. 이 장에서 신독의 의의를 발명한 것이 실로 《대학(大學)》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대체로 《대학》의 신독(愼獨)과 《중용》의 계신 공구(戒愼恐懼)는 똑같은 주경(主敬) 공부로서 모두가 신(愼) 자를 썼는데 과연 서로 말할 만한 차이가 없겠는가?"
하니, 이성보가 말하기를,
"계신 공구는 동정(動靜)을 통관(通貫)해서 말한 것이고, 신독은 그 가운데서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만을 집어내서 말한 것이니, 이것으로 본다면 분계(分界)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계신 공구가 동정을 통관한다는 말은 곧 우리 동방 선정(先正)이, 전인(前人)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논설인데, 경의 말이 실로 여기에 근원하였으니, 잘 보았다 이를 만하다. 주 부자(朱夫子)의 장구(章句) 가운데 항상 경외를 마음에 둔다[常存敬畏]는 네 글자 속에 이미 동정을 통관하는 뜻이 있다. 그러나 그 은미한 뜻의 소재를 벽파(壁破)할 사람이 없었는데, 아조의 선정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에 이르러 비로소 그 뜻을 발명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경연에 출입하는 신하들도 사람마다 이를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만 고 강관(講官) 김창협(金昌協)이 비로소 《통동정설(通動靜說)》을 저술하였으나, 이 일단(一段)은 보고 이해하기가 극히 어렵다. 대체로 뜻이 발(發)하기 전에는 공부를 할 수가 없으나, 계신하고자 하고 공구하고자 하는 뜻이 있기만 하면, 이것이 비록 평범하게 일어난 것, 또는 약간 존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이미 한 생각이 발하는 데에 속하니, 이것이 또 신독의 자취는 비록 동(動)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드러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비록 《어류(語類)》와 《혹문(或問)》의 설로 보더라도 혹은 계신 공구를 치우치게 정(靜) 쪽에 소속시켰으니, 이는 혹 주 부자 초년의 미정론(未定論)에 연유되었을 수도 있겠거니와, 만일 이 네 글자를 뜻이 발하기 이전의 경계에 전적으로 귀속시키고서 문득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본체가 본디 절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혹 마음으로 마음을 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대체로 계신 공구도 비록 뜻이 발하기 이전에다 전연 귀속시킬 수는 없으나, 능히 계신 공구할 수 있는 것은 곧 항상 경외를 마음에 두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방심하지 않고서 계신 공구하는 뜻이 항상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즈음에도 끊임없이 존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항상 경외를 마음에 둔다[常存敬畏]는 네 글자가 주자의 장구 가운데 제일의 긴요처가 된 까닭이다. 경은 여기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보는가?"
하니, 이성보가 말하기를,
"계구 근독(戒懼謹獨)은 곧 수많은 성인들이 서로 전해온 요결(要訣)인데, 뜻이 발하기 이전의 경계는 과연 형용하기가 어렵고, 겨우 공부를 착수하려 한 때는 문득 뜻이 이미 발한 데에 귀속됩니다. 그런데 삼가 고 유신(儒臣) 김창흡(金昌翕)이 고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에게 답한 편지에서 그 한계를 분석해놓은 것이 가장 정밀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밝게 모든 것이 갖추어 있다[昭昭具在]느니, 깨달음이 이 속에 있다[惺惺在這裏]느니, 항상 조관을 가지고 있다[常着照管]는 등의 말은 좋은 형용이라 이를 만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고 유신 김창흡의 한 말이 과연 좋구려. 이것을 《통동정설》에 비유해보니 또한 공부의 천심의 차이를 알 듯하다. 나도 평소에 일찍이 이 말에 의미를 두었었는데, 경이 그 많은 서책 가운데서 유독 이 말만을 집어내었으니, 경의 공부를 여기에서 또한 알 만하다. 지금 연석에서 두 번 묻고 두 번 답한 말이 모두 서로 계합할 수 있었으니, 내가 경에게서 얻은 것이 많았도다."
하였다. 이성보가 말하기를,
"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삼가 구구한 소회가 있어 아룁니다. 선정신 이이(李珥)의 말에 ‘도통(道統)이 위에 있으면 도는 한 시대에 행해지고 은택은 후세에까지 미치는 법이라, 신은 도통의 전(傳)을 전하께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도 비록 불초하기는 하나 충성과 의리를 다하려는 정성에 대해서는 스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여기옵고, 수많은 성인들이 서로 전해온 도통에 대해서 또한 전하께 바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좋기는 하나, 《대학》 서문에 이르지 않았던가. ‘총명 예지(聰明睿智)가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를 명하여 억조 인민의 군사(君師)로 삼는다.’ 하였으니, 진실로 천하 사해의 일인자(一人者)가 아니면 본디 위에 있는 도통을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天下)를 자기 집안의 소유로 삼은 이후로는 진실로 복희(伏羲)·신농(神農)·요(堯)·순(舜)의 하늘을 이어 법을 세우던 때와는 달라졌다. 경이 전석(前席)에서 선정(先正)이 임금께 고한 말을 외워 아뢰니, 내가 진실로 감탄이 된다. 그러나 나같이 부덕한 사람을 어찌 감히 선묘(宣廟)의 융성한 시대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性)을 좇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은 교(敎)라 하는데, 좇는다는 솔(率) 자는 비록 인력(人力)에 해당하지 않으나, 도는 성에 비하면 이미 사물(事物)에 나아가서 한 말이다. 그리고 예악 형정(禮樂刑政)의 교(敎)를 또한 도에 비하면 또 분계(分界)가 없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예악 형정도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거늘, 더구나 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상주지 않아도 권면이 되고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있던 그 시대 그 인품은 오랜 옛적의 일이라 논할 것도 없거니와, 세도(世道)와 조정의 체모도 수습하지 못하는 내가 비록 도통을 자처하고자 한들 되겠는가. 인(仁)을 당해서는 남에게 사양하지 않는 법이니, 내가 진실로 의당 더 힘써야겠으나,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겠구나."
하였다. 이성보가 말하기를,
"신이 삼가 온 나라 신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일로 전하께 우러러 기대하였습니다. 더구나 밝으신 공부가 이미 고명 광대(高明光大)한 경지에 이르셨으니, 어찌 수많은 성왕들이 서로 전해온 도통을 성상께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와 교화가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진실로 이렇게 된 까닭을 찾는다면, 안으로 은미한 즈음이나 밖으로 일 조처하는 사이에 반드시 병통을 받은 근원이 있을 것이다. 이미 그 병통을 알았으면 거기에 맞는 약을 들려주기 바란다. 경의(經義)를 토론하는 것도 활용하는 방법이 귀중하거니와, 제왕의 학문은 또 포의(布衣)의 학문과 다른 점이 있다. 그런데 만일 심성 이기(心性理氣)의 명목 사이의 낡은 담론에만 얽매인다면 이것이 어찌 실제를 먼저 힘쓰고 꾸밈을 뒤로 미루는 뜻이겠는가. 다만 실천을 하려면 반드시 사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니, 문의상(文義上)의 강구(講究)가 비록 여사(餘事)같기는 하나, 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몸소 행하기를 힘쓰는 것은 진실하다 이를 만하나, 사마온공(司馬溫公) 같이 독실한 군자로서도 오히려 치지(致知) 공부에 흠결이 있음으로 인하여 앎이 이르지 못한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고, 오로지 대본(大本)만을 궁구하는 것이 고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총령(蔥嶺) 일파(一派)는 도문학(道問學) 한쪽을 빠뜨림으로써 끝내 이단(異端)이 되고 말았으니,076)   문의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일을 또한 어찌 쓸데없는 것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갓 종이 위의 공언(空言)만 강론한다면 혹 ‘창생은 묻지 않고 귀신의 일을 물었다.[不問蒼生問鬼神]’는 혐의077)  가 있지 않겠는가. 한(漢)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서 물은 것은 대체로 제사지낸 귀신에게서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제사지낸 귀신 가운데서도 또 그 치우친 것을 지적하여 물었기 때문에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중용》에 이른바 ‘귀신의 덕[鬼神之爲德]’의 경우는 음양 소장(陰陽消長)과 굴신 왕래(屈伸往來)가 모두 귀신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시상(時象)으로 본다면 군자의 도와 소인의 도가 어느 쪽이 펴지고 어느 쪽이 굴하며, 어느 쪽이 사라지고 어느 쪽이 자라나는가? 경은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시험삼아 듣고 본 것을 말해보아라."
하였다. 그러자 이성보가 말하기를,
"신은 본디 병이 들어 가만히 틀어박혀 있던 몸이라, 전혀 들은 말은 없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의 한 생각 사이에는 실로 천지를 회전시키는 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성학(聖學)은 고명하시어 천고에 으뜸이신데다, 한 생각도 반드시 요·순을 법으로 삼으셔서 혹시 추호라도 요·순에 미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십분 성찰(省察)을 하고 계시니, 공부가 이른 곳에 도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일(精一)의 공력이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면 이 밖의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에 대해서는 다시 힘쓰기를 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과연 좋다. 사람마다 요·순이 되지 못하는 것은 또한 한 생각의 아주 미세한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천도(天道)가 끊임없이 심원(深遠)함과 문왕(文王)이 또한 끊임없이 순일한 것은 모두 성(誠)하기 때문이니, 조금만 간단이 있으면 성인의 도가 문득 이미 중지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릇에 가득 물을 담아서 소거(繅車)078)   위에 올려놓고, 잠시도 멈춤이 없이 계속 돌게 한 다음에야 그릇 안의 물이 조금도 새나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잠시나마 멈추었다가는 물이 땅에 엎질러져서 다시 담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나는 평상시에 때로 자신을 점검해보면, 그 마음이 혹은 1년에 한 번씩 이르기도 하고 혹은 1개월에 한 번씩 이르기도 하여, 1개월에 한 번씩 들고 나고 하는 조수(潮水)보다도 사이가 더 뜨는 지경이다. 공렬(功烈)이 저토록 낮고 규모(規模)가 저토록 협착한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을 바로잡을 방도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자, 이성보가 아뢰기를,
"삼가 자상하신 하교를 들으니, 강구(講究)와 성찰(省察)이 정밀하시어 신은 진실로 우러러 칭송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곧 하나의 하늘이므로, 일호라도 하늘과 서로 같지 않다면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이르지 못한 곳입니다. 하늘이 되기를 희망하는 도리는 오로지 순일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더욱더 성익성(聖益聖)의 경지에 종사하소서."
하였다.

 

명하여 인동부(仁同府)의 폐단을 바로잡는 동안, 해당 부사의 임기가 다된 자에 대해서는 그의 이력(履歷)에 따라 승진시키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중인(中人) 이상에게는 작록(爵祿)이 반드시 노둔하고 태만함을 각성 면려시키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일이 민읍(民邑)에 관계됨이 있다면 한 가지 이익을 늘리는 것이 한 가지 폐해를 제거하는 것만 못하거늘, 구구한 관리 규정을 어찌 구애할 것 있겠는가. 폐단을 바로잡는 동안에는 해당 고을에서 임기가 다된 부사에 대하여 각각 그 사람의 이력에 따라, 변경 방어의 직임을 지내지 않은 자에게는 변경 방어의 직임을 지낸 데에 준하여, 산관으로 삼아 체직시키지 말고 그가 승진한 다음에 그 대신을 차임하되, 대략 음관(蔭官)이 오고(五考)와 십고(十考)에서 연속 상고(上考)를 받을 경우 수령으로 수용(收用)하는 관례를 모방하여 이것으로 규식을 정하라."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집전(執錢)의 법이 맨 처음 하읍(下邑)의 이서(吏胥)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읍재(邑宰)가 이 나쁜 일을 본받아 영문(營門)으로 미루어 올림으로써 끝내는 또 상사(上司)에까지 미루어 올립니다. 그리하여 열읍(列邑)의 시가[市直]가 혹시라도 내리기만 하면 경사(京司)에서 다시 되돌려 보내서 끝없이 집전을 함으로써 심지어는 ‘태가(駄價)도 제해주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행회(行會)하는 중에도 이것을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비록 내각(內閣)같이 존중되는 곳에서도 이를 마치 보통일처럼 보아넘기고, 누차 행회를 하여 그중에 혹 따르지 않은 자가 있으면 아무리 도백(道伯)이라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서, 논제(論題)079)  를 계속 내리어 반드시 곡식이 귀한 고을로 공물을 옮겨 정한 다음에야 마음에 만족하게 여깁니다. 내각이 이러하기 때문에 타사(他司) 또한 그럴 수밖에 없고, 경사가 이러하니 영읍은 더욱 알 만합니다. 이끗만 쫓고 의리를 망각하는 것이 온 세상 풍조가 되어, 사부(士夫)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이서배들의 못된 행위를 배우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대체로 주자가미(鑄字價米)를 설시한 처음에는 각읍에 고루 배정하여 일체 상정례(詳定例)에 의거해서 돈을 만들었으므로, 그 후 10여 년 동안에 민폐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성헌(成憲)을 변개하여 기필코 신규(新規)를 창출하고자 합니다. 신은 주연(胄筵)의 옛 요속으로 오랫동안 성상을 가까이 모셨으므로, 이것이 결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은 알겠으나, 혹시라도 뭇사람의 말에 현혹이 되셨는가 하여 누차 이를 막으면서 지금까지 버티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래서만 이를 임시방편으로 해결해 넘기고 즉시 상문(上聞)하여 의심스러운 단서를 타파하지 않으면, 폐해는 백성에게 미치고 원망은 위로 돌아갈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집집마다 타일러 설득을 시키려 하더라도 끝내 백성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해서(海西) 일로(一路)의 경우는 실로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은데, 허다하게 작전(作錢)을 하기 때문에 많은 데서 취하여 적은 데를 도와줄 수 없어 분배(分排)가 균형을 잃음으로써, 이에 도리어 사람은 적고 곡식은 많아져서 매양 값이 높은 곳에서 그 폐해를 먼저 받습니다. 그리하여 이 폐해가 급속도로 연야(沿野)의 여러 고을에 두루 파급되어 어느 한 고을도 많은 저축이 있는 데가 없으니, 만일 큰 흉년이라도 만나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대체로 갑오년 이후로 변통하여 가분(加分)한 것이 그 숫자가 점차로 많아졌습니다. 이를 대략 말씀드리자면, 임인년에 획정한 내각(內閣)의 주자가(鑄字價)가 2만 5천 9백 석 남짓이고, 갑인·정사 양년에 획정한 장영조(壯營條)가 4만 6천 석 남짓이며, 을묘년에 신의 감영에서 장계로 청하여 가분한 것이 4만 4백 석 남짓 이어서 도합 11만 2천 5백 석 남짓이 되는데, 그중 신의 감영에서 장계로 청하여 얻어낸 조항은 바로 유고곡(留庫穀) 가운데서 가분된 곡식이었고, 주자가 및 장영조는 바로 분류곡(分留穀)080)   가운데서 진분(盡分)된 곡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이 주자가미(鑄字價米)의 명색은 이미 구차한 조치에 관계된 것이니, 만일 이것을 바로 혁파하여 분류조에 붙여버린다면 조정을 일월(日月)의 위에 높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이는 번신(藩臣)으로서는 감히 청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득이하다면, 일체 창시(創始)했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다만 상정가(詳定價)로 원래 지정된 각읍에 균평하게 분배한다면 곡식이 기왕 많지 않으므로, 별로 폐해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끝내 분류(分留)하는 것만큼 편리하지는 못합니다. 백성들에게 만일 해마다 다 나누어준다면 눈앞에 당장 백성의 고통만 될 뿐이 아닙니다. 흉년을 만났을 경우에는 거두어 들이자면 백성에게 큰 폐해가 되고, 그렇다고 정퇴(停退)를 하자면 영(營)에 군량이 결핍됩니다.
더구나 또 집전의 일을 가하는 것은 기필코 높은 값으로 강제 징수하기 위함이니, 다만 지금 경비를 기왕 별도로 조달할 방도가 없다면 작전(作錢)의 일은 끝내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일 상헌(常憲)을 삼가 지켜서 일체 상정가로 각읍에 고루 분배한다면, 평년에는 백성들에게 비록 손해되는 점이 있더라도 흉년에는 백성들에게 소득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수년 동안의 작황 가운데서 그 중등의 작황을 비교하여 이를 절장보단해서 통합하여 계산한다면 도리어 시장 가격을 따르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이는 실로 관민(官民)이 모두 편리하게 되는 방도로서 성덕(聖德)에 더욱 광채가 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이미 군량도 아니요 또는 백성이 먹을 것도 아닌 것으로, 교서관(校書館)의 이폐조(釐弊條)를 임진년에 서관곡(西關穀)에다 획정하여 붙인 것은 특히 임시방편의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지난번에 이를 본도(本道)에 옮겨 붙임으로 인하여 근래에는 또 내각(內閣)과 서로 갈등이 있게 되었으니, 경이 편치 않을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그 곡식이 없으면 이런 수치도 없을 것이니, 경이 청한 말대로 특별히 혁파하여 이를 분류조에 환부(還付)하라. 그리고 경의 ‘조정을 일월의 위에 높일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경은 주연(胄筵)의 옛 요속으로서 이렇게 숨김없이 말을 해주니, 또한 특별한 은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영향(營餉)을 절반만 나누어 줄 일과 곡식이 많은 곳에는 고루 나누어 줄 일 등에 대해서도 의당 바로 시행하여야겠으나, 아직은 그 사세를 자세히 모르겠으니,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해영(該營) 및 일찍이 도백을 지낸 사람에게 자상하게 물어서 회계하도록 할 것이다. 첨부하여 진술한 작전(作錢)의 폐단이야말로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그 폐단을 바로잡고 그 대신을 충당시킬 방도를 강구 상확하여 아뢰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뒤에 빈대(賓對)에서 대신이 이의준의 상소문 말투가 너무 다투는 뜻이 있어 서로 공경하는 의리를 잃었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에 관계된 일이라면 내가 항상 물흐르듯이 잘 따라주노니, 언자(言者)의 말이 비록 과당한 점이 있더라도 매양 너그러이 용서하고자 한다."
하여, 마침내 대신의 아뢴 말이 정침되었다.

 

4월 6일 경자

행 호군 이성보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열조(列朝) 이래로 성신(聖神)한 자손이 계승하여 크게 문교(文敎)를 드러내어 효묘(孝廟)에 이르러서는 도통(道統)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으니,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은 곧 본조의 가학(家學)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질은 상성(上聖)보다 빼어나시고 학문은 백왕(百王)에 으뜸이시니, 참으로 우리 동방의 천재 일우의 기회입니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맹자(孟子)는 견득(見得)이 민첩하고 통쾌하여 성현이 되기가 대단히 쉬움을 견득하였고, 또 성대로 하다[性之]는 말과 성을 회복하다[反之]081)  라는 말로 당시의 임금에게 고하였다.’ 하였는데, 신이 삼가 일찍이 그 여의(餘意)를 추연해보니, 성을 회복한 성인은 천하 후세에 큰 공이 있어 자못 성 그대로 한 성인보다 더 훌륭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성 그대로 한 경우는 마치 계단을 밟아 올라갈 수 없는 하늘과 같고, 성을 회복한 경우는 사람의 힘으로 하늘의 조화를 빼앗은 것으로서, 비록 천년 뒤에까지도 누구나 개연히 희망하여 본받을 뜻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 같은 총명 예지의 자질로서는 ‘성인 배우기가 지극히 쉽다.’는 교훈에 대하여 오직 전하만이 담당할 수 있습니다.
선정신 이이(李珥)가 요·순·우·탕이 서로 전해온 서업(緖業)으로 우러러 선묘(宣廟)에게 권면하기를 ‘도통(道統)이 위에 있으면 도가 한때에 행해지고 은택은 후세에까지 미칩니다. 이것은 신이 전하께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난번 뜻을 진달하면서 ‘성상께서 매양 한 생각이라도 반드시 요·순을 본받으면 곧 하나의 요·순입니다.’ 하고, 이어서 지경 정일(持敬精一)로써 옛 성인을 계승하고 태평성대를 여는 근본으로 삼고, 지성 무식(至誠無息)으로써 지경 정일의 근본으로 삼으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평소 강명(講明)하여 마음에 깊이 간직하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으나, 성학의 강령(綱領)을 논하자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몹시 두려워하여 항상 깊은 물을 대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철저한 경계가 있으면, 이것이 극도에 미쳐서는 공경을 두터이 함으로써 천하가 평치될 것이요, 상하가 지경(持敬)에 전일하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절로 육성되며, 기(氣)가 화평하지 않음이 없어 사령(四靈)082)  이 다 이를 것입니다.
또 한 생각이 처음 발생하는 즈음에 위태로운 인심(人心)과 미세한 도심(道心)의 기미를 자세히 살피어 항상 도심을 주로 삼는다면,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중화(中和)와 위육(位育)의 공이 극도에 달하여 천지와 덕이 부합될 것입니다. 오직 이 지경 정일의 공부는 성인을 희망하고 하늘을 희망하는 학문과 천하를 평치하는 법도에 크게 관계됨이 있으니, 일심으로 삼가 수행하여 잠시도 해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리(天理)의 중도를 차분하게 따르면, 행실이 도리에 맞고 마음이 편안하여 즐거운 뜻이 생기고, 즐거운 뜻이 생기면 스스로 멈추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계사(繫辭)에 이른바 ‘여기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되는 것이니, 신비한 이치를 궁구하여 변화를 아는 것이 성대한 덕이다.[過此以往未之未知也窮神知化德之盛也]’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힘써 차서에 따라 진취해서 스스로 그만두려해도 그만둘 수 없는 공부가 없으면 어떻게 온갖 변화를 연구하여 천지의 도를 도와서 성취시키는 도리가 되겠습니까. 학문하는 방도는 뜻이 정해져서 의리를 분명하게 강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춘궁(春宮)에 계실 적부터 성심으로 학문에 종사하여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대를 만회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성상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이를 만하고 성상의 학문은 이미 밝아졌다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임어하신 지 20여 년이 되도록 아직도 지치(至治)의 조짐을 보지 못하겠으니, 혹 함양 성찰(涵養省察)의 방도에 미진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程)·주(朱)가 서로 전해온 본지는 지성 무식을 주로 삼고, 또 공부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보이는 뜻에서 이르기를 ‘함양 공부는 진실로 중단되기가 쉬우나, 자신이 그 중단된 것을 깨닫기만 하면 그때가 곧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꼭 깊이 힘을 들일 것은 없고 항상 깨 있으면서 그 마음을 놓지만 않으면 된다. 이 일은 힘쓸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 다만 생각하느냐 안 하느냐의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심학(心學)의 지극히 정미한 요결(要訣)로서, 성을 회복한 성인도 결국 이 방도를 따라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본디 차분한 마음으로 연구하여 깊이 계오(契悟)한 바가 있는데, 이미 경성(警省)한 곳에 더욱 경성을 가하여 조석으로 부지런히 힘쓰고 삼가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강하여진다면, 끝내 천지를 회전시키는 공도 한 생각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 하늘을 희망하는 공부가 조금도 중단됨이 없으면, 이로부터는 무궁한 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크게 이루는 것은 오직 지성스럽고 간절하게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시어 경학(經學)을 토론하면서 양연(兩筵)의 시독관(侍讀官)들로 하여금 음운(音韻)을 서로 창화하게 하여 청아한 소리가 대궐에 충만하도록 한다면, 우리 원량(元良)의 덕성을 훈도하고 계발하는 즈음에 절로 성학(聖學)의 전심(傳心)의 묘를 얻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리고 성인은 사대(四代)083)  를 손익(損益)하여 때에 따라 타당하도록 재단하였으니, 본질을 숭상하는 도리가 정히 지금의 속습을 크게 변개시키는 한가지 단서가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왕의 도술을 밝혀 한 시대의 추향을 정하시며,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세우고, 다스리는 도구를 넓혀서, 천하의 모범으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법으로 삼으소서. 그러나 만일 감통(感通)하는 묘가 없으면 또한 어떻게 세상이 임금의 뜻에 따라 크게 호응하여 다함께 대중 지정(大中至正)의 가르침으로 향하겠습니까. 대체로 지성 무식한 다음에야 신화(神化)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융성한 정치를 진흥시킬 수 있으니, 성(誠)을 다하고도 물(物)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고무(鼓舞)하는 데에 따라 뭇사람의 움직이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른 것을 보면 여기에서 성인의 덕이 사람에게 감통되는 것이 마치 이와 같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순일한 정성을 더욱 힘쓰고 천하가 화성(化成)해지도록 계속 인도하여 위로는 요·순 이후 서로 전해온 도통을 이으시고 아래로는 억만 년 태평의 업을 열으셔서, 해동(海東)의 모든 생물(生物)들에게 모두 변하여 화락해지는 변화가 있도록 하신다면, 지덕(至德)의 깊고 미묘함과 저절로 호응하는 것을 여기에서 더욱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재앙과 일식(日食)의 변이 거의 없는 해가 없는데, 이는 바로 지극히 인애(仁愛)한 하늘의 마음이 정령이 잘못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경고를 하여 성상의 마음을 계발시켜서 그 성덕과 대업이 끝내 완전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요·순이나 삼대 같은 융성한 시대에도 재변이 또한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명왕(明王)들은 재변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재변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더욱 공구 수성의 실상을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혹은 한마디의 선언(善言)에 의해 형혹(熒惑)이 3사(舍)를 옮겨간 일084)  도 있었고 보면, 명성(明聖)하신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성을 쌓아 신명을 감동시켜서 하늘의 뜻에 우러러 보답하는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성인치고 순임금 같은 분이 없었으나, 당시에 뭇신하들이 진술하여 권면한 말들을 지금에 살펴보면, 마치 어긋나서 사리에 당치 않은 듯한 말도 있고, 오활해서 괴이하게 여겨지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을 갖지 않거나, 아주 미세한 기미를 살피지 못하면 일 조처하는 사이에 실로 끝없는 해가 있기 때문에 이토록 정녕하게 계고(戒告)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순이 치적을 이루게 된 까닭입니다.
어제 조강(朝講) 때에 계구 근독의 뜻을 자상하게 하교하시었는데, 이는 모두 묘하게 계합하여 도에 깊이 조예한 성학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신이 주대(奏對)한 말은 모두 매우 거칠고 고루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그때에 다하지 못한 소견을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계신 공구가 비록 통체적인 공부이기는 하나, 또 계신 공구와 근독을 나누어 말하여 미발(未發)의 설(說)에 이르러 논하자면, 사려(思慮)는 싹트지 않고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은 상태가 미발시의 경계(境界)이고, 엄연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고 숙연히 경계하는 바가 있는 듯한 것이 미발시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아주 밝고 신령한 지각으로 잠잠한 물[止水]이나 맑은 거울[明鏡]과 같은 마음의 본체를 조금이라도 비추면 본체가 혼연하고 찬연하여 그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른바 ‘계신 공구는 중하게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기(氣)가 아직 용사(用事)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말할 만한 결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막 발동함에 미쳐서는 기가 비로소 용사를 하기 때문에 말할 만한 결점이 있기가 쉬우니, 이때가 가장 경성(警省)해야 할 곳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아주 미세한 기미의 즈음에도 의당 성찰을 극도로 가하여 그 마음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자는 지(知) 자를 마음 구하는[求心] 묘법으로 삼았고, 또 이르기를 ‘구할 줄을 알면 마음은 문득 여기에 있어 구(求) 자는 벌써 필요치 않다.’ 하였으니, 참으로 이것이 정미한 훈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매양 위태로운 인심(人心)과 미세한 도심(道心)의 사이에 유정 유밀(愈精愈密)의 공부를 더욱더 하시어 만사에 대응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신은 본디 용렬한 자질에다 일찍부터 융고(癃痼)의 병을 앓아온 터라 실로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소명을 받고 온 것은 이미 원자의 성취를 학수 고대하는 정성과 신의 분의를 펴는 의리에서 나온 것일 뿐으로, 겸하여 몸을 드러내고 실상을 토로하여 그릇되이 은혜 입은 것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려한 것입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선부(選部)로 하여금 다시는 신을 기용하지 말게 하시어 농묘(壠畝) 사이에서 마음 편히 죽기나 기다리게 해주소서. 천신의 병이 계속 더쳐서 형편이 더이상 머무르기 어렵기에, 지레 국문(國門)을 나와 이내 고향길을 찾아 나서고 보니, 자취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에 관계되므로, 이에 엄하신 분부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이 조정에 나옴으로부터 한두 번 얘기를 나누어보고는, 이미 경의 마음속에 누(累)가 없음을 증험하였고, 다시 흉금이 서로 잘 통함을 기뻐하여 조석으로 좌우에 앉혀두고 항상 보고자 하였다. 일찍이 영재(英才)를 가까이하는 소대(召對)를 열고서, 경이 따라 들어오기를 발돋움하며 기다렸는데, 마침 경이 병으로 사임하는 내용의 부주(附奏)를 접수하고는 우선 그 풍상에 시달린 몸을 안심하고 조섭하도록 윤허하고, 저녁에는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 기거를 묻고 겸하여 어느 날에나 연석을 나오게 될지를 알아보도록 했었다. 그런데 사관이 돌아오기도 전에 경의 사직소가 먼저 이르고, 경의 수레가 이미 송파진(松坡津)을 향해 출발했다고 하니, 몹시도 실망이 되어 이 마음을 비유할 데가 없도다. 지금 성곽을 나간 경의 발걸음이 마치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한 듯 그렇게도 급속하니, 이것은 내가 은례(恩禮)로써 정성껏 대우하는 것이 도탑지 못하여 귀한 손님의 흰 망아지가 우리 밭곡식을 뜯어먹게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겠는가.085)   그러나 어제 강석(講席)에서 거듭 수시로 왕래하도록 면려했었으니, 또한 혹 내 뜻을 따를 생각이 있어 그 약속을 이행하려고 그러는가. 당직한 기거랑(起居郞)을 보내어 비지(批旨)에 못다한 내 마음을 전하도록 하노니, 바라건대 자세한 주대(奏對)를 부쳐주어, 아직 문을 닫지 않고 경을 기다리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상소문 가운데 자세한 여러 가지 내용에서 경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볼 수 있으니, 감히 곳에 따라 힘쓰지 않겠는가. 과인의 일신을 비롯하여 정학(正學)에 있어서나 세도(世道)에 있어서나 진정 만금(萬金)이며 양방(良方)인지라, 더욱 탄복이 된다. 밤이 이미 깊었으므로 여러 말을 다하지 못하고 오직 경의 행차가 속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4월 7일 신축

승지를 보내어 우유선 이성보에게 하유를 전하고, 지방관을 신칙하여 이성보에게 식물(食物)을 전하도록 하였다.

 

4월 8일 임인

차대가 있었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경은 내각(內閣)의 일을 들었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은 황해도 관찰사에게도 실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일이라면 쟁론이 서로 오가는 것이 진실로 무방하겠으나, 대성(臺省)과 번신(藩臣)은 체면이 절로 다른 것이고 보면, 사리를 구분하여 공평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규장 학사(奎章學士)의 직임은 지위가 월등히 유별하다. 당(唐)나라 때의 홍문관(弘文館)이나 송(宋)나라 때의 용도각(龍圖閣)에서 어찌 곡부(穀簿)·시치(市直)·태가(駄價)·환전(換錢) 등에 관한 말로 번진(藩鎭)에 이문(移文)한 일이 있었겠는가. 나는 글을 숭상하는 정치를 일으키고자 하여 당초에 내각을 설치했는데, 그것은 대체로 사부(士夫)들에게 척리(戚里)와 서로 결탁하는 일종의 폐습을 씻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내각을 설치한 지 20년 이래 전혀 없었던 일이 발생하였으니, 그 수치를 남긴 것이 과연 어떠한가. 해당 각신(閣臣)은 바로 김면주(金勉柱)라고 하는데, 그때 마침 입직(入直)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공문을 작성해 준 듯하다.
그리고 주자가미(鑄字價米)의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임진년 간에 고 중신 서명응(徐命膺)이 운관 제거(芸館提擧)로 있으면서 관서(關西)의 쌀 1만 석을 본관(本館)에 붙이고 그 모곡을 취해 썼는데, 그 명색(名色)이 대체로 이때부터 나온 것으로, 그후로도 본관에서 계속 그대로 그 모곡을 취해 써왔다. 그런데 지금 황해도 관찰사를 헐뜯는 논의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본(疏本)을 팔도에 반포해 보인다면 이 무슨 수치이겠는가. 장영(壯營)의 경우는 당초에 이를 설치한 뜻이 어떠했는데, 지금은 정히 옛날의 궁방(宮房)이나 각 아문(各衙門)의 꼴과 같이 되었으니, 이에 대한 다소의 언설이야 진실로 타산지석이 되기에 해롭지 않다. 이를 계기로 해서 영속(營屬) 무리들이 모두 십분 두려워하고 조심할 줄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크게 유익한 일이라 이를 수 있겠다. 대체로 이를 막 설치했을 때에는 그 일의 규모가 확대되지 않았으므로, 부실한 의논이 일어날 소지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의 두서가 조금 이루어지고 전곡(錢穀)도 모두 여러 도에 흩어져 있으므로써, 한번 누가 경영을 했다 하면 남들이 문득 그를 지적하여 논의를 하기 때문에 이런 때에 비방을 듣기가 가장 쉬운 것이다. 그리고 20읍(邑) 이외에 8읍을 더 획정한 관서곡(關西穀)의 경우는 모두 감사와 제조가 일을 잘 거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연 폐단이 많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근래에 사부(士夫)들 사이의 풍습이 날로 낮아져서 자못 여지가 없는 정도이다. 대저 조정이 존중되는 것은 실로 묘당에 달려 있는 것이니, 위로 공경에서부터 아래로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각각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 스스로 낮게 처신하려 하지 않는다면 조정이 절로 태평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작록만 애지중지하는 자들뿐이어서, 마치 굶주린 자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으며 목마른 자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마시는 것과 같으므로, 이런 자들은 법으로 단속해도 도리어 어려워 하지 않을 듯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반드시 작록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 다음에야 풍속이 낮아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사대부의 풍습을 낮은 데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은 또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도주 용화(陶鑄鎔化)하는 것이 어찌 조화옹의 용광로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의(私意)가 멋대로 행해지고 공도(公道)가 서지 않아서, 인재가 없는 가운데 재능에 따라 인재를 가려 발탁하지도 못함으로써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 모르겠으나 근래의 추향은 어떠하고, 상벌은 어떠한가? 규모가 있는 다음에야 바야흐로 의거할 데가 있게 되는 것이니, 규모가 없는 세상에서 장차 무엇을 의거하겠는가. 내가 용사(用舍)하는 사이에 있어 어찌 치우친 인사를 하여 불화를 격동 조성했을 리가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취생 몽사의 꼴이 된 것은 실로 추향을 모른 까닭이다. 거간꾼의 심술로 농단(龍斷)의 술책을 끼고서 망령되이 서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한결같이 모두 일을 반대로 보아서, 오늘 등용된 사람을 참으로 등용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늘 쫓겨난 사람을 참으로 쫓겨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실정이니, 세도와 조정의 기강이 일체 이렇게 된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하고 누구를 해치려는 것인가. 연전에 오익환(吳翼煥)의 상소문 가운데 ‘장차 남에게서 무엇을 취하려면 반드시 우선 베풀어준다.’는 말이 있어, 이에 대해 김 봉조하(金奉朝賀)086)  가 마음속으로 항상 절통하게 여기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오로지 규모가 서지 않고 추향이 바르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긴다. 만일 먼저 규모를 세우고 명백하게 추향을 바로잡는다면 어찌 백성의 뜻이 일치하지 않고 세도가 평온하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악무목(岳武穆)087)  의 말에 ‘문신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특히 조정을 중히 여기고 외방을 가벼이 여기는 뜻에서, 평안도 관찰사 같은 중대한 직임도 오히려 모두 아경(亞卿)으로 차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묘당의 천거에서 아경 출신 방백을 총재망(冢宰望)에 수의(首擬)한 것이야말로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현임 총재는 비록 대사마(大司馬) 같은 중대한 직임으로도 통의(通擬)가 되지 못했었다. 그런데 방백의 직임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대사마에 비하면 가벼운 정도뿐만이 아닌데도 지금 묘당에서 방백을 여기에 의망하였으니, 이는 종래에 아경 가운데서 의망하던 관례와 크게 차이가 난다. 평소에 국사를 위임받은 대신은 그 규모가 일체 이와 상반된다. 그 밖에 전관(銓官)의 행정도 모두 숫자의 많고 적음만 비교하여 오로지 붕당짓는 일만 숭상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조정을 그래도 규모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동인·서인·남인·북인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박우(樸愚)·경직(鯁直)·단혜(端惠)·자량(慈良) 가운데 한 가지라도 취할 만한 자가 있으면 특별히 거조(擧錯)의 정사088)  에 유의하여 처리한 다음에야 규모가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일은 규모가 전혀 없으니, 또한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해서(海西)의 상정(詳定)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혁파하고 그 대신을 보충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이미 명을 내렸거니와, 고 상신 정홍순(鄭弘淳)이 선혜 당상(宣惠堂上)으로 있을 때 상정한 것 이외에 하나도 범용(犯用)하지 않았는데, 요즘에 이른바 ‘시장 가격으로 장부를 이루었다.[市直成冊]’는 것은 곧 그가 방백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체통을 손상하고 수치를 남길 일을 한 것이다. 이는 아전들이 교활하게 농간부리기를 기다려 남은 이익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니, 비록 조정이 참여하여 안 것은 아니나, 어찌 당연히 금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좌상이 일찍이 말하기를 ‘양전(量田)이 비록 좋기는 하나, 위에 손해되는[損上] 정사를 행하면 백성들이 다행으로 여기겠지만, 아래에 손해되는[損下] 정사를 행하면 백성들이 모두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좋은 말이다.
대저 오늘날의 곡부(穀簿)가 20년 전에 비하여 더 많지 않은데도 백성이 그 폐해를 입는 것은 곧 그 진분곡의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곡식을 받은 것은 매우 많으나 고루 분배하지 못함으로써, 진휼할 곡식이 이미 다 없어지고 유고(留庫)가 모두 텅 비었으니, 뜻밖의 비용은 고사하고라도 새 곡식 날 때까지 이을 식량도 남아 있지 않은 지경이다. 그러니 지금 만일 곡식의 대부분을 삼사(三司)의 곡식으로 작정하고 반류(半留)의 법을 거듭 천명하여 이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꼭 관리의 청렴을 기르는 방도가 되지 않지만은 않을 것이다.
열성조의 가법(家法)이 대포(大布)·대백(大帛)에 부끄럽지 않았으니,089)   내가 의당 이를 받들어 준수해야 할 것인데, 지금은 사치가 날로 성해지고 있으니, 이는 또한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한가지 단서이다. 대저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이 모두 기강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이번 사행(使行) 때의 경우에도 전혀 어렴성 없이 금법을 범해가면서 주단(紬緞)과 서책(書冊)을 가져오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기까지 하였으니, 기강이 이러하기 때문에 조정이 높아지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이정덕(李鼎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9일 계묘

내각 제학(內閣提學) 정민시(鄭民始)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가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의 소본(疏本)을 보니, 경악스럽고 황송하고 부끄러워 차라리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은 해당 도신의 일에 대해서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1천 포(包)의 쌀을 구처(區處)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견이 과연 이러했다면, 당초 각료(閣僚)가 사사로 서신을 서로 왕복할 때에 바로 안된다고 말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장을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고 마치 따를 듯도 하고 안 따를 듯도 한 그런 태도로 수 개월을 경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와서는 사신(私信)을 공첩(公牒)으로 변전시키고 공첩을 장독(章牘)으로 변전시키어, 이를 큰 일로 간주하여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지적한 일이 부실한 것이 많고 말도 서로 반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쟁단을 일으켜서 극도로 꾸짖어 모욕하였으니, 각신(閣臣)이야 돌볼 것이 없겠으나 유독 내각(內閣)이란 곳도 위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릇을 깰까 꺼린다는 비유090)  는 옛사람이 훈계한 바인데, 애석하게도 그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한 신이 그 소본에서 더욱 놀라 개탄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신은 이것이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을 압니다.’ 했고, 또 ‘집집마다 설득을 시킨다해도 백성들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미세한 것이기에 비록 각료로서도 본디 참여해 알 것이 없는 것이었는데, 마침 도신과의 친숙함을 인하여 각리(閣吏)로서 우연히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백성은 어리석다 하지만 어리석으면서도 또한 신명한 것입니다. 누가 더없이 존엄하신 성상께 이 일로 의혹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도신이라는 자가 감히 망령된 말을 장주(章奏)의 사이에 번거로이 늘어놓음으로써 참으로 중청(衆聽)을 현혹시킬 염려가 있게 하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내각과 장영이 근래에 언자(言者)들의 칼자루가 된 것은 다만 신들의 불충하고 무상함에서 연유된 것으로서 간혹 성상에게까지 누가 되는 일이 있기도 하니, 이는 신들의 큰 죄입니다. 신은 외람되이 각료의 우두머리로 있는 처지라서 무릇 내각에 죄과가 있을 때는 의리상 가장 먼저 죄를 받아야 하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제학의 직임을 깎아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훌륭하다, 제갈씨(諸葛氏)의 말이여. 그의 말에 ‘나라에 충성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열심히 다스리어라. 그리하면 일을 성취할 수 있고 공을 발돋움하여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가사 남에게 미쁨을 받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만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른바 ‘마음이 착하여 남을 잘 포용한다.’는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10일 갑진

정리소(整理所)가 을묘년 원행(園幸)의 의궤(儀軌)를 올리니, 명하여 총리 대신(摠理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도록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11일 을사

차대가 있었다. 문무신의 전경강(專經講)과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서(海西)의 상채조(償債條)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원수(元數)가 4만 냥이라고 하더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탕채(蕩債)된 것은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2만여 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상채곡(償債穀)은 폐단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폐단을 만드는 단서도 없지 않으니, 이는 도신이 스스로 의당 편리할 대로 좇아 바로잡아서 물분조(勿分條)에 붙여야 할 것이요, 또한 꼭 조정이 하명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분곡(加分穀)이 상채곡과 서로 다른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가분곡이 상채곡에 첨입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분곡(加分穀)의 경우는 지방(支放)이 부족한 때문에 전 도백 이태영(李泰永)이 청하여 얻어간 것인데, 지금은 잉여분이 이미 많아졌으니, 이들 잡명색(雜名色)을 물분조에 붙여버린 다음에야 병폐의 근원을 막을 수 있겠다. 그리고 이밖의 여러 가지 곡식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일일이 다 반은 유치하고 반은 나누어주는 것이 편리하겠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만일 정퇴(停退)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반분법(半分法)을 모조리 시행하더라도 지방(支放)이 부족하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정퇴가 잦아서 비록 양남(兩南)으로 말하더라도, 작년도의 진곡(賑穀)은 10만 석인데 정퇴한 것이 또한 수십만 석에 가까와 이미 30만 석을 잃은 셈입니다. 지금 만일 일일이 반만 나누어준다면 반드시 점차 재정이 감축될 터라 이것이 가장 난처한 일이고, 순영(巡營) 곡식의 경우도 반만 나누어주는 법을 적용한다면 순영의 비용 또한 장차 탕진되어 일마다 모두 장애의 단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황해도 관찰사는 마치 소만 보고 염소는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내의 환곡에 대한 폐단이 더욱 심하다고 한 것이지만, 근래에는 어느 곳이나 다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옛날에는 철법(徹法)이니 공법(貢法)이니 한 것이 고작 십일세(什一稅)·구일세(九一稅)에 불과했던 법으로서 모두 의거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조정의 경우는 원래부터 전부(田賦)의 제도가 십일세에도 미치지 못했었는데, 요즘에는 각종의 불법적인 세금 징수로 온갖 폐단이 함께 생겨서, 이른바 결역(結役)의 폐단은 거의 십오세·십륙세나 되고 있으니, 이는 의당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첨정(簽丁)의 폐단으로 말하자면, 임진년 이전에는 없었던 군액(軍額)으로서 지금 각 영문(營門)에 새로 설치된 군정(軍丁)이 몇 십만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니, 이러고도 어떻게 불필요한 비용이 날로 늘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근래에는 불필요한 비용이 매우 많아서 그 대신을 충당하지 못하여, 전일의 낭비는 감소시키지 못하고 후일의 낭비는 점차 더해지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인데도 탁지(度支)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들은 흔히 이 격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고금의 사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 살면 반드시 지금 세상의 일에 익숙한 다음에야 고례(古禮)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삼대(三代) 이전의 훌륭한 법과 좋은 제도가 있기는 하나, 지금 세상에는 맞지 않는 것도 또한 많다. 그러므로 비록 공자 같은 성인으로도 일찍이 태묘(太廟)에 들어가 매사를 물었으니, 성인이 때에 따라 타당하게 조처한 데서 지금의 풍속을 인하여 옛 제도를 행하였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지금 사람으로서 지금의 예를 모른 자가 어떻게 옛 예에 미쳐갈 수 있으며, 지금의 법식을 모른 자가 어떻게 옛 법식에 익숙할 수 있겠는가. 한림(翰林)·주서(注書)도 출신한 처음부터 만일 후일 이런 직임에 쓰일 것을 안다면 반드시 이런 식례에 익숙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모든 식례에 관계된 것들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도 않고, 경연의 체례와 정사의 격식에 이르러서도 일체 배제해버리니, 이른바 정사(政事)며 문학(文學)이며 재부(財賦)에 대해서 모두 어두우면 후일 조정의 일에 어떻게 숙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2일 병오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친히 과강(課講)을 시험보였다.

 

4월 13일 정미

경모궁을 배알하였다.

 

전 대사간 김한동(金翰東)이 현도 상소(縣道上疏)하여 군제(軍制)·적정(糴政)·적법(籍法)의 폐단을 진술하고, 또 말하기를,
"근년 세폐(歲幣)의 사행(使行)에 충량가(忠良家)의 자손이 간혹 사명을 받은 자가 있어, 그곳에 가서는 청(淸)나라 조정에 절을 하고, 돌아와서는 또 대보단(大報壇) 향사에 참여를 하고 있으니, 속으로 반성해보면 스스로도 가책이 될 뿐더러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함을 면치 못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지금의 민폐를 말한 사람치고 그 누군들 그대가 말한 이 세 가지 일을 말하지 않으리오. 오직 군제가 정돈되고 적정이 정밀해지면, 적법 바로잡는 것은 다만 순차적인 일일 뿐이다. 그러나 군제는 본디 영구불변의 법전이 있으니, 도신이나 수령이 된 자가 진실로 법을 잘 봉행한다면, 가엾은 저 백성들이 어찌 혹시라도 서로 제 고장을 떠나 10호(戶)의 마을이 처음 지날 적에는 4, 5호가 남았고 두 번째 지날 적에는 2, 3호만 남았다가 세 번째 지날 적에는 아주 텅 비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또 더욱 간절히 가엾은 일이 있는데, 그대의 상소문에서는 어찌하여 ‘나서 장성해진 사람들은 오히려 딴 곳에 가서라도 부쳐 살 수 있다 해도, 저 황구(黃口)와 백골(白骨)에까지 신역(身役)을 징수하는 일은 충분히 화기(和氣)를 침해할 수 있다.’는 말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요즘에 기전(畿甸)의 열 고을에다 먼저 이 병폐를 없애는 데에 대한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시험하고 있노니, 모르겠지만 제로(諸路)에서도 과연 풍문을 듣고서 생각을 움직이고 있던가?
그리고 적정은 바로 요즘에 서로 자문하고 모의하는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손꼽히는 일인데, 곡식의 반을 유치하는 일은 우선 차치해두고라도 장부에 합해서 기록하는 것도 해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연전에 내가 정전(政殿)에서 물었던 말은 실로 타당성이 없는 지상(紙上)의 공언(空言)을 면치 못했었다. 그러나 급속히 결정하는 것이 익히 논의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오직 앞으로 그 폐단을 바로잡아나가기를 자나깨나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에 간 사행(使行)에 대해서는 고인의 출처(出處)에 반드시 참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경의(經義)의 조문(條問)과 정문(程文)의 과제(課題)를 내리고, 《어정대학(御定大學)》과 주서(朱書)의 교정(校正)으로 광주목(光州牧)에서 호남의 제생(諸生)들을 시험보이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정대학》과 주서 등본(謄本)의 교정은 체모가 자별하므로, 교정하는 제생들에게 공령문(功令文)으로 시험보이고 경서(經書)의 의의(疑義)를 물어서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교정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교정할 제생 가운데 혹 빠진 자가 있을지 모르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도내에서 본래부터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다 모아 일체 고교(考校)의 반열에 부쳐서 함께 응시하여 조대(條對)하게 하도록 하라. 광주는 도내의 한 중앙이므로 사람들이 타지로부터 이곳으로 모이는데 있어 도리(道里)가 서로 알맞고, 해당 수령 또한 문자(文字)의 일에 익숙한 사람이므로, 해당 고을에 회동(會同)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연로하여 그곳에 올 수 없는 자에 대해서나, 또 혹 공령문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경의에만 익숙하다든지, 경의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공령문에만 익숙한 자에 대해서는 또한 모두 본인의 소원에 따라 응대(應對)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경술

차대가 있었다. 겸하여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다.

 

4월 17일 신해

우참찬 김문순(金文淳)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삼가 전 대사간 김한동의 소본(疏本)을 보니, 충량가의 자손이 사명을 받들고 북경에 간 것에 대해서 매우 비난 배척을 가하여 심지어는 ‘마음속으로 반성해보면 스스로 가책이 되지 않겠는가.’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이번 사행을 갔다가 돌아와 복명한 지가 엊그제이고 보니, 그가 지목한 말이 마치 유독 신 한 사람에만 해당시킨 듯하여 부끄럽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리(義理)는 무궁한 것이요 수혐(讎嫌)도 처지에 따라 각각 다른 법입니다. 신의 처지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강구(講究)한 것이 있었고, 종전의 조의(朝議)에서도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고 보면, 신이 굳이 그와 더불어 시끄럽게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조상을 욕되게 했다.[忝厥]’는 두 글자의 말은 오로지 신을 헐뜯어 모욕하는 것이 더욱 깊은 데서 나온 것이니, 어찌 애써 변명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칭탁하여 자신을 깨끗이 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형벌을 내리시어 대간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8일 임자

전교하였다.
"노비(奴婢)도 또한 백성이다. 그래서 연전에 제도(諸道)에 두루 물어서 각각 내노(內奴)와 시노(寺奴)에 대한 폐단을 진술하게 하였었다. 그래서 알고 보니, 내노의 폐단이 시노보다 심하였고, 제도 가운데에서는 북관(北關)이 가장 심하고 북관 가운데에서도 또 북청(北靑)·이성(利城)·단천(端川)·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부령(富寧) 등 7읍의 공노(貢奴)가 더욱 심했으며, 공노 가운데서는 해척(海尺)이 또 더욱 심하였다. 1구(口)당 1년에 공납하는 것이 30금(金)은 충분히 되는데, 침탈에 대한 고통과 세금 독촉에 대한 어려움이 소위 해노(海奴)로 편적(篇籍)된 무리들의 골수에 사무친 병폐가 되어온 지 오래이다. 그런데 비록 그들을 구제하는 데에 손을 쓰고자 해도 다만 각각 명색(名色)의 소중함을 빙자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불법으로 징수하는 것이 응당 납부할 세액보다 백 배나 되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영읍(營邑)의 신하들이 애당초 감히 그 폐단을 언급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할 폐단이 어디 있겠는가. 잘 고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조정이 서민들에 대해서는 갓난 아이와 똑같이 보니 누구를 후하게 하고 누구를 박하게 하겠는가. 평민에 대한 폐단도 듣는 족족 구제하곤 하는데, 유독 이 무리들에 대해서는 매양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핑계삼아 방치해버리고 있으니, 나는 이를 불만스럽게 여긴다. 더구나 북관(北關)은 바로 왕가(王家)의 발상지이니, 조정에서 그들을 비호하는 정성과 이 무리들이 조정을 떠받드는 뜻이 또 과연 어떠하겠는가.
선두안(宣頭案)에서 수백 년 동안 내수사에 보고해온 내력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이른바 해착(海錯)091)  의 4등(等)의 응당 납부할 세에 대한 징수 방식이 백 갈래나 복잡하고 명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다소 이 폐단을 바로잡을 조건에 대하여 의당 묘당으로 하여금 연교(筵敎)에 의거해서 하나하나 시행해 나가도록 하되, 그중에 가장 큰 것을 다스리자면 4등 가운데서 책납(責納)이 가장 많은 동등(冬等)을 견면(蠲免)해주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으니, 이렇게 해주면 해노(海奴)들에 있어서는 혹 일분이나마 어깨를 쉬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7읍의 해노들에게서 나오는 동등을 모두 견면하도록 하라. 이 일이 어찌 이 무리들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왕가의 발상지를 위하는 생각과 칠저(漆沮)092)  의 공물임을 추상(推想)한 때문이다. 이를 영구불변의 법칙으로 저록(著錄)하여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뜻을 보이어서, 이와 같이 폐단을 바로잡고 이와 같이 윤음(綸音)을 선포하여, 안으로 궁차(宮差)와 사속(司屬)에서부터 밖으로 도신(道臣)과 고을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각 이것을 벽에 붙여놓고 엄격히 준수하여 영구한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4월 19일 계축

차대가 있었다. 상이 제신에게 하유하기를,
"이번 비는 삼농(三農)093)  에 아주 좋은 비이다. 요즘 벌레를 주워내는 일로 동네 사람들에게 혹 하루씩 울력을 잡히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대체로 백성을 위 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 중의 한 가지이다. 《시경》에는 이르기를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螣秉卑炎火]" 하였고094)  ,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영주(英主)라 이를 만한 분으로서 황충(蝗虫)을 삼킨 일까지 있었는데,095)   그 후 요숭(姚崇)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충을 주워내서 혹 불태우기도 하고 땅에 묻기도 하여 그 해를 제거하였으므로, 후인들이 또한 그 사업을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나무의 충해(蟲害)는 비록 농작물의 충해와는 차이가 있으나 백성들에게 대단히 관계됨이 있기는 한가지이다. 소나무가 말라 손상되면 산이 뻘겋게 민둥산이 되어, 백성들이 날로 쓰는 땔나무는 우선 차치하고라도 산의 흙이 자꾸 흘러내리어 좋은 묏자리가 메워져버려서 사람의 기품(氣品)에도 해로움이 많을 것이니, 부득이 곳에 따라 주워내도록 해야겠다. 그러나 만일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민폐가 있게 된다면 이는 곧 사람 기르는 자가 사람을 해치는 꼴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내가 다소 마음을 쓰는 곳이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일찍이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이제 성상의 자상하신 하교를 받들고 보니, 실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시려는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꼈습니다. 비록 초목은 앎이 없다고 하지만, 초목 가운데서도 소나무는 백성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니, 설사 사소한 민폐가 있다 할지라도 어찌 그것을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벌레를 주워서 묻는다고 하니, 날마다 주워 묻는 숫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이것이 비록 미물 중의 미물이긴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생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좋은 도리가 없다. 옛날 홍수를 다스리던 시대에 익(益)은 산택(山澤)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고, 우(禹)임금은 사룡(蛇龍)들을 늪으로 몰아 내쳤으니, 익이 산택에 불지른 것은 아마도 우임금이 미물들을 죽이지 않고 내치기만 한 것보다는 못한 듯하다. 천 년 이후에서도 오히려 익이 우임금에 미치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감히 여기에 의논을 가할 수는 없으나, 그곳이 산택이기 때문에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아마도 처지가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노공(奴貢)은 조정에서 긴히 쓸 데도 없는데, 한 사람당 공납하는 것이 30냥을 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은 공납이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특별히 4등 중에서 물량이 너무 많은 동등(冬等) 하나를 견면한 것이다. 그리고 곤포암(昆布巖)은 본궁(本宮)에 응당 소속되는 것인데, 중간에 이를 북병영(北兵營)에 빼앗기고 두 척의 배로 거둔 것만을 관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곤포암을 남북으로 나누어 정하여 남쪽은 궁속(宮屬)에 소속시키고, 북쪽은 해당 병영에 소속시키고 보니, 해당 병영에서는 전에 비해 영원히 절반만 얻게 되고 궁속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궁속들이 거둔 것이 동등(冬等) 하나 견면받은 물량을 충분히 맞먹고도 남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근래 폐단을 바로잡은 가운데서 관민(官民)간에 모두 병폐는 없고 이익만 있게 된 것이 이번 북도의 해부(海夫)들에게 공물 견면해준 일만한 것이 없는지라, 내 마음이 만족하여 나 같이 잠 잘 못자는 사람도 밤이면 조금 잠을 이루게 되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더구나 해부들의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하신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에게 조정에 나올 기약을 물으니, 김이소는 정세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즉시 소명에 따르지 못했는데, 사관이 이에 대하여 회주(回奏)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고 재상 김수항(金壽恒)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려고 할 적에 선정 송시열(宋時烈)이 그에게 ‘선생(先生)의 묘토(墓土)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096)  는 말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기는 하나, 그때에 반드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단서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만일 정도와 권도의 의리를 참작한 것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듯하다. 더구나 김수항의 자손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분의 후손으로서 조상이 먼저 이미 갔던 곳을 가지 않는다면 의리로 헤아려볼 때 장차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영돈녕부사의 일은 잘못되었다."
하니, 우의정 이병모가 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도 일찍이 사신으로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동료 재상인 이여(李畬)가 ‘만일 다른 사람 중에 갈 만한 자가 있으면 굳이 갈 것이 없겠다.’고 말하였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이 논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정도와 권도는 절로 각각 타당처가 있기 때문에 옛사람도 일찍이 이 문제로 가는 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하여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은 심정입니다. 어찌 유독 충량가의 후손들만 그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공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았다.[述而不作]’ 하였는데, 나의 평생 공부는 1부(部)의 주서(朱書)에 있다. 내 나이 20세 때에 《주서회선(朱書會選)》을 편집하고 또 춘방(春坊)·계방(桂坊)과 협력하여 주해(註解)를 초정(抄定)하였고, 또 《어류(語類)》에 구두점을 찍었다. 30세 때에는 《주자회통(朱子會統)》을 편집하고, 또 고 유신(儒臣) 한억증(韓億增)이 편집한 주서(朱書)를 정정(証定)하였으며, 또 《자양회영(紫陽會英)》 및 《주서각체(朱書各體)》를 편집하였다. 40세 이후에는 주서를 두루 열람한 것이 많은 가운데 근년에 또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집하였고, 작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주자전서(朱子全書)》 및 《대전(大全)》·《어류》를 가져다가 구어(句語)를 절략(節略)하여 또 한 책을 만들어서 《주자서절약(朱子書節約)》이라 명명하였다. 요즘에는 또 《주자대전》 및 《어류》와 그 밖의 주 부자(朱夫子)의 손에서 나온 편언 척자(片言隻字)까지를 한데 집대성하여 일부의 전서(全書)로 편집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편집이 다 이루어지면 장차 주합루(宙合樓) 곁에 방 하나를 별도로 마련하여 주 부자의 진상(眞像)을 봉안하고, 아울러 그 안에다 전서의 판본(板本)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주 부자에게 실로 사사(師事)하는 정성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곧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칙으로서 그 글됨이 참으로 진선진미하여, 내가 일생 동안 좋아한 것이 바로 이 글에 있었다. 20년 전에 이 책을 손수 베끼었는데, 요즘에 또 다시 읽으면서 다시 베끼어 서산(西山)097)  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합해서 내용을 가려 뽑고, 또 《대학》의 경문(經文)·전문(傳文)과 주자의 장구(章句)를 각단(各段)의 첫머리에 기재해서 초계 문신들로 하여금 정서(淨書)하도록 하였으며, 또 호남의 유생들로 하여금 《대학》 1본(本)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모두 나의 요즘 공부하는 대략인데, 요는 나의 심신에 유익함을 위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평안 감사에게 명하여 경학에 밝은 선비를 찾아내 보고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관서(關西)는 본디 무예(武藝)를 숭상하는 고장이라 칭하나, 우리 나라의 문명 발달이 실로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대체로 옛 삼대(三代) 시대에 도산(塗山)에서 봉건(封建)을 받고,098) 대동강을 황하수에 비유했으며,099) 토지에는 정전(井田)의 제도가 남아 있고,100) 세속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전하고 있으니,101)   전(傳)에 이른바 군자국(君子國)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관서 지방인 것이다. 그렇듯 미려한 강산과 풍성한 곡창의 고장을 선비들이 제(齊)·로(魯)의 고장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나는 매양 이를 애석히 여긴다.
시험하여 보건대, 장릉(長陵)102)  의 융성하던 시대에는 김태좌(金台佐)라는 사람이 있어 향선생(鄕先生)으로서 학도들을 교수(敎授)하였는데, 고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이 바로 그 문하 출신으로서 정초(旌招)의 반열에 들어, 선정 문원공(文元公)103)  과 서로 전후하여 성균관에 창설된 사업(司業)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관서 지방 선비들이 성리(性理)의 학설을 알게 되었는데, 그후로는 지금까지 2백 년이 다 되도록 다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을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선비가 옛날만 못해서 그러겠는가. 다만 조정에서 주의(注擬)의 격식에 국한되어 그런 사람들을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山東)과 산서(山西)를 막론하고 각각에는 그 수준이 있는 것이요, 십실(十室)의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한 사람이 있는 법인데, 기자(箕子)의 봉지(封地) 사방 천여 리 안에 어찌 옛 유신(儒臣)과 같이 경학을 연구하고 도에 뜻을 둔 자가 없겠는가. 관동(關東) 제로(諸路)에서 선비 추천하는 예에 의거해서 선비를 시험보이고자 하는데, 공령문(功令文)의 문체에 대해서는 응제(應製)한 여러 가지 시권(試券)에서 익히 보았는 바, 시(詩)와 이소체(離騷體)·문선체(文選體)를 모방하여 지은 글들은 약간 마음에 드는 것도 많기는 하나, 이것은 관서의 선비들을 위해 칭찬할 것이 못 된다. 그러니 도백으로 하여금 경전(經傳)의 뜻에 익숙하여 일향(一鄕)의 추천을 받고 일도(一道)의 칭송을 받은 자들을 찾아내서 이름을 열거하여 보고하되, 의당 일찍이 묻고자 한 경전의 의의(疑義)를 조목조목 물어서 그들의 소견을 말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하라. 이 뜻을 먼저 내각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호(洪明浩)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이 재차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상소문을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의 구구한 충성심을 바치려고 하는 것은 성상의 뜻을 드러내고 성상의 덕의(德意)를 백성들에게 선양하고자 하는 데에 있으므로, 신이 마음을 다한 것은 오직 민폐를 구제하기를 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단(事端)이 먼저 내각에서 일어나 논제(論題)가 마침내 신의 영(營)에까지 미쳤습니다. 이에 ‘앞서 작전(作錢)의 일로 연품(筵稟)하여 공문(公文)을 낸다.’는 말로 먼저 말의 단서를 만들고, 그 아래에서는 또 ‘지난번 공문에서 「시장 가격을 따르라.」고 한 것은 곧 상정가(詳定價) 이외 잉여액의 다과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당한 내각에서 그 잉여액의 다과를 다투어 이를 공문 안에 드러내기까지 해서 이미 남에게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게 하고, 이런 일에 대해서 매번 연품하는 것이라 칭탁하면서 한 번으로 부족하여 기필코 두 번씩이나 함으로써 보는 자로 하여금 두려워서 입을 꼭 다물고 감히 말을 못할 지경이 되게 하였습니다.
지금 중신(重臣) 정민시(鄭民始)가 스스로 해명한 말에 ‘이 일은 지극히 미세한 것으로써 비록 각료일지라도 아예 참여하여 알 것이 못 되는데, 마침 도신(道臣)과 서로 친숙함을 인하여 각리(閣吏)로서 우연히 언급한 것일 뿐이다.’ 하였으니, 이른바 ‘지극히 미세한 일로서 비록 각료일지라도 아예 참여하여 알 것이 못 된다.’는 말이 참으로 중신의 말과 같다면 이것이 바로 논제(論題)입니다. 감히 각료도 참여하여 알 것이 못 되는 일을 가지고 도리어 막중한 자리에서 빙자를 하고, 상께 진고(進告)할 적에는 이에 감히 ‘마침 도신과 친숙함으로 인하여 우연히 언급한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써 그 말을 모호하게 만들었으니, 그는 유독 임금께 직언(直言)으로 고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중신을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더구나 또 ‘내각의 지위를 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을 꾸짖고, 심지어 ‘그릇을 깰까 두려워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고까지 말을 한 것은 더욱 망발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대저 내각이 성상과의 친밀하기가 비록 다른 기관에 비할 바는 아니나, 백관(百官)이 서로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데는 조정과 외방을 가릴 것이 없어, 진실로 잘못한 일이 있기만 하면 비록 기예(技藝)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바로잡기를 꺼리지 않는 것은 예로부터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가(鑄字價)를 가지고 내각을 위하여 이익의 다과를 다투는 것은 비록 미세한 일인 것 같으나, 걸핏하면 연품한 것이라고 칭탁하는 것이야말로 어찌 관계된 바가 막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쥐를 때려 잡으려 하나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는 말은 곧 가의(賈誼)가 한(漢)나라 조정의 대신(大臣)에게 비유를 끌어댔던 말인데, 후세에 이 말 때문에 감히 대신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정민시의 말대로라면 모든 근신(近臣)의 과실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비록 이보다 더 큰 과실이 있더라도 앞으로는 장차 감히 힐문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그렇다면 앞으로의 무궁한 폐단이 꼭 정민시의 이 말에서 발단된 것이 아니기를 기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4월 21일 을묘

권유(權𥙿)를 이조 참판으로, 임희존(任希存)을 이조 참의로,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2일 병진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비각(碑閣)을 완성하였다. 이에 앞서 명하여 집경전의 옛터에 비(碑)를 세우고 어필(御筆)인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다섯 자를 새기도록 했었는데, 부윤 유강(柳焵)이 그 일을 감독하고 탑본(搨本)을 올리니, 부윤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4월 25일 기미

명하여 의사(義士) 차예량(車禮亮)의 후손에게 특별히 세름(世廩)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증 목사(牧使) 이사룡(李士龍)의 후손 1인에게는 길이 금군(禁軍)에 소속시키기로 지난번 규식을 정했는데, 더구나 차 의사의 가인(家人)에게랴. 강세작(康世爵)은 바로 방랑하다가 타향에 우거한 사람에 불과한데도 길이 사과(司果)에 소속시켜 대대로 녹봉을 지급하고 있는데, 차 의사를 강세작에 비한다면 그 우뚝한 충절을 어찌 같은 등급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차 의사의 봉사손에 대해서는 의주부(義州府)로 하여금 녹봉 지급할 자리를 특별히 만들어서 길이 녹봉을 주도록 하고, 병조에서는 호군의 관교(官敎)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벌레가 벼와 묘목(墓木)을 손상시키고 있으니, 어떻게 잡아 제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사(經史)에서 상고해보면 옛부터 그러하였으니, 《주관(周官)》의 서씨(庶氏)·전씨(剪氏)의 직(職)이 모두 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다. 벼줄기를 갉아먹는 것은 명(螟)이고 잎을 갉아먹는 것은 등(螣)이며, 뿌리를 갉아먹는 것은 모(蟊)이고, 마디를 갉아먹는 것은 적(賊)이다. 그리하여 못된 벌레를 불태워달라.[秉卑炎火]는 것은 전조(田祖)의 신령께 비는 말이고, 구덩이를 파고 태워서 묻는 것은 당(唐)나라 때 요숭(姚崇)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역대에 이를 인습하여 마침내 성헌(成憲)으로 만들고 모두 민력(民力)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자양(紫陽)104)  의 훈계에도 이르기를 ‘어찌 사람들을 부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공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다만 견식이 있는 사람은 이해(利害)의 실상을 잘 파악하여 자신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안일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서 스스로 원망하지 않을 뿐이다.
근자에 원침(園寢)의 뽕나무·가래나무에도 충해(蟲害)가 있어, 나무를 심은 10읍의 수령들로 하여금 관속들을 거느리고 벌레를 제거하게 해서 잠시 수고로움이 길이 안일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을 부쳤다. 그러나 관속들도 백성인지라 그들이 뜨거운 볕에서 사역하는 것을 생각하니, 자못 침식할 마음도 잊게 된다. 이에 구양수(歐陽脩)의 시에 ‘관전 스무 냥으로 한 말씩을 사들이니, 잠시 동안에 산더미같이 쌓이누나.[官錢二十買一斗頃刻露積如京坻]’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특별히 벌레를 사들이는 방식을 창안하고 나니, 어쩌면 일은 절반만 하고도 공은 갑절이나 얻을 수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내 마음에 아직도 스스로 편치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벌레는 이미 벌이나 누에와 같은 공이 없는데다 해독은 모기나 등에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꿈틀거리는 생물이니, 성인이 벌레에 대해서 그의 공도 기록하고 그의 해독도 명시한 뜻을 준수하여 의당 잡아 제거해야 할 것이나, 그 제거하는 즈음에도 방편적인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의당 생물 살리는 덕을 그 사이에 병행하도록 해야 하니 해독이 되는 것도 그 종류에 따라 각각 크고 작은 다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몰아서 늪으로 내친 것은 또한 불질러 태워버린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더구나 ‘잡아서 불태워달라.[秉卑炎火]’는 싯귀는 그냥 의탁하는 말일 뿐이고, 불태워 묻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상고와 후세의 구별을 또한 족히 볼 수가 있다.
일찍이 듣건대, 벌레가 날아서 바다에 들어가면 어하(魚蝦)로 변화한다고 하였고, 복파(伏波)가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밝은 징험도 아직까지 전하고 있으므로, 여러날을 조용히 연구한 끝에 법령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앞으로는 벌레를 주워서 구포(鷗浦)와 해구포(海口浦)에 던져버리도록 하라. 그곳은 나무 심은 곳과 멀지 않아서 20리 거리밖에 되지 않으므로, 벌레를 사는 데 있어서는 인력(人力)을 줄일 수 있고, 벌레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고사를 본받는 일이니, 의리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수신(守臣)을 소견하고 이 뜻을 하유하라. 그리고 또 여강(驪江)의 능수(陵樹)에도 충해가 있다고 하니, 벌레를 사는 일과 바다에 던지는 일을 각각 일체 화성(華城)에 새로 반포한 식령(式令)에 의거해서 하면 결코 추호도 안될 것이 없다고 본다. 이어서 도백의 장계를 보니, 벌레를 다 주워내기는 아직 묘연한 실정인데, 이때에 백성을 부리는 것은 농정(農政)에 방해가 될 것이라, 걱정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에 당장 촛불을 밝히도록 하여 이 내용을 써서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해도(該道)에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어디든지 모두 이것을 예로 삼을 일로 예조와 한성부에 분부하라.

상이 또 수원부 유수 서유린(徐有隣)에게 하교하기를,
"더위가 이러한데 벌레 줍는 일을 장차 시작하게 되었는지라, 각읍 수령들이 숲속을 왕래하면서 뜨거운 볕을 받고 벌레에 쏘이어 살이 부르트곤 할 것을 생각하니, 그 모양이 안 봐도 눈에 선하고, 그 수고로움을 완연히 내가 겪는 듯하다. 더구나 피폐한 고을의 이례(吏隷)와 교졸(校卒)들은 봄이면 나무 심는 일, 여름이면 벌레 줍는 일, 가을이면 집짓는 일로 해마다 노역이 끝이 없어 치우치게 고통을 받는 자들이 바로 너희들인데, 너희들이 이렇게 힘을 다하고 있으니, 더욱 잠시도 내 마음에서 놓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조정에서 몸소 나가 친히 검독하고자 한 일인데, 수신에게만 맡겨두고 보니, 수신이 오히려 미처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있다. 그리고 10읍의 수령들과 10읍의 이례와 교졸들의 과외의 노고에 대해서는 어찌 그들을 진념하는 거조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지금 특별히 제조한 제중단(濟衆丹) 1천 정(錠), 광제단(廣濟丹) 3천 정, 청심원(淸心元) 1백 환(丸)을 내리노니 이것을 수령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제중단 3천 정, 향유산(香薷散) 4백 첩은 이례와 교졸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경이 이를 지수(祗受)한 후에는 이 전령(傳令)을 등사(謄寫)하여 10읍의 수령들에게 반시(頒示)해서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그들에까지 미쳤음을 알게 하고, 또 내영(內營)의 교졸들을 보내서 양식과 약물을 지급하여 수령들과 나누어 먹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 일을 다 마치고 서유린이 별단(別單)을 갖추어 보고하니, 명하여 수고한 사람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도록 하였다.

 

4월 27일 신유

우의정 이병모, 비변사 유사 당상 이시수(李時秀)·조진관(趙鎭寬),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 이전에 통제사(統制使)를 지낸 한성 판윤 이경무(李敬懋), 행 대호군 조심태(趙心泰), 한성 좌윤 서유대(徐有大), 영남 어사 여준영(呂駿永)을 소견하였다. 여준영이 서계(書啓)를 올리니,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 영천 군수 심공저(沈公著), 밀양 부사 윤속(尹㬘), 대구 판관 홍이간(洪履簡), 전 칠곡 부사 윤양검(尹養儉), 의성 현령 김철순(金喆淳), 신령 현감 남정화(南正和), 전 현감 이귀석(李龜錫)을 모두 지방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등 있게 감죄(勘罪)하였다. 여준영이 또 별단을 올렸는데, 그 하나에 아뢰기를,
"통영(統營)에서 곡식을 사오는 것이 실로 강변 열읍(列邑)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곡식을 열읍에 분배하는 것이 자못 한도가 없는데, 1냥의 본전(本錢)만 내주고 1석의 실곡(實穀)을 받아들이니, 간악한 아전들의 더 지급하는 행위와 탐오한 수령들의 빙자하는 행위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강제로 지급하고 불법으로 징수하는 데에는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매양 수납(輸納) 때를 당해서는 축난 것을 보충한다는 명목의 불법 징수와 상부 아전에게 보내는 상납금의 증가가 또 끝이 없습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통영에서 곡식을 사오는 일은 막기도 하고 허락하기도 했었으니, 그것은 해영(該營)의 사세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지난 기유년에 통제사(統制使)가 장계를 올려 주청함으로 인하여 6천 석 정도만을 무역하도록 허락하고, 따라서 해영에서 운반해가야 하고 각읍에서 운반하여 납부하는 일은 일체 엄금한다는 뜻으로 복계하여 행회(行會)하였고 보면, 의당 이 명령을 어김없이 준수했어야 하는데, 이 문제가 지금 또 어사의 계본(啓本)에 올랐으니, 이는 조정의 명을 삼가 지키지 못한 것이라,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정을 가지고 논하자면 곡식을 사오는 한 가지 절차는 일체 영원히 막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일찍이 통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 각각 소견을 진술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한성 판윤 이경무가 말하기를,
"통영의 지방(支放)에 수용되는 2만여 석은 오로지 삼도(三道)의 모조(耗條)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를 영남 지방 산군(山郡)의 모조와 합하여 본도 내의 강해(江海) 연안의 각읍에서 환무(換貿)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 말고 가만히 앉아 운반하는 방법은 참으로 생각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남 같은 넓은 지역에서 1만 석 정도를 사오는 것쯤이야 어찌 민읍에 폐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대호군 조심태가 말하기를,
"해영의 형편으로 말하자면 해마다 2만 석의 곡물을 판출한 다음에야 이를 가지고 여러 가지 몫을 지을 수가 있으므로, 양호(兩湖)에서 값을 받아가지고 영남에서 무역하는 일은 일체 엄격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해영과 각읍을 막론하고 정수(定數)를 초과하거나 입본(入本)을 빙자하는 폐단에 대하여는 드러나는 대로 논하여 감죄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먼저 별단의 사의(辭意)를 가지고 엄한 관문(關文)을 내서 해영에 조사 신문하여 감히 흐리멍덩함이 없이 사실대로 보고해오도록 한 다음에 품처해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암행 어사 별단의 또 하나에 아뢰기를,
"조창미(漕倉米) 수천 석을 제류(除留)한 것은 절로 법의(法意)가 있는 것으로, 선격(船格)같은 집물(什物)을 모두 본색(本色)으로 지출한다면, 아무리 풍년이 들어 값이 헐한 때라도 절로 이득을 입을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호조에서 환무(換貿)한 뒤로는 이득을 볼 것이 없어 거개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수(外受)의 폐단은 환무보다 더욱 심합니다. 본읍의 대미(大米)는 그 숫자가 또한 많지 않으므로, 거친 벼로 기준을 정하여 민간에 내주고는 민간으로 하여금 쌀 1석 값인 7냥 2전을 공인(貢人)에게 채워주도록 하는데, 거친 벼 2석 7두의 값은 두서너 냥에 불과하므로, 그 남은 숫자를 곤궁한 봄철의 부황든 백성들에게서 공공연히 강제 징수하고 있으니, 제류미의 외수하는 법은 뱃사람[船人]에게만 피해가 될 뿐 아니라, 읍민에게도 피해가 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제류미를 환무하는 것은 극히 구차하고 소홀함에 관계되는 일로, 전후의 연석에서 누차 변통하라는 성교를 받들었으나, 해조의 수용(需用)에 있어 아직 어떤 편리한 방도를 얻지 못하여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사의 계본을 보니 더욱 그 폐단이 복잡다단함을 알겠습니다. 청컨대 물러가서 획대(劃代)할 계책을 강구하여 추후에 품처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 및 유사 당상에게 물으니, 호조 판서 김화진, 선혜청 당상 정민시, 유사 당상 이시수·조진관이 모두 당연히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여러 의논이 별로 서로 다름이 없으니, 끝내 혁파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류미를 설치한 본의가 어떠한 것인데, 경사(京司)에서 도리어 환무를 함으로써 환무 이외에 다시 외수의 폐단까지 있게 하는 것인가. 만일 환무를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법식대로 되어서, 제류의 사체가 바르게 되고 모든 폐단이 다 제거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호조의 환무하는 명색을 특별히 혁파하라."
하였다. 암행 어사가 별단의 또 하나에 아뢰기를,
"형구(刑具)의 규격은 법전에 실려 있는데, 대내에서 하사한 영조척(營造尺)을 가지고 고을마다 적간을 해보니, 이른바 형구라는 것이 법식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어사의 계본에서 논한 형구가 법척(法尺)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로 목척(木尺)의 길이가 고을마다 각각 다른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해도에 유척(鍮尺)을 만들어 보내어 이를 표준삼아 각 곤(閫)·읍(邑)·진(鎭)·역(驛)에 형구를 만들어 두게 해서 과불급의 폐단이 없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에 있는 유척을 경이 가져다가 법척의 척도(尺度)에 맞취 바로잡아서 이를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려보내고, 인하여 도신들로 하여금 내려보낸 척도에 의거해서 일일이 관하(管下)의 읍·진 등에 반급(頒給)한 다음에 장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다음 어사가 내려가서는 지금 반급한 척도가 있는지의 여부를 고찰할 일을 수행 사목(繡行事目)에 첨서(添書)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사 계본의 또 하나에는 아뢰기를,
"밀양(密陽)의 후조창(後漕倉)을 설립할 때에는 강물이 깊고 넓어서 배에 짐을 싣기가 매우 쉬웠는데, 임자년 홍수가 있은 뒤로 산이 무너져서 모래가 쌓이어 문득 얕은 여울이 되어버림으로써, 아주 자잘한 선박에다 나누어 운반하여 바다로 나가곤 하다 보니, 그 지체되는 폐단이 실로 민망스럽습니다. 그런데 김해(金海)의 지형을 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험난한 곳은 뒷쪽에 있고 수세(水勢)가 매우 순편하여 하물을 싣고 다니기가 실로 평탄하다고 합니다. 뱃사람들의 말이 이러하고 보면 이해 관계를 알 수 있겠으니, 이것을 옮겨 저쪽에 설치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김해로 후조창을 옮기자는 논의는 벌써 임자년 이전부터 있어왔으나,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대로 둔 것인데, 이제 어사가 그곳 형편을 직접보고서 이 논계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그곳 도신을 지낸 사람도 연석에 많이 참여하였으니, 청컨대 그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일찍이 그곳 도신을 지낸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우승지 이태영이 아뢰기를,
"후조창을 당초 삼랑강(三浪江) 어귀에 설치한 것이 무엇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해문(海門)과의 거리가 10여 리나 되는데다 지역이 좁고 여울도 얕아서, 각읍의 세미(稅米)를 창고 마당에 일단 받아들였다가 다시 해선(海船)으로 옮겨 싣는 과정에서 모비(耗費)와 지체되는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김해는 이미 접경인데다 해변에 창(倉)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이 또한 몇 군데가 있으니, 지금 만일 그 이해 관계를 잘 살펴서 창을 옮겨 세우기를 결정한다면 소속 각읍들도 반드시 즐겨 따를 것입니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전 도신의 말에도 옮겨 설치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주 신중히 해야 할 일이니, 다시 본도로 하여금 그곳 형편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따로 의견과 논리를 갖추어 장문하게 한 다음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므로, 이에 따랐다. 그 후 수 개월 뒤에 경상도 관찰사 이의강(李義綱)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김해(金海)·양산(梁山)은 곡식을 수납(輸納)하기가 가깝고 편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곳에 창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밀양(密陽)·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은 수로(水路)가 조금 멀기 때문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김해의 죽도(竹島)에 창을 옮겨 세워서 이삼백 리 밖의 속읍(屬邑)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운반을 담당하게 한다면, 허다한 전곡을 몇 척의 작은 배에 나누어 싣고서 타군의 지경에 뿔뿔이 정박하여 여러 날씩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옮겨 싣는 데 있어 그 난이도와 편리 여부가 작원(鵲院)보다 훨씬 더 나쁠 것이고, 창을 건축할 물력(物力) 또한 판출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예전대로 두소서."
하였는데, 이병모가 말하기를,
"김해로 창을 옮기는 것을 원하는 자는 적고 원치 않는 자는 많으며, 옮겨 건축할 물력 또한 판출하기 어려우니, 과히 급하지 않은 이런 일은 지금 우선 차치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암행 어사 별단의 또 하나에 아뢰기를,
"김해부의 명지도(鳴旨島)는 곧 소금이 나는 곳인데, 해부(該府)에 산산창(蒜山倉)을 설치하고 획부미(劃付米) 1천 석을 본미(本米)로 유치해두었다가 이를 도민(島民)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쌀 1석당 소금 3석씩을 징수하면서 이를 공염(公鹽)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봄·가을로 3천 석을 나누어 징수하되 그때마다 이를 낙동강에 정박시켜놓고 7냥으로 값을 정하여 팔아서 도합 1만 7천 8백 냥을 얻어 이것을 가지고 비공(婢貢)의 급대(給代)와 순영(巡營)의 경비로 쓰는 것이 바로 그 규식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7냥으로 값을 결정한 뒤로는 사사로이 뒷전에서 소금을 무역하는 감색배(監色輩)들이 반드시 공염과 함께 발매를 하여 뒷전의 이익을 꾀하기 때문에 공염을 징수하기 이전에도 도민(島民)들의 나무하고 물긷는 일까지 일체 엄격히 금하고 있으니, 이것은 도민에 대한 폐단이요, 공염이 강에 오른 뒤에는 사상(私商)들이 싣고 다니는 소금은 발매를 할 수 없으니, 이것은 사상에 대한 폐단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폐단이 있는 때문에 공염을 발매하기 전에는 영남 각읍이 소금을 먹을 수 없게 되니, 이것은 영남 백성들에 대한 폐단입니다."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명지도의 소금에 관한 폐단에 대해서는 명지도민과 영남 각읍의 백성들로서 입이 있는 자는 다 말을 하는 실정이나, 그 실상은 효과와 폐해가 서로 섞이었습니다. 명지도민들은 만일 순영(巡營)의 힘이 아니면 각 곤·읍·진의 무역을 형편상 감당해낼 수 없고, 강의 상류까지 운반한 소금의 수량도 또한 널리 보급하기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는 실상 백성들이 한쪽만 보고 다른 한쪽은 보지 못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불과 7냥으로 값을 정한 일은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리하다고 이를 만한데, 만일 앞으로 값을 올렸다는 말이 다시 어사를 통해 알게 될 경우에는 해당 도신을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중히 감죄해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암행 어사 별단의 또 하나에 아뢰기를,
"임자년에 천포(川浦)에 있는 1만 결(結) 가까이 되는 땅을 실결(實結)로 환원시킨 것이 영남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되었습니다. 신의 암행(暗行)이 마침 봄 농사철에 있었으므로, 농묘(壠畝)의 사이를 두루 살펴보니, 아무리 조그마한 땅이라도 개간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임자년에는 천포의 땅이 사석(沙石)이 많이 쌓인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일구지 못할 리가 없었는데, 백성들이 호소를 하고 아전 무리들이 원통함을 말하면서 매양 백징(白徵)으로 구실을 삼았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진실로 아는 것이 없으므로, 허다히 기경(起耕)된 실결들은 틀림없이 토호(土豪)나 간리(奸吏)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신이 영천(永川)에 출도(出道)했을 때에 재책(災冊)을 상고해보니, 이번에 재결(災結)로 인정된 1백 50결이 분배받은 가운데 들지 않았으므로, 그 곡절을 엄히 사핵한 결과, 혹은 유전해온 진전(陳田)으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계축년에 기경전으로 환원한 것이라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열읍에 비록 진전을 조사하더라도 얻어진 것은 서원배(書員輩)들의 자질구레한 물건에 불과하고, 허다한 은결(隱結)들은 자연히 거론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우의정 이병모가 복주하기를,
"전 도신 이태영의 ‘속전(續田)으로 강등시켜 경작을 권면하자.’던 주청(奏請)은 곧 진전을 통틀어 지적한 것이고, 계축년에 기경전으로 환원시킨 것을 말한 것이 아닌데, 영읍(營邑)에서 이를 혼동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영읍을 위하는 방도로 말하자면, 다만 그 면제해줄 것은 면제해주고 기경전으로 환원시킨 것을 조사하여, 이것을 옮겨 저쪽에 충당시키고, 서쪽의 것을 가져다 동쪽에 보충해서, 계축년에 기경전으로 환원시킨 데에 대한 말이 다시 민간에 행해지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지금 어사의 아뢴 것을 보건대, 영읍에서 아직도 그 내용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으니, 삼가 작년에 판부(判付)한 내용 및 전후의 사실을 가지고 새 도신을 대면하여 엄명하게 신칙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그곳 도백을 지낸 사람에게 소견을 묻자, 우승지 이태영이 말하기를,
"신이 연전에 진전에 대해서 햇수를 한정하여 강등시킬 일로 장청(狀請)하여 윤허를 받았으나, 그후 곧 체직됨으로써 가을일을 담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으니, 수령들도 혹 이 일에 대해 의혹이 없지 않아서 흔히들 ‘계축년에 기경전으로 환원시킨 것이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한다 합니다. 그러나 이미 기경전으로 환원시킨다고 하였고 보면 이는 곧 속전으로 강등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알기가 어려운 일도 아닌데 구별을 하지 않고 혼동해서 거론한다면 아전들의 간악함과 백성들의 원망이 장차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이 아뢴 말에 의거해서 하라. 계축년에 기경전으로 환원시킨 일이 영남 백성들의 대단한 고통이 되었다고 하기 때문에 작년에 칙교를 지엄하게 내리었고, 또 그후의 장계에 대해서도 다시 특별한 칙교를 내리어 다시 조정을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이 일이 어사의 계사에 포함되었으니, 연석에서 물러간 다음 특별한 관문을 보내 엄히 신칙하여 앞으로는 이전처럼 혼동하지 말도록 하라. 심지어는 전 도백이 주청한 ‘속전으로 강등시키자.’는 것 한 조항에 대해서도 단락이 각각 다르니, 이 또한 구별하여 알려주어야 한다."
하였다.

 

 

 

명하여 진부(賑簿)를 다 조사하기를 기다려서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을 잡아다 신문하도록 하였다.

 

윤동만(尹東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매수(徐邁修)를 동지 경연사로, 이병정(李秉鼎)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만년제(萬年堤)를 완성하였다. 만년제는 현륭원(顯隆園)의 동구(洞口)에 있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이번 화성(華城)의 만년제 공사는 백성 한 사람의 힘도 쓰지 않고서 몇 일만에 완성했으니, 참으로 큰 다행이다. 원침(園寢)의 수구(水口)에 이 방죽물을 저장해두면 현륭원 밑의 백성들 토지에 이것으로 물을 대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마치 저 장안문(長安門) 밖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고 여의동(如意垌)을 쌓고 대유둔(大有屯)을 설치한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만석거를 만들고 여의동을 쌓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누차에 걸쳐 권유 신칙하고 내탕전(內帑錢) 수만 금을 내려서 결심하고 시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성들이 도리어 주위가 광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니,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함께 즐길 수도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다."
하였다.


 

 

반응형